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나는 어느 날 시골생활이 무료해서 볼보 웨건 뒤에 카라반을 연결해서 운전하여 도시로 떠났다.
보통은 일을 열심히 하다 짜릿한 휴가를 맞이하고, 기나긴 또 고독한 청춘 다음에 낭만적 연애에 돌입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살다보면 어쩌다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가 있다. 물론 어이없는 방식으로 재미있는 이야기에 대한 착상이 떠오를 듯한,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근거없는 추측과 그런 막연한 기분에 이끌리는 예감 때문에 창의적인 친구들에게나 어울리는 '머머 해볼까'라는 과감한 역발상과도 비슷한 일상과 함께하는 기대를 즉시 실행에 옮긴 것은 아니었다. 곧 계기가 있었다.
그건 무엇이냐면 이랬다. 집에서 나는 웬 장비병에 걸려 은거하던 중 소설을 쓰랴 책 읽으랴 또 놀기도 해야 하고, 그렇게 막 스무살 젊음처럼 이것저것 뭔가를 하고 싶은 불분명한 욕구와 잔잔한 호기심 때문에 주위가 너무 산만한 듯 해서 나는 어딘가를 막 돌아다니고 싶어졌다. 누구의 이중생활 그것보다 훨씬 혼란스러운 다중적 자아가 서로 전면에 나서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마침 무슨 핸드폰 어플리케이션이 유행이길래 그걸 내려받아서 한번 해봤다.
그리고 나는 바다로 갔다. 왜냐하면 첫째, 이 기분 저 분위기보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야, 바다다!> 그 다음 둘째, 거기서 핸드폰 게임 같은데 나오는 공룡을 잡거나 인어공주를 발견하거나 그것마저 불투명하고 불가능하다면 나도 한번 적당히 순진하고 참한 아무 아가씨나 붙들고 <아가씨 아니 낭자 아름답소, 나의 헌팅을 받아주오!> 라는 약간 저급한 듯 하지만 어느 시대 화술인가 그러면서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게 만들면서 상대방은 하고많은 적절한 인사말 가운데 멀쩡하신 저분은 왜 하필 저렇게 푸르르고 촌스러운 대사를 골랐을까, 막 궁금하게 만드는 아닌 듯 하지만 은근히 신비스러운 최면의 말을 걸고, 여차하면 나도 뺨 한번, 그 고운 가냘픈 부드러운 향기로운 연한 살색의 손바닥으로 나도 뺨 한번 맞아보고 싶어라 라는 그런 충동이 불현듯 몹시 내 마음을 쥐었다 폈다, 들었다 놨다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갔던 바닷가는 쓸쓸한 해변이었고, 날은 무더웠고, 사람들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핸드폰으로 공룡을 한 마리도 못 잡았고, 그러므로 나는 약간 실망했다. 그래서 아주 잠깐 한적하고 고요한 생활에 염증을 느꼈고, 따라서 나는 트레일러를 끌고 도시로 떠난 것이다.
시골 A에서 도시 B에 이르는 동안 신기한 지대 X나 기발한 모험 Y, 우연히 만난 반가운 얼굴 Z는 모두 없었다. 오히려 소셜 네트워크에 보니 경치가 좋고 물도 좋은 쉬어 가기 좋은 어느 찻집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 들렸다. 그런데 정작 그곳에 들리고 나서야 알았다. 사진은 합성됐고, 소문은 과장됐으며, 나의 한숨은 엄살이 아니고 일상이라는 것을. 아마도 나는 일생을 이렇게 살아온 것 같다. 왜 실재 현실과 포장된 예상도는 다르냐면서 전자를 후자처럼 바꿔야겠다면서 변신하겠어, 셋 세면 바뀐다, 탈바꿈시켜 버리겠어 얍~, 이렇게 무모한 장난을 치듯 놀거나 또는 후자를 전자와 똑같이 사실화시킬려다가 무슨 풍경화가 엉망이 되거나 곰의 탈을 쓴 여우가 되버리는 삶을 살아온 듯 했다. 그러나 도시에 가서 문화생활도 하고 사람들 구경도 하며 신나게 놀 생각을 하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각함보다 단순함이 어울릴 때가 있다. 그러나 아마도 별로 신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마음가짐과 행동만 들뜬듯이 꾸미고 있었다. 말이 앞서면 안될 것 같아서.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사진 합성 놀이에 빠지게 됐다. 그에 대한 즐거움은 끝이 없어서 비공개로 남겨둔다.
몸을 풀었으니 이제 슬슬 도시 이야기를 해야 하지만 너무 일찍 리본을 푸는 우는 범하지 않는 게 좋겠다. 선수처럼 보여야 하니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일부러 참고 기다렸다가 받듯이 말이다.
