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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8. 7. 31. 17:09

    1

    사랑에 대한 열망은 다정하다. 그러나 대망의 실현은 단지 고요하기만 할 뿐. 우리는 천사가 아니고 이 세상이 천국이 아니듯, 그래서 공상가의 일상은 단조롭기만 하다. 약간 아웃사이더 기질도 없잖아 있는 그지만, 때문에 평범한 그는 과거가 이랬을 것만 같다. 즉, 꿈나무로써 과감했는데 로맨티스트로써는 소심했다는 것. 하지만 스스로 천재도 풍운아도 아니라는 걸 절대 부인하지 않는다. 하늘색 스포츠카도 없고, 화사한 꽃다발을 곱디고운 그런 정숙한 숙녀에게 선물해본 기억도 없다. 그러니까 꿈은 과감하고 사랑은 소심했다는 정평이랄까, 아니 어떤 추측성 분석은 어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헛된 기대는 듬직한 우군이요, 뭉클한 공상은 요정의 적자인 법. 한바탕 춘몽 같은 인생, 따라서 우리는 구름처럼 붕 떠 있다가 나비처럼 다가가서 요술처럼 네 마음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바로 그처럼 우리의 주인공, 아니 아니, 누구도 관심 없는 AB. 올드보이도 영보이도 아닌 어중간한 보이(Ambiguous Boy). AB는 신기한 전개에 캐스팅 되고, 어떤 숙녀의 놀라운 첫인상을 마음에 들어했을까? 과연 그는 행복의 예감으로 말미암아 밑도 끝도 없이 모험의 힌트를 얻었을까?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고품격 사교계에 직접 노크는 못했을지언정 숙명의 그림자에 젖어듬을 암시하는 세한 기분이 대두되고야 말았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 사무실에 설치했던 파란색 레이저 시스템으로부터 비상 문자 알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 뭐야 이거. 갑분싸! 갑자기 분위기는 싸해졌다.
    릴리가 큐레이터로 있는 미술관을 구경하던 중 뜻밖의 문자라니. 그래서 AB는 곧장 자신의 사무실로 달려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2

    AB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무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뭐야 이거! 그는 레이저 설비를 수동으로 작동시켜봤다. 그 결과 한 가지 변화를 알게 됐다. 그건 바로 레이저 색상이 파란색에서 연두색으로 바꼈다는 것. 아니 왜?
    그래서 그는 뭔가 느낌이 이상했기 때문에 그 레이저 시스템 대리점에 찾아갔다.
    그곳은 멀지 않았다. 중간에 별다른 일도 없었다. 그는 대리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옛 친구 레너드를 만났다.
   「어? 여기서 다 보네!」
   「야. 레너드. 너 여기서 뭐해?」
   「나는 레이저 시스템에 약간 문제가 생겨서 문의하러 왔어. 그런데 너도 혹시...」
   「나도 그거 쓰냐고? 왜 나는 그거 쓰면 안 되니? 꼭 학교 다닐 때 집에 뭐 있다니까, 깜짝 놀라는 짝궁의 반응 같은데. 너가? (화들짝) 왜 그런 거 있잖아. 그렇다고 우리 집 책상 밑면에 뭔가 귀중한 게 있다고 나는 말 못해. 아 맞다. 나는 파란색이 연두색으로 바껴서 왔어. 너는?」
   「그래? 나는 분홍색 레이저가 하늘색으로 바껴서 왔어.」
   「뭐야! 진짜?」
   「왜? 뭐라도 알고 있는 거 있어?」
   「아니. 그냥 놀라는 척 해 본 거야. 미안. 재미없지?」
   「농담이 모두 재밌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허허.」
   「그런데 분홍색 레이저가 하늘색을 건너뛴 채 곧바로 연두색으로 바뀐 경우도 있을까?」
   「그야 모르지. 왜냐하면 파란색 레이저가 연두색을 건너뛴 채 분홍색으로 바뀐 사례가 있을지, 우리가 그건 아직 모를 테니까. 그런데 넌 그에 대해 뭐 알고 있는 거 있어?」
   「글쎄.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뭐?」
   「허허허. 아 농담이야 농담. 이 친구 왜 그렇게 정색하고 그래? 괜히 무안해지잖아. 우리 옛날에 안 그랬잖아. 어?」
    거 어째 대화가 영 매가리 없고 재미없다고? 당연하지! 왜냐하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가지 않았을 테니까. 이런 말씀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럼 청년, 중년, 장년, 노년... 아무리 기다려도 입담이 어눌한 경우는 뭐냐 라는 반론도 아예 없진 않겠군. 듣고 보니 그분들 입장도 이해는 가나 위에서 밑으로 내려갈 수야 없지 않나. 아무튼 밑이고 위고 모르겠고, 통과.
    그들은 대리점에 들어가서 일을 보고 나왔다. 특별한 건 아니고 레이저 시스템의 인공지능 옵션 문제 때문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건 그렇고, 그들은 이대로 헤어지기는 너무 허전했다. 딱히 바쁜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섭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함께 차를 마시기로 했다.



    3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너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느냐고?」
   「응. 제발 알려줘.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지를!」
   「내가 그걸 왜 너한테 설명해야 하는데?」
   「그래? 하기 싫으면 하지 마. 그러든가 말든가!」
   「딱 하나만 말할께. 그건 바로, 난 손해볼 거 없다는 거. 넌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난 아니야. 난 아니라고. 혹시 있잖아. 너의 그 말도 유행어 뭐 그런 거니? 너 혹시 사이코패스니? 생각해서 얘기해주니까 그렇게 대꾸하면, 너 같으면 기분 좋겠냐? 라~고 반문은 차마 못하겠다야. 그러니까,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느냐고? 꼭 보면 그런 친구들이 이런 말을 주로 하는 것 같아. 그분들 공통점은 그거야. 주관이 뚜렷해. 자존심이 하늘에 가 있어. 자기 생각만 해. 남을 이해할려고 하지 않아. 내 말만 맞다 그거지. 우연인지 몰라도 못생긴 친구들도 많아. 외모지상주의, 뭐 그런 게 아니라 단지 사실일 뿐이야. 자기 확신 편향인가 전문용어가 뭐드라, 아무튼 결과론을 좋아하는 허세가 주특기라고. 또 말이 많아. 능력 있고 삐딱하면 그나마 나은데, 부지런한데 부지런하기만 하다? 성과와는 거리가 멀고 유난히 꼬인 게 많은 듯 하다? 고집불통으로 복고풍만 고집하고 남극 가서 에어콘을 팔 궁리만? 아아 (설레설레). 그래서 일기예보가 있다면 허당주의보도 있는 거야. MBA 출신들이라면 좋아할란가 몰라도 오락업이나 사교계에서 그러지는 마라. 충고라고 생각한다면 그야 내가 어떻게 말리겠나. 너 빼고 다 아는데, 그게 다 너 생각해줘서 얘기해줄려는 건데, 그런데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느냐니! 성격 좋네. 호인이야. 인기 좋겠어. (엄지척)! 대단해. 훌륭하셔. 어떻게 박수라도 쳐주리? 딸랑딸랑, 응애응애, 뿌잉부잉, 반짝반짝! 하지만 그 캐릭터도 옛날부터 흔했어. 인기 없다고. 응? 그런데 이게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어? 너까지? 유난 떨지 마셔! 심지어 내 친구? 재수 없어!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냐고? 왜냐하면 너 빼고는, 그걸, 다 알고 있으니까! 넌 거울도 안 보니? 늬 머리에 뿔났잖아! 아 여태 그 흔한 셰익스피어도 안 읽어봤냐고 이 친구야. 창이 짧은 건 괜찮다만, 검투사가 창을 놓고 패자부활전에 나가면 어떡하니? 그러니까 꼭 너 같은 애가 그래. 자기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증권 시세표 하나만 딱 가지고 가겠다고. 타임머신을 아무나 타겠다는 건가? 심지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옆에서 별로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데 그런다니까. 글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건 얼마든지 좋다만 말을 하고, 듣고, 대화하며 아이디어를 구하는 것도 유익해. 다망하며 다재다능함과 동시에 다행일 테지. 하지만 일단 사람들은 듣지를 않아.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통 생각을 안 해. 생각을 해도 자기 생각만 해. 남녀의 사랑이 식어서 헤어질 때까지 그래. 넌 너 밖에 몰라 라고. 이게 뭐니? 이게 대체 뭐냔 말이야?」
   「나도 말 좀 하자! 거 말 한 번 더럽게 많네...」
    AB는 옆 테이블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레너드에게 가자고 말했다. 꽁트라면 몰라도 드라마에서도 저처럼 늘어지는 대사는 별로 호응을 얻기 힘든데, 그런데 영 기분마저 아니다니. 그래서 AB는 엉덩이를 의자에서 뗐다. 그런데,
   「쟤들 연극 대사 연습하고 있는 거야. 여기 단골이거든. 나랑도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고. 괜찮아. 곧 끝나.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재밌지 않니?」
   「어. 정말... 그러네. 어디서 공연하니?」
   「가서 볼 수 있으면 좀 좋겠니? 아무나 못 본데. 초대 받아야지만 볼 수 있다더라고.」
   「어떻게 해야 초대 받는데?」
   「어떻게 해야 초대 받느냐고?」
   「어. 어떻게 해야 초대 받는데?」
   「내가 이제 무슨 말 할 차례인 줄 느낌 안 오니? 감 안 와? 어?」
   「어련히! 흐흠. 아랍에미리트에 있는 루브르 별관 루브르 아부다비에 가면 그 그림이 있어. 르네 마그리트의 종속당한 독자라고. 내 관상 보이니? 그 그림이 지금 내 표정이랑 똑같아. 어때?」
   「어떠긴 뭘 어때! 그래도 넌 저 연극 제목을 피할 수 없어. 어떻게 해야 초대 받는데?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흐흐흐. 농담이고. 내가 구해줄께. 걱정마. 우리 사이가 보통 사이니? 아니 차라리 이러는 게 좋겠다. 그냥 우리 저거 지금 보러가자.」
   「초대권이나 입장권을 바로 구할 수 있단 말이야?」
   「그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가가 바로 연극 보기. 그리고 2위는 극장에서 영화보기. 알잖아?」
   「너 저번에는 집에서 낮잠 자다 TV보고 과자 먹는 휴식이 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했잖아. 나머지는 순위에도 못 들었는데.」
   「내가 그랬냐? 원래 있잖아, 제일 좋아하는 머머는 자주 바뀌는 법이야.」
    요술관은 멀고, 신학론은 어렵지만, 소극장은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레너드는 발이 넓었다. 어떻게 온라인 초대장을 뚝딱 구했다. 그들은 그렇게 극장 앞에 도착했고, 연극을 보러 들어갔다.
    아, 연극 제목은 이랬다.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4

    그들은 연극을 보고 나왔다. 연극 내용은 겁나게 심심했다. 역시나 시시했다. 무슨 내용인지 요약하기도 힘들었고, 이해하는 건 더 힘들었다. 그러나 예술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들은 헤어졌다.
    레너드와 헤어진 후 AB는 집으로 갔다. 그는 오면서 대뜸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착상의 떠오름을 감지했다. 그건 정말 예술가의 심금을 울리는 영감을 방불케 했다. 주제는 당연히 연극 제목이었다. 종류는 픽션이면 좋은데 이 경우에는 칼럼이 딱이었다. 대충 어떻게 어떻게 하면 뚝딱 칼럼 하나 나올 수 있을 듯 했다. 보아하니 환상성의 정도는 하, 개탄스러운 신비감은 중급이요, 짜릿한 당혹감은 아마도 상급?
    일단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신들린 것처럼 심심한 뻔트론을 작성했다. 흡사 미친듯이 희안한 농담을 마구 만들어낼 수는 없었지만, 이번에 대충 호쾌한 헛스윙 정도는 가능할 것만 같았다. 그건 꼭 논리학에서 언어학으로 전과한 다음, 다시 연기학과로 옮겼다가 학업을 그만두는 것처럼 난데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5
 
