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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6. 11. 15.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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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제 어느 성대한 파티에 갔다 왔다. 그건 어제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꼭 어제의 일이라고 단정지어 가볍게 여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도 그 축제의 열기와 광란의 즐거움에 도취된 흥분감이 쉽게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어제의 일이 아니고 1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만큼 그 행사는 내게 이상한 의미와 희안한 기분을 안겨줬으며, 그 정도로 내가 사랑의 포로나 되는 듯이 나를 들었다 놨다─밀었다 당겼다─쥐었다 폈다 하며 버튼을 눌러 나를 덤블링 시켰다가 서커스장의 공으로 만들었다가 청혼을 뿌리치고 도망가는 여인 때문에 아~나 너나 가져라 하면서 아무 여자에게나 팽개쳐버린 꽃다발이 되었다. 나는.
   다시 말하자면 1주일 전에 파티가 있었다. 그 파티는 격조가 있었다. 음악도 2박자는 물론 3박자까지 제공했고, 나 같은 일반인을 오히려 보기 힘들만큼 유명인 일색이었으며, 거기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즐겁고 행복한 듯이 보였다. 그 어느 인상적인 행사의 이름은 조니의 중편소설 출판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뻤다. 사실 부러웠다. 또 책에 나와 있듯이 조니를 뺀 나머지 무명 블로그의 일원들이 그를 속이고 장난이 심한 듯 해서 내심 미안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뭔가 어떤 인정할 수 없는 뜻밖의 결과를 맞이한 것만 같은 억울함도 없지 않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나에게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그래도 명색이 내가 전업 작가인데 나는 말로만 인터넷 발간이네 어쩌네 하면서 폼만 잡았지 녀석처럼 종이로 정식 출판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조니는 프로듀서에 단편 영화제 감독에 프로덕션 사장에 그 직함만 말하자고 해도 연거푸 말하고 나서도 계속 생각날 만큼 그의 인생은 화려했고, 성공했고, 파란만장했는데 그런데 이번 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를 작가 조니라고 불러줘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다 핑계다. 내가 왜 챙피했냐 하면 솔직히 그가 쓴 책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런 소설을 못 쓸까, 나는 왜 이런 구상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한번쯤 생각해보기는 했는데 대체 왜 실행에 옮겨서 성과를 얻지 못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녀석이 지어낸 이야기일까, 어디서 베낀 건 아닐까, 정말 어디서 영감을 얻고 무엇 때문에 다이아몬드 같은 착상이 떠오른 것일까? 알고 싶었다. 그러나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진짜로 오오 집에서 샤워를 마치고 향수를 뿌린 후 적당한 고전음악을 틀고, 워워 맑은 와인잔에 고급 발포성 와인을 따른 다음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아아, 한 손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한 손으로 책을 들고 딱 그렇게 읽을 걸 그랬네, 라며 너무 성급하게 완독해버린 자신을 자책할 만큼 조니의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품위가 있었다. 읽는 동안 진짜 손에 땀이 났고, 그것은 이미 고전이었으며, 그 독서의 경험은 행운이자 위대한 행위였다. 믿기지가 않았다. 완전 신기했다. 너무 놀라웠다. 그 소설에는 모든 게 들어있었다. 시적 긴장감도, 낭만적 연애 감정도, 신비와 모험과 동화적 감성은 물론 걸핏하면 고급스러운 농담에 기가 막힌 환상에서 더 나아가 초현실적 사실성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그건 꼭 악마가 쓴 소설 같았다. 그러면 조니는 악마인가? 그럴 리가. 하긴 그는 천사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인간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천국도 지옥도 아니거나 생각하기 나름인 것처럼. 조니가 쓴 소설은 어른이 읽어도 어린이가 읽어도, 노동자도 지성인도, 여자도 남자도, 실연당한 술꾼도 사랑의 시를 작곡하는 청소년도 모두 넉넉히 만족시킬 수 있는 진짜 대단한 작품이었다. 완전 최고였다. 그건 미친 소설이었다. 그렇다. 그건 예술이었다. 그러므로 내 기분은 꽝이었고, 따라서 나는 울고 싶었다. 물론 속으로만.
   너무 칭찬 일색이라서 약간 그것의 흠을 잡고 싶다. 왜냐하면 저 하늘의 천사도 사소한 잘못과 우연한 하자와 어쩌면 사랑스러운 옥의 티는 아마도 없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조니의 소설에 나오는 바그너의 어느 서곡, 조니는 내가 잘 아는데 그는 바그너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냥 뭔가 있어 보일려고 그런 브랜드를 막 집어 넣은 것이다. 또 어느 구절에서 뭐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은 오기가 발동했다고? 그 인간이 처음부터 딴 생각을 품었지 어디 어떻게 마음이 선회하고 멋을 추구하고 낭만을 동경하며 추억을 만들겠다고, 다 뻥이다. 모두 위선이고 가식이다. 식상하고 상투적인 얘기다. 그래도 너무 진부하다. 고리타분해서 눅눅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녀석이 쓴 소설은 인기는 물론 당당히 청소년 권장 소설 목록과 지성인의 서재 그 두 곳에 모두 거뜬히 등재되는 축복을 누릴 것이 거의 확실해보였다. 
   그처럼 녀석은 내 동경심을 자극했다. 내게도 대망이란 야생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만들었고, 동심에 기반한 선망 역시 나와 언제나 함께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자극해주었다. 고맙게도. 조롱하는 게 아니라 진짜 감사하게 생각한다. 비꼬는 화법, 통 늘지 않는다. 나는. 여간해서는. 타고난 성정과 관계된 것인가는 몰라도 필요한 때가 있긴 있으니 조금은 것도 연마할 필요가 있다. 녀석은 내 케케묵은 이상주의를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다. 그것은 비로소 부활했다. 나도 말로는 녀석을 질투하네 어쩌네 하지만 우린 친하다. 우린 친구다. 다른 수식어는 필요없다. 그 말 하나면 충분하다. 그래서 난 늬가 뭔 재주로 이런 역작을 만들어냈냐고─늬가 뭔 능력으로 그런 멋진 차를 샀냐고─늬가 어떻게 그런 못생긴 여자를 꼬실 수 있었냐고, 도통 못 믿겠다고─늬 자질에 그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하면서 조니의 멱살을 잡든지 남들에게 비방을 하든지 어떻게든 괜한 장난, 괜한 다툼, 괜한 트집을 양산하고 싶었다. 억지가 아니라. 왜? 친하니까! 그러나 잊으면 안 된다. 이번에는 책이다. 책 출판 기념회다. 첨언하자면 공개적으로 자신의 과오를 자기가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은 코메디다. 작은 그릇은 아니다. 그런데 으쌰으쌰하는 자리에서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우연히 어떡하다 나온다면 모를까, 그쪽으로 대화의 진행을 일부러 흥을 돋고 심도가 깊어진다면 즉 내 허물을 바깥에서 공개하면 그게 언론이 아니라 친구라도 남자들은 싫어한다. 친구들을 깎아내려서 내가 돋보이느냐, 친구들은 가만 놔둔 채 날 자랑해서 내가 튀어보이느냐에 대하여 남녀간에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일전에 다른 친구의 음반 출시 기념회에서 한번 깽판을 부린 일이 있다. 잠깐, 뭔판? 바른 말 고운 말을 쓸려다가 뭔가 핑 돌아서 실수했다. 그때 나는 난동을 부렸다. 술 취해서 막 소란 피우고 막 소리 지른 적이 있다. 내가 최고야~ 내가 최고야~ 그러면서. 그래서 이번에 난 자중했다. 한번 무언가를 풀고 싶었는데 그냥 내면 연기로 대체한 것이다. 그때 일이 있고 난 다음 날 나는 많은 분들께 고개를 숙여야 했고, 그 충격으로 금주선언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번복됐다. 
   괜히 그 내용을 떠올려봐야 내 창작 생활에 도움도 되지 않고, 사람만 쪼잔해지고, 한없이 쩨쩨해지다 드디어 수줍은 줄도 모르고 간교해질 것만 같으니까 그에 대한 사연은 이만 줄이는 게 좋겠다. 그러나 조니가 책을 내다니 아아, 슬픔이 쉽게 가시질 않고 질투가 콕콕 가슴을 찌르고, 동화에 나오는 대표적인 악역들과의 친밀감이 부쩍 급상승한 듯 하여 내 기분을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당분간 바람 쐬고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편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쓰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가슴이 찡한 막 두근거리고 설레는 그런 연애 소설을 쓰기 위하여.


