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 99

from 소설 2017. 6. 30. 18:53

   1

   척은 19살에 화실에 다녔고, 20대에 화성학을 독학했고, 지금은 소설을 쓴다. 그래서 그는 다재다능함의 부재를 확인했다. 잔재주가 꿈이 되거나 취미가 직업이 되면 때로는 가난과 싸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병마와 다툴 일 없는 튼튼한 육신 하나로도 행복일 테지만, 그러면 삼류에서 위로 올라가기보다 아마도 호객꾼에게 넘어가서 비싼 술을 마시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게 다 어렵게 열리는 지갑 때문이다. 잔재주는 있고 큰-재주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중구난방식 글쓰기가 조금은 뭉크의 사춘기를 좋아하는 홍조 띈 소년의 낙서와 닮았기 때문이다. 홍조? 여드름이나 주근깨가 차라리 낫겠다. 소년보다 소녀가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이때 해결책은 세 가지다. 실은 한 열 가지쯤 되지만 왠지 세 가지라고 해야 멋지다. 그것은 살면서 습득한 진리였으니까.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가명을 짓는다. 가명만 지으면 그 다음부터는 일이 알아서 술술 풀리고, 행운이 제발로 굴러올 것이다. 물론 원래 화사하다는 악의 꽃 같은 호박한테 잘못 걸려서 험악한 모험으로 막연한 낭만의 기대에 대한 몸값을 톡톡히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작부터 겁 먹을 필요는 없다. 묘한 기시감일지, 뻔한 속임수일지, 무엇을 만나게 될런지는 몰라도 마주치는 현안들을 현명하게 차근차근 대처하면 그만이니까.
   둘째. 저 일 한번 해 보면 어떨까 싶은 호기심에 이끌려 취직을 하고, 한 달만에 때려치는 것. 이건 모범적인 답안도 아니고, 묵묵히 제 맡은 일을 하시는 분들께 폐를 끼치는 일이다. 딱히 권장할 만하지 않다. 허구에 나오는 전형적인 영원한 청춘 그 주인공의 인생 경험에나 어울릴 듯 한 방안이다. 차라리 흡족한 기분이 드는 최저가를 면하는 속옷을 잘 골라 구입해서 입는 게 훨씬 나은 일이다. 그게 생산적인 일이고, 저건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는 방법이다. 똑같은 형식이 반복되는 것. 게다가 그것은 무능을 부르고, 무능은 지루함과 심심함을 동반하며, 계속해서 무기력과 권태가 차차 등장할지도 모르는 철없는 공상에 불과할 것이다. 이 둘째는.
   셋째. 앞뒤 보지 말고,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이상적인 환상을 찾아 떠나는 방법이 있다. 이 셋째의 인기는 가장 항구적이고 어중간하긴 하나 호평을 부르는 안전한 방법이다. 그것은 부귀영화로도 복락으로도 변할 수 있고, 유복한 쾌락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여행의 즐거움은 역시 집이 좋구나 라는 빈축을 사기 쉽다. 그래서 이 셋째의 나중 발생할 혐의는 진부하기 때문에 여독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단지 척의 일상은 그게 다였나? 다가 아니면! 그는 집에서 문장 구조와 접속사와 어떤 어휘가 사용되고 문체는 어떠한가를 파악하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지금은 초여름이니까 실내 수영장에는 가지 않았다. 거긴 한겨울에 가야 한다. 뜨거운 해변가는 노을이 번지는 저녁에 이상한 나라의 미남들이 나타난다는 현지인의 귀뜸이 유효하듯이. 그 외에 금요일은 고독했고, 토요일은 약속이 없었다. 일요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가오는 7월은 무계획이었고, 20대의 애틋한 사랑은 연애를 안 해 봐서 잘 모른다. 마술사의 모자 속에서 무엇이 나올지, 설마 마술사 자신이 제일 놀라게 될지 그 결과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은 이미 버린지 오래됐다. 따라서 그는 이제 그녀를 찾아서 떠나면 그만이었다. 확실한 즐거움과 미묘한 신비와 뜻밖의 기쁨과 악마적 새로움은 물론 천사의 아름다움까지 모두 내포하지 않았을까 궁금한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천당이 원하는 모습일 꺼라는 증거는 없는 것처럼 그녀가 허당임을 입증할 예감이 적중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2

   그러나 척은 떠나지 않았다. 떠나면 돌아와야 하니까. 게다가 떠나야 하는 곡절이 영 신통치 않았고, 그 기분이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도 턱없이 부족했다. 신낭만주의를 그리워할 수도 창시할 수도 없었고, 발칙한 에로 비디오를 보는 것도 이젠 지겨웠다. 안 본지 오래됐다.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삶에 대한 기성의 운율을 깨트릴 수는 없는 일이고, 미지의 꿈을 꾸거나 미완성 환상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엑셀 파일을 하나 작성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사랑이 언젠가 시작될 때 엑셀 파일을 하나 만들어서 기억을 기록했고, 증거를 수집했으며, 그것이 쌓이는 것을 보며 희열을 느꼈고 환희에 즐거워했으며,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추억 만들기와 가 봐야 할 장소를 세세히 입력하면서 사랑과 사무를 결합시켰던 그 짜릿한 경험이 꽤나 특별했기 때문이다. 또 하고 싶어졌다. 비록 내용은 다를지라도. 그는 어차피 젊은 날 카페에서 사과 마크 은색 노트북을 펼쳐놓고,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소설을 쓰다가, 창밖을 한번 보고 카페 안과 밖의 여자들을 물색하며 눈요기하는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어디까지나 예술적 착상을 골똘히 호명하는 일은 못해봤다. 때문에 백조가 아닌 보라빛 소도 아닌 마이크로소프트 엑셀 파일이라는 평범함으로 독보적인 춘몽을 만드는 데서 유별난 애착과 각별한 기쁨을 느꼈고, 이미 그것을 예술로 연결시키고 싶어 했다. 실패해도 그만이었다. 부담은 없었다. 즉석 복권을 슥슥 긁어서 꽝-되는 기분쯤은 감수하기. 그건 오히려 원초적 본능과 탐미적 욕망에 가까울 것이다. 척이 엑셀 파일을 가지고 놀기 얼마 전에 특정 소셜 네트워크를 살펴보니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랬다. 변론은 엄살 논거는 투정이고, 핑계는 일상에 공상은 취미였다. 맞다. 그것은 새로운 취미였다. 취미가 일이었고, 구미에 썩 어색하지 않았다. 그림의 떡을 동경하는 생기발랄하고 싶은 성미에도 군말없이 알맞는 경우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생기발랄하고 싶은? 척은 본인이 생기발랄하고 싶다기 보다는 생기발랄한 애인과 놀고 싶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생기발랄하면 곤란하다. 그 정도 조증은 무척이나 피곤하다. 생동감은 좋지만 기가 빨릴 수 있다는 것이다. 틀리는 풍문에 의하면, 으로 넘어가면 쓸데없는 얘기가 길어질 수 있으니 어쨌든 척이 엑셀 파일을 가지고 무엇을 했는가에만 집중하자.
   그는 첫째 칸에는 각각 이름을 입력했다. 척, 햄릿, 밀러, 듀발, 마샤, 스펜서, 루시, 게스, 쾨헬 그렇게. 그리고 첫째 줄에는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잘 하는 건 무엇인가, 사람의 장르는 무엇이고-를 기록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나중 봐서 성과가 뚜렷하면 그건 베스트셀러일 테고, 좀 더 가면 반짝이는 와인빛 유명인 생활이며, 작심삼일이면 딱히 이의없는 삼류일 것이다. 그렇다. 척은 엑셀 파일을 완성하기는 커녕 인터넷 국어사전으로 허영과 허영심을 검색해봤다. 심지어 학교 다닐 때 미술시간에도 그려보지 않은 자화상을 난생 처음 그려보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비발디로 시작했던 아침은 썩은 미소와 한숨과 커피포트를 부르는 저녁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왜 그랬는지는 설명하지 않겠다. 이제는 인생과 친해질 때도 됐는데 아직도 몇 년 뭐뭐 몇 년 뭐뭐 라는 일반인의 일대기와 불화를 일으켜 다투는 중인 것만 같았다. 그 불화가 바로 예술적 원동력이라는 고견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멋진 사랑과 건전한 도파민에 인상적인 낭만적 생활의 연속이냐, 코카인과 주색과 쾌락의 낙원과 애첩의 배웅이냐. 그는 전자도 아니고 후자를 누릴 위인도 못됐다. 누가 후자를 거저준다고 해도 거절할 것이다. 정말로? 넘어가자.
   따라서 그는 달콤한 행복은 멀리 있는 것만 같아서 새로운 개성을 알게 되고, 행운의 마차에 탑승하기를 발견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미궁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책꼿이에 있는 책에서 힌트를 찾기로 했다. 척은 미래생활사전을 펼쳤다. 그런데, 어머나! 그는 뜻밖의 비상금을 발견했다. 웬 횡재란 말인가. 일명 짱돈. 뜬금없는 거금이 책 안에 끼워져 있던 것이다. (딱!) 그는 양쪽 검지로 하늘을 가르키며 홈런 세러모니를 흉내냈다. 척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촉촉한 피치 코랄색 립스틱을 바른 숙녀들에게 인기 있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이는 해변으로 떠나기로 했다. 거기서 밝은 다홍빛 컨버터블을 타고서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마른 장미색 수영복을 입은 미녀들을 유혹하다가 새똥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곳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낙원과 요정들이 어서 오라며 그에게 손짓했기 때문이다. 들린다 들린다. 쳄발로와 하프와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보인다 보인다. 고추 달린 요정으로부터 큐피트 화살을 맞은 숙녀가 내게 첫눈에 반한 표정이. 오오 가까이 가까이. 아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워─워─워. 회전목마의 환영이 자꾸 떠오른다면 그것은 둘 중 하나다. 미완성 교향곡을 들으면 꿈을 꾸게 되는 몽상가냐, 현실 도피를 꿈꾸는 고독한 도시 생활인이냐로. 가서 어설프게 아가씨를 꼬시다가 우락부락한 상남자에게 제지를 당하고, 스타일 구겨지고, 그래서 능글맞은 남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시무룩해질지라도 척박한 도시 생활을 탈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 늦잠 자고 조퇴하고, 일하러 가서 눈치 보며 놀고 놀러 가서 적극적으로 일하는 사람. 그는 자유를 누리고, 꿈을 찾고, 인생을 즐기며, 행복을 노래하고, 욕망의 과일을 따며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애정의 설을 풀며, 기쁜 로맨스에 관한 황홀한 독백으로 즐거워 하는 중 살짝 지겨워 하는 연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불행한 사랑 때문에 상심에 빠진 숙녀들의 마음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는 매정함과 비정함, 무정과 슬픔의 그림자에 짓눌려 기를 피지 못했던 다정을 찾아 곧바로 꿈의 파라다이스로 떠났다.


