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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58

from 소설 2015. 10. 26. 16:35

   안녕, 애들아. 어떻게 지냈니? 잘 살았어? 옷 괜찮은데? 얼굴 좋아보이는데? 요즘 누구 만나는 거 아니야? 처럼 만나서 하는 의례적인 말들이 오고 간다.
   「왜 내가 웹 시상제에 초대받지 못했는지 모르겠어.」 잠시 하고 있는 일에 관해 누가 말했다.
   「거기서 널 별로 좋아하지 않나봐.」
   「누구 뭐 새로운 소식 없어?」
   「영화제를 가볼까? 그러면 시간표랑 행사 일정이랑 누가 오고 어떤 영화 하는지 미리 알아보는 게 좋은데. 그냥 딱 가서 즉흥적으로 놀고 와도 괜찮지만. 그거 말고 다른 거 뭐 없나?」
   「그 지금껏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저 길을 따라가면 어디가 나올까, 저 사람을 만나면 즐거울까, 그런 궁금증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뭔가 새로운 무엇. 바로 그런 것 말야.」
   「예를 들면, 어떤 거?」
   「글쎄, 그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지. 그냥 말로 대신하자면 첫눈에 반할 수 있는 신천지?」
   「뭐가 있을까? 100년 전이나 후. 아니면 바로 지금의 아프리카? 그렇지만 멀지 않은 곳, 어디 없을까?」
   「미인대회? 헬스클럽에 갈 수는 없잖아. 아님 요가수업? 그래 NC. 하지만 클럽이라면 들어갈 때는 좋은데, 나올 때는 괜히 조금은 욱한다니까.」
   「우린 잡담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거 같아. 인생이 매순간 째깍째깍 줄어들고 있단 말야. 이러쿵저러쿵, 시시콜콜, 어쩌구저쩌구, 궁시렁궁시렁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재미있으면 좋겠다.」
   「넌 뭐 그렇게 사춘기 애들 같은 얘기를 하니? 꿈이 없는 사람은 꿈이 있는 사람에게 불평하는 법이야.」
   「그거 뭔 얘기야? 어디 드라마에 나오는 말이야? 그럼 꿈이 있는 사람이 꿈이 없는 사람에게 불평하는 건 뭔데? 꿈이 없는 사람은 즐거우면 안되나? 실은 꿈 없는 사람이 걱정없이 무사태평이니까, 삶의 목표가 꿈이 아니라 재미난 일 찾기,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더 즐겁게 살 것 같은데. 어, 진짜 그런 거 같아. 많이 그러잖아. 뭐 거창한 꿈 꼭 있으란 말도 지겹잖아.」
   「다들 꼼짝마.」
   「뭘 꼼짝마? 뜬금없이 누구보고 말한거야?」
   「여기 봐봐.」 알렉스가 핸드폰으로 인스타그램에 뜬 어떤 장소를 모두에게 보여준다.
   「거기 한번 찾아볼까.」 케빈이 핸드폰으로 검색을 해본다.
   「여기에 가면 누구든 동화 주인공으로, 주위를 판타지 시공간으로 만들어준다는데. 농담 아니고 정말이라네.」
   「특별대우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갔다온 사람이 그렇게 써놨어. 그곳을 다녀온 후로 자기 인생은 그곳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뉘었다고 그러는데.」
   「여기...는 이름이 환상관인데? 뭐지?」
   「환상관? 뭐야. 미술관이나 음악회, 마술 공연, 디너쇼, 박물관, 과학관은 들어봤지만 환─상─관?」
   「여기서 멀지 않은데.」
   「관람평과 사진과 동영상들 언뜻 보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밑도 끝도 없이 환상관? 환상관? 뭐지?」
   「환상관이라. 듣도 보도 못한 건데. 뭔가 우리를 오라고 잡아 끄는 기운이 느껴지기는 한데 또 선뜻 확 결정은 어렵네.」
   「그래? 환상관에 갈꺼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고. 가, 말어? 갈 사람? 아니 안 갈 사람 있으면 말해봐. 자, 거수.」
   「어? 없네.」
   「그럼 가자.」
   「바로 그거야. 도시에서 벗어나 시간을 좀 보내야 돼.」
   「항상 이런 식이야. 환상이 우릴 조종하는데. 소비자의 환심은 이렇게 사야 하나봐. 정석이야. 교묘하다구.」
   「따라해봐. 이렇게 해보란 말이야. 삐리리리 삐리리리.」 환상관을 소셜 네트워크에서 처음 발견한 알렉스가 로보트춤을 추면서 케빈과 친구들의 눈짓을 받는다. 한두 명 막 따라하기 시작한다.
   실제 공간에서는 그들이 시간을 들이고 중간에 배도 고팠다가 한눈도 팔았다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곳에 도착하지만 소설 지면에서는 또 영화와 드라마를 감상하는 사람 입장이라면 그럴 필요없다. 무거운 카메라와 조명기구 옮기고 무대 만들고 그럴 필요 하나도 없단 말이다. 벌써 그들은 환상관에 도착했다. 간판에 그렇게 써 있다. 환상관이라고. 환상관 건물의 건축 모양에 대해서는 딱히 특이한 건 없고 딱 하나, 커다란 등대가 있다는 거다. 여기가 육지인데 등대가 있다. 그냥 모양만 있는 게 아니라, 진짜다. 그리고 이곳의 입구는 고래가 방긋 벌린 입 안에 있다. 오, 요나? 오우! 뭐가 있을까, 저 너머에는? 당신 인생의 다음 행보는? 내일 할 일은 그리고 다음 사랑은.
   입구를 들어서니 보이는 것은 매우 단정하게 카펫이 깔려있고, 썩 큰 미술관이나 극장처럼 지나가면서 하나씩 또는 한곳에 머물며 작품을 감상하는 그런 구조를 띄고 있다. 사람이 나타나서 안내하는 광경은 없고, 어딘가에서 인조인간의 목소리를 내보내는 것 같다. 이곳에 와서 환영한다고. 꼭 1,000명의 성우 목소리를 완벽하게 합성하여 특이한 느낌을 터득하도록 만들어진 그런 목적으로 탄생한 로봇의 음성같다. 뭐 일단 들어왔으니 처음 보이는 곳에 들어간다. 들어간 1번째 내부 공간은 어둡다. 그런데 점점 밝아진다. 계속 밝아진다. 바깥이 보인다. 벽면들이 유리로 되어 있나 보다. 바깥으로 눈이 내린다. 자세히 보니 눈이 아니다. 그건 구름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새떼가 벽면 바깥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마치 새는 가만히 날고 있고, 1번 내부 공간은 우주를 향해 솟구치는 듯이. 게다가 토네이도인지 태풍인지 그런 비와 바람과 눈과 솜사탕이 보인다. 하늘의 도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바깥 풍경을 보고 있던 중 그들은 붕 뜬다. 마음이 붕 뜬게 아니라 몸이 붕 떴다. 기분이 날아오른 것과 별개로 육신이 공중에 띄워졌다. 그곳은 우주공간은 아니지만 또 그들이 우주복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이 이곳에 들어온 후 살며시 문이 닫히고, 뭐 어떤 작동 원리에 의해 발을 땅에 딛고 있을 수 없게 된 거다.
   「뭐야, 이건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믿기지 않아.」
   「오, 이런 신발.」
   「도대체 뭐야?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이런 일이 사실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겠어. 누가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 좀 해줄래?」
   「하나도 몰라서 오히려 다행인데.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해서 빠져들었던 거 같아. 아닌데. 이건 분명 알고도 확실히 알지만 어쩔 수 없이 확 몰입되는 건데.」
   「알 도리가 없지.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니. 전혀 예측도 못하고, 감도 못 잡고, 뭐가 뭔지 통 모르겠단 말야. 그지?」
   「그래. 알 길이 없어. 그건 아무도 몰라. 딱히 뭐라고 하지 못하겠어. 정말 할 말을 잊게 만들어. 진짜로.」
   「숨을 쉴 수가 있어.」
   「말도 할 수가 있어.」
   「공중에 떠 있는 거 말고 다른 건 다 그대로인데. 그렇지?」
   「어 맞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야. 이게 가능한 일인가? 누구 과학원리 아는 사람 있어?」
   「거기까지는 알고 싶지 않은데. 혹 아는 사람 있어도 알려주지 말래?」
   「소름 끼쳐.」
   「뻔한 거 아냐? 그냥 즐겨!」
   「어쨌든 정말 놀라워. 굉장해.」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1번째 내부 공간에서의 유희를 즐기고 나와서 또 어딘가로 이동한다. 처음에 환상관에 입장한 이후로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는데 지금 그들 앞에 나타난 이상한 복장의 사람을 보니 버럭 겁을 먹고 긴장한 채로 약간 경계를 한다. 뭐든 말로 가닥을 잡아야 할 것 같아서 뭔가 물어본다. 장난스런 말은 조용하게 상대방이 잘 알아듣지 못하게 말하고, 명확한 용건이나 이를테면 활자화해서 문서로 남길 가치가 있는 말은 좀더 또박또박 말을 한다.
   「당신 마약상이나 뭐 그런거야?」 이건 장난스러운 말이다.
   「누구지?」 이것도 장난스러운 말이다.
   「그러게 말야.」
   「여기 설계자랄지 운영자? 감독? 쟤 팔에 주사자국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 될 꺼 같아.」
   「왜 말이 없어? 우리 말을 못 듣는 거 아닐까?」
   「혀 끝에서 뱅뱅도네, 생각이 날듯 말듯해... 저번에 나이트 클럽에서 봤던 웨이터 닮았는데, 아닌가? 의문의 여지가 없어. 확실해. 아니야. 잘 모르겠어.」
   「그런데 그 NC 사장 말이야, 사람들 평이 그가 그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는데.」
   「브라질 수도가 어디지? 리오데자네이루? 브라질리아?」
   「뭔 소리야?」
   「아, 난 긴장하면 수도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 잘 떠오르면 행운이 따르고, 틀리면 그래도 행운이 따라와. 이 습관, 버리면 안되겠지?」
   「내가 봤을 때 우리 얘기는 어디 3류 촌극이나 인기없어서 중간에 서둘러 종영되는 시트콤에나 나와야지 이거 원, 소설로 남으면 큰일날 꺼 같다. 뭔 험담을 얻어들을지 모르겠단 말야.」
   「그래도 악명은 높여주겠지. 그것도 잘 하면.」
   「넌 뭔 실존하지도 않을 작품 걱정을 다 하냐? 가능하지도 않은 상상을 다 하고 그래?」
   「내겐 그게 징크스야.」
   「어 그래, 어련하시겠어.」
   「난 이런 거. "자기야, 난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이 안가." 상상속의 연인과의 대화? 그런 거.」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네가 아직 몰라서 그래.」
   「저 아저씨 그냥 가버리는데? 우리가 한 얘기 들었나? 사이보그, 기계인간 뭐 그런걸까?」
   「쉿! 저 소리 들었어?」
   「뭔 소리?」
   「네 거짓말에 안 속아.」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지?」
   「뭔데?」
   「아, 맞다. 나 여기 알꺼 같아. 옛날에 어렸을 때 여기 와 봤어. 옛날에 여기는 바다에 있던 등대였는데, 여기 주변은 바다였어. 그래, 바다. 데자뷰 현상일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미리 속단하지 말자구.」
   「얘들아. 이건 뭔가 이상해. 여기 혹시 정자은행 아닐까?」
   「이제 어느 정도 가닥이 드러나는데. 여기 딱 보니 부도난 거 같아.」
   「음. 아직 시설을 확충하거나 뭔가 준비가 늦어지는 뭐 그런 단계 같은데.」
   「우리 짐작이 빗나갔어.」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어쩐지 처음에 들어올 때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했어. 정말 값어치가 있다면 그럴 리 없잖아. 개장했는데 중간에 잘 안돼서 주인 바뀌고 한물갔는지도 몰라. 아마도 부흥을 일으킬려고 안해본 일이 없을 꺼 같은데.」
   그 순간 공중 어딘가에서 또 확성기인지 시설 전체 방송인지 모를 음성이 들린다.
   「좋은 의견입니다. 의견? 마땅히 해볼만한 생각이죠. 서비스 제공자라면 꼭 자문해 봐야 할 물음이죠.」
   「뭐야? 우리가 잘못 들은거야?」
   「정확히 듣긴 들었는데 이것까지만 준비된 거 아닐까?」
   「그럴꺼야.」
   「뻔할 뻔자지.」
   「혹한거야. 그게 다야.」
   「그냥 흔한 일이야. 그래도 좀 어리둥절하네.」
   「다들 그렇게 말하겠지. 어디서나 항상 들리는 얘기, 뭐 새로 나왔다고 하면 하나같이 똑같은 말들. 그런 거.」
   「왜 그래? 뭔가 나올려다 안 나오니까 실망한거니? 괜찮아. 다른데 가거나 딴 거 찾아보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
   「차라리 잘된 일이야. 그럼.」
   순간 벼락같이 화재경보가 울린다. 삐~요, 삐~요, 삐~요!
   「안 봐도 비디오다.」
   「그래도 화재경보에는 자동반사가 정답이야. 잘못 울렸을 거라고 절대 미리 짐작하면 안되는 일이지.」
   「그럼. 당연해.」
   「얘들아. 뛰어.」
   뛰면서 얘기한다.
   「뻔하지 않아? 이거 뭔가 냄새가 나는데?」
   「아무 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네가 알긴 뭘 알아.」
   「그럼 넌 감 잡았어?」
   「아니. 그냥 해본 말이야.」
   「하여간 쥐뿔도 모르겠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얘들아 그런데 출구가 어딘지 모르겠어.」
   「그러게. 어디로 나가야 할지 모르겠는데.」
   「뭐야. 나가는 출구가 안 보여.」
   「몰라. 전혀 모르겠어.」
   「맙소사! 정말이야?」
   「늬들 제정신이야? 미쳤니?」
   「네가 만들어낸 이야기지?」
   「그럴 리가 없어.」
   「어쩐지 첨부터 이상하다고 했어. 누가 오자고 한 거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도시로 가야할 꺼 아냐. 여기서 나가야 한다구.」
   「난 내일이나 이번주 약속 하나도 없는데.」
   「여유있어. 멋져! 비상경보음도 이제 멈췄네. 좋아.」
   「오랫동안 이런 행복을 느끼지 못했어. 너희는 어때? 짜릿해?」
   「이제 슬슬 게임을 해볼까? 컴퓨터나 게임기로 하는 그런 거랑은 차원이 다른데.」
   「집에서 선풍기 틀어놓고 게임하는 게 시시한지 이 상황이 미련한 건지 통 모르겠다.」
   「두고 봐야지.」
   「모든 점을 고려해볼 때 일단 침착해야 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좀 보자고.」
   「여기서 못 나가면 어쩌지? 그런 생각 든 적 없어?」
   「너무 신경쓰지마.」
   「누가 이 같은 일들을 꾸미고 만들어서 실행할 수 있었을까 궁리를 해봤는데 뭐가 하나 떠올랐어. 혹시... 이중에 한명이 그 사람 아닐까?」
   「용의자가 이 안에 있다고? 설마.」
   「뭐야 벌써 특수용어 나왔네. 용의자.」
   「얘들아 좀 창의적으로 생각해 봐.」
   「난 창의적으로 생각하는데 약해.」
   「뭔가 직감이 오지 않니?」
   「어. 안 와.」
   「직감보다는 과학적 증거를 다르겠어.」
   「아니면 육감?」
   「영화 생각 많이 나게 하네. 참나. 뭐 엑소시트트? 스릴러, 공포?」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잠시 분위기가 설명할 수 없는 만큼의 차이로 덜컥 그 모양을 달리한다.
   제임스: 그거 주문이야? 다음으로 넘어가다,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그럼 주문이 이루어졌네? (자신의 핸드폰이 혼자 노는 걸 바라보고 있다.)
   닉: 뭔 소리야?
   하워드: 내 핸드폰이 혼자 놀고 있잖아. 봐봐. 혼자서 트위터가 켜졌어. 그리고 글을 내려서 누군가 보고 있어. 내 터치는 말을 안들어. 누군가 내껄 작동하고 있다고.
   마크: 그거 해킹? 아니 탈옥? 기계적으로 하나의 계정에 두개의 기기가 연결된 증상 그런 거 아니야?
   알렉스: 나도 제임스랑 하워드 핸드폰이 그와 같은 이유로 혼자 논다면 좋겠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내꺼도 그래. 내껀 페이스북이 혼자 켜졌어. 막 사진보고 동영상 보고 혼자 댓글다네. 누구야? 뭐야 이거.
   케빈: 내껀 자기 혼자서 인터넷 검색하는데. 여기에 대해 검색어를 계속 달리해서 찾아보고 있어. 환상관, 이거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기피대상같아.
   조니: 이런 젠장. 차라리 내꺼 핸드폰도 너네들처럼 막 혼자 켜지고 움직이면 좋겠다. 내껀 그냥 기계 고장난 거 같아. 아까부터 핸드폰 플래쉬가 혼자 켜지더니 통 말을 듣지 않아. 꺼지지가 않는다구. 다른 버튼도 통 듣지를 않고. 이런 삐─ 삐─ 삐─. (속임수라도 좋으니 작은 환상이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았다고 심술부리는 꼬마처럼 투덜거린다.)
   조니의 말이 끝나고 나서 내부의 조명이 모두 꺼진다. 바깥 태양광선은 하나도 유입되지 않기 때문에 실내가 즉시 어두워졌다. 다만 조니의 핸드폰 플래쉬 때문에 떠들석한 법석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들 동그란 눈동자를 깜빡깜빡 하고 있는 순간 누군가 뭔 일이냐고 말을 꺼내려던 순간 조명이 켜진다. 그러더니 내부공간의 측면부가 열린다. 옆의 어느 즈음에 있는 보통 크기의 문이 열리는 게 아니라 측면 공간 전체 커다란 눕혀진 직사각형이 통채로 열린다. 옆으로 들어가고 위로 말리고 그런 방식으로 반원을 그려 가운데 부분이 그 중심점이다. 그렇게 문이 열린 후 바깥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경비업체 차량과 직원이 보인다. 업계 상위권 회사로 그 상표만 보고도 뭔일인지 알듯하다. 경비업체 직원의 말로는 아까 화재경보가 울렸기 때문에 출동했는데 오작동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들이 얘기한데로 환상관의 정식 개업은 미루어졌고 계속 미뤄져서 비공식적으로 간혹 관계자만 왔다갔다하지 평소에는 이곳에 행인도 뜸하다고 한다. 간단히 대화를 하고 그들은 이제 건물바깥으로 나왔으니 인사를 나눈 후 경비업체 직원들은 차를 타고 떠났다.
   「것봐. 별일 아니라니까.」
   「길어졌으면 정말로 영화찍는 건데 지나고 보니 아쉽구먼.」
   「그러게 말야.」
   「어디가서 가볍게 레모네이드 마시고 싶어.」
   그러면서 그들은 같이 타고온 대형 밴 차량이 주차된 쪽으로 갈려는데 갑자기 땅이 움직인다. 그러면서 그 어느 정도 범위의 구간, 그 땅은 그들을 다시 내부공간 안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그리고 건물의 문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커다란 한쪽 면이 다시 닫히기 시작한다. 뛰어도 소용없다. 런닝머쉰처럼 제자리 뛰기만 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경비업체 직원이 와서 문을 열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네말에 전적으로 동의해.」
   「이건 현실이 아니야.」
   「이름부터가 이상했어. 수족관도 아니고 수목원도 아닌 환상관. 에잇.」
   「우리 외계인한테 걸린 거 아냐? 뭐지?」
   「차라리 어디 댄스파티에나 기웃거릴껄 그랬어.」
   「내 삶은 왜 이런 거지?」
   「그만 좀 해. 우리에겐 모두 각자의 어려움과 힘든 일이 있는 거잖아. 그걸 이겨낼 때 기분이 어떻겠어. 그냥 태풍속을 헤쳐나가는 과정 그것과 함께 하면 돼.」
   「그쯤 해 둬.」
   「기다려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구. 게다가 우리가 딱히 위험에 빠진거도 아니잖아.」
   「그래. 좀비가 나돌아 다니지만 않으면 된 거지.」
   「얘들아. 어쩌면 바깥 세상이란 없는 게 아닐까? 아마도 탈출할 방법이 없는 거 아닐까?」
   「진정해. 이제 시작이라구.」
   「살살 좀 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지금 살짝 적기를 놓친 것 같아. 놀랐지~ 속았지롱! 이런 거 말야.」
   「지금 이 순간. 마요르카 외딴 해안가의 울퉁불퉁한 바위에 기대 서 있다고 상상해 보면 어떠니? 크리스털처럼 빛나는 바다 위에 솟은 낮은 절벽 위에 있는 남자 한 명이 양손을 쭉 뻗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와. 멋진데. 태극권 수련중인가 봐.」
   「얘 왜 이래?」
   「뭔 소리야?」
   「어? 아닌데 저기 봐봐. 정말이야.」
   「삐─.」
   「이럴 수가.」
   「믿을 수 없어.」
   「아름다운 해변, 파노라마 촬영중인 관광객, 백사장, 환상적인 미녀와 뛰노는 강아지들. 여기는, 여기는 진짜 마요르카 같은데. 오 이런.」
   「거기보다는 핀터리스트에서 봤던 흑백사진으로 봤던 아일랜드 해변 같은데. 자, 봐봐. (핸드폰 앱을 켜서 사진을 보여주며) 똑같잖아.」
   「정말. 어쩜, 이런 일이...」
   「나 방금 전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백사장을 상상했는데 설마 그게 우리 눈 앞에 나타난 건 아니겠지?」
   「그럼 좋겠다.」
   여기까지만 좋았던 것일까? 진짜 거기까지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웃으면서 좋아하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풍경, ‘나는 이렇게 좋은 데 갔다 왔다’ 라면서 소셜 네트워크에 날마다 쏟아지는 사진과 같은 정경, 바로 그것이 꼬부라져서, 지표면이 꼬부라져서 그들쪽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아마도 제일 비싼 책으로 1% 안짝에 포함되는 책인데, 크고, 화려하고, 반짝이고, 종이가 두껍고, 실제 사진들이 인쇄된 그런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처럼 지표면이 종이도 아닌 지표면이 꼬부라져서 그들쪽으로 점점, 차츰차츰, 점점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가속도가 붙는다. 웅장한 영화 배경음악이 들리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악한 중간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미친 상황을 마주하면 사람은 일단 둘로 나뉘는 건가. 시간의 정지같은 침묵과 삐─? 온다 온다. 다가온다 다가온다. 가까지 온다 가까이 온다. 왔다 왔다. 드디어 드디어. 바로 앞까지. 멈추지 않는다. 연속 동작이다.
   그런데, 그런데.
   지표면 꼬부라짐 현상은 그들을 지나쳐 갔다. 옆으로 비켜간 것이 아니라 그대로 그들을 통과해서 에너지 보존 법칙과 질량 무슨, 운동 뭐 그런 원리 그대로 움직이던 방향대로 그들을 통과해 갔다. 홀로그램이나 가상현실, 몇 년 후에는 이럴 것이다 그런 영상을 테스트해서 만들고 크기만 확대한 것일까.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진짜로 그처럼 그들을 통과해서 지나갔다. 지표면이. 오, 지표면이!
    「이거 뭐냐?」
   「글쎄다. 뭘까?」
   「이제 왜 이곳의 이름이 환상관인줄 알겠다.」
   「아직 인정하기엔 이른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언제 공인받을 수 있지? 환상관이라고. 그래 믿어주지. 환상관. 하지만 아직은 절반쯤? 아니 절반의 절반, 절반의 절반의 절반? 알아 맞춰 봐.」
   「가능한 한 늦게, 가 어떨까?」
   「그 시기를 맞춰보기로 결정했어. 그건 아마도 몇 번 더 겪어봐야 알 수 있겠어. 그래야 짐작이라도 해볼까?」
   「일단 좀 더 출구를 찾아보는 게 어때?」
   「그래 우선 저쪽으로 가보자.」
   「그럼. 좀 걷는 게 좋겠어. 눈 땡그랗게 뜨고 마술사가 속임수 쓰나 안 쓰나, 판돈 몽땅 걸었는데 카드패 돌리는 사람이 밑장을 빼나 안 빼나 잘 보려면 냉철한 이성과 건강한 신체, 건전한 사회? 아니 이건 여기서 할 말이 아니군. 어쨌든 그러려면 좀 걸어야 해.」
   「그래.」
   한 블럭,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환상관 내부공간에서 대충 감으로 한 블럭쯤 지났을 거라고 예상하는 순간 그들 앞으로 벼랑에 뛰어내려 자살하는 레밍쥐때들이 보인다. 당연히 광활한 바다도 눈 앞에 있다. 이건 좀 완성도가 떨어지는 건가. 왜? 짠내가 느껴지지 않아. 아직 매장을 정식 개장하기엔 일르다는 증거일지도 몰라. 레밍 쥐, 죽음의 행진. 어렸을 때는 마치 12월 거리에 그 음악이 울려퍼지는 시기가 오면 아빠와 엄마, 간혹 삼촌? 이모? 큰 오빠가 들려준 산타크루즈가 진짜로 와서 양말에 선물을 넣어주는지 말짱 거짓말인지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그와 같은 애써 끝끝내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동하지 않는 궁금증, 나중 커서도 어른이 되어도 계속 몰랐으면 하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화들 바로 그것이 아무 이유없이 떠오른다. 레밍은 왜 바다로 뛰어드나? 왜 뛰어드는지 안다고? 모른다고? 관심없다고? 그건 거짓이라고? 그런 물음들과 별개로 여기서 서술자는 지구 반대편이나 집필 공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옆 나라, 앞 나라, 인근 시골, 관광하기에 그나마 제일 싸게 먹히는 섬에 사는 깡섬 처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왜 단체로 바다에 빠져 죽는 나그네쥐 얘기를 차라리 선호하냐고? 작품 속에서, 사람이 죽는 드라마와 소설과 영화보다. 얘기가 꼬인다. 때문에 그건 레밍 딜레마가 아니라 독자의 난해한 글읽기가 된다. 뭔 말도 안되는 레밍 신드롬은 집어치우고, 이야기를 이어가자. 할리우드 영화에서 배운 대표적인 '거짓말' 8개는 잊어버리자. 너무 많이 알면 재미없다. 어쩔 땐 오히려 모르는 게 약이다. 재미없지만 정말 재미없지만 사회성 높은 글을 쓰며 인간의 존엄성을 다루고, 교육적인 영상을 만드는 어려운 길을 가는 어떤 분들께 감사하자. 그런 작품들이 재미는 없지만 그분들이 있어서 세상은 굴러간다. 입바른 말을 언젠가는 하고 넘어가야 했는데, 이젠 그 부담감을 떨쳐버리게 되었다. 짝짝짝! 자, 자, 자 간다. 즉 그들의 앞에 보이는 화면에 거대한 바다와 레밍쥐떼들이 보인다. 그 행렬이, 그 움직임이, 그 시간의 확장이.
   「뭔줄 알겠니?」
   「아니 모르겠어.」
   「이건 뭘까, 뭐라고 해야하나. 뭐랄까, 환영? 최면? 그런게 아니야. 극사실에 기초한 이 환상관의 인공지능과 우리의 전두엽과 측두엽, 후두엽등 고등행동을 관장하는 연합영역의 느슨한? 아니 엉터리지만 예술적인 동기화, 그것일 꺼야.」
   「뭔 소리야?」
   「이쯤에서 저번에 모히토 요트 탔을 때 만날 뻔 하다 못 만난, 아니 만났나 안 만났나, 헷갈리게 만드는 수상쩍은 NC 사장이 우리 앞에 떡 나타나서 그리고 그 주위에는 치어리더들이 큰 경기에서 응원하는 것처럼 요란하게 막 막 그러면서 딱 묵직한 음성으로 대사를 건네겠지. 자기가 이 환상관을 인수했다고. 아직은 준비가 미비해서 시범 테스트중이라고. 어땠냐고. 뭘 보완해야 할지 알려주라고. 여기 음료수 한잔 하라고. MONSTER 캔을 마시라고. MONSTER 캔 디자인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캔 겉표면의 촉감이 마음에 드냐고. 그곳으로부터 협찬받았다고. 머머했다고. 머머하다고. 그리고 저쪽으로 나가면 강으로 나갈 수 있는 협곡이 있다고. 또 그리고 그대들은 마지막을 장식해야 한다고.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그대들의 몫이라고.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건드릴 수 있지만 썩 마음을 끌지 않는 교향시와 악극의 찬미. 그곳으로 가서 준비된 조정 보트를 타고 노를 저으라고. 그 앞에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노을이 질 것이라면서. 오 이런! 뭔 헛소리를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거지?
   「그게 바로 환상관일 꺼야. 표절인지 아닌지 불확실한 거. 지금 우리가 쓰는 핸드폰도 수많은 기기와 제품들도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 그 디자인은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거.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식으로 글을 쓰는 누군가도 자기 입으로 말했어. 대놓고 남의 글을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다고. 언제 말했지? 게다가 항상 그러기만 하는 것도 아니야. 기필코 그걸 조금은 이용해서 예술인지 뭔지 말이 되는 뭔지 모를 어떤 뭔가를 만들어 내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마치 글렌 굴드의 음반 제작 과정처럼. 마치 앤디 워홀의 깡통 수프나 그런 수많은 작품들처럼 말이야.」
   「너네들 점점 이상해지고 있는 거 알겠니?」
   「하긴 일리 있는 얘기야. 기계적으로 작업하는 직업인과는 다르게 제정신으로는 절대 작품을 양산할 수 없는 사람들 있잖아. 그걸 미쳤다고 하든 뭐라 부르든. 사랑도 그런거지. 주위에서 보면 술이나 담배나 각종 유희와 기호품들을 전혀 취하지 않는 사람들 보기 힘들잖아. 인간세계가 원래 맨정신으로 살기엔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날 홀라당 다 밝혀버리면 전부 모든 것을 드러내버리면 어 그건 말로하기 힘든 희극이자 동시에 비극일 수도 있어.」
   「오오 좋아.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환상관은 살아있다?」
   「여긴 어디? 우린 누구?」
   「일단 여기를 벗어나는 게 어때?」
   「그럴까?」
   그들이 감지하지 못한 수준으로 바닥이 움직이는지 공간이 변하는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주변 상황이 바뀌어 있다. 그 환경이란 게 딱 두어 번만 바뀌어도 꼭 하도 많이 바뀐 듯이 정신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즉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그들과 똑같이 생긴 7인의 행인이다. 저만치 대형 스크린인지 진짜 사람인지 모를 그들이 그들과 똑같이 환상관의 내부공간을 헤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동영상 기기나 핸드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어보면 그걸 촬영할 때는 기록해서 기계에 기록물을 남기는 거다. 그리고 전자제품 판매점 같은데 가보면 실시간으로 행인의 모습을 그대로 스크린에 보여주는 것은 실시간이다. 또 A지역을 실시간으로 B지역에서도 볼 수 있고, C의 상황을 동시간으로 D에서 주시하기도 한다. 여기서 태어나 저기서 살거나 일하러 멀리가거나 여행하러 대륙을 건너가기도 한다. A에서 디자인하고 B에서 조립하고 C에서 마케팅한 제품을 D에서 사용한다. 저곳의 소식들에 대해 여기저기서 매일 논설을 쓰고 읽는다. 비교적 과거에 비해 현대는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문명이란 단어 같은 거. 옛날 세상에 비해서 놀랍도록 뒤섞이고 관계-역학적으로 얽히고설켜 있는 것. 세계 주식시장은 모두 독불장군처럼 홀로 외롭게 벌스지 않는다는 것. 기타등등. 실시간이 좋을 때가 있고 녹화가 더 나을 때도 있다. 지금같은 경우는 녹화를 어떻게 변형시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후자다. 완전 이상한 모습이다. 지금 보이는 영상은, 영상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 친구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놀라고 있다. 저쪽에 있는 친구들 말이다. 그런데 잠깐 언뜻 갸우뚱하면서 잘 들여다보니 그건 사람이 아니라 매우 정밀한 마네킹이다. 그걸 눈치채고 그들은 또 한 번 놀란다. 저쪽에서 그들이 놀란 모습을 보고 이쪽에서 얘들이 아차, 한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왠지 이쪽 사람들은 저쪽에 있는 그들에게 모자이크 처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평정심을 잃게 만든다. 눈밑의 살결이 파르르 떨린다. 다짜고짜 도플갱어, 여러명의 도플갱어가 나타나다니 이게 뭔일이란 말인가. 도플갱어가 아닌가? 녹화된 게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뭐가 기고 뭐가 아닌지도 흐릿한 가운데 그들은 묵상에 잠기고 모든 일이 우스꽝스러워지면서 그저 친한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데 안도감을 느낀다. 몸놀림은 둔중해졌지만 정신은 청명하리 맑아졌다. 말수도 줄었다. 뭔가 가슴 속 어딘가에서 너른 벌판으로 뛰쳐가고픈 울렁이는 동심이 고동치는 것도 느껴진다. 도대체 이렇게 절율케 만들고, 분위기를 난장판(?)으로 이끌며, 환상에 탐닉되어 홀리고, 꿈결같은 현실에 미혹시키는 이짓을 부리는 속 좁은 괴짜인지 운영체제인지 그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정체란 게 있기는 있나. 몇몇은 침을 꿀꺽 삼킨다. 뿅, 하면서 지금 이곳이 클럽으로 바뀌고 클럽의 스테이지에서 수많은 인파에 휩싸여 발바닥을 열심히 비비며 부비부비, 오 부비부비, 아가씨들과 몸을 스치면서 클럽 음악을 듣고 춤추고 술을 마신다면, 그렇게 바뀌는 기적을 바란다면 그건 너무 부도덕한 것인가? 그대는 진정 복장도착자가 아니란 말인가? 뭔 생각과 설명이 이렇게 진척없이 머뭇거리기만 하나. 하나의 의문부호만 뇌리 속에 남게 된다.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더 이상해지기 전에 이곳을 나가야 한다. 가급적 출구를 늦지않도록 찾아야 한다. 탈출? 아하! 뭔가 좋은 방법이 떠오를려다 말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감각만 예민해진다.
   조니: 얘들아 제임스가 안 보이는데. 뭔 일인지 상황 판단하느라 얘기하느라 몰랐는데 그녀석 여기 없어. 어떻게 된거야?
   케빈: 어 진짜네. 어디갔지?
   알렉스: 그러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뭐야?
   마크: 잘 생각해 보니 안 보인지 10분 넘은 거 같은데. 금새 어디로 가버린 거지?
   하워드: 기다리면 올까? 우리가 찾으러 가볼까?
   닉: 제임스 녀석 꼬마도 아니고 어딜 간거야? 찾으러 가는 건 문제가 아닌데 여기 길이 워낙 종잡을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건물 내부구조가 정말 이상해. 꼭 미로같아.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는 바로 그때, 그들은 모두 눈을 땡그렇게 뜨며 놀란다. 아니 이럴수가, 그런 표정. 그리고 그들에게로 제임스가 걸어온다. 모두들 어디갔었어? 뭔 일 있었니? 어디 이상한데 없나 봐 보고, 말을 시켜보고, 볼도 꼬집어 본다. 그러던 중 뒤늦게 지금의 제임스와 행방불명 이전 제임스의 차이점을 발견한다. 그의 머리카락이 모두 새하얗게 변해버린 거다. 실제로 있었다던가 옛날에도 지금도?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된 왕비 이야기가 왜 하필 지금 여기서? 그것보다 기록을 단축한 건가. 그런 이야기로 그나마 가장 유명한 일화가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 마리 앙투와네트는 다음날 단두대에서 처형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극심한 공포로 하룻밤만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고 하던데. 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에서 한 유태인이 다음날 처형당한다는 어마어마한 두려움에 백발이 되었다는 일화, 그것은 모두 사실이라고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극소수로 간혹 발생할 것이란 예측은 가능하다. 게다가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고 한다. 뭔 근거로 어떻게 증명되었는지 딱히 설득력은 부족하지만 말이다. 심지어 불과 몇개월 만에 백발이 된 사례 또한 없지는 않다는 건 뉴스와 해외토픽과 인터넷을 통하여 삽시간이면 퍼지고 찾으면 다 나온다. 진짜든 가짜든, 하루가 걸리든 1년이 걸리든, 믿거나 말거나 지금 친구들의 앞에 서있는 제임스의 머리카락은 완전 백발이다. 글로 읽은 얘기도 아니고 어디서 남에게 들은 얘기도 아니다. 직접 현장을 보고 있고, 당사자가 눈앞에 있다. 그렇지만 그 놀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제임스는 여기 저기 구경하느라 친구들과 거리가 멀어지는 줄도 모르고, 뚤레뚤레 하다가 저만치 보이는 안락 의자를 보니 퍼뜩 거기 몸을 누이고 싶다는 어떻게 태몽했는지 모를 욕구가 발생했다는 거다. 그래서 거기로 가서 딱 앉아보니 잠시 5분인지 10분인지 대충 사르륵 잠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의자는 안락의자는 맞지만 기능이 하나 추가된 의자였다는 거다. 그럼 그 기능이 무어냐? 미용실에 있는 무인 모발 세정 기계라고 한다. 그 기계는 로보트로 상당히 정밀하게 매끈한 아가씨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깜빡 속아넘어갔다나 뭐라나. 대략 독자 10명? 인심썼다. 100명 가운데 최소 1명은 그런 기억 있을 것이다. 10살쯤에 미용실에 가서 의자에 앉았는데 미용사가 앉아 있는 꼬마의 높이를 올릴려고 의자에 장착된 페달, 미용사가 페달을 쑥 밟으면 의자 높이가 싹 그리고 꼬마는 싱글벙글 배꼽 빠지게 웃기. 반복하면 페달 쑥, 의자 싹, 킥킥킥. 그게 왜 웃기지? 별 의미도 없는데 대체 그게 뭐가 웃긴단 말인가? 참나 알다가도 모를 무의식의 세계 같으니라고. 또 그 특급 미용사는 속으로 뭔 생각하셨을까, 얘는 상당히 조숙한 거야 아니면 천재야, 설마 바보? 하여간 제임스는 거기서 자기가 자고 있을 때 머리카락이 감겨지고 염색이 된 것 같다고 한다. 그런데 대단히 약한 염색인 거 같고, 길어야 1주일? 짧은면 반나절이나 하루쯤 갈꺼 같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갑자기 사라졌던 사람이 불쑥 백발로 나타나니 대략 3초쯤은 얘가 좀비가 됐나, 라는 썩 불경스럽지 않은 신통방통한 상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잠깐 행복했다. 하기야 옛날 세상에나 문신한 사람을 보면 멋지거나 위압감도 풍기고 그랬지 요즘은 그게 문신인지 스티커인지 분간도 안되고, 피어싱에 가죽잠바에 험악한 입담등 사람을 쫄게 만드는 방법은 쌔고 쌨다. 또한 괴팍한 취향의 이색적인 그대는, 젊은이도 아니고 중년도 아닌 당신은 여자친구의 손톱 발톱에 뭐 절대 못 바르게 하거나, 호르몬 분비량에 따라 그거도(살짝만 매니큐어 하는 거도) 흐름을 타야한다고 주장하는 똘아이도 있다. 그렇게 별의별 사람이 다 있듯이 이곳 환상관도 하여간 참 이상하기로는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어느 흔들의자 옆에서 설을 시원스레 풀었다가 흔들의자를 번갈아 가면서 탔다가, 계단을 올라갔다가 직진에 좌회전 하고, 봉타고 한 층을 내려갔다가 우회전에 후진을 해서 어떻게 출구를 찾긴 찾았다. 또 뭔 속임수와 위기가 닥쳤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차분하게 출구를 나와서 고지대에 위치한 그곳 환상관의 앞으로는 멀리 도시의 전경이 보인다. 이제 갈까? 하던 찰나인데 어머나! 하워드가 핸드폰을 놓고 온 것이다. 흔들의자 옆에 있던 고전적인 탁자에 그것을 놓고 와버렸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어쩌긴 뭘 어째. 다시 가지러 가야지. 환상관이 좀 불안정했지만 딱히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길을 찾기가 쉽지도 않고 막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좀비들이 우글거리면서 쫓아오지도 않았다. 그냥 다시 그곳으로 갔다가, 핸드폰 찾아서 챙기고, 다시 출구로 나오면 끝이다. 그러면 된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꺼림직하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아. 약간 오싹하다.
   조니: 하워드, 내가 핸드폰 하나 새로 사주면 안 될까? 나도 모르게 환상관 내부 공간을 날아다니는 용을 만날 것만 같은 그런 몽상을 지워버릴 수 없단 말이야.
   케빈: 어? 너도야? 나도 뭔가 저 도시에서 나를 막 잡아끄는 염력이 느껴지는데.
   알렉스: 갔다 오는 건 문제가 아닌데, 뭔가 불안한 심리가 깔려있어. 지금 표정 안 좋은 사람은 어제 집에서 잠을 잘못 잔거니 아니면 최근 생활이 온통 욕구불만 투성인 거니?
   마크: 갔다 올까? 아니 다시 들어갔다가 못 나오면 어떡하지? 가지 말까? 어, 그러면 하워드 핸드폰 새로 사야 하는데, 웹 계정과 동기화되서 뭐 자료 따로 잃을 걱정은 없겠지만 새롭게 만난 어떤 여인의 연락을 기다릴 수도 있고, 또 당장 없으면 서운하잖아. 새거 장만하기도 귀찮고.
   하워드: 그러게 말야. 어쩌면 좋지? 어떡할까?
   제임스: 괜찮겠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닉: 왜, 누구? 입담 좋은 조니랑 요즘 컨디션 좋은 마크만 보낼까? 제임스는 음 가기 싫은가 보구나. 아니면 뭔지 모를 정체불명의 뭔가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너네들은 뭐 그리 생각이 많니? 생각이 너무 많으면 결정을 못해. 결정을 못하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어.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사랑은 떠난다니까. 실패해도 좋으니 도전을 해야할 꺼 아니야.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를 가고 싶나?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그런 거 그냥 하진 말고, 해야 한다, 머머일 것이다, 라는 느낌이 들면 해야지. 그럼. 연주자가 되고 싶다? 슈퍼모델이 되고 싶다? 정말 어려운 일이라면 하루 아침에 기분만 느껴보는 방법도 있지. 거울을 보고 그 복장을 갖춰 입는 것, 그거 말이야. 하긴 그게 말이 쉽지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겠어. 나도 전에는 남들이 '나는 뭐를 제일 좋아한다'라고 하거나 소셜 네트워크에서 타인의 글을 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술 A와 안주 B의 조합, 그 둘을 같이 먹고 취해서 행복하게 꿈나라로 가는 것'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흔한 일상적인 말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해. 와 저분은 어떻게 <나는 무엇을 제일 좋아한다> 그 말을 그렇게 쉽게 하나, 그런 표현을 남발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딱 끊어서 간결하게 선언? 표명? 그냥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서슴없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야, 라는 소심한 10대나 조금 외로운 20대 같은 생각을 하긴 했지, 나도. 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듯, 편하게 그럴 수 있는 거지? 이런 일을 신기해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건가? 이렇게 말야. 그대신 남의 의견에 동조하거나 기분 맞춰주느라 일평생 <나는 무엇을 제일 좋아한다, 뭐가 제일이야, 최고야> 그런 말은 또 쉽게 했어. 같은 표현을 참 다르게도 사용한 거지. 지금이라고 확 달라지지는 않았어. 하지만 속마음에 대한 걸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쓰거나 생각을 더 한다고나 할까, 점차 그렇게 바뀌는 거 같아. 그러면, 그렇다면 당연히 최선을 다하다, 라는 말 또한 쉽게 못하거나 글로 남기지 못한다는 일관성 또한 있으리라고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별 얘기는 아닌데 그냥 생각나서 말했어. 음 아무튼 하워드 핸드폰 찾으러 다시 환상관 내부로 돌아가는 거 무서워 하지말자. 뭔 일 있겠어? 무서운 괴물 나타나면 엉아가 지켜줄께. 함께 가보자!
   조니: 얜 사람들 동기부여하는데 일가견이 있어. 그리고 남자만 잘 다루는 게 아니야.
   마크: 사람들 얼굴에 술을 끼얹어보지도, 지금껏 살면서 단 한번도 그걸 당해보지도 못했는데 여기서 물러나면 안될 것 같지 않니?
   제임스: 사람 얼굴에 술 끼얹기, 결혼식 없이 결혼기념일 없이 혼인신고만 하고 같이 살다가 불화를 겪는 연인이 술집에서 마주 앉아 술을 거의 동시에 퍼붙는 걸 코 앞에서 보기는 했어. 그땐 친구로서 중재 아닌 중재의 역할이랄 것도 없고 그냥 옆자리에 있다가 재미난 구경한 거지. 재미난 구경? 그거 좀 이상하네. 뭔가 그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말 많고 한 사람이 다 맞고 그거 다 뻥이야. 현실에서는 확-확 순식간에 이루어져. 파파팍! 아, 맞다. 저번에 누가 말했니? 엇그저께 그 뭐야, 긴 명대사, (한 손으로 엄지를 중지와 마주했다가 검지로, 딱!) 그거 따라했다가 뺨 맞을 뻔 했잖아. 진짜 한 대 맞을 뻔 했어. 그래서 막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라고, 무섭다고, 화를 가라앉히라고 달랬단 말야. 나도 긴 명대사를 현실에서 써먹어야지, 라는 생각에 딱 했어. 내가 따라한 명장면은 대략 이런 거였어. 이를테면 "마실 걸 물어보지? 뭘 주든 간에 고급으로 골라. 커피나 차 드시겠어요? 차로 부탁합니다. 수제 레모네이드나 소다수 드시겠어요? 레모네이드로 하죠. 감사합니다. 왜요? 왜냐하면 우리는 싼 값으로 후려치지 않으니까. 우리도 최고여야 해. 고객이 느끼기를, 아니, 확신하기를 '최고만 추구하는구나' 그러니 뭐라뭐라 어쩌겠지. 그리고 견적을 보여준 후엔, 장기적으로 절약되는 액수를 제시하면서, 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들어야 해. 하지만 문제는 우릴 고용하면 누군가를 해고해야 한다는 거지. 고객 입장에서도 어려운 일이야. 그러니까 수치들을 보여주고, 고객을 향해 빤히 바라보고 있어. 필요 이상으로 오래. (침묵, 침묵) 웃을 일이 아니야. 영업 실적이 없으면 바로 해고니까. 내 유일한 관심사는 이 회사의 성장이야. 그 고객들도 힘들게 번 돈이야.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그저 벗겨먹으려 들지. 그러니까 고객들 눈을 바라볼 땐 우리는 다르다는 믿음을 가져야 해. 사실이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바라보면서, 진실되게 말하는 거지. (침묵)" 그거 보고 응용했지. 딱 보니까 침묵이 중요하더라구. 차분하게 말한 다음에 최선을 다해 말없이 바라보는 것과. 똑같이 따라했어. 똑같이 따라했다구. 멋져 보였으니까. 정말 그렇게만 하면 사랑이든 일이든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어. 당신도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 있다. 가능성이 보였지. 그렇게만 한다면 금새 또는 좀 더디게라도 뭔가를 이룩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누군가가 일부러 내비치는 속옷처럼 엿보였어. 마음이 여린 사람들에게, 나이게 걸맞는 적절한 교양을 비춰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특히나 비교적 여자들에게 따라하기가 왜 중요할까? 그들은 왜 남을 따라할까? 그냥 남이 하면 멋져보이니까, 난 별로인 것 같아서, 학자들이 말하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흔한 답변말고 하나를 들자면 실생활과 연기가 그들에겐 신중한 사람보다는 그것의 구분이 매우 흐릿하다는 거지. 태생적으로 원래 그래. 행복이란 게 어딘가에서 내가 아닌 타인이 되어서 사는 것이라면 잠시 설을 풀어서 그런 체 할 수 있고, 선수용 모터사이클을 못타도 그 전문가용 옷만 입어도 그걸 착용한 그 순간 즉시 외관상 선수와 구분되지는 않고, 블로그와 소셜 네트워크에 내 꿈은 뭐다, 난 나중 이렇게 살고 싶다, 라고 글로 써서 알려도 바로 미래와 현재는 일직선이나 꽈배기 모양일지 몰라도 같은 곡선상에 위치하게 된다는 거지. 그래서 따라해. (최선을 다해 바라보면서 침묵) 봐, 시선을 건네고 침묵하면 너네들은 기다려 줘. 이어가자면, 꿈에 근접하여 다가가 보니, 꿈을 화끈하게 이뤄보니 즉 실제 직접경험으로 겪어 보니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내가 꿈꿔온 그것과 좀 달라, 그러면 꿈을 재수정하면 되고 또 다른 뭔가를 찾거나 기다리거나 평소처럼 남들처럼 책 읽고 대화하고 영화보고 여행하고 사랑도 하면서 그냥 사는 거지. 언제부터 그렇게 허황된 꿈을 찾아 살아던 걸까. 꿈, 자면서 다 이뤄. 얼마나 좋은데.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그게 꿈이야. 그게 꿈이라구. 잡지에 나오는 그 흔한 인터뷰에 나오는 말이 글로 바뀐 지면에 나온 꿈은 대부분 이룰 수 있는 꿈이야. 그래서 이룰 수 없는 꿈보다 어쩌면 더 짠한거야. 슬프면서 그러니까 더 기쁜거라구.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말로 쉽게 툭 '그거'하고 말하는 게 바로 그것이 꿈이란 말인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 이룰 수 있는 게 꿈이라고? 누가 그래? 혼자 생각해 봤어? 책에서 하나 같이 다 동기부여하고 지겹게 듣고 또 듣고 평생 들으니까 그게 진짜 꿈인 거 같지? 넌 커서 뭐가 될래? 그게 꿈인 거 같지? 한 권의 자서전과 파란만장한 인생이 꿈인 거 같지? 그렇지? 잘 생각해봐, 휘둘리지 말고. 그게 꿈이라고 생각해? 대답해봐. 대답해. 아무 생각없이 말하지 말고, 생각을, 하고, 나서, 말을, 하란, 말야. 생각, 안 하고, 말하지 말고. 다 다시 간다. 자, 다시 시작해. 그게 꿈이야? 시간이든 돈이든 노력이든 얼마만한 단위를 들여서 이룬 게 그게 꿈이야?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그렇지만 과거 일평생, 지금도 온통 그 얘기 천지고, 미래에도 죽을 때까지 계속 또 계속 듣게 될 말, 하면 된다고 듣던 말, 그렇게 성취한 것, 못 이뤘을지라도 최선을 다했다는 것, 노력을 해봤다는 것, 그게 꿈이야? 그게 꿈이냐구. 그건 남이 말하는 꿈이야, 늬가 생각하는 꿈이 아니고. 그건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라구. 차리리 허풍을 떨거나 낮이나 밤에 잠자면서 만들어지는 그 꿈이 낫지. 그래. 정말 그래. 이룰 수 있는 건 꿈이 아니라구. 남 얘기만 듣고 그게 꿈이라고 생각하면 그게 꿈이 아니라는 생각은 평생 못하게 되는 거야. 그거라구. 이룰 수 있다면 그건 그냥 조그만 소망일 뿐이야. 하나만 명심해. 너의 바깥에서 말하는 꿈은 모두 <그럴 것이다>야. 잊지마. 누가 꿈은 뭐다, 드라마에서 내 꿈은 뭐였어, 책에서 꿈이란 무엇이다, 자 그것은 뭐라고? 전부 이렇게 바꾸란 말이야. 우렁찬 목소리로 손짓을 곁들이며 멋지게 휘젓는 말을 듣든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이건 뭐다 저건 뭐다라는 글을 읽든 그건 모두 <그럴 것이다>로 순화해서 받아들이란 말야. 알겠어? (말없이 최선을 다해서 바라보기) 이 말도 그렇게 받아들이길 바래. 나도 그걸 아직도 썩 그리 잘 한다고 할 수 없지만. (침묵. 눈빛. 침묵. 얼음땡) <그럴 것이다>로! 최선을 다해 내면을 바라보는 거지. (침묵), (침묵) 뭐 그런 생각이 들게 되겠지. 엥? 그런데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아 따라하기, 흉내내기 그 얘기하고 있었구나. 오늘은 왜 삼천포로 빠지지 않나 했어. 그렇게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어. 거울 보고도 연습했고 거울 안 보고도 연습했어. 곰인형한테도 여동생한테도 연습해 봤단 말이야. 말과 행동이 어느 정도 맞아들어가니까 만족감이 슬며시 찾아오더라니까. 그래서 아 때가 됐구나, 하면서 실전에 돌입하게 된거지. 여기서 배웠으면 저기서 써먹어야지. 그런데 그게 한 번에 잘 안 되나 봐. 그녀를 찾아가서 똑같이 따라했어. 거래처와 영업 상대를 찾아가서 똑같이 따라했어. 상대방에겐 다르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우선 분위기 잡고, 몸짓 살며시 보여주고, 그러다 갑자기 뭘 물어봐, 그리고 쉬었다가, 침묵하고, 말하고, 상대방이 웃으니까, 농담이 아니라 말하고, 눈빛 보내고, 시선을 유지하면서... 어, 흠, 알지? 그런데 듣는 사람은, 긴 명대사, 그게 긴 명대사가 맞다면, 그것을 길게 늘여서 한 호흡에 뺄 여유를 주지 않아. 자꾸 못 참고 딱, 딱 끊는단 말야. 짜증나게 말이야. 긴 명대사고 뭐고 집어치우고 싶게 만들어. 에잇, 삐─ 해도 안돼. 따라해도 안된다고. 새침한 기집애 같으니라고. 판 다 깨버려. 언제는 분위기잡는 게 좋다드니만. 딱 보니까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했어. 순전 놀러만다니고. 노는 거도 제대로 못했을 꺼야. 그런 친구가 옛날에 좀 놀았을지 누가 알겠어. 차라리 그냥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며 어줍짢게 말하는 게 백번 나을 뻔 했나. 그래도 그저 작은 일이라서 다행인 게 그 친구가 계집애가 아니고 악당이나 다단계 사업체 간부였다면 그것에 잠시 내 생각의 어디가 막혀서 설득당하고, 세뇌되어 강력한 최면에 빠지고, 감성적인 충동을 참지 못해 그쪽으로 계속 빠져들었으면 한동안 어떤 음지에서 계속 살아가야 했을지도 몰라. 그렇게 됐다면 인생의 행로는 목적없이 어딘가로 부유하고 정처없이 어느 어두운 곳을 떠돌기만 했을 꺼야. 새로 만나게 될 사람과 잠깐만 알게 될지 아니면 오래도록 손잡고 더 오래도록 두손을 꼭 잡게 될지 가늠하는 능력까지도 잃어버렸을지 누가 알겠어. 카리브해나 인생의 무게와 언어의 정원, 백조의 호수, 이런 건 꿈도 꾸지 못했겠지. 근데 뭘 보고 백조의 호수라 하지? 그건 실존하는 오아시스 같은 건가? 꼭 말하다가 난 퉁명스럽게 딴 길로 빠지는 게 문제야. 그래서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잘 몰라. 에잇, 몹쓸 흉내내기!
   닉: 아하 그런 일이 있었구나. 잊어버려. 다 그런거지.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케빈: 초현실주의! 
   알렉스: 야수파 아닐까. 표현주의 같기도 하고. 어쩜 미래주의일 수도 있어. 팝컬쳐? 포스트모던! 
   조니: 그래 제임스, 말로 다 날려버리지 말고 기억했다가 그걸 소설에 쓰라구. 아 맞다. 다음 번 블로그에 자기 작품들 올리는 거 모두 잊지마. 나름 기대하고 있으니까. 이제 다시 슬슬 그곳으로 가볼까?
   마크: 자, 한번 다시 환상관으로 가볼까? 고! 고!
   하워드: 좋아 그럼, 출발하자고. 오늘은 모두들 환상관에서 시간을 보내자고.
   (하이파이브, 하이파이브)
   그들이 다시 환상관의 내부에 들어선지 몇 잔의 차를 내리는데 필요한 물을 끓이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얘들아 저기 앞에 있는 더운 기운이 느껴지는 액체, 그 붉은 물줄기가 보이니?」
   「어 정말. 뭐지? 저거... 용암일까?」
   「오 이런. 뭔 여기가 화산도 아니고 이곳이 용광로일리도 없는데 그러기야 하겠어? 열기는 있지만 수증기가 없어. 아니야 용암.」
   「그럼 케찹?」
   「그게 케찹이든 용암이든 상관없고 저기 보이는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 보이니?」
   「뭐야, 쟤네들?」
   「옷과 머리카락 색깔과 장신구로 보아서는······ 전사, 기사, 마법사, 요정 그리고 엘프 같은데?」
   「뭐야? 아이템 어디서 주워온 거 아니야?」
   「자, 조니. 이럴 땐 조니가 납셔야지.」
   친구들 가운데 조니 혼자서 이상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뭔일인지 물어보러 그들에게 다가갔다. 보통은 이런 생소한 만남을 즐기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런 상황을 반가워하지만 그도 이번 만큼은 왠지 모르게 자꾸 주인의 눈치를 보며 가기 싫은 장소로 끌려가는 강아지 마냥 어쩔 수 없이 수상한 복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조니와 그들이 만나서 뭐라 뭐라 얘기를 나누고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조니가 다시 친구들에게 왔다. 이제 보니 그쪽도 쪽수가 7명이었다. 일단 개인 대 개인이 아니면 친한 친구들끼리 있다가 이런 상황에 맞닥드리면 이쪽 숫자와 저쪽 숫자를 재빨리 파악하게 된다. 여자들은 잘 모르는, 알게 되면 웃는, 결코 사소하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사실.
   「무슨 봉인 해제를 하러 혈맹을 찾고 있다는데. 잊혀진 섬을 아냐고 물어보길래 난 모른다고 했지. 어디서 장난하냐고 멱살을 잡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어? 게다가 저 장신구들이 그저 흉내낸 플라스틱이 아니라 진짜라면... 아니 그런데 왜 내가 자꾸 저네들에게 말려드는 느낌을 들지?」
   「잘 살펴봐. 혹시 변신할지도 모르니까.」
   「뭐 공성전이라도 같이 치를까?」
   「거대한 운명의 서막이 시작되었군. 쟤들은 오래 전 봉인되었던 잊혀진 섬을 찾아 시공을 초월한 항해를 시작한 거라구. 내가 봤을 때 저들은 아덴의 용사들이야. 아니 붉은 기사단?」
   「웃기고 자빠졌네. 엮여 들면 안돼. 정신 똑바로 차려.」
   「다가올 거대한 운명을 맞이하라!」
   「자꾸 너까지 왜 그래?」
   「재밌나자!」
   「오 그런데 저기 저 요정인지 엘프인지 완전 멋진데. 성적 매력이 넘쳐. 난 잘 모르겠는데 혹시 그쪽 정극에서 사람이랑 쟤들이랑 그런 뭐 그 있잖아? 그런 게 가능할까? 그냥 몰라서 하는 얘기야.」
   「아 이런. 정작 찾고 있는 하워드 핸드폰은 나타나지 않고 뭔 나이랑 안 어울리게 코스플레이하는 꺼벙한 친구들이나 만나고 이게 뭐니? 이게 진짜 환상관이야? 환상관이 뭐 이래? 이름만 환상관이네. 이런 젠장. 왜 몬스터는 안 나와?」
   「지금 나오는 교향악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런 음악이야.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옅어져 여러 일들이 벌어지고 신들의 보물과 신성한 힘이 한꺼번에 휘몰아 치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음악.」
   「봐봐. 이렇다니까. 너가 방금 말하기 전에 이미 이 환상관의 인공지능 시스템이 우리들 생각을 읽었어. 미리 예상했겠지. 이미 척하면 척, 외모만으로 동작 딱 하나만으로 눈빛 잠깐이면 뭐든지 5분후 10분후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니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의 바닥을 봐봐.」
   「어 이거 지도잖아? 자르딘, 피시스, 울라, 라노, 콘누스. 뭐야 이거?」
   귀여운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바쁘게 사는 건 좋은 일. 자신에게 활력을 줘 보세요~."
   「아 이거 나 미치겠네.」
   또 들린다. 이번엔 도톰한 남성 목소리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어요. 모험은 계속 될 겁니다."
   「(또) 별을 따려 손을 뻗다가는 자기 발아래 놓인 꽃잎마저 놓쳐버리고 말아요.」
   「점점. 이젠 웃기지도 않는다.」
   「(마법사의 음성이다) 막연한 기대따윈 하지 않는 것이 좋아.」
   「(이 사람은 누구일까)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인생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만화영화 주인공 목소리다) 빨리 다시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점점 빠져들게 되는데.」
   「환상관. 흡사 하나의 영화평처럼 지어졌어. 어쩜 그리도 닮았는지 모르겠네. 영화보고 나서 왜 그런 짧은 1줄 후기 말하잖아. <난 괜찮았는데 친구는 잤다.>」
   「환상관이 차츰 살아나고 있는 것 같지 않니? 설마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일까?」
   「일단 여기를 지나가자. 이 지역을 벗어나야해. 지도가 그려진 바닥 위에 있으니까 자꾸 이상한 말이 들리고 기분도 이상해지잖아. 마법의 언어에 말려들면 안돼.」
   「그러게 아까부터 너무 당혹스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길을 가다가 바닥에 버려진 악보나 쪽지, 이상한 글씨와 숫자, 표식, 종소리 같은데 혹하면 안돼. 다 구라고 거짓이야. 모두 (개)뻥! 그 흔하디 흔한 추리소설이나 드라마들 보면 그 다음에 뭔 일이 있을지 다 보이잖아. 뭔가 있어 뭔가 있어, 하면서 따라가다가는 그냥 날새. 환상관? 이름만 그럴게야. 무슨 파란만장한 모험이야 있을려구 이름이 그렇겠어. 환상관 좋아하시네.」
   「저기 그림자 세계라고 씌여있는 문이 보이는데?」
   「저 너머에는 하워드의 핸드폰은 없어. 뻔해. 뻔할 뻔자야.」
   「저기 또 7명 정도 사람들이 보이는데. 이번에는 그냥 모두 일반인이야. 그리고 모두 여자야. 게다가 음 이뻐. 조니는 약간 김샜으니 누굴 보내지?」
   「보내긴 뭘 보내. 딱 보면 모르겠어? 지금 계속 7이 반복되고 있잖아. 쌩가. 모른 채 해야 된다니까. 이렇게 삼세번 7이 나온 다음에는 틀림없이 7의 배수가 나오게 되어 있으니까.」
   「(냉큼) 그러자.」
   그들은 이제 사람이 지나가도 미래에서 온 외계인이 지나가도 그리고 동물이 말을 하고 책과 소파가 걸어다녀도 본체만체한다. 뭐 길지는 않았지만 나름 그동안 어떤 환상관의 기운이 그들에게 주입되었던 것일까.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어떤 충동적인 또는 극중 배역과도 같은 말을 개별적으로 말하면서 일행이 대화를 같이 이어나가지 않고서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쁘게 사는 건 좋은 일. 자신에게 활력을 줘 보세요~.」아까 들은 말인데, 느낌이 괜찮았던지 다시 반복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삶의 무게가 있지요.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흥. 어른들은 다 똑같다니까.」
   「그릇이 없이는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 해도 담을 수 없지요. 사람의 몸과 영혼의 관계도 그러하답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왜 그것을 원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세요. 마음이 약간은 편해질거에요.」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인생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이것도!
   뭐 여기까지는 그냥 서로 혼잣말을 하는 분위기인가 보다,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멈추지를 않는다.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만들고 싶어요. 그것이 제 소원.」
   「이봐~ 밤이 새도록 즐겨보자구~ 에헤헤헤.」
   「나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이건 뭔가 안 좋은 쪽으로 계속 나아가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상한 혼잣말하기도 차츰 잦아들고 멈추었다. 그렇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들이 당도한 곳은 어느 칸막이로 임시 설치된 것 같은 백화점이나 마트, 박람회 같은데서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어느 아담한 아가씨가 신생 회사 에너지 음료의 시음 행사를 하고 있었다. 그것의 이름은 뭐야, 프랑켄슈타인? 그쪽 시장에 큰 어려움없이 안착하기엔 썩 어울리지 않는 제품 이름으로 보인다. 너무 길어. 이상해. 그러나 그래서 먹힐지도 모른다. 그건 사후에 평가하는 게 말을 만들기가 쉽다. 당연한 거라고? 그걸 누가 몰라?
   「어머나, 이미 저희 제품을 여러 번 시음하신 분이 자꾸 오심 어떡해요~ 몰라요~.」
   「네? 우린 여기 환상관 46번지에 처음 왔는데요.」
   「또 예쁜 건 알아가지고. 안경을 써도 예쁜건 예쁜거 아니겠어요?」
   「네. 그대의 미모를 저흰 무척 흡모하고 있습니다만 우린 프랑켄슈타인? 이걸 한번도 마셔보지 않았다구요.」
   「거짓말! 우후... 어쨌든 우리 프랑켄슈타인을 다른 경쟁사 에너지 음료랑 비교하진 말아주세요.」
   「네, 잘 모르겠지만 주의할께요. (몇몇이 프랑켄슈타인 음료를 마신다) 그건 그렇고 아가씨, 여기 근처에 혹시 미용실 기구나 지표면 구부러지는 기법에 관한 행사장을 혹시 아시나요?」
   「환상관에 오셨으면 쉽게 쉽게 목적지만 찾아다니실 게 아니라 환상적으로 각 번지수 가게들을 즉흥연주처럼 건너뛰어다니셔야죠. 진정한 환상가는 그런다던데요. 아저씨들은 환상가, 아니에요?」
   「아가씨도 잘 모르나본데.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그래요. 모험은 계속될 꺼에요.」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어요.」
   「벌써 인사하면 어떡해? 언니, 이따 몇 시에 끝나요? 친구 만나기로 했어요? 아님 친한 친구와 요즘 만남이 뜸한가요?」
   「에이 그만하고 우린 갈 길을 가자.」
   「잘 있어요. 귀여운 소녀여.」
   「저두요~ 환상가님들! 저기요,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이렇게 어느 유니폼걸과의 짧은 만남은 끝나고 그들은 또 어딘가로 하워드의 핸드폰을 찾아다닌다.
   「어쨌든 대단한 밤이야? 막 신기한 일들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청소년 권장 소설같은 기분은 나네.」
   「뭐? 벌써 밤이라고?」
   「그래 저기 창문을 봐봐.」
   「오, 이런!」
   「세상에나. 여기 있으면 안되겠다. 여긴 바깥 세상과 뭔가 달라. 시간이 무척 빨리흘러.」
   「그럼 여기 계속 있으면 우리가 빨리 늙는단 말야? 난 인생을 좀더 천천히 즐기고 싶다구.」
   「누가 아니래.」
   「오 이런 바보같으니라고. 하워드에게 전화해 보면 될 꺼 아니야?」
   「으악, 우리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전화 안 받아.」
   「아 맞다. 그때 창가로 등대가 보였어. 우리가 처음 이곳에 들어오기 전 봤던 등대말야.」
   「오호, 그럼 등대를 찾아가면 되겠네.」
   「그런데 등대를 어떻게 찾지?」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벨은 마크 핸드폰으로 울렸는데 전화는 닉이 받는다. 아니다. 받기 직전이다. 마크 핸드폰은 알람이었고, 닉 핸드폰 소리가 전화가 걸려오는 소리였다.
   「뭐야, 발신자로 하워드라고 뜨는데?」
   「받아봐. 전화 놓고 갔다고 누가 알려주는 건지도 모르잖아.」
   「그래. 받아봐.」
   「여보세요. 네? 누구요? (옛날 드라마에서 보듯이 전화기가 좀 컸으면 송신부를 손으로 가리고 말할텐데, 그래도 들리긴 하겠지만, 지금은 상대방 다 들으라고 닉이 친구들에게 말한다) 자기가 하워드라는데?」
   「얘 뭐야?」
   「여보세요? 하워드세요? 하워드 여기 있는데요.」
   「뭔 소리야? 닉! 나야 나. 하워드라구. 누가 내 행세를 하고 다니는 거야.」
   「하워...드? 그래 그런 것 같은데. 어리둥절한데. 어떻게 된 거지?」
   말이 필요없었다. 정말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아무도 믿으면 안돼, 라는 명대사가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진짜라는 걸 깨닫는 것 같았다. 고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뒤돌아 보면 안될 것 같아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우리는, 당신은, 그대는 살면서 단 한번도 사랑을 해보지 않았던 것일까. 지금 알고 있는 타인이 그 타인이란 말인가. 더 이상 뭘 믿고 살아야 하는가. 이럴 줄 알았다면 한번 불러보는 건데. 공주님이라고. 나의 왕자님이라고.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지금이라도, 당신을 만나 행복하다고, 너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고, 내가 만일 화가였거나 화가가 아니라도 살면서 한 번쯤 자화상을 그리든 그걸 뭘로든 남기든, 내가 어렸을 때 누군가에게 롤리타였다면 또는 아니었다면, 내 이름은 하찮지만 당신의 이름은 고귀하게 여긴다면, 이 세상에 이렇게 태어난 게 너무너무 더없이 기쁘다고, 거짓말이라도, 뭔가 상대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드는 아늑한 안정감과 무슨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가슴 속에 몽글몽글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긴장감까지,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지금부터는... 언제까지나... 주어도 동사도 목적어도 불분명한 엉망진창 문장이 뭘 말하는 것인지. 그러나 당신의 님은 어딘가에서 당신을 보고 있을 것이다. 기다릴 것이다. 그녀. 어렸을 때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어느 노부부가 사는 집에서 3일간 지냈던 그녀. 그녀가 꼭 남자아이처럼 보여서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어린 그녀를 키울려고 집으로 데려갔는데, 고추가 달려있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실화이자 어린시절 각인된 기억을 간직한 그녀. 갸 눈 얼마나 높은 줄 아냐? 라는 말을 듣던 그녀. 날파리가 주위에 얼마나 많이 날리는지 미처 다 알지 못하는 그녀. 그러나 변변치 못하고 보잘 것 없어도 내 마음에만 쏙 들면 그만이라는 마음을 잘 숨기지 못하는 그녀. 여자들은 사소한 일을 세심하게 기억하고 챙겨주는 남자를 좋아한다. 그렇게 현재를 추억과 미래로 길게 늘여서 정신을 아찔하고 몽롱하게 만드는 하워드의 출현이 이루어졌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원점으로 돌아가서 시작해야 하나 여기서 판을 새로 짜서 시작해야 하나. 자꾸만 생각이 복잡해져만 간다. 아, 인간이 되고 싶다. 너가 찰과상을 입어 피를 흘려본지 오래 되었다면 네 피가 초록색이 아닌가 의심이라도 해봐야 한다. 그것이 파란색으로 한 번 더 변했을지 어찌 알겠나. 누군가는 처음부터 사람이었지만 누군가는 살아가면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일까. 순간 저쪽에서 하워드가 걸어온다. 
   「이런 뭐야, 삐──삐──.」
   「삐─삐─삐─.」
   「삐─.」
   「쟤 뭐야.」
   「너 누구야?」
   그들에게 걸어오는 하워드는 핸드폰을 들고서 통화중인 것처럼 보인다. 닉과 아직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쪽엔 하워드가 없었다.
   「누구긴 누구야? 나야 나. 하워드라구. 왜 그렇게 놀라는데?」 이제야 주변을 둘러보며 하워드2가 없다는 걸 알고 이 하워드가 그 하워드인줄 깨닫는다.
   「너 어디 갔었어? 가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야할 꺼 아니야?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공짜로 공포영화봤네. 혹평이 하나도 없는 완전 무서운 걸로.」 
   「이······ 보고 싶은 얼굴. 하워드.」 
   「오, 대단해!」
   「여기, 환상관, 맞네!」

