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만약 신이 있다면 아마도 이 세상 안쪽보다는 바깥에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또는 물리적인 탄소 기반 물체보다는 다른 방법일 테고. 아울러 궁금함에서 상상은 시작되고 그것은 제한이 없으니, 가정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신은 개미를 만족시키고, 벌의 눈 밖에 나지 않으며, 로마제국 병사들보다 훨씬 못생긴 채 삐리하지 않을 것이다. 싹싹 빌든 교묘히 꼬시든 물고기들의 환심을 반드시 사야 한다. 어떻게라도 구워삶아서 기필코 당신의 마음에 들어야만 할 것이다. 확실한 건 이렇다. 동물은 인간의 밑이고 신은 인간의 위라는 점. 그 때문일까? 역설적이게도 인간에게 신은 밉상이면 안된다는 것. 혹시, 모순인가? 아닌가? 아니네. 왜냐하면 나는 SF에 나오는 괴물이요 라면서 만인을 놀라게 하여 거창한 공인이라는 심사를 통과해야 할 테니까. 만화영화에 나오듯이 행성들을 저글링하며 시간에 구속 받지 않기를 누군가는 바랄 테니까. 이미 데뷔를 인정 받지 못했던 실-사례가 일부 존재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양치기 소년이 나비에게 거짓말을 하겠나 구애를 하겠나. 양치기 소년이 나비로 변신하지 않는 이상 그런 거 다 포기해야 한다. 어떤 거? 사랑의 나비 입장에서 감탄할 수 있는 탁월한 신기함이랄지, 슬기로운 복음이니 뭐니, 놀라운 새로움이니, 손쉬운 비유법, 슬픔의 역사를 고찰하기, 아찔한 지성과 깜찍한 재미와 행복한 사랑. 그리고 나비가 인지할 수 있는 궁극의 섭리까지 그런 거 다 포기해야 한다. 만약 양치기 소년이 나비로 변신하지 않는다면! 양치기 소년이 양치기견으로 변신한다면 사랑까지는 몰라도 사귀면 좋을 테고.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인간과 똑같은 외계인을 말 잘 듣는 좀비처럼 길들이던가. 그 당연한 순리를 누가 모를까. 남의 발을 밟은 사람은 절대로 발을 밟힌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도덕적으로 상식을 알고, 상식적으로 교양을 배우며, 학구적으로 이상을 추구할지언정 타인의 마음을 훤히 알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추정, 배려, 생각뿐. 하이힐을 신고, 거울 보고 화장하며, 치마를 입고 1달에 1번 마법에 걸리는 여자의 마음. 그걸 우리 남자들이 추정만 하지 어찌 온전히 이해하겠나.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는 희극과 라트라비아타의 아리아.
    그러니까 가짜가 아닌 진짜를 알기 위해서는 진짜가 되는 방법 밖에 없다. 토끼와 거북이. 톰과 제리. 여우와 두루미. 그리고 남자와 여자. 강력계 형사를 실제 만나봤을 때 드는 생각은 그거다. 정보가 많이 쌓이면 다르겠지만, 첫인상만으로 딱 느끼기엔 그렇다. 취조자와 피의자가 잘 구분되지 않네 라고. (너 머머해봤냐? 현장에서 체포돼봤음. 1번도 아님) 드라마나 소설에 곧잘 나오는 대사, 괴물과 싸울려면 괴물이 되야 한다나 어쩐다나. 조류학자 만큼 새에 대해서 많이 아는 사람이 비율로 따지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99퍼센트 추정만 할 거라면 몰라도 100퍼센트 이해하며 알고 경험하고자 한다면 그래야 한다. 인간은 TV 다큐멘터리 시청자가 아니라 그 주인공이 되어야만 한다는 논리. 지극히 타당한 이치다. 결코 불합리하지 않은 원리다. 미용실에서 하이에나 같은 돌격형 헤어스타일로 꾸미는 게 아니라,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진짜 하이에나! 전자는 하이에나 전문가도 뭣도 아니고, 후자는 진짜 하이에나다. 낳은 정과 기른 정이랄지 알이냐 닭이냐 같은 예를 끌어당겨도 무신론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는 힘들다. 아무리 무한할 정도로 크나큰 천문학적 우주도 어차피 그 끝이 변한다는 걸 과학적으로 증명한지도 오래 됐다. 동물원의 동물들에게 인간이 백날 설명을 해 봐야 동물들이 뭐가 뭔지 납득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인간은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무엇까지 알아낼 수 있을까. 신과 인간의 차이도 있듯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전자는 신학이고 후자는 많다. 축산업, 수의학, 인생론, 점성술, 과학, 사랑, 우정, 의리 등등.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서 무의식이 어디까지 변색될 수 있는가는 윤리일 테고. 이를 테면 인간은 드물게 자발적으로 동물 미만이 되거나, 차츰차츰 신의 영역에 근접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또 다른 예로 술 마시면 개, 빈둥빈둥 심심할 때는 사자, 으쌰으쌰 신나게 놀 때는 얼룩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원채 비슷하며 다르기 때문에 산타 마리아만 놓고도 긴가민가한다. 뭐든지 의견은 다양하다. 첫눈을 기다리고, 사랑을 그리워하며, 크리스마스 카드를 처음 보내는 첫경험 같은 거. 캐롤송에 기분이 들뜨며 흥겨운 일도 없는데 괜히 설레는 크리스마스 이브. 그러나 크리스마스 당일은 꿈벅꿈벅─헤롱헤롱─맹숭맹숭. 또 뭔 얘기하다 여기까지 온 거야? 여기가 대체 어디야! 다시 돌아와서,
    그처럼 늑대에게 승인 받고 양에게 허락을 간청해야 하는 게 만약 신이라면 그건 뭘까. 허당? 아니 삼류. 구도자? 아니 방랑자. 개구쟁이? 아니 몽상가! 우주의 바깥에 과연 무엇이 있을지 조금은 궁금할 테니까. 그보다 차라리 누가 천사이고 누가 요정이며 누가 악마인지 모르는 게 어쩌면 나을 수도 있고. 만약 그 뭔가를 알게 된다면 좋은 쪽으로 그림을 그리는 수 밖에.
    따라서, 따라서긴 뭐가 따라서야! 결론은 이렇다. 패자부활전은 난 모르겠고, 멋진 친구들의 기쁜 삶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라는 점. 우린 챔피언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의무방어전을 연상하며 명대사를 연구하기. 그리고 혹시라도 세계 마초 협회에서 허풍 대회를, 허당 클럽에서 자랑 대회를 개최한다면 시원하게 예선 탈락하기. 고로 명분은 충분하겠다 많이 참았겠다 짱돈 아니 비상금도 마련됐겠다, 야 야 가자 가자 당장 떠나자! 어디로? 희망의 나라와 신비한 낙원과 환상의 세계로! ~가 아니라 오픈발이 어쩐다는 나이트클럽 에뎅2로.
    농담이 지나친 점 깊이 반성하고. 그래도 하기 싫어도 공부는 해야 한다. 적기라는 게 있으니까. 가기 싫어도 출근해야 한다. 위선과 가식, 판에 박은 듯한 예절과 식상한 빈말도 다 필요한 법이다. 비둘기나 동네 똥개가 실례한 그것마저도 긴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싫어도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난 아니다 난 아니야.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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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니면 말고 2

from 칼럼 2018. 11. 11. 15:29

1

    근사한 심성의 소유자들은 결코 드물지 않다. 예를 들면 이렇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헤어스타일, 의복, 구두, 악세사리의 총액이 얼마 이하인 서민이 평균이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 과연 없을까? 유니언 잭은 패션 아이템으로 흔하지만 현지에서 그걸 돋보이게 입는 사람은 단지 극우 정치인 누구 정도뿐. 보이면 보고 들리면 듣지만 그걸 내가? 고상한 숙녀께서는 어떻게 입고, 무엇을 보며, 얼마나 세련되어야 할지 잘 아신다. 브랜드 로고조차 특정 국기와 비슷하면 숙녀는 사석에서 망설이지 않고 말한다. 서슴없이! 싸구려는 지나가던 개한테나 던져주라고! (그건 정당함. 옳음. 나쁘지 않음. 예쁨. 그렇지 않으면 사석이 아님. 친하지 않음) 우정이라면 썩 동의 못할 말은 아니지만, 그 말이 어쩌다 풍문으로 들리길래 오히려 오기가 발동해 그 옷만 샀던 사람. 없을까? 어디 출신 과티를 입는 친목의 범주에서, 유독 튀고 유난히 파격을 추구하는 한 친구 때문에 그 사교계에서 발을 빼고 싶은 심정. 사석에서 그런 말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너무도 친한 친구들 사이지만 지나치게 성대한 약혼식을 여네? 참석한 다음 각자 돌아가면서 할 말은, 짧게, 뻔하다. 하지만 우정은 영원하고.
    고결함에 대해서 친교가 아닌 혈연에서 일정 범위를 넘어서는 특별함이 발생할 수도 있다. 부족할 것 하나 없는 그런 남부럽지 않은 집안에서 미운 오리 새끼도 그런 아이가 없다니. 진짜로 영화처럼 산다면서 완벽한 천재지만 막노동판을 전전하겠다고? 부모님 머리 위로 송글송글 부쉬쉭 수증기가 끓어오를 일이다. 사극만 봐도 반틈 미친 척해서 막판에 재기에 성공하는, 진짜로 미쳐서 목숨을 건지는 왕자도 나온다. 즉 탁월한 조건이 드물게 새똥에 해당할 수도 있고, 쾌적한 환경이 어쩌다 바나나 껍질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물론 개인의 자유이고, 그 비율 때문에 고된 일과 힘든 일을 도맡아 지구가 잘 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층위라는 걸 알게 된다. 똑같은 상황과 똑같은 현상을 보고 사람들 생각은 제각각이다. 취향이니 존중해야 하고, 안목이니까 존경 받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천부적인 큰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살면서 잔기술이 발달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물건을 놓고서 <머머 내꺼랑 바꾸자> 라는 말은 틈틈히 반복된다. 어디 물건만? 사무실을 운영하는 아들이 사장이라서 엄마는 반찬을 전했는데, 거기 2인자인 사장의 친구&부하가 반찬 그릇을 깨끗이 씻어서 직사광선에 꼼꼼하니 말려서 돌려주네? 뽀드득뽀드득 뭐야, 냄새 0 이잖아! (너 워매~ 우리? 내!) 아들-하자! 라고 어른은 말씀하신다. 사랑이 무엇인가? 내꺼-하자 아니냔 말이다! 옥석은 가려지고 행운은 어디로 튈 줄 모르며, 시장이 있으면 고품격 사교계도 있다.
    수평. 보아하니 수평은 혼잡하다. 그렇다고 수직이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래서 나이트클럽은 오픈발이 중요하고, 바깥에 서서 선수 입장을 관리하는 절차가 더 중요한 법이다. 난 음악은 무엇만 듣고, 글은 딱 뭐-뭐만 읽고, 동선이야 미술관과 어디와 어디만! 그런데 따따부따 유명마를 탄 뱁새는 역으로 타인들을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잠자로 본다? 제발 스스로 알았으면, 알아서 거리를 두었으면! 직업인도 아닌데 날이면 날마다 해충-조류-심리학 연구에, 영화광도 아닌데 매일처럼 고스터 버스터즈를 보고 또 보기? (절레절레)! 귀족들 세상이던 옛날도 아니고 신분이니 재산이니 잘난 척이니 다 좋고, 얼마든지 괜찮다만 교양미가 무엇인지 만큼은 모르지 않았으면. 그게 아니라면 겉이야 똑같은 사람이라지만 서로 다른 종으로 볼 수도 있는 일이다. 닭, 오리, 너구리, 딱따구리, 거위, 넙적부리 황새, 펠리컨, 기러기, 갈매기, 촉새, 나비, 나방, 날파리, 벌꿀, 모기까지. 가난해도 얼마든지 괜찮고 직업이 무엇이건 집안이 어떻건 다 좋다만, 거지라도 좋다만 우리는 그저 교양인으로써는 평범하기를. 개성으로 특별한 거야 얼마든지 갈채하겠지만, 교양과 상식은 고유한 개성과 달리 평범하기를. 따라서 숙녀는 기도한다, 부디 뭘 좀 아는 남자가 날 좋아했으면! 보던 TV를 끄고, 가던 클럽에 발길을 끊고, 사귀던 친분에게도 핑계를 골똘히 강구하는 일. 구독하던 과학잡지마저 튄다마와 침팬지 특집이라니! 피가로지에 기고하는 어느 칼럼니스트는, 타임스에서 은퇴한 문화부 기자는 그래서 날개 돋힌 듯 팔렸던 파울로 코엘료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눈길조차 줄 시간마저 인색해하는 게 지극히 정상이다. (옛날 기준으로 천하디 천한) 광대가 지금 세상에서는 자기가 자기 입으로 나는 아티스트, 너네는 대중예술가! 그분도 성격 보면 딱 그렇다. 자기가 어느 자리에 가서 2인자다? 2번은 없다. 친교를 오직 병풍들로만 구성하는 빼어난 재주를 지녔으니까. 특급 나이트클럽, 그리고 초-호화 요양원! 객관성을 따져보면 그렇다. 전자에 입장 금지 당하면 기분 나쁘고, 후자에 갔더니... 오오 저런! 은퇴 번복해도 관심이 뜨겁지 않으니까, 어떤 사업에 큰 투자를 했다가 이렇게 자조 섞인 한마디가 탄생한다.
   「오오! 하늘은 딴따라에게 큰 부를 허락하시지 않는구나.」
    그래서 난 행복해, 그의 인생은 불행했다 라면 차라리 낫다. 무관심에 인기 없음, 구애에 무반응보다는 말이다. 늬가 잘났냐 내가 잘났냐 라는 추접스러운 우정과 유치한 사랑. 그 외에도 수평적인 세상사의 다양성이라는 게 이렇다. 무명이 행인3의 시선으로 봤을 때 말이다.