    AB는 연극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를 보고서 영감을 얻어 다음과 같은 칼럼을 완성했다. 때문에 정말 간당간당했던 품위 유지비는 호황은 아니지만 겨우 예선 탈락은 면하게 됐다. 참 다행이다. 어쨌든 칼럼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제목: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내용: 본 칼럼은 지그문트 프로이드식 정신분석도 아니고 서술자는 어디식 학파도 아니므로, 고로 최대한 쉽고 최고로 슬기로우며 최상의 이해도를 추구함을 먼저 밝히겠다. 과연 두 마리 토끼를 잡나 못 잡나는 나중 채점하자. 결과를 놓고 영 아니다 싶으면 뭐 칼럼니스트 한동안 쉬는 거지. 인생 뭐 있나? 농담이고, 출발한다. 여러분 준비되셨나요? 자, 그 미지의 마법사를 만나러 이제 떠나가볼까!
    정신분석! 그분들 생각은 이렇다. 거친 인생관을 일부러 배배 꼬았을 리도 없고, 심사가 의도적으로 화염방사기─레이저─커피포트─세차 분무기와 닮았을 리도 없다. 다만 사람들은 꿈이 많고 세태는 어지러우며 세상은 바쁘게 돌아갈 뿐. 그러므로 친구의 자랑에 장단 맞추기도 귀찮고 물개 박수도 피곤하다는 거다. 여심은 항상 농심을 유혹하고, 광고는 넘쳐나며, 오락산업은 언제나 저기 저 45도 각도에서 날 내려다보기만 하는 식이지. 기분 나쁘게? 그럴 리가! 결국 일하기는 재미없고 놀기마저 심심한데 미스테리아까지 날 피로하게 만든다는 거다. 안 그럴 수가 없다. 고상한 태도로서 말하고, 세련된 눈빛으로 듣고, 근사한 품격과 함께 고고한 대화를 나누는 영화의 한 장면! 그런 친교가 아니라 주변을 돌아보면 겉도는 사교가 태반이다. 평범한 일상을 돌아보자면 아마도 삶의 드라마는 역전 홈런도 거포도 득점왕도 아니고, 어쩌면 그저 뻔트이자 독심술에 지나지 않을까? 그러니까 남자는 목적이 일치하면 '자 떠자나' 라거나 위스키 3병이요, 여자들끼리 친분이 돈독하면 수다가 3시간이다. 나 좋아하는 것만 쫓기에도 버겁지 않다면, 그건 솔직한 인생론이 아니다. 가식이고 허세며 단지 누구 앞이니까 폼 잡는 거다. 얘들아 얘들아, 상황 해제 상황 해제, 야 야 갔어 갔어, 나와 나와! 만약 허접한 칼럼니스트라면 그런 말을 해도 된다. 글로 주창해도 눈길조차 끌기 어려울 테지만 천직이 글쟁이인 만큼 칼럼 하나, 책 한 권 뚝딱은 일도 아니다. 곧 사람이 언제 긍정에서 비관으로 바뀌는지 그 찰나를 꼬집어서 외람되지만 예를 들겠지.
   「이런 말씀 드려도 될려나 모르겠지만 조심스럽게 살짝만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이렇습니다. 글쎄요, 우리 사이에 이런 말 해도 되는 것 아니냐...?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도 할 만큼 했어요. 네. 그럼요. 지금이야 내 그대를 보필하지만 왕년을 돌아보자면... 흐흠. 허험. 그러니까, 이게 다 나리님의 명랑한 삶을 위한 겁니다요. 독자님의 제7 전성기를 위해 드리는 간곡한 간언이니 만큼, 꼭 기분 나쁘게 들으실 필요는 없다는 걸 미리 말씀드립니다. 서로의 진심을 왜곡해서 뭐헙니까, 네? 그럼요. 꼭 욕심을 회심하라 군침을 재고하라, 라는 말이 아니라, 어?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고, 꾹 참고 타인의 마음 속을 들여다 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살짝 손에 침을 묻힐지언정 의중 한 쪽을 제껴보고, 욕망을 넌지시 엿보는 것. 불손함도 아니고 명백히 병이 아니라 약에 가갑죠. 네. 그럼요. 그럴 수만 있다면, 예? 집이도 좋고 나도 좋고. 뭐시여! 아 아무도 없을 때는 말 놓으라며? 나 원 참! 내가 이거 때려치든가 해야지 참말로. 이 일도 못해먹겠구만 그래. 허허허. 못 들었지? 농담이고. 아 그러니까 대관절 어떤 말을 들었길래 이 사단이냐구요? 뜸 좀 그만 들이라구요? 네. 지두유 진짜로 지겹습니다. 지긋지긋해요. 지도 정말 신물이 날 지경이구먼유. 아 짜정난다구유. 그러니까, 곧장 갑시다. 속된 말로 하자면 이렇죠. 우리 만나자 라면서 초청장을 건네더라 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정면승부 같아요. 우린 의표를 찔렸고 속셈을 들켰어요. 그게 본색을 드러내라는 말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다시 말해 소극장 앞에서 보자고 헙디다. 연극 제목은 바로,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2라나 뭐라나!」
    일개 삼류 글쟁이라면 몰라도 만약 유명인이 이렇게 말한다? 일부는 웃고 좋아하며, 일부는 푼수라 놀리고, 또 한쪽에서는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라며 반응은 뜨거워진다. 관계자는 부탁을 하고 또 한다. 아아 제발, 오오 제발 생각을 한 다음에 말을 하라고! 평점은 어디까지나 평균이란 말이지 취향과 안목의 통일이 아니다. 모든 기준은 바로 나이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내가 불리하면 생전 처음 가 본 레스토랑에서 주문의 최선은 추천이다. 차선은 '나도'다. 그렇지만 내가 유리하면 당장 '나는'이 우리를 이끌 수 밖에 없다. 자 우리 모두 돌격 앞으로, 그래서 갔는데 나 빼고 아무도 없을 수도 있지만. 바로 그러니까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을 주지 않는 거다.
    사랑! 재미없어서 조느라 통채로 시간 낭비만 하느니, 차라리 잠깐 딴 얘기로 쉬었다 가자면 이렇다. 첫인상 얘기는 아니니까 미리 긴장하지는 마시고. 사랑은 처음의 열정만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야 야 비켜 비켜 이런 머저리 같은 놈 넌 그것도 못하냐 답답하다 정말 답답해 하 참 나, 그런데 잠시후, 효과음......!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여자가 말이 길고 약간 산만하듯이, 남자는 말이 세고 큰소리치는 게 특기다. 사랑이라...!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을 주지 않는다는 둥 뭐라는 둥, 라는 말이 있다. 우리 여성분들 그런 말 많이 들어보셨죠? 철들면 안된다나 뭐라나. 여러분, 사랑은 혹시 이렇지 않을까요? 여심이라는 하드웨어는 사랑이라는 소프트웨어에 최적화되어 있다. 반대인가? 그거나 그거나! 때문에 인생이라는 최적의 먹잇감마저 포기할 수 없는 남아의 마음과 정결한 여심은 마찰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사랑에 대해서 여심이 농심보다 우월하다. (아담과 이브 어쩌고저쩌고는 넘어가고, 에덴2라는 NC가 과연 행복의 온상인지 아닌지는 차차 또 각자 확인하고) 그래서 버전이 있고 업그레이드라는 게 있다. 여자의 마음을 대변하자면 이렇다. 남자들은, 농심 1.0은 여심 2.0과 호환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자꾸 우리에게 가르칠려고 한다나 뭐라나. 그래서 농심 1.0은 여심 2.0에서 열리지만, 역으로, 여심 2.0은 흑심 1.0에서 안 열린다? 고로, 사랑마저 여자가 모성애로 남아를 보듬어야 한다라나 뭐라나! 꽃을 선물하며 졸졸 쫓아다니고 내내 기다리더니 존중 받았던 숙녀의 마음이 글쎄, 어느새 명령 받고 구박 받는 하녀로 격상됐다는 건가. 말하자면 재미없는 농담이고, 아무튼 앞선 정신분석의 요점은 이렇다. 내 입장의 합리화이자 이기주의자의 냉소에 대한 변호. 예를 들어보자.
    가령 미스테리한 남자의 마음을 엿볼 수도 있다. 친구를 만났을 때 나의 우월감은 곧 내 자랑이다. 그런데 친구 입장에서 보면 그 녀석의 우월감은 곧 나의 열등감이다. 그래서 친구의 자랑을 내가 다소곳이 들어야 할까? 아니지. 예상되는 그 영웅담까지 행사장 순서처럼 진득하니 기다려야 할까? 아니다. 나는 VIP다. 더군다나 나는 말 돌리기 선수다. 고로 그때까지 기다릴 수야 있나! 뒤늦게 맞받아치면 낙제점만 겨우 면하거나 마이크 이미 있는데 또 추가만 될 뿐이다. 따라서 응당 먼저 선공을 펼쳐야 한다. 왜냐하면 남자의 예법과 우정의 척도를 무시할 내가 아니니까. 즉 나의 열등감을 선망─부럽다─인정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미리 비꼬는 거다. 어떻게? 이렇게! <너 잘생겼자나─넌 키 커서 좋겠다─넌 뭐뭐해서 좋겠다─너는 나처럼 얽매이지 않자나 넌 자유롭자나─너는 놀자나 넌 먹고 살만 하잖아─(아부) 너 그런 거 잘하잖아 (깐족) 누가 너만 하겠냐─제3자에게 얘 돈 잘 벌어요─얘 어디 살어─바텐더에게 얘 연봉 얼마에요> 라면서 한 번 꼰다. 그분들이 알고보면 고품격 화술의 귀재거든. 그럼 또 상대의 유대감과 겸손을 저절로 불러온다. 드물게 같이 귀 막는 사례도 있는데, 실제 그럴려나 몰라도 자랑에 앞서 사전에 미리 새파란 새싹을 살포시 밟아주는 식이다. 뿐만 아니라 다시 나의 우월감을 자랑할 차례가 곧바로 이어지므로, 따라서 그 선순환은 정당함도 얻고 행운마에 올라탈 수 있는 그래프 각도마저 전망이 좋아질 수 밖에 없다. 우정이란 이름으로 빈수레가 요란한 건 뭐 이렇듯 합당한 명분이지만, 잔칫상에 숟가락 올라오는 걸로 봐서는 어쩜 이 세상은 바보 대회이자 자랑 대회요 푼수 대회인 것만 같다. '너 좋아하는 뭐뭐'까지 가면 너무 간 거니까 그건 통과. 그러니까 꿩 먹고 알 먹기! 그처럼 우정의 원리가 이러니까 사랑도 변할 수 밖에 없다.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드리겠소,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전자에서 후자로 바뀌는 것. 그걸 사랑이라고 한다. 물론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뭐, 사랑? OK, 사랑! 수업시간에 선생님 강의가 재밌나, 아니면 선생님의 쓸데없는 모험담이 재밌나? 당연히 학습에 도움 되는 건 강의고, 재미있는 건 수다다. 전자는 이성이고 후자는 감성이다. 이때 중요한 게 뭐냐면 대체로 전자가 먼저고 후자는 나중이라는 것. 전자가 어느 정도 보장된 다음에 후자까지 덤으로 챙겨야지, 그 반대가 되면 비싼 강의료를 냈더니 스승님이란 양반이 글쎄 어디 가서 여자 꼬신 이야기나 하고 있다고?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그렇게 된다. 그렇게 된다고. 그런데 만약 강의보다 정작 딴 얘기가 월등하게 훌륭해서 약간 뭔가가 애매해질 수도 있다. 그럼 어떻게 될까? 그러면 규율로써 제재가 가해지든 스스로 그만두든지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영원한 현역감이 못되니, 박수칠 때 떠나거나 꾸역꾸역 버티다가 억지로 밀려나든가. 그 다음에 개그맨 시험을 보던가 허당 대회에 출전하던가는 당사자 마음이고. 규율도 밑에서 요청하든, 위에서 판단하든, 옆에서 말이 나오던지고. 어느 선을 넘지 않으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거고. 간당간당 조마조마 애매모호... 그 현란한 줄타기에 대해서 뭐랄까, 일단 지금 상황을 보건대 어느 정도 전자를 챙겼다는 산술적 판단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잠깐만 삼천포로 빠져도 된다는 명분은 누가 봐도 지극히 합당하다. 실익이란 정량은 챙겼으므로, 고로 그럼 이제 허영이란 환상을 잠깐만 엿보아볼까? 그랬더니 화들짝! 뭐야 뭐야 뭐야, 아 뭔데 그래? 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5분만 웃고 가자.
    사랑을 얘기할려면 우정을 알면 된다. 왜냐하면 그 둘은 확연히 틀린 점 빼고는 완벽하게 똑같으니까. 앞서 논했듯이 남자의 우정은 그런다. 너 잘났자나 너는 돈 많자나, 그런데 난 뭐냐 난 어쩐다 등등. 그게 자꾸 반복되면 어떻게 될까? 서로 딴 얘기만 하게 된다. 얘기를 듣고 말을 했는데, 때로는 언제 그랬는지 기억도 못한다. 그런데 말은 듣기도 있지만 끊기와 빼앗기, 부풀리기, 무시하기, 비꼬기, 전달하기도 있다. 그런 가운데 여자도 직설법을 애호하는 순간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바로 사랑과 우정 사이! 여자는 남자와 반대로 말한다. 오빠 눈 튀어 나왔어. (애니메이션 주인공이야 뭐야? 맞는 말이거든!) 오빠 입도 튀어 나왔어. (조류야 뭐야, 개야? 사실이거든!) 오빠 옷이 그게 뭐야, 우리 할머니랑 똑같네. (그녀의 할머니를 보지 못했으니까 확인할 길이 없거든!) 남자든 여자든 친하지 않으면 그런 얘기 하지도 않고, 친해도 그렇게 말해서 기분 나빠할 거 같으면 그처럼 놀리지도 않음. 단, 희박한 확률로 어려운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10번 참는 사람과 1번도 참지 않는 사람이 만나면 동화든 코메디든 뭔가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마이크 타이슨이 링에서 챔피언 벨트를 뺐겼을 때 언더그라운드에서 누군가는 있지도, 보이지도, 멋지지도 않은 우승컵을 슥 들어올리는 거다. 때문에 이치를 보아하니 얄팍하든 호쾌하든 직접화법이 유리하겠다고? 하오나 어느 마초가 좋아하는 숙녀는 정작 싱거운 남자를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간접화법만 또 선호하다가는 사기꾼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만남이 우정이면 그나마 낫다. 으샤으쌰 분위기가 기쁨과 슬픔을 오갈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사랑이면? 그러면... 그러면 오히려 일찍 결별해야 해피엔딩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르겠다. 사랑은 너무 어렵다. 그래도 다 방법이 있다. 왜 없겠나. 사랑을 알려면 사랑과 제일 흡사한 우정을 생각해보면 된다. 그려면 이해가 한결 쉽다. 10번 참는 친구를 A, 1번도 참지 않는 친구를 B라고 했을 때 우정은 이렇다. A가 참다 참다 도저히 못 참고 30번 꼬박 채워서 꾹 참다 못해 B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쌓인 걸 참으로 빨리도 말한다. 그러면 B는 뭐라고 할까? 뭐라고 하겠나. 야 이 바보야 야 이 멍충아 그럼 그걸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 야 늬가 똥개냐 그럼 처음에 말을 해야지 라고 한다. B의 관점에서는 당연하다. 1번도 참지 않는 인생관이니까. 그러나 A는 어떤가, 1번도 참지 않는 생애가 아니라 뭐든지 최소 10번 참고, 뭘 사기 전에 20번 고민하며, 누군가를 사랑하기 전에 30번 재고하는 친구다. 그래서 A는 마침내 뚜껑이 열린다. 두둥~! 짜잔~! 그렇지만 A라고 마냥 푼수일 리가 있나. B라고 세상을 모를 리가 있나. 그 둘은 적당히 벤치 클리어링까지만 가고 소중한 우정은 깨트리지 않는다. 그런데 사랑도 이와 같을까? 정말 그럴까?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A와 B처럼 부딪히면 우정이 아닌 사랑은 생각할 게 많다. 2세도 있을 수 있다. 애완견은 뭘 보고 배우겠나. 단념과 절망 그리고 원망과 달리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질 수도 있다. 포기나 달관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바람도 있고 법원행도 있겠다. 문학도 있고 다큐멘터리도 있다. 영화와 드라마가 빠질 수야 있나. 곧 사랑은 우정보다 경우의 수가 더, 훨씬 많은 것이다. 파급력도 크고, 멀티태스킹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의인법처럼 사랑과 문학을 사람으로 봤을 때) 사랑이 생각할 때 우정처럼 자유롭지 못하니 참으로 머리 아플 수 밖에. 그러니까 사랑은 우정을 질투하는 거다. 주위를 보시라. 진짜 그런다. 더 할 얘기가... 다 했네. 아 피곤해. 말을 너무 많이 했어. (설레설레)! 아니 근데, 이거 뭐야? 1분 넘겨서 6분씩이나 해 먹었잖아? 어쨌든 수다는 이쯤으로, 다시 칼럼으로.
    원리! 그런데 낭만파가 그 흔한 사랑 얘기만 하면 좀 좋나. TV를 틀면, 잡지를 펼치면, 인터넷을 보면, 풍문을 들으면 다 똑같은 얘기. 다 그저 그렇게 식상한 모범 답안 말하기, 뻔한 과장법, 앵무새 따라하기 일색.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겠지만, 그런데 남의 다리를 피나게 긁으면 아 진짜 너무너무 시원하다, 그 둘은 모순이다. 정말로 남의 다리를 피나게 긁었을 뿐인데, 그게 긁어 부스럼이 아니라 일약 스타덤에 올라 쾌락마저 덤으로 선사한다? 그 기쁨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클라우드 나인의 행복감을 미리 탐지하기는 어렵다. 추측론과 나의 신기한 환상은 다른 거니까. 그렇듯 오락산업은 순수예술가 뿐만 아니라 악역과 얼굴마담도 필요하고, 대중예술가에게 연예계는 꿈과 희망의 인생 무대인 것이다. 모순은 또 있다. 나는 영원한 현역이고 싶다는 둥 박수칠 때 떠나라는 둥. 그야 어쨌든 허당 잔치 학예회에 나까지 신부들러리를 서야 할 합당한 이유는 없다. 내가 할 일이나 할 말이 없다고 굳이 수다쟁이들의 병풍이 되야 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나는 건 아니니까. 지식인의 품격과 예술가의 새로움이 아니라 시시콜콜한 수다를 나보고 또 들으라고? 지금, 우리, 장난하나! 지금은 BC가 아니라 A.D. 곧 기원후라는 시공간인 것. 그처럼 A의 밤무대와 D의 주무대라는 어떤 어색함이라고나 할까, 무언가 운동선수의 숙명을 모른 체 하기에는 우린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또 우리는 투정과 응석으로 진짜 초딩들과 경쟁 관계다. 때문에 현대인은 일정 부분 피곤함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다. 신의 권능에 버금가는 리모콘 채널 돌리기라는 권한마저 우리에게 거의 무한대로 부여된 형편. 오히려 테크놀러지의 노예가 되지 않음이 힘든 실정이다. 어쩌고저쩌고는 예를 들자면 끝도 한도 없다. 나는 구두를 고를 때 무조건 끈이 있는 유형을 선호한다, 나는 벌써 유명해졌지만 돈 욕심 없다, 나는 애스턴마틴을 팔았고 람보르기니를 샀다, 나는 허풍을 좋아하고 허영심은 싫어한다! 뭐뭐뭐... 뭐라고?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거장이니 대가니 뭐니 알아서 오락산업에서 날 띄워주니 난 정말 귀찮아 죽겠다, 라고 말하는 명사 가운데 최근의 시사 문제에 관해서 뚜렷한 의견을 밝힌 사람이 많나? 있나? 없나? 말할 뻔 하다 말았나? '난민'이라는 주제에 대해 잠깐이나마 떳떳하게 의사를 밝힌 거장 있으면 누가 누가 있나 생각해보자. 과연 누가 있을까? 많지 않다. 그래도 그런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큰소리치지는 맙시다, 호호호! 순진한 선의일지라도 할 말은 하는 게 좋지, 쾌감을 얻기 위해서만 책을 읽고 '나는 아티스트 너희는 대중예술가'라면서 떽떽거리기만 하면 푼수임을 자처하는 거다. 물론 코메디언은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 복고풍이란 건 옛날의 유행이 현대식으로 새롭게 재탄생한 것이지,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언제식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장르는 미스테리 아니면 판타지, 하나-둘-셋 하면 말하기! 그래서 반의 반 박자 딱 늦게 말하는 아가씨처럼 행동하는 마에스트로는 뒷북으로 또 한번 푼수임을 증명하므로, 그러므로 비난이나 무관심이란 벌에 처해질 수도 있다. 응애응애 삐악삐악, 애들은 말이라도 잘 듣는데 말이다. 우와 우리 뭔가 통하는 것 같아요 우린 정말 잘 어울리는 거 같지 않나요, 그건 남녀 사이라면 몰라도 지성인의 지위에서는 본전도 못 찾는 일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꿋꿋이 어려운 길을 가거나, 까다로운 삶을 살거나, 욕을 듣더라도 옳은 말을 하는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지금 세상에 많나? 적나? 없나? 있어도, 오락산업한테 밉보이면 언제 그랬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묻혀버린다. 쥐도 새도 모르게 내 이름 브랜드는 잊혀지는 거다. 반대로 아무리 당사자가 싫다해도 끝까지 뽑아먹을 수 밖에 없다. 속된 말로 끝까지 우려먹는다. 곧 영원한 푼수가 되는 거지. 너절너절할 때까지 이용당하고 헌신짝처럼 버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일부러 악평이라도 들을려고, 누구에게나 엄연히 시원한 인생이고 공평한 사랑이니까, 숟가락은 쉴 새 없이 잔칫상에 쓰윽 올려지는 법. 그런데, 대중은 또 어떤가? 일단 유명해진 다음에 어정쩡하게 남의 다리를 긁거나 내가 100퍼센트 솔직하면 만인의 반응이 공통될 리는 없다. A는 B에게 친절함으로 다가가야 하지만, B는 A에게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우릴 웃겨봐!' 이런 식일 테니까. ('우리는' 화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항상 우리 뭘 해도 우리, 둘째 내게 유리할 때에만 만사 제치고 우리!) 개중에는 물론,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도 있다. 그래서 가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고, 오히려 암말도 안하는 게 제일 이득인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요즘 이 바닥 돌아가는 낌새가 심상치 않다 싶으면 두 눈을 지긋이 감고, 고개를 틀고 살짝 들어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지라도 그때는, 그때는 관망이 최고다. 전망 보면 견적 딱 나오는데 그 무슨 월계관을 바란다고. 이미 영화로움은 나와 함께 하는데 굳이 고행길에 앞장설 필요는 없을 테니까. 막 그렇게 막 쉬쉬하며 눈치 작전으로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지니는 내 지니다. 남의 지니가 아니다. 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게 편이라고, 게다가 이미 무인도에 데려가고 싶은 넘버 쓰리로 뽑히기도 했다. 심지어 오락산업마저 내게 우군이자 믿음직한 조수다. 그러니까 그러다 다시 분위기가 말랑말랑해지면 슥 고개를 들고, 조명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쭉지를 쫙 편 채 밝고 자신있게 그래야 한다. 따따부따 따따부따, 이러쿵저러쿵 이러쿵저러쿵, 어쩌고저쩌고 어쩌고저쩌고! 그렇지만 (대체로) 가수는 노래만 잘 부르면 되고, 영화배우는 연기로 말을 하며, 학자는 논문으로 승부하는 거다. 일단 태풍은 지나가길 기다리고, 추문은 듣기도 전에 손사래를 치며, 은근한 스캔들이라면 내가 먼저 슥 흘릴 줄도 알아야 한다. 먹고 살려면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어려운 시절이랄지 따끔한 시선이 스쳐지나가면 다시 얼굴이 활짝 펴지는 거다.
    (딩동~)
    (쉬는 시간)



