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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79

from 소설 2016. 8. 31. 14:26

   ①
   오늘은 무명 블로그 회원들의 소설 간담회 모임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어느 접시가 예쁜 식당에 모였다. 일곱 명 모두 참석했다.
   그리고 그곳과 별개로 다른 장소를 들여다본다. 자신의 계정에 사진을 올리면 보통 나도 가고 싶다네 부럽다네 데려가줘라네 라고 댓글이 달리는데 이것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듯한 전경과 그곳에 처음 방문하는 방랑자가 딱히 뭔가 감흥이 일지 않을 것 같은 전망이 그 심심함에 대하여 남다른 투정도 관심도 호의도 나타내지 않는 어느 신시가지에서 제임스는 하워드를 기다리고 있다. (전경과 전망은 말을 할 수 없으니까 당연한 말이다) 곧 둘 중 하나는 음 아니 두 공간에 한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설명이 어울리는 시골인지 도시인지 그런 공간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지 그 허위를 파헤쳐보고 싶은 궁금함은 잠시 뒤로 미루겠다.
   그러면 두 공간에 어떻게 동시에 두 명이 출연하고 역할을 맡고 살아서 움직일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현실은 환상극이 아니니까. 왜 그렇게 되었나, 를 추적하면 적나라한 속옷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제임스와 하워드는 그들과 닮은 대역을 모임에 보냈고, 그들은 이 이상한 동네를 구경하기로 계획한 것이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블로그 모임의 신선함과 학술적 목적의 진지함이 다소 퇴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스테리와 스릴러와 환상성에 대한 탐구는 뒷전이고 막 이와 같은 시시콜콜한 수다에 탐닉하는 분위기를 결코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 누구 옆구리 만져봤어?」 「아니. 넌 만져봤어?」 「만져봤겄냐?」 「그게 뭐야? 난 또... 에잇, 당했네 당했어. 그런데 다른 사람 옆구리를 왜 만져?」
   뿐만 아니라 직접 대면했을 때도 그랬지만 핸드폰으로 또 노트북으로 소셜 네트워크 상에서 이처럼 노는 것도 약간 싫증났기 때문에 도시와 시골의 중간, 현대와 가상, 현실과 허구의 완충 지대는 이런 곳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과 동심이 그 기조를 이룬 호기심을 자아내는 웬 색다른 동네를 찾아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아, 지겨워졌다는 댓글 놀이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또 합성이냐─딱 봐도 합성인데─뻥 좀 그만쳐라─어디산 뭐를 어디식 뭐로─합성천재─헤헷 너뮤 신나─속았다 속았어>
   제임스는 이런 말장난 놀이가 따분해졌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를 위해 모차르트를 틀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바흐를 틀었다... 시드니 스미스는 천국이 트럼펫 선율에 귀 기울이며 푸아그라를 먹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이런 과일의 비유가 몇 번이나 버텨줄까..." 이와 같은 결이 매끄러운 글도 좋지만 톡톡 튀는 말에 가까운 B급 글이 들리는 풍경을 보고 싶다는 것이 진솔한 내면의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하워드는 소설의 소재를 찾느라 폐가 탐험과 엑스트라 활동과 여행에 지쳤던 찰나였다. 또 하워드는 일명 교양소설과 철학소설, 고품격 소설을 위해 <문에 발 들여놓기 기술>, <말하면 믿게 된다 패러다임> 같은 심상치 않은 심리학 용어마저 즐거운 이야기로 바꿀려다가 지치고 또 지쳐서 휴식을 절실히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선한 여행지에서의 낯선 시간 보내기는 생각보다 허무하게 너무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제임스는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져서 손가락을 삐어서 멍들었고, 하워드는 오는 길에 배탈이 나서 심하게 아퍼 다시 되돌아갔으며, 무명 블로그 모임에 대역으로 참석했던 친구들은 참석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들이 가짜란 것이 탄로나버렸을 것이다. 귀여운 녀석들, 알맞는 엑스트라가 일을 빵구내고 집안 행사에 간 사이에 그 역시 대역을 쓴 게 틀림없다. 안 봐도 뻔하지만 아직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어서 속단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다.
   제임스는 신도시가 도시라고 하기엔 크기도 작고, 사람들도 붐비지 않고, 무엇보다 모든 상점들이 딱 하나씩만 존재했기에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무척 간절했다. 하지만 뭔가 액운을 만난듯한 불길한 느낌 때문에 그건 나중으로 미루고 좋게 집에 가서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휴가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왜 상점들이 딱 하나씩만 존재하는가 왜 딱 하나씩만 있는가, 가 궁금할 수도 있으니 그 얘기를 잠깐 하고 넘어가자면 이렇다.
   그곳은 모든 상점이 딱 하나만 있는 곳이었다. 상점의 이름은 본연의 이름만 사용했다. 백화점? 딱 하나, 이름은 백화점. 찻집? 찻집도 단 하나, 이름은 물론 찻집. 작명소... 작명소라... 음 작명소... 간판에 작명소라 씌여있다. 또 뭐가 있을까? 서점은 서점, 빵집은 빵집, 문구점은 문구점, 미술학원은 미술학원, 이런 식으로 모든 이름이 그러했고 그 수량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둘이면 뭐가 문제될까, 그건 아직 구경하고 살아보지 못했으니까 응당 알아내지 못했다. 그중에는 행복설계소, 낭만연구소, 농담전파소, 웅변아카데미, 낙원상가 같은 정체불명의 이름들도 살며시 끼어있었다. 여기서 그 동네의 기이함이 한껏 부풀려지는 것만 같다. 이름 그대로의 상점이 딱 하나씩만 존재하는 까닭이 독점과 협업과 경제학과 산업이론에 연관되지 않고 뭔가 있을 듯한 신비로운 꿈과 희망과 환상의 측면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근거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그 합당한 설득력은 짧은 시간 안에는 결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식품점, 오락실, 술집, 미용실 같은 일반명사가 아니라 저 이상한 이름들이 고유명사로 씌였다는 것은 그것이 그냥 좋은 이름을 명명한 것 그 너머의 어떤 숨겨진, 아니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숨김없이 정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듯한 기대감은 어른의 순수한 열정 마냥 무척 쏠쏠했고 한없이 부풀려졌다. 이쯤 되면 TV 단막극 정도 소재로 괜찮을 듯 하지만 그건 허구일테고 이건 현실이었으니 과히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무명 블로그 친구들의 이목을 확 집중시킬만한 소재였으며, 누구보다 먼저 그 신비를 탐험하고 그 매력에 한껏 빠져들어 그 호젓한 도시 생활과 고전적인 시골생활을 모두 함께 먼저 경험하고 먼저 탐험하여 공동이 아닌 단독으로 그 신비감을 선점하고 싶게 만드는 곳이었다.

   ②
   한편 무명 블로그 모임은 연기되고 친구들 모두 단독 칩거 연구에 들어가기로 했다. 즉 대역이 탄로나는 일은 다음 모임으로 연기되었다. 살짝 귀뜸하자면 다음 모임 때는 들킬 것이다.
    친구들 가운데 자택이 호텔이라는 소문은 뜬소문으로 확인된 닉은 집에서 나름 소설 구상하는 가운데 뭔가 서운해하고 있다.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살 때 왜 자기에겐 신분증을 확인하자는 물음을 건네지 않는지, 그 때문에 삐진 것이다. 그러나 마냥 낙심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그는 지금 열심히 브로콜리를 먹고 있다. 왜냐하면 뉴스에서 브로콜리가 항산화요소가 많고 어쩌고 그랬기 때문이다. 곧 있으면 브로콜리를 그가 직접 집에서 키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날은 그의 생일이다. 자기도 그걸 까먹었고 누가 챙겨주지도 않았다. 잊어먹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그리고 조니는 요즘 인공지능에 빠졌다. 사진을 그림으로, 영화를 음악으로 또 누가 지금 살아있다면 이렇게 책을 썼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라는 어마어마한 자료와 방대한 자료 처리 속도에 기반한 여러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구해서 어떤 초현실주의 작품의 소재를 찾고 있었다. 케빈은 복고풍 의상에, 알렉스는 레코드판 수집에, 마크는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고 현상하는 것에, 그리고 제임스는 스크린 야구장 스크린 배구장 같은 가상 게임에 빠졌고 또 집에서 TV 채널이나 돌리며 인터넷으로 이것 저것 알아보다가 혼자 술 마시며 하워드와 같이 가 보기로 했던 미지의 세계, 이상적인 파라다이스, 그들의 무명 블로그처럼 이름이 없는 유령 도시, 뭔가 비밀이 있을 것만 같은 그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도시에 대한 그리움을 새록새록 키워나갔다. 그러나 그는 그곳으로 갈 수 없었다. 의지가 있어도 시간과 마음의 여유와 풍족한 자원이 있어도 그는 그곳에 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지도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번에 잠시 둘레둘레, 뚤레뚤레 잠깐 입구만 둘러본 기억에 의지에서 다시 찾아가기에는 가는 길이 너무 복잡하고 이상하고 뭔가 이해할 수 없는 힘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딱 1번은 직접 그 언저리에 발을 디뎌봤기 때문에 그 존재는 절대 부정할 수 없었으나 다시 방문하기엔 뭔가 막연하게 겁이 났고, 거기서 살다온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고, 그곳에 관한 아무런 자료도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아무도 모르고 아무런 정보도 구할 수 없었다. 인터넷 검색 자료도 전무했다. 그래서 제임스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 지도에 없는 도시의 현실감을 잊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하워드는 그러지 않았다. 이번에는 하워드가 나는 놈 위에 있는 하는 놈이었다.
   처음에 하워드는 제임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걔는 좀 이상해, 멀거니 시선도 막 4차원을 보고 있는 것 같고, 속으로 음흉한 생각을 하는 듯 하지만 뭔 꿍꿍이가 있어서 뭔 놈의 미스테리를 꾸미고 가짜 꿈에 대한 구상을 글로 옮길 모략을 계획하는 것 같기 때문에 말도 어눌하고 농담도 희안해서 그의 말을 통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신빙성도 없고, 납득도 안되고, 내용도 이상했다. 왜 어릴 때 들어봤던 그런 낭설처럼. 조용한 주택가에서 밤 12시 5분 전에 분홍색 차가 보이면 그 차 지붕에 올라가서 엉덩이를 까고 일을 보는 자세로 한 손에는 야구방망이를, 뒷주머니에는 면도기를 다른 한 손에는 거울을 들고 12시 정각을 기다렸다가 12시 정각이 땡~ 되면 거울에 미래의 신부? 아니 전생의 자신의 모습이 나타난다나 뭐라나, 맞나? 그런 쓰잘데기 없는 허무맹랑한 뜬소문을 하워드는 제임스로부터 듣게 됐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하워드는 그걸, 그 지도에 없는 도시에 가는 방법을 바로, 믿고 있었다.
   하워드가 그 존재하지 않는 동네를 처음 알게 되고 나서 단골 가게에 틈틈히 꼬박꼬박 들리는 것처럼 일정한 습관이 형성된 후에 그는 그곳에 이쪽 세계, 저쪽에서 봤을 때의 이쪽 세계에는 없는 세게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 여자를 알게 되니 선물을 주고 싶고, 선물을 주고 나니 진도를 나가고 싶은 것처럼 그는 그곳의 지형을 집에서 모니터 화면으로 조망하면서 찬찬히 다음에 구경할 곳과 소문난 먹거리나 그런 입소문을 검색해봤다. 그러나 그런 자료는 전혀 없었고 그런 동네도 없다고 한다. 아무도 보도 듣도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연히 알게 된 작은 신비를 그는 쉽사리 정상적인 상식과 수평적인 교양으로 변환시키고 싶은 욕구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곳이 더 알고 싶어졌다. 쉽게 포기할 수 없었고 잊을 수 없었다. 더 궁금해졌고 그 괴상한 동네를 비로소, 벌써 좋아하게 되었다. 불과 알게 된지 얼마나 됐다고. 그 동네는 동네가 아니라, 여자였다. 친구들에게 으스대며 그곳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제임스에게도 비밀로 해야 했다. 왜냐하면 통상 이런 경우에 일이 알려지면 비경은 그 환상성을 잃어버리고 애정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릴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선-처리 후-보고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그럴 것이다, 라는 학습을 그는 자동적으로 평생 해왔다. 그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소년이었다, 소년!

   ③
   그는 하나의 비밀이 생겼고 그리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그래서 그는 아예 스마트 포투 뒤에 카라반을 연결해서 그곳으로 떠났다. 어차피 이쪽 동네에 있어봤자 재미난 일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인생이 너무 뻔했고 일상이 지루했으며 타성에 붙들려 옴짝달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자기가 일부러 적극적으로 미는 유행어가 있었다. 루팡하라는. 그러나 그 신조어를 쓰면 친구들은 괜한 시비를 걸고 우정을 빙자해서 시도 때도 없이 깐죽거리기만 했다. 쫀쫀한 녀석들 쩨쩨하게 말이야 어떻게 놀 줄도 모르고 이런 말장난이나 하면서 블로그에 너무 비협조적인 삶을 사는 것 같아 생각이 참신하지가 못해, 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루팡해!」 하워드.
   「루팡해? 루팡해, 가 뭔 말이야?」
   「루팡하라고.」
   「뭘 루팡해?」
   「아 루팡하라니까. 아 나 미치겠네. 척하면 척 못 알아듣냐? 다 설명을 해줘야 해? 어?」
   「도대체 그게 뭔 뚱딴지 같은 소리냐? 존말할 때 소설이나 써라.」
   「너나 존말할 때 얼토당토 않은 공상, 말 같지도 않은 글을 블로그에 그만 올려라.」
   잠깐 동안 하워드는 혹시 제임스가 밀사를 파견해서 자기를 감시하면 어떡하나 라는 걱정이 얼핏 스쳤지만 이곳은 지도에 없는 도시이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안심이 되었고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인간의 생활과 모험가의 여행과 그가 사는 공간과 맞는지 맞지 않는지 잘 모르겠으나 100억년 수명 가운데 약 40억년째 쨍쨍 열을 내며 쉬지 않고 열을 내고 있다는 태양이라는 혹성이 모두 사진과 글과 영상과 음악과 그림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에 추측이 당도했기 때문에 그는 딱 하나 별안간 떠오른 소원을 생각했다. 그리고 별똥별은 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 소원의 가치는 이렇게 정량화할 수 있었다. 이루어지거나 말거나 라고. 그 다음에 그 소원의 잔영은 근간 자신이 누리고 즐겨야 할 대상을 궁리하는 것이었으며, 그야말로 그 소원이란 것 그것의 알맹이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가까운 미래에 시간구분선을 거슬러서 지구 자전과 반대 방향으로 뱅뱅도는 구름 위의 도시 생활을 아늑하게 체험하는 것처럼.
   일단 하워드가 파악한 것으로 봤을 때 새로운 도시는 그가 사는 곳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그는 하나하나 사진으로 가지각색 풍경들을 모두 담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새로운 소설의 소재로 유용할 것 같은 어떤 이유를 알 수 없는 객체 지향형 문학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길가에 보이는 평범한 길고양이,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 당사자가 사후 알더라도 썩 기분 나쁘지 않을 듯한 도둑 촬영도 간혹 포함해서 노변에 멀거니 놓여있는 의자들 차들, 거리의 음악가, 건물에 보이는 이상한 대문들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사진기의 렌즈를 들이밀었다.
   그렇다. 하워드는 지도에 없는 도시에 이미 도착해서 그곳을 탐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잔디광장에 갔다가 어느 실외 수영장과 찻집에 들렸다. 그러다가 허기는 그냥 대충 햄버거로 때우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그가 찍은 사진들에 그곳의 영혼과 비밀이 담겨있을 것만 같은 은밀한 격동감과 그것을 글로 옮겨 걸작을 탄생시킬 수 있을 듯한 근거 없는 자신감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 이상한 동네와 하워드의 집은 자동차로 이동했을 때 채 1시간이 넘지 않는 거리였다. 그는 집에 도착했다.

   ④
   하워드는 집에서 도메니코 치마로사의 피아노 소나타를 들으면서 그가 찍었던 사진들을 차근차근 관찰하기 시작했다. 순간 그는 하나 특이한 의문점을 포착했다. 웃으면 안되는데 웃기다, 라는 상황이 아니라 <안들은 걸로 할래>나 <못 볼 걸 본 듯한> 마치 그와 같은 신기한 현상을 발견했다. 썩 기발한 건 아니었으나 사진 가운데 어느 공사현장 사진도 있었는데 그 공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의 글이 씌여진 표지판에 나타난 공사일정이 이상했다. 그건 꽤 먼 미래의 날짜였다. 그는 느닷없이 아뿔사, 라는 표정을 짓고 이렇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우리가, 아니 내가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됐지?」
   그래서 그는 첫째, 그것을 잊을려고 노력했다. 첫째, 다시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첫째, 멀리 떠나기는 귀찮고 새로운 취미를 물색하는 것도 귀찮아서 가까운 호텔 수영장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호텔 수영장에 가는 길에 길가에 버려진 웬 노란 비닐 봉투에서 찢어진 밑면으로 마네킹이 튀어나온 걸 보고 식겁했다. 그리고 호텔 수영장에서 그는 제임스를 만났다. 그는 저런 바로 같은 놈, 애도 아니고 고무보트 타고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생각했지만 속으로 제임스가 알려준 신도시에 몰래 다녀온 기억이 되살아나 슬그머니 움츠려드는 기색을 감지했다. 녀석이 직접 말은 하지 않았으나 꼭 이렇게 말할까 말까 라는 의혹이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표정과 눈빛과 몸짓으로 분산되고 변형되어 그에게 쏠쏠한 압박감을 가하는 것 같았다. 뭐야, 너 혼자 갔다왔어? 그런 말을 듣는 듯 했다. 그러나 실제 그런 말은 발화되지 않았다. 그날 하워드는 제임스와 헤어지고 그 후로 그는 그 호텔 수영장에 일절 방문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하워드는 집에 와서 프란츠 슈베르트의 환상곡 D.934번을 들으며, 한 잔의 우유와 초콜릿을 옆에 두고 그 이상한 동네에 관한 사진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은 제임스가 하워드 몰래 그 이상한 동네로 찾아간 날이었다. 대망의 길일일지 상서로운 원망의 게임 미션이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지만 기쁜 일을 기다리지만 말고 즐거운 경험을 찾아 직접 시도하고, 장르를 애착하며, 인생을 아끼는 친구라면 조심스럽게 그 일은 살며시 일시적일 망정 신성에 귀인하고, 범접하기 힘든 신비로움을 탐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룩한 예측이 우세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썩 홀대할 만한 터무니없는 탐사가 아니란 것은 이미 지금의 하워드가 간직한 소심한 불신과 거짓된 현실감과 이 세상에 대한 불가해한 애증의 경험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무슨 수로 미래 도시가 옆 동네에 나타나냐고, 말도 안 된다고, 믿을 수 없다고 발끈하는 회의론이 슬슬 고개를 들만도 했으나 아직 딱히 확인된 건 별로 아니아니 아예 없었다. 대형 광고판에 있는 커다란 웃는 얼굴에 장난끼 넘치는 누군가가 낙서하는 것과 뭐가 다르다는 것인가? 이빨 빠진 걸로 모자라 정확히 그 자리에 문을 만들고, 상처 자국과 바이킹 뿔을 그려서 붙이고 약간 부족한 듯 하니까 지금까지는 오직 불독만 찬다는 바로 그 뿔달린 쇠목걸이까지 지저분하게 그리는 것도 예술이라면 예술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왠지 아닌 것 같다. 적정 연령은 유아요 대상은 도화지를 넘어서면 안될 것만 같다는 말이다. 그 이상한 동네는 쉽게 생각하면 공사현장 안내판에 날짜가 잘못 인쇄되었을 수도 있고, 모든 종류의 가게가 딱 하나씩만 있다는 사실은 멀리까지 돌아보지 못하고 근처만 살펴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내내 망설이다가 하워드는 제임스에게 끝내 고백하고 말았다. 전화로!
   「미안. 꼭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저번에, 거기, 나 혼자 갔다왔어.」
   「어? 그게 뭐 어때서? 왜 미안해?」
   「왜냐고? 어... 그래 별일 아니긴 한데... 나도 잘 모르겠어. 어쨌든 거기가 좀 이상해. 뭔가 소름이 돋아. 그래서 괜히 뭔가 껄쩍지근한데, 음, 어, 뭐랄까 그곳은 목소리를 위한 협주곡 같다고나 할까? 거긴, 괴상한 동네야. 정말이야. 더 자세한 건 밝힐 수 없어. 귀신이 사는 듯 해. 그러나 증거는 없어. 딱히 뭐가 집히는 데가 있다고도 못하겠어. 하지만 그곳은 어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연상시킨단 말야. 음습한 기운 있잖아? 딱 떨어지는 맛이 없어. 수상해. 의심스러워.」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너 혼자 거기서 공중부양이라도 했냐?」
   「공중부양? 그건 아닌데, 아무튼 사람을 무척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어. 정말이야. 계속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는 것 같고, 내 뒤를 슥 잡아끄는 뭔가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있단 말이야.」
   「뭔가가 있기는 뭐가 뭔가가 있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너도 모르겠지?」
   「실은 그 동네가, 있잖아...... 지도에 없어. 거긴 지도에 없는 동네야. 그리고 그곳은 시간대가 여기와 달라. 완전 다르다구.」
   「뭔 소리야? 왜 루팡하게? 지도에 없기는 왜 없어? 지도 만드는 곳에서 또 지도를 알려주는 곳에서 업데이트를 안 했거나 뭔가가 착오로 빠졌겠지.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래서 그들은 타협안을 놓고 의견 차이를 조율하고 신기술 기기를 이용해서 그 이상한 동네를 방문하기로 의견을 조율하고 절충했다. 하워드는 본부에 남고 제임스는 위치추적기를 갖고 거기 갖다 오기로. 동전 크기만한 물체를 제임스 운동화 깔창 안에 부착해놓고 위치추적을 시작했다. 제임스는 그곳으로 갔고, 별일 없다며 둘이 통화를 하게 됐다.
   「마법의 숲이라도 발견했냐?」 하워드.
   「마법의 숲? 응. 연필들이 날고 있어. 신나는 모험 여행에 함께 하지 못해서 서운하냐? 지금도 늦지 않았어. 생각 바뀌면 오라구. 아니 그럴 순간을 기다릴 게 아니라 마음을 바꾸면 되잖아. 어? 내가 거인의 엉터리 딸기잼이라도 찾아줄께. 문제 없어. 자신있단 말이야.」 제임스.
   그러나 그곳은 아무런 이상 징후를 발견할 수 없는 평범한 동네였고, 제임스는 돌아왔고, 당연히 순간이동 그런 것도 없었으며, 하워드는 꼬장꼬장한 여전히 지성적이며 신중한 작가로, 또 제임스는 다시 재미없는 어른으로 복귀하여 따분한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피식, 재미없는 어른. 웃기지도 않다.

   ⑤
   평범한 나날이 이어지는 가운데 블로그 모임일이 되었다. 그 친구들은 오랫만에 하워드의 요트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얘기는 역시나 겉돌았다. 닉과 마크는 어제 거나하게 달리느라 내내 묵상에 빠져있었고, 알렉스와 케빈은 그들이 업무 협약을 맺으면 좋을 듯한 단체와 만남을 성사시킬 계획에 대해서 논의했으며, 조니는 뭔지 모르게 요즘 빠져있는 노래만 흥얼거리고 있었다. 뭔가 있었다. 밀었다 당겼다, 들었다 놨다, 쥐었다 폈다, 울렸다 웃겼다 하는 상대가 있었던 게 분명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하워드는 블로그의 약점과 헛점, 보완점 등에 관하여 괄괄하게 간드러진 조언을 하는 중간중간 자기는 곧 초현실주의 작품을 선보일 테니 너네들도 장르 변화를 시도하던가 문체나 내러티브의 변용을 고찰해보던가 하라면서 블로그의 애증과 삶의 권태와 생애의 애원에 대하여 무겁고 재미없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또한 그의 요트 이름을 모히토에서 다른 걸로 바꾸는 걸 심각하게 검토중이라고 했다. 금요일은 촌스럽고, 뭐가 좋을까 뭔가 기발한 작명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 제임스는 평소와는 다르게 사람이 변신하여 완전 다른 인격이 들어선 듯한 새로운 인물처럼 보였다. 뭔가 연기를 하는 듯한 꾸며진 행동을 내내 드러내고 있었다. 갑자기 이런 말을 뜬금없이 현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꺼냈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얍~! 그런 후 그는 바로 어디서 배웠는지 진짜 공중부양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말로만 듣던 공중부양. 아주 드물게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인도풍 차림새의 요가 수행자처럼 정좌세로 붕 떠서 서 있는 사람과 시선을 마주하고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뻔한 속임수는 아니었다. 금세 친구들은 눈이 똥그래졌다. 당연히 보이지 않는 지지대가 있나 없나 다 확인했다. 올망졸망 제 2의 무엇을 바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날도 학구적인 글쓰기와 창작의 고통과 웹소설의 동향과 블로그 업데이트 마감 전의 처절한 괴로움과 마감 후의 환상통에 대한 진중한 토론과 작가로서의 고뇌와 가난과 예술에 대한 평론의 시간은 모두 꺼이꺼이 바람에 날아가버렸다.
   곧바로 제임스는 물 위를 걷는 마술을 선보였다. 물론 마술쇼를 보여주기 직전에 구호를 외쳤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얍~! 그는 꼭 말을 많이 하면,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가짜라는 게 탄로난다는 듯이 몸소 행동으로 뭔가를 보여줄려는 것처럼. 뒤이어 당연히 믿을 수 없으니까 그들은 제임스에게 신발을 벗은 후 묘기를 재현해보라고 했고 그는 아니나다를까 재현을 거부했다. 그러나 어디서 작두나 계란 수십 판을 구해온다면 그 위를 걷는 기행은 보여줄 용의는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는 아차 했다. 말을 너무 많이 했던 것이다. 녀석이 쓰라는 글은 안 쓰고 어디서 이상한 차력과 서커스만 몽땅 배우고 독학으로 신기술을 섭렵한 것으로 모두들 예측했다. 그러던 중 조니가 뭔가 의심스럽다는 듯한 눈초리로 캐묻기 시작했다.
   「제임스! 너 그런 말 들어본 적 없지? 야 너 느낌있다, 이런 말 해주는 애 없었지? 내가 해줄께. 야 너 느낌있다! 히트다 히트! 완전 이건 파란 토끼가 있다고 해도 믿을 판국인데, 안 그러냐? 그래, 강아지는 무섭지 않아, 강아지는 무섭지 않다고. 이젠 녀석의 얼굴이 개로 보이는데, 왜지? 얘가 당나귀 가면을 쓴 것도 아니고 내가 약을 한 것도 아닌데, 영화도 아니고 현실인데, 왜 그렇지? 음... 그런데... 있잖아... 얘 좀 이상해보이지 않냐? 목소리도 어딘가 가늘어. 원래 가늘긴 했지만. 팔도 우리가 알던 제임스보다 더 짧어. 하지만 다리는 극미하게 더 길어. 또 목은 훨씬 퉁겁고. 비율이, 비율이 이상해. 봐봐! 그렇잖아? 어? ...... 우리에게 날마다 놀라운 일들이 생기지는 않지만 오늘 그런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어때? 잘 봐보라구. 잘 봐봐. 얘 모공이 이렇게 매끈하지가 않았어. 피부가 이게 사람 피부라고 하기엔 너무 살색이 도드라졌는데, 꼭 고무같아. 그리고 머리카락도 이상해. 가짜같아. 아무래도 얘는 제임스가 아닌 것 같은데?」
   역시나 여러 번의 눈빛이 왔다 갔다 하다가 정밀한 가면을 벗길까 말까 신분증을 뒤져볼까, 옷을 벗겨볼까 망설이던 순간 그 가짜 제임스는 재빨리 도망가기 시작했다.
   「야 잡어!」
   먼저 몸을 던지고 그 말을 들으면 쉽게 쉽게 가짜 엑스트라를 잡고 자초지종과 비밀스런 고백을 받아낼 수 있었을 텐데, 모두 대사를 먼저 꼭 자기가 칠려는 욕심이 지나쳤다. 때문에 그들은 간발의 차이로 짧은 추격전에서 가짜 제임스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멀어져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도망자가 되뇌었던 말이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얍~!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러게 말이야. 귀신에 홀린 거 같은데.」
   「에~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뭔가 있겠지.」
   「가짜가 아니라 진짜 아닐가?」
   「걔가 진짜 그렇게 목이 퉁거워졌다고? 그러고 보니 머리도 좀 커보였는데, 왜 그렇지? 어렸을 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믿거나 말거나식으로. 개 냄새를 많이 맡으면 머리가 커진다고 그랬던가, 그건 뜬소문이니까 내버려두고 뭔가 바뀐 점을 헤아려본다면 음, 녀석이 쓰는 소설대로 그의 얼굴이 개의 머리로 바뀐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우리가 믿지 않을 테니 변장을 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닐꺼야. 너무 갔다 너무 갔어.」
   「그래? 그래도 몰라. 그럼. 개인간 없으란 법도 없잖아. 늑대개는 있었어. 또 신화를 보면 그런 거 엄청 많아. 만화에도 그런 인물 천지야. 뭐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런데 아까 공중부양 그거 어떻게 한 거지? 물 위를 걷는 건 또 어떻고?」
   「맞아. 난 이미 말로는 지금까지 수십 번도 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심심하면 큰소리쳤지만, 음, 저건 진짜였어. 척 보면 알아.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대충 할줄 알았는데... 음 그게 쉽게 안되더라고. 정말 어려워. 그런데, 걔는 했어. 쟤 뭐하는 놈이지?」

   ⑥
   한편 제임스는 어느 날부터인지 모르게 왠지 팔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듯한 이상한 낌새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진짜 제임스다. 물론 앞서 나왔던 대역이 가짜라는 확증도 명확히 제시할 수는 없다. 그 증상은 군말없이 딱 잡아뗄 수 없는 착각일 수도 있고, 아마도 어쩌면...이 아니라 명백한 착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작업실 책상에서 일어나 벽에 대고 팔 길이를 기록해보았다. 그러나 비교할 수 있는 표본이 없었기 때문에 즉각 그 짧아진 듯한 팔 길이 변화의 진위와 그 정도를 측정할 수는 없었다.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다만 다행인 것은 그 괴상한 증상이 나중 다시 나타날 때를 대비해 첫 기준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마치 꼭 어린이들 키를 색연필이나 뭔가로 벽에 기록해놓는 것처럼. 물론 사진을 보거나 옷을 여러 벌 입어보거나 주변에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되지만 이건 그만큼 둔중한... 뭐랄까 아직은 평상시의 팔 길이와 짧아진 후의 팔 길이가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지는 않았기 때문에 거의 지금은 의심과 오해와 대비의 단계에 불과했다. 게다가 의심스러운 증상과 오싹한 의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제 2탄과 제 3, 제 4의 물음표로 이어졌다. 즉 그는 어딘가 모르게 자신의 다리가 매우 미세하게 점차 길어지는 듯한 환각을 극미하게 인지했다. 그 시작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높은 데서 떨어지는 꿈을 몇 번 꿨더니 키가 클려고 그러나 짐짓 장난스런 농담으로 외면해버릴 수도 있었으나 나름 그건 그에게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다리가 계속 길어졌을 때 적당히 길어지다가 멈추면 괜찮은데 만약 멈추지 않게 된다면 무척 곤란한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추론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목이 두꺼워지기 시작했다. 어, 내가 이렇게 목이 퉁거운 남자가 아닌데 어떻게 된 거지 라면서. 목이 두텁다 목이 두텁다... 음... 자라? 거북이? 코뿔소? 하마? 미세한 차이는 있겠지만 그는 어느 정도 차이를 느꼈다. 변화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즉 배는 금방 전보다 더 빵빵해지고, 다리는 아주아주 천천히 길어졌고, 나머지는 어떤 속도에 따라 알맞게 변형은 진행되어서 즉 이상한 초딩 또는 약간 판타지 영화 속의 난쟁이를 떠올리게 했다. 느낌은 그랬다. 정말이지, 효과음과 더불어 막 축소된 기분도 들었다. 오오 효과음~ 아, 들린다 들린다. 그는 진짜 신선한 효과음을 듣고 말았다. 피슉!
   그래서 그는 없던 습관이 생겼다. 전신 거울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점점 자기 신체가 더더욱 이상해져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변태나 괴물은 아니지만 뭔가 변화가 멈추지 않는 것만 같았다. 외계인처럼 갑자기 지력이 뛰어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슈퍼맨처럼 잠재적인 초능력을 숨기고 사는 것도 아닌, 결국 몸에 관한 문제가 예사롭지 않게 새로이 대두되고 있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처럼 살면 그만이지만 잘하면 진짜로 구름 모자를 쓸 수도 있을 듯한 불안감 때문에 그는 슬슬 외출을 자제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그레고르 잠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임스는 공중부양하는 기술을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터득했다. 집 안에서는 방과 방 사이를 항상 공중부양해서 다녔다. 심심하면 공중부양을 했다. 그래서 그는 그걸 어떻게 달리 써먹을까 그걸 고민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그는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자기 집 수영장 바닥이 빵구나서 그곳에서 확인하지는 못하고 빗물이 좀 흥건히 고인 곳에서 확인해봤다. 진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경미한 대인기피증이 가시면 그는 나중 큰 무대에서 확인해볼 계획을 세웠다. 또 곧 있으면 투명인간 기술도 숙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그는 음 자칫 응큼한 상상에 빠지는 걸 미연에 방지했다. 그러나 끝끝내 그는 자기 자신이 괴물처럼 여겨졌다. 따라서 그는 뭔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대상에게 쫓기는 심정에 휩싸였으며, 그러므로 그는 저번에 하워드가 잠시 먼저 머물다왔다는 지도에 없는 동네로 떠나기로 작정했다. 그곳이 아니면 안될 것만 같았다.
   그가 그곳으로 가던 중에도 그 기묘한 신체 변화는 그칠 줄 몰랐다. 물론 육안으로 봐서는 전과 후의 차이를 뚜렷이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당사자의 기분과 느낌과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그는 속눈썹이 길어지고 팔다리의 털이 옅어지고 짧아졌다.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가슴도 봉긋 솟는 것 같았다. 아직은 양쪽의 균형이 약간 불안하다. 이러다 혹시 골반도 커지는 거 아니야,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그가 찍었던 또 찍혔던 과거의 사진에서도 별 차이는 없겠지만 그 변모된 모습의 차이가 모두 고스란히 그 사진들에 반영되었다.

   ⑦
   제임스는 그 이상한 동네에 도착했다. 그 이상한 동네는 도대체 어떤 동네를 말하는가, 가 궁금하지만 그냥 도시의 이름이 그런가 보다 쯤으로 넘겨짚어야만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예전의 그 그, 예전의 느낌을 하나도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이때 진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공기의 향기, 거리에 보이는 물웅덩이, 누가 버린 종이 뭉치, 노란색 빨간색 나뭇잎, 짹짹 지저귀는 제비와 까마귀, 바지 입은 남자와 치마 입은 여자들, 그 가운데 그는 펭귄 한 마리를 본 듯한 환각을 느꼈다. 그것은 가짜 체험이 아니었다. 헛것이 아니었다. 그건 진짜였다. 다시 한번 그런데! 그런데 이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그와 똑같이 생긴 것을 우연치 않게 발견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말도 안돼...... 믿을 수 없어.」
   보이는 사람들은 마치 SF 영화처럼 로보트 같지만 로보트는 아니고, 정상인 같지만 정상인도 아니며, 나사가 하나 풀린 뭔가 많이 부족한 듯한, 혼이 절반쯤 나간 듯한, 내가 집에 TV를 켜놓고 나왔나 큰소리만 쳐놓고 무작정 연기했던 벌칙을 수행할 날이 벌써 임박했나, 그런 사소한 고민을 안고 있는 것만 같은 평소의 그와 몹시 흡사한 사람들로 거리는 가득했다. 뭔가 흐리멍텅하고, 뭔가 우유부단하고, 뭔가 정신박약하고, 뭔가 명령을 기다리는 듯 하고, 뭔가 방금 전 슈퍼 다람쥐가 굴렸던 쳇바퀴를 뺏어서 굴리다 나온 것 같고, 뭔가 꿈꾸는 듯하며, 뭔가 그 꿈을 되새기며 공상에 빠져 가물가물 헤매이는 것 같으면서 뭔가 망설이며, 뭔가 뭘 해야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대체 어떻게 놀아야 할지를 잘 모르는 듯한 자신의 모습을 거리에서 1명, 2명, 3명, 4명, 5명...... 계속 보고 있었다. 그는 볼을 꼬집고 자신의 따귀를 스스로 때리고 벽에 대고 물구나무서기도 했다가 바닥에 엎드려 팔굽혀펴기와 가만히 서서 양 숫자 세기 등 할 수 있는 온갖 단순 몰입하기 행위를 진행했다. 그걸 하고 나면 정말 꿈 같은 이 이상한 정경이 모두 사라지거나 꿈이 깨거나 정상으로 돌변하거나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었고, 그리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맙소사, 그러자 정말 거짓말 같이 마술처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 요상한 소설 같은 특이 현상은 모두 사라졌다. 믿을 수 없다, 가 아니라 믿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모든 게 정상이었다. 말이 됐다. 충분히 납득되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즐겁지는 않았고 재미도 없었으며 약간 우울했다. 평소에도 그렇다. 항상 그렇다. 그러니 괜찮다.
   그건 그렇고, 그는 괜한 걱정은 훌러덩 벗어버리고 대책없는 기쁨과 행복과 즐거움을 찾아헤매느라 시간을 소비하지도 않았으며, 다시 차분하게 우수한 글쓰기 그 황홀한 순간의 절정이 다시 자신에게 방문하기 전에 일부러 서툴게 삶을 재구성하고, 광고에 속고, 드라마에 빠지고, 속이고 속았던 인생을 되돌아보고, 복잡한 지난 삶은 잊고 지금 이곳에서 그분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없는 비밀을 만들며 새롭고 신비로운 생활을 소설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항상 초반에는 왕성한 의욕과 더불어 실제 행동과 실천 또한 부지런하고 기운이 넘치는 사람이 있다. 제임스 역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에잇 여기도 별거 없네, 그렇게 짐짓 실망하면서도 방향 전환의 방편을 찾기 위해 가까스로 체념은 연기하고 자연스러운 퍼포먼스와 아둔한 열정, 엉겹결에 찾아오는 번득이는 착상이랄지 어떤 천재성이 엿보이는 뭔가 재미있는 그런 궁금한 호기심이 스스로 춤을 추는 무언가 기쁜 놀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시간 보내기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가 고안해낸 결론은 이런 건 아니었다. 지면 닭이 된다 닭닭 미니게임, 불가능한 난위도의 버튼 찾기, 오버워치 단편 애니메이션 마지막 바스티온, 괴담 애니메이션 쪽지의 비밀, 그리고 앙앙앙 난 니가 정말 좋아~
   그가 내린 결단은 이와 같았다. 카페에서 혼자 그것 해 보기. 첫째, 저기 저 가련한 자세로 앉아있는 유난히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연을 간직한 듯한 고운 그분을 스르륵 스르륵 스케치해서 스케치북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가 스케치북 한장을 팍 찢어서 그녀에게 건네면서 뭔가 건네려던 대사를 까먹고 그녀의 가슴을 보면서 코피 팍~ 코피 팍~. 그리고 둘째, 영상편지라 하기엔 조금 부끄럽고 단편 영화라 하기에는 너무 수줍지만 또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단편 영화를 하나 찍기. 왜냐하면 친구들과 블로그 모임일은 가까워오고 마감일은 닥쳐오는데 글은 안 써지고 영감도 떠오르지 않고 그야말로 미칠듯한 답답함에 쉴새없이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엔 글 대신 단편영화를 대신 올리겠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⑧
   그래서 그는 저기 보이는 노란 찻집, 알록달록 물감과 색연필과 크레파스를 떠오르게 만드는 웬 고전적인 느낌의 찻집에 들어갔다. 그곳의 이름은 참 복고적이었다. <나랑 친구할래?> 어차피 엄청 오랫만에 만나는 산뜻하고 여전히 청초하고 언제까지나 귀여운 후배가 "선배!" 라며 부르는 곱디고운 목소리를 듣는 일은 자신에게 일어날 수 없는 기적과도 같았으며, 글도 잘 안 써졌고, 단기 목표 1번과 2번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보나 마나,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그는 "난 왜 여기 있을까?"라는 분위기에 젖어들었기 때문에 작전 1번은 물건너갔고 작전 2번을 해치우기로 했다. 그 2번을 위해서 그는 빵집에서 케익을 하나 사서 들고 왔다. 빵집 이름은 빵집이었고, 케익 이름도 케익이었다. 더럽게 재미없게 말이다.
   그는 전에 단편영화를 찍어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일단 찻집에서 노트북으로 단편영화, 라고 검색해봤다. 그랬더니 연관 검색어로 (단편영화) 몸값, (단편영화) 사이트, (단편영화) 시나리오, (단편영화) 상영관 같은 주제가 뜨는 걸 봤다. 괜히 삼천포로 빠지면 안 될 것 같아서 다 집어치우고 바로 즉시 찍기로 돌입했다. 이미 각본과 어떻게 찍을 것인가, 는 다 머리 속에 담겨져 있었다. 배우, 제작비, 사운드트랙, 촬영감독, 조명기사 그런 거 다 모두 다 필요하지 않았다. 간결한 편집, 긴장을 늦추지 않는 플롯, 삐걱거리는 문소리도 필요없었다. 곧바로 큐 들어갔다. 출연자는 1명이었다. 자기 자신. 음악? 없었다. 대사? 필요없다. 기획 의도는? 있다. 바로 극찬은 사양하겠다, 였다. 줄거리는 거의 없지만 내용은 대략 이렇다. 간단하다. 쉽다. 완전 쉽다.
   찻집에서 외롭게 슬픔을 간직한 듯한 까칠한 그러나 알고 보면 자애롭고 부드러운 어느 낭만적인 남자가 혼자서 케익에 촛불을 붙인다. 처음에는 초를 하나만 올렸는데 갑작스레 욱~했는지 막 여러 개, 수십 개의 초를 올린다. 그러다 다시 모두 치우고 초를 딱 2개만 남겨놓는다. 불을 붙인다. 혼자만의 촛불잔치를 시작한다. 표정을 보니 금새 다시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그는 조울증 환자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편집증? 강박증은 아니다. 증은 뭔 놈의 증, 그냥 작은 외로움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왜, 우리 모두 해피엔딩, 내가 주장한 제목을 팀장이 묵살했지? 왜 갑자기 통장 잔고가 바닥났지? 왜 이번 달 카드값이 이렇게 많이 나왔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건 알 수 없다.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없는 이상. 발끈할 일도 아니고 통찰이 필요한 탐구 과제도 아니다. 순간 그의 울적한 기분을 어떻게 알았는지 더없이 고즈넉한 경음악이 흐른다. 그건 어린시절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기억이 흐릿한 연하장, 누나를 따라해서 직접 수작업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를 친구에게 딱 한번인가 두어 번 보냈던가 그랬는데 답장은 못받았던 일, 누나는 왜 스무살에 그런 책들을 읽었을까, 그녀들은 어째서 그런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쓰고 읽는 것일까, 왜 여자는 월간지 1에서 월간지 2로 세월과 함께 취향이 바뀌는가, 반짝반짝 셀로판지, 매일 등하교길에 마주친 마주치기만 했던 그녀 그때 알던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볼 걸 그랬나......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곡이었다. 제목은 알 수 없다. 알아낼 수는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 슬모없는 공상과 쓸데없는 추억과 도저히 도움이 안 되는 상상은 집어치우고, 그는 눈을 감고 잡념은 물리친 채 닥치고 몽상과 상념에 젖어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갑자기, 느닷없이 목근육의 힘을 모조리 빼버린다. 꽃잎이 떨어지듯, 순결한 처녀가 고개를 떨구듯, 세기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의 그 표정 그 몸짓 그 손짓을 딱 흉내내자마자 어딘가에서 돌풍이 몰아치고 그것이 어느 미녀의 다홍색 치마 밑으로 들어가서 옆에 있는 사람들을 화사하게 웃음짓게 만드는 그런 뜬금없는 서스펜스처럼! 그렇다. 그건 단편영화의 시네마틱한 순간이었다. 고개를 떨구면 그 밑에는 바로 케익이 있었다. 눈썹은 이미 살짝 불에 탔다. 그 다음은, 다음에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해도, 된다. 그 다음의 뭔가를 어깨 너머로 꼭 확인하고 싶어지는 슬로우모션이 등장할 차례다.
   줄거리가 거의 없어? 간단해? 쉬워? 단편 영화가 뭐 쉬운 여자야? 음, 알아서 미리 처음부터 극찬은 잘 사양했고, 제작이고 연출이고 드럼이고 기타고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니까 다음 장면은 무엇인지, 어떻게 될는지, 그 다음에는 또 무엇이 나타날지 그것은 굳이 밝히지 않기로 한다. 너무 많은 걸 보여줄 수는 없다. 권태 먼저 다이아몬드 반지는 나중? 이상하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다. 살 수도 있고 못 살 수도 있다. 뭔 말을 해도 말꼬리는 잡힌다. 안 그럴 수가 없다. 그런데 말이 아니라 소설을 상대로 한다면, 김나는 커피포트를 연상시킬 것이다. 적어도 마음만은 부자여야 한다. 최소한 그 방향 그 일방성을 벗어나지 못할꺼면서 말만 말만 이러쿵저러쿵 그런 우를 저지르는 코믹 연기, 그런 건 그가 찍은 단편 영화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작품에 대한 미혹이랄지 대체 그걸 찍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라는 살가운 궁금증에 대한 미련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감정의 선율은 풍만했고 플롯 자체가 무척 감정적이었다. 퍽이나! 참 나 그것도 단편영화라고, 에~라...... 직업을 바꿔라~ 어? 양계업이나 목축업, 축산업, 술장사, NC 웨이터, TV 관련 연구자, 삼류 작가 등 많고도 많도다.
   하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는 무명 블로그에 올릴 작품을 다행스럽게 마감일을 여유있게 앞두고 완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블로그에 업데이트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긴장이 풀려버렸다. 그렇다고 바지에 오줌을 싸지는 않았다. 현실에 안주하고 타성에 만족했으며 못난 재능을 탓하며 스스로 자신에게 고까운 소리를 일삼았으나 그렇다고 내내 자책으로 일관하지는 않았다. 타산을 따져보니 자학은 했던 셈이 됐다. 눈썹이 탔고 그 다음 어떻게 됐으니까. 그는 가히 대중적인 화술은 썩 빈곤했지만 그런 이상한 뭔가를 만들어내는 재주 하나는 있었다. 따라서 그는 기쁜 나머지 오늘의 할일 두 가지 가운데 완수하지 못한 1번을 시도해볼까 하는 발가락 사이에 땀나는 충동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의지만으로 부족한 일인데 괜히 발동걸렸다고 좋다고 시도했다가는 씁쓸한 패배주의에 바져서 속수무책의 실망감을 떠안고 2번 과제를 완결한 뿌듯함까지 그것마저 상쇄됨으로 모자라 기분이 아예 잡치게 될까봐 그냥 오늘의 할일은 미완성으로, 절반만 성공한 것으로 남겨서 유종의 미에서 트로피와 상패는 놔두고 상금만 챙기기로 했다. 그러는 것이 신상에 이롭고 무난하리라는 복안이 반영된 결단이었다.
   그때 마침 조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임스, 마감일 잊지 않았지? 그런데 있잖아~ 마감일이 변경됐어. 그리고 그 변경된 마감일이 당겨졌어. 그런데 방금 한 말 뻥이야. 장난이고, 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음... 뭘까? 맞혀봐. 아, 생각났다. 모임 장소가 바꼈다는 거야. 다이얼 M을 돌려라, 거기서 만나기로 했잖아? 그런데 장소가 바꼈어. 왜 바뀌었는지는... 왜냐하면... 안 가르쳐주지. 푸하하하하하하. 재미없지? 나도 알아. 상대가 재미없어 하면서도 예의상 웃어주는 걸 내가 즐기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목소리만 듣고 그 목소리에 어울리는 영상을 상상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따라 웬 썩은 미소가 떠오르는 거 있지. 아 나 이거 이거 아재 개그에 익숙해지면 고품격과는 멀어지는 건데, 말이 늘면 글은 쉬운 길로 접어들게 되는데 큰일이네 큰일이야. 음 아무튼 이번에 거기 어디지, 지도에 없는 도신가 뭔가로 우리들이 찾아가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네비게이션 찍으면 나오겠지 지가 안 나오고 별 수 있을라고. 안 되면 보이스카웃으로 돌아가는 거고. 그것도 좋겠네. 괜찮겠어. 자칫 기대가 되는데. 그럼.」
   결국 조니의 용건은 차나 한잔 하지, 가 아니었다. 애들이 어떻게 알았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하워드는 무덤까지 비밀을 갖고 가기로 했는데, 쉽게 발설할 녀석도 아니고. 음...... 조니가 도청했군, 그랬군 그랬어.
   그러나 그는 뭔가 조니의 속내가 의심스러웠다. 그의 음성이 맞긴 한데, 그러긴 한데 그의 음성에 관한 자료를 많이 모아서 각 단어와 호흡과 리듬 같은 모든 발성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서 합성한 것 같았다. 그리고 말의 내용도 허풍이 부족했다. 허세도 등장하지 않았다. 허구는 끼어들 여지도 없었다. 프로그램에 글을 입력하면 그걸 조니의 말로 만들어주는 꾸며진 작위성 그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의뭉스러운 의혹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2번 과제의 완수 때문에 들뜬 기분을 잠재울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그는 엄격하게 가짜 조니를 추궁하고 파악하고 따라붙었어야 했다. 야근을 해서라도. 야근? 정식 출퇴근을 해본지 오래된 사람은 낯선 단어구나, 야근.

   ⑨
   장면이 바꼈다. 자주 바뀐다. 딱히 보이지는 않고 상상은 잘 안되지만 카메라 각도와 영상의 속도가 세련된 듯한 기분이 든다. 밑도 끝도 없는 공상이다. 하여간 장면이 바꼈다. 블로그 회원들이 모이기로 한 날이다. 약속된 장소는 호숫가 정취가 근사한 카페였다. 나른한 백포도주 한 병이 테이블 위에 보이고, 테이블 밑에는 정말 오래된 적포도주가 댓병 대기하고 있다. 촛불에 불꽃은 반짝이고 있지만 명백한 낯술이다. 탁자 위에는 오페라 초대권, 영화관 시사회권, 일기장, 엽서, 핸드폰, 노트북, 가발, 모자, 먹음직스런 요리와 인형과 꽃다발과 어느 전설적인 테너의 아리아 CD, NC 1년 자유입장권, 그리고 인문교양서와 소설과 만화책들이 보인다. 즉 탁자가 엄청나게 커서 올릴 수 있는 건 뭐든 올려야 할 것만 같다. 그러면? 음, 그러면.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면 슬로우모션으로 돌리든가 그러면 좋을 텐데... 보여줘? 뭘 보여줘? 여기서? 안 돼.
   아무튼 그랬는데 모인 애들 가운데 유독 제임스만 멀쩡하고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가짜 티가 난다. 그것도 많이 난다. 그러나 진짜 1명 가짜 6명이라서 진짜인 그는 쉽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쪽에서는, 지도에 있는 도시에서는 블로그 모임을 진행중이다. 오늘도 역시 가짜 제임스가 등장하셨다. 물론 나머지 여섯 명은 진짜다. 저번에 왜 도망쳤냐고 물어보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도망치기는 누가 도망쳤다고 그래? 급한 약속을 잊고 있다가 바로 떠올라서 서둘러 떠난 것 뿐인데. 생사람 잡고 있어. 흥!」
   그의 컨셉은 오늘 뻔뻔함이라는 원재료에 능청을 첨가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연기력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나머지 친구들은 팔짱을 끼고서 또 폼을 잡고서 뒷짐을 지거나 눈을 가늘게 뜨거나 당황함과 냉소와 끔찍함을 모두 넘어버린 웃음으로 일관하면서 그래 어디까지 하나 보자, 저분이 어쩔려고 저러지, 이젠 말리기도 귀찮다 라면서 합을 맞추고 덩달아 같이 놀게 되는 형국에 이르렀다.
   자, 종이 울렸다. 다음 과목은 수학? 과학? 예체능? 아니다. 경우의 수다. 그러나 예정에 없던 마술사의 등장으로 드라마 촬영장 말단 사원의 실수로 종이 잘못 울린 것으로 판명된다. 경우의 수, 그런 거 머리 아프다. 학교에서 공부하랴 직장에서 일하랴 집에서 청소하고 애기보랴 장비는 여력이 부족한데 소설에서까지 골치 아파서야 말이 되나. 재미없는 구간과 고리타분한 분량은 단숨에 뛰어넘기로 하자.

   ⑩
   앗! 그래서 저쪽 도시에서 제임스는 결국 제정신을 차리게 됐다. 알고 보니 그는 환상적인 글쓰기에 대한 욕심이 과했다. 인생의 신비를 과신했고 초현실주의를 맹신했다. 허구헌 날 헛된 이상을 쫓고 허황된 꿈만을 쫓아갔으며, 장비든 대사든 뭐든 길게만 만들려고 했고, 타인의 빈말은 물론 C급 허풍까지 덥썩 믿었던 것으로 모자라 자기 자신을 조종할 줄도 몰랐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고 허세와 허당 기질이 다분했으며 요설가의 장광설에 잘도 속아넘어갔다. 그분들에게 제법 중요한 고객이 되었다. 그것도 특급 단골로. 그리하여 그는 이 모양 이 꼴로 차의 네비게이션이 고장났는데 그것도 모르고 지도에 없는 동네라며 동화 속 나라에 당도한 듯한 착각에서 빠져나와 제정신을 차리게 됐다. 즉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곳은 친구들을 만나고 있는 근사한 찻집이 아니라 네트워크 마케팅 회사의 강연장이었다. 대역 연기를 신들리게 펼치는 친구들은 그처럼 반쯤 몽롱한 현실 감각으로 똘똘뭉친 광고와 헌사와 소개의 글을 모두 철썩같이 믿어버리는, 최소한 과거에 그렇게 반신반의하며 믿었던 바로 그런 순진한 보통 사람들이었다. 일명 일반인. 그래, 할 수 있어. 자 따라하세요. 뭐라 뭐라 구호를 외치고 그대로 따라하고 거미줄이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자기 밑으로 거미줄을 내려보내야 하니까 썩은 동아줄이라도 내려보낼려면 친구에게 좋은 생명수가 있다고 좋은 껀수가 있다고 괜찮은 장비가 있다며 연락을 해야 한다고 하니까 바로 그때, 그렇게 빠져나갔던 혼이 다시 제자리로 들어오고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게 된 것이다. 그가 믿었던 환상은 허깨비였고, 다단계 교본을 요술의 비서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미칠 듯이 하나에 빠져드니 이제 다시 다른 하나, 새로운 하나, 더 흥미로운 무언가 꿈결처럼 달콤하고 실크처럼 나풀나풀한 새로운 다음의 어떤 무엇이 또 다시 필요하게 된 것이다. 마치 어떤 뭇-남성들의 이상형은 새, 새, 새로운 여자라는 농담처럼(농담 대신 다른 낱말을 넣는다면? 가령 넌센스, 절망, 희구, 거짓말, 강박 관념, 풍자, 프로이트주의 같은. 그러면, 오! 그건 답이 안 나온다).

   ⑪
   그는 드디어 그러면 그렇지 뭐 특별할 게 있다고, 그러면서 괜한 기대는 금물이라면서 좋게 송충이는 솔입을 먹고 살아야지 라면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곱게 집에 당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럴 리 있겠나!
   최근 그의 취미는 무엇인가?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 글쎄! 실은 당신의 호사와 친교와 꿈과 사소한 습관과 내밀한 개인적 안목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실내에 있을 때 햇볕이 실내로 어느 만큼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는지, 때때로 그 좋아함은 어떻게 변하는지, 우아함을 위해 쾌적함을 얼마나 감내할 수 있는지, 언제 어떻게 무슨 과정을 통해서 기분이 날아갈 듯 정신줄을 놓게 되는지, 또는 사람이 너무 빈틈없고 매사 반듯하고 매우 윤리적이라서 술 취해 거리에서 한 번도 자보지 않았는지, 지갑을 잃어본 적이 있는지, 사랑을 하게 되면 주로 차는지 차이는지, 그분에게 바라는 건 자기를 험하게 함부로 심하게 꾸짓으며 막 대하는 것과 동화 속 공주처럼 떠받드는 것 그 두 가지를 모두 바라는지, 그 모든 게 궁금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누가 누구에게? 너무 자세한 것은 은근슬쩍 묻어놓고 넘어가기로 한다.
   제임스가 최근 즐겨 하는 일이 몇 가지가 있긴 하나 그 가운데 딱 2가지만 꼽자면 이와 같다. 사람들과 교감하며 사귀고 즐겁게 교제하는 기술도 딸리고 은거하며 소설 쓰기 특급에 몰입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한쪽 어깨 위에 이상한 인형을 아예 상의와 꼬매서 붙여버린 의상을 입고 다니는 것이 그 하나였고, 나머지는 근래 바짝 물이 올라서 좋다고 중독된 놀이인 얕은 정원용 호수, 무슨 기념 회관이나 큰 궁정 한가운데 무릎 깊이로 넓게 전망을 위해 만들어진 분수대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장난감 삼지창을 들고 서 있기, 바로 그것이었다.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계속 반복하기, 는 열외)
   변화가 하나 있다면 그는 예비용으로 사랑을 위한 큐피트 화살도 준비해뒀다. 그는 정말 그것에도 꼿혔다. 마음, 심리, 정신, 생각, 의도와 의지, 사유 그리고 사상까지? 이미 빠졌으면 한 번 부정해봐야 허우적거림에 지나지 않고, 한 번 반 부정하면 그것은 곧 애교요, 두 번 부정하면 과도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 되고, 이미 사랑은 시작됐으며 참을 수도 없고, 빠져들었으면 계속 진행하는 일만 남게 된다.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가령 바람피우기와 이혼하기는 부적절한 예다, 물론! 자,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삼천포, 한번 가자. 갈 시간이 됐다. 한동안 안 갔드니 서운하다. 독자 딱 두 명쯤 엉덩이 아니 귀가 근질근질하셨을 것이다. 자,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봅시다~! (손가락 딱) OK! 물론 사람에 따라 사랑한다는 말하기, 까지가 정말 어려운 사람이 있는 반면에 거기까지는 쉽고 그 다음부터가 어려운 사람이 있다. 즉 모두 그래프와 유형 차이다. <나는 어떻다, 나의 경우는 어떻다,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에서 '나는'을 생략하고 뭐는 뭐다 뭐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된다 인생은 뭐다 청춘은 무엇이고 내 꿈은 뭐였으며 난 그 가운데 몇 개를 이뤘고 아직 몇 개는 남았고 새로 영입한 친구는 어떤 녀석이다 또 '사랑한다는 말까지는 쉽다 그 다음이 어렵다' 라고 하면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진짜 그런 줄 안다. 그게 전부인 줄 안다. 한동안 그게 다라고 생각한다. 그게 모두에게 통용되는 줄로 안다. 그것이 대체로 거의 언제라도 누구에게나 항상 들어맞는 말인 줄로 안다. 그러나 그건 절대적이지 않다. 그거 절반은 뻥이다, 개뻥! 웃자고 한 얘기고 개인적 경험을 압축한 말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찰떡같이 확신을 가지고 누가 웅변을 하건 뭐를 하건 모두 저처럼 받아들이면 된다. <나는 어떻다, 나의 경우는 어떻다,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 별로 그다지 글 같지 않은 글이, 말 같은 글이 뭔가 의미가 불확실하고 개념이 모호하고 썩 중요하지 않지만 뭔가 어떤 결단과 불확실함과 이상을 궁금하게 만드는 힘은 없잖아 있다면 그건 모두 그 가치는 모두 절반 깎아야 하는 것이다. 50퍼센트 할인이 꼭 필요하다. 때에 따라 반대로 50을 곱하는 일도 개인에 따라 발생할 것이다. 그걸 늦게 깨닫고 어른이 되면 바로 평생을 상업과 타자적인 삶에 일조하고(그게 왜 나쁘겠냐마는), 진정한 나를 늦게 알게 되며, 인생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하게 되는 것이다. 어른이 언제부터 어른이냐 얼마를 벌어야 어른이냐, 에 따라 재론의 여지는 있지만 말이다. 어떤가, 이 요사스럽고 빙빙도는 무언가에 대한 설명은 한 개인의 뚝심 같은 철학이자 세월의 지혜가 녹아든 약간만 흐릿하게 인상적인 평대사 같은가, 안 그런 것 같은가? <나는 어떻다, 나의 경우는 어떻다,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 방금 전의 설명에 이 표어를 적용하자면 이건 음 어떡하나, 50퍼센트도 아깝군! 50? 50이라... 너무 했나? 너무 했다. 내 말은 일단 5퍼센트를 빼던가 또는 하나의 가설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가설로!> 그렇다. 진심이다. 하나의 가설로, 모든 것을. 똑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하게 만든다. 세상이 그렇게 만든다. 주변에 사람이 많고 바쁘고 멋져보이고 뭐 하나 빠지는 거 없고 인기도 많고 항상 유쾌하며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분에게는 여기도 사랑 저기도 사랑, 다채롭고 화사하며 웃음과 행복에 둘러쌓여 살아가시는데 그렇다면 뭘 해도 재미없는 사람보다는 비교적 사랑이 쉬울 수 있다. 정말 쉽겠지. 그럴 테다. 즉 사랑의 고비랄까 그것에 대한 의미와 관점이 다를 수 있다. 그러겠지. 그런데 가만 있자... 정말 그게 쉽던가? 진짜로? 그건 일반인 기준이 아니다. 대다수는 일반인이다. 그 말은 틀렸다, 적어도 일반인에게는. 최소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먼저 그 안온함을 떠올리는 숙녀에게는. 그러니까 사랑은 없어~ 라는 말이 먹히는 거다. 그것도 아주 잘! 사랑이 어디 동네 똥개 이름이더냐? 어? 어? 정말 그런가? 대부분 우리가 읽고, 보고, 듣고, 접하는 글과 말과 작품은 쉽게 말해 일반적으로 잘난 사람이 만든 것이다, 잘난 사람이, 능-력-자가. 모두, 싹.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살아도 그런 컨텐츠를 만들어내기 힘들다. 그건 모두 머머-마를 탄 사람들이 만들어낸다. 그러니 세상에 떠도는 통용되는 말과 글과 텔레비전에 나오는 내용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드문 확률로 지구에서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살아보니 인생은 뭐고 사랑은 뭐고 세상은 어떻드라, 에 대한 표본이 될 수 없다. 논리가 급진적이고 비약이 심했지만 인간계에서 그런 표본 추출을 비정상적으로 한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그건 대략 상업과 허구와 단편적인 사실일 뿐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라거나 다큐멘터리와 시민단체나 환경운동가 그리고 바로 작은 목소리를 지닌 일반인의 생각과는 거리가 한참 있는 것이다. 이~따만큼. 내 것이 아니면 우선은 껍데기다. 출신배경과 성장환경이 좋고 적당히 행복하고 유명하지만 생각은 좀 갸우둥한 사람의 글과 말을 곧바로 받아들이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 내게 체화되지 않았다면 그건 타인의 인생일 뿐이다. 사랑? 웃음이 나올 일이다. 사랑? 물론 아름다운 것이다. 구분을 해보자. 1번, 사랑은 없다고 가정하고 살면서 할일은 정말 그런가 의문을 가진다 진짜를 찾는다. 그리고 2번, 사랑은 있다 그러니 이건 사랑일까 다가오는 저분은 사랑일까 사랑은 쉽다 사랑한다 말할까 좋아한다 말할까 내가 사랑했으면 그만인데 왜 난 사랑받지 못했다고 푸념인가 그때 사랑이라 믿었던 건 풋풋한 사과향 같은 거였나봐 이 사랑 음 이 사랑이라 글쎄. 1번과 2번은 모두 전문용어로 짧게 압축할 수 있다. 뒤섞여서 정리가 필요할 수도 있다. 많이. 그러나 그대에게 오리발 1번과 2번 닭발을 내민다면, 그냥 다그치면서 고르라고 하지는 않고 고결한 자세와 고매한 태도로, 현명한 당신이자 고상한 그대는 그렇게 쉽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다. 보통은 근사하게 3번을 택한다. 없으면 만든다. 왜냐하면 그거 아는데 평균 수십 년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수십 년 씩이나! 그 지략을 터득하여 체감한 존재를 사회에서는 보통 어른이라고 한다. 그러나 법적 연령으로 성인이 된 후 또 다시 어른이 될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고 경쟁하고 좋은 일도 했다가 속고 속이기도 했다가 때로는 하얀 거짓말도 하며 옆길로 빠지기도 한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열심히 다람쥐 쳇바퀴를 돌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그러다 사랑도, 돈도, 게다가 꿈도 놓친다. 그나마 기쁨이라는 물풍선과 보람이나 삶의 의미라는 고무 풍선을 잡았으면 괜찮은 거네. 그런데 인기와 행복과 많은 풍선으로도 모자라 솜사탕까지 거머쥔 사람이 하는 말, 난 절대 믿을 수 없다. 나는 절대 믿지 않는다. 난 그걸 보기도 싫...... 아니지 아니지. 아니야 아니야! 강의 분량이 나오는데 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들리는 건 듣고 우연히 보이는 건 본다. 옳지. 그렇지. 으흠. 에헴. 그래도 순서가 있으니까 더욱이 제가 좀 약삭바른지라 우선 면피를, 변명 먼저 하겠습니다. 엄한 걸 가지고 그분의 바짓가랑이를 꽉 부여잡고 믿음의 문제로 끌로가서 무척 송구스러웁다만 다 놓치고 지성이라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풍선만 겨우 어렵싸리 잡은 사람은 어떨까? 뭐가 어때? 뭐가 어떠냐고? 1살 갓난아기가 생일잔치에서 앞에 놓여진 많은 상징물 가운데서 뭔가를 고르는 깜짝 이벤트처럼 비리비리한 어떤 아저씨가 지성이라는 사과를 따먹었다고? 그게 뭐야? 그게 뭐지? 그는 누구일까 어떤 사람일까? 그분의 생활은 대체로 합리적일까? TV는 주로 뭘 보고, 핸드폰은 어떤 거 쓰고, 소비 습관은 어떠하며, 사랑에 대해서는 어떤 관념을 지니고 있을까? 가게 마감 시간이다. 소설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갈 수 있는 문이 허공에서 45도 각도로 2층에 뿌옇게 구름이 형성되고 후광에 힘입어 드디어 나타났다. 곧 있으면 닫힌다. 아, 들린다. 울려퍼진다. 이번에는 피콜로 소나타구나. 지성에 당첨된 사람은 어떨까 뭐가 어떨까? 수없이 들어서 알지만 다시 듣고 보니 이상한 질문과 번민에 딱 적합한 사안들만 널찍히 풀어놓고 냅다 도망치겠다고? 벌써 잘하면 쉽게 도망칠 개구멍은 만들어 논거 아니냐고? 그런 법이 어딨냐고? 돌팔이인지 사기꾼인지 믿음직한 장사꾼과 성실한 학자도 과연 그러는지는 잘 몰라도 선수는, 선수는 마땅히 여운을 남겨야 그래야 선수다. 모르긴 몰라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결론이 대체 뭣이냐고라? 어~허 순진하시기는. 긴말 필요없다. 여러 말 할 것 없다. 딱 한마디면 된다. <그는 가난했다!> 음... 음... 그렇다. 됐습니까? 뭐시여? 아따 시방 뭐라고라? 아직도 불만족이시라고라? 거 마 아직 한~참 모자라다고 거 마 딱 하나만 더? 눈 감고 딱 하나? 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오케이, 미운 놈이든 어쩌든 일단 가자. 거의 결승점이 보이는구나. 음, 그럼 그대의 미소 때문에 기분이 좋으니까 딱 하나만 더. 오케이. <그는 불행하다?> 하하하하하. 바로 이제야 식 웃으시네. 이거야~ 이거야~ 이거라니까~. 자기는 이런 거 좋아하시는구나. 휴~ 저도 여러분 웃는 것 보니 정말 흐뭇하고, 감개무량하지만 적잖이 기진맥진합니다 그려. (저기 보이는 저 꼬마 신사를 향해서) 까꿍~ 안녕~(방긋, 엄마가 좋아요 아빠가 좋아요? 뭐? 곰돌이가?). 아 힘드네 힘들어. 오늘은 유독 힘들어. 모처럼 VIP만 모셨기 때문인지 제가 기력이 딸려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몹시 벅차군요. 어... 돈 버는 거 이게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네~ 그럼요. 어쨌든 마지막으로 구호를 외치고 이번 특별 부흥회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주섬주섬 필기구를 챙기며 바닥에 뭐 떨어졌나 어쨌나 확인을 하다가~) 거기 가죽점퍼 입으신 분 아 옆에 막 쳐다보지 마시고 눈 작고 척키인형 닮으신 분 아따 거기 주머니에 검정색 선그라스 8대2 가르마에 포마드 바르신 분 바로 그래 거기 아저씨, 일단 가짜 웃음부터 숙달하시기를. 끝! 
   앗, 돌아왔다. 분수대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장난감 삼지창 들고 망보기, 라는 바로 2번을 또 적당한 위치가 보이길래 즉시 실행했는데 이번에는 뭔가 이상하게 일이 꼬여버렸다. 원래 정상적이라면 한적하고 새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서 막 그를 사진찍고, 카메라 후레쉬가 번쩍거리고, 구경하고, 웃고, 혹자는 비웃고, 심지어 동전을 적선하듯 분수대 앞에 던져댔고, 그 가운데 일부는 바쁜 가운데 또 소원을 비느라 분수대 안에도 동전을 던져댔고, 선심쓰듯 유일하게 새하얀 속옷, 아마도 하의 그리고 어쩌면 제일 안에 입는 면 100퍼센트로 추정되는 내복마저 던져졌다. 저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라고 잠시는 시간을 빼앗게 만드는 그것까지 등장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경로로 왜 왔지? 뭣 때문에? 누구도 모를 일이다. 그걸로도 모자라 다양한 개들이 짓는 소리까지 들렸는데 그 소리는 왜 들리는지 그 이유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차마 밝힐 수도 없고 알아낼 수조차 없었다. 전대미문의,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서둘러 그 현장을 떴다.
   그리고 그는 볼보 웨건을 몰고 집으로 가다가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그는 어느 막다른 마을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뭐야 이거, 그랬지만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그곳은 꿈의 낙원이었다. 진짜 환상적인 요술의 공원이었고, 아름다운 요정들만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진짜 아름다운 요정들만 살았다. 바로 그래~ 이거야~ 이거라니까~ 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고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있는 진짜 괴물 온순한 괴물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탄복을 차마 멈출 수가 없어 경이로웠으며, 아름다운 꿈과 희망과 신비로 이루어진 지상천국이었다. 그곳은!
   그는 곧바로 행복설계소에 들어가서 행복을 설계했고, 낭만연구소에 들려서 낭만파 멋쟁이가 고민하는 판타지에 대해 눈부신 미녀들과 담화를 나누고 그분들과 진심어린 친분을 쌓았다. 게다가 그 동네에서 남자는 단 1명이었다. 그가 오기 전에는 0명이었다는 얘기였다. 뿌잉뿌잉~ 반짝반짝~ 알콩달콩~ 새콤달콤~! 그래~ 이거야~ 이거라니까~!

   ⑫
   그러나 이건 거짓이 아니었다. 가짜도 아니었다. 속임수 역시 아니었다. 모두 진짜였다. 흠없이 완벽한 요술 세계임이 틀림없었다. 암호명, 필요없었다. 한 번 잘 해주고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 이어지다가 막판에 잡아먹힐 걱정도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했다. 즐기면 그만이었다. 챔피언이 된 거다. 이렇게 기쁘고 즐겁고 한없이 재미있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입씨름할 상대조차 오금이 저릴 정도로 똑같았다. 무엇과? 바로 꼬마 아가씨가 읽는 동화책에 나오는 그림 거기 등장하는 그분과. 뭔가 반전이 있을까? 없다 그런 거. 그래도 덥썩 신뢰하기에는 세상을 알고 인생도 안다? 이곳은 예외다. 지구에서 유일한 이상향의 공간이다. 쾌락 대소동이 기다리지 않냐고? 어쩌면! 장막은 천천히 벗기자. 약혼자가 보고 있으면 어쩌나 라는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다. 왜냐하면 여긴 4차원이니까. 남극 저 밑에 있으니까. 시간도 돌릴 수 있고 알라바이도 다 만들 수 있으니까. 이렇게 행복하다니 어쩌면 좋아요? 그래, 어쩌면 좋을까 어쩌면 좋아. 바라는 소원은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불가능은 없다. 젊음은 영원하다. 당신은 청춘으로 돌아갔다. 화장지곽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화장지가 아닐 것이라고 예상해도 된다. 똑똑해지고 싶어요? 자, 여기 이 모자를 쓰시오. 모자에는 웬 숫자가 씌여있군요. 200이라고. 200은 IQ? 예~스!
   자, 당신은 쾌적한 공기에 상쾌한 기분으로 아늑한 흔들의자에 앉는다 앉는다. 스르륵 스르륵 천상의 음률이 들린다 들린다. 저 앞에서 눈부신 누군가가 당신에게로 걸어온다 걸어온다. 그녀는? 그분은 날개를 펼친다 펼친다. 그러나! 그러나 안개가 뿌옇게 끼며 졸음이 몰려온다 몰려온다. 당신은 그다. 그는 제임스다. 당신은 제임스다. 제임스는 당신이다. 당신은 비로소 단잠에 빠지고 말았다 말았다.
   그때, 블로그 모임일에서 제임스 대역을 맡았던 친구가 나타난다. 그는 제임스의 옆으로 와서 자신의 본 모습으로 변신한다. 그건 변장이 아니라 본디 그의 원래 형태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는, 그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불가해한 괴물의 모습이다. 만화와 영화에 나왔던 엑스맨의 미스틱과 닮았군, 정말 닮았어. 그의 성별은 알 수가 없다. 그는 마치 연기인 듯 기체가 아닌 듯 초소형으로 줄어들고 그 줄어듬을 멈추지 않는다.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지더니 결국 그는 제임스 즉 당신의 뇌리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제임스의 남성성일까? 분신일까? 당신의 복사판? 아니면 그대의 혼령? 그럼 제임스의 육신은 어떤 밀명? 서술자는 후견인? 따끔하게 혼이 나야겠군. 바로 이럴 땐 체벌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발바닥 간지럽히기나.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는 이하동문이라서 설명을 줄여야 할 것 같다.
   불후의 환상 소설을 이만 마친다. 이야기 끝.

   ⑬
   하워드는 만년필로 쓴 자필 원고를 마친 후 공책을 덥는다. 그리고 그는 주춤주춤하다가 안되겠다는 결연한 표정으로 앞 표지에 이렇게 적는다.
   제임스, 꿈을 꾸다.
   그는 아휴 하면서 한숨을 내쉰다. 이거 이거 모태에서 상상했던 이야기도 아니고 뭔 말도 안 되는 허접한 소설이란 말이더냐, 블로그에 올려야 돼 말아야 돼? 그는 그렇게 심각하게 심사숙고한다. '구술자 + 서기' 라는 형식보다는 차라리 이것에 가까울 것 같다. 잠자기 전에 동화책 읽어주기 단계를 지나 동화책 읽기는 그만 됐고 딱 됐고, 이젠 책을 덮고 즉석에서 이야기를 만들어서 막 지어서 파파팍 구연해주라는 유아의 주문에 적절히 응답하고 웃고 말하고, 말하고 웃고, 다시 어이없어서 또 한번 웃는 바로 그 상태가 아닐까 라고 슬며시 점쳐보게 된다. 정말 그처럼 넌지시 해석해봤으나 그 또한 억측이었다. 독자의 요구 사항이 정확히 반영됐나? 그렇다. 그렇다? 그건 억지다. 반영, 안됐다. 독자의 정신이 하워드의 마음으로 전이되었을까? 전이? 전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말도 안된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철썩 같이 엉망진창이다. 하워드는 그렇게 고민하다가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한마디 하면서 이상야릇하고 요상한 이야기가 씌여진 요술의 춤추는 구두 같은 공책을 갈기갈기 찢고 짓이기고 뭉치고 이빨로 물어뜯더니 집어 던진다. 침도 한바가지 묻어버렸다. (냄새를 맡아봐 말어?)
   「이런, 젠장!」
   이미 업로드했기 때문일까? 정말 백업은 이미 해놨고 괜히 쇼하는 건가? 그건 알 수 없다. 그는 성격 좋다. 그릇도 되고 깜냥도 된다. 그러나 연기는 이제 손 뗐다.
   누구 꿈을 꾸다, 는 그 누구의 인생도 바꾸지 못했다. 세상의 아름다움과도 연분을 맺지 못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에잇, 짝사랑이었네 그려.
   순간 불시에 하늘에서 공책 한 권이 떨어졌다. 그곳은 좀 전에 졸음에 빠져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었던 제 2의 이상한 동네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동네였다. 그러나 분명 그곳은 제 1의 이상한 동네로부터 자신의 집으로 좀 더 가까이 진전된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동네의 공원이었다. 그 공원에서 그는 다시 최근 몰두하고 있는 심각한 취미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얕으막한 정원 분수대에서 날개 달린 천사의 고추를 만졌다가 굳어진 하프를 튕길려고 했다가 웬 이름을 알 수 없는 바다의 신이 들고 있는 삼지창과 자신의 장난감 삼지창을 가까이서 비교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공책 한 권이 떨어진 것이다. 근처에 도서관이 있었을까? 제비나 까마귀 또는 하얗고 목과 부리가 다리와 날개가 모두 긴 새가 공책을 물고 날아가다 실수로 떨어트렸을까? 그건 알 수도 확인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제목은 대기중의 습한 수증기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살짝 흐릿하게 지워진 상태였고, 제임스가 그 공책을 펼쳐봤을 때 도대체 뭔 일이 벌어질지 앞으로 어떤 신비로운 환상적 사실이 진행될지 잘 모르겠으나, 그러나, 그는 뭐야 이거 에잇 공책이자나~ 공책이 왜 하늘에서 떨어져? 그래도 다른 게 떨어진 거 보다는 낫네~ 그럼 됐어, 그러면서 그 공책을 그냥 분수대에서 나팔부는 이름 모를 천사 옆에 가만히 놔두고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혹시 가짜 하워드? 신들린 하워드? 정신 나간 하워드? 꿈은 대체 누가 꾼 거야? 진실은 뭐고? 알 게 뭐야!
   감정적인 변곡점을 여과없이 또 여지없이 보여주게 만드는군.
   그가 칭송한 건 과연 소설인가 아니면 고귀한 속임수이자 극심한 사실적 허구에 대한 찬미란 말인가? 뭐 신복고주의? 오, 불쾌하도다. 말이면 다 되는 줄 알어 라는 답변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진짜 이만 줄이는 게 낫겠다.
   끝으로 딱 한마디만 더하자면, 요컨대, 어디서 고기 굽는 소리... 이루 말할 수 없이 군침이 도는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그 냄새, 그 정취, 그 분위기, 무엇보다 바로 그 환희 그리고 캬~ 청량음료 한잔 또 그리고 음 그 다음! 아, 상상된다 상상돼. 그림이 딱 그려진다. 식감과 식탐과 먹성, 꼬르륵 꼬르륵. 당신은 오늘 또는 조만간에 분명코, 지지지직 지글지글 지지지직 지글지글 고기를 굽게 될 것이다. 어떤 아찔한 지성에 결단코 필연적인 고기, 탐미주의에 대한 관망과 그 뭔가 자동반사적 선행에 불가결한 고기, 바로 그 고기를 굽게 될 것이다. 단, 채식주의자라면 그건 어쩌지... 고기를 남에게 구워주기만 하느냐 마느냐는 개별적인 일이지만 썩 모습이 좋지는 않으니까 냄새만 맡거나 그냥 상상만하기. 그대가, 어쩌다가 정말 어쩌다 보니 벌써 여기까지 읽게 됐다면! 이건, 예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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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78

from 소설 2016. 8. 15. 13:48

   ①
   나는 어느 날 시골생활이 무료해서 볼보 웨건 뒤에 카라반을 연결해서 운전하여 도시로 떠났다.
   보통은 일을 열심히 하다 짜릿한 휴가를 맞이하고, 기나긴 또 고독한 청춘 다음에 낭만적 연애에 돌입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살다보면 어쩌다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가 있다. 물론 어이없는 방식으로 재미있는 이야기에 대한 착상이 떠오를 듯한,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근거없는 추측과 그런 막연한 기분에 이끌리는 예감 때문에 창의적인 친구들에게나 어울리는 '머머 해볼까'라는 과감한 역발상과도 비슷한 일상과 함께하는 기대를 즉시 실행에 옮긴 것은 아니었다. 곧 계기가 있었다.
   그건 무엇이냐면 이랬다. 집에서 나는 웬 장비병에 걸려 은거하던 중 소설을 쓰랴 책 읽으랴 또 놀기도 해야 하고, 그렇게 막 스무살 젊음처럼 이것저것 뭔가를 하고 싶은 불분명한 욕구와 잔잔한 호기심 때문에 주위가 너무 산만한 듯 해서 나는 어딘가를 막 돌아다니고 싶어졌다. 누구의 이중생활 그것보다 훨씬 혼란스러운 다중적 자아가 서로 전면에 나서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마침 무슨 핸드폰 어플리케이션이 유행이길래 그걸 내려받아서 한번 해봤다.
   그리고 나는 바다로 갔다. 왜냐하면 첫째, 이 기분 저 분위기보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야, 바다다!> 그 다음 둘째, 거기서 핸드폰 게임 같은데 나오는 공룡을 잡거나 인어공주를 발견하거나 그것마저 불투명하고 불가능하다면 나도 한번 적당히 순진하고 참한 아무 아가씨나 붙들고 <아가씨 아니 낭자 아름답소, 나의 헌팅을 받아주오!> 라는 약간 저급한 듯 하지만 어느 시대 화술인가 그러면서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게 만들면서 상대방은 하고많은 적절한 인사말 가운데 멀쩡하신 저분은 왜 하필 저렇게 푸르르고 촌스러운 대사를 골랐을까, 막 궁금하게 만드는 아닌 듯 하지만 은근히 신비스러운 최면의 말을 걸고, 여차하면 나도 뺨 한번, 그 고운 가냘픈 부드러운 향기로운 연한 살색의 손바닥으로 나도 뺨 한번 맞아보고 싶어라 라는 그런 충동이 불현듯 몹시 내 마음을 쥐었다 폈다, 들었다 놨다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갔던 바닷가는 쓸쓸한 해변이었고, 날은 무더웠고, 사람들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핸드폰으로 공룡을 한 마리도 못 잡았고, 그러므로 나는 약간 실망했다. 그래서 아주 잠깐 한적하고 고요한 생활에 염증을 느꼈고, 따라서 나는 트레일러를 끌고 도시로 떠난 것이다.
   시골 A에서 도시 B에 이르는 동안 신기한 지대 X나 기발한 모험 Y, 우연히 만난 반가운 얼굴 Z는 모두 없었다. 오히려 소셜 네트워크에 보니 경치가 좋고 물도 좋은 쉬어 가기 좋은 어느 찻집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 들렸다. 그런데 정작 그곳에 들리고 나서야 알았다. 사진은 합성됐고, 소문은 과장됐으며, 나의 한숨은 엄살이 아니고 일상이라는 것을. 아마도 나는 일생을 이렇게 살아온 것 같다. 왜 실재 현실과 포장된 예상도는 다르냐면서 전자를 후자처럼 바꿔야겠다면서 변신하겠어, 셋 세면 바뀐다, 탈바꿈시켜 버리겠어 얍~, 이렇게 무모한 장난을 치듯 놀거나 또는 후자를 전자와 똑같이 사실화시킬려다가 무슨 풍경화가 엉망이 되거나 곰의 탈을 쓴 여우가 되버리는 삶을 살아온 듯 했다. 그러나 도시에 가서 문화생활도 하고 사람들 구경도 하며 신나게 놀 생각을 하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각함보다 단순함이 어울릴 때가 있다. 그러나 아마도 별로 신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마음가짐과 행동만 들뜬듯이 꾸미고 있었다. 말이 앞서면 안될 것 같아서.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사진 합성 놀이에 빠지게 됐다. 그에 대한 즐거움은 끝이 없어서 비공개로 남겨둔다.
   몸을 풀었으니 이제 슬슬 도시 이야기를 해야 하지만 너무 일찍 리본을 푸는 우는 범하지 않는 게 좋겠다. 선수처럼 보여야 하니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일부러 참고 기다렸다가 받듯이 말이다.
   나는 도시에 가서 무엇을 구경하고, 어떤 일을 하고, 새로운 탐색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연습장에 몇 가지를 기록해봤다. 가볍게 핸드폰에 금새 쓰면 간단하지만 일부러 손글씨로 할일을 기록했다. 꼭 기기에 뚝딱 써버리는 게 왠지 매정해서라기 보다는 내가 쓴 그 일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인가 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 위해서였다. 섬세하고 신중하며 꼼꼼하거나 그냥 나처럼 매사 확신이 부족하고 주관이 뚜렷하지 못하며 뭘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러나 잘 들여다 보면 약간 허풍이 생활화된 <미친 토끼 같은 청춘>이라면 하루를 또 인생을 정말 짜임새 있게 살지는 않더라도 가장 중요한 일 세 가지 정도는 꼽아야 한다. 오늘 이거만 하고 놀기, 최근에는 시간 나면 그 생각만 하기, 매일 책 읽기 30분 글쓰기 30분 인터넷 3시간 TV 3시간 또는 인터넷과 TV를 동시에 하기 6시간 마지막으로 그 반대라거나. 이렇게 누구나 정해진 생활이라는 게 있다. 내 하루가 소설 같지 않고, 나의 일주일이 드라마와는 딴판이고, 나의 한달짜리 연애는 영화와는 다르고, 내 사랑은 멜로드라마도 내 인생은 대하 드라마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연습장에 몇 가지 할일을 적은 건 이랬다. 고전음악 음반 파는 곳에 가보기. 극장, 미술관, 동물원, 놀이터, 술집, NC, 사람 많은 곳 그리고 학교, 시장, 병원, 공원, 조용한 주택가 동네, 강변, 괜찮은 드라이브 코스, 전망 좋은 찻집, 서점, 식사는 대충 때우고 그 돈 아껴서 한번에 근사한 식당 잘 찾아서 맞집에도 들리고. 또 생각나면 기록해놓기로 했다. 나중 멀리 다른 관광지에 가더라도 넉넉히 시간을 보내고 싶은 데는 실은 랜드마크나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아니다. 주로 관심을 끄는 곳은 단정한 학교, 한적한 주택가, 천변 산책로, 현지인이 거기 살면서 답답할 때 가끔 찾는 곳, 숨겨진 비경과 함께 하는 찻집이랄지 작업장 같은 장소.
   오늘, 어제, 일주일. 최근에 썩 재미난 일은 없었다. 새롭고 흥미롭고 매번 설레고 항상 들뜨는 일만 기대하는 시기도 이젠 지난 것 같다. 물론 때에 따라서 말을 바꿀 수도 있다. 내가 날씨가 바뀌듯 마음이 뒤바뀌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요? 네. 최근 책에서 읽은 것처럼 <......내가 입을 열 때는 개도 짓게 하지 말라> 나는 이런 분과도 아니고, 사춘기와 권태기의 어딘가에서 방황하는 진짜 청춘도 아니며─언제부터 청춘이 진짜와 가짜로 나뉘었나─도시의 멋쟁이들과 상큼한 여대생과 청초한 숙녀들은 안중에도 없어 하는 난 그냥 동네 아저씨다. 때로는 슬픔을 가장하고, 이따금 겸손과 겸연쩍음 사이에서 헷갈려하다가 동시에 근래 갑자기 책을 평소와 달리 너무 많이 읽은 건 아닌가라는 사소한 고민에도 빠지며, 종종 어떤 사안에 대해 좋은 말과 듣기 싫은 말 하나씩 해야 할 땐 험담 먼저 칭찬은 나중, 의 순서를 따르고, 왕왕 아무 이유없이 또 아무도 보지 않는데 뒤통수를 벅벅 긁고, 혼자서 가짜 웃음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며 매사 눈치를 보는 진짜 동네 아저씨 말이다.

