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일기
내용: 허니문으로 꽃망울을 터트린 사랑이 때로는 이혼을 성사시키는 일. 사랑의 불가해함이다. 그처럼 사랑의 미련함을 관철시키는 일. A에서 B로의 변화다. A는 <그대를 위해서라면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드리겠소> 그리고 B는 <사랑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뭐라고? 그러면 가수가 앨범─콘서트─앨범─콘서트라는 유형을 반복하는 것처럼 내내 일상적으로 일하기와 놀기를 왔다갔다-왔다갔다하는 일, 불행의 시작일까? 행복의 끝이 아니기를. 그렇지만 통상 공부하기와 일하기는 재미없기 마련이다. 아니라면 거짓말! 낚시와 어업처럼, 취미와 직업의 차이를 어른들이 어찌 모를 수 있겠나. 공부하면서 놀기랄지 놀면서 공부하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는 더 재미없다. 그러나 목줄을 풀어줘도 개는 처음에는 신나게 놀지만 곧 있으면 지친다. 어차피 개는 개다. 개는 심심하고 고양이는 요염함이 기본이니까. 조증녀도 할 말이 떨어지고 열정가 역시 퍼질 때가 있다. 곧 사랑이든 일하기와 놀기든 측정할 수 없는 것 빼고는 모두 측정할 수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녀는 나한테 넘어올 수 밖에 없다?) 공부를 못하는 친구는 공부를 안하거나 하기 싫다고 간주해도 거의 무방하다. 실제로 공부에 몰입한 정량을 엑셀표에 기록해보면 딴짓─공부─딴짓─공부, 고품격 코메디가 따로 없다. 그분들 기분 나쁘라는 말이 아니라 사실을 직시하는 게 낫긴 낫다는 거다. 또 소녀 시절 꿈꾸던 낭만적인 사랑을 장래 직접 경험해보면 숙녀는 마침내 알게 된다. 그 어떤 비밀을 터득하지 않을 수 없겠지. 사랑은 어쩌면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을 주는 게 아니다>라는 표어가 아닐까 라고. 사랑은 아름답고 인생은 멋지고 여자는 미스테리고! 통상 이론이고 천생 빈말이다. 집중력이 떨어지면 딴짓하게 되고, 애인이 싫증나면 사랑은 식게 된다. 장기전인데 초반부터 전력질주하면 막판 스퍼트고 뭐고 없다. 첫 끗발이 개 끗발 되는 거다. 개-거품 물고서 중도 포기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테지. 그러니까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대충 사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아니면 말고>식 하수와 나를 비교하지 마라! ~라고 상남자는 언제나 친구와 다투듯이 우정을 키운다. 옛날 영화 제목이 '미워도 다시 한번'이듯이 우리는 아무리 추접스러운 우정이라지만 일단은 으쌰으쌰거든. 어쨌든 여자의 마음과 나의 변심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자, 진정 고수일 것이다. (그럼 난 하순가?) 인생의 태반은 시간낭비인데 우리는 TV만으로도 그 인생을 배운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찬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그래프의 파형보다 한발 앞서 내일을 추론해야 한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삶을 이끌기가 어디 쉽던가. 그러니까 스스로 삶을 분석하며 난관을 헤쳐나가기보다 친한 점쟁이한테 실망한 채 불세출의 예언가가 어디 없나 두리번거리기 일쑤다. 속는 셈치고 믿어본 긴가민가는 대체로 헛소문으로 판명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말 그대로 인생은 판타지에 사랑은 멜로에다 여자는, 여자는, 내 발에 채이는 게 여자일 수 있을까? (고상한 숙녀를 예우하며 여자의 마음을 존중하나 말이 그렇다는 거다) 일단 맨발의 청춘도 좋다만 삶이란 회전목마든 트로이 목마든 뭔가를 타야만 한다는 것. 어른이 되면 모를 수 없는 진리. 설령 뽑기로 선정된 천리마가 알고 봤더니 당나귀일 수도 있지만, 행운이란 뽀너스는 언제 잡힐 줄 모르는 대어라서 더욱 반가울 수 밖에.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면 재미가 덜할 테니 어른은 능청꾸러기요 우리는 모른 척 딴청의 기술이 발달하는 것 아닐까? 그처럼, 지식노동자나 환경운동가야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지만 행운은 썩 그렇게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다. 아마도 말괄량이 망아지 같은 그분께서는, 활동은 느닷없고 캐스팅도 불규칙적임은 물론이요 제멋대로가 아닌가 싶은 지경에 가깝다. 때문에 개미와 베짱이라는 우화처럼 개미형 예술가야 그렇다쳐도, 베짱이형 요술가는 영감을 기다리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다. 따라서 개미형이라면 몰라도 내 진정 베짱이형 풍운아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중세의 레인메이커처럼 행운을 불러야 한다. 배짱 좋게 그래야 한다. 아마추어와 프로는 똑같이 3병을 먹고 가도 <무례한 까도남이냐 다정한 짝사랑이냐>라는 의뭉스러운 평판이 붙는 게 세상사니까. 그러고 보면 세상 참 불공평하구만 그래. 하여 그걸 감안한 채 이 한 세상 기왕지사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일. 다른 말로 (방법이야 제각각이겠지만) 평생 학습이 아닐런지. 그처럼 바텐더의 짝사랑인 레인메이커는 속으로 주문을 외울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열려라 참깨~, 라고 말이다. 