    6

    일반인도 똑같다. 내 친구들이 괜히 얼굴은 말상이요, 술 먹으면 개이자, 평소에는 한량인 것이 아니다. 심지어 낮에는 동물애호가이에, 밤에는 육식론자이자, 디오니소스로도 어디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친구들이다. 그런데 일요일에는 또 기도를 드린다? 필경 개인의 자유일 테지만 일부러 순수함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친구인지 모를 리가 없으니까. 어쨌든 우리들은 양의 탈을 써야 하니까. 구애를 여자의 몫으로 돌리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그처럼 업계의 흐름을 읽고 나서 우리는 다시 마이크를 드는 거다. 마이크 먼저 들고 업계 흐름은 나중에 읽기보다는 말이다. 그러든 어쩌든 오늘도 말하기 좋아하는 우리들은 뭔가를 말하고 싶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한다. 근질근질한 건 엉덩이일 때도 있지만 이번에는 입이다. 아무 얘기도 좋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나는 낯선 여행지에서 무작정 정처 없이 떠돌다 이상적인 호기심이 낯선 숙녀에게 향하는 걸 좋아한다, 남성잡지와 세계적인 주간지를 애독하는 나는 보아하니 그런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이를 테면 낮에는 여성잡지1의 기술이 온전히 투영되고 밤에는 여성잡지2의 지식과 기술이 잘 반영된 여자. 뭐-뭐, 뭐라고? 잔지식, 잔근육, 잔기술, 잔재주, 잔꾀, 잔소리, 잔재미, 까메오, 잔뻔치, 쨉 쨉 쨉 또 쨉 계속 쨉 끝까지 쨉, 그 언제까지나 뻔트? 저런!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이런...!
    논점을 잠깐만 벗어남. 불과 얼마나 됐다고 또 딴생각에 또 꿈나라의 유혹이? 단락 짧게 떼서 확실하게 쉬었다 가자. 진정한 고품격이 아니라 달랑 변죽을 울리는 말발, 놀리는 글발, 잘난 척 허세 본위의 말장난, 아는 체 타석주의, 잔지식, 잔근육, 잔기술, 장비발, 잔재주, 잔소리, 헛짓거리, 기타 등등. 그 잔머머의 친구 중 하나로 당연히 개헤엄도 있다. 잔재주가 아니라 큰 재주, 잔꾀가 아닌 고급 기술을 터득한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머머하는 법 같은 책을 읽으며 독학할 것인가, 몇 년치 계획표를 세워서 체계적으로 학습할 것인가 라며 고심한다. 어쨌든 영법 수영의 상징은 뭔가, 당연히 선수들이 입는 삼각 수영복이다. 한때 수영을 배우느라 여름에 친구들이랑 해변에 놀러갔는데, 하필 삼각 수영복을 고집한 사람 솔직히 손들어보자. 나 운동한다고 몸매 자랑하고 싶어서 아무 데서나 훌러덩 훌러덩, 그거랑 똑같다. 그래서 푸른 바닷가에서 간단한 놀이 기구를 탈려는데, 관계자가 그러는 거지. (삼각 수영복 입으신 남자분을 가르키며 일행인 숙녀들에게) 저분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세요! 라고. 다시 돌아와서,
    문제점은 이렇다. 일단 거기까지는 옳다. 틀리지 않다.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 나쁘지도 않다. 오히려 좋을지도 모를 테고. 유익한 점이 꽤 된다. 그리고 나는 학교 다닐 때 악역을 맡아본 일이 전혀 없다. 사실이다. 아니, 있나? 아무튼 문제를 바로 안 다음 해결책을 도출할려면 남녀의 사고방식을 알아보면 된다. 그러면 문제점이 무엇인지 자명해질 것이다. 고개를 끄떡거리게 될 것이다. OK! 여자 먼저.
    여자들이 일기장에 쓰는 표현에서 주로 반복되는 표현은 무엇일까? 이와 같다. 머머 같다, 머머인 듯 하다, 머머일지도 몰라, 그럴까 안 그럴까, 잘 모르겠다, 머머하면 어쩌지, 타인이 날 보고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까, 머머하면 좋겠다, 머머는 좋고 머머는 싫다, 누가 나한테 뭐라고 했다, 머머하고 싶다 머머 먹고 싶다, 어디 가고 싶다, 머머 사고 싶다 갖고 싶다, 오늘 머머했다 머머했다, 내일 머머할 것이다 머머할 것이다, 누가 나보고 뭐라고 했다, 오늘 어떤 얘기를 들었다, 나는 오늘 어떤 선물을 받았다, A는 나보고 착하다고 했고 B는 나한테 예쁘하고 했으며 C는 나에게 얼굴이 참 표정이 많다고 했다, 친구1과 친구2는 비교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다르다, 그런데 내일의 희망은 어떡하지, 나는 친구한테 뭘 빌려줬는데 걔는 고마운 줄도 모르고, 기집애 단짝을 뭘로 아는 거지 나 설마 1.5로 밀린 거 아냐 나는 항상 걔 얘기 다 들어주는데 지 아쉬울 때만 연락하고.. 쩜쩜쩜.
    그러면 남자는? 주전 빼고 대타도 빼고, 딱 9번 타자만 말하자면 남자는 한마디로 그거다. <내가 대체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여자의 일기장이, 타인이 읽고서 반한다, 그 남자의 마음이 흔들린다, 독자는 나한테 홀릴 것이다, 라는 전제로 쓰이지 않는다면 몰라도 투정과 자랑과 응석은 필수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자기애이자 자존감이니까 나쁜 게 아니다. 단지 그게 지나치면 여자의 수다 3시간과 쇼핑 6시간에 남자의 뚜껑은 열리는 거다. 겉으론 아니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남자도 똑같다.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가 심하게 반복되면 하는 수 없이 그렇게 된다. 주변에서 슬슬 그분을 피하는 거지! 야 야 떴어 떴어, 피해 피해 비상 비상, 딴 데 봐 딴 데 봐, 고개 숙여 고개 숙여! 그런데 그분이 상급자랄지 한량의 3요소와 플레이보이의 4대 요건에 대해 일부 성과가 확실하다면 모를까, 그런데 그게 아니다? 어디 보자, 영 그렇지 않다라... 한마디로 괴로워지는 거다. 그래서 굳이 직설법을 고집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혼자서 열정은 과소비되고, 그러므로 완곡어법으로 주변에서 말을 하면 때로는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일도 있다. 그래서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안다고 루저의 제일 친한 친구는 루저일 수 밖에 없다. 허나 내가 루저인데 루저의 마음을 굳이 아프게 할 필요야 있나. 그래서 루저는 루저에게 기본적으로,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라는 삐딱한 직설법은 자제한다. 좀처럼 그 말만은 남발하지 않는다. 대신에 바텐더는 다섯 명 또는 일곱 명 중에 딱 1명을 꼽아야 하니 막 난감하고 적잖이 난처해질 수 밖에! 때문에 어설픈 루저를 하느니 차라리 왕-루저, 허당 중의 상허당이 되어 루저 마인드라는 주제로 인문교양서를 쓰는 게 차라리 나아도 나을 것이다.
    해법은 이렇다. 그래서 '기분이 완전 좋다 완전 나쁘다'를 오르내리는 자존심은 그래야 한다. 경주마에 올라타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당근의 기준과 채찍의 취향에 대해서 융통성이란 찾아볼 수 없도록 속좁은 남자가 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면 된다. 그게 바로 중간이다. 그러다 또 슥 분위기 타고, 기분 들뜨며, 가슴이 으쌰으쌰로 부풀어오르면 둘 중 하나가 된다. 첫째 오 땡큐, 둘째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따라서 우리는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한다. 다몽과 다변?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다정과 다망? 그 역시나! 그런데 그게 아니라 다작과 다처? 때에 따라 좋을 수도 있는데, 그런데 과찬과 립서비스가 대관절 뭘로 바뀔지는 굳이 상상하지 말자. 뭘 좀 모른다면 몰라도 일부러 거기까진 알고 싶지 않을 테니까. (끄덕끄덕). 내가 의전으로 앞서야 할 차례인데, 서로 잔말 말고 따라와? 돈 쓰고 욕 먹고 독박 쓰는 거다!
    (딩동~)
    (쉬는 시간)