   ②
   그러나,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 난 기분이 좋다. 집에서 죽 TV만 봐도 좋다.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동경하는 사랑과 꿈꾸는 낭만은 있다. 나는 뭘 해도 재미있었다. 난 절대 심심하지 않았다. 혼자서도 완전 잘 놀았고 완전 잘 살고 있었다. 글? 완전 잘 써졌다. 무슨 일을 하든 하나도 지겹지 않았고, 하나도 따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이 바꼈다. 전에는 그랬다, 사랑은 없다고. 사랑은 없다? 있다, 사랑은 있다. 단지 너무 흔하고 종류가 많을 뿐이다. 좋은 남자? 왜 없겠나, 있지. 오늘도 좋은 남자를 거리에서 20명, 한 30명쯤 봤고 나쁜 남자는 한 명도 못봤다. 예전에 나는 뭘 해도 안 됐고, 안 될 것 같았지만 지금은 뭘 해도 될 것 같고, 뭘 해도 된다. 만성피로? 그런 거 모르고 산다. 체력이 조금 약하니까 사전에 미리미리 쉬면 된다. 이거 이거 너무 행복한 거 아닌가, 자못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너무 부러움을 한몸에 받아서 미안할 지경이다. 다시 의뭉스러운 눈초리를 받고 싶다. 이러다 뭔가 뜬금없이 (개)망신 당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밑도 끝도 없는 걱정이 내게 노크하는 듯한 미세한 불안감이 없잖아 있다. 그러나 이젠 거의 날개를 달았다. 마음만 먹으면 A에서 B로 순식간에 이동하고, 시간여행조차 쉽게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늘이 날 반기고, 새들이 내게 인사하며, 세상은 아름답고, 뭘 보고 뭘 들어도 웃게 되고, 오늘은 어떤 즐거운 일과 어떤 신나는 모험은 물론 놀라운 영감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라며 막 기대되고 설레며 파릇파릇한 예감에 둘러싸여 마음이 붕붕 떠다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스스로 박수치기, 까지는 하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이래도 될 것 같다. 도시야, 딱 기다려!
   그런데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아무래도 과장이 심했다. 많이 심했다. 앞서 호언장담했던 허풍은 실은,
   뻥이다! (개)뻥!
   멍멍, 멍멍멍!
   이상한 소리를 내뱉는 새로운 습관이 내게 생겼다. 도시야, 딱 기다려? 딱 기다리긴 뭘 딱 기다려? 혼자 공상을 하다가 잠깐 기분이 고조되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가 급속도로 냉각되어버렸다. 저런~!
   나는 불신과 허위와 거짓의 늪에 빠져버렸다. 허세, 작작 좀 부려라 라는 말을 들어도 싼 거 같다. 그러나 침울하게 그 바닥에서 계속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어쨌든 나는 도시에 도착했다. 도시의 이름은 조롱? 조바심? 아니면 다른 '조'자로 시작하는 단어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장난은 아니다. 그러나 꼭 장난 같다. 왜 그랬냐면 나는 도시의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도시명이 잘 생각나지 않았느냐? 그 실체에 집중하고, 본질을 즐기고, 결과를 추궁해야 한다는 어떤 신념이 잠깐 인지력을 떨어트렸기 때문인 듯 하다. 사람이 맹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맹했다.
   일단 나는 적당한 위치에 카라반을 세워놓고 글을 조금 쓸려고 했다. 하지만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어디서 휴식하기, 어디서 쇼핑하기, 낯선 도시에서 우리집을 만나다 라는 어느 기억에 남는 문장에 이끌려서 적당한 가정집으로 숙소를 어떻게 선정하고 그곳으로 갔다.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가까웠고, 평범한 주택가였다. 집주인은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기 때문에 난 그를 만나 열쇠를 받고 간단한 설명을 듣고 인사를 나눌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집 앞에서 집주인과 내가 만나는 일은 그렇게 평범하지가 않았다.
   집주인 양반은 날 보자마자 기겁을 하며 쓰러졌다. 30년 전 집을 나간 자신의 남편과 내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내가 자기 남편인줄 알았다고 했다. 영화에나 나오듯이 주인공이 어딘가로 놀러갔다가 벌어지는 사건의 경우의 수 두 가지. 첫째, 며칠 후 누군가 훌쩍 나이든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둘째, 몇 십년이 흐른 후 누군가가 옛날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는 내용. 그 가운데 정확히 두번째 일이 실현된 것인가 의아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분은 날 자세히 보니 코 살짝 밑 입술 끝 부분에 점이 없고, 다리를 절지 않으며, 사소한 습관들과 예법과 화술과 목소리가 틀려서 그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아내는 데는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괜히 긴가민가한 소란을 가지고 영화 한 편 찍을 필요없이 단념했던 마음이 복잡해지지 않게 불가사의한 감정은 그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로 차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집주인은 그 집을 당분간 내게 인계하고 여행을 떠났다.
   난 이 일을 가지고 소설을 써볼까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단념했다. 그런 후 난 짐을 풀고 그 마을에 정착해서 창작 생활을 시작했다. 글쓰기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별일 없을 게 뻔하지만 신선한 또 하나의 목적인 도시탐험과 함께.

   ③
   묘하게 행운이 겹쳐서─그런데 한꺼번에 맞이한 반가운 행복은 도대체 무엇과 무엇과 무엇인가, 기분만?─득의양양하는 가운데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공책을 펼쳤다. 우연히 얻게된 소박한 남의 가정집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오랫만에 하이든의 교향곡을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역시나 글은 안 써졌다. 그래서 최근 즐겨 애용하는 방법인 타인의 삶 훔쳐보기를 시도했다. 예닐곱 명의 소셜 네트워크를 노트북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한 명. 참 깐깐하고 호탕하며 말 잘하고 시원시원한, 물론 인성이 반듯한 어느 멋진 남자의 트위터를 구경했다. 대체로 원 그래프, 막대 그래프, 엑셀 파일로 삐리리리 삐리리리 삐리리리 그의 스타일이 분석되기 시작했다. 동사 빈도 분석하고 뭘 좋아하는가, 내가 여자라면 이 남자에게 관심과 호감 또는 최저점을 면하는 친절을 베풀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며 따지고 가늠했다. 마치 남자들이 속된 말로 이빨까면서 이 여자 어때, 얘는 성질 있겠다, 이런 애들이 도도한 척 하면서 은근 홀딱 빠지는데 나중 피곤해, 내 스타일은 아니야, 얘는 생각이 없겠다 하지만 놀기는 좋아 어느 때까지, 막 그러면서 노는 것처럼. 그가 쓴 글은 거의 전부 그런 식이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든다, 싫다, 좋다, 수준이 떨어진다, 한참 모자란다, 그게 뭐냐 대체 뭐냐, 비교 많이 된다, 정도껏 천박해라, 뭐가 이상하다, 뭐를 작작 좀 해라, 아직도 그 모양이냐, 이해가 안 된다, 이해를 못 하겠다, 또 맞춤법은 그게 뭐냐, 생각은 하고 사냐, 그러고 싶냐, 뭐가 고통스럽다, 제발 뭐를 하지 말아달라, 웃겨서 말도 안 나온다, 그게 말이 되냐, 뭐뭐 하고 싶다 등등등.
   나도 그분과 비슷하게 간출여 말하자면 이분 완전 남자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친해지면 좋은데 아니라면 돌아서면, 돌아서자마자 욕을 얻어먹을 것 같다. 한가득! 그래 봐야 들리지도 않을 텐데, 또 1개국어나 외국어로 대충 알아들어도 별로 상관없지만. 난 그 이상 좋아했고 반틈 날 좋아했던 직장 동료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누구, 만나지 마세요!> 정말 돌아서서 언제 친했냐는 듯이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는데 난 뒤통수를 맞았는지도 몰랐던 일이 있었다. 말발이 중간만 가도 공공연히 또는 대놓고 슥 들어오는데, 다시 볼 일 없다? 말 다 한 거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내가 이래서 1등을 하기가 싫다. 1등 하기가 겁나지만 동시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다. 그래서 피장파장인 거다. 그러더라도 난 순위권에서 멀어지고 싶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미 또는 나이들면서 알게 된다. 무엇을? 욕을 바가지로 얻어들으면 싫을 줄 알았는데 또 그렇지도 않드라 라는 것을. 그래서 그 때문에 그렇게 습관적으로 하고 또 듣는 것일까? 그건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사람의 행동 방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목말라 하는 증상을 겪을 수도 있다. 아무튼 속으로 뭔 생각을 하는 줄 알아야지, 그래서야 어디 잘난 척 하겠냐고! 차라리 가식이 낫다. 말 잘 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기가 막히게 말을 잘하는 논객의 단문을 인터넷으로 자주 접해도, 옆에 있어도, 친구였어도 피곤할 것이다. 절반은 예상이다. 물론 말랑말랑하면 전문가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도 힘들고 마감일엔 쫓기지 기쁜 일은 쉬 잊히고 흥미로운 우연은 찾아오지 않지 실제 그저 그런 일들이 대부분이라서 진면목을 드러내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럴 테지만! 그 때문에 그분과 친해지면 나중 난 또 그럴 것이다. 묵시적으로. 오오 사람 참 괜찮네 호인이네 어쩌네. 한마디로 그분은 내 친구들과 내가 알았던 남자들과 완전 똑같다. 내 친구들은 남자다. 남자는 다 똑같다? 아니면 그분은 여자다? 도대체 결론은 뭐냐? 그게 아니라 사람은 사후해석 편파에 취약하구나, 가 결론이다. 그래서 전문가는 뻔한 실험을 하고, 예측 가능한 식상함을 재차 연구한다고 한다. 그래서.
   멍멍, 멍멍멍. 멍멍멍!
   소설 구상은 하지 않고 괜한 공염불만 성대하게 퍼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따라서 나는 바깥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정신줄을 놓으시면 안됩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된다구요>라는 말을 들을지라도 난 밖으로 나가기로 작정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나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찻집을 발견했다. (또 이상한 이름의 찻집? 와, 기가 막혀!) 그걸 보고서 난 이렇게 생각했을까? 오 특별하다, 변별력을 갖춘 듯 하다, 저기에 들리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까 그럴까, 은밀한 반전과 막후에 놀랄만한 속임수는 없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그냥 걷어차버렸다. 왜냐하면 그래 봤자 별일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다 알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런 거 없다. 절대 없다. 툭하면 신기한 미스테리, 그런 허황된 공상은 갖다버린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나는 필름 사진 느낌이 나는 어느 술집에 들어가보고 싶은 욕구를 물리치고 어느 벽보 광고를 보고서 동네 공원에서 하는 무료 영화 상영회를 찾아갔다.
   그곳에 도착했다. 아차, 날짜를 보지 않고 왔다. 아무 것도 없었다. 실망감은 툭툭 털고 저기 보이는 풋살 경기장에서 공손한 표정과 우람한 신체를 겸비한 청년이 혼자 연습하고 있길래 운동이나 할까 하면서 나는 그에게 한 게임 어떠냐고 친한 척 말을 걸어보았다. 그는 마침 잘 됐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러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내기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고 우리가 돈내기를 하기엔 너무 순진하고 착실한 것 같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는 내 말에 수긍을 한 후 그럼 이건 어떠냐고 했다. 승부차기를 상품으로 걸자고. 경기를 이긴 사람이 승부차기에서 공을 차는 역할을 맡고, 진 사람은 골키퍼. 단! 골키퍼는 돌아서서 가만히 서 있기. 나는 OK, 했다. 아마도 거절하는 게 옳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땐 몰랐다.
   그날 나는 뒤통수를 원없이 얻어맞고 집에 돌아왔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히 그 부위가 부어오르고 화끈거렸으며 또 당시 화를 낼 수도 없었고, 더군다나 그 녀석은 말을 꽤 잘했다. 내 기분을 풀었다가 약을 올렸다가 다시 날 제자리에 뜸어다 놓아주었다. 사뿐사뿐 두둥실 내 마음에 무게가 있는 듯 여겨졌다. 그는 선수였던 거 같다. 말로든 풋살로든. 그 다음날 난 그를 만나러 다시 그 풋살 경기장에 찾아갔다. 물론 집에서 몇 시간 시청각 학습을 하고, 몇 시간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붙었지만, 설마 그 친구가 내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도 오공본드처럼 내게 착~ 쩍 달라붙었다. 그러나 쉼 없이 재담을 풀면서 형이 괜찮은 술집에서 근사한 술을 대접하며 극진히 접대하겠다고 하면 녀석이 냉혹하게 거절하진 못할 것이라고 상상하니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 그는 없었다. 오후에 다시 찾아갔다. 하지만 그의 흔적은 눈 씻고 봐도 없었고 종적은 묘연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라는 한심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가정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길을 떠났다.
   가만 보면 세상에는 정당한 게임의 배당 방식에 따라 다른 사람이 뒤통수를 엄청나게 얻어맞았다고 하면 그걸 꽤나 웃기다고, 재밌다고, 뭐 지루하진 않다며 고소한 기분을 잘 숨기지 못하는 순박한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러한가, 가 궁금해서 나는 사회심리학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메모장에 기록해뒀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승부차기에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장면은 TV도, 인터넷도, 신문도, 잡지도 그 어디에도 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에는 나왔다. 징징댈 일도 아니고 능욕을 당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그만 넘어가자.
   멍멍, 멍멍멍. 멍멍멍!

   ④
   그래서 나는 차를 몰고 공원 2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도 소셜 네트워크를 보다가 어느 광고를 봤다. 기막힌 내용이었다. 이론대로라면. 완전 횡재였다. 대출 광고였는데 금리가 연 마이너스 12퍼센트였다. 내가 거기서 100만원을 빌리면 1년 이자로 매해 꼬박꼬박 나는 12만원씩을 복리는 따로 챙겨서 받고 10년 후에 다시 기준 금리와 화폐 가치 감소를 감안하여 내가 과거 100만원에 상응하는 액수를 받는다는 원리였다. 그대로라면 전재산을 거는 게 맞다. 그게 옳다. 정확한 승부수의 적기다. 그러나 좋긴 좋은데 이건 미친 짓이다. 걸려들면 안 된다. 귀가 팔랑팔랑 날개짓을 할 때가 있고 안 할 때가 있지. 딱 봐도 사기다. 미끼만 떼먹기도 아깝다. 그냥 무시하는 게 현명한 거다. 그러나! 그런데 저런! 만약 숫자를 낮추면, 그래도 못미더워. 또 낮추면... 또 다시 낮추면... 변심한 애인에게 버림받은 여자의 마음? 더 꾸미고 포장하면... 그건 말이죠~ 남의 말을 잘 믿는 아버지, 눌변의 아버지, 어수룩한 아버지, 착한 아버지 무엇보다 가난한 아버지가 떠오른다. 양반 증조할아버지와 난봉꾼 할아버지는 만류하고, TV리모콘도 만화 주인공 성우 목소리도, 유치원 학예회까지 연관짓지는 말자. 
   그러다 나는 공원에서 어떤 젊은 아가씨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난 그들과 함께 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뭔 얘기를 하나 주의깊게 귀를 쫑긋 세우며 바짝 긴장하지도 않았다. 그냥 들리는 걸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싸구려 팁 받는 것도 지겹고, 사람들이 나한테 '저기요'라고 부르는 것도 지겨워.」
   ...(침묵)...(시시콜콜한 얘기들)...
   「나 쟤 싫어.」
   「난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아 싫다구.」
   「니 친구잖아?」
   「말은 바로 해. 니 14년지기친구잖아.」
   「미안. 넌 20년지기 친구지?」
   「미쳤어? 그 정도로 친하진 않어.」
   「망할 년.」
   나는 그와 같은 대화를 듣고 이렇게 생각했다. 저 친구들은 나와 정반대의 부류구나. 저네들은 시를 읽지 않는다. 나는 읽는다. 저분들은 고품격 소설을 읽지 않는다. 난 읽는다. 저분들은 가만 들어보니 그런 말들을 많이 한다. 질렸어, 지겨워, 짜증나, 삐─, 재미없어, 지긋지긋해. 난 그렇지 않다. 뭘 해도 새롭다. 예감이 좋다. 기분도 좋다. 설렌다. 떨린다. 기대된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뭘 해도 재미있다. 혼자인 게 좋다. 사랑을 믿는다. 사랑은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생긴 듯 하다. 글도 잘 써질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배울 용의가 있고, 제값을 지불하고 과일을 사기보다 사과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기다릴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이라고나 할까 그런 싱그러운 심성도 절로 생겼다. 내일 당장 감나무든 오렌지나무든 그 그늘 밑에서 드러누워 입을 벌리고 기다려볼 테다. 졸다가 눈탱이를 얻어맞을 수도 있으니 졸음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자신감이 팽배했다. 그 어떤 여자라도 내가 꼬시면 다 10분이면 넘어올 거라고.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그냥 해괴한 공상이었고 미친 몽상이었으며 과대망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과점으로 달려가서 케익을 샀다.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나 혼자 먹기 위하여. 냠냠 냠냠냠! 둘째, 누군가의 얼굴에...... 음...... 그것. 둘째 목표에 대한 당사자는 아직 없고 앞으로도 지원자가 선뜻 나설 것 같지는 않지만 헛된 기대감이라도 내 옆구리에 착 붙여서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물론 둘째는 감상과 품평을 뜻한다, 뭘 생각하셨나 정말 뭘 기대하셨나? 나는 꽤 예전부터 케익을 먹고 싶었고 케익을 낭비하고 싶었다. 그러나 실행을 못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끽해야 케익 하나 값 뿐이 들지 않는데. 그렇게 나 혼자 공원에서 케익을 먹으면서 어떤 뜻 모를 억지랄까 역 태도 지지를 연상시키는 듯한 고집 때문에 음료는 절대 마시면 안 될 듯한 뭔가 거역할 수 없는 미신, 권위적인 징크스를 예측했고, 따라서 나는 케익을 우걱우걱 우걱우걱 개처럼 먹으면서 돌아이처럼 켁켁거렸고 애초에 내가 도시에 뭐 하러 왔나를 생각했다. 나는 친구도 없나? 나는 할일도 없나? 어디 어디 가봐야지 라며 연습장에 뭘 적은 게 생각났지만 계획대로 인생은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난 어느 이상한 이름이 붙은 술집에 들려 은근 분위기 있는 마담과 농담 따먹기를 해볼까 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대화의 흐름 있지 않나. 오빤 뭐 하는 사람이에요? 나? 뭐 하는 사람 같아 보여? 그러나 그런 뭘 해볼까 라는 충동은 금새 수줍은 미소처럼 사라져버렸다. 내가 뭐 여자에 환장한 놈도 아니고, 군침 흘리는 동네 똥개도 아니고. 잘 없어졌다 헛생각. 자아 1과 자아 2가 의논할 만한 호사도 아니었고, 실현시켰을 때 나중 그걸 논평할 만큼 간직될 기억도 못됐으며, 내가 그 일을 행동으로 옮겨서 과연 나는 남자다 라는 걸 증명해야 할 논거는 더없이 빈약했으니 잘 집어치웠다.
   멍멍, 멍멍멍! 멍멍멍?

   ⑤
   장소가 바꼈다. 이곳은 술집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가까운 곳을 택해서 들어가 나는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술집 이름은 이랬다. <까불지마라!> 나는 바로 옆에 있던 클럽 <날 좀 봐주세요>와 까불...머라머라 사이에서 어디로 갈까 약간 고민하긴 했다. 나도 안다. 뭐가 신물이 나네 어쩌네 해도 세상 물정 모르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고 난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을. 넌 나쁜 길로 빠지면 안 돼, 어른들만 즐기는 악습과 청소년에게 권장할 만하지 못한 기호, 그건 일종의 전-여자친구로부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받는 청첩장 같은 거다. 그녀가 정말 멋진 남자를 만났다더라 라는 누군가가 남긴 뒷말을 어디서 들었다면 그래 안심이야─다행이군─잘 됐어─이제야 마음이 놓이네─내 그럴 줄 알았어, 바로 그것이 모범이고 멋진 남아의 요량이며 뒷모습이지만 뭔가 가장무도회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개운치 못한 어떤 재채기 하기 직전의 궁금한 아로새김 같은 게 남는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마담에게 최근에 읽은 글을 외워서 내가 고안해낸 착안인 듯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폈다가, 손바닥을 올렸다가 평행으로 마주했다가 또 두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훓었다가 마지막에는 한 손으로 주먹을 쥐는 모양에서 갑자기 손을 반듯이 쫙, 팍 피면서 이렇게 말했다. 막 억지로 달달 외운건 아니지만 문득 생각이 났다.
   「아, 누가 디자인 했는지는 몰라도 렘브란트랄지 화가 카라바조가 빛을 소중하게 여겼듯이 이곳은 바깥의 밝음을 세속적인 어둠과 대비시켜 <까불지마라!>의 명암 배분은 빛이 심리적 통찰의 한 형태라는 사색이 불현듯 자신에게 엄습하게 만드는군요.」
   「렘브... 뭐요? 아니 카사노바? 도대체 그게... 뭔 소리에요?」
   나는 분위기 있는 카페의 외관에 속았고, 마담이 내게 썩 호의적이지 않다고 그렇게 쉽게 속단하거나 안타깝게 포기하기는 싫었다. 왜냐하면 이미 고상한 대화는 시작됐기 때문이다. 일방적일지라도. 뜬금없지만. 허사로 끝날 것이라고 예견하며 걱정을 미리 떠안았다면 아예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아, 아무 얘기도 아니에요. 그렇다고 제가 당신께 어쩜 그렇게 정확히 술집 마담처럼 생기셨어요? 이렇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안 그래요? 아첨과 미사여구는 아직 자기 차례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답니다. 똑똑한 녀석들. 맹렬하게 서먹서먹 오랫동안 서먹서먹할 때 불쑥 튀어나와서 그 극렬한 대비감 그것의 이익을 누구에게 선사하겠다는 건지 참 그분도 어지간히 무심하시지.」
   그녀는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남의 글을 나의 말인 듯 마담을 희롱하는 것도 아니고 칭찬이라 하기에도 뭔가 어딘지 느낌이 세한 듯 그렇지 않은 듯 약간 넘어올 뻔 말 뻔한 말을 꺼냈다. 당시엔 몰랐다. 그 때문에 멱살을 잡히지 않았으면 다행인 것을. 급하게 옆 가게에서 일하는 무술 유단자이자 남자 중의 남자를 마담이 호출했으면 어떡하나, 어떡하긴 어떡하나, 말을 엄청나게 많이 해서 겨우 오해를 풀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담은 기질상 금욕적인 사람인가요? 허영심 많은 사람이 소유욕이 강하듯이 당신께서는 우아한 자기 고문에 대하여 욕심이 많은 여자로 보인답니다. 그러면 전 이곳으로 사랑의 도피를 떠나온 사람일까요? 맞춰보세요. 싫어도 한 표 던저보는 것도 나쁘진 않답니다. 하하하, 호기심을 이끌어내지도 못하고, 궁금함을 충족시키지도 못했으며, 기대감과 낭만적인 예감은 저기 저 탁자 밑으로 떨어져버렸군요. 추풍낙엽처럼요. 바로 마지막 잎새와 같이.」
   그녀는 아무래도 본색을 드러내기 싫은 눈치였다. 부자연스러운 낭독에 대한 결과는 즉시 측정 가능했다. 뭘 기대하겠나? 옛날에 내가 읽은 연애 교본은 모두 엉터리였고, 난 어쩌다가 이성에게 이상한 말 걸기를 실천하고 있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면 돌이 되버릴 듯한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혹시... 대학교수세요?」
   「그렇게... 보이나요?」 어쩜 이럴 수가. TV를 너무 많이 봤다.
   「아니요.」 뭐가 아니란 거야? 그럼 그건 왜 물어봤어?
   「행여... 여자친구분께서 너무 영특한 게 아닌가, 그런 측은한 마음이 나도 모르게 똑똑똑 제게 노크하는 걸 느끼네요. 너무 속상해하진 마세요. 제가 보기에 그대는 딱 대인배처럼 보이는 걸요. 그럼요. 제 말을 외면하진 마세요. 이래 봬도 저도 사람을 조금 볼 줄 안답니다. 호색한 보다는 그게 낫잖아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훨씬, 백배 낫죠. 그럼요. 어느덧 하루가 다 가고 있군요. 그런데 어째 아까부터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제가 <까불지마라!>의 손님 같고, 당신이 꼭 이곳의 마담 같아요. 어때요, 생각있어요? 우리, 바꿀까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난 괜찮을 거 같은데.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약간 그 뭐랄까 골상학적으로 마담의 전형적인 관상과 학습된 인상을 쏙 빼닮으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알쏭달쏭하군요. 어때요? 제 입담은 뭉크식인가요? 그렇다고 델로니어스 몽크의 팬들을 모독할 생각은 전혀 없답니다. 어때요? 심리적 통찰이 너무 노골적으로 노출된 건가요? 아니면 렘파든지 렘브란튼지 옛날 사람 이름 몇몇을 거들어서 설명할까요?」
   뭐? 몽크식? 몽크야 뭉크야? 이 여자가 보자 보자 하니까 아까부터...... 난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사납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웬 이상한 술집에 들어와서 놀림이나 당하고 술값은 술값대로 깨지고, 시간도 낭비하고, 게다가 마음에 썩 들지도 않는 마담에게 뭔가 계산과 숨겨진 속셈을 드러내고 싶어지면서 또 사전에 그녀는 멋질꺼라는 그녀를 꼬실꺼라고 예견하며 홀연히 떠난 그분마저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술값을 지불하고 그곳에서 나왔다. 얼른 내빼버린 것이다.

   ⑥
   나는 불현듯 내가 이 도시에 왜 왔는가 라는 철학적 의문을 느꼈다. 누가 거기 가서 세상 구경을 하고 오너라 하고 날 떠밀었나? 아니면 그냥 대충 시간만 삐대고 오라 세월만 대충 때우고 오라고 연막이라도 펼치고 내게 바람을 불어넣었나? 지금 와서 그게 왜 중요한가? 난 지금 뭔가 허전함을 느끼나? 응 그렇다. 외로움과 쓸쓸함은 도처에 깔려있다. 그게 도시다. 회색빛 도시. 인생이란 것도 원래 그렇다. 왜 안 그렇겠나? 그러나 여긴 우범지대가 아니다. 난 뭘 해도 된다. 보통 이렇게 기분 좋게, 가 아니라 좀 언짢게 마음이 붕 뜰때는 동기부여를 잘 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1) 재미있냐 재미없냐
   2) 뭘 하고 싶은가 그걸 모르겠다면 적어도 틈틈히 그리고 열심히 하는 건 뭔가 혼자 있을 때 생각나는 건 뭔가
   3) (귀결되는 건 이거다) 안 해 본 건 뭔가?
   인간의 번뇌든 남자의 고독이든 외지인의 모험이든 나아가, 청춘과 노인의 수다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의 무의미한 본분이든 내 욕구를 누가 사주하든 말든 어쨌든 난 딱 하나, 오직 딱 하나, 부디 딱 하나, 무조건 딱 하나, 정녕 단 하나의 새로운 일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자코 있다가 소설의 소재는 도망가고, 거북이를 이길 수 있는 너끈한 실력은 탱탱 녹슬며, 열정은 외면받고 희망은 캄캄해지고 어느덧 시간은 덧없이 흘러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단 하나의 할일이랄까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을 실행한 후에 다시 시골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기실 나는 그분들과 동류는 아니지만 이젠 결국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⑦
   그 하나의 분명한 명제는 무엇일까?
   지금 이 도시의 상태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고, 때문에 그 이유가 대체 뭔가 들어나보자 라는 궁금함을 잠깐만 살며시 잠시만 부드럽게 미루자. 덥다, 자유롭다, 평온하다, 시끄럽다, 활기차다, 그저 그렇다 같은 간략하거나 다른 많은 설명이 있겠지만 홀연히 단 한 사람만 언제까지나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맹세와 그런 울먹이는 선언과도 같은, 지난 고백을 떠올리면 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난 커피포트가 된다는 체념과도 비슷한 숙명과도 같은 마음가짐으로 딱 하나만 딱 하나만 꼽자면, 그건 <왜?>이다.
   뭐가 왜냐고? 왜 도시가 이렇게 텅 빈 것 같지? 왜 이렇게 도시가 조용한 거야?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거야? 자기들끼리 짰나? 외부인에게 노출되지 않기로? 아니면 영화 찍나?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그 사람만 피하자?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무엇 때문에 도시가 이렇게 고요하고 인적이 드문지 알 수 없지만, 그 때문에 나는 그 어떤 급박함에 근거를 두고 난데없이 튀어나온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도저히 규정할 수 없는 최우선 순위의 할일, 약속, 의무, 필수 코스와 같은 어떤 정성어린 절차이자 단 하나의 애도하며 경건히 행동해야만 하는, 그런 반드시 꼭 내가 해야만 하는 딱 하나의 과제가 떠올랐다. 그 추론은 쉽게 파악할 수 없다. 과연 그것의 임무는 타당한가 당사자는 피실험자로서 적절한가, 에 대한 검토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럴 계제가 아니었다. 이타성과 호혜주의도 좋지만 그것과 하등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건 마치 추리소설이라는 단어와 비슷하다. 추리소설? 추리와 추론과 추측은 살짝 걸쳐진 공통 영역이 존재하나 명백히 구분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추리하면서 이야기에 빠지고 글을 읽는다? 그건 틀렸다. 완전 틀렸다. 완곡히 말해서, 틀렸다. 솔직한 독자의 심정은 이와 같다. 재밌거나 말거나! 영화를 보며 앞뒤 따지고 왜 그랬을까 꼼꼼히 살피기는 사실 어렵다. 그냥 본다. 날 최면걸어주세요, 감동도 주시구요, 웃겨주세요, 의미도 있어야겠죠 단순하면 곤란하구요, 잘 아시잖아요, 어쩜 우리 남편과 그리도 똑같으세요, 저기 저 고상한 몸짓을 선보이는 여자분 완~전 내 마누라랑 판박이군, 자 한번 시작해보세요, 전 사랑을 모르는 가냘픈 소녀랍니다, 이게 바로 이게 감상자의 기본 입장이다. 그런데 추리소설? 추측소설이 더 정확한 명칭이다. 그런데 이 얘기가 지금 왜 나왔지? 무슨 상관이야! 그럴 수도 있지.
   어차피 이 도시에서 나는 이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없다. 그건 온전히 글러 먹은 일이다. 그 말은 뭘까? 이거다.
   「기쁜 소식과 더 기쁜 소식이 있어. 어떤 거부터 들을래?」
   좋은 소식과 슬픈 소식이 있어, 둘 중 하나를 고르라 또는 골라 골라 골라잡어 아니면 그냥 무분별하게 <그래, 넌 웃는 게 예뻐!> 틈만나면 긍정, 그것도 아니면 뭐든지 싫다 싫어 저건 뭐야 그건 뭐야 에잇 에~잇!
   평범함과 계획과 짜임새 있는 전개, 환상과 사실적 마술주의, 마술적 사실주의 등등 모두 집어치우고 내가 선정한 딱 하나의 할일은 이거였다.
   설명. 분위기 조성?
   이 도시에 있는 대공원에 가면 분수대가 있다. 오줌 누는 날개 달린 천사도 있고, 오줌 누지 않는 날개 잃은 그녀도 있다. 얕은 물이 굉장히 넓은 공간에 펼쳐져 있다. 고전적인 분수도 있고 현대적인 정원도 있다. 사람들도 많다. 물고기도 산다. 헤엄치는 보석으로 불리는 비단 잉어, 우아한 고니, 세련된 노란색 오리, 주홍빛 물고기와 하얀 물로기 그리고 황금빛 물고기. 알록달록 갖가지 예쁜 색깔의 인어공주들. 그런데, 그런데 사람들 모두 휴가를 떠났는지 그곳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 대신 누가 버렸는지 몰라도 병 뚜껑은 허천나게 즐비했다. 그 때문에 나는 하나의 직무, 단 하나의 맡아야 할, 다른 사람은 모두 아니고 꼭 내가 맡아야 할, 단 하나의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하나의 할일이란 게 대체 뭐길래 아직도 안 나오는 건가, 참~나!
   첫째, 저번 주에 우리의 무명 블로그에 올라온 조니가 쓴 소설을 읽었는데, 거기에 상점을 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 개업 행사 추첨식에서 1등 당첨을 애타게 기다리는 주인공이 나온다. 그의 행동을 보고 나는 신비로운 슈퍼맨의 비밀스런 활동에 대한 알 수 없는 인생을 관철하는 절대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느꼈다. 그래서 그건 나의 귀감을 샀고, 나도 그와 비슷한 일을 해야겠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선망감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둘째, 친구에게던가 어딘가에서 들었다. 그런 공원에 가서 보면 꼭 이상한 아저씨들이 있는데 매우 드물게 그런 데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또 애들이라면 몰라도 다 큰 아저씨가 정신줄을 놨는지 어쨌는지 꼭 그런 데 들어가서 타인이 소원을 빌면서 던졌던 동전을 몰래 또는 보란듯이 수거해가는 돌아이, 있다. 첫째는 '왜'고, 둘째는 '누구'랄지 현상수배쯤 되겠군. 어쨌든, 좌우지간!
   난 그들을 막아야 한다. (드디여 나왔다, 할일!) 난 극소수 이상한 인간의 그와 같은 어이없는 실책을 미리 방지해야 한다. 이를 두고 해외토픽이라 할 수는 없다. 또는 뭐 바보선언,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다. 바보선언, 괜찮네. 그러나 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책임감을 느꼈고, 그 행동을 실행하고자 하는 제 2, 제 3, 제 7의 자아가 내 전면에 나설려다가 끌려나가고 다시 제 8의 자아가 대두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문구점에서 장난감 삼지창을 샀다. 중고품이 아니라 새 제품을 샀다. 짱짱하고 깡깡하고 튼튼한 걸로. 그러나 심미적으로 썩 모자라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조금 더 단가가 있는 물건을 취급하는 상점에서 가방을 샀다. 그 가방은 보통 가방이 아니다. 무게 1KG을 살짝 넘는다. 접혀진 가방을 펴면 고무 보트가 된다. 시중에서 절찬리에 시판되고 있는 물건이다.
   그날 난 그 고무 보트를 타고 대공원에 가서 분수대를 수호했다. 그리고 그날 오묘한 일 하나와 애석한 일 하나가 발생했다.
   오묘한 일은 이것을 뜻했다. 하늘을 나는 물수리의 사진이 그날 소셜 네트워크에 널리 퍼졌다. 하늘을 나는 물수리의 발에는 잉어가 매달려있었다. 즉 남자들이 잠깐 일시적으로 혹하는,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즐겨 보던 만화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그러한 주제를 연상케 하는 장면을 누군가 휴가 떠나지 못한 일중독에 빠진 어느 블로거가 포착한 것이다. 둘째! 애석한 일은 이것을 말한다. 그때 하늘을 나는 비둘기가 있었고, 나는 분수대에서 고무 보트를 타며 삼지창을 들고 수상한 괴물이나 진짜 좀비가 나타나지 않나 하면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자가 후자의 머리 위에 뭘 떨어트렸다는 것이다. 뭔가 척척한 물체. 대관절 그건 뭘까? 연애 엽서? 행운의 편지?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이 편지를 포함해서 7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 주셔야 합니다......  며칠 뒤에 복권이 당첨되어 20억을 받았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은 행운이 깃들 것입니다... 7년의 행운을 빌면서.....) 난 머리 위에 뭔 설탕물인지 생명수인지 솜사탕인지 대체 뭐가 튀었나 하며 만져봤고, 그 느낌을 헤아려보고 나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십중팔구, 이런 젠장~ 뭐야 이거 아 나 증말 미치겠네 뭐시여, 같은 감탄사를 예상할 수 있겠지만 때때로 예상은 빗나가기 마련이다. 예측은 어긋나기 쉬우니까 예견에도 기댔다가 추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거기서 빗나가면, 엇나가면 예언이 된다. 미스테리는 바로 그렇게 탄생한다.
   「오! 그분인가? 누군가 천재선언을 하셨구나! 아아!」
   어쩌면 그분이 맞을 것이고, 아마도 그것은 천재선언이었을 것이다.
   혹시라도 아니길 바란다는 냉담한 상상은, 더더욱 썩은 미소는 거두어주시길. 망측함은 이미 이쪽에서 떠안았으니까! (뭔 말 같지도 않은 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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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77

from 소설 2016. 7. 31. 23:49

   ①
   어느 날 아침이다. 이곳은 조니의 사무실이다. 그날은 폭풍이 몰아치는 것도 아니고 눈이 키 높이 이상 쌓이지도 않았으며 굉장히 쾌적한 날씨였다. 그리고 사무실에는 그리그의, 웅장하다고 해야할까 그건 아니고, 약간 흐릿한 기억을 건드리면서 그것이 선명한 사실과 가슴 저미는 예술적 심상 사이를 질투하면서 그 사이에 끼여든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아침에 듣기에 약간 뭔가가 애매한 고전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에드바르드 그리그의 페르퀸트 조곡을 오늘 아침에 들었는데 뭐가 생각난 줄 아니? 오늘 하루는 뭔가 다르게 시작하고 싶다? 그녀는 지금 뭘 생각하고 있을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이것, 나도 영화에 나오는 그걸 따라해볼까 살면서 한번도 안 해봤잖아, 새빨간 립스틱으로 거울에 미-친-놈 지랄하네 라고 쓰는 것 말이야. 사람들이 그걸 흉내내지 않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까? 그건 모르겠고, 아침에 그 음악을 들었을 때 뭔 생각이 들었는 줄 아냐고. 내가 몇몇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저 신뢰하니까 차용증도 안 썼고 아예 돈 빌려준 일마저 까먹은 것을 아닐까, 그런 생각? 아니면 내 삶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뭔가 단조로워 너무 단조롭단 말이야 그게 내 인생에서 하나의 단점이라면 단점이겠군, 그런 거? 백주대낮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커피 대신에 그냥 확 아침부터...... 명분이 부족하고 뭔가가 생략되고 중간이 빠진 것 같고 아무 이유없이 완전 추상적으로 딱 그렇게 캬~ 아침부터 그럴까 라는 생각? 또는 일을 어서 하고 싶다는 신선하고 산뜻하며 건전한 욕구를? 다 아니야. 그건 다 아니라고. 그냥 그 뭐야, TV 광고가 생각나. 우유 광고. 투우장에서 날뛰는 그 친구들 말고 초원에서 평화롭게, 공기 좋고 새들이 지저귀고 은은한 꽃향기와 하늘색과 연두색과 연분홍색 소풍 가방에 둘러쌓인 물이 오른 젖소, 젖소하면 우유, 우유 하면 샌드위치, 샌드위치 하면 아니 젖소 하면 젖소라 젖소라... 음 젖소라 크크큭... 이런 삐─삐─ 아침부터 뭔 뚱딴지 같은 샌드위치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군.」
   이와 같은 긴 대사를 조니는 누구에게 읊었을까? 그 명철한 논리와 냉엄한 인문학적 소양을 그는 과연 누구에게 피력했을까, 누구에게? 그 누구는 다름 아니라 바로 사무실, 그의 사무실에 살고 있는 고양이 엘도라도에게 퍼부은 폭언, 까지는 아니고 간곡히 얼르고 되는 대로 막 뭔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건넸던 사념이었다. 고양이에게 꽃다발을 선사하면 녀석은 그게 꽃다발인지 연애편지인지 파티 초대장인지 분간하지도 못하니까 생선은 없고 따로 줄건 없고 그렇다고 야한 잡지를 줄 수도 없고 해서 조니는 그냥 대화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일 뿐 이상할 건 하나 없었다.
   거두절미하고 왜 그랬냐면 그의 개인 사무실 일을 혼자서 거의 도맡아 해야 하는 여비서가 일을 때려쳤기 때문이다. 때려쳐? 경력 단절, 업무 종료, 링크드인 프로필 변경, 사표를 내다 그런 표현으로 순화해서 일단 받아들이자. 다만 조니의 지금 기분이 그렇다는 것을 알리고자 둔탁한 말의 거친 표면을 다듬지 않았다. 꾹 참고, 고개를 돌리며, 팀원 모두의 불만과 울분을 내가 총대매고 관리자에게 전달하겠다는 도저히 말리기 어려운 참말로 끈끈한 돌아이의 지각 과정을 참고하여 품위 없이, 교양도 없이, 고상함도 상식적인 사근사근함도 없이 다짜고짜 직설적으로 도망간 정당히 떠나가신 그분의 빈자리를 설명했을 뿐, 다른 의미는 없다.
   조니의 인생은 행복하다? 뻥이다! 조니의 삶은 완벽하다? 뻥이다! 조니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 뻥이다! 조니는 지적이고 단정하고 소박하며 근사하고 세련된 생활을 좋아한다? 뻥이다! 조니는 일을 그만둔 조수이자 경리이자 비서이자 그의 엔터테인먼트 만능 일꾼인 그녀에게 털끝 만큼도 흑심이 없었다? 구태여 그걸 여기서 단적으로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왜냐하면 그는 켕기는 게 없으니까. 왜냐하면 그는 그녀에게 잘 해줬으니까. 무엇보다 그는 여자 보기를 돌맹이 보듯 하니까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그녀는 정말 업계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쏠쏠한 혜택과 빵빵한 금전적 이익에다가 최근 조니를 찾는 곳이 하나둘 없어지다보니 그녀는 사무실에서 할일도 별로 없었다. 일에서 보람을 찾고, 일에서 모든 즐거움을 발견하고, 일에서 내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일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 일에 관한 명언을 누군가에게 듣고 싶으면 리모콘 딱 눌르면 좔좔좔 뭐라뭐라 저절로 감격스러운 명언이 쏟아져나오게 되어 있다. 옆에 있는 그분을 보니, 음, 아아 기대는 접고 책을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월요일에 출근하면서 또 출근해서 몸이 풀릴 때까지 죽상을 짓는 사람들,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약간의 과장을 더하지 않아도 물 반 고기 반이다. 그런 분들 천지다. 아니라면 그건 거짓말이다. 여기 사무실은 그녀에게 최고의 직장이었다. 여기 들어오고 싶어하는 아가씨들, 끝이 안보이도록 줄이섰다고 전해진다. 업무 환경은 그랬다. 전화도 별로 오지 않았다. 서류 작업과 소셜 네트워크를 관리하고, 여기 저기 답변하며 일정 챙기는 거 모두 한두 시간이면 충분했다. 한두 시간은 너무 짧고 두어시간 정도 되겠다. 그리고 업무 기기도 최고였다. 그녀가 앉는 의자는 웬만한 직장인이 한두달 뼈빠지게 일해야 손에 쥘 수 있는 금액에 버금갔다. 사무실에 고양이도 있었다. 고양이도 고양이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꺼뻑 까무러치는 그런 희귀하고 고귀한 고양이종이었다. 나머지는 말 안해도 된다. 모두 그 급이었다. 그 층위였다. 휴가도 충분했다. 중간에 꾸벅꾸벅이 아니라 확실히 코를 골고 자도 뭐라 할 사람 하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일을 그만 두었고, 조니는 그녀가 떠났다고 슬퍼하고 있다.
   물론 조니는 그녀의 공간을 좀 더 귀빈석으로 꾸미지 못했다는 자책, 그녀를 운명의 여신으로 떠받들지 못했다는 심각한 낙심, 사무실에 친구가 놀러와도 된다 심심하면 영화도 보고 누구 연예인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말만 해라 나 마당발인 거 알지 않냐 나 한때 잘나갔다 지금도 살아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연봉 올려줄까 같은 다정하고 친근한 헤아림이 부족했다는 회심이 대략 80퍼센트였고, 약 19퍼센트는 남은 일을 자기가 다 해야한다는 불만과 새로운 직원을 구해야 한다는 걱정 그리고 나머지 1퍼센트는 정말 속 시원~하다는 쾌심이 있었다. 하는 일도 없이 밥만 축내고, 애가 웃고 향수도 뿌리고 옷도 깔끔하게 입고 그래야지 맨날 무표정하니 뚱한 모습으로 공상이나 하고 견적이나 내고 가죽점퍼나 과-점퍼를 입고, 가죽점퍼 상표는 몽유병이었고, 운동화에 아예 화장을 안 하던가 아니면 아예 분장을 하던가, 또 뭔가 음험하고 속이 편치 않은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자주 나타냈는데 이번에 제발로 나가서 잘됐다고 내심 고소해 하고 있었다. 누구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완전 통쾌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좋았다가 말았다가 다시 좋았다가 말았다가, 를 반복했다. 왜냐하면 우선 그는 친구들끼리 연작소설을 쓰기로 했는데 자기가 1번으로 당첨됐고 그런데 자기가 비서의 일까지 1인 2역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새로운 여비서는 좀 더 똑똑하고, 좀 더 상냥하고 애교 넘치고, 좀 더 목소리가 꾀꼬리 같고, 좀 더 슬픈 사랑을 간직한 듯 하고, 좀 더 세련되고, 좀 더 맵시 있고 어떤 매료당할 것만 같은 당혹스러운 관능미는 기본이고 지성미와 착함과 귀여움과 깜찍함과 곡선미도 참고 해서 충분히 참고 해서 뽑아야겠다는 은근한 기대감을 송두리채 싸그리 날려버리는 바로 전-여비서가 남긴 문제의 연습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②
   조니 그 인간은 항상 하는 일도 없이 놀러나 다니고, 2층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며 영감과 악상과 시상을 떠올리며 뭔 놈의 정교한 플롯을 구상한다고 철학적인 명상을 한다고 하지만 딱 보면 맨날 창문 너머로 지나다니는 여자들 옷차림을 구경하고, 점수를 주고, 감상하고, 자기와의 데이트를 상상하며, 여심을 추측하며 나체나 떠올리면서 말이야, 그게 뭐야 맨날! 개 팔자가 상 팔자라는 말이 있지만 내가 봤을 땐 조니 팔자가 완전 상 팔자 중의 상 팔자 같다. 순 폼이나 잡고 허당 주제에 말이야 날이면 날마다 뭐하고 놀까 그 생각 밖에 안 해. 찌질한 인간 같으니라고. 정말 혼쭐을 나야 정신을 차리지, 어, 커서 뭐가 될려고 그 인간은 말이야, 어, 책상에 앉아서 인터넷을 떠돌면서, 어, 지가 하는 일이 있기는 뭐가 있어? 어? 군침 밖에 더 흘리냐고, 어, 안 그래? 그리고 뭐가 어쩌고 어째? 여자 보기를 돌맹이 보듯 한다고? 우끼고 자빠졌네 그 인간. 걸핏하면 자기가 자기 입으로 자기는 천재래. 천재? 천재가 무슨 동네 똥개 이름도 아니고 녀석은 아무래도 골룸 아니면 척키, 딱 둘 중에 하나야. 확실해. 항상 기발한 소설을 썼다고 나한테 읽어보라고 하면서 칭찬만 듣고 싶어하는데 그럼 내가 그 앞에서 재밌고 감동적이다 라고 해야지 반전이 이게 뭐냐고, 좋게 소설 집어치우라고, 좋은 말 할 때 연기 연습이나 다시 하라고 하겠냐고, 어? 앞뒤 꽉꽉 막혀가지고 말이야!
   그는 바로 이와 같은 낙서를 발견한 것이다. 그냥 지나칠려해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울그락불그락. 얘를 데려다가 정신 개조를 시킬까, 정말 내 매력에 빠져들면 어떻게 되는지 실감나게 만들어줄까 라는 도전적인 어딘가 모르게 게임을 할때 솓구치는 그래프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감정에 휩싸였다. 더없이 상냥하고 착한 새로운 여비서를 뽑을 생각으로 마음이 싱그럽게 부풀어오르다가도 얘는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날 이렇게 밖에 보지 않았다니 아니 이럴수가, 그러면서 울화통이 치미는 것 같았다. 조니는 뒷목을 잡고 나머지 한 손은 미간을 짚으면서 자기는 자기 별명이 진공청소기라고 나름 자신하며 자부하고 조심스럽게 짐작했는데, 사람들은 날 보일러나 커피포트로 봤을 꺼 아니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공책에는 다음과 같은 글도 있었다.

   ③
   <난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 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없어> 와 같은 말, 비슷한 말은 무엇일까? 뭐긴 뭐겠나, <나는 차-욕심 없어>지. <일인칭 단수형 대명사 + 머머 하기 싫어─머머를 원하지 않는다─머머를 바라지 않는다─머머 욕심 없다>는 대체로 그 반대의 강렬한 욕망을 고급스럽지 않게 나타내는 것이다. 그 욕구는 보통 강렬한 게 아니다. 그건 갈망이고 갈구고 오공뽄드이자 내 남편에게 껄떡대지 마 이년아다. 살면서 그런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나중 상황 바뀌면 완벽하게 손바닥 뒤집는다. 비슷한 예로 <난 꼭 뭘 하고 싶어>라는 타인의 의견에 대해서 미친듯이 거부감을 표시하는 것 즉 엄청나게 발생하는 인터넷 댓글이랄지 인터넷이 아니라 거리에서 집단으로 모여서 다소 불미스러운 일을 구실로 시위를 하는 것도 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말할 깜냥은 안되니까 놔두고 그게 어떻다 라는 것도 모두 제쳐두고 딱 하나의 단어만 데려와서 소개시키자면 소개팅 나온 이상형도 폭탄도 아닌 딱히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분의 명찰은 <자기 합리화>가 아닐런지. 하나는 왠지 외롭다. <난 그거 마음에 안 들어>도 있겠다. <너 잘났다>도 있겠고, <대단하다>도 있겠고, <이건 글로 남겨야겠다 거리에 나가서 외쳐야겠다>, <난 참고 안 하는 걸 넌 하는구나>도 있을 것이다. <난 참고 안 하는 걸 넌 하는구나>는 꺼림직함과 얄미움에 살짝 더 가깝고 <난 못하는 걸 넌 하는구나>는 질시와 질투 그리고 존경와 인정과 부러움에 좀 더 가깝다. 그리고 기본적 귀인오류, 행위자-관찰자 편향, 자기-편향, 자기 중심적 사고, 자기고양 편향과 더불어 마지막으로 하나 더 <객관성 무시하기>가 있다. 하나만 데려와서 소개시켜준다더니 막 계속 너도 나도 나올려고 한다. 지들이 스스로 그랬다. 계속 나오니까 그만 나오라고 하고 싶다. 더 나올 거도 없지만. 개인의 열정 수준과 새로운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을 추구하는 성향, 감수성은 개인에 따라 대략 비등비등 하면서도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데 "내가 원하는 것을 할 꺼야"라는 열정을 비꼬아서 어디에 올리면, "난 재미있다고 생각되면 기꺼이 새로운 도전을 할 거야"라는 의욕을 비틀고 민감하게 페이스북에 쓰면, "좋은 일이 생기면, 난 거기에 휩쓸려, 난 어떻게 생각해"라는 감수성을 얼핏 유명인이 사석에서 말 한 번 잘못하면 엄청난 곤욕을 치르게 된다. 사실 그렇게 만들기는 쉽다. 쉽다? 동사를 편편히 펴고 느끼함과 푸석푸석함의 중간 정도로 말하자면, 가능하다. 전문가는 그 일을 할 수 있고 난 못한다.
   하나의 가설을 세워보자. 난 돈 없어 난 집도 없어 난 책도 안 팔리고 더없이 비리비리해. 가정 끝났음. 그러면 이것에 대한 반응을 1번과 2번까지만 끊고 나머지는 탈락시키든 유보하든 일단 제한하기로 한다. 1번 선수는 이렇다. 먹고 살만큼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을 파서 돈을 캐내거나 커피를 팔아서 먹고 살 만큼만 돈을 벌고 싶다, 이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류가 있는 반면에 2번 타자는 이렇다. 돈 싫어 집도 싫어 일류 작가들 다 별거 없어 유명한 감독들 다 싸구려야 예쁘지도 않은 것이 여기저기 나오네 재수없어 꼴불견이야 세상은 내 진가를 몰라 나도 자존심만 조금 접으면 적지 않은 부를 쌓고 명성도 적당히는 얻어 그러나 난 대중성과 오락성과 시시한 인기와 영합하기는 싫어 절대 싫어 왜? 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거든 난 통속적인 예술가도 아니고 상업에도 휘둘리지 않거든 난 나니까, 이게 2번이다. 1번도 2번도 모두 좋은 사람이고 바른 인성을 갖췄고 그 둘이 또 친한 친구다. 1번도 2번의 마음이 분명코 있고, 2번도 1번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기본 관념은 나뉘어진다. 1번도 2번도 난 저 친구 싫어 난 저 브랜드 싫어 무조건 싫어 그런 마음도 역시 있는데 표현은 다르다. 천지 차이로. 그러나 모두 기본 감정은 동일하다. 약간의 차이는 서로 분과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지금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지금 행복을 일부러 미루고 나중 더 큰 행복을 누리든 어쩌든 현재의 불운이랄까 불행...은 좀 그렇고 아 그래 불편함을 빌미로 그에 관한 작품을 만드는, 뭔가 노는데 최적화되지 않은 인생의 호시절을 영롱한 다이아몬드로 만드는 어려운 길을 걷는 사람도 있고, 앞서 1번처럼 적당히 먹고 살 만큼 돈벌이를 하며 살고 적당히 만족하며 인간 관계도 적당히 하는 사람, 또 앞서 2번처럼 난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 난 차 욕심 없어 난 그러나 로또는 꼬박꼬박 사지 에잇 이번에 또 꽝이네 언제나 꽝이네 매번 꽝이야 아휴 이런 삐─삐─삐─ 그러시는 분도 있다. 일부 일정하기 싫은 입장이 있겠지만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정말 난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 라면 정말 그렇다면 원론적으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난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 의 '유'자도 꺼내지 않는다. 그게 옳다. 그래야 맞다. 그게 아닌데 그런 말을 한다, 그건 왜 그럴까? 어차피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라는 말과 비슷한 것이다. 이와 같이 쉽게 정의내리면 편하지만 좀 더 살짝 괴씸하지만 어떤 흥미로움을 위하여 약간의 신랄함을 가미하자면 인생은 아직 중반전이지만 이미 결판은 나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상대를 물 수 없을 땐 이빨을 보이는 게 아냐 라고 하지만 인생이란 상대는 결코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 한방이야 남자는 한방이다, 에 대한 신뢰는 남아있기에 복권을 사는 건 일상이고, 남의 떡은 커보이고, 내가 최고이며, '허'자로 시작하는 단어에 대한 최고봉 그것마저 절대 포기하거나 양보하기 싫은 것이다. 타인에게, 세상에게, 그리고 예술에게도. 따라서 말로만 떠드는 거다. 그러므로 말로만 즐기는 것이다. 남자는 폼이다 하면서. 다만 그건 이해가 된다. 지금 행복하면 그 시간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지만 지금 불만족하다면 곡을 짓고 그림을 그리며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고통과 비탄의 시기와 달리 행복한 시절은 금새 지나가버리니까 뭔가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은 심정 같은 거? 때문에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 난 삼류야, 난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 그의 인생은 불행했다, 그 남자는 은근 허당이다 라는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난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 충분히 지금이라도 유명해질 수 있는데 당장 유명해지지 않겠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없다, 그러면 그 말이 용인될 꺼 같다. 그건 말이 되지, 말이 돼! 유명해질 뻔 했다가 그 근방까지 거의 다가갔다가 거의 다다렀다가 미끄러진 사람도 역시 그런 말을 아예 하지 않겠지. 또는 웃기거나 씁쓸하거나 뭔가 달리 말하겠지. 또 남들이 나보고 글을 잘 쓴다고 한다 남들이 나보고 뭐를 잘한다고 한다, 와 같은 어법의 사용에 대해 익숙한 사람도 그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 술 잘 마셔, 나 싸움 잘 해, 난 세상 모든 여자를 단 10분이면 꼬실 수 있어, 넌 최고가 아니야, (어릴 때 오스트리아에서 10년 살다온 친구가 옆에 있는데) 너 오스트리아 가 봤어? 난 가 봤어, 풍향을 바꾸거나 변심한 여인의 마음을 되돌리는 건 일도 아니고 쳤다-하면 3루타요 말만 하면 뻥뻥 터지고 삶은 스타트렉 인생은 카사노바 오늘은 혹성탈출 그러면 옆에서 웃기시네, 뭘 해도 재미없어 뭘 해도 안 돼 막 그런 말을 들으면 짜증내, 왜? 어째서? 그 말을 내가 해야 하는데 내가 못했으니까, 뭣도 아닌 것이 잘난 척 하고 있어 이런 건방진 뚱보 같으니라고 늬 까짓 게 뭔데 넌 최고가 아니야 넌 최하야 그리고 그리고 내가 최고야 으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하, 그런 분위기에서 놀아보지 않은 위인이 그 말을 한다면 음 그건 이상하다. 그럴 수는 없다. 적당한 유명세, 그것에 대한 욕망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건 인간의 본능과 거리를 두는 말 같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가볍게 내가 올린 트윗이 낮에 보니 겁~나게 리트윗 됐어 그러면 기분이 나쁠까? 낮에 사무실에서 안전하게 도망가는 법이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어 그런데 그게 완~전 난리났어 재밌다고! 그렇다면 이런 삐─삐─삐─ 완전 짜증날까? 저녁에 페이스북에 글을 하나 올렸어, 어느날 강변에서 산책하다가 급해서 풀밭에 들어가 일을 보고 있는데 저기서 뭔 큼지막한 골든 리트리버가 나에게 뛰어와, 난 얼렁뚱땅 일을 마치고 자리를 뜰려고 하는데 웬 아저씨가 뛰어오시더니 막 굽신굽신 쩔쩔매며 완전 미안해하시면서 죄송하다고 죄송하다고 그러면서 그 뭔가를 치워가셨어, 그래서 나는 골든 레트리버에게 미안해 해야 하는가 아니면 당장 오해를 풀어야 하는가─늦었지만 어딘가에 고해해야 하는가─그 설명할 수 없는 그 불가해한 거의 믿을 수 없는 신비스럽기까지 했던 넙죽 목례하며 아무 말 없이 정말 괜찮다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한 어중간한 반사신경은 정말 뭐였는가─난 그리 동적인 사람이 아닌데... 내가 언제부터 운동감각이 이리도 뛰어났나─이건 대체 뭔가 라면서 심각한 현자의 고민에 빠지게 되었어, 라고 썼드니 그날 완전 내 게시글이 난리났어 대박났어 끝내주게 재밌다고, 그러면 그렇다면 완전 뚜껑 열리면서 화가 날까? 그럴까? 내친김에 그날 밤에 페이스북에 게시글을 하나 더 올렸어, 오늘 좋아요 1백만개 되면 뭐 합니다 라면서 사진과 함께 게시글을 하나 올렸더니 글~쎄 진짜로 좋아요가 1백만개를 훌쩍 넘어버렸어 훨씬 말야, 그래서 좋긴 좋은데 진짜 그걸 해야 돼 말아야 돼 안 할 수는 없잖아, 솔직히 그딴 걸로 뽐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건 그저 울며 겨자 먹기였다고 친구들에게 나중 행복한 비명을 지를 생각을 하니 기분이, 기분이 별로였어. 그러면, 그렇다면 이 또한 엄청나게 신경질이 날까? 그럴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아니다. 간접적으로 내 친구가 유명하고 난 일반인이더라도 그걸 극도로 꺼려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거의 없다. 있으면 한번 나와보라고 따져도 된다. 진짜 나오면 그건 가짜일 테고, 극소수지만 있긴 있을 진짜는 나오지 않을 테니까. 라디오 쇼를 진행하는 한때 잘나갔지만 이젠 말만 많은 코메디언이, 온 도시에 언제 어디서 공연한다고 포스터가 나붙어 있는 가왕이, 이름 대면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 유명인이 내 친구야 그분과 내가 두터운 친분이 있어 난 싫은데 걔는 날 찾아, 그렇다면 그것이 뭔가가 으쓱한 것인지 이상야릇한 것인지 썩어빠진 허세와 허영과 허풍과 허당 기질 때문인지는 몰라도 뭔가 사람을 우쭐하게 만들고, 낙천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며, 주목할 만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최소한 헛된 인생을 살지는 않아야겠다는 걷잡을 수 없는 충동과 일말의 감지덕지한 활력과 요동치는 작은 기쁨과 미세한 즐거움, 청춘의 느낌, 화창한 날씨, 청명한 기운, 호쾌한 산뜻함, 허황된 사랑이든 지독한 사랑이든 미친 사랑이든 나도 그 흔한 사─랑 한번 해봐야겠다는 삶의 긍지와 샘솟는 의지와 새로운 의욕, 인상주의에 대한 동경심과 동심에 대한 회고와 추억, 다시 우주의 신비를 알고자 하는 욕구에 한발짝 더 다가가게 해준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좋은 소식 때문은 아니지만 불미스러울망정 날이면 날마다 TV 뉴스에 그 일 때문에 내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매일 등장해, 그것도 썩 내키지는 않지만 유명세긴 유명세다. 그리고 드물게 그것과 관련하여 트라우마를 간직해서 극도로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는 일도 있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꼭, 반드시 창발마에 올라타고 싶어하는 고집불통인 양반도 있다. 타인이 보기에는 취미마와 재능마에 다리 하나씩 걸쳐서 서커스를 연출하다 미끄러진 사례도 많을 테고. 반대로, 아무도 날 찾지 않고, 소싯적에 펜팔도 못해봤고, 과자와도 비슷한 장난감이나 인형 같은 사랑은 다 날 비켜가고,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이성은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고, 항상 그랬고, 차이는 거 이젠 지치지도 않고, 대체로 항상 그렇고, 즐겁고 웃겨서 들썩들썩 하다가도 내가 뭔 말만 한마디하면 좌중에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 썰렁해지고, 어느 자리를 가나 내 존재감은 없었고 지금도 없고, 제 7의 전성기는 날 반기며 찾아와 줄 것 같지도 않고... 그러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어!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유명함은 내 의지와 관련이 없다. 내가 유명해지기 싫다고 해서 꼭 유명해지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로 유명해지고 싶다고 해서 딱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다. 일례로 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없어 라는 화법을 습관적으로 구사하는 친구들의 경우, 대략 부를 추구하고 젊고 예쁜 여자를 꽤나 좋아하며 어지간한 명성과 존경받고 싶은 욕구와 성공에 대한 열망, 유대감, 동질감, 연민과 도덕성과 허영과 허세와 허풍과 '허'자로 끝나는 보통의 감정들을 보통 사람들만큼 다 갖고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100만명 가운데 1명 될까? 0을 하나 줄일까? 에잇 모르겠다.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시는 분들이 일반적으로 뭘 원하시는가 그 가운데 딱 하나만 꼽자. 유명함은 싫으시다니까. 그 하나는 바로 부다! 그러나 돈이 많아지면 인적이 없는 곳에서 혼자 살지 않는 이상 절대 유명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도 자연스럽게 유명해지게 된다. 난 싫지만!
   도시에 있는 동물농장에서 일하는 어느 닭이 휴가차 시골로 내려가서 친구들을 만났다. 닭 한 마리, 닭 두 마리, 닭 세 마리 그 이상 계속 모여 놀면서 사이좋게 대화를 나눈다. 그 가운데 오리도 끼어있다. 완벽한 닭 분장을 하고서. 당연히 그는 자기가 오리인줄 모른다. 그러면 거기서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 몰라도 사석이니까 뭔 말을 하든 나라님 욕을 하든 어쩌든 뭘 해도 괜찮다. 자유다. 그런데 그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화의 소재는 뭘까? 뭐긴 뭔가, 뭐니 뭐니 해도 단연 동물농장의 사장이랄까, 농장장? 그분 얘기만 한다. 들어보면 아주 가관이다. 안 들어봤다면 들어보라고 권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다. 권할 수도 있다. 완전 꽝인 영화를 보고 나서 나만 어쩔 수는 없다 해서 추천하는 심정이라면. 물론 가관인 것이 맞다. 그게 옳다. 당연히 가관이 아니라면 그건 사석에서의 대화가 아니다. 또 스스럼없기는 커녕 친하지도 않고 그건 친구도 뭣도 아니다. 사석이니까, 친하니까 떠들썩하고 웃기고 시끄럽고 대리만족한다. 뭔 얘기가 오가는지 짐작 안 해도 다 안다. 그런데 그분, 동물농장 사장님은 진짜 유명해지기 싫었던 분이었고, 또 어느 만큼 곧 사회적 책임을 비켜가도 될 만큼 눈총은 낮고 거의 아예 일절 없고, 권리는 높은 부를 이뤘을 뿐 달리 유명세를 얻진 않았다. 그러나, 그러나 그분은 지금 살짝 유명한 것이다.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그런데 난 유명해지기 싫어라는 화법을 대놓고 규칙적으로 틈틈히 구사하는 사람이 나중 어쩌다 그분처럼 부를 이룬다면 어떻게 될까? 대체로 듣기로는 그런다고 한다. 두가지 상반된 입장을 동시에 지닌다고 들었다. 동시에! 수준에 맞지 않게 상당히 더없이 겸손하다고. 또 그와 함께 어디 가서 자기 말이 다 옳고 말로는 절대 안 지고 말이 겹치면 다시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안 볼 테고 완전 재수없다고 한다. 즉 남자다. 곧 상남자다. 완벽하고 완벽하고 완벽한 촌닭이다. 드라마 용어로는 졸부다. 만일 여자라면? 오, 촌년! 닭도 병아리도 달걀조차 부러워하는 그분은 그래도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때문에 적어도 허당은 아니다. 이분들도 알게 모르게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또 어디 가서 이보다 더 올바른 가치관과 고결한 심성과 반듯한 인성의 소유자를 만나기도 힘들다. 진짜 어렵다. 최소한 중간은 가는 사람이란 말이다. 가난한 동네와 부촌에 모두 피자를 배달했던 청년의 경험을 높이 사자. 정말 높게 사자. 그러나 요컨데 그 수준은 후천적 부자다. 옛날로 치면 대대손손 명망 높은 백작과 자작과 후작과 남작과 공작, 그쪽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니겠지만 속으로는 절대 어떤 뭔가를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해선 안 된다. 놀아주지도 않는다. (물론 옛날-식으로 존경을 얻지 못한 귀족도 있고 귀족에 어울리지 않는 귀족도 적지 않을 것이고, 역으로 후천적이더라도 좋아하는 취향과 추구하는 안목이 귀족적인 부류도 있다. 촌스러움부터 고고함까지 모두 갖춘 분과도 있고) 그래서 나중에 클라우드 나인에 입성하신 분은 비슷한 친구를 찾아야 한다. 괜히 친구를 잘못 끌어주다 보면 괜한 유명세를 탈 수도 있다. 뉴스에 나오게 된다. 언제적 소설이던가, 위대한 유산인가 어딘가에 보면 친구와 지인을 어떻게 도와주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복잡하고 유감스럽고 속절없는 세상, 옛날 규범과 인습과 고리타분한 격식을 모두 따르기도 귀찮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지금의 나와 20년 전의 나는 다르니까, 일관성과 프라이버시도 상충하니까 쉬운 길을 택할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만 그땐 실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게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게 아닐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별일 아닌 일도, 정말 별일 아닌 일도 일파만파 커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따라서 바로 그래서 행복을 누리는 운신의 폭이 더없이 자유로운 층위의 부를 이룬 동물농장 업주에 대한 친구들의 사적 담론을 어쩌다 듣게 되면 그건 그야말로 말도 안 나오게 되는 것이다. 웃음은 나온다. 실소로.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시는 분들이 원하는 낭만적 요술 세계의 끝이 바로 그 지점이다. 동물농장! 조지 오웰풍은 아니다. 내 맘대로 뭘 하든 어떻게 살든 아무도 뭐라 안 하고, 피곤할 정도로 유명하지도 않고, 인기 관리 팬 관리 이미지 관리 그런 거 일절 필요 없고, 상장된 기업을 이끌며 일 중독에 빠지지 않아도 되고, 걸출하지는 않아도 빅3 법칙 정도만 되는 인문-교양서를 쓰라고 그 어디서도 종용받지도 않고,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나 모두 알아서 예스-예스-예스만 말하고, 거추장스러운 인기라는 이름의 먼지는 툭 털어버리면 그만이고, 권태라는 똘똘한 녀석만 잘 요리하면 그만인 상남자들이 바라는 최고의 이상향이다, 동물농장의 그분은!
   한편 태어날 때부터 유명하냐 아니면 나중에 후천적으로 유명해지느냐를 놓고 이렇게 구분할 수도 있다. 작품으로 비유하자면 현대극에서 많이 나오는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그리고 찰스 디킨스의 작은 도릿에 나왔던 긴 명대사. 이렇게 둘로 나뉜다. 나라면 후자를 선호한다. 도리어, 속된 말로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전자를 원한다면 이왕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전자도 포용하자면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오오 우습다! 아, 그러나 이종간의 사랑이라면 인정할 수 있다. 그게 뭔가? 판타지 장르 아니겠나! 덧붙여서 찰스 디킨스의 작은 도릿에 나온 긴 명대사, 너무 기니까 달리 말하면 하품 나온다. 또 반대로 그런 걸 좋아하시는 분도 있다. 역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명대사, 누구나 아는 거. 내가 봤을 때 햄릿에서 그것은 명대사가 아니다. 그냥 대사다. 일명 평-대사. 거기서 진짜 명대사는 그 앞인가 뒤인가에 나오는 긴 대사다. 그게 진짜 명대사다. 그런데 그건 유명하지 않다. 아무도 몰라. 말도 안해. 인용도 안해. 왜? 기니까. 단순하지 않으니까. 잘 못 알아먹으니까. 쉽게 이해가 안되니까. 따라서 근거는 빈약하지만 그런 추론을 하게 된다. 지식 노동자를 만족시키는 글은 유명해지기 싫다는 말과 반대편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로미오와 줄리엣식 사랑을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작은 동네에서는 그것도 큰일이겠지만 라디오, TV 다음에 인터넷 세상에서 이젠 뭔 실제 있지도 않은 공룡 잡으러 간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세상이라서 그런 작품들이 비교적 예전에 더 흔했었다고 해서 하는 말이다. 까딱 잘못하다 화제가 옆으로 샜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어린시절 환경 때문인지 제약이 많아서 그런지 목이 긴 백조가 자유로운 촌닭보다 덜 재밌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지켜야할 예법도 많고 얽매이는 게 많으니까. 타율과 관련된 고급스러운 농담은 약간 다를 테고.
   그런데 그런데 난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 알겠다. 그럴 수 있는 분이 아니신 걸로, 차 욕심이 없는 걸로, 법 없어도 살 정도로 착한 사람인 걸로, 그저 베푸는 것만 좋아하시는 걸로 받아들이겠다. 일기, 혼자서만 하루를 정리하고 혼자서만 인생을 생각하며 혼자서만 볼려고 쓴다? 글쎄요, 천만에요! 편지를 단둘이서만 볼려고 쓴다? 대체로 맞지만 그것도 딱 그것만 묶어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동안 아니라면 사후에라도 딱 출판된다. 전세계 방방곡곡에서 책이 팔리고, 핸드폰으로 뭐로 언제 어디서 누구나 읽고 화자된다. 그래서 학문적으로 어떻게 나누어질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화술과 글의 성격 분류를 단 몇가지만 구분했다. 그것 밖에 못했다. 타인의 연구 성과인 작가 누구 누구의 단행본이 아니라 그에 비하면 보잘 것 없고 완전 초라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몇십 년 동안 보고 듣고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하여 얻은 분류 말이다.
   첫째, 난 뭐 잘해. (나는)
   둘째, 남들이 나 보고 뭘 잘한다고 한다. (천동설)
   셋째, 난 유명해지기 싫어─난 차 욕심 없어─그거? 너가 뭐 좋아해? 난 관심 없어─그런 거 다 쓸데 없는 얘기야─저거 다 허세야. 쟤? 허당이야. 너? 지랄하네. 나? 내가 최고야─차 좋지?─그러면 날 부러워하지 말든가─아 나 이런 뭐야 이거 증말 얘네들이랑 같이 술 못 먹겠네 너네들 나중에 나랑 같이 술 마시자고 하지마 아 나 얘네들 웃겨서 말도 안 나오네 이제 내가 술 제일 잘 마시는 걸로 결론났다─짜증나지만 놀아줘야지 내가 너네들이랑 놀아주는 거도 힘들다 힘들어─넌 나의 제일 친한 친구가 아니야 넌 넘버 투야─너보다 내가 더 누구랑 친해. (나는 2)
   넷째, 난 뭐 못해─잘하고 싶어─아직은 잘 모르겠어─난 장비라도 좋았으면 좋겠어─실은 난 실력은 뒷전이고 나아지고 싶지도 않고 장비가 좋아 타인의 시선과 약간의 부러움은 받고 싶어. (나도) 
   다섯째, 늬가 나보다 뭐 더 잘해, 네 장비가 내꺼보다 더 좋아, 내 수완은 네게 뒤지고 네 말발은 나보다 앞서, 넌 진짜 진정한 텐미닛이구나, 훌륭하십니다 존경합니다 부럽습니다 그게 꼭 나쁜 게 아니에요 딸랑딸랑~, 그 누가 뭐래도 넌 지존이야, 뻠프질 푸쉭푸쉭~ 그리고 그날 술값은 결국 칭찬받은 사람이 계산했다더라! 다음날 혹은 먼 훗날 그는 자신이 말렸다는 걸 깨달았다더라! (나는 3)
   그 외에 묵묵부답하는 부류도 있을 테고, 가위바위보 하기 전에 난 주먹낼꺼다 알아서해 라고 말하는 보고 있으면 훈훈해지는 남자 일명 훈남도 있고, 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모르겠어 분과도 있을 것이다. 어디 족보도 없이 굴러와가지고 잘난 체야 꼴보기 싫어, 도 물론 있겠다. 그리고 잡은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를 비롯한 <나는 시리즈>의 연작은 각자 알아서 상상하기로 하자. 이미 글이 말의 탈을 써버렸지만 여기서부터는 정말 말의 영역으로 남겨놓는 게 좋겠다.
   자~ 그렇다면 왜 다 아는 사적 영역의 농담과 습성을 굳이 꺼냈는가, 가 남는다. 왜? 도대체 왜? 왜냐하면 그것이 풍경화 <친교>라면 아무런 문제의 소지가 없지만 그런 개인의 고유한 성정과 생활 습관과 삶의 태도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야 하는 공적 영역에까지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연장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동네에서 팔고, 그 특별하고 진귀한 가치는 그 짝을 찾아볼 수 없을 듯한 신기한 작품에만 예술혼을 쏟고, 무언가에 빠지고 머머 접습니다 다시 무언가에 빠지고 머머 접습니다 또는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가 이별하고 또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가 어쩌다 그건 짧은 만남으로 그치고 다시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가 긴 사랑으로 이어지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어쩌고저쩌고를 들으면 푸쉭푸쉭 부글부글 수증기가 발생하는 건 그나마, 그나마 괜찮다. 그렇지만 세상 일이 꼭 그렇게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정형화된 패턴이 소문자 개인사에서 그치지 않고 어른들이 잘 아는 익히 잘 아는 대문자 세계로 넓혀지는 것, 그건 한마디로 판이 다른 문제, 다수를 불편하게 만드는 완전 딴판의 불미스러운 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어떻게 보면 정상적인 현상같다. A는 사적 영역이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다. 난 유명해지기 싫어, 난 차 욕심 없어, 우리 동네에 놀 거 다 있는데 뭐하러 놈의 동네에 가서 논데?, 내가 하면─좋은데? 좋은데? 좋지? 좋지?─남이 하면─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저거 다 돈낭비야 저런 뭐라뭐라 말하는 거 보니 완전 백치네 백치 쟤 허당 중의 허당이야 저거 별거 없어 또는 조용히 핸드폰을 보거나 딴청을 피우고 말을 안 들어주고 따로 방송하고 그냥 돌아서서 가버리고 아예 사교를 단절하거나 그런 거 다 필요없어 다 쓸데없는 거야 허세야 허세─내가 하면─권리이자 당연한 소비─남이 하면─내가 봤을 때 늬 성격에 늬 혼자 그런 데 절대 못가겄드라 내 그릇은 이만하다 나는 촌닭 중의 촌닭입니다 내가 최고고 내가 사는 동네도 최고야 주제를 알어라 좋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라─내가 하면─사람이 그렇게 빡빡하게 굴면 안되니까 적절히 탄력적으로 때와 장소에 맞게 처신하고, 사람 봐 가면서 사교를 하고, 하면 안돼 위에 난 괜찮아로 군림하며 애매모호한 명언 나는 놈 위에 하는 놈 있다─남이 하면─율법을 어겼다네 환심을 산다네 윤리적이지 못하네 도덕이 아니네 화합도 아니고 새롭지도 않고 화성학을 무시했네 사람이 너무 깐깐하네 이간질이 아닐까 뭘 해도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존재 자체가 문제군 쟨 너무 고지식한 게 문제야─내가 하면─(타인의 감탄을 도발하여 적당히 듣기 좋은 대사를 타자의 목소리로 이끌어냄) 와 멋지시네~ 저러니까 스캔들이 끊이시질 않지─남이 하면─(어쩌면 이렇게 이타적일 수가 있나 싶도록, 어떻게 이토록 몇 박자 늦게 터지는 웃음을 유발할 수 있지 라며 탄복할 정도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이 알쏭달쏭해지는 고백처럼) 저게 뭐야 저게, 추접스럽게 말이야─내가 하면─고급스러운 농담─남이 하면─넌 메이저 못되겠다 그걸 왜 늬가 하냐 너 여기서 빠져라 그게 왜 궁금하냐 예절 좀 지켜라, 라면서 촌닭도 어떻게 이런 촌닭이 다 있나 라는 모습은 미덕이요 풍습이고 척도이면서 값싼 농담에 그친다. 그러나 그것이 B까지 이어지는 것이 원래는 자연스럽고 슬프지만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 아빠 사랑해, 와 별개의 문제다. 그렇다. 부정하고 싶지만 원래 그게 정상이다. 그게 수학적이다. 그러니까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게 이렇지 않는가. 안 그런가? 내 잘못이다. 나의 잘못이란 말이다. 바로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씁쓸하지만 이건 과학이다. 증명됐고, 그에 대한 재탕만 가지고도 그 언제까지라도 베스트셀러는 등장한다. 불편한 사실이면서 재밌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걸 법이라는 구속력이 강한 규율과 막강한 권력과 당근&채찍 이론에 따라 1차적으로 규제하거나, 제재가 약하거나 있어도 거의 없고 솜방망이에 그치며 때로는 오히려 참느니만 안 하니만 못한 경우도 발생하는 그런 억울한 일이 비일비재한 소문과 평판, 도덕, 풍습, 불문율, 정서, 의식, 여론, 예술, 문화, 상식, 양심, 교양, 적절한 투명성, 교육, 집회와 운동등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보통은 전자가 앞서야 하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다. 보통은 전자가 앞서야 하지만 후자가 아직-인데 전자를 다듬어도 후자가 못 따라오기도 한다. 배 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 있다. 지키지도 않을 텐데 전자 먼저 보내버리면 후자는 헤매게 된다. 하지만 대체로 일반적으로 전자를 먼저 개선하는 게 먼저다. 그것이 성과를 불러오고 들인 노력 대비 얻은 결과의 비율이 높아서 효율적이지만 허나 그건 인간적이지 않다. 사람은 개, 소, 돼지 또는 좀비나 로보트가 아니니까.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규칙을 바꾸는 것이라지만 오히려 후자가 터줏대감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걸 기대하기도 힘든 세상이고 인생이란 함께 사는 사회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영화에서는 좀비가 사람을 물면 사람이 좀비가 되지만 촌닭 이러쿵저러쿵 해도 촌닭이 오리가 되지는 않는다. 허당은 면할 수 있지만. 드물게 힘든 사랑도 실제 있고. 또 말로는 앤디 워홀의 수프 작품이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동물농장은 왜 건드려가지고 헷갈리게 만드나, 명백한 모순이다. 그리고 게다가 거위 왈 "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데 왜 내 얘긴 없어?", (입을 벌리면 무엇이든지 꿀꺽 삼켜 버리는) 펠리컨 가라사대 "난 쏙 빼놓다니 동화와 만화와 게임으로 내게서 단물 다 빼먹었다는 거냐? 늬가 펠리컨 밥주기를 알어?" 이젠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환영, 환각, 환몽 등등. 동물농장이 완전 벌통이구만! 음료수 깡통인줄 알고 함부로 뻥 찼드니, 글쎄! 나는 아무래도 대-사상가는 꿈도 못꾸고 삼류 작가를 면할 방편은 눈씻고 찾아봐도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험담가에 지나지 않는다. 몽상가, 머머-가, 선구자, 머머-자 다 빼놓고 하필이면 험담가라니! 오, 이런 불운을 다 봤나. 아무튼 그 중간에서 갈팡질팡하는 건 뭘까? 지역적으로 더(?), 덜(?) 예민하거나 시대적으로 먼저랄지 나중 발생하는 바로 그런 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손가락 딱!)
   그리고 심리학과 여타 학문에서 말하는 어지간한 감정은 다 개개인에게 내포되어 있고, 난 아니야 그러면 좋겠지만 이승에 사는 사람이라는 개체요 인간이라는 포유류 종이라면 나쁘다 뭐하다 어쩐다 라는 밖으로 향하는 거의 모든 반응들은 판박이로 내 안에도 표출되지 않은 채 온전히, 분명히, 정치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준비되어 있다. 그 차이 뿐이다. 내 일관성을 자신할 수 없다는 것과 프라이버시는 겹치는 일면이 있지만 전자 때문에 후자를 보호하는 듯한 느낌을 완연히 부정할 수는 없다. 사람이라면! 그 정도로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내 옆에 있으면 피곤할 것이다. 무수한 작품들에 등장하는 다양한 등장인물 역시 모두 다 내 안에 내재되어 잠자고 계실 것이다. 깊고 깊은 어두컴컴한 심연의 바닥에 있는 판도라의 상자를 따고, 그 어느 천사의 단잠을 깨워서 함께 소풍 가서 즐겁게 놀자면서 풀밭에 데리고 갔드니 에고머니나! 그분은 천사가 아니라 괴물이었고 보석 상자인가 뭔가는 알고 보니 아이언 메이든이었드라, 이렇게 되면 찻집에서 나누는 수다가 극장에서 감상해야 할 영화가 되니 유명이고 무명이고 나발이고 일기고 블로그고 자시고, 조니 그 인간이 정말 제대로 된 일거리를 줄 때까지 1인 시위라도 해야만 할 것 같다. 때가 됐다. 안 그러면 난 직장을 때려칠 것이다. 정말로! 내가 때려친가 못 때려친가 보자. 내기 한번 해봅시다.

