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 89

from 소설 2017. 1. 3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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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번뜩이는 대사,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줄거리, 빼어난 미모의 여주인공, 엉뚱한 웃음, 기발한 반전, 신기한 새로움 등등. 그런 시나리오를 쓰고 있니?」
   「K. 여자는 말이야, 두 가지로 나뉘지. 돈 많은 남자에게 넘어가는 부류와 잘생긴 남자에게 빠지는 쪽으로. 방금 네가 말한 각본은 그 둘을 모두 섭렵해야 가능한 일인가 봐. 그리고 아마 나는 그 두 가지에서 어느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시나리오가 잘 안 써지나 봐.」
   「예술을 사랑에 빗대어 설명하는 거니? 돈 많은 남자는 예쁜 여자와 비슷하다, 뭐 이런 거야? 그래도 비범한 게 더 멋지지 않니? 평범한 것도 좋지만 꺾이고 변화하며 굴곡이 있는 거 말이야. 개구리로 변신한 왕자가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혹시 그게 너는 아닐까?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잖니.」
   「난 원래 두꺼비인가 봐. 만인에게 사랑 받을 작품을 쓸려고 하는데, 그걸 원한다는 것은 문제될 게 없는데 특급 성공이 실현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가 봐. 그동안 연기했던 그 수많은 배역에 대한 몰입과 경험이 그 역할을 창조해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인 것 같아.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일단 촌극이라도 써서 그걸 걸작으로 변모시키는 방법도 안 통하니? 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놀라운 착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꼭 영감론 그런 걸 따르겠다, 뭐 그런 말은 아니지만 그 왜 있잖아, 첫눈에 반한다는 말. 보고 듣는 드라마에 나오거나 보며 읽는 소설에 나오거나. 그 화자가 아니라 그 말을 실제 듣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남자들은 그 기분을 짐작이나 할까? 여자가 남자에게 첫눈에 반했다고는 잘 하지 않잖아! 여자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남자가 있는 자리에서는 아니고 여자만 있는 사석에서는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아, 첫눈에 반했다는 둥 그대를 처음 본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는 둥 그런 말은 다 시인과 바람둥이가 무책임하게 발설한 거짓말이라고 봐. 모두 드라마에 나오는 뻥이고, 로맨티스트가 특별한 경우에 써먹는 은근한 기술 같은 건 아니란 말이지. 왜냐하면 순진한 시골 청년을 또는 순박한 아낙네를 어느 화려한 사교계나 신나는 파티가 한창인 호화 펜트하우스에 데려다 놓는다면 첫눈에 반할 상대는 하루에 12번도 더 등장할 테니까. 어디 12번이 문제겠어? 안 그래? 그렇지. 그냥 눈 돌아가는 거지, 속으로 환희의 낙원이라고 느낄 꺼야. 곧 그 말은,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그 뒤에 생략된 상업적 진실과 냉엄한 예상 결과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야. 그건 무엇이냐,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듣게 될 고귀한 여인이, 첫눈에 빠져버렸다는 고백과 찬사를 선사받게 될 아리따운 숙녀가 말이야, 첫눈에 반한 행위의 당사자와 맺어질 가능성이 있냐, 없냐, 농후하냐, 바로 그 차이지. 
   어여쁜 숙녀가 있어, 홀딱 반했네 그래서 나랑 어떻게, 어떻게 미녀와 야수가 맺어지는 것처럼 내게도 기적이? 
   지식의 왕국과 지성의 전당을 통채로 섭렵하다가 누구는 우상, 무엇은 신념, 농담이라면 단연 누구에 예술적 허풍의 지존은 그분이며 모범은 페스트라네 나도 다 알아 다 안다구, 그러나 나는 그냥 수다쟁이요 그런데 나는 만년 삼류 인생, 비약하면 너는 최고가 아니거나 내가 최고인데 여태 난 아직도 이 모양 이 꼴? 
   멋진 자동차를 꿈꿔, 어쩜 고급스러워 나랑 딱 어울려 하지만 막 옆에서 이래, 그게 늬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영화에서처럼 해 볼까, TV를 보다가 오오 괜찮네 쟤 라며 찍어, 그러나 그 다음은 없어, 날이면 날마다 첫눈에 반하는 거지. 
   바로 그거라고! 이거야, 이거! 
   시간 대비 내용이라는 인간의 생애에서 무엇을 파악하고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최소한의 경험이 연륜으로 변하는 동안 재능에 대해서 사는 동안 새삼 깨닫게 돼. 노력으로 감당되는가, 에 대하여 명백히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 가령 사람을 무수히 만나보니 누군가를 척 보면 안다 파악한다 느낌 온다, 글을 읽어도 말을 들어도 음악을 들어도 그림을 봐도 아하~ 그렇구나 의견은 분분하지만 간단히 나뉠 꺼야. 알겠다 모르겠다, 호기심이 생긴다 무관심이다, 감흥이 생긴다 안 생긴다,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 별로 시큰둥하다고. 그렇지만 꼭 회의주의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는 알 수 있어야 해. 그것은 무엇일까? 음 알겠다 모르겠다, 아 느낌 온다 안 온다, 오 살아온 인생이 보인다 안 보인다, 무엇을 표상하는지 알겠다 어쩐다... 그건 모두 피상적인 짐작 같은 것이라는 것을. 더 나아가 그 다음은 무엇일까? 척 보면 안다 모른다, 를 넘어서는 딱 하나의 본질. 그것은 감당이 된다 안 된다야. 마치 사랑에 대해서 첫눈에 반했다 어쨌다 그런 시상에 젖고 노래를 부르고 싶고 들뜨며 설레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한다는 것은 나와의 가능성이 짙냐 아니냐 그것에 달려있다는 냉정한 사실과 냉혹한 계산이 선행된 다음에 겉으로 어쩜 포장되는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퉁명스런 민낯. 나는 어떤 책을 읽는 순간 깜작 놀랐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까무러칠만큼 충격을 받은 무엇은 단 3가지다 어떻다, 모두 '감당이 된다면' 이라는 조건에 정확히 부합하는 거야. 그게 아니면 등식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내가 저 여자를 갖지 못했을지라도 그때는 가까스로 비록 혼자서는 사랑을 했다, 까지는 제한선에 턱걸이한 걸로 봐도 돼. 자신의 일부나 전부를, 한 시기를 걸었을 테니까.
   그런데 이 말이 왜 나왔지? 아, 시나리오. 일단 기다려 봐. 영 맹탕이 아니면 어떤 방대한 자료가 쌓였다면 그분을 기다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음,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해피엔딩이냐 열린 결말이냐 그 두 가지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그거 하나 결정하는데도 1~2주가 걸렸잖니. 그런데 막상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을 하고 있기는 한데, 그런데 당장 그 일이 현실이 되니까 뭔가 좀 엉성한 듯 해. 어떻게 보면 꿈이었을 때가 더 나은 점도 있어. 염원하던 시절이 더 간절하고, 때문에 그 당시에 주업과 별개로 시간을 쪼개서 기쁨의 찬가를 쓰는 것이 더 멋져 보이는 구석이 있고, 그래서 음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니. 가루약이든 알약이든, 휴일이든 평일이든 날마다 방학이고 날마다 청춘인 것 같아서 은밀한 행복이 따로 없어. 아무래도 늬 말마따나 일단 그분을 기다리는 게 좋겠다.」
   「그거 말고 뭐 재미난 일은 없니? 나머지 무료한 시간은 어떻게 보내? 혼자서 사건의 진상을 추리할 일은 없을 테고. 위험천만한 모험을 찾아서 떠날 수도 없고. 짝사랑에 상심할 나이는 이미 지났고. 황당무계한 망상, 벌써 뗐어. 절망과 비관과 염세와 낙담, 그런 한담을 나누는 거도 우리가 할일은 아니야. 사랑을 믿냐 안 믿냐, 청춘은 외롭고 부질없는 짓일까 아닐까, 그런 일로 고민하는 나날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 그렇다고 우리가 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엑스트라도 아니잖아. 어때? 새로운 일 한번 해볼까? 생각...있니?」
   「새로운 일? 그게 뭔데?」


