나는 한동안 소설을 못 쓰고 있었기 때문에 또는 간혹 매우 적은 양의 글을 쓸지라도 거의 핸드폰이나 중고로 구입한 노트북에 글을 썼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볼펜을 쥐고 수첩에 글을 쓸 때의 오묘한 즐거움은 잊은 채 살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그야말로 완벽한 왼손잡이에서 오른손잡이로 전향했다. 뻥이다. 왼손잡이로 전향할려다가 어중간하게 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3가지 방법과 더불어 말을 녹음하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래도 제일 비중이 높아야 할 그것은 그러고 싶은 것은 단연 손글씨다. 글이 어떤 방식으로든 잘 써진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어차피 방법의 문제이지만 육필로 쓴 글은 그 경험을 원하는 것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매력과 함께 어설픈 이유가 있기는 있다. 왜냐하면 펜으로 필기를 할 요량과 깜냥이면 그 쓸 것에 대한 씌여질 뭔가에 대한 막연한 그림이 어느 정도 머릿속에 구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핸드폰이나 키보드를 두드려 글을 쓰는 것 보다는. 적어도 초고는. 내용이 어디로 갈 것인가, 는 제쳐두고서. 그래서 나는 지금 뭔가 잘 안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왜 그런가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당연히 명료하게 그 이유는 찾지 못했고.
그러다가 나는 차를 운전해서 무작정 시골과 도시와 바닷가와 번화가를 돌아다닌다. 분명코 정처없는 움직임이지만 굳이 왜 그렇게 뭘 찾는지 모르는 것처럼 정신없이 찾아 헤매는가 그 동기를 부여잡고 날 추궁하고 널 추적해 봤드니 이런 소묘적인 단상이 언뜻 내 옆구리를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아마도 좀 더 비현실적인 공간들이 모여 있는 지극히 이상적인 장소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를테면 오롯이 현대적이지만 상당히 촌스럽고 추상적이면서도 전위적이지만 그런데 왠지 모르게 자꾸 끌리고 뭔가 기분이 좋은 그런 동네. 그런 데가 어디 있을까. 어디 있긴 젊음의 기운이 넘치는 거리나 이성의 비율이 유독 불균형한 동네, 새롭게 뜨는 시내, 이것이면 그나마 후보군으로서 완전히 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건 내가 찾는 전시회가 아니다. 내가 찾는 서커스단은 이런 게 아니야. 은근히 암시한 다음 서서히 달아오를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자, 7번 장면 들어간다. 그녀를 만났어. 눈빛이 만화처럼 확 불타오르면 안 돼. 다가가. 다가가. 키스를 할 듯 하다가 볼에 한 번, 키스를 할 듯 하다가 이마에 한 번, 키스를 할 듯 하다가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여, 키스를 할 듯 하다가 정말로 할 듯 했는데 순간 개처럼 개처럼 그녀의 코끝을 핥아, 코끝을! 그러면서 막 강아지처럼 흥흥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해 본격적으로 개처럼! 마치 상대가 혹시 감지할지 모를 감미로움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황홀함이란 무엇인지 그 전에는 미처 한 번도 생각조차 상상조차 못했다는 것 같이. 에로 영화 감독이 가차 없이 요구하고 정중히 주문하는 바로 그것. 아름답고 신비로운 젊음의 무지개가 느껴지는 그런 뭔가, 그것이 지금 나 자신과 내 환경에 없다는 허전함. 찾아봐도 둘러봐도 그런 건 없다, 없어. 내가 찾는 놀이공원은 이런 거였다. 3번 연속 바이킹을 타도 구토감이 일지 않는 곳, 3번 연속 청룡열차를 타도 실제로 구토하지 않는 촌락, 3번 연속 우연히 놀이공원에 놀러온 멋진 연인들의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아도 작가나 미술가나 음악가 커플이 생각나지 않는 그런 예술촌. 그게 뭐야? 생각해 보니 그것은 과거의 시공간이나 문학에나 나오는 게 그나마 제일 그 감성에 가까울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이다. 거리를 둘러보면 모두 세련된 건물과 고상한 이름들과 은은한 디자인에 최신식 설비를 갖춘 건물들과 행인은 (반올림해서) 100% 영화배우들. 너무 했나? 즉 거리에 보이는 카페, 빵집, 문구점, 편의점, 식당, 서점, 음반 가게, 극장, 전자제품 가게, 의류점, 백화점의 간판을 보면 하나 같이 1) 좋은 의미의 이름 2) 나름 생각해서 지은 이름 3) 구식이 아닌 그나마 새로움을 찾으려는 기미가 보이는 애쓴 흔적이 느껴지는 작명에 시간 좀 들인 듯한 이름 4) 현대적!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순간 나는 몸짓으로 뭔가 있어, 안면으로 두근거리는 의심을, 손동작으로 재담꾼의 소리내기와 듀퐁 라이터의 극렬한 시간의 구부러짐의 입체적 구현, 동시다발적인 움직임을 선보이면서 나는 그것이 대충 뭐란 것을, 무엇일 것이다 라는 호기심을 일으키는 예감을 떠올린다. 그 예감을 하기 전과 후 모두 나는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고 있다.
간출이면, 내가 원한 것은 이랬다. 찾집 이름은 소설, 만년필 이름은 환희, 아이스크림 가게 이름은 낭만, 극장 이름은 신비, 음악원 이름은 불가사의, 미용실 이름은 예술, 후라이팬 이름은 세계 3대 후라이팬, 그대 이름은 내 수준은 10억명 중에 1명, 립스틱 이름은 화장발, 마스카라 이름은 윌, 바디클렌저 이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은 예뻐지고 있다, 사전 이름은 행복, 웹사이트 주소는 iLike.com, 내가 사는 곳은 너의 마음 속, 멜로 영화 대본을 쓰는 극작가 이름은 춘화, 한때 필명은 JS(진상), 내 뽀얀 엉덩이는 누가 누가 봤을까, 마을회관 이름은 꿈, 도시 이름은 내 사랑, 학교 이름은 초현실주의, 행위예술을 위한 공원 이름은 환상관, 옷집 이름은 애인, 근사한 음식점 이름은 천국, 미술관 이름은 돈 그리고 당신의 나이트 클럽 이름이나 집 이름은 고품격 그렇게! 곧 적당히 촌스러우면서 현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시간을 앞선 느낌이 들고 동시에 시대에 뒤쳐진 느낌과 함께 고급스럽게 복고풍을 지향하는 상당히 우아한 정말 어려운 이름짓기가 아닐까, 그런 느낌이 드는 동네를 찾은 것이다. 마침내. 오 이럴 수가. 써야 하는 소설은 안 쓰고 지가 무슨 연예기획사 캐스팅 매니저야? 뭘 해도 꼭 이렇게 살짝 돈 느낌의 정신이상자 취향의 변태의 일관성을 두루 갖춘 마치 이런 단어를 난데없이 떠올리게 만드는 추구 성향과도 같다. 날개, 키스, 환송, 성염색체, 소변 보는 개, 소풍가서 도시락 먹기, 나체로 춤추기, TV와 성채, 대부와 인형,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무슨 소설이 장난이냐!
