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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8. 3. 31. 17:32

   1

   행복한 인생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언제나. 그리고 누구든지 환영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보통 그 앞에서 허우적거리기 일쑤다. 왜냐하면 찬란한 사교계에 초대 받긴 했지만 그 초청장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고 보니 훨씬 멋진 제2호 행복의 문은 옆 동네에도 있고, TV에도 NC에도 있다. 심지어 투정과 엄살과 응석과 아양과 넉살마저 지겨워진다. 사랑은 식고, 유행가는 싫증나며, 슈퍼스타가 뭘 했다더라 라는 뉴스도 더 이상 재미없다. 새로운 관심사도 금새 식상해진다. 지나친 허세는 짜증나고 재미없는 허영은 익숙하지만 호기심과 감수성은 대타로 등장할려고 호시탐탐 대기중이다. 뻔트는 대만족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복, 돈복, 남자복? 여복, 일복 즉 인생의 행운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러니까 교양학자와 점술가도 먹고 사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이기주의자다. 적당히 이타적이되 사람들은 모두 이기주의자라는 진실을 사는 동안 잊으면 안된다. 하이에나, 늑대, 사자, 여우, 참새, 벌꿀, 생쥐, 고양이, 사냥개, 너구리등 모두 자신들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며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눈독, 질투, 군침, 시기, 경쟁, 추억, 패배, 회상. 어른들은 누구나 심리학자감이다. 추측은 습관이고 공상은 취미다. 욕망은 영원하고 심심함의 친구는 쾌락이다. 그러나 우리는 방탕과 퇴폐의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그 흔한 백치미도 여성잡지1일 뿐이다. 허당들의 잔치는 남성잡지고, 여성잡지2는 수다다. 기분이 꿀꿀할 때는 모두 실패고 권태며 허탕이다. 다 남의 행복이고 타인의 반짝반짝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만의 비밀, 곧 나만의 궁전 가슴 뛰는 낙원 내 행복의 문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단란한 가정일 테지만, 예컨대, 어제는 정치 오늘은 문학 내일은 오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사랑이다. 어느 날 그 사랑이라는 행복의 문을 열고 누군가 나타난다. 아아 그분은 천사다. 오오 눈부신 비너스다. 그녀는 정말 클레오파트라 뺨 칠 만한 미녀다. 그때부터는 세상은 동화고 에르메스는 가방이며 페라리는 마차다. 인생은 기쁨이고 세상은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나는 말이다. 그 말은 준마일 수도 있고 당나귀일지도 모른다. 설마 회전목마는 아니겠지만 혹시 가난하면 어떡하나? 그래도 괜찮다 괜찮다. 설령 그럴지라도 적어도 멋진 자동차 잡지 광고를 찍 찢어서 내 방 벽에 붙여놓을 수는 있다. 밝고 명랑하며 꿈과 희망은 언제나 함께 하니까. 멋진 행복의 조건을 소유해 봐야 그건 단지 이동 수단일 뿐이고, 차츰 귀찮아지며, 어차피 싫증날 테니까. 그래서 마침내 사랑은 결실을 맺는다. 아들이든 딸이든 그분은 공주님이요 왕자님이다. 슈퍼주니어의 탄생이다. 그러나 숙녀는 어느새 아줌마가 되어 있고 남자는 인생이 점차 재미없어진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남 얘기하기를 좋아하며─내 얘기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만약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는 나는 나는 하면서 내 애기만 한다면?─허구를 보고 읽고 때로는 라디오 드라마의 애청자가 된다. 그리고 갖고 싶은 쇼핑 리스트를 업데이트한다. 그러다 어느 험담을 싫어하는 작자는 뜬금없이 작가가 될 수도 있다. 그 인간은 본인의 작품이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에 연재되기를 실눈을 뜨면서 노릴 것이다. 하지만 매번 예선 탈락한다. 나아가 이제는 칼럼도 안 써진다. 우량주식을 오래 갖고 싶고, 환상을 믿고 싶고, 인기를 끌며 사랑 받고 싶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딴청을 피운다는 화제도 바닥났다. 할 말 없지 할 말 없지, 라고 말했던 옛날에 잠깐 만났던 영심이를 확 그냥 때리고 싶었는데 드디여 재미난 이야기와 간곡한 사연과 애틋한 곡절 및 할 말이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JS는 어떻게 했을까?
   그는 이 당황스런 슬럼프를 학습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JS는 애용하는 머신과 신뢰하는 징크스 같은 건 없었다. 새로 만들면 몰라도. 그래서 그는 친구 하워드에게 전화했다. 그렇게 해서 예전부터 꼭 한번 방문하고 싶었던 무슨 창작 아카데미던가, 그곳의 실체를 안내 받았다. 적당한 추천장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는 자기가 명작의 탄생을 차일피일 미루는 건 아닌가, 예술의 정열 그 전의를 불태우다가 방전됐을까 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바텐더의 조언처럼 특별히 요령 있게 딱 70~80퍼센트만 워밍업해서 일하지도 않았고, 썩 게으르지도 마음이 없지도 않았다. 그래서 고심해본 결과 이건 쉬는 시간 같은 경우인 듯 했다. 다른 말로 타성. 사교 생활에서 선심 쓰고 우정에게 생색내는 일과 관계없이 이건 광기를 가라앉히는 작전 타임이었다. 맞다. 삶을 돌아보며 인생을 중간 점검하고, 일기장을 촌스런 알록달록 표지에서 고급스런 가죽으로 교체하는 일. 자기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도 다 그런다. 자주 쓰는 마스카라 브랜드를 바꾸고, 차를 바꾸며, 이따금 애인까지 바꾼다. 새로움 그리고 변화. 지금이 적기다. 악마의 쾌감은 몰라도 천사의 영감을 위해서는 방식을 바꾸고 자리를 옆으로 옮길 것이 아니라, 아예 학생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아침에 사무실로 출근한 게 아니라 예술 아카데미로 등교했다.
   그런데 그곳은 그의 기대와는 정 딴판이었다. 요즘 시대에 누가 순수한 사랑을 하고 누가 문학을 논하겠나. 초보자가 첫사랑에 빠지고 허당은 시간 때울려고 소설을 읽다가 만화로, 영화로, 음악과 취미로 건너뛰느라 바쁘다. 젊음은 오락과 심심함, 놀 궁리와 미래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게 전부다.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며 멋진 추억을 많이 만들고 놀라운 인기를 획득하면 좋겠지만 실상 청춘은 그처럼 신나기는 어렵다. 기대에 부응하는 일과 욕구에 부합하는 대상은 많지 않은 것이다. 그처럼 적당한 시기에 과-점퍼를 입은 친구들이 모인 게 아니라 각자 분야에서 내놓으라 하는 당대의 쟁쟁한 전문가들이 제7의 신세계를 찾아서 모인 예술 창작 아카데미. JS는 생각했다. 차라리 기상 캐스터 팬클럽 모임이나 라운드걸을 구경하러 가는 게 좋을 뻔 했다고. 그는 유혹에 깜깜한 남자는 아니지만 싫증이 빠른 남자였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한 달은 몰라도 일주일은 채우기로 했다. 하워드가 날 속일 리는 없고, 내가 혹시 잘못 찾아왔나 라는 의구심도 그를 간지럽혔지만 일단 그는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중간에 작전에 투입된 이상 대타 역할은 마쳐야 했고, 감독의 면도 살려줘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슨 예술 아카데미는 일주일 후 폐교가 결정됐다. 따라서 그 아카데미 집단은 인근 예술대학 연예과와 합병하기로 잠정 결론났다. 그는 졸지에 연예인 지망생이 된 것이다. 물론 옆문이라는 출신에 맞게 나중 그들에게는 정식 학위 대신에 수료증이 증정된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느꼈다. 학교 잔디밭에서 주위를 보니 그랬던 것이다. 사랑의 봄바람과 즐거운 분위기, 재밌는 인생이 시작될 듯한 기분, 열망, 유머, 활기, 밝음, 기쁨, 행복, 패션, 스포츠, 선동, 으쌰으쌰 그 모든 것이 함께 하고 있었다. 사랑도 행운도 인기도 품위도, 재미까지 다 놓칠지라도, 하다못해 그는 험담가 라더라 라는 헛된 풍문에 인상이 일순간 찌푸려질지라도 그는 한평생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 유감스러운 기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2

