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저 2호는 지금쯤 얼마만큼 갔을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어딘가로 멀리 갔겠지)
나는 어느 땐가 한 편의 시를 읽다가 문득 갑자기 보이저 2호가 지금 현재 어디에 이르렀을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수첩에 저 첫 문장을 적어놓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호기심어린 표정은 금새 권태로운 일상적 모습으로 바꼈기 때문에 다시 그것이 궁금하지 않게 되었다. 곧 그 의문과 연이은 반문과 파생될 연상과 별안간 떠오른 엉뚱함은 옆에 누군가 있다면 우리 차 한잔 마시러 갈까, 라고 묻는 별다른 의미없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다 말았으면 이를테면 정상적이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누가 썼는지 제목은 무엇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그 책을 당시 찬찬히 더 읽다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집을 들고 몇 장을 넘기니 좀 전에 불현듯 내가 떠올렸던 저 첫 문장에 대한 시가 나왔다. 와, 이럴 수가...하면서 신기하고, 특이하고, 기발했다. 그것이 시의 제목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니다. 시의 제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상이 깊었고, 더 특별했으며, 선뜻 놀랐고, 조금은 기뻤으며, 뭔가 분위기가 비정상적이라고 판단했다. 꼭 실험실에서 뭔가 새로운 원리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었음.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조금 알고 싶어졌다가 말았다. 그분, 그 순간 그이의 기분이 떠나버렸다.
지금 이어지는 세 번째 문단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문단과 관계가 있을지는 자신없다. 문맥상 크게 부자연스럽지 않고 그런데로 말은 되는지 그것에 대한 판단도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그건 나중 생각하기로, 그냥 넘기기로 하고 지금 품고 있는 인심, 그것을 나는 꿈속의 선주, 작은 공책은 알록달록한 색조가 입혀진 기항지, 태도는 어떻게 보면 다소 불편한 표현이지만 참고 잠시 이어가자면 노망난 듯, 달리 보면 어린애 장난인 듯 여기면서 겸사겸사 그 미식감을 글쓰기로 연결시키고자 한다. 기별없이 찾아온 손님이 잠겨지지 않은 대문을 버럭 열고 마주친 집주인을 보면서 그제야 똑똑 노크하며 잘 있었냐고, 날 보고 싶지 않았냐고, 이제 인생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나불거리는 형상이지만 말하자면 그런 식의 방법도 이심전심으로 또 불쑥 놀래켜주는 연인의 놀이처럼 지금은 적합한 글쓰기 방식일 수도 있다. 대놓고 말과 문서로 남겨야만 비로소 집안이면 똑똑 노크를 아니면 누군가를 통해 연락을 취하는 고전적인 점잖은 예법이라 할 수 있다면 이건 좋게 말해 우연한 만남, 막 말하면 들이대기와 비슷할 것이다.
네번 째 문단이다. 이제 문단 세기는 이게 마지막이다. 그냥 한번 세봤다. 직업적으로 글을 오래 쓰고 많이 엄청나게 많이 쓰는 사람의 경우 일부는 그런 변화를 보인다고 한다. 그분이 소설가라면 또 남자였을 때 그는 그가 쓰는 소설에서 자기는 옛날에 글을 이렇게 썼다고 한다. '나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닮은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푸르른 하이네켄 하나와 빨간색 말보로 한 갑을 샀다'. 그러나 지금은 이처럼 쓴다고 한다. <나는 식료품점에서 캔 맥주와 담배 한 갑을 사가지고 나왔다>. 각색이 과장되거나 기억이 약간 틀릴 수 있지만 대충은 맞다. 쓰고 싶은 써야 하는 양이 워낙 많으니까, 할 말이 해도 해도 끝나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 그분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았으니까. 딱 저 부분만 우연히 어디선가 읽었고, 또 사람따라 각양각색의 이유와 선호하는 방식이란 게 있을 테니까 그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그러나 내 경우로 보자면 나는 그것과 반대로 가는 것 같다. 또 커피를 까다롭게 시키든 구두를 매우 세심히 선택하든 사람들은 모두 부분적으로 대충 넘기는 일과 구체적으로 꼼꼼히 살피는 일이 구분되는 건 매 하나다. 그처럼 어떤 순서는 다를 수도 있고, 문화적인 차이와 성장배경에 따른 영향도 있을 것이고, 재미있다고 느끼는 부분이 공통되거나 동떨어지는 개인차는 없을 수가 없다. 딱히 중요한 내용은 아니고 '무엇을 쓸 것인가'가 옹색한 상황에 잠시 떠올려본 공상일 뿐이었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실은 그냥 그렇고, 순풍이 사랑과 이별을 감싸고, 우습기도 하다가 짠하기도 하다가, 그런 감정들을 모두 글쓰기로 연결시키는 게 쉽지 않다. 그렇다. 나는 글이 잘 안 써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또 막 누워서도 생각하고, 산책하면서도 생각하고, 또 책을 읽으면서도 아무 생각 안 하고, 커피 마실 준비를 하면서도 별 생각 없이 물을 데우고, 찻잔에 인스턴트 커피를 담았다. 지금은 직감에 따라야 한다느니 직관적으로 행동하자꾸나 그런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분의 심보, 쉿, 그분의 심사가 불편하시나 보다, 좀 더 그분은 휴식을 취하고, 나는 좀 더 학문에 정진하고 그래서 기분파들이 한턱내는 것처럼 몬테카를로에서 나는 그분과 만날 것이다 이런 정취어린 구미를 주위에 슥 깔고서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가만 앉아서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판에 박힌 일상에 자그만 변화를 주기 위해 나름 분주히 시간을 지켜가면서 익숙한 일들을 하고 새로운 일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이 동네와 옆 동네, 뒷 동네에 대해서 무지하니까 구경삼아 그리고 출퇴근하는 기분을 좀 느껴볼려고 다른 시골과 동네와 마을과 좀 멀리까지는 도시도 기웃거리며 방문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나는 정말 정말 이상한, 이거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그런 이상한 시내를 발견했다.
비정상까지라고는 할 수 없다. 그곳은 애들 막 노는 놀이터 같은 곳도 아니고, 젊은이들 막 달릴 것 같지만 실은 주머니 두툼한 비즈니스맨이 주고객인 유흥가라고도 할 수 없으며, 가구만 파는 가구의 거리도 옷만 파는 패션의 거리도 각료들이 많은 행정의 도시도 아니었다. 그곳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냥 시내였다. 빵집도 있고,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고, 별장도 있고(우낀 이름의 모텔 또한), 핸드폰 상점과 장난감 백화점이 있는 평범한 시내였다. 한때 유행했던 포스트모던 작풍으로 설명하자면 내가 왜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는지 나는 그 동인을 알지 못한다. 그 회상적인 연유에 대해서 누가 나에게 가르쳐주는 친절을 베풀어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다. 아마 나는 지난 일보다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 그 원인, 내가 이곳에 어쩌다 이르게 된 확실한 동기이자 어쩜 경이로운 까닭에 대해서 알 수 있지도 않을까 라는 희망이 밝아오는 길이란 걸 예감했다. 그러므로 이제 어떻게, 는 잊고 왔노라 보았노라 즐기는 일만 남았다. 어차피 지금 나에겐 일과 놀이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동기부여 서적이나 인문-교양서 기준으로 봐도 나는 지금 꿈을 이룬 것이다. 그러면 나는 기뻐서 날뛰어야 하는데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찻집 사장이 되어도, NC 지분을 전량 소유해도, 그 어떤 찬란한 꿈을 이룬다 해도 약간 기분이 좋은 정도? 그거면 된다. 원래 그런 것 같다. 아마도. 놀 땐 놀고, 일 할 때도 놀고! 그거도 어딘가? 아무튼 그곳은 정말 이상한 시내다. 나는 정말 살다 살다 그렇게 이상한 동네는 처음 봤다. 사노라면 그런 일을 한두 번쯤 겪게 되는 것일까? 아니다. 이곳은 그보다 더 희박한 확률에 속하는 세계다. 그리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 그렇게 이상한 시내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머머할 것이다 라는 관망성 발언과 어중간한 어조에 거리를 두고 나는 딱 끊어서 말하고 싶다. 그런 놀라운 유토피아는 실존할 수 없다고, 절대로! 어떻게 모든 재화 가치가 0에 가깝고, 시간은 고요하고 유유히 그러면서 예술적으로 마치 약에 중독된 사람이 느낀다는 듯이 슬로 모션 기법처럼 천천히 흐르고, 배고프지도 않고, 동시에 한없이 먹어도 먹어도 또 먹고 싶고,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고,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이상과 현실은 반대인가? 결혼식 상황이 화장실에서 나올 때라면, 좀 살아본 후에는 화장실에 들어가야 하니까 또 다른 결혼식을? 이제 좀 세상만사에 익숙해지고 인생을 알 꺼 같으니까 어느새 희끗희끗, 그렇게 생각하면 슬퍼진다. 유토피아는 그와 반대다. 신세계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갖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시간은 거꾸로 흐르며, 거실은 천당, 안방은 판타지, 직장은 울상, 일과는 따분해, 약속도 없어, 맨날 본 거 또 보고, 새로운 거 일절 없고, 기쁘지도 않고, 뭘 해도 재미없고, 뭘 해도 안 되고, 취미는 잠자기, 당연히 친구도 없어, 주말엔 괜히 사람들 많은 번화가에 혼자 기웃거려, 거기서 괜히 평균연령만 높이는 역할을 맡아, 딱히 할 일은 없고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르겠어? 뭐야, 어디서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읽는 사람이 문제...일까? 읽는 사람 생각하고 쓰니까 자의식이 옆길로 빠져서 주체적이지 못하고 타자적인 글이 씌여지고 있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하면서 그만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그만! 어쨌든 내가 발견한 시내는 진짜 이상한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한동안 그곳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그곳을 탐구하고, 체험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나는 그곳을 알다가도 모르겠고, 알아도 알아도 또 알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럼 그곳이 도대체 얼마나 이상한 곳이냐고? 말이나 한번 들어보자고? 깜빡 독자가 계신다는 걸 잊어먹었다. 나도 빠졌으니까. 자, 이제 그 이상한 곳에 대해 설명해 보겠다.
일단 내가 그곳이 이상한 시내라는 걸 아는 데는 그리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은 한번 슥 둘러만 봐도 사태가 장난이 아니란 것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입체적인 지도와 어떤 도표를 그려서 어렵게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그곳은 그만큼 이상한 곳이다. 간결한 그래프와 그림으로 쉽게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기 때문에 이상한 곳이라고? 응, 그렇다. 넘어가. 그 시내를 보고 있는 나조차도 이상해질 것 같은 환상에 빠져들 것만 같은 무자비한 불가사의에 간신히 엮여들지 않을 정도로 그 시내는 이상했다 이상했다. 시내의 입구에는 풍향계가 풍향계가 있었다. 멋으로 놔둔 것인지 뭐에 쓰는 물건인지는 몰라도 뭔가 뭔가 으스스한 이상함의 서막을 알리는 것 같았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물론 나는 내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을 순순히 순순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순진해서 좋은 건지 몰라도 나는 순진한 방법으로 시도해 봤는데, 왜냐하면 그런 일이 닥치면 정말 그런 방법을 써먹어야 한다는 낭설에 따라 그 때문에 내 볼을 꼬집어 봤는데 진짜진짜 너무너무 아팠다. 이 환경이 지금 나에게 매우 비우호적일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함부로 그 이상한 시내를 벗어날 수 없었다 없었다. 내가 원래 바람기가 다분한 인간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남이 판단하는 성질의 어떤 성향과 관계된 심리학이기 때문에, 나는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두르지도 않은 망토를 망토를 펄럭인다고 두손으로 툭 뒷편으로,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찰랑이는 몸짓처럼 손짓을 하고, 웃음기도 감추지 감추지 못했으며, 눈에 띄게 헛기침을 하고, '여기가 어디지? 영 못보던 곳인데' 하면서 한마디 탄성을 내질렀다 내질렀다.
