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어쩌고 어째?'로 시작한 난장판, 그가 말하는 환락궁이란 이런 것인가, 누구 드디어 일내다 등등 이렇게 시시콜콜한 뉴스 제목과 연예기사 쓰기에 적합한 일이 터진 현장이 벌어졌다. 그곳은 좋은 취지로 모인 전성기를 갓 넘긴 유명 배우의 일대일 대국 생중계 자리였다. 체스나 바둑 또는 장기, 기타 지적 놀이 같은. 거기서 J는 사소한 훈수를 두다 묘하게 그날따라 초능력에 가까운 청력을 뜻하지 않게 발휘했던 행사장 주인공 스타와 멱살을 잡고 대면하며, 주위에서는 말리고, 사진을 찍고 그런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한편 그 자리에 있던 독립 저-예산 전문 영화감독의 눈에 띄여 J는 감독에게 지금 찍고 있는 영화에 딱 적당한 인물이네 뭐라네 하면서 출연 제의를 받고 다음날 그곳을 방문했다. 이걸로 한 5페이지 정도 분량을 뽑아야 두꺼운 그러면서도 진지하고 학구적인 소설이 되는데 너무 가벼운 느낌 때문에 드라마 제작 즉 가짜 이야기 티가 팍팍 난다.
아무튼 장면이 바꼈다. 여기는 영화 촬영장. 어느 장면에서 출연진과 촬영 관계자의 사소한 말다툼 끝에 나 영화 안 해, 아 이런 영화 못 찍겠네, 여기 아니면 갈 데 없는 줄 아냐며 다투던 당사자는 두편으로 나뉘어 어딘가로 사라지고, 이런 건 익숙한 풍경이라며 원래 영화 판에서 이런 일은 흔하디 흔하다며, 1시간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상황은 정리된다며, 그동안 요 앞에 생긴 클럽에서 잠시 기분 전환을 하고 오자는 영화사 매니저 S양의 설득과 인솔에 의해 그는 새로 생긴 클럽에 들어간다.
클럽은 크게 말해 두가지가 있다. 음악이 멈추는 클럽 즉 느린 템포의 음악이 간혹 빠른 박자 음악들 사이에 귀찮게 끼어드는 그런 클럽 그리고 음악이 아예 멈추질 않는 클럽. 매니저 S와 그가 들어온 클럽은 후자였다. 그런데 그들이 입장한 클럽은 한마디로 이상한 클럽이었다. 쿵쿵쿵, 방방방 리듬이 튀고 불빛이 번적번쩍, 깜빡깜빡, 반짝반짝 거기까지는 여타 일반 클럽과 똑같았지만 이곳은 그날 드레스 코드 때문인지 모두 제비복과 연미복, 커다란 드레스, 면사포 가끔 양산을 든 여인 등 그런 옷을 사람들이 입고 있고, 룸에서는 고급 카지노처럼 카드놀이를 하고, 벽면에는 인상주의 그림들이 걸려있고, 간혹 구석에서 E.M.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을 읽는 아가씨도 보이고 음향 시스템도 보아 하니 들썩들썩 그런 음악이 아닌 라라라라 아아아 우우 음 그런 음악을 위한 오디오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는 딱 견적을 내리기에 폐장된 고급 화랑이나 음악감상회장으로 짐작되며, 이곳의 주인은 거부이고, 홀로 살았을 것이고, 아마도 동성애자, 뜻밖에 젊은 애인을 남몰래 둔 게 아니라 먼발치서 조용히 흠모하며 간혹 한두 번 생면했다가 해후의 순간 그 짧은 시간을 그리워하며 미래를 과거로 보내며 여생을 보낼 것 같은 어떤 영화 주인공과도 비슷한 인물이 그 주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분위기를 파악한 후에 멀뚱멀뚱 더 신기하고 희한한 또 다른 숨겨진 뭔가를 찾고 있다. 싸구려 카페와는 전혀 다른 하지만 이상하게 그것과도 연결되는 어떤 복선이 깔려 있을 것 같은 이상에의 호소, 숨겨진 라파엘로 그림의 거래 현장, 백미의 신사를 보고서 아 저 사람은 인생의 3분의 1이 지났겠구나, 눈썹이 없는 이 아가씨는 세가지 슬픔에서 겨우 하나를 덜고 팔랑팔랑 흔들리는 불안한 일과를 보내던 중 적요, 적적하고 고요한 안정감의 손길에 익숙해지고 싶어하는구나, 그런 혼자만의 공상에 빠져 있는 사이 영화사 매니저 S양은 어디서 놀고 있는지 보이지를 않고, 그는 혼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어느 룸을 발견했다. 그곳에 가까이 접근하니 인적이 드물고 조명이 달랐으며 음조도 조용해졌다.
묘한 흡입력에 끌려온 그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는 그 너머가 어떤 곳인가 를 파악하기 위해 한두 발 내디뎠고, 순간 문은 혼자 닫혔으며 또 잠겼다. 허걱. 그곳은 또 다른 클럽이었다. 딱 봐도 근처 경쟁 업체 같은 느낌의. 이건 뭐지, 라는 기분을 만끽하면서 그 동요된 감정을 어디에 하소연하지도 못하고 경련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상한 각성 상태에 빠져들었다. 왜 A 클럽과 B 클럽이 연결된 거냐고, 난 입장료 안 내고 공짜로 B 클럽에 들어온 거냐고, 인생에 공짜는 없다는데 이거 뭔가 어디에 걸려든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그러나 클럽 분위기, 음악과 열기에 들뜨고 춤추고 떠들고 술 마시고 뭔가 (개)수작을 모의하는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 탓에 그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놓쳐버리고 만다. 게다가 혼자다. 왠지 행색이 몹시 초라한 거 같아. 다들 멋있어 보이고 이쪽은 울적하고. 그래서 그는 클럽 내부 외곽을 빙빙 돌다가 에라 그냥 나가자 라고 다짐하여 보이는 문 아무데나 가서 손잡이를 잡고 벌컥 문을 열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걷고 한참을 구불구불 돌고 돌아서 어디 바깥이 나오겠지 하면서 나갔는데 도착한 곳은 미술관이었다. 자기가 출구를 잘못 알고 쪽문이나 개구멍, 비상통로 등을 이용했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이왕 미술관에 도착한 거 예술품 구경이나 하고 나가자 하면서 수준 높은 미술품들을 관람한다. 여러 거장들의 유화와 설치 작품과 신인 작가들의 그림까지 잘 보다가 한쪽에서 썩 거대한 그림을 주의 깊게 살폈다. 괴상한 마수의 얼굴 그림이었는데 감탄하면서 바라보다가 괴물의 치아 가운데 딱 하나 검은색 치아의 빛깔이 하도 특이해서 그걸 자세히 볼려고, 만져보고 싶어서, 아니야 느낌만 살피자 하면서 그 앞에 서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멈추지 못하고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마치 텔레비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모니터 화면이나 사진을 정상 각도에서 보다가 딱 멈칫해 그러다 그걸 아래쪽에서 쳐다보면 어 안 보이던 어 그러지 않을까 하는 것처럼. 아니다. 극장에서 관객과의 대화 중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던 관중 가운데 한 사람이 조용히 일어나서 걸어나가 배우 옆 빈 의자에 착석하는 것이 비슷하겠다. 그 괴물 그림이 그렇게 컸다. 또 마술적인 매력이 넘쳤다. 그리고 괴물의 치아는 검은 그것은 묘하고 은은한 줄무늬, 무늬만 줄무늬가 아닌 실제 줄로서 장식되어 있고 막혀 있는 게 아니라 그림 전체에서 딱 거기만 뚫려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안으로 공연 장치처럼 쑥 빨려 들어가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정신이 혼미한 채로 이게 샤갈 그림인가 아닌데 프란시스 베이컨인가 그것도 아니야 이런 얘기는 보도 듣도 못했는데 뭔가 도발적인데 끝없이 도발적이네, 입체파인데 그냥 입체파가 아니야, 원래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작품인가 보다 라면서 뭔지 모를 예술에 넋을 잃고 심취해서 걸어가다가 갑자기 스르륵 굽어진 길을 지나 살짝 낮고 눕혀진 어느 신축성이 좋은 연분홍색 소파에 털썩 걸터앉게 되었다. 딱 만화 영화의 한 장면!
