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있어요
나는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무심코 회상에 잠기며 어떤 옛일을 떠올리다가 어딘가에서 들리는 조금 철 지난 유행가를 듣게 되었다. 그 음악은 내가 틀지 않았으니 나는 그 음악을 불현듯 듣게 되었던 것이고, 따라서 그건 능동적인 자세를 견지하지 못한 생각의 과정과 사유의 습관을 핑계삼아 동기부여 강의 비디오를 시청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그 슬픈 음악을 거리에 울려퍼지게 만든 장본인, 왠지 특이한 DJ는 최소한 아니라는 뜻이다. 자, 이쯤 몇 자 간추린 설명만으로 뭔가 정상적인 사고를 벗어나 어쩌면 상태가 조금 비정상이 아닌가, 왜 그렇게 말이 꼬이고 좌충우돌하는가, 그 횡설수설은 지금 잠시만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그런 특유의 특징으로는 특출나신 그분들과 닮아서 그런 것인가, 그와 같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물론 이 짧은 재담이 드라마였다면 TV 채널이 돌아가든가 TV를 향해서 빵이 날아가든가 했을 것이고, 대화 상대였다면 아이고 그러신가 어이쿠 그렇구나 하면서 열과 성을 다해 경청하거나 아니면 넌 제정신이 아니야 정신차려 이 친구야 하면서 살짝만 가볍게 뺨을 후려치던가 했을 것이다. 또는 냉수를 한 잔 얼굴에 끼얹을 수도 있겠고. 당연히 그것이 소설이라면 아 나 이런~ 이거 계속 읽어야 돼 말아야 돼, 괜히 서점에서 혹 해서 사가지고 돈 아깝네,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이건 다 그 음악이 화근이었다. 왜냐하면 예전에 거리에서 그 꿈결 같은 추억이 담긴 음악을 들었다면 아주 잠깐은 울컥했겠지만 지금 나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뭐야 제목이 애인있어요 라고 의문문인데 음악감상자에게 숨겨진 연인이 있냐고, 달콤한 연애를 하고 있냐고 묻지 않고 지 얘기만 하고 있자나, 그리고 있다 없다도 확실히 말하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알쏭달쏭하게 어렴풋이 추측하게 만들고, 자꾸 추론과 정연한 논리와 반듯한 설득과 빈틈없는 자로 쟤고 초정밀 하중계로 측정한 것만 같은 납득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아니냐면서 혼자 괜히 투덜거리는 것만 같다. 가령 그건 마치 누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을 놓고 똑 떨어지게 논리적이고 매우 냉철한 이성이 돋보이는 수작이라고 한다면, 이쪽에서는, 어떤 미친 놈이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냐며 짧게 <시적이야, 멋져, 훌륭해!> 그럼 끝날 것을 논리 좋아하시네... 마치 이런 모습과 유사한 일이다. 가히 거의 딱 들어맞는 예시라 할 수 있다. 자발적으로 스스로 걸어서 마의 산에 위치한 천상의 요양소에 들어가던가 해야지 이상하게 유행가 제목 하나 때문에 사람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감정이 매말랐나 아니면 너무 사람이 이지적이고 감성보다 이성을 추구하며 모든 것을 사랑마저도 그저 도식적으로 보고, 느끼고, 분석하여 자꾸 그걸 말로써만 풀어놓으려고 하기 때문인가.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알고 싶은 사람도 기관도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포장하고, 글을 쓰고, 고상한 몸짓과 근사한 어법과 아찔한 지성으로 피력할려고 해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언제까지나 솔직히 겉멋이 자아의 중심에 실세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구에서 얼추 반세기를 살았지만 나는 남에게 특히 화장술을 익힌지 얼마되지 않은 중학교 1~2학년쯤의 소녀들에게, 그리고 불투명하지만 잠재적인 롤리타 콤플렉스를 작품으로만 잘 승화시키면서 딱히 큰 사고는 치지 않고 굳건히 학계에 남아 후진 양성에 힘쓰고 교육과 연구에 정진하시는 이름에 말이 들어가는 교수님께 <사랑은 무엇이다, 사랑이란 말이야...> 라고 멋지게 구술할 재주가 없다. 오히려 크나큰 자잘한 일들이 사는 동안 많았지만 어쩜 다행스럽게도 다단계 사업체에는 한 번도 끌려들어가보지 않았으니 그것 하나만 해도 나름 소기의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전자에게 후자의 작품을 추천하거나 선물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여자친구나 지인에게도. 만약 선물했다가는... 그건 상상하면 안됨. 그렇지만 예술에는 그런 지류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사적으로 글과 말이 뛰어나신 분과 혹시라도 독대하게 된다면 난 말 한마디 못하고 화끈하게 혼쭐이 나게 될 것이란 것은, 그야말로 요행을 바랄 수 없는 냉엄한 이치라 할 수 있다. 그건 실제 그런 일이 재현되더라도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어쨌든 예술 가운데서도 전위적이랄지 뭔가 이상한 분야만 끝까지 고집한다는 것은 그 특수성 때문에 창작자는 걸음을 한 발짝 자칫 잘못 디딘다면 겁탈이란 단어와 당면하게 되는 수도 있다. 꼭 예술가만 그런 게 아니라 어른의 삶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유혹하는 온갖 호사로움이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가. 사랑은··· 없고(?), 삶은 권태고, 뭘 해도 재미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이 무엇인지 통 모르겠다는 심정이 느껴지신다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젊은 그대니까. 그건 그렇고, 그래도 옛날 같았으면 거친 파도가 나에게 물었다고, 왜 혼자만 온 거냐고, 넌 어딜 갔냐고, 바다에게 기도 드렸다고, 언제나 너의 곁에 항상 둘이 함께 해 달라고, 나의 곁에서 재잘거리던 너의 해맑던 그 모습 이젠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그처럼 노래를 따라부르기라도 했을 텐데 이젠 모든 에너지가 소설쓰기로 가버렸기 때문인지 그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도는 음악을 듣게 되었는데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바닷가에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의 소유자랄지 누군가와 단 둘이 가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 항상 무뚝뚝하고 눈치 없고, 나는 나는 하는 친구들과만 가봤으니까. 거리에서 내 눈은 어디를 향하고, 청각은 어떤 소리를 듣고, 마음은 무엇을 떠올리는지 딱히 밝힐 순 없고 불확실하며, 그 심상은 타인과 똑같고 오묘하지만 일단 나는 노래 하나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나는 하루를 기분 좋게 보내려면 미용실에 가고, 평생을 즐겁게 보내려면 예쁘고 착하고 요리 잘 하는 마누라를 얻으라는 출처가 불분명한 명언에 따라 어느 미용실에 들어갔다. 미용실 이름은 <하오의 연정>
나는 미용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왔다. 내가 왜 미용실 안에서의 일을 얘기하지 않느냐면 그 안에서는 별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용실에서 컷트를 한 후 미용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무슨 기별이 있었다. 그곳의 수석 디자이너로 보이는 아가씨가 자기는 오후 시간이 비번이라고 하면서 나를 따라서 바깥으로 나온 거다. 그녀는 안에서 나와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눈빛은 수차례 교차했다. 전기? 찌릿하지는 않았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 쪽은. 만약 내가 그 전날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뭔가 뚜렷하지 않은 채로 머리카락을 잡아끄는 것 같고, 자꾸 끌리는 것 같은 느낌의 오고감은 아마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당연히 나는 신혼여행을 갔다온 후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날 유혹하지 말아달라고, 어디서 앙탈을 부리냐고, 요염한 자태와 자길 꼬셔주라는 귓속말 같은 몸부림에 대한 응분의 댓가는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따끔하게 충고 어린 텔레파시를 보낼 것이다. 어디서 이쁜 척 하고 있어~ 이러면서! 그러나 상대방이 그걸 못받거나 딱 선을 그어 거절할 때의 후속 대책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미용실의 수석 디자이너 B모양은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내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때는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머. 비가 오네요. 저기... 우산 좀... 저기까지만 씌워주시겠어요? 죄송해요. 제가 오늘 우산을 안 가져와서...」
그녀가 왜 그렇게 직설적으로 용건을 말했느냐 하면 그것은 내가 내리는 비와 오후의 할 일과 내일의 기대 그리고 사랑의 예감,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이브의 모든 것, 아담이 눈뜰 때, 사랑을 합시다... 이런 시상을 떠올리면서 자꾸 우산을 펼칠려다가 말고 우산을 펼칠려다가 말고 다시 악상에 젖어들곤 하였기 때문이다. 마초업계 선두주자라면 그 중요한 찰나 청력이 떨어진다든가 딴 생각에 빠질 수도 있지만 나는 그와 같은 유별난 감성의 속삭임을 놓칠 수는 없었다. 쉬거나 준비중인 감각에 대한 에너지는 언제나 보존중이라서 그럴까. 그렇다면 몰입은 잘 못한다는 뜻인데,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와 같은 말을 듣자마자 한 10년 전쯤, 15년 전쯤 우리 같이 드라이브 갈래요, 절 좀 어떻게 해주실래요, 그런 느낌의 신호를 받은 경험을 떠올렸고, 그리고 좀 전에 그 수석 디자이너 B양이 조그만 양산을 가방에 집어넣는 모습을 모른 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소설을 써야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소설을 괜히 쓰기 시작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 나는 꼭 소설 쓰기와 낯선 곳에서의 가벼운 연애감정이 한 바구니에 담기지 말란 법이 있나 하는 지극히 평범한 의문이 일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은 그러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까 우산 가방에 넣으셨자나요.」
「아... 네...」 들릴 듯 말 듯한 음조. 점점 작아지는 음색. 진정 그것은 개미 목소리.