   의혹은 말끔히 해소됐다. 일하기가 아닌 공부하기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나 아직은 머머론을 읽었고 낯선 강의실에 들어가 생소한 과목도 청강했다. 또 숨겨진 데이트 장소를 염탐하며 젊은이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직은 말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JS는 수업이 끝나고 하교길에 들어설려고 했다. 그런데 웬 동호회인지 학과 모임인지 어느 청년들이 교정에서 실험이랄까 소개 비슷한 일을 벌이고 있었다. 공기를 도체로 활용하고, 액체에 정보를 입력하며, 피부에 생각을 표시할 수 있다길래 무슨 마술 동아리인 줄 알았다. 게다가 그는 전날 꿈에서 음료수를 쏟았는데 쏟아진 음료수에서 영화가 재생되는 기묘한 장면을 봤다. 때문에 그들이 옛 시골 장터에서 볼 수 있는 약장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친구들은 미래과학부 학생이라고 했다. 그는 그래서 전과나 할까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일주일이 흐른 후 깨달았다. 내면의 그분께서 막연한 심술인지 일상적인 변심인지 그 때문에 그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건 순전히 어설픈 체험이요 우스꽝스런 회상이자 신부들러리나 만년 조연에 불과한 일이라고. 그러므로 이런 시간 낭비는 그만두고 사무실로 가서 글이나 써라! 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맞다. 타인의 의뭉스런 연애사는 어차피 남의 일이다. 이건 완전히 다른 신비도 아니었다. 흔해 빠진 일을 모험이라 뭐라 칭송할 수도 없었다. 그는 정말로 발단─발단─발단─(느닷없는) 결말에 질릴대로 질린 것이다.
    결국 그는 더 이상 학습에 열의를 느끼지 못했다. 학교에 다니기 싫어졌다. 그는 늘 그랬다. JS는 인생에서 항상 초보자였고 구경꾼이자 무조건 독학이었다. 영화의 독백으로 치자면 산전수전 공중전 어쩌고저쩌고. 그러나 그건 다른 말로 수박 겉 핥기다. 그렇지만 그는 그게 싫지 않았다. 솔직히 좋았다. 왜냐하면 강아지가 냄새 엄청나게 맡고 다닌 다음에 사랑을 만나고 뭔가 일을 내는 것처럼 천 번 만 번 수박 겉 핥기, 바로 그 다음에 진정한 환상을 독대하는 일. 알고 보니 그게 인생이었다. 전망을 보며 견적 내서 아니다 싶으면 차라리 일찍 그만두는 게 낫다. 물론 처음 생각은 언제나 대망이겠지만. 엇그제 그는 독서 중에 느꼈다. 꽤 괜찮고 은근 감동적인 문장이었는데, 내내 찾다가 포기했다. 어쨌든 마음이 바꼈기 때문에 무슨 아카데미의 수강생 자격으로 시작한 캠퍼스의 낭만은 포기했다. 아르바이트 한 달, 학원 한 달, 취미 한 달, 우정은 내 기분 좋을 때에 또 사랑은 줄곧 탐색전이 전부였던 것처럼. 그러니까 결국 지성의 전당은 그에게 입을 수 없는 아동복이자 발에 맞지 않는 유리구두였던 것이다. 환생은 가상이었고, 인기는 그냥 바쁨이었으며, 낭만은 착각이었다. 그의 현재 인생 과제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것인가, 위스키를 마실 것인가가 아니었다. 하루는 소개팅 하루는 여행도 아니었다. 나중 생각했을 때 탐욕으로 비쳐질지 모르지만 일단은 해야 하는 건 학습이 아니라 일이었다.
   JS가 그처럼 결심했을 때 바로 그 순간 때마침 첫인상이 괜찮았던 교우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딕 발렌타인. 그는 한물간 작곡가였는데 예술 아카데미는 그냥 재미로 나온 것 같았다.
   「형. 이제 수업에 안 나올 거지?」
   「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그렇게 울상인데 모사꾼이 아니라 동네 꼬마라도 알겠다.」
   「......」  그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형. 그러지 말고 얘네들 공연이나 한번 보고 가. 응? 완전 재밌다는데! 정말이야. 차력단 발표회 끝나면 선물로 유니폼도 준다는데. 어디 유니폼만? 마치 후광이 비추는 것만 같은, 어? 어떤 뭇남성들일지라도 첫눈에 반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그 뭐라더라... 어, 맞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그녀와 데이트도 하고 그 친구들과 소개팅도 준비되어 있다던데. 어때? 괜찮지 않아? 어차피 우리들 인생은 행운아의 별나라 모험 같은 것이잖아. 형. 그러지 말고 내 체면 한번 세워주쇼. 네? 우리가 그래도 연예과 아니냐 이 말이야.」



   3

   JS의 근황은 이랬다.
   코끼리 팬티, 샀다. 야생 펭귄 보러가기, 그건 무기한 연기했다. 예술 아카데미에 상심하고 연예과 수업 듣기엔 낙담했다. 다시 그는 사무실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행복한 글쓰기를 위해서든 새파란 젊음을 책상에 앉아 그저 상상만으로 낭비하기 위해서건. 그렇다고 위대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막 기다려지며 기대하게 만드는 행사도 없었다. 당연히 적당한 친교를 신나는 사랑으로 간주할 만한 숙녀들의 열띤 호응도 없었다. 일상은 비호감이고 엉겹결에 과-점퍼의 허망까지 깨달았다. 애시당초 그냥 허당에게 지성의 전당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무슨 연예과 씩이나. 누가 아니래. 그렇다고 짝사랑을 퇴짜놓을 수도 타인의 정사를 염탐할 수도 없었기에, 그는 막사는 사기꾼에 권태의 숭배자가 되어서는 안되니까 그는 결국 차력쇼를 보러 갔다.
   행사장은 어설펐다. 어차피 그 친구들도 차력단 몇 기 라고 소개하고 몇 회 발표회 그럴 테며, 그들은 아마추어이자 JS가 원한 것도 오직 쨉이었다. 더구나 공연도 무료다. 관객이 자기 혼자일 리도 없고 보다가 재미없으면 적당히 빠져나오면 그만일 것이다. 그는 미처 앞으로 다가올 아름다운 환상, 살면서 거의 만날 수 없는 진짜 신비감을 예상할 수 없었다. 그 친구들이 얍 하면 일행이 모두 지구 반대편으로 순간 이동할 리도, 짠 하면 누군가의 옷이 벗겨지거나 유체이탈을 증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차력쇼의 가장 멋진 모습은 아마도 노력하는 모습, 멋진 쇼맨쉽, 웃긴 진행일 것이다. 그는 모든 기대를 내려놓은 채 자, 시작해봅시다 라는 마음으로 공연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JS는 마술사의 조수 역할은 누가 맡나를 관찰했다. 나이트클럽은 음악으로 분위기를 압도하며, 선수는 실력으로 승부한다. 여성잡지1은 화장발을 가르치고, 여성잡지2는 슬기로운 허영심을 조장할 수도 있다. 공연은 조명발, 비전문가는 장비발, 대타는 행운의 여신에게 간청한다. 추산이 그렇다. 그게 세상사의 일반적인 원리다. 그런데 여기는 뭔 미리 둘러대지도, 사전에 꾸미지도, 비장의 조커를 준비하지도 않은 듯 했다. 아무리 봐도 없었다. 그는 즉각 사태를 파악했다.
   이건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는 서커스라고.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풍만한 미녀 역할은 없다는 걸 간파했다. 그럼 뭐야? 진짜로 뭐 순간이동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그러다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그는 관객 가운데 차력 참가자로 당첨됐다. 진행자의 논리적인 설득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대체 믿지를 못하지 않냐, 왜 고객님을 의심하게 만드느냐, 그러니까 우린 다르다 라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만약 순간 이동시킨다면 선생님께서는 그 기술을 믿으시겠습니까? (딱)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신사분께서는 숙녀들께 인기 꽤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왠지 모르게 질문에 알맞는 답을 해주실 것 같지는 않네요. 여러분, 그렇죠? 제가 동네 서커스단 공연을 구경하던 유년기 소년일 때 딱 이랬답니다. 이분과 완전 똑같았어요. 아, 묻지 마세요. 제 나이요? 저 여자친구 없어요. 연봉요? 그런 걸 알아서 뭐합니까! 지금 순간이동을 하냐 마냐, 그게 중요한 판국에 말입니다. 안 그렇수? 어쨌든 저도 이분과 완전 똑같았어요. 네. 그럼요. 하긴 당사자야 절박하죠.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다. 순진하고 순박하며 순수한 말과 순결한 이야기 말고, 어서 그 보따리 안에 들어 있는 메두사인지 괴물인지를 냉큼 보여달라, 라는 애원의 눈빛! 제가 어렸을 때 그 앞에서 막 3시간 기다리다 결국 바지에 오줌 쌌어요. 네. 100퍼센트 실화죠. 그럼요. 아~! 아직도 기억나. 그 냄새. (설레설레) 그렇다고... (실눈을 뜨면서 시선을 밑으로) 아직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군요. 네, 당연하요. 허허허. 허허허허허. 하긴 눈으로 못 보면 믿기 힘들죠. 어떻게 믿어? 마음을 빼았긴 다음에, 아니면 돈을 강탈당한 다음에? 세상일이란 게 그렇죠. 그래서 다들 슬쩍 한 발만 내밀고 있어요. 언제든지 발뺌할려고. 저기 분홍색 모자에 흰색 티셔츠 입으시고 방금 웃으시는 분, 네 그대 말입니다. 들어오시기 전에 그러셨죠? 재미없기만 해 봐라, 내 당장 도망갈 테니까 라구요. 허허허. 뭐 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뭐 어쩔 수 없죠. 네. 그럼요. 속고 속이는 세상 잔꾀와 귀뜸과 소문과 험담이 전부인 듯 하죠? 세상을 알고 보면 말이에요. 뭔가 분위기 잡고 그분의 마음을 홀딱 빠져들 게 만들려면 꼭 어디서 나타났는지 웬 수다쟁이 아줌마가 판타지를 방해하죠. 매번 그래요. 옆에서 어느 동네 아저씨는 또 한술 더 떠서 거든다니까요. 자기가 다 먼저 겪어봤다나 뭐라나. 그러면 또 허접한 친구들은 막 좋다고 웃어요. 네? 막 박수치면서요. 허허허. 하여튼! 그러나, (딱)! 그건 뭐예요? 그렇죠. 그건 모두 훈수와 복권과 병풍이죠. 이 놀라운 인간 세상에서 사람의 인생에서 우리가 행복을 오백 년을 누립니까, 천 년을 누립니까? 우린 정말 언제까지 가난뱅이 아니면 구경꾼이어야 하냐고요. 여우 같은 이성, 생쥐 같은 부지런함 그 둘이 만나서 쾌락의 벅찬 기쁨과 어리둥절한 황홀함, 그걸 한번 보고 듣고 만져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짜 환상이 아닌 진짜 신비! 네? 돈 내고 잠깐 재미있을 뻔 하다 마는 오락, 뻔한 이야기 형식적인 감동 식상한 농담, 이제 지겨울 때도 됐죠.
   여러분, 어때요? NC에 들어갈 때는 웃고, NC에서 나올 때는 웁니다. 사람에 따라 짜증과 질투와 허영심이 선두에 나서기도 하죠. 그렇지만 언제 어디서나 실망스런 첫인상을 만회할 기회란 게 있는 법이죠. 그럼요. 일생에 한번은 기적과 조우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우리 차력단은 새출발을 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타율이 자신 있거든요. 그럼요. 확, 그냥, 응?
   자, 선택하시죠. 선생께서 하실 일은 고르는 것 말고는 없답니다. 신출귀몰이든 불가사의든 그건 모두 우리가 개발한 가상머신이 대령해드릴 것입니다. 설마 기존에 알고 계시던 그런 차력쇼나 흔한 카드 마술을 예상하신 체 참석하신 건 아니겠죠? 그럼요. 다음 생에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판타지의 주인공이 되실 거라고 굳게 약속드립니다. 한정판이다 뭐다, 뭘 사라 어째라, 가입을 해야 한다 입소문이 필요하다,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일랑 남들에게 양보하세요. 왜냐하면 당신께서 할 일이란 오직 가상머신을 고르는 일일뿐이기 때문이죠.
   자, 앞에 보이시는 가상현실 기기가 보이실 겁니다. 첫째, 헬맷형. 둘째, 가상현실 안면 마스크. 셋째, 특수 선그라스. 넷째, 쌍안경. 앞선 것일수록 강도가 세며 미래로 떠나는 성격입니다. 이렇게 환상머신의 주인공이 되셔서 꿈과 희망의 세계로 떠나기 직전 제가 드릴 말씀은 이렇습니다.
   축하합니다 대단히 축하합니다~!
   그러나, (딱)! 그곳에서는 다를 것입니다. 그대를 영접할 하늘의 선녀와 대천사 일동이 모두 한목소리로,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요.
   미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4

