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날 나는 오늘의 운세가 궁금해졌다. 왜냐하면 꿈에서 월척을 낚았기 때문이다. 돼지꿈을 꾼다거나 운수대통을 의미하는 어떤 상징물이 꿈에 나오거나 여러가지 길몽의 종류가 있겠으나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 가능함과 꿈의 중간 그 어설픈 줄타기의 교묘한 뭔지 모르는 설득이 되고 납득이 되는 사실 같으면서 꿈 같은 그런 꿈 때문에 그건 내게 상당히 운세가 궁금해질만한 타당성을 지닌 꿈이었다. 물론 나는 꼭 오늘에 관한 운세만 궁금한 것이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꿈 해몽도 수정구 점도 동물점도 포함하여 전반적인 그 업계의 재담을 듣고 싶다는 한가지 미약한 욕구를 느낀 것 같다.
사실 꿈에서 봤던 물고기는 거의 고래만 했는데 고래는 아니었고, 꿈의 내용도 거의 드라마 48부작 수준이라서 기억이 엉켜버렸지만 그 내용 가운데 온갖 길흉화복과 흥망성쇄를 빼고 딱 하나의 무언가 의미를 찾는다면 그건 결코 흔치 않은 대망을 낚는 경험이었다. 살면서 누구나 흔치는 않아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어떤 꿈을 꾸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즉시 밖으로 나가서 복권을 사라 라는 격언. 꿈에서 깨자마자 나가야 하는데 화장실에 들렸다 나갔기 때문에 자기는 제일 꼴찌에서 두세 번째에 당첨된 적이 있다는 둥 그런 기억은 드물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 흔한 꿈을 꾼 후 1등 당첨을 위한 시도와 실패, 나도 겪었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내 장담한다. 아직...이라면 앞으로 다가올 일이다. 전에 한두 번쯤 그랬고, 그 드문 일이 딱 오늘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내 운을 행운의 번호에 걸고 싶지 않았다. 옛날의 나는 지금의 나로 변모했다. 그래, 세월에 시달렸다거나 늙었다거나 엇비슷하게 에둘러서 표현해도 괜찮다. 빙빙 목표 주변만 맴돌고, 방법을 몰라 빙글빙글 도는 인생이었으니까. 예전엔 꿈을 종이와 맞바꿨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전과 똑같은 길을 갈 수는 없었다. 아침에 깨서 화장실에 들리냐 안 들리냐, 눈꼽을 떼냐 안 떼냐로 1등 당첨이 갈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왠지 나중 후회할지 몰라도 아침에 의식이 드는 순간 그런 억만금은 내게 별 의미가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겠지만 이미 당첨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가공의 사상과 온 몸의 털이 바짝 서는 고양이나 만화영화에 나오는 개 한마리가 된 듯한 환상성의 총애에 내 복과 길을 모두 걸어보고 싶었다. 일종의 승부처랄까, 암암리에 그런 세한 느낌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런 기분이 내게 찾아오는 시기는 뜬금없었고, 장소는 맹랑했으며, 그 맥락 역시 썩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뭔가 그날 하루를 다르게 시작해보고 싶어졌다. 이거다. 당첨 대신 얻은 깨달음은. 또 다른 이유를 찾아보자면 동네에서 최근 나는 은근히 혼자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두꺼운 책도 찬찬히 읽었고, 잔디도 깎고 수영장도 청소하고 딱히 할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위에 색다른 일이나 동정을 살필만한 사건과 날 필요로 하는 막연한 숙녀의 손길이 좀처럼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횡포를 부리는지 어쩌는지 글도 잘 안 써졌고, 삶의 비밀 그 전모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 신비감을 벗을 뻔 하다가 다시 나를 밀고 들어올리고 나의 격정과 열정과 동심의 천진난만한 기운을 조여왔기 때문이다. 난 뭔지 모르는 허상에 쫓기는 허당이었다. 은근함도 떠나갔다. 안녕이라는 말없이. 그 대신 기대도 남지 않았다. 딱 노래 가사처럼. 내가 찾아야 했다. 스스로 마법의 성을 쌓아야 했다. 순서가 바꼈다. 어쩌다가. 얼렁뚱땅. 적응할 수 밖에 없었다. 바싹 그리고 불손하게 운명과도 같은 그 원리는 날 찾아왔다. 그리고 그 일리는 나를 굴복시켰다. 나도 싫지는 않았다. 당연히 좋은 줄도 잘 몰랐다. 토끼는 챗바퀴를 돌리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나는 오늘의 운세에 판돈을 걸고 나서 그 불확실한 감이 좋으면 판을 키우고, 아니라고 해도 패를 즉시 까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늘의 운세! 무슨 별자리. 무엇을 조심하라. 어느 때 태어난 사람은 뭐가 좋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추진하지 마라. 방심하면 곤란하다. 고전한다고 낙심하지 마라. 최상의 조건이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라.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마라. 해가 뜨면 누구를 만날 것이고 서풍이 불면 무슨 일에 엮일 것이다. 오늘 역마수가 끼었으니 자만하지 마라. 운세를 가상으로 받고 읽고 듣고 토론을 모두 거쳐서 딱 결론 나왔는데 오 이런 개똥 같은 일이라니! 사주 정보를 잘못 입력했군, 저런!
2
나는 딱히 중요한 일이나 아무런 약속이 없었기 때문에 은밀히 혼자 알고만 있었던 어느 점쟁이를 찾아갔다. 미리 점찍어 둔 것은 아니지만 한번 가봐도 썩 나쁘지 않을 듯한 곳을 한군데 봐놓기는 했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약 1~2쪽에 걸치는 상황과 묘사와 서려있는 음기랄지 이 양반이 혹시 돌팔이는 아닐까 라는 의심에 관한 설명은 모두 생략한다.
「결혼은 했어?」 용한 도사 왈,
「아니 그걸 물어보시면 어떡하나요? 대번에 뭐 때문에 왔구먼, 길게 시간 끌꺼 없고 판돈을 올리면 핵심만 추려서 귓속말로 알려주겠다고, 그렇게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네? 거 왜, 드라마 보면 그렇잖아요?」
「젊은이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구만. 그거 다 뻥이야. 지들이 뭔 수로 미래를 알어? 걔네들 대충 넘겨 짚어서 일단 혹하는 말을 던지는 거야. 틀려도 책임 안 져! 맞으면 좋은 거고. 제일 들어맞을 가능성 높은 걸로 딱 3가지를 알려주면 대충 그 가운데 2개는 맞아, 그러면 괜히 그 말을 들었고 기억하고 기대했거나 설마 맞겠어 하며 웃었던 사람들은 나중 그분이 달리 보이겠지. 그럴 수 밖에 없어. 이 바닥이 원래 그래. 답변의 가능성 그리고 혹하는 말! 먼저 떡밥을 던지는 게 순서지. 그것은 두 가지로 나뉘고. 평서문과 질문으로. 여기서 마침표는 문장이 계속 이어져야만 하지. 말을 많이 하면 힘 빠져. 체력이 금새 바닥나게 돼. 이 일도 체력이라고. 장기전인데 기분 좋다고 막 달리면 얼마 못가서 거품 물게 되어 있어. 그래서 짧은 평서문은 자주, 긴 명대사는 아주 가끔 딱 느낌이 올 때만 하는 거야. 곧 그것은 자주 질문을 던지라는 말이지. 거기서 또 두 가지로 나뉘어. 대답이 '예'냐 '아니오'냐로. 애매하면 판돈 올라가고 잡아먹히는 거고. '예'라면 계속 분위기 조장하면서 기분을 끌어올리는 거고, '아니오'라면 딱 잡아떼면 돼. 이때 세게 나가는 건 기본이지. 약하게 나가더라도 더 조용히 말하거나 그런 방법이 다 있고. 목소리를 아주 낮춰서 고개를 슬며시 들이밈과 동시에 눈을 가늘게 뜨는 거지. 그러면 안 된다면서. 점 보는 거, 그거 별 거 없어. 나한테 딱 2시간만 배우면 끝나. 그리고 어디가서 세계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예언가에게 20년 배웠다고 광고 하고 가게를 차리면 되지. 그럼. 찾아오는 사람들 다 뭘 바래서 오는 거 아니야. 자기 말 들어주라고 오는 거지. 연애상담도 똑같아. 누가 몰라서 물어보나? 또 누군 조언을 해주면 자기가 도사인줄 알겠어? 다 그저 서로 연기하는 거지. 절반쯤은 위선이 차선이라고, 그게 바로 살면서 악인이 되지 않는 길이야.」
「선생님, 시작부터 어째 좀 불편하게 풀리는군요. 전 여기 점을 보러왔지 선생님 제자가 되겠다고 온 게 아니라구요. 네?」
「어, 알아. 안다구. 일단 부드럽게 주변을 맴돌면서 긴장감을 푸는 거야. 나는 나비고 자네는 꽃이야.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는 게 아니야. 내가 뭔 운동선순가? 여기가 노름판이야? 아니야~. 상대방의 긴장감을 푸는 게 먼저거든. 그러나 자네도 너무 늘어지면 안돼. 나한테 단물 쪽쪽, 설탕물 쪽쪽 빨리면 어떻게 될지 몰라. 지갑을 열고 분수대 옆에서 삼지창을 들고 논다면 괜찮지만 아예 한 재산 맡길려는 작정을 하는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구. 그런 거 노리는 작자들 어딘가에는 있어. 속고 속이는 게 이 세상의 이치라는 거, 잊지말라고. 그걸 꼭 경험으로 학년 올라가듯이 아는 친구들도 있으니까 말이야.
내가 아까 물어봤지? 결혼했냐고. 자네는 결혼 안 했네. 딱 보니 안 했어. 음, 그리고, 어제 TV 봤지? 혹시 코메디 프로그램? 거기 나오는 스무살 처녀가 예뻐보이던가? 때가 됐구만. 하지만 웬만한 아저씨들 다 그럴 걸~! 얼만큼을 웬만하다고 할 수 있냐, 그건 따지지 마세 그려. 게다가 그 아가씨만 그렇게 통통 튀고 신선하고 새록새록 산뜻한 줄 알어? 과연 그럴까? 어? 또 웬만한 그 또래애들 역시 다 그래~! 또한 얼만큼이 웬만하냐, 를 재차 짚고 넘어가지는 마세나 그려. 그럼. 솔직할 땐 솔직해야지. 응큼할 땐 응큼하듯이. 부끄러워하지 마. 그게 정상이니까. 그때 예의가 지금은 냉정함이고, 지금의 애교가 내일에는 지고지순함이 될지 지금 어디서는 현실일지 누가 알겠나. 걔들도 꺾이면 다 부러워하게 돼, 젊음을. 추억을 회상하며 아련히 곡조를 뽑거나 복고풍 의상에 빠지겠지. 뻔해. 그걸 알아야 한다고, 남아는 말이야. 들었다 놨다, 들어봤지? 밀었다 당겼다, 하고 있나? 쥐었다 폈다, 지금 여기서 우리 둘 중 하나는 바로 그래. 사람 일이란 게 그런 거거든. 당신의 마음은 내 손 안에 있소이다, 사랑과 열정을 그대에게? 오늘의 운세를 젊은이에게! 그녀들도 모두 걱정해. 자기 남자가 자기 어릴 때 자신이 습관적으로 아무한테나 선보였던 꼬리침을 예절로 보고 또 그건 기본이 될 테니까! 당해보면 알 꺼야. 완전 나 꽃이야, 그건 그나마 괜찮아 헌데 문제는 그 꽃이 무제한 복제되는 거. 사르르 사르르 전율이 돋는 내 남자의 달콤하며 도톰하고 감미로운 음성은 나만 듣는 게 아니고, 교태 넘치는 그녀의 눈웃음은 낭군에게만 보내기로 약조하지만 그게 어디 자기 마음대로 되나, 제 버릇 개 줄까, 그 앞에서 뿐이지, 잘 알지 않나. 예전의 연애 감정으로 현재 널리 통용되는 행태를 본다면 어떻게 봤을 때 그건 명백히 반칙이라거나 썩 문란해 보일 수도 있어. 마음이 헤퍼보일 수도 있다구. 허나 그건 옛날 이야기지. 이런 말도 세월이 흐르면 완전 촌스러워지겠지. 고리타분해질 꺼라구. 미래생활사전을 봐 보라구. 많이 변할 테야. 그러나 정말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과 내 님을 위한 일편단심과 꽤 많은 것들은 변하지 않아. 절대 변치 않는다구. 마치 연인들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기원하고 축복하는 것처럼 말이야, 끝날 때 끝나더라도 일단은. 다이아몬드를 심혈을 기울여 들여다본 적이 있나? 정말 정성스럽게 들여다보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줄 알어? 사랑이 영원할 거라는 착각을 하게 된단 말이야. 마치 어느 카피라이트를 떠올리면서. 하하하하하 내가 그런 카피라이트를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야, 결코 아니라고, 내가 젊었을 때 광고회사에서 앗 삼천포로 빠지지마세 그려. 현재주의, 뭐 그런 말은 모르겠어. 약간 끌리고 예뻐보이고 동경심이 감도는 그런 감정이 TV와 인터넷과 핸드폰과 거리에서 누구를 봤을 때 살짝 피어오른다고 창피해 하지마. 안 그러는 게 비정상이니까! 당사자야 그럴지도 몰라. 내 친절과 내 애교와 내 호의와 내 상냥함과 내 꽃내음을 내 주관에 따라 모든 곳에 퍼트리고, 면사포와 팔꿈치 직전까지 도달하는 하얀 면장갑을─그것의 이름이 뭘까─낀 채 다소곳이 마지 못해 못 미더운 척 춤을 신청하는 그이에게만이 아니라 춤을 신청하는 누구에게나 손을 건네듯이 마치 그러하듯이, 만인에게 똑같이 어디에나 똑같이 수평적으로 똑같이 대하는 게 그게 뭐 잘못이냐고, 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야. 하지만 그런 일을 객관화한다면 어디 그게 좋아보이겠나? 착해보이겠나? 아름다워보이겠나? 그렇다고 새싹들의 선망을 사고 널리 권장할만 하다겠나. 젊은이 입장에서 보면 당사자야 불미스러운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또래 애들과 같은 계층과 친한 친구와만 어울리다보면 약간은 사회성이 그 주위에 기준하여 형성되고 시야가 좁아지고 아무래도 덜 이타적일 수 밖에 없게 되지. 한 남자가 착각을 했어, 두 번째 남자도 착각을 했어, 세 번째 남자도 인정했어, 누가 봐도 오해를 살 만해,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개나 소가 되고 그들은 시시각각 항상 복제되는 꽃에 관한 사진이고 그림이며 일상적으로 재생산되는 수프에 지나지 않아. 그럼 뭔가 오해의 소지로 시작해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볼만한 문제라고 봐도 큰 오산은 아닐 꺼야. 보통 연애를 하는 단 한 사람에게만 응대해야 할 태도, 그처럼 오직 단 하나 정녕 나의 그대이기를 바라는 무엇을 누군가는 한순간에 와장창 와해시켜버릴 수도 있어. 그게 생활이자 인생일 수도 있다고, 그걸 인생...이라고 하기엔 좀 뭐하시만 말이야. 그게 뭐 잘못이냐고, 뭐가 문제냐고, 웃지 못할 일이 뭐냐고 반문하며 실소를 부를 수도 있어. 그건 의외로 흔한 일일테야. 이런 걸 공감 못하고 이런 데서 연민과 나아가서 동질감과 유대감으로 모자라 어떤 불편한 동정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오락 영화가 아닌 다른 건 왜 만들고 시를 왜 쓰며 다큐멘터리는 뭐 하러 만들겠나? 뭐 할일 없다고 뭐 미쳤다고 그런 헛일을 하겠냐고, 뭐 하러 시간낭비를 하겠어? 바로 그와 같은 몸짓과 어조와 목소리의 떨림과 표정과 말투를 비롯한 신경 써주고 나아가 챙겨주며 아껴주고 보기 힘든 다정함까지, 그 모두를 만인에게 똑같이 인자하게 대한다? 그건 뭔가? 혹시 그게 평등이라는 것인가? 평~등? 그럼 자유와 박애는 뭐란 말인가? 옛날에 몽테스키외 남작이 글로 썼나 아니면 칼 마르크스가 말했나? 그것이 그것이라고. 발음은 같은데, 어... 발음만 같네. 그거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걸 꼭 깨달아야 하냐고! 그 둘의 의미까지 똑같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금시초문 같네 그려. 옛날에도 발 없는 말은 천리를 갔는데, 지금이라고 거짓 평판이 얼마나 통하겠나. 뭇남성들의 상심, 그 서글퍼지는 비애, 보답받지 못하고 토라져버린 애련을 복돋워주자고, 잠시만 말이야. 유행가가 다 뭐야, 90퍼센트는 이거야. 사람은 누구나 질투심에 불타오르는 시절이 있기 마련, 교분은 언제 어떤 연결로 일어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지 몰라. 친교에서 한걸음 떼면 추문이고 그 옆에는 치정이라고. 사랑이 뭐 별건가? 상처받은 체념을 치유하는데는 부적 3번이 괜찮다네, 슬쩍 눈여겨보라고. 정말 심혈을 기울여 한 세월이 걸린 작품이야. 불상사는 미연에 방지해야 하지 않겠나. 쓰라리지만 어쩌겠나, 사람이니까 사랑 앞에서 마음이 괴로울 수 밖에. 그러면서 크는 거라구. 제2의 자아는 그렇게 탄생하는 법. 입장을 바꿔서 말이야, 여자들 입장에서도 무언가 들인 노력에 비해서 돌아오는 찬미가 부족하니까 이해는 된단 말이야. 그분은 소식이 없고 엄한 파리만 날리니까 그럴 만도 하지. 그럼. 산들산들 덥지도 춥지도 않고 꽃은 피었는데 내 님은 오시지도 않고 나비도 벌도 봄마저 오지 않느다면 슬프겠지. 아예 기약도 없어, 완전 서글퍼지는 거지. 그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흔하겠어? 요즘 어떻다고, 남자들이 어쩐다고. 그런 말이 나올만도 하지. 그냥 흔한 수다는 아니야. 결론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란 거야.
난 말이네, 내 말이 크게 틀렸다면 말도 안 된다면 그러기를 바래. 어설픈 이론도 아니지만 헛점을 파고들고 논리를 깨트리면 내 깨끗이 인정하리다 승복하겠단 말이오, 그거야. 그래 내가 틀렸고 당신이 옳소이다, 난 그런 거 꺼려하지 않는다네. 좋아해. 그게 바로 내 분야라오. 점쟁이는 끝까지 우겨야 하지만 어느 층위에 오르면 안 그래......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걸려, 걸린다구. 내가 괜한 걸 트집잡는 건 절대 아니라고 봐. 흥정의 묘미를 살리지 못하고 다 귀찮으니까 억만금을 내고 내 당장 사겠소 하면 어이쿠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 건 신분을 뛰어 넘는 사랑인가? 그게 뭐야, 그게 대체 뭔 소리냐고. 나도 뭐가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군 그려. 어쨌거나 그건 오직 하나, 의 가치가 없지. 즐거움만 남고. 내 곁에만 있어줘요 떠나가지 말아요, 라는 애절함을 그 어디서 찾겠나? 어떻게? 그게 어디 사랑이야? 그 흔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사랑 때문에 왜 그럴게 법석을 떨고 난린데? 유행도 아니고 인간사 절반이 사랑이라고. 뭐, 여자라면 무죄야? 사랑이면 다냐고? 아니야. 그건 아니라구. 그건 절대 아니야! 인생이야 너그럽게 그걸 안아줄 수야 있지, 인생이야 모두 받아주고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분들 역할은 그래도 내가 그분들 변호하는 게 아니야. 인생이 꺾여야만 아는 그런 것들이 있다는 얘기야 내 말은. 하지만 녀석은 진득히 어느 품에 있지 못하고 나비처럼 날아가버리는 거라구, 훨훨. 꺼이꺼이! 그런 여자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희대의 난봉꾼이 됐을까? 희대는 무슨 희대, 찰스 부코스키 정도 됐으면 성공한 거겠지. 가능성은 거의 없어, 제로야. 정말 많은 청춘 남녀들이, 아니 모든 아가씨들이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그건 반칙왕이지. 아, 그렇지 않나? 날 따라서 해봐, 난-봉-꾼! 아니 아니 아니, 반-칙-왕! 숙녀 먼저, 와는 다른 얘기야 분명. 엄연히 다르지. 따라하라 했다고 진짜 따라하지는 말고. 그렇게 말이야, 결혼 전에 두 다리 세 다리 그 이상 얼마든지 걸치고 얼마든지 마음대로 살아도 돼, 그 누구도 뭐라 못하겠네. 저마다 삶의 기준은 다르니까. 남의 인생에 배 나와라 감 나와라 내가 무슨 권리로 훈수를 두고 침해하겠나.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서 날아다녀도 그게 어디 자연의 섭리지 뭔 죄란 말인가? 그러나 그렇게 모두 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을 남자를 여자를 친구를 연정을 흠모한다는 무언의 고백을 통 믿을 수가 없어. 믿어주는 척 연기하는 것도 지겹지만 말이야. 동기부여해서 부풀어오르고 미리미리 사기 당하기 전에 그것, 바로 학습을 하라는 것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래야 그 둘을 같은 잣대로 쟤는 게 되지. 샤르르륵 샤르르륵 눈꺼풀을 우아하게 천천히 아주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말도 조용조용 아주 근사한 속도로 대화할줄 알지만 그걸 실행하면 웃음이 나와서 차마 그건 보너스로 보여드리지 못하겠다는 숙녀의 변명이라고나 할까, 할 말은 있을 꺼야. 천성이 그러한데 어쩔 수 없다라고.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된 거냐고. 남들도 다 그런다고. 그런데 정말 다 그럴까? 잘잘못은 아니지 음 그럴 수도 있어 그럼. 청춘이니까. 요조숙녀니까. 새침하니까. 무엇보다 재능이니까. 탁월한 능력이니까. 하지만 뛰는 놈 위엔 나는 놈이 있는 법, 또 다른 명언까지도. 죄는 내가 지고 벌은 다른 누군가가 받는 일, 드문 일이 아닐 꺼야.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 웬걸, 그 여건까지 따지지는 마세.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데 사랑의 여신은 등을 돌리고 이타적인 삶을 실천하는 현인에게 행운의 여복은 너무 늦게 찾아올 수도 있는 법이야. 사람 사는 세상이 원래 그래. 그렇지만 거기까지 촉수를 디디면 그럼 머리 아퍼. 너도 나도 자유롭기 힘들단 말야. 난 재물운이나 관상과 태몽, 궁합이나 애정운이 전문이야. 놀라운 적중? 솔직히 자신없다네. 그럼, 그렇지! 그러나...... 자네는 나를 만난 걸 행운으로 알아야 해. (이때 이 분은 나를 똑바로 노려봤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중 깨닫게 되는 시기가 있을 꺼야.