   벌써 끝나셨어요? 맞긴 맞는데, 얼빵한 이번 편께서 역시 얻어듣긴 얻어들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여기서 들을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럼 도대체 어디서, 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그렇다고 부끄러워하지는 말고. 왜냐하면 안고 있는 게 더 좋은 포근함처럼 읽고 있는 그 상태를 사람들은 보통 더 간절히 바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식사와 대화와 매일? 어쩌다? 자는 낮잠처럼 취미가 아니라 그냥 생활이라고. 누군가는. (워, 어쩌지? 그럼 또 그 다음에, 가 나와야 하는데!) 꾹 참았다가 더 절실함이 긴요한 시공간에서 넌지시 어떻게 다른 의사표현으로 여쭙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정말 몰라서 묻는 질문이다. 언제는 생각하지 말자고 해놓고서. 무엇을. 그런데 왜, 하필, 여기서, 그 말을!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그래, 가자. 좋다. 괜찮다. 떠나자. 여기서 다 뒤집어쓰겠다. 여기서 모~두 덮어쓰겠다. 이번 이야기를 서둘러 급하게 마무리한 걸로. 허접하게. 마땅히 뒤짚어써야 한다. 여기서. 덤탱이, 아니다. 눈탱이도 아니다. 억울한 누명이 아닌 정당한 오명이다. 다 모두 다 뒤짚어써야만 한다. 모든 뒷담화와 온갖 불만은 이곳에, 바로 여기서! 게다가 이번 편은 객관적으로 봐도 많이 재미없다. 뭔가 나올 것처럼 간질간질하다 끝났다. 인간이 꼭 즐거움만을 위해 읽기라는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지어 이미 독서에 할애해버린 타인의 귀중한 시간마저 뺏어버렸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돈으로 살 수 없는? 꼭 그렇지만...은 아닌 듯한 타자의 막대한 시간을 딱 훔쳤단 말이다. 그러니 욕을 먹어도 싸다. 뭐 그게 대수란 말이냐. 좋다. 모든 악담과 화풀이와 험담을 이곳에 풀어놓으시라. 다 감수하겠다. 아니, 그래도 싸다. 단, 여기서 풀고 저기서, 당신의 삶에서, 그것이 진지하든 가볍든 1회성이든 그곳에서는, 당신이 잘 살고 있다면 주변을 돌아보고 그게 아니라면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된다. 그대에게 건투를 빈다.
   그동안 한꺼번에 얘네들끼리만 너무 몰려다녔다. 뭔 특집 하이틴 드라마도 아니고.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말인데, 그리고 이렇게 끝나면 아무래도 너무 서운하니까 다음편에서는 위에서 누가 말했듯이 이 친구들 각자 쓴 소설을 모두 한꺼번에 한자리에서 흠잡는 시간을 갖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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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57

from 소설 2015. 9. 30. 11:52

   「오실 때는 자유롭게 들어오셨지만 가실 때는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마음대로 떠나실 수 없습니다. 심각한 결례에 가까운, 명백히 실례라고 볼 수 있는 발언이지만 그만큼 귀한 주빈이신 손님을 고이 보내드리지 않겠다는 예우이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결연한 태도요, 편의를 더 아낌없이 선사해드리지 못했다는 판단 때문에 빚어진 과도한 무례에 가까운 처사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민법이 아니라 형법상으로도 문제가 있습니다. 손님께서 머무르신 객실은 무척 특별한 어떤 호텔의 상징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보통의 시장 규칙과는 반대로 운영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 머무르신 손님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특수 규정에 따라, 몇 년도 언제 그가 이곳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어떤 영화를 찍었다드라, 바로 그 장면, 무슨 작품을 완성했다드라, 그와 같은 업계의 전설적인 기록을 남겨야만 하는 진부한 숙명이 뒤따르게 되죠. 호텔은 호텔대로 과업에 대해 할 건 해야 한다는 그저 일상적인 업무과 업계 철학과 예술적인 전망, 그것이, 이 문화가 손님께도 사르륵 스며들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죠. 이런 특별한 사회 규범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이곳 지방에서 거의 유일한 관습이자 대대로 이어져온 이 지역 문물과 뭔가 암묵적으로 조약되고 공통으로 인정하는 약조이며 규범과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옆에서 다른 직원이 가로 세로 두께 1m 정도 되는 육중한 책을 가져오드니 밑줄쳐진 어느 한 면을 펼친다) 여기 나와 있다시피 본령과 내규로 준엄하게 정해진 이곳 호텔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얘기를 들으시고 선뜻 무슨 얘기인지 그 말의 목적과 숨겨진 의미와 드러나는 본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리라고 짐작합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암요. 당연한 일이죠. 생면부지의 쌍둥이를 어른이 되어서야 처음 만나게 되는 일처럼요. 그러나 말씀드린 것처럼 존빈께서 떠남에 있어 우리 호텔측에서 그동안 축척된 숙박비를 모두 계산해드리기 전까지는 귀빈의 호텔 생활은 현재 진행형으로 유지될 것입니다. 객실 이용 종료는 그 때까지, 어쩔 수 없이 유예되어야 합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정말로 어이없는 일을 겪거나 실없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품격을 갖추어 심각하고 차분하며 도톰한 음성으로 단추가 많이 달린 수트를 입은 남자에게 듣는다면 할 말을 잃게 될 것이다. 방금 말 한 사람은 총지배인이다. 그의 헤어스타일은 올백이다. 옷차림도 그렇지만 얼굴과 격식, 몸짓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 없다. 바늘로 찔러도 꿈쩍도 안 할 것 같은 사람, 청록색 피가 나올려다 멈출 것 같은 인물이다. 별명이 있다면 원칙맨?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정신없이 빠져들게 듣게 되게끔 하는 행동을 뭐라 하나, 연기력이라고 한다. 로비 한쪽에서 여직원들끼리 수근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아니 그게 무슨 이상한 말씀인가요? 그러니까 지금 저 보고 계속 머무르라는 뜻인가요? 그런 얘기인가요? 그게 무슨... 아니 이건······ 뭔...」
   「이해합니다. 저희도 얼마 만에 특별실 손님을 받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이사회 긴급 회의 소집과 이사회의 특별 승인과 함께 호텔비 정산이 가능하게 되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그 날이 서둘러 오길 바라시거나 좀 늦추어져 천천히 다가오길 원하신다면 그건 안타깝지만 퇴실 절차의 진행과는 하등 아무런 영향이 없는 별개의 개인적인 심리이자 사안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군요. 특별실 운영을 겪어본 직원은 아마 지금 근무하는 직원 중에 한 명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몹시 흥분되는군요. 사실 떨려요. 솔직히 말씀드립니다만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잘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무척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날, 그때까지는 불편하시겠지만 적을 이곳 섬에 두셔야겠습니다. 물론 인근 관광지를 구경하셔도 되고, 요트를 타고 좀 멀리 갔다오셔도 괜찮습니다. 하루나 이틀, 더 오래되어도 괜찮지만 전화로라도 제게 또는 이곳 안내처에 손님 안부를 알려주셔야 합니다. 꼭 그러셔야 합니다. 좀 답답하시다면 해변가 풀밭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셔도 무방합니다. 그래도 잠깐씩 호텔에 들르셔서 인기척을 하시든 눈인사를 하시든 호텔 직원이라면 누구에게든 눈도장만이라도 최소한 맞추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어디를 가시든 누구를 만나시든 소리 소문없이 어느 엉뚱한 소식통이 사소한 일 하나하나 모두 이 책상으로 첩보와 희소식을 전해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단 직원들 불편을 초래하시면 그 친구들 젊은 혈기에 사표를 쓰고, 애인과 헤어지고 그러다 정신이 이상해져 다시 유치원에 갈지 정신병원에 갈지도 모를 일이니 부디 너무 멀리 가시거나 너무 오래 떠나가 계시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만 하지 않으신다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이사회인가 승인인가 그건 모르겠고, 호텔비 정산을 도리어 제가 받는다뇨? 그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긴지 모르겠네요. 나 이거... 어디다 하소연 할 데도 없고. 어쩌면 좋죠? 어떡하란 말씀인지... 그냥 그 무슨 호텔비 정산인가 뭔가 그거 안 받을께요. 됐죠? 그냥 갈께요. 네. 그럼 이만······」 뭔가 잘못된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서 그는 서둘러 인사를 남기고 떠날려고 한다. 그가 뒤돌아서자마자 부드러운 말이지만 뭔가 일침을 놓는 것처럼 무언의 암시와 경고에 가까운 어감이 아주 살짝 느껴지는 친절한 도움말이 건네와 그의 옷깃을 잡는 것 같다.
   「귀객께서는 어디든지 가실 수 있습니다. 그건 자유죠. 이 땅에 태어날 때 누군가 미리 앞으로 넌 어떻게 살게 되고, 어떤 일들을 할 수 있고, 나중 어디를 찾아가거라, 때가 되면 누구를 만나거라, 그런 걸 미리 정해놨다고 한다면 마땅히 인간의 도리와 별개로 또는 철학적으로 보면 그에 앞서 자유의지와 행동에 따른 근거를 제시하는 불문율과도 같은 것이죠. 운동선수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승부에만 집착하는 모습보다는 "돈, 개나 줘버려. 스포츠 정신없이 이 일을 하라고? 때려쳐, 이런 젠장." 마치 이렇게 할 땐 하더래도 지난 날을 돌아보면 적어도 비열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팬들로부터 시간이 흘러도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뭐 이런 생각처럼요. 어디든지 마음데로 갈 수 있다, 평범한 선수로 은퇴했다, 전자와 후자가 뭐가 비슷하냐고요? 별로 상관없는 얘기죠. 그러나 어떤 선을 넘는다, 선을 긋는다, 나중보니 그건 선이었다, 뭐 그런 의미로 본다면, 그래요, 아시죠? 중의법, 환유법 그런 비유말예요. (좀 전 운동선수에 관한 경직된 발언을 그는 실제 현역 감독처럼도 아니고, 구연동화처럼도 아니며, 딱 초딩이 책 읽듯이? 초딩이 방송 인터뷰하듯이? 로봇 연기 비슷하게 대사를 읊었다. 그 부분만.) 세상에는 이해할 수 있는 일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누구나 언제든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게 마련이죠. 아시겠지만 이 일이 손님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추억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저희에게는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그러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아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죠? 네 그렇죠. 맞아요. 생각났습니다. 손님께서는 떠나실 수 있습니다. 이 곳이 무슨 감옥도 아니고 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곧 신부와 수녀님, 수도승과 랍비들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답니다. 매일 기도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기기타도 치고, 단편영화도 찍고, 홍차도 마시고, 연극무대에도 슨답니다. 정치가도 만나겠죠. 우주비행선에서도 거하게 만찬이 이루어진다죠. 그렇듯 당신께서도 오롯하게 자유로운 몸이자 영혼일 것입니다.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르시겠다구요? 이해합니다. 이곳에 최장기간 근무했던 직원들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니까요. 더군다나 TV를 사면 TV 값을 손님에게 준다, 케익이나 소파와 원피스를 사면 그 정식 가격을 소비자가 판매자에게 지불하는 게 아니라 물건을 사는 사람에게 파는 사람이, 어이쿠, 하면서 돈까지 쥐어준다, 무슨 천국도 아니고, 재밌는 지옥도 아니고, 어디 만화에나 나와야 될 일이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실제인데요. 현실요. 믿어야죠. 받아들이세요. 도로를 주행하면 자동으로 충전되는 차, 옛날에는 말도 안 되는 얘기였겠죠. 그러나 지금은 가능한 일입니다. 노르웨이던가 캐나다? 에콰도르던가 옛날에 심장이 멋은지 12시간 후에 깨어난 사례던가 그런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죠. 관에서 1주일 누워있다 깨어난 사람도 있어요. 정지된 심장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환경을 만들어 다시 뛰게 만든 다음 그것을 이식하는 일도 있습니다. 사람의 머리 이식 수술 뉴스도 나오는 세상이죠. 나중에는 은하계의 원점과 끝점의 중간이 은하철도 기차역이 될지도 모르죠. 떠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퇴식 절차는 종료되지 않을 거에요. 그뿐입니다. 몸은 떠나보내드리지만 마음만은 영영 고이 보내드리지 않겠다는 시골 아낙네의 성화처럼 저희 입장은 그렇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참고로 지금 이사회의 중요한 위원이신 호텔 대표님은 본사에 출장가셔서 안타깝지만 이 일을 손님께 직접 설명드리지는 못한답니다. 죄송합니다. 서둘러 연락을 드리고 경사를 알려서 나중 영상 통화를 연결하도록 하겠습니다. 머무르시면서 불편하신 점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구요.」
   「승인인지 뭔지 서류상 절차가 남았고, 캐시백? 호텔 비용 정산해서 호텔 측에서 제게 돈을 지불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과정이 지연되고 있어서 퇴실이 미루어져야 한다. 요약하면 이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군요. 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원 참. 뭐지? 뭐야 이거? 계속 여기서 놀고 먹으라면 내가 못 할줄 알아? 제발 보내달라고 빌기라도 할 줄 아냐고.」
   「네?」
   「아, 아닙니다. 혼잣말이었습니다.」
   「아, 예.」
   「돈은 됐어요. 그저 악수나 합시다.」 이렇게 영화처럼 대충 마무리 할려고 했는데 차마 이 말은 성대에서 발성되어 입술로 발음되지 않는다.
   「네, 알겠습니다.」 그는 평소 자신이 말하는 성량보다 곱절로 두텁고 중후하게 딱 끊어서 대답 못 한다. 돌아이를 보면서 쟤 뭐야, 그렇듯이 힘없이 답한 말이다.
   「외출하고 올께요.」 눈빛 보내고, 잘 다녀오시라는 화답의 눈인사 그리고 그는 호텔 바깥으로 나왔다.
   혼자서 허공에 대고 나불거린다. 화는 아니지만 뭔가 이상한 감정의 상태다.
   「야 이 멍충아, 미련 곰탱아. 넌 왜 그렇게 사람이 갑갑하고 답답하냐. 뭔 헛소리를 그렇게 나불거리냐고, 지금 장난하냐고, 삿대질을 해가면서 혼쭐을 내놓던가, 아니면 네가 당당하고 큰 목소리로 논리적으로 딱딱딱 설득하면서 어제 마신 술 아직 안 깼냐고, 고백하라고, 들어오라고, 드루와, 말 해, 실토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란 말야, 통쾌하게 호통치면서 왜 그렇게 실없는 말을 그리 짓껄였냐고 혼구멍을 내줄 것이지 가만 서서 멀뚱멀뚱 뭐했어?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벌 슨거야? 늬가 초딩이야? 아, 뚜껑 열려. 이런 머저리 같은 놈!」 막 이렇게 식식거리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그 총지배인, 매니저? 그 인간이 아무래도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1마디 하면 10배로 답하고, 2마디 하면 2시간의 연설을 돌려주며, 3번째 이해할 수 없다는 의중을 내비추면 3박 4일이든 남은 인생 걸고 30년이라도 설득하고 다독이며 책을 쓸 인간이라는 것을. 붙잡히면 무척 곤혹스러운 피곤한 타입. 그러나 그 분도 딱 필요한 일에 대해서만 그러시지 매번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라면 누구보다 자기 자신의 인생, 그것이 피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일이 정말인가, 믿어야 하나, 호텔 안내처에 열쇠만 툭 던지고 도망 나올 껄 그랬나, 대체 뭔 일이지, 이런 호텔에서 사기칠 것 같지는 않은데, 설사 그렇더라도 사람 봐 가면서 해야지 내 행색이 이러한데, 하면서 상당히 난감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호텔에서 머무르고 체크 아웃, 계산 끝내고 인사, 안녕, 끝. 그렇게 떠났어야 했는데 이게 다-인데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무슨 1인 연극을 코앞에서 본 것 같다. 아까 총지배인 말을 돌이켜 보면, 퇴실은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된다, 왜냐하면 첫째 이사회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 숙박비 총금액을 돌려드려야 하는데 아직 그것이 정산되지 않았으니까, 지금 지불할 수 없는 사정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이게 뭐야?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그 무슨 장난 같은 얘기냐고, 뭔 개떡같은 소리야, 수작부려, 지금 나와 동화를 얘기하자는 것이냐며 미쳤냐고 따지거나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너무나도 진지한 그 화법에 빠지면, 아 이건 진짜구나, 오 그렇구나, 아 인생은 사랑이 다가 아니구나, 라는 착각에 휩싸여버리기 때문이다. 이때 기어이 생물학적 귀는 만화 속의 코끼리 귀보다 커지고 천마 페가수스의 그것보다 아름다운 아아, 드디어 날개가 된다. 펄럭펄럭 날아오른다. 힘차게. 지평선 너머 수평선 멀리가 보이도록. 이카루스를 떠올리며 조심히. 
   어차피 그는 간소한 짐을 가지고 나왔으니까 퇴실이고 어쩌고는 모르겠고, 해변 도로를 타고 공항에 간다. 자전거를 타고서. 해수욕장이 나오면 쉬었다가 바다를 구경하고 음료수를 사 마신다. 사진도 한두 장 찍는다. 핸드폰에 작품 구상에 대한 메모도 입력한다. 맨손 체조도 했다. 할 건 다 했다. 다시 출발. 공항에 도착한다. 그런데 기상 여건이 안 좋아서 비행기가 뜨지 않는단다. 호텔 퇴숙 절차, 아까 들은 그게 진짜였나? 그럴 리가. 다시 되돌아올 거라고 그 사람이 정확히 말했던가 돌려서 암시했던가? 두더쥐도 심어놨다고 했나? 컨버터블 타고 바다를 건널 수는 없지만 배는 가능하다. (바닷물이 많아지는 거 말고 바닷물이 쫄아서 줄어들거나 마르는 재난영화 나오면 재밌겠다) 그는 지금 여객선 터미널로 간다. 그런데 기상여건이 안 좋아 배가 뜨지 않는단다. 그럴 수 있다. 정상이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다. 오, 이런! 여기서 필름을 빨리 돌리면 그는 이 절차, 공항과 여객선 터미널에 가보는 일을 3번 반복한다. 거의 한달에 걸쳐서 다시 필름을 원위치 시키면,
   그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총지배인 얼굴을 마주치면 왠지 모르게 뜨끔할 것 같았는데 다행이 그 분은 보이지 않는다. 특별실에 올라가 짐을 풀고 침대에 대자로 드러눕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인간, 로댕이다. 아니, 로댕이 조각상 이름인가 조각가 이름인가. 아무튼 여기서 잠깐, 그가 묵는 방은 2층에 있고, 호실은 숫자가 아니라 알파벳 J다. 쌍 J? 어쨌든 알 게 뭐야. 뭔가 시무룩하고 덤덤하다.
   하루는 금새 지났다. 그냥 이대로 눌러 앉아? 이런 생각 안 해 본 게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건 입버릇처럼이랄지 사람들 상호간에 약속한 듯이 공통적으로 그리고 의무적으로 말하고 듣고 바래야 하는 꿈 같은 생활이지만 이런 일이 진짜 닥친다면, 당신께 벌어진다면, 이건 사람들이 많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 남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았으니까 슬쩍 예상해 보자면 그럴 것이다. 왜 그럴까? 잘 해야, 복권 당첨되면 그 다음에, 돈이 좀 모이면 그땐 어떻게, 나이 들어서 그나마 여건이 된다면 나중에는 머머할 것이다, 대개는 이 정도다. 수치로 따졌을 때 그에게 닥친 지금의 실제 상황과 보통 사람들의 공상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큰 차이를 보인다. 오히려 전자가 더 알뜰할 것 같지만 또 따져보면 그 생활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금전이 펑펑 샐 만큼 그 층위는 어딘가로 날아가버릴 수 있다. 때문에 어느 만큼 나이가 들면 더도 필요없고 얼마면 돼, 라면서 실현 가능한 수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상상의 범주를 좁히는데, 그걸 거꾸로 뒤집어 본다면 액면으로 제한하는 숫자의 개념이 아니라 작은 차이점에 대한 조명을 다른 데 비추어야 한다. 외부화, 편의 생활, 아웃소싱 그런 것. 그게 아니라면 돈 때문이 아니라, 뭐랄까, 영화같은 삶과 주인공 같은 인생을 일반인이 받아들이기에는 쉽게 말해 나이나 가족, 자기가 살아온 여정과 재능등 그런 인간의 굴레 때문에라도 생각하기 귀찮아진다고 할까, 동화와 판타지로 되돌아 갈 수도 없다, 뭔가 어중간 하다, 이게 더 알맞는 대답일 수 있다. 아니면, 지구를 떠나거라?
   어떤 날, 즉 이렇게 머무른지 2일째 되던 날 또 총지배인을 만났다. 그가 말한다.
   「안내 말씀 드리자면 호텔 내 모든 이용료는 기존 금액에 합산되지 않습니다. 호텔측에서 정산해 드릴 금액은 객실과 기본 서비스 금액만 해당되고, 다른 카페나 수영장 같은 서비스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대단히 죄송스럽지만 계산은 계산이니까요. 다만 이용하시는 데는 모두 지장없이 그 횟수와 사용에 대해서는 제한이 없다는 걸 알려드립니다. 혹시 불편하신 점이나 궁금하신 의문점이 있다면 언제라도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네, 그러죠. 그런데 이건 뭐랄까 꼭 맥주 공장 견학가서 맥주를 무제한 마시라거나, 시골 축제나 운동 대회에 가서 그 지역 생산 토속 과실주를 무한정 먹는 혜택과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군요. 그 보다는 훨씬 반가운 소식인 건 분명합니다만.」 딱히 응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인지 총지배인은 한쪽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리면서 웃음을 띄우고 인사 후에 유유히 사라진다. 의뭉스러운 사람.
   손님 J는 호텔 생활 1주일이 되던 무렵 지배인과의 대화를 통해 당신 연봉은 얼마냐,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지 않고, 내 재산은 얼마다, 라고 밝히지는 않으면서 에둘러 내 처지가 조금 어떻다, 어서 돌아가 생업에 대한 걱정을 해야 하는데, 글이 잘 써져서 고료 얼마짜리 환상문학상에 당첨되야 할 텐데, 같은 까다롭고 어려운 얘기를 질끈 마음 먹고 까지껏 한-번, 1년에 딱 1번 내리는 첫눈처럼 흘려나 보자 라면서 말했드니 총지배인이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해주었다. 객실 J에는 TV 옆에 갑 티슈 상자가 있다. 그 상자를 뒤집고 종이 마개를 따면 또 다른 화장지가 나올 것이다. 총지배인은 그럴 것이다, 라는 왠 이상한 말을 하였다. 서로 딴 맘 품고 있으면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상한 선문답이 되어버렸지만 객실에 가서 확인해 봐도 손해볼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방에 가서 확인해 보니 이럴 수가, 아니나 다를까 그 티슈는 종이 화장지처럼 고액권 지폐를 1장씩 뽑아 쓸 수 있게 된 발명품? 특수 장비였다. 게다가 객실을 청소할 때 미리미리 바닥나면 재충전도 된다고 한다. 그걸 청소할 때마다 매번 교체하고, 마구잡이로 써서 청소 안 할 때도 생떼를 부려 티슈를 바꿔달라는 손님은 애시당초 특실에 받지 않을 것이니 그러지만 않으면 된다고 한다. 이건... 좋은 일이다. 길운!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이랬다. 보통 홈그라운드가 아니래도 연락해서 술 한잔 할 수 있는 친구는 외지에 있게 마련이다. 급하게라도 술친구를 사귈 수도 있는 일이고, 실패하면 홀로 독배를 들 수도 있다. 그도 이 섬에 사는 옛 친구에게 연락해서 약속을 잡고, 만나고, 그래서 기분 좋았는데 친구가 만남의 자리에 새로 사귄 여자친구와 같이 나와서 셋이서 데이트? 그런 묘한 놀러가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미리 서로 좋은 선에서 헤어지게 된 거다. 아무 일도 아닌 드라마나 소설에 나오면 안될 것 같은 일상이지만 이건 뭐랄까, 꼭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보면 그렇듯이, 마치 청춘 연애담처럼, 뭔가 있을 듯 하다가 멈추고, 연정의 불이 붙을 듯한 조짐이 보일려다 끝나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오겠지, 살아 보면 뭔가 있겠지, 10년 20년 후에 너와 나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상상만 하다가, 그 다음에 딱 마침 등장하는 신인은 정작 미스터 실망? 그런 것과 비슷하다. 그랬다. 지금 그렇다. 색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 같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다. 원래 사람 사는 게 그런 것이다. 지금은 별 거 없지만, 앞날은 누구도 모른 것. 그럼 미래에도 그렇다는 말인가? 남들도? 그래 그거야. 삶의 비밀은 바로 헛된 기대라고. 막 부족한 데로 갖다 붙이면 9번 내내 그냥 이상하고(이상하기만 해!) 10번째는 신기하게 이상해, 느낌이 막 변해 계속 바뀌면서 그게 뭔지 모르겠어. 다 알지만 모른 척 넘어가기, 부딪혀 보기, 뻔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기,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기, 못해도 본전이고 타율왕 한 명과 홈런왕 한 명 빼고는 나머지는 평균이야. 그렇다니까. 세상은 1등만 기억한다는 그런 말일랑은 하지 말기.
   언제쯤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가는 곳이면 이상하게 인적이 끊기거나 사람들이 흩어져서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뭔가 관찰자 시점과 추리 감각을 끌어올려주는 동인과도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령, 어떤 날 관광을 마치고 저녁에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올라가서 바텐더와 독대를 하며 마티니를 마시려는데, 다른 손님들이 홍해가 갈라지듯이 슥 인파가 빠져나가거나, 해수욕장 모래밭을 거닐면 배구하거나 놀거나 선탠하는 사람들이 모두 스르륵 멀찍이 가버린다. 전부 다는 아니다. 남았던 사람 가운데 어느 연인이 있다. 나 잡아봐라 하면서 앞서 뛰어가는 남자와 뒤 따라가는 여자가 있다. 뛰어가던 남자가 갑자기 멈춰서 제자리 폴짝 뛰기를 하면 쫓아가던 여자는 얼굴이 남자의 엉덩이에 쾅, 하며 부딪힌다. 그외 파도타던 서퍼들 모두가 또 홍해가 갈라지듯이 쏴악 빠져나가고, 무슨 관광지나 유원지에서도 이따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인기 영화배우나 연예인이나 예술가가 나타나면 보통은 웅성웅성, 무관심, 다른 데 가지 여긴 왜 왔데, 난 쟤 별로 그런데 알고 나니 좋아졌어, 반갑다, 사인해달라, 사진 한 번 같이 찍자, 멋져요, 먼발치서 구경, 사랑해요, 에잇 실물로 보니 별로네, 누구야 누구야 누군데 이렇게 난리야 하면서 유명인의 뒤에서 쑥 다가오더니 유명인의 얼굴을 보면서 "에잇~ 난 또 뭐라고.", 싸이클 선수가 경기 끝나고 성적이 안 좋아서 그런지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Don't Touch My Body."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통은 유명인 주위에 인파가 몰리게 된다. 전성기를 지났더라도 또 그에 맞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리학 법칙에도 이걸 가르키는 용어가 있다. 그런데 이 인간에게 닥친, 그가 체감한 일은 그것과 정반대되는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삶의 공백, 망상? 풍상, 불길도 아니고, 어딘 한번 보자, 이건 어떤 감정과 비슷하냐 하면 빼어나게 예쁜 아가씨가 자기가 남자들이 마음에 안 들면서 틈만 나면, 잊혀질만 하면 "나 또 차였어!" 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누가 뭐래도, 왜 비슷하고, 왜 그를 모두들 피하는지, 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 재미난 일 없나, 하면서 두리번 거리고, 오늘은 낚시를 할까 아니야 독쇼(개 대회)에 가보는 게 좋겠어. 그보다 먼저 지리적으로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는 고지대와 전망대를 찾아가 봐야지, 아니야, 운동도 규칙적으로 해야 하니까 등산을 할까? 새로운 친구를 사귈까? 여자로? NC? 이와 같은 잡념의 전단계로 우선 왜 그렇게 우연치고는 뭔지 모르게 짜고 움직이는 듯한 낌새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 궁금중을 해소하기 위하여 섬 외곽의 주변부가 아니라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내, 축구장, 젊은이들의 열기로 들썩거리는 대학가와 카페가 많은 곳과 소란스럽고 불빛도 밝은 술집이 많은 동네를 찾아다녔다. 이동수단은 군내버스와 시내버스, 자전거를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총지배인이 흔쾌히 건네준 전기차, 총지배인이 구입한 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전기차를 이용했다. 그리고 처음 돌아다닐 때보다 두번, 세번 돌아다니니 목적이 무엇이고,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떻게 성과를 거둘 것인가, 그것을 생각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쓰잘데기 없는 왜, 어떻게, 무엇을, 그걸 점점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도 완전히 까먹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작정 영화 보고, 미술관에 들렸다가 서점과 지역 축제를 보러 싸돌아다니는 것 보다는 유명인이 온다는 지점을 찾아다니게 된다. 동서남북 멀리 어딘가에서 건너온 작가와 새 영화를 홍보하러온 배우, 헤비메탈 공연장 같은 장소를 돌아다녔으나 시장 경제가 휘청일 정도로 여기서도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흩어지는 이상한 군중 동요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보니 깨달았다. 그렇게 흩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왜 그럴까 하는 궁금증이나 호기심보다는 뭔지 모를 막연한 쾌감을 느꼈다는 것을. 다른 무언가로 대체하기 어려운 꽤 불가사의한 매력이 분명 어디쯤에 굳건히 자리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제나 항상 혼자 놀아, 친구가 없네,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다, 그것과는 다른 왠지 모를 초자연적인 기운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이걸 지칭하는 전문용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어떤 때는 발생하고 어떤 때는 발생하지 않는가,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하고 미해결 문제로 남게 되었다. 그렇게 지적 욕구 하나를 그 정도까지만 해소하고 나니 그럼 이제 무얼 할까, 그것을 고민할 때가 된 것이다. 본격적으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나는 이곳에 있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가, 소인국 공원에 놀러갔다가 그는 총지배인의 추천으로 제안 받은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근처 해변으로 이동한다. 해변쪽에 위치한 언덕이나 봉우리쯤 되는 야트막하면서 좀 높은 호텔 옆과 뒤 산자락의 중봉과 해변 바다 건너편에 있는 가까운 섬, 그곳의 또 다른 언덕이자 봉우리 정상에 위치한 휴게소를 연결하는 케이블카를 타기로 어느 날 마음을 정한 것이다. 그곳에 가서 보니 그런데 이상하게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기상학적으로 이유가 있겠지만 A와 B 봉우리 모두 도넛 모양으로 구름이 형성되어 있다. A에서 B로 가는 케이블카가 무슨 알프스의 그것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B가 마의 산도 아니다. A는 역시 부다페스트 호텔도 아니다. 그러나 뭔가 분위기가 닮았다. 케이블카 밑으로는 대교도 있다. 바다를 대교로 건널 것이냐 케이블카를 타고 건널 것이냐, 그 중에서 후자를 권유받았고 올때는 아마도 전자를 이용할 것이다. 섬에 와서 만난 할아버지와 물물교환한 카약을 할아버지가 싫증나서 택배로 호텔 특별실에 보내주었지만 지금은 그건 호텔 앞에서만 타고 노닥거린다.
   호텔에서 그곳까지는 분홍색 컨버터블을 타고 이동했다. 이 차는 호텔의 단골 손님이 총지배인에게 한사코 갑자기 문득 자기는 이런 색깔의 지붕없는 차를 지금 타고 싶다고 하여 총지배인은 지인과 수완을 총동원하여 즉시 그 차를 단골 손님에게 대령하여 지금은 전기차 대신 자신이 간혹 이용하니, 그후로 그에게 대신 사용하라고 위임한 것이다. 호텔 지배인 생활을 오래하면 이런 일이 심심치 않게 있다고 한다. 자기는 꼭 신선한 어떤 요리가 먹고 싶으니 어떤 경력의 요리사를 바로 초빙할 수 없냐, 어 그러냐, 그럼 그건 곧바로는 어렵지만 대신 육지에서 최고급 음식을 헬기로 반나절만에 공수하겠다, 그렇게 손님은 감동하고 호텔의 꾸준한 팬이 되었으며, 총지배인도 보람을 느끼고, 고객을 만족시킨다는 예술이 아닌 일을 할 때에만 경험할 수 있는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구나 라는 바로 그 느낌을 겪곤 한다는 것이다. 호텔에서 피둥피둥 놀고만 있는 그 인간만 나중 멋지게, 소설 쓰기가 내 인생을 바꿨다, 블로그가 내 삶을 바꿨다, 라면서 팔짜 좋은 소리를 하고, 부푼 꿈을 안고 파랑새가 지저귀는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총지배인이라는 직업인에게는 현재 묵묵히 현실의 벽돌을 신실하게 쌓아가면서 누군가가 꿈꾸며 상상을 초월하는 미래를, 그것을, 시공을 뛰어넘어 현재로 가져와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신에게는 쩔쩔매는 앞날이 당신의 전-여자친구(전-남자친구, 전-부인, 전-남편)에게는 점잔하게 음악을 듣고, 창밖을 보며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지금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괜히 정말, 아~ 하면서 기분 이상해진다. 따라서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표를 끊는 J가 떠나려는 공간으로 앵글을 돌린다.
   그는 표를 끊고 케이블카를 탄다. 케이블카의 이름은 <내일로 가는 마차>다. 케이블카는 출발 대기 시간이다. 사람들이 탄다. 현지인도 있고 관광객도 있고, 학생도 있고 백수도 있다. 친구들로 보이는 이제 막 화장술을 익혀나가는 데서 엄청난 즐거움을 깨닫는 것 같은 여중생쯤으로 보이는 애들도 탄다. 애? 어른? 뭐가 애고 뭐가 어른인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는 케이블카 유리창 너머로 먼 바다를 쳐다본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꼭 속으로 딴생각을 하면서 누가 물어보면 다음 영화 구상을 하고 있었어요, 라고 대답할 듯한 그런 모습이다. 그가 잠시 보기에 농부와 여대생과 포도주 감별사, 학자, 유치원 선생님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케이블카에 승선한 줄 알았는데 한번 빙 둘어보니 싱글벙글 웃으면서 자기들끼리 장난치고 종알거리는 하루를 48시간처럼 즐기면서 사는 것 같은 친구들 뿐이 없었다. 하루는 24시간이지만 모두에게나 똑같은 24시간은 아니다. 괜찮은 거 보면 다 따라하고 싶고, 한순간도 마음이 진득히 머무르지 못하며, 줄곧 확확 바뀌니까 누가 뭐하면 다 멋져보이는 친구들. 춤, 나도. 노래, 나도. 사진, 나도. 글? 나도. 명대사와 내면연기,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왜 그런 것일까? <나도>와 <나는-나는-내가>는 뭐가 다른가? 뭐가 뭘 감싸냐, 일 수도 있겠다. 사람은 둘 다에 해당되니까. 그러나 잘 모르겠다. 그건 누구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러다 가끔 뭘해도 재미없다고 하니까. 궤변! 그러나 우껴. 그렇게 케이블카에는 그 친구들과 아저씨 한 명만 있다. 유달리 그는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면서 피식 냉소를 흘리며 다시 창문을 바라다 본다. 머머 한다, 머머 한다, 꼭 '머머한다'체를 보아하니 이건 희곡에서 대화 전에 설명하는 그런 느낌이다. 이제 대화가 나와야 하는데 대화가 무슨 개 이름도 아니고, 사건이라도 터져야 하는데 사건이 무슨 풍선껌도 아니고, 정말 괜히 썩은 미소가 나올 듯한 논리이자 상황 전개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가 그렇게 허당 폼을 잡고 바다를 하염없이 시인처럼 물끄러미 쳐다볼 때, 케이블카에, 아저씨와 소녀들,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 작품번호 810번 죽음과 소녀? 아저씨는 저승사자? 아니 불행한 건 안 돼, 해피엔딩이 좋아, 그러다 은연중 그녀들 가운데 가장 발랄하고 쾌활할 것 같은 친구 하나가 아저씨 옆자리에 와서 잠깐 앉는다. 그러자 다른 애들이 모두 속닥속닥 하면서 엄청 웃는다. 그 즉시 주력이 좋았던 그 소녀는 다시 자기들 무리로 흡수해 들어간다. 아직 케이블카는 출발하지 않는다. 잠깐 쉬었다가 이번에는 다른 소녀, 공주풍으로 옷을 입고 머리에 티아라를 썼으며 하얀 면사포에 하얀 면장갑을 낀 다른 친구가 다시 아저씨 옆자리에 앉고─웃고─떠난다. 주력이나 의지? 결단? 상상력? 아, 주력과 실행력, 둘 가운데 하나가 그들 가운데 2번째로 좋을 것 같은 친구가 처음과 똑같은 방식으로 다녀간 것이다. 이쯤되면 그도 모른채만 할 수는 없다. 그 자신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아니지만 미학을, 예술을, 철학을, 연극을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자신이 그 친구들에게 웃음을 줄 수만 있다면야 기꺼이 기회의 끈을 잡고 애처로운 눈빛이라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크게 결례를 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썩 지나치지 않는 정도로 괜찮은 반응일 것 같다. 오, 그런데 그가 정말 그렇게 눈빛을 보낸다. 그러면서 그들은, 아저씨와 소녀들은 자연스럽게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는 말만 대화만 시작하면 되는데, 데이트만 한 번 하면 되는데, 먼저 연락하고 못 미더운 척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그 작은 고개를 넘지 못하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얼마나 많은가. 뭐 괜히 분위기 잡고 있어 보일려고 한 얘기는 아니다만 대화를 잘 살리지 못하는 소설가, 더럽게 재미없는 영화만 찍어대는 영화감독, 돈이 주체할 수 없이 많아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 시인, 뭔가 비슷한 구석을 애써 찾을려면 꼬투리는 잡힐 것 같은 얘기다. 자, 그들은 대화를 시작한다.
   「아저씨 혼자오셨어요?」
   「어어, 이 케이블카 혼자 타면 반생을 홀로 보내게 된다는 불길한 전설이 있는데, 아저씨 큰일 났다!」
   「아저씨 뭐하는 사람이에요? 광고쟁이? 석공? 어촌 계장? 영화관 매표소 직원? 국립공원 수렵 관리원?」
   「기집애, 그게 뭐니? 넌 아저씨 어딜 보고 그렇게 평범한 추측을 하는 거야? 상상력 하고는. 딱 보면 답 나오잖아. 내가 봤을 때 아저씨는 작곡가야. 그런데 대필 작곡가. 뭔가 사정이 있어서 생계와 노후용 재산은 대중곡을 써서 할당하고, 어떤 낭만적인 대교향시를 쓰실 것 같아. 생전엔 엄청 쪼들리고 더럽게 가난하게 살다가 사후에 빛 제대로 볼 것 같은. 어, 아닌가? 아저씨는, 과학자 같아. 그냥 그런 것 같아.」
   「그래? 재밌는 예측인데? 꽤 설득력 있어. 뭔가 믿게 만드는 매력이 있단 말야.」
   「아저씨! 여기 사람 아니죠? 어디서 오셨어요? 미래? 과거? 막 이래.」
   「그런데 말이야. 이 아저씨 상당히 유별나. 딱 스캔하니까 어, 신발 테스토니 운동화야. 스카프는 20세기풍에 안경은 나사가 없고 티타늄 소재야. 청바지, 엄청 낡었어. 구멍나고 헤졌어. 새치도 조금 나고 한 30대 중반, 후반? 하지만 50대의 중후함과 스무살 청년미까지 겸비했어. 미스테리야. 난해해. 저기 섬에는 뭐하러 가시지?」
   「우와 정말 테스토니네. 그런데 36개월 할부에 납입은 2회째야. 음 있잖아. <왜 사지도 않을 꺼면서 구경만 해> 어쩌면 이거가 <구경만 하고 안 사>보다 슬픈 거 같아. 무턱대고 구경만 할려다가, 구경만 하다 빠져들고, 빠졌으니 사고 싶고, 그러다 지름신이 내려오시고, 나도 모르게 계산하고, 그 다음 그 다음, 툭하다 반복이 이어지면 인생이 꼬일 수도 있으니까. 헤어나오지 못할 늪에 빠져버릴지도 몰라. 그래서 처음부터 아름다운 것에는 눈길을 주면 안 돼. 그런데 상품이야 싫증나면 바꾸면 되고 부담되면 애초에 구경만 하고 안 사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자나. 남정네가 마음에 안 들어서 자꾸자꾸 싫어져서 바꾸고 싶지만 의리? 미운 정 고운 정? 자녀와 가족애... 차마 그러지는 못해, 여편네를 바꿀 수는 없고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소리칠 수도 없어 '이 여인을 데리고 살꺼냐고' 또는 친구에게 "늬가 데리고 살래?" (오, 땡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나 만날 수 없어, 고귀하게 날 가꾸고 꾸미면서 바르게 커왔는데 어떻게 쉽사리 어느 층위에 날 이양시켜, 그런 소 도둑놈 같은 놈한테? 이 몸매를 유지할려고 내가 얼마나 온갖 배고픔과 유혹을 물리치며 눈물겨운 노력을 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1주일에 6일 7일 땀 흠뻑흘리면서 운동하는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일단 사귀고 나중 실망하라고? 그러면 남자 만나기 힘들어. 사람을 정말 잘 알려면 극단적으로 보자면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단 말야. 만에 하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도저히 당신이란 사람을 모르겠어요, 이럴 수 있단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좋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잘 어울리는 그런 환상같은 도플갱어 연인은 거의 없을 꺼야. 비슷하고 잘 맞으면 좋겠지만 최상을 찾을려고만 하거나 기다리기만 하다 보면 사람 사귀기 힘들꺼야. 그래도 다가옴과 시작을 기다리는 여자의 운명이란 어쩔 수 없어. 그니까 유혹의 기술이 발달하지. 하지만 오히려 나이들수록 더 사람을 보는 기준선이 까다로워지는 것도 다 나름 장점이 있을 꺼야. 늦게 만나면 아무래도 나중 끝까지 함께하지도 못할 꺼면서, 책임지지 못할 꺼면서 왜 날 택했냐는 애매한 면책성? 순진한? 순수한 발언은 덜 하지 않을까. 아무튼 너무 깊이 생각하면 안 돼.」
   얘들은 꼭 사춘기 소녀가 아닌 것 같다. 그 나이에 이렇게 말하는 친구들이 있나? 있으면 있을 테고, 없으면 이 긴 얘기 한마디로 정리할 사람 손들어 보라고 외쳐볼까. 쓸데 없는 짓이다. 당연히 이런 얘기 하겠지, 왜 안 하겠어. 꽤 수준 높은 말도 아니잖아. 그냥 흔한 얘기들, 그거야. 이 정도는 노래 가사 밖에 안 돼. 이 정도는? 가사, 밖에? 너가(늬가) 아주(아조) 욕을 얻어 먹고 싶어 발악을 하는구나. 환장했어. 물 올랐어. 바싹 독이 오른건가?! 따끔한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래나.
   「아저씨 여자친구 없죠? 없을 꺼야. 보통 이런 스타일 아저씨들은 작품 구상 하느라 바빠서 여자친구 잘 안 만들어. 깊이 사귀지를 안는다고. 숨겨진, 만나서는 안 될, 지금은 볼 수 없는 연인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니까 이런 꽈는 "남자는 절대 집에 있으면 안 돼. 무조건 밖에 나가야지. 남자는 밖으로 돌아야 돼." 라면서 나는, 남자는, 우리는, 그런 말 자주 쓰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
   「서늘하게 젖은 눈매, 뭔가 아쉬워, 너무 젖었어. 옷 너머로 음음 순수함 속의 관능미? 부족해. 뭇 여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타입도... 아닌 것 같아. 오히려 어떤 염문이 느껴지는데. 이 남자는 우리를 반드시 우껴줄 수 있는 남자야. 그건 분명해. 뭔가 있어. 확실해.」
   「얘 넌 애가 왜 그렇게 촌스럽니? 고상하지 못하게 말야. 아저씨가 그렇게 막-나가는 사람인 거 같아? 아저씨가 무슨 에로영화 촬영스텝이야? 감독은 되야지. 촬영스텝이 어때서? 촬영스텝이 이 얘기 들으면 서운해하겠다. 우리 아저씨가 무슨 욕망의 화신인 줄 알아? 한 여자에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그러니까 느닷없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명언이 생각나잖아. 세월이 인내심을 길러준다는 사실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살 날이 줄어들수록 더 오래 기다릴 수 있게 되다니. 이 아저씨는 화려한 사생활이나 밑도 끝도 없는 스캔들, 희대의 바람둥이, 난삽한 연애,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 느낌 온다니까.」
   「우리······ 아저씨?」
   「아저씨? 친구 없죠? 어딘가 모르게 외로움이 느껴지네. 막 그런 느낌이 확 다가와. 날 덮쳐. 왜 친구가 없어요? 혼자인 게 좋은가? 자신이 일부러 속세를 멀리하는 그런 건가?」
   「맞아. 아빠 아니 오빠, 아 이상하다. 아저씨 친구 없는 게 분명해. (앞뒤 안 보고 들었다 놨다) 남자 기준으로는 물론 친구 없지 않겠지. 그러나 여자들 기준으로 보면 친구, 하나도, 없어. 절대. 맞아. 그래. 완전. 정말. 진짜로. 확실해. 틀릴 수가 없어. 빼도 박도 못해. 의외로 그런 사람들 많아. 더군다나 여자라면... 음. 그래프로 다 그려져. 우리는······ 다른 건 모르겠고 미래를 속단하지 말며, 지금을 소중히 여기자. 현재가 흐리멍텅하면 예언, 안 먹혀. 미래, 까지 생각하지 말고 지금 어떻게 살고, 누구를 만나며, 무엇을 하는가, 여기까지만.」
   「아저씨는 말이야, 한 사람과 오래 갈 스타일인데 느낌이 이상한 게, 여자에게 꽃다발을 한 번도 선물해주지 않았을 꺼 같아. 못했거나. 그런데 꽃집에서 일은 해 봤어. 그러다 꽤 괜찮은 단골 손님이나 뜨내기를 눈여겨만 봤을 꺼야. 그러다 끝나. 막 이래.」
   「혹시 꽃 알레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만 가족끼리 또는 누군가 집에서 외롭게 서 있는 화병에 꽃을 채워주기 위해 정기적으로 꽃을 사러 오는 단골 손님이 있었을 꺼야. 퇴근 후 집에 가면서 꽃을 사들고 가는 남자라면... 아! 우리 아빠는 꽃 대신에 술을 사오셔.」
   딱히 답을 하지 않아도 밉상으로 찍히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깨고 소녀 중 누군가가 약 2분쯤 플루트를 분다. 어느새 케이블카는 운행을 시작했고, A와 B의 중간 어딘가에 떠 있다. 공중에. 하늘에. 구름과 구름 사이에. 소녀가 연주하는 음악은 사베리오 메르카단테의 플루트 협주곡 E단조 작품번호 57번 3악장이다. 그런데 뭐 그런 옷이 다 있지? 유행인가? 뭐 이런 게? 소녀들 가운데 누군가는 어깨 위에 파랑새가 앉아있다. 진짜 같다. 정말.
   「에에, 으으, 그만 할래. 지겨워. 재미없어. 플루트 그만두고 클라리넷 시작할래. 그건, 이유가 다 있지. 히히.」
   「그럼 그렇지. 오래간다 했어. 그래도 플룻으로 오늘 로맨스를 이뤘어. 됐어. 괜찮아.」
   「얘들아, 아저씨 왠지 사연이 있을 것 같지 않니? 차마 말로는 다 풀어낼 수 없는 그런 사연 말야.」
   「이 아저씨 뭔가 재미있을 것 같아. 반전, 많을 것 같아. 알면 알수록 신기한, 까도 까도 계속 뭔가가 나올 것 같은 신비함,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 아저씨가 가난하다면 뭐 어쩔 수 없고, 그래도 낭만을 알아, 뭘 좀 안단 말야. 무엇보다 그는, 여자를, 알아. 그럴 꺼 같아.」
   「내 말이~.」
   「그래. 얘 혹시?」
   「너도?」
   「너도 그 생각했어?」
   「너도, 너도? 그럴까? 그래?」 ······ 「아저씨! 우리 모임 들어오실래요? 우리는 막 기자회견 할려고 난리치는 외계에서 온 사람들, 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불량 청소년도 아니며, 마약 이런 거 안 친해요. 무분별한 연애 우리 얘기 아니죠. 나름 공부든 운동이든 뭐든 열심히 하고, 아직 이런 말 하긴 이르지만, 우린, 인생을 알죠. 사람을 보면, 딱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여요. 아저씨를 보아하니 아저씨의 벌거벗은 몸이 상상되지는 않지만 (웃음) 아저씨의 미래가 보일락 말락 하네요. 우린요, 음, 우리 모임은요, 인파에 눕는 사람들이에요. 들어보셨어요? 인파에 눕는 사람들, 일명 인파 서퍼. 당연히 비밀모임이죠. 실패 동영상, 즉석 비디오, 놀라운 영상, 재미난 도전, 이런 거 찍는 애들이랑도 친하죠. 그렇지만 우린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 많이 안 해요. 우린 십대잖아요. 그 가운데서도 드문 종족이구요. 쟤 봐봐요. 쟤 귀. 귀 위쪽이 뾰족한 게 꼭 요정같죠?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요정 말예요. 어때요? 인파 위에서 고무보트 타 보고 싶지 않으세요? 콘서트장에서 언제까지 뒷좌석에서 맥주만 홀짝거리고 배 내밀고 핸드폰 쪼물딱 거리기만 하실 꺼에요? 쪼물딱? 스탠딩 인파 제일 앞에서 누워 보면, 클럽 분위기에 클럽 음악에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 그들 위로 돌아 서서 팔 벌리고 한 번 누워 보면 이 세상이 달라져 보일 껄요? 한 번도 그래보신 적 없죠? 그거 아무나 못해요. 그럼요. 저희가 아저씨를 특별히 특별회원으로 받아들일께요. 회칙은 차차 정하구요. 뭐 정하지 말죠. 그딴 거 없어도 되요. 어때요? 생각있어요? 이건 첫째, 돈 주고 할 수 없는 경험이고 둘째, 극히 희소한 일이라서 첫째 때문에 둘째인지, 둘째가 첫째에 선행하는지 아니면 때때로 다른건지 제각기 다르겠지만 그 둘의 합집합? 교집합인 건 분명해요.」
   「아저씨!」, 「오빠!」, 「다시 아저씨!」
   「아저씨, 사랑, 해봤어요?」
   「사랑이... 있을까?」
   「사랑이 뭔지 아세요?」
   「우린 몰라요.」 키득키득.
   「육체적 사랑?」 들썩들썩.
   「행복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야, 여기 철학자 나셨네.」
   「우리, 환상을 찾으러 떠나볼까?」
   「아, 회전목마 타고 싶어라.」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그런데 있잖아. 아저씨 제인이랑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니?」
   「어, 맞어, 정말. 진짜!」
   「와, 그러겠다. 오.」
   「오우, 대박!」여기서 소리내어지지 않은 한 마디가 있었다. 「아저씨... 그분을 아세요?」 그분? 그분이 누구야?
   이런 모습은 꼭 비슷한 또는 정반대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남자 친구들 7명? 여럿이 술집에 갔어. 마담? 괜찮아. 많이 괜찮아. 이 술집 누가 들어오자고 했어, 그 녀석 안아주겠어. 아니다. 마담을 재빨리 덥썩 껴안아버리겠어. 뺨 맞아도 좋아. 다른 녀석들이 선수치면 어떡해. 이런 하이에나 같은 놈들. 딱 거기서 마담에게 물어보는 거지. 이 가운데 제일 잘 생긴 사람은 누구냐? 우리 중에 누가 제일 돈이 많을 것 같냐? 그외 누가 더 뭐, 누가 더 뭐란 말들. 대화 요점이 아니라 대화 당사자가 바껴도, 남자 대 남자라거나 여자들이라거나 이렇게, 모든 예의와 가식 사이 어딘가에는 있을 사람에 대한 말들. 너무 포괄적이다. 멈춰야 한다. 그렇게 그와 같은 물음이 있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그 다음 마음에 안 드는 답변, 신경쓰이는 되물음, 결코 결코 결코 동의하지 못하겠소, 화나는 호칭, 괴성과 야유, 고함, 호통, 세계 3대 후라이팬, 불이? 물이 끓는 주전자, 결코 사소한 일희일비라 부를 수 없다. 어이없어, 얼척없단 말야. 버럭, 맹력한 분노, 목청껏 소리지르기, 울화통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하나는 한편으론 침착하며 겸연쩍은 조증 한다발을 꽃 피울 것이다. 안개꽃으로. 이유는 묻지마세요. 왜 그런지, 더 이상의 동기는 필요치 않아요. 막 분위기 달아오르고 갑자기 재밌어진다. 완전 막 흥분돼. 흥미진진해지지. 곧바로 말이다. 남자들 이렇게 발동 걸리면 완전 (개)웃겨! 물론이다. 뭐가 물론이냐 하면, 이것은 그들이 얼마만큼 친한가, 그 우정이 얼마나 지고지순하냐, 그것을 판별하고 측정할 수 있는 더없이 엄격한 지표가 된다는 것. 다시 말하지만 그만한 기막힌 리트머스 시험지는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앞서 케이블카의 대화와 술집이나 술집 바깥 어딘가에서의 남자 다수에 여자 한둘의 정황, 비교될 것이다.
   그런데 남자들이 이런 경우에 처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물론 모두 꼭 이처럼 똑같이 반응하지는 않는다. 반대 의견을 완곡하게 제시하거나 다른 자리에서 부드럽게 말하거나 아니면 그걸 (타인이 읽으라고) 블로그에 쓸 수도 있다. 문학과 노래와 만화와 드라마와 연극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즉 어딘가에서, 어떻게든,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표현은 하게 된다. 비밀은 있다, 세상에 비밀이 어딨어, 그런 간편한(애잔한) 말은 하지 않겠다. 비밀은 그냥 비밀일 뿐이다. 그건 진짜 비밀이 아니라 희미한 안개 같은 걸 가리키는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이며 말이고 그냥 표현 수단의 하나다. 나이 먹고 모든 게 귀찮아지고, 세상에 닳아져서 뭘 해도 재미없기 때문에 더 이상 신경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 소멸하지 않은 뭔가는 아직 표출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속속들이 훤히 들여다 볼 수 있겠냐마는 혹 그렇다면 그건, 그건 말이다, 그들이 안 친한 거다! 뭐? 친한데, 많이 친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그건 남자가 아니라 여자, 아닐까? 이런 때 거짓말 탐지기가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은 육지에 살고, 새는 하늘에, 돌고래는 바다에 산다. 남자와 여자는 과장하자면 그만큼 다른 존재다. 어느 한쪽을 두둔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정서가 절반쯤 달라. 문화도 약간은 조금 그렇다. 그러니까 세상사가 신기하지. 세상에는 이미 멋진 말들이 너무 많으니까 여기까지만.
   나중 그가 정말 소녀들과 함께 인파에 드러누웠는지, 그랬다면 그걸로 끝인지, 또 다른 섬에서의 모험은 없었는지 그리고 A섬에서 B섬으로 갔다가 다시 A섬으로 돌아왔는지, 새로운 C로 튀었는지 그건 공개할 수 없다. 분량은 있지만 일단 비공개다. 너무 많이 밝히면 독자와 작가, 양측 모두 낮 뜨거워져 탈 날 수 있다. 탈 난다. 탈랄라! 그러나 그가 묵었던 호텔의 경영자는 일선에 복귀해서 총지배인과 어떤 밀담을 나눴을지는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다. 어디서 저런 꺼벙한 촌닭 코흘리개 얼간이 똥싸배기 같은 놈을 특별실에 들여놨냐며 화자와 청자 게다가 엿듣는 사람까지 모두 화들짝거리게 만드는 험악한 험담이 된통 오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설마, 여기서? 이제 드디어 말이 필요없는 단계에 들어섰다. 그렇다. 바로, 당신은 독서의 신이다. 책읽기의 귀재, 그것이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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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56