   JS가 가상현실 기기 가운데 1번을 선택한 건 행운이었을까, 분운이었을까? 그건 불쾌감도 아니고 비운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건 결과적으로 지구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진짜 체험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농담조로 과장하는 말이 아니라 그건 말 그대로 미스테리였다.
   가상머신 헬맷을 쓰고 나서 보고, 듣고, 구경하며 느낀 체험은 결코 최고의 행복도 최대의 환희도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미래의 동반자를 만난 것도 아니고, 희대의 난봉꾼으로 환생하여 이 과일 저 과일 막 다 따먹으며 알록달록 화사한 꽃들의 달콤한 벌꿀을 쪽쪽 빨아먹은 것도 아니다. 적당히 짜릿했고, 잠시나마 극성으로 재밌었으며, 들뜬 예감은 톡톡히 흥미로웠다가 다시 낙심하게 만들었다. 그처럼 그만그만한 경험이었다. 쉽게 말해 80점.
   그러나!
   맙소사!
   세상에나 세상에나!
   가상체험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으나 가상머신 헬맷을 멋은 다음이 장난 아니었다. 그건 그야말로 대반전이었다. 왜냐하면 가상머신 기기를 쓸 때는 차력 동아리 발표회 공연장이었는데, 헬맷을 벋을 때는 영화관이었기 때문이다. 극장에서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있었다. 꼭 그 세대가 아닐지라도 인생과 내내 함께 했던 명감독 더블 에스씨의 최신작 영화가 마침 끝난 마당이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건 말이 안되는 일이니까. 이건 뭐 주최측의 농간도 아니고 차력사들의 장난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상머신 기기는 당신의 두뇌와 감성적 접촉이 가능하도록 특별히 기기 내부에 오공본드를 발라놨다는 농담에 처음에는 피식하며 비웃었는데...! 가상현실 몰입도야 그냥 남들 다 아는 정도였고, 자긴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었던 게 전부인데...! 그런데 어떻게, 말도 안돼! 그는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JS는 차력 동아리의 발표장으로 따지러 갔다. 이건 따져야 마땅하니까 말이다.
   내내 평범한 인생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신인 작가의 당선 소감 같은 경험을? 그는 분명 환상적인 모험의 주연이었지만 그 은밀한 기쁨을 얘기할 사람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정할 심판도 뭣도 없었다. 때문에 그는 허세 대회에 나가 꼴등에서 두세 번째에 당선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마침내, 진짜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사랑이란 그대만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건, 이건 그 내막을 파헤치기 위해 달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제대로 낚여버린 것이다.
   JS는 살면서 그랬다. 그는 솔직한 일기를 좋아하고, 유명한 동화를 알았고, 고결한 사랑을 믿었다. 남들처럼 소소한 행복을 원하고 간지러운 인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귀찮음은 대체로 꿈처럼 행복한 시간이었다. 뭐? 그러나 그는 탕자도 탕녀도 아닌 재수 없는 범인이니까 이상한 유혹에 매료되는 일이 흔했다. 따라서 몰입하고 따라가며 듣고 함께 할 때는 몰라도, 지나고 보면 모두 허랑하고 실속없는 방황이 거의 전부였다. 모두 가짜에 농담에 예선전에 할인이자 덤이고 뻔트였다. 누가 볼까 봐, 들을까 봐, 수근거릴까 봐 못해 본 구애와 도전이 아니라 인생은 그냥 심심함이자 평범함이었다. 고유한 개성? 나는 나는, 그래 봐야 '나도 나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대체로 그렇다. 그런데 마침내 진짜로 순간이동이라니...!
   그는 이 생각 저 생각에 애인의 기뻐하는 표정을 상상하다가 처음 가상머신 기기를 썼던 발표장에 도착했다.