   2

   나는 볼보 웨건에 캠핑카를 결착하여 길을 떠나서 어느 조용한 시골에 당도했다.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그냥 정처없이 도시를 떠나왔다. 아, 도시가 아니라 주거지를 떠나온 것이다. 한눈에 둘러봐도 내가 거처하기로 결정한 건물은 이상했다. 해변에 듬성듬성 위치한 펜션들과 휴양소들은 모두 건축미가 대단했다. 망부석 같은 조각상도 있고 조경도 꽤 잘해 놓았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런 평범한 펜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완전 직사각형 같은 정사각형에 단순한 웬 건조한 건물에서 당분간 지내기로 했다.
   아, 다시 생각난다. 조니의 소설. 제목이 뭐였드라? 그게 제목인가? '나는'과 '나도' 사이? 그게 뭐야! 블로그 증후군?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사랑의 맹세 같은 예사롭지 않은 사건도 아닌데 왜 날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일까? 왜냐하면 그것은 따라하기, 때문이다. 조니의 소설을 읽고 1주일 동안 나도 소설 주인공처럼 통조림과 각화장지를 엄청 사모았다. 하도 많이 사서 어디 쟁여둘 데가 없었다. 캠핑카는 짐짝이 된지 오래다. 그렇지만 혹시 어떻게 객지에서 무료로 드립니다 같은 행사를 하면 글이 잘 써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캠핑카를 끌고 왔다. 어쨌든 그건 헛짓거리로 판명났다. 그리고 무작정 소설 속 주인공 흉내를 낸 것도 아니었다. 이미 조니의 소설을 읽기 전에 일종의 징크스처럼 나는 비누를 사모았기 때문이다. 한 2~3개월 동안 나는 비누를 엄청 사모았다. 나 때문에 비누 회사는 좋았겠지만 나는 그 때문에 그다지 별다른 2차 소득은 없었기 때문에 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따라한 것이었다. 뭐 그래서 역시나-였다.
   나는 그곳의 지명조차 딱히 관심 갖지 않고 매일 백판 자빠져 노는 일상에 빠져들었다. 책을 조금 읽다가 맥주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다가 해변에 나가 낚시를 하고, 낚시를 하다 근처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무료한 생활을 하다가 나는 어떤 평행선과도 같은 두 가지 일하기라는 어느 막연한 임무를 떠올렸다. 한 번에 한 가지만 하기는 평생 해왔다. 조니처럼 다채로운 직업 갖기는 희망이자 이상이었다. 그래서 남은 것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기였다. 그것의 과제는 이랬다. 첫째, 아서 밀러의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 읽기. 둘째, 여행지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살아보기. 나는 그러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나니 조니의 출판 기념회에서 느꼈던 뒤틀린 미성숙한 자존감 그것의 고배를 좀 더 밝고 건강하며 아름답게 개선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작렬하는 생동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뿌듯함은 길게 가지 못했다. 작심삼일도 못됐다. 오히려 훨씬 우울해졌다. 근시안적 권태에 대한 미흡한 수심만 간직하게 되었다. 만복을 바란 것도 아닌데 소풍의 기쁨은 커녕 창작의 절벽과 마주하고, 나른하며, 심심하고, 따분하다는 그 유명한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나는. 하여튼 세상에 태어난지 몇 년째 삶, 참 잘도 돌아간다. 그래 놓고 하는 말이, 인생은? 지금 생각 같아서는 정말이지 뻔트라도 대고 싶다. 뻔트를 댔는데 그 공이 떼굴떼굴 굴러가지 않고 장외홈런이 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리 영예로운 잔치가 아니다. 반짝이지도 않고, 출세도 못했고, 내 마음대로 무엇을 좋아하며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것조차 어딘가에 양해를 구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음험한 작전을 책동하는 게 아니다. 조니처럼 출판기념회를 화사하게 치르는 것, 바라지도 않는다. 핸드폰 바꾸기를 원하지도 않고, 차의 뚜껑을 없애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인생이 날 푸대접하고 있는 것만 같다. 여담이지만 내가 날마다 놀고 일하고 자고 먹고 하는 바로 이곳은 그냥, 천재들의 나라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리고 나는 여기 당도해서 생활한지 1주일이 되었다. 내가 그 7일 동안 도대체 뭘 했나, 대체 어떤 위대한 성과를 얻었는가? 아찔한 지성으로 똘똘 뭉친 고객을 창출할 수 있는 소설을 썼는가, 못 썼는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떠올리기도 싫다. 일단 더 놀아봐야 할까? 뭔가 더 숙고하고 자중해야 하는가? 뭘 자숙해? 왜? 어느 높은 자리에서 내가 실각했나? 아니다. 잃을 게 없으니 오히려 용기가 충만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어쨌든 당분간 동서남북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녀도 보고, 낯선 사람과 밑도 끝도 없는 대화도 시도해보며, 소설 구상과 문학적인 착상을 얻기 위해 힘쓸 테지만 분명한 건, 내가 이곳 천재들의 나라에 7일간 머물러서 글이 써지지 않았으니 이 숫자에 0이 한 개 붙든 두 개 붙든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세 개? 거 너무한 거 아닌가? 보자 보자 하니까 이거......! 왜 그런 엉뚱한, 꼭 볼이 새빨간 십대 소년 같은 다짐이 발생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뭔가 꼭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가당키나 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당히 떼쓰다 또 나중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삶이 뭐 배꼽 잡고 웃을 일도 아니고 인생이 심심하면 다냐, 그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린 그냥 새장 속의 새다. 남편은 생쥐고 마누라는 암고양이다. 누구는 상민 누구는 상놈일 수도 있다. 위신이랄지 체면 때문에 무언가를 포기해서는 결코 안 되는 처지는 아니지만 일이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 어쩔 도리가 없다. 하루는 TV만, 하루는 독서만, 하루는 관광만 그렇게 버틸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어딘가에서 맴돌던 그분이 오시기를 기대하면서.


   3

   문제는 8일째 되는 날에 발생했다. 내가 천재들의 나라에 도착하여 생활한지 일주일 하고 하루가 지난 날. 왜 그랬을까? 설마 처음에 무턱대고 날 천재라고 간주했다가 알고 보니 나는 천재가 아닌 사실이 발각된 날이 바로 오늘일까? 아닐 것이다. 부디 나도 천재이기를? 그런 재수없는 소리는 생략하는 게 옳다. 타성에 젖은 인기에 길들여지지 않았다면. 요즘 세상은 그 누가 뭐라 해도 두 가지로 나뉜다. 유명인이냐 아니냐로. 이 말이 왜 나왔을까? 왜냐하면 그런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잠정적으로 지정했던 천재들의 나라는 곧 유명인의 나라가 아닐까라는 생각. 여기 사는 사람들은 거의 모든 사람이 연예인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전문가다. 인문과 교양과 상인과 만화작가와 동네 아줌마와 술집의 아저씨든 누구든 거의 모든 사람이 유명인이고, 인기라는 차를 마시고, 명성이라는 공동체로 연관되며, 자존감은 극도로 높고, 세상에서 내가 최고고, 미치고 발광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 되는 곳, 그로써 생기가 돌고 돈도 돌고 인기마저 도는 곳. 따라서 웃음꽃은 끊이질 않고, 조의는 일상적인 농담으로 변모되고, 상복까지 예술이며, 만가는 천상의 빛나는 음률이자 또 다른 생명력을 태동시키는 어쩌면 사사로운 생활이 되는 곳. 그런데 그게 뭐지, 그게 대체 어떤 곳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만우절이나 문화 행사 또는 어떤 유행 같은 것에 불과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내가 뭐 바보도 아니고 SF소설광도 아니며, 사회성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걸 아는데 왜, 대체 왜 8일씩이나 필요했는지 정말 의문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기 글을 쓰러 왔기 때문에 잠재의식은 구상에 골몰해 있고, 직관은 장르와 색다른 발상을 떠올리는데 분주하며, 다른 어떤 지각마저도 항상 그 생각에 빠져있었으니 아마 그래서 몰랐을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이해는 된다. 그 무엇을 보든지 <나는-나는>을 대입하고 붙여보고, 저걸 써보면 어떨까 이건 재미있을까 그건 뭐랄까 너무 평범하지 않을까, 바로 그런 생각들.
   빙빙 돌려서 설명하지 말고 딱 부러지게 뭔가 문제고 어떻게 그동안 몰랐나를 말하자면 이렇다. 아, 8일이 지나서야 사태를 깨닫는 건 나왔으니 무엇 때문에 그 믿을 수 없는 질서랄까 어떤 당연한 진리를 신뢰하게 되었나를 말해야겠다.
   자, 그러면 대체 이상한 일은 뭔가? 신기한 발견이란 게 있긴 있나? 놀라운 무언가가 다 알고 나서도 나중에도 놀라웁다고? 그 노래 가사와 같은 일은 바로 이것이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 머리 밑은 사람이지만 머리는 모두 다 다르다. 마치 지문이나 성문처럼 다 다르다. 그럼 어떻게 다르냐? 누구는 말, 누구는 개, 누구는 사자, 바로 그렇게! 그러나 이곳을 알기 전의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기존에 살았던 곳에서는 그랬다. 저분은 말상, 저분은 개상, 저분은 고양이상. 그런데 여긴 진짜 얼굴이 말이고 개고 사자였다. 당연히 그래서 나는 처음에 장난일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장난이 조금 길게 가나보다 했다. 더 나아가 나는 속으로 짜증이 났다. 약간 신경질이 났다. 뭘 저렇게 머리에다 쓰고 다니는지 사람 머리가 토마토고, 케익 상자며, 호박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랬다. 정말 어지간히 한다, 애쓴다 라고. 그냥 축제가 길다라고 하자, 이제 그만 제정신으로 돌아가자, 그 얼빵한 가면 작작 좀 써라 라고!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계기는 내가 묶고 있는 펜션의 식당에 걸린 사진 액자를 보고 문득 팍 깨우침이 왔던 것이다. 느닷없이 딱! 그것은 평범한 단체 사진이었다. 네 명이서 화면 분할에 신경 쓴 듯 찍은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사진. 나는 일주일 전부터 그걸 봐왔는데 왜 몰랐지? 사진에 있는 사람들은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밑은 사람인데 위는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부터 나는 주변의 사람들을 좀 더 주의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면밀히 살펴보고 다녔다. 그곳도 한적한 시골이라서 인적이 드물지만 인간이 보이면 안 보는 척 자세히 훓어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러나 주로 얼굴을. 그 특이한 면상, 뭔가 말을 걸면서 용건이 있는 듯한 못짓을 취할 것 같은 생김새를. 물론 간혹 인간의 얼굴을 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인형극에 나오는 커다란 얼굴 같은 그런 모양이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을 때, 사랑을 하고 키스를 할 때, 그 미세한 표정 변화와 어조와 아련한 눈빛들 바로 그것들이 나보고 이제는 믿겠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시장과 병원과 동물병원과 약국과 빵집과 목욕탕과 야한 비디오와 실시간 방송등 온갖 증명 가능한 뭔가 믿기지 않는 일에 믿음이 가도록 도움을 주는 일은 다 해봤고, 어디든 다 가봤고, 뭐든 다 시도해봤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는 저게 바로 정상이라고!


