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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93

from 소설 2017. 3. 31. 16:09

   1

   로니는 작곡가다. 한때는 잘나갔다. 팬클럽도 있었고 그를 따르는 여자들도 많았다. 그는 3분의 마법이라는 유행곡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가 쓴 곡들은 하나같이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많은 로니광들이 쉬지 않고 이런 얘기를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고 있었다. 내 인생은 로니의 음악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 라고. 그만큼 그의 명성은 대단했고, 그 멋진 대리석 무늬처럼 신비한 인기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그는 DJ로도 활약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라디오 방송에서 사소한 실수를 했다. 그보다 더 유명하고, 더 어리고, 더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더 재주가 뛰어나고, 더 외모도 뛰어난 어느 슈퍼스타를 조롱한 것이다. 그를 오래 사귄 친구들은 그가 구사하는 특유의 화법과 매우 독특한 농담을 전혀 오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을 모독하지도, 사회를 무분별하게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비판하지도, 관계를 비꼬지도, 듣기에 썩 거북하지도 않았다. 그가 구사하는 언행은 얼핏 들으면 떨떠름하게 들리지만 잘 들어보면 즉 농담의 높은 수준 때문에 듣고 나서 즉시 웃지 못하고 상당히 시간이 흐른 후에 터지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 농담을 친구들은 이해했고 좋아했다. 그러나 대중은 달랐다. 로니와 대중은 친했으나 적어도 친구는 아니었다. 또 당시 분위기가 좀 애매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여러 매체를 통해서 대중들의 불편함을 전달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느 날 집에서 소포도 받았다. 자기 자신의 대형 사진을 펼쳐봤드니 눈이 없었다. 자기를 닮은 인형을 봤는데 뿔이 달려있었다. 자기의 일대기를 다룬 비디오를 봤는데 마지막이 이상했다. 영정사진도 배달되었고, 비석은 물론, 장례식을 연상시키는 꽃이 꽤 오랫동안 집으로 배달됐다.
   로니는 낙마했다. 다만 인기가 식었을 뿐 변한 건 없었다. 오히려 여유를 찾게 되어 더 좋은 것 같았다. 일을 하지 않아도 거액의 음원 수익은 통장으로 꼬박꼬박 입금되었지만 그는 일을 계속했다. 그는 대외적인 활동이 잠잠해진 대신 1분이나 10분 길이의 곡을 써서 각계 재주꾼들에게 그 곡을 팔기도 하고, 선물도 했으며, 광고 전단지처럼 핸드폰 메세지처럼 무차별적으로 선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곡이 너무 잘 써졌기 때문이다. 즉 그의 천재성은 비현실적으로 최고조에 이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로니의 악상이 뚝 끊겨버린 일이 발생했다. 왜냐하면 그의 사무실에 새로 입사한 직원에게 로니는 첫눈에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홀딱 빠지고 말았다. 사랑이 뭐길래! 만약 그가 훨씬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면 갑자기 부닥친 사랑 때문에 없던 재능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그 반대에 해당했기 때문에 역시 그 반대에 걸맞는 현상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일을 너무 많이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약간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좀 쉬는 시간을 갖고 싶었으니까, 둘째 그 모든 환상을 경험했고 아무런 불만도 없었으며 부족한 무엇도 없었고, 셋째 그 사랑이 짝사랑일지라도 너무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순수한 행복에서 물장구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지금 현재 그의 삶은 희극이었고, 세상은 아름다웠고, 인생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흥분되고 짜릿하며 멋진 잔치와도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 축제의 흥취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고, 끝없이 이어질 듯 했으며, 로니는 마침내 만화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의 개인 사무실에 새로 들어온 경리는 이름이 코코였다. 코코는 로니에게 뮤즈였다. 그의 삶은 화려함 대신에 뭐랄까 고귀한 매력을 얻었다고나 할까? 괜히 눈물이 났다. 쉬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어쩜 코코 때문에 로니는 무능력에 가까와진 듯 했으나, 그의 인생은 현 시점이 최고였다. 하루하루는 시간낭비가 아니었다. 그의 사무실도 켜둔 채 잠든 TV가 아니었다. 코코는 요정이었고, 로니는 비운의 천재 작곡가였다. 로니는 그러나, 고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 그런 일을 시도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일 때문에 만난 사이라서 어떤 보이지 않는 선을 지켜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로니는 일단 코코를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져도 이 음악만 있으면 다시 뭐 어쩐다는 그리고리 소콜로프가 연주하는 J.S. 바흐의 평균율을 틀어놓기도 했다. (그 어딘가에서 인상적인 한마디로 시작할 사랑을 예감한다. 이거 누구죠? 와 누구 아니에요? 첫만남이 단지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지만. 먼저 다가섬이란 것은 너무 미묘하기에!) 이어서 스트라빈스키와 프로코피에프가 활동하던 그 즈음 녹음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들려주었다. 그와 같은 미묘한 반응들을 몇몇 살펴보면 금새 사람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2

