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곳은 오락실. 닉과 하워드는 치고 박고 싸우는 게임을 같이 하고 있다. 둘이서 같은 편이 되어 악당을 쓰러트리는 게임이 아니라 서로 상대를 때리든 꼬집든 어떻게든 쓰러트려야 끝나는 승부 게임이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승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하다. 단 둘이서 어른 남자 둘이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랑 노래든 재즈든 발라드든 오붓하게 대화를 하면 닭살이 돋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집 언제가?」
「뭐여? 설마 나 보고 부장님 개그를 하라고? 싫어. 끝까지 안 할꺼야. 내가 답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 세상 사람들이 다 그 방식의 익살을 구사한다고 해도 나는 언제까지나 고급스러운 농담을 추구할 꺼라구.」
「하긴 꼭 재미나고 흥미진진한 드라마만 나오란 법 있냐! 아 근데 다른 기술 좀 써라. 계속 쨉으로만 날 때리냐? 어? 지겹지도 않냐? 넌 그럴 때 보면 꼭 편집증적 성향이 다분해 보여. 옛날에 학교 다닐 때도...... 아, 우리가 학교를 같이 다니지는 않았구나. 한 방 먹일 수 있었는데, 약점을 놓쳤다. 대신 내 로우킥이나 실컷 맞아라. 팍! 팍! 퍽퍽퍽! 어때? 시원하냐? 그건 그렇고, 너 요즘 글 쓰고 있기는 하냐? 이젠 좀 영화사랑 판권 계약할 만한 거 쓰는 게 어떠냐? 조니 봐봐. 제임스는 엿 먹었고, 너는 뒤통수 맞았잖아. 제대로. 꼭 우리 보란 듯이 어쩜 그리 성대하게 출판회를 여는지! 촌스럽게 말이야. 그거 보면 완전 애야 애. 우리는 토끼고 자기는 뭐 거북이라도 된단 말이야? 나 원 참, 얼척없어서!」
「기분 풀어. 조니도 겉으로만 그러지 속 얘기 들어보면 말이 아니라구. 최근 거 뭐야, 어느 웹서비스 투자했다가 석 장 날렸고, 괜히 맥주 가게 열어서 감당 안 되지, 또 뭔 바람이 불어서 어디 대학 들어갈려고 공부한다더라. 식물학과? 조류학과? 모르겠어 어딘지. 걔랑 술 마시면 항상 하는 말은 그거야. 안 변해. 맨날 똑같아. 뭘 해도 재미가 없대. 언제나 심심하다고. 사는 낙이 없다며 징징거린다니까. 그래도 녀석이야 꿈을 이뤘으니 그걸로 된 거지. 야심이란 말로 대신할 걸 그랬나...(침묵)... 아, 나 뭐 쓰고 있냐고 물어봤지? 어, 내가 뭘 쓰고 있지? 아, 그거. 평생 놀고 먹는 소원에 대한 이야기. 늬 말처럼 생각만 해도 기쁘고, 읽으면 완전 재밌고, 상상하면 코끝이 찡하고, 주위에 수소문하고 막 알려주며 얘기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고, 누군가에게 선물해주면 뿌듯해서 가슴 설레며 눈물이 핑도는 그런 감동적인 이야기만 꼭 써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게다가 신기하고 놀랄만한 이상한 착상은 잘 안 떠올라. 훈훈한 가족애에 대해서도 아직 안 써봤어. 그건 잘 못하겠어. 아내의 성화? 한 번쯤 겪고 넘어가야지. 하긴 은연중에 부모의 승락과 아름다운 로맨스에 관한 할리퀸 문고도 막 쓰고 싶을 때가 있어. 내 삶이 뭐 촉망 받는 작가 인생도 아니고, 밖에 나가도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하는데 잘 된 거지, 뭐. 글로야 애절한 기도를 올리고, 은밀한 사랑을 노래하며, 남부러울 것 없는 열정을 묘사한 후 슥 인생 대역전으로 해피엔딩의 마침표를 찍으면 통장에 알아서 막대한? 조촐한 인세는 들어오고, 나는 따로 현실로 돌아와서 나무랄 데 없는 자유인으로 사는 거, 얼마나 좋아. 누구에게는 실망스러운 현실일 수도 있지만 낙천적인 성격이라면 고개를 예각으로 숙이며 땅을 보고 걷지 않아도 되고, 둔각으로 수증기를 발산하며 한숨 짓고 눈을 지긋이 감지 않아도 된다네. 누가 나를 별 볼 일 없는 남자로 보든 어쩌든, 평론가에게 나는 그냥 먹다 버린 팝콘 같은 존재라며 비난받든 어쩌든, 나는 마음껏 자유롭게 콧대 높은 여자에게 시선을 떨구어도 허황된 얘기로 순진한 여심을 마구 흔들어도 내가 유흥가를 탐문하든 문화유적을 답사하든 난 하나도 거리낄 게 없지 않나? 그저 태평세월이지. 하지만 뭘 해도 재미없는 병! 그게 조니로부터 옮은 거 같아. 아 나 미치겠네 미치겠어...... 그러는 넌 어떻게 살고 있는데?」
「나? 이렇게 오락하고 있잖아, 승부사 기질 돋보이잖아? 왜? 재밌는 여자 이야기라도 해줄까? 난 있잖아, 요즘 동네 독서 모임에 나가. 최근 단골 찻집이 생겼는데, 거기서 동네 아저씨들끼리 모여서 책을 읽어. 말은 한마디도 안 해. 그게 다야. 그래봬도 어디 마야 유적지라도 둘러보고 와야 하나 같은 고민은 모두 말끔히 사라져버린다구. 효과 만점. 그래도 내 삶이 너무 정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남지. 이제 오락도 할 만큼 했으니 우리 자리 좀 옮기는 게 어떠니? 요 앞에 새로 생긴 맥주집이 있는데, 어때?」
「거기, 사장은 조니는 아니겠지?」
장소를 옮겨 새로운 분위기에서 닉과 하워드는 무엇에 대하여 수다를 나눴을까? 친구끼리 서로 사기 충전시켜주기?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약속의 무지몽매함에 대한 토로? 권태를 훈계하는 것? 모두 아니다. 전부 아니다. 다시 그들은 말이 없어졌다. 우정을 업신여겨서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그래서 그들은 말없이 근엄한 표정으로 연거푸 맥주만 마셔댔고, 그러므로 그분이 오게 됐다. 그리고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 곱게 헤어졌다. 다음 날 닉은 어제에 대해서 일기를 썼고, 하워드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어른이 일기를 쓰는 것이 뭔가 어색하긴 하지만 그들은, 아 닉은 삶에 작은 변화를 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2
한편 마크는 핸드폰으로 조니의 소셜 네트워크를 훔쳐봤다. 조니가 어느 멋진 사진과 함께 자기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금방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글을 올렸다. 마크는 그 포스트에 댓글을 달았다. 어디냐? 조니는 넌 어딘데, 라고 답했다. 댓글로써. 다시 마크가 뭐하냐, 라고 물었다. 그래서 조니는 넌 뭐하냐, 라고 되물었다. 그러길래 마크는 꾹 참고 누구랑 있냐고 글을 달았다. 조니가 뭐라고 했을까? 그거 알아서 뭐 할래? 아니다. 넌 누구랑 있냐, 라고 물었다. 그 다음의 댓글 이어 달기는 대충 흐름이 예상된다. 보고 싶은 사람 없냐, 때리고 싶은 사람 있냐,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자꾸 따라할래, 내가 언제? 차라리 말을 말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그 재킷 어디서 샀냐 에르메스? 뭔 메스?