    7

    주의점도 있다.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풍 정신이 너무 부족해도 탈이다. 뭐든 대체로 적당한 게 좋다. 적게 걸면 적게 따거나 적게 잃거나. 아니면 올인처럼 많이 따거나 몽땅 잃거나. 물론 우리는 주식이 내려가면 거꾸로 돈을 버는 옵션은 물론, 세상사에 대해서 한 발만 쓱 걸치는 작전도 얼마든지 능숙하다. 실제로 한 발만 슥 걸치는 게 좋은 예는 결코 적지 않다. 사랑은 아닐 테지만 명쾌한 과학─초자연적 신론─행복한 세계관은 당연히 양다리가 좋다. 그 외 뻔트냐, 모든 걸 거느냐, 흐름을 타느냐 등등.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나는-나는-나는-나는, 바로 그 <나> 위주의 인생관들 틈바구니에 그게 있다. 이를 테면 우리는-화법, 이타주의, 입버릇 '늬 말마따나'! <나> 위주의 인생관과 그건 상반된다. 우리는-화법? 주어는 내가 아니다. 이타주의? 남을 위하는 주의다. 입버릇 '늬 말마따나'? 남을 먼저 띄워준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정말로 그럴까? 아니지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 '우리는' 화법의 목적은 뭐든지 '우리는'으로 물타기 해서 내가 항상 파도의 최상층에 올라가는 것이다. 이타주의는 이타주의자로만 살면 천사가 아니라 호구로 보일지도 모르므로, 다시 이기주의는 급부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입버릇, 늬 말마따나? 1차적으로 타인을 띄워주는 거지만, 알고보면 목적은 날 띄우자는 거다. 즉 우정이든 처세술이든 사랑이든, 뭐든지 그 기준은 나, 바로 나다! 왜 그렇겠나. 왜 빈수레가 요란하다느니 응애응애니 삐악삐악이라는 둥, 어째서, 도대체 왜 그렇게 그 주제는 짜증나도록 지겹게 반복될까? 왜냐하면 자존심은 왕급, 자의식은 황제, 자랑은 제우스요, 자긍심은 신기록을 가뿐히 능가하고, 허세 쩔며, 허영심으로 만년 1등인 위인들은 결코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인이 아니라 우리 친구들만 봐도 자존심왕과 자의식 황제는 흔하다. 영심이에게 인생의 기쁨 그 절반은 연예계 백과사전식 지식이다. 여성잡지1과 2는 진정한 바이블인 것이다. 조명 받는 직업인 입장에서는 그런 친구들까지 대리만족시킬려면 사랑처럼 자랑도 그저 일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어느 때인가 자기도 모르게 당대의 내놓으라 하는 삐에로─푼수─바보─허당─삼류─허세꾼─영심이─호사가가 잠깐 좋아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연기 못하는 영화배우, 노래 못하는 가수, 보이스레코더로 글을 쓰나 싶은 작가, 잘난 척 유난 떠는 험담가, 뭔가 부족한 안다 박사님, 막말하는 유명인, 막사는 예술가, 못생긴 여자 화장품 모델 등. 나랑 단지 뭔가가 비슷해서... 내 처지와 닮은 배역... 달랑 연예계 싸움 순위 상위권이라는 신빙성 낮은 이유 때문에, 인성은 못됐지만 그냥 단지 무섭게 생겼기 때문에. 왠지 모르지만 우리는 살면서 나도 모르게 그분들에게 호감이 가는 시기가 있다. 각자 정상으로 돌아오면 제정신을 차리겠지만 말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제 손에 케첩 묻히지 않는 캐릭터네, 손 안대고 코 푸네, 흙탕물 튀기지 않게 조심해, 라는 속담과 대사도 있으니까 우리는 제각기 관심사가 분산되는 것일 뿐이다. 어려운 시절이 닥치면 경우의 수는 나뉠 수 밖에 없을 테니까 일종의 방어기제에 해당하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거칠고 거친 세상 속에서 항상 연애론만 공부할 수는 없다. 때문에 합리화의 이유와 방황담의 와전과 대리만족의 원리는 그때 그때 변할 수 밖에 없다. (뭐야! 또 없다-야?) 고객층 100과 무대 100 사이 로얄석의 임자는 때로는 등호, 때로는 부호일 테니까. 일생 내내 심심하기만 했다거나, 일생 내내 파리조차 스쳐지나가기를 마다했다거나, 막 그랬는데 딱 인생이 무엇인가 겨우 알 만한 시점이 되자 그때사 나에게 전성기가? 뒤늦게 어복이? 역으로 뭐 하나 부러운 것 없던 화려한 슈퍼스타의 몰락이랄지 재산 탕진이? 그걸 대체 뭐라고 하냐, 바로 말년운이라고 한다. 그래프가 올라가면 올라간다고, 내려가면 내려간다고, 왔다 갔다 요동친다면 요동친다고 다들 할 말은 많은데, 그런데 나는 대체 뭐냐고! 이때 반응은 둘로 나뉜다. 첫째 나도 말 좀 하자, 둘째 나는 여태 어쩌고어쨌는데 왜 지금 나는...! (아니다. 딴청, 독설등 후보군 쟁쟁하겠군. 그래도 일단 응어리에 대한 대표적 예를 그렇다 치고) 그렇지만 그게 다일까? 그럴 리는 없다. 재능마저 상 중의 상이요, 처세술과 함께 아첨과 애교와 반칙왕 그리고 오락산업의 막후 세력등등 주전은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아예 대타마저 행운을 비롯해서 주전 뺨 치는 거물들이 득실거리는 실정이다. 어디 보자 그런 분들이 과연 얼마나 되실까...? 세상에나, 맙소사! 그렇지 않은 분들을 세는 게 차라리 낫겠네. 바로 그래서 '내가 최고' 정신이 주류를 이루며, 바로 그래서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스타일도 흔한 것이다. 허세왕과 허영심왕 앞에서 물개박수니 뭐니 진짜 왕은 명함도 못 내미는 실정. 오락산업에서 거론하는 상품과 사람 브랜드를 보시라, 자존심과 자의식은 한마디로 끝짱이다. 규칙이 그렇고 질서도 그렇다. 그렇다고 일반인이 휘둘리고 길들여지며 언제나 밀릴 수야 있나. 바로 그래서 따따부따, 따따부따, 따따부따 그러면서 헤드폰을 쓴 채 모두들 그 마이크만 들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이크의 이름은 바로,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고로,
    1.과잉된 자의식과 과분한 자존심은 <대화와 집중>이 아닌 <소비와 멀티태스킹>을 양산한다.
    2.다시 그건 특별판이 아닌 게 없고, 과소비? 과사용이 아닌 게 없는 오락산업의 거품으로.
    3.또 다시 그건 자의식 과잉과 1등 자존심으로.
    * 쫄병으로 영입한 핸드폰의 주인은 나지만, 실상 우린 노예나 다름없다.
    1부터 3까지를 내게 유리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하면 선순환이고, 아니면 악순환이다. 그 순환은 쉬지 않고 반복되므로, 따라서 이 시대는 모차르트 같은 예술가가 아니라 스티브 잡스 같은 천재 사업가를 더 선호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단지 선호도가 더 높다는 것 뿐이지 또 다른 모차르트의 부활과 피카소2세의 환생을 마다하는 게 아니라는 점) 때문에 사랑처럼 인생도 모르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런 길을 걷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라는 일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이 세상을 이제 조금 알고 났더니 사랑은, 봄바람도 나비도 첫눈도 아닌 바로 나방이란 진실. 인생이 미로처럼 보일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래는 모르는 거다. 나도 말 좀 하자 라면서 어느 허당이 밑도 끝도 없이 화염을 뿜을지 누가 알겠나. 그럴 꺼면 좀 일찍 작게라도 행복할 것이지 뒤늦게 어복이 넘쳐서 세차 분무기를 뿜을려는데, 딱 그 중요한 순간 물이 떨어지고, 웬 뚱딴지도 아니고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레이저 시스템을 설치하네 어쩌네, 연구실에서 비친 레이저를 따라가네 라며 난리를 피우고, 커피포트의 작동 원리를 연구한다면서 이제사 커피포트론을 들고서 인문교양계에 지각 데뷔를 할지 어쩔지! 인생은, 모르는, 거다. 그러니까 기분파와 고슴도치는 내 기분만 따지지 말고,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카드를 남발하지 말 것을 권고 받아야 한다. 안 그러면 정작 중요한 순간에 양치기 소년은 당황한다. 심지어 소년도 아니고 뭔가는 밑에서 위로 올라왔을 텐데, 정작 난 피노키오가 아니라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아저씨로 낙인찍히는 거다. 안 그러면 아무도 믿지도 관심 갖지도 않는데, 난 행복해 난 행복해 라며 사랑가를 부르게 된다. 안 그러면 이제야 자랑 좀 하며 뒤늦게 세상에 뭔가를 베풀려는데, 주위에 사람은 없고 다들 날 피할지도 모른다. 대타란 그런 것이다. 에어컨은 발명가의 의도로 탄생했을 수도 있는데, 적지 않은 경우 소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는 일이 꽤 된다는 것. 인생에서 뻔트는 기본이요, 대타 카드를 뭘로 쓰느냐에 따라 나의 위치는 시시각각 달라질 수 있다. 진흙 속의 진주냐, 보석상에서 사기꾼에게 도둑맞느냐, 아니면 뒤늦게 대어가 잡히느냐로.
    그 외에도 어른들은 알고 있다. 그분들께서 어떻게 모르실 수 있겠나. 타인의 재산 탕진한 사연이 알고 보면, 듣고 보면 그 가운데 최고 사연은 정말 으아~! 크아~ 기가 막히게 재밌다, 우와 어지간한 영화보다 훨씬 극적이다, 캬~ 완전 환상적이네! 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우리가 그걸 모를 리는 없다. 어쨌든 자의식이 너무 심해도, 몸은 여기 있는데 자존심은 하늘에 가 있는 것도 불편하지만,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정신이 너무 부족해도 탈이다. 빈말과 참말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하니까. 으쌰으쌰 기분 좋고 마냥 들썩거릴 때 의기투합해서 내일 우리 떠나자, 해서 딱 당일이 되어 어디에 나갔는데! 뭐야 이거, 아무도 없잖아? 하오나 그게 다일 리는 없다. 으쌰으샤 경우의 수는 또 있다. 없을 수가 없다. 친구들끼리 오랫만에 뭉쳤는데 나 빼고 전부 다 여자친구가 있네, 그러다 또 어디로 떠나자 라는 얘기가 나와, 그래서 나 빼고 너네들끼리 가라 라고 했는데 극구 사양해도 꼭 반드시 함께 가자고 한다, 그래서 함께 떠났어, 그런데 여행지에서 그 뭔가를 절실히 깨닫는 거다. 그 뭔가를 정말 극적으로 통감하는 거지. 그래서 밤중에 하는 수 없이 나 혼자 조용조용 야반도주를 하는 수 밖에! 그게 뭐야? 뭐지, 뭐지, 뭐지...!
    듣고 보니까 어느 작명가가 봤을 때 퍽 불행한 이름 같지도 않다. 보아하니 정말 그렇다. <내가 봤을 때─우리는 화법─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부인은 모든 걸 알고 있다─부인은 아무것도 모른다> 라는 애칭의 잘생긴 노장들도 그렇지만 초딩들 사이에서도 그럴 수 밖에 없다. 응애응애 아기, 걷는 아기, 유치부, 초등부들이 함께 놀 때 자기들끼리 막 그런다. 우리가 배려를 해야 한다,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맞춰줘야지 쟤들한테 동조성을 바라겠니 뭘 기대하겠니? 응? 우리가 쟤네한테, 그럼 어쩌라고? 라~고 할 수야 없지 않냐. 어? 쟤들이 뭘 알겠니? 쟤들이 유행가를 알아 아니면 만화영화 주인공을 알아? 우리는 기저귀 무늬를 애용하지만 쟤네들은 진짜 기저귀를 차지 않냐 이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걔네들끼리도 그런다. 진짜 세대 차이 난다고!
    어디 아이들만? 80대 명콤비 친구도 그런다. 어디 물이 안 좋더라, 거긴 아니더라. 그래서 찾아간 새로운 휴양소 몽블랑을 순방하신 다음 나중 그러신다. 보보스는 무슨 순 꼬부랑 무광들 밖에 없더구만, 야 야 야 우리 이제 거기 가지 말자! 그런데, 뭐시라, 꼬부랑? 너는...... 라는 말이 들린다면 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자. 대체 어떤 분들께서 주로 그렇게 말씀하시나 그 공통점을 찾아가며 구태여 떠들썩하게 엑셀 파일을 바쁘게 할 필요도 없다. 정녕 노인들께서 그렇게 말하시지 않는다는 것일까? 진짜로? 아무도? 아마도 그 반대일 거라고 굳이 못 박지는 않겠다. 다만 쉬쉬할 뿐. 분위기랄지 예의상 그러지 않을 수는 있는데, 사석에서 또 친해지면 속마음의 고운 결을 은연중 비출 수 밖에 없는 게 사람이다. 꼭 어린애와 노인만 그러는 게 아니다. 중간도 똑같다. 중간층을 놓고 나이트클럽 신비, 호박, 엄마한테 말하지 마, 딱 그 3곳에 데려다 놓은 다음 그댄 최적의 고객층이다 라고 한다면? 묻는 분이 설마 그대라면 상욕만은 듣지 않으시길 바란다. 오, 제발! 그처럼 애-어른-노년 각계각층에서 그렇다는 건 안 그런 사람은 없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그건 곧 말이 세냐 기냐, 의사표현이 말이냐 표정뿐이냐 그 차이다. 단지 '춥다 덥다' 같은 감정과 똑같은 사람의 기분일 뿐이니까. 물론 일과 놀이는 다르니까 국제구호와 환경에 대한 옹호성 글을 쓰고, 표는 상반되게 어디로 향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가문이 어떤 전통을 거스르는 초유의 행사를 선보일 수는 있는데, 근본적으로 나와 남의 일은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인습과 편견이 한 발짝 내딛는다는 건 바로 그런 거니까. 어디 NC가 괜찮다길래 단짝은 얘기한다. 우리가 뭐가 어때서! 우리가 어디가 모자른다고, 특별히 멍청하지도 제법 가난히지도 않은데, 우리가 어딜 봐서 찌질하다고 언제까지 음악이 중간에 멈추는 나이트클럽에만 가야 하는데? 삼촌들 엉덩이는 들썩거리는 거지. 부비부비 부비부비 부비부비, 어디 소식을 듣고 읽고 보고 으쌰으쌰 (혹시라도 술기운에) 환장할 테니까. 그처럼 딱 거길 방문했다가 8 대 2 가르마 친구들과 한사코 실랑이를? 알고 봤더니 길을 잘못 들어 괜한 사설 클럽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일, 오늘도 있을 것이다.
    (칼럼 끝)