   「밤의 황제야 밤의 여왕이야?」 샘.
   「남자냐 여자냐 라고 물어보면 되지 그걸 꼭 뭔가 어떤 밤의 문란함으로 포장해서 클럽에서 나와 어떻게 될까, 같은 그런 뒷이야기를 연상시키도록 물어봐야 속이 시원하니?」 로니.
   「내 말은, 늬가 그동안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진짜 그랬다고. 그간, 누굴 좋아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라는 얘기를 너한테서 한번도 못들어봤으니까 하는 말 아니냐. 안 그래? 그러니 내가 오해하지 않게 생겼냐고.」 샘.
   「너무 앞서 간 거 아니니? 원래 남자들끼리 있으면 나 누구 좋아, 그런 말 잘 하지 않잖아? 그게 정상인데 누굴 사랑한다 누굴 좋아한다 그런 말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하냐? 우리가 무슨 연예계에서 잘 나간다면 또 몰라. 또는 사교계에서 관심을 한몸에 받고 만인의 부러움을 산다거나. 그런 거도 아니잖아. 그 애는, 여자야! 여자라고. 나 여자 좋아하는 거 몰랐냐? 그래. 나 여자라면 환장한다. 됐냐?」 로니.
   「네 주변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도 않더니만 어떻게 딱 한번에 사랑에 빠질 수 있지? 신기한데! 뭐하는 친군데?」 샘.
   「우리 사무실 경리.」 로니.
   「뭐? 너네 사무실 경리?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일인데. 늬가 유혹에 넘어간 거야? 잘 생각해봐, 그쪽에서 꼬리친 거야? 너는 유혹에 넘어갈 준비가 되어있었던 거고?」 샘.
   「아 몰라. 그 정도만 알아둬. 아 맞다. 그 향기. 막 화사한 그런 향수가 아니라 내가 사춘기 때 사용했던 여드름 물약 냄새도 났어. 또 막 뭐라 딱 설명하기는 곤란한데 그 어떤 캐롤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뭔가 그런 게 있어. 음. 그렇다니까.」 로니.
   「오~ 얼굴 빨개지는데? 늬가 무슨 사춘기 소녀냐? 오 이거 장난 아닌데! 그녀가 마음에 드니?」 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데. 이미 내 마음을 빼앗겨버렸으니까. 어때, 답변이 마음에 드니?」 로니.
   「평소 같으면, 꼭 그렇게 빈정거려야 직성이 풀리니, 라고 했겠지만 뭐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을 궁금해 하며 세상을 믿는 나이는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줄께.」 샘.
   「너 말 한번 잘했다.」 로니.
   「것 참~ 사랑이 뭐라고! 좋아보인다. 부럽다야~! 행운을 비네 친구. 얼마 후에 차였다며 징징 짜지나 마셔.」 샘.
   로니는 모처럼 친구가 놀러왔는데 사무실에 친구를 들이지 않고 바깥에서 샘과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눴다. 아직 그녀를 친구에게 소개시켜주면 안될 듯한 긴박한 사정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로니는 샘을 서둘러 되돌려보낸 후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서 로니는 코코를 관찰하며 생각했다. 얘는 아마존이 무슨 뜻인 줄 아는 여자일까? 사람을 처음 만날 때마다 항상 이 사람은 어떤 인간형인가 라는 판단을 먼저한 후 친분을 맺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직관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고, 직감이 나중 나서기도 하는 법이다. 또는 정이 먼저 들고 사랑은 한참 나중 나타나는 사례도 있지 않나. 우정이든 사랑이든 나중 생각했을 때 더 애틋하거나 더 비중이 약해보이기도 하는 법이니. 그런데 아마존이 무슨 뜻인 줄 모르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알면서 까먹은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래서 로니는 코코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않기로 했다. 그것의 뜻을. 그러면서 상상을 이어 갔다. 혹시 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사랑해 라는 밀담을 속삭여 보지 못한 쑥맥은 아닐까? 그러다 결국 로니는 혼자 속으로 약간은 건전하지 못한 욕망을 품게 됐다. 기준이 불명확하지만 일단은 그랬다.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그녀의 손금을 봐주고, 그녀의 눈썹을 만져보고, 그녀의 속눈썹을 바라보다...... 그만, 헉! 로니는 여자를 너무 좋아하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로니는 일단 자신의 사랑관과 인생론의 요점을 그녀에게 살짝만 얘기해 보기로 했다. 많이는 피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지루한 남자로 찍힐 테니까. 그 말을 듣고난 후 그녀의 반응을 보면 그녀가 어떤 스타일인지 알 수 있으니까.
   「코코! 사랑은 뭐고 인생이 무엇인 줄 아니? 사랑은 극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 같은 심정, 그게 바로 사랑이야. 그리고 인생은 말이야, 보긴 봤는데 그 결말이 단번에 딱 떠오르지 않은 영화 같은 삶. 그게 바로 인생이야. 알겠니?」
   「네. 알겠어요.」
   뭐야, 얘 뭐지? 로니는 당황했다. 코코는 미끼를 물지 않은 것이다. 코코를 옷으로 비유하자면 기상천외한 속옷은 아니지만 뭔가 예측하기 어려운, 즉 공략이 까다로운 성향의 소유자인 듯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범위는 훨씬 수월하게 좁혀진 거나 다름없었다. 조심스럽게 고상한 척 하느라 뭔가 대처가 어렵다 싶으니까 아마도 앵무새 따라하기를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은 듣지만 마음은 읽는 것이다. 느낄 수도 있고 점지할 수도, 주문을 걸 수도 있는 것 그게 바로 마음이다.
   그날 로니는 집에 가서 일기를 썼다. 마음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쓴 일기는 엉터리였고,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가 쓴 일기는 이랬다.
   !
   그녀는 적극적이었다. 적극적인 여자는 많다. 그러나 그녀처럼 적극적인 여자는 거의 없다. 뭐랄까 그녀는 일생에서 딱 한 명에게만 적극적이라고나 할까? 그렇다. 정말 그렇다. 그녀는 뭔가 달랐다. 많이 달랐다. 이런 여자는 평생 단 한 번 만날까 말까 아니 아니, 이런 여자는 이 세상에서 10년에 오직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하는 그런 여자다. 0은 일부러 하나만 붙였다. 흐흠. 느낌이 왔다. 그녀는 괴짜다. 괴짜인 여자도 많다. 아니, 많으면 안 되나, 여하튼 그녀는 괴짜다. 그런 그녀가 나와 사랑에 빠졌다. 나는 이 여자를 더 알고 싶어졌다. 매사 따분하고 재미없던 삶이 이제 뭔가 신나고 즐겁게 돌변할 것만 같은 예감 때문에 거리에 나가서 발가벗고 춤이라도 추고 싶다. 아니면 선거 유세하는 그런 차를 구해와서 그걸 타고 다니며 마이크를 들고서 한바탕 노래라도 부를까? 여기저기 막 돌아다니면서? 하마터면 진짜 할지도 모르니 참아야겠다. 아무튼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다.
   !


   3

   로니는 사무실에서 그녀와 단 둘이 있었다. 로니는 긴장되어 보였고, 코코는 편안해 보였다. 코코는 로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로니. 우리 집에 놀러갈래요?」
   뭐? 벌써?
   코코가 로니를 데려간 곳은 코코의 집이 아니라 일종의 비밀 작업실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예술 기계라는 기기가 있었고, 거기는 약간 사이비 교습소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예술 기계는 매체를 변환시켜주는 기계였다. 소설 양식의 파일을 넣으면 음악이 나왔다. 음악을 넣으면 소설이 나왔고, 입력이 무엇이냐에 따라 출력은 브랜드 슬로건으로도 광고 문구로도 설정할 수 있었다. 코코는 시험적으로 잘 믿기지 않아하는 로니에게 시연을 선보였다. 로니가 만든 노래의 가사를 예술 기계에 넣으니 출력은 그가 만든 노래가 나왔다. 로니는 처음에는 설마 되겠어 그랬지만 지금은 은근 신기해 하며 그 기계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코코도 좀 더 기분이 좋아졌고, 어떻게 이 기계를 미래에서 데려올 수 있었는지에 관하여 설교를 하고 또 했다. 그런데 설명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고, 로니도 그런 주변 사정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물론 코코가 로니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었을 리도 없다. 로니 이 기계 갖고 싶지 않아요? 라고. 그러니 당연히 로니도 거절할 기회가 없었고, 그 예술 기계의 값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로니는 좀 더 다양한 기계의 작동을 원하는 눈치였고, 코코는 그런 로니의 마음을 부추겼다가 충족시켰다가, 다시 뜸들였다가 주문인지 뭔지 뭔가 반복되는 문구를 각인시켰다가 하면서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예술 기계는 정말 신기한 물건이었다. 입력단에서 각종 매체를 선택할 수 있는데 나머지는 연구 및 개발 중이고 지금은 글과 곡, 소리만 가능했다. 출력단도 그와 똑같았는데 추가 옵션이 있었다. 압축과 확장이라고. 그들은 몇 가지 시험 검사를 더 진행했다. 피카소가 남긴 시를 입력하니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가곡이 나왔다. 살바도르 달리가 쓴 소설을 넣으니 리스트나 리하르트 쉬트라우스가 쓴 듯한 그런 교향시가 나왔다. 앤디 워홀이 남긴 영화 각본을 넣으니 지금 현재 발표되는 단편들과 비슷했다. 인기 없었던 옛날 영화인 코카인 카우보이스의 영화 음악 악보를 넣어봤드니 웬 디스코풍 음악이 나왔다. 지금 당장 발표해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을 듯 했다. 장 콕토의 시를 넣으니 아트락 음악이 나왔고,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음악을 넣으니 상당히 흥미로운 중편소설이 나왔다. 작품성도 있어보였다.
   「로니. 정말 이 예술 기계가 탐나지 않아요?」
   「코코. 고맙지만 사양할께요. 그래도... 되죠?」
   「좋아요!」
   「그렇지만 정말 혼자 알기엔 너무 신기한 물건이군요. 얘가 얼마인 줄 몰라도 제 친구 발렌타인에게 물어볼께요. 혹시 의향이 있나 어쩌나.」
   「아니요. 그건 절대로 안되요.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 생겨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창작 아카데미에서 직접 나설 꺼에요. 사람들은 역대 교황이 누구였나 기억하며 그 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지만 우리도 그런 게 있거든요. 뭐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알려드릴 순 없지만 거기까지만 알아두세요. 그래...주실꺼죠?」
   그들의 거래는 무산됐다. 적정 거래가의 협상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끝나버렸다. 장차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으나 서로 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협상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창작 아카데미는 뭔 말인가? 무슨 다빈치 코드, 장미 십자단 그런건가? 아무튼 이런 다이아몬드 사업 같은 풍미를 엿보이는 뭔가 오싹한 분위기의 만남은 이렇게 끝이 났다.