   2

   테니스 코트는 3가지로 나뉜다. 특별한 코트를 더 추가할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세 가지다. 클레이, 하드, 잔디 이렇게. 그러면 그랜드 슬럼은 무엇이냐? 혹시 모르시는 분을 위한 추가 설명은 피하자. 왜냐하면 그게 나오면 당장 나인 브릿지가 무엇인지 아느냐, 융프라우의 뜻이 뭔 줄 아냐로 살며시─슬쩍─현란하게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듣고 보면 별거 없지만 알기 전에는 전무한 신비고 완벽한 무식이며 기대하게 되고 궁금해진다. 그러나 알고 난 후에는 거의 실망한다. 그래서 큰 낙담은 피하기 위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절대 생각이 안 나서 그러는 게 아니다.
   실내 테니스 코트에서 J와 K는 테니스를 즐기고 있다. 땀이 난다. 칠 만큼 쳤다. 쉬어야 한다. 음료수를 마실 시간이다.
   「조니, 늬가 말한 새로운 일이란 게 결국 테니스였니? 뭐 꼭 새로운 일과 재밌는 일이 일치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간신히 작은 흥미를 선물해서 상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실소를 금할 수 없잖니? 그러면 약이 오를 테고, 약이 오르면 이렇게 테니스를 가볍게 하더라도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내기를 하겠지. 그러다 져, 진다고. 수증기 부글부글, 어? 그럼 찝찝해 기분이. 그래서 생각을 하게 될 꺼야. 설마 이건 교묘한 속임수일까? 쟤 말에 속아넘어가서 불행을 자초한 건가?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해야 하는데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할 때 자꾸 감정적으로 흥분하게 될 테지. 잘 하면 뚜껑이 열려. 버럭 대신에 지니가 출연하시면 좋겠으나 일단 그래.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판돈을 올려야지. 만회하고는 싶은데 모래시계는 쉬지 않아. 본 게임을 시작하고 판을 키워야 해. 그러나 결말은 애초에 정해져 있고, 한 번 걸려들었으면 빠져나올 수는 없어. 하지만!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그것은 바로 긴 명대사는 만들기 어려우니까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것이지. 음...... 그런데 J, 우리가 테니스를 왜 하게 됐지? 뭔가 색다른 일을 기대하게 만들더니만 꺼낸 카드는 그냥 운동이야? 땀 흘리고 음료수 마시고? 아, 김빠져!」
   「K. 왜 그래? 이제 시작이라니까. 탐스런 과실이 열리는 환상 나무가 자라는 꿈의 궁전 그 근처에도 못 갔어. 벌써부터 힘 빼면 막판에 졸리는 수가 있다구. 그림을 그리다 잠이 들게 돼. 서커스를 보러 갔는데 내내 잠만 자다 나올지도 모른다고. 중요한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런 말을 듣는 사람도 있을 꺼야. 지금 장난해, 라고! 원래 첫날밤이란 그런 법이지. 아니기도 하고.
   약간 비유가 좀 따사롭지 않지만 그래도 기왕 생각난 거 풀어나 보자구. 사기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 첫째, 아는 인맥으로부터 수혈받는 분과. 둘째, 체계적으로 피라미드를 만드는 마술사 일명 전문가 약칭 업자. 첫째도 둘째도 원리는 간단해. 요술 보자기가 있으니 만인의 호기심과 자금을 모두 그 요술 보자기 안에 빠트리게 만드는 거지. 풍덩! 어떻게? 이렇게! 자, A가 있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해. 금광을 손에 쥐는 것은 확실해. 그러나 딱 휘황찬란한 보물섬에 도착하고 보니 마녀와 요부를 양쪽에 동시에 끼고 보니 좋긴 좋은데 이미 청춘은 떠나갔고, 이혼도 했고, 자녀도 바쁘고, 인기도 물 건너갔어. 장기 투자, 바로 그게 A야. B는 그게 아니야. 고위험 고수익이지. 모 아니면 도라고. 모든 걸 잃느냐 모든 걸 얻느냐. 그러나 우리네 인생이 도박꾼의 한판은 아니잖아? 비이성적으로 공든 탑을 무너트려서야 되겠나, 그 희박한 확률에 전재산을 걸 수는 없잖아, 그냥 복권이나 사는 거지. 잘하면 얻어걸리는 거고, 못되도 꽝이지만 웃고 마는 거지.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라고. 그러면 재미없지~! 인생에도 패자부활전처럼 묘미란 게 있다구. A와 B만 있냐, 아니야. 딱 그 둘 뿐이냐? 아니야! C도 있다구 C도. 바로 이거야. 이 얘기는 그만 해야겠군. 어째 내가 꼭 사기꾼이 된 거 같지? 아무튼,
   음... 실은 테니스는 그저 몸풀기였어. 그냥 구실이 필요해서 시간을 벌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사실 새로운 일이라고 덥썩 제안하긴 했는데 나도 딱히 떠오르는 기발한 놀이나 신나는 줄거리 같은 건 없었거든. 의붓어미 눈치보듯 이제 뭐가 나올려나 잔뜩 호기심 가득한 너의 눈망울을 보고만 있으려니 왠지 미안한 느낌이 드는군. 솔직할 땐 솔직해야지. 그럼. 아무 때나 그러면 자주 당하는 거고. 음. 내가 생각한 계획은 이래. 별거 없어. 어른들이 즐기는 평범한 여흥 말고, 돈이 많이 필요한 환락도 아니고, 특별한 소수에게만 허락된 유흥도 아니야. 게다가 몰래 숨어서 만끽해야 하는 그런 불건전한 취미도 아니야. 그건 그냥 이런 거야. 끝말잇기 같은 거. 가위바위보 같은 거. 노래 부르고 듣기, 소풍 갔다 오기, 다정한 연인끼리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애들같이 애들처럼 A네 집에 놀러가자는 거였어. ...(쉿)... 진짜 별거 아니지? 네가 들으면 실망할까 봐, 나도 말하기 힘들었다구. 사랑 고백도 아닌데 막 수줍고 챙피하고 살짝 긴장되며 두근거리기까지 했다니까. 그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때? 너도 둘은 조금 단조롭고 셋이 낫겠다는 생각, 하지 않았니? 응? 솔직히 말해 봐. 막무가내로 다그치니 막 거짓말로 둘러대라는 말이 아니라 진짜 속마음이 어땠냐고. 음... 얼굴에 씌여 있네. 재미없다고. 그게 뭐냐고. 대실망이라고. 때리고 싶다고. 그렇지만, 하지만, 한번 생각을 해 봐. 요즘 애들이야 그런 거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핸드폰이 없었잖아? 동네 꼬마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하는 게 뭐겠어? 오늘 하루는 뭘 하며 즐겁게 놀까, 겠지. 그거 말고 없어. 노는 게 일이니까. 우리는 돈 버는 게 일이지만, 그분들은 그렇지 않잖아. 음 그렇지. 그러면, 놀면 혼자만 노나? 혼자 놀아도 재밌기는 한데, 그러다 지친다구. 친구집에 놀러가게 돼 있어. 둘이 놀기 위해서. 그때 친구네 집 앞에서 친구를 불러, 누구야 놀자 라고. 핸드폰이 없으니까 찾아가는 거라고. 그 친구 집은 빨간색 대문일까 파란색 대문일까? 아니면 연분홍색 대문? 알게 뭐야. 어쨌거나 저쨌거나 어른들의 놀이터와 평범한 향락은 이제 질렸어. 좋긴 하지만 당분간 사양하겠다고. 생각을 해보렴. 자, 한번 상상해 봐. 그렇게 찾아가고 만나고 모이고, 찾아가고 만나서 모이고, 5명이 되면 뭘 할까 농구를 할까? 6명이 되면 배구를 할 수도 있어. 그럼 9명이 되면? 오, 아하 경마장에 가도 돼. 놀이공원 단체 할인이 몇 명 이상이지? 점점 뭔가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치 못했던 그런 거. 막 흥분되고 재미있을 꺼 같지 않냐? 어? 얼마나 재미있을까? 어? 어떻게 생각해?」
   「하나도 재미없을 꺼 같은데!」


   3

   처음에는 J와 K 그 둘이서만 놀았다. 그러다 그들은 A를 찾아갔다. 만났다. 그리고 A의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 다음날이 되어 이제 그만 돌아가기를 바라는 A를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었다. A는 두 친구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A의 자유를 유예시키고 싶어했다. 솔직히 이러이러한 계획을 실행할 테니 동참하라고 애원할 수는 없었다. 부질없는 순례일 뿐이라면서 젊은이의 푸른 기상이자 의기투합한 우정의 순애보 그 오렌지색 춘몽을 냉정하게 깔아뭉갤 테니까. 그러면 어떡해야 하나?
   어떡하긴 뭘 어떡해! 방법은 하나였다. 역시나 그것 밖에 없었다. J가 A에게 마성의 입김을 불어넣는 것. 번지르르한 요설을 잘 포장해서 마치 미지의 신세계를 찾아떠나가는 듯한 외경심과 파랑새를 만나러 가야만 하는 정신의 이상을 깨어나게 만드는 말솜씨를 발휘할 차례였다.
   A는 귀가 실룩실룩거리더니 금새 스타 탄생을 예고하는 듯한 동경심이 부풀어올라 코끼리 날개를 펼치면서 순순히 넘어왔다. 그래서 세 친구는 내친김에 M을 만나러 가는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4

