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거는 듯 하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의 말이 아니라 나 혼자 떠올린 생각이었다. 집과 학교만 오고 가는 학생이나 집과 회사 밖에 갈 곳이 없는 일 중독에 빠져 사는 지식노동자처럼 나도 집과 찻집만 매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이 아마도 발전한 듯 했다. 왜 그래야 할까? 딱히 타당한 답을 떠올리기가 어렵지만 그 때문에 질문에 곧이곧대로 답하며 읽고 보고 듣는 세상사를, 수동적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내 지난 행동 양식을 거꾸로 뒤집기로 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집에서 음악을 들었다. 페루치오 부조니가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 또 나는 집에서 책을 읽다가 오랫만에 밑줄을 그었다.
"질투라는 자연적 열정과, 정탐질이라는 사회적 기능 사이에는, 매우 깊은 유사성이 있다. 정탐꾼은 개처럼 다른 이를 위해 사냥을 하고, 질투꾼은 고양이처럼 자기를 위해 사냥을 한다." 웃는 남자, 빅토르 위고.
또한 나는 집에서 잡지를 보면서 사고 싶은 물품을 기록했다. 나는 오페라 공연을 예약하고, 남의 블로그를 구경하고, 인터넷을 통해 예쁜 무늬의 손수건을 주문했다. 손수건은 정말 유용하게 써먹을 일은 거의 없지만 어쩌다 아주 좋은 사용처가 발생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그 멜로드라마적 사랑과 섬세한 증오의 반대말, 불투명한 행복과 스쳐지나갈 불행에 대한 기대와 예감을 내 곁에 두기 위해 나는 손수건을 구입했다. 소녀의 환상, 별거 없다. 그리고 나는 대충 한 50년 전에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림을 내 집에 들여놨다. 원본은 비싸니까 일회용 카메라로 원본을 찍은 사진을 구해서 책상 옆에 붙여놨다. 그외에 나는 말을 나눌 상대가 없고, 뭔가 말하고 싶은 대상과 내면의 울림이 없었다. 그래서 듣기만 했다. TV로 인터넷으로 사람들의 말과 음악을 들었다. 어떻게 작품 구상을 잘 해서 그것을 글로 옮기면 환상이 마치 손에 쥘 수 있는 과일이나 되는 것처럼 그 난해한 요술의 불가사의를 수중에 넣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는데 따지고 보면 삶의 신비는 바닥난 듯 했다. 벌써 또는 이미.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좋은 생각이 났어!」
그러나 나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첫째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 나는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영감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언제 예고도 없이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기별이 없었다. 전혀. 나는 멍청이가 된 듯 무지했고, 번쩍이는 소재를 떠올릴 수 있는 재주는 결핍됐으며, 그럭저럭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만족이 아닌 불만족이고, 자만이 아닌 권태였다. 창작욕에 목마르다고 확언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게 막연했다. 그러나 딴청을 피우면서 NC와 새로 뜨는 클럽을 전전하는 일은 멀리했고, 주색은 사양했다. 이 정체된 전형을 깨트릴 새로움은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일하는 날과 노는 날의 구분도 불분명했다. 뭐를 배우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게 퍼뜩 깜짝 놀란 것처럼 착 사람을 휘감아야 삶이 즐거운 법인데 말이다. 나는 깨달았다. 이렇게.
「나, 늙는건가?」
「이런 젠장,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고로 집에만 주로 머무르는 나쁜 습관, 뭐랄까 끝없는 사랑이 아닌 통속적인 사랑으로 인해서 결국 사랑에 지치고 말게 될 뭔가 모험가가 딱 질색할 만한 악습을 탈피하라는 제2의 자아 그분의 명령을 감지했다. 녀석은 내게 막 이렇게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개처럼 벌어서 토끼처럼 쓰라, 몰라? 살면서 그런 말도 안 들어봤냐? 남자는, 어, 남자는 자고로 아침에 눈을 뜨면 집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야. 그런 거라고. 어? 너가 뭐 계집애냐? 여자는 소극적이다, 여자는 집안일을 한다 같은 뭐 그런 식상한 정체성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구. 그냥 이런 순간에는 확 그냥 억지로 구실을 만들어야 하는 거라구. 쉴 만큼 쉬었잖니? 설마 집에서 혼자 고추나 만지작거리면서 띵까띵까 백판 자빠져 놀겠다는 심보, 그건 아니지? 너! 그래, 너! 어딜 두리번 거려, 여기 너랑 나 밖에 누가 더 있어? 너 혹시, 축하해 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 없어? 어, 그런 말 들어본 적 있냐고 없냐고. 있긴 있겠지만 딱 떠오르는 기억 없지? OK! 그럼 나가! 알았어? 당장 나가! 어서 나가라고. 넌 겁장이가 아니란 말이야! 격투기 용어 가운데 더티 복싱이란 말이 있지. 사랑도 말이야 어떤 사랑은 그런 사랑이 있다고들 하더라고. 그처럼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밖에서 원대하게 활동해야 할 순간이 있어. 지금이 그 시점이라구. 하지만 아직 정해지지는 않았어. 뭐가? 네가 겪게 될 체험이 사행성일지 모험 장르일지 아니면 흥분되는 무용담일지 말이야. 그러나 밖으로 나가야 죽이 될지 밥이 될지 결판이 나겠지? 게임의 다음 단계로 올라서야만 다음 장르를 기대하는 법, 장르가 바뀌면 그 때는 문을 닫고 새로운 문을 열게 되는 거야. 그러려면 집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고. 그럼.
바로 이렇게 누군가 나를 세뇌시키며 잔뜩 혼을 내고 있었다. 나는 내게 바람을 불어넣고 내 심통을 가라앉히며, 정체된 비사교적 분위기와 축축 처지는 왠지 우울한 기분을 신나고 즐겁고 놀라운 경험으로 만들어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예견했다. 책임까지질 것 같은 몽상가에게 내 삶의 재량권 일부를 통채로 맡겨보기로 했다. 약 올리냐? 그런 말은 쏙 들어가버렸다. 어, 음 착종? 왜냐하면 지금 상황이 딱 그런 낱말과 그 뜻이, 그 지복이, 그 활기가, 그 의지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정말 천년만년 집에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짐을 많이 쌀 필요는 없고, 간단한 필기구와 책 한두 권을 챙겨서 길을 나섰다.
2
나는 집을 나선 후 앞집 마당에 있는 나무에서 망고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보고 내 재능이 땅 바닥으로 떨어지는 건가, 역설적으로 위대한 법칙과도 같은 환상적이고도 섬뜩한 그런 미친 이야기를 쓰게 될 것이라는 전조는 아닐까, 그런 날뛰는 날것 같은 그와 같이 파닥거리는 공상을 잘 진정시켰다. 다만 그곳에 언제부터 망고 나무가 심어져 있었지, 망고는 더운 지방에서 자라는 열매 아닌가, 저 열매가 진짜 망고 맞나 안 맞나, 그런 의심은 그냥 귀여워해주기로 했다.
그러다 나는 어딘가에 도착했다. 그곳은 결국 <어디에 같군요> 같은 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부러움과 자기도 언제 데려가달라는 성화를 받을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어딘가 좀 황량했다. 많이 우중충했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기껏 떠나온 데가, 찾던 무슨 대대적인 착상의 낙원이 여기가 맞더란 말이냐, 그와 같은 푸념을 절로 부르는 경치를 갖추고 있는 그곳은 그냥 황무지였다. 뭔 엘리어트 그런 말도 아까웠다. 감흥이 특별하지 않았는데 하도 많이 주워 읽어서...! 이상한 사람들 참 많다. 남이 하니까 그냥 무의식적으로 따라하는 인간들로 꽉 찼다, 이 세상은. 대기도 꾸물꾸물했다. 캠핑카도 달고 오지 않았다. 가까운 해변으로 가서 일광욕을 할 수도 없었다. 이상은 멀리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부들부들 떨리며 왠지 감기 기운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한적한 곳 보다는 사람이 모여있는 장소를 찾게 되었다.
그리 멀지 않은 어느 시내에 도착했고, 나는 그곳에 들어갔다. 찾집 이름은 쥐구멍이었고, 그곳의 느낌은 썩 예술적이지는 않았다. 쥐구멍?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 라는 긍정적인 속담을 떠올리게 만들려는 의도로 작명을 했을까? 관심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간판은 걸려있다. 개구멍이라는 가게를 찾을 때까지 한 달이건 두 달이건 막 아무데나 싸돌아다닐 껄 그랬나, 잠깐 헷갈렸지만 일단 그곳에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구상하며 숨을 고르고 쉬었다 가기로 했다.
나는 그곳에서 홍차를 한 잔 마시면서 왠지 처량한 기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내가 여기 왜 온 거지, 그런 의문에 올바르거나 합당하거나 아니면 제멋데로 떠오르는 아무런 답변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기분을 전환할까 해서 자화상 사진을 찍어서 내 소셜 네트워크에 올렸다. 하도 사람들이 그 일을 많이 하니까 그건 다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합성 기능은 참을려다가 못 참았다. 머리에 뿔을 하나 달고, 어깨에 뽕도 넣고, 발바닥에서 화염이 뿜어져나오게 만들었다. 그러다 발바닥 화염은 뺐다. 커페에 있던 한 친구가 사진에 찍혔는데 나는 그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라고 적었다. 그가 양성애자였나 어쨌나는 모르겠고, 난 그저 저번에 빌려준 급전을 받고자 녀석을 묵사발로 만들든 그냥 곱게 조용히 말로 옷을 모두 벗겨버리든 어쩌든 결판을 짓기 위해 여기에 찾아왔다는 부연 설명을 했다. 댓글은 기대하지 않았다. 꿋꿋이 우리는 친한 친구 사이라고 적어놨다.
그곳에 있는 몇몇 숙녀들은 얌전한 척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얌전했다. 거기 있는 아가씨들은 언뜻 봐서 조신한 게 아니라 격조 높은 신부 수업을 사전에 받은 것만 같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가정교육일까? 어쨌든! 말하는 모습도 무척 조심스러웠다. 어미를 길게 끌거나, 질문이 나오면 그걸 듣자 마자 즉답성을 놓치면 행복도 쾌락마저 놓친다는 것처럼 촐싹맞게 바로바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 박자를 타고 운율을 실어서 살짝 여운이 가셔지면 딱 그때 대답을 하곤 했다. 눈꺼풀마저 뭐 그렇게 무거운지 들어올리고 내리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기다리다 날 샐 것 같았다.
누가 말을 했다. 비가 오려나봐요! 비가 오면 오는 거고 안 오면 안 오는 거지, 뭐 오려나봐요? 혹시 내숭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어떤가, 남의 일일 뿐인데. 아무튼 그녀들은 어쩌다 어른이 될 듯 말 듯 다시 될 뻔 하다가 그 문턱까지 다다른 것 같았다. 내가 꼭 그녀들 얘기를 엿들은 것 같다마는 나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심심하기도 하니 우연히 들린 몇마디를 옮겨보자면 이랬다.