   4

   로니는 집에서 잘려고 누웠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예술 기곈지 뭔지 때문에 흥분이 가라앉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알게 된 사실을 없던 일로 되돌릴 수도 없었다. 어쩌면 좋은가. 방법은 없었다. 잊어야 한다. 그 이상한 기계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자기는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잘 살고 있었다. 괜히 로니의 마음이 흔들린 건 혹시 코코 때문일까? 모르겠다. 코코가 우리 집에 놀러가실 꺼냐고 하길래 넙쭉, 쫄랑쫄랑 따라갔다가 그의 앞에 나타난 건 멜로나 에로 비디오의 흔한 전개 방식이 아니라 웬 보도 듣도 못한 기계였다니, 뭔가 허전했으나 그렇다고 꼭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불순한 탐욕이 어떻게 단번에 그와 같이 미지의 신비감으로 바뀔 수 있는 건지 참 믿기지 않았다. 지금 당장 집에서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아마 예술 기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겠으나 그것의 정체를 이미 알아버렸는데, 이미 모든 상태는 온전히 기지였는데 그것은 로니에게 언제까지나 미지의 환상 머쉰이었던 것이다. 코코를 사무실에 괜히 들였나? 내일 사무실에 가서 당장 그럴까, 넌 해고야 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은 로니가 생각해도 너무 발칙했다. 로니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평정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살면서 간혹 그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피아노 학원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K.545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번 1악장을 연습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로니는 이미 그 예술 기계의 예비 주인이 되었다.


   5

   로니의 사무실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타미 제임스 & 더 션델스의 I Think We Are Alone Now.
   「오, 로니. 그 노래 좋아하세요?」
   「아니. 별로. 구식이야. 요즘 노래들도 딱 3번 들으면 질려. 그런데 이 노래는 훨씬 많이 들었지. 그러니 좋을 리가 있나. 안 그래?」
   「로니.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어요? 지금 그건 투정이에요 아니면 불만이에요? 게다가 그것은 욕구에 관한 거에요 아니면 환상에 관한 거에요? 말 좀 해 봐요. 이를 악문 채 짓는 그 뚱한 표정은 대체 무얼 뜻하는 것인지를.」
   「아무 것도 아니야. 나 원래 성격이 이래. 몰랐어? 내가 무슨 설마, 솔직-담백하고 시원스럽고 자상하며 친절한 그런 남자로 보이는 건 아니겠지?」
   「어머! 로니가 심술부리는 모습 너무 귀여운 거 있죠? 호호호!」
   로니는 이제 한물간 작곡가가 아니라 어영부영 현역에서 완전 물러난 것처럼 보였다. 기발한 착상은 떠오르지도 않고, 허구헌 날 인터넷에서 야한 사진만 찾아보며 새로운 롤렉스 시계를 살까 말까 고민하며 지냈다. 잠깐, 롤-렉-스? 어려운 사정이길래 목돈을 빌려줬다가 인연이 끊기고 돈도 못 받은 롤렉스라는 친구가 생각났다. 하지만 걔는 떴다. 완전 떴다. 회사가 상장해서 떼돈을 벌었는데 어려웠을 때 지 코흘리며 지지리 궁상맞게 살고 있을 때 도와줬던 친구를 모른 채 하기로 했나 보다. 그런 사람들 많다. 꼭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벤처 캐피탈쪽 일을 해 봐도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됐는데 도움 받고 투자 받은 (십)만 명에게 어떻게 일일이 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사례를 하겠나. 절대 그렇게는 살 수 없다. 냉정하긴 하지만 성공 가도를 달려야 하는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연대)책임과 가속도 외에도 이유는 많다. 그런 경우 딱 뒤집어서 생각하면 된다. 걔가 혹시 희대의 폰지 사기처럼 그쪽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다행이라고! 도움 하나 주고 생색 낼대로 내고 다시 뭔가 받을 대로 받고, 그건 삶도 포부도 뭣도 아니다. 불공정한 거래가 있었으면 정당하게 계산해야 옳은 거고. 한번 바뀐 주객은 감정을 회복하기도 힘들다. 최소한 여기서 탈무드를 인용하지는 말자. 그러니까 그런 사례는 처음에 투자할 때 돈 잃는다 생각하고 투자해야 한다. 본전 생각과 투자, 그건 어떻게 보면 두 마리 토끼다. 현찰은 어디까지나 거래다! 친구고 가족이고 뭐고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절대 없다. 페이스북도 그랬고, 아마존, 구글, 야후, 애플, 트위터, 인스타그램도 다 그랬다. 안 그런 경우는 없다. 다만 안정된 투자 행태가 정착되어 있냐 안 되어 있느냐, 무분별하게 피라미드의 피라미드 방식이 적용되었냐의 차이는 좀 크다. 많이 크다. 물론 규모가 크다 보면 누구는 동물농장 사장이 되고 누구는 희생양이 되어 알카트라스에 갔다 와야 하는 일도 과장하자면, 빈번하다. 좋은 일도 그렇지만 안 좋은 일일 경우도 첫 번째 법칙은 인맥의 인맥의 인맥을 파고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최상위 목표와 최상위 포지션의 사람들만 상대하는 것. 세 번째는 일과나 회사나 지인이나 어느 단위든지 우선 순위 1번만 혹은 2번까지만 해치워야 한다는 점. 네 번째는 최악과 차선을 항상... 이렇게 치자면 인문-교양쪽 베스트셀러는 작심하면 대충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분야 1위 책을 읽어 봐도 별 거 없다. 다 아는 얘기다. 실상 쉽고 잘 읽히기 때문에 자료를 취합해서 간추리는 방법의 아마추어 방식의 책이 제일 많이 팔리지만 그건 대략 그것을 읽는 데 시간을 투자하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또 그 때문에 적이 안심이 되지만 말이다. 살면서 시간 낭비라는 생각과 말을 많이 했던 사람일수록 그런다. 그들은 같은 분야라도 최고만 상대하고 최고만 선택한다. 재수 없다고 느낄 만큼 얄미울 정도로. 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가설을 세워서 그것을 발전시킨 다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실험을 거쳐서 통계가 이렇고 그래프가 이렇다 그래서 결론은 뭐다, 성공한 사람들 10,000명의 공통점과 특징을 나열하여 정리한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꽤 크다. 모르면 젊은 거고. 어리버리하면 그냥 게임 끝나는 거고, 들러리로 살아야 한다. 말은 그런다. 장사치라고. 자기 기분 좋으면 비즈니스맨이라면서 딸랑딸랑, 자기 기분 나쁘면 장사치. 그래도 장사치가 제일 깨끗하고, 장사치가 제일 인자하고, 장사치가 제일 선량하다. 그러나 흠을 하나 잡자면 흉은 아니겠으나 그릇이 작다는 것. 당연하다. 나쁜 일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이치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는둥 뭐라 뭐라 해도 그 누구나 공통된 목적은 사랑이나 행복같은 개념이니까. 정문으로 또 한 우물만 파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일도 있지만, 옆으로 또 얄미움과 손가락질과 시샘과 노이즈 마케팅이나 갖은 책략으로 성공한 반칙왕 또한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주식시장에서 장기 투자라는 것도 그와 비슷하다. 그래서 한방이네 어쩌네 라는 말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진리가 있다. 로또 복권도 있고. 젊은이는 장기 투자를 모르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중 투자의 귀재 누구로 살고 싶다면 젊어서 폼 잡고 하고 싶은 일 하고 연애도 하고 어쩌고 놀고 그거 다 못하는 거다. 거의 포기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다. 일만 하든가 자린고비가 되든가. 그래도 돈 많은 노신사와 가난한 젊은이 가운데 많이들 후자가 어쩐다고 한다. 젊음이 뭔가, 청춘과 스무살이란 말만 들어도 흐뭇한 기분, 그게 바로 생동감 넘치고 활기찬 꽃다운 그것이다. 말은 그래도 실제 생활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어쨌든 로니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코코가 좋은 아침이에요 라고 인사해도 그는 아침이 싫다고 했다. 이건 분명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이었다. 이게 다 어쩌면 그 보잘 것 없는 예술 기계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설마 코코가 사는 집을 구경하지 못한 그 일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로니는 인기도 식고 있고 예술적 재능도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사는 건 재미없었고,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은 커져만 갔다. 그도 한때는 잘나가는 호색한이었고, 꽤 알아주는 수완가였으나 지금은 애타게 지난 날을 그리워하고만 있었다. 가자 회견, 그 기분을 다시 느껴볼려고 일부러 TV를 틀기도 한다. 기억도 안 난다. 사무실에 미러볼이라도 달까? 쓸데없는 일이다. 촌스럽게 클럽에 자주 드나들 수도 없었다. 이젠 허울도 좋지 않고 기쁜 일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로니는 오직 권태에서 벗어나고픈 일념 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는 그 예술 기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보너스로 코코도 따라서 덩달아 오면 좋겠으나 그건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되더라도 몹시 성가실 것이다. 은밀한 동거에 관심 가질 청춘에서 조금 비켜갔다. 그렇다고 애원하다시피 자기가 먼저 코코에게 그 거래의 성사에 대해 운을 띄울 수도 없었다. 귀는 멍해졌고 그는 마침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예술 기계와, 이미,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것도 매우 심각하게.
   한편 코코는 그의 작업실에서 새로운 기계를 만들고 있었다. 작업대 옆에는 책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와 특수 상대성 원리. 영화에 흔히 나왔던 타임머쉰과 그 무슨 아카데미의 비밀을 유추할 수 있는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예술 기계에도 타임 머쉰에도 made by 무슨 아카데미라고 씌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코코는 자기 집이 그곳인 듯 했다.
   어느새 타임머쉰은 완성됐다. 그것은 흡사 놀이공원에 있는 놀이기구와 거의 똑같았다. 기구에 타고, 안전벨트를 매고 헬맷을 스고, 기계가 작동하면 시계 방향으로 돌고, 오르락내리락 큰 원을 그리다 다시 제자리로 와서 다시 도는 그런 놀이기구. 그 기계가 진짜로 사람을 과거로도 미래로도 데려다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으나 일단 타임 머쉰은 완성됐다.