이 신기루와 같은 공간을 찾은 그날은 가을치고는 여름처럼 후덕했고 풍향은 맞바람이었으며 또 우연히 근처는 해변가 모래사장이고 나무와 풀과 바람과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카페들이 많은 살짝 낙후된 지역이지만 시골인 것을 감안했을 때 나름 상권도 형성되어 있고 경치도 그런대로 받쳐 주는 동네다. 그래서 나는 어떤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난쟁이처럼 행진하고 똑똑똑 하며 동화 속 등장인물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노크를 하고 싶어졌다. 그것의 하늘거리는 불확실한 종착역은 무기력한 불감증일지라도 살아 있음의 징표이자 최근 또는 예전에 어딘가에서 유행했을, 아마도 유행을 타지 않는 게 더 나을 단어 '치유'를 떠올리면서 요즘 실패했던 따라하기에 재도전하는 기회를 즉시 그곳에서 붙잡아 실행에 돌입한다. 나도 모르게 예고 없는 흉내하기 감행이 벌어진 것이다.
해변가, 모래사장, 바닷물이 철썩, 갈매기가 끼룩끼룩, 바람에 날려오는 이국적인 시상과 난데없이 떠오르는 어떤 친구의 이혼 소식과 한물 간, (영영) 갈 유명인의 파경! 해변가로 시작해서 파경이라! 가히 기분이 좋았던 것일까. 즉 나는 그 근처에 주차하고 트렁크에서 커다란 수건을 꺼내고, 화장실에 가서 속옷을 벗고 은은한 꽃무늬 수영복 팬티를 입었으며, 철지난 시집을 한 권 들고 해변가로 갔다. 그렇게 모래밭에 큰 수건을 깔고 팬티만 입은 채 엎드려 시집을 읽는다. 시집 제목은 당신이 괜찮게 생각하는 것으로 아무거나. 찬 바닷바람을 맞고, 썬그래스를 끼고, 핸드폰으로 오래된 유행가를 틀고서. 원래대로-라면 난 지독한 독감에 그 즉시 걸려야 한다. 그건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얄미운 각본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말이다. 다른 말로는 숙명. 그러나 운명은 변하는 것일까? 여자의 마음처럼? 갈대와 같이? 아니면 호르몬 분비가 순간 너무 극적이었단 말인가. 나는 비록 닭살이 심하게 돋았지만 그 맹추위? 우수? 뭔지 모를 서글픔? 그 어떤 불편함을 잘 참을 만 했다. 일단은. 아 이 따라하기는 연이은 실패가 아니다. 어설픈 충동에 따른 시늉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것은 진정 재도전에 이은 축복이구나. 왜냐하면 나는 곧바로 기침을 하면서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니까. 하루가 지나도 독감에 걸리지 않을 것을 충분히 이유는 잘 모르지만 예상할 수 있었다. 저기 또 다른 낭만파가 있구나. 마침 혼자 왔구나. 여자다. 어떠하다. 어쩌면 좋은가. 그런데 특수부대 출신에 가죽점퍼에 가죽장갑을 낀 무섭게 생겼지만 상당히 멋진 모습의 남자친구가 음료수를 사러간 줄도 모르고 혼자 있는 왠지 뒷모습이 슬퍼보이는 분홍색 하이힐을 신고 엎어져 최신곡을 경청하며 로맨스 소설이나 여성 월간지를 읽는 여인에게 말을 걸어볼까? 지금 심정은 낯선 미인에게 뺨 한 번 맞는 게 뭐 대수란 말인가 그와 같다. 설령 그렇게 될지라도 오히려 정체가 수상한 알 수 없는 그녀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이쪽의 무모함에? 그녀가 한번도 그런 터무니없는 치근댐을 혹시라도 살면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을 만큼 그 정도로 몹시 도도한 여인네였다면 그건 당연히 그 자리에 있던 당신의 건장한 남아로서의 불충임이 분명하리라. 물론이지. 이곳에서 나의 고조된 감정은 딱 이 정도다. 즉 난 감기에 걸리지 않았단 말이다. 그것만 해도 어디야.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이 나이 먹고 그거라도 내 마음대로 해봐야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나는 추위를 잊고 싶었던 것일까.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옛날에 나는 드라마에서 봤다. 영화에서도 봤다. 실제로도 봤다. 나만 아는 나만 생각할 수 있는 특별함이 아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손쉬운 낭만, 그것을 나도 그리고 당신도 봤다. 딱 봐도 멋져 보였어, 이미 옛날에. 보자마자. 그동안 따라하지 못해서, 안 해서, 언젠가 따라했다가 실패하고 낭패를 겪어서 끙끙 앓았나 봐. 이제야 성공했다. 몇 분 전에. 이게 낭만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낭만이겠나. 단어를 외국어로 바꿔도 그것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느낌이 오히려 더 배가될 뿐. 고양이의 뿔 달린 펑크 목줄이 그것이라면 그나마 나을 것이다, 하루 온종일 게임을, 1주일 내내 낚시를, 1달 내내 스포츠카 여행을 그것이 낭만이라고? 진짜로?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개뿔이 낫겠다. 낭만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건 남자끼리 따로 얘기하자! 여자애들 가운데 드물지만 그런 거 좋아하는 애들도 있으니까! 누구? 어? 걔?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쉿!) 낭만은 그런 게 아니다. 낭만은 해변에서 큰 수건을 깔고 애인과 같이 수영복만 입고 엎어져 있어도 춥지 않은 척, 전혀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연기하는 것, 전혀, 바로 그게 낭만이다. 그걸 간과했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낭만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름이 돋아도 참아야 한다. 꾹! 안 그러면 낭만은 다른 사람에게 가버린다. 휘발성이 강하니까. 자기는 여자와 살아 보니 남자는 음식을 잘 만드는 여자를 만나는 게 좋겠더라 그러니까 당신은 요리사와 결혼해라, 당신은 집 앞에 잠깐 우유를 사러 갔다올 때도 까탈스럽게 옷 입는 걸 신경 쓰신다 음 그렇다면 한창 뜨는 패션 스타일리스트나 유명 패션 디자이너와 결혼하여라,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한다면 이건 낭만이 아니라 막 던지는 호언장담이다. 낭만과 낭만이 아닌 것의 차이점, 유의해야 한다. 다시 낭만으로! 한겨울에 매서운 눈바람이 날려도 멋지게 수트를 벗어서 그녀의 양 어깨에 걸쳐주자. 춥지? 하면서. 이게 낭만이다. 절호의 찬스에 등장하는 교체 선수. 이게 낭만이라고. 여기서 반대하는 사람은 다 보통 남자다. 난색을 표명하는 여자는 뭐다? 그냥 조연감 수다녀일 뿐이다. 차라리 수녀가 낫다. 훨씬 낫다. 진짜 도도함이 무엇인지 여자들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어금니 꽉 깨물고 웃지 마시라. 이제 그럴 때도 되지 않았나. 정녕 이 모습이 낭만이 아니라면 어디서 로맨스를 찾고, 언제 미래를 위해 기도하며, 어떻게 함부로 시를 읊조리며, 카메라에 이 순간이 잘 담겨지나 내 고백을 그녀가 감동적으로 잘 흐느낄까 하면서 이 시간을 만끽하면서 즐기겠나, 어떻게? 그래, 숙녀에게 말이다. 숙녀와 함께. 그냥 여자, 가 아니라 숙녀! 말만 들어도 뭔가 근사한 느낌이 묻어나는 숙녀! 사모하는 여인이 혼자서 상상을 하고 드물게 (음흉한?) 악몽을 꾸며 연애 소설을 읽는 그녀의 방 창문 밑에서 세레나데를 불러보지 못했다면 이건 진정한 멋쟁이로 거듭날 수 있는 필수 과정이자 역전의 찬스이며 필요충분조건 아니겠나. 해변 백사장에서 추울 때 수건 깔고 수영복 입고 일광욕 하기. 그렇게 엎어져서 찬바람 맞으며 책 읽기. 설마 그 책이 이 책? 말문이 막힌다. 그곳엔 샌드위치와 가벼운 음료가 있어도 괜찮다. 수줍은 음악도 함께 한다면 더욱 그럴싸하다. 겨울이 코앞이다.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지 말자. 시간은 빠르다. 설령 그때 당신이 그녀와 함께하지 않을지라도 춥지 않다면 그것을 살짝 참는다면 그때는 예술적 감성과 천재적 영감이 뻥뻥 터질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곳에서 따라하기 대성공했다. 와우!