그때 그녀의 표정과 분위기. 꺄~악! 이게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나는 어쩌면 이런 말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빈방 많던데 웬만하면 입원하지 그래.」 그러면 내 상대 배역은 이렇게 엄한 애드립을 치면서 NG를 간신히 얻어낼 것이다. 감독으로부터 엄중한 꾸지람을 들을 것이고. 「난 믿고 싶어요. 내가 더 이상 난봉꾼이 아니란 것을요. 개방된 속세에서만?」 그렇다고 그녀가, 상남자가 아니시면 잠시 모른 채 건너뛰어주실 것을 권고한다, 어디가 모나거나 괴상하거나 쉽게 말해 그냥 짦은 연분에 대해 고민하기에 빠지거나 모자란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그랬다.
그렇게 나는 B양과 헤어진 후 거리에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금새 비는 그쳤다. 그러자 뭔지 모르게 울적했던 기분은 다시 괜찮아졌고, 아까 거리에서 들었던 노래를 듣고 괜한 오해를 일으킨 결정적인 원인이 생각났다. 그 노래의 제목을 평서문이 아닌 의문문으로 원했던 내 잠재적인 요구, 바로 그게 문제였다. 그래서 그런 기의가 섣불리 사실로 둔갑하여 착각을 일으키고, 왜 노래 제목에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를 붙였을까라는 기표를 거쳐서, 감상자의 느낌이 예전 같지 않다는 슬픔까지 이르고야 만 것이다. 이쯤 되면 나도 내가 혹시 공황장애 초기 증상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혹과 걷잡을 수 없는 미망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때문에 그만그만한 수준으로 돌아왔던 기분은 다시 울증의 늪에 빠져들었다. 나도 알고 있다. 날씨의 영향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어떤 즐거운 일 때문에 금방 조증에 치달았다가 잠시 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 이유없이 반대로 울증에 빠져드는 타인의 모습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꽤 있다는 것을. 그러다가 나는 딱히 다른 대책이 없고 해서 아무 옷가게에 들어갔다. 기분전환에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은 쇼핑이다. 그것과 동등한 층위 가운데 다른 것으로는 먹는 즐거움이 있고. 그래서 새옷을 입고 맛난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옷가게에 들어간 것이다. 옷가게 이름은 <웬만하면> 이었다, <웬만하면>.
나는 옷가게 <웬만하면>에서 옷을 구경하던 중 포스트맨...카페에서 일하는 점원 V양을 만났다. V양은 오늘 정오에 거리에서 잠깐 스쳐지나갔다. 나도 그녀를 보고, 그녀도 나를 봤다. 그녀가 누구와 같이 있길래 서로, 그녀는 소극적으로 나는 적극적으로 인사를 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또 오늘 따라 여자인 그녀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오빠~ 무척 오랫만이에요. 이런...데서 다 뵙네요.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나는 평소 같으면 상대방에게 맞춰주면서 그가 원하는 장르와 박자에 동조해주었을 테지만, 그게 내 본모습이고 천성이니까, 그런 성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다른 유형으로 대처하고 싶다는 충동이 불현듯 일었다. 그렇게 어딘가 모르게 평소와는 달리 엇나가고 싶은 욕구를 나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뭘 오랫만이야? 아까 낮에 봤자나? 어제도 봤고. 같이 있던 남자는 누구니? 너네 사장은 잘 있니? 아~ 이렇게 물어보면 큰 실례구나. 하지만 좀 전에 너도 그랬자나. 새침하고 의뭉스럽게 말이야. 그래 나도 반갑고 또 놀랍다야. 구경 잘 하고, 마음에 드는 옷 있으면 찍어놔.」
「왜요? 오빠가 사주시게요?」
「아니. 그냥 찜만 해놓으라고. 그랬다 나중에 살려고 했는데 품절될 수도 있고.」
그렇게 나는 그녀와 싱겁게 헤어졌다. 나는 아무리 둘러봐도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옷이 없었다. 그러나 홀딱 반한 마네킹은 있었다. 그래서 점원과 대화하고, 사장과 통화하고, 애쓰고 애써서 나는 옷가게에서 마네킹을 샀다. 당연히 쉽게 내가 원하는 마네킹을 살 수는 없었다. 이곳은 옷을 파는 곳이지 마네킹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혹시... 꿈을 파는 상점을 찾으시나요, 아니면 막 막 이상한 거? 이와 같은 물음을 주거니 받거니 실랑이를 벌이다가 나 돈 있어 하면서 돈도 보여주다가 결국 안 되겠다 싶었는지 주인장은 마네킹을 내게 넘겼다. 그렇게 마네킹을 입수한 후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그걸 집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나는 마네킹과 동거를 시작했다. 성별은, 모르겠고 이름은 때에 따라서 내 마음대로 내키는 데로 편하게 부르고, 막 껴안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다가 잠잘 때 침대 옆에 눕혀놓고 자기도 했다. 옆집 강아지를 반나절 맡아줄 때는 이런 얘기는 비밀이지만, 꼭 그대 혼자서만 알기 바란다, 마네킹 배꼽과 다른 어딘가에 개가 좋아하는 크림을 발라놓고 강아지가 그걸 핧아먹는 모습을 모면서 약 20분 내내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하핫 그렇게. 어디였을까, 어디였을까? 그곳은 어디였을까? 광대뼈일까 팔꿈치일까 아니면 슬와근일까? 거긴, 그곳은 (중)둔근이다! 물론 주인 어르신께 말 할 수는 없었다.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시를 낭독해주었고 하루 1번씩 노래도 불러주었다. 나도 그녀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TV 스포츠 해설을 들려주었다. TV 스포츠 해설을 직접할려니 입이 아팠다. 피곤한 일이었다. 물론 내 망상이다. 내가 뭐 미친놈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놀았단 말이다. 그러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우울한 기분을 감지해서 같이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취향이 특이하다. 차에서 자세가 이상하게, 음 어정쩡하다. 그러나 그녀는 평소에 말이 없었다. 정말 과묵했다. 겁나. 그러면 나는 그녀와 어디까지 갔을까? 가긴 어딜가? 어허, 이상한 상상하시지 마시고. 나는 그녀와 인터뷰도 했다. 녹음 파일을 소설 쓸 때 참고하려고 문서로 옮겨놓았다. 그녀는 생각이 참 맑다. 너무 청순하다. 아, 떨려. 너무, 멋져! 나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을까? 그렇다. 이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랑도 가능하다면 그 포장지 상표는 다름 아닌 사랑일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떤 날 앞집 이웃이 자기 강아지가 편지를 받았다며 기쁜 소식을 반갑게 전해왔다. 편지 내용은 어떻겠는가, 이랬다.
멍멍 멍멍멍 멍멍 멍멍멍멍멍, 멍멍멍! 멍, 멍, 멍~멍 으르릉 으르릉... 컹컹 컹컹컹 컹컹 컹컹컹컹컹
멍멍 멍멍멍, 멍멍멍 멍멍멍 멍멍멍멍멍멍멍, 멍멍멍 멍멍멍 멍멍멍멍멍멍멍. 컹컹컹 컹컹컹 멍 멍
컹컹컹컹컹컹컹 멍멍멍 멍멍멍멍멍멍 멍멍멍멍멍멍 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 멍 멍
멍 멍멍 멍멍멍 멍멍멍멍 멍멍멍멍멍 멍멍멍멍멍멍멍멍멍 멍멍멍멍 멍 멍 멍 멍 멍 멍 멍 멍 멍 컹
멍멍멍멍멍멍...... 멍~
그걸 보고 나도 마네킹에게 이메일도 보내고 소심한 그녀를 위해 소셜 네트워크도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막 소식도 올려주고, 내가 그걸 좋아요 누르고 추종 눌르고 하면서 같이 신나게 놀았다. 뿐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내게 자기는 좀 남에게 무섭게 보이고 싶다는 말을 전해왔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가죽점퍼를 선물해주었다. 집에서 입혀주고, 스티커 문신도 만들어주고, 수염도 그려주었다. 파티도 열었다. 그런데 나는 그녀가 케익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왜냐하면 케익에 올려진 촛불을 그녀가 호~ 하며 불어서 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그녀의 발을 뽀드득뽀드득 향긋한 세숫비누로 씻겨주었다. 그후 발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 보니 마네킹, 요즘 부르는 이름은 그녀다, 그녀의 이름은 그녀, 그녀에게 바로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순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눈과 귀 사이쯤으로 식은 땀을 한두 방울 흘렸다. 이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싶어서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확인해봤다. 그랬더니 그림자는 정상적으로 나타났다. 내가 잘못 본 것이다.
그러던 한편 나는 그녀와 포스트맨 찻집에 놀러갔다. 그런데 그 앞에 가 보니 그 카페는 없어졌다. 그 자리에는 웬 이상한 카페가 하나 생겼다. 간판이, 간판에 써진 글씨는 이랬다. <정 원한다면> 정 원한다면? 뭘 원해? 도대체 뭘? 왜? 지금? 나랑? 뭔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막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어떤 찐한 여운을 안겨주는 느낌을 대하고 보니 그 이름이 나쁜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순간 그곳에서 포스트맨 카페 사장이 나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볼까 해서 카페 이름을 바꿨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우리, 그녀와 나와 아제는 모두 함께 <정 원한다면>에 들어갔다. 카페에는 에드워드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 셋은 창가에 앉고, 음료는 알아서 준비되었다.
