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니는 작곡가다. 한때는 잘나갔다. 팬클럽도 있었고 그를 따르는 여자들도 많았다. 그는 3분의 마법이라는 유행곡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가 쓴 곡들은 하나같이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많은 로니광들이 쉬지 않고 이런 얘기를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고 있었다. 내 인생은 로니의 음악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 라고. 그만큼 그의 명성은 대단했고, 그 멋진 대리석 무늬처럼 신비한 인기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그는 DJ로도 활약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라디오 방송에서 사소한 실수를 했다. 그보다 더 유명하고, 더 어리고, 더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더 재주가 뛰어나고, 더 외모도 뛰어난 어느 슈퍼스타를 조롱한 것이다. 그를 오래 사귄 친구들은 그가 구사하는 특유의 화법과 매우 독특한 농담을 전혀 오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을 모독하지도, 사회를 무분별하게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비판하지도, 관계를 비꼬지도, 듣기에 썩 거북하지도 않았다. 그가 구사하는 언행은 얼핏 들으면 떨떠름하게 들리지만 잘 들어보면 즉 농담의 높은 수준 때문에 듣고 나서 즉시 웃지 못하고 상당히 시간이 흐른 후에 터지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 농담을 친구들은 이해했고 좋아했다. 그러나 대중은 달랐다. 로니와 대중은 친했으나 적어도 친구는 아니었다. 또 당시 분위기가 좀 애매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여러 매체를 통해서 대중들의 불편함을 전달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느 날 집에서 소포도 받았다. 자기 자신의 대형 사진을 펼쳐봤드니 눈이 없었다. 자기를 닮은 인형을 봤는데 뿔이 달려있었다. 자기의 일대기를 다룬 비디오를 봤는데 마지막이 이상했다. 영정사진도 배달되었고, 비석은 물론, 장례식을 연상시키는 꽃이 꽤 오랫동안 집으로 배달됐다.
로니는 낙마했다. 다만 인기가 식었을 뿐 변한 건 없었다. 오히려 여유를 찾게 되어 더 좋은 것 같았다. 일을 하지 않아도 거액의 음원 수익은 통장으로 꼬박꼬박 입금되었지만 그는 일을 계속했다. 그는 대외적인 활동이 잠잠해진 대신 1분이나 10분 길이의 곡을 써서 각계 재주꾼들에게 그 곡을 팔기도 하고, 선물도 했으며, 광고 전단지처럼 핸드폰 메세지처럼 무차별적으로 선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곡이 너무 잘 써졌기 때문이다. 즉 그의 천재성은 비현실적으로 최고조에 이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로니의 악상이 뚝 끊겨버린 일이 발생했다. 왜냐하면 그의 사무실에 새로 입사한 직원에게 로니는 첫눈에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홀딱 빠지고 말았다. 사랑이 뭐길래! 만약 그가 훨씬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면 갑자기 부닥친 사랑 때문에 없던 재능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그 반대에 해당했기 때문에 역시 그 반대에 걸맞는 현상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일을 너무 많이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약간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좀 쉬는 시간을 갖고 싶었으니까, 둘째 그 모든 환상을 경험했고 아무런 불만도 없었으며 부족한 무엇도 없었고, 셋째 그 사랑이 짝사랑일지라도 너무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순수한 행복에서 물장구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지금 현재 그의 삶은 희극이었고, 세상은 아름다웠고, 인생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흥분되고 짜릿하며 멋진 잔치와도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 축제의 흥취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고, 끝없이 이어질 듯 했으며, 로니는 마침내 만화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의 개인 사무실에 새로 들어온 경리는 이름이 코코였다. 코코는 로니에게 뮤즈였다. 그의 삶은 화려함 대신에 뭐랄까 고귀한 매력을 얻었다고나 할까? 괜히 눈물이 났다. 쉬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어쩜 코코 때문에 로니는 무능력에 가까와진 듯 했으나, 그의 인생은 현 시점이 최고였다. 하루하루는 시간낭비가 아니었다. 그의 사무실도 켜둔 채 잠든 TV가 아니었다. 코코는 요정이었고, 로니는 비운의 천재 작곡가였다. 로니는 그러나, 고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 그런 일을 시도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일 때문에 만난 사이라서 어떤 보이지 않는 선을 지켜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로니는 일단 코코를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져도 이 음악만 있으면 다시 뭐 어쩐다는 그리고리 소콜로프가 연주하는 J.S. 바흐의 평균율을 틀어놓기도 했다. (그 어딘가에서 인상적인 한마디로 시작할 사랑을 예감한다. 이거 누구죠? 와 누구 아니에요? 첫만남이 단지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지만. 먼저 다가섬이란 것은 너무 미묘하기에!) 이어서 스트라빈스키와 프로코피에프가 활동하던 그 즈음 녹음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들려주었다. 그와 같은 미묘한 반응들을 몇몇 살펴보면 금새 사람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2
「밤의 황제야 밤의 여왕이야?」 샘.
「남자냐 여자냐 라고 물어보면 되지 그걸 꼭 뭔가 어떤 밤의 문란함으로 포장해서 클럽에서 나와 어떻게 될까, 같은 그런 뒷이야기를 연상시키도록 물어봐야 속이 시원하니?」 로니.
「내 말은, 늬가 그동안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진짜 그랬다고. 그간, 누굴 좋아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라는 얘기를 너한테서 한번도 못들어봤으니까 하는 말 아니냐. 안 그래? 그러니 내가 오해하지 않게 생겼냐고.」 샘.
「너무 앞서 간 거 아니니? 원래 남자들끼리 있으면 나 누구 좋아, 그런 말 잘 하지 않잖아? 그게 정상인데 누굴 사랑한다 누굴 좋아한다 그런 말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하냐? 우리가 무슨 연예계에서 잘 나간다면 또 몰라. 또는 사교계에서 관심을 한몸에 받고 만인의 부러움을 산다거나. 그런 거도 아니잖아. 그 애는, 여자야! 여자라고. 나 여자 좋아하는 거 몰랐냐? 그래. 나 여자라면 환장한다. 됐냐?」 로니.
「네 주변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도 않더니만 어떻게 딱 한번에 사랑에 빠질 수 있지? 신기한데! 뭐하는 친군데?」 샘.
「우리 사무실 경리.」 로니.
「뭐? 너네 사무실 경리?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일인데. 늬가 유혹에 넘어간 거야? 잘 생각해봐, 그쪽에서 꼬리친 거야? 너는 유혹에 넘어갈 준비가 되어있었던 거고?」 샘.
「아 몰라. 그 정도만 알아둬. 아 맞다. 그 향기. 막 화사한 그런 향수가 아니라 내가 사춘기 때 사용했던 여드름 물약 냄새도 났어. 또 막 뭐라 딱 설명하기는 곤란한데 그 어떤 캐롤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뭔가 그런 게 있어. 음. 그렇다니까.」 로니.
「오~ 얼굴 빨개지는데? 늬가 무슨 사춘기 소녀냐? 오 이거 장난 아닌데! 그녀가 마음에 드니?」 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데. 이미 내 마음을 빼앗겨버렸으니까. 어때, 답변이 마음에 드니?」 로니.
「평소 같으면, 꼭 그렇게 빈정거려야 직성이 풀리니, 라고 했겠지만 뭐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을 궁금해 하며 세상을 믿는 나이는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줄께.」 샘.
「너 말 한번 잘했다.」 로니.
「것 참~ 사랑이 뭐라고! 좋아보인다. 부럽다야~! 행운을 비네 친구. 얼마 후에 차였다며 징징 짜지나 마셔.」 샘.
로니는 모처럼 친구가 놀러왔는데 사무실에 친구를 들이지 않고 바깥에서 샘과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눴다. 아직 그녀를 친구에게 소개시켜주면 안될 듯한 긴박한 사정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로니는 샘을 서둘러 되돌려보낸 후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서 로니는 코코를 관찰하며 생각했다. 얘는 아마존이 무슨 뜻인 줄 아는 여자일까? 사람을 처음 만날 때마다 항상 이 사람은 어떤 인간형인가 라는 판단을 먼저한 후 친분을 맺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직관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고, 직감이 나중 나서기도 하는 법이다. 또는 정이 먼저 들고 사랑은 한참 나중 나타나는 사례도 있지 않나. 우정이든 사랑이든 나중 생각했을 때 더 애틋하거나 더 비중이 약해보이기도 하는 법이니. 그런데 아마존이 무슨 뜻인 줄 모르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알면서 까먹은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래서 로니는 코코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않기로 했다. 그것의 뜻을. 그러면서 상상을 이어 갔다. 혹시 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사랑해 라는 밀담을 속삭여 보지 못한 쑥맥은 아닐까? 그러다 결국 로니는 혼자 속으로 약간은 건전하지 못한 욕망을 품게 됐다. 기준이 불명확하지만 일단은 그랬다.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그녀의 손금을 봐주고, 그녀의 눈썹을 만져보고, 그녀의 속눈썹을 바라보다...... 그만, 헉! 로니는 여자를 너무 좋아하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로니는 일단 자신의 사랑관과 인생론의 요점을 그녀에게 살짝만 얘기해 보기로 했다. 많이는 피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지루한 남자로 찍힐 테니까. 그 말을 듣고난 후 그녀의 반응을 보면 그녀가 어떤 스타일인지 알 수 있으니까.
「코코! 사랑은 뭐고 인생이 무엇인 줄 아니? 사랑은 극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 같은 심정, 그게 바로 사랑이야. 그리고 인생은 말이야, 보긴 봤는데 그 결말이 단번에 딱 떠오르지 않은 영화 같은 삶. 그게 바로 인생이야. 알겠니?」
「네. 알겠어요.」
뭐야, 얘 뭐지? 로니는 당황했다. 코코는 미끼를 물지 않은 것이다. 코코를 옷으로 비유하자면 기상천외한 속옷은 아니지만 뭔가 예측하기 어려운, 즉 공략이 까다로운 성향의 소유자인 듯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범위는 훨씬 수월하게 좁혀진 거나 다름없었다. 조심스럽게 고상한 척 하느라 뭔가 대처가 어렵다 싶으니까 아마도 앵무새 따라하기를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은 듣지만 마음은 읽는 것이다. 느낄 수도 있고 점지할 수도, 주문을 걸 수도 있는 것 그게 바로 마음이다.
그날 로니는 집에 가서 일기를 썼다. 마음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쓴 일기는 엉터리였고,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가 쓴 일기는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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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적극적이었다. 적극적인 여자는 많다. 그러나 그녀처럼 적극적인 여자는 거의 없다. 뭐랄까 그녀는 일생에서 딱 한 명에게만 적극적이라고나 할까? 그렇다. 정말 그렇다. 그녀는 뭔가 달랐다. 많이 달랐다. 이런 여자는 평생 단 한 번 만날까 말까 아니 아니, 이런 여자는 이 세상에서 10년에 오직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하는 그런 여자다. 0은 일부러 하나만 붙였다. 흐흠. 느낌이 왔다. 그녀는 괴짜다. 괴짜인 여자도 많다. 아니, 많으면 안 되나, 여하튼 그녀는 괴짜다. 그런 그녀가 나와 사랑에 빠졌다. 나는 이 여자를 더 알고 싶어졌다. 매사 따분하고 재미없던 삶이 이제 뭔가 신나고 즐겁게 돌변할 것만 같은 예감 때문에 거리에 나가서 발가벗고 춤이라도 추고 싶다. 아니면 선거 유세하는 그런 차를 구해와서 그걸 타고 다니며 마이크를 들고서 한바탕 노래라도 부를까? 여기저기 막 돌아다니면서? 하마터면 진짜 할지도 모르니 참아야겠다. 아무튼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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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로니는 사무실에서 그녀와 단 둘이 있었다. 로니는 긴장되어 보였고, 코코는 편안해 보였다. 코코는 로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로니. 우리 집에 놀러갈래요?」
뭐? 벌써?