    8
 
    액면 그대로 보이는 걸 믿고, 들리는 데 끌리며, 알고 나면 혹할 수 밖에 없는 요술─마술─최면술─점성술. 학문과 상업이 아닌 오락 같은 바로 그 머머술. 그리고 증명할 수 없으면 어쩐다 라는 과학과 수학의 논리. 그 둘의 중간에는 사랑도, 믿음도, 행복도 있지만 행운론과 경제가 있다. 하지만 지속적인 환상, 꾸준한 쾌락, 섬세한 기쁨을 꼭 액자 안에서만 찾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럼 옵션이 더 비싸다는 그 고차원적 보너스는 과연 무엇일까? 대체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어디긴 어디고 무엇이면 무엇이겠나, 바로 카지노 사장실이지!
    알고 봤더니 레너드는 진짜로 카지노 사장이었다. 그런데 가 본 사람보다 안 가 본 사람이 아마도 훨씬 많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익히 아는 그런 카지노가 아니라 한마디로 구멍 가게 수준의 카지노였다. 이왕 친구를 만날 꺼면 마권업자보다 동물학자를 추천하느냐, 라는 신념을 고집하지는 않겠지만 어떡하다 또 그렇게 됐다. 그러니까, 관련 분야를 억지로 넓혀보자면 뭐랄까 거대 브랜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인지심리학 연구소장이 레너드의 직업과 연결되겠구나. 그렇지만 모든 과학자가 아인슈타인처럼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유명한 데다, 고위직 행정가가 기가 막히게 재미있으며, 화가들이 다 잘생긴 건 아니다. 의사도 최소한의 사회성이 필요하고 뭘 하든 눌변보다는 달변이 좋다. 그러나 장점이 하나 가면 단점도 하나 딸려 오는 법. 다정하고 성실한 사랑이 좋긴 좋다만 그 어떤 어눌함을 몇 십 년 견뎌보시라. 아무튼,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AB는 레너드와 한두 번 인연이 반복됐기 때문에 한동안 친하게 지냈다. 여자라면 운명이란 낱말을 슥 갖다댈지도 모르겠지만 레너드는 적어도 학교 다닐 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때문에 회상은 달콤했고 기억은 각별했다.
    당시 레너드와 AB는 중학교 3학년 같은 반이었다. 적당히 친해서 쉬는 시간에도 곧잘 얘기하고 그랬다. AB는 인기 그래프로 봐을 때 매년 오르락내리락했는데 그땐 나름 괜찮았던 시절. 그러던 어느 날 레너드와 담소를 나누던 중. 그건 대화라기보다 레너드 혼자 신나게 떠드는 웅변에 가까웠다. 그런데 하필 주제가 담임 선생님. 그래서 레너드는 정신없이 침을 튀겨가며 담임이었던 여선생님의 험담을 웬만한 만담꾼보다 훨씬 뛰어나게 우리에게 선사했다. 학생에게 걸맞지 않는 입담으로 말이다. 그런 레너드가 딴 데 신경 쓸 겨를이 어딨겠나. 진짜로 정신없이 침을 튀기며 떠들고 있던 중이었다. 담임 여선생 이름이 만약 소피아라면, '선생' 떼고 '님'이란 의존명사도 떼고 레너드는 결국 이름마저 생략하는 화술을 택했다. 급히 만든 별명을 들었다 놨다 막 그러면서. 브레이크가 없었던 거지. 그런데 담임 선생님 소피아는 하필 레너드 뒤에서 그 얘기를 다 듣고 있었네?
    그래서 아무도 레너드를 말리지 않았고, 따라서 소피아 선생님은 그 모든 얘기를 똑똑히 들었으며, 결국 레너드는 눈치 빠르게도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참 천천히 깨달았다. 그래서 소피아 선생님왈,
   「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레너드는 차마 고개를 못 들었고... 이때 중요한 게 뭐냐! 최소한 레너드의 열변을 들었던 AB를 비롯한 친구들은 그래야 했다.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드라마 작가라면 원래는 그렇게 글을 써야 모범이다. 멋쩍다, 겸연쩍다, 남부끄럽다, 쑥스럽다, 선생님께 죄송허다... 등등등. 그러나 모범은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고, 오히려 비범함이 인기마를 타지 않나. 못된 인간이 수치심과 골 세러모니를 잘 견디며, 뻔뻔함이라는 가치만으로 롱런에 성공할 수도 있다. 세상이 그렇다. 그래서 너무 착하지도 너무 순진하지도, 그렇다고 구태여 자랑 대회와 허풍 대회의 트로피란 트로피를 죄다 휩쓰며 꼭 막살 필요까지는 없다. 지금 시대에 첩1과 첩2를 양쪽에 꿰차면 곤란할 테지만,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양쪽에 꿰차는 건 다름 아닌 인간의 도리다. 양의 탈을 쓴 늑대는 동화에 나오지만 우리는 진짜로 금수처럼 살아서는 안될 테니까 말이다.
    때문에 레너드와 선생님이 아닌 AB를 비롯한 나머지의 반응이 어쨌겠나. 당시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어쩌긴 뭘 어쩌나. (조심조심) 웃었지! 당사자였던 레너드와 소피아를 빼고는 화면이 흐려지고 어쩌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그런데 또 AB와 소피아 선생님은 한마디로 우호적인 관계. 사람은 눈빛과 태도로서 꽤 많은 걸 파악할 수 있다. 기왕 수려한 외모면 좋겠지만 그래서 단정한 외양이 더 중요한 법이다. 그건 그렇고, AB가 학교 후문 바로 앞에 있는 문구점에 들렸다 돌아오면서 한 장면을 목격한다. 바로 자동차 안에서 소피아 선생님과 내연남? 그건 일일드라마 용어고, 다시 말해 아마도 합법이면 남편이요 사랑법이면 애인인... 그런 다정한 장면을 목격했다. 당연히 분위기 간파한 채 못 본 척 자연스럽게 지나갔고. 그래서 소피아 선생님은 레너드의 원맨쇼를 결코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레너드와 AB는 어쩌면 막역한 사이일 테니까, 따라서 선생님은 AB에게 한두 번 다정하고 따듯한 언사를 건넨 적이 있다. 끝. 그게 다다.
    실상 아무런 일도 아니다. 어차피 우리들이 살면서 실제 겪는 소소한 일일 뿐이고, 시트콤으로 수없이 학습했던 장면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그렇지만 레너드와 AB에게는 아마도 추억. 그리고 소피아 선생님은 그냥 은사님. 그래서 그런 레너드를 오랫만에 만나니 AB는 반가웠고, 한동안 우정은 긴 슬럼프를 종료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9

    AB는 에밀리와 로즈마리와 사귀던 중 레너드를 만나게 됐다. 그러나 우리 이제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라는 합의는 없었지만, 그들 모두는 남남이 됐다. 그러다 레이저 시스템 고장이라는 묘한 우연은 우정의 부활을 예고했다. 때문에 벌써부터 AB는 이상한 전개라는 도약을 예단했다. 그처럼 화사한 절정이 나타나줄려나 몰라도, 큐피트가 쏜 화살은 사랑이 아니라 우정인 건 분명했다. 사랑도 추억을 만드는데, 우정이라고 발동도 걸렸겠다 가만 있을 수가 있나. 그래서 레너드는 AB를 고급 사교계에 초대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AB는 어울리지 않는 고품격 살롱에 드나들면서 알게 됐다.
    아아, 레너드는 성공했구나 라고.
    옛날의 그 눈치 없던 레너드가 아니구나 라고.
    이 VVVIP 회원들도 모두 레이저 시스템을 애용하는구나 라고.
    곧 그분들과 AB의 차이점은 그거였다. 레이저 시스템이 그들에게는 재산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고, AB에게는 순수한 목적이라는 것. 한쪽은 일 한쪽은 놀이. 여기는 심각 저기는 재미.
    그러다 어느 날 레너드와 AB는 어느 과학자의 집에 놀러갔다. 같은 레이저 시스템을 이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명목상 초대였다. 아, 하나 더. AB는 최저가 설비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주문 제작한 무제한 설비라는 점. 아무튼 그 과학자는 전공이 양자역학인지 상대성 원리인지는 몰라도 그분은 다른 부자들처럼 뭘 지키기 위해 레이저 시스템을 도입한 게 아니었다. 바로 연구 목적으로 설치했으니까. 자기 말로는 타임머신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라는데... 그게 정말인지 장난인지, 아니면 농담 반 진담 반인지... 아직은 긴가민가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더 지켜볼 수 밖에. 그렇다고 친교가 사기로 돌변하거나 애정으로 급변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들은 연구실도 구경했다. 연구실에는 상시 레이저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었다. 그런데 차이점! 그것은 레이저 색상이 하늘색, 분홍빛, 연두색이 아니라 은색이라는 점. 그리고 대단한 걸 지킨다랄지 그저 재미로 설치한 게 아니라 연구 목적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뭔가가 또 있었다. 그건 바로 하나의 레이저가 연구실 바깥으로 이어진다는 점. 과학자가 다른 일을 볼 동안 레너드와 AB는 바깥으로 나가서 그걸 확인해보기로 했다.
    바깥에 나가보니 저기 저 멀리, 아주 멀리 끝까지 수평선처럼 레이저는 펼쳐져 있었다. 뭐야 이거? 지면과 수평으로 레이저가 이어지다니! 그들은 당연히 그 선을 따라가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체면 따지고, 평판 신경 쓰며, 품위만 생각하다가는 무슨 3박자인지 4대 요소인지 다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그 레이저를 따라갔다.
    그렇게 한 100미터쯤 갔나? 갑자기 레이저는 사라졌다. 청소년식 표현으로 바꾸자면 뭐야, 갑레사? 재미없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은 효과음을 들었다는 게 진짜다.
    레너드는 핑~! AB는 퐁~!
    그래서 레너드와 AB는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한동안 과학자네 연구실에 놀러가기로 다짐했다.
    아무도 믿지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전자는 극적인 영화고, 후자는 일상적인 드라마다. 그런데 그들의 호기심은 뭘까? 그렇다 말없이 곧 짜릿한 무언극이 시작된 것이다.



    10

    그 후 그들은 과학자네 연구실에 수차례 방문했다. 박사한테 연락하고 올 때도 있고, 무작정 몰래 방문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레이저를 볼 때도 있고, 못 볼 때도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여러 번 레이저를 따라갔다. 그들은 그게 혹시 무슨 양성자 연구소... 막 그런 시설과 비슷한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불규칙적으로 매번 레이저가 중간에 꺼져서 끝까지 따라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레너드. 저 끝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러니까! 그런데 우리가 꼭 저 끝까지 가서 확인해야만 하는 걸까?」
   「그건... 누가 시키지는 않았으니까 안 그래도 되겠지?」
   「그럼 여기서 우리, 멈출까?」
   「그럴까?」
   「그래도 조금 아쉽지 않니?」
   「그러니까. 뭔가 섭섭하긴 하다야.」
   「너도 그렇지?」
    다시 그 다음날이 됐다. 그들은 매번 연구실부터 레이저를 따라가다가, 오래 되니까 머리를 쓴다고 언제부터 마지막 지점부터 따라갔다. 그런데 거리가 얼마인지 측정하지 않은 채 대충 눈대중으로 따라가다가 오늘 처음으로 사람을 보게 됐다. 그러고 보니 레이저를 따라가는 탐사 도중 사람을 한 번도 못봤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낯선 아저씨가 그들에게 물었다.
   「여기서 뭘 찾고 계시나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뭘 따라가고 있어요. 여기 보이는 이 레이......」 
    갑자기 레이저는 사라졌다.
   「혹시 방금 전에 은색 레이저를 보지 못하셨어요? 바로 직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은색, 뭐요?」
   「아니 그러니까. 방금 전에. 저기 저쪽부터 이쪽으로. 색상은 은색. 모양은 그 왜 조명쇼나 콘서트나 클럽, 뭐 그런 데 가면 볼 수 있는 레이저 같은 거 있잖아요. 그게... 있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기 저 꼬마들이 놀고 있는 고무줄을 뜻하지는 않으실 테고. 혹시 영화를 보신 다음 뭘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 줄자로 뭘 재고, 강철선을 설치하고. 레이저요? 그런 거라면 못봤어요.」
    설마 그 은색 레이저가 레너드와 AB에게만 보이는 건 아닐까? 라면서 세한 느낌에 약간 어질어질했다. 그리고 그 아저씨는 어느새 사라졌다.
    그렇게 매번 실험실의 생쥐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다람쥐 챗바퀴 도는 것처럼 몸만 쓰다 보니까 그들은 어느덧 지쳤다. 그래서 그들은 머리를 쓰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인터넷으로 그 방향을 알아봤다. 그건 완전한 남극점을 가리켰다. 설마 지구동공설? 그러니까 아문센을 검색해야 돼, 아니면 마젤란을 흉내내야 돼! 아, 맞다. 평면 지도만 볼 게 아니라 지구본도 있구나. 그들은 또 열심히 제일 크고 정밀한 지구본을 영차 영차 알아냈다. 어떻게 어떻게 알아봤다. 박사님의 연구실이 지구본에서 그 반대편이 어디인가를 살펴봤다. 그 결과 어디인지 알게 됐다.
    자, 그러면 그 꼭지점 세 개는 정삼각형...은 아니고. 북극점까지 포함해서 최소 2개 이상의 도형을 그려야 하나? 그럼 혜성들의 공전 궤도까지 포함할까? 물리학은 작심삼일마저 힘든 종목이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보는 다큐멘터리라면 몰라도, 뭐가 어쩌고 어째? 꿈 깨자 라고 그들은 결론 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성적 사고는 진작 포기했다. 상대성 이론을 과연 어디에 적용할 텐가, 그보다 상대성 이론을 나는 알고 있는가... 우리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라고 생각했으니까.
    어제는 오늘의 꿈나무. 새로운 사랑은 내일의 이상한 희망. 그러나, 레이저 시스템은 무슨 세계 몇 대 불가사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11

    레이저를 그만 쫓기로 합의했지만 끝끝내 그들은 나 혼자, 딱 한 번만, 진짜로 마지막 한 번만 더 그곳에 가 보기로 했다. 물론 각자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그만 오자라는 합의를 내렸지만 어떻게 된 게 둘 다 미련을 선뜻 버리지는 못했으니까. 그래서 각자 다시 그 장소를 찾게 됐고, 그들은 현장에서 서로 마주치며 깜짝 놀라게 됐다.
   「늬가 여기 웬일이야?」
   「그러는 넌?」
   「나? 나는... 내가 먼저 물었자나? 넌 여기 뭐하러 왔는데?」
   「나? 나는 여기에... 널 만나러 왔을까? 아닌데. 우리는 우정이지 사랑은 아니지. 그럼. 그런데 왜? 내가 여기 왜 왔지? 솔직히 말해. 고백해. 어? 어서. 실토하라고. 내가 왜 여기를 왔을까? 너는 알고 있을 꺼 아니야. 그렇지? 알고 있지?」
   「뭘 알어, 알기는! 내가 왜 그걸 알아야 하는데? 어? 대체 왜 내가 그걸 알아야 하느냐고!」 
   「흥분하지 마. 흥분할 일이 아니야. 지구는 망하지 않아. 단, 지구가 망하기 전까지는. 외계인은 없어. 단, 외계인이 비밀리가 아니라 전면에 나서기 전까지는. 심지어 빅뱅이론도 일종의 가설일 뿐이야. 꽤 훌륭한 이론으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사실이냐 추론이냐를 따졌을 때 당연히 추론이지. 사실은, 아니라고. 응? 많이들 사실로 알고 있겠지만, 나도 귀찮으니까 그러고 싶지만 그건 원소기호 발견하는 거랑 전혀 다른 문제거든. 많은 일반인이 빅뱅이론을 믿고, 많은 전문가가 신뢰하지만 빅뱅이론은 말 그대로 단지 하나의 학설에 불과하다고. 응?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거든. 여러 후보들 가운데 가장 그럴싸한. 더구나 반박할 수 없는 헛점마저 적지 않아. 하나의 뛰어난 학술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대식. 곧 먼 미래에서 보자면 아마도 이럴 거라고. 위키리크스에 나오겠지. 1억년 전에는 빅뱅이론이 대세였다고. 응? 말하다 보니 주제를 벗어났지만, 어쨌든 레이저를 따라가도 어디선가 끝나. 그럴 수 밖에 없을 테니까. 일단 그 레이저는 직선이라고. 응? 그런데 지구는 뭐야, 둥글잖아. 우리가 이걸 언제까지 따라가서 끝에 뭐가 있다는 걸 확인해도, 아마 별거 없을 꺼라고. 이론적으로 생각해봐도 레이저는 점점 지면과 멀어지면서 붕 떠서 하늘로 가겠지. 맞잖아? 레이저는 직선, 지표면은 곡선이니까. 응? 그럴 수 밖에 없다구.」
   「너도 그렇게 생각해? 하긴 나도 그냥 아쉬워서 그냥 지나가던 길에 들린 것 뿐이야.」
   「그렇지? 우리 그러지 말고 영화나 보러 가자.」 
   「그럴까?」 
    그래서 그들은 영화를 보러 갔다. 저번에 봤던 연극과 같은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영화를 보러 갔다. 그러니까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2, 가 아니라 리메이크작 정도일 것이다.



