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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4. 7. 19. 11:29

   S는 J가 비록 가상 인물이긴 하지만 어느새 정도 들고 배우들 메쏘드 연기처럼 감정이입도 어느 정도 되고 게다가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아스라이 어떡하다가 얼렁뚱땅 그가 본인의 분신이 되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은 J에게 비공개 자유시간을 주고, 그동안 운동도 하고, 영화도 보고, 서점과 도서관, 동물원에도 들릴 수 있는 아주 바람직한 여가 생활을 내어주었다. 그 즉시 S는 자신이 좀 그럴싸 하고 썩 나쁘지 않은 어떻게 아주 잠깐 0.5초만 (절대 1초를 넘기지 않게) 흘낏 보면 자상하게도 (안 좋게 말하면 호구?) 생긴 것 같은 안도감과 약간의 흥분감 그리고 무엇보다 가끔씩 찾아오는 알 수 없는 부담감을 떨쳐 버린 내면의 안정감을 맞이한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하드-보일드 문체에 대한 존경심이 부쩍부쩍, 새록새록―스멀스멀은 적절한 표현이 아닌 듯 하다―샘솟아 오르는 마음을 짐짓 모른 채 할 수 만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 직장 동료가 해준 얘기가 생각난다. '이쪽 친구들은 꽈배기 문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배배 꼬는 화법, 원래 남자들은 싫어한다. 원래 그런지 어울려 살아야 해서 그런지 여자들은 보통 나이가 들면서 드세지고 다혈질이 된다. 좀 더 계몽적으로 쓸 껄 그랬나 하는 허황된 생각도 들지만 계몽... 위험한 단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만 전설에나 살고 있는 신들을 제외한 누군가가 지금 이 모든 상황을 엿보는 게 아닌가, 아니 그냥 대놓고 전지적 시점으로 내려보고 감상하고 재미있어 하면서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비웃기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데로 생각이 옮겨졌다. 그 생각이란 녀석은 가만히 있는 적이 없다. 이게 영화야? 왠 뚱딴지 같이 막 어딘가에서 불규칙적으로 미세한 소음도 들려오는 것 같다. 이젠 정말 미친걸까? 그건 아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단 J를 잠시 풀어줬드니 S도 한동안 여행자도 꼬시고 호텔 여직원들의 눈총을 더 애달프게 만들어서 뭐라도 이끌어내 보고 낚시와 그리고 인근 무인도 기행, 미술관 유람등을 하면서 창작의 부담감을 조금씩 덜고 있는 듯이 보였다.
   실 생활에서는 방학 기간이 한두달이고 취업 준비 기간이 어느 정도 되며 큼직큼직한 특종이 유명 웹사이트들에 공개되는 대충의 기간이 짧으면 얼마, 길면 어느 정도 된다고 알려져 있다. 정작 요점은 무엇이냐면 그곳에선 그렇지만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서는 단 몇 초면 충분하다. 너무 빠르니까 스토리를 요약하고 넘어가야겠다. 벌써 하품하고 나가 떨어진 독자가 보인다. 머리털이 빠싹 선다. 우선 S라는 인간이 있는데 S가 시간과 자본의 여유가 생겨 어느 섬으로 소설을 쓰러 갔다. 초특급 호텔에서 팔자 좋은 생활을 하면서 J라는 인물을 소설로 만들어낸다. 그 J라는 인물이 글이 안 써진다고 또 이빨만 엄청 까드니만 이제는 진중하게 뭔가 무서운 표정으로 혼자 나름 구상이란 것을 하기 시작했다. 짧으니까 굳이 요약하지 않아도 되는데 괜히 썼다.
   참고로 글의 수준이 왜 이렇게 낮아졌냐 하면 가벼운 소설을 좋아하는 중고딩과 젊은 친구들을 위해서다. 어 그런데 이 말은 어패가 있다. 나이 어리면 모두 높은 수준의 글을 안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이 글은 이미 애초부터 (수준 자체를 거론할 깜은 안되지만) 고품격을 지향했으니까. 아무튼 J가 하고 싶어하는 얘기가 구상 단계를 지났다.

