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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7. 2. 15.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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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자, 노래를 부르자 그림을 그리자, 청춘의 달콤한 사랑에 대해서.
   공감각을 혼미하게 만들고, 행복의 송가가 울려퍼지는 낙원 그것을 꿈꾸는 비가로 황금 해변을 만들자.
   그러나 몸이 달아오르지는 않았다. 마음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분이여, 열망의 향연이 열리는 꿈에 그리던 열락의 경지는 아직 멀었나이까? 아무도 없는데 대체 어디다 묻고 있나!
   나는 집에서 오전에 저처럼 낙서를 끄적거렸다. 차는 커피와 녹차를 1잔씩 마셨고, 음악은 독주곡과 관현악곡으로 각각 3곡씩 들었다. 의자에서는 한 10번쯤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몇 권 읽다가 메모를 하며 생각을 했다. 집 앞에 가끔 찾아오는 낯익은 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길래 녀석에게 휘파람을 불었다. 새는 가버렸다. 괜히 그랬다. 조용히 지켜만 볼 걸. 그러다 낮이 되었다. 나는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산책을 했다. 서점에 들렸고 초등학교 앞을 거닐었다. 동네에 있는 어느 피아노 학원 앞을 지나가는데 그날 따라 쇼팽의 즉흥 환상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학원장이 술을 끊은 것일까 아니면 특별 강사를 초빙한 것일까. 남의 일에 신경 끄고 나는 해변으로 갔다.
   그곳에서 나는 파도타기를 하는 친구들을 구경했고, 그날은 조금 추웠지만 일광욕을 감행했다. 다행히 감기에는 걸리지 않았다. 침체된 기분이 약간 호전되는 것을 느꼈다. 일광욕을 마친 후 집에 가서 공포 영화를 볼 계획으로 말미암아 약간 들뜬 마음으로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바로 그때였다.
   내가 타고 싶은 고급 컨버터블, 그것도 똑같은 모델 3대가 요란하게 조용한 해변가의 분위기를 흐트려놓고 있었다. 연노랑색과 불가사의한 청보라색 계열 하나와 나머지 한 대는 또 다른 산뜻한 파스텔톤이었다. 그들은 적당히 근처에 주차시키고 자기들끼리 사진을 찍으며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도시에서 바람쐬러 내려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옷차림을 보니 무슨 연주회를 끝내고 온 것은 아니고, 웨딩 촬영이나 잡지 화보를 찍는지 무척 멋졌고 한껏 화려했다. 대충 차려입은 나와 꽤 대비되이 보였다. 그땐 몰랐는데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내가 봐도 난 상당히 꾀죄죄했다. 그러다 그들은 어디로 떠날려고 채비를 갖추고 차를 이동하여 떠날려다가 내 앞에 멈추어서 내게 길을 물어봤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가기를 원하는 유적지를 가르쳐 줬다. 내게 말을 건넸던 아가씨는 낯이 약간 익은 듯 하기도 하고 웬 흑백영화에 나왔거나 광고 모델을 닮은 것도 같았다. 그들은 떠나갔고, 한참 후에 나는 아하~ 하면서 가물가물했던 기억 속 필름과 연상되었던 심상이 겹쳐져서 최종 선정된 아는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에 혼자 조금 기뻐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귀 위로 넘기면서 내게 길을 물어봤던 그 숙녀는 바로 척키2를 닮은 것이다. 한때 나와 내 친구 척키의 우정 사이에 불쑥 뛰어들었던 불청객이었던 그녀. 그때 그 여인과 좀 전의 그녀는 약간 닮았다. 그러나 예전의 척키2는 그분께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실상 정면이 영 묘사하기 까다로웠고, 그래 젊음에 기인한 아름다운 자태였고 뒷모습마저 썩 애매했다면 저기 저분은 같은 얼굴형이더래도 이쁜 축에 속했던 것이다. 뭐 가슴 조릴 사랑의 예감도 아니고 과장된 추억의 폭로도 아닌 그냥 잊고 살았던 어여삐 여길 기억일 뿐이었다. 별 중요한 일은 아니었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후 집에서 영화를 봤고, 맥주를 마셨다. 또 1회용 식품을 먹었고, 광고 전화를 1통 받았으며, 달력에 일정 하나를 적어넣었다. 그러다 나는 낮에 잠깐 봤던 그 아가씨를 떠올렸다. 그건 교태였나? 그 아양은 대체 어디서 배웠지? 설마 선천적인 재능으로? 머리카락을 넘길 당시 그녀의 팔랑귀가 쫑긋쫑긋, 코끼리 날개가 팔랑팔랑거리는 환영을 떠올려봤다. 그녀가 내게 유령의 술수를 부렸을 리도 없고, 큐피트의 화살통이 비워질 만큼 대단한 사연이 생긴 것도 아닌데 그냥 헛생각이 지나쳤던 모양이다. 그건 탐스런 첫인상도 아니었고, 탐미적 사랑 역시 아니었다. 만약 내가 유부남이었고, 옆에 내가 애호하는 용어로는 공주님 타인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명칭으로 여편네가 내 눈치를 살폈다면, 만일 그랬다면 이 인간이 속으로 골똘히 뭔 딴생각을 하는지 퍽 궁금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 나는 지금 자유인이었고, 또 가난뱅이였다. 그렇다고 내가 야릇한 속셈을 품었던 것도 아니고, 새색시야 새색시야 새색시야 하면서 최면술을 함부로 오용한 것도 아니니 딱히 남부끄러운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그날 하루가 그냥 조용히 마무리될 것이란 내 예측은 심하게 경솔했다고 판명되는 일이 별안간 벌어졌다. 나는 잘려고 딱 잠자리에 누웠는데 마침 그때 쿵쾅쿵쾅 클럽 음악이 울려대기 시작한 것이다. 일어나서 창밖을 보고서 알게 됐다. 첫째 옆집에 이웃이 이사왔다는 것, 둘째 낮에 봤던 3인방 컨버터블이 그 집 앞에 세워져 있다는 점을. 그것은 007 가방이 뒤바뀌는 우연과는 달리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한적한 시골에 똑같은 차들을 타고 와서 소란을 피우는 스무살 꼬마들이 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추호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러면 음 가만 있자... 저분들이 다 여기서 살 것 같지는 않고, 생각을 해봐야겠다. 척키2가 이웃일 가능성은 50 대 50이었다. 뭐 그러든가 말든가. 자기들끼리 오붓한 시간을 갖고, 나는 숨은 진주를 찾아 꿈나라로 떠나면 그만이었다. 때마침 우렁찼던 음악 소리는 차츰 줄어들다가 조용해졌다. 동네 인적이 드물고 교류하는 이웃이 없던 찰나 새로운 인물의 출연이 반갑긴 했으나 어떤 고단한 고투를 겪게 될지 무슨 우스꽝스러운 기싸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괜한 기대와 대기만성형 예감을 가라앉히고 나는 겨우 꿈나라로 떠났다.


   2

   날아 바꼈다. 그리고 이웃이 출현한지 3일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나는 창작의 소임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나는 망원경을 들고 동네에서 제일 높은 동산에 올라가서 옆집의 동태를 살필려고 했다. 그러나 망원경은 내가 무인도에서 잃어버렸는지 어쨌는지 찾아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즉시 인터넷으로 새로운 망원경을 주문했다. 4일 후에 망원경이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한 박스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망원경이 아니라 거짓말 탐지기가 들어있었다. 이건 나보고 수사관 놀이를 하라는 건가 아니면 예능 프로그램을 혼자서 따라하라는 것인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물건을 반품하지는 않았다. 나중 언제 유용하게 써먹을 수도 있을 것 같고, 나는 왜 그동안 이 장난감을 갖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살짝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나는 세상 모르고 뛰노는 아이들의 무리에 뒤늦게 합류한 개구쟁이가 된 듯한 존귀한 착각 때문에 슬쩍 기분이 고조됨을 느꼈다. 미리 준비해줘야 하나? 나중 이웃과 친해지면 덕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나중 잔치상 앞에서 술잔을 들고 실토할 일이 있을려나, 앞으로? 혹시라도 도리어 바보 취급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니 괜한 웃음 욕심은 자제하기로 했다. 게다가 아직 어떤 인간이 내 이웃인지 확인도 못하지 않았나. 설레발은 금물이다. 이제 근엄해질 때도 됐다. 늠름한 사내가 방정맞은 공상이 다 뭔가!
   그러다 8일째 되는 날 나는 이웃과 만나게 되었다. 그날 역시 바람이 쌀쌀했다. 그러나 나는 꿋꿋이 침낭 속에 들어간 채로 우리 집 수영장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척키2는 몸에 착 달라붙는 섹시한 운동복을 입고서 뛰면서 운동을 하던 중 우리집으로 막 들어왔다. 한 30센티미터짜리 야트막한 울타리를 칠려다가 그건 별로인 듯 해서 내버려둔 잡동사니 위를 번쩍 뛰어넘드니 곧바로 내게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군요. 그래도 초면은 아니죠? 그럼 다음에 또 뵈요.」
   급작스런 현현에 이어 그녀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냉큼 떠나갔다. 무슨 대답할 틈도 없이 가버리길래 설마 우리 사이에 어느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분이 몹시 의뭉스럽게 뒤엉켜버린 분위기만 남았다. 그래서 나는 의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녀와 어떻게든 친해져야 내게 득이 되고 행운이 찾아올까? 아니면 어쩌다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으면 차갑게 인사를 마지못해 받아주는 식으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작전으로 상대해야 할까? 나는 그 쓸데없는 두 가지 의견을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 후로 나는 척키2와 묘하게 마주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우리는 동선이 겹쳤던 까닭으로 그랬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멀더가 운영하는 찾집에서 잠깐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그녀는 자기가 소설가라고 했다. 통성명은 나눈 것이다. 우리는 창밖을 보는 1인 좌석에 앉아있었다. 그래서 각자 창밖을 향하여 할 일을 하면서 듬성듬성 말을 나눴고, 또 한동안 말없이 글을 쓰거나 인터넷 검색을 했다. 그러다 다시 소셜 네트워크를 둘러보다가 간간히 말을 나눴다. 나는 그녀가 혹시 거짓말을 하지 않았나 해서 즉시 검색해봤다. 헉! 아, 망했다.
   그건 뻥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밝히는 게 많았다. 나는 친구가 애인이나 관심가는 여자가 생겼다고 하면 이렇게 물어본다. <걔 말 많니?> 라고만 묻는다. 그외 관련하여 얘깃거리가 생기면 점차 질문을 늘여가는 게 내 방식이었다. 즉 나는 그 정도였는데 척키2는 진짜 수다스러웠고, 내세울 것도 많았고,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는 듯 했다. 경력도 투명했다. 나랑 많이 비교되었다. 무엇보다 나보다 글을 더 잘 쓸까, 라며 나는 슬슬 겁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걸 겁이라고 지칭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멍청한 자문이긴 하지만 최적화된 대답은 아마 동문서답일 것이다. 그런데 혹시 말까지 나보다 더 잘하면 어떡하지? 잘하면 잘하라고 하지, 안 웃어주면 그만이다. 그렇게 그녀의 약력을 살펴보니 그녀는 최근 상을 받았고 상금도 한 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냥 적당히 회사 다니다가 방랑을 거친 후 찾집을 운영하다 대뜸 작가의 세계로 뛰어든 것이 아니라 그녀는 학문을 3개나 전공했던 것이다. 그것도 적당한 명문대학교에서. 뭐야, 그런데 나는? 다행일까 아니면 무관심일까, 그녀는 나보고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좋긴 좋은데 또 그걸 꼭 좋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고마우면서 한편 얄미웠다. 뭐야 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옆에서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묻고 싶은 말은 <그 상금 다 어디다 썼냐, 한턱내라, 그리고 말 놔라>였지만 나는 그냥 마른 침을 꼴깍 삼키기만 했다. 그쪽에서 먼저 살갑게 굴지 않는데 내가 먼저 저자세로 친한 척 하기도 영 언짢았다고 하는 게 그 상황의 적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녀는 마법사의 준마를 탔는데 나는 무기력증에 빠진 당나귀를 모시는 형국이었다. 어렵싸리 치료되었던 허언증이 다시 도질 것만 같은 불길한 기운이 나를 잠시 떨게 만들었다. 그리고 척키2는 앞모습은 척키과였으나 옆모습은 괜찮았다. 그렇다. 옆모습만.
   아! 나는 그날부터 삼류 소설가라는 나름 자부심을 느끼는 직분을 숨기며 살게 됐다. 차라리 백수가 나을 것 같았다. 풍운아에 몽상가에 사색가에 반항아에 염탐꾼에 피노키오에 갖다댈 애칭은 많고도 많았으나 누가 물어봐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또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내가 꿈에도 모르는 일이 이미 현실일지 누가 알겠나. 장외에서 환상 소설의 숨은 실력자라고 소문이 났을지 혹시 모르지 않은가. 뜬금없는 풍설,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그러나 그건 꿈이고 현실은 가엾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나는 기죽지 않고 척키2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더욱 맹렬히 창작 생활에 몰두했다. 그런데 왜 하필 척키2가 그것도 인지도 약간 있는 소설가가 내 옆집으로 이사온 건가? 괜한데 의미부여하며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에 몇 글짜 더 쓰고 학문에 정진하기로 했다.