    12
 
    레너드와 AB는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웅성웅성,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헤어지기 전에 인파에 섞여 그 말다툼인지 아니면 행위예술인지를 구경한 다음에 집에 가기로 했다.
   「아니 이게 누구요? 어... 맞죠? 맞네 맞어. 귀신은 속여도 내 눈은 못속인다니까. 대체 뭐가 그리 바빠서 통 얼굴을 안 비춥니까? 왜지? 왜일까? 깍쟁이인가? 아닌가? 너무헌 거 아니유? 한때 꽤 괜찮았는데. 막상 알고보니 인기 그거 별거 아닙디까?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말투가 좀 거친 듯 하오만 너무 고깝게 듣진 마쇼. 중요헌 건 사람 마음 아니냔 말이오. 에 그게 그러니까 평생 장사꾼으로 살았더니 남는 게 돈이 아니라 이처럼 거친 입담뿐이더라, 그 말씀입니더. 알겠습니껴? 거 마 어이쿠, 처량한 인생이지. 사랑은 모르겠고 인생은 더 모르겠고. 여자의 마음은 미스테리, 그런 여자를 좋아하는 나는 불가사의. 말이야 바른 말 아니오. 대화에서 흥정의 재미를 놓치고 살면 그건 일단 내 손해가 아닙디까?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 청춘 남녀가 연애를 하는데 밀담의 즐거움도, 밀고 당기는 재미도 없어. 그게 사랑이라구요? 에이~ 그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손 잡고 뽀뽀하고 거짓 고백을 하건, 손 잡기를 건너뛰건 찐한 사랑의 묘미를 모른다면 그게 뭐가 사랑이대유? 청포도 같은 상큼한 풋사랑이지. 하오나, 어떻게 그거라도... (뻔트 몸짓)
    아니 근데 아티스트 앞에서 내가 무슨 청승이야? 하하하하하. 이해하쇼 스타님이! 하하하하하. 그래도 한때 애정이 각별했는데 안 보이니 섭섭해서 그러요. 게다가 깨방정 깐족은 오히려 내 분야가 아니라오. 역으로 그걸 받는 넉살이 내 전공인데, 이거 이거 남의 옷을 걸친 느낌이랄까. 그야 어쨌든 추억의 스타니 뭐니 해도 아직 마음만은 현역 아니오? 보아하니 여전하시구만! 그렇다면 날 한 번 웃겨주시는 건 어떻소? 감도 잡고 긴장감도 즐기고, 일석이조. 아이고 얼마나 좋소. 나는 언제라도 공짜로 웃을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니까 그러네. 연배를 예상컨대, 이런 말씀 드려도 될려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뭔가가 밑에서 위로 슥 올라오지 않았을까요? 하하하하하. 히히히히히. 크크크크크.」 
    연상되는 건 랩배틀인데 보이는 건 영 애매한 동네 아저씨? 그래서 그래서,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이거 이거 어떡하나. 고맙다고 해야 할지 죄송하다며 양해를 구해야 할지, 썩 남감하구만요. 허허허. 그럴 게 아니라 우리 일단 명령인지 부탁인지 그거 먼저 정합시다. 선상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로 보아하니, 음 가만 있자. 이 아우님이 애원으로 오해하지는 않겠소이다. 거기꺼정 좋아요. 네. 딱 좋아요. 기럼요. 헤헤. 그 정도도 못하면 어디 알아봐줘서 고맙다며 몸둘 바를 몰라할 자격이나 있겠소? 나도 누구 보고 뭐가 그리 바빠서 일찍도 숨어버렸냐고 비꼬아야 정상 아니겠소. 그러니까, 이건 어떻겠소? 만약 제가 형씨를 웃기면 형씨가 내 소원을 하나 들어주고, 제가 형씨를 못 웃기면 형씨가 내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기 말이오. 자신있소? 괜찮은 방법 같지 않나요? 맹숭맹숭하게, 예? 간지럽게 동네 꼬마들마냥 우리가 언제까지 남의 다리나 피나게 긁으면서 막 고라고 놀 수야 없제이! 응, 아니 그렇소? 아니 왜... 다시 생각해보니 똑부러지게 요구할 게 아니라 애처롭게 읍소하고 싶소? 아따 그라요? 참말로? 에헤 정당한 간청이라... 허허, 글쎄올시다. (기다란 수염도 없으면서 허공에 손짓은 무슨!) 그러면 나도 더더욱 바짝, 어? 빠싹 엎드리겠소. 내가 제일 잘하는 게 이건께. 시방 그게 뭐가 어렵다고. (시늉만 살짝 다시 원위치) 그러니 자 어떻게 물팍이라도 꿇으리요? 말만 하씨오, 그대 정녕 원한다면! 내 이래봬도 어딘가에서는 아부의 화신으로 통한다오. 허허허허허. 내 옆에서는 그 어떤 아이스크림도 살살 녹아들고, 나는 사탕도 애들처럼 막 쪽쪽 빨아먹고 쪽쪽쪽 핥을 수 있소. 여심이라면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쥐락펴락 쥐락펴락! 응? 일도 아니죠. 에이~! 사랑과 행복은 이 손 안에 있소이다. 아 봐 보시오. 똑똑히 관찰해보시란 말이오. 이 내 손바닥이 부처님 손바닥이랑 완전 똑같이 생겼지 않소? 거짓말 아니라니까 그러네. 게다가 내 코는 피노키오요 족보 따지면 그 옛날 아더왕, 아니 아니 알렉산드리아 대왕이랑 나랑 아마 직계인가는.. 몰라도 방계쯤은 거뜬할 걸요? 내가 그처럼 왕년에 펜싱도 했고, 전직 정보원 출신이란 말이오. 뭐니 뭐니 해도 내 주특기는 여심의 정복이구요. 허허허허허. 이러니 내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허요. 헤헤. 그러든 어쩌든, 내가 마음 먹고 형씨 가려운 곳을 한번 긁어볼까요, 긁어보지 말까요?
    다만 오늘은 도저히 이 내 맘이 저기압이라서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겠소. 나중 그럴 기회가 있을려나 모르겠소만, 글쎄요, 어디 사람 인연이란 게 내 마음대로야 되나. 차차 때를 기다리다 보면 어떻게 우연히 마주칠지도 모르는 것 아니겄소? 어쨌든 풍자의 기준은 각기 다를 테니 이해는 하요. 내 뭐헌다고 일부러 곡해하겄소. 충분히 납득이 된단 말이오. 나도 한때 알아주는 투정꾼이자 응석쟁이였소. 불평객으로써 소문이 자자했는데, 감히 누가 나한테 명함을 내밀 수 있었겠소. 어림없는 소리지. 당시에는 말이외다. 먹기 싫은 밥에 재나 뿌리지 말지 라는 심술,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라는 시절.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소! 같은 사람으로써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이오. 그런데 애들이 떼를 쓰면 귀엽고 예뻐보이지만, 우리 어른들도 그럴까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람들 불만의 단골메뉴, 뉴스의 만년 헤드라인, 운전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뭔가 올라올 듯 하다 슬며시 잠재워지는 괜한 훼방감이라고나 할까요? 살다보면 괜히 도덕군자로써 칭찬 받고 싶은 시기가 있으면, 당연히 내면의 짜증을 어떻게든 겉으로 실현시키고 싶은 때가 왜 없겠소! 그러니까 그 행동화를 이왕이면 좋게 하자 라는 뜻에서, 그래서 우리가 뛰고 치고 달리고 춤 추고 노래 부르며 그러는 것 아니겠소? 그 모든 심리학 전문용어들. 이 몸도 응당 수없이 경험해봤지 어떻게 처음일 수 있겠소. 만약 처음이다면 그 거짓말을 과연 누가 믿는단 말이오. 아니 그렇소? 다혈질이 귀여운 게 뭐냐면, 네? 요만~한 일에만 분개해요. 네? 요만~한 일에만. 험담가들이라고 뭐가 다르겠소. 그분들도 요만~한 일에만 따따부따 떠들죠. 자기 빼고는 뭐든지 다 나쁘다는 거죠. 자기 빼고는. 그처럼 하수는 어설퍼요. 네, 몹시 어설프죠. 그치만 어설프면 재미가 없어요. 재미가 있어도 조잡해요. 애매한 허세? 글쎄요. 어중간한 사이코패스? 좀 그렇죠. 소심한 기분파? 귀엽다니까요. 참다 참다 도저히 못 참고 뚜껑이 열릴 때, 바로 그 순간조차 전광석화처럼 견적 내고 계산 끝내서 딱 괜찮을 정도로만 화를 풀죠. 그치만 다음을 생각해야 하니까 그건 당연히 좋은 거죠. 허허허. 나라고 뭐가 다르겠소? 공부해서 알거나 살면서 깨닫거나, 국어사전을 펼쳐보면 몽니라는 낱말이 있죠. 받고자 하는 대우를 받지 못할 때 내는 심술. 그걸 한 단어로 몽니라고 하죠. 그런데 몽니를 친구한테 부리면 그건 뭐 괜찮아요. 그럼요. 또 재밌어요. 어떨 땐 필요하고 절실하기까지 하단 말이오. 그런데 그 대상이 바뀌면 뭐겠소? 골 세러모니지 뭐겠냔 말이오. 구시대적 조직 문화의 대표적 명언이 뭔 줄 설마 모르시진 않겠죠? 잘 아시겠지만 제가 아는 체, 알은 체, 허허허. 이 딴따라의 깨방정 재롱을 부디 용서해주기 바라오. 그건 바로 조직에서 불평-불만 많아서 좋을 거 하나 없다! 그거요. 말 그대로 구시대적-이었을 때 말이요. 구시대적? 우리 역사 얘기 한번 할까요? 에이, 하지 맙시다. 학교 다닐 때 우리 정말 지겨웠고 공부도 못했는데 해서 좋을 게 뭐 있겠소. 아, 본인은 그랬는데 형씨는 달랐겠죠. 일부러 묻어갈려는 의도는 없었소. 허허허. 아무튼 거창한 그런 거 말고, 개인의 역사가 뭐냐, 그건 바로 인생이지요. 사소한 혼잣말에, 지나가는 넋두리에, 가벼운 하소연에 아마도 내가 너무 심헌 거 같소이다. 그렇지만 말이오.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걷다가 혹시 개미를 밟지나 않을까 하면서 저절로, 원래 그랬긴 했지만서두, 유난히 걸음걸이가 더더욱 신경 쓰이더란 말이오. 오늘 비가 오면 우산을 쓰겠지만 때로는 비를 맞으면 기분이 좋아요. 난 원래 비 맞는 걸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그러다 문득, 혹시 이건 천사의 눈물일까? 아니면 이 세상 사람들의 눈물일까? 라는 생각이 든단 말이요. 그럼 또 멈칫하겠죠. 내가 연못에 던진 돌 하나. 그거 아무것도 아니지만 개구리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겠죠. 왜 펜은 칼보다 강하다란 말이 유명하겠소? 정작 심한 건 말이니까 하는 얘기 아닙니까. 살면서 사람이 실수도 하고 한눈도 팔며 실패도 하지 왜 안 하겠소. 그런데 굳이 그걸 일부러, 또 꿋꿋이, 심지어 억지로 반복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오. 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그것도 밥 먹듯이? 그건 아니오. 한번 가면 오지 않는 인생,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란 말이오. 물론 이건 모두 내 탓이오. 명백히 내 잘못이란 말이오. 그러니 대체 왜 이렇게 얘기가 길어졌는지, 나 편허자고 이해를 바라는 소생의 복안. 아마도 눈치 채셨겠죠? 우리끼리 모른 체 하지는 맙시다 그려. 그게 숙녀에게 향하면 애정이요, 줄거리가 엮이면 사연이고, 이권이 끼면 꿍꿍이가 되니까 말이오. 헤헤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이해하요. 풍자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알고 있소. 상황과 분위기를 일부러 비꼰다? 그러기 싫소. 충분히 납득이 된단 말이오. 네. 그럼요. (쯧쯧쯧) 이 몸이 그렇게 속좁은 남아는 아니란 말이오. (으잉) 아 조롱이든 뭐든 웃겨야 고수 아닙니까! 아니 그렇소? 물론 막말을 권리라고 생각치는 않으실 테지만, 만약 어쩐다면, 막사는 걸 책임지라고 해서도 안되겠지요? 아니 이치가 그렇지 않소이까! 저는 허접한 푼수에 지나지 않소만, 그게 또 절 막 무지 좋아하는 마귀가 있단 말이오. 한두 명이 아니여. 일단 그 중의 1인자. 그런데 문제는 그 친구가 들쑥날쑥하다는 것. 어떻게 안돼. 도저히 안돼. 어? 아 말도 말어. 영 못 말린단 말이오. 아이디부터 '묻지마'라니까 그러네. 아아 몰라 몰라 몰라. 다 됐고. 말도 마시오. 그런데 이게...... 뭐여! 아니 어떻게...... 벌써 그 녀석이 선상님 두 어깨를 밝고 있구먼유. 앗 깜작이야. 쟤가 언제 벌써...? 아마도 최근 승모근이 솔찬히 뻐근하셨을 껀디. 그런디 여태 어떻게 참았디아? 사람이 너무 독하믄 못쓴 것이여. 그람~!」 
   「(궁시렁궁시렁)~!」 
   「뭐, 뭐요? 아하! 이제 알겠네 이제 알겠어. 결국 형씨는 원래 심성이 그런 양반이 아니구만 그래. 하긴 내 반응이 심한 것 인정하요. 문제는 나였어! 아, 나라고. 아무튼 옆에 친구분인지 뭔지 이방을 달고 다니셔서 그렇구먼. 아니 내시인가? 아니야 이방이야. 그래 이방. 콤비를 잘못 결성하셨구먼유. 혹시 조수께서 나 땜에 신분 격상을? 그야 뭐 내 알 바 아니고. 그런데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겠다. 내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어요. 초음파로 읽었는데 어떻게 놓치겠소. 최면술로 말을 이끌어냈단 말이오. 아니 생각만 하셨을까? 아니야. 딱 걸렸거버렸거든. 그러니까 듣자하니,
    웃기지도 못할망정 지가 우리 막사는 데 뭐 보태준 거 있나, 라고 하셨죠?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이 아름다운 말을 어찌 감히 보잘 것 없는 이 소생 혼자 독점하오리까. (미성-가성-진성-흉성-육성-두성-비성이 아니라 이건 복식호흡에 따른 발성. 하긴 표정부터 심상치 않았음. 이를 테면 대극장용)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아니면 웃깁니까! 허허허허허. 저기 저 예쁜 언니 말씀하시네요. 그녀는 과연 뭐라고 했을까요? (딱) 그렇죠, 나만 당할 수 없지! 허허허. 저기 있잖아요. 유감스럽게도 내 눈은 천리안이요 청력은 개미의 감탄사까지 엿듣는다오. 왜, 못 믿겠소? 이 냥반이 속고만 살았나, 내가 여태 팔아넘긴 은하계가 몇 갠데 그래! 너무 겸연쩍다고 얼굴 빨개지시면 거 참 적잖이 민망하네요. 불그락푸르락, 불그락푸르락? 커졌다 작아졌다 커졌다 작아졌다! 어허 뚤레뚤레하시는, 저기, 저, 네. 선생님 말이오. 네. 남자답게. 네? 시선 집중되니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잘 모르시겠다구요? 관심 받으면 좋지 뭘 그러요! 이왕이면 다홍치마요, 봄 조개 가을 낙지라 하지 않소이까! 아 뭘요? 지금 이렇게 멍석 깔아졌을 때 놀지 언제 논다요? 안 그라요? 선상님! 제 눈을 피하지 마씨오. 허허허.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니까요. 제 속마음을 속 시원히 말씀드리자면, 보태주지도 재롱을 부리지도 못해서 죄송헙니다. 제가 원래 재미없는 사람인가 봅니다. 그런데 있잖아요. 그럼 만약 응애응애 딸랑딸랑 물심양면으로 제가 지존께 뭔가 보탬이 됐다면 어떻겠소? 그럼 반응이 어땠을까 궁금하지 않소이까? 그렇죠. (딱) 그럼요. 왜 아니겠어요. 제가 뭔가 성의 표시를 한다면 또 할 말은 뻔하지 않냐 이 말이죠. 그 말은 대체 뭘까요?
    뭐긴요, 누굴 거지로 아시나!-겠죠. 그럼요.
    허허허. 맞나? 맞겠지! 허허허허허. 뭐시여, 아닌가? 아니긴 뭐가 아니여! 으하하하하하하. 돈 아까워서 영화는 어떻게 보셨을까! 귀찮은데 사랑은 왜 하실까. 아울러 처음에 주문하셨죠, 자 한번 웃겨보라구요. 나도 하나 물읍시다. 내가 대체 왜 당신을 웃겨야 하는데! 라~고 어떻게 따질 수야 있겠습니까. 허허허. 허허허허허. 원래대로라면, 저는 단지 유명인으로 착각허시고 알은 체 해주시는 건 그냥 흔한 일인데, 제가 흉내도 내고 최대한 하는 데까지 해야 정상입니다. 그렇죠. 다시 말하자면 저는 형씨께서 예단하시는 그분이 아니라, 단지 그분을 닮은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요. 이거 참 송구스럽게 됐구먼유. 그렇지만 그게 꼭 제 잘못만은 아니지 않나요? 착각하신 분 눈썰미도 한번쯤 의심해볼 만 허다, 그거라구요. 네. 그럼요.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여태껏 이런 사소한 일로 말을 이처럼 많이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진짜로?) 완전 처음이라구요. (정말로?) 그러니까 초유의 사태. 그렇게 여기서 저기서 뭔가를 들었어도, 해명을 하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든, 차라리 연기하는 게 재밌었단 말이오. 장단 맞춰드리는 게 뭐 어렵다구요. 더더군다나 감쪽같이 속이지도 않았어요. 나중 무조건 함께 웃었죠. 네, 해피엔딩! 저 어디 가서 막 험한 말 듣고, 뒷얘기 부풀어지는 그런 사람 절대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걸 어쩌죠? 누구 아니시냐는 착각을 놓고 3년 동안 들을 걸 오늘 단 하루에 몽땅 들어버렸지 뭡니까! 딱 1일에 말이죠. 저도 저죠.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 멀었어요. 사람 될려면! 철들려면! 농담이 고급스러워질려면 말입니다. 그래도 참 신기한 게 뭐냐면, 거 어째 열렸던 뚜껑이 따따부따 따따부따 말을 막 장황하게 나불대다보니 저절로 닫히는 거 있죠? 참으로 신기허군요. 허허허허허. 공갈젖꼭지야 뭐야, 참 나! 결국 정작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저고, 미안해야 할 사람 역시 저구만요.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정식으로 인사나 합시다. 사람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디 이거 이거 보통 인연이 아니구먼유. 전생에 우리가 혹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뭐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죠. 네. 그럼요. 아 농담이고, 나 여자 좋아허요.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린단 말이오. 헤헤. 일단 제 소개 먼저 올리겠소. 나 장사꾼되는 사람 누구올시다......」 
    끝으로 레너드와 AB는 뭐랄까 은근 기대했던 드라마 대사는 못들은 채 소란스런 길거리 구경을 마치고 헤어졌다. 즉 장르가 코메디나 드라마였다면 그 말이 나왔어야 했다. 첫째, ...이거 왜 이래! 둘째, 뭐가 어쩌고 어째? 그들은 두 손 두 발 다 든 채 무슨 얘기를 하는지 홀딱 빠져버렸지만, 그 말만은 못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분들의 연기, 좌중의 분위기, 두 친구의 기분만 봐서는 그게 고대 그리스극인지 철학 드라마인지 아니면 시골 시장판 말다툼인지 통 분간이 어려웠다.
    하지만 옅디옅게 뭔가 느낌이 왔다. 저들은 어쩌면 일당이 아닐까 하는! 곧 그건 아마 연극,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2탄? 아니, 벌써 영화 3탄 홍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합리적 의심은, 타당한 증명 과정을 거쳐, 유익한 성과를 얻어, 이론이 된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물론 그건 머머술일 수도, 머머설이랄지 머머증은 물론 머머업이자 머머가도 가능할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승산이 있으니까. 아마도 그게 그리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결국 AB는 집으로 가던 중 생각했다. 그 양반과 통성명이라도 나누며 호형호제라도 하자랄 껄 그랬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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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아마도 레너드가 연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녀석은 이미 애들 장난 같은 레이저 따라하기를 잊었고, 마음이 떠났을 것이다. 그럼 당연히 AB도 나중 이 시절을 회상하며 술회하듯 구술자로써 허구를 쓰지도 않을 테고. 그래서 그는 갑자기 새로운 관심사가 허무하게 끝나버렸기 때문에 어디에 마음을 기대야 할지 몰라 했다. 그 일이 그렇게 대단하고, 매우 즐겁고, 아주 기쁘지는 않았으나 뭔지 모를 유별난 애착이란 게 있었나 보다. 하트 뿅뿅, 사랑의 윙크에 기대감 뿌잉뿌잉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잔재미는 마땅한 행복감이었다. 드라마처럼 많은 걸 거는 모험이 아니라 출퇴근하면서 쪼잔하게 얼쩡거리는 흥미라는 게 진정 있긴 있었다는 걸,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AB는 아쉬움을 달래며 할 수 없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피로한 일하기 재미없는 놀기, 피로한 일하기 재미없는 놀기.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14