   5

   이 세상은 허당이란 허당들은 모두 뒤섞여 활개치는 무도장이요 꽃밭이자, 축제고 학예회며 정글이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분위기와 전망을 살피고, 누구를 만나든 타고난 천성과 숨겨진 속마음을 짐작해야 한다. 사랑은 변하기 쉽고, 어떤 믿음이든 예외가 있으며, 모순으로 가득찬 것 그게 바로 인생이다. 그처럼 인생이 어떻고 세상이 어떠하건 지금 당장 그의 관심은 그가 도대체 어떻게 순간 이동을 했는지 그 원리를 알아내는 것 밖에 없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으니까.
   도착해보니 차력 동아리 발표회는 이미 끝난 듯 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이랬다. JS와 비슷한 용건으로 모인 사람들이 심하게 많은 듯 했다. 그들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들은 행방이 묘연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임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건 정말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다. 어떤 크나큰 사건에 개입되어 합심한, 곧 사기 당한 사람들의 모임은 아니다. 그런데 어째 이상하게 그것과 너무도 흡사했다. 뭐랄까 영혼을 일부 빼았겨버렸다고나 할까.
   그 후 그분들은 체험의 기막힌 신비감 때문에 각자 다양하게 사건에 집착했다. 여러 검색어를 계정에 등록해서 알림 설정하고, 발표회 장소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 사람도 있었다. 직접 정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명한 탐정을 고용한 사람도 있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결과만 남았고 과정은 실종된 일생일대의 미스테리에 모두 똑같은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주인공의 상상도 아니고 최면도 아니다. 잠자다 꾼 꿈도 아니다. 공상도 아니고 말미에 직접 밝히거나 힌트만 남기는 액자식 픽션도 아니다. 완전 실화일 뿐이었다. 깜짝 반전으로 느낌표와 물음표를 가득 안겼지만 더 오묘한 미궁 속으로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없다. 불가능하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겪었네? 심지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친구들이 으쌰으쌰한다? 말 다했다! 이건 완전한 환상이고, 완벽한 신비이며, 전설 같은 드라마이자 황홀한 진짜 SF다.
   그는 일단 장면이 다시 관망으로 바꼈다는 걸 직감했다. 그렇다. 지금은 일종의 방학이었다. 억누를 수 없는 유쾌함과 달콤한 분위기는 다시 시든 꽃, 벌레 먹은 과일, 싫증난 연애, 낙 없는 삶 같은 재미없는 일상으로 변환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동호인들이 만든 인터넷 사이트의 회원이 되어 주위에 말은 하지 못한 체 눈치만 살피며 새로운 정보만 기다리게 되었다. 그 모임의 이름은 물론 역시나 투박했다. 누가 지었나 모르겠지만.
   가상현실 기기를 착용한 채 순간이동한 사람들의 모임.



   6

   어린이는 궁금한 게 많고, 어른은 아는 게 많다. 곧 어린이는 아는 게 적고, 어른은 궁금한 게 별로 없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웃음이 많다. 어른은 비교적 어린이에 비해서 주로 적다. 그러니까 무엇이? 가고 싶은 곳이. 하고 싶은 일이. 알고 싶고 되고 싶고 좋아하며 꿈꾸는 일들이 점점, 차츰, 슬슬 줄어든다. 할 말조차 적어지며 뜨거웠던 사랑까지 진정된다. 열망의 대상마저 한정된다. 그래서 돈이라도 많으면 좋겠지만 먹고 사는 일도 마냥 쉽지만은 않다. 그러므로 사랑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먹고 마시며 놀고 춤추며 노래하는 바로 그게 인생인 것처럼 느껴진다. 꿈 많던 젊음도 멀어져 간다. 그러나 어른들은 변신의 귀재요, 요술을 부르는 천재며, 미지의 신세계를 동경하며 숙녀를 감동시키는 낭만주의자다. 하지만 남성적인 허풍과 여성스런 공상의 재능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른들은 내가 좋아하는 제1의 취미이자 특기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어한다. 예를 들면 전문가 실력 뺨 치는 아마추어. 복권 당첨 인생 역전. 허송 세월 월척 특급. 하지만 대게는 장비가 딸리거나 실력이 형편없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운이 없던가.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며 아예 종목이 자주 바뀔 수도 있고. 따라서 우리는 제3의 새로움을 찾아서 떠나야 한다? 여행이다!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을 살아라? 인문교양서다! 머머해라 머머하지 마라 같은 글을 읽지 말고, 내 말을 믿어라? 점쟁이의 예언이다! 자, 이 패턴으로 무려 3페이지 정도라도 수다로 거뜬할 테니 그건 그만 건너뛰자. 본론으로 넘어가서 남자답게 결론만 제시하자면─여자답다가 나쁘다는 게 아님─그런데 결론이 뭐였더라? 베베 꼬지 말고 그래. 귀뜸도 아니고 속 시원히 본론만 말하자. 그 멋진 변죽 그만 좀 울리며 뜸 좀 그만 들이고 용건만 딱 요약하자면 JS는 입이 근질근질거려 그만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JS는 일단 첫 고백은 좋아하는 바텐더에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녀는 말없이 가게를 그만뒀다. 저런! 호의와 안녕과 우정은 다 가짜였나? 갖다 받힌 매상이 얼만데! 농담이고. 그렇지만 그는 금새 기분이 좋아졌다. 왜냐하면 저기 저 뉴페이스가, 그분의 친절과 고상한 응대, 부드러운 음색, 상냥한 눈인사가 앞선 단골 손님 전담 요원을 귀엽도록 살짝 능가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알렉시스 모스. AM은 남자친구가 있을까, 없을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데 그게 단지 딱 한 번이었다고?」
   「응. 녀석들은 감쪽같이 종적을 감췄으니까. 왜인지는 아직까지 아는 사람이 없어. 조사하며 수사하고 수소문도 했지만 진도가 통 나가질 않았어. 성과가 전무했다고. 무슨 아차상이나 데이트하기 싫은 남자 3위에 바로 내가 뽑힌 일 같다고나 할까. 아직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오빠. 잘...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정체도 모르고 추적도 안되는데 어떻게? 재현은 불가능해. 그건 다시 크리스마스 카드에 적힐 꼬마의 소망으로 변해버린 미결 사건이라구. 대책 없는 미지의 낭만 같은 일.」
   「아니야. 아닐 수도 있어. 그럼. 엑스맨 영화에 나오는 전동 휠체어. 그거 탄 상태에서 가상머신 헬맷을 써. 일단 그 휠체어를 안마 기기 같은 푹신한 소파처럼 만드는 거지. 그런 다음 장애인 이동 차량. 거기에 전동식으로 타고 내리는 거 봤지? 그렇게 해서 극장에 내리고 그 다음에 전부 다 평탄한 길만 이동할 테니까... 그런데 극장의 의자로 옮기는 게 관건인데. 그건 어떡하지? 그래도 모를 리 없을 텐데 이상하네. 걔네들 차력사가 아니라 밀수꾼 아니야? 지들이 무슨 이 시대의 마지막 신비주의자도 아니고 말이야. 응? 그게 뭐야!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뺐었으며, 어? 계속 사랑하던가 사랑을 끝내던가 해야지. 뭐 흐지부지? 그건 매가리 없는 인상의 미남 같은 일이야. 듣기 좋은 말만 하는 남자인데 알고 봤더니 순 바람둥이에 능글능글하고 응큼한... 그런데 어쩌다 주제가 미스테리에서 남자로 바꼈지? 정말 이상하네. 좌우지간 그런 일은 그냥 두목을 잡아서 혼쭐을 내던가, 아니면 그냥 잊어버려. 응, 오빠.
   그런데 오빠는 왜 결혼 안 해?」
   「아아, 여자 입장에서 듣기가 아닌 말하기 좋아하는 질문은 역시나 그거구나. 오빠 왜 결혼 안 해! 남자들의 솔직한 심정은 그거지. 좋은 차 몰며 돌아다니고 인생을 즐기다가 천천히, 운명적으로 첫눈에 반하는 여자가 나타나면 바로 그때 가서 결혼할 거라고. 하오나, 난 아니야. 난 아니라고. 나는 일단 숙녀의 꿈에 지대한 관심이 있거든. 여자의 선망에 동조하며 조력하고 응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적극 순응해야 하다고 생각하지. 허허허허허. 나중은 몰라도 적어도 말이야, 시작은 그래야 하지 않겠어? 내 특기로 말할 것 같으면 그거지. 말하자면, 걸핏하면 마력의 수정 구슬을 상상하며 애무하기. 오빠가 또 관상은 중급, 사랑운과 재물운을 보는 건 상급이야. 자네를 딱 보아 하니, 음 가만있자. 인생에 대한 황홀한 열정과 사랑을 향한 희열이 다양하기를 희구하는구먼 그래. 맞지? 아니라고 하지 마셔. 그리고 음, 얼굴은 말상. 꿈은 쉿, 고이 일기장에만. 왜? 오오, 저 부드러운 손에 포근히 키스해달라는 애처로운 눈빛! 송구스럽지만 그건 18세기식이야. 지금 우린 21세기를 사는 거고. 왜 서운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건 다 오빠의 철칙 때문이야. 난 말야, 처음 보는 숙녀의 손금을 볼 수는 없어. 아니 대체 왜? 왜냐하면 그녀의 미래가 한눈에 보이니까. 그냥 필름이 한번에 쫙 보여버리거든. 그래서 난 어디식 인사도 여간해서는 잘 시도하지 않는다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게. 어여쁜 숙녀에 대한 예우니까 말이야. 음... 그리고 말이야. 그대는 친구는 많은데 지금 있잖아. 단짝은 어, 현재는 공석이네. 맞지? 내 눈은 못 속여. 절대로! 애인은 음, 굳이 정보를 캐내지 않더라도 알겠네. 너 쟤랑 사귀지?」
   「와! 오빠 그거 어떻게 알았어?」
   「뭐? 이...! 진짜야? 안돼. 안돼. 쟤 순전 허당에 방탕에...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내 말은, 그런데 아까 뭘 물어봤지? 어. 결혼. 결혼은 남자들의 무덤이 아니지. 아니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아니라고. 누가 그래? 뭐 아무튼 그 인간들을 어디 가서 찾지? 헛된 정보를 캐낼 게 분명하지만 초보 탐정이라도 고용해 볼까? 아니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JS는 AM에게 나이 꽤나 먹은 아저씨로 바춰질지도 모르고, 역으로 JS에게 AM은 골키퍼가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숙녀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물론 그녀의 대답은 농담일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오늘 그는 느꼈다. 첫 비밀 고백은 꽝이라고. 그래서 그는 그날 일찍 집에 들어가서 잤다.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꾸는 꿈은 길몽이나 악몽이 아니라 주로 개꿈이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꿈에서 어떤 여자와 관계가 발전했는데 고요한 집에서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그가 그녀에게 생삼겹살을 주니까 그녀가 덥썩 귀여운 강아지처럼 받아먹었다나 뭐라나.