행복에 겨워 입이 귀에 걸리고, 사랑의 콧노래를 부르며 새와 별과 대화하는 삶은 많은 청춘들이 바라는 몽환 같은 삶이고 노래 가사 같은 인생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것에 익숙해지면 호사는 평범해진다. 그것이 반복되면 지루하고 심심하다. 사는 게 그것이 전부라면 사람은 새로움을 찾게 되는 법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사랑은 변한다. 감미로운 인생이 어디가 어때서? 달콤함에만 길들여지면 삶은 무미건조해지기 마련이다. 스잔나라는 이름을 가진 동화 속에만 나오는 새를 만나기 위해 연극을 보러 소극장을 찾게 된다. 정상은 근엄하고 재미없다. 일반적인 것은 놀랍지 않다. 평범한 것은 신기할 만한 면모가 없다. 매일 보는 거리의 풍경과 등하교길 마주치는 도시의 사람들, 그 건조한 기억과 소탈한 모습에 대한 생각의 차원을 달리하면 모든 것에서 하나하나 신선한 성미를 발견하며 신기한 의미를 찾아낼 수도 있고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뻥이다! 가능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어려운 일이다.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면 좋겠으나 보통은 비상식적인 계산이고, 몰상식한 낯설게 하기 기법에 불과하다. 백년해로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교훈적이지만 누군가를 훈시할 적에 적절하지 잘 읽힐 이야기를 쓰고자 할 때, 부적절한 주제다. 듣기에도 썩 거북한 주제다. 그렇다. 예상은 빗나간다. 기대는 무너진다. 꿈은 깨진다. 키는 자라다 만다. 위가 아니라 옆으로 커진다. 거울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옷장을 열어봐도 입을 만한 옷은 별로 없다. 소설은 안 써진다. 친구는 없다. 사랑은 어렵다. 나는 뭐다식 드라마, 뻔하다. 시험에 떨어진다. 그는 불행했다. 양말은 구멍 났다. 동네에서 돌아다니는 개에게 물렸다. 개에게 물리면 아프다. 마음이 훨씬 아프다. 통장 잔고 바닥났다. 뭘 해도 안 된다. 꼭 이런 거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디서 읽었다. 또 항상 심심하다. 언제나 따분하다. 뭐 재미난 일 없을까, 없다. 뭘 해도 재미없다. 이젠 기대도 안 한다. 이런 글만 찾아 읽는 사람이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자, 몇 시 방향에 미남이 있다가 아니라 뭔가 서늘하고 자애로운 책 잡힐 만한 트집거리를 포착해보자. 마치 애청자 엽서 같은 사연 말이다. 단, 두둔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거. 특히 아둔한 거. 가까스로 최소한의 연기력은 갖춘 거. 이거 봐 남자 편들고 있어, 그런 거 말고. 여기 있다. 우주에서 지구로 파견됐나 땅에서 솟았나 모르겠지만. <내 지난 인연에 대해서 모두 좋았고, 늘 그리움만 남았다고? 그래서 어쩐다고?> 새빨간 거짓말이다. 파운데이션이 바닥났다. 미친 거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비정상이다. 완전 비정상이다. 말만 많은 거다. 동네 반상회나 여고 반창회에 나가서 물어보는 게 낫다. 늬 남편 뭐하냐고. 언제라도 손쉽게 손바닥 뒤집힐 수 있는 정치적 성격의 발언이다. 어디서 배웠어 아니면 원래 그런 건가, 나 원 참! 상태, 심각하다. 완전. 심성, 따질 필요도 없다. 적어도 지금은. 그리고 그분이 여자라면 그건 신이다. 여신! 하지만 여신은 여신인데 못생겼다. 백퍼센트. 엄청 재수없다. 그런데 신도 아니고 사람 여자다? 촌년이다. 남자다? 촌닭이다. 그건 가식도 예의도 뭣도 아니다. 완전 짜증난다. 아니, 그건 가식의 끝이다. 사유가 아닌 수다다. (깊이 생각하고 쓰는) 글이 아니라 (쉽게 스스럼없이 표출하는) 말이다. 내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당장 오후에 생각 바뀐다. 추궁받아도 빠져나가는 건 일도 아니다.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쉽다. 그때 나는 뭐를 좋아했고, 나는 어떤 생각을 했으며, 뭐는 그랬다 라고 하면 땡이다. 딩~동! 왜냐하면 지금의 나와 어제의 나가 어떻게 다르냐고 우기는 것은 철없는 사랑을 하는 것보다 백 번 못하니까. 사랑도 변하고 선망은 동기고 감수성도 팔며 욕망은 자유롭고 행복도 사는 세상인데 대문 밖에 내놓는 안 쓰는 재활용품, 싫증난 타자기, 퇴역하는 생활용품, 그걸 모두 알아서 가져가주고 치워주고 소비까지 하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 자본은 월간지고 명망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보너스지 않냐, 그게 규칙이고 질서지 않냐 또 그 룰을 내가 만들었냐, 그럼 그걸 내놓거나 버리거나 광고하며 공짜로 퍼트리거나 중고로 적당히 헐값에 팔지 어떡하냐고 매일 품에 안고 잠이라도 자란 말이냐, 나는 그게 이상하다는 사람은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다? 틀린 논리는 아니다. 백수식 푸념보다 무능력한 우유부단함보다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 성깔없이 착하기만 하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 쉬운 세상이다. 빗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애의 묘사 그 전문가는 뭐니 뭐니 해도 에로 장르 영화감독이다. 간단히 비유했을 때 로렌스의 사랑에 빠진 여인들이 만약─멜로지만 편의상─에로라면 과하고 심하고 불필요한 외설은 정통이랄까 본격이랄까 어떤 전위적이든 전형적이든 또는 모범적이든 그건 에로가 아니다. 그럼 뭐냐? 그냥 남자의 방식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친구와 사랑에 대하여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있다고 해도 그래 봐야 시시한 수준. 그 어느 중요한 순간에 나 사랑해 라는 물음을 듣고 멈칫 하며 거짓말해야 하나 말하야 하나 선뜻 지혜롭게 잘 넘어가지 못하는. 부러 철들지 않는 어떤 권위자가 봤을 때 그건 철없는 청년의 솔직한 행동이다. 남자 대 남자까지 그래야만 하는가는 잘 모르겠으나. 겉은 어른이지만 그건 애송이다. 이해력 참 넓은. 그처럼 간편하고 쉽고 잘 변할 것 같은 글의 옷을 입은 말은 소비되기에 적합하다. 잘 읽힌다. 인생을 논하는 이해력이 역시 좀처럼 부족한 어느 꺾인 풍운아가 봤을 땐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왜냐하면 외우고 싶은 밑줄과 기억하고 싶은 명대사와는 달리 자신의 삶은 바쁘고, 인생은 삐걱거리고, 나는 잘 살고 있나 의심스러울만큼 생활도 세상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일상이 한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지루하게. 재미없게. 생각 자체라는 것, 왜 그런가라는 이유를 젊어서는 잘 모른다. 헷갈린다. 그런 환경에 둘러쌓인 채 어른이 되면 콜라와 클럽만 찾고 유행만 쫓으며 고전은 멀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어쩌다 동물농장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터득하고, 운 좋게 거물이 되어 놀라운 철학과 천문학적인 돈 몇 푼을 떡 주무르듯 하더라도, 제아무리 그 구조를 통달하더라도 신통한 변신술은 절대 익힐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영은 잘 할 수 있다. 둥둥, 배영만. 그 다재다능함 때문에 약을 팔아도 될 텐데 그 흔한 예술을 고집하는 경우도 있다. 폼 나니까. 그래서 잘 팔리는 상업은 분위기를 읽고 시류를 예견하며 풍조를 이끌지언정 학문을 내포하기보다는 겉면에 내세우는 것을 선호하는 법이다. 알거나 모르거나, 속이거나 속거나, 보여주거나 보거나, 사랑하거나 사랑받거나, 능동사거나 피동사거나, 누가 뭐래도 첫째는 이거다. 일단 상대의 마음을 꼬시고 시선을 홀리고 청각을 설득하고 보기 좋은 광고 문구를 감미로운 목소리로 제시하여 당신의 느낌을 내쪽으로 끌어다놓는, 바로 그것이 첫째다. 이 세상에 마음처럼 간사한 건 없으니까. 일단 상품을 팔고 이름을 알리는 게 첫째다. 생태계는 원래 치열한 법이다. 사랑? 잘 아시지 않는가. 유감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인간사가 원래 그렇다. 그런 다음 제2단계에 돌입하던가 건너뛰고 본게임을 시작하던가 하는 것이지 거기서 실패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러나 그건 절대로 고수의 방법이 아니다. 따라서 쉽게 변할 것 같은 큰소리 떵~떵거리는 듯한 말이나 글은 꿈을 파는 게 아니라 장난 같은 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중적인 브랜드 가치 때문에 상대적으로 고급스러운 당신의 취향은 한껏 존중받고, 그러므로 당신의 격조 높은 안목 그 고귀한 철옹성은 안정적으로 한층 더 공고해지며, 더불어 그 떨리는 희소성을 언제까지라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틀을 바꿔서, 그 유동층의 표가 쉽게 얻어진다는 것은 전체적인 평균의 의미로 봤을 때에는 손해라는 답이 나오는 게 문제다. 따르릉 따르릉 팔랑팔랑~! 윙크? 퍽, 퍽퍽!
