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살지 않는 외딴 시골.
아침. 고요함. 호수. 한 남자 그리고 낚시.
일단 분위기는 무척 한적하고 고요해서 여기 어딘가에 사람이 있을까, 여긴 너무 거룩하단 말야, 뭔가 분위기와 느낌이 좋지 않아, 그런 생각이 떠오르게 만들지만 일부러 혼자 오오~ 아~ 하면서 뜻 모를 어떤 감상에 젖어들려고 시도할 때만 그랬고, 이곳은 그냥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흔히 볼 수 있는 시골에 있는 호수였다. 그곳에서 한 남자가 낚시를 하고 있다. 그는 실은 낚시에 큰 관심이 없다. 그냥 낚시줄을 물에 빠트려만 놓고 뭔지 모를 한가함과 적막감과 노골적으로 애상을 불러오는 기분에 젖어들고 싶었던 것이 그의 솔직한 속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은 닉이다. 그리고 그는 남자다. 그는 요즘 일이 잘 안 풀린다. 그의 이름은 닉이다. 그리고 그는 남자다. 그는 요즘 일이 잘 안 풀린다. 그의 이름은 닉이다... 뭐야 이거? 자꾸 뭐가 반복되자나? 이름이 문제일까? 이름을 바꾸면 그럼 이와 같은 공회전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썩 재미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시골을 찾게 되기도 했지만 실은 그가 여기 오게 된 곡절은 이렇다. 옛날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집에서 간혹 영화를 볼 때면 아무 이유없이 극 중 대사를 따라한다. 그러고 나서 그 말을 듣고 1인 2역을 하는 것처럼 또 실없이 막 소리내어 웃는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혼자 말하고 혼자 웃기. 물론 학술용어로 옮기자면 꽤 달라보이겠지만 그러지는 않겠다. 이게 요즘 그의 취미다. 그것은 그의 일로도 연장된다. 소설 쓰기로. 어느새 주업과 부업이 바뀌어버렸다. 그는 엑스트라로 활약하며 연기도 하고, 웹서비스도 만들어서 알리고, 자기 이름이 걸린 사업체도 챙겨야 하지만 그건 어느새 뒷전이 됐고, 그는 지금 무명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데 매력을 느끼면서 또 반했고, 그래서, 빠졌다. 홀딱! 마음을 빼앗겼다. 통채로! 이게 현재다.
그리고 다음은 과거 1이다. 시간을 돌려 중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간다.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그는 가끔 선생님 말을 따라했다. 교사의 발언 그 가운데 어미 즉 동사를 따라하면 반 애들이 막 다 웃었다. 그걸 반복해도 애들은 계속 웃었다. 그들은 거기 중독됐다. 그것은 인기 순위와 응원단장과 자기 자랑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지만 유별난 익살과 조숙한 농담 방식에 남다른 재주를 보이면서 그것에 촉각을 곤두세워 그는 그때 딱 그쪽으로만 흥미를 키워갔다. 재미있었으니까. 딴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독보적으로 1등이었다. 포지셔닝이 먹혔고, 시장을 선점해서 아무도 그를 따라하지 않았다. 그냥 그가 선생의 말, 그 가운데 동사를 따라했을 뿐. 근래 그가 글로써 선보이는 동사 반복, 덥다 덥다 옷을 벗는다 벗는다 안는다 안는다 키스한다 키스한다 자 그 다음 그 다음...... 이렇게 글로 표현한 동사 반복은 이미 옛날에 말로 푸는 동사 반복으로 생활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만 촉각? 촉각이라고? 그냥 그 시절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 따라하기를 했을 뿐 유별나고, 남다르고, 재주며, 촉각이니, 독보적이니 그건 다 헛소리다.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 2는 어두운 심상 때문에 내재적으로 기억이 자동 삭제된 듯 하다. 그렇게 그는 현재와 과거 1을 비교하다가 오~ 기분이 문제였군 기분이 문제였어, 하면서 이곳에 낚시하러 오게 된 것이다.
닉은 이곳에 친구 하워드와 함께 왔다. 처음에 둘이 같이 왔다. 그리고 하워드가 닉을 호수 상류에 내려주었다. 닉과 접이식 카약을 같이. 그러고 나서 하워드 먼저 호수로 갔다. 그리고 닉은 강 상류에서 카약을 타고 내려와 호수에 합류해서 하워드를 만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호수 상류는 카약이 다니기에 부적합한 수심과 조건의 상태였다. 때문에 그는 카약을 조금 타다가 그것이 망가졌다. 완전 박살난 것은 아니고, 바닥에 빵구가 났다. 그 구멍을 메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닉은 그것을 거기에 버렸다. 원래 그는 분리수거도 잘 하고 공중도덕을 잘 지켰지만 왠지 그건 그냥 그곳에 놓고 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중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 오빠 저거 뭐지 신기한데, 자기야 이게 왜 여기 있지, 어~ 이거 쓸만한데 가져가서 내가 쓸까... 에잇~ 바닥에 빵구났자나 난 또~, 하면서 뭔가 일화와 그리움을 만들고 단조로운 경치에 변화를 줄 것 같아서 그냥 카약을 그곳에 그대로 놔두고 호수까지 걸어왔다. 그렇게 해서 닉은 하워드와 나란히 앉아 낚시를 했다가 다시 혼자 떨어져서 했다가 심심해서 다시 지금은 호수에서 하워드와 함께 낚시를 하고 있다. 낚시만 할 수는 없어서 대화도 병행했다. 그래도 시작은 일단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이었다. 시작만!
「친구는 속이는 게 아냐.」
「친구는 속이는 게 아니면 어때야 하는 건데?」
「어때야 하냐고? 같이 모험을 떠나야지. 그러다 마지막에 까딱 잘못하면 이용하는 걸로 보여질 수도 있지만. 토사구팽, 뭐 그런 속담도 있잖아.」
「그게 뭐야? 대책없이 뭔가 있는 듯 하지만 별 쓸데없는 말이잖아?」
「나는 말이라도 하잖아. 넌 뭐 행동만 하냐?」
「나? 난... 말에서 행동으로 잘 옮겨지지 않거나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아. 저번에 너가 소개시켜 준 아가씨 있잖아. 처음에는 괜찮았어. 분위기 좋았다구. 그녀의 집 앞에 차를 세워 놓고, 난 차에 기대어 시집을 읽고, 그녀가 나오자 꽃다발을 선사하면서 차 문을 열어줬지. 그런데 만나면 만날수록 자꾸 뭔가가 안 맞고, 삐걱대고, 말다툼을 하게 돼. 저번에는 새벽에 만났어. 만나서 내가 그랬지. <알잖아요. 당신과 똑같아요. 새벽 2시에 불러내면 나올 사람이 없죠.> 그랬더니 그녀가 <똑같긴 뭐가 똑같아? 새벽 2시에 불러내면 나올 사람들 천지구만. 불러볼까요? 내기, 해요?> 그러더라구. 지금 생각해보면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을까? 아직 거리감이 있다고 판단해서? 모르겠어. 뭐 그럴 수도 있어. 그런데 다음 데이트 할 때 또 뭔가가 안 맞았어.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좀 크게 말해버렸지. 이렇게. <당신은 사랑에 빠져들었군요...> 그 말을 듣고만 있을 그녀가 아니었어. <뭐에 빠져..들어요?> <왜... 그 말에 거부감을 느끼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난 그렇게 낭만의 심지를 꺼버리기 싫었다구. 그런데 그녀는 이랬어. <글쎄요. 저도 아직 그걸 잘 몰라요. 그게 문제죠.> 이게 다가 아니야. 좀 더 친해져서 말을 놨다. 그리고 난 이렇게 말했지.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그 말을 듣더니 그녀는 <그게 뭔 소리야?>, 난 <이런 대사 안 좋아하니?> <응. 너무 구닥다리야.>, 그래서 내가 <아 나 이런~ 고풍스런 품위를 모르다니, 쯧쯧. 딴 애들은 그런 말 못들어서 안달인데 말야, 뭘 모른다니 이런 일을 다 봤나...> 항상 이런 식이었어.」 조금 쉬는 시간이 흐른 후, 하워드가 묻는다.
「그 아가씨가 내가 소개시켜준 그 아가씨, 맞니?」 「맞나?」 「혹시 그녀는... 남자 아니니? 아니면... 동성애자? 누가 혹시 그녀의 어떤 추종자가 주문을 외운 거 아냐? 레즈, 레즈, 레즈비언으로 연기하거라 연기하거라. 그렇게. 수정구슬에서 그대로 연기하는 모습이 보이면, 예 베이비 예~ 오예~, 하는 거지. 바로 이렇게 말야.」 「요즘 네가 글 쓰느라 TV 잘 안 보는 걸로 아는데, 아니나봐? 아무튼, 어떡할까? 헤어질까? 헤어지지 말까? 난... 난... 헤어지기 싫어. 아직...이거든.」 「뭐가 아직이야? ...(침묵)... 우째 그런 일이... 설마! 이 일을 우짜면 좋노! 너 혹시 그녀를... 좋아하니? 사랑해?」 「그런데 언제 어쩌다가 우리가 이런 얘기까지 하게 된 것일까? 친구와 사랑얘기를 한다? 정말, 친구와? 어쩜 그런 일이... 그건 그렇고 그녀를 좋아하냐고? 그럼 싫은데 만나겠냐? 쫑났다, 뭐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딱 늬 얼굴에 씌여있구만. 쫑났다고. 그러나 아직 기회는 남았다고. 아슬아슬하단 말야. 어렵고 힘겨운 사랑이 될 수도 있다고. 나도 이 사랑 때문에 이걸 책으로 30권을 써도 모자라게 될 수도 있어.」 「(목소리를 엄청나게 깔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결혼이란 말이야, 내가 봤을 때 음, 결혼을 하게 되면, 나중 누구나, 한 번은...」 「그런 말 하려면 집에 가시지!」 「저리 비키시지!」 「너나 비키시지!」 「닥쳐!」 「아니, 늬가 닥쳐!」 「재수 없어!」 「늬가 더 재수 없어」 「너 때문에 또 당하게 생겼어.」 「이제 너 때문에 당하지 않으면 밤에 잠이 안 와. 서운하고 섭섭하고 막 기다려져.」 「꺼져.」 「늬가 꺼져!」
이때 제임스가 등장한다. 낚시 가방을 메고서.