나는 오늘부터 예뻐질꺼야. 마음 먹으면 난 이뻐질 수 있어. 가능해. 못할 거도 없지 뭐. 과자와 청량음료를 끊겠어. 너 오늘 살짝 고상해보이는데, 어쩜 옷도 근사해, 와 어디 그뿐이야 그 우아한 머리핀은 대체 어디서 구한거니, 너의 고고한 취향과 네 세련된 안목을 내게도 좀 전수해주지 않을래? 야, 어디 다시 가고 싶지 않니, 난 엉덩이가 막 근질근질해. 너 옛날에 카리스마 있는 남자 만나고 싶다고 했잖아, 만나보니 어때? (알면서 일부러?)
그러다 끝내 그녀들은 바깥으로 와르륵 몰려나갔다. 낮술을 마시러! 나는,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라는 말이 목젓까지 올라와서 탁 육성으로 나올 뻔한 사태를 무척 어렵게 진정시켰다. 잘 참았다. 엄한 말이 순간 튀어나올 뻔 했는데.
그리고 나는 눈길을 돌려 벽에 붙여진 어느 광고를 읽었다. 공책에 성의없이 만년필로 대충 끄적거린 다음 쫘악 찢어서 붙여놓은 듯 했다.
월 얼마. 모든 시설 완비. 집 주인 까탈스럽지 않음. 게다가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음. 심지어 자타공인. 더군다나 젊음. 믿어도 됨. 꽃무늬 원피스를 즐겨입음. 예술가 특히 작가나 학자나 언론인이 잠시 머무르다 갔으면 좋겠음. 잡아먹지 않겠음. 귀찮게 하지도 않음. 나 돈 많음. 냉장고에 술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음. 최고급품으로만. 잘 보이면 내 친구를 소개시켜줄 의향도 있음. 그러나 어디까지나 임대인과 임차인의 품위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함. 정들면 곤란함. 하얀 침대는 어제 들여놨음. 다른 의도는 없음. 인생에 변화가 필요한 사색가에게 최적의 공간이 될 것이라고 사료됨. 맹세도 가능함. 자부할 수 있음. 기타 등등.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이었다. 물론 몇몇 아주 약간은 내 희망사항 때문에 내가 헛것을 읽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나서 딱 하고, 골 세러모니를 선보였다. 뭔가 느낌이 왔다. 슬프지 않았다. 기다렸던 건수였다.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이색적인 만남이자 왠지 운명적인 추억은 물론 최적화된 숙명일 것으로 예상되며 덤으로 현생의 인간에게, 전생의 개에게, 내세의 누군가에게 금지됐을지도 모르는 그런 어떤 기발한 작품을 거기서 쓰게될지도 모른다는 엉거주춤,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기쁜 예감이 부풀어오르는 걸 차마 감출 수는 없었다. 사무실 주인은 약간 무성의하지만 부족하지 않게 사랑스러울 것으로 짐작되었다. 나는 처음에 고분고분하게 시작해서 속속들이 레이디의 속마음을 간파하고, 쉬지 않고 그녀를 극찬해서 임대인을 길들이다가, 적당히 친숙해진 다음 마음을 놓지 않고 고삐를 바짝 당겨서 더더욱 친밀해진 다음에, 완벽한 최면을 걸어서 손가락 딱만 하면 언제든지 내 말대로 따르는 그런 어떤 인생의 열렬한 친구랄까, 나는 건방진 남자를 알아보는 안목을 키워주는 형으로써의 내 역할을, 그녀는 내가 한 말이라면 뭐든지 정말 뭐든지 하늘이 노랗다고 하면 하늘은 노란 거고─책은 양식이고 신비는 일상이며 환상은 모두 친구라는 것으로도 모자라─아무 남자에게나 마음을 주지 마라 하면 정말 그렇게 눈길조차 주는데 인색한 아리따운 여인이 되며─빗물은 천사의 눈물이라고 하면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것이고 즉 내가 하는 말이면 그건 뭐든지 다 믿고 다 감명을 받고 다 따르고 다 좋아하며 애정을 품는 것으로도 모자라 적절히 자동 모드를 작동시킬 수도 있을 정도의 나만 아는 나만 바라보는 나만 좋아하는 나를 흠모하는 한 숙녀이자 한 고귀한 아가씨로써의 임무를 완수하게 만들 수 있을 듯한 그런 어느 뜻모를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 부쩍 솟구쳐오르는 걸 느꼈다.
3
이곳은 사무실이다. 임대료도 싸다. 완전 거저다. 새로운 영감이 막 새록새록 떠오르지는 않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금새 날 찾아올 것만 같다. 소파부터 흔들의자와 세세한 문고리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마당에는 강아지, 벽면 1에는 세계 문학 전집이, 벽면 2에는 출판사별 시집 세트가, 벽면 3에는 진품인 듯한 액자가, 전망도 좋고 동네 분위기까지 좋았다. 인테리어, 기가 막혔다. 감성은 자극되고, 추억은 회상되며, 조명도 끝내줬다. 건물은 2층이었다. 1층은 내가 쓰고 2층은 집주인이 그리고 옥상에는 천사가? 사무실 창가로 각종 새들이 알아서 찾아와 잠시 놀고 간다. 갈매기 조나단, 까마귀, 딱따구리, 파랑새와 백문조, 호금조, 카나리아, 골든체리앵무새, 잉꼬까지. 집에서 이곳으로 출근하면 기분 좋은 아침이고, 오후에 퇴근 시간은 자유다.
심심하면 길고양이가 놀아준다. 모든 일이 뜻대로 알아서 스스로 잘 돌아가는 것만 같다. 현실은 꿈이다. 햇살은 부드럽다. 남부러울 것 없는 일상이다. 불면증은 떠나갔고, 허언증은 치료됐다. 집 근처나 사무실 주위에 떠돌이 개가 가끔 돌아다니지만 오히려 반가울 뿐이다. 거짓말을 구사한지는 오래되었다. 뻥은 어떻게 퍼트리는지 잊어먹었다. 분별력이 생겼고, 변별력을 갖췄다. 다 출퇴근할 사무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남은 일은 내 작품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낭만적 사회고, 인간의 생활은 언제나 풍요롭고, 사는 건 다른 게 아니라 꿈이 정말 실현되고 간혹 구토도 하는 것이란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뭐, 하면 된다. 걱정할 거 없다. 사무실 문을 열어놨드니 구름이 들어왔다. 다음 손님은 별님이다. 조만간 곡을 하나 써서 유행가 순위 상위권에 올릴 수 있을 듯 하다. 음악, 별거 없다. 내 인생의 어두웠던 과거는 까마득하다. 내가 그래프의 어느 선상에 위치해 있는가 자꾸 헷갈리지만 방향은 알고 있다. 지난 일 때문이다. 그것은 배움이었다. 현재의 진보가 옛날에는 역적이었듯이. 노예제도, 사람 사는 곳에서는 거의 있었다. 그냥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비롯한 많은 어떤 일들이 거의 모두 정당하고, 옭고, 바르고, 당연한 미풍양속이며 질서였다. 그 옛날은 극소수 최상위층을 위한 세상이었으니까. 그러면 미래에는 지금의 보수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불미스러운 관점에서 봐야 한다. 수학적으로 그게 맞다. 논리적으로 그게 옳은 얘기다. 그러나 그래프의 기울기가 어떻고 우리가 어디쯤 위치하는가 그 기준과 변화와 얼마만큼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측정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해서 앞으로 어느 정도 나아질 것이다 라는 예상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확연하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미래는 낙관할 수 있고, 그러므로 노력해야 한다. 다만 개인의 인생처럼 인류의 연대기가 어느 쪽으로 선회할지 그건 미지수다. 그렇다고 뜬구름 잡는 예언으로 치우치지는 말고 어디까지나 학문과 정치와 예술과 문화와 어디 놀러가고 어쩌고 그와 같은 실정을 기반으로 교양미를 쌓는다면 꼭 글을 잘 쓰거나 말을 잘 하지 못해도, 그렇더라도 인생이 보이고 포지셔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라~ 어쭈! 어디서 또 아는 체하기는. 이 양반이 또 어디 한대 쥐어터지고 싶어서 근질근질하시나? 농담이고, 예민한 단어 또 등장하셨다. 상감마마 납시오! 그쪽에 대해서 워낙 말이 많고 항상 불협화음이 생기며 언제든 첨예한 대립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 있을 것이다.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내 귀를 코끼리 귀라고 상상해봅시다. 펄럭펄럭! 꺼이꺼이! 동물원에 가서 보면 모두 각자 따로 생활하지 않느냐? 곰이 사람 흉내를 내며 걷는 모습을 보면 왜 웃게 되는가? 실제 우습고 재밌지 않나! 닭을 위한 세상을 만들자고? 꼬끼요~꼬꼬댁? 날개 달리면 뭐 다 새일까? 난 묵비권을 행사하겠지만 대신에 펠리컨이나 신천옹이나 독수리에게 여쭤보시라. 닭을 과연 새로써 인정할 것인가, 그렇게 봐도 괜찮은가를. 참새가 사용하는 언어를 타조가 알아듣는가를. 거위가 쓰는 어휘를 표준어로 인정하고, 닭이 푸는 설을 방언으로 봐도 되는가를. 로미오와 줄리엣이 이종의 결합인가─행복의 정복인가─애정의 실패인가─사랑의 완성인가─미완의 과제인가를. 정말 소설은 농담이고 시는 거짓말인가를. 어르신이 과-점퍼를 입는 것이 이상한가, 초딩이 크레파스와 동요와 어린이 드라마와 어린이 신문을 시시하다며 다 유치원생들 소꿉놀이 장난 같다고 유치하다며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과연 어색한가를. 하지만 그 논리라면 닭이 오리를 낳거나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아마도 드물겠으나 어쩌면 빈번할지도. 늑대로 컸는데 커서 보니 여우요 B형으로 알고 살았는데 나중 세월이 흘러 어쩌다 혈액검사를 하게 됐어 그런데 결과는 어머나 글쎄 A형이래, 어쩜 이런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일이다. 출생의 비밀도, 천사의 승천도, 괴물의 현존도 모두 가능한 곳이 바로 이 세상이다. 매우 드물지만 기적이란 단어가 있으면 그것은 실재 존재한다. 바로 이승에서. 단어가 이미 있기 때문에 (희박한 확률로) 사실도 있다. 현상이 먼저고 단어는 나중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전설! 현세에 존재하는 일을, 허구에 등장하는 사건을 미래에는 그것을 전설로써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 저세상은 점쟁이에게. 그리스-로마 신화? 실화였다. 사실담. 아니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나는 태어나서 (약) 반 세기가 지난 이날 이때까지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믿으셔도 된다. 아! 까딱 잘못했으면 오직 진실만을 추구하며 살아왔던 거짓 없는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길 뻔한 적도 있긴 있었다. 하지만 용케 고비를 슬기롭게 넘겼다. 세속적 인간사에 관한 뻥이라는 단어의 존재조차 모른 채로 살아왔다. 사교는 순진했고, 친교는 순수했으며, 매사 순결만을 간직하고자 나름 애써왔다. 용썼다. 괜한 걸 지킬려고 발버둥쳤다. 지금 돌이켜보면 것 참 뭐랄까, 그래 맹추였다. 맹추! 멍청이! 얼간이! 적당히 거짓으로 행동하고 에둘러 말하고 뻥으로 남을 띄워주면서 살면 그만인데, 이 바보! 그러면 사랑은 외교적으로? 공식적인 연애는 못해봤다. 그것 역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못하니까 눈부신 찬미와 감미로운 아첨의 언사는 끼어들 틈이 없었고, 당연히 숙녀들은 싫어했다. 