   ④
   조니는 그녀의 연습장에 씌여진 글을 보면서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그래서 조니는 생각했다. 자긴 마냥 잘해주기만 했다고. 배려만 풍성했다고. 자기가 만든 어항은 너무 아늑하고 지루하며 따분했다고. 그녀가 심심해했을 거라는 건 알긴 알았지만 자신이 좀 더 현명하게 그녀의 업무 능력을 높여주고 동기를 부여하고 막 그래야 했는데 너무 안락함과 여유로움, 편안함만 제공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그도 자신의 어장을 키우지 않았다. 뭔가 약간 사는 게 타성에 젖고 시들시들했으며 무기력과 권태와 싸우느라 너무 바깥으로 도느라 그녀에게 많이 신경써주지 못한 거 같아 미안함을 느꼈다. 물론 그녀의 글은 꼭 사생활이 굉장히 문란했던 삼류 소설가의 일기와 막 흡사한 듯한 느낌도 가져다주었다. 타락한 아부의 천재, 가짜 내시, 궤변의 왕 막 그런 유형의 인물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딱히 상징적으로 손꼽을만한 인물의 이름은 기억하기 힘들다.
   그러다 그는 영화판에서도 그를 불러주지 않고, 광고 제의도 없고, 업무 제휴 문의도 없었고 딱히 일거리가 없어서 자기의 개인 사무실에서 경리의 빈자리에 앉아 그녀가 하던 일 즉 따분하게 웹 서핑을 하고 지루한 표정으로 잡지를 보며 늘어지는 자세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혼자 말하고 대화하기에 접어들었다.
   「휴가 계획은 세우셨냐고? 날마다 휴간데 뭔 계획을 세워? (휴지기) 이번 주말 이태리 요리는 어떠냐고? 어떤긴 뭘 어때, 좋지! (휴지기) 긴 설명이 필요할까요? 글쎄 상황 봐서. (휴지기) 축구 좋아하세요? 좋아는 하는데 빠지면 정신 못차리니까 잘 안 봐. (휴지기) 하여간 더럽게 재미없네. 나도 전에는 쾌활했는데. 우리도 재밌게 놀자, 이런 말도 하고. 추억의 핑크팬더 시리즈도 다 봤어. 돌아온 핑크 팬더, 핑크 팬더의 아들, 핑크 팬더의 복수, 핑크 팬더의 역습, 핑크 팬더의 추적까지. 그런데 기분 탓일까? 왜 이렇게 막 쳐지지? 혹시 이래서 그녀가 그만둔 것일까? 그럴지도 몰라. 다시 부를까? 그러나 전화해도 안 받아. 찾아갈까? 싫어하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찾아가자. 그런데 가서 만났다고 했을 때 뭐라고 하지? 뭐라고 하긴 뭘 뭐라고 해? 다시 출근하라고 해야지. 그래. 카리스마를 풍기면서 영화의 주인공처럼 말하면 된다구.」
   그렇게 그는 혼잣말을 마치고 그녀를 만나러 가는 여행의 장정에 올랐다. 어째 조니의 뒷모습이 지금 이 순간 딱 핑크 팬더와 비슷해보인다. 사실 위에 설명한 이야기가 다가 아니다. 뭐가 다가 아니냐면 조니가 자기 사무실에서 일했던 동료를 찾으러 떠난 이유, 조니가 모르는 척 하는 내막, 그런 뭔가 의미심장한 쿵쾅거림 그 진짜 원인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곧 조니는 그녀의 연습장에서 이와 같은 글을 발견한 것이다. <꿈을 꿨어요. 거리에서 자고 있는데 웬 젊은이가 다가왔어요. 키가 크고 강한 남잔데 내게 불친절했어요. 근데 잘 생겼어요. 순간 저는 그와 사랑에 빠져버렸죠. 그의 이름은 바로 조니에요.> 그는 그 글을 보고 아 나 이거 또 나야 아 이런 미치겠네 이 놈의 인기, 그러면서 그녀를 찾으러 떠난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회유하기 위해서. 하지만 묘한 우연으로 실제 그녀의 남자친구 이름도 조니였다. 또는 그녀가 기르는 강아지 이름이 조니던가. 그녀가 위스키광일 수도 있고 또 조니가 조늬를 조니로 잘못 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배 고프면 아무 단어나 빵으로 보일 수도 있고, 궁하면 찾게 되며, 물 한잔 마실려고 해도 물의 표면에 잠을 잘려고 눈을 감아도 앉으나 서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분, 그분이 마음에 있다면 그분은 언제나 아른거릴 수 밖에 없다. 피할 길이 없다. 어쩌면 그 때문에 조니가 오독했을 것이다. 제법 그럴 공산이 크다. 썩!
   조니는 먼길을 떠나야하니까 일단 근처 찻집에 들려 비엔나 커피를 마시며 심기일전하기로 작정했다. 작정하고 커피를 마시기로 했는데 그가 그 찻집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했던 말은 이랬다.
   「비엔나 커핀가 뭔가 거 더럽게 맛없구만. 내가 여기 다시는 오나 봐라. 그래도 미운 정은 유보하고 다음주에 다시 와서 점원의 커피 타는 솜씨가 늘었나 확인해봐야겠어. 그러는 게 좋겠다.」
   그때 제임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조니, 왜 연락이 없어? 전화해도 받지 않던데. 재미난 일이 있어도 부를 수가 없잖아.」 제임스.
   「연락이 없긴 뭘 연락이 없어? 항상 내가 먼저 전화하는데. 넌 전화도 늦게 받고, 또 내게 전화가 걸려오지도 않았어. 이제는 너도 입만 열면 뻥이냐? 이번에 정말 오랫만에 딱 한 번 먼저 전화한 거잖아. 왜? 뭔데? 뭔 일이야? 무슨 재미난 일 있어?」 조니.
   「아니. 그냥 한번 연락해봤어. 별일 없지? 별일 없으면 됐어. 그만 끊을께.」 제임스.
   뚝. 삐─ 삐─ 삐─ 삐─ 삐─ 삐─ 삐─
   「뭐야 이거? 커피도 맛이 없고 그녀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할지도 막막한데 뭔 시덥잖은 전화나 걸려오고 말이야. 싱거운 녀석. 글이 잘 안써지는 게 틀림없어. 잘됐네. 인기상이든 공로상이든 내가 다 독차지할 꺼야.」
   찻집에서 나온 뒤로 막상 동업자라고 할까, 단순히 그녀라고 하기에는 뭔가 허전하고 어쩐지 정확한 이름을 떠올리는 것도 왠지 죄스럽고 어쩌다 그녀를 호칭하는 것 조차 언제인지도 모르게 어색해져버렸지만 어차피 그녀도 자기를 떠나간 마당에 그는 그녀에게 괜찮은 이름을 하나 근사하게 정해주고 싶었다. 당사자가 마음에 들든 싫든 알리도 없고 자기도 편하게 막 부를 수 있고, 조심성과 예의 그런 건 지나가는 개에게 줘버려도 자신의 품위가 손상되는 일은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핸드폰 전화번호부에 등록되어 있을 나는 모를 나의 이름과 같은 의미로 그가 혼자 생각한 놀이였다. 아아, 바로 그것은 안녕이다. 곧바로 멋진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에 대한 기대와 희망, 있는 게 축복이다. 안 그래도 남들도 오늘 마신 커피를 내일도 마시고 날이면 날마다 집과 직장을 왔다갔다 하는 다람쥐 챗바퀴 도는 삶을 살고 있다. 매일 보는 얼굴, 매일 듣는 음악, 매일 똑같은 시간에 취침하고 기상하고, 항시 입는 옷 항시 뿌리는 향수 항시 타는 탈 것, 다 똑같고 다 익숙한 것이다. 뭐 남은 남이고, 작명은 작명이니까 차차 더 세련된 이름을 떠올려보기로 하고 조니는 지금 할일을 기억했고 그것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녀를 만나서 퇴사를 종용하고 사려 깊은 마음으로 걱정하고 관심을 표명하며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랬다. 너가 궁금했다, 살짝 보고 싶었다, 미운 정 들었지 않느냐, 너가 떠난다고 내가 후임을 덜컥 뽑겄냐 아니면 1인 기업을 하겄냐 우리 이대로 끝가지 언제까지라도 같이 가자꾸나, 난 너를 기특하게 생각한다, 난 널 좋아한다, 난 너에게 고맙다, 실은 맹렬히 사모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멋진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주겠다 등등. 그리고 적당히 눈치봐서 날 단념하거라 날 잊어라 난 나쁜 남자다 이젠 맹목적인 사랑은 힘들다 부담스럽다 라는 말은 그때 가 봐서 하기!
   그러나 그는 오늘 할일의 우선 순위 1위인 그것에 대한 자꾸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외부의 영향 때문이었다. 일 잘하는 사람은 주로 중요한 일을 오전에 할당하고 덜 중요한 잡무나 회의는 오후로 미룬다. 그러나 조니는 공부하다 자꾸 신경이 바깥으로 도는 남자였다. 그동안 이룬 업적과 인생의 성과와 작디 작은 인기는 도움 받은 측면도 크고 운도 많이 작용했으며 일하거나 노는 족족 행운이 자기를 따랐으며 특별한 노력을 해도, 이혼녀 친구의 구애를 물리쳐도, 뭘 해도 행운의 여신이 작용하기 일쑤였다. 이처럼 말 많은 세상에서 말이다. 이번주의 표어로 노트북에 붙여놓은 표어 <언제나 둘이서>와 전혀 상반되는 일이 발생했지만 그는 금새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는 것을 알긴 알았지만 엄청나게 급한 일은 아니니까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 차근차근 쉬었다가 창밖의 풍광도 둘러보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자기는 사는 동안 내내 주인공으로 연극 무대에도 서고, 조명 받는 일을 많이 하고 언제나 정력적으로 나돌아다니는 돈키호테였지만 오늘 낮에 본 어느 광고 문구가 마음에 걸렸다. 그 문구는 이랬다. <왜 주인공은 매번 떠나는가?> 아마도 책 제목이거나 공연이나 또는 떠나지 말라는 어떤 해결사 사무실 광고일 테지만 그는 그걸 보는 순간 뜨끔했다. 그건 완전 노골적으로 자신을 겨냥한 광고였다. 그래서 그는 왠지 이제 그만 좀 떠나야 할 것 같다고 느꼈으며 뭔가 일탈이라도 감행해볼까 라는 호기와 장난스런 치기를 간파당한 것 같아서 가슴이 아닌 엉덩이에 털이 나는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옆에서 막 너도 나도 이구동성으로 다그치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정신차려라, 정상적인 생활에 정착할 때도 됐다, 그렇다고 너가 비정상이란 말은 아니다, 엉뚱한 생각 좀 그만해라, 언제까지 그렇게 두리번거리기만 할래, 왜 그렇게 뭐에 꼿히면 정신을 못 차리냐, 그리고 뒤뚱뒤뚱 걷는 그 걸음걸이는 뭐냐 대체 뭐냐 대체 대체 왜 그렇게 걷냐 늬가 뭔 꽥꽥 오리 꽥꽥 미운 오리새끼라도 되냐...... 바로 그런 환청들을 진짜 들었지만 어느새 그의 시선은 어느 행사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어슬렁어슬렁 엉거주춤 걷다가 발견한 것은 무슨 가전제품 판매점의 요란한 경품 즉석 당첨 행사였다. 귀도 즐겁고 시각적으로도 호사를 누리고 뭔가 창의적인 성스러움까지 느껴졌다. 그는 원래 시간을 기다리고 공을 들여서 어렵게 무엇을 점령하고 말도 안 되는 꿈을 이룰 듯 이룰 듯, 말 듯 말 듯 하다가 포기하더래도 그렇게 도전 의식을 끌어올리는 목표와 과정에 호감을 갖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별로 재미난 일도 없고, 일도 잘 안 풀리고, 꿈도 뒤숭숭해서 그런지 잘 찾아보면 찾을 수 있는 귀티는 내동댕이친 채 약간 뭐랄까 어떤 위태로움과 거의 초연함의 중간 쯤으로 아늑한 즉답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물론 근래에만. 즉 언제나 어디에서나 고전음악과 기품 어린 복장과 은은한, 과연 은은하다고 해도 될런지 어딘가 모르게 망설여지지만, 은은한 홍차를 마시는 생활에서 갑자기 헤비메탈을 즐겨듣는 청춘으로 돌아간 듯한 뒤숭숭한 만족감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조니가 지금 명백히 청춘이 아니다 라는 말은 아니다. 어쨌든 그는 최근 복권은 즉석복권, 술은 조니워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하나 공개해, 이번엔 늬가 쏠 차례인 거 알지, 같은 치유를 거부하는 전형적인 상남자의 속성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그는 왜 그 당첨 행사장에 머무르게 된 것일까? 그건 그가 그날 읽은 책에서 뭔가를 봤기 때문이다. 대체 책에서 뭘 봤을까? 머머할 땐 머머해라? 행사장에선 일단 들이밀고 보라? 그런 게 아니라 그가 읽은 내용은 이처럼 뭔가 달뜨는 감정,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그래서 여렵게 은유든 추상이든 뭔가 감추고 농축시켜야 할 듯한 시상이었다. 책을 읽고 곧바로 그를 아찔함으로 직면하게 만든 경외감, 당면한 당혹감, 끈질긴 잠식성과 뇌리에 남아 줄곧 따라다니는 오묘한 잔상, 신뢰할 수도 단호히 신뢰하지 않을 수도 없는 낭만적 감성은 대체,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건 별거 없었다. 낭송할 것도 외울 필요도 없었다. 다만 단적으로 표현해보자면 그 기분이 뭐길래 라는 의구심을 자아내고 뒤따라서 한번 따라해보고 싶은 그래도 되는 썩 부적절하지 않은 충동을 느낄만한 것이었다. 그렇다. 그건 흉내내도 부도덕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잘 찾아보면 부도덕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글을 읽는 순간 자막이나 경고 문구와 안내의 말은 없었다. 이건 따라하시면 안 된다는.

   ⑤
   자, 그가 뭔가를 따라한 경위는 이랬다. 그가 책에서 읽은 행사장 관련 어떤 고단한 통찰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느 작가가 이처럼 고백했다. 자기가 어느 개업식 경품 행사에서 자전거가 상품으로 수여되는 1등에 당첨된 일이 있는데, 빵집 주인이 자기 이름을 세 번 연속 불렀지만 그는 끝내 나가지 않았고, 빵집은 반년만에 폐업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조니가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에 경품 행사장에서 머뭇거리며 어쩌다 번호표를 들고 즉석 추첨식의 추첨 전 잔잔한 북소리를 들으며 머무르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만일 그가 당첨되었을 때 자기가 당당하게 또 의젓하게, 무엇보다 그 상점에 악운이 끼는 것을 무마하려는 일종의 사명감이랄까, 믿거나 말거나 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불신할 수 없는 몇몇 이론에 근거하여 그는 한동안 그곳에서 동태를 파악하고 그 떨림과 설렘으로 말도 안 되는 환상적인 황홀감으로부터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더이상 무심할 수 없었고,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짧은 명대사를 혼자 읊조리게 되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밤이나 낮이나 그게 뭐가 중요해? 정작 어떤 최고조의 순간에 경건함 안에 있어야 할 시기에 딴 여자 이름만 호명하지 않으면 되잖아? 이미 시트콤에서 많이 학습한 거야. 사람은 사는 동안 읽고, 배우고, 깨닫고 그렇게 사는 동안 항시 학습을 해야 해. 살면서 필요한 건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고? 유치원 좋아하시네. 빨개벗고 백화점에서 당당하게 걸어나오는 게 뭐 그리 어렵냐는 말과 똑같잖아? 그게 뭐야?」
   그는 추첨이 길어져서 그 따분함과 극도의 흥분, 요동치는 기다림의 즐거움 사이에서 생각이 이리 튀었다 저리 튀었다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감나는? 실감나지 않는 속담을 다시 재탕하자면 이와 같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당첨이 될 줄도, 꽝 될지도 모르는데 당첨되서 상점의 폐업을 막겠다고? 원론적으로 당첨 가능성도 희박하긴 희박하지만 당첨과 폐업이 뭔 상관이야? 그리고 혹시 자기랑 똑같은 의도로 그곳에 와 있는 사람이 있다면? 또는 없다면? 한 명이 아니라 삼분의 일 정도 된다면? 게다가 그들은 조니와 다른 의도를 품고 있다면? 심지어 그건 가난한 시의 문제가 아니라 주식 선물 옵션으로 작전이 걸려있고 바로 그곳에 조니의 개인 사무실, 무명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했던 그녀 "안녕"의 판돈이 모두 고스란히 걸려있다면?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다행히 그는 추첨에 당첨되지 않았다. 정말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행 중 불행인지 불행 중 다행인지는 불분명하고 확인이 불가능하며 통계와 실험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지만 그는 별안간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꼈다. 그 대상은 불확실했다. 그야말로 비로소 환상지상주의자의 신비로운 법석과 떠들석한 로맨스를 동경하고 추앙하다 급기야 들것에 실려나가는 위기를 모면한 것만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그가 하면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요 남이 하면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 그는 그냥 기분 전환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조니는 정작 안녕의 거처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망상가처럼 꿈과 이상을 쫓고 긴 명대사를 연기하며 밤에 피는 장미도 겨울까지 기다려야 하는 첫눈도 왜 지금 즉시 보러 가면 안 되냐는 식으로 자꾸 자아 1과 자아 2가 마찰하고 충돌하며 호전성도 띄었다가 사랑 비슷한 금빛 오로라빛 기이함도 감출 수 없는 것이 바로 그의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그리고 그는 안녕이 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라면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자기 할일을 했다. 그러나 그는 당장 할일이 없었다.

   ⑥
   앗! 그는 할일을 찾았다. 하나에 빠졌다. 그건 무엇이냐면 최근 필요한 몇몇 물품을 사느라 중고품 매매 사이트를 구경하는 것. 조니는 돈이 많다. 그는 돈이 귀찮다. 너무 많으니까. 그는 풍성한 부, 풍만한 부, 풍요로운 부, 모두 짜증난다. 그는 유명함, 수용한다. 그는 인기, 초심을 잃지 않고 천성에서 동심이 도망가지 않게 주의하면 그만이다. 그런 그가 중고품은 왜? 그냥 새 제품을 사면 되는데 그리고 쓰다 버리면 그만인데, 그런데 왜? 왜냐하면 그는 중고 제품을 구경하면서 그런 글을 읽는 순간 어떤 짜릿한 전율과 저항할 수 없는 희미한 흥겨움, 격심한 두근거림과 평소에 경험하기 힘든 완전 딴판의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동안 잊고 살았다. 내막을 알고 보면 별거 없는 주기가 긴 호탕한 습관이요 마치 사랑처럼 뜻하지 않게 뜻밖에 찾아오는 의외의 횡재와도 같은 잔잔한 파문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면 그런 글은 어떤 글인가? 그건 이와 같은 글이다.
   「뭐뭐 접습니다.」
   뭐는 뭘 뜻했다. 게임, 취미, 스포츠 등. 그건 마치 명대사 같았기 때문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왔던. 
   조니도 뭐에 빠졌다가 금새 그만두고, 다시 뭔가에 몰두했다가 마음이 식고, 또 다시 새로운 무언가에 홀딱 빠져서 딱 그것만의 세상에서 막 즐거움을 찾는 생활을 아마도 평생 지속해온 듯 하다. 남들처럼! 난 그거 밖에 없어 내겐 뭐하는 거 뿐이 없어, 그러듯이. 그러니까 허니가 어떤 장비를 갖다버려서 안타깝지만 불가피하게 이혼할 뻔 한 적이 있었다네 라는 풍문도 전해진다. 그들처럼 조니도 어느 가난한 화가의 공방에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가 한달도 못채우고 발길을 끊고, 수묵담채화 무슨 대회 상금이 얼마라길래 또 그거 배운다고 한동안 열심히 어딘가로 왔다갔다 했다. 그런 것들이 많았다. 농구, 테이프-레코드-CD 수집, 독서, 펜팔, 머리길르기, 피아노, 과소비, 남자들의 로망, 블로그, 싸이클(다양한 관심만), 영화보기 기타 등등 엄청 많았다. 보기야 계속 들 수 있지만 여기서 멈추는 게 낫겠다. 왜냐하면 대체로 100분의 1이나 간혹 1000명 가운데 1등을 할만하다 싶은 것 외에는 순위권에서 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야구도 넣어야하나? 완전 열애까지는 아니었는데... 기준도 적잖이 애매하고, 측정과 진실 파악도 어렵고, 못해본 것도 많고, 새로운 걸 넣고, 먼저 있던 거 빼고 그러면 거의 남는 거도 없을 듯 하다. 꼭 차일 걸 알면서 하는 괜한 고백 같다. 또는 헤어지자는 말을 들을 것 같으니까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거나 자기가 작별을 고하기는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 그 말을 하게끔 만드는 행동과 비슷하다. 물거품 같은 알고 보면 별거 없는 기행 같은 거. 크면서 최소 한번에서 수없이-까지 뭔가에 빠졌다가 <머머 접습니다>에 이르는 달리 말해서 일종의 행동주의에 다름 아니다. 생활, 삶, 인생, 현세 같은 말처럼. 그러나 크면서 또 살면서 뭐에 관심을 갖고, 뭘 지속할 것이며, 나중 어떤 게 오래가고, 왜 시작했는가─언제까지 어느 만큼 까지만 가고 싶어─나, 저거 갖고 싶어─누구처럼 되고 싶어─나는 사랑을 하고 싶어, 나는 뭐가 좋아, 나도 책을 쓰고 싶어, 나도 TV에 나왔으면 좋겠어 그러나 교육방송에만, 라는 미래에 대한 분명한 목표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그도 어딘가에 알리고 싶고 남기고 싶고 그걸 포장해서 다듬어 표출하고 싶었기 때문에 조니의 수줍은 독백을 대신 이 자리에서 전한다. 그게 전부다. 반면에 그냥 한번 해봤는데, 가 나중 대박을 터트릴 여지도 가냘프지만 그 가능성은 존재하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더 중요한 개념인지 잘 알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조니는 그런 걸 누가 알아도 전혀 관여치 않았다. 그는 진정한 대인배다. 최소한 지금은. 곧 말이 앞서는 분야는 빼기로 한다. 또 냠냠 냠냠 냠냠냠 맛난 음식 먹기와 놀기와 여행하기와 사랑 놀음 같은 누구나 좋아하지만 누구나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건 순위권에 오를 수 없다. 그걸로는 돈도 벌기 힘들다. 대략 최소 1퍼센트, (재수없지만) 드물게 0.1퍼센트에 들겠다 싶은 것들이 조금 오래간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기간만 조금 길었다 뿐이지 어차피 마음은 뜨게 되어 있다. 100에 0을 더 수두룩하게 붙이고 거기서 선두와 대등한 재능이 있어야만 <머머 접습니다>라는 변심에 물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라는 어느 극작가의 조언도 있다. 또 어른들은 사랑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재능과 욕망과 호감과 취미와 직업은 모두 일치하지 않고, 따라서 조니는 알고 보니 <인생은 뭐다>와 결혼했고, 조니는 온갖 명언을 막론하고 <내 꿈은 평생 놀고 먹는 것이다>와 평생 연애를 지속하며 알콩달콩 로맨스를 이어가는 뭔 이상한 말도 안 되는 두집 살림의 평행선을 삶의 철학으로 삼고 있는 듯한 인상을 타인에게 안겨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 대단한 지금 할일이라는 게 중고품 거래 사이트에서 <머머 접습니다>라는 글을 막 땀 뻘뻘 흘리며 찾아서 읽고 있는 것이다. 히죽히죽, 킥킥, 오오 그러면서. 꼭 미친놈 같다. 그러나 정말 미친 건 아니다. 그리고 또 언제는 한때 러시아어 독학하네 고대 라틴어 학원에도 다녔다가 언제는 춤 배운다고 또 교습소에 다니고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다가 가입만 했고, 누구나 그러듯이 살면서 참 헛짓거리 정말 많이 했다. 그 가운데 지금은 친구들과 무명 블로그에 소설을 쓰며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처럼 허탕을 치지 않을려고, 운수와 환경과 실력은 뒷전이고 나중 포세이돈에게 농락당하지 않을려고, 남자는 인생에 있어서 한번은 스포츠카를 몰아봐야 하니까, 어른이 되기 전에 한 번쯤 별은 못 따도 꽃향기가 뭔지는 알아야 하니까,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으니까, 그러다 진공청소기처럼 집에다 모셔만 놓고 제사드리고 신주 모시듯 기도만 드리며 고사 지내고 잔디밭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연습 장비에 밀려 벤치 신세를 면치 못할지라도, 그럴지라도 그는 어떤 분야의 장비 욕심만 왕창 부리며 시간 보내고 소일하는 것에 빠져있었다. 그러다 언제 느닷없이 참회록을 쓴다고 산속으로 들어갈지도, 진정한 동기부여계의 현역 장수와 학계의 인지심리학 학자를 개인교수로 초빙할지도 모른다. 정작 작심삼일로 그칠 가망성이 클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채팅이라는 전-부인과 다시 합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인생경험이니 어쩌니, 추억이고 뭐고 그분은 잊어야 한다. 간직할 만한 일도 독려받을 허언증도 존중받을 무용담도 뭣도 못된다.
   그리고 조니는 얼핏 일부러 중고 사이트에서 뭔가 조금은 변태적인 색다른 기쁨을 채집하면서 혹시 그녀도 일을 그만두면서 뭐뭐 접습니다, 그와 같은 해방감이랄지 주저하지 않는 씩씩한 공허감과 홀가분함, 새로운 뭔가에 대한 기대감, 권태와 작별하고 타성과 헤어지며 나른함과 결별하는 묘한 즐거움을 느꼈을까 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잠깐! 마스네의 타이스의 명상곡이 어딘가에서 울려퍼진다. 저기 저 45도 각도로 주변부가 어두워진 가운데 물안개가 어느새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허공에 문이 하나 생겼다. 그 살아숨쉬는 듯한 찬란한 생기를 간직한 문이 열리면서 사람의 혼을 빨아들이는 듯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분이 나타나실 뻔 하다가 보일 듯 말 듯 하다가 애만 태우고 사라졌다. 거의 등장하실 뻔 거의 재회할 뻔 거의 근접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러다 말았다. 예고편조차 연기되어 버렸다. 그것도 무기한으로. 그러나! 오오, 조니는 그녀의 이름이 생각났다. 항상 너, 그녀, 자기, 당신, 사장님, 애기야, 어젯밤의 몽상 또 막 생각나는 대로 딱 떠오르는 대로 변덕쟁이네 말괄량이네 아무 이름이나 막 불렀기 때문에 그래서 잊었던, 잊혀졌던 그녀의 이름이 생각났다. 그녀의 이름이. 그녀의 이름은 네네, 였다. 과거엔 노노, 였다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그건 아마도 믿을 수 없는 낭설에 불과할 것이다. 신빙성 전혀 없는 뜬소문 말이다. 그러나 그 다음은 없었다. 그 다음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악흥의 순간이 파급 효과를 일으켜서 악마의 트릴을 불러오고 그것은 미친 듯한 소설 쓰기의 착상을 연역하게 되고, 마침내 무명 블로그에 올라오는 작품 가운데 오직 조니 자신의 작품만이 그 천재성을 넉넉히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영감은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울적한 마음에 요 앞에 새로 생긴 찻집에 가서 기분 전환 삼아 내키는 데로 카푸치노나 칵테일 한잔을 마시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조니는 그곳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혹시 지금은 모르겠는데 예전 그때 그분의 이름이 그것은 아닌지 약간 궁금하고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름은 바로, 캄파놀로 샤말 울트라 골드! 게다가 있지도 않은 동화 속의 요술 구두인지 시중에 광고가 나오는 고급 하이힐인지 그것의 경쾌한 음감 또각또각, 청량한 선율 또각또각, 어쩌면 그녀의 발걸음 또각또각 바로 그와 같은 진짜인 듯한 환청에 잠깐 시달렸다.

   ⑦
   조니는 그곳에 도착했다. 찻집의 이름은 당연히 범상치 않았다. 왠지 모르게 평범하지 않은 어떤 작명의 영험함 때문인지 그는 거의 고급스러울 뻔 하다 말았던 하나의 농담이 생각났다. 그가 겁나 놀려먹은 다음 괜찮지 괜찮지 넌 대인배니까 라고 깐족거렸더니 상대방은 자긴 그냥 범인, 일반인으로 남고 싶다던 어떤 친구가 생각났다. 가을 바람이 불면, 꽃 피는 춘삼월, 계절의 여왕 5월이든 언제라도 창가에서 사랑과 연모와 애정을 품는 누군가와 함께 차 한잔 마시고 싶어지는 그런 찻집이었다. 당연히 제임스라면 어쩐지 저곳에 들리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는 아무런 근거없는 예감을 나타낼 것만 같은 바로 그와 같은 느낌을 간직한 곳이었다.
   카페 이름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구나. 그것은 이랬다. <지지고 볶고 지지고 볶고>. 조니는 그곳에 들어가면 우연히 그녀 안녕? 노노? 네네를 만날 것만 같은 친애하는 기대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들어갔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릴 만큼 그 엉뚱한 예감은 들어맞지 않았다. 내부 분위기는 그저 그랬다. 시골의 부동산 아저씨, 동네 이장, 은퇴한 세일즈맨, 사연이 있을 것 같지만 표정만 냉랭한 어떤 남자, 그리고 무기력해 보이는 저번주에 이혼한 남자들로만 득실거렸다. 괜한 기대감에 따른 처절한 상실감과 어떤 막연한 동경심의 빛바램을 무마해줄 만한 요소는 이모저모 찾아봐도 아무 것도 없었다. 괜히 술 취한 동네 아저씨 두분이서 말다툼을 하고 말로만 거들먹거리는 분위기를 외면하고 그는 어두컴컴한 정말 으슥한 탁자에 앉아서 주문한 마티니를 마셨다. 그러면서 기쁜 삶에 대한 인생관은 잠시 유보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다른 카페 다 놔두고 왜 하필 이곳으로 들어왔는지 후회막급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인생이 참 기복이 심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첫키스를 아직 경험하지 못한, 약을 한번도 해보지 못한 멋모르는 순진함과 순박한 허영심을 떠올려줄 듯한 순수라는 이름의 우유를 한잔 주문할 껄 그랬나 하는 어떤 사무적인 창작 욕구와 예술적 근성이 근본을 이룬 돌이킬 수 없는 충동감을 뒤늦게 느꼈다. 그리고 그걸 무시했다.
   그 순간 돌연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즉각 그는 자신의 시계도 보고 다른 사람의 움직임도 살폈다. 그러나 이상한 건 없었다. 하지만 계속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은 냇물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리는 것 같은 환청이 자신을 잠식하는 것을 깨달았다. 때마침 믿을 수 없는 묘기를 보는 것만 같은 신기하고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그와 면식이 있는, 있어도 많이 있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인이 찻집 <지지고 볶고 지지고 볶고>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게 아니라 사람이 잠깐 서 있어서 언뜻 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했지만 역시나 아무 일도 없었다. 조니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내는데 일부러 꾸물대는 것처럼 왜 너야 왜 지금이야, 같은 어인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네네였던 것이다. 그가 방방곡곡 찾아다닐려고 하다가 포기한 그녀, 네네! 신통방통한 신기가 풍선껌 단물 빠지듯 싹 가셔버린 한때 잘나갔던 최고의 주술사가 주술 인생 후반부에 내내 허탕만 치다가 최후의 예언을 내렸는데 그것이 묘한 우연의 일치로 딱 맞아떨어진 듯한 일과도 흡사했다.
   「조니, 여기서 뭐해요?」
   「...... ......」
   「왜 말이 없어요? 더위 먹었어요? 아니면 내가 너무 예뻐? 정말 그래요? 날이면 날마다 나보고 못생겼다고 놀렸자나요. 그런데 갑자기 예뻐진 것 같아요? 외모 보고 경리 뽑지 않은 걸 후회한다고 그랬잖아요?」
   「아, 너구나! 오, 너야. 아아, 네네였어. 어떻게 여기서 다 만나네.」
   「왜요? 전 뭐 <지지고 볶고 지지고 볶고> 이런 찻집에 오면 안 되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어! 너 왜 일 그만둔다고 한거야?」
   「누가요? 제가 왜 일을 그만둬요. 여기만한 직장이 어딨다고. 완전 천국이구먼. 진정한 신의 직장이구만. 내가 미쳤어요? 그만 두게?」
   「아니 그게 아니라, 저번에 언제지 나 출장가기 전에 잠깐 일 그만둔다고 했잖아? 내가 너...... 그랬잖아? 어 기억나 안 나?」 그는 찾으러 갈뻔, 찾으러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얘기는 왠지 할 수 없었다. 해서는 안 될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거요? 당연히 뻥이죠. 농담도 못하고 곧이곧대로 정해진 일만 하거나 시와 노래를 모르는 거 질색하시잖아요. 설마 속으신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저 웃겨주실려고? 그게 웃겨요? 하하하하하! 아 정말 우습네.」
   「아 그럼~ 농담이지 농담이야. 그렇다고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싶다는 건 아니야. 당신은 정말 여시 같아요!」
   「그게 뭔 소리에요? 생활 연기 하시는 거에요? 납득이 안 가잖아요 납득이! 왜요? 제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안 들어요?」
   「말 한 번 잘했다, 라고 할 줄 알았지? 비가 와야 무지개가 뜨는 법. 어려운 일 있으면 말 하고 또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소개도 시켜주고 그러렴. 연봉도 부족하다 싶으면 말해, 올려줄께. 어?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는 차마 네네의 일기장을 몰래봤다는 얘기는 할 수 없었다.
   「비는 뭐고 무지개는 뭐에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 수작 부리세요? 언제는 못생겼다면서요? 약주 드셨어요? 댁에 전화해드릴까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정말 웃기는 친구들이라니까.」
   어머나! 조니는 혹시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지는 않을까, 남반구의 어느 섬에서는 일년 중 이맘때 검은 태양이 떠오른다는데 그곳에나 가볼까, 라는 혼자만의 사념에 젖어들었다. 수영장에 풍덩, 이라도 할까? 옆 동네에 <단 한 번만이라도>라는 나이트클럽이 잘나간다는데 거기나 가볼까? 아니, 일 해야 하는데! 장비 알아봐야 하는데! 오오, 블로그에 글도 쓰고 영화 대본도 외워야 하는데! 그런데 툭하면 놀러갈 생각 뿐인 자신이 그는 왠지 불쌍하게 느껴졌다. 나도 일기를 써볼까? 아니면 네네를 우리 무명 블로그 클럽에 영입할까? 아니야. 아니야. 그건 미친 짓이야! 그럴 수는 없는 일이야. 우리가 그 빼어난 상아탑을 어떻게 쌓아올렸는데. 딱히 어디서 인정받진 못했지만 그만한 지성의 전당, 중독된 권위, 빠져나올 수 없는 신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환상의 오아시스를 어디서 찾겠어? 누가 그 보물섬을 공짜로 알려주겠냐고. 그런데 그녀는 뒤늦게 입학해서 무임승차하고 수업료도 안내고 숟가락 하나만 슬쩍 얹겠다고? 어디서 굴러온 호박이야? NC이름이 호박이야? 그런 다음 인기까지 한꺼번에 독차지하겠다고? 아니될 소리. 또 친구들이 네네의 빼어난 미모를 인정하면 어떡해? 그땐 정말 어떡하냐고? 그렇게 된다면, 대체 도대체 난 어떡하냐고! 네네는 어깨뽕 제대로 들어가고 날이면 날마다 날 놀려먹을 꺼 아니야? 눈 한 번 껌뻑하면 내게 깐족거릴 꺼 아니야? 그것도 애교라고. 이쁜 척 인기가 귀찮은 척 난리도 아니겠지. 큰일 나는 거야. 그렇게 되면. 그럼. 그는 그렇게 자기 자신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니는 그후 소녀처럼 일기를 쓸 수는 없고 소셜 네트워크나 블로그는 이미 운영하고 있고 그래서 따로 명언집을 하나 간직하기로 결심했다. 소극장에서 1인극을 하던지 극본이나 소설을 쓰거나 어쩌다 한번씩 섭외가 들어오는 강연에서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개인적 백과사전이라고 하면 좀 어색하고 이름 붙이는 건 자기 마음이니까 환상록을 작성해나가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환─상─록! 신비로운 단상과 창작에 얽힌 고뇌와 혹독한 인간 분석과 발상이 문학에 이르는 과정등을 총망라해서 기록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그 첫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씌여졌다. 두둥~ 빰빠라밤 빰빠밤 빰빠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네 마리...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우린 우아한거 싫어하지. (이건 지울까 말까 하다가 일단 놔두기로 했다)
   여자의 마음은 뻥이다.    
   엄마한테 말하지마.
   오,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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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76

from 소설 2016. 7. 15. 18:21

   ①
   나는 최근에 어느 언덕에 올라갔다. 글을 쓰기 위해서 그랬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래서 나는 새벽에 일어나 접시에 물을 받아놓고 기도드리며 촛불을 켜놓고 그런 분위기에서 글을 서봤다. 그래도 소용 없었다. 대낮에 해변에서 선그래스를 끼고 일광욕을 하면서 모래사장에 엎어져서 글을 써봐도 영 신통치가 않았다. 단연코 무엇이 안될 때는 싹 포기하고 조금 쉬는 것이 좋은 방법이란 걸 오랜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푹 퍼질러 쉬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나는 그냥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사실 그대로 쓰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첫째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 어떤 정량적 데이터와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이상하게 예전부터 차분하게 또 매우 진지하게 글을 쓰다 보면 왠지 모르게 재미난 일들이 발생하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명할 수는 없다. 그건 어떻게 돼도 상관없고, 우선은 실행이 우선이기 때문에 곧바로 나는 집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내가 요즘 친한 사람은 문구점 사장 O씨다. 혹시 내가 옛날 썼던 소설에서 문구점 사장이 다른 사람이라고 썼다면 그것도 맞는 얘기다. 둘 다 틀린 얘기가 아닌 것은 무엇 때문이냐면 중간에 주인이 후자에서 전자로 바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최근 O씨와 자주 만나고 있다. 그리고 전 이름 '정 원한다면' 현 이름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의 사장 멀더는 전에는 친했는데 요즘 그가 너무 유머감각이 떨어져서 서로 연락한지가 오래되었다. 특히 요즘 그는 호시탐탐 주색에 빠져 있고, 더군다나 저질 댄스를 연습하는 걸 보니 어디 자주 가는 NC가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그 인간이 제정신 차릴 때까지 당분간 거리를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화가게 Q양, 으슥한 술집 주인 G씨, 골동품 상점 사장 레이디 제인도 뭔가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또 다른 동네 친구들은 말이 너무 많거나, 말을 너무 잘하거나, 말을 너무 안 하거나 또는 말을 잘 안 듣거나 어떤 비애와 상념과 과묵한 묵상을 떠올리게 하는 용모라거나 수완이 너무 약삭빠르다, 해박한 지식이 부담스럽다, 엮이면 꽤 피곤할 듯 하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같이 자주 만나고 어울리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근래 부쩍 문구점 사장 O씨와 교제를 했는데, 그런데, O씨가 도시에 일이 있다면서 본격적인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갖가지 핑계를 대고 도시로 떠나버렸다. 내가 그에게 심하게 <나를 잊지 말아요> 분위기를 피력했을까? 아니면 당신을 위해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리오 내가 그렇게 비추어졌을까. 실재 그는 도시에 급한 용무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그렇게 도시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어차피 장사가 잘 안 되는 그의 장난감 가게에 별일 없나 한 번씩 들러서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공짜로 꺼내 마시거나 갖거나 놀고 싶은 장난감을 아무거나 가지고 놀면 되었다. 그것이 최근 내 일상의 전말이었다. 그런데,
   아차, 그런데 O씨가 도시로 떠나기 전에 내게 간곡한 부탁을 하나 남겨놓고 떠난 것이다. 그건 무엇이냐면 자기의 동생 시몬이 오기로 되어있는데 자기가 자리를 비우게 됐으니 나보고 자기 대신 시몬과 놀아달라는 것이었다. 길어야 한 이틀 있다 돌아올꺼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문구점 사장 O씨의 동생 시몬이 도착했다.
   잠깐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다. 그건 무엇이냐면 과연 지금 남기는 이야기가 재미있냐는 것이다. 읽기에 즐겁고 기쁠까? 마냥 재미있을까? 썩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괜찮다. 재미없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건 글을 쓰면 뭔가 재미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에 근원을 두고 시작한 사실의 기록과 같은 어떤 동굴 벽화와 비슷한 일이기 때문이고, 둘째 무인도에 같이 데리고 가고 싶은 1인에게 들려주는 허무맹랑한 옛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평범한 일상은 이보다 더 재미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득 떠오르는 흥미로울까 하는 의구심은 무시하고 가는 것으로 간결히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다시 돌아와서 지금 우리 앞에 도착한 시몬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②
   시몬을 소개하기에 앞서 내가 시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특별한 취미는 아니지만 그냥 심심할 때 소일하는 정도지만 그와 관련하여 뭔가 특이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걸 얘기하자면 이렇다. 나는 왠지 모르게 주변에 있는 알고 지내는 지인보다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내가 알고 있는 그 얘기를 했을 때 그분의 반응을 보고 싶고 그것이 매우 궁금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어딘가 모르게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 이 얘기를 했다가는 뭐 그런 걸 가지고 다 놀라고 신기해하냐고 약간 핍박받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히 예상됐다. 흡사 그것과 관련해서는 내가 저명한 미래학자가 된 기분과 비슷했다. 내가 시몬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가 무엇이냐면 바로 이것이다. 즉 사람들이 인터넷 세계에서 이거 저거 구경하다가 클릭 클릭 하다가 어느 일반인의 일상에 관한 사진과 글들을 구경하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니라 내 말은 그 일을 한 다음날에는 꼭, 꼭꼭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사진 어플리케이션에 등록된 누군가의 블로그나 소셜 네트워크를 구경하면 그 다음 날 반드시 그를 직접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주스믹스기를 사서 무슨 쥬스를 만들어 먹은 사진을 올리고, 어디 콘서트에 가서 즐겁게 구경하다 왔다, 강아지 몽군이 내 벼개를 몽땅 물어뜯어서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느 날 산동네 마을에 벽화를 그리러 갔다, 최근 내가 일하는 업계와 관련하여 발표회가 있었다 나는 거기서 아주 묵사발이 됐고 상사에게 호되게 혼났으며 나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휴가를 떠나기로 계획했다는 그런 내용의 글을 보면 나는 그 타인을 당장 내일 만나게 됐다. 멀더 친구랄지, 터미널에서 미술관에서, 개 운동장에서, 식료품점에서 등등. 정확히 몇 번 만나졌고, 어떤 경우에 선별되어 나타났는가를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뭔가 그런 낌새가 느껴진 이후로 나는 그 패턴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남자에서 여자로, 생각이 새롭고 사진도 감각적이고 어떤 호사로운 분위기나 예술적인 심상이 느껴지는 블로그들에서 단적으로 예를 들면, 다이어트 엑스포 무슨 클래식 비키니 부분 상위권 선수의 단독샷을 찍은 블로그로. 거기서 또 약간 진화했다. 그런 사진들을 찍고 댄스 그룹 개별 동영상을 찍은 블로그를 보면 다음날 무대 위의 사람이 아니라 무대 밑의 사람을 만나게 되니까 어떤 연습생을 찾아보고 모델 지망생이나 열심히 활동하는 조연 영화배우의 홈페이지를 찾아보게 되었다. 혹시 만나게 될까봐. 그러나 만나지는 못했다. 만났다고 해도 인사를 나눌 것도 아니고 몸의 굴곡을 대놓고 감상할 것도 아닌데 괜히 호기를 부렸다. 그래서 다시 나는 일반인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다 딱 시몬이 나타났다. 내 앞에 나타났다. 하필 O씨의 장난감 백화점에서 캔 맥주를 퍼마시고 있을 때 시몬이 나타났다. 그런데 녀석이 나타나자마자 그런 일들이 정말 거짓말처럼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 이상한 현상이 지금 사라졌기에 다행이지 조금 늦게 사라졌고, 난 또 그걸 시몬에게 얘기해준 후 사태를 지켜봤다면 역시나 양치기 소년이 되었을 게 뻔하다. 원래는 소년, 그러면 사춘기도 생각나고 변성기도 떠오르고 코메디 영화와 첫사랑과 청춘과 사랑 노래와 청소년 드라마와 연애시가 떠올라야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소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양치기 소년이다. 둘째는 몽정. 맙소사! 나는 거짓말쟁이 어른인 것만 같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시몬, 시몬, 시몬을 들먹거려놓고 시몬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다. 아예 이 긴장감, 이 고조되는 궁금증, 어떤 막연한 낭만, 뭔가 감추어진 비밀스런 귀족적 신비감, 어느 단계에 이르러 나타날 당혹스런 황홀감, 내내 기대되고 내내 심심하고 재미없지만 알 수 없는 까닭으로 기다려지는 그 돌발적인 환희, 그것에 대해서 좀 더 심층 탐구하고 두근두근 설레고 애타는 마음을 키워갈까? 그럴까? 일말의 감정은 그러고도 싶지만 아무래도 욕을 바가지로 얻어들을 것 같아서 참기로 하자. 시몬도 시몬이니까, 무대 뒤에서 뭐 벌 세우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시점에 등장시키기로 하겠다.
   적당한 시점? 기습 키스? 뭐가 적당한 시점이고 어떤 게 시의적절한 신체 접촉이란 말인가. 그런 거 모르겠고 그냥 지금 딱 그가 등장한 것으로 한다. 내가 시몬을 만나는 날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그 전날과 전전날과 또 전전전날에는 비가 많이 왔는데 시몬이 도착한 날 그날은 맑게-는 아니고 약간 흐리게 개인 날이었다. 나는 그날 시간이 정지된 줄 알았다. 왜냐하면 한두 가지가 아니라 그것을 초과하는 기이한 현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서 구했는지 선물 받았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 구석에 놓여진 시계가 정지되어 있었고, 거리에 나가면 보이는 대로변 조형물에 붙여진 시계도 정지해 있었다. 게다가 거리에 사람들이 한 명도 없었다. 더군다나 바람이 일순간 갑자기 정지했다. 뿐만 아니라 새들도 날아오고 날아가지 않았고, 결국 내가 잘못 봤던 정교한 실상 크기 강아지 인형도 짓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하면 시간이 정지된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어, 이거 뭐야?> 그러면서. 그때 딱 시몬이 등장했다. 허걱! 뭔가 나는 내가 뭔 죄를 지었을까 덜컥 겁이 났다. 잠깐은. 나는 그가 미래에서 짜잔하고 등장해서 막 슬로우모션으로 걸어오는 듯 느꼈다. 그러나 그 느낌은 잠시 후에 사라졌다. 왜냐하면 멋진 옷을 입고, 수려한 외모와 뭔가 고급스러운 분위기, 도저히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 느낌, 목젓이 없는데 가슴도 없고, 언뜻 보니 반대로 가슴도 있긴 있고 목젓도 있긴 있는 듯 보였는데, 뭔지 모를 고전적이며 복고풍의 귀족적인 고상한 고고함은 갑자기 파파팍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입을 염과 동시에!
   시몬은, 시몬은 수다쟁이였다. 그러나 그건 내가 잘못 알았던 것이고, 그는 매사 매번 달변가가 아니라 때에 따라서만 열변가였고, 장난꾸러기였으며, 무모한 도전가이자 영화 주인공식 도망자, 알고 보면 아무것도 없는 속빈 강정형 탐험가이자 거짓말쟁이에 그냥 천진난만한 소년이었던 것이다. 물론 미리 도시로 떠나기 전에 시몬이 이렇다는 걸 O씨가 다 얘기해줬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들은 것 같다. 넘어가자. 들은 그대로 시몬은 그랬다. 우선 나는 그의 짐을 내 집에 놔두기 위해 우리집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는 우리집을 보더니 굉장히 놀란 듯, 신기한 듯, 의외라는 듯 쳐다봤다.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제임스, 어떤 모양의 집을 좋아해요? 천혜의 자연 경관 속 여유롭게 살아가는 하늘과 하나가 된 듯한 스타일? 미니멀리즘 스타일의 개방적인 콘크리트 주택? 아니면 삼각형의 협소한 대지를 현명하게 극복한 주택? 또는 산뜻함은 더하고 불편함은 빼는, 그러면서도 오직 요리를 위해 주방에 모든 것이 최적화된 집? 목조 주택? 거실 창으로 바다가 보이는 집? 좁은 공간은 어둡다는 편견을 깨는 틈새 주택? 어떤 형식을 선호하나요?」
   「어, 난 청소하기 쉬운 집. 지금 여기! 넌 그런데 건축 관련 일을 하니? 말하는 게 아주 청산유순대? 설마 거짓말도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겠지?」
   「아~이 그럼요. 하지만 때에 따라 감언이설은 적당히 필요한 법이죠. 아, 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에요. 전-여자친구가 그쪽 일을 해서 억지로 습득한 지식이 남아있어서 그냥 써먹어 본 거죠. 헤헤!」
   싱거운 녀석,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넌 몇살이니, 이렇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넌 요즘 무슨 책을 읽니, 라고 오랫만에 만나는 부모의 심려를 선뜻 떠올릴 듯한 우를 범하지도 않았다. 또한 만나자마자 우리 술 한 잔 하자면서 남자 대 남자로 속 터놓고 대화를 나누자며 사나이의 순정을 자극하는 호의와 어리석음의 중간쯤 되는 애매한 심기를 밝히는 일도 잘 참았다. 그러나 그는 정녕 매우 특이한 인물임이 분명했다. 옷 입는 것도, 상류층이다. 그는 빈손으로 등장하지 않았고 웬 포도주 한 병을 건네는 의례적인 예법을 생략하는 실수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나도 심심했고 그도 여기에 놀러온 것이며, 나는 O씨와 시몬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기억했고, 여유 시간 동안 분위기를 말랑말랑하게 만들면 그만이며 담소도 나누고 적당히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내 임무는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는지는 차차 지켜보기로 하고 우선 나와 시몬, 우리는 격식을 갖추되 말은 편하게 하기로 합의를 봤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물어볼까, 를 생각했다. 먼저 그와 함께 나는 인근 공원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나는 시몬에게 넌 왜 이름이 그 모양이냐, 어디 가봤냐, 여자는 몇 명이나 사귀어봤냐, 너는 사랑을 아느냐, 혹시 너와 내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가 어느 불량배와 맞서게 된다면 넌 나를 보호해야 되느니라, 이런 걸 묻고 동의를 구하며 윽박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을 했냐고, 내가 봤을 때 자네는 악기 2개 정도는 기본으로 다루고, 스포츠에 일가견이 있으며 꽤 멋지고 바쁜 인생을 살고 있을 것 같다는 달콤한 듣기에 좋은 말을 속삭여주었다. 진짜 귀에 대고 하지는 않고. 그는 그동안 몇몇 일을 해봤는데 최근엔 일러스트레이터였다가 갑자기 그 일을 그만뒀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더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가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그가 나를 경계하는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지 그는 무척 조심성을 띄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 온정 어린 대화가 싹틀려하다가 다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 자식이 속으로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길래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있는 거야, 이런 의뭉스러운 녀석 같으니라고, 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시몬에게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라고 물어볼려다가 덜컥 그가 값비싼 음식이나 구하기 어려운 요리를 답하면 어쩌나 하는 측은한 마음 때문에 이렇게 묻고 말았다.
   「게임, 좋아하니?」
   「아니요.」
   「공놀이는 좋아하니?」
   「아니요.」
   「만화 보는 건?」
   「별로...」
   「소셜 네트워크는 좀 하고?」
   「거의... 안 해요.」
   「어때, 스포츠카 운전하는 건?」
   「그것도 별로.」
   「그럼 찻집에서 차 마시기, 노래부르기, 춤추기? 드라마 보기? 에잇, 다 재미없네.」
   「......」
   「이거도 아니요 저거도 아니요. 넌 뭐 좋아하는 것도 없냐? 간식을 주면 낼름낼름 받아먹기만 하는 고양이처럼 대답하는 것도 시큰둥하고 젊은 놈이 뭐 그렇게 기운이 없어? 어휴 이 쪼그만... 등치는 커 가지고 속에 든 건 없고, 아휴 정말~ 한심하다 한심해~ 넌 커서 대체 뭐가 될래? 어? 그래 가지고 뭔 큰 꿈을 꾸겠다고, 사랑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냐?」 이건 말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되는 격조를 갖춘 생각만 했을 뿐.
   그러다 시몬은 갑자기 해변으로 가자고 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햇볕을 쐬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근처 가까운 해수욕장에 갔고, 파라솔 밑에서 엎어졌다. 나는 책을 읽었고, 시몬은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날 따라 해변에는 멋쟁이들이 많았다. 나는 예전에 그런 경험이 있다. 내가 가는 곳은 있던 사람도 가버리고 그 근처에 일절 인파가 접근하지 않는 이상한 일을 마주친 적인 있었다. 그런데 시몬은 그와 반대로 사람을 끌고 가는, 끌어모으는 그런 신기한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겐 척력, 그는 인력 그리고 나머지 뭔가 있는 듯한 느낌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러다 시몬은 갑자기 저기 가는 어떤 아가씨가 잊혀진 그녀가 아닌가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그는 그 일을 정확히 3번 반복했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서 삼세번. 처음에는 그가 뭐라고 묻길래 아가씨 두 명이 그냥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가버렸다. 두 번째는 그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는데 시몬이 계속 추근대고 그녀들을 귀찮게 하자 시몬이 말을 걸었던 일행 가운데 어떤 아가씨가 시몬의 따귀를 때렸다. 철~썩! 세기는 좀 약했다. 그냥 경고성이었다. 그리고 드디여 세 번째는 일행에서 뭔가를 사러갔던 건장한 남성들을 잘 살피지 못한 불찰 때문에 그는 행패를 불러일으켰고, 주변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분위기를 깼고, 험악한 어떤 전조 단계에 이르렀다. 나는 도망칠까 말까, 잠깐 고민하다가 급히 뛰어가서 어떻게 어떻게 겨우 중재하고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아무래도 시몬은 허당 같았다. 방금 보여준 행동은 허세였다. 보나마나 뻔한 허식일 것이다. 우린 허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남자였던 것이다. 나는 허상을 꿈꾸고 그는 그 허상을 내게 보여준 소년이었다. 혹시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나의 추측은 어김없이 빗나가버렸다.
   상황은 마무리되었고 대충 왜 그렇게 소란이 일었는지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지만 나는 시몬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확인을 하고 뭔가 안심을 하거나 또는 반전에 따른 흔한 예기적 술법이 아닌 것이 드러나서 붉어지는 작은 즐거움을 부수적으로 얻어보고자 노린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시몬에게 간단히 직접적으로 물어봤다. 굳이 저 아가씨들을 꼬시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냐고, 왜 갑자기 그런 충동이 일었냐고, 그와 같은 자연스러운 습벽은 후천적으로 익숙해진 것이냐고, 바로 그렇게 물어봤다. 역시 시몬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또 나도 허탕을 치지 않은 것이다. 시몬 왈, 그는 그녀들에게 자기가 개발한 놀라운 화장품을 팔고 싶었다는 것이다. 상품은 그야말로 획기적이고 놀라운데 최근 들어 매출이 발생하지 않아서 고민이었는데 그걸 해결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미 자기 돈으로 선주문해서 대량구매를 해놓고, 봉급과 특별 수당을 먼저 챙겼다는 것이다. 그는 미모의 여인들에게 노화의 방지 비결을, 그녀들의 보디가드이자 남자 친구들에게는 초단기에 거액을 벌어들일 수 있는 주식 옵션 투자에 대해서 장황한 설명을 시도했는데 때와 장소 그리고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갔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강의실에서 배운 것을 현장에서 시도하면 그게 잘 안 된다는 것이 의문이라고 했다. 흔히 아는 상업적 사업 수완에 대한 실망감을 그가 말했으나 나는 '그럼 그렇지' 라는 일상적이고 무신경한 기분에 젖어들지 않고 오히려 얘가 그냥 단순히 여자를 꼬실려고 했던 게 아니었구나, 지금 그는 어려운 길을 걷고 있지만 분명 대성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미약하나 그 길은 열려있다는 어떤 예상 외의 기쁨을 잠시라도 누렸던 것이다.
   그리고 시몬은 나와 별다른 일 없이 희희낙락하지 않고 뭔가를 찾고, 기다리고, 탐색하며 궁금해만 하다가 시간을 보낸 후 그는 짐을 챙겨서 떠났다. 몇 가지 허례허식을 같이 경험할려고 했는데 약삭빠르게 눈치 채고 도망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야?)

   ③
   그후 나는 O씨의 문구점에 가서 혼자만의 공상에 빠지고 소설 구상에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소설의 플롯을 정밀히 기획하고, 어떤 이야기를 쓸까,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무엇보다 일타쌍피를 노려야 하는데 어쩌면 좋을까를 고심하던 바로 그때! 예상보다 빨리, 급작스럽게 문구점 사장 O씨가 가게로 들어섰다. 그는 미리 도착 계획에 앞서 곧장 불시에 돌아오면 뭔가 이색적인 행동을 내가 자기 가게에서 하고 있지나 않을까, 또는 자기가 나를 놀라게 깜짝-쇼를 연출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도로 연락없이 들이닥쳤다고 했다. 재미는 없었다. 이걸 가지고 과감하다, 남달리 통찰력이 뛰어나다, 순전히 고도로 발달한 직관력 때문이다, 나는 여지없이 구설수에 말려들었다 라고 하지는 않고 단순히 O씨는 애꿎다, 짓꿎다, 그는 장난치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보면 된다. 나도 특이한 일을 벌이지는 않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이다. 쓴 미소와 허무함은 남았다.
   그런데 한 가지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그 무렵, 문구점으로 어떤 수려한 외모의 우수를 간직한 듯한 여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비정상적으로 가슴이 컸다. 그러나 그건 어릴 때 어디에서 살았다, 밀크쉐이크를 좋아한다, 샤워를 하루에 2번 정확히 30분 알람을 맞춰놓고 한다, 팬티가 30개 있고 매일 다른 팬티를 입으며 한달에 30일이 넘는 달의 남은 하루는 노팬티로 지낸다, 와 같은 기호나 타고난 습벽과 어떤 구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살면서 안고 가야할 시선과 어딜 가도 주목받는 부담감은 물론 실지 전방으로 가해지는 압력과 무게와 위-아래로 작용하는 중력 때문에 고생하는 측면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당신은 정말 브래이저와 같은 남자다. 문제는 그 황홀한 착용감의 브래지어가 금새 탈이 난다는 것이지만. 아무튼 알고 보니 그녀가 바로 O씨의 동생 시몬이었다. O씨가 장난감 백화점을 비울 동안 내가 잠시만 같이 놀아줘야 할 상대. 꿈의 손님. 인위적이고 억지스러운 인연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호의를 베풀고 약간의 호혜를 요구해도 썩 부자연스럽지 않을 사이. 그런데!
   「이거 웃을 일이 아닌데!」
   뭐야? 그럼 내가 아까 만난 시몬은 누구야? 나는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했다. 설명이 끝났다.
   O씨가 말하기를, 그 시몬은 자기도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말했던 시몬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시몬이라고 한다. 또 내 동생 시몬은 발음은 시몬이지만 철자와 발음이 유사해서 그렇지 시 - 몽이라고 부르고, 시 - 몽이라고 써야한다고 한다. 영락없이 나 혼자 엄한 사람을 두고 시몬이라고, 아니 시 - 몽이라고 착각했던 거다. 더군다나 아까 그 시몬은 자기가 시몬이라고 당당히 내게 밝히지도 않았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시몬이었는데 시몬이었다. 그가 시 - 몽일줄 알았는데 시 - 몽이 아니었다. 나는 뭔가 가슴 벅차오름을 느꼈고, 시간이 구부러진 듯한 어지러움과 공간이 겹쳐진 것만 같은 개탄, 오락가락한 정신과 어떤 현실에 대한 불신감을 느꼈다. 나 혼자 속이고 속았지만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다. 나는 분명 일정 시간 이전에 그의, 가짜 시몬의 모호한 성정체성에 대해 뭔지 모를 기이함과 애착을 느꼈고, 약간의 기대와 뭔가 재밌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까지 감지했다. 그러나 그건 바보짓이었다. 헛다리 짚은 것이다. 괜히 가만있는 남의 다리를 긁은 것이다. 그것도 피나게, 벅벅! 차라리 그 인간에게 일확천금을 버는 비법에 대해 캐묻고, 나는 가짜 시몬의 제 1호 수제자가 되어서 스승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지금 이 실소에 대한 당사자가 되지 않았음이 어쩌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고, 무척 심란했으며, 허둥대기만 하고 이루지도 못할 꿈만 찾아 돌아다니는 이상주의자가 된 듯한 그런 광증의 주인공 그 표본이 된 듯한 환각에 어느덧 나는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이 내 마음은 다시 정상적인 희노애락에 반응할 수 있는 평상심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왜냐하면 진짜 시몬, 다시 말해 시몽, 시 ─ 몽이 간다고 인사하며 떠났기 때문이다. 극구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말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항상 한발 늦거나, 기왕지사 큰길로 가면 샛길에서 좋은 일이 생기거나, 꿋꿋이 참았다가 딱 한번 옆문으로 들어가면 내가 칵테일 값을 지불하고 나면 그때부터 모든 제품은 반값 할일이라면서 정문을 넓히는 것만 같다. 반신반의...하지만 뭔가 머피의 법칙이 작용하는 듯 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다. 의심할 수 없는 일상성의 원리이긴 하지만, 그러나, 모두 다 감수할 수 있다. 모두 넉넉히 품어 안겠다. 불세출의 블로그 원리를 위해서는. 하지만 간출이면, 쉽게 말해 거의 좋다 만 거다. 응당 열 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어디 뚜껑 한두 번 열려보나. 원래 사는 건 그런 거다. 골이 깊으면 또 언젠가는 환희와 환락, 유흥과 쾌락의 파도타기를 즐길 날이 오게 되어 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는 법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게 세상이니까. 그나저나 아쉽기는 조금 아쉽다. 그러나 사기는 당하지 않았다. 이제 뭔가 전말이 밝혀지는 느낌이 드는 건 내 행색 때문인 듯 하다. 아까 가짜 시몬이 뭔가 캥기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얘는 설득하고 주문을 외우고, 구슬리고 최면을 걸어도 딱 봐도 나올 게 없겠구나, 그렇게 내다봤나 보다. 뭐 잃어버린 게 없으면 그만이지만 어째 약간 기분이 나쁠락말락 하는 쎄한 분위기가 없잖아 있다. 딱히 웃긴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산을 탕진한 과오도, 기분 나쁜 실수도, 미녀와의 데이트를 놓친 설움도 아닌 듯 해서 괜히 삶에 대한 통합 복잡성만 늘어난 느낌이다.
   그렇게 O씨와의 친교는 별일 아닌 별일과 함께 어느 만큼 휴지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후 O씨는 장난감을 많이 팔게 됐고, 웹사이트도 운영하며, 장난감을 직접 만들고 디자인도 한다는 후문이 전해졌다. 특히 어른용 장난감 분야에 심취해서 때론 식음을 전폐하며 시간을 쪼개 쓰면서 거의 상업과 예술이라는 쌍두마차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멀더에게 들었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인생의 호시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제 몇의 전성기가 아니라 처음 만난 환희에 빠져서 그것이 환희인지 헛경험인지 분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장난감 백화점은 그야말로 최소한 지금은, 환락궁이었다.

   ④
   한편 그와 반대로 나는 <경사났네 경사났어>라는 찬사와 축사와 꽃다발을 받지도 못하고, 딱히 자축할 일도 새로운 관심사도 없이 심심한 일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엇비슷하게 보내는 시간과 삶이라서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었다. 혼자서 카드놀이를 하고, 혼자서 TV를 보고, 혼자서 텔레비전을 끄고, 혼자서 책을 읽고, 혼자서 음악을 들었다. 누가 귀찮게 하지 않아서 너무 좋았다. 그런데 동네가 너무, 너무 조용했다. 지나다니는 고양이나 개도 없었다. 이럴 때 찾아오면 반가운 걸로는 많겠지만 그 가운데 딱 두 개만 꼽자면 첫째, 편지나 엽서 그리고 둘째, 누구야 어디 가자 하면서 집 앞으로 뜬금없이 4인승 컨버터블을 친구 세 명이서 타고와서 남은 자리는 널 위해 남겨뒀어 캬~ 하는 거다. 캬~!
   그러나 엽서 켕이는, 엽서는 커녕 엽차도, 엽으로 시작하는 어떤 단어도, 염문도 뭣도 없었다. 물론 글도 안 써졌다. 그렇게 뚱하고 있던 찰나 마침 나는 동네에서 어떤 비밀을 가득 품은 듯한 은둔형 예술가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O씨에게도, 멀더에게도 약간 말을 듣긴 했는데 통 아는 정보가 없다던 인물이었다. 동네 주민과도 교류가 거의 없고, 옷도 이상하게 입고 다니고, 이름도 본명이 실장님이라고 한다. 그 실장님이 뭐가 아쉽다고 나 같은 삼류소설가, 거의 놈팽이에 가까운 날건달에게 초대장을 보냈을까, 모를 일이다. 게다가 초대장도 특이했다. 우산 만한 봉투를 내 차 와이퍼에 끼워놓은 것이다. 그런 일을 직접 할 리는 없고, 나도 수많은 영화와 제법 우스운 드라마를 많이 봤기 때문에 이분도 어디서 본 건 있구나, 교양미가 빼어나고 그야말로 상식을 갖추고 품위가 드높겠구나 라는 것을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여성 편력은 모르겠고 뭔가 재력이 풍족할 것만 같은 낭만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그 재력을 그와 내가 사이좋게 나누어 갖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보통 규모에 따라 시골도 시골 1, 2, 3으로 나누어 보면 시골 1, 2도 거의 도시와 비슷하게 굴러간다. 즉 동네 사는 사람도 대체로 타인이다. 누가 어디 살고 누가 가슴에 털이 많이 났고 누가 복권에 당첨됐네 누군 재산이 거덜났네, 그것을 하나도 모르고 산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사는 시골은 시골 3이었다. 그래서 동네 청년과 중년들끼리 우애가 좋았다. 누구 집 개가 개... 몇 마리를 낳았다네 뭐라네 개인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지냈다. 그러나 그곳에 이방인이 나타난 것이다. 기간은 한참 됐다. 하지만 그 신비감이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아서 그, 실장님이 속인인지 기인인지 그것도 아니면 허당인지 그것을 알 수 있는 정보나 근거를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가만 있자. 멀더 외에 나랑 친한 친구들이 또 누가 있드라. 아무래도 이건 갑자기 내 기억력이 일시적으로 곤두박질쳤거나 내가 좀 더 교우관계에 신경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지표로 여겨지는 일임에 틀림없다. 아~! 그래서 실장님이 나를 초대한 것일까? 동-병-상-련? 동네에서 인기 순위가 바닥권이고, 상당히 심심하게 사는 듯 하고, 이를테면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안다고 측은지심? 또한 멀더에게 듣기로는 실장님씨는 동네에 정착한지 기간이 꽤 됐다고 한다. 날 찾는 동네 청년들이 별로 없기에 망정이지 살짝 바쁘기라도 했다면 당연히 그는 날 초대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자기는 동네에 오래 살았는데 여기저기 성금도 알게 모르게 많이 내지만 인색한 스크루지요, 난, 난 뭐 그건가?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괜히 밉상으로 찍힐 수도 있었는데, 더없이 사람들과 친하고 바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나름 소설 쓴다고 칩거하랴 일광욕이든 낚시든 새로운 취미가 생기면 하나만 끝까지 하느라 사방팔방 나다니고 나대지 않아서 썩 다행인 일이었고 그래서 안심이 된다. 그런데 뭐 선물이라도 사가야 할까? 빈손으로 갈 수야 없는 일이지만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으니 적잖이 난감한 일이다. 내 정보력이 이 모양이라니, 맙소사! 뭐 발이 넓고 촉이 좋다고 글이 잘 써지고 소설의 문학적 상상력이 월등히 뛰어나도록 삶이 새롭고 흥미로워지는 것도 아닌데 그냥 엄살 한번 피워본 것이다.
   일단 혼자 고민하기에 적적하니까 몇 가지 어려운 점을 풀어놓고 봐야겠다. 우선, 그는 여자가 있고 그것도 젊고 예쁘고, 그런데 거기서 그녀가 날 유혹하면 어쩌지? 어머, 어떡한담? 음, 그건, 글쎄... 그건 그때 가서 보자. 그리고 나는 선물로 꽃다발을 가져가기로 했다. 그리고 위스키 작은 거 한병을 안주머니에 챙기고 분위기를 딱 봐서 꺼내든지 아니면 꺼내지 않든가 해야겠다. 그런 건 살면서 많이 해봤다. 항상 그랬다. 국어 시간에 수학 숙제 하고, 소풍날 탐험을 하고, 졸업식 전날 술 엄청 마시고 그 다음 날 뻗기. 추이를 지켜보고 넘버 쓰리, 불어서 펼치는 사람 크기 풍선 인형을 꺼내든지 말든지 할 꺼다. 그 외에 제 4, 제 5 계속 이어지는 건 일도 아니지만 너무 거추장스러우니까 긴밀히 멀더를 부르든가 멀더가 바쁘면 다른 친구를 부르면 될 꺼 같다. 난 지금 나 초대받았어, 그 기대감과 흥분과 도취감을 묘사하는 것만으로 날이라도 샐 꺼 같다. 동틀녁에 알몸으로 동네 한 바퀴, 세 바퀴 반이라도 거뜬히 돌 수 있을 듯 하다. 하여튼 보면 항상 초반에 기세는 좋고, 초반에 체력도 빵빵하고, 초반에 의욕도 충천하지만 문제는 그게 오래 못간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환경에 말리고 주변에 엮이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더라도 언제나 기분을 새롭게 하고, 각오를 재설정하며, 한 고비 넘고 나면 여행을 가든 술을 혼자 퍼마시든 재충전의 즐거움을 기다리고 누리자고. 나는 언제까지나 소년이고, 때로는 초딩, 항상 미성숙, 모든 게 서툴고 모자라도 딱 하나 환상 소설의 영감에 대하여 꿈에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그분에 대한 기다림과 그리움은 지치지도, 질리지도 않고 오히려 배가 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괜히 나의 들뜬 기분을 강조하여 그분의 미스테리함, 정체불명의 실장님의 마법적인 동화적 분위기만 고취시킨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곧 그의 집에 대해서 또 그에 대하여 털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무엇을 거치고 어찌하다가 만났는가, 는 모두 생략하겠다. 나는 실장님을 만났다. 그의 집은 한마디로 데이비드 호그니의 그림과도 같았다. 딱 그걸 모델로 만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만화영화에서 뚝딱 튀어나온 듯 보였다. 나는 실장님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잡고 대체 왜 날 초대했냐고 따질 수는 없었다. 간략히 그에 대해 묘사하자면 이와 같다. 그는 전혀 연예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사랑스럽다, 이런 말이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도 무척 단순한 성향의 소유자인 것 같다. 나도(독자도) 뭐에 빠지면 하나만 하는데 그는 진정한 남자 같았다. 왜냐하면 방 하나에는 의자만 꽉 차 있고, 또 다른 방 하나는 빈 맥주 캔으로 꽉-꽉 차 있고, 사진첩을 보니 웃고 찍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을 좀 아는 듯 한데 그런 느낌이 있어서 나는 그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구르는 돌, 롤링스톤즈의 가사를 얘기하니까 겉으로 아는 체 하는데 속으로는 모르는 것 같다. 나도 특기가 수박 겉 핥기니까 그가 지식을 깊게 물고 늘어지면 그것도 별로 좋은 장면은 아니기에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그리고 그의 집에 딱히 숨겨지고 비밀스런 뭔가는 전혀 없었다. 괜히 기대만 잔뜩했고, 실망감 엄청 컸다. 그러나 항상 결과가 그럴지라도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똑같을지언정 그 패턴에 변화를 줄 생각은 없다. 전혀 없다. 오히려 그게 좋다. 바보 같다. 어쨌든 내 예상이 들어맞았다. 그는 그냥 동네에서 존재감이 없으니 사람들과 좀 어울려 지내야겠다는 심정으로 나를 불렀고, 자신의 수줍은 성격도 보여주고 호탕한 기질과 약간의 호색적인 마초 성향도 엿보여주고 일부러 빈틈을 많이 보여서 동네 청-장년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서 차를 마시고 카드놀이를 하고, 물장구치는 정도로 수영을 하고, 명화를 감상하고 차후 다시 만나기로 약조하고서 거기서 나왔다. 걱정 말라고, 문제도 아니라고, 어디 그런 게 일이나 되냐고, 누구 누구 누구랑 어울리면 게임 끝난다고, 내가 미리 씨를 뿌리고 잡초는 밟고 열매를 거둘 날짜도 받아놓겠다고 그를 적잖이 안심시켰다. 괜히 그렇게 그를 구슬리다가 너무 멀리간 듯 했지만 꺼낸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가 바보가 아닌 이상 내 말을 다 곧이곧대로 믿지도 않을 것이니까 괜찮을 것이다. 적당히 가감해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역시나 나는 별일 없이 실장님의 집에서 나왔다. 꼭 별일 있기를 바랬던 건 아니었으니 뜨뜻-미지근했다는 그런 감정이 슬쩍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말했으니 됐다.
   나는 집에서 몇 날 며칠 푹 쉬어도, 일광욕을 해도, 서점에 가고 극장에서 영화를 봐도 뭔가 울적하고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를 느꼈다. 평범한 주민을 괜히 특별한 신사요, 사연이 있는 남아, 어쩌면 돌아온 탕아일지도 모른다고 오해를 했기 때문에 예정에도 없던 투덜거림을 동반한 답답한 애잔함에서 쉽사리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번 기분을 타면 그 흐름이 꽤 이어지는 게 누가 몰래 우리집에 부적을 숨겨놓은 듯한 기분이다. 보통 나이값 하시는 어른들은 잘, 여간해서 잘 하지 않는다는 사서 고생하기, 그걸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핸드폰 전화번호를 뒤적거려도 그다지 연락하고 싶은 사람들이 없었다. 친구들도 다 멀리 살고, 조금 친해진 지인들도 모두 바쁜 듯 했다. 오늘은 신나는 토요일인데 도통 신이 나질 않았다. 놀고 싶은데 어떻게 놀지 모르는 범생이, 꼭 그것이 된 느낌이다. 그 영화가 뭐였지? 나도 꾀병을 떠안고서 자진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해볼까? 그러다 멀쩡한 사람 진짜 이상해지면 어떡하지? 그건 안 하는 게 좋겠다.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그리고 나는 삼류소설가, 만족한다. 키우는 애완동물이 없으니 녀석을 산책시키다가 우연히 운명처럼 새로운 나의 추종 세력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톰도 없고 제리도 없다. 괜히 동네 산책하다가 문닫힌 동물병원 바깥에서 유리창 너머로 내부를 막 흘낏 흘낏 들여다보곤 한다. 새 옷을 입고 싶지도 않고, 멋진 선물을 타인에게 들이댈 위인도 주위에 없다. 이럴 때 특효약이 있긴 있는데 그건 좀 비겁한 방법이다. 억지로 쓰면 탈난다는 말이다. 그건 무엇이냐면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서 한 달 또는 일 년 열심히 일하고 온갖 괴로운 소리 여기저기 다 지르고 알리고 그러다가 전형적인 모습으로 슬프게 직장을 때려쳤다면서 평소에 연락 한번 안 하던 사람에게 새벽에 전화해서 불러내는 것. 다 부질없는 짓이다. 괜찮은 직장? 들어가기도 힘든데, 들어가지도 못할 꺼면서 미리부터 들어갔다 때려치울 생각을 하다니, 너무 미련한 짓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래서 난 과거에 좋은 직장에 못들어간던 것이다. 그러나 낙오 때문에 지금 삼류소설가가 된 듯 하니 좋은 일이긴 한데 음 좋은 일이라고... 좋게 생각해야겠다. 뭔가 깜찍하고, 뭔가 매력적이고, 뭔가 두근거리고, 뭔가 막 엉덩이를 들썩~들썩~하게 만드는, 뭔가 뭔가가 있을 것만 같고 그런 게 뭐가 있을까? 없다고? 그렇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혹시 음악을 듣지 않고 살기 때문에 삶이 이렇게 달리의 그림처럼 녹아내리는 것일까? 모르겠다. 다이어트는 안 해도 된다. 기가 막힌 음식점은 썩 땡기지가 않아. 새 옷도 귀찮아서 사기 싫다. 만사가 귀찮다. 어디 발 디딜 틈이 없는 인기 폭발 분위기 좋은 행사에나 가볼까, 갈만한 데가 없다. 일단 오늘은 집에서 TV 채널을 돌리다가 영화를 보고 술 마시고 그런 후 자야겠다.