자, 초대하지 않은 손님 '비교의 시간'씨가 당신을 찾아왔다. 간청컨데 <꺼져> 라는 말만, 그것만 참자. 젊은 사람들은 수채화를 그리기 힘들다고 한다. 왜냐하면 수채화는 칠했던 물감이 마른 후에 다시 칠하는 방법이 필요한데 그걸 기다리기 힘들어하기 때문에. 1번이 카랴얀이고 2번이 번스타인? 잘못 말했다. 1번이 프랑켄슈타인 2번이 토스카니니? re: 지금 장난해? 1번은 수채화고 2번은 햄버거다. 1과 2에서 1이 조금 길다. 그럼 바로 면사포를 벗기겠다. 1번. 추억의 영화는 대부, 지금 최고는 오려붙이기 놀이?, 유행 안 타기는 고전주의, 대세 화장법은 악녀 스타일?, 그리고 초현실주의 경향과 낭만주의 사조, 여기서 끝이 아니야 인기 장르는 판타지와 미스테리와 스릴러가 아니라 예능, 출처가 비공개인 대학생들이 제일 데이트하고 싶은 연예인 남녀는 누구. 1번 끝. 2번은 방금 소설의 한 장면. 2번 끝. 으아 숨차다. 이제 비교하는 시간, 1번이 2번보다 더 보편적일까? 1번이 2번보다 더 유명한까? 말끔한 광고 사진에서 웃고 있는 얼굴의 몇 번 치아에 까망색 칠하기보다 더? 천만의 말씀, 아니다! 그러니 예술에서 최소한 새로운 소설에서 당연히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할 소재. 그럼 이제 다시 이야기 속으로,
그런데 그 소파가 놓여진 장소, 거기도 미술관이었다. 이 역시 A 미술관에서 B 미술관으로 연결된 그런 시적인 흐름이자 뭐에서 뭐로, 그런 신비스러운 위인의 모토 또는 브랜드의 표어 같은 일이 벌어졌다. 클럽에서는 일부 막, 기분이 침체된 분들을 위한 통로를 통행료 없이 그냥 이용했다가 다른 클럽에 당도했다고 쳐, 그리고 클럽과 미술관이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어. 인정해. 이럴 때 아량을 보이지 언제 생색을 내나. 거기다 바다처럼 넓은 포용력과 인내심과 유연함에 천재 행위 예술가의 응용력이 절묘히 결합되고 건물주의 농간 때문에 미술품에 통로를 뚫어 다시 미술관이 나왔다고 쳐, 다 괜찮아. 그럼 여기까지만 하고 끝나겠지 하면서 그는 더 이상의 뭐는 있을 수 없다, 그건 사기다, 팝아트가 아니라 다단계 피라미드다, 그런 반신반인의 포효는 있을 수 없다, 또 다시 그런 2연타가 나온다면 그건 그야말로 홈런이 아니라 파울이다, 아쉬우니까 그냥 파울은 아니고 파울 홈런일 뿐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번 슬쩍 둘러보고 입장료 없이 무료로 잘 구경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내심 이 서커스가 계속되었으면 시간이 멈추었으면 요모조모 재미난 선잠에서 깨지 말고 그냥 꾸던 개꿈 계속 꾸었으면 그랬으면 하는 바램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우주 공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미래 세계가 짠 하고 등장하는 것도 아닐 테니까. 곧 살짝 감추어진 여흥이 궁금하긴 했지만 내 사랑은 아닌 것 같아, 잘 단념하고 뒤돌아섰어, 어른스러워, 만족해 하면서 자축하고 생길까 망설이던 자괴감을 털어버리며 바깥으로 나와 도착한 곳은 공원이었다.
나무, 풀, 숲, 청소년들이 수건돌리기를 하고, 일부는 구석에서 핸드폰을 보며 입담을 풀고 입담배만 피우고, 강아지와 뛰어 노는 아이들, 왜 미술관에는 혼자 있는 여자들이 많은가 에 대하여 골똘히 연구하는 고양이를 안고 있는 차가운 도시의 여자들 그리고 풍선, 값싼 불꽃놀이 축포 몇몇의 때 이른 대낮의 도약, 시가 써지지 않는다며 울상을 짓는 시인 친구를 달래는 매출이 바닥을 기는 운동선수 출신이자 전-음악가였던 어느 현역 일러스트레이터, 작별하는 연인들, 친구에게 하는 얘기 즉 TV에서 어느 유행곡 작곡가가 자기는 비행기 VIP 석에서 히트곡을 많이 만들었고 지금도 계속 그렇게 작곡하는 습관이 있다는 연예 프로그램을 보고서 힌트를 얻어 자기는 대형 화물선을 타고 다니면서 글을 쓸 것이라는 만담 곧 화물선에도 엄연히 일반 승객이 있고 여행 상품마저 있다는 얘기, 평범한 동네 아저씨들이 많이 보이는 범상한 공원 풍경이 보인다.
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로소 어쨌거나 저쨌거나 드라마 같은 평행 운동, 병렬 진행에서 용케 빠져나왔구나 혼자 탄성을 지르며 안심하고, 혼자 서운해 하면서 쩔쩔매고, 타성을 억제하며, 드디여 심심하지 않게 되었네 이제야 나태와 작별하고 권태를 갇다 버리고 새로운 인생이 낡은 지난 삶에 참견하기 시작하면서 드디여 <바로 이거야!>라는 감탄사를 내뱉고, 아름다운 세계를 찬탄할 빌미를 잡을 듯 하다가 옆 사람에게 넘겨버릴려는 찰나에 단꿈이 깨버린 듯한 썩 개운치 않고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꼭 세상 물정 모르는 목동처럼. 아직 늑대를 한번도 못봤으니까. 양치기 분야에서는 천재적인 양치기견 보더콜리처럼. 혹시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까 라며 놓쳐버린 대어의 재물운이 다 보인다는 것 마냥. 그는 못내 아쉬워서 그러면서 공원을 몇 바퀴 거닐며 돌았다.
저 앞에 오리-배가 보인다. 호수에서 페달을 밟아 떠다니는 백조를 닮은 오리, 오리와 비슷한 오리배. 옆에 어떤 유명 점묘화를 흉내내는 예술가들이 보여서 에잇 뭐지 뭐야, 라면서 J는 오리배를 탄다. 그러나 주위에는 모두 연인뿐이 안 보인다. 또 금방 다시 그는 지루하고 따분하고 심심하고 재미없어졌다. 그러니 애꿎은 페달만 밟고 또 밟고 영차 영차 힘차게 많이 밟으면 많이 밟을수록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워진다는 듯이 그것을 계속 밟아댔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다른 일행들과 멀리 떨어져서 고립된 것 같고,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곧 이어 내르막 길이 이어졌으며 이제는 오리배가 혼자서 막 계속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여기가 호수인지 바다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 커다란 강 같은, 13일의 금요일 같은 표제가 연상되는 듯한 호수가 나왔다. 그는 아직 이것이 제 3의 2연타 즉 첫째 클럽 안의 클럽, 다음에 등장한 두번째 연인 미술관 안의 미술관에 이은 3번째 환상인 줄 아직 낌새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멍청한 놈!