   3

   예상대로라면 나는 원래 자연을 예찬하며 허구를 창작하는 천직에 고마워하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척키2를 흥미롭게 생각하며 즐거워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거꾸로-맨이 되기 시작했다. 가령 나는 집에서 오빠 머머 하지마, 같은 어떤 일들에 몰입하는 내 모습을 불현듯 알아차리며 새삼 스스로 놀라는 순간이 틈틈히 발생했다. 그리고 새로 생긴 일 두 번째는 멀더의 카페에서 매일 그녀와 담백한 대화를 나누며 각자 노트북을 펴놓고 자판을 두드리는 생활이 일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나를 오빠로 부르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를 부를 때 앗 나는 그녀를 뭐라고 부르고 있었지?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피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미리 계산된 행동이라는 듯이. 불시에 그녀가 내게 물어볼지도 모른다. 오빠는 왜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나요 라고. 그러면 나도 할 말은 있다. 방금 부를려고 했다, 넌 유명인이고 난 일반인이지 않냐, 내가 어디서 감히 높으신 분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겠는가 불경스럽게 말이야, 내가 봤을 때 아무리 봐도 너는 척키2다, 나는 너를 척키2라고 부르고 싶다 라고. 아닌 게 아니라 진짜 그렇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 것이다. 잔잔히 띄엄띄엄 뒤늦게 깨우치게끔 슬며시 흘릴 수도 있을 테고. 그러다 갑자기 숙 들어가는 거지, 어이 척키2 라고. 이때부터 얘는 항상 척키2로 굳어지는 거다. 그런데 그녀는 실제 그렇게 물어왔고, 나는 저 세 가지 보기를 제외한 보결 명단에 자리한 답변을 내놓고 말았다. 척키2 까불지마 라고! 그러나 그녀는 웃었다. 나는 그녀를 웃겼고. 그녀는 무척 좋아했다. 남자 여자 사이는 별것 없다. 여자는, 웃으면 끝난다. 절반은 넘어왔고, 나머지 절반은 쥐락펴락하는 일만 남은 거다. 물론 웃음과 비웃음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썩은 미소 일명 썩소와 냉소도 분간하면 도움될 테고. 쓸데없는 얘기는 이제 그만. 그래서 나는 심심하면 그녀에게 척키2라고 불러주었다. 나도 좋고 그녀도 좋고. 어쩜 이렇게 복스러운 일이, 어떻게 이처럼 아름다운 축복이! 별의별 우연의 일치가 다 있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나는 그녀를 이웃이자 동료요 최근 친한 동생으로 여긴 것이다. 그녀는 나를 어떻게 여기는가, 에 대한 뚜렷한 (상반된) 징후는 없었다. 표면적으로만 봤을 때 첫만남이 자연스러웠고, 친해지는 과정도 무난했으며, 적당한 단계를 거쳐서 친해짐과 동시에 이미 처음부터 그것을 예감했으니 각자 감정은 꽤 괜찮은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블로그를 찾아내서 그녀 몰래 즐겨찾기에 등록해뒀다. 척키2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 테고. 만나는 사람 2명 중 1명은 의례 그러는 거 다 안다는 듯이. 하지만 내가 그녀의 블로그를 북마크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응석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비록 평등할지언정 내게 엄청난 애교 공세를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척키2는 내게 교묘한 염력을 뿜었고, 자기를 좋아하라는 최면을 비밀리에 내게 지속적으로 덧씌웠으며,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라는 썩 밉살스럽지 않은 세뇌를 지속적으로 내게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를 잠정적 애인으로 점지해 둔 것일까? 누구 맘대로!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리지널 척키 친구로도 모자라서 추종 세력 척키2까지? 아,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건 횡포다. 숙명의 채찍질일까? 아야! 아프다. 간지럽다. 그러나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싫지는 않다.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나. 허나 지적할 수는 없다. 알려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관계도가 엉망으로 변형될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불문율이니까. 또 여자 마음을 모르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고별을 종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우리는 이웃이고 동료였으며, 우리는 딱 여기까지 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의리를 지킬 것을 묵묵히 약조한 거나 다름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나를 만나면 말 한마디에 오빠라는 단어가 최소 한 번 등장했다. 1분에 5문장을 말한다, 그럼 1분 안에 오빠라고 최소 5번 부르는 셈이다.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문장의 처음에 오빠를 놓거나 문장의 끝에 오빠를 두는 식으로. 드물게 중간 중간 불현듯 오빠가 등장할 때도 있다. 예측하기 어렵게 말이다. 그러나 꼭 어리둥절할 필요도 없고 그냥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그만 부르라고 권고할 수도 없고, 나는 그냥 그녀에게 더 좋은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고운 마음과 척키2라는 고유한 진가와 그녀의 예기는 물론 들쑥날쑥한 그녀의 허영심과 온전한 애교까지 모두 사랑해 줄 수 있는 멋진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뭐 나름 나는 그녀를 천사들의 합창 바로 옆까지 인도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우리는 우정으로 뭉쳐진 것과 거의 진배없었다.
   그리고 나도 어서 환상 문학상과 상금을 거머쥐기 위해 더더욱 창작생활에 매달리기로 했다. 새파랗게 젊다는 한밑천으로는 뭔가 부족했었나 보다. 새파랗게?


   4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집에서 잠을 자다 꿈을 꾸었다.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았으나 대략 나는 꿈에서 천부적인 소질을 주체할 수 없어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작품을 시간 대비 얼마로 찍어내고 있었다. 또 발표하는 작품이 하나 같이 인기를 얻었다. 모차르트의 재래네 피카소의 부활이네 문학의 거장들이 지닌 특별한 특징들을 모두 섭렵했네 어쨌네 하면서 반응이 장난 아니었다. 천부적인 소질을 잘 살려 마침내 환상 기계가 된 것이다. 그런데 쏟아내는 작품량이 만만치 않으니 그건 거의 환상 공장이라고 불러도 썩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꿈에서 4차원의 천재였고, 초능력자였으며, 믿을 만한 예언가였다. 꿈에서 나는 그랬다. 손만 까딱하면 명화가, 입만 뻥끗하면 어디서나 웃음꽃이, 눈빛 한번이면 그녀의 마음을 절묘히 훔칠 수 있게 되었다. 욕망은 곧 작품이고, 사랑은 초현실주의, 인생은 걸작이며, 나는 현존하는 전설이었다. 생각하는 족족 예술적 착상에다 말하면 문학이고 콧노래만 흥얼거려도 음악이 저절로 탄생했다. 그것도 초절기교로. 눈을 떠도 인기요 눈을 감아도 환상이며, 눈에서는 레이저가 입에서는 화염을 뿜을 수 있었다. 손짓 하나는 요술 지팡이의 얍~이었고, 발까락을 틀면 무용가였다. 고개만 까딱해도 천상의 팡파르가 대지에 울려퍼졌으니 말 다한 거나 마찬가지다. 도대체 어려운 일이 없었다. 웃기면 희극 슬프면 비극, 어려우면 전위 못 알아먹겠다면 실패작이라는 평론가로서의 해석 역시 널리 화자됐다. 실력은 장비에 비례한다는 말마저 브랜드의 슬로건으로 쓰일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말을 참았다. 왜냐하면 관상가에 작명가에 사상가로서도 명망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뭘 해도 재미있었다. 그러다 끝이 흐지부지하다가 꿈을 깼다. 이런, 젠~장!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그걸 내가 알았다면 나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뭔가 지금보다는 더 반짝이는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별다른 요행을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에 복권은 사지 않았다. 꿈에 나온 이야기를 글로 쓰지도 않았다. 단지 인터넷에서 예지몽에 관해 조금 검색해보다 말았다. 현실의 금은보화가 아니라 금기시된 야한 모험을 꿈에서 이루어보고 싶었냐고? 아니다. 천만의 말씀! 나는 그냥 미래가 조금 궁금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척키2에 비해 내 약력이 너무 초라하다는 것을 절감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어떻게 대학능력시험을 다시 봐야 하나 아니면 파란만장한 경험을 쌓아야 하나. 썩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척키2가 혹시 물어보더라도 대충 둘러대면 그만이다. 풍족하기만 하다면 백수도 그리 나쁜 본분은 아니다. 그냥 할일이 없는 것보다 대망이 잠자고 있다는 핑계에 그칠지라도 말이다.
   기껏해야 개꿈일 뿐이라며 허무맹랑한 공상과 미련한 몽상, 뚱딴지 같은 상상은 당분간 자제해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정말 그 개꿈이 어느 천운의 실현을 달성한 것일까? 얼떨떨했다. 허깨비에 속았고 귀신에게 홀린 듯 했다.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세세히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척키2로부터 아양은 무한히 공급받고 있으나 그에 상응하는 박력과 마땅한 배짱도 색다른 우연도 없던 찰나 자상한 서광이 나를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즉 옆집에 또 한 명의 숙녀가 이사온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남자들이 내려와서 그들로부터 공주 대접을 받기 원하는 여인이 부럽지 않았다. 은닉된 보물, 원하는 이상향이 아니다. 나는 권태의 감옥에서 석방됐다. 가공할 타성은 즉석해서 청산되었다. 악운은 나를 비켜갔고, 풍류를 재촉하고 무지개에서 미끄럼틀 탈 일만 남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정말 나는 황홀했던 것이다. 으흐흐, 으흐흐흐흐!
   옆집 여자는 이름이 천사였다. 왠지 모르게 그 때문에 척키2가 혹시 악마와 연관된 것은 아닐까 살짝 걱정됐으나 호기롭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읊지 않을 수 없었다.
   「귀신에 홀린 것이 분명해. 틀림없어!」
   머리가 띵하고 가슴이 떨려왔다. 점점 생활이 하이틴 드라마풍으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슬럼프에서 탈출할 것을 예감했다. 왜냐하면 양쪽에 사는 얘와 쟤와 함께 부딪히고 노는 얘기를 과장한다면 시나리오 한 편 가볍게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구원받은 것일까 환생한 것일까? 또는 이제야 정상 궤도에 올라간 것일까? 어쨌든 양편에 미녀들을 꿰차고 있는 주인공을 영화에서만 보다가 어딘가 모르게 내 처지가 어쩌면 약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멀쩡했다. 그러나 미친듯이 활력이 솟구쳤다. 이러다 잠을 자지 못하고 거리를 밤새 뛰어다닐지도 모른다. 무작정 말도 안 되는 비유를 든 것도 아니다. 어두컴컴한 삶이 타기되었고, 순식간에 그냥 정상적인 삶이 파란을 수반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나도 허세보다 실속을 좋아한다. 그러나 허세도 마다하지 않겠다. 허풍의 사촌이니까. 그런데 농담이 고급스러우면 절묘한 기쁨을 안겨주지만 뻥이 저속하면 멱살을 부르고 내 인생마저 값싸게 느껴진다. 그러나 뭐랄까 꼭 8대2랄지 그런 롱테일까지는 아니더래도 실질적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되뇌이는 것 뿐만으로도 풍자도 되었다가 시적으로도 느껴졌다가 황금으로 이루어진 호박마차가 제발로 굴어들어온다면 조금 부풀리고 약간 과장해도 퍽 구박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곧, 현실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이상한 형세가 뭐 퍽 탐탁치 않은데 또 싫지는 않다, 라고나 할까. 만약 당신께서 내게 <좋소, 싫소?>라고 물으신다면 미천한 소인은 똑 떨어지게 전자를 선택하고 싶소이다, 가 명쾌하며 유일한 정답이었다. 그야말로 점점 가짜 웃음이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터득되는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5

