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어느 날 가방을 하나 샀다. 토성과 UFO 자수가 멋진 가방을. 나는 그 가방이 딱히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그 가방을 사게 됐는지 모르겠다. 버리기 좋아하고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는 뭔가 돌아온 탕자 같은 기질을 숨기고 살아야 하니까 그런가는 몰라도 막상 가끔 무언가를 버리고 싶은데 주위를 둘러봐도 버릴만한 적당한 무엇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 이유없이 눈에 띈 가방을 산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왠지 옛날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서? 조금은! 잡지 한 장을 쭉 찢고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매장에 가서 이거 있어요? 라고 물어본 후, 어머 손님 죄송해요 그 제품은 워낙 인기가 좋아서 불티나게 팔려버렸기 때문에 재고가 하나도 남지 않았답니다 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는데 재고가 그것도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래서 그 가방을 사게 된 듯 하다.
그 외에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한 건 하나 없었다. 상상력은 빈약했고, 뭔가 막연하면서도 거창한 변화의 바람을 기대하는 건 여전했다. 오전에는 녹차를, 낮에는 커피를, 밤에는 독주를 마시는 생활에 대해 잡담을 나눌 만남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눈빛이 약간 내 약혼녀를 연상시키는 듯한 어느 여배우가 출연하는 에로 비디오를 봤다. 별로 재미는 없었다.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두 번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다. 장담...은 하지 않겠다. 다시 그리고, 나는 앤디 워홀이 쓴 일기를 읽었다. 존 파울즈의 일기를 본 이후로 오랜만에 편히 읽을 수 있는 일기라고 생각했다. 온갖 투정과 불만과 짜증으로 일관된 일반인의 일기라면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하도록 재밌을 테지만 그런 까다로운 작품은 만나기 힘들다. 그래서 아무래도 차선책을 택한 것 같다. 중요한 기록은 많지 않고 시시콜콜한 내용이 많았지만 간혹 나오는 인상적인 구절, 예를 들면 여자들이 그린 그림은 알아보기 쉽다 단순하기 때문이다, 자기 작품은 얼마에 불과한데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얼마에 팔린다, 같은 부분이 나오면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러다 나는 평소에 잘 듣지 않는 추억의 히트곡을 하나 찾아들었다. 노래는, 다이아몬드는 여자들의 제일 친한 친구. 그 즉시 나는 그 아름다운 선율에 매혹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 노래 가사를 일기장에 옮겨적었다. 나는 오늘부터 일기를 써보기로 했던 것이다. 작심삼일에 그칠지라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왼손으로 소설을 필사하기를 다시 시도할 수는 없으니까 오른손으로 꽤 인상적인 그 노래 가사를 옮겨 적어 보았다. 가사는 이렇다.
프랑스인들은 사랑을 위해 목숨도 마다하지 않지
사랑을 위해 싸우며 결투를 벌이는 것도
하지만 난 값비싼 보석들로 살아가고 그걸 주는 남자를 선호한다네
손등에 받는 키스가 꽤 근사할지 모르지만
다이아몬드가 여자의 제일 좋은 친구라네
키스가 좋다한들 초라한 거처에 집세를 내주거나
가엾은 고양이 먹이값도 대주지 못해
여자가 젊음을 잃을수록 남자는 차가워지고
우린 언젠가 매력을 전부 잃게 되지만
네모낳든 물방울 모양이든
보석들은 변하지 않아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제일 좋은 친구!
티파니, 까르띠에, 블랙스타, 프로스트, 고햄
말해요, 해리 윈스턴, 전부 다 말해봐요!
어쩌면 나중에 변호사가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다이아몬드가 여자의 제일 좋은 친구지
언젠가는 무미건조한 보스도 네가
엄청 멋지다는 걸 알게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침착하세요 아니면 어림도 없어요
주가가 높을 땐 당신의 남자이겠지만
떨어지기 시작한다면 조심하세요
그때가 바로 남자들이 아내에게 돌아가는 때에요
다이아몬드가 여자의 제일 좋은 친구라네
어디까지나 플라토닉한 관계라 해도
다이아몬드가 여자의 제일 좋은 친구라네
당신이 비밀스러운 관계라 하면
더 낫지 더 큰 걸 물어올 수 있으니까 말야
시간이 흘러가고 젊음은 가버리겠지
당신의 허리는 굽어지겠지
하지만 허리를 펴고 무릎을 세워
당신이 티파니 앞에 섰을 땐
다아이몬드 다이아몬드
가짜 다이아몬드는 의미없어
다이아몬드가, 여자에겐 최고의 친구라네
나는 집에서 심심했던 것이다. 때문에 꼭 성의없는 선물의 대표격인 향수처럼 인용문과 브랜드와 타인의 이야기를 잔뜩 가져다가 소설 하나 뚝딱 완성해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손쉽게 이름을 올리는 통속 소설가가 된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2
무료한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계이름이 색깔로 보이고, 공감각과 환각이 교차하는 광인이나 백치의 경험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많이 써먹은 익숙한 방법에 의존했다. 글이 안 써질 때 내게는 동사가 있었다. 젠체하다, 를 바꿔봤다. 젠체했다로. 민망하다? 민망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인터넷에서 진짜로 오지 오스본이 박쥐 머리를 뜯어먹은 적이 있는지를 검색해 보는 게 더 유익한 일일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꼭 한숨만 쉬면서 따분한 삶에 관하여 괴로워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TV로 촌스러운 코메디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저기 나오는 저 친구들은 배우 생활이 즐거울까 곤혹스러울까 하면서 그분들의 삶을 궁금해 하기도 했다. 저 친구들은 유명인을 꿈꾸었고 나는 특별하고 구체적인 염원의 대상이 없었다는 점이 차이점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이미 각자 자기의 삶을 열심히 살고 있는데 괜히 어려운 영역에 새롭게 도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내 인생을 가만히 진단해 봤을 때 영화사에서 별안간 연락을 해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새 출발은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명왕성을 파는 사나이에게 맡기고, 나는 젊은이들의 이상에 근접하여 글로써 새로운 인생을 친애하면 그만이다. 일단 공상의 결론은 <문제 없음>이라고 밝혀졌지만 뭔가 마음 한구석이 훵한 기분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음악가든 화가든 문필가든 세상에 예술가는 차고 넘치는데 나는 아직 내 확고한 예술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 듯한 느낌에 갑자기 내가 현재 잘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걱정에 분위기가 돌연 침울해지기 직전이었다. 그러므로 왠지 내 삶이 상한 우유와 바나나 껍질과 빵 부스러기 같은 인생은 아닐까 하면서 그냥 삼류 소설이라도 틈틈히 왕왕, 운 좋으면 자주 출간해내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사 그렇게 명석한 추리력이 없는 채로 추리소설가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다지 비난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만일 그렇다면 상상력의 발현에 따른 쾌락과 은밀한 환상이 늘면 늘었지 느닷없이 실패와 불행과 비운에 휩싸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처럼 나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의 부재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찰나 우리 집 초인종이 울렸다. 밖에 나가보니 빈센트가 놀러온 것이다. 빈센트는 최근 사귄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다. 착한 녀석이다. 빈센트는 비록 지금은 라이브 음악 카페 사장이지만 그의 경력은 화려했다. 과거 이브 클랭의 파트너였고, 더스틴 호프만의 매니져였으며, 격투기 기획사 프로모터에 모터사이클 선수와 광고 회사 중역으로도 활동했었다. 근래 속옷 사업이 내리막을 걷길래 낙향해서 지금은 조용히 살고 있는 친구다. 그 친구의 말인 즉 피에르의 집에 불이 났다고 했다. 말이 필요없고 우리는 얼른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피에르의 집까지 뛰어갔다.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 피에르는 자기 집 정원에서 혼자 바베큐 요리를 하고 있었다. 빈센트가 말한 화마는 바베큐 요리였던 것이다. 나는 피에르와 인사를 나눴고, 바베큐 요리를 시식했다.
「제임스.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파티가 있는데 같이 가는 게 어때? 막 미스테리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음산한 저택에서 비밀스럽고 으스스하며 설레는 분위기로 가득찬 신나는 파티라구. 시골에서 그런 축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화려한 도박장에 수영장에서 펼쳐지는 광란의 도가니, 놀라운 예감으로 가득한 이야기와 늘씬한 미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구. 이 고장의 신비주의자 바로 시드니가 주최한 파티야. 가면 아마 실망하지는 않을 걸!」
피에르의 감언이설에 이어 빈센트도 살살 나를 꼬시기 시작했다. 중요한 약속이나 꼭 봐야 할 TV 프로그램이라도 있냐면서 마치 나를 뿅가게 해줘요 라고 애원하는 듯한 숙녀들의 환대를 받고 싶지 않냐면서 같이 가자고 마구 조르길래 썩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나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그 달콤한 꾀임에 그만 홀딱 넘어가버렸다. 우리는 곧바로 시드니의 저택으로 출발했다. 우리의 행복해지고 싶은 열망은 호쾌히 부풀었고, 우리의 때묻지 않은 기쁨은 이때까지는 그나마 촉망받는 낭만주의의 포근한 보호를 받고 있었다. 우리는 시드니의 집에 도착했다.