그렇다고 물 위에 계속 떠 있을 수 만은 없으니 어딘가 가까운 육지로 오리배의 페달을 열심히 밟아서 갔다. 오리배는 육지에 닫았다. 그는 오리배에서 내려 뚤레뚤레 주변을 살피고 사태를 파악했다. 그대로 탐색을 계속하며 앞으로 쭉 걸어나왔다. 공터로 그리고 카페 앞으로. 그 찻집의 이름은 연애 소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여기에 들어가면 어떤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은 딱히 설레는 감정 같은 기분 좋은 사치감은 없었으나 그런 게 다 뭔 소용이냐며, 뭔가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 그런 허황된 기대는 이미 옛날에 포기해버렸다며 멈칫했으나 어떤 관성과도 같은 이끌림에 따라 카페에 들어가고, 어느 좌석에 앉아 술을 시켰다. 그는 여기 흐르는 음악이 모차르트의 레퀴엠으로 들리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컨츄리 음악이나 블루스, 재즈, 팝 음악으로 듣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그는 그냥 에스프레소 한잔과 최고급 위스키 스트레이트 한잔을 시킬려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웨이터에게 저기 저 잘 차려입으신 백작? 준남작처럼 보이는 신사가 마시는 술을 주세요, 그랬드니, 안 어울리게 완전 비싼 턱시도를 입은 웨이터가 하는 말이, 손님 저 술은 어... 저 술은... 음... 저건 안 드리겠다는 얘기는 아니고... 어... (자꾸 안절부절 못하면서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쪽으로 오시죠, 하면서 그 술은 여기서는 절대 안 된다, 큰 일 난다, 더 안쪽에서 마셔야 한다, 그 술에 어울리는 공간이 따로 있다, 그러면서 어느 깊숙한 밀실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를 따라가니 어떤 으슥한 기운이 느껴지는 내부 복도가 나오고 그 복도의 끝에 방이 하나 있고, 방에 이름이 있었다. "블랙잭!"
그는 블랙잭에 아직 안 들어왔다. 그곳은 카페 안의 카페일 것이다. 연애 소설 다음에 블랙잭. 여기를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 길을 계속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누구 방해하는 작자는 없는가, 누가 날 말려주지는 않는가, 원래 각본은 이런 것일까, 각본이 필요한 것일까, 그게 있기는 있나, 언제 이 콘서트가 시작되고, 어떻게 연작이 이어지고, 무슨 결과가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관객은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를 생각하며 이 순간 순간에 각별한 애정을 품음과 동시에 아무 생각없이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블랙잭의 문을 벌컥 열었다.
아, 보인다. 뿌연 오로라가 온통 주변을 감싸고, 새소리인지 하이든의 종달새인지 뭔가 음률이 귓가에 들리는 거도 같고, 불투명하고 상징적인 줄거리가 있었으니 이제는 결정적이고 청명한 본 게임이 시작될려나보다, 하면서 이렇게 뜸을 들이고 날 애태우게 만든 그 장본인은 대관절 누구일까, 그러면서 앞에 보이는 물체를 좀 더 빤히 들여다보니 예상했던 놀이공원이나 동물원, 해변 비치발리볼 경기장, 평범한 조각공원은 아니고 저 앞에 카페 사장이 문을 열고 날 부르고 있다. (그러면 그렇지. 내 그럴 줄 알고 있었어, 실망하는 몸짓!)
아, 꿈이구나, 오 이런 이게 다 진짜가 아니었단 말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이리도 실감날 수가 있지? 경이감이라는 액자 안에 낭만으로 스케치된 경외감의 빛깔을 띈 환상의 윤곽이 서린 추상적인 신비한 현실의 꿈나라가 아니라니 이런 날샛구나, 하면서 난 그를 맞이했다. (이 꿈마저 현실로, 글로, 예술로 살리는 재주는 내겐 없나 보다. 고로 난 진지하고 진솔한 사람이다. 절대 허풍쟁이가 아니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고 연락은 안 되고 집은 가깝지 까페 한적하고 심심한 데다 걱정도 되고 얼굴도 볼 겸 해서 와 봤다, 얼굴 좋아보이네, 놀러와라, 좋은 건수 생기면 연락해줘(뭔 건수?) 하면서 그 상황은 마무리됐다. 내 표정을 보고 방금 꿈에서 깨어나 정신이 없고 대답도 못하고 있는 걸로 알았나 보다. 잘 봤다.
그가 다녀간 후 꽁꽁 얼렸던 굳게 닫혀 있던 창작의 문 그 철옹성이 많이는 아니고 약간 꿈틀대기만 하면서 찬란한 영감이 잠자고 있는 녹슨 궤짝에 열린 고드름에서 착상의 단서 그 감흥이 뚝뚝 떨어질 듯 했는데 그냥 그럴려다 말았다. 윽 스팀!
그렇게 하루가 시작된 후 일과를 보내면서 평소처럼 왜 글이 안 써지냐, 늘상 하는 생각으로 뭐 재미난 일 없나, 귀를 한 번 후비고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 엉뚱한 상상을 두번 쯤 하다가 아, 그건 어떨까 라고 생각했다. 그게 무엇이냐면 그건 뭔가 새로운 일을 해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아까 꾼 꿈을 살짝 바꾸어 보자면 착상이란 명패가 붙은 문을 열었드니 본격적인 소설 집필 사무실이 나오는 것처럼 뭔가 생각날 듯 한데 그것이 아직 구체화되지는 않았다. 변형시켜서 비유를 들면 좋은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일상에 지쳐 일을 하다가 무작정 회장님 비서와 노닥거리다 사장단 회의실에 갇힌 설정에 이어 그녀와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밀월 여행을 가버린다는 이야기, 이것도 아니다. 틀렸어. 꿈이 너무 또렸해서 현실과 잘 구분되지 않거나 꿈이 완전 가물가물하여 갸우뚱하니까 줄거리를 떠올려 보고 복기를 해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나는 한 손으로 딱, 손가락을로 전방의 허공을 가르키며 삿대질, 그 다음에 골 세레모니, 이거야, 이거라구, 바로 이거라니까 하면서 약간 실낱같은 희망으로 잔잔한 웃음을 미친 사람처럼 지었다. 만약 누군가 나를 보고 있었다면 그 행위는 생략되었을 것이다. 즉 옛날에 흔했고 지금도 특별하지 않은 글로도 영상으로도 곧잘 나오는 주제, '나는 어느 날 출근을 하지 않았다', '오늘 나는 갑자기 집에 가기 싫어졌다' 같은 도입부나 첫 장면의 해설! 그것으로 반틈은 독립된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뭔가 어떤 일을 시작하고, 그러다 일을 때려치고 떠난 후에 그 상태를 즉시 글로 옮겨서 그 다음에는 온갖 거짓말로 계속 모래성을 쌓고, 큐브를 돌리고, 요술 주문을 외우면 그만이다, 라고 생각한 끝에 새로운 일을 찾아서 취직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 말은 곧 내가 지겨운 일을 때려쳐 본 짜릿함을 경험한지가 오래됐다는 뜻이다. 이런 거 좋아하면 이상한 녀석이라고 의뭉스러운 작자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지만 남의 숨길 수 없는 심리를 치밀하게 파헤치는 것보다는 내 마음을 활짝 열어버리는 게 그게 차라리 편하고 쉽고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엄밀히 따졌을 때 소설 쓰기를 위한 위장 취업이기는 하지만 나름 대의를 위하여 멀리 보며 소일거리를 찾는 것이고, 또 일도 열심히 하면 보람도 느끼고, 어느 기간은 한동안 꾸준하고 성실히 근무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제목도 뭣도 생각나지 않던 에로 영화가 아무 이유없이 떠올랐기 때문에 게다가 집에서도 가깝기 때문에 나는 어느 고급차 매장에 찾아갔다. 새로운 일자리를 위해서 옛날처럼 취업 관련 웹사이트를 돌고, LinkedIn을 뒤적이고, 지역 신문을 챙겨 보고, 지인과 연락하고, 거리를 헤매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래서 더욱 부담감이 없어서 무턱대고 근면한 사람들이 일하는 남의 사업장에 어느 소심-남이 차를 사지도 않을 거면서 불쑥 방문할 수 있었다. 