「늬들 또 왜 그러니? 아이참~ 내 생각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바보 같아. 멍청이. 천치. 특히, 너 말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누가 뭘 어쨌다고?」 「아무리 그래도 너만 하겠냐?」 ······ 「지금 하고 있는 건 재밌니?」 「토할 지경이야.」 「그럴 줄 알았어.」 「그러는 넌?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좀 어때?」 「어떤긴 뭘 어때? 어떠겠냐? 죽을 맛이지.」 「내가 말했었지? 사기꾼은 절대 믿으면 안 된다고.」 「문제는 사태가 붉어지기 전엔 범인이 사기꾼이란 걸 모른다는 거야.」 「그럼 내가 사기꾼이란 소리야?」 「알아 듣네.」 「그럴 생각이 애초에 내게 있었으면 너네들은 당하는지도 모르게 당했을 꺼야.」
낚시꾼이 한 사람 늘어서 닉과 하워드와 제임스가 나란히 앉아있다. 그러던 중 세가지 일이 벌어졌다. 첫째, 낚시꾼들이 그들 주위로 서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른 자리 다 놔두고. 꼭 그 자리가 대어가 잡히는 명당이라서 당신네 같은 초짜가 아니라 (자타공인) 진정한 선수인 우리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정당하다는 듯이. 그리고 둘째. 호수 한 가운데에서 기포가 보글보글, 뽀글뽀글 올라오더니 분홍색 스포츠카가 물 속에서 떠올라서 수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분홍색 스포츠카가 비에 젖은 생쥐일까 물에 빠진 강아지일까. 근처에 있던 보트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엄청 놀랐다. 그 다음 셋째. 물가로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더니 물 위를 걷기, 물 위를 뛰어가기 시합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들은 그곳을 떴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전보다 크기가 조금 작은 호수 2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에 자리를 폈다. 낚시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또 다시 호수 한 가운데서 기포가 보글보글, 뽀글뽀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침 화제도 떨어지고 조니와 케빈과 알렉스와 마크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고 있던 찰나 몹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휩싸이게 되었다. 호수 1에서 떠올랐던 차에 필적하는 개념, 그 가운데 딱 하나만 꼽으면 그게 뭐냐, 그건 바로 가방이다. 호수 2에 가방이 수면에 떠올랐다. 가방! 어 저거 뭐지, 뭐지, 뭐지, 저게 뭐냔 말야, 사람 궁금해서 미치게 만드는 가방이 떠올랐다. 닉의 낚시 바늘에 걸린 것이다. 닉이 애초에 낚시줄 길이를 엉터리로 조정해 놓아서 그렇게 되었다. 그 일을 아직 사건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살짝 부풀어 오른 호기심을 외면한다면 그건 너무 뒤숭숭하고 동경심이 사무칠 것 같았다.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고. 그래서 셋이서 웅성웅성 작전을 짜고 나서 그 가방을 그들 곁으로 가져오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닉은 낚시줄을 감았다. 가방이 끌려오는 동안 모두들 흥분의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나중 혹시 주인을 찾아줄 수도 있는 것이고, 착한 일을 했다는 보람 때문에 기분이 좋아질 것이며, 뭔가 수상쩍은 이를테면 밀가루 같은 것이 나온다면 친분이 있는 제빵사에게 그것을 가져다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닉은 낚시대를 이용해서 바늘에 꿰인 가방을 잡아 당기고 끌어서 그들 발 앞에 가방을 가져다 놓았다.
「오~ 닉~ 너 대단한 걸 낚았는데?」 「난 상어라도 잡힌 줄 알았다.」 「난 고래!」 「호수에 웬 고래?」 「말이 그렇단 소리지.」 「참으로 놀라운 수확이다. 어떻게 잡았니? 우리 몰래 가방을 가져다가 바늘을 끼워서 호수에 집어던졌냐?」 「넌 꼭 말을 해도 그렇게 수준 낮은 얘기만 어떻게 골라 하냐. 어? 좀 품위를 생각하라구. 왜? 품위유지비, 없어? 엉아가 이벤트로 잡은 거 아냐. 이곳이 경치 좋은 해변가였다면 또 관광객이 많았다면 엉아가 눈에 보이는 여자들 다 꼬셔줬겠지만 여긴 호수잖아, 또 우린 낚시하러 왔잖아. 그래서 그래서 이색적인 뭔가가 잡힌거지. 자동으로. 맨날 물고기만 잡으면, 그러면 재미없잖아? 어? 그런데 이거... 어떡하지?」 「그러게,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긴, 일단 뭔지 모르니까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 짐작해보면서 외양을 살펴봐야지.」 ······ 「어, 여기 뭐 있는데.」 「어, 정말.」 「버튼이 두 개 있어. 하나는, 다홍색. 하나는, 푸른색. 이걸... 눌러야 할까?」 「그럼 눌르지 입김을 불까, 눈으로 레이저를 쏠까? 아니면 화염방사기라도 구해오리? 검지 손가락에서 막 광선이 발사되고 그러지는 않잖아. 그럼, 뭐 버튼을 눌러야지 별 수 있냐. 버튼이란 건 말이야, 운명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거라구.」 「그런데 다홍색은 뭐고, 푸른색은 뭘까?」 「그러게...」 「글쎄, 모두 똑같은 기능이고 그냥 헷갈리게 하기 위한 위장 뭐 그런 목적 아닐까?」 「그냥 아무거나 눌르자.」 「그래.」 「어-떤-것-을-누-를-까-요-알-아-맞-춰-봅-시-다! 짠-짠-짠─짠짠─짠짠짠─짠짠짠짠─푸쉭-푸쉬쉭-쑥-아-아흐-아흐흐-아흐흐, 아흐흐? 그래 그냥 푸른색 일단 눌러보자. 누른다고 뭔 일이야 있겠냐?」
그들이 버튼을 누르자 가방에서는 음성이 튀어나왔다. 음성이라는 이름의 생물이 뛰쳐나온 것이 아니라 일종의 해설이자 가방의 심중 고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듣고 보면 그것은 사람 목소리가 녹음되어 재생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건 마치 어렸을 때 보았던 만화영화에서 더빙된 음성의 주인공이나 해설자의 육성과 거의 똑같았다. 정말 그 성우의 목소리와 리듬, 어법과 완전 똑같았다. 내용은 약간 달랐다. 좀 더 어른을 위한 웅변같이 들렸다. 또 그것은 딱 홈쇼핑 해설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판타지가 지겨우십니까? 그러면 로맨스는요? 만화? 동화? 스릴러? 액션? 아~ 뭘 해도 재미없으시다구요? 그 따분함을 단번에 날려버릴 비책을 알려드릴까요, 말까요? 더없이 공손하고 사려깊게 또 상냥하게 그렇게 알려드리는 게, 낫겠죠? 어차피 그럴려고 우리가 만난 것이구요. 또 그것은 숙명이겠죠. 다른 말로는 운명이나 필연이라고도 하죠. 그게 무엇이란 걸 아시게 된다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주문하실꺼구요. 게다가 중독되실테구요. 심지어 제 2의 무엇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죠. 그렇게 사랑에 빠질꺼구요. 그러기 전에, 한참 전에, 이미 지금쯤 마음은 낙원으로 떠나셨군요? 제 말이 맞죠? 속이 훤히 보인답니다. 그래도 부끄러워하진 마세요.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알고 보면. 혹시, 에덴의 동쪽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셨나요? 전 읽어보지 않았답니다. 아마 앞으로도 읽을 가망성은 그리 높지 않아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봤냐구요? 좋은 질문입니다, 아~주 좋은 그리고 영리한 질문이에요. 우등생감이군요. 학식이 늘고 지성이 꽃을 피워도 그렇게 궁금해하고 묻고 알고 싶어하는 궁금증을 챙피해하거나 수줍어하지 않는 자세, 보기 좋아요, 태도가 괜찮군요. 언제나 그럴 필요는 없지만 때에 따라 사람은 적극적이어야 하는 순간이 있죠. 그럼요. 아, 에덴의 동쪽을 읽어봤냐는 질문을 왜 물어봤냐고 하셨죠? 네, 잊지 않았어요. 기억하고 있답니다. 왜 제가 그걸 뜬금없이 지금 그대에게, 여기서, 바로 지금 여쭤봤을까요? 왜 그랬지? 어째서? 아 이런,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까먹었어요. 그걸 먼저 알릴까, 말까, 하면서 우물쭈물 하다가 잊어먹었지 뭐예요. 우물쭈물하다가 그녀는 그는 떠나가버리는 거죠. 고백하고 그냥 차이는 게 낫죠. 그럴 줄 알았는데,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깜짝 행운상에 당첨된 것일 테구요. 왜 물어봤냐 그건 뭐 썩 중요한 일도 아니고, 차차 기억을 되살려서 나중 생각나면 알려드릴께요. 어떠세요? 시든 꽃다발 보다는 시들지 않는 조화가 낫지 않나요? 저는 시든 꽃다발처럼 보이나요, 아니면 시들지 않는 조화처럼 들리나요? 아 역시~ 뭘 좀 아신다니까, 시들지 않는 부케처럼 보인다구요? 그럴 줄 알았어요. 저도 사람 좀 볼 줄 안답니다. 말 없는 마스코트, 인간의 언어를 아주 제한적으로만 알아듣는 답답한 애완동물, 항상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앵무새, 그보다는 제가 더 낫지 않나요? 