코코가 로니를 데려간 곳은 코코의 집이 아니라 일종의 비밀 작업실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예술 기계라는 기기가 있었고, 거기는 약간 사이비 교습소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예술 기계는 매체를 변환시켜주는 기계였다. 소설 양식의 파일을 넣으면 음악이 나왔다. 음악을 넣으면 소설이 나왔고, 입력이 무엇이냐에 따라 출력은 브랜드 슬로건으로도 광고 문구로도 설정할 수 있었다. 코코는 시험적으로 잘 믿기지 않아하는 로니에게 시연을 선보였다. 로니가 만든 노래의 가사를 예술 기계에 넣으니 출력은 그가 만든 노래가 나왔다. 로니는 처음에는 설마 되겠어 그랬지만 지금은 은근 신기해 하며 그 기계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코코도 좀 더 기분이 좋아졌고, 어떻게 이 기계를 미래에서 데려올 수 있었는지에 관하여 설교를 하고 또 했다. 그런데 설명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고, 로니도 그런 주변 사정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물론 코코가 로니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었을 리도 없다. 로니 이 기계 갖고 싶지 않아요? 라고. 그러니 당연히 로니도 거절할 기회가 없었고, 그 예술 기계의 값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로니는 좀 더 다양한 기계의 작동을 원하는 눈치였고, 코코는 그런 로니의 마음을 부추겼다가 충족시켰다가, 다시 뜸들였다가 주문인지 뭔지 뭔가 반복되는 문구를 각인시켰다가 하면서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예술 기계는 정말 신기한 물건이었다. 입력단에서 각종 매체를 선택할 수 있는데 나머지는 연구 및 개발 중이고 지금은 글과 곡, 소리만 가능했다. 출력단도 그와 똑같았는데 추가 옵션이 있었다. 압축과 확장이라고. 그들은 몇 가지 시험 검사를 더 진행했다. 피카소가 남긴 시를 입력하니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가곡이 나왔다. 살바도르 달리가 쓴 소설을 넣으니 리스트나 리하르트 쉬트라우스가 쓴 듯한 그런 교향시가 나왔다. 앤디 워홀이 남긴 영화 각본을 넣으니 지금 현재 발표되는 단편들과 비슷했다. 인기 없었던 옛날 영화인 코카인 카우보이스의 영화 음악 악보를 넣어봤드니 웬 디스코풍 음악이 나왔다. 지금 당장 발표해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을 듯 했다. 장 콕토의 시를 넣으니 아트락 음악이 나왔고,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음악을 넣으니 상당히 흥미로운 중편소설이 나왔다. 작품성도 있어보였다.
「로니. 정말 이 예술 기계가 탐나지 않아요?」
「코코. 고맙지만 사양할께요. 그래도... 되죠?」
「좋아요!」
「그렇지만 정말 혼자 알기엔 너무 신기한 물건이군요. 얘가 얼마인 줄 몰라도 제 친구 발렌타인에게 물어볼께요. 혹시 의향이 있나 어쩌나.」
「아니요. 그건 절대로 안되요.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 생겨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창작 아카데미에서 직접 나설 꺼에요. 사람들은 역대 교황이 누구였나 기억하며 그 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지만 우리도 그런 게 있거든요. 뭐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알려드릴 순 없지만 거기까지만 알아두세요. 그래...주실꺼죠?」
그들의 거래는 무산됐다. 적정 거래가의 협상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끝나버렸다. 장차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으나 서로 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협상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창작 아카데미는 뭔 말인가? 무슨 다빈치 코드, 장미 십자단 그런건가? 아무튼 이런 다이아몬드 사업 같은 풍미를 엿보이는 뭔가 오싹한 분위기의 만남은 이렇게 끝이 났다.
4
로니는 집에서 잘려고 누웠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예술 기곈지 뭔지 때문에 흥분이 가라앉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알게 된 사실을 없던 일로 되돌릴 수도 없었다. 어쩌면 좋은가. 방법은 없었다. 잊어야 한다. 그 이상한 기계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자기는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잘 살고 있었다. 괜히 로니의 마음이 흔들린 건 혹시 코코 때문일까? 모르겠다. 코코가 우리 집에 놀러가실 꺼냐고 하길래 넙쭉, 쫄랑쫄랑 따라갔다가 그의 앞에 나타난 건 멜로나 에로 비디오의 흔한 전개 방식이 아니라 웬 보도 듣도 못한 기계였다니, 뭔가 허전했으나 그렇다고 꼭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불순한 탐욕이 어떻게 단번에 그와 같이 미지의 신비감으로 바뀔 수 있는 건지 참 믿기지 않았다. 지금 당장 집에서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아마 예술 기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겠으나 그것의 정체를 이미 알아버렸는데, 이미 모든 상태는 온전히 기지였는데 그것은 로니에게 언제까지나 미지의 환상 머쉰이었던 것이다. 코코를 사무실에 괜히 들였나? 내일 사무실에 가서 당장 그럴까, 넌 해고야 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은 로니가 생각해도 너무 발칙했다. 로니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평정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살면서 간혹 그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피아노 학원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K.545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번 1악장을 연습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로니는 이미 그 예술 기계의 예비 주인이 되었다.
5
로니의 사무실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타미 제임스 & 더 션델스의 I Think We Are Alone Now.
「오, 로니. 그 노래 좋아하세요?」
「아니. 별로. 구식이야. 요즘 노래들도 딱 3번 들으면 질려. 그런데 이 노래는 훨씬 많이 들었지. 그러니 좋을 리가 있나. 안 그래?」
「로니.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어요? 지금 그건 투정이에요 아니면 불만이에요? 게다가 그것은 욕구에 관한 거에요 아니면 환상에 관한 거에요? 말 좀 해 봐요. 이를 악문 채 짓는 그 뚱한 표정은 대체 무얼 뜻하는 것인지를.」
「아무 것도 아니야. 나 원래 성격이 이래. 몰랐어? 내가 무슨 설마, 솔직-담백하고 시원스럽고 자상하며 친절한 그런 남자로 보이는 건 아니겠지?」
「어머! 로니가 심술부리는 모습 너무 귀여운 거 있죠? 호호호!」
로니는 이제 한물간 작곡가가 아니라 어영부영 현역에서 완전 물러난 것처럼 보였다. 기발한 착상은 떠오르지도 않고, 허구헌 날 인터넷에서 야한 사진만 찾아보며 새로운 롤렉스 시계를 살까 말까 고민하며 지냈다. 잠깐, 롤-렉-스? 어려운 사정이길래 목돈을 빌려줬다가 인연이 끊기고 돈도 못 받은 롤렉스라는 친구가 생각났다. 하지만 걔는 떴다. 완전 떴다. 회사가 상장해서 떼돈을 벌었는데 어려웠을 때 지 코흘리며 지지리 궁상맞게 살고 있을 때 도와줬던 친구를 모른 채 하기로 했나 보다. 그런 사람들 많다. 꼭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벤처 캐피탈쪽 일을 해 봐도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됐는데 도움 받고 투자 받은 (십)만 명에게 어떻게 일일이 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사례를 하겠나. 절대 그렇게는 살 수 없다. 냉정하긴 하지만 성공 가도를 달려야 하는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연대)책임과 가속도 외에도 이유는 많다. 그런 경우 딱 뒤집어서 생각하면 된다. 걔가 혹시 희대의 폰지 사기처럼 그쪽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다행이라고! 도움 하나 주고 생색 낼대로 내고 다시 뭔가 받을 대로 받고, 그건 삶도 포부도 뭣도 아니다. 불공정한 거래가 있었으면 정당하게 계산해야 옳은 거고. 한번 바뀐 주객은 감정을 회복하기도 힘들다. 최소한 여기서 탈무드를 인용하지는 말자. 그러니까 그런 사례는 처음에 투자할 때 돈 잃는다 생각하고 투자해야 한다. 본전 생각과 투자, 그건 어떻게 보면 두 마리 토끼다. 현찰은 어디까지나 거래다! 친구고 가족이고 뭐고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절대 없다. 페이스북도 그랬고, 아마존, 구글, 야후, 애플, 트위터, 인스타그램도 다 그랬다. 안 그런 경우는 없다. 다만 안정된 투자 행태가 정착되어 있냐 안 되어 있느냐, 무분별하게 피라미드의 피라미드 방식이 적용되었냐의 차이는 좀 크다. 많이 크다. 물론 규모가 크다 보면 누구는 동물농장 사장이 되고 누구는 희생양이 되어 알카트라스에 갔다 와야 하는 일도 과장하자면, 빈번하다. 좋은 일도 그렇지만 안 좋은 일일 경우도 첫 번째 법칙은 인맥의 인맥의 인맥을 파고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최상위 목표와 최상위 포지션의 사람들만 상대하는 것. 세 번째는 일과나 회사나 지인이나 어느 단위든지 우선 순위 1번만 혹은 2번까지만 해치워야 한다는 점. 네 번째는 최악과 차선을 항상... 이렇게 치자면 인문-교양쪽 베스트셀러는 작심하면 대충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분야 1위 책을 읽어 봐도 별 거 없다. 다 아는 얘기다. 실상 쉽고 잘 읽히기 때문에 자료를 취합해서 간추리는 방법의 아마추어 방식의 책이 제일 많이 팔리지만 그건 대략 그것을 읽는 데 시간을 투자하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또 그 때문에 적이 안심이 되지만 말이다. 살면서 시간 낭비라는 생각과 말을 많이 했던 사람일수록 그런다. 그들은 같은 분야라도 최고만 상대하고 최고만 선택한다. 재수 없다고 느낄 만큼 얄미울 정도로. 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가설을 세워서 그것을 발전시킨 다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실험을 거쳐서 통계가 이렇고 그래프가 이렇다 그래서 결론은 뭐다, 성공한 사람들 10,000명의 공통점과 특징을 나열하여 정리한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꽤 크다. 모르면 젊은 거고. 어리버리하면 그냥 게임 끝나는 거고, 들러리로 살아야 한다. 말은 그런다. 장사치라고. 자기 기분 좋으면 비즈니스맨이라면서 딸랑딸랑, 자기 기분 나쁘면 장사치. 그래도 장사치가 제일 깨끗하고, 장사치가 제일 인자하고, 장사치가 제일 선량하다. 그러나 흠을 하나 잡자면 흉은 아니겠으나 그릇이 작다는 것. 당연하다. 나쁜 일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이치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는둥 뭐라 뭐라 해도 그 누구나 공통된 목적은 사랑이나 행복같은 개념이니까. 정문으로 또 한 우물만 파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일도 있지만, 옆으로 또 얄미움과 손가락질과 시샘과 노이즈 마케팅이나 갖은 책략으로 성공한 반칙왕 또한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주식시장에서 장기 투자라는 것도 그와 비슷하다. 그래서 한방이네 어쩌네 라는 말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진리가 있다. 로또 복권도 있고. 젊은이는 장기 투자를 모르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중 투자의 귀재 누구로 살고 싶다면 젊어서 폼 잡고 하고 싶은 일 하고 연애도 하고 어쩌고 놀고 그거 다 못하는 거다. 거의 포기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다. 일만 하든가 자린고비가 되든가. 그래도 돈 많은 노신사와 가난한 젊은이 가운데 많이들 후자가 어쩐다고 한다. 젊음이 뭔가, 청춘과 스무살이란 말만 들어도 흐뭇한 기분, 그게 바로 생동감 넘치고 활기찬 꽃다운 그것이다. 말은 그래도 실제 생활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어쨌든 로니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코코가 좋은 아침이에요 라고 인사해도 그는 아침이 싫다고 했다. 이건 분명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이었다. 이게 다 어쩌면 그 보잘 것 없는 예술 기계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설마 코코가 사는 집을 구경하지 못한 그 일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로니는 인기도 식고 있고 예술적 재능도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사는 건 재미없었고,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은 커져만 갔다. 그도 한때는 잘나가는 호색한이었고, 꽤 알아주는 수완가였으나 지금은 애타게 지난 날을 그리워하고만 있었다. 가자 회견, 그 기분을 다시 느껴볼려고 일부러 TV를 틀기도 한다. 기억도 안 난다. 사무실에 미러볼이라도 달까? 쓸데없는 일이다. 촌스럽게 클럽에 자주 드나들 수도 없었다. 이젠 허울도 좋지 않고 기쁜 일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로니는 오직 권태에서 벗어나고픈 일념 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는 그 예술 기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보너스로 코코도 따라서 덩달아 오면 좋겠으나 그건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되더라도 몹시 성가실 것이다. 은밀한 동거에 관심 가질 청춘에서 조금 비켜갔다. 그렇다고 애원하다시피 자기가 먼저 코코에게 그 거래의 성사에 대해 운을 띄울 수도 없었다. 귀는 멍해졌고 그는 마침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예술 기계와, 이미,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것도 매우 심각하게.