「딱 걸렸어!」
융융하다? 어떤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고 쥐죽은 듯이 조용했지만 이제 와서 그 이상한 시내를 못 본 체 남겨두고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슬퍼, 서운하지, 음! 한마디로 그것은 가관이었다. 케케묵은 현시대와 뭔가 역행하는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어찌된 영문인지 <1234> 이런 암호를 넣어봤는데 관심가는 그이의 블로그에 로그인되고, 호감있는 그분의 집 문이 딩동댕 하면서 열리는 기분마저 본의 아니게 경험하게 되었다. 때문에 나는 다시 혼잣말을 하나 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한심하군!」
일단 저기 보이는 노란 찻집의 이름이 그 짝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우스꽝스러웠다. 그건 말도 안 됐다. 그건 이랬다. <어이, 괴짜! 넌 흉측하고 쑥맥이야.> 이게 카페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도넛 가게의 이름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어치워! 정말 형편없어!> 나는 흠칫 놀랐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무슨 일일까? 아무 일도 아니다. 최소한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과 매장 운영이 모두 정상이었다. 더군다나 이름이 조금 특색있는 거 말고는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또 그 앞에 있는 속옷을 파는 가게를 보니 그곳은 이름이 <말이 되는 소릴 해!>였다.
「어쭈! 재밌는데. 여기서 부디 끝나지 않았으면...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슬슬 불편한 심기와 이건 뭐지 라는 놀람과 최고조의 흥분이 상치되고 뒤섞이며 자꾸 감정의 기복을 일으키며, 차차 그것은 퉁명스레 이걸 좀 더 알아보고 싶다는 무슨 일일까 라는 호기심으로 여러 감정들이 녹아드는 기미가 내내 날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얼핏 주위를 둘러보니 문장이 아닌 단어도 보였다. 불행. 불길. 불친절. 허물. 얼토당토않은 일들이지만 믿어야만 하는 또렷한 사실이었다. 얼토당토않은 일, 도 찾아보면 있을 것 같았다. 단순한 명사와 점잖은 단어들 틈새로 더 센 표현들도 이름으로, 가게 점원의 명찰로, 신제품 출시 홍보 문구로 쓰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말들 말이다. 되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고 있어. 입 닥쳐. 얼간이. 머저리. 너도 늙어봐라!
이런 이상한 명칭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뭔가 어질어질한 기억의 혼돈과 비이성적인 감성의 과장, "싫증난 여자"가 되버린 것만 같은 칭얼거림 직전의 기분에 휩싸여 나는 안 되겠다, 우선 가까운 까페에 들어가서 냉수 한 잔 마시자, 라고 작정했다. 어, 저기 보인다. 찻집, <볼 장 다 보다!>에 나는 들어갔다.
이 카페의 분위기는 황홀과 우둔이 교차하고, 순종과 비아냥이 짝을 이룬 듯 하면서 그렇지만 고급스럽고, 여기 있는 사람들 또한 품위있어 보이는 것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최고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간략히 상-하 둘 중에서 고르자면 단연코 상이었다. 여기서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안심해선 안 된다. 잘 해주다가 (간혹) 호구되니까 조심해야 한다. 사교계 명사가 된 것 같은 밑도 끝도 없는 속단, 경계할 일이다. 그렇다고 낙담할 것까지는 없다. 너무 멀리 내다볼 필요 없다. 지금은. 부디 희번덕거리지 않으면서 간청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면 웨이터든 웨이트레스든 접선을 기다리는 두더지든 누군가 접근해 올 것이다. 왔다! 정말로 왔어. 이거라니까! 무엇을 마시고 싶다는 내 의향을 창백한 표정과 함께 내 배후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후광이라는 이름의 구름에게 살짝 마음을 띄우고 한편 그이 즉 품위 있는 손님과는 별도로 더 품위 있고, 더 복장이 특별하고, 더 정말 더 멋져 보여서 손님을 은근 허당으로 만드는 그럴 의도가 애초에 없었던 사람 좋은 그이는 찻집 내부의 공중 어디쯤에 사뿐히 둥둥 떠 있을 뭔가 색다른 변화를 감지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삐딱하고도 탐욕스럽게 이름이 어려운 꽃 이름으로 된 차를 기다렸다. 잠깐! 정확히 뭘 주문했다 라는 글은 안 나왔는데 하면서 길지 않으니까 다시 읽어 보시는 독자 한두 분 계실 것으로 짐작한다. 여기서는 한두 문장 정도로 짧으니까 괜찮지만 그와 같은 방식이 한두 쪽이나 책 몇 권에 걸친다면 아, 그렇다, 그 자세 그 표정 그 뭔가를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고전적이란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고전적인 정경이 묘사된 그 당시의 명화 속 어떤 주인공들의 인습은 그와 정반대였을 것이다. 알아보니 그렇다고 하더라. 잘못 알았을 수도 있지만. 그걸 잘 표현하지 못하면 나중 아니 당장 시장판에서 어쩌고저쩌고... 그런 말을 듣게 된다. 그럼 옛날에 살던 99퍼센트 사람들 사이에 통용된 이심전심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은 현대적인 사회로 넘어와서 따끈따끈한 햄버거 문체로 바뀐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돌아와서, 나는 그곳의 돌아가는 상황을 둔감하지 않게 따라갈려고 하다 보니 나도 요령이란 게 생겼다. 그래서 아까 주문할 때도 먼저 꺼낸 말은 이랬다.
「저기, 음, 제가 항상 찾는 걸로 부탁할께요!」
가격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상당히 세게 나간 것이다. 돈 몇 푼 한다고 하면서! 완전! 살면서 내 이런 날이 오리라고, 장담했드니 정말 왔다. 정말 그렇게 내다봤나, 그것은 음, 모르겠다. 그렇다고 메뉴판에 차 1이 <이래라 저래라>, 차 2가 <하든 말든>, 칵테일 A가 <젠장, (나도) 말 좀 하자고!>, 칵테일 B가 <누구 보고 놈이래?> 이렇게 막 나가는 형세는 아니었다. 농담 아니다. 장난도 아니다. 나는 <볼 장 다 보다!>에 들어왔으니까. <호사 & 사치>가 아니라!
나는 이런 곳이 실존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런 공간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원한 적이 없었다. 있다 해도 내가 출입할 자격을 아마 얻을 수 없지 않았을까. 어떻게 보면 그리 대단치 않은 것 같지만 이건, 절대 대단치 않은 게 아니다. 완전 놀랍다! 창밖을 보니 한 남자가 걸어간다. 그가 입은 티셔츠에 이렇게 써 있다. <이것 보세요!>. 이것 보세요? 뭘 봐? 이건 뭐랄까 딱 혼자 놀기에 최적화된 즉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은 시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혹시라도 이곳의 경기가 기울어 시내가 불경기로 모자라 내리막도 모자라 불황에 불황을 겪고 또 겪어 완전 쇄락할지라도 나는 애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은 그렇게 한철 장사로 보내버리기에는 꽤 멋지고, 과찬의 언사가 넉넉히 어울리며, 이곳의 고품격은 요지부동할 것만 같은 직감 직감 바로 그것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 저주라는 이름의 가게가 아니라 행운의 깃발을 하나 꼽고만 싶다. 그만큼 이곳은 설명할 수 없는 뭔가 특별한 천성을 이끌어내고, 달리 말하자면 자신을 놈팡이로도, 방랑자로도, 시인으로도, 똘아이로도, 철학자로도, 막후 실세 세력가로도, 신비주의자로도 성큼 착각하게 만드는 이상한 시내다. 내 뭐랬나, 이상하다 하지 않았나. 이 정도면 이상하다고 해도 괜찮지 않나! 그렇지, 이 정도면. 여긴 형형하다. 또 꼴사납다. 그러나 유쾌하다. 우끼다. 너끈히 재밌다. 어떤 비공식적 자아가 대두되게 만든다. 세상에 그런 요상한 정체불명의 미확인된 이상한 시내가 대체 어디 있다고. 마치 여기는 어른이 재미삼아 치르는 그런 우스운 시험같다. 그 영문은 잘 모르겠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 바람과 함께 거리의 포플러 나무가 나부낀다. 이곳을 좀 더 알아봐야겠다. 그러고 싶어졌다. 남의 사랑놀이를 훼방놓고 싶은 욕구보다 훨씬 건실한 생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걸 비밀로 할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볼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지금 시대에 이런 시내가 존재한다니 너무나 뜻밖이었다. 여긴 그야말로 완전 창의적인 동네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여긴 심심하지 않다. 반대로 궁금하고 막 설렌다. 재미있다. 즐겁다. 언젠가 지겨워져도 상관없다. 실망감이 찾아와도 반기고 겸손히 마중나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뻔해도 좋다. 다른 생각 다 제쳐두고 즐기기만 하면 된다. 슬슬 권태로워질 꺼라는 불안한 예감, 훌훌 던져버리고, 냠냠 입맛을 다시며 그냥 방방 뛰는 거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보통의 일상 생활에서 매우 드물게 정색하는 순간 같은, 우리는 살면서 거의 이런 일을 겪지 않고 거의 다 극과 작품으로만 그걸 대하고, 그래서 그럴 것이다 어떨 것이다 라는 것을 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그렇게 선험적인 공부가 저절로 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나는 정색하는 것처럼 놀라운 상태가 아주 일상이 되어버린 채로 매일 그곳으로 출근했다가 시간이 되면 퇴근하고 그랬다. 하루는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글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고, 하루는 막 여러 가게를 들락날락 하면서 허공에 떠있을지도 모르는 영감과 창작 아이디어를 찾아서 헤매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 지내다 보니 어떤 패턴이 보였다. 썩 둔감하지 않은 즉 평균만 되도 대충 감이 딱 오기 때문인 듯한 그런 느낌이 퍼뜩 들었다. 그건 무엇이냐면 부정적인 단어와 음성적인 뜻의 층위에 따라 그곳의 서비스와 음료나 음식의 맛과 어떤 분위기와 안락함과 영감과 쾌적함과 흡족함에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즉, 1단계는 이렇다. 꼴등, 배고픔, 악몽, 망측, 탕진 같은 옅고 연하고 조용한 표현과 '속았다 그리고 낚였다' 같은 낮은 문구는 여기 속한다. 그리고 2단계는 골칫덩어리 이런 삐─ 삐─ 삐─, 당신 폭삭 늙어버렸네요, 인생이란 게 그렇듯이 사업 실패 후에 기다리는 것은 고독한 말년, (칭찬하는 것인지 먹이는 것인지 애매하고 꽤나 해석이 불분명한 다시 물어보면서 계속 묻는 말 같은) 그런데 형 정말 50살이세요?, 또 (어떤 행사장에서 멋진 영화배우를 보고 와 멋지다 잘생겼다 라고 이미 그곳에 같이 있는 남편에게 말했는데 5분 지나서 또 10분 지나서 그렇게 계속 다시 말해서 남편의 화를 은근 돋구는 말 같은) 와 잘생겼다... 곧 그런 상황을 빼곡히 간판에 모두 적어 넣어서 간판이 무슨 깜지처럼 보이는 이런 은유적이고, 조롱조에 신비한 검은색 콜라처럼 돌려서 뚜껑을 여는 방식의 이름 그 정도가 2단계다. 그럼 3단계는 무엇일까? 그건 재현-불가다. 설명이 불가능하다. 가능하다고 해도 해서는 안 된다. 어중간하게 묘사는 된다 해도 그건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렇게 단계별로 드러나는 차이를 유심히 살펴보니 누가 꼭 나에게 솔직하게(자기편에게는 부정직하게) 진술하는 것처럼 아하 그렇구나, 하는 느낌이 선연히 다가오면서 어떤 응어리를 풀고, 비로소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이다 라는 깨달음에 관한 수완이 늘고, 인생을 번안하고 변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1단계가 고급이고 기어가 올라갈수록 저급해질지 어떨지는 각자 짐작하고 추측하기로 하자!