3
나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실망했다. 불꽃놀이는 없었다. 잔치도 없었다. 설레는 분위기는 웬걸! 미녀들 대신에 (뻣뻣한) 동네 청년 몇 명과 함께 거나하게 취한 시드니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토성과 UFO 자수가 멋진 가방을 들고 갈까 하다가 갖고 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 심정을 눈치챘는지 빈센트가 그랬다. 오늘은 전야제라고. 내일이 진짜 파티의 날이고, 내일은 저 가난한 시드니가 아니라 대부호인 시드니의 형 집에서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나는 아 속았다 하면서 딱 체념할려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느껴질까 말까 한 미묘한 심리가 있었으나 나는 빈센트를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왠지 행복한 반전이 기대된 것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 기분은 이상했다. 내가 꼭 시드니의 수하에 들어간 늙은 개가 된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내 기분을 말로서 꺼내지도 않았고, 일기에도 쓰지 않기로 작정했다. 속에 있는 모든 의식을 표출하며 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렇게 나는 침묵을 지키며 고분고분하게 하루를 기다렸다.
그렇게 다음 날 저녁 6시에 나와 빈센트와 피에르와 시드니 이렇게 우리 넷이 만났다. 우리는 시드니의 형네 집으로 출발했다. 이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마침 준비해 간 토성과 UFO 자수가 멋진 가방이 어딘가 더 아름답고 멋져 보여셔 뿌듯했다.
우리는 시드니 형네 집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완전 다른 국면이었다. 이건 진짜 영화에서나 봤던 그런 광란의 파티였다. 술, 여자, 음악, 호사, 사치등 모든 게 최고였다. 쿵쾅쿵쾅, 분위기 들썩들썩했다. 일생일대의 기회인 듯한 기분이 들었고, 거기에 있으니 흡사 내가 이미 슈퍼스타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만일 여자였다면 나는 아마 내가 본드걸이라고 자만하며 춤 추고 노래하고 놀고 뛰고 난리 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본드걸이 아니었다. 하지만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즐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웃는다고 웃었는데 우린 모두 죽상이었다.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감지했다. 우린 거기에 안 어울렸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삼류 소설가였고, 빈센트는 농부요 피에르는 시골 술집 사장이었다. 아! 바꼈다. 빈센트가 술집 사장이고 피에르는 농부였다. 우리는 겨우 시드니의 형만 살짝 알은체했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왠지 선남선녀들은 우리에게 쌀쌀맞은 듯 했고, 졸지에 우리는 남의 집 잔치에 놀러온 불청객이 되고 말았다. 시름은 깊어졌고, 탄식은 늘어만 갔다. 우리는 비상구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딱히 방법은 없었다. 우리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면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우리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우리는 그 요란한 파티장에서 나와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뒷풀이없이 모두 헤어졌다.
나는 집에서 잘려고 침대에 누웠다.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꿈이라도 꾼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들은 이런 얘기들을 하면서 놀고 있었다. 여자들이 줄줄 따라다니게 할 것인가, 아니면 늬가 여자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살 것인가, 그것은 늬가 지금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다구, 라면서. 그러나 그건 모두 들뜬 흥취였고, 헛된 기대였다. 어리광도 안-통했고, 일반인과 유명인의 차이를 실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한숨이 나왔다.
물과 기름이 섞이기 힘들 듯 서로 꼭 수준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어울리지 않았던 어쩌던 파티를 즐기지 못하고 돌아오기는 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뭔가가 있긴 있었다. 그건 무엇이냐면 그곳 이름에 얽힌 어떤 상징이랄지, 어쩌면 일부러 우리들에게만 암시하는 듯한 난제 같은 게 숨겨진 것은 아닐까 라는 호기심에서 발전한 미스테리가 있었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하나 이상한 점은 이랬다. 시드니의 형네 집은 우리 동네와 가깝긴 했으나 지역 이름이 바뀌는 장소였다. 딱 거기서부터는 환청리였던 것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는 환각리, 시드니의 형네 집부터는 환청리. 뭐라고, 환청리? 우리 동네 지명은 환각리인데? 그럼 앞 글자 '환'이 똑같고, 뒷 글자를 붙이면 청각? 음 청각이라 청각... 청각하니 생각난다. 내가 태어난 곳의 지명이 지금은 환상리로 바꼈지만 당시에는 환영리였다는 것이. 워워 생각이 많아진다. 이건 뭔가 짜맞춘 듯 하지만 결코 일부러 꾸밀 수 없는 일인 듯한 기이한 운명의 힘이 느껴졌다. 그건 마치 어떤 숙녀에게 첫 번째 남자친구의 이름은 허영, 두 번째 남자친구는 허당, 세 번째 사랑은 허풍으로서 남자친구의 본명 이니셜이 모두 묘하게 일치되는 어떤 이상한 숙명과도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웃지마시라. 그런 사람 진짜 있으니까.
그런데 아차! 이제야 생각난다. 시드니의 형네 집에서 봤던 그 가방들. 모두 다 거기에 토성과 UFO 자수가 세겨져 있었다. 설마...? 그럴 리 없다. 뭔가 미심쩍긴 했으나 나는 그냥 꿈나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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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이 되었다. 그날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하루가 시작됐다. 지구에 토성처럼 띠가 생겼다는 뉴스가 나오지도 않았고, 네스호의 괴물이 승천했다는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엇비슷한 뉴스가 엿보이기라도 하면 호들갑을 떨면서 떠들썩한 소란이라도 벌일려는 형색의 초딩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가방을 확인했다. 혹시 그 가방이 흔한 코메디 영화에 나오는 사건처럼 남의 가방과 바꼈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불안 심리의 저쪽 구석에는 어느 신비스러운 여인의 가방과 바뀌어서 막 내용물을 근거로 그녀를 추적하고 어쩌고 하는 엉뚱한 상상이 미동과 요동 사이를 바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가방은 바뀌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이고 한편으로는 조금 섭섭했을까? 아니다. 쓸데없는 소란에 휘말리면 나만 피곤해지고 나만 귀찮아진다. 그래서 나는 일과를 시작했고, 오늘은 어디에 가서 일할까를 생각했다. 우선 커피를 한잔 탔다. 그걸 마시면서 나는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 갔다. 이를 테면 이런 4차원 분류를 골똘히 분석했다. 작품의 종류는 네 가지가 있다. 전체적으로 생각이 많고, 행동도 많은 이야기가 첫째. 둘째는 전자가 많고 후자가 적고. 셋째는 전자가 적고 후자가 많고, 대표적으로 스티븐 킹의 원작들. 마지막 넷째는 다 적은 것, 가령 알랭 로브그리예의 작품처럼. 이 가운데서 나는 1번 방식을 일단 선호해야겠다 라고 생각한 순간, 바로 이때 딱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우리 집에 올 사람이 없는데?
밖에 나가보니 웬 단정히 차려입은 아가씨가 혹시 자기 가방이 여기 있지 않냐고 묻길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실례했다면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아니잖아 하면서 나는 나갈 채비를 하는데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또 누구지 하면서 밖에 나가보니 아까 봤던 아가씨와는 전혀 다른 발랄한 스타일의 숙녀가 혹시 제 가방을 못 보셨냐고 물었다. 그걸 왜 제게 묻냐고 답할려다가 나는 정중하게 저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고, 그녀는 떠나갔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딱 그와 같은 간격으로 7명의 아가씨가 찾아와서 자기 가방을 아느냐, 혹시 가방이 바뀌지 않았느냐, 내 가방을 혹시 보시게 되면 꼭 연락해주시라면서 애달픈 부탁을 하고 떠나갔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하면서 나는 무시했고 사소하게 보아 넘겼다. 그리고 나는 내 가방 안에 준비물을 챙겨서 빈센트의 카페로 갔다.
빈센트의 카페 이름은 특이하다. 양자 터널링!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빈센트. 혹시 웬 아가씨들이 차례로 찾아오지 않았니? 하나같이 자기 가방을 아느냐고 물어보면서 말이야. 우리가 놀러갔던 저 도시 사람들 잔치에서 만난 그 아가씨들인 것 같은데.」
「왔지. 그런데 모두 자네한테 보냈어. 우린 그날 가방을 가져가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안 그런가, 시드니?」
「어, 맞어. 우린들 뭐 그냥 보내기가 좋았겠나? 그런데 말이야. 그 아가씨들 아홉 명인가 됐지 아마? 내가 보기에는 그랬어. 그 뭐랄까, 한 명씩 올 때마다 점점 이 위와 아래 그리고 표정과 헤어스타일이 차츰 커졌다고 해야 할까, 뭔가 농염해지는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다니까. 안 그런가?」
「뭐시여? 진화론이란 말인가? 아닌데. 내가 봤을 땐 궁녀 1부터 10까지, 거기서 1을 뺀 느낌에 가깝지 않았을까? 아무튼 잔소리 같지만 어제 너네들 기분 별로였지? 괜히 잔뜩 기대했다가 신부 들러리도 서보지 못하고 쫓겨난 기분, 왜 억울하지 않겠냐? 우린 이대로 낡은 다트판처럼 주저앉아야만 하는 걸까? 뭐라고 말 좀 해 보지 않겠니? 이건 정말 아니잖아. 나도 우리가 왜 그렇게 주변만 맴돌다 큰 경기에서 대패한 듯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구. 너네는 안 그래? 나만 그런 거냐? 왜 우리가 순순히 물러나야 했는데? 우리가 무슨 큰 죄라도 지었냐? 아니잖아! 그런데 왜, 어째서? 그렇다고 우리가 안티히어로도 아니고 말이야. 이건 그냥 팽당한 것도 아니잖아. 좋았던 시절 하나 없이 그냥 시작하자마자 낙오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차일때 차이더라도 사랑 고백은 한번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이건 정말 아니지 않냐? 어? 어떻게 생각해, 너네들?」
「그래.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우리는 중요한 손님이었고, 주최측의 긴요한 관계자였다고. 우리가 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고.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했다구. 설령 꽝이 되더라도 열려라 참깨 라고 적어도 그렇게 외쳐보기라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원래 우린 모 아니면 도잖아? 더군다나 시드니의 형은 아닐지라도 누군가 기죽은 우리들 모습을 보고서 막 한껏 과장해서 막 우리 얘기를 온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니면 그땐 진짜 어떡하냐? 인터넷은 네티즌이라고 또 가만히 있겠냐? 그래도 우리의 의기랑 무관한 일일까? 한때는 너네도 잘나갔잖냐? 빈센트도 도시에서는 클럽에서 서로 모실려고 안달난 VIP 중의 VIP였다구. 안 그래?」
「야! 전화해 봐. 다시 날을 잡자.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안 그래?」
우리는 의견을 모았고, 시드니의 형에게 전화를 했고, 통화한 후 참 난감한 얘기를 듣고서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시드니 왈,
「형이 그러는데, 그런 파티를 연 일이 없다는데?」
뭐야 이거? 우리의 경험은 진짜였고, 시드니의 형도 살면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심지어 동정마저 간직한 순정파 마초일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 둘 중 하나는 틀렸는데, 거짓인데, 빼도 박도 못하는 뻥이라는 얘긴데 이걸 어떻게 확인한단 말인가? 이건 정말 그런 일임에 틀림없었다. 야, 이 미친년아!