한편 코코는 그의 작업실에서 새로운 기계를 만들고 있었다. 작업대 옆에는 책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와 특수 상대성 원리. 영화에 흔히 나왔던 타임머쉰과 그 무슨 아카데미의 비밀을 유추할 수 있는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예술 기계에도 타임 머쉰에도 made by 무슨 아카데미라고 씌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코코는 자기 집이 그곳인 듯 했다.
어느새 타임머쉰은 완성됐다. 그것은 흡사 놀이공원에 있는 놀이기구와 거의 똑같았다. 기구에 타고, 안전벨트를 매고 헬맷을 스고, 기계가 작동하면 시계 방향으로 돌고, 오르락내리락 큰 원을 그리다 다시 제자리로 와서 다시 도는 그런 놀이기구. 그 기계가 진짜로 사람을 과거로도 미래로도 데려다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으나 일단 타임 머쉰은 완성됐다.
6
그러던 어느 날, 코코는 사무실에 친구 팅커벨을 데려왔다. 마치 노는 듯 일하는 듯 잘 분간이 어려운 사무실 분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밖에 나가 함께 식사를 했고, 로니의 뚱한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코코는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한때 잘나가던 유명 작곡가가 아직도 삐져있다니, 그건 온당치 못한 일이었다. 암만 봐도 그들은 예술 기계에 대해서 결단을 내려야만 할 것 같았다. 열띤 감정 대립은 길게 가져가 봐야 결코 좋은 일은 아닌 듯 했다. 아마도 남자란 애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 날 담판을 했다.
「로니. 그 기계 갖고 싶어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있어도 나쁘지는 않고, 없으면 생각나고 막 그래. 코코, 쑥스럽게 그런 건 왜 물어보고 그러는데?」
「호쾌하게 마무리 지읍시다. 어른들끼리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구요. 왜요? 예술 기계가 아니라 저를 갖고 싶어요? 그건, 아니죠? 꿈도 꾸지 마세요. 사귄다면 또 몰라도. 하지만 전 아카데미 소속이기 때문에 함부로 누굴 만나고 사귀고 그렇게 쉽게 운신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랍니다. 예술 기계 얘기나 마저 하죠. 얼버무리지 않을께요. 원래 처음 책정된 가격은 한 장이었어요. 또 둘째 조건은 우리 아카데미에 영구 회원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구요. 그러나 아카데미 총수가 바뀌면서부터 그런 제한 사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죠. 이러다 자칫 조직이 와해되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공동체는 상업적으로 변해버렸다구요. 그래서 이젠 어느 만큼 부를 달성했기 때문에 돈은 받지 않아요. 적이 의심스럽다면 알아보실 만큼 알아보셔도 돼요. 그래도 딱히 밝혀질 무엇도 없겠지만요. 그렇지만 조건이 없다고 그냥 무책임하게 기계를 사용하다 고물상에 넘기시면 안되요. 갑은 을에게 뭐라 뭐라, 계약서도 쓰셔야하구요. 뭔지 모를 가능성도 도사리고 있다는 점 감안하시구요. 그렇게 멍하니 듣지만 마시구 뭐라고 말 좀 해 보세요. 왜요? 아니꼬워요? 큰 거 한 장 불러야 하는데 거물 취급해 주지 않아서 기분 나쁜 거예요? 로니가 무슨 드라큘라 백작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솔직히 말해 한물갔죠. 그게 다예요. 그게 다라구요. 그래서 처음에 저 마지막 남은 예술 기계를 놓고 로니와 경합을 벌인 분이 있었죠. 순수예술가! 그런데 그분은 어딘가에서 비밀스런 초대를 받은 후 잠적해버리셨어요. 그래서 꿩 대신 닭이다, 로니가 예술 기계의 주인공으로 낙찰된 거죠. 어때요? 이쯤 되면 서로 손해볼 일 없는 완벽한 거래 아닐까요?」
「코코. 음 그럼, 어떻게, 칠면조 요리라도 준비할까?」
로니는 그 즉시 혈색이 좋아졌다. 안색만 봐서는 오늘이 무엇에 대한 첫날밤인 것처럼 보였다. 그 어느 예술적 감흥이 잠재되어 있다가 깨어날려고 약동하는 듯 했다.
7
로니는 집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떠오르는 짧은 경구를 예술 기계에 넣어보기로 했다. 그 문구는 이랬다. '누가 자기는 생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속없이 믿지 마라. 그러나 일단 속는 셈 치고 옹호하라. 그리고 지켜봐라. 오래!' 출력된 음악은 바로 다름 아닌 최신 클럽 음악보다 딱 100배 뛰어난 음악이었다. 그는 기분 끝장이었다.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미소를 금치 못했다. 폭소에 이어 또 폭소가 터져서 얼굴 근육이 실룩거렸다. 그는 당장 소셜 네트워크에 공언했다. 다시 활동을 재개하겠다고. 드디여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됐다고.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음악을 들고 다시 나타나겠다고. 그의 각오는 비장했고, 예감은 황홀했으며, 젊음을 불사르는 것으로 모자라 다시 환생한 것만 같았다.
그런데 기계를 들여놓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예술 기계의 부실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악보 파일을 넣어도 출력물은 싸구려 코메디 대본이 나오거나, 유명한 단편 소설을 넣어도 새 소리나 개 소리만 나왔다. 로니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어떻게 가져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말썽인지 너무도 답답했다. 코코의 그 이상한 화술에 넘어가서 한 장을 주고 얘를 데려왔다면 그는 지금 발끈함으로 모자라 역정으로 씩씩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특유의 간접 화법에 넘어가지 않았다. 나중 그 무임승차의 대가가 어떻게 되돌아올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그랬다. 낌새는 불편했으나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8
다음 날 로니는 코코에게 예술 기계의 오작동에 대해 설명했다. 그 말을 듣더니 코코는 벌떡 일어섰다. 그것은 추가로 설치해야 할 장치가 나중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에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타임머신은 자기 집에 있다고 했다. 그날따라 로니에게 그녀의 콧수염은 왠지 짙어만 보였다.
퇴근 후 그들은 코코의 작업실로 떠났다. 그런데 코코가 그랬다. 타임머신은 맨정신으로 탈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호화 별장이 아닌 단골 술집으로 갔다. 그들은 잭 다니엘스를 마셨고, 듀어스 앤 선스도 마셨다. 발렌타인까지는 무리였다. 약간 취기가 올랐을 때 로니는 코코에게 물었다.
「코코. 설마 타임머신 그거 진짜 있는 건 아니지?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다 애들 장난 같은 소리지. 그럼. 솔직히 말해. 내게 반했다고.」
코코는 그 말을 듣더니 열띤 어조로 응수했다.
「로니. 내 말이 장난인 줄 알어? 이 양반 이거 안되겠구만. 쥬라기 시대로 데려가야 믿을 사람이구먼. 로니 너 혼 좀 나야겠어.」
그들은 코코의 작업실에 도착했다. 저번에 로니는 앞부분까지만 봤는데 오늘은 그 너머로 갔다. 그곳은 꽤 넓직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웬 작은 놀이기구가 하나 있었다. 코코 말로는 그게 놀이기구가 아니라 타임머신이라고 했다. 시간은 어느새 밤 12시 5분 전이었다. 아까 술 마신 후 노래 부르고 나이트클럽에서 춤도 추고 어쩌고 하느라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당사자들이 많이 취한 상태이기 때문에 좀 더 사실만 간추려서 설명하는 게 좋은 듯 하다.
그들은 타임머신을 탔고, 조명은 끝내줬으며, 음악은 우선 Plastic Bertrand의 Ca Plane Pour Moi가 흘러나왔다. 기분은 환상적이었고, 그들은 세기의 연인인 것처럼 느껴졌다. 노래가 끝났고 타임머신도 멈췄다.
「뭐야, 다 왔어? 벌써 왔어? 지금이 몇 년인데? 설마 천 단위를 넘은 건 아니겠지?」 로니.
「우리가 있던 공간에서 7777년 후로 왔어. 혹시 바깥에 나가보면 실망할 수도 있어. 미리 얘기해주는 거야. 타임머신과 미래 세계는 막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지 않아. 그거 다 뻥이거든. 그리고 과학적으로 이론상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지만 우리 조직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잖아. X축 시간, Y축 공간, Z축 변화량에서 X축을 나타내는 그 수치만 바꾸면 이렇게 미래에 올 수 있어. 자, 우리가 머물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아직은 타임머신이 완벽한 상태는 아니니까. 아 증말 내가 늬 말상대나 해주고 나도 참 한심하다. 수많은 미남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나도 슈퍼스타가 되야 하는데 말이야. 안 그러니?」
뭐가 안 그러니? 아무튼 그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7777년 후의 미래 세계로 나갔다. 어떠했을까? 미래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들은 미래로부터 고무되지 않았고, 미래 세계에서도 그들을 보며 다음과 같이 놀라움을 표시하는 미래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밤 12시가 넘었으니까.