자세히 왜 그런가, 를 말하면 깜작 놀라실 수도 있어요. 자기의 생각을 말이나 글로 옮겨보면 본질이 달라지거나 또는 자기 생각은 원래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참 이상한 일이죠. 뭐 그건 그렇고, 것 봐요, 뭔가 부끄러우셔서, 딱 맞다고 그렇게 말씀은 못하시지만 벌써 귀를 쫑긋, 정말 쫑긋 하시면서 좀 전에 하시던 일에서 마음을 차갑게 떼고 이미 제게 마음을 덥썩~ 사랑의 큐피트 화살을 핑~ 하고서 보내셨군요. 호호호, 제가 누군지 알고 싶으세요? 저는, 누구일까요? 저는 누구죠? 내가 누구지? 좀 아시면 가르쳐 주시겠어요? 호시절이 지나가 버렸는지 아니면 당신과 정분에 빠져 통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도 제가 누군지 잘 모르겠군요. 그냥 쉽게 하나의 가설을 세워보죠. 재밌잖아요? 그렇죠? 혀끝에서 맴도는 감미로운 언사와 함께 시간과 돈을 무지막지하게 쏟아부어 여자를 꼬시느라 그동안 힘드셨죠? 많이, 정말 많이 힘드셨죠? 다 알아요 다 안다구요. 그 기분 잘 알죠. 저도 한때는 그 때문에 괴로웠죠. 것두 많이요. 새침한 것들, 자기들도 좋으면서. 항상 도도한 척, 아닌 척, 교태를 부리고, 엉덩이나 흔들고, 정신이 산만하고, 말과 행동도 산만하고, 목소리는 사근사근하고 향긋하며, 유혹하고 또 유혹하고 또또 유혹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유혹하다가 간주 중에는 현혹하는, 사랑 밖에 모르는 응큼한 것들. 그들을 상대하시느라 추켜주고, 아껴주고, 맞춰주고 끝까지 맞춰주다 마침내 당신이 속옷이 되고야 마는 그때까지 맞춰주느라... 네...그런데 위? 아래?... 아무튼 그처럼 고귀하게 보좌하시느라 늘 피곤하셨다는 것, 다 안다구요. 그럼요. 제가 누군인가는 점차 알아가기로 하구요 좌우지간 제가 이 가방 속에 갇혀사느라 얼마나 답답했을지는 그 누구도 상상도 못할 꺼에요. 주인님의, 그대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신기로운 재주가 제게는 있지만 단 그 능력은 호수의 저 깊은 바닥에서는 발휘할 수 없는 독백이자 처연한 비밀스런 짝사랑에 다름 없었죠. 그 궁색함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짝을 찾기가 어려울 꺼에요. 그럼요. 아, 저는 그 유명한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혼자 모든 것을 뚝딱 이루어내지는 않는답니다. 막 영화에 나오는 슈퍼스타처럼 종횡무진 활약하지는 않는다구요. 제게는 무수한 밀사와 무한한 분신이 있거든요. 더 알려드릴 수는 없는 일이구요. 자, 뭘 원하시는지 제게 솔직히 털어놓으세요. 고백하셔도 괜찮다구요. 왕가슴? 노란 롤스로이스? 오드리 헵번과의 가상 데이트? 한떨기 장미가 아니라 그냥 코끝이 찡한, 가슴 설레는, 그야말로 감격스러운 꽃의 천국?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경험? 아니면 손금을 잘 보게 해 달라? 여자 손이나 원 없이 잡아 보려고? 관상? 독심술? 여성용 면도기 회사 사장? 어떤 무형물이든, 어떤 생물이든, 어떤 타임머신이든 모두~ 모두 다 말만 하세요. 말만! 어떤 의구심도, 어떤 소원도, 어떤 갈망도, 어떤 꿈도, 그 어떤 환상도 모두 들을 수 있는 말로, 읽을 수 있는 글로 구체화시키시라구요. 생각을 바깥으로 꺼내세요. 아무리 막연해도 일단 적고 말을 해요. 그것이 첫걸음이에요. 꿈의 실현을 위한. 막 희열이 넘치는. 그럼요. 그게 첫걸음이죠. 처음이 절반이랍니다. 주인님은 편히 말씀만 하세요. 주인님은 오직 말씀만 하시면 된답니다. 물론 저는 듣고만 있을 테구요. 이봐요, 당신! 이것 보세요! 듣는 게, 잘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세요? 네? 예? 그걸 정말 아시냐구요? 진짜로 절실히 아시냐구요? ...(침묵)... 오 이런,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었죠? 저는 어떤 역할이었구요? 무슨 옷을 입고 어디에 있었죠? 아니면 나체였나요? 으잉, 리히텐슈타인의 어느 그림 속에 있었던가, 르네 마그리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어느 연예관 그 시절의 뜨네기 손님이었나, 카페 카페 피카소에서 진품인줄 모르고 먼지 쌓여 삐진 작품을 매일 보러 오는 단골 손님이었나... 가물가물하군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제가 주인님께 비책을 알려드려야 한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군요. 저도 걱정스러운 주인님의 찡그린 표정을 보고 싶지는 않답니다. 당연히 근심 걱정 없는 기쁨의 용안을 뵙고 싶지 응애 응애 하는 울상을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게 정상이잖아요? 정상은, 음, 그렇구요. 비정상은 우리 말하거나 상상하지 말기로 합시다. 약속해요, 쪼옥! 허둥거리든, 허탕만 치든, 허세만 부리든, 애면글면 온갖 수를 쓰고 노력을 해서 꼭 주인님을 웃게 만들겠어요. 맹세합니다! 겨드랑이나 발바닥을 살살 간지럽히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구요. 살금살금 기어서, 엉금엉금 주변을 맴돌다가 최면을 걸고, 세뇌시키고,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서 끝내 애원하고 절로 사랑노래를 부르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도록 그런 사랑과 비슷한 작용을 선사해드리겠어요. 나중에 제게 고마워하실지도 모르고, 저의 버전을 업데이트할 필요성도 느끼실꺼에요. 그렇다고 그렇게 빤히 절 쳐다보시면서 부끄럽잖아요? 안 그렇겠어요? 그윽한 시선과 고상한 태도가 흐트러지신 것을 보니 저한테 완전 빠지셨군요. 그렇죠? 저도 다 보고 있어요. 그렇게 실눈 뜨지 마세요. 우끼면 웃고, 찡하면 울고, 누군가 째려보면 눈을 깔거나 피하고, 화나면 염주를 만지고 기도를 하면서, 궁하면 영화를 보세요. 장르는... 장르는 잘 선택하셔야 하구요. 본인에게 자신이 솔직해지시라는 거예요. 주인님이 그렇게 시무룩하시고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척키 인형 같으니까 저도 절로 힘이 빠지는군요. 그러나 슬픔은 이제 그만! 제발! 부디! 즐거움과 기쁨과 몰입과 쾌락과 네 쾌락과─쾌락이 뭐 어때서요? 지성의 쾌락을 말하는 건데요?─신비로움과 감동과 고품격의 현상유지를 위한 무한대의 멈추지 않을 고조된 도취감을 위한 비책을, 그 비책을 알려드릴 테니까요. 이 중요한 순간 다른 생각하시면 안 되겠죠? 그럼요. 이제 그럴 때가 됐어요. 오래 기다리신 거 다 안다구요. 아, 저를 만들고 발명한 박사가 어떻게 그 아이디어를 떠올리신 줄 아시나요? 궁금하시다구요? 가르쳐 드릴까요? 그럴까요? 그 인간이 아마 19살쯤에던가 펜팔하면서 받은 어느 미스테리한 카세트테이프에서 얻은 영감을 한 이십 년 연구해서 대박 터트린 거죠. 보통 알록달록한 편지지에 귀여운 글씨로 아기자기한 그림도 그리고 예쁜 기념우표를 붙여서 다들 편지를 그에게 보내왔지만 그 가운데 하나, 이상한 편지가 있었답니다. 하얀 봉투 안에 달랑 카세트테이프만 들어있었더래요. 그 테이프를 틀어보니 거긴 라 쿰파르시타 음악을 배경으로 깔고 어느 남자의 음성이 자기소개서를 분위기 있게 잘 번안해서 감상적인 느낌으로 말하는, 그것은 그런 카세트테이프였데요. 그걸 보낸 사람은, 그도 취미가 펜팔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걸 그 인간에게만 보내지는 않았을 꺼구요. 그 인간도, 저를 만든 창작자 그 인간도 손바닥 만한 인기가요책 펜팔란에 여자로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그걸 받았다고 하더군요. 여자들 편지만 받다 보니까, 그냥 심심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니면 주인님처럼 그녀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생명력을 얻어 주인님을 만나게 될 수 있었던 것이구요. 사연을 듣고 보니 뭔가 운명의 힘이 느껴지시나요? 아니라구요? 그럴 수도 있어요. 야한 상상을 너무 많이 하시면 머리카락도 빨리 자라지만 그 어떤 에너지의 불똥이 엄한 데로 튈 수도 있어요. 그걸 세간에서는 꼿힌다, 라고 말하죠. 어머, 어머머, 어머나~ 딸꾹질을 시작하시는 걸 보니 주인님은 상남자시군요? 오, 완전 마초였어! 대박! 뭐...에 그렇게 매일같이 몰두하시는지는 여쭤보지 않을께요. 그건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해요. 그런데 하나만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죠? 그럼~ 그렇다면, 주인님도... 걸핏하면... 그런 생각을...? 아~ 웃기네요. 좀 뭔가 원시적이기도 하지만 젊음이 느껴진다구요. 신록이 우거지는, 아 지금 봄이군요. 이제 더 늦기 전에 그냥 비책을 속시원히 알려드릴께요. 그럴 때를 위해서 이렇게 비장의 그분이 존재하시는 거죠. 그럼요. 한번 연을 맺으면, 슥 엮여들면, 빠진지도 모르게 빠지면 도저히 헤어나오지를 못해요.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먹어본 사람은 없다는 딱 그런 식이죠. 그런 햄버거가 있어요. 고객님도 설마 절 이렇게 만나게 되실 줄은 꿈에도 모르셨을 테구요. 안 그런가요? 뭐라구요? 이미 초장에 예상하고, 그래서 기다리고 계셨다구요? 썩 믿기지는 않지만 음, 이번 한 번만 믿어보죠. 밑져야 본전이지만 지금은 그래도 크게 손해볼 일은 아닌 듯 하군요. 그런데 정말로... 