나는 도시에 가서 무엇을 구경하고, 어떤 일을 하고, 새로운 탐색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연습장에 몇 가지를 기록해봤다. 가볍게 핸드폰에 금새 쓰면 간단하지만 일부러 손글씨로 할일을 기록했다. 꼭 기기에 뚝딱 써버리는 게 왠지 매정해서라기 보다는 내가 쓴 그 일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인가 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 위해서였다. 섬세하고 신중하며 꼼꼼하거나 그냥 나처럼 매사 확신이 부족하고 주관이 뚜렷하지 못하며 뭘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러나 잘 들여다 보면 약간 허풍이 생활화된 <미친 토끼 같은 청춘>이라면 하루를 또 인생을 정말 짜임새 있게 살지는 않더라도 가장 중요한 일 세 가지 정도는 꼽아야 한다. 오늘 이거만 하고 놀기, 최근에는 시간 나면 그 생각만 하기, 매일 책 읽기 30분 글쓰기 30분 인터넷 3시간 TV 3시간 또는 인터넷과 TV를 동시에 하기 6시간 마지막으로 그 반대라거나. 이렇게 누구나 정해진 생활이라는 게 있다. 내 하루가 소설 같지 않고, 나의 일주일이 드라마와는 딴판이고, 나의 한달짜리 연애는 영화와는 다르고, 내 사랑은 멜로드라마도 내 인생은 대하 드라마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연습장에 몇 가지 할일을 적은 건 이랬다. 고전음악 음반 파는 곳에 가보기. 극장, 미술관, 동물원, 놀이터, 술집, NC, 사람 많은 곳 그리고 학교, 시장, 병원, 공원, 조용한 주택가 동네, 강변, 괜찮은 드라이브 코스, 전망 좋은 찻집, 서점, 식사는 대충 때우고 그 돈 아껴서 한번에 근사한 식당 잘 찾아서 맞집에도 들리고. 또 생각나면 기록해놓기로 했다. 나중 멀리 다른 관광지에 가더라도 넉넉히 시간을 보내고 싶은 데는 실은 랜드마크나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아니다. 주로 관심을 끄는 곳은 단정한 학교, 한적한 주택가, 천변 산책로, 현지인이 거기 살면서 답답할 때 가끔 찾는 곳, 숨겨진 비경과 함께 하는 찻집이랄지 작업장 같은 장소.
오늘, 어제, 일주일. 최근에 썩 재미난 일은 없었다. 새롭고 흥미롭고 매번 설레고 항상 들뜨는 일만 기대하는 시기도 이젠 지난 것 같다. 물론 때에 따라서 말을 바꿀 수도 있다. 내가 날씨가 바뀌듯 마음이 뒤바뀌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요? 네. 최근 책에서 읽은 것처럼 <......내가 입을 열 때는 개도 짓게 하지 말라> 나는 이런 분과도 아니고, 사춘기와 권태기의 어딘가에서 방황하는 진짜 청춘도 아니며─언제부터 청춘이 진짜와 가짜로 나뉘었나─도시의 멋쟁이들과 상큼한 여대생과 청초한 숙녀들은 안중에도 없어 하는 난 그냥 동네 아저씨다. 때로는 슬픔을 가장하고, 이따금 겸손과 겸연쩍음 사이에서 헷갈려하다가 동시에 근래 갑자기 책을 평소와 달리 너무 많이 읽은 건 아닌가라는 사소한 고민에도 빠지며, 종종 어떤 사안에 대해 좋은 말과 듣기 싫은 말 하나씩 해야 할 땐 험담 먼저 칭찬은 나중, 의 순서를 따르고, 왕왕 아무 이유없이 또 아무도 보지 않는데 뒤통수를 벅벅 긁고, 혼자서 가짜 웃음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며 매사 눈치를 보는 진짜 동네 아저씨 말이다.
②
그러나,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 난 기분이 좋다. 집에서 죽 TV만 봐도 좋다.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동경하는 사랑과 꿈꾸는 낭만은 있다. 나는 뭘 해도 재미있었다. 난 절대 심심하지 않았다. 혼자서도 완전 잘 놀았고 완전 잘 살고 있었다. 글? 완전 잘 써졌다. 무슨 일을 하든 하나도 지겹지 않았고, 하나도 따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이 바꼈다. 전에는 그랬다, 사랑은 없다고. 사랑은 없다? 있다, 사랑은 있다. 단지 너무 흔하고 종류가 많을 뿐이다. 좋은 남자? 왜 없겠나, 있지. 오늘도 좋은 남자를 거리에서 20명, 한 30명쯤 봤고 나쁜 남자는 한 명도 못봤다. 예전에 나는 뭘 해도 안 됐고, 안 될 것 같았지만 지금은 뭘 해도 될 것 같고, 뭘 해도 된다. 만성피로? 그런 거 모르고 산다. 체력이 조금 약하니까 사전에 미리미리 쉬면 된다. 이거 이거 너무 행복한 거 아닌가, 자못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너무 부러움을 한몸에 받아서 미안할 지경이다. 다시 의뭉스러운 눈초리를 받고 싶다. 이러다 뭔가 뜬금없이 (개)망신 당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밑도 끝도 없는 걱정이 내게 노크하는 듯한 미세한 불안감이 없잖아 있다. 그러나 이젠 거의 날개를 달았다. 마음만 먹으면 A에서 B로 순식간에 이동하고, 시간여행조차 쉽게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늘이 날 반기고, 새들이 내게 인사하며, 세상은 아름답고, 뭘 보고 뭘 들어도 웃게 되고, 오늘은 어떤 즐거운 일과 어떤 신나는 모험은 물론 놀라운 영감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라며 막 기대되고 설레며 파릇파릇한 예감에 둘러싸여 마음이 붕붕 떠다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스스로 박수치기, 까지는 하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이래도 될 것 같다. 도시야, 딱 기다려!
그런데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아무래도 과장이 심했다. 많이 심했다. 앞서 호언장담했던 허풍은 실은,
뻥이다! (개)뻥!
멍멍, 멍멍멍!
이상한 소리를 내뱉는 새로운 습관이 내게 생겼다. 도시야, 딱 기다려? 딱 기다리긴 뭘 딱 기다려? 혼자 공상을 하다가 잠깐 기분이 고조되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가 급속도로 냉각되어버렸다. 저런~!
나는 불신과 허위와 거짓의 늪에 빠져버렸다. 허세, 작작 좀 부려라 라는 말을 들어도 싼 거 같다. 그러나 침울하게 그 바닥에서 계속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어쨌든 나는 도시에 도착했다. 도시의 이름은 조롱? 조바심? 아니면 다른 '조'자로 시작하는 단어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장난은 아니다. 그러나 꼭 장난 같다. 왜 그랬냐면 나는 도시의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도시명이 잘 생각나지 않았느냐? 그 실체에 집중하고, 본질을 즐기고, 결과를 추궁해야 한다는 어떤 신념이 잠깐 인지력을 떨어트렸기 때문인 듯 하다. 사람이 맹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맹했다.