여기서 경험을 쌓는다면 고급품 세일즈 시장에서 통용되는 화법을 익히고, 운이 더한다면 그 언변에 뽀너스로 사적인 자리에서도 즉시 구사 가능한 응용 기술을 또한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될 썩 괜찮은 교육적인 직장인 것처럼 보였다. 언술이 글발로 변환 가능할 것으로 봤다. 그런데 낮고 굵직하고 안정되며 침착한 음성이 돋보이는 그곳의 중견 세일즈맨이 고급차 옆에서 어떤 모델을 원하시냐, 주말에 애인과 바닷바람 쏘이시러 떠나시는 건가, 사장님께서는(언제 봤다고?) 여성분들께 인가가 많은 타입으로 보인다, 손님께서는 브랜드 A와 B와 C가 어울리실 것 같다느니 그럼 이 모델은 어떤가요 하니까 나는 금새 취업 응시생에서 일찍 은퇴한 갑부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 매장에서 그 양반의 훌륭한 화술에 엮여들다보니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나도 모르게 더운 것 같아서 옷을 벗을 뻔 했다. 이상하게 그 순간에 말문이 막혔다. 도저히 나는 말을 길게도 짧게도 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갑자기 달아오르면서 더워지는 사람이 어디 나 뿐이겠는가. 그리하여 일단 거긴 취업 후보군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다 급히 서두를 일은 아니라는 판단 때문에 나는 주말에 도시로 연극을 보러 갔다오기로 했다. 주말이 됐다. 도시로 가기 위해 가차를 탔다. 기차의 어느 칸에서 앉아 창 밖을 옛 생각을 하는 것처럼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지겨워져서 잠시 바람을 쐬러 뒷편으로 갔다. 그런데 저만치에 반갑게도 카페 사장이 보인다. 나는 눈치도 없이 어이 형씨, 정겹게 부르는 말에 곧바로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물을 뻔 했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럼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응?」
「사랑... 아니었어?」
「아니긴... 알잖아. 내 마음.」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기뻐하는 일은 모두 할 수 있다 그랬잖아. 다, 다 말야.」
이 상황인데 눈치도 없이 으흐흐, 으헤헤 하면서 그 사이에 낄려하다니 그랬으면 미움을 아주 많이 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그렇게 나는 도시로 가서 연극 한 편을 보고 시골로 돌아왔다. 기존에 알고 있었겠지만 새롭게 깨닫는 것이라고나 할까, 글쎄 혹시 처음으로 알아챘나, 정말 전에 신경쓰지 않았으니 몰랐던 게 아닐까 하면서 연극에는 등장인물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울고 웃고, 감동먹고, 그걸 일기에 쓰고 친구에게 권하고, 어딘가에 나 정말 오랫만에 연극 봤다고 알리며 자랑하고 싶어한다. 인기 정상의 드라마도 최고 작품도 절반은 등장인물이 많지 않다. 주인공 한둘이나 몇이 계속 뭐 하고 뭐 하고 또 계속 해먹는 이야기, 그게 다다. 그래서 또 어느 영화에서는 어떤 배역이 이건 시네마야 그건 TV 드라마고, 그건 불쉣이야 뭐라고 뭐라고 그런다. 또 원래 관중들은 많은 배역이 나오면 그걸 다 매끄럽게 이해하고 소화하면서 웃고 분석하며 글로 쓸 분량을 파악해 내기는 힘들어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휴식이나 감상이 아니라 일이나 공부다! 사람들은 등장인물 많은 거도 좋아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도 단 몇 명이서 다 해먹는 이야기다. 실은 대중은 너무 어려운 거도 꺼려하고 간단하고 쉬운 걸 선호하는 면이 분명 있다. 꼭 이건 마치 남성미 넘치는 마초이자 거친 상남자가 자기는 부들부들하고 낮고 갸름하고 기집애 같은 차는 못탄다, 딱딱하고 각지고 야성미 넘치는 그런 차 밖에 못탄다는 선호도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셰익스피어 희곡의 책 두께는 얇다. 그런데 읽는 사람은 어떠할까? 나는 주변에서 틈틈히 그것을 재독하는 사람을 보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을 찾고 싶고, 또 만나고 싶다. 만나면 어디 악수 뿐이겠는가 덥썩 껴안고 뽀뽀라도 쪽쪽 소리나게 해 줄 것이다. 단 그쪽에서 그걸 용인한다면! 그리고 또 상대방이 여자이고, 젊고, 미모에...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고결한 마음과 어여쁜 영혼이 더 중요하다. 훨씬. 난 괜찮은데 하도 사람들이 뭘 하드라도 사람 봐 가면서 해야 한다고 해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층위라면 아무래도 젊은이 보다는 음... 오우 저런, 그러면 대학생들이 아니라 대학 교수랑 어울려야 하는데 그건 난해하다. 만일 그런 지식인들과 만났다 하면 헤어질 것이고, 또 정말 우연히 마주치고 반가운 척 하고, 극적인 해후와 일상적인 상면 사이를 오간다면 참 애매하고 난감한 일이다. 때로는 마음에 들어서 가식을 던져버리고 친구 먹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제일 앞서는 예상 순번은 아니다. 목선이 우아한 뒤통수를 손쉽게 보여주는 큰손은 바로 이거다. 즉 그쪽에서도 날 안 받아준다는 것! 어디서...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어디에도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OK! 에라, 모르겠다. 그냥 나는 뭐뭐했다, 나는 뭐뭐했다, 로 가자.
나는 시골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까페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에 찾아갔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생활정보-신문을 들고서 그곳으로 갔다. 볼펜을 쥐고 취직할 곳을 알아보며 따뜻한 차를 한 잔, 기분이 좋으면 칵테일 한 잔을 더 마시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나는 포스트맨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예술가들의 삶과 내 인생이 어떻게 다른지, 친구들과 운영하는 무명 블로그는 왜 팬이 없는지, 블로그 무명은 유명과 명성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궁금해 하면서 까페 주인장의 속마음을 맞춰볼까, 그는 내게 당분간 이 까페 운영의 전권을 맡길 것이다, 번창하고 친절하며 깨끗하고 유쾌하게 까페를 운영하라는 말이 아니라 딱 하루에 한 번 문을 열었다가 마감 시간은 내키는 데로 문만 닫아주라고 단지 원하는 것은 그게 다라고 필시 그런 의도를 구체화시켜 내게 말을 건넬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것이라며 그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나, 그 뚱딴지 같은 허겁지겁 때려 맞춘 핀볼 같은 예상이 쪽집게 도사의 점술처럼 그대로 적중해버렸다. 설마 그가 거미줄이 생기고 난장판으로 변용될 까페의 운명을 내게 순순히 의탁할 리는 없을 거야,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가 선심을 쓴 건지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잘못 내린 결정인지는 몰라도 내 낮의 예언이 여실히 틀렸다는 것을 고스란히 증명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는 당분간 중요한 할 일이 있다며 그것이 마무리되는 데로 돌아오겠다면서 떠났다. 아! 이게 도대체 뭔 일이지? 좋은 일인가, 실감나지 않는 하나의 사건인가. 아니면 미완성 소설을 위한 어떤 발단이자 똘똘한 동기가 되는 찬사가 될 것인가. 일단 뭔지 잘 모르겠으니 혼자 한마디 내뱉었다. 그것은 혼자 말하고, 혼자 듣기.