    AB는 그 동안 색다른 원숭이 마술을 배우지도 않았고, 신선한 염문을 캐내지도 않았다. 의뭉스러운 기쁨이 떠나갔다고 무작정 땅을 팔 수도 없었고, 괜히 전봇대에 올라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치고 때리고 달리고, 그건 이미 옛날에 많이 했고 또 귀찮았다. 그처럼 끔찍스러울 만큼 환상적인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 그는 친구를 만나려고 시내에 나갔다.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에밀리와 로즈마리를 만나기 위해서.
    어느 덧 공간 이동을 했고, 저기에 에밀리와 로즈마리가 보였다. 그런데 그 옆에는... 뭐야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친구가 있네?
   「너네들 어떻게 된 거니?」
   「어. 왔어?」
   「아, 아직 말 안 했구나. 이렇게 사귀고, 저렇게 사겨.」
   「그런데 농담이야.」
   「뭐 농담이라고? 나 차인 거야?」
   「아 뭔 소리야?」
   「몰라.」
   「나도 몰라.」
   「그러니까.」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아 나 이런 정말, 기가 막혀서. 맙소사, 뭐야 정말? 나 빼놓고 다 뭐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번에 오빠 그 레이전가 뭔가 있잖아. 그 얘기 좀 해 봐 봐 봐.」
   「늬가 그걸 어떻게 알아?」
   「레너드 오빠가 얘기해줘서 알지. 그런데 있잖아. 오빠는 딱 거기서 포기했지?」
   「야 레너드. 그럼 넌 거기 또 갔어? 가지 말자며! 늬가 그랬잖아?」
   「어떻게 어정쩡하게 그냥 끝낼 수가 있니? 우리 사전에 포기란 없어. 물도 아니고 술도 아니고? (손가락 노노노노노)」
   「그래? 그래도 돼. 어차피 나는 주연감도 못돼고 희망의 주역이 될 생각도 없었어. 내가 정말 알고 싶었던 건 그런 거였어. 차라리 이럴 게 아니라 귀여운 급여를 지출해서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면 어떨까 라고. 여유가 되면 난 정말 그러고 싶었어. 그런데 마침? 나야 좋지.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알려줘? 알려줄까 알려주지 말까? 로즈마리.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아 쫌! 뜸 들이지 말고. 요점만 간단히. 응? 너 왜 그런지 몰라도 애가 이상해졌어. 전에 안 그랬잖아. 좀스럽게 그러지 말고, 아 진짜 궁금하니까 딱 줄거리만 간략히. OK?」
   「OK. 말할께. (침묵)」
   「뭐야? 생각해? 뭘 지어낼려는데? 나 간다?」
   「알았어 알았어. 말할께 말한다고. 거 참! 그거야. 그거라고. 바로, 중계소! 중계소가 있었어.」
   「중계소라고?」
   「응. 중계소.」
   「중계소가 뭔데?」
   「내가 말했잖아. 아니 늬가 말했니? 레이저는 직선이고 지구는 둥글다. 따라서 우리는 레이저를 끝까지 따라갈 수 없다. 고로 여기서 접자 라고. 그래서 넌 포기했고, 난 끝까지 따라 붙었고. 맞지?」
   「어. 그렇지. 맞어.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런데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이 참. 중계소. 아 중계소.」
   「아 맞다. 그렇지. 중계소. 중계소라는 있었어. 양성자 무슨 연구소 막 그런 거 들어봤지? 규모가 대단한 그런 연구소에서 중성자 가속이니 뭐니 해서 엄청 길다란 통로가 딱 있고 막 그런 거. 그걸 그 과학자 양반이 따라한 게 아니었어. 왜냐하면 과학자 양반은 곡선이 아니라 직선을 추구하는 몽상가니까. 그는 결국 상남자였거든.」
   「곡선이 아니라 직... 뭐라고? 아 그게 대체 뭔 얘기야? 좀 알아 듣게 설명을 해봐봐봐.」
   「뭐냐니! 들어보라니까 그러네. 왜 얘기를 중간에 막 끊고 그래? 너는 지금 모범생, 얘는 꿈꾸는 소녀, 나는 연설가이자 내 안의 그분은 기도하는 아동. 응? 저 상상하기 좋아하는 숙녀를 보라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서 내 얘기를 애청하고 있잖니. 왜? 경청자니까. 마이크는 내가 쥐고 있다고. 호호호. 그래. 요점만 말할께. 줄거리만 말이야. 알고 봤더니 그분은 글쎄 과학자가 아니라 사업가였어. 너 빛의 속도를 어떻게 측정하는지 아니? 최신 기법은 알았다가 아마 잊어먹었을 꺼야. 아님 관심 없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만 최초 기법은 아마 대충 기억하고 있을 걸? 그거야. 그거라고. 그 과학자, 아니 사업가는 그 방식으로 레이저를 중계소를 통해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사업설명회를 열었더라고. 레이저를 반사, 반사, 반사, 반사 계속해서 에너지를 생산한다는 주제로 말이야. 그러면 당연히 사업계획서도 있었겠지? 그 다음은 뭐야, 사업 자금이 모일 거라고. 그럼 어떻게 된다? 조직이 결성되겠지. 애플 본사 구조식이든 토너먼트식이든 일종의 네트워크 사업 체계가 부흥할 준비가 마련되는 거라고. 응?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겠어? 이제 이해가 돼?」
   「아, 그런 거였어?」
   「그래. 그랬다니까.」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넌 그걸 왜 알고 싶은데?」
   「왜? 친구니까! 그 정도는 얘기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 이거 왜 이래, 쪼잔하게!」
   「알았어 알았어. 얘기해줄께 얘기해줄께. (침묵)」
   「아 정말!」
   「알았어. 정말로. 진짜로. (딱) 내가 그걸 어떻게 안 게 아니라, 그건 바로 내 추측이 그렇다는 말이야. 단지 내 예상일 뿐이야. 그게 다야.」
   「뭐라고? 참 거창한 사업계획을 일찍도 속단한다. 아휴 이걸 정말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이 자식이... (설레설레)! 이런 능청꾸러기가 뭐가 좋다고 여자들은...」
   「오빠들 뭐라는 거야?」
   「설마 내가 꼴도 보기 싫은 건 아니지?」
   「잡것.」
   「속물.」
   「그런 말은 당치도 않소.」
   「당치도 않긴 뭘 당치도 않아?」



    15

    AB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일까? 정답을 모두 나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단연 NB다. NEW BOY! BAD BOY일 리가 있나. 그러면 뉴 보이가 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시적이라면 무도회장이 있다. 좀 더 멀리 가면 여행이 있고, 낭만과 행복은 물론 쾌감이라는 보너스가 두둑한 사랑도 있다. 그러나 여행은 갔으면 돌아와야 하고, 사랑은 좋아도 진정해야 한다. 그럴 수 밖에 없으니까. 그렇지만 말이야, 꼭 뉴 보이가 되야만 하는 것일까? 방법이 목표가 되면 뭐 어떻다라지만, AB에게는 그 방법이 곧 NB가 될려는 목적이었다. 때문에 실상 그는 뉴 보이가 되든 안 되든 별 상관없었다. 그래. 전혀 상관이 없었다.
    따라서 AB의 결심은 이와 같았다. 머머-되기가 아닌 머머-하기에 집중! 피터 드러커식 성과도 좋지만 중세의 흑기사가 되어 기다란 창의 길이를 꼭 비교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럴려면 철가면도 써야 하고, 방패와 함께 명마는 기본인데? 게임에서 아이템 사듯이 뭘 해도 이렇듯 황금은 우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것도 지독하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본격적으로 경제학을 공부한다? 얼마 못 가 포기할 게 뻔하다. 그렇다면 동기 부여 직종에 도전한다? 나중 괜찮은 인문교양서 한 권을 출간하던가, 뚝딱 칼럼 하나 쓰는 걸로 대신하자. 고로 결론은 나왔다. 바로, 농부처럼 일하고 플레이보이처럼 놀기!
    기쁨을 만끽하기에도 짧은 인생, 결국 삶이란 이런 것이다. 가령,
    개는 닭을 쫓는다. 닭은 지붕 위로 올라간다. 그렇다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 볼 수야 있나. 개는 재빨리 목표 변경.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에라 놀이공원에나 가자. 그래서 개는 쳄발로와 리코더 음률이 가미된 최신 유행가를 들으며 회전 목마를 탄다. 그런데 회전 목마는 개가 마음에 드네? 본지 안지 얼마나 됐다고, 홀딱 반한 거지! 그러니까 목마는 개를 품었고 그들의 사랑은 트로이의 목마가 된다. 트로이의 목마가 무엇인가? 둘 중 하나다. 오디세우스의 지모, 아니면 바이러스! 뭐야 결국 우리네 삶이란 신화 아니면 인터넷 바이러스라고? 이런, 젠장! 픽션은 쓰기 어렵고, 허풍은 통 늘지를 않는 데다, 그러니까 나는 바이러스를 만들 수 없다. 고로 신부들러리나 원 없이...? 저런!
    결론은, 놀면 뭐하나!
    그래서 AB는 루저의 특명으로 남자의 마음에 대해서 칼럼을 썼다.