일단 나는 적당한 위치에 카라반을 세워놓고 글을 조금 쓸려고 했다. 하지만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어디서 휴식하기, 어디서 쇼핑하기, 낯선 도시에서 우리집을 만나다 라는 어느 기억에 남는 문장에 이끌려서 적당한 가정집으로 숙소를 어떻게 선정하고 그곳으로 갔다.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가까웠고, 평범한 주택가였다. 집주인은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기 때문에 난 그를 만나 열쇠를 받고 간단한 설명을 듣고 인사를 나눌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집 앞에서 집주인과 내가 만나는 일은 그렇게 평범하지가 않았다.
집주인 양반은 날 보자마자 기겁을 하며 쓰러졌다. 30년 전 집을 나간 자신의 남편과 내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내가 자기 남편인줄 알았다고 했다. 영화에나 나오듯이 주인공이 어딘가로 놀러갔다가 벌어지는 사건의 경우의 수 두 가지. 첫째, 며칠 후 누군가 훌쩍 나이든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둘째, 몇 십년이 흐른 후 누군가가 옛날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는 내용. 그 가운데 정확히 두번째 일이 실현된 것인가 의아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분은 날 자세히 보니 코 살짝 밑 입술 끝 부분에 점이 없고, 다리를 절지 않으며, 사소한 습관들과 예법과 화술과 목소리가 틀려서 그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아내는 데는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괜히 긴가민가한 소란을 가지고 영화 한 편 찍을 필요없이 단념했던 마음이 복잡해지지 않게 불가사의한 감정은 그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로 차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집주인은 그 집을 당분간 내게 인계하고 여행을 떠났다.
난 이 일을 가지고 소설을 써볼까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단념했다. 그런 후 난 짐을 풀고 그 마을에 정착해서 창작 생활을 시작했다. 글쓰기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별일 없을 게 뻔하지만 신선한 또 하나의 목적인 도시탐험과 함께.
③
묘하게 행운이 겹쳐서─그런데 한꺼번에 맞이한 반가운 행복은 도대체 무엇과 무엇과 무엇인가, 기분만?─득의양양하는 가운데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공책을 펼쳤다. 우연히 얻게된 소박한 남의 가정집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오랫만에 하이든의 교향곡을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역시나 글은 안 써졌다. 그래서 최근 즐겨 애용하는 방법인 타인의 삶 훔쳐보기를 시도했다. 예닐곱 명의 소셜 네트워크를 노트북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한 명. 참 깐깐하고 호탕하며 말 잘하고 시원시원한, 물론 인성이 반듯한 어느 멋진 남자의 트위터를 구경했다. 대체로 원 그래프, 막대 그래프, 엑셀 파일로 삐리리리 삐리리리 삐리리리 그의 스타일이 분석되기 시작했다. 동사 빈도 분석하고 뭘 좋아하는가, 내가 여자라면 이 남자에게 관심과 호감 또는 최저점을 면하는 친절을 베풀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며 따지고 가늠했다. 마치 남자들이 속된 말로 이빨까면서 이 여자 어때, 얘는 성질 있겠다, 이런 애들이 도도한 척 하면서 은근 홀딱 빠지는데 나중 피곤해, 내 스타일은 아니야, 얘는 생각이 없겠다 하지만 놀기는 좋아 어느 때까지, 막 그러면서 노는 것처럼. 그가 쓴 글은 거의 전부 그런 식이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든다, 싫다, 좋다, 수준이 떨어진다, 한참 모자란다, 그게 뭐냐 대체 뭐냐, 비교 많이 된다, 정도껏 천박해라, 뭐가 이상하다, 뭐를 작작 좀 해라, 아직도 그 모양이냐, 이해가 안 된다, 이해를 못 하겠다, 또 맞춤법은 그게 뭐냐, 생각은 하고 사냐, 그러고 싶냐, 뭐가 고통스럽다, 제발 뭐를 하지 말아달라, 웃겨서 말도 안 나온다, 그게 말이 되냐, 뭐뭐 하고 싶다 등등등.
나도 그분과 비슷하게 간출여 말하자면 이분 완전 남자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친해지면 좋은데 아니라면 돌아서면, 돌아서자마자 욕을 얻어먹을 것 같다. 한가득! 그래 봐야 들리지도 않을 텐데, 또 1개국어나 외국어로 대충 알아들어도 별로 상관없지만. 난 그 이상 좋아했고 반틈 날 좋아했던 직장 동료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누구, 만나지 마세요!> 정말 돌아서서 언제 친했냐는 듯이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는데 난 뒤통수를 맞았는지도 몰랐던 일이 있었다. 말발이 중간만 가도 공공연히 또는 대놓고 슥 들어오는데, 다시 볼 일 없다? 말 다 한 거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내가 이래서 1등을 하기가 싫다. 1등 하기가 겁나지만 동시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다. 그래서 피장파장인 거다. 그러더라도 난 순위권에서 멀어지고 싶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미 또는 나이들면서 알게 된다. 무엇을? 욕을 바가지로 얻어들으면 싫을 줄 알았는데 또 그렇지도 않드라 라는 것을. 그래서 그 때문에 그렇게 습관적으로 하고 또 듣는 것일까? 그건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사람의 행동 방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목말라 하는 증상을 겪을 수도 있다. 아무튼 속으로 뭔 생각을 하는 줄 알아야지, 그래서야 어디 잘난 척 하겠냐고! 차라리 가식이 낫다. 말 잘 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기가 막히게 말을 잘하는 논객의 단문을 인터넷으로 자주 접해도, 옆에 있어도, 친구였어도 피곤할 것이다. 절반은 예상이다. 물론 말랑말랑하면 전문가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도 힘들고 마감일엔 쫓기지 기쁜 일은 쉬 잊히고 흥미로운 우연은 찾아오지 않지 실제 그저 그런 일들이 대부분이라서 진면목을 드러내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럴 테지만! 그 때문에 그분과 친해지면 나중 난 또 그럴 것이다. 묵시적으로. 오오 사람 참 괜찮네 호인이네 어쩌네. 한마디로 그분은 내 친구들과 내가 알았던 남자들과 완전 똑같다. 내 친구들은 남자다. 남자는 다 똑같다? 아니면 그분은 여자다? 도대체 결론은 뭐냐? 그게 아니라 사람은 사후해석 편파에 취약하구나, 가 결론이다. 그래서 전문가는 뻔한 실험을 하고, 예측 가능한 식상함을 재차 연구한다고 한다. 그래서.