놀기의 명수는 어린이다. 부동의 1등이다. 어른은 2인자다. 항상. 다른 말로는 뭐랄까 발군의 노력으로 사랑받는 더도 덜도 말고 중간보스? 그리고 어른의 강적은 권태다. 두 번째는 타성이다. 세 번째가 의타심 아니 이타적 성향이라고 미리 예측하지는 말자. 따라서 정리하자면 놀면 금새 싫증난다? 놀아도 놀아도 계속 놀고 싶다? 그렇다. 어떤 사람은 겸손이 힘들다하고, 누군가는 자기를 쫓아다니는 남자의 구애만을 선천적으로 선호하며 적극 절실하고 마냥 좋아서 여자는 공주이기를 바랬으나 나중 남자가 돌쇠로 판명났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하지만 당신은 만족이 힘들다. 왜, 불만족이 친구 이름이라도 되나? 일일 드라마 제목이 뭐, 사랑은 고객만족센터? 이쯤 하면 예술도 꼭 장난 같다. 예술도 뻔트다. 왜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
그렇다. 당신은 백조해라. 그러나 나는 어젯밤에 악몽을 꿨다. 사람들은 솔직하지 않다. 어른들은 거짓말쟁이다. 툭하면 거짓말이고, 경각심을 풀면 또 구라고, 설마하면 뻥이다. 허구라면 흥미로울 것이고, 싸구려 호텔 바에서 술 마시고 노닥거리면서 거짓을 말하는 거야 그렇다쳐도 진중한 화술 그 신비로운 언변의 소유자의 참말, 답답하고 답답하고 답답한 일이다. 그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차 서글픈 일이라고 아마 몇 천 년 전에 많이들 예견하고 예언했으며 적중했다. 지금 시점 이후로도 똑같다. 참과 거짓, 잘 분간도 안 된다. 하물며 민초의 삶 그 세부적인 여흥으로 들어가자면 뻥을 빼면 퍽이나 심심하고, 과장미를 제외하면 통 재미가 없다. 뭔가 인간의 삶은 무척 혼돈스러운 듯 하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네 어쩌라네 그런 명대사가 그냥 유명해진 게 아니다. 그런데 아직도 연필은 어린이가 쓰고, 어른은 볼펜을 사용한다. 그건 왜 바뀌었을까? 원래 그랬을까? 모르겠다. 소설쓰기 첫 페이지나 사랑의 계약서를 그냥 확 찢어버리기 위해서? 쫙~쫙? 뭐야 그게! 어른의 선생님은 어린이라면서 어른들은 오늘도 시시각각 바쁘다. 열심히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아무튼 어른들은 바보다. 어린이는 천재다. 그 중간은 청소년일까, 것도 역시 모르겠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얘기다. 그리고 그분의 종적은 묘연하다. 단서도 없다. 진공청소기는 고장났다. 인형뽑기 기계는 늘 실패감만 안겨준다. 돈 먹는 기계다. 간혹 정말 드물게 웃음을 안겨주긴 하지만. 괜히 수 초 동안 사람을 들었다 놨다, 쥐락펴락한다. 대관람차를 같이 탈 사람이 없다. 영화는 혼자 본지 오래 됐다. 엇그제 산 것 같은데 책상 위에 모셔진 1년치 달력 12장이 어느새 다 넘어가고 이젠 딱 1장 남았다. 감수성은 바닥났다. 감성도 메말랐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 무엇인지 이미 잊어버린지 꽤 됐다. 어떤 예감을 기다린다. 뭔가 애달픈 감정을. 그건 아마 핸드폰 액정이 깨져서 수리비가 많이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시콜콜한 의식의 흐름 그 실속없는 기록은 모두 그 때문이다. 소설이 해킹당했기 때문이다. 어느 해커 집단에 의해 거리의 현금인출기에서 마구 돈이 쏟아져나온 사례가 있다는데 그걸 직접 봤다면 가사는 몰라도 어떤 노래를 흥얼거려야 했을 것이다. 또 차의 뚜껑을 열고 질주하면서 신나는 음악을 틀고 정처없이 어딘가로 떠나면서 돈을 하늘에 뿌릴 계획을 세웠던 사람은 기계가 대신 그 일을 해줬기 때문에 조금은 김샜을 것이다. 구식 장난꾸러기로 묻힌 거다. 일도 벌여보지 못하고. 어쨌든 마크의 일상도, 조니의 소셜 네트워크도 재미없다.
3
어제 제임스는 알렉스가 감독을 맡았던 영화 시사회에 다녀왔다. 케빈이 음악과 마케팅을 담당했고, 나머지 기획과 각본과 연출등 어지간한 작업은 모두 알렉스가 혼자 맡았는데 문제는 그 영화가 제임스의 마음에 쏙, 아주 쏘~옥 들었다는 것이다. 최근 조니에 이어서 친구 가운데 진정한 예술가가 또 한 명 탄생하신 것이다. 그처럼 물밑에서만 활동하며 작품성을 따지고 나름 까다롭게 만 명 가운데 한 명에 해당하는 천재를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그렇게 드문드문 어렵게 작품을 출시하는 당사자는 낙향하여 한적하게 살아가고, 친구들은 도시에서 어엿한 유명인이자 만능 연예인으로 잘 나가고 있었다. 그 시사회에 다른 친구들은 모두 각자 일정과 행사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임스는 자기도 이런 근사한 잔치를 열어야 하나, 그러려면 괜찮은 장편을 써야 하나, 그래야지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돈도 모이고 인기도 덩달아 들썩거릴까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였고, 그는 자기 생활에 전념하면 그만이었다. 따라서 그는 오늘부터 무슨 창작 아카데미 그런 교습소를 찾아내서 그곳에 나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곳은 시골에 위치한 대학교에서 주최한 방학 계절 학기와 비슷한 강습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등장한 강사는 삼류작가였고, 수강생은 제임스를 제외한 전원이 문예창작, 조각, 작곡, 무용, 평론, 서양화등을 전공으로 하는 예술대 학부생들이었다. 또 그들은 모두 친구들이었다. 우리 우정 영원히, 같은 장난스런 말을 스스럼없이 주고 받는. 처음에는 그 친구들과 제임스가 바로 아무런 개연성 없이 꼭 사이코드라마처럼 그냥 친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또 한쪽의 일방적인 끈질긴 구애 같은 우정의 요청과도 비슷한 답례를 바라지 않는 지속적인 호의가 나중의 친교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아니었다. 뭐 초반에는 자연스럽게 눈치만 보다가 들릴 듯 말 듯 상대방 얘기를 하는 것도 같은 분위기로 시작하여 이제는 더 보고만 있을 수 없겠다는 답답함 때문인지 제임스가 먼저 그녀들에게 물어보았다.