   새로 이사온 옆집 처녀는 척키2보다 더 강하게 나왔다. 대뜸 나를 보자마자 오빠라고 불렀다. 왠지 친근한 호감이 느껴지는데 그 웃는 얼굴에 정색하며 무안함을 안겨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 처제, 왜 불러 자기, 라고 답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식 웃기만 했다. 난처하고 어중간하면 때에 따라 일단 시간을 끌면 된다. 전문가가 아마추어처럼 괜히 시간을 끄는 게 아니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남자들 얘기를 들을 만큼 들어보면 인간사 만물의 원리를 알 수 있다. 뻥치고 허세부리고 허풍 대회 출전을 벼르네 어쩌네 해도 실상은 여자가 다 알아서 한다는 것을. 여자의 마음은 애초에 남자의 상투 끝에 올라서 있는 법이다. 물론 연습이 필요한 부류가 있고 처음부터 하찮은(?) 연습 따위는 필요없는 친구들도 있다. 대충 보아도 반반이다. 50 대 50. 그건 마치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그저 야한 옷차림과 몸짓만으로 옆구리를 찌르느냐, 아니면 기억에 남는 짧은 명대사를 남기고 타인에게 그이의 주변에 이 남자 내 남자다 라고 보란듯이 먼저 선포하는 구미로 나뉘는 것처럼. 얘나 쟤나 누구에게나 그저 적당한 남자라면 전자든 후자든 공평하게 쓰윽 흘리는 형편이 반이라면 이 남자 아니면 안 된다도 역시 절반을 차지한다. 그러나 수학은 아니다. 변수도 많다. 오히려 연애의 실패가 나중 보면 나을 수도 있다. 사랑에 왕도는 없는 것일까? 남녀의 인연이 정해져 있다면 음, 그건 너무 어려운 얘기다. 아무튼 면면히 화자되고 어디서나 설명이 반복되는 여자의 마음은 쉽게 말해 진짜 이리 튀고 저리 튀기 전에 사전에 이미 그 움직임과 예측이 빠르다는 것이다. 그걸로는 여자가 100미터 경주 세계 챔피언이다. 강아지가 자기 집에 들어가지 않고 개 집 지붕에 올라선 모습은 귀엽다. 한없이 사랑스럽다. 그러나 그 강아지의 머리 위에 고양이가 앉아있는 그림을 떠올려보면 아아, 아찔하도다. 그런 것이다. 여자는. 남자들이여! (봐봐, 그 고양이 머리 위에 '톰과 제리'에 등장하는 위엄하신 생쥐의 늠름함을 떠올려 보라구요? 다시 생쥐의 꼬리는 강아지에게 잡히고 강아지는 쥐꼬리만한 봉급 생활자이며... 그렇게 빙글빙글 돌지 않겠냐고? 막 이따만한 슈퍼쥐가 없으란 법도 없지 않느냐? 오오, 딱, 거기까지만! 같이 게임해 보면 알게 됨. 초딩도 짜증낼 땐 짜증냄)
   그렇게 처음부터 오빠란 말을 쉼없이 들었지만 하지만, 앤젤리나와 나는 의례적인 인사만 나누었다. 그녀의 생기발랄함에 나의 찬사는 무색해졌고, 그녀의 고혹스런 자태에 나는 그만 넋을 잃고 당혹감에 정복당하여 머리가 띵해졌다. 처음 만나자마자 내 뺨은 붉게 물들었으며 앤젤리나는 아마 화장에 의해서 홍조를 띄었으리라. 그 빛깔의 화장술이 그녀만의 트레이드 마크인가? 뭐 두고 보면 알게 될 일. 하지만 첫 만남이 곧바로 허물없는 친구 사이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그녀에게 막 측량할길 없는 아름다움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느끼한 칭찬으로 그녀를 부담스럽게 만들지는 않았다. 물론 이렇게 저렴한 무리수 또한 던지는 일만은 아직 주저했을 것이다. 차마 내가 이런 말까지는 정말 안 할려했는데, 대체 그 미모의 비결이 뭐냐고 한번 속시원히 알려줄 수 없소? 라고. 왜냐하면 효과는 빠르지만 꽤나 상습적으로 쓰일 것만 같은 뒷맛을 남기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사람 봐가면서 조심스럽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뜻.
   곧 앤젤과 나는 두 번째 만남을 계기로 친해졌다. 우리는 처음보다 두 번째가 특별했던 것이다. 왜 하필 그 순간에 앤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는지는 몰라도 그 때문에 판도라의 상자 그 광대무변한 뚜껑이 쿠쿵~ 하며 열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충격이 발현되었고, 그녀는 내 비밀을 움켜쥠과 동시에 나를 비호해줘야 할 모성애마저 간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내게 어떤 연민까지 느꼈던 것일까? 속속들이 이미 나를 알고 있었나? 서로 얼마나 안다고! 차라리 호통을 떨구어 주셨으면! 그녀는 꾸지람도 아니고 절교도 혹평도 아닌 미묘한 웃음과 간지러운 수줍음만 남기고 떠나갔다. 바쁘신 것 같으니 다음에 찾아뵙겠다면서.
   나는 그때 예술적 착상을 위해서 어디까지나 뭔가 제2의 자아와 새로움을 공모하기 위하여 어느 에로 영화의 핵심 장면을 보고 있었다. 진짜 딱 보고 싶어서 보지는 않았다. 어쩌다 파일이 있길래 그저 확인하고 지울려고 했다. 더군다나 길게 볼 생각도 없었다. 또 실제 길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고 진지하게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참았다. 다시 말하면 최소한 그럴까 하는 갈등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작품 구상이 더 중요했다. 내 인내력은 견고했다. 아주 잠깐 한눈팔았을 뿐이다. 아주 잠깐. 그러니 내가 더 억울한 셈이었다. 재미도 없었다. 좋아하지도 않고. 결과는 꽝이었고. 가슴에 손을 얹고 사실만 따졌을 때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원색적인 뭔가를 딱 확실히 봤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드라마를 봐도 가볍게 키스하는 장면만 딱 떼어내서 보면 것도 역시 곡해할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줄거리 영상이었다. 바쁘신 거 같아서? 바쁘긴 뭘 바뻐? 내가 왜 바쁘냐고! 도대체 무슨 오해를 했길래...! 작품 감상도 아니고 그냥 간추림 요약 파일을 우연히 한번 재생시켜 본 게 다다. 나는 그래도 까딱도 않고서 어디까지나 가녈픈 선정성을 아주 태연히 작품에 활용할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가 들어온 것이다. 앤젤이! 노크도 없이. 문이 잠기지 않은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런데 불가해한 점은 이상하게 그때 우리 집에는 베토벤의 삼중주가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는 말씀. 그와 더불어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와서 책을 한 권 밝았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내가 주제넘게 그런 치밀한 계산을 미리 준비했을 리도 없다. 얼마나 값진 양서를 많이 읽길래 그 집에 가면 발에 밟히는 게 셰익스피어냐, 라는 뜬소문이라도 퍼지기를 바랬냐고? 그럴 턱이 있나! 여기서는 체이는 게 베토벤이고 옷깃만 스쳐도 환상 문학과 인상주의에다 신비한 향수라니, 그래서 나는 저 남자를 사랑하고 싶다 같은 착각에 빠지도록 미리 설정된 것 아니냐고? 오해다 오해. 내가 그런 최면술을 정말 터득했다면 나는 진작...... 아 지친다. 내가 왜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아야 하는지 너무나도 답답하고 눈물이 시야를 가린다. 누차 얘기하지만 나는 억울했다. 찬찬히 설명할 수 있었고, 조곤조곤 설득해야만 했다. 그러나 해명할 기회는 날아갔다. 아니 상대가 있어야지 서사를 말할 텐데 사람이 없어, 게다가 상황도 상황이라서 그걸 또 말로 한다는 것도 참 모양빠지는 일이야, 난제가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든 자초지종을 설명할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간 것이다. 흔적도 없이. 그녀, 앤젤리나가 내 엄마라도 되나? 아니다. 그런데 왜? 오, 이럴 수가! 난 망했다. 망해도 단단히 망했다. 많이 망했다. 폭삭 망했다. 이제 그녀 얼굴을 어떻게 본담?


   6

   보면 보지 왜 못보겠나. 상황이 근사하지 않았다 뿐이지 아무런 일체의 부조리는 없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잠시 얼굴 붉힐 일도 있을 수 있고 챙피하고 부끄러운 일들 뒤돌아보면 얼마나 많더냔 말이다.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앤젤과 나 사이에 곡해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미적지근하게 수동적으로 뭔가를 기다리는 일은 썩 모범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착한 여자로 남고, 나는 나쁜 남자로 낙인찍이더라도 나는 후련하게 말을 하고 싶었다. 당시 내가 봤던 비디오는 어디까지나 예술의 연장선이었다, 보고 듣지 않았냐, 베토벤을 듣고 셰익스피어를 툭 건드리지 않았느냐, 나 그런 사람이다, 이건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지성이 아니고 도대체 뭐란 말인가 라고. 혹시 그대는 지적인 남자를 싫어하시냐고 난 정말 따지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여자의 의중을 파악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아 그건 오해다 오해, 있는 말 없는 말 온갖 찬미와 온갖 허풍은 물론 온갖 협상의 기술을 총동원하여 뭔가 관계를 순탄하게 되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 서로 속마음을 툭 터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도 미련하게 어설픈 변명같은 잔말은 하기 싫었다. 뭐 변명?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잘못은 오히려 앤젤의 몫이다. 당연히 내가 따지는 게 옳다. 나는 무슨 사생활도 없이 살란 말이냐고. 내가 먼저 찾아가서 왜 내가 부끄럽고 송구스럽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면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이 상황의 해명을 부탁한다고, 그렇게 잘잘못을 가려야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내가 손을 내민다면 그녀는 그럴지도 모른다. 이거 왜 이래요 라고 서운한 한마디를 툭 던지면서 그녀는 그러겠지. 엄청 화난 듯이 퍼부을려다가 싹 바껴서 미안하다고, 진짜 미안하다고. 시간이 필요할 꺼라고 생각했다고. 자기도 허물을 하나 밝히겠다고. 솔직히 속사정을 하나 털어놓고 싶은 게 있었다고. 다른 거 다 제쳐놓고 당신이 너무너무 좋다고. 어떻게 술은 위스키? 와인? 그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그렇지만,
   그럴 턱이 있나! 어디까지나 어림없는 헛생각이었다.
   나는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옆 동네에 있는 기린을 보러 외출을 하기로 했다. 음지에 숨어 사는 어느 자산가가 기린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는 즐거움은 찾기 마련이란 것을 생각하며 나는 다시 기분이 흐뭇해졌다.
   나는 집을 나섰다. 그런데 얼마 가지도 않아 갑자기 태양 빛에 버금가는 어떤 찬연함에 눈이 부셨다.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김없이 그곳은 앤젤의 집이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어떻게 그냥 지나치랴. 나는 참새였고, 앤젤의 집은 방앗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순간 나는 익히 들어왔던 투시력이 나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집 안에서 그녀가 흥분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들떴는지는 불분명했다. 내 투시력은 딱 거기서 불투명으로 변질됐다. 꼭 결제를 한 후에 다시 투명으로 바꿔준다는 듯이. 나는 그것이 가증스러운 일이 아니란 것을 확인하고 싶었고, 또 내 도움이 혹시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고민없이, 망설이지 않고 앤젤의 집 그 부들부들 떨리는 손잡이를 나도 모르게 돌려서 당겼다. 어디까지나 내 손이 떠는 게 아니라 그것이 진동했던 것이다. 아마도 진동 손잡이?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무슨 4DX 기술이 적용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머나! 문이 열렸다. 허걱!
   문을 열고 내부의 분위기를 재빨리 감지하고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앤젤이 나와 동류의 인간이라거나 그녀의 행동에 대한 예상이 적중해서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첫째 거기는 고전음악도 없었고 양서도 멋진 그림이나 조각상도 전혀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 그녀의 뒷모습은 내 환상을 더없이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뒷모습만으로도 그녀가 끔뻑끔뻑 눈을 잘 뜨지 못하고 부르르 떠는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설마 파가니니의 음악을 무선 이어폰으로 들을 리는 없다고 맹신했다. 그녀는, 나보다 더해도 완전 더한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이 와중에 동작 정지 라고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지금은 기다려줘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미 내 기분은 나도 모르게 저절로 라흐마니노프의 2번 피아노 협주곡의 1악장 주선율이 흐르는 음악회장에 가 있었다. 나는 사색의 정원, 그녀는 풍문이 무성할 사건의 주인공! 사람은 살면서 일탈도 하는 것이고, 방황은 물론 곧잘 주색의 늪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어차피 피조물인데 그래야 인간적이지 않겠나. 나는 하트 에이스 포커 패를 쥔 거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더없이 느긋했다. 그 순간 만큼은 이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어쩐 일인지 나는 그녀에게 선물을 하나 선사하고 싶다는 묘안이 떠올랐다. 신제품을 포장해서 리본으로 묶는 그런 선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집에 있는 거짓말 탐지기를 왜 무심코 주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악당이 아닌 전설적인 수완가였고, 철없는 개구쟁이가 아니라 자상한 오빠였다. 그런데 나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사태 판단을 하던 찰나 의자에 앉아서 무슨 중요한 파일을 보는 것 같던 그녀가 갑자기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돌아보았다. 그때 그녀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어! 이게 아닌데...... 그녀는 앤젤리나가 아니라 얼굴이 척키2였다. 가면이 아니라 진짜 척키2! 설마 오늘은 13일의 금요일?
   그때 척키2가 나를 깨웠다. 그것은 꿈이었다. 장소는 우리 집 수영장 옆 의자. 나는 침낭 안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아,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것인데...... 아 이럴 수가, 아깝다! 오, 다 잡은 대어를 놓친 것이다.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했던 월척이었는데 오, 이런 이런 이런! 아아,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것이다.
   최근 척키2와 나는 20세기 문학 사조에 대해서 연구하는 그룹을 결성해서 공부중이었다. 함께. 약속한 시간에 내가 멀더의 찻집에 나타나지 않자 그녀는 나를 찾으러 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척키2에게 끌려나가게 되었다. 죽상을 지으면서!


   7

   척키2는 내게 물었다.
   「오빠! 비디오 잘 보셨어요?」
   「어? 뭐? 디오? 디오를 만났냐고? 내가 디오를 왜 만나! 그런데 너가 디오를 어떻게 아니? 디오는 내 친구가 아니라 가수인데. 그것도 옛날 팝송. 주옥같은 추억의 명곡을 불렀던. 이 친구 이거 이거 음악에 조예가 꽤나 깊은데 그래? 음, 아는 것도 많고 글도 잘 쓰고, 아주 팔방미인이군 그래.」
   나는 혹시 앤젤이 척키2에게 그 일에 대해서 귀뜸해줬나 라고 생각했다. 설마 전했다고 했드래도 그것은 '너만 알고 있어'일 테고, 일종의 상담이자 쉬쉬해야 할 수다에 지나지 않을 텐데 얘는 무슨 의도를 품고 그 말을 슥 흘리는 것이지...... 너무 궁금했다. 그러나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걸 어떻게 물어보나.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른 얘기를 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그녀는 알고 있을지 나는 안절부절, 그녀는 기쁨 시작 행복 두 배인 것만 같았다.
   룰루루랄라~ 룰루루랄라~ 룰루루랄라~!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뭘 그렇게나 좋다고. 내 기분이 이렇게 좋다는 것을 당신은 아셔야 합니다, 라고 웃음으로 대신 외치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한창 열심히 일하던 시절 생각이 났다. 숨은 참조에서 '숨은'을 떼어버린 것만 같았다. 숨은 참조 메일을 보내거나 받은 일, 아마 세 손가락으로 넉넉히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썩 점잖치 못한 소문의 진원지에 내가 포진하게 된 것인가, 아닌가.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 말 못할 사연이 더 부풀려지고, 퍼지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이 태산이라고 느꼈다. 좌우지간 나는 그 말을 어딘가에 외치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고.
   이때부터 우리는 셋이서 참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나는 척키2를 애호하고, 척키2는 앤젤을 흠모하며, 그리고 앤젤은 바로 나를 동정하는 삼각관계를 예상했다. 조금 베팅을 더 하자면 둘 다 나를 추종하거나 둘 다 열렬한 열애의 전 단계에 머물거나 바로 그렇게 추측했다. 처음에는. 운이 좋으면 동정을 짝사랑으로, 삶이 항상 불길한 것이 아니라면 그 모두는 혹시 우정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가늠해봤다. 소원까지는 아니지만 대략 그러지 않을까 조심스레 내다본 것이다. 인생이 항상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우리는 영화를 따라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쥴 앤 짐, 맞나? 그 영화를 봤는지 안 봤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그러나 난 나의 영특하지 않은 기억력에 실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중충한 어떤 날 앤젤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받았기 때문이다. 애드윈 A. 애보트의 플랫랜드라는 소설을. 나는 그 책을 처음 읽다 졸았다. 두 번째 독서를 시도했을 때 역시 하품이 계속됐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읽을 때마다 잤다. 하지만 앤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은 적은 처음이라고. 그때가 아마 우리 셋이서 결혼식 2번과 1번의 장례식을 같이 다녀온 후일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그 뒤로는 비디오 얘기를 들을 수 없었다. 좋긴 좋은데 그 감정이 다가 아닌 듯 해서 생각이 많아졌다. 어쩌자고 그 애매한 장면을 들켜버렸는지 그건 거의 불가사의가 틀림없다.