   4

   잠시 여기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남이 없는 자리에서 그를 깎아내리고 단점을 꼬집는 행위를 꼭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앞에서 못하면 뒤에서 하지 어디서 하겠나. 앞에서 해도 어차피 무시할 사람인데. 세상의 말로야 물지 못할 거면 짓지도 이빨을 보이지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도 말라고 하지만 그건 다 인생교본의 선봉에 해당하는 말이다. 알파벳 같은 기초일 뿐이다. 간혹 철자야 틀릴 수 있다. 나는 험담의 즐거움이 얼마만큼인지는 잘 모르지만 인문학적으로 기호학에 근거하여 타인들의 인상을 호평한다면 썩 손가락질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 도착해서 그런 감정을 느꼈다. 신선함이라고 할까, 여기에서만 전해지는 매력이라고나 할까, 어떤 새로움과 찬란한 그 어느 고고함의 태도와 나는 보다 다른 신천옹으로 태어난 존재다 라는 듯한 뭔지 모를 경이감을 삶의 기본 관념으로 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여기 사람들은 정치와 경제와 사회 또 타 지역 소식과 유행과 비인기 문화는 물론이요 산업이나 연예계 소식등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직접 확인은 못했으나 그런 모습이 충분히 상상되었다. 선거권도 당연히 만약 내게 이득이 된다면, 주로 내게 이득이 된다면 철저히 보수당만 찍을 것 같다. 그게 뭐가 나쁘겠냐마는. 보수당이라는 마음이 편치 않은 그 단어에 응분하는 값을 하느냐, 그건 썩 의심스럽지만 그건 시대상 변질되어 편의상 부르는 명칭일 뿐이지만. 어차피 1위냐 2위냐 그 차이 밖에 없지만, 당신도 그 어디에 산다면 (초반에는) 오히려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러나 그분들은 그것도 관심없다. 귀찮다. 예측 가능하고, 흔하고, 재미없고, 통속적인 것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품격 있고, 대체 불가능하며, 지고의 가치가 존재하고, 남과 차별화되며, 개성이 돋보일 수 있게 남이 아는 브랜드 즉 예를 들면 상업 상표 외에도 셰익스피어와 아인슈타인과 피카소와 모차르트는 자주 들먹이지 않는다. 걸신 들린듯이 남이 많이 아는 유명인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마디로 천한 짓이다. 찰스 디킨스와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그 둘만 놓고 봤을 때 누가 귀족에 대해 비교적 가깝게 묘사했을까, 는 잘 설명할 수 없더라도 타인에게 보이는 내 인상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다. 개성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고전적인 명예? 그건 약간 소홀한 것 같다. 그보다 자유로운 인생이 더 값어치 있는 듯 하다. 그분들은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면 보자마자 즉 채 5초나 퍽 늦어도 10초를 넘기지 않아서 직관적으로 그 즉시 그 사람이 백조인지 촌닭인지, 재규어인지 톰인지, 개상인지 말상인지를 바로 진단내릴 수 있다. 가끔 틀리기도 하겠지만 어지간해서는 틀리기도 어렵다. 오차가 있더라도 더 재껴보면 다 들통나고. 정말 신기한 재주다. 자기가 싫어도 갖고 태어난 선천적인 능력이다. 어쩔 수 없다. 위 아래 훓어보지 않아도 견적이 내려지는데 그게 어디 내 잘못이란 말인가. 그분들은 바로 옆에 유명인이 앉아서 한 잔의 차를 마시고 있다고 하더라고 신경이나 쓸까, 눈길 한 번 주는데 어쩜 그리 인색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괜한 들뜸은 마치 거리를 둬야 하는 뭐 그런 세속적 마찰과 오해나 하찮음과 진중한 고뇌를 거치지 않은 값싼 인심 정도로 여기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런 무언가 그럴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있겠으나 우선 꼭 마치 여기 사람들은 지구 바깥에서 이주해온 것이 아닐까 그런 엉뚱한 추측을 하게 되었다. 뭐랄까, 정말 그 어느 말도 안 되는 경험을 진짜 해본 것 같다고나 할까? 어떤 정도의 말도 안 되는 경험이냐? 그것은 멀쩡한 일반인을 아침과 점심과 저녁과 또 그 중간, 중간 쉬지 않고 틈틈히 언제 어디서나 그 어느 그 어떤 매스미디어로도 생산되고 반복되며 파생되어 계속 뭔가가 재생산되는 뉴스의 그 당사자로 만들어서 생활해보기, 를 말한다. 일반인이 하루 아침에 그런 유명인의 생활을 겪고 나면 세계를 그 전의 시각으로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인생이 달리 보일 것이다. 앞으로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자,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흔히 사적으로 하는 말인 중2병이랄지 친교라는 관계성이 성립할 때 지나가는 말로 잠깐 나오는 단어 연예인병. 꼭 오만하고 방자하고 그냥 통과의례적인 범상한 의미의 그런 1차적 뜻은 차치하고,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타인에게 어떤 이미지를 심어주느냐 바깥으로 드러나는 정보는 무엇인가를 그것의 본질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보통 사람들도 남들이 내 뒷모습을 어떻게 생각할까 라고 언뜻 떠올리는 것처럼. 하루도 빼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당신을 사진 찍고, 당신에 관한 뉴스를 만들어서 배포하고, 당신에 관한 댓글은 규칙적으로 슈퍼스타에게 꿇리지 않을 정도로 생산되고, 당신에 관한 책도 틈틈히 나오고, 당신에 관한 말을 세상에서 많이 하고, 바로 그게 유행을 타지 않고 언제나 어디서나 그런다면, 그런다면 당신은 어떻겠는가? 정말 그런다면 당신은 어떻게 될까? 정말 그렇게 된다면 어떨까? 흔히 우리가 아는 연예인은 진짜 연예인이 아니다. 노래 잘 부르는 가수? 상위 몇 퍼센트를 빼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상상이 되는가? 멋진 영화배우? 글쎄다. 그리고 나 지성이라고 이마에 씌여있는 작가, 세속에 관한 건 작품에 절대 담지 않는 미술가, 그래 스포츠 스타, 또 소셜 네트워크의 유명인, TV에서 많이 나오는 사람들, 영화감독이나 사진작가등 우리는 그분들이 연예인이라고 알고 있고 그렇게 말하지만 그분들은, 그분들은 연예인이 아니다. 그분들은 바지다. 병풍이다. 신부 들러리다. 어쩌다 간혹 드물게 신에게 바치는 염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 진짜 연예인은 누구일까? 진짜라는 관형사, 맞나 그 수식어가 그 의젓한 격조가 자연스럽게 어울릴만한 대상은 진짜 누구냐 대체 누구냐, 과연 정말 누구일까? 누구겠나, 그냥 유명인이 아니지. 그럴 테지. 그분이 진정한 진짜 슈퍼스타다. 그러니까 누구냐고! 그분들은, 그분들은 바로─음─바로 정치인들이다. 또 사회계와 경제계와 매스컴에서 많이 다루는 여러 분야에서 명망 높으신 분들이다. 그분들이 진짜 연예인이다. 나머지 명함만 연예인은 다 허울뿐인 허수아비다. 잠시 소비되는 스카프 같은 거다. 이 글을 정말 맞을 각오로 쓰느냐고? 그게 대체 뭔 말인가, 모르는 사람 하나 없는 얘기를 뭐 미쳤다고 각오까지나 필요한가? 거창하지도 않은 수사법이다. 카메라 플래쉬를 받는 양, 전체 뉴스 기사의 양과 그것이 퍼지는 속도와 범위와 파급 효과, 오오! 파파라치? 매일 뉴스에서 나오지 않나. 신문기자와 사진기자와 언론사 관계자와 기타 등등 쫄망쫄망 바쁘게 따라다니시지 않나. 고생하시는 그분들을 깎아내리려는 뜻은 없으나 일순 오해는 있을 수 있겠으나, 그건 수다에게 양보하자. 정치인도 똑같은 사람인데 무턱대고 폄하하자는 의도, 없다. 그쪽 업계에서도 구르는 돌 있고, 박힌 돌 있다. 철새도 있고 텃새도 있다. 대세도 흐름도 유행도 있다. 상업 시장과 똑같다. 완전. 그렇다. 진짜 연예인은 그분들이다. 진짜 슈퍼스타는 그분들이다. 진짜 최고의 유명인은 바로 그분들이란 말이다. 와, 진짜 다른 연예인은 다 완전 장비다. 물컵이고, 화분이며, 의자다. 과자고 빵이며 피자다. 드레스고 껌이고 쟁반이다. 광대가 맞는 말이고 애석하지만 소비품이다. 알맹이 없는 버리기 아까운 포장지 같은 거다. 반지와 목걸이가 들어있지 않은 처음부터 도둑맞았다고 할까 그런 상자다. 화장지곽이데 안에 화장지는 없다. 돈도 없다. 참치 통조림인데 안에 참치가 없다. 자기가 유명한줄 알고 있거나 거리에서 얼굴을 알아보거나 나름 팬들을 끌고 다니시는 분들께는 대단히 미안한 말씀이지만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럼. 이런 겸연적은 말을 하는 나만 죄송한 게 아니라 그분들도 뒷머리 벅벅 긁을 수 밖에 없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왜 내 얘기를, 하면서. 그런데, 여기 이곳 천재들의 나라 사람들이 바로 어딘가 모르게 그분들의 성향과 무척 비슷한 듯 하다. 더 자세한 얘기를 이어가는 것은 깜냥도 안 되고 인문-교양학적으로 접근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 하나만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그러면, 그러면 왜 하필 그 분야냐? 그건 그 모두의 구심점에 그 분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진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찍어주는 것이다. 뭐 신문기자와 사진기자와 방송사에서 그분들 예쁘다고 좋아한다고 착하다고 그러겠나? 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그 다음으로 허울뿐인 연예인을 하면 되지 그럼 왜 사석에서 욕을 얻어먹으면서까지 진짜 연예인을 하느냐, 그건 내가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일반인의 삶에 뭐 하나 도움이 안 된다고 고개를 돌리며 설레설레 외면하기만 하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왜 그런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틀릴 수도 있다. 말도 안될 가망성, 크다. 그러나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 자~ 여러분 정치, 어렵죠? 그렇다면 A와 B 그리고 A=B를 생각하면 된다. A에 정치를 B에 인권단체를 넣으면 뭘까, 표는 환불되고 신간 소설, 망한다. 폭삭! 그러면 A가 정치라면 B에는 과연 뭘 넣어야 할까? 뭐긴 뭔가 딱 하나만 남지 않을까? 그래 그렇지, 바로 경제다. 돈이다. 단, 왜곡된 시대상이 아닌 상태에 기초하여 상식이 통하고, 기본이 지켜지며, 무법적인 무언가가 쉽게 통용될 수 없는 사회라는 가정 하에서. 딱 하나만 더.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영화에나 나오는 더 나은 미래 사회가 되든 어쩌든 B를 오락화라고 보는 생각, 있다. 좀 더 그랬으면 싶은 사람, 있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에 대한 개개인의 판단과 사적 의견은 지나치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무엇을 얘기하기에 앞서 그 두꺼운 책을 읽으신 분들은 턱없이 부족하다. 벌어먹고 살기에도 바쁜 세상이다. 기버와 테이커를 구분하는 결정적 단서조차 정작 중요한 시점에는 잘 떠오르질 않는다. 인간의 광범위한 성향이 원래 그렇다는 걸 알고 인생이라는 도박판에 끼는 게 분명 더 낫다. 어쩌면 학습이 아닌 경험으로 배우게 될 공산이 크고, 아마도 뉴스보다는 그외 다른 매체에 의하여 깨우치거나 세월이 가르쳐주기 일쑤고, 그러므로 학교와 사회는 판이 원론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어느 정도 유감스러운 세상이며, 세상사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그런데 왜 제일 덩치가 큰 당부터 작은 당까지, 체급에 비례해서 뭔 말을 많이 들을까? 왜긴 왜겠나, 규모가 크면 챙길 게 많고, 다수를 만족시킬려면 소수의 표정은 찡그려지기 때문이다(그럼 소수를 위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야 하느냐, 것도 좀 그렇다). 기업도 공룡이 되면 요리조리 폴짝폴짝 쉽고 재빨리 움직이기가 힘들다. 그래서 가만 보면 이론적으로 10퍼센트 내외의 작은 정당이 옳은 소리를 외친다. 그러나 힘은 없다. 만약 힘을 얻더래도 추진력과 실행력은 한계에 부딛힐 공산이 크고. 또 정당이 구호단체가 아니듯이 회사는 공익단체가 아니다. 적당히 놀면서 우애를 다질려고 일하는 게 아니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 창출이 아니라 고객 창출이라지만 어차피 이윤 창출 못하면 뭐가 아무리 어쩌고저쩌고 해도 외면받을 수 밖에 없다. 투자금 회수되고, 인력 빠져나가고, 샀던 주식 팔 수 밖에 없다. 그거, 빛 좋은 개살구! 면하면 드라마요, 역전에 실패하면 누굴 탓하리오. 핵심, 제일 중요한 하나의 단어는 이권이다. 키가 전봇대처럼 큰 어른과 어린이처럼 작은 어른이 같이 길을 걷다가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봤을 때 누가 빨리 주을까? 산술적으로 당연히 키 작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과 저것은 판이 다르다. 쉽게 말해서 덩치가 크면 옳기 어렵다, 가 맞다. 이 말이 얼마 만큼 옳은가에 대해서는 썩 자신이 없다. 그러나 하나만 묻자. 덩치가 큰 어른이 옳은가 아니면 작은 꼬마가 옳은가? 말을 바꾸면 과연 철든 사람은 어른일까, 애일까? 아니면 도대체 철들라는 말인가 철들지 말라는 말인가, 왜 이랬다 저랬다야, 대관절 왜 속시원히 그 뭔가를 딱부러지게 꼬집어서 명쾌히 알려주지 않는 거야? 타당한 궁금증이다. 합리적인 호기심이다. 그러나 되묻는 질문이니 만큼 살짝 미련은 남겨 놓자. 따라서 그렇게 이미 애초에 힘든 분야이며 모순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그래서 바로 사진과 말과 글과 뉴스에서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성대하게! 나는 이곳 천재들의 나라에 와서 바로 그걸 느꼈다. 하도 천재들이 많으니까 여기도 천재 저기도 천재, 커피도 천재 핸드폰도 천재, 행복도 천재 동기부여도 천재. 발에 채에는 게 천재고, 손만 까딱해도 천재다. 뻑~하면, 눈 한 번 껌뻑하면 천재다. 그러니 고상하게 개인적으로 쿨할 수 밖에 없다. 학교에서 배웠듯이 질서를 지키고 타인을 배려하고 어쩌고저쩌고, 좋다 좋아. 다 아름다운 교훈이며 가르침이고 도덕이다, 왜 나쁘겠나. 그러나 비유가 좀 부적절할지도 모르지만 뭐랄까, 성소수자나 장애인에 대한 처우나 뭐가 옳은지를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고 동의하고 누구나 어느 정도 실천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런데 누군가가 옆에 있다 어떻게 내 삶과 관계 된다, 일단 긴장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어떻게 뭘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괜히 미안하니까. 또 뭔가 말이나 글로써 잘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으니까. 이미 그런 의중에 익숙한 상대편도 마찬가지고. 나중 결혼해서 불편한 아이가 태어났다 또는 결혼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다, 그게 인생이고 세상사다. 외국인끼리 만났는데 말이 안 통해, 간단한 제3의 언어와 바디랭귀지로 웃고 서로의 공통된 취미에 관한 전문용어로 어느 정도 대화가 된다. 금방 교감한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서먹해진다. 할말이 바닥난다. 뭘 합하기도 어렵고 나누기도 어려운데 어디서는 못합쳐서 난리고 어디서는 못나눠서 난리다. 법원에 가면 그렇고, 결혼식장에 가면 또 그런다. 그걸 원칙적으로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 분야가 뭐다? 그래 그거다. 골때리는 분야! 
   끝으로 위에서 다룬 논점과 내용이 맞다면 왜 맞는 것이고, 틀리다면 대체 뭐가 틀린 것일까? 참고로, 나는 잘 모르겠다.