동화에 나오던가, 잠자코 가만 있는 호박마차는 끌어들이지 말자. 그 결과 나는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 사는 게 가능했다. 오로지 참말만을 고집해왔기에 그것의 무결함은 어긋나지 않았다. 무수한 유혹을 뿌리쳤다. 주색도 싫다 부귀영화도 싫다, 진의만을 좋아했다. 진실이 아니면 고개를 돌렸다. 흥! 그런 헛소리에 누가 넘어갈 줄 알아, 그러면서. 고생 좀 했고 우여곡절 많았다. 당연히 여자 보기를 돌맹이 보듯 했다. 물론 진심이다. 게다가 그것은 엄중히 현재진행형. 그 답보 상태는 언젠가 변할 테지만, 우선은. 사람들은 왜 서로를 속이고 어째서 속으며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지 그 의구심은 암만해도 잠재울 수 없었다. 대체 왜 사람들은 구라를 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뭐 재밌다고! 나는 위선이란 말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3일 밤을 샜다. 오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뜬눈으로 삼일을 꼬박 보냈다. 병원에도 갔다 왔다. 이런 부류는 대략 둘 중 하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안 했거나, 입만 열면 뻥이거나! 나는 전자다. 기필코! 맹세도 했고, 공인도 받았다. 현장검증, 마다할 이유 없다. 도둑이 제 발 저릴 일은 애초에 만들지도 않았다. 용기도 없고 담도 작아서 그런 일을 벌리지도 못함. 일명 새가슴.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거짓말을 아예 못해봤는데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그런데 어떻게? 그럼, 그렇지! 앞뒤가 맞는 말이다. 이제야 속시원히 모두 진짜고, 모두 참말이며, 모두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됐다. 와, 기쁘다. 노래를 부르고 싶어진다. 춤도 출까, 막춤? 확실한 게 좋다. 애매한 건 개운하지 않다. 때와 여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우선은 그렇다. 여하튼 믿음직스러운 정보통이기 때문에 앞서 꺼낸 비밀, 즉 어느 신화가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은 의심할 수도 그렇다고 그 명예가 실추될 수도 없는 실화임이 결단코 확실하다. 추호도 틀림이 없는 일이다. 걱정도 팔자다. 뭘 꾸미고 가공하고 만들고 속이고, 다 귀찮은 일이다. 두근두근 조마조마, 기질상 그런 일을 감당하기 꺼려하시는 분을 무대에 올려놓으면 다음은 예측하기 힘들게 된다. 지금 이 시점에 신망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 일단 믿자. 나도 남의 말 엄청 믿었다. 이상한 데 따라가기도 했고, 이용당한 기억 음 말 마시라. 숱하고 끝도 없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뒤늦게 허풍의 허자도 모르면서 어느 안전이라고 구라를? 당치 않다. 지나가던 개가 웃는다. 감히 대하드라마 어설프게 흉내낼려다 큰코다친다. 그 무엇은 실화였고, 그대의 신뢰는 든든하며, 융통성도 엄살도 과장마저 모르는 바보는 섣불리 어느 업계 무슨 판에 끼기조차 힘든 세상이다. 속임수, 안 통한다. 지금은 정면돌파다. 그대는 아는 게 많다. 모르시는 일이 없다. 만물박사다. 나도 슥 기어올라서 슬쩍 묻어갈려했는데, 솔직히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아이고, 형님! 나는 거기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은 맞다. 정녕 옳다. 어른 흉내낸다며 괜히 폼만 잡고 인문-교양서적은 다 뗀 것처럼 행세했는데, 나는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야 한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독학도 하다 말았다. 선수들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고수의 세계다. 어른들은 그래서 우유 대신에 술을 마시나 보다. 한 사람 건너서 천재다. 아찔한 지성과 교양학의 거성도 못 알아보고, 한두 명도 아니고... 이런 쯧쯧쯧! 그러하나, 그렇기는 하지만 지식의 양은 보잘 것 없지만 어떤 무엇에 대한 의향은 그대와 내가 비슷하다. 당신도 나랑 똑같다. 당신처럼 나도, 종교1의 1에 올인하기에는 난 너무 뭐랄까 위험 회피에 대해, 증권업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습득한 게 너무 많다. 그게 정말 아까울 뿐이다. 과거 한때 전설적인 도박 인생은 또 어떻고. 그래! 현재 나는 예스맨이고, 지금은 동물농장 관찰자다. 누가 뭐라 해도. 뭐 그건 그렇고 퍽 재수없는 나, 득세할려는 나, 거짓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나는 뒤로 빼고 하던 토의 계속하자. 정치, 수학적인 분야가 아니다. 물론 과학도 아니다. 문학과도 다르다. 그러나 비밀은 없다. 있다면 이거다. 정치관에 관한 바로 저와 같은 솔직한 의혹과 모순. 정말 왜 그런 것인가, 의아할 수 밖에 없는. 거기서 어휘를 몇몇 바꾸면 세계관이고 번지수만 교체하면 인생관이란 뻔한 말은 하지 말기로 합시다. 논점을 잃으면 안 되니까.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 닭을 과연 새로 인정할 것인가, 에 대하여 논하던 중 화제가 딴길로 샜다. 많이. 왜냐하면 흥분했기 때문이다. 흥분 안 하게 생겼나, 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닭은 새냐 아니냐? 딱 간결히 화합하고 화해시키기가 쉬운 문제는 결코 아니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나지만 그게 다가 아니란 말이다. 정치 뿐만이 아니라 세상사가 원래 그렇다. 마치 인생이 제멋데로인 것처럼. 심지어 독자는 두 마리 토끼를, 신비주의자는 이상향을, 자본주의는 만인의 행복과 만물의 번영을, 이기주의자는 양보를, 환상가는 오직 쾌락만을 그리고 정세는 바깥을 바라보기도 한다. 즉 얘기가 복잡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견은 조금씩 다르다. 곧, 한쪽에서는 이로써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기도 한다. 차라리 그렇게 간단했으면 좋겠다! 부익부 빈익빈? 불우한 이웃을 도웁시다 북극곰을 살립시다, 당연히 좋지 왜 나쁘겠나! 좀 더 극명한 사례인 거리의 거렁뱅이에게 그 불편한 풍경에 과연 잠깐의 마음을 신경을 푼돈을 적선할 것인가 말것인가! 적극적으로 나서느냐, 언짢으니까 거리를 두느냐! 모른 사람은 없다. 작은 성의라도 표하는 게 내 마음의 안정 때문인지 진정 그분 인생의 재기를 바래서인지. 유식과 무식의 차이는 없다. 전혀. 전자냐 후자냐, 가 아니라 거의 만장일치라는 것. '점진적으로 차근차근 개선해야 한다'를 옹호하며 합심해야 한다는 것을. 도구를 알면 곤란하고 문맹은 당연한 것이니 미천한 하층민이 문자를 깨우치면 곤란하다─말과 글이 만나서는 안 된다 그것이 교배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상위 평준화? 저런! 악의 무리는 척결해야만 한다─범필하기 짝이 없는 일이로다─예스런 시대에는 앞서 걷는 것이 피어에 대한 존경의 의미였으나 그것이 지금과 같은 난세에는 이렇게 바뀌었다, 자발없는 남자들이 혼자 제멋데로 앞장서며 너네들은 잔말 말고 뒤따라오기나 하라는 우스꽝스런 모습으로─그리핀 켄타우루스 피닉스 뭐 이런 거 골치아픈 일이다 라는 것은 TV 드라마에 나오는 구시대의 일이며, 현재의 표준과 질서는 (더 나은) 미래 시점의 기준으로 봤을 때 절대 완벽할 수 없다는 것, 어느 지역에서는 한때 중하류 30에 귀족이 자그만치 70퍼센트에 이르렀다는 것까지, 모르는 사람 그분은 대체 누구인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째깍째깍 시침을 되돌려서 교복 입던 시절을 떠올려보고 싶다. 나도 모르게 뜬금없이 그러기를 원한다. 누군가 버튼을 눌렀나 보다. 지금처럼 양말을 짝짝으로 신지 않던 그때는 뭔가 제도가 싫었다. 왜 이래야 하는가 대체 왜 이 모양인가, 라고. 그러나 교복을 벗고 나서, '교복을 벗고 처음으로 만났던 너...' 같은 달콤한 유행가를 듣고 나서부터는 그분들의 불만은 자연스럽게 경외시한 채 나는 행복의 파랑새만을 낭만의 모험만을 오직 인생의 영화와 환상의 신비만을 탐색하고 틈틈히 쾌락만을 탐닉하며 살게 되던란 말이다. 그게 뭐 잘못된 것이겠냐마는, 마치 내가 언제 교복을 입던 시절이 있긴 있었냐는 듯이. 이건 뭔가 아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생활은 변하지 않는다. 안 그런가? 실정이 그렇다. 세상도 그렇다. 뭐가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인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다. 교복을 벗는 시점부터 지금까지 내 삶을 돌아보자면 난 그 제도가 오히려 너무 자주 바뀌는 것을 보면서 살아왔다. 교육은 백년지계라며, 아이고 아이고! 꼭 초딩 생일이랑 비슷함, 귀엽고 착하고 예쁘고 잘해주고 싶어서 생일을 기념하고 싶은데 초딩은 아니라고 함, 왜 내 생일인데 날 가만놔두지 않느냐고 날 좀 내버려두라고. 바꾸고 또 바뀌고 계속 바뀌고. 어디 그 친구들만 뒷목잡겠나? 어? 그것도 개개인의 행복과 미래와 용돈과 식구 병원비와 데이트 비용과 생계가 걸린 엄정한 거대 산업인데! 뭐 그렇다. 나는 신발공장에서 일하며 기후를 연구하거나 식물학을 공부하고 더 나아가 예술을 하니까 이런 제재를 다루지 않아도 된다? 그대들도 똑같다. 백조 자격, 없다. 뭘로든 인정, 못한다. 목에 기부스하지 않아도 된다. 가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 극좌 신문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많이 아프다. 고지식하게 자기 잇속 챙기지도 않고 선행만 베풀며 자기는 그게 좋다는데 일은 그렇다 쳐도 노는 시간도 그것에 예속되는 것, 답답한 일이다. 왜 만물의 영장이 이룩한 환경이 그것을 포용하지 못하는지. 극우정당의 당비를 단골로 체납하거나 현시대의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든 그냥 그딴 소음 모르겠다며 산속에서 외딴 섬에서 산다고 하여 나쁜 사람이란 말이 아니다. 사람은 대개 비슷하다. 그걸로 보자면 당신도 유죄 나도 유죄다. 법복을 입든 교리를 따르든 꽃을 팔든 블로그를 쓰든 무능하건 무심하건 끔찍히 사랑을 실행하며 살건 어쩌든. 적당히 백조-하자, 라고 풍자하면 끝이 아니다. 모른다고 다가 아니다. 그렇다. 정말, 동물농장론으로써 딱 그것만으로써 진보와 보수가 1+1=2라는 산수처럼 깔끔하게 구분되었으면, 진짜 차라리 그렇게 간단했으면 좋겠다! ......(엄숙한 침묵)...... 그런데 잠깐. 이걸로만 본다면 난 약간 보수적이라는 말이잖아! 뭐시여? 뭐냐고! 뭐이? 그럼 내가 늙었다고? 이런, 젠~장! 내가 이제는 앞으로 오기로라도 늦잠을 자야겠다. 원래 그랬긴 하지만. 