   8

   어느새 우리는 멀더의 다방에서 일하는 3인조 친구로써 지내고 있었다. 아, 앤젤은 만화가이자 웹툰 작가이자 디자이너였고 일러스트레이터였다. 그림과 이야기를 결합한 일이면 무엇이든 가능했고 다방면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 친구도 책을 몇 권 냈고, 그 분야에서 꽤나 잘나가는 재주꾼이었다. 역시 유명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그냥 동네 아저씨! 뭐 차라리 이때가 나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같이 일하다가 나는 노트북으로 여자들 수영복 입은 모습 같은 색정적인 사진을 구경하는 장면을 녀석들에게 딱 걸려버렸기 때문이다. 졸지에 나는 아름다움과 지성을 담당하는 여인과 젊음과 빼어난 도도함을 추구함을 숙녀, 그 두 마님을 모시는 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차마 이런 현실을 미리 내다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뼛속까지 돌쇠의 명예를 감당해야 할 기구헌 팔짜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걔네들 둘이서 짝사랑 1순위를 다퉈도 모자랄 판국에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린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나는 이 친구들이 나를 자기들 작품에 등장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값싼 감상주의는 이미 발발했다.
   행복의 음파를 조정하며 기쁨의 음계를 기획하던 중 잠시 피로를 푸느라 한눈판다는 것이 그만...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 인생은 덧없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중력이 존재하는지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세상, 한껏 야속했다. 벙어리가 서방질을 해도 제 속이 있다는데, 나는 텃새도 안 부렸는데, 이런 젠장! 나의 수심은 커져만 갔고, 애지중지 관리한 멋진 남자 포지셔닝도 날아갔다. 날씨는 을씨년스러웠고, 내 처지는 한껏 객스러웠다. 농담 몇 마디와 풍성한 식사 자리를 접대하는 것으로 뒤집혀질 약점이 아니었다. 내가 뭐 금지된 사진이나 불온한 영상을 본 것도 아닌데 하지만 나는 쥐꼬리가 됐고, 그녀들은 완고했다. 차라리 옆집1과 2에 마초의 대표주자, 얼굴은 극도로 무섭게 생긴 반면 심성은 순둥이인 마초들이 이사오기를 바랬어야 했나?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영영 감을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장난꾸러기 말괄량이들!
   그러나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척키2는 언젠가  한번 흐트러질 것이다. 앤젤도 차갑고 이쁜 척만 했지 허당끼 다분했다. 은근한 정도가 아니란 거, 이미 내게 들켜버렸다. 자세한 얘기는 생략한다. 나는 그녀들를 지켜주고 싶으니까. 어차피 나는 더 내려갈래야 내려갈 수도 없었다. 주도권은 넘어오게 되어 있다.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대세를 읽을 수 있다. 수싸움이 내 전공이니까. 뇌물을 건네든 감언이설을 쏟아놓든 헛점을 노려야 한다. 그녀들도 사람이다. 게다가 둘 다 여자다. 심지어 이사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시골 생활에 슬슬 싫증을 내고 있는 기미가 엿보였다. 그러나 정작 기다리던 기회, 확실한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날개 달린 천사가 아니었고, 목마른 나그네였다. 그녀들이 하면 마땅한 변덕에 다행스러운 환영이었고, 내가 하면 관심을 가지는 족족 헛방이고 사는 일은 따분함 그 자체였다. 자유를 갈망해도 기쁘지 않았고, 갈망하지 않아도 재미없었다. 권태만 횡행했고, 그분과의 만남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고리타분한 타성이 내 삶을 주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정신의 권좌는 그녀들에게 빼앗긴지 오래 전 일이었다. 꽃 피는 봄날에 대한 기대와 동경과 애정마저 식어버렸다. 그윽한 향이 풍미하는 찻잔까지 식어버렸다. 뭘 해도 재미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에게 나 오늘 조퇴한다 하면서 먼저 퇴근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몇 일이 지났다.


   9

   내가 우리 모임에서 조퇴를 일삼은지 1주일이 되었을 때였다. 나는 우리의 아지트에 갔다. 척키2도 없었고 앤젤도 보이지 않았다. 소개팅 하러 가셨나, 타인의 인생에 깊게 관여해도 피곤하고 또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래도 책잡힐 수도 있고 저래도 지겨울 수 있다. 나는 내 일을 해야 한다. 한 잔의 마티니가 정답이었다. 오늘은 글이 잘 써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다. 어쩌다 반가운 손님이 오면 고맙고. 그런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다. 그래도 소설을 쓰자 라는 다짐을 잊지 않으면 된다. 따라서 나는 무탈했고 건재하다. 그런데 왜 나는 그녀들의 소식을 알고 싶은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나는 슬슬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 오늘 오전에는 서투른 무당이 장구만 나무란다고 인터넷으로 노트북 쇼핑만 하면서 빈둥빈둥 놀았다. 시간이 아까웠다. 꼬박 2주째 글을 못쓰고 있었다. 혹시 척키2와 앤젤에게 기가 쪽 빨려버린 것일까? 그럴 지도! 그녀들은 흥하고 나는 망하고, 작용과 반작용. 그녀들의 인생은 전성기 나의 인생은 의뭉스러운 침체기.
   먹기 싫은 밥에 재나 뿌리지 말지, 라는 의도는 없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기쁨도 슬픔도 함께 하기로 합심했기 때문에 그녀들은 내 불행을 다독여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했다. 우리 모임의 이름을 정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다정이라고. 전당포가 아니라고. 그런데 그녀들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미리 양해를 구했으면 또 몰라! 어디 간다면 간다고 말을 해야 할 꺼 아니야. 지들 선본다면 내가 뭐 말리기라도 한데? 이미 나도 대충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약간 그녀들의 동성애적 기질을 파악한 것이다. 확신은 못하겠지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고 내가 재미없어졌다고 느꼈을까? 그러면 큰일인데. 나는 정말 그녀들의 인생과 사정에 무지했다. 도무지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왠지 욱-하던 기분 때문에 그녀의 집에 찾아갔다. 먼저 척키2의 집을 첫 번째 표적으로 골랐다.
   그런데 왜 앤젤이 아닌 척키2의 집을 방문하기로 정했을까? 앤젤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녀가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가 나를 보자마자 놀라서 샤워가운이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카메라의 시선을 바닥에 떨구어진 샤워가운으로 옮기는 황망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목적은 아니었다. 왜 척키2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냐면 바로 실존 인물 척키2의 이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기억에 가깝지만 척키1에게는 추억 속의 그녀에 해당하는 척키2의 본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 하늘이여! 설마 그게 우연이었을까? 이제야 생각난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믿고 싶지 않지만 정말 그러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 그럴진데 어쩌겠나. 네. 척키2의 존함이 떠올랐습니다. 꿀벌이 붉은 샐비어의 달콤한 꿀을 쫒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따스한 봄날은 아직 우리 곁에 오지 않았으나 척키2의 이름이 생각났다구요. 어렵게? 아니요, 어처구니없게도. 그런다고 내가 뭐 나중 혹시 척키2를 만약에 만나게 된다면 뭐 미안해질까? 쫄까? 겁날까? 또는 측은해져? 그래서, 그러니 그냥 확 고백할까? 너를 험담한 인간은 바로 나라고? 내가 바로 (진짜) 다스바이더라고? 그러나 그건 뒷일이다. 발생 가능성도 희박하다. 또 지금은 현재다. 그러니까 미리미리 사서 마음 고생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세상 사는 이치가 그렇더라. 하지만 그런 번민에 마음이 흔들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가 설레설레 흔들었다가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척키2의 본명 그 이름의 이니셜이 JS였다는 것은! 척키2의 이름 이니셜도 JS고, 성+이름의 이니셜도 JS다. 아아, 이럴 수가!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러나 받아들이는 나는 참 당황스럽다. 그 의미심장한 단축 기호가. 텔레비전은 TV, 나이트클럽은 NC, 개구쟁이는 초딩, 그런데 JS? 그게 뭐야, 금시초문이다. 왜 하필 척키2의 이름이... 아, 망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세기에 1번 발생할까 말까 하는 그런 일도 아니고, 괜찮다. 응, 괜찮다고. 이런, 젠장! 이 말이 이제는 내게 유행어가 되어버렸군. 교양도 떠나갔고, 정체도 탈로났고, 무명 작가라고 떳떳이 밝힐 수도 없고, 아따 거 참말로 뒷목잡게 만드는구먼. 그런데 그 확신은 100퍼센트가 아니고 99퍼센트다. 그러나 척키1에게 전화를 걸어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확답을 얻고 싶지는 않다. 실명이라고 공인받아도 얻는 게 없다는 말이다. 손해볼 꺼 없으니 친구에게 물어보라고? 물어보나 마나다. 100퍼센트 맞으니까.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때 그 사건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테니까. 왜 영화가 하나 흥행하면 자꾸 2탄, 3탄이 이어지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척키2의 눈빛 그 표정, 오오 그 이름까지 또렷이 기억난다. 오늘 잠을 설칠지도 모르겠다. 악몽이라도 꾸다 깨면 불켜놓고 헤비메탈을 들으면서 다시 숙면을 청할 것이다. 외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거북하지만 돌이킬 수도 없다. 그녀는 아름다웠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나는 뜻밖에 맞이한 향수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절대 쿨하지 않다. 이런 걸 진퇴양난이라고 하나? 아니다. 그건 너무 길다. 짧게, 꽝이라고 하면 된다. 꽝! 좋네. 괜히 척키2 때문에 그 고유한 브랜드, 독보적이며 전무후무했던 척키에게 1이라는 딱지가 붙어버렸다. 막 간혹 헷갈린다. 척키를 그냥 척키라고 불러야 할지 척키1이라고 불러야 할지를. 항상 그런 식이다. 인생은. 그야 어쨌든 그래서 나는 척키2의 집으로 찾아간 것이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딩동딩동.
   딩딩딩딩딩딩딩딩딩딩딩딩~동!
   그녀는 집에 없었다. 아이 참 어디 간 거야, 하면서 대문의 손잡이를 열어봤다. 오, 그런데! 이럴 수가... 열렸다. 이 일을 어떡하지? 음, 운명의 여신의 가호에 힙입고 유복한 우정의 복무를 빌미로 삼아 나는 용기를 내기로 결정했다.
   나는 척키2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10