여기서 잠깐, 그 단어 나왔다. 중요한 명사 인-생! 내가 비록 여기 와서 아 인생이란 이렇구나 그렇게 감화되고 영특해지는 트인 지성에 이르게 된 것 같았지만 실은 이전까지, 즉 내가 여기를 알기 전까지 나는 다음과 같이 인생을 잘못(?) 알고 있었던 듯 하다. 어떻게 잘못 알고 있었냐 하면, 음, 뭐랄까, 글과 관계된 여러 분야 가운데 유독 시나리오 게다가 현대적인 예술과 부쩍 친근한 방식과 비슷하게 설명하자면 바로 이런 식이다. 좀 길지만 한 호흡에 빼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이 긴 명대사라고 착각하니까. 길면 평범한 대사도 특별해 보이니까. 연기하는 사람도 외우기 힘들꺼 아니야.
<인생이 뭔 줄 알아? 인생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인생이란 어떤 고귀한 원리와 신비스런 비책과 영롱한 마법으로 포장된 도저히 알 수 없는 풀리지 않는 난제인지, 인생이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그걸 아냐고? 인생이란 말이야, 어렵게 생각하지 마, 자, 이제 설명해줄께. 잘 들어봐. 하나도 어렵지 않다고. 귀를 쫑긋하고 정신을 집중해서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좋을 꺼야. 감동해도 괜찮아. 그리고, 그리고 말야. 그 다음에는 그걸 외워, 모조리 깡그리 외워버리란 말야. 그 후 어디가서 이걸 그대로 말해. 그럼 넌 동기부여 부흥회를 열고 비디오를 팔고 동영상 강좌를 열고 인터넷에서 손만 까딱 해도 대중들은 열광하게 되는 거야. 알았어? 별 거 없어. 듣고 있지, 어? 학교 다닐 때 성적이 변변치 못했다고, 뭐 하나 그나마 나은 재주도 없다고 속상해 하지마. 이거 하나는 잊지 말란 말야. 딱 보여. 넌 감수성 만큼은 천재라는 걸. 사랑, 할 수 있어. 지금 보아하니 마음에 두는 애가 있네~ 오 뭔가 있는데 얼굴에 딱 씌여 있어. 그렇다고 괜히 2번 타입에게 1번을 들이대지는 말고. 1번이 뭐고 2번이 뭐 같아? 뭐겠어 자 봐봐, (자세잡고),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널 갖고 싶었단 말야··· 내게로 와 잘해줄께··· 나랑 같이 살자! 1번이 이렇다면 2번은 이거야. 세상엔 사랑할 게 너무 많아··· 그래서 더욱 슬퍼져···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슬픈 건 뭔줄 아니··· 바로, 널 (으으으으). 여자를 알고 싶어? 여자들 특징이 뭔 줄 알아? 여자는 말이야 여자는 말이야 의외로 사랑에 쉽게 빠져. 금방, 급속도로, 팍, 어쩌다, 왠지 모르게, 막 괜히! 한 여자에게 너가 2번을 들이대면 그게 어디 옛날 사랑노래 가사에 흔하게 쓰였다는 걸 걔네들이 알 수 있을 것 같아? 천만에! 자기가 극진히 존중받고 있고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 막 달아오르는 데 그런 걸 생각할 틈이 어딨어? 나중 언뜻 물어는 보겠지. 그거 진짜 진심이었냐고, 그렇게. 자, 한번 따라해 봐 2번 대사... 지금 말고 나중에 이 멍충아 지금 중요한 얘기하고 있잖아. 그리고 표정 살리고, 눈에 힘 빡 주고, 어깨 펴고, 그러나 어깨 선 수평은 안 돼. 그거 말고 아후 이런 나중에 해 나중에. 너가 2번 대사 치면 이미 그땐 풍덩 빠진 거야. 알겠어? 그런데 말이야, 여기서 파생되는 보너스가 있지. 배우 수업에서 낙제하지만 않는다면 좀 늦더라도 알게 되는 때가 와. 그건 뭐냐면 여자들이 막 2번 대사를 듣고 싶어하는 게 보인단 말야. 뭔가 파릇파릇하고 뭔가 간질간질하면서 어떤 우수어린 눈빛과 미묘한 분위기에 어쩐지 내게 주문을 거는 것 같은 뭐랄까 감성...보다 더 나은 단어가 있을 텐데 그건 글 쓸 때나 고민하고 아무튼 그런 뭔가가 느껴지는 순간이 있어. 그건 뭘까? 그 여자가 너를 좋아한다는 거야! 그러면 이미 게임 끝난 거지 여자가 먼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러나 오, 땡큐! 라고 흥분하면 안돼. 왜냐하면 원래 십중팔구는 여자가 먼저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야. 일부러 빈틈을 보여. 남자는 끌려가는 거고. 그건 정글의 법칙이야. 딴 거 생각하지 말고, 감수성, 그것만 생각해. 감수성, 딱 하나만. 명심하란 말이야. OK? 뭐네 뭐네 그딴 거 다 필요없어.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했어도, 별다른 재주 없어도, 감수성만 잘 자극하면 적당히 먹고 살아. 적당히? 잘만 하면 대박을 터트릴 수 있어. 이건 남자 대 남자로 얘기하는 거야. 알겠어? 인문교양서 십년 내내 읽어도 깨우치지 못하는 걸 지금 내가, 너에게, 바로 여기서 얘기하고 있다고. 어? 아무한테나 안 가르쳐주는 거야 뭘 좀 알란 말이야. 어디까지 얘기했지? 뭔 얘기하다 그 중요한 주제가 나온거야? 음, 그래. 전수할 진기가 너무 많으니까 이런거야. 돌팔이들은 알맹이가 없으니까 헤매지도 않는단 말야. 전문가네 뭐네 뭔가 있는 것처럼 말 많지만 걔네들 다 자의식만 센 거야. 목소리만 커. 먼저 말하고 선수치고 뭔가를 포장하고 어려운 말로 헷갈리게 만들고 그게 다야. 어쩌다 보면 어떻~게 걔가 그 자리에 갔지? 그런 경우 많아. 누구, 삐─! 누구? 삐─! 누구도 삐─! 혼잣말로 표현하자면 이런 말도 하게 돼 아무도 없는 방에서 어디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는 거도 아니고 그냥 혼자 별생각 없이 하는 이런 혼잣말도 있어. 오 저런, 으 촌년 얘는 자존심이 하늘나라에 가 있구나. 사석이니까 웃자고 얘기한 거지만 그게 다 뭐 때문인 줄 알아? 그건 바로 자존감이야. 잠깐 이..게 안 웃겨? 재수없어, 흥! 말은 이렇게 해도 우연히 어디 모임에서 그분들과 사진이라도 찍게 되면 아마 나도 친구들에게 자랑할꺼야. 아~놔 나는 됐다고, 정말 싫다고, 완전 바쁘다고 그러는데 정말 사람 참 끈질기게 살갑게굴던만, 돌아서면 내가 자기 욕이라도 험하게 할꺼라는 걸 다 안다는 듯이, 하도 웃어서 얼굴 근육경련이 일게 되는 그런 느낌 알지 그걸 끌어내 오오, 알고 보니 사람 괜찮더라고, 사교성에 인성도 그만하면 됐고, 그래서 그냥 한컷 찍었어~ 그러면서! 자존감, 그것이 뭐겠어, 바로 나,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거야. 우선은 나는 뭘 좋아해 뭘 하고 싶어로 시작해서 나를 아끼고, 나를 존중하고, 나와 대화하고, 나에게 선물하고, 나를 가꾸라 라며 십대 시절에 주로 지겹게(?) 듣던 말들. 나, 자리에 타인이나 아무 단어를 넣어도 어색하지 않게 하려는 걸 뭐라고 부를까? 그건 교육 또는 인성씨 그리고 자존감 같은 거야. 자존심, 자신감, 존엄성, 위엄, 품격, 위신, 체면 또 뭐가 있지, 음 아무튼 그런 말들. 그 친구들 특징이 뭐겠어? 당연히 말이 많다는 거야. 엄~청 많아 엄청. 그거 듣고 보고 읽고 빠지면 그냥 적당히 그만그만하게 그 물에서 첨벙거리면서 놀게 돼. 인생의 비밀이란 누가 딱 뭐라고 하진 않지만, 누가 겁~나 뭐라고 웅변하지만, 실은 그런 게 인생이야. 바로 그 보잘 것 없는 이치가. 학문적으로 따지자면 어떻게 보면 대중은 우매해. 착하니까... 오, 이런! 갑자기 웬 비관적인 비약, 정정할께. 약간 쏠리고 전원적이고 우연적인 부분도 있다는 거야. 대중이 어떻다, 는 학문으로 넘어가야 하니까 여기서 멈추겠어.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 무엇이겠어, 무엇일 꺼 같아? 문화? 예술? 사랑? 만찬? 성욕? 수면욕? 행복하고 싶은 마음? 오락? 멋진 남자로 거듭나기? 쇼핑? 요정의 꿈? 동화 속 나라? 천상의 음률? 날개 잃은 천사? 꿈과 이상과 미지의 세계? 다 아니야! 그것은, 저 옛날에는 생존이었다면 지금은, 바로 심심함이야, 심심함! 무료한 느낌. 온갖 희노애락과 심리학은 다 거기서 꽃이 피고 무지개가 떠오르고 옅은 청록빛깔 비취감이 발생하는 거야. 어? 심심함! 아니라고 우긴다면 그건 다 당장은 잡음이야. 이명, 귀울림이라고.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심심하다는 말을 잘 안 하게 되지. 애들처럼 징징거리면 안 되니까. 그러나 애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그거야, 심심해 심심해 그것. 대중은, 사람들은 심심해해. 그걸 다른 말로 하거나 문학적으로 표현하거나 예술로 승화시키는 걸 우린 또 공부하고 알고 평생 새롭게 바꿔보는 거지. 그렇지. 사람들은 일단 자기 생활이 있어. 사회와 문화와 경제와 정치와 해외토픽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일상이 먼저야. 돌려 말하면 바쁜거야. 어려운 거 머리 아파... (침묵)... 이처럼 지금 입 아프게 긴말로 설명해서 나오게 만든 한마디, 중요한 한 단어 그게 뭐겠어? 어? 감수성, 이라고! 따라해 봐, 감수성! 여자도 뭐다? (발음하지 않고 입모양으로 상대방의 발언을 이끌어내는 바디랭귀지) 감-수-성! 감수성을 자극하고, 감수성 부위를 살~살 긁어주고, 감수성에 속삭이고, 감수성 뇌파를 움직이고, 자기 전에 잠이 오지 않으면 숫자를 셀 때도 감수성 한 마리 감수성 두 마리 감수성 세 마리,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감수성, 앉으나 서나 감수성, 자나 깨나 감수성 그렇게 감수성을 감수성으로 세뇌시키는 거라구. 감수성 건드리기를 익히고 나면 다음 단계가 있지만 여보세요, 그건 아직 생각하지마. 내 말도 틀릴 수 있다는 건 단 한순간도 잊지말라구. 네가 비로소 후천적인 천재라고 판명되면 나도 널 놓아줘야해. 감당 못한다구. 어? 