「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니으이...있어요? 왜... 자꾸 날 쳐다보는지... 그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 모르겠어요. 혹시 그걸 내가 알아도 괜찮다면 가르쳐주지 않을래...요?」
「아저씨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요?」
「아저씨? 아저씨는, 아저씨가 여기 어떻게 들어오긴 뭘 어떻게 들어와? 글쓰기, 작법, 창작론 그런 거 가르쳐준다길래 찾아왔는데. 왜 뭐가 잘못됐니? 그게 아니면 뭐, 나 문 열고 들어왔습니다가 정답인가?」
「아니 뭐, 꼭 그럴 거 까진 없는데... 아저씨도 아시다시피, 혹시 모르실 수도 있지만 여긴 여자대학교거든요. 그래서 우리들에겐 뭔가 남자가 낯설어서 설마 잘못 찾아오신 것은 아닐까 궁금해서, 그래서 여쭤본 거에요.」
「아, 그래? 어, 음 난 처음 알았는데. 여자대학교? 여자대학교라... 오, 그랬구나! 아하! 그랬어 그랬어. 아아! 뭔가 느낌이 뭔가 느낌이, 올려다가 말았다. (그는 이제 글을 읽는 듯한 교수님 화법을 대놓고 구사하기 시작한다) 그럼 어떡하지? 내가 계속 강의를 듣는데 무엇이, 뭔가가 크게 문제가 될까? 아니면 아저씨가 마술이라도 부려서 하늘에서 남자들이 내려오게 만들어줄까?」
그 말을 들었던 그녀들은 다 함께 꺄르륵 꺄르륵 한꺼번에 웃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 알게 되었고, 강의가 끝난 후 같이 공부를 핑계로 그윽한 커피향을 맡으러 또 고뇌하며 술잔을 기울이기 위하여 여러 곳을 전전했고, 금방 친해졌다. 나중 제임스는 그녀들을 이끌고 도시까지 걷기 여행을 떠날까, 저번 하숙집에서 시도했던 그걸 제안해볼까 하다가 그냥 괜한 망신을 사서 당하기 전에 잘 참았다.
그녀들은 주로 대도시에 집이 있고, 대개 부자집 딸이었고, 공부는 그만그만했으니까 바로 여기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으로 떠나온 것이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그녀들은 모두 이름이, 본명이 꼭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명사 같았다. 숙녀들의 대화에 단골 손님으로 나오는 좀처럼 애매한 그런 단어가 이름이라는 것이 특이점이라면 특이점이었다. 즉 낭만, 신비, 요정, 장미, 환상, 미래, 키스... 막 이런 말이 그녀들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그녀들에게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자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웃긴 일인데 그녀들은 하나도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면서 한 번 두 번 웃음을 참으니까 또 그것에 적응이 되었다.
그로부터 우리는(그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같이 놀 궁리만 하면서 실재 같이 어울려 놀러다녔다. 또 그는 이미 과-점퍼를 하나 얻어서 매일 입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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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녀들 가운데 누군가가 고양이를 강의실에 데려왔다. 그러면서 오늘은 요정이 도시에 일이 있어서 강의에 출석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꼭 왠지 그 고양이가 혹시 요정이 아닐까 그런 엉뚱한 공상을 해봤다. 그날 강의 주제는 시점이었다. 1인칭이 어쩌고 3인칭이 어떻다고 교수님이 땀을 뻘뻘 흘리시며 열강을 하시는데 학생들은 모두 각자 할일이, 매우 중요한 다른 과업이 있는 듯 했다. 유일한 청일점 제임스는 공책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탐스럽다 탐스럽다, 간직하다 간직하다, 수줍어하다 수줍어하다, 아름답다 아름답다, 시집가다 시집가다, 음... 그리고 심심하다 심심하다. 여학생 사랑은 뒤에서 막 도시락을 먹고, 여학생 느낌은 하늘을 나는 집을 소재로 하는 그림을 그리고, 여학생 엘레강스는 강의실 제일 뒷자리에서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면서 베토벤처럼 오선지에 미친듯이 악흥의 순간을 옮기는 정도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악상을 악보에 옮기고 있었다. 다행히 교수님 뚜껑이 열리지 않도록 만들만큼 녀석들 인성이 삐툴어지지는 않았다는 얘기였다. 녀석들이 뭔 뇌물을 줬는지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뭔가 방법을 쓴 거 같았다.
지루한 강의가 끝났다. 여대생 행복이 캔 커피를 교수님께 선사했다. 교수님은 의례적으로 고맙다고 했고, 그는 바쁜 일정 때문에 급히 떠났다. 어쩔 수 없이 제임스는 다시 청일점이 되었다. 그가 의도한 일은 아니었으나 사실이 그랬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그냥 어떡하다 이런 꽃밭에서 단 한 마리 꿀벌로서 작품 구상을 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 뭐한 인간들은 꼭 있다고. 뭐가 꼭 있다는 말일까? 그것은 곧 처음부터 그럴 의도를 품고, 꿈을 키우고, 열심히 노력해서 나중 어른이 되어 그런 환경에 둘러싸인 분들을 뜻할 것이다. 별 어설픈 밑도 끝도 없는 상상은 그만 생략하고, 서사의 진행에 대하여 더욱 심도 깊게 관찰해보기로 한다.
그들 일행은 여대생 천사의 작업실로 이동했다. 천사는 유화를 전공한다. 그녀의 부모는 포춘지 선정 몇 대 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녀는 일부러 그와 같은 풍족함에서 멀리 도망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유독 자매들 가운데 미운 오리 새끼라서 학업에 대한 재능만 약간 가녀렸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기까지 애써 행차하여 그림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소설 창작 수업은 취미였다. 그녀의 작업실은 웬만한 미술관 뺨칠 정도로 매우 세련된 디자인을 바탕으로 무척 섬세한 건축술로 만들어진 듯 했다. 그들이 거기까지 어떻게 이동했을까? 컬러 TV가 막 부흥하던 당시에 유행했던 영화처럼 랄라랄라 랄라랄라 하면서 오늘은 뭐할까 막 그러면서 그들은 그곳으로 놀러간 것이다. 여대생 연애가 묻는다.
「아저씨는 꿈이 뭐였어요? 설마 무명시인? 막 무명 블로그 같은 거 운영하고 집에서 혼자 있으면서 하녀 복장 입어보고 이상한 거 보시는 거 아니에요? 어머, 진짜 그러면 어떡하지?」
아저씨만 쓴 웃음을 지었고 다른 친구들은 모두 함박웃음으로 약속이나 한듯이 함께 즐거워했다. 가짜 웃음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었다.