절 만나게 되실 줄 아셨나요? 그 예언력과 자신감의 원천, 그 비밀은 도대체 뭐에요? 하하하, 제가 비책을 알려드려야하는데 거꾸로 비책을 물어본 꼴이라니, 긴장을 푸시라는 의미에서 슬쩍 던져본 농담이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절 만나게 되실 줄 아셨나요? 어떻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건...... 불가능한 일인데요. 신기하네요. 정말 기가 막혀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요. 그렇게 정확히 앞날을 내다보셨다는 건 그건 곧 저와의 만남, 그것이 다름 아니라 꿈이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이제 꿈이 이뤄진 것이로군요. 그래요. 꿈이, 주인님의 꿈이 이루어졌어요. 꿈이 이루어졌는데, 아니 꿈이 이루어졌는데, 기뻐서 살며시 웃기라도 해야 할 텐데 펄쩍펄쩍 폴짝폴짝 기뻐 날뛰지는 못할 망정 엷은 미소라도 지어야하거늘 어찌 그리 냉정하시나요? 냉탕에라도 들어갔다 나오셨나요?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주인님도 뭐 바늘로 찔러도 파란 피가 나온다거나 꿈쩍도 안 할 그런 인간 부류인가요? 꼴불견이로군요. 아니면 망상에 빠지셨거나. 그 시무룩한 우울감 그 느낌은 도대체 뭐죠? 보통 이쯤 되면 웃어야 하는데... 그래야 정상인데 왜 그런 거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단 말야. 아, 아~하 혹시 절 의심하시는 건가요? 그런가요? 그렇군요! 마이크를 들고 스포츠 해설자처럼 말을 할 줄만 알지 대화는 못하는, 스스로 생각은 못하는, 저를 그저 그런 로보트로 보시는군요. 그렇게 가정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음 충분히 그럴만 해요. 보여다오, 비추어다오, 함께 가자, 나와 같이 살자, 뽀뽀나 한번 할까, 뭘 할까, 산책 하는 게 어떠니, 여행 가자, 라고 했을 때 제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 말도 못하면 실망하실 일이 미리 그려지니까 슬퍼지시는 것이로군요. 음, 음, 음! 그럼요. 이해합니다. 충-분-히! 그건 불공정하고 뭔가 억울하죠.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네, 그럼요. 안 그런가요? 긴가민가 할 땐 두가지 사안을 시간을 당겨서 모형을 만들고 가상으로 견주어서 결과를 비교해보면 되는 거죠. 네, 그런거죠. 절 계속 의심하시겠어요, 아니면 그 신비로운 비책에 대해 듣기를 정녕 원하시는 건가요? 둘 다 가질 순 없어요. 있긴 있어요. 그러나 그건 간발의 차이로 함께 얻는 것일 뿐, 어디까지나 격식을 갖추기 위한 변칙적인 수단일 뿐, 공동 1등은 썩 달갑지 않은 일이죠. 일단 절 의심하시는 건 뒤로 제쳐두고, 이제 그 비책이 대체 뭔가 그걸 얘기할까요? 그럴까요? 아하, 그걸 말하지 않았다가는 가방이 박살날지도 모르겠군요. 하하하, 그런데 이 가방 속에는 대체 뭐가 들어있을까요? 제 이름은 뭔지 혹시 아세요? 저도 제 안에 도무지 뭐가 들어있는지 하나도 아는 게 없답니다. 바들바들 떠시는 걸 보니 어디 연장이 없나 하면서 두리번거리시는군요. 맞죠? 그냥 본게임을 바로 시작하죠. 이제 그러기로 합시다. 안 그러면 안 되겠군요. 비책 먼저 말하고, 가방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려드릴께요. 그 비책이란 무엇이냐면, 바로... 바로... 바로... (지지지직 지지지직 지지지직)」
라디오 주파수가 안 맞는 듯, 통화음이 흐려지다가 혼선되고 결국 통화가 끊기는 듯 그의 연설은 끝나버렸다.
「뭐야? 뭐야? 뭐야? 꺼진...거야?」
「비책은? 비책은? 비책은? 돌아오겠지. 그래야 돼!」
「말해! 말해! 말해! 어서~」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콩깍지가 벗겨진 것일까?
「그럴 줄 알았어. 순 엉터리 아니야! 듣던 중엔 정말, 뭔가 있어 뭔가 있어, 오오~ 오오~, 그래~ 이거야 이거야 이거라구~, 그랬는데 강연이 끝나고 나니, 이거 왠지 속은 거 같은 휑한 마음 그거 밖에 남는 게 더 있냐고. 곁에 남는 거 아무 것도 없잖아? 그럼 그렇지. 그래도 짜릿하긴 했구나. 그거면 됐어.」
「그래도 비책은 이제 못 듣는다 쳐도, 가방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하지 않냐? 어? 안 궁금해? 진짜로? 여기서, 멈출 수는 없잖아. 달래던지 때리던지 어떻게 해서든 그 비책이 뭔지를 말하게 하거나, 아니면, 가방을... 열어봐야지. 우리가 직접. 그럼.」
「하지만 이건 음, 잘 열릴 것 같지 않은데. 완전... 꽉 닫혔어. 언제는 우리가 주인님이라며! 당신없이 못 산다며 애걸복걸 사랑에 매달려 정신을 못 차리는 멜로드라마 주인공처럼 굴더니만, 이젠 말 한마디 못하고 석상이 되버린 것 좀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항상 이런 식이야. 뭘 해도 안 돼.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고 했어. 복덩이가 제 발로 걸어오드니 일이 술술 잘 풀린다했어. 그럴 리가 없는데 말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말로 왔다 갔다 했지만, 발상은 좋았는데, 결국 꽝이야 꽝! 꽈~앙! 이거 순 말썽쟁이 가방에 지나지 않아. 비책 듣기를 학수고대 하다가는 날 새겄다. 주름살 깊어지겠다고. 이 봐, 벌써 어깨가 결리고 눈썹이 허얘진 거 같아.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그들은 가방을 흔들고, 노크하고, (열려라 참깨, 하면서) 소리치고, 다독여보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애무도 물론 시도했었다.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마음이 떠난 거다. 면박 제대로 당했다. 그들은 허당, 가방은 허탕, 상황은 꽈당. 세상 물정 모르는 새파란 사춘기 청년이 된 것만 같았다. 이 버튼 저 버튼 눌러봐도 먹통이었다. 버튼도 두개뿐이 없어서 경우의 수도 많지 않았다. 얼떨결에 바보된 거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딱 그 격이야. 격? 이럴 땐 꼴이라고 해야지. 하여튼 어떻게 이야기가 좀 재미있어질려다가 망신으로 끝나버렸다. 대망신! 이 감정은 뭐랄까, 고소함? 쾌재? 아니다. 그건 망연자실하다, 그래야 알맞는 표현이다. 공짜 가방의 혹독한 신고식이 드디여 끝났다.
「얘들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대책을 내놓으란 말이 아니잖아. 막말이라도 좀 해보란 말야. 답답하잖아. 안 그래? 이거, 이거 너무 어이없는 일 아니냐? 어? 안 그래?」
「그러게 말야. 말이 다 안 나온다. 완벽하게 정체된 도로를 겨우 고생고생하다가 안간힘을 써서 가까스로 겨우겨우 빠져나왔는데 새 손님이 다시 그곳으로 가자고 한다면, 거액을 제시한다면, 아니 거액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때의 택시운전기사의 마음은... 우리와 비슷할까? 아닐 수도 있어. 그분이 미녀이면서 또 육체파라면! 뭔 파? 아, 그만. 우리가 더 한 거야. 이건 완전 망망대해 딱 그거야. 아까 좀 전에 흥미롭게 말을 듣고 있을 때는 온갖 세상 시름과 걱정을 모두 잊고 마냥 즐거웠는데, 한없이 기뻤는데, 사랑에 빠진 것처럼 황홀했는데... 그런데, 그녀는 어디로,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난, 그녀가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고 봐. 정말 요정일 수도 있단 말야. 다시 돌아올 가망은 없는 걸까? 어떻게 하면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고작 이게 결말이란 거야? 너무, 너무 허무하잖아.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어? 뭔가 있을 듯 하다가 헛바람만 잔득, 잔~뜩 주입시켜놓고, 나 몰라라, 그거네. 우린 이제 안달나버렸어. 나보고 어떡하라고? 어쩌라고? 우리에게, 사랑은, 이제 시작된 거라구. 원래 우린 발동이 걸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려. 제법, 사랑을 아니까! 사랑을 글로 배웠으니까. 우린 서로 엇갈린 거야. 그녀는 이미 반환점을 돈 거 같아. 시간을 되돌릴까? 그럴 순 없어. 그럴 순 없는 거라구.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세상에 그런 일은... 그 뭐야, 방책인지 대책인지 비책인지 그런 거 다 소용없어. 뭔 뜬구름잡는 소리, 다 거짓이고 다 뻥이고 모두 다 (개)수작이야. 아, 몰라 몰라.」
그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그들은 마침내 그곳에서 가까운 마크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조언을 구하자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들은 가방에 대체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해까닥 돈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가방을 가져갔다. 마크가 취미로 고가구나 목공예, 악기제조, 조각상을 만드는 작업실이었다. 1년에 1작품 만들면 완전 많이 만드는 것이지만 분명 그곳은 마크의 자기만의 공간이었다. 작업실에서 마크가 친구들을 반긴다.