그 다음에 나는 그 근방을 돌아다니면서 정착할 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둘러보았다. 그러다 괜찮은 장소를 찾았다. 항구도시에서 도심지를 조금 벗어나 새로 조성되고 있는 신도심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대학교 그래 여기다. 딱! 나는 하숙을 하기로 결정한다. 자가, 월세, 전세, 여인숙, 유스호스텔, 게스트 하우스, 텐트등 주거 방식이 많은데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하숙이 딱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는 대학생도 있겠고 야간 경비원과 도시에 있는 회사에서 출장 나온 직원, 대학교 강사, 특파원, 여행지에 글을 기고하는 사람등 새로운 친구들과 젊음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대학가, 바다, 도시 그것이 모두 다 같이 근방 얼마 범위 내에 있으니까 여길 뜨면 미련한 짓이라고, 그건 바보가 틀림없다고 느꼈다. 운수 대통!
나는 하숙집에 입성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절차도 간단했다. 나는 짐도 많지 않았다. 차로 카라반을 끌고 하숙집에 당도해서 하숙집 주인장과 담판을 짓고 계약하고 끝. 나는 하숙집에서 넘버 투였다. 나이순으로. 아 알카트라스에서도 넘버투였는데. 그때도. 이곳에서 나는 평균 연령을 조금 깎아 먹는다. 그렇지만 애들 맛난 것도 사주고 드라이브도 같이 하고, 하루는 낚시를 하루는 선탠을, 닉과 하워드와 마크와 알렉스와 케빈과 조니, 내 친구들이 도시에서 여기 놀러오면 멋진 차도 구경시켜 주었다. 금새 나의 입지는 안정되고 탄탄한 권위 또한 구축되었다. 든든하게. 하숙집의 멤버는 대략 많으면 20명 적어지면 10명, 보통 15명이 하숙집 구성원 평균 숫자다. 그 가운데 여자친구가 있는 친구도 있고 없는 친구도 있는데 녀석들은 꼭 남자 기숙사처럼 모두 거의 남자 대학생들이었고, 나는 좀 이상하게도 여자 기숙사의 노처녀 사감 같은 그런 기분에 빠져들었다. 히스테리는 느낄 수 없었다. 그거 별로다. 아침에 애들과 함께 밥을 먹고 녀석들은 학교로 몇몇은 직장으로 갔고 나는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 가운데 대학교 교직원도 한 명 있어서 대학교에도 놀러가고 그곳 도서관에 자주 들르게 되었다. 그곳에는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스쿨룩 옷을 입은 상큼한 신입생도 많았고 밤에 술집에서 일하는 것 같은 그냥 그런 의심이 드는 학생도 보였으며 어느 강사를 꼬시기 위해 여학생이 차를 대학교에 몰고 와서 남자 강사와 해변가로 놀러가고 해변가에서 모래사장에 큰 수건을 펼치지 않고 차 안에서 노트북으로 영화를 같이 보다가 성급하게 여학생이 남자 강사에게 부끄러워하면서도 대담하게 입맞춤을 시도하다가 거절당한 것처럼 보이는 새침한 여대생도 눈에 띄는 것 같았다. 축제 기간에는 유명 뮤지션과 헤비메탈 그룹 공연도 구경하고 학교 정문 옆에서 나를 교수인 줄 알고 인사하는 남학생도 있었다. 그땐 거의 회춘하는 기분이었다. 나를 교수로 착각한 것을 알아챘을 때가 아니라 그 이전과 그 이후가. 하긴 것도 그냥 괜찮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하루는 하숙집 멤버였던 미술학도를 따라가서 강의실 창문 너머로 누드 스케치 현장도 훔쳐봤다. 절대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다. 볼이 빨개졌다. 홍당무처럼. 많이. 아흐. 또 하루는 매일 헬스클럽에 다니는 다른 하숙집 멤버를 따라가서 헬스클럽을 구경하고 나와서 녀석의 여자친구와 그녀의 여동생과 함께 넷이서 더블? 어정쩡한 데이트도 했다. 어느 날 대학교 가로수길에서 유명 주류회사가 시음 행사를 해서 나는 낮술에 거나하게 취하기도 했다. 내가 마치 대학생으로 환생한 것 같았다. 학교 교정 잔디밭에서 술을 마시며 인생을 논하고 미래를 예견하며 참치를 잡고 고래를 보고 바다의 신을 만나러 떠나자며 떠들고, 사랑 노래도 불렀다가 오페라 아리아도 흥얼거렸다가 잔디밭에서 침낭 하나 달랑 놔두고 거기 쏙 파고들어가서 아침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후,
오늘은 이곳에 첫눈이 내리는 날이다. 토요일이고. 우리들 하숙집 멤버들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미팅을 할지 헌팅을 할지 그것도 아니면 공부를 해야 할지 NC에 쳐들어 가야 할지 망설이면서 들뜨고 초조해 하면서 최신곡을 듣고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물리적으로 어른이 되었지만, 그대들은 화학적으로 아직이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있을까, 누구 고액의 복채를 내고 저명한 포춘텔러를 만나본 사람 있냐고 물어보고, 각자 어떤 아르바이트를 해 봤는지, 특별하고 기억나는 야사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결단을 내렸다. 시간이 막 흘러내리고 줄줄 새면서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듯하게 쪼여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심이 무엇이냐면 대략 이랬다. 첫눈 오는 날을 이렇게 무의미하고 지루하게 보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뜻 있게 기억에 남는 일을 만들어야 한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으며 청춘은 그 단어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면서 슬슬 나는 애들에게 펌프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어설픈 동기부여지만 틀린 말도 아니고 나도 심심했다. 애들아 우리 하이틴 드라마를 한 편 찍어보자꾸나, 돈키호테처럼 저기 도시까지 걸어서 오직 걸어서 가보는 거다, 어때, 그동안 우리들끼리 단합대회 한번 해보지 못했다, 하면서 자꾸자꾸 그들에게 명분을 고취시키고 그 줄거리를 상상하게 만들고 따라서 나도 주인공이다, 뭔가 중요하면서도 재미난 일이 있을 것이다, 나중에 보면 이것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라는 마법적인 주문에 심취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했다. 차츰 하숙집 멤버들은 나의 허황된 낭독과 어느 연가의 가사를 급한데로 갖다 붙인 탄식에 그들은 그야말로 홀딱 빠져버렸다. 이 순간만은 나는 신흥 연예기획사의 잘나가는 대표고 승승장구하는 개그맨이고 고품격 소설을 지겹도록 출간해대는 작가가 된 것 같았다. 저 하늘의 빛나는 별인 것 마냥. 애들은 꼭 그곳의 A급 배우이자 가수이며 한창 기예를 갈고 닦는 후보생인 것처럼 느껴졌다. 애들에게 청초한 꿈을 주입시키다 나도 최면에 빠져버린 것이다. 마치 역발상 투자처럼 역최면에 빠진 것이다. 약간 부족한 감이 있지만 거의 애들의 환심을 샀고 그것을 어딘가에 저당 잡히고 대출도 받았다. 이미 할 건 다 했다. 추가 환심까지 덥썩 손에 쥐게 되었다. 앗싸, 라는 환호성을 내뱉지는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표정과 그윽한 미소와 덤덤하며 차분한 어조로 바람이 빠지지 않게 주의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 순간이 언제까지라도 지속될 것 같았다. 그 환각이 풀리면 그냥 행사가 파토날 수 있으니까, 어떻게 빠트린 환청과 환영과 환시를 동반한 각성 상태인데 여기서 물거품처럼 멈출 수는 없다, 고삐를 쥔 김에 바싹 바짝 당기기로 마음 먹었다. 내심 점점 내가 B급 사기꾼이 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지만 솜사탕 같은 첫눈을 보고서 딴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고 결정적인 연설에 돌입하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다짜고짜!
