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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7. 5. 31. 23:52

   1

   제임스는 어느 날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처음에 그에 대한 정확한 욕구는 없었다. 뭔가 색다른 기분이 절실했을 뿐. TV를 바꾸기도 그렇고, 빅3법칙 같은 인문교양서를 쓸 수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애첩을 늘리겠나 클럽에 출근하겠나. 그럴 일은 만무하다. 이름을 바꿔서 운명이 바꼈다더라 팔자를 고쳤다더라, 그런 어설픈 효력은 관심조차 없었다. 농담이나 운수 보기는 좋아했을지언정. 다만 그는 찬바람에 대한 연민과 봄날에 크리스마스 이브를 걱정하는 듯한 동정심 때문에 문득 별 이유없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가 바꾼 이름은 준이었다. 6월과 7월과 주노, 제우스, 야누스등 후보군에서 그냥 부르기 편하게 준으로 정했다.
   그는 이름을 바꾸고 나니 새로운 사람으로 환생한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는 준이라는 이름으로 블로그를 하나 만들었다. 어떤 새로운 정체성의 가상 인물을 만들어서 원래의 자신이 그를 막 휘어잡고, 좌지우지하고, 조종하는 놀이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달리 보면 인형놀이.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하긴 그는 일 때문에 예전에 채팅 사이트에 여자 계정을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와~ 그때도 정말 신선한 경험을 했었다. 딱 여자 계정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하니까 막 남자들이 와우! 그건 정말 양 1마리에게 100마리의 늑대가 달려드는 모습과 똑같았다. 100마리가 뭐야 숫자는 의미 없었다. 아마도 꽃을 제일 많이 들고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현실과 이상, 실재와 이론은 괴리와 모순이 끼어들 틈이 없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실상은 수백 마리의 양떼에게 소수의 늑대가 접근했던 것 같긴 하다만.
   어쨌든 준은 이름을 바꿨고, 그 이름의 블로그를 만들었으며, 앞으로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면 그는 친구에게 준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렇다고 막 가짜 증명서를 만들고 정말로 진짜 이름을 숨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는 일종의 실험을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별 기대는 없었다. 추론에 따른 예상 결과도 없었고, 목표도 방법도 없었다. 그냥 즉흥적인 일이었을 뿐이다. 너무 무모했다. 그러나 이미 저질렀다. 가짜 이름 하나 만드는 게 무슨 큰일이겠냐마는.
   그리고 그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특정 사이트로 만들어진 블로그에서 괜찮은 블로그들을 찾고 구경하기.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우연히 구경하다가 그는 여러가지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재밌다. 새롭다. 낯설다. 흥미로운 블로그를 물색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처음에는 허밍이 절로 나왔다. 뛰어난 블로그들이 즐비했다. 마침내 준은 미지의 낭만에 허덕이고 있었다. 기지의 신선함은 이미 사로잡은 듯 했다. 마치 그는 바람난 고양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일단 초반에는 눈이 똥그래졌다. 이건 흡사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친한 친구와 대화하는 듯 했다. 다른 조류가 아닌 드디여 펠리컨과 갈매기들을 보는 것만 같았다. 구경만 해도 좋았다. 바라는 건 그게 다였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소설가라고 당당히 어딘가에 자신의 업을 공개한다는 데 무척 신중해야 한다고 직감했다. 지금부터는. 전에도 그러기는 했지만 괜찮은 블로그들을 보니까 왜 자신이 삼류 소설가인지 알 것 같았다. 보석상자 같은 매우 개인적인 블로그는 웬만한 소설 저리 가라-였다. 완전 재밌었다. 사적인 글이란 게 그렇다. 친해지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다정한 고백과 내밀한 독백 같다고나 할까. 실은 별거 아니지만 수필 같은 출판물이나 칼럼에서 느껴지는 나는 일이다─이 글은 일이다─전 일이에요 라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그게 좋았다. 꼭 비유가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굳이 갖다 붙이자면 채식 10년 하다가 다시 육식으로 방금 돌아와서 막 어? 막 어? 약간 그런 기분도 느껴졌다. 직접 겪어봤거나 경험담을 들어보셨으면 잘 아실 것이다. 그러나 채식주의는 존중받아야 하고, 존경해야 한다. 그럽시다. 어쩜 준이 외로웠기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고독과 목마른 사랑에 대한 애상, 특히 틀에 박힌 사고 틀에 박힌 생활에 대한 염증, 사는 낙이 변변치 못한 권태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가 있었다. 그 뭔가가. 그래서 그는 이름을 바꾸고, 또 새롭게 블로그 세계를 떠돌다 보니 거짓말 조금 보태면 환상을 닮은 무언가가 그를 기다리며 한 명은 짝사랑에 한 명은 상사병에 괴로워하는 것만 같았다. 그 향기로운 분위기, 그 입소문을 저절로 부르는 순애보가 언제까지 갈런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기쁨도 찾고, 꿈과 동경심도 만났으며, 내일 소풍 가는 어린이처럼 준은 즐거워했다. 뭐 그 정도까지는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는 적어도 사는 게 재미없다고 막 짜증을 내지는 않았던 것이다.


   2

   타인의 블로그를 보는 것은 흡사 TV를 보는 기분이다. 그렇지만 약간 다르다. 타인의 블로그를 보는 것은 잡지를 읽는 것과도 비슷한데 것도 약간 다르다. 준은 카페에서 글을 쓰는 대신 남이 쓴 글을 주로 읽었다. 여행을 가지 않아도 여행 다녀온 기록을 잘 간추려서 읽으면 그만이었다. 그분들과 친해지고 밖에서 만난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 만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고로, 그러니 그냥 재밌게 타인의 블로그를 구경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 역시 금새 재미없어졌다는 것이다. 무슨 싫증이 그리도 빨리 찾아오나. 마음이 꼭 손바닥 뒤집는 듯 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진솔한 내면이 보이고 그럭저럭 신선했는데 점차 시간이 지나니까 그 글들을 쓴 사람의 나이와 성별과 직업과 기호와 그를 둘러싼 환경과 선호하는 구미 같은 그런 선입견들이 나중 선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형식은 글이지만 대체로 그건 거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대부분 사연이나 사건보다는 상황이나 사진과 일상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뭘 하고 싶다, 무엇을 좋아한다, 머머했다, 뭐는 좋고 뭐는 싫다, 머머하면 좋겠다, 기분이 어쩐다, 뭐라고 생각한다, 뭐는 사랑스럽다, 왜 나는 뭐뭐할까 등등. 정작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준은 생각했다. 빙글빙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는. 준은 왜 사람들이 서점에서 읽을 만한 책을 면밀히 고르는지 (다시)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또 자주 읽는다면... 그만 그만. 그중에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무궁무진한 유형도 꽤 될 듯해 보였다. 그 글과 말을 다 수용해야 한다면, 만일 그게 사랑이라면!
   준은 그래서 소셜 네트워크에서 <낮에는 조마조마 밤에는 불안불안>이라는 소개 글을 보고 힌트를 얻어 축구 경기를 보러 갔다. 아, 조마조마와 불안불안 자리에는 실재 스포츠팀을 넣으면 된다. 준은 그곳으로 갔다. 축구장.
   준은 축구장에 도착했다. 그는 축구장에서 한적한 자리에 앉았다. 조용히 있고 싶었으니까. 인적 없는 외진 곳에서. 그렇게 그는 가장 한적한 경기장 구석에서 가장 소란한 서포터즈의 응원을 볼 계획이었다. 사실 준은 축구 경기가 아닌 서포터즈의 응원을 보러 그곳에 갔을 것이다. 그는 서포터즈를 보고 있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막 젊어지는 것 같고, 설렘은 기본이고, 축구 경기 다음에 뭔가 본격적인 모험의 서막이 열릴 것만 같은 흥분감에 도취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노트북도 가져갔고, 공책과 볼펜도 준비해뒀다. 글이 써질런지 불확실하긴 했지만 말이다.
   경기는 시작했고 준은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직 경기 초반이라 응원은 조금 심심했다. 그는 자기도 저 서포터즈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모임에 들고, 인사하고, 적당히 웃고 떠들고 대화하고, 그 모든 과정이 견딜 수 없도록 식상해서 막 괜히 난데없이 양철북에 나오는 난쟁이 꼬마 소년 마냥 소리를 지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멀리서 거리를 두고 구경하는 게 좋았다. 언제 어울리고 어떻게 쫓아다니고 생각만 해도 복잡했다. 게다가 준이 가담함으로써 서포터즈의 평균 연령이 부쩍 높아지면, 훌쩍 급상승하게 되면 그 침울한 기세는 어떻게 회복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그냥 이렇게 고독감을 즐기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준의 쓸쓸함을 방해하고 그의 예술적 착상에 훼방을 놓는 존재가 등장하고야 마는데...!


   3

   준의 옆에 새롭게 나타난 인물은 다름 아닌 장미와 별이었다. 준과 장미의 눈빛이 마주친 그 순간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하다거나 아찔하며 쓰러질 듯 휘청하거나 누구 하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런 건 주부들도 즐겨 보지 않는 일일 드라마고 이건 현실이니까. 대신 '아 누구였드라'에서 '오오 누구구나'로 슬며시 넘어가는 분위기가 무척이나 절묘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것은 보일 듯 말 듯 옅디옅은 미소뿐이 없었다. 그러나 준과 로즈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채워질 수 없는 선망은 소망과 대망 사이 어디 쯤에 숨어있는 것일까? 뭐와 뭐 사이? 그런 꿈 같은 시상을 떠올릴 리는 없고, 그들이 느낀 감정은 단지 호기심과 호감과 약간의 반가움, 뜻밖의 기대와 이채로운 관심이 아마 전부였을 것이다.
   「오빠. 왜 연락 안 했어요? 기다렸는데!」
   「아. 미안. 연락...하고 싶었어. 연락...할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일이 생긴 거야. 잡지사에 사랑에 관한 단상, 그 주제로 보내야 할 글이 있었거든. 그건 사실인데 음, 오빠 전공은 실은 변명이야. 오빠는 바람둥이가 아니니까.」 핑계를 대는 데 익숙하면 바람둥이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린다.
   「오빠! 숙녀를 기다리게 하면 되요 안되요? 네?」
   그들의 만남은 역시나 나이트클럽이었다. 일전에 준은 어디까지나 기분 전환 삼아 멀더와 함께 NC 사장 고든을 만나러 그곳에 갔었다. 그런데 손님이 없어서 잠시 앉아 있다 사장실로 간다는 게 그만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로즈는 준에게, 별은 멀더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그래서 나중에 멀더는 별에게 연락했고, 준은 로즈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준이 별을 마음에 들어했다거나 로즈가 뭘로 보나 뭐 하나 빠져서가 아니었다. 그는 로즈를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혹시 피앙세가 보낸 스파이가 아닐까 라고.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했던 것이다. 그게 뭔 심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최소한 사랑과 관계된 트로이 목마라는 예측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준이 멀더의 여자친구에게 지금 멀더가 딴 여자를 만난다고 밀고하지는 않았다. 그는 입이 무거운 남자니까. 어찌됐든 멀더의 최근 고민은 무슨 재미로 사나-였고, 준의 최근 표어는 이랬다. 사랑에게 순정을 바치다!
   아마도 멀더는 본처에게 끌려갔을 것이다. 어쩜 혼쭐이 났겠지. 그러나 멀더를 제외한 한 남자와 두 여자의 관계가 그렇게 발전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장래의 그 어떤 관계는, 풀벌레 소리를 제외한 고요함과 모래사장의 파도소리가 만드는 적막감에 함께 빠져드는 관계.
   「선생. 사랑을 아시오?」 
   「선생? 오빠 보고 웬 선생? 너 무슨 드라마 찍니?」 
   「사랑? 그게 뭔데. 그게 뭐냐구요! 오빠! 사랑이 음악처럼 들리나요, 오빠 사랑이 구름처럼 눈에 보이나요 아니면 오빠, 사랑이 푸아그라보다 맛있어요? 것도 아니면 그게 뭐 예측 불가능한 고급스런 농담인가요? 사랑은 적어도 잠자는 동기에 생동감을 부여해 주는 것과 같은 동기 부여, 그런 건 아니지 않나요? 네, 오빠. 아니지요 아니지요.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어요. 오빠. 그것은 어쩌면 생동감과 활기와 파릇파릇함과 순수한 열망 같은 감정일 테니까요. 사랑은 언제라도 그대 곁에 머물러주는 것이다, 사랑은 내게 남은 모든 사랑을 다 드리는 것이다, 라고 어떻게... 어떻게 드라마도 아니고 실생활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뭐 눈 딱 감고 하면 하겠지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지만 사랑은 어떻게 보면 그런 것 같아요. 앞서 나왔듯이 의미 부여하고 명분을 살리며 주문을 외워서 시키는 대로 하게 만들기? 그럴지도. 오빠. 살면서 괜히 잠시 생겼다가 막상 해 보니 포기하게 되는 그런 것들. 꿈틀대는 꿈으로 시작해서 그 꿈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방황하다가 어느새 세월이 흘러 어린이가 어른으로, 동심이 꿈으로, 다시 꿈은 사랑으로, 사랑은 재차 헛된 꿈으로 바뀌는 것 아닐까요? 오빠. 그렇다고 사랑을 너무 거룩하다거나 장엄함과 거창함 같은 느낌으로 대하지는 마세요. 왜냐하면 그건 그냥 친구 같은 개념이거든요. 오빠 어때요, 뭔 얘기인 줄 잘 모르겠죠? 그러나 그것도 다 필요한 때가 있어요. 꼭 그게 언제라곤 말하지 않겠어요. 사랑도 일이다, 사랑은 돈이다, 사랑은 뭐다, 사랑은 있다 없다 라는 말을 들으면 뭐랄까 얼핏 아주 미세하게 눈빛이 핑~ 하며 살짝 흔들리는 분들이 있긴 있으니까요, 오빠.」
   「얘가 처음 볼 땐 괜찮았는데, 이제 보니 상태가... 영 의심스러운데. 허영심과 변덕이야 적당하다면 숙녀의 자질일 테지만 의뭉스러움은 아아 그건 정말 곤란한데. 왜일까? 조명 때문인가?」
   「바람이 불고 노을이 진다. 손을 잡았으면 연애를 해야 한다. 면사포를 벗겨 본 사람 가운데 일부는 또 다시 면사포를 벗긴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오빠 그게 뭔 줄 아세요?」
   「오, 점점. 뭔데? 일단 들어나 보자.」  준은 예가 혹시 실연당했나 라고 생각했다. 아주 살짝 얘가 혹시 자기를 좋아하는 건가 라는 의혹도 있긴 있었다.
   「그건요 순차성이에요. 오빠, 순차성이라고!」
   「뭐? 뭔차성?」
   「응. 순차성. 오빠.」
   「그게 뭐야?」
   「뭐긴 뭐야 인공지능이지 오빠. 또는 친화력이라고나 할까? 응 오빠.」 
   「사랑의 서약 결혼의 맹세 그런 얘기할려는 거니? 아무래도 너네들이 멀더한테 뭔가 감쪽같은 최면 학습에 관한 맹훈련을 받은 것 같은데, 그거 다 허세야 허세. 멀더, 욕심내지 마세요. 여자친구 있으니까요.」
   그들은 들뜬 분위기에서 찬연한 조명 아래 만난 첫 만남만 그럴 듯 했다. 그러나 우연히 마주친 두 번째 만남으로 즉시 어색해진 관계로 굳어진 것이다.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건진 몰라도. 여자들은 어쩌다 자신의 지성을 남자에게 피력하고 싶은 순간이 있는 법이다. 정확히 언제 그런가는 넘어가고. 그들은 얼렁뚱땅 인사 없이 축구장에서 헤어졌다. 잘 가라는 인사말도 없이.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쉬쉬하며 알게 된 사이였으니 첫 만남이 산뜻했던 사람들처럼 지내지는 말자 같은 모종의 공모였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왕이면 밝은 곳에서 처음 만났다면 어땠을지 조금 궁금해지는 건 사실이다. 어쨌든 그들은 그날 아무 일 없이 헤어졌다. 더구나 작별 인사도 없이. 마치 한때 친했던 친구를 거리에서 우연히 10년만에 만났는데 스치듯 마주치자마자 웃으며 아는 체만 하고 헤어진 일과도 비슷했다.


   4

   준은 별다른 약속이 없었다. 그는 다시 축구장을 찾았다. 하긴 그가 질투심에 사로잡힐 리도 없고, 정복의 대상을 새롭게 발견했을 리도 없다. 준은 다시 축구 구단 서포터즈의 응원을 구경하기 위해 그곳에 갔던 것이다.
   그는 축구장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멀찍이 떨어져서 보지 않고, 근처 약 30미터쯤에 자리를 잡았다. 경기가 시작됐다. 그날도 그는 우유를 사 갔다. 새하얀 우유를. 경기가 시작됐다. 응원도 시작됐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 경기도 응원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로즈와 별이 자꾸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옆에서 나눴던 대화도 떠올랐다. 둘 중 하나의 말버릇은 이랬다. 머머하네, 머머하는구나, 머머하더라, 머머는 왜 그럴까, 머머해야지, 머머할까 우리. 또 둘 중 하나는 이런 얘기를 했다. 자기가 아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는 이름이 '기쁜'이란다. 환희나 희사나 복희 같은 명사형이 아니라 형용사라고? 이름이? 당시 들었던 그런 얘기들이 나중 언젠가 다시 기억날 것이라고 준은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들은 아직도 관형사와 부사, 불규칙 형용사와 관사를 (아주 약간) 알맞게 사용하지 못하는 데 비해 말수는 터무니없이 많았다. 야외라서 유독 기분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준은 그녀들이 필시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했을 듯 하다고 추정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혼자 웃고 싶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서 그분들이 나타났다.
   「어, 오빠. 또 뵙네요? 어떻게 이런 일이!」
   「어? 언니들 여기 웬일이니?」
   「웬일은요? 축구장에 축구 보러 왔지 설마 오빠를 만나기 위해 왔겠어요? 우리가 딱히 뭐 애태우는 사이도 아니고, 오다가다 스치듯 알게 된 그냥 아는 사이라고 규정지으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그런 거리가 있긴 하지만, 뭐 그런 해묵은 얘기는 하지 말죠. 그럽시다. 축구나 보자구요.」
   「그게 뭔 얘기지? 아~ 너네들은 그렇다는 것이로구나. 외롭다고. 남자친구가 없다고. 장미랑 별! 너네들 친구 없지? 그치?」
   「네? 우리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요. 정말 막 피해다녀요. 네? 남자들이 집 앞에, 학교 앞에, 아르바이트 하는 가게에 막 시도 때도 없이 따라다니니까요. 그러는 오빠는요? 오빠야말로 진짜 친구 없네. 오 진짜네 진짜. 이거 완전 동네 아저씨구먼~! 어허, 이거 뭐, 손에 술병만 들면 딱인데! 아 그려진다 모습이.」
   「뭐? 뭐라고? 뭐가 어쩌고 어째? 얘들이 이거 이거... 참한 처녀가 뭔 말발이 그렇게 좋아? 나 원 참!」
   「아이참. 그러지 말자구요.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다 부질없는 짓이라구요. 그만들 합시다. 그렇다고 오빠가 웃으며 태어났다는 예언가 짜라투스트라도 아니잖아요? 네?」
   「누구? 그런데 지금 얘기하던 중 짜라투스트라가 왜 나오는 거지? 그게 뭔 상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 그런데. 짜라투스트라가 내 애제자였다는 걸 넌 어떻게 알았느냐? 대답하거라. 아이 증말 재미 하나도 없네. 그만 하자.」
   「그 말은 우리가 할 말이네요.」
   「내 그 말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멀더는 뭐한데니?」
   「멀더 아저씨요? 전화하니까 여자가 받던데요. 그래서 바로 끊었죠. 한번씩 이상한 여자들이 있거든요. 어쩌다 잘못 걸리면 그냥, 아휴 탄식만이 남을 뿐이죠 오빠. 아 오빠! 그런데 왜 오빠는 축구장에 와서 축구는 안 보고 왜 서포터즈만 보고 있어요? 저기 누구 마음에 드는 여자 있어요? 가만 보니...... 없는데. 다 별론데. 나 보다 더 예쁜 애는 하나도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왜 그런 거에요 오빠?」
   「아, 그건, 그건 말이야. 나는 쟤네들을 보러 여기에 왔으니까. 축구는 집에서 TV로 보는 게 편하고 그게 더 좋아. 나는 저 젊음과 열기와 전율감, 간 떨리게 만드는 힘과 열정, 그 몰입감을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좋거든.」
   「오, 그래요? 오빠 그런 거 좋아하는구나. 그럼 내가 저기 서포터즈 주장도 알고 단장도 알고 감독까지 모두 아니까 지금 즉시 소개시켜줄께요. 이왕 구경할 꺼면 멀리서 짝사랑하는 소녀 마냥 훔쳐볼 게 아니라 아예 한복판에서 응원을 즐기는 게 낫지 않겠어요?」
   준은 한치의 빈틈도 없이 걸려들고 말았다. 혹시 장미와 별양은 이런 식으로 축구 구단 서포터즈의 회원 수를 늘려온 것은 아닐까? 아마 아니겠지만 한두 번 해 본 솜씨라고 보기에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건 꼭 정해진 각본대로 진행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장미와 별이 저 친구들과 상당히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라고 준은 생각했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중간했으나 지금은 그래도 전자에 가까웠고 잠시 후에는 완벽하게 후자로 기울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쪽 서포터즈와 저쪽 서포터즈 간 응원전이 몸싸움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말로만 그랬다.
   「야 와 봐.」
   「왜 우리가 가냐. 늬네가 와라.」
   「뭐? 말 다 했냐?」
   「아니 아직 남았다. 앗. 그런데 잊어먹었다.」
   「오라면 우리가 못갈 줄 아냐?」
   「꼭 뭘 하지도 못할 꺼면서 입만 살아서 큰소리치는 녀석들이 있다. 그게 너네야. 알겠냐? 어?」
   「늬들이라고 뭐 다르냐? 어? 잔말 말고, 너네가 와라. 우리가 줄 것이 있다. 이러다 정 들겠다.」
   「우리도 솔직히 가고 싶다. 그러나 가고 싶지만 너네들 바지에 오줌 쌀까 봐 못가겄다. 알았냐? 뭐야 벌써 지렸냐? 저런 저런. 야 야 우리집 강아지도 오줌은 잘 가린다. 알았냐?」
   「뭐라고? 기저귀는 늬들이 차고 있으면서 뭔 헛소리를 그렇게 하고 있냐? 그러니까 늬들이 공부를 못하는 거야? 어? 알어? 늬네가 축구를 아냐고.」
   그처럼 목소리 제일 큰 에이스끼리 티격태격하다가 진짜로 상대팀 서포터즈가 이쪽으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준은 잘못 걸린 것이다. 완전 잘못 걸렸다. 응원의 정열은 커녕 그는 도망갈 수도, 그렇다고 전면에 나설 수도 없었다. 인생은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 드라마일까? 결과를 간출이자면 그는 상대팀 서포터즈의 선봉에게 시원스레 한 방 얻어맞았고, 사태는 스스로 또 쉽게 진정되었으며, 그 장면은 여지없이 신문기자들에게 포착되었다. 아무려면 어떠냐! 재산의 축척과 탕진을 반복하며 피곤하게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느니 이렇게 무대에서 삶의 치열함을 맛보며 꿋꿋하게 버티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행복한 미래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을 잃지만 않는다면! 다만 얻어맞은 그의 모습이 사진기에 찍히긴 찍혔는데 그건 지역 신문에만 나왔다. 조그만하게. 대문짝만한 명사진이 인터넷과 TV와 신문등 각종 대중 매체를 도배할 뻔 했는데 손톱 만한 뭔가가 부족했던 것이다. 정말 단번에 인기를 한번 실감할 뻔 했는데 정말 그럴 뻔만 하다 말았다. 못내 아쉬웠다. 그렇지만 좀 더 솔직한 그의 속마음은 이랬다. 그는 시원스레 얻어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은 기분이 좋았다. 그는 자신이 혹 변태가 아닌가 그런 의구심에 살짝 괴로워하기도 했고, 때문에 그는 예전 어느 권투선수의 말이 기억났다. 세계 챔피언은 아니고 지역 챔피언의. 지금은 인기가 좀 식었지만 전성기 때 권투의 인기는 괜찮았다. WBA, WBC, IBF등. 그분이 그랬다. 다른 데는 맞으면 아프다고. 내색은 하지 않지만 다른 데는 맞으면 고통스럽다고. 그러나 광대뼈를 맞으면 시원하다고. 기분 좋다고. 상쾌하다고. 그도 그랬다. 준이 비록 광대는 아니겠지만. 그가 챔피언은 아니지만 말이다. 실제 준의 기분이 그랬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는 의무방어전에 대한 어떤 절실한 애절함이 가득했다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인생의 도전자임에 불구하고 세상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멀리 원정 경기를 가서 어설프게 마이크 타이슨 흉내나 내는 돈키호테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키호테가 다 뭔가, 그의 당나귀 로시난테라면 그나마 감지덕지일 테지. 즉 열만 좋은 거다. 전설적인 록 그룹 퀸은 노래했다. 우리는 모두 챔피언이라고. 그런데 정말로 우리는 모두 챔피언일까? 과연 그럴까? 아니다. 아닌 것 같다. 틈만 나면 깐족깐족 쓱 고개를 드밀려는 권태를 걱정하는 대략 중년이 챔피언이지 누구나랄지, 멋모르는 젊음이랄지, 전진하고 행진하고 한껏 부추겼다 지만 쏙 빠지는 낙천주의는 실은 챔피언이 아니라 도전자는 커녕 순위권에도 들기 어려운 것 같다. 하기는 울화통이 터진다 그건 아니다 안되겠네 외칩시다 따지자 가자 엎자, 라고 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안면 바꾸고 더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정상이다. 그처럼 일상에 복귀하지 않고 바보처럼 나서는, 어쩌다 나서는지도 모르게 얼렁뚱땅 나서게 된 준 같은 인간이 문제아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는 아마도 가까운 장래에 약간의 아쉬움이 그지없이 그리워질 것이다.  