「구두쇠와 꼬마 숙녀, 검은 표범, 노란 까마귀, 푸른 트럭, 포춘쿠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그리고 삼류극장! 이런 이름들이 카페의 새로운 이름을 위한 후보군 물망에 올랐는데 모두 촌스럽더라구. 물론 사랑이란 원래 유치한 것이라지만 어딘가 모르게 챙피하고 부끄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카페 이름을 바꿀 수는 없겠다 싶어서... 그래서 이곳 찻집 이름을 <정 원한다면>으로 정했어. 그렇게 바꾸고 나니까 정말 제 2의 인생이 시작된 거 같아. 왜냐하면 그건 뽀너스 때문이지. 곧, 내 이름도 이번에 바꿔버렸거든. 뭘로 바꿨는지 아니? 뭘로 변했을 꺼 같냐? 아직 모르겠지 내가 말을 안 했으니까. 하하하하하! 그건 뭐냐면, 음...... 멀더야 멀더! 멀 ─ 더! 어때? 어떤거 같아? 벅찬 감흥 막 그런 거 일지 않아? 이제 형 부를 때 그냥 편하게 멀더라고 불러. 알겠지? 지금 불러봐, 멀더라고. 멀 - 더. 첨에만 어색할 꺼야. 그런데, 네 옆에 있는 마네킹은 뭐니? 그거 뭐하러 들고 다니는데?」
「닥쳐요 멀더! 그녀가 듣자나요...(침묵)... 어때요? 연기력 괜찮았어요? 자, 소개할께요. 이쪽은 멀더, 이쪽은 그녀. 이름이, 그녀는 그녀에요. 그 ─ 녀! 그런데 동시에 카페도 바꾸고 형 이름도 바꿨다고? 그것도 멀더? 세상에나...! 멀더, 그건 말도 안 돼요. 멀더, 그건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아요.」
「나도 알아. 오~ 금새 적응하는데. 학교 다닐 때 연극 좀 했나 봐? 있잖아, 새로운 인생이 어디 말처럼 쉽겠니? 그리고 옛날부터 그럴 마음이 있었어. 모든 건 주춤거리며 망설이기만 해서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법이야. 의식이 넓혀지면 어항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거라구. 알을 깨고 나와야지. 슬퍼도. 처음부터 SF 작가를 꿈꾸란 말이 아니라 제한을 두지 말란 얘기지. 운을 타고, 복을 읽고, 재주를 건져올려서 적당한 시기에 A에서 B로 옮겨가야 하는 거라구. 진실은 저 너머에 있어. 꿈은 말이야, 마계에서 제작되어 언제 어떡하다 어느 가난한 고고학자에게 발견된 외경심의 응석받이인 만년필 그의 친구, 그분의 이름은 애원, 그 양반과 돈독한 운우의 정을 나누며 뭉클하게 가슴이 울렁거리는 나뭇잎이 깃털로 이루어진 애인나무에서 열리는 것이라고! 알겠어? 때로는 살면서 뜬구름도 잡아야 하는 법. 그때가 지금일 수도 있고. 빙판 위도 달리다가 광장에서도 서성거렸다가 공원으로 산으로 해변으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집에서 어딘가에서 연습, 연습, 연습. 정진, 정진, 정진. 연구, 연구, 연구. 일과, 일과, 일과. 공부, 공부, 공부... 바로 그걸로 꿈은 비로소 현실이 되는 것일 게야. 뭐 자네도 다 아는 얘기지만 이름을 바꾸니까 기분이 새로워서 탐경가를 읊고만 싶은 욕망을 자꾸 견딜 수 없었다네. 이해해 주시게나. 아직 노인가를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멀더, 멀더~ 어딨어요 멀더? 멀더의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 사람을 만난지 오래되서 그런 것인가? 원래 사장이 바라는 건 그런 거 아니었어? 아름다운 이상에 대한 동경. 빈곤을 퇴치하고, 행복을 정복하며, 소망을 되찾아 이루고, 꿈을 계속 만들어내고 이루어나가는 일. 잊혀지고 아른거렸던 공상을 현실화시키는 것. 그런 것 말야. 하긴 그게 그거겠다.」
「음. 그랬지. 그런데, 바꼈어. 그래서 이름도 바꿨자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난 말야, 내 진정한 실체는, 작명가인 것 같아. 나도 잘 몰랐는데 내가 어느 날 보니 이름 짓는 걸 좋아하더라고. 그걸 왜 이제서야 알게 됐는지 모르겠어. 왜 저건 구름이고 왜 이건 시계일까? 왜 스무살에는 모든 것을 결정하고 어른스러운 모습만 보여야 하며 인생을 궤도에 올려야만 하는 것일까? 왜 나는 살면서 오페라를 한 번도 직접 가서 보지 못했을까. 그건 잘한 거 같아. 코 골고 옆사람 방해하면 안되잖아. 나비넥타이도 없어. 하여튼 막 그런 생각들 있잖아. 그래도 용케도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않은 건 잘 한 거 같아. 돈이 개입되면 감정이 흔들리고, 감정이 흔들리면 그분과 멀어지고, 그분과 멀어지면 뭐겠어? 뭐긴 뭐야 돌팔이지! 두런두런 돌아서 나중에라도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그걸 알게 된다면 그건 정말 크나큰 행운이고, 더없는 축복이야. 그런 거라구, 인생은!」 손짓, 딱!
「오~ 멋진데, 멀더. 멀더, 이름 진작 바꾸지 그랬어? 나도... 음 이름을 바꾸는 건 귀찮고 여러 이름과 다양한 정체성을 갖는 것이 좋으니까 예명 하나 만들어서 써 볼까? 나나, 어때? 이상한가. 아니면 몽? 우주? 인류? 내가 요즘 제복을 하나씩 모으느라 조금 이상해도 이해해줘.」
「뭐 좀 더디긴 했지만 이제라도 님을 만났으면 그걸로 된 거야. 그 모든 방황이 그래서...? 라고 하면 너무 끼워맞춘 우발적인 즉흥시 같지만 때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요리도 있지 않겠니? 사람은 말이야 목소리가 우렁차고 듬직하고 자신감이 있으면 겉으로 보이는 몸가짐과 마음과 행동도 조금은 그것에 기울어 가는 법이야. 즉 타고난 신분이나 선천적인 능력이 부족해도 태도와 방향과 의지에 의해서 삶과 인생은 어느 범위에서는 충분히 변화할 수 있는 거라고. 그래도 그런 말이 좋긴 한데,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그리고 예전에나 여자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깔고 그랬지 지금은 안 그래,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그렇게 되었어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면 흥미롭지만 졸린다 그의 나직한 음성 그 음조를 들으면 떨린다 그녀의 목선과 입술을 보면 끌린다 그런 것처럼, 이젠 술을 마셔도 처음 취했던 그것과 똑같은 기분과 신체 반응은 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교감신경 때문에 무조건 반사 때문에 즉 자기도 모르게 꼭 성우가 된 듯이 막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렇게 저음을 본능적으로 끌어냈어 옛날에는 말이야, 이젠 그런 순수함, 순진함, 천진난만함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어. 이젠 목소리가 아니라, 어차피 그건 별로니까, 어법과 표정과 옷과 예법 그리고 농담도 두가지를 적절히 때에 따라서 적시에 꺼낼 수 있게 됐어. 고급스러운 것과 또 알잖아, 부장님 농담말야. 정말 있잖아, 옛날에 초반에는 여자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깔았어. 정말 왜 그땐 왜 그랬는지, 또 지금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인문교양서를 봐서 대충은 아는데 이렇게 바뀌는 거 보면 그거 하나는 신기해. 아 놔 그런데 왜 여태 가짜웃음은 도저히 늘지가 않는 건지 몰라. 그게 딱 맞게 써먹을 때가 있는데, 안되니까 방법이 없단 말야. 딱 핸드폰 어플 켜놓고 대기할 수도 없고. 애석해. 많이 애석해. 뭔 얘기 하다 여기까지 왔지? 아, 저번에 도시에 갔을 때 아는 헌책방에 들렸다가 책 한 권 사왔어. 선물이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 초판본은 아니지만 절판본이야.」
「오, 멀더~ 고마워 고마워. 한번 읽고 싶었는데, 어떻게 알았어, 내 마음? 그런데 왜 자꾸 형씨 얼굴이 점점 점쟁이 같이 보이는 거지? 내가 이상한 건가? 그래도 그만~하면 괜찮은 거야. 사기꾼에 협잡꾼으로 보이는 건 아니니까.」
「하하하. 그럼 이제 날씨도 따뜻해졌으니 자화상을 그려볼까 아니면 일광욕하러 해변가로 갈까?」
나는 동네도 돌아다니다 <정 원한다면>에도 들렸다가 마네킹, 그녀와 내가 애정이 식고 약간 침체기에 접어들 무렵 우리에게 권태기가 당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어디서 고혹적인 립스틱을 구해와서 그의 입술에 발라주기도 하고, 나는 상점에서 가끔은 여자옷을 사기도 했다. 최근에는 굉장히 특별한 속옷을 사서 그녀에게 입히고 감상했다. 그리고 혼자 막 엄청 키득거렸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많이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동네에 뭔 일이 있는지, 왜 해가 뜨지 않고 밤이 몇날며칠 지속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주민들은 외부로 나갈 수도 없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친구들 무명 블로그에 등록된 소설에 나오는 TESLA와 같은 일이 실제로 바로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첫째 날. 낮이 처음 밤처럼 지속된 날을 내가 이해하고 직접 경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듣기로는 이랬다. 비와 눈과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처럼 그냥 좀 바깥은 어두웠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자 점점 그 강도가 심해졌다고 그랬다. 급기야 1주일이 되던 날에는 낮과 밤이 똑같이 되었다. 내가 아무리 그녀와 알콩달콩한 연정을 나누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쯤 되면 나도 일이 돌아가는 정황을 모를 수는 없었다. 당시 나는 그녀와 함께 집에서 같이 영화를 즐겨봤다. 영화를 보기 전에 언제난 그렇듯이 나는 마티니를, 그녀는 피냐콜라다를 만들어서 소파 앞 탁자에 놓았다. 나는 그녀 전용 소파도 특별 제작 주문해서 완비해놓았다. 그때 그녀와 내가 같이 본 영화는 러브 어페어 (1994), 클로버필드 10번지 (2016) 그리고 (내가 도입부만 좋아하는) 사탄의 인형 1~5, 키스 오브 처키였다. 영화 포스터만 보면 알 수 있는 그런 영화들을 그녀는 별로인 듯 했지만 애써 거부의사를 밝히지는 않고 절반쯤 매혹된 듯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잠자리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읽어주었다. 왜냐하면 그건 꿈나라로 가는 직행 티켓이었기 때문이다. 완전 직방이다. 한달에서 나머지 몇 일 비율로는 이탈로 칼비노를 읽어주었다. 그리고 현실에서 더 어떻게 1차적인 감각이 오고 가고 향긋한 느낌을 주고 받기 어려운 부분 때문에 그녀와 나는 꿈에서 만났다. 꿈에서 그녀는 거대 호텔 업계의 큰손이었던 적이 있어서 우리는 수많은 호텔의 객실에 엄청나게 자주 드나들기도 했다. 꿈에서. 그러다 그녀는 내게 헤어지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작별의식은 필요하지 않다고도 했다. 왜냐하면 이건 운명적으로 정해진 삼각관계이기 때문이란 거다. 질척거리지 말고 쿨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헤어지자고 했다. 뭔 믿기지 않는 이상한 얘기를 가장 안락하고 쾌적하며 행복한 시절에 하다니, 나는 그녀가 어떤 짜릿한 경험을 원하는 줄로만 알고 그것이 모두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일이 발생한 건 도시,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시골이 어둠에 잠긴지 1주일이 되던 날이었다.