from 소설 2015. 9. 13. 17:13

   한동안 이 친구들은 각자 개인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사느라 서로 소원하게 지냈다. 그러다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뭔가 계기가 있었다. 꼭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지만 모이거나 이상하게 모였는데 어떤 기발한 체험에 빠지거나, 그런 정해진 미래나 불확정적인 우연은 있을 수 없겠지만 무언가 새로운 일이 닥쳐온다면 그때는 공교롭게도 대체로 모여있는 일이 잦았다. 마침 이 날도 그랬다.
   닉이 파티에 초대를 받았는데 만난지도 오래되었으니 같이 가보는 게 어떠냐, 나쁠 거 없다, 그래 모일까, 해서 지금 현재 일곱 명 친구들은 리무진에 모두 같이 타고 있다. 뭐는 뭐고 어째서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며, 어떤 공통점은 왜 그렇고, 그런 이상한 얘기들 없으니까 머리도 복잡하지 않고, 한 얘기 또 했을 걱정도 없으니까 마음이 놓인다. 훨씬 낫네. 한결 좋아. 그런데 왠지 불안해. 이제 1인칭만 자연스럽게 가능하다면 딱인데, 그건 조금, 한편으로 재수없다. 그러니, 통과. 이상한 생각은 무시하고, 그러고 보니 모두 길다란 리무진을 처음 타 본다.
   「그냥 그라마에 나오는 파티 생각하면 되는 건가?」, 「파티에 초대받아 가본지도 오래 됐네.」, 「난 클럽도 안 다녀. 음악 소리가 대따 커서 귀가 멍멍한 게 한 1주일은 간다니까. 그런 데 어떻게 오래 머무르니?」, 「옷이나 구두, 얼굴 또 뭐가 있지, 잘 차려입지 않았는데 괜찮을려나?」, 「나도 초대 받긴 했는데 모임이 어떤 성격인지는 잘 모르겠어. 그냥 와인 마시고 구경 좀 하는 셈 치고 오지. 기분 전환하고 말이야. 별 일이야 있겠어?」 시작은 이랬다.
   시간은 오전, 파티치고는 꼭 회의? 비즈니스 미팅이나 조찬 약속을 떠올리게 한다. 리무진 안에서 정확히 누가 먼저 잠들고, 무슨 얘기까지 하다가 대화가 끊겼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정말 애매하게 모두들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오전 시간이니까 전날의 피로는 말끔히 날아갔으니, 일의 중요도가 높거나 집약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오전에 처리하는 게 좋지만 그건 직장인들 얘기고, 이들이 맞이한 오전은 꼭 해질녁 오후처럼 나른한 기운이 감돌았기 때문에 리무진 안에서 모두 잠에 취해버렸다. 리무진에 있던 샴페인 한두 잔 때문인가 아니면 무색, 무취, 무미, 무감의 마취 가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내뿜어져서 그랬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각자 따로따로 단꿈을 꾸고 있다. 꿈 속에서 모두 같이 행동하거나 공동 출연, 개개인 꿈의 다자적인 동기화, 시리즈를 찍을 수는 없다. 있다면 그걸 지칭하는 용어는, 해몽이다. 오 해몽이라, 어린이 시절 등교길에 오토바이 뒷좌석에서 왼발 아킬레스건이 까여본 것도 특유의 징조이자 해몽인가, 바다의 여신인 테티스의 아들이 몽중방황할 일이겠다. 또는 평론이나 연구라고 해야 할까? 평론가들을 뭐라 하는 건 아니다. 오해를 사서 좋을 게 뭐가 있나. 사전에 양해를 구하는 게 낫지. 그런 꿈의 다각적인 뒤섞임이 가능하다면 그건 최면 아니면 허구다. 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짧은 시간이지만 단꿈에 빠졌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자면 개꿈의 내용은 이와 같다. 꿈이라고 써진 정육각형 큐브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안에 피라미드가 있다. 피라미드에 문이 있다. 문을 열고 피라미드에 들어간다. 시공간이 무한 확장된다. 안개와 화려한 연기가 피라미드를 채우드니 갑자기 어딘가로 이동 중인 리무진 안에 친구들과 함께 있는 당신의 정신으로 순간 이동되어 환경이 바뀐다. 리무진이 멈춘다. 리무진의 문은 바깥으로 열리는데 그와 동시에 그 문은 복제되어 안쪽으로도 동시간에 열린다. 1개 시간에 2개의 몸과 공간, 그러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기하급수적으로 확산한다. 그래, 이건 개꿈 맞다.
   그러다가 차가 멈추고 모두 잠에서 깨어나자 어느 공원의 공터에 도착해 있다. 제복과 모자를 쓴 준수한 기사 양반이 뒷문을 열어주신다. 아깝다. 영화배우 감인데. 직업에 귀천이 어딨나, 그 일을 하시면서 남을 감동시키는데 이보다 더 고귀한 일이 대체 어딨다는 말인가. 딱 됐다. 잠시 자는 동안 얼마나 멀리까지 떠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혹시 그들이 자는 동안 그 리무진이 대형 수송기 안으로 들어가서 주차하고, 수송기가 어느 민간인 통제 구역까지 와서 그들을 내려주고, 다시 리무진이 달려서 어느 사택? 비밀 심리 연구소로 그들을 데려온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어볼 사람도 없다. 핸드폰 안테나 감도는 한 칸에서 깐닥깐닥한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리무진을 타게 된 경위가 잘 떠오르질 않는다. 하지만 모두들 함구하고 누구 하나 나서서 그 궁금함에 대해 편하게 말 한마디 꺼내 놓지 않는다. 오전 시간인데 꼭 클럽에서 밤 새고 터벅터벅 집으로 혼자 퇴근하는 기분이다. 오전인데 말이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나무가 우거지고, 대문 너머로 오래되고 커다라며 비밀스런 궁전이 있을 것 같은 어떤 거대 주택의 대문 같았다. 그런데 꼭 놀이공원 매표소...처럼도 보인다. 아니 박물관 입구일까? 그것도 아니다. 마치 군사 기밀 시설이 있는 대형 군부대의 위병소를 연상케 하는 황갈색 천, 구멍이 숭숭 살짝살짝 뚫어진 천과 그물이 뭘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싸여진 그 내용물은 비상시에만 공개하는 것인가. 몰라서 묻는다. 그럼 가르쳐 주던가. 혹시 수도사나 주술사가 제작한 기관총으로 탄환으로는 옥수수 알갱이나 팥알 같은 특수 곡물을 쓰고, 서로 영혼이 바뀐 남녀 당사자에게 그걸 연발로 다다다닥 사정없이 발사하면, 뒤바뀐 그들의 영혼이 다시 제 육신을 찾아갈 가망성이 미약하지만 조금은 농후한 그런 용도의 발사 기관이란 말인가. 또 군데군데 일정 간격으로 높은 감시 탑들도 보인다. 이 안에서 어떤 파티를 한다는 것일까, 의아하지만 우선 기다려본다. A급 현장 요원을 보면 8:2 가르마와 2:8가르마, 꽁지머리, 덥수룩한 수염등 모두 뭔가 한 역할 할 듯한 위압감을 보여준다. 조니, 케빈, 알렉스, 마크, 하워드, 닉, 제임스는 일단 쫄았다. 그 가운데 누군가 어떤 기억이 떠올랐는지 오면서 도착하기 전에 밀집된 꽃농원 군락, 대평원, 초원, 골프장, 양편으로 가로수가 엄청 크고 차는 한 대도 다니지 않는 쭉 뻗은 직선 도로 그리고 아무래도 잘못 보았겠지만 비행접시를 보았다고 한다. 비행접시 음 비행접시! V자로 날아가는 철새일 수도 있다. 참고로 파티에는 여권을 지참하고 와야 한다고 해서 지금 그것 때문에 좀 까다롭고 꼼꼼하게 탐문? 신원 확인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이름만 파티일지는 모르지만 대형 글라이더나 수상 이착륙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차분히 그들은 말없이 기다리고 있다. 다만 수상한 느낌이 드는 점은 이 일대의 성곽과 공원과 입문소등을 설계하고 만든 사람 가운데 현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아무도 없을 듯한 어쩐지 어딘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모두 눈빛으로만 공감하고 있다. 어쨌든 드디여 통관절차가 끝났다.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드라큘라, 맞나? 아니 빌더버그? 스토커 경? 오 그래, 스토커 경께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말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어하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바로 옆에서 상관으로 보이는 다른 요원이 똥그랗게 도끼눈을 뜨면서 한 손으로 입술의 자크를 잠그는 몸짓을 보여준다. 「이제 궁전에 들어가셔서 즐거운 파티를 즐기시길 바랍니다.」  성문? 큰 대문이 열리고 리무진에 내렸던 그들은 걸어서 입구를 통과하고, 커다른 나무들이 즐비한 숲을 한동안 걸어가니 앞에 노란색 스쿨버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앞서 입구에서 이 버스를 타고 이동하라며 안내를 받았다.
   스쿨버스에 탄다. 버스 안에는 체크 무늬 옷을 입은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모두 외국인이고 말도 안 통해서 파티에 관한 의사소통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무척 근엄하신 분들이신 데다가 스쿨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중간에 버스가 멈추어서 어디쯤에 그들을 내려주었다. 그들이 내린 지점에서는 왠 관광 안내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관광객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인솔하며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방금 내린 체크 무늬 옷을 입은 사람들도 파티에 초대되었을 텐데 그들을 따라 내려야 했나? 그들은 드레스 코드가 체크 무늬인가, 체크 무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인가. 뭔가 안내가 허술한 건가 아니면 자유로운 건가? 어리둥절한 뿐이다. 그렇게 노란 스쿨버스는 계속 어딘가로 그들을 데려간다. 마침내 어딘가에 도착한다. 그들은 내린다. 버스는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간다. 이들이 내린 곳에는 또 다른 대문이 있다. 이제 현관이 나올 때가 됐는데, 너무 큰 집에 초대받은 거 아니야, 라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별다른 얘기를 할 수 없다.
   여기 있는 대문도 아까와 비슷한 컨셉이지만 자세히 보니 건축 기술과 양식이 조금은 차이가 있다. 이제 마지막 관문이겠지 하면서 안내처 여직원으로부터 조금 걸어가시면 된다는 얘기를 듣고 다른 건 물어보지 않고 대문을 통과했다. 그대로 길을 따라 쭉 걸어가니 왠 주택 한 채가 보인다. 집 앞에는 조그만 수영장이 있다. 집사의 집인가? 이게 별채일 리는 없는데. 도대체 얼마나 큰 저택이란 말이야, 가늠이 안되는구만. 야외 정원에 딸린 파티가 이따금 열릴 것 같은 주택의 실외 수영장, 딱 아담하게 그만한 수영장이 있고, 수영장 바닥에 청록색 복고풍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다. 당연히 수영장에는 물이 채워져 있는 상태다. 수영장 안의 색깔은 청록색의 보색이다. 꼭 작품같다. 아마 그럴 것이다. 것이다? 예언은 커녕 짐작이라도 자주 하고 싶다. 아예 날 감쪽같이 속여주라, 대놓고 말하고 싶어지기 직전이다. 슬슬 인내심이 줄어들고 호기심과 탐구욕이 차오른다. 그러나 이곳은 초대받은 파티의 주무대는 아닐 것이다. 바깥으로 나돌더래도 주최자가 경연장의 주무대를 선보인 후에 슬쩍 빠지는 게 순서일 것이다. 예의지. 파티는 파티지만 일단 녹차든 커피든 뭔가를 마시고 싶지만 우선 파티장에 가야하기 때문에 아무데서나 무작정 퍼질 수는 없다. 좀 피곤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벌써 피로하다는 뜻은 아니다. 어? 그런데 거짓말처럼 갖가지 칵테일과 물, 보드카, 과일과 빵, 커피등이 있다. 누가 미리 준비해둔 것인가. 이게 뭔 경주인가? 알 게 뭐야. 일단 목을 축인다. Kiss of the Fire 라는 칵테일, 누구 만들 줄 아는 사람 있냐고 마크가 물어보지만 모두 묵묵답답이다. 그렇게 간단히 다과를 마무리 한 채 아무래도 이곳은 그들이 찾는 파티장이 아닌 것 같아서 그곳을 나온다. 그리고 걷는다. 파티가 열리는 무도회를 찾아 떠난다. 막 걷는다. 계속 걷는다. 이대로 가면 지구라도 한 바퀴 돌 것만 같다. 드디어 꽃밭과 승마 일행, 브라스 밴드 행진단을 스쳐지나간 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대문이었다. 옛날 왕들이 살았다는 또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그런 거대한 궁전의 대문. 좋긴 하지만 뭔 대문 박물관도 아니고 계속 대문이 나와?
   「장난하냐?」, 「장난 아닌데.」, 「어떤 장난꾸러기 작품이야?」, 「어쭈, 이것 봐라?」, 「LIKE?」, 「흥분돼?」, 「느껴?」, 「이런, 장난쳐?」, 「그런데 이 유형에서 못 빠져 나가면 어떡하지?」, 「무슨.」, 「그럴 리는 없어. 그러······겠지?」
   이 대문은 3번째 대문이다. 대문을 지키는 사람들의 수는 점차 줄어 들어 0이 되었지만 그 규모나 정교함, 외관과 양식과 깃발등은 능히 그 대문 너머에 스위트룸, 손님용 침실, 대무도회장, 중무도회장, 소무도회장, 오락실, 카페, 놀이공원, 동물원, 미술관, 극장, 직원용 침실, 사무실, 욕실, 호수, 대정원, 집무실, 착륙장, 비상 탈출구가 있을 듯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세상 어디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듯하게 생긴 웅장한 인류 문화 유산으로 보존해야 할 것 같은 유물과도 같았다. 혹시 다음에 제 4차 대문이? 상식적으로 내다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대문을 통과해서 커다란 그늘이 있는 수풀지대를 통과하니 저 앞으로 호수가 보이고 그 호수 한 가운데 궁전이 보인다. 이거다. 겨우 찾았다!
   이걸 보여 주려고 문짝 3개를 통과해 온 것이다. 하지만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호수가에 있는 나무 보트 밖에 없다. 이렇게 큰 공간에 사람들은 하나도 없는데 이곳 호수 근처도 꼭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 같다. 어찌 보면 성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것인지도 몰라. 그렇다. 아무튼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더 잃을 것도 없고 남은 판돈 가져가 봐야 의미 없다. 올인만이 정답이다. 다른 테마 파크와 놀이 공원에 가면 이런 보트, 돈 내고 타야 한다.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주인공들이나 타는 거다. 그들이 탈 나무 보트는 바이킹 배와는 또 다르게 애니메이션 <어드벤쳐 타임> 같은 만화 캐릭터가 나무로 정교히 조각되어 있다. 즉 배가 멋져!
   보트를 만진다. 탄다. 노를 젓는다. 하긴 수영해서라도 조금 힘들겠지만 갈 수 있는 거리다. 호수 한가운데 있는 성에 도착한다. 그런데 뭐야, 호수 바깥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이 성은 1:1 실측 사이즈 모형 같다. 폭샥폭샥, 푸쉭, 프악, 퍽퍽, 머리 위에 주전자를 즉시 올려놔야 할 것 같다. 성채 중간중간 있는 문도 모두 잠겨 있다. 게다가 문도 엄청 커서 넘어갈 수도 없다. 어떻게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란 전무하다. 무슨 소리도 안 들린다. 맛있는 음식 냄새도 안 난다. 그러다가 제임스가 사무실에서 프린터 기기로 빼낸 듯한 종이에 <성 뒤쪽 길을 따라 가시오!> 라는 벽에 붙여진 종이를 발견한다. 하긴 다른 방도가 없다. 이 직접적인 실마리가 아니더래도 그럴려고 결심하기 직전이다. 고급스럽게 뭘 암시하질 않고, 라면서 불만을 표출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성 뒤편에 가보니 호수를 건너오기 전에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성과 육지는 육로로 연결되어 있다. 단지 그들이 나무배를 탄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을 뿐. 그렇게 육지로 건너가는데 갑자기 미라가 발견되거나 좀비가 쫓아오는 말도 안 되는 믿을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앞으로 보이는 것은 놀이공원이나 유럽 도시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도심지 도로로 다니는 열차와 미니 열차, 그것을 합한 형태의 기차가 있다. 그들은 그것을 타고 버튼을 누른다. 조작도 쉽다. 버튼 누르면 출발, 속도는 일정, 이동하는 궤적은 꼬불꼬불 나무와 탑과 정원들 사이를 지나서 간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사막의 끝이다. 영화 Mad Max: Fury Road (2015) 같은 데 나오는.
   「혹시 여기 버닝 맨 페스티벌 지역 아니니?」, 「잘 모르겠는데.」, 「아닌 것 같은데. 지점식으로 여러 곳에서 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열리지는 않아. 정말 여기가 어딘줄 모르겠어. 이런 데 처음 와봐.」, 「이곳은 뭐하는 곳일까?」, 「지구, 현재...는 맞겠지?」
   그 앞으로 정말 기궤하게 만든 이상한 차가 있다. 여간해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미래에서 온 차 같다. 그걸 만지든 타보든 거기까지 간다. 갑자기 조니는 투명한 벽에 머리가 부딪히고, 제임스는 손이 또 다른 친구들도 투명 유리벽에 부딪힌다. 이런 삐─삐─삐─ 순간 아주 잠시 얼굴 표정이 뒤틀릴 뻔 했지만 코피가 나거나 눈탱이가 부은 건 아니니까 진정하고, 무슨 일인가 차분히 살펴 본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문이 보인다. 광선이 조금씩 가르쳐준다. 그럼 이건 제 4차 대문이다. 흥분하고 나불대고 뭐 그런 절차 생략한다. 모험을 많이 하면 그렇게 된다. 자, 대문 통과.
   뭔 이상한 차를 타고 사막을 달린다. 사막을 차를 타고 달려봤는가? 사막 근처에도 안 가봤다고? 그럼 낙타는 타 봤나? 낙타를 보기는 했지만 만져보지는 못했다? 사막을 차를 타고 달려보지 않았다면 말을 하지 말라, 이런 격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직선 구간이 아니다. 곡선이 시작된다. 중간중간 구불구불 굽은 길이 나왔지만 큰 시각으로 보자면 모두 직선 구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균등하게 정확히 구부러지고 있다. 기분이 이상하다. 한참을 사막의 변두리 지역을 가로질러 가다 보니 거대하게 동남아시아풍? 아랍? 천일야화에 나오는 것 같은 대문이 보인다. 차에서 내린다. 마침내 제 5차 대문에 도착한 것이다. 이 대문은 불투명 대문이다. 대문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도 없다. 표식도 없다. 문고리까지 없다. 문을 어떻게 열지? 열려라 참깨? 깡충깡충? 트랄 라 라 노래? 혹시 문 너머에는 집단 나체 향연이? 생전 처음 경험하는 온갖 도취감과 미풍, 육체의 탐닉에 따른 순수함과 청량감과 뽀얀 미인들? 빗자루를 탄 마녀가 바로 옆에서 공중에 떠 있고? 이보쇼, 꿈 깨셔! 이런, 지금 문도 못 열고 있는데 일장춘몽이라니. 여보게 황금 열쇠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암호가 뭐야. 꿈꾸는 건 자유니까 일단 어쩜 그럴 것이다, 라고 간주하고 진땀 흘리면서 들어갈 방도를 찾고 있는데 문이 찰칵, 하면서 열린다.
   이번 문은 자동문이다. 좋다. 아까 한 말은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아무쪼록 그런 일은 없기를? 그렇다고 불쑥 기도까지 할 것까지야. 비로소 제 5대문을 통과한 후 맞이하는 제 5지역이다. 뻔하다. 아마도 비행기 무덤이 나오겠지. 수십만 대의 폐 비행기들이 있는 곳. 사막을 지났으니 그런 지역이 나올 법 하다. 그게 아니라면 당연히 오아시스, 육체의 대향연이 열리고 있는 환락의 오아시스지 뭐겠나. 엉거주춤하며 둘 중 하나이겠거니 했는데 실망했다고 할까? 진짜 비행기 무덤이 있다. 오, 이런! 도리어 잘못된 건가? 실망해야 할 일인가? 비행기 한 대는 확실히 진짜다. 나머지도 진짜 같다. 그런데 수영장에서 마셨던 음료가 아무래도 자못 의심쩍다. 수영복을 입은 미녀 군단이 당신을 향해 뛰어온다. 옆에서 하는 말이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처럼 몇 분의 1초, 그렇게 느리게 들리고 보인다. 당신 얼굴도 펭귄으로 보이고, 조니 코는 코끼리, 제임스 코는 피노키오, 오 이런, 지면이 구부러진다. 미래가 보인다. 남반구에 있는 향수 제조 공장의 꽃향기가 느껴진다. 구름을 타볼까? 아까 마셨던 음료에 아무래도 뭔가 섞인 듯 하다. 그렇지만, 허나, 여기서, 여기서 다시 돌아가? 아니 될 일이다. 파티고 뭐고 다 때려쳐? 그동안 공들여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그럴 순 없다. 뭐 어쩌겠나. 진짜인데!
   아까 크게 봤을 때 곡선이 시작된다고 했듯이 이 비행기 무덤이 있는 장소도 꼭 육상 트랙의 바깥 구역처럼 보인다. 더 이상 대문은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 이들이 걷고 있는지 뛰고 있는지 아니면 어디 나딩구르는 스쿠터 몇 대를 타고 돌아다니는지 모를 일이다. 멀쩡하기야 하다면야 아무래도 괜찮다. 그렇게 구부러진 방향으로 좀 더 가보니 트로이의 목마를 연상케 하는 10층 건물만한 개 인형이 보인다. 그 옆으로 느닷없이 지름 20m 쯤 되는 빨간색 야구공, 아니 잘못 봤다, 테니스공이 굴러온다. 고무 재질로 제작된 듯 하고 찰지게 탄력적으로 잘 굴러간다. 단지 개는 가짜라서 뛰어가지 못한다. 공이 지나간 후에 한숨 돌린다.
   재미난 일들이 벌어지는데 왜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것일까? 왜 없기는 그냥 없다, 이걸로 설명은 충분하다. 왜 머머 하는가, 정말 궁금해야 하는 일들은 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나중 생각하고 우선 현재를 살아가자, 이렇게들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보여준다. 오늘 하루 벌어진 일들을 떠올리며 이들은 무작정 걷고 있다. 걷기, 가 좋다거나 뭔가에 도움된다는 것은 익히 아는 일이지만 작정하고 많이? 그것에 집중하여 걷는 일 또한 그리 많지 않다. 그렇게 수많은 나무와 넓은 대로, 푸르른 초원을 굉장히 커다란 육상 경기장 트랙이라 생각하면서 살짝 굽은 길에 들어서서 계속 따라가고 있다. 이건 마치 직선 주로에 접어든 중거리 육상 선수의 마음가짐이나 기분, 느낌과 그나마 가장 비슷할 듯 하다. 게다가 그 움직임의 곡선이 시계 방향인지 시계 반대 방향인지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지나온 사건들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순간 갑자기,
   전방이나 측방, 하늘 또는 약간만 높은 어느 고도에서 컨테이너가 하나 툭 땅으로 떨어진다. 쾅 하는 굉음에 놀라기도 하지만 그 소리 이전에 확연하게 어느 높은 지점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여 조금의 멈추는 정지 동작없이 연속 동작으로 그대로 땅에 떨어지는 잔상, 그 시각적인 환영이 계속 반복하여 뇌리에 떠오르고 있다. 믿기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서로 봤어? 봤어? 뭐야? 뭐긴 뭐야? 같은 묻거나 답하고 동의를 구하는 짧은 대화조차 나누지 못한다. 컨테이너가 2개, 3개, 10개 막 연속으로 계속 떨어진다면 어찌된 일인가 잘 파악해 볼려는 노력이라도 해볼 텐데 딱히 할 수 있는 반응은 당장, 없다. 정말 없다. 더군다나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연이어서 그랜드 피아노 3대가 연속으로 공중에서 떨어진다. 이번에도 정확히 못 본다. 하지만 그리 높지 않은 어느 만큼에서 떨어진 건 알겠다. 어떻게 갑자기 공중에 나타났지? 그들과의 거리는 좀 된다. 멀리서 보이는 것이지만 꽤 옛날에 만들어진 피아노로 하얀 건반은 상아로, 검은 건반은 흑단으로 만들어진 듯 하다. 하긴 어떤 무언가를 위해 상아 안에도 추적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독수리나 숲과 들판을 걷고 뛰는 곰과 물 속의 상어에게도 GPS가 붙는 세상이다. 영화에서 특수 요원이 자기 몸 속에 심어진 칩을 꺼내는 일은 또 뭔가로 업그레이드 될 것이다. 잠깐 정신을 놓은 사이에 분명 그 자리에 없었는데 트럭 1대가 붕 하면서 질주하드니 전속력으로 나무를 들이받는다. 안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 높은 하늘에서 배가 30척, 탁 땅으로 떨어진다. TV 커피 광고에 나올 법한 보트이면서 어딘지 모르게 하늘을 날지 않았을까 예측하게 만드는 괴력을 지닌 이상한 배다. 그리고 골든 리트리버가 감당 못하는 태니스공 몇 박스처럼 하늘에는 배구공들이 공중 어느 지점에 고도를 일정히 유지한 채 떠 다닌다. 몇 억 개, 는 아니다. 하여튼 많다. 농구공들은 공중으로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축구공들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한다. 분포도 고르다. 아름답다. 경이롭다, 는 바로 이런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이 초자연적인 마술쇼를 누가 부리느냐, 왜 일어나느냐, 왜 하필 우리에게, 따위는 상상해 볼 여유가 없다. 그러나 촐싹맞게 겁먹은 것처럼 제자리에서 뛰지는 않는다. 아까 걸었다면 지금은 훨씬 빨리 걷는다. 즉 경보다.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한참을 빨리 걷다 보니 좀 흐리고 침침한 날씨였는데 하늘이 갑자기 환해진다. 슬슬 발걸음이 느려지더니 그들은 눈부시게 밝은 약간 크기가 작은, 뭔가 의심스럽지만 평소보다 덜 밝은 태양을 바라본다. 뭔가 그래야 할 것만 같다. 때마침 어두컴컴했던 먹구름이 걷힌다. 시커먼 구름 커튼이 젖혀지면서 훨씬 드높은 하늘에 해님이 나타난다. 너무 밝아서 제대로 쳐다볼 수 없다. 대놓고 정말 독한 맘 먹고 바라본다면 안구에 심각한 악영향이 끼칠 것이다. 마치 실연당한 리듬 체조 선수가 2단 평행봉 위에서 안무를 마치고 번쩍 날아서 땅에 착지할 때 무릎을 딱 펴고 지면과 접촉하는 행동처럼. 일단 먼저 봤던 태양이 가짜고 나중 것이 진짜인가? 아니면 해가 2개나 하늘에? 먼저 있던 태양이 진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그게 가짜? 어떻게 이런 일이. 왜 안 돼? 오, 신이시여! 2개의 태양을 거룩히 여기옵소서. 이건 완전 뜬 구름 잡는 일이다. 하지만 진짜다. 완전!
   걷다가 빨리 걷다가, 다시 오히려 뛰지 않고 걸음이 느려진다. 평균적인 걷기 속도를 되찾았다. 이제야 진짜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걷는 그들의 주변은 여전히 리무진에서 내려 성채로 들어왔던 그리고 2번째와 3번째의 대문에서 보았던 엄청나게 우거진 수풀과 초원, 평지, 꽃밭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이다. 누가 헐값에 내놓은 골프장을 냅다 인수해서 이름 모를 쇼를 벌이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정신이 몽롱하고 그저 계속 걷고 있다. 그렇게 대략 30분쯤 더 나아가니 그들의 앞에는 폐허로 변한 도시가 보인다. 몇백 년, 몇천 년 미래에 핵전쟁이 벌어져서 도시가 엉망진창이 되면 이럴 것이다, 라는 설정으로 영화에서 많이 봤던 무대. 해수면이 엄청나게 올라간다면, 커다란 괴행성이 지구와 부딪힌다면, 빙하기가 되찾아 오면 혹시, 지구 내핵이 변이를 일으키거나 지구 자기장이 심각하게 틀어져서 어떤 대혼란이 찾아왔을 때 이럴  것이다, 라고 예상해 볼 수 있는 모습, 딱 그것이다. 그런데 화면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건물은 모두 망가지고 낡고 1800년대 후반에 부서진 다리처럼 대교도 휘어져 있고, 모래 언덕에 도심지 일부가 물에 잠겨있고 일부는 사막화가 진행되는 장면, 정확히 그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뉴스에서 봤던 빈민이나 난민을 위해 도로변에 놓여진 음료수와 바나나, 즉석 식품들이 보인다. 혹시 이게 진짜일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그렇다고 가짜일 리도 없다. 그럼 아마도 영화 촬영장? 적당히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할 것이지 이렇게 생-난리를 칠 수는 없다. 의미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서바이벌 게임? 그게 맞다면 음 아무래도 게임이 아니라 진짜 생존이 문제일 것 같다. 아니? 예술의 영감을 수없이 전파할려나, 또 모른다. 뭔가 예상치 못한 여러가지 일들이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인근 1km 정도를 탐색하고 있던 중에 완연한, 득의만만한, 완벽한 안심의 징후를 느낄 수 있는 노란색 스쿨버스 1대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럼 그렇지, 누군가에 의해서 갑자기 그들이 미래 세상에 덥썩 내던져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알았다. 휴, 하면서 한숨을 몰아쉰다. 스쿨버스가 그들 앞에 멈춘다. 문이 열린다. 열릴려다가 다시 닫힌다. 문이 삐그덕거리는 게 좀 상태가 안 좋은 것 같다. 다시 열린다. 이번에는 확실히 열렸다. 스쿨버스의 운전사 아저씨는 외국인 같다. 그런데 딱 어느 계열인지 상당히 추측하기 어려운 얼굴이다. 혼혈도 이런 혼혈은 처음 보는 듯 하다. 그런데 이분이 하얀 종이 한 장을 들어올린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씌여있다. <이 차는 파티장으로 갑니다.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이게 다다. 꼭 청렴한 해외 여행 상품의 현지 안내자가 공항에서 맞이할 여행객을 위해 들고 있는 표식같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파티장까지만 가면 된다. 목적은 그것이지 않는가. 그들은 차에 탄다. 운전하시는 아저씨에게 얼마나 가야 할까요, 이 곳은 어디인가요, 이 성곽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나요, 이 지역은 대체 뭐하는 데에요, 여긴 언제부터 이랬어요, 라고 물어봤지만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들을 수 있는지 없는지, 아무 답변없이 때때로 그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면서 살짝 미소만 건네신다. 이분 모나리자야? 아니 남잔데. 원래 이 일을 담당하시는 분이 아니라 급히 투입된 땜빵이거나 진짜 운전기사를 매수했거나 때려눕혀서 잠시 기절하게 만들고 무대포로 (나는 당신들을 데리러온) 저승사자다, 그럴 것만 같은 기묘한 낌새가 엿보인다. 그러나 저러나 스쿨버스는 파티장으로 가고 있다. 버스가 파티장에 도착하기 전에 하나 특이한 풍경이 있었다면 그것은 어느 건설 중인 도심지를 지나쳤다는 거다. 힘차게 부지런히 마구 대폭적으로 만들어지는 신도시 건설 현장, 딱 심시티 게임을 연상시키는 경치가 꽤 인상깊었다. 폐허로 변한 도시와 건설중인 신도시, 무슨 관련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참으로 희한한 대조 때문에 몹시 가슴이 울렁거려 약간 토할 것 같은 속쓰림과 오랜 등산으로 높은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의 희열감 또한 사르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뭐 어쨌든 그들은 파티장에 도착했다. 스쿨버스에서 내린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두번째가 아니라 첫번째 운전기사 아저씨가 살짝 뭔가 숨기고 있었다는 데 중론이 모인다. 그분과는 헤어졌으니 따져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뭐야 이거? 이런 환장할! 이곳은 앞서 제 2차 대문을 통과해서 잠시 쉬어갔던 수영장이 딸린 저택, 수영장 바닥에 복고풍 차가 잠수해 있는 그곳이었다. 다만 틀린 그림 찾기를 하자면 아까는 물 즉 수영장 바닥은 선홍색에 쿠페가 청록색이었다면 지금은 쿠페는 본홍색이고 수영장은 하늘색이란 거다. 자동차도 전에는 복고풍 옛날 차였는데 지금은 약간 클래식한 모습의 콘셉트카로 바뀌어 있다. 혹시 이와 똑같은 모양의 주택이 몇백, 몇천 채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과 이것이 같다고 봐야 한다. 안 그러면 미쳐버릴 것이다. 처음에 잘못 봤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와 여기가 다른 장소는 아니다. 이 전체 지역이 거대한 나사 못처럼 회전하는 거도 아닐 테고, 각 구역이 따로따로 움직이는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해는 기울고 있다. 벌써 하루가 가고 있다. 어느새 하루 다 간다. 정말 힘든 하루였다. 파티 즐기기도 전에 힘 빼버렸다. 일단 에너지 음료 마시고 파티를 시작해야겠다. 이미 파티는 시작되었는지 안에서는 음악소리와 외침소리가 들린다. 이제야 안심이 된다. 기나 긴 고생 끝에 다다른 짧은 행복도 행복은 행복이다. 이제부터 즐기면 된다. 기나 긴 고생에 인생이 겹쳐지면, 나는 불행했다, 같은 묘비명이나 자서전 뒷 얘기와 비사가 떠오르면서 기분 이상해진다. 또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의 인생은 파란만장했으며 끝으로 그는 불행했다, 라고 한다면 최상층의 고급 유머다. 개패, 내가 개를 왜 패? 싼타페, 내가 산타를 왜 패? 와는 다르게 번역하고 통역해도 허공으로 흩어져버리지 않는 농담. 그래서 글보다는 말에 1차적 유머가 더 많이 쓰일 것이다. 그러니 때로는 부장님식 재담을 힘껏 참을 것! 그래서 정확히 말하자면 그 재주가 부족함을 다행으로 여길 것! 그러나 오히려 카사노바가 갖추어야 할 제 1단계 기본 덕목이 부족함에 절망할 것! 그건 그렇고 향연에서 주의할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약간 에너지가 줄어들었으니 독한 술로 시작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더한다면 손바닥만한 천으로 만든 것 같은 검정색 숏 원피스나 빨간색 롱 드레스를 입은 향기로운 여인의 유혹을 조심해야 하는 몸가짐일 것이다. 초반에만!
   어느덧 조니와 케빈과 알렉스와 마크와 하워드와 닉과 제임스는 파티장에 들어가서 파티 분위기에 한껏 게다가 흠뻑 젖어 있다. 어느 정도 긴장감이 무르익고, 동향도 파악했으며, 먹이를 물색하고 접근할 대상의 우선 순위까지 정해질 즈음 누군가 좌중을 휘어잡는 우렁찬 목소리를 뽐내며 언사의 지휘봉을 휘두른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정말 애타게 꾹 참고 이 시간을 기다리셨군요. 얄미우리만치 잘 참으셨어요. 마음 속으로 정중한 경의를 표합니다. 저기 계시는 아리따운 숙녀분, 볼이 빨개지셨군요. 저기 뒤돌아서서 밀애를 즐기시는 아가씨는 스커트 뒤 자크가 고장난 것 같군요. 아차 방금 환하게 웃으시면서 어느 남자분께 눈짓을 보내시는 여주인공의 스타킹 올이 나갔군요.... 드디여 오늘의 메인 이벤트! 그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여기 계신 세계 곳곳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계시는 마술사 분들을 위해 또 그분들의 이혼녀? 아니 약혼녀를 위하여 마술사를 위한 마술, 공주를 기뻐하게 만드는 마술, 초과학적인 마술을 선보여드릴 시간입니다. 이렇게 말만 해놓고 막바지 파티 인사말로 끝낸다거나 은근슬쩍 노래 몇 곡으로 때울려고 한다면 여러분의 그 억울한 마음은 도대체 누가 위로해 줄까요? 제가요?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아니면 뭐 음성이 고운 텔레마케팅 직원이? 그것도 아니겠죠. 그럼요. 뒷감당은 어떻게 하라구요? 그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에~이, 후훗~. 자, 여기서 인사말을 줄이고 여러분께 신비스러운 요술쟁이를 소개하겠습니다. 아차, 이 분은 그냥 그렇게 불린답니다. 요술쟁이라고. 다른 곳에서는 A네 B네 C네 하면서 장황한 애칭, 그것도 핵심을 콕 찝은 별명을 붙인다지만 그건 모두 2인자를 위한 칭호들이죠. 이 시대의 진정한 요술을, 자, 부정할 수 없는 환상을 펼쳐주실 요술쟁이를 여러분께 소개하겠습니다. 자, 나와주시죠. 요-술-쟁-이~. 신사 숙녀 여러분, 우뢰와 같은 박수로 그분을 맞이해 주시길 바랍니다.」
   요술쟁이가 나타난다. 그는 잠시 무대에서 조명에 적응하는 시간을 가진다. 아주 여유가 넘친다. 이것만 봐도 베테랑이 확실하다.
   「안녕하세요. 제가 준비해 온 요술은 따로 없습니다. 실망하셨나요? 아직 고개를 떨구거나 얼굴을 찡그리기엔 이른 시각입니다. 유명한 교수도 일부 그런다지 않습니까. 수업에 들어와서 강의는 하지 않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한다는 말이, 자 질문하세요!, 이렇게요. 학문에 정통하고 학문의 인접 영역과 그 이웃의 지식까지 자신 있으니까 뭐든 물어보라는 강의법이죠. 물론 훌륭해요. 그러나 그건 학습이고 이건 마술입니다. 자, 무엇이 있을까요. 순간 이동? 그거 어떨까요? 중력을 거슬러서 제가 저 천장을 걸어가 볼까요? 음 사람의 몸통을 분리하는 신체 절단 마술, 식상하죠. 심지어 사고 위험까지 있어요. 게다가 논란의 여지는 다분하고, 진짜다 가짜다 말이 많을 수 밖에 없죠. 카드 마술, 변신, 시간 여행, 무서운 마술 뭐 많죠. 그럼요. 그렇다면 말이죠, 제가 무얼할지 딱 정하지 않았으니 여러분께 신청을 받아 보면 어떨까요? 앵무새를 허공에서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왠지 오늘 제가 땡기지가 않는군요. 예? 뭐라구요? ······ (노련한 프로라서 적당히 뜸을 들인다) 빨가벗고 마술을 하라구요? 순전 구라고 뻥에 속임수라서 하나도 못 믿으시겠다구요? 예, 예, 압니다, 안다구요, 잘 압니다. 그럼요 저도 처음엔 그랬거든요. 딱 여러분이 계신 자리에 제가 있을 때, 여러분과 똑같았어요. 어, 음, 카드로 만든 집은 어떨까요? 카드로 집이 만들어졌다가 신호를 보내면 모두 땅에 떨어지는 마술요. 아 오늘 카드를 안 가져왔군요. 그리고 공중부양...은 저도 손 땐지 오래됐습니다. 차라리 까놓고 이거다, 하면서 빛나는 요술 구슬을 그냥 속시원하게 보여드릴까요? 자잘한 거 모두 빼버리고 큰 거 딱 하나로 모두 정리해 버리면 어때요? 생명수? 탄산음료 마시고 싶네요. 음 또 뭐가 있죠? 엔간히 물어보고 딱부러지게 확실한 거 보여주라고요? 맞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제가 원래는 굉장히 말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술을 배우고 나서는 어눌한 말투에서 어느 날 갑자기 능변으로 돌변했답니다. 사실 오늘 제가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마술봉을 가지고 오지 않아 무척 불안하고 실수 연발에, 아 저는 미래가 조금 보이거든요, 예견 분야에도 잠깐 있었지요, 오늘 굉장히 뭔가 감이 안 좋고 몸살 기운이 있어서 실은 무대에 서지 않으려고 했답니다. 이제 후진들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 할 시기일 수도 있죠. 정말요. 하나 고백하자면 진짜 솔직히 말씀드리는 건데 프로의 길에 접어든 이후로 저는 오로지 몇-톤-급 크루즈선에서만 마술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지상에서 펼쳐지는 마술엔 자신이 없습니다. 사실이 그러한데 어쩌겠습니다. 요즘은 눈속임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기가 쉽지 않죠. 그건 오래가지 않습니다. 장점을 부각시켜야죠. 그래요, 인정합니다. 내르막길이라는 걸. 그러면서 복장에는 또 어찌나 민감한지, 제가 생각해도 진정한 명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명인으로 대접받긴 합니다만 어쩔 수 없게도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죠. 전문 조명 예술가도 항상 붙어다니고, 제 까탈스러운 성질머리 때문에 조수도 오래 버티기 힘들죠. 아 1차 조수의 조수 말입니다. 곧 2차 조수가 그렇다는 거죠. 게다가 유리세정제도 해마다 트럭으로 써대는 통에 그 회사 우선주까지 이미 챙겨두었죠. 나이는 들고, 벌어놓은 돈은 상당히 탕진하고, 실력은 예전같지 않고, 한마디로 환장할 노릇이죠. 저는, 음, 디 어메이징 랜디, 마술계에서 알아주는 20세기의 중요한 마술사 중 한 명인 제임스 랜디, 그의 정통 수제자라고 사칭하는 어느 사기꾼에게 거액을 사기당했답니다. 챙피한 일인데 엄밀한 사실에 한때 뉴스에도 나왔어요. 인생을 헛 산 거 같아요. 마술을 할 줄 알지만, 대중을 감동시키지만 뒤에서는 사기나 당하고, 애처롭고 때론 혼자 운답니다. 사랑 얘기까지 하면 진상부릴 위험이 있으니 자중하리다. 오늘 이거~ 마술쇼는 안 하고, 넋두리만 무진장 늘어놓고 갈 꺼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존경하는 단 한 명의 진정한 마술사, 믿거나 말거나지만 요즘 잘 나가시는 마술사 듀오인 베리와 스튜어트, 그들이 아직도 이분께 비밀 강습을 받고 있다는군요. 여러 마술 볼 필요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큰 거 하나, 딱, 확, 쏴, 끝, 지존! 이게 환상이다, 이게 당신이 원하는 거다, 막 이렇게, 그분은, 그대의 가슴을 쥐었다 폈다 마음껏 요리하실 것입니다. 장담하겠습니다. 보장할께요. 자 그분, 그분이 이곳에 오셨습니다. 지금 즉시 그분을 여러분께 소개하겠습니다. 참고로 이분은 염력술사 입니다. 이 시대 마술계의 명맥을 잇고 있는 진정한 단 한명의 염력술사, 그분이 나오시겠습니다. 자, 여러분, 박─수, 그분을 환영해주시길 바랍니다!」 본격 메인 이벤트를 위한 희구와 촉망감을 고조시키는 바로 그것에 대중이 취해버렸나 보다.
   흔한 말로 우뢰와 같은 박수, 웃음, 기대 그리고 마술이 실패로 끝나면 어쩌나 하는 조마조마한 걱정의 풍선과 보이지 않는 콩닥거림의 물방울이 파티장을 떠다니고 있다. 마침내 그분이 무대에 올라오셨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염력술사입니다. (박수), (박수) 오늘 제가 보여드릴 마술은 다름 아니라 바로 저 하늘의 달,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도플갱어, 다이아나의 쌍둥이 자매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역시 진정한 고수라 말이 짧다. 아마도 조수가 민첩한 손놀림과 황급한 몸놀림의 절묘한 조합으로 음악을 틀었을 것이다. 빈센초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에서 정결한 여신! 그 음악이 나온다. 와 분위기 끝장이다. 마술만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꽤나 다행일 것이다. 음악과 함께 서투르게 바로바로 마술을 보여주지 않고 염력술사는 시어 한두 마디, 농담과 명언을 곁들여서 이 마술은 절대 속임수는 아니지만 굉장히 간결하게 시작되어 간단하게 정점을 찍고 천둥 소리와 함께 끝날 것이라고 마음껏 청중의 혼을 빼놓아버린다. 끝으로,
   「자, 여러분. 오래기다리셨습니다. 모두 저기 저 창문의 달님을 바라 봐 주세요.」 라고 힘껏 외친다. 그리고 모두는 그곳을 그윽히 바라다 본다. 그리고 창문 밖에는,
   먼저 있던 월광 옆에 또 하나의 달나라가 생겼다, 거짓말처럼!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
   와!
   달이 둥글면 이지러지고 그릇이 차면 넘친다고 했나? 딱히 알맞는 속담은 아니지만 어떻게 이리도 상황과 여건이 이렇게 놀랍고, 이다지도 감동적이며, 이미 어딘가에는 비슷한 게 있을 테지만 이리도 발랄하게 적시적소에 써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오! 아름답도다. 이게 바로 낭만이로다. 현실에서의 드라마다. 이것이다. 뭔지는 몰라도 바로 이것이다. 아아, 아름다워라! 어여뻐, 멋져! 적어도 한두 명쯤은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맺힐려다 그 짧은 순간에 마르거나 증발하거나 마술로 감추어버렸을 것이다. 깜빡 속아서 누구도 절대 눈치채지 못하도록. 난 마술사나 관중 이전에 마초야, 라면서.
   분위기가 뭔가 사이키델릭? 전위적? 몽환적이고 마술사에 대한 뭔가 못 믿을 구석이 남겨진 신뢰감으로 파티장은 압도된다. 모두들 완전 이상한 요술에 심취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의 대문에는 보통의 주택과 달리 현판이 달려있었다. <로스웰>이라고. 뭔가 아른거리고 수상하지만 딱히 따지고 들어가거나 파티의 흥을 깨며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으니, 우리는 수영장으로 가서 한 잔 더 하는 게 어떠니, 라면서 그들은 밖으로 나가 수영장 옆 소파에서 하늘에 떠 있는 2개의 달을 보며 술을 마시게 됐다.
   마침 날개 달린 아기 천사가 수영장을 향해 시원스레 누던 오줌을 멈춘다. 꼭 유명한 관광지에 가보지 않았더래도 누구나 평범한 분수대에서 또 TV에서 흔히 봤을 그분, 그리고 그분의 음, 쉬, 쉿! 조니가 그쪽으로 걸어가드니 무심코 그분의 고추를 만진다. 아기 천사 동상의 안색이 금세 붉어지는 것 같다. 또한 그분의 카이엔이 성큼 태동을 일으킬 것 같드니 정작 변화를 보인 것은 수영장이다. 수영장의 물이 급속도로 빠지고 있다. 그것이 이 용도의 버튼이었나 보다. 수영장 물이 모두 빠지니 화사한 색상의 컨셉트 모델 쿠페 1대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클래식 자동차로도 보이고 시장에 선보이지 않은 모델 같기도 하다. 모두들 와, 오, 우, 헉, 아, 감탄사를 내뱉는다.
   특수 버튼을 만드는 데 무슨 불경스러움이 문제되겠나! 나, 특수 버튼, 여기 있소, 대놓고 광고라도 하란 말인가? 어?
   괜히 앞서가거나 다가오라는 신호를 1년 후에도 눈치채지 못하는 부잡한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형 사나이를 위하여, 그리고 식탐을 탐구욕으로 해소하며, 빠져들고 싶어 안달나서 미남을 보면 매사 옴짝달싹 못하는, 그와 말 한마디라도 나누게 된다면 그분을 마주 보면서 두 눈을 13시 쯤의 방향을 불쑥 쳐다보는(왼손잡이는 11시 방향일까?) 귀여움이라도 보여야지만 비로소 안도하면서 애정운에 대한 관심의 끈을 한시도 놓지 않는 '사랑밖엔 난 몰라'꽈 아가씨라면, 문득 호기심에 그럴 수 있으니까, 간혹 충분히 그럴만 할 테니까, 쓰다듬는 방향이 강아지나 고양이에게 행하는 그것과 비슷하면서 강도와 또 뭔가 섬세한 추가 사항은 당연히 마법의 주문, 열려라 참깨에 포함되어 있겠지, 라는 것쯤을 예상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대충 만지자마자 사태가 벌어지면 음 그렇다. 곧이어,
   하워드는 엉덩이가 근질근질했는지 아기 천사 건너편에 있는 어느 여신상, 제우스의 일곱 부인 중 한 명인지 또는 헤라인지 아테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느 고혹적인 여신, 그분의 유두? 젖꼭지를 쓰다듬는다. 바로 하워드가. 눈빛도 심상치 않다. 뭔가에 홀린 것 같다. 어쩜 심각한 듯 하다. 오른손은 여신의(여신 자신의) 왼쪽 가슴, 하워드의 왼손은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즉 그 동상을 당신이라고 가정했을 때 두 손을 X자로 교차해서 나의? 너의 나신을 감추는 몸짓에 기반한, 나름 생각해서 행동한 절도 있는 움직임이었다. 이 동작을 우연치 않게, 자기도 모르게 하워드가 딱 한 번에 그것도 막 심하게 격정적으로 단박에 헤치우는 바람에 직사각형 수영장의 긴 변, 그 면의 8:2 곧 상단 20%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이 드르륵 열리고, 그 안쪽으로 조명과 도로가 드러난다. 그 안쪽으로 바로 눈에 보이는 차가 3대 있다. 그것은 1.벤틀리 벤테이가  2.롤스로이스 던  3.포르쉐 파나메라. 열려진 입구에 제일 먼저 걸어가 서 있는 마크의 스웨터가 유난히 돋보인다. 글씨가 씌여진 옷이라서 그렇다. 뒷모습에. 이런 글씨가. FOLLOW ME!
   이런 삐─삐─삐─! 허걱, 놀랍다. 신기해. 이럴 수가. 미쳤어. 와우. 장난 아니다. 끝장! 이것도 멋지지만 이게 끝일까? 아는 사람은 없다. 차 너머로는 조명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터널이 쭉 뚫려 있다. 보통 대도시에서 공항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일반적인 모양이다. 도대체 이거 뭐지? 저 길을 따라 가면 어디가 나올까?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새로운 세상이?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득하고 궁금하고 신기하다. 갈까? 말까? 일수불퇴, 낙장불입.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전진한다. 가야한다. 가자. 가겠다. 저승사자를 만난다 할지라도. 만약 만난다면 안녕하고 성큼 되돌아올 것이다. 만나면 안 된다. 곧바로 이들은 정말 무미건조한 로보트처럼 3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탄다. 자연스럽게. 당연한 듯이. 넋이 나간 것 같다. 자동차들은 시동을 바로 걸 수 있는 상태고 에너지도 가득 차 있다. 앞뒤 안 보고 눈빛만으로 결의하고 즉시 출발한다. 고고!
   경주마를 채찍질하여 애마의 주력을 풍성히 풀어놓고 싶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다. 속도를 낼 수 없는 이유는 터널 내부에 가끔씩 휘황찬란한 벽화가 간혹 보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궁전이나 멋진 대성당 내부에 보면 옆과 위와 바닥에 그려진 그림들 있지 않은가. 바로 그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길다란 창문이 어쩌다 한 번씩 나와서 바깥의 숲이나 강을 보여준다. 완전 처음 만나는 자유, 신세계다.
   한참을 그들은 달린다. 시간을 짐작할 수 없는 채로. 꾸준히 길을 가고 있는데 속도를 줄이라거나 안녕이라는 말은 하지마,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안녕 나의 사랑, 잘가요 내 사랑, 이제 보내줄께요, 안녕이란 말 대신, Goodbye Yellow Brick Road, 같은 표지판들이 보이면서 가로등이 강렬해지고 어떤 알 수 없는 방법에 의해 반강제적인 특수한 방법으로 차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점점, 점점, 점점.
   한편 장면을 전환해 보면 이곳은 사막 한 켠에 있는 스타벅 카페다. 고전소설과 알파벳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면 또 아동이라면, 그것이 그건가? S 한 글자만 안 붙어도 갸우뚱 할 수 있다. 물론 의뭉스러움은 끝내 표출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곳은 바깥이 사막이고, 안은 보통의 카페다. 적당한 소음과 음악과 사람들, 또 커다란 그림이 하나 있다. 완전 대작이다. 카페 한 면을 다 차지한다. 이 그림은 이 카페와 비슷한 찾집의 내부 풍경을 보여준다. 그림 안에, 카페가 있고, 카페 안에, 그림이 많이 있다. 최종적인 그것은 터널 그림도 있고, 레이싱 게임의 다양한 모드도 있고, 해변 도로 질주, 다리 위 컨버터블등 모두 시점이 자동차 운전자 시점이면서 자동차 앞유리 바깥 틀이나 계기판은 안 보이고 모두 깔끔하게 1인칭 운전자 시점이다. 고로 그것은 실존과 공상의 괴리감을 잠재적으로 줄여 나간다. 때문에 그로써 창문이자 그림이 모두 탈출구라는 반에 반쯤 성공한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앞유리 틀과 계기판이 보인다면 그건 1인칭 보다 전지적 시점에 가까울 것이다. 소설에 쓰이는 나는, 내가, 나의, 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고 통상 부른다. 하지만 그건 레이싱 게임의 좌석에 앉아 운전대를 잡고 앞쪽에 있는 선풍기를 틀어놓고 운전할 때의 화면 양식 3번인 1인칭 관찰자 시점과 비슷할 수도 있다. 사격 게임의 3인칭 관찰자 시점도 같은 얘기다. 정리하면, 사막의 카페 > 그림 1점 > 그림 내용 > 카페 내부 풍경 > 카페에는 그림이 여러 점 진열됨 > 제일 크고 멋지며 주목할 만한 그림은 터널 내부를 지나는 차의 1인칭 운전자 시점 > 그것과 양대산맥, 용호상박으로 쌍벽을 이루는 그림은 카페에서 그림을 보는 사람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오는 자동차, 그것도 컨버터블, 딱 만화나 로맨틱 코메디 액션 영화 캐릭터! 정리하면 이것이다. 딱히 복잡한 내용은 아니지만 쉬우면서도 퍽 어려워 보인다. 말만 길었다. 아무튼 그렇다. 딱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커다란 화근이자 잠재적인 나이트 클럽 사장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림이 아닌, 바그다드) 카페 내부에서 그 유화를 볼 때는 단순한 그림이고, 액자가 걸린 벽면 뒤로는 조니, 케빈, 알렉스, 마크, 하워드, 닉, 제임스가 타서 신나게 달리고 있는 슈퍼카 3대의 주무대인 터널 내부가 존재한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큰 그림 하나를 경계로 현실과 이상이 교묘히 맞닫아 있다. 꿈, 벽, 생시. 바꾸어 카페와 그림과 미몽.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라는 표지판을 마지막으로 터널이 끝났다.
   우광쾅쾅쾅!
   천둥 소리, 완전 번쩍 번쩍, 난리와 먼지와 혼돈.
   쿠르릉 쿵쿵!
   액자가 걸려진 카페의 한 벽면, 카페 내부 정경이 그려진 그림, 그것과 맞붙어 있는 벽면이 무너진다. 무너졌다. 난리났다. 현실과 이상이 만난 것인가?
   그림에서 차가 튀어나왔다는 환상, 이 아닌 실제 사건의 구현이 카페 손님들에게 바로 코 앞에서 벌어졌다. 벽면이 무너지고, <벤테이가─던─파나메라>가 이어서 나오더니 사막을 향해 전면 노출된 카페의 바깥으로 나아간다. 카페 설계와 그림 위치는 사람이 안 다치게 미리미리 설정되어 있었다. 카페에 있던 사람 가운데 점원 일부와 단골 손님 1명, 곧 그 그림을 익히 봐서 잘 아는 사람 그리고 7인의 전사 가운데는 조수석에 탔던 1명이(지금 그 이름을 밝힐 수는 없다) 바로 그, 그 현상을 체험하게 된다. (간드러진? 표현으로) 의식의 팽창&딱딱! 혹시나 그분이 여자라면 무의식적 흥분? 이건 어디까지나 야릇하거나 성적인 전개와 내용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신체 과학, 의학, 성별 특징, 생물학, 단지 그것일 뿐이다. 남자는 뭐가 뭔지 잘 모를 것이다. 여자는 웃고 있다. 완전 빵긋! 원리는 불분명하다. 남자에겐 어른이 되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그러나 너무나도 아는 게 많으니까 모른 일을 발견했을 때의 약소하지만 환희, 결코 무시해 버릴 수 없다. 인생은 어렵다. 세상은, 온통, 미스테리, 투성이다.
   생애를 통틀어 수상 기회가 단 1회 곧 데뷔 연도 뿐이라는 신인상의 성품과 닮은 파격적인 한시적 행위 예술, 단발성 플래시몹의 시기가 임박했다면 원래는 카페 벽면에 걸린 그림은 1인칭 운전자 역시점으로만 그림 내용 전체가 채워질 텐데 쌩둥맞게 이 친구들에게 잭팟이 안겨졌다. 즉 얘들이 아니었다면 언젠가 미래에, 미리 정해져 있는 당첨자가 미리 그림을 바꿔치기 했을 것이다. 하지만, 따라서 죽 쑤어 개 준 꼴이 되어 버린 거다. 만에 하나, 이와 같은 연출을 의도로 기획하지 않았다면 이걸 '깜짝 행운상' 이라고 불러야 하나, 난 잘 모르겠다.
   하여간 이건 완전 대형 사고다. 그러면서 또 사고는 아닌 듯 하다. 왠지 작품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이걸 그렇게 불러도 된다면. 아마도, 욕 먹을 것 같다. 아슬아슬. 사고가 대형인지 토막 기사에 불과한지는 뭔가 모호하지만 7명 친구들은 일단 달린다. 오늘도 달린다. 항상 달린다. 오빠 달려. 나중에 걷고 싶어질 만큼, 쉬고 싶도록. 운명이다. 숙명이란 말이다. 타고 났다. 빠져 들었다. 헤어나올 수 없다. 시간은 앞으로 간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남자는 부풀리고 여자는 축소하고, 이건 아니다, 취소. 어차피 일은 터졌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타임머신이 발명될 그날까지. 그것이 만들어져 시판되어도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기 전까지. 시간은 차근차근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만 간다. 바닥은 모래다. 사막이다. 하늘엔 태양. 모래 언덕으로 달려간다. 붕붕, 붕붕. 더 빠른 속도로 언덕 너머를 향해 도약. 모래 둔덕을 넘어가니, 넘어가니, 넘어가니,
   아-뿔-사!
   사막 자동차 랠리가 진행중이다. 얼떨결에 참가한다. 연습과 준비와 심사와 예선 모두 날려버리고 바로 즉시 본선이다. 와우! 그런데 이건 토끼와 거북이 경주 동화를 떠올리게 한다. 완전 똑같다. 그들 1호, 2호, 3호 차는 완전 천천히 길을 따라서만 갔는데 앞서 갔던 차들이 모두 고장이나 사고나 길을 잘못 들어서 이 친구들 7명이 탄 3대의 차량이 나란히 사이좋게, 오손도손 1등, 2등, 3등으로 골인한다. 그러나 나중 주최측에서 기록만 비공인 처리하고 적당히 경기 끝낼려다가 뒤늦게 들어온 진짜 선수들 때문인지 이 친구들에게는 메달 박탈에 출전 정지 처분만 내려진다. 벌금은 면했다. 언제 출전 자격을 따기라도 했던가? 시상대에는 올라갔다. 샴페인도 터트렸다. TV에서 많이 봤다, 어떻게 하드라. 그러므로 거의 똑같이 따라했다. 아니다. 완전 더 오바했지. 혹여나 청중에게 거북함을 유발하고, 어쩌면 민폐 제대로 끼쳤을 것 같다. 그렇지만, 기분 완전 째졌다. 대박! 
   이제 그만 모험을 끝내고 차를 돌려주기 위해 그 수영장이 딸린 저택을 찾아 헤매기로 한다. 좀 늦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한다. 독서 감상문식으로 교훈까지 덤으로 주어지면 고마울 것이다. 그러나 조금은 암담하다. 뭔가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서글프단 말이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위대함과 인간 승리, 게임 주인공의 입장에 입각한 가슴 설렘을 온몸과 영혼으로 흐느끼며 체험하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담? 음, 그건 말이야, 자, 1) 파티가 열렸던 집을 찾거나 2) 사막 옆에 있는 카페를 찾거나,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한다. 1에서 2로 가던 중 뭔가 다른 파생 도로가 있었던 거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은 일주일이 걸려 드디어 수영장이 딸린 저택을 발견한다. 그 인근의 어마어마한 일대 지역에는 군데군데 간이 숙박시설과 샤워, 화장실, 의료 도구, 간단한 식음료는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곳은 문이 모두 열린 채 꼭 일부 깽판을 부린 돌아이 때문에 경찰이 뜨고, 약 파티라는 뜬금없는 카더라 소문이 마을에 나돌며, 몇몇은 입건되었다드라는 이웃 사람들의 숙덕거리는 모습, 바로 그것을 연상케 하는 작태(?)를 아주 은근하게 보여주고 있다. 깜빡하면 잘 파악하지 못할 뻔 했다. 그리고 저택의 후방에는 처음에 이곳으로 타고 왔던 리무진 기사님과 리무진이 세워져 있다. 리무진 기사님은 저번 스쿨버스처럼 외국인이 아니었고, 그들을 집까지 모셔다 드린다고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들이 처음에 모인 도심지에 도착하여 리무진에서 내린다. 리무진은 떠나고 다 같이 이 말을 몇 번씩 되뇌이며 메아리 울리며, 마음속으로 되새김질 한다. 나직하게 다같이,
   "덮자!"
   그래 덮어야 한다. 우린 소시민이요, 신비와 불가사의에 환장한 인간도 아니잖아? 부디. 그래야 할 것이다. 빛이 아예 들지 않는 기억의 저 깊숙한 심연에 이번 일을 깊숙히 묻어버리자는 모종의 성격으로 비밀스럽게 결의한 다짐처럼. 왜냐하면 도저히 그것은 캘만한 규모와 궁금해 해도 괜찮을 수준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 이 친구들이 만났던 친구들은 이 지역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 마법사와 최면술사, 요술쟁이들도 이 시대 사람이라 단정지을 수 없다. 그들을 포함한 주요 참모진과 핵심 진행요원이 지구인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들은 당연히 꼭 착할 것이라는 근거 역시 없다. 뭐 하나 안심할만한 게 없다. 있다, 는 하나도 안 나온다. 이건 꼭 술집 간판 같지 않은가? 묻지마! 그들이 참여했던 파티는 조그만 잔챙이였고, 진짜 파티의 정체는 뭔가, 우두머리 성주는 대관절 누구냐, 뭐하는 작자냐, 어떤 비밀단체인가, 새록새록 캐내다가는 역풍을 살며시 아니 호되게 당할지도 모른다. 완전 개망신 당할 것이다. 뻔할 뻔자다.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땅으로 뚝 떨어지는 컨테이너에 깔린다면 뼈도 못추릴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식겁해, 식은 땀 쭉 나! 딱 한 눈에 그림 그려진다. 사람이 많이 사는 대도시나 웬만한 주, 국가의 전체 행정구역보다 더 큰 크기의 괴-미확인-비행물체가 도시 위에 갑자기 떡 나타나서 도시가 아침이 됐는데, 당신이 등교하면서 출근하면서? 아니 클럽에서 작업에 실패하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아직도 어두운 밤 인가봐. 하늘엔 반짝이는 별들이 내 모습을 가끔 쳐다보네.' 이렇게 나직한 시어를 소곤거리는 일이 발생하라고? 어? 그래? 진짜? 가난해도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인생을 길게 살고 싶다는 게 죄는 아니다. 뭐가 어때서? 견적 나와. 훤하다. 해 두 개 뜬 거 안 봤어? 달님이 두 분 계신 거 똑똑히 안 봤냐고? 봤자나! 믿을 수 없다면서도 진짜 떴는데, 그냥 뭔가 억울해 했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콱 그냥 생쥐로 만들어버릴까? 그거...보다는, 아니 개구리가 나을려나? 이런 혼잣말이 들리는 것 같지 않냔 말이다. 원숭이, 캥거루, 너구리, 토끼, 곰, 여우, 갈매기, (GOD 철자를 역으로 하면) DOG... 후보군도 빵빵하다.
   그렇게 모험과 사건에 대한 종합적인 논의는 마무리 된다. 아울러 그와 별개로 지금 바로 알렉스가 케빈의 뒤통수에 새겨진 3D 바코드를 바라보고, 그걸 가르키며 친구들에게 묻는다.