「아니 여긴 어인 일로......」
이게 그 찬탄을 아끼지 않을 만한 막 그런 미래 세계인가? 이곳은 그들이 여기 오기 전과 0.7777초의 오차도 없는 그런 공간으로 보였다. 그러나 코코의 말로는 여기가 7777년 후의 시공간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그들은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코코의 작업실 3호실에서 웬 서버처럼 생긴 기기를 하나 챙겨서 다시 작은 놀이기구로 돌아왔다. 로니는 미래 세계가 뭔지도 모르는 채 돌아갈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만취 상태였기 때문에 코코의 기세에 위축되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거기가 진짜 미래 세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코코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들은 로니가 술에서 깨기 전에 서둘러 타임머신에 탑승했다. 엘튼 존인가, 밴 모리슨일까 데이빗 보위일까, 어떤 달콤한 음악이 나왔고 타임머신은 출발했고, 그들은 다시 현재에 당도했다.
로니는 그냥 어영부영 코코의 작업실에서 미친 척 잘려고 했는데 그 일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집에 가서 잤다.
다음 날 부품을 예술 기계에 부착한 후 고장난 기계가 잘 작동되는 것을 로니는 확인했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마 숙취 때문은 아니겠지만 무언가 희미한 환청을 듣는 것만 같았다.
「나야 나~ 코코야 코코라구~!」
9
로니는 요즘 즐겁다. 아침에 일어나면 사무실에서 코코의 그 환한 웃음을 마주하며 인사를 나눌 생각에 뿌듯하고, 알찬 하루를 보낸 후 노을이 질려고 하면 집에 가서 예술 기계와 놀 생각만 해도 그의 기쁨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두 가지 재미에 푹 빠져 방긋한 미소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그는 그동안 왜 자기가 슬럼프를 겪었는지 생각해봤다. 한때 히트곡 제조기라는 별칭으로 독보적인 1등을 달리다가 그는 단번에 잊혀졌다. 어느 날 문득 자기가 그걸 다 어떻게 이루었고, 무슨 방법으로 곡을 쓰고, 영감을 어디서 가져와 왜 새벽에 곡을 써야 했는지를 모두 까먹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런 일이 가능하나? 쉽게 납득할 수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하지만 비운의 주인공은 자신이었다. 왜, 왜 그랬을까? 로니는 왠지 예술 기계와 친해졌기 때문인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짐작컨대 자기 사고 방식이 오류를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로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 안에 쌍둥이가 살면서 자꾸 그들끼리 줄다리기를 하는 그런 기분들을 이제는 알 듯 했다. 하나는 은근함을 하나는 확실함을 원하는데 정작 조정되어 작동하는 히트곡 제조기라는 그 육신은 누구 말을 들어야 하냐면서 갈팡질팡하다 보니까 곡이 안 써지고, 곡을 발표해도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은근해야 할 때 확실하면 우정이 삐그덕거리고, 확실해야 할 대 은근하면 노래하는 사랑은 싸우는 사랑으로 변한다. 은근함 대 확실함이 8 : 2인 사람과 2 : 8인 사람이 만나 영원한 사랑을 꿈꾸게 되면 대체로 사랑의 맹세 그 이전에 끝이 나거나 그 이후로 넘어가더라도 진공청소기에 빨려 커피포트로 사는 인생인 경우가 허다하다. 확실함과 은근함은 누구나 알면서도 누구나 오해하기 쉬운 습성이다. 그 비율과 긴장감만 잘 살려도 작품은 반타작은 한다. 손익분기점에 도달은 된다. 먹고는 산다. 먹고 살 정도는 벌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나! 우선 1차적으로는 그렇다. 이 얼마나 뿌듯한 삶의 길조란 말인가! 은근함과 확실함은 잘은 몰라도 엎어졌다 뒤짚어졌다 그러는 모래시계인 것 같다. 그 하나가 100인 사람은 없다. 100만명 가운데 2~3명이나 1명이면 없는 거다. (왜 내겐 아무런 희소 가치가 없느냐는 불만이 있을 수 있음. 괜찮음. 첫째 평범함이 좋은 것이고, 둘째 그대를 모르긴 몰라도 찾고 찾고 또 잘 찾아보면 뭐 하나는 걸릴 테니까. 내 장점을 극대화하거나 내 본 면목을 아는 데 주력하면 됨) 그는 바로 그 둘의 불균형 때문에 사랑 노래가 잘 써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기술적으로는 문제 없었다. 또 사랑 노래가 아닌 다른 주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3분의 마법을 다루는 시장에서 사랑을 노래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외면한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다른 분야도 비슷하다. 사랑이 뭐가 그렇게나 좋다고. 연극도 그렇고 뭐도 그렇고. 참말로 그 놈의 사랑이란!
평소였다면 그는 이런 생각을 무심코 걷다가 운전하다가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로니에게 딱 하나의 관심사가 무엇인가? 예술 기계다. 그것 때문에 그는 차분히 카운터테너의 노래를 들으면서 복잡한 심상을 정리하고 사무적인 간편한 단순 작업을 하는 듯이 왜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나 라는 일관되고 반복되는 맥락이 바로 쉽고도 선연하게 떠오르더라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비슷한 원리로 그는 소설과 영화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왜 자기는 장편소설과 영화를 비교적 단편이나 수필이나 드라마보다 선호했는지 약간은 알 듯 모를 듯 했다. 소설과 영화라면, 길이로 보면 당연히 장편소설과 수십 편에 이르는 드라마가 한 짝일 텐데 왜 긴 시간 필요없는 영화와 할 말이 뭐 그렇게나 많은 장편소설이 하나의 짝인지를 알 것도 같았다. 또 자기는 왜 장편소설과 영화를 비교적 더 애호했는지도. 재미만 놓고 보면 드라마가 월등히 재밌다. 영화는 어떻게 보면 드라마에게 명함도 내밀 수 없다. 그게 맞다. 영화는 드라마에게 상대도 안된다. 당연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극장에 갈까? 그런데 왜 작품 대사로부터 실생활에 인용하는 무엇은 드라마도 있지만 영화가 많을까? 아닌가, 비슷한가 아무튼! 사람들이 바보이기 때문에?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보가 아닌데 왜 집에서 TV로 드라마를 보지 않고─보기도 하면서─왜 바쁜 몸을 움직여 옛날 사람들처럼 거추장스럽게 가발을 쓰고 치장을 하면서까지 오페라를 보러 갈까, 바로 그것을 약간이나마 잘 하면 알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드라마도 좋고 드라마에 빠지면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며 실재 너무 포근하기 때문에 혼자 보기엔 아까울 수도 있다. 감상적인 작품이라면 썩 달가워하지 않는 마초가 왜 오락을 닮거나 게임과 비슷한 드라마는 좋아하는지가 뭔가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어떤 상남자들은 책이라면 오직 인문-교양이나 자기-계발 분야만 책으로써 인정하는지를 이제 조금 이해할 수도 있을 듯 했다. 속시원히 또 간략히 말해 왜 그런가는 인공지능이 업데이트될 예술 기계에게 물어본 후에 나중 정리하여 블로그에 올리기로 했다. 로니는 이제 자신감이 부쩍 늘었다. 예술 기계에 힘입어서 또는 자기 혼자 독립적으로도 인기곡들을 손쉽게 착착 쓸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술 기계를 약간 손봐서 인공지능을 추가하는 게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그런 공상을 하면서 그는 그날 하루를 보냈고, 그는 집에 가서 밤에 잠을 자면서 꿈을 꿨다.
꿈에서 로니는 자기가 맡아야 할 역할이 많았다. 줄거리는 뚜렷했다. 중학생인가 초등학생인가 어느 학생이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놀고, 공부하고, 친구 집에 놀러가고. 그런데 그 꿈이 참 특이했던 게 뭐냐면 로니는 꿈에 나오는 등장인물로 모두 변신해서 그 모두를 1인칭으로서 짧은 시간이나마 살아봤다는 것이다. 로니는 꿈에서 12살 아이의 엄마였고, 또 아빠로써 사업가들과 골프도 쳤다. 로니는 12살 아이였다가 녀석이 소풍간 날 우연히 만나게 된 소녀들의 리더도 되어봤고, 그 소녀들 무리의 등번호 3번도 맡아봤다. 녀석이 다니는 학교에서 선생은 물론 이사장으로부터의 외압을 꿋꿋이 버텨내는 교장으로도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교무처 직원으로 일하면서 졸업한지 한참 지난 어느 어른이 문득 그곳에 찾아와서 동문의 연락처를 알고 싶다며 문의하는 그런 아저씨와 대화도 나눴다. 학교 대문을 지키시는 분과 학원의 교무실 경리 아가씨도 물론. 그러면서 그는 각자 개인의 역할을 맡아보니 음 그럴만 하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됐다. 직접적인 꿈의 해석은 그렇고, 로니는 그것에서 파생된 하나의 단상을 좀 더 발전시켜 보기도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너스 1! 보통 인물 유형 하나면 모두 설명된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다. 거기에 거대한 관성, 장구한 시간, 중력과도 같은 거부할 수 없는 자기만의 법칙, 그러면서 발생하는 마찰과 어떤 커다란 일관된 정형성이 추가된 것은 허구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은 시작이나 끝에 뭐라 뭐라 안내말인 붙기도 한다. 붙지 않을 수도 있고. 인물 유형 즉 배역과 그의 인생! 전자는 흔한 현실이고, 후자를 포용했을 때 그것은 작품이 된다. 전자는 드라마고 후자는 영화다. 후자가 왜 중요하냐? 왜냐하면 일단 인물 유형이라는 타고난 캐릭터 하나로도 그 모든 것은 전부 다 해설이 되고 설명이 가능하지만 후자를 놓치면 그것은 평범한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편적인 수다에서 그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후자를 어떻게 이해햐야 하느냐, 이해할 필요없다. 전자만으로 다 설명되는데, 인물 유형이면 완결되는데 왜 그의 인생까지 알아야 하나, 그것은 장르와 매체와 어딘가에 전달되는 교훈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저 후자를 다른 말로 오기나 아집, 철학, 인생관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인물 유형이 그래프에서 시간이 쌓이면 그건 절대 멈출 수 없는 폭주기관차가 되고, 황소가 되고, 불도저가 된다. 그것은 절대 멈추지 않는 탱크가 된다. 멈춤 버튼은 사라져버리든가 눌러도 작동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최고의 성과와 효율과 인기와 부, 대망등 그 모두를 놓쳐도 이미 궤도에 접어들어 익숙해진 방법이 수정되는 법은 있을 수 없다. 훈수 두는 시선으로만 봐도 길이 딱 보이는데 한번 설정된 기존 방법은 변경되지 않는다. 그 무엇으로도. 쉽게 바꾼다면 그것은 일상일 테고,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며 명성이 아닌 무명이자 작은 성공으로 만족해야 하는 부락에 사는 촌부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영화로 다룰 특별함도 없고, 꿈도 처음 품었던 목표도 왜 그리고 어떻게 사는 의미와 함께 재미까지 다 놓치는 일이다. 목숨 같은 자존심도 꺾이는 거고. 범죄-액션 영화에서만 그런지는 몰라도 그 둘이 하나인 경우도 심심치 않은가는 잘 모르겠다. 바로, 그래서 멈출 수 없는 것이다. 흔히들 살면서 누구나 듣는 생활 대사 있지 않나. 인생 한 방이다 그리고 인생 직진이다. 하나 더 있다. 한 우물만 파라. 그만 파도 되는데 굳이 왜 쟤는...... 바로 그런 처지들을 살다 보면 틈틈히 보게 된다. 