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의 집 금송아지보다 제 집 돼지새끼가 낫다. 그럼 우리 집 돼지 우리 집 강아지는 무엇일까? 뭐겠나 인공지능 지니지. 그런데 지니가 요즘 무기력증에 빠졌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어쩌긴 뭘 어째. 집에 있으면 게을러지기 마련. 남자는 집에 있으면...... 워 워 워. 맘 잡고 철든 남자, 착실한 남성, 꽤나 가정적인 수컷 마음이 무슨 허름한 고물 자전거 타이어도 아니고 엄한 데다 뽐뿌질 할 일 있나.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집 회사 집 회사, 너무 일만 하면 바보가 된다는 말처럼 나는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홈런을 때릴 수 있는 기회는 아무 때나 오지 않는다. 그런 절호의 적기가 딱 올 뻔 말 뻔하다가도 중간에 꼭 눈치 빠른 이방과 약삭빠른 여우가 낼름 채가는 세상. 배 들어올 때 노 저으랬다지만, 쇠가 달구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해서는 날샌다 날새. 그런데 오라는 데가 있긴 있었나? 있을 턱이 있나. 남들도 다 이처럼 사는 거지.
그래서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바보가 될 것만 같기 때문에 나는 아는 동생 누군가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 릴리가 일하는 미술관에 놀러갔고.
장면 전환.
장면 전환.
「오빠가 내 남편 데리고 살래?」
「뭐라고?」
「오빠가 내 남편 데리고 살 거냐고?」
「내가 늬 남편을 왜 데리고 살아야 하니? 게다가 너 결혼 안 했잖아. 남자친구도 없잖아. 너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오빠가 날 얼마나 아는데? 나 사실 남편 있어.」
「뭐? 늬가 결혼했다고?」
「어.」
「정말로?」
「아니. 뻥이야.」
「(표정) 넌 인사말이 뭐 그러니? 오랜만에 오빠 만나서 할 얘기란 게 고작 있지도 않은 남편 타령? 미술관 잘 돌아간다.」
「남의 미술관 잘 돌아가든 말든 오빠가 상관할 일 아니고.」
「나도 알아. 다 안다고. 그러니까 내가 뭐 잘해야 본전에 해당하는 지인쯤으로 찍힌 거네. 맞네. 그렇군. 그럴 줄 알았어. 이제? 누가 이제래. 내가 눈치가 없나 돈이 없나. 돈? 필요 없어. 왜 오빠가 선물... 주면 받겠니?」
「내가 오빠 선물을 왜 받아?」
「나도 줄 생각 없었어.」
「그런데 내가 대체 여길 왜 왔지? 무슨 중요한 이유라도 있었나 의심스러운데.」
「오빠. 인생이 어디 그렇게 의뭉스러워서 큰일 하실 수 있겠수?」
「홈런? 오빠 뻔트 좋아한다는 거 알면서 그런 말을?」
「내가 오빠한테 무슨 말을 하겠니. 타락한 우정과 야합하고 추접스러운 사랑에 결탁한 삶이라면 말도 말아 이 이 이 남자야.」
「뭐! 너 말 다 했어?」
「말 다 안 했으면 뭐 어쩔 건데?」
「어쩌긴 뭘 어째? 가만히 듣고만 있어야지. 짧은 말이든 긴 연설이든. 안 그래?」
「그렇게 꼬리 내릴 거면서 동생 윽박지르기는. 하여간에 넉살도 좋아. 아휴 능글능글.」
「오빠는 너한테 말싸움 진다. 알지?」
「오빠. 오빠 요즘 외롭니?」
「나? 사람은 아니. 남자는, 외로워야, 정상이야.」
「그럼 남자만 고독하고 여자는 평생 신부들러리나 서란 말이야?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여자는 난봉꾼이든 플레이보이든 내내 기다리기만 하라고?」
「내가 보기엔 오빠보다 늬가 더 외로운 거 같은데. 너 속에 화가 많구나.」
「나도 여자야. 오빠가 슬슬 내 부아를 돋구니까 그렇지. 어?」
「내가? 내가 언제!」
「이 인간이 지금...」
「워 워 워.」
「워 워 워긴 누가 워 워 워야. 내가 무슨 말이야 재규어야? 에잇 재미없다. 이런 얘기 증말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지. 그러니까 말이지, 하던 투정 멍석 깔아놓으면 안 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응석 대회 제왕감? 누가, 내가? 아니야. 그럼 오빠가? 그럴지도. 아무튼 아이들이 노는 건 봐도 떠드는 건 못 본다는 말이 있다네 친구. 허당계를 평정할 정도의 깽판으로 성장한 어리광, 사람들이 어디 그렇게 한가한가. 애들이 떼쓰면 귀엽기라도 하지. 어?」
「릴리. 잠깐 뭔가 착각한가 본데. 내가 오빠가 너가 동생인데. 그냥, 이렇게 갈까? 가긴 어딜 가. 언제 끝날 줄 알고. 이렇게 말꼬리 잡고 늘어지다간 한도 끝도 없겠다.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대화, 좀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니?