멍멍, 멍멍멍. 멍멍멍!
소설 구상은 하지 않고 괜한 공염불만 성대하게 퍼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따라서 나는 바깥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정신줄을 놓으시면 안됩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된다구요>라는 말을 들을지라도 난 밖으로 나가기로 작정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나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찻집을 발견했다. (또 이상한 이름의 찻집? 와, 기가 막혀!) 그걸 보고서 난 이렇게 생각했을까? 오 특별하다, 변별력을 갖춘 듯 하다, 저기에 들리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까 그럴까, 은밀한 반전과 막후에 놀랄만한 속임수는 없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그냥 걷어차버렸다. 왜냐하면 그래 봤자 별일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다 알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런 거 없다. 절대 없다. 툭하면 신기한 미스테리, 그런 허황된 공상은 갖다버린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나는 필름 사진 느낌이 나는 어느 술집에 들어가보고 싶은 욕구를 물리치고 어느 벽보 광고를 보고서 동네 공원에서 하는 무료 영화 상영회를 찾아갔다.
그곳에 도착했다. 아차, 날짜를 보지 않고 왔다. 아무 것도 없었다. 실망감은 툭툭 털고 저기 보이는 풋살 경기장에서 공손한 표정과 우람한 신체를 겸비한 청년이 혼자 연습하고 있길래 운동이나 할까 하면서 나는 그에게 한 게임 어떠냐고 친한 척 말을 걸어보았다. 그는 마침 잘 됐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러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내기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고 우리가 돈내기를 하기엔 너무 순진하고 착실한 것 같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는 내 말에 수긍을 한 후 그럼 이건 어떠냐고 했다. 승부차기를 상품으로 걸자고. 경기를 이긴 사람이 승부차기에서 공을 차는 역할을 맡고, 진 사람은 골키퍼. 단! 골키퍼는 돌아서서 가만히 서 있기. 나는 OK, 했다. 아마도 거절하는 게 옳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땐 몰랐다.
그날 나는 뒤통수를 원없이 얻어맞고 집에 돌아왔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히 그 부위가 부어오르고 화끈거렸으며 또 당시 화를 낼 수도 없었고, 더군다나 그 녀석은 말을 꽤 잘했다. 내 기분을 풀었다가 약을 올렸다가 다시 날 제자리에 뜸어다 놓아주었다. 사뿐사뿐 두둥실 내 마음에 무게가 있는 듯 여겨졌다. 그는 선수였던 거 같다. 말로든 풋살로든. 그 다음날 난 그를 만나러 다시 그 풋살 경기장에 찾아갔다. 물론 집에서 몇 시간 시청각 학습을 하고, 몇 시간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붙었지만, 설마 그 친구가 내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도 오공본드처럼 내게 착~ 쩍 달라붙었다. 그러나 쉼 없이 재담을 풀면서 형이 괜찮은 술집에서 근사한 술을 대접하며 극진히 접대하겠다고 하면 녀석이 냉혹하게 거절하진 못할 것이라고 상상하니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 그는 없었다. 오후에 다시 찾아갔다. 하지만 그의 흔적은 눈 씻고 봐도 없었고 종적은 묘연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라는 한심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가정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길을 떠났다.
가만 보면 세상에는 정당한 게임의 배당 방식에 따라 다른 사람이 뒤통수를 엄청나게 얻어맞았다고 하면 그걸 꽤나 웃기다고, 재밌다고, 뭐 지루하진 않다며 고소한 기분을 잘 숨기지 못하는 순박한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러한가, 가 궁금해서 나는 사회심리학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메모장에 기록해뒀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승부차기에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장면은 TV도, 인터넷도, 신문도, 잡지도 그 어디에도 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에는 나왔다. 징징댈 일도 아니고 능욕을 당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그만 넘어가자.
멍멍, 멍멍멍. 멍멍멍!
④
그래서 나는 차를 몰고 공원 2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도 소셜 네트워크를 보다가 어느 광고를 봤다. 기막힌 내용이었다. 이론대로라면. 완전 횡재였다. 대출 광고였는데 금리가 연 마이너스 12퍼센트였다. 내가 거기서 100만원을 빌리면 1년 이자로 매해 꼬박꼬박 나는 12만원씩을 복리는 따로 챙겨서 받고 10년 후에 다시 기준 금리와 화폐 가치 감소를 감안하여 내가 과거 100만원에 상응하는 액수를 받는다는 원리였다. 그대로라면 전재산을 거는 게 맞다. 그게 옳다. 정확한 승부수의 적기다. 그러나 좋긴 좋은데 이건 미친 짓이다. 걸려들면 안 된다. 귀가 팔랑팔랑 날개짓을 할 때가 있고 안 할 때가 있지. 딱 봐도 사기다. 미끼만 떼먹기도 아깝다. 그냥 무시하는 게 현명한 거다. 그러나! 그런데 저런! 만약 숫자를 낮추면, 그래도 못미더워. 또 낮추면... 또 다시 낮추면... 변심한 애인에게 버림받은 여자의 마음? 더 꾸미고 포장하면... 그건 말이죠~ 남의 말을 잘 믿는 아버지, 눌변의 아버지, 어수룩한 아버지, 착한 아버지 무엇보다 가난한 아버지가 떠오른다. 양반 증조할아버지와 난봉꾼 할아버지는 만류하고, TV리모콘도 만화 주인공 성우 목소리도, 유치원 학예회까지 연관짓지는 말자.