   5

   나는 천재들의 나라에서 하루하루 시간이 가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머지는 내가 기존에 살았던 세상과 다 똑같은데 얼굴만 다르다고. 생각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몇몇 습성과 이색적인 차이는 문화적인 이유 때문이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사람들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됐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다. 허언증 역시 아니다. 뻥일리가 있나. 진짜다. 사실이다. 허구, 아니다. 내 말이 거짓이면 이미 외계인은 51구역에서 살고 있고, 지구의 내부에 초문명인이자 거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남반구는 해가 서쪽에서 뜨며, 코메디언의 피는 분홍색이고 귀족의 피는 초록색이다. 뻥이라고,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다. 내가 거짓말을 할 까닭? 있을 리가 없다. 난 누굴 속이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 진짜 그래서 성장기에 고생 좀 했다. 나는 가짜로 얻을 게 하나도 없다. 무명이 명성으로? 이미 포기한지 오래 됐다. 모두 내려놨다. 마음을 비웠다. 옷도 누가 보든 말든 그냥 막 입는다. 만사가 귀찮다. 양말, 짝을 맞추지 않고 막 신는다. 이제는 신발도 마찬가지다. 누가 뭐라 하든 어떻게 보든, 남에게 권할 마음은 없지만 솔직히 그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 내가 막 살아야지 타인을 헐뜻지 않을 것만 같은 왠지 그게 공평한 거 아닌가 그런 바보 같은 공상을 했다는 사실, 숨기고 싶지 않다. 난 아니지만 혹시 내가 과거에 남에게 거짓말쟁이로 비춰졌을지 모르나 모든 오해를 바로잡을 수는 없으나 앞으로는 부쩍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말만 제우스다. 말로만! 그러나 나는 진실만을 말하며 살아왔다고 맹세할 수 있다. 내 인생은 거짓없이 오직 진실과 함께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내 이름마저 정직으로 바꿀 뻔했는데 마침 당시 바쁜 일이 있어서 실패하기도 했다. 나는 작품도 허구보다 실화를 좋아한다. 드라마도 잘 보지 않는다. 어쩌다 영화만 가끔 본다. 그외 뉴스나 다큐멘터리만 본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싸워서 져본 적이 없다. 물론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술 마시고 취해본 적이 없다. 오죽하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술 마시고 딱 한 번이라도 취하는 게, 제발 취해보는 게 소원이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그 쓴 술을 마시는지, 왜 그처럼 맨정신으로 살기가 어려운지 알고 싶었으니까. 정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데 어쩌란 말인가? 일행에게 미안하니까 연기한 적은 있어도 그것도 이젠 지겹다. 혀가 꼬부라지고 취중진담을 하고, 다음 날 숙취 때문에 참으로 괴로워하거나 그 때문에 모험을 하는 것? 난 그게 뭔 소린 줄 도저히 하나도 모르겠다. 도통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나에게는 그 모두가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일 뿐이다. 또 나는 그렇게 허풍에 능한 사람이 아니다. 남을 속이고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낯선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도 서투르다. 마음만 먹으면 10분이 뭐야 눈빛이나 말 한마디로 금새 누구든지 꼬실 수 있지만 이제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이제 바르게 살고 싶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퇴폐적으로 살았다는 말은 아니고, 또 무조건 입바른 소리만 하고 살겠다는 뜻도 아니다. 지금 소설이 극사실주의라는 걸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내 장기는 남을 믿는 것이고, 지금껏 수없이 거짓말에 속았으며, 나는 구라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이 못난 입으로 가짜 진실을 토로한다? 어불성설이다. 말도 안 된다. 판돈, 걸어도 된다. 보장한다. 책임도 질 수 있다. 담판, 붙을 수 있다. 각계각층의 온갖 논객과 허풍쟁이와 사기꾼과 숨은 전문가와 숨을 수 없는 권위자, 내가 다 이길 수 있다. 콱 그냥...! 이 게임에서 그 누구든 이번 건으로 내게는 상대도 안 된다. 그분들은 나한테 게임도 안 된다. 절대로! 난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으니까. 나는 이 건으로 그분들을 아주(아조) 오줌 싸게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겪은 일은 모두 사실이고, 나는 아직 그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첫째, 거짓말쟁이로 들통나기 싫다. 그리고 둘째, 어떤 애처롭고 끝장나게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작품을 바로 여기서 써야 하기 때문에 나는 당분간 이곳을 떠날 수 없다. 그렇다고 꼭 나 같은 순진하고 꺼벙한 사람이 적당히 물 흐리기 작전을 써서 <나도 천재>라는 대열에 끼겠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는 것을 밝힌다. 양치기 소년으로 들통나고 소설을 완성하거나, 나머지 3가지 이상의 경우의 수가 발생하건 어쩌건 나중 때가 되면 조금 단조로워지면 돌아갈 수도 있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 돌아가는 것은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장난을 좋아한다. 노는 걸 좋아한다는 말이다. 애들처럼.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내 인생은 장난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하늘에 맹세코, 모두 사실이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바람 피다 걸리면 어디 하늘만 거나? 그건 그렇지만 난 거뜬히 무엇이든 걸 수 있고, 떳떳하게 패를 깔 수도 당당히 판돈을 올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얼마든지. 물론 관객이 일절 없는 굴욕을 당할 수도 있고, 이제 진짜 재미있어질려고 하는데 게임 제대로 즐겨보기도 전에 주최측으로부터 엉덩이를 걷어차여 카지노 바깥 거리로 내동댕이 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당할 때 당하더라도 미리 겁먹거나 시커먼 변고는 상상하지 말자. 이런 꿈 같은 현실 세계이자 초현실적인 일상생활은 내게 정말 너무나도 과분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날 믿어도 된다. 그대는 손해볼 것 하나 없다. 너는 이미 오락실에서 동전 넣고 게임기의 스틱이나 운전대를 잡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원, 별말씀을? 누가 할 소리를! 엘론 머스크가 왜 우리 함께 화성에 가고자 하는지를 알겠다고? 화성에 가봐야 별 거 없다. 지구의 사막 한가운데서 사는 거 보다 백번 못하다. 그러나 의의는 있다. 어려서부터 익히 듣고 배우고 읽어왔던 윤리와 지혜와 사랑 같은 단어들, 그게 과연 옳은가 정답인가 의심하고 회의하는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세계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여기 천재들의 나라에서의 삶, 당신은 이미 4차원에 당도했고(숫자는 알아서 바꿔도 된다), 이미 타임머신에 탑승 완료했다. 노는 일만 남았다. 즐기면 그뿐! 