   6

   그러던 어느 날, 코코는 사무실에 친구 팅커벨을 데려왔다. 마치 노는 듯 일하는 듯 잘 분간이 어려운 사무실 분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밖에 나가 함께 식사를 했고, 로니의 뚱한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코코는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한때 잘나가던 유명 작곡가가 아직도 삐져있다니, 그건 온당치 못한 일이었다. 암만 봐도 그들은 예술 기계에 대해서 결단을 내려야만 할 것 같았다. 열띤 감정 대립은 길게 가져가 봐야 결코 좋은 일은 아닌 듯 했다. 아마도 남자란 애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 날 담판을 했다.
   「로니. 그 기계 갖고 싶어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있어도 나쁘지는 않고, 없으면 생각나고 막 그래. 코코, 쑥스럽게 그런 건 왜 물어보고 그러는데?」
   「호쾌하게 마무리 지읍시다. 어른들끼리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구요. 왜요? 예술 기계가 아니라 저를 갖고 싶어요? 그건, 아니죠? 꿈도 꾸지 마세요. 사귄다면 또 몰라도. 하지만 전 아카데미 소속이기 때문에 함부로 누굴 만나고 사귀고 그렇게 쉽게 운신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랍니다. 예술 기계 얘기나 마저 하죠. 얼버무리지 않을께요. 원래 처음 책정된 가격은 한 장이었어요. 또 둘째 조건은 우리 아카데미에 영구 회원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구요. 그러나 아카데미 총수가 바뀌면서부터 그런 제한 사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죠. 이러다 자칫 조직이 와해되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공동체는 상업적으로 변해버렸다구요. 그래서 이젠 어느 만큼 부를 달성했기 때문에 돈은 받지 않아요. 적이 의심스럽다면 알아보실 만큼 알아보셔도 돼요. 그래도 딱히 밝혀질 무엇도 없겠지만요. 그렇지만 조건이 없다고 그냥 무책임하게 기계를 사용하다 고물상에 넘기시면 안되요. 갑은 을에게 뭐라 뭐라, 계약서도 쓰셔야하구요. 뭔지 모를 가능성도 도사리고 있다는 점 감안하시구요. 그렇게 멍하니 듣지만 마시구 뭐라고 말 좀 해 보세요. 왜요? 아니꼬워요? 큰 거 한 장 불러야 하는데 거물 취급해 주지 않아서 기분 나쁜 거예요? 로니가 무슨 드라큘라 백작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솔직히 말해 한물갔죠. 그게 다예요. 그게 다라구요. 그래서 처음에 저 마지막 남은 예술 기계를 놓고 로니와 경합을 벌인 분이 있었죠. 순수예술가! 그런데 그분은 어딘가에서 비밀스런 초대를 받은 후 잠적해버리셨어요. 그래서 꿩 대신 닭이다, 로니가 예술 기계의 주인공으로 낙찰된 거죠. 어때요? 이쯤 되면 서로 손해볼 일 없는 완벽한 거래 아닐까요?」
   「코코. 음 그럼, 어떻게, 칠면조 요리라도 준비할까?」
   로니는 그 즉시 혈색이 좋아졌다. 안색만 봐서는 오늘이 무엇에 대한 첫날밤인 것처럼 보였다. 그 어느 예술적 감흥이 잠재되어 있다가 깨어날려고 약동하는 듯 했다.


   7

   로니는 집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떠오르는 짧은 경구를 예술 기계에 넣어보기로 했다. 그 문구는 이랬다. '누가 자기는 생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속없이 믿지 마라. 그러나 일단 속는 셈 치고 옹호하라. 그리고 지켜봐라. 오래!'  출력된 음악은 바로 다름 아닌 최신 클럽 음악보다 딱 100배 뛰어난 음악이었다. 그는 기분 끝장이었다.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미소를 금치 못했다. 폭소에 이어 또 폭소가 터져서 얼굴 근육이 실룩거렸다. 그는 당장 소셜 네트워크에 공언했다. 다시 활동을 재개하겠다고. 드디여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됐다고.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음악을 들고 다시 나타나겠다고. 그의 각오는 비장했고, 예감은 황홀했으며, 젊음을 불사르는 것으로 모자라 다시 환생한 것만 같았다.
   그런데 기계를 들여놓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예술 기계의 부실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악보 파일을 넣어도 출력물은 싸구려 코메디 대본이 나오거나, 유명한 단편 소설을 넣어도 새 소리나 개 소리만 나왔다. 로니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어떻게 가져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말썽인지 너무도 답답했다. 코코의 그 이상한 화술에 넘어가서 한 장을 주고 얘를 데려왔다면 그는 지금 발끈함으로 모자라 역정으로 씩씩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특유의 간접 화법에 넘어가지 않았다. 나중 그 무임승차의 대가가 어떻게 되돌아올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그랬다. 낌새는 불편했으나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8