   3

   척은 도착했다. 그곳은 말 그대로 쾌적한 기후에 분위기 좋고, 상쾌한 풍경이 일품인 여행지였다. 그러나 뭔가 심심했다. 멜로 영화나 하이틴 드라마처럼 가슴 뭉클하고 설레며 짜릿한 어떤 사연이란 것이 부족했다. 아니 전무했다. 발단 ─ 전개 ─ 절정 ─ 결말 가운데서 오직 발단만 있는 인생이었다. 내내 발단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나 깨나, 재미있거나 지루하거나, 앉으나 서나,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내내 발단이었다. 이런, 그만그만. 아아 발단, 오오 발단, 그놈의 발단!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리 바라고 애원하고 기도하며 시를 써도 전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개부터는 장편소설이고 척의 삶은 발단이 전부였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가버리면 아무도 기억 못하는 뮤직비디오였다. 이런 젠장! 드라마 그거 다 뻥이구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니까. 아마 사실주의, 극사실주의란 게 이런 게 아닐런지. 하긴 지금 세상에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이 뭐가 중요한가. 오히려 카프카의 철학은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카프카라는 상표만 난무하는 세상이다. 문학과 상업에 한 발짝씩 걸치고 있는 일부(!) 어른들 뿐만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에 올라오는 포스트와 댓글에서도 이미 옛날부터 응당 미래까지도 카프카는 하나의 고유 브랜드다. 일부? 그 일부가 아닌 사람을 한번 만나고 싶다. 제발! 그럴 것이다. 카프카의 잠자와 성을 살짝만 바꿔서 글과 영화로 만들어서 내놓으면 그걸로 잘 하면 평생 놀고 먹어도 될 만큼의 많은 돈을 벌 수도 있다. 지금은 그런 세상이다. 말은 쉽다. 실천은 어렵다. 바로 그래서 무난한 화제와 평탄한 선곡이 존중 받는 자리에서 유독 튀는 스타일을 수줍게도 감추지 못하는 돌아이가 있는 것이다. 인기 작가? 시시하다! 영화계 흥행 1위? 그만그만한 영화 일색일 때 중간 정도 영화가 개봉하면 개봉하자마자 1위다. 중간 이상의 역작이 나오기 전까지 단독 1등은 철저히 보장된다. 더더군다나 그만그만한 영화 일색일 때, 라는 조건은 어느 분야든지 해당되는 흔한 풍조일 뿐이다. 진짜 그렇다. 현실이 그런데, 질투의 반틈은 존경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명성의 절반은 팝콘이다. 정말이다. 그 맛없는 팝콘이 괜히 인기 있는 게 아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이름까지 팝콘, 있다! 남의 이름 찬미하느라 허송세월 보내지 말고 내 인생을 즐겨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알고, 내 개성을 파악하며, 내 고유한 취향을 다듬는 게 중요하다. 그 때문에 무턱대고 유행을 따르지 않고 일부러 남과 반대로 가는 사람도 있다. 뭐야 원점이야? 이러니 내내 발단이지.
   척은 생각했다. 자기가 그동안 너무 집착했다는 것을. 그는 등고선보다 해안선을 편애했던 것이다. 본인이 무슨 1700년 전후에 활약했던 작가도 아니고 항상 혼자 다니면서, 나는 왜 발단뿐인가 전개는 대체 어디 숨어있단 말인가, 라는 투정이 지나쳤던 것이다. 그건 모두 욕심이었다. 벌써 능청이었고, 엄살이 지나쳐서 밉상쪽으로 기울었는지 감도 잡지 못한 것이다. 더불어 넉살마저 늘어버렸다. 맷집 좋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벌써 그런 원로라도 됐단 말인가. 개~뿔! 그의 블로그는 이미 과작이었다. 숫기도 부족하면서 원맨쇼가 웬 말인가. 응석, 개구쟁이, 앙탈, 모험, 전율감, 신비, 판타지등 이런 소문만 무성하고 실체는 없는 개념들에서 진정 졸업할 수 없단 말인가? 졸업할 수 없다! 어차피 입학한 적도 없으니까. 그러므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머머해라> 라는 인문학 어조가 아니다. <나도>라는 순진함, <머머를 좋아해>라는 착함과 <머머 하고 싶다>라는 사교의 근간을 이루는 몸짓도 아니었다. 뭐는 뭘까 라는 문학론도 아니고, 픽션에 목마른 로맨티스트도 아닌 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머머 하자>라는 명랑한 자긍심이었다.
   따라서 척은 회심의 1타를 치기로 했다. 미워도 다시 한번일 수도 있고, 발을 뺐는데 빼자마자 그 주식이 대박이 났다더라 라는 미래의  선망을 현재의 측은함으로 대체한 희구일 수도 있다. 그는 여행지에서 인적이 드문 공원만 갔다 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4

   푸르른 공원에 도착했다. 야자수도 보였고 일광욕하는 애처가와 하루 1번 큰 개를 산보시켜야 하는 공처가도 만날 수 있었다. 척은 볼보 웨건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맥주는 이제 지겹다. 꼬냑은 정떨어졌다. 당분간은 말이다. 센티멘탈 칵테일을 놓고 무슨 발포성 와인이 다 뭐란 말인가. 그렇다. 그는 차에서 흐르는 미뉴에트의 소리를 키우고, 오늘은 토요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허니문으로 하자. 아니 아니 그보다는 이왕이면 3번째 혼인의 3번째 결혼기념일이 좋겠다. 뭔가 운치가 드높아보이니까. 상상이야 자유니까. 그는 멋진 이국적 정취를 마지막으로 구경하고 돌아갈 생각을 하니 왠지 자기가 미래-지향적인 예언가가 된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거울아 거울아, 열려라 참깨 같은 주문은 필요치 않았다. 유려한 전망, 더 볼 거도 없었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다. 돌아가서 억지로 힘으로 유리겔라처럼 숟가락을 구부리고, 랜디처럼 염력과 예지력과 심령술을 연마할 것이다. 이제 그럴 때도 됐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그는 아직 생활 형편마저 변변치 못했으니 무엇보다 그는,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바로 집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언덕을 넘어서는 순간 그는 길가에 멈추어 차에서 내렸다. 왜냐하면 그는 육지에서 꼬리 같은 좁은 지형을 거쳐서 상쾌한 해변가에 도착했는데, 그 돌아갈 길이 모두 바다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장난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오지 말 걸 그랬나? 아니면 오히려 잘 된 일일까? 그때 그의 옆으로 웬 당나귀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 당나귀는 동화 속에 나오는 그 당나귀일까? 서커스단에서 탈출했든 동화책에서 뛰쳐나왔든 어딘지 그 당나귀가 신기해 보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올챙이와 개구리의 습성, 병아리와 닭의 특징을 모두 간직한 듯한 영험한 존재. 당나귀. 놀랍고도 기이했다. 설마 이건 어떤 상징일까? 뭐 전개가 시작됐다는 신호탄 그런 거?
   어쨌든 척은 마을로 돌아가서 동네 아저씨에게 돌아가는 길을 여쭤봤다.
   「선생님. 육지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 드러나나요? 원래 밀물과 썰물에 의해 나타났다 사라지는 도로가 예전부터 있었던 건가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세계의 끝, 그 바깥으로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는데요. 형씨 혹시 외계인이슈? 길이 어떻게 생겼다 없어졌다 그러나요? 길은 길이죠. 그렇죠. 길은 길일 뿐이죠. 안 그런가요? 원 별소리를 다 듣겠네.」
   척은 환상 속의 그대를 만나지는 못했고, 주말의 약속과 미래의 즐거움은 불투명했으나 대충 예감하고 있었다. 드디여 전개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5

   보통 전개라고 하면 발단에 이어 절정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고비라고 할 수 있다.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호기심을 고조시키며, 그 다음을 보고 싶고 알고자 하게 만드는 욕구를 증가시키는 것. 그것의 중요한 길목이 어쩜 전개일 것이다. 단, 척이 돌아가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이 수반되었을 때 전개는 비로소 유의미할 것이다. 왠지 그럴 것 같았다. 그러나 척은 돌아가기 싫었다. 굳이 틀에 박힌 생활을 벗어나고파 떠나온 것인데 벌써 돌아가라고? 그는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마침내 뭔가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갈 것만 같았던 척의 이야기는 절정이 아닌 다시 발단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원점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곳 휴양지로 낙향하여 자리를 잡은 어느 문학 잡지에 취직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미스테리 장르 문학 잡지였고, 척은 호텔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가 거기서 잡지사 편집장을 사귀게 된 것이다. 편집장은 즉석 해서 척의 블로그를 보자마자 영입 제의를 했고, 척은 휴양지에서 용돈이나 벌고 놀다 일하다 또 놀아볼까 하는 마음에 흔쾌히 스카웃 제의를 수락한 것이다.
   이쯤 되면 멋진 영화 같은 삶인가는 몰라도 삼류 소설의 소재에 관하여 썩 불이익일 것 같지도 않고, 지금부터 펼쳐질 새로운 인생의 기대가 그다지 불만족스럽지도 않았다. 응당 부도덕한 생활도 아니었고, 환상과 현실의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듯한 예감은 그를 살살 자극하고 있었다. 새롭게 펼쳐질 잡지사 직원의 인상에 대한 부담감도 적었다. 편집장은 매우 너그로운 인물로써 그가 척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성과 하나였기 때문이다. 성과-지상주의 뭐 그런 개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향후 척은 뚱딴지 같은 인터넷 삼류 기사와 탐정소설과 추리소설 서평들을 수집해 적당히 단편소설을 주기적으로 제공했고, 터무니없는 추측성 기사들을 기고했는데, 편집장은 한마디로 매우 흡족해 했다. 게다가 적지 않은 원고료에 회사 차 페라리를 아예 가져가서 타라는 특급 대우까지 받게 되었다. 성명이 페라리에 본명이 에르메스인데 딱히 형편상 이름만 그런 분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뭐랄까 페라리 타 보니까 별거 없었다. 페라리는 그냥 페라리였던 것이다. 아, 그가 블로그에 올리는 단편-중편 소설을 고정 연재하는 것 외에 간혹 짧은 기사를 기고했는데 그 단문은 보통 이런 제목을 달고서 잡지에 실렸다. 페루 나스카에서 발견된 외계인 미라... 진위 논란.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척의 인생 3막 4장에 해당하는 일시적일지도 모르는 행운의 일상이지만, 만약 이것이 그가 나중 쓰게 될 판타지 소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뭐 하나 제대로 갖추어진 게 없는 낭패를 면할 수준은 되었다. 일단 궁핍한 가난을 모면할 주급과 페라리가 있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위한 인물, 사건, 배경이 모두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첫째, 인물. 척 본인과 편집장에 회사에서 친한 형씨 1명에 현지인 둘, 거기다 곧 있으면 도시에서 척을 만나기 위해 급파될 척의 친구 햄릿도 아마 출현할 것이다. 더더군다나 여행을 온 걸출한 작곡가 마샤와 작사가 루시, 사진작가 게스, 호텔 사장 (남자 이름인데 여자인) 쾨헬까지. 그만 하면 괜찮았다. 실제 현업에 종사하고, 실존 인물이며, 타락했다거나 인격이 심하게 의심스럽다거나 그러지 않았고, 뭘로 봐도 뭐 하나 썩 빠지는 게 없으니까 그만하면 사정 나쁘지 않았다. 큰 흠은 없었던 것이다. 엄중한 현실이지만 허구라고 하더라도 작가의 심기를 건드릴 일은 전혀 없는 수준이었다. 독자의 반응은 모르겠고. 심지어 숙녀들은 5월의 신부가 따로 없었고, 남자들은 음성이 테너와 바리톤이고 쉽게 말해 여자들의 눈길을 끄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번잡한 대화는 불필요할 것만 같았다. 아, 그리고
   둘째, 배경. 언제 어디에서? 드라마를 보는 관객의 현시점인 지금, 소설을 읽는 독자가 사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 도시라도 상관없다. 다음으로
   셋째, 사건. 어떤 신비한 소동이 발생하고 기발한 모험과 사랑과 우정과 불가사의한 갈등이 비밀을 풀어나가면서 흥미로울 것인가, 재미없을 것인가! 그것은 차차 팔짱을 끼고 순순히 웃을지, 선선히 말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부득이한 경우 도저히 작품 가치가 없다면 척은 잡지사를 그만 두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용케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블로그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탄식하면 어쩌나 적어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 독자가 재미있을지 작가 자신이 뒤통수가 가려울지 그 승부의 결과가 은근히 기대되지 않으신가? 그것은 지루한 유원지 생활일지 구경꾼으로써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어깨 너머로 훔쳐보기만 하다 말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었다. 누군가 한쪽은 재미를 봐야 할 텐데, 가난한 애인에 싫증난 여자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속삭임이 어디선가 들리는 것만 같구나. 어차피 예고편 같은 인생 사는 일이 심심한데 값싸고 서글서글한 촉망이라도 품어보시지 않으실런지. 왜냐하면 둘 중 하나의 가능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초장에 잡아야 한다더라, 또는 점잔 빼다 좋은 기회를 놓쳤다더라!