   ⑤
   아~ 깨어났다. 꿈을 꾸긴 했는데 그 꿈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 왠지 모르게 상쾌하군, 어딘지 개운하다, 그와 같은 약간의 고조감을 느끼지 않았고 한마디로 찌푸둥했다. 그래서 나는 불현듯 그게 궁금해졌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아침 햇살이 나를 반기고 세상은 아름답고 오늘은 어떤 기쁜 일이, 무슨 즐거운 놀이가,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손님과 신기한 일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바로 이런 생각을 하는 친구들, 그분들은 대체 뭔 신경세포가 발달했기에 뭔 놈의 선천적인 기질 때문인지 그렇게도 마음이 둥둥둥 떠다닐까, 약간 의아한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러다 말았다. 왜냐하면 살면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많이는 아니고 어느 정도, 어느 정도는 아니고 몇몇, 몇몇...이라도 있었나 모르겠다. 점점 줄어들더니 급기야 생각나는 사람 하나 없다. 하지만 TV에서는 본 것 같다. 아무튼 십중팔구 그런 꽈는 허당이다. 아니면 사람이 가볍다. 처신이 진중하지 못하다. 입도 무겁지 않다. 남의 허점과 비밀을 사방팔방 다 떠벌리고 다닌다. 아니면 뭘 모른다. 아니면 자기 자랑만 한다. 아니면 말이 안 통한다. 아니면 거울만 본다. 아니면, 아니면? 꼭 꼬마들이 설명을 해주면 조금 귀찮게, 약간 짜증이 날듯 말듯, 슬슬 신경질이 날까 말까 하게 계속 왜─왜─왜 라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어쨌든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물을 마시고, 창밖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새소리를 듣고, 동네를 산책하는 강아지와 대화를 나눴고, 시상을 떠올리며, 악상을 추적하다가, 문학적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대하며 향긋한 커피를 마셨다. 나는 그렇게 고상한 자세로, 뭔가 햇빛의 각도와 바람의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세련된 불만과 어떤 근사한 예술적 착상에 대하여 생각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회사 경리녀 꼬셔서 삐─>라는 제목의 뭔가 음험하고 응큼하고 눅눅할 것 같지만 그게 다가 아닐 것이란 예감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시선과 관심을 끄는 것만 같은 에로비디오를 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 순간 폴에게 전화가 왔다. 폴은 내가 최근 가장 자주 만나는 친구다. 녀석과 만난지는 얼마되지 않았는데 상당히 끌리는 구석이 있고, 다방면으로 재주도 좋고, 성품도 좋고, 말도 잘하고, 무엇보다 사람이 좋았다. 인성이 바르다는 뜻이다. 우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특히 녀석은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얘를 만나면 항상 새로운 지인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건 어쩌건 그렇게 끊임없이 막연한 새로움을 직면할 수 있다는 것도 뭔가 그럴싸한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확률상 잔잔한 가운데 튀는 위인도 간혹 있을 수 있는 법이다. 나도 뭔가 바쁘고 젊음에 가까워진다고나 할까, 이 친구와 같이 있으면 환생이란 여동생과 친분을 쌓은 듯 지내게 되고, 회춘이란 시를 지으며, 청춘이란 옷을 입고, 로맨스라는 단편소설도 구상했다가, 무궁무진한 우아함 그런 이름의 특급 열차에 무임승차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고나 할까, 그런 도취감에 물들게 되는 그와 같은 신비감이 반짝반짝, 경이로운 설레임도 반짝반짝, 입고 있는 옷도 어두운 면 백퍼센트지만 단추 부분만 반짝반짝 빛나는 최면에 빠진 듯한 경이로움을 아주 극미하게 이끌어 내는 친구였다, 폴은! 그렇다고 폴이 이렇게 한적한 시골에서 썩기엔 아까운 물건이다 라는 말이 아니라, 또 시골에서 지내는 게 썩는다 라는 표현을 써도 된다 그런 말이 아니라, 쉽게 말해 얘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 웃게 된다, 재밌다 그런 기분이 느껴진다는 뜻이다.
   즉 폴 때문에 그나마 한동안 줄곧 단독으로 내 우정을 독차지했던 멀더는 아주 자연스럽게 넘버 투로 밀려났다. 또 멀더가 가벼운 찰과상 때문에 병원에 3일간 입원하게 된 것도 그와 나의 브로맨스가 휴지기에 들어간 이유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 물론 폴도 멀더와 친하다. 훈남들은 원래 서로서로 친하기 마련이다. 내가 멋진 사나이란 말이 아니라 난 그냥 묻어가는 잔꾀가 어쩌다 보니 후천적으로 생겼다고나 할까. 나도 험난한 파도를 헤치며 서핑을 해야 하니까, 서핑 보드만은 최고급으로 장만해야 하니까 그렇게라도 빌붙고 살아남는 재주가 저절로 발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 따지고 보면 멋지고, 우락부락하거나, 재밌는 친구들을 내가 알랑알랑 거려서 친해진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한 번...이라도 있을까? 모르겠다. 아마도, 없다. 그냥 친해졌던 듯 하다. 다 지난 일이다. 아 이거 이거 사랑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분위기가 꼭 남자들 사고 친 무용담을 풀어놓을려는 모습과 비슷해졌다.
   다시 돌아와서 폴에 대해 묘사해보자. 그는 정말 명불허전이다. 그는 그야말로 최고다. 그는 못하는 게 없다. 그는 지금껏 싸워서 져본적인 단 한 번도 없다. 그가 마음 먹은 여자는 지금까지 다 넘어왔다. 꼭 그런 일들이 믿거나 말거나 라는 것이 아니라 뭐랄까, 그렇게 띄워만 줄려는 의도는 일절 없다. 왜냐하면 첫째 실제 그렇기 때문이고, 둘째 그렇게 극찬 일색이다가 찌질한 일면이나 소심한 구석과 음습한 습관이나 어두운 실패담이 하나 둘 나오면 찔금 하고 웃기는 반전의 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좀전에 미리 선포했듯이 나도 그 익살과 인기와 못하는 게 없는 그의 다재다능함에 살며시 묻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폴은 그런 사람이다. 어떤 사람? 설명은 뭔가 장황하게 입에 거품 물고 했던 것 같은데 실상 그에 대한 객관적 자료와 상세한 신상 명세를 하나도 정확히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름 대면 하나도 모를 정도로 세간의 이목만 주목시키고 오명으로 판명나고 불찰로 붉어질지도 모르는 그에 대한 신비감과 궁금증만 커다랗게 부풀려놓은 듯 하다. 정말 그랬다. 그러나 그럴 수 있다. 지금부터 해명하면 된다. 원래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에는 전주곡이 요란한 법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도 하지만 광고도 다 때가 있다. 어디서든 좋은 자리는 비싼 법이고, 장미는 얼굴값을 하고, 전야제와 회상이 더 특별한 법이다. 본편은, 다시 말해 말도 많고 탈도 많으며 소문만 요란한 그 남자의 잔근육, 알고보면 별 거 없을 수도 있다. 작품에 따라 주인공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정상적 작품에 비해 산술적으로 따져 열세에 처해있지만 비교적 그런 작품들이 과거에 비해 많아지는 추세다.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웬 이상한 영화를 보고 나서 햇볕 쨍쨍한 바깥으로 나오니 아~ 옆에 있는 이 남자가 바로 내 인생의 주인공이구나, 그런 느낌을 자아내는 드라마도 있는 법이다. 최-후자와 전자가 뭔 상관이 있겠냐마는 상어 파도타기가 있다면 롱테일의 특별함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긴긴 연애 끝에 파국이랄지, 내 여자친구가 내 친구에게 넘어가버렸달지, 뭔가 있어 뭔가 있어 그래서 그래서 읽고 듣고 함께 살고 봤드니 결~국 그분은 허당이드라, 그는 허세로 일관됐드라, 그 달콤한 속삭임은 끝끝내 용두사미였드라, 사랑은 영원하지 않드라, 살고 보니 어디 남자만 사랑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더냐 여자도 어쩐다드라, 그런 깨우침과 직감과 직관력은 처음 만나자마자 또는 한 몇 십 년 살아봐야만 깨닫고 후회막급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뭔가 폴에 대해서 대대적인 서사를 풀어놓은 것만 같은데, 어디 보자, 도저히 그의 비밀스러움만 키워논 꼴이 됐다. (도저히? 뭐가 도저히야? 도저히, 가 왜 나와? 어쨌든) 따로 얘기 좀 해봐야겠다. 남은 계산에 대해서. 뭐 차차 알아가면 된다. 너무 깊게 알고 볼장 다 보고 부케를 던지면 꿀맛과 같은, 하늘 위의 구름이 솜사탕인 듯한, 지나가는 동네 강아지든 뭐든 보이는 건 뭐든 번쩍거리는 황금마차요 낭만적인 회전목마로 보이는 것만 같은 환상감이 비교적 덜 내 삶과 부응할 수 있으니 미리 실망하지는 말자. 내일을 꿈꾸고, 희망의 나무를 심고, 나를 가꾸고, 그분에 대하여 언제라도 미지의 이상을 간직하더라도 또 그와 별개로 내일 일은 내일 고민하자 라는 인생 법칙도 살다보면 아주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폴의 재산 내역과 그가 누구를 사귀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평소에 뻥은 얼마나 심한지, 그 비밀이 낫낫이 드러나고 남자의 역할과 자격은 충분한지 그렇지 않는지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서둘러 어떤 어두운 좌절감과 호흥하지는 말기로 하자.
   자, 폴이 뜬금없이 그리고 느닷없이 내 단짝 1위로 급-부상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참 어렵게도 밝혔다. 그러다 그가 덜컥 절교를 선언할지 그냥 조용히 멀어질지는 몰라도 일단 그와 내가 가장 친하고, 가장 많이 시간을 함께 보내고,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누니 딱 그 정도로 애상은, 남자와 남자의 애상은 묶어 놓고 제한시키고 이제부터 그와 나의 기쁜 일, 즐거운 사건, 흥미로운 다가올 추억 만들기에 대해 약간은 간교하게 또 과도히 간사하지는 않게 그렇게 간질간질 그대의 귀를 간질여주겠다. 주인님 딸랑달랑! 상감마마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성은이 만극하옵나이다~! 하지만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시골 생활이니만큼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다. 그런데 옆에 아무도 없는데 자꾸 누가 이렇게 말하는 듯한 환시와 환청에 시달리고 있다.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그냥 한동안 뜸했던 환상이라고 치부하고 다음으로 나아가야겠다. 영차 영차!

   ⑥
   어찌되었든 나는 엉겹결에 그 어느 층위의 남자, 그 대열에 덜컥-덜렁 편승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폴은 뭐랄까 비록 낙향한 듯 하지만 언제라도 아니, 지금 즉시 영화판에 뛰어들어도 비중 있는 자리를 꿰찰 수 있고, 음악이면 음악, 그림이면 그림, 춤이면 춤, 말이면 말, 단 한 사람이든 좌중이든 대중이든 분명 누군가의 속마음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난 그의 절친한 단짝이기 때문에, 그 어느 도도한 아가씨라도 폴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내게 문의하고, 내게 호의롭게 살랑살랑 향수를 풍기며, 그 누구도 아닌 나와 바로 나와 친교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걸 진짜 바란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웃자고 하는 얘기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일시적으로 PDI 지수가 올라갈 수 있다고 사전에 밝히는 건 농담도 되고 협상을 하는 탁자에서 이길 마음이 없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은 무릇 잘못을 하지 않아야 한다가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더없이 올바른 멀쩡한 사람도 클라우드 나인에 입성하고 보면 어쩌다 크고 작은 실망감을 발생시키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으니 쓴 소리를 반기고 글을 읽고 뭐 어쩌고저쩌고......라는 삼천포로 나는 절대 빠지지 않겠다.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다만 나는 덩달아 멋진 남자가 된 듯한 기분에 우쭐하고 어깨에 뽕이 들어간 듯한 어떤 권력감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 종이 한장 차이를 기억되는 농담으로 바꾸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덤으로 먹고 살 만큼만 글을 쓰겠다, 먹고 살 만큼만 커피를 팔겠다, 먹고 살 만큼만 과일나무를 키우겠다, 그런 것이 썩 기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어...... 바로 앞 문장은 문맥상 빼는 게 맞는데... 어떻게 말이 되게 논리적 오류를 교묘히 비켜갈라고 했는데 못하겄다, 이건 좀 어렵다, 그냥 놔두고 슬며시 넘어가야겄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그와 같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데 어쩌란 말인가. 어찌된 영문인지 얼렁뚱땅 나 역시 최고의 남자가 된 듯 하기도 했으나 난 무엇보다 주제 파악 하나 만은 잘 한다. 내 할일은 따로 있었다. 그는 우정 내 할 일은 소설쓰기, 이렇게! 나는 그것에 대해서만 엄격함을 유지하면 그만이었다. 어쩌다 이처럼 삼류소설가 생활을 지속한지가 짧지 않았기 때문에 난 이제 어디 가서 월급쟁이 생활을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자영업자도, 무슨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소설을 위한 것이라면 모를까 거의 모두 남의 일처럼 치부되어버린 것 같다. 아 나 이런~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면서 폴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이 또 내게 조명이 비추어져버렸다. 그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이제는 자, 새 술은 새 부대에!
   다시 시작한다. 또 시작한다. 언제나 시작이다. 시작만 한다. 그렇지만 나도 할말은 있다. 이제 와서 나도 불현듯 왜 그럴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만 실은 나도 그에 대해서 썩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그래도 괜찮다. 점차 더 많은 걸 알게 될 것이고, 그것과 비례하여 공허감이 커질 정도로 폴이 비루한 인생을 살지도 않았고, 그를 만나면 무조건 즐겁기 때문이다. 그도 이를테면 다시 만난 괴물도 아니고 나도 <나는 귀신이다> 그런 류의 인간도 아니니까 모든 게 준비된 상태다. 이제 즐거워질 일만 남았다. 속을 수도 있지만. 어찌됐든 좌우지간 다음 순서는 그것만 나오면 된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바로 이거!

   ⑦
   어느 날 나는 나 혼자 살고 있는 우리 집, 초소형 주택에 딱히 필요하지 않는 가전기기를 구입했다. 딱히, 가 아니라 아예 필요없는 물건이다. 그러나 왠지 그 기계가 내 마음을 빼앗아버렸다. 나는 녀석에게 어느 순간 이미 홀딱 반해버렸고, 참아야 한다는 근검절약 정신과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물품은 곁에 일절 놓지 않는다는 철저한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나의 신-포스트모던적 철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혼이 먼저 움직였고 손도 저절로 움직였고 귀도 실제로 움직였으며 어느새 점원과 대화를 나누고 그러다 덜컥 그 머쉰을 구입하고 말았다. 나는 알렉스와 케빈이 한때 환상 머쉰인가 환상-개뿔인가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다는 일화를 떠올리며 당시 그 친구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듯 했다. 그건 나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최고급 진공청소기를 구입했던 것이다, 진공청소기를. 왜 내는 그것을 샀을까? 어째서 필요하지도 않은 가전기기에 흥분했을까? 뭣이 나의 마음을 확 끌어당겼을까? 사전에 어떤 뭔가 의미심장한 광기의 징후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그건 모르겠고, 나는 그 일로 인해서 내가 최근에 두 가지 색다른 취미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째, 남들의 소셜 네트워크를 보면서 그 대화의 문맥을 살피면서 뭔가를 아는, 안목 있는, 광범위한 취향을 고고한 우아함으로 한껏 제한시키는 절제와 단순함의 미덕을 알 것 같은 사람들을 별다른 사심없이 웹 페이지만 보면서 찾고 구경하는 것을 즐긴다는 것. 옛날에도 간혹 했던 일이지만 한동안 잊고 살았다. 둘째, 온통 마음을 송두리채 앗아가버리는 물건이 있다면, 드물게 그런 소일이나 품목, 신조, 문구, 관심사가 발생하게 되면 그걸 최대한 가까이 놓고 최대한 그 음악만 많이 계속 듣고 그걸 최대한 감상하는 것, 직접 기계를 돌리고 격언에 따르지 않고 뒤돌아서면 잊기도 하지만 일단 뭐랄까 <군침 흘리기>라고나 할까, 밥 한 번 먹고 공중에 매달린 생선 한 번 쳐다 보고─밥 한 번 먹고 공중에 매달린 생선 한 번 쳐다 보고, 맨 빵 한 입 먹고 맛깔스러운 선명한 요리 사진이 인쇄된 책이나 핸드폰 화면을 넘기고─맨 빵 한 입 먹고 맛깔스러운 선명한 요리 사진이 인쇄된 책이나 핸드폰 화면을 넘기고, 바로 그와 같은 몰취미하다가 딱 하나 만난 듯한 취미도 되고, 사랑도 되고, 애증도 되고, 때로는 친구도, 가끔 꿈도 되고, 자주자주 소망도 이상도 선망도 기대감도 동경심도 부러움도 환-상-통까지 모두 되는 가히 만능이라 할 수 있는 대상에 몰입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요즘 내가 즐기는 두 번째 취미였다. 간출이자면 <첫째는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 일상 엿보기요, 둘째는 뭐든 하나만 하기>. 첫째에 대해서는 게시물을 놓고 친구들끼리 댓글 달아주고 대화하는 걸 보면 이것 저것 다 비추어지고 참 많은 게 공감되고 잠정적으로 (나 까짓 게 뭐라고) 평가하면서 타인의 삶을 유추하며 뭔가 견적을 나도 모르게 뽑게 되니까 어쩌다 그 일에 흠뻑 젖었고, 빠졌고, 즐게게 된 것이다. 둘째는 원래 대동소이하게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그것도, 분명,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최고급 진공청소기. 줄여서 진-청! 예전 내 친구의 별명도 진공청소기였다. 진공청소기, 구입한 그분을 집에다 모셔놓고 우리집은 그날부터 박물관이요 미술관이며 환상관인 것이다. 내심 각오를 새롭게 하는 거다. 모든 여심을 쏙 빨아들이는 것처럼 착착 감기고, 쩍쩍 달라붙고, 시선을 강탈하고, 단물 쪽쪽 빨아들이며, 마음이 온통 말려들어가는 그런 글을 써야겠다 라는 생각을 매번 새롭게 하게 될 것이다. 일종의 최면 요법이다. 사놓고 한 번도 기계를 작동시켜보지 않고 먼지만 쌓이고 쌓인 먼지를 닦아주기만 하면서. 살면서 내내 남 얘기만 듣고, 남의 글만 읽고, 남의 기계만 부러워하다가 나도 이젠 뭐랄까, <누가 뭐래도 난 나야!> 라는 표어에 심취한 돌아이 또는 드디여 정상인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어디까지 얘기했지? 어느 고전 소설의 작가처럼 나는 말하고, 내 말을 글로 옮기는 조수, 그 두 가지 일을 나 혼자 한꺼번에 할려니까 상당히 힘에 부치는 것 같다. 아, 생각났다. 내가 진공청소기를 샀고, 집에서 매일 매번 그걸 보면서 감상한다는 것까지 구연했다. 어느덧 장편소설이 구연동화로 바꼈다. 그래도 나는 이걸로 하나 깨달은 게 있다. 비록 진공청소기가 인간과 다른 기계지만 나처럼 웬 철들지 않은 어른을 만난다면 먼지를 빨아들이고 청소를 한다는 그 용도와 목적과 그 순수하며 지고지순한 운명이, 진공청소기의 천부적인 숙명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도 있구나, 나는 그걸 느꼈다. 썩 대단한 통찰은 아니지만 썩 대단한 통찰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 애들은 몰라도 된다.
   다시 돌아와서 내가 왜 진공청소기 얘기를 꺼냈냐면 집에서 한 잔의 녹차를 마시면서 고혹적인 진공청소기를 탐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짧게 서넛 문장이면 되는데 설명이 길어졌다. 뭐 그럴 수 있다. 살다보면 그분을 고대할 수도 있고, 공부하다 보면 거울 한 번 보고 머리카락 한 번 빗고 맨손 체조 한 번 하고 목 마르니까 물 한 잔 마실려다가 물이 없어 없네 어 콜라 생각나는군 콜라 사러 나갔다가 친구에게 전화가 오고 그 둘이 회원으로 있는 팬클럽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어 뭐라고? 우리의 구세주이신 슈퍼스타가 어디로 지금 오신다더라 그래서 공부고 자시고 뭐고 다 때려치고 딴길로 샐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인생이다. 왜 95퍼센트의 자영업자는 실패하는가,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왜 주식인가, 왜 머머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와 같은 <왜 점점점>의 제목과 때로는 <뭐가 답이다>,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같은 책의 제목들 그걸 보고 옛날에는 정말 왜 그럴까, 왜 그렇지, 왜 그렇게 쩜쩜쩜 한지 갸우뚱하고 감화되고 설득당하고 호기심을 느꼈는데 지금은 안 그런다. 이젠 다 아는 얘기다. 그래서 절반의 어른들은 책을 안 읽는다. 뻔할 뻔자다. 안 봐도 비디오다. 옛날에는 속았다. 이제는 머리가 커져버렸다. 자만심과 거만함과 건방짐, 과격함 그런 것도 다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늦었지만 알게 됐다. 정말 A를 절실히 원한다면 B는 냉정하게 쳐다보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도. 자존감이 비뚤어지면 보통 정상이 아니지만 예외도 있고 또 비정상에 대한 포용력이든 뭐든 출발은 자존감에서 시작된다는 것까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수업료가 들어가는 수업을 다른 말로는 기적, 신화, 전설이라고 하고 어린이에게 동화든지 뭐든지, 어른에게는 각자 하나 둘씩 있을 테고, 그걸 다 아니까 어른들이 책을 많이는 읽지 않는다. 또 돈을 벌어야 하니까. 애 키우고 어쩌고 삶에 치이다 보니까. 어쨌든 나는 진공청소기를 샀다. 그래서 매일 그걸 보면서 (기존에 알려진 비슷한 단어로) 기도랄까, 뭐 그런 어떤 의식을 새롭게 하고 있다. 어쩌다 중간에 어른들의 고달픈 인생, 먹고 살 만큼 돈벌기라는 샛길로 주제가 빗나가 버렸다. 때로는 말썽을 피우지만 보통은 귀엽고 정다운 강아지의 목줄을 부여잡고 다시 <인생은 무엇이다>에 대한 얘기를 잠시만 이어가자. 문단을 띄고서!
   왜 진공청소기였나, 를 말했다. 왜 소설과 인문-교양서인가, 말 안해도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가 몇몇 있기 마련이다. 또 시간은 제한적이다. 이 삶은 내 삶이다. 남의 집 잔치가 아니고 타인의 인생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내 인생이란 말이다. 내 인생을 1인칭 게임의 1인칭 시점에서 글을 읽고 게임을 하는 당사자와 완벽하게 일치시키자. 그것은 그대의 인생이다. 따라서 나는 최고를 추구한다. 진공청소기? 최고급으로! 소설? 고품격만! 사랑? 그것도 역시! 그러나, 그러나! 폴에게 연락이 왔다. 잘은 몰라도 <한 눈 팔자> 뭐 그런 의도로 연락한 듯 싶다. 특정 상품만 고집하고 설명서만 곧이곧대로 따르고 책에서 읽고 TV에서 보고 남에게 들은 말을 다 믿고 다 받아들이는 건 어른이 아니다. 믿을까 말까를 고민하는 건 어른이 하기엔 뒤늦은 순정이다. 때에 따라서 거르고 흘리고 연기하고 박수만 치고 그건 어른의 일이다. 이론과 실전, 이성과 감성, 교리와 생활, 학교와 회사, 어린이와 어른, 어떻게 보면 대치되는 개념이 너무 많은 것 같지만 끝내 직접적으로 뭔가를 짧고 쉽게 알려주지 않는 것은 다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뭔가 중요한 부분이 있는 듯하고 요점을 기억하고 가야할 부분은 슥 연구와 책임을 독자에게 전가했으니 이제 나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하겠다. ······정적······ 잠깐 시간이 멈췄다가... 다시 가기 시작했다. 길게는 멈추게는 못하겠다. 짧게는, 가능함. 폴에게 연락이 왔다. 한 눈 팔자고. 놀자고. 심심하다고. 뭐 재미난 일 없냐고. 그는 뭐 그런 의도로 연락했을 것이다. 사람이 최고만 추앙하고 최고만 가까이 하고 그러면 가식덩어리네, 허영끼 못 버렸네, 사람 변했네, 재수없어 라는 험담을 들을 수도 있다. 얻어들을 악담, 예상 가능하다. 처음 듣는 신기한 말도 있을 것이고, 간혹 일부는 그것에서 색다른 만족감을 느낀다. 앞뒤 꽉꽉 막힌, 고지식하며 제멋데로의 돌진할 줄만 아는, 아무 데나 갔다 들이대고 낄 데 안 낄 데 다 두리번거리고, 뭐만 보이면 다 먹고 마시고 그러면서 최고네 최고 아니네 비싸네 싸네 그렇게 우둔한 개구장이 어른으로 살 수만은 없다. 단짝의 요청을 뿌리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지금껏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후회? 많이 된다. 그러나 그건 인생이었다. 그래프에서 안 좋은 부분을 싹둑 생략할 수는 없다. 내 인생을 미화만 할 수는 없다. 어두웠던 지난 일도 엄연히 인생의 한자락이다. 내 인생이란 자리에 다른 단어를 넣어도 된다. 단! 문장 끝에 그 말만은 붙이지 말자, 옷을 벗는다. 그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DJ DJ~ 죽어도 잊을 수 없는 노랫말, 난 그것이 좋아서 나이에 안 어울리게 그런 음악도 찾아들었는데 또래 애들은 너무 단순했다. 뭐 자기는 후회를 안 하네 어쩌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신발을 유심히 살피네 어쩌네 그런 말 다 개소리다. 나는 <세상에서 네가 최고야>라는 태도로, <자 웃겨봐> 라는 쥐었다 폈다 조련하는 듯한 장난스런 허세도 포함하여 말해보세요 어린이~ 그런 느낌을 전달하여 폴의 용건을 나는 전달받았다. 뭐 특별한 지령은 없었으나 껀수가 있으니 나오라는 얘기였다. 나는 그곳으로 갔다.

   ⑧
   나는 폴을 만나러 <농담 반 진담 반>이라는 공원으로 갔다. 가는 동안 폭우가 엄청나게 왔다. 엄청나게! 현대의 문명에서 과학은 옳다. 그것은 진리다. 또 그것은 다름 아닌 미래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전설을 읽고 설화를 듣고 고대 신화든 뭐든 그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 그 엄청난 폭우는 당연히 대기 현상의 섭리와 결과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그 쏟아지는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장대비가 웬일인지, 왠지 모르게, 어딘가 모르게, 마치 사람들이 말도 안 되고 하나도 재미없지만 시를 읽는 것처럼, 수학의 기초를 바탕으로 세워진 세계에서 인간이 과학과 별개로 다양한 과목과 언어와 종교를 배척하지 않는 것처럼, 흡사 아니라고 하면서 남몰래 선행을 하거나 어른이 됐다고 마냥 쾌락에만 빠져 살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것을 예술의 연장선에서 인지하게 되었다. 즉 그 억수 같이 내리붓는 비가 이상하게 대기 현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또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흘리는 그칠 줄 모르는 어마어마한 눈물처럼 느껴졌다.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먹먹하며 울컥했다. 속에서 뭔가가 불쑥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폭우를 지나서 저 흐리고 어두운 지대를 지나 폴과 만나기로 한 공원에 이르렀다.
   공원 <농담 반 진담 반>에는 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느 여인이 그와 함께 있었다. 음악하는 여자일까? 그림 그리는 여대생? 그냥, 쉬는 아가씨? 신부 수업을 받는 여인? 폴을 흠모하는 짝사랑을 들켜버린 비운의 여자? 사랑의 약자? 그들은 보통의 연애를? 아니면 불안한 연애? 혹시 비밀연애? 시시콜콜한 설명은 건너뛰기로 한다. 평범한 대화도 건너뛰기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른이 되는 일이니까. 일단 폴이 건넨 첫마디는 이랬다.
   「뭘 그렇게 놀래?」
   우리는 셋이서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찻집에서 창가에 앉아 한잔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학교가 살아있다, 올빼미 시간 탐험대, 우리 개가 학교 가요, 막 그런 얘기를 했다. 농담 반 진담 반이 아니라 진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동화에 등장하는 삽화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차를 마셨고, 차만 마시고 헤어졌다. 셋이 각자 뿔뿔이 흩어진 것이 아니라 그녀만 바쁜 일이 있다며 먼저 떠난 것이다. 나는 폴이 드디여 남부러울 것 없는 미녀를 얻은 것만 같아서 축하해줬다. 그러나 폴은 그 축하를 사양하며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녀는 폴이 좋아하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폴을 좋아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랑의 짝대기는 돌고 도는가 보다. 그녀는 뭐랄까 그날 하루에 본 아가씨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미모의 여자였다. 그리고 이름은 너무 특이했다. 나는 어떤 여자를 알았다. 예전에 만났던, 뭔가 궁금하고 웃기고 호기심이 도저히 가라앉지 않아서 채팅으로 알게 되어 딱 1번 만났던 어느 여인이 내 기억엔 있다. 왜 딱 1번이었는가는 굳이 밝히지 않겠다. 폴이 마음에 들어아는 여자의 이름은 예전 내가 만난 여자의 이름과 정반대 되는 이름이었다. 당시 TV에 많이 나오는 신화라는 이름의 인기 그룹 멤버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은 전진(난 유명인을 거의 못보는 축에 속하는데 우연히 거리에서 서로 마주치며 지나친 일이 있다), 나와 한때 매우 친했던 내 친구는 전진고, 그때 내가 만난 그녀는 전진해, 그리고 폴이 좋아하는 그녀는 <후진해>였던 것이다. 마침내 후진해 까지 만나게 된 것이다. 마치 운명인 것처럼! 그녀와 그녀는 뭐는 반대되고 뭐는 비슷하고 그랬다. 그 외에 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대화의 소재가 떨어졌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네에 새로 생긴 술집에 들려야 했다. 왜 새로 생긴 술집이냐? 왜냐하면 새로운 마담은 어떤 스타일일까, 그것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기존에 알고 친하던 술집 사장과의 재회와 새로운 술집 물색하기에서 전자의 기쁨과 익숙함이 후자의 모험을 뛰어넘는 일이 최근엔 드물었다. 따라서 우리는 가까운 술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별로 재미난 일은 없었다.
   우리는 술집에 도착했다. 술집 이름은 <젠장>이다. 폴은 위스키 스트레이트와 에스프레소 더블을 시켰고, 나는 고급 수제 맥주가 없다고 해서 그냥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병맥주를 시켰다. 폴이 말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그는 달변가다.
   「한 두어 달 동안 해변도로 드라이브와 모래사장에서 비치발리볼을 구경하고, 날마다 술 마시고, 날마다 낚시하고, 날마다 아름다운 풍경들을 구경하고, 무조건 많이 먹고, 미술관도 갔다가 동물원도 갔다가 여기저기 하도 싸돌아 다녔드니 이젠 뭔 생각이 드는 줄 아니? 놀다 지치다 놀다 지치다 또 놀다 지친 후에 드는 생각, 그게 뭐게? 뭘 꺼 같니? 부지런하고 성실한 친구들은 이럴 때 보통 일하고 싶다 라고 하지. 그럼. 그러나 난 그 부류가 아니야. 그럼 난 무얼 느꼈을까? 뭘 꺼 같아?」
   「또 놀고 싶다? 계-속?」
   「(손가락 딱) 빙고! 그런데 중간에 한번 일이 있었어. 어느 호텔에서 지낼 때였는데 호텔 카지노에서도, 바에서도, 레스토랑에서도, 수영장에서도 마주쳤던 여인이 있었어. 반짝반짝, 번쩍번쩍, 트윙클트윙클, 눈꺼풀 깜빡깜빡 막 진짜 그녀에게서는 빛이 났어. 뭔가 기분이 저조할 땐 또 그 반짝임이 사라지고 슥 후광이 비추어졌지. 자동으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자유로운 몽상가인 내게 더없이 적격인 듯한 아가씨였어. 그렇다고 내가 구태의연하게 그녀 옆으로 접근하고, 데이트 신청을 하며, 꽃을 선물하지는 않았어. 평범한 행복을 기반으로 하여 반미치광이처럼 사랑에 빠지고 서정적인 낭만과 신남과 단순한 기쁨을 추구하는 건 이제 애제자에게 모두 전수했고, 일임했고, 전화번호와 내 작업 백과사전까지 모두 넘겼어. 수업료, 내지말라고 했어. 나 돈 많아. 귀찮아. 짜증나. 난 이제 새로운 즐거움 그리고 서로 특별한 혜택을 주고 받는 일, 곧 호혜를 즐기기와 다가가지 않고 주변에서 머뭇거리며 내가 마치 소년이 된 듯한 기분을 느껴보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지. 뭐 그렇다고 변태는 아니고. 순수한 넉살과 염원 어린 그리움이라고나 할까, 속인이 아닌 듯 속인이고 싶어한달까, 조금 그런 변화가 내게 있었거든. 그래서 나는 그녀를 더 관찰했지, 관찰만. 유심히 살펴보고, 추측하고, 혼자서 내기도 했어. 뜨뜻미지근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난 이제 그 경지로 접어들었거든. 여기저기 눈독 들이고, 여기저기 군침 흘리고, 여기저기 친절을 베풀고, 여기저기 내 몸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주다가 여자친구를 기분 나쁘게 하고, 해명을 하느라 난색을 드러내고 기분이 급속도로 냉각되는 일, 이젠 지겨워. 그건 미욱한 짓이야. 나 정도면 어~ 나 정도면 이젠 거의 텔레파시를 이용해야지. 돌고래처럼. 그 있잖아, 그 뭐야... 음, 진공청소기! 일명 진-청! 그처럼. 여심을 쏙, 쪽쪽 빨아당기고 끌어당겨서 내쪽에 놔두는 거지.」
   폴은 연극 무대에서 일인극을 하는 것처럼 매끈하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화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가 혹시 약을 한 건 아닐까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또 그가 입고 있는 옷도 보통은 격식 있는 수트였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1954년식 501 빈티지 청바지와 도트 무늬 실크 스트라이프 셔츠에 소가죽 모터사이클 재킷을 입고서 뭔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알 수 없는 의문과 애잔한 추억을 떠올리며 회상에 젖어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를 정말 좋아했다네 친구. 그녀와의 기분 좋은 데이트를 탐냈지만 꼭 그렇게 함께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어. 나는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면서 그녀의 세계에 빠져들었지. 그녀가 읽는 책, 그녀가 듣는 음악, 그녀가 즐겨 마시는 음료, 그녀가 즐기는 운동, 그녀와 연락하는 사람과 그날 기분은 어떻고 어조는 어떠하며 표정을 살피고, 그렇게. 어느 날 그녀가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길래 옆에서 신문을 보는 척하면서 들어봤는데 그녀가 경마장에 간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날이 됐고 나는 그녀를 따라갔지. 그런데 그녀가 간 곳은 진짜 경마장이 아니라 스크린 경마장이었어. 그게 다가 아니었어. 매번 보니 그녀는 모든 게 그런 식이더라구. 그녀의 팔뚝에 불독 목걸이 문신은 스티커였고, 눈가와 입가의 점은 가짜였고, 처음에 그녀의 블로그를 보고서 난 그녀가 독서광인줄 알았는데 나중 알고 보니 그건 다 어디서 줄거리랑 남의 글을 짜집기한 것이었고, 무슨 케이프타운과 남태평양 어디 섬에 자주 간다던데 그것도 알고 보니 그건 모두 자주 가는 술집과 미용실 이름이었어. 또 무슨 명문대 이름이 씌여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길래 언어학과나 조류학과 이런 걸 전공한 줄 알았는데, 그녀는 고졸이었어. 고졸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야. 그게 끝이 아니야. 난 그녀가 특파원일 꺼라고 예측했어. 거의 심증이 있었기 때문에 내 추측에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지. 그런데 그것도 알고 보니 그녀의 별명이 특파원이었어.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는 사진과 글도 전부 그런 거야. 주말이 기다려진다, 아직도 수요일이다, 맨날 어디 가고 싶다, 어디 갔다 왔다, 여기서 살고 싶다, 어디가 생각난다, 뭐 먹고 싶다, 요즘 아주 허영이 물이 올랐어. 잔뜩! 원래 그런 줄도 모르지만. 과도한 스트레스와 온갖 불만족과 뜬금없는 여러 불이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마음에 안 들어! 흥!」
   오늘은 폴이 기분이 안 좋은 듯 하다. 오늘은 폴이 말을 잘 못하는 것 같다. 소년 어쩌고저쩌고 하드니 정신연령이 초딩 수준으로 낮아진 것처럼 보인다. 뭔가 멋진 얘기를 꺼낼려다가 결국 끝말은 마음에 안 들어? 흥? 냉소도 아깝다. 웃기지도 않다. 그는 적어도 오늘은 허당이다. 원래 항상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일까? 그러나 돈을 빌려달란 말은 못 들어봤다. 두고 봐야겠다. 그는 오늘 김 빠진 맥주다. 나는 지금 신선하고 향긋한 맥주를 마시고 있다. 녀석이 술이 취해서 조용하다. 나는 그래서 분위기 전환 삼아 폴에게 하나 제안했다.
   「NC... 갈까?」
   「NC?」
   「그래 NC.」
   「뉴 써클? 뭔 불가사읜가 뭔가 신종 미스테리 서클이 어디 옥수수밭에서 새로 발견되었데?」
   「안 웃긴 거 알고 있지?」
   「응. 미안해.」...... 「주변에 어디, 분위기 있는 여자, 없냐?」
   「어, 없어.」...... 「미안.」
   어느덧 대화는 끊기고, 분위기는 비몽사몽, 기분은 얼레리꼴레리, 모험과 오늘의 일과는 어쩐지 망한 듯, 뭔가 즐거운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대감과 열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현실이 못마땅하다면서 NC는 들어갈 때만 기분이 끝짱이라면서 터무니없는 한탄만 쏟아내고 낙심한 듯한 자세를 잡고 시골에 살면서 도시인의 권태를 흉내내고 있었다. 그렇게 별다른 출중한 일 없이 그날 일정은 끝나는가 보다 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⑨
   그날 일정이 끝나는가 보다 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바로 이거야!> 같은 일이 벌어졌다. 환상도 아니고 초현실도 아니라 진짜였다. 거의 그것에 버금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버젓이! 나는 정신이 또렷해졌고, 폴도 눈을 땡그랗게 뜨면서 한마디 했다.
   「놀랍다, 그지 않아?」
   저쪽 탁자에서 늘 똑같은 일상에 힘들어하는 것만 같은 느낌의 어느 묘령의 미인 두 명, 그 가운데 한 명이 막 카우보이가 밧줄을 휙휙 돌리다가 우리쪽으로 던져서 딱 걸렸고 그래서 헉헉거리며 끌어당기는 무언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은 잘못 본 것이겠지 하며 지나쳤고, 조금 있다가 우리는 우리 뒷편을 쳐다봤는데 아무도 없어서 이상해 했고, 좀 더 지나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즉 폴이 그녀에게 다가가면서 네? 저요? 저요? 무슨... 저 말인가요? 저를 부르셨어요? 하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바로 노트북 배경화면과 핸드폰 바탕화면에 자기 사진이나 남자 사진이 아닌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설정해 놓았을 것 같은 어느 아가씨에게. 따라서 지금 이 일은 정확히 이런 대사와 정 반대? 완벽하게 부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냐고?>
   사람들은 살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지난 일이 있기 마련이다. 흡족한 일 보다는 불만족스러운 하룻밤이, 최적화된 로맨스보다는 뭔가 부족한 대로 좋았던 연애가, 평범한 인생보다 그 가운데 깨알처럼 묻혀있는 사건과 품행이 흐트러진 장난이며 어떤 비밀의 문을 마주한 것만 같은 작은 일화들이 더 새록새록 떠오르고 기억에 남는 법이다. 왜 그런 줄은 모르겠다. 원래 그런 것 같다. 부정해도 된다. 옹호할 수도 있다. 어쨌든 폴과 나는 2 대 2로 그녀들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그녀 둘이 사는 집에 놀러가서 하룻밤을 자고 왔다. 그런데 거기서 아무 일도 없었다. 정말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꼭 뭔 일이 있으란 추궁은 그곳에서 실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어설픈 드라마와 농염한 연애소설이 어른들의 이상적인 사랑과 소녀가 꿈꾸는 순수한 사랑과 소년이 동경해 마지않는 뜨거운 격정적인 포옹과 키스와 그 다음에 대한 환상을 다 흐려놓고, 이상한 선입견을 어설프게 주입하는 것이다. 경험이 많이 쌓이고 세상을 어느 만큼 알게 되면 저처럼 아무 일 없이 같이 놀고 하룻밤 남의 집에 얹혀서 눈만 붙였다가 다시 기운을 차린 다음 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꼭 시간이 그만큼 필요하지도 않다. 그런 경험을 해본 사람 굉장히 많을 것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그런 일을 겪을까. 그게 잘된건가, 잘못된 걸까 또는 나은걸까, 그 얘기가 아니고 말이다.
   폴은 그녀 둘을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리고 그녀들은 정상이었다. 우리도 썩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었다. 아니다. 가만 있어보자... 뭐가 있긴 있었다. 폴이 그녀를 엎고 그녀의 집으로 갈 때 그녀가 폴의 등에 구토를 했다. 그랬다. 나는 그녀가 당나귀인 줄 알았다. 그녀가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설마 일부러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옛날에 그녀는 폴을 좋아했으니까! 그녀들 얘기는 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왠일인지 뭔가 찜찜하기 때문이다. 폴과 내가 그렇게 품성이 올바르고 단정한 류는 아닌데 어쩌다 우리는 소년으로 남고 싶었던 것이다. 왜? 그게 뭐 잘못됐나?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피곤할 수도 있고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우리가 항상 늑대도 아니고 하이에나의 탈이라도 써야한단 말인가. 그 판에 박은 드라마를 찍고 전형적인 단계를 여지없이 밟으라고? 차라리 그 반대의 길을 택한 것이다. 아니면 그녀들이 우리들 보다 술이 더 센 거든가. 모르겠다. 본의아니게 하룻밤 우리는 포스트모던형 소설을 쓴 거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둥절하지만 사실이다. 그런 실화가 내게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극의 주인공이라면 사양하고 싶다. 그래도 나는 우리의 무명 블로그에 올릴 껀수를 건졌다. 나의 내면에서 이런 울림이 여운을 남기고 있다. <블로그가 없었다면 어쩔뻔했어?> 어제 일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로 사석에서 나눌만한, 흔쾌히 공유할만한 그런 소재였던 것이다.

   ⑩
   날짜가 바꼈다. 아, 하나 생각났다. 엄청 얇은 종이에 날짜 하루만 써있고, 그것이 365장 묶어진 달력이 생각난다. 언제 한 번 그거 구해서 집에 걸어놓고 날마다 찢어보고 싶다. 뜯든 찢든 어차피 해야 될 일이다. 개운동장에서 우연히 개 몇백 마리를 보고서 뭐라고 어떤 감탄사를 내뱉는 건 어떻게 보면 품위유지비를 벌고 쓰는 것과 별개로 또 의식적으로 참아야 할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달력은 넘겨야 한다. 시간은 멈추지 않으니까. 그 달력을 집에다 걸어놓고 날마다 한장 찢어서 하루는 뭉개서 던지고, 하루는 컵 받침대로, 하루는 메모지로 쓰고, 하루는 씹어먹든가 포장지로 써먹든가 해야겠다. 재미있을 꺼 같다.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아마 이런 생각 해 본 사람,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즉시 실현하면 뭔가 허전하고 억울하며, 자꾸 어 이게 아닌데 이 느낌이 아닌데, 그런 기분에 휩싸일 것이다. 그래서 그걸 해보는 건 일도 아니지만 미루고 미루고 또 미뤄서 난 꿈이 있어 라며 폼만 잡는 것이 좋겠다. 아무튼 날이 바뀌고 나는 집에서 쉬었다가 글이 잘 써지지 않아서 또 폴의 작업실에 놀러갔다.
   폴은 예술가다. 그리고 나는 요즘 폴과 주로 논다. 바꾸어 말하면 동네에서 은근히 둘이 따돌림을 받는 느낌이 없잖아 있다는 뜻이다. 물론 과-점퍼가 없으니 의도적으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폴은 완전 종합 예술가다. 못하는 게 없다. 또 폴의 작업실에 오면 뭔가 재미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내 운동화의 중력을 약화시키는 듯 하다. 그래서 살짝 기분이 고조된다. 오늘은 누드 스케치나 패션모델 촬영 그런 일은 없고 녀석 혼자 칵테일을  홀짝거리고 있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일까? 꼭 보면 술도 못마시는 것들이 저렇게 개폼 잡는 걸 좋아한다. 나는 폴에게 나도 칵테일 한잔 만들어주라고 부탁했다. 생소한 칵테일을 주문할 처지는 아니고 똑같은 것을 주문했다. 간혹 그런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되는 때다. 칵테일이 도착했다. 그리고 폴이 물었다.
   「뭐 할 말 있는 건 아니지?」
   「그럼.」
   나는 그녀에 대해 물어볼까, 옷은 빨았냐, 그날 술값 많이 나왔던데 그녀들이 일부러 너 눈탱이 맞힐려고 짠 것일까,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꺼내서 그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가고 싶은 대로 가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이와 같은 태도와 <왜 웃어?>와 비슷한 용건 그리고 <야~호!>를 바라는 듯한 뭔가 불분명한 전망을 품고서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잘 아니까! 뭘? 성인 여성을 엎고 이동했을 때 드라마에서처럼 절대 가뿐하지 않다는 것을. 매우 숨차고, 매우 헉헉대고, 매우 땀 뻘뻘흘린다는 것을. 완전 중노동임. 완전 제대로 퍼짐. 그런데 폴은 그걸로 끝이 아니라 ...... 뒤통수에 ...... 그렇게 됐다.
   「누누이 말하지만 그녀들은 그냥 동생들이야. 그게 다야.」
   「누가 뭐래? 지금 우리가 허둥댈 상황은 아니잖아. 또는 뭐 팍~, 캬~, 웩~, 뷝~, 꺄~ 이런 장난스런 말을 운운하겠니? 사랑과 디지털 카메라의 유사점이 뭔 줄 아니? 뭘 꺼 같아? 나도 몰라. 다만 우리는 그런 쪽이라는 거지, 내 말은. 디카 처음 샀을 때, 그 기분, 알지? 막 이거 저거 다 찍고 올리고 관심받고 기록으로 남기고, 마치 사진을 찍기 위해서 여행가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 친구를 만나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 노는 것 같은 생활. 어느 시점까지는 좋아. 그런데 그게 길게 안 가잖아. 친구들끼리 어디 놀러라도 가면 귀찮으니까 서로 사진 안 찍을라 하고. 나 같은 경우는 돈을 곽 티슈에서 뽑아써도 관광지에서 물건을 잘 안 사. 왜? 귀찮으니까. 어차피 버려야 하니까. 그걸 놓고 주변에서는 자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런 의도로 내 의견을 표명하는 건 아닌데, 난 자랑을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하고 또 그 말에 대한 반응을 듣고 보니 그걸 자랑으로 여길 수도 있겠구나 그랬어, 언젠가. 하지만 어차피 <자랑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났으니까 또 난 원래 그게 좋으니까 그냥 계속 하던대로 하면 되는 거지. 단, 하나 주의할 점. 어디서든 지인이든 새로 만난 사람이든 친구든 다 서로 모든 게 궁짝이 맞을 수는 없으니까 반응을 봐 가면서 말을 할 것. 사람들 다 그래. 교향악단 연습 끝나면 어떨 꺼 같아? 다 끼리끼리 흩어져. 누구는 채무 때문에 일 끝난 다음에 곧바로 개인교습하러 가는데 누구는 바람을 피거나 누구는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클럽에 가겠지. 또 친한 사람들끼리도 말하는 거 있고, 숨기는 거 있고, 아무리 친해도 다 뭔가 미묘하게 어색한 건 있기 마련이야. 그렇게 난 대회 기념품이든 관광 상품이든 행사 기념품이든 그걸 받으면 받자마자 버리고 싶어. 혼자 있으면 뭐가 문제겠어? 그런데 혼자가 아니라면 그 사은품이 내 것이지만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분하면 안되드라고. 그걸 챙기지 않을려고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어떤 친구는 그걸 왜 버리냐고, 목소리가 커지고 약간 심각해지면서 남의 일에 참견하면서 자기가 대신 챙기더라구. 부부 사이에서도 보면 남편쪽이 뭘 안 버려, 말은 그런다 (빈 물컵에 물을 넘칠락말락할 정도로 가득 채우면서) 이렇게 맹물이 가득차면 쥬스든 맥주든 뭔가 새로운 액체를 채울 수가 없다고 비워야 한다고 비워야 한다고 그래야 새로운 거의 신기한 관심사가 놀라운 무언가가 양질의 호사와 원대한 꿈이 채워질 수 있다 라고 하지만, 컴퓨터에 쌓인 어떤 파일들과 집에서 먼지 쌓인 오래된 물건들 게다가 자신의 악습들로 모자라 심지어 찻집 카페 피카소에 묵혀둔 외상값과 어딘가에 돌려줘야할 호혜주의는 그 말과 따로 논다 완전 따로 놀아 말만 세계 몇 대 갑부 실상은 허당, 그래서 계속 보관하고 쌓아둔 잡다한 물건들을 부인이 그걸 몰래 버리고 그래. 나중에 쓰지도 않고 없어진 줄도 모르면서 그냥 무조건 쟁여두고 보는 건데, 각종 그래프 지표로 통계로 구분이 되는 게 있어. 그래도 참 이상해. 내 짐을 내가 관리하겠다는데 그건 온전히 내 관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 상류층에서도 그렇고 서로서로 끼리끼리 뭔가 지식의 양이나 취향이 많이 다르거나 예법에서 조금만 차이가 나도 뭔가 그에 따라 기분이 언짢아질 수도 있나봐. 어떻게 보면 참 이상해. 과격한 행동과 일단 비관과 냉소 다음에 불신과 험한 말과 매사 좌충우돌 그 모든 것이 이거 하나면 다 OK야. 그것이 뭐겠어? 뭐긴 뭐야 친구지. 그런데 이거 뭔 얘기지? 아~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골을 보니 다른 시골과 다른 것 같아. 원래 여기 출신 친구들은 모두 도시로 올라갔고, 우리가 도시에서 여기 시골로 내려와서 우리는 뭐랄까, 어떤 새로운 촌닭이 되어 있는 것 같아, 신개념 촌닭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아무데나 막 굴러다니고 막 궁굴러오는 호박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멋진 호박마차에 타고 내일로 떠나는 로맨티스트니까. 푸하하하하하! 나도 내가 뭔 말하는지 잘 모르겠어. 아무래도 재미난 일이 없어서 그러나봐.」
   「그럴 수 있어. 이해해. 길 잃어버리지 않고 용케 여기까지 잘 찾아왔잖아. 그러면 된 거야. 어떻게, 오면서 뭐 이상한 일은 없었고?」
   「뭐 그러지. 다 평범한 일상이야. 찻집에서 자기들끼리 나누는 말들, 소셜 네트워크에서 하는 말장난 다 그런 것들 뿐이야. 가령 뭐는 없다, 문장 끝에 옷을 벋었다를 붙여보자, 또 월요일이다, 아무리봐도 미쳤어, 슬픔은 아름답다. 그런 애기들.」
   「어쩔 수 없잖아. 아저씨들이 그럼 청춘영화를 찍겠냐? 아니면 주술사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겄냐. 그렇다고 <안아줘요>라는 시를 쓰겠니 <너를 사랑해> 이런 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 희망사항에 대해서 노래할 수도 없고, 남들이 하나 같이 재밌다는 장안의 화제 최고 인기 게임인 실시간 증강현실 앱도 왠지 나는 예술을 위해서든, 내 개성 때문이든, 무엇보다 그걸 해봤는데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 때문이든 그렇게 게임이나 하면서 귀중한 인생을 허비할 수도 없다면서 소심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겁만 먹고 있어. 나, 나만 그렇다고. 나만! 오늘도 봐봐. 누드 모델 서주기로 약속했던 여대생, 약속 빵꾸냈잖아. 난 그림만 그릴건데 내가 뭐 지를 어떻게 한대? 커피 사주고, 술 사주고, 뭐 사주고, 돈만 허-천-나-게 들었어. 아 나 증말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네. 이런, 젠~장!」
   폴이 말한 여대생은 저번에 내가 하숙집에서 기거했던 그 대학교에 다니는 어느 학생을 말한다. 우리는 그 말이 나왔으니까, 그래서 뜬금없이 그래서는 안된다는 불합리하고 불편한 사교와 빌린 돈은 늦게 갚아도 했던 말은 지켜야 한다는 보도 듣도 못한 이상한 신념에 대해 떠들다가 그녀, 그녀의 이름은 시몬이라고 했다, 시몬을 만나기 위해 그 대학교로 찾아가기로 했다. 대체 왜 말을 바꾼거냐고, 왜 마음이 바뀐거냐고, 따져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아직 그 시몬이 그 시몬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 도착했다.

   ⑪
   우린 사실 그곳으로 가면서 조금 설렜다. 박힌 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 저, 저기 저분들 또, 또, 또 저 양반들 여기 평균 연령 낮추시려고 오시네, 뭐라뭐라. 그렇지만 우린 그런 걱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우린 혹시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축제 기간이면 어떡하지 막 그러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어떤 긍정적인 간헐적 강화의 드라마틱함을 기대하면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간헐적 강화는 뭔 놈의 간헐적 강화? 축제는 뭔 얼어죽을 축제? 그날은 시험 끝나고 무슨 기간인지 방학인지 어쩐지 사람이 유난히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난 어디를 가면 싸늘하게 관광객이 빠지고, 반대로 폴은 어디를 가면 인파가 불야성을 이루는데 그럼 이게 그와 뭔 관련이 있을까? 없는 것 같다. 괜히 마음의 준비만 하느라 우린 제풀에 지쳐버렸다. 그래서 아마 폴과 나는 어떤 공통된 의심, 교집합의 음모, 너무 순조로워서 심심한 일상에 대한 대항마적인 의미와 뭔가 짜릿하고 흐뭇한 교감, 똑같은 생각을 서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얘랑 놀면 전엔 재미있었는데 이젠 힘 떨어지고 운이 빠지고 복도 달아난 것일까? 지금 와서 보니 얘는 완전 허당 같아. 너무 철이 없어. 사랑을 몰라. 도대체 뭘 몰라. 따라서 미안하지만 음, 단짝을 이제 그만 바꿔야 할까? 지금이 그때인 것일까?」
   물론 우리는 그걸 말로 하지는 않았다. 또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도 않았다. 폴은 몰라도. 난 사실 폴을 우리 무명 블로그에 영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언뜻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도 해봤다. 여지없이 탈락했지만. 폴은 모르겠으나 괜히 가상으로 녀석은 엉덩방아 제대로 찍은 거지. 암~! 예전에는 폴을 보기만 해도 재밌고, 전화로 목소리만 들어도 반갑고, 녀석이 과자를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난 포식한 것처럼 배가 다 불러왔는데, 지금은 미안하고도 서운하게도 안 그런다. 사실인데 어떡하랴. 혹시 사랑도 이런 단계를 밟는 것일까? 이 글을 읽고 있는 연인끼리 같이 공감되는 미소를 지으면 어떡하지? 난 냉정한 마초가 되는 것이고, 비열한 얼간이요, 한마디로 바보 천치로 찍히는 거잖아? 이런, 개뿔 같으니라고! 간헐적 강화도 날아갔고, 축제도 날 샜는데, 욕까지 한가득 얻어들으라니...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지금 상황에 적절한 대사는 이런 것일까? 에라~ 인간아~ 넌 잘해줄래야 잘해줄 수가 없어~ ......!
   뭐하냐, 어디냐, 뭐 재미난 일 없냐, 오빠 보고 싶어요, 우리도 데려가줘요, 얼굴 좀 보여주세요 오빠, 살판나셨군요, 같이 가줘요, 같이 뭐 좀 합시다...... 이런 말을 들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당연히 폴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틀림 없다. 아~ 나 이거 이거 이 놈의 인기 못 말린다니까~, 이런 말 한 번 해 보고 싶다!
   「이건 꿈일꺼야!」 폴.
   「영화일 수도 있어.」 나.
   「그럼 좋겠다. 또는 중편 소설?」 폴.
   「그만 하자!」 나.
   폴이 말할 차례였지만 가만 있길래 다시 이어서 내가 말했다.
   「응... 그래도 괜찮아. 우리만 술 마시고 노는데 돈 다 쓴 거 아냐. 여자들도 그런다드라. 이때까지 찻집에 쓴 돈 다 합치면 찻집 차리고도 남았을 거라고. 진즉!」
   「그래? 어쩐지 위로가 되는 것 같은데...」 폴.
   「하기사 지금 이렇게 놀듯이 공부했으면 진작...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지금껏 마신 술값을 모았으면, 한 재산 모았을 텐데... 아아! 그렇다고 뭐 불행한 것도 아니야. 그럼 된 거네. 굿! 그건 그렇고 그녀에게 연락해봐. 여기까지 왔으면 얼굴 보며 인사하고 차를 같이 마시면서 근황이라도 물어봐야 하지 않겠어?」 나.
   「응, 그래. 그래 볼까?」 폴.
   그런데 폴이 전화를 걸고 누군가 전화를 받았는데 그 음성이 나온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더 넘버 유 헤브 리치드......(침묵)......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라고 하는데?」 폴.
   「요금을 안 냈을까? 아니 그건 당분간 통화를 할 수 없다고 나오는데. 번호를 차단하거나 어떤 사정으로 정지해도 그렇게 나오고. 번호를 바꾼 거 같은데. 누드 모델은 커녕 같이 카페에서 차 한 잔도 마실 수 없고, 완전 남남이 된 거네. 아, 어찌 이럴 수가!」 나.
   「핸드폰 집어 던질까? (손가락질, 저쪽으로)」 폴.
   「참어!」 나.
   「알았어.」 폴.
   폴은 그녀를 헬스클럽에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헬스클럽에서 그녀가 자기를 꼬셨다고 한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남자는 딱, 막, 팍 그런 분위기가 있었는데 폴은 자기를 돌맹이 보듯 대했기 때문이란다. 뭐 어쨌든 폴은 헬스클럽을 옮길려다가 그냥 그만 다니기로 결정했다. 우리 동네에는 헬스클럽이 없는데 그동안 폴은 도시까지 원정 경기 다니느라 고생했다. 나는 그만 뺀질거리고 녀석을 토닥거려주기로 했다. 하기야 우리가 만인의 연인이라면 귀찮을 것이다. 운신의 폭이 비좁으니까. 우리가 대학생이 아닌 것, 좋다. 날마다 이와 비슷한 일상을 보내는 것, 괜찮다. 불현듯 갑자기 지금 그녀에게 연락이 온다면, 이젠 우리가 싫다. 그러나 뭔지 모를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멈출 수 없고 뭔가를 하고 지금 현실에 안주할 수 없고 나를 둘러싼 시공간에 대하여 마뜩잖다고 느끼는 감정만 남았으며, 그 때문에 움직였고 이곳 교정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녀인지 누구인지 사실 보고 싶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다 핑계였고 투정이었다. 그러나 허영과 허세를 동반한 달이 뜨는 시간에 남몰래 체조를 하는 것과 봄에 낙엽을 밟고 싶은 낭만적 충동감은 멈출 수가 없다. 행복은 가까이 있다? 천만의 말씀. 완전 멀리 있다. 지금 행복하다고 선언해버린다면, 그것은 지속되기도 어렵고 짧은 영원은 커녕 앙증맞은 원대함은 기대할 수도 없으며, 창작의 영감은 다정스레 작별을 고하고, 괜스레 얼빠진 동네 아저씨가 될 것만 같은 사념 때문에 쉽게 이와 같은 수다를 말로 털어낼 수도 없다. 못난이 같지만 못난이가 어때서! 뭐라는 거야!! 하지만 이렇게 폴과 나는 학교 잔디밭 그늘에 앉아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멀뚱히 바라다 보고 있으니 지금 우린 별로 바라는 게 없는 것 같다고 느꼈다. 지금을 설명하는 단어는, 고졸함? 우린 누구, 밀정? 제아무리 재주가 용해도 발각될 일은 발각되고야 만다. 그것도 쏜살같이! 우리는 허당, 은근한 허당이라고! 그냥 허당 보다는 저처럼 수식어가 붙는 게 차라리 낫다. 그러나 끝까지 한사코 아니라고 우겨야만 하고, 적어도 독자 한 분 쯤은 그 부서진 환상의 반대편에 서있어야 하는 우리가 처한 난처함과 피로함을 극구 만류해야 하리라. 우와,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뭔가 홀가분하긴 홀가분하지만 자기애, 완전 쩐다. 못봐주겠다. 재수 없다. 타인의 소셜 네트워크와 남의 우정과 행복과 인생을 괜히 훔쳐봤다. 아아, 챙피하다. 오, 민망하고 부끄럽구나.
   하나 분명한 건 우린 아직 단짝이고, 서로 모르는 부분이 많으며 어떤 망설임의 순간 그것에 대한 소년 같은 동경심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 다행이다.
   우리는 왠지 모를 기분 탓에 마음이 들떴지만 목마름과 배고픔과 약간 꿉꿉한 날씨를 탓하면서 돌아가기 전에 내가 예전에 지냈던 하숙집에 들려보기로 했다. 그곳에 도착했다. 난 기분이 이상했지만 폴은 표정이 어두웠다. 그래서 난 남고 싶었고, 폴은 돌아가고 싶어했다. 따라서 난 남았고, 폴은 떠났다.
   나는 다시 짧은 일정 동안 하숙 생활을 다시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하숙집에 묶기로 했다.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 기존에 많던 학생들은 한 명도 없고 인근 공장 지대던가 무슨 뭘 만드는 어디선가에서 일하시는 아저씨들만 엄청 많았다.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았다. 그래도 좀 더 머물러 보기로 했다. 영감이 떠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그분들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반주를 곁들이며 착상이고 시상이고 다 날아가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나는 근처를 산책하면서 노을을 봤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있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보게 됐다. 그런데 그 화장지가 엄청 길게 풀어져 있었다. 내가 그 길게 풀어진 화장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땠겠나. 난 허당, 허무, 허영, 허세, 허공, 허탕, 허풍과 온갖 허짜로 시작하는 낱말들에 둘러싸여 진일보하지 못하고 있구나, 난 도대체 또 뭐에 말렸길래 여기까지 와버린 것일까, 난 착착 감기고 술술 말리는 글을 써야 하는데 그 반대의 어떤 상징을 떠오르게 만드는 장면을 보았으니 고개를 돌리고, 눈을 잠시 길게 감았다가, 머리 위로 수증기가 푸~~~쉭 올라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달리 할 일이 없어서 나는 그 화장지가 풀어진 길을 따라가보았다. 그런데 금방 길이 끝나지 않고 화장지가 엄청나게 길게 이어져있었다. 뭔 특수 화장지도 아니고 누가 장난치는 것도 아닐텐데 뭔일인지 모르겠지만 중간에 멈출 수도 없었다. 그렇게 길게 화장지를 따라가다가 나는 예전 그 하숙집의 주인 아저씨든가 할아버지든가 그분이 항상 관리하시고 운용하시던 시추기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하얗던 화장지는 슬그머니 연한 노란색으로 바뀌고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나는 나는 조금씩 조금씩 정신이 흐릿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느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내 기억은 끊겨버렸다 끊겨버렸다. 뿌연 안개가 짙어지는 것은 감지한 것 같은데 괴상한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는가, 말을 걸어왔었나, 중력을 무뎌지게 만들었나 그것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머쉰이 그냥 머쉰은 아니었던 듯 하다. 기괴한 자기장을 내뿜었든가 뭔가 날 홀렸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어떻게, 어떻게 시간이 지나서 하숙집 생활을 정리하고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한 머쉰 앞에서 또 하숙집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의 기억은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즉 중간의 기억은 끊겨버렸다. 지금도 그때 어찌된 일인지 그것을 하나도 모르겠다. 현실에서 못볼 껄 봐버렸을까. 그래서 내 기억이 단절된 것일까? 그건 정말 미스테리다. 그렇다고 정신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전문용어 몇 마디를 듣는 건 어쩐지 마음에 내키지 않으니 그 분야를 독학할 수도 없는 일이고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어떻게 달리 알아볼 수도 없고, 점쟁이 말발은 이젠 내게 먹히지도 않고, 이미 알아볼 만한 건 다 알아봤는데 아무 것도 나오는 게 없었다.
   나는 사람은 대략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첫째, 살다보면 이런날도 오는구나 라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를 궁금해하는 친구. 둘째, 나처럼 이상한 일을 겪고도 그걸 설명하지도, 이해하지도, 잊지도 못해서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쓰는 사람. 나는 그 가운데 명백한 후자였다. 그러나 나는 전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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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75