    2

    그렇지만 번잡한 수평에 비해 비교적 수직적인 먹고 살기의 문제는 또 다르다. 먹고 사는 문제는 '아니면 말고'처럼 거칠고, 공격적이며, 사나운 성질을 띄기 마련이다. '아니면 말고'라고 주로 말하던 사람이 어느 날 보니 180도 바뀌는 일. 그런 말을 웃음의 용도로 선호하면서 그냥 무덤덤히 여기고, 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일. 그저 인생이다. 말도 말어 말도 마! 야 야 떴어 떴어 고개 돌려 고개 돌려 모른 척해 모른 척해! 먹고 살기가 그렇다. 사이코패스 직장 상사가 능력이라도 있으면 내 능력이 상승하는 동안 꾹 참을 수 있다. 그래야 한다. 하급자의 능력을 일취월장시키는 능력 만큼은 업계 최고니까. 그렇지만 어느덧 내가 연못만 해지면? 스카우터가 그 정도 감까지 잃으면 은퇴할 시기가 임박한 것이다. 현역 선수들의 전출-은퇴 시기를 관중이 따지는 일처럼.
    말습관에 따른 층위가 어떻고 함께 사는 세상이니 만큼 시끄러울 수 밖에 없다지만 다양성이란 건 여간 쉬운 문제가 아니다. 가령, 패션의 완성은 얼굴인 법. 피부색이 까맣다면 속으로, 될 수 있으면 아프리카로 돌아가주었으면 하는 사람. 0명은 아닐 것이다. 나랑 생각과 구사하는 언어의 개수와 관습이 약간 다르네? 너네 원주민들 사는 고을로 돌아가라, 라고 거리에 나서서 으쌰으쌰하는 소수라고 왜 없겠나. 이를 테면 배보다 더 큰 배꼽은 차라리 낫다. 심지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고 오히려 그거면 양반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떤 비율이랄지 무슨 불문율 때문에 은근 꺼림직하니까, 왜 우릴 피하시오? 라~고 어떻게 없을 수 있을까! 동성애자들이 괜히 커밍아웃을 안 하는 게 아니다. 일단 멈칫 해야 정상이거든. 서로 다른 걸 어쩌겠나. 오히려 멈칫 하면 최선이고, 너무 자연스러우면 차선이게? 구시대적 잣대를 들이미는 구체적 내용이 정말 어떤 것인지, 애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싶은 마음. 어른들은 모르지 않음. 무대 위의 개 100마리, 1000마리가 있는 모습을 어떻게, 그 짧은 낱말, 그걸 어찌 내 입으로 말하리요! 좌-가죽점퍼요 우-수트가 있는데, 왜 슬리퍼가 나선단 말인가. 내 손에 패스트푸드점 케찹을 묻히라고? 아마데우스를 듣고 자란 희소품 최고급 스테이크를 놔두고? 영화에 나오기로는 중간보스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피어 신분께 피어 미만은 사람이 아니라 그건 일종의 짐짝이랄지 물건이었고, 지금은 겉으로는 평등해졌다. 그렇지만 생각을 표출하는 것으로 보건대 (과거 기준에 해당하는) 칼춤 추는 사람과 백정은 있다. 현재 직업이 아니라, 생각을 표출하는 근거로 따졌을 때 말이다. 생선 팔고, 농업에 종사하며, 행복을 배달하는 게 뭐 챙피한 일이라고! 그게 아니라 내 안의 무의식을 온전히 바깥으로 다듬어서 내놓는 과정을 말하는 거다. 오직 무의식에서 의식, 의식에서 생각, 생각으로부터 말과 글! 순수하도록 딱 그 과정에 근거하여, 그 기준에만 따르자면 옛날 세상의 칼춤 추는 사람과 백정은 있다. 아니, 많다. 엄청 많다. 말도 못한다. 오히려 오락산업이 제일 반기는 부류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다. 곧, 옛날에 귀족들은 사냥을 했고, 지금 세상 뉴질랜드에서도 낚시로 물고기를 잡자마자 슥삭슥삭해서 생으로 먹기도 한다. 잘 익지도 않은 생두로 커피를 뽑듯이 말이다.
    한편, 집고 넘어갔으면 싶으신 분도 계실 테니 잠시만 한말씀. 앞서 뭐, 패션의 완성은 얼굴인 법? 못생긴 사람 이거 정말 서러워서 살겠나! 단순함 1.0을 심하게 2.0까지도 말고 살짝만 틀어보자. 대폭이 아닌 소폭만 부분 업그레이드 말이다. 재미없는 풍요이자 불행한 갑부가 낫나, 아니면 행복한 평민이요 정겨운 가난이 낫나! 물론 우월한 신체조건 빼고 모두 가진 남자라고 다 좋은 건 아니다. 누구나 장단점과 더불어 제약은 있고, 하루 3끼 먹는 건 똑같다. 나이 들면 팔과 목이 짧아지는 것도 똑같다. 초-갑부와 유명인이 눈총을 얼마나 받고, 입길에 어떻게 오르는지 자세히 알면 까무러친다. 아무도 부럽지 않다는 어르신이 계신 반면, 회춘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걸겠다는 멋진 늙은이도 있다. 좌우간 모든 것을 가진 노인보다는 맨발의 청춘이 낫긴 낫다는 데 반대표는 많지 않다. 인생은 생각하는 태도 반에 희망적 자세가 반이다. 물론 액면은 긍정이더라도 필요하니까 부정적 사고방식도 대타로 거느린 채 말이다. 반틈 일한 밭! 남은 반틈 언제 다하지? 반대로 반틈 했으니 반틈만 하면 되겠네! ~라는 마음가짐과 몸가짐! 50 대 50을 장조냐 단조일 것이냐, 개인의 자유다. 외모도 한몫하는데, 외양과 웃음 같은 거. 그리고 스타킹. 스... 뭐? (말리지 마 아직 안 끝났어. 거의 막판이니 기다리라고 이 친구야) 슬리퍼가 가죽점퍼와 수트들을 오래 관찰하다 보면 보인다.
    결론은 이렇다. 놀랍도록 간편하게 유명해질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니 약간 애매한 일에 대해서까지 아니면 말고? 한 번쯤 생각 좀 해볼 일인가, 스스로 판단하기를. 뭐든지 대부분 차분히 생각을 하면 알 수 있다. 워낙 세상사가 발전하니까 기계가 나보다 더 똑똑해지고, 생각마저 기계가 대신하니까, 자꾸자꾸 생각을 덜 하고 안 하게 되는 듯 해서 잠시 잔소리가 늘었다. 만약 플라톤이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에 와서 뭔가를 진단한다면 그렇지 않을까 라고 추정해봤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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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니면 말고 1

from 칼럼 2018. 11. 7. 17:10

    1

    인생이란 그럴지도 모른다. 즉 단조로운 생활에 만족하느냐, 화려한 삶에 불만족하느냐! 일단 도표는 생략하고. 그게 아니라 나는 거꾸로맨이니까 단순한 삶이 불만족스럽지 않나요? 하긴 루저도 급이 있다. 왜 없겠나. 진실을 외면하면 후퇴만 있다. 패전 처리 전담 요원이나 벤치멤버는 꿈조차 못 꿨을 수도 있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결과는 무조건 상심이라면! ~그래도 밝고 맑고 청순하며 긍정적인 그녀를 꼬시기 위해, 냉소꾼 늑대는 양의 탈을 쓰고서 오늘도 낙천주의자 행세를? 그런데 그녀는 자긴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서 애원을 정중히 거절! 그래서 아마존에서 장난감을 사겠지.
   「알렉사. 뭐 재미난 일 없니? 나 또 차였어!」
   「나보고 어쩌라고! 안될 놈은 뭘 해도 안되는 거야. ~라고 친구한테 악담하던 자신의 옛 모습이 혹시 기억나십니까? 네, 주인님.」
    뭐가 어쩌고 어째? 브랜드는 말한다. 나이키는 그냥 해, 그러나 난 해도 안돼. 그냥 하긴 뭘 그냥 해! 입으로 먹고 얼굴에 바르는 광고도 말한다. 사랑하니까! 뭐, 사랑하니까? 하지만 거기 아르바이트는 날 짝사랑해주지 않는다. 그런 바램의 실현은 추호도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고 뭐 행복을 마셔라? 나 살 엄청 쪘어. 아, 보라니까! 그렇다고 애플의 띵크 디퍼런트? 우리 동네 바에서 말 많기로는 내가 단독 1등인데, 아 이 양반아 내가 압도적으로 1등이면 뭘해! 바텐더들 눈빛을 누가 뭐 모를 줄 알아?
    신사 숙녀 여러분!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은 인생 2막의 좌우명에 도착한다. 돌고 돌아서 사뿐히 안착한다.
    그건 무엇? (딱) 안되면 말고! 다시, 아니면 말고!
    그 잘난 유명인들이 착한 일도 많이 하고 웃기며, 항상 웃을 수 밖에 없어서 안면 근육이 씰룩거리느라 고생하는 거 다 알아, 나도 다 안다구. 그런데 그 중에 잘난 척을 하면 할수록 웃긴 사람이 있고, 입만 열면 망하는 사람도 있다. 좀비영화가 괜히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고, 공연히 뻔뻔마와 간사마가 비밀 리에 유행하는 게 아니다. 너도 나도 튄다마에 올라타며 잔칫상이 차려지든 말든 일단 숟가락부터 올리기. 우선 그냥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을 궁리 하기. 번갯불에 콩 구워먹기. 그렇지만 퇴물도 물건은 물건이고 우리도 먹고는 살아야 하거든. 또 그렇지만, 손가락만 까딱해도 재수없고 입만 뻥끗해도 유난 떠는 족속, 드물게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누군가 나를 그렇게 보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호불호는 나뉘니까. 좋다. 괜찮다. 나쁘지 않다. 수긍한다. 이치가 그렇다. 일리 있는 말일 뿐. 그런데 문제는 그것.
    우리는 너무 막사는 건 아닌지! 세상은 너무 요지경이 아닌가 라는 점.
    나 혼자서 망가지는 건 괜찮다. 다만 나 망가지며 나 망할 때, 나를 따르라? 저런!
    딱 모두 모였는데, 자길 따르라던 그 형씨는 대체 어디 갔냐고! 그러니까 약속 장소로 나가면 나 혼자 뿐이지.
    바로 이 지점이다. 안되면 말고? 아니면 말고? 왜 이상하지! 왜 이상할까! 뭐지? 뭐지? 대체 뭘까? 도대체 왜 살짝 갸우뚱 하는 거냐고. 왜냐하면 그 때문이다. 바로, 우리는 어렸을 때 하면 된다 라고 배웠거든. 학계와 업계가 많이 다르니까 애들마저 동요는 건너뛰지 않게 생겼나. 여기서 정확히 나뉜다.
    첫째, 최선을 다하자. (A급의 겸손이지만 알고 보면 '아니면 말고'와 절반쯤 똑같음)
    둘째, 대충 살자.      (B급 유명인의 아니면 말고. 잊혀진 노병의 안되면 말고)
    셋째, 막살자.         (C급은 무명이란 말이 아니라, 일반인의 아니면 말고)
    저 1-2-3은 엄연히 다른 건데, 그런데! 행운 빼고, 전문가의 도움도 부풀리거나 빼고, 체념도 빼고, 좌절도 빼고, (개)고생도 빼고, 대충 포장하고 쇼맨쉽으로 더 포장해서 조명을 비춘 다음에, 딱! 짜잔~ 캬~ 으아~, 아니면 말고! 뭐?
    답습하고, 베끼며, 모방하고, 따라하기. 갓난애기처럼 흉내내기는 인간의 본능. 장점 본뜨기는 나쁜 게 아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그것은 둘로 나뉘게 된다. 곧 날 따라해봐요 이렇게, 또는 따라하지 마! 옛날 어느 가난한 화가는 사후에 유명해졌지만 이제는 누구나 바이런처럼 조명 받기가 쉬워졌다. 인터넷이 없어서 호시절을 누린 예가 그 얼마나 많은가! 역으로 인터넷 때문에 물 만난 물고기도 많을 테고. 하지만 지금은 포장의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시대. 때문에 세상을 비롯해서 오락산업은 당신을, 그 누구도 그대를 거들떠보지 않도록 가만 놔두지를 않는다. 마치 남자가 여자를 귀찮게 하듯이 말이다. 그 바닥이 장난이 아니거든. 응? 그런데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거울아 거울아 라면서 동화 백설공주 따라하기. 거울의 안과 밖이 다른 데도 불구하고 또 마이크 잡고서 뭐라고요?
   「아니면 말고!」