   5

   미술관 핑크. 관람객은 전무했고, 평범한 미술관이었다. 이따금 제품 문의 전화나 전시 일정을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관장실은 매우 조용했다. 한 남자와 두 여자는 그곳에 있었다. 바로 로즈가 그곳의 관장이었다.
   「뭐 할 말 없니?」
   「어디 봐 봐요. 와, 괜찮은데요. 멀쩡해요. 그 정도야 뭐, 애들 장난이죠. 오빠, 이게 듣고 싶은 말 맞죠? 응, 오빠.」
   「말 말자. 휴~. 너네들을 어떤 상남자가 데려갈런지는 몰라도 아 답답허다.」
   그때 그 일로 그들은 친구가 됐다. 울고불고 유난 떨 일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메이저쪽에 실리지 않아서 조금 섭섭하긴 섭섭했다. 그러나 그 작은 간극은 서포터즈 내부의 인기로 매꾸어졌다. 클럽 서포터즈에서 준의 입지는 가입하자마자 급상승했던 것이다. 스스로 가입 의사를 소상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는 이미 서포터즈 내에서 어느새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차기 회장 물망에 오르네 마네 말들이 많았다.
   「어떻게 우리가 멋진 여자친구라도 소개시켜 드릴까요? 네, 아저씨?」
   「뭐시여? 아저씨? 하나만 하지 않으렴? 오빠든 아저씨든. 헷갈리잖아. 아, 여자친구? 나 실은 동성애자야.」
   「와, 정말이에요? 우리 둘이 내기했는데. 하하하. 내가 이겼다. 아이 좋아라. 와 정말 기분 좋은데. 신나고 기쁘고 즐겁고 어쩜 막 떨리는 것 같단 말이야. 얘 보이니? 내 뽀얀 볼의 홍조 말이야.」
   「홍조? 글쎄 얼굴이 너무 하얀 게 너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닐까? 이건 뭔가...」
   「홍조는 모르겠고, 아 오빠가 별이 말을 가로채서 미안한데 어쩔 수 없어서 말이야. 그거 있잖아. 오빠가 동성애자라는 말. 그거 뻥이야. 푸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오빠는 말이야, 여자를 좋아한단다. 크크큭. 아직 오빠가 너네들이 추구하는 성향과 반듯한 기호, 다채로운 욕망과 숨겨둔 취향에다 선호하는 스타일을 아직 미처 파악하지 못했네. 차차 나아지겠지. 아 있잖아. 오빠 여자친구 있어. 우린 약혼했어.」
   「오, 정말이에요? 와, 멋지다.」
   「멋지다고? 약혼한 게 멋진 건가 아니면 나 같은 동네 아저씨가 약혼했다고 하니 뭔가 행복의 가능성과 낭만적인 허영심 같은 게 엿보여서 멋지다고 생각하는 거니? 왜, 나는 약혼 같은 거 하면 안되니?」
   「아 오빠 왜 그래? 상대팀 서포터즈 단장한테 쥐어박힌 게 아직도 억울한 거야? 그런 거야 오빠?」
   「아니, 그게 아니라. 오빠가 딱 맞는 장면이 절묘하게 카메라에 잡히긴 했는데 요즘 정국도 시끄럽고 일들이 많잖냐. 그래서 뭐 잘됐다, 그거지. 그게 다야. 정말이야.」
   「그런데 그 숙녀분은 뭐하시는 분이세요?」
   「내 피앙세? 어 음... 소설가야. 유명하지는 않지만 중편 소설 몇 편 발표했고, 음반도 하나 냈어. 인기는 요원하지만. 인기는 무슨 돈만 잘 벌면 된 거지. 아 농담이야. 혹시나 진담으로 듣지 말라구. 간혹 보면 내 고급스런 농담을 잘 못알아먹는 친구들이 있어서 말야. 원래 그건 한 박자나 일주일 후에 터지는 거거든. 아, 피앙세는 게다가 엑스트라로써 영화와 뮤직비디오에도 간혹 나와. 다소곳이 신부수업 받으며 정숙하게 지내라고 해도 우리 애기가 말을 안듣네 그래. 그래서 단편 영화제에도 꼬박꼬박 출품하고 그런다니까.」
   「와! 멋지다. 언니 한번 불러봐요. 아, 우리가 언니일까? 뭐 어쨌든. 오빠 약혼녀 보고 싶다.」
   준은 거짓말 할 생각이 원래 없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어쩌다가 꼭 진짜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지 말고 우리 별이네 농장에나 가 보자구나. 오빠 여자친구 바뻐. 또 멀리 살아. 실은 당분간 떨어져 있기로 했어. 왜냐면 우린 너무 사랑하니까.」
   그들은 장미 소유의 핑크 미술관에서 나와 도시 근교에 위치한 별의 농장으로 향했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곳에 도착했다.
   「뭐야? 여긴 대 저택이잖아? 농장이라며?」
   「별이네 별채 옆에 농장 하나 있어 오빠. 아, 여기 안에 동물원도 있는데 지금 보러 갈까? 별아 지금 동물 친구들 누구누구 있니? 응?」
   「음 지금... 코뿔소랑 얼룩말이랑 앵무새랑 기린이랑 사슴, 양, 수많은 조류, 퓨마. 아 개는 종류가 엄청 많아. 얼마 안 돼.」
   잠시 후 준은 입이 떡 벌어졌다. 그건 얼마 안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옛날에 농담으로 대문에서 현관까지 얼마가 걸리네 어저네 하며 값싼 농담을 즐기곤 했지만 이런 데를 진짜 와 보기는 생애 처음이었다. 준은 목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습관은 아니지만 어떡하다 그는 최근 침을 꼴깍 삼키는 일이 꽤 잦았다. 그런데 그는 뭔가 느낌이 세했다. 혹시 자기를 때렸던 상대팀 서포터즈의 그 친구가 별이나 장미의 친오빠일까? 아니면 전-남자친구? 얘네들이 대체 뭐가 아쉽다고 자기 같은 가난뱅이 예술가를 만나는지 그게 정말 궁금했다. 심지어 싸구려 나이트클럽에는 뭔 일로? 이건 뭐 완전 미스테리가 계속 이어졌다.
   놀라움은 멈추지 않았다. 접견실에서 차를 마신 후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이스크림 찻집이 따로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TV를 봤다. 그런데 나오는 프로그램은 별양의 일상을 안내하는 다큐멘터리였다. 뭐야, 방송국도 있다는 말이야? 아마도 외주 제작이겠지만 이건 규모가 예상을 뛰어넘었다. 심지어 신기함은 준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별양의 큰 언니와 큰 오빠쯤 되는 사람에게 준을 소개하면서 별은 그랬다.
   「이쪽은 내 남자친구, 이쪽은 우리 엄마 아빠!」
   뭐라고? 준은 어떻게 가까스로 별의 부모님과 대화의 시간을 간신히 버텼다. 그리고 별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 말 없이 도망쳤다.
   이때부터 추격전은 시작됐다. 준의 볼보 웨건을 뒤쫓는 별의 페라리와 장미의 포르쉐. 준은 왠지 모르겠으나 울상이었고, 별과 장미는 마치 사랑의 작전을 흥미진진하게 펼치는 듯 했다. 준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던데, 설마 별양이 자기를 점찍은 걸까? 남자친구로? 준은 전례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한시 바삐 오해를 풀고 각자 입장 정리를 해야 했으나, 별과 장미의 신비한 아름다움과 지고의 지성 그리고 그녀들의 심미안과 우아미는 물론 꿈에 그리던 신비주의와 나무랄 데 없는 환상의 현현이 호사가 아닌 청렴함에 가까운 그 어떤 차이를 생각하면 그는 당분간 걔네들과 만나면 안될 것만 같았다. 일신상 그게 좋을 듯 했다. 뚝심은 소심함으로, 패기는 패배주의로, 정다운 친교는 가택감금으로 바뀌고야 말았다. 그럴 것이다. 마침 뒤따라오던 천마 페가수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그는 맘 편히 자신의 심심한 창작 생활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약 2주일이 흘렀다.


   6

   준은 다시 축구장을 찾았다. 역시나 서포터즈를 보러. 갈 곳이라고는 거기 밖에 없나? 꼭 그건 아닌데 소설로 옮겨지는 실화에서 그는 실재 실시간으로 그랬다. 아마도 거기 밖에 갈 덴 없었나 보다. 그러나 이제는 서포터즈의 재롱을 즐겁게 관람하는 구경꾼이 아닌 당당한 서포터즈의 일원이었다. 역할은 비상 대기. 아마도 특수한 상황에 대비해서 내내 쉬고 있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로 보였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맞는 거도 맞아 본 놈이 뭐 어쩐다더라, 그런 논리일까? 논리는 무슨! 그건 공갈도 허풍도 뭣도 아니다. 그러나 아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일찌감치 조마조마 서포터스의 든든한 보디가드로 자리잡은 듯 했으니까. 그에 대한 대우가 괜찮은 것도 같고 아니 분명 예사롭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그건 뭔가 기묘하기도 하고, 느낌이 몹시 이상했다.
   「형.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어요?」
   「아니. 기다리긴 누굴 기다리니.」
   그러면서 준은 자꾸 여기저기 쳐다보면서 장미와 별을 닮은 사람이라도 있는지 알아보는 듯 했다. 그런데 그는 그날 따라 왠지 기분이 이상해서 한쪽으로 보는 망원경, 즉 단안경을 그곳에 가지고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챙겨왔다. 그는 그걸 꺼냈다. 그리고 곧바로 경기장 귀빈석을 둘러봤다. 망원경으로.
   아니나 다를까!
   아무래도 고위 관계자로 보이는 듯한 사람들 옆에 장미와 별이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뭐야 저거? 쟤네들 혹시 구단 관계자? 아니면 구단주? 이런 젠장!
   그는 엄한 추론은 치워버리고 경기에 집중할려고 했다. 그러나 어쩐지 뭐랄까 속 보이는 몽상에 빠졌다고나 할까, 머지 않아 멋진 컨버터블을 장미와 함께 타고 하루는 해변 드라이브를, 하루는 별과 같이 동물원에 갈까 미술관에서 쉴까를 고민하는 상상의 나래를 그려봤다. 준의 사랑론이 다 무색하게도 말이다. 그러나 그런 엉뚱한 공상은 자기 탓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했다. 이건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쟤네들이 뭐가 아쉬워서? 그는 갈피를 못잡고 하던 공상을 계속했다. 그러다 염증을 느꼈고, 다시 뜬구름 잡는 공상에 사로잡혔다가 그런 자신이 얄미워서 환멸을 느꼈다. 왕년의 잘나가던 준이 아니니까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왕년의? 생각도 얽히고 자꾸 어딘가에서 피앙세가 자기를 막 훔쳐보는 것만 같아서 무척 찜찜했다.
   「형. 그런데 있잖아요. 형이 별 누나 남자친구에요?」
   「뭐, 뭐라고? 누가 그래? 얘 또 어디서 이, 이상한 얘기 들었네. 아니야. 아니라고. 내, 내가 왜 걔 남자친구여야 하는데? 그, 그냥 별이 귀엽고 착하니까 어? 어, 내가 잘 대해주는 것 뿐이야. 그, 그게 다야. 정말이야!」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지 형은 왜 그렇게 말을 길게 하고 막 말을 더듬어? 형 이상하네. 진짜 이상하네. 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형이 봐도 그렇지?」
   「그렇긴 뭐가 그래? 아니. 그건 그렇긴 한데, 아무튼 아니야. 다 아니야. 뭘 의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아니야. 가만 있어 봐. 넌 그런데 왜 그렇게 자꾸 아까부터 별 얘기만 하는 거니? 너 별이 좋아하니? 아~ 그렇구나!」
   준은 조마조마 서포터즈에서 입지가 애매해졌다. 그래서 경기가 끝난 후 뒷풀이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청춘의 열병이 시작된 것일까? 그건 두고 보면 알 것이고, 그는 우선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숨기는 뭣도 없었다. 의젓했다. 그러나 비밀이 없으니 왠지 지갑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러는지 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가 기다리는 예술적 착상을 덥썩 데려다주시는 그분이나 자기나 피차 쉬는 게 좋을 듯 했다. 그래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결심했다. 바람을 쐬고 오기로. 그렇게 그는 별양의 집까지 드라이브만 하고 오기로 정하고 집을 나섰다. 그 야심한 밤에 말이다.


   7

   준은 별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녀의 집 앞에는 아 글쎄 월트가 꽃을 들고서 아마도 별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생각했다. 서포터즈에서 말이 통하고 친하게 지내는 월트가 자기를 연적으로 보고 있구나 라고. 뭐만 했다 하면 그 옆에는 항상 그분이 있었다. 바로, 사랑! 못말리는 인생사다. 준은 잠자는 불독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발끝으로 걷듯이 뭐랄까 그 떫은 현장을 빠져나갈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인적이 없기 때문인지 녀석의 직감 때문인지 그는 월트의 레이더에 딱 걸려들고 말았다. 뒷덜미를 척 잡히며 '너 잘 걸렸다 이런 쥐삐── 같은 놈 같으니라고' 라는 장면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게끔.
   「어, 형. 여기 웬일이에요?」
   「그러는 넌 여기 웬일이니?」
   「아 저는 별 누나에게 뭐 좀 전해 줄 게 있어서요. 조마조마 서포터즈 후반기 일정표와 소풍 계획안을 전해드릴려구요.」
   「그걸 왜 늬가 전해줘? 이리 줘. 내가 전해 줄께!」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아주 잠깐 준을 흔들어놓았다. 하지만 준은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 월트가 준에게 제의를 했다. 여기서 별을 기다릴 게 아니라 우리 시내에 가서 아니, 서포터즈 사무실에 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해서 그들은 그 자리를 떴다.
   도착한 곳에는 월트의 친구 앨이 기다리고 있었다. 앨은 서포터즈 조마조마의 새로운 귀염둥이였다.
   「형. 짧게 요점만 말할께요. 별, 포기하세요.」
   「별을 포기하라고? 별이 무슨 휴양지의 별장이니? 별이 혹시 놀이공원 오즈의 마법사 후계자라도 되나? 아니면 별이 어쩌면 바스키아의 검은 피카소처럼 상품 가치가 높은 미의 여신이니? 너 못 봤지? 난 봤어. 별이 방에 걸려있는 드 쿠닝 그림. 그거 진짜더라. 걔네 부모님과도 인사 나눴다. 그분들은 날 마치 별의 친오빠처럼 대하시던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난 있잖아, 형은 다른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 끼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설사 내가 당사자일지라도 사랑은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네 친구. 어떤 노력과 진심과 시간으로서 하늘이 허락해주시는 사랑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네. 사람의 일이 사람의 일이긴 하지만 남자의 인생에서 사랑은 전부가 아닐 텐데 사랑에 너무 빠져든 게 아닌가, 스스로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눠볼 필요가 있어. 월트! 월트 이 친구야. 월트 늬가 왜 나 보고 별을 포기하라고 하는데? 월트가 뭐 제우스니? 그럼 뭐 에르메스야? 잠깐만 에르메스가 남자던가 여자던가 아무튼, 내가 딱 가면 벗고 난 나이키다 그러면 어떡할 테냐고. 늬가 뭐 아마존 사장이라도 되냐? 어? 왜, 대체 늬가 무슨 권리로 나보고 별을 포기하라 마라 명령하는데? 그거 명령이야 부탁이야 설득이야, 그걸 먼저 정하고 날 만났어야지 이 친구야. 아 나 이거 이거 얘네들 드라마를 봐도 어설픈 거 봤네. 뭐 봤니? 어? 뭐 봤어? 뭐 삼류 영화 봤구만. 아 나 웃겨서 증말! 내가 뭐 별의 인생을 쥐고 있기라도 한단 말이냐? 내가 어디 그런 악덕 뭘로 보여? 괜히 단어 사용에 신중해지는구먼 그래. 그리고 너도 너야. 그런 엄포를 할 꺼면 좀 떡대 좋거나 아니면 분위기가 있거나 뭐드라 그래 카리스마! 뭔가 하나 있어야지 아무 것도 없이 패기만 가지고서 이게 도대체 뭐니? 그리고 봐 봐. 앨 이 친구는 너무 사람이 착해 보여. 아마도 앨 자네는 앞으로 대성할 것이네. 제2의 짜라투스트라가 혹시 나타난다면 그가 내 애제자였다고 고백할 테니 내 말을 믿게나. 꼭! 명심하게. 자네는 대성할 것이라는 나의 예언을, 부디!
   사랑의 열정? 연정의 배짱? 멈출 수 없는 사랑? 정확히 뭐라고 생각하니, 너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그 의혹의 정체는? 무엇보다 월트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어? 지금처럼 형, 누구 포기하세요 라고 모기 목소리로 말하는 게 사랑이니? 과연 그럴까? UFC 헤비급 챔피언 같은 형의 친구도 나와 내 피앙세의 애정이 커가는지 미처 모를 때부터 마음을 키우면서 나중 그러더라. 그 이상은 없더라고. 자기 회사에 남직원이 하나 있는데,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아니까 그녀의 마음을 뭐라더라, 아무튼 녀석의 말은 딱 그 정도였어. 차라리 한 여자를 놓고 친구끼리 한때 연적이 되는 게 낫지, 이렇게 멋모르는 타인을 만나서, 아 우리가 조마조마에서 돈독한 사이이긴 하지만 말이네, 어떻게 응? 어떻게 하면 될 것 같다? 그건, 그건 하이틴 드라마야. 꽃 들고 쫓아다니는 사랑과 한 짝이라고. 형 친구는 흔한 경우처럼 등치만 그랬던 게 아니라 녀석은 진짜 인생이 그랬거든. 약력, 경험, 소속, 능력 모두. 약간 부족한 건 딱 하나 얼굴이었고. 뒤늦게 아무추어 2부 대회 무제한급에서 가볍게 우승하긴 했는데 1부는 출전 자격이 안됐다더군. 얘만 그런 게 아니야. 아는 동생 가운데 카레이서도 있었는데 완벽한 WRC급 되는데, 어떤 일화를 간직한 걔도 학력 미달로 그쪽으로는 못나갔어. 형 친구 중에 느와르 영화랑 맞닫는 사람 많았다. 걔네들 얘기하자면 혐오도 있고 사이코패스, 마이크 타이슨, 브로맨스, 사기꾼, 전직 뭐등 아 많아. 힘들어 상대할려면. 아 말 말어. 거친 남자들의 세계도 나름 매력이 있긴 한데 그게 또 장점이 하나 있으면 단점도 하나 있더군. 세상사가 원래 그렇지 않나. 새 친구와 친하게 어울리다 보면 친구의 친구의 친구로 파도를 타게 돼 있어. 여자보다 남자는 친교가 넓고 길고 다양하니까. 내 입으로 나 인기 있었다, 라고 내가 스스로 내 자랑하는 것 같아서 퍽 부끄럽고 죄송스럽네만 말이야. 아무튼 그래서 학창 시절 바라보던 멋진 사람들과 꿈꾸던 이상이랄지 계층까지는 아니지만 거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친구 중에 예술가도 있고, 은행장도 있고, 수완 좋은 오락산업 대표와 지명도 적당한 운동선수, 고위 관료, 외교관, 의사, 환경운동가, 스포츠기자, 학자, 그~래 재력가! 자기가 자기 입으로 난 재력가라고 하는 사람은 몇몇 만나봤지만 말이야. 원래 촌닭은 코메디언이거든. (쉭쉭) (눈썹 까딱)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난 딱히 뭘 바라지는 않았지만 내 친구들을 스윽 봤더니 글쎄, 파도타기를 하다가 장르가 너무 그쪽으로 기우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네. 그래도 반전이 있었지. 애틋한 해피엔딩을 절로 연상시키는 내 인생의 유일한 사랑을 만났으니까. 하지만 내가 만일 어떤 작품의 주인공이라면 난 그 전말을 꼭꼭 숨길 꺼야. 설령 내가 작품의 주인공이 아닐지라도 은밀히 감출 테야. 왜냐하면 여자는 원래 그런 걸 좋아하는 법이거든. 아닌 척 모른 척 없는 척 하다가 기대가 곤히 잠드는 틈을 타서 막판에 뜻밖의~ (딱)! (검지)! 내 인생은 예술에 담아내고, 내 과거는 그녀에겐 비밀로 해야지. 그 궁금증과 신비스러움을 오래 지속시켜야 하니까. 뭐 들통날 때 들통나더라도 말이야. 그래도 주기적으로 세뇌시키면 그녀는 최면에 걸릴 수 밖에 없어. 넘어올 수 밖에 없다고 여자의 마음은. 있잖아! 어느 작품의 주인공이 나이기는 어렵지만 말이야 그래 희박하지만,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 사랑의 왕자님은 바로 나라는 점. 낯간지럽고 오글거리긴 하네만 결코 쉽게 간과해서는 안된다네. 왜냐하면 그것은 만인에게 해당되는 만고의 진리니까. 어쨌든 한 여자를 놓고 드라마처럼 두 남자가 대립되는 일이 있긴 하더라고. 그래도 그 친군 자세한 얘기 없이 웃더라. 눈빛 왔다 갔다 서로 알지. 체급이 그러한데 우리가 뜨겠니 어쩌겠니. 한쪽은 사나이의 상심 한쪽은 사랑. 그러나 녀석은 나와의 다툼이 아니라 웃음을 택했지. 사랑을 잃고 우정을 택했다더라일까, 아무튼. 왜? 우리는 친구니까. 노래에서 말하는 흔들린 우정, 그건 보통 여자쪽에서 갈팡질팡하거나 뭔가가 있는 경우가 많아. 그게 노래는 멋져 보여도 실제는 아니고. 그런 일을 허구에서는 야만적으로 그리기도 해. 그러나 실화에서는 진짜 느와르 장르 인생의 친구는 단지 미소였다고. 그게 다였어. 끝. 그런데 말이야, 아 맞다 맞어. 그 남자 중의 남자인 형 친구. 그 친구랑 또 다른 친구들이랑 형까지 네 명이서 우리끼리 지하 세계 도박계를 접수할려고 집을 얻어서 합숙하며 일했던 때가 생각나구만. 타짜는 실전에서 판을 설계해서 시작하며 내가 원하는 패를, 그러나 만질 수 있고 고체로 존재하는 진짜 패를 나눠 주지. 우리는 인터넷 카드 게임에서 그런 타짜 같은 일을 아주 잠깐 시도하다가 만 적이 있어. 그 얘기를 왜 하냐면 말이야, 그 UFC 헤비급 챔피언 같은 친구가 외출했다 집에 딱 들어왔을 때, 그때 형이 뭔가를 하다가 들켰거든. 완전 딱 들킨 건 아닌데 우리 남자분들 잘 아시는, 우리 청소년들 익히 아시는 그런 일 말이야. 아 나 이거 원 참 쑥스러워서 고개를 못들겠구먼 그래. 5살인가 6살 때 우리 아빠는 바닥에 엎드린 내 엉덩이를 지긋이 밟으셨고, 난 그때 삐─ 운동이라고 해서 동네 아줌마들을 모두 거뜬히 웃겨버렸으며, 그 뒤로 나중 엄마한테 뭐 들키기도 했겠지. 아 증말 인생 슬프구먼 그래. 아아 너무 짠해 내 인생. 그나저나 그게 말이야, 아마 그때쯤일 꺼야. 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까서 자기 여자친구에게 보여주면서 자 봤지, 그 일. 나는 저 덩치 큰 친구와도 친했고, 얘랑도 친했어. 침체된 시기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상중하에서 내 인기와 교우 관계는 그래도 상이었다고. 그런데 그 층위가 상은 상인데 좀 이상했던 거지. 왜냐하면 나는 불난의 축이었으니까. 어쩌면 정말 그랬나 봐.
   그런데, 월트는 대체 왜 별에게 매료되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서 그 순정을 입증할 수 있는 뭔가는 있는 거니? 형 말은 천문학적 배팅을 하라는 게 아니야. 형이 무슨 걸출한 도박사도 아니고 말이야. 자,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 지금 당장 월트가 별을 좋아한다, 그건 좋아. 좋지, 아름다우니까. 사람 마음을 어떻게 사고 팔겠니 어쩌겠니. 그런데 너 언제까지 별을 따라다닐 꺼니? 얼마나 그 끈기를 유지할 수 있는데? 그리고 그 마음을 온전히 별 하나에게만 딱 언제까지 집중할 수 있냐고. 너 별이 어떤 애인 줄 아니? 애절하긴 하다만 별이 그 사랑을 받아줄 것 같니?
   그와 함께 별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모두 파악했니? 별의 허영심과 변덕과 질투와 꿈과 욕망과 고결한 마음과 자잘한 습관과 그녀의 사랑관을 분석했냐고. 여자에게 그런 덕목들이 있듯이 남자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뭔가가 있어. 우리 월트는 허세 지수, 상중하에서 하. 허풍은... 가만 있자 것도 하. 허당끼는 상. 딴 건 낮고 허당 지수만 왜 높냐고? 허당 지수 높은 게 나쁜 게 아니야 이 친구야. 이거 이거 진짜 순 허당이구만. 누가 은근 허당 아니라고 할까 봐. 자네, 남자들이 왜 거짓말을 많이 하는 줄 아는가? 왜 그런가를 알려면 사랑을 알아야 한다네. 사랑! 여자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인생에서 순도 높은 다이아몬드처럼 눈부시고, 찬란하고, 아름답고, 밝고, 내 마음에 드는 흡족한 연정의 상대는 남자에 따라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겠지. 그러나 사랑학에서 봤을 때는 말이야 그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은 적어도 하나면 된다네. 그건 최소 하나면 족해. 바꾸어 말하자면 남자의 인생에서 진실한 사랑은 최소 1개, 나머지는 그게 2개든 2000개든 의미 없어. 즉 1개만 퀄러티고, 나머지는 양이란 말씀이지. 그러니까 남자들이 뻥이 센 거야. 그런데 허세도 별로고, 허풍도 싫고, 여자 경험 역시 변변치 않아. 그건 뭔 줄 아나? 그건 노-재미야. 심심한 남자라고. 싱거운 데다 썩은 미소와 냉소도 함께 하는. 그분과 함께 대화의 즐거움을 찾으려면 힘들어 많이 힘들어. 대체로 뭐든지 중간이 좋아. 그래서 내가 봤을 때 월트는 별에게 몇몇 항목만 놓고 보자면 예측 사랑 지수가 썩 높게 나오지는 않아. 그걸 모르고 덤비면 돈 낭비 시간 낭비, 한 시절 방황 좀 해야 한다네.
   꽃 들고 쫓아다니는 사랑에는 네 가지가 있어. 그녀만을 바라보는 애타는 마음을 숨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 기다린다, 지켜본다, 그녀의 행복을 하란다, 그녀의 꿈을 응원한다, 그녀가 바라는 환상과 그녀가 동경하는 로맨스에 조용히 환호한다, 그러다 만나거나 헤어지고 영원한 남남이 될 뻔 하다가 다시 사랑의 불씨를 살리다가 그녀를 내 우정에게 빼앗긴다, 그리고 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배 들어올 때 배 들어오지 않을 때 내내 노만 져었는데 완전 죽 쑤어 개 줬다 등등 많은 게 있어. 그러나 그 끝은 네 가지야. 즉 결론은 성과란 말이야. 사랑의 끝은 네 가지가 있다고. 첫째 그녀의 마음만 얻거나, 둘째 그녀의 몸만 얻거나, 셋째 그녀의 몸과 마음을 지켜주며 떠나보내거나, 넷째 모두 얻고 사랑의 주인공이 되거나.
   갈피를 못잡더래도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렴. 남자가 100번, 1000번 애원해서 이루어진 사랑은 그건 뭐라 말하기가 곤란하다네. 여자쪽에서 문제를 찾을 수도 있고. 해피 엔딩 물론 가능해. 문제를 여자쪽에서? 그렇지. 빌미는 찾아보면 있어.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사연이란 것도 있고. 막장 드라마가 있으면 사랑의 센티멘털 장르, 왜 없겠나. 아 막장? 막장도 라틴쪽 드라마는 급이 달라 급이. 음... 찬미가 충분했든 어쩌든 여자가 꽃인 건 맞아. 그렇지만 특별한 사랑을 원한다면 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꽃이면 안되는 거라네. 바로 거기서 고수와 하수가 갈리는 거야. 종이 한 장 두께 차이는 이때 드러난단 말이세. 999번 나 꽃이야? 좋아! 완전 좋아. 왜 나쁘겠나. 하지만 나머지 1번은 한 여자가 간직했던 그 진심이나 무언가를 먼저 제시해야 한다네. 흔들었던 꼬리를 단정히 내려야 한다고. 작전 들어가야 한다고. 그것은 남자가 아닌 여자의 숙명적인 베팅이야. 당연히 그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겠지. 더불어 나중 그녀는 후회하기도 하겠지. 그때 내가 왜 이 인간을 유혹했지? 이 인간이 하도 꽃 들고 쫓아다니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쫄랑쫄랑 내 꽁무니만 쫓아다니며 나만 바라보길래 나는 그게 사랑인 줄 알았는데, 어디 가서 내 남자친구라고 하지 마, 그러면서. 아닐 수도 있고. 상대를 바꿀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은 게 당연해. 아니라면 거짓말이지. 나도 그런 기억이 많다네. 나와 척키와 척키 여자친구와 그녀의 어머님과 함께 만났는데 어머님이 호호호 뭐라 그러시네. 나이트클럽에서 어떻게 친구랑 사냥에 성공해서 밖으로 2 대 2로 나왔는데 아 글쎄 친구쪽 여자가 막 뭐라 그러네. 쓸데없는 일과 부질없는 기억들 다 잊었어. 잊어야 하니까. 그렇지만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인연도 아니고, 함께 한 시간에 익숙해지고 추억이 쌓이고 사랑에 길들여지고 나면 낭만이든 뭐든 포기해야지 별수 있나. 여자도 여자를 알아야 한다네. 주관과 심지와 줏대와 판단력과 의지와 권위에 대한 투시력과 말수의 타율-장타율을 간파하는 현명함, 촌년의 바꿀 수 없는 천부적인 안목, 내 연애 소질로 도달할 수 있는 사랑, 고삐 풀릴지도 모르는 기준선, 나와 남을 보는 동등한 잣대, 여자는 아마도 이런 덕목들과 평생 씨름해야 할 걸세. 사는 내내. 그래. 정말 그래. 옛날에는 그랬지. 어느 왕이 1000명의 시녀를 거느렸다더라, 누구는 첩이 만 명이나 됐다더라 라고. 귀족과 관련된 속담이나 뒷말도 있을 테고. 허나 그건 옛날 이야기야. 지금은 어떠할까? 지금은? 이렇게 바뀌지 않았나. 집을 10채 갖거나, 차를 100대 소유하고, 1위 곡만 1000개라는 히트곡 제조기가 되거나, 명화 만 점을 보유한 거물이 된단 말일세. 그 가운데 제일은 대략 집 1채에서 살며 서로 죽고 못 사는 소박한 사랑이 최고일 테지만 일단은 말이야. 그 반면 여자는 어떤 줄 아나? 천년의 사랑을 하는 여자일지라도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꿈에도 그리워하는, 자신만을 흠모하는 남자가 1000명이 되더라도 절대 마다하지 않는다네. 그게 여자야. 왜? 왜냐하면 여자는 누가 뭐래도 꽃이니까! 먼발치서 바라만 보겠다는 데 그게 뭐 어째서, 남의 일 아니냐 그거지. 실재 타인의 인생이고. 그건 맞아. 그러면 남자는? 꽃씨를 뿌리고 사랑을 노래해야지 별수 있나. 사랑의 완성은 다시 사랑의 시작이야. 사랑도 나뉜다고. 동등한 사랑이냐 아니냐, 아름다운 사랑이냐 아니냐, 처음은 어땠고 나중은 어떠한가로. 그걸 꼭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될까? 그럴 것 같은가? 그렇기도 하지만 보통은 처음에 이미 정해져 있고, 처음에 다 훤하게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건 사랑을, 사랑에 대해서 뭔가를 알아야 하니까 쉽지 않을 수도 있어. 가령 월트에게는 그럴 수도 있다고. 가볍고 넓고 많고 일방적인 사랑에 익숙했던 사람이 나중 사랑을 받는 것과 사랑을 하는 일을 새롭게 깨우치게 되면 이 세상이 달라보이듯이, 사랑을 받는 데 익숙했던 사람이 마침내 사랑을 하고, 사랑을 주고, 사랑 받는 것에 앞서 내가 누굴 사랑한다는 사랑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그때 그 사람은 단호해지는 법이지. 그분이 만약 여자라면 그녀는 마침내 사랑과 인생을 동일시하게 될 꺼야. 그건 거의 3부 리그에서 2부 리그를 거치지 않고 바로 1부 리그에 오르자마자 우승하는 것과도 같아. 
   자네는 그 모두를 다 면밀히 검토해 본 다음에 나보고 별양을 포기하라고 하는 건가? 그렇다네. 난 어딘가에 숨겨 놓은 여자친구가 있을 수도 있어. 그러나 내가 별양을 좋아할 것인가는 엄밀히 봤을 때 다른 문제야. 왜냐하면 그건 다른 사랑이니까. 또 내 문제야. 별의 소망일 수도 있고. 다름 아닌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사랑이 그렇다네. 방향이 막 서로 달라. 어떻게 보면 그건 완전 동물의 세계를 보는 것과도 같지. 왜냐하면 사랑의 시작과 끝은 물론 그 태동과 소멸과 다중적 의미란 게 원래 불명확하기 때문이야. 어느 날 별이 자네한테 그러면 어떡할 텐가? 월트, 준을 괴롭히지 마세요 그리고 저에 대한 사랑을 그만 멈추세요, 라고 한다면! 내가 자네의 고백을 듣고 사랑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듯이, 그녀의 부탁을 듣고 자네가 자신의 순애보를 청산할 것인가는 자네의 자유야. 그러나 그 자유가 너무 일방적이라면 이게 정말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지. 안 그런가? 월트가 내게 별을 포기하라고 했어. 그럼 나는 네 알겠습니다 라고 할까? 그런 카드 게임이 세상에 어딨나? 받고 한 장 더, 가 나오는 게 순서지. 안 그래? 난 포기 못해, 늬가 포기 해. 자, 그 다음엔? 뭐 걸 거 없어? 것 봐 액면도 별론데 너무 무리한 거라고. 월트는 지금 얼마나 자신의 사랑을 확신하는가? 그 사랑이 변치 않을 자신이 있는가? 설령 있더라도 그건 현재고, 미래는 다른 얘기지. 나중 그 사랑이 변한다면 그땐 어떻게 책임질 텐가? 내게 별을 포기하라고 제의한다는 것은 월트의 별에 대한 사랑이 영원하고 유일무이해야 함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라는 점 잊지 말게. 혹시라도 말일세, 나중 별에 대한 월트의 사랑이 변한다면 그땐 어떻게 책임질 텐가? 응? ...... 왜 내가 책임져야 하냐고? 그러면 결론 났네 결론 났어. 사랑의 맹세와 결혼 서약은 물 건너간 걸로. 정작 그 모든 사랑의 열망에 관한 당사자인 별이는 아무것도 모를 테지만 말이야.
   자, 이제 다시 한번 처음의 질문을 떠올려 보세. 사랑을 포기하냐 아니냐, 는 별개로 하고 별이를 포기하라고 왜 제3자가 선언해야 하는지를. 전에 뮤지컬이나 오페라 본 적 있는가? 그렇다네. 그렇지. 그 애달픈 마음은 사랑의 큐피트 그 수혜자를 향한 말이 아니라, 책이나 노래나 꿈을 향한 정진이든 그 뭔가로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미처 논리정연함은 챙기지 못했네만 이만하면 첫 질문에 대한 답변은 대신한 듯 하네. 이처럼 괴상하게 답변을 일축해도 괜찮을런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결론은 이래. 번거롭겠지만 처음부터 사랑의 관계도와 사랑의 방정식을 다시 검토해 보지 않겠나?」
   고요함.
   약간의 거룩함.
   말은 없어도 들린다. 체크. 패스. 체크. 고.
   「형. 그런데 있잖아유. 이런 말씀 드리긴 무척이나 유감스럽지만 지가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유. 아까 지가 한 말 있잖아유. 별 포기하라는 말. 그거... 실은 그냥 해 본 말이에유. 제 감정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걸랑요. 곧 지 말은 농담이었시유. 형이 뭔가 판단 착오를 일으킨 것 같구먼유. 너무 쉬운 액면이라서 크게 오산하신 거구먼유. 그분이 오셨는지 성이 꼭 석고상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웅변가로 보이기도 했걸랑요. 그란디 어뜨케 중간에 말을 끊을 수도 없구...! 네. 지는 참 곤혹스러웠구먼유. 앨은 또 무슨 죄겠시유 괜히 지 만난다구 놀루와서... 일은 그렇게 된 거네유. 성님! 전 정말 성 입에서 막 화염방사기의 화염이 쏟아져나오는 환영을 본 것만 같구먼유. 지는 그거면 됐시유. 재밌었응께. 야 앨. 너두 그렇게 느꼈지? 와~ 완전 끝장! (엄지 엄지 쉭쉭) 삐─ 멋져! 뭐 그럼 됐쥬. 네. 그럼유. 성님 그거 아요? 아따 그래도 형이나 된께 이라고 유익한 얘기를 해주제 누가 우리헌티 그라고 좋은 말을 해준다요. 안 그라요? 아야 앨! 아따 거시기, 그러냐 안 그러냐?」
   「아 그라제~. 두말허믄 잔소리제. 아따 나는 아까 막 레이저 맞어브렀당께 참말로. 진짜 막 우리 성님이 화염방사기 뿜어븐디 와 건 마 뭐 거의 완전 멋져븠어. 환장해브렀당께. 성님, 그거 아요? 우리가 성님 좋아한단 거 말이오. 이러니 이러니 우리가 성님을 조마조마에서 에이스로 모시지 않을 수가 없어브러. 아 미쳐븐당께 증말.」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까마귀 한 마리로는 모자랐다. 간에 기별도 안 간다. 준은 정말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정말 막 머리를 쳐박고 싶었다. 닭처럼. 아아 그건 정말, 오오 안돼 안돼. 말 말자!