   M은 집에서 책에 밑줄 그은 구절을 포트스잇에 옮겨 적어서 모니터 옆에 붙이고 있었다. 그가 읽었던 밑줄은 이랬다. "그렇소, 진보의 난폭함을 혁명이라 부르오. 혁명이 끝나면 사람들은 인정하오. 인류는 곤욕을 치렀으나 진보했음을. ... 호화로운 신부란 자가당착이다.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 옆에 있어야 한다.. 화롯가에 있으면서도 따습지 않다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가? 줄곧 용광로에서 일하는 노동자인데, 머리털도 타지 않고, 손톱도 더럽지 않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얼굴에 재 한 점 묻지 않은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가? 신부에게, 특히 주교에게 자비의 첫째 증거는 청빈이다. ─ 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M은 포스트잇으로 명언 적기 취미에 흠뻑 빠져 있었던 것이다. 또 무엇을 적어서 어디에 붙여놓을까 고심하던 바로 그때 친구들이 찾아왔다.
   세 친구는 결국 M을 만났다. 그 만남이 성사되기 전에 달리 특별한 일은 없었다. 가령 M의 집에 갔더니 M의 집 안에 M은 없고 웬 당나귀만 한 마리 덩그러니 있었다거나, M의 집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거기는 알고 보니 어느 신비주의자와 어떤 은둔자가 동거하는 집이였드라, 또는 친구 집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눌러도 응답이 없어서 문을 스윽 밀어보니 열렀어 오 열렸어 잠깐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드니 무슨 한 벽면에 포스트잇이 수백장 붙여져 있고 누구를 추적하고 사건을 분석하는 그런 영화 같은 작위적 설정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은 저녁이 됐고 가볍게 M의 집에서 그들은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가까운 술집에 갔다. 도착해서 바에 앉았다.
   꽤 적당한 화제랄지 퍽 적법한 안부 인사를 나누기에는 왠지 어색했고 살짝 나른한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M은 친구들이 지친 듯해 보여서 지금은 자기가 말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얘들아. 나는 있잖아, 어른이 되면 막 자유롭게 작품 생활을 하면서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흥했다 망했다 흥했다 망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삶을 살게 될 꺼라고 막연히 내다봤었어. 그 예상은 어김없이 빗나갔지.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 호텔 생활은 잔잔한 호기심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꽤 많이 해 봤어. 그 생활을 하면서 내가 깨달은 게 뭔 줄 아니? 뭘 꺼 같아? 특별한 건 없어. 뭐 대단한 걸 깨닫지는 못했다구. 하지만 이래저래 주워들은 정보의 양과 그것의 고귀한 가치는 무척 특별했어. 자세한 걸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 밝힐 수는 없지만 음, 내가 아는 세상은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 우리가 모르는 어느 범주 너머의 움직임이 있고, 그것은 체계적으로 작동되며, 그것의 기원은 이미 500년 벌써 5000년 가까이 됐다는 것이야. 물론 속시원히 다 알려주면 나도 좋고 너희들도 좋겠지만 말할 수 없는 사정이란 것도 있으니 이해해주기 바래.
   너네들 한번 생각해 봐. 평소 아무런 의심이나 궁금증이 없었던 일에 대해서. 나도 작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특급 호텔을 전전하는 생활을 오래하던 시절 생활이 무척 때분해지고, 창작의 절벽에 부딪히던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 너네들도 알잖니? 호텔에 도착하면 길다란 모자를 쓰고 턱시도나 뭐 그런 격식 있는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승용차의 문을 딱 열어주잖아. 근사하게 말이야. 어느 날 그걸 보니 이상했어. 옛날 같으면 그분은 귀족이고 난 삐에로쯤 될 테니 뭔가 무척 부자연스러운 일이겠지? 또 있어. 호텔에서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 별관이나 근처의 나이트클럽에 놀러가기도 했지. 거기도 그래. 돈을 내는 사람은 나고, 대우를 받는 사람? 그것도 나야. 즉석 만남을 누가 하는데? 역시 나지. 무대에서 쇼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때로는 마술을 선보이는 친구들이 모두 누구를 위해서 그 일을 하냐고? 나라고 나! 그런데 나비넥타이는 누가 매니? 그래, (딱), 웨이터 아저씨지. 바로 그거야! 이게 다가 아니야.
   그러다 호텔 생활 정리하고 집에 돌아왔어. 딱 생각을 했지. 시나리오를 80퍼센트는 썼는데 나머지 20이 안 써지네... 고민했지. 음 아 그래, (딱), 그거야. 골 세러모니를 보란 듯이, 주위에 아무도 없지만, 그렇게 들썩들썩하며 검색을 했어. 발명가,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 작품의 원작자, 귀족과 고명한 나리, 기원전 비극 시인, 방랑자, 선구자, 사색가와 발명가에 하물며 괴짜까지. 이미지 검색도 했고. 결과가 딱 나오더라고, (딱)! 뭔 줄 알어? 그래~ 다 수염을 길렀더라고! 나도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어. 거 약간 이상하던데. 거동이 조금 바뀌어. 태도나 자세에 미세한 영향을 주나 봐. 시나리오의 나머지 20을 완성하려고 나도 수염을 길렀더니 아주 약간 사람이 바뀌는 듯 했어. 그런데 문제의 글은 안 써지고 내 용모는 영 지저분해졌어. 주변에서는 추접스럽다고 하더라고. 난 나대로 방법을 찾고 노력했는데 말이야. 억울했어. 일거양득이었지. 나쁜 쪽으로.
   그러다 그 시나리오는 폐기했어. 망했다고. 미완성! 선불로 받은 계약금에 특별 사례금과 흥행 보너스까지 모두 돌려줬지. 토해내니까 괴롭더라고. 그래도 소송에 휘말리지 않아서 다행이었어.
   그러다 어느 날 하워드랑 단둘이 술을 한잔 했어. 여기야!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술집. 너네들도 알다시피 하워드 집이 여기서 가깝잖냐. 만났어. 그날 내가 무리했어. 골든벨을 울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속으로 작정했어.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내심 하워드라면 우리가 모르는 뭔가 신비롭고 기쁘고 은밀하며 어떤 뭐랄까, 끊임없이 염탐할 만한 그와 같이 격찬할 만한 비밀을 하나쯤은 분명 알고 있을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최고급 술을 샀고, 내가 아는 숙녀 가운데 최고로 근사한 옷을 입는, 최고로 세련된 예법이 몸에 익은, 최고로 고상한 말투가 돋보이는, 최고로 관능적이며 최고로 우아하고 최고로 지적인, 즉 하워드가 한눈에 반할 것만 같은 어느 상속녀를 불러내서 하워드와 나 사이에 앉혔지. 하워드는 그날 뿅갔어. 완전 뿅갔다고. 어리둥절할 만했지. 분명 그랬을 꺼야. 그녀의 이목구비는... 아, 말 말자! 막 상상되네, 알면서도. 꿈에라도 나올까 무섭다. 그렇다고 뭐 희대의 꽃뱀 그런 건 아니야. 얘도 본심은 착해. 본색을 드러내도 맹하고. 그래, 백치미가 뛰어나. 그러니까 입을 열면 안돼. 그럼 망해. 음. 그녀는, 그 여자는 어디까지나 내가 하워드를 위해 준비한 비장의 카드, 내 망가진 역작 시나리오에 대한 어떤 속죄양의 의미랄까? 녀석의 고결한 예술 인생에 조그만 흠집을 내고 싶다랄까, 전부터 첫날밤 얘기를 해주라고 막 졸라도 해주지 않더라고. 하워드가. 그래서 내가 준비했지. 그녀를. 가책 같은 건 꼭꼭 숨기고서. 그녀의 남자 경험 역시도.
   뭐시여, 남자 경험? 사소히 다루기에는 너무 막중한 화제인데! 안 그러냐? 살짝만 건드리고 가자구. 시간 있으니까. ...(휴)... 너네들 그거 아니, 여자의 미모에 대치되는 남자의 가치는 무엇일까? 뭘 꺼 같니? 황금, 화술, 외모? 또 뭐가 있드라, 아무튼. 뭐가 맞고 뭐는 틀리다 라고 하기는 어렵겠지. 알아도 쉬쉬 하자고. 뭣땜시? 왜냐하면 일단 1번이 뽑히면 나머지 채권자는 아아, 그 때문이니까. 그만그만! 전문가가 평점을 매길 수도 있고, 투표로 인기 순위를 정할 수도 있어. 그러나 살면서 수많은 남자들과 친숙하게 어울리고 부대껴 보면 그것은 아마도 여자 경험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 번쯤 해게 돼! 그건 때때로 연애지침서에서 놓치는 부분이 아닐까? 아니야! 아니면 좋겠어! 아니기를 바래! 뭐 그러거나 말거나! 그쪽 세계를 모르니까 뭐라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연애 경험은 훈장의 의미를 지니는 화려한 상징미에 귀결되는 의미가 있다는 그 분야 전문가의 일설보다는 남녀의 만남은 운명이고 우연이며 노력이자 그냥 인연이다는 <뭐는 뭐다>식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어. 뭐, 훈장? 괜히 헷갈려. 훈장이라면서 숨어서 속닥속닥 이러쿵저러쿵 숙덕거리고, 또 담판을 짓거나 첫인상을 각인할 자리에서는 무슨 훈장이 대체 뭔 소리냐고 되물어. 다 처녀야. 다 처녀래. 생판 모르는 이론이라는 것처럼. 보도 듣도 못했다 그래. 하나 같이. 간혹 딱 3명 만났다고도 해. 그런데 오래 만났대. 즉 한번 마음을 주면 길게 간대. 그러듯이 여자에게 허영심이 있다면 남자에게도 있어. 그건 뭐겠어? 뭐긴 뭐야, 그것은 허세지! 그럼 여자의 변덕에는 뭘 내놓겠냐고? 아무래도 허풍! 오오, 여자의 남자 경험에 대척되는 지점이 남자의 여자 경험이라... 음 글쎄, 여자에게 사랑이 전부라면 남자에게는 어떻다고 하잖니? 남자가 카사노바라면 간혹 허탈할지언정 웃음을 부르지만 여자가 그렇다면 오, 아득한 일일 꺼야. 있잖아, 남자의 허세가 절밤쯤 맞다는 것은 여자의 마음을 안다는 것이지. 그러나 그것은 기교야. 어디까지나.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기술적으로만 아는 것이라고 생각해. 중요한 것은 여자의 마음이라고. 그러니까 어, 말을 바꾸면 여자의 청각. 그래서 글조차 말을 따라가기도 하지. 그 반대가 어렵나 봐. 드물지만 그 둘을 엄정히 직업적으로 구분하기도 해, 법정에서도. 이미 옛날부터.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지. 여자의 마음을 안달 나게 하는 재주는 단 한 여자의 마음만 안달 나게 하지 않는다는 점. (딱!) 그것은 늦더라도 서서히 터득하는 기술에 불과하다는 점. (딱!) 남자의 재화 가치는 상승할 수 있지만 여자의 미적 가치는 하락할 것이라는 점. (딱!) 사랑은 그것이 처음에 사랑이 맞는지도 잘 모르지만 설령 맞더라도 변하기 쉽다는 점. (딱!) 출신이 미약하든, 왜 그런지는 몰라도 여자 경험과 돈과 재능과 화술과 외모든 성정이든 뭐든 그 때문에 허세와 허풍이 부족하다면 오히려 남자가 남자를 상대하기도 즉 남자 대 남자로써 어울리기에도 때때로 버거울 수 있다는 점. 허세를 비롯해 완벽한 마초인데, 여자 경험이 아쉬워 중년이 될 즈음 그래프에 대해서 난생 처음 알았어, 무언가 살아온 인생의 초상이 억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는 점. 여자도 똑같지. 여자 대 여자로써 허영심과 변덕과 질투가 0과 0과 0이거나 100과 100과 100이라면 그 다음은 상상에 맡겨야지! <내가 최고야>라고 해도 뚱하고, <너는 최고가 아니다>라고 해도 뚱해. 단, <늬가 최고야>라고 해도 뚱하긴 한데 좀 덜 뚱해. 험담도 쓸데없고 고품격 농담도 쓸모없으며 다변도 잡설일 뿐이야. 좌천도 아니고 내가 일을 잘해서도 아닌데 거긴 배달할 사람이 도무지 나밖에 없대. 뭐를? 피자를! (딱!) 여자를 존중하며 숙녀를 찬미하는 자질이 부족하더라도 여자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한다는 점. (딱!) 적어도 어떻게 그리도 여자 마음을 모르냐는 소리는 듣지 않기. (딱!) 여자가 말해. 여자는 그래요, 라고. 속으로는 그럴 꺼야. 아 또 시작이구나, 라고. 속으로는 그래, 우리끼리 대화를 나눠 보면 남자가 정말 바보 같지만 알고 보면 여자가 진짜로 바보인가 보다고. 그러나 속으로만 그래야겠지. 속으로만. 정말 그래. 여자는 뭐다는 이쯤에서 줄이자구.