여기서 잠깐 그 이상 기후 현상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시각이다. 나는 당시 동네 친구이던 약사 F양, 산부인과 의사 A씨, 문구점 주인 N씨, 세탁소 직원 C양, 안주 없이 술만 파는 술집 사장 Y군 그리고 <정 원한다면> 사장 멀더씨를 통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딱히 관계있는 얘기는 아니지만 참고로 말하자면 옷가게 <웬만하면>의 여사장도 이미 나의 마수에 걸려들었기 때문에 친교 모임을 결성하네, 마네 그런 단계까지 이르렀던 찰나였다. 그 당시는. 주위의 의견을 도합해보고 매스컴과 소셜 네트워크 소식을 모두 모아보니 그건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과학적 현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지구에서는 태양을 관측할 수만 있지 그곳으로 근접해서 정밀히 측정하고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맞는 얘기다. 이카루스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은 즉 태양의 흑점이 여기 시골 좌표와 연동하여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흑점의 크기가 커지고 특징이 더 특이해졌다고 한다. 흑점과 시골, 그것과 이것이 어떻게 동기화되었는지, 왜 그 일이 발생했는지,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젊은이들을 주축으로하여 다음과 같은 반론도 재기되었다. 그것은 여기 시골, 이곳 이름은 나중 내가 이렇게 바꿀 것이다 못 바꿀 수도 있고 그래서 일단 내 맘대로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 제우스라고, 여기 제우스 상공에 거대 비행접시가 떠 있기 때문에 낮이 되어도 햇빛이 비추어지지 않아 광합성을 못한다는 것이다. 조금씩 별처럼 달처럼 반짝이는 것은 그 UFO에서 나오는 광선과 오로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푸른 하늘을 볼 수 없었고, 햇빛이 투과된 초록 나뭇잎이 나부끼는 모습도 볼 수 없었으며, 바람과 볕과 맑은 공기에 잘 말린 하얀 셔츠의 뽀송뽀송한 정결한 내음도 맡을 수가 없었다. 뭐 그건 믿거나 말거나 라고 쳐도 또 하나 더불어 발생한, 파생한 사건은 제우스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제우스로 출입이 통제된 것이다. 이건 길을 막고, 보급을 끊고, 인터넷과 전화와 전기를 차단하는 그런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매우 간접적으로 교묘히 이루어지는 마치 어떤 작전을 방불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입만 안된다 뿐이지 다른 모든 것은 정상이었다. 뒤태가 멋진 연보라빛 컨버터블을 몰고 도시로 갈려고 하면 도로공사 중이라서 못 나간다. 버스를 타고 갈려고 해도 버스는 연착된다. 갈 수는 있다고 하는데 승객이 모두 차야한다거나 버스가 고장이라거나 운전기사가 부족하다는 거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공산품도 거의 차이는 없는데 큰 소란이 일지 않은 만큼 그 정도로 어떤 비공식적인 경로로 들어온다고 한다. 양은 적고. 질도 조금 떨어지고. 경찰, 행정공무원, 군인들도 모두 모르는 일이라고 함구한다. 이상한 일이다. 방법이 없다. 달리 어떻게 떠올릴 수 있는 묘책도, 취할 수 있는 방도도 없고 해서 나는 찻집 <정 원한다면>에 놀러가기로 했다. 그녀와 함께. 핑~ 도착했다.
<정 원한다면>에는 카페 사장은 안 보이고, <웬만하면>에서 만났던 V양만 있었다. 카페 사장은 사전에 도시로 떠났는데 지금 사태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꼭 V양 자신이 여기 사장이 된 듯 하여 기분이 좋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다는 거다. 편한 얘기만 하면 좋은데 나는 그녀에게 들은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운명의 장소로 이곳을 지목했다. 나는 불편하고 불미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숙명적인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순간 V양이 먼저 말을 건네왔다.
「형씨, 얘기 들었어요. 얘기 들었다구요. 제 말은 물어보는 말이 아니라 알려주는 정보랍니다. 제가, 얘기를 들었다는 사실말이에요. 믿기시지 않겠지만 때가 왔는데 어쩌겠어요. 받아들여야죠.」 나는 내 옆에 앉은 그녀와 함께 V양의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그 의도를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뭐라고 반문을 해야할지 망설이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또 다시 그녀, 아니 V양이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제가 그분께 잘 인도할께요. 어떻게 이곳이 접선 장소로 선정되고, 제가 중간 거점으로 지목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역할을 맡은 이상 맡은 임무를 완수해야죠. 그리고 그녀에게 들으셨죠? 새로운 상대를 만나실 거라구요. 지금 그분과 함께 왔어요. (방금 그분이 두 번 나왔는데 전자와 후자가 다른 것 같다. 그러면서 그녀는 웬 시커먼 그러나 은빛이 감도는 007 가방을 가져오더니 거기서 수상쩍은 인형을 하나 꺼낸다. 그것은 놀랍도록 사실적이어서 꼭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정판 척키 인형이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만나실 분은 어렴풋한 기억과 다른 행복, 이따금 스타카토처럼 정확하고 선명한 추억, 사랑스러운 미혹, 끌리는 획책의 분위기, 실추된 낭만과 신비한 요행과 환상적인 미몽까지 모두 불러올 수 있는 꼭 동화 주인공 같은 인물이어야만 하죠. 아시잖아요. 게다가 그녀와 꼭 닮은 정적인 동체 뒷편에 숨은 생명력과 마법성 또한 내포해야 한다는 것 까지도요. 바로 그녀의 뒤를 이으실 분을 소개할께요. 바로 이분이에요. 그냥 평범한 척키 인형이 절대 아니니까 차차 친해지시면서 알아가시구요. 생활하고 서로를 알아가면서 뭔가를 깨닫게 되실 꺼에요. 그 뭔가를. 저는 그럼 이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만날 사람이 있으니 이만 잠시 자리를 비울께요. 두분이서 인사하시죠.」
텅 빈 마음에 정곡을 찌르는 듯한 그런 이상한 말을 남기고 그녀는 아니, 독신녀일지도 모를 V양은 그녀를 데리고 카페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는 척키 인형이 앉아있다. 나는 척키를 보면서 이거 원~ 집을 지키는 개도 아니고, 가출한 고양이도 아니고 이거 내가 정말 뭐하는 짓인가, 글이 써지지 않는 자신이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다 바보. 그리고 나는 V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척키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당분간 멍한 채로 집에 있는 수영장에서 연분홍색 튜브 보트에 녀석, 척키를 태워주기도 했고, 볼보 조수석에 태워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해변으로 가서 같이 일광욕을 하기도 했다. 물론 깜깜한 낮에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로부터 쪽지가 왔다. 종이 한 장에 내용을 적고, 그 종이를 길게 접고, 한 번 중간을 접고, 뒷편도 접고, 끝부분이 꼬이게 일부분을 한 번 더 접는 그런 쪽지가 아니라 전에 내가 그녀에게 만들어준 소셜 네트워크 계정으로부터. 내용은 이랬다. 언제, 어디서, 무슨 전시회를 연다는 것. 그녀의 새로운 연인에게 자긴 낭만적으로 사랑받고 있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소식도 알려왔다. 또 책을 한 권 쓰기 시작했다는 귀뜸까지. 나는 그 메시지를 읽고 반갑기도 하고, 온전히 기뻤고, 조금 이유없이 약간 허둥댔다. 좋았으니까. 무심코 재밌다고도 느꼈으며 뭔가 미심쩍은 느낌도 들었다. 내가 직접 염탐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사람을 붙일 껄 그랬나 라는 허황된 생각도 잠시 했다. 그러나 내 감정의 대부분은 엄숙한 기쁨 곧 순수한 즐거움이었다. 한때 그녀는 나의 발레리나였고, 내가 꾸미는 그림일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인기 순위 1위였다. 언제나. 그녀는 나의 청춘이었고, 상징이었으며, 나는 그녀의 작명가였다. 그리고 우리는 환상적인 한 시절을 아무도 모르게 같이 보냈다. 마치 꿈 같은 그 시절을, 함께. 진정 그랬다. 거짓없이. 멋진 수트나 블라우스에 있는 어깨 패드처럼 우린 가벼우면서도 품위가 있었고, 없어도 있다고 믿었다. 행복 그 주변만을 선회했으며, 천국의 문을 노크했다. 그냥 그런 노래를 같이 듣고, 그저 노크만 했다. 정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여도 우린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크, 그냥 노크가 좋았으니까. 똑똑 똑똑! 그것만으로 좋았다. 더 꼬치꼬치, 멀뚱멀뚱, 두런두런, 탱글탱글하고 근사한 뭔가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 하나 걸리는 점은 내가 그녀에게 주름치마를 선물해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 1인 헹가래도 선사해주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나팔바지만 지겹게 입혀주었다. 다양한 제복들도 많이 입혔다는 것도 고백한다. 그러나 나는 변태가 아니다. 