그러다 나는 공원에서 어떤 젊은 아가씨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난 그들과 함께 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뭔 얘기를 하나 주의깊게 귀를 쫑긋 세우며 바짝 긴장하지도 않았다. 그냥 들리는 걸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싸구려 팁 받는 것도 지겹고, 사람들이 나한테 '저기요'라고 부르는 것도 지겨워.」
...(침묵)...(시시콜콜한 얘기들)...
「나 쟤 싫어.」
「난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아 싫다구.」
「니 친구잖아?」
「말은 바로 해. 니 14년지기친구잖아.」
「미안. 넌 20년지기 친구지?」
「미쳤어? 그 정도로 친하진 않어.」
「망할 년.」
나는 그와 같은 대화를 듣고 이렇게 생각했다. 저 친구들은 나와 정반대의 부류구나. 저네들은 시를 읽지 않는다. 나는 읽는다. 저분들은 고품격 소설을 읽지 않는다. 난 읽는다. 저분들은 가만 들어보니 그런 말들을 많이 한다. 질렸어, 지겨워, 짜증나, 삐─, 재미없어, 지긋지긋해. 난 그렇지 않다. 뭘 해도 새롭다. 예감이 좋다. 기분도 좋다. 설렌다. 떨린다. 기대된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뭘 해도 재미있다. 혼자인 게 좋다. 사랑을 믿는다. 사랑은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생긴 듯 하다. 글도 잘 써질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배울 용의가 있고, 제값을 지불하고 과일을 사기보다 사과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기다릴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이라고나 할까 그런 싱그러운 심성도 절로 생겼다. 내일 당장 감나무든 오렌지나무든 그 그늘 밑에서 드러누워 입을 벌리고 기다려볼 테다. 졸다가 눈탱이를 얻어맞을 수도 있으니 졸음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자신감이 팽배했다. 그 어떤 여자라도 내가 꼬시면 다 10분이면 넘어올 거라고.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그냥 해괴한 공상이었고 미친 몽상이었으며 과대망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과점으로 달려가서 케익을 샀다.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나 혼자 먹기 위하여. 냠냠 냠냠냠! 둘째, 누군가의 얼굴에...... 음...... 그것. 둘째 목표에 대한 당사자는 아직 없고 앞으로도 지원자가 선뜻 나설 것 같지는 않지만 헛된 기대감이라도 내 옆구리에 착 붙여서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물론 둘째는 감상과 품평을 뜻한다, 뭘 생각하셨나 정말 뭘 기대하셨나? 나는 꽤 예전부터 케익을 먹고 싶었고 케익을 낭비하고 싶었다. 그러나 실행을 못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끽해야 케익 하나 값 뿐이 들지 않는데. 그렇게 나 혼자 공원에서 케익을 먹으면서 어떤 뜻 모를 억지랄까 역 태도 지지를 연상시키는 듯한 고집 때문에 음료는 절대 마시면 안 될 듯한 뭔가 거역할 수 없는 미신, 권위적인 징크스를 예측했고, 따라서 나는 케익을 우걱우걱 우걱우걱 개처럼 먹으면서 돌아이처럼 켁켁거렸고 애초에 내가 도시에 뭐 하러 왔나를 생각했다. 나는 친구도 없나? 나는 할일도 없나? 어디 어디 가봐야지 라며 연습장에 뭘 적은 게 생각났지만 계획대로 인생은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난 어느 이상한 이름이 붙은 술집에 들려 은근 분위기 있는 마담과 농담 따먹기를 해볼까 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대화의 흐름 있지 않나. 오빤 뭐 하는 사람이에요? 나? 뭐 하는 사람 같아 보여? 그러나 그런 뭘 해볼까 라는 충동은 금새 수줍은 미소처럼 사라져버렸다. 내가 뭐 여자에 환장한 놈도 아니고, 군침 흘리는 동네 똥개도 아니고. 잘 없어졌다 헛생각. 자아 1과 자아 2가 의논할 만한 호사도 아니었고, 실현시켰을 때 나중 그걸 논평할 만큼 간직될 기억도 못됐으며, 내가 그 일을 행동으로 옮겨서 과연 나는 남자다 라는 걸 증명해야 할 논거는 더없이 빈약했으니 잘 집어치웠다.
멍멍, 멍멍멍! 멍멍멍?