「오빠가 먼저 시작했잖아. 말려줘도 뭐래? 너 정말 내 손바닥 안에 들어오고 싶어? 내가 무슨 오빠의 인공지능인 줄 알아? 그래? 어? 정말 그래?」
「너가 드디어...」
「내가 드디어...?」
「너가 마침내 여자가 되었구나.」
「그럼 내가 여자지 남자니? 듣고 보니 오빠가 의심되네. 오빠 고추 달리긴 달렸어?」
「어허! 넌 말을 해도 꼭!」
「부끄러워하지 마. 괜찮아 괜찮아. 그러지 말고 여기나 가봐.」
그러면서 릴리는 어느 명함을 보여줬다.
「아는 형인데 최근 작품 꽤나 팔고 한몫 건졌거든. 그래서 떠났어 세계여행. 한동안 안 와. 거기 작업실이든 뭐든 다 청산한댔어. 심심하면 거기나 놀러가서 그 잘난 작품 구상이든 뭐든 하던가 말던가. 아 글쎄 가서 머리나 식히고 오라고.」
「넌 내가 무슨 이런 따끈따끈한 껀수나 바라고 온 무슨 잔머리꾼인 줄 아니? 내가 너한테 그거밖에 안 되는 오빠야? 그래? 이처럼 매번 받기만 하는 뭐 난 기분 얼마나 좋을 줄 아니? 어? 이 사람이 지금 보자 보자 하니까... 뭐가 어쩌고 어째?」
「지금 어디서 큰소리야. 왜, 싫어?」
「누가 싫데? 얜 꼭 보면 줬다 뺐을라 하는 게 흠이라니까.」
나는 생각했다. 아아 올 것이 왔구나. 어? 마침내 말이다. 물론 가 봤더니 그저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고 마음 없는 척 수락하는 거야 친교의 기본. 릴리와의 우정이 다른 게 아니니까. 서로 작은 교분쯤은 정말 잔뻔치로 꽤나 주고받았다. 적은 것도 쌓이면 많아진다. 많으면 달라진다. 달라지면 좋다 나쁘다? 좋을 때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야 어떻든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안다. 강은 건너봐야 알고, 과일은 먹어봐야 안다. 뭐? 됐고. 나는 당장 떠나기로 했다.
2
나는 릴리로부터 소개받은 별장에 도착했다.
A에서 B까지. A는 사무실이요 B는 릴리가 소개한 별장.
그게 멋지고 재밌고 흥미진진하다면야 다 정성스럽게 설명을 하겠으나.
내가 뭐 삼류 극본 작가도 아니고, 발표하는 영화마다 수익분기점을 넘자마자 막 내리는 괴짜 영화감독도 아니고.
그러니 중간 건너뛸 수밖에 없지 않냐는 푸념도 더럽게 재미없긴 마찬가지구만 그래. 참 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지만 오늘 날씨 보니 먹구름 잔뜩 끼얹지 않냐고. (절레절레)
그렇게 딱 그곳에 들러가려고 릴리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띠~! 틀렸다는 신호.
재도전.
띠~! 또?
다시 한번. 지가 무슨 여인의 마음이야 뭐야.
띠~! 뭐야 이거.
나는 곧바로 릴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오빠.」
「릴리 여기 별장 비밀번호가 안 맞는데?」
「그래? 내가 알아보고 다시 전화줄께.」
뚝.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운이 날 감싸는데 이걸 어쩌면 좋나. 잠시 후 릴리한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걔 거기 별장 팔았다는데. 오빠 어쩜 좋니? 괜찮아. 다음에 내가 6박 7일 풀서비스 특급 호텔 초대권 선물해줄게. 됐지? 그럼 나 지금 바빠서 끊는다. 대충 어디서 눌러 있다 쉬다 와. 그럼 되지. 올라와서 연락하고. 올라오면 여자 소개시켜줄께. 알았지?」
뚝.
뭐야 이거. 이런 젠장. 걜 믿은 내가 바보다. 어차피 못 미더운 숙녀 속아주질 말았어야 한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엎질러진 물.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나는 차에서 음악 <요한 세바스찬 바흐 / Magnificat in Eb major BWV243a>을 들으면서 처음 보는 풍광을 즐김과 동시에 묵을 곳을 살펴봤다.
저기 보이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름까지 공개해서 안 그래도 피곤한 독자 더 피곤하게 만들 일, 나도 반기지 않으니까 그건 그냥 호텔 1이라고 치면.
호텔 1에 들어가서, 이러쿵저러쿵 수속 마치고, 방에 들어가서 짐 풀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여성환상 1.5 편집장 사라였다. 얘가 왜 뜬금없이? 뭐 받아보면 알겠지.