그러니까 저 친구는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라고 공상의 나래를 펼친다고 해서 수줍어하지도 슬퍼하지도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언짢아하지도 마. 자기만 그러는 건 아닐까, 비관하지마. 보아하니 아직도 그런다면 그건 순수한 거야. 그러나 그렇게 순진하게 살기에 이 세상은 어느 만큼 팍팍하다고. 굉장히 넓고 신비로워. 그렇지만 우선은 순수하다는 것으로 논증되었으면 사춘기가 다시 온 거라구, 반겨야 하지 않겠나? 그게 내게 온다면 다른 말로 불러야겠지, 회춘이라고! 젊어서 좋은 게 뭔가? 사랑! 많이 해 많이 하란 말이야. 늙어서도 못할 건 없어. 이승에서나 마음껏 하지, 레테의 강을 건너서 많이 하겠다고? 아니야~!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크게 사회규범에 저촉되지 않는다면 마음대로, 맛난 음식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실컷, 어디를 가고 싶건 누굴 보고 싶건 얼마든지, 알겠나?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거 왜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말일세. 그렇치 않나 길지도 않은 한평생, 사람이 살면 얼마를 산다고 길어야 백년이야. 그것도 거의 반올림이지. 우리가 인간이 말일세 한 오백 년을 사나 10세기를 사나? 아니지 않나. 끽 하다 운 때문에 이 모진 세상 그것도 지구에서 태어났는데, 차일 때 차이더라도 고백이나 하고 차이면 속이나 시원하겠지. 현재의 감정에 충실한다고 해서 그게 꼭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나무 그늘 밑에서 낮잠 자는 토끼가 되는 건 아니란 말일세. 내가 괜한 얘기를 했네 그려. 난 원래 그렇지 않은데, 잠시 전에 이 동네 영감탱이들이 다녀갔드니 그 짧은 찰나에 나도 금새 물들어버렸어.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말이야. 어찌되었든 추측이 몽상을 부르고 상상의 축제에서 별 희한한 생각들이 단꿈을 펼친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마시게, 그건 청춘의 자유야. 뭐 젊은이가 수도승인가? 인생을 통채로 어디 헌납했냐고? 아니야,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주인공이야. 그러니 나비는 꽃을 탐해도 된다네. 그대의 특권이란 말이세. 아름다운 꽃을 꺾는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며 희망의 사과를 따먹고, 꽃은 그분을 기다리다가 꿀벌을 만날 수도 있고 말이야. 아니면 엄한 설과 이상한 이론에 헷갈려하며 한 시절 도취될 수도 있고 말이야. 모두가 웃고 행복해하는 즐거운 파티의 대미는 뭔가? 만약 그것이 불꽃놀이라면 명대사의 꽃은 바로 긴 명대사라네. 모르긴 몰라도 어설픈 오늘의 운세보다는 아마 이게 더 낫지 않나, 난 그렇게 내다 본다네. 거리를 보면 빨간 스포츠카가 뚜껑이 없어, 원피스의 옷감은 하늘하늘하고 무늬는 어여뻐, 모두들 행복해보인단 말일세. 그들이 부럽지 않나, 선망을 꼭 감춰야 할까, 자네도 그렇게 하고 되고 즐기고 싶지 않은가, 꿈을 꾼다고 그것이 죄로 이어질까? 그녀를 품고 싶어? 그녀를 만나면 가장 하고 싶은 일 딱 하나 제일 하고 싶은 단 하나의 소원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정답게 손잡고 걸어가고 싶은가? 바래도 돼, 원해도 된다고. 정말 그렇지 않다면 그건 이성을 보기를 돌맹이 보듯 하고 바로 나무를 사랑하는 거지 뭐.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라네. 상인이라고 아무나 잡고 흥정하지는 않아. 뭐 자기 기분 나쁘면 상인이 아니라 장사치야? 딸랑딸랑 하면 비즈니스맨이냐고. 제품을 제한없이 최대한 많이 팔면 많이 팔수록 좋아하는 주식회사가 있다면 슬로건을 엄격히 지키고 타켓층이 비좁고 일정량 이상은 절대 팔리게 하지 않게 교묘히 제한하는 브랜드도 있지. 사랑? 사랑도 똑같아. 사람도 브랜드니까. 쟤가 나한테만 그러나? 나는 개나 소일까, 아닐까? 그런 생각, 할 수 있어. 조용조용한 분위기의 고상함을 원했다가 신선한 생기와 산뜻한 발랄함에 넘어갔는데 얘가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이러면 어쩌지, 그럴 수도 있어. 그런데 그때만 그럴 꺼야, 그때만. 남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변하거나 말거나, 오리발이 생활이든 말든, 때 되면 지조와 절도를 알 테지. 아니라면 말고. 누구처럼 그 언제까지라도 환상가로 남든가. 지 인생 지가 살지 내가 사나? 뭐 여자라고 다를 꺼 같아? 아니야~ 똑같아. 완전 똑같다고. 여자도 남자와 똑같다고! 오히려 더하면 더할 테지. 어? 더 자세히 관찰하고, 더 오래 지켜보고, 더 많이 알게 되면 바뀔지 모르지만 말이야. 남자만큼 여자가, 여자만큼 남자가 비슷할까 라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호감 그 마음이 말이야. 처음에야 언뜻 보면 상큼하고 상콤하며 달콤하겠지만 대개는 잠깐이야. 계속 놀아주다보면 피곤해져. 아장아장 걷는 아이도 귀엽지만, 그게 딱 5분이래잖아? 키우는 게 정말 힘들다는 뜻이지만 말이야. 결혼해도 별거 없다고 하잖아? 생활비 계산하고, 설겆이 하고, 식료품 사고, 청소하고 쓰레기 버리랴, 사회에 적당히 관심도 갖고 여기저기 행사에도 얼굴 비추고, 생활에 충실하랴 적당히 한눈 팔랴, 권태란 놈도 곁에 오지 못하게 슬쩍 거리를 둬야 하랴 삶이 다 그래, 사랑이 다 그런 거라고. 잘 알지 않나. 안 그런가?」
이런 순간 찾아오는 적막한 적요함. 과히 사람 기분을 정말 이상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자주 경험하기도 힘들고. 그게 뭔지도 모르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고.
「아 나 이거 영감님 영감님, 이거 이거 순 돌팔이시네. 전 여기 오늘의 운세를 보러왔다구요. 네~!」 내 농담을 칭찬으로 여기시지 않을려나? 나 감동먹었어요, 를 이렇게 표시하는 사람 많지 않나?
「급하기는~ 누가 청춘 아니랄까봐. 쓰잘 데 없는 수다, 불필요한 꾸밈어와 속임수 같은 아리송한 말들, 입에 발린 칭찬 그 가운데 간간이 꼭 기억해야 할 농염하고 찬란한 모종의 주문과도 같은 도움 되는 말이 있을 테니 잘 찾아보게. 하나부터 열까지 밥 먹여주듯 다 알켜주면 재미 없지 않겠나.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줘야지 예금하고 적금을 붓듣이 도와주면 그건 옛날 식이야. 자네는 말하는 걸 보아하니 말로 돈을 벌진 않아. 그러나 몸짓으로 봐서 딱히 드러나는 습관은 없고, 눈빛은 보통이지만 몽롱하니 뭔가를 꿈꾸는 듯 해. 혹시 좋은 꿈을 꾼 후에 날 찾아온 것은 아닌가? 왜 찔리는 구석이 있어?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혹시라도 그랬다면 뭐 나야 좋은 일이고 반가운 손님이지만. 내가 봤을 때 당신은 무척 자유로운 일을 하는 것 같아.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아. 그러나 뭔가 부담감은 꽤 큰 거 같은데. 주색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 같아. 허나 싫어할 리가 있나. 적당하면 그뿐. 그리고 음악 쪽은 아니야. 여러가지를 겪어봐도 정말 그만한 게 없다는데 드물다는데 빠지면 너무 많은 걸 걸어야 해 그 분야는. 성실해 보이지만 뭔가 굴곡이 있어. 했더래도 중간에 그만두었을 꺼야. 그림도 아니야. 시야가 불투명해. 집중이 안 되고 무엇보다 재능이 없어. 어때?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건? 쫄기는, 농담이라구. 왜? 진담인줄 알았나? 내가 봤을 때 자넨 일기는 쓰지 않는 거 같은데, 맞지? 아직 감동하기엔 일러. 아무 어른이나 붙잡고 물어봐.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일기 쓴다는 사람은 만나기 힘들테니까. 대신 그 단어를 좋아하느냐 아니냐, 그 말을 읽거나 들으면 뭔가 핑 도는 기색이 있냐 없냐, 그게 중요한 법이지. 아저씨는 말이야 고급스러운 농담과 위엄 있고 품위를 갖춘 3인칭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즐거움과 기쁨은 1인칭에서 찾아. 물론 바뀌기도 해. 그 둘을 이제...보니 지금은 합칠려고 하는 것도 같아. 누가 봐도 분간하기 어렵게 말야. 내 말 맞지? 틀렸나? 아닌데, 거의 그게 맞는...데!
어떤가? 이런 자유로운 형식으로 점보는 거, 싫은가? 싫기는. 이 바닥도 어느 정도 겪고 겪으면 손님도 독자도 관객도 절반은 도사가 되는 법이라네. 어느 분야나 다 그래. 점을 수없이 보고 또 본 광적인 애호가에게 물어보게. 끝없이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한없이 달콤한 말을 속삭여주며 듣고 또 들어도 도무지 질리지 않는 그 신령스러운 정기가 충만한 강의를 이렇게 길게 한번에 쉴새없이 이어서 친절하게 코앞에서 설명해주는 도사가 과연 몇 명이나 있는지 말이야, 그러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말이야. 거기 한번 빠지면, 절대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한두 명은 말할 꺼라고 내 장담하네. 그럼. 당연하지. 대충 시간 떼우고, 묻고 답하고, 책 보고, 도구를 이용하고, 눈치 보고 낌새를 살피고 반응을 엿보고, 부적을 써주고, 복채를 올리고, 시간 낭비하지 않고 할 말만 하고, 믿거나 말거나 요점에서 빗나가는 얘기는 반가워하지 않고,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이렇게 말로써 가만히 있는 사람을 나체로 만드는 듯한 그 황홀감에 탄복하는 부류도 있게 마련이지. 글도 마찬가지야. 어떤가, 자넨 후자 같은데! 아니라곤 하지만. 그쪽이 월등히 많은 법이니까. 이런 건 눈 감고 소액을 걸어도 된단 말이네. 자넨 이런 순간에 변화구 던지는 타입은 아닌 듯 보이니까, 굳이 연기할 필요 없어...(침묵)...
자네 혹시 일이 잘 안 풀려서 날 찾아왔나? 글이 잘 안 써져서? 난 학자도 아니고 교수도 아닌데? 난 생기 넘치는 동기를 부여줄 수 없어. 그렇다면 왜? 무언가 사는 낙이 없어서? 뭘 해도 재미없고 그냥 심심하기만 해서? 언제나 따분하니까? 그렇다면 연애를 하고 미술관과 동물원에 가면 되지 않나. 놀이공원도 있을 테고. 나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겠나? 앙? 저 하늘을 바라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네. 바람이라고 그가 시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거칠게 불어서 자연 재해나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이지. 지가 가수야 뭐야? 그런데 왜 지금 내가 꼭 머리에 꽃이라도 꼿은 듯한 기분이 드는 거지? 잘 모르겠는데 누가 날 조종하나? 혹시 옆집 영감탱이가 주술을 잘못 걸어서 살이 내게로 뻗힌 거 아니야? 내 이 놈의 영감탱이를 그냥 확 그냥 마...... 어쨌든 혹시 글을 쓸 생각이라면, 쓰다가 막혔거든 머리 속에 떠오른 바보 같은 짓을 그냥 백지에 옮겨보시게. 시점을 먼저 정하고 동사에 얽매였다면 이젠 목적어를 따져야 돼. 목적격과 보어, 부호 그리고 언제 감탄사가 필요한가 그걸 따라잡아야지. 왜 그 일을 하는가, 그걸 생각하라고!...(침묵! 그는, 얘가 뭔가를 더 바라나? 그러나? 하면서 아 나도 지치는데... 마치 그런 무언의 표정을 짓는다)...
젊은 친구 보기에는 어떤가? 꽤 궁금하구먼. 대충 대화를 나눠봤으면 뭐가 보이지 않나? 그래 어떤 거 같아? 나는, 난 그 경지를 이미 옛날에 넘어선 거 같지 않나? 어떤 경지냐고? 그거 말이야 그거! <내가 맞히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맞히지 못한다> 경지. 하하하, 익살맞게 또 이걸 고도의 기법이라고 둘러댈 깜냥은 못되니 거 너무 걱정마시게. 아, 그 다음은 어떤 단계였드라, 하도 오래되서 잘 생각나진 않지만 다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서 음, 아하! 그 다음에 아마 그걸 꺼야. 무슨 경지? <들어맞거나 말거나>. 하하하, 뭐 그거야 초보자들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거지. 그걸 뛰어넘어야 비로소 <떡~하고 들어맞을지도 모른다>의 찬사와 입소문에 둘러쌓이게 돼. 그리고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어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심하라> 이와 같은 논리를 구사하는 단계에 들어선단 말이야. 그럼 거기서 끝이냐? 아니지. 그 다음은 또 있어. 그게 무엇이냐 하면, <내 진단이 들어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이야. 이건 제법 고급 수법이라고. 물론 각각 순서는 바뀔 수도 있고 어려운 걸 먼저 배우고 쉬운 걸 나중 깨우치기도 해. 그러다 모든 기술을 습득한 후에 비로소 신선계라는 입신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지. 그것은 바로 <머머일 것이다>라고 예언하는, 말이 필요없는, 차원이 다른 예언가가 되는 거야. 즉 점쟁이에서 예언가로 직함이 변화되는 것이야. 이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드물어~ 그럼......(그는 일순간 잠시 추억에 젖는다. 회상이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아주 잠깐만)...... 그 할망구가 내 은인에다가 스승이기는 한데, 한때 난 무척 그녀를 원망했어 그땐 나도 젊었으니까 너무 어렸으니까 뭘 몰랐지 그럼...... 나그네, 혹시 내가 너무 처량해보이나? 허허허, 괜찮아 난 괜찮다고. 정원에서 보면 다채로운 관상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듯 그렇게 나는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주 또렷하게 모두 읽고 있는데 음, 생각이 참 많구만. 싹수가 푸르러. 그런데 어째 벌써 그렇게 막 새치가 나고 그러네 고민이 많나 아니면 이미 노화가 시작됐나 우리 이제 같이 늙어가는 건가 왜 말을 그냥 팍 놓고 싶어? 허허허, 농담인데 별로 농담같지 않구먼 그래. 아, 한가지 더! 나는 항상 일부러 상대방의 생각을 읽지 않을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지만 지금 언뜻 스쳐지나가는 뭐랄까 간과할 수 없는 젊은이의 몽환적인 생각을 하나 읽을 수 있군 그래. 재미있다고 너무너무 재미있다고 허허허 (그는 한 2~3초 정도 나를 예리하게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직 그 생각을 하고 있구먼. 이 양반이 아까부터 점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뭐 지가 지 입으로 지는 예언가라고? 이미 내가 맞추지 못하면 그 누구도 못 맞힌다고? 뭐야, 애들 장난이야? 이거 너무 유치한 거 아니야? 뭐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식상하시기는~ 내가 이런 돌팔이 달변가 구식 약장수의 농간에 놀아나다니 나도 참 많이 내려갔구나...... 괜찮아 괜찮아, 웃자고 한 얘기라네. 설마 정말 그랬을라고? 또 속으로 잠깐 그러면 또 어때? 허허허허허, 허허허허허 (이건 가짜 웃음이 아니라 울음 대신 짓는 미소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리고 당장 이 영감님이 꽤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이가 된듯 했다. 그런데 정말로 진짜 놀라운 점은 이분의 목소리까지 어린이의 음성으로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정확한 시각에 변한게 아니라 그건 아 음 오오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아 이거 속세에 사는 친구에게 너무 많은 걸 가르쳐주는 거 같은데, 그냥 재미로 듣고 잊어버리시게. 그게 좋을 꺼야.」
잠시 대화가 잠잠해진 사이 바람의 언어와 상대방의 마음을 간파하고자 하는 동물의 감각적인 뇌파가 그 자리를 대신 하는 듯 조용한 시간이 짧은 순간이지만 영글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오늘의 운세 그 영험한 후광을 배가시키는 효과를 차일피일 미룰 수는 없었다. 그 에메랄드빛 유종의 미를 만끽해야 하는 작별의 시간을 불러오게 됐다. 헤어질 시간이 임박한 것이다.
「영감님은 왜 이 일을 하시나요?」
「어라~! 제법 빠른데! 보통 내기가 아닌데? 허허허허허. 허허허허허.」
(동시에) 하하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물론 그것은 가짜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이었다. '영감님은 왜 이 일을 하시나요?'부터 '물론 그것은 가짜 웃음이었다'까지. 그리고 실제 내가 물었던 말은 이랬다.
「선생님, 그런데 제가 어제 집에서 TV를 봤단 사실을 어떻게 아셨나요? 그것도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희곡을 본 것은요?」
3
하루가 지났다. 나는 그 이상한 점쟁이 노인을 잊기 위해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내야 할까 라는 고민이랄까, 자기 자신을 다독이는 응석과도 비슷한 어떤 방심에 빠져버렸다.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듯한 비탄이라고나 할까, 싫증난 사랑이 된 것만 같은 이상한 낙담 때문에 이 위기를 모면할 방책을 찾게 되었다. 이모저모 따졌을 때 지금 최선의 대책은 최근 발견한 미술 마을에 놀러가는 것 뿐 다른 다복한 해결책은 전혀 없는 듯 했다.
나는 일상이 다시 권태에 잠식당하기 전에 서둘러 그곳으로 떠났다.
아, 그날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사실적인 꿈이었다. 나머지 내용은 개꿈이니까 복기해볼 필요가 없는데 단 하나 정말 의아한 일이 하나 있었다. 꿈에서 벌 한 마리가 날 따라다니다가 어떡하다 내 왼편 팔꿈치와 팔꿈치 안쪽, 그것 둘의 바깥쪽, 어떻게 더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어쨌든 그 부근에 벌집이 생겼다. 그것도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으로. 아니다. 바깥 쪽이다. 팔을 굽히고 다른 손으로 거길 살짝 짚으면 엉덩이 모양이 보이는 바로 그곳. 그것도 살 안에 말이다. 당연히 나는 꿈에서 이런 뭐야 이거, 하면서 막 그걸 만져봤고 어떻게 해야 하나 라면서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깰 때 나는 오른손으로 왼쪽 팔꿈치 근처를 만지고 있었다. 한참을 만졌다. 애무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진짜 살 안에 벌집이 있는 것처럼. 뭐 아무 일도 아니고만, 하면서 나는 화장실에 갔다 왔다. 다시 방에 와서 잠을 잤다. 그땐 꼭두새벽이었으니까 다시 꿈 2탄을 기대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두 번째 잠을 자다가 잠에서 두 번째 꿈을 또 꿨다. 그리고 역시나 새벽에 잠깐 깼다. 요즘 정신이 산만하기 때문인지 꼭 새벽에 한두 번 잠에서 깬다. 이번에는 오른쪽 발바닥 안에 개미가 집을 지어 살았다. 완전 생생한 꿈이었다. 당연히 난 또 꿈에서 깰 때 오른쪽 발바닥을 벅벅 엄청 긁어대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난 꿈풀이고 뭐고 어딘가로 떠나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날 나는 미술 마을에 도착했다.
아, 깜빡했다. 나는 내가 벽에 시를 썼던 미술의 마을에 당도하기 전에 한적한 어느 예술 극장에 들렸다. 문득 영화 한 편이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극장 안에 관객은 별로 없었다. 선전은 요란했고 이상한 복장을 입은 아가씨가 막 사진도 같이 찍어주고 그런 행사 분위기였는데 이 영화를 위한 것은 아닌 듯 했다. 뭔지는 모르겠고 남의 일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나왔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이 처음에는 '뭐지? 뭐지?' 라고 하다가, 중간에는 이렇게 될까 저렇게 될까, 끝에는 그럼 그렇지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로 돌아가는 수 밖에. 끝나고 나서야 왠지 서운하고 아쉬움이 남으면서 뭔가 허전하고 여운이 가득한 가운데 어떤 유치한 사랑 놀음에 빠진 친구를 본 것만 같은 시시함을 동반하여 약간 찡한 감동이 없잖아 있는 듯한 분위기와 더불어 무언가 뭉클함? 짠함? 어딘가 코 끝이 아니면 발가락이? 뭐 그 정도면 괜찮다는 뜻이다. 속아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긴 장마가 끝나고 날씨가 갤까 말까 하지만 더 이상 비는 오지 않겠구나 그러나 환한 햇빛도 비추지는 않을 것 같은 그런 날씨에 컨버터블을 타고 놀러갈까 말까, 하는 그런 감정과도 비슷한 심리가 느껴졌다. 그럼 괜찮은 거다.