「아저씨, 아니 오빠! 우리한테 최고로 멋진 남자친구를 각자 소개시켜주실 수 있어요, 없어요? 내가 봤을 때 어쩜 잘 하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어떻게 절실함을 끌어올리지?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우리는 뭘 해드려야 할까? 꼭 그렇게 하나 주고 하나 받아야 하나? 너무 삭막한 거 같지 않니? 아, 생각났다. 아저씨 꿈에 그거도 들어 있었죠? 닭다리 파는 거! 닭다리가 아니면 빵을 만든다거나 곡을 쓴다거나 그런 거. 어지간한 상업과 예술, 어른들의 소망으로 하나씩은 자리잡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어떻게 남편 노릇은 잘 하세요? 어머나! 혹시 노-총-각? 푸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아, 그게 나쁘다거나 우습다는 게 아니구요. 그냥 그렇다구요. 왜요? 우리가 막 술집 여자처럼 보인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유흥업과 관련된다, 가 좀 꺼림직하다는 빌미를 제공하는 말인가요? 그래도 솔직히 말하자면 남자들의 환상은 물질주의를 넘어서는 거 아닌가요? 아, 맞다. 제가 뭔 말 하는지 잘 못 알아들으시죠? 딱 정신 없죠? 한낱 아줌마들 수다 같죠? 막 피곤하시죠? 그렇죠? 거리낌없이 말해보세요. 졸지에 한 대 맞을지도 모른다구요. 왜요? 무모한 장난 같아요? 그래요. 맞아요. 장난. 낙엽 같은 거. 흔한 고백이나 가벼운 농담이랑 똑같죠. 뭐가 다르겠어요? 네, 그럼요.」
「오빠, 혹시 여기서 키스하고 싶은 숙녀 있어요?」 얘가 정말 못하는 말이 없네...!
그러나 그가 학교에 오가면서 기쁘고 들뜬 기분만 연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집에서 학교까지 갈려면 거쳐 가야 할 길은 딱 하나였다. 그게 아니라면 볼보 웨건이 하늘을 날아가든가 또는 금수강산 구경을 다 하면서 엄청 멀리 돌아가야만 했다. 즉 집과 학교의 중간에 도로에서 뭔 액션-스릴러 영화에 나오는 검문소도 아니고 뭔 돈을 내란 것이었다. 도로를 그분들이 만들지는 않았으나 알고 보니 그 땅은 자기들 종교 단체의 땅이란 것이다. 행정부도 이미 고개를 돌렸고, 사법부도 옛날에 손 놨다. 시민의 힘으로 부당하다는 판결을 살짝 얻어냈으나 보란 듯이 나는 놈 위엔 하는 놈 있다고 버티니, 상황은 두 손 두 발 들고 다툼과 짜증은 끓이지 않는다고 한다. 근처 멀리 지나가도 오명이 전해진다나 뭐라나. 그것은 명목은 문화재 관람료인데 말만 그랬지 실은 통행료였다. 워렌 버핏이 말한 바로 그 최고의 주식에 해당하는 사업, 옛날 말로 산이면 산적 바다면 해적!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행실을 전하는 곳. 건강은 최상의 이익, 만족은 최상의 재산, 신뢰는 최상의 인연이다 그러나 마음의 평안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다라나? 좋다. 다 훌륭하고 아주 숭고하다. 그런데 표면적으로야 그렇게 좋고 옳은 진리를 설파하지만 숲 속에 들어가보면 딴청을 피우며 그분들은 다르게 사는 게 아닌가 의문이 든다. 그건 분명 역할이 유익하다는 종교라는 상표의 교리와 정반대되는 행태다. 그것이 뭐 항간의 통속적인 속담이라도 된단 말인가, 마을에 누군가가 새로 오면 동네 사람들 사랑니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그 바닥이라고 높은 자리든 뭐든 정치성이 없을 리야 있나, 타 분야와 이해 관계나 뭔가 애매함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속세와 꼭 이렇게 얽혀야 하나, 기분이 결코 좋을 리가 없다. 이처럼 잠깐 지나가는 사람들, 근처에 사는 사람들, 세상에 전해지는 이야기등 얼굴을 찌풀릴만한 일이 인간계에는 비일비재하다. 참 아름다운 세상이다. 하지만 나중 세대가 지금보다 투정의 격이 높고, 더 낫고, 더 바른 무언가를 지향하기를 바란다면 이런 그늘 때문에 지금 불편을 겪는 게 낫다. 적절한 균형과 장기적 관점을 고려해서. 그 측면을 자꾸 연기하고, 그 소란스러움을 잠재우고 적당히 넘어갈려고만 하는 것을 (그것의 참된 진면목을 영위하지 못하는 썩 납득이 어려운 미온적인 뜻의) 보수라는 달갑지 않은 단어로 불러야만 한다면 그건 뭔가 크게 잘못된 거다. 선험자 집단이 몇 천년의 기초로 몇 백년 걸려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서 안정화시킨 체계를 그 몇 백년에서 0을 하나 떼고 바닥부터 시작하여 모방한다면 나중 크고 작은 뒤탈이 없을 수 없다. 그건 필수다. 선구자들이 뭔 바보-천치-둔재라서 은행에서 계좌 하나 만드는 데 일주일씩 걸리고 어쩌고 다 괜히 그러는 게 아니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가 괜히 나왔겠나. 과거 세대야 좋든 싫든 격동을 겪어서 많은 변화를 체감했을 테지만 현재 세대는 지금 태어나고, 지금 시작해서, 지금 많은 것을 개선해나가며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어떤 분야는 현업이지만 나중을 보고 일해야 한다는 명백한 이유다. 어쩌다 의욕이 지나처서 매번 바꾼 거 또 바꾸고 항상 그 바꿈만 되풀이하는 부작용도 있지만 말이다. 이미 출발부터 어느 뒷탈과 이상한 관례와 불미스러운 개별적 불만족과 어쩌면 선뜻 좋아하기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기질과 직면하여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운명을 떠안고 시작하게 된다. 여긴 정말 왜 이러는 것일까 지역과 부모는 골라서 태어날 수 없긴 하지만 말이야, 하면서. 그러나 사람 사는 데는 어디든 천국은 없다. 어디를 가나 차이는 있어도 문제는 다 있다. 어떤 곳은 모두 좋을 것 같지만 또 거긴 거기대로 일단 단어의 총량이 적고, 약간 단조롭거나 자칫 심심할 수도 있으며, 그런 뭔가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래야 맞다. 그래야 옳다. 몰아주는 게 자연스럽고, 크게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며, 대망이 노력과 절반의 운에 따라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대체로 불균형이 큰 만큼 그에 따른 드라마틱함이랄까 로또 1등을 위한 나머지 흔한 꽝은 있기 마련이다. 대체 왜 그 무언가는 그토록 더디게 변화하는지! 허나 괜찮다, 괜찮아. 왜곡된 시대상이야 일장일단이 있고, 그 어디든지 그런 불합리한 시기는 반드시 있었다. 그러나 애매함은 물론 애석함과 더불어 불편하지 않기를 바라는 어떤 업적과 함께 무수한 피와 슬픔과 설움과 장대같은 세월의 빗물로 이루어진 불분명한 뭔가가 남지만 그것에 대한 기준조차 조금씩 다르다. 안쪽의 옛 시각과 현재의 관점과 그리고 후세의 평까지 갈 필요도 없는 바깥의 학문적 접근에 근거를 둔 객관적인 사실성과 직관적인 눈길로. 선크림으로 자외선이나 막지 양심을 포장하겠나 더 뭘 어쩌겠나! 남자친구나 남편은 슈퍼맨일까? 아니다. 그러면 동물농장의 대표는 신일까? 아니기를! 뭐 전대표? 오, 세상에나! 사실과 지식과 구단이 성장하는 과정으로서의 대하드라마로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침묵할까, 아니다. 그냥 묵념하자. 사람이 누구를 좋아하는데는 이유가 있겠으나 유행은 사춘기의 열병 같은 것. 지금과 너무 다른 세상의 시대적 소명은 상사병과 정반대의 것. 돈의 자본의 호통이 들리지 않냐고, <내가 최고야> 라고? 묻지맙시다! 때때로 들리면 흘립시다! 환경이든 표준이든 영 아니더라도 절대 포기하지는 말자. 더군다나 민중은 개나 소나 돼지가 아니었으면! 때로는 시적으로 이곳에 소풍왔다고 한 번쯤 생각해보기를! 대신 될 수 있으면 연봉은 많이, 행복은 높았으면 좋겠다. 지금 적게 받고 나중 크게 될 수 있다면 그걸 감안해야 할 테고. 보통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쉽게 말해 이런 게 아닐까? 보수나 정치, 진보, 독단적, 가난, 빈곤, 그래 (반어적으로 쓰이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듣고 읽어도 썩 언찮치 않은 그런 세상에서 사는 것! 통계와 그래프와 객관성과 비교, (은유?) 비유로 따지면 긴 말 필요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머머 아닐까, 에 대한 합리적인 해답은 일단 아니오다. 우선 최소 1표는 확보됐다. 왜냐하면 적절한 비관성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니까. 적당한 부정적 감정은 과거를 되짚어보고, 현재를 점검하며, 향후 개선의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인문-교양서에서는 말한다. 찡그려진다고 무조건 피하지 말고, 모르겠다고 정말 중요한 걸 장난으로 대체하지 말 것이며, 오뚜기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자.
