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한권 읽었다. 토요일 by 이언 매큐언! 보통 사람들 가운데 어떤 타입의 부류는 친구에게 책을 읽은 후의 느낌에 대해 뭔가 얘기하고 싶은게 있을 것이다. 어떤 단점이 있을텐데 그걸 꼬집어 보고 싶다거나 정말 괜찮기는 한데 직접 적절한 길이의 감상문을 쓰는건 잘 안된다랄지 커피 마시면서 가볍게 얘기하고 재수없네 훌륭하네 투덜거리는 말들. 하지만 그와 같은 불분명한 여러가지 감정들을 글로 남겨야 하는 이유를 꼽자면 첫째, 그만큼 얘기거리가 확실하게 있다. 둘째, 그렇게라도 깍아내려 흠잡고 싶은 정도로 얄미운 스타일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얼마나 품격 높은 글을 썼다고 말이다.
이 책을 한번 읽고 나서 곧이어 두번째 읽기를 시도했다. 왜냐하면 소설 전체에서 '부추긴다'는 표현이 2번 나왔기 때문이다. 스토리상 헨리 부인이 저렴하게 부추기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순간에서 많은 독자들은 친근감을 느낀다. 조너선 프랜즌의 인생수정이란 책에서도 (좋은 작품이지만 반틈만 읽었음) 첫째 아들이(맞나?) 엄마를 이간질의 명수라고 읊는 대목이 나와서 핑하고 연결되는 지점이 생긴거다. (명수가 나오니까 또 그게 생각난다. 약 10년전에 박명수를 완벽하게 닮은 여자를 어느 노래방에서 본 기억이 난다. 닮은 정도가 정말정말 완벽했다) 실은 이런 고품격 소설에서 주인공이 이간질과 사촌지간인 '부추긴다'는 용어를 2번 이상 사용한다는 것이 책을 2번 읽기 시도했던 더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자신있게 의욕적으로 2번째 읽기를 시도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초반부에 포기했다. 아니 10대 문학소녀도 아니고 20대 아마추어 에세이스트도 아닌 가끔 술이나 퍼마시는 30대 아저씨니까 '이게 왠 오바냐' 그런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줄거리가 아닌 소설과 관련되어 떠오르는 감상들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결국 거창하게 좀 뭔가 있어보이게 그럴싸한(?) 서론으로 시작했는데 이간질로 넘어왔다. '부추긴다'에 대한 알맞는 구글링 검색결과 첫빠는 아쉽게 없지만 어떻게 보면 이간질과 코메디는 동의어다. 이간질의 좋은 표현으로 무엇이 있을까? 딱히 찾아보기는 싫고 얼추 추려봐도 몇가지가 금방 나온다. 권유하다. 제안하다. 떠보다. 알린다. 보도하다. 그리고 유난떨다. 이러한 단어들도 어떤 각도로 보면 이간질이 될 수 있고 강렬한 인상의 눈빛도 그 퍼포먼스의 정상급이 맞지만 진정한 이간질의 최고봉은 사실 존재 그 자체다. 이건 동시에 너무나 저차원적이라서 뻑하면 이간질이기 때문에 답답함을 동반한 허탈한 웃음을 불러온다. 이렇게 보자면 멀리 떨어져서 고고하고 우아하게 사는 아이슬란드와 뉴질랜드도 문제다. 국경이 다닥다닥 붙어있거나 여러 분야 이념적 이슈에서 결코 자유스러울 수 없는 까다로운 국가들 입장과는 다르게 잘 살고 평화롭고 고귀하게 백조처럼 엘레강스하게 그네들과는 거리를 아주 멀찍히 두면서 살고 있는 아이슬란드와 뉴질랜드 그리고 영국이 문제다. 소설 토요일에서 헨리 퍼론은 훨씬 신랄하고도 모질게 국가 단위로 문제의 소지를 얘기했었다. 즉 이 이야기가 헨리 퍼론보다는 훨씬 저급하지만 동시에 덜 신랄하고 덜 모질다는건 명확하다. 하기야 이건 말도 안된다. 그러면 영화배우 금성무도 재수없다. 말을 하나만 하지 중국어도 하고 일본어도 하고 말이다.