   8

   요컨대 월트는 당분간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만 짝사랑을 지속하기로 했다. 그리고 월트의 친구 앨은 서포터즈 조마조마의 새로운 에이스가 됐다. 서포터즈의 에이스는 딱 하나만 잘하면 된다. 큰 목소리! 이쪽 골대 뒤에서 저쪽 골대 뒤에 있는 상대편 서포터즈에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목소리만으로!
   「야 이리 와 봐. 자신 있으면 와 보라고. 한판 뜨자!」 
   「떠? 뜨긴 뭘 떠!」 
   「가시내처럼 그게 뭐냐. 인사나 하자.」 
   「오라면 못갈 줄 아나. 하지만 귀찮다. 늬네가 와라. 왜 우리 보고 오라 하냐.」
   「야 잔 말 말고 굽혀라. 오라면 올 것이지 뭔 말이 그렇게 많냐. 어?」
   「너 방금 뭐라 했냐? 뭐가 어쩌고 어째? 너네들 말 다 했냐.」 
   「말 다 했으면? 왜, 오게? 어차피 안올 거잖아. 아무리 약 올려도 안올 거 다 안다.」
   「너네 못본 사이에 많이 똑똑해졌구나. 어떻게 알았냐? 너네들은 공부 못했으니까... 천재라도 영입했냐?」
   「누굴 영입해? 내가 천재다. 우린 천재 아니면 상대를 안한다. 우리 조마조마는 최소 수재, 보통은 천재다. 알았냐?」
   「몰랐다. 너네는 어떻게 농담이 그렇게 유치하냐. 익살엔 통 소질이 없는가 보구나. 포기했다. 기대도 안한다.」
   「늬들이라고 뭐 얼마나 다르냐. 그러는 너넨 못본 사이에 많이 뻔뻔해졌구나. 하나도 안 웃긴다.」
   「안웃기면 웃지마라. 웃어달라고 부탁한 적 없다. 그렇지만 이러면 싸우다 정드는 거 아닐까?」
   「뭐라카노? 우리는 애증 같은 거 안키운다. 우리는 젊다. 고로 우리는 사랑하냐 사랑하지 않느냐, 둘 중 하나다.」
   「그럼 우리는 늙었단 소리냐? 내기 할래?」
   「우리는 애들이랑 내기 안한다.」
   등등
   그리고 서포터즈에 새로운 회원이 등장했다. 사라와 이브! 그녀들은 아마 준의 졸작 블로그를 읽고, 준이 삼류 소설가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준이 말끔한 양복을 입고 축구 경기를 보러 오기 때문에 일찌감치 준의 팬클럽이 되기로 마음 먹은 듯 했다. 즉 서포터즈 조마조마에서 사랑의 관계도는 어느 정도 정해졌다. 피라미드 제일 위에는 준, 준을 장미와 별이, 별에게는 아직 월트가, 다시 새로운 사라와 이브는 준을 보며 오빠, 오빠, 오빠. 막 그러고 있었다. 친구랑 같이 오지 않고 혼자 활동하는 앨리스도 후보군에 대기 중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또 다시 서포터즈 조마조마에 두 숙녀가 새롭게 출현했는데 별다른 멋진 남성들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녀들도 준에게 구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준이 호명을 해서도 아니었고,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건 영락없는 사랑이었다. 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때부터 그는 차차 축구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언제부턴가 아예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래서 서포터즈 내부에서 뭔 얘기가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떻게 어떻게 해서 준이 근처 연고팀 지역에서 유랑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모두 알게 됐다. 준의 입장에서는 아마 글을 쓰기 위해서 잠시 주거지를 떠난 것 정도였을 것이다. 준은 팀내 내분이나 자기한테 쏟아지는 흠모와 남아들에게 받는 눈총, 스스로 생각해도 왠지 이건 지나친 인기의 독식이 아닐까 라는 반성에 가까운 성찰을 하게 됐고, 때문에 그는 저번에 경기장에서 맡붙은 상대팀 연고지 지역에서 생활하며 이런 시를 짓게 되었다. 그는 그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모든 애정의 화살표가 내게로 향하던
   피라미드는 역피라미드가 되었다.
   단정한 삼각형은 뒤집어졌다.
   추상적 심상의 다이아몬드 모형으로
   그것은 드디여 꽃으로 변했다. 그리고
   멋진 형상의 분수가 되었다. 이제
   분수대 밑에 특별한 소원이 담긴 동전만 쌓이면 된다
   먼 미래에는 동전없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데
   아니 가까운 미래던가? 이미 그렇게 사는 데도 있다던데
   그러면 천사의 고추에서 내뿜는 물줄기에서는 우유가 나올까?
   그래도 될까? 생각이 이처럼 튀면 콜라 캔을 따는 것과 같다
   그 소리는 마담 클링!
   왜 하필 그 소리가 들렸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에 쓸 때는 뭔지 모를 아찔함과 멋스런 흥취랄지 빼어난 감각미가 돋보였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그건 그냥 일기였다. 인터넷에서 적당한 블로그 찾아보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그런 글. 한마디로 투정. 물론 말이 그렇단 소리다.
   그나저나 조마조마 서포터즈는 한번 경기장에서 뜨겁게 맞붙은 인연도 있고 해서 준이 머무르고 있는 고장으로 원정 응원을 갔다. 월트는 물론 장미와 별도 오랫 만에 만났고, 정 붙이자마자 정을 떼버린 사라와 이브, 게다가 이젠 이름도 얼굴도 신호도 무시할 수 밖에 없는 다른 친구들도 반갑게 만나게 됐다.
   「형. 그만 돌아오세요.」
   「네 오빠. 그만 돌아와. 돌아와 줘 제발. 여기서 혼자 응원하시기엔 아무래도 무리..아니겠어요?」
   「네 오빠. 글이야 아무데서나 쓰면 그만이죠. 뭐 바래는 거 있어 오빠? 내 친구 소개시켜줄까? 응, 오빠!」
   준은 설명할 길 없는 바램이 수그러드는 것만 같았다. 또한 서포터즈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애착심이 다시 한번 뜨겁게 타올랐다. 그는 친구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에 이지적으로 아니라고 응대해야 했으나, 별 생각없이 무심코 그러겠다고 해버렸다. 아무래도 자기가 돌아가서 사랑의 관계도를 정리해야만 한다는 책임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우정과 사랑과 연정을 모른 채 하며 서포터즈에 대한 열정까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건, 그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9

   홈구장으로 돌아와서 준은 무엇을 보았을까. 그는 깨달았다. 아 내 판단이 너무 성급했다고. 얍, 같은 기합도 필요없었다. 무엇도 통하지 않았다. 흐름은 바뀔 수 없었다. 대세는 기울었다. 가급적 모른 체 할려고 해도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안간힘을 썼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의 바램대로 됐다. 준이 입바른 소리로 툭툭 던졌던 대로 자기를 향하던 인기와 관심과 호의와 애정과 친교는 모두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피라미드는 역피라미드로 바뀐 것이다. 상황은 역전됐다. 재역전은 가망 없었다. 암담했다. 그놈의 서포터즈에는 왜 들어갔길래. 어디다 하소연할 수도 없고 망신살만 톡톡히 샀다. 그는 완전 찬밥이었다 조마조마에서. 이제 준은 서포터즈에 나가도 지나가는 개도 쳐다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그가 지은 시 그대로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다른 할일을 찾아야 했다. 간신히 붙은 정 이제는 떼야 하는 실정에 이르고 말았다. 아니다. 과정 없이 결론만 남았다. 이름을 바꾸고 조마조마 서포터즈에 몸담기까지는 좋았다. 상대팀 서포터즈와의 몸싸움에서 뜻하지 않게 선봉에 서게 된 일까지도. 왜냐하면 그나마 지역신문에 작게나마 대서특필되었으니까. 유명세란 게 그런 거다. 한번 그 짜릿함을 알게 되면, 아아아! 건성일지는 몰라도 조마조마에서 준은 전에 호응이 괜찮았고, 인기는 파죽지세였으며, 차기 회장감으로 운운하는 소문도 듣기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스를 수 없는 큐피트의 화살이 너무 한꺼번에 집중되다 보니까 어떻게 조마조마의 사랑을 받고 그 기대에 착하고 예쁘게 호응하지 못했던 거다. 부담스러웠고, 질투심과 시기는 물론 팀내 의기의 균열과 인기의 불균형이 심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어렴풋하게 드러나는 삐걱거림에 아랑곳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떠났고, 정체기를 보낸 후 돌아왔을 땐 조마조마는 예전의 그 조마조마가 아니었던 것이다. 누구를 탓하랴! 그렇다고 딱히 잃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다만 어딘가 모르게 살살 말리고, 착착 엮여서 덤으로 패자가 된 듯한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뿐. 아마도 떫은 기분은 이를 뜻하리라. 감당하기에 과히 쉽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준은 집에서 심기일전에 들어갔다. 가택 감금으로 비책을 모색해 볼 생각이었다.


   10

   준은 묘안을 하나 생각해냈다. 이름을 바꾸기로. 뿐만 아니라 서포터즈도 바꾸기로. 그 당시 맞붙은 그 우락부락한 친구들쪽에서 먼저 영입 제안이 오지 않았으나 지금은 누가 뭐래도 변화의 바람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쪽 서포터즈의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 <간당간당!> 여자친구를 바꾸는 건 뭐라 말하기 곤란하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건 길조인 경우가 많다. 학교를 졸업하면 회사에 들어가고, 최고 인기 드라마를 위시한 광고는 단가가 비싸다. 남의 다리를 피나게 긁는 일이 있으면 우연히 찾아오는 깜짝 행운도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이사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단어가 생각났으니까. 특파원!
   서포터즈는 간당간당. 새 이름은 로버트. 직업은 그대로 삼류 소설가. 취미는 TV 보기? 첩은 없음. 준은 아니, 로버트는 기쁜 예감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즐거워졌다. 마음을 바꿨을 뿐인데 칙칙하던 전망이 갑자기 아름다운 풍경으로 변한 것만 같았다. 그러나 큰 기대는 없었다. 가는 여자 붙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마다하지 않는다. 앗, 그건 아니다. 로버트에게 여자는 오직 1명이다. 사랑도 하나다. 진짜다. 아무튼 그는 돌아오는 축구 경기가 기다려졌다. 설레며 기다리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유부남들에게 물어보면 안다. 막 가슴 졸이며 애타게 기다려지는 무언가가 있냐고, 뭐 먹고 싶은 거 있냐고! 후자는 값싸고 객적은 농담이고, 전자의 답은 뻔하지는 않지만 생략하는 게 좋겠다. 그런데 진짜로 당신은 막 궁금하고 마구 날짜를 세며 기다려지는 무언가가 정말 없는가? 아마도 동네 아저씨라면 그럴 것이다. 딱 부러지게 없다 라고. 듣는 즉시. 인생이 아름답냐고 물어봐도 단칼에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세상은 아름답고 사랑은 해야 한다고 노래할 줄은 아신다. 하지만 뭔가 꺾고 어떻게 접어야 할 분위기다, 그러면 다시 제2의 발언을 내놓으실 것이다. 그러나 라고. 실제 그분들 말씀이 맞긴 맞다.
   정리하자면 준은 로버트가 됐다. 소속은 조마조마에서 간당간당으로 바꼈다.


   11

   새로움!
   새로움이 그렇다. 새로움은 대천사이자 동시에 악마 중의 악마다. 걸작은 새로움으로 시작해서 새로움으로 끝난다. 따분하고 지루하고 지겹고, 연애마저 일이고 사랑도 싫증일까? 그 앞에, 모든 무엇 앞에 '새'와 '신'을 붙여 보시라. 새 옷, 새 차, 새 가방. 새로운 인생, 새로운 직업, 새로운 권태 그리고 신소설조차. 새로운 아이스크림 먹기에 도전하고, 새로운 산책로를 발견하고, 새로운 음악을 듣고, 새로운 소식을 접하고, 새로운 드라마를 보고, 새로운 신발을 구입한다. 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사랑? 비록 나중은 몰라도 처음은 완벽한 새로움이다. 그 다음은 각자 사랑을 연구하고 사랑을 학습하며 사랑을 연기해야 한다. 여행? 물론 새로움이다. 그것이 직업일지언정 새로움이다. 젊음? 완벽한 새로움이다. 자, 이제는 그 새로움을 겹쳐 보자. 여행지에서 사랑을 만난다. 지금은 애 낳고 잘 살지만 표정만 봐도 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으리오. 새로운 학년에 올라가서 새로운 단짝을 만나 우정을 키웠는데 알고 보니 나도 몰랐는데 난 동성애자였드라? 새로움이 세 번 연속된 거다. TV 연속극을 보고 주인공이 멋져 보여서 난 커서 뭐가 될래, 라고 해서 나중 제빵 학원에 다녔는데 딱 한 달 다니고 때려치고, 꿈은 포기하고, 낯선 길티 플레져를 알게 됐다? 긴 설명 필요 없는 새로움이다. 스무살 청춘이 집에서 떠나 멀리 있는 삼류 대학교 앞에 살면서, 낮에는 삼류 대학교 학생 오후엔 학원생, 인근에 새로 조성된 신도심으로 뭔가 새로운 예기를 배우러 다닌다? 게다가 선생님이 참하거나 예쁘네? 새로움이다. 새로운 집에 사는 것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시나 새로운 신세계나 새로 만들어진 도심지에 갔는데 하필 바닷가다, 애들이 많고 그 환경이 어떠하다? 기분 이상해지는 거다. 새로움을 파는 곳 가운데 하나는 백화점이다. 대체로 여자들은 (고품격) 백화점을 좋아한다. 여건이 변변치 않더라도. 중년이 청춘으로 돌아가기 위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 수는 없다. 악마도 입장이란 게 있다. 또 아무 영혼이나 사지도 않는다. 게다가 그건 허구다. 그래서 중년은 사랑의 묘약을 산다. 보통은 말장난이고, 어쩌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식으로 고급스러운 농담이 (얻어)걸리거나, 작게는 공상, 쉽게는 단골 술집, 모험으로 일이 커진다면 불륜? 그렇다. 다 새로움이 시킨 일이다. 주렁주렁 열린 새로움은 보통은 농부요 특별하게는 과일 애호가에게 따이고, 호박처럼 스스로 떨어져서 희박하게는 학자에게 법칙에 대한 영감을 선물한다. 그게 다 새로움이다. 뭐시라고? 아니다, 난 아니다. 나는 현재의 행복을 지키고 싶다? 바로 그래서 차고, 던지고, 치고, 게임광이지만 마누라가 바쁜 틈만 타서 게임을 하며, 잡고, 넣고, 떠나고, 빠지고, 걸고, 오르며, 달리는 것이다. 모두 새로움 때문이다. 대천사의 이름도 새로움이고, 루시퍼의 이름도 새로움이다. 우리 고양이가 요즘 들어 짜증을 내고, 우리 강아지는 내내 시무룩한 채 기력이 쇠진하다? 사람도 간식이 없고, 기쁨이 부족하고, 일만 하거나, 또는 아예 일을 못하거나, 사는 낙이 없으면 똑같이 된다. 개나 고양이만 그런 게 아니라. OK! 모두 새로움이다. 다 새로움과 관련이 있다.
   준은 아니 롭은 그래서 이름을 바꿨고, 영화배우로 변신할 수는 없으니까 헤어스타일을 바꿨다. 요리 학원에 수강 등록은 하지 않았지만 서포터즈를 바꿨다. 정치 노선을 바꾼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연애 철학을 변경한다? 그건 바꿔도 행동은 그대로인 경우가 태반이다. 남자친구를 바꾸고 싶은데 미안하고 내가 나쁜년 같고, 그래도 바꿀 테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난 떨며 막 상담하고 점 보러 다닌다? 유난 떨며? 말이 그렇단 소리다. 그러나 서포터즈 정도는 그래, 1단계다. 뭐 서포터즈 정도? 워─워─워! 말이 그렇단 소리다. 와 여기 너무 좋다 다음에 또 올래, 이거 완전 물건인데 다음에 또 사야지, 우리 우정은 영원할 꺼야, 하늘이 맺어주신 이 사랑 언제까지라도 변치 말자 이건 끝없는 사랑이니까? 그건 그거다. 빈말에 이제 제발 그만 속자. 그 놈의 립서비스! 하지만 제2의 자아는 더 속고 싶어하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당신은 엇그제 친구의 두 번째 결혼식에 다녀왔고, 유명인들은 매스컴에서 자랑삼아 이혼 경험으로 웃음을 뻥뻥 터트리고 다닌다. 장미 대학교에서 언어학과를 전공한 다음 다시 별 대학교에 입학해서 조류학을 배웠다, 그런데 장미 대학과 별 대학은 최소한 스포츠로서 숙명의 라이벌이다. 그러면 오늘은 장미를 내일은 별을, 기분이 좀 뭐할 때는 아무나 이겨라 또는 라이벌전 하던가 말던가, 그럴 수도 있다. 사람 사는 세상사가 그렇다. 살면서 신앙을 바구거나 국적이 바뀌기도 한다. 남편이나 아내가 바뀌는 경우, 흉도 아니고 쉬쉬할 일도 아니다. 인생은 길다. 직업을 바꿔서 행복해진다면 삼류가 무슨 대수랴. 뭘 망설이겠나. 드물게 태생의 비밀이 밝혀지거나 늦바람이 불어서 뒤늦게 예술한다고 어느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지 말란 법도 없다. 실재 풍요로운 부를 포기하고 자아 성취를 이루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는 A팀을 응원했다가 지금은 B팀이 좋아지는 일, 드물지 않다. 이왕이면 너무 변덕스럽거나 너무 의뭉스럽거나 아 그 사람~ (종이 한 장 차이로) 자발없어, 라는 소리는 듣지 않는 게 좋겠으나 서포터즈! 옮길 수 있다. 이왕이면 누가 봐도 꽉 막힌 분인데 내가 내 입으로 '저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에요' 라는 썰렁한 농담을 가끔은 괜찮은데 그게 아니라 습관처럼 남발하거나, 그분은... (종이 두 장 차이로) 좀 나대, 누구? (종이 세 장 차이로) 밉상이야, 라는 평판이 굳어지지 않는 게 좋겠으나 서포터즈! 옮기게 되는 일도 어쩌면 생긴다. 그건 자유다. 살다 보면 알게 된다. 그래도 된다. 누가 물어보면 스카웃됐다고 거짓말하기엔 좀 뭐하지만 말이다.
   물론 새로움은 반갑기도 하지만 언제나 달갑지는 않다. 좋아하는 남자가 뭘 좋아하네, 피곤해도 귀찮아도 새로운 화장술을 익히고, 그 좋아하는 NC에도 발길을 끊어야 한다. 그러다 아직 안정권에 들어오지 않은 그 남자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겨버렸네 어쩜 좋아, 그럴 수도 있다. 필자의 책임은 아니다. 즐겨찾는 매장의 구조가 바꼈네, 어머 처음에는 낯설고 헷갈린다. 소셜 네트워크가 새롭게 개편하면 숙달하는 데 약간은 참을성을 발휘해야 한다. 유행이 자주랄지 멋지게 바뀌면 소비자야 좋지만 업계 당사자들 몇몇은 괴로울 것이다. 새로운과 익숙함은 사람이면 누구나 평생 감수해야 할 숙명이다. 그리고,
   여심!
   여심. 롭이 새로움 때문에 서포터즈를 조마조마에서 간당간당으로 옮겼다면 이제 인기의 관건은 여심이었다. 왜냐하면 서포터즈 간당간당의 물이 좋았기 때문이다. 마치 이 좋은 서포터즈를 내가 왜 그동안 모르고 있었지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롭이 간당간당의 여심을 사로잡느냐 마느냐에 따라 그의 서포터즈 활동은 환희로도 좌절로도 운명지어질 것이란 사실은 거의 뻔한 일이었다. 여심을 공략하려면 여자를 알아야 한다. 자, 여자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 돌아왔다. 빠밤~! 여자의 마음과 영혼과 육체를 알아야 한다. 뭐가 신비하고 뭐가 경탄할 만 하고, 여자는 무엇에 약한지를. 그리고 왜 여자의 마음이 갈대와 같다고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때는 여자의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영원히. 또 다른 때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유체이탈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여자만 그러는가? 아니다. 남자도 그런다. 다만 그 방법과 원리와 형식이 다를 뿐이다. 그렇지만 남자는 비교적 더 단순하다. 예측 가능하다. 그래서 남자에게 영원한 미스테리라는 여자의 마음에 대해서 좀 더 심층적으로 알아 보자. 왜냐하면 로버트가 어떻게 해서 서포터즈 간당간당의 입지적 인물이 될 것인지, 어떻게 해서 단기간에 서포터즈 간당간당의 여심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는지 그것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는 서포터즈 간당간당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인기를 한몸에 독차지하고 결국 대변인 자리에 오르게 됐는지, 그 진상을 밝혀내야 한다. 아, 서포터즈의 대변인은 다른 게 아니라 이거다. 그분들쪽에서는 그 자리를 에이스로 쳐준다. 그건 바로 응원하는 일 가운데 딱 하나만 잘 하면 된다. 바로 고함지르기를! 야 이리 와 봐, 거기 찌그러져 있지 말고 건너와라, 왜 겁나냐, 늬네 바보냐 어, 가서 엄마 젓이나 더 먹고 와라, 왜 너네는 우유랑 요구르트랑 과자를 먹냐, 그게 바로 너네들이 꼬마라는 증거다, 알았냐, 바로 그런 일! 자칫 서포터즈 에이스의 할일로 이야기가 흐를 뻔 했는데 다시 돌아오면 된다. 여심으로.
   여심은 무엇일까? 여심을 생각해 본다. 여자의 마음을 그려 본다. 여자의 마음을 알려면 여자가 되어야 한다. 망상으로써 빙의됐다. OK, 알았다. 여자의 마음을 알았다. 여자의 마음은 한마디로 꿈이다. 꿈! 꿈이 무엇인가. 꿈은 뭉개구름처럼 마음이 일렁이고, 뻥 뚤린 해안선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다. 야 바다다! (으잉! 와 오빠다?) 꿈은 언덕 위의 푸른 집이다. 꿈은 개꿈도 있고 대망도 있다. 야망이나 야심은 남자의 애첩이니 여자의 마음을 얘기할 때는 그보다 소망과 욕망을 떠올려야 한다. 꿈은, 욕망은, 여자의 마음은 왜 몸보다 앞서가거나 늦춰지거나 못 이긴 척 따라가거나 여자의 한 시절 인생을 이끌기도 하는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판도라의 상자를 열겠다는 것과 같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알아 보자. 그런 다음 나중 보석 상자의 뚜껑을 덮으면 되니까. 여자의 마음은 꿈이다. 꿈 하면 선망이다. 선망 하면 동경심이다. 무엇을 동경한다, 그것은 부러움이다. 그런데 부러움이 어느 날 값비싼 소비재를 알게 됐네. 일부러 찾지는 않았으나 우연히 알게 된 거다. 부러움은 상점에 들어간다. 그곳은 완전 딴세상이다. 천상의 선율이 흐른다. 부러움은 그것을 듣는다. 부러움은 떨린다. 부러움은 여자지만 분수대에서 노는 아기 천사의 고추가 어쩌면 자기 꺼가 아니었을까 그런 의구심에 휩싸인다. 그래서 부러움은 허영심으로 바뀐다. 허영심의 친구는 누구일까? 누구겠나, 변덕이지. 변덕이 감독으로써 바늘 방석에 앉아 있는 팀은 이렇다. 1번 호기심, 2번 애정운, 3번 짝사랑, 4번 상사병. 물론 숨겨둔 구원 투수도 있다. (조용조용히) 그것은 남자복! 그럼 이게 끝이냐? 그럴 리가 있나! 그렇다. 질투심! 질투심은 상시 비상 대기다. 그것은 이성과 감성을 모두 언제라도 꿰차고 있다. 질투심은 여차 하면 먼저 감수성을 보내서 상황을 살펴본다. 그럼 이걸로 얘기는 다 된 건가? 그럴 턱이 있나! 여자의 마음은, 그녀는 탐구심이 왕성하다. 왜? 여자이니까! 때문에 그녀는, 적어도 그녀의 마음은 추측하는 걸 좋아한다. 그녀는 걸핏하면 상상하고, 아침에는 공상, 낮에는 몽상, 저녁에는 드라마나 소설 대신에 만화책을 보거나 잡지를 뒤적이며 밤에는 잠꼬대를 한다. 그녀의 꿈나라에서 펼쳐지는 꿈 그것의 장르는 SF 아니면 판타지다. 장난 아니다. 그리고 그녀가 읽는 추리소설은 추측 소설이다. 추리와 추측은 다르다. 그녀는 왜 추측을 좋아할까? 왜냐하면 추측은 상상의 자유도가 광범위하고 즐겁고 기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한적이지 않다. 조금은 초현실적이다. 여자의 마음이 추론을 좋아할까? 아니다! 그다지 편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추론에서 논리를 뺀 나머지, 곧 추측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추론은 일이고, 추측은 놀이다. 추론은 현실이고, 추측은 꿈이다. 추론은 어렵고 추측은 즐겁다. 드물게 공부나 일이 재미있을 수는 있어도 그건 대체로 재미없다. 그래서 여자가 때로는 억측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본은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예민한 예측과 날카로운 짐작과 섬세한 직관력은 유혹 만큼이나 반사적인 본능이다. 맞다. 정말 그렇다. 그녀라고 억지를 아무 때나 내 편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나중 뭘 좀 알기 전까지는. 여자는 둘 중 하나다. 판타지를 좋아하거나 있을 법한 매우 사실적인 미스테리를 좋아하거나. 그러나 그것은 이론일 뿐. 너무 많이 알면 재미 없다. 더구나 여자의 마음은 변화무쌍하고, 신비로우며, 여차하면 변덕이 납신다. 무척 예민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심도 깊게 알고자 한다면 차차 알아가야 재밌다. 드라마가 다 그렇다. 앞서 처음에 여자의 마음은 꿈이라고 했다. 꿈. 꿈 하면 또 인접한 분야가 있다. 많다. 무엇일까? 살짝만 거론하자면 이렇다. 독심술, 최면, 진공청소기, 마법사, 신비주의자, 인상주의, 비교주의, 점성술, 용한 점집, 목요일이었던 남자, 어느 첩보 소설 1~2페이지, E.M. 포스터의 소설, 오르간과 쳄발로 소리... 그거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은. 여자의 마음은 기대와 예감과 반전을 싫어할 래야 싫어할 수가 없다. 따라서 여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기분과 분위기다. 그 남자의 말에 넘어가든 그 남자의 꽃 들고 쫓아다니는 노력에 넘어가든 실망할 때 실망하더라도 여자는 꽃인 것이다. 여자가 육체적으로 흥분할 때는 어느 때일까? 그것은 내가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그 후보군 가운데 이런 것도 아마 있을 것이다. 서서히 균등하게 점진적으로 점차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그 신비한 선율이 마지막에 딱 기대에 정확히 부응했을 때! 그때는 빠밤~ 하면서 저 45도 각도에서 그분이 오신다. 바로 그때 그녀는 흥분하는 것이다. 아흐흐! 여자는 원래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법이다. 여자의 마음은 재빠르게 앞서 가기도 하고 못 이긴 척 의전을 받는 것처럼 뒤따라 오기도 한다. 때로는 남자를 뒤에 거느리며 앞서 걷기도 하고, 때로는 돌쇠를 앞에 보내어 사전 정보를 입수하게 만들기도 한다. 악녀 얘기는 생략하겠다. 여자는 시시각각 다르다. 그녀에게 있어서 지동설은 말이 안된다. 천동설이 옳다. 때문에 그녀들은 전망을 따진다. 말은 안해도 미래를 내다본다. 어쩌면 예측한다. 아마도 예언하다. 차라리 타인의 조언을 신뢰한다. 고생은 남이 하고 효과적인 결실은 내가 챙긴다. 그러나 정보통을 까다롭게 가리긴 한다. 그래도 코끼리의 귀는 펄럭펄럭~ 날개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다. 여자의 마음은. 여심! 여심은 신비하다. 여심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알고 나서도 환상적이다. 그녀를 앞에 두고 사실을 말할 수는 없다. 남자는 그걸 알아야 한다. 그건 강력하게 머머 해야 한다, 그것이다. 여자의 마음은 사랑받음을 동경하고, 여자의 마음은 사랑함을 고대하며, 여자의 마음은 사랑을 어딘가에 애원한다. 그 사랑이 참을 수 없는 사랑이라면 아마도 그녀는 기도한다. 어쩌면 그녀는 그 사랑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물론 간절히 그러고 싶지만 정숙한 그녀는 속마음을 숨겨야 한다. 도도한 목선을 유지해야 하니까. 그러므로 남자는 <나 꽃이야>와 거리가 먼 부류의 숙녀에게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요>라고 해야 한다? 난 절대 그런 말 할 수 없다. 그런 간지럽고 낯뜨거운 말을 어찌 소신이, 상남자가 해야 한단 말이더냐. 아니 될 소리. 여자가 절대로 상대를 배려해서는 안될 단 하나의 행동이 무엇인가, 내 입으론 절대 말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된다. 못한다. 말할 수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어찌 그런... (눈을 지긋이 감고서 고개를 설레설레)! 참아야 한다. 입이 근질거리든 어쩌든 보고, 듣고, 깨달았던 그 무엇들. 모든 것을 꾹 참아야 한다. 내가 입만 뻥~끗 하면... 아아 안돼 안돼. 내가 입만 뻥~끗 하면 그땐, 오오 쉿!
   ......(휴~)......
   아무튼 너무 멀리 갔다만 여자의 마음은 이렇고, 로버트는 서포터즈 간당간당의 여심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뭐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중을 위해서 억지로 턱을 쭉 내밀 수도 있고, 지금 아니면 언제 대체 어디서 자랑하겠나 그럴 수도 있다. 시시콜콜한 과정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롭은 서포터즈 간당간당에서 (파견된) 에이스로 자리잡는데 최단 기간 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래도 뭔가 서운하니 몇 가지 친해진 계기를 마련했던 말에 대해서 공개하자면 이와 같다. 특별히 엄청난 선물 공세를 퍼부었다더라 그런 일은 없었다. 단지 사소한 말 몇 마디가 전부였다. 와 누구 오늘 치마 예쁘다, 오오 스타킹 워워 멋져(그러면 그녀가 뭐라 하겠나. 호감이 전혀 없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그녀는 옆에 있는 여자 친구에게 그런다. 야 오늘 성공했다), 이야 누구 머릿결 끝내준다 내가 여자친구 없었다면 당장 들이대는 건데 아 세월이 야속하구나, 가만 보니 누구는 참 표정이 많구나 어 정말 그런 것 같아, (말없이) 윙크만 살짝. 그리고 서포터즈 간당간당의 어떤 남아들도 시도하지 않았던 행동 하나. 축구장에서 딱 숙녀가 자리에 착석할려고 할 때 잠깐 이라 하고서 손수건으로 자리의 먼지를 터는 척만 해 주기. 그녀가 있는 반대쪽을 보면서 말하기, 그렇게 슥 흘리기. 누구랑 누구 있으니까 그거네, 완전 미녀와 야수. 언니들 와줘서 고맙다야 아차 했으면 연예계로 진출했을 텐데 말이야 우리 언니들이 있어서 서포터즈 간당간당이 빛이 나네 반짝반짝 아이 즐거워라 등등. 아, 또 있다. 서포터즈 간당간당에서 애교와 귀여움을 담당하는 그녀와 선녀에게 살며시 흘린다. 경기 끝나고 오빠가 근사한 (어디) 식당 예약해놨어! 어머 진짜요? 아니, 뻥이야! 그래 놓은 다음에 딱 경기가 끝난 후 상남자들이 썰물처럼 빠졌을 때 딱 두 명만 불러서 식사하고 나면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 문제다. 그게 끝이 아니다.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 쉬는 시간, 녀석들이 응원하느라 소리 지르느라 애써서 힘들기 때문에 쉬고 있을 때 딱 그는 시늉이라도 선보인다. 흉내라도 낸다. 못 불러도 전혀 상관 없다. 바로 명테너의 유명한 아리아를 한소절 읊는 것이다. 음치면 어떠랴!