   「척키2 집에 있니? 있으면 대답하렴. 듣고도 못들은 척 하기 없이!」
   척키2의 집은 일단 숙녀의 공간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향긋했다. 또 깔끔했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로 눈이 돌아가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이 집에 방문한 목적을 상기했다.
   「척키2야! 야! 자기! 여보! 이 바보야! 미련곰탱아~ 대답해 대답하라고! 어? 당신! 아줌마! ...... 뭐야 이거, 설마 집에 없는 거 아니야?」
   척키2는 집에 없었다. 여기는 척키2의 집이 맞는데, 그런데 없었다. 어쩔 수 없으니까 나는 나갈려고 했다. 그런데 저기 책상 위에 조그만 사진이 보였다. 학창 시절에 친구와 찍은 사진 같았다. 하단 측면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행복한 시절 누구와 함께 라고.
   뭐라고? 행복... 행복이라... 더블 에스? 나는 그 즉시 내가 8살 어린이의 순수한 동심을 안고 불현듯 느닷없이 보게 된 같은 반 여자애인 더블 에스의 뽀얀 엉덩이가 생각났다. 방학하던 날 우리 학교에 놀러온 누나에게 쟤가 자꾸 까불어서 마음에 걸린다고 알려줬던 기억이 났다. 허허허! 왜 당시 더블 에스는 빨간색 고무줄 츄리닝 스타일 하의를 입고 왔을까? 차라리 치마였으면 잠깐 펜티 색깔만 확인하고 말았을 텐데. 하긴 그때 그 친구도 짖꿋긴 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고맙다. 참 좋은 친구였다.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만나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아, 척키2의 집에서 그 이니셜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다시 추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됐다. 더블 에스의 눈부신 맨살 엉덩이를 8살에 봤는데 그 전에 정확히 그것과 대비되는 기억이 있었다. 그때 내가 살던 동네에서 학교에 매일 같이 등교하고, 때로 같이 하교했던 한 동네 친구가 있었다. 엄마들도 셋이서 친했는데, 그 가운데 엄마3의 아들들인 형JH와 동생JH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또 자주 노는 세 친구였다. 나이와 학년이 차례로 1년 터울로 형JH, 나, 동생JH. 그 가운데 동생JH의 환한 엉덩이를 아마 6~7살 쯤에 봤던 것 같다. 그런데 동생JH는 엉덩이에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어쩌다가!
   바로 녀석이 꼬마 때 그 뜨거운 후라이팬인가 냄비에 털썩 앉았다가 생긴 흉터였다. 그 후라이팬이 세계 3대 후라이팬인가는 잘 모른다. 그러나 녀석의 엉덩이는... 어 그만큼 특별했다. 그렇게 남자인 동생JH의 엉덩이를 본 후 여자인 더블 에스의 엉덩이를 본 것이다. 엉덩이 하면 나도 10대 초중반부터 30대 즈음까지 좀비처럼 보이는 악성&만성 피부병으로 오랫동안 고생 꽤나 해놔서 싱그런 뽀얀 엉덩이에 대한 인상이 더더욱 깊은 것 같다. 상큼한 레몬향에 이어 환상의 맛을 선사하는 판나 코나를 비롯한 최고급 호텔에서 만날 수 있는 푸딩과 애들이 좋아하는 젤리의 그 탱글탱글한 탄성, 막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 무엇... 그게 다 좀비 시절을 졸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손등에 대고 향기를 잘 맡아보면 애기 냄새가 약간 나기는 난다. 그 후 일은 또 있었다. 엄마와 나, JH엄마, 형JH, 동생JH 이렇게 다섯 명이서 만화영화를 보러갔을 때 일이다. 저 멀리 하천 건너편에 극장이 보였다. 그런데 가슴이 부풀어 올랐기 때문인지 동생JH가 천변 도로를 먼저 건너갔다. 혼자서 룰루랄라 룰루랄라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면서. 그러다 택시에 끼익~ 부딪혔다. 다행히 가벼운 상처만 입고 영화는 못봤다. 당시 동생JH는 일방로에서 정방향으로 또 그후 11살이던 나는 일방로에서 역주행으로 사고를 겪게 되었다. 그때 보기로 했던 만화영화가 야구 만화영화였다. 
   척키2의 집에서 나는 진짜 나갈려고 했다. 그런데 옷장 앞에 티셔츠가 하나 걸려있었다. 그 티셔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인생은 뻔트다>
   나는 그 옷장을 열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마음은 냅다 뛰쳐 나가고 싶었는데 어떤 강력한 자기장 때문에 옷장 손잡이에 손이 쓰윽 끌려가서 덜컥 붙어버렸다. 그렇게 척키2의 옷장을 열게 됐다. 나는 도둑놈 취급 받기도 싫고 무례를 범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척키2가 걱정되어서 왔는데 어떡하다 옷장 문을 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충 옷의 브랜드만 살짝 구경하고 바로 나가자고 작게 속삭였다. 마지막이고 딱 하나였다.
   그렇게 원피스와 가터벨트와 투피스 정장에 티셔츠와 청바지등 옷가지들을 보다가 옷장 내부에 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슴이 두근두근 심장이 콩닥콩닥, 마음이 울렁울렁 정신이 알쏭달쏭 아주 몹시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몹시 흥분되었다. 뿐만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몹시 기뻤고, 몹시 뭔지 모를 뭔가가 기대됨을 느꼈다. 저 문을 열면 나타날 어떤 현상은 내 호기심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만족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진짜로 환영을 보고 난 후 정말 그런 독백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 환상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어쩐지 그때는 열까 말까 그런 망설임 같은 건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일념뿐이었으니까. 이 문을 열면 그 길을 따라가면 어쩌면 시간을 파는 상점에 도착하게 될까? 잘은 몰라도 최소한 새로운 모험, 잘 하면 요정과의 첫 키스, 밀고 당기는 흥정이 필요하다면 나는 괴물의 어떤 맺힌 한을 대신 풀어주고 녀석은 내 3가지 소원을 들어주고, 적어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라는 속담은 그동안 유독 내게 달리 실감되었다고나 할까, 즉 전에는 내 어느 한계 너머는 아예 보이지 않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아니 아니... 오르지 못하니까 실컷 더 쳐다보며 꿈이라도 실컷 꾸자고 해놓고, 금새 잊어버리며 손쉬운 오락과 물안개 같은 향락과 짧은 시간 효과가 제법 큰 쾌감에게 눈을 돌렸던 듯 했다. 항상 그런 식으로 어려운 일은 포기가 빨랐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당장 오르지 못할 나무를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만 같았다. 더구나 손잡이를 당기느냐 마느냐, 그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지금 저 문을 열지 않는다면 나는 아마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어차피 이 뜻하지 않게 주어진 신비 극장에 입장하지 않고 돌아가 봐야 나는 아마 그런 흔해 빠진 것들만 겪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의 허상에 대해서 뭔가 특별한 글을 쓰다가 포기하기. 명랑한 내일과 밝은 미래에 대한 뻔한 영감에 좌절하기. 열애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다시 에로 비디오를 볼 것이냐, 말 것이냐 사이에서 고민하기. 척키2를 놀리고 앤젤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고서 역으로 내가 그녀의 헛점을 캐내기 위한 장난꾸러기 같은 생활에 결별 선언. 현재의 내 문학 장르에 의표를 찌를 만한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회전목마를 타러 떠나기, 혼자서. 목마에 몰래 숨어서 적진 깊숙이 침투한 인물은 율리시스가 맞나 라면서 인터넷 검색하기. 거의 뭐 이런 게 전부였다. 나는 TV 속으로는 못 들어가지만 지금 이처럼 옷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쩜 필연적인 숙명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은 아마도 불가해한 미스테리를 해결하기쯤? 더불어 나중 애인을 만나면 항상 뻥만 칠 수는 없는 일이지 않는가? 나중 들려줄 환상적인 무용담과 실존하기 어려울 것만 같은 진짜 경험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박쥐의 똥에 옷이 지저분해지든 온몸이 거미줄에 범벅이 되든 어쩌든 지금은 결전만이 살길이었다. 퇴각은 패배주의를 초래할 뿐 선택은 하나였다. 나는 다시 스무살 청춘이 된 것이다. 아직 회춘이란 말을 사용하기는 좀 뭣하니 환생이라고 적당히 거명하자. 그게 좋겠다! 앗~싸, 야~호!
   나는 씽긋 한번 웃고, 윙크 한번 하고, 골 세러모니도 한번, (손가락 딱) 소리내고 나서 과감히 옷장 내부에 있는 비밀 문의 손잡이를 열었다. 그냥, 확, 거칠게!


   11

   여기서부터는 요점만 설명하겠다.
   내부는 길이 하나였다. 나는 그 길만 따라갔다. 썩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니 어느 육중한 철문 앞에 도착했다. 내부의 불빛은 무슨 특수 전원에 의한 반영구적인 불빛 같았다. 이때 문을 여는 것 말고는 다른 보기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나는 문을 열었다. 문은 엄청 무거웠고 빡빡했다. 겨우겨우 열리더니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니라 신음 소리였다. 그리고 저기 보이는 저 침대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척키2와 앤젤리나가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음의 소통과 영혼의 대화와 함께 육신에 귀속하는 그런 행위가 무르익어가는 도중인 듯 했다. 아마 그곳은 앤젤리나의 집인 것 같았다. 거리상 대략 그 정도쯤일 꺼라고 예측했다. 뭐야 그렇다면 내 집 밑으로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인가? 하긴 내 집은 설치하는 방식의 박스형이고 저 친구들은 설계도에 의해 건설한 것이니 음... 그렇다면 한참 옛날에 이미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말인가? 원래 우리 세 명이 사는 공간이 하나의 집인데 옛날에 집주인이 사정이 어려워져서 그 공간을 셋으로 나눠서 지금과 같이 어떻게 어떻게 되었다고도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오 저건... 원래 쟤들이 나를 추종하고 연정을 품어야 하는데 지금 저것들이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이지? 오, 저런 저런 저런! 아뿔사!
   나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설마 전혀 예상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긴가민가 아주 약간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하긴 했는데 그 이상의 확신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뭐 절정으로 가는 길목인가? 나는 그쪽을 살며시 다시 쳐다봤다. 오오, 뭣이지 저건? 위에서 이렇게 어, 그게 그러니까, 저거 혹시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진짜 레슬링 아닌가? 아니야. 아니야? 아니기는! 아닌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애매한 몸동작보다 제일 중요한, 제일 기묘한 점 하나는 이것이었다. 상위에 위치한 분이 아마 앤젤인 것 같은데 앤젤은 아래에 위치한 척키2를 제압하며 압박하고 있었다. 즉 앤젤은 밑을 보고 있어서 나는 앤젤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런데 앤젤의 뒤통수에는 눈이 달려있었다.
   그 순간 앤젤의 뒤통수에 달린 눈동자와 내 시선이 부딪힐까 말까 했던 바로 그 찰나 나는 절묘한 차이로 주저앉아서 그 괴상망측한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 어디 겁나서 계속 쳐다보기나 했겠나!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오던 때는 길이 거의 직선이었는데 돌아가는 길은 무척 꼬불꼬불했다.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 이때 나는 거의 어떤 시간 개념을 상실한 듯 했다. 꽤 오래 걸렸다는 것만 근근히 감지했다. 그렇게 척키2의 집에 있는 옷장의 특수 문을 딱 열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녀석들이 뭔가 중요한 일을 모두 마치고 돌아온 것일까?
   문을 살짝만 열었는데 척키2가 콧노래를 부르며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방법이 없었다. 옷장 문과 옷장 안의 비밀 문을 살며시 닫고 다시 앤젤의 집으로 향했다.