「지금 우리, 저 도시까지, 첫눈을 맞으면서, 함께 걸어가는 거다. 행진! 끝없는 행진을 해보는 게 어떠니! 낙오해도 좋다. 멋진 추억으로 남지 못할 수도 있어. 그렇다고 마냥 방구석에 앉아 TV만 보고 마셨던 술 또 마시고, 했던 게임 또 하고 공부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여러분, 젊음이여, 청춘이시여 지금 이렇게 첫눈이 내리는데, 그렇게 기다리던 고운 내님 같은 그대를 생각나게 하는 첫눈이 내리시는데, 안 그래? 너네들 젊음의 생동감을 느껴보라구. 혹시 알아? 이 가운데 한두 명은 눈부신 여자친구를 만나게 될지. 어떤 스타일 좋아하는데? 말해보렴, 부담갖지 말고 말해봐. 어떤 스타일? 단발머리? 미니스커트? 펑크? 생머리? 꽉 끼는 청바지? 처음부터 끝까지 예쁘고 착하고 청순한 스타일? (손동작 딱) 그래 망사 스타킹? (또 한 번 딱) 레이스? (마지막 딱) 가터 벨트? 사람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거야. 그게 인간의 운명이야. 너네들이 바로 그렇다구. 제아무리 재주가 좋다 한들 신이 아닌 이상 앞날은 모르는 법이야. 무한한 낙관도 음울한 비관도 다 정답은 아니야. 가능성은 열려 있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아무도 모른다구. 한번 생각해 봐! 우리랑 똑같이 음악과, 약학과, 무용과, 미학과 여자애들이 그들끼리만 우리랑 똑같이 목표를 향해 저 도시까지 걸어가지 말란 법은 없어! 왜?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거든, 마음이 움직일 수 밖에 없어, 들뜬다구! 여자들은 첫눈을 좋아하는 법이거든. 많이. 그거야. 하지만 (침묵) 그러나 일단 도시까지 가는 동안 기쁘고 즐겁고 계속 재미있기만 하진 않을 꺼야. 중간에 불량배를 만날지도 몰라. 그래도 우리는 숫자가 앞서. 젊어. 패기가 넘쳐. 형도 있어. 청년들, 형 요즘 운동 한다. 난 도망치지 않을 꺼야. 아주 사소한 사고가 터질지도 몰라. 손가락 조심해야겠지. 다리 아프다고 힘들다고 지겹다고 누군가는 울어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어려움을 이겨내야지. 역경을 헤쳐나가야 해. 알잖아? 파도타기, 등산, 달리기, 숨이 차도 힘들어도 끝까지 묵묵히 계속 가는 것! 알잖아? 대마왕이 진짜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니? 이 다음에 어떤 화면이 나타날지, 어떤 내용이 나올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낭만, 동경, 신비, 환상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모른 채로 미래의 사랑에 대한 기대도 없이 아무런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대학교 졸업할 꺼야? 그럴꺼야? 어? 그게 뭐야? 그게 뭐냐구! 곧 있으면 방학이야. 한동안 우리는 헤어진다구. 지금은 연락하고 친하고 술 마시고 게임하고 떠들고 몰려다니고 그러면서 이 우정이 평생갈 꺼 같지만 천만에! 10년 20년이 아니라 1, 2년만 지나도 언제 알기나 했냐는 듯이 서로 모른 채 살게 돼. 사람의 인생살이가 원래 그렇단 말야. 너네들도 이미 알고 있는 거야. 하지만 누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우긴다면 너희들의 그 확신은 슥 모습을 감춰버리지. 슬그머니. 그런거야 아직은. 장기적인 비전, 찬란한 꿈, 그렇게 멀리 보지 말고 오늘, 나는, 이런 추억을 만들었다, 오늘, 나는, 이런 학습을 했고, 멀리서 멀리서만 좋아했던 그녀에게 말을 걸어 봤고, 나는 비로소 꿈을 내 꿈에 대해 생각해 봤다, 오늘, 나는, 그렇게! 첫눈 오는 날은 이거만 생각하자, 이거만! (침묵) 어때, 다들?」
그렇게 우리들은 떠났다. 행진을 시작한 거다. 부푼 가슴으로 뭔지도 모를 기대와 함께. 우리는 대학교 앞 하숙집에서 시골길을 지나서 도로 갓길을 걷고 철길을 건너고 다리를 건너고 추위에 떨며 많이 떨면서 눈송이도 먹었다가 캔 맥주도 마시며 뚝방을 넘고 등대를 바라보며 신도심지를 지나 구도시의 NC까지, 그 근방 시내 산 중턱의 카페까지 가는데 성공했다. 마침내 성공했다. 완주를 하기는 했다. 그러나 우리는 막심한 체력 고갈과 예상을 초월한 굉장한 시간이 걸렸고, 낭만은 초반에 이미 포기했고, 분위기 급-저하에 눈이 엄청나게 엄청나게 내려서 겨우 겨우 다음 날 오전 조금 덧붙이면 거의 정오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중간에 쉬어가기도 했다. 도저히 걸어서는 끝을 낼 수 없다는 걱정에 사실 중후반 끄트머리에 다른 교통 수단을 조금 이용했다. 안 그러면 진짜 끝이 안 날 것 같았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하숙집 멤버들의 표정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상당히 어둡고 딱히 말로 하기 처참할 만큼 많이 안 좋았다. 굉장히 어두웠다. 낭만이라면 아주 신물이 난다구 같은 말이 이마에 딱 씌여 있다. 내가 전생에 낭만의 애첩이었냐고, 그거라면 속이 다 울렁거린다고! 천만다행인 게 그날 멤버에는 하숙집에서 우리들 보디가드 역할인 권투부, 학과 이름은 잘 모르겠다, 그 친구가 개인사정으로 빠져서 불의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다. 즉 리더인 나의 면상은 추위에만 허덕이고 그럭저럭 현상은 유지했다는 것이다. 같이 간 친구들, 그만하면 인성은 꽤 괜찮은 걸로 판명났다. 날 때리지 않았으니.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상황이 급변해서 뭔가 낌새가 달라졌드래도 나는 그 기세를 잘 가라앉혀 불상사를 사전에 방지했을 것이다. 주변에서 주워듣고, 보고, 배운 게 있어서 멜로드라마가 화려한 액션극으로 둔갑될 위기를 모면할 정도의 통빡은, 내게도 있다. 그분들 만큼은 안 되도 알게 모르게 어딘가에 내재되어 있긴 해. 때문에 남자는 배짱이요, 여자는 애교라고 그러나 이곳에 여자는 없으니 그 자신감을 잔꾀로 격하시키고, 따라서 그걸 꽁트로 승화시키는 건 일도 아니다. 여차하면 TV에서 자주 봤던 좋아하는 코메디언 흉내내기, 에 돌입하겠지. 어깨동무 먼저 꽉 하고(이게 중요해), 그런 다음 설 풀어, 형이 너한테 싸움진다, 애석하게 일이 이렇게 됐다, 하지만 다음 주 너네들을 위해서 5 대 5로 1차 소개팅 잡아놨다(당연히 거짓말!), 새로 부임한 김교수는 잘 있냐(re: 김교수란 사람은 없는데요 또는 지금 그 자리 공석인데요), 이렇게. 그러나 애들은 착해, 품성이 좋아, 잘 컸어! 그러나 이 친구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정말 우리랑(어쩔 수 없이 묻어가자면 나까지 슬며시 포함해서) 비슷한 여자애들 10명 20명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내가 미쳤지. 