같이 양장점 앞을 주섬주섬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냥 딱 그 정도로 좋았고, 기뻤다. 불만이 없었다. 그녀도 나에게 그렇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만나고 나서부터 글이 안 써졌고, 물론 그 전에도 썩 신통치는 않았지만, 또 예언력이 눈에 띄게 부쩍 떨어졌다. 그 전에 했던 예언의 사실과의 부합 여부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수 없다. 퍽이나 좋았겠다, 혹시 했는데 역시 였다, 그런 말들은 최소한 듣지 않을 수는 있었다는 뜻이다. 그걸로만 봤을 때 무척 민망한 일이지만 그 경험으로, 그 환상이 전제가 되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없다. 뭐가 뭔지 잘 모르니까. 은근한 추측 약간 정도만 가능할 뿐이다. 그것도 어디겠냐마는. 그래도 썩 괜찮은 사귐이었다. 그런 만남, 흔하지는 않을 것 같다. 후회는 없다. 후련하지도 않다. 덤덤한지도 잘 모르겠다. 이젠 좀 맹해진다. 오~ 이런 오페라 극장을, 그냥 그 근처 돌아다니기를 하지 않았구나. 낚시도 같이 안 했구나. 웨딩숍에 가서 같이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한껏 들뜨면서 사진도 같이 못찍어봤구나. 같이 놀이공원도 못가봤구나. 둘이서. 친하게. 다정하게. 그렇게. 동물원은 물론 미술관까지. 이런 삐─! 앞서 후회는 없다, 는 말 취소다. 나는 후회가 많이 된다. 엄청 후회된다. 후회막심하다. 그녀의 이름을 괜히 그녀라고 지어주었을까? 좀 더 고상한 이름을 붙일 껄 그랬나. 그녀는 세련된 분위기를 좋아하니까. 뭔가 고고한 것도 찾아보면 있을 텐데. 많을 텐데. 얼마든지. 아쉽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다. 추억이란 말이다. 그 시절은, 생활에서 추억으로 바꼈다. 생화가 뭘로 바뀐거지, 장미꽃밭에 언제 가긴 갔었나. 하지만 나는 난봉꾼이 아니다. 설마 이 글을 듣거나, 읽거나, 영상물로 보시는 당신께서는 그녀, 가 누구인지 모르시지는 않으리라... 그래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알고 있다. 그녀의 요술지팡이만 그랬을지 아니면 그녀의 온 전신이 마네킹이었을지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다. 뭐가 뭔지 통 모르겠다. 아주 그냥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나보다 더 뭘 해도 재미없고, 뭘 해도 안 되고, 뭘 해도 어쩐다는 글을 읽고 우스워하고, 또 드물게는 좀 어렵고 힘들거나 불편한 사람이나 식물과 동물, 책 한 권이 언제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 그건 안다. 알면 됐다. (소곤소곤, 어쩌고저쩌고, 속닥속닥) 그녀는, 그래 그녀는 올 누드 마네킹이다. 이제 됐나? 그러나 누가 알리, 지금쯤 플라스틱이 샤워를 마친 촉촉한 피부로 바뀌었을지! 향수는 뭐가 좋을까. 남자 냄새? 오 이런~ 젠장.
척키가 내 2번째 부인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척키와 살기 시작할 무렵 여기 시골 제우스에 나타났던 이상 기후 현상은 사라졌다. 또 그 요상한 이동 통제 사태 또한 모두 해제되었다. 좋은 일이다. 이제야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포스트맨은 벨을... 아니다, <정 원한다면>으로 찻집 사장도 복귀했다. 그 양반도 참 바쁘고 소란스럽게 산다. 부지런한 게 좋은 거다. 그렇다고 권태를 썩 물러가랏 하면서 쫓아버릴 수는 없다. 그것도 연가를 부를 때 요긴한 모닥불의 장작더미 가운데 하나이니까. 그럼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날까? 열린 결말? 해피 엔딩? 미궁 속으로 빠져서 2탄에 대한 속편에 대한 기대도 없이?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그렇다고 닫힌 결말이나 새드 엔딩을 바란다는 뜻은 아니다. 아직 때가 아니란 거다. 왜냐하면 나는 도시로 가서 그녀의 전시회를 구경하고 와야 하며, 서점에 가서 그녀가 작가라고 씌여진 책을 사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도시로 가기로 결심했다. 날씨가 따뜻해졌으니까 V양과 차를 바꿔 쓰기로 협약을 맺고 그녀의, 아 이런 아직도 헷갈린다, V양의 허름한 컨버터블을 몰고 나는 도시로 떠났다.
도시 아틀란티스에서 나는 시간 여유가 있기 때문에 전시회에 가기 전에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동안 시골 제우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다 있을 수 있냐며, 낮이 없이 밤만 계속되면 도대체 어떤 기분이냐며, 게다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는 그게 도대체 뭔 일이냐며, 또 어떻게 마네킹이 사람처럼 말을 하고 들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냐고, 어떻게 된 게 요즘엔 마네킹이 속옷도 갈아입냐며, 더군다나 생일잔치도 하고 수영에다 일광욕도 하냐면서 나는 친구들이 놀람과 동의와 핀잔과 기겁, 야유, 놀림이 가미되지만 어디까지나 주로 그들이 걱정을 해주고 말장난을 나누고 같이 웃고 떠들 줄로만 알았다. 나는 딱 정확히 그렇게 예상했다. 말을 바꾸면 그 외의 다른 아무것도 예상치 못했다. 그게 정해진 순서였다. 원래 그래야 한다. 예외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기대나 예감이 아닌 논리와 이치, 교감과 원리를 딱 비켜가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보고 깜작 놀랐다. 화들짝 뒤로 자빠질 뻔 했다. 거의 주저 앉았다. 그들의 말은 첫째, 그곳도 그렇다는 것이다. 아틀란티스도 낮은 없이 밤만 지속된다고 한다. 그 현상이 나타난지는 얼마 안 됐고─듣고 보니 내가 척키와 함께한 시점과 일치했다, 헉!─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갖가지 설들이 난무하다고 한다. 누구는 일단 이름부터 짓자고 하고, 백야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사방팔방 알아봐도 안 되니까 태양으로 무인선을 보내자는 의견도 나오고, 급기야 대기권에 4차원 어딘가로 거대한 물체가 아틀란티스를 가로 막고 있다는 일설이 점점 퍼져나가 많이들 긴가민가 하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둘째, 아틀란티스에서도 외부 출입 통제가 시작됐다고 한다. 야릇한 방법으로 사람을 지치게 만들면서 고립이 시행되고 있지만 시장 물가는 들썩이지 않고, 뉴스와 인터넷에도 특이사항은 없고 딱히 큰 불편은 없기 때문에 그냥 사람들이 이것에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보인다고 한다. 단지 사람들이 조금은 더 느려지고, 유순해지고, 주장을 한 번 더 생각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의 꿈을 찾고, 사는 게 뭔가 재미있어지고, 외부세계에 대해 대체로 능동적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이요 관조적이며 명상적으로 서서히 바뀌어지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걸 놀라운 일이라 하기도 그렇고, 마법같은 일도 아니고, 전혀 신기한 일까지는 아니어서 흐름에 순응하게 되는 것 같다고 한다. 그 다음 셋째, 인형이나 무형물과 사이버 객체에 대한 활동과 교류와 사귐이 지금 아주 일반적이라고 한다. 즉 그게 유행이라고 한다. 아~ 그럴 수가! 오, 이런...!
그녀가 나를 떠난 후 교체멤버 척키가 등장한 후부터 점점 과거가 되풀이 되고,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척키!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특이한 녀석이다. 진짜 이 친구가 신비로운 요술을 펼치는 것일까? 젠장,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비정상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도록 돌아가고 있다. 말은 안 해도 미치고 펄쩍 뛸 일이란 말이다.
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를 만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이 모든 일들이 원래대로 복귀하고, 그간의 일들이 이해되고 원인을 알 수 있으며, 불규칙적인 모든 일들이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니면 V양에게 맞장구를 쳐주고, 미용실 수석 디자이너 B모양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최소한의 친절을 베풀어야 했을까? 인간적으로? 그건 순위 밖 얘기다. 한참 바깥.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직감이 퍼뜩 들었다. 한편 나는 핸드폰으로 내 소셜 네트워크를 확인해보니 다시 그녀에게서 메세지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삐삐 삐리리리 삐삐삐삐 띠띠띠띠띠 빰빠라빠밤 빠빠라빠밤 빰 빰 퍽 퍽 퍽 띠띠 띠리리리 띠띠 띠띠 띠리리리띠 띠디띠띠 디디디 띠딧띠리 띠띠띠띠띠띳 띳 띳 띳 5633 366993 1919 2488 356 44663 57 68894 710 8112 922 1063391367 1155724 27405 3705 0521 546874103654 543543 6543543541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아, 미치겠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빙빙 돈다 빙빙 돌아. 아~아 어지러워라. 척키의 새로운 계정을 만들어서 그 둘을 맺어줄까?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나는 뒤로 쏙 빠지고? 그러지 말까? 왜? 어째서?