소설 토요일의 헨리 퍼론에 대한 설명은 현실주의자, 직업 환원주의자, 경건주의적 멋쟁이등으로 묘사되면서 (절대적이라고는 하지 않지만 그와 비슷한 즈음이라고는 나온다) 그의 부인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과는 판이하게 단정할만치 그의 외모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마법처럼 독자를 쇠뇌시킨다. 이건 작가의 관록에 어울리는 무척 고급스러운 방법이다. 소설에서 헨리 퍼론은 미국과 그외 다른 나라에 대해서 나이듬에 어울리게 조금은 시니컬한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저널리즘과 여러 학문까지 깊숙하게 건드리지는 않지만 각 방면 분야에 대해 그와 같은 삶의 경력의 소유자가 어찌 그렇게 똑똑하게 확고한 의견을 품고 있는가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게다가 어떻게 토요일 단 하루 안에 이런 생각들이 모두 가능한가 또한 미스테리다. 물론 현실에서 근사치는 있겠지만 소설이니까 가능한 얘기다. 보통 영화에서는 많이 알면 다치고 영화는 현실을 얼마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설정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범위를 개인으로 좁혀서 현실을 본다면 많이 알면 대개 목소리가 크거나 또는 아예 조용하다. 또 다르게는 드물지만 늙는다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헨리 퍼론은 그런 부작용을 교묘히 피해가면서 균형잡힌 매커닉한 사견을 설파한다. 하지만 그런 세간의 뉴스에 대해 주로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가운데 헨리 퍼론도 소설상 인물 설정 때문인지 일반화의 문제에서 자유스러울 수는 없다. 그래서 신문과 뉴스를 통해서인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꺼두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장면도 나온다. 나이게 걸맞게 지적이고 비교적 여유롭게 많은걸 갖추었기 때문인지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자의 스타일에 대한 의견들이 많은 것 같다. 누가 말했나 지휘자는 떠나도 베를린 필은 남는다고. 헨리 퍼론은 의식의 흐름상 지휘자와 베를린을 완전히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청자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달라스 사는 사람들과 베를린 사는 사람들은 서로 잘 모른체로 인격 대 인격이다. 서로 친절하고 오히려 넘어가서 살아보고 싶은 사람들도 결코 적지 않다. 그런데 시간에 따른 흐름 가운데 어떤 극소수 때문에 또는 시대상 한순간의 지휘자 때문에 대다수의 개인의 취향이 미세하게 영향을 받거나 본인의 완벽하지 못한 교양수준에 대해 괴로워하고 불편함을 겪어야 하는 일이 틈틈히 발생하는 것 같아 조금은 안타깝지만 문제는 울타리 안에도 있을 것 같다. 지나가는 태풍과 토네이도는 이것과 분리되는게 맞는데 말이다.
사람 사는 곳은 대개 비슷하다. Culture Difference가 분명히 있지만 또 어디나 똑같이 착한 사람이 있는 반면 나쁜 사람도 있다. Bach는 독일 사람이다. 그리고 대부분 어디에서나 수컷은 대체로 거칠다. 늬가 잘낫네 내가 잘낫네 서열도 정하고 술마시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누군가 쓰러져야 자리가 끝난다. 지금껏 수없이 쓰러졌다. 물론 집단으로 실신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딱 몇가지 꼽히는 사건사고도 있다. 조셉 콘래드의 어떤 말이나 이러한 사례는 코메디로 널리 동서고금으로 씌여지고 있다.
http://online.wsj.com/article/SB10001424052702304713704579095211104006416.html 국가별로 어느 지역이든지 거의 다 낮춰부르는 속어가 존재한다. 그런 속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주로 단순한 남성들이다. 그런 단순한 소수 마초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화로운 사람들이다. 그런 속어들에 평화로운 사람들이 받는 영향은 제한적이어야만 하고 또 영화 Johnny English Reborn에 나오는 장면처럼 주로 극중 코메디로 씌이면 좋겠다. 괜히 그네들끼리 으쌰으쌰 하는데 평화주의자들이 영향받지 않는 것이 본인의 소중한 시간을 침해받지 않는 길이다.
http://blogs.wsj.com/korearealtime/2013/10/10/south-korea-risks-overplaying-its-hand-with-japan/ 사람들 생각과 사리판별 기준은 각양각색이지만 이와 같은 아주 완곡한 어법과 그 뒤에 숨겨진 긴장감을 동시에 느끼도록 만드는 글쓰기 스타일을 배우고 싶다. 링크글에 나오는 프레임 또는 큰 이름에 대해서 사람들은 헨리 퍼론과 소설 인생수정(by 조너선 프랜즌)의 엄마와 같은 심정을 누구나 헤아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또 연예인 혼자 모범적일 수는 있지만 그 스케일을 넘어서면 원주율을 바라기는 힘들다.