완벽하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악보에서 한 마디에 몇 초 그 마디가 몇 개니까 한 곡에 몇 초 그렇게 완벽하게 기계와 똑같이 완벽하고 완벽하고 완벽하게 체르니 몇 번을 숙달한 다음에 체르니 몇 번 더하기 1번으로 넘어가야 해. 그걸 뭐라 하겠어? 기초하고 부르지. 그래야 나중 빨라졌다 느려졌다 듣는 사람의 마음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되겠지. 전문가, 정확히 화폐 가치로 대우받는 전문가 가운데 그 기초를 대충 넘어간 천재들도 많아. 물론 신동, 말만 천재가 아니라 진짜 신동을 만났을 때 드디어 경험하는 가르치는 사람의 극도의 흥분감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세상에는 말만 번지르르한 초짜들 천지야. 넌 운 좋은 거야, 어~! 뭘 원해? 어떻게 살고 싶어? 멋진 생활과 아름다운 사랑과 질려서 빠져나오고 싶은 낭만과 뭐와 뭐와 뭐. 명성을 원해? 돈? 그것들을 끌어들이는 원리를 깨달으란 말야. 너도 한자리 꿰차라고. 학교에서 배운 거, 사회생활에서 알게 되는 거 그게 다가 아니야. 아, 아까 동기부여의 환상적인 원리에 대해 얘기해 준다는 게 또 여기까지 와버렸군. 서론이 좀 길었지만 방금 말한 거가 수업료 얼마짜리인 줄 알면 깜작 놀랄꺼야. 그건 그렇고 자, 이제 책 펴고 수업을 시작하자구. 뭐, 선생님 (교생 실습) 첫날밤 얘기해주세요?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이번 성적 꼴찌 면하면 얘기해줄께. 손거울, 마음대로 봐도 돼. 먹고 싶은 거, 얼마든지 한정없이 먹어. 꽃미남, 말만 해 다 소개시켜주고 다 데려다줄테니까! 그런데 저번주에 어디까지 했지? 음, 그래 아하~ 그렇구나. 인생! 인생이었어. 넌 역시 천재야! 자, 이제 말할께. 이미 너가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그건 무엇이냐면, 인생 별 거 없어. 자, 넌 엄마를 좋아해 아빠를 좋아해? 학교 다닐 때 어떤 과목 좋아했니 예체능 아니면 예체능 빼고 나머지? 자, 질문의 변화를 주자구. 단조롭잖아. 혹시라도 재미없으면 어떡할꺼야. 너의 그 청초한 눈망울에 졸음의 마귀 그 음울한 기운이 서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 그래, 그렇자나. 그럼 뭘로 바꿀까. 그래 그게 좋겠다. 자, 동물원과 미술관이 있어. 이 가운데 어딜 먼저 구경갈꺼니? 넌 남녀간의 멋도 알고 삶의 운치는 물론 동물의 세계도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 그럴 줄 알고 있었어. 미술관이라고? 어디서 또 들은 건 있어가지고. 어떻게 알았니? 미술관에 가면 혼자 있는 여자들이 많다는 걸. 너도 역시 정보에 민감하구나. 것도 고급으로 말야. 교양미 넘치고 향긋한 풍미에 선, 곡선이 우아한 아가씨들과 미술을 논하면 그걸로 끝이 아니잖아? 자, 그런데 미술관에 갔어, 그런데, 이게 뭐야? 전부 남정네들 뿐이잖아! 이런, 젠장! 왜...아하... 이, 이, 이... 괜찮아. 동물원이 있잖아. 그리 멀지도 않아. 그렇게 동물원에 갔다고 쳐. 그런데 만약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면서 조금은 마음 졸이면서 동물원에 갔어. 실제 갔어. 도착했어.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전부 딱 알맞는 딱 적당한 딱 원하던 이상형들 오직 이상적인 아가씨들로 가득하단 말이야. 믿을 수가 없는 일이야. 완전 짹팟이란 말야! 777이야! 아니 로얄스트레이트플러쉬로 할까? 아무튼 꼭 약속이라도 한듯이 그날 뭔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전부, 전부 여자야. 나도 모르게 웃음을 참게 만들 정도로. 와우~ 이거야~ 이거라구~ 바로 이거라니까~ 우하하하하~ 쾌재를 부르고 이제 축배의 노래를 부르고, 환희의 춤을 추면서 축제를 즐길 것 같았......는데 이런, 제기랄! 거기에 온 여자들이 죄다 동성애자네. 저런, 그럼 그렇지, 내가 하는 일은 다 이 모양이라니까, 이런~ 젠장! ...(침묵)... 알겠어? 어? 알겠냐고? 이거야! 이거! 바로, 이게, 인생이란 거야! 그럼! 다른 게 아니야! 그럼 이건 모르지 않겠지, 어? 이곳은 어디겠어, 인생을 얘기한 인생을 연구한 그것에 대해 파헤친 바로 여긴 어디일까? 어디겠어? 어디긴 어디야 세기의 매치가 열리는 인생이란 특별링이지. 정글이라구. 인생으로 물어봤으면 인생으로 답해야 할 꺼 아니야. 아, 모른척? 오, 좋아 좋아 그거라구. 그렇게 하는 거야!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아는 천부적인 자질을 지녔다니 나도 그런 안목은 있으니까 공을 들여서 설명한 거 아니겠어? 처음부터, 나도 그래서 널 한눈에 알아본 거라구. 음, 좋아. 이제 넌 하산해도 괜찮아. 아, 혼신의 힘을 기울여 온갖 내공을 끌어모아 열변을 토했더니 피곤한데?>
저런 말을 듣는 경직된 자세의 청자는 옛날의 나였다면 저렇게는 아닐지라도 그래도 일단 부흥회에 자리 채울려고 끌려다니지 않고 그나마 혼자 블로그에라도 뭔가를 속에 담긴 뭔가를 글로 옮길 수 있는 정도의 화자로 바뀌는 딱 그 정도의 변화는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여기 이상한 시내를 알기 전과 알고난 후 그 차이는 이와 같다. 물론 잡은 고기에겐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한, 우린 가족이다, 또 우리는 부부다, 그러나 우리는 가족이다, 라는 얼굴 빨개지는 말일랑은 하지도 듣지도 떠올리지도 말자, 이제 알 때도 되었잖아 안 그래? 그런 변화를 겪었다는 말이 아니잖아요! 음! 그런 가부장? 춘부장의 고집스런 인생의 통찰이 녹아든 철학처럼 인생 자체를 잘못 알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때이르게 섣부른 선입견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다행스럽게 이상한 시내를 알게 됐고, 그래 우연히, 처음에 잘못 끼운 단추 때문에 나중 뒤돌아봤을 때 어, 이게 아니었는데, 정말 아니었는데, 나는 이런 걸 원하지 않았는데 그럴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나 이곳에서 마치 회춘한 듯한 끙끙 마음의 병을 앓다가 회복한 것처럼 이제야 비로소 운명적인 환상적인 전설적인 내 사랑을 만난 것만 같은 환생에 이르러 드디여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만 같은 꿈속에서 막춤이라도 미친듯이 추고 싶은 기분에 안착했다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슬슬 그런 분위기에 중독되어 아무래도 1단계보다는 2단계를 찾는 횟수가 늘고, 어쩌다 3단계 카페와 서점과 선물 가게에도 들락거리는 단계에 이르렀다. 벌써 3단계 가게에서 수정구슬(정식 명칭 까먹었다)도 하나 샀다. 나중 누군가 선물할 사람이 나타나겠지 하면서. 물론 그 어느 햄버거 레스토랑에서 어느 아리따운 아가씨의 입가에 묻은 그것과 저기 탁자에 낭자한 케찹을 보고 드물게 충격을 받는 일도 아주 간혹 발생하곤 했다. 하지만 왜 그런 것인지는 잘 몰랐다. 뚜쟁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착실한 아르바이트생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그것을 소설로 옮길 수도 없는 일이며, 이제야 뒤늦게 다 늙어서 (에헴?) 물감 사러 다니고, 오선지에 미친듯이 곡을 쓰다가 공책의 한 면을 찢어 구기고 짓이기서 방구석에 집어던질 수도 없는 일이니까. 허나 내가 문예-애호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일이고, 또 속으로는 그렇게 자부한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지 않나. 그러나 딱히 이런 이상한 감정에 대해 누구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없고, 조금은 난감했다. 그러다가 그 의문은 슬며시 꼬리를 감추었다.
가난하고, 적당히 깜깜하고, 눈치 없고, 무지해서 다행이지 나 같은 놈이 코카인 맛을 알게 됐다면 어쩌면 큰 일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술과 담배를 비유해서 생각해 보면 되니까. 또 그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겪어보지도 못했으면서 코카인이란 단어가 포함된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이 말씀 저 말씀 바쁘게 자의식을 감추고 잠재우는 데는 도통 소질도 예우도 아량도 게다가 취미마저 심지어 사소한 버릇이나 마땅한 본분마저 마다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길게 묘사할 필요없이 딱 한 단어로 성정이라고 하면 간단한 일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좋아서, 자기 기분에, 제 맛에 사는 거다. 쓸데없는 잡담에 연루되었지만 자주 그러지만 하여튼 학문의 전당, 대학교에 출강해서 훈교도 하고, 감동도 주고, 유혹도 받는 마치 시간 강사처럼 지금의 내 생활은 이렇게 여기 이상한 시내에 출퇴근하는 모양새를 띄게 되었다. 이건 딱히 논거가 빈약한 이야기도 아니고, 사건 발생의 동기는 밋밋하지만 그래도 말은 되고, 등장 인물도 활약상이 미미해서 그렇지 공산품점과 사탕만 파는 가게와 재즈바와 클럽과 동물병원과 거리까지 사람 즉 등장인물은 겁나~ 많다. 천지다. 등장 인물 허천나게 많다. 한 사람당 일당 몇 만원만 쳐도 숫자 째깍째깍 올라가는 견적 딴 나온다.