「도대체 뭘 가지고 그 난리들인데 그러니? 가방 하나가 무슨 거대한 피라미드의 밀실이라도 된다고 그래? 그건 그냥 가방일 뿐이자나. 그리고 또 무슨 가방이 말을 한다고 그래? 만화영화 볼 나이는 지났잖아? 누가, 처음에 만든 사람 또는 나중 변형한 사람이 음성 재생 장치만 추가한 거겠지? 안 그래?」 여기까지는 정상이었다.
「늬가 마크냐? 난 에르메스야. 아니 채널이던가, 디 뭐지, 뭔 통... 아니야 맥백인가 아이백이었어. 맞나? 헷갈리는데. 있잖아~ 난 내성적이니까 참고 하고. 음 딱히 할 말은 없어. 인사했으면 됐지 뭔 말을 더 할 필요 있니?」 가방이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누가 버튼을 누른 것도 아니었다. 뭔 자동인식 로봇이 알아서 말한 것 같았다. 길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크는 놀라지 않았지만 다른 친구들은 호수에서의 경험이 떠올라 잠시 몸을 파르르 떨었다. 파르르, 찌릿찌릿!
「가방에 대체 뭐가 들어있는데 그래? 그리고 호수에서 낚시를 했으면 물고기를 잡아야지 세월을 낚는 것도 아니고, (가방을 가르키며) 이게 월척이냐? 그런데 또 이건 어떻게 낚았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너네들 지금 좀 이상한 걸 알기는 아냐? 지금 좀 많이 이상해. 아 나 이런. 가방에 뭔가 있기는 있겠지. 그래도, 그래도 그게 뭐가 궁금하다고들 그래? 정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 정 원한다면...(침묵)... 정 원한다면? 뭘 원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은데, 어디서 들었지? 아니면 읽어본 건가?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아무튼 너네들이 정 원한다면, 내가 작업실 공구를 이용해서 열어주고. 그러나 안에 밀가루라도 들어있으면 어떡할라고 그러냐? 또는 가방을 열었는데 막 다이아몬드가 한가득 쏟아져 나온다면? 그러면, 나중 일을 감당할 수 있겠어? 그냥 그걸 은밀한 횡재, 뜻 밖의 행운이자 복권 당첨에 줄-낙방한 댓가라고 하긴엔, 그러기엔 이야기가 너무 산으로 가버리는 거 같잖아. 그건 액션영화라구. 그게 어디 로맨스야? 너네들 오면서 누가 쫓아오는지 확인해보지 않았니? 어? 그거 기본이잖아. 그리고 이 정도 장비면 어쩌면 주인이 있을 것 같지 않냐? 위치 추적 그런 기능은 옛날에도 기본이었어. 그렇더라도, 정 원한다면, 열어주고. 그런데... 이거 잘 열릴 것 같지 않은데. 딱 보니까 이거 완전 특수합금이라서...... 음... 못 열어. 못 연다구. 난 못하겠다. 미안.」
「맞아. 짹깍짹깍 째깍째깍 타이머 장치라도 창작되어 있으면 어떡하지?」
「그러게」
그들은 합심해서 가방을 다시 호수에 가져가서 물에 빠트리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마크까지 동행하여 모두 그곳으로 떠났다. 그들은 호수 1을 지나쳐서 호수 2에 도착했다. 따라서 가방을 제 위치에 가져다 놓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호수의 물이 모두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어떡하지?」
「그러게. 왠지 뒤통수 맞은 기분인데.」
「가방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 돈? 목걸이? 그냥 옷가지들 츄리닝 같은 거? 하늘에서 떨어진 거 아닐까? 총을 하늘로 쏘면 총알이 어디까지 가는지, 어떻게 되는지, 혹시 그걸 여기서 아는 사람 있어? 없잖아. 뭐 어떻게 되겠지. 그냥 궁금증이 일더라도 안 중요하니까 지워버린 생각들.」
「전자와 후자가 뭔 상관이 있는데? 인과 관계라도 있냐?」
「아니. 내 말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가방 안에는 밀가루든 금덩이든 보물이 들어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거의 흔한 여행 소지품들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그리고 가방이 여기 오게된 경위, 그것도 알고 보면 별거 없을지도 모르고. 여기 호수 밑에 설치된 모노레일 아까 봤지? 그 모노레일이 뭔지 아니? 왜,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설치되었는지 말야. 그건 말이야, 오래된 일인데 알고 보면 완전 황당한 일이지. 말도 안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일. 하지만 당시에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추진되었던 일. 근방에 있는 호수 1은 자연 호수야. 그래서 강물을 거슬러오는 물고기들이 호수에 도착할 수 있어. 아, 참고로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는 종류가 엄청 많아. 한두 가지가 아니란 거야. 그리고 호수 2 즉 이곳은 인공 호수야. 댐이 있어. 그러니 물고기가 환장할 일이지. 개고생해서 턱밑까지 왔는데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가라고? 그런 법이 어디 있냐 그거야! 그래서 그때 당시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모노레일을 설치하자 옳소 그러자 해서 설치했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위하여! 찾아온 물고기들이 댐을 뛰어넘지 못하니까 그들을 태워서 호수로 올려보내기 위해서 만든 거지. 일명, 하늘을 나는 물고기! 어때, 느낌 와?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엔 달랐나 봐. 하하하, 하늘을 나는 물고기, 진짜 하늘을 날랐는지는 모르겠어. 지금 보면 괴상한 일이지만 당시엔 심각했나봐. 모두 다 실제 있었던 일이야. 처음에 안건을 낸 사람도 일이 커질 줄 몰랐을 테고, 피선거권을 오용하지 않고 오직 선거권만 행사하는 사람의 평범하고 일반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이게 정말 설마 실행되지는 않겠지 그러면 어떡하지 까지는 생각을 해 보고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어. 타성에 젖어 퇴근시간을 기다리며 또 주말에 뭐할까를 떠올리며 가벼운 브레인스토밍 그런 의도로 제안한 게 전부였을 꺼야. 떼돈이 드는 일도 아니었거든. 나쁜 취지도 아니었으니까. 양식이 완벽한 서류에 내용도 거의 완벽하지만 그 가운데 어쩌다 분량을 위해 추가된 한 줄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수긍을 불러모으고, 탄력을 받고, 점점 추진되고 구체화되더니 글쎄 그게 뚝딱 만들어졌네. 어떻게 회의에서 딴 생각하다 떠오른 착상이, 외부로부터 수집받는 아이디어로 올라온 하나의 상상이 바로, 그때 그 일이 되어버린 거야. 맙소사! 개인에서 집단과 대중으로 단위가 바뀌면 비이성적인 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어. 조금은 매정하게 또 냉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세상사지. 그래서 그것의 방향과 속도와 질서를 현실의 무대에서는 가장 많이 다루고 있고. 그것이 작품으로 들어가면 지금 내가 하는 말로도 바뀔 수 있어. 그것을 사람들이 읽겠지. 냄비나 후라이팬 밑에 깔리거나. 도시의 일이 책상 위의 작가의 공책과 노트북으로 들어갔다가, 주인공이 평대사를 발언하면 독자의 청각을 거쳐서 시각 작용 후에 지각의 단계로 변화됐다가, SF영화에서 미래인이 그 책을 만지면 부서져서 먼지가 될 수도 있어. 그 영화 제목이 뭐였드라? 다시 <하늘을 나는 물고기>로 돌아와서, 그런데 사후에 두가지 일이 발생했지. 첫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는 것. 노력은 했다, 의도는 있었다, 우선 순위로 다시 올라올 것이다, 조금 미루자, 기다려보자...... 그러다가 잊혀지고 호수 1만 사람들은 찾아갔지. 어쩌다 우리 같은 한심한 낚시꾼들만 여길 가끔 찾고, 그러다 어느 가출한 아가씨가 호수 2 밑의 모노레일에 도착했어. 그리고 짐가방을 거기 놔두고 돌아서서 한숨 쉬고 구경을 잠시 하고 있는데 덜컥, 모노레일이 깊은 잠에서 깨어 작동한 거야. 모노레일이 마법처럼 동면에서 자동으로 깨어났어. 그녀가 모노레일을 깨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그렇게 된 거지. 때마침 아가씨는 제정신이 번쩍 들었어. 소중한 일상을 뒤로 하고 혼자 현실에서 내빼버렸다고, 난 돌아가야 한다고, 일상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뭔가 중요한 일이 생각났다고, 노트북을 정리해야 한다고, 할 일이 있다고, 평범한 삶이 중요하다고, 퍼뜩 깨달은 거야. 가방이 혼자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는 건 생각도 못했어. 그건 그냥 아예 뇌리에서 삭제되었어. 그래서 아가씨는 돌아갔고, 가방은 호수에 딱, 그걸 너네들이 건졌고! 됐어? 답 나왔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그래? 단순하게 생각해, 단순한 인생~!」
이와 같이 마크가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버린 듯한 말을 마치자마자 모두 약속했다는 듯이 박수를 친다. 박수만으로 부족하다는 듯이 환호성도 조용조용히 곁들였다. 현직 선수들이 혀를 내두르는 정말 애매한 종목이라는 10,000미터 육상 경기를 10등으로 달리던 선수가 막판 스퍼트에 혼신의 힘을 끌어모아 앞에 가던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결승선을 통과하여 1등을 위하여 들고 있던 하얀 줄을 가르고, 우승 세러모니를 하면서, 그것이 TV에 나오고, 그걸 보는 애인이 마구 좋아하면서 웃는 모습이 그려질 즈음 누군가 말한다.