어쨌거나 저쨌거나 꼬박 꼬박 왠지 모르게 그 때문에 기분이 울적해서 그는 과-점퍼를 입고 콧노래를 부르다가 꼭 학교에 가는 동안 한 번, 또 집으로 오는 동안 한 번 그리고 날마다, 근사한 가곡은 꼭 어김없이 단조로 바꼈다.
5
어느 날 문득 그들은 수업이 끝나고 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교정 잔디밭에 앉아 뭔가 정취가 느껴지는 듯 한 장면을 연출할려다가 너무 바람이 차가워서 그랬는지 음대생 미모의 작업실로 이동하여 함께 차를 마시기로 했다. 곧 딱 도착했다. 간판은 없었다. 대신 떡하니 찢겨진 공책 한 장이 문 옆에 붙여져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미모의 첼로 연습실.
「오빠 이거 좀 읽어보실래요? 제가 쓴 소설 습작 초고에요. 어떤가요?」
여대생 사라방드가 건넨 공책에는 이런 글이 씌여 있었다. 행복으로 가고자 하는 어떤 표상이다. 음, 어디로 가고자 한다고?
「이거 니체가 쓴 거 아니니?」
「오, 어떻게 아셨어요?」 웬만한 어른이라면, 소싯적 책 좀 읽었거나 소양의 근처에 잠시 머물렀으면 말재간만으로 가능한 짐작이다. 책 제목만 두루두루 아는 것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 지성의 양이랄까 뭔가가 예측 가능한 것이다.
곧이어 지그는 자기 글도 읽어보라면서 두툼한 다이어리를 건넨다.
「이거 네가 쓴 거 맞니? 이건, 음, 아무리 봐도 여자가 쓴 게 아닌데. 혹시 남자친구가 쓴 거 아니냐? 그렇지?」
「오! 대박! 와!」
곧바로 친구들 가운데 어느 누군가가 제임스에게 어디 사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그는 V지구에 산다고 답했다.
「와, 나도 그 근처 사는데!」
그렇게 말했던 친구는 딱 그 정도 얼떨결의 다가섬을 선호하는 듯 했다. 한 숙녀가 그런 말을 쉽게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단, 습관적으로 아무 말이나 누구에게나 막 베푸는 다소곳함으로 유명하지 않다면. 그게 뭘 뜻하는지, 낯설거나 애써 모른 채 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잠시 후 다른 친구가 자기 글은 어떠냐고 단편 초안이라면서 공책 한 권을 그에게 건넨다. 그는 그 글을 잠시 읽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와, 얘 자긍심 대단한데. 완전 인생을 만끽하며 사는데. 얘는 자기 생각이 왕이고 임금이야. 거의 신격이라구. 이거 남자친구랑 같이 쓴 거지? 그 친구 피곤한 스타일인데. 엄청. 이미 다음 행보의 기별이 있어서 확인할려고 했던 거면 깜짝 놀래켜줄 참고할 만한 귀뜸은 자제하고 싶네. 아저씨는 얼음 같은 냉정함이 부족하니까 말이야.」
미술학도인 영화는 자기가 그렸다면서 그림 하나를 보여줬다. 그림의 바탕화면은 인문서적의 한 페이지였고, 그 위에 꽤 괜찮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왠지 그것도 1900년 이전의 누구 더하기 1900년 이후의 누구와 누구를 합해서 그려놓은 듯 했다. 그래서 그냥 그는 훌륭하다는 몸짓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다 여대생 파랑새는 자기 관상을 봐달라고 했다.
「음 그게 내 전공은 아니지만 뭐 숙녀에게서 묘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니까 지금은 무언가 피치 못할 사정이란 게 있는 듯 하니까 미인의 걱정을 일소시키고, 활기찬 미래를 맞이하기 위한, 아...... 미래 얘 말고 말이야. 아무튼 대충만 봐도 너 그 생각 해보지 않았니? 입술선이 좀 더 확실했으면 좋겠다거나 음 가슴이 더 커지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같은 생각. 농담이고, 일전에 애절한 사랑에 한번 아파하긴 했는데 음, 잘 이겨냈어. 훌륭해. 립스틱은 그거 안 어울려. 바꿔. 당장. 그리고 여행 좋아하지? 가보고 싶은데 많지? 하고 싶은 것도? 미래가 보이는데. 열망이 언젠가 실현될 거 같아. 얘, 넌 관상 볼 필요도 없겠다. 이미 소망이 나랑 딱 똑같네. 아무 걱정 하지도마. 알았어?」
얼마지나지 않아 숙녀 회전목마양께서 좀 더 직접적으로 핸드폰으로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를 보여주면서 뭐가 문제인지 진단해달라고 한다.
「이거 이거 이거, 이런 거 빼야지. 저는 촌년입니다 라고 광고하는 거야. 또 이거 뭐야 이거. 우리 회전목마 아가씨가 도스도예프스키니? 막 길다란 글, 필요할 때가 있긴 한데 적절하더라도 그게 말이 아니고 글이면 뒷목을 잡거나 수증기를 부른단 말이야. 말이라도 정신이 혼미해질테고. 뭐 어쨌든 둘 중 하나네. 아무튼 그러다가 사리가 생길 수도 있다고. 아, 사진 더럽게 못 찍네. 본판은 정말 젊고 아름다운데 사진을 못찍어. 정면 사진, 똑같은 자화상, 관광객 사진 그런 건 혼자만 봐. 아니면 적게 올려. 타인 보라고 올려놓지 말란 말이야. 훈훈한 남자가 괴로워하기에 딱 좋은 사진이니까. 그리고 책이나 특정 글이나 그런 거 찍은 사진도 올려야지. 왜? 넌 지성인이니까! 한마디로 균형. 뭐뭐 하고 싶다, 뭘 좋아한다, 전에 어땠다 같은 초딩식 표현은 줄이고......」
어찌되었든 쓰잘 데 없는 수다를 나눴지만 그녀들이 그를 부를 때 발성과 함께 공기의 진동, 분위기의 고조, 떨리는 기분은 약간 변화를 띄게 되었다. 새로운 호칭과 함께. 곧 아저씨에서 오빠로. 다시 오빠에서 형으로!