「얘들아 이건 뭘까?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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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55

from 소설 2015. 9. 1. 00:42

   나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대화를 잘 못한다. 말을 나눌 사람이 없고, 기회도 없으며, 굳이 속마음을 정돈하여 표출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거리를 지나가다가, TV를 보다가, 말 많은 사람들을 보면 저분은 뭐 저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거지? 꼭 날 바라 봐, 나 멋지지 않니, 난 나야, 난 어때, 난 뭐가 좋아, 난 어떡하고 싶어, 계속 그런 깊지 않은 짧은 수다만 무한정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잘재잘 삐악삐악. 딱 거기서 한 스푼 당분을 덜어내면 완벽한 풍자요 익살이며 해학일 텐데, 그런 욕심까지는 없나 봐, 나는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도 안다. 이런 내 생각이 찌질한 투정임을. 그게 바로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모든 일의 절반인 것을. 왜 사람들은 했던 얘기를 계속 또 할까? 난 모르겠다. 그냥 그래, 그게 다일 것이다. 딴 거 없다. 하지만 내게는 영역과 단위를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세간에 알려지면 안 된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도 들킬 것 같으면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액자에 끼인 그림과 TV 브라운관, 컴퓨터 모니터, 핸드폰 화면, 극장이나 경기장의 대형 스크린만 있으면 어디든 옮겨다닐 수 있다. 비싸 보이는 유화가 아니라 인물화 스케치를 통한 공간 이동도 가능하다. 이 기술은 개인의 의지와 밀접히 결합하여 바로 순간 이동을 하기도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어디에 끌려간달까, 생각도 없었는데 괜히 주위에 그림이나 모니터가 있으면 거기에 빨려들어가는 사태가 발생한다. 즉 뜬금없이 내 이름이나 그와 비슷한 억양의 남 이름을 부르는 사람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것처럼 여기 있다가 갑자기 그림으로 빨려 들어가서 내 주위가 그곳 세상으로 환경이 바뀌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2015년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다가 게임 속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모니터로 들어갔다가, 2008년 콜롭비아의 초코주에서 누군가의 핸드폰 화면으로 툭 튀어 나와서 괴기스러운 붉은 비를 맞았다. 즉 공간을 넘나드니 시간까지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그 불가사의한 액체는 피와 같은 성분으로 판명났다. 참 희한한 일이지만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사례의 유형과 비슷하게 1794년 프랑스 랄랭 지역에서 야영하는 군인이 몰래 가지고 있던 수채화 엽서로 튀어나갔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두꺼비 비도 맞았다. 참고로 하늘에서 이상한 게 떨어지는 현상 가운데 개구리와 두꺼비떼가 쏟아지는 것은 가장 흔한 일이라고 한다. 영화에만 나오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이처럼 1890년 이탈리아에서 새들의 피를, 1981년 그리스 남부 나프폴리오에서 또 개구리 떼를, 1861년 싱가포르에서 길이 30cm 물고기 비를, 1996년 호주 태즈매니아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확인 불가능한 끈적끈적한 물질도 맞아 보았다. 약간 어정쩡한 순간이동 능력이 있으면 이렇게 그 능력이 어정쩡한 만큼 삶이 고달프다. 떼돈이나 끝장나는 신기한 탐사, 미래에 사는 카사노바 모두와 관계없는 재능이다. 정말 못 해 먹을 노릇이다. 그 때문에 나는 영화 주인공처럼 터키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산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영국 스톤헨지, 중국 나장의 자기 석탑, 불가리아의 고대 현존 도시 플로브디프,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 지역들을 나열하니까 거기도 가봤겠네, 라고 예상하셨다면 이 글을 읽는 분께 실망을 안겨드린 셈이다. 차라리 사기 금액 역대 1위 사기꾼 버나드 매도프에게 착 달라 붙어서 폰지 사기 비법을 확실하게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 이거와 그거를 맞바꿀 수 있으면 어쩜 더 나았을 수도 있을 텐데, 못하니까 아쉽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14가지 감각이 뚜렷하고 확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희미하게만 구분될 뿐이다. 초능력, 통각,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방향감각, 속도감각, 색각, 광각, 균형감각, 온도감각, 운동감각. 이렇게 14가지 감각보다 이야기에 대한 인지력과 감정과 몽환이 무엇보다도 가장 크게 나를 좌우한다. 그리고 나는 왕족의 일원이 되거나 일부다처제는 경험해 보지 못했다.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말만 꺼네도 웃길 테니까 잘 활용하시길 바란다. 옛날 세상에서 노비로 태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히 다행인 일이다. 에휴! 나는 잠도 자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걸 의식적으로 꿈을 조절하는 자각몽이라고 한다. 의식적으로? 그것이 아니라 그냥 삶이다, 내게는. 나는 웹사이트에 간단히 관련 모임도 만들었다. 그 비법 아닌 비법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가 보다. 걷기, 읽기, 먹기와 똑같은 수준의 행위라고 밝힐 수는 없다. 번개 맞은 사람들, 이란 모임을 예전에 만들어서 막 던지는 뻥을 신나게 회원들에게 세뇌시키던 유쾌함을 못 잊기 때문에 또 한 번 놀아 볼려고 만들었다. 으아, 못하겠다. 도저히 못하겠다. 나는 뭐뭐 한다, 나는, 나는 뭐뭐 했다. 그걸 말이다. 하지만 (약간은) 재밌다. 그래서? 아~하! 고단계로 실력이 상승한다면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다. 이걸 잘 하려면 자의식이 굳건하거나 허풍이 세야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어디 허풍을 늘려주는 학원이 있다면 다녀야 할 것 같다. 그건 아무래도 약간 타짜나 험담가와 비슷하겠지만 배울 것만 골라서 배우고 나머지는 흘리면 될 것이다. 나는 어쨌다, 뭐하다, 왜 그런 것일까? 사춘기, 청소년기에 생각 안 해 본 사람이 없다는 의문, 왜 사람들은 그렇게 맨날 TV만 보는 것일까? 그거와 똑같아. 늑대에게 키워진 소년이 인간 사회로 돌아오면 처음에 어떻드라, 무엇과 같은 행동을 보이더라, 딱 그것과 같다라고 보면 돼. 인간의 삶은 말하고 듣고 그것이라면, 살면서 그 균형이 안 맞았던 거야. 아닌가? 끝으로 이건 나의 꿈나라 일상이다. 뭐라고? 잠깐 스피커를 끄겠다. 소설은 계속 이어진다.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노력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성실은 성공의 열쇠다. 모두 양이라는 X축 바닥을 어느 만큼 바짝 엎드려 기고 계속 나아가면, 어떤 한계가 축적되면 언젠가는 Y축 기울기로 한 단계 올라가게 된다는 뜻의 속담들이다. 예쁜 그래프선을 자세히 보면, 정밀히 살펴 보면 예쁜 게 아니라 화소로 만들어진 뾰족뾰족 거북한 직선의 모음일 뿐이다. 왜냐하면 과정은 모양 빠져도 작품은 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했던 얘기지만 또 반복할 수 밖에 없다. 영감이 어디 있다고, 눈부신 모험담이 뚝딱 떠오르지 않지만 일단 써라, 닥치고 쓰라는 일종의 좌우명이랄지 살면서 수없이 듣고 읽었던 말과 글을 떠올린다면, '누구는 천재다.' 라는 말은 내가 남에게 하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난 천재가 아니야.' 이건 굳이 말하지 않는 게 관습이자 태도이기 때문에 어린이나 당신이나 누군가는 우선 양을 극대화시킬 필요가 있다. 전문가도 아니고 장비-발이나 선천적인 재능이 받춰주는 것도 아니니까 막 던져서 수없이 사진을 찍어대서 그리고 모든 것을 저장시키고 기억을 떠올리고 A와 B를 짜맞추고 합성하며 변형시켜서 쓸만한 것 하나를 건지는 방식도 글이 안 써질 때, 작품의 구상이 잡히지 않거나 무작정 내 사랑을 기다려야만 할 때 실전에 대입하여 적용해 보아도 괜찮은 방법이다. 사랑을 기다리지 않고 아무데로 그물이나 낚시줄을 막 던진다? 이건 약간 다른 얘기니까 살짝 제쳐 놓는 게 좋겠다.
   소설가 J는 일관되지 않게 병렬로 인문학적 지식까지 억지로 꿰어 맞추어 글을 쓸려다 보니 자꾸 꿈에서 글을 쓰거나 이상한 영화 같은 꿈을 꾸게 된다. 위에 나온 내용은 그가 또 모든 사람들이 꾸는 꿈에 관한 내용의 한 예시다. 꿈은 기억나는 꿈도 있고 잘 생각나지 않는 꿈도 있다. 꿈은 또 현실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전혀 다르거나 현실과 반대되기도 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일반적이다. 흔히 알려진 초현실과 SF가 꿈에서는 실재이자 내 공간이며 <언젠가>가 아닌 바로 지금이자 이상이며 현실이자 꿈의 실현이 된다. 그렇다. 꿈 속에서 꿈의 실현, 그 말이란 말이다. 완전 말도 안 되는 꿈 같은 얘기니까 1인칭으로 표현해도 응당 소설 전체 분량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작고 또 아이들 목소리를 듣는 어른이 느끼는 감정과 고급 독자가 아동물 이야기를 읽고 빠져드는 기시감이 1%는 섞일 수 있기 때문에 그걸 진화라고 부르든 역설이라거나 장편 소설 중간에 들어있는 막간 예능 액자? 초소형 소설이라 부른다면 허영의 불꽃이 일겠지만 이미 그렇게 진행됐으니까 그냥 지우지 않고 놔둔다.
   어쨌든 그는 새 경험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절판된 책을 중고품 파는 웹사이트에서 주문했다. 그 책의 제목은 <1.새 경험>이었다. 그리고 서점에서 봤던 어느 남성 잡지에서 신제품 카약을 봤다. 바로 <2.접이식 카약>. 무게는 약 12kg. 가방만한 크기로 접을 수 있다. 당연히 혹 하면서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면 그걸 집에 모셔만 놓겠나, 떠나고 싶어졌다. 그러면 접이식 카약은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거냐. 그것이 비싸 봐야 2주일 급여나 한달 봉급보다 비쌀 리는 없다. 약간 넘을 수는 있지만 그보다 값싼 중고품을 구하면 된다. 비밀이 없는 것처럼 재산 또한 없었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재산 목록 1호, 2호, 3호로 순번을 매길만한 물건은 없지만 통장에 남아있는 잔고와 누나와 관련된 사업자에 등재된 사외이사, 그것의 어떤 체납금에 대해 받는 수상한 소액의 정기적 발생, 사이클 자전거 처분, 부모님에게 한 번에 단돈 얼마를 틈틈히 그리고 간간히 규칙적으로 받아서 모은 용돈, 게다가 딱 한 달만 일해도 여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돈 걱정 끝났다. 근심을 덜었으니 그러므로 1번과 2번, 새 경험과 접이식 카약을 결합하기로 한다. 접이식 카약 타고 떠나면 된다. 그것이 새 경험이다. 어느 날 갑자기 구부러진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나 자신을 빼고 모든 게 바뀐다거나 낮잠자고 일어나서 대문을 열었드니 자기 집이 어느 신천지에 있더라는 <나 + 내 집>을 제외한 모든 게 변했다, 밑도 끝도 없이 마법사가 날 찾아오거나 급작스러운 실종과 추적, 모험은 있을 수 없다. 신기한 발견과 탐색, 변신, 구출, 수수께끼는 모두 거짓말이다. 어린이나 청소년, 정신연령이 낮거나 정신연령은 높은데 순수한 어른들이 읽는 환상극은 허구다. 모두! 다만 행동과 의식에 의해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는 있다. 하느냐 마느냐, 그 차이다. 꿈과 낭만과 이상과 모험을 언제까지나 드라마와 게임기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본격적인 공상 과학 소설에 절대 빠져들 수 없는 독자라면 따라서 그것을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 픽션인 듯 아닌 듯한 현실과 거짓의 경계선에 있는 환상을. 그렇다. 그래, 그냥 떠나는 거다. 그가 환각으로 살다 왔던 어느 섬의 호텔, 그 신비로운 생활을 찾아서.
   접이식 카약을 타고 집을 떠나 보이스카우트 같은 소년단 놀이? 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섬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곳에, 푸르른 파라다이스에 도착하기만 한다면야 반투명하게 예상되는 어려움을 안고서 떠나볼만한 일이다. 딱히 얽매인 직장도 처자식도 없으니 좋은 일이고, 만일 있다 해도 젊으니까 새파라니까 떠나지 더 나이 들면 체력이 딸려서라도 힘든 일이기에 골똘히 생각한 끝에 일찌감치 덜컥 즉흥적으로 마음을 정한거다, 정한거다.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 완전 재밌는, 엄청 신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우며 게다가 눈물나게 만들었다가 흥분시키고, 어리둥절 할려다가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박수갈채를 보내게 만드는 그런 소설과 드라마의 주인공, 잠깐 출연하는 단역, 한순간 훅 가는 악역마저도 현실에서 실현되는 실제 사건에 캐스팅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짧은 인생 금방이니까 불미스럽지 않게 평범한 일상에게 시치미를 뚝 떼고 적절한 찰나에 잘한 결정을 한 것이다, 것이다. 공산품을 만들고, 식품의 원재료를 키우며 커피를 팔고, 뭔가를 나르는 사람들이 왜 즐거운 인생과 섬뜩하리만치 덥석 부합하면 안 되느냐, 보아라, 지상낙원을 만들어 보자, 택시 운전사가 시를 스고, 서점 말단 직원이 스탠드업 코메디의 명인으로 우뚝 서서 이보다 더 기쁘게 살 수는 없다, 난 미망인이라도 훌륭한 아름다운 삶을 살겠다, 라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그 비법을 귀뜸할 수 있는 비결을 연구하는 둥 마는 둥 하느니 자처해서 잘 떠난거다, 떠난거다. 이미 출발했다, 출발했다. 헛소리 작작 하며 그만 히죽거리고 이제 떠났으니 A.집  B.신비의 섬! A에서 B까지의 여정, 운이 따라주면 B에서의 새로운 인생, 그곳에서 보낸 한 철에 대해 차차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다, 것이다. 좀 더 서두가 길었다면 독자님은 다른 SF 소설로 갈아타실 뻔 했다, 뻔 했다. 기분 상하시기 전에 잘 끊었다, 끊었다. 낌새가 썩 밝진 않지만 우선 떠나볼까, 떠나볼까. 음흉한 의미의 동사 반복 이제 그만, 이미 배가 떴으니. 자, 가자 요술의 섬으로!
   그는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 이상한 주술에 빠진 것 같은 감정에 젖어든다. 바로 세계적인 국제 열기구 축제들에서 볼 수 있는 모양도 모두 제각각이고 색깔도 풍성하며 모두 특색있게 다르며 개성있는 열기구들을 떼거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단일 지역에 너무 넓어서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보아야 할 정도로 완전 많은 열기구들. 하늘 위에 족히 500개, 1000개는 될 듯 하다.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부유한 성장 환경을 보낸 말괄량이라면 진즉 어려서 배웠을 앨버키키 상자 현상도 띠리리리 하면서 전두엽에 각인된 정확한 기억을 냉큼 떠올릴 것이다. 열기구 모양들은 시계 인형 모양, 술독에서 고개를 내미는 해적 모양, 단순히 흰색 바탕에 글씨만 씌여진 것, 만화 캐릭터들, 동물, 통나무집, 동화 주인공, 동물, 성, 맥주 컵, 삐에로 등등 매우 다양하다.
   기구를 타기는 무섭고 실지로 본 적은 없고, 눈 앞에서 구경이나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이건 정말 두 눈으로 똑똑히 가까이서 봐야만 믿을 꺼야, 광대함이란 이런 거라니까, 라는 탄성과 비명을 지를려다가 순간 멋쩍어서 썰렁하여 멈칫한다. 그가 본 열기구는 진짜가 아니고, 강변 아니 아직 거기까지 안 갔으니까 천변 카페에서 내뿜는 매직 버블이었다. 대상 연령 4~5세, 자동 발사, 무지개 빛. 이런! 불쌍한 녀석 같으니라고. 마술적 사실주의? 사실적 마술주의? 배가 고픈거야 캔 맥주가 땡기는 거야. 아니면 신나는 모험과 개고생을 구분하지 못하는 철부지란 말이야?
   여자들이 실질적인 환상성에 비교적 빠져들기 쉽다면 남자는 환상적인 실제성에 더 열광하는 특징이 있다. 물론 전자와 후자가 뒤바꼈을 수도 있고, 지금 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광활함, 거대함, 광막함, 무엇을 보고 그렇다고 해야 할까? 어른은 어린이보다 인생 경험이 풍부하고 어마어마한 지식의 탑을 쌓았으며 애들 좋아하는 상상력 또한 마음만 먹으면 마음껏 부릴 수 있기 때문에 규모, 그것에 대한 기준이 아이보다는 높다. 게다가 내성과 의존성, 독성, 강화성, 중독성, 금단현상까지 몸과 마음으로 모두 터득했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암스테르담 돛단배 축제에 가서 600척, 6000척 배를 한가득 보고 나면 범위와 한도, 크기, 짜임새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될 것이다. 물론 어려서 본다면 더 좋을 것이고. 참고로 필자는 그런 행사가 있는 줄 이제야 알았다. 그걸 아는 사람조차 지구인 1%, 될려나?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지만 좀 늦어도 괜찮다. 설령 모르고 살아도 괜찮고, 달리 보자면 더 낫지 않을까? 깡섬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고 있는 어른만, 난 끝없는 바다를 보면 가슴이 막 울렁울렁거려, 그분들만 그러는 게 아니다. 동등하지만 꿈의 성격은 다 다르다. 남자 그리고 어른 그 교집합은 상남자다. 상남자는 걸리버 여행기를 좋아한다. 규모와 떼거지. 그래서 상업적으로 음악가를 만족시켜줄 수 없는 어느 지역 공연장에서는 떼창이 유행일 것이다. 성인 남자는 광장을 가득 채운 스타워즈 레고 세트만 봐도 즉시 미소 지으면서 눈동자가 흔들리고 뭐라 뭐라 한다. 뉴스에서 노르웨이의 한 도로 자전거 경주 중간에 탱크가 등장해 자전거 선수들과 나란히 정말 짤막한 구간을 같이 달렸다는 소식, 상남자의 가슴은 두근거린다. 상남자는 애다. 애. 아이에게는 어떤 한계라는 게 없다. 고양이의 첫번째 감정이 호기심인 것처럼 그분들은 신기함으로 하루를 모두 보낸다. 모든 게 궁금하다. 왜, 왜, 왜 또 왜 그리고 왜 계속 왜. 하지만 아이도 속이 꽉 차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희노애락과 부모를 속이는 묘수 또한 알고 있다. 심지어 아침마다 마법에 걸린다. 아이도 상남자다. 딱 1회전 했다. 그럼 이제 계속 도는 일만 남았나? 남자, 어른, 상남자, 애 그리고 다시 남자! 약간 순서는 뒤죽박죽임.
   노를 저어 가며 저 노을 끝까지 나아가자. 저 수평선 너머 신세계에 당도하리라. 지금껏 천변에서 강으로, 바다까지 어떻게 어떻게 나왔다. 중간에 낮은 둑이 강의 흐름을 막고 있는 곳에서는 물가에 카약을 대고, 카약을 들고 둑 너머로 이동해서 다시 카약을 타고 이동했다. 강변에서 일광욕하는 사람들도 보고, 야구하는 동호인들, 자동차를 강변도로에 세워 놓고 밀애를 즐기는 연인들도 보였다. 그렇게 집에서 떠나온 시간이 점점 지나갈수록 자꾸 불안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에잇, 괜히 나왔어, 그냥 집에서 책이나 읽을 걸, 이게 뭔 개고생이야, 엉덩이도 아프고 다른 카약들도 안 보이고 하나도 재미없네, 그러면서. 출발할 때 가지고 왔던 가방에 들어있던 에너지 바와 에너지 젤 그리고 에너지 음료도 먹었다. 중간에 강변 화장실에도 들렸다. 혹시 글이 써질까 하는 의구심에 그 근처 카페에 잠시 들려 차도 한 잔 마셨다. 몸에 땀이 났고, 약간 피곤했으며, 씻고 싶었다. 집에서 가져온 물건은 많지 않았다. 자외선 차단제, 수건 1장, 식음료, 핸드폰, 책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도플갱어 1권, 침낭, 구명조끼, 수첩 하나와 볼펜 1자루, 원터치 텐트, 바람막이 점퍼, 옷은 겉옷과 속옷을 여분으로 하나씩만 챙기고 들뜬 마음에 훌러덩 떠나온 것이다. 다시 확인해 보니 침낭과 원터치 텐트는 무게와 부피 때문에 안 챙겼다. 몽블랑 톨스토이 에디션 만년필도 안 챙겼다. 아니 안 샀다. 있어도 쓸모가 없으니까. 자세 잡고 멋지게 글쓰기? 집어 치워랏! 이봐, 그건 명작가한테나 해당하는 일이라고. 어디서 초딩이 명작을 쓰겠다고. 강물과 바다가 만나는 삼각지에서 어느 환경 단체의 선박도 보았다. 이제 해가 저물어 간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포기할까 하는 갈등도 할 수 없다. 한 길 뿐이 없다. 운신의 폭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다. 법썩을 떨다 지쳤고, 신나는 탐험 운운하다가 퍼졌으며, 슬슬 무모한 한계로 치닷고 있다. 어떡하지? 날씨는 이미 파악했다. 몇 년 내에 물결이 이만큼 평온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바다로 나와서 먼 바다로 떠나지 않고 고기잡이배 A에서 고기잡이배 B로, 낚시선 1에서 낚시선 2로, 놀러나온 요트 파란색에서 선홍색으로 그리고 해변과 수평선의 중간쯤을 유지하는 전략으로 카약을 운전하고 있다. 멀리 노을이 보인다. 와 태양이 저렇게 크게 보이는 줄 몰랐다. 갈매기가 날아간다. 뭐라고 짓는다. 도요새인지 고니인지 백로인가? 뭔 기다란 새도 날아간다. 뭐라고 노래 부른다. 끼룩끼룩. 까마귀도 몇마리 보인다. 제비까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안 보인다. 혹시 저기 저건 인도 기러기? 고도 9.5km 정도로 높이 비행하면서 단 하루만에 1,600km를 이동한다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 승객들이 창밖으로 그들을 보면서 연인처럼 눈을 마주친다는 바로 그 기러기. 그 옆에 있는 새는 북극 제비 갈매기? 새 중에 가장 멀리 가는 이 새는 몇 번만 쉴 뿐 극에서 극으로 54,700km를 계속 이주한다는 갈매기. 맞는지 틀린지 확신할 수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 진짜 어딘가에서 개 짓는 소리가 들린다.
   그건 그렇고 으, 으, 서서히 한계가 가까이 다가온다. 바짝 접근했다. 본디 야외 모험은 TV 다큐멘터리성 예능 방송이나 영화와 드라마에서나 어울린다. 여행을 떠날 것이라면 190여개국 5천만명의 게스트, 5만 도시와 2천개의 성채에 있는 현지인들의 독특한 숙소를 예약해서 현지인 생활을 단박에 체험하는 숙박 공유 서비스도 좋지만(에어비앤비나 우버같은 서비스가 문제점도 있고 이렇다 저렇다 하지만) 샤넬풍 원피스든 흰색 단화에 청바지와 흰 티셔스만 입어도 모든 남자들의 눈길과 호의 그리고 흑심? 까지 유발할 수 있는 처자라면 그보다는 특급 호텔에서 쉬면서 트루먼 커포티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또는 그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잠깐씩 마치 우연처럼 우발적 사건에 빠지는 듯이 편히 쉬며 우아하게 돌아다니고, 그 비율이 적절하며, 품위와 격조가 당신은 고귀한 존재이자 환영받을 손님이라며 칭송하는 것 같이 노래를 불러주어도 썩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대책없이 사표 쓰고, 무작정 컨버터블 빌려서 친구 3명이 떠나면서 도로에 핸드폰 집어 던져버리고, 술 깨보니 어디 이상한 곳에 도착해 있고, 컨버터블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고, 무서운 사람들에게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쫓고 쫓기며, 마술에 빠지고 요술을 부리며 점점 단계가 올라가는 일, 현실에서는 꿈 깨는 게 좋다. 대체로 나이와 여행 경비가 비례하고, 무수한 그래프와 도형에서 보듯이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한편 이 인간은 완전 퍼졌다. 뻗기 직전이다. 참고 참고 또 참았지만 신비고 불가사의고 나발이고 모두 다 개한테나 갇다주라고 하고 싶어진다. 드디여 게임 단계가 바뀌고 드라마 장면이 변할 차례였는지 이상한 일이 거짓말처럼 귀신의 영혼처럼 닥쳐온다. 모든 것을 내 주문에 따라서만 행동하고, 생각하고, 로보트처럼 이상한 교주의 신도처럼 시키는 대로 모두 하면서 강아지와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는 남자들이? 여자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꼭 특이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일단 따분한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게 무엇이냐면 그는 눈도 침침하고 체력도 떨어져 가면서 노를 저어 가고 있는데 바다 한 가운데 딱 고정되어서 카약이 노를 저어도 움직이질 않는 것이다. 꼼작도 안 한다. 바다의 신, 이름이 뭐지? 혹시 지금 고래 위에 멈춰 있나? 자동 세차 기계처럼 모든 환경이 바뀌어버리는 기적이 일어날려나? 다 아니다. 어림없는 일이지. 그럴 리가 있나. 누가 그런 미친 짓을 할리라고. 그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겠나? 왜 그걸 나한테 물어보냐고? 알면서 묻는 질문, 그 단어를 뭐라 하드라, 아무튼 한번 맞춰 보시라. 단 못 맞추시기만 한다면 청초한 아가씨라면 덥썩······ 헉······ 그리고 중년 신사분이시라면 음 쓸데없는 상상은 정신건강에 이롭지 않고, 독자의 상상력에도 불이익을 가져온다. 자, 예측하는 지능을 최적화해 보자.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은 무엇일까? 답은 하나 밖에 없다. 딱 1개.
   왜 카약이 앞으로 안 가고 멈춰 있었냐 하면 앞에 두꺼운 천이, 옛날에는 그것 한 묶음이 1년간의 조세였다는 비단 결 같은, 값비싼 브랜드 옷의 실크 같기고 한 바다와 수평선과 하늘이 모두 그려진 천이었다. 재료는 단연 면 100%. 최고급 면. 다림질을 수십년 해보거나 괜찮은 옷을 오래 소장해 보면 알게 된다.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모든 옷감의 영원한 1번은 면 100일 것이다. 집에 신발이 10켤레, 100켤레 있는 사람도 있지만 검소한? 청소년이면 대개 1~2켤레를 주로 신고, 낡은 거는 신발장에서 깊은 잠을 잔다. 그  한 켤레의 인조 가죽은 완전 철갑이다. 삼천포는 증발되었다. 그 바다 그림이 그려진 천은 길이를 가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천과 그것을 보는 사람이 딱 붙어 있으니까. 정교하게도 그려놨다. 그것을 젖혀보니 카약이 들어갈만한 공간이 있다. 들어간다. 그가 탄 카약이 그 공간에 들어왔다. 그 앞에서 사선으로 꼭 불꽃놀이로 만든 천국으로 가는 계단, 하늘로 쏘인 불꽃들이 모여 사다리를 구성하는 모습의 창작자가 자신의 할머니에게 헌정했다는 어느 설치미술 작품처럼 푸르스름하면서도 따듯하며 시원한 느낌의 불빛이 계단 손잡이를 장식하고 있다. 딱 맞게 카약을 고정시키는 시설도 장치되어 있다. 카약을 고정시키고 배낭을 들고 계단을 올라간다. 다 올라갔다. 뭐가 보이는가. 뭐가 보이냐고? 뭐가 보일까? 아, 뭐가 보이냐면 굉장히 넓은 평지가 보인다. 바닥은 나무 같다. 뗏목의 바닥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아스팔트 도로 같은 느낌도 든다. 그나저나 상당히 넓다. 많이 넓다. 이런 삐── 끝이 안 보이자나. 꼭 배구 코트를 직렬로 2~3개 그리고 그걸 병렬로 20~30개 붙여놓은 크기 같다. 눈이 침침하고 어두워 잘 안 보여서 그렇지 더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뭐야 이거! 이와 닮은 배는 동화에나 나오는 섬에서 탈출한 통나무 배, 그것뿐이 없다. 약간은 바다 속 모래 채취선 비슷한 느낌이 난다. 완전 이상하니까 아예 경이롭다. 이건 조금 작은 크기의 유조선처럼 생긴 배다. 오오! 단지 배 위에는 아무 것도 없고 완전 평지다. 배 내부에도 기계 설비 말고는 아무 것도 없을 것 같다. 아아! 저 뒷편으로 전체의 3분의 2쯤 되는 지점에 작은 정육각형이 보인다. 그곳으로 다가가니 나지막하게 텔레만의 무반주 바이올린 모음곡이 들린다. 꼭 공원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 안에서 들을 수 있는 그런 기분 같다. 그 네모난 시설은 설치형 집이다. 아담하니 딱 귀여운 크기로 꼭 필요한 집기만 갖추고, 거추장스러운 부품과 공간은 모두 빼버린 쉬기 좋은 만화에 나오는 집 같은 네모 상자다. 도심지나 시골에 땅만 있다면 뚝 떼어다가 설치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예를 들면 www.microcompacthome.com 같은 사이트에서 간략히 보여주는 집이다. 문도 열려 있다. 사람이 아무도 없다. 물고기 잡으러 갔나, 낚시 동향을 파악하러 근처로 떠난 것인가. 모르겠다. 에라 좀 뻔뻔해지자. 뭘 주저하나! 인생은 1번 뿐인데! 누군가 주인장이 나타나면 조난당할 뻔 했다고 엄한 핑계를 대면서 구차하게 해명을 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 번만 봐주라는 식의 구실을 대면 그만이다. 다만 매우 정중한 예법을 갖추어서 그 상황 설명에 꺼뻑 넘어오도록 연기하는 건 기본이다. 최악의 상황을 감안해 봐도 크게 손해볼 건 없다. 어차피 잘된 일이다. 그 안에 누굴 닮은 선장이 있고, 그가 J보다 키가 작다면 어딘지 모르게 본능적으로 조금은 미안해질 텐데 그런 마음 씀씀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탄탄하며 미세한 유대감일 뿐이다. 220cm 거구 아저씨라면 살면서 자기보다 큰 사람을 만나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평생 극미한 송구함을 안고 사시겠나 아니면 '쯔쯧 이런 에라 소인들' 하면서 살아갈까. 산 꼭대기로 돌을 굴려 올려야 하는 운명의 헤라클레스? 프로메테우스? 바위를 산으로 굴려 올렸다는 벌을 받은 신이 누구더라, 누구지? 에잇 모르겠다, 몰라! OK, 좋다. 일단 샤워부터 하자. 샤워실에 들어가니 1811년, 추정에 따라 1815년 경에 지었다는 니콜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3악장이 자동으로 나온다. 왠지 불안하다.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고 귀빈으로 모신 후에 늑대와 돼지 3형제 동화 같은 뭔가 음습하고 어두우며 기괴한 뭔 일이 있을려나. 마치 어린 송아지의 눈망울이나 아기 돼지가 뛰어다니는 귀여움, 그런 인간과 친근한 생명체의 인생 중후반부? 어떤 뭔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예상과 모호한 징조, 불확실한 전조와 전율, 불암감도 살짝 떠오른다. 예감, 누구나 그러질 않나. 보통 남자들, 길을 걸으면서 어 저기 저 강렬한 인상의 험악한 아저씨가 갑자기 나를 마주쳐 지나가다가 날 때리면 어떡하지? 여자들은, 사람들 많은 곳을 지나가다가 치마의 실가닥이 많이 풀려서 팬티가 보이면 어떡해? 저기 다가오는 멋진 남자가 내게 고백해 오면 뭐라고 대답할까 했는데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불여우같은 기집애한테 말을 걸 때, 백화점에서 쇼핑만 하다가 나도 모르게 지름신과 접신하게 되면, 집에 가면서 뒤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나와 똑같은 옷이나 똑같은 구두를 신은 사람을 보았을 때,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면서 인생의 비밀을 뒤늦게 깨달아서 비밀이라고 부르기도 왠지 민망하고 성질나는 어느 '친구'에게 가고 있는데 갑자기 경비행기가 내 옆에 착륙하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기우와 아무 쓰잘데기 없는 노파심, 강박증의 앞 단계, 그런 것!
   어쨌든 그건 그거고 샤워는 샤워다. 바다는 바다고 하늘은 하늘이지 샤워실 한 번 빌리는 게 뭐 그리 잘못한 일이라고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불러오는 마법 거울이나 요술 구술 같은 엄청난 불난이라도 일으키겠어? 하면서 그냥 한다, 샤워를. 에라 샤워하면서 오페라든 유행곡이든 뭔가 불어야겠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의 인생찬가라도. 내용은 어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 어차피 그 내용이 다 그 내용이다.
   샤워를 마친다.
   아 개운하다. 뿌듯하면서 외롭고 또 홀가분하다. 뭔 기분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 분위기 참 생소하다.
   샤워를 마치고 샤워실에서 나와서 상자 집 바깥으로 나가봤다. 선주는 보이지 않는다. 똘만이도 없다. 개미 새끼 한마리도 안 보인다. 혹시 했는데. 잘 된건가? 처음에 카약을 이곳에 정박했던 장소는 전장 3분의 1 지점이었다. 그곳에서 정육각형 상자로 걸어오면서 못 봤던 탁자가 보인다. 그 탁자 위에는 좀 식었지만 그런대로 무난한 파스타 한 접시와 스테이크 한 접시가 있다. 시중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특수한 스파클링 워터 한 잔까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건가? 어떻게 처신했을지는 밝히지 않겠다. 살짝만 공개하자면 그 순간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이 1800년대 초반에 작곡한 왈츠를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1900년대 전반에 연주했던 음악이 지금, 2000년대 전반기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딱 거기까지.
   정육각형 상자 집에 다시 들어와서 바로 앞에 침대에 잠깐 누웠다. 하루를 돌이켜 보던가 도시와 자연에 대해 명상을 한다던지 그럴 힘이나 정력은 바닥났다. 바로 옆에 작은 컵, 포도주가 담겨있는 컵이 있다. 음악도 나온다. 생상스의 백조. 딱이네, 마셔야지. 마셨다. 눈이 스스륵 감긴다. 아기처럼 잠에 빠져든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같이 깊이 잠들었다. 새록새록, 코오오, 꾸우웅. 달콤한 꿈나라. 동화 속 세상.
   아마도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났을 것이다. 갑자기 쿵쿵쾅, 쿵쿵쾅, 쿵쿵쾅 소리가 들린다. 바깥 소리를 미처 듣지 못한 건 자면서 클로드 드뷧시의 음악을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고, 그러므로 뒤척이며 굉장히 이상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REM 수면은 이미 지난 듯 하고, 차 지나다니는 소리, 뱃고동 소리, 파도 소리, 사람들 대화도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기계음도 들리면서 뭔지 몰라도 어느 공중 공간에 떠 있는 것 같다. 이제 잠 다 깼다. 꿈도 날아갔다. 뭔 꿈인지는 생각도 안 난다. 꿈을 조종한다? 마법이 풀린 것 같다. 망상에서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이던가. 뭐지? 뭐지? 혹여나 지금 문을 열면 낭떠러지가 보일려나 겁이 덜컥 난다. 마땅히 그럴 순 없다. 문은 일단 손대면 안 된다. 일단 기다리자. 그래야 한다. 그러다 또 다시,
   쿵-쾅-쾅! 단발음이 경쾌하게 울리고 끝났다. 이제 쾅쾅대는 소리도 멎었고, 공중부양하는 듯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선주에게 인사도 못 드렸다. 이쯤 나가 봐야 하지 않겠나, 가 아니라 얼른 튀어 나가는 게 예우일 것 같다. 그렇게 결심하고 초소형 주택의 문을 열었드니 그곳은 어느 섬의 항구였다. 그의 1번 목적지였던 샹그릴라 섬은 아니지만 차선책이자 2번 대안지인 전에 두어 번 들렸던 관광지로 유명한 섬이다. 그 섬에는 큰 항구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여객과 화물 위주, 또 하나는 고기잡이 배와 요트와 보트 중심인데 그곳은 후자인 항구였다. 풍수지리학적으로 괜찮고 왠지 기분도 좋다. 초소형 주택은 대형 크레인이 배에 있는 걸 뜸어다가 포구에 내렸는데 최신식 크레인이 아니라 재래식 기중기로 보인다. 그래도 부드럽게 작동하여 안정적으로 착지했나 보다. 잠에서 벌떡 깸. 덜컥 일어남. 문을 열여보니 뭐 그나마 암담한 결과는 아닌가? 그는 나직히 소리쳐 본다. 그 단어! 숙─취? 시처럼! 행 오버? 바로 몸짓과 함께.
   그는 배낭에서 캔 커피를 하나 꺼낸다. 아침이다.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고 하지만 그날의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해는 떴는데 회색 구름이 모두 커튼처럼 가려주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칙칙한 날씨라고 하시지만 대책없는 동경심을 잃어버리지 않은 철부지, 난 아직 늙지 않았어, 나이 들었지만 철들지 않을 꺼야, 간혹 이렇게 혼자 술주정하는 아저씨들과 톰보이들은 이런 날씨를 매우 좋아한다. 비가 올 걱정도 없다. 비가 와도 된다. 비를 맞으면 속이 다 후련할 것이다. 바람도 선선히 분다. 머리카락 날리고 어떻게 풀릴지는 몰라도 막 새로운 연애에 대한 기대감에 바람에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다. 붕붕 이미 떠다니고 있다. 바로 그와 같은 예감이 들게 만드는 그런 날씨다. 날씨 얘기는 이제 그만. 컨버터블 타기에 가장 좋은 변덕스럽지 않은 기후라서 설명이 길어졌다.
   이건 세기말 증후군인가 그냥 개폼인가. 캔 커피를 마시며 한 편의 뮤직 드라마 아니다, 가라오케용 좀 그런 영상에 나오는 인물이래도 상관없다. 그렇게 살며시 가벼운 또 포근한 웃음을 짓다가 별안간 뜨~아, 외마디 탄성을 내지른다. 이상한 축구장 닮은 배에다가 접이식 카약을 놓고 온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어쩌고저쩌고 필름을 빨리 돌려서 쫄망쫄망 뛰어가서 카약을 가져와 다시 그 자리에 섰다. 접이식이라서 5분만에 다 접었다. 선장은 얼굴도 모르고 누가 승무원인지도 모르니까 또 거기에 사람은 코빼기도 안 보여 인사라도 드릴려다가 슬렁슬렁 돌아와버렸다. 자, 그렇게 육지에서 섬까지 어쩌다, 어떡하다 겨우겨우 오긴 왔다. 험난하든 쾌적했든 온 거면 됐다. 딱 됐다.
   그가 서서 캔커피를 마시고 있는 해변가, 그도 걸었고 그가 가는 그쪽으로 왠 나비넥타이 신사분과 꼬마 숙녀가 걸어왔다. 뒤로 연노란색 최신형 최고급 컨버터블이 보이고 그 옆에 접이식 자전거가 펼쳐져 있다. 삼각형의 꼭지점에서 만나 모두 잠깐 멈추어 바다를 바라본다. 노신사와 J가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가 은근슬쩍 마주친 그 상태에서 눈동자와 얼굴을 움직이지 않은 채로 눈의 촛점만 원거리로 이동하면서 뭐라뭐라 중얼거린다. 마치 다시 만나서는 곤란한 어떤 남녀 관계였다는 듯이. 원래는 '연상하기'로 만나자마자 친해진 건데 실은 연상하기가 아니라 '끝말잇기'였다. 즉 이런 식이다. 오 바다, 라고 하면, 아 하늘, 다시 음 캔 맥주, 하면 으 캔 커피, 딱 탄성과 한 단어만 들릴락 말락 말하기, 그것이었는데 묘하게 그걸로 교감이 발생했다. 그래서 바로 이렇게 이어짐. 먼저 이쪽에서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혼자만 들릴만큼 말하면 또 저쪽 어르신께서 「자유로운 인간이여, 항상 바다를 사랑하라. 바다는 그대의 거울, 그대는 그대의 넋을 한없이 출렁이는 물결 속에...」 딱 거기까지만, 외웠던 게 떠오르지 않는 것인지 알지만 일부러 그만둔건지 불명확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전자 같다. 다시 이쪽에서 「돌고래들아, 너희는 바다에서 놀건만, 날이면 날마다 파도는 쓰고 짜지. 어쩌다 음 어쩌다 어 어쩌다 음음...」 그럼 저쪽에서 「여기 빛나는 바다에서 거센 바람이 일어나 테라스를 어어 테라스를 아잇 테라스를...」 무작정 명시를 읊을려다 갑자기 경쟁심에 불이 붙었을까. 겸연쩍게 웃으면서 어느새 살다 보니 삶에 지쳐 수없이 외우고 또 외우고 밤새 외워서 이 아가씨와 저 부인에게 속삭여주던 시를 모조리 잊어버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1.5초쯤 눈빛을 마주쳤다가 실소를 터트린다. 참 남자들이란! 못 말려?
   1개 언어에만 한정되어 통용되는 농담과 웃음. 같거나 비슷한 음률에 대한 발음과 해석. 사람들은 말하거나 들을 때 그 발언이 번역될 것이다, 라고 가정하면서 그것이 재밌냐, 재미있지 않냐, 라는 예상을 하지 않는다. 당연하지. 바보도 아니고. 그러나 글을 쓸 때는 약간 다른 문제다. 완전 웃기고 까무러치고 뒤집어져서 대박난 이야기, 번역된 걸 읽으면, 아니 도대체 뭐가 재밌다고 그러는 거지? 이와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한 경우가 가끔, 은 있을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 썰렁한 게 저기서는 배꼽 빠지게 웃길 수도 있고. 원래 1차적 유머는 하이개그에서 살릴 수 없는 뭔가가 있는데 언어가 바뀌면 사라지는 성질의 유형을 띄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면, 방금 노인과 J가 대화를 나누게 된 계기 또한 1차적 농이지만 이건 음, 반반일 것 같다. 어떤 뭔가에 대한 자신이 없다. 어렵다. 꼬였다. 그러나저러나 끝말잇기는 1개 언어, 연상하기는 다국어. 말로 표현이 어렵다만 1차, 1.5차, 2차... 이렇게 차근차근 층계를 올라가는 담소 때문에 금방 친해졌다고 하자. 아무튼,
   시작은 그랬고 간단한 인사말과 처음 봤지만 이상하게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던 것처럼 안부를 묻고 스스럼없이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 있다. 정적은 노-신사, '노'자 빼버리자, 사석에서 어느 여사님은 늙은 것도 원통한데, 라고 하시니까. 신사분께서 어이없이 발생한 고요함을 깨트리신다.
   「자네는 관상을 보니 음 약간 개상? 하관은 개구리상? 그런 거 같은데. 혹시 그런 얘기······ 들어보지 못했나?」
   「강아지상 말씀인가요? 지금 썬그라스 쓰고 있는데 썬그라스를 벗어야 관상을 제대로 보는 거 아닌가요. 아 그럼 노인장 아니 아저씨께서는 신통한 투시력이 있으신 것이 되는군요. 대답하자면 입은 좀 돌출되어서 다른 동물에 비유되곤 합니다. 하관이 발달되었다면 조금 무섭고 강한 인상이 되었을 텐데 미소년과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니에요.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껌이라도 씹어야 할까, 같은 쓰잘데기 없는 공상도 한답니다.」
   「음 그래? 관상은... 내 전공이 아니네. 난 뭐랄까 과거나 현재, 사주, 재물운, 타로카드 이런 게 아니라 미래를 본달까? 아니 예언? 노스트라다무스나 누구 누구는 모두 다 허당이야. 그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던지고 보지. 그래, 안 그래? 하나도 모르면서 말이야. 순 거짓말. 다 구라야.」
   「어르신께서 허당 같으신데요. 아니요 아니요. 연세 드신 분 치고 유머감각이 뛰어나신 분이 드문데 완전 개그맨 뺨 치신다구요. 엄청 멋져요.」
   「왠지 모르게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네만 아무튼 고맙네. 사람은 호의나 칭찬에 답하는 말에 인색하면 안 돼. 하지만 난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진 않아. 열불을 토하며 웅변을 한다 해도 입에서 화염방사기의 화마가 나가지는 않고. 하지만 머머할 것이다, 그럴 것이다,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르키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동공을 확장시킨 후, 부드럽고 다정하게 때론 살짝만 격정적으로, 그렇게,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고, 내게 당기고, 끌어 안아서?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오우 이런 뭐야. 잠시 딴 생각에 빠졌네. 그럴 수도 있어.」
   「하하하 어르신 말발이 아니 언변이 무척 뛰어나십니다. 왕년에 아니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오신 듯 보이네요. 나리께서 들으시기에 조금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도저히 외양과 언사가 일치하지 않는 듯 하여 여쭈어 봅니다만... 혹시 동년배 친구분들로부터 이런 꾸지람을 듣지는 않으신지요. '넌 말야 어떻게 된게 우리들은 모두 굽고 쭈글쭈글하고 기운도 없는데 도대체가 넌 뭐가 좋다고 그렇게 싱글벙글하고 즐겁고 건강하게 사냐? 너 혼자만 회춘하는 법이 어딨어? 이런 의리없는 놈 같으니라고. 대관절 집에서 뭘 퍼마마시길래 그래?' 어이쿠, 죄송합니다. 한번 뱉은 말은 절대 주워담을 수 없지만 꼭 이렇게 실수를 반복합니다. 넓은 아량으로 소인배 꽁생원의 허물을 덮어주시는 덕망과 선처를, 부끄럽지만 간절히 바래봅니다.」
   「이 친구 술수가 장난이 아닌데. 늙은이 놀리면 못써. 그래도 기분이 참 좋아. 아주 뒷북 유머가 일품일세. 나중 생각하게 만드는 농담, 다음날 아침에 터지는 웃음, 먼데이 모닝 쿼터백 개그. 젊은이가 할아버지를 아주 회전목마와 바이킹에 태우는군. 쥐었다 펼줄 알아. 잘 컸어. 자네는 말이야 뭔가 어떤 재주를 살리면 될 것 같은데 미래가 뭔가 보일려다 흐려지다가 자꾸 그런단 말이야. 자네의 미래를 슬쩍 보아줄려고 했는데, 그건 음 진짜 미래를 봐도 실례고 그 미래가 밝다면 말을 안 하는 게 좋고, 어두침침하다면 그 또한 말하는 당사자도 언짢은 일이니 차라리 함구하는 게 낫지. 그래도 재미로 조금만 볼까 했는데 지금 잘 안 보여. 딱 다른 잡다한 생각 때문에 잘 보이지 않네. 그분이 내려왔을 때! 오! 그 순간에는 말이야 미래로 가는 문, 사무실이나 집에서 보는 평범한 손잡이가 달린 문, 그것이 갑자기 공중에 떡 하니 나타난다네. 그것 주위로 물론 후광이 비치면서 주위는 뿌옇게 안개가 끼고 쪼끔 어두워지지. 문을 열려면 공중으로 날아올라야 하지. 어디선가 들어봤을 꺼야, 공중부양, 공중부양. 이제 날아올라야지. 슬쩍 붕 떠올라서 문 앞에 딱 서. 딱 선단 말이야. 그 다음 문을 열면 화사한 밝은 빛이 비추어서 젊음의 기운에 휩싸인다네. 성우의 음성도 들리지. 정말 고운 목소리로 어린 꼬마인지 아가씨인지 잘 분간이 안되는 정말 아름다운 음성으로, 미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누구의 미래를 알고 싶은 건가요?, 주인님은 붙일 때도 있고 생략되기도 해. 음 그렇게. 아 자꾸 말하다가 얘기가 곁가지를 뻗는군. 이 친구가 딱 정신의 민감한 부위와 가려운 곳을 정확히 보고 살살 긁는 기술이 뛰어나. 말을 술술 하게 만들어. 영화에 나오는 뭐 그런 사람이야? 범죄 심리 분석가? 노망든 것도 아닌데 젊은이 앉혀놓고, 아니 세워 놓고 벌주는 거 같아. 그런데 젊은이, 자네 옆에 있는 카약이 혹시 접이식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 접이식 카약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신사의 시선으로 한껏 귀여움을 받는다. 접혀진 상태만 보고 즉시 카약인줄 알았나 보다.
   노인과 신사, 라는 영화 제목이 있던가. 지금 대화와는 다소 관계없을 수도 있지만 이런 거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다. 완전! 맞다. 노인과 신사가 아니라 사관과 신사다. 아니? 아닌데, 아 맞다. 사관과 신사. 어르신께서 잠시 뜸을 들였다 한마디 건네신다.
   「자네 혹시 노인과 바다 읽어 보았나?」
   「아 그럼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입니다. 어떻게 아셨죠? 역시 전설적인 은둔형 심령술사 맞으시군요. 아까 먼발치서 잠시 춘부장이 보이길래 제일 먼저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지만 막 그 소설이 떠올랐걸랑요.」
   「오오 그럼 그 다음으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마...해서 물어보는 건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것까지 읽지는 않았겠지? 그럼, 그럴 꺼야. 암 그러면 못 써. 안 돼. 젊은 친구가 말야.」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영화까지 본 걸요. 죄송합니다. 조심스럽게 하나 여쭈어도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작정하고 이젠 제가 묻고 싶군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설마한들 읽으신 건 아니죠? 뭐니뭐니해도 또 뭐가 있죠? 아, 라스 채스트의 만화 에세이도 괜찮아요. 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 돼니?」, 「어떤 얘기? 우리? 아, 아 그럼 읽었지. 명작 중의 명작이지. 그럼.」 사람은 살면서 새하얀 거짓말을 해야 하는 기회가 생기는 법이다. 잠시 쉬어 가는 분위기다. 다 쉬었다. 이어서,
   「저...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궁금해 해도 괜찮을까 걱정되네요.」
   「어 그럼. 괜찮아 괜찮아. 얼마든지 뭐든지 언제라도 어떻게든 물어보시게. 대환영일세.」
   「아저씨 화법이 참 특이하네요. 친구분들 가운데, 어느 지역과 분야에서 그걸로 지존이셨을 꺼 같아요. 아 궁금한 점은 이거에요. 어쩌면 그러지 않을까, 아까부터 내심 굉장한 의혹이 일었거든요. 혹시... 요원 아니세요? 앗 은퇴하셨을 테니 잠깐 현역을 도울 일이 있으시다거나 꼭 지금이 아니어도 분명 직감적으로 두더쥐 생활을 한동안 하셨을 꺼 같아요. 주로 책상에만 앉아 계셨거나 고위직만 거치셨다고 할지라도 왠지 모르게 첩보 업계에서 일하셨을 꺼 같은 오묘한 감이 퍼뜩 느껴졌다고 할까요? 솔직히 보자마자 즉시 떠오른 감정은 이랬어요.」 순간 이 말을 들은 노인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지만 얼굴에 한 수 당했다, 배웠다, 예리한데? 라는 당혹감과 얘 뭐지? 라는 일종의 신기함과 호기심이 반반 섞여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교차하는 것, 그것조차 한박자 아니 한 세박자 반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런 일은 사는 동안 늘 셀 수 없이 겪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가장하며 답을 하신다. 「어이쿠, 말하면 안되지만 벌써 들켜버렸군. 맞다, 라고 말할 순 없지만 음 젊은이 눈썰미가 대단한데? 어떻게 알았어? 아니 아닌데, 내가 이상한가? 푸하하하하. 참나, 내게 인생이 친절이 아닌 첩보와 스릴러를 선사하게 해준 것 같아 기분이 무척 들뜨네 그려. 맞다는 말은 농담이지만 기분이 결코 나쁘지 않은데? 오 좋았어. 내 한가지 제안을 하지. 내가 갖고 있는 이 단순한 낚시대와 접이식 자전거 그리고 오리발, 조금 진열이 약하니까 음 뭐가 있더라... 어 그게 있었군. 해변가 근처에 있는 인터콘티넨탈 호텔 4박 5일 숙박권. 딱 이런 조합의 세트를 자네의 그 접이식 카약과 바꾸는 게 어떤가? 낚시대, 한정판 최고급이야. 자전거, 비밀이 숨겨져 있어. 버튼 잘못 눌러보면 깨달을 꺼야. 여관은 좀 촌스럽네만 꽤 괜찮은 호텔이야. 호텔 뒤로 골프장, 앞으로 해변이야. 그 골프장 누가 설계했는 줄 아나? 맞혀 봐. 누구드라? 나도 몰라. 백상어던가? 어떤 유명한 사람이라던데 잊어버렸어. 나이 들면 이렇다니까. 싫으면 꼭 바꾸지 않아도 되구. 또 혹시 알아? 딱 보니 현지인이 아닌데 이곳에 놀러온 거면 가까운 시일 내에 우연히 다시 만나서 이 노인장과 드라이브도 같이 하고 넓고 푸른 바다가 보이는 골프장에서 한 게임 즐길지 누가 알겠나. 사람에 따라서는 좀 아니꼬워 보일 수도 있다지만 그건 딱 두가지 이유로 모두 날려버릴 수 있다네. 싹 발라버리면 그 누구도 암말도 안 할 꺼야. 첫째, 내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네. 쉽게 말해 자네나 (꼬마 숙녀) 이 녀석과 비교해서 내겐 남아 있는 살날이 그리 넉넉치 않아. 둘째, 난 그 접이식 카약을 지금 당장 타고 싶어. 또 이 자전거도 내게는 별로 필요없는 물건이야. 오히려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울 뿐이지. 지극히 사적인 얘기를 붙여서 미안하네만 난 뭐든지 <사서 쓰고 버리고> 그것의 반복 즉 보관하고 뭘 쌓아 놓는 걸 싫어하는 성미라네. 그렇다고 중고품이나 고전적인 제품을 꺼려하지는 않아. 근검절약, 그걸 내가 실천하는 방법은, 착한 일을 하는 내 방식은 따로 있다네. 게다가 어릴적 친구들을 만날 때는 철두철미하게 기름기를 쫙 빼는 걸 잊으면 안 되지, 암. 그렇고 말고. 어쨌든 그렇다네. 왜? 지금 세상에 왠 물물거래냐고? 멋지자나! 사람들은 현실에서 직접 하거나, 찾거나, 반기지를 않고 온종일 날마다 낭만이 없다고들 난리야. 안 그런가? 또한 난 돈을 더 벌거나 모으면 안 된다네. 욕 먹어! 이미 넘치거든. 하지만 이렇게 살면서 늙었는데 가끔 곡을 쓰거나 추상화를 그릴 때, 아 난 확고하게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드는 스타일이야, 그럴 때 곡이 잘 써지질 않는다거나 그림에 대한 착상이 한동안 떠오르지 않으면,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는구나, 뭣 때문이지, 그러면서 그분이 오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네. 어찌하면 실마리를 잡고 사단을 낼까? 노을을 바라보며 브랜디를 한 잔 할 때? 음 더없이 기분은 좋겠지. 기분만. 누군가를 끝끝내 감동시켰을 때? 정말 딱 순수하게 상쾌함의 감정 그리고 곧바로 보람과 교감과 극렬한 희열감도 느끼겠지만 대체로 그보다는 잔잔한 시상이 마음을 물들인달까, 저기 저 파도 같은 잔잔한 출렁거림에 가깝겠지. 어떡하면 곡이 잘 써지고 그림이 잘 그려지겠나? 여행, 연애, 운동, 휴식, 봉사, 기부, 사람들과의 교류, 친목 다 아닐세. 최소한 내게는. 적어도 지금 말하는 주제로는 말이야. 그건 무엇이냐면, 때로는 내게 푼돈일 테지만 새로운 상품을 갖게 되었을 때야. 결국 새로움이지. 여행이든 연가든 뭔가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면 말도 안되는 얘기는 아니라고 이해할 수 있을 걸세. 뒤늦게 성공한 예술가나 스포츠 선수 사례에서 간혹 말하는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네 뭐하네, 그런 말들과는 다른 얘기지. 복권 당첨된 사람들도 대체로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아. 누군가 그러다 쫄딱 망했다면 유별나게 그것만 커 보이는 현상들과 작품에서는 항상 모든 게 과장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돼. 새로운 상품에 따른 신선한 경험처럼 그저 잘 자고, 잘 먹고, 잘 즐기고 등등 한마디로 웰빙, 그것이 중요하다네. 그래서 반 고흐 같은 화가의 미술품도 좋지만 그 인생이 참 뭐라 말할 수 없게 구도적? 극적으로 보이지 않나. 그건 결코 거창하다거나 속물스럽다거나 어 유별난 게 아니야. 그냥 자연스러움 바로 그것이야. 그러니 혹시 이 거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저기 보이는 컨버터블의 트렁크를 열테니 조금이라도 끌리는 게 있다면 내 다 내줄꺼네. 자네에게. 아니 그렇게 하세. 이왕 마음 쓰는 거, 기왕에 하는 물물거래 기억에 남아야지. 그래 그거 좋겠네.」
   「어쩜 그렇게 마음에 쏙 드는 제안을 하시는지. 더 바랄 게 없네요. 할아버지와 손잡고 계시는 (손녀라고 할려다가) 꼬마 숙녀가 웃었으니 계약 완료된 겁니다. 나중 두말하시면 안됩니다. 안 그러실 꺼죠?」
   저쪽에 보이는 컨버터블 조수석에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청아한 아가씨가 지금에야 눈에 띈다. 또 설마하니 번쩍번쩍 하늘색(어? 아깐 노란색 같았는데?) 컨버터블 조수석에 앉아 있는 처녀는 딸이 아니라 부인이고, 저기 저 아장아장 걷고 웃고 말하며 고양이를 껴안고 있는 손녀는 혹시 딸이 아니었을까? 첫째? 아니 한 넷째? 왜? 남의 일인데, 사랑일 텐데, 사랑에 왠 국경, 로미오와 줄리엔 안 봤어? 언제적 작품인데. 사랑에 국경이 어딨어, 가 아니라 그건 옛날 얘기며 진부한 말이고 그냥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 끝.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사랑. 그건 그렇고 어찌되었든 대박난 물물거래다. 가지고 다니기엔 좀 버거웠을 텐데 잘됐다. 접이식 카약은 11.3kg 패들 1.8kg 적지 않은 무게라서 차를 또 빌려야 하나 했는데 말끔히 해결되었다. 트렁크에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희한한 물품들이 많았지만 그래서 눈이 정말 호사를 누렸지만 추가품으로 딱 하나, 고급 멜빵, 을 더할려다가 가냥 놔두고 오히려 오리발을 추가품에서 제외했다. 가지고 다니기 귀찮으니까.
   그러나, 그러나 그렇게 깔끔하게 물물교환이 딱 끝났느냐, 그건 아니다. 딱히 뭔 사건이 터진 건 아니고, 서로 물품을 바꾸었는데 왠 분홍색 컨버터블이 저 멀리서 질주해 오는 걸 신사분이 급작스럽게 눈치 채고, 큰일났으니 그에게 차에 타라고 해서 노란색인지 파란색인지 하여간 그 컨버터블에 얼른 탔다. 신사, 딸, 손녀 그리고 J 이렇게 네 명이서. 그렇게 신사에게 받은 4박 5일 숙박권을 사용할 수 있는 그 호텔까지 오게 되었다. 가던 중 눈치를 보아하니 아까 쫓아왔던 분홍색 컨버터블에는 신사의 본처가 타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딸로 보이던 아가씨는 내연녀였다. 손녀? 당연히 음 그 다음은 긴가민가하다. 아주 잠시 쫓고 쫓기는 흥분감과 긴장감에 짜릿한 전율과 반전까지 더군다나 밑지는 장사도 아니었다. 그렇게 정말 거짓말처럼 모험이 휴가로 바뀌게 되었다. 믿을 수 없었으니까 당연히 여행 일정이 굉장히 들뜨고 빨리가는 느낌 때문에 즐겁고 재밌으면서 시간까지 천천히 가는 삐─ 삐─ 욕먹을 사태는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재미있고 짜릿하며 시간도 느리고? 그것까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어느 정도 가닥이 나왔다 싶어서 마음을 놓았는데 반전도 한두 번이지 이 호텔 사장이 그 신사를 쫓아왔던 핑크 컨버터블 영부인? 에잇, 거기 엮이면 헤어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아차, 꼭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비밀이나 정보를 캐낼 때까지 한달이고 두달이고 그 객실에 계속 머물러주라고 도저히 사양할 수 없게끔 만들어서, 특급 호텔 생활 오래하면 정말 지겨운 게 이거구나, (진짜 혼자 있을 때 조용히 혼잣말로) 에라 이짓도 못 해 먹겠다, 라는 반응을 이끌어낼지도 모를 일이지 않나.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야... 완전 좋겠지만. 또는 이름은 인터콘티넨탈 호텔 지점인데 뭔가 신출귀몰 건축가의 특수한 설계로 탄생했기 때문에 딱 1개 객실은 하루에 1번 방이 움직이는 그런 건물일지도 모를 일이다. 한술 더 뜨면 하루가 지나서 다급하게 호텔을 포함한 인근 지역이나 섬 전체에 긴급 재난 지역이 선포될지 누가 알겠나. 전염병 뭐 그런 이유로.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완전!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극히 미미한 불안감의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살면 그렇게 오래오래 산다면 또 그러저럭 적응해서 살게 된다.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퍽이나 들어 봤던 말, 이분은 도박을 저분은 주색을 당신은 소설을 나는 가난을 그렇게 사람에 따라 딱 1가지 주의해야 할 뭔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만 한다면 크게 부주의하지만 않는다면 당신도 꽤 괜찮은 순탄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가분수 포동포동 꼬마에서 분자보다 분모가 작은 분수인 진분수로 훌쩍 커버린 중년이 될 때까지 그래도 한 번쯤은 읽어 봤을 글, 어느 지역은 자연과 저곳은 역동성과 어딘가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미묘한 문제들을 또 다른 유적지에서는 사회나 경제 문제 가운데 제일 큰 건 뭐다, 라는 제각기 연관되면서도 다른 개인과 전체의 삶에 관한 좀 흔한 진술들.
   그건 그때 가서 확인하고 이제 호텔과 가까운 해수욕장에서 낯선 그곳으로 치유 여행을 온, 애지중지 금지옥엽으로 성장한, 왕성하고 단정히 자라나서 불륨감 있고 인상도 괜찮은, <정숙해 보이지만 놀 땐 노는, 이때다 싶으면 묶었던 머리 푸는, 낮에는 따사롭고 인간적이며 커피 한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지만,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 그런 반전 있는> 아가씨가 등에 오일을 발라 달라며 유혹하는 일만 남았나? 애초에 정한 여행의 목적이 힐링이냐 모험이냐, 그에 따라 실제 여정도 좌지우지되겠지만 처음에 우발적으로 떠나온 것이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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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54