   12

   척키2의 옷장을 통해 들어왔던 미로에서 나는 한 바퀴를 순환한 상태였다. 그래서 흡사 그 길이 출퇴근 길이나 되는 것처럼 나는 다시 앤젤의 집으로 나아갔다. 들어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도착한 지점의 문을 열었더니 그곳은 앤젤의 집이 아니라 우리 집 수영장 바닥의 측면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데, 음,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만약 앤젤이 집에 있었다면 뚝딱 문을 열고 앤젤 앞에 나타날 수는 없었을 테니 어차피 미로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보다야 백번 낫긴 나은 일인데...... 나는 귀신에 홀린 기분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오오,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처음에 척키2의 집에서 옷장 문을 딱 열기 직전까지는 그야말로 꿈과 이상을 충족시킬 것이란 기대감에 기분 만점이었는데 무지개가 살고 있는 미지의 세계는 헛된 상상이란 것을 알게 된 후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첫째, 척키2와 앤젤이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것. 둘째, 앤젤의 뒤통수에 눈이 달렸다는 점. 그런데 그 괴물이 앤젤인가 척키2인가는 확실치 않았다. 뒷모습이 범상치 않은 걸로 봐서는 아마 앤젤일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조금 농후했을 뿐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셋째, 척키2와 앤젤의 집을 잇는 비밀 통로는 간단한 조정 장치에 의해서 길이 바뀐다는 것. 꼭 그것은 철로길과 비슷하게 착착 잇고 닫히고 그렇게 만들어진 듯 했다.
   어쨌든 나는 기를 모두 빼앗긴 듯 탈진하여 온몸에 힘이 빠지고 엄청 피곤했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서 선잠을 청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옷을 입은 채로 들어눕자마자 골아떨어졌던 것이다. 거의 12시간 내내 어쩌면 15시간쯤 잠을 잤을 것이다. 그러다 월요일이 되어 깨어났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가 가물가물했다. 어제의 기억이 통채로 날아가버린 것만 같아서 아침부터 슬퍼졌다. 그 울적한 기분은 달랠 길이 없었다. 유수의 레크레이션 강사랄지 그 어느 고품격 코메디언도 내 기분을 풀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학문을 같이 공부하는 그녀들과의 암묵적인 모임 '다정'의 업무 시간이 임박해서 다시 우리의 아지트로 향했다.
   이제는 내가 뜨내기가 되었고, 그녀들이 이곳에 마치 옛날부터 살았던 터줏대감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들은 자유분방하고 나는 승승장구하다 도박 때문에 엉망인 모습으로 중도하차한 어느 전문가가 된 듯한 안타까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윽고 멀더의 다방에 도착하니 그녀들이 먼저 당도해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창가에 일렬로 위치하여 창밖을 바라보는 의자에 앉아서 두 여인 모두 일을 하고 있었다. 마치 어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하긴 그녀들은 그러겠지. 나만 괜한 비밀을 알아버려서 말할 수도 없고 말하지 않자니 또 애만 타고 속만 끓고 내 심정은 말이 아니었다. 묘한 분위기였다. 물론 나만 그랬다. 이제는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가 썩 영속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란 가녀린 예감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녀들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인생은 기쁘고, 즐거운 주말 소풍을 기다리며 오늘도 모파상을 읽을 것이고, 우린 언제까지라도 젊고 아름다울 것이다, 마치 그런 생각을 견지하고 있는 듯 했다. 앤젤과 척키2는. 소녀들은 향수도 잔뜩 뿌린 듯 했다. 누구한테 잘 보일려고 이리도 꽃단장을 하셨나.
   그녀들과 나는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각자 바쁜 척 일에 매진했다. 나는 카페라떼를 한 잔 가져왔고, 그녀들은 나한테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꼈다. 얼굴은 정면을 바라보며 눈동자만 돌려서 앤젤을 쳐다보았다. 뒤통수에는 고운 머리카락만 있었다. 나는 가방을 들고서 그녀의 뒤로 걷다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가방의 자크가 걸린 척 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뒤통수를 살며시 은근슬쩍 만져봤다. 그녀가 약간 놀란 듯 했으나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분명 저 자리에 눈동자가 있어야 하는데 어디 갔지? 설마 감추고 덧씌우고 그런 장치가 되어 있는 건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혹시 척키2가 범인일지도 모르니 그녀의 뒤통수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앤젤에게 썼던 방법을 똑같이 되풀이할 수는 없으니 그녀에게는 그녀가 좋아하는 찬미와 격의있는 칭찬의 방법을 사용했다. 어머 어쩌고저쩌고, 머릿결이 어쩜 이리도 낭만적일까, 자주 가는 미용실이 있냐 없냐, 너무 깜찍해서 뭇남성들 꽤나 울리겠네 내가 다 걱정이 된다네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척키2의 뒤통수를 스윽 스쳐지나가듯이 만져봤다. 얘의 뒤통수는 앤젤의 뒤통수보다 납작했다. 완전 절벽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가슴은 앤젤보다 척키2가 약간 더 도톰했다. 그곳이야 뭐 측정할 수도 비교할 수도 없으니 속만 탈 뿐이었다. 진짜 그렇다는 뜻이 아니고 아무튼. 뭐 그건 그렇고, 둘 다 뒤통수에 눈이 달려 있지 않았다는 것은 확인했다. 자, 그럼 어떡하지? 어떡한담?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아아아! 답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이 혹시 내게 경계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에서 준비해 간 선물을 그녀들에게 건네줄려고 했다. 내가 준비해간 선물은 그 어떤 유희나 쾌락과 관계된 것이 아닌 바로 동심을 자극하고 낭만을 간지럽혀주는 물건이었다. 잊었던 동경심에게 연락하게 만들고, 다시 한번 선망에 대해서 단짝과 속삭이고 싶도록 동심을 부풀게 만들어서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소품을 미리 구비해 놓았던 것이다. 녀석들을 길들이는 수법은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다. 다만 손이 많이 갈 뿐이고 그녀들을 존중하면 그뿐, 말을 바꾸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태연함에 기반해서 시간에 비례하여 자연스레 터득하게 되는 그런 유들유들함과는 엄연히 다른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니라면 아마 여자를 다룰 줄 아는 기술이라고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 상관없다. 그거나 그거나!
   우리 셋은 창밖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있었는데 이때 역시 그녀들은 내게 가운데 자리를 권했다. 매번 그랬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가방에서 선물을 꺼냈다. 선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오르골과 수정구가 합쳐진 물품. 수정구를 흔들면 오르골의 태엽이 자동으로 감아지고, 수정구를 딱 놔두면 브람스의 자장가가 들리면서 반짝반짝 하트 뿅뿅 빤짝이들이 서서히, 부드럽게 수정구의 하늘에서 가라앉으며 날개 달린 큐피트의 웃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매우 고급스럽고 값비싼 제품이었다. 물론 한정판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게 아니라 비누였다. 그런데 포장지가 원체 예뻐서 그냥 옷을 벗기고 그 나체를 이렇게, 음 저렇게, 막 그렇게 사용할 수는 없을 것만 같은, 그래서는 절대 안될 듯한 심정 때문에 한쪽에 모셔놓고 방향제로 쓰고 싶은 물건이었다. 그녀들에게 선물이라면서 이쁜 짓을 하면 언제라도 선물은 무한정 준비되어 있다면서 나는야 산타라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흉내내며 선물을 건네주었다.
   「와~! 멋지다!」
   「어머 어머 어머! 이야, 와 멋져! 이러니까 우리가 오빠를 좋아한다니까!」
   나는 좋아하는 그녀들을 보며 흐뭇했지만 어떻게 하면 누군가의 뒤통수를 다시 한번 정밀하게 확인해 볼지 그 궁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뾰족한 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대놓고 그녀들의 뒤통수를 벅벅 더듬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어디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서 애무할 수도 없고 상황 참 난감했다. 만일 그처럼 행동했다가는 아마 둘 중 하나의 반응밖에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는 철썩~하며 슬로우모션으로 시간이 느려지며 그윽한 소프라노 아리아를 듣게 되는 일. 즉 시간은 느려졌지만 달콤한 음악은 그대로라는 것. 오, 신비하도다. 한번 해 볼까? 궤적이 빗나가면 코피가 날 수도 있는 일이니 참는 게 낫겠다. 어쩜 이게 더 경이로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또 하나는 뭐 아마도 이런 말을 듣게 되지 않을까?
   「오빠! 우리가 아무리 여자로 안 보여도 그렇지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이건...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야? (조용조용히) 정 원한다면 차라리 쟤 없을 때 하시든가...」
   바로 그렇게!
   그런데 선물이 다인가? 단지 선물 때문에 그녀들이 내게 그 은밀한 속마음의 빗장을 열었을까? 이렇게 셋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앞일을 걱정하지도 무엇을 하며 놀까를 크게 고민하지 않으면서, 나아가 스스럼없이 집에 초대를 하고 놀러가서 냉장고를 내 맘대로 불쑥 열어서 뭘 꺼내먹든 말든 그런 냉장고 권리를 획득하고, 웨이터 법칙이네 뭐네 같은 일들까지 흔쾌히 그와 닮은 장난을 치며 때로는 쾌활하게 이따금 진중하지만 정말 편하게 마음을 나누고 정을 건네는 사이, 그게 다 오직 선물만으로 가능한 것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건 보나마나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닐 것이다. 절대 아니겠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우리 이렇게 친하게 지내요 라며 살뜰한 관계를 드러냈으니까 이제는 식상한 전개 대신 밑줄 긋기랄지 요점 정리나 그 얘기 왜 했냐는 그 방송 왜 만들었냐는 기획 의도를 하나쯤 꺼내놓으라는 말을 어렵싸리 돌려서 저처럼 물어본다고 볼 수 있다. 그걸 못 알아듣고 또 줄거리 위주로 요약하면서 허세에 대한 승수 쌓기로 대화 내용이 돌변하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인기 폭락이다. 허당으로 굳히기 들어가는 일. 곧 서로 통하는 뭔가가 있었다는 그런 말은 다 아는 얘기니까 건너뛰고, 나머지 가운데 딱 하나만 귀뜸하자면 이거다. 그녀들이 살갑게 오빠라는 단어를 애용했다면 나는 무엇보다 이름을 많이 불러줬다는 것. 그냥 가볍게 목적에 최적화된 호칭으로써가 아니라 단 한 번을 불러도 정성스럽게. 다정하게. (우정의) 하트 뿅뿅 눈빛과 함께. 또 새롭게. 고개를 틀어서 저는 당신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다는 몸짓 다음에 이름을 살며시 부른 후 한 박자 쉬기 같은. 그처럼. 누구나 자신의 외모가 조금 불만이라거나 형편이 넉넉치 않다거나 뭔가 마음에 차지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이름만은, 적어도 뒤에 나오는 말이 명령이든 재미없는 보챔이든 뻔한 잡설이든 일단 자기 이름의 발성까지 딱 거기까지 듣는 것을 퍽 불쾌해 하지는 않는 법이다. 설사 자기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개명을 앞두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다. 나는 선물은 가끔이고 돈들지 않는 이름 부르기가 습관이었다.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말이다. 그렇지만 내 청각이 유독 예민해지는 기분이랄지 한쪽 가슴이 막 커져서 짝가슴이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지는 않았다.
   사랑스러운 소녀들. 탐스러운 자태. 낭만적인 눈길. 착하고 고운 살결. 왜 갑자기 장르가 바뀌고 박자가 변할려고 하냐면 잠시 내가 화장실에 갔다오면서 봤드니 글쎄, 앤젤이 노트북에 희곡을 쓰고 있는데 그 신비스러운 탐미적 고유성이 나보다 훨씬 훌륭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뛰어난 그녀의 글쓰기 특징은 그것이었다. 나는 동사 반복이었는데 그녀는 걸핏하면 명사 반복이고 심심하면 동사 3연속 반복이라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얘는 나보다 더 했다. 훨씬 능가했다. 이를테면 무용하다 무용하다 무용하다, 거뜬하다 거뜬하다 거뜬하다, 마음이 녹는다 녹는다 녹는다, 감동 감동 감동,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아,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녀들은 절대,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방심할 수는 없다고 재차 다짐했다.


   13

   다음 날이 되었다. 우리는 오전에 아지트에 모였다. 각자 차를 주문했다. 그녀들을 위해서 내가 준비된 차를 가지러 갔다. 가져온 차를 그녀들에게 건네주면서 나는 기이한 체험을 했다. 아가씨들의 손바닥에 눈이 달려있었던 것이다. 말로만 듣던, 아니 글로만 읽던 아르고스던가 뭔가 바로 그 백안의 신? 아닐 것이다. 아마 잘못 본 허상일 것이다. 착각이겠지. 설마 그럴 리가 있나. 그러나 확인은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손쉽게 심증의 오판을 가릴 수 있으니까.
   나는 척키2와는 악수를 했고, 앤젤은 손금을 봐주었다. 차라리 앤젤에게 다른 방법을 쓸 것을. 말만 엄청 하느라 기가 빠져버렸다. 하지만 그녀들의 손바닥에 눈이 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목적은 달성했다. 차라리 솔직히 말해버릴까? 고백 같은 거? 말하지 않는다고 녀석들이 알아서 내 마음을 헤아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을 알겠는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고 이것은 사연이었다. 시치미를 뗄 때 떼더라도 통사정이나 해보고 뭐를 기다려도 기다릴까? 아니다. 그런 사정과는 거리가 멀다. 한참 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들이 스스로 내 의중을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직감, 믿을 게 못된다. 가령 하루는 둘 다 머리카락을 빡빡 밀고 나타나서 그러는 거다, 봤죠? 뒤통수에 눈 달리지 않은 거! 그런 멜로드라마?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은 발생할 수도 없다. 나도 원치 않고.
   이때부터 나는 두 가지 염려하는 일이 생겼다. 첫째, 내 뒤통수에 눈이 생기면 대체 어떡하냐는 것. 둘째, 환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 척키2의 얼굴은 개의 머리로 보이고, 앤젤은 몸은 사람인데 얼굴은 영락없이 고양이로 보였다. 거리에서 지저귀는 새는 얼굴이 사람이었다. 사과나무에 열린 열매 안에 사는 벌레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몸은 사람인데 얼굴은 제각기 다른 동물 얼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걱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해소되었다. 왜냐하면 내 뒤통수에는 눈이 생기지 않았고, 약간의 환영들은 모두 일시적인 환시이자 오래 가지 않을 간곡한 착각으로 판명났기 때문이다. 에르메스 가방을 샀기 때문도 그녀들과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눠서도 아니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일어날 때 눈을 비비면서 나는 엉뚱한 망상에 빠지지 않았다. 이른 아침 눈부신 햇빛을 맞으며 오늘 하루는 어떤 즐거운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아니라, 눈을 비비면서 내가 지금 뒤통수를 만지고 있나? 그 정도 증상까지는 발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하루 중 가끔 뒤통수를 벅벅 긁적거리면서 내가 지금 눈을 비비고 있나 같은 오해도 발생하지 않았다.
   일단은 최근 발생한 중대 사건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다시 무심하게 날짜만 지나고 있었다.