⑤
장소가 바꼈다. 이곳은 술집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가까운 곳을 택해서 들어가 나는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술집 이름은 이랬다. <까불지마라!> 나는 바로 옆에 있던 클럽 <날 좀 봐주세요>와 까불...머라머라 사이에서 어디로 갈까 약간 고민하긴 했다. 나도 안다. 뭐가 신물이 나네 어쩌네 해도 세상 물정 모르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고 난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을. 넌 나쁜 길로 빠지면 안 돼, 어른들만 즐기는 악습과 청소년에게 권장할 만하지 못한 기호, 그건 일종의 전-여자친구로부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받는 청첩장 같은 거다. 그녀가 정말 멋진 남자를 만났다더라 라는 누군가가 남긴 뒷말을 어디서 들었다면 그래 안심이야─다행이군─잘 됐어─이제야 마음이 놓이네─내 그럴 줄 알았어, 바로 그것이 모범이고 멋진 남아의 요량이며 뒷모습이지만 뭔가 가장무도회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개운치 못한 어떤 재채기 하기 직전의 궁금한 아로새김 같은 게 남는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마담에게 최근에 읽은 글을 외워서 내가 고안해낸 착안인 듯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폈다가, 손바닥을 올렸다가 평행으로 마주했다가 또 두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훓었다가 마지막에는 한 손으로 주먹을 쥐는 모양에서 갑자기 손을 반듯이 쫙, 팍 피면서 이렇게 말했다. 막 억지로 달달 외운건 아니지만 문득 생각이 났다.
「아, 누가 디자인 했는지는 몰라도 렘브란트랄지 화가 카라바조가 빛을 소중하게 여겼듯이 이곳은 바깥의 밝음을 세속적인 어둠과 대비시켜 <까불지마라!>의 명암 배분은 빛이 심리적 통찰의 한 형태라는 사색이 불현듯 자신에게 엄습하게 만드는군요.」
「렘브... 뭐요? 아니 카사노바? 도대체 그게... 뭔 소리에요?」
나는 분위기 있는 카페의 외관에 속았고, 마담이 내게 썩 호의적이지 않다고 그렇게 쉽게 속단하거나 안타깝게 포기하기는 싫었다. 왜냐하면 이미 고상한 대화는 시작됐기 때문이다. 일방적일지라도. 뜬금없지만. 허사로 끝날 것이라고 예견하며 걱정을 미리 떠안았다면 아예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아, 아무 얘기도 아니에요. 그렇다고 제가 당신께 어쩜 그렇게 정확히 술집 마담처럼 생기셨어요? 이렇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안 그래요? 아첨과 미사여구는 아직 자기 차례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답니다. 똑똑한 녀석들. 맹렬하게 서먹서먹 오랫동안 서먹서먹할 때 불쑥 튀어나와서 그 극렬한 대비감 그것의 이익을 누구에게 선사하겠다는 건지 참 그분도 어지간히 무심하시지.」
그녀는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남의 글을 나의 말인 듯 마담을 희롱하는 것도 아니고 칭찬이라 하기에도 뭔가 어딘지 느낌이 세한 듯 그렇지 않은 듯 약간 넘어올 뻔 말 뻔한 말을 꺼냈다. 당시엔 몰랐다. 그 때문에 멱살을 잡히지 않았으면 다행인 것을. 급하게 옆 가게에서 일하는 무술 유단자이자 남자 중의 남자를 마담이 호출했으면 어떡하나, 어떡하긴 어떡하나, 말을 엄청나게 많이 해서 겨우 오해를 풀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담은 기질상 금욕적인 사람인가요? 허영심 많은 사람이 소유욕이 강하듯이 당신께서는 우아한 자기 고문에 대하여 욕심이 많은 여자로 보인답니다. 그러면 전 이곳으로 사랑의 도피를 떠나온 사람일까요? 맞춰보세요. 싫어도 한 표 던저보는 것도 나쁘진 않답니다. 하하하, 호기심을 이끌어내지도 못하고, 궁금함을 충족시키지도 못했으며, 기대감과 낭만적인 예감은 저기 저 탁자 밑으로 떨어져버렸군요. 추풍낙엽처럼요. 바로 마지막 잎새와 같이.」
그녀는 아무래도 본색을 드러내기 싫은 눈치였다. 부자연스러운 낭독에 대한 결과는 즉시 측정 가능했다. 뭘 기대하겠나? 옛날에 내가 읽은 연애 교본은 모두 엉터리였고, 난 어쩌다가 이성에게 이상한 말 걸기를 실천하고 있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면 돌이 되버릴 듯한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혹시... 대학교수세요?」
「그렇게... 보이나요?」 어쩜 이럴 수가. TV를 너무 많이 봤다.
「아니요.」 뭐가 아니란 거야? 그럼 그건 왜 물어봤어?
「행여... 여자친구분께서 너무 영특한 게 아닌가, 그런 측은한 마음이 나도 모르게 똑똑똑 제게 노크하는 걸 느끼네요. 너무 속상해하진 마세요. 제가 보기에 그대는 딱 대인배처럼 보이는 걸요. 그럼요. 제 말을 외면하진 마세요. 이래 봬도 저도 사람을 조금 볼 줄 안답니다. 호색한 보다는 그게 낫잖아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훨씬, 백배 낫죠. 그럼요. 어느덧 하루가 다 가고 있군요. 그런데 어째 아까부터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제가 <까불지마라!>의 손님 같고, 당신이 꼭 이곳의 마담 같아요. 어때요, 생각있어요? 우리, 바꿀까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난 괜찮을 거 같은데.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약간 그 뭐랄까 골상학적으로 마담의 전형적인 관상과 학습된 인상을 쏙 빼닮으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알쏭달쏭하군요. 어때요? 제 입담은 뭉크식인가요? 그렇다고 델로니어스 몽크의 팬들을 모독할 생각은 전혀 없답니다. 어때요? 심리적 통찰이 너무 노골적으로 노출된 건가요? 아니면 렘파든지 렘브란튼지 옛날 사람 이름 몇몇을 거들어서 설명할까요?」
뭐? 몽크식? 몽크야 뭉크야? 이 여자가 보자 보자 하니까 아까부터...... 난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사납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웬 이상한 술집에 들어와서 놀림이나 당하고 술값은 술값대로 깨지고, 시간도 낭비하고, 게다가 마음에 썩 들지도 않는 마담에게 뭔가 계산과 숨겨진 속셈을 드러내고 싶어지면서 또 사전에 그녀는 멋질꺼라는 그녀를 꼬실꺼라고 예견하며 홀연히 떠난 그분마저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술값을 지불하고 그곳에서 나왔다. 얼른 내빼버린 것이다.