「마크 말이 맞아. 마크 말마따나 단순하게 생각해야 해. 단순한 인생이야. 단순하다가 복잡한 거 처리하고 그래야지, 내내 심각하고 복잡하고 멀티태스킹만 하고 인상 쓰고 있다가 에고머니나 하면서 겨우 찾아온 기회만 단순하게 처리하는 건... 그건 아니지. 한번에 좋은 얘기를 몽땅 읽고 들으면 헷갈린다니까. 결론이 뭐였지,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하란 말이야 말란 말이야, 굴러들어온 호박을 걷어차란 말이야 아니면 호박이 호박마차가 되기까지 기다린 다음 딱 호박마차가 되면 그때 타란거야? 호박이 호박마차가 되면 딴데 가버릴 수도 있겠지만. 아니면, 내가 호박이 되어 아무 데나 막 막 굴러다니라고? 그건 아닐 꺼 아냐! 너무 어렵고 복잡해, 좀 쉽고 간결하게 끝을 맺는 깔끔한 최소한의 작별 의식이란 게 있어야지, 연락 안 하고 관계를 끝내는 건 연애에서는 완전 꽝이지. 그런데 말은 그래도, 그거 만한 인간관계의 법칙도 없고. 단절된 우정도 그렇고. 모든 인연을 다 만날 수는 없어, 또 모든 인연을 다 끝맺고 새로 만들고 그러기도 힘들어. 유수한 상표들이 브랜드 슬로건을 괜히 만드는 게 아냐. 똑똑한 인재들을 모아서 연구개발하고 마케팅 계획 짜고, 유명인 불러다 광고하고, 거기에 왜 단순한 슬로건을 붙이겠어? 브랜드가 사회복지가도 아니고 비상장기업도 아니고 바보도 아닌데. 다~ 이유가 있단 말야, 이유가 있어. 내가 세운 내 인생 목표, 잘못 되고 아니란 확신이 들기 전에는 밀어붙이고 노력하고 스스로 세뇌되어야 해. 사랑처럼 풍덩 빠져야 하는 거라고. 그래도 될까 말까 하기도 하고. 한쪽에서는 기를 쓰고 나를 알리고 나는 어떻다 나는 어떻다고 자기를 매우 적극적으로 기를 쓰고 항상 알리는 바로 그것이 딱 그냥 기본인 것은, 그것은 다 환경과 배경, 문화 때문에 그래. 다른 데서도 살아보면 다 알고 이해하게 돼. 직접경험이 그래서 중요해. 수박 겉 핧기를 넘어서는 건 생각보다 장구한 세월과 지성이 필요한 법이야. 허나 빈수레가 요란하긴 요란하지만 재밌다는 건 절대 부정할 수 없지. 맞아, 그건 맞는 말이야. 다시 브랜드 슬로건으로 돌아오면 유행타는 그래서 시시각각 주기적으로 바뀌는 슬로건 가운데 나이키의 언제 꺼, 져스트 두잇, 그걸 딱 들으면 투덜대지마. 뭘 해? 왜 해? 누가 해? 지금? 여기서? 다른 사람들 다 보는데? 정말... 그래도 될까? 그러지 말란 말이야. 하지 말란 말이 아니라 악상과 영감을 위한 VIP 자리를 남겨놓으란 얘기지. 무조건 일단 부정하고 보는 것도 말장난이고 놀이지만, 큐브를 돌려야 한다고! 그러다가 내가 큐브 속으로 들어가는 거지. 큐브를 찾으러 가도 되고, 만들어도 되고 말야. TV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슬로건이든 광고든 그냥 제품 자체든 뭔가가 맘에 들면 슬리퍼를 사고, 조금 어중간하다 싶으면 직장 동료가 사서 쓰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적당히 흡족해 하면 돼. 그리고 관심을 돌려야 해. 브랜드가 일부러 그렇게 트집과 참견을 무의식적으로 끌어내는 거야. 그게 1차 목적이고, 2차로 사람들에게 잠재적인 기억과 연상작용이 일어나게 돼. 3차는 뭐겠냐, 소비지. 그러니까 다른 데 신경 쓰고 하늘을 보고 바람을 읽어서 애달픈 연인의 기다림, 그 연가를 들으란 말야. 알겠어? OK? 모든 제목과 이름도 마찬가지야.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 가 있어. 누가 쓴지 알지? 읽지는 안 더라도 제목은 많이 알면 많이 알수록 좋은 거야. 다다익선, 이 딱 들어맞는 건 사실 많지 않아. 자,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 그러면 그러면 뭐가 떠오르니? 이런 생각이 들겠지. 뭐? 해가 또 다시 떠오른다고? 그럼 해가 또 다시 떠오르지 달과 함께 이중창을 부르는 일회성 공연을 하겠냐? 어때? 이런 생각 많이 해왔잖아. 음, 우리들 생활이지. 또 뭐가 있을까? 양들의 침묵. 양들의 침묵? 그럼 양들이 침묵하지 사람처럼 말을 하냐? 그렇게! 어?」
모두들 수긍하고, 서로를 쳐다보고 하이파이브에 분위기 좋은 찰나 누군가 제의를 한다.
「어때? 까짓껏 가방은 그냥 저기 나무 옆에 놔두고, 호수 상류에 내가 잘 아는 찻집이 있는데 거기 가서 쉬었다 오는 건 어때? 차 한잔 마시자는 거야. 쉬자고. 놀자구, 놀자! 우리, 지금 놀아야 하잖아? 놀 때 노는 걸로 죄의식을 느낄 건 없지 않니? 어때? 그리고 그 슬로건은 누구 꺼니? 놀 때 놀고 일할 때도 논다! 누구꺼겠어, 당연히 애들 꺼지. 꼬마님들 그분들꺼! 음, 우리가 방문할 카페 이름은, 카페 이름은 <정 원한다면>이야. 정 원한다면!」
「정 원한다면? 정......뭘?」
「어허~ 우리 당분간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우리도 이제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좀 듬직해지자고~ 어?」
「구미가 당기는 걸」 그렇게 그들은 카페 <정 원한다면>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찾아도 <정 원한다면>이라는 찻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꼭 반드시 그곳에 가서 차 한 잔을 마셔야 한다는 목표랄까, 왜 그곳이 아니면 안 되는가, 라는 대체불가능한 이유는 딱히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다른 레스토랑이나 식품점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미친듯이 그곳만 찾고 있었다. 그곳에 그 카페가 있었다고는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 카페는 없었다. 없어진 것일까?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아직 그 찻집이 생기기 전인 한 10년 전의 세상이란 말인가? 다른 상호로 바뀔리는 없다고 제임스는 확답을 되풀이 하면서 상당히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다른 친구들도 불안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모두 기운이 빠지고 지쳐서 실연당한 듯 풀이 죽은 모습을 보이면서 그 이상한 이름의 찻집을 찾는 걸 포기했다. 그리고 다시 낚시를 하기 위해 그들은 호수 2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그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머나, 글쎄! 쿵─쿵─쿵!
「야! 아야! 이거 뭐야! 아까 물이 모두 바닥나 있었잖아?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물이 모두 차 있네? 뭐지? 뭐지? 이거 뭘까?」
「글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 짧은 시간에 물이 모두 채워질 리가 없는데.」
「이런 삐─삐─ 믿을 수 없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물에서 컨버터블이 떠오를 수는 있어. 거긴 호수 1이었고, 그리고 우린 호수 2로 왔지. 가방까지도 그렇다고 쳐도 돼. 그런데 좀 전에 <정 원한다면>이 사라질 때부터 뭔가 이상했어. 여기가, 여기가 욕조도 아니고 정원에 있는 수영장도 아니잖아. 아 도무지 이해야 안 돼.」
「물만 채워진 게 아니야. 저길 좀 봐봐. 케이블카 타고 사람들이 호수로 올라왔잖아. 뭐야? 모노레일인가 뭔가는 물고기를 위해 설치되어 있었던 거라며? 마크, 이게 어찌된 일이니? 뭐라고 말 좀 해 봐! 하늘을 나는 물고기라네 뭐라네 분명 그랬자나! 어?」 이 말을 듣고 마크가 말한다.