   7

   그는 미스테리 탐사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다시 칼럼을 썼다. 그런데 이번에 기고한 곳은 색다르게 정치 주간지였다. 그도 때로는 도시인 때로는 촌부인지라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하여 그는 그쪽 업계의 동향에 발맞추어 적당히 변죽만 울리는 식의 저급한 글로 짭짤한 수익을 올린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목: 모순
   내용: 모순이란 이런 거다. 사극에서 역모가 성공하면 그런다. 드물게 개국이랄지 영웅에 최소한 유명이고, 설혹 악명일지라도 미래의 일이다. 그러나 만약 역모가 실패하면? 죄인이다. 그래서 군률에서는 출신자의 나중 불명예는 아예 출신자 과거의 격상된 대우를 삭제하는 일도 있다. 또 정당에서는 지난 1인자의 당적을 제명하기도 한다. 으쌰으쌰할 때는 언제고, 예우란 게 있든 없든 가차없이 버리며, 다가올 정국 구상에 뭐 하나 도움도 안되니 불리한 일은 항상 딴청에 따따부따 따따부따로 일관한다. 인류 조상들이 대의를 위해 희생했는데 하물며 죄가 있으면 벌을 받는 게 옳고, 설령 빠져나갈지라도 황금을 챙겨서 저 세상으로 도망갈 수는 없다. 갈 때 가더라도 사람은 발가벗고 태어났으니 빈손으로 가야만 한다. 품위는 바라지도 않지만 초심이 흔들리면 어쩌다 자성은 자기도 모르게 포기할 수도 있다. 안에서는 그런데 바깥을 보면서는 또 당연하게 정의를 요구한다. 안에서는 칼로 밖에서는 펜으로? 그거 언제적 어디의 사고 방식일까! 차라리 펜2.0이 아닐거라면 그 반대가 낫지 않을까? 어항에서는 힘으로 연못에서는 말로라... 안에서 밖에서 다 당해 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 그건 재미없는 대하드라마다. 제발 현실이 아니기를. 만일 젊은 그대가 정치가를 꿈꾼다면 부디 품위를 갖춘 정치가로써 후세에 존경 받기를 바란다. 나아가 세계 제패를 꿈꾼 때늦은 제국주의 때문에 (예를 들어)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러시아는 공영방송에서 바깥을 향한 참상 99는 단 한번도 다루지 않고, 그건 불문율이니까, 오직 내부의 슬픔 1만 다룬다. 심각한 불균형 아닌가 말이다. 완전 거꾸로 된 세상이 따로 없네. 그런 일을 먼저 많이 겪은 유럽은 결코 그렇지 않다. 자칫 오해할 소지가 있지만 그보다는 정말 왜 그럴까 라는 원리를 알고 싶은 게 먼저이지 않은지! (어느 지역 비알파벳 문화권의 장점에 대해서만 지금 당장 10권의 두툼한 교양서를 쓰는 일은 식은 죽 먹기지만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생략하겠음. 주제에만 집중하기도 벅차니까. 아무튼) 제국주의를 먼저 겪은 선험자와 후발주자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은가 보다. 꼭 정치적으로 보지 않더라도 후발주자는 선험자와 달리 왕조 시대와 현대적인 체제 정착까지의 간격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든다. 활동 범위가 좁고 늦었으면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유달리 제한 사항이 많다. 그야 어떤 식으로든 차차 발전하기를 바라고,
   정치 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세계사로 빠져서 논점이 흐려졌다만 다시 정치로 돌아가자. 남녀 사이에야 옛 사랑의 행복을 기원한다지만 정치 세계에서는 뭐라 말하기 곤란하다. 고개를 돌릴 수 밖에. 그러나 소식은 언제나 들리고 보이며 우릴 귀찮게 한다. 마냥 모른 체 할 수도 없다. 그래서도 안된다. 정치인이 다 그런 건 아닌데, 그런데 최고의 연예인은 언제나 정치인이다. 어설픈 진짜 연예인은 명함도 내밀기 힘들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유리할 때와 불리할 때에 따라 정계의 입장과 말은 수시로 바뀔 수도 있다. 신화에서는 미다스의 손 현실에서는 마이너스의 손, 그런 것처럼. 서론이 길었다. 본론으로 넘어가서,
   군칙 및 당론과 달리 헌법은 기록이 기본이고, 신앙은 윤리가 우선이다. 최상은 도덕과 양심이지만 인간이 천사가 아닌 이상 최고는 개인의 인성과 사회의 관습 그리고 헌법이다. 군법이 민법보다 엄해야 하는 건 맞다. 그러나 심하게 구식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이상한 건 타임머신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 땐 크고 작은 역모의 결과에 따라 명예와 불명예의 기준이 오락가락한다는 점. 때로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된다. 논란이 많은 역사적 인물의 대표적 예는 그거다. 군복을 입다가 하는 일이 정치로 바뀐 경우. 그에 대해서 논란의 요점에 해당하는 일을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 인생사 즉 과거사, 둘째 정치사, 셋째 역모 즉 자리에 오르거나 내려간 계기, 넷째 제 발로 내려왔는가.
   사극은 드라마지만 사실을 기본으로 일부분 허구가 반영될 수도 있다. 현실도 사극과 비슷하다. 어쨌든 현실은 가깝든 멀든 언젠가 사극이 된다. 수필식으로 말할 때 옛날 그 당시 만일 어땠다면-이라는 가정법은 뭐 어떻다고 한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또 뭐라 말했고, 가정법은 예술적 상상력의 출발선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그거다. 논란이 많은 역사적 사건이 만약 지금 일어난다면! 바로 그 가정법 말이다. 그게 바로 타임머신이니까. 옛날 사람들이 먹고, 입고, 하는 일들. 지금 보면 박물관식이요 다큐멘터리다. 불합리한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 이제 보니 어떤 역사적 논란의 인물이 필자의 과거 군부대 직속상관이었네? 아니 어머나 세상에나, 어떻게 이런 우연이! (그런데 작위를 박탈당했음)
   하긴 세상사에 대한 의혹은 그 뿐만이 아니다. (그냥 대충이라도 언뜻 봤을 때)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지지율이 나중 혹시 5%, 10%를 넘게 된다면 설마 변하는 것 아닐까란 걱정. 아마도 지나친 기우는 아닐 것이다. 결코 쓸데없지도 불필요하지도 않을 테지. 지금은 소수를 대변하기 때문에 또는 순리를 내세우기 때문에 옳은 말을 하는,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상 말하자면 딴은 먹고 사는 일이, 내 기분과 집단의 이익이 언제나 먼저일 테니까 어쩌면 그럴 공산이 크다. 사랑의 변심, 정치인의 신념과 논리. 누구나 전자와 후자를 꼭 직접 비교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서 제일 안타까운 게 뭐냐면 일 잘하고 옳은 사람이 정치인인데, 정치공학적으로 정치력이 열세인 경우다. 또는 무소속의 소외감이랄지. 또 하나. 어떤 정치적 자리에 대해서 후보군을 슥 살폈을 때, 음 어 그게 아, 뭐라 말하기 곤란한 경우. 달리 보자면 그다지 귀감이 아닌데 술수와 변통에 따라 미꾸라지처럼 정계에서 오래 살아남는 일. 그거야 당사자 마음이요 피선거권자의 권리에 해당하지만 썩 안 그래도 되실 분 같은데 그런 분들께서 심심치 않게 건재하는 모습, 적지 않다. 그러니까 어떤 어른들께서는 최고의 오락과 드라마로 단연 정치를 꼽고, 정말 그래서 TV에서 드라마가 나오면 채널을 틀어 토론만 보시는 일이 꽤 된다.
   사람들은 살면서 한 번쯤 생각해볼 것이다. 내가 만일 옥황상제라면 이라고. 이 세상에 비이성적인 일들이 많았어도 지난 일은 지난 일인데, 내게 유리한 이념은 어쩔 수 없다는 거고 내가 싫어하는 논조는 따따부따. 일관성도 정의도 타당함도 기준도 모두 제각각이라니. 그런데 타임머신에 환상머신에 좀비머신이 유행이라니, 나 원 참! 내게 이롭지 않으면 말을 돌리는 건 어른들의 특기일까? 인간은 참으로 신기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8