   한편, 말이 나온 김에 허세에 대해서 부언 설명을 하자면 이래. 허세! 허세란 말이야... 허세는 뭘까? 그분은! 허세는 말이야 이런 걸 허세라고 해. 오랫만에 친구들끼리 만나서 말이 나와. 예를 들면 이렇게. "첫인상이 그렇다더니만 역시 천생연분인가 봐. 사랑은 뭐니 뭐니 해도 첫눈에 반해야 한다니까. 어때, 여전하지?" 또는 당사자가 친구에게 직접 물어 봐. "내 여자친구(부인) 괜찮냐?" 라고. 이때 경우의 수는 크게 다섯 가지가 있어. 1.허탈 2.허세 3.묻지마 4.독설 5.절대 긍정으로. 대략 다중적이겠으나 일단은. 향후 바람은 어디서 어떻게 불지 모르는 일이야. 장래 뭐하고 살지 어떻게 알겠어, 수정구슬도 없는데 말이야. 그럼.
   첫째. 그건 이래. "그때 내 눈이 삐었는 갑다." 라고. 아, 정녕 웃음에 대한 이해득실의 최대 수혜자는 누가 뭐래도 제3자란 말인가? 허세도 싫고, 실정도 변변찮고, 불만이나 냉소 아니면 투정 또는 간혹 험담에, 잡은 물고기에게 밥을 주는 것도 언짢고, 로또 복권 꼬박꼬박 사는 여건을 보면 사정 뻔하며, 뭘 해도 재미 없고, 거짓말도 짜증나요 삶은 피곤해요, 감언이설은 성격에 안 맞아, 라는 전형적인 그 분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
   둘째. 이건 인생 자체가 허세, 허세 빼면 시체! 허세 하면 누구, 누구 하면 허세! 위처럼 말이 나오면 '그래 괜찮지!'와 '장난하냐?'에서 전자를 원하는 물음이 확실하니까 뭐 동의하고 당사자의 허세1을 충족시켜주는 게 순서겠지. 이걸 전문용어로 접어준다고 해. 그러면 자, 허세1에 이어서 허세2께서 납시지 않겠니? 왜냐고? 그분이 나서지 않는다면 또 그럴 테니까. "짜식 진짜 그런 줄 아나본대, 원 참! 넌 어떻게 된 게 사람이 그 나이 먹도록 눈치가 없냐? 참 나!" 라고. 바로 허세2가 나설 차례라고. 아니 왜? 왜냐하면 접어주면 꺾어야 하는데 발동이 걸려서 도저히 멈출 수 없기 때문이야. 누구하면 허세고, 허세하면 누구인데 말 다 했지. 그래서 자, 나오셨어 허세2가. "그래? 난 그냥... 딱히... 썩... 그렇다고 찬성하기는 힘든데, 객관적으로 그렇잖아. 퍽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애들도 크고 그냥 사는 거지. 가족이잖아. 가족! 결정적으로 헤어질 뻔 했던 그때 나는 마음 비웠는데 걔가 나섰잖아. 거의 매달린 거지. 당시 난 별로 생각없었어. 나 유학생 만나고 있을 때 말이야. 아 나 영화배우도 만나봤고 아나운서도 만나봤고, 아 이번에 뜨는 누구 걔 있잖아 와 전에 나 좋다고 한참 따라다녔는데 그렇게 될지 예상이나 했겠냐, 하나 하나 세기도 힘들어 차마 헤아릴 수가 없어 대충 셈해봐도 어.. 음.. 에잇 관두자." 라고. ...음... 다음은 뭘까? 하나 밖에 더 있겠냐, 허세군은 허당씨로 바뀌는 일만 남은 거지! "아, 그래~? 다음에 제인 보면 제인한테 말해줄께. 딱 그대로~! 너가 사람이 너무 겸손하더라고 말이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아니 우리 그만하자! 우린 서로 약점을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까. 말 나와 봐야 서로 좋을 꺼 하나 없잖아. 아니 아니 아니지! 그게 아니지! 절대 아니지! 넌 이미 풀어놓은 게 많을 테니 혹은 넌 나 때문에 구박 엄~청 받았을 테니까 비교된다고든 어쩌든, 무엇보다 넌 결백하니까 그냥 우리 같이 죽자. 하지만 어머나, 아 글쎄, 이렇게 증거가 남았네. 어떡하지... 녹음된 거 틀어줄까?  <그래? 난 그냥... 딱히... 썩... 그렇다고 찬성하기는 힘든데, 객관적으로 그렇잖아. 퍽 만족스럽지는... STOP> 접어줘도 꺾을 줄도 모르고, 누가 촌닭 아니랄까 봐 발악을 하네 아주. 애쓴다 애써. 그래 봐야 넌 삼류야 삼류, 알아? 그것도 영원한 삼류! 이 삐─ 같은 놈. 넌 도대체 사이코냐 돌아이냐? 사람이 어떻게 그리도 꽉 막힌 거냐, 어? 정말 신기하다 신기해! 진짜 답답허다~ 누구 앞날이 훤허다~. 옛날에 너는 늬 여친한테, 어디 가서 내 남자친구라고 하지 마란 말을 들은 걸로 부족하냐? 어? 너 어디 가서 내 친구된다고 하지 마라! 챙피하다. 수치심이 가라앉지가 않아.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데.. 이거 원! 알았어? 앗, 잠깐만. 워 워 이거 클라우드 동기화 안 끊었는데. 그 계정 내 여친이 쓰는데. 어떡하지? 어쨌든 몰라 봐서 미안허다. 너가 최고란 것을. 너 여기서 빠져라? 아니! 너 여기 남어라. 여기 술값 늬가 내라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설이고 과장이자 우정일 뿐이야. 정말 친하니까 밥 먹듯이 허세를 부리더래도 그냥 누가 듣지도 않는 허세 마이크 내비두고, (고급 허세) 채널 하나 또 하나 더 켜면 되는 거지. 그러면 돼. 자연스럽게. 왜? 왜냐하면 친구니까. 왜냐하면 허세 친구들 5명 막 7, 8명끼리 우르르 어느 근사한 바에 가서 딱 소문난 바텐더에게 몇몇 난제에 대해서 자문을 구하면 쟤는 단 한 개도 얻어걸리지 못하기 때문이야. 한 개는 무슨~ 만년 꼴찌한테 순위권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힘들 것임. 그 질문은 뭘까? 빼어난 매력이 돋보이는 언니에게 막 이렇게 물어보면 깔끔하지. 우리들 가운데 가장 돈이 많을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누구로 보이나요? 이 가운데 제일 마음에 드는 남자는, 제일 잘생긴, 그냥 그대 성에 차지는 않더라도 그나마 도토리 키재기로 그나마 많이 봐줘서 비교적 50점이라도 줄 만한 딱 한 명의 남자는 누구에요? 그 때문이지. 친구가 뭐 별 거니? 그러나 이 부류는 하수야. 공신력 있는 허세 대회 출신 애들 앞에 서면 저 친구는 고개를 들래야 들 수가 없어. 이 층위의 특징이 뭐겠어? 물론 어디까지나 친구니까 넉살 부리는 것이지만 자기 허세 안 들어주면 안 만난다, 바로 그것이라고. 뭔가 이상하지 않니? 어차피 같은 허세야. 그런데 왜 얘는 거품 물고 허세부렸다며 얄미움 받고 욕 얻어먹고, 왜 누군가는 명백한 자랑임에도 불구하고 허당과 허풍도 얘기해주라고 막 환호성에 웃고 쓰러지고 심지어 때리고 마구 기다려지며 난리일까? 그러잖아, 적잖이 불공평해. 평등하지가 않다고. 불평등? 그래. 누가 하면 그냥 뻥인데, 누가 하면 시적이고 낭만이며 신비이자 환희야! 같은 말이라도 그런다니까. 괜히 여자들이 목소리에 꺼뻑 넘어가는 게 아니라고. 대체 왜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왜 얘는 찬밥 쟤는 환영이냐고. 될 놈은 뭘 해도 되고, 안 될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논리면 끝나는 건가? 정말 그게 다일까? (골 세러모니) 왜냐하면 전자는 그거 밖에 모르기 때문이야. 그것은, 오빠 달려! 힘껏 달려 보면 어떠니? 어떠긴, 결국 퍼진다고! 안 그래? 멍멍 멍멍, 개가 뛰고 나서 그러잖아 막 헐떡헐떡. 평소에는 껄떡 허세부릴 때는 헐떡인가? 그러니까 반응이 안 좋아. 그러나 후자는 그게 아니야. 밀었다 당겼다, 들었다 놨다, 쥐었다 폈다, 쉬었다 나섰다 하다가 지금이다 싶으면 딱 상대의 마음을 빼앗아! 뛰고 날고 하고 때로는 관망만 하고, 그러다 이때다 하면 슥~ 상대의 마음을 훔친다고! 이거야 (딱)! 전자는 힘은 힘대로 빼고 좌중은 짜증 내고, 후자는 쉬엄쉬엄 했을 뿐인데 도저히 미워할 수 없다는 거! 전자는 허세꾼에 호색한에 환장가인데 후자는 (우리) 선생님에 환상가라는 거! ...(휴)... 내가 농담을 고급스럽게 포장하는 방법을 하나 알려줄까? 내용은 너가 말했다고 쳐. 그러고 나서 재밌으니까 발언자와 청중이 나와 친구들이 같이 웃는다고, 보통은. 하지만 희극배우는 안 그래. 희극지왕 정도 되면 좌중을 웃음으로 휘어잡고 나서 자기는 반대로 인상을 써야 하는 법이지. 웃고 싶어도 참아야지. 무표정으로 효과를 극대화한다고. 뭐 절제 같은 말도 비슷한 거지. 진짜로 무인도에 데려가고 싶을 만큼 웃긴 친구는 안색만으로도 웃겨. 눈빛 한 번이면 뭇여성은 떨리다 참다 못해 안달복달에 밤잠을 설치며 그대를 생각한다고. 그래야 한다고. 그럴 수 밖에 없다고. 그게 바로 고수야! 그런데 저건 뭐니? 그렇다는 말일세 ......음...... 그럼 한번 생각을 해보자구. WHY, 정말 왜 그럴까? POURQUOI? 왜냐하면 어설프니까! 실정이 어설프니까. 연기가 어설프니까. 꿈도 어설프니까. 다 어설프니까. 봐봐, 봐보라구! 아예 허세 분야 전직 선수였거나 그걸로 국대급이라면 그~냥 쓰러지는 거지. 완전 웃기다고! 바로 이거야, (딱) 바로 이거라고 이거! 허세의 단짝인 허풍으로 어느 경지에 올랐으면 그건 TV 코메디 프로에 나오는 허당 시리즈처럼 엄청 재밌어. 좋아 좋다고. 기쁘고 즐겁고 또 듣고 싶고 또 보고 싶지. 하지만 어설프게 머저리처럼 뚱딴지 같은 헛소리에 관한 습관이 천성이면 그건 다름 아닌 광고라고. 전 바보에요 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다니는 거지. 난 푼수에요 라고 등에 포스트잇이 붙여진 것과 똑같아. 그게 다 어설프다거나 정작 원하는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그런 거야. 즉 자기가 홀딱 빠질 만한 여자가 먼저 자기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듯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주지 않았어. 한 번도. 단 한 번도. 미래도 뻔해. 늬가 여자라면 그럴 마음이 생기겠냐? 어? 그러겠냐고! 내 짝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는 청아한 여인께, 우리 오빠라 칭송할 대상이 미처 빈자리인 상큼한 숙녀께 이렇게 여쭙는다면 대체 뭔 소리를 들을까? 그 사랑을 빼앗아 보고 싶지 않나요, 라고. 하트 뿅뿅, 윙크 반짝반작! ...... 어쭈, 이 양반이 시방 사람을 뭘로 보고! 뭐가 어쩌고 어째?... 상상만으로도 분위기 험악해지겠다야, 에잇 기분 나빠지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고 친구나 되니까 그 허세 다 받아주지 안 그러면 어디다 하소연하겠냐고. 단골 술집 마담? 돈 많이 들어. 친해졌드니 글쎄 술 취하면 짜증내, 허세도 정도껏 하라고. 