그러나, 만일 우리 중에 여자애들이 조금만 있었으면 얘기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런 계기로 결혼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여대생은 없었다. 무모한 모험단 일행이 남자 100%가 아니었다면 설혹 그랬다면 그것은 나중에 그냥 희뿌연 기억이든 기꺼이 찾아오는 추억이든 하염없는 낭만이든 해맑은 회상이든 그 무엇이든 그것은 분명코 훗날 시간이 지나서 떠올리자면 정말 어떤 눈부신 재물과도 바꿀 수 없는 뭔가가 틀림없이 되었을 텐데 그러고도 남았을 텐데, 아쉽게도 오, 아, 그건 아니었다. 그러하여 별다르고 유별난 사랑이나 즐거운 젊음의 시기를 딱히 기쁘지 않고 심심하게 그냥 그렇게 지내고 난 다음 어느 시점 이후 눈부신 재물이 제 발로 찾아오거나 행복한 생활에 사뿐히 안착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이땐 이랬다, 여기까지. 여기까지? 얘네들 입장에서는 그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서 이상하지만 그 무엇이 유달리 크게 보일 수 밖에 없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느니 개미와 배짱이라거나 토끼와 거북이요 어려서 너무 조숙했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었을까 어쩌네 그때 재미없어서 지금도 재미없네에 고진감래 같은 말까지 마술사의 뒤집힌 채도가 높고 명도가 낯은 검정색 모자 안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지는 그때가 지나고 나서야 결정된다, 마치 꿈의 해석처럼. 그래서 첫눈이 내리는 주말은 그냥 그렇게 개고생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하숙집 멤버들에게 신임을 잃었고 그후 애들이 같이 놀아 주지도 않고 슬슬 은근히 날 피하기 시작했다. 이미 예정된 시나리오인 것 같았다. 이런 결과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어떻게... 우째 이런 일이.
하숙집에 사는 이 친구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대화를 나누며 이런 미래를 그리고 산다. 인생은 아름답다! 사랑은 있다! 사랑을 믿는다! 사랑은 또 온다! 판타지는 못 봤지만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이다! 우리도 동화처럼 살 수 있고 아직 이름이 없는 내 인생의 장르는 내가 선택할 수 있으며 복권은 꽝일 수 있지만 삶은 의미가 있다! 엄마 난 노을을 보면 왜 슬퍼지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빠 인생이란 무엇인가요! 우린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뭐 재미난 일 없을까! 우리 앞에는 왜 멋진 남자가 아니 여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왜 우리는 연애를 못할까! 우리 동네 서점은 문 닫았고, 우리 동네 꽃집은 폐업했고, 우리 동네 고양이 카페 사장은 장사가 안 된다고 망할지도 모르다며 매일 독주를 들이켜! 동네 산책하다가 어느 찾집 앞을 지나면서 더럽히고 싶은 새하얀 도화지처럼 생긴 여인이 홀로 쓸쓸히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푸른 커텐 틈 사이로 보이길래 몰래 날 잘 숨겨줄 것 같지 않은 나무 뒤에서 훔쳐보고 있었는데 그렇게 내 마음은 그쪽으로 건너갔는데 왠지 발이 따뜻해 바람불고 추운 날이었는데 양말을 안 신었거든 게다가 발만 빼고 무척 두툼하게 입었는데 발만 슬리퍼 차림이었어 그래서 이상해서 아래를 쳐다봤지 그러니 글쎄 근방을 돌아다니는 똥개가 내 발에 오줌싸고 도망갔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녀석이 착각했을까 자주 오줌누는 나무와 내 육중한 다리를 놓고? 새 신발인데 비싼건데 아직 할부 남았는데! 데이지꽃을 안겨줄까 라는 말을 듣고 기분은 좋겠지만 정작 여자친구에게 데이지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향기를 품고 있는지 꽃말이 무언지 아냐고 물어보면 그런 걸 왜 내게 묻느냐는 표정을 지어 그러다 30분이 지나면 이유없이 날 꾸짖어! 나는 나 술 잘 마셔 그러지만 여자친구는 그래, 사람들이 왜 나보고 글을 잘 쓴다고 노래를 잘 부른다고 춤을 잘 춘다고 말하는지 잘 모르겠어, 항상 그런 식이야! 나도 전-여자친구랑 서로 너무 안 맞아서 헤어졌어, 그녀는 착한데 정말 착하기는 해 예뻐 그런데 그런데 너무 이상해 막 이상해 많이 이상해, 처음에는 말하는 거도 어린애 같고 행동하는 거도 귀엽고 재밌었어, 세상의 끝은 손가락이라며 우주의 비밀은 모아이 석상에 담겨있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그녀, 햇볕이 따뜻한 공원 잔디밭에 엎드려 서로 턱받침을 하고서는 눈싸움을 하던 그녀, 무엇보다 <남몰래 하는 사랑>을 속마음과 달리 감추고 드러내지 않기를 잘 참지 못하는 그녀, 몰래한 사랑 바로 그것에 무척이나 목말라하면서 견딜 수 없도록 가차없이 그 언제라도 궁금해하며 애달파하는 그녀 그리고 그녀와 많이(?) 비슷한 그녀-들, 하루는 연애편지처럼 그걸 접어놓고 일해야 하는데 하루는 한 권의 인문-교양서처럼 잠시 제쳐두고 그것의 도정을 위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상남자 환장하게 남드는 사랑 그것이 뭐길래, 아니나 다를까 그녀 역시 그랬어, 그땐 애교 있고 우끼고 새롭고 얜 뭔가 다른 것 같았어, 자기도 그랬어 난 특별하다고, 처음에는 그랬다고, 중간에도 그랬고, 치근댐을 너무 받아 이젠 '치'자만 들어도 깜짝깜짝 놀란다고 이쁜 건 알아가지고 그러면서 내 남자친구 얘기를 친구한테 모른 사람에게 또 어디가서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셀 수 없이 계속 반복해도 오히려 좋았다구, 내 여자친구니까 자랑이 반복되도 한 얘기 또 하고 또 해도 투정부려도 그러려니 했는데 뭔 심도있는 말을 하면 블로그와 신춘문예에 매번 도전하는 글을 읽어 보면 도대체 뭔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읽을께 읽을께요 했지만 도저히 못 읽겠더라구 읽었다고 거짓말했지 호평 위주로 아쉬운 점을 곁들여 얘기해 주면서, 순전 지 자랑에 시기와 질투에 다시 자랑, 그래서 헤어졌어, 다른 애들과 똑같지 않을 줄 알았는데 금방 싫증나지 않을 꺼라 기대했는데, 그러다 헤어졌어, 참다 참다 더 참아야 하는데 그건 어려웠나봐, 내가 모자랐지만 내가 많이 부족했지만 그녀의 다음 남자친구는 좀 더 품이 나보다 넓었으면 좋겠어 그녀도, 다음 사람에게는, 그래도 좋아했는데 