   J는 주인공을 하나 만들었다. 이니셜 A로. A의 성별은 여자다. A는 여대생이나 중년의 나이가 아닌 그 중간에 위치한 매우 지성적인 삶을 살아왔을 것 같은 외모의 소유자로 일단 겉모습부터 눈물 겨운 사랑을 한두 번 해본 듯한 막연한 호기심을 품게 만드는 여인이다. 어렸을 때는 다소 아니 매우 머슴아이처럼 생겨서 곧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곁눈질과 함께 5m 가다가 한 번, 10m에 또 한번 뒤돌아 보았고 어쩌다 집에 들린 여자 외판원이 남자로 오해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3:3 미팅에서 남자들이 갸우뚱 하면서 여자가 맞나 오해하는 일까지 있었다. 젋었을 때는 일순간 또는 길지 않았겠지만 상류층 젊은이들이 그 눈을 마주보면 사랑의 열병이 계절 동안은 간다고 해서 그녀는 선글라스 매니아가 되었다. 즉, 상류층 여사님들이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나름 그녀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쪽에서는 어떻게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의 핸드폰은 2대다. 첫째, 갤럭시 라운드. 최근 아마존 폰으로 바꿀까 생각 중이다. 갤럭시는 공적으로만 사용하고 오픈된 소셜 네트워크와 사진, 메모등 몇가지 기능만 이용한다. 둘째, 아이폰. 사적으로 사용하는데 전화번호부에 등록된 사람의 숫자가 적을 때는 24 많을 때는 30 초반까지만 등록된다. 아, 첫째-둘째... 그거 자제하겠다. 만일 A가 남자라면 정말 까탈스러운 재수 없는 까고 싶은 도시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그녀는 지갑 속에 들어있는 지폐를 항상 앞뒤, 얼굴 모양, 구겨진 정도를 정렬하기 좋아하는 여자다. 다행이다. 그녀는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피곤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한 번 읽은 글, 전부 다 기억하는 포토그래픽 메모리. 한 번 엿들은 말, 모조리 완벽하게 재생할 수 있다. 엿들을 의도는 없을 테지만. 전생에 공주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알려진 그녀의 직업은 좀 재수 없는 번역가다. 그것도 초일류로 알려져 있어서 모국어를 제외한 5개국어에 능통하다. 보통 정상급 번역가가, 최정상급 동시통역자가 다루는 수준으로 그 5개국어를 떡 주무르듯이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번역량도 어마어마해서 제 몇 회 (당신이 살고 있는 국가명) 번역대상도 받았다. 글재주도 상당해서 시대와 대륙을 넘나드는 정도인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목표했던 첫 소설의 완성이 계속 늘어지고 연기되어서 업계 차원에서까지 상당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이다. 그녀의 단문 만을 꼬박꼬박 챙겨 읽고 기다리는 팬들이 있는 반면에 너무 고품격 수준, 소설의 층위를 따지다 보니까, 자꾸 소설 '여자를 안다는 것'에서 존 르 카레의 신작을 정보 요원들이 돌려가며 즐겨 읽던 장면이 떠올라 쉽게 작업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한 책이 몇 권이고 읽은 소설은 얼마이며 쓴 글은 물론 삶의 경력으로 따져도 책 몇 권이 필요할 텐데 말이다. 유령작가라는 영화도 감명 깊게 봤다. 그러면서도 에세이 책만 내고 소설은 발표하지 모한 채로 시간이 너무너무 흘러가 버렸다. 설사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어떤 독자들은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어감의 격을 너무 못 견디게 사무치도록 민감하게 느끼는 것 때문은 아닐까 하고. 커트라인에 관한 좋은 인용문이 있다. 

안나 카레니나/톨스토이
p.1-265 얘기는 품위 있게 시작되었으나 너무 지나치게 품위 있었기 때문에 이내 또 막히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결코 바뀔 일이 없는 확실한 방법인 험담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p.1-368 그는 언제나처럼 프랑스어로 말을 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못 견디게 냉정한 느낌이 드는 러시아어의 당신(브이)이라는 말과 너무 친밀해서 위험한 너(트이)라는 말을 피하기 위해서. 

   참고로 이 글은 완전 허구다. 만일 사실과 우연히 일치하는 부분이 있을 경우 그것은 완벽한 우연이며 작가의 책임은 없다는 것을 밝힌다. 어 느낌이 신종 파파라치 소설인가. 이 책이 안 팔려도 기분이 그렇겠지만 잘 팔려도 것 참 썩 좋은 일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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