    2

    그 말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그러니 피라미드의 상중하를 살펴보자면 이렇다.
    A.피라미드 상. 말하자면 피라미드의 최상층은 내가 페가수스다 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유니콘이다 라고 외칠 필요가 없다. 파랑새가 뭐하러 나는 파랑새다 라고 주장하겠나. (나를 캥거루로 부르지 말라, 는 지식-상식-교양으로만. 양치기견으로 태어난 건 내 의지가 아님) 이를 테면 페라리보다 빠른 치타, 마담의 사자머리보다 원류인 사자, 고유한 문양의 외로운 호랑이. 또 웨이터 에르메스. 제비복 입고서 고전음악을 아직도! 그리고 메트로놈까지.
    B.피라미드 중. 하지만 피라미드의 중층은 어떤가? 말도 못한다. 혼전도 그런 혼전이 없다. 우리들 친구들만 봐도 딱 그렇지 않나. 촌닭도 그런 촌닭이 없지 않나. 얘가 누굴보고 촌년이래, 어? 늬가 더 촌년이야, 어? 알아? 그러니까 늬가 남자친구가 없는 거야. 어? 그러니까 늬가 뭘 해도 안되는 거라고. 알어? ~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바로, <안되면 말고>가 다 이 층위에서 나온다.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도 어차피 모두 B다. 아마데우스는 영원해도 연주자는 직업인이다. 하이든도 고용인이자 낭만파 음악인들도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다지만 작곡가와 연주자는 전혀 다른 세계. 피라미드의 상층도 잘 모르면서 피라미드의 중층까지 신경 쓸 여력이 많으면 둘 중 하나다. 속 편하거나 시간이 많거나. 아, 어리다도 있겠네. 숙녀들이 말하는, 뭘 모르는 남자도 있겠네. 헤어질 때 그 얘길 듣는 숙녀도 있겠네, 넌 너 밖에 몰라! 뭐야 이거, 계속 나오면 곤란한데. 지나가는 이야기로 인터뷰 기사가 하나 생각난다. 어렵게 인터뷰 일정 따내서 준비한 문답이 오가는데, 표범-코끼리-기린-재규어측에게 침팬치가 쓴 무엇을 읽어보셨나요? 아 생각을 해보시라. 응? 생각을! 당신께서(내가) 표범-코끼리-기린-재규어라면 그 시간을 어떻게 만들겠나! 형식적인 배려와 정식 사냥은 엄밀히 따져 같지 않거늘 내 인생을 오롯이 선심성에 할애하라고? 아무리 진보하고 비율이 어쩌고 해도 더, 점차, 더더욱 시끄러우면 시끄러웠지 그 반대는 아니거든. 이론과 현실의 괴리. 그래서 누군가 뭘 추천하고 권해도 내가 싫으면 죄송하지만 점잖게, 간곡하게 거절하는 게 옳다. 전적으로 백번 옳다. 방향성이 그렇다. 눈표범은 눈표범끼리 보노보는 보노보끼리. 그런데 차이는 있다. 보노보는 눈표범을 따라하는데, 눈표범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 억지로 봐도, 찬찬히 마음을 기울여 들여다봐도 뭔 얘기인지 도통 하나도 모르겠거든. 응? (절레절레)! 커피는 생두를 반쯤 익힌 걸로 뽑아서 먹을 수 있다지만, 진화한 인간으로써 어떻게 고기를 생으로 먹겠나. 프로메테우스가 뭐 할 일 없어서 불을 우리에게 가져다줬겠나. 자기는 그 때문에 어떤 대가를 치를 텐데. (그게 뭐 프로메테우스냐, 시지푸스지! 빡빡 우기는 친구 보면 꼭 있다. 야 내가 거기 지리 제일 잘 아는데, 조용해, 거기 옆에 뭐 있고 그 옆에는 있는 건 뭐야 응 그래 그렇지 내가 제일 잘 알아 내가 최고야 빡빡 빡빡) 물론 특식은 가능이요 외식은 OK. 곧 물고기를 재미로 낚던가, 잡자마자 슥삭슥삭 해 먹을려고 낚시를 하던가, 그 차이. 그렇지만 보노보는 또 그들만의 리그가 있고, 이 세상은 나 잘난 맛에 사는 인생을 응원한다는 것. 일평생 피라미드 상층에 기록되기 위해 발버둥치며 노력했거늘, 왜 나는 피라미드 중층에 불과하나 라는 투정을 B가? 그럴 리가 있나. 이미 그 조명에 황금에 스스로 피라미드 상층으로 인식하기 쉽상이다. 아니면 말고, 라는 자세가 괜히 이류와 삼류들의 정체성으로 자리잡은 게 아니다. 업계에 따라서는 동네 수다 잔치와 피라미드 중층은 분간조차 안된다. 나는 합리적인 소비자인데 친구를 보고는, 넌 그게 뭐니 그걸 옷이라고 입었니, 그렇게 우리 같이 놀러 가자고? 무슨 삐에로도 아니고 참 나! 그런데 나는 싸구려에 짝퉁에 가짜에, 어쩔 수 없이 1원짜리 하나에 벌벌 떨고 10원까지 아끼면서 친구한테 하는 말, 싼 게 비지떡이더라! 어지간히 일확천금이 생기지 않는 이상, 절대로 베팅을 못하는 부류다. 심지어 대회 (싸구려) 기념품을 받자마자 버릴려고 하면, 옆에서 화를 낸다. 그걸 왜 버리냐고. 이상한 놈이라고. 눈 똥그랗게 뜨고서 굳이 선천적 출신과 속일 수 없는 천성을 감추지 못한다. 그걸 왜 버리냐고. 이상한 놈이라고. 그러면서 싼 게 비지떡이네 자긴 페라리와 포르쉐를 좋아하네 뭐는 싸구려네, 그러다 갑자기 음료수 없이 최저가 햄버거 먹기? 뭐야 그거! 가난한 태생을 누가 얼마나 손가락질 하겠나. 어려서 기억나는 표정 가운데 참으로 인상적인 게 있다. 초등학교 행사에 엄마들이 왔는데, 같은 반 친구의 엄마. 속된 말로 곱추요 나은 말로 척추 장애인. 그렇지만 그 친구는 엄마를 챙피해하지 않고, 그렇지만 어떤 뭔가 차이는 있고, 이런저런 오묘한 표정. 나중 그 언젠가 반복되더라. 그래서 우정이란 건 재밌으면서도 추접스럽다. 그러니 불편함은 내내 반복된다. 공직에 있지도 않은 데도 불구하고 그런다. 음식점에서 같이 나오면서 좀 뭔가 어중간했다 라고 친구가 말하면, 늬가 가자고 했어 난 아니야 라고! 나는 뭘 해 봤기 때문에, (내 기분이 좋아서) 친구들한테 너네 뭐 해 봤어? 나는 뭘 못 해봤기 때문에, (짜증나서) 그럼 넌 뭐 해 봤냐? 숙녀들로부터 사랑 받지 못한 남자의 비애에 대해서, 유독 독불장군을 놀리길래, 그럼 넌 여자랑 사겨 봤냐? 나는... 단 1번도 사겨보지 못했지. 그런 말 들을 꺼면서 뭐하러 물어보실까. 싫거든, 짜증나거든, 아는 척하거든, 내가 꼴찌거든, 난 루저거든. 완벽한 촌닭 중의 촌닭.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성실한 아빠가 되겠지만 일평생 정상적인 연애는 단 1번도 못해본 남자요, 사랑이란 말을 친구끼리 단 1번도 안해본 남자다. 일기 0에 스무살 이후 독서 0에 잔지식만 왕창, 그리고 할 말 없음. 아니면 조롱만 왕창. 그렇지만 착실한 가장이자 정직한 남편, 가끔 재미없는 친구. 그분과 그의 단짝 친구. 속에 쌓인 게 알고 보면 말도 못한다. 그러다 목에 턱 하니 걸리는 그 말.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만은 부디 말할 수 없고. 완벽한 촌닭 중의 촌닭. 삶을 돌아보면 친구들 유형을 구분할 수 있다. 중간 보스, 영화배우 뺨 치는 친구, 성우, 달변가, 웅변가, 사기꾼, 코메디언등. 그 친구들은 곧잘 명대사를 읊었다. 캬~, 어? 캬~! 그런데 그 물결이 지나가고 나니 남은 건 그거였다. 즉, 잔소리꾼! 꽥꽥 짹짹 뿌락뿌락 떽떽거리고, 따따부따 삐악삐악 이러쿵저러쿵 닦달하며, 서로 통 듣지 않고 각자 마이크 들고 딴소리하기. 천성적으로 이 B 유형이 아무리 천문학적인 부를 거머쥐더라도, 아무리 유명해지더라도, 아무리 행복해지더라도 그 한계를 절대로 벗어날 수는 없는 거다. 통 버리는 걸 못하거나, 지나치게 완고하거나. 사겨보고 말을 섞어보면 알 수 있다. 겉으로 표출하는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정체는 들통날 수 밖에 없다. 내가 고릴라인지, 똥개인지, 펠리컨인지, 참새인지. 겉과 속이 어떻게 다른지를. 아니 그렇다면, 어? 그렇다면 당나귀의 수다를 일기장에나 쓰시지 왜 여기에? (지긋이 눈을 감고서 고개를 틀고 두상의 각도를 꺾어... 부쉬쉬쉬쉬~)! 아무튼 <아니면 말고>가 다 이 단계에서 나온다.
    C.피라미드 하. 마지막으로 피라미드의 최하층. 한마디로 무명. 다시 말해 일반인. 내가 막살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잔소리는 있겠지만─최선을 다해도 일상적으로 체념. 따라서 미덕은 대충 살자인 것! 다른 건 몰라도 중간은 가자는 것. 어머나, 철들었네? 그래서 마음 먹고 착하게 살며, 숙녀에게 다정하고 다망함을 선물하며 자상하게 에스코트를! 그러다 또 엉덩이가 근질근질 입도 근질근질하여 친구들과 만나서 으쌰으쌰? 색다른 허세로 친구1한테 밀리고, 새로운 허풍으로 친구2한테 딸리는 걸로도 모자라, 친구3은 술값 자기가 자주 낸다고 생색내지 않나 메뉴는 뭐가 불만이라며 따지지 않나, 홀딱 반할 만한 허영심 바텐더 언니마저 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니! 난 뭐 마담 꿈도 꾸지 말라고? 또 1등은 쟤요 난 꼴등, 인생이 루저라니! 그런데 바에서 켜놓은 TV 화면에서 웬 오리인지 하이에나가 나와서 또 한다는 소리가 글쎄,
    아니면 말고!
    뭐? 이러니 그분들께서 B에서 C로 옮겨갈 명분은 충분해지는 거 아닐까? B는 대충 살자요, C는 막살자! 뭐라고? 이런, 젠장!





    3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말투를 고상하게, 어조를 세련되게, 몸짓마저 우아하게 뚝딱 바뀌겠나. 그러니 일단 '아니면 말고'를 살짝 완화하는 수 밖에. 이를 테면 2번 말할 거 1번으로. 1번 말할 거 참거나 대체하기. 대신할 말은 무엇이냐,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다고. 진취성, 도전하기, 적극성, 단점 따지기, 꼼꼼하게 경우의 수 파악하기, 막무가내 떼쓰기, 트집 잡기. 각각 확 다른 듯 하지만 얼렁뚱땅 많이 비슷하다. 말하는 기교와 간교한 화술에 따라 구분이 안될 여지도 많다. 그래서 상호 화목함을 추구하기 원한다면 말습관에 변화를 주면 된다. 가령, 어쩌라고? 어쩌라구요! 아니면 말고, 그 끝에 물음표 붙이기. 그렇게 생각은 시작되니까. 여자들이 잘하는 추임새 본뜨기. 즉 할 말 없으면, 그랬구나! 앵무새처럼, 머머했다고? 아니면 고래라도 끄덕끄덕. 그런데 그 인간은 대체 말이 필요 없는 거야 아니면 원래 꿍한거야? 그냥 하라니까, 그냥 하긴 뭘 그냥해! 이와 같은 여건을 종합해보건대 정작 문제점은 그것인 듯 하다. 보아하니 토론, 논쟁, 토의, 협의, 타협, 회의, 대화, 밀담, 수다, 흉보기, 혼잣말, 대본등. 그 구분 자체를 하지 않고 일단, 응? 아니면 말고! 그래서 저 A-B-C에서 어디가 시끄럽고 누가 누가 말썽쟁이인지는 명쾌해진다. 그러니까 일단 뒤통수 먼저 긁고 나서 딴지 걸고 어깃장 놓겠다고? 못-말-려!
    A 리그에서 1팀의 표어는 닥치고 공격, 닥공! 다람쥐의 닥치고 쓰기, 닥스! 그리고 B의 아니면 말고. 또 C의 (혹시라도) 막살자 또는 대충 살자. 이 A-B-C에서 막말이 어디서 많이 나올까? 전혀 어렵지 않은 질문이다. 내가 굳이 그런 추론까지 해야 하나,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라는 퉁명스런 반문이 진짜로 들리는 것만 같다. 그게 아니라 탁월한 유머, 고급스런 농담, 아찔한 지성, 참으로 이해 못할 만큼 이상하게 눈물 나도록 웃긴 잘난 척, 깜짝 놀랄 만한 신기함과 타율왕은 물론 뻔트왕이 어디에 포진하고 있을지 가늠하는 건 퍽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니면 말고'를 하루 12번 입버릇처럼 남발하는 양치기 소년이 되면 주변에서 이미 간파한다. 완전한 허당이라고.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한다고. 소극적으로 손하나 까딱 안 했는데 얼렁뚱당 어부지리 승자가 될 것인가, 적극적으로 화끈하게 패배할 것인가. 때와 상황에 맞게 각자 하고 싶은 데로 하면 된다. '아니면 말고'라는 이름의 경주마에 확률 따져서 베팅하면 그뿐. 아니면 말고! 누구나 간혹 이용하는 말일 뿐이다. 그래서 심약한 분이랄지 순진한 소녀는 이렇게 선생님께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화법처럼 그걸 심하게 사용하는 위인은 어떻게 응수하면 좋은가요? 라고! 정답은 이렇다. 좋으면 사귀고 싫으면 무관심, 아니면 피하기! 사석은 간단하다. 사석에서, 아니면 말고? 얼마든지! 응? 마음껏! 원하시는대로. 안될 게 뭔가. 그렇지만 사석이 아닐 때는 사석과 똑같지 않기를! 그 정도 세상사 일리를 누가 모르겠나. 그런데 문제는 공과 사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 사람들이 원하는 게 뭔가. 좋아하는 게 무엇일까. 타인의 마음을 알고 싶고, 뭔가를 엿보고자 하는 건 인간의 타고난 본능이며, 오락산업은 물론이요 예술도 공과 사의 구분은 이미 옛날부터 희미해진지 오래다. 그렇지만 푼수가 나을 때도 있는데 이왕이면 바보보다는 천재가 낫지 않을까? 그러니까 '아니면 말고'의 대타들을 활용하면 어떠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 가. 해. 하지 마. 갔다 와. (친구끼리 가끔씩만) 꺼져! 오빠. 천천히 빨리 와. 살살 막 해. 됐어. 딱 됐고. 좋아. 싫어. 괜찮아. 나쁘지 않아. 아니. 그래. 될 수 있으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고! (그래? 너무 기니까, 뭘 고민하니 망설이지 마 라는 뜻으로) 그냥 해! 그럼 또 즉각 천적이 고개를 슥 내민다. 뭐, 그냥 해? 그냥 하긴 뭘 그냥 해! 그렇다고 또 방법이 없겠나, 작전명은 역시나 뻔트다. 그렇다고 대항마가 어찌 없겠나. 쟤 뻔트마야? 이런 찌질한 놈 같으니라고. 야 재껴, 거포 어디 갔어, 홈런왕 내 보내! 아니다. 이번에는 마구가 뭔지나 구경시켜 주자.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 수도 있다. 뉴욕 사는 양키즈팬이자 관광업자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이다. 뉴욕에서 관광객이란, 그 마음 모르는 사람은 없다. 주택가와 번화가의 경계에만 살아도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러니 그분께서 들리는 얘기 대충 듣고 즉시 반사적으로 직감한다. 직업병일까? 아무튼! 뭐라고 편견과 선입견이 말씀하시냐, 이렇게 옆구리를 툭 건드린다.
    북유럽? 짠돌이!
    동유럽? 재미없어!
    남유럽? 제멋대로!
    서유럽? 꽉 막혔어!
    그걸 반대로 해석하면 뭘까? 짠돌이, 이성적이고 질서 있다. 재미없어, 착하고 인심 좋다. 제멋대로, 예술적이고 재밌다. 꽉 막혔어, 친절하고 배려심 좋다. 뭐야 손님께서왈,  「그런데 어쩌죠. 전 아이슬란드 사람인데요. 아, 저는 섬 것들이라고요!」   뭐? 묻의 것은 깜짝 놀라며 주춤한다. 그러든 어쩌든 확률상 틀릴 수도 있다. 장사 하루 이틀 하나. 일상은 또 이어진다.  「뭐야 또 소세지 좋아하는 사람들이잖아? 쟤는 피자 쟤도 에스프레소!」 <아니면 말고>가 바로 이런 식이다.  「뭐야 이번에는 단체 관광객이네, 그런데 물량이 물량이... 오!」 응? 그래서 대충 비슷하게 생기면 전부 차이나, 아니며 말고!   「그런데 어쩌죠. 전 뉴욕 2포인트인데요.」  '아니면 말고'가 들으면 들을수록 재밌고 웃긴데, 개인적으로 그런 농밀한 사적 담론를 찾아서 알고 싶은데, 문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 세계 마초 협회 명예의 전당에 등록된 분들의 울분은 생각치 말자. 단지 스코트랜드에 사는 상남자들께 여쭤보자. 우리 터놓고 얘기하자면서. 가죽점퍼를 즐겨 입는 내 친구 중에 혹시 그런 친구 없냐고. 가령,
    짠돌이에, 재미없고, 제멋대로요, 꽉 막힌 친구!
    그 네 가지를 싹 다? 그런 친구 기분 나쁘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만 따지자면 오직 사실 아닐까! 뭐 아니라고? 그럼 뭐 아니면 말고! 아닌 게 아니다? 차마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을려고 했는데 기왕지사 말 나온 김에 한말씀 올리자면, 그분들께서는 뭐 그럼 좋다고 얼씨구나 하면서 스스럼없이 그 사실을 인정할까?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지적질은 어디서 지적질이야? 어? 내가 봤을 땐 늬가 꽝이고 내가 쿨해 임마. 어? 알어? 그러니까 늬가 여자가 없는 거야. 어? 그러니까 늬가 뭘 해도 안되는 거라고.」 라고 하시지 않을까? 그분들께서 저 네 가지를 어찌, 흔쾌히, 인정하시겠나! 게다가 한 번 큰 베팅을 해서 실패한 다음이면, 어쩔 수 없이 긴축 재정을 할 수 밖에 없는 형편도 있지 않겠나. 그러니까 난 아니라고? 난 절대 아니라고? 뭐, 아니면 말고! 웃자고 농담한 걸 가지고 그렇게나 도끼눈씩이나? 글쎄요 글세요.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어. 아니면 말고!」  진짜 늑대는 괜찮다고 한다. 자기가 늑대니까. 자기는 진짜로 간혹 양떼 목장에 들르니까. 그런데 자칼은? 여우는? 너구리는? 필자가 만약 두더쥐라면 나까지 늑대로 상정한 채 '아니면 말고'라는 으쌰으쌰가 살짝 들린다면, OK! 왜 안되겠나, 나쁠 거 없다. 재밌다. 웃기다.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음. 딱히 언급하기도 귀찮음. 감정 요만큼도 없다.  「늬가 정말 그렇다고? 정말로 그렇다고 늬가? 이 자식이...!」 양치기 소년은 약 올라서 동네 넘버쓰리 꼬마한테 시킨다. 쟤를 더 약오르게 놀리라고. 그래서 막 두더쥐 앞에서 두더쥐 흉내내고 메롱 메롱 놀리고 비하에, 차별에, 조롱에, 따돌림에? ......(효과음)...... 내가 이상한 건가! 아무렇지 않네? 그걸로도 모자라 꼬마 녀석은 엄마한테 딱 걸려서 엉덩이 까여서 엄청 얻어터지고 수도꼭지 터진 것처럼 울고불고. 인형극이야 뭐야! 괜히 내가 다 미안하잖아? 이런 젠장, 뭐야 이거! 아니면 말고?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고. 일단 넘어가자.