   14

   그러던 중 왠지 빨간 장미를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수요일이 지나고 목요일이 되었다. 나는 그날 깍쟁이인 것처럼 노란 튤립을 한 송이 사서 멀더의 다방으로 향했다. 튤립꽃 하나면 다 그분이 되시나? 말이 그렇다는 말이다. 가게에는 척키2만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침 앤젤은 부재중이었다. 나는 불현듯 새로운 발상이 떠올랐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어쩐지 척키2의 가방에 지난 일에 대한 비밀을 풀 수 있는 뭔가 핵심적인 단서가 들어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 잘 하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초등학교 다니던 때 내가 직접 겪은 일을 그대로 얘에게 적용해도 썩 무리한 시도는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미리 멀더에게 양해를 구하고 협조를 약속받았다.
   그렇게 우리, 멀더와 나는 감쪽같이 척키2를 속였다. 척키2가 화장실에 간 사이 그녀의 가방을 주방에 숨겼다. 그리고 그녀가 화장실에서 왔을 때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오늘 가방 안 가지고 오지 않았냐고. 그녀는 깜짝 놀랬다. 자기는 가방을 가져왔는데 무슨 소리냐고. 우리는 우겼다. 계속 우겼다. 무표정으로 우겼다. 아니다 넌 가방을 오늘 가져오지 않았다, 저기 봐라 없지 않느냐, 내가 없는 것을 확인했고 멀더도 오늘 너가 여기 출근할 때 빈손으로 왔다고 하더라 라고 하니 그녀는 딱 속아넘어갔다. 그래서 그녀는 집으로 떠났다. 내심 미안했다. 그러나 대범함을 유지했다.
   나는 주방에서 척키2의 가방을 뒤졌다. 아직 무언가 특별한 물증을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이미 마음은 타임머신에 승차한 것이다. 어쩜 그리도 홀딱 속아넘어가시는지. 나는 나중 척키2에게 좀 더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선물도 틈틈히 선사하고. 그러다 나는 척키2의 가방에서 썩 까다롭고 심상치 않은 물건을 하나 발견했다. 아하~ 바로 얘였구나! 나는 손가락을 딱 하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눈꺼풀을 뒤집으면서 인상을 팍 쓰고 고개를 살살 끄덕거렸다. 차마 믿기지 않은 일이지만 또 무작정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발견한 물품은 바로 수면용 안대였다. 안대? 그렇다 안대. 그냥 안대가 아니라 완전 정밀하게 진짜 사람의 눈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그림이 그려진 수면용 안대. 설마 내가 본 것이 이것이란 말인가? 이럴 수가! 그렇다면 그건 모두 사실이고? 아닌데... 내가 봤을 때 그녀들은 결코 동성애자와는 거리가 먼데... 이거 정말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척키2가 찻집으로 돌아왔다. 가방이 집에도 또 차에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 봤다고 했다. 고장난 의자를 치우느라 가방을 옆으로 옮겨놓은 걸 깜박했다고 하면서 내내 미안하다고 다독여주었다. 척키2의 귀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했다. 척키2는 괜찮다고 했다. 안색은 괜찮지 않은 듯 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자기 일에 몰두했고 앤젤을 기다렸다. 그날 앤젤은 다방에 오지 않았다.
   나는 뭔가 억울했다. 울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것을 글로 써서도 안될 것 같았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어쩌긴 뭘 어쩌나, 그냥 잊어야지. 그래서 나는 어중간하게 넘어가기는 여간 개운하지 않아서 무언가 기념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딱 그걸로 그 이상한 일은 없었던 일로 퉁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다음 날 아지트에 케익을 두 개 사들고 갔다. 하나는 척키2의 얼굴에, 하나는 앤젤의 얼굴에 팍 키스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러고 나서 그녀들에게는 내 방식의 행위 예술이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들이 아지트에 당도했다. 그러나 나는 차마 계획했던 일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작전 실패였다. 완전 꽝된 거다. 초반 기세만 훌륭했고 작전만 뛰어났다. 그게 다였다. 기분만 더 안 좋아졌다. 분위기 엉망이었다. 둘 다 열심히 글을 쓰고 차를 마시고 매우 바쁜 것 같았다. 나만 글도 안 써졌고, 더더욱 침울해져만 갔다. 나는 딱 그만큼 착했고, 딱 그만큼 소심했고, 딱 그만큼 새가슴이었다. 매정하지 않은 동시에 용기도 뭣도 없었다.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 동안! 이제 진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된 것일까? 무슨! 그보다는 아줌마, 아니 할머니가 낫겄다. 아흐흐! 나는 자꾸 내가 혹시 바보는 아닌가 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그래서 분위기는 점점 더 착 가라앉아 저조해지기만 했다. 그러므로 나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뭐가 좋을까? 그래, 여행이 좋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당장 어정쩡한 그 <다정>이라는 동인에서 잠시 빠져나와 떠나기로 결심했다. 목적지는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자유가 그리웠던 것이다. 그래야만 에너지를 충전하고 나중 환상적인 허구를 창안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나는 색다른 귀여움을 찾고 싶었고 신선한 풍경을 보고 싶었다. 새로운 장소에 가면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따라할 것도 생기고, 흉내내고 싶은 구경거리도 많을 거라고 예상했다. 내가 여행을 갔다 왔을 때 앤젤의 귀에 눈이 달렸든 척키2의 젖꼭지에 귀가 달렸든 개의치 않겠다. 그래봐야 뭔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그건 걔들 인생이다. 내게는 내 인생만 해도 벅차다. 엄밀히 따져보면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사실화일 뿐이다. 대세는 우선은 극사실주의다. 드디여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상한 궤변 때문에. 어쩌면 다 우리 모임의 이름이 잘못됐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다정? 냉정한 그녀들. 흥! 우리의 모임도 그녀들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는 아니고. 그렇게 여행을 다녀온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동인 '다정'에서 임의 탈퇴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내가 아마 잠정적인 휴가를 원했었나 보다. 뭘 확 때려치울 수는 없고 사표를 쓸 직장도, 목에 핏대를 세우며 다같이 따지고 외칩시다 하며 팀장 앞으로~ 외친 다음 주위를 둘러봤을 때 당면해야 할 생소한 얼굴들이 내 옆에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떤 은근한 변화를 꾀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아마 그 모든 것이 그로 인하여! 마침내 나는 행복의 비밀을 알아냈고, 창작의 비결을 발굴했으며, 새로운 인생의 희망을 찾아냈다. 내가 서툴렀기 때문에 헛것을 봤을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그녀 가운데 한명의 뒤통수에 눈이 달렸더래도 뭐 괜찮고, 달리지 않았으면 정상인 것이다. 아무 것도 문제될 건 없었다. 척키2는 지성보다 다변에 가까웠고, 앤젤은 허영보다 허당에, 우리의 동인 그것의 낭만적인 이름인 다정은 놀이에 다름 아니었다고 보는 자세가 필요했다. 여행을 갔다 와서 모임을 탈퇴할지 말지는 그때가서 정하면 된다. 마음이 바뀌면 출장쯤으로 둘러대기로 하자. 단, 돌아오면서 그녀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공평하게 선사하기로 했다. 똑같은 여성잡지2를 두 권 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이 마음에 들어하는가 들어하지 않는가는 신경쓰기 싫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들에게 호혜주의를 요구할 테니까. 언제까지 받기만 할테냐면서.
   진짜 그랬을까, 안 그랬을까? 이 말은 과거형이다. 저 일은 놀라운 신세계든 썩은 미소든 그야 어쨌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 시점이다. 그래서 그것은 큰소리고, 때문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언장담이자 작은 애원 같은 거다. 따라서 그것은 그때 가서 보면 된다. 멍석이 깔려지면 별안간 더 맹렬히 기존의 습관을 유지할지, 돌변한 모습을 선보일지, 그도 아니면 새로운 태도로 그녀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지는. 왜냐하면 내가 그녀들과 관계를 맺는 우정의 근원은 내가 쟤를 어떻게 한번 해봐버려야겠다, 나는 갈대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쟤를 어떻게 한번 눌러서 내 호승심을 만족시키고, 꺾고 접는 내 차례를 생략하겠다는 <누가 승자인가, 넌 뭘 해도 마음에 안 들어, 난 (최고인) 너가 싫어 (최고가 아닌) 너는 뭐 그나마 봐준다, 내가 최고야>라는 경쟁의 원리와는 다른 양상을 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절을 차려도 가식이고 속마음을 털어놔도 응큼하네 어쩌네 라는 이론이 만약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면 그것은 곧 상업적 논리와 상반된다. 안 그럴 것 같은데 상충된다. 하나 주고 하나 받고, 뭔가 찜찜하다 나중 아무래도 불리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형님 먼저, 라는 (소규모?) 자본의 논리. 내가 흥하면 복권에 당첨된 거고, 내가 망하면 이놈의 세상이란... 그처럼 지킬 박사도 됐다가 하이드도 됐다가, 천사였다가 악마는 아닐까 오해하게 만들었다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우정이라고 불러도 괜찮은가 라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모래성 그 허상을 쌓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리 모임 다정은. 척키2야 너는 롤러코스터를 타거라, 그리고 앤젤 너는 시작 단추를 눌러야 하느니라, 나는 그런 구상을 하면서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그 이름이 불분명한 어떤 증후군 같은 기쁨에 심취했다기 보다는 같이 표를 끊고 함께 회전목마를 타고자 했던 의도 그대로 실천해왔기 때문이다. 그게 다다. 설령 레이싱 게임을 하며 앞에 선풍기를 틀어놓든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NC에 가도 별거 없다는 장황한 열변만 늘어놓았을 지라도. 일단은 나는 이 친구들에게 뭔가를 기대하게 만들었고, 염원하는 꿈을 드높였으며, 선망을 품는 것에 대한 막연한 죄의식을 탈피하게 만들어주고자 노력...했다? 정말? 진짜로? 아니다. 노력하지 않았다. 말은 대체로 그녀들이 많이 했다. 주제도 그녀들이 주도했다. 행동도 거의 그녀들이 다했다. 나는 끄덕거리기만 했다. 나는 동조하기만 했다. 나는 거의 끌려다녔다. 모든 소풍은 그녀들이 준비했고, 그녀들이 성대한 파티를 열었고, 나는 숟가락만 얹었다. '나는'에 해당하는 화법을 다른 자리에서 '나도'로 바꾼 것일 뿐, 비밀은 없었다.
   그렇다면 뭔가 하나 의아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것은 무엇이냐면 '나는'이 '나도'를 어떻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요리할까 라는 것! 방금 놔왔지 않은가? 첫째, 뭔가를 기대하게 만든다. 다름 아닌 상대의 예감을 드높여주는 일. 뭐뭐 할까, 어디 갈까, 저거 살까, 나중 언제가 좋을까... 등등등, 동경심과 작별하기 싫은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웅변술은 한도 끝도 없다. 그러나 규칙은 대충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밑도 끝도 없을지라도 시작도 말 끝도 말이라는 것. 보너스 하나 추가하자면 아니 하나로는 부족하고 대략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 - 어디 - 무엇' 같은 지칭대명사를 즐겨 사용하기. 여자들처럼 말의 양으로 요점을 부풀리기 보다는 헤드라인을 변형시켜서 뭔가 그 다음이 있을 것만 같은, 무지개 너머로 가보고 싶게 만드는 복합관계대명사와 복합관계형용사와 복합관계 부사를 적절히 분배하여 틈틈히 제시하기. 어떤 때는 결론을 맨 앞에, 때에 따라 다른 때는 결론을 맨 뒤에 배치하기. 그리고 언제 어느 때 그래야 하는가는 알려주지 않기. 몸짓과 함께, 설명하는 중간 중간 잘 기억나게끔 헤드라인을 듬성듬성 반복하기. 때때로 물음표로써 앞일을 추측하게 만들어 실상에 비해 심상을 키우고, 관계부사의 남용과 지시 형용사의 남발등등 그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보통 여자들이 좋아하는 장르를 파고들면 게임 끝나는 거다. 그리고 둘째, 몰라도 아는 것처럼 달변으로 그녀의 청각과 동심을 꾸준히 자극하며 자꾸자꾸 헷갈리게 만들어서 쇠뇌시킬 것. 셋째, 셋째는 뭔 셋째, 포기하든가 숟가락 빼든가 잔치는 끝났던가 즉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다음 행동을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음...... 잠깐만, 쉿! ...... 뭣이라고? 여자를 꼬시는 방법? 아니 그녀의 정신을 긴장시키며 설레게 만드는 재담의 원리? OK! 사랑과 우정 그 두 가지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푼 다음 넘어가자.
   첫째, <사랑은 뭐다>를 알려면 여자가 어딘가에 집중하고 무언가에 넘어가는 청각의 원리와 사고 방식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별거 없다. 줄거리와 에필로그와 몇 년 뭐뭐 같은 전기적인 타인의 일을 내 약력인 것처럼 들려주면 된다. 곧, 궁금해 하고 알고 싶게 만들기. 몸은 여기 남아도 마음은 신비의 세계로 떠나보내기. 보통은 리모콘으로 가능하고, 특별한 날에는 꽃이나 선물등이 효과적임. 그런 후 최면이 완전히 걸린 후 이름만 부르면 (딱)! 처음 만난 날 손을 잡고, 두 번째 봤을 때 키스하고, 셋째 날 미래를 약속하는 비법. 때에 따라 축약은 가능하나 일반적으로 남녀의 우정은 퍽 곤혹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짝궁둥이인 그녀를 보며 너처럼 환상적인 몸매의 소유자는 태어나서 처음 본다고, 두번 다시 못볼 것이라며 보기도 싫다느니 어쩐다는둥 뭐라나! 시간의 압축, 제아무리 심심한 인생도 긴긴 삶에서 몇몇 기억에 남는 중대사를 추려보면 그 또한 한 편의 영화다. 바로 그것을 짧은 말로 변환시키는 행위, (딱)! 풀었다 감았다 풀었다 감았다,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여자를 애달프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하기보다는 신비한 재주라고나 할까! 여자들이 그리 썩 달가워하지 않는 취미에 괜히 남자들이 열중하는 것이 아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일 뿐. 던지고 치고 잡고 때리고, 그래서~, 넣고 넘기고 제치고 갈채를 받으며 트로피를 거머쥐며 인기를 얻는 일. 말은 그런다. 말은. 사랑은 장기전이다, 몰래한 사랑이 아름답다고, 어디서 주워듣고 읽고 가끔 생각한 건 있어 가지고. 그러나 행동은 다르다. 행동은. 인생 한 방이다, 남자는 폼이다, 가는 여자 붙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마다하지 않음으로! 남자는 친구와 사랑을 논하지 않는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 그러면 매를 벌고 불화를 부르는 셈이며 결코 남자답지 않은 일이다. 비록 꼴찌일지라도 사내들 수다의 화제 그 순위에 오른 역사가 없다 그것은. 왜냐고? 왜냐하면 남자는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사랑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사랑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남자에게 사랑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인데 우리 오빠는 그렇지 않다고?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 그건 남자가 아니다. 본심이 아니다. 그거 다 빈말이다. 멍멍, 거짓말이다. 컹컹, 완벽한 뻥이란 말이다. 적어도 내 사랑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외에는! 그러나 낭만을 알고 사랑을 노래하며 당신을 미지의 공간으로 데려다줄 멋진 남자, 있긴 있다. 그분을 만나는 과정, 그것을 인생이라고 한다. 그런 왕자님을 평생 못 만날 수도 있다. 당신을 만났다가 향후 실망하는 건 시간 문제일 수도 있다. 아니면 만난 셈 치자고 스스로 달래는 방법도 있다. 사랑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그 진리를 다 늙어서 깨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하나 남은 신뢰는 사랑의 이상주의자, 그것도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긴 있다는 것. 이래서 사랑은 뭐다를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남자와 아빠란 단어는 명백히 그 뜻과 역할과 말하는 목적이 다르다. 완전한 인간은 없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할 수 있다. 최소한 다이아몬드님께서 그것의 상징이라는 제역할을 마다하시지는 않는 것이다. 뭐랄까, 사랑은 학문과 상업을 양쪽에 끼고서 좋아하는 상남자를 닮았다고나 할까!