   라 돈나 모빌레 꽐 피움 마 벤또
   무타 다 센토 에 디 피엔세로
   셈프레 아밀레 레지아르도 비소
   일 피안토 오리오소...

   또는

   리비아 리비아모 넬리에티 칼리치
   켈라 벨레짜 인피오라
   엘 라 푸제볼 푸제폴 오라
   시네브리 아 볼루타
   리비암 네 돌치 프레미티
   케 수시타 라 모레
   포이케 켈로키오 알 코레 옴니포텐테 바...

   만약 외국어일지라도 정확히 외울 필요 없다. 절대 없다. 대강 흉내만 내면 그만이다. 음치라도 상관 없다. 반주가 다 뭔 말인가. 꼭 고전 아리아가 아니어도 된다. 요즘 한창 주가가 높은 외국 유행가도 괜찮다. 길게 할 필요도 없다. 채 10초, 20초를 넘지 않아도 효과 만점이다. 진짜다. 아니라면 그분은 남자다. 여자는, 그녀가 숙녀라면 그녀는 말은 하지 않아도 쓰러진다. 꺼~뻑 넘어간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그녀는 황홀함에 몸서리치게 된다. 약간만 과장하자면 그녀는 마침내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여자의 마음은 사랑에 홀리게 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분이 오셨으니까. 큐피트의 화살도 필요없고 당장 큐피트가 나타났으니까. 노래를 못불러도 그 정도 흉내만 내면 끝난다. 그렇게만 되면 저 하늘의 구름은 솜사탕이 되고, 당신은 비로소 연애소설과 낭만적인 영화 속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외국어를 공부할 필요도 없다. 우리말로 쓱쓱 그냥 소리나는대로 들리는 대로 써서 그 종이를 찍 찢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외우면 그만이다. 여자의 마음을 얻는데는 뭐니 뭐니 해도 그게 명약이다. 핵심은 엉터리 외국어로 노래를 부른다는 점이다. 엉터리 외국어. 소리 들리는 그대로 앞부분만 대충 적어서, 10초 20초만 외워 부르면 된다. 간단하다. 복잡할 것 하나 없다. 물론 기뻐하는 그녀들이 있을 테니... 음... 그렇다. 아하 그런데 뭐라고라, 다른 건 몰라도 외우는 거 하나만은 정말 자신이 없다고라? 주입식 가사가 도저히 숙지가 안되든 가사를 잊어먹든 설령 그럴지라도 다 방법이 있다. 바로 여자친구의 이름 오직 그것만 반복해서 노래를 부르면 되니까! 이마저도 어려울 리는 없겠지만 노래하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 무색하게도 다른 낭자의 이름을? 설마 그런 암담한 실수만은 피하시길!
   그러므로 로버트는 서포터즈 간당간당에서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서포터즈 간당간당은 로버트의 인근 지역으로 원정을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약간 여행 떠나는 기분으로 들뜨게 된다. 그녀들의 마음을 둥실둥실 띄워주기만 하면 된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것이다. 세이렌의 오묘하고 요상한 음률을 그녀들의 귀에 호호 불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로버트의 인기는 그야말로 순조롭게 높아졌다. 그랬다. 언제 값이 폭락할지 몰라 조마조마했던 서포터즈 조마조마에서의 준과는 다른 차원의 기쁨이었다. 앞서가 하이틴 드라마였다면 지금은 멜로나 어쩜 곧 있을 에로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그는 여자를 알았으니까. 여자들이 언제 황홀해 하는지. 여자들이 어떤 말을 들으면 좋아하는지. 여자들이 질문 받는 걸 좋아한다니까 막 무턱대고 아무거나 아무 때나 막 물어보는 식이 아니라 스치듯 살며시 그녀들의 심경을 읽을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어쩌다 막 거짓으로 물어봤다. 첫눈에 반한 사랑에 빠져본 적 있냐면서. 아무리 해도 사랑은 사랑은 도무지 모르겠다면서, 막 그러면서 모른 척 연애 상담을 부탁하면 그녀들은 기뻐하니까. 내 친구 중 한 녀석이 최근 사랑에 빠졌는데 아 글쎄 얘가 정신을 못차리네 홀딱 반한 여자가 있는데 하면서 막 날 귀찮게 하는데 딱 그러면서. 그러다 보니 로버트 오빠는 천재같아요 라는 말도 들었기 때문에 그는 무척 흐뭇해했다. 그러나 쉽사리 자만에 빠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처럼 진의가 의심스러운 얄팍한 조언만 구하지는 않았다. 준은 아니, 로버트는 자기가 생각하는 사랑은 이렇다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롭은 서포터즈 간당간당의 지성 담당에게 또 사랑 담당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뭐가 사랑이고 뭐가 그냥 연애 감정인가, 그것은 사랑이 무엇인가만 알면 된다 둘 다 알 필요 없다, 왜냐하면 하나만 알면 나머지 하나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음 사랑은 그게 사랑이다, 사랑은 심하게 아파했거나 심하게 괴로워했거나 그러다 몸과 마음이 분리될 위기를 잘 이겨내겠지만 또 심하...지는 않더라도 그 때문에 울어봤거나,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들 생각은 어떠신가 라고 물어보기도 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소녀들이 어땠겠나, 말 다 한 거지. 여자들은 말한다. 그녀들은 다 그런다. 우리 여자들이 먼저 어떤 남자를 좋아한다는 신호를 보내지 말자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그 남자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들키지 말자고. 제발 그러지 맙시다 라고. 당신이 정말 좋아요 라는 느낌을 폴폴 풍기지 좀 말자고. 아하, 그렇단 말이지... 음음! 이해한다. 이해된다. 수긍한다. 공감하고 충분히 일리 있는 뭐랄까, 그거다. 내숭! 내숭은 썩 나쁜 게 아니다. 오히려 엉큼함과는 꽤나 동떨어진 상태나 어쩌면 예절을 뜻한다. 그것은 여성스러운 꽃향기에 가깝다. 그러나 마음이 그렇고, 행동이 어떠해야 한다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앙탈과 사랑은 다르다. 참 다르다. 매료되게 만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누군가는 그런다. 반세기를 살아 보니 이제 조금은 알겠다고. 여자가 먼저 끈질긴 애정의 신호를 보냈던 사랑이 더 좋았다고. 당신은 내 마음 속에 꼭꼭 숨겨둔 내 애인이에요 라고 말하는 듯 했던! 그런 사랑이 더 어땠다고. 더 순수했다고. 훨씬 애틋했다고! 돌아보니 그렇더라고. 진짜로 그랬다고. 고혹적으로 남자의 구애를 유도하는 여자, 부지기수였으나 지나고 보니 그렇더라고. 사랑은, 감춰 봐야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사랑을 어떻게 숨기나! 안 그런가? 여자의 마음은, 여심은, 숙녀는 웃으면 끝이다. 여자는 웃으면 끝난 거다. 이미 사랑이 시작된 거다. 마음을 떠보고자시고 어쩔 필요도 없다. 눈빛 하나 말 한마디, 그리고 웃음 한번이면 진단은 끝난다. 그런데 만약 여자A에게 지속적으로 구애하는 남자A가 있고, 여자A는 남자B를 좋아하고, 그 어정쩡한 관계가 짧든 길든 (남자A가 있을 때 즉 셋이 함께 있을 때) 여자A가 남자B의 팔짱을 꽉 끼지는 못하더라도 살며시 남자의 팔꿈치에 손을 스치듯 근처에 가져가거나 옆에 다소곳하게 짧은 찰나 머무르는 형세가 한번 쯤 취해진다면? 그것도 게임 끝난 거다. 그 감정이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지만. 따라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무언가를 바라기 시작했다. 아 이 인기와 환상과 즐거움이 언제까지라도 딱 지금과 같았으면 이라고.


   12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그러나 공신력은 따지지 말자. 어쨌든 그 아찔함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래서, 라는 조급함은 숨기자는 말이다.
   일단 목이 셀 때까지는 좋았다. 성급한 인기 때문에 서포터즈 에이스 자리를 꿰찼기 때문에 할일은 해야 했다. 바로 소리 지르기. 목청껏.
   「야 응원이 그게 뭐냐 뭐 소꿉장난 하냐? 그게 뭐냐 너네 초딩이냐? 어? 아조 우낀다 우껴. 우껴서 말도 안나온다. 푸하하하하, 너네들 그럴려면 차라리 옷이라도 벗어라. 뭐 하나 볼 게 없지 않느냐. 진짜 못봐주겠다 아휴 저런 저런. 이런 바보들 같으니라고. 같은 일 하는 입장으로써 참으로 수치스럽다. 듣고 있냐? 어? 뭐라고? 건너와라. 와. 오라고. 와 보라고. 어? 왜 못 오냐? 겁 나냐? 그러나 그런다고 진짜 오면 안된다. 절대 안된다. 저번처럼 불문율은 어기지 말자. 그건 누가 뭐래도 영원한 철칙이다. 아무리 뚜껑이 열리고 커피포트가 끓어도 묵계는 철저히 지키자. 묵계는 묵계니까. 물론 그땐 우리가 잘못했다마는! 그땐 정말 미안했다. 나도 맞아봐서 안다. 그러니까 난 그러지 않을 꺼다. 알았냐? 알았으면 대답을 해라. 모기 목소리 같이 그게 뭐냐? 어? 너네들 장난하냐? 어? 장난하냐고! 등치만 컸지 완전 허당이구만 그래. 그러니까 늬들이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거야. 어? 알았냐? 어? 알았냐고! 어디 그 뿐이냐. 여자친구는 커녕 친구도 없어 늬네들은. 어, 알어?」
   준 아니 롭은, 그는 그날 목이 쉬었다. 완전 갔다. 그나마 거기까진 좋았다. 딱 좋았다.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겠는가. 롭이 딱 어깨에 뽕이 나올락말락 하던 바로 그 찰나 더 강력한 상대가 등장하고 다시 등장했고, 막 계속 새로운 훈남과 나직한 음성을 간직한 녀석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의 인기는 인정사정없이 곤두박칠치게 되었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그랬다. 심상치 않은 녀석들이 나타나고서 부터 그는 간당간당이 이쪽으로 원정을 왔을 때만 녀석들과 합류했는데, 사정이 사정이니 만큼 이제는 로버트도 원정을 떠나야 했다. 그는 축구 경기가 있을 때마다 서포터즈 간당간당의 지역 연고지까지 꼬박꼬박 갔다. 그 멀리까지. 왜냐하면 그만한 보람이 있었으니까. 그 노고보다 그로 얻는 즐거움이 월등했으니까. 좋았으니까. 재밌고 기뻤고 흥겨웠으니까. 정말 흥미로웠거든. 그들과 함께 응원을 하면 그건 마치 신명나는 글을 쓰는 기분과도 흡사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가도 찬밥이고 돌아올 때 그 기분은, 아아! 그건 NC에서 쓸쓸히 홀로 나올 때의 분위기보더 더 험악했다. 삶은 허무했다. 인생은 우울했고. 사는 게 재미없었다. 뭘 해도 재미없었다. 다시 심심해졌다. 그럼 그렇지! 에잇 좋다 말았네. 이런, 젠장!


   13

   로버트는 어쩔 수 없이 헤비메탈을 찾아들었다. 롭 누구던가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브레킹 더 로 브레킹 더 로, 디스 이즈 뭐더라 아무튼. 더불어 그는 다시 돌아갈 것인가를 고민했다. 단번에 되돌릴까 아니면 중간을 거칠까. 그래 봐야 아무 의미 없고, 아무도 관심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 다음에 그의 행보는 어떠했을까? 어떤 파격적인 움직임이 있었을까? 흡사 수준이 다른 어디 2부 리그 팀에 입단했을까? 그 팀의 이름은 비리비리? 그런 일은 없었다. 로버트는 살면서 몇몇 큰 목표는 이뤘다. 곧 처음의 의도를 높고 분명하고 절실히 정한 것들. 이를테면 척키 인형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썼다. 앞으로 일기처럼 블로그를 꾸준히 쓸 것이다, 지키며 살고 있다. 또는 세계 동화 전집 1부터 100권까지를 독파하겠다 같은. 그러나 그런 일은 매우 드물었고, 로버트는 보통 시련을 미련으로 연결시켰지 제2의 꿈의 도약 같은 거창한 긍지와 생기 넘치는 면모로 연결시킬 정도의 행동력은 구비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때문에 그는 이제 그만 간당간당에서 조마조마로, 로버트에서 준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친했던 장미와 별과 사라와 이브와 월트와 앨에게 연락해 봤다.
   「어 오빠. 무슨 일이야? 어디 입단 테스트하러 떠났나 했네. 약혼녀 언니는 잘 있고?」
   「누구? 넌 오빠한테 물어볼 게 그것 밖에 없니? 너 오빠 소식 들었어 못 들었어? 오빠가 말이야, 저쪽 팀 서포터즈 간당간당에 잠입 취재를 갔다 왔잖아. 아 정말 애네들 정보가 늦네 늦어.」
   「어디? 간당간당? 조마조마도 분위기 완전 꺾였는데. 요즘 누가 그렇게 무식하게 응원해? (뭐라고, 무식하게?) 간당간당이 뭐 어쨌다고? 관심 없어!」
   그들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할 말 없으면 끊으라는데 눈치없이 로버트가 계속 주저리주저리 떠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로버트는 뭔지 모를 애석함을 느꼈다. 그리고 또 다시 이름을 바꾸어야 할 듯한 어떤 보이지 않는 거대한 기운에 쫓기는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로버트를 준으로 바꾸기는 그렇고 해서, 아무 생각없이 새로운 이름을 결정했다. 그것은 바로, 아마데우스! 그렇다고 그가 두근두근 같은 이름의 싱거운 친목 모임에 합류를 시도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대신 심심했으니까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야, 뭐하냐?」
   「오, 아마데우스! 오랫만인데. 뭐 하고 살았냐?」
   「뭐? 아마데우스? 너 어떻게 알았어? 내가 이름 바꾼 거?」
   「뭐라고? 늬가 이름을 바꿨다고? 이름을 왜 바꿔? 아, 내가 무슨 예지력이나 주문을 외운 건 아니고 그냥 잘못 말했을 뿐이야. 왜 그런 거 있잖냐. 중요한 순간에 새로운 여자에게 전-여자친구의 이름으로 부른다거나, 속으로 왠지 나폴리에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옆에서 마누라가 내가 좋아 저 여배우가 좋아, 라고 물어봤을 때 나폴리라고 답하는 그런 일 말야. 그런데 너 지금 무슨 생각하니? 혹시 그거 음식이니 아니니? 바로 그거야. 아, 그게 왜 그랬냐면 아직 난 가게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하필 출근하는 바텐더를 지금 만난 거 있지? 그 친구 이름이 아마데우스거든. 그렇게 된 거야. 그게 다라고. 」
   「이 녀석이 못본 사이에 입담이 많이 늘었는데. 어조도 밝은 거 보니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본데?」
   「좋은 일?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지금 여기 갈까 저기 갈까 고민 중이야.」
   「거기가 어딘데?」
   「여기? 술집의 거리. 저기 보이는 가게는 극장식 카바레, 이쪽은 룸살롱. 있잖아... (조용조용히) 여기 끝내준데! 왜? 너도 오게? 오고 싶어? 안돼. 넌 집에서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나 들어라. 이 형님이 다 둘러 보고 나중 얘기해 줄께.」
   「뭐라고? 나도 어떻게...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까? 응?」
   「뭐? 진짜 오겠다고? 왜, 밤의 황제가 되고 싶어서? 원하는 게 그거야? 안돼. 넌 글이나 써. 밤의 세계는 내가 접수할 테니까!」
   「뭐가 어쩌고 어째? 그냥 해본 말이야 이 멍충아. 이런 바보 같은 놈. 끊어!」
   뚝.


   14

   롭은, 아니다. 아마데우스는 상심했다. 그는 체념했고, 무언가 어떤 새로움을 열망했다. 그러나 자신도 그게 대체 무엇인지를 몰랐다. 아마데우스가 원하는 것은 뭐랄까 천동설식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동설식 1인칭 시점도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새로움을 사고, 새로움을 찾고, 새로움을 만들고, 힘겹게 여심을 공략하고, 보람차게 여심을 획득하는, 그 모두를 내가 직접 해야 하는 행동 방식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일까? 정녕 그렇단 말인가? 그건 아니다. 그건 아니다. 아마데우스는 자기 방식은 그게 아니란 걸 직감했다. 그의 개성은 아마도 이런 걸 뜻한다. 자기는 가만 있어도 알아서 새로움이 찾아오고, 저절로 새로움이 떠오르고, 어쩌다 새로움이 대기하고, 온갖 여심의 호박 넝쿨이 제 발로 자기 앞으로 굴러오는 것. 그러나 우연도 한두 번이고 듣기 좋은 말도 역시 한두 번이다. 아마데우스가 마음 먹기로는 그랬다. 내가 만약 소설가라면 세상 모든 것이, 모든 호사와 쾌락과 새로움과 참으로 다양한 즐거움과 천사 같은 여자의 마음이 모두 내게 스스로 찾아오는 그런 주인공을 내세워서 글을 쓰면 어떨까 라고. 하지만 그는 곧바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 맞다. 나 소설가지, 그것도 삼류!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주제 사라마구의 어느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막 사실적으로 반도가 대륙에서 뚝 떼져서 열도가 되고 그 열도는 마치 하나의 나룻배처럼 유유히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그런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다고. 그건 불가능하다고. SF식으로는 자기가 글을 쓸 수도 없고, SF나 판타지를 읽을 수도 없으며(읽는 즐거움이 가능한 SF는 드무니까), 그렇다고 정작 스스로 새로움을 찾아서 떠나기는 귀찮다고. 그는 만사가 귀찮고 싫은 권태의 늪과 심심함의 그물에 걸려버린 로빈슨 크루소가 되었다. 그러나 극복해야 한다. 그럴 수 있다. 하면 된다. 그러고 싶었다. 롭 노노노. 아마데우스는 로빈슨 크루소에서 걸리버로 변신하고 싶었다. 집에서 TV를 틀고 인터넷에 보면 나오는 정말 몇 개 중 하나에 해당하는 트루먼 쇼 스타일의 방송을 볼 게 아니라. 그는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사랑의 씨를 뿌리고 사랑의 시를 쓰고 사랑을 노래하며 사랑에 대하여 설교를 하는 건 가능해도, 제 버릇 개 줄까 마는, 강남콩을 마당에 뿌린다고 구름 위 세상까지 자라는 나무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런 탄소 기반의 물체는 없다. 그러나 천국에 당도하는 과정은 있다. 만일 그 과정이 아름답다면, 작은 가치가 있고 영롱한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인생이다. 물론 잡초도 인생이고 요정 역시 인생이다. 그러나 훌륭한 인생, 그것 역시 어디 쉽나. 안 그런가? 근대소설의 시초라는 걸리버 여행기를 그 정본을 1번 완독한 사람도 아마 1000명에 1명도 안될 것이다. 10000명에 1명은?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자칭 소설가라는 작자인 아마데우스조차 아직이다. 그렇다 현실이. 거짓일 가능성이 높을지언정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에서 현재의 고품격 인문교양서 글에 비해 저 과거 유명 소설의 문체는 뭐라 말하기 곤란할 수도 있다. 그만큼 세상이 바꼈는데도 걸리버 여행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시라, 라고 한다면 당당히 나오실 분은 한분도 없다. 다 안다. 누구나. 그러나 (스위프트씨가 쓴) 걸리버 여행기를 읽은 사람을 만나기는 어쩜 하늘의 별 따기와 비슷할 것이다. 다 유아용 편집판을 읽었거나 만화영화만 봤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와 야후도 거기에 나오지만 현대인은 먹고 사느라 놀 궁리를 하느라 바쁘니까 그런 세세한 지식은 관심 없다. 도움이 안된다. 교양이란 게 사실 별로 실용적이지 않다. 최신 유행이 대체로 상식이지 오래된 지식은 상식에서 약간은 천대받는다. 모비 딕에 등장하는 스타벅이 그 스타벅스인가, 식인종이 들고 다닌 인형을 가르켰나를 아는 사람도 썩 많지는 않다. 앗, 맞나? 넘어가자. 하물며 아마데우스의 꿈? 모르긴 몰라도 그는 아마 단짝에게만 쉬쉬하며 귀뜸할 것이다. 아 이론은 그렇다는 말이다. 실재로는 사랑에 대해서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언급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처럼 애제자가 쫓아다니면서 조르고 또 조른다면 그럴 것이라는 말이다. 자기의 꿈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기의 꿈은, 솔직히 자기 꿈은 이류 작가가 아니다고. 아마데우스의 꿈은 그것이 아니라 평생 놀고 먹는 것이라고. 그마저도, 그마저도(?), 이 모양인데 새로움이, 진짜 새로움이 쉬울 리가 없다. 그게 정말 말처럼 쉽다면 개나 소나 다 천재 하고, 다 백조 되겠다. 안 그렇소? 옳소? 아니지요 아니지요. 틀렸소! 일단 목표는 크게 잡읍시다 그려. 천재, 왜 못된단 말이오. 백조? 벼락부자는 당장 힘들 수 있지만 백조처럼 살면 백조가 된단 말이오. 촌닭이 더 재미있기는 하지만 말이오. 설명이 상당히 꼬이긴 했다만, 그러므로 새로움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바로 준은, 아니 로버트는, 아니 아마데우스는 좀 더 전위적인 새로움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15