어느새 관성을 유지하는데서 어떤 환희를 경험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건 아마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수없이 발생하고 반복되는 사례들의 공통된 정형을 분석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이미 정해진 각본이기 때문이다. 대망을 이루지 못했을지언정 그것을 실현하는 모든 원리는 터득한데다가 이미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에 올라서서 문만 딱 열면 되는데, 과정이라는 경험 때문에 벌써 환상 그것을 이미 살고 있고 어떤 이상형을 체감하며 생활하고 있는데 다시 현실로, 그 뭐한 현실로 퇴보하여 시간을 되돌려서 돌아가라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굽어진 시간으로 설명하자면 담배를 피기 전에 나오는 도파민과 술을 마시기 전에 떠오르는 번뜩이는 영감의 발생이 거의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시간이 구부러지고, 때문에 어느 어두운 삶을 살면서 그 과정에 만족하고 그 과정의 항속성이 떨어질까봐 불만족하게 되며, 따라서 그 인생의 처음 목표는 사라진 채 그 삶은 시가를 피울 이유가 없고 한 잔의 술을 마시면서 시인처럼 시를 짓고 가수처럼 노래를 부를 그렇게 여유롭고 새로운 삶을 살 필요가 더이상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말만 들으면 이미 전설이고 돈키호테가 따로 없다. 이것이 개인에 국한된 문제이면 그나마 덜 해로울 것이다. 또는 덜 이롭거나. 가치관이 많이 엇갈린다면 개인 대 개인은 각자 서로의 갈길을 가면 그만이다. 억지로 친교를 유지할 필요가 없이 자기 인생을 살면 그뿐. 그러나 그것이 개인이 아니라 이를테면 좀 더 넓은 개념이라면! 물론 잘 풀리면 스타가 되고, 좋은 경우라면 예술혼처럼 한 분야의 일가를 이루게 되며, 기념비적이면 박물관에, 나쁘면 독선(자기 혼자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일)으로 비롯되어 역사의 어둡고 참혹한 일면을 장식하거나 탕아로써 대하드라마에 등장하게 된다. 독선가의 특징은 고집도 있지만 무엇보다 미안하다 라는 발언을 싫어하기 때문에 거의 그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인이 미안하오 괜찮소 라는 처지를 썩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원래 상남자들, 그분들 수컷 세상이 여자들은 좀 이해가 곤란한 그런 측면이 있다. 그는, 부러졌으면 부러졌지 절대 굽히지 않는다. 그런 유형의 자존심은 매우 불편하다. 그런 극단의 경우 뿐만 아니라 남자 하면 자존심이다. 만족하면 끝이라는 예술가의 자존심이 왜 나쁘겠나. 브랜드 포지셔닝처럼 행동하는 운동선수의 자존심도 만인의 귀감을 산다. 그러나 괜한 자존심은 답답한 일이다. 인간이 꽉 막혀 있으면 답이 없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사람은 각자 다른 존재이며 각자 다른 기준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존심 하면 뭔가 막연하다. 그래서 그 단어를 약간 달리 치환하여 생각해 보면 쉽다. 어떻게? 이렇게! 남자의 자존심 하면 뭘까? 누가 뭐래도 이거 하나는 내가 세계 최고다, 이래 저래 다 필요 없고 전부 다 최하 또는 내가 최고, 이것도 자존심이긴 하나 더 중요한 자존심은 뭐니 뭐니 해도 약점이다. 허세 하면 누구 누구 하면 허세, 라는 말처럼 자존심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약점이다. <자존심 = 약점> 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다른 말로 열등감, 콤플렉스! 절반에 해당하는 질시, 시기, 질투, 선망은 자존심의 친구다. 그러나 자존심의 사랑은 누가 뭐라고 해도 콤플렉스다. (최소한 여기서는) 자존심은 약점이자 콤플렉스다. 내 인생을 얼마나 아끼며 장기적 관점을 잊지 않고 꿈을 잃지 않느냐가 자존감이라면 자존심은 일단은 약점이자 콤플렉스다. 당신이 만약 한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의 약점을 툭 건드려 보면 윤리적으로 애매한 일이지만 일단 효율은 좋다. 효과도 훌륭하다. 허나 조심해야 할 것! 긴말 필요 없이 내 주변을 보자. 여자들은 대체로 친구에게 스스로 자기 약점을 내가 먼저 말한다. 친구의 약점조차 누가 말하든 같이 웃고 같이 논다. 혼자 극성스럽게 잘난 체하면 사이가 멀어지고. 반대로 남자들은 자기 약점이 공론화되면 그건 한마디로 자존심의 훼손이다. 자존심의 훼손은 하루 동안의 상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절교가 될 수도 있고, 그 무엇이 될 가능성도 있다. 남자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수컷 친구에게 녀석이 아파하는 걸, 약한 부분을, 약점과 콤플렉스를, 싫다는 걸 먼저 나서서 줄기차게 화제로 삼거나 웃음을 권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거의 다 그런다. 그런데 참 미련하게도 인생 내내 그 힘든 길을 꿋꿋이 가는 사람도 드물게 있기는 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생을 통해 뒤늦게 깨닫을 것이다. 지치지도 않는다. 지쳐도 전공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농담의 방식을 맞출 때도 됐는데 인생 직진이다. 그런 인간도 자기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접고 꺾고 고개를 돌릴지언정. 그렇지만 그것도 몇 가지로 나뉜다. 내 약점을 친구에게 내가 먼저 말하거나, 내 약점을 친구로부터 듣거나, 내 약점이 분위기에 의해 드러나거나 등등으로 나눠질 것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건 반응이다. 자존심의 민감한 약점이 건드려졌을 때 주지할 반응의 <형식에 대한 분류>는 이것이다.
1.도둑이 제발 저리듯 밑도 끝도 없이 자기가 막 따따부따 성내는 경우. 때와 장소와 상대에게 적절하지 않게 이유 불문하고 닦달하는 대사가 저절로 등장하는 경우. 아니 왜? 몰라!
2.내 약점이 나오자마자 발끈하는 경우 (상대의 의중, 그런 거 관심없다. 저 인간이 왜 이렇게 말을 할까, 위선도 호의도 후풍도 모두 무용함. 오직 내 기분따라 세상은 맑기도 흐리기도 아름답기도 우습기까지 할 뿐)
3.내 약점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었을 때만 (살짝 여리게 또는 강하게 한번으로) 딱 집고 넘어가는 경우.
4.성격 좋은 친구 또는 호구
이 뿐만이 아니다.
자존심 곧 <약점에 대한 반응의 강도에 대한 분류>도 있다.
1.커피포트 및 독설 (농담으로 씌여지는 간지러운 조롱이 아니라).
2.주의, 넘어가자 묻지마라.
3.인정 또는 무관심, 화제 전환.
4.꽁트! 이것조차 유머로 승화. 곧 진공청소기
보기가 입력이 어중간한 데 비해 출력이 당사자 행동 편향적이지만 대충 상황을 추정해 보는 건 어렵지 않다. 십중팔구는 아무 문제 없고, 있어도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문제는 롱테일! 극단적으로 담아두거나 극단적으로 발산하거나, 짧은 기간 친하면 괜찮은데 그 기간이 길어지면 무슨 일이 없을 수가 없다. 언행이 가벼운 친구는 사려 깊은 친구가 참다 참다 끝끝내 못 참고 하는 말을 이렇게 묵살한다. 「넌 그걸 그때 바로 말하지 않고 쫌팽이처럼 왜 담아 두고 그랬냐, 뭐하러 모아 두고 그러냐 쫌팽이도 아니고.」 라고. 쫌-팽-이? 언행이 가벼운 친구의 허세가 너무 지나쳐서 그걸 지적하면 녀석 역시 즉시 쫌팽이가 됨! 여기까지는 괜찮다. 얼마든지 괜찮다. 여기까지는 풀면 되는 우정의 일상이고 문제는 그 다음. 그 다음은 속내를 즉시 또 여과없이 말하는 상남자 3번 유형이다. 표독스럽고 포악하며 못난 언행 바로 그 실수는 살면서 틈틈히 반복된다. 그는 부정적인 감정을 전부 다 말로 해소한다. 막 지른다. 앞뒤도 없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딱 지른다. 그러지 않으면 병이 되나 보다. 그렇게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이분은 뭐 그렇게나 싫은 게 많은지... 막 그런 사람에 해당하는 듯 하다. 또 여기까지도 드라마다. 그 다음 더 발전하면 작품의 소재. 떠오르는 모든 느낌과 생각 그 모든 의식을 글로 남기는 극단적인 범죄-액션 장르의 인물 유형도 있다. 그러나 사회성은 완벽하고 사건은 우발적인 사례가 많다. 그 수많은 공통점을 보면 사람은 살면서 어느 정도 가면을 쓰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단짝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 연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또 살면서 어떤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TV와 크면서 보고 들은 여러 정황들을 근거로 따라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을 겪으면 슬퍼하더라 라고 학습했고 그 분위기를 익혔는데 정작 실재 상황의 주인공이 되면 사람은 개별적으로 다를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인간은 알면 알수록 신비하다. 교양과 상식과 기본적인 도덕과 인성등 공통된 어느 범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어떻게 보면 완전 천차만별이다. 이때 발생하는 상호 친밀감을 수치화하기는 어렵지만 저 분류를 참고할 수도 있다. 자존심 즉 약점 반응의 형식에 대한 분류와 강도에 대한 분류로. 어, 음, 가만 있자. 형식 1에 강도 1, 소시오패스다. 형식 2에 강도 1, 사이코패스다. 그외 50 대 50인데 생각나는 사람 많으신가요, 어쩌신가요? 따따부따 산문으로 쓸 게 아니라 엑셀 파일로 정리하여 인문-교양 분야 베스트셀러로 두 마리 토끼를 노려야 하는데 이거 정말 인자한 건지 무지몽매한 건지, 아마도 게으르거나 무능력함 때문인 듯 하다.
그런데 하룻밤 단꿈을 얘기하다가 화제가 왜 갑자기 동물농장 인생으로 흐를려 그러지? 이쯤에서 이상한 이야기는 멈추고,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우리는 로니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OK! 그의 꿈에서 놓친 게 있다. 곧 보너스 2! 그것은 로니가 자기가 꾼 꿈으로 인해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내가 저 사람 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난 그를 모르는 것이다. 내가 저 사람과 30년간 한 이불 덮고 살거나, 바로 곁에서 오래 지켜봤거나, 단짝으로 오래 사귀어 보지 않은 이상 난 그를 나는 한 사람을 모르는 것이다. 때로는 아냐 모르냐, 에 대하여 법정 드라마처럼 답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로니가 살면서 알았던 3번은 다름 아니라, 그게 바로 무슨 패스였던 것이다. 그래 봐야 100명 중 5명인가 1명이다. 축가를 부를 일도 아니고 선물로 기념할 일 역시 아니다. 동류도 많고 어느 종류는 더 많다. 빛이 어둠을 이기고 글이 칼보다 강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살다 보면 알게 된다. 낮이나 밤이나, 자나 깨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앉으나 서나 그대 생각만 하면서 사는 당신의 오빠도 있겠으나. 원래 승부의 세계와 더불어 어느 바닥이든 좀처럼 장난 같지 않으며 한없이 치열한 법이고, 예술은 모방이 시작이고, 남자는 늑대요 여자는 (불)여우며, 책임을 져야 하는 대표와 사장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랑은 독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례로 유명 브랜드 사장들 가운데 머머 패스, 꽤 된다. 아마 스티브 잡스도. 옛날의 괴팍했던 유명 예술가가 옆집에 산다고만 해도 이거 원~! 어쩌면 소설 같은 삶을 사는 로니의 인생도 조금은 냉혹할 수도 있고, 아마도 예상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거나 어디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정녕 촌스러울지도 모른다.