from 소설 2016. 6. 30. 21:31

   시몬의 아리아.
   찻집 이름이다. 그곳에 친구들이 모였다. 잠깐 엉뚱한 생각이 들었지만 잠언을 들추어내자면 그것은 이렇다. 어렸을 때 읽은 탈무드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친구 가운데 랍비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여간 시몬의 아리아에서 그들은 새로운 공동 소설 집필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초지일관 일 얘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최근 겪은 흥미로운 일을 알려주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제 해명하기도 지친다.」
   바로 전에 뭘 물어봤길래 이처럼 드라마에 자주 쓰이는 말을 했을까. 뻔하다. 글이 잘 써지냐, 뭐 재미난 일 없냐, 요즘 사랑 하고 있냐, 주변에 누구 관심가는 사람 있냐, 색다른 취미 생겼냐, 한때 친했던 그녀에게 연락오지 않았냐, 뭐 그런 물음이었을 것이다. 심령술사의 관록도 주술사의 부적도 세기말적 짐작도 다 필요없는 추측이다. 궁금하지도 않은 일이다. 뭐 퍽이나 대단한 일이라고. 장난스런 소설처럼. 마치 사랑의 불장난에 대한 언약이 평생 지켜질지 몰랐다는 노년기의 어떤 회상처럼.
   「손꼽아 기다리는 일 같은 거 없냐?」
   「있겄냐?」
   「지당한 말씀.」
   「등골이 오싹하군.」
   「얘들아 말을 좀 길게 하든가, 좀 더 멋지게 말하든가, 아니면 재미난 농담을 하라고. 나중 두고두고 기억나는 그런 고급스러운 화법, 알잖아? 누가 듣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런...화법? 몰라. 관심없어.」
   「못 말리겠네. 저번에 올렸던 공동 소설은 문단 띄여쓰기 별로 없이 빡빡하게 글로만 채웠으니 이젠 대화체로 쓰는 게 어떨까? 어차피 사람 일인데 사람에 관한 건데 너무 빡빡하게 굴 필요 없잖아. 안 그래? 대화체라, 음, 대화-하면 남자보다는 여자잖아. 여자-하면 돌맹이, 남자는 목석, 음. 나무-하면 뭐가 생각나니?」
   「나무? 나무...나무라... 관?」
   「아 나 이런. 어, 너 모자 멋진데. 모자-하면 뭐가 생각나?」
   「모자? 모자...모자라... 영정 사진?」
   「아 나 이런!」
   「뭐 연상 기법 놀이하니? 끝말잇기 하게? 그러지 말고 멋진 경구나 명언, 특이한 이름과 이상한 지명을 얘기해 봐. 그게 더 건실해보여. 기실 더 재미있을 테고. 시작은 그런 데서 오는 거야. 실마리를 잡아야 할 꺼 아니야.」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 조니.
   「일생에 한번뿐인 사랑.」 케빈.
   「당신에게 사랑 노래를 불러드릴꺼에요.」 알렉스.
   「봄바람이여, 왜 나를 깨우는가?」 마크.
   「비가 오면 행복해져요... 아니 아니야. 음... 그대는 아시나요, 사랑이 무언지? ...... 아니야. 너무 느끼해......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이건 뭔가 노래 제목  같은데...... 천사의 품안에 있는 그대여?...... 뭐야?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하워드.
   「여러분 축배를 듭시다.」 마크.
   순간 그들이 모여서 놀고 있는 탁자 곁으로 제임스가 다가왔다. 어느 <창가로 와주오, 내 사랑> 같은 아가씨와 함께. 또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미리 카페 사장에게 신청곡을 부탁해놓고 등장했다. 노래가 나온다. <잔인하다고요? 아녜요, 매정한 여자라고 하지 마세요.> 인기 하나도 없는 인디밴드 음악이다. 카페 사장은 뭐라뭐라 투덜거리고 있을 것이다.
   「축배는 뭔 축배? 대낮부터 술 퍼마시게? 커피나 드셔. 얘들아, 소개할께. 여기는 내 조수, 루시. 루시, 이쪽은 내 친구들. 전에 말했지? 그 똘만이들. 서로 인사해.」
   그들은 인사를 나눴다. 인사말은 가령 이랬다. 필요하다면, 접근금지 명령이라도 받아내겠어요. 그리고 루시는 급한 볼일이 있다고 하면서 그들을 떠나갔다. 좋다 말았다. 아예 얼굴을 비추지 못한 것만 못하게 됐다. 그럼 그렇지. 제임스가 이어서 말한다.
   「미안해. 조수...는 아니고. 단골 술집에서 일하는 점원의 친구의 여자친구의 동생의 동창이야. 우연히 요 앞에서 만났고, 할말도 없고 그냥 차 한잔 사드릴께요 라고 인사말을 했는데 덥썩 사주라 그러네. 예상하지 못했어. 뒷사람 음료값 지불하기를 바랄 수는 없으니 외상을 달아놓거나 골든벨을 기다릴까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농담이라 그러네. 그녀가 농담으로 차 사달라고 그랬다고. 그리고 나와 몇 마디 나누고 너네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리고, 갔어. 그게 다야. 사랑은, 물 건너갔어. 아까 하던 거 계속하자. 누가 말할 차례니?」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한다... 여자들 이런 거 좋아하잖아. 진심은 아니어도, 귀찮아도 주기적으로 말로 또 글로 연신 마음을 들뜨게 해주는 게 또 우리 남아들의 할일 아니겠냐. 그만하라고 그게 뭐냐고 그런 거 정말 싫다고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알지. 돈후안적 색체란 딴 게 아니라는 걸. 그게 바로 카사노바의 필수 덕목이란 걸.」 조니.
   「그 누가 나의 슬픔을 거두어주리.」 케빈.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
   사랑은 자유로운 새.
   지옥의 복수심 내 가슴에 불 타고.
   우유빛 흰 옷을 입은 그대여.
   어찌하여 나의 잠을 깨우는가?
   오 나의 태양. 그리고 해와 달과 별.
   이런 사랑, 세상에 또 있을까?
   누구라도 한번은 사랑의 감정을 겪어보지.
   이 마음을 당신께 드릴께요....... 여기까지.」 알렉스.
   「사랑을 몰랐다면. 당신이 좋다면. 당신이 원한다면. 희망이 없다면.」 마크.
   「이봐요, 난 죽은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이야기를 나눠왔는데 여기다 망상증까지는 필요없어요. 필요없다구요.」 하워드.
   「후궁으로부터의 탈출... 연인이나 아내를 원해요... 사랑은 장밋빛 날개를 달고... 공주는 잠못 이루고.」 닉.
   「친구들이여, 내 얘기를 들어보시게...... 가는 여자 붙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막지 않는다.」 제임스.
   ...... ...... ......
   「(합창) 뭐야?」
   「그거 누가 한 말이야? 명언이냐?」
   「누구나 하는 말이잖아. 누구나 어디서나 들어본 얘기. 하여튼 쟤는 분위기 깨는 데 뭐 있어!」
   「평범한 삶을 좋아하시는군.」
   한동안 조용했다가 닉이 동화가 잘 써지지 않는다고, 누군가 음식점 매출이 바닥이라고, 준비중인 영화가 엎어질 판국이라고 하자 이와 같이 걱정의 말이 오간다.
   「정상적인 직장을 가져보는 건 어때? 좀 제대로 살면 안 되겠냐, 그런 말이 아니구 말야.」
   「나도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힘들어!」
   「집에서 그냥 텔레비전이나 볼  걸.」
   「차라리 잘 됐는지도 몰라. 지금 내 인생에선 새로운 여자는 필요없거든.」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이 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잔말 말고 글이나 쓰자. 닥치고 쓰기. 아찔한 지성. 탁월한 안목. 청아한 아이다. 유려한 미적 감각. 사랑인지 환상인지!」
   자, 개인 방송 또 시작됐다. 들어주는 사람 없이 혼자 말하고 혼자 듣기.
   「졸업 무도회나 어디 축제든 총각잔치든 남의 집 행사에 낄 뭐 없냐? 깜작 파티 뭐 이런 거.」
   「어, 없어.」
   「독서 클럽에서 활동해보는 건 어떠니?」
   「독서 클럽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네!」
   「이거 뭔가 잘 안 풀리는데. 일하는 거도 아니고, 노는 거도 아니고 말야.」
   「문제가 뭔지는 바보라도 알겄다.」
   「친절하기도 하셔라.」
   「문제가 뭔데?」
   「글쎄! 뭐지?」
   「너네들 혹시 셀룰러 메모리라고 들어봤냐?」
   「어.」
   「어, 가 뭐야? 그 다음이 있어야지, 어?」
   「들어만 봤어. 들어만 봤다구.」
   「그게 뭐야?」
   「뭐긴 뭐야. 허무고 권태지.」
   「그래. 갸륵하다... 뜻밖의 약속은 잡히지 않고, 전혀, 어안이 벙벙하지 않은 일상에, 뭔가 후경이 있을 법한 친구 집에도 놀러가고 싶지 않고, 비경이 자기를 찾아주기를 바라는 공원에 소풍가기도 마냥 귀찮기만 하구나. 그렇다고 투우사의 노래나 사랑의 미풍을 부를 수는 없고. 기분 참 이상하네. 자주 그래. 너네는 안 그러냐? 나만 그런가?」
   「어. 너만 그래...... 아, 맞다. 그러고보니 우리, 조니네 집에 안 가봤어. 조니, 집에 뭘 숨겨놨길래 친구들을 한번도 초대하지 않니? 정말 뭐 있는 거 아니냐?」
   「아 그게 있잖아. 지금 내가 자숙중이거든. 접근금지 뭐 그런 문제가 있어서 그래. 별일 아닌데 조만간 해결될 꺼야. 나중에 내가 초대할께. 걱정 말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서 핸드폰만 들여다본다. 소셜 네트워크를 읽거나 거기에 뭔가를 적고 있다. 시시콜콜한 얘기들. 어떻게 살고 싶다, 뭐가 그립다, 따분하다, 생활 리듬이 어떻고 뭐가 보이네 들리네, 남이 뭐라고 한다 책에서 뭐라고 한다 그것에 대해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 오늘 특별히 기대되는 일이 없다, 나는 머머할 것이다, 뭐가 생각난다, 옛날에는 어땠는데 지금은 어떻다, 기타 등등. 얼추 이런 얘기들만 묶고 이으면 뚝딱 소설 하나 나오겠다. 비슷비슷한 이야기들. 그래서 혹 하고 읽어보면 역시나, 라고 하면서 새로움과 동경과 낭만과 환상은 온데간데 없어지는 통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글인지 말인지 구분이 잘 안되는 그런 포장품들.
   각자 자기 삶을 사느라 분주하지만 어쩌다 블로그라는 구심점에 의해 공동소설 집필이라는 목적 때문에 약간 규칙적인 만남을 가지게 됐다. 때문에 그들은 학창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학교에 갔는데 그날은 공부하지 않고 노는 날이랄지, 수업을 할려다가 선생님이 잠깐 애들 졸음을 쫓아줄까 하다가 자기 얘기에 자기가 심취하고 흥분해서 밑도 끝도 없이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공부라는 대업은 있으나, 명성이라는 명분은 남겨봤지만 진짜 목표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노는 게 주요한 일처럼 느껴졌다. 어른의 꿈, 휴가 계획, 집에다 거짓말하고 직장에는 월차 내고 하루 놀러갔다오기, 초딩 흉내내기, 전문가 따라하기, 거기에 빠져서 그들은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무슨 시트콤 드라마에 나오는 아지트 1과 아지트 2가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고, 매회 새로운 여자를 꼬시고, 공연만 하면 전석 매진, 취미로 음반 하나 냈는데 대박 터트려서 평생 일 안 해도 될 정도로 한밑천 든든히 챙길만한 행운, 로또 복권 당첨된 거를 주변에 지인에게 친구에게 거저 주고 그런 수준은 아니었으나 진정한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심오한 예술 창작에 대하여. 그러다 뜬금없이 하워드가 슬며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곧 넌지시 말을 어렵사리 꺼낸다.
   「너네들과 있으니까 하는 말인데, 있잖아, 어 그게 말이야, 그 뭐냐면, 어, 내게 있어서, 동요를 작곡하고 동화를 쓰고 아동복을 디자인하고 동심을 본받고 흉내내고 되찾는 거도 중요하지만, 그렇지만 뭐랄까, 그건 말이야. 지금 시점에서, 음 틀림없이 뭔가 의미심장한 일이면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자 어찌보면 탐욕이랄 수도 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게 음 내게 있어서, 지금 내 인생에서 어떤 삶에 느닷없이 찾아오는 행복의 풍선과도 같은 그런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금빛 호박이고 은빛 수정구슬이기 때문에 썩 모른체하고 경악할 일은 아닐꺼야. 그렇지. 절대 그렇게 요원한 일이 아니라 실체고 생명이며 환희이자 찬미, 더군다나 궁극적 미학이자 광란의 분위기인 동시에 뭐랄까 보일락말락한 그런 속옷? 아니야 아니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술 마시고 전날 필름이 끊겼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내 차에 그 페인트 뭐야 그거 그래피티가 되어있고, 차 위에 내 팬티를 입은 마네킹이 이상한 자세로 엉거주춤 뭔가를 연상시키듯 그 멈칫한 자세를 취한다고나 할까, 어떤 시간의 춤, 뭔가 운명의 힘, 유쾌한 미망인에 대한 기억과 갖고 싶었으나 갖지 못하고 잊어버렸던 세련된 어느 악세사리, 빛나고 행복했던 어느 날 거리의 악사와의 만남, 꿈에서 만난 청초한 여인에게 들었던 말, 만약 나리께서 춤을 추고 싶으시다면, 그런데 그 순간 딱 알람소리에 번쩍 깨어나고, 나는 몽정했고 앗싸 청춘으로 돌아가서 나는 몽정했고, 나는 몽유병에 걸렸나 걱정하며 드디여 내가 몽상가이자 비로소 완연하게 시인이 된 것만 같은 어떤 흥분과 만족감, 하지만 만에 하나 모르니까 정신병원에 어디 으슥한 정신병원에 검진을 예약해 놓는 센스, 음, 어...... 음, 어...... 음, 어......」 하워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게 뭔 소리야?」 조니.
   「대체 뭔데 그래? 사랑에 미치다, 이런 거야? 여자, 생겼냐? 그런데 그게 해서는 안 될, 불가능한, 슬픈 운명, 알 수 없는 인생, 뭐 그런 거야? 정말 그런 거라도 되냐?」 케빈.
   「자 말해다오, 하워드!」 알렉스.
   「아주 일생이 꿈이군.」 마크.
   「내 인생도 문제가 많지만 쟤 인생도 만만치 않아.」 닉.
   「가는 여자 붙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마다하지 않는다.」 제임스. 아 나 이런, 뭐야 이거! 흉측하게시리, 판을 깨는 시점이 어떻게 보면 추접스럽군.
   「하워드, 여자란 말이야, 자고로 여자는 안정된 상태에 안주하는 걸 좋아해. 그렇다고 지루하고 지겹고 하품 나오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적절히 흥분과 불안과 환락과 경건함, 건전한 것 같으면서도 어떤 고대의 쾌락주의를 연상시키는 듯한 움직임과 함축적인 시적 언어, 맺고 끊는 경쾌함도 좋지만 제멋데로 모든 걸 틀에 가두어버리면 또 거부감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단 말야. 어? 알겠어? 너도 네 마음을 잘 모르겠지만 하워드가 사랑에 빠지다니, 오오! 아, 이건 뭐야 뭐지? 성난 황소? 아니야. 숭고한 정신? 너무 근엄하지. 애정의 기운? 뭔가 느껴지기는 해.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엔 일러. 노래의 날개 위에 우리가 올라가선 안 돼. 개선 행진곡은 참아야 된다구. 그래, 이건 꿈이야. 꿈이라구. 괜히 내가 다 흥분되네. 사랑에 빠진 건 하워드인데 누가 보면 내가 주인공인줄 알겠네. 뭐 삼각관계라도 되는 줄 알겠다고. 그래. 하워드, 속시원히 엉아들에게 실토해봐. 고백하라구. 마음을 열어. (동작, 손동작 딱!) 아잇 그런 몸개그, 하지마. 마음을 열라고 했드니 나이가 몇 살인데 남대문을 여는 시늉을 하니? 그거 버릇된다니까. 언제적 익살인데 그런 걸 써먹냐, 어? 좌우지간 네 속마음을 꺼내놔봐. 친구들이 듣기를 원하자나. 말해봐, 어서. 마음을 열란 말이야. 남자답게, 그렇게.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데? 5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처럼, 공주는 잠 못 이루고, 다시 한번 그대 목소리를, 정결한 집, 무정한 마음, 뭐 그 단계야? 아니면 남몰래 흐르는 눈물? 별은 빛나건만? 오직 한 송이 장미만이 답이야? 그런 것 같아?...... 느낌표든 물음표든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았군. 딱 보니 답 나와. 달에게 부치는 노래와 사랑의 괴로움 그대는 아는가,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까지 다, 다 좋아, 좋다구. 그런데 말이야.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잊으면 안 돼. 언제까지 인생은 아름다워, 귀여운 여인이여, 사랑의 이중창을 부르고 미풍이 불어온다며 시만 읊어줄 수는 없어. 뭔가 증표를 건네라구. 때가 되면 한 학년 진급을 해야 돼. 요모조모 구색을 맞출려다간 사랑은 변색되어 버린다네, 친구.」
   「오~ 조니! 하워드가 뭐 애니? 지 알아서 잘 하겄지. 그리고 넌 그걸 말이 아니라 글로 쓰라고 글로.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냐! 늬가 뭐 초딩이냐? 엉?」
   「음, 어쨌든 하워드가 그랬구나~」
   「하워드, 키스했어?」 하워드는 대답이 없다. 하워드는 대답없는 남자다.
   「했네, 했어.」
   「그래 우리의 공동 소설, 몇 번째인지 이젠 세지 않아도 뭔가 든든해. 하워드의 사랑, 다음 편은 이걸로 가자. 생각하고 말 것도 없네. 딱이네. 딱이야. 정통 로맨스, 나올 때도 됐지. 그럼. 청순한 멜로, 에로틱한 순수함, 낭만파 H의 고결함, 그녀는 누구인가, 뭐 이런 걸로 꾸미면 작품 그냥 나오겠네. OK~!」
   「하워드, 어떻게 우리에게 그동안 숨겨온 거야? 왜? 그녀가 떠나갈지도 모르니까?」
   「이름이 뭐야? 그녀?」
   「말 못 해.」 하워드.
   「뭐 하는 아가씬데?」
   「아직 몰라. 이름도 몰라. 어디 사는지도 몰라. 그녀는 나의 존재도 몰라. 아직 실제로 만나보지도 못했어. 그러나 마음은 쉽게 접혀지지 않아. 왜 그런지 모르겠어.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구. 뭐랄까, 나는 그녀가 작가처럼 느껴져. 그녀는 소셜 네트워크에 글을 쓰고, 나는 그걸 읽는 독자고. 어제 그녀는 이렇게 글을 남겼어. 아 짜증난다고. 나는 그녀가 왜 짜증이 나는지를 알아봤는데 알아내지 못했어. 이걸로 끝일까? 아닐꺼야. 여기서 짝사랑, 해보지 않은 사람 있어? 없잖아! 쪽팔릴 일도 아니야. 사랑이 변할 꺼라는 걱정도 필요없어. 서로의 마음에 상처줄 일도 없다구. 뭘 선물해줘야 한다는, 기념일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다구. 같이 살면서 지겹고 짜증내다가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올 일도 없지, 당연히. <도저히 못참아. 텔레비전 꺼!> 상황이 그렇다네. 나도 알아. 내가 아둔하단 걸. 그렇지만 좋은 걸 어떡해? 멈출 수 없는 걸 어떡하냐고. 그러다 마침내 나는 용기를 냈어. 하늘과 바다에 대고, 남자와 여자의 오묘한 조화 앞에, 애수를 조수 삼아 애절함에 전념하여 용기를 냈다구. 그래서 어떡하다가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고, 그녀의 집이 어딘지 알아냈어. 뭐 스토킹을 하겠다는 그런 뜻은 아니야.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좋거든. 이 애정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이미 그 감정은 까마득히 멀리 가버려서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되돌릴 수 없다구. 언젠가 새출발을 하긴 할 꺼야. 간신히 마음을 돌리겠지. 너네들에게 도움 받고 신세도 질 테고. 본의 아니게 딱한 사정에 빠져서 구슬픈 사랑을 하는 것 같지만 더없이 순결한 열망일 수도 있어. 무심결에 이 마음은 내 소설로 스며들꺼야. 그리고, 그러나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나는 그녀는 알고, 그녀는 나를 모르는 딱 그 지점에서 마침내 그건 끝나버렸어. 이미 끝났다는 건 말하지 않을려고 했는데 어쩌다 말이 나와버렸네. 음. 그래. 난 그녀와 끝났어. 그렇게 그녀는 내게서 멀어져갔지. 그렇게 잊혀졌어. 가차없이. 가뜩이나 때마침 일이다 뭐다 블로그다 바빠졌기도 했고. 난 다시 예전의 호쾌함을 되찾았어. 조금은 명랑한 예전의 나로 되돌아온 거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의향도 있고, 여차하면 남의 사랑에 뛰어들 심중도 없다고는 못할 만큼 제 1의 자아로 되돌아왔지. 누구 관심가는 사람도 없으면서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이랄까, 막 샤워하면서 노래도 혼자 불러. 산타루치아, 그대의 찬 손, 오 사랑스런 아가씨, 신음하는 그녀의 영혼은, 한번도 본적 없는 미인. 그러다 내게 자장가를 불러줄 아가씨가 나타나겠지. 나타날 꺼야. 난 그렇게 믿어. 난 그렇게 믿을래......(침묵)...... 그러다 기적이 일어났어. 난 이미 마음이 떠났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그녀가 나를 예전의 나처럼 똑같이 추종하며 마음을 키우고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 자세한 건 나중 소설을 읽어보면 알게 될 꺼야.... 그런데 있잖아, 고요한 내 가슴에 잠들었던 사랑을 그녀가 다시 깨웠어. 잊었는데, 지웠는데, 마음 접었는데. 제비꽃 한 송이도 전해주지 않았는데. 꿈에도 몰랐어. 그녀가 이렇게 나타날 줄은. 그녀는, 그녀가, 그녀를...... 그녀가 누구냐면 너네들도 한번 본 적이 있어. 그런데 그게 오래되지 않은 일이야. 왜냐하면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이거든. 아까 제임스가 데려온? 제임스와 함께 온 여자 있지? 그녀가, 그녀야!」
   ...... ...... ......
   「정말...이야?」
   「널 그렇게 놀리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좀 괜찮니?」
   「생각해보니까 앞뒤가 착착 맞네.」 어디가 착착 맞어? 대체 뭐가?
   이때 하워드가 한마디 한다.
   「그런데 있잖아. 아까 한 얘기, 다 뻥이야. 미안. 미안해. 그러나 전부 다는 아니야. 진짜도 있다구. 하지만 일단 뻥이란 것만 분명히 해둘께.」
   멈칫.
   한 번 더 멈칫.
   「알고 있었어.」
   「이미 눈치챘어.」
   「와, 깜빡 속았잖아~ 이럴 줄 알았지?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본 거야.」
   「천재가 아니라도 그건 알겠다.」
   「한마디만 할께. 이런, 개뿔!」
   「소설 쓴 거야? 녹음 안 했는데, 설마 이거 글로 쓸 꺼니?」
   「다 블로그 때문이야.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오 그거 괜찮은데. 어떤 제목이나 이름으로 말이야.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꼭 명대사 같아. 어디 나올 것만 같다구.」
   이때 닉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과 닉이 서로 눈빛을 마주치자 서로 놀란다. 말을 듣기만 하거나 주의력이 산만해지거나 하면서 하품하고, 어딘가를 만지고, 시계를 보고, 핸드폰을 보고, 주변을 갸우뚱거리고 그러다가 그 둘이 잠깐 눈빛만 마주쳤는데, 마주쳤다 시선이 제 갈길로 갔는데 핑~ 하면서 되돌아왔다. 바로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오~ 닉~, 오~ (누구~ 라고 부르진 못하고, 왜냐하면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니까) 반갑다~ 하면서 소싯적 꽤 친하게 지냈던 사이처럼 보인다. 실제 매우 친했다. 닉이 게임회사에서 일했을 때 바로 옆자리에 앉은 동료 사이로 그때 그들은 많이 친해졌다. 어쩜 둘이 연인이 될 뻔한 기회도 있었다. 잘 찾아보면 많았을 것이다. 이상하게 그때는 회사에서 지금은 서로 각자의 삶을 사는 타인이지만 어느 찻집에서 또 앉아서 만나게 되었다. 장소만 바꼈다. 그땐 회사에서 옆자리, 지금은 찻집에서 앞뒷자리. 그러나 둘은 소셜 네트워크로 서로 어떻게 사는지 대충은 보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말은 안 해도 그녀는 여기 모인 닉의 친구들을 이미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댓글로 봐 왔고, 몇몇은 이름은 물론 취향도, 구미도, 습관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마크를 눈여겨 봤었다. 지금도 더없이 눈여겨 보고 있다. 그런데 닉은 혼자 정신없이 게임 이야기, 같이 아는 친구 이야기, 뭘 했던 이야기, 자꾸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혼자 주저리주저리 하고 있다. 그래서 닉은 그녀가 중간에 화제와 동떨어진 말을 하는 걸 듣지 못했다. 중요한 순간엔 다중 작업을 잘 하지만 이런 건 한참 시간이 지나서 생각난다. 또 잊는다. 다른 일에 우선순위가 밀린다. 자기에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전형적인 격식에 집중하고, 멋진 남자의 위엄이 떠올라서 전-직장에서 놀이로 했던 인기순위 투표, 거기서 꼴등한 일을 떠올리면서 쉴틈없이 재미난 얘기, 재미없는 얘기를 막 쏟아붙고 있다. 닉이 그러고 있다. 거의 화염방사기, 한 단계 밑 수준이다. 그녀가 말한다. 어, 그래, 그렇지, 맞아, 정말? 와~ 진짜? 진짜 그랬어? 박수 치고 웃고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니...... 그러면서 한 번 두 번 이런 말을 한다.
   「닉, (눈빛을 그쪽에 보내면서) 너 째 알아?」
   그 째는 마크고, 그 째도 그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 째는 속으로 생각한다. 괜히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다가도 다시 생각해보니 왕좌에 앉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종의 브랜드 전도사, 마케팅의 귀재, 환상적인 상표의 숨결을 고객의 마음에 전해주고 그 상품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그 툭출남을 알리고, 그 고고함을 강조하고, 그 놀라움을 세뇌시켜야할 광고판, 세일즈가 관련된 브랜드 슬로건이자 상징이었던 닉은 그녀가 뭔 말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기의 말에 가짜 관심을 표하는지 알면서 또 모르면서 그녀의 말에 통 반응을 하지 않는다. 야속한 인간. 마크는 지금 여자친구가 있지만 혹시 몰랐는데. 골키퍼 있다고 골 들어가지 말란 법도 없는데. 그러나 그녀는 여기까지. 그녀는 여기까지! 그녀의 절실함이 부족했다고는 하지 말자. 절대로! 지금은 닉만 그냥 바보 만들자. 그래도 싸다. 왜냐하면 녀석은 듣고도 모른 체 했으니까. 닉은 그랬고, 그 '째'였던 마크가 듣고도 모른 체 했던 건 당연하게도 또 당연하지 않게도 썩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결론났다. 쉽게 결론났다. 닉이 마크에게 심술부린 것으로! 닉은 섬세한지 못한 남자로! 닉은 일시적으로 (최소한 지금만) 쪼잔한 남자로! 마크가 닉에게 뭐 잘못한 일이 있나, 뭘 밉보였나, 왜, 왜 그랬을까? 닉은, 도대체 닉은 왜 그랬냐고!
   친구의 결혼식 날 식장에서 만난 동창에게 철없이 핸드폰으로 이상한 동영상을 보여주는 친구들도 있다. 지금 뿐만이 아니라 핸드폰이나 동영상의 시장 여건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옛날에도. 감수성 보다는 새로운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을 추구하는 성향이 진한 사람, 익숙함보다는 비교적 새로움에 좀 더 열정적인 사람, 뭔가 어떤 기기와 공과 자동차와 도구와 게임을 좋아하고, 글보다는 단편적인 소식과 시각적인 취미와 동영상에 열광하는 사람. 그러나 여기서 본질은 이게 아니다. 닉이 방금 만난 전-직장동료인 그녀가 매우 다소곳했으나 충분히 귀여웠고 더없이 반짝였으나, 여자로써 유혹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조금 방자하고 경솔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지만 여자의 그 적극성, 최소한 지금 놓치고 갈 수 없는 문제다. 결코 그럴 수 없다. 분량 때문이기도 하고. 그 문제는 주관식, 객관식? 독자는 문제 푸는 학생, 아니면 출제자? 그건 가령 비오는 날 바람에게, 새의 지저귐을 동반하여, 물안개를 어딘가에서 왠지 모르게 누구와 함께 같이 보면서 얘기하기로 하고, 자! 여러분, 간략히 왜 그런가를 알아보자. 왜 의사소통이 안 되었는지를. 신사-숙녀 여러분, 뭘 비빌 언덕이 있는지를, 무슨 어릿광대의 농간이 숨어있는지, 세심한 욕구의 엇갈림을 알아보잔 말이다. 여자들은 생각한다. 말한다. 바로 이런 생각을 말한다. 나는 수동적으로 간택받고 싶지 않다(간택? 어디서 간택 같은 소리를? 그러나 간택이란 말이 언제 쓰이는지 모르는 사람 지금 씩 웃고 계신다. 또 적지도 않다), 난 평범하게 그런 인연으로 만나지 않을꺼야, 난 내가 먼저 다가가서 사랑을 쟁취할 꺼야, 그 남자 그 멋진 남아를 옆에서 주위에서 여자들이 그냥 그대로 가만 놔두겠냐, 또 왜 여자들이 유부남에게 포근함을 느끼는지 그리고 부인은 그런 삐─삐─들을 확 그냥 확 그냥...... 그러는지 다 타당한 이유가 있다. 충분한 논거에 바탕하여 이성적인 까닭이 있겠으나 여기서는 <보기 외>를 살며시 꺼내보면 어떨까 한다. 이른바 번외경기. 학교 종이 울린 후, 진치가 끝나고, 또 뭐가 있지 아빠의 뒷모습과 아빠의 꿈과 아빠의 취미와 습관과 아빠가 읽는 글과 참석하는 강연회, 즐겨보는 TV 프로그램, 집에서 아빠가 평생 유지하시는 일인 뭔가를 닦는 일 즉 화초 잎파리를 닦고, 골프채 헤드를 번쩍번쩍 반들반들 민들민들 파리도 미끄러지게 닦으시고, 라디오를 조립하시고 뭔 열정으로 이제사 헤비메탈 음악을 작곡하신다네 뭐하신다네 그런 게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꿈에서 봤던 노인, 그분을 떠올려보면 된다. 거의 상관관계가 빈약하고 인과관계가 약하지만 좀 전에 의사소통이 빗나간 이유에 대해서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차례만 읽거나 결론만 제시할 수는 없고 중요한 도표 생략하고, <본편 뒤 부록> 그것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날 미래로 이동시킨 후 친구에게 들을 핀잔, 그런 게 뭐가 있을까? 통계나 그래프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답 나온다. 잘못된 예, 딱 하나만 들면 게임 끝난다. 레벨 업! 끝판 왕을 만나러 가게 된단 말이다. 그건 뭐냐? 그건 뭘까? 뭐지, 그게?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으려 하지만 다시 마법을 부려 그동안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총체시켜 벌을 세운 후 집약시켜 체에 걸러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한 친구가 그렇게 얘기하겠지. 자, 당신의 단짝 친구 또는 그녀가 결혼했다면 지금 제일 자주 만나는 친구 또는 당신의 이름을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많이 불러주는 친구를 떠올려보자. 그 친구가 그렇게 얘기하겠지. 넌 그 수많은 남자들의 구애를 무시하고 물리치더니 기껏 지금 고른 게, 원했던 인생이, 바래왔던 이상이, 궁극적 낭만파 남편이, 결혼생활의 신비와 환상과 온갖 기대와 동경이 고작 이거란 말이더냐? 최고의 남자 1번부터 100번, 미래에서 걸어오고 뛰어오고, 4차원에서 짠 하고 튕겨져나오고, 3년 또는 5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하는 예술가까지 다 죄다 너 좋다고 그 난리를 쳤는데 넌 마침내 끝내는 다 마다하고 진짜 이게 아름다운 사랑...... 이걸 어찌...... 말 말자! 실제 이러지는 않겠지만 취중진담으로 이럴 수도 있다고 가정해보는 것이다. 이거다! 이거란 말이다. 저 남자와 매일 아침에 한 침대에서 일어나는 상상? 도저히 그게 안 되니까 적극성의 비검을 남자 대신에 꺼내드는 여자들, 있다. 꼭 있다. 여기도 있고, 거기도 있다. 예전에도 있어왔고, 앞으로도 말할 것도 없다. 개방성, 성실성, 외향성, 동조성, 신경성 다 따져봐도 그래도 나는 그래도 나는 이 남자다, 내 평생의 진정하고 유일한 사랑은 바로 이분이다, 진정 그이는 내 사랑이다, 내 영원한 단짝이란 말이다, 그런 확신 없이 결혼 하는 여자? 둘 중 한명은 그렇게 신부가 된다. 놀랄 일이 아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그게 무슨 흉이라고. 오히려 자제하고 참는 게 미덕이 되는 실정이다. 정확히 그렇다. 그게 세상 이치다. 왜? 남자는 10번, 100번, 1000번 도전하고 쫓아다니고 정성스럽게 구애를 해서 딱 1번만 성공하면 아름다운 사랑, 그 분위기의 무지개 카펫을 밟고서 사랑 다음의 인생이든 또 다른 사랑이든 나머지 원대한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왜? 왜? 남자에게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니까! 왜? 남자는 여자보다 비교적 사랑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무게와 중요도와 맹목적 존엄성이, 남자는 여자보다 비교적 얕교 옅고 현실과 이상주의에 대한 동경이 순전히 여자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왜? 닮은꼴이 아니라 원리와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자는 10번, 100번, 1000번 거절하고 이상주의의 기준선을 내리지 않고 찬란한 인상주의의 빛나는 대문을 열지 않다가 어느 날 멋진 컨버터블을 탄 말 잘하는 웬 이상하지만 멋진 남자에게 넘어갔어, 그래서 결혼했어, 그리고 세월이 흘렀어, 그러면 꿈이고 판타지고 영화고 뭐고 다 날라간다. (실재 그 반대가 월등히 다수지만 여기서 다루는 주제로는!) 전부 꺼이~꺼이~! 그래서 간혹 어떤 여자들이 남자의 역할을 맞고, 너를 나만의 남자로 만들겠다는 꿈을 꾸는 것이다. 간혹? 글쎄요! (인생 후반부가 어떻드라는 말 안해도 눈빛 한번이면 된다, 아가씨는 모를 수도 있다)
   어쨌든 마크가 좀전에 이렇게 답했다면 어땠을까? <그대여, 지금 저를 유혹하시는 겁니까?> 당신은 알고 있다. 마크도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다. 그녀는 떠났다는 걸. 배 떠났단 말이다. 주책부리며 따라가지나 말자. 사랑보다 마음은, 호감과 관심은 훨씬 더 빨리 변한다. 모두 가타부타 입 아픈 얘기들이지. 그러나 눈치 없는, 주관 뚜렷한, 심지 확고한, 유달리 집요하신 분들, 많다. 단 하나뿐인 사랑, 그것이 있을까? 고민하지 말자. 그냥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있든 없든 모든 걸 다 알 필요는 없다. 그건 제우스 할아버지가 와도 어찌 못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맞다! 지금의 사랑이 제일 고귀한 것이다. 너무 멀리 보지 않으면 된다. 미니시리즈가 아니라 단막극을 찍으면 된다. 같은 단막극인데 난 소극 넌 시네마? 천생연분을 만나면 그만이란 말이다. 그게 어디 쉽겠냐마는 후회없이 사랑하면 그뿐! 어? 뭔 시나 노래의 한 소절 같은데, 아닌가, 아닌 듯 하다. 보고 들은 글과 노래가 하도 많으니 헷갈린다. 그들이라고 절대 자유로울 순 없다. 추적하면 어떻게든 나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훔치란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꼭 베낀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또 좀 베겼으면 어떤가. 모르고 베꼈고, 베껴진 무엇들은 이거보다 더 많이 베꼈다. 다 돌고 도는 것을.
   그러다 노트북으로 남의 블로그를 구경하던 제임스가 말한다.
   「어, 이거 멋진 말 같지 않냐? 어느 블로그에 보니 이런 프로필 안내글이 있는데. 이렇게 씌여 있어. <어째서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때? 막 우리들 즉흥적이었던 때로 돌아간 거 같지 않니? 조금 순진하고, 무식하고, 상냥하기도 했고. 뭐 하나 걸리면 딴 거 안 보고. 그러다 질리면 딴 걸로 넘어가고. 그러다 싫증나면 때려치고.」
   「왜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소녀 감성이네.」
   「음하하하하. 누군지 몰라도 나한테 걸리면 눈물, 콧물 마구마구 흘리면서 정신없이 혼줄이 날 텐데, 깨어있는 가운데 꿈도 꾸고 주문도 따라하고 중요한 요점은 받아적기도 할텐데 말이야. 오직 말로만! 찍소리 못하게 왜 행복하면 안 되는지 아주, 아조 정신 개조를 시켜놓을 수 있는데. 말로만! 찍소리 못하게! 막 험한 말로 우기지 않고도 품위를 갖추고서 셈여림에 따라 나는 악흥에 겨워 그분은 신세계를 체험하면서 시간 여행도 했다가 정신이 육신에서 살짝 분리되면서 붕 뜨고 하늘에서 내 영혼과 만나서 교합하고 지령을 받은 후에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가서 완전 딴사람이 되게 만들 수 있어. 그분의 인생은 둘로 나뉘게 되겠지. 내 말에 감동받기 전과 후로. 누군지 몰라도 내 강의를 들어야할 꺼 같아. 의자에 앉기만 하면 완전 새사람이 될 텐데. 인생도 바뀔 텐데. 어째서 행복해야... 뭐, 뭐가 어쩌고 어째? 완전 그냥 혼을 쏙 빼서 한 세바꾸 반 돌려서 다시 제정신이 들게 할 수 있는데, 말로만! 그러나 사람들은 다 모두 뭐 제맛에 사는거지 뭐.」
   「그래. 걔 공포영화 보고 싶어할 꺼 같은데. 누군지 몰라도.」
   「나도 누군지 몰라.」
   「우리도 비슷하잖아. 오늘 봐봐. 돌아다니지 않고 사고도 안 치고, 진득하게 실내에 머물러 있고, 어디 휩쓸려서 돌아다니지도 안잖아. 게다가 우리에게 블로그도 있고, 자주 쓰는 표현 우리도 있잖아. 우리도 자주 쓰는 말 있어. 뭘 해도 재미없다, 심심하다, 따분해, 지겨워, 뭐 재미난 일 없냐, 결국 술 밖에 없냐, 글이 잘 안 써지네, 사랑? 좋아하시네. 그러 말들 있잖아!」
   「또 있어. 나 일 그만 뒀어. 직장 때려쳤다고!」
   「어 맞어. 그 말도 있네.」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정상적으로 살아볼까 해서 취직했는데, 한동안 즐거웠는데, 동료들이랑 많이 친해지고 실적도 상승세였는데, 그런데, 짤렸어. 그만 나오래.」
   「왜? 뭘 잘못했는데?」
   「무단 결근. 사고도 쳤어. 말하자면 길어. 거의 영화 찍었거든.」
   「어, 그렇구나.」
   「음. 괜찮아.」
   「말 안 해도 돼. 이 일 하다가 저 일 할 수도 있는 거지. 괜찮아 괜찮아.」
   순간 고혹적인 아가씨가 지나가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저분과 데이트하고, 또 그녀가 여행 가자고 하면 사표 쓰는 게 옳지.」
   「그럼!」
   또 침묵이 이어진다. 순간, 퉁명스럽게 케빈이 자신의 궁금증을 묘사한다. 순식간에.
   「놀랄 일이 연속될까? 희대의 사기꾼이 어떻게 됐다고 뉴스에 나왔지만 속아서 구입했던 환상 머쉰, 그 호수에서 봤던 만났던 이상한 가방 "그녀", 하늘을 나는 물고기, 놀이공원 오즈의 마법사, 아직 확인은 못했지만 예술 창작 아카데미인가 뭔가 거기, 그런 여러가지 일들 말이야, 어? 어떻게 생각해?」
   「내 말이 그말이라니까!」
   「음, 내가 하려는 말을 네가 먼저 해버렸네.」
   「그래. 내가 딱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찰나에 너가 먼저 말했어. 멋진 놈!」
   「너네들 앵무새야? 에코야?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그냥 동의만 하냐?」
   「너네들 앵무새야? 에코야?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그냥 동의만 하냐?」
   「아 나 이런, 말을 말아야지.」
   「그렇다고 우리가 공룡을 본 것도 아니고, 거의 볼 뻔 뭔가 있을 듯 말 듯 할까 못할까 관둘까 그런 경계의 영역까지만 갔다온 거잖아. 그게 다야. 그럼 된 거지. 원래 최고의 가치는 그 중간에 있는 거야. 아예 저쪽 걸 가져다 이쪽에서 보여주면서 놀랍지 않냐고 하는 게 아니라 어중간한 레테의 강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며 직접 본 것처럼 설명하는 게 요점이야.」
   「그래. 그렇지. 갔다 왔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거 다 뻥이야. 모든 건 두뇌에서 만들어내는 거야. 참으로 놀라운 과학이지. 유명하지 않은 학자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경계의 지점이 아니라 훨씬 멀리 딱 갔다 딱 왔다는 사람을 천 명, 만 명, 그 이상 만나서 그걸 연구해서 집약시켜 봤드니 어떻드라 결론이 나오더라 그건 기억나. 정말 그 애매한 중간 경계가 오로라고 불꽃놀이인 거 같아.」
   「그건 그냥 우리 상상력의 산물인지도 몰라. 아닐 수도 있고. 그러나 우린 블로그에 소설을 썼다구. 우린 뭔가를 했어. 실행이 있었어. 실행! 또 읽어보면 썩 재미없지도 않잖아. 물론 한... 75퍼센트쯤은 흥미롭게 읽을 때는 흥미롭게 읽고 나서 끝엔 이럴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소설 더럽게 재미없네. 좋게 돈 주고 책 사서 읽을 껄, 그랬네. 괜히 공짜여서 혹 했다고. 에~잇 그러면서.」
   「그렇지만 뭐가 문제냐. 오늘은 금요일인데!」
   누군가 핸드폰으로 달력을 확인한다. 날짜를 보려고.
   그리고 닉이 알렉스의 가방에 연결된 장난감을 알아본다. 그러고 나서 흠칫 놀란다.
   「오~ 알렉스! 저거 최신 장난감 그거 아니야, 뭐지 뭐드라 이름이? 공갈? 응석? 무슨 인형인데. 인공지능은 기본이고 생각에다 판단, 예술 감각은 물론이고 주인의 총애도 이끌어낼 수 있다며! 좀 굼뜨게 보이지만 아주 극찬이 자자하던데. 온갖 천재와 천사는 물론 마귀와 악령의 역할도 연기할 수 있을 꺼 같아. 하다못해 조수까지. 혹시 인격도 있니? 배 나온 그 인격 말고, (손동작) 이 인격말야?」
   「닉, 과찬이야! 그리고 미안해. 이거 고장났어!」
   썰렁함. 효과음 메아리 디미누엔도! 안단테 칸타빌레? 노노노노노노노, 디미누엔도! 단숨에 뭔가 궁금하고 심심한 기분은 숙연한 분위기로 확 바껴버렸다. 조소는 약간 불충분하지만 그 현격한 차이, 유독 누군가가 꺼낼려던 시건방스런 농담을 쏙 들어가게 해버렸다. 야멸차게! 다시 공동-소설 창작에 대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나 진짜 새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아직도! 보드랍고 뽀송뽀송한 살랑살랑 솜사탕 같은 구름 위에 그 새는 올라탔을 것이다. 그런데 그 구름이 먹구름? 어찌되었든 언성을 높일 일은 없었으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도, 시몬의 아리아에서 뭔가 불가사의한 그런 간주곡도, 탐닉할 만한 시샘도, 세습될 신비도 뭣도 없었다. 실존과 현실은 요술과 초현실에 경도되지 않았다. 원래 삶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섭생과 무릇 인생은 먹는 게 남는 거다라는 어떤 이상과 맞닿아있는 알력과 허기짐만 남아있었다. 그것은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 와 관계되는 것인지 어떤 다른 본능 때문인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적 도량과 기상을 부르는 나팔소리인지는 불분명하나 뭔가 미답의 신기루를 기다리는 것만 같은 고상하며 근사한 탐구욕이 그 애매모호한 분위기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각자 비밀리에 속마음을 타진했다. 하워드는 숨겨논 애인과의 밀애를, 제임스는 루시를 어떻게 다그치고 닦달하며 약올리다가 적절한 시점에 싹 전환하여 상냥함과 호의와 애원의 임무를 맡은 신사로 돌변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각자 귀여운 입술을 그리워한달지 휴일에 전념하고 몰두할 대상에 대하여 심사숙고하면서 화색을 지었다가 모종의 심려와 적의를 물리치고 끝내는 거기에 도달했다. 어디에? 환상적인, 끝장나는, 기가 막힌, 홀딱 반할만한, 환장할 듯한, 까무러칠 듯한, 인생 최고의 순간과 막상막하인 것만 같은, 자초지종 다 잊고 몰빵하고 싶을 정도로 혼을 쏙 빼놓는, 지력도 체력도 애타는 감정도 뒷일을 염두에 두지 않고 충분히 혹사시킬만한 즉 그럴 듯한 시간 보내기에 대한 구상을 마친 듯한 속내를 허겁지겁 숨기고 있다. 그것이 계획한 대로 톡톡한 성과를 보일지는 불투명하지만 적어도 편파적 미명과 관습적 구습과 어리광 부리는 듯한 떼씀과 부응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건 분명해보인다. 그래서 일부러 지금 꾸지게 노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들은 아마도 멋진 주말을 위해 오늘 힘을 아끼고 있는 것 같다. 괜히 오늘 힘을 빼버리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재로 막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면면히, 치밀하게 계산한 듯한, 모든 것이 블로그에 무엇을 올릴까 하는 아마추어 정신에 의해 돌아가는 삶의 자세가 드러나는 것만 같다. 그렇게 그들은 별일없이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의 공동 블로그에는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익명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주말엔 뭐하고 놀까?
   밤에 꿈을 꾸고, 낮에는 꿈을 이룰까? 꿈도 야무지다!
   너와 혹시 우연히 만나게 되지 않을까?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샴페인과 주사위와 사랑한다는 거짓말과 역위임의 참말과 햄버거와 음료수를 싸들고 소풍 갈까? 혼자서!
   영화보러 갈까? 영화는 혼자 봐야 제맛이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볼까? 시간이 뭐 누구집 똥개 이름인가!
   만화책을 읽을까 만화영화를 볼까? 아니면 시사교양 프로그램?
   집에서 TV로 야구를 볼까, 아니면 직접 축구장에 가서 소리치며 신나게 야유를 할까. 경기가 끝나면 스트레스야 살짝 풀리겠지만 대신 목이 쉴 꺼 같다! 나중 보면 이런 걸로 이상한 연구결과가 나오게 된다.
   설마 갑작스러운 몸살 감기에 걸려 주말 내내 집에서 궁상맞게 지내지는 않겠지. 드러눕더라도 가죽점퍼를 입고 드러눕겠다. 나는 할 수 있다!
   서점에 가고 영화도 봐야 하지만 인문교양서는 저리 밀쳐두고 낮잠자기. 쿨쿨쿨, 코코코, 새근새근!
   길을 가다가 맨홀 구멍에나 빠지지 말자.
   그러나 뉴스를 읽고 피식 웃게 된다. 누가 슈퍼마켓 검색대에 신용카드가 아닌 뭔가 이상한 걸 들이댔다가 체포됐다면서.
   주말 동안 모차르트와 헤비메탈을 양쪽에 끼고 지낼 테다, 순수한 미녀와 육체파 미녀를 앙편에 착 붙이고 어깨동무를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정치─경제─사회등 각 분야 토론과 명강의와 동기부여 강연을 챙겨야 한다. 나도 예언가로 우뚝 서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자신의 어떤 범위를 넘어서려는 노력과 뭔가에 도전하려는 삶의 태도를 잃어버리면 안된다.
   좋게 즉석 복권 하나 사고, 아니다, 몇 장 더 사고, 집에서 술이나 마시다가 심심하면 아저씨들 놀이를 따라하든가 어른 흉내내기에 적당한 장소에나 기웃거려봐야겠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그거다.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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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74