다시 돌아와서, 현시대에는 왕이 현존할 경우 입법부에 관여하지 않지 않소, 그런가 안 그런가? 선거권으로 평등을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 그 1표와 길바닥 노숙자의 1표와 정말 뭐가 다르더란 말이요? 안 그렇소? 다르긴 다르죠. (어느 쪽에 표를 많이는 안 주니까.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니까) 현대적 신분의 척도는 누가 뭐라 해도 돈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이요? 아요, 모르요? 나도 그걸 애타게 알소 싶소이다. 날아다니는 포유류인 박쥐나 누군가 그 배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바다에 사는 포유류인 고래는 어떤가 몰라도 인간이라는 자칭 고등동물이라는 포유류는 내가 가난함에 정박해 있든 운이 좋아 때돈을 벌든 어쩌든 어떻게든, 어떻게든 세금을 적게 내려 하고 내 행복을 극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나요? 그런데 기업은 뭔 죄인가? 왜 개인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알게 모르게 자잘할지언정 쉬쉬하는 일마저 마다하지 않으면서 심지어 때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막살기까지 하면서 왜 회사는─왜 국가는─왜 세계는─왜 내 사랑은─왜 내 인생은 알아서 자동적으로 사회복지 단체처럼 행동하고 그저 아름답기만을 바라는 것이요? 개별적으로 응원하는 정치가나 경제연구소장이 있을 것 아니오, 같은 값으로 묶어서 말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억울한,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조용히 사시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건 너무 자기중심적인 모순된 생각이 아니냔 말이오. 음, 그렇다! 설령 속고 속이고 초심은 잊혀지고 변화의 바람에 휘말려서만 살았던 내 인생이라 할지라도 현역은 만회할 기회란 게 있음. 사는 법은 어느 만큼 희끗희끗 살고 나서 깨닫기도 하지만. 참회. 기도. 뭐, 은퇴번복? 거기까지만. 뭐라 뭐라 말은 많고 의견은 다채로워 보이지만 결국 순서도는 대략 하나다. 대중이라는 다수를 설득하는 선전을 내세우고, 만인의 이익을 대변하여 예쁘게 포장하며, 나중에 이미 잡은 물고기에게는 밥을 주지 않는 것. 시간이 부족하다고, 선택은 불가피하다고, 이번에는 여기까지만이라고 그렇듯이. 그래도 대차대조표는 남는 것. 비록 삼류일지라도 예술가는 작품 번호가 남는다. 그런데 되려 그것이 더 가치있게 존중받아야 할 분야는 자칫 뭔가가 소홀할 수 있다는 것. 목표와 동기와 의욕과 다수의 기대는 상층에, 결과와 방법과 타협의 문제는 중간에, 그리고 간혹 커피포트라는 선례도 남기는 일. 후발주자는 예상도가 아닌 엄중한 실사례인 커피포트랄지 될 것처럼 보이지만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고 결론나서 포기하고 패기했던 (광대한) 타지의 과제를 참고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굳이 정면돌파하고자 하는, 똑같이 답습하게 되는 실행의 오류를 피하기 어려운 것... 음... 눈을 지긋이 감고 고개를 둔각으로... 왜 그럴까? 어째서, 대체 왜? 너무 많은 걸 바래서? 정치는 정치학이라는 학문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실정은 거기서 한발을 뺀 모습이고, 정치인은 싫든 좋든 작가나 학자보다 오락산업에 오히려 한층 더 가깝도록 그 성격이 규정된 시장, 오직 그것만이 대체로 그분들이 운신 가능한 폭이다. 혼자 올바르고, 혼자 똑똑하고, 혼자 부지런하며 성실하고, 혼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며 나의 말과 글과 행동이 뛰어나다면 그것은 예술에서는 성공한다. 예술에서는. (저속한...까지는 아니지만 흔한 말로 먹힌다고 하죠. 머머하면 예술에서는 먹힌다고. 운이라는 분은 잠시만 벤치로 내려보내자) 또 대성할 것이다. 기술자로서, 관료로서, 보험왕으로서. 곧 그 말은 어느 분야에서든 승승장구할 가망성이 크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아니다. 그 때문이다. 뭔가 더디게 나아가거나 어떤 불합리한 공회전이 일어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게 정치다.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혼자 해도 된다면 저명한 정치학과 교수님을 수장으로 모시면 그만이지 뭔 말이 더 필요하겠나. 그러나 정치란 어렵지만은 않다. 일단은 정치 앞에 다른 단어를 붙이면 된다. 떨지 말고 흥분하지도 말고, 무엇을 그것과 다정하게 짝지어줄까? 사내 - 정치? 오케스트라 단원 - 정치, 노동자 - 정치, 교육자 - 정치, 공무원 - 정치, 그렇게. 시작은 쉬웠는데, 그러나 슬슬 머리가 아파온다. 물고기가 먹이와 조우하기 위해 그 운명적인 만남을 위하여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이지 버뮤다를 향하여, 모비딕을 찾아서, 가난한 낚시꾼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가는 것이란 말이오? 아니요 아니요 아니란 말이오. 식물을 키우고 곤충을 연구해도 사랑도 하고 밥은 먹고 살아야 하는 법. 세력의 문제도 있는 것. 늦어도 둔중해도 일상생활에서도 정치는 항상 존재하는 것. 그게 바로 언제 어디서나 반복되고 인간과 함께 했던─하는─할 정치의 묘미다. 그렇다. 틀이 문제다. 체계를 보완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판도가 다듬어져야 개선되는 것이지 사람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한계가 있다. 괜히 뚜껑만 열릴 수도 있다. 길게 보기 힘들어진다. 즐기기 어려워진다. 그렇더라도 성이 어쩌고 기본권이 어떠하며, 단 몇마디로 시간을 과거로 그것도 많이 과거로 되돌리기는 어렵지 않다. 손쉬운 일이다. 의식의 발전은 더딘 반면에. 사람을 관찰하며 내 나름대로 평가하는 시선과 함께 저분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려고 하시는구나 그 속마음을 절묘히 간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체계라는 거시적인 관점의 값어치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사람 하나 잘나서 회사를 어렵게 일으켜세울 수도 있지만 일단 공룡은 체급이 있다. 그렇소이다.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다. 그게 정상적인 인간이다. 아니라면 비정상이다. 그건 돌아이다. 너 하나 나 하나, 나 이익 너 이익, 이번엔 너 다음엔 나, 그게 맞으니까 둘이 친구가 되어 우정인지 연적인지 모를 행복한 시절을 보내는 것이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한다. 그렇게 행동한다. 공감하는 능력이 있고, 이타적이기도 하지만, 그건 둘째다. 후천적으로 머리가 커져서 모든 일을 (내게 최적화되도록) 합리화한다. 그것의 기준은 뭐냐? 진짜 뭘까? 나다! 그건 나다. 내가 기준이다. 당신 인생의 기준은 당신이고, 책임도 그대 몫이다. 모든 절대 좌표 0은 나다. 바로 나! 내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내 아이에게 이익이 되냐 불이익이 되냐, 난 뭘 얻게 되는가, 내 시간은 침해받지 않을까 야근할까, 나아가 내 후세는 어떠할까 같은. 본성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가 최고야> 그것이다. 본능은 의지와 다를 수 있다. 유명인과 일반인이 쓴 자서전의 차이점은 명백히 존재한다. 뭔지는 몰라도 놀랍도록 공통적인 뭔가가 있긴 있다고 한다. 일반인의 자서전에 대해 부적정인 의미 전달이 된 듯 해서 썩 거북하지만 그건 아니고. 아무튼 그게 인간이다. 그게 바로 사람의 본모습이다. 그런데, 그런데 정치라는 개념을 믿음과 결부한다? 투명한 삶의 기록과 그 여정의 굴곡과 방향이 아닌 환한 선전과 반짝이는 단기간의 평판과 말에 기반한 의도로만 판단하고 맡긴다? 무엇을? 아이쿠, 저런! ......음...... 대충 마무리 짓자면 네? 그렇지! 그것이지요. 정말 뭔가 억울하다면 아침에 늦잠을 잡시다! 과-점퍼 입는 게 뭔 죄라도 된단 말이요? 언론사 정치부 기자는 뭐 골목길에 숨어서 술 한잔도 마시지 말란 말이냔 말이오? 그런 말이 아니지 않소! 아, 그만하자. 애썼다. 목마르다. 배도 고프다. 이게 다, 이게 다 출퇴근할 사무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얘기가 곁으로 샜지만 어쨌든 삶이 이렇듯 잘 풀리는 시기가 있었나 싶다. 때늦은 전성기를 맞은 듯 하다. 연락 없던 지인으로부터 안부의 궁금함이 아닌 혼처의 안내를 받은 것만 같다. 지금은 겨울날, 그러나 왠지 꼭 지금이 꽃 피는 봄날 같다. 다 출퇴근할 사무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1주일짜리 좌우명도 새로 만들었다. 그건 이랬다. 사람들에게 선물꾸러미를 안겨 주자! 별로 멋진 말이 아니라면 바꾸면 그만이다. 하루종일 먹고 놀고 자고, 만사태평이다. 천우신조로 막판이 되어 코너에 몰렸을 때 대작 하나 나올 것이다. 가난해도 괜찮다. 빈번하게 실패하면 뭐 어떤가. 서글프지 않다. 출판사에서 내 습작을 소설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사비로 그걸 장시라고 주장하여 살짝 바꿔서 어딘가에 출품하면 된다. 타인의 기준에 종속될 필요없다. 인생은 독창적이고 삶은 낙천적이다. 다 사무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살 찌고 싶으면 살이 찌고, 살 빼고 싶으면 살이 빠진다. 적당히 사는 게 재수없어졌다. 먹고 싶은 음식이 많다. 먹으면 된다. 하고 싶은 일도 많다. 하면 된다. 뭐가 문제란 말인가. 가보고 싶은 미지의 세계는 미래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시간은 간다. 나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방법은 있다. 인정하지 말 것! 비가 와도 좋고, 아무나 칭찬하고, 누구에게나 고마워하고 싶다. 다 출퇴근할 사무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하나 있는 단점은 백치미라지만 슬슬 생활의 목적이 변질되는 것만 같다.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정이 들어버렸으니까. 피상적이지만 나는 이미 누군가에게 형으로 불렸다. 썩 부적절하다고 트집 잡기도 애매하지만 그냥 무심코 진정할 일인가는 조금 의문이다. 왜냐하면 어지간한 스포츠 선수는 모두 나보다 어리기 때문이다. 뭐 나이 많은 게 자랑이다, 그런 말이 아니다. 옛날에는 그분들이 다 내 삼촌이요, 아저씨요, 어른으로 보였는데! 이제는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글프지도 않다. 완벽한 조건의 사무실 임대료는 거의 헐값이라서 투정은 곧 사치다. 변명은 곧바로 면목없는 참회로 돌아온다.