   다음 날 로니는 코코에게 예술 기계의 오작동에 대해 설명했다. 그 말을 듣더니 코코는 벌떡 일어섰다. 그것은 추가로 설치해야 할 장치가 나중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에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타임머신은 자기 집에 있다고 했다. 그날따라 로니에게 그녀의 콧수염은 왠지 짙어만 보였다.
   퇴근 후 그들은 코코의 작업실로 떠났다. 그런데 코코가 그랬다. 타임머신은 맨정신으로 탈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호화 별장이 아닌 단골 술집으로 갔다. 그들은 잭 다니엘스를 마셨고, 듀어스 앤 선스도 마셨다. 발렌타인까지는 무리였다. 약간 취기가 올랐을 때 로니는 코코에게 물었다.
   「코코. 설마 타임머신 그거 진짜 있는 건 아니지?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다 애들 장난 같은 소리지. 그럼. 솔직히 말해. 내게 반했다고.」
   코코는 그 말을 듣더니 열띤 어조로 응수했다.
   「로니. 내 말이 장난인 줄 알어? 이 양반 이거 안되겠구만. 쥬라기 시대로 데려가야 믿을 사람이구먼. 로니 너 혼 좀 나야겠어.」
   그들은 코코의 작업실에 도착했다. 저번에 로니는 앞부분까지만 봤는데 오늘은 그 너머로 갔다. 그곳은 꽤 넓직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웬 작은 놀이기구가 하나 있었다. 코코 말로는 그게 놀이기구가 아니라 타임머신이라고 했다. 시간은 어느새 밤 12시 5분 전이었다. 아까 술 마신 후 노래 부르고 나이트클럽에서 춤도 추고 어쩌고 하느라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당사자들이 많이 취한 상태이기 때문에 좀 더 사실만 간추려서 설명하는 게 좋은 듯 하다.
   그들은 타임머신을 탔고, 조명은 끝내줬으며, 음악은 우선 Plastic Bertrand의 Ca Plane Pour Moi가 흘러나왔다. 기분은 환상적이었고, 그들은 세기의 연인인 것처럼 느껴졌다. 노래가 끝났고 타임머신도 멈췄다.
   「뭐야, 다 왔어? 벌써 왔어? 지금이 몇 년인데? 설마 천 단위를 넘은 건 아니겠지?」 로니.
   「우리가 있던 공간에서 7777년 후로 왔어. 혹시 바깥에 나가보면 실망할 수도 있어. 미리 얘기해주는 거야. 타임머신과 미래 세계는 막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지 않아. 그거 다 뻥이거든. 그리고 과학적으로 이론상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지만 우리 조직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잖아. X축 시간, Y축 공간, Z축 변화량에서 X축을 나타내는 그 수치만 바꾸면 이렇게 미래에 올 수 있어. 자, 우리가 머물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아직은 타임머신이 완벽한 상태는 아니니까. 아 증말 내가 늬 말상대나 해주고 나도 참 한심하다. 수많은 미남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나도 슈퍼스타가 되야 하는데 말이야. 안 그러니?」
   뭐가 안 그러니? 아무튼 그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7777년 후의 미래 세계로 나갔다. 어떠했을까? 미래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들은 미래로부터 고무되지 않았고, 미래 세계에서도 그들을 보며 다음과 같이 놀라움을 표시하는 미래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밤 12시가 넘었으니까.
   「아니 여긴 어인 일로......」
   이게 그 찬탄을 아끼지 않을 만한 막 그런 미래 세계인가? 이곳은 그들이 여기 오기 전과 0.7777초의 오차도 없는 그런 공간으로 보였다. 그러나 코코의 말로는 여기가 7777년  후의 시공간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그들은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코코의 작업실 3호실에서 웬 서버처럼 생긴 기기를 하나 챙겨서 다시 작은 놀이기구로 돌아왔다. 로니는 미래 세계가 뭔지도 모르는 채 돌아갈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만취 상태였기 때문에 코코의 기세에 위축되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거기가 진짜 미래 세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코코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들은 로니가 술에서 깨기 전에 서둘러 타임머신에 탑승했다. 엘튼 존인가, 밴 모리슨일까 데이빗 보위일까, 어떤 달콤한 음악이 나왔고 타임머신은 출발했고, 그들은 다시 현재에 당도했다.
   로니는 그냥 어영부영 코코의 작업실에서 미친 척 잘려고 했는데 그 일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집에 가서 잤다.
   다음 날 부품을 예술 기계에 부착한 후 고장난 기계가 잘 작동되는 것을 로니는 확인했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마 숙취 때문은 아니겠지만 무언가 희미한 환청을 듣는 것만 같았다.
   「나야 나~ 코코야 코코라구~!」