   JS의 고백을 들을 2번 타자는 바로 사람이 아니라 일기장이었다. 그는 학교 다닐 때 할 일에 소홀했고, 인생을 낭비했으며, 할 말도 없었다. 괜히 남의 다리나 긁고 다녔던 것이다. 학창 시절에 그는 공부를 못했다. 물론 시작은 좋았다. 초등학교 때 전교 최상위를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초딩 얘기는 건너 뛰고. 중1때도 초반 성적은 상중, 그 뒤로 그래프 하향세. 해를 바꿔서 그 뒤로도 매번 똑같았다. 새 책과 새 친구들과 새로운 선생님에 새로운 기분일 때는 거의 항상 상중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시작만 그랬다. 옛날 방식 그런 환경을 따졌을 때 교실에서 맨 뒤에 앉는 거나 취미나 다른 일들을 감안해 봐도 그는 역시 열이었다. 시작. 기분파. 꿈. 호기심. 감수성. 뜬구름 잡는 이상의 선경과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기. 곧 시작이 다였다. 시작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학창 시절에 공부도, 추억도 사랑도, 제대로 놀지도 못했다. 맞다. 다 못했을지라도 일기도 안 썼다. 다른 친구들은 뭐 안 그렇겠냐마는 말이 그렇다는 거다.
   그러나 그는 원래 말수가 많지 않은 공상가 부류였다. 아닌가? 모르겠다. 그래도 친화력이 비교적 장기적으로 봤을 때 완만한 성장세를 보였으면 그만일 것이다. 딱히 세상에 불만족을 품지도 않았고, 내놓으라 하는 당대 최고의 바람둥이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며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차력단의 흔적을 찾고 단서를 쫓아야 하는데 시시콜콜한 수다라니, 한심하다.
   그건 그렇고 애꿎은 추억의 유행가를 회상하는 일과 일기 쓰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일단 그는 타인의 견해가 궁금했다. 대담에 탐문, 취조하며 비밀을 만방에 퍼트리고 다니는 일은 생각만 해도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그는 커트와 도나를 불러내서 물어보고 싶었다. 친구들은 내 신기한 경험을 믿을 수 있겠냐고.
   「마술도 아니고, 허풍도 SF도 아닌데 순간 이동을 했다고? 나도 알아. 괜한 호들갑은 아니란 걸 말이야. 자네가 그럴 친구가 아니지. 그럼. 진실이겠지. 믿고 싶을 꺼야. 나도 그러니까. 아마도 엄정한 사실일 거라고. 결론은 그래, 다 진짜였다고 해. 아니 그렇다고 치자, 가 아니라 진짜였어. 내 눈으로 본 것과 다름 없다고 인정해. 그런데, 물증이 없다? 증인이 사라졌다? 귀신에 홀린 것 같다고? 못 믿는 거 아니야. 그럼. 우리가 무슨, 언제 여자의 운명을 트집 잡았나 몽상가의 시적 감흥을 비꼬았나? 조용히 찾아오는 행운은 반기고, 떠나가는 섬세한 사랑은 거짓일까 아까울까 돌아올까, 우리도 그 정도는 점쳤고 그 만큼의 깜냥은 된다고.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린 원래 사심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잖니?
   그런데 순간...이동? 유체이탈도 아니고, 순간이동? 에이~. 너무 많이 갔다. 응? 너무 많이 갔어. 이제 그만 돌아와 친구. 응? 넌 말이야, 차력 그런 거랑 어울리지 않아. 이미 그런 거 십대 시절에 다 떼지 않았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순간이동? 할 테면 하라지!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 가서 바닷물이 사라진 바다, 그 드라마나 보자구. 사람은 보통 둘로 나뉘지. 자기 집에 친구를 초대하는 친구와 자신있게 자기 집으로 친구를 부르지 않는, 못하는 유형. 호의를 베풀고 호혜를 요구하고. 어떤 부류일지라도 어른이 되면 삶을 재미있게 살게 되겠지. 목표를 향해 내내 달려야 할지 또는 평생 놀고 먹는 법을 연구하며 제2의 인생을 위한 복안을 강구하던 어쩌던. 다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되고, 자기 좋아하는 삶을 사는 것 같아. 그런데, 왠지 아니? 안 그러면 인생이 시시해지니까. 안 그래도 사는 게 심심하고 일상은 무료한 법이거든. 환상, 판타지, 불가사의, 스릴러 그런 건 현실의 내 삶에선 거의 기대할 수 없는 거거든. 어때? 지금 우리 집으로 순간 이동하는 건!
   차력사 친구들이 보여준 마술은 차차 생각해보기로 하자.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누가 알겠어? 뿐만 아니라 어쩌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런 생각 들지 않니?
   저 봐 봐! 도나의 우아한 동작, 다정한 어조, 매력적인 눈빛, 꿈결처럼 포근한 순간이동과 신기한 유체이탈을 선망하는 그녀. 아니 잠깐. 뭐, 뭐라고?」
   바닷물이 사라진 바다는 재미없었다. 물론 이번 편만 재미없기를 바랬다. 커트와 마라와의 상담도 소득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는 지금 이때 넘치는 기쁨을 꿈꾸고 막연한 새로움을 탐닉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동호회 홈페이지를 찾게 됐다.



   9

   가상현실 기기를 착용한 채 순간이동한 사람들의 모임.
   그는 동호회 홈페이지에서 최신 정보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 모두를 1차적으로 해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이다. 그 익명의 투고자가 쓴 글을 읽어보니 사건은 모두 1차적 노력의 결실이었다. 곧 예전에 미니 2층 버스가 한참 유행일 때, 45도 각도에서 직선형 또는 나선형 계단을 내려오던 게 인기를 끌던 일처럼 또 다른 유행을 불러올 전조로 보였다. 요컨대 유명인들이 애용하는 대형 밴 차량에 특수 설치를 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진공 기능에 버금가는 서스펜션, 무중력 우주 기술이 가미된 쇽업앤쇼버. 그 모두가 하나의 거짓없이 1차적 기술로 일궈낸 환상이란 제보였다. 일체의 그래픽 기술도, 속임수도, 요술도 없이 만들어낸 땀방울의 결과. 그 모두를 알고 난 당사자들의 기분을 뭐라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 글은 조회수가 미미했고, 고로 댓글도 거의 달리지 않았다. 게다가 의견을 제시한 글쓴이조차 혹시 믿거나 말거나에 해당하는 개인의 의견일 수도 있다는 참고 사항을 정확히 고지했다. 합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제시한 추정이 아니라 아마 그렇지 않을까 라고 예상한 추측이었다. 뭐, 어쨌다고?
   이건 뭐 좋은 징조도 아니고 나쁜 징조도 아니다. 기분 좋게 만드는 흥미로운 화제도 아니고, 사랑이 시작될 것만 같은 느낌의 일도 아니다. 괜히 기분만 싱숭생숭해졌을 뿐. 따라서 그는 그냥 그건 무시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는 최면에 쉽게 걸려들기에 적합한 감성의 소유자일지도 모른다. 맞다. 그렇다. 정말 그런 것 같다. JS는 불길한 예감을 특히 주의하기 좋아하는 냉정한 이성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관심을 끄는 비밀, 환상, 신비, 선망, 소원, 질투 같은 개념에는 약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센 척 가장하기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매끈한 가죽점퍼와 섹시한 하이힐, 멋진 컨버터블과 때로는 함께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건 인생에 대한 오똑한 태도이자 자연스런 본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난 일은 일단 미뤄두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그는 생각했다.
   딕 발렌타인!
   녀석을 찾아야 한다고.
   차력 동아리가 아니라 녀석을.
   그는 지금까지 목표를 잘못 정한 채 달려왔던 것이다.
   맞다. 범인은 녀석이다.
   그런데 어떻게 찾지?
   그러다 그렇게 시간만 갔고, 그는 끝내 딕을 찾지 못했다.
   그러든 어쩌든, 망상과 허언만으로 일생을 허송할 수는 없는 일. 긴 기다림이 다소 막막할지라도 밝은 행동과 선명한 실천을 위해 허영과 쾌락을 한사코 거절함이 옳다. 그러나 공식적인 인생관은 그럴지언정 아련한 안타까움도 내내 우리와 함께 한다. 왜냐하면 미련한 사랑, 애정의 슬픔, 삶의 뻔트를 통해서도 조촐한 성과는 물론 우린 항상 즐거움과 흥미와 교훈을 배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언가에 대해 뭔가 아쉬우면 정들든 싸우든 혹은 연패를 하던 피하지 말고 일단 당당히 부딪혀 봐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좀 더 딕을 찾아보기로 했다. 너무 일찍 또 쉽게 포기하지 말고 말이다.