아직 좋아하는데 설혹 애정이 애련으로 바꼈을지 모르지만 하지만 난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쩜 이제 와서 보니 그걸 사랑이라 불러도 크게 흠잡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그때 몰입해서 노력하고 하나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나도 변했나봐,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 노래 가사처럼 모든 걸 다 주니까 떠난다네 남자를(여자를) 울렸으면 책임져야지 니가 뭘 알아 여자의(남자의) 마음을 여자는(남자는) 다 똑같나봐 우린 미치도록 사랑했었지 그러면서, 그런 사랑 해 본 사람 주위에 보면 별로 없어 책을 몇 권 써야만 하는(막상 써 보면 또 분량은 쉽사리 잘 안 나오는) 그런 사랑을 해 본 사람은 거의 없다구, 그러나 어쩌겠어,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나 만나고 나서는 변했대 줄 듯 줄 듯 하면서 안 준다는 남자들이 제일 꺼려하고 짜증나는 헤프지도 않고 안 헤프지도 않은 이상한 여자애로, 소문 다 나는데 소문만 나겠어 길게 따라다닐 껀데 평판이 무슨 비밀도 아니고, 몸이랑 마음이랑 따로 노는 애들은 또 뭐야, 이건 나 때문인가, 자기 인생이 틀어진 게 다 내 탓이라는 뜻인가 대관절 뭐가 그렇게 꼬인거야 심사가 어떻게 뒤틀렸길래 그런 것인지 난 도무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아무래도 가만 보니 소식통이 가져온 정보가 잘못된 것 같아 녀석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또는 그냥 생각없이 뻥을 친 게 틀림없어, 왜 난 아직도 거짓과 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일까,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남의 말과 타인의 글을 덥썩 믿어, 거짓말이 아니겠지, 우기는 게 아니겠지, 뭔가 근거가 있고 타당한 얘기겠지 하면서, 하지만 그나마 이젠 좀 나도 바꼈어, 어른이 되어가나 봐 이제야, 살다 보니 사랑이 다가 아닌 것 같아, 남의 주장은 일개 의견일 뿐이고 살면서 사랑 없이 못 살 것 같지만 또 그렇지도 않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 그냥 사는 듯 해, 그렇다니까, 그런데 세상은 세상은 그렇게나 사랑을 부르고 부르고 또 불러대지, 사랑이 무슨 죄를 지었나, 사랑이 공기와 같은 것인가, 사랑을 말하고 듣고 연구하지 않으면 못사는 것일까, 사랑이 도대체 뭐야 뭔데 그 난리야, 사랑이 무슨 컴플렉스일까, 사랑이 무슨 환상일까 그림자일까, 사랑이 어디 나뭇가지에 앉은 파랑새인 것처럼 부르면 꼬리를 흔들며 날 반겨주는 골든 리트리버인 것처럼, 왜 그런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 죄다 사랑 노래야, 그 주제 아닌 연극을 볼려 해도 거의 없어 책을 읽어도 그래 노래를 들어도 그래, 왜 그런줄 모르겠어, 엄마 말을 빌리자면 사랑이 뭐 밥 먹여주나 사랑을 하면 돈이 나오나 집이 나오나, 그래도 어른들 사석에서 말하는 거 들어보면 사랑은 아주 잠깐이고 형식이며 거의 돈 보고 수준 맞춰가며 결혼하는 거래, 안 그런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어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 내심 아는 거니까 어른이 되면 다 그렇게 변하나봐, 인간을 동물이 아닌 별종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이 이어져온 기간을 100으로 잡고 그 가운데 사람에게 사랑이 심각하게 중요시되고 최대 쟁점이 된 건 1이나 될까? 안 될까? 그럼 나머지 99는 그 대신에 그 자리엔 뭐가 있었을까, 그게 바로 이 세상의 비밀인가봐! 나는 마로니에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이상하게 노랫말로 들으면 내가 그걸 잘 알고 있다는, 내 추억과 마로니에 나무는 메타 데이터로 연결된다는, 내 사랑도 그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들어! 어떤 그래프의 가파른 곡선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난 그녀가 진짜 아픈 줄만 알았어, 많이 아프면 어떡하지 어디가 아픈걸까 지병인가, 설마 이 나이에 병원 놀이? 중2병은 아닐꺼 아니야! 한 편의 연애시를 읽고서 뭔지 모를 우수와 동경과 낭만이 느껴지지만 그 시가 뭘 노래하는지 그것에 대한 정연한 해석은 못할 수도 있어, 입 떡 벌어지게 그것에 대해 멋진 말을 하는 녀석들이 이상한거야! 그림 한 점을 보고 멋져 비싸겠네 뭐가 생각나 라면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이걸 그린 인간이 뭘 말하고 싶었는지 하나도 감 잡을 수 없다 해도 예술과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착하고 젊고 풍성한 모발에 피부가 탱탱하고 웃음이 많은 친구들. 느낌표가 몇 개 나왔는지는 몰라도 얘네들은 분명 상냥하고 꿈 많고 착하고 다정하고 밝고 멋진 대학생들이라는 건 아주 잘 알겠다. 내가 바로 얘네들에게 꽃다발이 아니라 실망감을 안겨줬다. 그들은 한동안 꽤 우울에 찬 외로움과 초록의 싱싱함을 놓쳐버린 상념에 젖은 나날을 보낼지도 모른다. 내가,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랬을까. 의도는 좋았는데. 처음엔 부푼 꿈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사랑에 빠진 것처럼 설레기도 했는데, 첫 눈에 반한 것처럼 가슴이 저미며 너무 좋아 그 아픔을 즐기는 것처럼 신나는 모험이지만 어려움을 이겨내면 정말 즐겁고 보람찬 감정을 공유할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게 내다봤는데... 무모한 장거리 도보 여행에 뭔가 신나는 일이 함께 할꺼야 라면서. 내가 동기부여에 환장한 놈도 아니거늘. 한심한 녀석. 네가 그들에게 괴로움을 선물하고 패배의식을 은밀히 심어줬다구. 알기나 해? 꺼벙하게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낼꺼야' 같은 산뜻한 긍지를 내비추는 다짐은 커녕 이불에서 나오기 싫어 아주 온갖 어린양을 다 보이지. '영화에서 본 것처럼 내 손이 나도 모르게 조금 친분이 있는 어느 여자 또는 그저 낯선 이성이며 타인인 그이의, 언제 봤다고, 그이의 볼록한 가슴에 덥썩 손이 자석처럼 끌려가서 붙으면 어떡하지?' 같은 얼빵한 상상이나 하면서 말야. 자책이 뭔 취미야? 유행이야? 어머나 세상에나 12살이랑 하나도 다를 게 없자나. 아아 몹시 허무하다. 지금 심정은.