번민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나는 그녀의 작품 전시회가 열린다는 미술관에 가보았다. 그곳에는 Art of Noise의 Moments in Love, Paul Mauriat 악단의 경음악 그리고 Buon Vecchio Charlie의 Venne Giu a Fiume, 무제오 로젠바흐의 1973년과 2013년 앨범곡 같은 몽롱하고 몽환적이며 언제, 어떻게, 어디서 만들어지고 추종자들이 발생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희한한 음악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전시회는 작가의 개인 사정 때문에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안내문이 보였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이, 그녀의 모습이 달랐다. 그 전과 달랐다. 완전 남달랐다.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니었다. 마침내 인간의 육신을 얻은 것일까? 드디여 사람의 모습으로 환생한 것일까? 그랬다면 꽤 육체를 잘 어떻게 부여받은 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전신만 보였지만 그 육감적인 떨림은, 느낌 아니까. 왜냐하면 상당히 눈에 띄는 미모가 도저히 숨길래야 숨길 수 없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그녀의 작업실을 알아낸다거나 이 분위기에 더 엮여들면 신흥 종교나 변칙 산업체의 중간 관리자로 안착하게 될 것만 같은 몹시 불길한, 발목 제대로 잡힐 것 같은 섬찟한 기운을 감지했다. 때마침 나오는 쇼팽의 마주르카를 듣고서 나는 제정신이 든 거다.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면 미친다. 잠깐 동안은, 미쳐. 그녀를, 그녀에 대해서 뭔가 더 알아내고 싶다는 충동 같은 감정은 더 구체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고, 이제 그녀를 놓아주기로 결심했다.
그후 나는 도시 아틀란티스에서 시골 제우스로 돌아왔다. 도시에서 불과 하루를 다 머물지 못했다. 더 머물렀다면 이곳도 밤 같은 낮이 지속되는구나, 왜 그런 거지 라면서 의아해하고 추측하고 상상하기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거기서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내가 거기 왜 갔는지 모르겠다. 전시회와 서점에 들려 그녀의 어떤 모호한 흔적을 찾는다고? 다 헛소리 같다. 추억 만들기, 회상하기, 기억이 남겨진 장소 방문하기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예전에 내가 왜 그녀에게 빠져서 공을 들였는지 모르겠다. 딱딱한 마네킹의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다고 입술의 온기를 전하고, 보드랍네, 피곤하지, 넌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니, 놀러가고 싶다고? 심심하다고? 그냥 막 아무데로나 떠나고 싶다고? 그렇게 물어보면서 가발도 씌워주었다가 모자도 씌워주고 내가 마시는 맥주를 그녀에게도 마시라며 들이밀고... 그때 난 제정신이 아니었던 듯 하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의 시간을 부정하고, 도망가고, 잊어볼려고 노력하면서 차츰차츰 척키에게 정을 쏟고 깜작 선물도 해주면서 점점 대화를 늘려갔다. 정이란 걸 붙여갔다. 그렇게 불러도 될지 모르지만 사랑을 키워나갔다. 같이 산책도 하고, 운동경기도 보러 갔다. 같이 TV를 보면서 고대 다큐멘터리 방송이 나오길래 나는 막 아는 척 술술 막힘없이 이야기를 지어내서 척키에게 친절히 부언 설명을 해주었다. 사실 나는 그 분야에 문외한이었지만 왠지 그땐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머리속에서 지어내자마자 말하는 건 알고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가짜웃음은 정말 어렵다. 그리고 나는 은하계 너머 어디가 내 고향인데 그때 우리들이 지구에 와서 문명을 전파한거네, 지구에 지금 외계인이 몇몇 남아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라고, SF 영화에 보면 큰 비행물체에 이상한 생김새의 외계인은 모두 다 뻥이라고, 녀석들 하나도 모르면서 웃기고 자빠졌어 그러나 실은 그렇게 헛다리 짚고 황당한 얘기를 퍼트려줘서 그게 어찌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그렇게 척키에게 말해줬다. 그 무렵 나는 얌체처럼 혼자만 차를 마시지 않았다. 항산화요소가 듬뿍 함유된 최고급 녹차를 막 동양란에게도 주었다. 또 욕심꾸러기처럼 혼자만 커피를 홀짝거리지도 않았다. 이건 술이 아니라 걸작이라는 적포도주를 구해와서 화분에 키우는 화초에게도 그것을 나누어주었다. 그 후 기적이 일어났다. 정말 잭과 강남콩처럼 화초의 입이 윤기를 띄고, 뿌리 부분이 발광을 하여 흙 안에 있는 그것을 모두 볼수 있었고, 꽃이 유난히 자주 피고, 또 나머지는 밝힐 수 없고 나중 소설의 소재로 삼기 위해 공개하지 않고 남겨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척키와 나 사이의 지고지순한 연정을 더 돈독히 살찌우려고 검색사이트에서 이것저것 알아보기도 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깜짝 놀라는, 흥분하는 몇 가지, 막 그런 검색어를 조합해서 고도로 유용한 정보를 알아내곤 했다. 이제 난 척키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슬슬 나쁜 남자 본색이 물밑에서 부글부글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나 쉽사리 본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직 전면에 나오는 걸 그의 주인인 내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걸 분명히 인지하지는 못했었다.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막연히 내다봤다. 뭘 내다봐? 잘 모르겠다.
그러다가 어느 날 도시에 사는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용건은 두가지였다. 첫째. 내가 저번에 도시에 가서 했던 얘기를 듣고 자기들은 까무러치는줄 알았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팔과 다리가 저리고, 식은땀에 흠뻑 젖고, 막 헛것이 보였지만 자기들은 나한테 세게, 세게 보이고 싶었다는 거였다. 수염을 길러도, 가죽장갑을 끼워도, 번개머리를 해도 별로 위용엔 변화가 없었던 찰나에 하필 내 얘기를 그 시점에 딱 들었기 때문에 별안간 갑자기 이상하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 모두 입을 맞춰서 수트와 제복과 가죽점퍼만 입고 왔던 것이구나... 이제야 퍼즐이 맞추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제우스도 그러냐, 이곳도 그렇다는 그 3가지 설명은 모두 뻥이라고 했다. 그들은 사실 내가 부러웠다고 한다. 자기들은 그런 걸 TV 드라마로만 보고 즐기는데 내쪽에서는 그게 현실이라고 하니 사실여부와 과장의 정도를 떠나 사춘기 소년 소녀처럼 애가 타고 뭔가 견딜 수 없는 심정에 자칫하면 눈물이나 어떤 액체를 흘릴 뻔 했다고 한다. 가히 침 같은. 짜식들! 그렇다면 진작 말해줄 것이지. 애꿎은 그녀의 행방을 탓하고, 척키를 의심하고, 무엇보다 내가 정신과 치료를 심각하게 고민했었는데...... 허허허! 그리고 그들이 제시한 두번째 용건은 하워드의 집에서 모이자는 초대였다. 각자 기념물을 가지고 가서 냇물에 띄워보내고, 그걸 따라가고, 찍어서 웹에 올리고 중계하고 그러면서 놀자는 거였다. 아~ 그랬었구나. 내가 정상이었네. 이로써 척키와 나의 작별의 시간이 다가온건가? 석별의 정 뭐 그런 걸 어찌하나... 뭐라 설명할 수 없고 꾸밀 수도 없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버렸다. 그러나 초대에 응할까, 말까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미리 그걸 내다보고 조만간 그런 제의를 받을 것이라고 언젠가 척키가 내게 살짝 예언해주어서 진작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된 각본이었다. 그러나 뒷북치고는 뭐 그런 뒷북이 다 있나 싶었다. 또는 뒷북이 아니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척키의 신기가 증명됐다고 거리에서 발가벗고 춤이라도 출 수는 없지 않은가? 저런~ 저..저..저... 뭐라뭐라 흉을 들을 게 뻔한데. 실은 그래서 방금 전에 애들에게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조금은 놀랐던 거도 다 연기였다. 절반쯤만. 하하하!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저번에 발생했던 이상 기후 현상과 출입통제 사건이 그때 정말 있었나, 과대망상은 아니었을까, 잘 알아보지도 않고 밑도 끝도 없이 때려맞춘 건 아니었나 싶은 오판에 대한 판단력과 기억력이 자꾸 모두 흐릿해져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게 그랬단 말이지 생각하니까 소름끼칠 꺼 같았다. 아아~ 그건 음 아니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확신은 못하겠지만. 그러나 그러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하워드의 집으로 떠나는 길에 돌입했다. 그럼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건가?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려야 할까? 그리고 어디 잘 봐둔 으슥한 골목의 술집으로 향할까? 연락처를 우연찮게 알게 된 아는 여자에게 연락을 한번 해 볼까? 뭘 했다고? 별로 재미난 일도 없었자나. 이제 뭔가 좀 몸을 풀고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 하는데 NC는 폐장 시간? 초호화판 수영장 파티에 초대받아 그곳에 갔는데 나 혼자만 날짜 변경됐다는 소식을 못 들어서 달랑 혼자서 텅빈 수영장에서 진짜 수영하라고? 어? 보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덜렁덜렁 고추를 내놓고 나체로 혼자 수영할까? 정말 그래야 하나? 남자들은 아래가 흔들흔들 그렇다고 해도 여자는... 아 위쪽이 그렇겠구나... 정말 살면서 재담꾼들에게 숱하게 듣고 읽었던 그 말이 맞긴 맞는 것 같다. 아니, 남자답게 확실히 말해도 된다. 