영화의 내용은 이랬다.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의문의 실종 사건 후 단 며칠 만에 어른이 되어 나타난 주인공1과 유일하게 그를 믿어준 단 한 소녀 주인공2, 세상은 몰랐던 그 둘만의 특별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어떤 마술사가 주인공1에게 요술을 부려서 일시적으로 몸의 시간을 파파팍 당겼다가 나중 그 속도가 늦춰지는가, 마음과 육체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에 관한 하나의 실험인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눈속임처럼 보였다가 막판에 주인공1의 특이한 조로증 증세에 관한 자료를 살짝 엿보여주면서 영화는 끝났다. 결국 열린 결말이었다.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시켰다. 무책임한 감독이었을까? 모르겠다. 그 인간의 사생활도 그렇게 무책임할까? 그것 역시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는 대충 괜찮았고 재미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 미술의 마을에 도착했다. 동네는 특별할 것 같았지만 썩 신기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거나 뭔가 탐색하고 싶고 은닉된 사연이 있는 어떤 증후를 별안간 찾고 싶게 만드는 그런 신비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초딩 같은 동심과 무작정 모험에 빠져들고 싶어하는 중딩의 호기심은 충족되지 못한 채 난 집에 돌아갈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안이한 판단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새로운 점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나는 미술에 끌리지 않았다. 왠지 나는 앞으로 한동안 그것에 끌릴 것을 예감했다. 미술이 아니라 사주에. 어쩐지 난 거기 꼿힌 것 같았다.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듯 했다. 어쩌다가 나도 모르게 그것에 중독되어 버린 것 같았다. 운세, 바로 그것에! 내내 허탕만 치고 돌팔이 점집만 전전하더라도 나중 꼭 한 번 진짜 소름이 돋는 기절초풍할 만한 주술사를 만나고야 말겠다는 이상한 오기랄까, 푼수 같은 바보 같은 사랑에 빠져 앞뒤 분간 못하는, 하나에 빠지면 그것만 파고 또 파는 말괄량이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고야 말았다. 그건 거의 환각이었다. 점잔뺄 일도 아니고, 마음을 제어할 수도 없었으며, 심미안을 만나고 싶은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올라 도저히 말릴래야 말릴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손님이 별로 없을 듯 하지만 희박한 확률로 코끼리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을 것만 같은 그 점집에 들어갔다. 그곳의 이름은 밝힐 수 없다. 왠지 양치기 소년의 억울함을 공감한다고나 할까, 그런 측은하지만 딱히 밝힐 수 없는 부득이한 나의 방침 때문이다. 물론 그런 규칙은 즉흥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점집2라고 하면 될 것 같다. 그분과 나눈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우선 단락을 띄어야겠다. 다음 이 시간에.
4
자, 그분과 나눈 대화를 공개할 시간이 돌아왔다. 속고 속이고, 팔고 사고, 쓰고 읽고, 연기하며 구경하는 세상이지만 그걸 모두 혼자서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소설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근사한 식당에 예약하고 어떻게 진행될지 상상하고, 둘인 척 혼자 대결을 하고, 혼자 말하고 혼자 듣는 것처럼.
「자네는 여기 무슨 일로 왔나?」
그분의 생김새와 그곳의 정취에 대한 묘사는 과감히 생략한다. 절대 그걸 잘 못해서, 어려워서 건너뛰는 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바이다.
「점집에 점 보러 오지 뭐하러 왔겠습니까?」
나는 처음부터 좀 세게 나가기로 했다. 초반에 전문가 흉내를 낸 꼴이 됐다. 점집1에서 어째 좀 휘둘린 느낌에 아직도 조금 아찔했기 때문이다. 그게 싫다는 게 아니라. 그분이 하도 말씀을 길게 하시는 바람에 까딱 잘못했으면 앉아서 코 골고 잘 뻔 했다. 잘 참은 거지. 그러나 그게 절대 싫다는 게 아니다.
「자네 혹시 최근 거짓 술수에 엮여들지 않았나? 내가 보기에는 그런 화법은 젊은이에게 어울리지 않아. 꼭 일부러 가장하는 거 다 티난단 말이야. 왜, 무슨 일이 잘 안 풀리나? 여자친구가 바람 났나? 아니면 자네가 불륜이라도 저지르고 싶은가, 참고 싶은가? 확 그냥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어? 아니면 뭐 매사 나른하고 심심하고 따분하고 지루하고 뭘 해도 재미가 없어? 정말 그래? 설마 안 그럴 리가? 그렇다면 뭐뭐 하는 법, 그런 책을 사러 서점에 가고 동기부여 강연회에도 가 보고, 새로운 낭만을 찾아 꿈을 찾아 희망의 열매를 따먹으러 놀이공원으로 강변으로 공원으로 찾아갈 것이지 여기는 뭣하러 왔어? 혹시 이미 그런 고민과 시도는 다 거쳤는데 그래도 효과가 없다? 그렇다? 뭐 그렇다면 그거야 자네가 재미없지 내가 재미없는 건 아니니까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 그게 어디 자네 팔짜지 내 팔짜인가? 젊은이 인생 그리고 내 인생, 서로 가는 길이 달라. 달라도 너무 달라. 추구하는 장르도 다르고 선호하는 이성의 취향도 다르겠지. 간혹 겹치기는 할 테지만. 간혹? 글쎄!
어쨌든 다 불필요한 요설이고 사람 일은 본론이 중요해. 시작만 요란하고 과장이 심하고 엄살도 심하고 허풍까지 심한 사람, 그런 사람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야. 아, 난 아니야. 난 아니라고. 절대! 결코!」
잠시 고요한 휴지기에 접어든다.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내가 만난 도사는 만담에 매우 능숙한 분으로써 남의 운세를 봐줄 것이 아니라 극장식 카바레에서 스탠드업 코메디나 하면서 타인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쾌락과 1%의 퇴폐미까지 안겨주는 직업에 종사하는 로맨티스트가 더 어울려 보였다. 어차피 남의 사상을 자신의 이론인양 포장하여 설파한다는 점은 똑같지만 말이다.
「이 친구야, 뭘 그렇게 생각해?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뭘 망설여? 운세 처음 봐? 어? 왜, 이렇게 추궁받는 거 좋아하는가? 혹시 자네도...... 아니야 아니야.」
「저는 저의 가려운 곳을 남이 알아서 긁어주기를 바라는 그런 깍쟁이 같은 친구는 아닙니다. 자기 가려운 곳을 남이 긁어주는 사례를 하나 들자면 뭘까요? 뭐긴 뭔가요, 주인과 개 아닙니까? 주인이 막 긁어주면 좋아라 하면서 가만히 있고, 그러다 긁어주기를 멈추면 다시 하던 거 계속하라고 낑낑거리는 결코 밉지 않은 모습, 상상이 되시죠? 저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잠깐 저도 생각을 해봤습니다. 무엇을 생각해 봤냐, 바로 이것을요. 그렇게 도발하는 관능미, 탁월한 안목, 고결한 태도, 풍부한 감성, 우아한 위엄, 고상한 지성, 숙명 같은 순간의 연속, 때마침 찾아오는 행운, 잔잔하지만 셈이 빠르고 조용한 독심술, 손님의 신비감, 선망을 불러일으키는 손짓과 용건을 끌어당기는 몸짓, 악상의 연속, 회상을 불러일으키는 음조의 떨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자기도 모르게 시작된 그런 몰래한 사랑, 마술적인 대화, 너무 완벽하여 어쩜 해로울 수 있는 감식안, 그 어떤 유혹에도 꿈쩍도 않는 확고한 심지, 영매의 내공을 염탐하는 기벽, 사람의 마음을 끄는 환상의 술법, 그런 건 모두 정확히 저의 반대편에 부여해야 할 수식어들이죠. 제가 어떻게 어설프게, 네, 버릇없이 궁금한 걸 궁금하다고 섣불리 발설할 수 있겠습니까? 네? 그게 뭐 비밀이라도 된다고 말입니다. 네? 아니 그렇습니까?」
주술사는 뜨끔했을 것이다. 오늘 손님을 잘못 받았는데? 대체 이게 뭔 일이다냐? 얘 뭐야? 얘 뭐냐고. 뭐 하는 사람이야? 놈팽이야? 시방 나랑 자리를 바꾸자는 말이여? 바로 그와 같이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단 설마, 하며 경계심이 발동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자네 혹시 귀에 뭐 꼽고 있나? 뭐, 연극배우야? 지금 긴 대사 연습하는 거야? 앙? 아님, 뭐 랩이야? 지금 나 가르쳐? 어? 뭐, 계몽 그런 거? 여기는 학교 교실이고 난 학생? 왜 겁을 주고 그래? 왜,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이미 간파...했나? 내 내공을?」
「간파하긴 뭘 간파해요? 선생님이 양파에요? 별로 깔 거도 없구만. 속이 다 보여요. 속살은 아직 뽀야시네요. 제 소견으로 보자면 그 분야에서 아직 쟁쟁한 현역이시구만요. 너무 잘나가셔서 한때 그분들의 앙숙이셨던 거 같은데요. 어지간한 여자들이 선생님 만나면 그냥 가슴이 요동치고 어쩔 줄 몰라 했을 것 같아요. 번번이 여자들 가슴에 불을 지르고 다니셨구만요. 너무 과도하게 싱그러운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시다가 조금 지력을 일찍 소모하신 듯 하군요. 그 분야든 이 분야든 넉넉히 세 손가락에 꼽히실 위인을 제가 뭐라고 놀리겠어요? 어디 감히 저 같은 천한 것이......! 오해하셨구만유~ 그럼유~ 그럴 리가 있겠시유~ 선생님, 너무 겸손하시다. 소문난 무당이시라던데, 실존 인물로 진짜 세 손가락에 꼽히신다고 해서 찾아왔구먼유~. 어떻게 제가 감히... 에이~ 아니에유. 에이~ 어떻게? 에이~ 잘못 보셔도 한참 잘못 보셨시유~!」
「젊은이, 응석이 지나치구만! 본의 아니게 그분이 왔다가 가버리는 수가 있어! 경거망동하면 안 돼! 그럼!」
다시 침묵의 시간이 돌아왔다. 마치 광고가 나가는 시간처럼.
쓰잘데기 없는 대화 내용을 모두 옮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시간 가운데 주목할 만한 부분만 간추리고 넘어가자면 이렇다. 아! 당시 나는 그런 의심을 품었다. 그 양반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활 습관과 소비 유형은 물론 어디서 살았고, 어디 출신인지를 하나하나 맞추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노인 혼자 점집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 얘네들 일당이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심각한 추론을 하기에 이르렀다. 몇몇 논거에 근거하여 최소 3명에서 4명은 되는 듯 했다. 최소로 따졌을 때 말이다. 바람잡이, 천재 해커, 행동요원 그리고 특파원까지. 그 양반이 아마도 찔리니까 내게 역으로 먼저 선수쳤을 거라고 내다봤다. 나에 대해 조사하는 천재 해커의 음성을 몰래 이어폰으로 듣고 있었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설명으로 그 느낌을 전달하는 것은 뭔가 부족하니까 대화를 살짝만 음미하고 가겠다.
「젊은이, 집에 수영장 있지?」
「네.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우리의 영특한...... 아니 그분이 알려주셨지. 그럼.」
「......」
「집 마당에 잔디가 자라고 있지 않나?」
「네네. 오오! 와~ 이번에도 그분인가요?」
「허허허. 뭐 별 거 아니야. 그 정도야 뭐. 그까짓 것 아무 것도 아니지.」
「혹시 우리집에 잔디가 깔려있지 않았다면 그럴려고 하셨죠? 오오, 이런! 큰일이야, 보통 일이 아니라구. 자넨 잔디와 운이 맞아. 딱 들어맞아. 그러니까 잔디를 꼭 심어야 한다고!」
「뭔 소리야? 아직 신뢰감이 충분히 쌓이지 않았나? 무언가 더 기대하는 게 있어? 내 그럴 줄 알았어...(침묵)... 자네 혼자 뭐 하는 거 좋아하지 않나? 아니야 아니야. 약해. 뭐가 있지? 내가 봤을 때 젊은이는 아무리 봐도 작가 같은데, 아닌가? 아닐 리가 없는데. 딱 답이 나오는데. 왜? 요즘 대화가 잘 안 써지다가 딱 대화만 잘 써지나? 안경은, 고급품이고. 가방도... 어, 특별판? 한정품일 꺼야. 옷감도...... 젊은이 먹고 살만 하구먼. 여보게, 혹시 여자 좋아하는가? 좋아하는 거 같은데?」
「그럼 영감님은 싫어하세요?」
「아 이거 왜 이래? 이 일도 다 쇼맨쉽이 필요한 거라고. 아무래도 은근한 분위기를 보아하니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게 틀림없구만? 그렇지? 아닌가?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못 속여.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구. 어림없지. 다 넘어가도 나한테는 절대 안 통해. 그런데 그분은 가만있자, 종류가 다른데 오, 헷갈려. 2명 같은데. 오, 신기한데? 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나와 비슷한 별자리는 나도 생전 처음인데, 오오 이... 이... 이럴 수가!」
대화의 방식은 이와 같았다. 그리고 기억할 만한 특이사항은 하나가 더 있었다. 그분은 내게 예언을 하셨다. 얼핏 들으면 조언처럼 들리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예언임이 분명했다. 그는 먼저 내게 일주일 후 다시 오라고 했다. 그러다 일주일이 아니라 내일 다시 오라고 말을 바꿨다. 뭔가 좋은 일을 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무슨 좋은 일일까? 나 보고 자기 이름이 걸린 점집의 지사를 내라고? 그것을 브랜드로 키울 테니 마케팅을 담당하라고? 얼굴 마담? 그건 여자 몫인데? 그러나 그는 전문가였다. 내일 오면 그 비밀을 공개하겠다고 했으니, 그래서 나는 내일을 고대하게 됐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5
나는 다시 점집2에 찾아갔다. 당연히 그곳에 가기 전에 이런 헛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무슨 생각일까? 답 나오지 않나. 하루는 점집1에 갔고, 다음날 점집2에 갔고, 세 번째 날 다시 점집2에 갈려고 하니 그 뭐지 수학 용어, 수열? 등차던가 피보나치던가... 미적분 배울 때부터 수학 시간에 뒤에서 고전을 읽었더니 이 모양일세, 꼴 좋다! 아무튼 나는 점집2에 갔고, 그곳은 하루 동안에 없어지지도 변하지도 않았고, 주인 양반이 자리를 비우고 웬 젊은 아가씨가 그 자리를 대신 지키고 있지도 않았다. 하긴 그는 내게 거리두기, 밀기, 모른 채 하기 등의 전략을 구사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연애하는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우리는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엄숙한 분위기에서 좌담을 나누기 위해 마주보고 앉았다. 아, 그는 나로부터 어제 복채를 받지 않았다. 왜 그런지, 에 대해 뭐라 뭐라 설명했는데 그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중요한 내용은 아닌 듯 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어르신, 오늘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때 아닌 북동풍이 불고, 하늘의 구름도 이상하고, 오늘 같은 날은 기분이 무언가 세한 게 왠지 모르게 꼭 오늘의 운세를 점치면 안될 것 같은 일년에 딱 하루 정도 된다는 바로 그날 같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뭔 풍이 불어? 젊은이, 지금 날 떠보나? 나를 공부시키지도 않고 바로 시험장에 집어 넣은 겐가? 왜 내가 그리 신통치 않아보이는가? 내 이래 봬도 못 맞추는 게 없는 도사라고. 그냥 자칭 그렇게 이름을 내 마음대로 갖다붙인 게 아니라 다 어디서 사사 받고 오랜 수련을 거친 결과라니까. 이 바닥에선 그래도 꽤 유명해. 내가 자부한다면 그건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말이라고. 내 입으로 꼭 내가 직접 말해야 한다는 게 썩 꺼림직하네만, 지금 이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어제 뭘 먹었는지, 잠버릇은 어떤지, 어디 갔는지, 어떤 음흉한 생각을 했는지 나는 다 알고 있단 말이야. 난 다 알고 있다고. 모두 다! 푸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침묵)... 이거 이거 순 색마구만! (그는 몹시 험상궂은 표정으로 돌변했다. 그러나 안면을 싹 바꾸어 활짝 웃기 시작한다. 그에게 숨겨진 딸이 있을까? 모를 일이다) 농담이야, 농담이라구. 왜? 나는 농담도 못하나?」
「그건 아닌데... 별로 재미가 없어서요.」 난 과도하게 너무 솔직한 성정을 탓해도 탓해도 모자랐다.
나는 내가 먼저 물어보기 싫었다. 그가 알려주겠다는 어떤 좋은 일은 대체 무엇인지를. 그러나 슬슬 그가 그런 말을 했었나 기억이나 제대로 하고 있을지 사뭇 걱정이 되고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건 그냥 묻지 말고 기다리지도 말고 설레지도 말며 잊기로 했다.
그 후 그와 나 사이에 오간 대화를 검토해봤을 때 특별히 상기할 만한 중요한 대목은 없었다. 전혀. 지극히 일상적인 안부를 물었고 지극히 의례적인 범위 내에서 지극히 예상할 수 있는 질문과 답을 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때 그와 내가 혹시 한 명은 수감된 자고, 나머지 한 명은 그를 면회하러 온 사람이 아닐까, 라는 공상에 빠져들었다. 일은 잘 되나, 사는 건 어떠나, 꿈은 많이 꾸는가, 만나는 사람은 있는가, 어디에서 살았는가 등등. 그래서 나는 첫째, 이 양반이 어제 내게 했던 그 의미심장한 말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둘째 내가 여기 괜히 다시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나도 참 싱겁네 할일 더럽게 없네, 그러면서 나는 점집에서 나올려고 했다. 인사를 마치고 나는 뒤돌아섰다. 설혹 대하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돌아서면 안 되고 굽히고 뒷걸음질로 나와야 했을까? 웬걸! 그리고 그때 내가 한두 걸음 뗐을래나, 그러나 그는 내 뒤통수에 대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사 대신에.
「젊은이, 내가 어제 좋은 일이 생길 거라면서 오늘 다시 오라고 했지? 차분히 기다렸드니 끝내 먼저 물어보지 않는군 그래. 내 예언은 어쩜 일기예보랑 비슷해. 그러나 우산은 챙기는 게 좋겠지? 날이 궂으면 미리 허리가 쑤신다거나 손가락이 결릴 수도 있어. 내가 봤을 때 자넨 아마 척키 닮은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자넨 가진 거도 많고 이 복 저 복 많아. 많이 풍족하진 않아도 행운아야. 그런데 자넨 왜 그를 부러워하나? 어? 이해가 안 돼. 혹시 그는 자네의 친구였고, 설마 미대 조각과를 같이 다니지 않았나? 그리고 학과 여학생 절반이 그의 마수에 넘어간 거 같은데, 어, 여기 그렇게 나오는데. 진짜 딱 절반인데, 얘는 그게 전문이라고. (난 그때 하마터면 뒤를 돌아볼 뻔 했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따질 뻔 했다) 그 척킨지 뭔지 그 녀석은 뭔 어설픈 작업을 많이 했네 그려. 산을 오르다 말고, 별을 쳐다보다 그 별을 어떤 남자가 따다가 남의 여자친구에게 주고, 얘도 한때 채팅을 많이 했는데, 그렇지만 얘 전공은 딱 무책임하게 인맥을 파고들어서 이성친구에게 접근하는 것이구만. 하지만 상대 친구들도 마다하지는 않았구만. 선수야 선수. 누구, 누구, 누구, 누구 다 그에게 넘어갔어. 어설프게! 순 저질이구만. 얘는 진짜 마수를 쓰는 친군데! 에잇! 괜히 쓸데없는 거만 보여. 점집 문을 한동안 닫아야 하나?...(그는 한동안 침묵한다. 점집 문을 닫을 게 아니라 내가 떠나면 될 것 같았지만 도대체 그가 알려준다는 좋은 일이 뭔가 그게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나는 얼음땡이 되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뭔가 수정구 같은 걸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내가 뒤돌아서서 나갈려고 할때 내 마음을 붙잡아두고 놓아주지 않는 듯 했다)... 내 말했지? 좋은 일을 말해준다고. 오늘 있잖아, 서쪽에서 누구를 만날 꺼야. 귀─인! 시내로 가라고. 시내로. 내 말을 기억해. 누군가 접선을 시도할 꺼야. 은밀하게! 새로운 사람. 오늘은 길일이야. 그럼 예술 잘 하고, 잘 가시게. 그런데... 그런데... 꼭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나오는데, 어쨌든 기억하라고. 반드시 서로 만나게 되어 있으니 말이야. 언제 인연이 되면 또 만나게 되겠지. 나중 다시 만나면 반가운 척 궁금한 척 안부라도 물어줘. 거 왜 있지 않나, 인생이 그대에게 친절을 베풀었기를, 부디! 뭐 그런 말 말이야.」
그는 내 뒤통수에 대고 금방 끝날 것처럼 말하다가 한참을 끌었고, 대미는 예언으로 마무리했다. 난 돌아설까 말까 망설였고, 끝내 적절한 시기를 놓쳤으며, 무언가 매정한 끝맛을 남긴 것 같아서 조금은 씁쓸했다. 즉 나는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은 것이다. 뭔가 멋있어 보일려면 고개만 살짝, 많이도 말고 살짝만 각도만 슬쩍 틀어줘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뭔가 있을 것 같은데 라고. 슬슬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뭔지도 모르는 예언의 실현을 동경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절묘했다. 그러나 헛소리가 많아서 그분은 썩 믿음직스럽지 않았고, 그건 예언보다는 소망에 가까웠고, 내게는 거의 소원으로 들렸다. 그러나 난 뭔가 그가 그냥 허당은 아니라는, 어쩌면 그의 말대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기이한 보라빛 예감과도 같은 일말의 어떤 기다리는 즐거움이 솟구치는 걸 감지했다. 그러나 기본 맥락은 이랬다. 예언은 무슨, 영감탱이도 소싯적에 척키과였던 것 같은데! 난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말았다. 어디 그의 지령이 들어맞나 들어맞지 않나 두고 보자, 하면서. 하지만 괜한 궁금함은 날 따라다녔다. 그분은 도대체 왜 그런 이상한 발언을 해서 날 귀찮게 하지, 그와 같은 의문이 또 다시 내 곁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고, 나는 시내로 갔다. 그분의 예언대로!