   자, 둘째 <우정은 뭐다>로 넘어왔다. 우정, 우정은 두 가지로 나뉜다. 남자의 우정과 여자의 우정으로. 여자의 우정은 모르겠고, 달리 말하자면 관심없다 라고 말해야 한다더라. 그럼 남자의 우정은 무엇일까? 단어의 정의는 사전이 안내할 일이고 우리는 자기의 친구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러면 쉽다. 친구? 그래, 친구! 그 역시 둘 중 하나다. 질투의 유발과 시기의 실행으로. 재수없음과 위선이나 기만으로. 말을 바꾸면 자존감과 자존심으로. 요거 요거 매우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자존감과 자존심의 차이라는 거! '사고 싶다─갖고 싶다─하고 싶다─가고 싶다─닮고 싶다─되고 싶다─뺏고 싶다'가 있으면 합리화와 허세와 구라와 회의와 허무와 냉소도 존재하는 법. 부러워하는 의식이 자연스럽고 챙피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처럼 행동하는 것이 하나라면, 나머지 하나는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 그 다른 하나는 끝까지 내가 최고고, 죽어도 나는 최선이며, 굽힐 수도 없고, 겸손은 어려우며, 인정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정말 힘들어하는 (내) 본성이 밉고 (내) 본능이 싫은 강한 남자 콤플렉스다. 강한 남자 콤플렉스? 그거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최고' 콤플렉스라고! 저 두 가지로 구분되는 그들이 만나서 사과나무를 키우는 것일까? 그건 개인적으로 각자 탐구할 일이고, 촛점을 돌려본다. 왜 부러워하면 수치스러운 일인가로. 아니, 그러지 않은가? 부러워하는 게 죄인가? 아니다. 부러워하는 게 비굴한 행위인가? 아니다. 그런데 왜 부러워하는 것을 치욕까지는 아니더라도 떳떳하지 못하고 뭔가 싫고 기분 나쁘며 짜증나고 창피한 짓으로 인식한다는 것인가? 정신병은 아니지만 정상은 아닌 듯 하다. 그걸로만 보면. 무언가를 부러워하거나 내 치욕을 표출하는 것이 왜 그렇게 싫은 것일까? 촛점을 돌려본다. 그 인간이 뭐가 좋다고 대체 뭐가 멋지다고, 완전 썰렁하기만 한데 그게 뭐가 재밌다고 그 덜떨어진 멍청이한테 열광하는지로. 촛점을 돌려본다. 그 녀석이 대관절 왜, 어째서 아무런 이유없이 싫은지로! ...휴~, 어느 현상을 너무 정확하게, 적확하게 꼬집어서 해석해도 쌍방이 불편하고 분위기 참 불미스러워질 수도 있지만 어차피 말 나온 김에 모두 털어놓는 게 나을 듯 하다. 그래야 왜 그럴까 왜지 왜지 어째서 어째서 하다가 아하 그랬구나 그 때문에 그렇구나, 에 약간 더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계단 올라가야 하니까!... 남자가 우정의 상대에게 자기 여자친구를 소개시켜주면 알게 된다. 그냥 아는 동생만 선보여줘도 알게 된다. 우정에 가까운 친구 녀석이 데려온 애가 가슴이 크네? 친구는 딱 벌레 씹은 표정이 된다. 녀석과 웃으며 대화하는 그녀가 예쁘네? 짜증 제대로 나고 얼굴 막 일그러진다. 친구의 그녀가 아름답고 착하고 젊고 친구의 차가 번쩍인다? 여자들은 죄다 허영 덩어리고 세상은 말세다. 객관성은 상실된다. 남자1의 애인이 남자2를 치켜세우며 뭘 좀 아는 남자라고 칭찬하면 남자3은 그야말로 얼굴 망가진다. 아뿔사! 아이고 무서워라, 가 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남자3은 남자2를 열심히 깎아내린다. 무던히도! 이 1, 2, 3에서 애인을 술집 마담으로 대체했을 때 남자2가 자신의 치욕을 스스로 밝히면 남자3은 완전 좋아한다, 남자들끼리의 금기 사항인 여자가 끼었을 때 내 과오나 허물을 내가 아닌 남이 밝혀서는 안 된다는 점. 혼자 알아서 후순위로 밀려나겠다는데 당연히 고맙나 보지 뭐! 권위적인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지 않아도 훤한 이치다. 또 내가 최고가 아니거나 썩 내켜하지 않는 놀이만 하게 되면 표정 관리 안되고 울화통이 터진다. 참다 참다 폭발한다. 심하면 절교는 당연지사! 친하고 좋아한다고 할지라도 살다 보면 어차피 친교는 대부분 단절된다. 너무 냉정해 보이는 것일까? 과연 그럴까? 그럼, 살면서 바쁠 우리는 나중 언제 다시 또 보게 될까 라는 인정보다는 내가 최고라는 사욕의 순서가 앞서는 진실은 온정일까? 글쎄요! 그런 우정은 왠지 좀 불안해 보인다. 하지만 불안불안해도 또 그 나름대로 근근히 명맥은 이어가게 마련이다. 주변을 돌아보거나 뒤를 돌아봤을 때 그런 일을 마주하게 된다. 묘하게 두 친구가 한 여자를 좋아하는 일, 드물게 발생한다. 이때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당신은 무엇을 택할 텐가? 말을 바꿔도 된다. 가난한 사랑과 적당한 애정이나 부유한 조건에서 무엇을 고를 것이냐로. 사람들은 말한다. 흔히들 얘기한다. 사랑을 택해야 한다고. 철지난 연애소설은 속삭인다. 사랑에 인생을 걸라고. 왜냐하면 사랑을 놓치면 나중 후회하고 우정은 상심할지언정 나중 회복되기 마련이니까 라고. 또 반대 의견도 있다. 우정을 고르라고. 사랑 그거 오래 가지 않는다고, 더 멋진 사랑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건 모두 하나의 견해일 뿐이다. 손아랫사람에게 그건 뭐다며 멋진 말을 하고 싶을 때, 소셜 네트워크에 사진과 함께 남기는 짧은 단상, 바에서 외로운 손님이 명-바텐더와 독대하며 나눌 얘기들. 그것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느냐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뭐가 옳은 결정이냐 라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내가 그 모든 결정을 온전히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큰 흐름은 거의 정해져 있다. 두 친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자기를 쥐락펴락해도 싫어하지 않는 오히려 그 뭔가를 반기는, 심한(?) 말로는 무게와 가치를 견주는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한 게임이다, 그것은. 끝이 아름답기에 쉽지 않을 수도 있는 일. 만약 사랑을 택한다 할지라도 나중 어쩔 수 없이 대개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 그 사랑이 길이길이 유지됨과 동시에 습관적으로 외롭다고 하거나 사랑은 없다라는 사랑관과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면 제3의 길을 가라는 엄한 이론을 퍼트림. 둘째, 사랑의 결별 또는 파혼 혹은 이혼! 더불어 셋째도 필요하겠다. 사랑도 우정도 모두 남았으면 친구에게 남편 흉 보기! 사후 확신 편향이네 뒷북이네 과거네 뭐라 하더라도 사랑 그거 절대 쉽지 않다. 그건 정말 바보들이나 하는 짓일 것이다. 그러면서 사랑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며 추억의 드라마 명대사를 인용하고, 어제는 단테를 읽고 오늘은 마크 로스코 전시회에 가며 내일은 바람을 피우고, 평소에는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노래를 부른다. 일평생 동안! 다 바보들이다. 오오, 이런 이런 이런! 우정은 뭐다를 논하다가 다시 사랑은 뭐다로 돌아가버렸네. 아아, 대체 사랑이 뭐길래...! 우정에 대한 얘기를 마저 마무리지어야겠다. 그렇다. 친구도 서로 안 맞으면 안 만나게 되고, 아무리 절친해도 이런 저런 이유로 자주 보기도 쉽지 않다. 더 중요한 점은 좋든 싫든 대개는 교류가 끊긴다는 것. 법정대리인이자 1촌 관계라는 사랑도 이혼으로 끝나기도 하고 불의의 사고로 사별하는 사례도 있는 게 다름 아닌 인간사다. 친구, 짜증나면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을 수도 있다. 그게 둘 다에게 이익이다. 속 편하게. 쌍방 과실이 아닌 상호 이득인 것이다. 단정하게. 내가 최고인데 녀석이 풀하우스나 포커패를 먼저 공개하면 그냥 아무 까닭없이 싫고 미워지며, (원래 싫었으면 그건 말 다한 것임), 내 패는 보여주기도 추궁받기를 원하지도 추리를 환호하는 것마저 내켜하지 않게 된다. 결국은 원페어로 그 모두를 다 이겨버린다고 규칙을 혼자 새로 정한다. 여자들이 비교적 남자보다 괜히 친구로 인정하는 문턱이 높은 게 아니다. 여자들이 비교적 남자보다 괜히 친구의 숫자가 적은 것이 아니다. 여자들이 비교적 남자보다 괜히 단짝과 친구를 자주 바꾸는 게 아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물론 추측이고 섣부른 일반화라는 것 인정함) 그에 비해 남자의 친구 관계는 상당히 이상하다. 꽤나 이상하다. 그래야 정상이고, 친한 관계가 돈독해지며, 우정은 한껏 공고해진다. 남자의 우정에서 둘 중 하나의 특징은 이렇다. 표어를 하나 선정하면 이해가 한결 수월하다. 그것은 이렇다. 마초의 관점, 그것의 기본 문제는 이 때문에 생긴다. <내가 최고다. 그런데 (뭐가) 부럽다> 내가 최고인데 부럽다고?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모순이고 딜레마다. 내가 최고니까 부럽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런데, 나는 최고도 아니고 부럽지도 않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최고가 아닌데 부럽다거나, 최고인데 부럽지 않다라 그건 말이 안 된다. 전자는 허탈이고 후자는 불합리이자 허세다. 묻지마, 는 열외로 치자. 넷 중 하나만 1등이지 공동 1등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 그건 인정 못할 이론일 뿐 실제로 허용도 적용도 되지 않는다. 남자의 우정이라는 그 애매한 분야에서 보통 둘 중 한 명에게 적용되는 법칙이 이런 모습을 띄고 있다. 그래서 그런 우정은 미안해서라도 접어주고 져줘야 유지된다. 남자 중의 남자가 아닌 사람들끼리의 어찌보면 편협한 우정이다 그것은. 그래도 유지는 된다. 끼리끼리 만나니까! 그러나 그래 봐야 남자 중의 남자도 50보 100보 차이 밖에 없다.
   때로는, 나는 그 방식이 싫다 라는 나머지 한 명이나 어떤 4차원 친구가 대표적인 마초들과 지속적으로, 범수평적으로 친한 경우도 있다. 그 또한 둘로 나뉜다. 접고 꺾어서 대충 적응하는 부류와 끝까지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쪽으로. 전자와 후자 사이를 오락가락하다가 불씨가 커진다? 그러면 마이크 타이슨 사건이 발생한다. 그래서 다시 후자는 전자로 살아야 한다고 자기 최면을 건다. 자기만 참으면 다 좋다고, 문제될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실제로 그러니까. 그러다 어느 날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왜? 항상 자기만 손해보는 것 같거든. 그래서 접고 꺾는 걸 이따금 지나쳐버린다. 즉흥적으로. 일행 중 여자가 끼어 있다면 웃으면서 말린다. 친구니까 자상한 오빠가 참고 견디며 받아주라고 다독일 것이다. 하지만 오빠라 부르는 상냥한 목소리가 없으면 그 결과는 좌충우돌이다. 그러다 어느 날 똑같이 응수하잖아, 거울처럼? 원래 그네들 방식대로. 음, 그러면 갑자기 평소와 다른 상대를 보며 그분들은 붕 뜬다. 자기들과 똑같은 방식인데도 뭔가 기분이 나쁜 것이다. 온갖 권태와 싫증과 불만족에 앞서 알고 보니 친구는 돌아이였던 것이다. (완전) 똘아이! 참고로 숙녀를 극찬하면 그녀의 기분은 푸르른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반면에 상남자를 당황하게 만들면 그분의 마음도 흥분하며 저 하늘의 흰구름이 혹시 솜사탕은 아닐까 하며 푸르른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그러나 똑같은 설렘이고 똑같은 '새 신을 신고서 펄쩍 뛰어보자' 인데 그 성격은 확연히 다르다. 하나는 콧노래와 흥취를 하나는 레이저와 화염을. 자기가 최고라서가 아니라 괴짜 친구 때문에 퍽 거슬려서 공중 부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붕 뜨고 벙 찐다. 짜증난다. 발동 걸린다. 수증기가 끓어오른다. 부글부글 부글부글! 원하는 진공청소기는 작동이 안되며 말도 안 듣고, 엄한 커피포트만 바쁘고 또 바쁜 것이다. 녀석들은 친구가 아니라 다 골목대장 놀이에서 탈피하지 못한 동네 꼬마 녀석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해는 된다. 내가 최고다, 그런데 부럽지 않다? 그 모순을 일생 품고 사는데 참 피곤할 수 밖에! 그 마음을 누가 누가 달래줄까, 아마도 촌년? 어쩌면! 그것도 운이 좋았을 때 얘기. 아니면 던지고 치고 잡고 때리고, 술집으로 떠나거나 운동장으로 무도장으로 게임장으로 나설 수 밖에! 말 나온 김에 모순을 하나 더 밝히자. 당당히 공개해서 해법을 모색하자. 예술 세계에서는 철들지 마시라고 한다. 철들면 안된다나 뭐라나. 그런데 철들지 않으면 저처럼 장난이긴 하지만 조롱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어이쿠~ 조심조심하며 철이 들었어. 그랬더니 아 글쎄 재미가 없네! 손가락 딱─골 세러모니, 검지를 하늘로 향하여 살랑살랑─윙크 깜박깜박! 나는 과연 성격이 좋은가, 내 인생이 혹시 불행한 건 아닌가 살살 어~ 슬슬 의심이 들기 시작할 꺼야. 그러니까 다시, 누가 나를 비꼬든가 말던가 난 내 갈 길을 가겠다며 철없는 행동을 서슴치 않게 돼. 그러면 어떻게 된다?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나, 사람들이 슬슬 날 피하기 시작하더란 말씀. 바꾸어 말하면 철들지 않았는데 난 여태 삼류이라는 거! 상대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가난하다는 거! 그러면 다시 철들어? 재미없을 텐데... 세상도 모르겠고 인생도 까다롭기만 하나 보네요 그려!
   남자의 우정이란 (대체로 절반쯤은) 바로 이런 것이다. 꺾을 줄 아는 기교를 익히는데만도 한 세월이 걸린다. 부드러움과 섬세함을 알게 되고 인생의 비밀을 마침내 터득한 바로 그 순간, 환갑 잔치를 코앞에 두게 된다. 이런 우정 어떤가요? 어떠긴 뭘 어때! 더는 묻지 맙시다. 호기심은 각자 해결하자구요. 차라리 그 대상을 바꾸는 게 어떨까? 이를테면 육체적 사랑으로! 뭐라고? 이런, 젠장! <사랑은 뭐다>도 엉터리고, <우정은 뭐다>까지 엉망으로 판명됐다. 다만 우리들 동인 '다정'의 지란지교와 그 끈끈한 교분이 어떻게 확립되었나는 겨우 설명되었으니 그것만 해도 뭐 다행인 것으로 만족하고, 이제 그만 나는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하겠다.
   나는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여행을 갔다 왔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심심해졌다.
   다만 '다정'은 탈퇴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우정이 더 돈독해지지도 않았다.
   산책하고, 일하고, 차 마시고, 사진 찍고, 가끔 선물을 교환하고, 괜찮은 전시회가 있는지 정보를 나눴다. 꽃을 사고 화분을 가꿨다. 나는 우리집 수영장을 내줬고, 녀석들은 나를 자기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옛것이 낫다? 그래서 소박한 삶이 뭐가 나쁘냐고? 나쁘지 않다. 다만 척키2가 우리 동네에 정착한 후 앤젤이 이곳에 사뿐히 터를 잡았든 어쨌든 뭔가 어떤 감상할 작품과 새로움을 안겨줄 영감도 함께 기쁜 우리네 인생에 동참하기를 바랄 뿐이다. 많은 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다 나는 쇼핑 중독에 빠져서 잠시 휘청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후 블로그에 열중했고, 척키2는 SF 소설을 하나 쓰고 있으며, 앤젤은 본격적으로 미스테리 만화영화를 구상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네 삶은 변화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일단 이만 하면 큰 불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안 그런가? 안 그렇다. 과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미완성은 뭔가 찜찜하다거나 허전하다. 결국 언젠가 꼭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사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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