from 소설 2016. 6. 15. 21:30

   척키가 연락이 없다.
   척키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다. 척키가 무명 블로그를 읽었을까? 그건 말도 안 된다. 걘 책 안 본다. 종이는 거의 안 읽어. 무명 블로그가 출판물도 아니고 또 그쪽 세계에서 유명하지도 않다. 그러니 그건 아니다. 그럼 뭘까? 왜일까? 왜 척키가 연락을 하지 않을까? 그는 정녕 소인배라서? 범상치 않은 남자라서? 남들 다 아는데 제일 가까운 당사자인 부인이나 남편이 제일 나중 알게 되는 일이 간혹 일어나듯이 척키만 그걸 몰랐다가 소문으로 겨우 제일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알게 되어서? 그래서 자존심이 상해서? 글로 읽어서 알아야 하는데 말로 들어서 알게 되니 열 받아서? 그건 아닐 것이다. 영화에서 명문가 아가씨와 주연을 맡은 하녀 1, 비중 전혀 없는 하녀 2가 있다면 보통 미모는 통상적으로 어떤 순서를 띄는 게 정석이다. 그리고 정석 2단계는 그걸 정확한 대사로 쓰고 똑똑한 발음으로 연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맛에 영화판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사람들 많을 것이다. 비공식이긴 하나 공식은 공식이다. 그와 달리 척키가 뭐 정상 운의 하녀 2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다. 그는 남자다. 그것도 남자 중의 남자. 도대체 왜 척키 1에게 연락이 없을까? 괜히 척키 2 때문에 척키를 부를 때 귀찮게 됐다. 경우의 수를 생각하자니 귀찮고, 알고-는 싶고, 난제네 난제. 그러나 모를 땐 물어보면 된다. 그게 답이지만 나는 그런 대화를 나눌 친구가 없다. 그러면 그 다음은? 그 다음에는 또 방법이 있다. 물어볼 사람이 없다면 최소한 거울은 있다. 지금은 그것이 독자다. 그렇다면 새로운 친구, 딱 1명의 독자가 생겼다고 가정하고서 그 1분이 그분이다 라고 믿으면 된다. 그러면 그분은 동화에 나오는 주인님 주인님, 하는 기절초풍할만한 거인 마법사이자 요술 지팡이니까 그에게 물어보면 그만이다. 왜 척키에게 연락이 없냐고. ...(침묵)... 답이 왔다. 답을 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척키라면 연락을 할 건가요?> 내가 척키라면? 내가 척키? 오, 이런 삐─ 삐─! 괜히 무서운 얼굴을 부러워하고, 가죽점퍼를 들먹였던 지난 일이 다 후회 된다. 어, 옆길로 새지 말고 내가 척키라면...에 집중하자. 나 뿐만 아니라 당신도 그분도 누구나 연락을 안 하실 듯 하다. 왜냐하면 나라도 당연히 안 할 테니까! 왜? 다 그렇게 사니까. 그냥 자기 삶을 살고 현재의 인생을 즐기면서 과거에 친했던 친구에게 서로 연락이 뜸해지니까. 그래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을 괜히 들추어내서 귀중한 시간만 허비했다. 두고 보면 알겠지만 당장은 자신이 없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인지, 깡총 뛰기 위해 웅크리는 것인지, 도움닫기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뒷걸음질 치는 것인지 말이다. 두고 보면 알게 된다. 두고 보자고 하는 사람 하나도 안 무섭더라, 두고 보니 괜히 움찔했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척키는 놔두자. 그는 그의 인생을 살고 나는 소설을 써야 한다. 마당 잔디도 깎고, 수영장 청소도 해야 한다. 그러다 나는 동네에서 멀더의 친구들을 하나둘 알게 되고 나서 그렇게 발을 넓혀가게 됐다. 새 친구를 맺고 지인을 사귀어가다보니 나는 아직 스스럼없이 먼저 연락을 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들로부터 사소한 부탁을 받게 됐다. 그렇게 받은 부탁은 주로 물건을 맡아달란 것이 주를 이뤘다. 내게는 뭐가 없을 듯 보였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 사소한 부탁을 받아 맡은 물건 때문에 우리집 마당이 뭔 판이 됐다. 초소형 포크레인을 잠시 맡아달라 해서 마당에는 초소형 포크레인도 있고, 트럭과 시추기 1대와 골프채와 테니스 가방, 개도 2마리 맡아주고 있고, 동네 피자 가게도 하루에 약 30분 정도 어쩌다 고정적으로 봐주게 됐다. 농사일도 어쩌다 거들게 되고, 어부들 그물 손질 하는 것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거절할 거 거절하고, 방어선을 구축하며, 너무 방만한 삶을 살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게 보통 순서지만 나는 그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반대로 갔다. 너무 소설의 소재를 구하고 구상에 도움이 된다며 발을 넓혀서 이 부탁 저 청탁 다 들어주고 통제가 어려워지다보니 아, 정말 못해먹겠네 라고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사건도 있고, 기승전결도 있고, 알아서 물건 맡겼다 가져가고, 청소도 해주고, 술도 사주고, 남는 장비도 주고, 친구의 친구도 소개시켜주고, 그래서 내 제 2의 인생은 흥미로워졌다. 친구도 많아지고, 친구의 여자친구의 친구도 알게 되고, 한마디로 삶이 재미있어졌다. 이래서 귀촌하는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내 글은 그와 반대로 재미없어졌다. 조금 썼던 소설을 읽어보면 발단으로 시작해서 발단으로 끝났다. 전개와 절정, 결말과 반전에 긴장감과 기품은 찾을래야 찾아볼 수도 없고, 교훈은 실종됐고, 품위는 도망갔다. 저 멀리 아득히. 따라서 있었나 라고 의심스럽지만, 있었을까 라고 이따금 회의에 가까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고전미 역시 감쪽같이 사라진 걸로 여실히 알게 됐다. 나는 글을 참 못 쓰는구나, 더군다나 글이 부쩍 더 안 써진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글이 안 써지고 뭘 해도 재미없더라도 하던 대로 기존의 생활을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안 해 봐도 아는 걸 괜히 실험까지 해버렸다. 아흐흐.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 찻집이 하나 생겼다. 그곳 사장은 최근 귀촌했다. 고향이 이곳으로 스무살까지 살다가 도시로 나간 후 이제 돌아왔다고 한다. 여기서는 그 뭐지 한 잔에 얼마짜리인 루왁을 비롯해서 원숭이 커피, 족제비 커피, 다람쥐 커피 같은 익히 알려진 희소품 커피를 판다. 그래서 카페 <블로그>와는 손님이 크게 겹치지 않아 멀더가 안심하는 분위기다. 여기 찻집의 이름이 좀 길다. <친구와 사랑하는 연인이 같이 물에 빠졌습니다. 누굴 먼저 구하실 건가요? ...... ...... ...... 왜 둘이 같이 있어?> 이랬다. 인테리어, 간단하다. 다 흰색. 그리고 어떻게 저런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어느 남자의 표정 사진 하나. 갸우뚱, 어째 저런 일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절묘한 표정이다. 그게 다다. 여기 사장 이름은 스탐이다. 스탐과 나는 친구 먹기로 했다. 우린 금방 친해졌다. 많이 친해졌다. 알고 보니 사람이 썩 괜찮다. 물론 어느 범죄자나 작품에 나오는 악인일지라도 대화 좀 섞어보면 정감이 느껴지고, 말도 통하고, 사람 괜찮네 괜찮아 그런 기분이 아예 들지 않기는 어렵겠지만 스탐은 내가 봤을 때 앞날을 보고 사귀지 않아도 되는 그런 친구 같았다. 편했다. 호인이었다. 또 웃겼다. 막 카페에서 카우보이 몸놀림으로 여자를 꼬시는 재주가 있을 것 같았다. 스탐은 일단 경험이 풍부하고, 아는 거도 많고, 얼굴이 어디산 다비드라 하기엔 좀 약하지만 그래도 준수하고, 성격 좋고, 말발 좋고, 돈도 많고, 인심도 후했다.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한마디로 팔방미인이었다. 최소한 스탐이 도시에서 죄를 짓고 낙향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의 말은 시골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도시에 사업체와 가정이 있고, 여긴 가끔 들리거나 쉬었다 가는 것 같았다. 나는 멀더와 스탐과 또 다른 동네 아저씨와 아가씨들과 즐거운 시절을 보내다가 어느 날 찻집 <친구와 사랑하는 연인이 같이 물에 빠졌습니다...... (너무 길다)...> 에서 스탐에게 한소리를 듣게 됐다.
   「(넌) 그게 왜 궁금하냐?」
   왜 궁금하냐고? 왜? 아니... 난... 그저... 아니지. 그게 왜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어? 그게 뭐 어때서? 당연히 궁금해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라고 나는 되묻지 않았다. 스탐도 개인적으로 정신장애는 아닐 테지만 뭔 트라우마 정도는 있겠지만 그보다 그 말을 들은 내 충격이 좀 커서 나는 부쩍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뜻 궁금증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가 정말 그렇게 말했을까, 왜 그렇게 말했을까,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내가 뭐 실수한 것일까, 내가 잘못한 일이 뭐지, 그는 왜 말을 돌려서 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톡 쏘듯이 말했을까, 그가 그 말을 하던 때 그의 표정은 마치 당시 우리가 앉아서 원숭인지 고양인지 그들과 연관된 커피를 마시는 스탐의 찻집 <친구와 사랑하는 연인이 같이 물에 빠졌습니다. 누굴 먼저 구하실 건가요? ...... ...... ...... 왜 둘이 같이... (찻집 이름 더럽게 길구만)> 에 있는 실내장식에 사용된 인물 사진과 완벽히, 정확하게 똑같았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그의 전부인을 만나보지도 않았고, 그의 현부인이 전부인인지도 모르고, 뭔가 껄끄러운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스탐 너는 왜 내게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너가 그렇게 심상치 않은 눈빛을 건네면 난 뭐가 되니? 어? 내가 거기다 대고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당당히 발언할 수 있겠냐고. 그는 오히려 눈동자를 마주친 거 보다 더 어떤 연출력과 효과가 뛰어난 기술을 썼다. 즉 약간 고개를 틀고 허공 어디쯤에 시선을 두고 뭔가 골똘히 추측하는 듯한 연기력, 그건 갈고 닦았다기 보다는 즉흥적으로 나온 듯 했다. 간략히 둘의 감정을 말하자면 기분 나쁘기는 피차일반이었다.
   그러면 째깍째깍 시간을 불과 얼마 전으로 되돌려보자. 그가 대체 뭔 얘기를 하고, 그 전에 우리 사이가 얼만큼 돈독해졌는지를 따져보자는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스탐에게 칼칼한 음성으로 답변하지 못했다. 그 말이 뭐가 어쨌다고, 그런 말 할 수 있지 않냐고, 우리 사이가 이 정도냐고, 곡해하지 말라고. 되려 왜 네가 정색하냐고, 혹시 마이크를 뺐어서 화난 거냐고, 박수만 쳐야 하는데 박자를 끊어서 맥이 풀리냐고, 우리가 너와 내가 그런 말 할 만큼 친해진 거 아니냐고, 남자 대 남자로 얘기 한번 해보자고, 할말 있으면 하라고, 뭐가 불만이냐고, 무엇보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라고, 내가 당황해할 걸 뻔히 알면서 왜 그러냐고. 나는 바로 이렇게 답변하지 못했다. 뻔히 알면서? 그는 그걸 뻔히 알았을까 몰랐을까? 모른다면 왜 몰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어쨌든 스탐과 나는 친해진 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동네에서 같이 운동 모임도 나가고, 집에도 서로 놀러가고, 수많은 얘기를 공유하며, 술 취해서 어깨동무도 하고, 같이 자동차 범퍼 위 앤블럼에 대고 또 바퀴 로고에 대고 오줌도 같이 누었다. 마라톤 대회도 한번 같이 나갔다. 이삿짐도 날라줬다. 경조사도 참석했다. 같이 술 먹고 헤어진 다음 차에서 잠을 잔 후 나 혼자 집에 가다 음주단속에 걸려서 면허 정지도 됐다. 게임도 같이 하고 근처 도시로 원정 가서 어느 골목길 바에 들어가서 여자들을 물색하고, 선정하여 꼬시기도 했다. 결과는 안 좋았다. 그러나 볼을 부드럽지도 다정스럽지도 않게 어루만져지게 되지는 않았다. 곧 발끈하겠다 앙칼진 목소리 튀어나오겠다 싶으면 먼저 알아서 빠졌다. 어디보자, 또 뭐가 있드라. 여행도 둘이 한번 갔다 왔고, 같이 등산도 하고, 소액이지만 돈거래도 해봤다. 깔끔하게 받을 생각없이 서로 빌려주고 빌렸는데 실망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돈 잃고 친구도 잃은 게 아니라 원금에 이자는 물론이요 우정도 한층 더 공고히 다졌다. 나중 딱 1번에 크게 당할 수도 있는 희박한 가능성은 일단 배제한다. 생일 선물로 그는 내게 어떻게 알아가지고 자코메티 수제자가 만든 마네킹을, 나는 그에게 황금물고기를 선물해주었다. 자코메티? 믿거나 말거나, 는 아니지만 꽤 수작은 되었다. 선물한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급하면 회전율이 보장되는 미술품으로 손에 쥐게 될 액수도 쏠쏠하고 꽤 짭잘할 것으로 예견되었다. 아무튼 같이 막 이상한 데도 같이 가고, 같이 이상한 취미를 즐기고, 같이 이상한 뭔가에 심취하지는 않았지만 남자 대 남자로써 짧은 시간에 큰 우정을 쌓았다. 우리는, 그래 우리는 이란 말을 써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 그 말을 듣기 전에 이미. 게다가 스탐의 엄마와 아빠와 여동생은 물론 부인과 아들과 딸도 모두 만나고, 전-직장동료와 현-직장동료는 물론 스탐의 각계 각층 친구들도 만났다. 그건 기본이었다. 그 말을 듣기 전에 이미. 그런데 그는 내게 왜 그렇게 말했을까? 왜? 그게 왜 궁금하냐고! 그런 말 왜 하냐고! 뭔 속마음이 있냐고! 그가 했던 말이 정확히 그 말 맞나? 그건 뭐 하러 묻냐, 라고 했던가? 아무튼 묻지 않아야 할 어떤 금기 사항을 물었던 듯 하다. 그의 반응으로 보자면! 그는 그럴 만 했으니까 그랬겠지. 그러나 그건 스탐의 기준이다. 내 기준에서는 남부끄럽지 않았다. 떳떳하다. 불온한 상상도, 불미스런 공상도, 야단 맞을 몽상도 전혀 없었다.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왜 나는 죄진 사람이 된 듯 한 감정을 느껴야 할까? 사람 미칠 노릇이다. 참말로 환장하겠네. 평등하다가 갑자기 2인자가 된 기분이다. 2인자가 원래 편하고 좋지만 넌 내게 첫 번째 친구가 아니야, 그런 말을 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사소한 오해가 내게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반복되니까. 아, 스탐과 내가 친한 사이가 됐다는 건 설명했으니까 당시 그가 어떤 말을 했는가를 알아보자.
   그는 내게 고생했던 일과 특수부대 이야기─전역하기 한두 달 전에 동기 끊은 1달 차이 동기의 집에 놀러갔을 때 자기가 앉은 동기의 침대에서 동기의 전-여자친구가 있다 갔네 그러고 바로 헤어졌네─또 스프레이 이야기─자기는 친구 1과 동거할 때 지휘 학원에 다녔고 목표가 있었다, 환상교향곡 악보를 즐겁게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그리고 유난히 고전음악을 많이 들어서 CD를 모아놓은 상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상자에 뭔 조그만 스프레이가 있길래 친구 1에게 그게 뭐냐고 물어봤지만 친구 1도 어물쩍 넘어갔지만 짐작은 했지만 자기에겐 목표라는 게 있었다, 도시에서 친구 2가 내려와 그와 친구 1과 친구 2 이렇게 셋이서 동거를 한 적도 있다, 나중 그는 친구 1과 친구 2가 한 여자를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친구 2와도 친했는데 그에게 듣기로 그 한 여자가 얘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스프레이에 대해서, 또 대학교 구내 식당에서 봤던... 그 인연은 그냥 인사만 하는 사이가 아니었드라 그... 그..게 가능하구나 그렇게도 되는구나 그런 실소는 드물지가 않더라─또 여러 무용담들을 들려주었다. 게다가 여자 이야기를 많이 했다. 왕비와 애들 이야기도 물론 했다.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헤어졌다. 어떻게 다시 만났고 어떻게 살고 있다 까지. 마누라 엉덩이를 토닥이며 쉬고 싶은데 기막힌 커피가 입수됐다고 다른 도시에 갔다와야 하네, 자기는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 항상 마법에 걸리네 부인은 뭐라하네 어쩌네 또한. 그러다 그곳 <친구와 사랑하는 연인이 같이 물에......>에 어느 아가씨가 찾아왔다. 그녀는 속된 말로 첩, 보통은 정부, 좋은 말로 연인이었다. 바로 스탐과 밀애를 즐기는 사이였던 것이다. 이미 스탐은 그녀에 대해 다, 정말 다 얘기해주었다. 직업은 뭐고, 그녀가 무슨 말을 했고, 어디서 만나고, 만나서 뭘 하고, 뭘 할 때 어땠으며, 최근에 언제 만났고 얼마 주기로 만난다고. 스탐은 그 여러가지를 모두 다 말해주었다. 또 그녀와 비슷한 분신이 각처에 있다고. 어디까지가 뻥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실체 하나만으로 나머지는 의미가 없어졌다. 나는 찻집에 찾아온 그녀를 보고 속으로 아 얘가 걔구나, 스탐 말처럼 눈부실 정도는 아닌데 스탐이 왜 그런 말을 했지, 그녀가 만날 때마다 레이저건으로 스탐을 조종하나, 오 뜨겁다 뜨거워, 남자들이란 또 여자들이란 그리고 남녀 사이란, 그녀는 혹시 우리 얘기를 들었을까, 멀더가 표정 관리가 안 되는데 점심 먹은 게 탈 났을까, 우리랑은 별로 할 얘기가 없는데 여긴 왜 오라고 했지,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대충 상황은 이랬다.
   그런데 난 왜 스탐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했을까? 아직도 원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뭐 심한 말을 건네지도 않았는데. 이번만 그런 게 아니다. 거의 비슷한 일을 옛날에도 겪었다. 동창이며 동업했던 친구에게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엇비슷한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내 말 뿐만 아니라 내 행동 역시 탐탁치 않나 보다. 최근 또 스탐의 친구와 나는 친구 먹었다. 스탐의 친구와 나는 친구가 됐다. 그 친구에게 또 나는 역시나 한소리 들었다. <늬가 그걸 왜 하냐고!> 늬가 그걸 왜 해? ...오오, 저런!... 그거 장난 아니다. 장난이 아닌 이유는 곧 설명하겠다. 어찌 됐든 간에 내 친구에게, 자기의 여자친구나 부인에 대한 안부랄지 <부디...> 같은 겉으로 표시되지 않는 내 의중이 또는 그에 대한 어떤 잠재적 기표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다. 크게 언짢아 하는 것 같다. 상대편에서는 신경쓰이니까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하고 가지만, 내가 지금 이렇게 비리비리하고 3류 소설가가 아니라 우락부락하고 거친 운동을 하고, 카리스마 쩔고 가죽점퍼를 입고, 재력은 기본이고 화술도 기가 막힐 정도라면 어땠을까? 전자가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그 대답을 대체로 어른들은 알고 있다. 자, 판돈을 걸 시간이 돌아왔다. 자-자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쇼도 아니고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서커스단도 아닙니다요. 암표도 구하기 어렵답니다. 그러나 객석에서 구경만 해도 괜찮다.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여러 의견을 보아 하니 그래프 모양새가 각이 안 나온다. 그렇지만 우습지만 거두절미하고 질문에 알맞는 답을 내놓자면 이와 같다. 내가 헐크에 엑스맨에 슈퍼맨에 백지 수표로 코를 푸는 사람이라면 그분들은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전자와 후자는 친구 관계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이 못 만난다. 만나더라도 친구가 아니라 상하 관계나 직접 대면하지 않고 중간에 은행이나 서류, TV, 핸드폰, 소셜 네트워크 같은 매개체가 가로놓여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전자와 후자가 친구라고 할지라도 대화의 진행 방식이 그와는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컷의 암컷 보호 본능, 을 이렇게 겪어 보면 이해는 된다. 동네 산책할 때 개들도 똑같은 행동을 보이니까. 그야말로 완벽하게!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 다만 한쪽은 불편할 뿐. 그럴 땐 받아쳐야 한다. 늬가 친구냐고, 이런 삐─ 삐─! 그래도 상황을 봐가면서 받아쳐야 한다. 받아치는 게 대화에서는 중요하다. 받아쳐야 해! 이렇게. <그래. 그래, 좋아.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라고. 그럼 그래야지. (인상 팍 쓰면서, 내 이론으로 상대방을 마음을 휘어잡아야 한다. 곧 말로써!) 오라~ 이제야 반응을 하시는군. 난 그걸 원했어. 나는 바로 그걸 원한 거라고. (골 세러모니) 있잖아~ 너도, 너도 말이야 말이야. 사나이의 순정이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단 말이야 말이야. (손가락 딱!) 바로 그걸 끌어내기 위해 내가 악역을 맡은 거라고 거라고. 알겠어? 어? 나는 뭐 그게 좋아서 그런 줄 아냐 아냐? 어? 나는 그런 대접받는 게 어디 좋을 줄 알아 알아? 내가 어디 바보도 아니고 미친놈도 아니고 (손 모양 그것) 내가 어딘 머저리도 아니고 그게 좋아서 그런 말 하고 그런 행동을 하겠냐고? 어? 넌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설정에 쏙닥 속아 넘어가냐? 이런 순진한 놈 같으니라고. 저런~ 머저리 같은 놈을 봤나. 괜찮아 괜찮아. 그렇다고 고개 숙일 거 없어. 상남자의 야성을 확인했으면 된 거야. 그걸로 목적은 달성했어. 그럼. 자, 이제 슬슬......> 바로 이렇게! 이 장면에서 남자는 남자가 아니라 수컷이다. 수컷! 그렇다고 남자가 개란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개가 아니란 말도 못하겠다. 나도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와 비슷한 글을 쓰고는 있지만.
   앞서 말한 어떤 말이 장난이 아닌 이유를 재차 설명할 차례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꼭 뭐 이상한 걸 가르치고 세뇌시키는 느낌이 든다. 동기부여, 오히려 내가 어디 가서 스파르타식으로 배워야 하는데 말이다. 정난이 아닌 이유. 그것은 사람 성격 때문이다. A 남자 유형은 어떤 장난은 못하고 성격 때문에 그랬을 뿐더러 앞으로의 행동 또한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보통 이런 꽈는 1 대 1이나 1 대 다를 추구하는 성향을 보인다. 1 대 다, 에서 '다'의 최대값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설에 의하면 대략 몇가지 구체적인 수치가 있기는 있다. 3000, 1만, 4만이라고. 물론 세월이 둘 사이에 개입되면 변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절대로! 비슷한 상남자라도, 똑같은 마초라도 이 꽈는 나중 이런 말 절대 못한다. 친구에게, <(내 부인) 늬가 데리고 살래?> 같은. 또 이 꽈는 맞바람, TV 연속극 아니면 남의 일이지 내 일은 못될 것이다. 형식은 유지하고 서로 자유롭게 사는 것, 역시 어려울 것이다. 물론 세월이 둘 사이에 개입되면 변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절대로! 그런데 쓰고 보니 어깨에 뽕이 들어간 거 같다. 내가 넣지는 않았다. 뽕을! 삐─도 모르면서 완전 건들건들 아는 척 한 거 같아 두가지 기분이 동시에 든다. 첫째, 자괴감. 둘째, 뭐가 뭔지 모르는 혼란스러움 즉 초딩들 티격태격의 대명사인 아는 척 하면 곧바로 <나대지마> 바로 그것! 요약컨데, 그냥 뻔대기 앞에서 주름 잡은 것에 불과하다. 잠깐, 어디선가 <여자는...> 이럴 것 같아서 첨언하자면 여자는 또 여자대로 다 고충도 있고 허물도 있다. 한 여자가 말한다. 자기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성을 선택할 수 있다면 여자로 태어나지 않겠다고. 여자는? 여자는, 좋아하시네! 남자와 여자는 차이는 있으나 방식이 다를 뿐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런 말 자주 쓰면 재미없다. 여자는, 남자는, 우리는, 내가 봤을 때, 솔직히, 뻔한 뻔자다, 늬 말마따나! 여자는 이랬다. 내 앞에서 손 뻗으면 닫는 거리에서 내 일행과 뭔가 어떤 뭔가를 하고 나서 돌아서서 가기 전에 메롱~하며 가는 사람, 여자다. 손 뻗으면 닫는 거리에서 내 지인과 밀담을 나누다가도 내게 당신께 그대에게 그분에게 홀딱 반하고 윙크하고 마음을 송두리채 빼앗기며 앞으로 드라마를 재현하는 것도 바로 여자다. 여자, 잘 아시지 않는가! 여자는 물론 사랑까지! 여자는? 참아주시라. 남녀 사이는 알 수 없다. 끝도 없고 시작도 불투명하다. 실체마저 없다. 남는 것? 뭐가 있을까, 모르겠다. 남기는 남나, 알 수 없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의 가능성은 모두 열려있다. 그게 남녀 사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그 주제를 귀찮게 하는 것이다. 누구는 그것에 홀렸다고 깨어나서 마치 남의 일처럼 저주를 퍼붓기도 하는 것이다. 너무도 중요한 일이니까. 그래서 예술에서 일부는 그렇게 몸에 관한 것에 매달리기도 하고. 아니라면 뭐 미쳤다고 그렇게 다들 하나 같이 사랑을 노래하겠나. 뭐 미쳤다고! 적어도 대체로 사람은 안 변하고, 대체로 사랑은 변한다. 슬프지만, 그렇다. 예외는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앞서 나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는 모두 순 엉터리 학설이라는 것이다. 다 구라고 뻥이고 거짓말이다. 학설은 뭔 학설? 어디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호박도 뭣도 아닌 뭔가 유명무실하고 이상한 무언가를, 어떤 포만감을 느끼게 만드는 당근과 채찍을 가지고서 조바심과 동경심과 궁금함과 흐릿한 기대감만 꿈틀거리게 만드는 제법 길다란 창에 불과하다. 모든 창을 막을 수 있는 방패를 뚫지 못하는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다고 우기는 창. 길기만 엄청 길다. 고기는 못 잡어. 그것은 정말이지 허겁지겁, 얼렁뚱땅, 통상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 이론으로써 찻집에서 나누는 말을 공책에 옮겨놓은 것과 비슷할 것이다. 까보면 원페어조차 아니지. 그 와중에도 자책을? 참 가지가지 한다? 그런 말 들어도 싸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지금 나는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왜냐하면 독자에게 따끔하게 혼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늬가 친구가 없지) 고집불통? 인정한다. 뭣 모르는 사랑의 포로를 타의적으로 경험하시는 그분들의 마음을 혼탁하게 만들고 들들볶고 꼬신 죄를 인정하겠느냐? 네, 마님! 죄인은 고개를 들라. 내 적선한 셈 치고 앙금을 가라앉히고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할 것이니 변명이 있다면 마저 털어놓거라.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하지 않느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겠지만 어디 들어나 보자. 너도 사정은 있을 것이고, 위신이 뭔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니 순조롭게 남은 이야기를 마저 풀어놓아 보거라. 단, 나는 그런 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런 거? 바로 이런 거. <뿅갈 정도로 멋진 뭔가를 해 봐!> 자못 무슨 뜬금없는 사연이 나올지 궁금하구나. 그 정도 스스로 가택감금 했으면 적어도 삼류소설 하나 정도는 내놓아야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더냐. 자, 이어서 시작해보거라.
   짠, 쿠궁쿵 팍팍 픽픽 폭폭 푹푹 푸쉭푸쉭 파바박 퍽 디딕디딕 드기득 드기득 퍽!
   아, 그러고 보니 스탐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무엇을 물어봤던가, 그걸 얘기하지 않았군요. 그때 무슨 말을 물어봤드라, 썩 개인적인 걸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야한 질문도 아니었답니다. 어렵거나 기이한 내용도 아니었다는 건 분명해요. 그러나, 그러나 정확히 뭘 물어봤는지 바로 그것은 생각나지 않는답니다. 그럼요. 하긴 그러면 그게 생각난다면 내가 여기서 꾀죄죄하게 삼류소설이나 쓴다고 허세 부리며 종이를 찢고 구기고 씹고 뭉개서 집어던지겠습니까? 네? 펄새 어디서 호시절을 보내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겠죠. 나도 다 속이 있고 꿈도 있다구요. 내가 뭐 바보도 아니고. 대강 짐작은 하지만 말 못할 내용도 아니고, 재밌거나 민감한 사안도 아니라서 여기서 줄이는 게 낫겠어요. 김새니까요. 그럼요.
   빠라바밤 빵빵빵 띠용띠용 숭그리 당당 숭당당 핑글핑글퐁글퐁글 푱푱푱 피욱피욱 퍽퍽퍽!
   앗, 내가 어디에 홀린 것일까? 소설을 쓰다가 갑자기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달려가서 요괴의 구술을 대신 필기했었던 듯 하다. 그건, 잠시 썼던 글은 내가 쓴 게 아닌 것 같다. 이제 다시 글을 써야겠다. 나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글이 잘 써졌던가 안 써졌던가, 잘 기억나질 않는다. 전에도 매번 이랬다. 작정하고 뜻을 세우면 청운의 꿈을 품으면, 이거 해야겠다 뭐 하고 싶다 어느 분야에서 최고가 될 꺼야, 라는 각오는 어딘가로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것은 끝내 꽝으로 종결된다. 소설을 쓰기만 하면, 뭔가 미친듯이 관심가는 무언가에 몰두하면 뭐든 될 꺼 같지만 주로 처음의 상상만 그렇다. 그래도 아주 드물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서 괜찮다. 지금은 그분이 돌아가셨으니까 뭔 얘기를 했던지도 모르겠고 기분이 다시 우울해졌다. 이젠 조증도 나에게로 잘 찾아오지 않는다. 아니다. 언제 만나기라도 했었나 미심쩍다.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힘이 들었지만, 이제는 지금도 어둡고 힘이 든다. 뭘 해도 재미가 없고 글이 잘 안 써진다. 내가 입만 뻥긋 하면 사람들이 매번 깜짝깜짝 놀랄 것 같지만 정말 놀란다. 재미없는 글만 계속 쓰는 거 같아 그런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그동안 내가 만났던 남자들과 비슷해진 듯 하다. 닮아가는 것 같다. 흉내내는 걸까? 모르겠다. 따라하는 걸까? 이미 숙달 끝났다. 응용에 이어 고난도 단계로 접어들었다. 동조 현상이라고나 할까? 아예 판박이다. 나도 말이 별로 없다. 말하기가 귀찮다. 할말이 없으니까 글도 안 써진다. 원래 내성적인 것 같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어느 다과회에 나중 합류했는데 나 같은 남자가 있다, 서둘러 피하는 게 상책이다. 나는 대체로 입이 무겁지만 또 말할 기회가 별로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입을 뻥긋 하기는 한다. 내가 입만 뻥~끗 하면 큰일 난다. 내가 입만 뻥~끗 하면 큰일 날 사람 많다. 그래서 일부러 글이 안 써진다고 하는 거다. 내가 입만 뻥~끗 하면 하는 말은 긴말 하기 귀찮으니까 주로 이렇다. 내가 최고야! 너는 최고가 아니야! 웃기시네! 좋게 꼴찌권이나 탈출해라! 이런, 젠장! 이렇게 한마디만 하고 끝까지 침묵해야 한다. 나는 과묵한 남자니까. 남자 중의 남자니까. 수다? 싫어한다. 1번에 1가지 일만 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에는 일상적으로 다중 작업을 알아서 잘 한다. 그 중요한 순간이 어떤 순간일까? 어떤 순간이지? 오늘... 시간 있어요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원래는 시간이 없지만 많이 없지만 어떻게 없는 시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떡한담 일단 질러? 커피를 마시며 책 읽기. 걸으면서 생각하기. 그녀와 데이트를 하면서 그녀를 생각하기. 보고 있어도 보고 싶기. 새로 사귄 친구나 스탐이나 멀더에게 연락을 받고 여자들이랑 있다고 해서, 분위기 좋다고 해서 딱 어디에 갔는데 그곳에는 바로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어. 그것도 술 취해서 있던 아가씨들도 다 쫓아버렸어. 나중에 온 남자, 이런 삐─삐─ 수증기 푸~쉭!
   나는 뭔가에 씌여 그분으로 빙의 됐다. 오, 몸도 마음도 그분으로 탈바꿈했다. 나는 그분이다. 오오, 아아! 나는 자존심, 엄청 세다. 호불호, 확실하다. 의견, 분명하다. 떠보는 대화 방식, 좋아하지 않는다. 풍자와 조롱과 조소, 약간씩 잘 못 알아먹는다. 따지고 보면 약간..도 아닌 듯 하다. 모를 땐 어정쩡할 땐 그냥 말 안하면 된다. 동물원? 싫어한다. 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다시 말하자면, 솔직히 혐오한다. 애들이 좋아하니까 강아지 머리도 쓰다듬고 고양이에게 야옹야옹, 그들의 언어를 흉내내 보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애들 때문에 하는 거다. 콱 그냥 발로 차버릴까, 그런 생각까지는 안 한다. 아니, 한다. 생각과 달리 행동은 점잖다. 미술관? 연애할 때나 갔지 사람들이 거기 뭐하러 가는 줄 모르겠다. 거기 가면 짜증난다. 재미 하나도 없다. 스포츠는 열광한다. 차도 바꿔야 하는데 이번에 집 사고 부인에게 가게 하나 차려주느라 여유가 없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싸워서 져본 적인 단 한 번도 없다. 견적 보고 꼬리 내린다. 그게 현명한 거다. 안 그러면 인생 골치 아파진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다. 그러나 나는 겉으로 말은 안 하지만 몇몇 존재하는 내 팬들에게는 말한다. 나는 전설적인 텐미닛이라고. 세상 모든 여자까지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여자는 거의 다 꼬실 수 있다. 것도 딱 10분만에. 10분도 많다. 5분이면 끝난다. 전화번호는 그냥 스치면 얻는 거다. 그런 기본을 우리쪽에서는 취급하지 않는다. 고수들에게도 기본은 중요하지만 걸음마를 논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나도 이제 은퇴했다. 그쪽 세계에서. 나도 관심이 시들어진 거다. 어찌되었든 나는 지금까지 싸워서 져본 적이 단 한 번, 단 한 번도 없다는 거~! 그렇지 그거지 전적! 문학? 옛날에는 그녀에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느라 급하게 제목과 줄거리 위주로 외우기는 했지만 문학도 불필요한 분야다. 남자에게는. 그건 쓸 데가 없다. 도무지 써먹을 데가 없다고. 게다가 그건 다 뻥이다. 뭔 포터? 동네 코흘리개 꼬마들이나 좋아하지 그게 뭐야 애들처럼. 애들도 동요, 잘 부르지 않는다. 최신곡을 듣고 저거 사줘 이거 사줘 그러지 동심도 다 옛말이다. 동화도 다 뻥이다. 책은 어쩌다 인문교양서 가끔 읽고 나머지는 다 쓰레기다. 나머지는 영화처럼 다 오락물이다. 보든 말든, 읽거나 말거나,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 봐도 별 도움 안 된다. 다 아는 얘기들. 짜집기한 글들. 수준 낮은 글들. 그러나 여성잡지를 부인이 읽으면 못본 척 한다. 고전은 가끔 읽는다. 휴일이면 집에서 낮잠 자다가 리모콘으로 TV 채널이나 돌려야 하는데 애들과 부인은 자꾸 어디로 가자고 한다. 강아지도 막 나한테 친한 척 한다. 내 발에 오줌이나 안 싸면 다행인 녀석이 말이다. 귀찮다. 가기 싫다. 그러나 어른이니까 할일은 한다. 차에서 또 뭔 바람이 불었는지 마누라가 오페라 아리아를 듣는다. 나도 바그너나 모차르트를 드물게 듣기는 하지만 그건 정말 드문 일이고, 고전음악회? 마누라랑 애들 때문에 가는 거지 그거 만큼 답답하고 정말 짜증나는 일 없다. 나는 왜 모든 일이 귀찮고 짜증나는 것일까? 내 친구에게 들어보면 자기는 나와 약간은 다르다고 한다. 자기는 뭘 해도 재미없고 글이 잘 안 써진다고 한다. 나도 인생이 심심하니 이해는 간다. 나는 한적한 곳이 좋다. 사람들 북적이는 번화가? 정신없다. 짜증난다. 거기 끌려가면 미칠 것 같다. 독신 생활을 즐기는 친구가 부럽다. 비서에게 연락하지 말랬더니 휴일에 자꾸 연락이 온다. 여자들이란! 나는 내 사생활을 친구들에게 다 떠벌리며 웃고 떠드는데 여자들은 그런 것 같지 않다. 아무리 친해도 내밀한 것 정말 중요한 부분은 쏙 빼놓고 말하지 않는 그녀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친구와 그녀들이 생각하는 친구는 다른 것 같다. 그녀들과 어울리는 직업적 습성 때문인지 몰라도 친구 중 한 명이 참 거슬린다. 내가 바깥에서 만나는 여자 얘기로 좌중을 휘어잡고 있으면 꼭 녀석은 중간에 내 마누라 안부를 묻는다. 즉 살짝 비켜가는 구름을 올라타지 않고 구름을 모자로 쓴다. 로켓에 탑승하지 않고 4차원을 얘기하는 놈이 있다. 아주, 짜증난다. 협주곡에서 독주 중인데 카덴차에 끼어드는 것 같다. 또 내 마누라는 친구들 가운데 유독 A와 B를 좋아한다. A와 B 모두 흐리멍텅하고, 사람은 좋아도 별로 남자답지도 않은데 왜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통 모르겠다. 모두 오래되고 편하고 친한 사인 건 맞다. 결혼 전부터 연애할 때부터. 그러나 내 앞에서 마누라가 A와 함께 내 흉을 보면 짜증 엄~청 확 돋는다. 콱 뭘 집어던질 수도 없고. 마누라가 B에게 수다를 떠는거야 그렇다 쳐도 B는 듣기만 할 것이지 여기서 말발을 왜 푸는지 뭔 아재 개그를 공부했는지 참으로 신경쓰인다. 이게 끝일까? 아니지. 그러면 재미없지. A와 B의 있는 흉 없는 흉을 마누라에게 속닥속닥, 이러쿵저러쿵, 쫑알쫑알, 미주알고주알 알려주어 험담의 태산을 만들어야겠다. 그게 처음은 아니다. 아 때가 되었구나 라고 느끼면 묵묵히 수행하는 농번기나 여행과 같은 드문 행사에 불과하다. 살면서 중간 중간 그래야 속이 시원하지 안 그러면 소화불량에다 밤에 잠도 잘 오지 않는다. 나중 마누라가 물어보면 A와 B 모두 이직하고 이사갔다고 해야겠다. 집사람은 집에서 고상하게 꽃꽂이를 하고, 세련된 자태로 책을 읽고(뭐 잡지?), 우아할지는 모르겠으나 고품격 상품을 쇼핑해다오, 부인! 나는 밖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최선을 다해 가족을 챙기며, 남자의 관심사에 몰두할 테니 말이오. 으하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런데 이상한 게 이제 그녀는 가족이니까, 오래 되었으니까, 권태기든 침체기든 열애하는 시기는 아니니까 그녀를 좀 놔주고 서로 각자 따로 놀기도 해야 하는데 자꾸 신경이 쓰인다. 자꾸 신경이 쓰여. 나는 집에 오면 말을 별로 안 하는데 그녀가 나와 함께 지인들을 만나면 마누라는 엄청 좋아한다. 내가 먼저 나서서 멋진 이야기를 해서 적당한 웃음과 교훈 그 두 마리 토끼를 잡을라 치면 꼭 나는 중간 다음부터 이야기가 꼬이고 잘 생각이 안 난다. 이미 이때부터 흐름은 바뀐 거다. 마이크는 넘어가고, 타인의 얘기에 분위기는 들썩들썩, 시끌시끌 폭소 왕국이 따로 없다. 그게 대체 뭐가 웃기다고 막 웃다가 눈물을 흘리고 콧물도 흘리고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 정도고 아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모두 마음에 안 든다. 빈정 팍 상한다. 짜증 완전 돋는다. 그러나 겉으로는 웃는다. 다행히 내가 가짜 웃음에는 일가견이 있다. 내가 봐도 나는 완전 삐져서 여간해서는 응어리가 풀릴 것 같지도 않다. 저 인간들 원래 어떤 인간들인지 마누라에게 다 얘기해줄 테다. 마누라는 또 어디 모임에 같이 갔는데 한두 번 얘기했으면 됐지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계속 한다. 당연히 영화배우니까 멋지고 잘 생기고 자상하고 음성도 그윽할 텐데 뭔 어학 공부하듯이 막 구간 반복이다. 완전 짜증난다. 이거 정말 부부동반 모임을 확 때려치울 수도 없고 답답하다. 내 존재감이 바닥이다. 아, 그 모임에서는 운동을 하지 않는다. 운동을 하면 표정 관리 안 되는 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 아는데 계속 운동을 하자고 우긴다? 그건 엿 먹으란 소리 밖에 안 된다. 그걸 대중의 삶으로 의미를 확장해보자. 사는 동안 내내 엿만 먹이는 인간은 뭘까? 대략 악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사는 동안 내내 (악의가 아니라 선의로) 타인에게 엿만 먹이고, 그와 동시에 사는 동안 내내 (악의가 아니라 선의로) 타인으로부터 엿만 얻어먹는 부류는 뭘까? 더 적합한 명칭이 있겠지만 불완전하지만 조심스럽게 하나 꼽자면 괴물이 아닐까? 작품에서 수없이 주제로 다루는 괴물. 숨어 사는 괴물도 있고, 적응하면서 평범하게 사는 괴물도 있고, 자기가 괴물인줄도 모르는 괴물도 있고. 많거나 적거나 드러났거나 드러나지 않았거나 괴물은 이방인라는 개념과 그 정체성의 일부분을 공유한다. 이방인, 이방인의 종류는 또 얼마나 많은가. 살기 좋기 때문에 아름다운 매력이 있기 때문에 또는 다른 이유로 텃새를 감내하며 새로운 곳에서 사는 사람도 이방인이고, 동성애자도 이방인이고, 왼손잡이도 이방인이요 그 종류는 엄청 많다. 아, 딴길로 빠지지 말고 주제는 내 얘기로 국한해야겠다. 지금 내 얘기를 하는 중이다. 나는 그 즐거움에 빠졌고. 또 주위에서 그런 소리도 들린다. 친구 한 명은 부인이 실제 불륜녀가 되어서 다른 방법이 아니라 그는 야구방망이를 들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후 그건 솜방망이라고 알려졌다. 오해가 있었다고 한다. 험한 세상이다. 거기서 나는 험한 세상을 잇는 다리가 되어야겠다. 아, 잠깐만. 여기서 잠시 멈춤. 구간 반복? 구간 반복! 오라~ 구간 반복! 나는 저번에 다른 도시로 출장을 갔다. 자동차가 아닌 다른 교통 수단을 이용했다. 거기서 일을 마치고 다른 친구들과 연락해서 친구 셋이 같이 내려오기로 했다. 친구 1이 새 차를 뽑았는데 녀석도 집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그런데 오던 길에, 이미 만나기 전부터 친구 1은 노래를 불렀다. 차 좋지 차 좋지! 고속도로에서도 시속 100km를 넘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차 좋지 차 좋지! 우리보다 늦게 가는 차가 한 대도 없다. 또 중간에 친구 1은 피곤해서 졸며 운전하며 졸며 운전하며를 반복했다. 교대로 운전하자고 해도 막무가내다. 차 좋지 차 좋지! 완전 짜증난다. 중간에 고속도로에서 조금 정체가 됐다. 왜냐하면 저 앞에 사고가 났었다. 그런데 사고 처리를 하고 교통 흐름을 원활히 하려고 정리도 다 됐건만 왜 차가 막힐까? 꼬집어서 말하기가 더없이 부담스럽지만 어른이니까 얘기하고 넘어가자면 이렇다. 지나가는 차량들이 그 현장이 어떤가 슥 둘러보면서 지나가기 때문에 차가 막히는 거다. 그게 뭐 어때서, 라고 묻지는 말아야 한다. 알만 하신 분이라면. 언어에 따라서 그걸 가장 짧은 단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언어가 꽤 있다. 2단어, 3단어가 책이 한 권 필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친구 1은 운전대를 잡고 도시에서 도시로 천천히 계속 가면서 중간중간 구간 반복만 했다. 딴 거 없이. 그러면서 100세 할머니처럼 운전해. 야 졸지마 짜샤 라고 주의를 주면, 으흐흐 차 좋지 차 좋지! 완전 짜증난다. 얘도 딱 구간 반복이다. 차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러서 얘 앞에서 차 얘기 하면 그런 얘기 밖에 안 한다. 너네들 뭐 운전대 잡아봤어, 나는 잡아봤어. 어디 앤블럼에 오줌 눠봤어, 난 눠봤어. 뭐 해봤어, 난 뭐 해봤어. 주제가 차가 아니라 뭔가 뉴스와 관련된 거라면 잡혀갔을지도 모른다. 하긴 해킹 기술 관련해서 몇번 잡혀간 적인 있던 친구였다. 정신분석학계에서 하는 말이 가족이나 친구, 지인등 주변의 가까운 사람은 정신분석을 하지 마라고 한다. 하지 말기는 뭘 하지마? 단박에 왜 그러는 줄 다 보이는데. 친구 1의 얼굴, 아 우울하다. 살면서 여자들에게 관심을 못 받고 호감을 얻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 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 보다 더. 말발? 어디서 그 발음과 어법과 억양에다가 음성이 그 짝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어눌하다. 내가 여자였다면...... 아, 뒷목 잡을 일이다. 말을 잘 못해도 어리숙해도 충분히 미녀의 환심을 살 수 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어리숙함에 가치를 두는 분들도 많다. 한데 이건 말 자체를 알아먹기 힘들고 억양도 정통 사투리도 아니고 완전 깡촌과 깡섬의 토속 억양이다. 어지간한 노력 아니면 못 알아듣는다. 세월이 흘러야 알아먹는다. 나도 처음 만났을 때 적응하느라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그외 나머지는 평범하니까 친구 1이 멋진 새 차를 사고 그래서 세상 모든 걸 얻은 기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 수 있다. 잠시나마. 이해 된다. 구간 반복, 아 그래서 그랬구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또 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친구 1은 때와 장소에 따라 고고한 대사를 못 친다. 아가씨 아름답소, 보다는 꽃을 들고 그분들 꽁무늬를 쫓아 다니는 부류다. 부지런하게. 발바닥 땀나게 돌아다녀야만 겨우 관심을 받다니, 짠하다. 친구들과 있으면, 요즘 애들 맛있게 생겼드라 라고 한다. 사석에서 뭔 얘기를 못하겠냐마는 남자들은 안다. 남자도 종류가 있다는 걸. 단 몇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자기만의 공간에 오직 여자만 있는 부류, 사윗감으로 그것만 아니라면 괜찮다는 어르신들, 있을 것이다? 많다! 요리도 하고,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골프도 치고, 춤을 배우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멋진 카페에 가고, 낚시를 하고, 서점에 가고, 장비를 알아 보고 그 여러가지 가운데 이거 이거, 저거 저거, 각자 좋아하는 게 다르다. 그런데 답 안 나오는 분들이 있다. 오직 여자, 오직 도박, 오직 나만의 공간, 오직 여자! 바로 그 꽈다. 이런 친구들은 같이 시간을 보내도 할일이 없다. 할말도 별로 없다. 옛날 얘기만 주야장천 할 수도 없다. 여자 얘기만 사냥감 얘기만 계속 하거나 말을 들어주기만 해야 한다. 꼭 남자인 내가 신부 들러리 선 느낌이다. 친구로써가 아니라 일로써. 그런데 이 부류가 매우 드무냐? 또 그렇지도 않다. 뭐라고 말은 못하겠다. 짜증난다. 그래서 친했어도 그 부류는 잘 만나지 않는다. 걔네들은 또 끼리끼리 알아서 단짝을 찾게 되어 있다. 친구 1은 멋모르는 순진한 숙녀를 10번이고 100번이고 1000번이고 따라다녀서 사랑을 쟁취하는 남자다. 그러면 된 거다. 잡은 고기에게 밥을 주지 않는 건 그 다음 일이고. 그렇다. 냄비에 깔리는 책에서는 그렇게 얘기한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는 속담이 있긴 하지만 요즘 남자들은 10번 찍지 않는다고. 그래서 슬픈 일이라고. 10번 안 찍는 남자가 없다고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어. 웃기고 까무라칠 일이다. 남자가 들끓지 않는 걸 서운해하는 거랑 뭐가 다르냔 말이다. 어장관리를 해야 하는데 물고기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다는 건가? 순진한 청소년들 이런 거 읽으면 정말 그런 줄 안다. 뭐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상술이든 상도덕이든 그런 게 있으니 적당히 넘어가자. 영세 출판사 망할 수도 있다. 괜히 기억나서 문제다. 날 한때 품었던 남자가 날 사랑하지 않았다고. 비통한 일이라고. 그럼 뭐 지는 사랑이었나? 사랑받지 못한 것이 슬픈가 지금 그게 반복되어 슬픈가? 멍청한 년! 똑같이 다국적 성장 환경을 거쳤다고 자기가 카림 라시드인줄 알어. 사람에 따라 민감한 구석이 다 있다. 그것이 내게는 출신과 배경이다. 조금, 아마도 많이 감정이 과장되고 격해졌지만 나는 능력껏 다 갖췄는데 성장환경은 바꿀 수 없는 것이라서 그런 의미에서 너무 억센 표현이 나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출신과 배경과 환경이란 것은 어항의 성격과 용적과 변화 가능성을 결정짓고 한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남자들 개인사로 넘어오면 역린 같은 말을 또 때와 장소에 따라 슥 해주면 저절로 싹 넘어온다. 다 그러게 되어 있다. 언제 어떻게 어쩌다 나도 모르게 그 기술을 터득해버렸다 어쩔 수 없단 말이다. 그리고 남자 1은 언젠가 바깥 여자가 엮이냐 안 엮이냐 그 찰나에 또 이랬다. 남자가 태어났으면......! 그분이 싹 씌여서 딴 사람이 된다. 잘 아시지않는가. 이게 남자다. 안 그랬으면 공룡처럼 멸종했을 테니까. 친구 1은 책을? 당연히 싫어하지. 지성과 말발은 일반적으로 전혀 별개의 영역이다. 생각보다 상당히 동떨어졌다. 내가 봤을 때 절반의 글은 모두 말발이다. 남자가 이렇다면 여자는 어떨까? 여자는? 그냥 음악이나 듣자.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중 여자의 마음! 그러나저러나 요즘 걱정이 하나 있다. 마누라가 내 친구 C를 좋아하게 됐다. 내 친구로서. 물론 나도 녀석을 좋아한다. 하지만 문제는 마누라가 친구 C를 무슨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언제나 숙녀 먼저, 근사한 음악만 듣고, 옷도 깔끔하게 잘 입고, 여자의 마음을 아주 잘 알며 챙겨주고, 기다릴 줄 알고, 맞춰줄 줄도 알고, 뭘 좀 알고, 여자의 마음도 알고, 신경써줄 줄 아는 뭐든지 다 맞춰주고 다 알 꺼 같고, 브레지어나 미네르바 같은 존재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문제다. 엄청 큰 문제다. 완전 짜증난다. 뭐랄까 막 어떤 궁금증을 유발하고, 사연이 있을 것만 같고, 눈빛은 동경심과 우수와 낭만을 표현한 듯 하고, 가슴에는 동심과 설레이는 꿈으로 가득찬 신비롭고 재밌고 자상한 그런 남자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를! 이거 이거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옆에서 듣고 흘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날이면 날마다, 같이 만났을 때는 만났을 데로, 안 만날 때는 또 생각난다면서 궁금하다면서 안 봐도 문제고 봐도 문제고, 어떻게 뭔 수작을 부렸는지 아주 멀쩡했던 여자를 홀려놨다. 완전 짜증난다. 이 자식이 이걸 그냥 콱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나랑도 친하고 내 친군데 나도 보고 싶기는 한데 내 삶이 내 존재감이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뭔가 해결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고심 끝에 생각해냈다. 내 해킹 실력을 과시하기로. 누군가 넌 최소한의 직업 의식도 없냐, 그럴려고 컴퓨터 언어를 배웠냐 라고 묻는다면 할말 없다. 누군가 는 모를테니 제 2의 자아와는 이번 한 번만 이라고 속닥속닥 알콩달콩 타협을 봤다. 안 그럴 수가 없었다. 부인 왈, 그분은 인생이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좀 본받으라고, 왜 그런 고급스러운 농담을 오빠는 못하냐고, 오빠도 운동 좀 하라고, 친구 C와 더 친해지라고 더 자주 만나라고, 이젠 친구 C도 우리 오빠라고, 오빠는 가을이면 가을 남자고 겨울이면 겨울 남자라고, 사진도 잘 찍는다고, 모든 일에 대해서 정말 섬세하고 사려 깊다고, 못 하는 운동이 없다고, 수영도 잘 한다고, 무엇보다 지성미가 넘친다고, 그런데 오빠는, 오빠는 뭔 가슴털 자라라고 발모제를 가슴에 바르냐고, 안 그래도 운동 부족으로 배가 남산만 하게 뽈록한데 그러면 어떡하냐고 그러니까 가슴도 나오는 거 아니냐고, 뭘 하더래도 부작용을 생각해야 할 거 아니냐고! 장난삼아 발모제를 가슴에 발랐을 뿐인데 심각한 정도는 아니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여자로 변하는 건가,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완전 짜증난다. 난 뭐 봄이면 봄 남자 여름이면 여름 남자 아니냐고. 완전 짜증난다. 나는 그렇게 무수한 핀잔을 들었다. 아주 일상이었다. 나는 태도도 품격도 습관도 취향도 인성도 참을성도 외모도 출신도 감각도 모두 내 그녀 마음에 차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내가 사는 도시에서 내 또래 가운데 소득 수준으로는 상위권이었다. 1%, 는 몰라도 5%? 10%? 15%? 아 점점 늘어난다 점점. 시골로 이사가야 할 거 같다, 어쨌든 그거 하나는 절반은 흡족하게 할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조차 그녀는 썩 내켜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녀석은 내 집에 놀러오면 꼭 마누라가 바가지 긁는 소리를 어떻게 똑같이 따라한다. 본 적도 없으면서. 둘이 궁짝이 완~전 잘맞는다. 그럼 난 어쩌겠나, 미치지. 오빠는 즉 C는 안목 있는 남자라고? 뭐 그럼 나는 안목 없는 남잔가? C는 뭘 좀 아는 남자라고? 난 뭐 뭣도 모르고 날뛰기만 하는 망아지에 망나니에 미친 개 같은 남자란 말인가? 아 나 이거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어느날 나는 완전 망가진 나를 느꼈다. 나와 부인과 친구 C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코털도 깎지 않고 지저분하고 남 생각도 않는다면서 부인이 나 보고 이랬다. 어디 가서 내 남자친구라고 하지 말라고. 정말 그녀 말대로 나는 어디 가서 나는 누구 남자친구입니다, 그녀는 내 여자친구입니다 라고 말하면 안될 꺼 같았다. 또 나는 태어나서 <성격 좋다>라는 말을 단 한 번도 못 들어봤다. 물론 앞으로도 들을 가망성은 거의 없다. 아예 포기했다. 그런데 녀석은 그냥 거저 먹는다. 아조 날로 먹어. 완전 짜증난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껏 내 외모에 반해서 넘어온 여자는 솔직히 단 한 명도 없었다. 또 그동안은 내가 매력이 있어서, 내 특유의 포근함 때문에 여자들이 많이 많이 정말 많이 넘어온 줄 알았다. 그런데 이쯤 되고 보니 나이가 드니까 이제는 알겠다. 그녀들은 모두 내 말발에 넘어온 거도 아니고 내가 재밌어서 만난 거도 아니고 그냥 잠시 놀았던 것에 불과했다는 걸. 내가 어떤 그녀를 찍은 게 아니라 그녀들이 처음부터 나를 선택한 것이라는 걸! 그녀에게 애초에 마음이 없었다면 뭔 발광을 하더라도 안 될 일은 안 될 있이었다는 걸! 양과 질을 따질 수는 없고 아무튼 내가 못 가진 것들은 걔는 다 가졌다. 세상 참 불공평하다. 마누라에게 나는 뭐 지겨운 기성품이고 녀석은 선망의 대상이며 꿈이고 마술사며 백마 탄 왕잔가? 나는 아예 가질 수 없고 터특할 수도 없는 걸 녀석은 그냥 타고났고, 그걸로 덤블링을 하고, 그걸로 저글링은 기본에다 여자를 꼬실려면 눈빛만 보내면 끝나고, 그냥 마음만 먹으면 그걸로 다 정리된다. 이게 뭐냔 말이냐. 이런 삐─ 삐─ 삐─! 심지어, 심지어 차마 글로 옮기고 싶지 않은, 옮길 수 없는 일도 있었다. 누군 뭐 내 여자를 나중 어떤 사연이 있든 마지막의 어떤 무엇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없냐고. 누가, 도대체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어? 그렇게 말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그냥 콱, 아 운동을 좀 많이 하셨다면 누군가 보고 있다면 뒷감당 안된다면, 말만 그런 것으로 말로만! 그럼. 그러고 넘어가야지 정말 여기서 한 얘기를 저기서도 하라고? 계면쩍은 표정을 짓고 뒷머리 벅벅 긁으라고? 날이면 날마다? 왜 A에서 했던 얘기를 B상황에서 하지 않냐고 사람들에게 따지고 소리지르고 난리를 친다? 그건 애다. 놀이터에서나 놀아야지 사교계로 나오면 곤란하다. 사회성, 참 많이 떨어지는 어른이 되는 거다. 뭘 모르는 거지. 그런데도 뭐 사랑을 연필로 쓰라고? 연필로? 어, 그건... 맞는 말인 거 같다. 아무튼 수증기 팍팍, 주전자 물 끓는 걸 알리는 소리 삐잉삐잉, 수증기 푸쉭푸쉭! 그러니 정말 그러니까 내가 다음과 같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나. 그래서 그 후 나는 녀석을 잘 아니까, 걔는 동성애자가 아니니까, 심증은 있으니까 물증을 확보해서 그걸 부인에게 제시하고, 그녀의 환상과 신비를 깨트리기로 했다. 한순간에 와장창 깨트리고 싶었다. 그건 환상도 뭣도 아니라고 하면서. 뭔가가 아깝고 자연보호와 어긋난 일인 듯 하고 상도덕의 어두은 일면 같은 느낌도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확실히 그땐 뭔가 내게 씌인 거 같았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녀석이 전에 친구들과 같이 일을 하고, 나랑도 일을 했던 것도 그렇고 유난히 친구와 동업을 많이 했던 걸 보면 일단 그는 남자 세계에서 닳고 닳아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나는 녀석의 소셜 네트워크를 해킹하고, 동영상 사이트 계정을 해킹했다. 또 나와 같이 일할 때 녀석이 놔두고 가버린 노트북이 내 창고에 곱게 예쁘게 반갑게 고이 잠들어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오케이~! 그래서 노트북 하드디스크를 까기로 마음 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얘도 남자였다. 딱 그걸 확인했을 때 그 뭔가를 확인했을 때 아~ 좀 과장하면 세상 다 가진 거 같았다. 그런데 그 어떤 걸 마누라에게 보여주고, 또 셋이 같이 모인 자리에서 녀석 들으라고 슥 흘리면서 마누라에게 "봤지~ 그렇다니까~" 라고도 해주고 그랬는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나도 기분이 왠지 모르게 차츰 이상해져갔다. 마누라도 어딘가 모르게 실망한 듯 그러나 애처로운 듯 알듯 말듯 슬퍼하는 것도 같고 오빠를─내가 아니라 녀석─녀석을 걱정이랄까, 뭐랄까 한마디로 처연함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다. 100퍼센트 실화다. 괜히 일을 벌였을까? 이런 결과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말은 그래도 나는 사실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깨가 쏟아졌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솔직함, 숨기지 않겠다. 남자니까. 그래, 그렇다. 속으로 나는 아주 쾌재를 불렀다. 푸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 그러나 가슴 한쪽에서 가책도 느껴졌다. 꼭 옛날에 녀석 보라고 지금 마누라인 그때 여자친구의 뒷주머니에 자꾸 손을 넣는다든지 엉덩이를 더듬는다든지 꼭 잘 보라는 듯이 뭘 연기한 다음 그녀의 반응, 그걸 보는 것 같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임무 완수했고 세상은 잠깐만 내 것이 됐다. 그리고 터치 바이 터치 그것도 사연이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즈음 난 녀석이 어려운 처지라고 해서 내가 일하는 조그만 회사로 스카웃했고, 큰 사무실 하나가 전부였는데 거기서 일하다가 회사 앞 식료품점을 같이 가다가 우린 직장 동료가 앞서 걷는 걸 봤다. 우리 사무실 커플이 저 앞에 걸어가며 다정하게 얘기하다가 남자가 여자의 엉덩이를 바지 뒷주머니를 쓰다듬고 여자는 막 앙탈을 부리는 장면을 같이 봤었다. 그때 난 녀석에게 따라가지 말고 자리를 비켜주자고 했다. 그녀는 선악과니까. 그 뒤로 내가 먼저, 라는 건 그렇다 쳐도 난 녀석도 얼른 좋은 짝과 만나기를 바랬지만 실은 난 옛날만큼 멋진 남자가 아니었고, 이상하게 거꾸로 어 음 막 그... 나도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일부러 그러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었다. 어쩌다 슥 스쳤는데 간지럽혔는데 만졌는데 나중 의식하게 된 것 같다. 아무래도 그랬다고 믿고 싶다. (남자들은 정말 친하면 경쟁이라는 단어를 데려와서 친구에게 소개시켜주면서 암묵적으로 모르지 않기를 그분과 친해지기를 기원하기도 한다, 친한가 친하지 않는가를 알아볼려고 할 때 그것은 중요한 지표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녀석과 같이 일할 때 5층 건물 한채를 통채로 빌려서 썼는데, 일하는 사람은 얼마되지도 않고 사무실 한두 개만 쓰니까 남는 방에서 그녀와 밀애를 즐기고 여자친구가 가면 또 나는 왠지 으쓱했다. 어깨 뽕 뽈록. 이야기는 끝이 없다. 왜냐하면 나도 장편 대하소설에 버금가는 연애를 했기 때문이다. 책으로 쓰면 50권 될려나? 예전에 또 마누라의 친구들도 모두 C를 좋아했다. 오빠로서든 이성으로서든 먼 거리에서든. 딱히 멋지게 표현은 못하겠지만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일단 자기들끼리는 어떤 공유해야 할 뭔가, 대화로 알리고 웃고 전해야 할 <할 말>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그런 남자였던 것 같다. 그때 내 친구 도톨이는 내 여자친구의 친구 Y를 좋아했다. Y는 도톨이를 안 좋아했다. 그러나 도톨이는 소문 다 내고 어떻게 할 수는 없고 그냥 주변만 맴돌고 겉도는 그런 존재였다. 여자들끼리 말하는 오공뽄드 같은 존재, 낙지 빨판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마누라의 친구 Y는 전혀 마음이 없었다. 이미 그때부터 Y는 내 친구 C에 대한 마음이 있었다. Y는 C에게 중간에 신호를 보내고 또 보냈다. 회신은 없었다. 그녀는 마음을 키워 갔다. 그녀는 때를 기다렸다. 데이트할 수 있는 완전 허름해도 중고차가 있다는 거도 확인했다. 그 말도 슥 흘렸다. 그러나 그냥 흘러갔다. 미끼를 물지 않는 녀석이었다. 녀석은 형편이 궁했다. 많이 어려웠다. 녀석은 나무고 돌이었다. 그녀는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어장관리는 쉴 수 없었다. 그러면서 Y는 C에게 먼저 전화도 했다. 어장관리 차원에서. 왜, 내가 먼저 전화하면 안 되냐고 하면서. 먼저 전화하면 안 되는 남자는 C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C는 어항 속에 사는 금붕어였다. 그러다 때가 왔다. C가 불완전하지만 허름해도 큰 회사에 들어가게 됐다. Y는 내 마누라를 통해서 C에게 직접적인 통보를 했다. Y가 직접 고백은 할 수 없으니까 Y를 저만치 10미터 앞서 걷게 하고 마누라와 C가 같이 걸어가면서 넌지시 C의 마음을 떠보게 된 거다. C는 당연히 거절했고. 당연히? 나쁜 감정 때문이란 게 아니라 어떤 정중함, 남자 측의 모자람, 약간 어울리지 않는 듯한 측은함, 이상향은 아니니까, 뭐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톨이만 빼고 당시 내 친구들은 Y를 아는 여동생 그 이상으로 보지를 않았다. 그녀도 여자였지만 인기도 있었지만 뭔가 어떤 뭔가가 부족하고 모자랐다는 뜻이다. 남자의 말로 감당 안 된다는 뭐 그런 뜻이었다. 모두 같이 NC를 가더라도 블루스를 같이 추자고 누구도 청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분 꽝이었을 것이다. 내가 이 정돈가? 기껏? 겨우? 내가 뭐 어때서? 모두 친하게는 지냈지만, 그 이상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고 어떻게 한 번... 그런 거도 없었다. 그래도 Y는 어장관리에 탁월한 감각을 지녔고 그런 감정 놀음을 좋아했다. 자기만이 부릴 수 있는 능력이라는 듯이. 그래서 나는 C에게 중간에 그런 얘기도 해주었다. 내 여자친구는 내가 처음이었지만 Y는 그렇지 않다고. 마누라에게 듣고 보니 허우대 멀쩡한 어떤 남자가 잠깐 만나다 고지를 점령하자마자 Y를 뻥 차버린 거 같았다. 여자들은 정확히 공통적으로 많은 남자가 자기를 좋아하고 배려하고 관심을 갖고 좋아하는 줄 안다. 두뇌 회전 원리는 천동설이기 때문이다. 논리야 어디 가버렸니? 그래서 남이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걸 가지고 막 물어본다. 들었냐고, 아냐고, 어떻게 생각하냐고. 듣고 싶지도 않을 텐데 날 차버린 남자, 얘기 들었냐고. 자기가 축구공도 아니고 뻥뻥 차인 게 뭐 자랑이라고,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단, 연애지침서에서는 그걸 훈장이라고 한다. 엄밀히 따져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타인은 그걸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시시콜콜한 얘기고 남의 일이니까. 마음이 있다면 몰라도. 시간이 그렇게 지나고 지나서 Y는 계속 어장관리만 했다. C는 계속 타인의 어항 속에서 살아가는 금붕어였다. 하지만 C는 그때도 인문교양서를 읽긴 읽었는지 뭘 좀 아는 것 같았다. 인문교양서에 나오는 말처럼 처음부터 큰 바다로 나가지 않고, 적합한 어항에서 몸집을 키워 새로운 둥지로 옮기고, 또 그곳에서 더 이상 그릇이 감당안 될 만큼 스펀지처럼 현지 문화와 장점과 기술들을 습득해서 곧이어 다음으로 다음으로 진출할려는 포부가 있었나 보다. 자신은 잘 몰랐을 수도 있고. 그 어항과 이 어항이 다를 수도 있지만. 그러다 그때 또 다른 친구들이 내 인맥에 합류했다. 이른바 소문자 친구들. 캬~ 얘네들이 진짜 남자 중의 남자다. 어디든지 막 가는 거침없는 깍뚜기. 나는 그들과 연락이 뜸했었는데, 다시 연락되어 자주 만나게 되었다. 소문자 친구들 a, b, c, d, e... 마누라의 친한 친구 Y는 소문자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청춘남녀 모두 친하게 지내기는 했다. 궁짝이 맞은 거다. 처음과 중간까에만! 중간에 다른 의도와 거미줄과 사연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논점에 집중하자면 소문자 친구들은 몸을, Y는 마음을 가지고 놀고 싶었으니까 저절로 자주 만나고 친한 사이로 발전했다. 속마음은 다른 채로. 이렇게 목적이 충돌하게 된다면 승리는 여자에게 돌아간다. 비운의 감투겠지만. Y, 기분 좋았겠지. 지금은 몰라도. 나도 Y를 좋아하지 않는다. Y는 내 마누라의 친한 친구지만. C도 Y를? 심하게 표현은 않해도 말 안해도 그 친구 마음 다 안다. 그 뒤로 그렇게 Y가 감정 놀음하는 데로 C도 똑같이만 해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C는 보통 남자같으면 남자가 해야 할 역할을 할텐데 그걸 안 하드라. 그냥 똑같이 상대방 만큼만 신경쓰고, 상대방 홈페이지에 관심의 글을 남겨주고 그게 끝이었다. 남자가 봤을 때, 한마디로 이상한 행동이었다. 왜 그런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C는 어느 정도 마음을 받은 만큼 그 정도만 건네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뭐랄까 남자들 가운데 그런 부류?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성욕이 일지 않는데, 딱히 마음이 없는 여자에게도 거리 유지만 하지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남자. 전자와 후자의 중간에 대해서만 몸이 반응하는 남자라고나 할까? C는 그랬던 거 같다. 남자 뿐만이 아니라 통상적으로 누구나 그런다. 곧 남자와 여자 단둘이만 알고 만난다면 감정의 개입은 적고 육체에 종속되는 의도가 앞선다. 그리고 남자의 친구들과 여자의 친구들을 알게 되고 인사하고 서로를 더 잘 알아가면서 단둘이 만난다는 것은 농밀한 감정이 깊숙이 개입한다는 뜻이다. 짧은 만남과 스치듯 만났다 헤어지는 인연은 감정이 동하고 교감하며 고민하고 또 그리워할 그런 여유가 없다.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순서가 바뀌어 그렇게 시작하는 사랑도 있긴 하지만. 반면 왜 그런 경우 있지 않나, 1과 2가 만나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아주 잘 어울릴 듯 하다 어쩌면 배필감일지도 모르니 한번 만나봐라, 이와 같은 의도로 주선한 자리. 곧 진중한 교제를 전제로 친척이나 가족이나 지인과 동료가 소개를 시켜주었는데도 그것이 하룻밤 사랑으로 둔갑하게 되는 일도 있다. 앞뒤 살피지 않아도 되는 짧은 만남, NC에서의 즉석 만남, 어떤 우연한 만남, 그 여름 바닷가 '따지지도 묻지도 말라'식 만남, 드라마 같은 만남에서나 있을 법한 법도가 적용되는 사례, 있─다. 당신 같으면 그렇게 나간 자리에서 그럴 마음이 동하겠는가? 보통 아니다 못한다, 가 정답이다. 모름지기 그래야 하고. 표면적으로, 의례적으로, 공식적으로, 지금 생각으로, 대외적으로 또는 타고난 성정 때문에 대개 누구나 보통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걸 알아 보는 여자가 진정 도도한 여자고, 설령 확 빠졌더라도 참을 수 없는 열정이 금혼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천우신조의 인연이고, 간곡하며 값진 사랑이다. 남녀 사이는 모른다고 식장에서 결혼행진곡이 울려퍼지면서 입장하게 되기 전에는 모른다고 하지만 사람 일이란 게 기쁘고 즐거운 일이 다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을 이미 하고 있을지라도 몸이 어딘가에 갔다 올 수도 있고, 마음이 몸과 분리되어 1인 2역을 하는 일도 있다. 만물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확률로 따지자면 당사자에게, 만인에게, 다이아몬드 반지에게, 또 어떤 상징 앞에서 거룩하게 묵상하고 조용조용하게 엄숙히 선언하는 맹세는 끝내 지켜지기 어려운 경우가 태반이다. 결국은. 그렇다. 슬픈 일이지만 어쩌겠나. 사랑은 변하기 쉬운 것! 그래서 그것을 지키고 가꾸는 노력이 필요한 법! 여기서 잠깐, 그런데, 사랑은 변한다 라고 하면 왜 사람들은 즉시 안 좋게 변한다는 암시를 떠올릴까? 왠지 모르게 그건 더 알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사랑은 더 좋게도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정녕 가치있고 사랑의 인기는 영원한 것이다. 따라서 <좋은 남자는~ 없어> 같은 농담은 잘 먹히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래도 그때 난 늬 엄마 사랑했다, (집나간 엄마 때문에 아빠와 단둘이 사는 딸에게 하는 말로) 그때 나는 최선을 다했다 라는 말, 그래서 가슴 깊이 느껴지고 기억되며 인상 깊고 내 마음에 쑥 다가오는 것이다. 마치 파도처럼 철~썩! 흡사 따귀를 얻어맞듯이 철~썩! 그리고 쌍코피! (아 나 이거 도저히 글 못쓰겠구만 뭐만 했다 하면 뻑-하면 옆길로 새고 뭔 말만하면 있는 폼 없는 폼 다잡는 것처럼 보이고, 아는 지식 없는 지식 말 되는 뻥 말도 안되는 뻥 다 갖다붙이는 것만 같고, 어디서 들었던 듯 안 들었던 듯, 읽었던 듯 안 읽었던 듯, 하늘에서 별을 따다가 바다에서 달을 건져 그대에게 안기리다 뭐 그런 말만 하고 자빠졌으니, 쓰다보면 쓰면 쓸수록 뭐랑 비슷해지니 미치겠다고. 이거 이거 딱 보니 결혼식 주례사랑 똑같군. 아 나 이런 이~런 젠장! 저런 천하의...... 아 나 정말 미치겠다고) 딩~동! 종쳤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타이틀 지명(의무?)방어전의 3회전이 시작됐다. 앗, 그게 아니라 학교 종 울림. 3교시 시작됨. 그렇다. 정말 그렇다. 나는 넣다 뺐다 넣다 뺐다 하는 얘기는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없지만 이런 얘기는 할 수 있다. 돈버는 재주와 관련하면 주제가 삼천포로 빠지니 이만 멈추자. 내 마누라의 절친한, 넌 내 첫 째가 아니야 넌 내 2번째야 라고 각자 몇 번째라고 정하는 건 좀 비정하고 슬프니까 그냥 많이 친하다고만 하자. 그래서 내 마누나의 친한 친구 Y는 결혼 준비를 하면서도 내 소문자 친구들 a, b, c, d, e...들을 관리했다. 거울아 거울아, 가 아니라 어항아 어항아 였다. 또 Y가 먼저 소문자 친구들에게 개별적으로 먼저 연락을 해서 일대일로 만나고 자기 쪽에 그들 마음을 끌어다 놓고, 그걸 또 하고 또 하고 그랬다. 그게 좋았나 보다. 남편될 사람은 몰랐겠지. 그걸 소문자 친구 누구라면, 자기 친구가 직접 관계가 됐다면 또 당연히 그랬을 꺼다. 둘이 잤다고. 낄 데 안 낄 데 다 나서는 안 가리고 아무데나 막 들이미는 소문자 친구는 자기를 대인배로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자기가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뒤끝 없다고. 스스로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호박이니까 본인은 뒤끝 없겠지. 본인만. 반면 C는 Y에 대해서 중간에 생각이 바꼈던 듯 했다. 친구의 여자친구의 친구들과 인연은 그걸로 끝난 걸로 보였다. 거미줄처럼 엉켜서 한때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여동생 같은 느낌이 들었겠지만,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다 소문자 친구들 덕택이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정중히 호의를 표합니다! 상남자들. 깍뚜기들. 마초들. 늦기는 해도 그분들 사이에서도 소문 다 난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이다. 그들도 다 생각이 있고 사리판단 할줄 알고 남의 마음도 읽을 줄 안다. 뭐 정말 동물처럼 달려들었겠나 다 서로서로 아는 인맥들인데. 소문자 친구들이 한 일은 상대방이 먼저 걸어오니까 그에 상응해서 맞대응한 정도뿐이 없다. 그렇게 C는 전에 Y와 신경 써주는 감정 놀음 정도는 있었겠지만, 옛날에 간접 고백이랄까 어떤 긴 시간 동안의 마음을 아니까 그냥 그 정도로만 시간을 봉인해 버렸다고 할까. 그런 게 있었다. 소문자 친구들이 나타나기 전에 같이 추억을 많이 쌓았고 즐겁게 지냈는데 소문자 친구들이, 진짜 수컷들이 나타나서 난장판이 되었던 것 같다. 곧 개판! 우연일 수도 있지만 여기다 우연을 들이밀기는 싫다. 또 이분도 어촌 계장에 스파이더맨이구나 여장수로구나 하면서 C든 누구든 나도 아마 반가워했을 수도 있다. 책잡힐 과거를 이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 하면서. 때문에 C는 Y에게 철저히 오리발엔 오리발로 응수했다. 어느 주말에 친구들이 모이게 됐다. 술집이다. Y는 나중 일행에 합류하게 됐다. 빈자리 가운데 즉시 C 바로 옆에 쪼르륵 앉았다. 그 다음으로 합류한 친구는 소문자 친구 f다. 소문자 친구 f는 합석하면서 나란히 앉은 Y와 C를 보고 한마디 한다. 둘이 나란히 앉아있으니 연인 사이로 보인다고. Y는 그 말을 듣고서 묘한 표정과 쓴 웃음을 지으면서 흥분한다. 그와 동시에 한마디 한다. 다른 남자는 다 몰라도 오빠는, 오빠는 절대 아니라고. 그 말을 했던 Y에게 C는 똑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리발로만 응수했던 것이다. 즉 C가 내 마누라와 내 흉을 보면 나는 맞대응할 게 끝내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완전 짜증난다. 노란 카드, 빨간 카드, 주황색 카드 몇 개 내밀어도 그걸 또 써봤자 의미도 없고 새로운 조커는 없고 수증기만 끓어오르고 그렇다고 대인배로 침묵할 수는 없고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에 잠길 수도 없으며, 한마디로 사람 미치는 거지 미쳐. 어쨌든 오빠만은 불미스럽게 좋은 관계로 기억되지는 않는 듯 해서 조금 언짢겠지만 그는 그래도 그녀들, 즉 내 마누라와 친구들과 편했고─친했고─즐거웠고─고마워했고─다정했고─친근함을 그 인연의 기저로 했으나 그의 잘못, 그의 딱 하나 큰 잘못은 그것이다. 남자로써 다가가지 않은 것. 다른 건 없다. 그도 소문자 친구들도 선을 넘어서 다가가기는 싫었을 테지만. 사랑? 아, 머리 아프다. 단어 자체가 다르지 않나, 사랑과 인생.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사랑이 몸에 예속되듯이 사랑도 인생에서 하나의 아름다운 기간이라고. 사춘기, 청년기, 노년기 그리고 발정기처럼 언제부터 언제라는 시간 개념으로 조금은 그렇게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느새 사랑은 인생을 잠식해버리고 나와 마누라와 그 모든 것에 스며드는데 일단 선은 긋고 직장 일을 집에 가져와서 하는 건 동거인의 눈치를 봐야하지 않겠는가. 그렇게나 사랑이 대단한데, 미처 몰랐지만 뒷목 잡고 머리 위로 수증기 아로아롱 푸쉭푸쉭 오를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인생에 대해서 사랑보다 인생을 선행 개념으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내 말이 적이 그르오? 다소 부적절하냔 말이오? 안 그렇소? 안 그러면 자, 유부남들이여 들고 일어섭시다! 자, 으쌰으쌰! 그러나 진짜 들고 일어서지는 맙시다. 눈치 없이 몇 분 엉덩이 들썩이기는 하셨지만 요즘 뭐 재미난 일이 없어서 그러시나 보군요. 사랑? 머리가 지끈지끈해. 애정? 오 골치 아퍼. 어디 좋은 껀수 없나? 그...거 괜찮네! 어, 괜찮아.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이거다.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사진으로 남았던 즐거웠던 추억은 각별히 딱 선뜻 떠오르는 뭔가가 없는 반면 이렇게 약간 엮이고 꼬이고 짜증나는 일은 잘 떠오르고 기억되냐는 말이더냐. 왜?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내게 뭐 그런 걸 추구하는 성향이라도 있단 말인가? 정말로? 그대에게도? 발전과 성취감과 뭔가 어떤 성과를 갈구하고 효율을 추구하기 때문에 일부러 불행과 연관된 기억에 매달리는 이유, 뭐 그런 게 있다면 아아 참 불편한 일이다. 너무 유감스럽겠지, 친절하게 요목조목 설명하고 정리하기엔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도 본능 때문인가? 난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오리발이나 내밀자. 안될 게 뭔가? 오리발, 그래 오리발! 몸이 문란하든 감정이 지저분하든 오리발이나 내밉시다 그려! 그런데 누구야, 누가 남의 집앞에다가 자꾸 걸레를 가져다 버리는 거야? 그건 그렇고, 그래서 C는 TV에서 본 영화,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영화, 그 영화의 여자 주인공, 그녀의 명대사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 반에서 내가 자지 않은 남자는 너가 마지막이야, 그런 대사. TV를 너무 많이 봐서 애가 이상해진 것 같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그래서 마누라 친구들이 저 오빠 뭔가 있어 뭔가 있어, 그래서 아마도 그랬을 꺼 같다. 그러나 그녀 Y는 딴 거 다 놔두고 왜 하필 그걸 따라했을까? 둘 중 하나다. 첫째, Y도 그 제목도 모르는 영화를 TV에서 봤거나 둘째, 여자들은 원래 그런 속성이 (극미하게라도) 있거나.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 그 뒤 Y는 결혼 준비를 하는 동안 그녀들 가운데 한 명인 여자 Z를 만났다. Z는 내 친구와 사귀었다 헤어졌다. 모두 같이 친했던 C가 좋아했던 진공 청소기라는 별명으로 불린 친구와 사귀었다 헤어졌다. Z가 전화해서 C를 공원으로 불러냈다. 공원에서 그렇게 C, Y, Z가 만났다. 그 자리에서 Y는 자기는 곧 결혼하니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C가 X와 잘되면 어떡하나 그런 의미에서인지는 몰라도 이런 얘기를 했다. 같이 모두 친했던 친구이자 숙녀인 X에 대해서 누구를 만났다네 숙녀 X가 남자가 많았다네 숙녀 X가 요즘 만나는 남자는 누구라네 어쨌다네 다 까발렸다. 그래서 나도 C도 진공청소기도 Y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인상은 좋았던 시절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변할 수 있다. 추억은 향수병을 부르기도 하지만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게도 만든다. 그것이 예술혼과 만나면 작품이 되는 것이다. 말은 그럴싸 하다. 그래서 나중 내가 결혼하고 드물게 여러 사람이 만나게 되면 꽤 신경이 쓰이게 됐다. 어색한 만남인데 Y는 챙피한 줄 몰라하기 때문이다. 수치심이 없드라. 뭘 잘못했는지 알고 싶어하지도 않드라.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모두 서로 자연스럽게 뜸해지게 됐다. 즉 나도 여자친구와 초중반에는 좋았다. 그러나 연애 기간이 너무 길어지니까 중간에 또 일이 없을 수가 없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도와주라는 의미로 자세한 속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눈치없이 소문자 친구 하나는 내 여자친구 홈페이지에 거친 욕설을 도배해놔서 마누라와 둘이서 많이 웃기도 하고 속상했던 적도 있다. 그는 전화 통화로도 그때 내 마누라에게 화염방사기를 뿜어댔다. 소문자 친구들이 나타나기 전의 원년 멤버인 인기짱 진공청소기는 전화로만 내 마누라를 꾸짓었다. 모든 여심을 흡수해버린다는 거의 텐미닛과 비등한 별명 진공청소기, 오작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나는 내심 기뻤다. 사랑에서 결혼으로 기승전결 있었고, 우리의 우정은 굳건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 내가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구나 그렇게 느꼈다. 그후 내 친구와 내 여자친구의 친구 가운데 한 짝이 탄생하고 그들이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는 했는데 그게 전부였다. 그 이상은 없었다. 그걸로 나는 교훈을 얻었다. TV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막 남녀가 같이 어울려서 친할 때 막 2대2로 엮이고 어쩌고 하면서 멋진 장면을 연출하지만 그거 다 뻥이라고. 현실은 막장이 아니면 다행이라고. 현실은 순정만화가 아니라고. 나는 지금 언젠가 내가 C에게 했던 말, 내가 너한테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를 지금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쯤 쌓였던 이야기,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어딘가에 언젠가 쏟아 놓고 싶었다. 혹시 모르니까, 혹시라도 그걸 애타게 듣기를 바라고 가슴 두근거리며 읽기를 원하고 간절히 뭔가를 애원하는 사람이 적을 테지만 있긴 있을 테니까. 오래 참았다. 그걸 도대체 말 못하고 어떻게 참았냐고? 아무래도 그건 인내심의 문제는 아니었던 듯 하다. 참고 견기며 때를 기다려야 하는 문제였다면 나는 아마 못 참았을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빨가벗고 소리치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다 MT 때 진짜 잠깐 빨가벗기는 했지만. 남자들은 원래 그렇게 크는 법이다. 거리에서 잠도 자고, 사고도 치고, 치고 박고도 해 보고, 여기 저기 거기 관심을 쏟고 파헤치고, 돌아다니고 꿈을 찾고 찾다가 행운의 여신이 찾아온다면 그야말로 내 분야를 만나게 되는 것이고, 내 운명의 짝에게 청혼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사실 이런 걸 말하고 싶지도 쓰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럴 능력도 안 됐다. 지금도 그렇고. 아마도 그것은 신통방통한 주술사의 주문 때문일 것이다. 그 이상은 알려고 하면 안 된다. 절대 뒤돌아 보지 마라. 결국 내가 이런 글을 쓰면 안 되는데... 안 돼? 안 되긴 뭘 안 돼? 없는 이야기 꾸며서 하는 거도 아니고 아무도 안 볼 껀데. 서로 터놓고 말해서 이런 얘기 반가워하는 사람, 어마어마하다. 여성 월간지에 나오는 얘기가 다 뭔가? 아, 여성 월간지는 크게 구분해서 2가지 종류가 있지만 어떤 후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라고 절대 싫어하지는 않는다. 자, 이와 같은 일을 내가 무덤까지 안고 가는 게 맞는가, 아니면 이렇게 털건 털고 가는 게 옳은 일일까? 어디 한번 따져보자. C는 왜 그렇게 타켓이 되어야 할까? 뭔가를 예측해봤을 때 뭐 영특하지 않더라고 아무리 눈치가 없더라도 내가 봤을 때, C는 공공의 과녁 같은 존재다. 적어도 남자들에겐. 같이 놀 때는 재밌고 으쌰으쌰 분위기 좋고 다 좋은데, 이상하게 뭔가 딱 속시원하게 설명할 수 없는 정말 까다롭고 또 설명하기도 어려운 그 이상한 어떤 뭔가가 있다. 그에게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 그게 대체 무엇일까? 나는 정말 그게 궁금했다. 지금도 궁금하다. 그래서 괜한 일 벌인 거다. 뭐지 정말 그게? 뭘까? 그게 대체 뭐냐고.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동성애자에게만 있는 그런 느낌도 아니다. 나도 살만큼 살았고, 세상도 남자도 물론 여자도 알만큼 안다. 책은 잘 안 읽는다. 다른 사람들도 책 별로 읽지 않는다. 읽어봤자 베스트셀러, 그냥 심심풀이 땅콩들이다. 거의 다 오락물이고 여흥과 유희다. 유행일 뿐이다. 그 가운데 클래식은 드물다. 안 그라요? 내 말이 틀리요? 상남자! 남자 중의 남자에 대해서 남자가 제 2의 남자에게 말을 건네본다. 내가 나에게. 상남자는 일단 책을 안 읽는다. 말하는 걸 더 선호한다. 그래서 TV도 토론과 강연을 좋아한다. 드라마를 보는 건 간접 체험이 되냐 안 되느냐가 관건이다. 일단 타인은 남이고 놈이다. 까놓고 말해서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에 관한 일도 때로는 OX로 판단한다. 내 구미와 알맞냐 아니냐가 중요하니까. 그렇다. 남자는 지동설이란 말이다. 얼핏 봤을 때 아 남자는 태양 그러니까 천동설 같지만, 남자는 지동설이란 말이다. 일단 태양처럼 빛나고 핼리 혜성처럼 멀리도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하지만 여자에게 천동설처럼 보이지만 남자는 정리하자면 요컨데 지동설이란 말이다. 남자는 지동설! 즉 은하계 내에 모든 행성들이 다 태양인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나중에는 하이에나가 승자라는 걸 잘 아니까. 사회성도 있고 올바른 가치관을 갖췄지만 남자들은 부류는 조금 나뉘어도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태어날 때 그렇게 정해져서 어쩔 수 없다. 상남자인데 박식하고 똑똑하며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최고만 골라서 읽는다?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상남자는 남에게 굽히지를 않는다. 그런 상남자는 사과? 안 한다. 절대 안 한다. 통쾌하게 잘 하는 남자도 있다. 드물지 않다. 아니, 많다. 그러나 본디 남에게 굽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연기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대체로 자존심 상해서 못한다. 시인은 한다. 태도를 보면 형식은 갖추지만 교묘히 시기나 난국을 비켜가서 나중 보면 같이 관망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어느 때 보니 같은 편이 되어 같이 팔짱끼고 전망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게 된다. 깜짝 놀랄일인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깜짝 놀랄 수가 없다. 남자는 원래 때로는 정치적으로, 적절히 외교적으로, 종종 연모의 감정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가끔 경쟁적으로 또 이따금 사적으로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암묵적으로 배우면서 크게 된다. 어떤 잘못으로 인해 감정이 틀어지고 이제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에 대해서 잠시나마 말을 하고 듣고 그런 일이 반갑고 기분 좋을 수가 없으니 윤곽을 정하고 다음으로 살며시 넘어가게 된다. 어쩌다 드물게 사돈지간이 만나게 된 자리, 남편이 남의 집 귀한 딸내미를 데려와서 살면서 사업한다고 있는 고생 없는 고생 없청 시켜서 살았어─돈 관계 지저분하게 처가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까지 거미줄에 다단계 사업 방식처럼 돈을 끌어다 쓰고 그 파장은 말도 못하는데──사돈지간이 어쩌다 만나게 됐어, 거기서 본가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남편의 형님과 누나가 그 역할을 대신할텐데 여기서 극명하게 그 태도는 갈린다. 그 남편의 누나는 고개를 못든다 고개를 못들어. 그러나 그 남편의 형님은 내가 잘못한 게 뭐야 자기들끼리 좋아서 살면 된 거고 우리도 피해 많이 입었어 그런 자세로 목에 꼭 기부스를 한 거 같다. 말은 그래도 평상적으로 처신은 하지만 그만큼 사돈지간이 만난 자리에서 남자와 여자의 태도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남편도 기억은 한다 자기가 벌인 일과 별개로 내가 뭘 잘못했냐 내가 잘못했는 줄 아냐 외가만 그런 게 아니라 본가도 아주 초토화가 됐다 똑같은데 똑같으면 됐지 뭘 어쩌란 말이냐 라는 의미의 실언, 불편하니까 잊고 산다. 남편은. 어쩌다 프로메테우스가 된다. 명절에 남편의 형님께서 외가로 선물을 보내와, 남편의 누님과 너무 다른 모습을 보여서 그냥 서로 모르고 살고 싶은데.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없이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게 된다. '남자는 한 방-이다' 라는 말도 있지만, 마음은 있어도, 나중으로 행복을 미뤄도, 미래의 원대한 행복을 위해 지금 덜 행복하고 시련을 감내하겠다고 할 수도 있다. 찬란한 영광은 험난한 담금질을 요구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위험 회피는 그래프 선의 꺾임은 노력과 의지만이 전부가 아니라 성공에는 길과 운이 큰 작용을 한다. 때문에 첫 단추를 잘못 끼웠을 때 악순환에 빠진 다음 쉽게 그 늪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예가 많고, 인력 너머의 불투명한 요건이라는 숨은 식스맨 그 복을 사람들은 잘 아니까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떤 행동? 날개 달린 아기 천사가 오줌을 누는 분수대, (이자의 이자라도 갚을려고) 거기서 바닥에 쌓인 동전을 잔뜩 수거해가거나 생명수가 나오는 고추 끝을 막거나 또는 7인의 친구들이 어딘가에서 비밀의 문을 열게된 행위였던 비볐달까, 더듬었달까, 문질렀달까, 쓰다듬었달까 그 촉각을 느껴보는 일이 그것이다. 그대여! 제발, 지금 행복하소서! 내일이면 늦으리. 그대여! 제발, 지금 행복하소서! 낮에 힘들다면 밤에, 밖에서 어렵다면 집에서, 혼자서 심심하다면 둘이서, 시시각각 변하는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면 블로그가 있다오 일기가 있다오 친구가 있다오 거울도 있다오 그렇단 말이오. 척키 인형이든 뭔가든 내가 좋아하는 무엇, 하고 싶은 뭔가, 날 잡아끄는 그것이 신비든 환상이든 사랑이든 춤이든 노래든 또는 허풍이든 그 뭔가는 반드시 존재한단 말이오. 정 안 되겠다면 어항이라도? 그 어항 이 어항? 오오 그건 아니라오. 단, 그런 말들이 있으니 뭘 해도 재미없다고, 글이 안 써진다고, 뭘 해도 안된다고, 매사 싫증나고 따분하더라도 낙담하지 말 것! 웃음도 잃지 말고 희망도 행복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 것! 소망도. 예뻐짐도. 지성도. 그리고 대물도. 그리고 그 말은 이것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나... 과연 그럴까?, 끝이라도 안 좋았다면...,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다...... 다시 남자는, 으로 돌아간다. 앗 벌써 돌아왔다. 다시 이어간다. 남자들의 사고 체계나 행동 양식을 지켜보면 동물의 세계를 너무 많이 닮았다. 수컷은 서열이 중요하지만 또 그런 언급이 과하면 마음에 안 들면 막 화낸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그게 뭐냐고. DNA를 그렇게 타고났다. 궁지에 빠진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격이다. 자주. 당연히 그들은 약육강식의 논리를 철저히 신봉한다. (그래서 나는 옛날에 잠깐 연예인 하다가 국적을 포기하고 나서 욕을 바가지로 얻어들었던 사람을 좋아한다. 말 그대로, 는 아니고 좋아해야 할 것 같은 오기와 반골과 욱 하는 심정을 느낀다.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싸우고 싶어. 그러나 싸우면 안 된다. 삶이 망가진다. 생각난다. 한사람,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없던 법도 만들어서 배척 당했던. 제일 만만한 놀림감이자 주홍글자였던.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고 말들 하지만 사람들 의견 쑤두룩하지만 나랑 반대되는 의견들을 보면 정말 가슴 아프다. 할게 있고 안 할게 있는데, 중요한 거 놔두고 욱 하고 으쌰으쌰하고 다 거기서 거긴데, 모든 일은 약점과 빈틈이 없을 수가 없는데 이상하게 문화적으로 뭔가에 민감하게 구는 그런 기질이 엿보인다. 먹고 살기가 팍팍해서 그런가 뭔가 꼬인 뭔가가 있다. 그건 전문가들이 분석할 일이고, 간출이자면 으쌰으쌰 해서 떠들썩하기만 하지 나중 보면 별로 바뀐 거도 없다. 소탐대실이란 말이다. 어떻게 보면 땅 기운이 나랑 안 맞는 데서 태어난 거 같다. 그거도 어디냐, 도 맞긴 하지만 모두 그런 자세라면 그 미래는 참담할 것이다. 말은 그래도 사람들은 나라는 육신과 껍데기, 인간 종의 정신 그리고 그 이상 모두를 비관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으로 살지는 않는다. 하나의 장점이 있으면 하나의 단점이 있을 뿐. 쓴맛이 있으면 단맛도 있으니까. 말을 아껴야 할 때 멋모르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있다. 내 뒤를 돌아봤을 때 저렇게 폐쇄적인 사람이 과연 나였나, 불만만 가득하고 비굴하고 어렵고 의롭고 힘든 일은 모두 외면해버린 그가 바로 나였나, 싶을 때가 있다. 그럴 수 있다. 마음은 저기로 향하고 몸은 다른 말을 할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없이 맨몸으로 둘이 사랑 하나로 시작하여 살림을 하나하나 갖춰나가고 틀을 다지고 조금씩 발전하며 알콩달콩 사는 재미를 어른들께서 모르시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초록색 생태계가 차근차근 선순환되는 시간의 흐름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 축복의 반대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선험자가 아니라면 선구자도 못된다면 아무래도 좋다면 나는 하나의 자연인이 되겠다. 그것이다. 적어도 악의로 똘똘뭉쳐 인생을 헛되이 흘려버리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사람이라면. 군중이자 인류에 속한 인간으로써 각각의 단위를 존중하고 아끼며 의무...나이값은 하면서 사는 동안 내 권리 오직 그것 하나만을 외치지는 않는다. 하찮은 미물도 자기 생을 사랑하며 열심히 산다. 개미를 보라, 꿀벌을 보라, 언젠가 만나게 될 줄도 모르는 외계의 생명체를 생각해보잔 말이다. 젊어서 과오와 실패와 좌절이 없었던 사람 거의 없다. 그 꼬투리는 당장도 10년 후에도 낫낫이 밝혀질 수 있다.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잊힌다. 그게 세상일이다. 어려서는 그렇게 배웠다. 약자를 돌보고 살피고 강자에게 맞설 줄 알아야 한다고. 그러나 세상 사는 논리는 절대 그렇지 않다. 이긴 놈이 장땡이다. 이긴 놈이 장땡이란 말이다. 싸구려 장비로 초짜가 대물을 잡으면 옆에 있던 꾼이든 선수든 미치광이든 모두 찌그러진다. 결국 결과고 성과다. 재수 없으면 힘 없으면 욕 바가지로 얻어먹는 거다. 새싹들에게 그러라고 가르치면서 어른들은 반대로 하고 세상도 반대로 돌아간다. 아예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가르쳐주던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까보면 사람은 다 똑같다고. 어차피 거기서 거기라고. 세상은 아름다움이 전부가 아니라고. 인생도 사랑이 다가 아니라고, 절반은, 순서는 그렇다고. 가공되지 않은 날 것─살아있는 생물─팔딱팔딱 뛰는 그 생에 대한 의지와 생존과 본능과 그것 모두가 장구한 세월 동안 메타데이터로 구축된 원리를 모르면, 따르지 않으면, 개선하지 않으면 종은 단위는 결국 도태되며 종내 지구의 장엄함이고 뭐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고.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인생의 승부는 관 뚜껑을 덮어봐야 안다고. 그리스의 비극시인 에우리피데스 왜 이렇게 말했을까? <시간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시간은 묻지 않았는 데도 말을 해주는 수다쟁이다> 둘 중 하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던가, 배고픈 소크라테스던가. 어차피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는 안 어울리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는 쥐들에게 이상주의일 따름이다. 일단 첫째 목표에 집중하고 한마리 토끼가 먼저다. 계획 B와 운과 복은 그 다음이고. 1번이 도덕과 윤리와 정의고 2번이 패권이라면 1번 다음에 2번 이렇게 순서가 되어야 한다고들 하지만 보통 2번이 어려워서 1번에 호소하는 경우 적지 않다. 또 나와 관계된 것, 내게 유리한 것은 1번을 따지지만 아니라면 관심이 없거나 2번을 택하는 게 일반적인 인간의 행동이다. 자기가 봤을 때 1번에 걸려서 도저히 아닌 것 같아도 다수가 원하면 군말없이 승복해야 한다. 나도 보통은 선량한, 때로는 우매한─먹고 사는 게 먼저니까─어쩌다 이용 당하는 대중에 속하는 1인이란 말이다. 군중에 관한 명언, 듣고 읽으면 불편하다. 나라고 별 수 있나, 내가 시간을 돌릴 수 있나 고대의 그 수많은 신들을 현실로 불러낼 수 있겠나? 할 수 있는 건 한마디로 제한적이다. 설령 독불장군으로 확 없는다? 그건 책을 써서 일조하겠다, 환경운동해서 세상을 바꾸겠다와 같은 의미라면 모르지만 아니라면 꽤 참 참혹한 일이 될 수 있다. 실제 사례도 없지 않다. 이름 붙여진 단어도 있다. 그것은, 역─모!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는 절묘한 극적임과 어떤 풍성함과 거북하지 않은 조신함을 동반한 것으로도 모자라 사석에서 말하기로는 멋져보이기도 하겠으나, 그러나, 분명, 사극에서의 몰입감 때문에 널리 화자되고 불미스럽지만 미화랄까 미적 가치로 환원된 측면이 없잖아 있는 낱말.) 괄호가 길었다. 다시 돌아와서 그들은 약육강식의 논리를 철저히 신봉한다. 이걸 뭐라 하느냐, <본능>이라고 한다. 거의 모두 바른 인성을 갖추고 교양과 사교와 애정과 친교, 우애, 사랑, 교분, 정분, 정나미, 친분, 사모 등등 시시각각 거기에 적합한 대인 관계에 가장 알맞는 감정을 내세울줄 알지만 그 중에 하나의 철문을 열면 그 자리는 항상 본능이라는 강자가 턱 버티고 서 있다. 즉 사람에 따라 자기는 우정인줄 알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본능이 크게 작용하는 사람이 있고, 누구는 정분과 관련되어서만 본능을, 누구는 서열에 관한 한 무조건 본능을 따르고, 누구는 장소에 따라, 누구는 유독 운전할 때만, 누구는 자존심과 관련되면 본능이, 또 누구는 어떤 연관성에 따라 본능이 작용한다. 그 차이만 있을 뿐 본능이란 심리 기제는 원색적이지만 보호색을 띄고 있으나 언제 어디서나 언제까지나 사람과 또 인생과 함께 한다. 열등감과 관련된 뭔가를 건드려도 또 그분이 나타나신다. 본능이. 그분이 없었다면 공룡의 전철을 밟았을 테고. 뭬~야, 이제는 본능조차 그분이시군. 아 나 저런, 뭐 이런 일이 다 있나. 다시 이어가자면, 남자는 소설도 별로 안 좋아한다. 그건 논쟁에 효율적인 분야가 아니다. 다다익선 이론에 따라 최대한 많은 저자와 제목과 대강의 개요는 알아두는 것, 그것은 중요하다. 그건 한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학문은 지식을 쌓는데 도움이 별로 안 된다. 여자친구가 말은 많이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우위에 서더라도 한참 지나서 보면 결국 그는 그녀를 웃게도, 울게도, 놀라게도, 헷갈리게도 만들고 모성본능을 자극하여 말로, 말만으로 세계여행 돌고 오고 말만으로 흑백영화 분위기를 연출하며 말만으로 잘잘못도 슥 넘어간다. 그 화술이 좀 딸리는 상남자? 잔소리를 피해서 떠난다. 어디로? 게임기로. 부릉부릉 도로로. 골프장으로. 낚시터로. 운동장으로. 술집으로. 사이버 공간으로. 새로운 뭔가를 찾아서. 이따금 잘못된 만남 속으로. 물론 나도 그런다. 상남자니까. 남자 중의 남자니까.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을 혹시 읽게 되었는데 불편한 썩은 미소를 짓는다? 백퍼센트 남자 중의 남자다. 자기가 잘못 하고도 성내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위기 모면술이 아주아주 뛰어나다. 임기응변에 능해야 한다는 걸 잘 안다. 그건 생존본능이다. 그걸 학습하면서 큰다. 친구 D도 남자다. 친구 D가 요즘 인기 드라마에 나오는 이 지역 남자 연예인과 대학시절 어울렸다네 친구라네 그땐 시시했다네 하면서 하도 거들먹거리길래 나는 언제 어느 자리에 그분을 불렀다. 친구 한 명 건너면 연예기획사 사장이다. 그래서 그 스타가 고향 내려오는 날을 잡아서 자리를 만들고 친구 D를 불렀다. 그래서 D에게 아니 왜 친한척 안 하냐고, 친구라며, 시시했다며, 별거 없었다며 그러니 그 다음은 어땠을까? 어떠겠나, 화를 내지. 핑 도는 거지. 남자는 이런 처지에서는 궁극적으로 화를 내는 수 밖에 없다. 그것도 험하게. 어설프게 연기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오리발 내밀며 소리를 지르게 된다. 내가 언제 그랬냐고! 그러면서 화제를 돌려야지. 연봉이 얼마로 올랐다고. 경쟁사에서 더 큰 액수를 제시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고. 뻔하다, 우리들. 남자들 세상을 가끔 보면 라디오 주파수를 다 다른데 틀고서 다 다른 얘기를 한다. 듣고만 있는 사람은 없다. 있다면 속으로 딴 생각한다. 그녀랄지, 장비랄지, 블로그랄지 같은. 그러다 떠들기가 지치고 공통된 목적과 주제가 통일되지 않다보면 자연스럽게 침묵의 시간이 돌아온다. 담배만 퍽퍽 피든가, 술만 캬캬 마시든가. 오만 인상 찌푸리면서. 세상의 시름과 걱정은 혼자서 모두 다 짊어지고 있다는 듯이. 지금은 핸드폰이 있으니까 딴짓하기도 편하다. 할아버지 친구들 모이는 자리에 가보시라. 서넛 가운데 한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문 반복이다. 자식이 뭘 해줬어 어쨌어, TV 코메디 프로그램의 소재로 쓰이기에 딱 알맞다. 분명 우낀데 웃겨야 하는데 이게 또 썩은 미소를 불러온다. 그게 남자들 세계의 생리다. 노는 방식이 그럴 뿐이다. 삶의 방식과 인생 철학, 이미 얘기했다. 여자들 세계? 넘어가자! 아무튼 그 이상한 기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아직도 그 비밀을 풀지 못하고 있다. 흔해 빠진 사랑은 아닐 것이다. 축복 받은 재능 또한 아니다. 이미 안고 태어난 유복한 낭만주의? 절대 아니다. 아무래도 장차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연구자가 나타나면 대신 논문을 쓸 테고 아니면 말고. 뭐 별 수 없지 않은가? 누군가에게는 두고두고 설레는 일일 테지만 내게는 남자에게는 그냥 그저 그런 정도다. 내가 오죽하면 그랬겠나? 사실 나는 보통이다. 그러면 다른 남자들은? 그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절대 기분 좋을 리가 없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더래도 반틈은 속으로 꿍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오죽하면 그랬겠나? 어? 오-죽-하-면! 내가 봤을 때는 별 차이도 없구만 뭔 대단한 배려와 섬세한 선택이 있다고 그 난리인지 통 몰라 모르겠다구. 그녀가 봤을 땐 녀석은 여심을 들었다 놨다 쥐었다 폈다 긴장의 끈이 자유자재로 음악성을 띈다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땐 별거 없다. 그럼 뭐 나는 쥐었다 펴야 하는데 너무 세게 쥐어서 안 펴지는 건가? 들었다 놔야 하는데 아예 어딘가 딴 데로 여기가 어딘줄도 모르는 생판 희한한 딴 세상으로 보내버린단 말인가? 그럴 리가! 물론 내 생각일 수도 있지만 나도 들었다 놨다 쥐었다 폈다 할 줄 안다. 잘 안다. 잘 한다. 대가는 아니지만 수준급은 된다. 내가 뭐 어때서? 나 정도면 어디에 명함을 내밀 정도는 안되지만 또 어디서 썩 빠지지도 않는다. 능력 발휘를 잘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럼. 더군다나 나는 속좁은 남자처럼 굴지도 않았다. 바다처럼 마음이 넓지는 않지만 중간은 간다. 나도 이미 C의 속마음을 읽었기 때문에, C가 넌 내키지 않겠지만 마누라에게는 호감이 있는 듯이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또 돌아가는 용한 기운을 파악해냈기 때문에 보통 남자들 같은데 엄두도 못냈을 행동까지 했다. 이미 옛날에. 우선 C에 대해 삐리리리 정신분석 끝내고 나서 녀석이 다른 데서 개 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 적이 있었던 것 같아서 나는 세심히 신경써주었다. 딱 보니 살면서 이런 말들을 꽤 들었으리라 판단했다. 늬가 그걸 왜 궁금해하냐네, 늬가 그걸 왜 하냐네, 늬가 뭔데 나서냐, 너는 우리 모임에서 빠져라, 늬가 무슨 아니 뗀 굴뚝을 연기나게 만드는 마법사라도 되냐 같은. 그런 소리를 적잖이 얻어들었을 꺼 같아서 나는 또 내 여자친구가 내 친구들 가운데서도 유독 특별히 C를 좋아해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까닭은 이것이다. 나는 하늘처럼 마음이 넓기 때문에 따라서 나는 C에게 예전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넌 말이야 우리 코알라에게 좀 수줍게 대하는 거 같아, 너무 조심하는 듯 해, 좀 더 편하게 대하렴, 영화에 보면 중후반부를 넘어가면서 사이가 이상하게 꼬이기는 하지만 우린 발단의 분위기로 계속 가자구, 라면서 나름 신경썼다. 남자들은 안다. 이런 친구, 많지 않다는 것을. 자타공인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인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내 친구 E도 다른 친구 여자친구에게, 내 친구 H도 내 마누라에게 참지 못하고 말로써 C가 어떻다, 어떤 사람이다, 뭘 하드라 라고 도저히 참지 못하고 말했다. 고발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치졸하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들이 사회성 없는 사람도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들인데 녀석들이 이러는 건 정말 그건 어떤 제 3의 힘에 의해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 같다. 아니면 이건 누군가 조종한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뭔가가 쌓이고 쌓여서 화자는 별뜻 없는 말로써 의사를 전달하고, 청자에게 그것은 어쩌면 표독스러운 의미 전달이 되어 각인된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또 쌓이고 쌓여 어떡하다 치부가 들추어지기도 한다. 언어학적으로 보자면 삐걱거리는 교감을 화자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화자는 자기는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할 테니까. 내가 잘못한 게 뭐냐고 따질 테니까. 그렇다면 명시적으로 오해를 풀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흘러서 그걸 지금까지 또 지금 이후로도 썩 언짢게 안고 사는 청자의 책임으로도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두 사람의 언어가 또 두 사람의 인지심리 체계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뿐이다. 다른 건 없다. 의사소통의 원칙을 따지고 기준에서 벗어난 게 뭐냐를 분석할 것이 아니라 그냥 안 맞는다고 보면 된다. 쉽게 말이다. 이것이 혹시 긍정성의 효과에 상한선이 존재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비관성이 특이하지만 이렇게도 표출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까? 모르겠다. 그분들에겐 드물게 한 번이지만 나에게도 드물게 한 번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거슬리는 것은 거슬리는 것이다. 이래서 어떤 분들은 그렇게 순위권에 올려지기를 꺼려하는 것일까? 존말할 때 순위권에서 빼주라고? 물론 나도 안다. 그때 못했으면 지금 잘 하면 된다는 것을. 남 탓 하지 말고 내 안에서 원인을 찾으면 되는 것까지. 잘 되면 내가 원래 좀 잘해 내가 원래 좀 예뻐,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든 말든 나만 내 길을 가면 그만이다, 남이 안 하면 내가 하면 된다, 해도 해도 안 된다 남이 안 하니까 힘 빠진다 그래도 그렇더라도 그 단계를 겪고 깨우치는 게 먼저다 안 그러면 새로운 다음은 제발로 찾아오지 않는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시작이 절반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규칙이 바껴야 하고 질서 의식이 수준에 이르러야 하며 생각이 한 계단 올라서야 한다지만 그걸 아는 게 먼저다 절망이 없으면 실패가 선행되지 않았다면 전기도 없고 문명도 없다, 하루아침에 대단한 걸 이룬 것 같고 혁명이 위대해 보여도 <갑자기> 란 없다 절대 없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래프 선은 움직인다, <어쩌다 한번>에 인생이 바뀌고 그때 재미없고 심심해서 팔자가 바꼈을 수도 있다, 타인을 계몽시키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지는 못할지라도 나만 타락하지 않아도 절반은 성공한 거다, 못 되면 조상 탓 잘되면 난 몰라 같은 말도. 지금 나도 미래 세대에게는 조상이란 것, 왜 모르겠나? 영화처럼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가 만날 수 있다면 만나서 차나 한잔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다면, 혼자 생각했던 말과 동기부여 강사에게 듣던 말을 건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 또 지금 너는 왜 그렇게 살았냐고, 사냐고. 그때 넌 왜 그렇게 내 욕을 해댔냐고 그와 같은 소소한 질문을 해도 될 만큼 흔한 만남은 아니니까. 뒷머리나 벅~벅 긁어야겠지. 불미스러운 건 이유를 다 바깥에서 찾고, 특별한 건 다 내 개성이라고 단지 그런 거라고 할 만큼 나는 절대적으로 곤궁하지도 궁핍하지도 불행하지도 못되지도 어리석지도 않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른 때란 말, 좋을 면을 보고 장점을 찾으려는 혜안, 내게도 있고 그걸 키우지는 못해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 산다. 전기기타의 플랫을 깎다 조각가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뒤늦게 내 전공을 찾게 된 듯하여 매사에 감사해 하는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한다. 교육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무엇과 무엇을 받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우리 인생에 관여한다는 것도 잘 안다. 부인이 큰 걸 바라는 게 아니란 것도, 많은 걸 기대하는 게 아니란 것도 모두 다 안다. 따라서 왜 어떤 여자들이 지적인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들이 은근한 걸 좋아한단 걸 잘 모르는 반면 어리숙한 반면 멋지고 또 멋져서 그 남자를 옆에서 내가 보살펴줘야겠다 진짜 나 아니면 안 되겠다 저 남자를 내 껄로 반드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바른 인성을 갖췄는가를 먼저 보고, 모순 같지만 자기는 아니라고 할테지만 고급스러운 농담과 가짜 웃음 둘 중에 하나를 갖추기를 바라는지 나도, 나도 잘 안단 말이다. C도 나를 특별한 친구로 여긴다. 나도 안다. C도 나를 좋아한다. C가 아주 잠깐 사라졌을 때 나는 수소문해서 C가 교도소에 잡혀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C와 친했던 친구 그러나 배신한 친구와 나는 같이 면회를 갔다. 벌금인가 보석금인가를 내가 아는 형에게 빌려서 대신 내주고 나서 C는 교도소에서 풀려났다. 그때 C는 너스레를 떨었다. 귀여웠다. 자기가 있던 알카트라스 교도소 다인실에서 자기가 넘버 2였다고, 죄수번호가 3141번이었다고. 캬~! 남자들은 안다. 어떤 드라마틱함, 그 거대한 서사가 있어야 진짜 친구라는 것을. 그것이 나와 C 사이엔 존재했다. 그렇다고 하여 우정을 간직하면서 주변의 꽃향기에 심취하고 나른한 권태에 대해서 대화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어 뭐야 우리에게 서사가 있나 우리에게 드라마틱함이 있나 뭐야 이런 뭐야 아휴 뭐야 하면서 없자나~ 없다구~ 만들어야겠구나, 그럴 것 까지는 없다. 이거 집고 넘어가야지 안 그럼 잘못된 우정의 뜻을 그 심오함을 다음 남자에게 심어줄 수 있으니 기록하고 본다. 나도 C를 좋아한다. 나도 C와 친하다. 나도 C를 보고 싶다. 녀석도 현실적으로는 힘들어도 이미 꿈에서 나든 척키 인형이든 친한 친구들을 만난다는 것도 안다. 안 봐도 비디오다. 나도 C를 부인 말마따나 따라하고 좋은 건 배우고 좋은 건 좋게 보고 싶다. 그러나, 그런데 왜 그 어떤 무엇은 나를 자꾸 불편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 무엇이 대체 뭐란 말인가? 대관절 뭐가 샘난단 말인가? 왜 그렇게 어떤 무형의 불가사의가 얄밉단 말인가? 어떤 원리로 내 속이 그렇게 뒤틀리고 꼬인단 말인가? 난 그러기 싫은데 말이다. 가슴 속에서 막 사랑과 비슷한 무엇도 아닌데 막 뭐가 솟구치는 것만 같다. 좀비 영화에서 봤던 딱 그런 뭔가가 말이다. 도무지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아무리 해도 나는 그걸 모르겠다. 녀석뿐만 아니라 나도 남자도 우리들도 잘 안다. <사랑은 없어> 라는 농담이 왜 웃기고 잘 먹히는지를. 그런데 왜 녀석은 그것의 고고함을 잘 아는 로맨티스트고, 우리는 침울한 책망감을 떠안아야하는 장난꾸러기요 항상 어떤 기회만 엿보며 식탐을 잠재우지 못하는 늑대이자 탐구욕을 만족시켜야만 하는 소년 기동대로 취급 받고 잠재적인 꾸지람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가? C가 하면 열광과 갈채가 자동적으로 따라오고, 뭐 우리가 하면 그냥 발광과 난동으로 끝나버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고 싶지도 않다. 집어치우고 싶다. 내가 언제 어떡하면 맨날 바깥으로 돌 궁리만 했다고. 뻑 하면 자기만의 공간으로 탈출만을 꿈꾼다나? 내가 언제 그랬다고. 나 만큼 가정적인 남자들 있으면, 경건한 태도로 가슴에 손을 얹고 나 만큼 가정적인 남자 있으면 나와보시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대해서는 암울한 결과가 뒤따를지도 모를 일이니 카메라를 끄고 더 이상 접수를 받으면 안 된다.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심연의 정체는 과연 대체 뭐란 말인가? 언제쯤 그 비밀을 속시원히 알 수 있을까? 언─제─쯤! 아, 그쪽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하는데 괜히 그 생각을 하다보니까 또 수증기가 팍팍 올라오네. 이런, 젠~장! 나는 원래 말이 많은 남자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길다랗게 뜬소문과도 비슷한 장문의 회고문이랄까 비망록을 작성한 것 같다. 무덤까지 안고 갈라 그랬는데, 뭔 거창한 비밀은 아니지만. 그동안 이 얘기를 토로하지 못하고 어떻게 참았냐고? 어떻게 참았을까? 침묵의 명약을 삼켰을까 대인배의 법도를 지켰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라서 그냥 잊고 산 거다. 그게 맞는 것 같다. 흐흠, 음 흐흠. 자, 이런 데도 어디선가 그 말을 또 들어야 하나? 다시 태어나면 지금 부인과 또 다시 결혼하시겠습니까? 그래, 좋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그녀와 결혼하겄다. 그녀와 다시 결혼하겠다고. 어? 됐습니까? ······ ······ ······ 나중 들리는 뜬소문에 의하면 부인은 그러지 않겠다는 간곡한 선언이 있었다고 한다. 정말 아조 처절했다고 한다. 분위기 장난 아니었다고.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이거 이거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어? 이 양반이 지금 이거 안 되겠구만~ 말이면 다 되는 줄 아시나 이 양반이... 하면서, 삿대질은 기본이고 취재 기자는 한 대 아니 여러 대 따끔하게 맞을 뻔 했다는 풍문이 전해졌다고 한다. 물론 헛소문일지도 모른다.