아! 문제란 뭐냐 하면 2층에 사는 집주인과 틈만 나면 놀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마법의 거울이고, 나는 탈진했다. 이것이 다 출퇴근할 사무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녀의 취미는 참 고상하다. 그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내 바지끄댕이 붙잡기였다. 뿌리칠 수 없는 치명적인 애교였다. 빠져나올 수 없는 앙탈이었다. 나는 어느새 그녀의 인기에 편승했다. 무임승차인가 까지는 생각하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곧 내 친구들이 되었다. 내가 꼭 그걸 원한 건 아니었으나 어쩌다가 그렇게 됐다. 나는 하루는 오빠, 저녁에는 실장님, 어떤 때는 아빠, 또 누구에게는 스승님이었다. 선배라는 애칭도 빠질 수 없었다. 녀석들과 단체로 와인잔을 들고 드라마도 봐야 한다. 소설 쓸 시간이 부족하다. 좋긴 좋은데 어쩐지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감정도 없지 않다. 어째 쫌 불안불안하다.
나는 어느새 그녀들에게 우리가 됐다. 우리는 항상 즐거웠고, 우리는 언제나 재밌었고, 우리는 어디서라도 노래 부르고, 춤추고, 시를 낭송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받아쓰기도 시킨다. 다음 주에는 모자를 자주 쓰는 속눈썹이 특히 이쁜 등번호 3번 그녀의 생일 잔치가 기다리고 있다. 큰일이다. 또한 나는 날은 점점 추워지는데 캠핑 장비를 하나씩 사모으고 있다. 큰일이다. 걱정이다. 그녀들이 모두 시집을 가야 급하게 결성된 우리 놀자족이 해체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이 끈끈한 우애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같이 함께 해서 즐거운데 더없이 행복한데 자꾸만 내 상상력이 바닥나는 것 같다. 안 그래도 창의력이 뒤쳐졌는데 눈꼽만큼 있던 것마저 고갈되었고, 끝내 노란 불이 들어왔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나는 만족스러워 하면 작품이 잘 안 써지는 부류인가? 모르겠다. 이게 다 그것 때문인가? 그분은 뭐 하시고? 나는 소설을 써야 하는데 왜 일기를 쓰고 있지? 아마도 그게 다 출퇴근할 사무실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4
그 친구들과 언젠가 헤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내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쩐지 나는 이 순간이 언제까지라도 쭉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이단아 같은 몽상을 하고 있었다. 이것 역시 출퇴근할 사무실이 생겼기 때문일까? 그것과 저것이 굳이 인과관계가 있다고 가정하면 아니라고 똑똑히 답할 수는 없겠지만 그 둘을 억지로 연결시킬 필요까지는 없을 듯 하다.
나는 어딘가 모르게 너무 급하게 새로운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만 같아서 일부러 하루를 건너 뛰고 출퇴근하거나 출근했다가 한두 시간 정도만 머무른 후 바로 퇴근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다 딱 3일간 사무실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집주인의 안부가 궁금하거나 새로운 사무실 생활이 그립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투를 듣지 못한다는 것에 가녀린 떨림이 동반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녀가 했던 말. 이를 테면 구태여, 다음에 문장이 끝나기 전에 이상한 화제로 돌린다거나, 부정사와 어울리는 부사를 잘못 배치하여 밝은 평서문에 쓰거나, 타인보다 유달리 부쩍 빈도가 높은 조사의 과감한 사용, '왜냐하면'으로 시작한 말이 '머머 때문이다'로 끝나지 않고 그 까닭과 관계 없는 의문문으로 종결짓는 화법. 그리고 '그런데'의 남발과 '그러니까'의 남용. 대화 도중 자꾸자꾸 주제를 변경하여 우리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일부러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교묘한 말하기의 주도권 쟁취하기. 미처 상대에게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자기는 최근에 무엇에 홀딱 빠져있으며, 어느 환상적인 경험을 했다는데 나중 듣고 나면 썩 새롭거나 놀랍고 신기한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거. 바로 그런 어투와 몸짓, 눈짓, 손짓과 음성들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내 마음이 어딘가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너무 익살맞고 싱거운 일시적인 증상인 듯 하여 나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면서 운전 중 라디오를 듣는데 신나는 음악이 나왔다. 룰루랄라 룰루랄라, 콧노래로 따라부르는데 차의 조수석 공중에 나뭇잎이 하나 떠있는 걸 보았다. 마침 신호대기중이었고 거리에는 인적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음악이 카세트테이프 늘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시간이 정지되는 중일까? 아니었다. 나뭇잎이 허공에 떠있다는 것은 차 안에 거미가 산다는 뜻이었다. 무단침입이다.
그런데 그날 나는 출근해서 사무실에 도착한 후 일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그 건물에 지하실이 있다는 것. 임대인은 왜 그걸 내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내가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마침 지하실로 내려갈 수 있는 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문을 열고 내려갔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또한 지하실도 잡다한 물건들이 있긴 했지만 별로 특별한 뭔가는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괜히 내려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실망하고 나서 나는 사무실에서 좀 멋진 글을 쓸려고 했는데 정작 절실히 하고 싶은 응어리라고나 할까, 꼭 해야 할 말, 애써 참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그런 중요한 내용은 없었기 때문에 글을 쓸려다 말았다. 그래서 나는 2층으로 올라가서 집주인이 잘 있나, 최근 만난지 오래됐으니 눈인사는 필요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노크를 했다. 반응은 없었다. 다시 문을 두드렸다. 역시 조용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문을 열어보았다. 그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들어가도 될까? 들어가지 말까? 혹시 인기척이 있나 잠시 기다릴까? 혹시 집주인이 나를 보고 싶어하다가 술병이 나서 쓰러져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는 걸 깨달았다.
여사장은 일전에 내게 말했다. 자기는 고독하다. 자기는 쓸쓸하다. 자기는 외롭다. 반면에 나는 그 양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항상 기쁘다. 나는 매사 즐겁고 모든 것에 흥미진진함을 느낀다. 거리에서 들꽃만 봐도 설렌다. 금토 드라마가 기대된다. 미소가 멈추지 않는다. 약속이 너무 많다. 다음 달에 요가원, 내년에는 수채화를 배우러 미술학원에 등록할 것이다. 나는 청소만 해도 잔잔한 보람을 얻는다. 나도 참 눈치 없었다. 완전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왕-재수였다. 한참 우매했었다. 그래서 우리의 심각한 감정적 불균형 때문에 뭔가 어색한 분위기로 인해 나는 그 부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사라지도록 만들고 싶었으며, 그러므로 나는 그녀에게 약속을 하나 하고 말았다. 내가 동생에게, 너에게, 집주인에게, 사장에게, 임대인에게 눈부신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주겠다고. 이 임차인이. 만약 내 친구나 지인들이 그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피치 못하게 만남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시내에 가서 괜찮은, 꽤 괜찮은 남자에게 그녀가 찍은 아무 남자에게나 말을 걸고 꼬셔서 둘의 만남을 주선시켜주겠다고 큰소리 뻥뻥치게 되었다. 너무 떵떵거려서 그 뒤로 난 잠시 그 일을 잊고 말았다. 까마득히.
그런데 그때 마침 집주인이 거짓말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그날은 뭐랄까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집주인은 간단한 인사도 생략한 채 어떤 발단이나 일말의 뜸들임도 없이 다짜고짜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주라고 내게 당당히 요구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그녀가 나를 들들 볶은 적도 없고, 단 한 번도 말하지 않다가 불시에 자신의 못마땅한 심정, 그 애처로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남자에 대한 미움과 못미더움과 서운함을 한꺼번에 즉각 몽땅 털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쩔쩔맸고, 그건 하등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는 도저히 그녀의 들뜨고 신경질적인 설렘의 상태이자 무척 불안정한 그녀의 심기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임차인, 너무 교만한 거 아니에요? 뭘 망설이세요? 남자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할 거 아녜요? 그렇게 머뭇거리지 말고, 그렇게 뒷머리만 긁적긁적 벅벅 긁지만 말고, 지금 당장 소개받읍시다. 쇠뿔도 단김에 빼래잖아요. 뭐 문제될 꺼 있나요? 세상이 아름답다면서요. 뭘 해도 재미있다고 분명 저에게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네? 아니면 실망의 언사를 미리 하나 깔고 갈까요? 극적인 전개, 뭐 그런 거 좋아해요? 얼레리꼴레리, 얼레리꼴레리! 자, 됐죠? 아, 재미있다 재미있어. 기분이 날아갈 듯 하네, 정말. 그렇게 낙오자를 자청하지 마시고 자, 우리 한번 제 미래의 남자친구를 하나하나 따박따박 검토해봅시다. 날씨도 좋은데 뭐가 걱정입니까? 즐거운 인생 신나는 청춘이잖아요? 저만 청춘인가, 뭐 아무튼! 그러게 평소에 잘 하셨어야죠, 그럼 돌아가는 거 봐서 형도 청춘에 살며시 끼워줄 테니 걱정하지 마시구요. 누가 뭐라 하겠어요, 네? 결론은 나왔으니 음, 불만없죠? 사무실 비용, 거의 공짜잖아요? 제가 아저씨한테 무슨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라구요. 처음부터 끝까지 오빠가 뻥뻥 큰소리친 거지. 그 말은 제 가슴에 빵빵 심금을 울렸다구요. 알아요? 네? 제가 어떤 남자 좋아하는지 아시죠? 뭐 드라마 같은 그런 만남을 기대하지는 않아요. 특별히 소원도 없어요. 꼭 저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컸으면, 그런 시시한 바램은 없다구요. 시시한? 나중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죠 뭐. 제가 너무 급하게 재촉하는 건 아니겠죠? 아저씨! 어머 호칭이 격하됐군요. 허나 슬퍼할 일은 아니에요. 올라갈 일만 남았으니까요. 아저씨, 절 희롱하시지는 않으실 꺼죠? 전 아저씨 믿어요! 그럼요. 이 천상의 약속이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나, 우리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는 맙시다. 우리네 인간 인생, 거 너무 찡그리고 살지 맙시다. 알겠소? 이건 인정에 호소하는 불법적인 요구도 아니고, 사랑법에 기반한 합법적인 신뢰라구요. 후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지금만 생각하기로 해요. 임차인, 어이 아저씨! 설마 반대하시는 거 아니죠? 아니라구요? 내 그럴 줄 알았어요!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좀 있어요. 처음부터 이 양반 괜찮겠다고 딱 찍었다니까요. 아주 제대로 찍었어. 어때요? 남자 대 여자로써 천하의 거짓말을 하는 수모를 허락하시지는 않겠죠? 왠지 애초에 느낌이 좋았어요. 헤헤헤. 그럼요. 어쩐지 눈물 콧물 쏙 빼놓는 사랑이 찾아올 것만 같은 예감, 느껴져요! 난 알 것 같아요. 그래요. 뭔가 느낌이 와요. 있잖아요? 아저씨 어머 실례. 오빠! 오빠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솔직한 마음이라구요.」
5
우리는 먼저 내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 집주인은 내 노트북을 켜게 하더니 나의 소셜 네트워크를 모두 확인했다. 동작 정확했고, 확인은 빨랐다. 모두 영양가 없다고 결론이 났다. 꼭 뭔가 나는 내가 인생을 정말 헛산 거 아닌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거리로 나가게 됐다. 보통은 말만 들어도 좋다, 고맙다, 빈말인 거 다 안다, 그냥 인사말 정도로 여긴다, 의례 그렇게 여기는 게 일반적인데 이 아가씨는 내가 했던 말을 다 그대로 믿었고, 정말 오늘이냐 내일이냐 하루하루 그날만을, 오직 그 결전의 날만을, 유일한 운명의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때문에 참다참다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떤 분야의 권위자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분야가 대체 뭔 분야인지 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말 어느 새로운 신성의 전문가 같았다. 그런데 도대체 뭐에 대한 전문가인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초보도 아마추어도 아니고 업종도 불분명하기만 했다. 어디서 굴러온 돌인지 도통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썩 밉지는 않았다. 한번 갈 때까지 가봐야 하는 것만 같다는 그런 의도를 나도 모르게 품게 만드는 신통한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사노라면 꼬이고 치이는 날도 있다지만 나는 살다 살다 그녀 같은 웬 희한한 말괄량이는 난생 처음이었고, 또 그녀도 어떻게 보면 그녀쪽에서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지는 미처 몰랐다거나, 혹시 모른다 이러다 정말 횡재할지도 모르고, 연애하고 사랑하고 약혼녀가 되어 날아갈 듯 하다가 정말 결혼하게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는 듯 표정이 싱글벙글, 덩실덩실 기분이 차원을 달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고수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속마음을 절대 비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도 하다 하다 이런 식의 뚱딴지 같은 부탁과 억지와 생떼는 처음 시도한다는 의미의 그것을.