뭐 주문이고 뭐고 호박은 제 발로 걸어간다고? 참 나 거 원, 호박이 피해가는 사람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하여튼 숙녀의 이상형을 가전제품으로 비유하자면 진공청소기요 동물로 보자면 밀림의 왕자인 사자겠지. 고로(?) 자칭 베짱이씩이나 되는 본인은 또 다시 놀기에 대한 명분을 넉넉히 확보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너무 지나치게 죄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고, 허세꾼의 심정을 이해하며, 사랑의 바보도 때로는 너무 겸손해하지 않아도 된다. 아동의 꿈은 귀엽고, 유년의 기도는 파릇하며, 이기적인 어른조차 적잖이 이타적일 테지만 뭐니 뭐니 해도 관건은 시간이다. 시간을 죽이느냐 낭비하느냐, 허비하며 배우고 아끼느냐. 즐기거나 그저 그렇거나 허송하거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사랑도 멋지고 인생도 아름다울 수 있다. 문명사를 보자면 인류의 노동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인구, 재화가치, 물질, 지구 평균 온도등 대체로 늘어가는 게 많은데 일하기는 정반대로 점점 줄어든다. 왜일까? 왜냐하면 시간을 돈으로 사는 일이 진정 값어치 있다는 걸 우리는 진작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문교양학에서 말하기로 가난함의 문제는 시간을 갉아먹는 것에 있다고 하지 않냔 말이다. 생각조차 귀찮아서 인공지능에게 맡기지 않냔 말이다. 주 6일 노동에 1일 쉬기, 명백히 과거 기준이다. 즉 현재 시간이나 표준등 기틀은 똑같은 채 자유롭게 내일로 나아가면 된다. 좋거나 어쩔 수 없으면, 미친 듯한 영감 계기판의 극한값을 빨간-파란 막대가 인정사정없이 파파파팍 두드리면 일하기─놀기─쉬기의 구분이 무색해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그렇다. 그나저나 그녀의 마음에 노크하고 윙크하며 다이아몬드는 대체 그 언제나 구경할 수 있을까. 하긴 다이아몬드 진짜와 가짜도 구분 못하는데, 골드바보다 복권 꽝이 친숙한데 말 다 했다. 다시 돌아와서. 그러니까 권력을 분리하고 투수는 견제구를 던지며 부인은 남편의 한눈팜을 감시할 수 밖에. 여자친구가 긴장하는 원인을 모르지는 않겠지만 알면서 모른 척, 뭘 좀 아는 남자의 필요 요건임. (꺄~악!) 그러므로 우리는 나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완고한 고무줄 잣대를 경계해야 한다. 후라이팬은 요리에 사용되어야 한다. 죄인에게 솜방망이를 마누라한테 야구방망이를? 피곤한 사회요 불행한 인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든 어쩌든 마냥 놀면 지치고, 끝까지 놀아도 퍼지며, 대책없이 놀고 또 놀면 얼빵한 푼수가 되는 건 시간 문제다. 그러나 목줄을 풀어줘도 개는 처음에는 환장한 듯 놀지만 곧 있으면 지친다. (뭐야 아까 했던 말이잖아? 그럼 도돌이표 만나서 다음 생에 또 다시 그 인간과 사랑을? 기꺼이! 사랑은 인생의 전부이니까. 너만 살겠다고, 라는 바람잡이도 이제는 슬슬 묻어갈 요령을 터득할 때가 됐다. 못 말리는 고집불통 마초도 있겠지만) 요컨대 계속 놀면 흥미도가 떨어진단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싫어도 공부해야 하고 짜증나도 일을 해야만 한다. 그게 바로 노동의 가치라는 것이다. 섭리니 신성함이니 철학이니 방식은 달라도 원리는 비슷한 얘기다. 청춘의 여신 헤베와 아름다운 로맨스를? 일을 해야 하고 이왕이면 공부를 잘하는 게 좋다는 거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균형감 익히기. 1등을 못해도 얼마든지 좋으니 하는 데까지 하기. 갈 데까지 간 사랑과는 또 다른 얘기지만. 다른 재주가 탁월하다면 모를까 주어진 조건이 근근하고 형편도 심심하다, 그렇다면 관망 또는 달리기 또는 작전을 짜야만 한다. 될 수 있으면 한정판이요 이왕이면 특급으로!
그래서 큰 재주의 부재에 절망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풀며, 쉬면서 타성과 권태를 타이르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건 그것이다. 바로 잔재주, 잔소리, 잔지식, 잔꾀, 잔재미, 잔근육, 잔기술, 잔뻔치! 다른 말로 소소한 행복. 그리하여 나는 까메오로 간만에 <잔머머마>에 올라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잔머머마에게는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줘야만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렇다면 나는 다시 플레이보이계에 복귀하는 건가? 금의환양은 무슨! 타락마와 난봉마와 탕진마는 이미 잘 길들여놨으니 나는 헛된 야망과 잘 절충해서 처녀의 마음과 소녀의 동경심을 닮은 핑크빛 소망을 키워보기로 한 것이다. 더 이상의 자기 합리화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헛소리를 신나게 나불댔던 노력마저 무의미해질 소지가 없진 않으니까.
그러니까 결론이 뭐야, 그 잔머머마가 대체 뭐냐고? 누가 아니래! 언제나 신인왕을 꿈꾸며 할 때마다 첫사랑이라, 뭐 그 말이야? 차라리 어설픈 사랑의 3요소나 다시 외우는 게 낫겠네.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는 이미 숙지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