   10

   그는 이번에 마라의 청탁으로 오랫만에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에 칼럼을 기고했다. 그는 아마 칼럼니스트란 직책과 장편소설이란 꿈은 마치 '사랑과 야망'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제목: 인생론
   내용: 날렵하고 민첩한 청춘들에게 물어보자. 젊음의 기분은 언제나 즐겁고 씩씩하며 상쾌한 것이냐고. 일단 과도한 긍정은 잠시 제쳐둔 다음 그분들의 솔직한 심정을 번역하면 아마 이럴 것이다.
   뭘 해도 재미없다고! 항상 심심하다고! 멀리까지 보기 힘들다고. 미래는 잘 모르겠다고.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게 뭐냐면 그거다. 스스로 다 숱하게 겪어서 잘 아시는 어른들은 매번 그분들께 다른 걸 기대한다는 점. 자기도 재미없고 심심했으면서 눈 똥그랗게 뜨면서 새파란 젊은이가 왜 꿈이 없냐고 이러쿵저러쿵. 본인도 그랬으면서 참으로 모순되게 말이다. 간혹 그런 일들이 있다. 꼭 그런 건 아닌데 말로 하느냐, 말하지 않느냐 라는 차이란 게 조금 있다.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에, 난 패자였지만 당신께서는 아니길 바라네 뭐 그런 마음 때문일 것이다. 의도는 좋은데 인생의 경험이 월등하니까 태도가 멋지지 않은 일, 살면서 드물게 겪에 된다. 왜냐하면 우린 모두 이 세상이 아름답고 우리네 인생이 멋지기를 바라기 때문 아닐까? 아니다. 완전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왜냐하면 신나는 파티와 분위기 좋은 무도회에 초대 받으면 당장 내 기분부터 언제 우울했냐는 듯이 좋아지니까. 바로 그 순간 만큼은 즐거운 인생, 재밌는 세상, 행복한 사랑일 테니까. 그처럼 인간의 삶은, 타인에게 거는 바램은 절반쯤 실망이고, 어차피 처음부터 큰 기대 없으며, 나의 예감이 커피포트로 변하는 건 불행이다. 그러므로 행복의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그건 불운을 피하고, 행운의 가능성을 높이며, 내가 진공청소기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쉬울까 어려울까? 좌우지간 쉬우면 재미없고, 어려우면 헷갈리며,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뚜껑 열리기 쉽상이다. 따라서 (행복한 인생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해 보이니까) 삶의 기쁨을 위한 단순한 해법은 아마도 우선 전망과 견적일 것이다. 그래서 이성과 합리에 앞서 먼저 분위기를 읽고, 직관을 초빙하며, 상대의 기분과 속셈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양 위에 개가 올라가도 되는지, 하이에나가 여우의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가야 할 상황인지, 번잡하며 시끌벅쩍해서 싫으니까 또는 이번엔 당신이 선발대를 해보지 않겠냐는 듯 늑대는 표범을 앞장세워도 괜찮은지 같은 것. 고로 우리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걸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건 무엇이며, 적어도 소망과 대망의 차이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응? 그러나! 이미 아동부터 동요보다 유행가를 편애하며, 유년 때부터 어른들의 세상을 궁금해 하며 아빠 엄마의 참모습을 흉내내는데, 글쎄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남녀의 인기와 애정운조차 부익부 빈익빈이다. 어떤 걸 하고 싶냐고요? 적어도 바텐더한테 칭찬 받거나 나이트클럽 앞에서 입장 제지 당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나올 때 기분 뻔한데 애초에 입장 불가? 말 말자! 이미 스스로 다 아는데 어디 평균 연령 깎아먹는다고 소문낼 일 있나. 그러면 갖고 싶은 건? 극명하게 간추리자면 미스터 에르메스와 미스 페라리 까레라다. 물론 솔직함보다 거짓말을 택하는 사람도 없진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심지어 내 친구 중에 뭘 좀 아는 친구를 만난지는 오래 오래 됐고, 여러분 친구 중에 뭘 좀 모르는 친구는 그런다. 우월감은 말하고 싶어하며 열등감은 말하기도 듣기도 싫어한다. 완전 신경질에 아주 그냥 짜증나는 거지. 그러니까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대게 비슷비슷하다란 말씀. 딸랑딸랑─반짝반짝─새콤달콤─뿌잉뿌잉! 그래서 쉽지가 않네 쉽지가 않아.
   결론은 얘기가 길어지니까 필자가 쓴 책을 참고할 것. 그 중에 추천은 딱 2권만. 첫째, 인문교양서. 제목은 새로운 뻔트마! 부제는 할 수 있으면 규칙을 새로 쓰고, 못하겠으면 철저하게 표준과 모범에 근접해라. (그러니까 좋게 후반전에 눈치 작전 하라야 뭐야!) 둘째, 장편소설 새로운 대망.



   11

   그 뒤로 한두 달 지났나.
   어느 날 그는 거리에서 누군가 유심히 자신을 응시하는 걸 느꼈다. 어떤 낯선 남자는 주의 깊게 그를 관찰하며 줄곧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가 가는 곳으로 계속 따라왔다. 빨리 걸으면 빨리, 천천히 걸으면 천천히. 쟤 뭐지? 라면서 그는 생각했다. 나한테 돈 받으러 올 사람은 없을 텐데. 그는 불안해서 결국 도망갔다. 쫓고 쫓기는 추격이 짧게 이어졌고 긴장감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배가되었다.
   「형! 나야. 딕이라고. 딕 발렌타인. 형 뭐 잘못한 거 있어? 왜 영화를 찍고 그래!」
   그는 DB였다. 아니 어떻게! 찾아헤맬 땐 없더니만 제발로 나타나다니. 쟤도 호박인가?
   알고 보니 그는 차력 동아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딕의 집에 놀러가기로 했다.
   멀지 않은 그의 집에 도착했다.
   딕은 다짜고짜 자기가 발명한 특급 의자를 자랑했다. 자기가 취미로 어떤 기계를 만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괴물이란다. 딕이 사용해보지 않겠냐며 넌지시 부추기는데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의 권유를 받아들일까 말까, 못이긴 척 응할까 뿌리칠까. 고민은 쉽게 결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형. 이게 뭔 줄 알아? 그냥 의자가 아니야. 형은 그냥 몸을 맡기기만 하면 돼.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 첫째, 최고급 안락 의자. 둘째, 환상적인 흔들의자. 둘 중에 어떤 거? 물론 의자에 앉은 다음 착용하게 되는 가상머신 헬맷은 같은 걸 사용하게 돼. 그러니까 형 취향을 고려해서 고르면 돼. 그렇게 멀거니 제품을 응시하지만 말고 일단 앉아 봐. 응? 완전 끝내준다니까. 정말 장난 아니라고. 이건 말이야, 내가 장담하는데. 뭐랄까, 그래. (딱)! 우머나이저에 필적하는 좀비머신이라고나 할까! 그 놀라운 기적을 경험해 보고 나면 그때 비로소 알게 될 꺼야. 왜 내가 그처럼 이 신종 의자를 극찬했는지를.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런 경험은 일평생 한번도 못한 걸. 귀신 봤다는 사람들 있잖아. 진짜 확실한 유령의 실체를 본 사람은 거의 없어. 다 심신이 미약한 상태랄지 어떤 상상력과 불안감, 공상이 적합한 사람이랄지 귀신이 나타나기 좋은 환경. 그 모두가 함께 최적의 조건일 때 일시적으로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듣는 게 전부야. 그처럼 귀신 이야기가 과거에 존재했던 미신이랄지 어떤 해프닝이었다면 현대는 거의 모든 인간의 경험들은 장르로 구분 되고 있지. 그러나 내일은 아마도 다를 걸! 왜냐하면 형 앞에 있는 이 좀비머신 때문이지. 연예-오락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응? 그처럼 장난으로 끝나지 않아. 한마디로 이건 순간이동 기술의 구현이라고. 스타트랙 봤지? 그런 거야. 그런데 원래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게 맞지. 물리학 법칙에 위배되니까. 그러나 학계에는 아직 비공인 상태로 머물러 있지만 다중 우주론이라는 게 있거든. 그 이론을 적용시켰기 때문에 가상현실을 겪고 난 다음에 헬맷을 벋으면 아마도 다른 도시, 어쩌면 무인도에 도착할지도 몰라. 형! 무인도에 데려가고 싶은 3가지 정해뒀어? 하긴 재산 목록 1호-2호-3호가 어른들한테는 더 중요하지. 하지만 오늘 이후로는 진지하게 그 세 가지를 정하게 될 걸. 형은 나와 같은 괴짜를 만난 걸 행운으로 알아야 해. 일단 방식은 소풍으로 설정해놨어. 보너스로 시간 여행이나 카드로 만든 집에 당도할 수도 있을 꺼야. 어차피 미로를 탈출하면 되니까 지레 겁 먹거나 미리 당황하지 말고. 아 맞다. 형 지금 무슨 약 같은 거 복용하고 있는 거 없지?」
   딕의 말을 듣자 하니 그건 심신 분리 기계라고 했다. 99퍼센트 개발을 마쳤는데 중간에 뭔가 어떻게 참여자의 적극적인 의지에 따라 낯선 장소에서 깨어나는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누군가. 다른 누구도 아닌 가상머신 헬맷 때문에 순간 이동을 경험한 JS는 선뜻 DB가 개발한 의자에 앉아 정체 모를 헬맷을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전의 비밀에 대한 탐구심, 정체를 캐내고 싶은 욕구, 가상 현실에 대한 환상은 이제 일종의 트라우마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12