from 소설 2015. 8. 14. 15:51

   이런 젠장! 왜 기계식 키보드를 샀는데 글이 안 써지는 거야? 이번 편 분량을 먼저 쓰고 나서 즉 부담되고 어려운 일을 하고 나서 소풍을 떠나겠다, 라는 순서를 따라야 했나. 한시름 덜었나 했는데 이런 개뿔도 모르면서 또 행동이 앞섰어. 장기적인 관점에서 행복감에 대한 기계식 키보드의 영향력은 예상보다 낮을 가능성이 크지만 길고 가는 만족감을 안겨줄 줄 알았는데, 일시적으로 창조적 생산성을 높여줄 거라고 내심 콩알만하게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더군다나 부담감만 늘었으니 괜히 혹 떼러 갔다가 도로 혹 한 개를 더 붙이고 온 국면인가. 물건 사기 지름신이 뭔 없던 능력을 가져다 준다고, 돌맹이가 꽃을 피울리는 없는데 하필 그깟 예지력을 믿는 게 아니었어. 키보드 매니아들 웹사이트에 들려서 그들의 온갖 설전과 인터넷 지식들을 짧은 시간에 습득한 다음 기계식 키포드를 집에서 인터넷을 통해 주문했는데, 이 글을 쓰는 당시 물건이 아직 도착하진 않았지만 그 물건을 곧 받는다는 두근거림으로 뭔가 새로운 영감이 탄생할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손글씨로 수첩에 내용을 완성한 다음에 주문할 걸 괜히 섣불리 지름신이 내려와서 쇼핑에 빠져들어 쉽사리 결제를 한 것 같다. 혹여나 이렇게 한참을 투덜거린 다음에 또 몰라, 번뜩이는 그분이 내려오실지도. 이건 지킬?
   저런! 축배를 너무 일찍 들었군. 천재들의 그늘에 내내 가려져 있다가 뒤늦게 대기만성으로 처음 시상대 위에서 샴페인을 터트리는 1등 선수보다 마치 혼자 체스 두며 노는 아저씨 같아. 홀로 체스를 두면서 한 수 두고, 체스하는 사람 어디 갔나, 라면서 깐족거림과 동시에 탁자 건너편으로 재빨리 넘어가서 다음 수에 대한 갈등에 빠지는 1인 2역 뚱딴지. 모노드라마에서만 1인 2역하란 법 있나 하면서. 기계식 키보드만 준비하면 만사형통? 아니야. 아직 그 고전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기행도 안 해봤자나. TV나 영화에서 거의 안 본 사람이 없다는 그 장면. 원고지에 글을 써내려가다가 안 써져서 머리를 긁적거리고 종이를 찢고 구기고 뭉쳐서 방구석에 집어 던지기. 그걸 계속 반복. 사무실이나 방바닥에 그 원고지 구긴 뭉치가 가득 쌓인 장면.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럼 늬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항상 그런 식이야. 매번 똑같아. 새로운 여자를 만나서 사랑은 드문 것이니까 이 사랑은 소중하다며 막연하게라도 고마워 해야 하는 것이라고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다가 금새 지겨워지면서 한눈을 파는 그 과정처럼. 당최 기다림을 즐기질 못한다구 이 친구야. 생각해 보라구. 너의 글을 읽고 누군가 즐거워 한다면 기쁨의 회전목마와 즐거움의 총각 잔치 그 사이에 있는 기다리는 재미를 왜 즐기지 못하는데? 연애를 예로 들면 완전 뜨겁게 불같이 타오르는 사랑도 있지만 점점 그 아름다움과 절실함이랄지 애틋함을 키워가는 경우도 있어. 그 사람은, 내 님은 나 만 알고 내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되는 것이라며. 독자 또한 글쓰는 사람과 같이 그 다음, 이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마치 몸과 나이만 어른이고 다시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느낌을 갖게 되는 순간은, 그것은 아마 1번 글을 읽을 때와 2번 글을 읽을 때, 바로 그 중간의 어디쯤일 꺼야. 딱 1번, 막 2번이 아닐 수도 있어. 난 그렇게 생각해. 왜 안 써지는 생각만 하는 거야. 퇴근 후 집에 가서 배우자의 엉덩이를 토닥거릴 안락한 기분을 떠올려 보라구. 아, 이건 잘못된 비유, 인정. 독자님, 고귀하신 그들의 기다림을 생각해 봐. 1번 글과 2번 글을 그냥 읽든 웃으며 읽든 그건 잠깐이고 모두들 자기의 삶을 사는 거라구. 그게 다야. 물 반 고기 반이라 말하던 이야기 전개를 뺀 인문-교양학적인 화제를 곁들여 쓰려는 욕심은 이야기만 쭉쭉 빼지 못하니까, 돈 빌려주라니까 죽는 소리하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 거 아니겠어. 대사 외우는 게 싫어서 배우의 꿈을 포기하고, 사인하는 걸 거북해 하니 연예인은 되지 않겠다는 변변치 못한 핑계와 똑같아. 소설과 인문, 교양, 자기계발 등등 두마리 토끼와 월척을 한꺼번에 낚을려다 죽도 밥도 안 되는 수가 있어. 누울 자리 봐 가며 다리를 뻗어야지. 그래 봐 줬다. 잔소리 이만 줄일께. 깡통이 아니라면야 알아들었을 테니까. 여기까지는 하이드. 
   어찌됐든 7인의 친구들은 쥬라기 공원, 그 섬에 당도하지 못하고 다시 하워드의 집과 가까운, 이상한 요트 여행을 떠났던 해변으로 되돌아 왔다. 왜 그 섬에 들어가지 않았는지, 언제 요트가 정착한 슈퍼 요트에서 떠나왔는지, 어떻게 다시 처음의 이 장소로 되돌아왔는지 기억하는 친구들이 하나도 없었다. 뭐 이런 숙취가 다 있나, 하면서 하워드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 어디를 가든지 만날 수 있는 카페에 들려 차를 마신 후 이번 모임을 마무리할 계획으로 그 찾집에 들어간다. 찾집에 들어가 보니 한쪽 면이 꽉 막혀버렸던 엇그제 그 카페와는 달랐다. 음악이 있고 사람들이 보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다. 그런데 서로들 옆 테이블의 다른 사람 노트북을 보던지 신문을 보거나 자기 핸드폰을 보든지 하나같이 시간과 날짜를 의아해 한다. 왜냐하면 하워드의 집에서 출발한 일시에서 불과 반나절 뿐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 몇 시간, 같은 날짜, 이게 뭔가. 약 3박 4일? 일주일? 까지는 아니래도 분명 2박 3일쯤 보냈던 거 같은데 시간이 되돌려질 리는 없고, 지구의 자전이 느려질 수도 없는 데다가 과거로 시간 여행을 갔다온 것도 아닌데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딱히 기적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조금 피곤하지만 마지막 날 기억이 모두 끊겼으니 또 정확한 설명도 안 되고 잃어버린, 아니 늘어진 시간의 원인에 대한 이해도 끝맺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뭐야 이거? 이걸 믿으라고? 이거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이런 경험 처음인데, 처음.
   「어, 어. 누가 설명 좀 해 줄래?
   「글쎄. 점원에게 물어보고 대답을 듣고 나서 난 화장실에 가서 귀를 씻었어.
   「얘는 냉수 3컵을 마셨어.
   「쟤는 에스프레소 2잔 원샷했고.
   「볼을 꼬집어도 따갑고, 귀를 비틀어도 똑같아.
   「우리가... 미친 건 아닌데.
   「이러다가 우리 몸의 크기가 막 줄어들어서 소인이 되는 거 아냐?
   「내 핸드폰만 그런 게 아니었네.
   「이건 장난도 아니고, 행사도 아니고. 그냥 사실이야. 현실. 초현실도 공상도 꿈도 아닌 실재라고.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야. 못 믿겠어. 사기야.
   「내가 봤을 때는 딱 3일 된 거 같거든. 그런데 왜 그러지. 일단 받아들이자.
   「받아들이는 건 문제가 아닌데 이건, 이건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어이없어. 뭐지 이거?
   「시간이 천천히 가면 나쁜 건 아니잖아? 물론 당사자만 그러겠지. SF 영화에 보면 우주 여행을 갔다 오면 자기는 그대로인데 지구의 시간은 무진장 흘러가버려서 손자 손녀들이 더 어르신으로 나오잖아. 하지만 이건 우리와 그들 즉 이 카페 안의 사람들과 함께 시간이 더디게 갔어. 아니 아니지. 우리만 시간이 더디게 갔나? 뭐야 이거. 잘 모르겠는데.
   「이건 말이야, 내가 봤을 때는 일종의 착시야. 착시? 아, 착각. 우리가 낮잠 잔 걸 1박으로 계산한 걸 거야. 그래야 설명이 되는데... 아닌데, 아니란 말야. 분명 2박 3일을 보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자, 생각해 보자구. 한참 재미난 일을 하면 시간이 빨리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지겹고 지루한 작업을 반복하면 시간이 더럽게 안 가. 깊이 들어가지 말고 이것도 상대성 원리야. 어 잠깐, 행복하면 시간이 빨리가고 불행하면 나이를 천천히 먹는다? 세상은 공평하다는 말인가? 아 옆길로 새면 안 돼. 그러면 우리가 너무 활동적이고 짜릿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반나절을 2박 3일이라고 착각한 건가? 아니 아니 절대 아니야. 이것도 아니란 말야. 도저히 뭘로도 설명이 안 돼. 미치겠다.
   「우린 미치지 않았다구. 난 정상이야.
   「그래 넌 미치지 않았어. 원래 상태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으니까 아예 지금이 더 정상이야. 극히 이성적인 상태야. 멀쩡해. 그냥 믿기지 않는다 뿐이지. 아, 미안. 이상한 일이 닥치면 내가 좀 직설적이 되나 봐. 
   「됐어. 벌써 빈정상했어. 아예 그런 말을 하지를 말던가. 저속하게 말이야. 넌 전혀 속되거나 상스럽지 않고 매우 점잖고 얌전한 친구란 걸 다 아는데 뭘. 다만 간혹 음란해. 미안, 농담이야. 
   「하여튼 유치하기는. 됐고, 마지막 날 누구 기억하는 사람 없니? 왜 모두 필름이 끊겼지?
   「난 NC 사장이 왕요트 주인일 꺼라고 기대하며 기다린 것 까지는 기억나. 그러나 딱 거기까지. 거기서 끊겼어.
   「가물가물하게 아주 희미하게 뭔가 그림은 보여. 하워드 요트로 돌아가서 거기서 스르르 잠이 들고 좀 덜컹거린 기분 정도로만.
   「어떻게 된 거지?
   「살다보니 참 별 일이 다 있네.
   「앞으로 살면서 더 희한한 일들을 많이 많이 보게 될 꺼야!
   「어? 그건 뭐야? 예언이야? 넌 마술사? 이건 주술?
   「혹시 이건 아닐까? 이 도시의 축제가 진행중이니까 실제 시간은 우리가 인지한 게 맞고, 나머지 곧 종이신문과 기계 즉 핸드폰과 노트북과 시침 시계 등등을 모두 2박 3일 이전으로 돌려놓은 상황 말야. 그거 같은데. 이거야. 이거라구.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난 또 바보된줄 알았잖아.
   「나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네 의견이 틀린 것 같은데. 저기 텔레비젼 봐봐. 뉴스 나오잖아. 방송 앵커랑 리포터, 방송국 모두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과 대립하고 있어. 저기 드라마 방송되는 화면 보이지? 드라마도 아직 찍지도 않은 걸 방송에 내보낼 리는 없잖아?
   「그건 그래.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니콜라우스, 니키. 너꺼 노트북 봐 보자. 접 때 왕요트 찾아갈 때 접속했던 웹사이트, 거기 무슨 단서가 있을지 몰라. 왠지 그럴 것 같지 않니?
   「그래. 그게 좋겠다. 오 왠지 모르게 흥분되는데.
   「그러게 말야. 뭔지 모르는 리듬을 타고 있어.
   「맛난 음식과 몸에 좋지만 맛없는 음식, 그 가운데 뭘 먼저 먹을까! 오늘 공부하고 내일 노느냐, 지금 당장 용돈 다 써버리고 한동안 청렴하게 살든가, 사람 일은 모른다고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겠냐면서 오늘 바로 지금 모든 걸 마음가는 데로 할꺼라며 스피노자가 심은 사과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릴 것인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런 동기부여를 만드는 생명수, 그것의 제조비법을 정확히 분리하여 나누어 가지고 있는 핵심 경영진, 핵심 경영진이 접근 가능한 그 비율이 씌여진 문서, 그것이 보관된 스위스와 바하마 버뮤다 군도의 비밀금고, 그 금고 담당 현장 요원, 그 현장 요원을 관리하는 코드명 관리 책임자, 그 인간의 옆집에 사는 어린이, 이런 초딩이 즐겨 읽는 동화에 나오는 괴물 콩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구름 위 세상에 도착한 아이슬란드 탐험가 같지 않니? 꼭 우리가 말야. 그것도 지금.
   「뭔 말이야?
   「여긴 보니까 꼭 촬영 스텝들로 보이는 사람들만 있는 것 같은데.
   「다시 찾아야 돼. 내 척키 인형.
   「나도. 특수 코팅된 색종이로 만든 대형 종이배.
   「다들 정상이 아니야. 너네들 말리고 있어. 뭔지 몰라도 걸려들면 안 돼. 저들은 이걸 노린 거라구. 정신차려. 너네들 이름이 비정상, 꼭 그런 거 같아.
   「일단 그 웹사이트 들어가 보자.
   「그래 시간이 정말 반나절만 지났다면 거기, 거기 어디지? 그래, 쥬라기 공원에 다시 가보는 거야! 여기서 공룡 본 사람 있어? 없잖아. 혹시 알아? 이번에 보게 될지.
   「박물관이 살아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
   「그래 맞아. 시간이 정말 반나절만 지났다면 거기 다시 놀러가 보고, 우리가 느꼈던 시간이 맞다면 웹사이트든 NC 사장이든 에르메스씨든 어디서든 확실한, 납득되는 단서를 찾고 이해를 해야 해. 답답해서 현실과 이상이 분간이 안되잖아. 어때, 그래야 하잖아?
   「맞아.
   「콜.
   「오! 저기 저 사람 스티브 발머 아니니? 완전 똑같이 생겼는데. 뭐야 그와 얘기하는 사람은 케빈 스페이시랑 닮았는데. 아니 닮은 게 아니네. 맞네 맞아. 둘 다... 내가 잘못 봤나? 니콜라스 케이지 윤곽도 보이고 아무튼 이상한데. 아닌 것도 같고.
   「너가 잘못 봤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가 미쳤나 안 미쳤나, 그걸 따질 때라구. 여자도 아닌데 엄한 데다 한눈 팔지 말도록.
   「Yes, Sir!
   숫자 도메인의 그 웹사이트에 들어가니 저번에 봤던 사진과 채팅이나 공지사항들은 없고 왠 초대장만 덩그러니 보인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한다, 그러니 오라, 이곳으로! 간략하게 이게 다였다. 하지만 이 친구들은 모히토, 하워드의 요트에 입력되어 있는 좌표값이나 이동 기록을 확인하면 되니까 일단 그곳으로 가기로 한다. 미친 사람 취급되기 일보 직전이라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다. 게다가 그들이 시간 개념? 관념을 잘못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시간을 번 거다. 모험까지 덤으로. 즐거움과 새로움, 꿈과 낭만과 그 다음 대기자 명단에서 기다리고 있는 좋은 단어들, 마구 계속 따라온다. 그 원리를 상세히 알게 되고 연구해서 어딘가에 알리고 발표한다면, 오 대박! 제정신이 아닌 게 맞다. 혹시 그 섬, 쥬라기 공원에 어렵싸리 찾아갔는데 그 섬이 이동식 섬이라서 교체 멤버, 지명 타자 <알라딘의 요술램프> 팻말이 나 섬 이름, 이라고 광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건 모르겠고 일단 떠났다. 두고 보자.
   자, 그들은 1시간인지 몇 시간인지 불확실한 못 믿을 일정에 따라 그 섬으로 가고 있다. 하마터면 <자, 도착했다>라고 쓸 뻔 했다. 천만다행이다. 기계식 키보드, 손맛이 좋다. 죽인다. 기똥차다. 착착 감긴다. 쩍쩍 달라붙는다. 물론 좀 과장했다. 아니 많이 그런 거 같다. 좋기는 한데 막 날아갈 것 같지는 않다. 솔직히 말이다. 조금 지나면 이 정도가 기본 아니겠어, 라고 이 층위에 적응될 것이다. 세상일이 다 그렇다. 그렇게 미지의 신비한 쥬라기 공원으로 가는 동안 하워드의 요트, 모히토에서 딱히 다른 놀이도 아닌 가장 유서깊고 무난한 인류의 놀이, 즉 담소를 나눈다. 말을 잘 하는 친구들이다. 그런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닉이 대뜸 명대사 읊기, 가 아닌 명대사를 연기했던 전설적인 배우들이 사석에서 했던 말, 공공연히 매스컴에 슬쩍 흘린 몇 마디, 여기서 한 농담, 저기서 떨구었던 입만 뻥~끗하면 난리 날 언사, 어디에서 듣고 보고 읽고 구경하기 어려운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보아하니 꽤 괜찮은 연기이자 공연이다. 이걸 눈 앞에서 안 본 사람은 절대 실감할 수 없을 것이다. 문단을 넘기기 전에 여기서 잠깐, '소문나면 안 될 비밀'이란 게 짐짓 있긴 있는 것일까? 정말? 글쎄요! 모르는 사람만 속앓이 할 수도 있지만 있어도 탈이고 없어도 진부하니 즉 한마디로 모순이다. 다만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난떨다, 넉살 피우다, 전자와 후자가 서로 어떻게 비슷한지는 딱 1번만 생각해 볼 일이다. 
   「잠깐 분위기 가라앉은 것 같으니, 나만 말짱한가, 왠지 모르게 다들 침울한 것 같으니까 말하지 않고 듣고만 있어도 돌연 기쁘고 재미있도록 명언이랄지 멋진 말 몇 마디 해볼께. 지금이 이런 말 하기 딱 알맞는 것 같아. 혹시 따분하거나 재미없을 수도 있으니 미리 양해를 구하고 말야. 자, 준비 됐어? 시작할께.
   「일단 몸 먼저 풀어야 하니까. 원주율 먼저 가자! 3.14159 26535 89793 23846 26433 83279 50288 41971 69399 37510 58209 74944 59230 78164 06286 20899 86280 34825 34211 70679. 더 할 수 있지만 여기까지. 그리고 올림푸스 12신은 제우스, 포세이돈, 헤라, 아프로디테, 데메테르, 아테나, 아폴론, 아르테미스,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아레스, 헤스티아 혹은 디오니소스.
   「여기 나오는 괴물 및 종족은 고르곤, 그라이아이, 기가스, 라미아, 메두사, 미노타우르스, 사티로스, 세이렌, 스킬라, 에키드나, 카토블레파스, 켄타우로스, 키메라, 퀴클롭스, 티폰, 퓌톤, 하피, 헤카톤케이레스, 히드라. 어! 왜 괴물을 먼저 말했지? 이어서 티탄! 니케, 레아, 레토, 메노이티오스, 므네모시네, 비아, 셀레네, 아스트라이아, 아스트라이오스, 아틀라스, 에오스, 에피메테우스, 오케아노스, 이아페토스, 젤로스, 코이오스, 크라토스, 크로노스, 크리오스, 테이아, 테티스, 테미스, 팔라스, 페르세스, 포이베, 프로메테우스, 헤카테, 헬리오스, 히페리온. 자, 그 다음으로 태초의 신이 나와야지. 가이아, 닉스, 아난케, 아이테르, 에레보스, 에로스, 오레, 우라노스, 카스마, 카오스, 크로노스, 타르타로스, 탈랏사, 폰토스, 헤메라. 그 밖의 신과 티탄과 님프는 이렇다네. 고르고, 네레이드, 네메시스, 다프네, 데이모스, 디오네, 메두사, 무사, 모르페우스, 스틱스, 아글라이아, 알라스토르, 아스클레피오스, 에로스, 에리니에스, 에리스, 오리온, 운명의 세 여신(모이라이), 이리스, 타나토스, 티케, 카론, 페르세포네, 프리아포스, 프시케, 헤르마프로디테, 헤베, 휴프노스. 그리고 로마 고유의 신은 야누스, 유스티티아, 포르투나, 플로라 이렇다네.
   「여기 등장하는 영웅을 또 빼놓을 수 없지. 디오메데스, 메데이아, 벨레로폰, 아이아스, 아킬레우스, 아탈란테, 오디세우스, 오르페우스, 오이디푸스, 이아손, 카드모스, 테세우스,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 나우폴리오스, 네스토르, 라에르테스, 륀케오스, 멜라스, 멜레아그로스, 몹소스, 칼라이스, 제토스, 부테스, 아드메토스, 아르고스, 아우톨루코스, 아이탈리데스, 아스칼라포스, 아카스토스, 악토르, 안카이오스, 암피온, 에치온, 에르기노스, 에우페모스, 에우리알로스, 오일레우스, 이다스, 이드몬, 이올라오스, 이피토스, 카스토르, 클뤼티오스, 탈라오스, 텔라몬, 타퓌스, 팔라이몬, 펠레로스, 페리클뤼메노스, 페이리토스, 펠레우스, 필록테테스, 포리클리메노스, 포이아스, 폴리데우케스, 프론티스, 힐라스, 메넬라오스, 아가멤논, 네오프톨레모스, 니레우스, 마카온, 아이아스, 메돈, 메네스테오스, 메리오네스, 스케디오스, 스텐토르, 스테넬로스, 아가페노르, 아스칼라포스, 아우토메돈, 안티파테스, 안틸로코스, 에우도로스, 에우리알로스, 에우리필로스, 이도메네우스, 탈티비오스, 테우크로스, 테우시테스, 토아스, 트라시메데스, 틀레폴레모스, 포이닉스, 포다르케스, 포달레이리오스, 프로마코스, 프로테실라오스, 고르기티온, 글라우코스, 다레스, 데이포보스, 헥토르, 아이네이아스, 파리스, 사르페돈, 돌론, 리카온, 레소스, 멜라닙포스, 미돈, 아카마스, 아이세포스, 알카토오스.
   「뭐야 말로만 듣던 고기능 천재 서번트가······ 닉이었어?
   「오 뭐야, 얘 괴물이야?
   「처음엔 뭔 장난할려나 했는데, 이거 장난이 아닌데?
   「얘들아 이젠 몸 풀렸으니 좀 멋진 말 해볼께 좀 더 기다려 보렴.
   「언젠가 모리스 슈발리에가 말했지. 영화는 이를테면 당신이 전화를 통해서만 구애하고 싶은 아름다운 여자와 비슷하다. 어때? 아직 모르겠지? 무반응. 전율 때문에 얼었다. 안 그럴 수가 없겠지. 카페인이 필요한 건지 술이 마시고 싶은지 또는 잠자고 싶은지 그저 쉬고 싶을 따름인지 통 속내를 보여주질 않고 있다. 무엇보다 말없이 놀라는 게 급선무다. 그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코메디를 만들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공원과 경찰관 한 명 그리고 예쁜 소녀 한 명이다! <찰리 채플린>. 어 반응이 시큰둥한 데. 기달려 봐. 한 번 더 간다.닉 혼자만 계속 말한다.
   「두 가지 재앙 사이에 끼게 될 때, 나는 주로 예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쪽을 택한다. <매 웨스트>. 그래 알아 안다구. 이제 시작한지 얼마 안 됐자나. 기다려 보라구. 마술을 보여줄 테니까. 메이드 바이 닉.
   「내 생각에, 나는 나 자신이 되고 싶지 않아서 배우가 된 것 같다. <진 아서>. 이젠 바로 이어서 말할께. 참을성을 가지고 끈기 있게 버텨. 이따 놀라지나 말고. 대중의 박수와 아첨을 즐겨라. 그러나 절대로 그것을 믿지는 말라. <로버트 몽고메리>. 닉 와우.
   「<베티가 존에 대해> 그녀는 래시를 제외한 MGM의 모든 남자 스타와 잤다. <존이 베티에 대해> 나는 데이비스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단지 분개할 뿐이다. 튀어나온 눈알과 담배와 우스꽝스러운 짤막한 대사들을 빼면 그녀에게 뭐가 남는가? 그 여자는 가짜다. 하지만 대중은 바로 그 점을 좋아하는 것 같다. 슬슬 닉의 말을 듣고 있는 친구들의 표정과 눈빛이 심상치 않게 변해 간다. 딱히 답변은 하지 않고 어디까지 하나 보자, 이런 공통적인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연기는 환상이고 환상인 만큼 마술이기도 하니 사실성을 따질 문제는 아니다. <로렌스 올리비에> 어, 율 브리너..는 까먹었다. 통과. 모든 남자는 생애 한 번쯤 매혹적인 빨강머리를 미친 듯이 사랑해 볼 권리가 있다 <루씰 볼>. 그리고 <이브 몽탕> 나는 남자는 두 번, 어쩌면 세 번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어쨌든 세 번이 최대치인 것은 확실하다.
   드디어 제동을 걸고 확답을 들어야 한다는 것인가. 워 워, 뭐니? 어디 보고 말하는 거야?
   「그러게. 누가 스케치북 들고 넘겨가며 보여주는 거도 아닌데. 어떻게 된 거지?
   「닉, 너 미쳤어? 왜 그래? 아까 그거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에 나오는 대사인가, 아닌데. 옛날 영화들 보면 영화 제목이 참 괜찮은 것 같아. 많이 안 봐서 잘 모르지만.
   「너······ 어디··· 아픈 거 아니니? 무슨 일 있으면 말해. 친구 좋다는 게 뭐야?
   「그걸 어떻게 다 외울 생각을 해? 도대체 얼마나 걸린 거야? 외우는 거... 힘들지 않아? 외우는 거... 어려운 거잖아?
   「아니 어떻게 원주율과 그리스 로마 신화 이름들과 그 배우들의 말을 똑같이 그대로 읊을 수 있는 거지? 뭔 속임수니? 오 이런!
   「와우! 놀라워!
   「이런 펭귄. 오! 신이시여!
   「이게 사람이야 로보트야? 그걸 어떻게 다 외웠니? 이 또한 못 믿을 일이군. 오늘 운세가 이상한가. 왜 그러지.
   「귀에 뭐 꼽은 채로 듣는 즉시 따라 말한 거 아니야? 오, 아니네.
   「그 말이나 글을 외워서 읊은 것도 대단하지만 이 몸짓, 어조, 표정, 연기. 오 멋져, 졸라 멋져!
   「이런. 이 친구 완전 딴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래. 사람이 달리 보인다야. 원래 괜찮은 친군데 훨씬 더 멋져 보여. 정말. 신기하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다른 멋진 말 더 외워볼께. 멈추라고 하지 않으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계속할 테니까 알아서 제지해 줘.
   「내가 손가락을 벤다면 그건 비극이다. 어떤 남자가 뚜껑 열린 하수구로 걸어 들어가 죽는다면 그건 코미디다. <멜 브룩스>. 내가 출연한 영화 중에 새벽 두 시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게 하도 많아서 사람들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다. <마이클 케인>. 남자들은 바람이나 피우도록 놔두고 우리 여자들이 세상을 굴려야 한다. <골디 혼>. 스카치에서 마티니로 바꾸는 게 아니었는데 <험프리 보가트>. 나 이거 원, 흔히 말하는 것처럼 그 모든 여자들의 품속에 다 뛰어들었다면 아마 낚시하러 갈 시간도 없었을 거요. <클라크 케이블>. 닉이 잠깐 멈춘다. 그래도 누구 하나 말을 받지 못한다.
   「스탕달의 연애론, 존 갤브레이스의 풍요한 사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뿐만 아니라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만유인력과 운동법칙, 빅뱅과 현대우주론, 전자기학과 전자기유도, 반도체와 트랜지스터, 엔트로피의 법칙, 빛의 이중성, 쿼크발견과 표준모형. 단분자, 물질파 이론, 슈뢰딩거 방정식, 불확정성 원리, 슈뢰딩거의 고양이, 초끈이론, 파울리의 배타원리, 패러렐 월드. 읽으면 다 외워져. 미치겠어. 병원에 가봐야지. 이러니까 잊는 게, 잊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새삼 깨닫는다니까. 이 세상을 잘 몰랐을 때는 또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어디가든 말을 못하고 듣기만 했지만 말이야. 초능력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라는 걸 초능력을 얻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 당연히 그게 없었을 때는 우스개 소리로 잡담만 나누지 거기까지 생각이나 하겠어? 직업이나 취미로 작품 만드는 사람들만 예측하겠지. 더...... 할까?
   오 그만. 여기까지. 안 말리면 언제까지라도 끊임없이 계속할 듯 하여 말없이 동시에 이 친구들은 손짓으로 그만하면 됐다며 표시를 보낸다.
   거인의 외침, 거성. 괴물의 요술, 초능력. 지독한 명연기에 감동하여 그 분위기에 고무되고 떨려서 다른 친구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관객석에 앉은 관람자 마냥 넋을 잃고 바라만 본다. 한 친구는 팔짱을 끼고, 다른 이는 깍지를 끼며, 누군가는 동영상을 찍고 또 누군가는 눈부신 연기를 보면서 몸이 굳어버리고 눈빛이 레이저를 비추는 듯 감격의 정점을 찍는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아무 여념없이 마치 짜고 연극을 찍는 것처럼 하나같이 얼척없다는 표정이다. 그렇다. 진짜 얼척없는 일이다. 행여나 닉이 이런 재주를 언제 터득했는지 짐작이나 했을까. 잠시 좌중의 신기함에 답을 해야할 듯 허공에 떠다니는 부담감을 낚아채서 닉이 말을 잇는다.
   「초능력이 생긴다면 어떻게 되는 줄 아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다만 사람이 어려질 꺼야. 그 어려진 모습을 본다면 어쩌면 니글니글할 수도 있어. 많이 거북할지도 모르지. 게다가 남아는 원래 나이와 관계없이 애야. 철들면 늙는 것? 지는 거라고 생각하나 보네. 어른이 되기엔 이미 부적합한 면모를 지녔다고 딱 거기까지만 언급하고 멈춰야 하나. 그렇게 더 어려지면서 초능력이 생긴다면 실은 그다지 변한 건 별로 없을 꺼야. 우연히 처음 만나 담소를 나누면서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에게 하는 이런 말처럼, 부자가 되어도 별로 사는 데 크게 변하는 것은 없더라. 일반인에서 초능력자로 바뀌고 빈자에서 부호로 변한다면 기본적인 틀은 변하지 않나 봐. 보통은 살면서 반틈 정도는 계층을 이동하지 않자나.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이런 쉬운 비유도 가능해. 나는 초능력자니까 일반인인 너보다 뛰어나, 알아? 당연히 그러지 않지. 그러잖아? 물론 친구끼리는 친구니까 농담은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너보다 우월해, 잘 살아, 키 커, 예뻐, 부국이야, 똑똑해, 그러지 않잖니. 단지 남자 친구들 사이에서 왜 그런 거 있잖아. 서로간에 억측과 반감은 없다, 그걸 꼭 확인하기 위해 모이고 만나서 다시 재확인하고, 한 번 친구는 영원하다, 우린 고추 달린 고추 덜렁덜렁한 남자 대 남자다, 다툼과 오해는 풀자, 이미 풀었다, 우린 뒤끝 없다, 하루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고 말끔하다, 다시 풍년이요 최고의 전성기로다, 그렇게 여성적이지 않은 것들. 그런 약간 원시적인 DNA 같은 측면들. 반면 여자들은 그 반대니까 애를 낳겠지, 남자같지 않으니까 여자라는 사람이 아기라는 인간을 낳을 수 있는 거겠지. 느낌과 표현으로 넘어가자면 대사상가는 되야 명함을 내미니까 삼천포로 빠지면 안되겠다. 다시 초능력에 대해 말하자면, 그러다가 좀 더 나아가면 뭐랄까, 자아보다 초능력이 커진달까, 잠식한달까, 그걸 뭐라 표현해야 하지. 천사가 되고 싶어 한다고 할까? 별명이 타락천사였나? 적어도 초능력으로 악마가 되고 싶어하지는 않을 꺼란 얘기야. 몸은 그대로고 마음만 붕 뜨니까 날 좀 지면에 붙잡아 달라 그 말이겠지. 강아지나 고양이가 되고 싶어한달까? 어려지는 마음처럼 주어진 삶을 즐겨야겠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 사는 동안 뭔가 의미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꺼야. 말이 좀 길어졌지만 해야 할 말이 몽글몽글 발생하는 행운과 토실토실하고 포동포동한 생각을 설파하는 기회의 구름을 탔으니까 하던 얘기 조금만 더 계속할께. 동영상 찍은 거 나중 보면 재미있어. 요즘 사람들이 거기 시간을 제일 많이 쓰잖아. 즐거움 쏠쏠하지 음. 가슴이 벅차올라. 영화에서 보면 초능력 돌연변이를 보고 사람들은 무서워하고 공포에 떨며 사회는 혼란에 빠지지만 SF에 가까운 기이한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치로써 극한에 다다른다는 의미의 초능력을 어느 날 터득한다면 그렇게 될 꺼란 말이야. 내 얘기는 아니고 그냥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해 봤어. 실은 난 동화를 쓰고 싶었어. 해리포터 같은 판타지도 괜찮고. 하지만 그런 능력은 체득할 수 없었어. 대신 고딩 때 필사했던 경험을 떠올리고 성우 생활 하면서 즐거웠던 일 그리고 최근에 빠져버린 키보드 동호회 활동과 기계식 키보드를 구입해서 명언과 명대사를 키보드를 통해 컴퓨터로 옮겨보는 취미가 생겼어. 흔히 아는 색칠하기와 비슷한 놀이지. 아무 생각없이 알록달록 애들처럼 색칠하다 보면 뭔가 편안해지고 안정감을 느낀다는 색칠하기 취미 있잖아. 그러다 보니 또 뭘 외우는 법, 순식같에 통채로 사전 한 권 외우는 법, 그런 책들도 사서 읽고 연구하며 한동안 그 분야를 팠어. 꼿혀서 완전 매달렸지. 뭘 창작할려다가 엄한 쪽으로 전문가가 된 거야. 결국에는 마음 먹으면 말이든 책이든 모든 걸 외울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거야. 물론 이것도 초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야. 외울까 하면 다 외워져. 그래서 외우기 대회에는 안 나가. 자랑 같지만 외우기 대회의 문제는 하나도 재미없어. 마치 프로 바둑선수들이 셀 수 없는 명경기의 첫수부터 마지막수까지 다 외운다고 하지만 규칙을 깨버리고 마구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바둑돌은 하나도 못 외우는 거랑 비슷해. 하지만 외우기 대회에 나가면 또 몰라, 고개 팍 숙이고 좌절할지. 하지만 지금 올라선 단계는 어느 수준까지는 이미 도달했어. 있잖아, 이건 말이야, 나의! 나의 글을 짓고 만들려다 남의! 남의 글과 말을 외우고 말하는 데서 재미를 느끼고 그 재능이 생겨버리고 거기 풍덩 빠져버린 거야. 무한대의 외우기 능력이 창작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건 기다려 봐야지. 사람들은 그래, 초능력이 생긴다면 뭘 하고 싶냐고. 그냥 웃자고 하는 얘기들 말야. A라는 능력이 생긴다면 돈을 왕창 벌겠다. B의 운발이 찌릿하며 내게 들어온다면 난 그걸로 카사노바가 되겠다. C라는 초능력 때문에 기분도 좋고 슈퍼맨이 되어 승천하게 된다면 난 만화나 영화처럼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내 능력이 필요한 곳에 달려가겠다, 그러면서 일이 끝난 후 몰래 사라져서 평범한 삶을 살 테다.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꺼야. 그런데 내 경우에는 이 능력으로 너네들 웃겨주고 사람들 감동시키고 놀라게 하면 그걸로 대만족이야. 돈? 난 더 필요하지 않아. 이미 많아. 무덤에 가지고 갈 수도 없잖아. 거기서는 한바탕 웃지도 못하는데 뭘. 유명세? 지금도 나름 뭐 괜찮아. 더해지면 아마 오히려 피곤해지겠지. 그만그만해. 삶의 경험, 많이 겪었어. 충분해. 시련이든 쾌락이든 인고의 세월이든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마음껏 즐기면서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행복이 뭐다, 딱 말은 못하지만 최소한 불행하지는 않아. 그거면 됐어. 또 몰라, 살아보니까 어쩌다가 나중에 초능력이 생겨서 그런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부자랄지 그런 귀족과 신흥 부호가 같이 어울리고 친한 풍경은 잘 그려지지 않는 것처럼, 이 능력도 딱히 써먹을 용처가 많지는 않는 것 같아. 초능력에도 끕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걸 초능력이라고 부르기엔 낯간지러운 일일까. 난 사실 곧이 곧대로 말하자면 잘 모르겠어. 그리고 그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아. 그러다 어느 날 뜬금없이 동화가 써질 수도 있을 테고 말이야. 처음엔 이게 뭐냐며 당황스럽고 난감해 하며 창피하고 수줍어했을지 모르지만 아까 말했잖아, 어려진다고! 어려진다는 것, 어른이 어린이처럼 들뜨고 어려진다는 것. 그건 사랑처럼 좋은 일 아닐까? 대답은 내가 대신할께. 난 잘 몰라. 도저히 모르겠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든 발바닥 간지럽히기든 몰라, 모른다구. 이게 다야. 음 저번에 에너지 음료 몬스터는 마셔봤으니 이번에는 레드불 먹어봐야겠다. 갑자기 땡긴다야. 아 자꾸 말이 많아지면 나이든 건데. 큰일이다. 정말 큰일이야.
   「브라보!
   「앙콜!
   「멋져!
   「잘컸어.
   「이제 비로소 어른이 되었군. 장하다.
   「와! 또 듣고 싶다. 내일도 듣고 싶다. 어안이 벙벙하네.
   「오 재밌어. NC 사장인지 왕요트 주인 때문에 벌어진 명연기, 갑작스런 감동이라서 더욱 놀랍구나. 훌륭해. 외우기의 명수, 태어나서 실제로 처음 봤어. 오오!
   「오 멋지다. 뭔가를 듣고 싶으면 바로 사인 보내고, 얘 능력 필요하면 같이 있을 때 써먹어야겠다. 그런데 말이야. 뭔가를 외우는 능력. 그거 얘 말마따나 그렇게 딱히 써먹을 곳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 좀 명석한 친구들은 아주 높은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다 하잖아. 게다가 이미 우리는 초능력이 일반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잖아. 남의 사생활을 내 손바닥 보듯이 보고, 불구경이든 싸움구경이든 뉴스만 봐도 온갖 소식들이 다 나오고, 심지어 남들 잠자는 거도 혼자든 둘이든 별의 별 영상들도 많자나. 인터넷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자료들이 있어. 하늘도 날아다녀. 닉처럼 굳이 외울 필요없이 사진을 찍고, 이 사람 장기를 떼서 저 사람에게 집어 넣고, 3-D 프린터에 천체 망원경도 이젠 메가톤급으로 쓰여지고 무인 비행체도 은하계 단위로 돌아다녀. 온갖 호화스러운 요리와 옷과 생활들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잖아. 어쨌든 그건 그렇고 작가나 화가, 음악가의 말과 글이 아닌 평생 연기만 했던 배우들의 말을 그 찰진 육성으로 직접 듣게 되니 가슴 한구석이 차갑기도 하고 뜨거워지는 거도 같고 정말 뭉클하구나."
   「일부러 만들어낸 창작품, 시인과 소설가와 화가와 작곡가, 무용가 등등 예술가의 녹록한 언어와 표현법이 아닌 평생 남의 창작품을─당연히 창작품의 일원이자 요체지만─연기했던 배우들의 사소한 말, 그 글이 아닌 짧은 말에 유명인의 인생이 통채로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가치는 쉽게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같아. 꼭 부작용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뭐랄까. 꼭 나의 이야기, 내가 하는 거짓말, 내가 생산해낸 픽션, 그걸 굳이 만들어야 하나? 그런 생각도 가끔 들더라니까. 타인이 만든 예술품이 아닌 배우로써 일생을 보낸 연기자의 말, 그 자체가 예술이었어. 배우라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직업군이기 때문에 말할 때 사용하는 어휘 또한 달라. 진짜 자아인지 어디 등장인물인지 잘 분간이 안 되니까 그래서 유달리 범상치 않아 보이는 듯 해. 그 언어 구사 때문에 또 생각이 끝말 잇기를 하게 되지. 그 있잖아,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하는 부패지수. 그것이 문화의 특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테지만 한 언어가 나타내는 낱말의 총량, 바로 그것과 작으나마 연관이 있지 않을까, 라는 어딘가 인문서적에 씌여 있을 내용도 떠올라. 하여튼 평생 말하며 행동하는 사람들이라서 참 다르다니까.
   「완전 닉 독무대구나. 오 저기 뭔가 보이는데.
   「어 보인다 보여. 그런데 팻말이 이상한데.
   「맞아. 깃발도 보여. 그런데 해적선 마크도 아니고 그 어디에서도 못 본 문양이야. 글씨는 확실하게 보이는구나. 누가 얘기해 볼래?
   「내가 말 할께. 알라딘의 요술램프!
   「오오. 느낌 이상한데.
   사르륵 일단 그들은 그곳에 배를 정박한다. 섬의 해안선으로 들어와서 부두에 배를 댔다. 간략하게 그곳을 설명하자면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당신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장소 몇, 딱 그런 모습이다. 그리고 해안 인근 전체가 놀이공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설프지만 있어 보이는 요원이나 보디가드 같은 아저씨들이 많이 보인다. 얘네들은 귀에 뭘 꼽고 있다. 영화 찍나? 아닌 것 같은데. 군사시설인가? 그거도 아닌데. 무슨 높은 직위의 거물급 인사가 방문할려나? 알 수 없다. 그들은 닉이 주인공이니까 닉에게 모두 뒤집어씌운다. 어려운 일이든 수훈이든 뭐든 다. 대표로 가서 물어보고 오라고 주문 완료. 닉이 벌써 저만치 멀어져 가고 웬 블랙요원과 심각하게 대화를 나눈다.
   「쟤 뭔 얘기를 하는 거지?
   「그러게 말야. 왜 저리도 진지한 걸까? 그럴 필요 있나?
   「뭔가 있겠지. 그럴 만한 사연이 있을 꺼야.
   「내 말이 그 말이야.
   「오면 물어보자.
   돌아와서 닉이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설명해 주는데 아까 블랙요원에게 단단히 쇠뇌당한 듯 하다. 요약하자면 이곳은 쥬라기 공원인가, 맞다. 저 놀이공원과 산 너머에 진짜 공룡들이 있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공룡이 그 공룡? 이것 역시 맞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고 한다. 공룡이 사고를 쳐서 약간의 재난이 발생하여 비상사태에 돌입했기 때문에 입장은 안 된다는 거다. 일시적이지만 잠정적으로 무기한 폐쇄한다는 거다. 저런! 헛걸음인가. 눈으로 살아있는 공룡을 직접 봐야 믿을 수 있는데. 보긴 봤는데, 맞긴 맞는데 공룡이 딱 삐─! 그만하다면, 만약 그렇다면 실망이다. 완전 실망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까 그 요원이 닉에게 자꾸 이런 설명의 중간 중간에 귓속말을 건넸다고 한다. 비밀 코드가 있다면 출입은 가능하다는 거다. 뭐야 장난도 아니고 쇼도 아니고. 단호하게 말했다고 한다.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꼭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 그래? 그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들어가 볼까? 약간씩 눈빛으로 서로들 속마음을 타진한 끝에 좀 더 장고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 얘기를 들은 그 때부터 슬슬 이곳의 음험한 기운이 느껴지고, 경치가 별로 썩 개운해 보이지 않고, 놀이 공원도 어딘지 모르게 급조한 티가 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그때 보았던 모히또가 들어갔던 왕보트에서 본 섬, 쥬라기 공원과 다르게 생겼다. 그때 왕보트와 해안과의 거리는 얼추 100M 이짝 저짝이었다. 당시 술이 조금 취하고, 분위기 탄 걸, 분위기 많이 탄 걸 감안해도 대강의 해안선과 산자락의 직선과 곡선, 변곡점들이 지금 보니 그때와는 많이, 아주 많이 다르게 보인다.
   「뭐야 이거. 여기는 그 섬이 아닌데!
   「저 요원도 사기꾼 같고.
   「이거 원, 롤스로이스야 벤틀리야? 옛날 중딩들 사이에서 잠깐 소문 돌았던 그런 얘기야? 떼돈 싸들고 가도 신분이나 품위, 명성이 안되면 못 산다는 밑도 끝도 시작까지 없는 카더라-소문. 그런거야?
   「가만 가만.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히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구. 친구들 한 박자 쉬어 가자고. 첫째, 하워드 요트에 기록된 좌표가 잘못된 거다?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래 위치는 맞아. 푯말이나 대강의 분위기와 형식은 똑같아. 그니까 이건 아니야. 그리고 둘째, 쥬라기 공원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건 믿거나 말거나, 까지는 아니지만 존재했을 것이다, 실제로 있었다고 하더라, 에 근접하는 신기루와 같은 가장 신빙성 있는 가설이야. 왜? 왜냐하면 우린 이곳을 목도하고 기억이 사라졌으니까. 그 다음 셋째, 쥬라기 공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섬은 이동하는 즉 바다에 떠다니는, 그러나 정밀한 규칙에 따라 표류하는 섬이었다? 그래, 그래서 좌표는 맞는데 그 섬은 그 뭐지, 세계지도를 뉘어진 위와 아래가 올록볼록한 그런 지도로 봤을 때 물결치는 자기장이 신비하게 흐른다는 그런 이론에 따라 어딘가로 쥬라기 공원은 이동했을 것이고, 우리가 현재 도착해 있는 이 좌표에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아니지 아니지, 나도 막 회까닥한다, <알라딘과 요술램프> 바로 이 섬이 이 지역에 떠내려와서 임시 정착했다! 이게 그나마 가장 설득력 있는 추리이긴 한데, 이건 내가 말하고 나서도 웃음 밖엔 안 나오는군.
   「검색해 볼까? 인기 동화 순위? 그런데 검색을 왜 해? 난 안 해.
   「점점 미쳐가는 거 아냐. 원래 그런 영화들 보면 대개 스스로 만들어낸 환각과 환상 때문에 사건이 꼬여가고 혼자 흥분하면서 일이 커지잖아. 우리가 딱 그 초입 단계에 이른 거 같아.
   「그래 이도 저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자. 왠지 느낌이 안 좋다. 불길한 조짐이 뒷목을 타고 올라와.
   「그래 정말 그런 것 같아. 돌아가자.
   「그럴까?
   「늦은 건 아닐까? 돌아갈 수 있을까?
   「못 돌아간다면 그건 더 이상 영화가 아닌 현실, 아니 재난이자 믿을 수 없는 미래 세계지.
   「돌아가고 싶다. 집에 가고 싶어.
   「돌아간다면, 돌아간다면, 닥치고 어서 집에 가자.
   「NC 사장 아니면 왕요트 주인 또는 누군가 알 수 없는 비밀 단체. 아무튼 누군가 어떤 사람들이 지금 초딩의, 초딩에 의한, 초딩을 위한 초딩 소설 쓰시나?
   「우리가 언제 또 이런 경험 해보겠니?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이거 뭐 청소년 환상극도 아니고, 컨셉을 엄청 잘못 잡았네. 우선 부딪히고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나아가며 끝까지 가고 싶지만, 음, 그렇게 배워왔고 모든 작품들은 그걸 가장 많이 말하지만, 이런 실제 상황에서는 그냥 돌아가는 게 현명한 일이야.
그럼.
   「그래 집에... 가자.
   「그래 늦지 않았어.
   「그런데 돌아가면 또 시간이 훨씬 짧은 시간만 지나간 걸로 되어 있을까? 아예 하루나 이틀 시간이 거꾸로 가 있지는 않을까?
   「오~ 오~ 이거야, 이거. 돌아가면, 우리가 돌아가면 어찌되어 있을지 궁금하지 않니? 모험의 주제는 이거야. 이 효과가 정답이야. 이게 결론이라고. 이러니까 기억이 끊기면 미스테리 스릴러는 시작되고, 우리식으로 신장르를 만들자면 문명 기기를 이용해서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녹음하고 영상을 찍고선 마지막엔 그 의문의, 마법의, 신기한 섬의 비밀은 끝끝내 풀리지 않는다! 그렇게 결론 내리는 거라고.
   「뭔 말이야? 얘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그래 맞아. 존은 끝에 가서 죽는다.
   「그럼. 난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모두들 돌아가는 걸로?
   「컴백홈!