비교하기와 현재주의(http://julianseo.tumblr.com/post/332329620) 그리고 다니엘 튜더(http://daniel-tudor.com/)가 말한 현재 과거 식민지를 경영했던 대다수 선진국에 대한 표현,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스타일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고 보면 동양과 서양, 양쪽을 모두 경험하거나 그러한 성장환경을 겪은 사람들과 특파원들 그리고 여러나라를 둘러본 사람들의 생각이 좀더 범상한 듯 하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들을 따라할려다 보면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단점이 적어도 하나는 발생한다. 헨리 퍼론의 딸 데이지의 말처럼 "양다리"를 걸치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으쌰으쌰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함께 헨리 퍼론 이상으로 균형감 있는 괜찮은 현재, 더 나은 미래 그리고 형이상학적 웰빙이 보통 사람들과 함께하면 좋을 것 같다. 헨리 퍼론이 그렇게 행복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한 소설속의 시릴처럼 양심적이고 예의 바른 생활. 조금 재미없는 생활이 되는건 책임질 수 없다.
괜히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수준의 특수요원 니키타가 은퇴해서 어느 커다란 호수 옆 정원이 있는 주택에서 만난지 아주 오래된 것 같지 않은 새로운 남편과 살고 있는데 아직 은퇴하지 못한 현역 요원이 어떤 한 사람과 동행하여 찾아왔는데 재회하는 순간 눈물을 흘리는 모습.
자기 자신을 잘 알아가야 하는 이유는 좀더 쾌적한 현재와 멋진 미래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쾌적한이란 형용사가 조금 딱 알맞게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 자리는 다른 여러 긍정적인 수식어로 대체될 수 있을 것 같다. 훌륭한, 멋진, 낭만적인, 즐거운, 아름다운... 소설을 예로 들자면 여러 장르와 시대, 분류등 다양하게 책읽기 시도를 지속하다가 자기 스타일을 알게 되고 그래서 그러한 책을 만났을 때는 아마도 글을 좀더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을 감지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에 씌였는지 잘 떠오르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본듯한 '나는 너를 만나면 더 멋지게 살고 싶다' 같은 왜 그런 문장이 연상된다. 그렇게 차근차근 꼼꼼하고 편안하면서 기분좋게 천천히 읽고 싶은 글을 만나면 많이들 기뻐하고 그 행운에 감사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순간을 만나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또 자신의 스타일이 약간 나이와 비례해서 또는 어떤 이유로든 바뀔 수도 있어서 친구나 지인에게 또 소셜 네트워크나 여러 매체에서 힌트를 얻는게 도움이 된다. 그렇게 정독이나 속독이랄지 그런 일련의 습관을 거친 후에 딱 자기 스타일의 작품을 만나면 천천히 읽고 싶지만 차분하고 느리게 읽는 품위 있는 읽기 행위는 그 동안의 관성 때문에 잘 적용되지가 않는다. 그건 마치 젊어서는 시간과 의욕, 이상은 있지만 돈이 없고 늙어서는 헨리 퍼론처럼 아이를 따르고도 싶어지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 어려운 것과 조금 닮은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영화 감독이 (꼭 그 업계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들 그러겠지만) 한 영화를 50번 또는 200번 보고 또 어떤 시골 사람은 어떤 음악을 셀 수 없이 듣고 누군가는 특정 시와 소설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아주 규칙적으로 다시 읽는 것 같다. (책 Iconoclast 280쪽 참고) 그러므로 정말 창조적이지 못한 평범한 사람 또는 그레고리 번즈, 잡학의 대가 켄 제닝스, 빌 브라이슨과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작가로 유명한 더글라스 케네디 같은 사람들의 교양과 학식을 갖추지 못한 일반인들은 항산화 요소가 듬뿍 들어간 건강한 음식을 먹는 식습관을 생활화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인스턴트 과당 음료를 먹으면 안된다고 주변에 충고하고 다닌다면 그 식음료 회사와 임직원의 식구, 회사의 직간접 주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현대인들은 그저 생각의 연속성을 차단하는 습관을 생활화하는 길 밖에 없다. 사람 감정탓인지 환경탓인지 또는 세상일은 어려운 일들 투성이라는 변명 때문인지 헨리 퍼론의 아들 시어군은 뉴스를 기사만 스캔하는지도 모르겠다
뻥카를 찾아볼 수 없도록 밋밋하고 잔잔하며 지루한 소설 토요일. 압축밸브는 보장할 수 없고 이간질도 보증되지 않는다. 이러한 불만을 토로하게 만드는 불편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 누군가에게 아직 안 읽어봤다면 그 불편함을 한번 느껴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작품에 대한 호평은 일반적으로 요목조목 논리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 또한 기하학적이고 정돈된 형식으로 작품을 분석해준다. 하지만 희한하게 엉뚱한 색채를 띄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자유로운 해석법은 전혀 새로운 글쓰기 스타일이 아니다. 시트콤에서 어렵지 않게 비슷한 장면을 마주칠 수 있다. 정성스레 만든 음식의 품평을 부탁하면 시음자가 곧바로 아구창을 날릴 듯한 표정으로 "아니 이렇게 맛나게 만들어도 되는거야?"라고 반문하는 그런 장면.