그러다 사무실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녀는 한 남자를 찍었다. 나는 일단 웃었다. 드디여 올 것이 왔다.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멀뚱히 서있을 수도 없었다. 내 머리 속이 하얘지는 듯 했다. 지금 와서 못하겠다고 무를 수도 도망칠 수도 또 그렇다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안절부절 망설일 수도 없었다. 마침내 나는 어떤 유체이탈의 경지에 이르른 게 아니라 진짜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어 넋을 잃은 채 그 남자에게 다가갔고 말을 걸었다. 물론 난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하지만 내 몸은 조종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어떤 남자에게 다가갔다. 차마 낯뜨거운 용건을 꺼내느니 시간이나 물어볼려고 했다. 그러나 내 몸을 작동시키는 리모컨은 그녀가 쥐고 있었다.
「저기, 아저씨!」
「네? 저요?」
「네. 혹시 향수 좋아하시나요?」
「향수요? 무슨... 그건 왜 물으시죠?」
「아, 저기 보이는 저 아가씨가 전설적인 조향사였는데 너무 일에 몰두하다가 그만 정신이 어떻게 됐어요. 거 참 안 된 일이지요. 꽃다운 나이에 공주처럼 생겨가지고 뭐 하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면서 말이에요. 조금 상태가 안 좋아. 거 웨 있잖아요, 그런 좀 그런 사람들. 알잖아요? 네! 그래요. 딱하게 됐어요... 그녀가 아저씨에게서 천상의 향기가 난다나 뭐라나, 잠시 이렇게 붙잡고 있다가 놓아주라는데 음. 갑작스럽겠지만 거 이해하슈. 알고 보면 사정이 딱해. 한 일분만 있다가 나랑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척 하시다가 가시면 돼죠, 뭐! 착한 일 하신다 셈치고 이렇게 딱 1분만 아니 좀 더 써도 괜찮구요, 관상을 보아하니 어이쿠! 이 양반 인생이 참 훌륭으시네. 사람 참 괜찮아. 아주 훌륭해, 멋져. 앞으로도 뭔가가... 있어. 네 그럼요. 그렇게 하는 걸로 합시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껄껄껄껄껄.」
그분은 살짝 미소를 띄울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떠나갔고,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어떡하나? 집에 애기 보러 가야 한다는데. 그럼 진작 초반에 그렇게 말할 것이지. 처음에는 총각인 척 하드니만. 뭔 자세는 또 그렇게나 잡는지, 완전 허세 장난 아니더구만. 아가씨께서 남자를 섣불리 너무 급하게 찍은 감이 없잖아 있구만 그래. 아, 맞다. 영화 대사랑 외국어 좀 섞어서 말하면 누가 못 알아먹을까봐, 거 아무래도 몹시 객쩍은 젊은이임에 틀림없어. 요즘엔 개나 소나 다 자기가 연예인인 줄 알아. 자기에게는 너무 아닌 남자지. 딱 그 전형이야. 너무 벅찬 나쁜 남자라니까. 자기는 나쁜 남자랑 어린 남자를 막 좋아하는 그런 시기는 지났잖아? 누가 뭐라 해도 딱 그럴 것처럼 어려보이지만 말이야. 완전 상스러운 녀석이었어. 괜찮아. 처음에는 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살다가 거 뭐 새똥도 맞고 개똥도 한번 밟고 그러는 거지. 호사다마, 뭐 그런 말도 있잖아, 어?」
그녀는 나를 보는 고개의 각도를 살짝 틀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오빠, 브루스 가니에르 알아요?」
「어? 뭔 가니에르? 어디 가냐고? 내가 가긴 어디가?」
「아이참, 오빠! 사무실에 걸린 그림 있잖아요. 저 남자 딱 그 그림이 떠오르게 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아쉽다!」
「오늘은 이상하게 적포도주와 코코아가 섞인 음료를 마시고 싶은 날이군. 왠지 모르게 흡혈귀가 나타날 것만 같아. 바람의 방향이 바뀐 거 느껴져?」
난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으나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슥, 재빨리 던지는 걸 잊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다 알겠다는 것처럼. 그냥 쉽게 넌 젊어, 넌 귀여워, 넌 예뻐, 넌 눈부시게 아름답구나 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적어도 그녀는 실리콘 소재의 수술용 1회용 장갑을 낀 채 담배를 피는 여자는 아닌 듯 했다. 끽연, 기호일 뿐이지만 반찬통에 사과 조각과 함께 신경 써야 할 일이 음, 아아, 오오오! 그런 과정을 감내할 듯한 그녀는 아니었다. 최소한 오늘은 일찍 잠들기 싫어하시는 건 분명했다.
그녀는 그런다. 틈만 나면, 어쩌면 뭐라뭐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아마 나는 쑥덕쑥덕, 우린 아직 뭐한다 어쩐다, 착각했네 아 어떨까 같은 말과 생각과 간혹 글까지 그것 모두에 먼저 반발짝만, 딱 반발짝만 앞서 걷는다면, 오! 말이 필요 없겠으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피곤한 상황 난감한 처지. 아찔한 현기증. 괜히 어떤 멋진 남자에게 말을 거는 척 시비를 걸어볼까? 한물간 설정이다. 지금 무슨-주의가 분위기를 잠식했는지 어쩐지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다정하다. 나는 끄떡없다. 지금 이 순간, 즐겁다. 솔직히 말하자면 항상 바래왔던 그런 낭만적 풍경이었다. 꿈에서도 딱 애원해왔던 전망이었다. 그래. 어쩜 동경했을 것이다. 왜 아니란 말인가!
문득 나는 그녀가 쓴 글을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녀의 음성을 듣는 것과는 다른. 지극히 섬세하면서 동시에 극도로 압축하는 간결미가 엿보인다면! 쓸 만만 쓴다면!
그 후 몇 분에게 나는 더 실례를 범했다. 무례로 넘어가기 전에 어설픈 말걸기는 중단됐다. 패션쪽 일을 하시는 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대체로 동감하지만 내가 그녀의 전담 관리자였다면 그녀 마음에 쏙 드는 패션업계 종사자를 찾을 자신이 있었다. 당연히 그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할 것인가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쉽게 말해 그녀는 업계 상위 1퍼센트를 선호하는 듯 했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다가 어떤 한 남자를 아예 내가 그녀 앞으로 데려왔다. 삼자대면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러나 걔는 차라리 나랑 더 잘 맞을 것 같았다. 술 한 잔 걸치면 금새 빨가벗고 사우나에라도 같이 갈 자신이 있었다. 남자 대 남자로. 브로맨스로써.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그는 좀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유명 요리사, 까탈스럽다고 한다. 모델, 남자가 화장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단다. 그외 직종을 대면 싫어하는 척 하다가 슬슬 화를 내는 듯 했다.