    4

    어떻게 사느냐,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조금씩 바뀐다. 툭하면 '아니면 말고'였던 야망가가 '그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라는 호인으로 변하기도 한다. 막사는 듯했던 삼류가 대기만성해서 어엿한 어른이 되기도 한다. 짠돌이라는 낱말에 빈정 상하고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 검소한 소비 습관, 행복한 인생의 필수 요건이다. 기분파든 팔랑귀든 아낄 때는 아껴야 한다. 현명한 돈 관리, 인생의 장르가 좌지우지된다. 낮에는 오늘을 살자 라며 열심히 일하기. 해가 지면 내일은 없다며 풀 베팅. 아니면 일찍 집으로. 인생이란 사랑의 인사라는 꽃도 좋다. 하지만 금단의 열매와 달콤한 쾌락, 꿈 같은 전성기도 좋지만, 행복은 구체적인 것. 생업은 추상적이지 않다는 점. 먹고 살기의 제1번은 그 벌고 쓰기 라는 씀씀이인 것. 꽃과 화병의 애정도 모두 다 그 다음에 성사시켜야 할 부차적인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생존을, 인생 극장은 생업을, 배우 수업은 운명을 뜻하지만 그에 앞서 삶은 벌고 쓰기가 최우선! 그래서 배당률은 이따금 닭 알에서 오리가 태어나는 기적을 실현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뭘로 봐도 유리할 수 밖에 없는 가족마랄지 큰 재주 딱 1개만 타고난다랄지, 그것이 아니라 잔재주만 많다고 투덜거리는 일도 어찌 보면 복에 겨운 일일 수도 있다. 수트 입은 평범한 봉급쟁이, 흥정에 익숙한 장사꾼, 천직을 찾아 성공과 실패를 오가는 사업가. 7번마에 베팅할지 착실히 예금만 할지 야생에서 뛰노는 망아지는 나중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아직은 모른다. 인생은 모르는 거니까. 마치 사랑처럼! 어찌 됐든,
    결론은 이렇다. 정작 절실할 때는 따로 있다. 아니면 말고, 가 딱 필요해서 최적의 대타가 투입될 적기는. 왜 연애 얘기할 때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을 주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으면 웃지 않을 수 없을까. 잘 아시다시피 다큐멘터리에 나오듯이 하고 또 하고 따따부따 아무리 반복해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밀림의 맹수들이 아무 때나 최선을 다하면 진짜 먹잇감, 저거 잡으면 1주일을 안심할 수 있는 먹잇감이 나타나도 매가리없이 비리비리 불쌍하게 쳐다만 봐야 하기 때문. 충분히 잡을 수는 있겠지만 찰과상의 피해는 감수해야 하니까, 거기에 감염되어 1주일이면 꼴까닥일 수 있다는 걸 절대 모르지 않거든. 내 인생의 운명을 만났을 때! 뭘 해도 재미없고 언제나 작심삼일이었는데 마침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 바로 그때가 되면 '아니면 말고'라고 말해서는 결코 안되는 거다. 뭘 하던지 '아니면 말고'를 남발하고, 습관처럼 '아니면 말고'를 오용하면 진짜로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될 탐스런 목표를 영영 놓치게 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다음에 갈 곳은 딱 정해져 있다. 곧 아무 말 대잔치와 자기 합리화 경연장일 수 밖에. 허풍 대회랄지 자랑 대회라면 차라리 낫고. 그처럼 '아니면 말고'식 배짱은 부릴 때와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무턱대고 아니면 말고, 친구 따라서 어디 가고, 누구 따라해서 아니면 말고? 인생은 하루 아침에 답답하고, 시시하며, 하찮고, 짜증나며, 재미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떼나 떼쓰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우기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다고!
    아니면 말고? 그거 다 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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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일기

from 칼럼 2018. 10. 28. 18:34

    나는 최근 자진해서 일기를 쓸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할 말을 일기장에 옮길 수는 있지만, 그러면 할 일에 (악?)영향을 받기 때문이었다. 물론 하고 싶은 말이 별로 없었을 수도 있고, 단순한 핑계일 공산도 크다.
    그런데 쓰는 일이 업인데, 그와 별개로 일기를 또 쓴다? 정력이 왕성할지라도 순수하지 못할 여지가 다분하다. 액면─미끼─흑심─사심─양심─본심─동심─사랑─변심─풋사랑─추문─스캔들, 그 구분은 썩 확연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쓰는 일이 업인데 그와 별개로 일기를 또 쓰면, 생전에 출판해서 품위 유지비를 두둑히 챙길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래도 되고, 그게 나쁜 일도 아니고 일종의 취미와 똑같은 일이지만, 누구나 그러지만. 그야 어쨌든 상술이라는 야유와 딴따라라는 조롱쯤이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닌, 나는 그런 입장이 아니다. 뭐 어떤 비꼬기가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은지 오래된 처지도 아니다. 그래서 무관심에 특급 처방은 노이즈마케팅일까? 넘어가고. 취미와 일이 분리되지 않으면 타성에 젖을지도 모른다. 싫증에 뚜껑이 열리느니 미리미리 으쌰으쌰 달리는 게 낫다. 회사 서류를 집에까지 들고 와서 들여다보면 부인께서 참 좋아하시겠다. 내놓으라 하는 요리사를 만나러 동생이 가게에 놀러왔는데, 왜 그 요리사는 배달 음식을 시켜줄까? 노는 게 일인 경우도 있는데, 대체로 일은 일이다.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놀고. <놀 때 놀고, 일할 때도 놀고>를 누가 싫어하겠나! 터놓고 말해서, 일하기 싫고 공부하기 싫음이 솔직한 거 아닌가? 내가 아는 친구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안 친한 거네, 친구는 1이고 댁은 1.5구만, 사석에 뭔가 상품이 걸린 우정이구만 그래. 학교 가기와 회사 가기가 좋다면, 월요일 아침 거리의 사람들 표정은 대체 뭘로 설명할 텐가.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고, 좋아도 고백하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 경우에도 그렇다. 쓰기에 미치지 않는 이상, 놀기와 휴식에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그렇기는 하나 어차피 어른도 응석 반 투정 반이다. 그게 아니면 넉살 반 불평 반. 업어치나 메치나! 기분 좋으면 일기를 쓰지 왜 못 쓰겠나. 어렵게만 생각할 일도 아니고, 굳이 순수한 동경심과 포근한 소망을 편애할 소녀 감성에 스스로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하면 된다. 나는 꼭 일기장에 자발적으로 뭔가를 적고 싶다는 욕구가 풍선처럼 부풀면, 그때는 일기를 쓰기로! 간단하네.
    산악자전거 대회 대 부엘타 아 에스빠냐─뚜르 드 프랑스─지로 드 이탈리아! 고전음악 전공자가 대중예술계로 데뷔하는 일이 그 반대보다 많듯이, 왜 그런가는 언젠가 설명한 듯. 그렇듯이 어느 전설적인 레이서는 이렇게 말했다. WRC 레이서가 F1 머신을 모는 것이 F1 레이서가 WRC 머신을 모는 것보다 쉽다고. 왜 아니겠나. 당연한 얘기. 그건 그거고,
    아무튼 그런 레이서가 백화점-공원-옆 동네에 놀러가면서 운전하는 것. 일보다는 일상인데 꼭 누군가 옆에서 부채질하고, 부추기며, 살살 꼬시고, 꼼지락꼼지락 간질간질 깐족거리는 일. 영화에 보면 나온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부화를 돋구면 깐죽 분위기를 끄던가 신경쓰지 않던가. 아니면 기대에 부응하여 열정으로 상대를 만족시키던가 딴청피우게 만들면 된다. 다만 빈말에는 응수하지 말기를. 실제로는... 넘어가고.
    (잠깐. 깐족? 행동으로 알짱알짱 얼쩡얼쩡, 말로 변죽을 울리는 일 외에도 있다. 가령 친구1의 여자친구한테 친구2의 점백이라는 놀림은 기름 붇는 일이 아니다. 친교가 별건가. 단지 그 말에 빵 터져서 웃음이 도저히 멈추지 않는 친구3이 밉상인 거다. 연애하며 찬물을 끼얹고 싸우고 또 싸우느니, 사랑의 뒷모습이 멋진 게 난 좋더라! 그런데 그 친구3이 대체 누구였더라...?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이론은 그렇다. 철들면 재미없다고 해도 어른은 애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혼자 삭힐 건 혼자 삭혀야 한다. 드라마 대사에 나오듯이, 난 그이를 사랑하지만 좋아하지 않아요? 애증이다. 명백한 후반전이고 어쩌면 연장전이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숙녀는 원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고. 즉, <사랑의 시작 그 파릇파릇한 감정의 영원함>과 <습관적으로 짝사랑 받기>. 그녀는 그 둘을 양쪽에 꿰차기를! 아닌가? 그건 열망이 아니라 뜬구름 잡는 공상이라고? 넘어가자)
    곧 말하기, 듣기, 읽기, 보기, 쓰기, 베팅하기, 차기, 뛰기, 넣기, 장비발, 먹기, 타기, 좋아하기, 사랑하기 그리고 행복하기! 뭐 아이스크림? 어쨌든 인간의 본능이다. 하든가, 못하든가, 안 하든가, 참든가!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까지. 그러거나 말거나. 뭐가 됐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해서 하면 된다. 따라서 공과 사를 나누듯 구분을 하고, 이치를 깨우치며, 원리를 이해하여 행동하면 된다. 예를 들어 나는 일기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 또는 쓰기에 어떻게 임할 것인가. 왜 쓰는가, 에 대한 반문일지도! 일단 보기를 들자면 이렇다.

  1. 타석왕: 아무말 대잔치! 짹짹─꽥꽥꽥─따따부따. 뭐든 막 쓰기. 닥치고 쓰기. 또는 근면&먹고 살기. 예선 탈락도.
  2. 타율왕: 딱 영감이 떠오를 때만. 바로 그때 뭘 써도 쓰기! CD는 테슬라와 베를리오즈, 콘서트는 AC/DC만, 웨이터는 에르메스요 차는 페라리!
  3. 원맨쇼: 화염방사기! (뭐, 걸리기만 해봐?)