   6

   사실적 글의 형태는 크게 4가지. 첫째, 짧으면 역피라미드형. 둘째, 기승전결의 최소 분량이 필요하면 피라미드형. 셋째, 길면 모래시계형. 넷째 사다리형. 그렇다면 글이 아닌 말은 보통 어디에 해당할까? 당연히 1번 역피라미드형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아는 게 많은 데 비해서 인내심은 약하기 때문이다. 뭔 말은 뭔가 있는듯이 커다랗게 부풀려서 시작하고, 본론은 훨씬 줄어든 다음, 결론은 요만~하게 끝난다. (사석이라면, 에게~ 응애~!) 헤드라인이 거의 전부다. 아 정말이지 그게 뭐냐고! 그러게 말이다. 바로 거기서 진공청소기냐 커피포트냐로 나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허구는 어떠할까? 우선 허구가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허구는, 요컨대 허구는 거짓말이다. 진짜 같은 거짓말, 진짜일 수도 있는 거짓말, 가공된 실재, 마술적 사실주의 또는 그 반대. 허구의 보너스로는 과장과 허풍이 있다. 때문에 사실적 글의 형태보다 거쳐야 할 단계와 형식이 더 많다. 물론 더 어렵다. 사실적 글이 남자라면 픽션은 여자에 해당된다. 이론은 그렇다. 남자는 비교적 여자보다 단순하다. 0이냐 1이냐 같은 컴퓨터 언어처럼. 비교적! 그러나 여자는 덜 단순하다. 픽션이 그렇다. 목표 ─ 현실 모순 ─ 결여 ─ 행동 ─ 결말. 즉 성공이냐 실패냐! 아아 거쳐야 할 단계가 많다. 왜 전문가들이 똘똘 뭉쳐서 작심하고 만든 작품들이 대체로 기대 이하일까? 왜냐하면 거쳐야 할 단계가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던가, 형식을 철저히 지켰더니 지루해서 그만 관객을 모두 꿈나라로 보내버린다거나, 10년에 1번 나올까 말까 한 작품을 만들려고 했으나 만 명당 딱 1명만 마음에 쏙 들 정도로 관중의 구미가 까다롭고 다채롭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에 이르러서 작품의 총량도 어마어마하게 축척됐다. 대충 보면 다 안다. 예술가의 머리 꼭대기에서 관객이 그런신다. 어디 잘 노나 보자, 라고. 진짜 그런가는 모르겠고. 심지어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자신있게 말하기 난해한 것처럼 예술품은 내 생활의 품위를 높여주고, 기쁨을 안겨주며, 감동의 물결을 불러오지만, 그보다는 예술을 향유하는 대중의 입장에서는 예술 작품이 기실 피로를 풀어주는 오락물에 더 가깝다. 솔직히 그렇다. 상업은 일단 일이고 공부며 소비재다. 그것은 먹고 사는 생사의 문제다. 그것의 성공과 실패를 즐기는 것은 놀이고 경험이며 인생이다. 그 가운데 예술이 있다. 알고 보면 위치 애매하다. 창작자와 애호가, 업자와 소비자의 매개체로써의 예술은 그래서 대중 예술과 순수 예술로 나뉘기도 한다. 그런데, '너 일할래 놀래' 라고 물어보면 둘 중 하나만 답해야 하듯이 전위나 진보나 고난위도는 몰라도 <전형이냐 파격이냐>에서 하나는 골라야 한다. 어중간하면 인생 모호해진다. 만약 그에 대한 재주꾼이라면 그것은─전형적이냐 파격적이냐─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복선과 암시를 제시하여 목표부터 결말까지 그 중간을 데칼코마니처럼 딱 접어서 어떤 새로움을 만들 수도 있다. 가능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시계 토끼를 만나야 하는 스타일도 있다. 여자가 다수인 자리에서 남자를 옹호하면 그런다. 남자 편드는 거 보라고. 작가의 문체가 A유형이냐 B유형이냐, 아니 무엇보다 작가편이냐 독자편이냐. 사람들은 인생관을 정하고 기도를 드리며 사랑을 열망하며 살기도 하지만, 하루종일 놀고 인생을 즐긴 다음 일기는 나중 한꺼번에 몰아서 쓰는 개구쟁이도 있을 것이다. 왜 없겠나. 은근함 대 확실함의 비율이 어느 쪽이 높냐에 따라 이성이 선두냐 감성이 이끄느냐, 의 관건이 될 수 있다.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의 편집장 밀러씨가 괜히 척에게 회사 차 페라리를 편히 이용하라고, 그 애마를 어여삐 애용하라고 한 게 아니다. 차를 좀 아는 사람들이 하는 말로 페라리는 감성이자 여자고, 포르쉐는 이성이며 남자라고 한다. 절반은 농담이고 말장난이겠지만, 절반은 일리 있는 얘기다. 밀러가 의도적으로 페라리를 제시했을지 순전히 우연일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나중 그 불분명한 계기가 필연성과 개연성과 전개와 절정을 모두 불러올 수 있는지는 바나나 껍질을 까듯이, 패를 뒤집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헛된 꿈과 없는 복선과 엄한 상징에 대한 억측을 종식시키고, 겨우겨우 건질 반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실 모순이 무엇이고 결여와 행동은 어디 있는가는 제쳐 두고 오직 단 하나, 딱 하나만 하면 된다. 도대체 전개가 언제 태동할 것인가만.


   7

   어이쿠! 다시 숨어버렸던 전개가 나오셨다. 척의 친구 햄릿이 등장한 것이다. 햄릿은 척에게 돌아가자 했고, 척은 햄릿에게 난 여기가 좋아 라고 했다.
   「그런데 햄릿. 너 여긴 어떻게 알고 왔니?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리고 이곳으로 오는 길은 사라졌는데...?」
   「하나씩 물어 봐 이 친구야. 첫 번째 질문이 뭐였지, 내가 여기 어떻게 왔는가? 하워드가 요트로 날 이곳으로 태워다 줬어. 여기에 가 보면 흥미로운 일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난 지금 알게 됐지. 하워드한테 속았다는 것을. 그리고 척 네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몰랐어! 어떻게 알기는 뭘 어떻게 알아?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하다가 널 만나니까 놀랐지. 그게 다야. 또 마지막 말이 뭐였드라... 이곳으로 오는 길이 사라졌다고? 그게 대체 뭔 얘기니? 응?」
   「아, 아니야. 모르면 그냥 알려고 하지마. 너무 많이 알면, 안돼. 어차피 이곳에서 그걸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고, 그걸 입증할 근거도 없는 데다가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니까. 그럼. 그런데 어때? 여기 살아보니까 재미없지? 하지만 어떡하니, 난 재밌는데. 난 여기가 좋아졌거든!」
   「왜? 초현실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여자라도 만난 거니?」
   「그러지 말고 너도 그 자크 넥타이는 풀어서 던져버리고, 사랑의 찬가를 부르며 근처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비밀의 숲을 찾아보렴. 아니면 우리 회사에 취직하던가.」
   척과 햄릿은 말 그대로 평범한 휴양지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들은 친구였고, 그들은 서로를 100퍼센트 신뢰하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햄릿은 혼자서 놀기 위해 관광지를 둘러보러 떠났고, 척은 문학잡지사 미스테리아로 갔다.
   그는 미스테리아 사무실에 도착했다. 직원들은 모두 단체로 소풍을 갔고, 그러므로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척은 함께 가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척은 편집장의 방에 들어가서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다리를 책상에 올리며 거만한 자세를 취했고, 그는 편집장 밀러를 흉내냈다. 대충 따라하니 시늉이 어설프지 않았다. 실재와 똑같지는 않았으나 따라한 사람은 꽤나 재미있어하는 듯 했다. 척은 밀러의 책상에 앉아 자신의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파일 미스테리아를 열었다. 미스테리아는 미스테리와 히스테리아를 결합한 용어였다. 그는 엑셀 파일에 기록했다. '미스테리아에서 첫 만남'이라는 A4와 '햄릿'이라는 C1이 만나는 지점인 C4 칸에 날짜를 입력했다. 그것이 필생의 염원을 이루어낼 기회의 전조일지 아니면 그냥 척의 최근 취미일지는 몰라도 자신의 주변 일을 모두 기록하니 뭐니 해서 작품의 제재를 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엑셀 파일 미스테리아가 나중 진가를 발휘하면 좋은 거고, 그것이 제값을 해내지 못해서 고단한 노동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척은 싱글벙글 웃으며 무언가 희뿌연 꿍꿍이를 도모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 편집장실로 미스테리아에서 척과 친하게 지내는 직원인 듀발이 뛰어들어왔다. 척은 깜짝 놀라서 긴장했다.
   「척. 여기서 뭐 해요? 우리 편집장 못 봤어? 아 글쎄 밀러 그 인간이 어디 갔지? 소풍 가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니까. 꼬마도 아니고 본사에 일 안하고 맨날 놀러다닌다고 확 보고해버릴까?」
   아마도 밀러가 또 지병이 도졌나 보다. 편집장 밀러는 간혹 정서가 메마른 것 같은 감성에 휘말리면 낯선 여인을 따라가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  숙녀가 하녀일 수도 있고, 연극배우나 평범한 여행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상천외한 사건도 황홀한 모험도 없는 일상, 어쩌면 밀러는 직업 의식이 투철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척은 어쩐지 앞으로 자기가 편집장 밀러를 직접 찾아나서야 할지도 모른다는 어떤 상투적 운명이 느껴졌다. 아니 정말로 페라리까지 받았는데 사무실에서 높은 성과에 비해 제일 한가한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도리가 아닌 듯 여겨졌다. 만일 그 곡진한 사연을 잘 캐내기만 한다면 이 미스테리아 같은 환상문학 잡지를 자신이 새로 창간하든가, 아니면 아예 거대 인터넷 기업처럼 이곳을 통채로 사버릴 만한 부와 명성을 안겨줄 장편소설의 주제를 직접 체험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왠지 예감이 좋았고, 어딘지 모르게 참을 수 없는 기대가 느껴졌다. 그에게는 이제 밀러 찾기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척은 밀러가 어디 사는지도 몰랐다. 성급하게 친해지기는 했지만 아직 모르는 사정이 많았던 것이다.
   그는 그날 숙소로 돌아가서 좋은 방법을 떠올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괜찮은 아이디어가 쉽게 떠오르겠나. 그래서 척은 단골 술집 모던 클래식으로 놀러가게 되었다.


   8

   그는 회사 동료 듀발과 마샤를 불러냈다. 바 모던 클래식으로. 그는 이미 눈치를 챘기 때문에 미스테리아 엑셀 파일에 기록해뒀다. A6에는 비밀, E1은 듀발 E6는 '마샤를 염탐중', F1은 마샤 F6은 '듀발을 향한 연정이 뜨거움'이라고. 척은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작은 기대는 확실히 있었다. 듀발이나 마샤가 뭔가 솔깃한 정보를 내놓을 것이라고. 하지만 바에서 그들과 얘기하면서 산통은 깨져버렸다. 그것도 와장창! 왜냐하면 바텐더 스펜서도 이미 아는 일을 자기만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편집장 밀러가 최근 객지에서 굴러온 웬 햄릿이란 작자와 삽시간에 친해졌는데 그들이 무슨 요트를 타고 유람도 다니고, 골프도 치러 다니며, 한참 브로맨스의 열정을 과시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건 꽤 믿을 만한 정보통으로부터 습득한 정보도 아니고 이 일대에 모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내일 밀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출근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떻게 보자면 상스러운 징조였다. 척의 심경은 더없이 착찹했다. 미스테리아 문학잡지 편집장이 미스테리에 대한 소명을 종식시키면 안되는 거였다. 그건 착란이자 절망이었다. 새로운 전개에 대한 신념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화색이 돌던 안색은 냉소를 불러왔다. 미스테리아 독자님들께 다 면목이 없었다.
   순간 마샤가 척에게 야심찬 회유인지 은은한 빈말인지 구분이 퍽 까다로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졌다.
   「그러지 말고 이참에 척 오빠가 새로운 편집장이 되면 어떨까? 괜찮은 생각 아니니, 듀발? 밀러 그 인간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있었잖아!」
   「그래도 밀러...가 최고지. 우리끼리 농담으로 뭐라 뭐라 해도 어디 밀러 만한 물건이 흔하니? 안 그래?」
   척은 이별가라도 부르고 싶어졌다. 발단으로 시작해서 발단으로 끝나는 게 자신의 운명인 듯 느껴졌다. 피식-하며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건 명백한 비애였다. 전혀 마음이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멍석은 깔아줘야 예의 아닌가? 아닌가 보다. 허세와 허풍과 허당에 이어 허식과 허위까지 들고 일어선 상황인 듯 했다.
   척은 그날 집에 가서 K.334번을 들으면서 엑셀 파일에 뭔가를 입력했다. A7에 친교라 썼다. D7에 역삼각형 표시. E7에 삼각형을 썼다가 지웠다. 왜냐하면 어차피 듀발과 마샤는 사랑의 드라마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텐더 스펜서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나서 하워드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받지 않았다. 햄릿에게도 전화했다. 받았다. 그런데 햄릿은 몹시 퉁명스럽게 왜 전화했냐고 투덜거렸다. 그처럼 삐딱하게 나올 것까진 없는데, 척은 그게 아마도 새로운 우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맞다. 그는 친구를 뺏긴 것이다. 우정의 순위가 바꼈다. 그는 찬밥 신세였다. 문학 잡지 편집장 밀러에게. 그것도 두 명씩이나. 그 인간이 괜히 인심 쓰는 척 하면서 누군가에게는 열렬한 신앙일 페라리를 건넨 게 아니었다. 다 계획된 수작인 듯 했다. 뭐 이성과 감성? 고전 문학 제목도 아니고 그는 결국 비애와 애수와 비창을 느끼고야 말았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사정이 딱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페라리를 타며 해안 도로를 질주하다 해변에서 일광욕을 그것도 차에서 하며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을 모른 체 했는데... 희극은 악몽으로 급작스럽게 조바꿈을 한 것이다. 이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된다! 우정은 가고 오는 것. 사랑은 이별로도 권태로도, 친구에게 빼앗길 수조차 있는 것. 그는 차분히 하이든의 C장조 미사를 들으면서 이 고등한 인연의 얽힘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으니까.