「그런데 있잖아. 왜 갑자기 친구들은 오지 않는 거야? ...(침묵)... 왜지? 왜일까?」
「왜, 겠어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잠시 멈칫 하더니 뭔가 한마디를 더 했다 그녀는. 곧 나는 인간의 청각으로 들을 수 있는 주파수가 아닌 음성을 지금 이 순간 듣는 것만 같았다. 그 말은 이랬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어?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음. 그렇긴 한데... 뭐 다들 바쁘겠지... 바쁠 꺼야... 음, 그렇겠지. 연말이잖아?」
그날 우리는 어느 찻집에서 연거푸 커피를 세 잔씩 마셨다. 카페라떼, 에스프레소, 카푸치노 그렇게. 샷도 추가해서. 멋져보이는 일인가? 어쩜 그럴지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지 않았으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꼭 그렇지는 않다. 커피 마시면 화장실에 가고, 그러면 목 마르고, 또 커피 마시면 화장실 가고, 그러면 다시 목 마르고, 말하지 않고 창 밖만 바보처럼 실연당한 여인처럼 처연히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말을 해야지 말을. 그러면 그 말을 모두 내가 할까? 내가 뭐 유명 MC라도 되나? 아니면 연설자? 진행자? 아니지 아니야. 모두 아니라구. 난 꼼짝 말고 멈춰라 얼음땡이 됐다. 그렇다. 할 수 있는 것은 청자, 친절한 시청자이자 간절한 애청자 그 하나 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건 곤욕스러웠다. 그러나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그녀의 기분이 풀릴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고, 그래서 조금 안심이 됐다. 음 그렇지만 나는 다시 한번 이 말을 속으로 하고야 말았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속으로만.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아 나 이거 정말 것 참 아핫 진짜 어떻게 표현해서도 안 되고 내색할 수도 없고, 이거 정말 난감하네... 입을 딱 꼬맬 수도 없고 말야, 그런 생각이 손톱 만큼은 있었다. 그런 솔직한 심정이 없다면 그건 겉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다. 로보트다. 귀에 이어폰을 끼워도 딴청을 피워서도 안 되고. 예의에 어긋나게 시큰둥 듣는 척 마는 척, 주의깊게 듣는 둥 마는 둥, 그럴 수는 없으니 다크서클로 시작해서 안면 근육 경련에 이어 코피가 나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그녀는, 그녀는 말이 너무 많았다. 아, 뒷목! 그러나 나는 굳이 대사를 낭독하지는 않았다. 잘 참았다. <아, 말 참 많네!> 라는 말을! 그녀가 글을 쓴다면 혹시 누군가가 남자친구라면 장래 구박 받을 일은 없을지 몰라도 그녀는 못내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는 없을 테니까. 절대로. 최소한, 남편이 읽지 않는 활자의 세계에서는.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우리가 처한 현실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말 참 많네 아니면, 진짜 과묵하네로. 중립, 중도, 만족, 쾌적, 최적화, 이상은 물론 사랑이나 우정마저... 중간은 정말 힘들고, 어렵고, 귀하고, 드물고, 한눈 팔면 금새 사라져버리는 파란 나비가 날아다니고 투명인간도 있고 시간이 멈추기도 하는 그런 꿈 같은 환영이자 고귀하고, 소중하며, 어쩜 반항기의 숙녀가 꿈꾸는 연보라빛 소망이나 동심의 세계에서 안온히 변주되는 샤또 와인빛 희망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에게만 솔직해보자. 이성에 대한 이상형 뿐만 아니라 나에게 딱 맞는 친구조차 이 세상에 있긴 있나! 아니면 자주 바꿔? 오, 그건 좀...! 역할을 바꿔서, 나는 타인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는가? 최근 단짝에게? 한 친구에게 나는 그의 멘토라고 자부하는데 설마 그 녀석은 나를 투정만 부리는 뭐 전화번호에 기록된 이름이 귀찮음? 하찮음? 놀아줘야함? 가만 있자... 것 참 말 많네? 어째 내가 다 찔리는데......! 상대방 딱 한 명 또는 다수의 마음에 쏘옥 드는 과연 그런 나일까? 학교에서, 가정에서, 회사에서? 자신있다, 에서 시간에 비례하여 점차 그 확실성이 떨어졌으면 떨어졌지 아마 올라가기는 힘들지 않을런지. 여자분들은 잘 아시지 않는가, 내가 립스틱을 왜 바르는지 남자들은 흔히 착각한다는 것. 심지어 화장발이라는 무척 엄한 말까지 나돈다는 것.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살다보면 정말 많고도 많다는 것까지. 말이 너무 많든 말이 너무 없든, 매사 뭔가를 대충 받아들이든가 적은 발언권에 적당히 만족하며 밝고 건강한 자신감이나 영혼의 아름다움쪽으로 그 섬세한 감각미의 극치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일인 것 같다. 어쩌면!
그리고 그날 새벽이 되어 그녀는 2층으로 올라갔고, 나는 1층 사무실에서 혼자 TV를 보며 칵테일을 간단히 만들어서 마시다가 골아떨어졌다.
긴 하루였다.
6
우리 집주인. 그녀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나처럼 어중간한 남자에게는 차마 알려줄 수 없는 어떤 기막힌 비밀, 천년의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비련의 운명 뭐 그런 거라도 있나? 아니면 없나? 난 필경 그걸 알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걸 캐묻고 따지고 벗기고 나는 그 부류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일단은. 그러나 그녀 앞에서는 뭔가 궁금한 듯한 내면 연기를 언제라도 선보일 수는 있다.
내가 그녀를 모를까? 아니다. 나는 그녀를 안다. 그녀는 어느 정도 양면성을 지니지만 그녀는 좀 더 적극적으로 에필로그를 좋아한다. 그래 그거, 에필로그! 시시콜콜? 노노! 마침표 사이의 거리를 줄인다고 다 강건체가 아니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좀 극단적이다. 여자치고는 굉장히 남성적이다. 그런 측면으로 보자면 남자들은 기획자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는 게 합리적일 것 같지만 그건 일이고 사랑은 일 바깥의 영역에서 부딛혀야 하는 좀 더 열정적인 불가사의의 결정체다. 따라서 방금 전 신기한 발견 같은 예측은 어김없이 틀려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뭔가 통합적이다. 그녀는 상징적이고 압축적이며 시적이다. 그녀는 전에 페라리 FF를 탔었다. 그러다 어딜 가나 그 후광이 자기 이름 브랜드보다 더 압도적이고, 어디서나 주목받고, 언제라도 눈총과 부러움과 관심을 받았기 때문에 차고에 쳐박아뒀다고 했다. 끼리끼리 어울리면 그만이지만 그녀는 어째 좀 그런 굴레를 잘 참고 견디지 못하는 직성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녀는 내가 타는 적당한 볼보 웨건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그것도 많이. 그녀는 심성이 모나지 않고 인성도 꼴찌는 면한다. 많이. 오리와 닭이 과연 잘 어울리는 한쌍이냐, 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아는 그녀다. 그녀에게 차는 거의 양분된 세계였다. 나머지 어중간한 차는 다 기계였다. 진공청소기와 환상머쉰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는. 그녀는 일단 겉옷으로 치자면 깃이 있는 옷을 선호한다. 절대적으로. 무조건. 항상 접힌 옷깃을. 재질은 오직 모직. 합리적이고 편하기만한 점퍼라면 깔끔한 블루종이나 가죽 점퍼라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같이 걷게 되면 다른 사람이 일행처럼 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깃이, 고전적인 옷깃이 있어야 하는 그녀였다. 언제나. 청개구리로 변한 왕자를 알아 볼 수 있는가,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내 인생도 벅차다. 그녀 인생에 어떤 조그만 보탬이 되는 멘토의 모습을 잠시라도 선보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일단은 삶의 영역과 성장 환경과 어항 자체가 다른 세계였다. 그리고 그녀는 감식안이 뛰어나나 그걸 쉽게 겉으로 비치지 않는 남자를 남달리 살펴보고 마음에 둘 것이며, 분위기를 읽고 기분을 맞춰주는 방법을 외면하는 것에 대해 조금은 질색해한다. 물론 그녀는 목소리가 착 가라앉고 아늑하면 일단 속으로 휘청할 것이다. 이건 예상이다. 그러나 빗나가는 추측은 아닐 것이다. 절대로! 장담할 수 있다. 그러나 확인하지는 말자. 잡아떼는 모습이나 그녀와 뭔가 어울리지 않는 궁색한 모습, 보고 싶지 않다. 요컨대 그녀는 천생 여자였다. 절대 롱테일은 아니었다. 일정 수준의 낭만을 거쳤다면 그녀는 한 남자에게 종속되는 인생을 살 수 있는 여자였다. 그걸 바랬다. 그걸 원한다. 원래 여자는 그런다. 여자는 일단 착하다. 기본적으로 심성이 곱다. 보통은 그게 정답이다. 자기가 좋아하고, 절차를 거치고, 남자가 중간만 간다면 여자는 절대 바람을 피지 않는다. 그게 여자다.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공식은 그렇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중간에 큐빅으로 바뀌는 기적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것인가, 난 그런 거 모르겠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혼을 많이 하냐고? 묻지 마시라. 그걸 왜 내게 묻는가! 1번, 2번, 3번등 몇 가지 따질 수는 있지만 자기는 결혼 안 하겠다 결혼하기 싫다 남자는 뭐다 어쩐다에 대해서 자신있게 발언하실 수 있는 분들을 위하여 긴말 하지 말자. 그 외에 또 많지만 수다는 활자로 그만 옮기는 게 좋겠다.
아무튼 나는 다음 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당분간 사무실에 가면 그녀에게 시달릴 것 같지만 그렇다고 또 마냥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일광욕을 하자며 추운 날 해변으로 같이 가서 다짜고짜 등에, 곱디 고운 등판에 오일을 발라달라 그러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건 그때 가서 보는 거지. 이게 과연 호박인가 미끼인가, 판가름하는 것은 당사자의 몫이고. 본인이라면 음, 응답 거절. 하여간 내 심정은 뭐랄까, 내가 쓴 댓글은 답글이 달리지 않고 내가 가는 곳은 갑자기 인적이 뚝 끊기고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듯 뭔가 정상적인 창작 생활에서 크게 엇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되자 나는 출근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집주인은 사무실에 놀러왔다. 이 호사스런 사무실, 괜히 거의 공짜였을 리가 없다. 설마 오늘도 우리는 길거리 캐스팅을 하러 가야 할까? 계약서에 뭔 특별 조항이 있나 다시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나 미리 겁 먹을 건 없다. 가자고 하면 내가 못 갈 줄 알고? 한 번 떠보기는 할 꺼다. 무릎 꿇고 빌기에는 좀 각이 나오지 않고 너무 초라해지니까 그건 건너 뛰자. 차라리 남자 중의 남자나 아예 돈이 많든가, 완전 잘 놀든가, 완전 어쩐다든가, 그래서 그녀를 데리고 둘이 무지개 너머로 떠나든가, 잘 생기든 어쩌든 그녀가 뿅갈 남자가 나타나면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다 내가 홀딱 넘어가면 어쩌지? 아니다.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나는 환상가다. 여자는 사랑이고, 우정은 남자다. 후자에 전자도 넣을까? 너무 일찍 인생을 알아버리면 곤란하듯이 이 또한 쉽게 제한하지는 말기로 하자. 지금 했던 말을 미래에 지킬 자신이 있든 없든, 지켜지는 것은 다른 문제고 생각이 바뀌는 것은 무척 길더래도 시간 문제일 수 있으며, 사실 사랑도 어떻게 보면 오락가락하는 측면이 없지 않으니까 말이다. 불쑥 튀어나온 진의가 아니라 그게 원래 그렇다. 찾아보면 주위에 럭비공은 널렸다. 뭘 지지하든 개인의 자유겠으나 간편한 애정이 만연한 세상인 건 분명하다. 인간의 감정도 어느 정도 즉흥적이고 변하기 쉽다. 삶에도 요령은 필요하다. 그런 세상에서 당신의 무궁무진한 활약을 기원한다.
내가 사무실 임대인의 대변인은 아니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가 내게 이런 의견을 어딘가에 주술하라고 시킨 것만 같다. 이상한 여자.
어쨌든 사무실로 출근하는 기분이 천근만근이다. 이것도 모두 출퇴근할 사무실이 생겼기 때문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사무실에 도착하기 직전에 나는 마음을 모두 정리했다. 낯선 남자들에게 몇 번 치근덕거리기도 하고, 뭔가 중요한 얘기를 꺼낼 것처럼 하다가 그녀의 인상착의를 알려주며 그런 여자 어디서 보지 못했냐고 묻기도 하며, 나는 그동안 얼굴이 많이 두꺼워졌다. 비교적 예전보다는. 앞서 언급한 내용 외에도 몇몇 사건들이 있었다. 모두 밝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그냥 같이 범위를 넓혀서 이 근처에서만 이럴 게 아니라 아예 도시에 갔다 오자고 그녀를 설득할 것이다. 밀리면 안 된다. 먼저 뭐랄까, 어떤 생경한 단어, 선동? 너무 멀리갔고 아무튼 어느 정도 나도 성의를 보여야 할 것 같다. 거 왜 사무실 임대료를 몸으로 때우는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부터 그녀가 콕 찝는 남자에게 모두 말을 걸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차피 지금까지는 연습 게임이었다. 모두. 준비 운동에 불과했다. 피식! 몸풀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진짜 드라마를 찍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취미고, 낯선 생활이며, 신선한 경험에다 색다른 인생의 화사한 국면이다. 봉을 잡지 말란 법도 없다. A부터 Z까지 골고루 소개시켜 줘야겠다. 그녀에게. 내가. 앞으로 사랑의 '사'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도록 사랑의 전사로 만들어줄 테다. 그녀를 조련시키겠다.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줄 것이다. 그녀는 덤으로 이별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스승 잘 만난 것이다. 운 좋은 거지. 만약 결과가 좋다면, 성과가 일찍 발생한다면 다음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고, 예상되는 꿈의 그림을 채색해서 한 가지 놀이를 하자고 청할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그 어느 장난을 같이 하자고. 그건 뭔 게임이냐고? 알려줄까, 말까? 그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에잇, 까짓껏 말하자. 인심 쓰자. 것도 후하게. 그것은 집주인 보고 1층 사무실에서 일하라 하고, 나는 2층으로 올라가서 집을, 방을, 침실을 구경하기. 이참에 하트 뿅뿅에 대해서도 가르쳐줄까? 그런데 혹시 그녀가 나보다 더 고수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내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면 이렇게 한마디만 슥 흘리면 그만이지.