우리는 흥분을 가라앉힌 후 이성을 되찾고 번득이는 예지를 바탕으로 판단력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당장 핸드폰 위치 기록을 살펴봤다. 우리의 기억대로 이동 궤적이 지도에 나타났다. 또 우리는 뭐 어쨌든 어떻게 어떻게 해서 관할 CCTV를 확인해봤다. 확인 결과 착오는 없었다. 시간과 이동 거리와 화면에 나오는 모습등 모두 우리가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시드니의 형과 통화를 했고, 그분으로부터 재차 특별한 잔치는 없었다는 확답을 들었다. 시드니의 형이 가짜인가, 그럴 리는 없는데. 오늘은 시드니의 형이 도시에 일이 있어서 출타를 나가야 하니 우리는 내일 시드니의 형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더 자세한 사태 파악에 들어가기로 했다.
5
다시 하루가 지났다. 나는 오늘 빈센트의 카페에 가서 빈센트와 피에르와 시드니를 만날 것이다. 그래야 한다. 회의를 하고 우리들은 시드니의 형을 만나러 가면 된다. 그래서 담판을 지으면 어디서 오해가 발생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가 어쩐지 바쁘게 지나갈 듯 하면서 어딘가 모르게 묘한 놀라움, 기발한 반전, 기막힌 신기함은 없을지라도 최소한 궁금증은 후련하게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도 된다는 예상을 하게 됐다. 그런데 왠지 이상하게 일이 꼭 그처럼 수월하게 풀려나갈 것 같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간밤에 꾼 기억나지 않는 꿈 때문인가? 아닐 것이다. 일단 나는 빈센트의 카페, 양자 터널링으로 출발했다.
잠시 후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내가 너무 일찍 방문했는지 카페에는 상큼한 아르바이트생뿐이 없었다.
「낭자, 좋은 아침입니다. 사장님은 아직 나오지 않았소?」
「네? 제가 여기 사장인데요. 무슨 일이시죠?」
「허허허, 귀여운 숙녀가 농담을 꽤 진지하게 구사하는 재주가 무척 탁월하구먼 그래. 웃겼소 낭자. 자, 한번 웃었으니 이젠 오늘의 바쁜 용무를 위해 빈센트 사장의 출근에 대해 답을 꼭 들었으면 하오. 빈센트의 행처에 대해 살짝 알려주시면 고맙겠소이다.」
「네? 어르신,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여기 양자 터널링 카페의 사장이라니깐요.」
어르신? 나를 신사로 봐주는 건가? 거기 신경 쓸 게 아니라, 저 친구가 왜 이처럼 완강하게 장난을 이어가는 것인지 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차차 대화를 나눠본 후 나는 빈센트라는 사람이 이곳의 주인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됐다.
그러면 빈센트는 누구지? 이때부터 내 행적은 매우 바빠졌다. 피에르를 만나러 갈려다가 시드니의 집이 가까우니까 그곳으로 먼저 갔다. 그러나 제 위치에 있어야 할 시드니의 집은 없었다. 나는 다시 피에르의 목장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목장의 주인도 피에르가 아니었다. 방금 전 양자 터널링처럼. 진짜 목장 주인은 그런 분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얘네들 셋이서 정말로 양자 터널링의 원리로 공간 이동이라도 했단 말인가? 4차원으로? 그렇게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 혼자 어떻게 된 일인지 원인 파악에 골몰하던 중 목장 사장이 아까 내가 보여준 사진을 보더니 피에르가 자기의 할아버지를 완전 쏙 빼닮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해결도 이해도 만족할만한 해명도, 납득할 수 있는 추정도 할 수 없었다. 지금 현재 뭐 하나 단서도 없으니 추측도 불가능했고, 그동안 간혹 읽었던 추리소설도 일단은 모두 시간 낭비였다는 원망의 심정마저 느껴졌다. 저 푸른 목장을 보니 양과 소와 양치기견이 보였다. 혹시 피에르가 소로 변했을까? 무슨 그런 유치한 공상을! 설마 빈센트가 양으로 환생한 건가? 무슨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상상을, 망측하기도 하여라. 나는 원래 양치기견이었고 시드니는 목동이었는데 하루 사이에 시드니는 개가 되고 나는 사람으로 변신한 건가? 그건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도 안되는 망상이다. 우린 분명 셋이서 함께 환상적인 파티에 갔고, 거기서 따돌림을 당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그 정도의 어설픈 모험은 이루어냈다. 그런데 이게 다 뭔 말인가? 나는 친분이 있는 정신과 의사도 없었고, 내 몇 일간의 행적을 결코 거짓이라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난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진짜 양자 터널링 현상이 현재 다른 어디도 아닌 지금 여기서 발생했단 뜻일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고. 어떻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동네 터줏대감인 멀더는 물론이고 그 누구와 상담하더라도 난 분명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그런 뻔하디뻔한 일은 한마디로 피곤하다. 내 꾀죄죄한 행색 만큼이나 기승전결이 없었고, 물증과 근거도 전무했다. 그래서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어느 대사를 떠올리게 됐다. 그것은, 차마 이런 말까지는 안할라 했는데, 바로 그것이었다. 곧 나는 정말 이 방법까지는 동원하지 않을려고 했는데 라는 술책을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즉 나는 우리 동네 정육점 사장의 채무 관계를 알아보았고, 극장식 카바레의 지번에 대한 세밀한 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꽃집 사업자의 명의 변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동네 음악당 사장의 지난 사랑을 모두 분석해봤다. 그러나 모두 쓸데없는 짓이었다. 아무런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므로 나는 양자 역학을 독학할 수 밖에 없었다. 늦었을 때가 제일 빠르다는 건 내가 인생을 통해 배운 값진 교훈이었다. 일단 어떤 속임수와 뜻밖의 반전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기 때문에 때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언제 싫증나서 현대 물리학의 거대 지류인 양자 역학에 대한 독학을 때려치울지 쉽게 속단할 수는 없었으나, 따라서 나는 더욱 양자 터널링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삼류 소설도 제대로 못쓰고 있는데 양자 역학이 웬말인가, 나는 공부는 늘 딴전이었다. 놀러가고 해변으로 일광욕을 하러 가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어딘가에 숨어있을 기쁨과 환희와 흥미로움을 찾아서 바깥으로 나돌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불쑥 찾아왔던 그 믿을 수 없는 환상을 잠시 잊기로 했다. 이건 기만도 아니고 꿈의 포기도 루저 마인드도 결코 아니었다. 그냥 알려지면 살짝 곤란한 정도의 동네에서만 화자되고 동네에서만 술렁일 헛소동이나 추문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그게 나을 것 같았다. 뜬금없이 정말로 밑도 끝도 없이 아무데서나 막 염문을 뿌리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근신에 들어갔고, 오래간만에 가택감금하며 자숙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6
나는 집에서 청춘의 고뇌와 더불어 사랑의 기쁨 그것의 순수한 본질과 찬란한 의미에 대해서 명상을 하던 가운데 겨우겨우 양자 역학에 대한 기초 지식을 습득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집에서만 머무르는 생활에 답답함을 느껴서 바깥 날씨를 잠시 살펴보기 위해 정원에 있는 수영장으로 나갈려고 했다. 이때 실내로 들어올 수 있는 대문 밑으로 살며시 하얀 종이 봉투가 쓰윽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됐다. 나는 즉시 직감적으로 문 너머의 생명체가 누구인가 그것을 어서 확인해야 한다는 소명을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시 뛰어나가서 주변을 살펴보니 웬 온 몸에 검정색 옷과 검정색 두건을 쓴 누군가가 서둘러 검정색 컨버터블에 승차해서 떠나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와 전혀 관계없는 일일 수도 있고,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쩐지 얼마 후에 순조롭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기분과 함께 왠지 불길한 신비감이 쉽게 가시질 않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난 쫓아가는 역할을 직접 선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와서 그 하얀 봉투를 열어봤다. 그것은 요즘 우리 동네에서 최고로 잘나가는 빌리의 생일 잔치 초대장이었다. 빌리는 전화를 하던가 동네에서 얼굴 보고 알려주면 될 일 가지고 왜 이렇게 유난스레 격식을 차리는 걸까, 그런 의문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결국 수상함은 기특함으로 마무리됐다. 나는 물리학 공부가 하루하루 지쳐가던 순간 좋은 건수가 생긴 듯 해서 딱히 장담할 수는 없지만 금새 기분이 좋아졌다. 거기 가서 빈센트와 피에르와 시드니를 만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일 테고, 우리 집을 방문했던 아홉 명의 여인들에 관한 궁금증까지 해소할 수 있다면 최고의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데 불합리한 추리력이 모아지니 그 예감만으로도 나는 이미 로맨스에 빠져든 것만 같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인기 없는 삼류 작가에서 풋내기 작가 지망생으로 후퇴하여 다시 새 출발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마저 막 날개를 펼치려는 듯 했다. 빌리의 생일 축하를 위한 젊음의 축제는 길게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오늘 저녁이었다. 어느새 지루할 틈도 없이 하루가 훌쩍 지나더니만 저녁이 가까와지고 있었다.