   9

   다음 날 척은 페라리를 타고 휴양지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처음에는 그냥 작품의 소재를 포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한 둘러보기였다. 그러나 우스꽝스럽게도 예술적 격정은 뭔가 신경 쓰이는 추측으로 바꼈고, 그것은 다시 사무치는 추론으로 변했다. 뭐랄까 그 염치없는 추론은 마침내 정탐으로 귀결되고야 말았다.
   그는 발견했다. 푸르른 공원에서 소풍을 즐겁게 즐기고 있는 세 친구를. 그는 다가가지 않았다. 단지 쌍안경으로 먼발치서 밀러와 햄릿과 뭐야, 또 한 명은 누구지? 아! 초호화 요양원 원장인 쾨헬이었다. 그는 흔들린 우정을 예단하지 않았다. 달랑 한 장면을 가지고 우애를 속단할 만큼 그는 속 좁은 남자는 아니니까. 다만 이 예증을 잡지사 출판인 즉 대빵에게 투고할 생각을 굳힌 것이다. 나중에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는 모르지만 그가 정말 간곡한 통사정을 어딘가에 했나 안했나는 아마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척은 사랑에 일가견이 있지는 않았지만, 우정을 한두 번 겪어본 것도 아니지만, 그 일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그만큼 척이 마음의 그릇이 크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 영문은 따로 있었다. 그날 척이 휴양지를 돌고 또 돌며 뭔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휴양지와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였다. 새 연륙교. 그가 여기 당도할 때 왔던 경로와 얼추 비슷한 위치인 듯 했다. 고로 그는 자신이 전에 썼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뜻밖의 거금이 생겨서 먼 곳으로 떠났고, 안락한 호텔 생활을 이어가다가, 어느 숲 속을 거닐었는데 안개 낀 그 이상한 느낌의 길을 따라갔더니 자기가 살던 도시의 폐쇄된 놀이공원이 나왔다더라 라는 이야기. 그것은 단순한 습작이었는데 그것이 지금 역으로 재현되는 듯한 기분은 결코 묵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날 밤에 숙소에서 꿈을 꾸었고, 자다가 몽정을 했다. 꿈의 내용은 어렴풋했고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전혀 야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수했고 거의 동화나 다름없었다. 하긴 전에 비슷한 경험이 있었더랬다. 과거 어느 때던가 그는 타임 패러독스 ((2014)란 영화를 보았고, 그날도 그는 그날 밤 뒤척이며 선명하지도 또렷하지도 내용이 기억나지도 않는 꿈을 꾸었고, 신기하게도 몽정을 경험했다. 전혀 색정과 관계없고 호색과 무관한 꿈이었다. 꿈을 꾸긴 꾸었나 아리송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는 그때 당시 아 정말 이럴 수도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옛날 인상적인 체험을 했는데 기억을 못할 리는 없고, 아마 척은 그것이 그때 난생 처음 겪은 일이었다. 당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그런 일을 겪었을 것이다. 그것은 누가 뭐래도 놀라움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일을 겪는 기회는 결코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놀라운 일이 다시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 날 고민에 들어갔다. 미스테리아에 남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페라리를 계속 탈 것인가, 키를 반납할 것인가를!