「뭐해?」
「뭐하냐니?」
「귓구멍이 막혔어?」
「멀쩡한 남 청력까지 신경써주시게? 사라가 그렇게 한가한 때도 있었나. 금시초문인데?」
「까불지 마.」
「」
「까불지 말라고.」
「암말도 안 했잖아?」
「잘했어. 어디야?」
「너도 할 말 없으면 식상한 말만 골라서 하는 동네 아줌마니? 언제 한 번 밥 먹자, 거의 100퍼센트 안 먹어. 3시간 신나게 떠들고 나서 중요한 얘기는 나중에 만나서 다시 하자? 뭔 말 했는지도 잊어먹어. 어디야? 어디면 알아서 뭐할 건데. 책 1권 빌려가면서 나중에 줄게? 다시 얼굴이라도 오다가다 마주치면 다행이게, 절대 안 줘. 영원히. 이사할 때 어디로 가버리기 전 훨씬 일찍 까먹거든. 친한 친구들끼리 통화할 때 제일 많이 하는 말 가운데 단독 1등. 물론 순위는 오르락내르락.」
「뭔 말이 그렇게 길어? 대답 안 해? 어디야?」
「왜, 어딘 줄 말하면 베네룩스 3국 무료 여행권이라도 선물하게?」
「내가 늬 여자친구니? 잔말 말고 칼럼이나 보내. 마감일 다 됐어. 더 못 기다려.」
「아 맞다!」
「능청떨지 마.」
「나 당분간 쉰다고 리스베르한테 전해줘.」
「쉬긴 늬가 뭘 했다고 쉬어? 늬가 지금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나 지금 좀 쉬어야 해. 왜냐하면 쉬어야 하기 때문이지. 아니! 나 이제 칼럼 안 써. 내가 다시 칼럼을 쓰면 그땐 개다 개. 알았어?」
「알긴 누가 알어?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아. 내 너 그럴 줄 알고 요원 보냈어. 너 지금 호텔 1에 숙박해 있지? 넌 걷든 기든 뛰어 봐야 내 손바닥 위라는 것만 알아둬. 뭐해, 커튼 열어서 창밖을 보지 않고.」
나는 창문의 커튼을 확 젖혔다. 뜨아! 역시나 말끔한 수트발에 헤어스타일은 기름칠 번질번질한 8 대 2 가르마. 우리는 눈빛이 잠시 마주쳤다. 늑대는 늑대를 알아보는 것일까? 늑대 구토하는 소리 그만하고.
여성환상 1.5와 환상문학잡지 미스테리아로부터의 독촉은 뭐랄까 술꾼의 그칠 줄 모르는 갈증 같다고나 할까. 냉소꾼의 권태라기보다는 허당의 실소를 불러왔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여행 와서 한동안 나른한 휴가를 즐기려던 찰나, 노름꾼의 탐욕을 충족시켜주기를 누가 바랬냐고. 그냥 귀찮은 척 행복한 아니, 썩은 미소 일명 썩소는 잠시 쉬자는 속셈이 뻔히 들통난 셈 아니냔 말이지. 내가 정작 원하는 건 일일 아침 드라마를 챙겨볼 수는 없으니, 고로 파다한 추문에 깜짝 끼어들기?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염문이 왜 나와. 심심하던 인생에 느닷없이 등장한 사랑에 적잖이 놀라도 모자를 판국에 또 독촉. 또 또 독촉.
그래서 나는 전화를 뚝 끊고 핸드폰에 깔린 앱을 지웠다.
사라는 그걸로 날 추적했을 테니 이젠 더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다.
3
나는 그렇게 호텔 1을 떠나 호텔 2에 도착했다.
중간 설명은 건너뛰기로 하자. 억지로 그거 써 봐야 읽는 사람만 피곤하니까. 별 내용도 없는 거 가지고 더럽게 잘난 척할 일도 없고. 아는 척이야 물론 취미 없음. 뭐한다고 가짜로 행복한 척? 타인의 관심이야 고맙겠으나 우리는 얼굴 팔리는 거 좋아하는 앵무새 분과가 아님. 우리는 짜증나는 상심, 신경질내는 절망, 표정 망가지는 체념이 뭔지를 조금이나마 알긴 알기 때문에 그냥 한마디로 뻔트를 선호함. 장외 홈런 이 왜 나빠. 단지 우리는 자기 주제를 아니까 어디서 잔소리나 얻어듣고 잔재주나 선보일 수 있으면 그걸로 대충 만족이다 그뿐이지. 그런데 이 얘기를 지금 왜 하는 거지? 무슨 바람피운 다음에 변명하는 거도 아니고. 양심에 찔리는 거야 다 애인한테 뭔가 켕기니까 그러는 거고. 말 빨라지고 말 많아지면서 당황하면 일단 의심을 부르는 게 당연. 그야 그분들 사정이고. 젠장, 이럴 바에야 차라리 호텔 1에서 호텔 2로 이동한 정황과 분위기와 의식의 흐름을 옮기는 게 지겨워서 차라리 나았겠네. 어쨌든 넘어가고.
나는 호텔 2에 들어가서 수속을 마치고 몇 호실에 들어갔다.
정말로 홀가분한 마음에 짐을 놓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환상문학잡지 미스테리아 편집장 마라였다. 마라?