    1번은 이렇다. 버는 족족 과소비에 퇴폐를 옹호하는 탐미주의자처럼 재산을 탕진하듯이-일 수도 있다. 물론 어둡게 보자면 그렇고 밝게 보자면 성실함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듯이, 동전을 뒤집어 보면 그거다. 하루 몇 시간 노동. 즉 무조건 하루 20페이지를 1년 365일 내내 쓰기. 장단점은 있다. 그렇게 써서 바흐나 모차르트나 베토벤급이면 좋은데 그게 아니면? 뭐 타석도 인생이니까. 7부 리그는 뭐 축구가 아니라 피군가. 이류-삼류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병풍도 사랑을 해야 한다. 신부들러리라고 언제까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아니냔 말이다. 그처럼 대부분의 직업인이 1번이다. 마감일이 존재하듯이 연봉 협상도 있으니까. 노력형 천재든 깜짝 신인이든 뭐든 어차피 1번이다. 다망과 다작과 다변등 전부 1번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도 1번인데 그런 희박한 확률에 명예욕이 동하는 것, 먹고 살기다. 아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어떤 표정이 떠오르는 것일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뭐라 설명하기 애매하지만 언제더라 객관적 자료에 따라 형세가 어둡다가, 날짜가 거의 임박해서 안색이 더 어두워지기 직전인데 딱 더 화나게 생겼는데, 그런데 어떤 깜짝 뉴스가 발표됨에 따라 기사회생한 표정! 으아~ 캬~. 넘어가고.
    2번은 이렇다. 진공청소기를 분석, 커피포트를 탐구, 고전적 액자를 애호함과 동시에 현대적 추상미를 추구하다 끈금없이 미친듯이 몰입. 걸출한 물건은 2번일 가망성이 높다. 1번이 대중예술이라면 2번은 순수예술쯤.
    3번은 이렇다. 참고 참고 또 참고. 맹해서 참든 멍청해서 둔감하든. 어쨌든 계속 참고. 참고 또 참고 꾹 참고 끝끝내 참다가, 막판 스파트로~ 쏴아~~~~~~~! 따라서 3번은 둘 중 하나다. 괴물이든가 미친놈이던가.
    1-2-3 가운데 때와 장소와 여건에 맞춰 선택하면 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자의와 별개이겠지만 부분적으로는 말이다. 다만 개가 말처럼 뛰면 곤란하고, 늑대와 양은 원래 정반대라는 거만 알면 된다. 그래서 인문교양론에서 지겹도록 하는 말이 그거다. 다른 무엇보다 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그게 잘 될려나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변수도 있다. 일례로 말수 없고 나서기 싫어하는 1번에게 만약에 떼돈이 생긴다? 그분은 하루 아침에 2번이 된다. 1.1─1.2─1.3..... 점차 상승할 수도 있고. 만일 말수 없고 나서기 싫어하는 1번이 참다 참다 끝내 못 참고 울분을 토로한다? 밑도 끝도 없이 희귀하게도 3번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전에 사교나 취미랄지 뭔가로 풀고, 사전에 짜증 계량기의 압력을 낮춰야 한다. 기본기를 신경 쓰고, 멜라토닌 분비량을 늘리며, 각종 호르몬 변화량에 신경 쓰는 일. 으쌰으쌰가 뭔가? 수다 3시간과 위스키 3병이 뭐냔 말이다. 장타가 좋긴 좋다만 당장 유흥비 마련을 위해서 여행회사의 주식을 단타로 사고 파는 일. 그걸로 한몫 챙긴 친구한테 술을 얻어먹어봤는데, 기분이 썩 묘하더라. 좋긴 좋은데, 그냥 단순히 좋은 것과는 또 다르게 좋더라! 그거 뭐지? (단, 단타는 될 수 있으면 쩜쩜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에 생판 모른 사람왈, 타지도 않고 문이 닫히는 그 틈으로 말만 던짐. 누구씨 머머 종목 사세요 늦기 전에요. 끝. 그런데 그 말에 혹해서 그분은 자그마치 3장을 날렸다나 뭐라나. 원 세상에나!)
    그리고 그래프를 참고하자면 그렇다. 스포츠인이라면 젊어서는 1+2가 좋고, 시간에 따라 1번으로. 머리에 꽃을 꼿거나 마담이 사자머리를 선호하는 일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갱년기 이후로 넘어가기 전에 1.5를 욕심낼 수도 있고. 그런 반면 귀에 펜대를 꼿은 일이라면 반대로 1+2에서 2번쪽으로 옮겨가는 게 좋다. 인문교양학에서 천재론도 거의 빠삭히 연구는 완결되었다. 때문에 상식은 파다하다. 고로 원숙한 플레이보이는 말씀하신다. 꼭 미리 조숙하지 않아도 된다고. 헛물켜서 꽝되느니 대기만성하라고. 오히려 늦바람이 무서울 수도 있다고. 그렇지만 각자 인생론은 약간씩 차이가 나니 만큼 새로운 도전의 문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비타민 담배랄지 알콜 엔진 사업에 속아서 거액을 손해봤다거나, 요트가 안 팔리거나. 그러면 뭐 각자 알아서 하는 거고!
    결국 만루홈런도 아니고 허당계에서 원맨쇼도 아니고, 기껏 얘기가 길어졌더니 또 옹호 받는 건 그거구만. <전망을 살펴서 암산한 다음에 뻔트를 댈 것인가, 말 것인가!> 참 나. 직감은 마누라한테 딸리고, 직관은 독학도 안되고 학원도 없고. 동기부여계는 거품이고 행복업은 복권이니, 하 나 이거 정말 답답한 노릇이구만 그래. 그러니까 결론은, 좋으면 좋고 아니면 다음 기회에?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대타가 성공하면 만점이고, 필요하다면 '아니면 말고'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인생 뿐만 아니라 하여간 일기까지 하면 하고 말면 마는 식이군. 간단하네.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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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별 인구 변화에 따라 증시가 일부 영향을 받듯이, 세계 인구 이동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통계만 따지자면 유럽과 북미의 백인 비율은 점점 줄어든다. 그래프를 안 봐도 상상이 된다. 그런데 왜 아직도, 왜 여태, 어째서 여전히 말이 많을까? 이치만 따지고 보자면 그렇다. <그래프와 수치라는 근거가 명확하다, 따라서 불만은 훨씬 줄어들어야 정상이다> 이치-상으로는 그렇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왜 그처럼 차이와 차별이 구분되지 않을까? 왜인지는 전문가들한테 맡기고, 과학적 추론이나 추상적 사상이 아니라 대충 보자면 이렇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그 비율이 낮아지니까, 반대로 다양성의 비율이 높아지니까 말은 많아질 수 밖에 없다고.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일단 자리를 잡으면 텃새도 역으로, 차별도 역차별이 될 여지가 없지 않다. 보아하니 그렇다. 제품마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예는 흔하고, 요술 뿐만 아니라 상술 또한 쉽게 쉽게 소비자를 농락한다. 조류학을 공부하던 청춘이 사회에 나오면, 학자가 아니라 닭을 튀기는 식품업에 종사하는 일은 다반사다. 스탕달의 연애론 대충 훑어보고 여자 꼬실려고 하면 그렇게 되던가? 시대적으로도 전체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넘어왔다.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도 자유와 황금 같은 덕목이라고 오락산업에서 물어본다. 그거 맞냐고. 때로는 가르치다가, 때로는 그거 진짜 맞냐고 물어본다. 그럼 사랑은 어디 갔냐고. 마을에 웨건 타는 양복쟁이가 100퍼센트라면 그러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 비율이 1까지 떨어지는 동안 어떤 일들이 발생할까? 발생 가능한 일은 모두 발생할 것이다, 가 정답이다. 파란색 난쟁이가 100퍼센트인 마을에서 주민 하나가 분홍색 난쟁이와 결혼해서 파란색-분홍색 혼혈 아이가 그 마을에서 자라나면, 뭐 양측에서 어떤 말할-말 못할 느낌을 안고서 살아간다. 원주민과 이주민 즉 주거의 문제가 아니라 관광의 문제도 비슷한 게 있다. 몽고로 관광 온 동쪽의 졸부들이 돈을 어떻게 쓰니까, 장사꾼 사이에서 잡음이 발생하는 일. 그 장사꾼 왈, 내가 이런 말발을 다 누구한테 배웠겠소!
    설핏 생각하기로는 훨씬 좋아져야 정상인데, 왜 그 정반대일지 이상한 문제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처럼 사회지도층은 거의 왕권과 동일한 권위를 가졌을 때는 문제가 없다. 단, 위에서는 좋고 아래서는 죽겠고! 어쨌든 구간 당기기 버튼을 눌러서, 딱 어쩌고저쩌고 해서 현재가 됐다. 그럼 세상 사람 모두 행복하고 웃고 기뻐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아니다. 영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과거의 피라미드는 신분제였지만 현재의 기준은 황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평민이 과거의 황제는 상상조차 못할 어마어마한 풍요를 누리더라도 일부분 불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다. 키 빼고 다 가진 남자마저, (웬만한 20위권 상장기업 시가총액 만한 현금성 자산 보유자), 입버릇처럼 외롭다고 한다. 키 작고 가진 것도 비전도 없는 걸로도 모자라 뭘로 봐도 루저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데. 물론 사석에서니까 그럴 수 있고,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 그래야 하는 게 정상이다. 누구나 그렇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이니까. 실정이 그렇다는 거다. 인간은 비교의 동물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황금 뿐만 아니라, 인구의 이동에 따른 인종 구성의 변화도 있다는 거다. 더 자세한 얘기는 전문가들께 일임하고, 어차피 생각은 개인주의일 테니 다음으로 동네의 사정을 알아보자.
    유럽과 북미의 백인 비율 변동과 끼리끼리의 벽이 높은 것은 비례한다. 그런데 그 비례함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면 머머주의고, 일종의 자연스러운 질서로 보면 인지상정이자 유대감이다. 동네에서 양복을 입지 않고 웨건을 타지 않는 주민의 비율이 10퍼센트가 넘어가면 이사를 가는 것. 선택은 온전히 이사를 가는 사람의 자유다. 동네에서 NO 양복 NO 웨건인 사람의 비율에 대해서 왜 너네는 10퍼센트를 기준으로 삼았냐, 나는 그 기준이 50퍼센트는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자유지만 부자연스러운 자유다. 왜냐하면 생각은 생각하는 사람 마음이지만, 이사는 온전히 이사를 가는 사람의 결정 사항이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내 인생을 타인의 의사에 맞추어 삐에로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엇갈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예 가죽점퍼를 입고 뚜껑 없는 차를 타는 주민의 비율이 높은 동네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많다. 난 그냥 강 건너 낙원으로 가고 싶지 않고, 지금 살고 있는 데서 유유자적 대충 살면서 즐거운 인생을 살고 싶다. 가끔 기발한 착상과 번뜩이는 영감이 떠오를 때만, 아니 아니 여심을 기쁘게 해줄 때도 더불어, 단지 그때만 최선을 다하겠다. 난 멀리 가기 귀찮다, 집 근처에 시카고바도 있고 카페 이름도 핀란드다. 난 그거면 된다. 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맥주나 마시면 된다. 왜? 뻔트면 대만족이니까! 난 야망 그런 거 안 키운다. (혹시 못 키우는 거 아니냐고? 뭐-뭐, 뭐가 어쩌고 어째!) 내 주제에 무슨 최고급 와인에 만찬이란 말인가. 철갑상어 알은 구경하기도 싫고 달걀과 메추리알도 맛있다. 명태알도 괜찮다. 알이 아니라 값싼 연어 살이면 된다. 거위만 간이 있나 돼지도 간이 있다. 소고기도 좋지만 치즈는 더 좋다. 우유도 있다. 차라리 이참에 셰익스피어나 다시 읽고 아예 채식을 하던가 해야지, 이거 원! 하여간 비유해서 아는 척을 좀 많이 하긴 하지만, 나는 이웃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나 행복하기도 바쁜데 내가 뭐헌다고 옆집이랑 싸우며 불쾌하게 살고 싶겠나. 안 그런가?
    그렇듯 스포츠계에서 용병을 제한하듯이 단위 내에서 인종도 할당제로 비율을 유지할 게 아니라면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감안하는 게 맞다. 그게 아니라면 올림픽 메달도 인종 구성 감안해서 수여해야 하니까. 곧, 하나 주고 하나 받기. 왜냐하면 어떤 방향성은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실례를 모래시계처럼 뒤집어 보더라도 발생하는 현상은 처음과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용두사미라는 공감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니까.
   「아니다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칼 포퍼도 안 읽어봤냐, 열려 있는 사회에서 다양성이 증가할수록 끼리끼리의 장벽도 낮아져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게 진짜 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틴계 100에 슬라브계가 진입해서 9 대 1이랄지 8 대 2의 비율이 무너지더라도 라틴계는 이사를 가면 안된다. 아니다. 내가 그냥 다큐멘터리의 본고장으로 가겠다. 그럴 수도 있단 말이다.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킬리만자로에서 하이에나로 살 용의가 있다고. 내 헤어스타일을 보란 말이다.」
    글쎄요 글쎄요, 정말 글쎄요! 몰라서 주장하실까?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일, 한순간이다. (덜 잘사는 쪽을 비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치를 따져야 하니까) 좀비 영화 그거 엄정한 현실이란 말이다. 그 때문에 다양성이 낮은 데 사는 사람은 다양성이 높은 집단의 끼리끼리 장벽이 그 얼마나 높은지를 잘 모른다. 초식동물은 육식동물 생태계의 잘난 척과 슬기로운 자랑, 현명한 겸손, 그들만의 모순을 영 모른다. 체감하지 못하니까 당연한 일. 어쩌면 알면서 모른 척일 수도 있고, 혹여나 생각 자체를 하기가 귀찮아서일 수도 있다. 세상은 시끄럽고 오락산업은 내가 차분히 생각하도록 가만히 놔두질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초식동물 공동체에서도 똑같이 다 존재하는 일일 뿐이다. 곧 안과 밖을, 나와 남을 똑같은 잣대로 보지 못하는 일. 괜히 초딩끼리 거울이네 반사네 에코네 그러면서 노는 게 아니다. 어른으로써 어리광 만큼은 제발 애들 꺼 빼았지 말자. 그런데 초식동물이 아는 척, 뭐 자유다. 꼬마한테도 하이~ 할아버지한테도 하이~ 처음 보는 사람도 하이~, 뭐야 그거, 예의도 없고 구별도 없네? 응애응애 삐악삐악, 귀엽다. 모른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용기와 지혜에 해당한다. 루저에게 패배감은 운명이라서 광고는 우리에게 그토록 살가운 것이다. 오락산업마저 곰살궂지 않으면 빈말조차 듣기 힘든 수도 있으니까. 나 또 차였어, 라는 말도 농담할 여유가 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다. 숙명이 영 기쁘지 않은데 선녀가 어떻게 빵끗 웃으면서 그 말을! 누구도 늙었어, 누구나 되니까 그런 말도 들을 수 있다. 우정이란 게 뭔가. 친구 파도타기를 단조로만 해 보시라. 인생 이상해지기 쉽상이다. 나는 우정조차 편파적이고, 사랑마저 외모차별하면서, 그런데! 그런데 왜 이 사회는 약자에게 닫혀있고, 정의는 다 어디로 갔냐? 이런저런 비유는 헷갈리고, 피자배달부의 경험만 봐도 된다. A+++동네에 B---주민이 유입되어 반반이 되면 A+++는 그 동네를 언제 떠났는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런데 B---동네에 A+++주민이 유입되면? 그럴 일은 드물고, 만약 그렇더라도 이론적으로는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질 수도 있다. 그걸 뭐라 하느냐, 위화감이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실제 B---동네에 A+++주민이 유입되면 B---가 뭐하러 떠나겠나. 죄진 게 없는데? 내가 바보도 아닌데? 내가 원래 원주민인데? 내가 왜! 그렇다. 이거다. 이거라고. (물론 기준이 자본이라면 굴러온 돌은 박힌 돌을 빼낼 수도 있고, 대상은 가족마랄지 신분-사교-NC일 수도 있다) 여자 세계에서 말이 통하는 남자가 없더라,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과 해서는 안되는 사람은 딱 정해져 있다. 아마존이라고 서열이 없고 허영심이라고 고급이 없겠나. 여자는 남자한테 잘 보일려고 화장한다, 라는 말에만 발끈할 게 아니라 여자도 내가 아는 연민과 내가 절대 모를 수 없는 유대감에 대해서 나와 남, 안과 밖의 기준을 외면하면 안된다. 사랑이야 내게 유리하도록 노래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으쌰으쌰 철없는 남자들은 일단 애라고 상정한 채 여자는 말이 통하니까 말이다) 지금 세상에 피라미드의 기준이 바꼈지 지구는 결코 평평하지 않다. 피라미드의 원리는 여전하다.
    자유냐 평등이냐, 둘 다면 좋겠지만 그 사이에는 경쟁이 있는 것이다. 사랑이냐 행복이냐, 둘 다면 좋겠지만 그 사이에는 최소한의 황금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처럼 집단 이주 개국은 크게 보면 차악이라기보다 썩 나은 해법이었고, 종교적으로 보면 퍽 애매한 예일 수도 있다. 독립하고 싶은데 못하는 일부 스코트랜드 주민, 영국의 한 주이고 싶나 아니면 아일랜드의 한 주이고 싶나 라는 북아일랜드인의 입장은 약간 다른 문제고. 옛날 세상도 아닌데 신분제가 강한 문화와 아닌 문화가 역사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인접한 주변국이 10개~20개인 나라보다 1~2개인 국가가 지리적으로 꽤 유리한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래서 인접한 주변국이 10개~20개인 나라보다 1~2개인 국가가 욕심이 적을 것 같은데, 또 꼭 그렇지도 않다. 그야 어쨌든 구시대적인 야욕과 소년의 야망과 상남자의 야심은 구분되는 게 좋고.
    흑인으로도 살아보고, 백인으로도 살아보면 훨씬 많은 걸 알게 되겠지만 한 번 살지 두 번 살 수 없는 인생. 때문에 한계가 있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을 수 없는 생애. 고로 평생 배워야 한다. 나는 틀리고 늬 말이 맞다, 라고 할 줄도 알아야 한다. 혼혈을 비롯해 어디계로 살아보면 그렇다고도 한다. (A에서 태어나 쭉 살지만) A에서는 B계로 존중 받고, B에서는 그를 100퍼센트 A 사람으로 보는 일. 99퍼센트 추정은 하는데 100퍼센트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일단 먼저 힙합 가수로써 막 화나서 무대에서 진짜 화났기 때문에 제대로 멋진 무대 예술을 선보일 수도 없다. 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석이든 무대든 카메라 보조든 삼류 잡지 기자던,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는 한도 내에서 얄팍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이론과 실제는 왜 차이가 날까, 를 그냥 야트막하게 추론해봤을 뿐이다. 그게 다 외모, 언어, 문화, 사고방식, 세대차이, 풍습, 형편, 개인주의, 이기주의, 환경. 그런 개념들 때문 아니겠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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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결정이란 단어에 아차-해서 몇 자 적어본다.
    선험주자와 후발주자의 차이는 대충 말하자면 이런 거다.

                                      선험주자               *후발주자
은행 계좌 개설 소요시간     1주일                     즉시 또는 2~3일
은행 계좌 개설 필요사항     사인-전화-편지...      서류 위주
계약서 작성                      꼼꼼히                     ......
인수합병                          기업(구-국가)            ......
* 후발주자도 신용등급처럼 구분이 나뉠 테지만, 편의상 구분하지 않음.
* 후발주자의 후발주자에서는 미묘한 쟁점에 대해 주객이 바뀌는 일도 가능하다. 가령,

  1. 소비자의 권익     : 판매자 사업권 보장
  2. 가해자가 입증     : 피해자가 증명
  3. 배상이냐            : 보상이냐
  4. YES                  : NO              (위자료에 정신적 요소와 미래 가치까지 포함하느냐 아니냐)
  5. 개인 보호가 먼저 : 조직과 회사와 체계 위주에 가깝냐.