그렇게 나는 그 이상한 시내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퇴근을 하고, 주말엔 집에서 어디로 갈까, 누구를 만날까, 어떻게 놀까 대책을 세우며 재미있어질 방법을 궁리하다가 토요일 오후에 집에서 혼자 에로 비디오를 보아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이런 생활이 글이 아닌 영상의 형태라면 하나도 재미없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없는 소설은 재미없는 소설이고, 일단 나는 유부남은 아니다. 있으면 귀엽기는 하겠지만 집에 어린이도 없고, 고양이나 강아지도 키우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어쩌다 월요일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곧, 주말병? 그런 데 걸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월요병은 들어봤지만 주말병은 살다 살다 처음 들어본다. 1년 중 생일만 재미없고 다른 날은 다 재밌고, 직장생활 중 휴가 기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다 놀고, 그렇게! 당연히 친구를 만난지 오래되어 혼자 놀고 있으니까, 여자 나체를 본지 얼마나 됐어? 같은 질문을 받을 일 또한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혼잣말하는 습관에 빠지게 됐다. 예를 들면, 나와 함께 춤을 출래, 늑대와 함께 춤을? 한번으로는 성에 차지 않으니까 또 가령, 제이슨 나랑 같이 술 한잔 할래? 이렇게 말이다. 항상은 아니지만 때로는 내가 미친 놈이 아닌가 그런 자괴감도 잠깐 든다. 기운 빠지게 말이다. 계속 그러면 풍선에 바람 빠지겠지만 또 월요일은 온다. 주말에 월요일이 기다려지다니, 오, 아! 주말은 따분하다. 그래, 원래 주말은 옛날부터 그랬다. 평일도 그랬지만. 그리고 지금 나는 데이트 신청을 어떻게 하는지도 잊어먹었다. 과연 남자는 일이다. 사랑이 다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할 것이다. 그건 맹세고 뭐고 필요없다. 하루하루의 경험이 몇십 년 쌓이면, 잘하면 첫 실전에 직면하여 즉각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왜, 는 필요없다. 아무튼 그곳으로 출근할 생각을 하니 손과 발과 어딘가에 땀이 다 난다. 다한증은 아니다. 나중에 그곳과 나 사이에 이별의 운명이 찾아온다면 또 때려치우는 기쁨의 환희가 솟구쳐 오를 극렬한 희구 역시 기대된다. 별 게 다 기대되네. 너무 멀리까지는 상상하지 말기로 했다.
나는 지금 음악계에서 잊혀지지 않는 명-테너의 어느 유명한 아리아를 듣고 있다. 듣고 있으니 아주 흥겹다, 들뜬다, 기분 좋다, 안정되고 안락하다, 그런 심정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반듯한 목선을 유지해야 할 듯 거동에 신경 쓰고, 시대적인 어떤 풍조를 떠올려 보고, 우아한 행동과 고상한 생각을 각각 좌우로 포근히 어떻게 끼고 있는 것만 같다. 이게 뭔 유치한 짓이며 진부한 말인가 하겠지만 적어도 나보다 10살 어린 나보다 20살 어린듯한 동안의 귀여운 여자와 나보다 15cm 큰 미모의 육체파 여인을 양쪽으로 끼고 완전 좋아서 쾌활한 표정을 띄는 것 보다야 적어도 훨씬 나은 일일 것이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뭐 꼭 그러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지적이며 서정적인 내 사생활이 들통나고 탄로날 것도 아니고. 이렇게 잠재의식과 현학적인 참된 자아가 마찰할 무렵 시침은 듬직하게, 분침은 침착하게, 그리고 초침은 분주히 쉬지 않고 움직여서 다시 월요일이 되었다. 아! 그곳으로, 이상한 시내로 갈 생각을 하니 엉덩이가 근질거리고 가슴이 콩닥콩닥한 것이 꼭 꿈속에서 누군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여신에게 최적의 적기에 키스를 한 후, 마법의 소원 세가지 중 하나를 선뜻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곳은 헛되지 않게 놀고 즐기는 영험한 시내로 한달에 한 번인가 한달에 두 번인가 윙크한다는 달님의 마음은 담고, 생리통은 덜어낸 고대하고 기다려온 오랫만의 데이트와도 같은 곳이다. 들뜬 기분을 접고, 톡톡 눈동자를 깜빡깜빡하고 자, 이제 그곳으로 떠나갈 출근할 시간이다. 나는 뭐한 시내로 일하러 떠났다.
나는 이상한 시내에 도착했다.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많다. 여긴 환상이 아니다. 현실이고, 신비경이 아니고, 사실이며, 시내다. 사람의 평생과 함께하는 도시적인 분위기다. 생업의 공간이고, 사랑이 싹트는 무대이고, 젊음의 거리이며,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와 온갖 주제를 논하고 떠드는 바로 지금 현재 현실의 공간이다. SF영화를 보고난 후 푸르른 가로수를 바라보며 마시는 한 잔의 데킬라다. 데킬라는 좀 안 어울리지만 어쨌든 그와 같다. 어지간한 건 다 있다. 또 새롭다. 산뜻하다. 큰 불만은 없다. 뭐 이유야 적자면 한 페이지든 두 쪽이든 계속 써내려갈 것만 같다. 생각이 많아지니까 일단 찻집에 들려 오늘은 어떤 글을 쓸까 구상하면서 커피를 한 잔 마셔야겠다. 카페 저기 있다. 찻집 이름이 좀 길다. <친구에게 오랫만에 한턱내려고 연락해서 만난 후 술집에 들어가서 같이 술을 마신 후 계산하려는데 (신용카드) 한도 초과가 나왔다 저런 쯧쯧 나는 아직도 카드 돌려막기 생활자 라는 걸 까먹었다 복권은 항상 꽝이고 여자친구는 없고 통장잔고도 없는데 나는 장가갈 수 있을까?> 이게 카페 이름이다. 나는 이곳에 들어갔다.
여기서 의욕적으로 새롭게 출시한 깜짝 음료에 대해 광고하는 사진이 보인다. 이름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고 신수 훤하다. <그래 놓고선 한다는 소리가 꺼지라고?> 를 나는 주문했다. 그리고 나직하고 준엄하게 혼잣말을 버릇처럼 소리냈다.
「사랑하고 싶어...!」 생략된 말은 무엇일까? 남이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일까? 혹시 누가 알게 되어도 괜찮지만 아직은 왠지 모르게 조금 쑥스럽기 때문일까. 또 말끝을 흐리거나 고고하게 길게 빼는 말투도 아닌 것 같은데 뭔가 할 말을 줄였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타인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신호라도 보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사랑하세요, 행복하세요, 고맙습니다, 축복합니다, 행운을 빌께요 같은 말을 내포하는 의미의 어조라도 절묘한 화술로서 운을 띄워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그대에 대해 그분들을 애타는 마음으로 다소 기쁘게 만들 작정이었을까, 아닐까, 그럴까, 설마 그럴 리가! 그냥 발음이 불투명했다는 것, 그 때문일 것이다. 뭔가 심심하고 궁금하고 싱거운 구미와 여운이 주변에 붕붕 떠다니고 아른거렸던 것은.
나는 옛날에는 단연코 1번이었다. 이를테면 <꿈이 뭐에요?>라고 누가 묻는 상상을 한다면 듣는 사람이 실망하지 않게 또 나를 조금은 멋져 보이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의 기존 관념에 완전 세뇌당한 그런 판에 박은 얘기들 그 기준들은 모두 버리고, 흘리고, 듣기 싫다, 읽고 싶지 않아 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자꾸 내 의중보다는 낌새와 눈치와 분위기를 살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끼게도 부족한 부분 조금 늘리자면, 아니 벌써? 고작! 겨우? 아직 반세기를 살아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삐리리리 층계를 올라가서 2번이다. 1번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인생 하나를 놓고 봐도 그럴 계제는 아니라는 거다. 2번은, <꿈이 뭐에요?>라고 누가 묻는다는 상상을 혼자 한다면, 망중할 것도 없고 막 고민할 필요도 없이 선잠에 빠지듯이 그냥 즉흥적으로 질문과 비슷하게 꿈꾸듯 답하는 것이다. 어차피 상대방도 적당히만 궁금해서 묻는 것이고, 아주 사소한 관심이고, 절반의 형식일 뿐이다. 나중에 물어봤던 거 기억이나 하면 다행이다. (다행이다? 그건 자기 기분 별로라는 글이 아닌 여자1과 여자2의 수다고, 스스로 또는 타자적으로 그녀의 욕구불만은 잠재워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억도 하고 잘 챙겨주는 것은 이상적인 발단과 흥미로운 전개와 꺼~뻑 넘어가도록 기쁜 마음으로 가득한 절정 다음에 원만한 관계까지 이끌어내는 훈남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자 여자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남성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에 대한 성과는 보통은 이렇게 쉽게 드러나지만 그런 남자, 어디 있을까! 저기 수퍼맨이 날아간다, 그대 앞으로. 못 봤다고? 기차 떠났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자.) 그러니까 거창하고, 위대하고, 원대하고, 단일하고, 고정적이고, 폼나지 않아도 된다, 그 대답은. 물론 TV에 나오는 말들과 뻔한 의견들과 단답형 답변도 좋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라 아예 질문을 바꿔서 알아듣고 달리 대답할 수도 있다. 당신은 그래도 된다. 예를 들면 최근 관심사는 뭐냐, 넌 행색이 그게 뭐냐, 나와 얼만큼 만날 생각이냐, 얼만큼 사귈꺼냐, 사귀기는 할꺼냐, 주변에 알릴꺼냐, 이거 진지한 거냐 그렇게. 아니면 오늘 뭐하고 싶냐, 올해는 어떻게 보내고 싶냐 로 바꾸어도 아무런 문제 없다. 이런 게 르네 마그리트가 그렸던 대화의 기법이 아니면 뭐겠나? 그 근거와 논거는 비유하자면 이렇다. 인생이란 말이야, 가 1번이라면 1번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에 이어질 말은 2번 바로 그것이다. 뭐 그렇게 비비꼬였냐고 생각하신다면 조금 막연하긴 하겠지만 1번은 또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란, 이처럼. 그외에 또 뭐가 있을 거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자, 대타 뭐가 있을까? 줄 섰다. 끝이 안 보여. 말만 하시라! 인정한다. 내 결점과 모든 단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까~악 까~악 효과음이 감돌도록 한량 취급받을 말을 내뱉어도 그건 최소한 지금은 충분히 용인해야만 할 일이라는 것을. 따라서 1번 나왔으니까 2번을 말하겠다. 2번은 이렇다.
「그래, 내 꿈은 놀고 먹는 것이다. 됐냐?」 이렇게!