6
오늘은 토요일이다. 여기는 시내다. 나는 혼자다. 날씨는 그럭저럭 괜찮다. 물도 음 좋다. 지금은 가을인데 꼭 어딘가 모르게 봄바람이 부는 듯 하다. 다들 집에서 무척 신경 쓰고 나온 걸로도 모자라 수시로 손거울을 보고 또 보는 것 같았다. 혹시 영화 찍나? 아닐 것이다. 그냥 사시사철 춘풍은 부는 것이고 사시사철 마음은 동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아까부터 웬 꼬마가 날 따라온다. 난 오늘 할일이 있다.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서점에도 가고 문구점과 극장과 미술관도 들려야 한다. 나는 오늘 바쁠 것이다. 물론 일정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계획의 빈틈을 확인하고 점검하자면 음, 햄버거도 먹어야 한다. 난 바쁜 현대인이다. 그런데 어느새 그녀와 나는 친해졌다. 그녀는 선수 같다. 그녀는 누구일까? 누구긴 누군가 방금 말하지 않았나, 누군가 날 따라다녔다고. 처음에 꼬마인줄 알아서 신경쓰지 않은 점, 그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어느새 곁을 내주게 된 것이다. 그러면 절반은 넘어간 것이다. 주객이 바뀐 것 같다만 그쪽 이론대로라면 그것이 맞다. 얘는 방법을 알았다. 그것도 아주 잘 알았다. 그녀는 일단 내 시야에 안면 노출을 굉장히 많이 시도했다. 그리고 한참을 따라다녔다. 그보다 약간 덜한 정도로 눈빛으로 무언가 찡한 신호를 보냈으며, 따라서 그녀는 사람을 아니 남자의 마음을 궁금하고 기대하고 추측하고 비로소 설레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성공에 '대'자를 붙여도 썩 엇나간 평가는 아닌 듯 했다.
그녀를 편의상 X라고 부르겠다. X? W는 위, Y는 예스? 뻔한 딕 앤 제인이 뭔 내용이었드라? 대체 이게 뭔 소리야? 다 X 때문이다. 시작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지도 모르게 부드러웠고, 과정은 그야말로 은근했고 접근은 동물적이었으며, 그녀가 건넨 첫마디는 놀랍게도 제법 촌스러웠다. 오빠 시간 있어요, 라고. 그래도 다행이다. 저기요 오빠, 커피 있으면 시간 한잔 하자고 하지 않아서. 윽, 꺄악! 난 처음 그녀가 시간을 물어보는 줄 알았다. 초면인데 불쑥 오빠라고 해서 내가 진짜 그녀의 오빠가 된걸까 착각했다. 그러다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며 날 몹시 추궁하길래 난 나도 모르게 깜빡 잘못 했으면 동문서답을 할 뻔 했다. 원하는 게 뭐야, 라고. 누가 보냈어, 라고. 왜 따라다녀, 라고. 그리고 그녀는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목에는 불독 목걸이를 찼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눈화장을 정성스럽게 했고, 새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눈탱이를 어디서 한대 얻어맞은 줄 알았다. 뭘 생으로 잡아먹은 줄 알았다. 그러나 처음엔 무엇보다도 초딩인줄 알았다. 다시 한번 쳐다보니 중딩인줄 알았다. 그러나 몇 번 더 바라보니 그녀는 숙녀였고, 그녀는 예뻤다. 그렇다. 그녀는 여자였다. 성숙했다. 그러나 터프했다. 근사하게 차려입고 고고한 목선을 유지하며 고상한 말투와 세련된 화제와 우아한 몸동작에 까다로운 예법을 잘 연기한다면 잠시나마 남자친구의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을 것 같다. (잠시, 가 뭔가?) 길지 않아서 이런 말을 내뱉겠지만. 특기는 다 다르니까, 기질상 아양은 도저히 해도 해도 안 맞는 부류도 있기 법.
「에잇, 못해먹겠네! 아 뭐야 이거, 뭔 면사포에 장갑에 아 거슬려 거슬려.」
딱 하나 신기한 재주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나와 관련된 것이다. 겨우 겨우 간절히, 겨우 겨우 가까스로, 겨우 겨우 어렵게 도달 했어. 뭐에? 나는 뭐뭐했다 나는 뭐뭐했다, 로. 그런데 얘 때문에 얘가 나타나서 얘 위주로 그것이 바꼈다. 직간접적으로 다. 그건 뭔가, 뭐로 바꼈다는 말인가? 뭐로? 그녀는 뭐뭐했다 그녀는 뭐뭐했다, 로. 별거 아닌 거 같지만 별거 아닌 게 아니다. 엄청난 거다. 그녀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꾸는 놀라운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능력이 과연 온전히 그녀에게 예속되는가, 라는 의문은 남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오빠-였다.
그런데 그녀는 어쩌다 그와 같은 시적인 말을 일상적으로 하게 됐을까? 어쩜 그럴 수 있을까? 시적인? 정정하면 재치 넘치는.
「오빠, 전 미래에서 왔어요. 저를 알고 싶지 않으세요? 처음에는 별로였다가 슬슬 볼수록 괜찮아지죠? 그게 제 매력이에요, 오빠. 도대체 난 누굴 닮아 이렇게 예쁠까? 왜요? 제가 말하는 게 너무 고혹적이에요? ...(잠시 멈칫 한다)... 오빠, 제 첫인상은 어땠어요? 얘는 뭐하는 애일까 라는 추측의 시위를 끌어당겼나요? 아니면 얜 어떤 삶을 살아왔고, 키스는 지금까지 몇 번 했고, 마지막 포옹은 언제였고,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그게 궁금했나요? 말 못할 이유 없죠. 지금은 아니고. 나중 오빠 하는 거 봐서. 오빠, 예측 불허 같은 낌새를 눈치 챘어요? 아니면 오빠의 여자친구가 고용한 첩보원은 아닐까, 지금 날 유혹해서 넘어가나 안 넘어가나 지켜보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한쪽은 가슴조리고 한쪽은 좋다고 헤헤거리고 그런 수순을 밟을 지도 모를 일이지 라고 그렇게 의심했어요? 오빠도 참... 뭐, 상상이야 자유죠. 오빠, 단지 전 미래에서 왔다는 거, 그것만 기억해두세요.」
그러다 나는 무시하기 작전을 썼다. 질투심 유발하기를 쓸 여건도 처지도 아님. 아니면, 달리 어떻게! 그럼 그렇지 하면서 뭔가 내가 권력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까닭없이 버튼을 누르면 기쁨조로, 다시 버튼을 눌르면 요조 숙녀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또 후배로 또 유치원 동창으로 마음대로 조정하며 쥐락펴락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랬는데, 정말 거의 고지를 점령하고 깃발을 꼽기 직전이었는데 난 그녀 X에게 말려들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녀를 초장에 확 휘어잡는 데 보기 좋게 실패했다. 어차피 예정된 일이었을 것이다. 핏!
「오빠, 우리 집에 갈래요?」
「내가 너네 집에 왜 가? 얘 이상한 애네. 뭔 큰일날 소릴 하고 있어?」
「농담이에요 농담. 앗, 그럴 게 아니라 우리 지금 오빠집에 갈까요? 와 재밌겠다. 왜요? 집에 뭐 꼬실꼬실 진공청소기가 고장났거나 꼬실꼬실 강아지가 말썽을 부려놨을까 봐요? 괜찮아요. 그래도 뭔가 걸린다면 다음에 가기로 해요. 그러면 되죠. 오빠, 그런데 너무 과장해서 부정하는 거 같은데...... 강한 부정 아닌가요? ... 오빠 방금 쫄았죠? 헤헤헤, 아 웃겨!」
만일 이것이 TV에 나오는 드라마였다면 난 처음에 주인공이었다가 어영부영 슥 주인공의 조명은 그녀를 비추는 형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난 어떤 위기감과 말리고 있다는 흐름상의 기세를 역전시키고 싶은 도전 욕구 같은 걸 느꼈다.
「오빠 그냥 내가 남자 하고 오빠가 여자 할래요? 네? 어때요? 그럼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요? 난 재미있을 거 같은데 오빠는 어때요?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오빠~ 네?」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넌 이미 지금도 충분히 숙녀야. 네 짝은 오빠가 찾아줄께. 딱 기다리고 있어!」
그러다 그녀는 자기가 쓴 시라면서 핸드폰으로 소셜 네트워크에 적혀있는 시 한편을 보여주었다. 어머나! 글쎄! 에고머니나! 그것은 내가 쓴 시였다. 지금은 비록 작자미상이 되었지만 엄밀히 말해서 원작자는 나였다.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 난 열 받기 시작했다. 뚜껑이 열리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커피포트가 달아오르고 머리 위로 수증기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실은 그 시를 자기가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건 실은 얼마 전 인터넷에 떠돌고 있던 작자미상의 시라고 했다. 제목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처럼 감상의 변을 토로했다.
「어떤 미친놈이 그런 정신나간 시를 썼는지 참 한심하죠, 오빠? 어지간히 할일이 없었나봐요.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지가 시인이야? 시가 장난이야? 아 참 나 얼척없어. 뭔 요즘은 개나 소나 다 자기가 작가고 예술가고 시인이고 지성인이래. 잘났어 정말. 어디서 다 갖다 베끼고 모으로 짜집기 해서 뚝딱 그림일기 쓰듯 만들어가지고 말이야. 그게 뭐냐고! 어? 찌질한 놈 같으니라고. 아예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오빠도 뭐라고 좀 해 봐요. 이런 교양 없는 애들은 좀 얻어들어야 정신을 차려요. 대관절 뭣 때문에 이렇게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이 최근 자주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어때요? 오빠 클 때도 그랬어요? 오빠는 언제 컸어요? 어떻게 컸어요? 오빠의 제1차 성징기는 언제였고 제2차 성징기를 제대로 거치기는 거쳤어요? 어때요? 오빠! 저는, 섹시한가요? 성적 매력이 별로에요?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네? 아무튼 이런 애들 때문에 제가 남자친구가 없었나 봐요. 오빠, 제가 정말 그렇게 별로에요? 오빠, 제가 너무 도도해서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걸까요? 많이들 제가 남자 엄청 많이 사겨본 것처럼 보고 주위에도 남자 엄청 많을 거 같다고 예상하지만 실은 저 남자 한번도 사겨보지 못했어요. 그건 바로 이런 애들 때문이에요. 이해가 안된다구요. 정신나간 얼간이 같으니라고. 이런 머저리 같은 놈. 영구. 땡칠이. 바보. 밥통!」
우린 그렇게 친해졌다. 그리고 나는 오빠 라는 말에 세뇌당했다. 완전 거칠게. 오빠? 응, 오빠! 말의 시작도 오빠 끝도 오빠. 틈만 나면 오빠, 자나 깨나 오빠! 밤이나 낮이나, 앉으나 서나! 숙녀여 장래 그대가 만나게 될 조랑말을 타실 듯한 왕자님, 지금 당신을 사랑하시는 눈부신 그분은 어쩌면 남자로 잘못 태어났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친구들이 남자로 태어난다면 오빠는, 오빠는, 오빠는 말이야 라는 '오빠는' 화법의 달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참으로 신기한 게 뭐냐면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듯이 그림자 없는 햇빛은 있을 수 없는 법. 거기에 한번 걸려들면 영원한 행복일 수도 있고, 그 장단에 어쩌다 잘못 놀아난다면 이런 묘비명을 감수해야 할 운명에 휩쓸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의 인생은 불행했다. 대체 이건 세상사의 오묘함일까 아니면 지엄한 이치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그 둘이 만나는 걸 세상에서는 천생연분이라고 하고, 간혹 악연이 될 가능성 또한 전무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물론 의심은 갔다. 누가 받았을지 모르지만. 나도 이젠 가뭄에 콩나게 부장님 개그를 하기로 했다. X는 점집2와 뭔가 관련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증거는 없다. 심증을 발전시켜봐야겠다.
당연한 수순에 따라 나는 거리를 걸을 때 일정하게 일행이 아닌 것처럼 그녀와 거리를 뒀고, 찻집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실 때도 그녀는 나와 겸상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옆 탁자에 앉았다. 물론 계산은 내가 모두 치렀다. 남자에게 그 정도 사려는 기본이다. 어떡하다 영화에 나오는 어른 주인공1과 소녀 주인공2로, 이질적인 조합으로 앨범을 발표하고 책을 같이 쓰고 연구를 같이 하는 동료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진짜 그랬다. 어쨌든 그렇게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연락처도 가르쳐주지 않고 나는 X와 헤어졌다. 교분이 갑자기 뚝 끊겨버렸다. 뭔가 너무 우연을 믿은 것이다. 걸핏하면 운명을 탓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1주일이 지났다.
7
내 삶에 누군가 들어왔다. 어느 날 그랬다 라고 나중에 회상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은 그렇다. 내 삶에 누군가 들어왔다. 결혼식장에서 두터운 저음으로 선언하는 사회자의 '신랑 입장' 같은 말은 아닐 것이다. 경기장에서 말을 빠르게도 느리게도, 운동 이야기도 다른 이야기도 자유자재로 술술 청산유수로 말하는 스포츠 진행자의 '선수 입장' 같은 말도 아니리라. 물론 어중이떠중이가 나의 신성한 삶의 영역을 침범한 것도 아닐 것이다. 곧 그것은 정해진 게 없다는 뜻이다. 아직 모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더욱 좀 더 심층적인 토론이 필요하다. 그만하면 이유는 충분하다. 잠시 그녀 얘기를 더 해야겠다. 그러고 싶다. 잠깐, 은 좀 더 길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안심해도 될 만큼. 그러니 잠시 회상이 필요하고 그것은 언어로, 언어 가운데서도 글로 옮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전형적인 마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믄 미쳐븐께!> 일단 '우리는'식 화법을 구사한다면 그것은 대표적인 상남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말은 최소 절반은 맞다. 아니라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정신이 이상해지지? 그건 아마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여자들이 자신의 동성 친구와 있을 때는 막 비비 꼬고 꼬리 치고 목소리를 사근사근 화제도 매우 신중하게─더없이 조심스럽게─사적으로 엄선하게 고르고 막 가려서 하고, 절대 그러지 않지. 결코, 절대로. 못 미더운 친구와 함께 하지 않는 이상 그냥 막 하지 막, 막 안 가리고 막, 사석이니까. 어느 만큼? 막! 알면 알면, 그만 하자. 하지만 남자가 있으면 얘기가 달라. 남자만 나타나면! 남성이 등장했다 그러하면 골키퍼가 있든 없든 그 골키퍼가 친구든 누구든, 낭군님이 내 곁에 있든 멀리 있든, 남자만 보이면 정신 못차리는 것과 어쩌면 비슷하지 않을까? 기분 좋은 날 타자가 투수의 공이 수박만하게 슬로우비디오로 보이듯 그 미묘한 섬세함은 유독 꾼에게만 들키는 것일까? 그럴 리가! 이 자발없는 설명을 단 한 단어로 압축하면? 본성! 머리카락 찰랑찰랑, 눈빛과 태도가 바뀌고, 꼬리 살랑살랑, 아첨 딸랑딸랑 그러나 요염한 고양이 목에 '애교' 방울을 달면 좋을텐데 대체 누가 달지? 그것이 문제로군. 허나, 그렇지~ 정답은 그거야 그거라고. <묻지마세요!> 참고로 이 단원의 이 문장 앞에서 오빠라는 단어는 몇 번 나왔고, 이 단원의 이 문장 다음에는 몇 번 나온다. 틀릴 수도 있다. 바뀔 수도 있다. 55? 66? 워, 77? 헉 88? 아담한 44? 나는 어느 마초협회에서 정식으로 공인받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이상한 신호랄까 어떤 애정에 대한 무언의 외침같은 극심한 요구를 느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정도를 눈치채지 못하는 남자가 어디 흔하겠냐마는. 그녀는 그렇게 쉬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트 뿅뿅을 내게 보냈고, 쉽게 드러나는 윙크도 가끔 보냈다. 가끔? 조금 더. 하트 뿅뿅, 정말 그것이 막 보이는 듯 했다. 나는 그걸 진짜 막 맞기도 했고, 날 피해가기도 했으며, 그건 마치 장난감 물총을 쏘면 연속으로 나가는 물풍선인 것만 같았다. 정말 그랬다. 나는 처음에 얘가 눈에 먼지나 뭐가 들어간줄 알았다. 정말로 어디서 눈탱이를 한대 맞아 눈화장은 물론 무리한 윙크까지 남발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물론 나는 대놓고 차갑게 묻지는 않았다. 다른데 가서도 아무 남자한테나 그렇게 막 눈웃음 짓냐고. 그녀에게 무수한 아양과 쉴새없는 교태는 기본이었다. 식은 죽 먹기, 가 아니라 습관이었다. 즉 그녀는 재능을 타고났지만 사는 동안 내내 학습하고 연마해서 그 경지에 올라선 듯 보였다. 당연하게도 그녀가 동성 친구와 있다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할지 눈에 선했다. 상상이 되었다. 넉넉히. 그 극심한 차이는 우스운 혼잣말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래서 오빠라는 단어의 끊이지 않는 반복과 아주 미세한 비음과 향수는 향수까지만 으응?, 그리고 사랑에 빠진 여자가 보이는 일반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얘가... 설마... 날 좋아하나?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그녀의 자유다. 그러나 어깨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로 새겨진 사랑의 큐피트 표시가 있는 진정한 로맨티스트는 눈빛의 흔들림과 동공의 떨림과 나를 향해 노력하는 언어 외적인 바디랭귀지를 근거로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대번에!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따라서 나는 감성이 아닌 이성에 호소하여 일단 더 지켜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인물 유형은 마지막 화룡점정을 절대 찍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건 다 해도 그것 하나만은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되니까. 왜 그런지는 몰라도. 그녀는 최후의 고백 즉 직접 화법, 그것은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절대 선택할 수 없다. 그녀로써는. 그것은 일종의 불문율이다. 그 묵계는 지구의 역사와 함께 했다. 거기까지만 알아두자. 오히려 장기전에 돌입했으면 했지! 그 때문에 사랑도 변한다. 애증으로 또 무엇으로. 그러므로 장래 나의 일관된 행동 강령이랄까 그것은 무엇이겠나? 그냥 지금 이대로 지금처럼 지금과 같이 죽 가는 것, 바로 그것일 것이다. 즐겁게 어쩜 슬프게. 사랑을 받아주지 못해서 나는 너무나도 미안하고 나도 정말 답답하다는 듯이. 그러나 어떻게 보면 객관적인 시각으로 관전평을 내린다면 이것 역시 너무 비겁하고 너무 가혹하지 않냐 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선택할 수 있는 방법, 내밀 수 있는 카드는 단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무엇일까? 그게 뭐 그렇게 대단히 중요한 요점이라고 밑도 끝도 없이 빙빙돌려서 반문하냐고? 질질 끌지 말라고? 어디서 적반하장이냐고? 오케이, 인정! (손가락 딱, 의표를 찌르는 듯한 삿대질) 상대방의 감정이 특별하지 않다면 그 연정이 유일한 게 아니라면 그 사랑의 혜택을 오직 나만 받는 것이 아니라면 똑같이 오리발로 응수할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많은 뭇남성들, 즉 뭐가 이렇게 복잡해~ 아 정신없어~ 뭐야 이거 재미 하나도 없어~ 관심 없어~ '내가 쉬워 보이나 봐'가 아니라 쟤는 단계가 보이는데 어렵지 않겠는데~, 하시는 분들 바로 그분들은 그렇게나 전장을 전전하며 공부하고 경험하며 언제나 멜로드라마와 같은 삶과 함께 하지만 여전히, 여전히 사랑의 약자로 남기를 자처한다. 아주 꿋꿋히. 그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 그분들은 꿈이 바뀌고 연애에도 실패해봤으며 우정을 불신하고 운명을 탓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사랑의 밧줄에 꽁꽁 묶이게 된다. 밧줄로 꽁꽁 밧줄로 꽁꽁 단단히 묶어라 내 사랑이 도망가지 못하게, 유행가 가사처럼. 그래서 당분간은 도망가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숙명이다. 왜?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숙제로 남겨놓겠다. 쉽게 가면 재미없고 그걸 풀어서 설명하면 그게 어디 연애지침서지 소설인가?
그런데 그분들은 어떤 분일까? 그녀가 환상곡이나 하프시코드 소리나 흔한 유행가 즉 사랑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데 이런 노래를 트시는 분들이라면 그나마 낫다. Judas Priest의 Dreamer Deceiver, AC/DC의 Whole Lotta Rosie, Iron Maiden의 Hallowed Be Thy Name, R.E.M.의 Losing My Religion, Lynard Skynyrd, Yngwie Malmsteen 등등. 음악 이야기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그나마 낫지 않은 걸 또 따질 수는 없으니 이건 여기서 줄인다. 다시 돌아가서 어, 주제가 뭐였드라... 나는 숙녀를 아꼈을 뿐이고, 나는 숙녀에게 자상했을 뿐이고, 나는 숙녀에게 사랑을 가르쳤을 뿐이고?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뭐지, 뭐드라, 뭘까... 혹시 내 생애 단 한 번만이라도 사랑, 아니었나? 아니라고? 맞다고? 모른다고? 오오 그래 학문이었다. 상업이 아니라 학문!