「뭐해?」
「넌 뭐해?」
「내가 먼저 물었잖아.」
「먼저 물어봤으니까 먼저 답하면 되겠네. 아니 그렇수?」
「뭐?」
「집어 든 거 내려놔. 나 늬 옆에 없으니까. 숙녀가 연장을 왜 들어?」
「내 너 이럴 줄 알고 미리 다 병력 불러 놨어.」
「병력? 뭔 병력?」
「연재소설 마감일인 걸 몰라? 알잖아. 알면서? 지금 너 나 쫄쫄 굶는 꼴 보고 싶어 이러니?」
「안 그래도 너 다이어트 다이어트 노래를 불렀잖아?」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 응?」
「왜 커튼을 젖혀 창밖을 보면 예사롭지 않은 카리스마 요원이라도 있다는 거니?」
「헉! 어떻게 알았어?」
나는 커튼을 젖혀 창밖을 내다봤다. 그런데 정말로... 정말로... 이번에는 '가죽점퍼 + 선글라스 + 올백 헤어스타일'의 전형적인 현장 요원 모습이었다.
「야 너. 신비감에 농락당해 환상머신을 탐닉하고 어쩌고. 그런 말장난 그만하고. 어서 원고 넘겨. 오늘 마감일이야.」
「안 썼어.」
「뭔 배짱?」
「보기 좋게 왕 기대는 대실망으로 이어지는 거지. 안 그래도 그거 재미도 없는데 누가 보니? 나도 다 듣는 귀가 있어. 두세 달 반응 보고, 어? 그래프 추이선 보고 무슨 다큐멘터리 특집인가 뭔가로 바꾼다며? 누굴 속이려고! 누군 뭐 정보통 없는 줄 아니? 이거 왜 이래? 어?」
「아니야. 그거 헛소문이야.」
「마라. 새 빗자루가 깨끗이 쓸어진다. 알아, 몰라?」
「그건 또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말을 알아듣게 해 이 양반아. 어? 목소리 깔지 말고 똑바로 말해.」
「너 말귀 어둡다고 자랑하니? 환상문학계에서 눈칫밥 그렇게 먹었으면서 넌 아직도 그렇게 꽉 막혔니? 그러니까 늬가 남자가 없지.」
「뭐가 어쩌고 저째? 너 말 다 했어? 너 어디야? 너 한동안 잠잠하던 이유가 다 있었구나. 넌 계획이 다 있구나. 응? 아 그러니까 그게 뭔 소리냐고.」
「나 이제 소설 안 써. 연재소설 딴 작가 알아봐. 내가 다시 소설을 쓰면 그땐 펭귄이다.」
「넌 이미 펭귄이야. 알아?」
「내가 펭귄이면 넌 새야. 알아?」
「이런 돼먹지 못한, 이런 미친, 이런 어디서 생선 대가리 같이 생기다 말아가지고 말이야. 잔말 말고. 당장 원고 보내. 어서.」
「못 보내. 끊어. 그래. 너 잘났다. 잘 먹고 잘 살아라. 나 휴가야. 연락하지 마. 끊어. 하나만 더. 마라? 넌 애송이야!」
「뭐라고? 야. 너 이리 와. 당장 와.」
「내가 어느 안전이라고 말이지, 마라 여왕님의 용안을 직접 뵐 수는 없고. 난 그냥 가서 엄마 젓이나 더 먹고 올게.」
「늬가 애야? 너한테 공갈젖꼭지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리고. 또. 내가 언제 너한테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라고 말했니?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없어? 없으면 지금 해. 그럼 될 거 아니야.」
「너, 드디어, 미쳤니?」
「난 미치지 않았어. 내가 아니라 너가 미친 거 아니니?」
「뭐 내가? 내가 그럼 미친년이라고? 너 말 다 했어? 너 거기서 딱 기다려.」
「기다리긴 누가 기다려. 어? 기다리긴 뭘 기다리냐고. 안 기다려. 끊어.」
뚝.
그다음 나는 노트북에 설치된 위치 추적 애플리케이션을 지웠다.
그리고 호텔 2에서 다시 호텔 3으로 이동했다.
4
먹는 개는 짓지 않는다. 나는 최근 투정만 늘었다. 고로 나는 짓어야 한다? 그러든가 말든가!