   어-어, 설마!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 나도 제발 끝이 아니기를 바란다. 지금 소설이 시작해서 챕터가 여기까지 이어온 게 어딘데, 그동안 수없이 복선과 반전이 있었는데 설마한들 여기서 끝내겠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무리 그러한들 여기서 끝나면, 그건 슬픔이야. 여기가 끝이 아니기를 가슴 떨리게 기원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시오? 진정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오? 틀렸소! 확실하게 틀렸소. 그래서 애통하고 구슬프다오. 물론 미안한 마음도 있고, 독자를 속였다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낀단 말이오. 엉덩이도 가렵고 손가락은 아프며 땀 날라 하면서 약간 불쾌한 기분, 그것이 엄습하여 온 몸을 휘감는다오. 꿈인가? 생시인가? 전생은 아닌가? 초능력? 이런 젠장.
   그들은 딱히 실연당한 젊은이나 무언가에 낙담한 패배 의식과 닮은 이상한 우울함과 몽환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처음 떠나왔던 해변으로 그리고 NC, 나이트클럽이 있던 도심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워드의 집을 향하여 공간 이동을 한다. 모히토가 해변에 닫기 전 어느 즈음이던가 그들은 마지막으로 하늘에서 내려주셨을지 악마의 수작인지 모르는 환영을 보고야 만다. 절대 최면만은 아니었다. 뭔가에 감염되지도 않았고, 어딘가에 중독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은 그들의 배와 약 100m 거리에서 바다 위를 달리는 열차를 본 것이다. 열차도 그냥 열차가 아니라 정말 못 말리는 못 믿을 그런 기차!
   바로, 토마스 열차! 토마스가 간다. 에드워드도 간다. 헨리까지 간다. 고든을 빼놓을 수 있겠나. 제임스, 엄청 깐죽거리는 제임스 열차도 행진하신다. 그리고 퍼시, 토비, 덕, 도널드, 더글라스, 올리버, 에밀리, 하비, 빌, 벤, 로지, 아서, 머독, 네빌, 퍼거스, 찰리, 몰리...... 너무 많다. 토마스와 친구들, 잃어버린 왕관. 기차 앞면에 얼굴! 전설의 왕관과 사라진 친구는 어디에?! 꼬마기관차 토마스와 친구들. 블루마운틴 미스터리. 하여튼 토마스 열차는 있다. 명백한 실존주의! 그것이다.  
   한심스런 얼굴색으로 그게 뭡니까? 라는 독자의 급작스런 꾸짖음에 아차, 하며 쫄아든 마음을 애써 감추고 싶지는 않지만 오오, 토마스 열차! 그것은 결단코, 정녕 사실인데 절대 어찌할 수 있는 수법도 아니요 명백한 실제일 뿐인데 어떻게 더 해명하지도 거짓 자백을 털어놓을 수도 없는 입장인 것만은 분명함. 
   오, 웃었어 웃었어! 비록 냉소지만. 그 다음은 상상하기 싫다. 음. 워워 예감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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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53

from 소설 2015. 7. 31. 11:01

   당신은 누구시길래.
   규수이자 부군이신 당신께서는 뉘신지. 그대는 누구시길래 이 심상치 않게 재미없는 소설을 읽으십니까? 그래도 되는 겁니까? 당신이, 아니 당최 당신이 뭔대 이리도 한심한 글을 쓰면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버리시나요? 이게 뭡니까? 참나, 소설이 뭐길래, 단 1번 읽고 그만인데!
   글이 안 써진다. 글이 안 써져. 안 써져도 너무 안 써져. 말이나 글에 따라 수동태나 능동태를 적절히 분배해서 사용해야 하는데 사람에 따라 하나의 행위에 대해 그것이 확연히 구분된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훤히 읽는다, 능동태다. 누군가를 만나면 그분의 마음이 느껴진다, 수동태다. 다시 능동태는,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한다, 나는 최면을 잘 건다. 수동태는, 나는 최면이 잘 걸린다, 언제 어느 때나 글이 잘 안 써진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해도 안 된다, 뭘 해도 안 된다, 뭘 해도 재미없다, 는 딴 얘기다. 혹시 틀리지 않았나 확신은 못한다. 여기서 이걸 읽고 다른 데서 크게 읊을려 생각했다면 한 번 더 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설쓰기 & 온라인 발행 & 연재물 & 초보자 & 과거에 말 수가 많지 않았고 & 하고 싶은 얘기가 엄청나게 많지 않음 즉 자아가 확고하지 않다는 뜻, 이 여섯가지를 만족함과 동시에 너무 잘 쓸려고 한다면 집필에 관한 동사는 수동태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는 골백번 그게 맞다. 왜 안 써지는가, 를 좀 더 생각해 보면 이런 추론도 가능하다. 이런 창작의 작업이라면 뭔가가 안 된다, 그분이 오시지 않는다, 오늘은 접어야겠다, 그날을 침착하게 기다린다, 그날은 올 것이다, 이렇게 슬그머니 분명치 않게 '주어가 뭐뭐했다'의 원인을 살짝 흐려서 여운을 남기다 보면 거짓말처럼 어느 날 글이 잠시는, 어떤 날은 잘···은 아니고 조금은 잘 써지는 행운을 만날 수도 있다. 가장 최소 단위의 등장인물로 어떻게 하면 가장 즐거운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연구하는 듯한 J의 뇌리엔 특별한 착상이란 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2명 중 1명은 잘 한다는 연상법, 저급의 두뇌 훈련 기술, 늘상 할 일 없이 자동적으로 의지에 딱히 영속되지 않는 무엇, 그것은 좋으나 싫으나 열심히 할 수 밖에 없다. 불편하든 지겹든 운명이든 습관이든 어쩔 수 없는 일. 컴퓨터 게임 가운데 고전 게임에서는 연관성 있는 그림인 볼펜과 노트, 짝이 맞는 1번 벽돌이나 문자나 문양과 어울리거나 똑같은 2번을 서로 잇게 만들면 그것은 같이 소멸되면서 점수가 올라가고 단계가 다음으로 넘어간다.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이와 같은 연상법, 짝짓기와 떠올리기, 그것만으로 잡생각의 소멸과 반대로 어떡하다 소설이 써질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은 그럴 수 없다. 그러기 힘들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럼. 그러니까 그게 된다면, 그렇다면 대박이다.
   세븐 일레븐, 즉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하는 워커홀릭의 애칭. 나인 투 파이브, 곧 아침 9시에 잠을 자기 시작하여 해와 달과 대기가 노을의 광경을 준비하는 시간인 오후 5시에 단꿈에서 깨어나는 예술가 또는 유흥업계(주류업계) 종사자와 DJ 그리고 밤손님. 전자와 후자가 친한 친구 사이이기는 어렵다. 어렵지만 또 그래서 극과 극은 통하니까 절친한 사이가 될 수도 있다. 그 두 인간이, 인간이라 하니까 어감이 어째 좀 달갑지 않게 들려서 바꿔 부르자면, 그 두 VIP가 가깝다거나 그 둘이 한사람의 과거와 현재라면 흔히 말하는, 읽는, 듣고 보는 그런 자조의 울림에 관한 대화가 들려질 것이다. 어머 그렇데, 어쩐다드라, 어떡하니, 어쩜 그런 일이 등등등. 또는 난 과거엔 이랬는데 지금은 그때 그랬다는 걸 못 믿겠다, 살다 보니 바뀌더라, 변하더라, 어떻드라 그런 말들. 우낀 해석이나 '첫인상은 어땠는데 현재-인상은 어떻다'는 좋은 대화도 가능하지만 어쨌든 여기서는 조금 그쪽으로 몰자면 비교의 극대화, 차이점의 최대치다. 난 그때 열심히 일만 했어, 하나 밖에 몰랐어. 순진하고 또 순진하며 미련했어. 지금 그때를 돌이켜 보니 그건 그냥 뭐뭐한 척, 흉내내기, 답습하기, 모방, 베끼기, 오마쥬, 패러디, 필사, 따라하기, 여기다 몸을 던지고 마음은 저곳에, 액션만 취하고 터부와 사회규범에 구속받지 않는 새로운 인생을 산다고 법석을 부렸지만 그건 파격이나 혁신이 아닌 독창성과 신선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타성에 따른 삶, 남들처럼 살아가기에 다름 아니었어. 그런 거. 난 인생을 잘못 살았나 봐.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어. 즉 그땐 그랬고 지금은 이래. 허구헌 날...은 아니지만 가끔 한숨 쉬고 수십 년 평생 반복하는 혼잣말 몇가지.
   그러나 그 두 VIP가 멀다면, 두 인물을 한사람으로 보고 그 차이가 깊고도 푸르다면, 그러면서 그 둘을 연결한다면, 좋아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묵직한 의미를 수반한 많이 듣고 또 보게 되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얼굴 표정의 반응을 뛰어넘는 좀 오바하면 찬란한 기적이 태동하게 된다. 말은 기적, 크게는 전설, 작게는 추억, 밝은 면으로는 기쁨, 넌 연애, 쟨 또 무엇이 된다. 그렇게 부를 수 있다. 그래도 된다. 개개인의 자유다. 이름 부르는 사람 마음이다. 그게 뭐든지. 안 그러면 눈치 없는 어른이거나 숨기는 본능을 이해 못하거나 언제 드러내고 언제 감춰야 할지를 잘 모르는 거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서사적인 꿈의 실현에 가까웁게 될 것이다. 실패라도 그건 실패가 아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 아니다. 그게 맞다. 전자가 새드 엔딩이라면 후자는 뭐겠나. 오! 해피해피 고고? 달링, 러빙 유? 척-하다 보면 어느 날 그와 똑같이 되어 있고, 남이 그대를 따라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잘 하고 싶지만 못하는, 따라하기 단계가 높은 가짜 웃음도 있음) 릴레이 상어 파도타기, 파도 넘자마자 아쉬우니가 그냥 내리켜 계속 파도타기, 다같이 타기, 평생 파도만 타기, 파도를 안 타더라도 파도 타기 사진 한 장 프린트해서 책상 옆에 1주일간 붙여 놓기. 너의 꿈은 이루어진다. 이루어질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악담을 퍼붓고 비관을 일삼는 이가 있으면 조용히 가슴에 담아두거나 그것을 원동력으로 좀 더 노력할 것.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 는 말은 마음가짐과 자세에 대한 얘기다. 긍정적인 태도. 보통은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일 테지만 또 드물게는 하면 된다. 에잇 해도 해도 안 되네, 깨끗하게 포기하고 뒤돌아선 순간 1단계 클리어, 2단계 시작. 하면 된다, 라는 말이 어쩔 때는 살면서 당신 생활에 먹힌다.  1)노력하면 다 된다. 2)뭘 해도 안 된다. 3)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4)가능성은 반반 50 대 50. 나열된 1, 2, 3, 4를 합산? 절충? 꿈보다 해몽이라드니 했더니 된다, 그거다. 머피의 법칙과 샐리의 법칙의 합작품! 이런 맛에 세상을 사는 거 아닌가? 아니면 절반만 거는 방법도 있다.
   잠깐 정리하면, 이번 챕터의 첫 문단은 어 뭐냐면 그냥 모르는 사람이 서로 만나서 말 튼 거다. 압권, 은 아니고 도입 장면. 두번째 문단은 침잠에 이은 명상과 긍정적인 자애심의 분위기. 세번째는 안 써지는 건 안 써지는 거지만 실낱같은 실마리에 대한 희망, 꿈도 야무진 기대, 그야말로 뻔뻔한 자기 할 일 계속하기, 묵묵히 삶을 꿋꿋이 살아가기, 에 대한 내용. 넘버 4~ A와 B의 매칭 곧 짝짓기에 대한 실망이랄지 뻔한 내용과 익숙한 얘기. 그리고 다섯은 끈기있게 꾹 참고 버티고 버텨서 재회에 성공하는 설렘과 그것을 포기하지 말고 해야 하는 이유 또 으쌰으쌰 동기부여까지. 6번 문단은 다섯번째 문단을 짧게 요약. 그리고 이번 문단은 별 일곱 개. 자, 다음으로 가본다. 여덟, 아홉, 열 계속 가보자. 무지개 너머로 오즈의 마법사가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아무도 없을 때만 큰소리.
   무엇을 뭐뭐한다, 문법에 맞는 말로 예를 들면 책을 읽는다, 영화를 본다, 그림을 그린다, 이렇게 쓸 수 있다. 이 보통의 문법을 슬쩍 화법으로 바꾸면 생소하긴 하겠지만 새로움 또한 있다. 요즘에만 누가 누가 자주 쓰는 게 아니라 인류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래 왔다. 그러나 막 심하게 남용한다면 그건 정신 산란하고 속된 말로 저질? 고품격과 멀어지게 된다. 속된 말의 기준이 뭔지는 불분명하지만 글과 말의 차이, 그걸로 추가 설명은 생략할 수 있다. 앞서 말한 VIP처럼 글과 말을 감정이 움트지 않았더래도 가까이 서로 억지로 붙여보자면, 글이 말을 남발하게 하자면(글과 말 모두 하나의 인격체나 사람이라고 가정 그래 의인화), 처음엔 갑갑하지만 점차 진행시키면 좀 더 행진시키면 계속 우주로 보내버리면 무질서와 카오스 그 경계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지금을 위해서 앞의 VIP를 끌어들여서 얼렁뚱땅 설명했다. 여기서 평범한 건 지나치고 그 파격을 허용하는 예를 들면, 이렇다. 꼬냑 두 병 쳤어, 가방이나 차를 질렀어, (가난한 대학생이 택시를 타다, 가 아닌) 택시 꼿아랄지 점심 (먹다 대신) 때려, 같은 말들. 품위는 다소? 떨어지지만 품위-유지비의 개념처럼 이런 어법을 J는 소설쓰기의 창작 동기로 차용한다. 왜냐하면 그게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해 보고 싶어서! 그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코너에 몰렸으니까! 따라서 그는 그와 같은 전위적인 글쓰기를 선보여야 하는데 또 여기서 너무 쉽게 가면 재미없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개구리 뜀뛰기 자세. 그러다 폭삭 주저 앉을 수도 있지만 영영 주저 앉아 그냥 시골에서 웰빙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한번 그래프에 꺾임의 요행과 미학을 살짝 덧붙여본다. 그러므로 그는 그냥 계속 글이 안 써졌던 것이다. 마치 글이 안 써짐으로써 사람들을 웃겨보겠다는 속내처럼. 분명 그렇다. 숨길 수 없는 의도.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려.
   그런데 이게, 무엇을 뭐뭐한다, 그것이 소설쓰기에 도움이 되나? 정말? 과연? 두고 볼 일이다. 한번 지켜보자. 이 무슨 기구하고도 이상한 소설쓰기 발상이란 말인가, 참 나!
   그리하여 그는 집에서 글이 안 써지니까 바깥으로 돈다. 도시 안에서 여기저기 가 보고 사람 구경하고, 소셜 네트워크에서 뭐 없나, 세상 소식 가운데 중요한 밀담을 누군가가 암호와 암구어를 이용해서 전달하지 않을까 하면서 외부에서 글쓰기 소재를 찾아다닌다. 그렇게 하나 마나 보나 마나 찾아봤자 별것 없는 소득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간 보내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미 써놓은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럽고 그러나 아까운 블로그 연작 이야기에 어느 덜떨어진 극소수 독자층이 알게 모르게 게 눈 감추듯 슬그머니 생기고, 열혈 팬덤이 형성된 것일까. 만약 있었더라도 겉으로 드러날리는 없다. 그 블로그 포스트처럼 그 팬들도 상당히 까다로운 스타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마도 간접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전달할 가능성이 크다. 대놓고 들이대지 않고 은근히 마음으로 다가가고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모두 건네오게 만들 것이라는 계산 딱 나온다. 딱 맞춘 예상 아니면 헛된 망상이다.
   결국 이 말은 그가 지금 온라인으로 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최대 장점, 즉답성이 확 희미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딱히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뭔가 연결되는 공통점이 보이고 어떤 미심쩍은 일정한 유형이 보일락 말락 하고 있다. 이건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이종이다. 어쩌면 미래에 예속된 일일 것이다. 아마도 일종의 몽상이리라. 또는 혼자 보는 우화. 심지어 실체가 거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게 대관절 무엇인가는 중구난방이지만 차차 알아가기로 한다. 차츰 정체가 드러날 것이다. 자, 개봉박두!
   수사적인 문구와 꼬고 꽈는 어려운 표현법은 지금 논외다. 복잡함은 사양, 단순함 그것. 연인에게 문학을 말로 그것도 길게 설교하는 것은 한동안 핀잔받을 일임이 확실하니까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어디 문학만인가. 뭐야, 이건 연애편지나 다정한 속삭임과 사랑의 은어가 아닌데, 이런.
   판타지와 SF, 픽션의 경우 한가지 구분 기준이란 게 있다. 처음부터 환상 세계 안에서 시작하느냐 아니면 현실에서 시작하여 기적적으로 드라마틱하게 꿈의 만화적 환상극으로 넘어가느냐, 그것이다. 보통 2명 중 1명은 전자보다 후자쪽을 좋아한다. 비교적 어린이보다 어른이 그렇다. 또 남자와 여자, 나이, 혈액형, 별자리 등은 각자 알아서 판단하자. 실화를 영화로 만드느냐, 영화가 먼저 있고 나중 그게 실현되느냐도 중요하지만 닭이 먼저든 달걀이 먼저든 여기서는, 이 소설에서는 전자쪽은 일절 다루지 않고, 후자의 선경에 섬광을 잔뜩 비추어서 찬탄을 거듭하여, 염치 불구하고 작정하고서 억지로 독자를 최면에 빠트린 후에 그분들이 선뜻 넘어와서 왈칵 홀라당 정신줄을 놓아버리게 만든 다음에, 당신께 기다렸던 낭만과 무드를 안기고, 드디여 단박에 전자의 느낌에 흠뻑 젖어들게 만들고 싶은 것이 서술자의 솔직한 마음이다. 둘 다 몰입이 가능한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안 좋을까.
   그러나 신출내기, 날땅보, 초보 풍쟁이 J는 애당초 인간이 너무 순박하고 어리석은 허당이라서 터무니 없는 소설도 못쓰고, 형사 콜롬보나 선망하면서 고작 한다는 게 조만간 대단한 소설을 쓰겠다는 의욕만 시종일관 자꾸 키우고 있다. 그 허영기를 만회할 기회가 와야 할 텐데. 소설의 신이나 악마를 알현하면 좋으련만, 아 악마는 곤란하다. 한 번 불러본 것으로 그만. 거참!
   날이면 날마다, 하루 24시간 꿈에서도, 꼬마 때부터 어른일 때까지 언제라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해적선과 웜홀 시간여행과 고대 유적에 감추어진 비밀, 어느 날 아침 일어났드니 집 앞 공원에 코끼리 10배만한 싱크홀이 생기고 그 안을 탐험, 능력치를 무한대로 끌어올리는 신비의 영약을 구해서 먹고 팔고 연구하고, 실존하는 아틀란티스, 쉬쉬하며 막는데 급급한 피라미드의 전설, 마법의 성, 알라딘의 요술램프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여기서 다루기에는 탐탁지 않은 식상한 이야기다. 그런 소설을 쓰면 반드시 누군가는 <뭐해서 뭐한 이야기>라고 달랑 한 문장으로 요약해버릴 뻔한 일은 반드시 발생한다. 틀림없다. 운 좋으면 몇 줄 더 이어질 테고.
   소설은 안 쓰고 그는 급기야 소설에 대한 선행 학습에 나선다. 쓸 경험 쌓기. 소설 쓰기보다 경험이 먼저란 얘기다. 만에 하나 누군가는 괜히 이런 소설을 읽고 나서 우울증에 걸렸다고 할 수도 있으니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뭘 쓰더라도 알고 써야 하고, 구술을 하더래도 겪은 뭐가 있어야 한다는 논지로 그는 무작정 거리로 나선다. 그가 사춘기 시절 감행한 시내버스 타고 종점까지 갔다오기, 도시 근교 종교 시설 구경하고 오기, 고속버스를 타고 좀 더 멀리 가보기. 갈 때는 멀면 멀수록 좋겠지만 돌아올 생각을 해야 한다. 집, 외지, 집, 시골, 집, 공원을 아무 규칙없이 막 싸돌아다닌다. 그러다 문득 그가 대학교 2학년 때던가, 그 대학교는 지금 없어졌다, 사실 고등학교도 중도 포기가 맞다, 어느 지방 공원인 산으로 학과 MT를 갔다. 또래들과 같이 안 놀고, 친구랑 둘이서 따로 떨어져 나와 그 산의 중턱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주인없는 카페, 망한 아니 폐업한 개패를 발견하고, 대책없이 위스키를 그곳에서 갖고 나와서 친구랑 둘이 병나발 불었는데 자기만 쓰러져서 그가 뻩은 후, 친구가 산 아래 사람들 있는 곳에 내려가서 병력 요청하여 인력을 끌어온 다음, 짐작처럼 몇명에 의해 뜸어져 내려온 일을 떠올렸다. 그래 이거야. 여기 가보는 거야. 그리 멀지도 않아. 아직 공짜 술도 남아 있을지 몰라. 썩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길도 다 알아. 그는 떠났다. 그곳으로.
   이렇게 산속으로 떠나서 헤매는 이야기로 재주꾼들은 영화 한 편 2시간짜리를 만든다. 작품이고 예술이다. 앞서 말한 전자, 그처럼 설정 자체가 판타지가 아니래도 이걸로 그분들, 프로들은 영화 전문 웹사이트에서 60~70점 너끈히 뽑는다.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만 그걸 감안하고 그는 '난 소설가야. 난 지금 소설을 쓰고 있어. 이곳에 가면 글이 써질 꺼야.'라고 스스로 되뇌이면서 그곳으로 간다. 꼭 어디 안 좋은 데 끌려가는 것 같다. 이 다음에 이야기가 어떻게 될까? 어떻게?
   그의 집으로부터 해당 목적지까지 100km 정도일 것이다. 평일엔 책을 읽고 데스크탑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 돌아다니기와 소설 구상으로 뭔가 일하는 자세를 보이고 주말에 그곳으로 떠났다. 그 도립공원에 도착. 맑은 날, 시원한 산공기, 산뜻한 바람, 산악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암벽등반 동호인들 그리고 동아리 MT 대학생들. 그들 가운데도 누군가는 정규 일정에서 이탈하여 무작정 산속으로 들어가 그 숨겨진 카페를 발견하고 이상한 술병을 들고 나와 그걸 마신 후 남녀 영혼 체인지라는 놀라운 사태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퇴근 직전의 직장인, 금요일을 맞이한 대학생처럼 그도 행복도가 올라갔다. 실재 그가 태어난 지명의 번지는 999, 그 숫자는 다 계획된 것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그건 그렇고 날도 덥고 힘겹게 그만의 추억의 장소를 찾고 있지만 그건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듯 하다. 그러고 보면 참 오래됐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시간이 너무 지나버렸다. 만약 있었다면 그걸 발견했다면 몹시 실망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예 찾지 못한 게 좋은 건지도 몰라. 뭐 어쩌겠나. 그분은 오시지 않나 보다. 소설도 안 써지는데 별안간 어떻게 생긴줄도 모르는 마로니에 나무를 찾아다니는 게 나을까? 창작의 오로라, 신비한 영감, 영광스런 착상의 순간, 악흥의 회오리. 아무런 책임이나 의무가 없는 그분의 면피를 위하여 또 다른 그분을 찾아야 하나. 좋게 집 뒷산에나 올라가 캔 맥주나 깔걸 그랬다. 새 됐어, 완전. 최소 등장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로 최대 흥행 수익 영화 대박, 드라마 연작 초히트,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개소리. 헛소리. 투자자에게 아쉬운 소리할 필요도 없었는데 그게 다 뭔 잠꼬대란 말인가. 다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한마디 한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막 쓰자!
   그는 실상 마음 한구석에 자꾸 어딘가로 뜻 모를 청운을 품고 멀고도 멀리 정처없이 떠나고 싶은 속마음이 약간 있었지만 실은 멀리가지 않아도 그가 사는 도시 안에 있을 건 다 있었다. 사람 사는 게 원래 그렇고, 세상사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만의 망상, 딱히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 부러 캐내거나 알고 싶어하지 않는 모른 척 하기. 태연자약 포스트 모던 소설가연. 초사실주의와 판타지를 결합한 아직 장르의 이름이 없는 신소설 작가인 체함. 구태여 멀리 갈 필요 없을 듯 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야. 멋있어 멋있어. TV 개그 프로그램의 유행어를 따라하는 것도 다 쓸모가 있다.
   어 저기요 잠깐만요. 재미없는 이런 소설 읽으시면 우울해져요. 차라리 조증이 나아요. 어머. 우리 여성분들, 기쁘고 신나는 또 아름답고 감명 깊은 그런 소설 고르실 줄 잘 모르시죠? 미치겠다. 이제부터 차츰 기어를 올리고 터보를 가동시키고 천상의 음률을 마법의 글로 풀어내겠어요. 메인 경기 다 끝나가는데 언제까지 큰소리, 입장권 환불되고 소설의 악명만 높아갈 것이다. 왜 하필 여기서, 지금, 어떻게 이리도 천연덕스럽게 스스로 저주의 언사를 내놓는지. 그 반사이익, 그것의 효과를 설마 바라지는 않는다. 절대 아니다. 절대!
   저기요 독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런 따분한 소설 읽지 마세요. 뭔 교훈이 있나요 아니면 하던 일 다 때려치우고 소설 읽기 그 하나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영험한 힘이 있나요. 아무 것도 없어요. 남는 거 없다구요. 리콜 마케팅조차 들이댈 수 없다니까요. 저라면 이런 책 한 트럭 갖다 줘도 읽지 않을 거에요. 단지 읽을까 말까, 끝끝내 읽을까 말까, 그 미묘하고도 팽팽한 오묘함을 즐길 심산이라 이거죠. 솔직히 속마음을 다 깠어요. 자 어떠세요. 그만 읽고 당신의 삶을 사세요. 인생을 즐기시라구요!
   시원스레 술취한 듯 개소리를 퍼부었으니 이제 소설로 돌아간다. 본연의 업무로. 꼭 보면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변태들. 어쩌다 보니 이런 스타일로 글을 쓰는 게 본령이 되어버렸어. 어쩌면 좋아. 어쩔 수 없다.
   J는 집에 와서 급하게 캔 맥주 세 개를 쳤다. 오! 아아! 쳤다? 쳤다! 마시다, 적시다, 들이키다, 그런 먹는 것과 연관된 동사가 아니라 난폭함은 아니지만 젊음의 장난과 무모한 움직임, 그 역동성이 느껴지는 말. 요술의 묘약을 뿌린다, 그러면서 동시에 친했던 오래 소식이 끊겼던 친구인줄 알고 낯선 타인의 뒤통수를 세게 철썩 후려치는 반가운 몸짓을 뜻하는 동사. 혼자 있을 땐 옷을 홀라당 벗어도 되고 품위도 내던져 버리고 캔 맥주를 마시지 말고 치자. 그러자. 그래. 이거다. 멀리 갈 필요없이, 멀면 멀수록 좋은 환상적인 천혜의 관광지로 떠날 필요없이 그가 사는 동네, 도시 거기만 둘러보고 잘 찾아봐도 분명 신기하고 기이한 이상스런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선망에 가까운 확신과 그래도 된다는,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과 친숙함이 동반된 동기가 부여됨을 느낀다. 맞다. 그는 정말 그런 사례와 실제 장면을 드물지 않게 봐 왔다. 바로 그걸 모두 모아서 연결시켜 글로 쓰기만 하면 점묘화 기법을 닮은 놀랍고도 새로운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까닭 모를 희망의 달덩이가 떠오름을 느낀다.
   자동차. 자동차가 도로에, 주차장에, 차고에, 판매점에, 수리점에 있는 것은 정상이다. 하지만 깊은 산속 차가 다닐 수 없는 산속 오솔길에 턱 있다면, 오 뭔가 있어. 뭔가 있다구. 저번에 그는 그런 걸 한번 보았다. 집 뒷산을 타고 멀지 않은 봉우리로 가다 보니 뭔 삼지창 마크가 돋보이는 분홍색 컨버터블이 한 대 있었다. 그곳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평소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인기가 하락한 산길이었다. 차가 바퀴를 굴려서 도달할 수 없는 사람만 지나다니는 산길이다. 그런데 어떻게 삼지창이, 분홍색 삼지창이 이곳에 있을 수 있지?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그 추종자들이 여기서 몇 달 몇 년에 걸쳐서 바로 이곳에서 만들었나? 그럴 수는 없다. 아, 그는 지금 집에서 캔맥주를 치고 있다. 1캔 치고, 2캔 치고, 3캔째 치고 있다. 어느 때던가 복잡한 심정을 달랠 겸 떠났던 산행길에서 보았던 있을 곳이 도저히 아닌데 있었던 컨버터블을 회상하고 있다. 그 장면. 그건 모두가 아는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곳에 이동되고 그래서 영화를 찍은 것일까? 행위예술이라도 한 걸까? 아니다. 아니다. 다 아니다. 그건 아마도 바다의 물오름인가 용오름인가 하는 그 과학적인 현상이 해변으로 이동해서, 물에서 땅으로 넘어왔으면 그건 토네이도라고 부를 것이다, 그래서 해안 도로에 정차되어 있는 분홍색 삼지창 컨버터블을 하늘로 올렸다가 거센 태풍으로 수십, 수백 킬로미터를 날아와서 턱 하니 그 위치에 던져진 거다. 그렇게 꽉 안착된 증거로 바퀴 한쪽이 펑크나 있고, 페인트가 조금 탈색됐으며, 약간 짠-내가 나고, 타이어에 소금 자국이 핸들에 바다 수초 건더기가 그리고 뒷좌석에 결정적인 단서가 있다. 산드로 보티첼리(1444~1510)의 비너스의 탄생에 나오는 비너스가 탄생한 딱 그런 것 같은 커다란 조개 껍데기, 그게 바로 그 말도 안 되는 기막힌 이동 과정을 밝혀주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품 제 1호다. 보물 1호, 가보 1호, 그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는 이 좋은 구경거리를 놓고 황급히 집에 돌아왔다. 왜 그랬을까? 왜 그는 그것을 핑크 트라이던트를 보고도 그냥 힘없이 시무룩하게 지나쳐버린 것일까. 왜 그때 왜 그 거룩하고 고요한 찰나에, 아무도 방해하는 이 없는데 좀 더 구경하면서 마음껏 추측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이지 왜 그랬나. 그래 안 늦었다. 지금 캔맥주를 골방에 쳐박혀서 마시든지 치든지 할 게 아니라 다시 보러 가면 된다. 못 할 게 뭔가. 좋다. 떠나자. 어서. 그곳으로. 록 그룹 COLDPLAY 앨범 재킷에 나오는 그 그림은 뭐드라. 꼭 그 포즈 한 번 잠깐 취해 봐야 할 것 같다. 자, 따라하기 끝났다. 벌써. 가자. 간다. 떠났다. 이런. 뭐야? 집에서 뛰어가면 40분, 보통 걸음으로 가면 그 두배가 걸리는 그곳에 도착했는데 분홍색 삼지창이, 올드 마세라티가 보이지 않는다. 근처에 누가 버렸는지 아동용 장난감 빈 박스와 바람개비, 개 사료인지 땅에 떨어진 고양이 밥 뿐이 없다. 저런! 누가 어느새 그걸 가져가버린 것인가. 오, 타이밍 놓쳤다. 아끼지 말고 그 시간을 즐겼어야 하는데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사랑은 또 온다. 어울리지 않는 마법같은 조합 A + B는 또 온다. 숙명의 궁합 A + B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지난 사랑의 불꽃은 아직 꺼지지 않았어. 다시 온다. 다시 와. 웃으며 보낸다. 기다리면 돼. 사랑은 또 다시 올테니까. 왜 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노래 말 같은데...
   횡 하니 산들바람만 부는 장소를 뒤로하며 아쉬움 꼬리 삼아 살랑살랑 흔들면서 돌아오는데 언뜻 그때 컨버터블 범퍼에 새겨진 낙서인가 사인을 보았던 화면이 떠오른다. 고풍스런 글씨체, 그것은 조니, 였다. 조니, 조니······워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토끼는 동화처럼 사람의 말을 할줄 몰랐다. 다람쥐도 발바닥 사이즈보다 큰 게 없었다. 나무에서 식사를 위해 무슨 일을 하던 딱따구리도 산중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사진 작가의 어깨 위에 자유자재로 앉았다 날았다 하지 않고 인적이 드문 외길에 있는 자작나무의 가지에 착 달라붙어 있다. 즉 특이 사항은 없다. 정상이다. 평화롭다. 덤덤하다. 돌아오는 길에 산길 교차로에서 멈춘다. Y자 모양, 좌상에서 내려와 구심점을 거쳐 밑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세 갈래 길에 웬 강아지 한마리가 이 친구를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꼬리를 흔들락 말락, 시선을 피할까 말까. 자연스럽게 다가오길래 녀석의 머리도 쓰다듬고 배를 만져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강아지가 재롱을 부리면서 그의 손을 깨물었다가 도망갔다 다시 다가오고, 뛰었다가 바짝 엎드렸다가 마음껏 애교를 부린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를 따라 오라는 듯 살살 거리를 띄면서 물러나고, 쳐다봤다, 딴청부렸다, 를 반복한다. 정말 자연스럽게. 꼭 사람같다. 집도 가깝고 바쁘지도 않으며 얘랑 좀 더 놀고 싶은 마음에 아무 의심없이 사심은 조금 품고 가만가만 따라간다. 다만 강아지를 따라온 이곳은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길로써 풀이 많이 자라나 길이 희미해지고 있다. 그렇게 J를 끌고 유인하여 그 이름 모를 들개는 어느 약간 야트막하고 평평한 이상한 마크가 바닥에 그려진 장소에서 멈추드니 땅바닥에 막 몸을 비벼댄다. 땅에 새겨진 표식은 별 내용없는 흔한 인터넷 뉴스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외계인 표식, 뭐 그런 거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냥 별 일 없네 하면서 한번 슥 둘러보고 돌아갈려는데 에구머니나, 이게 뭔가, 뭔 생쇼도 아니고 이 근방에서 제일 커 보이는 나무 위, 즉 나무의 중간 가지에 걸터서 뭔 요트가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카누나 헹글라이더, 패러글라이더, 무인 글라이더, 대형 풍선이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뭔 요트. 그것도 대충 봐도 실운전 가능해 보인다. 처음에 놀라서 약간 뻥 튀겨 말한 듯 하다. 요트 보다는 보트에 가깝다. 요트 같은 보트, 그래 그거다. 즉시 바다에 띄우면 꽤 멀리 갈 수 있고, 지금 팔아도 제값 받을 것 같다. 운전석 옆에 책도 몇 권 보인다. 태양을 따라 항해하는 법, 바다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돌아오는 법, 떠다니는 유동 등대를 만났을 때 대처하는 법 등등. 죄다 머머 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노란 책들 뿐이다. 그런데 그 노란색의 빛 바램이 모두 차이가 있어 한 번에 산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하나씩 사 모은 것 같다. 한쪽에 통조림 깡통, 인형, 침구류, 침낭, 츄리닝, 가방, 낚시 도구들도 보인다.
   배가 산으로 가다, 그건 속담이 아니었어!
   그러나,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서 좀 더 수색하고 탐사할까 하다가 감탄사를 연발한다. 삐─! 아차! 아뿔사! 맙소사 이게 왠 떡이야. 그런데 알고 있는 감탄사가 많지 않다. 아까 생각은 이랬어. 이런 믿기지 않는 B + A가 나타나면 나중에 보면 늦는다고, 아끼지 말라고, 기다리고 애태우다 미루기만 하면 배 떠난다고, 딴 늑대들이 가로채간다고,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하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먹고, <먹을까 말까 할땐 먹어라>라는 카피라이트를 보면 웃고, 사고 싶은 거 있음 사고, 가고 싶으면 가라고. 그러나, 그러나 그건 너무 쉽다. 귀중한 건 쉽게 오지 않는다. 원래 세상 이치가 그런 법이다. 그러나 그 법칙이 안 먹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세상은 뭐 같다, 라고도 한다. 그러든지 말든지 아무튼 지금은 '해라, 하자, 해도 된다' 에서 그럴까? 로 반쯤 넘어왔다. 정말 진귀한 무엇이 하늘에서 덥썩 내려와 안겨질리 없다. 완전 고귀한 거라면 진짜 그렇다면 게임 이론에 따라서 나타날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머저리, 멍청이, 바보, 얼간이 같은 녀석에게 공짜로? 어림없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게다가 트릭도 있다. 심지어 유인술도 널렸다. 유혹의 반짝임은 늘상 함께하는 것이다. 감 잡았다. 딱 패턴 드러난다. 앞서의 기적, 삼지창을 확인하지 않고 지나쳐서 새끼친 거다. 저번에 슬며시 웃고 지나쳤던 컨버터블처럼 님을, 내 님을 보냈다가 집에서 마음을 보내고 그분을 떠올리며 그리움을 키우다 나중 조용히 근처에 들렸다가 못 보고 아쉬움과 함께 돌아오다 보면 또 다른 순간 이동의 신이 새로운 모습으로 신기한 방법과 함께 나타난다, 이게 바로 지금 사건의 윤곽이다. 그도 남들과 똑같이 인생의 풍파를 조금은 겪었다. 그래, 파도의 물결을 타는 거네. 그렇다. 참아야 한다. 참지 않는 건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정말 매일 언제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만고의 진리다. 그럼, 다음을 기약하고 양보하며 천상춘의 시기를 기다리는 건 아무나 못한다. 바늘로 허벅지라도 찔러야 하나? 정말? 못할 거 없지. 남의 행운을 가로채는 것 같아서 어째 찜찜했다. 공짜는 마음이 불편하다. 싼 게 비지떡이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수 있다. 손해보는 게 속편한 인생이었다. 영혼은 팔지 않을 테다. 그렇지만 무엇을 거침없이 하고, 뭐는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하며, 어떤 건 더 키워서 잡아먹어야 하는지 딱 훤히 이치와 물정과 원리가 드러나지 않는다. 마구 헷갈린다. 좋은 놈, 멋진 놈, 이상한 놈. 주면 먹고, 줘도 못 먹고, 줘도 안 먹는, 놈놈놈, 영화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1966). 마치 사랑의 감정과 좋아하는 마음이 엇갈리는 것처럼 뭐가 뭔지 도통 모른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 직감과 직관만은 온전하고.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양다리, 삼다리, 뻔한 인생살이말고 오직 일편단심도 있고. 어떻게 해야 해? 어찌 살아야 하냐고? 1번 룰을 따르면 시끌벅적, 플랜 B를 지켜도 웅성웅성,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아직 세상을 덜 살았을까 고생을 덜 했을까. 이런 젠장 그러다 다 늙어서 꼬부랑 할망구 영감탱이 되겠다. 다 모르겠고 일단 피한다. 결정했다. 기적이 뜬금없이 딴 데로 갈려다가 착오가 생겨 그가 먼저 맛을 본 거다. 기다리면서 애타고 있는, 속앓이 하는 누군가에게 괜히 미안함. 그래, 봐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것처럼, 못 볼 껄 본듯이 가만히 지나쳐서 돌아오기.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고를 수 있는 카드는 내빼는 것, 단 하나였다. 돌체 비타! 뜻이나 알고 하는 말인가. 지금 볼살 떨린 독자 있다, 옆사람 보면서 웃는 사람. 뭔 뜻인지 몰라. 알아도 금새 까먹어.
   어, 여기서 잠깐 돌아갈 수 없는, 당분간은 돌아가면 안 되는 그곳에 있던 보트 옆면에는 꼬마가 낙서했는지 공장에서 나올 때 씌여졌는지 웬 서명이 있었다. 케빈! 아니 글씨를 다시 보니 알렉스 같기도 한데, 도굴꾼이나 그림 사기꾼 손을 거쳤나, 홀로그램처럼 약간 겹쳐보인다. 뭔 상표도 아니고, 뭐지? 자, 여기서 잠시 그 전에 봤던 핑크 삼지창에서 봤던 조니, 그 이름과 이게 관련이 있나? 케빈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누가 있지. 알렉스는 또 누가 있고. 어쨌든 케빈은 12살이야. 아니야. 신출내기인지 몰라. 그것도 아니야 일반인이 분명해. 일반인 신성이야. 맞아. 왠지 조작된 이름 같은 거, 존 스미스, 그런 느낌이야. 만날 때마다 이름이 바뀌는 친구, 그런 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여기서 나아갈 단서는 더 없다. 그냥 둘 다 이름이라는 거. 그거 말고 이 상황에 뭔 억측을 떠올리겠나. 때를 기다려야 한다. 조용히.
   그 일이 있은 후 한동안 아무런 특이함과 신기함을 일상생활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행이다. 더위 먹어서 헛것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행인이 많은 길을 가다가 괜히 하늘의 구름 모양이 이상하다고 막 쳐다보면 몇몇이 같이 쳐다보게 되어 있고, 또 그 가운데서 상태가 조금 안 좋은 친구가 있다면 어 뭐다, 뭐 아니야 라고 소리치면 옆에서 웅성거리다가 참다 못한 한 아저씨가 한마디 하신다. 저런 미친 놈 쯧쯧쯧, 하면서.
   이제 그는 지난 일에 대한 그때의 기억과 감각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괜히 신빙성도 떨어지는 얘기였다면서 콩만한 걸 보고 카페만하다고 오해했다거나 온전히 타인의 '타인의 여자친구'를 위한 행위예술이었을 것이라고 단정지은다. 이젠 더 이상 생각도 안 난다. 양치기 소년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 들렸다가 지역 신문을 보던 중 흥미로운 사건을 알게 된다. 도시 인근 시골 공용 운동장에서 시추기가 발견된다. 어느 시골 아저씨께서 약주를 좀 많이 드셨는지 뜬금없이 뭔 천연가스와 석유와 지하수를 찾겠다고 여기저기 시추기로 막 파고 다니다가 주민신고로 제지되었다는 내용이다. 청년시절 본인의 전성기에 분명코 최소 딱 1번은 성공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생 삽질만 하시면서 대박의 환상을 쫓으며 이일 저일 오만가지 분야를 기웃거리다 청춘을 허비해버렸기 때문에 뭔가 아쉽고 허탈하니까 늙으막에 기네스북에 등재되던, 보물을 찾던, 끝으로 왕삽질 한번 해보던, 뭔가 탐험가이자 탕아로서 족적을 남기고 성과를 얻어야겠다는 조바심에 밑도 끝도 없이 옛날 영화를 흉내낸 것으로 추론이 모아진다. 단지 장소가 틀렸을 뿐이다. 상황도 그렇지만 그래도 소원 푸셨겠다. 이쪽도 돌아이다. 돌아이 전성시대. 꼭 무슨 이상하자, 캠페인 같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과 잡지도 보다가 그는 집으로 간다. 지금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는 할 말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딱 그런 약간 의기소침하고 침울한 분위기다. 집으로 가는 길에 보게 되는 도심 속 휴가지 이벤트 현장의 길다란 물-미그럼틀 설치 현장의 대형 크레인, 이걸 뭐라 불러야 하나. 이동식 크레인이 아니라 설치형 크레인, 지금 보이는 이것보다 더 큰 것은 항만시설이나 대형공장에나 있을 법한 그런 커다란 크레인. 집으로 가다가 공사현장에서 그 큰 크레인의 줄 끝에 이동식? 설치형 간이 샤워실이 걸려 있다. 에이~ 뭐야! 별거 아니잖아. 극히 평범하게 크레인은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거다. 인터넷 소셜 미디어 사이트에서 특종감으로 취급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그 뉴스에 턱걸이로 제일 낮은 등급 소식이라도 될려면 1)해안도로에서 트럭이 도로를 이탈하여 바다에 빠지고 2)소형 크레인이 삐요삐요 하면서 도착, 그걸 끌어올리다가 힘에 부치다 부치다 크레인도 따라서 전복 3)안되겠다 싶어서 중형 크레인 장비가 도착, 곧 기다리면 상황 종료될 거에요, 그랬는데 이마저도 출력과 안착력이 딸려서 꽈당 엎어짐. 4)처음부터 이 친구가 왔어야 했는데, 늦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한다, 그럴 수 있다, 안 그러면 안 된다. 사진 다 찍혔다. 동영상도 물론이다. TV 뿐만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난리난다. 지구촌 곳곳에서 사람들이 핸드폰으로 금새 보고 삽시간에 퍼진다. 대형 크레인이 도착하여 상황 끝. 이 정도는 되어야 소셜 미디어의 물결을 탈 수 있다. 그래 그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무슨 원맨쇼도 아니고 그가 도시 괴담이자 괴도 루팡인가? 비정상적인 나이트크롤러, 엇나가는 파파라치, 액션과 스릴러와 SF와 미스테리와 판타지 장르의 영화 및 드라마에서 단역조차도 어울리지 않는다. 좋게 집에서 발 닦고 책 읽으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그분이 그리고 내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게 낫다. 딱 그럴 팔짜다.
   도대체 소설의 소재는 어디서 찾고 소설은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일까. 소설보다는 먹고 사는 것이 먼저인데 전자(소설)로 (떼)돈을 벌어 후자를 해결할려 하니 그게 문제다. 그는 집에서 맨날 풀만 먹으니까 화장실에서 나오면 꼭 사슴이나 소, 말의 그것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비자발적 채식주의? 저런~! 그분은 오시질 않고, 아아!
   매일 똑같은 일과, 항상 보는 풍경, 의식주의 변화도 없고, 그분은 영영 오실 기미도 약조까지 없는 데다가 불가사의의 실종, 비밀의 단절, 흘깃 이상함과 새로움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아무 일도 아무런 색다름은 없다. 문득 땀만 삐질삐질 흘린다. 땀이, 분비물이 많은 체질인가. 그러나 이 생활이 타당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하고 계속 연타를 터트려 그걸 소설로 쓰면 썩 납득하기 곤란할 것이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신력을 몰두해도 그런 소설은 잘 안 읽힌다. 험담의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다. 노골적으로. 공교롭게도 그럼 그렇지, 하고서 허무주의의 실증감을 느끼는 가운데 그는 기인한 광경을 발견한다, 비로소. 블로그 소설 추종자들의 옛정이란 말인가. 아니면 또 역시나 주빈은 그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지만 이걸로 됐다. 이거면 된 거다. 그만하면 됐다. 행복하단 말이다. 여기까지로 되고 더는 바라지 않는다. 일단은 만족!
   무엇이냐 하면, 그가 일주일에 3번 운동하는 런닝 장소를 바꿔볼려고 아니나 다를까 인근 산행에 나서다 이상한 걸 본 것이다. 달리 뭘 할 수 없었다. 산행은 산행인데 약간만 더 멀리 갔다. 저번에 산에서 봤던 컨버터블, 집에서 거기까지 거리 A. 그때 본 나무 위에 카더라-식으로 자태를 뽑내며 걸터 있던 요트? 아니 보트, 집에서 그곳까지 거리 B. 이번 사건의 장소는 A + B + 알파였다. 그 정도 산길을 가보니까 수풀에 가려졌지만 보일락 말락한 샛길이 있고, 거길 따라가니 철조망이 있다. 토끼, 다람쥐, 산록 비슷한 덩치 큰 동물도 보인다. 어쩌지? 여길 넘어가면 영영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 아닌가? 오빠 달려? 철조망에는 팻말이 붙여져 있다. <상수원 보호 구역> 들어가면 안 된다. 벌금 얼마 뭐라뭐라. 그럼 들어가면 안 되지, 하면서 발걸음을 돌리는데 이런, 철조망이 몇 미터 가다 끝나 있다. 개구멍도 아니고 설마 이 철조망도 어디서 날아와서 하늘에서 툭 떨어진 건가? 아닌가? 그런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더 길을 따라 쑥 들어간다고 해서 별다른 볼거리는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저기 저만큼 숲속인데 웬 콘크리트 더미가 보이는 듯 하다. 조금만 들어갔다 돌아오자, 괜찮아, 무엇인가 보고만 오자구, 확인차 들어갔다 바로 나오자구, 하면서 들어간다. 마침내, 이윽고 그 앞에 보이는 것은,
   오 마이 갓, 삐─ 삐─ 삐─!
   가까이서 확인한 괴물체는 집채만한, 그건 너무 낮춰 잡은 거니까, 정밀한 감식이 불필요하게 딱 맞는 크기로 비유하자면, 비유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큰 건물만한 테트라포트 1개가 숲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뭔 말이 안 나와. 이게, 왜, 여기, 혼자, 덜렁...... 초음파 측정기나 방사능 검사라도 필요한 건가. 아직 저번 요트 아니 보트 위치에 확인차 가보지 않았는데. 정리하면 1번 삼지창, 2번 보트, 3번 크레인에 매달린 간이 샤워실, 이건 선수교체라 치고 다시 3번 테트라포트. 1번을 보고 지나쳤다가 다시 가보니 없었어. 돌아오다가 2번 발견. 다시 시간이 지나고 2번을 재확인하지 않고 3번 목격. 피보나치 수열이야 뭐야? 복잡하네. 어렵군! 에잇 다 몰라, 전부 다 타겟은 딴 사람일 꺼야. 한 번 더 두고 보자구. 진득히 기다려 보는 거야. 쇠뿔도 단김에 빼라지만 이건 그거와 맞지 않아. 뭔가 패턴이 있을 꺼야. 아니라면 숨겨진 뭔가를 더 추적해 나가야 해. 뭐야 나 탐정? X파일의 멀더야 스컬리야? 아님 멀더 + 스컬리?
   그는 내심 쫄아서 서명이고 뭐고 확인하지도 구경도 않고 달음박질쳐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가택감금!
   그분이 오셨던 것일까? 아니면 오시지 않은 것일까? 설마 간 보고 내빼신 건 아니냔 말이다. 그대는, 이처럼 하품 나오는 수면제 같은 소설을 읽으시면 안됩니다. 절대 안됩니다. 당신이 주인공인 소설을 사세요. 당신은 걸어다니는 소설입니다. 소설이 지금 소설을 읽고 있다구요. 소설이 소설을 써서는 곤란합니다. 이거 읽으면 IQ 팍팍 떨어져요. 이런 소설 절대 읽지 마세요. 절대. 그래······ 주실거죠? 
   최면은 보통 눈 감고 빠지고, 숫자를 셉니다. 뭣이여? 이번에는 숫자도 안 세고, 눈도 안 감았는데, 윙크까지 안 했는데, 어렵쇼, 눈 뜨고 당한건가?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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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52