   10

   하루는 이랬다. 척은 단골 술집 모던 클래식으로 갔다. 보기 드문 명-바텐더 스펜서와 독대하며 향후 자신의 거취에 대해 논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모던 클래식에는 스펜서 홀로 어느 잡지를 읽고 있었다. 음악은 영화에 나올 법한 잔잔한 노래가 나오고 있었고, 묵음으로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에서는 치타와 하마와 돌고래와 딱따구리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는 남자니까 아마 여성잡지1이나 여성잡지2를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스펜서는 남성잡지를 읽고 있을까? 설마 문학잡지 미스테리아를? 척은 그 궁금증을 다소곳이 아껴두기로 했다. 목마른 열정은 가슴 벅찬 감동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싫증이나 실망, 썩은 미소를 불러오기 때문에.
   척은 스펜서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스펜서와 말이 좀 통한다는 것을 척은 느꼈던 것이다. 스펜서는 인생 경험도 풍부하고, 사람들과의 인연도 적당하고, 여자도 알고 게다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경험했으며, 허풍과 허식과 허세의 배경이 되어 박수치며 반짝반짝 호응하며 장단을 맞춰주는 기술은 물론 교양과 상식이 모두 어느 선에 도달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자세한 대화 내용을 옮기지는 않겠다. 단지 스펜서의 고향 친구들 세 명이 바에 들어와서 스펜서가 어떻게 변했나에 집중해보자. 그럽시다. (박수 한번, 양 손바닥을 맞닫아 슥삭슥삭)
   요점은 척과 바텐더 스펜서, 스펜서의 친구 1─2─3, 그들은 모두 무난하게 웃고 떠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래서 척은 반 발 앞선다고 또 스펜서 띄워주기에 들어갔다. 살짝 진행됐다. 조금 몰입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스펜서의 표정이 뭔가 거북한 듯 보였다. 척은 눈치챘다. 스펜서가 수탉 무리에서 암캐와 관련된 앙앙대는 영웅담은 그다지 노출시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석하자면 상황은 이랬다. 바텐더 스펜서는 놀러온 친구들 1─2─3 때문에 바텐더 역할을 척에게 넘겨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통은 남자 세계에서 내가 나서지도 않았는데 타인이 날 띄워주면 웃어야 정상이다. 이때 비웃으면 비정상이다. 그때 하수는 좋아하고, 고수는 상대의 의중을 간파한다. 립서비스가 왜 싫겠냐마는 이미 분위기가 말랑말랑해졌는데 그것이 지나쳐도 모자라도 부자연스럽다는 것, 어린애들 사이에도 그 정도 사회적 식견은 아마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척은 정상, 스펜서와 그의 친구들은 비정상이란 말이 아니다. 그 역은 성립하냐 역시 증명할 필요없다. 왜냐하면 한쪽은 어린이 한쪽은 철없는 어른, 그렇게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안에 대해서 혹자는 아시는 게 많기 때문에, 무엇보다 말이 많기 때문에 경솔한 판단을 내리실지도 모르겠다. 그분께서 촌닭이 아니시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경솔한 행동이지만 적어도 그분은 촌닭이라는 골-세러모니를 받지 않기만을 바람. 즉 옆사람 말을, 라디오 사연을 얼핏 듣고서 이를 권력 관계랄지 콤플렉스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인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펜서가 만약 바텐더가 아니었다면!> 라는 연설의 목소리가 커지는 일도 가능다는 것. 어설프거나 상황 뻔해 보여서 '뭔 말인 줄 알아' 그렇게 말하거나 유추하면서, <만약-그러면>이라는 조건문으로 이미 설명을 끝냈다가 뒤늦게 낭패를 본 사례, 아마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막판 반전은 바로 그 전형적일 수 밖에 없는 추리 같은 추측을 노린다. 베테랑 가수의 신곡을 듣고 베테랑 가수는 일부러 새로운 창법을 선보였는데 지나가는 말로 목소리가 갔네 전성기가 지났네 라고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런 사례도 있긴 하겠으나 이 경우에는 누가 갑이든 을이든, 누가 주인이고 손님인가가 문제가 아니다. 최소한 지금은 역할에 따라 오해가 발생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상관관계보다, A라는 원인 때문에 결과 B가 발생한다는 인과관계를 전제로 하는 말이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척은 똑같은 상황을 옛날에 친구 사이에서도 겪었기 때문이다. 척과 척의 단짝, 단짝의 시골친구 1─2─3. 그렇게 만났을 때도 척은 단짝의 친구들과 바로 남자 대 남자로써 말을 놓고 그렇게 수 차례 만났다. 그랬는데 똑같은 일이 발생하더란 말이다. 그래서 녀석 친구들 1─2─3이 없는 자리에서 둘은 속을 터놓고 얘기했다. 척의 단짝이 말을 꺼냈고, 척이 답했다. 
   「1─2─3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하면 어떡하냐, 내 이미지는 뭐가 되냐! 애들이 날 뭐라 보겠니.」
   「1─2─3이 무슨 여자냐? 걔들 남자잖아! 그 친구들은 고추가 달렸지 가슴이 나오지 않았다고.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게 곧 미덕이다. 그런데 왜... 그게... 하여간 미안하게 됐다. 내 잘못이다. 내가 주의하마.」
   척의 친구들은 난봉꾼, 달변가, 모험가, 탕자, 영화배우감, 도박사, 개그맨, 마당발, 신비주의자, 술꾼, 게임광, 스프리트파이터, 재력가 지망생, 예술 애호가 가운데 최소 대여섯은 겸직한 상남자였기 때문이고─범생이는 어딨어?─그러므로 척 단짝의 친구는 몰라도 척의 친구는 좀 남라서 그건 간혹 현현되는 일인 듯 하다. 오해라는 게 보통 그렇다. 법률 용어인 유권해석, 입장 차이 형편 차이, 딜레마를 불러올 수 있는 상황, 허세와 허영의 주파수가 일치하는가 라는 불문율(왜냐하면 허세와 허영 지수가 양측이 대략 근소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는 불문율을 전제로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 상대적인 문제보다 개인적 문제인가(내가 지금 행복하니까 미래지향적인가, 내가 지금 바닥이니까 어떠한가, 내 성공과 또는 타임머신과 밀접히 관련되니까 정치적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교양미를 앞세워 문화 차이를 인식하고 말을 줄이는 게 먼저인가)등. 이와 같은 객관적 지표 그것에 대한 이론과 실제는 누구나 알지만 이론대로 이성이 감성과 감정을 모두 제어할 수 있는가, 그건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고로 앞날은 모르고 장담하는 건 자유니까 장담해도 좋다만, 다만 판돈은 걸지 않는 게 현명하다. 바로 그래서 잘못된 건 잘못된 거다 라는 문제 제기 정도의 베팅이 올인 만큼의 시간을 잡아먹을 수 있는 모순은 드물게 현존하기 때문에, 가난의 문제 역시 곧 시간을 갉아먹고 어떤 기회가 줄어들 가능성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 라는 부조리는 과거보다 미래가 적고, 따라서 그것을 역이용하는 일을 줄여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리고 언제까지나 현재에 해당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 적게는 3명 덜 적게는 7명의 친구들이 술집에 들어간다. 일렬로 바에 앉는다. 비싼 술에 대해서 물어만 보다가 값싼 술을 시킨다. 변죽만 울리고 실속은 챙긴다. 살 듯 말 듯 간만 보다가 카페 피카소 사장으로부터 외상값 독촉 전화를 받는 것보단 그게 차라리 낫다. 그들은 적당한 목표가 없기 때문에 말수를 아낀다. 바보도 아니고 남자끼리 있는데 들뜨겠나 어쩌겠나. 꽃밭인 줄 알고 나이트클럽에 갔는데 순~ 촌닭과 촌년 뿐이더라, 1차 실패에 슬퍼하지 않고 2차 시도, 10시 방향 양 한 마리 2시 방향 고양이 한 마리 나타나면 둘 다 놓치지 않으려면 실력 발휘를 해야 할 텐데, 바로 그래서 힘을 아껴야 한다. 좀처럼 보기 드문 왕성한 정력의 소유자도 있긴 하지만. 어찌 됐든 그렇게 술잔을 들고서 깔짝깔짝 홀짝거리는데, 그런데 누가 먼저 나서서 묻는다. 이처럼 적막이 깨트려지는 순간 우리 남성들의 눈빛은 살아난다. 핑~! 질문의 요지는 이렇다. 우리 가운데 누가 제일 돈이 많아 보이냐고. 왜 하필 그걸 물어봤냐고요? 왜냐하면 다른 질문들도 많겠지만 핸디캡을 고려해서 그것이 그나마 제일 무난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에 있는 언니는 참 속도 없다. 순전 허당 같다. 사정 참 딱하게 됐다. 그녀는 왕년에 좀 놀았을까? 놀았거나 말거나! 좌우지간 그 언니가 수트 입은 범생이 스타일을 점찍었기 때문에 딱 한 명 빼고는 모두 절망하고, 울분을 터뜨리며, 수증기의 열기가 분출된다. 오오 절규! 가련한 예술가이자 가난한 삼류 로맨티스트의 끝없는 추종자에 지나지 않는 게 뻔히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그러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나! 그럼 난리난다. 바로 그 순간 분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와 별개로 뜻밖의 인기상을 거머쥔 지존은 이래야 한다. 원 별말씀을! 푸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하! 겉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이분은 숙녀의 눈썰미를 속으로 칭찬한다. 겉으로도 칭찬한다. 그러나 비싼 술을 시킬지는 두고 봐야 한다. 그녀는 안목 있는 여자인 것 같다. 아마도 글귀도 밝을 것이고, 교양미까지 겸비했기 때문에 어머 어머 그녀가 그녀가 예뻐보인다. 큰일이군. '계단을 올라갈 때는 남자 먼저, 계단을 내려올 때는 여자 먼저'가 예의지만 그 반대로 갔기 때문에 어떤 파릇한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제발로 굴러오는 호박마차에 누가 타게 되는 것일까? 그분은 신데렐라다! 날 찍은 그녀가 뭘 좀 아는 거지. 킥킥킥 크크큭큭큭! 하지만 한 명의 진공청소기가 있으면 나머지 친구들은 커피포트다. <이것 봐요!>로 시작해서, 저 꽁생원이 뭘로 봐서 그러냐고, 난 살면서 단 한 번도 쟤한테 저 쫌팽이한테 뭘 얻어먹어본 적이 없다는 둥 뭐라는 둥. 즉 내가 나서서 <내가 최고다> 라고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3자에 의해 일시적인 공인으로 권위자에 등극되고, 표면적인 왕좌에 누군가 어쩔 수 없이 앉게 되면 보통은 으쌰으쌰 들고 일어나야 정상이다. 왜냐하면 상남자는 그래야 하니까. 왜냐하면 뭐니 뭐니 해도 친하니까. 그런데 스펜서의 반응으로 봤을 때 그 친구들은 스스로 나서지는 않았어도 어떻게든 돋보이고 반짝이면 그건 자기들 사이에서는 미덕의 반대 급부인 것 같았다. 그분들 1─2─3은 잘들 논다 그러면서 편안히 듣거나 아니면 나서거나 그러지 않고 뭔가, 뭔가 이상했다. 스펜서는 반대로 친구들에게 안 좋은 심상으로 찍힐까 봐 꽤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건 곧 부정적인 영향이 크다는 거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도시 대 시골의 특징이 다르듯 다만 접고 꺾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소한 딜레마에 봉착하는 것이자, 대상이 불분명한 텃새가 발생하는 현상인 듯 여겨졌다. 주로 구사하는 어휘가 표준어냐 사투리냐 외국어냐, 아니면 하이브리드냐. 여자냐 남자냐. 이성이냐 감성이냐. 막 대해도 편하고 친하고 재밌냐, 격식과 예절이 필요하냐 또는 배려하지 않는 게 최선의 배려가 되는가. 그 차이였다. 척은 스펜서의 친구 1─2─3을 아직 잘 모르니까 적응할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던 것이다. 스펜서는 누가 뭐래도 명백히 허세 지수 50인 호인이다. (허세 지수 95나 5도 괜찮음. 다른 부분에서 감점을 메꾸니까. 일장일단 있음) 생색을 너무 내도 불편하고 너무 안내도 영 재미없는데, 스펜서는 그것마저 50이었다. 그래서 그는 꺾고 접고 나섬과 물러섬과 기다림을 아는 남자다. 말로는 탕자도 됐다가 남을 영웅으로 치켜세우기도 하고, 으쌰으쌰로 분위기를 몰아가서 일부러 자신이 꼴찌가 되는 기술 역시 탄탄했다. 사랑에게는 믿음직스러웠고, 우정에게는 든든했다. 일면식 없는 남아들에게도 두둑한 지갑 만큼 덕망도 두터웠다면 말 다 한 거다. 그러나 문제는 스펜서의 친구 1─2─3이 있다는 것이었다. 스펜서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 것이다. 그가 명-바텐더인가 아닌가, 는 따질 시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척은 곧바로 말수를 줄였다. 척의 그 환영 받지 못할 어설픈 쇼맨쉽은 누구 하나 옹호하지 않는 위임에서 가로소운 역위임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많이 시무룩하지는 않았으니 나름 선방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터 스펜서의 친구 1─2─3의 순박함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이마에 홀로그램으로 글씨가 나타나는 게 보였다. 나순정이라고. 뒤통수에 666 바코드가 있는가는 확인해보지 않았음. 한 사람의 기호가 앵무새고, 선호하는 생활 방식은 부엉이일 수도 있다. 그가 오리건 까마귀건 그는 나중 성장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현대 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도시다. 쉽게 말해 도시 대 시골을 8 대 2라고 봤을 때, 인생의 전-전반기 곧 생애의 발단을 어디서 보냈냐에 대한 미세한 차이가 있다. 여자는, 숙녀는 그런 섬세함을 아는 남자를 좋아한다. 그것에 더해서 부드러움까지 알면 금상첨화고. 그러나 알기만 하는 건 좀 다르다. 
   결론은 스펜서의 친구 1─2─3이 밀고 댕기는 뽐내고 겸양을 부끄러워하고 먼저 예찬하는 흥정의 묘미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허풍과 허세와 허영과 익살, 질투, 농담, 욕망, 소원, 찬사등을 왔다 갔다 하는 웃음의 복마전일 수도 있는. 그분들은 대화의 방식이 달랐다. 웃는 시점도 달랐다. 그분들은 착하고 선량한 사나이라서 변화구에 대처하는 자세가 뭔가 약간 부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세상을 아니까 대부분 이런 사례를 직접 겪었다. 최소한 알거나 보고 듣기라도 했다. 가령 (지역별 차이 감안하고) 결혼식을 앞두고서 피로연에 신랑될 남자가 친구들을 부른다. A부터 E까지. A는 사립 유치원 친구들, B는 시골 동창, C는 도시의 전-직장 동료 D는 뭐 E는 뭐등. 어른이니까 만나서 일부러 다투지는 않는다. 화목하게 웃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다. 철없는 어디 악동이 아닌 이상은. 친해지기 전에는 서로 조심하고, 각자 교양과 예절을 지킨다. 친해지는 것도 단계가 있다. 처음 만나 호감을 느껴서 영원히 호형호제할 것처럼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소셜 네트워크 친구를 맺는다. 으쌰으쌰! 그런데 보통은 그 해맑게 웃는 약동감, 오래 못간다. 인정이 있는데 돌아서자마자 잊지는 않지만 사느라 바뻐서 보기 힘들다. 그럼 그런 인연이 한둘일까? 아니다. 계속 쌓이고 쌓인다. 기존의 최측근 친구도 개인 형편에 따라 만남의 횟수가 들쑥날쑥한다. 단짝마저 바뀐다. 다시 피로연으로. 그런데 분위기가 이성을 뒤흔든다. 으쌰으쌰! A와 E가 다툰다. 보통은 그러다 만다. A와 E는 화해했다. 그런데 B와 C는 쉽사리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분위기도 좋고 열도 좋으니까. 따지고 보면 잘못한 쪽은 없다. 그런데 오해는 이해가 아닌 논쟁을 넘어 소란으로 발전한다. 다 무리에서 통용되는 질서와 불문율이 약간씩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찻집에서 앉아 있는 남자와 서 있는 여자는 남남이다. 그날 처음 눈빛만 스친다. 그런데 눈빛 한 번에 말썽이 생긴다. 목소리가 커진다. 그래서 사전에 알아서 눈 깔고 굽히는 게 편하다. 차라리 그게 낫다. 그런데 아예 남남이 아니라 지인이나 친구 사이에 오해가 생긴다? 상대적으로 한쪽이 굽히는 게 보기 좋다. 최근 시련에 빠진 쪽 보다는 먹고 살 만한 친구가. 눈치가 둔한 사람보다는 빠른 사람이. 인기가 많거나 돈이 풍족한 쪽이. 꽃 들고 쫓아다니는 남자? 그보다는 고양이가 선호하고, 꽃과 양과 호박이 첫눈에 호감을 느끼는 쾌남아가. 속 좁은 남자 < 범인 < 대인배가. 무엇보다 이런 성격의 다툼에 대한 유경험자가. 그리고 여자보다는 남자가!
   여기서 인문학적 소양을 짚고 넘어가자면 이렇다. '친구들을 만나면 주로 뭘 하고 놀았냐'에 따라 <단순히, 친했냐 한때 어울렸냐>로 나뉘지만, 스무 살 이전에 학교를 도시에서 다녔냐 시골에서 다녔는가 역시 한 사람을 아는 데 좋은 지표가 된다는 것. 스무 살 처녀가 촌년일지라도 성장 배경만 봐도 최소 다섯 가지로 나뉜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계속 도시에서 살았냐 또는 시골에서 살다가 도시로 올라와서 학창시절을 보냈냐 곧 도시로 수렴됐냐가 첫째. 둘째는 시골로 수렴됐냐. 셋째, 도시와 시골을 폭넓게 전전했는가. 넷째, 도시와 시골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 단위로 옮겨 다니며 살았냐. 다섯째, 기타. 그 시기에는 모른다. 인생의 발단일 때는 마음 맞는 친구와 노는 게 먼저다. 알아도 쉽게 넘긴다. 이해하고 싶어도 상대가 이해해주기를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기 나이의 두 배, 세 배, 네 배를 앞으로 살게 되더라도 사랑에 대해서 친구와 사적 대화를 단 한 번도 나눠보지 못하리라고는 그 시절에는 쉽사리 예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교라는 이론에서 사회라는 실재로 나가야 그 입장 차이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정말 많은 경우는 단지 입장 차이 때문에 웃다가, 울다가, 오해했다가, 말은 안해도 미안해지고, 역시 말은 안해도 그냥 이 불편함이 지나갔으면 좋겠고, 겸연쩍어하고, 다시 웃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학문에서 상업으로. 공부하고 돈을 쓰고 육체적 사랑에 대한 팔팔한 호기심이 가득한 청춘에서, 일하고 돈을 벌고 조류 대백과를 경험으로 체득하는 어른으로 가는 여정은 꽤나 재미있을 수도 험난할 수도 있다는 것. 굳이 추신을 덧붙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따라서 척은 그날도 숙소에 가서 엑셀 파일 미스테리아를 띄우고, 새로운 내용을 입력하면서 색다른 기쁨을 누렸다. 그가 즐겁게 입력한 내용은 이랬다. A열 8행부터 밑으로 쭉 써내려갔다. 내적 부러움, 부러움의 표현, 허세, 허영, 허풍, 지적 매력, 인생 장르, 아는 체 하는 정도, 교양의 실천, 좋아하는 유행가, 분위기 갖추어지면 남 앞에서 생음악으로 부를 수 있는 추억을 부르고 향수를 떠올리게 만드는 3분의 마법을 부를 수 있는가(2절 3절 필요 없고 1분 동안 노래할 수 있는 로망과 용기를 간직한 낭만파인가. 왜냐하면 이 어느 때 필요한 것은 가왕의 재능이 아닌 분위기를 띄우는 작은 성의니까. 하지만 간혹 1번째 권하고, 2번째 보채고, 3번째 간절히 부탁해도 거절할 극소수가 누구인가 그것은 예측이 틀릴 수도 있음. 웃으며 춤추자 마시자 함께 하자, 아니다 아니다 난 싫다 난 싫다, 포기해라 포기해라 그만해라 그만해라, 아니다 아니다 포기 못한다 포기 못한다, 반복 또 반복, 이상한 지점에서 대결 구도가 발생하여 그러다 분위기 썰렁해질 수도 있음. 놀자 사랑해 청혼, 거절하고 빼고 응낙을 망설임. 시기와 행동의 적정선은 고정적이지 않을 뿐더러, 러브콜이 꼭 1 대 1로 질서 있게 대응할지도 의문임), 선망은 소망인가 대망인가 야망인가, 촌스러움이 언제 어떻게 발화되는가, 평판, 장밋빛 원맨쇼에 대한 반응 패턴 등등. 물론 본색과 심상을 빼놓지도 않았다. 그러면 몹시 섭섭하니까. 그런데 장본인이 설정한 인생 포지셔닝, 타인에게 비춰진 첫인상, 장본인이 누구 하면 뭐라는 본인에 대한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재설정한 포지셔닝등을 모두 거쳐서, 딱 확립된 개인적 특징에 대해서 대체 척은 뭐라고 짧게 논평했을까? 그는 정말로 거기에 뭐라고 적었을까? 알고 나면 가슴이 찡할런지 눈물이 핑돌런지는 몰라도 속시원히 알아나 보자. 좋소. 그럽시다. 그게 뭐 어렵다고. 음, 잘은 몰라도 아마 이렇게 입력했을 것이다. 개상, 말상, 쥐상, 고양이상, 호랑이상, 원숭이상, 오리상, 펠리컨상이라고. 그렇다고 척이 유독 말상과 개상에 눈독 들였다거나 뭐 그러지는 않았다. 그래서 거기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개상과 말상은 오직 여자뿐이다? 난 그런 말 못하겠다. 내 입으로 어찌 그런 통속적인 농담을! 내 어찌 그런 상스러울지도 모르는 만담을! 선생, 한번 생각해보소. 감히 소신이 어떻게 그런 천박한 표현을 입에 담겠소이까. 아니 그렇소? 어~라! 정녕 못 믿겠단 말이오? 이거 이거 이 양반이 사람을 뭘로 보고 말이야, 어? 살살 녹여주며 귀공자니 뭐니 슬슬 아부할 땐 언제고. 보아 하니 우리가 몸의 대화로... 허허허 승부사인 내가 참아야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나 원 참! 안돼 안돼 안돼.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소이다. 허접하고 비리비리허니, 이래 봬도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아 이 양반아. 내 별명을 알고 나면 아마 깜작 놀랄 껄? 더구나 한두 개도 아니야. 그러나, 해명하지 마쇼 형씨. 가만 보니 이분이 참 행복한 사람이구만. 신간 편허니 참 좋겄소. 내 구구절절한 설명일랑 바라지 않소이다. 음 열 좋고, 그림 좋네, 배짱도 있고. 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슥 훑어보고) 뭐 엉성한 듯 하지만 사연도 있어.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고. 은근 순정남이군 그래. (딱)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심히 무엄하도다. 안되겠다. 당장 거짓말 탐지기를 대령하거라. 어서. (뭐야 아무도 없잖아! 무언극이었어 상상이었어? 피한 거야 도망간 거야?) 에이~! 소네트를 읊고, 연가를 부르며, 고혹적인 낭자께 속삭여야 할 사랑 고백을 대관절 인체의 어떤 부위로 하는가를 설마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상상 맞네 상상 맞아. 독백인 듯 하니까. 그래도 유령은 줄행랑을 쳤으니, 냉혹히 따져서 내가 이겼음! 그것도 압승. 승부사인 거 증명됨) ......(휴)...... 일부러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공연히 물의를 일으킨 듯 해서 어떤 숙연함마저 느꼈다. 이쪽에서 미신이 저쪽에서는 천명이 되는 일, 사람 사는 세상에 그런 게 왜 없겠나! 그러나 꼭 무겁게 생각할 사안은 아니고 드문드문 생기는, 미숙함에서 성숙으로, 낯섬에서 친함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오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일 과일나무 씨앗을 구입할 계획을 세웠고, 사랑을 기도하며, 막연한 청첩장을 기다리기로 다짐하며 꿈나라로 떠났다. 