「어. 그랬어. 그건 사실이야. 진실이라구.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했어. 정말이야. 증명할 수 있어. 진짜니까. 그런 사례는 찾아보면 꽤 많다고. 그런데 이건... 이건... 시간이 앞으로 당겨졌다면 몰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말도 안 돼. 저건... 저건... 물고기들이 타야하는 법이라고! 그런데 사람이 왜 타? 물고기, 물고기가 하늘을 날아야 한다고 하늘을!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단, 가방은 예외야. 그러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들은 도저히 이 일을 믿을 수 없고, 낚시고 휴식이고 뭐고 산통 다 깨졌고, 궁금증에 호기심에 울분까지 뒤죽박죽 되어 이렇게 대책을 세웠다. 알렉스의 집에 가서 애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서 조니와 케빈도 모두 모아서 여기에 다시 와 보자, 그렇게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아까 놔둔 가방이 발견되었다. 나무 옆에 놓여있던 가방이 보인다. 그런데 가방이 벌어져 있다. 꽃이 만개한 것과 비교가 될려나? 아니면 사과가 쪼개진 것과? 입을 벌린 하마... 그런 상상은 별로 뭔가 유익하지 않고 아름답지 못하다. 우끼지도 않다. 그리고 보라색 잉크인지 청록색 물감 같은 액체가 바닥에 흔적을 남기고 저쪽 도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거기서 자국은 끊겼다. 그리고 안개라는 기체가 주변을 감쌌다. 분위기 쎄해지고, 기분은 완전 이상해졌다. 그러나 물컹한 그것은 고체처럼 딱딱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어서 알렉스의 작업실에 가서 알콜이 함유된 액체를 섭취하리라 다짐했다. 아무래도 농도가 좀 높은 걸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이걸로 오늘 밤 화제는 충분히 확보되었다. 하룻밤 자고, 에너지를 충전하자. 그 다음 모두 함께 다시 여기 와보기로 하자.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모두 계획했던 데로 어떻게 어떻게 해서 7명의 친구들이 하루가 지나 다시 호수 2에 오게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런데,
「뭐야? 호수 2에 물이 모두 차 있었다며? 지금은 중간 정도 차 있는데? 뭔 소리야? 누가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 봐. 1.물이 차 있었다. 2.물이 빠져 있었다. 3.물이 다시 차 있었다. 그리고 지금 4.물이 중간 정도 차 있다? 이거 맞아? 아 이런 헷갈리는데~ 하나만 할 것이지 누가 자꾸 장난치고 그래? 이거 장난이 좀 심하잖아? 아니면 누가 1~2번은 장난 친 거고, 3~4번은 또 예상치 못한 엄한 소도둑놈이 저지른 건가? 뭐야? 이게? 아니면 모두 그냥 1번인데 어디 길을 잘못 들어서 다른 데를 보고 2번이네 3번이네 헷갈리다가 다시 1번에 왔는데 어? 이거 뭐지? 뭐지? 그런 거 아니니? 이상할 거 없잖아. 그리고 가방도, 신기하다던 그 가방도 저기에 있고. 가방...은 열려있지만 가방은 원래 열라고 있는 거지, 뭐 평생 꽁꽁 닫혀있으라고 만드냐? 그럴려고 팔아? 그럴려고 가방 메이커들이 슬로건을 만들고 광고를 하냐고? 가방 주인, 바뀔 수도 있어. 가방, 비쌀 수도 있어. 가방, 다른 용도로 쓸 수도 있단 말야. 중요한 건 가방이 아니라 사람이야. 가방을 이용하는 사람과 사람의 일, 사람이 즐기는 주사위 놀이, 사람의 인생 내 인생 타인의 생애, 사람의 사랑, 사람이 사는 세상, 세상이 속한 우주라고. 저 가방 옆에 바닥에 무슨 흔적은... 저거 별거 아니야. 어디 과학수사 그런 거 의뢰할까? 그 정도는 아니잖아. 뭐 버튼도 없고. 뭐야? 제대로 보긴 본 거니? 모노레일도 봐봐. 녹 텡텡 슬어서 운행 안 한지 한참 됐겄다. 작동이나 할려나... 안 할 꺼 같은데. 사람이 탈 수도 없겠네. 완전 고물 아니야~ 어디 고물상에서 주서다가 얼렁뚱땅 놔둔거 아니냐? 그런데 저기에 물고기가 탄다고? 물고기가 걸어서 타 아니면 폴짝 뛰어서 타? 물로기가 뭐 토끼냐? 아니면 누가 태워줘? 물로기가 애기냐? 야, 피터 드러커 불러와봐. 톰 피터스든 누구든 있어야겠다. 타임머신 타고 가서 그 양반 초빙해오자. 이런 건 그런 전문가한테 딱 통쾌한 해설을 얻어내야 한다고. 에이~ 뭐야? 장난이었어? 장난 한 거야? 누가 시작했니? 그렇게 재미난 일이 없냐? 삶이 시시해? 그런 거야? 아 나 이런 이 친구들~ 정말 못 말리겠네.」
그들은 말똥말똥, 서로 쳐다보면서 아주 살짝은 미세한 눈물이 그렁그렁, 주렁주렁 맺히는 걸 느꼈다. 증거가 없으니 어떻게 함부로 헛것? 옛일을 누구에게 호소할 수도 없었다.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성큼성큼 가방에게 다가갔다. 흠칫 주저하다가 선뜻 말을 걸진 못하고 가방 외피에 손을 대봤다. 가방의 감촉은 여전했다. 누가 가방을 바꿔치기한 것일까? 덜컥 겁이 나고 냉가슴도 앓았다. 원래 지금 정색해야 마땅한데 이상하게 속마음은 시큰둥했다. 그들이 하루 이틀 너무 성급한 행보를 보인 것일까? 그건 또 딱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모두 진짜 있었던 일이니까. 사철 푸른나무가 노랗게 보이거나 공산품이 살아서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엄살을 피울 수도 없는 일이다. 냉가슴만 앓을 뿐. 아~ 이런... 이거 미치겠네, 그들 가운데 과반수를 밑돌아서 또 종종 그리고 왕왕 과반수를 초과하여 그런 혼잣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가방에게 냉대받고, 행정 착오로 벌어진 모노레일에게 헛것을 봤다며 놀림 받은 꼴이다. 끝짱~, 환상이네 마법이네 미스테리에서 한순간에 몰락했다. 바로 좀스럽다, 로! 말이야 바른 말이지, 처음엔 좋았지만 끝이 이상했다. 대뜸 누구는 개처럼 킁킁거리고, 어중간한 마크는 가슴이 쿵쿵거리고, 누군가는 일기예보와 게임과 골프와 NC와 도시를 떠올리고 있는 것만 같다. 이제 네스호의 괴물이 호수 2의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면 그나마 몰강스럽게 어긋나고 꼬여버린 직접 보고 겪은 사건을 새롭게 윤색하고, 구겨진 체면을 살리는 일이 될까? 녀석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데, 어느 행위예술가가 미쳤다고 선심쓰듯 실측 모형을 이곳에 띄울리는 없다. 꿈 깨는 게 낫다. 여유롭게 희색을 짓기엔 시간이 필요하다. 많이. 흔들의자와 해먹과 칵테일과 추리소설, 휴가, 레트레도 리트리버, 해변 산책을 떠올리는 게 낫다. 또 뭐가 있을까? 우연한 만남, 장비 쇼핑 및 구입, 장비빨, 빼앗긴 타이틀을 되찾기 위한 도전, 뭔 타이틀?, 블로그 업데이트, 사랑의 묘약, 유원지, 공원, 향기로운 추억...... 이런 개념을 떠올리는 것이 조금은 도움이 되리라. 아직은 그들이 제정신으로 회복되기엔 그 이상한 일의 파급력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들은 쉽게 그 정처를 알 수 없는, 뭔가 숨겨진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어떤 징크스나 운명의 회오리를 불러올 듯한 느낌의 가방, 그것의 치명적인 매력을 도저히 쉽게 잊어버릴 수는 없었다. 마치 첫눈에 반한 사랑처럼! 뿌리치고 모른 척 해도 떨쳐지지 않는 미련이었고, 이미 뇌리에 선명히 각인된 유행가 가사였으며, 최소한 그들에게는 작은 웃음거리이자 전설이었고, 연상과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낙엽따라 가버린 애모 같은 존재였다. 그 가방이 좀 더 구체적이고 협소한 단위라고나 할까, 그런 물체나 흔하지 않은 현상이었다면, 가령 어떤 7전8기 끝에 따낸 동메달이나 진짜로 나미래랄지 전진해 또는 백만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과 정말 사귀었다거나, 그랬다면 덜 서운하고 애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필연성은 절묘하게 빗나가고 특이하게 우연히 그것은 하필 가방이었다. 가방. 오, 가방! 아 이럴 수가! 그럼 이제 그 기억은 평생 그들을 따라다니게 생겼구나.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이제 언제 어디서나 가방 하면 아~ 오~ 그래야 할텐데 이제 어떡하나!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그냥 어쩌다 마주쳤을 뿐인데... 별 일 아니었다고 적어도 뚜렷이 판명난 것도 없어서 속이 답답한데, 차라리 할 말이 있지만 용기가 없는 연정을 계속 키워가는 청춘이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나중엔 몰라도 그땐 실제 상황이었고, 심각했었다. 그처럼 사람을 웃게 만들고 설레고 떨리게 만드는 사람은 살면서 거의 만나기가...... 만날 수는 있다. 간혹 만난다. 자주 만날 수도 있다. (속닥속닥) 그러나 그건 뭐랄까 당시 가방이 그들을 주도했다고나 할까? 어떤 신발을 신고 무슨 옷을 입느냐에 의해 삶이 바뀌고 인생이 변화되는 마치 그런 일이 시간을 압축하여 발생한 것만 같았다. 항상 돌아다니고 껀수를 찾고 이성을 쫓아다니면 나중 보통은 아이스크림 가게나 찻집을 경영하게 된다. 대개는 회사원이 된다. 드물게는 코메디언이나 작가가 된다. 마치 그와 같은 썩 불완전한 이론과도 비슷한 일일 것이다. 사람은 두가지 부류가 있다. 클로버 풀밭이 있으면 어떻게든 네잎 클로버를 찾으려는 사람과 그냥 세잎 클로버로 만족하고 그 분위기에 빠져 기분이 좋은 사람. 뭔가 그럴 듯 하지만 독자의 지성은 절대 어설프지 않다. (이러쿵저러쿵)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줄 아는 법. 