누구에게 비난받을 일도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자꾸 뭔가가 망설여지는 것은 음, 아 나 이거 꼭 내가 내 입으로 내 자랑하는 것 같아서 이걸 꼭 말로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쉽게 결정하기 힘들어지는군, 아니 지금 이 상황에다 이 처지에 좋은 흐름에 내가 왜 내 입으로 이런 얘기를 지금 여기서 꼭 해야 하는지 나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내가 진짜 이 얘기까진 안 할라했는데, 솔직히 나이에 안 맞게 재롱부리고 까부는 거 같아 남우세스러워 이건 정말 말하지 않고자 했는데 정말 이거 말 안 할 수도 없고, 아~ 나~ 이런 이런. 아 나 이거 정말~ 미치겠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해? 말을 해? 말어? 하지만 애달프게 궁금증만 왕창 불러일으켜놓고 또 입을 싹 닫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그건 정말 상스러운 처사라서 험한 소리 들을 수도 있다. 자, 그 말은 무엇일까? 당신이 인생의 어느 시기만 넘겼으면 펄새(벌써) 진작에 눈치채셨을 것이다. 길거리 마술처럼 장막이 벗겨지는 표어는 이와 같다. 빠밤~ <(남자는/사람은) 나이가 들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옵니다> 썩 틀린 얘기 같지도 않고. 그러나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여기에 들이댈 수는 없고. 자, 그렇지만 저절로 나올 것만 같은 말을 힘껏 참아 입을 앙 깨물어서 이런 허물은 들추어내지 말자. 지가 자기 글이 품격있다고 스스로 말하는 거잖아? 지가 자기는 이미 힘이 위로 올라와버렸다고, 바깥으로만 돌면서 온갖 꽃과 무지개 사이를 날아다니다가 이제는 나비도 벌도 뭣도 아니고, 이제는 그 업계를 은퇴하고 힘빠져서 집에 들어와 책을 읽고 TV를 보며 한가하게 희귀종 동양란과 화초를 키우는 그런 정적인 취미생활이나 하면서 벌써 그런 은퇴한 거장이라도 된다는 듯 연설하는 저 우스운 꼴을 보쇼, 이렇게 말이다. 아 이상한 얘기하지 말고, 이렇게 정말 끝내야 할까? 어? 여기서 소설은 끝났다, 재미없으면 끝이다, 이렇게? 별다른 동화적 환상성도 없고, 기하학적인 체계는 커녕 사랑과 욕망과 모험과 야망과 환희는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이 끝나라고? 뭐 허무주의야? 퇴폐주의도 아니고. 이렇게 덧없고 씁쓸하게 끝낼 수는 없다. 그렇자나요, 네? 여기서? 설마 그럴 리가, 설마! 아무리 사는 게 권태롭고 남편과 TV 드라마 주인공이 비교되더라도 소설은 그래서는 안 된다. 무슨 금본위제도 시대 이야기도 아니고 이제는 꿈과 희망에다 신나는 환상과 더불어 심심하지 않은 흥미로운 마술적 사실주의가 등장할 때도 됐다. 그냥 허탈하게 이야기를 끝내서야 쓰겠나... 음... 그런데 그냥 끝낼 껄 그랬나? 자꾸 떠올랐던, 떠올랐다고 믿고 싶은 번뜩이는 악상이 사라져 가는 것만 같다. 나는 하워드의 집으로 가는 길에 분명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야 한다. 그 길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예언도 아니고 최면도 아니다. 직감과 직관이다. 주인공의 경험은 일단 철저히 신사실주의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 물론 소설을 잘 쓸려면 쓸 단어 안 쓸 단어를 알고, 사리분별도 잘 해야 하고(단어 하나 사용하는 것만 봐도 격이 자연스럽게 분별되니까, 그런데 그것이 말이 아니라 장편소설이면, 행차하신 그분을 뭣도 모르고 쫓아버린 거다), 이왕이면 언어학이란 학문에도 정통하면 좋지만 그러면 한도 끝도 없고 자칫 고리타분해지기 쉬운 단점이 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 여러 장르가 도입되고, 종횡무진 미로를 헤쳐나가며, 충동적인 일상과 지지리 재미없는 삶과 새로운 인생에 대한 즐거운 기대와 해결방안과 극비의 해결책을 제시해야만 한다. 하다못해 동기부여라도 흉내는 내야 한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지어내서는 안 된다. 엄한 허구를 막 지어내서는 곤란하다. 어디까지나 직접 경험한 얘기를 써야만 한다. 그게 기본이다. 그게 진짜 SF 작가다. 꾸며낸 건 다 가짜다. 하룻밤 꿈일 뿐이다. 돌아서면 뭐 없다. 풋사과를 따먹지 말고, 진짜 사랑을 해 봐야 한다. 벌레먹은 사과라도 구해서 종이로 싸고 거기에 금사과라고 쓰거나 소설에 동화적인 요소라도 집어넣어야 한다. 생각해보자. 지금, 이후의 소설들도 모두 이전과 비슷하게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이 씌여질까? 응, 그렇다. 많이는 안 바뀔 것이다. 사는 것도 그러니까. 도표와 통계와 예측 가능한 전망은 시네마도 소설가도 아니니까. 그러나 이제 마법사를 만나고 시간을 여행할 때도 됐다. 거울 속에 사는 소설가여, (나는) 판타지 싫어, 이런 말 듣지 말자. 누구에게 누가 하는 얘기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소설의 임무고, 소설가의 막중한 책무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기는 한데...... 나는 하워드의 집으로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꼭 뭔 일이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여서 난감하지만 딱히 그런 것은 아니다. 도대체 어떤 신비롭고, 꿈결 같고, 설레며, 우끼는 그런 일이 있었을까? 나도 궁금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이 잘 나지를 않는다.
그러나 마침내 내 상상의 한계는 문이 열렸다. 잘못 열린 게 아니라 문이 없어져버렸다. 똑똑 소리가 즐거움의 거의 전부인데 문이 사라졌다. 지극히 현실적인 어른의 일상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몸은 오늘,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도시로 떠났고 영혼은 일부러 하워드의 집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 마치 유령처럼. 버스를 억지로 옆 마을로 타고 가서 내릴 때 아, 버스를 잘못탔구나 그랬고, 기차를 타고 가다가 목적지를 알면서 모른 채 지나쳐서 아차, 하면서 내렸다. 계속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다가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좀 쉬어가자 하면서 대뜸 극장에 들어갔다가 그 예술극장의 점원과 시덥잖은 짦은 연애를 즐기게 되고, 안 되겠다 나는 내 자아는 지금 바다를 몹시 보고 싶어하는구나 라면서 뜬금없이 서툰 방심을 그리워하면서 일탈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최후의 해변가 땅의 끝이라는 이름의 해변가로 향했다. 가다 가다 너무 멀어서 몸이 정신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만류했다. 우린, 너와 나, 영혼과 육신은 헛된 기대에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되고, 꿈과 현실을 분간하고, 우리가 합심하고 합체하여 헛배 부르고 허상에 잠식되면 안 된다고 자못 현실과 미래를 염려하면서 다시 원래 목적지로 경로를 재설정했다. 그러나 이건 아직 상상의 나래다. 잠깐만 휴식을 취하고 내가 공상의 품에 포근하고 또 아늑하게 안긴 거다. 속없이. 소설을 쓰고 새로운 인생을 살자는 미명 아래 너무나도 어떤 인기와 허영심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심에 잠겨 일시적인 착각과 환영에 빠져든 것이다. 일명 신기루! 거짓 환상! 그러나 그 단계 또한 어떡하다가 무턱대고 넘어서게 되었다.
결국 나는 <나 1>과 <나 2>로 나누어지게 됐다. 먼저 나 1. 나 1은 신체적인 제한이 없다. 따라서 모든 게 무한대라서 이 글을 읽는 사람의 험담도 듣는다. 허허, 거기, 그만... 다~ 듣는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외계인이 운전하는 잠수함이 물 위로 떠오를 때 재빨리 그곳으로 가서 007 가방을 건네받았다. 심지어 나는 이쪽과 저쪽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종의 기원을 쓴 사람이 누구더라? 그를 닮은 사람 말고 그 당사자를 만나서 악수를 하고, 기념사진도 찍고, 그가 친필로 쓴 접견증명서를 받아왔다. 처음에는 그런 서류들을 액자에 끼워서 벽에 걸어놓곤 했는데 계속 쌓이고 쌓여서 이젠 코팅도 안 하고 그냥 방 한구석에 먼지 쌓이도록 내버려두게 되었다. 그걸 서류와 사진으로 증명할 수 있다. 조작되지 않았다는 것까지. 오점, 단 하나도 없다. 동영상은 미처 못 찍었지만 다시 가서 제작해 오는 것도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매번 매해 세계 신비주의자 협회에도 초대받고, 거기 가면 무척 극진히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시간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나는 먼 옛날로 거슬러가서 공룡들도 만났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의사소통이 몹시 어려워서 친하게 기념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괜히 잡아먹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현대인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옛 사람들의 DNA 샘플을 채취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는데 윤리적인 문제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우선 소크라테스를 직접 만나고 상담하고 나서 결정하기로 했다. 또한 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프랑켄슈타인이 실존인물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드라큘라도 진짜였다. 그래서 SF 작가들이 지금 시대에 황당한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도 후손이 있고, 자기들끼리 모이면 인육과 흡혈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는다고 한다. 매우 극소수지만 그런 인간이 있긴하다는 걸 어떤 정보통으로부터 듣고 알게 됐다.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영화와 소설은 과장됐으니 지레 겁먹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나는 외계 행성으로 통하는 이동 통로를 통해 거의 완벽하게 지구와 흡사한 별로 가서 살고 오기도 한다. 과학기술로 지금 운송수단을 타듯이 해서는 지구와 똑같은 별에 못 간다. 불가능한 일이다. 지름길이란 게 있다는 걸 이미 일부 과학자들이 학설과 세부 실행계획서도 내놓았지만 아직도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나만 그곳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게 지구인에게 조금 미안할 뿐이다.