낙심한 나는 교수진에 줄을 대볼까, 하숙집을 바꿔 볼까, 이것도 정착 생활이니 어디 여행이라도 갔다 올까 라면서 혼자 괜히 울적해진 기분에 밤거리를 막 쏘다녔다.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딱히 옛날에 잘 나갔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래서 나는 거리를 방황하다가 혼자 어떤 술집에 들어갔다. 술집 이름이 앞서 말한 것처럼 특이해서 들어왔다. 단란주점! 뭐뭐, 뭐한, 무슨, 그것이 아니라 그냥 단란주점! 단란? 판타지? 스릴? 그런데 바깥에서 보는 것과 달리 안에 들어가니 그곳은 보통 술집이 아니었다. 술집 안의 어떤 특별실로 안내되어 들어가고 그곳에 술과 안주가 세팅되고 아가씨들이 10명 들어와서 앞에 일렬로 섰다가 나가고 또 10명 또 10명이 들어왔다 나갔다. 내가 어떻게 뭔 결단을 내려야 했는데 어리버리 했나 보다. 뭔가 이상했다. 무서웠다. 느와르 영화에서 본 딱 그런 상황이었다. 난 그냥 뒤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 뒤로 날 누가 쫓아왔던지는 잘 모르겠다. 그 다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하숙집까지 뛰어왔던 것 같다. 혼자서 시골길 마라톤을 한 거다. 그 뒤로 나는 아,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라면서 멍하게 노을을 바라보고 괜히 길고양이를 찾아다니고 다시 바닷가로 가서 이미 첫눈이 내렸는데 다시 수영복 팬티를 입고 큰 수건을 깔고 선그라스를 끼고 일광욕을 시작했다. 길게는 못했다. 나는 슬럼프에 빠진 것이다. 깊숙히. 아마도 꽤 오래갈 꺼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침울했던 시기는 그렇게 길게 가지 않았다. 아직 갱년기는 아닌 것이었다. 그렇다고 발정기라고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하숙집 멤버들과 조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하숙집 멤버들 모두 1일 1실을 쓰고 식사 시간에 모두 모이는데 개고생 도보 여행 사건 이후로 나는 다른 방에 놀러 가고, 놀러 오고, 식사하며 대화하고, 저녁 식사 후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 참석하고 동석하는 횟수에 변화를 준 것이다. 애들이 공부하는 동아리방이나 일하는 친구들의 개인 사무실에도 잘 놀러가지 않았다. 일전에 같이 술을 자주 마실 때는 몰랐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애들이 착해서 그렇지 조금 꺼려하는 분위기가 있긴 있었던 것 같다. 한 10분 20분은 같이 술 마시고 떠들고 하며 좋았다가도 그 고비를 넘기기 시작하면 슬슬 애들 표정이 부쩍 어두워지고 미래를 걱정하며 자꾸 술을 많이 마시고 살면서 언짢았던 일도 얘기하면서 나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기들끼리 말다툼을 하고 사소한 시비도 붙고 내기도 하게 되고 그랬던 것 같다. 내가 눈치없이 골든 타임을 넘겨서 이제 교수들 쪽으로 가든 혼자 방황하든 그래야 하는데 괜히 혼자 들떠서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거다. 그래서 그때는 그걸 잘 알아채지 못했다. 빈말을 그냥 믿었던 것이다. 바보같이!
그렇게 애들과 어울려 노는 걸 좀 자제하고 평소처럼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예술과 삶에 관해 생각하면서 거리에서 사람들 얼굴을 관찰하며 일상을 보냈드니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절대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무엇을 그렇게, 무엇을? 사람들이 딱히 뭔 일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평일에는 해질녁에, 일주일에는 금요일과 토요일에 괜한 기대감을 모두 조금씩 갖는다는 것을. 별일 없을 걸 미리 알면서도 어차피 다시 무료해지고 좀 맹한 모습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을 잘 모른다는 듯이. 인생은 그렇게 즐겁고 기쁘지 않다, 라는 것을. 남들도 다 그렇다는 것을. 특별한 일은 자주 생기는 게 아니란 것을. 그래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고로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일과 놀이에 정진하지는 않더라도 말로 남을 우끼지는 못해도 긴장감을 풀고 남의 기분을 웃기 직전의 상태로 만들고, 글로써 타인을 감동시키기는 어려워도 뭔지 모를 흥분이 섞인 감정을 태동시켜 보려는 시도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조금은 그렇게 했다. 그러니 그 뒤로 가끔 글이 써졌다. 그리하여 나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따라서 기분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곧바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저번에 떠나온 집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아주 잠깐 장소가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옮긴 후에 다시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종의 회귀본능일 수도 있고 그냥 아무 이유없이 변덕 때문에 그런 판단에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 왜 그랬냐, 는 별로 상관없다.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 참 단순하다. 나는 돌아가서 다시 잔디를 깎고 수영장을 청소할 것이다. 그동안의 생활을 글로 옮겨서 신작 소설이라고 우기면서 친구들과 운영하는 무명 블로그에 글을 올릴 것이다. 하숙집 친구들과 작별하고 하숙집 주인장과 인사 나누고 떠나는 일은 의외로 간소하고 조용히 잘 마무리했다. 그리고 나는 떠났다. 옛집이 팔리지 않아서 부동산 웹사이트 담당자와 다시 돌아간다는, 매물을 취소한다는 얘기도 마쳤다. 가기만 하면 된다. 설마 가다가 중간에 뭔 사건에 꼬여든다거나 하숙집 멤버의 전-여자친구가, 현-여자친구의 여동생이 아저씨 사랑한다고, 떠나지 말라고, 이 사랑을 나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사태는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다행이지만 그래서 좋은 일이고 안심이 됐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금 서운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는 걸 나는 부인할 수는 없다. 그랬다.