   9

   로니는 요즘 즐겁다. 아침에 일어나면 사무실에서 코코의 그 환한 웃음을 마주하며 인사를 나눌 생각에 뿌듯하고, 알찬 하루를 보낸 후 노을이 질려고 하면 집에 가서 예술 기계와 놀 생각만 해도 그의 기쁨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두 가지 재미에 푹 빠져 방긋한 미소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그는 그동안 왜 자기가 슬럼프를 겪었는지 생각해봤다. 한때 히트곡 제조기라는 별칭으로 독보적인 1등을 달리다가 그는 단번에 잊혀졌다. 어느 날 문득 자기가 그걸 다 어떻게 이루었고, 무슨 방법으로 곡을 쓰고, 영감을 어디서 가져와 왜 새벽에 곡을 써야 했는지를 모두 까먹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런 일이 가능하나? 쉽게 납득할 수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하지만 비운의 주인공은 자신이었다. 왜, 왜 그랬을까? 로니는 왠지 예술 기계와 친해졌기 때문인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짐작컨대 자기 사고 방식이 오류를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로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 안에 쌍둥이가 살면서 자꾸 그들끼리 줄다리기를 하는 그런 기분들을 이제는 알 듯 했다. 하나는 은근함을 하나는 확실함을 원하는데 정작 조정되어 작동하는 히트곡 제조기라는 그 육신은 누구 말을 들어야 하냐면서 갈팡질팡하다 보니까 곡이 안 써지고, 곡을 발표해도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은근해야 할 때 확실하면 우정이 삐그덕거리고, 확실해야 할 대 은근하면 노래하는 사랑은 싸우는 사랑으로 변한다. 은근함 대 확실함이 8 : 2인 사람과 2 : 8인 사람이 만나 영원한 사랑을 꿈꾸게 되면 대체로 사랑의 맹세 그 이전에 끝이 나거나 그 이후로 넘어가더라도 진공청소기에 빨려 커피포트로 사는 인생인 경우가 허다하다. 확실함과 은근함은 누구나 알면서도 누구나 오해하기 쉬운 습성이다. 그 비율과 긴장감만 잘 살려도 작품은 반타작은 한다. 손익분기점에 도달은 된다. 먹고는 산다. 먹고 살 정도는 벌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나! 우선 1차적으로는 그렇다. 이 얼마나 뿌듯한 삶의 길조란 말인가! 은근함과 확실함은 잘은 몰라도 엎어졌다 뒤짚어졌다 그러는 모래시계인 것 같다. 그 하나가 100인 사람은 없다. 100만명 가운데 2~3명이나 1명이면 없는 거다. (왜 내겐 아무런 희소 가치가 없느냐는 불만이 있을 수 있음. 괜찮음. 첫째 평범함이 좋은 것이고, 둘째 그대를 모르긴 몰라도 찾고 찾고 또 잘 찾아보면 뭐 하나는 걸릴 테니까. 내 장점을 극대화하거나 내 본 면목을 아는 데 주력하면 됨) 그는 바로 그 둘의 불균형 때문에 사랑 노래가 잘 써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기술적으로는 문제 없었다. 또 사랑 노래가 아닌 다른 주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3분의 마법을 다루는 시장에서 사랑을 노래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외면한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다른 분야도 비슷하다. 사랑이 뭐가 그렇게나 좋다고. 연극도 그렇고 뭐도 그렇고. 참말로 그 놈의 사랑이란!
   평소였다면 그는 이런 생각을 무심코 걷다가 운전하다가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로니에게 딱 하나의 관심사가 무엇인가? 예술 기계다. 그것 때문에 그는 차분히 카운터테너의 노래를 들으면서 복잡한 심상을 정리하고 사무적인 간편한 단순 작업을 하는 듯이 왜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나 라는 일관되고 반복되는 맥락이 바로 쉽고도 선연하게 떠오르더라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비슷한 원리로 그는 소설과 영화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왜 자기는 장편소설과 영화를 비교적 단편이나 수필이나 드라마보다 선호했는지 약간은 알 듯 모를 듯 했다. 소설과 영화라면, 길이로 보면 당연히 장편소설과 수십 편에 이르는 드라마가 한 짝일 텐데 왜 긴 시간 필요없는 영화와 할 말이 뭐 그렇게나 많은 장편소설이 하나의 짝인지를 알 것도 같았다. 또 자기는 왜 장편소설과 영화를 비교적 더 애호했는지도. 재미만 놓고 보면 드라마가 월등히 재밌다. 영화는 어떻게 보면 드라마에게 명함도 내밀 수 없다. 그게 맞다. 영화는 드라마에게 상대도 안된다. 당연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극장에 갈까? 그런데 왜 작품 대사로부터 실생활에 인용하는 무엇은 드라마도 있지만 영화가 많을까? 아닌가, 비슷한가 아무튼! 사람들이 바보이기 때문에?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보가 아닌데 왜 집에서 TV로 드라마를 보지 않고─보기도 하면서─왜 바쁜 몸을 움직여 옛날 사람들처럼 거추장스럽게 가발을 쓰고 치장을 하면서까지 오페라를 보러 갈까, 바로 그것을 약간이나마 잘 하면 알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드라마도 좋고 드라마에 빠지면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며 실재 너무 포근하기 때문에 혼자 보기엔 아까울 수도 있다. 감상적인 작품이라면 썩 달가워하지 않는 마초가 왜 오락을 닮거나 게임과 비슷한 드라마는 좋아하는지가 뭔가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어떤 상남자들은 책이라면 오직 인문-교양이나 자기-계발 분야만 책으로써 인정하는지를 이제 조금 이해할 수도 있을 듯 했다. 속시원히 또 간략히 말해 왜 그런가는 인공지능이 업데이트될 예술 기계에게 물어본 후에 나중 정리하여 블로그에 올리기로 했다. 로니는 이제 자신감이 부쩍 늘었다. 예술 기계에 힘입어서 또는 자기 혼자 독립적으로도 인기곡들을 손쉽게 착착 쓸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술 기계를 약간 손봐서 인공지능을 추가하는 게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그런 공상을 하면서 그는 그날 하루를 보냈고, 그는 집에 가서 밤에 잠을 자면서 꿈을 꿨다.
   꿈에서 로니는 자기가 맡아야 할 역할이 많았다. 줄거리는 뚜렷했다. 중학생인가 초등학생인가 어느 학생이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놀고, 공부하고, 친구 집에 놀러가고. 그런데 그 꿈이 참 특이했던 게 뭐냐면 로니는 꿈에 나오는 등장인물로 모두 변신해서 그 모두를 1인칭으로서 짧은 시간이나마 살아봤다는 것이다. 로니는 꿈에서 12살 아이의 엄마였고, 또 아빠로써 사업가들과 골프도 쳤다. 로니는 12살 아이였다가 녀석이 소풍간 날 우연히 만나게 된 소녀들의 리더도 되어봤고, 그 소녀들 무리의 등번호 3번도 맡아봤다. 녀석이 다니는 학교에서 선생은 물론 이사장으로부터의 외압을 꿋꿋이 버텨내는 교장으로도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교무처 직원으로 일하면서 졸업한지 한참 지난 어느 어른이 문득 그곳에 찾아와서 동문의 연락처를 알고 싶다며 문의하는 그런 아저씨와 대화도 나눴다. 학교 대문을 지키시는 분과 학원의 교무실 경리 아가씨도 물론. 그러면서 그는 각자 개인의 역할을 맡아보니 음 그럴만 하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됐다. 직접적인 꿈의 해석은 그렇고, 로니는 그것에서 파생된 하나의 단상을 좀 더 발전시켜 보기도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너스 1! 보통 인물 유형 하나면 모두 설명된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다. 거기에 거대한 관성, 장구한 시간, 중력과도 같은 거부할 수 없는 자기만의 법칙, 그러면서 발생하는 마찰과 어떤 커다란 일관된 정형성이 추가된 것은 허구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은 시작이나 끝에 뭐라 뭐라 안내말인 붙기도 한다. 붙지 않을 수도 있고. 인물 유형 즉 배역과 그의 인생! 전자는 흔한 현실이고, 후자를 포용했을 때 그것은 작품이 된다. 전자는 드라마고 후자는 영화다. 후자가 왜 중요하냐? 왜냐하면 일단 인물 유형이라는 타고난 캐릭터 하나로도 그 모든 것은 전부 다 해설이 되고 설명이 가능하지만 후자를 놓치면 그것은 평범한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편적인 수다에서 그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후자를 어떻게 이해햐야 하느냐, 이해할 필요없다. 전자만으로 다 설명되는데, 인물 유형이면 완결되는데 왜 그의 인생까지 알아야 하나, 그것은 장르와 매체와 어딘가에 전달되는 교훈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저 후자를 다른 말로 오기나 아집, 철학, 인생관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인물 유형이 그래프에서 시간이 쌓이면 그건 절대 멈출 수 없는 폭주기관차가 되고, 황소가 되고, 불도저가 된다. 그것은 절대 멈추지 않는 탱크가 된다. 멈춤 버튼은 사라져버리든가 눌러도 작동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최고의 성과와 효율과 인기와 부, 대망등 그 모두를 놓쳐도 이미 궤도에 접어들어 익숙해진 방법이 수정되는 법은 있을 수 없다. 훈수 두는 시선으로만 봐도 길이 딱 보이는데 한번 설정된 기존 방법은 변경되지 않는다. 그 무엇으로도. 쉽게 바꾼다면 그것은 일상일 테고,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며 명성이 아닌 무명이자 작은 성공으로 만족해야 하는 부락에 사는 촌부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영화로 다룰 특별함도 없고, 꿈도 처음 품었던 목표도 왜 그리고 어떻게 사는 의미와 함께 재미까지 다 놓치는 일이다. 목숨 같은 자존심도 꺾이는 거고. 범죄-액션 영화에서만 그런지는 몰라도 그 둘이 하나인 경우도 심심치 않은가는 잘 모르겠다. 바로, 그래서 멈출 수 없는 것이다. 흔히들 살면서 누구나 듣는 생활 대사 있지 않나. 인생 한 방이다 그리고 인생 직진이다. 하나 더 있다. 한 우물만 파라. 그만 파도 되는데 굳이 왜 쟤는...... 바로 그런 처지들을 살다 보면 틈틈히 보게 된다. 어느새 관성을 유지하는데서 어떤 환희를 경험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건 아마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수없이 발생하고 반복되는 사례들의 공통된 정형을 분석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이미 정해진 각본이기 때문이다. 대망을 이루지 못했을지언정 그것을 실현하는 모든 원리는 터득한데다가 이미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에 올라서서 문만 딱 열면 되는데, 과정이라는 경험 때문에 벌써 환상 그것을 이미 살고 있고 어떤 이상형을 체감하며 생활하고 있는데 다시 현실로, 그 뭐한 현실로 퇴보하여 시간을 되돌려서 돌아가라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굽어진 시간으로 설명하자면 담배를 피기 전에 나오는 도파민과 술을 마시기 전에 떠오르는 번뜩이는 영감의 발생이 거의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시간이 구부러지고, 때문에 어느 어두운 삶을 살면서 그 과정에 만족하고 그 과정의 항속성이 떨어질까봐 불만족하게 되며, 따라서 그 인생의 처음 목표는 사라진 채 그 삶은 시가를 피울 이유가 없고 한 잔의 술을 마시면서 시인처럼 시를 짓고 가수처럼 노래를 부를 그렇게 여유롭고 새로운 삶을 살 필요가 더이상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말만 들으면 이미 전설이고 돈키호테가 따로 없다. 이것이 개인에 국한된 문제이면 그나마 덜 해로울 것이다. 또는 덜 이롭거나. 가치관이 많이 엇갈린다면 개인 대 개인은 각자 서로의 갈길을 가면 그만이다. 억지로 친교를 유지할 필요가 없이 자기 인생을 살면 그뿐. 그러나 그것이 개인이 아니라 이를테면 좀 더 넓은 개념이라면! 물론 잘 풀리면 스타가 되고, 좋은 경우라면 예술혼처럼 한 분야의 일가를 이루게 되며, 기념비적이면 박물관에, 나쁘면 독선(자기 혼자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일)으로 비롯되어 역사의 어둡고 참혹한 일면을 장식하거나 탕아로써 대하드라마에 등장하게 된다. 