6
너무 급한 교분이었을까 야속한 인연이었을까, 아니면 가을 감기처럼 어울리지 않게 잠시 아저씨 혼자 친하다고 그렇게 됐다고 좋아했던 것일까? 마침내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애매한 관계는 급작스럽게 종식되고 말았다. 그동안 따듯했다. 멋졌다. 좋았다. 즐거웠다. 세월은 가도 강산은 변하지 않는 줄만 알았다. 미련이란 말은 노래에만 등장하는 한물간 낱말인 걸로 착각했던 것이다. 행복했어, 랄 것도 없지만 그리움이 쌓였나 궁금해지기도 전에 처량한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뜻하지 않게. 유력한 용의자 제임스 아저씨는. 지가 무슨 문예창작과에 갓 입학한 스무살 청춘이나 되는 줄 알더니만 보기 좋게 더 나은, 더 멋진, 더 눈부신 남자를 찾아 떠난 어느 여인에게 버림받은 몽매한 그런 툭하며 차일 길바닥의 깡통이 되고 말았다.
사연은 이랬다. 소설 창작론인가 뭔가를 가르치던 강사인 삼류작가 R이 썼던 책이 대박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즉시 유명세를 탔고, 일류작가로 수직상승했다. 그가 깡촌에 규칙적으로 내려와서 노는지 공부하는지 불분명한 친구들을 가르치고 뭔가 동기부여를 해야 할 까닭은 증발했고, 끝까지 맡은 임무를 완수해야 할 책임감도 무시되었다. 그는 도시로 떠났고, 그 자리는 웬 신수 훤한 이류작가로 대체되었다. 이 놈이다. 얘랑 정분이 나도 엄청나게 난 것이다. 그래서 제임스는 팽당한 것이다. 그는 예지력이 부족했고, 만약의 사태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잊고 있었다. 이별은 갑자기 찾아오고, 행복하다는 것은 1등의 마음과도 비슷한 것이다. 여대생 초절기교가 그의 등을 토닥거리고, 여대생 사색가가 그의 언 마음에 에어콘 바람을 틀어대는 듯 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에게는 딱한 사정일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제야 구색이 맞는 그림이 그려졌다고도 볼 수 있다. 강의실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 추운 날 멋진 연보라색 컨버터블 뚜껑을 열고서 그 새로운 강사 녀석과 하루는 여대생 탐욕이, 또 하루는 여대생 청순이, 다른 어떤 날은 모두 함께 어디 좋은 곳으로 소풍가는 모습이 엿보였다. 잠깐 총애를 독차지하나 싶었는데 그냥 임시 대역에 불과했던 것이다. 꽤 괜찮았던 시절이었지만 과-점퍼를 입어봤던 걸로 만족해야 한다. 그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레몬빛 아성은 신기루였고, 오색찬란한 모래성은 무너졌다. 그는 그녀들을 위해 준비했던 선물을 어떻게 처리해야만 했다. 뭔가 잘 풀리나 싶었는데 불길한 효과음은 그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 마음의 상처,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익숙했다. 마치 그런 말처럼. 나 또 차였어!
그는 상황이 대충 간략히 말하자면 절교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마주치면 어색하고 아마 그쪽에서 자기를 슬슬 피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문예 강좌에 발길을 끊었다. 자기는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지 않지만 진짜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는 인간을 알고 있다느니, 결국 만화영화에 나오는 깃털 몽땅 뽑힌 오리가 됐다. 자기는 화염방사기가 아니지만 입에서 화염방사기의 화염이 뿜어져나오는 사람을 알고있다더니 체면도 품위도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도 모두 날아가버렸다.
그러나 그가 단번에 수강생이랄까 대학생이라고나 할까, 출퇴근이 아닌 등하교의 생활을 바로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딱히 억울할 것까진 없겠지만 잘못한 것도 없고, 낯뜨거워질 사연으로 얽힌 사이도 아니었으며,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녀들 가운데 피노키오라는 의아한 이름을 가진 여대생의 가방이 그의 차 뒷좌석에 있어서 그는 그걸 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그 친구들을 쉽게 만날 수는 없었다. 해후라는 먼지 쌓인 듯한 단어를 알고 있기 때문에 푸른빛의 느낌이 희끄무레한 재회가 허락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으나 다시 찾은 강의실에는 그 어울려서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는 그녀들의 행방이 불투명했다. 미대생의 작업실도 음대생의 카페도, 무용하는 친구의 대저택을 기웃거려봐도 모두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그 가운데 그나마 가장 친하고 가장 무난하고 가장 편했던 리더를 딱 지목해서 전화 통화에 성공하여 <너, 당장 나와!>라고 어설프게 연기할 수도 없었다. 전화번호는 커녕 그녀들 이름조차 그게 진짜였나, 이제는 그 기억이 진짜인가 조작된 환영은 아니었나 실로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달콤한 한 때가 길어지지 않고, 그도 일찌감치 어중간한 형의 역할을 단념할 수 있어서 잘된 일이기는 하지만 그도 제아무리 성인이라지만 목이 케케한 게 다시 변성기가 오는 듯 하고 여태까지 진공청소기 어쩌고저쩌고, 환상머쉰 이러쿵저러쿵, 허풍머쉰 미주알고주알 큰소리 뻥뻥치드니 지독한 독감에 걸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실연당한 상실감 때문에 울증이 다시 그의 전면에 나서려는 조짐까지 보였다.
그는 결심했다. 안 되겠다. 돌려주려고 노력은 했으나 모두 허사다. 자기가 사심을 품은 것도 아니고, 그네들 비밀스런 모임에 껴달라고 안달하지도 않았으며, 시녀로서의 우정을 은밀히 지속시켜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방법이 없다. 따라서 최후의 노력은 그 쓸모있는 딱 하나의 방법은 가방을 열어보는 것이라는 건강한 남아로써의 호기심과 가방을 되돌려주고자 하는 착한 어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대두되는 충동을 잠재울 수는 없다고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바로 양심에 털나다 같은 읽기도 쓰기에도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세속적인 드라마에 대한 애착과는 멀찍이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이다. 가방을 여는 것 말고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한 숙녀의 내면을 빤히 들여다보게 되면 어쩌나, 이러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은 아닐까, 나는 친히 천사의 대역으로써 주소나 인적 사항 같은 연락 가능한 흔적만 찾는다는 다짐을 수반하여 그는 마침내 걱정 끝에 극비리에 그 가방을 열기로 했다.
그런데 그 가방의 품질과 취향은 향락의 최고봉이었다. 가방은 사치품이었다. 사치? 애매한 단어다. 이상한 말이다. 호사가 누군가의 애원이라면? 평생 놀고 먹는 것이 많은 청소년들의 정말 진솔한 속마음이라면? 그대들 소원은 모두 이루어지고 거의 절반의 소비재는 모두 무료가 되며 세상 사람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단 하나 난 딱 하나의 비싼 가방을 갖고 싶다면? 그렇다면 나쁘다고 할 수도 자동차에 빗대어 힐난할 수도, 고스란히 과소비를 조장한다고 손가락받을 일도 아닐 따름이다. 그건 그냥 그녀의 즉 가방 주인의 권익이었고, 선물받은 물건일 수도 있으며, 혼탁한 허영심이든 진공청소기에 필적하는 사랑의 마술일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안 되겠는가! 뭐가 문제라고. 어쨌든 그 물건은 실수투성이 아저씨의 삶에 찾아온 하나의 환희였다. 진짜 기쁨은 확인의 찰나보다 그 전 단계에 있는 것이다. 요 녀석 어떻게 요리하지 하는 바로 그 마음. 마치 첫날밤에 대한 공상과도 같은. 그의 글은 항상 흥행에 참패했고, 일단 글이 잘 안 써졌지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나마 하워드가 언급한 무슨 은밀한 창작 아카데미에 그런대로 흡사한 어느 강좌를 듣게 됐드니 이와 같은 기다림의 미학과 쉬쉬할만한 어떤 상징적인 호쾌함의 환상과도 같은 복받치는 가슴 찡한 순간이 발버둥치며 날 꺼내달라고 간청하며 애걸복걸 두 손을 싹싹빌며 환희의 순간을 통사정하게 된 것이다. 정말 눈 앞에 쌍수를 들며 그를 환영하는 천사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 가방이 말을 할까? 아니면 살아서 움직일까? 혹시 둘 다? 설마 가방을 열면 일단 스케이트보드가 제발로 걸어나오고, 마술사의 입에서 나오는 병아리와 반짝반짝 빛나는 무지개빛 줄처럼 다이아몬드든 황금이든 뭐든지 완벽한 이상형의 사이보그 아가씨까지 그야말로 그 뭐든지 계속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오, 오오, 오오오! 생각만 해도 짜릿하고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가슴이 뛰었다.