from 소설 2015. 7. 6. 18:20

   탄소 연대 측정. 유기물에 포함된 방사성 동위 탄소의 상대량을 측정하여 시료의 연대를 판단. 이게 뭐길래 까마득히 옛날에 만들어진 물건의 정보를 파악해내는 것이지? 세상에는 신기한 일들이 많다. 알고 보면 자연스러운 원리지만 모르니까 그렇다. 곧 알면 기이하고 신비로울 것이 없지만 모르면 재미나고 색다른 것 일색이라는 얘기가 된다. 예술가들이 아이 흉내내는 이유가 다 있다. 딱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 주지는 않지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음흉한 사람들. 그러니 모른 척 능청이라도 부려야 할 듯하다. 괜한 심술인지 몰라도 그래볼만 하다. 소설쓰기에 도움되니까 연기의 재능도 필요하다는 억지.
   알면 새로울 게 없으니까 모르는 것에 대해 궁금해 하고 생각하며 그것에 대해 써야 한다고 속으로 되뇐다. 모르는 것을 쓰는 엉뚱한 이야기만 만드는,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면서 쓰는 습성, 그런 이야기.
   자, 자, 모르는 게 무엇이 있을까. 그래, 있다. 사람들의 체격과 지능은 날로 커지고 무거워지고 높아만 간다. 점점, 점점. 자동차도 부피가 계속 커진다. 옛날 차를 보면 꼭 미니카 같다. 자동차가 커지니까 주차장 차 1대당 면적도 커진다. 차량 대수도 종류도 많아진다. 뉴스도 옛날에는 "오늘은 뉴스가 없습니다. 음악을 틀겠습니다." 라고 했지만 지금은 반올림 또는 반내림 1시간짜리 뉴스를 하루에도 여러 번 반복하고, 수없이 재생산하고, 정보는 차고 넘친다. 그럼 언제까지 늘어나고 커지기만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핸드폰 크기도 계속 작아지다가 다시 커지고, 서로에 대해 모르는 일이 하나도 없을 만큼 가까워지다가 자기 영역과 공간과 시간을 교집합에서 독립시키기도 하고, 직장을 옮기고 그런 것처럼. 다르게 변할 것이다. 일단 추측이지만 아직 모름이다. 아니면 발뺌?
   사실주의, 인상주의, 낭만주의, 초현실주의, 미니멀리즘, 팝아트, 복고풍. 그리고 다가올 미래의 무엇. 그것은 무엇일까? 나도 모르겠다. 조니. 케빈. 알렉스. 마크. 하워드. 닉. 제임스. 그럼 이 친구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육하원칙으로 속 시원히 알려주면 비밀이 바닥나버리니까 신비롭지도 않고, 공개되어 버리니까 모르지 않기 때문에 재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계속되야 하니까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보자. 조사를 할려면 꼬리가 보여야 한다. 고로 꼬리를 NC, 나이트클럽으로 정한다.
   이 친구들은 NC 사장실에 있다가 준수한 웨이터 에르메스씨가 하워드님은 이곳에 계실 것입니다, 라면서 그들을 어느 해안도시 바닷가에 데려다 주어서 지금 금빛 모래와 네온 싸인, 바다로 뻗어있는 그걸 뭐라 하지, 기다란 그리고 높다란 길, 폼나는 설치물과 많은 사람들, 여유로운 풍경을 보고 있다. 그런데 소설 장면의 가상공간은 꼭 해가 지지 않는 환영 같다. 해가 떠 있나 달이 떠 있나, 는 매우 탄력적으로 판단하고 상상하게끔 만드는 어이 없는 기법이다. 정말 거짓말처럼 어느 소설과 영화에 나왔던 헬륨가스가 들어있는(정확히는 모름) 열기구가 가까운 바다 위를 떠다니고, 거기 매달린 밧줄 끝으로 사람이 매달려 있다. 극중 장면처럼 비극은 예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매달린 사람이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 위에 떠 있는 노란 도착점에 착지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불시착 한다고 해도 바다에 빠져서 도전이 꽝만 될 뿐이다. 꼭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도전하는 어느 주인공 따라하기 같다.
   어떡하다가 그들은 어느새 하워드의 요트에 이미 승선해있다. 실시간 이벤트나 다큐멘터리 무비로 생각해보자면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승마 경기를 하는데 시선과 온 관심을 빼앗겨 그들의 이동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실재 승마경기가 해변에서는 이루어진다. 또 여기서도 승마경기를 했다. 게다가 종마도 등장했다. 종마, 아직 뜻을 모르는 친구들 많다.
   풍덩 소리를 내면서 물방울을 튀기며 뭔가가 근처 바다에 빠졌다. 자동차일까 아니면 텔레비전일까. 그것은 야구공이었다. 한두 명만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여러 친구들이 있으니까 뭐지, 뭐야, 라고 말을 주고 받으면 누군가 어 그거 뭔지 봤어, 라고 말을 해주니까 금새 그렇구나,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색 스포츠 경기가 준비중인 것 같다. 바다에서 카약을 타고 시작하여 어딘가에 도착, 도로용 자전거를 그곳에서 타기 시작하여 얼마 구간을 일주한 후에 마지막은 런닝으로 마무리. 마지막 런닝은 산 중턱 도로에서 시작하여 도로에서 계속 뛰어 산 정상에 도착. 골인. 개별 세러머니.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고 하지만 젊은이들은 또 그걸 (개)재밌다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해변가라서 개가 헤엄을 치는 모습은 안 보이는데 사람들이 개의 수영법을 흉내내어 떠다니며 그렇게 헤엄치는 이벤트도 진행중이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서핑 보드에 66명이 한꺼번에 올라타 12초 동안 보딩하는 서핑계 초유의 퍼포먼스가 진행중이다.
   요트 이름들도 망원경으로 보니 별의 별 이름들이 다 있다. 물론 무명도 있다. 육식주의자 대 채소주의자. 아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vs 아내는 아무 것도 모른다. POPULAST. SPAFINALE. 금요일. I LOVE MY DAD(이건 반듯한 글씨체에 정교한 물감칠하기로 씌여 있지 않고 딸아이가 아빠의 요트 몇-연도 몇-호를 기념하기 위해 십자드라이버로 깔끔히 새겨놓은 것 같았다. 요트 색상이 어두운 색이라서 왠지 유명 미술가의 작품처럼 보였다). Tell Me Why. 날 보러 와요. 언제 시집갈꺼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Room 101. 평범한 개츠비. 파우스트. 팡세. 1984. 노인과 바다. 드라큘라. 덱스터. 한니발. 백곰. 모비딕. 악령. 신드롬 J. 해리포터. 왕게임. 2666. 판도라. 아도니스. 니오베. 그리핀. 리베로. 맥심. 안젤로. 자콥. 매그놀리아. 열대병. 향수병. 마스터. 태양은 가득히. 헐크. 뭉크. 코엔. 본부장. 칸쿤. 트리스탄. 이졸데. 비비안. 마돈나. 요트 이름을 줄곧 나열해대서 소설 분량을 뽑으려 하다니 이런 초딩이 쓰는 어른 소설 같으니라고. 나를 만지지 말라. 피에타. 오필리어. 그것을 잊어라! 나를 잊어라!. 피앙세. 비너스. 결혼 직후. MOST WANTED.
   하워드의 요트, 하바나, 아니 익숙한 분야가 아니라서 서술자가 배의 이름을 헷갈려 한다. 모히토에 그 친구들이 있고 그들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사건보다 대화. 살면서 우리는 또는 누군가는 실은 기막힌 모험보다 멋쩍은 대화가 때론 거의 삶의 전부임을 깨닫기도 한다. 뭐 중요한 깨달음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좀 특별하다. 보통의 대화 방식에 반하여 새로운 시도를 애써 한번 쯤 감행해 보는 것일 게다. 안 해봤으니까. 더러는 이따금 열심히 시도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들끼리의 그들만의 노는 방식이니 뭐라 할 구실도 없고, 더 들어가서 뭐 하는 짓이냐고 다그칠 일도 아니며, 자세한 설명도 불필요하다. 일단 어떻게 돌아가나 그걸 슥 엿보면 그렇구나, 라고 느끼게 된다. 생각 이전에 1차적으로 다가오는 무엇.
   조니가 말한다.  <케빈>, 너 선그라스 바꾸는 게 어때? <알렉스>, 넌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유일한 오리발 매니아야. 서핑 보드에 오리발 끼고 서서 노를 저으며 절대 서핑은 하지 않는 1인. <마크>, 넌 요즘 살쪘어. 혹시 채식 그만둔 거니? 아니면 무슨 기간이라고 혼자 정해서 어느 하루만 몰아서 육식을 하는 거야? 집에서 날마다 바베큐, 칠면조 파티 하는지 알 수가 있나. 통 친구들 초대하지도 않고 말이야. <하워드>, 실망이다. 왜 우리들에게는 요트 이름 가르쳐 주지 않은 거야? 조니한테 뭐 밉보인 거 있냐? 수상해. <닉>, 넌 요즘도 뭘 해도 재미없니? 뭐 요즘 꼿히는 거 없어? 저기 보이는 해변에 비키니 미녀들 많자나. 비키니도 이젠 한물 갔어. 뭐가 불만이고 뭐가 걱정이야, 인생을 즐겨. 인생은 짧아. 인생은 더워. 뭔 말이야? 누가 인생을 말하라고 시킨 거야. <제임스>, 너 쓰고 있는 소설은 언제쯤에나 완성되는 거야? 쓰고는 있니? 구상만 하는 거 아냐? 플롯은? 재미있기는 한 거고? 그리고... 난... 난... 그냥 그래.
   꼭 사춘기 방랑의 시기를 보내는 친구들 마냥 빙 둘러 원을 그려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다. 어떤이는 옷차림과 안 어울리게 와인잔을 들고, 누구는 맥주 캔을 따자마자 원샷하다가 요트 끝자락에 달린 스프링보드 끝부분에 서서 오줌을 누고, 그래도 되나? 또 다른 친구는 시집을 옆에 두고 있다.
   닥치고 쓴다. 닥치고 공격한다는 축구 작전처럼 막 쓴다는 것. 새로운 글쓰기, 아직 해보지 않은 그것, 지금 진짜 어쩌다 그게 시작됐다. 정말 완전 밑도 끝도 없는 시작도 끝도 없는 끝간데 없이 막 쓰기, 맨 땅에 헤딩하듯이 글쓰기, 아직 안 해봤다. 진짜로 무작정 막 쓰면 어떻게 되는지 아직 해보지 않았어. 아마 나중 읽으면 실망할 테지만 한가지 위안이 되는 점은 이거다. 소설가가 연륜이 쌓인 후에 자신의 장편소설 38편 가운데 난 뭐가 제일 좋드라, 뭐가 가장 마음에 든다, 이런 말은 할 수 없겠지만 단 하나의 소설 그것에서 어느 챕터가 인기 있을지 미리 살짝 예상하면서 조금 감안하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점. 소설가가 아닌 독자 입장에서 독자 경력 수십 년을 놓고 봤을 때 우선 독서 행위에 있어서 마음에 걸리는 건 분량이거든. 장편이라는데 설명만 길어, 책표지에는 장편소설이라는데 도무지 뭘 보고 장편이라는지 알 수가 없네.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다가 감흥이 일었다가 황홀하게 빙글 돌았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어. 여기 있는 챕터 하나를 장편소설로 불릴 능력은 전문가의 초입 단계에 해당될 것이다. 즉 모순되는 일이다. 무턱대고 쓴다지만 분량을 단순한 요약이 아니고 의식도 아니고 얕은 수완이라도 좋으니 챕터 하나에 몽땅 몰아넣어서 재밌는 글읽기에 알맞는 질량으로 완성. 일단은 그렇다. 말은 그래. 닥치고 쓴다. 닥쓰! 뭐 챕터 하나 버린다 쳐야겠다. 한번 해보는 거야. 닥치고 쓰는 게 뭔지 보여주겠어. 혹시 그동안 계속 재미없다며 시무룩했던 어느 독자는 이게 제일 우끼다며 지금까지는 영 아니었다며 이제야 좀 재밌어지는구나, 라고 좋아하실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는 말만 그랬다. 닥치고 쓴다고. 하지만 그건 정말로 막 쓰는 게 아니었다. 어떤 결정체가 맺혀야만 쓰면서 겉으로는 닥치고 쓴다고 한 거다. 진짜 재미있을 거라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써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나중은 몰라. 지금은 그렇다. 워워 대체 뭐가 나올지 막 궁금해진다. 엄한 루트로 발동 걸렸어. 그러니 일단 써 본다. 쓰고 나서 실망한다면 또 그걸 구실로 술 한잔 하는 거다. 오케이, 간다.
   케빈이 말한다. (문단의 시작으로 누가 말한다는 문장을 쓰고 대화를 이으면, 대화를 쓰고 나서 칸을 띄지 않은 채 대화 다음에 누가 뭐라 했다, 뭐라 한다, 라고 쓰는 것보다 덜 헷갈린다. 그걸 시나리오 방식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희곡은 읽기 어렵다.) 케빈이 말한다.  <조니>, 요즘 어떤 차 타니? 요즘 어떤 책 읽어? 일은 잘 되고? <알렉스>, 대답 듣지 않고 막 물어보기, 이거 재밌지 않냐? 지금은 짧게 얘기하지만 조금만 있어 봐. 엄청 길게 말할 테니까. 그게 대체 뭔 원리인가 잘 모르겠지만 보고 있으면 조금 놀랍다니까. 실제로 이 게임을 구경해 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결과가 훤히 보인다니까. 지금 짧게 말할 때는 약간 그 게임같아, 당연하지, 하지만 좀 있어 보면 자기 최면에 빠져들 꺼야.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니까. 일단 기다려 보자. <마크>, 저번에 첼로 시작했다며? 독학이 어려워서 어느 첼로 연구소에 들른다지? 첼로 선생님··· 남자··· 아니지? 내가 너무 대놓고 물어보는 건가? 아닌가? 대놓고 물어보면 어때? 친군데. <하워드>, 최근에 보는 드라마는 뭐니? 혹시 요트 물 새지 않아?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요트 사고 나서 완전 개고생 한다는데. 내가 봤을 때 남자는 말이야, 요트를 한 번 사 봐야지 인생을 제대로 알기 시작하는 거 같아. 그럼. 그닥 틀린 말은 아니야. 딱 옳은 얘기도 아니니까. 재밌는 말이잖아. <닉>, 어제 뉴스를 보니 이탈리아 두오모 성당에서 누가 드론 날리다 생-난리 났다는데 딱 너가 떠오르더라. 드론 사놓기만 하고 너 이제 드론 안 쓸 것 같은데, 아마존에 올리는 게 어때? 그냥 싸게 넘겨. F1을 도전해 볼 시기는 넘었으니 놀이공원 범퍼카라도 타러 가든가. 자판기에서도 이젠 드론 팔더라. 처음에는 새로웠는데 말이야. 자연스럽게 케빈의 말이 끝난다. 흐름이 이어진다.
   알렉스가 넌지시 운을 띄운다.  암장 요즘도 들르니? 시작했으면 스포츠 클라이빙 대회 한번 나가 봐. 음 <조니>!······ 예전 언젠가 그런 말 들었던 것 같은데. 한때 별명이 딕 트레이시였다고. 아니 아니 행키 팽키라 그랬나? 최근에 새로 생긴 별명 같은 거 있니, <케빈>?······ 저번에 풋살 시작한 건 계속 하니, 처음엔 깜짝 놀랬다며, 자신에게 딱 맞는 스포츠라는 느낌이 확 들어서. 막 흥분됐다며. 어때 <마크>!······ 해양 스포츠에서 유독 우리들 가운데 다방면으로 재주를 보이는데, 우리처럼 기껏 어쩌다 한번 놀러오는 수준이 아냐 넌. 또 카약 타면서 동시에 낚시도 한다며? 저번에 유튜브 보니까 카약 타면서 낚시로 사람 키만한 물고기 잡던데. 설마 그런 거 연출 아니겠지? 카약 타면서 낚시 하면 기분은 어떠니? 막 세월을 낚는 심정 그런거야, <하워드>?······ 도대체 누가 너를 애타게 기다리는 걸까. 또 누가 지시하고 지침을 전달하는 거고. 그 사나이 아니 그녀가 너를 위해 이 곳에 있듯, 너도 그녀를 위해 꼭두각시 연극을 펼치는 무슨 이데올로기라도 있는 거야? 마지막 사랑, 치열한 투쟁, 뭐 이런 거야?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어땠어? 짧지만 좀 미스테리-스파이-스릴러 기분 나니, 응, <닉>?······ 가만 있어 봐, 음, 생각해 보자, 뭐가 있을까, 막 기대되는 것, 기다려지는 것, 가슴 한구석인지 그냥 마음 어딘가가 딱히 간지럽지도 아프지도 그렇다고 쿵쿵거리는 거도 아니고 마구 이상하게 붕 떠있고 휑한 느낌, 들떠 있는 것, 막 예상하며 추측하며 상상하며 한 번 맞춰볼까 하며 기분을 고조시키는 것, 뜨겁지는 않더래도 따듯한 것, 떠날 듯 하면서 한바퀴 빙 돌아서 되돌아 오는 것, 타인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 좋아하는 것과 장래 희망과 꿈에 대하여 추억을 문학으로 표현하는 것, 로맨스, 사랑 노래, 뭔가를 아낀다는 것, 와인을 알아간다는 것, 새롭고 새롭고 또 새로운 것, 말이 아닌 글처럼 시처럼 얘기한다는 것,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요즘 뭐 재미난 일 없니, <제임스>? 오오 알렉스는 질문의 끝자락에 이름을 부르네. 느낌 색달라. 대답 듣지 않고 막 물어보기, 어떤 운을 타기 시작한다.
   마크가 말 할 차례다.  <조니>, 저번에 키우던 토끼는 잘 크니? 토끼털 만져보니 너무너무 부드럽드라. 하지만 밍크 코트를 파티갈 때 입었는데 기분이 뭔가 이상했어. 세상은 그대로인데 난 잘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케빈>,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도시 사람들은 이렇게 해변으로 떠날 가능성을 안고 사는 뭐랄까, 떠나도 되지만 난 바쁘다─할 일이 있다. 많다─언제라도 가면 되니까 꼭 지금은 아니어도 돼─억지로 그 가능성을 남겨 놓을래, 라면서 선뜻 도시에서 멀어지기 싫어하잖아. 왠지 좀 그런 경향이 있잖아. 이미 휴양지에 와서 놀거나 사는 사람들도 자꾸 어딘가 한눈팔고, 해변이 바로 보이는 어딘가에 막 짐을 푼 여행객이 아닌 여유로운 어떤 떠돌이랄지 항구 도시 내부 도심지의 세련된 생활을 즐기는 분위기, 그러다 또 어디로 멀리 떠나고 싶어지고, 사라지는 건 사고니까 행선지로 떠난 후 여운과 함께 글로 남기고, 넌 그런 정착과 떠남의 오고감, 심심함과 재미있음의 균형을 어떻게 인위적으로 제어하는 거니, 말이 좀 꼬였지만 어려운 듯 들리지만 언뜻 즉흥성과 계획성 말고 날 움직이게 만드는 그런 뭔가가 너에게는 무엇이냐, 그런 물음이야 내 말은. 음 그래. <알렉스>,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해변에 수건을 갈고 눕거나 엎드려서 일광욕 해봤니? 난 안 해봤어. 선크림 바르고 햇볕을 약간 가려주는 커다란 우산 밑에서 잡지나 소설을 보다가,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칵테일을 마시며, 여러 디자인의 수영복을 구경하고, 저녁에 만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그런 일광욕. 그거 꽤 배 나온 아저씨나 철없는 유산 상속녀, 유복한 은퇴 생활을 떠올리는 느낌이 들지만 여태 그 느긋하고 쉬운 놀이를 안 해봤다는 게 말이나 되니? 참 나, 나란 녀석은 그간 뭐가 그리 바빴는지 정작 말로만 남에게 인생을 즐겨라, 해버려라, 질러라, 어째라 그랬지 정작 난 누드모델도 안 해봤고, 마술도 안 배워 봤고, 해변 산책 마저 언제 해봤는지 생각도 안 나. 그런데 또 이런 말 하면 일은 언제 하냐, 너무 사람 들뜨고 놀러 가게 뻠프질 하는 거 같은 느낌도 분명 아주 조금은 있어. 그런 말 많이 하잖아. 가르쳐 보면 자기 공부가 많이 된다고. 질문을 해보니 이브 클라인의 그림과 개가나 수절 같은 단어도 그냥 막 심상에 떠오르고, 내게 변화가 필요하단 걸 느낀다야. 문득 고맙네. 음. 그래. <하워드>, 저번에 007 가방 산단 계획은 지켰니? 계획을 지키다? 실현하다, 구현하다? 그런데 그 가방 열쇠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아 그건 그냥 디스플레이용으로 전시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그런 책처럼. <닉>, 언제 우리들 한번 초대해 줘. 피자집 차렸다며? 요리사가 굉장한 미남이라며. 맛난 피자 원 없이 실컷 먹을려고 레스토랑 차린 거 아니니? 완전 틀린 얘긴 아닌 것 같아. 닉을 보면 꼭 닉 드레이크 음악이 듣고 싶어져. 피자와 닉 드레이크, 그건 꼭 화장실에 젊은 부인이 앉아 있고, 화장실 문을 열어 놓은 채 거실에 있는 남편과 대화를 나누는, 그런 정경이 떠오른단 말이야. 왜일까? 왜? 잘 모르겠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지. 궁금하지도 않아. <제임스>, 지금 쓰는 소설에 우리들 얘기도 나오니? 나온다면 좋겠다. 흥미로울꺼야. 꽤 근사할 것만 같아. 아직 미완성이라면 우리 얘기 좀 넣어 봐. 경마장도 장소로 등장하는지 몰라. 애고머니나, 나 경마장도 아직 안 가봤다. 다음에 꼭 가봐야겠어. 말 동상, 말 그림, 말 마크, 백마, 말 근육, 천리마, 힘, 마력, 음. 좋아. 그나저나 젊은 친구들이 처음엔 호기심으로, 들떠서, 조금 재미로 읽다가 뒤로 갈수록 몰입도가 떨어지는 소설 그리고 그 젊은 친구들이 나이 들어서 젊었을 때 읽던 책들을 다시 읽지는 못하고 추억의 장소나 재회와 그땐 그랬구나-라는 그런 기분도 드는 후반으로 갈수록 신비로워지는 새로운 소설을 쓸 거라면 음 난 전자의 주체가 될래. 소설 읽고 뭘 느끼고 감흥과 영감을 얻고 뭔가 깨닫고 감동받는 것 보다는 <솔직히> 시간 때우려고 소설 읽어. 큰 즐거움과 짜릿한 읽는 경험이 아닌 작은 생소함과 신선함 어린 잠깐의 여가, 어렵싸리 탄생한 심도있는 문학을 차라리 그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젊은이, 난 그쪽을 택하겠어. 음 그게 좋겠다. 우리끼리 얘기하니까 하는 말인데 실은 그렇다니까. 마크의 말이 끝난다. 대화가 무르익는다.
   어느새 하워드 얘기할 차례가 되었다.  <오 조니>, 지금의 이 파노라마는 데이비드 호그니의 어떤 그림과 유명한 클래식 음악의 멜로디가 떠올라. 멈홀랜드 드라이브. 로브 무비도 있는데··· 제목이 뭐드라. 음 생각이 안 난다. 있잖아, 고적운, 고층운, 권운, 권적운, 적운, 적란운, 층운, 난층운 그리고 비행운. 조니 널 보면 꼭 구름 같아. 좀 유치하지? 그래도 그렇게 느껴지는데 어쩌겠어. 그 비결이 뭐니? 비결, 촌스러워서 안 쓰는 말인데 나도 그런 말을 하게 되네. 허허. 난 그게 정말 궁금해. 거기서 물이 내릴지 거인 유아들이 뛰어놀지 불이 번쩍할지 알 수가 없잖아. 놀라워. 기막히다구. 어쩜 그럴 수 있냔 말이야. <케빈>, 케이크를 준비할 걸 그랬나. 조금 출출해지는데. 아 케빈 널 보니까 공복감이 생긴다는 말은 아니야. 왜 너네들만 왔냐, 왜 상냥한 여인네들은 데려오지 않았냐, 그런 칭얼거림 또한 내 마음 속에 요만큼도 남아있지 않아. 정말이야. 정말이라니까. 믿어줘 친구들. 화가 존 싱어 서전트가 이런 말을 했지. '나는 초상화를 그릴 때마다 친구를 한 명씩 잃었다.' 케빈 네게 있어 초상화,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니? 예전부터 널 보면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이걸 꼭 물어보고 싶었어. 인물화를 그려서 여자를 꼬시는 거 말고 자화상을 그려서 친구든 시간이든 뭣이든 뭔가를 잃는다는 것, 오, 오, 아름다워! <알렉스>, 너 혹시 투우장에 가본 적 있니? 난 없어. 소더비 경매장도 안 가봤어. 그러나 넌 꼭 그런 곳에 가 본 사람처럼 느껴져. 왜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 나는 우주인이 지구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받아보진 않았으나 언젠가 국외거주자 어느 유명인이 투우장에 가있는 흑백 사진을 보았어. 사람들에게 당신은 점잔을 빼고 있다고, 죽도록 술을 마신다고, 모든 시간을 일하는 데가 아니라 말하는 데 쓴다고, 넌 유랑자라고, 카페나 어슬렁거린다고, 그런 말을 한 사람. 난 그 양반 작품은 별로지만 그 사람 작품 빼고 인생은 참 흥미로워. 나머지는 다 드라마틱-해. 하지만 시대가 변하니 외국에 오래 사는 사람들이 말하는 공통점은 마치 스위스가 되는 것 같다고 하더군. 어느 기사에서 읽었어. 자기가 어떤 식으로든 중립이 되는 것 같고, 여러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거야. 관대해지고 개방적이 되고 제트족이 된 듯한 꽤 멋진 기분, 느낌 알잖아. 뭐 요즘엔 TV시대에서 인터넷도 오래 되고 문화 자체가 국제적이 되었지. 그것이 투우장과 큰 연관성은 없지만 친구들 가운데 자네는 투우장에 같이 가고 싶지 않은 친구로 뒤에서 2등에 뽑혔어. 축하하네. 내가 너무 쓸데없는 말만 하고 있지? 나도 알아. 다 안다구. 어떡하겠나, 기분이 좋은데. 하지만 그러다 보면 뭐가 착상같은 게 떠올라. 그래서 그래. 꼭 낚시하는 것 같다니까. 담배피는 것도 뇌 구조도를 분석해 보면 기다리는 그 과정에서 정작 도파민이 나온다고 하잖아. 무작정 말하다 보면 하나가 얻어 걸려. 신기해. 그걸 수첩이나 핸드폰이나 노트북에 남겨 놓아야지만 그만큼 두뇌에서 에너지를 덜 쓰게 돼. 또 그래야 그 다음이 나오고. 꼭 글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러잖나. 많이 걷고 움직이고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경험을 하다 보면 어떤 실마리가 풀리는 착안감이 다가온다는 점, 그것 말이야. 다음 친구로 넘어가볼까. <마크>, 지금도 Family Guy 즐겨 보니? 실은 나도 어쩌다 한 번씩 보긴 해. 아니야. 아마 가끔 일부러 찾는 것 같아. 왜냐면 그건 뭐랄까 살면서 케익으로 얼굴을 맞아 본 경험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랄까. 생일날 케익에 올려진 촛불을 불어서 끌려다가 눈썹에 촛불이 옮겨 붙는 사건을 겪은이나 생일날 규칙적으로 촛불 잔치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생각보다 많은 것처럼. <닉>, 프라모델 미니카 지금도 가지고 노니? 엇그제 축구 경기 방송에 나왔는데 심판이 경기 시작 전에 리모콘으로 조종해서 경기장으로 중형 여행 가방만한 차를 들어오게 한 후 거기서 축구공을 빼더라니까. 공원에서 갖고 놀면 시선 끌기 좋을 것 같아. <제임스>, 넌 요즘 사소한 일이 커지고 커지고 커져서 무척 난감했던 적 있니? 난 있었어. 저번에 파티에서 예전 친했던 친구 녀석을 만났거든. 반갑고 기뻐서 마구 얘기나누다가 전화번호 교환하고 헤어졌어. 헤어질 때 하는 말들 있잖아. 우리는 너무 중요한 걸 잊고 산다, 꼭 연락해, 전화하지 않으면 난 일주일 내내 집에서 울고불고 난리칠 꺼야, 밖에도 안 나갈 꺼야, 너 밖에 없어, 내가 먼저 연락할께, 꼭 한번 만나자, 밥 한번 먹자, 술 한잔 하자,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하자, 기타 등등. 며칠 후에 그 녀석에게 전화를 했어. 한때는 정말 친했거든. 다시 그때처럼 놀 수는 없지만 일단 밥을 같이 먹든 어쩌든 다시 만나야만 하는 것처럼 저절로 몸이 움직여서 전화를 걸었지. 그런데 통화를 하니 나도 별로 할 얘기가 없고, 그 친구 목소리도 조금 그랬어. 뭐가 조금 그랬냐구?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거지 그게 대체 뭐냐고? 그냥 그렇다,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래야만 하는 그런 거 있잖아. 딱 그랬거든. 그러고 통화를 끝냈어. 괜히 기분이 울적하더라구. 그래서 밖으로 나갔지. 그냥 걸었어. 계속 걸었어.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던 중에 앞에 캔이 하나 길바닥에 있네. 펩시였나 마운틴 듀였나. 그랬어. 나도 모르게 그걸 발로 뻥 찼어. 있잖아 무회전 킥. 럭비 한번 해볼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도 조금 들었어. 그런데 그 캔이 빙글빙글 날아가더니 앞서가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아가씨의 뒤통수에 정확히 부딪히네. 왜 그런 거 있잖아. 행동에 들어가지 않고 3초 멈칫 하는 거. 딱 그랬어. 근데 그 순간 그 아가씨가 뒤돌아보더니 아가씨와 나의 중간쯤에서 걷던 몸집이 좀 있는 왠 뽀글이 걸스카웃의 파마머리를 다짜고짜 잡고 몇바퀴 흔들기 시작했어. 어떻게 말릴 수가 없었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구. 완전 개싸움이 시작됐어. 누가 힘이 쎄거나 한쪽이 무너지거나 아니면 코피 터지거나 혹은 박진감이 넘치는 거도 아니고 소란스럽고 스타일 구겨지면서 크게 다칠 것 같지도 않는 완전 개싸움 있잖아. 둘 다 스팀을 많이 받아 있는 상태로 뭘 툭 건드려만 주니까 시작 버튼을 누른 듯 불꽃놀이 축제가 펼쳐진 거지. 딱히 다치거나 망가지는 상황도 아니고 그래서 사람들 웃고 쳐다보고 사진찍고 동영상 찍고 한껏 웃드라구. 때마침 지나가는 경찰차가 싸이렌 한 번 울려주니 바로 그 즉시 알아서 싸움을 멈추더라고. 경찰아저씨 오기도 전에 서로 사과하고 미안하다 내가 술 한잔 사겠다 어쩌겠다 그러네. 이젠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함부로 길바닥에 있는 깡통을 발로 차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집에 왔어. 집에 왔는데 이럴 수가 대박! 대박! 누가 그걸 찍어서 인터넷에 올렸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터그램, 유튜브, 뭐, 뭐. 그날 여기저기 뉴스에도 나왔어. 그게 끝이냐? 그럴 리 있겠어. 다른 언어권 방송에도 해외토픽으로 떴지. 남반구 어딘가에 팬클럽도 생겼데. 그러다 그 친구들이 어느날 아침 방송에 나가네. 광고도 찍어. 영화에도 나와. 잡지 인터뷰 기본이지. 인생 폈어. 스타로 뜬 거야. 콜라캔에 뒤통수 한번 맞드니만 바로 유명해지고, 새로운 삶에 즐거운 인생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세상에 있을 수 있나 싶었는데 정말인 걸.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그러고 보면 세상 참 웃겨. 오, 아름다운 인생 오묘한 세상이여! 하워드의 말이 끝났다. 이곳은 정말 해가 지지 않는다. 해가 지지 않아.
   오래 참았다, 닉. 뭔가 할 말이 없어도 지어서 만들어 낼 듯한 눈빛이다. 소설도 그렇게 쓰는 사람이 있듯이. 고품격 문체 하면 줄리언 반스고 줄리언 반스 하면 고품격 문체다. 일전에 인터뷰 번역된 거 조금 읽었는데 어쩜 말까지! 한데 그는 남성이라서 그런지 아마도 E.M. 포스터가 꼭 지금 현재의 닉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런 인상이 없잖아 있는 듯 하다. 마치 실재 구스타프 플로베르가 빅토르 위고를 썩 애호하지 않았듯이. 그건 그렇고 당신은 닉이다. 너는 닉. 그래 질 수 없어. 오케이. 없어도 만들어 낼 꺼야. 할 수 있어. 닉, 그래 결심했어. 내 차례야.  <조니>, 최근에 본 영화 재미난 거 있니? 있으면 하나 추천해다오. 유명 영화제에서 월계관을 받거나 재밌거나 둘 다든가. 옛날 영화를 지금 보면 거의 다 재미없어. 그러나 그 가운데 명작은 간혹 재개봉하거나 TV 교육방송에서도 나오고, 스스로 찾게 되기도 하지. 나는 이런 얘기를 다른 사람과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즉 나와 모두 비슷한줄 몰랐는데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더라고. 옛날 꺼 다시 보면 촌스러운 거 말야. 안 그런 건 명작이고 고전이지. 나도 얘기할 분량이 생긴 삶이라서 슬슬 뒤를 돌이켜 보면서 얘기 나누는 재미가 있어. 학교 다니는 사람들 말야, 그 친구들을 보면 생각나는 것들. 학원가나 학교나 그런 데 가면 가끔 어른들은 자신의 그 시절을 떠올리잖아. 옛날 성우 생활하던 습관이 남아서 대화하다가 거기 빠지면 나도 모르게 말하다가 문어체로 얘기할 수도 있으니까 이해해 줘. 수업이 모두 일찍 끝났는데 딱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친구들. 그래서 항상 심심하고 내일이 내년이 궁금한 당신. 오늘 뭐하고 놀까. 강의실 제일 뒷자리에서 교수의 말은 오른쪽 귀로 들어 왼쪽 귀로 흘리고, 도서관에서 볼 만한 책을 골라서 대출한 후 강의 중에 소설을 보다가 재미없으면 중간에 읽다 그만둬버리고, 강의 중간에 강의실 탈출하기. 여러번 그러다가 어쩌다 한 번 교수님에게 들키기. 소설과 문체에 대한 생각도 별 관심도 미래까지 없었고, 남자 세상은 일단 지식의 풍만함이자 말발이니까 읽고 던지고 읽고 던지고 반복. 이거 하다 저거 기웃거리고 다음엔 뭘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아르바이트하다 만나 오빠, 작업 걸다 차인 아가씨, 무심코 헌팅, 딱 한 번만 더 헌팅, 딱 2번 했는데 2번째에 재수없게 당찬 여자애가 신고해서 경찰차 뜬 일. 여자들은 10번 대쉬하는 남자가 없다고 수다떨지만 100번 200번 대쉬하는 녀석들 봐봐 어떤지, 당해보면 남의 얘기랑 다르겠지. 뭐든 그래. 신사를 언제 찾아야 할지, 막 그런 얘기를 하는 스쿨걸들. 키득키득. 늙다리들은 그 때가 그립다. 이성도 모르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뭘 좋아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살고 앞으로 뭐가 될지 생각도 없고, 개념도 별로인 그런 방황하는 청춘. 어느새 50대 대학교수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한 김에 더 하자면, (오 마이 갓) 젊은 친구들, 그 가운데 무엇을 할 것인가, 를 잘 모르는 친구들은 주로 1인칭이면서 나는 어떻다, 뭐가 하고 싶다, 갖고 싶었다, 지금이나 그때 성적 경험이 어땠다, 라는 또래의 어린 마음에 대해 내가 알거나 모르거나 궁금한 것에 대하여 쓴 이야기, '그냥 몰라'가 아니라 왜 그런지와 어땠으면 싶은지를 친절하면서 쉽게 설명한 독백조 소설을 선호한다. 내가 주인공이어야 하니까. 대칭, 대입, 대리, 간접 경험. 하지만 사회에 나와서 아는 게 많아지고 여러 경험을 쌓으며 나이가 들면 그때 봤던 책과 입던 옷과 듣던 음악, 봤던 영화, 그건 모두 그때 얘기야. 아 옛날이여, 그거지. 그러나 그 기법은 이미 과거에 대중화되었다. 새롭지 않다. 대중적 기호도 변한다. 여기서 아마추어가 저기서는 프로일 수 있다. 시간에 따라 프로의 프로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사랑도 움직인다. 변한다. 그것이 0에서 1로 바뀌어 불변한다면 언제나처럼 사람들이 바로 그것에 대해 그토록 야단법석을 떨며 시를 쓰고 논하며 노래부를 리 없다. 택도 없다. 가당찮은 소리다. 이 말이 틀렸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그렇지 않겠는가. 변할 때 변하더라도 지금은 이대로 순항하자. 아름다운 시절을 잊지 말자. 좋았던 때를 기억하자. 남녀의 사귐은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설혹 끝나도 좋게 끝내자. 길게 가는 그것도 있다. 인류가 그렇고 바로 너가 그렇게 태어나서 살고 있다. 자세히 들어가면 아니거나 미추가 드러나거나 실망할 수도 있어서 덮어두는 것도 있다. 그래서 모두들 지금을 소비하며 즐기고 살아간다. 때문에 누군가는 독자에게도 작가에게도 인기없다는 2인칭으로 소설을 써. 물론 그때 보았던 화보집은 지금 보아도 괜찮지. 그러다 여행가서나 무슨 특별전시회에서나 우연히 보는 게 좋을 꺼야. 노안을 늦추기 위해 늦춰질지 모르겠지만 눈-영양제를 먹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비교적 청춘시절 보다는 건전한 또는 불건전한, 뭘 할줄 아니까 아는 게 많아지니까 범위가 좁고 단조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한번 알게 되면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 없나니 계속 새로움을 추구하고 그래프선은 멈추면 안 된다. 그러나 아내를 100명 1,000명 두면 안 되니까 대신 차나 다른데 애정을 쏟기도 한다. 뭐야, 말 하다가 나도 모르게 내가 내 말에 최면이 걸린 거 같아. 이거 뭐야. 무슨 원리로 이렇게 된 거지? 정말 이상한데, 신종 수법도 아니고 왜 이렇게 계속 말하게 되는 거지. 와 정말 믿기지가 않아. 오 미안 미안. 어디까지 말했지, 누구에게 물어볼 차례드라. 음 맞다. 케빈이구나. 물어볼께. <케빈>, 꾸며낸 일이 아니고 기억하고 있는 사실 가운데 너의 일화를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게 있니? 너무 사소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중요할 수도 있는 것. 이를 테면 클래식 기타를 사서 기타 연습은 안 하고, 맨날 매고 다니면서 여자 꽁무늬나 쫓아다녔다든가, 바이올린 활로 기타를 연주한다거나, 전기 기타 플랫을 조각가처럼 파냈다든가 막 악기나 도구를 개조하는 일 같은 거 말야. 난 하나 떠오르는 게 있어. 옛날에 피아노 연습할 때, 집에 있는 피아노가 업라이트라서 또 그걸 뜯었지. 액션을 갈아서 그랜드 피아노랑 구동방식이 같아질 수는 없으니까 집에 있는 잡동사니를 모아서 두꺼운 종이로 감싸고 둘둘 말아서 접착 테이프로 붙였어. 그걸 뜯었던 업라이트 피아노 액션 위에 올리고 연습한 적이 있어. 타건에 불같은 번쩍임이 실릴 것 같아서. 누구나 그런 일 많이 집에서 해보잖아. 종이로 네모난 상자 만들어서 물을 넣고 끓이면 물이 데워지는 실험 같은 거. 우린 이제 어른이지만 우리도 뭔가 그런 게 필요해. 플라멩고 춤을 배우다 포기하든 살사바에 가서 살사는 안 추고 내내 썰만 풀고 계속 썰만 풀다가 끝내 지치고 이성도 못 꼬셔서 혼자 집으로 쓸쓸히 돌아갈지라도 말이야. 맞아, 뭔가 해볼 필요가 있어. <알렉스>, 넌 어른이 되어 좋은 점이 뭐라고 생각하니? 어린이나 청소년일 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예비 어른과 '아니야, 난 천천히 성장할래, 늦깍이로 어른에 입문하고 싶어' 라면서 늦게 어른이 되고 싶은 친구들. 어떻게든 둘 다 어른이 되잖아. 그렇게 어른이 됐어. 딱 됐어. 그렇게 어른이 되니 어떤 점이 좋은 거 같아? 글쎄 좋은 점도 많겠지. 애들이 못하는 거 하고, 애들이 모르는 거도 알고. 그 가운데 하나로 예상을 깨는 점을 들고 싶어. 견문이 넓어지니까 딱 딱, 척하면 척 알잖아. 어른들은, 음 저 사람 전문가네, 이건 좀 약해, 살짝 봐주겠구나, 엄격할 거 같군, 어떤 코스를 거칠 꺼야, 뭐뭐 하고 뭐뭐 하지 말란 소리구나, 저 남자도 비슷하겠지, 똑같겠지, 거기서 거기겠지, 같이 살아보면 다 비슷하다고 해, 정말 그럴 꺼야. 그런데, 그런데 그게 깨어질 때 느끼는 흥분. 고거 참 기분이 좋아. 좀 가벼운 예로 이런 거. 동네 산책할 때 한두 번 본 듯한 배불둑이, 게으름뱅이, 애연가? 끽연가, 술고래 아저씨를 그 도시 교향악단 정기 연주회에 가서 봤어. 연주회장 제일 앞자리에 앉았는데, 이게 웬 일이니, 동네서 본 그 후줄근한 차림의 슬리퍼 아저씨가 바이올린 2파트 수석이네. 1수석은 생긴 거는 완전 동네 아줌마처럼 보이는데 음 그래. 친구랑 같이 소문난 레스토랑에 갔어. 어머 그런데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명연기자와 똑같이 생겼네. 그가 나왔던 영화, 명대사, 수없이 많은 성대 모사, 광고, 기타 등등. 그런데 홀에서던가 계산할 때던가 그 아저씨 목소리를 들었는데, 에구머니나! 완전 깨, 억장이 무너져 내려. 그런 경험들. 맥주가 떨어져 간다. 아직 마실 건... 안 남았네. <마크>, 어 딱 떨어지게 마크와 하워드에게도 물어보고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오줌 마렵고, 술도 떨어져 가는군. 처음 같은 분위기는 아니야. 아까 누가 말했니, 이렇게 변할 꺼라고. 와 완전 미래를 훤히 내다보는 점성술사인데! 일단 새로운 대화라는 의도는 좋았는데, 음 의도는 좋았어. 그거도 어디니. 노는 거도 힘들어. 마크와 하워드에게는 따로 긴히 너네들 몰래 할 얘기가 있으니 따로 만나서 얘기할께. 그래도······ 괜찮지? 음 괜찮다는 표정이구나. 그럼 이제 제임스만 남았어. <제임스>, 남녀에 관한 글도 지금 쓰는 소설에 포함되니? 한 권 전체가 남녀에 관한 책보다 더러는 소설에서 잠깐 나오는 남녀 이야기가 오히려 더 팍팍 공감되기도 해. 남자와 여자, 무궁무진한 비밀, 여성과 남성, 영원한 숙적, 숙적? 같은 이야기라도 남자는 최우선으로 압축하고, 논리적이고, 넓고 깊고 크게 생각하며, 듣기보다 말하기에 훨씬 에너지를 쏟으니 동행인의 말을 잘 놓쳐 또 항상 뭔가에 집중하면서 팀 컨셉은 허풍이지. 그렇지만 여자는 부풀리고, 상상하고, 늘리고, 교체멤버는 과장미 그러면서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다루면서 쉼 없이 맵시를 드높여.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이면서(?) 그 둘을 합치면······ 괴물이 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합칠려다 보니 막 쓸 수 밖에 없게 되는 일도 발생할 꺼야. 잘 내다본거니? 틀려도 일단 들어 봐. 그렇게 글을 쓰다가 어느 하루 면도하다가 또 코털 정리하다가 살짝 피를 흘렸어. 그런데 그날 문득 글이 잘 써지는 거 같아. 뭐야? 그거와 이거가······ 콧물을 흘린 날과 코피를 쏟은 날, 아무런 일이 없던 심심한 날 써지는 글의 차이가 확연하거나 조금은 달라··· 오 이런, demonio!」  
   친구들 가운데 제임스만 말을 글로 대신해서 나중 알려주기로 한다. 모두들 굉장히 피곤한 듯 보인다. 집중력도 떨어졌다. 알고 보니 무척 어려운 게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서로 특별한 질문의 시간을 함께 보낸 후 그들은 맥주랑 먹을거리가 떨어져서 핸드폰 배달 어플리케이션으로 음식을 시킬까 하다가 그것도 좋지만  조그만 배를 타고 직접 사러가기로 했다.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그들이다. 활동적이고 역동적인 사나이들, 그러면서 완수할 임무가 항상 리스트업 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움직이고 돌아다니고 구경하고 한 번 해보고, 그냥 해보는 것도 또는 '그냥 하는 건 없다 잘하냐 마냐만 있을 뿐이다.'까지 역시 좋아하는 친구들이었다. 얘네들은 <편해 배달시켜> 그런 주의가 아니라 불편해도 몸을 움직이면 마음이 동하고 그러다 무섭지만 잘생긴 누군가와 접촉하고 무언가 뜻밖의 사건을 만나고, 그러다 그 불확실한 정체의 일에 관해 몇 일 시간을 투자할 만한 하지만 큰 돈은 물리지 않고 빠져나올 딱히 속시원히 이게 뭐다 라고 밝힐 수도 굳이 말과 글로 확인하고 싶지도 않는 구미를 땡기는 그런 초미의 수법에 관심을 가지는 쪽에 가까워서 그렇게 직간접적으로 한 역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직접 몸을 이동하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즐길 무엇을 희구할 뭔가를 사기 위해서 어느새 육지로 가고 있었다.
   요트를 최대한 육지 가까이 정박시켜 정지시킨 후 카약과 서핑보드와 1인용 배, 최저가 유아용 칼라 고무 보트를 각자 타고 육지까지 도달한다. 머머 한다. 그랬다. 거 참 하워드의 요트에는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배가 많이 있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가지각색의 배. 아마 더 찾아보면 계속 나올 것만 같다. 흡사 그 흔한 카드 마술처럼. 아니면 누군가 뒤에서 몰래 떨어지는 물자를 계속 보충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인근에는 범선형 요트 몰티즈 팰컨과 메가요트와 온갖 호화 요트들이 무슨 요트 축제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이 주위에 몰려들고 있어서 하워드도 괜한 없는 바람이 들어 딱히 필요하지 않는 물건들을 마구 들이지는 않았겠지만 조금은 그럴 뻔 하다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 다음부터 갑자기 나빠지지는 않지만 평이한 흐름이었다는 말이다. 요트에 있다가 육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가까운 상품 판매점을 하워드가 알고 있는데 이 친구가 길을 잘 찾지를 못한다. 딱히 길치도 아닌데 길이 이상하다는 거다. 없던 언덕이 생기고 봤던 건물이 없어지고 못 보던 길이 생겼다. 동네 분위기도 이상하다고 한다. 닉이 핸드폰으로 금새 마트를 찾았다. 여기네, 하면서 핸드폰에 띄워진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자꾸 그 주위만 빙빙 도는 거 같다. 그래서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봤드니 그 마트는 없어졌다고 한다. 새로운 뉴 마트가 생겨서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이용한다는 거였다. 지도가 아직 업데이트되지 않았다고 결론내렸다. 그래서 새로 검색하고 어쩌고 있는데 넉살 좋은 조니가 컨버터블 자동차 타는 친구들과 인사 잠깐 하다가 몇 마디 주고 받드니 바로 금방 친해졌다. 조니는 정말 탁월한 재주를 지닌 친구다. 근엄한 예술적 기예와 놀라운 친화력을 겸비했다. 지성이라는 의자 팔걸이로 그것을 놓고 옷걸이까지 좋은 한마디로 다 가진 친구 같다.