사회심리학? 학문이다. 정신분석학? 학문이다. 그러면 사랑은? 사랑학, 이라고 그런 게 있나? 당연히 없지, 있을 리가 있나.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인간에게 어느 정도 선험적이어야 하는 인문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학문이 틀림없다. 사랑학, 있다고 봐도 손해볼 건 없다. 마치 사랑법처럼. 사람들은 알고 있다. 사랑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라는 것을. 그러나 사랑 노래는 전한다. 가슴 아프게.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뭐가 맞고 뭐가 틀릴까? 뭐가 맞고 뭐가 틀리냐, 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도저히 감을 못 잡는 어떤 남성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세월이 가도 모른다. 여자 앞에서 사랑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거짓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연기하고 착각하고 빙의해야 한다는 것을. 그녀 앞에서가 아니라면 당연히 머리 아픈 주제로 선두까지는 아니지만 상위권을 다툴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나, 사랑에 관하여 이미 말을 꺼내버렸는데! 사랑 뿐인 마치 그것이 전부인 듯한 세상에 이미 태어나버렸는데! 사랑이 전부라는 그녀와 이미 사랑에 빠져버렸는데! 비록 혹시나, 가상일지라도! 아마도 몰래한 사랑일지라도!
인생은 콜라처럼 짜릿하기도 하지만 우유처럼 담백하기도 하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를 만날지 모른다. 백마 탄 멋진 왕자님을 만날 수도 있고 못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옷깃을 스친 누군가를 알게 된 것은 어쩌면 그건 행운일 것이다. 요만~한 쪼그만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따~만한 행운일 것이다. 지금 아마도 점집 몇이지? 아, 점집 2의 도사님이 점지해주신 귀인이 얘일 것이라고 얘가 맞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 예언에 많은 걸 걸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생? 그녀 때문일까 판돈 때문일까 어머나 인생이라는 고귀한 말이 나와버렸네! 인생은 뭐다, 라는 시간이 돌아온 것인가? 그런가? 와우, 해야 하나? 갑시다. 자, 빠져봅시다. 인생은 무엇일까? 정말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네 인생에서 인생은 과연 얼마나 예측 가능하고 어느 만큼 세상사에 관여할까? 그것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우리 삶을 뒤흔들고 휘두를 수 있는 뭐 그런 어떤 거대한 존재인가 위대한 이상인가 지대한 철학인가? 무대가 이처럼 강연장의 분위기를 띄면 어려우니까 극장식 카바레 공연장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나마 낫다. 그러면 인생은 뭐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음... 어... 아... 지른 게 있어서 피할 수는 없고... 사석이라면 우리는 원래 냉엄하게 끊으면 그만인데 화내면 되는데 것도 안 되고... 꼬랑지 내리기도 모양 빠지고... 인생은 오빠다, 이런 값싼 농담으로 퉁칠 수는 없는데 어쩌지... 정말 어떡한담... 진퇴양난이다. 그러나, 뭔가 막 생각날 듯 생각날 듯 하다가 딱 생각났다. 오케이! 사랑은 없고, 인생은 거짓말이다. 어, 그렇다. 진짜다. 정말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인생은 그렇다.
인생은, 바로 그런 것이다. 오! 아아! 어머나 어머나! 인생이 어떻다, 가 나왔는데 과연 여기서 끝내도 되나? 뭔가 싱거운데? 거짓으러라도 앵콜을... 요청이 없어도 끌어내지만 않는다면 무대에 남아야 하나? 이번에는 이것만으로는 뭔가 아쉽다. 그러면 추첨머쉰은 돌리지 말고, 환상머쉰도 가동하지 말 것이며, 하트 뿅뿅 나왔으니 이왕지사 '여자'가 나왔으니 반복컨대 <여자는 뭐다> 그것을 거론하는 것은 어떨까? 새로운 시도! 본론은 그저 그래도 상투적이어도 시도는 새롭게. 잠시 내 말 좀 들어봐 다음에 인생이, 오늘의 운세 다음에 예언이 나왔으니 늦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나! 누구에게? 여자에게! 무엇이냐면, 여자에 대해서. 어떻게, 여자는 뭐다에 대한 변주를. 자, 시작해보자. 그분 자주 오시는 거 아니니까. 여자라... 여자는 어떤 존재일까? 남자가 오빠면 여자는 오빠라고 부르는 역할로 그것에 대한 임무를 완수하고 그녀에 대한 설명은 끝나는 것일까? 끝은 무슨 시작도 안 했는데! 남자에게 여자는 영원한 미스테리일 텐데 틈틈히 중요한 주제로 다뤄야 마땅하다. 지당한 말씀. 오케이! 정리됐다. 여자란 무엇이다, 가 완성됐다. 여자는 그런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는 긴장된다. 여자는 평소보다 우아해져야 한다. 반드시 고상함은 나아져야 한다. 목선을 꼭 고고히 보여야만 한다. 무엇보다 나를 근사하게 선보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순간 여자는 일상적인 나보다 좀 더 세련된 내가 된다. 저절로. 자동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언제? 남자가 나타나면! 품위, 그녀에게도 원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잊고 살았을 뿐. 그때 여자는 지성마저 아찔해진 듯 착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여자가 아니다. 남자다. 여자는 남자가 나타나면 긴장한다. 그로부터 뭔가 싫지 않은 어떤 분위기가 느껴지면 여자는 모든 것이, 거의 모든 것이 바뀐다. 바로 옆에 내 님이 있어도? 물론이다. 설마 팔짱을 끼고 있어도?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미 순위권 밖으로 밀려나버린다. 그 순간, 아주 잠깐 만큼은 차였다고 봐도 된다. 차인 게 뭔가? 행인1과 같고 정물화 속의 과일이며 빗이고 화분일 뿐이다. 아니라고? 모르겠다고? 그럴 거라고? 아니기는! 기억하자. 여자는 연기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을. 그것은 남자가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이란 것을. 남자는 토끼고 여자는 거북이다. 다시 여자 이야기로. 여자는 어느 범주에 드는 남자가 얼마의 범의 안에 들어오면 여자는 그런다. 여자는 말도 조심히, 눈빛도 그윽히, 커피잔에 입술이 닫는 딱 그 순간에도 눈빛은 저멀리! 여자는 천상 숙녀다. 우리는 그러지 않지만 여자는 그런다. 새롭게 등장한 남자, 그가 미남이면 여자는 더 긴장한다. 그의 목소리가 낮으면 더더욱 떨린다. 아흐흑! 그때 여자는 설렌다. 어쩜 다리가 풀린다. 진짜 주저앉기도 한다. 어쩜 흥분할 수도 있다. 여자의 기분은 이미 고조됐다. 많이 아주 많이. 어머나! 그런데 그이가 말을 잘하네, 홀딱 넘어간다. 부정해도 좋다. 그러나 여자는 홀딱 빠진다. 정말로? 그래 거짓말이고, 그래 농담이다. 또 여자는 웃긴 남자를 좋아한다. 많이 좋아한다. 웃기면 일단 용서된다. 여자는 그런 남자 옆에 있으면 자의적으로 표는 내지 않지만 또 겉으로 티는 나지 않아도 드물게 좋아서 어쩔 줄 모르거나, 드물게 들뜨거나, 드물게 기분이 살짝만 좋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은 그 세 가지가 친하게 함께 한다. 딱 동시에. 어느 여자에게 자기는 지적인 남자가 이상형이다, 그건 바뀔 수도 있고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외 누구는 착함을 누구는 배려를 누구는 성실함을 동경한다. 노래와 춤과 그림과 글까지 기대하는 면모는 많고도 많다. 만약 그 모두를 다 갖췄다? 말 다 한 거다. 나도 여자구나 라며 새삼 깨닫는다. 매번. 항상. 자주. 그런데, 첫눈에 반했다? 게임 시작도 전에 끝난 거다. 그녀는 황홀한 사랑의 여주인공이 된다. 여자는 프리마돈나가 되고 발레리나가 된다. 내숭은 여자의 특권이고, 애교는 권리며, 아양은 기본이다. 왜 그런 것인가는 묻지도 따지지도 궁금해하지도 말자. 그것이 여자의 의무인가 과연 예절에 속해도 되는가 까지.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여자의 전유물이다. 여자는 여자이니까. 나이를 먹고 세월이 가도 변할 수 없는 것이 여자다. 어쩔 수 없다. 흡사 남자들이 인생을 배우며 알고 또 가르치게 되더라도 결코 철들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좀 전에... 여자에게 애교는 뭐, 권리? 여자의 성정만 알고 넘어갈 수는 없다. 그러면 남자는 어느 정도 유혹 당하고 찬미해야 하는가, 그건 각자 알아서 판단할 일. 단, 이런 기교는 권장할 만한 게 못된다. 잘 미루거나 애써 외면하거나 좋으면서 싫은 척 투정 부리기. 멋진 남아는 그녀를 모르지도 놀리지도 않고, 그녀를 심심하거나 싫증나게 만들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또 우리는그녀를 예찬하며 웃겨주기도 바쁘니까. 어쩜 그리 여자의 마음을 포근히도 헤아리는지 어쩜 그리도 그녀의 의중을 너무도 쉽게 간파하는지. 우리는? 우리는! (아마도 귀찮아서 기술을 구사하지 않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여자를 대하는 데 미숙한 아저씨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말 신기할 따름이고, 성숙한 숙녀와 풋풋한 소녀에게는 모두 그저 놀라울 뿐! 그런 남자는 진기하다고 생경하다고 어쩐다고 해도 그러나, 지금은 여자에 대해서만. 여자는 대체로 언제까지나, 대체로 어디에서나, 대체로 누구에게나 여자다. 이게 여자다. 이게 여자라고! 물~론 여기서 또 둘로 나뉘다. 반칙왕과 당신의 사랑으로! 그러나 모체 즉 앞서 나온 특징은 철저히 공유한다. 직관적으로 또 경험으로든 인생이 알려주었든 읽는 사람이 모르는 새로운 내용은 거의 없다.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뭐랄까 이미 아는 사실이고 식상한 진실이지만 어째 꼭 다시 알아야만 하는 그런 제2의 속내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뻔하지만 무언가 뻔하지 않는 그런 느낌. 남자에 대한 지식을 여자들이 매번 듣고 읽고 대화하며 공감할 때 어떤 미소가 동반되는 것처럼. 그 미소는 혹시 젊은 미소? 아무튼, 그러나 챙피한 일은 아니다. 비난할 것도 없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것일 뿐. 오히려 더 알면 알수록 재미있을 수도 있다. 그럴 것이다. 그런 오묘함도 없으면 인간사 너무 덧없고 허전하다. 재미없단 말이다.
(한숨, 쉬어가자!)
누가 그랬나,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라고. 말 한 번 잘했다. 아니, 글인가?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그게 끝일 리가 있나. 그 뿐만이 아니란 말이다. 마음은 갔다 오기도 하고, 마음은 몸을 떠나기도 한다. 심지어 나눠주기도 한다. 광고지 전단처럼, 신제품 샘플처럼. 어떻게? 평등하게! 남자, 단순하다. 여자, 복잡하다. 여자는 남자와는 다르다. 뭐에 관한 기준이냐, 따지지 말자. 슥 넘어가자. 여자가 이러한데 사랑이, 사랑이 쉽겠나? 다이아몬드는 사랑이 영원하다고 하지만 사랑은 변하기 쉬운 것이다. 가짜 다이아몬드 같은 요설과 여자는 뭐다, 가 나왔으니 이제 사랑으로 넘어가 볼까? 그럴까? 그래도 될까요? 그럽시다. 까짓것 뭐 못할 건 뭡니까! 사랑. 사랑이 영원할까? 어려운 문제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끝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이 끝과 저 끝이 혼재할 수도 있다. 사랑, 그것이 신비로운가는 잘 모르겠지만 이만저만 까다로운 게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고 남자들은 절대로 친구와 사랑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말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런 말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눈빛만 봐도 안다. 말도 꺼내지 않는다. 그건 불문율이다. 그 말을 꺼내느니 차라리 맞겠다. 진짜 때리지는 말자. 하지만 실은 여자들도 어느 만큼 성숙하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낯뜨거운 주제가 되어버린다. 살면서 어쩌다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여자에게도. 삶이 그렇게 만들고, 인생이 그것을 강요한다. 결코 거부할 수 없도록. TV도 인터넷도 예술도 대중가요도 모두 사랑 사랑, 사랑 타령인데 남자들까지? 어떤 모습이 상상된다.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다. 골프장으로 게임의 가상 세계로 물고기를 잡으로 가고, 동그란 공을 자꾸 어디에 어떡하든 반드시 집어넣기 위해서 떠나고, 탈 것에 오디오에 사진에 수집에 심취하기도 한다. 주색도 빠질 수 없다. 아이쿠, 도박 빼면 서운하지. 보이시지 않나, 잘 아시지 않나. 대기 명단 까마득 하다. 허나 그건 나쁜 게 아니다. 적당하면 된다. 건전하면 그뿐. 퇴폐미? 1%만. 그런데, 그런데 다시 태어난다면......? 남자에게만 자상함을 강요하지 말고 여자도 친절을 베풀자. 특히 지금은. 열린 뚜껑을 닫아주자는 말이다. 커피포트도 좀 쉬게 해주자. 새벽에도 런닝머쉰 돌려야 하나? 각종 머쉰들은 뭐 쉴 수도 없나? 잠깐만! 그렇다면 방금 열거된 여러 조건이 넉넉히 충족되지 못한다면 소심하거나 울적해야 하나? 그건 아니다. 여자를 알면 된다. 여자를 다루는─떠받드는─대우하는─이윽고 존중하는 방법을 알면 더 좋고. 그녀에게 인생은 어떤 것이라고 말해주면 된다. 어떻게냐 하면, 다정하게. 차 문을 열어주고, 사소한 걸 기억해주고, 자잘한 걸 챙겨주고, 믿음을 주면 된다. 그녀의 의견을 알고 동조자가 되면 된다. 사랑은 몰래, 연모는 은밀히, 애정은 은근히 라고. 바로 그런 게 여자에게 잘 안 먹힌다면 목소리나 다른 무엇들이 그만그만한 남자들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어? 어디 서러워서 살겠냐고! 그래도 다 방법이 있다. 의기소침할 필요 없다. 여자를 모르겠다고? 그런가? 어? 어려울 거 없다. 여자는, 여자는 웃으면 끝난다. 웃으면 끝난다고. 그녀를 웃게 만들면 절반은 넘어온 거다. 그녀가 웃는다, 말이 필요 없다. 게임 끝났다. 방법도 필요 없다. 뭐, 좀 더 구체적인 힌트를 주라고? (손가락 딱!) 그녀에게 물어보시라. 방금 방금 속으로 속으로 내 험담했냐고 내 험담했냐고. 정확히 뭐라 뭐라 그렇게 그렇게 험담했냐고, 속으로. 몇몇은 창밖을 본다. 몇몇은 대답이 없다. 또 몇몇은 말을 돌린다. 그러나 대개는 식 웃는다. 하지만 고수는 그렇지~, 웃음을 참는다. 힘껏! 그러면 이미 넘어온 거다. 당신에게. 여기서부터 어떤 상남자께서는 꼭 일부러 어려운 길을 고집하시기도 한다. 고집 엄청 세다. 뭔 고집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서 그럴까? 그때는 배가 산으로 간다. 그 다음부터 말이 끊기고 매번 실수를 연발하면 다 잡은 고기를 놓치는 거다. 넘어오면 뭐하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고기 잡도 못했는데 그런데, 잡은 고기에게는 밥을 주지 않는다? 그게 뭐야! 그런데 간혹 고개를 푹 숙인 다음에 오빠는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모르겠냐고 되묻는 경우가 드물게 있긴 있다. 그땐 책임 못진다. 뭔가 실수한 거다. 연기 지도는 제대로 됐는데 연기를 못한 거다. 오 이런! 이거 이거 너무 멀리 왔다. 괜히 이러다 그 남자가 거짓말이 훨씬 능숙해지고 허풍만 왕창 늘고, 무엇보다도 특히 다른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면 어떡하지? 그러면 어쩌지? 그 일을 대체 어쩌면 좋은가? 그래서 남녀 문제에는 일단 끼지 않는 게 상책이다. 그건 다 아는 얘기고,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이만하면 사전 지식이 늘었으니 이를 편집해서 그녀에게 긴 명대사로 사실적으로 낭독한다면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그녀의 생각을 헷갈리게 만드는 데 성공할 것이다. 그럼 됐다. 어쨌든 인생과 여자와 남자 이야기는 이만 줄인다. 여기까지. 여기까지? 아 아직 안 끝났다.
끝난 듯 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그럼 뭐가 더 남았느냐, 뭔가 면책성 발언이 필요한 것 같다. 귀가 간지러우니까 딱 하나만 털고 가자. 미련을 남기지 말자. 아쉬움도 풀고 가자. 도저히 궁금하시다고 정말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대체 왜, 도대체 왜 그렇게 그처럼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가, 바로 그것을 알고 싶으실 것이다. 누군가는. 왜 그럴까? 정말 왜 그런 것일까?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이제는 다 궁금하게 생겼다. 일났다. 삼척동자(남자)가 곤히 낮잠을 주무시는데 괜히 어딜 건드려서 마술에 걸리는 것처럼 엄한 물음표를 건드렸다. (삼척동자가 뭐 잠자는 사자인가?) 못들은 채 넘어갈 껄 그랬나? 하지만 꿈처럼 진짜 지구 반대편에서 소곤소곤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떡하랴. 정말로 무슨 재간으로 어떤 재롱으로 타당하고 설득력있는 답변을 내어놓을지 의아해 하시는 몇몇 <우리는> 화법의 대가들이, 그것도 미래 언제에 계시는 그분들이 보이는데 난들 어쩌란 말인가.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어차피 앞으로 또 얼마나 반복되고 또 얼마나 더 반복될지 모를 일이니 털 건 털고 가자. 그게 좋겠다. 그렇다면 왜, 정말 왜 그렇게 그 어떤 주제들은 지겹도록 반복되는가? 질리지도 않냐고? 질린다. 지겹다. 힘들다. 짜증난다. 나도 그렇다고. 나라고 어디 좋겠나? 어? 어디 좋겠냐고? 정말 신물이 난다. 토할 꺼 같다. 내가 뭐 그 주제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꼭 억지 부탁을 들어주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반복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나도 정말 지겹고 신물이 난다. 그렇다. 겨울에 바깥에서 따뜻한 음료를 마실려고 하면 모락모락 연기가 난다. 내 머리에서도 그렇게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푸식푸식 지글지글 보글보글! 사람 미쳐버릴 꺼 같다. 푸식푸식 지글지글 보글보글! 그러나, 나 싫다고 그분의 간청을 거절하면 곤란하다. 나 불편하다고 팬들의 성화를 무시할 수는 없다. 딱히 확인한 건 아니지만. 아침에 늦잠 자도 학교, 가야한다. 말은 때려치네 어쩌네 해도 일하는 즐거움, 포기할 수 없다. 어느 직장에 들어오고 싶은 사람, 줄 섰다. 까마득하다, 줄이 어디까지 섰나 보이지도 않는다. 아, 금방 나올 듯 나올 듯 하드니 아직도 안 나오다니 이게 대체 뭐 하자는 행세인지 나 원 참! 그러나 성대한 시상식이나 세기의 대결이나 소문난 잔치나 모두 대상은 핵심은 용건은 제일 나중에 등장한다. 자, 긴장하자. 알고 보면 별거 아니지만 제일 정말 제일 중요하고 또 중요한 문제가 나올 차례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김샐 수도 있습니다. 속았다는 기분에 버럭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니지만 왜 그래야만 했는가 라는 정말 중차대한 해명은 바로 이렇게 밖에 이런 식으로 뿐이 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고민 많이 했습니다. 잔머리 많이 굴렸습니다. 모든 경우의 수 다 따졌습니다. 과연 이걸 공표해도 되나, 이래도 되나, 옳은 일인가, 공정한가, 왜 지금인가, 꼭 내가 해야 하는가 라고 말이죠. 그러나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정말 가슴이 먹먹했으나 새 삶을 살아야만 했던 것이죠. 답은 하나였으니까 말이죠. 네, 그렇죠 그런 거죠. 속으로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미워도 다시 한번 좋아도 다시 한번, 정말 심사숙고하고 이제야 결정했습니다. 이건, 꼭, 알려야겠다고. 알면 제법 많이 실망하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알려야겠다고 말이죠. 네, 그럼요......
(실례할께요 물 한 모금만 마시구요)......
자, 이제는 진짜 거두절미하고 정말 딱 끊어서 답을 하겠습니다. 곧바로 발표하겠습니다. 정말 그러겠습니다. 그것은 그 답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왜 대체 왜 그 어떤 주제는 그렇게 반복되느냐? 그것은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하여 몇몇 뭔가에 대하여 몇몇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절대 절대 절대 그분들이 바로 여자들이 지겨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또 뭐라고?) 언제까지라도, 끝없이, 영원히 반복해도 지겨워하지 않는다. (이런, 젠장?)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남자들은. 물론 아직 설마... 하시는 분들을 위한 말이다. 이미 문제없이 그녀 몰래 무형의 리모콘 버튼을 슬쩍 눌러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그녀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요리하시는 최면술사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는 얘기다. 이제야 답답하고도 답답하게 끙끙 앓으면서 지겹고 지겨우면서 어쩔 수 없이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털어놓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날아갈 것만 같다.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아 이제야 살 것 같다. 미치지 일보 직전이었다. 지금 당장은 소원이 없다. 오해를 풀고 염원도 풀고 게다가 악역까지 넘겼다. 심지어 그래, 웃겼다. 작게나마 웃겼다. 그럼 됐지 뭘 더 바래겠나. 그러나 우리, 쉬이 감동하지 말기로 합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알고 싶은 신비로운 주제들이 쑤두룩하게 대기하고 있다. 긴장을 풀면 안 된다. 그녀가 바싹, 바짝 긴장하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좀 더 노력하자. 영차영차 열심히. 그러나 놀 땐 놀고, 일 할 때도 놀자.