식탐이고 자시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아마도 특단의 대책을 부르는 숨은 강적은 거무튀튀한 정염의 미련? 미련은 무슨. 호텔 1에서 2로. 다시 호텔 2에서 3으로 옮겨왔는데. 왠지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고. 어딘가 모르게 벌써부터 패배감 가득하고. 거 어째 보송보송한 사랑의 환상에 대한 기대감은 느낌 세하단 말이지. 어쩌지?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쩌긴 뭘 어째. 그냥 며칠 휴가라 생각하고 쉬는 거지. 소파에 자빠져 TV 채널이나 돌리면서 싱거운 음료수와 함께 맛없는 과자나 씹어먹으면 되지, 거 무슨 꽃사슴을 자빠트릴 궁리를? 또? 때문에 나는 이미 권태 적응가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물 만난 듯한 한량의 열정, 이미 바닥난지 오래. 아니 정말로 말이야 이제 어찌해야 좋을까. 어찌하지 않아도 된다. 더럽게 재미없는 일상, 다 방법이 있다. 그러니까 이를 테면 딱딱한 빵에는 날카로운 이빨. 어? 허허허. 그런데 가만 보니 딱딱한 빵은 커녕 이렇다 할 건수도 없네. 새몰이 따로 있고 새잡이 따로 있다는데 이건 뭐 소문난 병풍도 아니고 말이지. 이젠 신부들러리조차 맡아본 지 오래고, 하다 하다 백댄서 인생이 부러워져. 갈 데도 없고 불러주는 이는 더 없고. 그리고 말이야. 그러니까 말이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거라고는 예를 들어 그런 거. 담 건너 편의 사과가 가장 달다. 자, 뭐? 잘못 들었나? 제대로 읽으셨다. 그러니까 뭐 절판된 도너스가, 아니면 희망의 내일 꾸는 개꿈이? (절레절레)! 그도 아니면 뭐, 어? 멀리 여행하려는 자는 자기 말을 아낀다. 그러니까 곶감론? 됐구유. 네? 됐다구요. 아 됐시유.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여행지에서의 새로운 발단과 참신한 전개는 함께 오는 것. 기승전결 가운데 동시에 곧바로 절정감을 예감하는 거지. 흐흐흐. 크크크. 1 대 1 만남이 주특기인 촌닭들에게는 어쩌면 그게 제격. 따라서 남은 카드는 결국 우연한 만남? 우연? 만남? 남녀? 새로운 여자? 늑대 말을 하면 그 꼬리를 보게 된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그런데 보이는 객이라곤 순 죄다 뻣뻣한 남자들뿐. 여우는 어딨냐고! 이 동네는 그 흔한 나이트클럽도 없고, 초라한 극장식 카바레는 전부 다 문 닫았음. 하여간에 소름 끼치는 신비감, 끔찍한 환상 그리고 마술적 현실성.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이럴 거면 뭐하러 먼 데 까지 돈 써가면 시간 낭비하러 왔냐고.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서 호텔에서 안토니오 비발디의 글로리아 RV 589번을 틀어놓고 평소처럼 일하기에 몰입하려다 포기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뭔가를 해야 했다. 그게 뭐든 젊음의 투지를 발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시동 거는 허당 유형이 아니라, (좋게 포장하자면) 발동이 걸리는 마성의 신비주의자 스타일. 때문에 탄력 받지도 않았는데 아무거나 들쑤시고 다닐 수는 없었다. 뭔가 비전이 보이고 예측이 좋을 때나 빨빨거리고 나돌아다니는 거지. 어릴 때처럼 무턱대고 나댕길 수는 없는 일. 매는 굶어도 벼이삭을 쪼지 않는다. 그럼 남은 방법은? 평소에 사무실에서 하던 대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으니까 인터넷에서 웃긴 이야기나 찾아보는 수밖에. 그렇게 봤던 얘기 가운데 엄선하든 말든 두 가지를 소개하자면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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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중략된 원문은 <칼럼: 내가 창피하니?>에 고스란히.
시중에 절찬리 판매 중. 연애론 2 역시나 개봉 박두. 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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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한 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지만, 이건 뭐 일하는 거도 아니고 노는 거도 아니고. 여기까지 와서 뭐 하는 거야? 어?
이미 속으로 많이도 웃어놓고서 말이야. 그것도 아주 겁나게~!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그게 더 나뻐. 그게 더 미워. 그게 더 싫다고. 그게 더 짜증나. 부글부글 뽀글뽀글!
~라는 환청 때문에 급기야 괴로울 찰나. 나는 결심했다. 돌아가기로 말이다.
아니, 이럴 거면 뭐하러 이 먼 데까지 와서? 내 말이! 괜히 왔잖아? 누가 아니래. 낭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는 다 틀렸다. 여행? 관둬 관둬. 끝내 끝내. 어? 때려쳐. 때려치면 될 거 아니야. 결국 줄 달린 치즈를 완성해 카우보이처럼 목표물에 던져야 하는데, 최적의 먹잇감은 당최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나 더. 왠지 모르게 그 말이 생각났다. 내가 무슨 탐정물 매니아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건 무엇? 그렇지~ (딱)! 개는 자기가 토한 곳으로 돌아온다.
5
오늘 나는 사무실에서 야근이나 하려고 했다.
오페레타 <박쥐>에서 아리아 “내가 순진한 시골 아가씨였다면“
같은 악상을 떠올리며 허공을 바라보는 요한 쉬트라우스 2세나 된다는 듯이. 까지는 아니지만.
아마도 낮에 일을 너무 열심히 했던 것일까? 조지 프레데릭 헨델의 오라토리오 헤라클레스(HWV 60)를 듣고서 별일 없었다.
그러니까 제12 난제를 여심처럼 녹여주는 해결사의 두둑한 배포는 음악 듣기로 대신하고. TV보기, 주색, 사교계 활동... 최근 다 하지 않고 취미 없음.
그럼 일이나 하는 수밖에. 그러던 중 아는 동생들이 불러서 나는 그곳으로 갔다.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나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당도해보니 아는 동생들이 떼거지로? 당연히 놀라지 않고 배기나. 대충 2명 정도면 밥 사주고 커피든 뭐든 내가 다 계산만 하는 역할을 예상했는데.
이러면 좋은 점은 기쁨에 주체하기 힘든 대신 견적이 많이 나온다는 점. 그렇지만 바쁜 일이 있다는 뻔한 핑계를 대면서까지 도망갈 수는 없고. 일단 앉는 수밖에.