독선가의 특징은 고집도 있지만 무엇보다 미안하다 라는 발언을 싫어하기 때문에 거의 그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인이 미안하오 괜찮소 라는 처지를 썩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원래 상남자들, 그분들 수컷 세상이 여자들은 좀 이해가 곤란한 그런 측면이 있다. 그는, 부러졌으면 부러졌지 절대 굽히지 않는다. 그런 유형의 자존심은 매우 불편하다. 그런 극단의 경우 뿐만 아니라 남자 하면 자존심이다. 만족하면 끝이라는 예술가의 자존심이 왜 나쁘겠나. 브랜드 포지셔닝처럼 행동하는 운동선수의 자존심도 만인의 귀감을 산다. 그러나 괜한 자존심은 답답한 일이다. 인간이 꽉 막혀 있으면 답이 없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사람은 각자 다른 존재이며 각자 다른 기준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존심 하면 뭔가 막연하다. 그래서 그 단어를 약간 달리 치환하여 생각해 보면 쉽다. 어떻게? 이렇게! 남자의 자존심 하면 뭘까? 누가 뭐래도 이거 하나는 내가 세계 최고다, 이래 저래 다 필요 없고 전부 다 최하 또는 내가 최고, 이것도 자존심이긴 하나 더 중요한 자존심은 뭐니 뭐니 해도 약점이다. 허세 하면 누구 누구 하면 허세, 라는 말처럼 자존심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약점이다. <자존심 = 약점> 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다른 말로 열등감, 콤플렉스! 절반에 해당하는 질시, 시기, 질투, 선망은 자존심의 친구다. 그러나 자존심의 사랑은 누가 뭐라고 해도 콤플렉스다. (최소한 여기서는) 자존심은 약점이자 콤플렉스다. 내 인생을 얼마나 아끼며 장기적 관점을 잊지 않고 꿈을 잃지 않느냐가 자존감이라면 자존심은 일단은 약점이자 콤플렉스다. 당신이 만약 한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의 약점을 툭 건드려 보면 윤리적으로 애매한 일이지만 일단 효율은 좋다. 효과도 훌륭하다. 허나 조심해야 할 것! 긴말 필요 없이 내 주변을 보자. 여자들은 대체로 친구에게 스스로 자기 약점을 내가 먼저 말한다. 친구의 약점조차 누가 말하든 같이 웃고 같이 논다. 혼자 극성스럽게 잘난 체하면 사이가 멀어지고. 반대로 남자들은 자기 약점이 공론화되면 그건 한마디로 자존심의 훼손이다. 자존심의 훼손은 하루 동안의 상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절교가 될 수도 있고, 그 무엇이 될 가능성도 있다. 남자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수컷 친구에게 녀석이 아파하는 걸, 약한 부분을, 약점과 콤플렉스를, 싫다는 걸 먼저 나서서 줄기차게 화제로 삼거나 웃음을 권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거의 다 그런다. 그런데 참 미련하게도 인생 내내 그 힘든 길을 꿋꿋이 가는 사람도 드물게 있기는 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생을 통해 뒤늦게 깨닫을 것이다. 지치지도 않는다. 지쳐도 전공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농담의 방식을 맞출 때도 됐는데 인생 직진이다. 그런 인간도 자기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접고 꺾고 고개를 돌릴지언정. 그렇지만 그것도 몇 가지로 나뉜다. 내 약점을 친구에게 내가 먼저 말하거나, 내 약점을 친구로부터 듣거나, 내 약점이 분위기에 의해 드러나거나 등등으로 나눠질 것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건 반응이다. 자존심의 민감한 약점이 건드려졌을 때 주지할 반응의 <형식에 대한 분류>는 이것이다.
    1.도둑이 제발 저리듯 밑도 끝도 없이 자기가 막 따따부따 성내는 경우. 때와 장소와 상대에게 적절하지 않게 이유 불문하고 닦달하는 대사가 저절로 등장하는 경우. 아니 왜? 몰라!
   2.내 약점이 나오자마자 발끈하는 경우 (상대의 의중, 그런 거 관심없다. 저 인간이 왜 이렇게 말을 할까, 위선도 호의도 후풍도 모두 무용함. 오직 내 기분따라 세상은 맑기도 흐리기도 아름답기도 우습기까지 할 뿐)
   3.내 약점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었을 때만 (살짝 여리게 또는 강하게 한번으로) 딱 집고 넘어가는 경우.
   4.성격 좋은 친구 또는 호구
   이 뿐만이 아니다.
   자존심 곧 <약점에 대한 반응의 강도에 대한 분류>도 있다.
   1.커피포트 및 독설 (농담으로 씌여지는 간지러운 조롱이 아니라).
   2.주의, 넘어가자 묻지마라.
   3.인정 또는 무관심, 화제 전환.
   4.꽁트! 이것조차 유머로 승화. 곧 진공청소기
   보기가 입력이 어중간한 데 비해 출력이 당사자 행동 편향적이지만 대충 상황을 추정해 보는 건 어렵지 않다. 십중팔구는 아무 문제 없고, 있어도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문제는 롱테일! 극단적으로 담아두거나 극단적으로 발산하거나, 짧은 기간 친하면 괜찮은데 그 기간이 길어지면 무슨 일이 없을 수가 없다. 언행이 가벼운 친구는 사려 깊은 친구가 참다 참다 끝끝내 못 참고 하는 말을 이렇게 묵살한다. 「넌 그걸 그때 바로 말하지 않고 쫌팽이처럼 왜 담아 두고 그랬냐, 뭐하러 모아 두고 그러냐 쫌팽이도 아니고.」 라고. 쫌-팽-이? 언행이 가벼운 친구의 허세가 너무 지나쳐서 그걸 지적하면 녀석 역시 즉시 쫌팽이가 됨! 여기까지는 괜찮다. 얼마든지 괜찮다. 여기까지는 풀면 되는 우정의 일상이고 문제는 그 다음. 그 다음은 속내를 즉시 또 여과없이 말하는 상남자 3번 유형이다. 표독스럽고 포악하며 못난 언행 바로 그 실수는 살면서 틈틈히 반복된다. 그는 부정적인 감정을 전부 다 말로 해소한다. 막 지른다. 앞뒤도 없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딱 지른다. 그러지 않으면 병이 되나 보다. 그렇게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이분은 뭐 그렇게나 싫은 게 많은지... 막 그런 사람에 해당하는 듯 하다. 또 여기까지도 드라마다. 그 다음 더 발전하면 작품의 소재. 떠오르는 모든 느낌과 생각 그 모든 의식을 글로 남기는 극단적인 범죄-액션 장르의 인물 유형도 있다. 그러나 사회성은 완벽하고 사건은 우발적인 사례가 많다. 그 수많은 공통점을 보면 사람은 살면서 어느 정도 가면을 쓰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단짝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 연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또 살면서 어떤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TV와 크면서 보고 들은 여러 정황들을 근거로 따라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을 겪으면 슬퍼하더라 라고 학습했고 그 분위기를 익혔는데 정작 실재 상황의 주인공이 되면 사람은 개별적으로 다를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인간은 알면 알수록 신비하다. 교양과 상식과 기본적인 도덕과 인성등 공통된 어느 범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어떻게 보면 완전 천차만별이다. 이때 발생하는 상호 친밀감을 수치화하기는 어렵지만 저 분류를 참고할 수도 있다. 자존심 즉 약점 반응의 형식에 대한 분류와 강도에 대한 분류로. 어, 음, 가만 있자. 형식 1에 강도 1, 소시오패스다. 형식 2에 강도 1, 사이코패스다. 그외 50 대 50인데 생각나는 사람 많으신가요, 어쩌신가요? 따따부따 산문으로 쓸 게 아니라 엑셀 파일로 정리하여 인문-교양 분야 베스트셀러로 두 마리 토끼를 노려야 하는데 이거 정말 인자한 건지 무지몽매한 건지, 아마도 게으르거나 무능력함 때문인 듯 하다.
   그런데 하룻밤 단꿈을 얘기하다가 화제가 왜 갑자기 동물농장 인생으로 흐를려 그러지? 이쯤에서 이상한 이야기는 멈추고,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우리는 로니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OK! 그의 꿈에서 놓친 게 있다. 곧 보너스 2! 그것은 로니가 자기가 꾼 꿈으로 인해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내가 저 사람 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난 그를 모르는 것이다. 내가 저 사람과 30년간 한 이불 덮고 살거나, 바로 곁에서 오래 지켜봤거나, 단짝으로 오래 사귀어 보지 않은 이상 난 그를 나는 한 사람을 모르는 것이다. 때로는 아냐 모르냐, 에 대하여 법정 드라마처럼 답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로니가 살면서 알았던 3번은 다름 아니라, 그게 바로 무슨 패스였던 것이다. 그래 봐야 100명 중 5명인가 1명이다. 축가를 부를 일도 아니고 선물로 기념할 일 역시 아니다. 동류도 많고 어느 종류는 더 많다. 빛이 어둠을 이기고 글이 칼보다 강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살다 보면 알게 된다. 낮이나 밤이나, 자나 깨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앉으나 서나 그대 생각만 하면서 사는 당신의 오빠도 있겠으나. 원래 승부의 세계와 더불어 어느 바닥이든 좀처럼 장난 같지 않으며 한없이 치열한 법이고, 예술은 모방이 시작이고, 남자는 늑대요 여자는 (불)여우며, 책임을 져야 하는 대표와 사장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랑은 독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례로 유명 브랜드 사장들 가운데 머머 패스, 꽤 된다. 아마 스티브 잡스도. 옛날의 괴팍했던 유명 예술가가 옆집에 산다고만 해도 이거 원~! 어쩌면 소설 같은 삶을 사는 로니의 인생도 조금은 냉혹할 수도 있고, 아마도 예상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거나 어디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정녕 촌스러울지도 모른다.
   로니의 삶은 그 꿈을 꾸기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그 꿈을 꾸기 이전에는 그 유명한 명대사 두 가지를 또 자기 혼자 머리 쓴다고 그는 거꾸로 받아들였다. 그 명대사 둘은 첫째, 절대 뒤돌아보지 마! 둘째, 아무도 믿지마! 거꾸로 할 게 따로 있지 하필 그것을 반대로 인식할 줄이야... 것 참 기특하네. 멍청한 놈! 그래도 늦게나마 알면 된 거다. 다가올 무언가에 대해서 너무 들떠서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달콤한 꿈이라 할 수 있다. 다가올 무언가에 대해서 맑으면 기쁜 예감이고, 바람 불면 직관이요, 느낌 쎄하면 조짐이라 불러야 한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불확실한 어떤 앞일에 대하여 로니가 막연하게나마 부족했던 측면은 바로 의심이었다. 의심하지 않아도 될 일을 의심하면 방황이고, 그것이 습관이 되면 무슨 무슨증에 이어 불행은 곧 당도하게 된다. 어쩌다 그것은 생활이 될 수도 있다. 너무 잘 믿어서 탈이면 인생은 조금 불친절할 수 있을지언정 사랑은 알 수 있다. 허나 그것은 보통 여자가 맡는 역할이다. 남자는 이미 청각 자체에서 진위의 여부가 판단되고 걸러진다. 때문에 역으로 잘 속기도 하고, 허세가 싫어질 수도 허풍쟁이가 부러워질 수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게 뭐냐, 드러나지 않는 것과 얼마 만큼 멀리 보며 다양한 즉 예측 가능한 모든 수를 읽을 수 있느냐-다. 로니가 무슨 불륜 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어쩐지 예술 기계 때문에 이상한 꿈을 꾸었고, 또 그 때문에 타인의 입장을 좀 더 세밀히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뭐라 하냐? 현실에서는 배려고 작품에서는 개연성이라고 한다. 또는 몰입감쯤. 배려? 개연성? 몰입감? 그런 개념 말고 우리는 로니에게 집중하자 그의 인생에. 따라서, 이제 어떻게 될까?
   당장 로니는 생각이 많아졌다. 뭘로도 빠지지 않는 쟁쟁한 인재인 코코가 뭐하러 제발로 우리 사무실에 그것도 경리로써 들어왔을까? 미치지 않는 이상, 바보가 아니면 몰라도 그럴 이유가 없었다. 어불성설이었다. 더군다나 그 대단한 예술 기계를 공짜로 넘겨? 한 장이라 말했을 때 거기에 0이 몇 개 붙는지도 가르쳐주지 않고? 더불어 그 타임머신은 또 뭐고? 이건 뭔가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0