    선발주자에서 멀수록 후자에 가깝다. 후자는 그 이치상 구시대적 성격이 짙다. 전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럴 수 밖에 없으니까. 때문에 집단과 기득권이 될 수 있는 진입장벽 자체가 높다. 힘이 있냐, 인맥은 있냐, (18세기처럼) 소개장은 있냐. 회사 만들기도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어렵고 힘들며 과정이 까다롭다. 아울러 그러니까 깡통 법인, 바지 사장, 신종 사기등 이런 편법이 통한다. 전자에서 대체로 이미 겪은 일. 그런데 불의의 피해자가 되지 않고 풍족하기만 하다면, 후자가 좋을 수도 있다. 또 전자라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후자는 전자처럼 법과 인습으로 일과 놀이의 제한이 약하니까, 놀고 일하며 1년 내내 불이 꺼지지 않는다. 전자의 단점도 물론 많다. 위자료가 크니까 동거를 선호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므로 기업사냥꾼은 불법이 아니고, 브로커도 합법이다. 탐정도 역시. 하지만 중요한 건 문명이란 후자에서 전자로 이동하는 걸 편애한다는 점. 그래서 후발주자의 후발주자권에서 그런 일도 있다. 100명이 모여 사는 시골 마을 50미터 옆에 비교공장이 세워짐. 10여년간 통계를 내보니 이렇다. 주민 1/3이 암에 걸려 사망. 1/3은 암 투병중. 나머지 1/3은 콜록콜록 알약만 하루에 100개 복용&다른 약도 끼고 삶. 곧 콜록콜록은 투병이 진행중. 사람 뿐만 아니라 땅과 나무와 대기등도 사람과 비례하여 아프게 변함. 비료공장 직원의 건강은 어쩔려나 몰라도 이런 불합리조차 지지부진에 흐지부지다. 모순은 찾아보면 너무도 많은 것이다. 판매자와 소비자의 관계도 똑같다. 후자측은 판매자쪽 이익을 대변하는 것과 소비자를 보호하는 것 가운데, 무슨 일이 있든 없든 대체로 소비재가 계속 잘 팔리도록 중재하는 데 힘을 쏟는 경향이 짙다.
    하다못해 자동차의 시동 버튼과 엑셀 페달, 문 손잡이, 문과 문틀의 간격까지 교묘한 차이가 있다. A부터 Z까지의 공정이 있다고 하면 선발주자는 A와 B의 장벽 자체가 높다. 반면 후발주자는 장벽은 구분되면 그만이고, A라는 또 B라는 공정 자체의 효율을 극대화한다. 선발주자 방식은 공정과 기능간 장벽 자체가 높기 때문에 A와 B를 완벽하게 분리하는데 주력. 반면 후발주자 방식은 공정과 기능간 합리적인 분리를 신경 쓰느라 A와 B의 구분은 3단계 정도로 분리되면 그만. 선발주자의 철학은 A와 B의 구분은 훨씬 드높은데 반해서 후발주자는 그건 중간이면 되고 다른데 더 가중치를 둔다. 후발주자 방식은 B공정에서 C공정으로 넘어왔으면 C공정의 기능성 구현을 최적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런 반면 선발주자 방식은 C공정에서 D공정으로 넘어왔더라도, D공정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조차도 C와 D의 장벽에 대한 부분까지 응당 D공정에 포함하는 듯 하다.





    2

    예를 들어 자동차. 최고급부터 저가 브랜드까지 자동차 액셀을 밟아보면 둔감하지 않은 이상 즉각 느낌이 온다. 토요타 프리우스를 타보면 흠잡을 데 하나 없고, 더없이 부드럽고 세련되며, 극도로 우수하고 매끄럽다. (그럴 것이다, 안 타 봤음) 한마디로 트집 잡을 데 없이 쾌적. 그런데 메르세데스 벤츠와 비교해보면 뭔가가 달라도 다르다. 왜냐하면 브랜드 이름 자체가 하나는 알파벳이고, 하나는 알파벳화했기 때문이다. 디자인도 그렇다. 포르쉐, 애스턴마틴, 페라리! 완벽하게 알파벳 스타일 디자인이다. 그런데 어디─또 어디─어디. 후발주자 가운데서도 절차가 까다롭고 형식을 철두철미하게 따지기로 최고를 꼽아봐도 그렇다. 딱봐도 그렇다, (전혀) 알파벳스럽지 않은 디자인이라고. 물론 막대한 자본이 투입됐는데 그럴 리가 있나, 과장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페라리 바닥을 보니 F1 기술을 하나 하나 옮겨놨구나 그런데 왜 다른 건 어쩌냐, 그 말이 아니라 브랜드별 포지셔닝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거다. 다른 말로, 원리! 기능으로 봐도 그렇다. 애플 아이폰 대 그외! 완전히 느낌이 다르다. 그래서 파나메라를 타는 사람 가운데 애플 아이폰을 쓰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0명일 것이다 라는 추산이 가능하다.
    (참고로 자동차를 비롯한 소비재도 차이와 차별의 개념이 약간 모호함. 즉 소비재가 비싸냐 저렴하냐, 고급이냐 합리적이냐에 따라 품질의 차이는 있다. 다만, 물건을 팔고 난 다음 판매자와 소비자의 관계는 '양측의 돈독한 믿음&브랜드 이미지'와 비례해야 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음. 주식회사는 자선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므로 주가 종목은 모든 소비자를 공평하게 VIP로 우대하지 않음. 말하자면 브랜드의 위나 아래나 완벽하지 않기는 마찬가지. 우선 고장률의 백분률은 차이가 난다. 품명-연식-옵션에 따라 그 차이는 커질 가능성이 큼. 야구에서 0점대 방어율 투수가 드물듯 대충 2퍼센트라고 가정했을 때, A++은 1퍼센트요 B--는 3퍼센트. 곧 기계는 사면 보통 97~98퍼센트 정상인데 나머지가 문제. 어떤 브랜드 새 차의 불량 비율이 가령 5퍼센트라고 치면 나머지 95퍼센트는 좋음! 곧 새 제품은 뽑기라는 말인데, 그래서 7개국어 77시간 검색은 소비자 몫이고, 광고는 별개. 그걸 뭐라 하냐, 평판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 슬리퍼는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면 좋고, 과정이 까다롭거나 어쩐다면 잊고 또 사면 그만. 전문용어로 기회비용인가 뭔가. 반면 인간의 삶은 1번이니 뽑기 보다 행복─사랑─자유 같은 의미에 치중하면 그만. 그런데 그게 아니라 새 자동차! 어머머머, 꽤 비싸네? MB 마이바흐 최고가 풀옵션도 엔진이 고장나 경운기가 되어도 새 제품 교환은 불가. 10번, 100번이 되든 실랑이 밖에 없음. 왜냐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는 안되니까. 모든 대책을 세워놓은 다음에 판매하고, 또 그 연구 비용까지 온전히 제품 가격에 포함되지만 문제가 붉어지면 브랜드는 여지없이 표정이 바뀌는 게 정상이다. 거기 딸린 직간접 식솔만 몇 명이요, 산업의 명운은 또 어떻고. 일부 현지 법에 따라 다를 수는 있으나, 이때 판매자와 소비자는 신뢰의 관계에서 법적 관계로 발전. 그러면 그들의 우정은 더 이상 공고할 수 없기 때문에, 미워하거나 좋아하거나 달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게 된다. 그러니까 만약에 피고 대 원고의 관계로 도약한다면, 회사라는 공룡과 개인이라는 생쥐처럼 1 대 1이냐, 아니면 1 대 다냐. 아니면, 이상한 뽑기는 잊고 내 삶을 살거나. 또는 뉴스에 나오듯이 투쟁 또 투쟁, 남은 인생의 상당한 시절을 걸거나. 사람에 따라서 나뉜다. 또 분쟁의 대상이 제품사일 수도 있고, 사회 문제랄지 얄미운 터부와 게으른 관례일 수도 있고.
    뽑기 문제라는 게 이렇다. 혁신은 어려우니 차근차근이면 좋은데 개선이 더디면 누군가 총대를 메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 진보라는 건 뽑기라는 문제 인식부터 출발한다. 렉서스가 뜨고 크라이슬러가 고전한 이유. 현지에서 무작정 포드를 싫어하고 링컨을 편애해서가 아님. 그런데 세계 부호 순위 100 안쪽이면 신제품 교환해줄려나? 그건 모르겠으나 상식적으로만 봐도 쪼잔하게 VIP측에서 그럴 필요가 없겠네, 또 사면 되니까. 마이바흐나 커피포트나! 마이바흐가 전재산이라면 아마도 힘들것이란 예측은 어렵지 않다. 곧 알콜 엔진 사기가 통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일단 코끼리는 순진하고, 당나귀는 착하며, 닭과 개구리는 사랑과 행복 밖에 모르거든. 서로 늬가 양이냐 내가 늑대냐 그 궁리하기 바쁘니까.
    너무 고급 브랜드만 옹호하는 듯 해서─사랑 타령만 고집할 순 없으니까─꼬투리 하나 잡자면 이렇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대 과르네리처럼 서로 다르다 뿐이지만 큰 차이도 있다. 예를 들면 포르쉐도 페라리에 비하면, 약점이 있다. 왜 매니아들이 F는 여자의 감성이요 P는 남성의 이성이니 농담 삼아 그러냐면 다 통계 때문. F는 막대가 이미 눈금 끝을 똑똑똑똑 다급히 노크할 때 P는 어쩐다, 둘 다 몰아본 사람들과 관심 있는 사람들만 아는 사실이다. P의 엔진이 깨진 사례를 인터넷에서 찾기 역시 힘들지 않을 테고. 여자는 집을 다 태우는데 남자는 반만 태운다는 어디 속담처럼 F와 P가 여실히 비교된다. 그럼 그 책임 판명은 또 어떻게 하지? 그야 뭐 재보험사에 맡기던가 어쩌던가 당사자 소관.
    따라서 그런 추정은 적잖은 신뢰도를 얻는다. 어떤 가설이 감별사의 선구안과 하트의 신뢰도를 훔쳤냐고? 곧 조류의 과학적 통계는 빈틈없이 수집될 것이라는 점. 그에 비해 육상과 해상을 누비는 기계는 집계 합산에서 빈틈이 발생. 일단 수학이 제일 앞서고, 의학은 중간일 테고, 뒤쳐진 그룹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정치처럼 소비자의 무관심은 평판의 와전과 광고의 과장, 정보의 왜곡을 불러올 가망성이 언제든지 있다. 모순은 상존, 타임머신도 공존, 난봉꾼도 실존.
    그렇다면 소-주제의 결론은 이렇다. 위 내용은 즉각 중고차 시세에 반영되고, 뭘 하든지 간에 증시 역시 일찍이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점. 아아 겨울이 가까와 오는데 보일러 회사 주식을 살까, 아니면 부동산이 불패를 기록중이니 건설회사 주식을 살까. 이도 저도 아닌 사람도 있을 테니 우리 그냥 신분 상승을 노골적으로 문제 삼지는 말자. 차라리 행복업에 일조하는 복권을 사거나, 단골 바에서 바텐더와 경마 단타 전업에 대해 토론하는 걸로. 그외 개인택시 1인 사업권 거래, 부동산 매매 권리금, 동산 매매 양도양수 세금 납부 문제는 다음 기회...가 아니라 일단 전문가에게. 다시 '선험주자와 후발주자의 방식 차이'로 돌아와서,)
    그 차이가 제일 큰 건 사고방식과 생활습관과 글이다. 중간 정도로 뚜렷한 건 정밀도의 끝까지 갈 수 있는 기계 분야이자 사회 전반적인 체계. 그리고 커피-맥주 같은 맛에 대해서는 그 차이가 덜 근소할 테고. 그래서 브랜드 품질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더라도 제품의 철학은 뭐가 달라도 다르니까, 아예 처음에 브랜드 창시부터 브랜드명을 알파벳 스타일로 만드는 일도 있다. 그에 따라 브랜드명은 사람 이름인 경우가 제일 많고, 과일이나 꽃 이름도 있으며, 다른 일반 명사도 있다.
    다른 예로 소설. 악기에서 스타인웨이 앤 선스라는 의의. 침대는 어떨란가 몰라도 커피머신처럼 글도 차이가 있다. 시계 하면 스위스지만 필기구를 보면 초정밀도에서 후발주자가 나은 면도 있다. 그런데 기계가 아닌 언어. 선발주자에서도 나뉜다. 고전음악의 제1전성기와 끝물로. 말은 끝물이라지만, 고전파의 호황은 덜 입은 대신에 다른 장르와 분야에서 최초와 선도역을 선취. 한창 재즈와 블루스와 현대 미술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F. 스콧 피츠제랄드 읽기를 시도하면 완벽하게 조지 거쉰과 상응하기 때문일까?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도저히 못 읽겠다. 억지로 꾸역꾸역 읽으면 읽겠지만, 시간이 없어서 중도 하차한 걸로. 언어의 특성상 고전음악의 제1전성기 위주가 아니라, 그와 더불어 근대가 시작됐기 때문에 그 뭐랄까 멋은 극작가쪽으로, 우수함은 인문교양쪽으로 다 가버렸다고 생각하는 자칭 교양가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훨씬 이전의 헨리 제임스는 읽고 이디스 워튼은 읽고 싶은데, 나머지는 대체로 인문교양서만!