「축하해!」
그리고 1인 2역의 상대방은 시치미를 떼며 뭐 그런 대수롭지 않은 일로 축하를 다 하냐며 가까스로 고맙다 라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혼자서 파티를 해야겠다며 까페 주방 선반에 있는 고급 와인과 음식들이 있는 쪽으로 별로 기쁘지 않다는 듯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려봤다. 그래~ 이거라니까~ 하면서.
얼렁뚱땅 넘겨받은 까페 경영권, 그것으로 달아오른 기분은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첫째 날도 그리고 둘째 날도 또 1주일이 될 때까지 거의 손님도 없고 별로 신선한 흥미도 없었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찻집? 술집? 혹시나 레스트호프 그런 까페 운영. 하고 보니 별 것 없었다. 이게 전부라면 까페 못 할 사람 하나도 없겠다. 그 인간이 한참 내르막의 정점을 찍는 시기에 넘겨주었나, 손님이 많으면 보통의 자영업자와는 반대로 나는 안 좋은 거니까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같이 놀 아르바이트생도 없고, 청소도 힘들고, 막 갇혀 지내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이 부탁을 딱 거절하고 어디 월급쟁이로 들어갈 껄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1주일을 돌이켜보니 매장 운영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카페 문을 여는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운영 시간 내내 파리만 날리고, 거의 개인 도서관이나 음악실, 그냥 자기 집이랑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생각해보니 여기 주인 양반도 전에 항상 눈이 풀려 있었고, 차림새도 좀 이상했으며 그가 읽는 책은 주로 호메로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단테 알리키에리, 안톤 체호프(!) 듣는 음악은 말러와 바그너와 어쩌다 베를리오즈, 드뷧시, 바르톡, 힌데미트 류의 음악을 많이 듣고, 이렇다면 미술 화보집은 어떤 걸 주로 보았을지 TV를 틀면 무얼 보는지 친구는 멀쩡한지 의외로 그가 자란 집안을 알게 되면 완전 반전을 안겨 줄지 어떨지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분은 이제 보니 꽤 수상쩍고 매우 특이한 인간 유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와서. 아흐. 뭐 그건 그거고 지금 와서 내가 점성술을 연구하거나 수학 공식과 과학 법칙에 대해 공부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것만으로 보자면 난 지금 꽤 행복한 게 맞다. 그냥 여기가 내 작업실이라고 생각하고 작품 구상에 들어가면 된다. 언제부턴가 손님은 아예 단 한 명도 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순진한 여대생으로 보이는 듯한 손바닥만한 가방을 사선으로 매고, 머리카락을 애들 마냥 두갈래로 묶고, 레이스 장식이 돋보이는 화사하지만 절제된 옷을 입고서 옆구리에 현대 시인 누구, 헨델의 모음곡 악보 그리고 블로그란 제목의 집에서 화분이나 냄비, 후라이팬 받침대로 쓰면 딱 좋을 듯한 정체불명 삼류 통속소설을 끼고(이렇게 가지고 다니면 무겁고 귀찮고 불편해서 거의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지만 드라마에서는 꼭 이렇게 나온다, 즉 이렇게 하고 다니는 사람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거나 외로움을 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하시길),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은 듯한, 잘못 썼다, 바람맞은 듯한 기색이 엿보이는 안면을 띈 아리따운 아가씨가 까페에 나타났다.
그녀는 이곳에 불규칙적으로 들리더니 가끔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누고, 뭔가 호감을 나타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으며, 왜냐하면 그녀는 아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오는 손님이 오직 그녀뿐이라서 그녀가 혹시 내게 관심이 있나 라는 착각에 빠져든 것 같다, 나는 그녀의 신청곡인 30, 40년이 지난 유행곡이나 비올라 협주곡을 남겼던 여러 작곡가들의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어딘지 모르게 나의 숙원이자 엉뚱한 방학숙제 같은 텐미닛의 애제자의 급선무처럼 느껴졌던 그녀의 정확한 이름은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저번에 하숙 생활을 하고 왔던 그 근방 대학교에서 쳄발로 전공에 서양화를 부전공으로 하는 것 같고, 좋은 성장 환경을 거쳤으며 가본 곳도 많은 듯 하고, 간혹 같이 오는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녀가 이니셜 뭐드라, 발음하기 힘들다, 엇비슷하게 넬이라고 불리는 것을 뿌듯하게 알아냈다. 우리는 친해졌다. 금새 가까워졌다. 그러나 앞날을 약속했다 같은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어느 정도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지적 취향과 생활 습관이며 주로 즐기는 것과 좋아하는 무엇들을 언뜻 예측하고 점찍어 볼 수 있는 공유했던 정보를 나중 생각해보았을 때 많은 것이 잘 떠오르게끔 그런 인상을 풍기는 정도의 상당히 애매한 몇몇 대화를 보통은 때때로, 흐리면 가끔, 뭔가 좋은 일이 있거나 기대되는 약속이 있을 듯한 날에는 더 자주 나누곤 했다. 그냥 그게 다였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둔하다 할지라도 분명 뭔가는 느꼈다. 이걸 일선에서는 흘리고 다닌다고도 하고, 이런 쪽으로 헤프면 나중 혹시 두고두고 욕 얻어먹을 수도 있다. 살짝 호감 가는 인간미와 우린 모두 동물에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존재이며, 뭔가 보호하고 싶은 대상이 더 뚜렸해졌으면 싶은 막연한 선망과 마땅히 최근 탄성을 내지를 일이 없다는 경황을 서로 감지하고서 통성명을 은근히 일부러 미루고, 더 가까워지기를 애써 연기하는, 즉 유부남과 유부녀들이 조심해야 할 단계 딱 그런 기분이 오고 가는 까페 사장 대리와 손님의 관계였다. 그녀와 나는.
인간사에 통달하지는 않더래도 중1 쯤의 농담과 중2 정도의 농익은 저난도 비꼬기, 초딩 수준의 몸개그 정도만 익히 아는 정도라면 이제 일이 어떻게 풀렸을지는 대충 어렵지 않게 눈에 선하게 그려질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 다음에 넬이 예비 애인으로 보이는 멋진 남자를 데려올 때 까지는. 그는 쉽사리 약점을 잘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뭐 하나 빠진 데 없이 너무 멀쩡했다. 그러나 딱 하나 단점을 꼽자면 매번 까페에 들릴 때마다 자동차 키를 탁자 위에 올려놓는데 그 브랜드가 매번 바뀐다는 점이다. 그쪽 관련 일을 하나 궁금하게 만듬. 그게 맞다면 좀 생뚱맞다. 약간 그녀쪽에서 과도한 애교를 부리고─혹시 나보라고?─데이트 비용에도 충분한 인심을 쓰며 한마디로 그녀가 애를 무척이나 많이 쓰는 듯한 (그냥 내 관점에서 편하게 부르는) 남자친구 1까지는 괜찮았다. 정말 딱 여기까지는.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남자친구 1은 보이지 않고 그와 또 다르게 탄복을 자아내게 만드는 목소리와 말끔한 외양, 훌륭한 예절, 코메디언 빰치는 능숙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농담 구사 능력과 카리스마와 가죽잠바와 아주 세세한 곳까지 챙겨주는 마음 씀씀이 등 모든 것이 좋아 보이는 새로운 얼굴, 남자친구 2가 나타났다.