때문에 이상적으로 바라는 공상을 실재 겪은 것처럼 풀어놓는 것이지. 이미 반틈은 숙련된 망상가요 능청스런 몽상가지. 진짜 그처럼 말 같지도 않은 허세를 부리면 남들이 믿는다고 생각할까?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 바보가 아닌 이상 스스로도 다 알 테야. 단 매일 거울을 볼 때마다 나르키소스가 되니까 그냥 어쩌다 생활이 되버린 것이겠지. 에코, 만나봤드니 별로래. 에코, 이미 자기를 거쳐갔대. 에코, 에코는 원래 자기 이상형이 아니래. 그 재능 타고났는데 말로라도 풀어야지 뭐 어쩌겠냐. 허나 선망을 허세로 옮기니까 이미 처음부터 장르가 잘못된 거였어. 사실주의라고 하길래 봤드니 글쎄나 SF? 진짜라며 우기고 노래를 부르는데 어머나 그건 판타지? (딱) 그거야! 이와 같은 분석이 아마 저명한 정신과 의사의 고견과 절반은 일치할 껄? ...(멈칫. 안색만 봐도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안다는 듯)... 이런 얘기 친구가 들으면 서운해 하겠다고? 아니야, 전혀 아니야. 왜냐하면 녀석들은 친구니까. 왜냐하면 녀석들은 남자니까. 진짜 언짢다면 달린 고추 달렸나 안 달렸나 확인해 봐야 하고. 만약 달렸는데 속까지 좁으면 아, 그거 감당 안 돼. 왜냐하면 누가 뭐래도 녀석들은 그 어디에서라도 대인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친구들이기 때문이지. 암. 그럼. 그렇고 말고. ...(엥. 눈빛과 눈빛의 교차. 연인인가?)... 이와 같은 치밀하고도 정교한 이론은 대체 뭐냐고? 저 가운데 하나냐고? 허탈도 아니고, 허세는 아닌 것 같고, '묻지마'일 리는 없고, 천동설과는 관계 없고, 허당과는 다르니까 몹시 의아해 하는 그 마음 잘 알아 잘 안다고. 이건 단언컨대 아마 깐족 아닐까? 깐죽! 다시 이어 가자고. 
   셋째. 늬가 데리고 살래? (오 땡큐? 어허허허허! 거침없네 정말. 완전 시원시원하셔. 으하하하하, 으하하하하, 크크크크크! 참고로 셋째 스타일과 '우리는' 화법의 대가는 비교적 허세를 덜 부리거나 불필요함. 차라리 허풍쪽. 그러나 헤세의 부류에 넣은 것은 허세가 변심하여 바뀐 것 뿐이라는 것을 반증하기 위해서. 무엇으로? 실속으로!)
   넷째. (난 항상 허탕이니까) 주로 악담을 남발하는 부류. 아무에게나. (절반은) 기억도 못함. 친구면 무조건 악평을 감수해야함. 뒷일 생각 않고 <내일은 없다>는 좌우명의 직진 인생. 이를테면, (친구가 여자랑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며) 못생겼네~! 이를테면, 참말로 걱정된다 너 그래 가지고 훗날 결혼이나 할 수 있을 꺼 같냐? 너만 보면 참 내 가슴이 답답~허다! 하긴 내가 이 정돈데 넌 오죽하겄냐 (토닥토닥)! 
   다섯째. 너무 좋아. 대만족. 정말 행복해. 다 너네들 덕분이야. 친구들한테 정말-정말 고마워. 세상은 아름다워...... 이건 허세가 아니라 허영의 친구인 동조이자 천동설이겠구나.
   정작 주인공이신 우리의 숙녀께서는 자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들었다 놨따, 감쪽같이 쥐었다 폈다 했는지 꿈에도 모르실 꺼야. 알면 남편 흉보기고, 모르면 어쩔 수 없고. 전자는 손 안 데고 코 풀기, 후자는 (비공식이고 자시고 그러든가 말든가 이미 내놓은 물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나 쯤 되겠지? 눈치가 빠르기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구미호 같고, 사람 마음을 빼앗고 훔치는 데 도가 트신 분이라면 딱 하루 전에 그 낌새를 미리 파악하실 테지. 남친(남편)의 동태를 분석할 필요도 없이 말이야. 바꾸어 말하면 옛날 옛날에 포기했다는 말씀. 사랑은 변해도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안 변해. 하지만 허세꾼은 또 그래. 사람이 안 변한다면서 여성잡지1에서 2로 변하는 거는 또 뭐냐고? 무슨 말도 안 통하고, 우기기만 하고, 뭐만 둘렀다 하면 안 가리고 그냥 군침만 흘리시니 아 나 이런 이런! 우리는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미친?) 개의 1인 방송을 평생 옆에서 들어주고, 평생 잔소리하며, 일평생 그것에 달관해야만 하는 오직 그럴 수 밖에 없는 누군가의 애처로운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에코. 머머 해야 한다) 부디 그분이 바라시는 홀딱 반할 만한 황금 마네킹 상점의 VVIP가 되시기를! (에코. 되시기를) 우리는, 어쩜 그 기구헌 운명을 불쌍히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에코. 머머할지도 모른다) 그 말 못할 심정에 측은한 마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구려. (없구료) 이건 뭐 거의 득도를 하는 수준일 것이다. (것이다) 말하시지 않아도 잘 압니다요, 마님! 네네 그럼요. 하여간, 수컷들이란! 정말 안 그러겠어요? 일생을 함께 사는 사람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냐구요! 한창 화사하게 꽃필 나이에 흡사 스토커처럼 하도 꽃 들고 쫓아다니길래, 하도 사기꾼 같은 달콤한 칭찬에 길들여지고 쇠뇌되다가 멋모르고 딱 발목잡혀서 인생 내내 막 고생하고 끝끝내 포기하시는 그분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바입니다) 이제는 허세가 무엇인지 잘 아시지만 이미 멜로드라마의 환상은 꺼이꺼이 떠나갔고, 낭만적 영화에 대한 가녀린 흉내조차 물건너간 마당에 우리는 여성지 2나 탐독하며 함께 모여 정담을 나누고 헤어질 때 이렇게 인사해야 하는 것이란 말인가? 진짜로 남은 것은 그것뿐이란 말인가? 나머지는 음, 우머나이저조차 매진됐다네요, 정녕 남은 건 그것 뿐인가 봐요! 딱 하나 남은 보석은 바로 이 말? 중요한 얘기는 우리 다음에 다시 만나서 하자꾸나! 우리는? 으쌰으쌰~ 들썩들썩~ 두근두근~ 뭔 말인지 잘 아시는 숙녀여 마담이여 귀부인들이여, 모두 함께 들고 일어섭시다? 워 - 워 - 워! 오오, 저런! 괜시리 괜한 어느 저질 허세 때문에 내가 뭔 대변인도 아니고, 뭔 별의별 시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고, 참 나 아조 한심하다 한심해! ...(휴, 휴, 휴)... 괜히 허세 때문에 이야기가 옆길로 샜지만 말하자면 허세란 바로 그런 것이란 말씀이야. 빛의 3원색이 뭔지 알지? 허식의 3요소도 그렇다구. 바로 허세, 허당, 허풍! 쉿, 외워두세요.
   허허허. 개구쟁이들! 뭔 별 얘기 있겠어 하며 호락호락 듣고 흘리더니 이젠 눈이 똥그래지다 못해 막 강아지처럼 군침을 흘릴려 그러네? 하하하, 하하하. 어쨌든 그날 술값 톡톡히 나왔잖아. 어디 술값만? 그러면 섭하지~! 몹시 섭섭하고 서운하다고. 어떻게 그런 처참한 결과가 내게로? 지나가던 새가 다 울고 갈 일이라고! 후회했고 울적했으며 막 쌍욕이 나올 뻔 하기도 했는데, 그런데 막 포기할려던 막판에 빈틈이 딱 보이더라고. 결국 마침내 최후의 승자는 나였어. 아무튼 그 무뚝뚝하던 하워드가 실토했잖니. 내내 부정하던 그 은밀한 사설 클럽에 대해서...(침묵)...
   아, 일부러 뜸들이는 건 아니야. 내가 어디 그럴 성격이니? 귀공자들을 어렵게 모셔 놓고 말이야. 아닐 소리지. 예의가 아니라고. 그런데 듣고 보니 하워드도 자기가 먼저 내게 그 일에 대해서 고백하고 싶어했나 봐. 예전부터 말이야. 입이 근질근질했던 것일까? 모르겠어. 왜 있잖아, 저번에 제임스랑 하워드랑 말다툼했던 일, 기억나지?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나 봐. 녀석도 우리들 편의를 봐주기 위해 같이 만나면 일부러 꺼벙한 척 하고 덜렁대며 지성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긴 하지만 본심은 선하고, 동심은 막무가내고, 순정은 미련하며, 열정은 살짝 괘씸한 진짜 가상한 남자라고. 알고 보면! 터놓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보니 말이 통하더라니까. 아주 잘. 아직 못 다 경험한 일에 대한 동경심도 투철하던데. 왕성한 호기심도 그 고급스러운 화술로 교묘히 감추더라고. 그래도 드러날 껀 어떻게든 드러나는 법, 녀석도 남자였어. 알고 보니 걔도 완전 상남자였다고. 짜식, 웃겼어. 흥! 한집 살아 보고 한배 타 보아야 속을 안다고 녀석이 글쎄나 마초였다니, 오오! 오래 살면 맏며느리 얼굴에 수염 나는 것 본다더니 정말 그런가 봐! 그 간절한 고해를 듣고 보니 난 당황해버리고 말었어. 왜냐하면 녀석은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았으니까. 아직도 세상이 막 궁금하나 봐. 여전히 더 크고 싶어하는지도. 그는 말이야 립스틱 공장을 짓고,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살아 보고도 싶고, 동화책도 써야 하고 모노드라마 주인공도 하고 싶어하더라고. 살살 감수성을 자극했더니 그냥 아주 술술 털어놓드라고. 감동이었어. 최고의 술과 최고의 숙녀를 탁 대령했드니 효과 만점이었지. 그런데 대체 어딜 봐서 최고라고 자부하냐고 그 알량한 허영심 때문에 챙피한지도 모르는 거냐 라는 추궁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주색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넘어가자고. 아무튼 녀석은 스무살 영원한 스무살로 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 했어. 아니, 아니야. 녀석은 그야말로 소년이었어. 팝콘처럼 발랄한 소년. 콜라처럼 짜릿한 소년. 토끼처럼 깡총깡총 종잡을 수 없는 소년. 여자처럼 변덕까지 심한 소년. 음, 정말 그랬어. 하워드의 독백은 가상했고, 난 열띤 감흥에 빠지고야 말았지. 게다가 신비한 비밀 그 경이로운 비밀 클럽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아내고야 말았어. 심지어 중간에 내가 살짝 최면술을 부려서 그로 말미암아 빌더버그 그룹의 모든 정의와 기원과 회원은 물론 극비 사항과 고위급들의 사적 모임일과 장소까지 통채로 알아내고야 말았어. 프리메이슨에 일루미나티에 무슨 위원회니 뭐니 세상에나 아 글쎄, 어머 어머 어머나, 하워드는 말이야 딱 그쪽 전문가였어. 저번에 제임스 늬가 파고 들어서 따졌던 이유를 그제서야 알겠더라고. 녀석도 켕겼던 거지. 과민 반응이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야.
   그렇지만 녀석이 완전 넘어온 건 아니야. 다만 갈등하고 있다는 건 분명해. 우정을 빌미로 협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하지만 어떻게든 종결시킬 필요가 있어. 끝을 봐야 한다구. 실패하던 패망하던 파탄나고 어렵게 모은 재산을 탕진하던 끝장을 봐야 잠이라도 편히 잘 거 같아. 뭐 이미 절반은 고스란히 알려줬고, 염려할 건 없어. 향후 어디까지 드러내느냐 뚜껑을 열고 보니 다 뻥이였드라, 그렇게 희죽희죽 웃게 될 일은 최소한 없을 거라고 봐. 해결의 실마리는 이미 드러난 셈이지. 새로운 아침은 이미 밝아오고 있어. 그럼. 경이롭고 신기했지만 알고 나니 덧없고 허무했어. 뭐 더 자세한 얘기는 우리의 H 양반을 만나서 직접 듣기로 하자.」
   그래서 그들은 H를 만나기 위해서 그날 하루는 M의 집에서 잤고, 하루가 지나서 날이 밝자 출발했다. 축복할 일인가는 불확실했으나 심심함에 허덕이고 권태씨의 분부대로 울상을 짓는 일보다야 백번 나은 일인 것만 같았다.