   11

   척은 바닷가에서 페라리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의 휴양지 생활은 그저 그런 재미없는 드라마라고. 그건 걸작이 아닌 졸작이었다. 페라리 빼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 사람들 사는 게 그렇다. 그래서 그렇게 페라리 페라리 그러는 것일까? 아마도! 그는 자신이 어느 중편소설의 주인공이라고 봤을 때 별다른 활약상을 선보이지 못한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사건이라고 해 봐야 휴양지 생활, 엑셀 파일 미스테리아, 문학잡지 미스테리아 프리랜서, 무슨 의도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편집장의 선처 즉 페라리. 그게 다였다. 돌아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추적도, 모험도, 사랑도, 신기한 사건도, 아름다운 사연도 모두 전무했다. 완전 허상이었네. 친구 햄릿을 만난 것은 시시콜콜한 일상이지 소설에 나올 법한 얘기가 아니었다. 아, 편집장 밀러에게 빼앗긴 우정도 있었다. 우연히 정탐했다가 밀러와 햄릿과 쾨헬의 브로맨스를 알게 된 건 치졸한 시기에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아 또 있다. 몽정! 뭔 사춘기 12살에 몽정기 소년도 아니고 부끄럽게 그게 무슨 소설의 소재란 말인가. 나 원 참, 맙소사! 또 단골 술집 모던클래식에 몇 번 들린 거. 스펜서의 친구들을 알게 된 거. 진짜, 정말로 페라리 빼면 아무 것도 없었다. 오 이럴 수가, 세상에나! 영화로 만들면 뭔 소리를 듣게 될지 뻔했다. 아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분들이, 정말로 그분들이 또 악평에는 꽤나 도가 텄는데 말이다. 대적하기 퍽이나 버겨운 상대들이 한두 명이 아닐 텐데 말이다. 페라리! 척의 미스테리아 시절은 나중 그렇게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페라리 하나 밖에 없었다고. 좀 더 살을 붙여보면 어느 원숭이가 있었는데 녀석에게 에르메스 옷에, 디올 벨트에, 폴 스미스 양말에다 정점으로 페라리를 선사해서 선보인 단편영화 같은 시절이라고. 한 편의 촌극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 시절은.
   척은 조바심이 일었다. 완전 초조했다. 거창하게 개봉 박두 짜잔~ 하며 출발했는데 영화는 조기 폐막을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수익분기점에 턱걸이는 커녕 빛만 왕창 떠안은 기분이었다. 그는 뭔가에 쫓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무슨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의 주인공도 아닌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깡총깡총 토끼가 되어 느림보 거북이라도 찾아헤매고 싶어졌다. 중편소설은 이대로 끝나면 안되는 거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발명가가 되어 인생 역전을 이룰 수도 없었다. 로또 복권? 꽝이라면 신물이 난다. 그러면 뭐 패션쇼에 가겠나 누가 받아준다고 망명 신청을 하겠나. 척은 두 눈 똑바로 뜨고 반드시, 꼭 전개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없다. 촌각을 다퉈야 한다. 남은 필름이 촉박하다. 여행 경비도 간당간당했다. 서포터즈 조마조마에서 활동하다 변심한지 얼마나 됐다고. 꼭 필요했다. 전개가 절실했다. 초라해도 괜찮은 전개가 애달프게 그리웠다. 그러나 그게 다짐한다고 쉽게 뚝딱 생기는 심심풀이 땅콩도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어떡하지, 어떡한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는 상습범이었다. 환상을 논하고, 사랑을 노래하며, 술에 취해 본 적이 한번도 없다느니, 싸워서 져본 적도 없다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여자라도 10분이 다 뭐야 라며 허풍 대회 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인생은 말이다. 별거 없었다. 그의 삶은 그야말로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황량했다. 왠지 모래 먼지가 나부끼는 듯 했다.
   그래서 그는 최후의 보루, 엑셀 파일 미스테리아를 펼쳤다. 믿을 건 그거 밖에 없었다. 현재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페라리를 반납하기로. 미스테리아를 때려...그만두기로. 현지에서 사귄 잊지 못할 우정들과 작별하기로. 그러나 혼자 떠날 수는 없었다. 호호호호호, 하하하하하. 그에게는, 운 좋게 시원한 바람이 부는 푸르른 해변에서 일광욕을 하면서 꼬신 루시와 게스가 있었다. 루시는 작사가고, 게스는 사진작가였다. 남자 1명에 여자 2명이라고 이상한 생각은 사양한다. 아니 그건 작품에 해당하고 이건 현실이었으니 그는 뭘 고르고자시고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핑핑 설렁설렁 놀면서 술 좀 작작 마시는 딴전 피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엑셀 파일 미스테리아의 A열 29행에 글씨를 썼다. 로드 무비라고! 당연히 H29와 I29에 애첩1, 애첩2라고 썼다가 지웠다. 좀 더 좋은 명칭이 생각날 때까지 임시방편으로 일단 조수1, 조수2라고 썼다. 그는 두 숙녀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도시 사람들은 휴양지로 오지만 자기는 이제 돌아가야 했으니까.
   다급한 마음에 새로운 여자를 꼬드길려다가 그녀들에게 예술적 영감과 낭만적 착상과 인상적인 추억을 안겨주기 위해 그는 루시와 게스를 선택한 것이다. 물론 루시와 게스도 그처럼 척과 똑같이 생각할지는 미지수였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코너에 몰렸기 때문이다. 회한을 남겨서는 아니되었다. 내내 놀고 미루고 또 놀다가 어쩔 수 없이 전개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삼류 소설가의 숙명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할 얘기가 바닥났다면서 블로그에 공지문을 내걸 수도 없었다. 몇 명 되지도 않을 텐데 누가 본다고.
   그는 일단 짐을 챙겨서 차에 탔다. 편집장 밀러와 미스테리아 식구들에게는 미리 조용히 떠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반복해서 남겼기 때문에 특별히 작별을 고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대신 밀러의 책상에 페라리 열쇠를 놔뒀고, 직사각형 종이에 슥슥 대충 남긴 이별의 인사말을 써서 접고 접고 접어서 고히 놓아두었다. 아 짐은 카프카 전집 2 꿈 같은 삶의 기록, 알베르 카뮈 전집 5편과 접이식 카약과 수영복, 망원경, 그외 몇가지 생활 물품 밖에 없었다. 그는 문학잡지 미스테리아와 술집 모던클래식의 중간에 위치한 빵집 <별들에게 물어 봐>로 작사가 루시와 사진작가 게스를 불러냈다.