빌리의 생일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나는 집을 나섰다. 거리도 가까웠다. 발리는 시드니의 형처럼 성대한 행사를 하는 게 아니라 동네에서 조촐하게 먹고, 마시고, 떠들고, 노래 부르고, 가능하면 춤까지 추고, 그런 평범한 놀이를 위한 시간을 보낼 계획인 듯 했다. 카페 이름은 블레이드 러너 2049였다. 언제 이런 술집이 여기에 생겼지? 이 손바닥만한 동네가 어쩌면 내가 모르는 어느 이상한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가사의한 기분이 느껴졌다. 뭐 그건 그렇고 나는 카페로 들어갔다.
이미 잔치는 무르익어 있었다. 뭐야 나만 시간을 잘못 알았던 거야 아니면 일부러 내게는 넌 좀 늦게 와도 돼 라는 뜻으로 일부러 늦은 시간을 알려준 거야? 그러나, 아직 드러난 어떤 사실도 없으니 괜한 오해는 금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게 뭐냐면 거기 있는 친구들이 모두 익숙한 얼굴이고 다 친한 친구들인데 어째 그 이름과 무슨 일을 하는지와 그들과 관련된 정보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니 먼저 알은체를 할 수도 없었고, 인사도 소극적으로 했고, 뒤늦게 합류하자마자 즐겁게 놀 수도 없었다. 여긴 정말 손바닥만한 시골이라서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이름이 모두 똑같은 동네였다. 만일 그 이름이 허영이라면 세 학교 모두 허영의 이름을 쓰고 허영심이 가득한 학생들을 바르고 건강하게 교육시키는 고장이었다. 그래서 다 그 얼굴이 그 얼굴처럼 보였을까? 모르겠다. 아무튼 녀석들은 시골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을 것이고, 언제 어디서 이같은 즐거운 유희를 만나겠냐는 것처럼 갖은 재주를 선보이며 장기자랑을 하면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쟤는 카바레 사장 로만이던가? 아닌가? 아무튼 녀석은 언제 배웠는지 모르지만 혼자서 마술쇼를 선보이고 있었다. 입에서 막 진짜 비둘기가 나오고, 눈에서도 진짜 초록색 레이저가 발사됐다. 손바닥에서도 무슨 초음파 같은 걸 내보내서 막 누군가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사전에 미리 둘이 짰고 그래서 벗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옷을 막 훌러덩훌러덩 막 계속 벗기는 벗고 있었다. 게다가 그 주인공이 남자가 아니란 점도 썩 안심되는 점 가운데 하나였다. 다만 옷을 벗어도 벗어도 계속 벗을 옷이 남아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게 잔치가 무르익어가던 중 어떤 어가씨가 내게 접근해왔다. 나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도, TV는 바보 상자라며 좌중을 휘어잡는 말솜씨를 발휘하지도, 가식적으로 가장하는 게 아니라 진짜 함께 어울려서 모임을 즐기고 있지도 못했다. 때문에 나는 그 낯선 상대가 조금은 반가웠고 부쩍 호기심이 발동했다.
「우리 서로 구면이지? 저번에 무례하게 우리 집에 찾아온 것 비밀로 해줄께. 단, 다시 조용한 시간에 너 혼자 방문하지 않으면 온 동네에 소문낼 꺼니까 그것만 알고 있어. 알았지? 기다릴께! 그리고, 기대할께, (하트뿅뿅) (손을 펴서 입술에 쪼옥 해서 후~)」 뭐야 이건?
뭐지? 쟤 누구지? 지 할말만 딱 하고 찬바람 싱 일으키며 가버리네. 뭐야! 사람 잘못 본 거 아닌가? 빌리한테 물어볼까? 무슨 루시퍼가 그린 그림이 그려진 페이지만 뜯겨 없어진 채 남겨진 비서의 정체를 안다는 거야 뭐야? 나는 그녀의 이름이 엠마누엘인 것도 같고 아니 것도 같은 묘한 착각에 이어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녀석들과 조금 떨어진 바에 가서 혼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웨이터에게 마티니를 한 잔 부탁했다. 그런데 혼자만의 여유를 즐길 틈도 없이 다시 얼굴은 익숙한데 이름은 딱 떠오르지 않는 어떤 숙녀가 내게 다가오더니 내 바로 옆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미처 놀랄 틈도 없었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문의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멋진 웨이터 오빠! 저도 이분과 같은 걸로 한 잔 주세요. 좀 진하게요, 알겠죠? (뭘 알아?) (얘는 분명 몽환적인 분위기와 백치미로도 모자라 어떤 불가사의함으로 포장된 지적 매력이 물씬 풍기는 그런 여자였다) 너 미쳤니? (뭘 미쳐? 내가 왜 미쳐?) 너 내 남자친구 게리 그 녀석이 얼마나 질투심이 많은지 아니 모르니? 그렇게 다짜고짜 내 차에 덥썩 타서 깜짝 놀라게 날 포옹하면 내 입장은 뭐가 되니? 어? 그래 안 그래? 너... 설마 우리 사이가 예전부터 심상치 않았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던 거니? 하긴 나도 오래 간다고 생각했어. 나가떨어졌어도 이미 나가떨어졌어야 했는데 뭐 억지로 여기까지 온 거지. 어때? 너 나 좋아하니? 이참에 깔끔하게 정리하자구. 어? 난... 뭐야 늬가 먼저 고백해야 할 거 아니야? 숙녀한테 이거 무슨 짓이야, 어? 어때, 나 괜찮겠어? 나 감당할 수 있겠냐구, 외롭게 하지 않을 자신 있냐고. 우리, 비밀로 만날까 아니면 이번에 확 그냥 결혼해버릴까? 어머 얘 표정 좀 봐. 농담이야 농담. 쫄기는! 어쨌든 다음에 조용할 때 다시 내 애마에 조심스럽게 승차하라구. 알겠니? 우리의 미래를 한번 타진해 보고 같이 운세 보러 한번 가야겠다. 알겠어? 딱 기다리고 있으라구.」 딱 기다리기는 뭘 딱 기다려?
그녀 역시 자기 할말만 마치고 곧바로 멀어져갔다. 얘는 또 뭐지? 나는 저 뒷모습은 기억나는 것도 같고 잘 모르는 듯 낯설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베아트리체인지 롤리타인지 아니면 샬롯인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는 끝까지 그 적응되지 않는 생일 잔치에 계속 남아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이상한 카페를 조용히 나왔다. 옛날 같으면 나 간다고 작별 인사를 반드시 할 것이고 그러면 못 가게 말리고 어쩌고 그러다 으쌰으쌰 하다가 만취해서 끝까지 갈 텐데, 지금은 장면 전환에 꼭 예고가 필요한 것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된 동네 아저씨였다. 그래서 나는 카페를 나와서 잠시 멈추어서서 어디로 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내 바로 옆에 어느 아리따운 여인이 다소곳이 서서 날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얜 또 뭐지?
「오빠. 저 기억 안 나요? 오빠가 내 가방 안으로 불쑥 들어왔잖아요. (가방? 무슨 가방? 가방에 내가 왜 들어가?) 설마 벌써 잊은 건 아니죠? 제가 운영하는 첼로 교습소 이름이 가방이란 걸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니죠? 그런데 그때 왜 그랬어요? (내가 뭘? 뭘 어쨌다고?) 아니, 진짜 그럴만 하잖아요. 우린 안면만 겨우 익혔던 사이였고, 통성명도 정식으로 나누지 않았는데, 어떻게 오빠는 갑자기 제 음악실에 뛰어들어와서 무슨 누구를 아느냐구요? 베아트리체던가? 베아트리체가 누구에요? 아, 그녀가 누군진 몰라도 참 좋겠다. 정말 많이 부럽네. (뭐야! 나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내가 얘의 음악실에 왜 뛰어들어갔지? 거짓말 아니야? 베아트리체는 또 누구야? 베아트리체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새로운 인생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인데... 뭐지?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런데 오빠 지금도 오페라 서곡과 간주곡과 아리아만 추려서 들으시나요? 왜 전곡 감상은 하시질 않는 거죠? 곧 있으면 우리들 기념 무도회 있는 거 아시죠? 이번에는 특별히 가면무도회니까 오빠도 꼭 참석하셔야 해요. 오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꺼에요. 아, 맞다! 이 얘기 저만 들어서 알고 있어요. 오빠가 저의 작업실에만 폴짝 뛰어들어오신 게 아니라는 사실을요. 오빠 아무래도 바람둥이 같아요. 다 들었다구요. 오빠, 엠마누엘의 집에도 갑자기 쳐들어가셨다면서요? 거기서 뭘 하실려고 그렇게 어느 숙녀의 집에 느닷없이 방문하셨던 거예요? 오빠 국가대표 상비군이에요? (뭔 국대 상비군?) 아니면 외판원? 오빠는 뭐지, 아마도 가난한 예술가? 아! 또 있다. 소피의 차에도 갑자기 뛰어들어서 조수석에 딱 타더니 그녀를 깜짝 포옹하셨다면서요? 뭐야? 완전 선수네~! 오빠 아무래도 짐승 같아요, 치!