어쨌거나 저쨌거나 무언가는 하트 뿅뿅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사랑의 언어가 나왔다. 사랑의 본질, 역시 나왔다. 인생은 어떻다도 나왔다. 여자는 뭐다도 빠트리지 않았다. 게다가 참다운 사랑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를 웃기는 방법까지 나왔다. 더군다나 심지어 왜 그 무엇이 그렇게나 반복되는가 까지 나와버렸다. 이제는 할 얘기가 바닥났다. 점집 1인가 2인가 도사님 충고처럼 뭔가 긴 설명이 이어졌드니 체력도 바닥났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거 그 점쟁이 꽤 용하구만! 그러나 마무리는 지어야 한다. 여자와 인생과 사랑과 어떤 동기까지 그 모두는 다 그녀로 귀결된다. 이 표어도 그녀 때문에 만들었다. 그녀 때문에. 끝끝내 남자 때문에? 아니 여자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다시 음미해본다. <사랑은 없고, 인생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정녕 사랑은 없을까 정말 인생은 거짓일까, 그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상대를 만났다. 비로소 나는 그런 인생의 의미를 그 가치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상대를 만난 것이다. 나는 풍각쟁이 그녀는 허풍쟁이? 바꼈나? 어쨌든 나는 물건을 만난 게 틀림없다. 물건을 다른 어떤 기분 나쁜 말로 바꾸지는 말자. 우리는 인생의 한복판에 있으니까. 어떤 단어인가 퍼뜩 떠오르기는 하지만. 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그게 더 나쁘다고? 아무래도 그 충언이랄까 스스로 느낀 충고를 참고 삼아 침묵하는 게 좋겠다. 썩 상스럽거나 화들짝 놀랄만한 말은 아니지만. 곧 그것이 뭐라고 절대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절대로 말할 수 없다. 발설하면 안 된다. 그럼 된 거다. 어른들도 참 애들만큼이나 능청스럽구나. 난 아니야?
8
1주일 동안 나는 집에서 은닉했다. 꼭 유명한 스타는 아니지만 웬일인지 막 자숙하고 싶어졌다. 기분이 뭔가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X에게 내가 너무 냉정했나, 괜찮은 남자를 소개시켜줄껄 그랬나 라는 후회도 했다. 조금? 아니 많이. 그리고 나는 집에서 바흐의 오르간 독주곡과 모차르트의 플룻 실내악과 협주곡, 칼 마리아 폰 베버의 몇몇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잠시 외출해서 어떤 물건을 구해왔다. 생필품이랄지 <잠이 오지 않는 밤에>라는 제목의 책을 구해왔다. 그런데 그 책을 읽었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잠은 더 오지 않았다. 우울할 때 듣는 음악과 무슨 뇌파가 나온다는 음악도 들어봤는데 다 소용없었다. 싸고 푹신푹신한 소파를 인터넷 주문하고 배달받아서 앉아봤는데 영 느낌이 개운하지 않았다. 괜히 짜증이 나는 것 같았다. TV를 봐도 따분하기만 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식탐에 빠졌고 술도 마셔봤다. 그것도 하루 지나니 재미없어졌다. 장엄한 풍경 사진이나 동물의 세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봐도 그저 그랬다. 잠이 늘었다. 일상이 무기력했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놀러가자고. 거절했다. 귀찮았다. 키우던 화분 미니사과는 당분간 잘 키우기 어려울 것 같아서 동네에 사는 단편영화 감독 V양에게 맡겼다. 친하니까 막 시키고 부탁해도 괜찮은 사이였다. V양은 자신의 전-남자친구가 찍은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는 작품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첫 작품은 탄생하지 못했다.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생기는 되찾았다. 전남친이 만든 그 영화는 이런 영화였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쓴 영국 작가 존 파울스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던 날, 백혈병으로 죽어가던 어머니는 자신을 돌보던 아들에게 자신이 바로 책 속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는 사실을 고백한다는 내용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만화를 오른손으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재능을 왼손으로 필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시작하자마자 때려치웠다. 그럴 꺼면 뭐하러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또 매일 철봉을 하고 있는데 추가로 팔굽혀펴기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작했는데 이것 역시 얼마되지 않아 그만뒀다. 잘 때려치웠다. 괜히 시작했다. 어디 가기도 싫고, 멋진 옷을 사기도 싫고, 새로운 풍경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왕성한 지식욕도 아찔한 지성도 색정적인...이라기 보다는 종족 보존 본능에 기인한 욕구도 모두 귀찮기만 했다. 왜 그런줄 통 알 수 없었다. 그날은 아니었다. 나는 남자 중의 남자였다. 마법이야 날마다 걸렸다. 오늘의 운수를 다시 봐야 하나 라며 심각하게 고민도 해봤다. 그래봐야 소용없을 듯 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고 내다봤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꺼 같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누구는 강 위에 있는 다리 그 위를 달리는 시내버스 거기서 제일 뒷자리에 앉아 물 위를 건너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나는 내가 뭘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바로 그것을 잘 몰랐던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은 21세기다. 어쩐지 지금 22세기인 듯한 환각 때문에 간혹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때가 있다. 페이스 팝콘의 책을 괜히 내다팔았다. 소장가치가 있었는데. 높은 곳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돈을 뿌려볼까, 도 생각했다. 안 해 본 건 아니다. 그러나 난 그 정도로 돈이 많지도 않고 그것도 썩 기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더군다나 지폐가 아니라 동전이라면 그건 중범죄다. 잡혀간다. 욕을 얻어먹는 정도로 안 끝난다. 그러다 나는 버스 동호회에 가입했다. 일반인은 생각치도 못하는 전문가들의 세계였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탈퇴했다. 나는 초현실을 바란 것도 아니고, 주위에 낭만이 부족하고 인생에 품격이 모자라고 매사 세상만사가 웃음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 인생은 뭔가 부족하고 모자란 것만 같았다. 판타지도 지겨웠다. 진공청소기도 진작 중고로 갖다 팔았다. 즉석 복권과 정식 복권에도 당연히 손을 내밀었다. 괜한 짓이었다. 생활에 불만은 없다. 그러나 말만 그렇고, 뭔가 불만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딱히 새로운 경험을 원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런데 대체 왜 갑자기 권태 가운데 전설적인 4번 타자가 하필 지금 이곳으로 날 찾아왔냐 라는 궁금증은 날 붙잡고 늘어졌다. 질긴 놈이다. 독종이다. 맹렬히 끈질기게 바지가랑이 붙잡고 늘어졌다. 실연당했나? 웬걸! 내가 허언증에 걸렸나? 아니다. 내가 너무 심한 허풍을 남발했나? 아니...ㄹ 것이다. 세상사에 너무 무심하고 사람들에게 더없이 무례하며,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과도한 쾌락에만 빠져 살았나? 내가? 아니다. 아니란 말이다. 모범은 아니지만 중간은 갔다. 그래도 살면서 그런 시절이 있긴 있었다. 그러나 잘 이겨냈다. 넘어져도 꿋꿋이 일어섰다. 그런데 왜? 왜냐고! 나는 오뚜기였고 생쥐였고 토끼였고 개였고 망아지였고 고양이였고 다람쥐였다. 심지어 나는 곰과 여우와 늑대와 너구리에도 비견됐다. 그리고 코뿔소이기를 바랬고 하마이기를 원했다. 먹을 걱정과 천적의 공격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그런 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부리와 날개와 다리와 목과 깃털이 모두 긴 그런 새의 세계를 동경했다. 그러나 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살면서 약간의 의아함과 불만은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건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인생에 관하여 노련함을 깨우치는 청춘과 중년 사이 어느 즈음이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월요일은 골프치고 쇼핑하고 TV보고, 화요일은 여행가고 블로그에 글 올리고 영화 보고, 수요일은 집에서 책도 읽고 정원을 가꾼 후 시내에서 온종일 놀고 또 놀고, 목요일은 그녀와 단둘이서 멜로로 갈지 에로로 갈지 줄다리기를 하고, 금요일은 날 추종하는 후배와 로맨스 코메디를 연출하고, 토요일은 낮에 잠깐 야구동호회에 가서 축구를 했다가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서 클럽 가서 달리고 일요일 오전에는 프라모델 조립 동호회에 가고 오후에는 소개팅에 대타로 나가고 정말 이 정도 스케쥴은 기본으로 일년 내내 산다면 약간은 싫증을 느낀다는 것을. 그것이 꿈인 사람도 그 꿈을 이루고 나면 뭔가 허전함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노는 게 일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른은 절대 어린이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허영심으로 똘똘 뭉친 눈총받는 줄도 모르는 푼수 중의 푼수로 살지라도 믿는 구석 하나 정도의 일거리는 마음을 쏟을 뭔가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과 놀이 그 어느 중간이 대체 어디쯤인가를 고민한다는 것을. 행복은 과연 내게 어떤 존재인가를 진지하게 떠올려본다는 것을. 백 판 자빠져 노는 동네의 저 귀여운 강아지는 대관절 뭔 생각을 하면서 인생을 사는지 까지도.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난 지금 권태의 늪에 빠진 것이다. 딱히 정신병원 의사가 병명을 가르쳐주지는 않아서 임시로 권태라고 이름 붙인 것일 뿐, 원인도 모를 타개책이 불분명한 완벽한 슬럼프였다. 그러나 침체기가 길어도 너무 길고, 심해도 너무 심하고, 느닷없어도 너무 느닷없었다. 이유도 몰랐다. 밑도 끝도 없었다. 대체, 도대체 이 무심함의 정체는 뭘까? 그걸 모르겠단 말이다. 도저히 모르겠다. 못찾겠다 그 이유를. 결국,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야겠다 라며 나는 꿈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다.
9
나는 집에 머무르면서 조그만 소리가 나면 창밖을 내다봤다. 햇빛의 밝기와 각도가 바뀐 듯 하면 혹시 누가 대문 앞에 편지랄지 선물이나 어떤 정표를 가만히 놓고 가진 않았을까 하는 의혹감 때문에 문을 슬며시 열고 안 본 척 슥 확인하기도 했다. 내가 꼭 무엇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는 어떤 소식도 없었다. 그리고 내 사랑을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건 그대로 온전했고, 그리고 영원할 것이다.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당신은 다시 태어나면 어쩌고저쩌고, 그것과도 연결시키지 말아주시라. 마초에게 좋은 약은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다. 원래대로라면 드라마에서는 이쯤 해서 누군가 나타나서 나를 깜짝 놀래켜주어야 하는데 그건 희극이고 이건 현실이었다. 그래서 무덤덤한 게 정상이었다.
그러다 이상하게 누군가 날 부르는 무언가 암호화된 신종 외계의 언어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어디로 오라 같은데 정확한 해석은 어려웠다. 잘못 들었나보다. 환청일 수도 있다. 또 다시 누군가 날 부르는 손짓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가시거리 밖의 아주 먼 곳에서 날 부르는 고요한 외침 같았다. 그러나 그것의 대상이 나인가, 정말 와주라는 요청인가, 반갑고 다정하게 날 부르는 그분은 가상의 존재가 아닌가, 그건 모두 하나도 확신할 수 없는 공상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망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마당을 거닐다가, 잔디를 고르면서, 수영장에서 고무보트를 타다가 진짜 누군가가 우리집 근처를 배회하고 사슴과 너구리가 알짱알짱거리며 뭔가 감시의 눈길이 따라붙은 듯한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괜한 걱정일지 모르지만 평소와 다른 뭔가 이상한 분위기와 직감을 근거로 하는 몇몇 징후가 포착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찌 하는 것이 좋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답은 없었다. 보기도 없었다. 참고할 만한 영감이 연상되는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는 현상도 없었다. 누가 귀뜸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카드를 공표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또 그것이 점집 탐방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도 싫었다. 누군가가 그냥 기분 전환 삼아 어쩌다 한번 들리는 게 뭐 그리 잘못된 것이냐고 한다면 썩 흔쾌히...는 아니나 마지못해 수긍하고 동행을 수락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은 쉬지 않고 규칙적으로 앞으로 진행됐고, 장소는 바뀌었고, 나도 이동했다. 나는 딱 그곳에 도착해서 어리둥절했다. 내가 여기 왜 왔지? 왜 출발했고 오는 중간 동안의 기억이 왜 희미하지? 그러나 내가 점집 3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내 앞에 앉아있는 도사는 그녀, 즉 X라는 진실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곳은 우리 집을 기준으로 그 미술 마을과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10
「어? 여기 무슨 일이세요?」 X가 말했다.
「어? 너...... 점성술사였니?」 나는 그녀를 우연히 만나게 됐기 때문에 문득 공부를 무척 많이 한 무척 지성적인 노교수 같은 말투를 구사하게 되었다. 재회의 기쁨을 타인에게 들키기 싫었을까? 모르겠다. 그러면 좋았을까? 뭐가? 남에게 그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왜 웃게 되었는지를 들키고 싶었냐고. 그건 모르겠다. 그걸 모르면 누가 알어? 아무도 몰라도 된다. 다 알 필요는 없다. 그게 정답이다. 내가 구사한 화법은 이랬다. 뇌리에 씌여지는 글을 그대로 읽듯이 발성하는 듯한 어법. 그것은 한동안 사용될 것이라고 쉽사리 예견되었다.
「실은,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귓속말하듯이 한 손을 펴서 입가에 붙이고 조용조용한 어조로) 어디서 소문내시면 안되요! 아셨죠? 그런데 여긴 뭐 하러 오셨어요?」
「점 보러 왔지 뭐 하러 왔겠니? 안 그러냐? 다른 이유가 뭐가 있어? 안 그러냐?」
「이 양반이 운세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대략 헤아려봤을 때 사랑 받고 싶어서 왔네. 얼굴에 딱 씌여있어요. 왜요? 제가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만날 길이 없어서 서운했어요? 그랬죠? 맞죠? 푸하하하하, 농담이에요. 제 농담은 알아채지 못하게 눈치 채는 순간 이미 숙 들어와 있답니다. 마음에 말이죠. 그래도 적응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어요. 오히려 늦게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 껄요. 아무 이유없이. 누군가의 마음에 노크하고 싶어질 테니까요. 그런데 있잖아요. 오빠, 어제 밥 혼자 먹었죠? 오늘도 혼자 먹었죠? 매일 혼자 드시죠? 그렇죠? 오빠는 취미도 혼자 하는 걸로 바꿨죠? 오빠 인생은 직진인가요? 어때요? 나 쪽집게 같죠? 푸하하하하. 마음이 썩 허전한 거 같으신데 어째, 몸은 혹시 부실하지 않나요? 아, 건강하시다? 제가 괜한 걸 여쭤본 걸까요? 허나 속으로 무슨 생각 하시는지 다 아니까 귀찮으시면 굳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지금 대충 진단을 하고 보니 오빠는 점을 볼 게 아니라 좀 놀아야 할 꺼 같아요. 오빠는 내내 실내에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또 실내에 주저앉아 있을려구요? 그러면 곤란해요. 삶의 균형이 흔들린다니까요. 그대는 일도 열심히 하고, 생활 주기도 문제 없어요. 여행은 지금 떠나기엔 약간 힘들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 같아요. 클럽은...... 너무 소란스러울려나? 우리 이제 문제가 뭐라는 걸 알았으니 그만 일어서기로 해요. 어디 가고 싶으세요? 알프스? 나일강? 남극 탐험? 그런 거 말구요. 억지로 뭔가 거대하고 크고 멋져보이는 걸 답할려고 하지 말고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여봐요. 음 어리둥절하시니까 질문을 바꿔봅시다. 오빠는, 뭘 하고 싶으세요? 나는 무엇을 하고 싶다, 그게 뭐냐구요? 예? 사랑?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오빠가 갖고 싶은 것은... 네? 저요? 네? 뭐라구요? 말이 잘못 나왔다구요? 아, 그럴 수 있어요. 뭐 먹고 싶은 건 없어요? 네? 잘 생각해봐요. 오빠가 먹고 싶은 것은...... 네? 제가 잘못 들었죠? 그렇죠? 뭐가 먹고 싶어요? 네? 놀랍도록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딱 알맞게 상큼하고 달짝지근한 사탕이 아니라 먹음직스런 케익이 아니라 향긋하고 정말 맛있는 뭔가 그런 음식이 아니라 그게 아니라...... 오 마이 갓! 어떨 때 보면 남자는 짐승 같아요. 하지만 오빠는 아니에요. 걱정마세요. 그냥 그렇다는 말이요, 오빠. 넘어가죠. 저는 도사고 오빠는 환자 아니 손님이니까요. 꼭 정탐하러 오신 건 아니지만 어쩌다 속마음을 들켜버린 겁쟁이인 거 같아요. 그렇죠? 뭐 알고 있으면 됐어요. 그럼 어디 가고 싶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 건...... 이게 아닌데, 뭐 다 괜찮아요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어요 오빠. 그게 건강한 거지 어디 불경스러운 건가요? 그렇죠, 오빠? ......(순간 그녀는 잠시 탁자 위에 놓인 슬픈 목소리는 커녕 아무 말도 없는 조화를 보고 또 인형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왜 얘가 이렇게 뒤집어졌지? 뭐야 이건 아예 발랑 까졌잖아? (인형을 가르키며) 넌 그것도 모르고 얘한테 홀딱 반했니? 정신차려 이년아~ 딱 보니 미래 어느 때가 되면 넌 그런 말 하겠구만 내 남편한테 껄덕대지마라래 어쩌라래 그러면서...(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자, 다시! 자, 평소에 안 해 봤던 거, 색다른 거, 다채로운 향락? 너무 음란한 건 안 되구요. 그것도 사랑에 필요하긴 하지만요. 아! 보기를 댈께요. 첫째 식물원, 2번 동물원, 3번 백화점, 4번 환상관, 5번 쇼핑센터 6번 마술극장. 오빠 그냥 제가 정할께요. 보기가 많으면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되죠? 좋다구요? 알고 있었어요. 1번 식물원으로 하죠. 그게 좋겠어요. 자, 뭐하세요? 지금 바로 같이 가셔야죠. 지금, 당장!」
「가게는... 어떻게 하고? 그런데 넌 혼자 말하고 혼자 답하는 것이 어쩜 네 취향과 일치하는가 보구나. 그 재주는 아주 탁월한데. 칭찬해줄만 해. 썩 훌륭하다구. 제법 괜찮아.」 물론 방금 말한 문장에서 나는 제일 앞에 <가게는... 어떻게 하고?>까지만 말했다. 나머지는, 나머지는 희망사항이었다. 그런 것이다. 얘는 어쩌다가 이렇게 말발이 센지 뭔 고생을 그리도 많이 했나 하면서 나는 그녀의 어떤 파란만장한 일생을 추측해봤고, 뭔가 그녀를 보살펴주고 싶은 마음이 울컥 솓구쳐오르는 걸 참지 못했다.
「귀한 손님은 왔다 가셨고, 오늘 매상은 이미 분기점을 넘었어요. 오빠 저도 좀 쉬어야죠. 더군다나 저 돈 많아요. 그리고 돈 욕심, 많아요, 하지만 오늘은 없어요. 저는 오늘 한 사람의 변심한 마음을 되돌렸고, 한 사람의 삶의 긍지를 북돋워줬으며, 한 사람의 향수를 자극하고 꿈에 대한 동경심 그것에 쌓인 뽀얀 안개를 흩트려 새로운 악상을 떠올릴 수 있는 힘을 굳건히 다지게 만들었어요. 저는 오늘 할일은 다 마친 거 같아요. 그러니 더더욱 놀 이유가 충분하죠. 때마침 반가운 손님이 오셨는데 그것도 오빠인데 그 이상의 명분이 뭐가 더 필요하겠어요? 지금까지 평범했으면 이제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이유가 뭐냐구요? 이제는 구태의연한 족쇄를 풀고 못 다 이룬 신비주의와 꿈을 찾아 모험을 떠나야죠. 무엇을 바라고 꿈꾸고 동경하고 원했다가 그것이 만족되는 경이로움의 그늘에 있는 뜻모를 상실감과 권태와 사전에 미리 포기해버린 행운을 이제 만회해야 하지 않겠어요? 네? 오빠 뭘 망설이세요? 어서 일어서세요. 촉망받는 동화의 세계가 우릴 기다리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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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X와 피치못하게 식물원으로 떠나게 되었다. 기분이 좋긴 좋았으나 의도는 합당했고, 썩 나쁜 일도 아니었으며, 그녀의 신선한 첫인상은 오늘 다시 만남으로 인하여 제법 건전하고 밝은 심상으로 이어졌지만 왠지 모르게 뭔가가 걸렸다. 아무 이유없이 뭔가 불륜을 조장하는 돌아온 싱글이 된 것만 같은 감정을 벗어날 수 없었고, 무엇보다 X는 여자였고, 숙녀였고, 예뻤고, 착할 듯 하고 돈도 많을 것 같았다. 내게 너무 잘 대해주었다. 요술도 마음만 먹으면 부릴 수 있을 듯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전체 인원이 단 1명인 내 팬클럽 그 가운데 단 한명뿐인 열혈 회원을 자처했다. 그녀는 팬에게 향하는 내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했다. 물론 혼자만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우리는 바로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고 일부러 돌아가려는 것처럼 시내를 구경했고 몇몇 상점에 들렀으며 그러다가 어느 괜찮은 찻집에 들려 쉬었다 가기로 했다.