   6

   천재들의 나라에서 내가 봤을 때 가장 웃겼던 현상이라고나 할까, 그 어느 대담하면서도 진지하고 몹시 자연스러운 일 가운데 그 짝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순수한 웃음이 튀어나왔던 일은 그것이었다.
   공원에서 곱슬머리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은 개상이 아니라 얼굴이 개였다. 오래 같이 함께 하면 서로 닮는다는 그 말이 맞나 틀리나, 뭔가 이면에 숨겨진 진의가 있나, 원래 처음부터 만나기 전부터 단짝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그건 모르겠다. 그러나 강아지는 코커 스파니엘 개 주인도 얼굴만 코커 스파니엘, 이건 뭔가 딱히 정의내릴 수 없는 총체적 난해함이다. 혹시 주인과 하인의 역할 바꾸기 놀이인가? 그건 아니다. 그럼 뭔가?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다. 코커 스파니엘이 뭐 헤비메탈 기타리스트도 아니고 말이다. 물론 개 주인과 개의 종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그럭저럭 보였지만 아직까지는 너무 뭔가 과도한 사례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놀이터 의자에 앉아서 고양이를 안고 있는 어느 근사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도 사람이 고양이과가 아니라 그 성격이 고양이스러운 게 아니라 면상이 고양이였다. 고양이 종류는 개보다 어렵다. 이건 그냥 넘어가자. 이 일은 핸드폰 어플리케이션으로 손가락 까딱하면 마술이 일어나는 그런 효과가 아니라 진짜였다. 재밌긴 재밌는데, 즐겁긴 즐거운데, 그들과 내가 평범한 대화와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대놓고 웃을 수도 없었다. 그분들은 반대로 나를 이상하게 볼 것이고, 나는 통속적으로 예절 바르고, 위선적으로 구태의연했으며, 가식적으로 남의 마음보다 내 기분이 찡그려지는 데 아마 더 민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을 막 하고, 거침없이 솔직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려면 자존감이 두텁거나 독해야 한다. 시대에 따라 또 유행따라 인기 있는 인물 유형은 다르다. 대체로 독학은 한계가 있고, 남을 분석하는 것도 좋긴 하나 나를 아는 게 먼저다. 하지만 나는 물러터졌다. 귀도 얇다. 엄청 얇다. 거의 날개다. 불새지 불새. 인생, 알만하다. 누가 악역 배역 자리를 알아봐주지도 않는다. 이런 삐─── 학교에서 배운 것과 정반대로 살아야 하다니, 아예 처음부터 강하게 키우던가. 차리리 그렇게 알려주든가. 장차 알게 되겠지만 많이 방황할 테지만 이 세상은 어느 정도 독학으로써 그 의미를 음미하게 된다고. 어른들 말 믿을 게 못 된다. 부모 말 믿지 마라. 믿을 놈 하나 없다. 정말 다른 게 아니라 뭔가에 속았다는 게 걸린다. 그렇다고 무조건 불신하란 말은 아니다. 애들 생각처럼 성인들 열변처럼 세상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절대 아니다. 기억해둬야 할 것. 첫째, 나는 언제라도 틀릴 수 있다. 나 뿐만 아니라 또 모든 시간에 다 맞고 1세기나 더 장구한 세월에 딱 한 번 시간의 문이 열릴 수도 있다. 둘째, 타인의 의사와 세상사와 오락 산업을 입체적으로, 입체적으로 인식할 것. 또 그럼 그런다고 뭐라 하겠지만 어쨌든 내가 지금 휴양 생활을 하는 이곳은 참 이상한 곳임에 틀림없다.


   7

   신선한 충격은 꽤 오래 갔다. 그러나 그것도 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제는 커피포트나 밥통 또는 웃긴 모습의 인형 안면을 사람의 어깨 위에서 사람 얼굴 대신 보더라도 나름 웃음을 잘 참을 수 있게 됐다. 게다가 드물게 꽃다발을 만나게 되면 어찌나 이상한 분위기는 나를 꿈의 동산으로 데려가 버리는지 황홀할 지경이었다. 아직 나는 천재들의 나라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비밀을 별로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이미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 것 같은 걱정마저 날 귀찮게 하는 듯 했다. 친구도 생겼고, 사진도 같이 찍었고, 전화번호도 교환했다. 물론 그 후 연락 두절 됐다. 토끼 얼굴을 했던 친구였는데 눈이 충혈되어 있고 안면의 솜털이 너무너무 고왔는데 그런데, 내가 먼저 연락하면 안될 것 같았다. 내 고향 시골은 여전한가 안부는 많이 궁금하진 않았으나 그 향수가 아예 흐릿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사전씨, 얼굴이 백과사전으로 생긴 양반에게서 에너지 음료 선물도 받았다. 기분이 좋았다. 짱 좋았다. 달나라까지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또 글이 잘 써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난 다시 초등학생이 된 듯한 환상에 흠뻑 적셔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정신을 시시콜콜한 수다와 공상이 마음 편히 접수하고 득세하게 놔둬도 괜찮을까 라는 시덥잖은 걱정이 들자마자 나는 이곳, 천재들의 나라에서 나와 똑같은 인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염치 불구하고 그를 알고 싶어졌다. 그와 친해지고 싶었다. 필요하다면 약소하지만 사례금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잃어버린 가방을 되찾는 것도 아닌데 사례금을 왜 줘? 말이 그렇단 소리다. 그런데 그는 그녀다. 여자다. 시작은 언제나 여자일까, 모두 여자 때문일까?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다. 그녀는 새침하다. 또 도도하다. 아울러 신선하다. 새롭다. 뭔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사연, 알고 싶게 만들었다. 어디 그게 다겠나, 그녀는 예뻤다. 더군다나 착했다. 와, 비율 봐라! 지금 당장은 내가 멋진 남자를 소개시켜 줄 수 없지만 왠지 나는 그런 의무감이 생겼다. 그녀는 내 친동생이 아닐까 하는. 설마 그녀가 투정부리고 날 차버린다고 해도 나는 마냥 좋다고 코를 흘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우리 관계를 좀 더 공고히 고착화시켜서 스스럼없이 친숙해져야 한다고 나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러자마자 아니, 이미 그 전에 최면이 걸려버렸다.
   그렇다고 우리의 만남이 설마 낭만적이었을 거라고 예상하지는 마시라. 오히려 정반대였으니까. 싱그러운 프리지아 향기, 안개꽃 한 다발, 선물용 부케, 광시곡 C단조, 거장 현대 미술가의 화보집, 음악회 초대권, 립스틱 모델 번호 뭐뭐뭐, 표지가 예쁜 공책과 색연필 세트, 두툼한 표지가 닳아진 19세기의 어느 시집 한 권. 이런 것과 우리의 첫 만남은 완전 거리가 멀었다. 멀어도 한참 멀었다.
   내가 여기서 살게 된지 10일째였나 12일째였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머물고 있는 펜션 3층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2층을 거의 다 올라갔다. 갑자기 2층 어느 문이 열리며 속옷만 입은 어느 아리따운 아가씨가 제임즈라고 부르는 것 같은 음성과 함께 활짝 문을 열었고, 그때 우리는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위-아래가 일치하였느냐, 는 아마도 언급을 피하는 게 좋을 듯싶다. 왜냐하면 지금 시점에 그건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무례한 언동임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뭐 딱히 이상한 그런 상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녀가 이곳에서 사는 유일한 동향인이라는 것을 직감했고, 깜짝 놀랐다. 그냥 멀쩡한 사람을 본 게 다인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또 알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곧 문을 열고 눈이 마주친 후 어머나 하면서 허겁지겁 문은 다시 닫혔다. 혹시 나중 딱 한 번 더 만날지도 모른다는 미세한 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감시하는 것만 같았다. 내게 닥친 삐딱한 설정처럼 느껴졌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뾰로통해진 채 천사들이 사는 나라? 아니 천재들의 나라에서 비로소 한 달을 맞이했고, 나는 집에서 혼자 쓸쓸하게 자축 잔치를 열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내가 살아온 인생과 견주어 봤을 때 극도로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한테 있었겠지만. 내가 고른 술은 어느 과실주였다. 조니워커 블루를 마실려고 했는데 그건 품절됐다고 한다. 안주는, 안주는 음 최고급 참치 통조림을 선택할려다가 혹시 몰라서 피자로 바꿨다. 그리고 나는 집에서 TV를 보며 인터넷으로 블로그를 떠돌며 놀다 마시다 먹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자면서 꿈을 꾸긴 했는데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8