   아아, 내게 있어서 음악은 무조건 대중음악인데 콘서트도 나 보고 싶은 거만 표 끊어서 부인을 데려가고, 이게 환상이라고 가르치고 주문을 주입하고, 집에서 먹는 음식도 내 맘대로, 청소를 어떻게 하라도 내 맘대로, 모든 것은 내가 정하는 데로 하고, 마누라가 좋아하는 놀이공원에는 단 한 번도 안 갔다. 그러기 위해 뻥을 좀 쳤다. 공황장애가 심하다고 뻥을 쳤다. 물론 내 그녀로 만들고 나서. 왜 여자도 그렇지 않은가, 친구는 한 명인데 그 친구는 완전 빼어난 미모의 친구인데 남자를 내 남자로 딱 만들고 나서 어떤 시점을 넘겨서 친구를 소개하지 않는가? 나도 그랬다. 좀 비유가 부적절하지만 갖다 델 이유는 무궁무진하게 만들 수 있다. 이젠 속지 않으면 못 견디게 만들어놨다. 나도 타성에 젖지 않고 틈틈히 공부도 많이 했다.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아무튼 연구 좀 했다. 그러니까 모든 게 내 중심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처럼 난 좀 까칠하고, 많이 까칠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친구가 별로 없다. 그러나 다른 아저씨들도 거의 그럴 껄? 나 뿐만 아니라 남도 그렇게 생각하는 정말 편한 친구가 5명 10명이 넘는 사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불과 한두 명도 결혼 생활하면 자주 못본다. 자기 만의 공간은 원래 어른들에게 중요한 개념이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거도 좋지만 나만의 공간과 욕구과 또 사소한 균형을 유지하는 게 정말 어렵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른, 안 됐다. 그래도 아직 철들지 않았으니까 그걸로 된 거다. 그리고 이상하게 요즘 호르몬 변화 때문인지 내가 원래 그러면 안 되는데 좀 더 자상해지고, 친절해지고, 상대에게 맞추고 조화를 이룰려고 노력하는 제 2의 나로 변화해가는 것 같다. 큰일이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도 막 따라 부른다. 가사도 외웠다. 정말 큰일이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끝까지 정말 끝까지 헤비메탈을, 헤비메탈만을 추구해야 하는데 말이야. 전기기타 학습을 포기하긴 했지만 샤우트 창법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고 싶단 말이다. 게다가 나는 이미 '카페 피카소'에 모아놓은 상당한 음 어 외상값도 깔끔하게 값았다. 누군가 날 조종하는 것 같아서 내가 내 맘대로 안 된다.
   빠빠 삐삐뽀 뿌잉뿌잉 삐리삐리 아흐흑 아흐흑 크키크크쿠쿠키코쿠 코콩 킁킁 쿵따리 샤방 포춘킁킁 쿠키.
   앗, 이거 뭐야! 돌아온 거네. 제정신이 돌아왔어. 뭔 놈의 가짜 환상머쉰에 빠져가지고 이 고생을 하는 건지. 당장 물러야겠다. 제대로 작동도 안 한다. 이게 다 뭐야 뭐냐고!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다. 빙의를 마치고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인문교양 서적을 읽어도 소용 없다. 소설을 써도 변화는 없다. 인생이 바뀌질 않는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차를 한잔 마셨다. 아, 정신이 맑아졌다. 이제 대충 내 삶의 줄거리가 보인다. 인생에 관하여. 그 모두는 썩은 경험이었다. 결과가 그렇지 않은가. 성과가 불투명하다. 앞으로 다를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어렵다. 때문에 그것은 겉은 평범할지언정 썩은 사과다. 속이 골았다. 빛 좋은 개살구. 실은 그런 벌레 먹은 사과가 제맛이라는 대사를 아재들은 제법 써먹고 또 그게 어딘가에 자주 먹히지만.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나면 재미없는 삶이 조금은 반짝이는 느낌이 든다. 뭔가 있어보인단 말이다. 고로 그걸 가지고도 인생은 어떻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보면, 그걸 글로써 읽는다면 나중 읽고 나서 할일은 하나만 남게 될 것이다. 그건 뭘까? 뭐겠나, 썩은 미소일 테지. 아니라면 그건 거짓말 같다. 그런 거짓말로는 뭐가 있을까? 거짓말인지 참말인지도 이젠 잘 모르겠지만 모두 나열해보자면 이렇다. 모두 헛것이라고! 모두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다고! 그러나 속고 또 속고 안 속으면 허전하고 기분이 울적하고 삶을 감싸는 분위기까지 어둡고 어둡고 계속 어둠에 묻혀 뭔가 있을 듯 말 듯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 다음 그 다음 에잇 에잇! 하지만 엷은 또 뿌연 기대의 빛을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기! 희망을 버리지 않기!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기!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부터 살면서 보며 알게 되는 고귀한 태도에 이르는 거대한 풍경들! 그러나 새로움은 없다는 것! 있다면, 을 얘기하는 게 지금 할일이라는 것!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다가 안 되도 밑질 것 없다며 공책에 볼펜으로 쓰고, 핸드폰 메모장으로도 쓰고, 데스크탑 컴퓨터로도 쓰고 궁리하고 또 궁리하고 뭔가를 하다 보면 드디여 아득히 보게 되는 것은 아, 그것은 허상? 첫날밤? 오, 저런! 맞긴 맞네. 썩은 경험이 썩은 사과였고, 그것은 썩은 미소를 부른다는 것! 참으로 낭패로군. 기껏 도달한 결론은 인생이 한바탕 개꿈 같은 것이라니! 결국 나는 개와 다름 없다, 개가 맞네 라는 것인가? 그러면 그것은 처음에 쓰고자 했던 의도, 개가 된 남자, 그것으로 다시 돌아가서 원상 복귀가 된 형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혼잣말 메아리)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분의 반문) 뒤늦게 청소년 드라마풍 작법이나 만화영화식 발상을 빌려올 수는 없다네. 잘 알면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스탐은 스탐의 인생을 살고, 나는 소설을 쓰고 내 인생을 살면 그만이다. 그도 놔두자. 신경쓰지 말자. 척키도 놔둔 것처럼. 잊혀지지 않는 생활 대사, 하나하나 신경 쓰고 담아둘 필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평생 남의 비위를 맞추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많고 적고 차이는 있겠으나 자아 1도 자아 2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며 살 수 밖에 없다.
   어차피 글이 잘 안 써지고, 대사를 못 쓰겠다면 생각이나 많이 하자. 그러자. 생각, 했다. 앗, 생각났다. 생각을 해보니 그렇다. 일단 요약을 해야 하니 <늬가 그걸 왜 하냐?>에 버금가는 아니, 으뜸가는 명대사의 기억을 찾아보면 이렇다. 살면서 읽은 게 아니라 직접 들은 명대사 말이다. 그것은 이것이다.
   「예절 좀 지켜라!」
   예절? 어떤 상황에서 내가 예절을 지키지 않은 게 뭐가 있지? 그때 나는 눈빛조차 건네지 않았다.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대충 어떤 상황인지 그려질 것이니 자비로운 남자로 둔갑하지는 않겠다. 그때 그 당시 일행에서 마초가 점찍은 그녀에 대해 나보다 더 어떤 눈빛을 보내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말 한마디 안 했다. 그녀도 말 한마디 걸어오지 않았다. 딴 데만 쳐다봤다. 이미 일행에서 한 명 이상의 남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익히 알려졌고, 도마 위에 오른 후 나중 합류한 그녀였다. 행실이 어떻다는 건 그녀 인생이고, 처음 봤고, 관심도 없었다. 친구들이 모인 일행에서 나중 참석한 홍일점, 그녀. 그녀는 보험설계사였다. 미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어떤 타입? 첫째, 예전 나와 둘이서 일을 같이 했던 친한 친구─그땐 그와 나 둘이 동업을 했고, 그 후 그와 나 또 그게 왜 궁금하냐고 물었던 친구 셋이서도 동업을 했다─그 친구가 보험을 상담하기 위해 어느 보험설계사와 밖에서 만날 일이 몇차례 있었는데 친구가 자꾸 어떻게 한번 해볼려고 해도 그분은 항상 자꾸 애를 데리고 나온다고 그래서 어떻게 못하겠다고 도저히 어떻게 못하겠다고 그랬던 사연에서의 그 여자. 둘째, 그렇게 어떻게 이전까지는 좋아하고 다정했고 친구였던 어떤 중년 아저씨에게 나는 어렸을 적 바로 저 꼬마였다. 그렇다. 그녀는 나중 상황이 재현된다면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간다면 애를 데리고 나갈지 어떨지, 행복할지 혼자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그 뭔가가 부족했다는 거다. 물론 심증이다. 추측이다. 육감이란 말이다. 그러나 무슨 얘기는 돌았다. 으흐흐. 으하하하하하. 그러고서 식스 센스? 꽝이군. 당신 같으면 그런 자리에서 그런 상황에 그런 그녀에게 사랑을 쟁취하겠다는 욕심과 의욕과 굳은 의지가 들겠는가? 과연 나처럼 조연이 되었을 때, 자기도 모르게 후발주자로 발을 담구게 되었을 때? 보통은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얘기다. 그러나 또 너무 정확하게 결론 짓지는 말자. 그게 좋겠다. 아무튼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거다. 거기서 나보다 예절을 더 지킨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제발 나와보라고! 거짓으로라도 나오라고 막 빌고 싶다. 나는 그때는 물론이고 어디에서나 어떤 그분들께 존재 자체가 질투와 질시와 시기의 대상이었다. 서로 마음에 안 차는 건 피차일반이었다. 또 저 말을 했던 친구와 절친이 있었다. 예절 지키라고 말했던 친구가 소문자 b라면 그와 단짝이었다가 나랑 친해졌던 친구는 소문자 a라고 치자. 소문자 친구들의 리더 a, 명색과 위치는 소문자 친구들에 속하지만 실은 대문자 A급인 그런 친구. 일단은 편의상 소문자 a로 지칭하겠다. 한때 또 걔와 내가 급히 친해졌다. 많이 친해졌다. 우정으로 만리장성을 쌓았다. 큐피트 황태자네 뭐네 서로 애칭도 붙여주고 단둘이 새로운 등산 모임에도 따라가고, 단둘이 브로맨스의 성을 쌓았다. 그와 나는 공통점이 있었다. 마음이 통했다. 우린 모두 유명 영화배우 이름을 이메일 아이디로 사용했다. 미리 선점된 이름일 테니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배우 이름 그 끝에 큐피트 황태자 a는 77을 붙였다. 친해질려면 작은 걸로도 둘 사이의 온기를 알 수 있고, 그 화려한 절친함과 숨길 수 없는 친밀감은 측정 가능할 것이다. 우정이 격정적으로 급속히 불타올랐다. 홈페이지 여자친구들이 막 부러워했고 즐거워했다. 바벨탑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본디 전에는 a와 b가 절친한 우정이었다. 완전 단짝. 그래서 내가 a와 친해져서 둘이 자주 만나고 노니까 b는 개밥에 도토리가 됐다. 당연히 소문자 b는 나와 a가 단둘이 찻집에서 차를 마실 때 문자도 하고 찾아 오기도 했다. 코드 맞는 사람끼리 만나라네 어쩌라네 문자하고 나서 즉시 다 떨어진 너덜너덜한 쪼리 슬리퍼만 신은 채로 택시타고 왔다. 울상인 채로 찻집에 도착하여 내 죽상을 좀 봐주시게 그러면서 쇼를 했다. 소문자 친구 b는. 뭔 말도 안 나왔음. 그는 내 집에도 찾아왔다. 지적인 남자를 좋아한다고 음 나도 책을 한번 읽어볼까 하면서 내 쪼매난 서재에도 기웃거렸다. 몇 권 훓어보다가 말았다. 물론 녀석은 그 집요함으로 살면서 많은 소득이 있었다. 나머지는 진짜 사석에서 할 얘기. 코메디도 그런 코메디가 없었다. 또 우리는 소문자 친구들 무리와 여행도 갔다. 거기서 모두 같이 술을 마신 다음 저녁이 찾아왔다. 나는 머리 아퍼서 쉬고 있고 다른 친구들은 카드놀이를 했다. 그러다 소문자 친구들 노는 걸 구경하다 나는 누워서 눈을 감았다. b는 내게 과자던가 어떤 즉석 식품에 대해 얘기하면서 게임 중이니까 물 좀 받아주라고 부탁을 했다. 처음에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나는 머리가 아펐다. 거절했다. 머리 아프다고. 그러다 부탁한지 얼마되지 않아 b는 뚜껑이 열렸다. 확 열렸다. 즉석 식품을 나라고 가정하고 화내고 소리지르고 벽에 집어던지고 발로 지근지근 밟아서 즉석 식품을 곱고 미세한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거긴 마이크 타이슨 사건이 일어난 알라스카가 아니라 중부 어디쯤 됐겠다. 그 사건 당사자도 소문자 친구들 일원이었다. 현장에 있었다. 그를 소문자 g라고 했을 때, 다른 자리에서 g는 내게 언지를 주기도 했다. 너가 친구들 있는데서 한판 붙으라고 b와. 애들 말릴 꺼고 나이 들고 친구끼리 치고 박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그런 방법도 있다고. g와 서로 충돌해서 괜히 내가 마이크 타이슨이 되기도 했지만 g도 남자 중의 남자여서 그렇지 나쁜 놈은 아니다. 거칠고 자기중심적이고 애완견에게 순서가 밀렸다고 부케가 시든지 얼마되지도 않아 곧바로 이혼해서 그렇지. f의 단짝 g는 그 특유의 관대함 때문에 b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했다. 재수씨 곧 c의 여자친구의 친구들은 b를 뭔 껄떡쇠로 알겠다고. 그렇게, 그렇게 b는 광분했다. 그러고서 혼자 식식거리며 분을 못 참고 b는 문을 팍 닫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서 집에 갈려고. a도 뺐겼겠다, 기분 상했겠다, 이미 난동부렸겠다, 애들에게 돌아가기에는 면도 서지 않겠다, 집에나 가야지 남아서 뭘 하겠나! 그렇게 그는 멋지게 남쪽으로 혼자 내려갈려 그랬는데 (막힌 차 때문에) 주차된 차를 못 빼고, 뒤따라 달려간 브로맨스 친구 a가 b를 엄청 야단치고 어르고 달래고 중재하고 다독여서 다시 숙소로 돌아온 적이 있다. 또 소문자 친구들에게 나도 소문자가 되어 같이 좋은 데도 갔다 왔다. 나중 모여서 어쩌다 그 말이 나와서 분위기 으쌰으쌰 웃고 떠들 때 b는 뭐가 뒤틀렸는지 으잉 으잉 에게 뭐야 에게 뭐야 그게 뭐야 에게~ 하면서 핀셋으로 들어올려야 하네 마네 현미경으로 보일려나 하면서 초딩도 안 할 행동들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실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에게~ (몸짓) 요만~ 에게~ 얼굴 찡그리고 또 에게~ 그게 다였다. 그것만 해도 어딘가. 진정 지적인 남자는 그분이고 풍자는 기본이요 단연 고급스러운 농담의 대가인데 인정할 건 인정하자. 가짜 웃음, 그건 일생 생활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기지와 재치가 넘치고 해학과 상상력이 풍부한 친구라서 각색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 살면서 자신이 행위 주체가 되어 그런 표정을 자기도 모르게 표출할 기회, 흔치 않다. 매우 드문 일이다. 어른이 되서도 그런다, 그건 푼수다. 역으로, 살면서 뭔지 모를 울화가 끓어올라서 말할 수 없는 어떤 불가해한 속내 때문에 약오르지롱~ 하면서 눈꼴사납고 같잖은 반응을 반드시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그 표정과 행동을 행위 객체로서 구독할 수 있는 기회, 역시 흔치 않다. 몇 번쯤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어른이 되어 매번 그런 사람을 만나고 겪는다? 그런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는다. 있다면 그건 비정상이고, 있다면 그건 정상적인 행복이 아니며, 있다면 그건 만화영화다. 만화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애들은 몰라도, 여자들...은 몰라도, 남자 세계에서 그런 일이 있다? 그건 쉬쉬할 일이다. 대하드라마에서도 보기 어렵다. 때문에 나는 아마 그분에게 고마워했어야 하지 않나 그런 심정을 느낀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오, 땡큐! 매우 감사! 마침 정말 때마침 당시 나는 TV 드라마를 보면서 폭소를 터트리며 겉으로는 즉 대외적으로 부쩍 말수를 줄이면서 또 혼자서는 뭐랄까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고혹적으로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 같다. 드라마 속 명대사를 듣고 또 따라하면서. 어떤 대사냐면 이런 대사였다. <내 남편한테 껄떡대지만 이년아, 뭐~? 껄~떡?>, <내 인생에 달라붙어 단물 쪽쪽 빨아먹는 낙지 빨판 같은 년!!!>, <돼지뽄드같은 년!!> 막 샤워하면서 노래도 부르고 그땐 좋았다. 정말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예절 좀 지켜라, 그 말 들을 만 했던 거 같다. 못 들었다면 나는 훨씬 더 망나니가 되었을 것이다. 충분히 들을만 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예절을 안 지켰다. 많이 안 지켰다. 나는 예법이 뭔지도 모르는 막 나가는 시정잡배였다. 반성해야겠다. 그래. 미안하다. 내가 예절을 안 지켜서. a를 뺐겠다는 의도, 원래 없었다. 추호도 없었다. 어쩌다 잠시 친하게 지냈던 거 뿐이다. 친해지려고 노력도 해봤다. 참고 마주치고 참고 어울리고 참고 사진 찍고. 그때 즉시 내가 예절을 안 지킨 게 뭐냐고 조곤조곤 묻고 가르치고 어정쩡한 결론도 얻어냈다. 내가 예절을 안 지킨 게 뭐냐는 물음에 그 친구는 덧씌워진 하이드가 순간 물러나고 지킬이 대두하여 금새 오보를 시인, 했다. 으쌰으쌰,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내 유머감각을 유독 높이 사는 친구였던 건뚱(건방진 뚱보)도 큐피트 황태자 a도 녀석 나쁜 놈 아니라고 하고 두런두런 어울려지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나도 인기있는 남자가 되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보여지고 싶고, 남자니까 원만한 유대 관계를 넓고 멀리 이어갈려는 일종의 의무감도 어른 흉내내기였다. 술도 같이 많이 먹었다. 공통된 친한 친구들도 끼어 있고. 그러나 안되는 걸 어떡하나. a도 자연스럽게 연애하면서 결혼하면서 멀어졌고 그렇게 그냥 지난 일이 된 거다. 과거 내가 친했던 친구들 목록을 보면 답이 나온다. 일관된 기준에 예외가 하나둘 끼어들면 그건 더 이상 기준이 아니게 된다. 흔들린 우정도 뭣도 아니다. 이제 보니 옛날부터 나는 이마에 <나미움> 이라고 써놓고 다녔구먼. 이름도 그렇게 <나미움>으로 바꿀 껄 그랬다. 지울 수 없는 낙인, 찾을 수 없는 부적 그게 바로 나 였어. 나는 타인에게 경구의 대상이었다. 어떤 경구냐면 이거. 남 잘 되는 꼴 못 본다. 그분들은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내가 얼마나 아니꼬웠을까? 또 지금은 얼마나 미워할까? 앞으로는 어느 만큼 아니꼬울까? 사건은 이어진다. 사건은 이어져. 소문자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인 c의 여자친구가 내게 그녀를 소개시켜줬다. 내 영원한 사랑, 마지막 사랑, 전설적인 사랑의 그녀 내 그녀 고운 님을. 고마운 사랑의 징검다리를 이어주긴 했는데, 그랬는데 또 c가 문제였다. 당연히 주위에서 또 소문자 친구들 벌떼처럼 몰려들었지. 같이 놀러도 가고 그랬는데 어느 날 날 빼놓고 소문자 친구들과 c의 여자친구과 내 그녀와 모두 같이 여행을 떠났다. c의 여자친구와 내 그녀는 친한 친구였다. 그때 내가 없는 사이 뭔 일도 아닌 일이 있었다. 여행을 갔던 일행들 모두 함께 술을 마시고 나서 밤에 내 여인과 소문자 친구들의 한 남자와 단둘이 밖으로 나갔다. 단둘이 차를 탔다. 어딘가로 갔다 돌아왔다. 그 한 남자가 다른 g던가 g는 마이크 타이슨이었고, e는 홈페이지 사진을 보고 c에게 그녀를 만나게 해주라고 난리쳐서 그녀와 단둘이 딱 3번 만났던 녀석이고, f였다 그는 f였다. f는 혼자 이미 결혼 계획을 다 짰고 c와 같이 거들먹거렸다. 날이면 날마다. 어느 날 c가 말했다. 내가 없던 그 여행에서 나의 그녀가 f가 잤다고! 오오! 아아! 이럴 수가! c, 자기는 백작이고 남작인데 하녀 2가, 하녀 2가...... 뭔가 억울해서 c는 여자친구가 자기 친구를 뒤늦게 소개시켜주니까 b에게 쪼르륵 달려가서 일장 연설을 해댔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말하고. 괴로운 날들이 시작됐다. 완전 어마어마하게 괴로운 날들이 그때부터 시작된 거다. 여자친구가 자기 친구를 뒤늦게 소개시켜줘서. 안 그래도 여자친구에게 험하게 대하던 그였는데 더 심해졌다. 결혼을 앞두고 Y는 소문자 친구들의 리더 a와도 만나고 c랑도 만났는데 그 둘의 시기가 겹쳤는가는 모르겠다. 지금은 각자 결혼해서 산다는 것까지만 들었다. 당시 결혼할 연인을 둘 다 놔두고 Y가 c에게 먼저 연락해서 만나자고 했고 그래서 만났다.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만나서 단 둘이 Y와 소문자 c가 뭘 했을까 궁금하지도 않다. 지금 소설 블로그 본편 출연자 몇몇은 반성할까? 절대 아니다. 뭘 잘못했다고! 억울할까? 그럴 것이다. 아마도! 서술자는? 반성한다. 과오를 인정한다. 죄송합니다. 그대여! 제발, 지금 행복하소서! 그러다 또 중간에 c는 내 님과 싸웠다. 그래서 1년쯤 안 봤다. c의 친한 친구는 동생들 빼고 그녀뿐이 없었는데. 나중 그들이 결혼하기는 했는데, 나한테도 소리지르고 발광을 했던 놈인데, 미세한 억울함은 남아있을 것 같다. c는 뭔가가 억울하고 짝을 바꿀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고, 그러니 특권만 강조했다. 남자는 남자가 보면 안다네 어쩐다네 자자 너네들 모두 줄 서 줄서라, 내 여자친구의 절친이라네, 소개받고 싶으면 나한테 잘 보여 잘 보이라구 으흐흠 그렇게. 한편 f도 쉽게 마음이 접히지 않았다. 진짜 남자 중의 남자는 이 친구다. 외모도 몸의 언어도 진짜 UFC 헤비급 챔피언급이고 그렇게 거칠게 살았다. 우락부락하다, 카리스마 있다, 얼굴은 어 넘어가자, 남자들이 하나같이 국가대표 상비군 정도로 운동했던 친구를 믿음직스러워하는 각별한 호감 그에겐 있었다. 원래 옛날부터 그와 나 사이엔 같이 아는 친구들이 많았고 둘이도 친했다. 정말 화통하고 남자로써 친구로써 좋은데 좋긴한데 여자들은 너무 세다고 강하다고 주관적이다고 어쩐다고 해서 조금 편하게 느끼지는 않을 뿐이다. 평생 글을 읽지 않고 글이 없는 인생을 살던 f, 그가 시험공부를 해서 무슨 자격증 시험에서 나의 신부가 보는 시험장에 따로 들어가서 같은 날 시험을 보기도 했다. 그가 시험을 봤다는 것은 어느 정도냐면 예를 들자면, 쉽게 말해 느와르, 범죄, 스릴러, 범죄 조직원, 지하 세계에서만 살았던 영화 속 주인공이 글을 깨우치고 배워서 어느 날 검사가 된 거랑 비슷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나의 신부가 빛났다는 뜻인가, 아니면 뻘때처럼 달려들던 소문자 친구들과 소문자 친구들의 친구들이 유별났다는 것인가. 이 또한 잘 모르겠다. 다만 오글거릴 뿐. 뿐만 아니라 알파벳이 아니라 전-직장 동료들과 나는 친하게 지내던 때가 있었다. 자, 다음 사건으로 넘어간다. 다음~ 사건~! 또 남자 넷이서 어울렸다. 한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사이였다. 네 명에서 나이 순으로 나는 2번이었다. 셋은 직장을 떠났지만 남아있는 제일 나이 많은 어르신 형님은 일종의 평생 직장에 계속 몸담고 있었다. 그때 달라스에서 1번과 나 2번이 주먹다짐을 했던 거도 다 그럴 수 밖에 없었나 보다. 친하지 않고, 아예 체급이 차이 났으면 나도 그렇게 깐죽거리지 않았을 텐데. 즐겁게 놀다가 갑자기 딱 연타로 느닷없이 뜬금없이 나는 아구창을 3대를 맞고, 이제 내가 좀 때릴려고 하니 한창 때인 젊은 청년 3번과 4번이 하필 나만 양쪽에서 딱 잡아서 제압하고 끝나버렸다. 상황종료. 분위기 끊기니까 분이 남아 있어도 끝을 시작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또 돌아서서 미안하다는데 뭐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다 맞을 만 해서 맞은 것이다. 어차피 예견된 일이었던 것 같다. 사과? 오히려 끌려가서 꾸중만 들었고, 내 과오만 인정했고, 내게 동반자는 없었고 이미 1 대 3이었고, 서로 어물쩍 풀었고, 나는 속좁은 남자가 되기 싫었고, 그래서 그렇게 몇 차례 더 어울리다 나는 패거리를 피했고, 그 후 스스로 따돌림을 택해서 그들과의 친교는 중단됐다. 그게 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였다. 흥분할 일, 못된다. 그때가 봄이었나, 서늘한 가을비가 내려서 그랬다. 신선한 경험도 아니었고, 멋진 일도 아니었다. 전혀. 그게 다다. 그런 것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서는 이 친구들은 어떻게든 나를 끌고 밀고, 같이 놀고, 우애를 다질려고 했다. 다 같이 격려하며 합심했다. 그래서 으쌰으쌰, 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충분히! 땅 짚고 헤엄치기로! 올커니, 굴곡도 만들어졌겠다 언제─왜─어떻게─그래서 그랬구나, 는 알아도 말은 안 해도 기억은 날 테고, 오히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딱 한 사람만 생태계에 적응하면 그만이었다. 노력은 했다. 시도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못내 뭔가가 마음에 내키지 않았는지 도전은 했으나 역시 이건 아니야-로 끝난거다. 물론 헐크 타입은 실제 살면서 나는 친구로 만들었다. 같이 다니면 든든하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맞은 게 잘된 일이다. 그래도 이해는 안 된다. 나는 남자가 그렇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건 내 상식으로는 남자가 아니다. 내 교양 수준으로 봤을 때 그건 악녀다. 마술을 못 부리는 마녀다. 내가 봤을 때 남자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이론은 그런데 또 실재는 다르더라. 항상 다르더라. 내 이론이 엉터리였다. 세상이 일단 평등을 말하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머지 덕목을 다 따지는 이유가 있긴 있다. 남자가 맞는데 1번은 그랬다. 그랬어. 왜 그랬을까? 그렇다면 음, 그건 그냥 골목대장 놀이를 하고 싶었던 거다. 그게 다다. 찰과상이야 몇 일 지나면 없어지고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은 오뚜기 장난감처럼 털고 일어나서 잊고 자기 인생을 살면 된다. 말은 쉽지만. 언젠가 4인이 모인 자리에 1인자의 친구이자 직장 동료인 1분이 손님으로 참석했을 때 그분도 그랬다. 3, 4번 동생은 친해도 어려워하는 구석이 있는데 2번은 그런 게 없다고. 저렇게 붙기 전 어느 때 또 술 먹고 먼저 야구를 했다. 그러다 갑자기 야구에서 종목이 바꼈다. 육상으로. 육상에서 끝나지도 않았다. 나도 나지, 뭔 그 여름 해변가에서 그녀와 사랑 놀음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때 거기서 '나 잡아 놔라'를 했다니, 오 저런! 하긴 누가 하고 싶어서 했나. 그러다 1인자가 느닷없이 레슬링을 걸어왔다. 얼렁뚱땅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야밤에 레슬링을 하게 됐다. 동네 주민 신고는 없었다. 동네 주민 신고로 파출서에 잡혀갔다 풀려나 본 적 있나? (그런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물어보는 거다, 너 뭐 해 봤어? 난 해 봤어) 난 있다. 그렇게 레슬링이 갑자기 시작됐다. 1인자와 2인자 둘이서. 넷이 모여 있으니 무조건 숏게임 단판이다. 소란이 일어나면 당장 말려야 한다. 나는 상대방이 걸어온 그레꼬로만형 레슬링 기술로서만 똑같이 응수해서 가볍게 한판승을 따고, 즉시 말려서 1번은 고개 푹 숙이고 일절 두말없이 집에 들어갔던 적이 있다. 첫째, 처음부터 편하게 지내자 더 친해지자 좀 더 가까워지자 아웅다웅 즐겁게 지내자 지금 이대로 영원하자 라고 하지 말던가. 둘째, 중간에 먼저 시비를 걸지 말던가. 난 빈말에 속아넘어갔고, 순진하게 양치기 소년이 되었던 거다. 남자의 질서도 모르고, 수컷의 순정도 모르는 양치기 소년. 그러고 보니 성산 독서실 쪽문 틈으로 어느 여인의 뒷태를 훔쳐봤던 중학교 1~2학년 때, 같이 놀던 동네 형과 그래서 그랬구나. (친한 건 좋은데) 올라타려 한다고! 그때도 싸움이 시작될 뻔 했다. 말싸움으로 끝났다.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왜 그러냐고 외치며 따졌는데 다른 형들이 말렸다. 제일 자주 봤던 형은 날 아니까 막 엄청 웃으면서 말렸다. 싸울 뻔한 형은 장난 아니었고. 아, 그래서 그랬구나! 말로는 수평이고 지란지교지만 핵심은 서열이다. 피터 드러커가 쓴 책에도 나온다. 모든 짐을 내려놓고 부담을 털고 오랜 친구와 만나 발가벗고 냇물에서 논다고 생각하고서 사소한 의문이나 약간이라도 뭔가 걸리는 부분을 얘기해주라, 그렇게 고위급 상사가 사원을 자기 방으로 불러서 간곡히 부탁을 한다면 대개는 그런다고. 한 번 거절하고 두 번 거절하고 세 번 정중히 사양하다가 4번째나 5번째를 넘어서 정말 등에 땀 흘리면서 어렵게 말을 꺼내놓으면 어떻다고. 고위급 상사의 얼굴,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분은 가짜 웃음, 다시 배워야 한다. 포커페이스? 어떻게 그분이 그 자리까지 갔는지 궁금하다. 교수님 그 차 설마 돈주고 사셨어요, 가 된다. 미스테리란 말이다. 물론 진담은 아니다. 웃자고 한 얘기다! 더구나 행운에 힘입어 멋진 전망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갔으면 인자함의 층위도 한층 격상되어야 하지 않겠나. 뭐니 뭐니 해도 품위 유지비는 제일 먼저 올라가는데, 품위 유지비만 올라갔어. 많이도 안 바란다고도 한다. 품위야, 내려가지만 말아달라고. 품위야, 오공본드든 낙지빨판이든 것처럼 거기 그대로 중간에만 붙어있으라고. 안 그런가? 날 이용하세요, 날 밝고 올라서세요, 난 진정 봉사를 하고 싶어요 라고 까지는 못하더래도. 농담이다. 웃자고 한 얘기다. 사람에겐 누구나 크고 작건 그런 일면이 있게 마련이다. 그게 인간이다. 또한 상석을 빈자리로 놔둘 수도 없다. 좋은 상사는 무엇보다 훈련을 잘 시켜야 한다는 것을 전문가들은 안다. 어항을 키우고 물건을 만들려다가 간혹 나중 보면 괴물을 키웠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고양이인줄 알고 키웠는데 장르가 바껴서 맹수로 변하는 일은 뉴스로도 보게 된다. 금융범죄 어쩌고저쩌고 해서. 좌우지간 아, 지금껏 난 예스맨으로 살아야했던 것인데 그러질 못했구나. 오오 예스맨! 항상 다투고 안 맞았지만 친했던 사이를 보면 서로 까고 티격태격해도 한번 접어주고 늬 차례 내 차례 그렇게 궁짝이 잘 맞았던 친구가 친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몸을 어떻게, 는 안되니까 마음이 잘 맞는 친구! 몸이라면 난 슬랩스틱 코메디를 노렸어도 상대방은 몸의 대화로 받아들였다. 어떻게 그렇게 안 맞을 수 있는지 신기했지. 여자들도 어리고 젊었을 때나 친구끼리 막 깨물고 만지고 장난치고 그러지 나이 들면 그런 거 안 한다. 아~ 그때나 지금이나 못말리는군. 끝까지 속아넘어가면 안 되는데 시작도 전에 제 발로 본진에 찾아가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거였어. 취미가 잠자는 사자 코털 건드리기-였군. 음! 그러나 각자 주어진 삶을 살면 그만이다. 작품이든 뭐든 견해는 많다. 뭐네 어쩌네 그러나! 그러나 하나는 분명하다. 지금은 하나만 말하고 싶다. 떠나면 못 온다. 갈 수는 있는데 돌아올 수는 없다. 레테의 강을 건너는 건 모든 책무를 마치고 천운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그 책무가 무엇이냐, 주어진 인생을 즐기는 것이다. 너는 너의 인생을 살고, 나는 나의 인생을 사는 것. 혹시 둘이 섞여야 한다면 그것이 한때 사랑이었다면 또 그것이 중간에 멈추어야 한다면 끝은 고~이 안녕! 아름다웠던 시절을 기억하고, 기쁜 일과 즐거웠던 추억을 간직하며, 내 인생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지금 당장 행복할 것. 말은, 쉽다. 말은 쉬워. 지는 개싸움에 애들 싸움과 어른들 싸움에 인생 내내 싸움꾼이자 말썽쟁이요 막캥이로 살아놓고 우리 보고는 뭐? 뭐가 어쩌고 어째?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어. 충분히 그럴만 하다. 인정, 인정한다! 그러나 할 건 해야 한다. 포장할 건 포장해야 한다. 살면서 언짢은 일은 부지기수다. 좌절과 실패는 딛고 올라서야 한다. 깨닫고 배우고 지나가야 한다. 돌아갈 수도 있다. 환락과 환희와 기쁨이 있으면 오열과 슬픔도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오뚜기 장난감처럼 털고 일어나서 잊고 자기 인생을 살면 된다. 말은, 쉽다. 오뚜기 장난감처럼 털고 일어나서 잊고 자기 인생을 살면 된다. 네 인생, 내 인생. 처음부터 편하게 지내자, 친해지자, 으쌰으쌰 우린 너무 잘 맞는거 같아, 다 좋아 다 좋다구 라고 하지 말던가? 너무 순진했다 너무 순진했어. 다 원인 제공을 한 내 잘못이다. 내 탓이란 말이다. 뭔 말이 더 필요한가. 존재 자체가 화근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냐고! 존재 자체가 화근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냐고? 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왜 트러블 메이커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 듣고보면, 말하고나면, 알고나면 흥미롭기 때문이다. 재미없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사건, 또 있었다. 자, (손가락 딱, 골 세러모니) 다른~ 사건~! 동창 모임이 있었다. 동창, 모임이, 있었다. 내게 몇몇은 친구였고 몇몇은 동창이었다. 그러나 이젠 그것도 모르겠다. 무엇이 친구고 무엇이 친구가 아닌지. 아무튼 동창 모임이 있었다. 모임의 형식이 없어도 서로서로 오래 만났고 친한 사이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자기 삶을 살면서 여기저기서 보고 들은 게 있어서 친구들끼리 형식적인 모임을 만들었다. 그 모임의 이름도 만들고 법도 만들었다. 즉 회칙까지. 그렇게 어른들 흉내내기를 시도하던 모임은 삐걱삐걱했으나 명맥은 이어졌다. 그러던 언젠가 당시 모임의 회장이 회비를 횡령했다. 얘기가 돌았다. 중간에 작은 빼돌림도 있긴 있었다. 누가 귀찮아서 감투를 쓰지 않으려고 하니 그분 혼자서 돈을 관리했고, 그분 혼자서 회장을 연임했고, 전체적으로 재무재표가 투명하지 못했다. 재무재표에서 뭘 보면 부풀림이 있고 그런 거 다 답이 딱 나온다. 그러나 그건 해킹과 비슷하다. 뚫으면 막고, 매번 새로운 방법이 나오고 또 나오고. 정말 악마의 이름은 새로움인가 보다. 그러면서 회원이 나가기도 하고 새로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다 모두 모인 어느 날 일종의 재판과 비슷한 시간이 주어졌다. 각자 또 전체 그리고 그분도 할말을 성토하는 시간이었다. 사실적으로 횡령, 두런두런 완곡히 표현하면 (두둑한 회비 전체를) 차용했던 그분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서로 매듭을 풀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친목도모였고. 그러면서 말이 오가고 술도 한잔 하면서 나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나중에 숟가락 하나만 얹었다. 말 그대로 딱 숟가락 하나였다. 그게 다였다. 게다가 그분의 발언권도 보장됐다. 그런데 너무 보장됐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나 보고 너 여기서 빠지랜다. <너 여기서 빠져라!> 그 자세, 그 표정, 그 태도, 그 기세, 그 여유, 그 증오, 그 무엇 그 앞에서 나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그래 빠질께> 라고! 그러나 나는 마음이 그렇게 너그롭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따지고보면 그분은 어차피 굴욕도 옅어졌겠다, 다 알려졌고 얘기 나눴고, 답답한 처지도 그만 정리됐고 적응도 됐겠다, 면피는 이미 옛날 일이고 적당히 슥 넘어갔으며, 재기와 재도약의 과정만 남았는데 뭔가, 뭔가 심사가 뒤틀린 거다. 왜? 왜 그랬을까? 그는 왜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고, 나는 왜 그렇게 뾰족한 말을 얻어들어야 했을까? 감정을 배제하고 고운 햇볕에 싱그럽게 잘 말려서 푸른 수건과 하얀 속옷을 단정히 개는 심정으로 접근하면 된다. 주군은 최-말단 신하에게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라고. 당시 녀석은 그랬다. 다른 애들은 모두 단짝이 있었는데 걔는 단짝이 없었다. 단짝이 없는 다른 애도 있었는데 그들은 결혼한 남자였다. 가정이 있었다. 걔는 총각이었다. 여자들만 단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언젠가 애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1번이 생기면 1번과만 놀게 된다고, 그래서 다른 애들에게 소홀해지게 된다고, (번역하면) 1번이 사랑에 빠지면 자기는 낙동강 오리알이 된다고, (말은 안 했지만) 서로 마음에 맞는 1번이 자기에겐 없다고, (이게 중요하다) 그래서 결국 현재 나는 1번이 없고 전에도 없었다고, 또 그래서 자기는 친구에게 넌 미안하지만 내게 1번은 못되고 넌 나의 2번째 친구야 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그럴 기회도 없다고. 또 녀석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놈이고, 자존심 빼면 시체고, 까칠하지만 외양이 좀 그만그만했다...... 그만그만! 남자들은 살면서 드물게 경험하거나 드물게 본다. 챔피언에게 묵사발이 될 정도로 심하게 얻어터진 얼굴을. 수컷 세계에서 일종의 불문율인 아구창만 때리고 아구창만 맞는다 라는 불문율이 깨트려질 만큼 때와 장소에 따라 사리판단 못하는 부류, 드물~게 있다. (막 남자는 무조건 안 굽힌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남자는 아빠다. 아빠는 남자다. 아빠 하면 뭐가 생각나는가? 아빠 사랑해, 다. 동물적 본능을 터부시하려는 것도 아니다) 암중모색, 임기응변, 권모술수의 법칙에 위배되는 꽉 막힌 기질, 꿇리면 못 참는 성질, 속으로 뭔가를 결의하지 못하고 진득하게 잘 기다리지도 못하고, 잘 참지도 못하고 오래 견디지도 묵묵히 조망하지도 못하는 그런 걸 말한다. 그러나 그는 비굴해도 돈이 있는 쪽에 힘의 주변에 붙는 재주 하나는 있었다. 여자들은 제일 꺼려하는 타입이다. 여자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뭘 모르는 타입. 이건 단언컨데 <몰라서>의 문제가 아니라 <싫어서>의 문제다. 또 남자들은 안다. 일이 나면 일방적인 전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또 그건 불상사고 서로 손해라는 것도. 그래서 끝까지 참고, 애초에 그리고 어렵다면 중간에 피해야 한다는 것까지. 친구가 사고뭉치여도 답답하다는 것도 다 안다. 그리고 일방적인 전개 예측에 대한 상황 판단은 보통 본능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걸 <못한 것>아 아니라 엄한 줏대를 내세운 것이다. 기질 때문에. 여자의 마음은 갈대? 남자니까 심지 굳게, 우직하게 드라마 찍기를 원하는 인생이다. 맞는 역할로. 여자 보기를 돌맹이 보듯? 스스로 나무요 돌이 되는 사나이라 할 수 있다. 단, 단짝으론 난처함. 그래서 걔는 언젠가 완전 묵사발도 됐다. 그 모습을 모두 학교에서 봤던 친구들 모임이었다. 또 그분은 예전에 모임에서 말했다. 친구들도 듣고 나도 들었다. 자기에게는 1번이 없지만 내가 자기 말을 잘 들어준다고, 나와 독대하며 서로 심중을 헤아리는 시간을 틈틈히 갖는다고. 그랬는데, 그랬는데 나중 사건이 터진 날 내가 눈치없이 숟가락을 얹은 것이다. 이미 사전에 난 거리를 두고 싶었고, 실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여겨서 어떤 부탁을 들으면 더 가까이 오지 말라고 따끔히 선을 그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날 숟가락을 얹었다고 그렇게 된 것이다. <너 여기서 빠져라> 라고 얻어들었다. 예~ 고맙습니다 빠지겠습니다, 그래야 했는데 그렇게 못했다. 진짜 별말도 안 하고, 긴 말도 안 했다. 그런데 또 역시나 나는 과녁이 되었다. 골대 그물이 되었다. 테니스공이 되었다. 투수 베이비~였다. 우익수 누구 슈퍼마켓 앞에서 춤이나 춰라, (전직 아이스하키 선수? 한때 유명했어? 동네 아이스링크에서 한게임 같이 뛰면서) 에이~ 별거 아니네~ 제껴-였다, 그럴만 했던 거다. 그럴만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얼마 살지는 않았다만 내가 경험한 인생 드라마에서는 사랑과 우정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모르겠다. 사랑과 우정이 왜 다른 말인지 모르겠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통 몰라 모르겠다고! 사랑 안에 우정이 있나? 아니면 사랑과 우정의 교집합만 존재할까? 그것도 아니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걸까? 또는 우정 다음에 사랑? 그나저나 사춘기 시절에나 고민할 법한 일을 왜 아직도 여태 껴안고 있느냔 말이다. 도대체 이게 다 뭐야 뭔 뚱단지 같은 법석이고 뭔 말도 안 되는 난리요 명대사란 말인가. 뭐 미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야? 어? 그런 거냐고. 참 나~ 우습지도 않다. 이젠 정말 지가 주인공인줄 알고 뭔 말만 하면 명대사고, 길게만 말할려고 하면서 뭔 말만 하면 다 긴 명대사야. 자기도 이제 개나 소, 그 반열에 올라섰다 이거군. 나는 학교에 가고 싶다. 나는 학교에 가고 싶다. 가야 된다. 가야 된다. 물론 선생님은 현재의 학생이면 좋겠다. 야한 복장이면 곤란하다.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다 라는 말,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알면 아는 거고, 모르면 모르는 거지 그게 뭐야? 그게 뭬냐고. 에게~ 그게 뭬~야! 나도 확실한 게 좋고, 지금 행복했으면-싶고, 뭐 아닐까 라고 묻기보다는 뭐는 뭐다 라고 설득하고 싶다. 뭘 해도 재미없다고, 사랑은 없다고, 좋은 남자는 없다고, 글이 잘 안 써진다고 자꾸 그렇게 매번 꼬박꼬박 부정적 어법을 남발하고 싶지도 않다. 어디 좋아서 그러겠는가, 인생이 수수께끼요 세상이 불가사의인데! 거 마 거 마 아조 인생이 어린이날이구먼유~ 왜 그랬시유~ 왜 그랬냔 말이유~ 그러겠지. 지금의 나가 과거의 내게 그러겠지. 그러나! 그러나, 지금의 나도 미래의 내게 똑같은 말을 들을 꺼 같아서 적이 헷갈린다. 일순 쭈뼜거리게 된다. 왜 그랬시유~ 거 마 거 마 아조 인생이 어린이날이구먼유~ 왜 그랬시유~ 왜 그랬냔 말이유~ 막 딱 막 그런 환청이 들린다. 아무래도 나는 비정상인 듯 하다. 그런 것 같다. 막 인생이란 게 삐툴빼툴 꼬이고 꼬인 사랑의 화살표처럼 느껴진다. 그런 감정을 놓고 사람은 두가지로 나뉜다. 첫째, 떨려! 그리고 둘째, 떨어! 즉 동화되는가 만들어나가는가로. 곧 동화되어도 뒤늦게 차 떠난 다음에 동화되면 난감하고, 만들어나가도 세월아 네월아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해서는 인생의 참맛을 알기 어려운 법이다. 간혹 수많은 직접 경험이 작가 인생에 큰 밑거름이 되기는 하지만, 그럴 수 있지만 보통은 그냥 밑거름만 되고 만다. 그거도 어디냐마는. 어쨌든, 다사다난했던 지난 일들 모두 이제 남들은 모르겠지만 난 추억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이제는, 이제는 그렇다. 옛날에는 속으로 뚱~할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깔깔거리고 낄낄대며 피식 냉소도 곁들이며 뭔가 속내를 털어놓고 나니까 뭔가 뭉쳐진 불만이나 정보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느낌이 든다. 말로 마음 정리가 어려울 땐 이렇게 글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또는 블로그가, 승마가, 모형 장난감 수집이, (컴퓨터) 마우스 동호회 활동이, 코스튬 플레이가. 이제와서 지난 일을 돌이켜보니 속으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뭔가 모른 체 하고 싶었던 것이다. 뭔가가 인정하기 싫었다는, 불편한 상황이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어떤 마찰에 대한 거부감이랄지 그런 감정이 있었던 듯 하다. 마치 만화영화처럼 신비의 풍선을 붙잡고 하늘로 올라가니 숲이 보인 것이다. 냇물에서 길을 잃어 물을 따라가다보니 큰 바다를 만난 것이다. 시간이 어떤 희한한 마법을 내게 선사한 것만 같다. 시간의 신, 그분의 이름은 무엇인가? 어찌되었든 그것이 돈과 직결되지는 않지만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진 것 같다. 내가 처음부터 대인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시간이 다 해결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아쉬운 점을 하나 얘기하자면 이렇다. 별로 달갑지도 않고 흥미롭지도 않고 기분만 나빴던 일, 그것 보다 남자들은 말이다 훨씬 타격이 컸더라도 대규모로 아예 판이 다른 축구장 난동에 엮여서 내가 심하게 얻어터지는 사진이 신문과 웹사이트들에 대문짝만하게 걸리는 게 훨씬 짜릿하고, 기쁘고, 뒤통수 벅벅 긁긴 하겠지만 즐겁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치 사랑처럼! 축구장에 친구들이랑 경기를 보러갔는데, 하필 그 경기가 대단한 명 경기였고, 또 내가 얻어터지는 내가 쥐어터지는 내가 아구창을 얻어맞는 사진이 명사진가에게 딱 정확히 포착되어서 그게 그 다음날 신문에 인쇄되어 나왔다. 그렇다면 보통 남자들은 친구들은 그것을 보고 화낼까? 화를 내? 그럴까? 슬플까? 그럴까? 정반대다. 기분 째진다. 그러면 쥐어터진 사진의 당사자는 (겉으로) 화낼까? 아니다! (속으로) 화날까? 아니다! 진정 화가 안 나? 노노노노노노노노노노노노! 정반대다. 걷으로 공표는 안 해도 기분 끝짱이다. 아조 환상이란 말이다. 대서 특필이자 드디여 걸린 특종이다 그건. 친구들 사이에서 영웅 된다. 얻어터졌다는 것 하나만으로. 진짜 금메달은 바로 이거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지만 소란을 피우고 남에게 피해를 주고 그러면 안 되지만, 얻어터지는 장면의 주인공이 됐다, 당연히 맞으면 기분 나쁘지만 그렇게 떠들석하게 어쩌다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면 그건 한마디로 <기쁜 일>이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이지. 그럼. 지금 시대는 TV 다음인 인터넷 세상이다. 한순간에 스타되는 거다. 그러나 여전히 일반인이지만 다시 조용해지지만 오히려 그게 더 재밌다. 그게 진짜다. 나중 뒤돌아봐도 웃게 된다. 경고성 훈장이지만 그래도 남자들은 자기에게 이런 일 있었다는 걸로 나중 체면이 서고, 틈틈이 웃고 열광하게 되는 것이다. 저처럼 뒷골목에서 골목대장 놀이에 엮이면 기분만 꽝 된다. 똑같이 아구창을 얻어터질 꺼면 이왕이면 판이 다른 <어떻게>에서 얻어터졌으면 좋을텐데, 그런 것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와 비슷한 각 지역의 속담으로 재미나고 딱 감탄사가 나오는 거 꽤 많다. 살면서 이따금 왜 나야, 하는 일은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나도 타인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남겨준 일은 없을까, 순간 그런 걱정이 되다니. 아 이런 철들면 안되는데 소설 작풍의 절반은 거기서 기인하는 건데 큰일이다. 책에 보니 나르시시즘이 충만한 사람은 자기가 잘못했을 때 그걸 시인해야 할 때, 그런다고 한다. "미안해" 라고 하지 않고 "내 잘못이야" 라고 말한다고. 자존감과 관련되어 더 들어가면 무식이 탄로나니까 뭐 그건 잘 모르겠고, 내가 겪은 걸로 봤을 때는 이렇다. 미안하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생각하며, 친구와 말장난 할 때도 먼저 미안하다~ 하면서 먼저 자기를 낮추고, 이간질도 유머로 승화시키고, 시가를 하나 탁 건네면서 "(나 혼자) 먼저 죽기 싫다." 라고 여유롭게 말하는, 이렇게 거침없이 시원시원한 남자 중의 남자는 앞서 말한 1 대 1이나, 1 대 다의 중간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일부러 그럴 생각이야 있겠냐마는, 처음부터 화분을 깨고 드라마에 나오듯이 연애를 시작하기 직전에 좋아하는 여자가 웬 낯선 남자의 차를 탄걸 보고 쫓아가서 그 차를 탁 들이받고 보는 것도 그렇고, 우연은 처음에도 찾아올 수 있고, 내가 몰랐던 나는 나중 나를 잠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초네 남자네 남자 중의 남자네 하지만 남자도 여러 부류로 나뉜다. 공통 분모든 교집합이든 그건 놔두고. 여자? 잘 아시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데, 잘 모르시는 분도 있긴 있다. 다른 건 놔두고 딱 하나만 집고 넘어가자. 여성잡지1에서 2로 왜 넘어가는지를. 단도직입적으로 왜 바뀌느냐, 바뀔 수 밖에 없으니까 바뀐다. 다른 예시를 들 필요없다. 엄마, 아빠를 보면 된다. 봐도 잘 모르겠다? 그러면 들리는 소문이 뭐하다거나 여자의 보통 속성에서 약간 벗어난 경우를 보면 된다. 주위에 없으면 저 위에 나온 예시랄지 일찍 눈을 뜬 친구들을 생각해 보면 된다. 남자는 나이가 들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온다지만 여자는 어떨까? 일단 똑같지는 않다. 그래프가 다르니까. 아마도 그 반대가 더 정답에 가깝다. 그래프가 다르니까. 자세한 설명은 남자친구에게 물어보고, 다시 여성잡지1에서 2로 왜 넘어가는지를 되집어보자. 그것은 체험 때문이다. 대체로 둘 중 하나다. 첫째, 자기 자신은 낭만적인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사랑의 주인공이 아니었다거나 둘째, 멋진 연애 한번 없이 그저 그런 풋사랑만 겨우 있었다거나 없었다거나, 그 경험 때문이다. 그 일을 겪는 동안 나이를 먹게 되고 많은 일들을 겪는다. 여자는. 그 가운데는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다. 그러다 보면 늙게 된다. 그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상처의 내용이나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내부의 어떤 응어리를 그처럼 발현되게 만든 내막이 있었을 것이다. 한 단어로는 트라우마! 극단적으로는 무엇, 그렇게. 사람이 처음부터 악하다면 성악설이고 원래 헤프다면 정숙하지 못한 여자겠지만 그 본성에 더불어 어느 서사가 분명 있었기에 1에서 2로 바뀌는 것이다. 큰일을 겪고 일찍 바뀌기도 한다. 사랑도 그렇다. 이미 첫만남에 있어서 사랑의 목적과 종류는 대게 직감적으로 안다. 처음의 의도와 대체로 결과는 비례한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애당초 직관이 전면에 나서서 지휘하는 법이다. 그래서 알면서 힘든 길로 들어서는 것이고, 그래서 먼 훗날 나는 왜 그 남자를 붙잡지 못했을까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당시 오빠는(그는) 날 사랑하지 않았다면서 썩 많지 않은, 퍽 적지 않은 추억에 대해 반추해보곤 하기도 한다. 또 사랑의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다 다르다. 마치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나오는 그런 어떤 다양함처럼. 불만이든 원망이든 어느 설움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버티다 쌓이다 참다가 끝내 어떤 형태의 뭔가로 표출될 것이다. 좋은 예로 예술, 흔하게는 유희로, 친구를 만나거나 부적절한 염문에 휩싸일 수도 있고, 사회복지 분야로 생업을 옮기기도 한다. 심지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되돌아오기도 한다. 은퇴 선언 없이 잠적했다가 일상에, 사교계에 컴백하는 건 보통 일반인의 장기일 것이다. 얼마나 사랑이 애절했으면 그럴까? 그래봐야 타인의 사랑이다. 아무리 연민을 느끼고 공감을 하더라도 간접 경험이란 말이다. 그래서 여자는 공통적으로 꼭 그런 말을 한다. 자기가 주인공인 사랑의 기쁨에 대해서 가까이 주위에, 사랑의 슬플에 대해서 먼 주변인에게까지 들었냐고 물어본다. 과장하자면 아무나 붙잡고 자기 사랑의 결별이나 파탄에 대해서 들었냐고 물어본다는 것이다. 뭔 밑도 끝도 없이 아는 오빠에게 아는 동생인 여인이, 처음 만나는 여인께서, 일면식만 있는 여자가 일면식도 없는 떠나간 남자에 대해서 반드시 이렇게 물어본다. 그거 들었냐고! 그거? 그거 뭐? 듣긴 뭘 들어! 왜 들어, 누가 말해주길래, 너 같으면 알겠니, 왜 알아야 하는데, 어떻게 아냐고! 대체 어떻게! 완전 코메디가 따로 없다. 최소한의 사랑이든 저질 사랑이든 하룻밤 풋사랑이든 사랑의 아픔은 남녀가 약간 특성이 다른가 보다. 그러나 결국은 이겨내야 한다. 시간이 약이고. 이 세상이 단순히 천국이나 지옥이 아니듯이 사람도 천사일 수도 있고 악마일 수도 무엇 같은 무엇일 수도 있다는 때와 상대에 따라 다를 수도 살면서 겪게 되는 별 희안한 일도 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추문이든 짧은 만남이든 남녀의 인연은 불미스러울 수도 있으나 아픈만큼 성숙해진다고 하지 않나! 이런 저런 속사정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듣고 겪다 보면 여성잡지1에서 2로 변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지엄한 이치다. '어쩌면'이 아니고 순리일 뿐이다. 반면에 남성의 잡지는 거의 변치 않는다. 쓰다 보니 음 이런 생각이 든다. 요컨대, 여자? 잘 모르겠다. 독자께는 그대여 여자를 잘 아시지 않는가, 라고 반문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분은 영원한 미스테리가 분명하다. 최소한 남자에게는! 
   소설을 쓰고 있지만 왜 자꾸 이게 연애 컬럼처럼 느껴지지? 아무렴 어떤가! 어쨌든 소설은 소설이다. 생각해보니 이런 거 같다. 어차피 제한선 차이다. 또 말은 안 해도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게 말로 표현이 되는 거다. 어떤 사람은 요만큼 올라왔을 때 어떤 사람은 저만큼 그래프가 채워졌을 때. 바로 톡 쏘고 무신경한 쪽은 아무렇지도 않고, 담아두는 쪽만 수증기 팍팍 푸쉭푸쉭-하지만 같이 톡 쏘면 훌리건 난동처럼 뉴스에 나오거나, 친구끼리 이미 그런 과정을 넘어섰다면 서로 얼굴 찡그리고 참고 또 그걸 즐기게 된다. 남자는 원래 즐겁게 노는 것과 병행해서 서로 갈구고 깔아뭉개고 내가 최고야 너는 최고가 아니야 그러면서 논다. 병신, 등신 이런 말을 실지 장애자와 어떤 환자들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습관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끼리 얼만큼 친하냐 그 척도로써 그런 의미에서 병신, 등신 그런 말을 쓴다. 그렇게 노는 게 그들의 생리고 질서이며 예의다. 그래서 집에서는 실제 그렇게 불편한 가족 일원과 함께 살더라도 바깥에 나가서는 또 친구들과 모지리, 바보, 밥통 그러면서 놀게 된다. 즉 남자는 여자들보다 좀 더 거칠고 활동적이고 둔탁한 활동과 취미와 습관을 선호하는 것 뿐이다. 야 나가자 그러자 그러고 나서 게임하다가 바깥으로 나갔는데 우리가 왜 나왔지, 를 잘 몰라 하고 이제 뭐하지 하면서 방황하는 게 남자다. 꼭 연정에 관한 것이 아니더라도 이쪽에서는 예절이고 인습이던 것이 저쪽에서는 월권이요 심지어 범죄로 취급받기도 한다. 과거엔 권장했지만 지금은 조심하고 미래엔 박물관에서 보게 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개와 고양이가 이뻐도 참아야 한다. 책임지기 어렵다면. 종으로서는 같지만 나는 남이 아니고, 남은 내가 아니다. 다른 게 당연하다. 기준과 취향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약혼녀가 A라는 언행을 보이는 것은 괜찮으나 똑같은 걸 설령 친구라도 타인의 약혼녀에게 건네는 건 경계라든지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다. 발끈하지는 않더래도 제한선을 향해서 도형의 일부분이 크레파스로(?) 색칠되어지는 것이다. 큰일날 수도 있다. 조심해야 한다. 허나 그녀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서는 보통 그러지 않는다. 중간에 남남이 될 수도 있다. 늙어서도 계속 부부고 대외적으로 연인이긴 한데 얼추 그런 감정이 남아있고 사모가 확연하다면 그건 작품으로 접하게 된다. 동거하는 앵무새가 평소 어떤 말을 따라하는지는 익히 아실테니, 훨씬 잘 아실테니 그만 생략한다. 그런데 정말 할망구가 되서도 정말 똑같다? 그걸 망측하다네 꼴불견이라네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미덕이요 귀감이자 사랑일 테니까. 젊어서의 사랑, 반틈은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많이 헷갈린다. 사랑의 종류는 많으니까. 속담이 좀 어떻게 보면 경망스럽지만 살짝 넘어갑시다. 젊어서 좋은 게 뭔가? 게다가 늙어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 다르지 않다고? 참 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혼자서 소설 쓰고 있네. 누가 삼류작가 아니랄까봐! 농담 하나 장난 하나 가지고 이게 뭔 과대망상에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포장이란 말인가. 이 무슨 정력 낭비란 말인가. 아니 될 소리. 꼭 놈팽이에 험담 좋아하시는 영감탱이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다. 그러나 이 나이에 내가 이렇게 '인생은 무엇이다'를 설파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으니 이제는 한가하게 바닷가에서 낚시나 하며 살아야지 안 될 건 뭐란 말인가? 이 재미라도 있어야지 그럼 내가 뭘 더 바라겠어? 내 말이 틀렸나? 아니꼽나? 떫으슈? 많이 그러요? 기분 나빴수? 왜, 생각 좀 해봐야 본인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저런! 배 떠나가버리네, 젊은이. 순간의 선택이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법이지. 나도 알고 있네, 내가 틀렸다는 걸. 나도 안다네, 아니꼽다는 걸. 못 마땅하다는 것도. 지루하다는 것도 잘 알아. 연설문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내 귀에서 이어폰을 빼버리고 싶다는 것까지. 하지만 말 나온 김에 마저 듣게나. 내가 원래 나중에 웃겨. 나중에 웃음보가 터진다고. 내 특기는 딴 게 아니라 바로 그거야. 집에 가서야 웃끼고, 1주일 후에 한 달 지나서도 여전히 웃낀다는 거. 그게 바로 내 전공이라고.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보시게. 보아하니 자네는 그만하면 인성도 좋고, 인내심도 있고, 배짱 좋고, 패기 있고, 대성할 가능성도 크구만. 음, 괜찮아. 걱정 말게. 일이 잘 안 풀리면 나중에 날 찾아와. 찾기 어려우면 일단 옛날에 나로부터 뭔 말을 들었는지, 그 인상이 어땠는지, 그 경험이 과연 진짜였는지,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걸 생각하라고. 어? 그래. 내 말은 틀렸어. 내 무덤의 좌우명은 이미 정해졌단 말일세. 그의 인생은 불행했다, 이것이지. 그럼. 난 살면서 궤변만 엄청 늘어논 거 같아. 간혹 내 말을 누가 엮어서 책으로도 냈어. 그거 다 틀린 말이야. 그것도 많이. 그분께서 왈, 일단 너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지도 않았고, 풍부한 경험은 남 얘기를 다 가져다써서 생동감이 떨어지고, 너무 뻥이 세니까 영험한 지혜로 가득찬 뭔가 있어보이는 지혜로운 어르신이 절대 아니라고, 그거 하나면 말 다한 거라고, 하시네... ...(침묵)... 다시 그분이 가셨네. 아, 살판났어. 더 이상 눈치볼 일 없지. 앗싸~! 언제는 그분이 안 오신다고 난리더니? 꼭 주위에 보면 낄 데 안 낄 데 모르시는 분이 있어. 참 안타까운 일이야. 어쩌겠나, 원래 눈치가 없는데. 어느 행사를 보더래도 축사 같은 게 있지 않나. 노인은 신선으로 둔갑해서 대미를 장식해야지. 나도 젊은이에게 뭔가 열정의 언사를 선사하고 싶단 말일세. 요원처럼 귀에 뭐 꼽고 거기서 나오는 음성을 따라해서라도 말이네. 눈치 채면 눈치 채라 그래.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어떻게든 나한테 넘어가게 되어 있어. 예언도 아니야. 각본은 이미 짜여 있어. 끝날 때가 되면 울고 웃고 완전 난리도 아니야. 구입하겠다고, 그것도 세트로, 앵콜 없냐느니, 양말을 벗어주라네 어쩌네, 무대 위로 어떤 말괄량이가 입고 있던 팬티를 벗어서 집어 던지는 건 약과야. 무대에 아주 수북이 쌓인다네. 뭐가? 브레지어와 팬티가! 누가 보면 속옷 재고품 처리장인줄 안다니까. 지금은 수제자를 거두는 기간은 아니네만 특별 강습이란 것도 있으니까 거, 있잖아, 어? 그래 거 좀 준비했다가 어? 있잖아, 그래 그거, 나중 조용히 찾아와 조용히. 제발 소문 좀 내지 말고. 이 놈의 인기, 정말 짜증난다고, 어? 그 놈의 인기 때문에 밤에 잠도 안 와. 뭐? 불면증 아니냐고? 그래 불면증 맞어. 아, 이게 목적이 아니었지. 좋은 얘기로 끝을 맺어야지. 그래. 마지막엔 이렇게 말하면 돼. 난 말야, 신바람 웅변가는 아니지만 동기부여 부흥회 업계에서 제대로 속아서 큰 재산을 탕진했다고! 거짓 고백을 하면서 자네는 그러지 말기를 바란다며 유종의 미를 위한 여백을 남겨놓으면 된다구. 그러면서 청중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지.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겠다고. 동시에 한 명을 또는 한 곳을 정해서 그곳으로 슥 다가가. 한 걸음 옮기고 그윽히 그곳을 쳐다보기만 해도 돼. 이건 연기력이 좀 더 필요하지. 조명도 중요하고.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거야. 준비됐나? 준비됐어요? 외쳐. 외쳐야 돼. 딱 소리질러야 할 순간이야. 크게. 준비됐습니까?, 라고. 그리고 잔잔하게 음악이 울려퍼지지. 대자연의 공간이야. 상상해봐. 상상해보라구. 즐거웠던 기억 즐거웠던 기억, 아름다운 추억 아름다운 추억, 해맑았던 청춘 해맑았던 청춘을 떠올려보라고. 자, 시간을 되돌려보시게. 당신은 유모차에 앉아서 허공을 바라봤다가 젓병도 빨았다가 쪽쪽 빨았다가 꿈나라에도 갔었다네. 그럼. 그렇지.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줄 모르고, 어떤 사랑을 하게 될 줄 모른다네. 왠지 모르게 빠져들고, 처음 보자마자 와 멋져 난 저이와 결혼할꺼야 라고 다짐하며, 원래 고급 사기꾼들은 말 잘하고 잘생기고 품위에 예법도 갖췄으니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어서 어쩌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보니 나중 알고보니 그건 꽝이었어, 이럴 수도 있어. 그걸 세상에서는 불운이라거나 불행, 지지리 복도 없다, 불길하네, 운수 사납다, (호재도 악재도 아닐 수 있는) 역마살이 끼었다고도 한다네. 하지만 처음에 먼저 따지고 판단하고 줄자로 재고 가치를 따져 측정하고 나서 그 다음에 자, 이제 이제는 사랑에 빠져도 되겠구나 라고 한다면 그땐 이미 늦는다네. 원래 사랑은 나비처럼 다가왔다 바람처럼 가버리는 그런 얄미운 존재인데 어쩌겠나. 물론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 얄미운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잠깐, 둘이 바꼈나? 아무튼 말이야, 그렇지. 그러니 어떻게 하시라, 그런 말을 나는 못하겠네. 직관력을 키우라, 그런 말 난 못해. 이미 해버렸다고? 그게 뭐 비밀이라고! 다만 나도 뒤늦게 사랑을 배운 것 같아 기분이 좋으니 그 학습에 관한 태도와 배우고자하는 욕심과 텅빈 마음, 놀고 싶은 본능과 궁금한 호기심, 덤으로 낭만까지 붙여서 그 습성을 흉내내서 얼렁뚱땅, 슬며시, 슥 내빼겠단 말일세. 내빼겠다고, 자네가 나를 알기 전의 공간으로 말이야. 그야말로 감쪽같이! 으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하. 아,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야. 딴 건 보통 대충 엇비슷하게 되는데 가짜 웃음은 도대체 왜 이렇게 안 되냔 말이야? 아 나 이런 이거 미치고 환장하겠구먼. 내가, 내가, 내가 그렇게 연습했는데 왜 안 되냐고? 어? 왜? 대체 어째서? 이런, 젠~장!
   숭구리당당 숭당당 수구수구당당 숭당당 궁자라작짝 삐악삐악 푸슉푸슉 뿌잉뿌잉...
   아, 깨어났다. 또 누구야 누가 도대체 내 몸을 뺐어가는 거야. 기가 빨린 느낌이군. 단물 쪽쪽 빨린 것 같아. 내 영혼이 어딘가에 조종당했다가 이제야 깨어났다. 그러나 이상하게 정신이 맑아졌다. 마음도 맑아졌다. 사람이 순수해졌다. 순수, 라는 이름의 우유나 빵을 먹으면 더 순수해질까? 그런 얼빵한 공상은 이제 그만하자구. 인성도 더 좋아졌다. 너무 좋아져서 탈이다. 감자로 만든 포테이토칩 삐─ 클레오파트라 감자로 만든 포테이토칩 삐─ 클레오파트라, 삐익삐익 꼬였네 들쑥날숙해 사과맛 딸기맛 좋아좋아 이상하게 생겼네 삐─ 스크류바! 어, 뭐야 이거? 왜 옛날 TV 광고 음악이 생각나는 거지? 아~ 정신 연령이 내려가서 그런 것이다. 그럼 신체 연령은, 저런! 있던 새치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건 그렇고 나는 스탐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서 찻집으로 갔다. 관계 회복? 언제 우정에 금이라도 갔단 말인가? 다투기도 하고 삐지기도 하고 그게 친구 사이다. 친구나 되니까 자랑하고 자랑을 안 들어주고 상대를 낮추고 나를 올리고 친구는 꽝이고 난 짱이고 그러지 친구 사이가 아니라면 들었다 놨단 쥐었다 폈다? 연애하라고? 친구랑? 그건 우정이 아니다. 친구 사이인데 저 이야기 같은 걸 만들어서 글로 쓰고 영화로도 만들고 노래로 만들어 음반을 내면 돈만 날리는 거다. 나는 어제 찻집 <친구와 사랑하는 연인이 같이 물에 빠졌습니다. 누굴 먼저 구하실 건가요? ...... ...... ...... 왜 둘이 같이 있어?> 에 갔다. 그런데 가게가 비었다. 간판만 남겨놓고 남아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멀더에게 물어보니 가게를 뺐다고 한다. 이사온지 얼마나 됐다고. 대략 아는 여자에게 가게를 차려줬다가 뭔가 뒤틀려서 어떻게 된 듯 했다. 인사도 못했는데. 뭔가 아쉽고 허전했다. 그래서 다시 나는 심심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지금 이 순간의 이상한 감정에 대해 누군가와 상담을 하고, 담소를 나눌만한 적당한 사람이 주위에 없었다. 스탐이 꼭 나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고, 기분이 상했으니 삶에 변화를 주고 싶고, 삶의 변화? 직업을 바꾸자, 이사를 가자, 여행을 떠나자, 잃어버린 꿈을 찾자, 감성을 되찾자, 이혼을 하자(이건 농담이다), 사랑을 하자...... 그러다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 제 2의 사업은 접자, 변두리 삶은 정리하고 도시 생활에 집중하자라고. 괜한 폐를 끼친 듯 하여 이 울적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네 직접 털어놓겠다는 게 아니라, 요즘 어떤 재미로 산다네 어 자네는 뭐 빼면 재미난 일이 없구나 그런 겉도는 얘기를 하다 보면 기분 전환이 될 테니까. 그나마 세탁소 주인 밥이 이런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기에 상당히 편안한 친구인데 어디 갔는지 세탁소 문이 닫혔다. 혹시 밥과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었다면 나는 옛날에 세탁소를 턴 적이 있다고 고백할려고 했는데, 그거도 다 물 건너갔다. 진짜다. 나는 옛날에 세탁소를 턴 적이 있다. 이제 난 앞으로 세탁소도 못가게 생겼다. 동네에 또 전성기를 지난 작곡가 리차드가 산다. 그의 작업실에는 무슨 지휘자 협회 간부 어쩌고저쩌고 라고 씌여있는데 그 친구를 찾아갈까 라고 생각도 했다. 왜냐하면 그와 어두침침한 바에 앉아서 이런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옛날에 처음으로 샀던 클래식 CD는 오토 클렘퍼러가 지휘하는 베를리오즈의 * 환상교향곡이었다고. (* 참고: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꿈이 생긴다. 대체로 외부적인 동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꿈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겼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뭔가를 보고, 듣고, 만나고 그래서 아 저 사람과 사랑에 빠지겠다 아니 이미 빠졌다 그이와 나는 결혼할 꺼야 그렇게 된다. 즉 <나는>은 결국 <나도>에 의해 발화되는 것이다. 다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알게 모르게 주변에서 도움을 받고, 환경에 둘러싸이고, 재능도 타고나야 하며, 살면서 어떤 계기와 우연도 겹쳐야 하고, 그렇게 수없이 많은 작은 원인이 쌓이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이다. 나는 뭐가 되겠다 하겠다 하고 싶다 그래서 꿈을 이뤘다 따라서 목표를 이루게된 처음의 결심이 내 안에서 생긴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바깥에서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긴 꿈은 사랑일 수도 있고, 성직자 같은 직업일 수도 있을 테고, 한 마리 새가 되겠다는 진짜 새로 개로 천재로 내 자아를 탈바꿈하겠다는 말도 안되는 목표일 수도 있다. 그 꿈을 일단 지금 다루는 어중간한 소재를 위해서 영화배우, 축구선수 같은 거창한 개념이 아니라 악기 연주 같은 작은 것이라고 가정해봅시다. 그래서, 그리하여 환상교향곡 그것을 읽고 싶다 라는 우연찮게 확립된 유일한 목표인 누군가의 따분한 삶에 찾아온 꿈은 보통 사람들에게 나중 하나의 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중간에 포기하고, 간혹 포기와 직업 사이에 중간 영역이 생긴다. 그 예는 이를테면 이와 같다. 어느 대회에 입상한달지, 입학 제의나 프로구단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달지, 처음에 품은 목적인 삶의 태도나 지휘 같은 목표인 초기 꿈의 1차 목표를 달성한달지 그럴 테고, 그러고 나서 전혀 다른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그냥 그만두고 싶어서, 같이 스스로 원해서일 수도 있고 또는 사고 같은 외부 원인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영역은 훗날 처음의 꿈이 충족된 후에 그 취미, 열정, 관심, 호사는 그 다음이 안개처럼 사라지게 된다. 조금은 기분이 반감되고, 단꿈의 달콤함은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륵 녹아버리게 된다.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청중의 마음을 쥐었다 폈다 들었다 놨다>와 <일상적인 음악 감상인 듣기>. 하나의 꿈은 악보만 읽어서 내 정신으로 내 심상에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능력 즉 악보 독서 하기는 전자로 옮겨가지 않고, 이상하게 후자로 귀결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왜 중단되는 것일까? 목표를 달성하면 그 성취감보다 과정의 몰입감이 더 즐거웠으니까 더 중요했으니까? 본디 때로는 파괴와 혼돈까지 묵인하며 그것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원초적 성향 때문에? 껍질을 깨고 미지의 새로운 바깥 세상으로 나갈려는 본능 때문에? 다른 종류의 새로움을 찾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그냥 지겨워져서? 그건 돈이 안 되니까? 이마저 아니라면 단지 하나의 원인 때문이 아니라 저 모두가 혼합되었기 때문에? 그 이유는 바로 그분들이 잘 알고 있다. 바로 그 직접 경험자가 그 까닭을 아는 게 아니라 인문교양 서적의 작가들이 안다는 말이다. 또는 드물게 소설에서 밑줄 그을 만한 부분에 왜 그런지가 나온다. 뭔가 겉과 속이 바뀐 거 같다. 부록이 훨씬 값비싼 경우다. 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깨우쳤으면 아 이렇구나, 라고 알아야하는데 왜 그랬는지, 자기의 마음이 왜 그렇게 선회했는지는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법이다. 자기가 제 마음을 경험을 해석도 못하고 옹호도 못하고 이해조차 할 수 없다. 바보가 따로 없다. 그걸 몰라? 저런, 미련-곰탱이네! 알고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한참 시간이라도 지났다면 아 그때 그건 불완전한 사랑에 근접만 했던 남녀간의 애정이었구나 요즘 말로 썸탔구나 라고 뭔가 회상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경험자는 그것도 못한다. 그냥 그때는 웬일이지 그러고 싶었다 또 그랬다, 정도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왜? 왜 그거 뿐이 못하는가? 왜냐하면 그 분야는 전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쪽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 안에는 내가 모르는 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나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이 일정 정보를 분석하여 정갈한 패턴과 최대한 근사치에 가까운 추론을 글로 정리하는 것은 실제 썩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말로는 즉흥적으로 순식간에 사람 마음을 홀리고 정신을 쏙 빼놓을 수도 있으니 어떻게 보면 말이 글보다 위 같다. 작정하고 들어가면 그것이 수없이 반복되면 알면서 속게 되니 알면서 웃게 되니 그것이, 말이 더 높은 계급인 듯 하다. 글보다. 아 나 이거 정말 내가 내 자랑 같아서 내가 내 입으로 이런 말 안 할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미 털어놔버렸다니 아 미치겠네 이거 아무래도 말린거 같아 맞아 말렸어 말렸어 완전 말려버렸어)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CD, 나는 사실 그 CD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고. 분홍색과 자홍색이 들어갔는데 근사한 품위가 느껴졌다고. 그런데 그걸 주인 몰래 옷 속에 감추어서 가게 바깥으로 갖고 나갈려다가 검색대에서 딱 걸려서 주인에게 혼났다고. 호되게 혼나고 나서 값을 치르고 나온 적이 있다고. 그날 엄청 기분이 꽝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오늘도 조금 그와 비슷하게 기분이 우울하다고. 그때 훔친 CD가 그 CD가 맞나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그래도 한 90퍼센트쯤 맞는 거 같다고. 그런 고백을 하고 싶었다. 리처드에게. 그러나 리처드와 나는 아직 친해지지 못했다. 아직 그럴 사이가 아니란 뜻이다. 그래서 거기도 못갔다. 동네 서점 주인 리오를 찾아갈까도 해봤다. 왜냐하면 나는 책도 한번 훔쳐봤기 때문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게임 책 1권이지만. 또 있다. 나는 지갑도 훔쳐봤다. 지갑도 주운 것이지만 한번 주머니에 넣고 가슴이 엄청 콩닥거리면서 집으로 가다가 내용물을 본 적이 있다. 군대에서 휴가 나와서의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내 인생은 완전 도둑질로 점철되어 있는 것 같다. 완전 엉망이다. 돈을 슬쩍한 기억, 물론 한둘 있다. 아마 더 될 것 같다. 이건 뭐 장발장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고질적 병폐다. 완전 트러블 메이커다. 비빌 틈도 없고 기댈 언덕도 없으며, 뭔가 재미난 일도 흥미로운 웃음거리도 없었다. 지금 역시 그런 게 없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집에서 TV를 보다가, 음식도 만들어 먹고, 음악 듣고 책을 읽었다. 혼자 놀았다. 누군가를 억지로 만나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물으면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라고 할 꺼 같아서 혼자 놀았다. 만날 사람도 없고. 어떻게 놀까 라고 궁리할 필요는 없었다. 항상 하던 일이었으니까. 혼자 집에서 주로 생각을 했다. 나의 지난 과오에 대해서. 
   여기서 멈출 수 없다. 그러면 안 된다. 나는 수영장에서, 온천장에서, 해수욕장에서 몰래 오줌을 눈 적이 있다. 지금은 안 그런다. 다 어릴 때 이야기다. 나는 전에 한창 쇼핑 중독에 빠져서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이클 용품과 부품을 살 때가 있었다. 그때 어느 곳에서 환불 비용을 곱배기로 돌려줬든가 그랬는데 나는 그때 연락이 오면 돌려줄려고 그랬다. 물론 연락이 없어도 먼저 돌려주는 게 도리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꿀꺽 했던 것이다. 내 이메일로도 연락이 없었다. 지나가던 개에게 물린 셈 치나보다라고 이상하게 기분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했다. 그걸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안 좋은 기억이다. 어떡하다 어물쩍 넘어갔다. 그리고 슈퍼마켓에서도 거스름돈을 과하게 받고 나왔을 때 돌려주지 않은 적, 있다. 나는 위선자다. 나는 가식적인 놈이다. 나는 벌을 받아야 한다. 나는 어렸을 때 규칙적으로 용돈을 받는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부모님께 거짓말하고 학용품 산다고 거짓말한 적이 있다. 실은 많다. 나는 그동안 쓰레기도 많이 버렸다. 나는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다. 나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급한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 그리고 연락없이 돌아서기도 했다. 어떤 순간 직전에 나 사랑하냐고 묻길래 좋아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아프다고 연락이 왔는데 안 갔다. 그리고 끝났다. 그리고 나를 순수하게 좋아했던 그래서 기달리던 아가씨도 있었다. 나는 직접 대면하고 말하기가 어려웠으면 간접적인 방법을 써서 날 좋아하지 말라고 알려야 했는데 그러질 않았다. 나는 죄인이다. 몹쓸 놈이다. 지금도 나는 사랑받았다고 자랑하는 거 같다. 아, 뒷목, 눈 감고, 인상 쓰고, 수증기, 푸쉭푸쉭! 또 나는 옛날에 어떤 그분이 있는 여인에게 흑심을 품은 적이 있다. TV에서 보든 책에서 보든 어딘가에서 스치듯 지나가든. 적지는, 않은 것 같다. 지금은 안 그런다. 나는 이제 여자 보기를 돌맹이 보듯 한다. 이상한 상상, 그런데 나는 취미 없다. 그런 게 뭔지도 모른다. 뭐라구요? 당신께서도 미모의 아가씨를 봐도 딴마음을 품지 않는다구요? 꿈쩍도 안한다구요? 오케이~ (하이파이브)! 누군지 몰라도 사람 좋네 사람 좋아, 호인이네 호인이야, 사람 참 괜찮네, 성격 정말 좋구만! 그 뿐만이 아니다. 옛날 제빵 학원 사건은 기본이고, 남을 욕하고 비방하고 얕잡아보고 피하고 불의를 모른 체 한 일도 많다. 평소 기분이 보통이거나 약간 침체된 거면 괜찮은데 기분이 아주 안 좋을 때 험담, 엄~청 했다. 운전할 때도 타인을 배려하기는 커녕 남을 많이 불편하게 했다. TV에 나오는 험담가? 껌이다. 자기들이 웃기다고 웃어주는 줄 알어. 이제는 착하게 살고 지난 잘못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짠한 마음에 꼬마들 장난하는 것 같아서 웃어주는 것 뿐이다. TV를 보면서 안 보면서 욕 엄청 했다. 옛날에. 지금은 안 그런다. 시험 볼 때 부정행위, 초등학교 3학년 때 했다. 나는 질이 나쁜 놈이다. 많이 나쁜 놈이다. 어린시절 사촌형 3이 우리집에 와서 살게 되었을 때 왜 외삼춘네 가정이 멀쩡히 있는데 우리집에 와서 살게 되었나 하면서 성장하면서 애가 조금 이상하게 되었다. 사촌형 3과도 많이 싸웠다. 혼자 있고 싶은데 막 따라다니는 거도 썩 싫고 막 그랬는데... 그래서 어느 겨울 우리집 2층에서 사촌형 3과 같이 돌을 넣은 눈뭉치를 던져 지나가는 동네 친구를 맞힌 적도 있다. 2층에서 연탄재를 떨어트려서 길가던 행인을 맞힐 뻔한 장난도 했다. 또 다른 외삼촌의 아들이 사촌형 1과 2가 방학이면 우리집에 와서 살다갔다. 그쪽도 외삼춘에게 돈을 빌려서 얽히고 얽힌 관계다. 다 저 사업을 하시는 그분에게 올려다 드린다고 일어난 일이다. 내 형도 자기 친구에게 돈 빌리고 아조 말도 못한다. 사촌형 3은 아예 같이 살고, 사촌형1과 2가 방학 때 우리집에 와서 지냈는데 사촌형 1과 사촌형 2 모두 손버릇이 안 좋았다. 난 또 사촌형 1과 또 적당하게 싸웠다. 나는 호박이었다. 명절엔 또 아빠네 사촌동생이 놀러왔는데 꼬마였던 녀석에게 나와 사촌형 3이 거칠게 장난치고 그랬다. 그 뒤로 그 사촌동생을 본 일이 없다. 자기 알아서 잘 살겠지만. 또 형의 아들인 내 조카의 머리를 한대 쥐어박은 일도 있다. 여동생이 우는데 남동생이 어쩐다고 살짝 알밤을 쥐어박았는데 딱 1번, 그랬는데 조카가 그걸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아서 가끔 조카를 만나면 조카의 얼굴을 볼 때면 나는 영 개운치가 않다. 뭔가 뒤가 켕긴다. 용돈을 틈틈히 후하게 줘야 하는데 통장 잔고가 바닥났다. 미치겠다. 인생을 환상 머쉰으로 치자면 그건 실패작이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헬스기구 파는 곳에서 일할 때는 있는 뻥 없는 뻥 다 써서 런닝머쉰을 판 적이 있다. 거기서 제일 비싼 런닝머쉰이었다. 당시 제값을 톡톡히 받았다. 언젠가 찻집에서 일하던 여종업원에게 미안하다. 옛날에 택시 회사 사장과 대판 개싸움을 벌이면서 카페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나서 도망간 일이 있다. 나는 마음이 있고 어떤 감정이 처음이었던 여인과 모텔에 들어가서 손도 안 잡고 잔 적이 있다. 나는 남자가 아니었다. 아니었나? 하긴 정말 좋아했던 여자와 손을 잡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40년간 "나 누구랑 사겨" 그런 말을 한 번도 못해봤다. 공식적으로 여자를 사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수명이 짧았던 시대를 기준으로 삼자면 태어나서 살다가 사랑을 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홀연 종적을 감추는 꼴이 되는건가. 나 원 참! 뭐가 잘못되긴 잘못됐다. 한참! 소설, 영화, 사람, TV도 완전 많이 따라했다. 물론 부적절한 것, 쑤두룩했다. 하지만 그 다양성과 호기심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라는 속담이 적용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요컨데 어른이 된 것이다. 철없이 덜컥. 그렇게 청춘은 가버린 것일까? 알게 뭐야. 나도 결국 외부로부터 달갑지 않은 정보를 받으면 그것은 쌓이고 쌓여 나중 다른 형태의 어떤 음성적인 것도 포함된 그런 성격의 행동으로 표출된 것 같다. 순서도의 중간에서 회전이 반복되다가 어느 때 정형화된 도식을 벗어나듯이. 또 옛날에 와레즈와 성인 사이트 일을 잠깐 했을 때 과장 광고 엄청 했다. 그때 속았던 사람 가운데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 있을 수 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그리고 그때 같이 일했던 친한 친구가 날 실망시켰다. 한땐 많이 친했었는데. 내가 벌 받은 것이다. 떠올리자면 쓸데없는 기억만 계속 나오니까 이만 멈춰야 한다. 나는 그야말로 천하의 가식적인 인간인 것 같다. 나는 위선자다. 나는 쓰레기다. 나는 몹쓸 놈이다. 나는 질이 나쁜 놈이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얼간이 같은 놈이다. 나는 결백을 주장할 수 없다. 내 정직함을 세상에 내보일 수도 없다. 품행은 방정맞고, 행실은 못됐다. 인생이 혼탁하고, 삶은 탐욕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순백의 신부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일까? 불결하다. 정결하지 못한 심보다. 어쨌든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쓸데없는 공상을 뒤로 하고 나는 밖으로 나갔다. 집 바깥으로 나갔는데 비가 왔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들어와서 한동안 집에서 칩거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공원에 갔다.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 나는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데 내 옆에 웬 펠리컨 한 마리가 와서 앉았다. 지가 꼭 사람이라는 것처럼. 나는 뭐야 이거, 기적이 일어났단 말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누가 사진을 찍기 위해 일부러 펠리컨을 어디서 데려와서 내 옆에 앉힌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나는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 거리에서 왠지 낯이 익은 한 여자를 보게 되었다. 그녀를 보고 또 봐도 그 이상한 감정을 알 수 없어서 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의 걷는 속도가 완전 느렸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저 아가씨를 어디서 봤지, 어디서 봤드라? 속옷 가게 <말이 되는 소릴 해!>에서 봤나? 아닌데. 찻집 <볼 장 다 보다>에서 만났었나? 아니다. 그럼 판타지가 지겨우십니까...는 아닌 듯 하고. 어디서 봤지 어디지? 미용실 <하오의 연정>에서 일하는 미용사던가? 것도 아니다. 그럼 대체 어디서 봤드라, 이 오묘하고도 세~한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의구심은 해소되지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일상이 이제 좀 재미있어질 때도 됐다고. 분명 어디서 보긴 봤는데, 하룻밤 사랑으로 만나지는 않았고, 뭔가 은밀한 관계가 있거나 나와 어떤 은근한 인연과 숙명에다가 별자리까지 가져다가 설명해야만 할 정도로 예전에 뭔가 돈독한 사이였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그때 그녀는 종적이 묘연해졌겠지. 당시 나는 펄쩍 뛰었을까? 나도 그녀의 신비스러운 사라짐을 따라서 방황하고 한동안 홀로 지냈을까? 과분한 상대는 아니었을 테고. 술집 <눈 감고도 할 수 있어>에서 봤나? 아니다. 나는 그런 이름의 술집에 들린 적이 없다. 그런 술집 어디 없나? Alt+F4 같은 거. 그녀는 나에게, 여자에게 기분 좋은 말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던 듯 하다. 때로는 샐쭉하고, 왕왕 눈물을 글썽글썽했던 것 같고,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라면서 막 파릇파릇한 생기 넘치는 환한 미소, 젊은 미소, 홀딱 반한 듯한 미소를 내게 건넨 적도 있는 것 같았다. 오오, 그녀가 내게 말이다. 골몰에 골몰을 거듭하지만 그러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참으로 난관이로다. 무작정 팔을 낚아채서 골목길까지 같이 뛰어갈까? 어머 왜 그러세요, 라는 앙칼지고 새침한 음성을 들으면 그녀를 어디서 봤는지가 생각날까? 그건 안 된다. 뺨 맞을 일이다. 무례 중의 무례일 것이고, 심각한 결례를 범하는 경우에 해당하며, 더없는 실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녀가 권투를 배웠으면 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곤혹스러운 추정이다. 그녀는 뭔가 결기를 자극하고 어딘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미모의 아가씨를 떠올리게 만드는 묘한 기운이 그녀에게 서려있는 것 같다. 꽤 고혹적이다 그녀는. 순간 나는 어떤 당혹감을 느꼈다. 나는 덜컥 놀랐다. 드디여 생각이 났다. 오, 아아 그럴 수가... 그래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는 천천히 멀어져갔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녀는 서서히 멀어져갔다. 꼭 뮤직비디오 같이. 아니 이럴 수가. 이렇게 무심할...수가...!
   아, 그녀를 거기서 봤구나. 그녀는, 그녀는 카페 <나 참 기가 막혀서!>에서 일했던 점원이었다. 내 돈 떼 먹고 도망간 년. 신문방송학과? 정치외교학과? 개~뿔! 나는 그녀를 아는 체 할 수 없었다. 반갑지도 않으면서 반갑다고 할 수 없을 테니까. 도저히 어떻게 한번 차라도 같이 마시겠냐고 운을 띄울 마음이 들지 않았을 테니까. 더욱이 돈 값으라고, 내 돈 값으라고 직접 말은 못해도 뭔가 할말이 있는 듯 없는 듯 있는 듯 압력을 가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뭐, 뭐, 뭐? 파릇파릇한 생기 넘치는 환한 미소, 젊은 미소, 홀딱 반한 듯한 미소? 그런 미소가 아니라 단언컨데 썩은 미소가 정답일 것이다. 일명 썩소! 쫀쫀함, 쪼잔함, 찌질함 이제 그런 말과는 헤어지고 싶다. 거리를 두고 싶다. 그만 작별하기를 원한다. 이제는 금액이 얼마였나 생각도 안 난다. 오오 그녀는, 아아 그녀였구나. 그럼 그렇지. 내가 하는 일이 다 이 모양이지, 별 수 있나. 괜히 들뜨다 말았다. 괜히 기분만 잡쳤다. 일파만파 마음만 심란해졌다. 왜 그랬나, 왜 설렜나, 왜 돈을 꿔줬나, 왜 그녀를 믿었나 라고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해명할 뭣도 안 되는 일이다. 좋게 집에 가서 잔디나 깎아야겠다. 아니면 수영장을 청소하든가. 아니면 냉장고에 캔 맥주를 꽉꽉 채우던가 해야겠다. 정 아니면 혹시 그분이 오신다면 나는 글을 쓸 것이다.
   나 참 기가 막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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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73