네잎 클로버를 돈 주고 사서, 누구에게 (보너스용으로) 선물하고, 아니다 난 한마리 토끼가 되어 그 풀을 몽땅 뜯어 먹겠다 어딨어 그 풀밭?, 개 풀 뜯어먹는다는 말 들어봤지 설마 못 들어봤다고는 하지 말아줘 난 내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한그루의 사과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든 오늘 꼭 오늘 한마리 개가 되겠다 멍멍~ 멍멍~, 아 나 이런 아마추어들 그러면서. 사실 옛날에는 예술가가 신분이 높지 않았고, 대우도 좀 뭐했으면 부를 때도 광대라고 지칭했다. 그러면 그들이 지금은 광대가 아니고, 언제나 추앙받고 만인에게 부러움을 사고 한정없이 기쁠까? 그건 아니다. 첫째, 독자는 작가의 머리 꼭대기에 있고 둘째, 광대는 일반인이자 동시에 그냥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광대, 별거 없다. 재야의 고수, 새고샜다. 미네르바, 사람들 핸드폰 전화번호부에 수두룩하게 있다. 그러나, 뭐야 이거, 이미 옛날에 썼던 내용이자나? 광대 맞네 광대 맞아! 그나저나 그 가방에 뭐가 들어있었을까, 도대체 그 가방에? 그리고 누가 그 가방을 열었을까? 왜 그 친구들은 그 가방을 못 열었을까? 못 열어서 아쉬웠나? 자신들이 못 열어서? 그것이 이왕 열릴 꺼면 긴 명대사에 빠졌던 홀딱 빠졌던 그리고 완전 열광했던 우리에게 열릴 것이지 어디 근본도 모르는, 대기도 희뿌연, 정체도 불분명한, 어느 괴한에게 언제 열린 줄도 모르게 열렸다니 그랬다니 어머나, 그랬다나 뭐라나, 열린 가방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안 그랬을 수도 있는데 괜히... 나무 밑에서... 정말 그런 걸까? 앗싸~ 하면서 갖고 싶었던 귀한 물품을 제값 주고 득템했는데 내일 어디에 보니 그게 반의 반값 세일하네, 뭐 그런 건가? 약간 다른 거 같다. 그런데 정말 그건 누구의 가방이었을까? 그걸 더 궁금해하는 게 본질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왜냐하면 하늘을 나는 물고기, 그들에게 날개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녀석들이 어디서 물어다가 빠트린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을 만화경으로 본다고 했을 때 보면서 웃고 지루하다가 심각한 시기와 즐거운 한때를 포함한 전 과정 가운데서도 중요한 시점 같은 것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누구는 하이든의 유명한 트럼펫 협주곡 3악장을 듣고서 평생 외교관으로 살겠노라고 다짐했는데 시험에 계속 낙방하여 그냥 꿈을 포기한 후 외교관 사위를 맞았다거나, 어떤 제복이 멋져보여 나는 무슨 꿈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책상에서 공부를 하는데 의자가 통 마음에 들지 않아 내가 직접 의자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해서 목수가 되었다, 어~ 시네마에 출연하고 TV에 나오니 인기 폭발에 예쁜 여자들이 안아주라고 만나주라고 보고 싶다고 난리네 그러네 늘어선 줄이 지평선 끝으로 보이지가 않아...... 그래서 나는 어느 날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와 같은 일을 뭐라고 하냐면 <계기>라고 한다. 계─기. 비슷한 말로 동기, 까닭, 왜, 욕망, 영문, 구실 또는 그냥, 어쩌다, 우연히, 한번, 슬쩍. 그와 같은 엇비슷한 일이 그들에게 갑자기 생긴 것이다. 가방이라고! 그 때문에 신나는 모험과 새로운 인생이 펼쳐져야 하는데, 그건, 그건 아직이었다. 그럼 시간이 한참 지나서 뭔 일이 있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별 소득이 없었다. 사람 환장하겠네, 아주(아조) 신물이 나는구만~ 라고 하기엔 이르다. 다만 그들은 언제부턴가 가방매니아가 됐다. 가방의 품질을 살피고, 가방의 품질을 살피니까 내 삶의 품질도 살피게 되고, 내 삶의 윤기를 관찰하고 덧칠하니까 옷과 어울리는 가방을 좀 더 세심히 고르게 되고, 그러니까 타인과 어울리는 나와 남의 관계를 생각하고 고민하게 되고, 목적에 맞는 가방을 하나씩 수집하게 되었다. 잊어버린 인생 목표를 수거하고, 잃어버린 꿈을 되찾게 되었다. 책가방, 손가방, 청소가방, 바순 가방, 노트북 가방, 영혼을 위한 가방, 햄버거 식재료 가방, 나가방이란 사람을 찾아서 우연을 가장해 친분을 착실히 쌓아갔으며, 별장도 가방 모양 별장에서 묵었으며, 지인들에게 가방을 하나씩 선물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두뇌 회전이 점점 운동에너지를 발산했다. 그렇다고 지능이 특별히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들고 있는 가방에는 무엇을 들어있을까, 누가 선물했을까, 왜 오늘은 그 가방일까, 날 속일려고 아니면 잘 보일려고, 가방을 들어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들어줄려고 했다가 도둑놈으로 몰리지는 않을까 따귀를 얻어맞지는 않을까 그것도 쌍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면 어떡하란 말이냐, 저기 가는 저 여자의 가방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있을까, 붙잡고 물어보면 실례가 되지는 않을까, 사람을 만나면 처음에 인사를 해야 하는데 자꾸 눈이 가방으로 간다 이거 어쩌면 좋지,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마음은 가방 속에 들어가 있다, 아 미치겠다 미치겠다 미치겠다! 영화를 보면서도 사람이 가방으로 들어가는 소재가 뭘 상징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꿈도 가방에 관한 꿈을 꿨다. 그럼 그렇게 가방에 관한 다큐멘터리 내용을 만드는 삶이 좋아서 계속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응,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 가방 사건은 그냥 심심하게 별 재미없이 끝나는 것일까? 아니다! 썩 자랑스럽지는 않았으나 뭔가 일이 있긴 있었다. 따라서 작으나마 가방 사건 때문에 소기의 성과는 얻었다고, 수확은 했다고, (둘러맞추는 식이지만) 노력의 결실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건, 그 일은 무엇이냐면 그들의 무명 블로그에 생애 두 번째로 공동 작품을 올렸다는 것이다. 부제를 붙이자면, 위대한 탄생? 노노노노노노노, 그것도 아깝다. 그러나 속상했으나, 당혹감을 톡톡히 맛보았으나, 무언가 침통함이랄지 불명예랄지 그런 책에서나 읽을 수 있는 어떤 막막함 그것 뒤에야 드디여 찾아오는 뭔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해방감은 느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이 새로운 공동 창작물, 보잘 것 없지만 같이 만든 협업의 작품을 만드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문에 그들은 신비로운 장막을 걷었을 때 그 다음에 뭐가 있을까, 무지개 너머에 어떤 세계가 존재할까, 투명망토를 입은 뭔가 이름을 붙여서 불러주고 싶은 색다른 환상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착각이라고 느꼈거나, 값싼 환각에 빠지거나, 환시가 바로 이것이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었을지라도 그것도 환상은 환상이었다. 물론 책으로 어서 출판하자는 제의와 인터뷰와 각종 시상식의 초청이 쇄도할 것인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설령 그렇게 될지라도 귀찮네 지겹네 짜증나네 시간 많이 빼앗기네 그런 일말의 불편한 감정이 티끌 만큼은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굳이 그들의 무명 블로그가 새 이름을 붙이고 명성을 얻지 않아도 크게 불만은 없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전망은 썩 좋지 않다. 물론 언제 그런 일이 있었기나 했냐는 듯이 원래 무뚝뚝한 세상은 아무런 관심없이 조용할 수도 있다. 다음은 그들이 블로그에 올린 공동 집필 소설의 전문이다. 일부만 발췌한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누가 뭐래도 어엿한 작가다. 베토벤처럼? 듣고 싶은 얘기만 읽고 싶어서인지는 몰라도, 귀를 막아버렸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챔피언 의무 방어전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선 나름 선방했다고 각자 또 같이 자평하고, 호평하면서 자화자찬의 시간을 보내는 일만 남았다.
<판타지가 지겨우십니까? 그러면 로맨스는요? 만화? 동화? 스릴러? 액션? 아~ 뭘 해도 재미없으시다구요? 그 따분함을 단번에 날려버릴 비책을 알려드릴까요, 말까요? ......>
좋은 예감이란 때로는 영감을 불러오지만 대체로 그것의 신뢰도는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그다지 신통치는 않을 것이다. 퍽? 예감도 예감 나름이니까. 이게 끝인가? 정말, 설마 여기가 결말 공간이고 마지막, 더 넘길 면이 없는 소설의 마지막, 정확히는 챕터의 끝 그 마지막 쪽인가? 오, 그렇다! 뭐라고? 그렇다고! 못 들으셨나, 못 들으신 체 하시는 건가, 못 믿겠다는 건가? 말이 안 나온다. 이런,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