(뭐야? 얘네들이 가방 때문에 자기들이 차례로 우리 집을 방문한 게 아니라 내가 누구의 집에 찾아갔고, 누구의 차에 타서 기습 포옹을 하고, 혹시 뽀뽀도 했을까? 난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또 지금 내게 말하고 있는 얘의 첼로 교습소에 찾아갔다고? 이게 다 대체 뭔 일이냐고! 지들이 다 날 찾아와놓고서 나보고 왜 이젠 저를 사랑하지 않느냐는 거야 뭐야? 참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얘는 정체가 뭐야?)
하긴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그건 한편의 드라마였죠. 오빠, 기억나요? 그때 유행하던 그 음악 참 감미로웠는데, 제목이 뭐였드라? 난 이런 게 잘 떠오르지 않아요. 왜 있잖아요, 빵집 목마에 흐르던 그 음악! (당시에는 그냥 듣기만 했지만 나중 두고두고 생각났다. 아 글쎄 빵집 이름이 목마라니! 촌스럽게 말이야) 그때 여자는 엠마누엘과 소피와 저, 남자는 빈센트와 피에르와 시드니. 그때 딱 사랑의 짝대기를 결정지으려던 바로 그 순간 오빠가 짠 하면서 나타나셨잖아요. 빰빠라밤~ 진짜 팡파르가 들리는 듯 했다니깐요. 아마 그러셨죠? 이 소개팅 무효라고! 그래도 소개팅이었으니 다행이죠. 다른 행사 같았으면... 아휴 아찔하죠 그냥! 오빠가 그때부터 그랬다는 건 분명 누구 하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단 말인데...... 지금까지 오빠가 보여준 행동은 그게 아니잖아요? 뭐 셋을 모두 다 품고 말겠다 이거에요 뭐에요? 당시 그때가 아마 중1 때였죠? 와, 기억난다. 새록새록 산뜻하고 막 설레던 기분. 딱 꽃 피던 계절의 여왕 5월 쯤이었을 거에요, 그쵸? 어떻게 잊어요, 그 첫 만남을. 오빠 그런데 그 토성과 UFO 자수가 그려진 가방은 우리 셋 가운데 누굴 줄려고 가져왔던 거예요? 설마... 전가요? 어머나! 어쩜 이럴 수가. 저도 눈치채고 있었답니다. 호호호. 그런데 왜 그냥 다시 가지고 가버리셨어요? 통 속마음을 알 수가 없는 오빠야. 음흉해가지고 말야. 그런데 오빠는 왜 도시로 가시질 않고 여기 남으신 거에요? 혹시 무명 작가라서? 푸하하하하하. 미안해요. 놀리는 거도 비웃는 것도 아니랍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성장한 우리가 처녀인가는 몰라도 우리도 하나 고백할 게 있어요. 우리 셋이서 각자 빌리 오빠랑 사귄 건 아닌데 서로 각자 그 오빠를 몰래 짝사랑했다는 걸요. 우린 뭘 해도 같이 했나 봐요.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아 있잖아요, 저 이번에 음반내요. 제가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몇 개 썼거든요. 작곡가가 직접 초연으로 선보이는 음반이죠. 걱정마세요. 잘 되면 제가 오빠 먹여 살릴 테니까요. 오빠도 형편 어렵다고 괜히 에로 비디오 각본 쓰고 막 그런 일 하지 마세요. 그리고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 셋이서 오빠도 좋아했다는 사실 그거 알아요? 하긴 오빠는 분위기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닌데... 아무튼 이상했어요. 혹시 그걸 응큼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요? 어쨌거나 우리의 변치 않는 우정 때문에 오늘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오빠는 왜 제게 오늘 아무 말씀이 없으신 거죠? (늬가 계속 말하고 또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말을 하니? 어? 안 그래? 그러고 보니 얘도 좀 상태가 안 좋은 것 같다) 옛날 같으면 언제나 젊고 아름답네 눈부시네 활짝 핀 꽃이 다 무색하겠네 그런 간지러운 말들 일색일 텐데... 오빠, 오늘, 뭔가 느낌이 이상해요.
아, 이제 알겠다. 빈센트와 피에르와 시드니 오빠가 왜 안 보이나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군요. 걱정마세요. 그분들은 열심히 가면무도회를 준비중이니까요. 오빠! 제 작업실에 가셔서 졸업 앨범 보실래요? 색다른 기분을 경험하실 수 있을 꺼에요. 우리 가서 칵테일 한잔 해요. 딱 한 잔씩만요. 잘 보이면 또 모르구요. 가서 오빠 작품 얘기 들려주세요. 그리고 오빠의 사랑 이야기도 살짝 귀뜸해주셔도 괜찮구요. 혹시 모를 사랑의 복병은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소피는 엠마누엘을 좋아하고, 엠마누엘은 시드니를, 시드니는 피에르를, 피에르는 빈센트를 사모한다는 헛소문은 잊어버리죠. 괜한 풍문에 마음 쓰실 꺼 없어요. 제가 오빠를 더없이 흠모한다는 사실만 변치 않으면 되니깐요. 호호호. 오빠의 그 애절한 눈빛은 여전하군요. 욕심쟁이!
(그런데 얘는 뭔 말이 이렇게나 많지? 바로 이런 애들이 말하기 위해 인생을 사는 그런 애들이라니까. 전화기를 잡고 살고, 누굴 만나도 말하고 듣는 척 하다가 다시 말하고.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아마 미래의 남편은 귀에서 피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야. 그런데 최근의 미스테리가 이제야 뭔가 앞뒤가 맞아가는 듯 한데? 다가올 무도회에 가서 녀석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속시원히 알 수 있겠군. 휴~! 그나저나 내가 무슨 중1때 3 대 3 미팅 자리에 껴들어 깽판을 부렸다고? 난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데... 진짜일까? 아닐까? 거짓 같은 진실일까? 이거 정말 다시 얘기해주라고 물어볼 수도 없고 미치겠구만!)」
어느새 우리는 그녀의 첼로 연습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의 이름은 '가방'이 아니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였다. 아, 또 속았다! 나는 그 음악실 안에 붙여진 무슨 증명서 같은 걸 본 후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됐다. 그녀의 이름은 미란다였다. 생전 처음 만나본 미란다였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까 말했듯이 진짜 칵테일 한 잔만 대접했고, 여기서 내가 그녀를 어떻게 한번 해 본다거나 그럴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벌서듯이 칵테일을 마시면서 들었던 음악, 바로 그녀가 작곡했다는 첼로 음악은 아무리 들어도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다. 그런데 그걸 자기가 썼다고? 이런,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 그렇게 나는 가면무도회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그녀와 헤어졌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볼 수 있는 짤막한 GIF 파일이 무척 공감되는 순간이었다. 클럽에 들어갈 때는 세상은 아름다워 야 신난다 야호 앗싸, 클럽에서 나올 때는 이런 젠장~! 그러나 나는 혼자서 다시 뒷골목 술집을 전전할 수는 없었다. 뭔가 꺼림직하지만 언제, 어디서, 드레스 코드는 뭐다 라는 가면무도회에 초대된 것으로 만족하고 집에 가서 잠을 잤다. 감수성은 억제됐고, 기분은 꽝이었으며, 사랑의 정령과 램프의 요정은 내게 한없이 비정했다. 나는 내일 희망의 과일 나무를 심고, 내일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내일 은밀한 욕망 그것의 실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리라 다짐한 후 단잠에 빠져들었다. 따라서 오늘의 쾌락주의는 꿈나라에서나 기대해 볼 수 밖에!
7
시간이 다 됐다. 알람이 울렸다. 옛날에 내 핸드폰 알람은 개 짓는 소리였다. 지금은 그냥 삐삐삐삐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그래서 나는 마술 피리에 나오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알람으로 울리게 설정해 놓았고, 지옥같은 내 마음에서 끓어오른다...라는 소프라노의 음성을 들으면서 침대에서 일어났고,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는 듯한 표정으로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일부러 심각했다기 보다는 나도 모르게 웃음기가 싹 가셨다고나 해야 할까, 누군가 리모콘으로 날 조종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쓸데없는 공상에 시간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나는 목적지로 출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면무도회가 열리는 어느 대저택에 도착했다.