그러나 나의 부적절한 질문과 시의적절하지 못한 끼어듬, 분위기 깨는 음악 선곡, 이상하게 날 부를 때만 딴 생각을 한다거나 뭔가에 집중하거나 야한 상상을 하느라 아늑하게 까페의 품에 안겨 기분 좋게 차를 마시며 창밖의 낯선 아가씨를 쳐다보는 멋진 정물화의 구도도 얼굴 표정도, 분위기도 모두 깨트리고, 그래서 매번 넬의 남자친구 2에게 실망감을 누적시켜준 형세에 처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눈치도 없이 하는 말, 그 옷 또 입고 오셨네, 옷이 몇 별 없나 보다, 옷을 잘 못 입으시네 같은. 앞뒤가 심각하게 안 맞는 질문들, 저번에는 그녀가 케익을 남자친구 1과 드시더니 이젠 케익 모양 악세사리를 하셨네, 차를 모두 파셨나 봐요, 조금 피곤해 보이시네요 남자 쪽만! 우하하하하, 스킨 뭐 쓰세요 아마도 좋은 향수를 뿌리셨을 테지만 그 마 거 마 향이 못 쓰겠네 아 견디기 힘들어요 머리가 지끈 지끈 아플려고 한다니깐요 C나 D꺼 한 번 써보세요 아 H도 괜찮더군요 멀쩡하게 생기셔가지고 신경 좀 더 쓰셔야겠다, 옆에서 잘 챙겨주시질 않고 어디 딴 데 신경쓰실 데 있나, 저번에 넬이 남자친구 1에게 선물한 가죽장갑은 안 하시는 거 보니 잃어버리셨나 보다 등등등. 딱히 심술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냥 단지 궁금함을 해소하거나 가벼운 말 한마디 나누고 싶어서, 정말 솔직히 목소리 한 번 더 듣고 싶어서 일부러 말을 나누고 이어가고 끼어들었으며, 진짜로 나는 가끔 넬의 남자친구 2와 남자친구 1을 헷갈리는 실수를 반복했으며, 또 나는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 2와 조금은 친해졌다는 한참 잘못 집은 틀린 셈을 정답인줄 알고 있었다. 무의식에게 깜박 속아서 된통 당한 것일까? 누구 대성통곡할 일 만들 일 있나, 그분이 요즘 이상해지셨다. 자꾸 엄한 곳에 불쑥 불쑥 꼭 불청객처럼 등장하시다니 아 이거 미치겠네! 귀납법, 연역법 이런 걸로도 안 풀리는 불가사의다. 나는 괜찮지만 그녀와 그녀의 새로운 근사한 세련된 고상한 우아한 그러면서 웃기는 재능 또한 탁월한 그녀의 남자친구 2는 괜찮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뒤늦게 짐작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가, 막 궁금해질려는 판국이지만,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는 왠지 서운하다. 왜냐하면 그 이상한 행동 기제의 원인 때문이다. 도대체 이런 기술은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이것도 독학인가? 이걸 과연 기술, 아 이런 땐 외국어로 말하면 있어 보이니까, 스플렌디드한 스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심지어 그 어느 바닥에서는 극히 평범함에 불과할지도 모르는데 이걸 누가 인정이나 해 준다고, 허허. 정녕 나는 이런 화법의 정진을 위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읽다 팽개치고, 예술 영화를 보다 꿈나라로 떠나고, 어떤 높은 자리의 사람은 착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 잘하고 잘 생긴 사람에게 표를 던지고 (누가 들으면 나가 떨어질 일이다, 인정한다, 나 때문에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 이라고 한다면 할 말 없다, 아니 반성한다. 그래서 책 꾸준히 읽고 나름 인격을 수양하고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니까 여러면으로 가치가 대동소이하다면 물론 착한 게 좋겠지만... 옛날에 난 애송이였다. 뭘 몰랐다. 그렇다고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졌다고도 하기 힘들다. 아흐!), 바깥에서 친구와 다투고 집에서 밤에 꿈꾸면서 괴한과 싸우고, 헨리 롱펠로우가 생각나네 괴테가 이런 말을 했다네 사랑법과 문법을 비교하고 비유하며 세계에서 제일가는 은유법에 대해 고민했던가? 이럴려고? 어? 정말 이럴려고? 나 이런 맙소사! 정녕코 아찔한 지성의 단계 그 앞마당에는 이를 수 없단 말인가. 기껏 나이 먹고 한다는 게 염치없이 농담이라며 웃고 살자고 깐죽거리고 염장지르기라니. 이런 삐─삐─!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인성이 중요하다. 그 흔한 사랑, 못할 수도 있다. 어느새 세월이 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성은 사랑 안에서도 사랑 밖에서도 기본이다. 굳이 알고 싶지는 않으시겠지만 참고로 부언하자면 나와 불꽃 튀는 신경전을 벌였던 그쪽 진영의 주인공인 그녀는, 내 님은, 그래 그분은 인성이란 단어를 이름으로 하는 영화배우를 좋아한다. 그랬다. (여기서 번역자에게 고충을 안기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고 내심 섭섭하다) 음은 같고 뜻은 다를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좋은 뜻 1과 좋은 뜻 2의 차이 밖엔 없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인성씨에게 체격도 안 되고, 얼굴도 안 되고, 말도 안 되고, 카리스마도 안 되고, 뭐도 안 되고, 다 모두 비교도 안 된다. 천부당만부당하다. 골백번이든 몇번이든 따져볼 필요도 없다. 비교 자체가 기분 나쁠 일이다. 적어도 그분 팬클럽원께는. 그러나 앞서 말한 그 기술,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거 하나를 기준으로 봤을 때 인성씨는 나한테 상대도 안 된다. 쨉도 안 된다. 어허, 그럼! 이런 젠장! 뭔가 반성하고 자조적인 논조였는데 어쩌다가 어떻게 뒤집혀진 거지? 이거 원 꼭두각시도 아니고 삐에로도 아니고 참 나 뭐가 뭔지 모르겠다. 자랑할 게 그렇게 없나. 나 참 못났다. 응~에! 어쨌든 멋진 인성씨도 보고 싶다.