   나는 단잠을 자고 있었다. 아주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꿈에서 온갖 맛있는 음식을 어마어마하게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 소화했다. 또 나는 어느 야외 공연장에서, 해변에서, 산책로에서, 서점에서, 거리에서, 극장에서, 내가 가는 곳 어디든 오빠 부대의 열화와 같은 호응에 시달렸다. 오빠 부대? 제일 예쁘고, 젊고, 착하고, 몸매가 아름다운 여인들로 선정된 걸로도 모자라 그녀들은 모두, 모두 나체였다. 오오, 눈부셨다. 입이 째졌다. 그래서 그녀들 인파 위로 뒤로 눞기를 시도했을 때 아마 나는 천상의 요정이 부린 마법에 걸렸던 것 같다. 그런데 그녀들은 실수하지 않았고, 날 뒤집지도 않았으며, 헹가래로 마무리 짓지도 않고 날 다시 무대로 올려보냈다. 좋긴 좋았는데 뭔가 얄미웠다. 즐겁긴 즐거웠는데 어떤 뭐랄까, 날 바보로 여기는 것 같았다. 기쁘긴 기뻤는데 정말 이래도 되나 싶었다. 그러던 중 나는 어느 날 한 편의 장편소설을 완성했다. 우연히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분이 오셔서 미친 듯이 하루 종일 글을 썼는데, 그래서 책을 발간했는데, 어머나! 글쎄, 초-대박 난리가 났다. 그러다 나는 결국 그분이 됐다. 나 자체가 그분이 된 것이다. 어쩌다가 나는 천재들의 나라에서 왕이 되었다. 허수아비도 아니었고, 병풍도, 뭣도 아니었다. 게다가 막중한 책임과 사명감, 필요없었다. 우리는 같이 놀면 그만이었다. 날마다 휴가고, 어디서든 잔치고, 언제나 소풍이었다. 그러다가 오빠 부대에서 내게 최고로 적합한 배필을 마련해준다는 소문자 떠돌더니 어느새 나는 신혼 첫날밤을 맞이하게 됐다. 나는 그분이 내 님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방문을 확 열고 나타난 그녀는 에고머니나, 어쩌면 좋은가 그건 바로 좀비 인간이었다. 이런, 이럴 수가! 저이에게 물리면 나도 이제 얼굴은 뭔가로 바껴서 저들처럼 살게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이왕 얼굴이 변한다면 뭐가 좋을까를 걱정했으며, 그래도 물릴 때 물리더라도 어떤 신성하고 경이로우며 장엄한 그런 뭔가 정신없이 신나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을 마저 치르고 난 다음에 물려야 하지 않을까 라는 몽상을 언뜻 하게 됐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천둥이 쳤다. 막 쳤다. 계속 쳤다. 소리도 딱 진짜 천둥이었다. 나도 모르게 번개를 기다리게 됐다. 환상적으로. 그래서 첫날 밤의 판과 흥은 다 깨졌다. 와장창 깨져버렸다. 거의, 거의 다다랐는데. 완전, 완전 좋았는데. 왜냐하면 그 천둥소리는 내가 살고 있는 펜션 3층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소음 때문에 달콤한 꿈에서 깨버렸다. 좋다 말았다. 좀비에게 물리지 않았으니까 다행인 건가? 어쨌든 정신을 차리는데 한참 걸렸다. 그런데 문을 두드리는 낯선 손님도 참 소신 있어서 그렇게 내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친절하게도 계속 문을 두드려주셨다. 뭔 배구선수도 아니고 손바닥 아프게 말이다.
   밖에 나가보니 날 찾아온 사람은 일종의 세일즈맨처럼 보였다. 생김새는 그랬지만 목소리는 성우였고, 말발은 마술사였으며, 얼굴은 만화영화 등장인물이었다. 자기는 정보 기관에서 나왔다고 했다. 또 자기는 특급 요원이라고 했다. 나 때문에 천재들의 나라가 이만저만 시끄러운 게 아니라고, 어디서는 토론이 열리고 누군가는 나를 명왕성에 팔아버리자고 했으며, 나를 조용히 어느 외딴 섬에 가두자는 흉흉한 소문도 돈다고 했다. 그러다 마침내 의견을 모으고 조정해서 나를 치료하기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 누구 맘대로? 그런데 내가 어디가 어때서 치료를 해? 내가 자기들과 틀리게 생겨서 아니 다르겐가? 아무튼 그래서 사람들의 사상에 대혼선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 양반이 내게 무슨 수작을 부릴려고 이러나 싶었고 일단 지켜봤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어떤 교묘한 술법에 차츰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물론 우리가 대면하자마자 그런 진지한 얘기가 오고 간 것은 아니었다. 아침이라서 나는 예술적인 꿈을 꾸다가 동물적인 감각으로 깨어나서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문을 열었고, 그와 내가 마주치고 잠깐 지나서 나는 나의 생물학적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펜티만 입고 있었다. 그제는 완전 나체로 잠을 잤는데 어제는 팬티만 입고 잠을 잤다. 나는 부끄러웠고 그는 민망해 했다. 서로 어디다 눈길을 둬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선생님, 우리가 그대에게 떠나달라고 애원하지는 않겠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변화시키겠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서로 어느 정도 교양도 비슷하고, 웃음의 방식도 일치하며, 각자 아는 상식이 어느 만큼은 공통적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어디든 가실 수 있고, 뭘 하든 자유입니다. 누군가의 명예가 심각하게 잘못 꾸며졌을 때 그것을 영화로 만드셔도 됩니다. 앞집 아저씨와 테니스장에 같이 가셔도 되고, 옆집 부인과 교제를 하셔도 저와는 무관한 일이며, 잊혀진 지난 두 번째 사랑을 찾아본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아하는 우유의 이름이 순결이든 방탕이든, 남의 집 강아지를 보고 개인적으로 사춘기라고 촌스러운 작명을 하시든, 파랑새를 찾아 떠나시든, 화단에 연분홍색과 다홍색과 선홍색 카네이션을 키우시든 뭐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예술 생활을 존중합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낭만적인 연예계 개그맨 데뷔를 침해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아주 작은, 아주 사소한, 아주 자연스러운 그 선생님의 일시적인 음흉한 눈빛, 그 어느 위험한 도발 감각이 발현되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불안, 초조, 혹시 내면의 욕망이 잘못 구현되어 도색 소설을 쓰실지도 모른다는 멜로드라마적 걱정, 다만 그런 부분이 걱정스럽고 근심스러울 뿐입니다. 그저 우리는 선생님께서 이 약을 일주일 동안 하루 3번, 식후 30분에 꼭 복용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아침에 나를 찾아온 웬 정체불명의 이방인은 약 2시간 동안 명쾌한 연설을 하고 떠나갔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그게 대체 뭔 얘기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약? 뭔 약? 내가 미쳤다고? 뭐 정신 개조? 뭐야, 꼭 피임약처럼 생겼자나! 혹시 약 팔러 왔나? 아닐 꺼야. 그런데 내가 소설을 쓴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점쟁이인가?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아까 다녀간 그분은 뭔가를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공원의 푸른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강아지와 공놀이를 하는 연인들 옆에서 누워 책을 읽고 있는 어느 아저씨를 보았을 때, 그분의 얼굴이 축구공이라면 내가 축구선수처럼 바나나킥을 차고 싶은 욕구를 가라앉힐지 말지 잠깐 망설인다는 사실을. 그리고 실내에서든 어디서든 다스베이더 얼굴 유형의 사람들을 보면 쫀다는 사실을. 또 탁상시계 얼굴을 보면 매우 혼란스러워한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어디 그뿐이겠나! 아이스크림은? 식빵이면 물어뜯고, 음료수와 호텔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바퀴 달린 거 머시기 미는 거기 위에 있는 동그란 뚜껑의 요리가 담긴 그거, 그리고 뭔가 신비한 기운을 내뿜는 보석 상자라면 그 뚜껑을 열어보고 싶어하지 않겠나. 어머! 뒤통수에 눈이 달렸네, 백허그 해도 하나도 설레지 않을 꺼 아냐, 에이 그게 뭐야! 어라~ 운이 좋은 친구군, 온라인 게임 캐릭터인데? 솜사탕이면 맛보고 싶다, 족제비털이면 만져보고 싶다, 환상머쉰이라면 어디 한번 작동시켜볼까? 귀면 말하고 싶고, 잭팟머쉰이면 딱 기대감을 품은 채 당겨보고 싶고, 비밀이면 알고 싶고,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다? 막 그러면서 두근거리는 익살맞은 심정을 이미 저쪽에서 훤히 꿰뚫어보고 있지는 않을까, 무릇 심히 걱정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냥 신경쓰지 말기로 했다. 그래 봐야 바뀌는 건 없고, 작업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약은 먹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걸 먹으면 나도 저들처럼 머리가, 얼굴이 뭔가로 바뀔 것 같다는 미약한 심려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이상한 잡상인에게 휘둘린 나는 근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해결한 후 가까운 놀이터가 있는 동네를 산책했다. 오늘 보게 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지는 않았으나 또 그 어느 가능성을 무시할 수도 없었고, 내심 기대도 됐다. 그렇다. 여기 와서 살고 보니 내 전업이 어떻게 되는가는 몰라도 호기심 하나 만큼은 완전 왕성해졌다. 왕성?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나는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심기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어느 찻집에 들어갔다. 여기서 내가 무엇을 마시고, 누구를 만나고, 카페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명상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건 그냥 잡답이고 스킵 버튼일 뿐이다. 그러면 남은 건 뭘까? 그건 바로 어떤 얼굴을 봤냐,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내가 본 것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처음엔 신기했는데 계속 신기했다. 기존에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거북이의 짝은 토끼였다. 그런데 이 찻집에서는 토끼는 럭비공과 친해보였다. 그리고 도널드 덕 옆에는 데이지 덕이 아니라 웬 험상궂은 가죽재킷을 입은 콤팩트 디스크가 있었다. 자식, 연예인병 제대로 걸린 듯 고개의 각도에 신경 쓰며 눈빛과 말과 몸짓을 매우 천천히 움직였다.
   오늘 하루, 그 외에 달리 글로 남길 만한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오늘 하루? 그날 하루! 나는 하루를 마감하기 전에 어느 헌책방을 방문했다. 그리고 존 르 카레의 죽은 자로부터 걸려온 전화, 그 소설의 첫 페이지를 사진 찍어서 내 소셜 네트워크 계정에 올렸다. 왜 그랬는가, 명백한 이유는 없었으나 그냥 그러고 싶었다는 게 당시 내 느낌이었다. 물론 헌책방에서 사진만 찍고 책은 사지도 않고 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나는 왠지 나 화났어, 잠시 그러고 싶었던 듯 했다.