   5

   그들은 냇가에 앉아 동요를 부르고, 동시를 짓고, 동심에 잠기며, 동화를 읽는 너무나도 귀여운 아동처럼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하염없이 바라다봤다. 그러면서 예전 친구들끼리 모여서 각자 가지고 온 기념물을 냇물에 띄워 보낸 후 그것이 물을 따라 흘러가는 동안 평행선을 이루며 따라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누구는 장난감 배를 띄웠고, 누구는 유리병에 소원을 또 누구는 뭔 속인지 척키 인형을 띄웠을 것이다.
   처음에는 J와 K 그 둘만 있었는데 어느새 인원이 늘어서 모두 다섯 명이 됐다. J, K, A, M, H까지. 장소도 어쩌다가 H의 집 앞 하천 공원에까지 당도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들은 그때 그 놀이를 다시 반복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H가 데려가는대로 따라가기만 했다. H가 친구들에게 뭔가 보여줄 게 있는 듯 했다. 설사 친구들이 놀러오지 않았더래도 자기 혼자서 구경 갔을 것 같은 그런 특별한 공간에 가는 길인 것으로 보였다. 네 명의 친구들이 H를 만났을 때 그는 어쩐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왜 왔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마침 어디를 가던 길에 때마침 먼 곳에서 친구가 찾아온 것이다. 그게 다였다.
   네 친구 가운데 이동 거리가 긴 친구일수록 속으로는 쉬고 싶었을 것이다. H의 집 다락방에서 만화책을 보며 휴식을 취한 후, 그러고 나서 뭘 하고 놀아도 놀고 싶었을 텐데 H는 지금 관대하지도, 경건하지도, 어설프지도, 영 정적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데려가는 H도 그렇지만 따라가는 친구들도 어디로 가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듯 했다. 또 할 말도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얘네는 가벼운 수다보다는 언제부터인지 한 사람이 긴 대사를 뽑는 대화의 방식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똑딱똑딱 쉬지 않고 또각또각 움직이며 핑퐁 핑퐁 오가는 다변보다는 뭔가 수준 높은 대화를 원하는 것 같았다. 참말을 하면 시선을 올려다 보고 거짓을 말할 때는 시선을 내린다, 와 같은 표정과 어조와 몸짓과 화술에 언제부터 이렇게 민감했나 의심이 들도록 말이다. 의뭉스러운 녀석들 같았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각자 조금 뭐랄까 갸륵해진 것만 같았다. 영락없이 돌아이가 되버린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물어봐도 대답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고. 기껏 동문서답이나 하겠지.
   어쨌든 친구들도 인내력이 뛰어났다. H가 인솔하는대로 묵묵히 따라가기만 했다. 지들이 뭔 유치원생들인가? 아니다. 그런데, 그랬다. 일단 믿고 보는 것일까? 그럴 지도! 그런데 왠지 H는 목적지가 어딘지는 몰라도 그곳까지 가는 여정이 별로 능률적이지 않아서 약간 괴로운 듯 보였다. 혹시 그가 이런 심통을 부리지는 않겠지만 어째 좀 이상했다. 너네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왔으니 딜레마는 현실이 됐다, 저 끝이 환상인지 꽝인지 확인이나 해보자, 가뜩이나 재미난 일도 없지 않느냐 라고.
   그는 방향도 꼬불꼬불, 이동 수단도 다양하게, 때로는 카리스마도 내뿜고, 고뇌하는 안색도 비추었다가 억측을 유발하며 목적지에 이르는 길을 파악하며 이동하는 동안 가지가지 하는 것 같았다.
   걸었다가 버스를 탔다가, 쉬었다가 택시를 타고, H의 요트를 타고 이동한 후 어디서 내려 한참을 걸어갔다. 그러나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왜냐하면 최종 도착한 어느 도시 외곽의 변두리에 딱 하나의 고층 건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잘 보니 영화에 나오는 때락 큰 비행물체였기 때문이다. 일명 UFO! 함장은 외계인 선원도 외계인. 아마도. 크기도 그렇고, 무엇보다 두 눈으로 바로 육안으로 똑똑히 코앞에서 보는데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 곧 그것은 진짜였다. 때문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SF 작품에 나오는 비행체는 세 종류다. 첫째 원반형, 둘째 스타워즈형 즉 제각기 이상한 모양. 그리고 셋째, 수직형. 만약 미래에 외계인이 오거나 또는 장래 어느 시점에 미래인이 현재로 놀러온다면 그 방법과 외관과 목적 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대를 충족시킬지도 모른다. 또 못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까지 이루어질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안될 수도 있고. 그래서 대충 지금까지 작품으로 구현된 가상의 UFO를 보자면 그 구분은 대충 저와 같다. 그런데 그게 바로 저 앞에...... 장난이 아니었다!


   6

   중얼거리기도 하고, 소리도 질렀다가 취객처럼 휘청거리기도 했다. 쉽게 말해서 당장 믿었다.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진짜 군인들이 여기 이상은 못 간다며 경계를 서고 있어서 꽤나 흥분됐고 정말 흥미진진했다. 오직 감탄사와 감상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뭔가 미심쩍었다. 어딘가 허구인 듯 했다. 진짜인데 설마 진짜-일까 그런 의구심은 통 가라앉지 않았다. 틀림없이 헛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일단 크긴 컸지만 또 진짜라고 보기에는 썩 크다고 하기도 그렇고 약간 어설펐다. 방식이 익숙했고, 무엇보다 움직임이 없었다. 처음에 예상은 뛰어넘었고, 기대는 능가했으며, 현실성에 대한 상상력을 초월한 점을 한껏 칭찬할 만 했으나 어김없이 미소는 금새 돌아왔다. 그것도 실소로.
   저것은 도시 근교의 짓다 만 부도난 건물이었다. 흉물이네 뭐네 라며 간혹 드물게 발생하는 그런 물건. 어떻게 완성도 안 되고 진행도 어렵고 처리도 안 되는. 철회할 수도 없고, 시간을 돌릴 수도 없으며, 판결과 행정 절차는 흐지부지 심지어 사겠다는 사람도 일절 없고.
   그렇지만 그 어중간한 건물이 예술품으로 활용된 것이다. 투명 망토 기술인가 뭔가로 저층은 구도에서 날리고, 그 위는 어떻게 작업하고, 주변 상황 만들어서 딱 보여주면 처음에는 와~, 헉~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더불어 비슷한 모형이 등장한 영화가 그 지역에서는 개봉이 연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그래도 언뜻 환영이었고, 신기한 요술이었다. 짧지만 그래도 분명 가슴 벅찬 기적이었다. 가짜라도 좋았다. 진짜가 아니라고 무슨 대수고, 알고 나니 역시나-라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처음에 잠깐 사립 탐정을 고용할까도 생각해 봤는데.
   친구들은 서로 눈빛을 교차하면서 그저 웃기만 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리고 남은 일은 하나 밖에 없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


   7

   아무 걱정이 없을 듯한 우리의 풍운아들이 그 작품인지 부도난 폐건물인지 모를 빌딩까지 오는데 어려움은 하나도 없었다. 못 들어가게 막는 사람도 없었고, 갑자기 새로운 일에 말려들지도 않았다. 누구를 만나지도 않았고, 마음이 바뀌지도 않았다.
   그곳은 건물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주차장이었다. 아마 이 건물은 짓다가 부도가 나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공사가 중단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지역 경제는 전보다 약간 침체되었기 때문인지 이런 생소한 황무지에 호기심을 보이며 찾아오는 방랑자도 거리의 인적도 전혀, 거의 없었다. 모든 분위기는 완벽하게 칙칙했으나 뭔지 모를 황량하지만 신선한 기운이 그들을 막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지? 공상과학 판타지 협회에 연락이라도 할까?」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왜 왔지? ...... 아, 잠깐 감동하고서 맞어 맞어. 꼭 영화볼 때는 좋다고 넋을 잃은 채 침흘리며 보다가 돌아서면 악담을 퍼붓는 투덜이처럼 굴지 않기로 해놓고선 말이야.」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난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좋은데. 들어갔다 나와도 달라지는 건 하나 밖에 없어. 그것이 무엇인가는 아직 말하고 싶지 않지만 말이야.」
   「저기 저 나뭇가지인지 뭔지 저거 보이니? 혹시 개뼉다구 아닐까? 아닐 꺼야.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바로 들어가보는 게 어떨까?」
   「그래, 그게 좋겠다.」
   그들이 건물 입구로 가까이 접근하던 중 보니 건물 바로 옆에 웬 경비실처럼 보이는 작은 별채가 하나 보였다. 그들은 그곳에 뭐가 있는지 보고 가야 할 듯 해서 그쪽으로 갔다. 거기는 경비실이 맞았다. 그런데 그 안에는 진짜 경비원이 있었다. 그분은 노인이었다. 그런데 멋졌다. 옷에 휘장이 많이 붙여져 있었고 외관도 깔끔했다. 어쩐지 노인으로부터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경비원은 아마도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작곡한 어느 관현악곡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자네들은 여기에 무슨 일로 왔나? 그분들은 모두 가셨는데. 여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없을 테고. 어떻게 알았지? 자네들도 혹시 무소속인가?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어쨌든 젊은 친구들이 존재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거나 인생의 목표를 수정하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거라면 대환영이라네. 뭐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고 할 줄 알았나? 난 그렇게 심통 고약한 노인네도 아니고, 속으로는 부러우면서 겉으로 추접스럽다고도 하지 않는다네. 새로운 도전이면 반겨야 하고, 알 수 없는 미래라면 기다려지는 법이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참으라고 또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지 않나? 다 알지. 나도 그랬으니까. 허허허!
   여기는 세상의 끝도 아니고 비밀의 궁전도 아니야. 또 역시 난 전설적인 점쟁이가 아니겠지. 당연히 주술사일 리도 없고. 자네들이 영웅이 아니듯이 말이야.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 경우에는 이곳이 어떤 영적으로 뛰어난 에너지를 내내 받을 수 있는 신비한 공간으로 여겨져. 지금 여기서 쪽잠을 자면서 가끔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데 도저히 번득이는 영감의 샘솟음이 멈추지가 않아. 까무러칠만한 천재적인 착상이 막 무궁무진하게 쏟아진다니까. 그래서 지금 이렇게 이 골방에서 3주 내내 곡을 쓰고 있다네. 저기 보이지 않나. 진공관 앰프, 공중 부양 스피커, 마법의 악보 재생기. 그리고 지금 들리는 음악은 내가 어제 완성한 곡이야. 어때? 괜찮지 않나? 따끈따끈한 신곡이라네. 이번에 이거 발표하면 아마 인기를 한몸에 독차지하고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을 꺼야. 왜, 내 말이 믿기지가 않나? 두고 보면 알게 될 꺼야. 말러도 다 내가 가르쳤어, 그 녀석 참 어지간히도 말 안 듣는 장난꾸러기였는데, 많이 컸지. 아아, 반응이 너무 좋으면 어떡한담? 황금마차는 물론 하루 한 명씩 365명의 후궁들이 문제겠어? 기가 막힌 성이라도 사야 하지 않겠나. 그게 다 여기에 뭔가가 있기 때문인가 봐, 그래서 그런가 봐. 정확히 어디서 전파를 쏘는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꿀 같은 탁월한 발상이 쉬지 않고 분출되고 있다네. 허허허!」
    「선생님, 그런데 어, 음,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한마디 여쭙자면, 어, 지금 나오는 음악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작곡한 음악 같은데요... 네......!」
   「아니, 이럴 수가! 자네 내 이름 어떻게 알았나? 오, 신기한데! 와, 놀라워! 우리 악수 한번 하세. (노인은 악력이 대단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불편함이 있었는지 겉으로는 웃고 계셨지만 내심 속으로는 심각한 듯 했다. 또 같이 악수한 A는 완전 울상이었다) 음, 나도 낌새를 느꼈다네. 이래뵈도 내가 눈치가 빨라, 그럼. 이 자리가 욕심나나? 언제 여자친구랑 같이 한번 오게. 대번에 탁 보고 내가 눈치껏 회장님으로 모실 테니 말이야, 굽신굽신 감언이설 딸랑딸랑 그거 내 전공이야. 나 정말 처음부터 이 친구들이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어디서 가르침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영험한 기운이 느껴졌어. 다 알고 있었다구, 저 멀리서 가까이 오는 게 보였으니까, 허허허. 관상도 정말 보통이 아니구만. 어허, 눈매도 부리부리하고, 시대를 잘 타고 났어. 또 잘 컸어. 그래 정말 그래. 지금 우리의 만남도 어째 운명적인 듯 한데. 절대 애정 없는 결혼 생활 뭐 그런 어색함과 애잔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럼.
   혹시 돌팔이라고 오해할까 봐 한마디 하겠네만, 음, 자네 친구 중에 혹시 닉이라고 있지 않나? 있어? 없어? 아니면 하인츠? 뭐 케첩? 뭔가 내 공상 속의 수정구에 읽혔는데, 아닌가, 잘못 읽혔나? 뭐 그럴 수도 있어......」
   여기서 자신이 살리에리라고 말했던 경비원인지 예술가인지 불분명한 노인의 대화 내용을 줄인다. 왜냐하면 그다지 중요한 말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확인할 수도 없고, 어쩜 거의 낭설이나 흔한 풍문 같았으니까. 뜬소문도 아니고 출처도 방법도 어투도 모두 이상하기만 했다. 조금만 더 들어 보면 뭔가 있을 듯한 예감을 덩실덩실 예열시켜 놓기만 했고, 정작 꼭 전달하고 싶은 할 말이자 전하고 싶은 소중한 용건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노신사의 발언 가운데 백미는 그것이었다. 모두 쓸데없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것이다. 곧 닉의 출연을 노인이 맞춘 것이다. 이름까지도. 말하는 동안 계속 우는 아이 젖준다는 둥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둥 말끝마다 친구니 인생이니 세상이니 뭐라 뭐라 하시더니 뭔가 찬사랄까, 어떤 복채에 대한 흥정의 기분을 알아주라고 자꾸 보채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까닭이 뒤늦게 노인과 이별한 후 정문을 통과하고서야 밝혀졌다. 그 결별 다음에 곧바로 재회였다. 닉과의. 즉 그들이 건물의 출입구로 들어가서 1층 대합실 앞에 잠시 멈추어서 그곳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피는 동안 안내 데스크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반쯤 혼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말 까무러치지는 않았다.
   건물 외부의 경비원과 헤어진 후 건물 내부에 들어서니 거기서 혼자 경비원 역할극을 하고 있는 친구는 바로 닉이었다. 오, 저런!