   고전주의에 대한 편애 만큼이나 세련된 향락. 그건 다름 아니라 아마도 소비일 것이다. 그런데 뭘 사지? 특별히 갖고 싶은 건 없고 탐나는 물건은 비싸고. 그러다 그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JS는 최근 돋보기를 구입했다. 왕성한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동처럼 탐구생활에 탐닉하기 위한 목적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탐정이 아니라 작가니까. 돋보기는 단순히 화분에 살고 있는 곤충을 관찰하기 위해서 샀던 것이다. 그래서 만족했는가 하면, 실망하지는 않았다. 어른들이 이렇다. 매번 그렇다. 항상 그런 식이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가 아니라 괜찮다 나쁘지 않다 지켜보는 중이다 아직의 상심의 전 단계다 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관망이 아니라 실행을 했다. 대극장에서 오페라나 뮤지컬을 한 번도 못봤지만 이번에 큰맘 먹고 극장에서 노르마와 라 트라비아타를 필름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 단지 필름으로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결과는 넘어가자. 알고 나면 냉소를 부를 테니까. 몇몇 외국어라면 아마 단 한마디도 못하거나 못 알아먹지는 않겠지만 그는 딱히 근처에 경륜장이 없다는 걸 원망할 수도 없었고, 대귀족을 지망할 수도 애정 결핍을 어딘가에 토로할 수도 없었다. 최신 유행가를 즐기며 한껏 사치와 호사를 누리며 방탕에 빠질 수도 없었으니 심심함이란 카드의 뒷면을 궁금해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낭만을 좋아하고 흥미로운 모험을 원했지만 아무 숙녀에게나 미쳐서 사랑을 애걸할 수는 없었다. 그러든 어쩌든 그가 구입한 돋보기는 그런 돋보기는 아니었다. 은밀한 소망을 남몰래 실현시킬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마법의 돋보기. 그래서 그 다음에? 안 그래도 얘기를 꺼낼려던 참이었다.
   JS의 의도는 결국 그거였다. 돋보기에 대한 실망과 가상체험 트라우마에 대한 절망을 서로 퉁치기. 그러나 결과는 여지없이 실패. 그러니까 순간 이동에 대한 환상은 그 어떤 사랑의 아픔처럼 그에게 계속 패전의 기억으로 남게 된 것이다.
   한 달쯤 지났나. 그는 미스테리아 사무실에 놀러갔다. 그런데 마라가 웬 헬맷을 쓰고 있네?
   「그거 뭐니, 마라! 어디 대회라도 나가니?」
   「응, 이거? 파마 기기나 그냥 단순한 헬맷처럼 보이지? 그런데 아니라네. 이건 바로 심신 분리 머신이니까.」
   「뭐라고?」
   「왜 그렇게 놀래! 너도 한번 해 볼래?」
   「내가 그걸 왜 해?」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사랑의 환희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혼을 쏙 빼놓는 설변에 휘둘리다가 자기도 모르게 설득되어 웬 차력쇼에서 가상체험 헬맷을 썼던 게 모든 일의 화근이었다. 그가 원한 건 이랬다. 젊은 열정, 새로운 탐욕, 신선한 도전, 유쾌한 모험, 인생에 각인될 만한 흥미, 부담없이 재밌는 주말 여행, 아름다운 사랑, 도무지 해도 해도 질리지 않는 꿈꾸기. 그러나 그와 같은 밝은 소망은 벤치로 끌려내려갔고 대신 무섭게 등장한 대타는 이랬다. 억압된 욕망 힘없는 열정,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그런 뻥뻥 터지던 유머 감각의 실종, 가식적인 웃음, 세속적인 사랑의 실패, 한탄과 환멸, 색다른 친밀감 대신에 저 멀리 줄을 길게 선 머머증들. 그리고 신종 트라우마까지! 그렇다고 지구는 평평하다는 학설을 믿을 수도 없고 참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긴 달 착륙 조작설도 일리가 있긴 있다. 왜냐하면 달과 지구의 거리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주 공간이고, 게다가 갔다 왔을 뿐이지 특별한 성과는 기대에 못미쳤으니까. 아무튼 그런 뚱딴지 같은 화제는 초딩들한테 맡기고, 그래서, 이제 어떡하지? 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선망도 질투도 상상도 다 물러나고 이제 남은 건 관망뿐이지.
   그는 지금도 헬맷 쓴 사람을 보면 잠깐 멈칫 한다. 안 그럴 수 있겠나. 아이스하키 경기장? 갈 수 없다. 무슨 대회? 상상도 할 수 없다. 어른이 바지에 오줌 싸면 꽤나 보기 좋겠다. 따뜻한 어느 남쪽 나라로 여행이나 갔다 올까 라며 생각했다가 그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왜냐하면 갔다 온 경험자의 얘기가 그랬기 때문이다. 어디에 딱 내려서 거리에 나가니 와~! 세상에나 세상에나 저쪽에서 저쪽에서, 아 글쎄 헬맷이 헬맷이...!
   따라서 그는 헬맷 트라우마의 타개책으로 특정 상품 중독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자동차 경주 선수들이 입는 위-아래 일체형 유니폼! 여자들이 원피스를 입는다면 남자는 그런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 살면서 한번쯤 가죽점퍼를 입고 싶은 때가 있는 것처럼, 남자가 어쩌다가 반-재산을 털어서 뚜껑 없는 차를 사는 것처럼 말이다. 또 각종 유니폼에 대한 이상한 욕구 때문에 변태머머증에 걸리면 안되니까 내 애인에게 이런 저런 그런 옷들을 선물하는 남자가 간혹 보면 드물게 있다. 그 얘기는 남자들끼리, 속닥속닥!
   그처럼 그는... 자기가 말이니까 주력이 좀 딸리더라도 나름 열심히 달릴 수 있는 애마니까 내 안의 기수인 그분께 일체형 유니폼을 선물하는 게, 뭐?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도, 교양으로 따져서 납득이 안될지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이지만 그와 같은 모종의 습관이 생겨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뭐 수요일은 코끼리 팬티! 그런 썩 나쁘지 않은 징크스에 불과할 테니까. 어줍잖은 전개도 절정도 없이 결말이 너무 갑작스럽지만, 그는 그 어떤 뚜렷한 성과에 대해서 그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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