    16

    제목: 남자의 마음이라는 미스테리
    내용: '늬 말마따나'라는 숙어를 애용하는 남자. '솔직히'라는 부사를 유달리 총애하는 여자. 그 둘의 호감도가 일치하는 걸 사랑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랑조차 '나도'에서 '나는'으로 바뀌는 변화의 바람을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의 영심이는 입버릇처럼 '내가 봤을 때는'라고 말하는 아저씨를 절묘히 피했다. 어설픈 눈독은 역시나 후보군에도 들지 못했다. 그런데 어쩌다 그녀는 '우리는'화법에게 딱 발목 잡힌다. 다시 그 세레나데의 결실로 머머2세가 태어난다.
    그처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슈퍼맨 주니어는 J.K. 롤링은 읽었는데 톨스토이 읽기는 건너뛴 채 성장한다. 어느 세대가 동화와 동요 단계를 일찍 떼듯이 말이다. 그래서 녀석은 테크놀러지 회사 대표들에게 뭘 발라주라고 편지를 써서 이간질시킨다. 그런데 우연잖게 하나 같이 페인트공들은 또 알았다면서 궁짝을 맞춰 답장을 쓴다. (그 결과는 관심 없음?) 그러다 그 친구는 어느 눈부신 숙녀를 알게 됐다. 그들은 일단 우정으로 시작한다. 그녀가 묻는다.
    왜 고전음악의 제1전성기가 끝났는 줄 아느냐고. 지금 세상에 고흐가 탄생하고 피카소가 길러지냐고. 그래서 청년은 또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자신이 기분파나 잔지식파가 아니라 낭만파 지성인임을 딱 입증한다. 마침 어제 읽은 인문교양서에 참고할 만한 대목이 운 좋게도 나왔으니까. 그러니까 뭐라고 답했을까.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모차르트급 신동이 우리 앞에 출연하지 않는 원인은 학문의 후퇴도 재능의 부재도 아닌, 바로 고전음악이라는 분야의 인기 하락 때문이라고! 시장의 요구 때문에 오락산업이 일부러 순수예술을 밉보았을 수도 있는데, 소비의 시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고전음악은 올림픽 비인기 종목처럼 대중들에게 뒷전이라는 말이군. 다른 말로 하자면 이렇다. 딴따라에게 한량의 3박자와 최소 행복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그분들 가난한 예술가의 총량이 슈퍼스타 지망생의 반의 반의─반의 반의─반의 반틈만 되어도 충분히 승산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만 된다면 '멘델스존 : 바그너'라는 결혼 행진곡의 굳건한 양강 구도는 너끈히 깨트릴 수 있다는 뜻이다. 청년이 어제 읽은 인문교양서는 알아보는 안목이 많지는 않지만 뭘 좀 아는 사람들은 결코 부인하지 않는 교양서다. 그런데 하필 청년은 다 놔두고 거기서 딱 애매모호한 미세 헛점을 인용했다니, 맙소사! 그 얘기를 들은 아가씨왈,
    그러니까 걸출한 고전음악 작곡가를 꿈꾸는 아동용 제비복들의 열망이 미미하고, 그 시장에 대한 애호마저 단지 귀여울 뿐이라고? 그래서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몰라도 (고전음악의 제2전성기를 리드하는) 불세출의 작곡가는 명맥이 뚝 끊겼다고? 나 참! 그 업계에 발을 살짝이나마 담궈봤던 여자친구를 대체 뭘로 아시나. 순진한 문학 소녀로서 당찬 숙녀로 성장한 여인이 봤을 땐 이렇다. 그거 너무 야심 찬 허세꾼에게 잔꾀를 사사 받은 듯한 발상 아닐까? 라고 그녀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건 한마디로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는 말이니까! 야무진 언변에 따른 자신감 넘치는 자세는 좋다만 그저 당돌함 이상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고전음악도 당시에는 최신 유행가에 지나지 않았다는 건 사실. 허나 이렇듯 논쟁에 불리한 사실만 추리는 건, 반박의 기록이 풍자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 그런즉슨, 현재 음악산업의 역량과 자원을 고전음악 분야로 충분히 집중시키면 모차르트급 천재는 틈틈히 나올 수 있다고? 못 나온다에 내... 도대체 뭘 걸어야 할까! 고전음악 제1전성기에게 천운의 시기였던 당시에 비해 현재는, 기술과 자원과 도전자등 뭘로 보나 당시에 비해 천문학적 재원이 투입됐고 투입되며 투입될 것이란 걸 누가 모르겠소. 딴따라로 폄하하는 건 아니오. 하오나 여러 장비와 함께 키보드를 두드려 유행가를 만드는 그런 직업 작곡가가 아니라, 필기구로 악보에 음표를 그리면서 곡을 쓰는 명문대 (고전음악) 작곡과 학생들께 과연 그걸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볼까, 물어보지 말까? 답은 들으나마나! 할 수 있는데 안 하거나 필명을 고집하는 뚝심, 나는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없어! 전자와 후자가 별반 차이 없다는 얘기자나? 거의 똑같다는 말이자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난 관심 없어. 유명세로 빚어지는 귀찮음, 인기 때문에 저절로 따라오는 호사와 풍요와 사치? 전혀, 부럽지, 않아!
    하긴 에르메스를 입을 수는 있는데, 에르메스가 될 수는 없다는 원초적 비련. 자손심은 센 데 반해 성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기 힘들다는 때 이른 체념. 사실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페라리를 아무나 타나? 영화감독 아무나 하고 숙녀들의 인기를 누구나 독차지 하냔 말이다.
    (참고로 잠깐만. 왜와 어떻게는 모르겠지만 최근 읽은 <고전음악이라는 분야의 인기 하락......>라는 구절이 등장한 어느 인문교양서. 근래 읽은 서적 가운데 제일로 흡사하다고 느꼈다. 무엇이? 문장 다음에 문장. 어휘 다음에 어휘. 놀랍도록 번쩍 스치는 그 뭔가가 대체 뭔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나와 손금, 귀모양, 지문등이 매우 흡사한 사람을 만난 기분이라고나 할까. 거 왜 보면 똑같은 구두랄지 똑같은 귀걸이를 찬 사람을 만나는 거보다, 습관과 필기구와 엑세서리까지 일치하는 굉장히 특이한 느낌. 쓰잘 데 없는 잡담은 여기까지)
    그래서 결론은 이렇다. 날마다 화장을 하고 또 하고, 거울을 보고 또 보고. 여자의 삶은 결코 쉽지 않고, 그녀들 세계는 남자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치열한 뭔가가 있다. 그 이치에 인간적으로 동의한다면 매일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커졌다 작아졌다는? 그러므로 여자도, 남자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변호한다고 해서 지나치게 수컷 공작새만 편드는 건 아니라는 것이 본 칼럼의 진짜 결론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여자도 남자를 이해해야 한다─요점은 단지 칼럼의 얼굴 마담일 뿐이니까.



    17
 
    일단 경쟁자는 스스로 기권했으니 만약 발견만 한다면 보물은 AB의 독차지일 것이다. 물론 뭔가 고생한 대가를 보상해주는 대단한 실체가 드러난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AB는 포기했던 모험심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레이저를 끝까지 따라가는 지독한 탐험을 강행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연구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같은 레이저를 따라가기 위해 다시 그곳으로 갔다. 그는 일할 때는 '재미없음' 주위에서 빈둥거렸고, 놀 때는 '심심함' 근처에서 알짱거렸다. 그런데 이제야말로 눈빛이 초롱초롱해지면서 마침내 활동을 시작한 좀비처럼 김빠진 맥주 같은 젊음을 입증하기 위해 애쓰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곳에 도착했다.
    레너드의 말마따나 웬 중계소 같은 기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물론 그날도 여느 때처럼 따라갔던 은색 레이저는 시나브로 종적을 감췄다. 이제 어떡하지 하면서 고민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AB는 친구 제라드를 만났다. 오오, 마법사의 아들 제라드! 그들은 언제부터 친구가 됐던 것이다.
   「늬가 여기 웬일이니?」
   「나? 블랙홀이 발명됐다 그래서. 아니 그건 가전제품이 아니니까 발명이 아니겠구나. 그럼 뭐라고 해야 돼지?」
   「그걸 왜 나한테 묻니?」
   「그렇군. 그럼 인공지능한테 물어볼까? 어쨌든 난 말이야. 블랙홀이 실험으로 증명됐다 그래서, 그걸 목격하러 왔어.」
   「그래? 그런데 그 첩보는 어디서 입수했는데? 믿을 만한 곳이야?」
   「뭐야! 그걸 장난도 농담도 아니라 심각한 탐구 활동으로 가정하는 건 늬가 처음이야. 고마워. 아아 감동이다.」
   「뭐라고?」
   「아니 그게... 난 그냥... 그런데 너는 여기 웬일이니?」
   「나? 내가 아는 어느 연구실이 있는데 말이야. 그 어떤 레이저가 이쪽으로 향하길래, 계속 따라왔을 뿐이야. 음. 그렇지. 그렇다고 그 불빛이 타임머신과 관계되는 뭐 그런 심오한 그런 건 아니고. 그게 다야.」
    AB는 현실을 떡 주무르듯 주물러 환상의 세계로 바꿀 수는 없었다. 믿었던 제라드마저 그 어떤 속임수도, 입이 떡 벌어지는 요술을 선보이지 못했다. 비길 데 없이 허탈했고, 그래서 오히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만족했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경외하는 태도와 미몽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따라서 잘된 일이었다. 귀엽도록 변덕이 심한 꿈, 도저히 측정하기 어려운 욕심처럼 새어져 나온 레이저는 단지 새어져 나온 게 전부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웬 중계소 같은 이상한 시설에서 레너드를 만났을 때 AB는 보았다. 저기 저 멀리 무지개가 떠 있는 것을. 와 정말 오랫만에 보는 무지개구나,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혹시 그가 찾는 레이저 따라가기는 나방이요, 저 미지의 희망을 연상시키는 듯한 무지개는 혹여 나비 아닐까? 왜냐하면 레이저는 직선이요 무지개는 커브랄지 슬라이더 아니 마구일 테니까. 그 말은 곧 레이저 따라가기는 단지 육체적 사랑이었고, 은은히 신비함을 비추는 무지개는 플라토닉이란 말인가? 플라토닉은 무슨! 하지만 그는 왠지 모르게 마지막으로, 진짜로, 진짜 정말로 딱 거기까지만 가본 다음 레이저 따라가기 프로젝트를 종료하기로 마음먹었다. 거기까지? 무지개 너머까지! 어딘가 모르게 막 그러고 싶었으니까. 그래야만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점찍었으니까.
    여기서 AB와 제라드가 어디까지 가서 뭔가를 발견하고 다음에 무엇을 했는가는 비밀에 부치기로 한다. 너무 많은 것을 밝힐 수는 없으니까. 행복과 사랑은 몰라도 이 시절엔 가난이 비밀을 애호했으니까. 아마도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2'를 상영했던 극장 앞에서 목소리가 컸던 장사꾼 아저씨들이 중계소에 나타날 테니까 말이다.
    그로써 비공식적으로 레이저 따라가기 탐사는 종료됐다. 그는 그래서 다시는 레이저 운운하는 레너드의 말에 속아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하긴 초장부터 낌새가 이상하다 했다. 숱하게 쫓고 또 쫓았는데, 레이저가 커브볼처럼 휘어질 일도 중계소가 타임머신으로 작동할 리도 없었다. 휘어진 레이저인지 구부러진 시간인지 몰라도 그 대신 무지개를 발견했던 게 조촐한 성과라면 성과였다. 이제 그만 부질없는 허구는 잊고, 정신 차려서 현실로 돌아가자는 용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것도, 엄숙히! 그는 결국 유익한 것이라면 마치 스펀지처럼 몽땅 닥치는 대로 흡수하더니만 레이저는 도저히 흡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로 그는 좋게 전공에 주목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첫인상은 호감. 기대는 달콤함. 예감마저 행복. 쑥덕쑥덕. 선망의 진전. 동경심의 촉발. 잇따라 왜냐고 묻지 않을 수 없는 허풍의 재발견. 기발한 상상력. 한껏 고무되는 허영심까지. 일이 안 풀리고 놀기까지 재미없으면 선심쓰듯 좋게 일기나 쓸 일이다. 괜히 타인의 분야에 참견하지 말고. 뻔질나게 탐구해 봐도 아직 우리 인간은 아무리 해 봐야 태양계 내, 무인선은 태양계 밖. 이게 한계니까 말이다. 적어도 일단은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어떻게 보면 진짜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한 거다. 그러니까 머머설이 유명할 수 밖에.



    18
 
    황홀한 사랑도 은밀한 행복도 다 모르겠고, AB는 단순함을 갈망했다. 그것은 바로 고상한 일하기와 유쾌한 놀기. 그런데 문제는 일하는 건 퍽 따분했고, 노는 건 꽤 심심하다는 것.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복권을 사며, 상상하기를 즐겨하고, 유명한 점쟁이를 알현하기 위해 빨빨거리며 돌아다녔을까? 아니다. 그럴 리가 있나.
    왜냐하면 녀석들은 적시에 대타로 나서봐야 뻔트도, 헛스윙조차 성공시키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덩킨도넛과 베스킨라빈스와 스타벅스에 발길을 무정하게 뚝 끊을 수야 있나. 그러니까 이대로 도너츠 가게 점원의 짝사랑도 못 받고, 이대로 아이스크림 가게 아가씨의 첫사랑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오오, 무심한 하늘을 탓할까 말까 망설이게 됐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대의 소망과 아는 동생들의 애원, 삼류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는 특별한 비밀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밑도 끝도 없이 특별함도 아니고, 그냥 비밀도 아닌, 특별함 + 비밀 = 특별한 비밀! 나방 + 플라토닉 = 나비? 하하하하하. 그래서 그는 아무리 막연할지라도, 제아무리 뻔할지라도 자신의 허당기와 허영기는 물론 그 어떤 관록미마저 총동원해서 기필코 만들어야만 했다. 무엇을? 비밀을! 그런데, 어떻게? 내 말이! 이번에도 열정만 앞섰으니 순진한 객기는 이렇다 할 계획표도 순서도도 뭐 하나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쉬쉬하며 그 중계소는 믿음직한 대타로 고이 남겨두기로 했다.
    좌우지간. 언제까지나 미스테리아만 구독하고, 유행가만 애청하며, 정숙한 아름다움만 탐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상한 주문을 흥얼거려서도 안된다. 때문에 재산이냐 자유냐, 일단은 재산이 먼저였다. 먹고 살면서 품위 유지는 해야 하니까. 따라서 AB는 신나는 놀기는 미룬 채 뿌듯한 일하기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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