로니의 삶은 그 꿈을 꾸기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그 꿈을 꾸기 이전에는 그 유명한 명대사 두 가지를 또 자기 혼자 머리 쓴다고 그는 거꾸로 받아들였다. 그 명대사 둘은 첫째, 절대 뒤돌아보지 마! 둘째, 아무도 믿지마! 거꾸로 할 게 따로 있지 하필 그것을 반대로 인식할 줄이야... 것 참 기특하네. 멍청한 놈! 그래도 늦게나마 알면 된 거다. 다가올 무언가에 대해서 너무 들떠서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달콤한 꿈이라 할 수 있다. 다가올 무언가에 대해서 맑으면 기쁜 예감이고, 바람 불면 직관이요, 느낌 쎄하면 조짐이라 불러야 한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불확실한 어떤 앞일에 대하여 로니가 막연하게나마 부족했던 측면은 바로 의심이었다. 의심하지 않아도 될 일을 의심하면 방황이고, 그것이 습관이 되면 무슨 무슨증에 이어 불행은 곧 당도하게 된다. 어쩌다 그것은 생활이 될 수도 있다. 너무 잘 믿어서 탈이면 인생은 조금 불친절할 수 있을지언정 사랑은 알 수 있다. 허나 그것은 보통 여자가 맡는 역할이다. 남자는 이미 청각 자체에서 진위의 여부가 판단되고 걸러진다. 때문에 역으로 잘 속기도 하고, 허세가 싫어질 수도 허풍쟁이가 부러워질 수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게 뭐냐, 드러나지 않는 것과 얼마 만큼 멀리 보며 다양한 즉 예측 가능한 모든 수를 읽을 수 있느냐-다. 로니가 무슨 불륜 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어쩐지 예술 기계 때문에 이상한 꿈을 꾸었고, 또 그 때문에 타인의 입장을 좀 더 세밀히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뭐라 하냐? 현실에서는 배려고 작품에서는 개연성이라고 한다. 또는 몰입감쯤. 배려? 개연성? 몰입감? 그런 개념 말고 우리는 로니에게 집중하자 그의 인생에. 따라서, 이제 어떻게 될까?
당장 로니는 생각이 많아졌다. 뭘로도 빠지지 않는 쟁쟁한 인재인 코코가 뭐하러 제발로 우리 사무실에 그것도 경리로써 들어왔을까? 미치지 않는 이상, 바보가 아니면 몰라도 그럴 이유가 없었다. 어불성설이었다. 더군다나 그 대단한 예술 기계를 공짜로 넘겨? 한 장이라 말했을 때 거기에 0이 몇 개 붙는지도 가르쳐주지 않고? 더불어 그 타임머신은 또 뭐고? 이건 뭔가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0
A.로니집에 있던 예술 기계가 갑자기 사라짐. 녀석이 생명력을 얻어 사람으로 변신했을까? 깜빡 잊고 있었던 계약서. 조항 몇 번이더라. 머머하면 머머해야 한다 라는 세부 조항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았네. 이걸 어쩌나. 그 무슨 아카데미에서 접근해옴. 친구들과 만나서 로니가 술에 취한 날 그는 필름이 끊겼다. 딱 그때부터 얼마 동안의 동영상을 그들이 보여줬다. 그가 동영상에 나오기로는, 예술 기계를 로니가 분석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억이자 매체로 변환하는데 성공했고 그걸 다시 자신에게 주입했다. 그는 계약 파기에 해당. 꾸며진 일은 그렇고 사실은, 로니는 그냥 집에 와서 잠을 잤고, 그때 미래에서 넘어온 정체 불명의 사나이들이 예술 기계를 가져갔음.
B.사이비 무슨 혐의로 코코가 체포됨. 예술 기계는 또 고장남. 로니 뚜껑이 열림. 로니는 결국 예술 기계를 고물상에 넘김. 로니 친구가 로니 사무실에 놀러와서 같이 시간을 보냄. 다음 날 그 둘은 고물상에 가서 예술 기계에 장착된 비상키를 떼어옴. 곧바로 그들은 코코의 작업실로 가서 타임머쉰에 탑승.
* A와 B는 로니의 공상이었음.
11
로니는 현재의 난관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종잡을 수 없는 경우의 수는 늘면 늘었지 결코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서 상대의 마음조차 전보다 더 파악하기 힘들어졌다. 차라리 빈말에 넙죽넙죽 속아넘어갈 때가 오히려 더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아한 생각마저 냉정히 뿌리칠 수는 없었다. 정말로 우스꽝스럽게도.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가라? OK! 합리적 의심? 좋다! 믿음과 확인은 별개이듯 의심과 의리도 한 바구니에 넣으면 안된다. 그런데 그는 너무 순진했다. 어른이 사는 험한 세상에서 착함과 순박함은 바로 아둔함과 엇비슷한 말이다. 이기주의자로 태어나서 얼마나 이타주의를 포용하느냐가 인생이라면 행복해지기를 원하지만 살면서 맞닥드리는 최소한의 불행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인생이다. 모든 인간이 착하게 태어나서 착하게 끝난다면 뭐가 문제겠나. 허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 세상은 광활하고 복잡하다. 그래서 합리적 의심은 필요하다. 그런데 로니는 뭐랄까 성정이 우직해서 아직 마음이 여렸다. 많이 속고 많이 겪었는데 아직도! 그러므로 그는 합리적 의심 그게 파닥파닥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현실에서 의심 드라마에서 복수 뭐 그런 단어 말고 그 사람 안으로 쏘옥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예술적 경지를 갈고 닦을 심산인 듯 하다. 마치 사랑처럼 그녀를, 오빠를 내 주머니에 쏘옥 넣고 다니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때 마침 샘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가 연예기획사 상무를 그만두어 실업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인데 집에서 놀기는 싫고 너네 사무실에서 신세 좀 지자는 얘기였다. 로니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들은 그런 사이였다. 돕고 도우며, 늬가 잘났냐 내가 잘났냐, 속고 속이며 뽐내고 무시하고, 그러는 한편 어쩌다 스윽 감동시키는. 샘은 쉬는 동안 희곡을 한 편 쓸 계획이라고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코코에게도 연락이 왔다. 사연을 듣고 코코는 로니의 마음을 떠봤다. 저번에 본 친구 있죠 하면서 걔가 뭐라 뭐라 하면서 그 미친년이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늘어놓은 것이다. 로니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 OK, 했다. 코코 역시 짐짓 고맙다며 정신차리게 만들어서 서둘러 내보내겠다며 넌지시 로니의 아량을 추켜세웠다.
다행히 로니의 사무실은 꽤 컸다. 건평 얼마짜리 빌딩의 2층 전체를 임대로 통채 빌려서 쓰고 있었다. 조그만 중소기업이라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로니는 통 큰 남자였던 것이다. 실제로는 속좁은 남자인가 몰라도. 그렇게 그들은 그 큰 2층 사무실에서 달랑 넷이서 정식 근무를 하게 되었다. 딱히 하는 일 없이.
12
한 사무실, 같이 일하는 동료 넷. 로니, 코코, 팅커벨, 샘. 그들은 유달리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고,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게 더없이 친해진 듯 보이지도 않았다. 살면서 전성기는 아니고 과도기라거나 약간 쉬어가는 듯한 한 시절이 있다면 꼭 모두 그때를 맞이한 듯 보였다. 그래서 대번에 첫눈에 반해서 넷이서 사랑의 짝대기를 타진해 보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가운데 로니가 그래도 일종의 암묵적인 리더라고나 할까, 조금은 그 무언가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가 먼저 제안해서 콘써트에 가게 됐다. 결과는 꽝이었다. 가기는 갔다. 공연도 보기는 봤다. 그런데 기대했던 가수가 아니란 게 문제였다. MAROON 5의 공연인 줄 알았고 사무실에서 가까운 장소에서 공연을 하길래 인터넷에서 소식을 보자마자 로니가 야 어때 하면서 제안을 하기도 전에 예매했다. 그리고 일단 어디 갈 데가 있다면서 먼저 애들을 데려갔다. 그래서 그곳에 갔다 오게 되었다. 그러나 공연했던 그룹의 이름이 이상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알파벳 O 한 개는 숫자 0이란 걸 나중 알게 된 것이다. 리메이크 그룹인가 뭔가. 이와 같은 실수를 로니가 한 번 했다.
그리고 로니는 코코를 좋아하는데 코코는 그런 로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따로 1 대 1 소개팅을 주선해주었다. 로니는 그 자리에 갔다 왔다. 웬만하면 뭐라 하지 않을 그였지만 이번에는 정 못 참겠는지 로니는 코코에게 아주 심하게 면박을 주었다. 이거 사람을 뭘로 보고, 어쩌고저쩌고! 정황상 코코가 뭔가 너무 했었나 보다. 즉 코코는 부정직했다. 그녀는 로니의 떨리는 음성을 모른 채 했고, 영 까다로운 친구를 그에게 소개시켜 준 것이다. 당사자가 매우 민망해 할 정도로.
샘도 책잡힐 일을 슬슬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이 출근했을 때 사무실에서 팬티만 입고 다스바이더 투구를 쓰고 잠자고 있는 샘을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비명을 질렀고, 건물 경호팀은 총출동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 더불어 샘은 코코의 하트 뿅뿅을 받아주지 않고서 자꾸 팅커벨에게 찝쩍거렸다. 그것은 샘의 판단 착오였다. 왜냐하면 팅커벨은 로니에게 구애하기 위해서 그의 질투심을 유발할려는 목적으로 샘의 호의를 퉁명스럽게 거절했다가 애교도 부렸다가 하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숙적의 라이벌이 겉으로 확연히 드러난 건 아니었으나 물꼬는 터지고 만 것이다. 따분한 일상에 이어 안 풀리는 애정 사업과 지루한 일상과 따분한 사생활로 이어지도록.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영영 축 쳐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각자 사무실이 유쾌한 분위기를 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실수를 예술 기계가 만회할 수는 없었다. 달콤한 변명도 소용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관심을 갖고,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사랑의 전주곡 그 흥도 깨져버렸다. 여지없이. 로니의 자긍심은 한것 위축되었고, 코코의 낭만주의는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들었다. 샘의 패배주의는 사무실에 내내 팽배했으며, 팅커벨의 막연한 동경심과 퇴색한 춘몽은 유령처럼 아무데나 막 활보하고 다녔다. 다, 그들은 모두 불쌍해 보였다. 겉만 말끔했다. 맨발의 청춘인 듯 했다. 항변할 기력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궁지에 몰린 것이다. 아무리 골몰해도 한참을 생각해도 묘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노년의 구름이 그들에게 성큼 다가온 것처럼 다크써클이 짙어져갔다. 급기야 샘은 사무실에서 낮잠을 자다 잠꼬대로 평소에 하지 않던 저급한 대사를 내뱉고야 말았다.