⑥
나는 불현듯 내가 이 도시에 왜 왔는가 라는 철학적 의문을 느꼈다. 누가 거기 가서 세상 구경을 하고 오너라 하고 날 떠밀었나? 아니면 그냥 대충 시간만 삐대고 오라 세월만 대충 때우고 오라고 연막이라도 펼치고 내게 바람을 불어넣었나? 지금 와서 그게 왜 중요한가? 난 지금 뭔가 허전함을 느끼나? 응 그렇다. 외로움과 쓸쓸함은 도처에 깔려있다. 그게 도시다. 회색빛 도시. 인생이란 것도 원래 그렇다. 왜 안 그렇겠나? 그러나 여긴 우범지대가 아니다. 난 뭘 해도 된다. 보통 이렇게 기분 좋게, 가 아니라 좀 언짢게 마음이 붕 뜰때는 동기부여를 잘 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1) 재미있냐 재미없냐
2) 뭘 하고 싶은가 그걸 모르겠다면 적어도 틈틈히 그리고 열심히 하는 건 뭔가 혼자 있을 때 생각나는 건 뭔가
3) (귀결되는 건 이거다) 안 해 본 건 뭔가?
인간의 번뇌든 남자의 고독이든 외지인의 모험이든 나아가, 청춘과 노인의 수다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의 무의미한 본분이든 내 욕구를 누가 사주하든 말든 어쨌든 난 딱 하나, 오직 딱 하나, 부디 딱 하나, 무조건 딱 하나, 정녕 단 하나의 새로운 일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자코 있다가 소설의 소재는 도망가고, 거북이를 이길 수 있는 너끈한 실력은 탱탱 녹슬며, 열정은 외면받고 희망은 캄캄해지고 어느덧 시간은 덧없이 흘러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단 하나의 할일이랄까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을 실행한 후에 다시 시골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기실 나는 그분들과 동류는 아니지만 이젠 결국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⑦
그 하나의 분명한 명제는 무엇일까?
지금 이 도시의 상태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고, 때문에 그 이유가 대체 뭔가 들어나보자 라는 궁금함을 잠깐만 살며시 잠시만 부드럽게 미루자. 덥다, 자유롭다, 평온하다, 시끄럽다, 활기차다, 그저 그렇다 같은 간략하거나 다른 많은 설명이 있겠지만 홀연히 단 한 사람만 언제까지나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맹세와 그런 울먹이는 선언과도 같은, 지난 고백을 떠올리면 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난 커피포트가 된다는 체념과도 비슷한 숙명과도 같은 마음가짐으로 딱 하나만 딱 하나만 꼽자면, 그건 <왜?>이다.
뭐가 왜냐고? 왜 도시가 이렇게 텅 빈 것 같지? 왜 이렇게 도시가 조용한 거야?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거야? 자기들끼리 짰나? 외부인에게 노출되지 않기로? 아니면 영화 찍나?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그 사람만 피하자?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무엇 때문에 도시가 이렇게 고요하고 인적이 드문지 알 수 없지만, 그 때문에 나는 그 어떤 급박함에 근거를 두고 난데없이 튀어나온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도저히 규정할 수 없는 최우선 순위의 할일, 약속, 의무, 필수 코스와 같은 어떤 정성어린 절차이자 단 하나의 애도하며 경건히 행동해야만 하는, 그런 반드시 꼭 내가 해야만 하는 딱 하나의 과제가 떠올랐다. 그 추론은 쉽게 파악할 수 없다. 과연 그것의 임무는 타당한가 당사자는 피실험자로서 적절한가, 에 대한 검토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럴 계제가 아니었다. 이타성과 호혜주의도 좋지만 그것과 하등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건 마치 추리소설이라는 단어와 비슷하다. 추리소설? 추리와 추론과 추측은 살짝 걸쳐진 공통 영역이 존재하나 명백히 구분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추리하면서 이야기에 빠지고 글을 읽는다? 그건 틀렸다. 완전 틀렸다. 완곡히 말해서, 틀렸다. 솔직한 독자의 심정은 이와 같다. 재밌거나 말거나! 영화를 보며 앞뒤 따지고 왜 그랬을까 꼼꼼히 살피기는 사실 어렵다. 그냥 본다. 날 최면걸어주세요, 감동도 주시구요, 웃겨주세요, 의미도 있어야겠죠 단순하면 곤란하구요, 잘 아시잖아요, 어쩜 우리 남편과 그리도 똑같으세요, 저기 저 고상한 몸짓을 선보이는 여자분 완~전 내 마누라랑 판박이군, 자 한번 시작해보세요, 전 사랑을 모르는 가냘픈 소녀랍니다, 이게 바로 이게 감상자의 기본 입장이다. 그런데 추리소설? 추측소설이 더 정확한 명칭이다. 그런데 이 얘기가 지금 왜 나왔지? 무슨 상관이야! 그럴 수도 있지.
어차피 이 도시에서 나는 이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없다. 그건 온전히 글러 먹은 일이다. 그 말은 뭘까? 이거다.
「기쁜 소식과 더 기쁜 소식이 있어. 어떤 거부터 들을래?」
좋은 소식과 슬픈 소식이 있어, 둘 중 하나를 고르라 또는 골라 골라 골라잡어 아니면 그냥 무분별하게 <그래, 넌 웃는 게 예뻐!> 틈만나면 긍정, 그것도 아니면 뭐든지 싫다 싫어 저건 뭐야 그건 뭐야 에잇 에~잇!