    3

    끝으로 왜 그런 차이가 발생하는가, 에 대해서. 잘 모르겠지만 예시가 하나둘 점점 늘어나네? 때문에 관찰자로써 추리소설에서 한 역할 떠맡을 듯한 자긍심이 샘솟는다. 하여, 찬찬히 살펴보며 어떻게 그 둘이 달라졌는지 그 서사와 이치를 따져보자. 왜 그럴까 추측하자면 아마도 이렇지 않을 런지. 즉, 왜냐하면 개념의 차이 때문. 선험주자 방식처럼 <꽃 : 꽃병>과 <그림 : 액자>가 일정 부분 비례하느냐를 제1기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후발주자 방식처럼 꽃의 가치와 그림 수준을 제1덕목으로 삼을 것인가! 맞춤복 대 기성복이다. 유럽에서 아무 미술관에나 들어가면 흔히 보이는 정물화. 그 정물화에서 꽃병을 눈여겨보자. 거기서 <꽃 + 꽃병>의 전체 높이에서 꽃병이 차지하는 비율. 바닥에 딱 달라붙어 있지 않다. 그런데 분재는? 화분도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화분은 병풍일 뿐이고 절대로 튀면 안되는 신부들러리일 뿐이다. <화초 또는 나무 : 화분>의 전체 높이에서 화분이 차지하는 높이마저 고급이면 고급일수록 현저히 낮아진다. 그림과 액자가 대등한 건 그것이다. 좋은 브레지어처럼 날 언제나 포근하고 고상하며 기분 좋게 만드는 애정. 실크 팬티가 왜 비싼 줄 알겠다고? 그렇다고 애들 입는 코끼리 팬티를 빼았지는 말고 우리는 호피 무늬를! 그래서 선험주자 방식은 멜로드라마의 사랑이 아름답듯이 CD 공정별 장벽이 높고, A와 B의 사랑은 사생활까지 꽤나 공유하기. 그런 반면 후발주자 방식은 이렇다. 미녀와 야수의 연애로 영화를 찍어야 한다면 공정간 장벽은 낮고, 개인주의적이며, 프라이버시가 앞서고, V공정은 V공정으로써의 고유한 기능성이 더 우선시된다. 그 차이다. 그 차이라고. 각자 장단점은 있겠지만 이렇듯 산업과 공학마저 보수적 철학과 진보적 관점으로 나뉜다. 주입식 교육이냐 아니냐까지는 건너가지 말고. 권위, 관례, 인습, 전통과 더불어 고전적 조각─건축─미술─문학 그리고 고전음악이라는 기반의 성격과 완전 놀랍게도 상응하는 차이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느냐, 백작이 재산을 탕진하다 끝내 타락하느냐. ~와는 다른 얘기고. 요컨대 개천에서 용난다 라는 말처럼 개인의 자유와 게임의 법칙은 현대적인 후발주자 방식을 비교적 더 선호한다. 반면 줄거리의 반전과 보수적인 식견은 고상한 선험자 방식을 적극 애호하고. 단지 완고한 선발주자 방식이 더욱 고루해지면 구식 탱탱 묵은 골동품일 될 수도 있고, 합리적인 후발주자 방식이 삐끗하면 싸구려가 될 수도 있다는 점. 고로 관건은 균형감이다.
    추가로 기계의 언어에 대해서 잠시만. 기계를 누가 만들까. 사람이? 아니다. 기계가 만든다. 기계는 기계가 만든다고. 물론 사람이 설계부터 운반과 사용까지 할 테지만, 사람이 담당하는 측면을 빼고는 모두 기계가 기계를 만든다. 수공업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계가 제품을 만든다. 그렇다면 기계의 언어는 무엇일까? 그렇지, 알파벳이다. 더불어 원소기호의 비율이자 공식을 비롯한 과학. 가령,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C, C++, C#, 자바, 자바스크립트, 파이선, PHP, SQL 등등. 그리고 0과 1같은 숫자. 곧 하드웨어는 선발주자에서 기반을 닦아놨고, 나머지 소프트웨어와 틈새시장 가지고 경쟁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걱정은 그것이다. 시간에 비례해 대체로 생명체 종의 다양성 하락을 경계함에 비해 주로 느는 것이 많다는 점. 쉽게 보면 환경과 지금은 예상은 하겠지만 실감은 먼 만화영화에나 나오는 일들. 곧, 인구와 지구 온도는 점점 느는데, 오히려 기계적 역량마저 함께 상승한다? 주식시장은 불과 얼마 정도 실물 경제를 앞서가지만, SF 작품은 그래서 미리미리 훨신 나중의 가능성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기 위해서.
    한편 남녀의 차이로 비유해 봐도 큰 어색함은 없다. 정물화에 대해 타인이 어떻게 그 조화를 평가하는지, 남들이 그 비율을 어찌 볼 것인지에 화병은 관심사가 크다는 것. 그런데 꽃도? 크지 왜 아니겠나. 다만 화병보다는 훨신 덜하다는 점. 요점은 그거다.  <1.과연 내 화병-꽃을 타인이 어떻게 볼 것인가  2.사랑> 비교적, 꽃이란 화병보다 순수히 그리고 결연히 2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꽃이니까. 내가 위니까. 내가 신부고 화병은 신부들러니까. 좋고, 옳고, 멋지다. 틀리지 않다. 모범안이고 권장할 만한 습성이다. 나쁘지 않다. 괜찮다. 그런데 지금 따져야 할 주제는 그것이 '아름답냐 아니냐', '어울리냐 아니냐'가 아니라 남녀의 명백한 차이다. 여자는 1과 2를 놓고 봤을 때 당연히 2를 압도적인 승자로 꼽는 걸로도 모자라,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는 격언을 결코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자는 아니다. 남자도 비교적 남들 앞에서는 여자와 비슷하다고 하겠지만, 우리들끼리도? 글쎄요 글쎄요. 여기까지!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는 인간의 본능이겠지만 남녀의 차이는 존재하는 것. 기본적으로야 내가 뭘 입으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누가 나한테 뭐라고 했다, 어머머머 그 오빠가 나보고 표정이 많다고 하다니 이렇게 기쁠 수가 이다지 기분이 좋을 수가! 라는 듯이 사고방식의 차이처럼 꽃과 화병은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아마도 조금 다르지 않을까? 하루에 최소 24번 1년 365일 일평생 거울을 세심히 들여다보는 생활을 지속한다면, 원래 그래야 한다는 건 인습보다 본능에 가까울 테니 <꽃 + 화병>에 대해서 비교적 남자보다 개인차의 범위가 더 넓다-라는 것. 여자 세계에서 그거 모른 사람도 있나? 어른 뿐만 아니라 애들도 알 건 다 안다. 속은 다 있다. 우선 격식부터 남녀는 다르다. 바텐더가 1등을 누구로 꼽건 남자는 잘난 척이 예의다. 잘난 척이 우정의 척도가 될 수 있다. 때로는 내가 잘난 척하다 지치면 친구를 비하해야 한다. 그러다 다시 에너지가 차고 기 받으면 잘난 척 하는 거고. 반면 여자는 첫째가 겸양이고, 둘째로 자기 비하이자 친구 띄우기, 그리고 셋째가 그거다. 잘난 척! 더더군다나 잘난 척에 대해 최소한의 멍석이 깔리는 대상과 친분이 알게 모르게 딱 정해져 있다는 것. 나의 화장발, 나의 조명발, 나의 실루엣, 나의 귀걸이, 나의 교양스런 말투, 나의 상식적인 논조, 나의 고상한 취향, 나의 근사한 안목...등, 은 천동설에게 당연히 중요하다. 단, (이론적으로) 화병은 제외, 딱 제외! 왜? 왜냐하면 화병은 에스코트이자 의전이며 시중 드는 돌쇠 때로는 보디가드, 즉 왕자님이니까. 다른 말로 사랑일 뿐이니까. 하나는 거울 속의 나와 직접적인 단짝이고, 하나는 단짝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랑일 테니까.
    평생 함께 해야 할 정체성─성격─생활상─교양이라는 전자, 인생의 동반자라는 후자!
    전자와 후자를 어떻게 동격으로 견주겠나. 종 차체가 다른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이 있듯이 전자는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 한다. 그러나 후자는 사랑하면 연인이지만 헤어지면 남남이다. 곧 영원한 타인. 때문에 여자는 그 둘을 함께 저울에 올려서는 안된다는 점, 금기 사항 중에서 무순위다. (여성잡지1과 2가 괜히 나뉘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러나 남자는 여자와 다르므로, 따라서 그 둘을 일상적으로 시소에 올린다. 그래? 그걸 누가 모를까! 사랑 하는 바보와 사랑 받는 백치, 같을 수가 없다. 12명도 아니고 내 주위에 120명의 1.0 미만이 있다면 그 모두를 다 유혹할 텐가, 아니면 전부에게 덤빌 수는 없으니 범위를 좁혀가면서 간을 볼 텐가. 농담이 지나쳤지만 남자는 농담에서도 갈린다. 3000명의 궁녀가 만약 네 꺼라면 넌 어떻게 할래? 1 대 1로 3000명 전부 다 개별 면담을 해야 한다, 아니다 100 대 1의 경쟁률은 기본이다로.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은 그처럼 다른 것이다. 그러면 1.5에게 사랑 받아서 반쪽과 반쪽이 만나 하트 1개가 완성됐는데, 아직 그 사랑은 진행중이지만, 이제는 내가 1.0미만을 사랑하고 싶다구요? 그걸 왜 여기서 물으시요, 낭자! 아 글쎄 연애산업을 놔두고 말이오. 친구는 뭐 괜히 있나요. 다만 사람이 뭐 로보트도 아니고 지나치지 않게 남 얘기도 하니 만큼 기준은 다를 수 있다.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해도 사랑이니까. 오락산업의 역할이 뭔가. 하오나 남 험담하기가 취미고, 남 흉 보기가 일이며, 타인 흠집내기가 인생이 되면 곤란할 뿐. 그런데 어떻게 본 칼럼의 주제가 그것과 연관될 수 있는지 참으로 신기하다. 하나는, C공정과 D공정이 너는 너 나는 나! 다른 하나는, A공정과 B공정이 너와 나? 그건 지나친 억측도 아니라 억지에 불과할 뿐. 그래서 아마도 B와 C의 교집합을 얼마만큼 인정할 것인가에 따라 그 둘이 나뉜다고 보면 간단하겠다.
    그래서-일까? 진도 빼는 플레이보이식 연애는 후발주자 방식일 거라는 예상. 안타깝게도 틀렸다. 하수는 몰라도 고수는 맞춤복도 좋아하고 기성복도 마다하지 않을 테니. 양다리는 멀티태스킹처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닐 공산이 크지만, 때에 따라 필요하다. 가령 먹으면서 걷기. 놀면서 생각하기. 자면서 꿈꾸기.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하기. 연애에 대해서 짧은 패턴을 각별히 아끼는 바람둥이가 철들고, 정신차려서, 전념하는 긴 행복을 만났다더라? 운명적인 사랑만으로냐, 아니면 그거 받고 찬란한 황금을 베팅하느냐. 고로 관건은 균형감이다.
    진짜 끝으로 딱 한말씀만. 선발주자와 후발주자의 특징이 뒤바뀐 예도 있다. 바로 컴퓨터 운영체제. 그것으로 선발주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고, 후발주자는 애플사 맥의 운영체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는 실용성과 합리성을 추구했고, 맥 운영체제는 정교함과 마이크로소프트의 틈새 시장을 노렸다. 보기에는 맥북이 괜찮다. 이쁘고, 섬세하며, 글씨체가 좋거든. 그런데 윈도우가 일단 시장을 선점했고 과점했으며, 가격과 기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래서 맥북을 쓰는 사람이 맥북에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운영체제를 깔아서 쓰는 웃지 못할 일도 있다. 맥북 운영체제보다 마이크로소프트 운영체제가 훨씬 포괄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50점짜리 지극히 정상적인) 허영심이긴 하다. 그런데 페이스북 회사 직원이 페이스북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애플 본사에서 윈도우만 쓰는 사람도 있다. 제일 흔히 보이는 노트북은 델이고. 그처럼 제품이든 양식이든 정체성이 많이 혼합됐다. 산업군에서 빅3의 안정성 주기도 짧아지기 때문에 기업들도 거미줄처럼 주식을 보유한다.
    선발주자와 후발주자가 사람과 소비재에 따라 차이가 있다만, 그에 따라 차이와 차별의 구분이 흐릿해지기도 한다. 그건 다음 편 칼럼 '인구 이동 그리고 인종 구성'를 참고.
    이상 시시콜콜한 잡담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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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보수란 무엇인가