「이걸 뭐라 하느냐, 완전 맛이 갔다 라고 하는 거야. 알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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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 크나큰 사무실에서 서로 마주보며 소파에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차분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로니. 그거 꼭 비밀로 해야 하는 건 아니지? 너가 전에 말했잖아. 무슨 예술 기계인가 번역 기계인가 그거 말이야. 너가 아는 무슨 돌아이 같은 말괄량이가 하도 부탁해서 맡아주기는 했는데 골칫거리라고 한 거 말이야. 그거 지금도 쓰고 있니? 작동은 되고? 누군지 몰라도 누가 버릴려다가 널 골탕먹이려고 네게 넘기고 튀었나 보다. 나는 너한테 그 말을 들었을 때 긴가민가했어. 얘가 조금 상태가 안 좋은 건가, 아니면 이제 곡도 안 써지고 음악계에서도 거의 퇴물에 가까워져서 그런가 처음엔 얘가 충격 받은 줄 알았다고. 그거 진짜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맞니? 그 또 뭐야, 무슨 타임머신인가 뭔가도 탔었다며? 걔는 또 누구니? 어떤 미친놈이 시간여행을 한다고 그래? 넌 또 거기 속은 거 아니지? 이미 옛날에 속을 만큼 속았잖냐. 이제 그런 데 걸려들지 마라. 어? 정신 차릴 때도 됐잖아. 예전에 그거 만든 여자가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랬다지 아마? 그래서, 타임머신인가 뭔가는 타봤어? 어떻게 됐는데? 하긴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있을 턱이 있겠어. 혹시나 궁금증을 품은 내가 이상한 놈이지. 안 그래?」
「샘. 왜 아침부터 쿡쿡 찌르면서 시작하니? 너 정말 타임머신 한번 타고 싶니? 나도 비밀로 할려고 했는데, 코코에게 미안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샘을 거기 태워서 한 1년 후로 그냥 확 보내버릴까? 어때?」
「어떠긴 뭘 어때? 뭐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거? 애들 장난하니, 그런 게 세상에 어딨어? 동네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겄다.」
「혹시 모르니까 로니. 저도 그거 태워줘요. 이미 눈치는 약간 채고 있었다만 코코, 넌 어떻게 된 게 너랑 제일 친한 친구인 내게 그런 좋은 일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니? 그러고도 늬가 내 단짝이라고 할 수 있어? 어? 나만 쏙 빼고 너희들끼리 이미 시간 여행을 즐기고 있는 거 아냐? 그거 타면 내가 장래 뭐가 될지, 내가 나중 누구랑 살게 될지, 내가 미래에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다 알 수 있겠네! 안 그래? 와, 재밌겠다. 나도 껴주라, 응? 승낙한 거다! OK! 야, 신난다. 야호! 어쩐지 오늘은 뭔가 기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구. 내 예감은 어떻게 된 게 적중하지 않는 법이 없어. 룰루랄라랄랄라~ 룰루랄라랄랄라~ 우후~ 우후~ 우우우~!」
「그래. 이참에 우리 다같이 타임머신 한번 타자구. 현실성은 몹시 떨어지지만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볼께. 밑져야 본전이지. 실소밖에 더 나오겠냐고. 혹시 어떡하다가 미래로 가면 좋은 거고. 그렇다고 나만 완전 과거로, 게다가 막 천민이나 역적이나 하인으로 보내지는 말고 말야. 가게만 된다면 내가 박수를 칠께. 거리에서 발가...벗지는 못하겠고 뛰어다니기는 할께. 그럼.」
대화가 분위기를 타는 동안 내내 가슴 조리며 코코의 눈치를 살살 보던 로니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코코가 이미 샘과 팅커벨을 타임머신에 승선시킬 의도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다 함께 친해졌다는 사실을. 이제 그 비밀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까지. 로니는 꼭 코코가 건성으로 이처럼 말하는 듯한 환영을 보고야 말았다.
「맘대로 하라 그래.」
그들은 그렇게 해서 코코의 집에 가서 타임머신도 타 보고, 로니의 집에서 예술 기계를 그경하기도 했다. 별 기대없이 타임머신에 승선하고 탐탁치 않은 시선으로 예술 기계를 봤기 때문에 샘과 팅커벨이 별 반응이 없어야 했으나, 또 그게 마음대로 되나! 샘이 와 멋지다 기분 끝내준다 타임머신, 그러면 또 팅커벨은 이게 그 세계 8대 불가사의에 버금간다는 바로 그 예술 기계구나, 와, 사람들이 왜 예술 기계 예술 기계 그러는지 알겠다~ 막 이러면서 조롱하고 한껏 우스워했다. 당연히 그 말을 들은 코코가 기분 좋을 리가 있나. 로니가 먼 산을 쳐다보는 동안 코코는 속으로 어떤 기발한 작전을 획책하는 듯 보였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뭐 그런 심정이었을까? 코코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막 지금이 대체 몇 년이냐는 둥, 누가 다스 바이더고 누가 엑스맨이냐면서 인공지능 로봇은 대체 어디로 숨었냐면서 깐족은 최상급으로 쉬지 않고 쏟아지고 또 쏟아졌다. 우주여행을 이제 떠나면 되는 거야 뭐야 그런데 세상이 왜 꼭 옛날 언제적 같지, 어? 이와 같은 능청스러운 의문 운운하고 있을 때 마침내 코코는 마음을 굳힌 듯 보였다. 그렇게 그들의 첫 타임머신 비행은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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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는 모르겠으나 나머지 세 친구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무슨 기계인지 뭔지가 아무런 제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에 안도감과 더불어 일종의 만족감을 느꼈던 것 같다. 사실 그건 누가 봐도 작은 놀이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만들 수가 있겠나. 만약 미스테리라는 게 진짜 있다면 그것을 목도하고 감탄하며 그 신기함을 함께 나누고 어떤 매체로도 옮기고 싶어할 테다. 하지만 그와 같은 동경심의 이면에는 그 미스테리가 가짜라는 것을 꼭 증명하고 싶은 욕구, 그래서 이 세상에 그런 엉뚱하고 불합리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상식을 명철하게 확인하는 데서 뭔가 설명하기 힘든 엷은 희열을 느끼는 기분 역시 모순되지만 동시에 소유한다고도 할 수 있다. 뭐 누가 그렇고 누구는 안 그렇고는 잘 모르겠으나 표면적으로 네 친구들은 모두 아무 탈도 뚜렷한 침울함도 신나는 일도 딱히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최근 동안 이제 그 작은 놀이기구가 아무런 판타지도 스릴러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또 교묘하게 코코가 자꾸 채근하고 은근히 부추겼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규칙적으로 코코의 작업실에 놀러가서 틈틈히 타임머신을 타면서 살고 있었다. 한 번 타고, 두 번 타고, 세 번 타고 계속 탔다. 타고 또 탔다. 그냥 코코의 집에 놀러간 김에 탔고, 음악 듣고 춤추러 클럽에 갔다 나오면서 기분이 좀 서운하니까 또 탔고, 누군가 트럼펫을 불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 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타임머신을 또 탔다. 아주 그냥 생각나면 탔다. 그건 아마 코코가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가한 최면이자 세뇌였던 듯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일하는 사무실 앞에 클럽이 하나 생겼다. 클럽은 클럽인데 무인 클럽이었다. 또한 그 동네가 번화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곳은 무척 한산했다. 따라서 그들이 거기서 놀게 되면 그들은 거의 그곳을 전세낸 기분을 넘어서 그 클럽의 지분을 소유한 임원이 된 듯한 기쁨마저 느꼈다. 왠지 부자가 된 기분 있지 않나. 클럽 이름은 SF였다. 그런데 정말 SF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만 무인 시스템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알아서 돌아갔다. 제 시간에 문을 열고, 그것까지 무인인지는 몰라도 청소도 완벽했으며, 또 끝날 시간이 되면 문도 혼자 닫혔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디든지 연락을 할 수 있고, 손님의 주문도 로봇이 받았다. 클럽의 DJ도 로봇이었다. 무슨 동네에 클럽 하나 생긴 걸 가지고 혹시 그거 작전 아니냐고 의심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들이 함께 타임머신이라는 이름의 놀이기구를 타고, 또 SF에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는 게 어떻게 보면 참 이상한 우연인 것처럼 보였다.
코코가 직접 또는 기계나 뭔가를 이용해 간접적으로라도 그들을 미래사회로 데려갈 수도 없고, 무슨 요술을 걸 수 없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코코가 아니더라도 이미 수많은 회사들이 그들의 정보와 지식과 취향을 수집하고 있는 현실이다. 넷이서 같이 일하게 된 이후로 누가 그들의 기억을 변조할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일도 없었다. 그렇게 평범하던 어떤 날 그들은 일과를 마치고 노을이 질 무렵 저녁식사를 하러 갈까 하다가 아니다 그냥 클럽에나 가자 하면서 클럽으로 갔다. 빈속에 맥주를 마시고 싶었나 보다.