7
그녀의 가방에 들어있는 물품은 별다른 건 없었다. 휴대전화에 엄지 손톱만한 뭔 부착물 두 개. 하나는 결제와 관련된 걸로 추정할 수 있고, 하나는 소형 현미경이 내포되어 있고 거기에 침을 바르면 배란일을 알려주는 기능을 제공하는 거 같았다. 그리고 시집 1권. 작은 즉석사진기 하나. 엽서도 하나. 손거울 하나. 립스틱. 골프공 1개. 테니스공 1개(개를 키우나?). 콘서트 초대권 2매. 나비넥타이(선물일까? 설마 남자는 아니겠지, 그러나 혹시 웨이터? NC?). 향수. 꽃씨 1포(농업용품점에서 구입했을까?). 녹차 티백 1포. 권총 1정(혹시 BB탄? 아니면 그녀가 담배를 피울까? 그녀는 골초? 아마도 물풍선이 발사되는 듯함). 선그래스. 구강청정제. 공책. 필기구(연필, 왜?). 빗. 그런데... 립스틱 빼고는 화장품은 없구나 라면서 그는 얘가 자기가 아는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화장품이 전혀 필요없을 만큼 미인이란 말인가? 설마 그 반대는 아니겠지! 그리고, 돈? 없다. 신분증? 역시. 그는 가방이 좀 크다고 생각했다. 아줌마인가? 여자들이 나이와 비례하여 가방과 몸무게가 늘어나는데...... 왠지 불길했다. 에잇, 성과도 없다면서 그는 탐정놀이는 그만하기로 하고, 미술관인지 음악실인지 문닫힌 누군가의 예술가 작업실에 그 가방을 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뭔가 큰 과오를 저지른 것 같아서 그만한 죄책감에 상응하는, 아니 그 보다 훨씬 어 어떠한 정도로 선행을 베풀면서 살기로 결심한다.
8
그는 집에서 몽상을 한다. 지금 이 세상은 미지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장래 이곳은 동화의 나라가 될 수도 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이 동네에는 앵꼬와 앵무새와 파랑새가 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공상을 해도 된다. 상상은 자유다. 그러다 그는 TV보기와 인터넷을 동시에 하며 요란한 음악도 틀어놓고 에너지 음료를 마시며 일전에 사놓았던 외계인 가면을 썼다. 바로 그때 아마도 환청일 수도 있는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그냥 느낌일 수도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헛수고할 셈치고 바깥에 나가본다. 바깥에는 지금인지 또는 언제 도착했는지 알 수 없는 웬 엽서가 한 장 놓여있다. 그 엽서의 내용은 이랬다.
앞면은 그가 전에 누군가의 가방을 열어봤던 당시 그 내용물이 고스란히 찍힌 사진이다. 흡사 잡지에서 1번부터 10번이나 20번까지 제품명과 설명과 가격이 친절하게 씌여진 그런 안내글과 거의 똑같았다. 어쩜 우연일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과 이것은 너무 유사하다. 꼭 거짓말처럼. 그리고 뒷면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깨알 같은 손글씨로. 엽서 가득 빼곡히. 정성스럽게. 마치 말인 듯한 글처럼.
「다른 것은 몰라도 삶의 활력을 찾아드립니다. 사랑도 이루어드립니다. 원하는 건 모두 가질 수 있습니다 있습니다. 바라는 소원이 있나요? 네, 천천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제촉하진 않겠습니다. 당신의 상상은 현실이 됩니다. 꿈은 곧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대의 덧없는 인생에 새로운 기대가 있나요, 남았나요? 없어도 문제될 건 전혀 없답니다 없답니다. 저희가 보장해드립니다. 책임질 수도 있다고 확신합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서광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더 이상 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기쁨만이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 그 다음엔 쾌락과 희열, 행복, 경탄, 환락등 그 뭐든지 말만 하십시요. 그동안 많이 외로우셨다는 거 잘 압니다. 잘 안다구요. 바람이 당신의 안부를 실어다주었답니다. 자, 이제 당신의 인생이 춤추고 노래하며 날아오를 차례가 되었습니다 되었습니다. 부디 찬란한 환희의 순간을 마다하지 마시기를! 아직 기회는 남았다구요. 이게 뭘까요? 천국으로 가는 티켓일까요? 네, 맞습니다. 당신은 천재이군요. 인생 역전, 가능합니다. 당신은 설렙니다 설렙니다. 당신은 왠지 좋은 예감 때문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좋아집니다. 밝은 미래의 전망은 늘 당신과 함께 할 것입니다. 준비됐나요? 한번 나오시겠습니까? 삶이 즐겁지 않습니까? 터무니없이 웃겨드립니다. 사는 게 그저 그런가요? 인생을 낭비하진 마세요. 뭘 해도 재미없다고 더 이상 슬퍼하지도 마세요. 드디여 그분이 행차하셔도 당신과 함께 환상의 짝 그 전설적인 황홀한 궁합을 완성할 단계에 직면했습니다. 남은 건 당신과의 직접 대면뿐이 없습니다. 비로소 때가 되었습니다. 오래 기다리셨다구요. 자,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하여 부흥회가 열립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함께 하시기를! (한 칸 띄고) 우리는 당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잘 알고 있답니다. 우리는 당신의 앞날이 눈부시길 기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라면 이미 당신의 미래는 반짝반짝 빛나고 아름답고 더없이 흥미로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바꿀 수 없는 절대 변하지 않는 이상주의는 당신과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이 기필코 돈방석에 앉도록 만들겠습니다. 이것은 운명입니다. 숙명적? 아닙니다. 벌써 숙명이자 천운입니다. (한 칸 띄고) 사랑은 있어요. 지금 마음의 결정을 내리세요. 기회를 놓치면 큰일납니다 큰일납니다. 따로 요원을 보내겠습니다. 저기요. 이 나직한 외침 그 고요한 행운의 신호를 무시하지는 마세요 마세요. 저희와 함께합시다 함께합시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승천할 것입니다. 작별의 키스와 함께! (한 칸 띄고) 미래 연구소장 누구 그리고 서명. (괄호 열고) 미래정신병원 계열사.」
그 후 그가 정해진 시간에 그곳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 그가 <오오, 느낌 와 느낌 와!> 막 그러면서 쾌재를 불렀을지는 모르나 하나는 분명하다. 그는 화장지각에서 나오는 화장지를 모조리 돈으로 보았고, 새소리는 모두 효과음이었으며, 자기가 어떤 마술적인 최면에 걸린 줄도 모르고 있었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아아! 그는 마침내 로보트가 되었다. 그는 희망을 보았고, 그는 드디여 새가 되었다. 이름은 모른다. 그냥 새! 오오, 새!
아아! 그는 마침내 새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