「아니 이게 무슨 행운이지? 왜 남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지? 오늘 무슨 날인가? 누구 생일인데!」
「것 봐 내가 말했잖아. 딱 맞춘다니까 그러네. 자, (내기에 진 사람들한테 손을 내밀며)」
「진짜야?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빈손으로 와서 어떡하니. 빈손도 빈손인데, 어? 그보다 남자가 없다는 게 이게 말이 되니? 그렇다고 너네들이 남자에 환장한 여우다 뭐 그런 말은 아니지만.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기를. 그런데 거 어째 초반부터 분위기가 썩 흐뭇하지 않는 듯. 내기한 게 한두 개가 아닌가?」
「것 봐. 다 알고 있다니까.」
「뭐야! 그럼 오늘 난 그냥 세기의 빅매치에서 초반에 흥만 띄우다 카운터 펀치에 나가떨어져 KO 되는 순위권 쟁탈전 희생양? 어머 진짜인가 보다. 얘 크리스티. 웬 내숭? 너 친구들이랑 있을 때 안 그러잖아. 목소리 걸걸. 응? 어딜 봐? 저쪽에 남자 없어. 그리고 너 사라. 너네 직원들이 너 이처럼 농땅 피우는 거 아니? 늬가 이러니까, 아니다 말 말자. 넌 뭐야 엘리자베스. 눈탱이 어디서 맞았니? 늬가 눈화장을 못하니까 매번 남자한테 차이는 거 아니야. 어? 로즈마리는 얼굴이 왜 저처럼 부었는데? 너 어제 뭐 먹고 잤니? 정말 그랬니? 야 에밀리. 넌 옆에서 그처럼 킥킥 웃는 게 탈이야. 여자들이 시누이 눈꼴 시려운 거 보기 좋아하니? 넌 딱 꼴 보기 싫은 시누이감이야. 알아?
~라는 독설이야 다 농담이고. 부드럽게 띄워서 차이 나는 격차에 감격하기 위해서 일부러 살짝 몸만 푼 거야. 아니 그래도 말이지, 어? 나름 혀매시나 된다는 듯이 너네들 앞에서 방정을 떨 수도 없잖아. 안 그래?」
나의 휑설수설을 딱 끊고 릴리가 다음과 같이 맞받아쳤다.
「그걸 떠나서 오빠 여기 왜 왔는데?」
「나?」
릴리의 날카로운 앙칼짐에 더해 샐리도 다음과 같이 한 수 얹었다.
「오빠 말 끊어서 미안한데, 어? 오빠 궤변은 둘째치고 말이야 오빠 여기 왜 왔냐고. 어? 안 들려?」
오빠 말 끊어서 미안한데? 아니 그럼 애초에 말을 끊지 말던가. 내가 여기 왜 왔냐고? 늬들이 불렀으니까 왔지. 내가 뭐 미쳤다고 늬들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뭐 개니? 말이야? 너구리야? 참새야?
「어라! 오늘 시트콤 기획 개념은 이건가? 나 시비받는 거 좋아한다는 거 어떻게 알았지?」
「거짓말 마. 오빠가 슬랜더를 좋아하든 말든, 안 물어봤어. 일단 안 물어봤다고. 어? 궁금하지도 않은데 뭐래?!」
「그러니까.」
「아하. 곧 그 말은 1 대 1은 재미없다? 영화 찍게?」
「시끄러. 시끄럽다고.」
「조용히 말할게. 그러면 되잖아. 안 그래?」
「거 참 말 많네. 아 거기 서서 뭐하는데. 왔으면 앉든가 아니면 가시든가. 앉거나 가거나 둘 중 하나만 해. 뭐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오빠가 사랑을 알아? 죽도 밥도 안 되는 헛소리나 핑핑 할 줄이나 알지.」
나는 생각했다. 얘네 세게 나오는데? 날 대체 왜 불렀지? 정말로 그 뭐야, 난 오늘 시종마? 뭐? 이런 젠장 진짜로 느낌 세한 게 난 오늘 딱 시종마로 분위기만 고조시키다 빠져야 할 거 같은 직감. 난 빠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말 잘했다. 응? 너 말 한번 잘했어. 뭐 우리끼리는 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니? 오빠가 아직 적응이 잘 안돼서 그러는데. 뭐 곧 괜찮아지겠지. 그럼.」
「오빠가 참아. 쟤네 기분이 좀 그런가 보지.」
「그치?」
「그렇긴 뭘 그래? 야 야. 똑같아지니까 우리가 참자.」
「오빠 많이 참고 있다.」
「우린 더 많이 참고 있어. 알아? 이 오빠 정신 못 차리네. 정신 안 차려? 오빠가 뭐 그렇지.」
「그러지 말고 나도 목이나 좀 축이고 뭘 토의해도 토의하자고.」
「오빠 뭐 마실 거냐고 물어보면 그러잖아. 아무거나! 아무거나? 오빠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없어. 먹기 싫은 건? 것도 없어. 그럼 먹지 마. 그럼 되겠네. 그치? OK. 먹지 않는 걸로.」