다시 돌아와서, 어쩌겠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따라서 그녀는 어쩌면 남자친구 2와 결별하고 술 취해서 남자친구 1에게 전화해서 험악한 말들을 퍼붓고, 그 다음 날 후회 많이 하고, 까페 포스트 맨에 발길을 끊을 것이다. 그러나 괜히 억울하고 분이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러겠지. 그러므로 내가 봤을 때 그녀는 계속 이곳을 찾을 것 같다. 내 짐작이 맞았다. 아 아직이다. 내 예상이 적중할 것이다. 다만 그녀가 내게 물을 끼얹거나 뿅망치로 날 때리거나 그런 유사한 분풀이를 한다면 내가 응당 치르고 귀엽게 살려서 받아주어야 마땅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뭔가가 있을까 봐서 괜히 걱정이 되고 불안감에 오금이 저렸다. 때문에 나는 부산히 준비하고 확실한 대책을 강구했다. 이 동네 화술의 1인자이신(정말 저렴한 그런 말발 말고 확연히 다른 그런 거 있지 않나) 신사분을 긴급 호출할 수 있게 연락을 해놓고, 그녀가 들이닥치면 너무 성스럽지도 너무 속세 느낌도 나지 않는 적당히 경건한 음악 즉 최적의 칸타타를 준비해 뒀다가, 그녀가 짠~하고 등장하면 빠밤~하며 분위기를 살릴 준비도 마쳤다. 물론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까 그녀에게 사람을 붙이거나 다른 뭘 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카페에서 바흐의 칸타타만 하루 종일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칸타타 정말 지겹게 들었다. 칸타타라면 (지금은) 신물이 난다. (이 글을 쓰는 미래엔 모차르트의 미사 C단조를 듣고 있다) 축구선수 칸타바로, 야구선수 누구 있겠지, 음악용어 칸타빌레, 영화제 칸, 지명 캔사스 시티... 칸 뭐시기는 한참 동안 모두 피해 다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는 꽃다발,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요리와 여러 종류의 술과 매니큐어와 악세사리, 여성 월간지를 아예 통채로 섭렵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서 어느 만큼 든든히 대비한 후에 나는 그녀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녀가 통 방문하지를 않았다. 이사갔나? 그새 남자친구 3을? 취향이 바꼈나, 여자로? 여행? 아니면 뭐지? 연락처라도 받아놀 껄 그랬나. 아 내 연락처가 없지. 나는 그렇게 초조하면서도 느긋하게 때론 조증으로 때로는 울증으로 일관하다 변덕을 부리다 그러면서 그녀를 기다렸다. 나는 사실 언제부터 그녀를 기다린 것일까? 필경 처음부터? 아니 아니야. 뭐? 빠졌네 빠졌어? 아니다. 그녀는 내 스타일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무명 블로그에 올려서 황금 종려상부터 공로상까지 그야말로 싹쓸이해서 그것의 명성을 쌓고, 그 이름을 유명이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같은 신화에 나오는 이름이나 어떤 명화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바꾸고 싶은, 어디까지나 학구적인 욕심에 기인한 시적 감성을 필두로 하는 단순한 동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설레는 감정은 무슨, 나는 사랑 그런 거 안 좋아한다. 안 키워. 그거 한송이 피울려면 아, 말도 못한다. 난 그걸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최소한 그것의 귀함과 현존성과 가능성과 영원함을 찬미할 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사랑을 잘 모른다. 아직 성숙한 어른이 아니다. 그거 금방 변한다. 믿을 게 못 된단 말이다. 종류도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그건 학문도 아니고 정확하지도 않아서 수학적이지도 않고, 이제 와서 내가 그 길로 나갈 수도 없다. 늦었다. 또 나이 차이도 많이 난다. 고로 그녀는 내 추종 세력일 뿐이며 따라서 그녀는 나의 팬클럽 가운데 한명에 지나지 않는다. 틀림없다. 그래야 한다. 그럴 것이다. 그렇다. 이렇게 뭔가 정리하고 나니 개운하다. 이 느낌은 뭐랄까 꼭 그런 것 같다. 땀을 흠뻑 흘리고 운동한 후에 씻고 근사한 곳에서 당신과 함께 맛난 음식 배불리 먹고, 당신을 일찍 달콤한 스윗 홈에 들여보내고, 친구들과 만취해서 거리를 질주했다가 거리에 보이는 어느 가게의 문양인 태양의 신 표식에다 캔 맥주를 퍼붓고, 그 앞에 주차된 삼지창에 오줌을 누고 나서 고요한 새벽 어느 시간에 오페라 한곡을 가사도 틀리게 고래고래 불러서 마을 사람들을 왕창 깨우고 나서야 딱 속 시원한 정말 정말 상쾌해서 날아갈 듯한 막 기쁘고 들뜨고 후련한 그런 괴팍한 감정, 그것과 아주 조금은 비슷한 것 같다. 진짜로!
하지만 그녀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내가 찾아나서야 하나? 보고 싶다. 그녀의 구두가. 그 뾰족 구두만. 그녀가 여기 다시 온다면 한잔의 차를 시킬지 브랜디를 시킬지 단지 그것이 궁금하다. 괜찮은 호남형으로 동네의 건실한 청년으로 소개시켜줄 어디산 누구, 도 준비 다 마쳤다. 자꾸 초조해진다. 일생일대에 아무래도 크나 큰 실수를 한 것 같다. 이 사태를 어떻게 만회한담? 어떻게? 불현듯 뜬금없이 미친 제인이 대주교에게 뭔 일을 따졌다나 뭐라나 그 시가 생각난다. 왠지 모르게.
그렇다고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마치 불 같은 열정적인 드라마 주인공처럼 사랑에 빠진 것처럼 멍하니 그저 허공만 바라보며 넬만 생각하고, 넬 노래만 듣고, 혹시 그때 까페에서 다른 작업을 하다 우연히 만들어진 그녀의 대화 즉 음성이 담긴 녹음 파일이 남아 있다면 미친 놈처럼 그녀와 정물, 풀밭 위의 사람들에서 다른 사람들 다 빼고 그녀의 누구와 나의 누드를... 그런 그림을 그리면서 이어폰을 끼고, 중저가 진공관 앰프로 아니면 최고급 트랜지스터 앰프로 그 파일을 듣는 난해한 작업을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덜떨어진 일은... 생각만 해도 아질하다. (말은 이래도 그런 경험 못 해봐서 뭔가 그립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잘 몰입하지 못했던 책을 읽기로 했다. 왜냐하면 첫째, 그녀에 대한 생각이 조금 옅어질 것이고 둘째, 못 읽었던 귀한 작품에 빠져드는 행운도 덤으로 얻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고른 작품은 무언인가? 희곡과 SF! 또 그 가운데서도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필립 킨드레드 딕. (개인적으로 조금 뭐하다면 적당히 다른 인물로 대체하자) 장비발은 암만해도 좋게 말해서 안목이고, 사실적으로 봐도 병이다. 불치병. 사랑보다 더한. 주위에서 그런 사람 보신 적 있으신가? 장비발 매니아 말고, 셰익스피어와 필립 K. 딕을 동시에 기쁘게 즐겨 읽는 사람, 난 못 봤다. 한 명도. 저런 저런! 질문부터가 잘못 됐다. 희곡을 주로 읽거나 희곡도 너그롭게 무난히 읽는 사람, 드물다. 적어도 직업적으로 시나리오를 읽는 사람 즉 배우, 그분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선천적으로 뿐만 아니라 후천적으로 희곡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아무래도 어렵다고 본다. SF도 완전 그쪽으로 빠져있는 친구들 물론 많긴 하지만 그분들과 친하거나 알고는 지낼려면 교우관계가 좋아야 한다. 그분들이 비정상이란 말이 아니다. 그럴려면 성격 정말 좋아야 할 것이다. 막 욕해도 좋아 해야 하는지는 좀 애매한 문제다. 난 성질이 드센 상남자다. 하여튼 그 둘을 모두 섭렵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한 길을 가는 것조차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음!
안되겠다. 나는 도저히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상대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득히 더 기다리고 싶지만 그러다 망부석이 되면 어떡하냐. 이게 대체 무슨 패배 의식에 물든 냉소주의란 말인가. 이러니까 옛날의 삶이 별로 재미없었던 것이다. 가만히 웅크리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인생을 수수방관하는 건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일어서서 움직이고 그녀에게 찾아가서 말 한마디 하면 된다. 미안하다고. 그녀가 무슨 과인지 친구 얼굴도 알고 그 누드 스케치 현장도 나는 저번에 봤다. 가서 하숙집 친구들과 인사하고 근황도 묻고 서로 담소를 나누며 혹시 축제 기간이라면 같이 놀다 오면 그만이다. 뭐 어려운 일도 아니네. 나는 바로 바다가 보이는 대학교로 출발했다.
그곳에 도착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는 했는데 넬을 찾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르는 행인이나 학과 학생에게 무턱대고 물어본다는 게 쑥스럽기도 하고 또 어떡하다가 어렵싸리 그녀를 만나더라도 불쑥 전전? 전-남자친구의 소식을 물을 수도 없거니와 일단 같이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쉽지 않은 사이 같고, 이런 나의 마음을 표출하는 걸 정작 그녀가 바라지 않을 수도 있으며,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란 생각도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아 이건 아닌 것 같다, 하면서 나는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그냥 바빠서 까페에 오지 않았을 수도 있고, 괜히 잘 사는 사람에게 갑자기 찾아와서 너무 친한 척 하는 것도 실례인 듯 하고, 몇 마디 타인의 농담에 고민할 만큼 흔들려서 헤어진 청년이었다면 그 문제 이면에 혹 다른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난 왜 이렇게 느닷없고 부지런히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찾아온 것일까, 무슨 근거로 말이야.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가면서 근처 풍광을 구경하다가 해안 도로에 접어들었다. 얼마 머물지도 않을 거면서 금방 발길을 돌리는 걸 보면 꼭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가 자주 가는 찻집 골목길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핸드폰이 없었던 시절의 영화학도 같은 약간 수수한 운치가 느껴졌다. 그렇게 해변 도로를 드라이브하면서 혼자서 분위기를 좀 잡을려고 어느 까페에 들어갔다. 그냥 돌아가는 건 폼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남자는, 폼이다. 마술피리라는 이름의 그 까페는 좀 촌스러워보였지만 내부 인테리어와 안에 있는 사람들 층위나 행색은 바깥과 달리 여실히 촌스러워보였다. 하긴 나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그게 편하다.