그날따라 클럽에는 손님들이 조금 있었다. 그래서 무척 기이한 현상이네 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손님들이 모두 나갔다. 바로 그 순간 다시 입구에서 네 명의 손님들이 클럽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은 코코와 인사를 나눴다. 코코와 아는 사람들인 듯 했다. 거기까지는 정상이었다. 뭐 우연이겠거니 하면서 그냥 지나쳤는데 자꾸 보면 볼수록 그들은 자기들과 닮은 듯 했다. 그러나 그 공통된 혼자만의 생각을 누구 하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코코의 소개로 그들은 인사를 나눴다. 통성명을 통해 알게 된 그 친구들의 이름은 톰과 미미와 로빈과 샐리였다. 그쪽도 남자 둘에 여자 둘이었다. 얘들은 이쪽보다 약 10년쯤 노숙한 것 같았다. 혹시 로니와 코코와 샘과 팅커벨이 10년 후로 넘어오지는 않았겠지. 설마 그럴 리가. 더군다나 이름도 다르다. 그러니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많이 닮았다. 진짜 똑같이 생겼다. 한두 명도 아니고 넷 모두가. 그렇다고 지문이나 DNA를 비교해 볼 수도 없었다. 또 누구 하나 그런 의견을 말하지도 않았다. 이상한 낌새 느껴지지 않아, 그런 말 슬쩍 꺼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들도 이쪽처럼 한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인 듯 했다. 그러나 하나의 프로젝트에 모두 관련된 것 같지는 않았다. 로니 4인방처럼 적당히 알게 됐고 어중간한게 얽힌 인연인 것 같았다. 정말 절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모르니 그들이 혹시 미래의 그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말이 안된다. 왜냐하면 흔히 드라마에 나오듯이 내가 미래에 가서, 또는 미래의 내가 현재로 와서 지금의 나를 만난다? 그건 전체 시공간에 유일한 존재가 2명 이상 즉 무한대로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 되므로, 질서가 틀어지므로 그 자체로 억지 설정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공간에 당신이 1명이냐 또는 2명 이상이냐, 라는 말은 이와 같다. 당신이 1명이냐 1뒤에 0이 해변의 모래알 숫자처럼 붙어야 할 정도로 많냐, 그 말과 똑같다. 과학적으로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또는 조건이 붙으면 어쩐다고도 하지만 최소한 허구에서는 당신이 미래나 과거로 간다면 또 다른 당신을 만나는 게 어쩜 말 같지도 않은 일인 것처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렇게 그들과 헤어졌고, 그날도 별일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던 중 분명 아닌 것 같은데 또 확실히 아니라고 소란스럽게 따질 수도 없는 일들이 차츰 발생하는 걸 깨달았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혼자서만 생각했다가 차차 의견을 누군가 먼저 꺼내자 모두들 동의하게 되었다. 그런 일들은 가령 그들이 규칙적으로 가서 노는 코코의 작업실에 있는 타임머신의 작동 방향이 바뀐 점. 또 뭐가 있지? 동네에 보이던 수많은 빨간색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약간은 분홍색이 아닌가 하도록 조금 변했다는 점. 참 많은 색깔이 파스텔톤으로 변했고 원색도 더 많아졌다. 그리고 근처 비즈니스맨들이 넥타이를 항상 매고 다닌다는 것은 기존에 알던 일이었지만 그 멋진 넥타이들이 모두 자크 방식이 대부분이란 점. 동네 헬스클럽에 사람들이 운동하러 가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지고 간다는 것. 동네에서 제일 장사가 잘 되는 카페의 연주자가 일을 그만뒀고 그 자리를 자동 피아노가 대신한다는 점. 가까운 미술관이 있는데 그곳에는 입구와 출구가 따로 있었는데 무엇이 없어졌는지 아니면 그 둘이 합쳐졌는지는 몰라도 문이 하나만 남았다는 점. 시낭송회의 회원들이 모두 축구부로 옮겨갔고, 축구부 회원들은 축구공 대신 야구공을 추종하는 종목으로 변경했다는 점. 이처럼 쉽게 노출되는 변화 외에 미묘한 변화도 있었다. 예를 들면 코코의 작업실에 있는 타임머신이 작동할 때 흘러나오는 그 주옥같은 명곡들이 점차 점진적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또 개개인에게 인상깊었던 기억을 유추할 수 있는 상징의 존재, 뜻깊었던 장면과 사진의 구도와 각도와 장면들이 시간을 거슬러서 느릿느릿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추억을 회상하도록 하면서 다시 기억이 과거로 돌아가게끔 TV광고에서 금지된다는 잔상 무슨 기법이 적용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신비감이 그들에게 암시되었던 것이다. 그외 또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꼭 그 모두를 코코 혼자서 진두지휘한 것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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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결과? 무슨 결과? 사건의 발단을 말하나 아니면 왜 타임머신은 작동하지 않는가를 말하나. 아니면 예술 기계는 이제 잊혀진 건가? 그 가운데 아마도 즉답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가장 궁금할 수도 또 제일로 뜬금없을 수도 있는 오차에 대해서 알아보자. 무슨 오차냐 하면 타임머쉰의 효과 그 놀라움이 왜 발생하지 않았을까, 바로 그것이다. 타임머신이 작동했으면 결과가 나타나야지 왜 아무런 변화가 없냐고! 타임머신이 엉터리라서 기능이 제구실을 못했거나 제대로 작동했는데 인간들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그 외에 다른 오차가 있었던 것이다. 즉 타임머신이 작동한 후 즉시 그 친구들을 미래 몇 년으로 풍덩 데려다 놓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쩌면 타임머신은 이렇게 작동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코코네 집에 있던 타임머신은 그게 한계였기 때문이다. 곧 타임머신이 탑승객의 몸을 시공을 뛰어넘어 미래 세계로 데려다줄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시공이라는 배경은 그대로 있고 주인공이라는 개체에 해당하는 그들의 마음만 과거로 되돌리는 건 얼마간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팅커벨과 샘과 코코와 로니의 정신연령은 점점 낮아지더니 급기야 10살 아래로 내려가고야 말았다.
로니는 주로 매일 입버릇처럼 뭐 재미난 일 없을까 라고 했다. 코코는 아 심심해 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 샘은 뭐라 했을까? 아 퇴근하기 싫어 라고 했다. 그리고 팅커벨은 그랬다. 아, 출근하기 싫다. 로니가 코코에게 물어봤다. 그 우리랑 닮은 양반들 있잖아 하면서 그 네 명은 지금 뭐하고 있냐고 물어봤다. 코코가 대답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코코의 음성은 온화한 어조가 아니었다. 또 기념할 만한 일도 없었고, 그들은 어서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 어른들은 아이에게 그런다. 너네들은 어떤 동화책을 읽어야 하고, 너네들이 들어야 할 음악은 동요다 게다가 감동적인 아동극도 많은데 왜 하필 고개를 숙이고 하루종일 게임만 하니 라고 어른들은 말씀하신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들은 착한 아이들인 듯 보였다. 이미 놀라운 천재성이 번뜩인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웬 신세 한탄을 하는 것처럼도 보였으니 사람 헷갈리게 만들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애들처럼 어려진 그들의 마음을 권태가 잠식함을 넘어서서 거의 지배하고 있었으니 그건 바로 때가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무슨 때? 놀이기구, 작은 놀이기구 타임머신을 타야할 시간. 이미 여러번 즐겼던 그 작은 놀이기구를 또 탄다고 상황이 특별히 더 악화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한번 시도해볼 만한 일이었다.
로니와 코코와 샘과 팅커벨은 코코의 작업실로 갔다. 그러나 왠지 이번에는 바로 타지 않고 막 망설여졌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타임머신에게 심어진 인공지능이 그 친구들을 챙피해 했을까? 그래서 그들이 타임머신의 환심을 사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모를 일이다. 누구도 대답하기 싫어할 그런 답 없는 공상이다. 그렇다고 이미 어려졌으나 어려져도 주입식 교육에 익숙했기 때문인지─주입식 교육도 장점이 많고, 시간 대비 효과도 높고, 주입식 독학이 없으면 인생의 재미도 반감된다─누구 하나 그렇게 물어보지 않았다. 왜 우리가 지금 타임머신을 타야 하지(?), 라고. 그러나 그들의 행진은 멈출 수 없었다. 이미 그건 정해진 규칙이었나 보다. 더불어 오늘따라 타임머신이 더 번쩍거렸고 어쩐지 그들의 마음을 막 잡아끄는 듯한 신기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들이 탈까 말까 쭈삣거리며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만들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저쪽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들은 톰과 미미와 로빈과 샐리였다.
그들은 코코와 인사를 나눴다. 다른 친구들과도 가볍게 인사했다. 그들은 쉬이 심중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아마 로니와 코코와 샘과 팅커벨이 놀이기구를 타지 못하게 말리려는 의도는 없는 듯 했다. 원래는 그걸 못타게 말려야 하지 않나, 그처럼 예상하게 만들었다가 사람 맥빠지게 만드는 재주가 그분들에게는 있었다. 반전이 없는 것이 반전인 영화처럼. 그래서 샘이 나서서 먼저 물어볼 뻔 하다가 말았다. 아니 왜 우리를 말리지 않는 거냐고, 지금 급박하게 뛰어왔어야 하지 않았냐고, 무엇보다 그 타임머신을 타면 절대 안된다며 성급히 우리를 그쪽에서 떼어놔야 말이 되는 거 아니냐고, 하마터면 샘이 나서서 따질 뻔 했다. 할 듯 말 듯 하다가 정말 거의 딱 따지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일인지는 몰라도 그는 그와 같은 의문점을 표출하지 않고 잘 참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중재할 심판이 나타나지도 않았고, 갑자기 그들이 원래 친했던 것처럼 대화를 활발히 나누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어떻게 어떻게 되어 그들은 모두 함께 클럽 SF에 놀러가기로 했다. 그들은 SF에 도착했다. 그날따라 SF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웬일인지는 몰라도 참 유난스러운 일이었다. 평소에는 파리만 날리던 곳이 어떻게 딱 그들이 함께 놀러간 날 하필... 뭔가 이상했다. 그들은 클럽 음악을 듣고 맥주를 마시며 놀다가 톰과 미미와 로빈과 샐리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느낌이 쎄했다. 감이 왔다. 아차-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깜빡 하고 잊었던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가 이제야 떠올랐던 것이다. 혹시 그 친구들이 우리보다 먼저 타임머신을 타기 위해서 자기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유인한 것일까? 그건 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다시 코코의 작업실로 갔다.
작업실에 도착했다. 톰과 미미와 로빈과 샐리, 그들은 없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왠지 허탈했다. 이 공허함을 뭘로 매꿔야만 할 것 같았다. 뭘로 그 허무를 충당할지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남은 것은 하나 밖에 없었다. 단 하나, 딱 하나! 이제는, 이젠 정말 끌지 말고 타임머신을 타야할 것만 같았다. 우리들은 타임머신을 타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타임머신을 탔다. 그리고 타임머신은 작동을 시작했다.
어디서 들어본 듯 들어보지 않은 듯한 음악이 나왔다. 무척 신나고 엄청 즐겁고 완전 흥미로운 그런 음악이었다. 계속 듣고 싶어지는 막 다음이 계속 궁금해져서 어쩔 수 없이 들어야만 하는 바로 그런 유쾌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원래대로라면 그 타임머신은 이름에 걸맞는 아무런 기능을 못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아주 희박한 확률로 딱 이번에만 이상한 기능을 이루어내고야 말았다. 확률 거의 0에 가까웠는데 오직 단 한 번에 성공한 것이다. 소 뒷걸음질치다가 정말로 쥐를 잡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미래 세계에 정말로 도착해버렸다. 그곳은 서기 7,777,777,776년이었다. 소숫점 얼마에서 반내림하면 77억년이었던 것이다. 지구의 수명이 어쩐다니까 혹시 거기는 제2의 또는 제 몇의 지구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당시는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몰랐겠지만 우주 여행이든 뭐든 누릴 수 있는 경이로움은 무궁무진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는 해가 바뀔 시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모든 호사를 모른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어리둥절한 축제의 현장과 하나가 되어 뭐가 뭔지 모르면서 엉겹결에 초 읽기를 따라하고 있었다. 10, 9, 8, 7, 6, 5, 4, 3, 2, 1, HAPPY NEW YEAR~! 이제 시간은7,777,777,777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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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까지가 무명 블로그에 올렸던 공동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느 기획사가 판권을 샀다. 그래서 드라마로 제작된 것이다. 물론 아직 방송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드라마가 방송되고 알려진 후 인기를 얻어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2탄, 3탄 막 계속 이어지기를 바래야 할까? 그러나 이미 애초에 기대를 접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며 처음부터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역시나 그것은 제작사의 실수로 판명났고, 방송 전에 넘어진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한번 절반의 성공이자 도움되는 실패를 겪었으니까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대신 훗날 그것은 연극으로 제작되었다. 지금 막 공연이 끝났다. 관객들은 하나같이 다들 인상을 험악하게 쓰면서 투덜거리기 바쁜데, 저기 객석 어딘가에서 정반대로 가만히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바로 공연의 원작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