   아마데우스가 새로움에 대해 먼저 시도한 일은 시내에 있는 음악당에 등록한 것이다. 플룻 아카데미. 아무 이유 없이 자기가 플룻을 배운다면 어딘가 모르게 그는 파랑새로도, 비둘기로도, 팔색조로도, 앵무새나 부엉이로도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막상 교습소에 다니기 시작하니 좋았다. 고상한 예술적인 분위기도 좋았고, 한가한 상류층과 심심한 귀부인은 물론 지성인이 되기를 열망하는 숙녀와 함께 어린이와 학생들이 많아서 좋았다. 뿐만 아니라 풀룻 선생님이 너무 호의적이었다. 막 피아노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아마데우스가 앉아 있던 피아노 의자에 바짝 붙어 앉았기 때문에 그는 막 헤롱헤롱 정신이 나가버렸다. 여자의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하지만 플룻은 어려웠다. 게다가 그의 인내심도 그만그만했다. 그가 플룻을 배우고 싶어하는 갈망은 가짜였는지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그는 직장에 사표를 제출하는 것처럼 홀가분하게 플룻 학습을 포기했다. 바로 그때 그는 당혹스러운 낭패감이나 괴로운 좌절감이 아닌 번득이는 쾌감을 경험했다. 아차-했다! 이 선경과도 같은 몽유의 기쁨과 유망의 희열, 그건 솔직히 너무 은밀한 이상스런 취향의 즐거움이었다. 따라서 그는 속으로 재밌고 웃기고 좋았지만 모른 체 하기로 했다. 어디에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는 누가 뭐래도 아마데우스니까!
   그렇다고 그가 섣불리 종목을 바꿔서 야구를 애호하게 되어 서포터즈 비실비실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막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듯 서포터즈 호락호락과 서포터즈 아슬아슬에 입단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는 다방에서 조용히 글을 썼고, 서점에서 여자를 꼬셨고, 지나가는 괜한 숙녀를 탐했으며, 혼자 놀았다. 낮술과 밤바다, 낮잠과 밤안개를 즐기며 하이드의 요구를 무시했고, 스스로 묵살했던 자신의 욕망은 무엇이 있었나를 생각해 봤다. 그러면서 아마데우스는 응큼한 욕구를 무작정 달랠 뿐이었다. 바로, 혼자서.
   그래서 번민은 즉시 찾아왔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꽃병과 구두에 대한 작품 구상에만 전념할 꺼냐, 이 세상이 두 쪽 나더라도 남자로 태어났으면 한 번쯤 웃음 기계나 사랑 머신이 되어 봐야 하지 않겠냐는 호기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 아마데우스는 사랑의 인사라는 문화의 거리가 아닌 네온 사인이 반짝이며 급작스런 애인이 그를 반기는 나이트클럽 해피투게더에 가게 되었다. 아마데우스는 아마데우스였다. 글이 안 써지면 독주를 마시고, 우정이 뭔지 모르겠다면 TV를 틀었고, 왼쪽에 여성미 오른쪽에 여성적 본능을 꿰차고 싶은 욕망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인터넷 세계를 떠돌았다. 원래 사람 사는 게 그렇다. 아무리 뛰고 나는 풍운아일지라도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이렇다. 자기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은 인터넷에서 최저가 물품을 구경하고 쇼핑하기. 애들과 놀아주고 부인과 극장에 가고 동물원에 갈까 미술관에 갈까를 고민하지만 그분의 가장 큰 즐거움은 뭐니 뭐니 해도 골방에 틀어박혀 콜라와 피자와 함께 게임하는 것. 하루에 마시는 맥주 한 잔과 산책 한 번. 쉽게 인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각가지 기쁨과 행복의 수치를 비교해 보면 그런 소소한 여유가 단연 1등인 경우가 많다. 사교에서 만족감을 얻고, 새로운 연애를 탐내며, 동화 같은 인생을 꿈꾸는 장본인일지라도 삶의 위락은 다 그런 식이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릴 게 아니라 이참에 그냥 확 대놓고? OK! 솔직히 마누라가 힘든 집안일과 육아는 전부 다 하고(뭐, 샤타맨?), 나는 선물과 현금과 드문 관능과 먼발치의 희망과 딸랑딸랑 찬미와 적당한 유희와 다정한 친절을 베푼 후, 우리는 가슴 졸이는 꿈과 낭만의 모험을 떠난다? 마시고 잡고 치고 때리고 넣고 까고 걸고 뭉치고 달리고 굴리고, 으쌰으쌰? 아니다. 그러면 안된다. 그냥 웃자고 한 얘기다. 참고 참았던 세상 모든 아줌마들이여 안 그렇소? 자, 우리 모두 들고 일어섭시다? 워─워─워! 말이 그렇단 소리다. 말이.
   그러나 애통하게도 나이트클럽 해피투게더 역시 별로였다. 영 뭔가 거시기 했다. 술값도 많이 나왔다. 눈탱이 맞았다.
   그는 그 후에 요트를 탔다. 무덤덤했다. 등산도 했다. 재미없었다. 연극을 봤다. 괜히 봤다.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를 봤다. 새롭지 않았다. 에로 비디오를 봤다. 따분했다. 사람들이 이런 걸 왜 보고 왜 만드는지 통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소셜 네트워크로 스탠드업 코메디 영상을 봤다. 그건, 조금, 괜찮았다. 그렇다고 배꼽이 빠지지는 않았다. 또 1박 2일 야영을 하고 왔다. 물고기는 한 마리도 못잡았고 고생만 원 없이 하다 왔다. 텔레비전에 축구 경기가 나오길래 봤드니 서포터즈 조마조마도 나왔고 간당간당도 나왔다. 재미없었다. 잠이 왔다. 잤다. 푹 잤다. 숙면을 취했다. 꿈도 꿨다. 개꿈으로. 기억은 나지 않았다. 나중 복권은 사지 않았다. 다음 대책은 전무했다. 그래서 아마데우스는 공연을 보러갔다. 바로 스탠드업 코메디의 명소라는 곳으로. 잘 찾아보니 있었다. 소문난 스탠드업 코메디의 뭐라더라, 아카데미? 응 아카데미! 가서 봤다. 한마디로 더럽게 재미없었다. 인터넷에 나온 거 그거 다 뻥이었다. 그건 전설이고 이건 현실이었다. 타율이 정말 못봐 줄 정도였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재밌는 척 박장대소를 터트리며 연기했다.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무심코 한마디 했다. 장난해, 어? 지금 장난하냐고! 말이 그렇단 거다. 뭐 적당히 재밌었다. 그러면 된 거다. 딴에는 심심한 생활의 변화를 모색한다는 취지였으나 괜한 스트레스만 더 쌓이고 말았다. 그래서 아마데우스는 아마데우스를 들으면서 차분히 그 다음을 생각했다.


   16

   준은 이름을 바꿨다. 로버트로. 로버트는 소속 서포터즈를 바꿨다. 조마조마에서 간당간당으로. 로버트는 다시 이름을 바꿨다. 아마데우스로. 아마데우스는 마침내 무소속이 되었다. 무소속? 그래 무소속! 고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더라? 아직은 뭐라 말하기 곤란했다. 그는 젊음을 증명했다. 아니다. 못했다. 그는 늙음을 인정했다. 아니다. 그것도 못했다. 아침에, 이른 아침에 의식이 깨어도 눈을 억지로 꽉 감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마치 환청이 들리는 듯 하니까. 난 아직 늙지 않았어!
   그럼 도대체 한 게 뭔가? 그렇다. 시도도 없었고 그러니 결과도 없었다. 그러나 기본기는 건재했다. 즉, 그다지 어디서 공인 받지 못했고 누구도 고개를 끄덕끄덕하진 않았으나 아마데우스는 여심은 마스터했다. 이미 예전에. 하지만 새로움은 쉽사리 정복되지 않는 난공불락의 유령과도 같은 추상적 개념이었다. 흡사 남자에게 여자가 영원한 미스테리이니 것처럼. 새로움이 대체 뭐길래! 문란한 사생활? 그는 그런 데 관심 없다. 주색은 그에게 무의미한 딴 나라 이야기였다. 그에게 사랑은 오직 하나였다. 그것만이 유일한 사랑이었고, 나머지는 다 말 그대로 나머지일 뿐이었다. 아마데우스는 싫증난 여자에게 다정한 남자가 아니다. 아마데우스는 그런 그녀에게 한없이 친절한 남자가 아니다. 아마데우스는 하지만 누구에게나 더없이 자상한 남자다. 그래서 그는 피앙세한테 호되게 질책을 받아야 마땅하다. 고기를 먹고 싶다? 먹으면 된다. 친구가 그를 조르고 또 조른다.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주라고. 소개시켜 주면 된다. 간혹 골탕 먹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친구다. 친구가 아니면 누구한테 자랑을 하고 누구에게 골탕을 먹이랴. 아마데우스는 알고 있다. 여자들이 이런 말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대의 이름은 신비! 그러나 꼭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녀가 뭔가를 더 기대하고, 어떤 미지의 가능성을 기다리며, 애달파 한다는 것까지 다 파악하는 아마데우스다. 그러나 문제될 건 없다. 전혀 없다. 제2, 제3의 후보는 상시 대기중이니까. 동화적 상상력? 궁하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환상적인 연애? 요조숙녀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사랑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자동으로 넘어온다. 어쩔 수 없이 넘어온다. 누구든지 어떤 도도한 숙녀라도 다 꼬실 수 있는 아마데우스였다. 최면이라도 걸고 예언이라도 남발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언제라도. 그런데 사랑을 느꼈고 했고 그래서 꿈의 대화는 지겨워지지 않냐고? 사랑이 오래 되면 심심함에 무뎌지고, 익숙함을 지탱했다가 권태와 결탁하면 그땐 정말로 어떡할 거냐고? 빙-고! 뜻밖의 선물과 뜻밖의 약속과 뜻밖의 애잔함이 다가 아니다. 그 답변은 이미 선약됐다. 아마데우스가 장래 발표할 인문교양서에게!
   영화에서는 다음 행동이 어느 정도 가시권에 들어온다. 드라마는 다음 회가 기다려지고 어느 만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움은? 아마데우스에서 이름을 또 바꿔야 하나, 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도 관심 없고,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데 말이다.