이런~ 젠장!
그래, 안 그래? 아, 혼잣말이다. 자기 최면. 신경 쇠약. 헛소리. 허언증-후유증.
아, 생각난다. 오오! 저번에 사무실에 놀러와서 그녀가 소파에 앉아 통화를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뭐 뭐라드라, 말라 비틀어진 피망 껍떼기 같은 녀석? 그게 나인가? 아니겠지만 아니기를 바라지만 꼭 그럴지도 모른다는 강한 의심이 든다. 믿기 싫지만 이상하게 믿는다는 동사가 퍼뜩 날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녀는, 그녀는 날 가지고 놀았나? 설마! 꼭 그렇게 곡해해서 까칠하게 논측할 필요가 있나. 하지만 뭔가 께름직한 뒷만이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허용하고 있지 않나? 낙관적인 누명이 저절로 벗겨져버린 이 마당에 말이다. 하긴 그녀, 집주인과 집주인의 친구들과 즐거운 시절을 보내긴 했다. 짧았지만. 그러나 그건 다 모래성 같고 들러리 같은 어떤 통렬한 뭔가 짭잘한 그런 개운하지 않은 뒷맛이 느껴지는 전-여자친구의 결혼식 같은 의미로 내게 새롭게 느껴졌다. 나만 혼자 좋다고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 같은 바보의 재롱이 이제야 느껴진다. 난 그때 한 마리 개였다. 멍멍, 멍멍멍. 아니면 고양이? 어쩜 그럴지도! 나는 사무실에 있는 스노우볼이나 소파 바닥과 책상 밑면등 뭔가 그녀가 내게 남긴 흔적, 심정이 담긴 편지가 어딘가에 남겨져 있지 않을까 하면서 사무실을 마구 뒤지며 난장판을 만들었다. 다 불필요한 짓이다. 그녀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다. 한 명도 아니었을 것이다. 남자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그녀였다. 한때 종횡무진 어떤 활약을 펼쳤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녀의 광대 목록에서 난 뛰어논 것이고,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쇼 한 것이며, 그녀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까부는 남자 명단에 그것도 최하단에 슬쩍 이름만 남겨논 것이 아닌가 그런 웬 측은한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도저히! 하긴 그녀가 그렇게 훌륭한 사무 시설을 무료에 가까운 금액에 빌려준 것도 그렇고 날 웃겨주고 내게 추억, 추억 같은 소리나 하고 있네, 내게 무언가 잊혀지지 않는 무대의 기억을 남겨준 것을 보니 뭔가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억지였다. 그건 연기였다. 그녀는 배우였고, 나는 관객이었다. 연기 수업을 위한. 바꼈나? 어렵다. 그런데 난 왜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이상하지 않은가? 왜 한번도 그런 의혹을 떠올리지 못했는가? 왜기는, 난 바보였지. 그거면 이유는 충분하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다 집어치워! 잠깐 즐거웠고 한때 재미있었으면 된 거다. 코끼리 뒷다리를 만지면서 어느 고대 신전의 기둥이라고 짐작하는 것처럼 인생을 얼마 만큼 알게 된 이 시점에 뭐 그런 실망도 절망도 체념도 아닌 투정에 가까운 방정에게 나는 제대로 한 대 얻어맞다니, 것 참 신기하고 허탈한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출퇴근할 사무실이 생겨서 얼마나 기뻐했는가, 그것만 봐도 썩 괜찮은 시기였다. 사람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때문에 나는 간접적으로 대충 그 까닭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뭔가 발설해서는 절대 안 되는 꿈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그러나 뭔가 개운하지가 않다. 그녀는, 그녀는 진짜 아니겠지만 혹시 푼수였나? 아니기를 바라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 푼수 아닌가? 어, 맞아. 그래. 없잖아 그런 것도 같다. 그러나 나는 한 처녀의 앞길을 막고 싶지는 않다. 나는 정숙한 어느 숙녀의 미래에 암담한 먹구름을 드리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음을 밝히는 바이다. 어디 그런 망측한 생각을, 떽! 그런데 뭐 어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든다. 푼수라고. 푼수니까 뭔 사무실, 것도 초호화 사무실을 거의 공짜로 빌려주고 또 거 뭐야? 뭔 남자를 꼬셔주라고? 뭔 그게 말이야 빵이야? 혹시 남자를 빵으로 보는 건가? 푼수 맞네 푼수 맞어! 푼수니까 그런 발상이 가능하지 푼수가 아니면 어디 그런 험악한 상상을 실행에 옮길 수 있어, 어? 푼수 가운데서도 지체 높은 위엄하신 푼수니까 다 그게 가능했던 게 아니냐고! 결론 났다. 그녀는 푼수라고. 그러나 나는 그녀가 푼수라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녀가 푼수라고 알려지면 그녀에게는 약간의 흠을 안겨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테니까. 그녀 입장에서야 썩 반가울 리도 없고, 또 푼수를 푼수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냐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내가 그녀에게 주홍글씨 그 길고도 무거운 짐을 안겨주고 꽤 심심한 낙인을 찍어주는 것 같아 나도 영 개운하지가 않다. 그녀는 푼수가 아니다. 마치 내가 가축장에서 돼지에게 A, B, C표를 찍어주는 관계자가 아니듯이. 또 그녀가 푼수면 뭐 어떤가? 푼수가 뭐 죄인인가? 푼수는 뭐 애교도 부리지 말고 화장도 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 원래 그렇게 타고 났는데 바꿀 수 없는데 뭐 어쩌란 말인가? 푼수가 오리신들이 사는 궁전에라도 들어가 살라는 법은 없다. 그 반대도 성립할 수 없다. 어차피 푼수니까 푼수짓을 하던 착한 일만 골라하던 그것은 푼수의 자유다. 그리고 그녀는 푼수가 아니다. 괜히 푼수 어쩌고 저쩌고 논쟁도 아닌 잡담을 늘리는 것은 그녀가 푼수일지도 모른다는 방자한 노이즈 마케팅일 뿐이다. 맞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호들갑스럽고 경망스러운 그냥 짐작하는 일. <아니면 말고>식 행동. 그녀는 푼수가 아니다. 그녀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괜히 다른 진짜 푼수가 뜨끔할 일이다. 만약 내가 푼수라고 가정하더래도 내 지위를 그녀에게 물려주는 것도 아니고 썩 반갑지 않은 논란의 여지가 다분한 소란임에 틀림없는 짓이다. 그녀가 푼수라는 아니, 그녀는 푼수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혹시 푼수가 아닐까 라는 추측은 말이다. 푼수? 살면서 별 이상한 일도 다 있다. 딱히 그런 어휘를 구사할 기회마저 거의 없어야 정상인데 이렇게 막 편히 말하고 쉽게 다뤘으며 조심스럽게 언급한 단어를 하고 또 하고, 쓰고 또 쓰고, 궁금해하고 또 의심하는 그런 행동을 하게 될 줄이야! 혹시 내가 푼수인가? 그래 그게 좋겠다. 그녀는 푼수가 아니고, 내가 푼수다. 그만 종결지어야 한다. 그녀가 푼수인가 아닌가, 에 대한 토론은. 이걸로 그녀가 푼수일까 아닐까에 대한 의혹은 더 이상 부풀려지면 안 된다. 딱 매듭짓고 그녀를 놓아주자. 그녀에게 자유를 선물하자. 그녀에게 진짜 푼수는 누구라고 귀뜸해주기라도 해야 한다. 여기서 그만 푼수 논쟁은 마치는 게 좋겠다. 당분간 푼수의 푼자만 들어도 놀라겠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것만 같다. 꿈에라도 나올까 두렵다. 푼수! 노래 가사에 유행처럼 앞으로 자꾸 등장할지도 모르겠으나 이제, 푼수 놀이는, 그만하자! 끝!
푼수? 푼수!
꼭 완전한 말인 것 같다. 완전함은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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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 오빠! (손가락 딱─하이파이브 딱) 오오 동화까지.
또 뭐가 있지? 빠트린 뭔가도 있을 것이다. 많을 것이다. 조사하기도 귀찮다.
뭐 척키? 허걱, 으흐흑!
어쨌든 다 같은 말이다. 다 한 통속이란 말이다. 다 필요없다.
잡아떼는 게 아니다. 절규다. 한 편의 시다. 뭔 말인지는 말하는 당사자도 잘 모르겠지만.
7
나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에서 대충 일과를 시작했고, 두 번째 커피를 타서 나는 2층에 올라갔다. 그런데 2층 문고리 옆에는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었다. 거기 이렇게 씌여 있었다.
「남자친구 생겨서 놀러감. 당분간 날 찾지 말기 바람. 멀리 떠남. 어쩌면 신혼여행이 될 수도 있음.」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결국 이거였어? 각오를 새롭게 다졌는데 와, 힘빠진다. 어이가 없다. 소름이 돋는다. 인생이란 마치 이런 것이군. 예상 전혀 못하고 있을 때 뒤통수 완전 정확히 맞기. 빡! 나는 사무실로 돌아가서 냉장고를 열고 캔맥주를 꺼내 뚜껑을 땄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머리의 뚜껑도 같이 열린 듯 했으며, 캔맥주가 개봉될 당시 웬 뜬금없는 퐁~ 소리를 들었던 것만 같다. 깡통을 따면 발생하는 정상적인 소리 대신에.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그건 진짜 같았다.
오, 이럴 수가!
집주인은 내게 마법을 걸고 떠난 거구나!
나는 마법에 걸린 것이로구나!
그녀는 요정이구나!
이건, 진짜구나!
아아, 에고머니나!
나는 어쩌면 좋은가. 다시 못들을 줄로만 알았던 퐁~ 소리를 다시 듣다니!
아마도 이것 역시 출퇴근할 사무실이 생겼기 때문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당분간 좀 놀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첫눈이 내렸다. 창밖을 바라보니 사람보다 강아지가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낭만 고양이도 함께.
나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뭐 언제는 이상하지 않은 적이 있었겠냐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