그래서 나는 다시 돌아왔다. 잔디깎고 수영장 청소하는 집에 도착했다. 그동안 잔디가 많이 자랐다. 수영장에는 물이 아니라 꼭 콜라같은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흙탕물인지 탄산음료인지 잘 모르겠고 아무래도 괜찮다. 청소하면 된다. 나는 다시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리지 않는다 카페에 자주 들리고 1주일 단위로 1가지 일만 하는 생활 주기에 다시 빠져들었다.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오니 뭔지 모를 긴장감과 안정감, 그 둘이 친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지금 상황에 딱 맞는 속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동떨어진 말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 시점에 필요한 말 같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2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카라반이 생겼다. 중고 노트북도 생겼으니 긴요하게 써먹어야겠다. 다시 팔지 않겠다. 먼지 쌓이고 고장나고 타이어 바람이 빠질지라도. 그리고 둘째! 둘째도 중요하다. 둘째는 그곳이 변했다는 것이다. 많이. 그 집터와 집이 변한 게 아니라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가 변했다. 그렇다고 확 바뀌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예전에 있던 모든 단층이 지금은 2층으로 바뀌고 1층에는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는 그런 가상 현실 같은 얘기. 그러나 예쁜 초소형 주택과 얇거나 작고 앙증맞은 주거형 몇층짜리 빌딩도 하나둘 들어서고 있으며 시골이 점점 세련되고 고상한 모습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내가 봤을 때 딱히 장사가 될 것 같지 않은데 미래 투자가치도 별로 높지도 않고 거의 없을 것 같은데 호텔도 하나 들어섰다. 건물주이자 운영자의 일생일대의 소원이라서 큰 돈 버는 게 목적이 아니라서 지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유럽 3대 오페라 극장이나 유서깊은 카페와 관광명소, 천혜의 비경, 손꼽히는 고대 성벽, 영화에 등장한 그곳 등 그런 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래서 오히려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 갑자기 대도시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평소에 괜찮고 만족했던 평상심에 살짝 일시적인 흠집이 갈지도 모르지만 그땐 외딴곳으로 피신하거나 그냥 그런 저조한 기분도 솔직하게 터놓고 고백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지만 놀러오는 친구들이 없다. 글도 잘 안 써진다. 사실 나는 이런 권태로움이 마음에 든다. 이젠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건 마치 내 인생 컨셉 같다는 것을. 폭풍전야, 구질구질하고 험상굳고, 위협적이며 칙칙한 날씨, 행위예술, 생활연기, 여기서 들은 말 저기에 넘길까 말까 흥정만 하다 약만 올리고 냉큼 포기하기, 1년 내내 여행 계획만 짜다 끝나기, 무서운 얼굴은 물론 사람들의 화장과 옷차림과 단정한 구두와 스킬레토 힐을 훔쳐보다가 지쳐서 대놓고 빤히 쳐다보기, 초록색 피를 상상하기, 내가 막 그런 걸 좋아하는 걸 보니 나는 꼭 변태 같다. 이제 보니 시골이 딱 내 수준이다. 오랫동안 부풀린 바람을 빼고, 인생을 어느 만큼 겪고, 읽고, 듣고, 보고, 경험하니 내게 적합한 호사는 이 정도가 딱 알맞는 것 같다. 예전에는 간댕이가 부었던 게 틀림없다.
자, 그러니 이제 나는 그리고 그대는 작품 속의 화려한 주인공을 꿈꿔 봐도 되고, 현대적이고 세련된 도시 생활과 최상층의 유희와 최고급 생활을 호시탐탐 노릴 것이다. 꿈만 꿀 것이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거, 이룰 수 없는 걸 꿈이라고 생각하니까 비논리적인 거도 아니고 이젠 그래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정말 꿈에도 몰랐던 마법에 걸린 청개구리가 된 것 같다. 만일 멀쩡한 청개구리를 왕자로 만드는 동화가 때로는 아주 우연히 정말 귀하게 믿을 수 없지만 있을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현실이라면 다른 말로 전설이라면 그걸 구현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고 게다가 그것이 자신에게는 결코 끊을 수 없는 권태로움의 즐거움이라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바로 권태라는 제일 아끼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뭘 해도 재미없다는 바로 그 감정이라는 사색가가 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세상은 넓으니까. 세상 살이가 원래 그렇다는 유대감도, 만물은 그럴 것이다는 동질감도, 기쁘고 즐겁거나 잔잔한 음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프고 처량한 노래도 있다는 엄연한 사실도, 죄의식을 동반한 즐거움도(이걸 언어에 따라 딱 1개 단어로 또는 2개 이상의 단어로 에둘러 말하는 차이는 있다),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도, 천사의 근사치와 빈자리도, 천사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도, 그 희망도, 그 진득한 희구도, 어떤 죄책감도, 혼자만의 그러나 결코 혼자만의 것일 수 없는 짠함과 쾌감도, 사랑의 복종과 그것의 항복도, 단지 인간이라서 그렇다는 종교에서 말하는 원죄나 과학에서 뜻을 짓고 설명을 하는 어떤 여러 단어와 현상과 조금 중복되며 축도의 차이가 있는 뭔지 모를 복죄 또한. 그가 그인가 그것인가 그 명사인가 바로 당신인가? 그대인가? 아닌가? 아니면 그분인가? 그는 누구인가. 그가 인간인가. 정녕 누구라는 말인가. 이것이 전보다 더 뒤쳐지고 더욱 덜떨어진 사념이 아니라면 좋으련만 꿈도 야무지다. 그런 엉터리 허구가 어딨나.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시작한 신화적 영웅담을 부풀린 온라인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마법사도 게임 소개 영상에서나 멋지지 실제 게임상에서는 맨날 지겹도록 돌아다니고 털리고 사기 당하고 대기하고 그게 절반이다. 아, 잘 모르니까 아마도 그럴 거라고 짐작한다.
일단 여기서 단락을 넘겨야겠다. 나도 다른 소설을 읽을 때 그런 생각 많이 한다. 여기까지 읽고 다른 일을 해야 하는데 밥을 먹어야 하는데 나가봐야 하는데 묵직함도 좋고 달릴 때 달려야 하지만 소설의 다음 단락이 나오지 않으니까 많이 불편한 기분에 대해서. 이 소설은 워 얘는 뭔 문단을 나누지도 않고 꽉꽉 채워서 막 인정사정없이 쉬지도 않고 빼곡하게 썼을까, 하여간 소설 더럽게 재미없네, 뭔 소설 속에 불만과 의문이 그렇게 많아, 설정 인물 1명 정해놓고 자기가(소설가) 하고 싶은 거칠고 험악한 말을 전부 그 친구에게 일임한 거 아니야, 그런 불평이 참 많았는데 이제 보니 나도 그러고 있다. 귀 간지럽게 말이야. 나이 먹고 수다만 늘었어. 그만 쓰고 다음 장으로 넘기자. 그래 그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