   17

   아마데우스는 집에서 생각했다. 머리를 길러볼까? 대학교 1학년 그때처럼? 그러면 정말 당시 그랬던 것처럼 본관 앞 내르막 길에서 그녀들, 다섯 명이었나, 그녀들이 막 한창 인기 있던 드라마 주제가를 불러줬는데, 지금 그 시절이 다시 재현될까? 과연 머리카락을 기르면 그렇게 될까? 그때 그 노래 왜 불렀냐고 따질 껄 그랬나? 아니다 아니다.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당시야 촉망받는 젊음이었고, 뭐 지금도 청춘이긴 하지만 옛날처럼 소형 CD 플레이어를 가지고 다니면서 박하우스가 연주하던 베토벤의 소나타를 듣지도 않는다 지금은. 그래서 아마데우스는 동네 아저씨처럼 휘파람을 불면서 축구장으로 갔다. 결국 그곳이었다.
   그는 남자였다. 한번에 하나만 했다. 말 많은 친구에게 오랫만에 전화가 걸려오면 반갑게 안부를 묻고 답하고 그건 좋다. 그러나 그 통화가 1시간, 2시간 길어지면 다른 일은 하나도 못한다. 전화 통화 하나만 해야 하니까. 한참 일하던 중 녀석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덜컥 겁부터 난다. 말이 그렇단 소리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정답게 2시간 통화를 한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에 2시간 야근을 했다. 1시간 반쯤 일했는데 2시간 일했다고 뻥-쳤다. 다중 작업은 피곤한 일이고, 비효율적이다. 한 번에 한 가지만 하기. 그게 좋은 줄 누가 모르나. 온전히 대화 하나에만 집중하는 통화를 못해서 안 하나. 아마데우스는 전화 받으면서 다른 일을 못하기 때문에 전화에만 집중하는 거다. 할일도 많고 고를 일도 많은 세상이다. 하나만 하기 힘들게 되어 있는 구조다. 그런 뻔한 상술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잘 통한다. 완전! 세상사가 그렇다. 하나만 해서는 반짝이며 빛나기 어렵다. 어떤 권위자는 그런다. 지금은 전문가의 세계라고.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런 식상한 말은 틀린 말 같다. 좀 어설프다. 왜냐하면 지금 세상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만사에 능해야 성공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헷갈린다. 거꾸로 뒤집어서 다시, 하나만 잘하는 게 맞는 것 같으니까.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처럼 몇 가지를 특출나게 잘한다, 그러면 뭐가 문제겠나. 하나만 잘하기도 힘든 상황에 말이다. 좋은 선생님처럼 가슴 안에 잠자고 있는 나도 모르는 내 꿈을 깨어나게 하거나, 뛰어난 상사처럼 부하의 잠재된 가능성을 모두 성과로 연결시키게 만들어서 그의 능력을 배가시키거나, 계속 변신하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전문가의 길은 어렵고 조금 벅차다. 그래서 인문교양서에서는 말한다. 한번에 한 가지를 잘하라고. 하루에 할 일은 한두 가지를 될 수 있으면 넘기지 말라고. 집중력이 높은 시간에 중요한 일을 처리하라고. 성공한 사람들의 통계가 그렇다. 처음에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잘하는 뭔가를 잘 고르고, 그것 하나만 하기. 전자에서 후자까지를 반복하면 뭐라도 되긴 된다 라고. 물론 방법은 많다. 그러나 기본은 집중이다. 삶도 그렇다. 좋은 아빠에 좋은 친구에 좋은 회사원에 좋은 시민에 좋은 동호인에 막 다 잘하기는 어렵다. 제약이 얼마나 많단 말인가. 그렇지 않은가. 법을 지켜야 한다(그런데 옆 동네만 가도 합법은 불법이 되고, 그 반대도 된다), 규율을 따라라, 카르텔을 잊지 말라, 법도는 어떻고, 예법도 빠질 수야 있나, 상식과 교양은, 나는 왜 빼나 라고 교리가 그런다. 교리가 한두 개인가 신이 한두 명인가. 왕을 섬겨야 한다. 아니다 교왕이 낫지 않겠나. 무슨 소리냐 지금이 중세더냐 국왕보다 통치권자가 현대에는 진짜 왕이다. 그래 봐야 언론인들이나 따라다니지 우리는 그런 거 관심 없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그냥 직함일 뿐이다. 어차피 같은 인간이다. 차라리 신을 믿어라. 아니다 교리는 어겨도 아무 문제 없다 그러나 법을 지키지 않으면 잡혀간다. 뭘 지키라고, 너 먼저 모범을 보여라 문법이나 틀리지 말고. 뭐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자나, 저런! 게다가 우리 동네는 왕 그런 거 없다. 모른다. 다 좋고 다 좋다, 허나 천륜을 소홀히 여기지 마라 무엇보다 정작 지켜야 할 것은 관습이니라. 도돌이표 때문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으니까, 법은 지키면 되고 종교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자. 종교. 내가 생각하는 종교는 선이다. 나는 선을 위해 종교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도서관에 있는 분량 만큼의 설전이 불가피하겠으나, 보편적이고 타당한 종교의 목적을 하나만 꼽자면 그것은 선이다. 착함! 나는 선을 위해 신앙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착함! 그러나 선이라는 관념은 절대적이지 않다. 쉽지도 않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된다. 이미 처음부터 불합리를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선은 불완전하고, 상대적이며, 인간-중심적이다. 어떤 선은 과거에는 악이기도 했다. 어떤 선은 미래에는 죄일 수도 있다. A에서 선이 B에서는 벌일 것이다. 인간에게 해당하는 선이 우리 돼지군에게는 절대적인 악일 것이다. 양이라고 불만이 왜 없겠나. 그렇게 털을 깎고 또 깎아대는대. 채식이라고 왕도일 리는 없다. 식물도 의식이 있으니까. 게다가 종교가 좀 많나. 몰몬교도 있고, 유대교도 있다. 맞다. 사이언톨로지교도 있다. 분파도 많다. 기독교와 천주교, 얘기하자면 피곤하다. 그렇다고 무소속이 뭐 어때서! 서로 데려갈려고 한다는 점이야 십분 이해한다. 옛날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랬다. 신은 죽었다고. 그러나 그건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다. 괴팍한 몽상가 뿐만 아니라 솔직히 얘기하고 보면 많은 공감을 얻을 것이다. 신은 부활했다는 것을. 그분의 이름은 돈이라는 것을. 돈! 돈 빼고 종교가 돌아갈 수 있을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종교계가 시들해지면 날씨를 걱정하는 정도일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삐걱거린다? 난리 난다. 목사 연봉? 거대 기업의 회장 연봉과 똑같다. 그렇다고 신도들이 교리를 얼마나 지키는가? 완전 이중 인격이 따로 없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 어제와 오늘도 다르다. 내일도 장담할 수 없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뭐 어쩐다더라, 그 말은 그냥 말이 그렇다는 뜻이다. 피자 배달원의 경험만 놓고 봐도 부자들 평판 괜찮다. 부자가 재산을 탕진하면 그 시점이 한숨 나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도 마음의 여유가 있고 인정도 많다. 하지만 어디서든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사람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그렇다면 왜 종교의 법전에서는 기준선을 그렇게 높게 잡았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음 혹시 이 때문은 아닐런지! 앞서 말한 종교의 목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서는 강해야 하니까, 인류의 선을 구현하기 위해서, 인간이 선함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선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선함이 위선으로 돌변하지 아니 하게, 그리고 다양한 선함이 충돌되어 발생하는 모순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바로 그래서 종교의 법전 그 기준선은 드높은 게 아닐까? 그래서 구태의연하다랄지 다소 무리한 내용도 포함되었다거나 현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적어도 그것은 미래적일 수 없었다. 당시 무엇은 당시의 기준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때문에 많은 부분 절대 유익했지만─유익하지만─동시에 많은 부분 절대 미래적일 수 없었다. 일부분 현대적이지 않고, 그 이상 미래적이지 않다. 최소한 그것은 반박할 수 없는 지당한 견해다. 달리 보자면 예상보다 인류 문명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 것일 수도 있다. 먼 미래에서 지금을 본다면 아마도 말문이 막힐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서 오신 미래인이나 외계에서 오신 외계인의 고견을 굳이 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현대인이 먼 과거를 보는 시각과 그것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곧 한마디로 그래서 재미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지킬까 말까, 일 수도 있으니까. 실제 결과가 그렇지 않나. 보시는 바와 같이. 따라서 종교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경직되고 재미없고 따분한 것이다. (엄지와 검지 요만큼) 아닐 수도 있다. 종교 역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아마도 힘겨웠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종교의 교리는, 교리와 비슷한 낱말은 번역이라고. 교리를 직역하면 한껏 과장했을 때 그건 커피포트고, 종교의 교리를 의역하면 이 역시 부풀리자면 진공청소기다. 교리의 직역은 외딴 수도원에서 수도승으로 살라는 말이고, 교리의 의역은 <착하게 살자>다. 그 중간은 가택감금? 그만 그만. 착함! 중세에는 종교가 세월과 대륙을 좌지우지 했다. 그 결과 피바람이 불었고, 그 피비린내는 그칠 새 없었다. 사람 너무 빡빡하고 고리타분하게 교리에 너무 얽매이지 말자고? 그런 사람이 먼저 나서서 타인에게 교리도 안지키고 그게 뭐냐고 따지실지도 모르겠다. 지구가 타임머신이고 인간이 타임머신인데 종교에 관한 순기능만 있을 리는 없다. 절대 없다. 종교가 순기능을 달성했다면 만일 그랬다면 왜 지금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일까? 그것의 성과, 약했다. 역으로 봤을 때 그래서 그나마 지금 이 만큼일지도 모른다. 착함! 내가 생각하는 선은 도덕과 윤리와 정의와 평판, 행복, 인성, 관습, 예의, 사랑, 멋진 인생 이런 것이다. (눈썹을 올리는 무언의 몸짓) 저요? 무소속이다. 어쩌실 텐가. 지나가는 여자를 훔쳐보며 이상한 상상을 하지는 않겠지만, 철없는 허접 찌질 오줌싸개 꼬마가 뭘 알겠소. (너 어디 소속이여? 나 무소속이다. 퍽~!) 자, 나는 그렇다. 그러나 마이크를 넘가지는 않겠다. 아직 할 말이 남았으니까. 가사도 잊어먹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 실전이자 무대인 이상 뭔가는 해야 한다. 하다 하다 안되면 엉덩이라도 까야 한다. 그 대신에 할 말을 하겠다. 자, 뭐였드라 아하 맞다. 내가 만일 신이라면 나를 믿어라, 믿으면 천국 믿지 않으면 지옥 666 바코드, 그러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사람 위에 신이라는 인식이 우세했지만 나는 그 피라미드를 거꾸로 뒤집고 싶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옛날 옛적 교주는 고생했고, 교왕은 권세가 존엄했으며, 교파의 세력은 다툼이 많았다. 인간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다. 편집과 미화, 없었다면 그건 이 세상은 이미 현존하는 천국이라는 것이다. 사람 위에 신? 좋다. 괜찮다. 그러긴 하나, 신 위에 사람이 있는 게 더 낫다랄지 뭐랄까, 최소한 그게 더 즐겁지 않을까? 그런 상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왜 신만 찬양해야 할까? 이미 많이 했다. 지금도 앞으로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보는 시선으로 나를 봐야 한다. 내가 나를! 겉으로만, 자기 아쉬울 때만, 모든 것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커졌다 작아졌다, 그러지 말고. 그 말은 곧 선을 전제로 자기 인생을 살자는 것이다. 시대와 지역을 골라서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어쨌든 지구에서 사람으로 태어났다. 태어난다.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천년만년 살 수 없다. 고로 사람의 육신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나무를 키우며 공기로 물로 옮겨간다. 다시 그것은 사람과 만난다. 한 번 사는 인생, 내 인생을 살면 된다. 이기주의자이되 선함을 전제로 할 것. 이기주의자이되 작은 이타주의는 실천할 것. 예를 들면 사랑 같은 것. 요람에서 무덤까지 나의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삶. 아니다, 나는 나를 위한 삶보다 종교적인 길을 걷겠다? OK! 선을 전제로 내 인생을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그래서 나는 신앙이든 무엇이든 뭔가 하나 필요하다? OK! 아니다 나는 한번에 하나만 하겠다, 그 하나가 예전에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이었고 내일은 뭘로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커피나무와 녹차를 키우며 산다? 좋다! 훌륭하다. 다만 선을 위한 목적이 월등한 만큼 종교는 좋다. 과학이 옳고, 종교는 틀리지 않았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기원전 언제 적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명백한 실화였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나. 전설이라고 한다. 이솝 우화 같은 것. 미래 언젠가 나는 외계에서 왔다 하면서 누군가 나서서 자기가 신이라고 한다면 그는 얼간이처럼 이런 헛소리를 할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신이요. 나를 믿든 말든 그건 그대들의 자유요. 강요하지는 않겠소. 구속하지도 않겠소. 다만 착하게 사시요. 인간의 일은 인간의 일이라오. 인간의 세상에서 명을 달리하신 분들 999명은 나중 모두 천국에 입주하게 될 것이오. 왜냐하면 999명은 흥망성쇠와 권성징악의 기준이 조금은 불명확한, 선의 통념과 실천이 불완전하고 상대적이며 인간-중심적인 지구에서 그다지 큰 문제될 것 없이 잘 살기 때문이라오. 그러면 나머지 1명은 지옥이냐, 아니지요. 프로메테우스나 시지프스처럼 혹독하게 벌을 주지는 않겠소. 단, 주당 25시간 정도 그렇게만 천국의 허드렛일을 시킬 계획이라오. 그 비율이랄지 패자부활전의 도입은 차차 검토하겠소이다. 요컨대 핵심은 선이란 말이오> 이렇게 말이다. 버트란트 러셀의 글도 맞고, 예술로 예찬된 그분에 관한 걸작 역시 타당하다. 성그럽고 아름답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북스러운 신경질을 내거나 짜증을 풀 때, 왜 하필 그 신성한 이름은 욕이 될까? 하필이면 왜! 뭐하러 가만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걸고 넘어지는가. 이건 뭔가 이상하다. 그건 아마 성인이 실존할 당시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엄청난, 어마어마한 인간의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옳냐 늬가 옳냐. 늬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이를 테면 역사 같은 단어. 많은 낱말 앞에 정치를 붙일 수 있듯이, 똑같이 '역사'도 그럴 수 있다. 가령 <종교의 역사> 같은. 그 많은 굴곡과 모순, 이론과 실재의 괴리등 그게 어쩌면 혹시 피라미드의 경직된 구조 때문 아닐까? 미래의 신은 아마도 그와 대칭된 모양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기대된다. 모르긴 몰라도 미래생활사전에 나오는 내용 가운데 얼마 만큼이 상규가 될런지. 그 생각만 하면 오오 막 잠이 다 달아난다. 아아 아득하다. 미래는 대관절 어떤 세상일지 열락의 호기심까지는 아니지만 가히 궁금하도다. 착함! 상식적으로 봤을 때 다음 세 분 가운데 누가 가장 종교의 목적과 신앙의 역할을 실천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첫째 부패한 종교인, 둘째 악랄한 신자, 셋째 신앙 그런 거 모르고 법이 없어도 살 것 같은 너무도 선량하고 무식한 시골 농부. 논리적으로 보자면 이건 어떤가? 첫째, 99년을 천하의 악당으로 살다가 작고 10분 전에 종교에 귀의했으니까 천당행 땅─땅─땅! 둘째, 세간의 소식에 어두운 채 사는 존경받는 환경 운동가나 성소수자 권리 운동가랄지, 사익을 추구하는 데 게으른 동물 단체나 시민 연합 회원이 촌각을 다퉈가며 평생을 그것 하나 밖에 모르고 산 인생.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어쩐다는 다수의 착한 선행을 존경하고, 커피 칸타타나 헨델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설마 이 의도를 곡해하시지는 않으시겠지만 말이다. 하데스의 궁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비통의 강, 시름의 강, 불의 강, 망각의 강, 증오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다. 신화와 종교는 다르다. 종교와 현실도 같지 않다. 그래서 극적으로, 좀 더 현실적으로 그런 사연을 압축하자면 이성주의자들은 다음의 논거를 첫손 꼽을 것이다. 그의 인생이 착했냐 아니냐! 그의 인생이 행복했든 불행했든 어쩌든. 얼마만큼 신실했는가, 어디에 적을 두었는가, 최후에 귀의했는가 보다는. 일관적으로 비열하게 살았다, 포악한 군주로서 악명 높았다, 뭘로 보나 악인이고 누가 봐도 무법자다, 이야 와 이거 완전 막살았네, 그런데 종교가 있다 있었다 적은 올려 뒀다, 그래서 그는 지옥행을 면하고 천당행 땅─땅─땅? 이게 뭐냐. 대체 이게 뭐냔 말이다. 저승의 신 플루토는 백분율과 대차대조표로 믿음과 교파와 그런 세부 사항을 따져야 할까? 정말 그래야 할까? 아니다. 그건 절대 아니다. 플루토는 아마도 단 하나의 명제만 고집할 듯 하다. 그분의 인생이 착했냐 아니냐, 그것으로! 신이 무슨 자기 연민에 괴로워하는 사춘기도 아니고, 신체 변화에 의아해 하는 몽정기도 아닌, 쾌할하고 때로는 심심해 하며 때로는 뭐 뽐낼 것 없나 주변을 둘러보다 아는 체 한다며 친구 녀석을 흠칫 경계하는 바로 그런 존재가 신이란 말인가? 어? 대체 누가 신을 그렇게 유아기적 아동으로 만들었나? 누구신가? 네? 누구시냐구요! 아하~! 인간이구나 인간. 사람들이 자기 입맛에 맞게 자기들 권세와 이상형에 맞게 신을 제단한 것 아닌가. 마녀 사냥과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무수한 혼란은 바로 이 때문이었군. 신은 이래야 한다 라는 점. 이건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과거다. 미래에는 좀 덜하겠지만. 그러면 그나마 현대에 생각하는 신은 무엇일까? 첫째 돈, 둘째 신은 죽었다, 셋째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자, 따라서 그 다음이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 나는 천국 우리만 천국이라는 틀에 갖혀 살아야 한단 말인가. 참으로 갑갑하다. 저게 바로 찬란한 태양이다 하면서 불빛이 비추어진 거울을 신성시하고, 달님은 어디 있어요 하면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구나. <종교가 있냐 없냐>는 명백하게 <착하게 사는가 아닌가>를 위한 것이다. 착하게 사는 게 때로는 힘들고 다양한 선이 서로 상충하기 때문에 후자가 아닌 전자를 지향하는 것 아닐까? 난 방금 들었다. 무엇을 들으셨나요? 바로 신이 이렇게 말씀하셨소. 전자를 위해 후자를 경시하는 일, 적어도 그런 꽉 막힌 사람은 되지 맙시다 라구요! 뭐이, 오호 형씨도 들으셨군요 축하하겠소. 신은 방금 말씀하셨다. 바로 이렇게.  「종교계여 말로만 따따부따 제발 그러시지 마세요. 행동은 어디로 가고 말만 남았나요. 내가 위에서 보니 딱 이렇다오. 인간계가 아름답기는 한데 그런데 동시에 세상은 요지경이 아닌가. 교리를 직역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그것을 실천하는 그~런 소크라테스는 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소. 단 한 명도! 흐흠 말이 그렇단 거요. 그런데 시대가 바뀌고 또 바뀌는데 아직까지 그처럼 구식으로 설강하신단 말이오? 그에 반해 연봉은 또 왜 그렇게 신식으로 받으시오? 신이고 자시고 넌 상관하지 말라, 그 말이오? 바로 내가 신이다, 그 말씀이군요. 내 잘 알겠소. 어이쿠 이거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지존이시여! 그게 뭐요. 말로만 자기 성찰이 중요하다고 하시지 마시고 프로크루스테스처럼 길 막고 돈이나 받지 마세요. 제발! 그게 무슨 종교입니까, 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즐겁고, 행복하고, 인생과 사랑을 알아가며, 사람들끼리 어울려서 잘 살도록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 바로 그게 종교 아닌가요? 무슨 종교가 인간 위에 신, 인간 위에 종교 종교 위에 돈, 인간 위에 프로크루스테스입니까?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누이고는,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만큼 잘라내고,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여서 죽였다는, 무슨 종교가 그런 프로크루스테스입니까? 네? 언제 어디서든 세상사라는 게 그렇지 않소이까. 다 자기가 위라 그러오. 사람 위에 사람, 숲도 있고 나무도 있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아니다 무엇보다 휴머니즘이지 그러나 그 사람 위에... 여기서부터는 서열이 어떻다고 말하기가 참으로 낯 뜨겁소. 중세에는 아니지만, 아 몇몇은 그때로 돌아가면 한마디로 천국이 따로 없다오. 거 뭐... (흐흠) 중세에는 아니지만 지금이야 법, (있으면) 국왕, (있으면) 교왕, 통치권자, 종교, 신분, 다 떠나서 돈 아니냔 말이오. 아 인기도 있군요. 바로 그래서 남자의 우정 가운데 절반쯤은 친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내가 최고다 라고 하지 않는다오. 보시오. 전부 다 자기가 위라는 외침이 정녕 들리지 않는단 말이오? 서로 다 자기가 위래! 누가 그분들을 향해서 엄지를 아래로 내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 말이오. 이런 말 하는 난 신인데 대체 왜 내 귀가 간지러워야 하냔 말이외다. 스스로는 아니겠지만 인간에 의해 예찬된 그 신이 만약 귄위적이라면 지구본은 다시 거꾸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법. 종교가 세계를 지배해야지요. 그럼요. 아아 그때 그 시절 참, 앗 그만 그만. 1000년을 살아본 사람이 없다는 걸 내 깜빡했소이다. 그것을 교양으로 아는 것에 어떻게 비할 수 있으리오. 당장 100년 아니 10년만 시간을 돌려보시오. 그때가 좋았다가 있으면 당시는 지옥이었다가 우세할지도 모르겠소. 실제 그렇지 않소? 아 나 이거 참 증말! 그렇다고 종교나 권위가 나쁘단 말이 아니라오. 그것이 잘 쓰이고 적당하다면 너무나 좋고 아름답다오. 그 때문에 지구상에서 가장 덜 권위적인 곳을 많이들 인용하긴 하는데, 그게 또 면밀히 들여다보면 막상 또 그게 일장일단이 있다오. SF 영화가 아니라 왜 지구가 타임머신인지, 어허 그렇지요. 하늘나라에서 보면 지구는 참으로 아름답다오. 세상은 신비로워서 너무나도 신기하다오. 그러면 그게 다냐, 그건 아니지요. 농담조로 추접스럽다고도 하고 불미스러운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긴 하더란 말입디다. 그렇다고 지구인이 이승을 떠나면 그 친구 누구요, 아 하데스 그 양반이 수학적으로 판결을 해야 하겠소? 자기가 무슨 검사 변호사도 아니고 영화처럼 예 아니오로만 답변하라는 듯이? 어찌 됐든 그건 나중 일인 법. 우선은 지구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현세를 아름답게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고, 선을 실천하면서 자기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오. 더디긴 해도 차츰 세상사는 좋아지는 듯 하오. 아마도 실존하는 지상 천국의 제일 쉬운 예는 그것이지 않겠소? 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의 즐거움을 아는 것! 바쁘다면 차는 나중에 마셔도 괜찮겠죠. 나라고 왜 마다하겠소. 신은 하나라면서도 그리스-로마 신화로 기적을 살았던 수많은 신들을 굳이 찬미하겠다는 데 그분들이라고 썩 꺼려하지는 않을 듯하오. 처지가 그럴 수 밖에 없겠구먼 그래. 선을 위해 날 찬양하겠다는 데 그게 대체 왜 나쁘겠소이까? 허나 예식에 따른 옷을 입는 사람일지라도 일과 외에는 취미로 헤비메탈에 심취해도 괜찮소. 그래도 된다오. 그 말이 뭐냐? 날 위해 살지 말고, 자기를 위해 살라는 말이라오. 기도할 때는 날 인용하고, 감탄사로 내 이름을 남발하고, 자기에게 유리하다면 날 핑계 삼아 감탄사를 남용할지라도 자기 인생은, 자기 인생은 신이 아닌 자기를 위해 살아야 한다, 그것이오. 그것을 무엇이라 하냐면 이기주의라고 부릅디다, 이기주의! 그게 그런데 본 뜻은 좋아, 좋은데 어째 어감에 꼭 숨겨진 뭔가 있는 듯 하긴 하단 말일세. 왜,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나를 위한 인생 즉 이기주의는 좋지만 그것에만 집중하면 선을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이라오. 그렇다고 이타주의자가 되란 말입니까 뭡니까? (워-워-워) 올커니! 듣기로는 그런 용어도 있다고 합디다. (조용조용히 귓속말로) 호-구. 허허허허허! 맞나요? 따라서 그 절충안이 필요하겠죠. 그럼 그건 무엇이겠소? 그렇죠 (딱) 사랑! 자기를 위해 살되 선을 실천하는 사랑을 노래하거나 선을 위한 신앙을 갖거나 그것은 모두 개인의 자유란 말이외다. 자기를 위해 살아야 하고, 선을 행하는 방법이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 후자를 위해 전자를 어디에 전임하는 일, 그것은 절대 쉽지 않다오. 그것은 일반적이지 않고, 그 마음이 변하기도 쉽다오. 그러므로 최선의 삶은 적당히 착하게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란 말이오. 네. 인간이시여, 부디! 음... 여보시오. 지금까지는 그대들이 신을 받들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신이 인간을 받들 것이오! 그러고 싶다오. 아니 아니 안되겠소. 사람 당신들이 내 위로 올라가든가, 내가 그대들의 밑으로 내려가는 게 낫겠단 말이오.」  ...... 오 신이시여! 누구... 아 네. 프로크루스테스! 우리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기억해야 한다. 바로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이야기. 자기 생각에 맞추어 남의 생각을 뜯어 고치려는 행위,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횡포. 종교가, 그처럼, 변해서는 안된다. 절대 안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악행은 아테니의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끝이 난다는 걸 잊지 말자. 저마다 다 자기 말이 맞다며 내가 진짜 라면서 장님 코끼리 뒷다리 만지기 식으로 그것을 신의 궁전 그 기둥이라며 인생을 허비한다면, 그렇다면 신은 하늘나라에서 퍽이나 좋아하시겠다. 만일 조물주가 있다면 그분은 하늘나라에서 그러실 수도 있다. 인간이여 그대들은 바른 삶을 살고, 인간의 삶을 즐겨야 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하며, 혹시 신앙이 있다면 글을 의역해서 착한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가기를! 그분은 단지 그렇게 바라실 것이다. 중차대한 과오를 범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윤리적으로 살기를 바랄 것이다. 앞뒤 떼고 기도를 얼마나 많이 드렸냐 절대적으로 1의 1을 골랐냐, 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그 반대라면 1의 1이 아닌 나머지는 다 망한 거다. 완전 줄 잘못 선 거다. 게다가 그게 1의 1이라는 보장도 없다. 2의 1일 수도 있다. 심지어 그분 자리가 공석일 수도 있다. 그건, 그건 말이 안된다. 조물주가 무슨 초딩도 아니고 말이다. 신은 경배에 목마른 존재가 아니라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잘 살아가게 하기 위해 고민하는 존재에 가까와야 옳다. 그게 맞다. 격식과 신성함과 절대적 선을 위해 경배나 의식이 까다로워졌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인간들끼리 잘 살라 적당히 착하게 살라는 것이지, 그 목적이 경배 자체에 있다면 그건 조물주가 초딩이라는 말 밖에 안된다. 겉과 속이 뒤바뀐 거다. 그것은 주객이 바뀐 것이다. 신은 주사위 게임을 하지 않는다. 주사위 게임은 인간이 한다. 그래도 뭔가 허전하니 첨언하자면 주사위 판을 누가 처음에 짰을 수는 있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과거 기준으로 만들어진 덕목과 부족했던 인간 존중 그런 것들, 현대에 완벽하게 다듬을 수는 없다. 차차 차근차근 다듬어가면 된다. 그러든 어쩌든 지금 이 세상에서 모순되는 여러 덕목과 다양한 종교와 무교의 권리를 모두 통틀어서 가장 어떤 기준에 가까운 제일 광범위한 개념을 신이라고 했을 때, 그 신은, 그분은 바로 돈이다. 돈! 그렇다고 돈을 위해 애초의 목적을 잊고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최소한의 규칙인 헌법에 위배된다. 삐요삐요, 수갑을 차게 되는 것이다. 종교에 따르지 않아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래서 법이 있고, 법원에 가면 법의 신 흉상이 있다. 법의 빈틈을 메꿀 수 있는 것도 적지 않다. 관습도 있고 평판도 있고 자성도 있다. 많다. 그러나 초심이 잘못됐을 때 많은 경우 돈-욕심이 화를 불러오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정치는 종교를 무시할 수 없다. 그처럼 종교도 선이라는 일반적인 의의를 모른 체 하면 안된다. 설명이 설교로 바꼈다. 종교 때문에 얘기가 길어졌기 때문에. 어렵고 헷갈리는 글보다 쉬운 말처럼 요약하면 훨씬 간편할 듯 하다. 종교.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는가, 를 떠올리면 된다. 국교와 국왕이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곳도 있지만 그건 명목상 의미가 크다. 엄밀히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무엇이 가장 세계적인가를 생각하면 된다. 원치 않았을지라도 누가 제일 유명한가는 개개인의 삶과 인생의 행보에 좋은 판단 근거를 제공한다. 쉬운 예로 교황이 있고, 아마데우스가 있다. 그러나 종교는 선택이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분적으로 함께 하는 덕목일 뿐이다. 그래서 종류도 많고 분파도 많다. 지역별로 문화적 차이도 있다. 사람들도 각양각색이다. 뉴스의 노른자는 정치, 경제, 사회다. 종교는 종교다, 보다는 종교는 예술과 문화와 교양과 떼어서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분야라는 것이다. 인류 문명에서 종교가 체계화되기 이전에 이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가 있었다. 훨씬 전에. 신화가 있으면 민담도 있다. 점성술이 있는 한편 토속 신앙마저 전통은 유구하다.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제창한 이후로 지구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우주의 기원과 미래는 어떠할지도 알게 됐다. 반면 지동설이라는 남자의 심리와 달리 여자의 심리는 천동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해를 기반으로 하는 양력이 표준이고, 그 외에 달을 기준으로 삼아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을 기준으로 만든 역법도 있다. 무교도 있고, 일 때문에 교당에 나가는 사람도 제법 많다. 종교적 의미보다 생활의 의미 때문에, 삶의 자세와 인생을 대하는 태도로서 종교와 함께 하는 사람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구교네 신교네 깊이 들어가면 머리 아프지만 성모 마리아는 이미 과학으로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종교는 신성하니 (다양한) 종교는 종교의 역할을 하면 된다. 종교는 선택할 수 있고 다양하지만, 그 목적은 크게 다르지 않다. 거의 공통적이다. 단일한 덕목을 하나만 들자면 그것은 바로 선이다. 그 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동안 일들도 많았고 얘기도 많았다. 참 많았다. 성선설이 맞든 성악설이 맞든 종교가 의도하는 기간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라는 이승을 지향하고 있다. 종교가 바라는 목적이자 소원은 선이다. 종교가 그 뜻을 함께 하고자 하는 대상은 왕도 아니고 특정 신분도 아닌 보통 사람이다. 옛날에는 종교와 왕권이 겹치고 종교가 다르면 막 시끄러웠다. 때문에 옛날에는 최소한 피라미드의 위는 종교적이어야 했다. 그때에도 황금은 중요했으나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종교적이어야 했다. 마치 어떤 지역에서는 옛날에 국어에 관하여 말은 있으나 글은 없었기 때문에 외국어를 알아야 지배적인 신분에 걸맞는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처럼 옛날에는 특정 분야가 학문, 업종, 직업, 생활등 사회 전반적인 흐름을 이끌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꼈다. 피라미드가 뒤집히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강자가 속속들이 세상을 장악한 것이다.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규칙에 대해서 제일 공통적이며 절대적인 가치 단 하나는 바로 돈이다. 그처럼 지금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신이 아닌 돈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말이 그렇단 소리다. 그러나 엄한 낭설도 아니다.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종교도 신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대의 질서이자 규칙인 돈이 왕좌에 앉아 있다. 황금을 빼면 종교는 절대 잘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지구는 다시 평평해졌다. 그래서 가장 공통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종교? 아니다. 종교는 다양성이고, 가장 공통적인 것은 이렇다. 첫째 돈, 둘째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는가. 유감스럽지만 종교는 그 순위에 오르지 못했다. 왜냐하면 종교는 다양성인 성격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순위에 넣어야 한다? 무엇을, 1의 1을? 그것은 시계를 중세로 되돌리는 발상이다. 인류의 발전과 수많은 기준을 제공했지만 현재는 내일로 가야 한다. 어제는 기억해야 하는 것이지 돌아갈 목표가 되서는 안된다. 종교를 배우는 곳도 있다. 하지만 그건 대체로 선택에 해당하고, 현재보다는 과거에 그런 경향이 컸다. 사람을 위해 종교가 있는 것이지, 종교를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는 없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종교에서 과학으로 어떤 비중이 바꼈다. 과거의 종교 곧 신에 해당하던 비중을 하나를 꼽자면 현재에는 돈이다. 그렇다고 돈이 신의 후계자는 아니다.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보면 이미 반박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현실이 그렇다. 불미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그건 슬픈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가올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서나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똑같다. 언어, 산수, 과학, 사회, 도덕, 예술! 고로, 무엇이 표준이고 무엇이 선택인가를 알면 사는데 도움이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왜 사람 위에 각종 개념들이 그렇게 많은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초등학생이 배우는 과목을 누가 정했나? 법이 정했다. 법! 법은 누가 정했나, 인간이 만들었다. 법의 신은 누구인가 까지는 가지 말자.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각양각색인데, 현재의 선은 미래에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데, 인간은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데, 너무 빡빡하게 굴었다. 석고대죄드릴 수 밖에 없다. 싹싹 빌고 잔소리를 경청해주신 데 대해서 고마워할 수 밖에 없다. 성은이 만극하옵니다. 바람 피우고 한눈 팔고 그런 건 아니지만 두말없이 굽히겠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다이아몬드이기 때문이다. ...... 라~고 생각해봤는데 아마데우스는 아무한테나 이런 생각을 밝힐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예전에 동자승의 민들민들한 머리를 만져봤기 때문이다. 그때 한 소리 들었다. 그러면 안된다고. 그러는 거 아니라고. 자기가 만진 게 아니라 손이 끌려가서 자석처럼 붙어버렸는데 말이다. 아마데우스는 누구를 만나던 과학자나 무소속 일반인을 만나던 전부 맞춤식으로 그는 딱 한마디만 할 것이다. YES라고! 그걸로 부족하면 한마디 더. 그렇소 당신 말이 맞소이다 라고. 그처럼 의견도 많고 지켜야 할 관습도 많다. 사회 규범도 있고 시장 규칙도 있다. 만나는 사람의 배경과 문화와 취향은 물론 교양도 파악해서 상대해야 한다. 문화도 다르고 유행도 바뀐다. 우정은 물론 사랑과 사람도 변한다. 눈치도 봐야 하고 분위기도 살펴야 한다. 그게 다냐, 다가 아니다. 그럴 리가 있나. 유니폼을 입었으면 유니폼 값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본능은 대체 뭔 죄란 말이더냐 먹고 마시고 입고 자고 보고 듣고 놀고 그게 왜 죄란 말인가. 진보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데 퇴보가 웬 말이냐. 언제는 당신만을 끝없이 사랑한다네 어쩐다네 하더니 이제 와서 뭐? 말은 안 그래도 완전 이거지 않냐, 잡은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어디 그 뿐인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날은 벌써 임박했다, 의무-방어전! 학교를 졸업한다고 영원히 공부와 작별하는 것도 아니다. 이론과 실재도 다르고 뭘 또 지키면 또 지킨다고 뭐라 한다. 안 지키면 안 지킨다고 뭐라 한다. 빡빡하게 그게 뭐냐고. 전부 다 자기들 기준이다. 다 자기가 지존이고, 다 자기가 백조고, 다 자기가 왕이고, 다 자기가 최고다. 어디서나 자기 합리화는 빠질 수 없고, 언제나 동기 부여는 빼놓을 수 없다. 푸쉭푸쉭, 살살살 딸랑딸랑, 달콤한 언사와 교묘한 화법과 마음을 녹이는 언변, 어디가든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 이러니까 간혹 보면 사람들은 그런 글씨가 씌여있는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바로, 이기주의자! 맡은 역할도 많고, 의무와 권리는 약간 다르고, 할일은 많고 돈도 벌어야 하는데, 그러나 재미가 없네 재미가 없어. 그래서 그런다. 아아, 나는 귀를 막겠다. 나는 정했다. 누가 뭐래도 한번에 한 가지만 하겠다고. 원래 남자는 전화 통화하면서 막 다른 일 이것저것 잘 못한다. 용건만 말하고 요점을 정해서 목적을 이루기, 가 아니라 불분명하게 서열 없는 관계를 돈독히 하고 친분을 형성한다? 차보다는 술을 부르게 된다. 진공청소기는 커피포트로 바뀐다.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문지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회사에서는 앉으나 서나 성과─어제보다 나은 목표─오늘도 성과─내일도 성과, 집에 오면 친절과 자상함과 다정함을 비롯해서 슈퍼맨 아빠로. 아 피곤하다 피곤해. <한번에 한 가지만 하기>. 업적이 뛰어난 명성도 명성이지만 훌륭한 군인 하면 동네 아저씨 같은 군인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하루에 한 가지만 시키기. 그런데 그 한 가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날 완수할 것. 그처럼 사람의 생활은 모두 잘할 것을 종용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처음의 꿈이 어쩔 수 없이 변경되거나 어떤 깨달음으로 인해 그것은 조정되기도 있다. 한번에 한 가지만 하기. 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미래의 이상을 현재로 가져오거나 신비로운 꿈을 실현하는 건 모르겠고 누가 뭐래도 원만한 가정을 가꾸겠다, 나는 딱 하나만 즉 일로써 성공하겠다, 나는 뭘 해도 중간만 가겠다, 나는 가족과 건강을 최우선 순위에 올리겠다, 나는 팔방미인 관심 없고 누가 나중 회상했을 때 아 그 사람 참 괜찮았어 라며 큰 오점이 없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겠다 등등. 나는 존경을 받고 영웅이 되고 인기로든 황금으로든 기쁨으로든 뭐든지 1인자가 되겠다고?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친한 친구끼리라면 몰라도. 어중간하게 호감 있는 세 여자를 거느리느니 한 여자와 찐하게 연애를 하는 게 낫다. 그래야 나중 상실감이든 체념이든 회상이든 추억이든 뺨 맞고 이별하든 뭐라도 남는다. 시간이 지나서 그건 사랑이었을까 라고 당시의 사랑을 지금 판결하게 된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애들 장난이나 어른이 했던 사랑의 불장난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이란? 여자들의 사랑학과 그녀들의 사랑법과 숙녀의 재잘거림과 다중 작업은 답이 없다. 최소한 마초에게는. 원래 수다라는 게 그런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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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아마데우스는 축구장에 도착했다. 힘겹게 왔다. 어이쿠~! 거기서부터 그는 도시의 고독한 사냥꾼으로 돌변했다. 어디 혼자 온 슬픈 사연을 간직한 듯한 그런 아가씨 없나 라면서. 그런데 진짜 있었다. 그녀는 낯선 여인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이브였다. 서포터즈 조마조마에서 아마데우스를 추종한 여인들 가운데서 이런 말 하면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굳이 밝히자면 그녀는 네 번째였다. 뭘로?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왜 그녀의 순위를 그렇게 저평가했었나 몹시 의아한 느낌에 그는 기분이 들썩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마데우스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고수이고 싶었던 것이다. 누가 하수라고 할까 봐 지레 가슴 졸였나 보다. 게다가 피앙세 생각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다. 하나의 의도에 집중하니까 딴 생각은 물러가버렸다. 손을 반듯이 펴서 눈썹이 붙여본다. 안 보인다. 멀리 갔나 보다. 그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좀 튀어보이기 위해서 이어폰을 끼고서 막 글을 쓰는 척 했다. 혹시 그녀가 자기를 발견할 찰나 그 잠시를 위해서. 사가지고 갔던 햄버거와 우유를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원래 햄버거에는 콜라지만 그는 왠지 햄버거와 우유를 같이 먹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건 살짝 미뤄둘 수 밖에 없었다. 아마데우스가 뭐 수줍어하는 가시내도 아닌데 그처럼 어리석게도 숙녀를 유혹하는 이상한 수법을 진짜 구사했냐고? 물론! 그랬다. 진짜다. 허튼 수작일 수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고전적인 방법이 저절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괜히 아마데우스가 먼저 이브에게 반가운 척 인사하고 그녀의 옆자리에 딱 앉았다가는 바로 그때 화장실에 갔던 그녀의 남자친구, 그것도 우락부락하며 완전 무섭게 생긴 남자친구가 짠~하고 나타난다면 것도 퍽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아마데우스는 여자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 아마데우스의 옆자리로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특유의 카우보이 몸짓으로 줄을 돌리고 던져서 끌어당기는 그런 웃긴 짤막한 무언극을 펼칠 필요도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비법은 딴 거 없다. 공부를 하는 것이다. 공부를 못하는 친구들은 공부를 안하는 게 전부다. 방법에 따른 결과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선은 공부를 실제 하는 행위의 실천이 거의 다다. 공부 못하는 친구는 공부를 잘할 줄 몰라서, 잘하기 싫어서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다. 그 학생은 첫째로 공부를 안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다가 거울을 보고, 거울을 보다가 화장을 고치고, 화장을 고쳤으니 다시 공부를 할까 하다가 이걸 어쩌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그걸 듣고 생각한다, 공부 시간은 잠시 쉬는 시간으로 바뀌고, 그러다 남자 이야기로 빠지는 것이다. 그게 다다. 일도 그렇다. 경영학의 대가가 그랬다. 일하는 시간을 적어보라고.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 말고.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생각이 딴 데 가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바로 그것을 뭐라 하느냐, 측정이라고 한다. 일도 공부도 하는 것이 기본이다. 성공은 대체로 실패의 횟수와 비례한다. 큰 성공? 큰 실패와 종이 한 장 차이다. 많이 걸어야 크게 성공하는 일이 많다. 일이 뭐 카드 게임은 아니지만 말이다. 해도 해도 안되더라, 분야나 방법을 바꾸면 대성할 것이다. 해도 해도 사랑의 아픔은 쓰디 쓰다? 큰 실패와 큰 과오와 막무가내식 꽃 들고 쫓아다니는 사랑만 거듭했으니 이제는, 곧 있으면 드디여 진짜 사랑을 만날 것이다. 타당한 진리의 시작은 가설이고, 위대한 명작의 첫걸음은 심심함이며, 멋진 인생의 비밀은 바로 새로움과 여심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공부는 하는 것이고, 돈과 호박은 제 발로 굴러들어오는 것이며, 일은 측정이라고? 그러면 사랑은 무엇이에요, 오빠! 오빠? 어 오빠! OK! 괜히 공부를 잘하는 비법과 일은 측정이라는 말을 꺼낸 게 아니다. 다 사랑을 위해서 밑밥을 깔아놓은 것이다. 걸려들었다. 앗 월척이다. 농담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수확의 시간이다. 사랑을 위한. 자, 다시 그 시간이 돌아왔다. 사랑이란!
   사랑은 오빠다. 농담조로 써봤다. 누군가 오빠라는 말을 듣지 못하시는 분이 계실 테니 오빠라는 글을 읽어서 그 기분을 대신하라는 뜻에서 오빠라고 독백을 해봤는데 아아 재미없다. 그런데 오빠라는 말만 들어도, 오빠라는 글씨만 읽어도, 오빠라는 뜻을 생각만 해도 기쁜 사람이 여럿 된다는 게 정말일까? 그렇다. 꽤 된다. 아, 사랑 사랑. 언제 어디서든 사랑이 문제구먼. 나 원 참, 그 쉬운 걸 가지고 말이야. 다른 사랑론은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강론되었으니 여기서는 간략히 하나만 밝힌다. 아마데우스는 사랑을, 연애를, 끌림과 떨림과 설레는 두근거림과 홀딱 반해서 황홀감에 흠뻑 젖게 되는 그 신비로운 감정의 모든 발단을 딱 한 단어로 집약하고자 한다. 딱 한 단어로. 그것은 바로 관찰! 낙원에 가면 놀아야 하고, 흔들의자에 앉으면 의자를 흔들고, 향기롭고 싱그럽고 한껏 물이 오른 성숙한 사과 열매를 보면 따고 싶어지며, 고운 꽃을 보면 탐난다. 안 그러면 문제 심각한 거다. 비정상이란 말이다. 재밌는 이야기라고 하면 듣고 싶어진다. 할 말이 있다고 하면 할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누가 날 사랑하면 그 사랑을 받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의 포로로 만들 것인지 작전을 짜야 한다. 그건 모두 순서에 따르는 것이다. 형식대로 적용하는 것이고, 누구나 본받는 규율이다. 하나의 전형과 모범으로 알려져서 만인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때문에 그건 새롭지 않다. 달리 말하자면 그건 낡은 방법이다. 따라서 기인이 볼 때 그것은 재미없다. 어린이는 세상 모든 일이 즐거울까? 동화나 교양 프로그램에서는 그런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인식할 수도 있다. 아름다운 척 재미있는 척, 그것이 연상되니까. 그러나 아니다. 어린이도 이미 다 안다. 이 세상은 제약이 많다는 것을. 뭘 해도 심심하다는 것을. 스무살 애기? 스무살 젊은이도 안다. 세상, 사랑, 일, 대망, 소망, 애교, 배짱, 행복과 불행, 섬세함과 대충대충, 쾌적함과 불쾌감까지. 그러나 스무살도 여심을 잘 아는 젊은이가 있고, 해도 해도 여자의 마음은 통 모르겠다는 친구도 있다. 그러나 천재가 되면, 마침내 도사가 되면 다 보인다. 모든 것을 알게 된다. 말 몇 마디 나눠 보고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책? 선거 출구 조사처럼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몇 문장, 어휘, 목차, 그래프, 표지 디자인만 봐도 대번에 답 나온다. 그걸 뭐라 하느냐? 편견이라고 한다. 그러나 편견은 상황이 좋아졌을 때 당시의 교양을 지금 편견이라고 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편견은 아니다. 선입견은 십중팔구 맞다. 선입견은 대부분 중요하다. 아주 엄중하다. 도움이 많이 된다는 뜻이다. 롱테일은 드물거나 변화가 심하고 어려울 수 있다. 그러므로 바람둥이는 타고난 재간을 바탕으로 왕성한 관찰력을 기반으로 하여 놀라운 통계, 유의미한 선입견을 만들어낸다. 그걸 강습료 내고 배우는 일도 허다허다. 일도 똑같다. 그걸 드라마로 만들면 인기와 돈은 따르지 않을 수가 없고. 자, 다시 요점으로 돌아와서. 사랑은, 사랑은 <관찰>이다. 세심한 표정 하나만 봐도 그대가 날 사랑할지 사랑하지 않을지 알 수 있다. 작은 행동 하나만 봐도 푼수 같은 그녀가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여자는 둘로 나뉜다. 여자는 완벽하게 둘로 나뉜다. 여자가 남자를 유혹할 때 정확히 둘로 나뉜다. 그 자잘한 행동 가운데서 딱 하나만! 여자가 쪼그려 앉거나 상체를 숙였을 때 상의와 하의의 틈이 환해진다. 여자가 자기 뒤에 있는 남자를 발견한다. 그 여자와 그 남자는 아는 사이다. 이때 여자의 행동은 정확히 둘로 나뉜다. 놀랍게도 그 통계 역시 어중간함 없이 군더더기 없이 딱부러지게 둘로 나뉜다.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 어떤 돌쇠라도 얘는 꽃 들고 쫓아다니고 기다리고 따라다니면 넘어오겠다, 넘어가겠다, 아마도 보인다. 주변의 일꾼들과 난봉꾼에게 비법을 전수받더라도 썩 다른 사랑론을 털어놓으시지는 않을 것이다. 얘기가 길어졌다만 아무튼 지금 당장 아마데우스와 이브는 저만치 떨어져 있다만 잠시 후가 기대됐다.