   8

   「얘들아,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걸까? N이 여기 왜 있는 거지?」
   「오늘 아닐까? 오늘 해가 동쪽에서 떴는데 다시 동쪽으로 지지는 않을까?」
   「그러니까 쟤가 여기 왜 있냐고. 원래 우리가 만나러 찾아갈 차례인데 말이야. 의욕을 잃게 만드는군. 사람 허탈하게시리.」
   여섯 명 친구들은 이제 제임스를 만나기 위해 건물의 제일 윗층까지 올라갔다. 건물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계단을 이용했다. 그들은 스카이라운지에 도착했다.
   그 층은 다른 층도 그렇겠지만 내부에 아무런 집기가 없었다. 하지만 저 끝에 책상이 하나 보였고, 그 앞에 소파들과 탁자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가까이 그곳으로 접근하는데 한참 걸렸다. 책상 앞에 가니 푹신한 사무용 의자 하나가 있었고, 사람이 앉아 있었으며, 그것은 뒷모습만 보였다. 뒷모습? 응. 그러더니 의자가 180도 빙글 돌더니 그들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그는 제임스였다. 변장한 누구도 없었고 속임수도 없었다. 가제트 형사의 앙큼한 고양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침묵을 고수했다. 그리고 정적만을 강조했다. 너무 허무하고 너무 재미없는 일이라서 비공개로 남겨놓을려다가 그것도 왠지 그릇된 처사일 꺼 같아 사실을 밝히는 바이다. 있는 그대로. 지금 이 장면이 훗날 어떤 사건과 연관된다거나 당분간 여기가 그들의 아지트로 쓰이는 그런 잠꼬대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아조 그냥 썰렁한 분위기와 냉혹한 효과음만이 흥건했다. 즐거움은 아득했고, 기쁨은 먼 나라의 얘기였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남은 행선지가 하나 있었다.
   하워드가 알고 있는 비밀 사조직. 그들은 그곳을 향해 떠났다. 곧 그 상황에서 진행 방향 그대로 7+1을 향해 가느냐, 모두 흩어지느냐, 아니면 다시 거꾸로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집으로 돌아가느냐, 그 가운데 첫째 방법이 선택된 것이다. 와우~ 와우~ 와우~ 와우~!


   9

   「말했냐?」 H.
   「뭘 말해?」 M.
   「말 했냐고. 저번에 너한테만 들려준 그 얘기.」 H.
   「그럼 말했지. 말하지 말라는 말, 너가 한적 없잖아?」 M.
   「그걸 말하면 어떡하냐 이 멍충아! 그냥 우리끼리 웃자고 한 얘긴데. J 몰라? 또 믿는다니까. 아 정말 미치겠네. 얘 정말 큰일낼 애네.」 H.
   「그게 뭐가 웃자고 한 얘기야? 난 지금도 그때 당시 설레던 가슴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는데. 지금 우리 그곳으로 가는 거 아니냐? 쟤들 봐봐. 지금 우리를 멀뚱히 쳐다보면서 뭐라 그러겠니? 또 그런 신기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실을 알려주면 얼마나 실망하겠어? 그냥 체념하고, 쿨하게 털고 웃을 꺼 같아? 내가 봤을 때는 뭐라도 하긴 할 꺼 같은디. 무엇보다 나도 믿으니까 조금 강조하고 살을 붙여서 얘기해준 것 뿐이여. 알겄냐? 그게 다랑께. 그래. 그게 다라고.」 M.
   「너 바보냐?」 H
   「내가? 아니. 난 천잰데. 늬가 바보 아니냐?」 M.
   그들 일행이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H와 M은 잠시 할 얘기가 있다면서 다른 친구들을 주차장 저 멀리로 먼저 보낸 후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분위기 심각해졌다. 그들을 보는 친구들도 몹시 궁금해서 자기들끼리 쟤들은 무슨 일로 저리 옥신각신하고 있는지 추측하고 상상하며 슬슬 즐거운 몽상에 편승하고 있었다. 반대로 H와 M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사태가 호전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 정말 왜 그래? 어?」 H.
   「뭐가 왜 그래? 늬는 진짜 왜 그러는데?」 M.
   「왜긴 뭐가 왜야? 다 뻥이라니까. 모두 다 거짓말이라고. 몇 번을 말해!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구먼. 꽉 막혔네. 나 원 참, 답답하다 답답해. 아아, 우우, 오오! 우리가 나눈 잡담은, 모두, 농담이었어. 농-담! 어? 내가 다 지어낸 가짜라고. 그런데, 그런데 늬 말발에 진지하게 쟤들에게 말하면 귀얇은 저 녀석들은 이제 막 공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미 파랑새는 찾은 거나 마찬가지라면서 로또 복권 당첨금을 받으면 그 돈으로 뭘 할지 고민하고 있을 텐데, 이게 아무 일도 아니야? 어? 너 어쩌다 이렇게 사람이 무책임하게 변했니? 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사람이 그렇게 변했어? 어? 너, 순진했잖아? 어? 너 옛날에 이런 애 아니었다고! 사익을 추구하며 성공에 도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멀쩡한 밥벌이를 하다가 별안간 비영리 조직에 뛰어들게 된 계기 같은 깨우침이라도 있었니? 특별한 사건 그런 거. 아니잖아! 애절한 사랑에 실패하여 타인을 돕는 과업에 종사하게 된 것도 아니고, 왜지? 내가 아는 트라우마는 딱히 없는데... 여성 잡지 1에서 2로 변하는 동안 겪게 되는 매우 드문 비참함이랄지 앙칼진 다짐 같은 일을 바보처럼 풀어낼려는 의도도 아니야. 넌, 음, 아무래도 넌 그냥 바보 같아! 나쁜 뜻으로 멍청이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을 연필로만 쓸려고 하는 바보, 바보만 빠진다는 사랑을 애달파하는 그런 바보. 너 최근 그런 꿈 꾸지 않았냐? 꿈에서 시험 같은 거 봤지? 남들은 다 OMR 카드에 전용펜으로 기입하는데 너는 초-미세한 뾰족 샤프펜슬로 입력할려니까 진땀을 빼다가 그러다 시험장이 아르키메데스의 목욕탕으로 바뀌는 그런 꿈. ...... 어째서... 기억나니? 알잖냐, 늬 별명, 머쉰! 내가 그거 괜히 지어준 게 아니라는 거, 다 알잖아? 아아, 마력도 있었어. 그렇다구.」 H.
   「잠깐만! 늬가 했던 얘기들이 다 지어낸 허구라고? 진짜야? 정말이냐고. 정말 다 뻥이었어? 진짜 아니었어? 난 찰떡같이 믿었는데! ...... 그래서 생각하는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고. 오, 이럴 수가!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어? 어떡하지? 어?」 M.
   「어떡하긴 뭘 어떡해! 사실대로 말해야지.」 H.
   「안 돼. 그러면 안 된다니까. 저들의 순수한 그 천진난만한 눈망울을 보면서 그들의 청초한 꿈을 깨트리라고? 난 못 해. 할려면 늬가 해! ...... 아니 그냥 이대로 갈까? 그냥 방향을 틀까? 뭐 나체교 그런 게 진짜 있다고 꼬드길까? 어때? 어? 대충 그림 그려지지 않냐?」 M.
   그들은 끝끝내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 입에 맞는 떡은 없다더니 진짜 없었다. 가만 있는 들판을 원망할 수도 없었고, 인생이 자꾸 꼬이는 것만 같았다. 세상은, 일생에 한 번은 좋은 날이 있다고 하는데 그 좋은 날은 오늘이고, 오늘은 바로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일곱 명의 친구는 멍하니 터벅터벅 걷고만 있었다. 그때 저기서 왠 마을버스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섰다. 거기가 마치 정류장이고, 그들은 한참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친구들은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는데 H와 M은 심상치 않은 눈빛이 오고가더니 자연스럽게 탑승하자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먼저 차에 탔다. 그러니 친구들도 따라서 승차했다. 그리고 버스는 출발했다.