나는 아마 소규모 실내 체육관이나 세기의 권투 대결이 열렸던 MGM 특설링 같은 데서 가면무도회가 열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그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왜냐하면 시드니의 형네 집과 거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행사에 거의, 아니 한번도 참석해 본 적이 없어놔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는 질서랄지 어떤 일정한 규칙을 금새 파악해냈다. 여기는 3박자 음악이 생음악으로 흐른다. 도나우강─다뉴브─봄의 소리 왈츠 같은 그런 음악 말이다. 그런데 음악이 멈추지 않는다. 멈추긴 멈추는데 멈춘 후 채 0.5초를 넘기지 않고 바로 다음 음악이 연주되었다. 뭐야 여기가 클럽이야? 아닌데! 정통 고전 음악 일색이었지만 틈틈히 경음악도 나왔다. 나는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부쩍 외로움을 탔다. 고독했다. 점점 쓸쓸해져만 갔다. 그래서 구석지 한쪽에 앉아서 입구에서 받아 계속 쓰고 있던 가면도 벗어버리고 연거푸 샴페인과 포도주를 마셔댔다. 혀가 살짝 꼬이는 듯 했다. 기분이 알딸딸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였고 모두 춤 추고 노느라 정신이 없는 듯 했다. 의상도 모두 화려했고 최고급 재질로 만들어진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인 것 같았다. 그리고 다들 그 꺼벙한지 고색창연한지 분간하기 어려운 가면을 쓰고 있으니 누가 친구고 누가 초면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빈센트도 보이지 않았고, 피에르의 형상처럼 보이는 인간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아무나 붙잡고 가면을 벗기면 시드니는 아닐까 그런 억측마저 잠시 나를 설레게 했다. 아주 잠시, 진짜 그래볼까─내가 못할 줄 알어?─자 난장판을 벌여보자─강아지야 짓지만 말고 말 좀 해 봐라─닭이여 요정처럼 날아올라라 오로라가 살고 있는 저기 저 창공으로─오 사랑의 여신이 속삭이는 주문이 들리지 않는가 가면을 벗기라는, 가면 안에 다른 가면이 있을지 모르겠지만─산들바람아 그녀의 치마폭을 들어올려주지 않겠니 라는 치기가 발동할려다 말았다. 그리고 엠마누엘과 소피와 미란다가 혹시 저기 저 건물의 실내 그것도 제일 높은 위치에서 나를 망원경으로 주시하며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며 즐거워할지 누가 알겠나. 언제 이런 고품격 파티에 와봤어야지 적응을 하던가 말던가 하지, 맙소사 내가 진짜 촌닭 중의 촌닭이었네! 이건 뭐 거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 있는 리플리씨 따라하기였다. 그러면 누가 알랭 드롱이고 누가 애인 마르주인가? 뭐야, 그럼 난 허언증 환자? 이런, 젠장! 차라리 영화 OST를 신청하는 게 낫겄다.
지금 노을이 져 있는 나른한 파티의 현장이지만 난 왠지 지중해의 눈부신 햇살을 내리쐬며 놀라서 뒤돌아봐야만 할 것 같았다. 할일도 없고 파티에 와서 심심하다 못해 우울하고 막 눈물이 곧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눈치 없이 남의 집 잔치에 괜히 온듯 한 후회의 감정이 급박히 밀려왔다. 아마도 난 지금 행복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3박자 왈츠는 때려치우고 야한 옷차림으로 신나게 춤을 추는 여성 5인조의 천사 같은 연예인이라도 등장하면 좋으련만......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데 어쩌면 파티가 다 끝나갈 무렵 딱 남자 셋 여자 셋 그 친구들이 절묘하게 느릿느릿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지금 당장 여기서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도 없고, 3박자 춤도 출 줄 모르고, 더군다나 여긴 바도 바텐더도 없다. 여기가 싸구려 술집 같았으면 아담한 홀에 있는 탁자 3개와 별도로 바가 있을 것이고, 화장실은 바와 벽이 닫을락 말락한 딱 사람 한 명 지나갈 만한 협소한 공간을 지나서 뒷편으로 가야할 것이며, 바로 이때 나른한 몸가짐을 보여주는 몽환적인 눈빛의 술집 여자는 나름대로 냉철한 이성주의자일 것 같은 어느 마음에 드는 손님이 지나가는 바로 그 순간, 그 좁은 틈에 비스듬히 고혹적으로 서서, 어디 한번 지나가보시지 날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나 보자는 식으로 그 남자를 유혹할 수도 있는데.. 그럴 텐데... 그런 어설픈 기대도 불가능한 풍성하고 야심차며 그야말로 호화로운 가면무도회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힘없이 시선은 떨구어졌다. 내 자의식은 윤색되었다. 괜히 왔다. 속았다. 꽝이다. 망했다. 슬펐다. 난 불행했다. 하나도 재밌지 않았다. 최소한 지금은. 난 빈말도 구분하지 못했고 말귀도 못알아먹었다. 난 바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TV나 볼 껄. 새로운 단골 술집을 찾아 헤매던가 할 걸 괜히 왔어 괜히. 지금 이 기분은 망연자실함이다. 저 앞에서 기뻐하며 춤을 추고 또 추는 저 친구들은 모두 부자들일까? 아니면 예술가? 또는 변태? 애인은 있을까 없을까? 그걸 내가 왜 궁금해 하는데? 그냥 가서 확 모두 가면을 벗겨버릴까? 이제 살짝 취기도 기분 좋게 올랐는데 확 그냥 어떻게 해버릴까? 미친 척? 일명 진상, JS? 만일 그렇게 되면 난 주목받지도 못하고 살벌한 보디가드에게 실려나가면서 제대로 망신당할 것이다. 그건 안된다. 차라리 샴페인이나 더 마시자. 체념을 마시고 추억을 마시고 천재적인 영감까지 마셔버리자. 한잔 또 한잔 아예 병채로 가져다 달라고 해야겠다. 아! 외롭다. 고독하다. 내가 대체 여기에 왜 온 것일까? 이런 바보같으니라고. 그렇다고 당장 나가기도 뭐 하고, 또 마냥 친구들이나 그 불분명한 뭔가를 기다리기도 퍽 어줍잖았다. 완전 뻘쭘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드라마에서는 이런 때 딱 안주머니에서 수첩과 만년필을 꺼내서 미친 듯이 막 번쩍이는 착상을 이야기로 써내려가던데, 그건 영화고 이건 현실이다. 그럼 그렇지! 내가 하는 일이 다 이런 식이다. 늘 그랬다. 항상 그랬고 언제나 그랬다. 이제야 안심이 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안주머니를 확인해 보니 안주머니엔 특수 초합금 티타늄 소재로 된 소형 그런 위스키도 없었다. 핸드폰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봐도 연락할 만한 친구는 없었다. 나는 외톨이였고, 나도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 나는 최근에 단짝이 없었다. 아예 혼자 예술한다고 은거중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오래된 일이고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렇다고 여기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랴 뉴스를 보랴! 아, 맞다! 나는 혹시 모르니, 나중 이걸 보면서 새로운 발상 비슷한 것이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니 이 환희의 무도회 그 찬란한 분위기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완전 맛이 가지는 않았다. 보통은 냉정하게 사진 딱 한 장, 인심 쓰면 두 장 정도 찍고 말 텐데 이상하게 난 지금 동영상으로 이 신비스럽고 우아하며 더없이 근사하고 무한정 세련된 이 환상적인 축제의 현장을 담고 싶어졌다. 한껏 고상하게 생생한 동영상으로 이 현장을 담고 싶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카메라를 켰다.
그런데, 어머나, 이게, 웬일이니......!
어떻게 이런 일이, 맙 - 소 - 사!
말도 안돼, 세상에나...!
동영상 속의 사람들은... 이걸 정말 믿어야 하나... 모두 투명인간이었다. 그러나 형체는 있고 또 옷을 입고 가면을 쓰고 가발을 쓰고 장갑도 꼈으니, 그 나머지 틈새로 보이는 공간만 투명이었다. 원래 그건 반투명도 아니고 불투명해서 살색이어야 하고 맨살이어야 맞는 건데, 그 건너편이 그대로 다 보였다. 그러나 다시 동영상에서 시선을 떼어 육안으로 직접 보면 모두 정상이었다. 이게 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오, 이럴 수가, 세상에나!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지는 않았지만 조금 슬퍼졌다. 약간 음울했고 혹시 나도 투명인간인 건 아닌지 살짝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요컨대 단 하나의 극명한 감정은 역시, 공포였다. 순수한 공포심!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없었다. 나는 좀비로 변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나는 그 즉시 뛰쳐나갔고 우리 집까지 도망갔다. 그리고 집에서 곧바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내리 이틀을 잤다. 무슨 꿈을 꾸긴 꿨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악몽이었을 것이다. 그 후 나는 그렇게 얼이 반쯤 빠진 채 당분간 지내게 되었다. 마치 나사가 몇 개 빠진 듯이 나는 진짜 바보가 된 것이다. 나는 머리에 꽃을 꼿았다. 하루는 새빨간 장미를 하루는 노란 프리지아를, 바람 부는 날엔 선홍색 카네이션을 자못 정서적이고 지나치게 감성적일 때는 연분홍 라넌큘러스를.