   19

   와! 어쩜 정말 거짓말처럼 이브는 아마데우스 곁으로 다가와서 은은한 색상의 원피스 엉덩이 부분을 의자에 가까이 하며 앉으려고 했다.
   「아, 잠시만!」
   아마데우스는 손수건으로 의자를 닦아주었다. 그런 후 이브는 의자에 앉았다.
   「오빠 웬일이야? 오빠가 이제 조마조마에 나오지 않길래 우리끼리 얘기가 많았어. 오빠가 수도원에 들어갔다더라, 아니다 실연당한 후로 어떻게 되어 버려서 머리 빡빡 깎고 어려운 시험 공부에 매달린다더라, 아니다 나이트클럽에 취직했네 시인이 됐다네, 누구는 어느 도박판에서 오빠를 봤다는 둥 말들이 많았어. 또 뛰어 봐야 벼룩이고 뛰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이지, 요즘에는 아이스크림 가게나 술집이나 가리지 않고 푸딩을 들고 다니면서 막 마술 보여준다는 식으로 여자를 꼬시는 걸 똑똑히 봤다는 둥. 말들이 많았다니까 오빠. 오빠, 정말 그랬어? 오빠 원래 그런 오빠 아니잖아? 아, 오빠는 날이면 날마다 여자 꽁무늬만 쫓아다니는구나~!」
   「얘가 얘가 어디서 그런 뚱단지 같은 헛소문을 듣고서... 설마 진짜 믿는 거 아니지? 오빠는 이브 믿는다. 그럼.」
   「그럼. 농담이지. 오빠가 어디 그냥 오빠인가. 지금이니까 뿔뿔히 흩어져서 그렇지 그땐 조마조마 즐거웠잖아. 우리들이 오빠 좋아했고. 오빠는 우리를 아꼈고 챙겼고. 한참 멋진 남자가 나타날 꺼라네 어쩐다네 하다가 맨날 쫀쫀한 남자애들만 가뭄에 콩 나듯 나타나고 그러긴 했지만 말이야. 아 오빠! 그때 누구한테 들었드라... 아 맞다. 앨리스가 그랬어. 오빠 서포터즈 간당간당에 막 게스트로 참석하고 그랬다며? 지금은 바람이 잦아들었지만 한참 응원 재밌게 할 때는 서포터즈에 뭔 바람이 불었는지 다들 두더쥐를 하나씩 둬서 막 경기 중에 실시간으로 상대편 보면서 응원했다니까. 요즘 장비 흔하잖아 오빠.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재미있었으니까. 제일 많이 나오는 얘기가 뭐였드라. 야 늬들 자신 있으면 와라, 이리 와라, 야 야 와 봐, 왜 못 오냐, 겁나냐, 그런 말들. 지금 이렇게 가만 앉아서 조용히 경기를 볼려니까 좀 심심해. 차라리 그때가 재밌었어. 물론 오페라도 좋긴 한데 그래도 들썩들썩 노래 부르고 춤도 추고 그러는 게 신나잖아. 그렇지만 다들 바쁜지 이제 조마조마 애들 잘 안 모여. 그래서 심심해.」
   「뭐? 심심해? 오빠가 재미나게 해 줄까? 우리 이브가 뭘 좋아했드라, 가만 있자. 오빠가 멋진 남자 한 명을 알고 있는데 지금 바로 불러낼까? 어때? 싫다고? 알았어. 진짜? 괜히 한번 튕겼다가 막 집에 가서 내내 후회하며 그 앵두 같은 고운 입술이 이만큼 튀어나오는 거 아니겠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언제든지 말만 해. 일단 말은 해. 오빠가 들어줘야지 별수 있나. 오빠가 아는 멋진 남자도 만년 백수가 아닌 이상 바쁠 테니까. 녀석이 진짜 멋지면 바뻐야 정상 아니겠니. 집에서 강아지 팔자 마냥 백판 자빠져 노는 남자라면 우리 이브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은 아닐 꺼야. 아마도.」
   「그런데 오빠. 있잖아, 남자들은 어떤 여자 좋아해?」
   「남자? 남자들의 세계를 알고 싶니? 거 알아 봐야 재미없는데. 알고 나면 괜히 알았다는 심정을 느낄 수도 있어. 그럼.」
   「그래도 무언가 좀 색다른 얘기 좀 해주라 오빠야. 흔히들 여자가 듣고 싶어하는 그런 거 말고 말이야. 응, 오빠.」
   「아 그래? 그럴...까? 우리가 또 여자에 약하잖아. 이브가 부탁하는데 오빠가 또 모른 체할 수 있나. 냉큼 뭔가를 또 지어내야지. 음, 무슨 얘기를 해줄까. 남자? 그건 좀 식상하고. 사랑? 것도 조금 평범해. 그러면 여자? 그래 여자! 오오, 그게 먼저지. 나를 잘 알아야 이 세상에서 사는 게 즐거워지는 법이거든. 음 그렇다면 먼저 이브의 주변 인물들을 봐 볼까? 저번에 애들이랑 친하게 지낼 때 있잖아 이브야. 이브는 누구랑 제일 친했니? 말은 누가 제일 많이 하고? 리더는 누구였고!」
   「아 장미랑 별이랑 사라랑 앨리스? 그야 뭐 난 원래 사라랑 단짝이니까 둘이 제일 가깝긴 했는데, 그런데 사라가 남자친구 생긴 후부터는 좀 멀어졌어. 처음에는 장미랑 별이랑 또 하나의 콤비였는데 둘이 싸웠는지 아니면 한 남자를 놓고 다퉜는지 어째 좀 언제부턴가 서로 말을 안하더라구. 그런 적이 있었어. 그래서 별과 내가 한동안 붙어다녔고, 장미는 앨리스랑 급하게 친해졌어. 그리고 같이 모여서 놀 때는 음 누가 막 나서서 말을 많이 하고 그러지는 않았고. 우리가 너무 순진한 건가? 하긴 우린 내숭도 별로고, 공주과도 아니지. 완전 털털해. 그런데 왜 멋진 남자들이 우리한테 막 구애를 하지 않는지 슬플 뿐이지. 그렇다고 진짜로 분한 건 아니라네 오빠야. 그게 다야 오빠.」
   「아 그랬구나. 대충 견적만 뽑아 봐도 정상이네. 나 보통, 이라고 딱 이마에 씌여 있군. 정확히 스무살 처녀의 평균이긴 한데 물론 꽃다운 나이에 뽀얀 살결과 샴푸 선전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머릿결과 고결한 청순미를 자랑하지만, 아직은 누가 뭐래도 여성잡지1이야. 여성잡지2를 읽고 쓰고 취재하며 그것을 만드는 전문가들이 볼 때는 완전 애란 말이지. 그래서 숙녀는 자기를 잘 몰라. 아직 그럴 수 밖에 없어. 왜? 아직은 꿈과 희망과 미지의 미래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이 자기를 조금은 이끌고 있거든. 그래서 거기에 끌려가다가 마음은 멜로로 몸은 아동극으로, 낮에는 청춘 드라마로 활약하고 밤에는 추리소설에 빠질 수도 있어. 그렇지만 걱정하지는 마. 다 그러니까. 그게 정상이야.
   흔히들 여자 하면 수다쟁이라는 상징성이 세간에 퍼져 있지. 하지만 그건 실은 사실과 조금 달라.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계속 반복하는 수다쟁이도 있긴 하지만 수다쟁이도 분과가 나뉘어. 조용조용 가만 있다가 한번에 터지는 수다쟁이도 있고, 썼던 글 계속 변형해서 또 쓰는 수다쟁이도 있고, 오직 남자와 사랑과 연애에만 불을 밝히는 수다쟁이도 있지만 그쪽보다는 더 넓게 여자의 특성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이브, 오빠 얘기를 잘 들어보렴. 오빠 말이 맞나 안 맞나, 잘 판단도 해 보고 말이야. 여자가 잘하고 좋아하고 즐겨찾는 부분 말고, 여자가 약한 게 뭔가를 알아보면 어떨까? 왜냐하면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도 그걸 알아야 뭘 하더라도 제대로 할 테니까 말이야. 여자는 무엇에 약하다, 여기서 무엇의 범주에는 어떤 것을 넣어야 할까? 일단 떠오르는 건 권위. 아 주관과 권위는 거의 뭐 쌍벽이겠네. 아닌가, 아니네. 그렇지? 답은 숙제고, 그리고 꼭 약하다 라고 하기는 뭐해도 굳이 살짝 한쪽을 걸쳐놓자면 뭐가 있을까? 동조성, 단짝 의존도, 까다로운 친분, 교분의 시작, 격식, 카리스마도 서로 자기를 언급해 달라고 보채긴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만 얘기하자구. 하나만. 막 이것 저것 많이 얘기하면 들을 때는, 읽을 때는 뭔가 있는 듯 하지만 나중 돌아서면 아무 것도 없어. 다 까먹는다고. 땀 뻘뻘 흘렸는데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 허무하게 말이야.
   그러니까 이번에는 <말수>에 대해서만. 말수! 보통 시인으로 문학계에 등단하면 중견 시인이 처녀작으로 막 등단한 시인한테 그런 얘기를 해준다더군. 처음 작품이나 또는 2번째, 3번째 책까지 쓴 작품을 나중 내내 반복할 꺼라고. 음반도 그래. 아마데우스의 교향곡처럼 1번에서 41번까지 거의 반듯한 상승세를 그리는 음악가들은 드물어. 증권업에서도 그런 주식은 찾기 힘들고 말이야. 그건 어느 업계든 비슷해. 했던 애기 하고 또 하고 계속 반복하는 수다쟁이 말고, 이브랄지 장미와 별과 사라와 앨리스를 봐 보자구. 그녀들은 흔히 여자 하면 수다, 여자 하면 횡설수설, 그런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부류에 속하지 않아. 지켜보니 그렇더라고. 여성잡지1에서 말수가 그만그만하다가 여성잡지2로 변하면서 말이 많아지는 유형도 있는데, 지금은 여성잡지1에서 말수가 많지 않은 숙녀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자. 말수가 없는 여자는 하나의 커다란 장점을 잠재우고 산다고 할 수도 있어. 이브도 아다시피 남자는 원래 그녀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발음되는 <오빠>라는 낱말을 사랑하거든. 그게 남자니까. 우리는 원래 그렇게 만들어졌어. 변할 수 없는 이치야. 변하면 섭하지. 너무 섭섭해. 우리는 원래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리거든. 푸하하하하하하,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것은 개인적으로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그렇다면 1막을 접고 2막을 살펴보자구. 이쁜 그녀가, 꽃다운 숙녀가, 바로 천사 같은 이브가 말이 없다. 음... 그녀가 말이 없네 말이 없어. 왜 말이 없지? 왜일까? 왜 그런 것이지? ...(침묵)... 할말이 별로 없으니까 그렇지. 재미없으니까. 매사 시시하니까. 항상 심심하니까. 뭘 해도 재미없으니까. 남자만 그런 게 아니야. 여자도 사람이잖아. 그런 거라고. 그런데 그 따분하고 재미없는 집안 일을 여자한테 전임하고 우리는 룰루랄라 떠나서 신나게 논다? 옛날에는 그랬지. 옛날에는. 말수가 없는 건 할말이 많지 않으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말수가 없는 건 속에 담겨진 광대한 자료를 말로 어떻게 표출할지를 모른다는 것과도 같아. 조금은 그래. 알긴 아는데 딱 구체화되기가 힘들어서. 왜냐하면 내 안에 담겨진 웅대한 자료를 놀랍도록 압축해서, 때로는 웃기게 때로는 신선하게 때로는 과장해서 때로는 일부러 서투르게, 바로 그처럼 표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 압축의 대명사인 헤드라인을 수십 년 읽고 스포츠 해설자의 말과 깐족거리는 고품격 코메디언 겸 예술가의 화법을 오래 들어서 체득해야만 뭐가 고급스러운 농담이고, 뭐가 수준 높은 작품이며, 무엇이 탁월한 안목을 필요로 하는 명작인지 알게 돼. 여성잡지2 편집장에게 시켜 봐. 그냥 그분이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상상을 해보자구. 야 편집장, 닥치고, 딱 닥치고, 10대와 20대들이 열광하는 TV프로그램을 보고 그들처럼 살고 그들처럼 놀아봐, 라고. 그 편집장은 어떻게 될까? 드라마처럼 빙의될 몸뚱이 딱 만들어주고 그렇게 상황이 됐다고 가정한다면. 그 편집장은 몇몇 좋은 경험도 하겠지만 침흘리며 환장할 뭔가가 있을 수도 있긴 하지만, 그분은 대체로 막 따분하고 시시하고 왜 이렇게 인생을 허비하고 시간 낭비를 해야 할까, 저 재미없는 코메디 방송이 뭐가 재밌다고 그렇게나 극성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꺼야. 어떤 오락 프로그램? 오그라드는 완벽한 유치함! 웃음의 방식이 완전히 몸개그와 말장난 뿐이야. 권성징악은 몰라도 고급 유머는 찾기 힘들고 그야말로 정확하고 완벽한 약육강식이네. (말이 그렇단 소리다) 그러나 조증 걸린 친구가 있으면 단정한 친구도 있는 법. 그런데 영화 장르가 뭐 가~족? 허걱! 드물게 마라톤 스포츠 중계나 퀴즈쇼를 흥미진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것도 매주 봐야 한다고? 어떻게 그걸 진득하게... 신기하네! 이런 뭐야 쟤는 완전 흥미 위주의 수필만 오직 가벼운 연애 교본만 읽는다고?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말이 그렇단 소리다, 는 이제 그만) 음악은 최신 유행가만 그것도 몇 번 들으면 질리니까 최신만 상대하고, 녀석들이 감상한 후에 한참 후순위로 그 열광을 우리들이?   「뒷북도 그런 뒷북이 없네. 잠깐만. 뭐야 우리가 떨거지야 뭐야? 사람을 뭘로 보고! 이거 왜 이래, 어? 내가 뭘로 봐서 촌년이야? 어? 나 백조야 백조? 어? 알어? 이 인간이 보자 보자 하니까 누굴 보자기로 아나! 이래 봬도 나 편집장이야 어? 편집장이라고!」   ...... 알긴 알았는데 거 왜 좀 그렇구만. 어머 어머 이번에는 따라할 상대를 잘못 골랐네? 얘가 진짜 여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인간이잖아! 이 친구는 또 뭐야 오직 관음증만 상대한다고? 얘는 아 뭐라 말이 안나오는군. 그래도 뭘 좀 아는 친구도 있겠지 아~ 찾았다 그래 있다니까 문화와 예술 취향이군 하하하하하. 뭐시여! 그렇긴 한데 이 친구의 지식과 교양과 상식과 안목과 수준이... 응애응애~ 애기구먼! 할 일이라곤 화장법과 연예계 지식과 먹고 마시고 노는 것 밖에 없어? 진짜 그게 다야? 그게 죄는 아닌데 죄는 아니야. (말이 그렇단 소... 아니지. 맞자나? 젊음의 허무와 방황과 번민. 불투명한 미래와 그려지지 않는 꿈. 없는 돈. 빈약한 재능. 젊음은 아름답고 신비롭다는데, 젊었을 때 꼭 해 봐야 할 단 하나는 바로 사랑이라는데, 그렇지만 조언이 다 어설퍼. 설명이 있어도 납득이 안돼. 마음에 와 닫지 않는다고. 사는 동안 심심하다 재미없다 그 말 몇 번 했고, 그 감정 몇 번 느꼈는데! 안 그렀소? 젊은이들! 아휴 그냥 이참에...... 워─워─워) 아는데 이미 다 아는 건데, 무엇보다 내가 옛날에 그렇게 살았단 말 아니야? 오오 맙소사 세상에나! 그래도 좋게 생각하자면 나는 여성잡지1의 독자에서 여성잡지2의 편집장으로 성장한 모양새니 그래도 성공한 거네? 뭐 그걸로라도 위안을 삼아야지 어쩌겠어. 같은 예로, 흥미 위주의 선정적 매체와 자극적인 영상과 가벼운 글을 주로 선호다가 나중 권위적인 남성잡지의 편집장이된 꼴(?)은? 그거나 그거나! (놀 거 다 놀고 편집장 됐단 말은 한마디로 천재라는 거다. 범생이 세계에서 독보적인 인물은 아마도 타고난 천재 베짱이과다. 놀 거 다 놀더라도 꾸준히 노력했겠지만. 잊혀진 정치인과 날 업그레이드시켰던 전-회사 사장과 뭐 그런대로 괜찮았던 전-애인의 좋은 추억과 장점보다 유독 오점이 커 보이듯 기억되듯이. 그런데 일류 편집장은 절대 뽐내지 않는다. 꽁트의 여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좀처럼 으스대지 않는다. 왕년에 좀 놀아봤다고. 오히려 숨긴다. 차라리 반긴다. 타인의 허세를. 뭐든지 일로 연결시킬려고. 왜냐하면 프로니까. 나 봐라 나, 뼈 속까지 소설가이지 않나. 웩! 뭐 그럼 우린 뼈 바깥까지만 문필가인가? 워─워─워! 그러나 삼류는 혹시 그거 뻐기는 게 아닐까란 반 박자 늦은 의문이 들 정도로 가장하며 묻는다. 놀 거 다 놀고 벼락치기 공부 하지도 않고 그냥 자세만 까딱 잡아 보고 어디 들어갔다고, 뭐 됐다고, 뭐 타 봤냐고, 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한 건 아닐까 라고. 일류가 부리는 허세는 통상적으로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농담이나 은근한 허당과 고급스러운 허풍에 가깝다. 재밌다. 신기하다. 진공청소기다. 그러나 삼류가 일류와 똑같은 허세를 부리면, 그건 자기만 봐야 할 패를 남에게 친구에게 거저 보여주는 거다. 액면으로 충분한데도. 아 얘는 왜 이렇구나 라고. 하지 마 그거 하지 마 멈춰 제발 멈추라고 엉덩이 까지 말라고, 이 나 이런 이거 정말! 그건, 재미없다. 씁쓸하다. 커피포트다. 그렇지만 학교 다닐 때는 괜찮다. NDJM을 필두로 순진한 척 왕/자뻑왕/침묵왕/쪼잔왕/리액션왕/연체왕/이중인격왕/침튀기기왕/별명왕/식탐왕/야동왕/굴욕왕/비명왕/염장왕/째려보기왕/초딩왕/귀찮게하기왕 등등 다 괜찮다. 왜냐하면 권장하고 용서되고 세상을 알아가며 어른으로 커가는 과정이니까. 친한 사이래도 절반 쯤 괜찮다. 두툼한 지갑이랄지 그 무엇, 그 다음과 푼수끼가 상응하면 노-재미는 차치하게 된다. 왜냐하면 친하니까. 삼류가 일류인 척, 웃어준다. 하지만 삼류가 간혹 특정한 무언가는 삼류라는 포지셔닝에 타협하지 않고 일류를 고집하는 건 존중하는 게 낫다. 누구나 그런 거 하나씩은 있으니까. 원래 삼류가 일류가 되는 경과는 그런 세세한 부분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평범한 삼류와 특이한 삼류의 적지 않은 차이다. 이류가 좋은 게 그거다. 반짝하며 일류도 됐다가 언제 보면 또 일류가 부러워하는 홀가분한 삼류 일반인이고, 완전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정체가 의심스러운, 겉으로는 삼류 속으로는 이류. 오, 그 기묘한 신비감이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게 이렇다. 꼬마 숙녀 SS의 엉덩이가 타의에 의해 드러나거나, 내 엉덩이를 내가 까거나. 벼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거나, 빈 수레가 요란하거나) 남성잡지는 세분화된 양식 말고는 1이나 2 그런 구분이 없어서 그나마, 그나마~ 내가 이상한 길로 빠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어. 그래. 아마도, 내가, 꼰대인가 봐! 차라리 그 결론이 좋겠네. 하긴 부모가 최고 학벌에 괜찮은 직업이라면 그것을 (강아지)똥 밟았다고 사석에서 친구와 말하며 웃고 떠드는 반항심도 있는 반면, 다른 친구의 선망은 괜찮은 집안 배경을 그 무엇보다 동경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이해는 되네. 이해는, 되! 왜냐하면 고전음악회 방송을 보면 관현악단이 아니라 객석을 비추는 화면을 딱 보고 있자면, 오 저런 거 어째 사람들 표정이 허허허허허 그러니까. 이해는 되. 그렇더라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 내가 못살아 정말 미치겠구먼. 진짜로 그 친구들이 그렇게 산단 말이야? 어? 그러면 난 진짜 꼰대야? 어? 이런 삐─ 삐─! 막 그러면서 진공청소기의 반대 현상이 일어날지도 몰라. 몇몇은 재밌고 몇몇은 재미없어서 신물이 날 정도일 꺼야. 아마도 후자가 많겠지. 영화와는 반대로 월등히. 쉽게 말해서 그는 그들의 2배를 살았으니까. 자기도 똑같거나 비슷한 시절을 겪긴 했겠지만 말이야. 나이든다는 게 그런 거거든. 종목별로 차이는 있지만 스포츠에 대한 사람의 전성기는 대체로 젊을 때고, 예술가가 발표한 작품의 최고는 중년 즈음에 많이 분포하고, 작가 뿐만 아니라 사람은 만년에 이르러가면서 사용하는 어휘의 양도 농담의 급도 사는 방법과 세상에 대한 식견도 원만히 올라가는 것처럼, 여성잡지1의 주-독자층이라면 아직은 세상을 잘 모를 수가 있다는 말이야. 물론 그의 재능과 능력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로써 사람과 사람이 교제를 하던 일로만 얽히든 사랑으로 승화하든 할 테지만 우선은 내면의 엄청난 메타데이터를 어느 정도 장르와 어떤 색깔과 무슨 형식으로 겉으로 드러내는가, 그것을 관건으로 사람은 친해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단다 이브야. 뭐 그게 놀랍도록 새로운 이론은 아니지만 그걸 청각으로 듣거나 글을 읽거나 해서 아 그렇구나, 하면서 한번 쯤 알 필요는 있어. 왜 스무살 때 나는 말이 없었나, 왜 우리들은 남자친구가 없을까, 나의 유혹술이 대체 뭐가 부족하고 내 화장술은 대관절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 역시 중요하긴 하지만 말이야. 똑같이 말수가 없더라도 여자에 비해서 남자는 주관이 비교적 더 뚜렸해. 그래서 비교적 심지가 굳고 의견이 강하지. 달리 표현하면 여자쪽이 더 포용력이 풍부하고 장점 본뜨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유리할 수도 있어. 남자가 '나는 나는' 할때 여자는 '나도 나도' 하다 보면 여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사교력은 차츰 눈부시게 발전할 수도 있다는 뜻이지. 그런데 말수가 없으면, 즉 내 안에 엄청나게 쌓인 데이터를 극도로 축약해서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말했던 하나의 정황이나 기분이나 뜻함에 대치하는 최적의, 최고의 글은 하나 라는 것처럼 단출하게 표현하는 재주가 아직 미숙하다면 살면서 굉장한 시행 착오를 겪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안 그래도 여자는 남자에 비해서 비교적 주관이 덜 확고한데 앞서서 말한 여자의 약한 점을 내세워서 그녀에게 액면만 가지고 들이밀고 압력을 가한다고 가정해 보자구. 단추 많은 수트, 단정한 말투, 도톰하며 흡사 명대사가 아닐까 착각하게 만드는 어조, 그런데 어머나 그이가 어디산 다비드네? 완전 웃음 기계네? 그러면 게임 시작도 전에 게임 끝난 거지. 그런데 그건 이상이니까 현실을 보자구. 곧 말수와 노력만. 다시 반복해서 말하자면 <말수>와 <노력>.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말수와 노력을 바친다? 한 여자는 한 남자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녀는 꽃 들고 기다리며 쫓아다니는 그분에게 넘어가게 돼 있어. 그럴 수 밖에 없어. 물론 아닐 수도 있고. 그런데 재미없는 말수와 노력에 따라서 사랑만 좌지우지될까?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 글도 있고 음악도 있고 직업도 있고, 뭐 계속 나오겠지. 말만 해! 그렇게 된다고. 
   자, 다시 한번 차분히 검토해 볼까요? 왜 우리 어여쁜 이브가 말수가 없는지를. 그건 아마도 이브에게 재미난 일이 없어서 아닐까? 맞아. 올커니. 그렇지. 기쁘고 즐겁고 신나는 일이 있으면 이브가 말이 많아지지 왜 말이 없겠니, 안 그러니? 당연하지! 그럼 왜 재미난 일이 없을까? 기분이 별로니까 그렇지. 그럼 왜 기분이 별로일까? 내가 뭘 좋아하는지 헷갈리니까 그렇지. 왜 나는 이것도 좋았다가 저것도 좋았다가 막 그럴까? 현혹하는 것들 천지라서 그렇지. 현혹하는 것들이 다 무엇일까? 좋고, 아름답고, 재밌고, 비싸고, 드물고, 사랑스럽고 그런 것들. 그 가운데 최고는 뭐다? 그래, 새로움! 내가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고 내린 결론이 뭐다, 그래서 그것을 바라고 원하고 기도했어. 그런데 그건 너무 멀리 있네? 내가 어떻게 동화 속 주인공으로 탈바꿈할 수도 없고, 요정으로 변신할 수도, 이름을 천사로 바꾸기도 뭣 하고, 에고머니나 쉽지가 않네 쉽지가 않아. 그러나 바라보면 갖고 싶어지니까 바라보지 않을려고 하는데 그게 또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네 그래. 깜찍한 이브여! 그런데 오빠가 뭔 얘기를 했지? 아 너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더니 내가 다 정신이 없군 그래.
   떠든 말이 많아서 귀가 아프겠지만 용한 점쟁이를 만났다고 생각하면 어떻겠니? 말이 길어진 게 다 말수가 많냐 적냐에 관한 얘기인데 너무 겉도는 느낌이 남는군. 아쉬워. 그냥 마무리하기엔 아무래도 섭섭하군 그래. 오빠 말은 그러니까 말을 무조건 많이 하는 게 좋다, 그게 아니야. <어떤 최저점을 넘어서는 정도의 말은 할 줄 알아야 한다> 그거지. 그게 오빠의 긴 말에 대한 핵심이야. 지극히 상식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고 사교의 범위를 넓혀서 굉장히 흥미로울 것 같은 새로운 사람을 사귈려면, 가까와지고 싶은 누군가와 친해지려면 일단 나를 표현해야 하고, 그것에 관한 제일 보편적인 방법이 바로 말이라네. 그러기 위해서는 말수가 어느 만큼은 있어야 한다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텔레파시로 말없이 타인이 나를 파악할 수는 없어. 내가 노래를 좀 하는데 친해지고 싶은 친구 앞에 가서 무턱대고 노래를 부르면 그와 나의 친밀감은 바로 특별해질까? 아니겠지. 내가 어디 소속이다, 내 블로그가 알려졌다, 내가 축구를 좀 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그러면 어떤 친교의 시작은 훨씬 수월할 수도 있어. 가능성은 높아. 그러나 말수가 가뿐하지는 않더라도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적으면 다른 무엇보다 대화의 즐거움을 놓친다는 점을 잊으면 안돼. 대화의 즐거움, 살아 보면 더더욱 알게 될 꺼야. 사랑도 대화의 즐거움으로 더 애틋해지고, 권태도 대화의 즐거움이 식어서 발생할 수 있어. 말수라는 게 그렇다네. 말을 하지 않는 것과 말을 못하는 것은 다른 문제거든. 그것은 말을 잘 듣는 재주와 말을 잘 하는 재주 만큼이나 차이가 크다네. 어떤 때 보면 그런 사람들이 있어. 말은 청산유수로 정말 잘하는데, 그러나 명망도 높고 인기도 많고 돈까지 엄청 버는데 비해서 그다지~ 호감형은 아닌 경우, 있다고. 혼자 푼수처럼 잘난 체만 하고, 남은 무조건 깎아내리는 방식의 농담이 특기인 유형이지. 딴 건 없어 그거 밖에. 제껴 보면 사람 다 비슷하고 그런 분도 따듯한 심성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런 반면 말도 그렇고, 보기에도 비리비리하고, 뭘로 봐도 애매한데 유난히 호감 가는 인물도 있다네. 유별나게 우정도 사랑도 모두 그를 향한다네. 왜 그런 줄 아시겠나? 왜 그럴까? 도대체 왜? 왜냐하면 그는 잘 듣는다네. 타인의 말을 잘 듣거든 그는. 듣는 걸 잘해. 듣는 것을! 사람들은 끼리끼리 만나고 어울리지만 누가 누구에게 호감을 느낄 때, 왜 그런가는 의외로 간단해. 나머지는 다 아는 얘기고, 물론 이것 역시 그렇지만 반복하자면 그것은 바로 이거야.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계속 듣고만 있으면 그것 만큼 피곤한 게 없거든.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더욱 어려워져. 그래서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누가 자기 말을 잘 들어준다? 그러면 그 사람이 좋아진다네. 관심을 가져주고, 친근감을 표명하고, 그의 장점을 추켜세워 주고, 깜찍한 애칭을 지어주고, 주색을 동원하고 노는 비용을 많이 부담하며, 그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주어서 그의 이름을 새롭게 명명하는 것도 좋은데, 그보다 제일 쉽고 동시에 제일 어려운 게 바로 잘 듣는 거야. 그래서 누가 자기 얘기를 잘 들어주자나? 그러면 그 사람이 왠지 모르게 좋아져. 잘 듣는 신중함, 차분함, 표면적일지라도 겸손함을 필요로 하는 <잘 듣기>도 또한 최소한의 말수를 표출할 줄 알았을 때 비로소 가능한 솜씨라는 점, 참 중요해. 정말 내성적이고 조용한 사람도 있고, 의식적으로 일부러 말이 없는 사람도 있긴 해. 하지만 말수는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후천적인 노력이 필요한 기교일 꺼야. 그 역시 분명 수완이고 요령이야. 이왕이면 그걸 일찍 알게 되면 더 좋고 말이야. 남자...들 사이에서는 어른이 되면서 알게 되지. 최소한의 말수가 없으면 긴장감이 형성된다는 점을. 말수만 그런 게 아닐 테지. 만남의 횟수도 그래. 어른들은 불규칙적인 만남 때문에 친목이란 명목으로 규칙적인 모임을 결성하기도 한다네. 좋은 사례도 많지만 웃긴 대화라는 게 그렇지 않나. 처음의 기세는 어디 가고 중간에 넘어지는 여정이 왜 그런가, 것만 짧게 봐 보자구. 그걸 보고 있으면 꽤 재밌단 말일세. 그래, 그렇게 모임을 만들어. 으쌰으쌰 하면서. 그러면 당연히 관례와 예의를 조례로 명문화하지 않을 수 없지. 그래, 법! 어디서 보고 들은 건 많거든. 이때부터 친구끼리 또 티격태격 다툰다고. 왜 1차냐 2차까지 뭐라며 어쩌고저쩌고 이러쿵저러쿵. 계 모임 회칙을 개량하고 우정에 따른 균형 잡힌 의무도 쇄신하자고 말이 많아진다고. 그러면 또 회칙을 바꿔야겠지. 보다보면 배보다 배꼽이 막 더 커지는 것 아닌가 참 우려스럽다네. 왜? 의욕이 있으니까. 초반이니까 열이 좋거든~! 그런데 무엇보다 귀찮고 불편한 건 돈 문제. 직위는 서로 꺼려 해. 입법부와 행정부와 사법부, 독립기관은 그 반대겠지만. 중진 국회의원의 의식이 후진이냐 선진이냐 뿐만 아니라 그분을 뽑은 시민 의식 역시 문제되는 건 이 지점에서 발생해. 의무는 낮게 권리는 많게, 바로 거기서. 복지는 낮게 세금도 낮게 또는 복지도 많이 세금도 많이, 그것과는 또 다르지. 어쨌든 어깨가 무겁지 않으니까 서로 꺼려 자리 맡는 걸. 어깨? 날 보시게 나를. 보이나? 어? 잘 봐 봐. 인사 나누고. 어? 내 어깨 위에 바로 이분 말이야. 내 어깨를 밝고 서 있는 이분이 정녕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잘 봐 봐 찬찬히. 내가 보기엔... 오! 꽤 닮았는데 둘이. 오오. 왜 남자가 아니라서? 얘 남자...성별은 잘 모르겠어. 그치만 얘 성격 좋아. 사람 좋다고. 뭘 좀 알어. 아 맞다. 쟤 귀신이구나. 그래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 일평생을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귀신과 교감을 나눌 수 있다면 것도 썩 나쁜 일은 아닐 꺼야. 일단 인사나 나누시게. 왜 아직 좀 뻘쭘하다고? 차차 나아지겠지 뭐. 허나 묵비권을 행사하는 건 젊은이 자유라네. 물론 행운을 놓치는 것 역시. 왜, 망설여지는가? 어떤가. 이참에 모험 한 번 해보지 않겠나? 그러지 말고 그냥 인사만 나눠 둬. 그건 괜찮지 않나. 또 몰라, 저 친구가 빅 브라더인지. 녀석이 마법사일지 지니일지 누가 알겠나.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거든. 그럼. 하기사 나도 친하긴 친한데 쟤를 잘 몰라. 아직까지도. 정말로 난 아직도 쟤가 유령인지 귀신인지 새인지 지킬인지 통 모르겠어. 아조 어깨가 아퍼서 미칠 것 같아. 어깨가 뽕 튀어나올려고 하면 저분이 또 밟아 내 어깨를. 아 나 증말 이거 원! 나도 좀 유유자적 핑핑 놀면서 살고 싶은데 어떻게 그럴 수가 없다고. 구두가 안 벗어지니까. 하여간,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그러다, 그러다 퍼져. 스포츠 선수들 후반에 퍼지듯이. 해설자의 말과 똑같아. 힘 빠졌어 힘 빠졌어. 그게 끝이냐, 아니지. 그러다 한 명이 목돈을 갖고 튀는 일, 살면서 1번쯤 겪고 여러 번 들어. 그러다 뭐한 놈이 뭐한다고 삿대질하며 가만 있는 괜한 사람한테 너 빠져라, 그런다니까. 영화 보면 많이 나오지 않나, 상황 안 좋아지거나 수 틀리면 먼저 선수치는 거. 친구와의 우정은 만남의 횟수와 조금은 비례하지. 단짝은 어쩜 정비례할 테고. 그러나 그 우정이 만남의 횟수와 반비례하게 되면 그 관계는 약간은 소원함으로 변하게 될 꺼야. 응, 약간은. 이 세상에 노력 없는 사랑이 어딨겠나. 아, 짝사랑은 봐 주자고. 남녀의 정분 뿐만 아니라 지인과의 친교, 나라 간의 외교 역시 그래. 원리는 똑같아. 주요한 근거는 전혀 다를 게 없다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네안 거 뭐 거시기 있잖아. 원시시대부터 현대의 문명까지 까무러치는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적인 원리는 비슷하다니까. 곧 있으면 인간이 우주 여행도 할 텐데 말이야. 그때와 지금, 육체적 사랑에 관한 테크닉 또한 바뀐 게 거의 없어. (딱) 그것이라네. 말수, 만남의 횟수, 소통의 깊이, 관계의 정의 그리고 다시 말수. 뭐시다냐, 아는 오빠 생각하고 있구만. 저런! 그나저나 빌더버그 모임에 꼭 나오라 그랬는데 아 진짜 가기 귀찮아 죽겠어. 옛날에도 무슨 힘 있는 극비 모임이다 뭐다 해서 가만 있는 날 자꾸 프리메이슨에 불러냈는데, 피해다니느라 정말 힘들었다네. 일루미나티는 또 지들이 원조라고 하고. 그래도 가만 보면 녀석들 귀엽다니까. 비밀 결사네 비밀 사교네 뭐네 아 귀찮아 귀찮아. 조용히 살고 싶어 난. 좋은 건수는 쉬쉬하며 우연히 찾아오면 엄선하긴 해야겠지만 말이야. 아 뭔 얘기하던 중이었지? 맞다. 말수. 다시 말수! 주변에 보면 유독 말수가 없는데 호감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말수가 없으면 카리스마 쩌는 사람도 있어. 학교 다닐 때 보면 반에서 누가 누가 인기가 있었니? 말수는 그만그만해도 웃긴 애! 말수도 많고 완전 웃긴 애! 말수는 없는데 다른 재주가 뛰어난 애! 용모가 좋거나 목소리가 그렇거나 배경이 남다르거나 뭔가 하나는 있어야 인기가 있겠지. 그런데 뭣 하나 없는데 그냥 그만그만 존재감은 있다, 그런 친구는 어느 만큼 말수가 보장되는 친구인 경우야. 이도 저도 아니고 말수도 없고 무척 내성적인 친구? 단짝이랑 주로 놀아야 해. 그런데 단짝이 없다? 그러면 좋아하는 뭔가가 있어야 겠지. 그림이나 열렬히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다거나 그런 거. 하지만 아무것도 없고 말수도 적고 공부까지 취미 없고, 어쩌면 좋니 가난이 죄는 아닌데 집안 형편이 그다지 넉넉치 않네. 그러면 꽃다운 사춘기 학창 시절을 재미없게 보내야지 뭐 별수 있나. 운동선수로 비유하자면 A팀에서 만년 벤치만 지키는 것보다 B팀에서 주전으로 왕성한 활약상을 선보이는 게 훨씬 나아. 그리고 말수가 내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웅변가가 되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대화의 즐거움을 아는 것이야. 대화의 즐거움을 알려면 기본적인 말수는 필요할 테지. 기본적인 말수가 충족되어서 말을 하거나 말을 참거나를 자유자재로 하게 될려면 그렇게 되기까지 방법은 하나야. 딱 하나. 바로 타석에 많이 들어서는 것! 타율은, 답답하든 형편없든 아무래도 괜찮아. 말수만 그런 게 아니라 꿈도 똑같아. 원리는 같다고. 적극적이어야 하는 이유도 그렇고. 그동안 사겼던 친구들을 떠올려 보면 한결 좋겠다. A를 만나면 녀석이 80퍼센트를 말해. 그래도 좋고 재밌으면 친교는 지속되는 것이고, 그게 아니면 커피포트는 아닐지라도 서로 갈길 가는 거지. 그런데 B를 만나면 녀석과 나는 50 대 50이야 말수가. 서로 잘 맞아 잘 통하고. 가장 이상적인 경우지. 그런데 흔치 않은 사례로 C를 만나면 내가 90을 말해야 하네. 그건 괜찮아. 왜? 왜냐하면 친구니까. 그런데 녀석이 좀 드문 사이코패스 스타일이야. 사람 좋은 사이코패스도 있고, 성격 쾌활한 사이코패스도 있고, 의롭고 불의를 못참는 사이코패스도 있을 꺼야. 단지 굉장히 어둡거나 비관적이고 막 그런 기운 같은 게 느껴지는 건 꽤나 떨떠름하지. 그런 C가 있다고 가정하면 친하긴 하지만 말이 잘 안 섞이는 데도 불구하고 내가 90을 말하고, 녀석은 나머지 10을 그것도 단지 다 기분 나쁜 댓글처럼 말하네? 아 그러면 정말 답답하지. 많이 답답해. 그래도 친해지고 접어주고 꺾고, 으쌰으쌰 어울리면 괜찮긴 괜찮아. 성격이란 게 그래. 팀원들끼리 팀장 도착하기 전에 쉬쉬 하면서 정보 공유하는 거. 그 인간 오늘 기분 어떠냐고. 타고난 천성을 어떻게 바꾸겠나. 까칠한 연예인 선배 누가 떴다, 그러면 막 그러겠지. 야 야 모른 체해 떴어 떴어 피해 피해, 그렇게. 성정과 더불어 말수가 그래. 남을 웃기고 싶은 능력을 많이 시도하고 연습해야지만 어느 층위에 오른다는 것과도 비슷해. 생각해 봐. 얼굴이 다비드네? 말 없어도 괜찮아. 목소리가 끝내줘? 말수가 없어도 막 기다려지고 기대돼. 고대한다고 그의 말을. 아니면 돈이 많거나, 아는 여자가 많거나, 뭔가가 있어. 그러면 말수가 없어도 돼. 그게 아니라 그냥 그만그만 하다, 그러면 기본적인 말수는 필요한 법이야. 다비드고 나발이고 사람은 마음이 중요하지 그게 뭔 소리냐, 난 아니다? 나는 절대 아니다? 나는 냉철한 이성으로 그 어떤 유혹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글쎄요! 평생 싸워서 한번도 져보지 않았다야 뭐야, 나는 그 어떤 절세 미녀라도 단 10분이도 모두 꼬실 수 있다야 뭐야. 자신감, 중요해. 열? 필요하지. 그런데 그런 건 영 아닌 것 같네. 그러면 그건 너무 뻔한 거짓말이라서 일부러 그럴 리는 없을 텐데, 하면서 뭘 노리는 의중인지 그 속셈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을 꺼야. 제일 간편하게 '관심 없어' 라고 할 수도 없을 테니. 한번 평생 듣는다고 가정해 보세. 사는 동안 평생 내내 들어야 한다 라고. 누가? 내가! 무엇을? 바로 눌변을. 즉 잔소리를. 말의 매체인 목소리, 말의 내용인 그이의 관심사, 말이 듣기 좋은가 라는 말솜씨, 모두 최상이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겠나. 그분을 어디서 찾고 어떻게 만난대니? 있으면 친구가 소개시켜 주겠니, 지가 만나지. 안 그래? 나 같아도 그러겄다. 당연하지! 고칠 수 없는 그이의 습관을 평생 함께 해야 한다? 말이 많기로는 그 어디 가나 둘째 가라면 서러울 지경인데 타율은 바닥인 양반과 음 뭐 함께 할 수 있어. 가능해. 돈을 번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게 아니거든~! 그래도 할 수 있어. 얼마든지. 그런데 그 양반이 상전이 아니고 마누라네? 어쩜 좋니 아 글쎄 남편이네? 50점을 이상으로 봤을 때 허영 지수 0이랄지 허세 지수 100이신 인재와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낸다? 그땐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되는 거지. 별수 있나. 상상해 봐 봐. 수증기가 나온다 나온다. 귀에서 코에서 귀에서 코에서. 기적 소리가 울린다 울린다. 희미하게도 아니고, 삑─삑─! 한 번 더, 삑─삑─! 기적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않는다. 간다 간다. 부글부글 부글부글. 때로는 눈에서 레이저가 나갈 수도 있다 있다. 부글부글 부글부글. 커피포트가 끓는다 끓는다.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젖힌다 젖힌다. 하늘이 빙빙 돈다 돈다. 오오, 얼굴이 빨개진다 빨개진다. 뚜껑이 열리는구나 열리는구나. 아아 그분이 오셨네 오셨어. 이런, 젠장! (딱) (휴) 바로 그거라고! 난 말수 없는 사람이 좋아, 그래서 우정은 사랑으로 바꼈어. 처음에는 좋아. 중간도 좋아. 계속 좋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언제까지? 그러므로, 혹시 나중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왜 나는 그때 그렇게 느꼈을까 내가 바보처럼 대체 그때 뭔 생각을 한 거지, 라고. 어떤 상황에 무엇을 말하고 어느 만큼은 빈말도 하고 떠볼 줄도 알고 때로는 말을 돌리고 가로채기도 하고, 그걸 알아야 그게 가능해야 말을 참을 수도 있고 진정한 대화의 즐거움을 알게 되는 것일 테야. 가령 말이야, 거의 대답만 했을 뿐인데 남자가 여자가 막 나 좋다고 환장하는 일, 불가능하지는 않아. 그건 가능하다고. 그거야. 그거라고. 어른이 되면 무엇보다 대화의 즐거움이 삶에서 차지하는 영역이 얼마 만큼인지를 알게 되거든. 대화의 즐거움, 그것의 첫 번째는 일단 최소한의 말수고. 
   실전으로 말수가 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떤 계기로도 말수가 최저점을 넘어서기도 하지. 예를 들면 어떤 회사에서 장기 프로젝트를 끝내면서 뭔가를 깨달았다거나, 외국으로 유학 가서 공부를 했다거나, 20대에 군생활을 했다거나 그런 일들. 그처럼 실전과 계기가 아니라 좀 더 이론적으로 접근하고 싶다? 가능하지. 방법이 있어. 그것은 최저점의 말수에 도달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간결한 글과 말을 규칙적으로 습득하는 것이지. 예를 들면 뉴스, 기사, 고전문학, 인문교양서. 흥미 위주의 인터넷 기사나 텔레비전 인기 프로그램과 재밌는 소설도 좋지만 말수라는 관점에서만 보자면 그보다는 가장 체계적인 글과 말만 엄선하는 게 좋겠지. 뉴스가 그래. 뉴스는 하나의 사안이나 사건과 상황에 대해서 최소한으로 설명하거든. 더 이상 압축할 수 없을 때까지 압축해서 나온 결과물이 그것이야. 바로 그 점이 중요하지. 신문기사 역시 그렇고.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 잘 골라서 받아들여야 할 테고. 그래. 어쩌면 최고 단 하나만 골라야 해. 시간이 펑펑 남아돌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렇지만 이브는 누가 봐도 세련된 교양미를 간직하고, 빼어난 지성이 돋보이고 미모도 무난하니 괜찮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볼 수도 있어. 그건 바로 내가 보유한 메타데이터의 양을 늘리는 방법이야. 아직 내 안에 입력된 정보의 총량이 살짝이랄지 턱없이-랄지 부족하기 때문에 타고난 수다꾼이 아니라면 말수가 부족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라고. 그러니 방법은 뭐겠어? 꼭 동기 부여 강연회에 가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스탠드업 코메디를 찾아보지 않아도, 말수가 없다는 고민을 어딘가 인터넷 공간에 적거나 혼자서 심심하니까 '길고양이 찾아오게 하는 법' 같은 검색을 하는 것도 좋긴 하지만, 만약 새로운 방법을 택하겠다면 시간을 벌어야지. 지금 한창 젊을 때 메타데이터의 총량을 늘리고, 양질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좋은 그림을 보고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내가 가진 재능이 어디까지고,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나중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내 음험한 재간은 어떻게 숨겨져 있을까를 고민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란 것이지. 적당한 말수가 가능하지만 조용조용히 말을 하고 말을 주로 듣거나 말을 참는다는 것은 발언권이 왔을 때, 내 기예가 시험대에 올랐을 때, 내가 정말 이 분야로 계속 나아갈 것인가 그것에 자신감을 갖고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예스라고 할 수 있을 때, 적당한 말수가 가능하지만 그것을 요령껏 조절한다는 것은 인생의 풍미를 더하는 데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됐지 결코 손해볼 일은 아니라네. 3부 리그에서는 일단 말수가 많고 많이 뛰면 주전도 되고, 작게나마 인기도 얻어. 학교 다닐 때 보면 그렇잖아. 그때 반짝하던 친구들이 1부 리그에서도 반짝하더라, 그건 다른 얘기고.
   큰언니가 혹시 그런 얘기하지 않던? 큰언니가 막내 남동생한테 너는 요가든 테니스든 육상이든 뭔가는 꼭, 반드시 하나 해야 된다, 그래야 나중 좋다고. 그런데 둘째가 큰언니한테 물어봐, 왜 그래야 하냐고. 그러면 큰언니는 말문이 막혀. 이유 없다고 하지. 화를 내거나 화제를 바꾼다고. 알긴 아는데 잘 모르니까 그래. 기본적인 말수는 있는데 엄청 많은데, 요점에 관한 말수는 없어서 그래. (몸짓 똑-똑-똑!) 큰언니한테 혹시 이래서 그래야 하지 않을까 라고 넌지시 물어보면 큰언니는 완전 좋아하겠지. 내 말이 그거라고, 바로 그거라고 (손가락 딱) (쉭쉭쉭) 하면서! 큰언니는 어디서 그 얘기를 듣긴 들었고, 자리를 옮겨서 동생에게 그 얘기를 해줄려는데 잘 생각이 안나는 거야. 큰언니...는 모르겠고, 젊은이가 원숙한 어른이 되면 상당한 정보가 쌓이니까 알게 될 꺼야. 와~ 반세기 동안 시간 낭비 엄청나게 했다고. 시행 착오 엄청나게 겪었다고. 실패와 이별은 왕왕 있었던 게 아니라 항상 함께 했다고. 사람은 로봇이 아니지만 몇 가지는 반드시 로보트처럼 해야만 나중 인생에 도움되는 게 몇 가지가 있어. 바로 그게 큰언니가 하고 싶었던 말일 꺼야. 예를 들어보자구. 체스나 바둑의 신동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좋아하고 중간 정도 재능은 있어. 그럼 하루에 한 판, 일 년에 몇 시간, 나중 언제가 되면? 그거야. 바로 그 꾸준함. 무엇이든 불공평함은 존재하기 때문에 그 간극을 노력이나 말수나 실패의 양과 꾸준함과 사랑의 고결한 퀄러티로 메꾸는 거야. 지금 당장은 주위에 멋진 남자도 있고 꿀벌도 윙윙 거리고 파리도 꼬이는 그녀가 멋져보이지만, 나중 되면 차라리 그때 그래서 더 나았네 그럴 수도 있어. 당시 외톨이가 오뚜기를 거쳐서 지금 행복이든 인기든 환희든 삼류로 만족이든 고르기만 하면 되거든. 당연히 나도 그랬고 말이야.
   지금 말수가 적다, 꿈이 없다, 소원도 없고 무언가를 기원하지도 않고 재주는 허접하고, 나는 실눈 뜨며 친한 재간둥이 친구를 부러워만 한다? 지금 그렇다고? 괜찮아. 괜찮다네 이브양. 그 대신 먼 곳을 지망하면 돼. 안정된 행복과 유망한 희망을 상상할 줄 알면 된다고. 변변치 않을지언정 나를 알아가면 된다고. 내 안에 천사도, 괴물도, 마법사도, 좀비도, 악마조차도 다 들어있는 법이니까.」
   아마데우스는 처음에 이처럼 길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꼭 누군가 자기를 조종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 술술 나오게 되었다. 그걸 글로 썼다면 공책을 빼곡히 채웠을 텐데. 아마데우스는 객관적으로 따져볼려고 생각했을 때 자기가 봐도 그래도 좋은 내용을 담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깜찍한 이브의 표정은 꼭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좋았다. 그러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차 그 표정은 아아! 오오, 저런! 용케도 이브가 착해서 그렇지 막 짜증을 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 뿐이겠나. 마침 이브에게 전화가 왔고, 이브는 3 대 3 소개팅을 하러 간다고 했다.
   「오, 그래? 모처럼 신나는 일인데. 축하할 일이야. 어떻게 나도... 나도...」
   「네? 오빠가 뭘?」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착오가 생기거나 그러면 안된다는 말이지.」
   「오빠 그럼 나 먼저 갈께. 지금 바로 오라는데. 나중에 봐. 오늘 재밌었어. 좋은 얘기 고마워. 그럼.」
   청컨대 이브의 앞자리에 앉아야 할 남자분의 대타로 아마데우스가 등장하길. 그러나 그런 어이없는 상상은 실현될 수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꿈이고 현실은 이랬다. 아마데우스는 이브 때문에 먹지 못하고 숨겨뒀던 햄버거를 꺼냈다. 그는 경기가 끝난 축구장에서 쓸쓸히 혼자서 햄버거를 먹었다. 우걱우걱! 그것도 콜라가 아닌 우유와 함께. 뭐 먹을 만했다. 그러나 끝까지 먹지는 못했다. 그는 꾸역꾸역 참고 참고 먹다 먹다, 채 반틈을 먹지 못하고서 햄버거를 쓰레기통에 쳐밖아 넣었다. 그래 가라 가 다 가라, 막 그러면서. 이런 젠장, 그러면서!