한편 나 2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음... 음... 썩 밝히기 어정쩡하지만 굳이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날 술을 혼자서 거하게 먹고, 그것도 집에서, 지금 일요일 오전인데 숙취로 고생하고 있다. 개고생! 즉 나 1은 영혼이고, 나 2는 육신이다. 그러므로 그녀와 이별하고 나서 나는 자신이 이상해졌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실감하고, 스스로 시인한 꼴이다. 진작 자신에게 인정하고 고생을 덜 했으면 마음도 몸도 편했을 텐데 이상하게 그러면 지는 것 같아서 싫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끝인가? 이게 다야? 정말? 어? 진짜 끝이냐고? 질문은 계속 떠오르지만 그 대답은 어떻게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더 미룰래야 미룰 수도 없다. 필경, 나는 쓸데없는 이야기만 잔뜩 쏟아낸 것 같은 간헐적인 절망감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 독자와 글쓴이의 감정의 오고감에 대해서 딱 영화에 나오는 그런 장면이 투영되어 글과 느낌과 영상이 하나로 겹쳐진다. 바로, 망아지가 엄청난 구토를 하는 모습! 그렇다면, 네가 그렇다면 독자는 어떻겠는가? 그분들은 대체 얼마나 어이없어 하시겠냐고! 그분들이 대체 뭔 죄를 지었다고? 소설읽기가 뭔 구도적인 고행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 어려움을 짐작이나 하시겠소? 이게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경솔하게 원숭이 나무타기를 하고 있어? 고무줄처럼 무진장 탄력 좋은 속옷 고무줄 같은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거미줄을 쫙 펼치더니 그 안으로 들어가 4차원 저 너머로 사라져버리는 거야 한심하게 말이야, 어? 어느 안전이라고? 내면에서 딱 그런 허기가 막 봉긋 솟아오르고 있다. 아 나~ 내면에서가 아니라 내 가슴이 봉긋 솟아오르는 것만 같다. 몽상 특급, 막 그런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순 엉터리에 돌팔이에 돌아이였어. (명맥이 이어져 지금에서도 어딘가 귀족들 사이에서는 거리를 심하게 둔다는 표현으로 치면) 뭔 개수작이냐고! 아~ 심한 단어 나와버렸으니, 내 입도 거칠어져버렸으니, 인생이 고단하며 이상해서 기억의 왜곡과 가공된 사유와 조작된 경험이 많아져버렸으니, 그리고 그렇게 꾸미고 포장하는 그 모든 것이 이미 많이 탄로 났으니까 어차피 태생부터 혈통부터 미래까지 그냥 서술자는 평민으로 남아야겠다. 원래 그러고 싶었다. 그게 좋다. 그게 편하단 말이다. 가끔 작품에서 과거로 떠나 귀족놀이나 하다 오면 그걸로 만족한다. 지금 이곳에 살면서 시를 읽고 TV도 보고 여행도 가며 운 좋으면 사랑도 하고, 그거면 된 거다. 시대상, 학교에서 배웠다. 전생의 나, 평범하게 살아서 훌륭하게 이름을 알리지 못해서 현생의 내가 있다. 세상 이치, 살면서 조금씩 깨우치고 있다. 점진적이지만 의식은 크고 깊게 넓혀간다. 책은 꾸준히 읽고, 좋은 것과 불미스러운 것을 구분할 줄 알면 된다. 사람들은 정규과정 공부를 못했어도, 동물의 세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살면서 그저 생각만으로. 같은 종이지만 고양이와 표범의 행동반경과 습성이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런 원리를. 그 다음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서 인간계의 질서는 이렇게 저렇게 다듬어졌구나 변화했구나, 표준은 어떻게 변천하고 인습은 무엇이 변모되었으며, A와 B의 차이는 왜 생겼으며 기존에 없던 지식과 시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구나, 과연 예술도, 이미 아는 익숙한 진부함도 나중 다시 보고 되새기고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구나, 영화에서 보여지는 내 연기가 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기 때문에... 뭔가 조심스럽다라는 여느 영화배우의 고백처럼 그리고 야구방망이와 주방기구를 만드는 공장의 순박한 기계공이 그들이 만드는 그것이 다른 용도로 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려고 하지만 또 완벽히 그럴 순 없듯이 내가 쓰는 소설이 어떻게 읽히고 받침대로든 인테리어든 그냥 맨손에 들고 다니는 광고용이든 발간 후 창작자를 떠난 그것이 새 생명을 얻게 되어 그 다음이라는 새로움이 있겠구나,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3~5분짜리 추억의 명곡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아아 요절했던 순수했던 천재였던 어느 작곡가는 악상을 오선지에 옮겼던 당시 그건 꿈에서도 미처 상상하거나 감안하지 못했던 일이었을 테고 내게는 껍떼기가 네게는 열매요 알맹이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나는 알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 아무리 재미없고 눈물겹게 심심하고 지루한 일상이더래도 끝까지 재미없으란 법은 없구나,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힘의 기준이 Calvin Klein collection 벨트라면 고정된 기준이 관건이니까 벨트를 풀어버리면 되겠구나(아니면 상하 일체형 복장을 입어야 하나 그런 옷 참 예쁘다 재밌다 멋지단 말야!), 또 오늘 거리에서 우연히 본 저 친구 학교 다닐 때 완전 비리비리하고 이상했는데 와 나보다 훨씬 좋은 차 타네 언젠가 아르바이트할 때 안 친했던 그저 그랬던 녀석이 어머나 어디 포스터에서 보이고 TV에 나오네 그럴 수도 있구나. 그리고 의식을 지구 바깥으로 보낸다면 다음과 같은 좀 더 거시적인 박물관적 시각을 <견지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순항시키면서 발견하고, 찾고, 발명하고, 이용하고, (때로는) 쟁취하고, 먼저 갖고, 탐험하고, 선점하고, 최초─최대─최고가 되고, 거래하고, 독점도 있고, 양보도 하며 공동체는 물론 아무런 이해타산 없는 타인을 돕고, 주어진 삶을 온전히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기고, 사랑을-사랑을 누군가는 하고 누구는 포기하지 않고 또 누구는 그건 있다 그건 꼭 올 것이다 라고 믿으면서 기다리고, 이따금 3류로 만족하고, 그러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한 번쯤 생각하고, 아~ 내 트위터 팔로워가 전혀 늘지 않는구나 오~ 내 블로그 구독자는 자꾸 나날이 줄어만 가는구나 아아 오~오! 또 우리는 여유가 된다면 이런 미래의 경험을 한번 아니 두번이든 얼마든지 <계획해도 된다>. 딱 하나만 예를 들면 이거다. 어디에 가면 별로 특이할 것 없는 어떤 성이 있고, 그 성의 제일 위에 첨탑이 있고, 그 첨탑에 가면 돌이 하나 있는데 그 돌에 키스를 하면, 그 돌에 키스를 하면 달변가, 달변가가 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누구 누구 누구도 아마 옛날에 다녀가셨다지? 은근 이런 게 꽤 그대로 이루어진단 말이지. 은근 효과 있어! 앗, 더 유명해지면 나중... 이거 일이 난처해지는데... 아무튼, 그런 신기한 전설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거기 가서 키스하고 돌아와서, 돌아와서...... 으흐흐 크큭 킥킥킥킥! 학문과 처세와 자연의 미래를 논하다가 의도하지 않게 분위기가 좀 경박해졌지만 간출이면 요점은 이렇다. 일반적인 미덕은 물론 사회규범과 시장경제, 가치, 진리, 도덕, 정의, 윤리, 의미, 문명, 성과, 대중문화의 기준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나무 한그루도 중히 여기고, 소수 의견도 존중하고, 숲도 볼 줄 알면 된다. 안 좋은 길을 걸었더라도 멋진 인생을 살 권리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있다. 헌법과 도의는 동의어가 아니지만 올림피아 제전 경주 중 달콤한 낮잠으로 손해본 시간과 잊어버린 초심과 관중과 동료에 대한 작으나마 생략되지 않아야 할 어떤 신뢰를 만회할 기회는 토끼에게도, 천리마에게도 그리고 콜로세움 바깥에서라도 있는 것이다. 그 기회를 끝내 놓친다는 것은 다른 말로 불미스런 선례이자 타산지석이 되는데 이거 쓰고 보니 다 아는 얘기를 괜히 돌려서 한듯 하다. 그러나 문단의 종결이 코 앞이니 조금만 참으면 된다. 정상에서 내려오시는 분에게, 얼마나 더 가야 되요? (독려의 뜻이 아니라 진짜) 다~ 왔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을 헤쳐나가고 그저 열심히 사는 것, 사람만 그러는 거 아니다. 식물과 동물, 무엇보다 의식은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마네킹과 척키에게도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마네킹과 척키에게도! 미래와 현재의 전혀 다른 차이점은 선각자와 전문가, 예술가, 초딩에게 연구를 일임하고 일반인은 그 교집합 즉 공통점만 우선은 부여잡고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통찰하고 생각해봐도 괜찮을 것 같다. 뭐 재미난 일은 원래 잘 발생하지 않는다. 별일 없이 사는 게 정상이다. 재미없는 삶에서 간혹 즐거움을 찾는 그게 바로 삶의 묘미 같다. 친구랑은 으쌰으쌰하다 늬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늬가 많이 아네 내가 자세히 아네, 그러해도 타인에게는 그분을 올리는 게 속편하다. 문화가 틀리고 어쩌고 해도 크고 작거나 다른 방법으로 형식과 격식과 풍속과 문화적인 차이만 있을 뿐 다른 사람들도 이와 완전 딴 판은 아닐 것이라고 예상한다. 별 중요하지 않은 얘기지만 문화니 혈통이니 귀족이니 그런 단어를 끌어들여 슥~ 넘어갈려고 했던 의도는 전혀 없었다. 다만 괜히 화제가 그쪽으로 넘어간 것은 아무래도 이거, 말린 거 같기 때문이다. 잔머릴 너무 굴렸단 말이다. 아 이거 말렸네 말렸어! 뭐 이런 봉변이 다 있을까. 살다 살다 이렇게 별 희한하고 더럽게 재미없는 글을 쓰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맞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