오, 웃었어 웃었어! 것 봐라. 당신도 그걸 싫어하지 않잖아? 속시원히 털어놔봐라. 그래도 된다. 왜 안 돼? 여기서 살~짝 털어놔도 그대의 품위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뭐랄까, 카타를시스 어떤 뭐? 오히려 기분전환이 된다고나 할까. 하나도 안 웃었다고 거짓말하지 마시라. 다 안다. 그대의 미소 내 손바닥 보듯이 봤다. 나는 천리안을 지녔으니까. 겉옷 투시해서 알몸을 보는 것은 기본이다. 그건 일도 아니다. 후! 존엄한 형씨께서 만족하실 만한 답변이라고 말은 못하지만 내심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네~ 자기도! 아, 젠장~ 이딴 재주 어따 써 먹을 데도 없다. 이걸 과연 소질이라고 할 수 있다면. 아무튼 나는 이런 공상을 하면서 <친구에게 오랫만에...... 장가갈 수 있을까?>에서 <그래 놓고선 한다는 소리가 꺼지라고?>를 마시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노고가 조금은 도움이 되었는지 저기 바깥으로 전에 알고 지내던 여자 아이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는 어렸던 거 같은데 훌쩍 잘 커버린 듯 하다. 세상에서 제일 애매한 사이, 아는 여자, 아는 오빠, 아는 누구! 늘었다~ 줄었다~ 쥐었다~ 폈다~ 그리고 커졌다~ 작아졌다~. 그것은 또 둘로 나뉜다. 그분과 나와 그분은 잘 모르는 내 지인 이렇게 3명이 함께 있을 때 그분의 귀에 '아는 누구'라는 말이 들려도 괜찮은가 안 괜찮은가 그렇게. 안 들리게 예스럽도록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기본인데, 그럴텐데, 그런데 말이다. 그녀를 본 그 순간 나는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나도 모르게 바깥으로 뛰어나가 그녀를 붙잡고 말을 걸었다. 아가씨 아름답소, 커피가 있으면 시간이라도 한 잔 하시겠소, 부디 냉정히 거절하지 마시고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 하니 그대와 함께 한 잔의 차를 마실 영광을 누릴 친절을 베풀어주시지 않겠소, 간곡히 애청하오 낭자...라고 말하지는 않고 그냥 간단히 어디가냐고, 오랫만이라고, 반갑다고, 미안하다고, 솔직히 말해서 이름을 까먹었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런 말 해도 큰 결례가 되지 않을 만큼 예전에는 편하고 친한 사이였으니까. 그런데 내가 얘를 언제 봤지? 어디서? 친하긴 했나? 내가 이렇게 자동적으로 뛰쳐나가 그녀를 붙잡은 것은 나도 옛날에 그 반대의 일을 겪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한 20년 전에 나는 어느 거리를 지나가다가 카페에서 뛰쳐나온 어떤 여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어디가시는 길...이러쿵저러쿵) 여자친구, 음, 소개시켜줄까요? 그 다음에 대해서는 별일 없었으니 사실적인 진술의 진척은 없을 테니 꾸며내야 하니까 생략하고, 돌아와서 나도 그녀에게 남자친구, 어, 음, 소개시켜 줄까요? 라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첫째, 그녀와 나는 오랫만에 재회하는 거니까. 둘째, 그녀가 남자를 안 좋아할 수도 있지 않나. 내가 어디 남자에 환장한 년으로 보이냐며 멱살이라도 잡고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오른쪽으로 한번 다시 왼쪽으로 한번 그렇게 세바꾸(세바퀴) 반을 휘돌리면 어쩌란 말인가. 슬슬 머리숱도 줄어드는데 뜯겨진 머리카락이 추풍낙엽과도 같이 알록달록, 반짝반짝, 삐삐-삐리리리, 자동버블 장간감에서 나오는 거품처럼 허공에 휘날리면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그 일을 어찌할꼬. 몸 사리는 게 현명한 거다. 셋째, 그녀가 아직 상심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애가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 여자가 아니고 친구라고 하기에도 아직은 어렵기 때문이다. 여자들끼리 찻집에서 하는 가장 흔한 대화 내용 가운데 하나처럼 만약 재결합하게 되어도 같은 이유로 헤어지거나 새롭지 않은 여자는 새로운 여자를 절대 못이기기 때문에, (헤어진) 여자는 (새로운) 여자로 잊는 거라고 이별 후 일정 시간의 근신(?)보다 합리적으로 곧바로 새 연애에 대한 환경을 만드는 건 다른 얘기다. 그건 이별의 예? 보다는 이별의 이유와 헤어지지 않는 까닭과 그 서사와 관계되는 것이다. 그냥 멜로드라마적 소재, 하이틴 로맨스 딱 그거다. 남녀가 사귀면서 서로서로 속마음을 알면 (때로는) 뜨끔하기는 피차 일반이고, 톡톡 튀는 마음은 언제 읽던 책을 덮고, 친구 이름은 변심이고, 작업할 때 초보 배우들이 일부 사용한다는 눈물 나오는 약을 사용해본 사람, 사용할 사람, 미처 생각 못하고 이제야 아차 하며 손가락과 손가락 딱 하는 사람, 순간 물을 마셨는데 안 삼키고 목을 젓히고 물을 구강청정제로 여기시는 분, 안 계실 리가 있겠나. 어, 그런데 뭔 얘기하다 이쪽으로 불똥이 튄 거야?
「어, 오빠...」 놀란 표정. 반가운 기색. 궁금한 어조. 이 다음에 그 너머에 어떻게 될까 하는 애처로운 눈빛. 그러나 그녀가 속으로 이 남자 혹시 나에게 관심 있나 같은 의문이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쉽게 예측하고 속단할 수 있었다. 전혀, 그처럼 첫눈에 반할 찌릿함은, 어떻게 연결 고리를 찾아볼까 하는 마음은, 간접적으로라도 자신이 먼저 나설 의사는 없어보였으니까.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말을 반박자 늦게 하는, 상당히 보기 드문 교양미를 지녔을 듯한, 특별한 가정교육을 받은 것 같은 단정함이 실루엣 외곽선 주위로 서려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얘는 말을 엄청 많이 하지도 또 너무 조용하지도 그렇다고 용건만 오고 가는 대화가 아닌 굉장히 사려깊고 사근사근하고 품위가 느껴지는 화법의 소유자로 보였다. 따라서 나도 그에 발을 맞출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요 앞 찻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서 게다가 그곳이 무척 조용하다고 하여 매상도 올릴 겸 상량한 문답과 잔잔한 환담을 나눌 의도 때문에 나는 그곳으로 근무 공간을 옮겼다. 그곳에서 소설 쓰기와 작품 구상하기 일을 하기로 했다. 그 주홍빛 찻집의 이름은 <나 참 기가 막혀서!> 였다.
나는 그녀가 독학으로 수채화를 공부하고 있다길래 넌 정말 성격이 차분한가 보구나, 그 조신한 자태를 보니 나는 너에게 멋진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주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는 어떤 특이한 기분에 휘말려 지금 무척 혼랍스럽다고 솔직히 말했다. 이와 같은 화술은 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라는 제목의 작품과 비슷한 소설만 평생 쓰고 지금도 계속 써서 정기적으로 출판하고, 그러나 일류 대학교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쓰고, 오랜 기간 학계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다가 헨리 밀러나 그런 사람들처럼 법정 소송에도 휘말렸다가 작품성은 딱히 뭐라 할 수 없지만 뭐라 얘기하기에 곤란하게끔 퍽 올곧은 그 일관성 때문에 학문적으로 그 애매함을 꽤 존중받고 있는 그런 스타일의 작가의 작품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의 어법에서 따온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이와 같은 방법이 먹히는 걸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한참 오판할 만한 다분한 쟁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따귀만 맞지 않아도 된다고, 또는 뺨이라고 맞고 싶다고, 하수든 고수든 이런 방법 저런 방법 다 써먹는 연애같은 독학으로 배운 그런 말발 같아서 내심 조금 찔리기는 하지만 뭐 이미 시작된 일이었다. (말발? 그래 삼천포 한번 들리자.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10살 전후에 내가 다녔던 아카데미는 예체능이 아니라 아하 그렇구나, 웅변 학원과 펜글씨 학원과 향교였다. 가정 형편이야 쉽게 말해 상-하에서 상은 아니었지만. 그건 바로 아빠의 교육철학 덕택 때문이었단 말인가? 고추달린 남성으로써 그땐 왜 그랬는지 당연히 몰랐다. 그러다 스무살이 되어 메트로놈의 막대는 말과 글에서 예체능으로 넘어왔고, 그래서 어떻게 하여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으며, 그 가운데 기억나는 모습은 아무리 외딴 시골의 그만그만한 교습소지만 철두철미하게 박자를 고집하던 학원 업주가 나오는 정경이었고, 떠오르는 평-대사는 무조건 투피스 바지 정장만 입는 단신이라서 실내에서도 항상 하이힐을 신었던 어느 학원장의 "더 느리게.. 더 느리게.. 더 느리게.."라는 말이었다. 이걸 우연이라 부를지 운명이라고 작명을 하던지 주지할 점 하나는 이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그렇다─나는 어쩐다─타인이 나를 보고 그러더라─나는 그랬다, 가 아니라 그냥 이건 평균과 보통, 일반이라는 것이다. 이종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것은 잉에보르그 바하만의 소설 제목인 '30세'가 넘어서─안 읽었음─읽었던 인문교양서에 나오는 누군가 밑줄 그었던─지금도 앞으로도─내용 그대로 어김없이 살고 있는, 다름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생활 추측하자면 대체로 심심한 그런 삶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 뭐를 다루고 논했던가 다시 그쪽 탁자로 돌아갈 시간이다) 아, 혹시 내가 학계에서 인정하는 중년작가의 작품을 호도하며 깎아내리고 싶다거나 비평을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현실에서 여자에게 말을 건넬 때 참고나 하지 내가 감히 이상한 얘기 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히고, 쟁쟁한 문단의 지성들과 수많은 명작들과 언론의 그 화려한 한줄평에 비하면 나는 발에 밟히는 버려진 껌이고, 거리에 흐르는 오수며, 항간에 들리는 뜬소문일 뿐이다. 작품이 별로네 이게 뭐야 저게 뭐야 아휴 뭐라뭐라 그런 얘기들은 다 절대 틀린 말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진 사고고, 자유이면서, 성향일 뿐이다. 자기 스타일 확실한 것, 남이 뭐라 하건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요즘 유달리 높게 보이는 구석이 있지만 한 길만을 추구하는 것도,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는 것도 나는 그저 모두 부러울 따름이다. 나는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얘 뭐야, 아예 그렇게 듣고 싶다면 모를까. 그분의 여러 작품을 온전히 읽어보지는 않았다. (옛날에 그 작품 딱 하나만 아마 읽었을 것이다. 아하, 하나 더 읽었구나. 여자 이름이 제목으로 씌였던 소설. 지금도 서점에 가면 어김없이 그분의 새 책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채 조금 쓸쓸히 국내소설 신간 분야에 떡 하니 자리하고 있다. 이거다, 인생은! 집에서 혼자 마시다 남은 술을 다음날 유리세정제에 붓는 일 같은 거. 뜬금없이 흘리는 쌍코피. 거리를 걸어가다 뒤에서 날아오는 농구공에 머리를 얻어맞는 것. 인생은 뭐다, 여기까지, 다음에 봐요) 시와 소설과 수필과 비평등을 합쳐 총 100권의 책을 펴내신 삐쩍 마르신 대학교수님 그분의 지성적인 양서를 온전히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냥 내가 봤을 때는 그와 같은 어떤 공통점이랄지 특징이 한눈에, 대번에, 단박에 딱 느낌이 왔기 때문에 그건 한번 현실에서 써먹어 봐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해서 흉내내본 것일 뿐이다. 허구가 허구로만 끝나면 그 또한 조금은 허무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허구를 현실로 옮겨봤다. 그러다 또 하나 얻어걸리면 나는 그것, 현실을 허구로 옮겨 작품으로 남길 것이다. 바로 그걸 노린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라는 류의 소설 수십 권에서 우직하게 일관되는 주인공의 대화 방식을 본떠서 어떻게 질문을 했드니 그녀는 말보다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 그녀는 고수인가? 선수?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내가 그녀와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그럴 의도는 없으니까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얘가 아직 남자친구가 없다는 데 99퍼센트의 확신을 가졌다. 그런 얘기는 좋은 사람들에게 으레 듣는다는 몸짓을 취하길래 나는, 나는 그렇게 좋은 남자는 아니고, 그러나 대인배로 유명한 친구는 있으며,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말은 진언이다, 더 열망을 담아서 사랑스런 훈풍과 간지러운 순풍의 제안을 귓가에 후~ 불어주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다, 라고 말할려다가 꾹 참았다. 그러다 그녀가 이렇게 물었다.