「제가 오빠 여자친구 있는 곳까지 안내할께요. 그곳으로 데려다 드린다구요.」
「너는 나의 여자친구를 아느냐?」
「아니요. 몰라요. 당연히 모르죠.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 날 희망의 나라로 데려간다는 거지?」
「그냥 해본 말이죠, 오빠도 참. 아, 농담을 진담으로 들으시면 어떡하나요? 이 양반 큰일낼 양반이네. 아니, 그게 농담으로 안 들려요? 네? 귀에 뭐 (귀를 보더니) 머리에 꽃을 꼿은 것도 아닌데 아니 그런데 오빠 왜 그래요? 완전 옛날 사람 같잖아요. 아 옛날 사람도 지식과 실정법과 누리는 혜택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의사소통에서 오는 차이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그러던데요. 오빤 어쩜 어떻게 보면 꽉 막힌 사람 같아요. 속으로, 대체 속으로 뭔 생각을 그렇게 하나요? 응큼해요! 의뭉스럽다구요! 여자에게 믿음을 줘야죠. 안 그래요 오빠? 아 농담을 진담으로 들으시면 오해가 생기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편한 오빠와 동생으로써, 친한 선배와 후배로써 좀 더 스스럼 없고 다정해질 수 있는 교제의 분위기를 방해하게 되잖아요, 네? 그렇잖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초현실주의에 매진하자구요. 동시에 현실에 집중하세요. 되든 안 되든 한꺼번에 해치우는 거에요. 꿈을 쫓는 건 그거고 이건 이거에요. 자꾸 오빠 때문에 저도 제가 뭔 얘기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에요. 말이 꼬이고 계속 꼬여서 정신이 하나도 없네. 아 내가 못살아!」
「뭔 말을 하는지 나도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침묵)... 어김없이 넌 날 헷갈리게 하고 있어. 안 그러니?」
「와, 그러고 보니 오빠는 장난꾸러기구나. 그리고 오빠는 말투가 그게 뭐에요? 머머 하냐? 생뚱맞게 뭐뭐 하더냐? 글 읽는 것처럼 그게 뭐에요? 뭔가 지금 노는 게 약하다? 그래요? 오빠께서는 좀 더 즐겁게 놀고 싶다? 별로 재미없다? 오케이, (딱)! 제가 폭탄 선언 하나 할께요. 왜, 제가 탁자 건너로 가서 오빠 옆에 앉을까요? 그걸 바라세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어르신! 네? 오빠!」
「...... ......」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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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선언? 얘가 뭘 말할려고 하는 거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오빠! 그런데 있잖아요. 저, 남자에요! 됐죠?」
「뭐? 그게 정말이냐?」
「몰라요. 아무튼 걱정마세요... 저, 여자 좋아해요!」
「그럼 뭐, 내가 널 어떻게 해볼려고 마음이라도 먹었다는 얘기냐? 얘가 자꾸 사람 이상하게 만드네. 느닷없이 생사람 잡고 있어. 아주 엄한 쪽으로 재주가 있어. 어?」
「그런데 오빠, 친구 없죠? 네?」
「내가 친구가 없긴 왜 없어? 뭐, 친구 없죠? 지금도 만날 애들 얼마나 많은데. 주말만 돌아오면 아주 내가 골머리를 앓아요. 약속으로 그냥 꽉꽉 차! 평일이라고 다르지 않아. 선배, 후배, 동료, 친구, 지인, 모임, 기타 등등. 그리고 너 왜 말 돌려? 얘가 아주 영악한 애네. 어?」
「오빠. 지금 불행해요? 행복한 사람은 이런 때 발끈하지 않는데... 멋진 남자는 이 상황에 보통 이런 말을 하는 법이죠. 너는 오늘 술 한잔이 땡긴다! 오빠가 낭만이 부족하시네. 거 웨, 제가 옷이라도 한벌 사드려유? 네? 아 참, 오빠 차 뭐에요? 페라리? 포르쉐 구형? 설마 볼보 웨건 구닥다리? 서글서글한 거? 오빠, 여자친구 없죠? 내 그럴줄 알았어. 완전 허당이네 허당. 앗, 미안해요. 빈말이랑 농담을 간혹 잘 분간하지 못하시는데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참말 한마디만 할께요. 오빠는 제 이상형이에요. 꺄악~!」
이때 이후로 X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석하게도 나는 그 순간 지금 겪는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추리와 연애감정과 마술적 사실주의로 풀어서 글로 쓸 것인지 그에 관한 구상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나는 꼭 진짜인 듯한 최면에 빠진 것 같다. 정말 내가 생각한대로 가까운 미래가 내 예상대로 척척 진행될 것 같은 예감을 느낀 다음 내 영혼과 육신이 일시적으로 분리된 것만 같은 착각 속에서 하나의 소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런 상상이었다.
나는 X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그녀의 손목시계는 고급스럽다. 그런데 그 멋진 초침이 째깍째깍 움직이다가 갑자기 정지한다. 그리고 초침만 정지한 것이 아니라 시간까지 멈춘다. 주변을 둘러보니 SF 영화에서 본 것처럼 모든 움직임이 정지됐다. 모든 생명체의 움직임이. 그러나 나는 움직일 수 있다. 나는 멈춰있는 그녀를 관찰하다가 그녀의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오, 이럴 수가! 그때 그녀의 모습이 차츰 희미해진다. 불투명했는데 반투명했지고 점차 투명해진다. 서서히 몸체가 증발한다. 거의 기화됐다. 마지막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나는 숫자 셋을 세는 음성과 손가락 딱 소리에 깨어난다. 그곳은 점집 2다. 그리고 나는 운세를 보고 어쩌고 일을 다 본 후 점집 2를 나온다. 그러다가 X를 만나게 된다. 나는 그녀와 초면이지만 우린 초면이 아닌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았던 그대로 산다. 그러다 나는 X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그녀의 손목시계는 고급스럽다. 그런데 그 멋진 초침이 째깍째깍 움직이다가...... 그 순환에서 탈출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문제를 푸는 이야기를 쓰면 어떨까 라고 생각했다. 내가 떠올려본 공상은 이러했다.
그렇지만 별로 재미없을 듯 하여 나는 그것을 잊어버렸다. 핸드폰에 음성으로 수첩에 글로 남길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그녀가 어딘가로 가자고 해서 난 그녀를 따라 찻집에서 나왔고, 우리는 식물원 대신 클럽에 가게 되었다. 클럽에 들어갔다. 클럽의 이름은 모르겠다. 클럽에서는 그녀의 친구가 생일 파티를 하고 있었다. 모두들 앳된 청춘들이었다. 파릇파릇했다. 생기가 넘쳤다. 모두 잘나가는 친구들 같았다. 하나같이 춤도 잘 췄다. 각자 또 같이 웃고 떠들고 얘기하고 모두 즐거워보였다. 한없이 기뻐하는 듯 했다. 행복해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이방인이 된 것만 같았다. 그녀는 처음에 날 챙겨주는 듯 했지만 친구들에게 붙들려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노느라 더이상 날 챙겨주지 못했다. 역부족인 듯 보였다. 아무도 나와 놀 생각이 없는 것 같고 또 너무 시끄러워서 난 위스키병을 한병 들고 그곳을 나와버렸다. 내가 보고 구경한 건 모두 허상인 것 같았다. 나와서 보니 병은 최고급 위스키였는데 새것이 아니었고, 안에는 그냥 설탕물 같은 음료수가 들어있었다. 저런! 그렇게 거리를 정처없이 걸어다니다가 나는 저 앞에 보이는 점집 4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의 대문을 열었다.
13
점집 4에 들른 후 특별한 물품이나 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실내에는 집중력을 높여주는 백색 소음 같은 음향이 흐르고 있었다. 도사는 특별히 고전음악을 좋아하는지 CD가 한쪽에 단정히 정렬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로맨스 소설도 보이고 또 마림바와 노트북과 증강현실 게임용 헤드기어 같은 물건도 보였다. 앞에 계신 도사는 백발이 성성한데 이해가 안 되는 게 수염은 검정 수염이 많이 섞여서 전체적으로 쥐색을 띄었다. 온통 백발이면 수염도 눈썹도 대충 구색이 맞아야 하는데 그게 약간 뭔가 어울리지 않아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점집에서 가장 많이 오고 가는 의례적인 대화의 흐름을 이어갔다. 그래서 나는 어쩐지 그 진지함과 심오함을 깨트리고 싶어졌다. 그래도 이곳은 어떤 영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 그러나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내가 실언을 하고 난 후였다.
「영감님, 그 수염 가짜죠?」
도사는 내 말을 먹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답변은 없었다. 엄한 말을 내뱉은 나만 어색해졌다. 그는 두꺼운 책을 매우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꼭 그림책을 보면서 숨은그림을 찾는 것처럼. 아마 저 책은 운세에 관한 교본일 것이다. 정통적인 개론서 같은 거. 나도 그 책만 달달 공부하면 1주일이면 웬만한 점쟁이처럼 점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가하게 점이나 보면서 희희낙락, 때로는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차서 따분하게 시간을 보낸다며 뚱한 표정을 지으며 쉽게 쉽게 노는 분위기는 바로 거기까지였다. 그때 이후로 나는 바짝 긴장하고 초조해 했으며 식은땀을 쉴새없이 흐르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 할 수 없었다. 완전 공포의 험악한 기분으로 일관되어 운세보기를 즐길 수도 그렇다고 그곳에서 도망쳐나올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도사의 머리 윗편을 살짝 봤는데 그쪽 벽면에 액자 세 개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액자 밑에는 1대 누구 언제부터 언제까지, 2대 누구 언제부터 언제까지, 3대 누구 언제부터 언제까지 라고 씌여 있었다. 이 도인이 속한 어느 문파의 역대 수장들이 나열되어 있겠거니 예측했고, 3대는 이 양반의 스승이나 직계 선배 또는 혈족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 후 나는 그냥 고개를 돌릴려고 했다. 그러나 오 어쩐다냐, 이게 웬일이야! 맙소사!
1대 누구 괄호 열고 몇 년 물결 표시 몇 년, 그리고 2대와 3대도 똑같이! 바로 그것은 내가 최근 들렸던 점집 1, 점집 2, 점집 3의 점쟁이들이었다. 처음엔 닮은 사람일 꺼라고 짐작했다. 또 괄호 열고 몇 년 다음에 물결 표시 다시 다음에는 연도가 씌여 있지 않겠거니 했다. 그런데 정확히 언제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1대와 2대는 사진도 흑백이었다. 다시 봐도 또 다시 봐도 아무리 봐도 분명 내가 점을 봤던 그 양반들이 틀림없었다. 그분들이 내 운세를 봐주고 즉시 액자 속으로 들어간 것도 아닐 것이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점집 2에서 증강현실과 최면에 걸려서 환상을 체험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미친......! 뭐야 이거? 정말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 앞의 영감님은 책을 보시다가 졸고 계셨다. 아예 곤히 주무시기 시작했다. 꼬부랑 할아버지는. 그럼 잠깐만, 이분이 4대라면 5대는 누구일까? 나? 뭐시여, 그건 아니야 아니라고. 뭔 그런 몹쓸 상상을! 나는 살며시 일어나 액자 곁으로 다가갔다. 그것을 만져봤다. 대충 만든 게 아니었다. 가짜인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먼저 이 점집에서 나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여러 가상의 예상되는 이야기가 살짝 떠올랐다가 막 서로 엉키기 시작했다.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순간 오디오에서 백색 소음 다음으로 실제 우주 음향, 각종 유인 무인 우주선이 녹음한 우주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완전 쫄았다. 바지에 약간 오줌을 지렸다. 나는 개였다. 개보다 더 했다. 그러나 잘 참았다. 이제 게임이 시작된 듯 했다. 본격적인 막이 오른 듯 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게임의 규칙은 무엇이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까마득하고 정신이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뭐였겠나, 아무 것도 없었다. 곧 나는 마음을 자의적이 아니 어쩔 수 없는 처지 때문에 비우게 되어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렀고, 따라서 나는 막 지어낸 듯한 썩 세련되지 못한 어느 지침을 따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무시하라(!),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몰래 빠져나왔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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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무료한 생활을 이어갔다. 아마 한동안 운세를 보러갈 의향은 날 찾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사는 고을에서는 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열리는 지역 축제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곳곳에 광고와 안내의 글과 말이 어딜 가나 가득했다. 작년 축제 때 즐겁게 구경하고 어울려 놀기는 했으나 나는 이번에는 조용히 혼자 집에서 지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동네를 산책하다가 어느 벽보를 발견했다. 몇 회 역술인의 밤을 축제 기간에 어디서 연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잊었다. 떠올리기 싫었다. 기억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미 읽었고, 기억됐고, 게다가 또렷히 저장됐다. 그것은 깊이 각인되어버렸다.
그날부터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시골 천변에 나갔다. 가서 무작정 노을을 구경하고 달을 주시했다. 그건 마치 완전 헤어진 것은 아니지만 각자의 사정 때문에 자연히 멀어진 남녀가 연인을 잊지 못하고 매일 술을 마시는 일과도 흡사했다. 그리고 나는 구스타프 말러의 1번 교향곡과 더불어 많은 음악가들의 1번 작품만 들었고, 도시에 갈 때는 1호 버스만 이용했고, 하루에 녹차는 딱 1잔, 모자를 쓸 때는 꼭 챙을 1시 방향으로 틀었으며, 옛날 자기는 밤 1시에 잠든다는 그녀의 말이 떠올라서 나도 새벽 1시에 잠들었다. 낮 1시에는 항상 단골 빵집에 들러서 카페라떼와 조각 케익을 먹었다. 외출할 때도 최대한 1가지 색상 계열로만 옷을 입었고, 하루에 완수할 과제는 1가지를 넘기지 않았고, 하루에 약속도 1개 책도 1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 전에는 다른 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별 쓸데없는 징크스가 생긴 것이다. 그것과 저것이 관계는 없지만 왠지 나는 우연히 생긴 법칙을 한동안 준수하면 그 역술인의 밤에 참석하고 싶은 욕망을 수월히 잠재울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예상은 어김없이 빗나갔고, 의지도 부족했다. 뿐만 아니라 D-데이 말미에는 잘 지키던 규칙을 조금도 아니고 아예 무분별하게 어기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운명이었을 것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쩐 일인지 그걸 피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사는 동안 내내 패배주의에 젖어서 소심한 인생을 살게 될 것만 같았다. D-데이 3일째부터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했다. 그러던 중 차차 결전의 날이 임박하여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2일 전에는 이렇게 생각을 바꿨다. 만약 X가 날 찾아온다면 찾아와서 같이 그곳에 가자고 한다면 꼭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 라고. 그리고 결국 하루 전에는 또 이렇게 변심했다. 만일 X가 오지 않는다면 그건 뭔가 앞뒤가 맞지 않고 나는 초대도 받지 못했으므로 아무래도 쳐들어가서 대체 왜 날 부르지 않았냐고 따지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설마 뭔 일이야 있겠어? 내가 뭐 죄졌어? 그렇게 혼자 생각했던 것이다.
15
그날이 됐다. 행사는 평범했다. 모임은 소란스럽지 않았다. 나는 절대 그런 모임에 참석하지 않을 꺼야 관심 없어, 라는 첫 다짐은 쥐도 새도 모르게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나는 행사 당일 행사 장소에 있었다. 마치 행사 관계자인 것처럼. 그곳에는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공짜 음료수와 공짜 샴페인이 제공되길래 처음에는 격식을 갖추고 홀짝홀짝했다. 말을 나눌 사람도 없고, 중간 중간 펼쳐지는 마술쇼와 연기와 공연은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다. 그러다 살짝 취기가 올라왔다. 나는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당시 나는 뭐랄까 잊고 있던 막연한 애원 하나를 떠올렸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당시엔 뭔가 원하는 구석이 있었나 보다. 그렇게 밖에 추리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애원은 이랬다. 부디 그분들을 만났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던 것이다. 제발 내가 점집 4에서 헛것을 봤기를. 나는 그렇게 기원했다. 간절히 빌고 무작정 재회를 바랬다. 오랜 기간 못 만난 인연은 아니지만 만약 그분들과 해후할 수 있다면 내 삶이 앞으로 더 재미없어져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어차피 항상 심심한 인생,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큰 변화는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더 이상 무덤덤해질 고비도 없었고, 왕성한 유흥 욕구와 쾌락만을 탐닉하는 본성보다 나는 언제나 고전적인 학문을 탐구했으며 명상을 하고 지성과 예술을 가까이했다. 극장에는 갔으나 삼류 비디오는 멀리했다. 그리고 어디 믿는 구석도 없으면서 그분들을 꼭 다시 만날 것으로 내다봤다. 감격적인 만남, 극적인 포옹 그리고 어디식 인사까지? 마지막 껀 한분과만?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같은 말이 생각난다. 그런 노래 제목과 술집 이름, 흔하다. 그러다 다시 술이 깰려고 했다. 나른한 조증에서 엷은 울증으로 느닷없이 전환할려는 국면이 얼마 남지 않은 듯 했다. 그래서 나는 쟁반 위에 공짜 발포성 와인 잔을 들고 다니시는 나비 넥타이를 맨 아저씨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는 내가 점집 1에서 만난 주술사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그분이기를 바랬고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마치 거짓말처럼. 오, 이럴 수가! 드디여! 일반인의 윤택한 삶을 위하여 쟁쟁히 현역으로 활동하시는 도사 1님의 정정하고 밝은 모습을 포착한 순간 나는 거짓말 조금 보태면 날아갈 듯 했다. 반가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분 옆에는 점집 2에서 봤던 만담에 능숙하신 신사에 가까웠던 도사님이 계셨다. 1과 2가 각별한 사이처럼 보였다. 적어도 서로 상도덕으로 얽힌 사이는 아닌 듯 했다. 나는 지면에서 떠오를 것만 같아서 뭔가 주변에 잡을 것을 찾기 시작했다. 까딱 잘못해서 엄한 걸 잡으면 안되니까 잠시 의자에 앉기로 했다. 점집 4 사장님도 참 짓궃기도 하지. 개구쟁이 어르신. 아니면 정말 내가 잘못 봤든가. 보기는 제대로 봤는데 나의 가짜 경험일 수도 있다. 또는 거짓 사진이거나. 그러나 대충 돌아가는 형국을 보니 뭐 어떻드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저분들은 정말 사자였고, 이곳은 그림자 없는 사람들의 가장무도회였으며, 이분들은 모두 모임이 끝나면 각자 액자로 앨범으로 책 속으로 동상으로 TV 화면 속으로 들어가야 할 숙명이라면 그건 다름 아닌 허구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은 허상이다. 인간의 삶은 너무 허무하다. 그리고 나는 허당이다. 또 문학은 허풍이다. 사랑은 허식이고, 어떤 약조는 허위다. 예의는 허례고 소비는 허영이다. 이처럼 목적지 없이 부풀어오르는 상상의 영화로움과 서사의 호사로움은 무대에 올라 마이 웨이를 열창하시는 실사장인지 대타인지 불분명한 점집 4의 도사님을 보는 순간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때의 찬탄은 비로소 환희와 열락에 이르렀다. 아조 정점을 찍었다. 12시에 나는 호박마차를 타야 하고 이분들은 모두 생쥐로 바뀔 것이라는 장애물 같은 속임수와 헛된 공상은 여지없이 거짓이라고 밝혀졌다. 억측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막다른 골목에서 환상을 만났고 대천사의 호의 때문에 시간은 마치 거꾸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유유히 그리고 아름답게 하지만 더더욱 즐겁게 말이다. 나는 여기까지만 게임을 즐기고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됐다고 판단했다. 늦으면 취하고 추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을 뒤로 하고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머나!
문 앞에서 숙녀 X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극단적이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그녀가 과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가 그것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또 그렇지 않다 라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또 그녀도 날 피할 이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녀는 꼭 내가 지금 이때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었다는 것처럼 나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아, 다시 우울감이 부쩍 상승했다. 즐거움이 너무 커서 환상통이 유예되었다가 한꺼번에 찾아왔으며, 허언증의 부작용이 도졌나? 뭔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속는 건 아닐까 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슬퍼할 아무런 까닭이 없었는데 나는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자수하여 광명을 찾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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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X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할 수 없었다.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녀는 가슴에 3번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설마 그녀는 유령? 아닐 것이다. 여기 이렇게 실체가 분명하게 있는데 그럴 리는 없다.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렇지만 날 뒤에서 잡아끄는 세한 느낌 그건 뭘까? 그녀는 괴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옛날 세상도 아니고 첨단 문명과 그것은 절대 공존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인사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어서 너무나도 흐뭇하고 좋고 기뻤으나 나는 인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눈탱이를 한대 맞은 것처럼 눈화장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다크 써클까지 심하게 앓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재빨리 기억의 필름을 되감았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내게 어떻게 대했드라, 나는 또 뭐라고 했드라... 아무래도 역할에 어울리지 않게 나의 앙탈이 좀 심했던 것 같아서 후회가 된다. 진심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야 한다. 포기할 수는 없다. 다시 관계를 따스하게 되살려야 한다. 온기는 시간이 지나면 살아날 것이다. 기억해내야 한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동안 동기부여 강연회와 홈쇼핑 판매용 비디오에 가져다 바친 돈이 얼만데! 나름 독학으로 갈고 닦은 술법은 뭐고 익숙하게 체득한 처세술은 다 어디 갔냐고!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속고 얼마나 많이 방황했는데! 모진 풍파와 숱한 고초를 겪었으면 이제는 우연한 마주침이든 잘못된 만남이든 자연스럽고 지혜롭게 대처할 때도 됐다. 언제까지 내 인생의 조연만 맡고 기쁜 인생의 변두리만 떠돌 수는 없는 일이다. 눈치는 물론 연기력도 늘었다. 말발, 늘었지 안 늘었겠나. 그러나 어째 이상하게 그녀의 진기한 위세 앞에 나는 한없이 쪼그러들었고 이건 마치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기억을 되살려내는데 성공했다. 얍─얍─얍! 앗싸! 야호!