   9

   다음 날 아침에 나는 눈을 떴다. 나는 이제 이곳 천재들의 나라에서 머무른지 몇 일째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오늘 하루는 또 뭐하고 보낼지, 어떤 음식을 먹고 무엇을 구경하며 어떻게 놀까, 바로 그것만 궁금했고 중요했다. 혹시 오늘 보게 될 사람은 얼굴이 자동차일까 윈드서핑일까, 동화의 주인공일까 현존하는 동물일까, 그는 그동안 살면서 책은 얼마나 읽었고, 키스는 몇번 했으며, 음악회에서 낯선 이성을 꼬신 적은 있을까 같은 쓸데없고 허튼 공상만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다 나는 오늘 오전에 비치발리볼을 한다는 경기 안내를 기억해냈다. 아하! 그게 있었구나 라면서 나는 작은 환호성을 외쳤고, 대충 씻고, 선크림을 바르고 향수를 뿌린 후 집을 나섰다.
   나는 준비를 마치고 집에서 밝게 나아갔다. 막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그런데, 2층을 지나던 찰나 나는 시간의 미로일까 이상주의의 신비한 공간일까, 아니면 환상의 신화 세계일까, 나는 어떤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에 의해서 굽어진 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상상의 산물이었다. 초현실은 그저 헛된 기대였고, 실제 벌어진 일은 이랬다. 저번에 잠시 마주친 게 전부였던 2층에 사는 이름 모르는 어딘가 부쩍 외로움을 타는 듯한 아가씨가 때를 맞춰 재빨리 나를 자기 집으로 확 잡아당겨서 문이 나를 잡아먹은 형태이자 만화영화같은 동작이 발생한 것이다.
   「아니... 여긴 왜...」 나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놀랐고, 흥분 됐고, 막연한 장면이 연상되었다. 자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저절로. 어떤 장르의 기대감,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에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공주풍으로. 꼭 트루먼 커포티 원작 영화에 나오는 자태를 바탕으로 뭔가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번에는 왜 속옷만 입고 있었느냐, 그때 원래 친구가 나타났어야 했느냐, 아니면 혹시 날 꼬시려는 의도를 품었느냐, 정말 그때 제임즈라고 부르지 않았느냐 설마 친구 이름도 그러냐, 끝에 S가 하나 더 붙은 게 아니냐, 라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내가 잠깐 이상한 추측과 논리적인 예측, 기하학적인 공상에 빠져들려는 순간 그녀는 말을 엄청 빨리 하면서 내게 조심하라고 긴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저씨, 어제 누군가 다녀갔죠? 보물섬에 관해 이야기 하던가요, 아니면 뭐 존중하네 어쩌네 하면서 무슨 약을 먹으라고 하던가요? 그 약은 파란색인가요 아니면 보라색인가요? 알약인가요, 물약인가요? 둘 다 였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아저씨는 외계인의 교화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는 사실이고, 아저씨는 절대 그들의 책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며, 아저씨는 이미 약을 받았고 곧 먹을까 말까 고민해봤다는 사실이에요. 맞죠? 아니라고 하진 마세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저는 아저씨가 밤에 어떤 자세로 잠을 자는지도 모두 알고 있어요. 어떤 꿈을 꾸는지 언제 마법에 걸리는지, 또 낮에 상냥한 숙녀를 보면서 어떤 상상을 하는지까지도요. 그러나, 그건 괜찮아요. 저의 투시력과 조종술 그리고 간파력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라 저들은 저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다는 바로 그 엄청난 사정 때문이에요. 그래요. 이건 비상 상황이에요. 그러나 저들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죠. 모든 건 시간 문제구요. 아저씨 제게 조용히 말해주세요. 대체 어떤 약을 받으셨어요? 푸르스름한 색의 약이죠? 맞죠? 아니라면 제 뺨을 때리세요. 어서요. 네? 맞다면 나중 봐서 제가 뽀뽀해드릴 수도 있구요. 뭐 포옹이 대수겠어요? 그 시절이 온다면 문제될 건 없겠죠. 안 그래요? 나중 우리가 천재들의 나라에서 다행스럽게 탈출하게 된다면요. (그러면서 그녀는 다짜고짜 노트북으로 백여개의 그래프와 나에 관한 정신분석 도표와 DNA 염기서열 분석 리포트까지 보여주면서 나는 철저히 감시당하고 있는 중이라고 알려준다) 아저씨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확인되고, 기록되며, 읽히고 있어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한번에 모든 것을 여기서 설명해드릴 수는 없지만 아저씨의 인생뿐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번영과 종의 번식과 지구의 미래가 걸린 문제라는 것만 알아두세요. 지금까지 여기서 아저씨가 보신 이상한 인간 군상들은 모두 피라미드의 최하위 계층이에요. 모두 외계인인 개와 곰과 늑대와 양과 다스베이더와 온갖 사물과 생물들은 모두 원래 여기 살던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가서 그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여 얼굴만 그들 모습으로 바뀐 것이라구요. 이제야 아시겠어요? 아직도 감이 오지 않나요? 원래 그렇게 한 박자 반 정도, 늦나요? 아니면 아직 인정하기 싫은신 건가요? 지금 사태는, 장난이 아니에요. 실전이라구요. 위기라구요. 절체절명의 순간, 바로 그것이에요. 아저씨는 지금까지 별 한 개만 보셨어요. 네, 그래요. 그것도 아직은 차마 믿기지 않는다는 것, 다 알아요. 말하지 않아도. 그러나 별 한 개가 끝이 아니라는 게 더 절망적이죠. 바로 위 계급인 별 두 개는 지상과 우주비행선 본부를 왔다 갔다하는 친구들인데 그들은 겉모습이 반대로 머리는 사람인데 몸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별 세 개는 우주비행선이나 외계 행성에 사는 온전한 인간의 능력은 물론 초능력을 지닌 개와 곰과 늑대와 양과 다스베이더와 헐크와 온갖 사물과 생물들이에요. 온전히 자기 모습을 하고 있죠. 그리고 별 네 개는 머리카락 하나 하나는 용이고, 얼굴은 사람 얼굴인데 이마 정중앙에 눈이 하나 더 달려있다고 해요. 저도 아직은 거기까지 밖에 몰라요. 그 너머에 그들을 조종하는 백안의 신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일설도 있는데 아직 밝혀진 것은 없고 모두 불가사의로 남아있어요. 또 저는 별 두 개까지만 실제로 만나봤구요. 아무튼 아저씨는 절대 약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만 알고 계세요. 나머지 일들은 차차 알려드릴께요.」
   나는 아무리 어안이 벙벙하더라도 딱 하나 궁금한 점은 꼭 묻고 싶었다. 그래서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묻지 않고 나중 우리가 재회할 수 없다면 나중 후회할 것 같아서.
   「아니 그런데, 아가씨는 고양이요 여우요? 꼬리는 몇 개 달렸소?」
   그녀는 차마 내 질문에 답할 가치나 어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척 하다가 애써 못이긴 척 이렇게 답했다.
   「내가 압니까?」
   나는 우리가 언제 다시 접선하는지도 모른 채 그녀와 헤어졌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비치발리볼을 구경하러갔다.
   뒤숭숭한 감정의 동요는 시작되었을까? 나는 그녀의 말을 찰떡같이 믿었을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나는 그녀가 말할 때 속으로 그랬다. 혹시 얘, 미친년 아니야? 그리고 그녀와 헤어져서 혼자 걷는 중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쟤 완전 똘아이네! 아침부터 뭔 생돌아이한테 세뇌당한 것도 아니고, 아 나 이거 기분 완전 꽝이구만! 이런, 젠장!」


   10

   어느 때부터인가 2층에 사는 아가씨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전에도 거의 못봤다. 아니 처음과 마지막 그 이상한 두 번의 만남이 전부였다. 그러나 왠지 기분은 개운하지 않았고 어딘가 미심쩍은 느낌이 등 한복판에 착 달라붙어서 날 조종하는 듯 하여 나는 여행지에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첫째 내가 여기 와서 봐온 얼굴들, 둘째 2층 여인에게 들었던 웬 뜬금없는 공상과학 이야기, 그 두 가지 때문에 나는 점점 매사 어떤 숨겨진 비밀은 없을까, 혹시 낭만은 설움으로 변하는 것은 아닐까 같은 남의 다리 긁는 헛된 생각이 자꾸자꾸 불쑥불쑥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침에 거장 연주자의 앙콜 연주곡 소품집을 들으며 커피 한 잔을 마실 때에도 그날 따라 왜 그렇게 커피향에 민감한지, 내가 혹시 후각이 극도로 발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내가 얼굴이 개로 바뀐다면 종은 무엇일까 같은 개 풀 뜯어먹는 억측이나 해대는 지경에 힘겹게 이르렀다. 그리고 좀비 영화의 각종 공식과 비공식 법칙, 좀비 유행과 사회적 역학 관계, 좀비와 사람들 취향의 연관 관계, 좀비와 직업과 나이의 상관 관계를 조사해봤다. 결과? 괜한 짓 했다, 가 결과였다. 그러나 나는 쉬지 않고 지금 내게 주어진 현재의 상황에 걸맞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인터넷 세계를 누볐고, 규칙적으로 동네를 순찰했으며, 수상한 인물이 없나 구석구석 헤매고 다녔다. 펜션에서도 물컵 바닥과 화장실 천장, 해변의 수로 주변과 근처 공원의 잔디밭등을 샅샅이 뒤지고 또 뒤졌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나는 다크서클이 점점 짙어져갔다. 그 약은 먹지 않았으나 정상적인 몸 상태에서 상당히 뭔가 균형이 어긋난 것 같았다. 눈이 퀭해졌고 식욕도 없었고, 하루는 불면증에 걸렸다가 하루는 조증에 걸렸다. 다음날에는 걸신들린 듯 식탐이 늘어서 정말 좀비처럼 맛난 음식점들을 돌아다니면서 엄청 먹어댔다. 설마 이대로 자연 변화로 인해 나도 저들처럼 얼굴이 뭔가로 바뀐다면 어쩌지 라는 기우는 커져만 갔고, 난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혹시 내 얼굴이 약통으로 바뀔까? 아니면 후라이팬? 그보다는 참치 통조림? 설마 뚜껑? 아마도 척키? 워, 그러면 큰일인데 진짜 큰일인데, 어떡하지? 어떻게 미리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펠리컨이나 고릴라로 바뀌면 어떡하냐고! 그러다 나는 환시를 경험하게 되었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홈쇼핑에서 브레지어 판매 방송이 나오는데 나는 그것을 고등어로 착각했고, 보험 상품 판매는 얼굴 변환 설정 계약에 대해서 방송하는 것만 같은 환각을 경험하게 되었다. 도저히 이대로 기다리다가는 사람이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 나는 약이 놓여있는 것을 봤다. 혹시 저 약은 치료제나 예방약은 아닐까? 내 얼굴이 방독면으로 바뀌면 큰일이니 그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약은 아닐까? 맞어, 평생 방독면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것도 정말 고역일 것이다. 또는 얼굴이 스핑크스로 변한 뒤에는 되돌릴 수 없을 꺼 아니야? 나는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말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척 절박했다. 무작정 도망가는 방법도 염두에 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잡힐 듯 했다. 죄만 더 늘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11

   그러다가 내 눈이 거의 팬더곰이 되던 순간 나는 한줄기 빛을 보게 되었다. 그분의 구혼과도 같은 다정하고 친근한 하트 뿅뿅과 천사들이 부는 뿔나팔 소리가 정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눈부신 광채는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오늘은 무슨 특별한 날도 개인적인 축일도 아니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새로운 발견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신만 차리면 뭐 어쩐다드니 드디어 나는 천재들의 나라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딱히 곡절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소설도 못 썼지만 왠지 다양한 얼굴맨들 눈길도 심상치 않고 뭔가 때가 된 듯한 기운이 느껴졌던 시기였다.
   그때 당시 내가 묵던 3층의 거실과 부억과 방에는 각종 명화들이 걸려있었다. 누구, 누구, 누구. 진품인지 모조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을 보고 내가 어쨌겠나, 당연히 나는 액자 뒤를 확인해봤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굳은 심지로 떠올려야 할 동물은 딱 두 가지였다. 첫째 거북이, 둘째 코끼리. 나는 두드리고, 비비고, 파고, 문지르고, 째려보고, 냄새를 맡고, 입김을 불다가 마침내 비밀 통로를 발견해내고야 말았다. 그것은 바로 거실 카페트 밑에 설치된 뚜껑 문이었다. 어디 살며시 만져볼 아기천사 조각상의 물건은 보이지 않으니까 갖은 시도를 이어가다가 끝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나는 뚜껑 문을 열었다. 그런데, 와! 그것은 원형 계단으로 내려가다가 진짜 만화영화에 나오는 그런 모험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신기한 장식으로 둘러싸여 쭉 이어진 천국으로 가는 길인 듯 보였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그때 어떻게 그 밑이 2층인데 그런 통로가 있을 수 있나 의심하고, 좀 더 찬찬히 살피고, 침대 속과 밑도 뒤져봤어야 하지 않았나, 그런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워낙 겁을 먹었고, 희망이 부족했으며, 환희가 불투명하더라도 어딘가 미지의 공간으로 떠나고 싶었다. 게다가 교묘한 압박이 가해질 테고, 나는 어떤 의미로든 그 정체불명의 응 어쩐지 궁금하고 묘한 파벌에 투항을 고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절감할 것이고, 무엇보다 나는 쫓기기 시작할 것이라고 직감했다. 때문에 나는 앞뒤 여건을 따지고자실 여유가 없었다. 나는 쫓기고 있었고, 시간과 싸우고 있었다. 동물의 세계에 등용되기 직전이었으며, 잘 하면 인형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억장이 무너지는 장래가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그 비밀 통로를 따라서 걸었던가, 뛰었던가, 붕 떠서 날았든가, 아니면 수영을 했나 뭐 어떻게 해서 기존에 내가 살던 우리 동네 시골 인근의 폐업으로 정지된 미니 놀이공원에 도착했다. 어떻게 천재들의 나라에 있던 펜션 3층이 놀이공원 타임머쉰과 연결이 될 수 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고, 나는 끝끝내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아직까지는. 그러나 앞으로도 그 비밀을 풀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우리 동네에 당도한지 얼마되지 않아 나는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많이 휘청거렸다. 그런데 때마침 소나기가 내렸다. 이때부터는 진짜 허겁지겁 뛰어서 우리집까지 갔다. 그리고 나는 집에 도착했다. 수영장도 잔디밭도 모두 그대로였다. 나는 갑자기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드는 걸 느꼈고, 그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후 나는 다음 날 깨어났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내 볼보 웨건과 캠핑카는 집 앞에 있었고, 시간도 아마 다시 과거로 되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일이 정확히 어떻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최면도 몽유병도 환각도 아니고 진짜 체험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진짜다. 사실이다. 내가 그곳에서 사진을 찍어 소셜 네트워크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사진도 그대로 있다. 그 무슨 이상한 약은 아, 놓고 왔다. 설마 그건 기억을 되살리는 약이었을까? 구충제일 리는 없지 않은가! 정말 이건 어디서부터 어떻게 된 일인지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 정말 너무도 생생히 기억난다. 너무 또렷한 영상들은 아마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펜션 2층에 살던 아가씨를 처음 봤던 일과 두 번째 만난 일 모두 너무나도 생생한 경험이었다. 그 수상한 사람들의 얼굴들은 다 뭐란 말인가. 그 위치를 아니까 친구들을 데리고 한번 찾아갈까? 애들이 내 말을 믿어줄까? 그곳은 변하지 않았을까? 아, 맞다! 그러고 보니 8일째 되는 날 발견했던 고급 액자에 끼워져 걸려있던 사진! 단체 사진에서 몸은 사람이고 얼굴은 각자 알아서 개성있게 생긴 무슨 무슨 맨이었는데 그런데, 어머나! 글쎄, 어떻게 그런 일이! 세상에나, 믿을 수 없어, 말도 안 돼! 마지막 날 뚜껑 문으로 내가 탈출한 날에 그 사진은 명화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와우! 소름 돋는다. 그리고... 그리고...... 거기서 책 한 쪽을 사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그것은 올린 날짜가 미래 시각에 올린 것으로 되어 있었다. 장소는 내륙 어느 공간과 해변 어디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의 어느 지역에서 올린 것으로 나와 있다. 나는 그 좌표를 지도에서 찾아봤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저런! 그 세 지점의 중심은 거의 우리집과 근처 폐쇄된 놀이공원의 귀신의 집과 가까웠다. 이럴 수가!