평범함과 계획과 짜임새 있는 전개, 환상과 사실적 마술주의, 마술적 사실주의 등등 모두 집어치우고 내가 선정한 딱 하나의 할일은 이거였다.
설명. 분위기 조성?
이 도시에 있는 대공원에 가면 분수대가 있다. 오줌 누는 날개 달린 천사도 있고, 오줌 누지 않는 날개 잃은 그녀도 있다. 얕은 물이 굉장히 넓은 공간에 펼쳐져 있다. 고전적인 분수도 있고 현대적인 정원도 있다. 사람들도 많다. 물고기도 산다. 헤엄치는 보석으로 불리는 비단 잉어, 우아한 고니, 세련된 노란색 오리, 주홍빛 물고기와 하얀 물로기 그리고 황금빛 물고기. 알록달록 갖가지 예쁜 색깔의 인어공주들. 그런데, 그런데 사람들 모두 휴가를 떠났는지 그곳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 대신 누가 버렸는지 몰라도 병 뚜껑은 허천나게 즐비했다. 그 때문에 나는 하나의 직무, 단 하나의 맡아야 할, 다른 사람은 모두 아니고 꼭 내가 맡아야 할, 단 하나의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하나의 할일이란 게 대체 뭐길래 아직도 안 나오는 건가, 참~나!
첫째, 저번 주에 우리의 무명 블로그에 올라온 조니가 쓴 소설을 읽었는데, 거기에 상점을 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 개업 행사 추첨식에서 1등 당첨을 애타게 기다리는 주인공이 나온다. 그의 행동을 보고 나는 신비로운 슈퍼맨의 비밀스런 활동에 대한 알 수 없는 인생을 관철하는 절대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느꼈다. 그래서 그건 나의 귀감을 샀고, 나도 그와 비슷한 일을 해야겠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선망감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둘째, 친구에게던가 어딘가에서 들었다. 그런 공원에 가서 보면 꼭 이상한 아저씨들이 있는데 매우 드물게 그런 데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또 애들이라면 몰라도 다 큰 아저씨가 정신줄을 놨는지 어쨌는지 꼭 그런 데 들어가서 타인이 소원을 빌면서 던졌던 동전을 몰래 또는 보란듯이 수거해가는 돌아이, 있다. 첫째는 '왜'고, 둘째는 '누구'랄지 현상수배쯤 되겠군. 어쨌든, 좌우지간!
난 그들을 막아야 한다. (드디여 나왔다, 할일!) 난 극소수 이상한 인간의 그와 같은 어이없는 실책을 미리 방지해야 한다. 이를 두고 해외토픽이라 할 수는 없다. 또는 뭐 바보선언,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다. 바보선언, 괜찮네. 그러나 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책임감을 느꼈고, 그 행동을 실행하고자 하는 제 2, 제 3, 제 7의 자아가 내 전면에 나설려다가 끌려나가고 다시 제 8의 자아가 대두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문구점에서 장난감 삼지창을 샀다. 중고품이 아니라 새 제품을 샀다. 짱짱하고 깡깡하고 튼튼한 걸로. 그러나 심미적으로 썩 모자라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조금 더 단가가 있는 물건을 취급하는 상점에서 가방을 샀다. 그 가방은 보통 가방이 아니다. 무게 1KG을 살짝 넘는다. 접혀진 가방을 펴면 고무 보트가 된다. 시중에서 절찬리에 시판되고 있는 물건이다.
그날 난 그 고무 보트를 타고 대공원에 가서 분수대를 수호했다. 그리고 그날 오묘한 일 하나와 애석한 일 하나가 발생했다.
오묘한 일은 이것을 뜻했다. 하늘을 나는 물수리의 사진이 그날 소셜 네트워크에 널리 퍼졌다. 하늘을 나는 물수리의 발에는 잉어가 매달려있었다. 즉 남자들이 잠깐 일시적으로 혹하는,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즐겨 보던 만화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그러한 주제를 연상케 하는 장면을 누군가 휴가 떠나지 못한 일중독에 빠진 어느 블로거가 포착한 것이다. 둘째! 애석한 일은 이것을 말한다. 그때 하늘을 나는 비둘기가 있었고, 나는 분수대에서 고무 보트를 타며 삼지창을 들고 수상한 괴물이나 진짜 좀비가 나타나지 않나 하면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자가 후자의 머리 위에 뭘 떨어트렸다는 것이다. 뭔가 척척한 물체. 대관절 그건 뭘까? 연애 엽서? 행운의 편지?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이 편지를 포함해서 7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 주셔야 합니다...... 며칠 뒤에 복권이 당첨되어 20억을 받았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은 행운이 깃들 것입니다... 7년의 행운을 빌면서.....) 난 머리 위에 뭔 설탕물인지 생명수인지 솜사탕인지 대체 뭐가 튀었나 하며 만져봤고, 그 느낌을 헤아려보고 나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십중팔구, 이런 젠장~ 뭐야 이거 아 나 증말 미치겠네 뭐시여, 같은 감탄사를 예상할 수 있겠지만 때때로 예상은 빗나가기 마련이다. 예측은 어긋나기 쉬우니까 예견에도 기댔다가 추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거기서 빗나가면, 엇나가면 예언이 된다. 미스테리는 바로 그렇게 탄생한다.
「오! 그분인가? 누군가 천재선언을 하셨구나! 아아!」
어쩌면 그분이 맞을 것이고, 아마도 그것은 천재선언이었을 것이다.
혹시라도 아니길 바란다는 냉담한 상상은, 더더욱 썩은 미소는 거두어주시길. 망측함은 이미 이쪽에서 떠안았으니까! (뭔 말 같지도 않은 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