   10

   버스에서는 모차르트의 어느 오페라 아리아가 틀어져 있었다. 빈자리가 적당히 있었고 승객도 그랬다. 그런데 어째 이 차는 마을버스가 아닌 듯 했다. 그리고 벽에 붙여진 행선지에는 선명하게 어떤 세상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고단함을 전해주는 듯한 명칭이 또렷하게 적혀있었다. 천국 아카데미라고!
   그래서 이번에는 H가 긴장했다. 바싹 목이 탔다. 식은땀도 났다. 혹시 저건 정신병원의 이름이 아닐까, 라고도 생각했다. 대책은 없었다. 일이 어떻게 되가는지 종잡을 수도 없었다. 염두에 둔 복안도 없었다. 갈 데까지 가 봐야 할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물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장나도록 거짓을 참이라고 우겨야 할 어느 선량한 책임감과 신비로운 직분을 느꼈다. 그는 혹시 어쩌면 인생은 정말 별거 없다는 말이 썩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라는 심상이 대두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주사위는 던져졌나 보다. 선택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나버린 듯 했다. 하지만 다가올 축복이 행운일지 불행일지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뭔가 께름직한 의심은 결코 잦아들지 않았다. 설마 이건 몰래-카메라일까? 뭔 카메라? 그건 TV에나 나오는 쇼일 뿐이다. 그들은 코메디언이고 연예인이며, 자기는 예술가고 친구들은 그의 뻥에 쉽사리 속아넘어간 우매한 소년이었다. 미련은 먼저 나고 슬기는 나중 난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그런데 또 청춘의 마성에 힘입어 스무살에서 점점 나이가 어려져서 전기 기타의 플랫을 깎는 조각가가 된 듯한 감성도 느껴졌다. 어디로 가든 지옥만 아니면 되고, 장래의 결과는 개 콧구멍으로 알고 현재를 즐기면 그만인 것 같았다. 이 세상에 좀비가 어딨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최종 목적지는 아마도 환상 학교일 것이다. 행복과 낭만과 신비가 그들을 영접할 것이다. 끝장나게 말 잘 듣는 나체교도들과 알현할 수도 있다. 미지와 비로소 조우하게 된다고 이미 맹신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도착할 곳은 실망과 좌절과 비현실보다는 청혼과 장미와 왕관과 회전목마와 시인의 분위기와 가까울 것이다. 기쁜 기대감은 엔돌핀을 불렀고, 그의 연인 도파민은 즐거운 예감과 왈츠를 추고 있었다. 대망의 실현이 눈앞에 당도한 듯 했다. <사랑은 없다─사랑을 믿는다─사랑은 꿈이다>가 영원한 사랑으로 재탄생할 것만 같았다. 옷이 날개란 말은 진짜였다. 약간 의자에서 2~3센티미터쯤 공중부양이 된 듯 했다. 이제 유체이탈만 기다리면 될 일이라고 여겨졌다. 독심술을 터득했다. 백안의 신이 됐다. 천리안은 기본이고, 큐피트의 화살은 다름 아니라 바로 윙크였다. 하트 뿅뿅, 애인이 되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애처로움과 모든 숙녀들의 애달픈 마음과 고고한 아가씨들의 부적절한 흥분감과 연정을 인정사정없이 모두 빨아들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지 말란 법도 없다. 이미 마음이 보이고 생각이 읽혔다.
   차 창밖으로는 첫사랑의 미풍이 불었고─이성을 처음 만날 때는 항상, 당신은 나의 첫사랑이라는 단골 유행어처럼─첫키스의 오색찬란한 꽃들이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고양이가 인간의 말을 했고 새들은 유행가 곡조를 부르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천사의 미소가 보이는 듯 했다. 온갖 선녀들이 대기중일 것이다. 꿈을 초월한다 초월한다. 포근한 포옹에 정신이 혼미하다 혼미하다.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다 없다. 어여쁜 내 님과 춤을 춘다 춘다. 만물은 새로워진다 새로워진다. 지겨운 일상이 재미있어진다 재미있어진다. 권태도 흥미롭다 흥미롭다. 인생이 신기하다 신기하다. 세상은 놀랍다 놀랍다. 달은 수줍어하고 별은 부끄러워한다. 그대는 한떨기 장미다 장미다. 당신은 머리에 꽃 꼿았다 꽃 꼿았다. 나체의 축제 그 한복판에 당도하는 상상을 한다 상상을 한다. 날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모두 다 사랑하리 사랑하리.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사랑한다. 구름을 탄다 탄다. 너는 선풍기고 너는 진공청소기고 너는 환상 복권이고, 너는 마침내 머신이다 머신이다. 흉내내는 것이 즐겁다 즐겁다. 따라하는 것이 기쁘다 기쁘다. 사람은 아름답다 아름답다. 하늘에서 햄버거가 내린다 내린다. 화장하면 예뻐진다 예뻐진다. 당신은 젊어진다 젊어진다. 나 잡아봐라 나 잡아봐라. 동심을 찬양한다 찬양한다. 허풍의 귀재가 된다 귀재가 된다. 그것도 어디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독보적으로, 경이롭게. 요술의 신이 된다 신이 된다. 슬픔의 눈물조차 다이아몬드로 변한다 변한다. 예술은 길고 인생도 길다 인생도 길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시선을 마주친다 마주친다. 포옹한다 포옹한다. 키스한다 키스한다. 애무한다 애무한다. 옷을 벗는다 벗는다. 안는다 안는다. 부드럽다 부드럽다. 포근하다 포근하다. 아늑하다 아늑하다. 흥분된다 흥분된다. 미치겠다 미치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런, 젠장~!
   버스는 종점에 도착했다. 깊은 산 속에 공장도 아니고 학교도 아니고 마을도 마술 교습소도 아닌 어느 이상한 건물이 보였다. 이때 버스 기사 양반이 일어나서 문을 열고 뒤돌아선다. 그리고 감미로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천국 아카데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순간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이 기절했다. 왜냐하면 운전수의 이마에 눈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H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잠시 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깨어난다. 그래서 툭툭 털고 일어나서 차 바깥으로 나가며 하얀 봉투를 건네 받는다. 안에 돈이 들어있을려나...? 무슨 수당인가? 그럴 지도!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친구들은 모두 지고지순한 기쁨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따라서 이제 남은 일은 깊은 숲 속에 위치한 요양소에서 H를 교주의 왕좌에 앉히고 한바탕 쇼를 연출하는 일만 남았다. 나체교? 쉿! 지금은 1차 실신, 그때는 진짜 2차 (떡)실신!
   그러나 계획은 변경되었다. A 계획은 무산됐고, 계획 B가 선택됐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11

   원래 세웠던 계획은 이랬다. H를 놀래켜주기 위해 다시 그 버려진 건물로 가서 꼭대기층에 올라가 의자에 앉히기. 그러나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방치된 건물까지는 잘 왔는데, 그런데 그것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짜 하늘에 띄워졌기 때문이다. 미완성 건물은 더이상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또 뭔가 속임수가 있지 않을까, 없었다. 아예 의심도 할 수 없었다. 너무 빈틈없는 실제라서 뭔가 억울했다. 그러나 여기서 H는 미리 작은 불가사의에 대해서 기절이라는 선행 체험을 했기 때문에 일종의 예방주사를 맞은 것처럼 또 무슨 장난이 있겠거니 예측하면서 외계인아 나와 봐라 우리 같이 놀아보자 하면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진짜 어안이 벙벙해지면서 자기들이 어디 잡혀가는 것은 아닐까,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당혹감을 넘어서서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신비감이 그들을 감싸안았고, 온몸의 털이 삐쭉 서는 것만 같았다. 모험이고 뭐고(나발이고?) 일상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미스테리, 안중에도 없었다. 심심함이 그리웠고 따분함이 좋았다. 오오, 지겨움이야말로 천혜의 길조였다니! 그 일은 도저히 분수에 맞지 않는, 인간의 율법으로 이해되지 않는 어느 우주의 섭리가 느껴지는 장엄한 일이었다. 이건 진짜 저편의 신호일까? 다시, 다시 SF 영화 시리즈를 탐닉하고, 엄한 낭설들을 찾는 탐구 생활에 빠지고, 불가사의에 대한 정보를 탐지하며, 신비주의를 탐색하고 예언가를 찾아 오지를 탐험해야 하는 것인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아차 낙원의 변방 역시 탐문해야만 하나, 생각이 많아졌다. 아마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재탐방하러 온 것일까, 탐사할 구실이 필요했나, 라면서. 모두들 왜 하필 우리야, 그랬다. 그러나 H는 무덤덤했다. 그냥 배가 고팠다. 피자도 먹고 싶었고, 고기도 먹고 싶었다. 정말 이 지구상에 괴생명체가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되는 일이다. 달의 내부 공간이 비었다고? 웃기고 자빠질 억측이다. 진짜 엑스맨이 지구인으로 살면서 외계에 정보를 전달한다고? 그건 억지고 그건 꼬마조차 믿을 수 없는 뻔뻔한 거짓이다. 그런데 저건 대체 뭐란 말인가? 눈앞에 떡하니 떠있는 저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냔 말이다. 멋졌고 경이로웠으며 신기하고 놀랍고 무한정 신비로웠지만 뭔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짐짓 다시 천동설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모른 채 하며 집으로 직장으로 현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허나 싱그런 복숭아빛 탐스런 사과향의 저녁 노을은 멋졌다. 별도 총총히 빛나기 시작했다. 꼬마들이 도화지에 그린 그림도 아니고, 어른이 백지장에 끄적거린 낙서도 사랑의 속삭임도 꿀밤맞기 내기도 아닌 도저히 어떻게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이었고, 코앞에 실존하고 있었다. 인정한다. 인간은 침팬지의 사촌이며, 기린과 코끼리와 하마와 고래를 보면 약간 공룡의 기분이 든다는 점은. 그러나 녀석들은 공룡이 아니다. 그들은 멸종했고, 무거운 건물은 하늘에 뜰 수 없으며, 사람은 물위를 걷는 게 불가능하다. 이건 설마 마술일까? 설마 저건 웜홀인가? 낸들 아나! 무슨 반물질 그런 거? 다 이론일 뿐이다. 아니면 그들이 미쳤나? 멀쩡했다. 당분간은 특정 장르의 예술 작품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단 자리를 뜨기로 했다. 팔자 소관으로 부닥친 우연도 아니고 운명의 장난도 아니다. 숙명이란 단어도 짜증난다. 그런데 초현실이다. 와우! 앗, 잠깐... 그러면 내일부터 갑자기 없던 초능력이 생길까? 아마도 희망 사항일 것이다. 설명이 불가능하니 자리를 피하는 게 옳은 일인 것 같았다. 만약 상대편과 만나게 된다 해도 차라리 오해의 소지를 만들지 않는 것이 현명할 듯 하다고 생각했다. 장난스럽게 또 예술적으로 상상하고 꿈꾸며 바래왔던 그런 동경심과는 어쩌면 전혀 다른 무언가가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하게 엄마나 아빠와 사랑하는 그대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추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자신들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파다닥 떠오른 직감 때문일까?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런지는 몰라도 이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만 같은 황홀한 느낌에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더불어 그들은 이 추상적인 사건에 대해서 평생 함구하기로 결의했다. 그걸 뛰어넘는 뭔가 의미심장한 까닭이 있다면 몰라도. 또 하나. 소년이 되기로 결심했다. 다시 더 하나. 계속 하나 더. 이 비밀을 평생 추적할 것. 성과는 기대하지 말 것. 그러나 잊지도 말 것. 지구에 대한 신비감이랄까 어떤 모종의 호의가 많이 증가했다는 것. 언제까지 갈지는 몰라도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체가 한층 더 좋아졌다는 것. 예쁜 꽃 한송이도 들꽃도 잡초도, 쉬운 단어와 어려운 어휘조차 영혼이 있지 않나 조심스러워졌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이 번득이는 영감을 화폭에 담거나 글로 쓰거나 음표로 옮기기 위해 현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워드의 집에서 카드 게임을 한판 하고 각자 생활로 돌아가기로 했다. 한겨울에 봄바람이 불었다. 훈훈했다. 꽃이 만발했고 나뭇잎은 푸르렀다. 하늘은 노랗고 먼 산은 파랬다. 그들이 본 기적이 행여 꿈은 아니기를 빌었다. 집힐 듯 집힐 듯 거의 집힐 듯 하다 잡히지 않는 선망이 진정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억뿐이나마 즐거웠고 어딘가에 고마웠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드디여 순간은 영원이 되었다. 마침내 시간이 엄청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나 기뻤다. 찬란했고 전율했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가슴이 떨렸고 두근거렸다. 코끝이 찡했고, 감동이 밀려왔다.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환청이었다. 환호성을 외치는 열광하는 관중이 보였다. 환시였다. 상상이 현실을 요리하는 듯 환각에 몸이 떨렸다. 그러나 그 모든 게 헛것은 아니었다. 또 동시에 헛것이었다. 마침내 그 언제까지라도 간직하고픈 하나의 비밀이 생긴 것이다. 섣불리 발설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몰래 흘린 눈물, 찬미할지어다. 설혹 가난한 시기를 거칠지라도 더 이상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라도. 이것은, 그것은, 이 경험은 바로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가 드리겠소, 와 같은 사랑이었다. 지금 장난하냐, 너 바보냐, 그런 물음은 쏙 들어가버린 것이다. 어느새. 어쩌다가. 저절로. 우연히 말이다. 아득했다. 그들은 나비가 되었다. 아이언 메이든! 제2의 자아는 탄생했고 날개를 펼치고 너른 세상으로 날아가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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