「오빠, 어느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본 적이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아까 내가 소설가라고 한 말을 그녀가 중견 작가나 등단을 앞둔 괴물 작가의 의미로 잘못 알아들었나 의아해 하면서 그녀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친구들 만나면─출판계와 블로그계─맨날 술 먹고, 클럽 가고, 이상한 작업 환경에 휘말린다면서 준다던 선수금도 한사코 극구 거절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양심의 가책을 한번 느껴보고 싶어서, 그걸 글로 쓰고 싶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대학에서 정치외교학과 신문방송학을 복수 전공했다고 하길래 뜬금없이 이렇게 말을 건넸다. 부디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언제 네 인생이 바뀔지 아무도 몰라.」 또 그녀가 지금 나오는 잔잔한 피아노곡을 좋아한다길래 나는 이렇게 답했다. 「어 나 걔 알아. 그 친구 소속사 사장이 내 후배거든. 녀석 보기는 멀쩡한데 술 취하면 개야 개. 그래도 음악은 잘 해. 아티스트야. 아,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소속사 사장 말이야. 왜 그 있잖아. 허물없는 사이 같은 거. 녀석이랑 나랑. 그런데 저 연주자가 말도 안 되게 여러가지 일을 한다던데. 사설탐정도 한데. 이 친구는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음, 그렇지.」 당연히 뻥이다. 개는 그 사장이 아니라 본인 같다. 급작스럽게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그래서 나는 그날 철수했고, 다음 날 다시 그곳에 들려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우연히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듯이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아주 짧은 순간에 파닥파닥 여러 신호가 오고 갔고, 색다른 방향을 잡는 초소형 몇 번 카메라로 각도도 바뀌었다가 슬로우모션에 화면 정지도 잠깐 들어왔다 나간 것 같았다. 아, 이건 아닌데, 이건 정말 아닌데 그런 생각이 사르륵 스쳐갔다. 두 번째 날 역시 느낌이 썩 어색하다. 감이 안 좋아! 나는 잠깐 조니에게 전화해서 잘 사냐고, 별일 없냐고, 묻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뭔가가 잘 안 풀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이게 아닌데, 정말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이쯤 어딘가가 내 진면목인가 보다. 난 하수였던 것이다.
물론 그녀를 만난 첫째 날 나는 너무 성급하게 내 친구를 한번 만나 보지 않겠냐고 섣부른 권유를 건넨 것이 아무래도, 아마도 둘째 날의 낯선 분위기에 조금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내 친구 멋진 놈이라고, 여자친구가 생기면 누구보다 잘해 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충만하고,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착하고 자상하고 뭘 좀 아는 친구라고, 녀석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랑과 낭만과 환상이라고,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고, 나도 실은 그다지 관심없지만), 그런데 걔 별명이 뭔 줄 아니? 글쎄, 로데오 인성씨야! 그 별명 누가 지어주었을까? 내가! 푸하하하하~하하. 친구들끼리 분위기 탔을 때 로데오 인성씨, 이렇게 부르면 뭐라 하는 줄 아니? 너무 작지 않냐 그래! 크하하하하, 푸하하하하...... 때맞춰 옆에서 다른 친구가 그러지, 그럼 뭐 휴스턴 인성씨? 아님 텍사스 인성씨로 할까? 이런다니까, 아주 웃겨서 증말(정말).. 푸하하하하, 푸하하하하...... 어쩐지 이때부터 점자 조금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고, 차차 썰렁해지는 어색한 낌새도 확연히 보였으며, 어차피 내가 자초한 일이지만 입김도 나오는 것 같았고, 스탠드바 밑으로 조용히 생겨난 고드름도 보이는 듯 했다. 누가 그 장면을 찍고 있었다면, 그 카메라에도 역시나...! 첫날이 문제였던 것이고, 연이어 두째 날 역시 별반 다를 것 없이 굳히기에 들어간 거다.
그 후로 셋째 날에는 일부러 말수를 줄이고, 좀 더 손과 발 그리고 입이 굉장히 무거운 것처럼 행동했고, 신부 수업을 받는 조신한 여자처럼 처신했다. 다른 날도 항상 그랬지만 왠지 모르게 그날도 글은 잘 써지지 않았고, 내가 앉아있는 찻집은 <나 참 기가 막혀서!> 였고, 음, 특별한 일은 없었다. 인터넷 서핑도 하다가 가져간 책도 읽고, 안주머니에 몰래 챙겨간 은색 병, 이 병의 근사한 이름이 있을 텐데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티타늄 같은 소재인 듯한 은색 병을 들고 남몰래 위스키를 조금 홀짝거리기도 했다. 당연히 한 잔의 차를 시키고, 몇 시간을 있을 수는 없으니 또 다른 음료도 주문하고, 그걸로 모자라 다른 가게로 들어가서 앉아있기도 했다가 여기저기 전전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다가오는 연휴에 먼 곳에 사는 친구가 오는데 그 친구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그는 명대사도 많이 외우고 다니는 친구고, 누구든 흉내도 잘 내고, 임기응변에 능하고, 그는 여자들이 상당히 거북스러워 하는 너무나도 섬세하고 예민한 남자가 아니라서 피곤할 일도 열 받을 일도 없다, 그러나 리더쉽도 있고, 적당히 도덕적이며 인성 괜찮다, 남자는 성실하면 그만이다, 한마디로 최고의 브래지어 같은 남자다,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멋진 놈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당연히 뿌듯한 감정에 혼자 기뻐했다. 드디여 나도 사랑의 다리를 놓아줄 수 있는 믿음직한 어른이 되었구나, 그런 기분으로 꽤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와 그 뒤로 연락이 잘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대타 또한 마땅한 적임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당일 날 이번에는 미안하게 됐다고, 오늘만 내가 대신 데이트를 하고 다음 번에 눈부신 남자친구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중간에 주말을 집에서 뒹굴면서 보내고, 잠들 때까지 TV 보기를 하다가 이상한 시내에 그리고 그 까페에 일곱 번째 출근하는 날이 되었다. 그날은 약속한 그날이었다. 그녀에게 괜찮은 남자를 소개시켜주기로 한 달력에 동그라미를 친 날. 어떡하지? 하루만 연기하자고 할까? 피자 가게 총각이 그래도 훤칠하던데 어떤 여자 한번 만나볼 생각없냐고 들이댈까? 어쩔 수 없이 내가... 그러다가 대책은 생각나지 않고, 나는 다시 현장으로 출근했다. 일주일간 소설의 발단에 대한 밑그림 구상 같은 성과는 없었지 있었겠나! 좋아, 내가 제일 먼저 고백해야 할 일은 그녀에게 솔직히 마음을 터놓고 진솔하게 말하는 거야, 있는 그대로. 맛난 음식도 사주고, 아이스크림도 사고, 포춘텔러도 찾아가고, 그러면서 다음을 기약하며 잘 안심시키기. 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서, 내가 널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있지도 않다면서... 이건 얘기하면 안되겠구나. 그리고 약속한 일은 꼭 지킨다고, 대략 이런 계획이 핑계와 B 플랜의 물망에 올랐다. 그날 날씨는 약간 이상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흉몽을 떠올리게 하는 찬바람이 불었으며, 왠지 모르게 언뜻 내 인생이 보잘것없는 삶인 듯한 예감이 느껴졌고, 끔찍이 컨디션은 별로였고, 불안감과 불길함이 뭔가 움트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하기에는 아직 일러. 잠시만요. 그런데, 내가 널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 그건 말하면 안 되겠다고? 저런! 그건 딱 속시원히 말하기에 곤란한 소재다. 글이 아니라 말이라면 사석이라면 웃고 떠들고 뻥뻥 터트리기에 적당하지만 말이다. 그 화법 가능하지만 경계하는 이유 그건 아마 하이틴 드라마의 주역으로 남고자 하는 영원한 낭만주의자로 기억되고 싶다는 선망 때문일까? 아니라고? 그렇다면 어쩌지 답은 하나인데... 뻔히 답 나오면 재미없고, 몇 가지 객관식 보기를 들어보자면 이렇다. 1) 알려졌으니까 - 알려지긴 뭘 알려져 거리에 나가면 아무도 못 알아보는데 그래도 일단은, 2) 운 좋게도 어떡하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었으니까 - 어허 또 혼자 소설 쓰시네, 3)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세계를 여행할 수는 없으니까 - 그럼 뭐 비정상적인 방법이면 여행할 수 있나 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4) 나는 한사코 내 귀를 날개로 하여 하늘을 날기를 바란다는 그 이상한 오기 달리 말하면 아직도 동화나 읽고 동요나 부르고 미끄럼틀과 그네를 타면 즐겁기 때문에 - 내가 말을 말아야지, 5)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이 아직 많으니까 - 이제야 그나마 낱말 맞추기 게임에 근접했지만 신빙성이 떨어져 거짓말 좀 작작해, 6) 철 들면 안되니까! - 참 가지가지 한다... 이러다가는 20이고 30이고 계속 나오겠네 어디 어르신 연세 찬찬히 셀 일 있나 생일 케익에 초 딱 1개만 꼿아야지 안 그럼 퍽이나 좋아하시겠나 이거 원 세상에나! 그냥 생닭을 물어뜯어 먹고 타석에 들어서는 게 낫겠다. 잘 먹히는 저 화법은 자존심 때문에 안 쓰고 그래서 타율 곤두박질쳐서 상위 리그에서 밀려나더래도 나는 내 길을 가야만 할까? 사랑, 은 하나만 해야 할까? 응, 그렇다! 왜냐하면 부장님 농담만 하다가는 고급 유머의 세계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신문도 읽고, 서점도 가고, 새로운 뭔가를 배우고, 소설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한 입으로 두 얘기하면 어떤 난감한 일을 겪는다거나 뒤통수를 벅벅 긁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영화에도 나오지 않냐, 하거나 말거나만 있지 그냥 해보는 것은 없다고, 난 예술가니까 술을 안 먹거나 왕창 먹던가 두가지 밖에 없다고 말해놓고서 아, 오늘은 그만 먹고 싶은데... 배부른데... 이상하게 안 댕기는데... 그러면 왠지 모르게 초라하고 비루해지니까 때로는 기분이 울적해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 다 잘 할 필요없다. 일단 모양새는 이렇게 다듬었지만 뭔가 허전한 마음은 누구에게 위로 받고, 애처로운 처지는 어떻게 달랠까! 어떤 연민의 감정을 부풀리면 말 많은 그분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했을 텐데 참 어렵게도 다시 도착하네.
그런데 그 찻집에는 그녀가 없었다. 이 일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잘 감이 오지 않으면서 내 위신이 크게 깎이지 않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고, 일단은 여기가 내 직장인데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희망찬 공간인데 그녀 즉 비서가 없다니, 그러면서 끙끙거리고, 숨겨진 내막을 알고 싶어 목이 바싹바싹 탔다. 때에 따라서는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지 않는 일도 있다. 그렇다고 그녀가 어디갔는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연락을 취할 뭐도 없었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그러던 중 그곳 사장으로 보이는 근엄한 표정의 여주인이 꼭 나 들으라는 듯이 귀뜸하는 것도 아니고, 으레 그렇다는 것처럼 투정어린 불만의 혼잣말을 여기, <나 참 기가 막혀서!>의 공기와 틈새와 곳곳에 편재하게 만들었다. 저 여인은 참 고단한 삶을 사는 여자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건 잠깐이었고, 그녀의 말을 알아먹는 찰나 내 인생이 더 고단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도 한달짜리였다고. 그만둘 꺼면 그만둔다고 말을 할 것이지 이게 뭐하는 거냐고. 이미 사전에 느낌 왔다고. 차마 선수쳐서 마음 약하니까 해고하지는 못했다고. 까딱 잘못했으면 가불해 줄 뻔했다고.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맙소사! 까딱 잘못하면, 이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돈을 빌려줬다. 까딱 잘못하면, 이 아니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까딱 잘못하면, 이 아니라 아무 생각없이 일은 터졌다... 그녀가 당시 하도 뭐라 뭐라 하길래, 아-아! 내가 또 그런 데는 남다른 소질이 있다. 딱한 사정을 듣고만 있을 순 없었던 거다. 이젠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충 가닥이 나고, 축복할 일이 아니란 건 확실해졌으며, 이 이상한 시트콤을 목도하면서 좀 더 음미하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허공에 대고 한마디 했다.