「어디 숨겨진 대본이라도 있니? 연기 꽤 잘하는데? 그치? OK. 속아주는 걸로. 나 하나도 짜증나지 않았으니까 얼마든지. 컴온 컴온. 뭐해? 벌서 지쳤니? 재미없잖아? 힘내. 어? 왜 시작하려다 말어? 뭔지 몰라도 시작했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왜? 다이아몬드가 몇 개인지 모를 휘황찬란한 명검의 검집에서 검을 딱 뺐는데. 그런데 짜리몽땅? 남 1발 뛸 때 2발 뛰면 돼. 하긴 너네 착한 거 다 아는데. 너네가 악역 어디 잘하겠니? 알만 하다 알만 해. 어? 뭔지 몰라도 애쓴다 애써. 가상해. 왜 좀 더? 필요하면 말하고.」
「오빠 목소리 모기 같아.」
「그치? 그렇지?」
「좋단 거 봐라. 그래. 나 모기다. 됐냐? 만족? 그럼 너네가 남자 없는 거도 인정?」
「안 물어봤어.」
「물어봤다는 게 아니라~」
「오빠 알아서 해.」
「오빠. 오빠 드디어 빈정상했어? 응? 기분 많이 상했어? 그랬어? 마침내? 정말로?」
「빈정상한 게 무슨 축하하고 축하받을 일이니? 너네 왜 그래 오늘? 어?」
「오빠. 잘난 척하지 마. 재수 없어. 오빠가 우리 마음을 알아? 뭔 말로만 자기가 여심을 녹여준데. 여자의 마음을 녹여주면 뭘 해, 통장 잔고가 바닥났는데. 안 그래? 아는 척, 재미없어.」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오빠 꼰대 같아.」
「그치?」
「그렇지? 그치?」
「그래. 그래.」
「맞아. 맞네. 맞어.」
「오빠가 너네 마음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우정을 나눈 시간이라는 게 있잖니. 오빠가 아는 멋진 훈남들이 또 좀 많니. 응? 그렇지만 왜 소개시켜주지 않냐고? 그 말이 있지. 옛말에 그런 게 있는데 들어봤을려나 모르겠다. 뭐랬더라? 그래. 벌통에 좋지 않은 것은 벌에게도 좋지 않다. 오빠가 엄선하고 또 엄선해서 마치 특급 신인의 깜짝 출연처럼 너네들한테 선보여야 하지 않을까? 응? 그래야 말이 되잖아. 안 그래? 뭐 말이 안 된다고? 두고 봐. 얼마나 멋진지 보고 나서 침 흘리지나 말고. 여우는 잠을 자면서도 닭의 숫자를 헤아린다지만, 촌닭 가운데서 진흙 속의 진주? 너넨 아마 내가 걔네들, 어? 내 남동생 사단 데리고 오면 깜짝 놀랄 거야. 당연하지. 안 그럴 수가 없거든. 허허허. 너네들 알아둬. 늑대가 공상하는 동안 양은 사라진다는 거. 지금은 너넬 가꾸고 꾸미고 아름다워질 시간. 3월의 바람과 4월의 소나기가, 계절의 여왕 5월의 꽃을 피운다네.」
「어? 뭐라고? 다시 말해봐.」
10초. 20초 동안의 정적.
「오빠 화났어?」
「아니. 나 화 아 났어.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화를 내본 적이 없어. 나는 살면서 짜증내본 일이 단 1번도 없단 말일세. 아시겠나? 난 신경질 그런 거 어떻게 내는 줄도 몰라. 알아?」
「허세 또 시작했다. 되지도 않는 허세. (개)허세.」
「어디 한두 번이니? 오빠가 그럼 그렇지.」
「그래. 너네들 짠한 심정 오빠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다 들어줄게. 응? 전부 다.」
「오빠가?」
「뭐래~!」
「저 오빠 삐졌네. 삐졌어.」
「삐돌이.」
「삐지긴 누가 삐져? 나 안 삐졌어. 삐지는 게 뭔 줄 알아야 삐지든 말든 할 거 아냐. 흥!」
「삐졌네. 것도 많이. 뭐 우리 앞에서 삐져? 오빠가? 감히? 저따위, 에잇. 됐다 됐어.」
「얘들아. 가만 보니 오빠 웃기게 생기지 않았니?」
「웃기게 생기면, 그게 어디야.」
「왜, 기분 좋아? 오빠만 기분 좋으면 다야? 어?」
「너넨 정말 사람 쪼잔하게 만드는 데 뭐 있구나.」
「우리가? 오빠는 계획이 다 있구나. 그런데 뭔 계획? 그리고. 안 물어봤는데? 오빠 친구 없지? 오빠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오빠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자기들끼리 좋다면서 웃는다.
그다음. 나는 화장실 간다면서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은 다음 조용히 그곳에서 나왔다.