문득 왜 어떤 나라는 차가 우측으로 다니고 어떤 나라는 차량 좌측 통행 시스템인지 궁금해진다. 상식이 부족해서 모를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음성통화나 문자메시지, 종이책이 아닌 인터넷 브라우저를 띄워 금새 손쉽게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귀찮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기 싫은 마음이 든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좀더 천천히 알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결론은 한마디로 명쾌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미래 세대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현재를 사는 것이다.
토요일, 이언 매큐언
p.54 그는 여전히 거리낌없는 무엇, 예측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열망할 만큼은 젊으며, 기회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음을 알 만큼은 늙었다. 이제 그도 그런 사내가 되는 건가? 상점 진열장 앞에서 발을 멈추고 색소폰이나 오토바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내, 자기 딸 또래의 애인을 얻고 싶어하는, 그저 그런 나이의 그저 그런 사내. 고급 승용차는 이미 장만했다. 시어의 연주는 아버지의 가슴 속에 이런 회한을 몰아온다. 블루스는 천생 블루스다.
p.57 이 십대 후반 아이의 침실에는 ... 틈바구니에 거의 손도 대지 않은 UFO 관련 책이 몇 권 있다. UFO, 요새는 외계인이 몰고 다니는 우주선으로 통한다지. 헨리가 보기에, 시어의 세계관은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떻게든 밀접하게, 또 흥미롭게 관계가 지어져 있다는 직감에서 출발한다. 이 아이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에 관한 정보를 입수할 특권을 지닌 집단, 특히 미국 정부가 그런 불가사의한 정보가 나머지 세계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고 믿는데, 딱딱하고 우둔한 현대 과학으로서는 애당초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얘기는 어지간한 문고본 속에 다 나와 있는데, 시어는 그 책들도 건드리지 않았다.
p.65 얼마전 일요일 저녁에는 시어가 잠언을 하나 꺼냈다. 크게 생각할수록 형편없어 보인단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정치판, 지구온난화, 국제 기아, 이런 큰 주제에 매달리다보면 전부가 정말로 끔찍하고 아무것도 좋아지는 게 없는 것 같고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는 것 같잖아요. 하지만 작은 거, 가까운걸 생각하면, 새로 만난 여자애라든가 채스하고 함께하게 될 노래라든가 다음달 놀러갈 스노보드 여행, 이런 거 말이죠, 그러면 세상도 근사해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제 모토예요. 작게 생각하라."
p.73 로절린드와 사랑을 나누는 것에 싫증이 난 적이 없거니와, 의사라는 직위에 통용되는 관대한 논리를 이용해 한눈팔 기회가 도처에 널렸음에도 심각하게 유혹 당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아니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변태에 속한다.
p.169 퍼론이 알기로 제이는 엄청난 봉급 삭감과 생활상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영국으로 온 유일한 미국 의사다. 그는 영국의 의료 체계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료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경의나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그를 이 평화운동의 지지자로 만들지는 못했다... 제이 말에 따르면, 상황은 암울하다... 그는 자기 확신에 흔들림이 없는 사람으로, 틈만 나면 외교정책, 대량살상무기, 사찰단, 알카에다와의 연계 증거 따위를 논하고 싶어 안달이다... 그는 주장한다. 미국은 처절하게 실패했던 과거의 정책을 벌충해야 한다. 적어도 이라크 민중한테는 이 점을 빚지고 있단다. 헨리는 제이와 이야기를 할 때면 자기가 어김없이 반전 진영으로 기우는 것을 느낀다.
p.209 확장되는 도덕적 연민의 범위, 이것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적 조건이다.
p.400 한 큐레이터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둥근 천장 꼭대기에 삐죽빼죽하게 뚫린 구멍을 가리켰다. 15세기에 강도들이 뚫고 들어와 황금 잎사귀 모양 장식을 훔쳐간 자리라고 했다. 나중에는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이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경이롭게도 그들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등불 아래서 그곳의 도안과 그림을 배껴 그렸다. 이 침입이 그들의 작품 세계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시뇨르 벨트로니는 통역을 통해 내빈들의 마음에 와닿을 것이라고 여긴 비유적인 표현을 했다. 그 화가들은 저 벽돌 두개골을 뚫고 들어가 고대 로마의 정신을 발견한 것이라고... 그 시장의 말이 맞다면 두개골을 뚫었을 때 보이는 것은 뇌가 아니라 정신일 것이다... 데이지를 위해서라면 관대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