   12

   앗! 알베르와 프란츠라는 상표가 나왔으니 잠시 책에 대해 몇 마디만. 인문서적에서는 이렇게 분석한다. 기버와 테이커를 구분하는 결정적 단서는 말에 나타난다고. 증권 분석가의 평가는 보고서에 실린 CEO의 사진 크기와 거의 완벽하게 상관관계가 있다고.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 법칙이 통용될 수는 없다. 창과 방패도 변하니까. 지난 패션계를 기억해 보자. 왜 이 얘기가 나왔냐면 남자는 볼록 튀어나오고 여자는 움푹 들어갔기 때문에 어떻다 그걸 말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학문과 상업이 만나는 지점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특징이 하나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별한 건 아니다. 경향에 따라 겸손이, 시류에 따라 빼지 않는 적절한 자랑에 대한 익살을 1번으로 쳐주듯 유행이란 바뀌지만, 유행과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법칙이 하나 있더란 말이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다음과 같은 하나의 공통점이다. 즉 책에 대한 개인적 취향을 최대한 배제하고, 다양한 책을 단지 구경만 하고, 특정 부류를 선호해서 읽고,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서점을 오래 방문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법칙이 도출됐다. 책 표지에 나타나는 저자 사진의 크기, 책 표지 두께, 책 디자인과 마케팅이 차분한가 요란한가, 그 역시 브랜드의 타겟 연령층&소비층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 브랜드 슬로건과 포지셔닝이 전부 맞지는 않지만 대체로 적중한다는 것. 뭘로도 최고점을 찍고 싶은 작가의 마음, 책을 많이 팔고 싶은 업자의 기술. 전자와 후자가 협심했는데 만약 운까지 좋다? 그건 흥행 1위가 된다. 연예계와 음악과 영화도 똑같다. 최고가 되고 싶다 꿈을 성취하고 싶은 일관된 길을 가며 내 일이 번창했으면 좋겠다, 부인할 수 없는 선이다. 1차적 선. 왜냐하면 화려해야 살아남고, 튀어야 돋보이며, 진취적 원동력의 첫째는 무엇보다 긍지와 자신감이자, 먹고 살려면 뽐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역시 상도덕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사람이 많이 찾는 빵집과 아이스크림 가게는 쉽게 말해 베스트셀러다. 딱 중간이란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우리의 백조가 납시셨다 라고 가정해 보자. 그래? 오오 생상스의 백조가 들린다 들린다. 어머나 뭐야 여기는 동물농장이네? 그분은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다는 거다. 그런데 백조만? 그럴 리가 있나! 연예인병이 있으면 너만 병이냐 나도 있다 라며 예술가병, 직업병, 지병과 일반인 예찬론도 스윽 고개를 내밀게 되어 있다. 요즘 한참 괜찮다는 나이트클럽에 들려본 다음에 그런다. 아 나 이런 뭐 언제는 100퍼센트라더니 순전 촌년과 촌닭 일색이더군 흥! 그런데 정작 그처럼 말한 당사자는 다름 아닌 촌닭과 촌년임.
   자, 누구나 아는 포장에 대한 서론이 나왔으니 본론으로 발전시켜보자. 상업은 둘로 나눠본다. <첫째 자동차>, <둘째 책(지성)>! 첫째인 차는 로망과 기상과 상징성의 표상이다. 나를 대변하는 캐릭터다. 아름다운 숙녀를 만나기 위한 필수품은 아니지만 멋진 인생에 대한 출발점이 앞선다는 잇점은 분명 있다. 이왕이면 비싸고 멋지면 좋다. 그리고 둘째, 책! 지성과 흥취와 품격 있는 생활을 반영하는 것으로 한 사람에 대한 환유법에 가까운 개념이다. 누구 하면 뭐, 남자 하면 허세 여자 하면 허영 그렇듯이. 말이 그렇다는 거다. 여기서 첫째와 둘째 곧 1번과 2번의 차이점을 아는 게 중요하다. 1번과 2번이 어떻게 다른가, 바로 그것을 알아야 고수이자 권위자고 챔피언이다. 1번은 흔한 말로 페라리다. 괜히 앞서 페라리가 많이 등장한 게 아니다. 이미 낚였다. 페라리라는 밑밥에! 자, 페라리를 상상하자. 페라리가 뭔가? 돈만 있으면 못사는 사람이 없는 소비재다. 즉 말이다. 입이 있으면 말을 못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동물농장의 그 누구라도 정당한 금액만 지불하면 페라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롤스로이스는 아무한테나 팔지 않는다더라, 그런 철부지 꼬마들 사이에서 통했던 낭설은 모두 옛날 얘기다. 롤스로이스? 돈만 내면 당장 살 수 있다. 아예 롤스로이스 관련 주식도 살 수 있다. 현시대에 드물게 왕족도 있고 표면적으로 신분제가 있는 곳도 있지만 현대의 신은 바로 돈이다. 돈으로 사랑을 산다 못산다, 그런 말이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소리임. 그러니까 지금 당장 한장의 복권을 사고, 내일은 가죽 점퍼를 사며, 내일 모레...쯤에나 시를 쓰며 사랑을 노래하자. 그러나 2번은 1번과 다르다. 2번은 말이 아니라 글이니까. 2번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신분이고, 따라서 사는 동안 변할 수 없는 개성이다. 나는 취향인데, 타인은 안목으로 본다. 2번은 돌아온 바람둥이이자 우리의 톰보이다. 그 어디에 가더라도 타인에게 멋져 보일려고 책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존 업다이크를 반드시 들고 다니는 말괄량이 숙녀. 아무리 그래도 톰보이는 절대 존 업다이크를 좋아할 수 없다. 죽었다 깨어나도! 왜냐하면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걸 취향-구미-성미라 부르면 편하고, 안목이라 칭하면 한쪽은 불편해 할 수도 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촌닭 보고 촌닭이라고 하면 좋아할까, 를. 그것은 같은 답인데 어감에 따라 둘로 나뉜다. 하나, 좋아하겠나! 하나, 퍽이나 좋아하겄다! 시험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마도 긍정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말을 꺼낸 사람은 좋은 의도 즉 진공청소기였으나, 말을 듣는 사람은 커피포트일 테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 시험에 들기 싫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까지 싸워서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으니까, 무패 전적에 손상을 가할지도 모르는 주사위는 던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웃사이더나 트러블 메이커 그 길을 유유히 고집하는 거, 절대 쉽지 않다. 역시나 촌년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면서 나 같은 촌년이 뭘 알겠니, 라고 하면 몰라도 옆에서 그분께 촌년이라고 하면 그 역시 어떤 유쾌한 반응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속으로는. 그렇다. 1번 페라리는 돈만 있으면 개나 소나 양이나 늑대 모두 아무나 살 수 있다. 그러나 2번은 그럴 수 없다. 멋진 BMW 컨버터블? 돈만 있으면 당장 산다. 고급 가죽 점퍼처럼. 하지만 BWV? 그건 타고 난다. 1번이라는 피라미드 최상단은 후천적으로 성취 가능한 목표다. 그런데 1번으로 백조가 될 수는 있는 건 알겠는데, 2번으로도 백조가 되고 싶다? 못된다. 불가능하다. 그건 검은 백조다. 후천적인 백조다. 신화에나 나오는 불새라면 모를까, 선천적인 백조 무리에서는 후천적인 백조를 겉으로는 몰라도 속으로는 썩 달가워 할 수 없다. 아니라면 그건 거짓말이다. 물론 후천적인 백조가 돈이 더 많기 때문에 뭔가 우위에 선 듯 보이고, 더 유명하고, 인기도 더 높다. 이름만 백조일 테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1번 편의적 소비재는 만인에게 평등하고, 2번 지적 소비재는 그 공평한 정도가 꽤 애매하다. 후천적인 1번 백조와 타고난 2번 백조는 모임에서나 어울리면 모를까 쉽게 친해지기도 어려울 뿐더러, 역으로 몇몇 차이는 감안하고 인간이니까 조류 종류와 시대와 지역을 골라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다. 한발 나아가서 진입 장벽을 낮추어 막 제발 와 주라, 꼭 와 달라 하며 딱 러브콜을 보내면 적당히 서로 빈말의 품위를 높이고, 긴장감을 얼마든지 코메디로 연결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백조든 뭐든 인간은 모두 유인원이니까. 어떤 감독이 영화도 찍고 자기 영화에 자기가 나와서 막 횡성수설하는 것, 다 이유가 있다. 비교적 소수인 선천적인 2번 백조가 아닌 이상, 사람은 2번 책을 살 수는 있으나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좋아하며 사랑하듯 그것에 빠지기는 어려운 법이다. 소비재라는 1번과 신분이랄까 성향이라는 2번, 그 차이는 알면 알수록 오묘하다. 그렇다고 쉽게 속단하고 선입견에 따라 행동하면 간혹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법. 왜냐하면 침팬지, 사슴 같은 동물과 달리 사람은 그런 유형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개새, 말양, 곰기린, 그처럼.
   끝으로 종이 한장 차이 이론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과소비, 불합리, 허영, 허세. 이런 심리와 행동이 적당하면 좋다. 적당하다면 매우 유익하지 왜 나쁘겠나. 그런데 지나치다, 그러면 그 다음은 아 말 말자. 소망과 대망도 그렇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소년이 야망을 품으면 좋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년이 성장하면서 인성은 팽개치고 야망만 이룰려고 한다면 그건 아아 답답한 일이도다. 그렇다고 소망이 나쁘단 말이 아니다. 시야도 있고 체급도 있고 어항 크기도 있고 환경도 있다. 뭐이? 종이 한장 차이가 아니라고? 1번 편의적 소비재인 자동차와 2번 지적 소비재인 책을 견주어 설명하여 진부해도 뻔한 전략과 미래 전망을 도출해냈다.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알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갖고 싶은 물건을 갖고, 되고 싶은 사람이 되라는. 그런데 뭐가 종이 한장 차이가 아니냐고요! 행복한 일하기와 돈독 올랐다, 가 종이 한장 차이가 아니란 건 알겠는데 그런데, 그러니까 뭐가 대체 무엇이 종이 한장 차이가 아니란 겁니까? 아하 OK! 1번의 성공에 대해 누구는 99번의 실패, 누구는 999번의 실패, 누구는 소 뒷걸음질 치다 한번에 쥐도 잡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도 챙겼다더라? 쉽게 말해 신의 한 수 같은 말, 혁신에 대한 실상과 허상, 썰을 풀고 씨를 뿌려 어떻게 과일을 딴다는 연애학의 이론과 실재 그 뚜렷한 인과관계. 음... 방법이라 방법. 혁신가와 사상가들께 감히 명함을 내밀 수는 없고, 요점을 말하자면 그건 본인이 찾아야 함. 왜냐하면 내게 최적화된 방법과 내게 최적화된 꿈, 행복, 사랑은 일반적으로 사람들끼리 비슷함과 동시에 서로 다르기 때문. 입력, 시도, 노력, 반복등 행운을 바라기 이전에 필요한 요소를 모두 알고 행하지만 앞을 봐도 희망찬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구요? 빙고! 그게 정상이죠. 그게 아니면 횡재죠. 쉽게 얻은 복은 잘못하면 쉽게 달아난답니다. 돈과 직결되는 1번을 쫓는 행마는 경쟁이 너무 심하죠. 모르는 사람도 하지 않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2번을 파고들어 고유한 나만의 스타일을 만든다? 그 역시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렵겠죠. 그럼요. 그러면 쭉 봐 왔듯이 어른들처럼 그저 행복을 위한 복권을 산다, 연애를 해 봤는데 사랑은 아니더라, 꿈은 없거나 있어도 황당하고 자주 변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뭘 해도 재미없고 답답허다구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왜냐하면 앞으로도 최소 10명의 바람둥이를, 적어도 1000명의 촌년을 알게 되거나 어쩔 테니까요. 평균 100번의 사랑이 기다린다구요. 길게 봐야죠. 그런데 알지만 잘 알지만, 맨날 내 꺼만 탐하는 동생이 밉다? 난 왜 항상 형의 옷을 물려입고, 언제나 형의 장난감만 물려받고, 괜찮은 무언가가 있다 싶으면 다 형이 뺏어가고, 친구를 부러워하며, 타인의 연애사를 궁금해 할 수 밖에 없는 겁니까? 그게 다 1번 페라리에 대한 열망 때문일 테죠. 네. 그렇죠. 그래서 2번을 통해 자신을 알라고 그렇게들 어른들이 입 아프게 말씀들 하시는 것이구요. 따라서 직접 경험은 한계가 있으니 그와 더불어 해야 할 일은 몇 가지로 좁혀지겠죠? 우정과 함께 사랑에 대해서 논하기, 2번 또 2번 언제나 2번, 2번처럼 어떤 뭔가를 하나만 하나만 또 하나만, 읽고 보고 듣고, 찾고 하고 포기하고 다시 반복, 일기, 블로그, 꿈을 글로 기록하기 같은 일들로. 
   하나 더. 오해가 어떻게 발생하는가. 복습할 필요가 있다. 숙녀가 말한다. 어딜 넘봐? 이에 대한 경우의 수는 네 가지다. 첫째, 넘볼 만 하니까 넘본다. 둘째, 명백히 넘보지 않았다. 셋째, 넘봐달라는 소리다. 넷째, 그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휴......) 첫째는 먼저 유혹했고 아무나 매혹하고 다닌다는 점. 화장을 평소와 달리 꽤 정성스럽게 한 날은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은 법이다. 당연히 억울하지, 꽃단장 하고 풀-메이크업을 했는데. 말하자면 본심은 선별적으로 심사하거나, 주목받거나, 칭송 받고 싶다는 뜻이다. 드물게 음... 어... 쉿! 어느 촌년이 그러는 거지. 오늘 좀 놀겠다며 마음 먹고 작심한 다음 화장을 한 후 나이트클럽에 갔어, 그런데 순전히 촌닭들뿐이 없네 아 틀렸다 틀렸어, 이런 젠장! 둘째는 남의 다리 피나게 긁는 일이다. 셋째, 넘보지 않으면 그녀는 슬퍼한다. 많이 억울하겠지. 왜 나 같은 미모의 아가씨를 가만 놔두냐고. 왜 꽃 들고 나를 쫓아다니지 않냐고. 왜 꽃 들고 집 앞에서, 학교 앞에서, 회사 앞에서, 날 기다리지 않냐고. 그런데 아 글쎄 세월이 지난 후에 내가 그 인간한테 속아서 이러쿵저러쿵, 잡은 물고기에게는 밥을 주지 않는다며 따따부따, 딱 3시간 동안 친구와 대화를 나눈 후 헤어질 때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다시 만나서 하자고 한다. 넷째는 청자와 화자 사이에 오해가 발생한 경우다. "아침에 면도를 하거나 립스틱을 바를 때,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을 만나기 원하는가?" 라는 거울 테스트 때문에 발생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스펜서와 스펜서의 친구들과 척이 겪은 일처럼. 그리고 다섯째부터는 여기서 다룰 주제가 아니다. 그건 월권이니까. 간혹 하위문화의 값싼 유희나 호기심이나 허영심으로 시작해서, '내가 너 이럴려고 만나니?'를 거친 다음, 장기적인 관점까지 넘어가는 일도 있을 것이다. 1번의 상상층에게 아주 당연한 합리적인 소비가 1번의 중상층에서 중하층으로 내려간 사람에게는 일시적으로 안 좋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1번의 하층에서 중층으로 올라갈 꿈을 품은 이에게는 똑같은 그것이 목표가 되기도 한다. 동기 부여가 다 뭐란 말인가. 종이 한장 차이 때문에 동기 부여 업계는 영영 해가 지지 않는 것이다. 동기부여업은 오늘도 또 내일도 여자의 마음과 코끼리의 날개 때문에 부흥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3