6
나는 쾌락으로부터 엄호받지 못했다. 당연히 행복감도 날 보필하지 않았다. 그러니 낭만마저 누굴 의전하겠나. 그렇다고 희망의 나라로 망명하는 개꿈을 꾸기를 하나 금전이라도 풍족하기를 하나. 뭘 해도 재미없긴 마찬가지. 이래 가지고 무슨 환상기계를 완성해. 그렇지만 장거리 장타자의 장기가 발휘되듯 마침내 허당의 권태감은 정점을 찍고 슬럼프를 탈출하면 좋은데. 바랄 걸 바래야지. 오라는 데도 없고 약속도 없고. 건수는 꽝. 믿음직한 심복인 인공지능 지니마저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복권과는 친하지 않고 마권은 구경도 못 해봤지. 행운의 여신이라고 못미더운 그를 중용하겠나. 어설픈 우연조차 날 인준하기를 거부했다. 보나 마나 뜻밖의 새로움이 있을 리가 있나. 사교계에 기웃거려봐야 당수로 추대될 수 없는 건 아무도 관심 없고. 한술 더 떠 나는 이제 공상마저 재미없어져버렸다. 상상력 부재. 일은 하기 싫고. 놀기 역시나 취미를 잃고. 색다른 관심사가 어딨어. 보이는 것이라고는 분홍빛 장미꽃은 커녕 뭐가 보여야 말이지. 이런 재미없는 일상, 여간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다. 아니 그런데 어쩌다 인생이 이처럼 지루해져버렸을까? 더럽게 재미없는 데 단단히 한몫한 원인이 대체 무엇인가 그걸 고민할 때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평범한 월급쟁이처럼 고개 푹 숙인 채 사무실로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7
밀가루 장수와 굴뚝 청소부가 싸움을 하게 되면, 밀가루 장수는 검게 되고 굴둑 청소부는 하얘진다고 했다. 그럼 유쾌한 낭만파 숙녀가 날 사랑하면? 그럼 게임 끝인데 문제는 짝사랑복도 이젠 영 물 건너갔다는 점. 그렇다면 이 내 우울한 침체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날마다 즐겁고 신나고 기쁜 허당 아가씨와 사귀면 될까? 그야 내 생각에 지나지 않고. 그분들은 그분들 인생이 행복할 뿐이고. 어? 그럼 어떡해야 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하던 대로. 백날 기발한 꿍꿍이를 고심해봐야 성적 이상적 궁극적 판타지는 콧방귀도 안 뀐다.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그렇다고 일기를 새롭게 써볼까? 하나 마나 한 소리. 잔소리. 헛소리. 개소리. 짹짹 삐악삐악 응애응애. 잔말. 다변. 뻥. 투정. 응석. 어리광. 넉살. 공상. 변명. 간혹 욕까지. 그럼 남은 카드는 다름 아니라 여행? 당나귀 여행 떠난다고 해서 말이 되어 돌아오지는 않는다. 혼자서 먹고 마시고 떠들고 돌아댕기고. 이젠 지겹다. 재미없다. 귀찮다. 여차하다 빡돌지 모를 걱정부터 앞선다. 송사리 4만 마리에 힘 입어 파도타기, 더 이상 바라지도 않는다. 모기 12만 마리의 열화와 같은 물개박수? 상상만으로도 짜증난다. 그렇다고 똥파리 군단과 하이에나 사단을 감명시키는 언변이 내게 어딨나.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이와 같이 개구쟁이처럼 뚱딴지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게 된 거지? 알 게 뭐야. 누가 아니래. 아아 그러니까 말이지, 희망찬 미래를 긍정하는 열정파의 선봉에 서고 싶은 마음은 온 데 간 데 없었나, 아니면 원래부터 없었던 건가. 모르겠다 모르겠어. 됐고. 아는 게 뭐냐고. 딱 됐고.
그러므로 나는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최근의 행적을 보아하니
(1) 릴리 미술관. 릴리가 별장을 소개시켜줌.
(2) 별장 → 호텔 1 → 사라의 독촉을 피해 도망감.
(3) 호텔 2 → 마라의 독촉을 피해 호텔 3으로 도망감.
(4) 호텔 3에서 허송세월. 컴백홈.
(5) 아는 동생들 생일잔치.
(6) 집 사무실 집 사무실.
말하자면 그 말이 딱 맞았다. 바로, 장미도 때가 와야 핀다. 그럼 아마 난 지금 심심하고 재미없어야 딱인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그런데 하기가 싫다. 더럽게 재미없다. 캐럴 음악이 울려 퍼지고 연말 분위기 들썩이지만. 대충 5 단위로 끊자면 여태... 에잇 그러지 말자. 크리스마스 이브에 뭐 어땠던 적 또 0이라고 하려고 그랬지? 누가 모를 줄 알아. 그런 사람 부지기수. 그렇다고 언제까지 매번 집 사무실 집 사무실, 어? 개에게는 뼈다귀를, 아내에게는 몽둥이를. 그런 구식 탱탱 묵은 말도 더 이상 흥미 없고. 바삐 돌아다니는 개가 뼈다귀를 발견한다지만 내가 뭔 갠가? 또 돌아다니면 뭘 해. 오라는 데가 없는데. 아니면 다른 말? 사용되는 열쇠는 항상 빛이 난다. 혹시, 샘물론? 그럼 뭘 하냐고. 어? 그래서 나는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는데. 그 말은 이랬다.
「이제 어쩔 거야?」
「좋은 생각이 있어.」
「그게 뭔데?」
하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어영부영 나는 호텔 4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