「안녕, X! (앗 아니다. 이건 예전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건넨 말이 아닌데... 다시 시작하자. 그러면 된다)... 오, 엑스마키나! 예뻐졌네, 농담이야! 푸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 (오, 이런! 망했다. 왜 이런 말이 튀어나왔지? 게다가 얘는 엑스마키나가 아니라 엑스인데... 이젠 심지어 그녀 이름이 X가 맞는지 그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됐어. 점점 상황이 악화되고 있단 말이야)... 있잖아, 난 말이야. 네 남자친구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어. (그래, 이거다. 이거라고. 그냥 막 던지는 거. 그게 내 전공이니까) 아가씨, 전 미래에서 왔어요. 나를 알고 있지? 우리 친했잖아? 처음에는 많이 다퉜지만 금새 원앙새처럼 가까와졌던 거 기억하니? 도대체 넌 누굴 닮아 그렇게 똑똑하니? 할아버지? 할머니? 안 웃기지? 나도 알아. 아마 감격스러워서 재회가 너무 반가워서 내가 조금 이상해졌나 봐. 이렇게 다시 만나니 기분이 어때? 설마 다시 못 볼 꺼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많이 보고 싶지는 않았어? 내가 아니라 네 남자친구 말이야. 외로웠니? 여자는 질문 받는 걸 좋아한다는데 음, 지금은 썩 그렇지 않은 거 같은데. 우리, 포옹할까? 아님, 키스? 아니면 뭐, 뭐? 도대체 뭘 바래? 어? 뭘 바라냐고! 말을 하란 말이야 말을, 어? 아, 화내는 거 아니야. 기분 풀어. (내가 너무 세게 나갔나? 알 게 뭐야!) 너 지금까지 남자 몇 명 만나봤어? 거짓말 할 생각일랑 접는 게 좋을 꺼야. 척하면 척, 다 안다구. 1명? 에게~ 정말? 10명이구만. 더 돼? 다들 뭐하는 놈들이야? 뭐하는 녀석들이었냐고. 나에게는 너를 너의 남자친구에게 데려다줄 책무가 있지만 난 널 쉽게 보내주진 않을 꺼야. 왜냐하면 넌 내 이상형이니까. 그리고 내가 과거에서, 아니 미래에서 왔다는 거 그것만 기억해두렴!」
나는 말하고 나서 그나마 완전 꽝은 아니라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얘는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너무 조용했다. 왜 말이 없을까?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왜 말이 없냐고!
이때 이후로 나는 할말이 떨어졌다. 이상하게 즉흥적으로 여자 꼬실 때 하는 말들조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예의상 숙녀에게 물어보는 그런 말들 역시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상황으로 봤을 때 지금 이 친구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건가? 남자에게 모성애... 부성애? 측은지심? 모르겠다. 내가 봤을 때 아무래도 얘는 사랑에 실패한 거 같았다.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난 그냥 옆에 있어주면 될 꺼 같았다. 그게 최선인 듯 보였다. 말없이. 조용히. 그렇게.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나왔고 같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지금 멀리 어딘가에서 우연히 들리는 노래가 있다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그런 제목의 사랑 노래? 그건 아닌 듯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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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나는 X와 나란히 걸었다. 그러다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시기는 아니기 때문에 나는 혼자 생각했다. 얘는 지금 어떤 알 수 없는 슬픔 때문이 아니라 원래 이렇게 발걸음이 느린 것은 아닐까 라고. 그러다 우리는 어느 조용한 공원 옆을 지나고 있었다. 이때쯤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그녀보다 반 보쯤 뒤쳐져서 걸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나는 한눈을 팔았다. 그때 내 전화가 울렸다. 무슨 전화지, 하면서 나는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때 난 옆을 쳐다봤다. 그녀도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얘가 나한테 전화를 걸었나 라고.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떤 남자와 통화하는 듯 했고, 내게 걸려온 전화는 잘못 걸려온 전화였다. 나는 그녀의 대화 내용을 엿듣는다는 오해를 사기 싫어서 우리의 보폭은 한 걸음으로, 그것은 다시 한 걸음 반으로, 그녀가 전화 통화를 마칠 때에는 두 걸음으로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멀어지지는 않았다. 우리, 라고 지칭하지만 그건 어쩌면 X와 나의 마음의 거리일 것이다. 나는 뭔가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꼈고, 그녀의 이름은 아마도 X가 아닐 것이라는 의문을 잡고 늘어졌으며, 마침내 나는 그녀의 이름이, 그것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혹시 그래서 내가 그녀를 그냥 X라고 알고 있었던 듯 하다.
갑자기 그녀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거리에 보이는 옷가게로 걸어갔고 그곳에 들어갔다.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줄곧 쇼핑만 하다가 어느 원피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 옷 앞에서 어쩜 만족스러운 듯 의뭉스러운 듯,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인지 흡족하다는 것인지 잘 모를 듯한 상당히 난해한 표정을 짓다가 그 옷을 들고 옷을 사기 전에 입어보는 쇼룸에 들어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녀가 기분이 풀리고 다시 웃는 모습으로 돌아오고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듯한 청량감을 동반한 다변을 되찾는 것은 비로소 시간 문제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나는 내가 너무 쉽게 마음을 놓는 것은 아닐까 라는 예측하기 어려운 어떤 돌발성의 가망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 잠시 가만히 전후좌우 따져보기 시작했다. 딱히 별일은 없을 것 같아서 다시 기분이 좋아질려고 했다.
바로 그때, 분위기가 좋아질려다 말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피팅룸에 들어갈 때 가방을 놓고 갔기 때문이다. 옷을 구경하다가 거울 앞에 있는 의자에 가방을 놓고 갔다. 가방의 재질은 가죽이었다. 겉에 적힌 글씨는 나는 '판타지'라고 읽고 싶은데, 어쩜 이럴 수가! 정말 그것은 판타지였다. 나는 그녀의 가방을 들춰보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그건 실례다. 그건 아니다. 딱 내가 잠깐만 알맞는 핑계를 미리 떠올려놓고 가방을 뒤지다가 그녀가 딱 나와, 오 이 인간이 내 가방에서 뭘 훔칠려고 그래 날 뭘로 보고 말이야 이런 소도둑놈 같으니라고, 철~썩!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기다리면서 혼자 몽롱한 공상을 했다.
공원에서 우리는 나란히 걸어가다 그녀가 내게 슥 팔짱을 낀다. 나는 깜짝 놀라며 팔을 뺀다. 그러다 우리는 공원 벤치에 앉는다. 그녀는 저쪽을 쳐다보는 척 하면서 엉덩이를 살짝 들어 내게로 한뼘 다가온다. 앉은 채로. 나는 이쪽을 쳐다보는 척 하다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한다. 다시 그녀는 이번에는 저쪽을 쳐다본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는 반대편을 쳐다볼려다가 얼굴을 살며시 돌려서 남녀 간의 그런 분위기를 잡을려고 하는데, 그런데, 어머나! 내가 정말 어렵게, 진짜 어쩔 수 없이, 너무도 불가피하게 꾹 참고 어느 정도까지만 선행을 베푼다는 의미를 바탕으로 청소년 드라마를 찍는다는 생각으로 농밀한 그런 거 말고 적당한 뭔가 풋풋한 그와 같은 가르침을 전해야겠다, 바로 그런 심정으로 나는 그녀에게 딱 고개를 돌렸는데, 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 이런, 개뿔! 그녀는 사라졌다. 감쪽같이. 분명 인기척도, 곁눈질로 확인한 환영도, 달콤한 분위기도, 가공할 만한 효과음이 들리는 환청도, 짠한 느낌도, 찡한 애정도, 키스를 부르는 립글로즈의 눈부신 반짝임도, 가슴 뭉클함과 부푼 기대감도 다, 모두 다 진짜였는데! 그런데, 그녀가, 사라졌다. 완벽하게! 완전히! 그리고 저 앞 나무 옆에 웬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있다. 야~옹 야~옹 하면서. 그녀는 마녀일까 장난꾸러기일까? 그녀의 이름은 네로? 메롱? 혹시라도 저 고양이는 남자일까? 저 고양이는 그녀가 아닐까? 나는 귀신에 홀린 것인가? 그녀는 정말 미래에서 왔을까? 그녀는 나에게 뭘 가르쳐주고 싶어서 여기에 왔을까?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무엇일까? 이별하는 법? 작별 의식? 사랑? 아니면 허풍? 혹시 난 미친 것은 아닐까? 아니다.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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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것은 피팅룸에 들어간 그녀를 기다리며 나 혼자 몰래한 사랑이 아니라 몰래한 상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는 좋았다. 조금 즐거웠다. 엷디엷은 기분 좋은 흥분은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기쁨의 흐름이 끊기면 무척 슬플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래도 그녀를 지켜주기 위하여 어디까지나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의미에서 그녀의 가방을 조사해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녀의 가방에 혹시 불법 파일이 담긴 USB가 있으면 어떡하나, 007 가방처럼 그녀의 가방이 바꿔치기 당했으면 어떡하나! 나는 천재적인 추리력의 소유자였고, 위대한 이타적 낭만주의자였다. 최소한 지금은, 적어도 여기서는. 그냥 가만히 샌님처럼 묻는 말에 답만 하고, 언제 손을 잡을지 어떻게 집에 바래다줘야 할지 하나도 모르고 좌충우돌하는 쑥맥이나 거꾸로맨은 내가 지향하는 우상이랄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었다. 그건 바보고, 난 그녀의 이상향이고 그녀의 천사요 왕자님이었다. 따라서 나는 그녀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때문에 나는 그녀의 가방을 조사해봐도 괜찮은 것이다. 그럴 것이다.
판타지라고 써있는 그녀의 가방 안에 혹시 블로그라는 제목의 공책이 나오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지금 읽던가 아니면 내 속옷 안에 넣어놨다가 나중 읽어봐야지. 아니야. 아니라고. 괜히 흥분하지 말기. 거기까지만 알고 다시 넣어놔야지. 곱게. 고이. 그렇지.
그러다가 나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나서 그녀의 가방을 열어봤다. 와우! 이런, 거북이가 잠꼬대하고 당나귀가 구토하고 토끼가 런닝머쉰을 뛰는 일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다른 게 아니라 그녀의 가방은 텅 비어있었다. 그것도 그냥 텅빈 것이 아니라 그 빈 공간은 무척 깊은 것 같았다. 무언가 우주의 기운과 4차원의 신비가 느껴지는 그런 허공이었다. 정말 고요한 침묵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막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진짜 머리카락은 그쪽으로 쏠렸다. 볼살도 온전히 중력의 영향만 받은 건 아니었다. 어쩜 이런 일이, 내 얼굴이 가방 속을 보다가 점점 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내 의지와 반대되는 일이었다. 나는 목에 힘을 빡 줬다. 다행히 내 얼굴은 가방 안으로 빨려들어가지는 않았다. 이게 대체 뭔 일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가방 속의 암흑은 그냥 검정색이 아니었다. 모든 빛과 혼과 영과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신비스러운 검정색이었다. 비싼 옷을 사본 사람은 안다. 몹시 세련된 검정색이란 어떤 느낌인지를. 지금 이 시간마저 그녀의 가방, 판타지 안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나는 슬슬 말려들기 시작한다. 나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세뇌를 당하고 있었다. 나는 착착 빠져들고 있었다. 내 정신은 온통 그곳에 쩍쩍 들러붙어버렸다. 나는 가방 안에 마음이 빠져버렸다. 그녀의 가방에게 내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처절한 의지와 투철한 이성의 힘으로 감성과 마력과 환각과 유혹과 유희와 탐미와 허영과 꿈과 신비주의와 모호한 동경과 달콤한 기대감을 이겨내고야 말았다. 나라고 언제까지나 헛된 몽상으로 일관하고, 가짜 사랑에 헤매고, 이상한 취미에 빠지고, 장비 탐닉만 하고, 으쌰으쌰 싸돌아다니고, 날이면 날마다 백~판 자빠져 놀고 또 자빠져 팔짜 타령만 하며 비관적으로 또또 자빠져 있어야 하겠나. 긍지를 갖고 밝은 세상을 꿈꾸고, 환한 미래를 향해서 희망의 찬가를 부르고, 환희의 허구를 지어내고 타인에게 열락의 간접 경험을 제공하기 위하여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뭔가 시도는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하지 않겠나, 아니 그렇소? 야구방망이 부러질 때 부러지더라도 뻔트는 대봐야 하지 않겠나? 인생은 뻔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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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그녀를 기다렸다. 가방은 반듯하게 한쪽에 놔두고 나는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이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진단을 내렸다. 보통 일이 아닌 듯 했다. 난관에 봉착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들어갔던 피팅룸에 바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거기를 잘 살폈다. 마침 그녀가 들어갔던 피팅룸에서 웬 아리따운 아가씨가 나오는 것을 봤다. 썩 아리땁다고 속단하기는 어려웠으나 일단 그랬다. 그곳은 대단위 쇼핑몰이고 피팅룸은 찾아보면 매우 많을 테지만 그녀가 들어간 피팅룸은 그 피팅룸이 확실했다. 내 두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그 후에 공상을 하든 추측을 하든 억지를 악상으로 연결시키든 나는 그분과의 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녀가 바로 그 피팅룸에 들어간 것을 지켜본 후에 말이다. 뭔 다른 사람이 그 피팅룸에서 나왔기 때문에 나는 당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라고 추론의 문을 열었다. 논리적으로 따져봤을 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이건 분명 뭔가 잘못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점원에게, 점원 가운데 중역에게, 끝내 이분 저분에게 여쭙고 사정하고 간곡히 아뢰어서 대형 쇼핑몰의 사장이 아니라 그 층을 관리하는 보안 담당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분과 같이 보안실로 향하게 되었다.
보안실에 도착했다. 우리는 같이 CCTV 영상을 확인해봤다. 아, 그 전에 내가 점원에서 보안 담당자를 만나게 되기 중간 단계에서 나는 그녀가 들어갔던 피팅룸에 내가 직접 들어가봤다. 왜냐하면 그곳에 비밀 통로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딱 피팅룸에 들어갔다. 별다른 이상한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당장 그 비밀의 문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면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초소형 로봇으로 변신했을까 아니면 순간이동이라도 했단 말인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뭔 이건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급기야 나는 피팅룸 안을 막 때리고 치고 차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제지를 당했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라고. 뭔가 사정이 그리고 사연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여기서 이러시면 안된다고 그랬고 나도 곧 이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녀가 없어졌다고 믿기도 싫어고 믿을 수도 없었고 그건 그래서는 안될 일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본명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더 미안해졌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매우, 매우 심각했다. 그러다 결국 나는 제복을 입은 건장한 양반과 함께 보안실로 함께 가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녹화된 영상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되는데 아 이런 오오 이럴 수가! 아, 어찌 이런 까마득한 일이 다 있나!
녹화된 CCTV 영상을 재생시켜보니 나는 옷가게에 혼자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피팅룸에 들어가기 전에 의자에 놔둔 가방도 재생되는 영상에서는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나왔다. 나 혼자 연기하는 것처럼, 조현증 환자가 환영을 보고 허상에게 묻고 답하고 같이 놀고 어디를 가고 뭔가를 하는 것처럼 마치 그런 것처럼 나도 그와 똑같이 혼자서 막 놀고 있었다. 말도 안 나왔다. 그건 아니었다. 그건 가짜였다. 난 진짜 경험을 했었다. 진짜 판타지라고 씌여진 가방을 만졌고, 이 두손으로 똑똑히 촉감을 느꼈고 글자를 봤고 내내 고민하다가 정말 어렵게 가방 안을 들여다봤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가방이란 것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도 없었고. 그녀가 옷을 구경하다가 원피스를 들고 피팅룸에 들어갔다? 난 나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완전 미친 놈이었다. 진짜 그랬다. 이건, 이건, 뭐야 내가 미친 건가? 난 멀쩡한데 그러나 멀쩡한데 미칠 수도 있는 것인가? 알 수 없었다. 나도 할말을 잃었고, 보안 담당자도 내가 불쌍해보였는지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날 토닥였다가 그럴 수 있다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그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가짜다. 그러나 난 허풍쟁이가 아니다. 난 양치기 소년이라는 동화책은 읽어서 알지만 난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난 도덕이니 영화니 최면이니 그런 거 모르겠고, 적어도 나는 혼자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녀의 가방을 봤고, 그녀를 옆에서 지켜줬을 뿐 난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뭔 일이냐고! 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어떻게 이런 일이......!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나는 어떤 무아지경에 이를 수 있는 포근하며 감미로운 세속적인 성가곡을 듣는 것만 같았다. 그것의 관현악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나는 마치 탐나는 보물을 발견한 듯한 착각을 일으켰고, 누가 봐도 욕심날만한 직접 체험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 했다. 물론 아주 잠시만, 아주 잠깐은 그랬다. 그와 같은 음악이 들린지 대략 채 1분이 되지 않아 웅성웅성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감지했다. 그 가운데는 내가 가까운 미래에 읽게 될 글도 포함된 듯 했다. 숨소리조차 내기 힘들었네요 재미있었어요~, 재밌어요! 와 진짜 무서워요, 놀람 또 놀람, 끝이 없는 느낌?,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착하게 살자, 내용이 별로에요, 혼이 나갔다, 조금 찝찝해요, 진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와 지루함 장난 아니네요, 촌스러워요, 시시해요, 억지스러워요, 유치해요, 장난해요?, 기발함? 뭐가 기발해요 기발하다뇨 먹이는 거에요?, 한마디로 그저 그래요, 허무 증후군이군요, 반전은 무슨 무반전이 반전이네요, 이야기가 산으로 가요, 보다가 잤어요, 읽다가 욱 했어요, 지루한 듯 뻔한 듯 그러나 하지만 끝내 지루하고 뻔했어요, 아 속았다 속았어...... 그러나 환청을 듣는 이상 증상은 이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막 고기능성 무슨 증후군 주인공처럼 나는 막 갑자기 흥분하더니 책을 한 권, 한 주제에 관하여 아는 지식을 총망라 하는 듯 숫자와 글자에 대하여 암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것처럼 딱 무언가 지식에 관한 일정 분량을 처음부터 끝까지 막 급하게 낭독할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랬는데 정작 길게 외울 수 있는 어떤 내용이 없었고, 나는 미친 게 아니었으며, 선천적인 무슨 기능도 타고나지 않은 것이다. 단지 나는 도저히 내가 나 혼자서 없는 가방을 볼까 말까 초조해하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정말 기쁜 듯이 설렌다는 듯이 가방 속을 엿보고 그녀를 기다리고 막 그랬다는 게 정말 너무나도 믿기지 않아서 답답했던 것이다. 미친놈도 그런 미친놈이 어딨냐고. 이건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완전 어이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나는 정신병자도 서번트 천재 뭐시기도, 돌아이도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본 것을 보고 내 시간을 체험했을 뿐이다. 침울한 그녀를 상냥한 그녀로 되돌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녀는 대체 어디 갔냐고! 이건, 꼭, 기적인 것만 같았다. 진짜 그랬다.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색다른 거 이상한 무언가 오묘한 어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심을 평범한 양심으로 모두 바꾸지는 않았기 때문에, 또 희망의 사과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를 따먹어도 되느냐 제발로 굴러온 호박을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어른의 합리적인 사회성으로 물물교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낮에는 개처럼 뭔가를 탐닉하고, 밤에는 꿈나라에서 코끼리가 되어 팔랑팔랑 귀를 날개 삼아 동화의 나라를 날아다니고, 때로는 혼자서 시인이 되어 시상에 젖어야 하거늘 혼자 영화나 보면서 술에 젖어서 이제 그만 작작 마셔야지 라며 자책하고, 때로는 블로그에 글을 쓴다고 그래서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원래 어른은 많이 알아야 한다며 시시각각 카멜레온처럼 참 많은 대상과 허상을 쫓고 흉내내고 따라했다. 사는 동안 내내. 마침내 이렇게 됐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미처 예상하지는 못했다마는 결국에는 이런 망측한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나중에 회상하자면 지금과는 달리 오히려 지금 당장 형용하기 곤란할만큼 그럴 정도로 당시 체험을 높게 샀을 지도 모른다. 이제는 동사 반복이 아니라 과거형 동사를 발생하지 않은 미래 시점에 부여하고 있구나, 과연 이 일을 어쩌면 아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오오, 손이 다 부들부들 떨린다. 갑자기 몹시 추워지는 것 같다. 몸이, 떨린다. 식은땀을 흘리는가 보다.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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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에 홀린 듯 너무 좋아서 황홀감에 미쳐버린듯 이상한 신비스러움에 도취되어 나는 제정신이 아닌 채로 집으로 갔고, 집에 도착해서 청순가련형 심상을 간직한 종이팩에 담긴 우유를 마셨는데 마시면서 막 입가에 우유를 철철 흘리면서 마셨다. 실지 마신 양은 얼마 되지도 않고 거의 흘린 것이다. 난 넋이 나간 바보처럼 멍한 채로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 후 나는 잠이 들었다. 그렇게 내리 20시간 이상을 잤던 거 같다. 대략 거의 하루를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잤다. 무슨 꿈을 꾸긴 꿨는데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잠을 오래잤나 그 원인은 모르겠으나 어떤 자기 의식을 보호하는 정신적 프로그램이 작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럴 꺼라고 예상했다. 뭐 예지, 투시, 환몽, 특히 판타지, 허영? 아무튼 뭔가 그런 평소에 매우 가깝게 대하고 느꼈던 의제들에 대하여 나는 왠지 모르게 일시적으로 멀리하고 싶은 가녀린 욕구가 느껴졌다. 그래서? 따라서? 그 다음에 나의 행보는 어떠했을까? 블로그에 새로운 글을 올렸을까? 도박에 빠졌을까 게임에 빠졌을까? 쇼핑? 등산? 요리? 아니면 다른 환락의 취미나 가상현실로 대리경험하는 퇴폐미를 추구했을까? 이제 나는 몰락하는 일만 남았나? 언제 고지는 점령했었나? 나는 그 어느 것 하나에도 몰두하지 않았다. 적당히는 즐겼다. 그러나 그것만 생각하며 그것만 상대하는 그런 몰입의 대상이 꼭 그것들은 아니었다. 뭔가 새로운 알듯 말듯 가물가물하며 간질간질한 어쩜 향수병과 닮은 듯한 그것의 실체를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면 대체 그것은 뭘까? 그것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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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후 점집 5를 찾아 떠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