   그래서 그 B사의 컨버터블을 타는 친구들이 끌고 있는 캠핑카에 이 친구들 모두가 탔다. 자기들은 이 곳에 캠핑카를 가지고 놀러왔는데 준비물을 많이 가져오지 않아서 쇼핑하러 간다는 거였다. 딱 맞는 친구를 사귄 거다. 급하게. 나중 서둘러 헤어졌다가 언제 만날지도 모르지만 사람 인연이 또 언젠가는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근데 이 B사의 컨버터블을 타고온 친구들은 남자 1명과 여자 2명이었는데 이상하게 얘네들을 보니 뭔가 앞서의 서사 과정이 떠오른달까, 그런 희귀한 점쟁이, 점쟁이도 딱 인생의 한 시절 전성기 때나 가능한 그들의 예전 행적이 보이는 것이다. 이 친구들은 육지의 내륙 도시에 사는데 대대로 명맥이 유지되어온 명문 집안이었고 거부였으며 옷 입는 거나 행동하고 말하는 게 모두 완벽하게 클래식한 친구들로 이 해안에는 한 시절 유람왔는데 오다가 기차에서 내린 어떤 꺼벙한 아저씨를 태워줬다가 좀 전에 내려준 것 같았다. 그들이 지금 타고 있는 B사의 컨버터블은 누군가 중간책이 있어서 구한 듯 하다. 그들은 위장용 B사 컨버터블을 타고 접선 장소에 도착, 집사는 다른 브랜드 B사 컨버터블을 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 그렇게 새로운 브랜드 B사 차량을 인수, 맞교환 한 듯 하였다. 그렇다고 더 이상 다른 환영은 보이지 않았다. 더 보였더라면 그들 인생이 바뀌니까 딱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그들이다. 누구 혼자에게만 그 투시력이 몽땅 내려온 건 아니고 하워드의 보트에서 말을 적게 한 순서대로 영적 능력이 많이 내려왔고, 그걸 집산하여 이렇게 결론내린 거다. 말을 너무 많이 해버리면 혼이 빠져나가는 것일까, 영감이 달아나버리는 걸일까. 다 아니고 그냥 진이 빠진다, 지쳤다, 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이런 저런 구경과 잡담을 나누며 식품 판매소에 가고 있는 동안 이상하게 이 친구들이 타고 있는 캠핑카가 정지한다. 어 왜 멈췄지, 벌써 왔나, 하면서 얘네들이 내린다. 내려서 보니 뭐야 이거, 달랑 캠핑카만 도로 한켠에 서 있고, 그걸 끌고 갔던 컨버터블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거야, 이음새가 낡아서 자연스럽게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거짓말처럼 이음새가 부서졌기 때문에 캠핑카만 놔두고 컨버터블은 가버린 걸까. 아니면 B사 컨버터블에 타고 있는 누군가가 이거저거 손대다가 캠핑카 연결 케이블을 푸는 버튼을 잘못 눌러버린 것일까. 여러 유추와 추측이 난무했지만 괜한 데 사고력을 낭비할 필요없이 간단하게 사소한 실수로 결락이 풀어졌다고 결론지었다. 편하고 쉬운 발상이다. 꼭 그건 스크루지 영감 이야기같이 어느 고장에나 있을 법한 구두쇠 동화를 떠오르게 만드는 손쉬운 삶의 처방과도 닮은 경영 기법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과 그것이 전혀 상관이 없을지라도 맥없이 사람을 그렇게 연관 짓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은 마력을 지녔다. 빵과 고기와 밥과 면과 스프와 여러 종류의 식재료가 집에 있지만 그 가운데 오직 하나만 조금씩 먹고 살면서 나머지는 다 공중에 매달아 놓고 한 스푼 먹고, 한 번은 허공에 매달린 식재료를 쳐다 보고, 한 번 먹고 한 번 쳐다보고, 계속 그것을 반복. 이성애자인 남성 수도승의 그런 수도 생활 말이다. 이게 뭔 유리 겔라의 숫가락 구부리는 마술인가? 알 게 뭐야. 문체는 훨훨 나비처럼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는데. 흔적도 없이. 자기를 쫓아와주라는 그리움 하나 남겨 놓지 않은 채로. 그러나 크레인에 거꾸로 매달린채 구속복에서 탈출하기, 묶인채로 물에 퐁당해서 관이 물속에 빠지면 탈출하기 등등 이런 건 사양한다.
   앗, 그들은 캠핑카가 언제 멈추었는지 몸의 단순한 감각에 의해 알아채기 전에 먼저 왜지, 왜지 하는 멀어져만 가는 아득한 아쉬움의 말랑말랑한 감정에 따라 캠핑카가 멈추었다는 것을 알아낸다. 왜냐하면 캠핑카 바깥으로 왠 느닷없이 타조가 뛰어가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저 멀리 보이는 풍력발전기를 바라보며 오 멋진데, 특별하거나 신기하지는 않지만 멋져, 가까이서 보면 커다란 프로펠러가 엄청 빨리 돌아가면서 슝슝 소리를 내는 풍력발전기의 프로펠러, 해변가에도 설치되어 있고, 바다 한 가운데도 설치되어 있는 풍력발전기를 넋 놓고 바라보는데 뜬금없이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동물이 나타난 거다. 웬만한 어른들보다 키가 훌쩍 큰 타조, 그들과 캠핑카의 창문을 사이에 두고 달려가는 타조, 자신이 왜 달리는지 잘 모르는 것만 같은 타조, 세상에서 제일 큰 새 타조, 불사조나 신화에 나오는 허무맹랑한 새 말고 타조, 멸망해 버린 익룡 말고 타조, 그 타조가 도로를 뛰어가길래 뭐야 이거 하면서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있는데 찍자 마자 타조가 엄청 빨리 앞서 가버려서 허망하던 차에 딱 깨달은 거다. 타조가 더 빨리 가버린 게 아니라 그들이 타고 있던 캠핑카가 멈추었다는 것을. 그 도로에서 왜 하필 타조가 달리고 있었는지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간만에 재미난 구경했고, 도로 한가운데 그들만 남겨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캠핑카에서 내린 그들은 꼭 외국에 여행온 이국 사람들처럼 주변을 둘러 본다. 하워드도 이곳이 낯선가 보다. 전에 한번 구글맵으로 이곳의 지리와 사진과 정보들을 살펴봤지만 전혀 딴 세상이 된 것 같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독자들 가운데 일부는 인기있는 SF 소설에 잘 빠지지 못하고 턱없이 나가떨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거야. 잘 설명하고, 조근조근 바닥을 다져서 설득시키고, 웃겼다가 찡한 감정도 살짝 안겨주고, 그러다가 감화시켜서 정말 그것이 있는 것처럼 글로써, 글을 통해 카드 마술이라도 보여줘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 즉 어느 독자는 평생 속고만 살았는지 아니면 뭐뭐 했다, 뭐다, 어쨌다 그런 이야기와 나는 뭐다, 나는 뭐뭐 한다 같은 남 얘기만 주야장천 듣는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인지 구조화된 글보다는 일목요연한 무척 산뜻한 기품을 지닌 글이 아니면 잘 빠져들지 못하나 봐. 통 믿지를 못하는 거야. 말로만 앞에 뭐가 있다, 저 너머에 오아시스가 있다, 정말이야 그러면 있기는 개뿔이 있어, 웃기고 자빠졌네, 그러는 태도로 심술부리는 거지. 믿음이 안 가니까. 구라와 뻥을 하도 많이 듣고 살아왔으니까. 그러다 허풍을 배운지도 모르게 조금 배웠지만 많이 부족해. 그런데 지금 이 소설이 그렇게 몰입하게 만드는가? 환상에 빠지는가? 신비로워? 땡. 아니다. 산에는 골짜기가 있고, 이곳 소설에는 꽈당인 챕터가 있다. 이번 챕터 꽝이다, 꽝! 마술적인 이야기? 쩍쩍 들러붙는 모험의 전개? 착착 감기는 구술? 젠장. 그러나, 하지만, 그렇지만 지금 딱 그러고 있다. 오오 이런. (난) 진정 그걸 바라지 않았건만.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건 그렇고 한편 그들이 탔던 캠핑카는 최신 인기 상품이었다. www.happiercamper.com 에서 파는 물건. 모델명 Happier Camper HC1. 파란색. 007 가방이 서로 뒤바뀌는 사례 즉 영화에서 보는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현실에서 가방의 종류가 엄청나게 많은 007 가방의 오류보다는 캠핑카 바꿔치기가 더 착실히 맞아떨어질만 하다고, 발생 가능성이 비교적 약간은 더 농후하다고 여겨져서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는, '저건 말도 안 돼' 라는 핀잔은 덜 듣을만 하다. 그렇게 그들이 탔던 캠핑카는 바꿔치기에 대한 오해를 샀다. 물론 그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이 친구들이 캠핑카에서 내려 주변 정황을 살피고 경치를 두리번거리던 찰나에 왠 사복경찰도 아니고 특수부대도 아닌 진짜 일급이나 특급 경호원들이 얘네들을 갑자기 빙 둘러싸기 시작한다.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도망치기 아니면 설명하여 오해를 풀기, 둘 중에 하나다. 이 경호원들은 똑같은 캠핑카를 잃어버린 다른 갑부에게 고용된 요원들이었는데 아마도 캠핑카의 번호판이랄지 사소한 차이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무작정 덥썩 '얘들이 범인이다' 라고 단정하여 그들을 포위한 듯 하다. 하지만 이 친구들은 잘못한 게 없었고 또 대충 보아하니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면 금새 범인 추정의 작전은 바로 풀릴 것 같았다. 경호원 팀 이름이 미란다일까, 아니면 일진이 모두 휴가를 떠나서 이진으로 대체되어 어벙벙한 걸까. 대체 불가능, 역시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그 기준은 정말 중요하다.
   후딱 오해는 풀렸고, 그들은 떠났다. 덩치와 무섭게 생긴 사람들과 삐─ 멋져보이는 실력자까지 모두 다. 이제 허전하게 그들의 기분이 떠버렸다. 순간 뭔 말을 해야할지 왜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지 무슨 떠오르는 생각도 없고 서로들 눈만 껌뻑거리고 쳐다보고 있다. 
   언뜻 얼이 빠진 채 길가에 서 있던 그때, 어제 같은 오늘 혹은 오늘 같은 어제 그들을 이곳에 데려다 준 에르메시씨가 나타난다. 짠 하고 무척 길다란 리무진을 몰고 나타난다. 그들을 내려줄 때 차량은 묵직한 밴이었는데 차가 바꼈다. 날마다 다른 차를 타는 건가, NC 회원 가운데 VVVIP를 모시러 가는 전용차인가, 알 수 없다.
   「어? 하워드씨. 여기서 뭐하세요?
   어, 미스터 에르메스. 새로 생긴 대형 마트에 갈려다가 잠시 길을 잃었네. 자네 혹시 그곳으로 가는 길은 아니겠지?
   와우. 독심술사. 깍쟁이. 딱 맞추셨어. 그 비법 저 가르쳐주세요. 어떻게 사람 마음을 그리도 정확하게 읽으세요? 어쩜 그리도 사람 마음을 속시원히 잘 읽나, 이런 말은 남이 해줘야 하는데 세간에는 자기가 자기 입으로 자화자찬 하는 사람들이 있죠. 여자말예요. 그것에 민감한 사람들. 예민한 바이섹슈얼. 제가 정말 긴요히 습득해야 할 기술인데. 그것만 익힌다면······ 오 완전 만능인데······ 아, 그곳으로 가실꺼면 타세요. 같이 가시죠. 마침 구해야 할 와인과 위스키 한 병이 필요해서 사러 가던 길이에요. 꼭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같이 가게 됐군요. 어쨌든 반가워요. 스승님. 이제 하워드씨를 스승님이라 부를 꺼에요. 조금 거슬리시더래도 말리지 말아주세요. 한 삼년 따라다니다 보면 누가 알아요? 어느 날 나도 모르게 그 마술을 일상적으로 구사하고 있을런지. 하늘이 웃고 세상이 우릴 반기는군요. 상상만 해도 즐거워요.
   잠시 에르메스씨가 언급한 자화자찬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1.사람들이 나보고 동기부여를 잘한다고 한다.  2.나 동기부여 잘해!  3.나 동기부여 못해.  이렇게 1번부터 3번 가운데 3번을 먼저 보자. 3번은 그런 말을 하고 나서 '뻑하면 갇다붙이기'로 제일 인기가 많은 우연 때문에 그 상황이 닥치면 완전 잘해, 사람 감동시켜, 질질 짜면서 울게 만들어. 아니면 진짜 못해. 반전이 있을 것처럼 부풀게 만들었다가 '그럼 그렇지'로 끝나는 타입. 오오 3번은 할 말 없음. 그리고 1번은 여자의 글, 2번은 남자의 말. 비교하면 1보다 2가 재밌다. 더 우끼다. 그걸 정말 잘 한다면 그리 말하지 않을 것이고, 일단은 코메디 단골 소재이며, 못하면 허당이라서 스스로 망가지면서 좌중을 즐겁게 만들어 그들의 유머감각을 사로잡는 거다. 동기부여로 자존감이, 자존감이 자책과 자존심으로,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감으로, 자신감에서 행동으로, 행동이 성과로, (때때로) 성과는 물거품이 되는데 웃으면서 실패하게 만들거나 동기부여가 아닌 것 같은데, 라면서 다른 강연장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동기부여를 다른 단어로 교체할 수도 있다. 경찰처럼. 허나 그건 각자 할 일. 이처럼 잘난 척이나 생색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코메디가 되거나 썩 내키지 않는 썰렁함으로 바뀐다. 다시 돌아간다.
   오케이. 그들이 함께 대형 마트로 간다. 해가 지지 않는 소설. 이 말은 꼭 암시성 문장 같다.
   보인다. 보인다. 저 앞에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그런데 간판에 씌여진 글씨는...
   51구역. 드라마, 유명 소설 원작 드라마를 촬영중일까.
   여기서 거장 소설가라면 곽티슈를 모두 쓰게 만들던가 영혼을 쏙 빼서 침대나 책상이나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태블릿에 쳐박아 놓게 만든다. 마에스트로가 아니라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방법은 있다. 찰스 디킨스의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 처럼 미완성이나 연결 단락 과제를 남겨 놓는 것이다. 다른 소설이나 그림과 음악도 논란이 많은 경우, 흔하다. 어쩌면 먼 미래엔 그 방식이 일부러 고착될 수도 있고 어찌될지 모른다. 옛날에는 말타고 다녔지만 지금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듯이, 미래엔, 미래에는 어찌될지 미래학자 마저도 <어쩔 땐> 점쟁이 같은 말을 한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들은 하워드의 요트로 돌아왔다. 괜히 갔다왔나?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을 뿐이다.
   하워드가 말한다.
   「너네들 도심지에서 들렸던 그곳의 NC 사장이 가르쳐 준 건데 말이야. 이 근방 어디에서 인터넷 주소창에 해당 연도의 마지막 날에 하루를 더한 날짜와 모차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쾨헬 넘버를 입력하여 엔터키를 눌르면 이 주위에서 요트타는 사람들의 비밀 통신이 보여진다고 하더군. 꼭 법률로 금지되어 있는 광고 사이에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화면을 넣거나 미성년에게 생각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광고의 메세지를 전하는 것처럼 이 친구와 담소를 나누며 차와 술을 마시는 중간 중간에 이런 얘기를 몇 번 나누어서 하더군. 끝인사를 하기 전에도 소수에 관한 얘기를 잠시 하다 끝맺지 않은 채로 끝나버렸어. 슬쩍, 실수처럼 은근슬쩍 흘리는 묘수랄지 어떤 암호문을 전달받는 느낌이 들더군. 그 왜 있잖아, 그런 섬세함이 완벽하게 몸에 베어있는 사람들 있지? 카페나 호텔에 가면 제일 먼저 출구와 도주로와 대처 경우의 수를 즉시 반사적으로 파악하거나 시야에 드는 장면들을 사진처럼 또 플래시 메모리처럼 짧은 시간이나 일정 기간 무조건 저장하고 기억하는 친구들, 항상 뒤를 살피거나 웃음의 뒤안으로 뭔가 슬프면서 애잔한 분위기를 띄는 사람들 있잖아. 그런 기분이 들더라니깐. 꼭 그것같지 않니? 인생은 짧다, 바람이 분다. 바람을 펴라. 그런 광고 문구 말야.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기존의 정상적인 숫자 도메인과 약간 방식이 다른 것 같아. 누가 모스 부호를 사용하거나 2중 3중 암호화하는 걸 직업으로 가졌던 친구들이 재미로 만든 사이트란 말인데 진짜라면 우연잖게 그 협소한 범위와 감추면서도 오픈한 컨텐츠의 대상이 바로 이곳이란 얘기야. 재미로 뭔가를 시작하면 둘 중 하나잖아. 전문적으로 발전해가거나 재미로 남거나. 물론 없어지기도 하지만 얘네들은 그걸 그냥 공개한 것 같아. 일단 믿었지. 오픈 소스 뭐 이런 거처럼. 그래서 여기 요트 안쪽 컴퓨터로 직접 해봤어. 2015.12.32 이렇게 입력하니 안 뜨길래 32.12.2015 이렇게 해도 안 떠서 그녀석 NC 사장이 장난친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끈기를 가지고 몇 번 더 시도해 봤어. 너무 짧으면 뭔가 없어 보이니까 거기다 좀 더 길게 뭘 붙여봤지. 세계 7대 수학 난제 알지? 잘 알지는 못해도 들어는 봤을 꺼야. 실은 나도 잘 몰라. 리만 제타 추측이니 양 밀스 질량 간극 가설이니 하는 것들, 하나도 몰라. 그게 당연하잖아? 그렇지만 그런 검색어로 예전에 구글링 해보다가 기억해 둔 숫자가 하나 있었거든. 흔히 그런데 자주 나오는 소수말야. 이 또한 어렵거나 복잡한 건 아니야. 이런 게 영화 대본으로 쓰이면 쉽게 써야 재밌을 거야. 그 오랜 시간동안 이어져온 속담 봐봐. 간략하잖아! 일단 10보다 작은 소수는 2, ,3, 5, 7이 있어. 그걸 붙인 2357 역시 350번째 소수라고 하더군. 349였나? 아무튼 그래. 그래서 그건 기억에 남아. 그리하여 그걸 덧붙여 본거야. 32.12.2015.2357 을 인터넷 주소창에 입력하고 엔터, 꽝이었어. 그런 페이지는 없데. 순간 쾨헬 넘버가 딱 생각나는 거 있지! 아쉽지만 그냥 포기할려던 찰나였어. 그랬으면 지금 이런 얘기도 못했을 테고, 그곳으로 놀러가자는 제안 역시 못했을 것 같아. 그래서 몇몇 조합을 거치다가 12.32.551.2015.2357 이렇게 입력해 봤어. 그랬더니 딱 뜨더군. 정말 믿기지가 않더란 말이야. 당연히 그럴 수 밖에. 거참. 뭐 신기한 건 없었어. 내용은 신기하지 않았지만 사이트가 뜨는 건 신기했지. 보물 지도, 비밀 기록, 특종 그런 거 말야. 그런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NC 사장 그 친구 말처럼 이 근방에서 요트를 타는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더군. 채팅창도 있고, 실시간 카메라 영상도 있고, 각자 소셜 네트워크를 아이콘과 여러 통계로 보여주는 그래프들도 있고 참 다채로웠어. 잠시 그걸 들여다 보니 누군가 재미난 얘기를 올리더군. 다른 건 아니고 저번에 우리가 도심지 천에서 띄웠던 기구들 있잖아? 소형 프라모델 보트와 고무보트 크기의 과자봉지로 만든 보트, 포도주병, 처키 인형, 종이배, 운동화, 상품 케이스. 그걸 누가 한꺼번에 발견해서 모두 구조했다는 거야. 혹시 소인이 그 배에 타고 있을지 모른다는 긴요하고 급박한 호기심이 움틀거렸다고 그러던가, 어쨌든 그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낚시는 좀 되던가, 요트에 강아지나 고양이는 승선해 있냐, 어떤 책을 읽고 있나, 바다에서 듣는 음악은 무얼 선호하더냐, 친해진 돌고래 친구들은 있었느냐, 그 친구와 그런 얘기들을 하던 가운데 은근히 서로 친밀감을 느꼈어. 묘한 교감 같은 거 말야. 그래서 이따 친구들 만나고 놀다가 심심하면 한 번 들린다 그랬지. 먼저 그쪽에서 흔쾌히 한번 놀러 오라고 했어. 어때? 한 번 가볼까? 꼭 안 가도 되는데 가도 뭐 나쁠거 같지는 않아. 거기 가서 심심하면 그냥 구경만 하고 나오면 되지. 너네는 어떠니?
   왜 싫겠나. 이미 그들은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요트, 참 성능이 우수한 물건이다.
   가던 길에 보니 등대가 하나 보인다. 그런데 등대에 이름이 씌여 있다. 커다랗게. 이름은 버뮤다 삼각지대. 엥? 버뮤다 삼각지대? 뭐야? 이 버뮤다가 그 버뮤다 맞어? 그거 다 뻥이라던데, 또 몰라 한두 개는 진짜일지. 괜히 낚여서 뻔한 기사 읽기, 이젠 안 해. 그런데 저기 보이는 저 등대, 이름만 그거야 아니면 진짜란 말이야? 만인이 알기로 또 그들이 알기로도 이 방향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데 또 모를 일이다. 제 2의 그것일 수도 있고,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이게 원조일지도 모른단 말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건 호텔이었다. 수상 호텔. 한때 버려져서 방문하는 사람이 없다가 언젠가 한번 뜻 모를 바람이 불더니 부흥의 여론이 일고 돈을 투자하는 법인이 나타나고 그 법인들이 점점점 늘어나고 팬클럽도 생기다가 마침내 호텔로 탈바꿈에 성공한 등대였다. 즉 조그만 등대가 아니라 흔히들 인터넷 뉴스에서 클릭을 유도하고 사람들 입소문과도 비슷한 그런 현상이 초기에 흥미를 유발시키는 이야기로 잊혀질만 하면 이따금 다시 알려지곤 하는 가라앉았다가 땅바닥에 착 달라붙기 전에 또 바람결에 살짝 휘날리는 화장지 한 조각처럼 사람들의 소문과 관심과 일화에 등장하는 지난 연인쯤으로 기억되곤 하는 바로 그런 등대였다. 물론 지금은 예약을 하고 결제를 하면 이용 가능한 호텔이다. 저기······ 한 번 가볼까, 할 법도 했지만 먼저 정해 놓은 목표가 있어서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을 아무도 표시하지 않았다. 자꾸 이걸 생각하다 보면 계속 빠져드니까 그냥 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삼천포는 삼천포다.
   어떤 공장에 가면 차를 싣는 차가 있고, 챔피언스리그 같은 정상급 축구 경기가 끝나면 친애하는 상대편 선수의, 전설적인 상대편 선수의 유니폼을 자신의 유니폼과 교환하기 위해서 자기편끼리 막 다투고 싸우기까지 한다. 오늘 난 전설적인 그 인간과 게임을 했고, 그와 유니폼을 맞교환하여 마치 동급이 되는 듯한 무아지경에 빠졌다, 는 연인들의 반지나 목걸이 같은 어떤 증표를 받는 행운의 복권에 당첨되어 버렸네, 그걸 위하여 같은 팀끼리 막 밀고 밀리고 다투는 거다. 세계에서 제일 긴 강, 제일 오래된 궁전, 제일 높은 나무, 제일 깊은 바다, 넘버 쓰리도 괜찮음 그리고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 이와 같이 이들이 타고 가는 하워드의 요트가 그들이 목표로 했던 12.32.551.2015.2357 사이트에서 대화를 나눈 친구가 알려준 좌표값에 거의 도착한다. 좌표값에 대한 얘기는 따로 하워드가 말하지 않았다. 좌표값은 표준이라서 존재하지 않는 좌표값이면 미스테리니까 그건 극장에 가서 찾고 여기서 하워드의 요트는 좌표값 입력만으로 모든 요트 동작을 자동과 반자동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거기다 수동까지 겸비한 만능 요트라는 것만 알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자, 이렇게 돌아 돌아서 거치고 거쳐서 드디어 그들은 그 좌표값에 도착하였다. 그 좌표값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는 편의상 구단주로 약칭한다. 이 약조를 한 번만 말하고 넘어가면 이따 글을 읽던 중 딴생각한 친구들은 이거 뭔 개소리야, 갑자기 구단주가 어디서 튀어 나왔어, 라고 울상을 지을지 모를 일이니 한번 더 강조한다. 그 웹사이트에서 만난 친구, 좌표값에서 느긋하고 비밀스럽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요트의 주인을 편하게 구단주로 약칭한다.
   좌표값에 도착하였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뭐야 이거, 이게 뭔데 아무런 표식도 없고 요트도 보이지 않는 거지, 똥개 훈련시키나, 그런 생각을 할법 하다. 당연히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불안한 의혹을 사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잘 보니, 잘 보니까 앞에 있던 파도와 바닷물과 구름과 안개와 멀리 보이는 배나 요트들은 거울임과 동시에 가상 화면이었다. 그 불빛과 영상이 흐려지고 있어서 그들은 그것이 즉 계속 보고 있었던 수평선과 물과 하늘과 바람이 하나의 배로 뚜렷하게 형체가 분명해지고 있었다. 곧 그건 어마어마하게 큰 요트였다. 배를 떼거지로 운반하는 배가 있다는 얘기는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거나 술자리에서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클래스를 직접 보게 된다. 보고 있다. 꺼뻑~ 경이로운 마음을 품게 되는 거대함. 이 친구들 앞에 있는 요트가 그것을 실감나게 해준다.
   이제 하워드의 요트, 모히토가 그 요트, 구단주의 요트 안으로 들어갈 차례다. 요트 안에 요트, 요트 밖의 요트, TV 속의 TV, 셀카 사진에 보이는 거울과 그 거울에 보이는 셀카로 찍는 화면의 반복. 일이 그렇게 되었다. 그거야 그렇다 쳐. 그럼 혹시 또? 구단주의 요트가 구단주 할아버지의 요트 속으로 또 들어가? 그건 아닐 게다. 또 들어가면 아예 무한 반복해서 계속 들어가야 하니까. 여기까지!
   해가 지지 않는 챕터. 진짜다. 아니야. 언제 잠을 자는가 그것은 독자가 곧 당신이 정하는 거다. 소설을 읽는 사람이 뭐 애야? 기어다니냐고? 어버버버 피둥피둥 응애응애 그리고 아기 냄새. 아기 냄새? 오오 아니야 아니야. 다 아니야. 언제까지 일일이 하나하나 모두 수동적으로 가르쳐 줘야만 하겠어. 이건 새로운 소설인데. 그래 아까 하워드의 요트 모히토에서 1박을 한 거야. 아니면 모히토가 무슨 바닷가 동굴도 아니고 공장도 아닌 우주선처럼 요트가 들어갈 수 있는 요트에서 구단주와 함께 파티를 즐기다가 먹고 얘기하며 놀다가 즐기면서 잠에 빠져든지도 모르게 골아 떨어진 거야. 그래. 그렇다구. 판타지 소설? 전부 다 뻥이야. SF 소설, 모두 거짓말. (개)뻥!
   자, 요트 안에 모히또가 도착한 때부터 이야기를 이어간다.
   맞게 온 거야?
   「그러게 이거 장난이 아닌데.
   「크루즈 선이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슈퍼 요트야?
   「엘리자베스 뭐나 무슨 8호 뭐 그런 거야?
   「앵무새가 개 위에 타고, 그 개가 말 위에 탄 거 같아.
   「날개 달린 말.
   「왔으니까, 에, 음, 일단 들어가 보자. 무슨 일이야 있겠어? 또 모르잖아, 멋진 파티가 우리를 기다릴지.
   요트 정착 구역에서 배의 갑판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사람들이 없다. 설마 유령선? 어딜 봐서 유령선, 완전 번쩍번쩍 빛이 나는데 그럴 리 없다. 하지만 자꾸 음험한 생각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다. 요트가 어떤 섬에 정착했다가 배만 떠밀려 나왔거나 다른 허영심과 낮은 지적 수준을 만족시킬만한 뭔가가, 있을 리는 없다. 그냥 도시에 항상 도시에만 살다 보니까 사람들은 사람이 안 보이면 잠깐 불안한 것일 뿐이다. 그게 다다. 잘 찾아보면 된다. 이 크나 큰 배에 사람이 없을 턱이 없다. 그것도 바다에 유유히 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점점 불안해진다. 바닷바람의 풍속이 조금 거칠어지고 풍향의 변화가 심해진다. 누가 먼저 나서서 긴장을 풀어줄 잡담마저 하지 않는다. 분위기 착 가라앉았다. 먼저 무슨 말이든 해서 정적을 깨트리기 망설여진다. 배의 규모로 봤을 때 어딘가 파티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충분히 가당한 얘기다. 핵심 인원만 놔두고 많이들 인근 섬으로 출타를 떠났을 수도 있다. 게다가 이 배에 들어올 수 있는 루트도 다양하다. 선착장과 착륙장은 물론 잠수함 정착지까지 갖추었다. 안 봐도 견적 나오는 규모다. 왜 사람이 안 보이지, 왜 사람이 없는 거야? NC 사장이 수작 중의 수작, 최고봉 개수작을 부린 건가. 작전? 이 개··· 불독 같은 놈, 뭐하는 놈이야? 베일에 감추어져서 자꾸 마술같은 일을 벌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우끼지만 정반대로 매사 투덜대기만 하는 사람 또한 우습다. 가령,
   남이 <뭘 해도 재미없다. 글이 잘 안 써진다. 하는 일이 잘 안 된다. 고품격 소설을 안 읽고 있으니, 끝까지 읽기를 하지 않으니 글쓰기 수준이 퇴보하면 어쩌지? 엄마의 잔소리를 많이 들을수록 정확히 그에 반비례하여 차츰 글을 못쓰게 되고 나도 똑같아지면 어떡하냔 말이야.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그 얘기를 자주 듣다 보면 지적 수준이 점점점점 추락하진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다.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다. 끝까지 읽는 책도 거의 없다. 읽고 싶은 소설은 잘 출판되지 않는다. 안 그러면 출판사 구조조정 들어가야 하니까. 번역자는 생활비가 줄어들고 애인이 떠나갈 수 있다. 여기서 끝이냐? 아니다. 학계 전문가들의 권위도 떨어지고, 여러 회사의 마케터와 에디터의 적금이 깨지고, 자녀가 있으면 용돈이 줄어들고, 더 하면 신용카드 연체된다. 그렇지만 그건 인문-교양이든 뭐든 마찬가지다. 고로 지금 이대로가 그냥 낫다. 고품격 소설 전성시대, 오면 골치 아플 수 있으니까. 핑계거리가 없어지면 울적할 거다.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네, 그저 평온히 조용한 삶을 살고 있어서 매사에 감사하네, 라는 말과 글을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이 듣고 어느 만큼 많이 읽었는지 또 앞으로 얼마나 더 듣고 읽어야 할지 예상만 해도 까마득해. 그러니까 꼬마 숙녀와 신사에게 말해줘야 해. 넌 말이야 앞으로 고리타분하고 고루하고 평범한 얘기를 인생의 머나 먼 뒤안길까지 무진장 엄청나게 많이 듣고 살게 될 꺼니까 그거 하나는 확실하니까 앞으로 인생 잘 살아야 할 것이야, 너가 만나는 사람 10명중 9명은 모두 다 똑같은 말만 할꺼라고. 그냥 세상은 그런거야 라고. 변명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기분 나쁘지 않고 행복하다. 명철한 변호가 직업이 아니라 생활이면 인생 피곤하다. 그건 아니다. 재미없는 천국에 평생 살면서 심심한 승리만 하고 지겹고 심심하다가 지루하기까지 한데 그러다 문득 뭔가 호사스런 기분이 느껴지고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운이 느껴져. 그래. 그런데 결국 그건 따분함이라는 이름의 감정이야. 그렇다면 그 보다는 변명하는 게 낫다. 평생 욕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지만 뭐 재미난 일 없나? 끝내주는 일 없냐고?> 라고 타인이 말한다면 엄청 웃기다고 좋아라 할 친구 많을 것이다. 어머나 당신도? 오 보인다. 들린다. 딱 걸렸어. 당신 지금 빵긋 웃었어. 활짝 웃었단 말이야. 웃기면 그냥 웃어. 왜 안 웃을려고 해, 뭐가 그리 심각하냐고. 지금 세상이 웃는 걸 들키면 혼나는 그런 이상한 미래 사회야? 아니잖아. 이건 내일 아침까지 참지 않아도 된다. 너가 지금 이 순간 웃는 모습이 홀딱 걸렸으니까. 아무튼 NC 사장, 어디서 굴러온 마초계의 신성이야, 이름은 뭐야, 허구헌 날 이국적인 뜬구름 잡는 얘기만 들먹일 놈, 정작 이국에 데려다 놓으면 맨날 향수병에 시달릴 인간, 절묘한 타이밍에 사람을 의뭉스럽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어, 녀석. 요술쟁이? 제발!
   우선 갑판을 훓고 방이 있으면 창문으로 보거나 들어가 보고, 계단을 통해 다른 층을 살피고 그러다 넓으니까 돌아다니기 귀찮아서 어디 보이는 냉장고를 열어서 캔맥주를 딴다. 캔맥주의 맛은 수제 맥주에 비하면 음 뭐라 말 할 수 없다. 솔직히 그 차이를 냉혹하게 말하라고 한다면 안 좋은 얘기가 나올 테니까. 하지만 캔은 캔이니까 캔에 씌여진 글씨의 서체와 손쉬운 휴대성, 디자인과 캔을 딸 때의 소리 그것만으로도 최고급 수제 맥주와의 차이를 감쇄한다. 이상하고 추상적인 단어, 사랑, 행복, 예술, 인생, 뭐 뭐도 마찬가지다.
   요트에 관한 기본 지식을 알아보면 이와 같은 기본 원리를 알 수 있다. <돛단배는 뒷바람을 받아 나아가지만 요트는 맞바람을 받아야 한다. 요트가 맞바람을 헤치고 항해할 수 있는 원리는 요트 바닥 밑에서 물 밑으로 내려져 있는 킬(Keel) 때문이다. 요트 길이와 세일(돛)의 높이에 따라 배마다 깊이가 다른 킬은 요트가 바람에 의해 옆으로 밀리는 것을 막아준다. 돛단배에는 킬이 없다. 이 때문에 요트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인 ‘풍상(風上)’ 방향의 정면에서 좌우 45도 안쪽 범위(No go zone)를 제외하고는 원하는 방향을 향해 ‘지그재그’로 나아갈 수 있다. 여기에 비행기가 뜨는 원리가 적용된다. 세일의 천이 바람을 맞아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면 세일 앞면과 뒷면이 받는 공기 속도는 달라진다. 굽어진 세일 앞면을 지나는 바람의 속력은 빠르고, 뒷면 속력은 느리다. 양력(揚力)이 생기는 것이다. 요트가 받는 바람 속력은 빠르다. 그래서 기압이 낮은 쪽으로 나아간다. 돛이 항공기 날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바로 ‘베르누이의 정리’다.> 이런 얘기를 얘기하다가 어눌하거나 지식이 바닥나거나 할 말이 떨어지면 곤란하다. 남자세계에서는. 앞서 말한 여자들이 자화자찬에 명민한 반응을 보이지만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남자들은 지식의 양에 대해서 꽤나 섬세한 촉수를 감추고 있다. 때론 보면 꼭 애들 같다. 내가 더 많이 아네, 너는 덜 아네, 너 뭐 할 줄 알아, 난 뭐 해 봤어. 위 글은 인터넷 검색해서 주워 읽었다. 그냥 읽은 게 아니라 거저 주워 읽었다. 단어 딱 하나로도 남자는 자동으로 자극된다. 진공관 마란쯔 앰프? 어디서 주워 듣고 말하는군! 눈썰미? 너 벤틀리 운전대 잡아봤어? 그렇다. 뽈록 튀어 나왔으니까. 그럼, 원래 인간의 감정은 유치함이 기본이다. 심리학, 정신분석학, 학문으로 넘어가지 않아도 된다. 그래, 독자가 갑이다. 왕이다. 진짜 그렇다. 언제 안 그렇다고 한 적 있나? 그렇지만 당신이 남자라면 또 여자친구가 있다면 베르누이의 정리, 요트의 구조와 킬, 그것에 대해 영리한 여자친구가 알아먹을 때가지 이해시킬려고 끝까지 해보겠다고 누가 이기는가 보자, 라면서 왜 못 알아듣냐고 왜 신기해 하지 않냐고 추궁대지 말 것을 권한다. No Go Zone, 그 원리를 하나만 말해도 열을 안다면 금새 빠삭히 다 파악하여 요트 준선수 급이 된다면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더 잘해서 당신의 여자친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 그렇구나' 라고 답하게 하는 더 간단한 설명은 안 찾아봤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베르누이의 정리!
   틀렸나?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재미있다는 지적이.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몇마디 대화를 나눈다. 그렇게 맥주를 마시면서 보니 이상하게 배가 움직이는 기운을 감지한다. 조니, 케빈, 알렉스, 마크, 하워드, 닉, 제임스 가운데 가장 평형감각과 운동신경이 뛰어난 누가 먼저 그 변화를 알아 챈 게 아니라 물살의 움직임, 조류의 흐름, 자전 방향, 달의 위치 그리고 내핵과 외핵의 자전 궤도(지구 내부에 있는 내핵과 외핵도 자전을 한다. 지구의 자전과는 별도로. 이 사실을 몰랐던 달변의 왕자들, 지식 자랑의 석학들 적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감안해 보니 그들이 타고 있는 요트, 이름은 요트, 그것은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또한 미세하게 자동으로 보트의 동력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동 항법 장치 on. 계속 움직여, 쉬지를 않아.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세월처럼 이 배도 어딘가로는 가고만 있는 것인가.
   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믿을 수가 없어. 믿지 않겠어.
   「<에잇 치사하고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다 때려쳐.> 난 왜 아무 이유없이 이런 말이 생각나는 거지.
   「<아휴 추접스러워서 증말. 이거 원, 나 참 기분 나빠서 일 못하겠네. 너 다 해먹어라.> 나도 그래.
   「<집어치워! 늬가 그렇게 잘났냐?> 난 이 대사.
   「<어찌 그리 사람 무안하게 빤히 쳐다보는 거에요? 응큼하게.> 난 이거.
   「<야 이 미친 XX야. 정신차려 이 친구야.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요거.
   「<이런 미친 놈 내앞에서 썩 꺼져버려!> 터치다운.
   「<아~ 됐고! 늬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주겠어, 라고 말할 줄 알았니? 아니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가란 말이야.> 예~스.
   「뭐야 이거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이런 개 뼉따구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지?
   「말도 안 돼!
   「도대체 X맨은 누굴까?
   그들 앞으로 멀리 섬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왜 하필, 맙소사, 그러냔 말이야. 그건 그 섬이 그 섬이 최근 영화에서 봤던 낙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점점 점점 그 섬이 가까와 온다. 점점 가까와 온다. 흔히들 아는 가보지는 못했지만 큰 사진으로나마 많이 보았던 멋진 휴양지와 크게 다를 바는 없다. 하지만 뭔가 이건 낙원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 원인은 그 순간 요트 주위로 수천 명의 스킨스쿠버 요원들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어쩜 수만 명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이 요트의 승선 인원들은 스킨스쿠버 동호회 회원들인 것 같다. 좋은 여행지를 모두 가본 사람도 한 번에 스킨스쿠버하는 사람들을 동시에 떼거지로 많이 봐 봐야 수십 명이나 수백 명일 것이다. 그러면서 배는 점점 육지와 가까와진다. 이런 해양 축제가 언제 소리 소문없이 생겼을까. 이 규모라면 대대적으로 많이 알려졌을 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구단주도 이 가운데 있을 것만 같다. 꼭 이 커다란 요트에 이 친구들을 남겨 놓고 일부러 배를 이 곳 쥐구멍으로 몰아서 놀래켜 줄려고 정밀하게 조작하고 짜맞춘 듯한 느낌이다. 저네들은 톰이고 얘네들은 제리? 말도 안되는 소리다, 개소리. 해가 중천이라서 불꽃놀이 축제 분위기는 아니다. 하지만 거짓말 같지만 진짜였다. 와우 저기 저 배를 보아라. 수륙양용-자동차에다가 한 대는 수륙양용-버스가 보인다. 모터보트, 캐빈 크루져, 수중익선, 하우스보트, 공중부양선, 저인망 어선, 구명보트를 입고 투명 카약을 타는 여인네, 의자보트, 태양광 보트, 구두와 똑같이 생긴 배, 허뻐 큰 종이배, 방수처리 종이로 만든 배 등등 없는 게 없다. 어디서 다 튀어 나오는 거야. 나 증말. 일종의 축제 성격 상 쇄빙선이나 벌크 화물선은 보이지 않는다. 자자 섬이 가까와 온다. 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천국일까. 저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인가. 무엇이 그들을 반겨줄까. 저곳의 삶은 어떤 운영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냥 아무 생각없이 만화영화를 보는 꼬마 마냥 모든 것이 궁금하다. 환청인가, 어딘선가 하프 소리와 아코디언과 하프시코드, 백파이프의 멜로디가 들리는 것만 같다. 미쳤다. 그렇지만 현실이다. 정말이다. 이제 거의, 거의 다 왔다. 보인다. 보인다. 해변가에는 아까 하워드의 요트와 가까운 바닷가에 있던 유락시설과 꼭 닮은 환락 공원이 형성되어 있다. 어쩜 판박이다. 그것이 이것과 똑같다. 이것과 그것이 닮았다. 그러면 이 곳이 섬이 아니라 그 육지의 해변인가, 아니면 그들이 갔었던 저번 육지의 해변이 섬이었단 말인가. 이거 뭐지, 뭐지. 일단 그런데 저번에 그들이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유명 조각가의 작품일 수도 있다. 그 큰 텍스트 작품에 보이는 글씨는 이랬다.
   쥬-라-기-공-원!
   (이런) 삐─ 삐─ 삐─!
   자,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 10초의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진격한다. 쑥 들어간다. 당신의 아름다운 인생으로. 준비. 준비. 간다. 10. 이제, 당신은 저 앞에 보이는 미지의 신세계를 탐색할 시간이다. 아! 당신의 감수성은 달아오른다. 오! 어제 그렇게 바라던 오늘이다. 이제 여행을 떠난다. 9. 당신의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맑아졌다. 초심을 되찾았다. 감미로운 그릭블루빛 창공. 물결은 코발트블루. 꿈과 이상과 모험을 떠올려라. 8. 너의 무한한 미래. 아름다운 인생. 지고의 순간. 당신에게도 쾌락과 기분이 고조되는 분위기는 언제라도 찾아온다. 다시 젊음을 되찾는다. 7.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 된다. 당신은 행복을 정복할 것이다. 당신은 행복의 신이 될 것이다. 6. 낙원이 저 앞에 있다. 가상으로 존재하는 이상향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은 지금 꿈이라는 과정 안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5. 그렇다! 당신은 저 앞에 보이는 꿈과 모험의 세상을 탐험할 것이다. 4. 아! 그렇다! 맞다. 지치지 않는 젊음과 역동적인 운동감. 희롱할 것인가 기꺼이 즐길 것인가. 3. 오 왜 이렇지, 왜 이런 거야. 뭔가 이상한데. 2. 아! 이거 느낌 희한하다. 뭔가 착오가 생긴 거 아냐. 오오! 점점 느려진다 느려진다. 시간이 느려진다. 차츰 몽롱해진다. 1. 눈이 게슴츠레해진다. 당신이 투명인간이 된다면 무엇이 하고 싶었나? 투명인간! 0.5 자자, 시간이 느려진다. 밑도 끝도 없이 느려진다. 0. 드디여! 정지한다. 마침내! 멈췄다. 오래 기다렸어! 그래 이거야! 이거라구! 농구장에서는 이미 슛을 쐈는데 농구공이 공중에 떠 있다. 사람들이 입 벌리고 있거나 박수치다 멈췄거나 점프하면서 응원하다가 공중에 떴는데 공중에 계속 떠 있다. 오오! 이 일을 어떡하면 좋은가. 어쩌란 말인가. 저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대의 마음은 어디에 있나요.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 정지다. 이제 배구장이다. 배구 경기 중 C퀵으로 스파이크를 때리려던 공격수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는데 내려오지 않고 그대로 둥둥 떠 있다. 붕! 기차박수도 응원도 모두 멈춤. 똑바로 안 해~ 이··· 이··· 센스쟁이야, 소리치는 아저씨도, 힘빠졌어 힘빠졌어 라고 외치는 선생님도, 그분들이 마시는 생수의 물도 공중에서 얼음 땡 하고 정지했다. 캔맥주를 입에서 살짝 띄워 벌컥벌컥 들이키며 마시는 습관을 가진 술꾼임이 분명하다. TV가 고장났나? 화면이 정지하고 현실의 시간이 멈췄다. 시간이 멈추면 투명인간일 필요가 없다. 당신은 시간이 멈춘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왜, 는 생각하지 말자. 시간이 멈춘다면. 순간은 영원이다. 슬로우 모션 그리고 멈춤! 그네를 타는데 슬로우 모션, 말할 때도 슬로우 모션, 노래 부르면서도 슬로우 모션, 사랑의 행위도 슬로우 모션? 자! 지구의 애호가여! 멀리 떨어진 이곳 은하에서 보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너의 지난 삶과 독자가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당장은 글을 읽고 있군) 그리고 그대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 그 환영이 보인답니다. 모두 투명하게 보인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 소설은 문학이 아닙니다. 이런 맥락없는 황당한 이야기를 예술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3류-입니다. 싸구려 라구요. 이것보다 다른 무엇이 덜 재미나거나 심오한데 예술이라면 그건, 그건 이런 얘기 자체가 미스테리이자 패러독스입니다. 그뿐이에요. 삶에는 그런 신비가 필요한 법이에요. 여기서는 자신있게 이건 소설, 저건 예술, 그대는 사랑······ 이렇게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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