룰루랄라랄라라~ 룰루랄라랄라라~ 룰루랄라랄라라~
8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나는 혼자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더불어 난 바보라는 진단 역시 절감했다. 흔히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고양이가 자기 가슴 위에 앉아서 주인님을 빤히, 뾰루뚱하게 쳐다보는 그 즐거움에 녀석과 함께 산다고도 하는데 나도 한번 그 기분을 느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면 고양이 사료도 사야 하고, 집안 청소를 1번 할 걸 2번 3번 해야 한다. 고양이 오줌 냄새도 날 테고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다. 그냥 인터넷 동영상으로 살짝 구경하고 말아야겠다. 그러나 아침에 딱 눈을 떴을 때 고양이가 주인님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시선을 맞추는 그 기분이 도대체 어느 만큼 아늑할지는 무척이나 궁금하고 또 한번 겪어보고 싶기는 하다. 이건 뭘까? 뭐긴 뭔가, 그녀를 어떻게 한번 해 봐서 내 욕심만 채우고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어떤 바람둥이의 철학과도 닮은 무언가 그런 의식인 듯 하다. 그러고 보면 여자들도 그 수를 다 읽고서 어쩐다니 참 대단하다. 훌륭합니다. 최고라구요!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돌아왔어요, 사랑이란 무엇이다 시간이. 사랑은 무엇일까요? 잠시 사랑에 대해서 살짝만 고심해 보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조수인지 상전인지 썩 불명확한 고양이님의 새침한 눈빛과 도도한 태도의 기다림이 나왔으니 말이다. 사랑. 사랑이란? 사랑은 무엇일까? 설령 사랑이 무엇인지 모를지라도 우정이면 몰라도 일단 사랑의 가능성이 싹트는 자리라면 우선 사랑은 무엇이다,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이란 그러면서 인상적인 표정과 추측하는 눈빛과 뭔가 있는 듯한 몸짓을 곁들여서 막 그러면서 그 말꼬리를 사랑에 대한 몽상에게 넘겨버려도 괜찮다. 일단 거기까지만 해도 절반은 성공한거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로맨스라면 언제나 마다하지 않는 그녀들에게 내가 아는 사랑에 대해 들려주는 것은 때로는 남정네의 의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사랑 얘기를 좋아하는 아낙네들에게는 그렇다고 살짝 거짓말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만족해서는 곤란한 법, 그러니 명쾌한 성과를 획득하기 위해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자. 사랑은 알면 알수록 어려워지는 것만 같다. 순수한 사랑이 평범한 그것으로 변하기는 쉽다. 반면 불순한 사랑이 귀한 그것으로 바뀌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그러나 사랑 이야기는 오히려 처음의 의도가 방탕함에 가까웠던 후자가 드라마에 더 어울린다. 하지만 이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일이다. 사랑을 하자 사랑을 학습하고 사랑을 응원하며 사랑을 찾고 사랑에 관심을 표명하며 그것을 열띤 흥분으로 지켜보는 데서 보다, '사랑은 없다' 에서 오히려 사랑 드라마의 그 애절한 꽃이 핀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러나 실상 알고 보면 내 사랑과 타인의 사랑도 어쩌면 사랑은 교양과 편견과 지식에 속하기를 결연히 거부하는 청개구리인 듯 하다. 그래서 사랑을 아끼고 키우고 선별하고 기다리고 궁금해 하며 자주 담론하는 쪽보다 오히려, 그냥 생각없이 어떤 종류의 사랑을 퍼트리는 어떻게 보면 사랑에 무관심하지만 권위자라도 된다는 듯 설을 풀고 씨를 뿌리는 농부와 꿀벌과 나비의 사랑이 차라리 더 쉽다. 그 무언가 훨씬 간편하며 어쩜 혼자 속편한 그런 이치 때문에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진공청소기와 커피포트를 구분하는 데 퍽 혼선을 일으키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어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로 보이고, 흔히 말하는 사랑은 무엇이다─사랑은 어떻다─사랑은 아릅답다는 둥 어쩐다는 둥 그거 다 거짓말 같다. 진짜 그렇다. 그래서 누가 그 거짓말을 멋지게 하느냐가 중요하고, 어떻게 사랑을 능청스럽게 감동적으로 노래할 수 있느냐에 그것의 크기와 인기와 가치와 의미가 어느 만큼 걸려있지 않을까? 걸려있지 않다. 걸려있지 않다고. 사랑이 무슨 옷걸이도 아니고. 다시 말하자면 그건 그때그때 다르다. 사랑을 한 번도 말하지 않는 남자와 사랑을 시도 때도 없이 말하는 여자가 만나서 그리는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을 입에 달고 사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만드는 그런 사랑은 어떻게 생각하면 머리 아프다. 누구 나오는 영화가 퍼뜩 떠오르면 오~ 아니면 아아~! 또 사랑을 입에 달고 사는 남자와 사랑은 없다 라는 여자가 함께 하는 사랑은 한숨이 나올 수도 있다. 자, 그러면 남은 건 뭔가? 뭐긴 뭔가, 사랑에 대하여 별 생각이 없는 건지 많은 건지 그 속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랑만 남는다. 즉 두 당사자가 모두 사랑합시다 라는 목적으로 만나서 아무도 사랑이 어떻고 사랑이 어쩐다고 절대 말하지 않는 것. 뭐 눈빛만으로 모든 것을 말한다고? 그럴 수도! 그러나 그것도 둘 중 하나다. 몰래한 사랑과 풋사랑으로. 허구와 노래에서 영원히 반복적으로 다루어 모두를 귀찮게 하는 바로 그것. 그것은 그 어느 예술에서도 통용되고 일일 연속극에서도 일상에서도 우리네 삶과 시시때때로 함께 하는 것이다. 이게 다 사랑의 모호함 때문에 발생하는 일인 듯 하다. 사랑한다 라는 말처럼 애매한 건 실상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살다 보면 알게 된다. 그런데 거기에 얹어서 사랑의 표현이랄까 그 기표 역시 그만큼이나 드넓다. 진짜 0부터 가짜 100단까지. 그러므로 골치 아픈 세상 사랑을 잘 모르겠다면 '사랑한다' 이 말은 '좋아한다'로 치환하자. 그렇게 바꿔서 이해하자. 다만 그래도 뭐랄까 은연중(?) 착찹한 문제는 남는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꽃다발도 좋아하고, 들장미도 좋아하고, 컨버터블도 좋아하고, 영화배우들은 모두 멋져보이고 도톰한 목소리를 타고난 그 남자의 나직한 속삭임은 뭇여성들을 설레고도 떨리게 만들며, 뭐야 글도 있고 음악도 있고 팔방미인도 흔하네? 이런, 젠장!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구만. 우선 나부터도 내가 나를 못 믿겠으니까. 그러고서 무슨 그 어느 말에는 뭐 그렇게나 하나 같이 꺼뻑~? 오, 저런! 아 나 이거 참나 진짜 세상사 복잡하구먼 그래. 이처럼 사랑 하나만 갖고도 수싸움 치밀한데 누가 그러시네. 사랑 받고 사회 더. 질 수야 없지, 사랑 받고 사회 받고 돈까지! 뭐야 경제도 아니고 돈? 오 세상에나, 저런 쯧쯧쯧! 정말 저이는 뭘 들고 있길래... 저 인간 대체 뭔 (삐)배짱이야 허영심이야 허풍이야? 이 놈의 세상은 도대체 왜 내 패를 깔 수도 게임에서 빠지지도 못하게 하는지 통 그 속셈을 모르겠구먼. 에라 나는야 마권업자도 싫고 게임의 법칙을 새로 쓰던가 해야 겠네. 그래서 탄생한 게 바로 새로운 인생, 신상품, 신작, 뉴 페이스란 거! 그렇지만 끊임없는 새로움을 반기다가 피곤하면 쉬고, 놀땐 놀고 일할 때도 놀고 인생을 즐기면 그뿐! 그러니 사랑 사랑 얼씨구나 사랑아 내 사랑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나 역시도 그처럼 말할 수 없다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꽃과 새에게 다정하게 손짓을 하고 나무에게 상냥히 말을 걸겠다, 나는 그냥 귀에서 피가 날 테다? OK! 왜 안되겠나. 멀어져간 어떤 희생과 이상스런 모순과 부조리와 옛사랑을 기억하고 청춘을 회상하며, 지금의 사랑과 다가올 그분을 기다리면 된다. 그대 역시 주변을 보거나 뒤를 돌아보더라도 분명 어둡고 괴롭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심리 기제 그 특성상 유독 아픈 기억이 선명해서 그렇지>, 즐거운 우정과 아름다운 사랑과 행복한 시간도 많았을 것이고, 누구에게나 우정과 사랑은 기쁜 시간이 훨씬 많다 그런데 난 왜 그렇게나...... 낯 뜨겁고 닭살 돋아서 또는 잘 떠오르지 않아서 말을 줄이지만 나만 해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거나 듣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잘 행하지도 않았고 그게 편했다, 길을 걷다 개미를 밟지 않기 위해 발을 헛디든 일도 있을 것이고, 친구의 단절된 연애에 대해서 좋았던 시절을 떠올려보라며 다독여주고 괴로울 때 지난 추억이 위로가 되며, 두고두고 종종 옛날 어느 못된 녀석을 떠올리며 저주를 퍼붓는 비합리적 행동을 쉽지는 않겠지만 이성적으로 제어하기를 원할 것이고, 크게는 지구와의 유대가 튼튼했을 것이며, 어디서 어떻게든 돈독한 역사가 유구했을 것이고, 그것을 탄탄한 기반으로 하여 다음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SF 장르가 있다는 것은 초현실주의도 있고 환상 머신도 있다는 말도 된다. 당신의 선망이 가까우면 소풍이고 드물면 잔치며, 보고 듣고 뭔가를 즐기는 작은 기쁨은 우리네 삶과 항상 함께 한다. 언제나 살면서 멀리 있을지 지금 함께 할지 모르는 푸르른 희망을 부르고 사랑을 꿈꾸자? 라~고 말하는 게 사랑 사랑 사랑은 말이야 라고 열변조로 수다를 나누고 사랑을 노래하고 다시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쉬울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온갖 가설과 추정과 경험에 비추어 예측과 조심스런 예단까지 해봤지만 사랑이란... 음 한마디로 어려운 문제다. 아무리 봐도 난 사랑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 화제만 꺼내고 귀에서 피를 흘리든가 딴청을 피우며 게임의 낙원으로든 골프장으로든 어디든 미지의 세계로 떠날 궁리를 하는 게 아마도 그나마 현명한 행동이 아닌가 라는 결론이 나온다. 물에 빠지면 입이 둥둥 뜨거나 추문을 퍼트리고 온갖 소문의 진상으로써 뭐든지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 이상은 차라리 거대한 수다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어떠할런지요. 때로는 몇몇 사랑까지도 말예요.