   「왜냐고? 왜 우리 셋이 함께 떠나야 하냐고? 왜냐하면 우린 꽤 잘 어울리는 트리오거든. 루시와 게스는 어쩌면 그런 유형의 여자야. 내 꿈은 뭐였다 라고 똑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반면에 난 그렇게 선언하지 못하지. 왜냐하면 난 꿈이 많았고, 쉽게 변했고, 이룬 게 없었던 데다 실은 꿈이 뭐라고 발설하기엔 너무 보편적이기 때문이지.
   루시와 게스. 너네들 엄청난 비밀 그런 거 있니? 없지! 없겠지. 없을 꺼야. 너희처럼 청초하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숙녀가 그런 게 어딨겠니.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도시로 떠나야 하는 거야. 사람의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구. 수많은 사람을 만나보면 무슨 신통한 재주가 생기지는 않아. 하지만 바로 그런 뭔지 모를 앞날에 펼쳐질 일을 알고 싶은 꿈과 동경심과 선망, 그런 것에 대해 장조인가 단조인가 그 정도는 보인다구. 영화 예고편이나 게임 출시 소개 영상을 보면 정말로 꿈과 희망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부푼 기대와 동경심을 멋지게 표현한 듯 하지만 실상을 알게 되면 뭐니? 뭐야 이거였어 이게 다야, 그거 잖니. 별거 없어. (딱) 그래서, 바로 그래서 우리는 떠나야 하는 거야. 어디로? 도시로! 젊음은 한적한 시골에서 노후 생활을 즐기듯 보내서는 안되는 거라고. 물론 여기가 좋긴 좋지. 물, 바람, 공기, 햇빛, 낙원. 또 있군. 정지된 듯한 시간까지. 그러나 번민과 갈등이 있어야 발전이 있는 법. 이 오빠가 그 길로 안내해주겠다는 말씀이야. 그렇다고 뭘로 변신할 필요는 없어. 어때? 갈꺼야 말꺼야? 선택해! 결정하라고. 단, 한번 정하면 번복은 안돼. 그럼.
   아무래도 이 친구들은 크면서 가출 같은 거, 그런 거 한번도 안해 봤을 거 같은데. 맞지? 딱 보면 안다니까. 저 언덕 너머에 나타날 무언가가 알고 싶지 않니? 그것이 풋풋함일지 감탄사를 내뿜게 만드는 황홀한 경험일지, 젊은 날 열망을 품고 달려가서 한번 직접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니? 루시! 너 지금 사랑하는 남자 있니 없니? 없지, 없겠지, 없을 꺼야. 그래 잘 알아. 괜찮아. 게스! 기막힌 세기의 걸작 사진을 찍고 싶지 않니? 어? 어때? 오빠에겐 계략 같은 거 그런 거 없어. 그러나 계획은 있어. 오빠와 함께 도시로 가자. 그러자. 무작정 계획도 없이 떠나자는 게 아니야. 오빠와 함께 도시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몇 군데 이정표에 들를 꺼야. 그것은 무엇이냐? (검지 쉭-쉭-쉭) 첫째, 카지노. 둘째, 영화 촬영장. 셋째, 대학교. 자, 오빠가 설명해줄께. 눈 똥그랗게 뜨고서 잘 들어보시게.
   1번 카지노. 응? 카지노 하면 뭔지 모를 얽히고 섥킨 드라마 줄거리가 연상되지 않니? 내용은 딱히 떠오르는 건 없을지라도 말이야. 응? 안 그래? 거기서 루시와 게스가 가위바위보를 하는 거야. 이긴 사람에게 오빠가 최고로 멋진 남자를 소개시켜주지. 절대 실망하지 않을 꺼야. 그럴 리가 있나! 그럼, 흐흠. 오빠가 너네들 입술을 빼앗겠다는 게 아니야. 그런 거 아니란 거 너네들도 잘 알잖아? 어디 오빠가 뭇여성을 막 함부로 넘어트리고 뭐 응? 그럴 남자로 보이니? 어? 그리고 2번. 우리는 가는 길에 영화 촬영장에도 들를 꺼야. 그 장르는, 연기자는, 감독은, 제목은, 그건 비밀이야. 그때 가서 놀라지나 마셔. 알겠니? 허허허, 영화계에 또 오빠가 아는 사람이 많잖니? 응? 기대되지 않니? 뭔가 떠오르는 예감 그런 거. 그리고 편집장 밀러에게 다 얘기해놨어. 너네들과 협업한다는 거 이미 다 알고 있다구. 그래서 페라리 그거 너네 쓰라고 얘기해놨다고. (물론 그건 뻥이었다) 혹시 모르는데 말이야, 오빠가 게스와 루시에 대한 연정이 싹트더라도 오빠는 꾹 참을 꺼야. 알겠니? 오빠 믿지? 그럼. 믿어야지. 오빠가 괜히 너네들을 이곳으로 부른 게 아니야. 오빠가 묻지마 스타일은 아니잖아. 별들에게 물어 봐, 에 가깝다면 모를까. 지금 여긴 어디? 그래!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너네들 청춘의 욕망과 숙녀의 이상, 오빠가 다 만족시켜줄께. 자신 있어. 그럼. 그게 오빠 전공이거든. 감동할 준비나 하셔. 이미 호기심이 동했는데 오빠가 도시로 떠나자는 약속을 철회하면 너네들 아마 실망이 클 꺼 같은데? 새로운 체험이 무엇인지 그게 대체 뭔지 알아나 보고 나중 상심을 하더라도, 모르긴 몰라도 아마 체념하기까지 그 여정의 즐거움은 쉽사리 깎아내리기 힘들 껄? 허허허! 말은 안 해도 나중 틈틈히 회상하게 될 껄? 그런데, 그냥 가지 말까? 가지 말자면 가지 않을께. 오빠는 전적으로 너네들의 의견을 따르고 싶어. 왜냐하면 너네들의 의사를 존중하니까. 그러나, 청춘 영화는, 이미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라구. 아, 그리고 3번. 우리는 도시로 가는 중간에 대학교에 들릴 꺼야. 물론 샛길로 빠져서 유적지에 들른다거나 기차를 타고 어디 먼 곳으로 떠날 수도 있어.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으니까. 사랑, 그 상대가 우연히 나타나게 된다면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레는데 이성을 빼고 대타 투입해야 하지 않겠니? 바로 등번호는 감성! 어차피 사람은 말이야 예술과 동물, 모험과 낭만, 행복과 환상, 여행과 사랑 가운데서 둘 중 하나는 좋아하게 되어 있다구. 그러나 아마도 둘 다-겠지? 하나면 뭔가 아쉽고 섭섭하지 않겠니? 지금 말한 장소들은 단순한 탐방이나 구경, 오락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거, 알겠지? 주변만 빙글빙글 돌려면 아예 가지도 않는다구 오빠는. 응? 가서 보면 알 꺼야. 아하 우리 오빠가 이래서-였구나 라고.
   아 그런데 오빠가 말이 너무 많았다야. 미안 미안. 말 많은 남자가 실속은 없다더라, 그런 속설은 잊어버리라구.」


    14

   척은 루시&게스와 함께 떠나기 전날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는 유원지에 갔다. 그런 곳에 보면 아마도 한때는 현역이었겠지만 모형인지 실물인지 꽤나 애매한 야외 전시물이 있다. 꼬마들이 좋아하는 탱크, 비행기, 배 막 그런 거. 척은 거기에 들어갔다. 그 긴 배는 상당히 컸다. 당당히 운항하다가 조기 퇴역한지 얼마 안 됐다고 하니까. 그처럼 척이 실내를 구경하고 있던 순간 느닷없이 어떤 비행접시가 출몰했다. 비행접시는 그 순항선에 비비탄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비탄인데 막 콩 볶는 소리와 진짜 불꽃과 그런 건 모두 실제와 똑같았다. 척은 찰과상을 입었고, 발바닥이 따가왔으며, 그래서 갑판으로 재빨리 올라갔다. 이때 그곳의 높다란 감시 초소 같은 곳에서 레어저를 발사했다. 비행접시는 삐리리리 삐리리리 소리를 내며 그 레이저에 빨려들어갔다. 그러나 비상 사태는 이미 발생했기 때문에, 고로 순항선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나 보다. 순항선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심해를 누비는 잠수함처럼. 약간의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연기가 나기는 했다. 그렇게 어딘가로 떠났고, 순항선은 미래 세계에 도착했다. 순항선이 미래에 도착해서 척이 그 대형 안내글을 읽었는지는 가물가물했다. 미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는. 
   척은 다음 날 루시와 게스를 만기기 직전 복권을 샀다. 한 장만. 결과는 미리 공개하자면 이렇다. 꽝은 면했다. 그런데 꽝만 겨우 면했다. 꼴찌에서 2번째였으니까. 꿈은 개꿈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개꿈이나 다름없었다. 


   15

   척과 루시와 게스는 도시로 떠났다. 그러나 기쁜 미담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았다. 척이 말했던 첫째─둘째─셋째도 허상에 불과했다. 예언은 거짓으로 판명났다. 지킬 수 있는 약속의 호언장담은 확증할 수 없는 미사여구로 밝혀졌다. 앞날이 맑지 않고 뿌옇게 수증기가 서려있는 듯 했다. 그래도 삼류 대학교 한 군데는 들렸다. 그러나 들르기만 했다. 그러면 뭐하러 들렸나 싶었다. 모처럼 햄릿에게 전화가 와서 잠시 하워드의 요트에서 쉬는 시간은 가졌다. 그 다음은 없었다. 그러니 전개가 있을 턱이 있나. 그러던 중 문학잡지 미스테리아 편집장 밀러에게 전화가 왔다. 처음에 척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루시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밀러는 페라리를 가져와라, 루시는 알았네요, 라고 일단락됐다. 루시는 척을 흠칫 노려봤다. 척은 게스쪽으로 슥 눈길을 돌렸다. 게스는 루시를 다독였다. 힘겹게 상황은 가라앉았으나 만에 하나 잘못됐으면 척은 루시와 게스에게 흠씬 얻어맞았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어떻게 되긴. 루시와 게스는 미스테리아 편집장 밀러에게 페라리를 반납하러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고, 척만 홀로 남게 되었다. 그곳이 어딘지도 잘 모르는데...! 그때 척은 듀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오늘은 마샤의 생일이고 곧 생일잔치가 시작되는데 참석하지 않겠냐 라고 했다. 척은 고민했다. 갈까 말까, 가지 말까 갈까. 그는 빈말에 그만 속기로 했다. 이제 좀 그만 속자고 되뇌었다. 그럴 때도 됐다고. 그를 진짜로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쩜 당연하게도 또는 희귀하게도 전개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분은 바쁘셨나 보다.
   척은 루시와 게스를 돌려보낸 다음 애잔한 마음에 기분이 살짝 가라앉았다. 본인이 루시와 게스처럼 젊은 날이던 때 그는 궁금했다. 왜 어른들은 현실적인 안락을 중요시하고, 왜 그렇게 복권을 꼬박꼬박 사시는가가. 그러면서 어른들은 드라마처럼 멋진 조언을 해주시는 분이 거의 없었다. 있어도 길지 않았고 횡설수설이 거의 전부였다. 뭔 말은 엄청 많고 길고 진지한데, 나중 돌아서서 기억하면 썩 인상적인 명대사는 음 아마도 없었다. 내 머리가 나빠서, 형편없는 기억력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전적으로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영화와 드라마를 봤다. 거기서 주인공은 그런다. 젊은 날 무엇보다 꼭 해 봐야 할 것은, 그 가운데 딱 하나는 바로 사랑이라고.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때문에 그는 글을 읽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런데 미래가 있다는 책에서도 사랑과 꿈에 대한 가치는 높다랗게 측정하며 멋지게 꾸미지만, 정작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따라서 척은 당시 노래를 즐겨들었다. 가리지 않고 들었다. 엄청 다양하게 들었다. 완전 열심히 들었다. 그러나 노래라고 별 수 있겠나. 하지만 노래에서 좋은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긴 하다. 맞다. 그것도 적잖이! 무엇보다 행복한 마음과 즐거운 인생,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즐겨라 추억을 만들자, 아름답고 신비로운 우리들 청춘의 무지개를 만들고 젊음의 행진을 하자꾸나, 파도를 헤치며 희망의 내일로 나아가자 자 떠나자, 저 흰 구름은 설마 솜사탕이 아닐까 뛰어올라보자? 들을 때는 좋았다. 달콤했다. 감미로웠다. 그래서 자주 많이 들을려고 노력했고, 그 시도는 성공했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러나 그 다음은 없었다. 그것은 작은 자질을 원대한 재주로 바꾸어주지는 못했다. 돈을 벌게도, 꿈을 구체화시키지도, 나를 특별한 존재로도 변신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척은 루시와 게스에게 엄한 낭설의 헛바람만 불어넣은 것 같아서 적잖이 미안했다. 지금쯤 그녀들이 자기를 혹시라도 험하게 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자신의 아첨이 부족했다며 작은 자책마저 느껴졌다. 있을 때 좀 더 잘 대해줄 껄, 그러면서. 그러나 그런 수많은 시간 낭비와 실패와 시행 착오와 무분별한 따라하기등이 아무 쓸모 없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지금 보니 삼류 소설에 무언가 도움이 되기는 되는 것 같았다. 다만 새로운 발단과 뚜렷한 전개, 환상적인 목표, 신선한 현실 모순, 색다른 결여, 놀라운 행동, 신기한 성과, 감동적인 결말이 부족하다는 게 문제였다. 발단, 오직 발단만 있었다. 왜 일전에 친구들과 공동 블로그 작품 활동을 하면서 블로그 이름을 무명으로 했는가, 이것으로 증명된다. 아니 고딩 때 활동했던 농구단 이름으로 미래는 어느 정도 예견된 거다. 뭔가 재미있어질려다가 간질간질하다가 전개가 나올 듯 말 듯, 잘만 하면 딱 나올 듯 하다가 다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막 머리 위로, 귀에서 코에서 수증기가 나왔다. 막 나왔다. 쉬지 않고 나왔다. 계속 나왔다. 게다가 눈에서는 레이저가 나갔다. 더군다나 입에서 화염방사기 같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심지어 얼굴도 빨개졌다. 그 뿐이겠나. 그가 홍당무인 줄 알고 지나가던 당나귀가 흑심을 품는 듯 했다. 어딜 넘봐? 넘볼 만 했다! 환상은 대체 어디 가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까악까악, 까마귀 소리는 더 이상 환청이 아니었다. 연옥에라도 뛰어들어서 미스테리를 구출해 오든가 해야지 이거 원, 답이 안 나왔다. 아 이래서 술집 이름은 행운이고, 상품 광고는 물건을 사면 광고 모델까지 주는 듯이 선전하며, 브랜드 슬로건과 온갖 광고 문구들은 그렇게들 소비자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일까? 모르겠다. 통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혹여 그다지 썩 잘못된 건 별로 없지 않을까?
   그러다 그는 집에 돌아가서 차분히 기본부터 점검해 보기로 했다. 스포츠는 거의 자세가 전부고, 많은 경우 기본기가 중요하다. 삶의 자세와 인생을 대하는 태도 그런 것들. 어쩌면 그래야 미지의 신비가 지극히 현실적인 기쁨으로 변신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엑셀 파일 미스테리아의 이름을 블로그로 바꾸고, 정상적인 생활 리듬을 되찾기로 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