   20

   아마데우스는 어느 날 오전에 인터넷에서 여러 동물들을 검색해봤다. 동물원까지 직접 가기는 귀찮고, 집에서 빈둥빈둥 인터넷을 통해 구경하는 것으로 동물을 관찰하고 싶은 욕구를 해소했다.
   그런 후 그는 찻집 스타벅에 갔다. 카페라테 한 잔을 시켰다. 주문할 때 이름은 아마데우스라고 했다. 커피가 나왔다. 아마데우스님! 카페라테 나왔어요. 아마데우스는 자기를 부르는 점원의 노래하는 듯한 밝은 목소리를 들으니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새로운 소설을 위한 글만 잘 써진다면 분위기 끝내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역시나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인지 쉽게 발동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데우스는 집에 도착했다. 집으로 오면서 사온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그는 TV를 봤다. <나 혼자 산다>라는 제목의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혼자 사는 유명인들의 일상을 예능과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인문주의와 코메디를 결합해서 시청자들의 동질감을 이끌어낸다는 목적으로 보였다. 괜찮은 프로그램이긴 한데 그는 예전에 그걸 봤을 때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그의 예측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그의 추측은 제대로 틀린 것으로 증명됐다. 인기가 꽤 오래 지속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충분히 좋은 정도의 훔쳐보기 성격의 대상으로 똑같은 사람이 아닌 동물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채널을 돌렸다. 동물의 세계로. 나왔다. 침팬지, 고릴라, 여우, 곰, 양, 늑대, 하마, 다람쥐, 당나귀. 아마데우스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그래 봐야 10분 20분이었다. 금새 지겨워졌다.
   그는 낮이 되어 또 정해진 시간표나 있는 것처럼 다시 찻집으로 갔다. 이번에는 바나나-망고를 선택했다. 이름은, 이름은 우디라고 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오전에 아마데우스님 이라고 호명했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있었다면 그녀는 뭐야 저 인간 아깐 아마데우스였는데 지금은 우디라고? 뭐하는 놈팽이길래...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어쩌다 눈빛이 마주치고 찌르르 전율이 일어서 그녀가 아마데우스 아니 우디에게 반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린다면 엑셀 파일 하나 만들어서 스포츠 복권처럼 막 그러면서 인연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텐데. 그림 그려서 보여주는 것도 고전이긴 하지만 그는 그림은 못그리니까. 아무튼 오전 그녀는 없었다. 그래서 아마데우스는 주문했다. 나 우디요 라고. 왜냐하면 그는 언젠가 우디 앨런의 친구가 방송에서 우디를 놀리면서 그는 허당이라고, 그는 요즘 부쩍 허풍이 심해졌다고, 그가 계속 이렇게 무리한 가짜 웃음을 강요하는 행동 방식을 지속한다면 나중 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씌여질 것이라고 놀렸던 장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은 불행했다나 뭐라나.
   차가 나왔다. 우디님~ 네! 그는 살짝 기분이 고조되었다. 사는 게 그렇다. 아마데우스도 아니 우디도 꼬마 때부터 엄청 심심해했다. 이미 어린이일 때도 심심해, 재미없어, 라는 말을 정말 심심치 않게 하고 살았다. 다른 애들보다야 비교적 말로 하는 표현은 훨씬 덜 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아마 그러지 않은 사람보다 그랬던 사람이 우세할 것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곧 누구나. 베팅은 자신 있다. 당신도 기억나지 않소?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얘기하다가 그대의 존함이 <기쁜>이라면 기쁜이 말한다. 항상 심심해요, 언제나 지루해요, 뭘 해도 재미없어요 라고 하면 상대방의 반응이 어땠나? 당연하다. 웃는다. 웃는 게 정상이다. 가짜 웃음이 아니라 진짜로 웃는다. 활짝! 빵~끗하며. 그런데, 만약 웃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역정 비슷한 걸 내는 그분이 당신의 친구라면 녀석은 푼수다. 녀석은 촌닭이다. 나이는, 머리카락은 송송 빠져가는데 정신연령은 여전히 골목대장이다. 아니다. 만년 골목대장 지망생이다. 언제까지라도. 원래는 말이다 웃어야 정상인데, 그냥 썩은 미소라도 살짝 비추는 게 정상이거든? 그런데 반응이 이상해. 이상하다고. 그건 완벽한 마초인데 허세, 고지식함, 자존심, 꽉 막힌 성격, 허풍, 연애 경험, 견제랄지 심한 질투등 어떤 지수가 비정상적으로 높거나 낮은 거다. 그걸 뭐라 하느냐, 모르겠다. 완고함? 개성? 약점? 아마도 속 좁은 마초의 특징에서 그 유형 같다. 묻지마! 삐리리리 삐리리리 성장 환경이 예상되는 듯 하니 그만 넘어가자. 정신분석 학계에서는 그게 불문율이라고 하니까. 사람이야 호인이고 인성 좋고 성실하며 친한 친구일지라도 말이다. 소개시켜줄 친-여동생은 없지만 말이다. 이건 더 확실하다. 더블 베팅! 같은 이치로 아는 오빠 있으면 물어보자. 오빠는 왜 연애 안해 왜 결혼 안해 라고. 그러면 그 오빠는 그런다. 아직은 뭐 지금은 그렇고 나중 좋은 차 타고 놀러다니면서 조금 즐기다 나중 때 되면 할려고, 라고. 이때 역시 보통 여자라면 해맑게 웃어야 정상이다. 그렇지만 뭘 좀 모르거나 허영심 지수가 극도로 높다랄지, 어느 사심이나 트라우마나 혹여 환멸이든 무엇 때문에 간혹 웃지 않는 숙녀도 있을 것이다. 드물게. 각자 개성은 다르니까. 즐거움의 진폭이 잔잔하면 누구는 그런다. 카페에서 일행과 차 한 잔 마신 걸 가지고 신나게 놀았다고 한다. 그렇다. 아마도 여자다. 어쩌면 아줌마다. 생활이 단조롭고 재밌는 일이 별로 거의 없는 듯 하다. 그러나 우리는 차만 마셔서는 만족할 수 없다. 폭삭 망하더라도 흥미로운 기대와 놀라운 예감을 품고 클럽에 가야 한다. 클럽 대신 딴 걸 할 수도 있다. 각자 적어도 뭔가 하나씩은 있다. 진득하니 1순위가 지속될 수도, 자주 바뀔 수도 있다. 취미만 그런 게 아니다. 새로움이 바닥나면 장비를 교체할 수도 있다. 교우 관계가 일관된 경우도 있고, 그것을 새로 개편하는 게 좋을 때도 있다. 그러지 않고서 새로운 인생을 바란다는 건 실례니까. 뭘 걸어야지 또는 하나는 잡고 있어야지 나중 뭔가 남아도 남는다. 살다 보면 부부가 남남이 되기도 하는데 단짝이 문제겠나. 그게 인생이다. 바뀔 때 바뀌더라도 미래는 몰라도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냥 조금 그런 시늉이라도 내는 것! 그것이 즐거운 인생을 위한 자세고, 행복한 마음에 이르는 태도다. 주어진 카드 패를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것이 준인지 로버트인지 아마데우스인지 우디인지, 아니면 조마조마인지를.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있다. 달님은 벌써 나타나셨다. 별님도 대기중이다. 젊음의 무지개는 투명 무지개다. 하다 하다 삼류 소설 안 팔리면 동화라도 써야 할 판국이다. 재미없으면 어떤가. 일이든 놀이든. 손해볼 꺼 없다. 일기장 제목을 천국으로 바꿔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천사님 커피 나왔어요? 왜 안되겠나. 그런데 천사 하면 어쩔 수 없이 그 무언가가 연상되는 건 혹시 나만 그런가?
   그건 그렇고 우디는 저녁이 되자 마침내 목적지를 정했다. 바로 신통하다고 소문난 작명소를 알아낸 것이다. 적당한 곳을 물색했고, 그는 그곳으로 찾아갔다. 과연 그곳이 용한지, 그 도사가 어떤 새로움을 안겨줄지, 아니면 그분이 돌팔이일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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