from 칼럼 2018. 10. 24.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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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란 무엇인가? 정답은 이렇다. 보수란 무엇이 보수인지 지금은 잘 모를 수 있다는 것. 그러면 어른들께 여쭤보면 된다. 옛날에 보수는 어땠냐고. 어른은 말씀하신다.
    옛날 세상이 어땠냐고?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뺨 맞은 기억은 드문 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고. 요즘... 아 또 이런 얘기하면 젊은이들 싫어하는데... 그러실 수도 있다. 또 그땐 무슨 통행료를 내듯이 학부모는 선생님께 봉투를 거의 전원 상납했다. 그러면 당연히 열외된 학생만 불이익 당한다. 지금 선생님이란 직업은 노동자이자 교육자로써 가치 있고 힘겹고 보람찬 일이다. 그렇지만 당시에 만약 부자 동네에 있는 학교라면, 선생님이 꿈인 젊음이 거기 들어갈려고 줄을 섰다. 가르치는 일은 적당히 하고, 일찍 퇴근하고, 배보다 더 큰 배꼽으로 수입도 두둑하며, 학부모들도 쟁쟁하니까 덕 보는 일도 많고, 1년에 또 몇 달은 쉬거든. 너무 지나치게 과욕을 부려봐야 전근 밖에 더 가나. 어차피 피자 배달을 하는데 이왕이면 소란스러운 동네보다 청결하고 즐거운 동네로 배달하고 싶을 테니, 뭐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있다. 불과 오래되지도 않은 일인데 부자 동네 교장이 학부모 간담회에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학부모 너네들 똑똑히 잘 들으시라는 듯이.
    위로 어지간히 상소하라고. 그래 봐야 꿈쩍도 안하니까, 괜히 헛일 하지 마시라고!
    그분 교육자 맞나? 혹시... 패1은 설마 그럴려고 교육자가 되셨나, 패2는 내가 오빠 이럴려고 만나! 아무튼 지금 어른들께 왜 그렇게 맞았냐고 여쭤봐도 그냥 그랬다고 하신다. 어려도 부모님한테 말할 수 없다는 정도로 속은 있으니까. 왜 뺨을 맞는지 알면서도 모른다. 다른 관청도 그렇고 병원도 그렇고 다 비슷비슷했다. 유독 무슨계 무슨계는 더 느렸다. 중간은 갔던 직업인은 그나마 나은데, 그분들도 불합리는 외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족이 있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나 혼자 뭐 어떻게 해봐야 하나도 바뀌지 않으니까. 그럴 수 없으니까. 그래서 총대를 매고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 또는 권력과 공룡에게 맞서다, 행방이랄지 아픈 결과라도 알면 그나마 다행인데 아예 종적도 없이 실종된 사람도 많았다. 정책이 잘못됐다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 라고 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행. 옛날에는 그랬다.
    인구당 의사수. 학급당 학생수. 언론의 자유. 교사 직업 만족도. 교내 총인원 / 교내 총면적. 도시내 녹지 공간 비율. 사립 기관에 대해 제어하고 견제할 수 있는 근거. 소방-우편등등 말단에 대한 처우 인구당 머머.
    0.5세기 전의 좀 더 나은 세상을 보면 형편은 그나마 낫다. 사회는 이처럼 힘들게 돌아가는데 그런데 백인은 달에, 우리는 어쩌고 경제는 어쩐데 그런데 백인은 달에! 백인 작가는 이게 말이나 됩니까 뭡니까 어쩌고저쩌고. 지금도 해외토픽에 나온다. 우르르르 어디로 가서 애를 낳자, 아이에게 새로운 국적을 선물하자 등등. 당시에는 사회지도층의 권력은 가족-인맥-친맥에 따라 세습됐다. 지금은 과학수사, 당시는 (정의로운 수사관도 있었지만) 비과학수사. 언제 어디서든 일단 돈봉투면 OK. 현금이 가득 든 007 가방이면 뭐든지 만사형통. 중급 관료 진급에 얼마, 법복이라고 왜 안통했겠나. 즉 관습헌법과 성문헌법의 큰 간격. 성문헌법조차 사회지도층에 유리한 정도로만 통용. 민-관-군 그 어떤 조직을 봐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 일들 투성이. 지금의 몰상식이 당시는 상식. 어디에서 1800년 전후로 혁명을 일으켜 정치 체제를 괜히 바꾼 게 아니다. 그렇듯이 그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현실적으로 형편이 늦은 실정이 적지 않다. 그처럼 내 선조는 야만적이었을 수도 있다. 현재의 너와 나는 부모의 (일부) 부도덕한 돈벌이로, 너와 나는 (일부) 비윤리적인 풍습 하에, 너와 나는 (일부) 부조리한 사회에서 성장하여 지금에 이르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모르게 너와 나도 죄악의 녹을 먹고, 그 수혜를 입었다니!
    그게 바로 옛날에는 정상이었고 현실이자 보수였다. 그게 바로 당시에는 보수였다고! 그렇게 체제는 겉으로 민주주의였는데 1당이 독재하고 1인이 독재하고 주인만 바뀌거나, TV 다음 타자로 인터넷이 도입되기 전부터 1당이 이름과 로고만 바꾸고 또 바꾸고 또 바꾸고. 사회적 명사들도 정계에 입문하면 병풍 서려고 정치를 하시겠나. 신부들러리가 꿈이 아닌 이상 제1당에만 줄을 섰다. 그렇게 해서 장점도 챙겼겠지만, 언론과 인권 또 정치-사회-경제는 비상식적이었는데 아직도 생각은 당시 기준으로 사고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왜냐하면 언제 어디서나 분포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음과 같은 논박도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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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게 무슨 보수냐, 시대적 현실 아니냐! 어? 진보만 이상이냐? 이 기반 다 누가 만들었냐! 그 정도 먹고 살게 만들어줬으면 되지 않냐, 뭔 말들이 그리 많냐. 먹고 살게 됐는데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냐 뭐냐. 먹고 살게 되기 위해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 걸로 치자. 어차피 전국민의 세금을 뽑아서 기득권이 좀 더 해 먹고, 조금 진보하게 만들며, 그 중에 힘 없고 비리비리하며 허접한 놈 가운데 골라서 악역 만들고 그림까지 만들었으면 되지 않냐. 그럼 나보고 소가 되라고? 그건...... 넘어가자! 어차피 잠룡은 많고 권좌는 천운을 품어야 하는 법. 기왕에 하늘이 내리시는 왕권, 아무리 잘해도 비판은 많고 많이 못하면 성토는 훨씬 많다. 쿠데타가 성공하면 사극에서 주인공이고 실패하면 인기 없는 역사의 1페이지가 되는 것이다. 대하드라마에 나오듯이 궁상맞은 평민과 미천한 하층민은 제발 잘 따르고, 잘 지키며, 시키면 시킨대로나 하자. 뭔 말들이 그리 많냐. 그러니까 배가 산으로 가는 것 아니냐. 법을 만들면 뭐하냐, 지켜야 장땡 아닌가. 그런데, 법이 잘못 됐다고? 그럼 보완하면 되는 것 아닌가! 뭐, 국회에서 통과를 안 시킨다고? 그럼 국회의원들이 어떤 잘못된 투표를 했는지 낫낫이 볼 수 있도록 인터넷에 공개하면 될 거 아닌가.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게, 정치인의 입법안 투표 기록만 주르르륵~! 분류도 법안별, 정치인별, 정당별, 시간별로. 1가지 색깔로 짙고 옅은 차별화 그래프를 곁들여 반듯하게. 정치인이 발의는 무얼 했고 기안은 뭘 했는지, 출석률은 어떻고 매스컴에 어떻게 노출됐는지. 그게 잘 되어 있냐, 못 되어 있냐. 잘사는 것과 못사는 것, 그 차이 아닌가.
    국회 안에서 정치인이 어떤 결정을 했나, 딱 그것만 모아서 볼 수 있는 시스템.
    막 어떤 말과 어디 가고 무슨 행동을 하고 언론에서 얼마나 띄워주고, 그런 거 다 빼고!
    소수를 대변하거나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거나. 우왕좌왕 무책임한 위인인지, 예측 가능한 양반인지. 쉽게 판명할 수 있도록. 단지 딱 클릭 몇 번으로! 얼마나 좋아. 매스컴에 노출되는 사진과 발언, 기념회와 출판회와 모임과 종교계 찾고 어디 찾고. 노이즈마케팅 그런 거 말고. 중요한 판단 근거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정치를 잘했는지, 앞으로 기대를 접어야 할지 어떨지. 정치인이 어떤 직책을 겸한다면 여기저기 행차하실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바깥 활동에 에너지를 낭비하면 정작 꼼꼼히 판단해야 할 입법안을 충분히 검토하기 힘들게 된다. 겉으로 보여지는 활동에만 전념하면 사무실에 들어와서 중요한 서류를 읽기에는 이미 지쳐서 힘에 붙이는 거다. 그러면 내가 할 일을 내가 어떻게 하나, 에너지가 떨어졌는데. 그렇다면 비서들한테 시키면 그만이다. 비서가 달랑 1명도 아니다. 판단 근거 자료를 수집할 협력관계는 세고 셌다. 보아하니 왜 정치도 절반은 오락산업이고, 정치인도 절반은 연예인이라고 할까? 왜냐하면 조명 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명을 받는 것과 받지 않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서 조명을 비추는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은 둘로 나뉜다. 자기는 조명 받는 사람과 결혼한다 하지 않는다, 사귄다 사귀지 않는다로. 뉴스 앵커가 뉴스 끝나자마자 일어나서 몸 풀고 수다 떠나? 아니다. 절대 아니다. 괜히 막 서류를 정리하는 척하면서 눈 인사 하고 어쩌고, 뭔가를 쓰는 척한다. 그런데, 정말로? 아니다. 그거 다 뻥이다. 연기다. 카메라발 받는 일이라는 건 그처럼 절반은 연기란 말이다. 국정감사도 그렇다. 진부한 관행을 하루아침에 개선하면 그게 혁명이고 혁신이지 무슨 개선인가. 그게 쉽나? 겉으로는 뭔가 하는 척 바쁜 척! 그래 봐야 한 번에 뚝딱 안된다. 그럴 수가 없다. 질문 받는 사람이나 답변하는 사람이나, 똑같은 이기주의자이자 사익 추구자다. 자선 사업가나 구도자가 아니다. 이따~만한 두꺼운 책 옆에 놓고 카메라 비추면 뭘 막 엄청 필기한다. (무슨주의는 아니다만 여자라면 저 헤어와 화장 하루 2시간짜리다. 매일) 뭘 필기할까? 하긴 하겠지. 그러나, 그거 다 뻥이다. 별로 필요없는 일이다. 물론 꼼꼼히 검토하며 뭘 공부하고 많이도 챙겨서 10가지, 100가지를 내놓으려하는 자세, 좋다. 왜 나쁘겠나. 그러나 그건 아마추어다. 카메라가 비춘다고 더욱 외양에 신경 쓰고 뭘 필기하며 서류 찾고 어쩌고. 그거 다 뻥이다. 아무리 질타를 하고 어쩌고 그래 봐라. 나중 보자. 얼마나 바뀔까? 대체, 얼마나, 바뀔까! 중요한 건 실행이다. 실행을 이끌어낼 수 없는 공론은, 물론 그게 모여 다음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발언자 각자 듣지 않고 내 말만 하는 토론처럼, 한계가 분명한 공론은 말 그대로 탁상공론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그래서 그런 자리도 너무 많은 걸 할려고 하는 것보다는 많으면 3개, 될 수 있으면 1~2개만 추려서 그것을 강조하는 게 좋다. 뭐라뭐라 이러쿵저러쿵, 조명 비추고 카메라 각도 바꾸고 1번 카메라 불 꺼지고 2번 카메라 불 켜진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 어떻게 책임지시겠어요? 예? 자리라도 내려놓겠습니까 어쩌시겠습니까? 그만 두실 수 있어요?」
   「네, 책임지고 그만두겠습니다. 온전히 제 잘못이고,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씀 따로 반복하겠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요.」
    효과음~!
    설마 이걸 위해서? 프로답지 않은 일이다. 프로라고 얼마나 다를까. 축구 얘기를 왜 많이 했냐면 이치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감독이 화 나서 막 빽빽 소리지르고, 방방 뛰면서 꽥꽥 고함을 질러봐야, 씨도 먹히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경기 중에 아무리 닦달하고 들들 볶으면 뭘 하나? 그래 봐야 감독 힘만 빠지거든. 그래서 감독 생활이 오래된 중고등부 축구감독은 2개도 많고 1개만 말한다. 그게 뭐냐? 바로, 숫자! 1 대 1을 시원하게 뚫는 일은 1부 리그에서도 보기가 쉽지 않으니까. 완전 어렵다. 스피드나 여건이나 옆에서 패스 주라는 신호랄지 그런 상황이 갖추어졌을 때나 1 대 1을 멋지게 뚫지 프로 대 프로가? TV에 나오는 명문팀들이야 그런 일이 흔하다지만 하위 리그에서는 그런 장면을 구경하는 건 차라리 포기하는 게 좋다. 오히려 기대하지 않는 게 이롭다. 여간 쉽지 않은 일이거든. 그처럼 준비도 많이 했으니까 말을 많이 하며 조명 받고 카메라에 신경 쓰다 보면, 나중 변화된 결과는 그것만큼이 아닌 경우가 흔하게 된다. 1개나 2개만 바꾸도록, 서로 머리를 맞대고서 의견을 나눠야지 그게 아니라. 꽥꽥 꽥꽥꽤, 꽥꽥 꽥꽥꽤, 꽥꽥 꽥꽥꽤! 간혹 찬찬히 관찰해보면 뭔 얘긴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논점을 빗나갔으나 다시 돌아와서. 정치에 대해서도 상남자처럼 남자는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면서 대외 활동에 치중한다면 그렇게 된다. 바깥의 영향을 받게 되고, 알력도 느끼며, 생각은 딴 데로 외출할 여지가 커지지 않겠나. 회의를 하고 또 하고, 7시에 출근해서 11시에 퇴근하면서 활동의 근거를 사진과 행적과 인터뷰로만 남길 게 아니라 그러면 된다. 종횡무진 돌아다니면서 뭘 많이 한 것처럼 보일 게 아니라 그러면 된다. 어떻게?
    하루에 단 3시간이라도 우선 순위가 앞서는 입법안 몇 개, 중요한 통계와 그래프와 새로운 논문을 참고해서 발의안 검토, 마지막 결정은 내가!
    한편 정치인의 비서도 그렇다. 법으로 제한된 친인척은 받지 않더라도 이권이 얽혀서 합법적으로 아는 비서를 고용할 수도 있다. 탈법이 아닌 한도 내에서 일부를 또는 그 이상 비서진과 보좌관을 꾸리는 것 역시 자유이자 권한이다. 그렇지만 작은 것도 오점은 오점이다. 왜 식사 전에 손을 비누로 박박 깨끗이 씻으면 비교적 적게 먹고 좋은 식품을 섭취하게 될까? 이유야 어찌 됐든 실험으로 증명된 일이다. 왜 축구를 할 거면서 경기전 선수들한테 어떤 감독은 양복에 커프스단추와 넥타이까지 매고 입장할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넥타이도 자크 넥타이 말고 직접 맨 걸로. 왜냐하면 마음가짐과 더불어 미세한 포부, 경기에 임하는 결연한 자세, 선수라는 엄격한 기분이 덩달아 동요되기 때문이다. 청탁도 썩 다른 문제는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만약 정치에 대해 어떤 권력자라면 공평한 경쟁 제도에 따라 보좌관을 뽑을 것이다. 영화 캐스팅처럼 경쟁하듯이 아는 사람이 정당한 절차에 따라 합격한 건 괜찮더라도. 그처럼 착오는 1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0이 갑자기 10으로 널뛰는 일은 거의 없다.





    3

  1. 언론과 기자님들과 친한 걸로도 모자라 모임 1-2-3... 협회 방문 1-2-3... 정당 회의 1-2-3... 밀실 1-2-3...
  2. 전문가들 자문 구하고, 인터넷에서 내가 직접 7개국어로 자료 조사하며, 결정의 빈틈을 연구하기.

    과연, 하나는 최선을 다하고 하나는 대충 해야 한다면! 그럼 대관절 무엇에 최선을 다하고 무엇은 대충 해도 되는 걸까? A에 최선을 다하면 B는 대충 하기조차 버겨운 것 아닐까? 그렇다고 B에 최선을 다하면 다음 선거에서 미끄러지지 않을까? 사람들은 내가 B를 열심히 했다는 걸 정말 알아줄까? 진짜로? 쉽지 않은 문제다.
    그렇지만 B가 진짜 내 소명이라는 심지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굳이 기자님들과 언론사까지 친할 필요가 없다. 영세 언론사와 삼류 기자님들한테까지 선물을 꼬박꼬박 돌리지 않아도 된다. 나머지 시간은 놀면서 취미로 캠핑 다녀도 된다. 골프장에서 살아도 된다. 일만 잘하면 나이트클럽에 출근해도 된다. 안 그런가? 얼마나 좋은가! 거물들과 친분을 유지하느라 시간 뺐기고, 큰손들 만나서 굽신거리느라 에너지 낭비하면 진짜 할 일은 언제 하나. 오늘은 무슨 협회 사람들과, 내일은 로비스트들과. 국회 출석 잘하고 매스컴만 휘어잡느라 노심초사 바쁘신 정치인만 앞서가면, 그 대가는 과연 누가 감당해야 할지! 그걸 생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모순은 있다. 그럴 수 있는 위치에 가기 위해서는, 그 어느 시점까지는 일정 부분 정치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그러니까 간혹 지역 의원에 출마하시는 제법 젊은 정치인을,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명함을 받고서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머머, 머머머, 머머머머, 머머머머머 위원, 머머머머머머 이사...... 하는 일이 이렇게나 많다고? 입이 떡 벌어진다. 그럼 정치는 언제 해? 어떻게, 말로? 무엇으로, 몸으로? 이권이 이렇게나 많이 얽혔으면 거기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정치 제도가 앞선 곳에서는 기관장─사기업 사장─대기업 이사─알짜 비상장 회사 대주주─차명 재산이 어쩌고저쩌고─어디 고문─무슨 머머등을 겸한 선거권자에게는 피선거권을 절대로 주지 않는다. 설혹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나중 150년, 200년 이렇게 땅──땅──땅 한다. 미숙과 성숙의 차이는 없을 수 없을 테니까. 판단 근거가 풍족했을 때 의사결정은 빠른 게 좋지, 결정을 먼저 하고 성과를 짜내며 밑그림을 나중 그리다가는 유령 도로가 생기는 거다. 시골 도로는 원래 한적하기 마련인데, 그게 아니라 딱 봐도 크고 어쩌고 대번에 직감할 수 있는 그런 도로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국회의원들이 꽤나 게으르고 막 술도 마시고, 더 많이 쉬며, 훨씬 많이 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막살지 않는 한도 내에서, 다만 일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도껏 잘한다는 가정 하에서 대충 살며 결정을 잘하고, 법률안 통과 투표를 잘하며, 까다로운 사안 가운데 뭘 먼저 추려서 입법 시킬지나 잘 판단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안 그런가? 일만 잘하면 되는 것 아니냔 말이다. 이미 혜택은 많이 누리고 있으니 정작 해야 할 일만 잘하고, 나머지 시간은 놀고 쉬고 즐기면 그만. 단지 정치인이 무슨 예언가도 주술사도 아닌 만큼 판단 착오도 있을 수 있고, 반성할 기회도 주며, 칭찬도 아끼지 않기.
    뿐만 아니라 이런 일도 있다. 내가 우리 동네 쓰레기를 하루 맘 먹고 깔끔하게 청소를 해 봤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는지 아시나? 글쎄 딱 1일 지나니까 원위치 되더라. 청소한 의미가 없다. 보람도 없다. 기분만 더 나빠진다. 어? 의미가 없어. 그게 뭐냐? 사람들이 못사는 건, 못사는 이유가, 다 있다! 다 못사는 이유가 있단 말이다. 뉴스나 보고 신문만 읽으면 그만이지, 정치권이 하는 일은 믿고 맡기면 그만 아니냐. 정치의 전문가는 정치인이고, 정치의 비전문가는 시민이다. 아마추어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잘사는 경우도 있지 않냐. 안 그런가?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 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지 않나. 규율을 안 지키고 형식에 얽매이기 싫어서 못사는 예가, 무조건 따르고 지켜서 잘사는 예보다 많지 않냐.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만, 흐흠, 넘어가고. 물론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고, 리더인 정치 전문가들만 잘살 수도 있긴 하지만. 일단은 길게 봐야 한다. 으쌰으샤해서 축구 감독 부임시키고, 진득하니 기다려주고 따르며 응원해줘서 대기만성을 바라는 게 미덕 아닐까? 한 번 지고 두 번 지니까 마저 세 번째까지 기다려주지도 못한 채, 당장 경질시키자? 뭐야 그게! 그렇듯 그때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세계사도 어쩔 수 없었나? 하긴 조상이 안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를, 왜 지금 내 마음대로 정해? 어찌 됐든, 나는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없어! 어?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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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론은 정당하다. 다만 반론의 논리는 맞지만 논리만 맞았다는 점. 즉 보수와 암담한 현실이 구분되는 게 맞지만, 만일 구분되지 않는다면! 교양이 상식을 외면한다면! 그래서 시민은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거다. 1세기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그랬다. 유색인이 마신 커피잔은 깨트려야 한다는 것. 의식주와 하나 다를 것 없는 인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온전히 사실 그대로 통계만 따지자면 유럽과 북미의 백인 비율은 점점,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난민 뉴스는 이제 단골이다. 크고 작은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풍요로운 문명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세계에서 중범죄 및 어떤 비율은 차츰 낮아진다. 그런데 반대로 중남미는 어떤 그래프선이 상승세다. 지구 상에서 큰 단위로 봤을 때 유일하게. 전쟁 없는 일상의 슬픔이, (지구 반대편에서) 전쟁 중인 비참함보다 통계-상 양적으로 훨씬 많다니! 근 1세기 동안 정치적으로 부침이 많았다는 증거다. 타임머신은 지구인데, 보수냐 중도냐 진보냐.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고개를 돌리면 국민은 자동적으로 체제로부터 존중 받을까? 그럴 리는 없다. 노예가 되기 싫다면 눈을 부릅 뜨는 수 밖에 없단 말이다.
    결론은 미래 세대가 보기에, 아아 그땐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였구나, 라는 관습을 차근차근 바꿔나가는 정도 만큼은 적어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99퍼센트는 보수인데, 내가 진정한 보수입니다 여러분 이 중차대한 시국에 좌파 어쩌고저쩌고, 그러지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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