from 소설 2016. 5. 31. 12:07

   「표지판에 들어가지 말라고 적혀 있어.」
   이 말을 듣게 된 경위는 이렇다. 먼저 제임스 혼자 <블로그> 옆에 붙여진 벽보를 보았다. 아, 블로그는 그가 자주 들리는 카페의 이름이다. 멀더가 사장으로 있는, 바뀌기 전 카페의 이름이 <정 원한다면>이었던 바로 그 찻집. 그는 첫눈이 오기 전에 그리고 그 찻집 창가에서 연인과 다정히 마주 보며 창밖을 내다보기 전에 멀더를 꼬셔서 찻집 이름을 바꾸게 했다. 또 멀더는 스컬리와 헤어진 듯 했다. 그건 그렇고 그가 본 벽보는 시골 근처 공원에서 록 콘서트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곳은 그가 자주 가는 낚시터와 가까웠고, 공연하는 밴드들의 이름은 하나같이 특이했다. 그것은 이를테면 이렇다. 펑크 음악하는 밴드의 이름은 <내 애완견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었어요. 뭐라고요? 당신 제정신이에요?>, 얼터너티브 밴드는 <거북목 증후군>, 스페이스 락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였다. 모던 록 밴드는 <우물쭈물하다간 큰일납니다>, 잔잔한 발라드를 노래하는 혼성 듀오는 <제 버릇 개 못 준다>, 스카 밴드는 <일기나 써 볼까 하다가 나는 작가가 됐다>, 뱃노래를 노래하는 실력파 원맨 밴드는 <평생 소원이 누룽지>였다. 제임스는 밴드 이름이 하도 우끼고 놀랄만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서 '이런 꼴뚜기 같은 녀석들'이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그들이 음악을 제대로 할까, 그들이 음악을 알까, 그들이 음악에 진정 열의가 있는 것일까 라고 사뭇 의심하면서 뒤숭숭한 여운이 감돌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또 딱히 재미난 일이 없었으니까 그는 혼자서 그 공연을 보러갔다. 물론 같이 갈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혼자 갔고, 그는 공연을 봤고, 감동을 받았다. 아, 음악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 생동감과 환희에 빠져 그는 사람이 약간 사색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공연은 매주 토요일마다 주기적으로 언제까지 지속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을 불렀다. 침울해하지 말라고, 기막힌 공연이 있다고, 부질없는 짓은 이제 그만, 혼자서 혼자서만 놀고 혼자서만 사랑을 하지 말라며 친구들을 소집한 것이다. 그런 후 친구들이 왔고, 제임스와 같이 공연을 보러 갔으며, 그들은 웬 이상한 철조망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딱 공연을 즐겁게 보고 나서 와, 이 무대 정말 훌륭했어 완전 예술이야, 그랬으면 오죽 좋으련만!
   실은 시골의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주변에 놀만한 즐길만한 소재들이 많았고, 무엇보다 정말 음악에 모든 것을 건 것만 같은 밴드들만 모인 것 같아서 그는 젖 떨어진 강아지 마냥 몹시 보채면서 친구들을 불러모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공연을 보러왔는데 아무도 없다. 왜일까? 그들이 말도 없이 공연을 취소했거나, 제임스가 있지도 않은 환영을 봤다거나, 과거의 경험을 잘못 불러내어 엄한 추측과 섣부른 억측이라고 간파해낼려다가 아직 미처 혼자만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황 그 3가지 가운데 거의 첫번째, 어쩌면 둘째, 아마도 가능성은 희박하나 셋째도 당혹스럽긴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무시할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희박하지만!
   사람이 혼자 너무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다거나 너무 힘에 붙이게 말도 안 되는 역작을 그것도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쓸려고 하면 헛것이 보일 수도 있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그의 병적인 긴장감 때문에 주변에서 실망감 때로는 절망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경험은 진짜였다. 사진과 동영상을 남겨놓지 않았다 뿐이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방방 뛰고, 땀을 흘리고, 그리고 옆에 있던 나시 티셔츠를 입은 아가씨와 살갗이 스치기도 했으니까. 또 그의 주위로 갑자기 기타리스트가 싱어를 물리치고 먼저 관객들의 환호성 위에 뒤로 벌렁 누워서 인파 위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걸 모두 똑똑히 보고 겪었기 때문에 그건 정말 진짜 경험이었다. 친구들은 믿지 않겠지만 그는 그걸 분명한 사실이라고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선서할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왜 그렇게 공연에 열광했냐 하면 그는 집에서 공책에 볼펜으로 글을 쓰면서 그 3단계 괴벽을 너무 많이 써먹어서 그 습관도 이제 지겨워졌기 때문이다. 3단계는 첫째, 글을 쓰고 둘째, 공책을 찢고 그걸 구겨서 물고 씹고 셋째, 방구석에 집어 던지기(때로는 그걸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기). 그것도 더 이상 재미없어졌기 때문이다. 그 뭉개진 침 묻은 종이를 펼쳐보면 주로 이런 내용이 단편적으로, 서로 이야기로 엮을 수 없게끔 따로 따로 씌여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혹시, 내 아름다운 사랑아? 그건 아니지? 내 마음은 온통 그대 생각뿐? 아니면 음 뭐가 있을까? 새로운 미래, 새로운 인생, 새로운 소설? 친구가 가방을 바꿨으니 나도 새 가방을 사고, 이웃이 차를 바꿨으니 나도 새 웨건을 알아보는 건 좋은데 음 웨건 모양이 이쁘긴 한데 웨건 모양으로 제일 괜찮은 건 또 엄청 비싸지. 음 그렇지. 게다가 출시한지 불과 1~2년만 지나면 실내 디자인이 촌스러워보여. 좋게 스마트 포투나 신형으로 바꿔야겠어. 그런데 뭐야? 아 이런, 네 속마음을 알아볼려다가 딴생각을 해버렸잖아. 한참 새로 익힌 독심술 2단계를 써먹고 있었는데 다 틀려먹었어. 이런, 젠장! 너가 책임져!> 또 짓이겨져 방구석에 나돌고 있는 종이에는 사랑에 관한 글도 있었다. <사랑 그것은 애잔함이고, 창백함이며, 무자비함이다.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고, 관심을 돌려도, 시를 지어봐도 노래를 불러봐도 벗어날 수 없는 것> 으아, 그가 이런 글을 썼다니... 손가락이 한참을 오글거리다 급기야 잘 펴지지도 않는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대화문도 있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아무 말이나, 아무거나 말이야. 어떤 말이든지. 뭐든지! 신기하지 않아도, 재미있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제발 말을 좀 해 보라니까. 듣고 보니 흥미로울 수도 있고 구미가 당길지도 모르는 일이라구> 그는 진짜 삼류 소설가였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잠시만이라도 즐거운 데이트를 하고, 멋진 사랑을 하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중이라고, 감미로운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라는 상상을 하자. 단지 잠시만이라도!> 글을 써서 돈도 벌고 유명해질꺼라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야 말겠다네 어쩌네 그런 포부는 포기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냥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산다 별일 없이 산다던 보통 사람이 이미 유명해진 다음에 난 유명해질꺼야, 꼭 그런 덜떨어진 결심과 비슷하달까. 그게 끝이 아니라 이런 글도 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고,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은 소원이라면 뭐가 있을까? 이를테면 비밀 일기나 블로그 같은!> 글을 쓰고 종이를 찢어 구기고 물고 뜯고 씹고 던지기, 는 아무래도 잘한 일 같았다.
   그나저나 그는 어쩌자고 이상한 공연을 보고 나서 더 이상 못 참겠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친구들을 웬 산중으로 불러서 공연장이 있기는 어디 있다고 다짜고짜 우기다가 친구들에게 미안해하고 스스로 억울해하고 있을까? 그러다 그가 보기 딱했는지 조니가 한마디 한다.
   「아까 여기로 올라오다가 말이야, 나만 본 건지 모르겠다만 팻말 하나를 봤어. 무슨 지명이 씌여 있었고 그 다음엔 산업물 폐기장이라고 씌여 있었어.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아마 그게 맞을 꺼야. 그래 공연이 취소되었을 수도 있어.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 안 그래?」
   조니의 말을 듣고 하워드가 거들려다가 약하게 빈정대는 말이 되어버린다.
   「펑크 밴드의 이름이 뭐라 그랬지? 뭔 증후군? 거북목 증후군이 뭐 어쨌다고? 또 뭐 우낀 이름이 있었는데... 뭐드라, 아~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 아닌가? 과일 망신은 모과가 다 시킨다, 였나? 하지만 난 제임스가 도깨비를 보고서 없는 얘기를 지어낸 건 아닐라고 봐. 유령이든 자동차 극장이든 뭔가 있었을 거라고 난 믿어. 얘는 장난꾸러기가 아니라고. 지금 우린 어린이 드라마를 찍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동안 꿈인지 생시인지 비몽사몽 간에 우리들은 이상한 일 정말 많이 겪었잖아. 그러니까 뭔가 곧 나타날테니까 미리 실망하지 말라구. 포기하지마. 지상의 일은 그렇게 돌아가게 되어있는 법이야. 행운의 여신의 비호가 있기를!」
   「진정해 친구. 끝간 데 없는 미궁에 빠진 거도 아니잖아. 단지 행사와 사건이 없을 뿐 그분은 언제나 느닷없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거의 생각치도 못한 장소에 나타나시잖아.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기대주니까 기다려보자고.」
   「정말? 그거 믿기 어려운 걸.」
   「그렇다면 좋아. 믿게 만들어주지. 신빙성이 없다라...... 그때 가서 놀라지나 마시게. 정 그렇게 원한다면 멀쩡한 맨정신이 영 도망가버리게 내 아지트 비밀의 공간으로 너네들을 데려가야겠어.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는데, 보고 나서 기겁하지나 말라구.」
   「그런데 너네들 아까부터 꼭 청춘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말하고 있다는 거 알기는 아니? 그리고 너 아지트 없잖아? 그 말 뻥인거 다 알아.」
   「정말 친절하시군요. 어쩜 그리 다정하실까. 내 님이 따로 없네요.」
   「긴 말 필요없고, 과감히 접고 어딘가로 떠나자. 재잘재잘, 은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고 봐. 근처를 샅샅이 뒤질 수도 없잖아. 이런 일 많이 겪어 봤잖아. 새삼스럽게 왜 그래? 늘상 있던 일인데 민감하게 굴 필요 있냐. 길몽이 될지 흉몽이 될지 모르지만 꿈을 찾아 떠나자구. 실은 우리가 바라던 건 이런 게 아니었을까? 개꿈을 찾아 떠날 명분을 마련하는 거? 개구장이들처럼 막 날마다 놀러다닐 수는 없으니까 어른인 우리에게는 뭔가 구실이 있어야 할 꺼 아니야. 잘된 거지. 이게 원래 우리 스타일이잖냐, 한풀 꺾였다 다시 치고 올라가는 거. 안녕 하며 인사한 후 떠날려고 뒤돌아섰다가 다시 메롱~ 속았지롱 하는 거. 안 그러면 재미없잖아.」
   「그래. 좋아. 좋다구. 그런데 어디로?」
   대화가, 대화만 잠시 소풍을 떠나려고 하자 마크가 다시 그것을 원래대로 가져다 놓는다.
   「개의 질주 본능이 너네들에게도 아주 조금 남아있기 때문에 그러는지는 몰라도 좀 대화의 흐름이 성급하게 흐르고 있어. 그런데, 너네들 이런 생각은 안 해 봤니? 아까 팻말 봤다고 했잖아. 그 팻말에 뭐라고 씌여있다고 그랬지? 폐기물 처리장? 나도 그거 보긴 봤어. 하지만 모양이 왠지 조악하고, 급조한 티가 나던 거 못 느꼈니? 물론 그 표지판이 정확히 표시된 상태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이 공연장이 아닌 게 당연한 거지. 최소한 우리가 지나왔던 길에는 공연장으로 가는 표지판이 없었다는 것 하나는 분명해. 돌아가서 그 수상쩍은 표지판을 다시 확인해보는 게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냐? 어? 어때?」
   그들은 마크의 말을 듣고 수긍한 후 그 팻말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팻말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팻말을 자세히 보니 그건 보기 드문 삼각형 팻말이었다. 그리고 정말 그걸 누군가 삐투름하게 팻말을 틀어놓은 것이다. 폐기물 처리장인가 뭔가의 방향은 맞지만 공연장 안내글을 그래서 못 봤던 것이다. 그러하여 그 삼거리에서 남은 한 방향으로 그들은 이동했다. 그리고 음악 공연장이 나왔다. 여기엔 진짜 행사가 진행중이었다. 시끄러운 음악, 시끌벅적한 분위기, 돌아다니는 사람들, 군데군데 보이는 무대들... 다 좋은데 이상하게 행사장이 나타나지 않기를 기대하고 뭔가 생각지도 못한 생소한 일을 보고 흥분하고 뛰고 떠들며 또 가끔 웃지 못해서, 그래서 왠지 실망한 느낌이 살짝 눈빛에, 표정에, 걸음걸이에, 몸짓에 엿보였지만 아무도 그걸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군가 먼저 말을 꺼내면 또 바랠 껄 바래야지, 한소리 들을까봐서. 원했던 제 1의 목적이 달성됐는데, 어딘가 허전한 기분? 그런 게 있기 있었나 보다. 간혹, 몇몇 독자도 공감하고 몇몇은 아예 에잇, 대놓고 상스런 탄성을 내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절을 차릴 필요없이 혼자 있으니까.
   「우리가 맞게 찾아왔네. 오, 분위기 좋은데~」
   「그런데 왜 아까 뭔 처리장인가 그곳에서 이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거지? 이 정도면 안 들릴 수가 없잖아? 이상한데?」
   딱히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은 아무도 꺼내놓지 못하고 멀뚱멀뚱 서로 쳐다만 봤다.
   「일단 왔으니까 저기 보이는 무대로 가보는 게 어떨까?」
   그렇게 그들이 당도한 무대에서는 어느 얼터너티브 밴드가 노래하고 있었다.
   「저거 뭐야. 이런 아뿔사! 저거, 저거, 저거... 너바나 아니야? 너... 너... 너바나 맞아. 완전 똑같아.」
   「흉내낸 거나 뭐 비슷한 밴드겠지.」
   그리고 그들은 다음 무대로 이동했다. 거기서 공연하는 친구들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고, 익숙한 음악 같았다.
   「이런 뭔가 했드니 세상에나, 저거 오 이런, 비틀즈 아니야 비틀즈! 오, 대단한데!」
   「재현 밴드일까? 재림일 리는 없고. 시간이 역행할 리는 더더욱 없잖아.」
   그들은 신기함이란 감정에 짓눌려 아무 말도 못하고 무대를 멍하니 바라만 본다. 또 한참 후에 자연스럽게 다음 무대로 갔다. 여기서도 기존에 몇 번 들어본 고풍스런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노래부르는 가수는 옷도 그렇고, 생긴 거도 그렇고, 뭔지 모르게 완전 옛날 가수 같았다. 순간 알렉스가 누구라고 소개한다.
   「어머나! 저건, 저건 프랭크 시나트라가 분명해. 오, 이럴 수가!」
   그들은 웃도리를 벗어 등판에 사인을 받을까 말까를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다음 무대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1800년대 음악을 연주하는 실내악단이 있었는데, 그들은 꼭 1813년 쯤에 발표된 음악을 바로 한달 후 당시 연주자들이 고악기로 초연하는 모습 같았다. 여기서는 누구도 섣불리 이건 누구 음악이다, 저 사람은 타르티니의 수제자다, 저 가발을 쓴 사람은 글쎄 가발이 가짜일까 혹시 그분이 아닐까, 라는 확신의 말은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음 무대로 옮겨갈 수도 없고, 여기 머물러 있을 수도 또 되돌아갈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조니는 어느새 저쪽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갔다오드니 들떠서 이렇게 말을 꺼낸다.
   「쟤들이 같이 놀자는데. 자기들도 여자들끼리 그렇게 친구들만 왔데. 더군다나 일곱명이래. 심지어 예뻐. 완전 청순해. 진짜 귀여워. 어때? 망설여지니? 뭘 망설여? 어? 왜?」
   「이렇게 만나면 나중 어떻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곤란해. 답이 안 나와.」
   「어, 그런데 쟤네들 어딘가로 바삐 뛰어가는데? 누구 또 다른 음악가가 왔나보다. 야, 뭐해? 따라가야지.」
   그들은 얼떨결에 그녀들 뒤를 따라갔다. 그러다 인파에 섞였다.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냥 거기에 몸을 맡겼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사람들이 흥에 겨워 앞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기차처럼 진행하면서 흥얼거리고 노는 무리에 섞여서 그들도 같이 놀면서 어느 무대 앞에 도착했다. 보아하니 그곳에서 노래부르는 밴드는 바로 그 밴드 같았다. <내 애완견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었어요. 뭐라고요? 당신 제정신이에요?> 아까 7인의 아가씨들은 어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들 옆에는 웬 초딩들이 보인다. 그들이 하는 말은 이랬다.
   「야, 야, 다음 공연 그거래. 거북목 증후군! 걔네들 음악 완전 끝장이자나. 오, 기대되는데. 막 흥분되지 않냐?」
   거북목 증후군? 흥분? 이상하게 초딩보다 이 친구들이 더 흥분되는 것 같았다. 이런 떨림이 이 시간 이 자리에 찾아와도 되나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때 아닌 흥분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분위기도 달아오를 데로 달아올랐다. 그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통 구분되지도 않았다. 꼭 어디에 홀린 것처럼!
   친구들은 공연장에서의 소동 같지 않은 소동을 체험하고 헤어졌다. 만약 그들이 드라마나 소설 속 인물이었다면 거기서 뭔 사건이 있었을 것이고, 필시 그들은 거기 연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꿈나라에 사는 것도 아니고, 정신이 어떻게 된 것도 아니었으며, 뿐만 아니라 블로그에 공동으로 쓴 그들의 세번째 소설 속 인물도 아니었고, 유식한 말로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였기 대문에 괜히 소란을 피우거나 말썽이 보이면 끼어들거나 하지 않고 조용히 그런 난리법석을 비켜서 돌아가며 현실을 살되 이상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미지의 세계라 씌인 연두색 스티커 풍선의 끈타발을 꼭 붙잡고 살았다. 일상이 영화도 아니고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그렇게 산다. 그래서 그들은 풀밭 위의 마돈나를 찾아 떠나거나 솔로몬의 지혜를 얻고 다윗과 같은 힘을 기르기 위해서 애쓰지 않고 적당히 괜찮은 인생 즐기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선 조니는 즉흥 연주 밴드에 합류했다. 밴드 이름은 이랬다. <오스트리아에는 캥거루가 없다> 기타와 키보드, 드럼을 모두 준비하고 공연하지만 음악을 틀어놓고 입만 맞추는 립싱크 밴드였다. 그는 그 외에 일상 생활은 정상적이라서 달리 특별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케빈은 친구들과 연락이 한동안 뜸했기 때문에 엄한 뜬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식물학을 공부한다더라, 고기와 술을 끊었다드라, 서점에서 식물학 관련 책을 사서 나름 탐독하며 휴가를 즐긴다더라 가 와전되어 잘스부르크 성에서 식물학을 연구한다네, 세계 식물학계를 평정했다네, 잭과 강남콩 나무에 나오는 그 나무 넝쿨을 타고 클라우드 9에 올라갔다네, 두 집 살림을 차렸다네, 하면서 이상한 말들이 무척이나 난무했지만 낮에 일하고 밤에는 취미 생활도 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행복한 시기를 보낸다는 일설이 그나마 그 가운데 가장 우세한 풍문이었다.
   그리고 알렉스는 모든 종류의 게임을 가장 게임을 하기에 즐거운 분위기에서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고 한다. 해선 RPG 게임을 한다 그러면 해변에서 요트를 타면서 또는 적어도 동네 수영장에서 1인용 보트를 타고 노트북으로 게임을 했다. 배경이 옛날로 설정된 게임을 한다면 어디서 갑옷을 구해와서 그걸 입고 게임을 했다. 간혹 사용하지 않는 게임 계정이 해킹되어 좀 겉늙은 듯한 초딩이나 중딩이 한판 뜨자고 찾아오기도 했다. 골프 온라인 게임도 골프 잡지에서 거의 항상 세계 100대 골프장에 선정되는 골프장에 가서 그 안에 있는 찻집에서 게임을 했다. 당연히 축구 게임은 축구장에서, 카운터 스트라이크는 밀리터리 복장을 하고 군부대 인근에서, 캐쥬얼 보드 게임은 애들 많은 곳이나 개 운동장 같은 데를 찾아가서 하곤 했다. 따라서 그는 가엾은 사랑이나 여자의 거짓말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좋아하는 게임 맘껏 하면서 게임을 하지 않을 땐 빈둥빈둥 쉬고, 최소한의 일상을 유지하는 일만 건사하고 있었다. 어설프게 관심사를 분산시키지는 않은 것이다. 만족할 만한 신기루의 휴일이라 불러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생활이었다.
   또 마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3인칭 관찰자 시점 즉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는 요술램프에 그 모습의 영상이 잘 포착되지 않고 있다.
   제임스는 보나마나 글이 잘 안 써진다고 괴로워하다가 쿨쿨쿨 낮잠을 자다가, 글을 써볼려고 공상에 망상을 거듭하다가 공중누각을 짓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던 영감의 일순간만을 호소하면서 그분을 애원한 끝에 우르르쾅쾅 굉음이 개인의 심상에 번쩍거리며 착상이 떠오를 리는 없을 것이다. 뚜렷한 해결책을 못 찾고 있을 게 분명하다. 시간만 허비하겠지. 철딱서니 없는 놈 같으니라고. 오랜 침묵 끝에 명작을 탄생시키겠다고? 일찌감치 꿈 깨는 게 낫다. 잘 해 봐야 카페 블로그에 가서 띵까띵까 놀고나 있겠지. 새로운 점원이 있으면 찝쩍거리거나 할 테고. 놈은 철떡꾸러기다. 끔벅끔벅 해 봐야 바둥거리고 고뇌를 거듭해 봤자 틀림없이 괜히 멀쩡한 공책이나 찢고 구기고 물어뜯고 집어던지기 밖에 더 하겠나. 뱁새가 황새를 따라갈려고 하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쪽은 재미난 일도 없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나마 어떤 실토와 안도감 사이에 있는 악감정도 아니고 호사가를 만족시킬 쾌청한 소식에 가까스로 근접할 가망성이 엿보이는 닉과 하워드의 만남 쪽으로 슬그머니 관점을 돌려본다.
   닉과 하워드, 그들은 단둘이 만났다. 어두컴컴한 동네 바에서 바텐더에게 이쪽에 접근하지 말라고 엄포를 하는 듯이 분위기를 잡고서.
   그들이 딱히 모험을 추구하고 시간이 남아돌며 놀라운 신비를 찾아 두문불출하지는 않았으나 둘이서 도란도란 담화를 나누다보니 뭔가 진땀을 빼게 만들고 자꾸 신경쓰이게 만드는 공통점을 서로의 일상에서 발견했다. 그렇다고 혼비백산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또 절대 무심코 넘겨버릴 만큼 사안이 결코 가볍지도 않았다.
   「하워드, 너도 솔직하게 말해봐. 우선 나 먼저 말할께. 난 다른 애들에게는 한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지금 갑자기 너에게는 꼭 이걸 말해야만 할 듯한 그런 긴박한 필요성을 느꼈다고나 할까? 내가 이런 말을 한다면 거의 모두 내가 헛소리 한다고 다들 장난치지 말라고 할 꺼야. 하지만 너라면 차분히 듣고 또 신중하게 믿고 같이 번민에 잠길 수 있다는 안심이랄까 뭔가 그런 확신이 들었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그런 예감이 홀연 날 찾아왔다고나 할까? 맹세하라면 맹세할 수 있어. 혹시 너도 원인 모를 무력감을 느껴왔을지 모르겠는데 내가 요즘 딱 그렇다니까. 식사를 하거나 운동을 하다가도 순간 어떤 검은 마음이 날 잠식해와. 흔히 아는 그런 흑심은 아니야. 나는 말이야 누굴 한번 어떻게 해 보겠다는 마음이 드는 상대를 흔히 발견하는 그런 남자가 결코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여심이 혼자 들끓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니까. 그렇게 되면 마다할 수는 없으나 대놓고 퇴짜놓을 수는 없어. 때문에 잘 설득해서 마음을 몸에게 살며시 돌려보내야겠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 뭘 뜻하는 거지? 흐흠(헛기침). 또 나는 괜히 엄한 남심을 자극하고 싶지도 않아. 잘 알잖아? 괜히 내가 어디 이상한 순위권에 오른다면─쟤가 그렇단 말이야? 그렇게 대단해? 어디 그럼 한번─그분들께서 지명방어전을 노크하면 곤란하니까 존말 할 때 순위권에서 밀어내라고 할 꺼야. 무시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좋은 말이 아니라 애걸복걸 해야 하나? 피식(냉소). 뭐야, 뭔 얘기하다가 의무방어전 얘기가 나왔지? 아, 맞어 그거야. 일상 생활에서 느닷없이 뒤숭숭한 감정이 날 감싼단 말이야. 그 뭔가 이상한 감정, 그 뭐지, 전에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혼돈과 어떤 환청? 와그장창 뭔가가 깨지는 환각도 경험했어. 격정적으로 말야. 그래, 가위눌리는 그런 경험이라니까. 그런데 이거 정말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도저히 감을 못 잡겠다야. 천착, 천착? 아니, 천품, 천품? 꼭 대강의 뜻을 희미하게만 아는 어려운 단어나 각종 관용구와 어려운 어법을 끌여들여야만 이 일을 네게 잘 설명하여 이해시킬지도 모른다는 그런 야단 맞은 강아지의 주눅든 느낌도 든다니까. 뭔 말인지 알겠지?」 너 같으면 그렇게 말하면 알겠냐, 라고 한소리 듣기 딱 좋은 말 같지만 가까운 사이라면 흔쾌히 안다고 해야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 닉. 허둥대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히렴. 그런데 대체 뭔 일인데 그렇게 꼭 소설 속의 광인처럼 주변만 빙빙 돌면서 본론을 꺼내놓지 못하는데 그래? 너답지 않게. 핵심만 말하기가 힘드니? 대체 뭔데 그래? 자꾸 그러니까 궁금하잖아. 이제 그만 털어나봐, 응?」
   「그래, 간단히 말할께. 내게 첩자가 붙은 거 같아. 증거는, 증거는 없는데 물론 심증은 있어. 괜히 썰렁한 트윗을 남겼는데 뭔 이상한 아저씨가 리트윗 하고, 어, 어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추종자가 늘었어. 또 우리집 우체통 옆에 누군가 조그맣게 네모 표시를 해놨어. 다른 집 즉 앞 집, 옆 집, 뒷 집은 모두 삼각형 표시를 해놨고. 그리고 메일도 왔어. 저번에 우리가 무명 블로그에 올린 공동작품 있잖아. 거기 나온 것과 비슷한 오즈의 마법사라는 유락시설에 놀러오라는 메일이야. 그 뿐만이 아니야. 누군가 날 고성능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것만 같아. 더군다나 간혹 어떤 성우가 내게 막 속삭이는 것도 느껴져. 뭐라드라, 뭐라고 했지? 아, 맞다. 이랬어. 뭐가 지겹냐고 했는데... 무슨 광고는 아니고, 아마 딱 이런 내용이었어. 나보고, 글쎄 나보고 말야, 판타지가 지겹녜. 진짜 굉장히 호감가는 들으면 기분이 막 정말 즉시 좋아지는 그런 음성이었어. 그래서 딱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거야. 뭔 귀신에 홀린 거도 아니고 말야. 또 뭐라고 했드라... 그러면 로맨스는요? 만화? 동화? 스릴러? 액션? 아~ 뭘 해도 재미없으시다구요? 그 따분함을 단번에 날려버릴 비책을 알려드릴까요 말까요? ...... 어쩜 이런 내용이었던 거 같아. 그 다음은 생각나지 않아.」
   「오, 저런!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실은 나도 요즘 그런 느낌을 감지했어. 하지만 그걸 어디 털어놓을 데가 있어야지. 맨정신으로 누군가에게 얘기했다가는 미친놈이라고 할 테고, 술집에서 술 마시며 마담에게 말한다면 술 취했다고나 하겠지. 아니면 술을 좀 더 드셔야 바른 말, 곧 날 좋아한다고 고백할 꺼 같다고나 하겠지. 안 그러겠어? 그리고 꿈에서 자꾸, 자꾸만 어떤 왈츠를 듣게 돼. 그냥 여기서 듣고 저기서 듣던 그런 음악이겠지 그랬는데 어느 날 알고 보니 그건 베를리오즈가 작곡한 왈츠였지 뭐야? 미발표 신곡, 인지는 잘 모르겠어. 또 뭐가 있었드라, 뭐가 있긴 있었는데 잘 생각나지가 않아. 맞다. 소셜 네트워크에 보니 제임스가 가는 단골 카페 이름이 바꼈다고 했어. 그래, 그 이름이 블로그래. 어, 이건 별로 관계 없는 얘기겠구나. 어찌됐든, 나도 뭔가 이상한 일들이 있긴 있었던 거 같아.」
   「하워드 네 얘기도 의미가 있긴 한데, 그러긴 한데, 그런데 그게 다야? 너무 적은 거 아닐까? 그걸 가지고 이상하다고 하기에는 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냥 내 얘기에 덩달아 궁짝을 맞춰준 거 아니냐? 너는 말이야, 너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야. 좀 앞으로는 너 하고 싶은데로 하면서 살아. 말도 이따금 좀 거칠게 해보고, 뭔가 변화를 주라구. 옷도 그렇게 샌님처럼 입지만 말고 때로는 가죽점퍼도 입고 말야. 어?」
   한편, 그들의 옆 탁자에는 완벽한 마초, 멋진 남자, 최고의 상남자, 거친 야성을 어쩔 수 없이 풍겨서 미안하다는 인사말이 푸른 빛깔이 겉도는 수염과 그들이 입고 있는 제복, 장갑, 헬맷에서 한없이 그윽하게 드러나는 모터사이클을 타시는 아저씨들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분들은 양치질도 엄청 과격하게 하실 꺼 같아 보인다. 막 잇몸에 피가 나도록. 그들은 한마디로 딱 프로 같았지만 평소 거리에서는 굉장히 천천히 달리고 오직 전문 경기장에서만, 그리고 한가한 교외에서만 질주를 한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실력은 완전 초보인데 나머지만 완전한 전문가처럼 보여지고 싶어한다고 실토하는 친구도 있었다. 닉과 하워드는 어딘지 모르게 부러움과 경탄 그리고 경외감과 더불어 동경심 또한 빠질 수 없고, 아저씨 멋져요, 이런 말을 내뱉고 싶은 충동이 이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꾹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사소한 대화를 나누고 나서 그들은 중요한 얘기는, 자세한 상담은 차후에 만나서 다시 하자면서 헤어졌다.
   강물이 흐른다. 다리가 보인다. 방향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1번 다리는 10시를 가르키는 시침 같다. 그리고 2번 다리는 2시를 가르키는 분침. 그 시침과 분침의 공통 고정점이 위치할 것 같은 지점에서 전방 얼마만큼의 위치에 조그만 섬이 있다. 즉 섬에서 강물을 조금만 건너가면 바로 육지다. 1번 다리와 2번 다리 그리고 섬을 이으면 하나의 문자가 된다. W! 더블유? 응, 더블유. 시계 광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구도 때문인지 또는 운전대를 잡는 손 모양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풍수지리학상 절묘한 각도와 배경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1번 다리와 2번 다리 안쪽에 있던 무인도,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고 카페를 만들어 그곳은 유인도가 됐다. 육지에서 그곳으로 오고가는 방법은 육지와 섬을 잇는 줄이 있고, 그 줄을 잡고 배를 타고 갔다가 다시 줄을 잡고 육지로 건너는 약간 원시적인 수단이 이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섬에는 찻집이 하나 있고, 그곳은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주인이 수차례 바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건너편 도심과 더 멀리 있는 산까지 보이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는 마크와 조니가 앉아있다. 그들은 한잔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면서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녀는 누구일까? 그녀는? 그녀는, 그녀는 바로 그들이 공동으로 작품을 남긴 소설에 나온 그녀였다. 무명 블로그에 남긴 공동 작품 첫 번째에 나왔던 그녀, 그리고 두 번째에 나왔던 그녀. 둘 다 모두 매력이 넘친다. 그들이 소설에는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의도된 것으로 그들은 그녀를 아끼고, 좋아했고, 어쩌면 사랑했던 것이다. 뒤엉킨 사랑. 심각한 불균형. 아마도 애타게 보고파 하지 않았을까? 볼 수 없는 그녀니까. 만날 수 없는 그녀니까. 안 그랬을까? 안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간간히 그녀가 생각나고, 가끔 가다 어찌할 수 없이 숨 가쁜 그리움이 물밀 듯 밀려오면 꼭 그날은 마치 뭐랄까 일진이 안 좋아 하루 온종일 뒤숭숭한 날처럼 무슨 일을 해도, 소설 구상을 해도, 온갖 기교를 갈고 닦거나 화려한 언변을 다듬고 지성을 보충할려고 하여도 통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서만 전전긍긍하며 끙끙 앓다가 그걸 알리고 위로 받고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가까이 사는 친구를 만난 것이다. 사람들은 편하게 만나고, 차 마시고, 술 마실 수 있는 사람의 숫자와 그에 대한 마음의 흡족한 정도가 X축 나이와 평행을 이루지 않고 전성기라는 선율에 따라 어느 만큼 완만한 굴곡을 보인다. 따라서 그들은 편하게 만나고는 있었지만 둘 다 속으로는 그래 내가 만나주께, 뭐 달갑지는 않지만 요즘 들어 부쩍 불쌍해 보이고 안 돼 보이니까 내가 다독여주지 누가 하겠어, 친구니까 내가 같이 놀아줘야지, 뭘 생각없이 말했다가 삐지면 어떡하냐, 그런 생각을 속으로 아주 조금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니, 그녀...가 생각나지 않니? 너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나는 말야, 밤에 잘려고 딱 누우면 천장에 저절로 그녀의 웃는 얼굴이 그려져. 컵을 손에 들고 냉수를 마실려고 해도 물의 표면에 그녀의 새침한 표정이 슥 떠올랐다가 한순간 싹 사라져버리지. 그리고 길을 걷다가 그녀 생각에 난 가로등에 살짝 부딪히기도 하고, 이상하게 그런 날은 또 뉴스에 보면 나와 비슷한 진짜 수컷 냄새가 풀풀 풍기는 어떤 남자가 가로수를 차로 들이 받고 도주했다가 다시 어딘가에 자진 출두했다는 소식이 나와. 책을 읽어도 자꾸 옆에서 나랑 놀아주라고 재잘거리는 것만 같은 착각? 아니야. 그건 착각이 아니라 매우 사실적인 환청이고, 반가운 복과 뜬금없는 운은 물론 촉망받는 기쁜 예감을 모두 동반한 환각이요, 그야말로 청빈한 환시라고 할 수 있을 꺼야.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매사 그렇게 그녀가 날 따라다니는데 어쩌겠니? 꼭 내가 꼭두각시가 되어 춤추고 있는 것 같아. 혹시 제임스가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녀석, 처음부터 소설 쓴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했어. 뭔 말도 안 되게 말이야. 환상 소설? 흥! 그래도 마음에 걸려. 그 친구가 막 리모콘을 누르고 그 버튼에 해당하는 행동을 우리가 한다? 오, 저런! 그러면 안 돼. 아니야 아닐 꺼야. 그러면 안 돼. 혹시 리모컨보다 더 센 거면 어떡하지? 녀석이 소설을 쓰는 데로 우리가 그렇게 움직이고 생각하고 있는지 누가 알겠어? 대뜸 제임스가 소설을 하나 들고 나타나서 이거 내가 쓴 건데 이걸 우리의 공동 소설 세번째 작품으로 출판하자고 제의할 수도 있는 일이잖아. 알고 보니 주인공은 우리일 수도 있고. 그러나 그건 아닌 것 같아. 왜냐하면 저번에 녀석이 내게 귀뜸해준 얘기 때문이지. 녀석이 막 바디랭귀지를 어디서 배웠는지 꼭 말발이 관가나 정가, 경제계, 학계의 거물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걸 그대로 흉내내면서 오른쪽 팔을 팔꿈치를 편 채로 앞으로 악수할 정도 보다 약간 낮게 뻗어서, 그 있잖아 꼭 로보트 같이, 그 다음에 딱 팔꿈치를 90도 각도로 안쪽으로 구부려, 그리고 손바닥을 땅을 보게 했다가 싹 틀어, 하늘로. 그러면서 팔을 위쪽으로 슬며시 올리면서, 다시 손바닥을 뒤짚어 팔을 내리면서 하는 말은 이랬어. 자기는 막 나이 들면서 힘이 위로 올라갈려다가 다시 밑으로 내려오는 거 같드래. 그래서 미치겠다고. 글이 잘 안 써진다고. 도무지 착상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이 방법 저 방법 다 안 통한다고. 뭘 해도 안 된다고. 뭘 해도 재미없다고. 혹시 나만 이런 거냐고. 너는 행여나 그렇지 않냐고. 정신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볼까, 무작정 약속도 안 하고 대학교로 찾아가서 문예창작과 교수에게 자문을 구해볼까, 아니면 하워드가 말했던 소설 창작 아카데미에 정말 입학할까, 어디 있나 찾는 게 문제겠지만, 그는 진짜 그렇게 심각한 고민을 했으니까. ... 음 그러니까 따라서 녀석이 우릴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니야. 더군다나 뭐 우리가 드라마나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도 아니고, 소설 끝날 때쯤 후렴구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그들이 공동으로 구상한 작품이네 어쩌네, 세 번째네 몇 번째네 그럴 일은 없을 꺼 아니야. 그러면 안 되지. 뒤통수 맞으면 아파. 기분이 꿀꿀해. 게다가 반전이 재미없으면 독자들 뚜껑 열릴 테니까. 그걸 가지고 또 뭐 어딘가에선 역-반전이네 뭐네 하겠지만. 하여튼 그럴 일은 없을 꺼야. 아, 어쨌든 귓전을 맴도는 그녀의 목소리, 너무 아늑하여 내 가슴이 떨리는구나. 왈칵 눈물이 쏟아질려고 그래. 눈에다 눈물 나오는 약을 살짝 넣는 정도가 아니라 인형극이나 꽁트에 나오는 특수 장치처럼 콸콸콸 수돗물을 트는 것처럼. 혹시 너는 안 그러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최근 너의 친구는 이런 일이 있었다네. 자네 혹시 그녀를 아는가? 우리 두 작품을 같이 썼잖나. 눈을 감아도 술에 취해도 그런다고 잠꼬대를 하더라도 어떻게 그녀가 꿈엔들 잊히겠나. 안 그러니? 정신이 다 혼미할 지경이야.」
   「나는 말이야. 마크, 나는 있잖아. 그녀의 얼굴이 잘 떠오르질 않아. 400살인지 4,000살인지 드셨다는 그녀. 하긴 우리가 글로 만들어낸 가상 인물이니까 생각이 안 나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 가방 속에 살고 있는 그녀도 딱히 안부가 궁금한 건 아니야. 부디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 그렇지만 내 경우에는 우리가 썼던 소설, 거기 나오는 일들이 내게 나타나는 것 같아. 정말 실제 그와 흡사한 일들이 막 내게 일어나고 있다니까. 우선 이상한 점 하나는 매일 인사하는 업무와 관계된 사람이라든가 지인들, 이웃이나 술집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이상하게 하나같이 대화하는 중간에 내게 꼭 그런 질문을 하는 것 같아.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긴 있는데 일단 돌려서 말하든 얘기를 슥 흘리든 모두 똑같이 먼저 의문의 추를 실은 말을 툭 던져. 그럼 내가 다시 반문하면 자연스럽게 말을 돌려. 화제를 바꾼단 말이야. 대화 방향을 트는 권리는 자기에게 있다는 것처럼. 모두, 모두 다 그래. 그들의 말은 그랬어. 거기 갔다 오면 어떠냐는 거야. 그곳에 가서 있다가 오면 어떠냐고. 뭘 어때? 뭘? 그리고 어디? 내가 어디 갔는지 안 갔는지 지들이 어떻게 알어? 그런 몇 가지 일을 겪고 나니 느낀 점은 이거야. 내 삶이 꼭 어딘가에 온전히 투영되어 어떤 대칭점이 생기고, 거기에 서광이 비추면서, 그 빛은 슬슬 조명으로 바뀌고 그 다음 뭔가 그것의 인상착의가 누군가 어떤 작가의 두뇌와 동기화 되고, 그건 장차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져 새롭게 탄생할 것만 같은 그런 불안하고 동요된 감정. 거기서 나는 잠시라도 벗어날 수가 없어. 최근에 보는 책을 읽고서 착안한 건데 나도 모르는 척, 그 정보를 추적하고 따라가야 하는지, 샛길로 빠져 적을 활용하고, 정체를 모르는 그들의 미끼에 걸려들어 연기를 하고 또 연기를 해서 적진 깊숙이 들어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 속담이 떠오르니까. 메소드 연기를 한 다음 극중 인물에서 배우가 빠져나오는 사례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알아보기 까지 했어. 그러다가 잡념을 뿌리칠려고 우리가 쓴 공동 소설에 나오는 누군가처럼 드라이브를 하고 다녔지. 정처없이. 그러다 또 하나 알게 됐는데 내게 미행이 붙는 거 같아. 처음에는 B급 정도 되는 인물로 무슨 흥신소 직원일 꺼라 짐작했어. 나중엔 정말 교육 제대로 받은 A급 요원이 붙길래 내 막연한 추측은 하나하나 근거를 모아나가면서 점차 추론으로 발전했지. 아무 일도 아닐 꺼라는 기우는 거의 명멸되어 갔어. 그러나 나는 그쪽 세계에서는 어디까지나 완전 초짜잖아. 완전 애송이지. 그래서 내가 그 뭔가 알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을 어떻게 거역하겠니, 그러다가 난 그냥 순응자가 된 것 같아. 어느덧 시간이 흐르니까 이제 뭔가가 날 따르지 않고 관찰하지 않고 추적하거나 어떤 관심의 징후가 엿보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 같아. 사태가 아주 이상하게 되어버렸지. 애초에 우리 소설이 이 일을 초래한 것일 수도 있어. 그런데 이 일을 대관절 어디다 하소연하겠니? 속에다만 담아뒀다가 이제야 너에게 얘기하는 거야. 바로 너에게! 너가 먼저 말해주지 않았다면 혼자서 속앓이만 했을 꺼 같아. <헛소리!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이런 말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어디다 말해도 대책이 없잖아. 그러면 이럴 꺼 아니야. <그러면 어쩔 껀데? 그 다음에 뭘? 어떻게? 그게 다야? 그래서? 어쩌자고?> 어떻게 이렇게 일반인의 삶이 영화처럼 흘러갈 수 있는 거지? 내 삶이 꼭 소설 같아. 이름은 뭘로 할까, 나장편? 우리 삶은... 그걸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은데. 특별한 포장을 위한 충분한 내용의 분량 면에서 말이야.」
   이렇게 조니와 마크는 W 지점의 가운데 꼭지점에 위치한 찻집에서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서 시간과 장소를 다른 곳으로 돌려서 주변을 살펴보자면 이렇다.
   잎파리가 뾰족하고 또 적당히 넓고 울긋불긋 나무 모양이 멋진 수풀이 우거진 녹지 공간이 보인다. 기린도 보이고 양들도 있다. 개들도 뛰어놀며, 8시 방향으로 운전해서 약 2시간 정도 가면 대관람차가 있고, 4시 방향으로 걸어서 20분 거리에는 각양각색의 알록달록한 카누를 타기에 딱 좋은 강이 위치한 경치로 둘러쌓인 어느 오두막이 있다. 한적한 숲속이다. 동화에 나와도 될 것 같은. 그 오두막 창고에는 윈드 서핑이 있고, 잡다한 도구들이 보인다. 해먹은 거의 쓰레기가 됐고, 고급 흔들의자는 망가져 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시골 같다. 가시거리가 매우 좋은 날은 저 멀리 등대도 보인다. 말만 오두막이지 고품격 별장 같다. 창고는 그렇고 오두막 내부에는 가만 보자, 한눈에 죽 둘러보니 에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이 보이기는 한데 그런데 그 용도가 좀 미심쩍다. 그리고 사진 출사를 다니기 위해서인지 최고급 라이카 카메라가 보인다. 물론 커다란 사진이 벽면에 붙여 있다. 달력이라고는 하지만 그 글씨는 매우 매우 작고 그림이 거의 전부다. 해상도가 기가 막힌 누드 사진이다. 물을 규칙적으로 주질 않아 말라비틀어진 선인장 화분도 보인다. 핸드폰은 꺼져 있다. 바람 빠진 럭비공 옆에 자동차 열쇠가 놓여 있다. 브랜드 로고가, 로고가 음 탐난다. 한쪽에는 소형 바도 설치되어 있다. 분홍색과 하늘색 네온 사인으로 <에딘버러의 가을>이라고 오두막 사무실 내부에 빛을 퍼트리고 있다.
   여기는 어디일까? 이곳은 알렉스의 작업실이다. 그가 울적하거나 외롭거나 그냥 심심할 때 찾는 혼자만의 공간. 그는 최근 게임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한동안 동적인 취미에 몰입했다. 그래서 온갖 스포츠를 두루 경험했다. 한두 가지 경기에도 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곧 재미없어졌다. 그 후 혼자만의 공간을 오랫만에 찾은 것이다. 그리고 방금 케빈이 방문차 알렉스의 혼자만의 공간에 도착했다. 그들은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서로 묻고 답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알렉스가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케빈이 묻는다.
   「오, 알렉스! 아니겠지만 혹시, 해서 묻는건데 그거 뭐니? 뭘 그렇게 막 섞고 짓이기고 만들고 있어? 뭐 동물 밥 같은 거 만드는 거야?」
   「아, 이거? 낚시 미끼 만들고 있어. 나는 일년 중 이맘 때가 되면 이상하게 말이야, 나도 모르게 막 낚시가 하고 싶어져. 이유는 모르겠어. 또 나는 나만의 낚시 미끼 만드는 비법이 있거든. 세계 곡물 생산량 1위를 주원료로 사용하여 식물성 재료를 이용해서 만들지. 뭐 더하기 뭐 더하기 뭐 해서 반죽 후 숙성하면 돼. 물고기가 썩 좋아하는 음식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건 그들에게 일종의 건강식이지. 또 어차피 잡혀도 바로 방생될 꺼고.」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그렇다 쳐도 저건 뭐니? 혹시 마약 아니야? 힘들거나 어려운 일 있으면 털어놔 봐. 여자 문제야? 친구 좋다는 게 뭐니? 혹시 저거 코케인? 아니면, 최고급 유기농 밀가루?」 책상 위에 하얀 종이가 펼쳐져 있고 거기엔 고운 미색 가루가 약간 쌓여있다.
   「하-하-하. 땡! 틀렸어. 아니야. 저거 아스피린이야. 그걸 가루낸 거야. 가끔 먹던 거 빻아서 선인장 줄려구. 나그네여 오해하지 마시게나. 즐거운 인생, 행복한 세상 아닌가!」
   「아, 그렇구나! 난 혹시 아마데우스와 마스네를 듣고 자란 세계 곡물 생산량 만년 2위인 밀에서 직접 채취한 밀가루라면 그걸로 빵을 만들어볼려고 그랬지. 난 요즘 한 달에 하루는 빵을 만들어. 새로운 거도 해 봐야 할 꺼 아니야. 알고 보니 귀공자 타입의 남자들은 모두 그런 기술을 습득하고 있더라고. 비밀리에. 나도 빠질 수가 있나, 주저해서도 안 되고 엉거주춤 암중모색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그 외에 요즘 하는 일은 뭐가 있냐면, 뭐가 있을까. 음 햇빛, 바람, 물, 태양, 우주, 나무, 금, 흙, 행성 이런 단어를 인쇄해서 벽면에 붙여놓고 바라보며 10분씩 명상을 하지. 커피콩 키우기, 예쁜 찻잔과 컵도 수집해. 알렉스는 어떠셔? 넌 요즘 뭐 재미난 일 없니?」
   「나도 뭐 색다른 건 없어. 보시는 바와 같이 강에 가서 카약 타면서 낚시 좀 해볼려구. 그리고 사진도 좀 찍고 개인 블로그도 다시 살려서 새로운 걸 올릴려고.」
   「음, 그렇구나. 그런데 소식 들었니? 애들이 뭔가 이상한 징후를 느낀다고 하던데. 뭐 이상한 거 찾으러 먼저 자기들끼리 조 짜서 떠나는 것은 아닐까? 슬슬 이제 우리가 전면에 나서야 할 때가 된 거 같은데. 애들이 뭘 막 규탄하네, 공동 소설은 해명이 필요하고 취소하자네 어쩌자네 하면서 정말 정신병원에 진료 예약이라도 하면 어떡하냐? 거의 우리가 꾸민 작전의 목표가 달성되어 가고 있는데 여기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잖아. 방심하면 안 돼. 운수 나쁘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닦아놓은 초석과 앉아야 할 상석은 모두 허사로 돌변해버리는 수가 있어. 실은 우리가 예상 기간을 좀 길게 잡긴 했지만 그새 애들이 우리가 짜놓은 미로에 벌써 빠져버렸지 뭐냐. 우리가 한패라는 것, 그녀는 가상 인물이라는 것 그러나 그녀를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런 만남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계가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을 꺼야. 아마 우리의 환상 머쉰을 보면 깜작 놀랄 꺼야. 충격 받을지도 몰라. 타임머쉰으로 시간 여행을 하는 건 알겠지만 환상 머쉰으로 작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건 생각도 못했을 걸. 저번 달만 해도 우리가 절반쯤 개발한 기계가 고장나기 일쑤였지만 비로소 이제는 완벽한 환상 머쉰으로 정상 작동하게 되었으니 이건 뭐 거의, 제 몇 차 산업혁명이나 TV, 인터넷에 버금가는 신기한 혁신품이라고 할 수 있을 꺼야. 이거 하나면 굳이 과거로 가네, 미래로 떠나네, 드라마 언제 나오지, 영화로 만들어지면 괜찮겠는데 하면서 무심코 기다릴 필요도 없잖아. 어리둥절하겠지만 가짜도 아니잖아. 예시로 딱 몇 가지만 되는 거도 아니고 소프트웨어만 입력하면 모두 다 가능하니까 이건 거의 어린이의 꿈과 모험도, 소년의 신비와 환상도, 소녀의 낭만과 문학도, 숙녀의 사랑과 동경심까지 뿐만 아니라 노년의 회춘을 충족시키는 것은 물론-이요 뭘 해도 재미없는 중년에게도 기쁨과 즐거움과 보람과 청춘과 행복과 천연 도파민을 이용한 쾌락마저 만족시키는데 이건 정말 가히 기막힌 발명품이라 할 수 있지. 만세 만세 만만세로다, 우리의 환상 머쉰! 여기 있소이다.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짜잔!」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구. 하하하. 푸하하하핫. 음하하하하하핫. 그런데 너 요즘 보니 왜 그렇게 말을 길게 하니? 쉬지도 않고 하나도 막힘 없이 꼭 긴 명대사를 외우는 것처럼 한 호흡으로 쫙, 꼭 글로 씌여진 분량을 암송하고 연기하는 거 같아. 미리 송시로 써 놓고 외운 거 아니냐? 사랑의 찬가일 리는 없고. 원래 전에는 주로 단답형으로 말하다가 어쩌다 좋아하는 주제가 나왔을 때만 말을 길게 했었던 듯 한데, 어떻게 된 거야? 환상 머쉰 때문에 들떴니? 혹시라도 짧게 말하면 그대로 말 따라 할까봐서 그렇게 길게 말하는 거니?」
   「오, 그럼! 어떻게 알았어? 우리가 말 따라하기 놀이를 할 나이는 아니잖아. 또 다른 이유는 말을 꺼냈다가 금새 할말이 끝나버리면 왠지 허기가 지고, 거기서 말을 더 지어서 하게 되고, 그러다 말을 그치면 그 말이 허위로 판명날까봐 겁이 난달까? 그래서 곧바로 다음 말을 하고, 그렇게 말을 이어가다 보면 언뜻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져. 나도 모르게 긴 대사를 뽑게 돼. 왜 그런가는 모르겠는데 검집에서 검을 딱 뺏는데 막 반 토막 아니 반의 반 토막만 남은 댕강 부러진 검이 나올 것만 같은 강박증? 그런 이유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그런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리고 그 세번째 이유는 이거야. 제임스가 요즘 이상한 화법을 구사하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그게 생각나서 따라하게 되는데 그걸 따라하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일부러 말을 길게 말해. 그 이상한 식으로 말하는 거 있잖아. 모든 말 끝마다, 어? 어? 한번 말하고 나서 어? 심심해도 어? 꼬박꼬박 어? 말하는 문장 중간에 여러 번 어? 계속 어? 그런 거. 이런 건 전형적인 술꾼 그 가운데서도 아주 좋게 말해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어법이잖아. 근데 녀석이 그걸 따라하니까 엄청 웃겨. 어쩌다 나도 모르게 막 따라하게 돼. 그런데 있잖아.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보고 나서 우리는 일단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자연 선택하게 되는 것 같아. 첫째, 아 따라하는 거 같아서 싫어 난 최초가 될 꺼야 첫째가 좋아 이제 그거 안 할래 나 따라하지 마! 그리고 둘째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또 따라하는 게 뭐 어때서 모방은 창조의 어미닌데. 이렇게 두가지로 나뉘는데 때에 따라서 첫 번째를 써먹고 싶어질 때도 있단 말씀이야. 하지만 흉내는 흉내고 장점을 본떠서 최고의, 최초의, 최대이자 최상이 되고 정 어렵다면 꿩 대신 닭이라도 잡을 것. 바로 그게 인터넷 시대의 가치잖아. 그처럼 말야. 그거 말곤 별다른 이유는 없어.」
   「어쨌든 애들은 상상도 못했을 꺼야. 환-상-머-쉰! 이름도 멋져. 그런데 발명가나 창업자는 아직 전면에 나서지 않는단 말야. 혹시 뭐 비속어로 바지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러면 안되잖아. 어느 벤처기업에 일부 투자했던 거 빼서 여기다 썼는데 말이야. 뭐 그건 아직 미지수지만 차차 알게 될 테고, 이거 애들에게 알려주면 뭘 먼저 고를까? 꼭 어린이가 방에서 읽을 동화책 고르는 거랑 똑같잖아.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 몸둘 바를 모를 꺼야. 공상, 마술, 상징, 전설 이런 장르의 작품을 먼저 시도할까 아니면 일단 곧바로 SF 소설 먼저 시도할까? 오오, 기대되는데~!」
   알렉스와 케빈이 말하고 있는 환상 머쉰이라는 것은 2층 침대 만한 기계다. 그것의 작동 원리는 이렇다. 거기다 소설이나 영화 CD 또는 일정 정보가 담긴 USB를 꼿으면 기계와 연결된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은 첫째 사라지게 되고, 둘째 그 소설이나 영화 속으로 들어가서 직접 그 줄거리를 체험하게 되며, 셋째 거기서 살아도 되고 또는 정기 이용료를 지불하면 자기의 분신은 기계 바깥 세상에서 자기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고 자신은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작품 속 공간에서 환상을 체험하게 된다.
   알렉스와 케빈은 이것을 인터넷의 소셜 네트워크에서 링크를 타고 들어가 어느 웹사이트에서 알게 되었다. 물론 처음 봤을 때 또 2번째로 TV 홈쇼핑에서 봤을 때는 애들 장난인 줄 알았다. 어느 날 누군가 집으로 찾아와서 밖에 나가보니 웬 방문판매원이 찾아왔길래 한 20~30분 얘기를 듣고서도 긴가민가 했다. 그러나 그런 여러 번의 고도로 치밀히 계획된 작업에 따라 그들은 어느 동기부여 강연회에 갔다가 우연히 환상 머쉰에 대하여 강의를 듣고 거기서 사람이 실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걸로 끝나지 않고 그들이 직접 강단에 올라가서 환상 머쉰에 앉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책과 영화 CD를 입력해 보았다. 그래서 직접 그 느낌을 알게 되었다. 책과 영화에 나오는 내용을 모두 환각으로 또 실지로 경험했다. 그들의 말발에 완전 엮여들었던 것이다. 물론 마술사의 옆에 있던 여인은 누구였겠나,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오, 그녀! 대체로 유명한 소설과 CD를 준비해갔던 것도 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수작이었다. 처음부터 그 집단은 트위터로, 페이스북 이벤트로, 회사 동료를 통해서, 단골 술집 사장과 함께, 주기적으로 그녀는 그들을 스쳐지나가고, 세뇌 시키고 또 세뇌 시키고, 최면 시키고 또 최면을 걸고, 결국 다중 최면이 딱 절묘하게 막 100%로 먹혀들었던 것이다. 사람이 사라졌어, 나도 경험했어, 친구도 같이 경험했어, 친구가 빠진 걸 목격했어, 공동 소설 소재도 얻고, 최신 유행을 선도하며 즐기고, 사업 지분도 얻고, 무명 블로그의 명성도 올리고, 출판사 줄 서고, 영화사와 판권을 계약하고, 언론사도 들썩들썩, 팬들도 들썩들썩, 상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고, 상을 수여한 후 축하의 말도 먼저 생각해놔야 하고, 팬들과의 모임이네, 학계에서도 러브콜이 쇄도하고, 매니저나 소속사도 알아봐야 하는 건 아닐까 골똘히 기쁜 걱정을 하고... 그야말로 인기든 부든 즐거움이든 두 마리든 세 마리든 또 토끼든 기린이든 뭐든지 바라기만 하면 그러면 될 줄로만 알았다. 환상 머쉰은 쥬라기 공룡 시대의 맹금과도 같은 신기한 존재였다. 입닥쳐 말포이! 해리포터의 사인이든 기원전 3,700년 전 엑스맨 시초와의 어깨동무든 뭐든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는 딱 여기서 끊고 자, 그들은 공동 집필 소설 세 번째 작품을 이렇게 준비하였다 막 이렇게 흘러가야 하는데, 그러면 좋은데, 대충 어떻게 되겠지 하는 독자의 예상과 착~ 하면서 결합해야 하는데 어쩌다 배가 산으로 간다. 알렉스와 케빈, 케빈과 알렉스는 이미 투자금도 넣고, 주식 보유 증서와 함께 그 기계 환상 머쉰도 받은 것이다. 정기 이용권을 단 몇 명만 구입해도 본전은 빼고도 남게 된다. 톡톡히 한 몫 건질 수 있다, 이론은. 그런데, 그런데 문제는 그들 둘이는 최면이 딱 걸려있는데 다른 친구들이 그 가상 체험을 정말 받아들일 것인가가 문제였다. 또 환상 머쉰이 앞으로 잘 작동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 기실 그것은 기대고 애원이며 작은 희망에 불과했다. 그것도 헛된 소망! 기계는 아마도 짐짝? 나중 버려도 돈 주고 버려야 하나? 그때 가서 애들이 이러면 어쩌지? <그걸로 뭘 할 건데?> 설마 놀리기야 할라고! 독려하고 슬픔을 달래주기에 딱 안성맞춤인 상황일 텐데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그건 그때 가 봐야 아는 일이고, 정말 애들이 토닥거릴지 풍자에 비꼼으로 일관할지는 그때 가 봐야 알게 된다. 일단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환상 머쉰을 보란 듯이 친구들에게 공개했는가 안 했는가, 그건 건너 뛰자. 뭐 좋은 일이라고. 환상 머쉰이 미완성 고물로 들통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겠지만. 두 마리 토끼를 독차지 할려다가 죽도 밥도 안 된 경우가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것인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믿어야 한다. 누가 뭐라든 신경 쓰지 않는, 단호한 추진력 그것은 마치 보통의 소비자들과 똑같고, 결제하고 나서 판돈 날리고 나서 그리고 마음을 빼앗긴 후 짓게 되는 애잔한 미소와 조금은 흡사한 구석이 있다. 자기-계발 부흥회에서 바람 잡고 무대로 올라오라고 했을 때 딱 잘라 거절했어야 했는데, 이미 지난 일. 어떻게 살려서 환상 머쉰은 폐기물로 재활용이라도 하고, 이 일은 이 대단치 않은 일련의 사태는 정말 웃으면 복이 온다고 유머로 승화시켜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저소득자에겐 큰 돈일 수 있지만 아니라면 경험으로 알고 액땜한 셈 칠 수도 있고, 또 그와 같은 지출로 얻는 지속적 경험제라면 먼저 알고도 속겠다는 사람, 절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경험의 그래프선이 중간에 갑자기 뚝 끊겨버리기 때문에 나중에 알고 보면 그건 과대광고였고 그걸 본 당사자는 부풀린 분위기에 매료된 것이다. 결국 그냥 올해의 사건 중 하나 또는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초딩들과 수업하고 있는데 학교로 마누라님께서 찾아오신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디서 샀냐고, 누가 꼬셨냐고, 왜 넘어갔냐고, 진공청소기 잘 작동하지도 않는다고, 말이 할부지 이거 총액을 생각하면 아 답이 안 나온다고, 당장 물르라고, 대체 언제 정신차릴 거냐고. 우리 선생님 꾸중들으시나 보다 라고 초딩은 생각하겠지만. 저 런닝머쉰을 구입하고 나면 집에서 열심히 운동할꺼라는 가정은 꺼이꺼이 날아가고, 기기에 대한 비호도 날라가며, 그때그때 다르겠지만 제 위치에 그냥 전시용으로 남든가 아니면 보살피기도 아깝다면서 창고로 폐기물 처리장으로 옮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상 머쉰의 팽창된 허식을 빼고 처음과 지금이 뭔 차이가 있는지 느껴봐야 한다. 그래서 환상 머쉰 앞에 가만히 슥 척 달라붙은 관형사? 맞나? (아는 사람 별로 없으니 이럴 땐 우겨도 된다) 그걸 이미 서둘러 떼버려야 했을까, 아니면 아직 그걸 모질게 떼버리기엔 꽤 무정한 것일까. 아, 수식어를 말하지 않았다. 그건 이거다. <우리> 같은 꾸밈어. 우리 뭐, 우리 누구 그리고 바로 우리 환상 머쉰! 오~ 그렇다. 유감이다. 그것도 매우 유감이다. 환상 머쉰? 어딘가 모르게 그런 각오를 떠오르게 만든다. 그곳엔 가지 않아야 겠다고. 왠지 거긴 외나무 다리일 꺼라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그곳이 어디냐면, 거기는 NC다. 슬픔을 이겨내면 괜찮은데 침체기가 좀 길어지게 되면 이러다 여차하면 퇴락한 번화가에 있는 후진 3류 NC를 찾게 되고, 또 거기서 우연히 마주칠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건 왜 그럴까? 예전에 알던 그녀, 예전에 알던 오빠 아니면 웨이터의 명찰을 어쩌다 마주치게 될 것만 같은 느낌. 그분도 내 슬픔을 알거나 또는 집에 그 물건, 환상 머쉰이 있을 것만 같은 동질감. 어떻게 이런 돈 주고 병 얻는 것 같은 비애를 유대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것처럼 환상 머쉰도 이쯤 되면 반품하던가 시간을 되돌리던가 하고 싶게 만든다. 당연히 판매처는 연락이 안 될 테고. 그러니 다음 번에는 정말 정상적인 제품만 사고, 꼭 필요한 물품만 또 제값을 주고 양질의 소비재를 구입하리라, 는 값진 교훈을 안겨주는 참 생각 많이 하게 만드는 환상 머쉰이다.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것 하나는 성공한 것 같다.
   그런데 자꾸 의문이 드는 건 꼭 누군가 그들을 조종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그 뭔지 모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쎄한 느낌, 그것은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다. 그러면 제임스가 친구들을 저번에 괜히 불렀을까? 거 뭐야, <내 애완견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었어요. 뭐라고요? 당신 제정신이에요?> 또 뭐드라, <제 버릇 개 못 준다>도 있었고, 맞다 무엇보다 <거북목 증후군>이 압권이었어. 그렇다면 그 삼거리에 있는 산업 폐기물 처리장 그 푯말을 보게된 건 우연이었을까? 우연치고는 뭔가 냄새가 난다. 정말 그렇다. 따라서 이쯤 되면 공동 작품 첫 번째와 두 번째 소설도 의심이 가게 된다. 때문에 그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된다. 그녀? 그녀라... 그녀라... 음, 의뭉스러워, 오, 그녀라... 정말 이게 다 뭔지 모르겠다. 제발 누가 말 좀 해 주시라. 이건 블로그에 올려질 공동 집필 소설 제 3편이라고. 서술자는 평범한 작가도, 인간도, 그렇다고 정상 작동도 시원찮은 환상 머쉰도 아닌 바로 춤추는 마법의 구두라고! 다시 말하지만, 믿기지 않겠지만 그건 동화라고! 아시겠소? 아니요, 잘 모르겠는데요. 왜냐하면 이건 실은 독자가 서술자거든요. 작가? 거창한 수식어? 뛰어봐야 독자 손바닥입니다. 당신은 사실 이렇게 작품의 끝을 맺고 싶지도 않았고, 어떻게 끝내야 될지도 몰랐습니다. 이야기가 이어지면서도 스스로에게 되물었죠. 자꾸만 그분이 대체 누구고, 어떻게 생겼고, 정말 사람 목소리가 있을지 궁금했거든요. 뭐라고 되물었냐구요?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니, 가 아니라 그건 이거였어요. <너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진짜 환상 머쉰인지 환상 밥통인지 그것이 사람 질색하게 만드는군요. 당신은 그야말로 헛소리의 달인이에요. 이래도 고분고분 인정하시지 않으실 꺼에요? 원래 남자는 나이가 들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데, 올라갈 뻔 하다가 다시 내려간다구요? 이런~ 젠장! 당신은 말대꾸하실 자격이 없는 분이세요.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을 해보세요. 아니라면, 정녕 아니라면 그분이 당신이고, 당신이 그분인가요? 그건 아니잖아요. 그저 그분은 뭐랄까, 그분은 거식증 같은 것? 뭔 소리야! 계속 딴청만 피우시고 아주 요지부동에 소신 있으십니다 그려. 재량껏 열린 결말을 추리해보자면, 음 추리는 무슨 추리에요 그건 모두 다 허세 같아요. 그냥 작가는 공동으로 하는 것으로 할까요? 그래요. 그냥 이 모든 일이 모두 졸렬하게 느껴지는군요. 사람이 너무 무엄하고 뻔뻔한 거 같아요. 왜냐하면 독자님 면전에서 어느 안전이라고 그 용안을 뵙기도 힘든 일인데 자꾸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것만 같고, 한마디로 꼭 죄를 짓는 것만 같아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묵념이라도 해야 할 꺼 같아요. 정말 그렇다구요.
   자, 보아하니 그대는 큰 교훈을 전달하고 싶어서 현실 속에서 직접 주인공을 체험한 것인가요? 음, 그렇다. 그럼 그것은 무엇인가? 대체 그것은 무슨 교훈일까요? 세상사를 너무 낙관적으로만 보지 말라, 적당히 비관적으로 볼 필요도 있다, 인생을 사노라면 크나큰 또 자잘한 고비와 험난한 파도는 많다 그러나 파도타기를 즐기다보면 아찔한 미지의 신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뭐 이런 판에 밖은 교훈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뭘까요? 그건 이것일 꺼에요. 당신은 바로 이로써 현대인에게 그리고 지금 세상에 또 미래에도 이와 같은 주제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군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가 현실에서 통한다는 것을! 여전히! 언제까지나! 나는 당신이 오늘 신은 양말이 무슨 색깔인지 속옷 모양이 뭔지 훤히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분에게는 손바닥 보듯 훤히 보이시질 않겠어요? 헉, 그대 팬티에 구멍이 났군요. 아직이라고 틀렸다고 좋아하신다면 해가 기울어 저녁이 되면 아차 하실 겁니다. 그때 빵구날 테니깐요.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뭔가가 좀 과한 것 같군요. 그래서 대화체를 일기체로 바꿔볼께요. 무언가 모르지만 정말 뭔가가 너무 튀틀렸다. 일이 심하게 어긋났다. 그래, 정말 그렇다. 당신께 누군지 모르는 당신께 나직한 음성으로 다시 묻고 싶다.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당신, 그분인지 뉘신지 모르는 당신, 내 당신, 우리 당신! 말 좀 해보세요. 정말 이 말이 들린다면 이 애절한 기도를 보신다면 대답을 해보시라구요. 네? 네... 오... 오... 보인다 보인다... 내려온다 내려온다... 당도했다 당도했다... 마주 본다 마주 본다 좀 더 가까이 가까이 아 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드디여 그분이 오셨다 그렇구나. 뭐 뭐 뭐라고? 오호, 인정한다고? 음, 꽤 양심적인 어른이군. 난 또 어둠의 세계를 생각했지 뭔가. 넌 영화를 너무 많이 봤고 그동안 이상한 책도 너무 많이 읽어서 쥐뿔도 모르면서 혼자만의 공간이 없다보니까 아주 그냥 상상 속에서 살았던 거야. 퍽하면 공상이야. 못 봐주겠어. 안 되겠다고. 그러나 이건 내가 봤을 때 실화가 아니야. 한 편의 드라마라고. 그러니까 이걸 어, 무명 블로그에 올렸으면 좋겠어. 3번째 친구들 공동 작품으로 말이야. 어, 어때? 응? 뭐, 그럴 생각이었다고? 능청은! 내가 웹사이트에서 티셔츠를 하나 주문해서 선물해줄께, 친구. 티셔츠 앞에는 이런 문장이 씌여있을 꺼야. <우리가 대체 무슨 일을 꾸민 거지?> 허나 생각이 바뀌면 말하시게─티셔츠 주문 취소하고, 취소 안 되면 내가 줄여서 동네 돌아다니는 개에게 입히고─티셔츠 주문 취소하고 1회용 문신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있잖아. 자네 정말 그럴 꺼였음 연기를 한번 진지하게 해보지 그랬나? 왜 그 생각을 안 해 봤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뭐? 벌써 옛날에 해 봤다고? 긴 명대사를 못 외우겠다고? 또 그건 관심도 없다고? 게다가 그쪽 외양도 아니라고? 그런데 뭔 변명이 그리 많어? 아예 그냥 긴 명대사를 써서 배우들을 환상에 빠지게 만들고 싶다고? 또 그 연기를 보고 재차 환상에 빠지는 시청자들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겠다고? 이거 이거 이 사람 이거 제정신이 아니구만. 이 사람 이거 인간이 아니야. 당신이 아무래도 환상 머쉰이 아닌가, 난 그렇게 생각하네. 그런 생각이 절로 들구먼. 그래, 틀린 말은 아니야. 옳고 그름을 따질 수도 없어. 그러니까 환상 머쉰인가 뭔가도 만들어서 팔 수 있었겠지. 다 안다구. 이해해, 친구. 뭐? 좀 크게 좀 말해. 건들거리지 말고, 두리번거리지도 말고, 주머니에서 손 빼! 뭘 말할지 이젠 나도 알아. 대충 예상한다니까. 말이 너무 많다고 그럴려고 했지? 자네 속마음이 훤히 드려다보이는군 그래. 자네 이제 보니 그동안 너스레도 많이 늘었군. 그런 모습 보기 좋아. 썩 좋아 보인단 말일세. 으흠. 그렇지만 하나 걸리는 게 있어. 뭐랄까, 잠시 삼천포로 빠질 꺼 같아 미리 칸을 띄우는 게 낫겠네. 살면서 때로는 인문학을 넘봐야 하지 않겠나. 때와 장소에 따라 멋진 말이 필요하기도 하잖나, 안 그런가?
   음 뭐랄까 자네는 너무 어, 그 있잖아. 그대는 모든 게 은근슬쩍이야. 하지만 천성이 그러한데 또 자네 인생인데 뭘 어쩌겠나. 다만 그런 모습에 어쩌다 그녀가 홀딱 넘어가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혹시라도 그렇게 된다면 그걸 보는 어떤 상남자는 다만 아~주 극미하게 속이 메슥거릴 뿐이겠지. 물론 찬미하고 축하하는 감정이 99퍼센트일 테고. 아, 나는 아니라네 절대 아니라네. 단지 그 뿐이야. 그럼. 음 그래. 왜냐하면 시인하기가 꺼림직하지만 미미하나마 그 또한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니이니까. 지구에서 2억년 넘게 번식했으나 지금은 멸종한 동물인 공룡, 또 현존하며 북극권 부근까지 서식하는 예쁘지 않은 어떤 생물과 인간이 정확히 공통된 습성이 있는 것처럼. 기원전 27년부터 1453년까지 로마제국이 커졌다 작아졌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다가 지금은 수십 개의 나라로 나누어진 것도 인간이 지구에서 한 일. 가까운 근대에 제1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가? 그때 그곳에서는 신사 - 결투 - 귀족 같은 근대 서구 문화의 인습 때문에 시작에 대한 선언이 있었던 것일까? 또 제2차 세계대전은 왜 시작되었다가 흐름이 어떻게 꺾였고 또 왜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어른들도 때로는 여전히 그 얘기를 하며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어째서? 독일어가 인기없던 시절에는 대표적으로 정확한 대명사가 있었네. H라고. 구글 트렌즈 그래프로 봐도 확인되듯이. 허나 그건 하나의 성이야 에르메스처럼. 미스터 에르메스가 엄청 많다는 걸 잘 않잖나. 또 그걸 지구 반대편에서는 슈퍼마리오가 대신할 수는 없지. 참 애매한 긴 이야기도 있었고. 전쟁에 관한 보통의 또 최고의 학자와 전문가들이 뭘로 가장 손꼽는 하와이 진주만 습격, 그것만 그럴까? 과연? 무엇이? 내가 사는 도시와 산업과 문학작품은 물론이요 수많은 말과 글에서 말하는 부조리는 그것이 언제 어떻게 발생할 것이라고─자 이제 들어갑니다 준비하세요─돌림판을 돌리겠습니다 준비하시고 자 (화살을) 쏘세요 라고 로또 번호 당첨하듯이 예고하고 친절하게 알리고 발생하던가? 로마 제국이 커졌다 작아졌다 할 당시에는, 그와 달리 자 살살 합시다 살살 하자구요 벤치 클리어링 보여줬으면 우리도 어색한 자리가 되었지만 서로 얼굴 봤으니 이제 그만 적당히들 하고 돌아들갑시다 자 옐로 카드 나가십니다... 그랬을 꺼 같지는 않아. 그 또한 모두 인간의 본성이 원인. 학생들이 배우거나 어른이 아는 우리나라가 어느 국가가 옛날에 영토가 이만할 때가 있었구나, 도 그렇고. 고대 7댄가 8댄가 불가사의는 물론 어지간한 세계 문화유산은 적지 않게 피와 땀과 눈물과 슬픔으로 만들어졌을 거라는 예측? 추정? 진실?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모르겠군.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건 멋진 건축물과 장엄한 풍경이요 내가 살고 누리는 풍요로운 세상이지. 글을 읽으면 드러나지 않는 행간을 읽고, 그림을 보면 숨겨진 비밀을 모조리 파악하고, 음악을 들어도 남에게 저는 평소에 이런 음악을 듣거든요 그러고서 진짜 정말 고전음악만 듣고, 그렇게 보통 사람들이 소일할까? 천만에! 그건 희망사항, 아니겠나? 아니라면 교수님일 테고. 세상이 정말 아름다울까? 사랑을 하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까? 사랑은, 있을까? 그건 그냥 달콤한 사탕 같은 거 아닐까? 세상은 요지경, 아닐까? 세상일은 결국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소 읽고 외양간 고치는 그런 원리로 돌아가는 거 아닐까? 자꾸 말 끝나마 아닐까, 라고 해서 말하는 당사자도 썩 부담스럽네만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오다 엄한 데로 가버렸는지 괜한 청각과 눈요기를 담당하는 지각만 발달되는 것 같아서 나도 자꾸만 듣는 사람과 읽는 독자와 험담에 두각을 나타내는 좌중과 신선함이 바닥난 험담가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의 의중을 상상하게 된다네. 어쩌겠나, 뒷짐지고 눈을 감고 몸을 30도 정도 옆으로 틀로 고개를 위로 슥 들어올리면서 머리 위로 수증기가 한무더기 올라가는 모습을 그려보는 수 밖에. 그렇지만 실내에서 그런 생각만 하면 따분하니까 어딘가 관광지로 떠나면 또 시대적인 배경을 누군가 설명해주겠지 친절하게 말이야. 그러면 둘 중 하나잖아. 졸음이 몰려오든가 슬쩍 기념사진을 찍으러 자리를 피하는 거. 물론 솔직히 자네와 난 거기 해당되지 않는 셋째지. 그건 뭐? 아찔한 지성! 이런 거 모르는 사람 없지 않나. 어허, 이런 말 하고 나면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든가, 하인에게 눈짓을 하거나, 로시난테 어디 갔냐고 산초 어디 숨었냐고, 정녕 고귀한 이상주의 그 금단의 열매는 어디로 가버렸냐고 누가 몰래 덥썩 따먹었냐고 내 몫은 남았냐고 혼자서 대사 있는 무언극이라도 해야 하거늘... 아~ 수염도 없고, 하인도 없고 형편도 궁하고, 기력은 딸리고, 모르긴 몰라도 친구도 나도 그녀도 돈키호테를 한 번도 정독하지 않은 듯 해서 마음이 씁쓸하군 그래. 자네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네. 이게 다 하늘의 뜻이고 인간의 일이야. 정말 미래에는 말이야, 이와 같은 시간의 역사가 책에서 단 몇 쪽만 할애할 꺼라는 걸, 난 모르는 척 할꺼야. 아마 그렇겠지만 지금까지의 일들을 10세기나 1000세기 후에는 모두 축약해서 인식할 것이라는 냉엄한 예견 또한 다른 동물이 아닌 온전히 인간의 일. 브라질은 삼바, 아르헨티나는 탱고, 캐나다인을 보고 미국사람이에요 묻거나, 벨기에의 초콜릿, 스페인의 투우, 핀란드의 산타마을, 그게 다가 아니라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 사람 사는 데는 다 그렇다구. 그러나 사람에 따라 그림자가 없는 인간이 있는가, 는 딱 똑부러지게 확답하지는 못하겠어. 그건 여기서 말하기가 썩 곤란하다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있었다면 그 포괄적인 본능을 바탕으로 인간 문명이 이렇게 발전했으니까 또 앞으로는 타임 머쉰도 환상 머쉰도 만들어질 수도 있을 꺼라고 예측해도 썩 비윤리적인 일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일세. 어떤가? 나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꺼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네. 자네는 답을 안하고 말을 아껴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참 탁월한 친구로군. 흐흠. 
   성장하면서 사람들은 난 나중 어떻게 살 꺼야 행복한 가정을 꾸릴 꺼야 미래를 그리면서 어른이 된다. 훗날 아이가 태어나 아빠가 되어 보니 이제 비로소 오오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좀 더 어른스럽게 살아야지 다짐하고, 내 아이가 크면서 아빠를 하나하나 다 따라하니 나를 보고 배우면서 크니까 아 모범이 되어야겠다 착하고 성실하고 훌륭한 삶을 살아야겄다 허튼 길로 빠지지 않겠다, 고 다짐하지만 그게 어디 그라고 됩디까? 네? 거 마 그게 어디 그라고 맘대루 되던가요? 네? ... 웬~걸! 돌아서면 곧바로 왜 그런지는 몰라도 아재 개그를 공부한다니깐요. 인도에서 가장 요가를 잘 하는 사람은? 꼰다리또꽈. 아랍의 가장 열성적인 지도자는? 하나라도 더 알라. 이탈리아의 유명한 자선 사업가 이름은? 더 달란 마리아. 프랑스의 유명한 요리사는? 더 드셩. 그렇게! 어디에 쓸려고? 모르겠어! 소설에서 중간에 딴 얘기가 나오는 것처럼, 비유는 적절치 아니하나, <이번 한 번만>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시 그러지 말아야지, 나는 왜 제멋데로일까, 나는 왜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성격 좋다 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을까 내가 그런 말을 못하게 막지도 않았는데, 내가 이러면 안되겠구나, 너무 지나치게..는 깐죽(깐족)거리지 말아야지, 악역만 맡지도 말아야지, 그러지만 그 다음은! 그 또한 인간이란 종의 본성이다. 그러나 낙담은 금물. 오뚜기처럼 넘어져도 일어서고 새롭게 거듭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려는 의지 역시 그것 음성적인 인간-종의 본성과 분명코 한통속이니까. 갑자기 횡설수설을 늘어놓았드니 왠지 모르게 사랑이 멀어져가는 남자의 심정을 토로하는 옛 노래가 듣고 싶군. 그런 노래들 정말 많지 않은가. 아주 부지기수지. 5분쯤 되는 노래 말야... 우린 한 여자를 사랑하지만 나는 당신과는 달라 당신은 당신이 가진 것 모두를 버리고 그녀를 택할 용기 있나요······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내가 물러나요······ 당신이 아닌 그녀를 위해... 그런 음악을 듣고 싶어 지금 말이네. 철지난 유행가를 들으면 이런 생각이 떠오르겠지.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의 아성에 짓눌린 권선징악의 불분명함과 설움과 모순 같은 거. 또 그때 그 기억이 떠올라 착찹하군 그래. 옛날 자네처럼 팔팔한 나이에 어느 레스토호프에서 시간제 일을 하다 그만둔 적이 있는데, 당시 가게 사장을 같이 일하는 친구와 같이 좀 꺼려했다네. 호감이 없었으니까. 싫어한 거 아니냐고 그래도 그때 감정으로 시간을 되돌려야 하니까 애써 부정하는 거 보단 차라리 말을 돌릴 꺼야. 안 친하면, 호감가지 않으면, 왕래가 없으면 왠지 꺼려지는 사례 얼마나 많냔 말이야. 나중 친구와 일을 그만두고 한참 지나서 뭐 재미난 일 없나 찾다가 발길을 끊은 그곳에 한번 들렸지. 이제는 손님으로 통기타 음악을 들으면서 맥주를 마실려고. 거기서 아직 일하던 전-동료에게 들었어. 그분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그 자리를 미망인이 대산하고 있다고. 거 참 기분 이상하더군. 누군가는 그런 일을 육성으로 듣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볼 수도 있을 테고. 희미하고 옅었겠지만 좋아할 수는 없더래도 미워하지 말껄 가짜 웃음이라도 좀 건네줄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때. 첫인상부터 뒷모습까지 그럴 여유가 있었을 텐데 말이야. 뭐 학교 다닐 때 학년이 올라가면 또 살면서 어디를 가든 괜히 얄미워보이는 사람이 한둘 있긴 마련이만 말이야.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나도 핀잔받을 일이 억수로 많네만 이제야 깨닫는 일도 많아. 뭐 몇 살이 되면 세상 일에 미혹되지 않고, 몇 살에는 하늘의 명을 알게 되고, 몇 살에는 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딱 몇 살이 되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모든 성인이 그렇다고? 순 뻥이야. 생거짓말이라고. 자, 이제 노래가 준비됐으면 틀어주게나. 지금 이 시점에 기분 전환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 아니겠나! (혼잣말) 아 그런데 아까부터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귀에 뭐가 들어갔나? 속도 괜히 더부룩한 거 같은데, 이 허전한 팽만감은 뭐지 뭐지? 아 나 이런 이거 이거 이제 안 아픈 데가 없군 그래. 이런~ ...!
   결국 용의자 X의 선상에도 오르지 못했던 그 얼간이가 그 일을 모두 기획하고 조종했을 줄이야... 오, 이럴 수가! 탐문할 빈틈이 너무 많아서 일하기 싫게 만드는 부류, 전문가를 잘 아는 사람일까 뭘까. 입 아퍼 그런 말들. Y 파일에 기록되고 보고된 녀석의 별칭은 이랬다. <평생 소원이 누룽지> 어머나! 좌우지간 그 환상 머쉰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을까? 발이 달려 뛰어갔나 누가 몰래 뜸어갔나? 이젠 임자도 없을 텐데, 정녕 그대는 어디로 가셨나요? 그분 곁으로? 혹시 그곳이 환상관이라면 약속을 지킬 자신은 없지만 편지 하겠노라고 내 마음을 고이 접어 보낼 텐데, 바람에 실어서. 그러나 여기서 잠깐, 혹시 이거 삼각관계가 아닐까? 그분은 그녀를 보고파 하며, 그녀는 환상 머쉰을 타고 환상관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몰락한 영주가 하는 말은 이럴 꺼야. 뭣이야 네가 헤라라도 된단 말이냐, 썩 물럿거라. 애타게 기다리는 그분은 행차하시지 아니하고 웬 미친년인지 말괄량이가 자기가 그분이라고 소리치며 득세를 하고 독무대를 만들려고 발광하는 모습이라니, 보기에 안스럽고 무척 딱하며 매우 불미스러운 일이로다, 그렇게! 꾸밈없이 말해서 거의 완성 단계에 다다렀던 환상 머쉰, 그 어느 르네상스적 인간도 고안해내지 못한 마술상자, 작품에는 있겠지만 실존하지 못할 운명의 그것, 공익을 가져다주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는 커녕 괜히 몽상가와 방랑자 그리고 어설픈 동기부여 업계 후발주자들과 그의 호객들 주머니만 가볍게 만들며 소란을 일으킨 것 같다. 겨우 잠잠해졌어.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그러나 다시 생각나. 잊혀질만 하면. 아 이런 주로 비탄이 즐비하지만 그러나 티끌 만큼의 영감은 겨우 가까스로 건진 듯 하다. 이제 복사기나 프린터기, 자동판매기, 스티커사진 기계, 카페에 있는 커피 머쉰만 봐도 그것, 그분 즉 <환 - 상 - 머 - 쉰>이 떠오르겠군. 아~ 큰일이다 큰일이야.
   다만, 환상관이 산업 폐기물 처리장이 아니기만을 바란다. 오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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