실내는 그래도 꽤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인다. 흔히 보기 어려운 색상 조합에 특이한 디자인이고, 공간은 원형과 타원형이 높이를 달리해서 엇갈려 있고, 무엇보다 창문이 매우 작고 띄엄띄엄 있었으며, 빙 둘러서 똑같은 문이 굉장히 많았다. 벌써 내가 어디로 들어왔는지 잘 모를 지경이다. 실제 문인지 그냥 벽면 장식인지 또는 작품인지 통 분간이 되지 않는다. 나는 한쪽에 앉아 차를 시켜 마시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이런 가슴이 콕콕 아린 모습이라니! 저 앞에 넬의 남자친구 1과 남자친구 2가 다정하게 무척 친밀히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면서 어떤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건 속없는 사람이 보든 나처럼 넬과 누군가가 같이 다니던 순서를 아는 사람이 보던 약간의 의심과 상당한 추론의 눈빛을 도저히 던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나는 한참을 촛점을 잃은 시선으로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오래 알고 지낸 듯한 기분이 드는 넬이 완전 불쌍하다고,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문난 연애술사의 총아처럼 보이던 그녀가 물 먹은 건가, 저들은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아니야, 사랑이 무슨 죄야? 또 확실히 아는 거도 없잖아, 그러면서 괜히 이상한 기분을 달래며 까페 내부 공간을 구경했다가 2층도 올라갔다와서 나갈 수 있는 문이 어떤 문일까 살피고 있었다. 저기 문 A? 아니면 문 B? C가 왠지 끌리는데!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문 C를 활짝 열고 그 문을 통과해서 그쪽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그곳은 또 다른 까페였다. 마술피리와는 다른 느낌의 찻집으로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차분한 분위기였으며 찻집 이름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였다. 좀전에 차 마시는 흥취가 좀 불안정했으니 여기서는 짜릿한 청량음료를 3잔 연거푸 원샷하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그런데 또 이게 뭔가. TV 코메디 프로그램의 화면 효과로 치자면 눈동자에 횃불이 켜졌다고 해야 할까, 주변에 변개 치는 모습이 나을까 아니면 그냥 눈에서 레이저가 지지직 하면서 나가는 게 좋을까. 저기 저 탁자 옆 푹신한 연보라색 소파에 앉아있는 인물은 다름 아니라 바로 넬과 까페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의 사장이었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까페 사장과 넬이라니, 세상에나! 이럴 수가!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오우 저런...! 그런데 왜 포스트맨은 벨을 딱 두번만 울릴까, 아니면 두번씩이나, 책을 안 읽었으니 당연히 모르지.
딱히 나와 별 관계없는 타인의 삶이고, 내가 나설 일도 아니지만 내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어딘가에 넌지시 묻고 싶은 심정이다. 이건 고요하고 거룩히 차 한잔 차분하게 마실려는 단정한 나의 알리바이를 방해했으니 파란이요 풍파이자 손톱만한 연애의 찬양이자 추파가 분명했다. 이쪽에서만. 또 지금만. 이곳도 내가 쉬면서 소설을 구상하고 현실에 안주할 만한 차 한잔 고상하게 편안히 마실 찻집은 아닌 듯 하여 나는 또 그곳의 문을 박차고 나갔다. 진작 분발해서 떠나갈 것을 아니 아예 이 불분명한 목적의 여행길에 접어들지 말 걸 그랬다.
찻집의 이름은 거창하게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혹시 옆사람에게 그게 뭔지 아시냐고 물어보자. 나는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까페에서 나가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정확히 어떤 것인 줄 몰라 앞에 보이는 2개의 문 가운데 아무거나 하나를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러자 저 앞이라고는 할 수 없고 두께와 넓이를 짐작할 수 없는 형체로 온 전체가 엄청난 밝음, 환한 빛무리, 하얗고 반투명한 캔버스, 모든 것이 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빗물도 하얗고 소리도 하얗고 화제의 신간과 꾸준히 팔려나가는 인문-교양서마저, 절대 놓칠 수 없는 들으면 젊어지는 최신 유행 음악 CD까지 모두 하얀, 그 무언지 모를 전체의 이름조차 하양이라는, 그리고 아마도 백야의 느낌에 가깝지 않나 싶은 바로 그 순간 서서히 시나브로 주변의 물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여기가 어디이고, 나는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천천히, 살며시, 은근슬쩍,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이곳은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까페의 바깥이고, 나는 까페 안에서 바깥으로 문을 열었으며, 내가 노출증 환자는 아니지만 팬티만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상한 심리에 휩싸이면서 이게 자각몽인지 단순한 일시적 몽유병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순간이동을 했는지 궁금해하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꼈다. 마술피리에서 마셨던 홍차는 진짜였는데, 아드리아네에서 봤던 옆사람이 마시는 음료수 돈 지오반니는 주황색이었는데... 그러면 기존의 그 까페는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가 아니라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리지 않는다, 가 맞나? 가만 넬이 남자친구 1과 다시 만나고 남자친구 2와 P 까페 사장이 만나기로 한건가? 저런, 넬을 부를 때 '경'을 붙여야겠군. 미친 제인까지는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귀신에 홀린건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은 어디로 갔나 아득해 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 차가 와서 멈췄다. 그것은 브랜드가 불분명한 P 찻집 형씨가 직접 튜닝하고 제작한 차다. 그 양반이 차에서 내려 내 쪽으로 다가오며 웃음 짓고 말을 건넨다.
그동안 별일 없었냐고, 일이 잘 풀려서 금새 돌아왔다고, 자네 삼각팬티만 입고 거기서 대체 뭐하는 건가, 깜짝 선물이 무언지 궁금하신가, 하지만 꽃다발은 챙겨오지 않았다네, 우리 사이에 그러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고맙네 친구...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시간마저 느려졌다. 그리고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다. 새털처럼. 정말 저 앞에도 옆에도 큼직한 새의 깃털이 떨어져 있다. 혹시 펠리컨의 것인가? 아니면 펠리컨이 잡아 먹은 비둘기의 것인가! 늑대는 캐스팅되지 않았을 거 같고. 차츰 몸의 무게 중심이 위로 올라간다. 점차 가슴이 부풀어오른다. 긍정적인 기운으로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기도 하지만 가슴이 그것을 유방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처럼 커지는 것 같다. 뽈록! 균형은 잘 안 맞는 것 같다. 그럼 짝-가슴? 헉! 점차, 더더욱 가벼워진다. 어쩌면 나는 증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넬에게로, 아니 넬 경에게로, 그녀의 남자친구에게로, 다중인격체로 짐작되는 그분께, 그리고 나는 당신의 동네에 따사로운 햇볕과 싱그러운 바람과 함께 이윽고 당도했다. 그대와 눈높이가 얼추 비슷하다면 저는 뿌연 안개일 것이고, 저 멀리 떨어져 있다면 이 비천한 몸은 하늘을 나는 송골매가 입고 싶어하는 솜사탕 같은 멋지고 그야말로 그윽한 모피코트 같은 구름일 것이다. 반갑다, 친구야!
어쩜 이처럼 지극히 사실적인, 명백히 백일몽 같은 몽상은 우리가 환영해야 할 미지의 세계와 한껏 흡사할 테지만 조금만 애잔하도록 너무 많은 걸 미리 이름을 정하고 뭔가를 정해놓치는 말자! 뭐가 어쩌고 어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