   12

   그건 그렇다 치고 오오! 그 선녀들의 나라에서 나는 왕이 되었고, 난 너무나 행복했는데, 그 꿈마저 거짓일까?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이마 정중앙에 눈이 하나 더 있는 별 네 개 이러쿵저러쿵, 궁시렁궁시렁, 거시기 이게 뭐가 뭔지 도무지 하나도 모르겠다. 나중 나도 모르게 향수병에 걸려 그곳으로 가고 싶어하면 그땐 정말 어떡하나, 걱정이 태산이다. 그나저나 그 어쩌면 요술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어느 거짓말 같은 진짜 사실은 모두 다 어찌된 영문일까? 왜 나는 하필 그곳에 방문했고, 어느 이상한 아가씨를 만났을까? 13일의 금요일? 나는 늬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그것은 기쁜 꿈일까, 슬픈 꿈일까? 기쁜 꿈이라면 끝장나게 달콤하고 미칠 듯이 황홀하지만 나 혼자 겪어서 아깝고, 타인에게 증명할 수 없어서 속이 타들어가고, 언제 다시 그 아득한 희망의 나라에 다시 방문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허전하고 처절하여서 그 기쁜 꿈은 아마도 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슬픈 꿈이라고 해도 그 슬픔은 어쩌면 사랑 같은 것이었고, 두 번이든 세 번이든 얼마든지 다시 맞이하고 싶기 때문에 그것이 슬픈 꿈이란 얘기도 말짱 거짓일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건 진짜 있었던 일이다. 재차 당부하지만 그 일은 내 인생의 중차대한 오로라빛 모험이었고, 에메랄드빛 환상이었으며, 사파이어색으로 가득했던 초현실적 체험이었다. 단언컨대 그건 추호의 거짓이 섞이지 않았던 실재 있었던 일, 순수한 진실이었단 말이다. 
   그딴 말 같지도 않은 말장난 말고 확실한 물증을 제시하라고? 이 양반이 이거 이거 속고만 살았나, 내가 아무 근거도 없이 호언장담을 할 사람으로 보이나? 어? 내 코를 봐라! 명쾌하게 증명되지 않나. 나는 르네상스적 인간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피노키오형 인간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겉으로 다 드러나니까 절대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보통 사람들도 둘 중 한 사람은 그렇다. 표정으로 다 드러난다. 외면에 뭔가 헛점을 노출한다. 포커페이스, 그거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아무나 못한다. 가짜 웃음처럼. 겉이 까칠할수록 속은 자상하고 더없이 따스하다. 아니면 이마에 다 써진다. 나 거짓말하고 있소 라고. 고수들은 벌써 텔레파시를 읽는다. 당신에게 있어서 천재들의 나라란? 이분은 스스로 묻고 답하기를 하고 있구나 라고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퇴보한 기능이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꼬리뼈처럼 피노키오의 코가 밑에서도 작동한다. 위에서는 진실만을 얘기하기 때문에 코가 그대로 있고, 밑에서는 어... 음... 뭐 그런 시답잖은 농담일랑 그만두자. 지금 천재들의 나라에서 있었던 신기한 일을 논하는 판국에 무슨 그런 입에 담기는 커녕 떠올리기도 불경스러운 추측을. 쉬쉬 하자. 품위를 잃지 말잔 말이다. 누가 듣겠다. 허위여, 무엄하도다. 거짓이여, 썩 물럿거랏. 허상은 다음 이 시간에. 허풍? 생판 처음 듣는 단어다. 허당, 까지는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그래, 인정한다. 그러나, 거짓말!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올씨다. 뻥은 용납치 않겠다. 절대로. 모두 진짜였으니까! 
   요약컨대 이미 자타공인된 일이다. 무를 수 없다. 동네 체스도 아니고. 아마추어처럼 굴지 맙시다.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이다. 신빙성, 신뢰감, 증거, 증인, 논거, 타당한 합리적 근거등 갖출 건 다 갖췄다. 단, 떨리는 불가사의에 대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요 남겨진 숙원이라고 보는 관점이 우세하다. 따라서 모든 의심은 말끔히 해소되었고, 그러므로 불미스러운 오점도 의뭉스러운 부당함도 고약한 허구까지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해결되었다. 비둘기가 돌아왔다. 제비꽃도 피었다. 달님은 웃고 바람은 노래한다. 해님은 벤치에서 대기 중이다. 누구나 시상을 떠올린다. 부흥이란 단어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다. 극사실주의는 건재하다. 극적인 모험을 생각하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하지만 친구여, 축배를 들자꾸나. 그냥 막연하게라도 뭔가 불분명한 대상에 감사하자. 우리는 행복하고, 그리고 사랑은 영원하다. 또 이 세상은 아름답다. 날 부르는 카멜레온풍 꿈을 찾는 기대에 대한 열정은 부풀어올랐다. 피노키오의 코처럼! 
   난 있잖아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는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거짓으로 남을 설득해 본 일이 없습니다. 거짓말을 할려고도 해봤지만 전부 실패했다. 일기도 가짜로 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뻥, 저는 그런 단어 싫어합니다. 구라, 상대할 가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허풍이란 단어를 알게 된지도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제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 혹시 해서 이렇게 소설로 남기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것이 거짓일지라도 저에게 실이 되면 실이 됐지 득될 건 하나 없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운이 따라준다면 나중 후세에 그렇게 전해지지 말란 법은 없겠지요. 어쩜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구요. 살면서 단 한 번의 거짓말도 하지 않고 살았던 사나이라고. 우웩! 마치 퍼펙트 게임 같은 어느 스포츠 규칙처럼. 켁! 농담이 너무 지나친 듯 하여 살짝 재수없어지네요. 살짝? 저런!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나는 알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에서 태어난 사람을 알고 있다. 나는 외계인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지구에서 살고 있는 그 어느 외계인을 알고 있다. 나는 미학적 안목이 형편없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며, 내가 장래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꿈은 있는지 있었는지도 잘 모른다. 가진 것도 이룬 것도 모두 변변치 않다. 내가 거의 이룰 뻔한 꿈이 하나 있긴 한데 그렇기는 하나 그건 발설해선 안 되는 비밀이다. 절대! 무엇보다 천기누설에 해당되는 일이라서, 때문에 나는 그것을 무덤까지 떠안고 가야만 한다. 왠지 꿈을 먹고 사는 젊은이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무엇이 이상적 삶이고, 대체 어떤 인생이 아름답고 대체 어떤 인생이 막가는 것이며(결과적으로?), 행복한 가정은 또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할 재주도 없다. 정말 쉬운 게 별로 없고 모두 어렵기만 하다. 그래 철도 안 들었고, 그래 뻑~하면 백판 자빠져 놀기만 한다. 그것만 봐선 완전 개다 개. 똥개. 그러나, 그러나 나는 단지 좋아함으로써 지구를 또 이 우주를 가진 사람을 알고 있다. 그 어느 신세계는? 좌우간 뭔들 못 가졌을까, 앞으로 어떠할까. 다─전부─다 가진 사람이 나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변치 않으리라. 또 나는 뭔가를 하고 싶은 욕구가 발생하면 그게 이루어지는 것은 곧 시간 문제일 뿐 더 이상 문제되는 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장래 대성할 사람, 척 보면 안다. 보기만 해도. 가까운 미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나는 도박사를 신뢰하는 편이고 점쟁이를 신봉할 뿐이다. 요술 수정구의 기원과 현재 잔여량은 물론 미래의 주인, 나는 예선 탈락했지만 그게 누구인지 알고 있다. 예언, 나도 한때 몸담았던 분야지만 엄한 추측만 남발해서 그쪽으로는 기력이 바닥난지 오래다. 요약하면 재능은 처음부터 없었거나 있어도 미미하며, 잔꾀는 벌써 들통났다. 하지만 갖고 있는 정보는 탁월하다. 놀라울 정도로. 더 나아가 이미 익히 알려진 일루미나티와 세계 몇 대 불가사의등 내가 입만 뻥긋하면, 내가 입만 뻥~끗하면 일반상식이 한바탕 뒤집히고, 그야말로 적지 않은 것에 관하여 일대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럴 가망성은 매우 짙다. 따라서 잔머리 회전이 빠르신 분이라면 아마도 지금쯤 눈치채셨을 것이다. 내가 왜 이 뚱딴지 같은 일을 글로 남겼는지를. 그 어떤 현대 기술로는 여기 포함된 미래 기술의 결정체로 뭉쳐진 암호를 절대 알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그 누군가에게 본 소설은 단 둘만 알 수 있는 뭔가 중요한 어떤 정보와 사연이 담긴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의 사실이 어쩌다가 신비스런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 최소한!
   한 번 또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진짜라고 정말이라고 타인을 납득시키고 싶지 않다. 단 한 명만 믿어주면 된다.
  끝으로, 이것은 실화다. 동시에 전설이다. 적어도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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