아무래도 내가 최근에 유령을 봤고, 또 환각인지 환영인지 그런 비정상적인 일을 체험했기 때문에 내 감성이 좀 말랑말랑해진 듯 하다. 때문에 나는 행복을 예찬하고 행운을 만나기 위해 뭔가 약동하는 활기, 은밀한 사랑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부푼 야성녀의 들뜬 생기 바로 그런 생동감을 되찾아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동네에 혹시 만연할지도 모르는 내연의 관계도를 조사하거나 나 자신이 직접 어느 갑부 이혼녀에게 두터운 신임이라도 얻든가 해야 할 텐데 내 몸은 내 의지를 거역하고 있었다. 참으로 모처럼 느껴보는 분위기다. 꽁해 있는 듯한 자세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근간의 그 귀신에 홀린 듯한 경험이 영 석연치 않다. 그러나 이 일은 꿈도 아니고, 누군가 만든 작품도 아니며, TV에 나오는 연속극도 아니다. 있었던 일을 외면할 수는 있지만 없었던 일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모두 거짓이고 허구였다며 나를 다독이고 모두 허영심에서 발로된 뻥이였다면서 진실을 은폐하고 환상감을 무마할 수도 없었다. 무슨 못 믿을 꽁트 같은 허무맹랑한 코메디 단막극쯤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설마 내가 진짜 3 대 3 미팅 자리에 불쑥 뛰어들어가서 이 미팅 무효라고 외쳤을까? 에이, 그럴 리가! 그때 그녀가 손에 쥔 그것은... 설마... 몇몇 기억이 떠오른다. 아무리 그래도 중학교 1학년생이 무슨, 대딩 1이면 또 몰라도. 뭐 삼류 대학교 1학년일 때? 이거 이거 주부들이 즐겨 시청하시는 아침 드라마라도 봐야 하는 건가, 정말 최근의 이상한 경험이 나를 못살게 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진짜로 아침에 방송하는 일일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다. 13일의 금요일 같은 추억의 옛날 영화를 볼까 아니면 다른 할일을 찾아볼까 고민하던 찰나 나는 도시로 바람 쐬러 갔다 오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별다른 준비물은 필요치 않았다. 나는 내 애마에 올라탔고 바로 출발했다.
그런데 이곳 시골을 거의 벗어날 무렵 최근 파티에 참석했던 시드니의 형네 집과 매우 비슷하게 생긴 집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남의 집 초인종을 무작정 눌러서 여기가 혹시 시드니의 형네 집입니까 라고 물어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 옆에 있는 찻집에서 바나나-망고 쥬스를 한잔 마시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갔다.
나는 찻집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찻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찻집의 창가 탁자에 앉아있는 세 남자 세 여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중에 엠마누엘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나는 반가웠고, 그런 내 마음을 알리고 싶었으며, 눈빛을 교차하고 안부를 묻고 최근의 일상과 관심사와 과거의 사연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엠마누엘은 날 알아보지 못한 듯 했다.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뭐랄까 오늘 따라 유독 엠마누엘과 소피와 미란다 가운데 엠마누엘의 꽃다운 얼굴이 예뻐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도 꼭 3 대 3 미팅을 시작한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가서 따끔하게 한마디 할까? 이 미팅 무효라고? 아니면 나도 이 자리에 껴주라고? 아마도 후자가 낫겠지? 아닌가? 어찌되었든 우선 인사는 나눠야 하니까 나는 카페로 들어가서 그들 곁으로 갔다. 막상 녀석들 앞에 서니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래도 할말을 해야 했고, 그래서 처음 떠올렸던 대사를 내뱉었다.
「이 미팅......」
「무슨 일이시죠?」
「누구시지, 너 아는 사람이야? 카페 사장님 바꼈나? 점원...이라고 보기엔 어... 조금 음 그런데?」
나는 내 할말을 마치지 못했고, 이 친구들은 내가 아는 세 남자 세 여자가 맞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런 것 같은데 훨씬 앳되 보였다. 갓 스무살이 되었을까 아마도 그런 듯 했다. 복장도 보아 하니... 뭐야 그럼 내가 아는 그들이 아니란 말인가? 그 친구들의 젊은 시절 모습일까? 하긴 녀석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왔을 리도 없고 아니겠지. 아닐 꺼야. 나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들과 헤어졌다.
그리고 바나나-망고 쥬스를 사들고 찻집을 나왔다. 그곳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다시 돌아가서 내가 엠마누엘이라고 지각한 그녀에게 이와 같은 예언을 선언해주고 싶은 미미한 충동이 내게 잠시 호가하는 것을 느꼈다. 그 예언이라는 것은 이것이다. 너는 앞으로 어떤 남자에게 또 그 다음 사람에게 즉 장래 만나는 남자로부터 각각 최소 두 번 이상 이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넌 너 밖에 몰라! 그렇지만 나는 그녀에게 늬가 뭔데 그런 말도 안되는 예언을 하냐면서 면박을 당하거나 빈센트와 피에르와 시드니로 알고 있던 청년들에게 험한 꼴 당할 게 두려워 차마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나는 이런 못쓸 못된 헛생각은 대수롭지 않게 지워버리고 다시 도시로 갈까 정처없이 여행을 갈까 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저분들과 나는 남남인 것 같았다. 웃긴다! 아니, 웃기지도 않다.
나는 그냥 가까운 해변가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거나 일광욕을 하던가 한가한 낚시꾼을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가 작품 구상에 매달릴 생각이었다.
나는 푸른 해변에 도착했고, 우선 한 잔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작은 찻집에 들어갔다. 나는 창가에 앉아 카페라떼를 마시며 그동안 대체 내게 무슨 일이 발생했나를 곰곰히 돌이켜 회상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내가 기다리고 고대하고 궁금해 하던 세 남자 세 여자가 찻집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맞았다. 두 번째 봐도 맞았고, 세 번째 봐도 그들이 틀림없었다. 이건 망설이고 자시고 기다릴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까지나 고분고분하며 조용조용하게 넌지시 상대의 의중을 살피며 슬쩍 마음을 떠볼 수만은 없는 일이다. 나는 무슨 차를 마실까 메뉴를 고르는 그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나는 첫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얘네들도 세 남자 세 여자와 거의 흡사하긴 한데 훨씬 원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뭐야 이거, 얘네들은 미래에서 온 건가? 지금 장난해? 이런, 젠장! 그럼 이건 미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고 하면 안되겠군. 그럼 뭐라고 해야 하지? 미래에서 뭐 하러... 에잇 인사말도 헷갈렸다. 게다가 실제 그렇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진짜 미친놈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내 눈썰미가 변변치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면 내 인지 체계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나는 정상이었다. 모든 게 문제 없었다. 그런데 왜... 이게 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점점 헛것을 보는 낌새가 짙어져만 가는데 이거 정말 정신병원에 가봐야 한단 말인가. 정말 답답한 일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의 경험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진짜였다. 엄정한 실화였단 말이다. 절대 환시 현상도 아니었고, 우리 동네 이름처럼 환각도 시드니의 형이 사는 동네 이름처럼 환청도 내 고향의 이름처럼 환영도 환상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환상적인 체험의 말미에는 이렇게 열띤 환각만 일시적으로 또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었다. 하긴 그 때문에 감회가 새롭긴 했다. 그러나 나는 점점 내가 갔던 파티가 진짜였는지, 내가 만난 친구들, 빈센트와 피에르와 시드니와 또 엠마누엘과 소피와 미란다가 실재 존재했었던가를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혹시 이건 사실이 허구로 변질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치 호언장담하고 승률 100퍼센트를 점치던 내기에서 통쾌하게 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나는 현실을 기피하고 싶어졌다. 모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모두 실화였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답도 없었고, 특단의 대책도 세울 수 없었다. 그 어떤 조치도 무효했고,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혹시 내가 현실 감각을 너무 방임했던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말하면 쓰러질 껄요, 같은 그런 믿을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이 때문에 나는 누군가의 비위, 비위를 맞추고 싶은 이상한 욕구가 발생하는 것을 감지하게 됐다. 그렇다. 나는 발동이 걸렸다. 딱 걸렸다. OK! 아마 누군가는 독자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도 된다. 그럴 수 있다. 하면 된다. 그러고 싶어졌다. 이 무구하고도 심오한 환상적 경험을 꼭 글로 써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래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불후의 신비적 환상 문학상으로 탄생하기는 힘들지라도 어렵게 완성한 삼류 소설이 자애롭게 생활비라도 벌어들이기를 바랬다. 최근 경험은 실화였고, 때문에 소설은 실재인지 허구인지 분간하기 어렵게만 만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에는 TV에 투명 피부가 개발됐다는 소식을 넣으면 될 듯 했다. 이제야 뭔가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진 듯 했다. 곧장 나는 집으로 가서 미친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9
나는 어느 날 가방을 하나 샀다. 토성과 UFO 자수가 멋진 가방을. 나는 그 가방이 딱히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