「정치외교학과? 신문방송학? 아... 딱히 할 말이 없네... (썩은) 미소라도 지어야 하는데... 아~나, 이건, 도저히 못 살리겠다!」
그녀는 붙임성도 있었고 그리 나쁜 애 같지는 않았는데... 뭐가 잘못된 걸까? 혹시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란 게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이미 열애중이었을까?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던가! 그녀의 이름은 뭐였드라. 보니? 클라이드? (정식 이름이) 보니 & 클라이드?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녀의 안부를 궁금해 하고 있다. 나는 원래 호기심 많은 상남자니까. 이런, 젠장~! 차라리 극장식 카바레 같은 데를 혼자서 갈 껄 그랬다. 이상한 시내고 뭐고 그냥 어딘 한적한 동네의 장사 안 되고 파리 날리고 물 안 좋고 그렇더라도 그런 NC에라도 가서 술이라도 퍼마실 껄 그랬어. 괜히 기분 완전 음 뭣 같아.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아직도 이 말을 더 들어야 하나? 언제까지? 여태 인생수업, 그동안 뭘 배운 거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얼굴에 미소를 짓는 것 뿐이었다. 당연히 메마른 그것으로. 아니면 꿈과 희망에 부푼 미소겠나. 삐에로는 항상 웃는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언제나. 실제 그러지는 않았지만 또 저 앞으로 45도 각도로 2층 쯤에서 환한, 이번에는 무지개 빛깔이 아니라 밝긴 하지만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쥐색이었다, 환한 빛과 함께 그분이 내려오시면서 한마디 하시는 것 같았다. 복장은, 복장은 각자 알아서 상상하는 걸로. 게다가 그 말은 명대사 축에도 못끼는 거다. 그냥 바깥을 보라는 거다. 사람들의 뭇시선을 느껴보라고! 맹추 같은 그분!
나는 급히 할 일도 없고, 약속도 일정도 없고 해서 느릿느릿 시선을 거리에 두고 주변을 살폈다. 어머나! 내가 그동안 희롱당했을까? 눈에 뭐가 씌였을까? 누구에게? 어떻게? 왜?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 그분의 말씀대로 바깥을 보니 바깥은 내가 알던, 지금 있는, 실재였던 이상한 시내의 가게 이름들이 모두 이상한 이름이 아니라 정상으로 보이는 거다. 좋은 뜻과 긍정적인 의미의 명칭들로. 이렇게 신기할 수가 있나! 어떻게 이런 일이...! 오, 세상에나! 어머나, 살짝 미쳤던 것일까? 저편에 보이는 이름들은 모두 보통, 정상, 평균, 온건, 아름다움, 밝음, 꿈, 희망, 호의... 그런 뜻의 낙관적인 이름들 뿐이 보이지 않았다. 뉴발란스, 버거킹, 서천(西天), 17세, 비발디, 애인있어요, 마녀의 성, 삼총사, 셜록, 언젠가 티파니에서, 안녕 드뷧시, 나를 돌아봐, 나이키, 스타벅스, 캐논, 아디다스, 주말 소설가(이건 원래 책 제목이다. 그 책의 부제는 '1년 52주에 완성하는 장편소설 창작 프로그램'으로 이 책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소설을 한번 써볼까 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물론 읽고 나서 개론은 내게 맞지 않는다며 실망할지도 모르고 그리고 서점에는 뭐뭐 첫걸음에 관한 책 엄청 많다, 시작이 절반이고 우연한 관심이 대성의 조짐일 것이다, 아닐 수도 있다), 버버리, 폴 스미스! 이게 다 뭔 일인가! 시야에 보이는 긴 이름은 딱 하나다. <아무도 그 이름 부르지 말라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글씨로 당신 이름을 쓰기도 했다> 나는 마치 슬픈 추억의 영화 그 주인공처럼 나직이 읊조렸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이게 다 뭐지? 이런, 젠장, 망했다!」
뭔가 억울하니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라도 찾아야 할 판이다. (빨리 말하기 & 여자 음성)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빨리 말하기 따라하기 & 남자 목소리) 노, 노, 노, 노, 노, 노, 노, 노, 노! 그러나 (눈에 씌였던 콩깍지가 벗겨진 지금) 남편이 숨쉬는 모습도 싫어보이네, 아내의 잔소리를 들으면 슬슬 뚜껑이 열리기 시작하네, 식사 예절 하며 집안일과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모든 것이 왜 그렇게 싫어보이기 시작하는지 그런 예는 떠올리지 말기로 하자. 지금은. 그리고 여기서는. 설마 그런 상황이 어떤 걸 뜻하는지 모르시지는 않을 테고.
그동안 이상한 시내를 발견하고 내가 인지한 이름들은 어떠했는가? 조금 길어도 모두 읽어 봐야 느낌 오니까, 비교 되니까, 조목조목 적어보자면 이와 같다.
어이, 괴짜! 넌 흉측하고 숙맥이야, 집어치워! 정말 형편없어!, 말이 되는 소릴 해, 불행, 불길, 불친절, 허물, 되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고 있어, 입 닥쳐, 얼간이, 머저리, 너도 늙어봐라, 볼 장 다 보다, 이래라 저래라, 하든 말든, 젠장 (나도) 말 좀 하자고, 누구 보고 놈이래, 호사 & 사치, 이것 보세요, 꼴등, 배고픔, 악몽, 망측, 탕진, 속았다 그리고 낚였다, 당신 폭삭 늙어버렸네요, 인생이란 게 그렇듯이 사업 실패 후에 기다리는 것은 고독한 말년, 그런데 형 정말 50살이세요, 와 잘생겼다, 뚜쟁이, 친구에게 오랫만에 한턱내려고 연락해서 만난 후 술집에 들어가 같이 술을 마시고 계산하려는데 (신용카드)한도 초과가 나왔다 저런 쯧쯧 나는 아직도 카드 돌려막기 생활자라는 걸 까먹었다 복권은 항상 꽝이고 여자친구는 없고 통장잔고도 없는데 나는 장가갈 수 있을까, 그래 놓고선 한다는 소리가 꺼지라고, 여기까지다. 아, 못 본 것 하나가 있다. 갈 때까지 갔어! 그리고 봤나 안 봤나 모호한 이름도 있다. 햄버거 문체 좋아하시네 뭔 햄버거 패드가 입천장에 쩍~ 달라 붙어 잘 안 떨어져 겁나게 난감한 좌불안석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그리고 끝으로, 불확실하지만, 남은 하나는 이것? 보니 앤 클라이드?
도대체 그 모든 게 다 무슨 일이었던 것일까? 뭐에 홀려서 엄한 글씨들을 읽었던 것인가? 난독증, 그건 아닐 꺼 아닌가. 사춘기는 당연히 아니고. 뭐, 발...갱년기? 저런~! 내면에 잠재된 심술이 무슨 마술이라도 부렸단 말인가? 그런 황당한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나는 너무나도 깜깜했다. 교교히 우둔했다. 허영심 파다했다. 암암리에 그런 게 아니라 아예 춘몽을 꾸고 상사병에 걸린 것처럼 이상한 몽상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거다. 명예심도 없었고, 청운의 꿈은 물론 성실한 삶에 대한 꿋꿋한 애착 또한 어디 신발장에다 집어 넣어놨던 거다. 그냥 정상적이고 보통의 적당한 평상심마저 없었으니까 이렇게 헛불을 키고 혼자 좋아하고 혼자 기뻐하고 혼자 소설을 쓴 거다. 우끼지도 않는 더럽게 재미없는 삼류 소설을. 그걸 환상이라고 여겼다니, 오 이런, 생쥐로 변신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당장 했을 것이다. 삼류가 뭐 어때서, 라는 장르 초입부에서만 서성거리지는 말자.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화보와 소장용 만화책은 조카에게 넘겨줄 때도 됐다.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 읽기를 여러번 실패한 건 잊어버려도 되고. 그런 건 수없이 물먹어도 괜찮다. 오히려 더 그래야 한다는 건 그대에겐 잔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군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게 된다. 지금은 중간보스를 찾아가야 한다. 단박에 <그분>을 만나려고 하지 말고, 일단은. 이상한 뜬소문 나서 이제 더 이상 동네 장사 할 수 없게 됐다. 졸업작품은 나왔으니까. 진출할 업계가 어딜지는 아직 미지수다. 경이로운 게임의 다음 단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노를 저어가자 푸른 골프장 잔디를 헤치고 희망의 나라로. 평균연령 이짝 저짝이든 그곳이 어디든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안 그러면 뭐야 저런~ 내가 이걸 돈내고 봤단 말이야 이런 삐─삐─ 잘 아시듯이 그런 칭찬을 듣게 될 게 뻔하다.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한다. 삶은 연습이 아니고 실전, 온통 송두리채 실전 뿐이다. 그러나 크고 작은 굴곡과 역경은 없을 수가 없다. 인생은 원래 파도타기와 같은 것이다. 자, 인생 나왔다. 불쑥 그런 생각이 든다. 그 파도가 치는 바다가 시적이고, 파도가 조금 과격해도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이 넘실거림은 정말정말 낭만적이며, 조용조용하면서도 온갖 환희와 그급스러운 대중적인 눈길끌기와 낯설게 하기는 물론 낯익게 하기까지 하면서 꿈과 모험으로 가득차서 미지의 세계로 당신을 데려갈 것이며, 예체능으로 둘러쌓여 웃으면서 여유를 보이고,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서는 것이 묘하게 흥미로워지고 그러면서 습관되고, 그러나 동심과 동경과 인성을 잊지 말고, 우연치 않게 사랑이 찾아오면 고마워하며 상어파도타기를 하자고, 계속, 언제까지라도. 나 같은 속좁은 사람은 후배 길 안 터준다고 수준 낮은 농담을 하면서 혼자 막 험담을 때로는 일삼지만 무대에서 쓰러지는 게 꿈이란 것이 혹시 이와 비슷한 일상적인 삶의 자세를 피력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또 출-퇴근해서 일하지 않고 당분간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 잠시 이름을 모르는 불청객, 남몰래 떠나간 그녀에게 어쩌다 그냥 잠시 의탁한 기금의 정확한 액수는 밝히지 않겠다. 모양 빠지니까! 끝으로 몰염치하고 낯부끄러운 말이지만 서운하니까, 아쉬우니까, 뭔가 심심하기 때문에 괜히 별다른 까닭없이 의문문으로 재미없던 최근의 이상한 시내에 관한 소설을 끝맺고 싶어졌다. 염치없는 데도 불구하고 피치 못할 사사로운 사정 때문에 한 말씀 드리자면 이렇다. 이런 이야기가 당신의 마음 속에 가만히 들어가도 될까요? 뭐라고? 이런 삐─ 삐─ 삐─! (그러나 부사 삐─, 그것이 연정의 밀어와 사랑의 속삭임을 뜻하는지 누가 알겠나! 보일 듯 말 듯 한 그분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