   A.로니집에 있던 예술 기계가 갑자기 사라짐. 녀석이 생명력을 얻어 사람으로 변신했을까? 깜빡 잊고 있었던 계약서. 조항 몇 번이더라. 머머하면 머머해야 한다 라는 세부 조항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았네. 이걸 어쩌나. 그 무슨 아카데미에서 접근해옴. 친구들과 만나서 로니가 술에 취한 날 그는 필름이 끊겼다. 딱 그때부터 얼마 동안의 동영상을 그들이 보여줬다. 그가 동영상에 나오기로는, 예술 기계를 로니가 분석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억이자 매체로 변환하는데 성공했고 그걸 다시 자신에게 주입했다. 그는 계약 파기에 해당. 꾸며진 일은 그렇고 사실은, 로니는 그냥 집에 와서 잠을 잤고, 그때 미래에서 넘어온 정체 불명의 사나이들이 예술 기계를 가져갔음.
   B.사이비 무슨 혐의로 코코가 체포됨. 예술 기계는 또 고장남. 로니 뚜껑이 열림. 로니는 결국 예술 기계를 고물상에 넘김. 로니 친구가 로니 사무실에 놀러와서 같이 시간을 보냄. 다음 날 그 둘은 고물상에 가서 예술 기계에 장착된 비상키를 떼어옴. 곧바로 그들은 코코의 작업실로 가서 타임머쉰에 탑승.
   * A와 B는 로니의 공상이었음.


   11

   로니는 현재의 난관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종잡을 수 없는 경우의 수는 늘면 늘었지 결코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서 상대의 마음조차 전보다 더 파악하기 힘들어졌다. 차라리 빈말에 넙죽넙죽 속아넘어갈 때가 오히려 더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아한 생각마저 냉정히 뿌리칠 수는 없었다. 정말로 우스꽝스럽게도.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가라? OK! 합리적 의심? 좋다! 믿음과 확인은 별개이듯 의심과 의리도 한 바구니에 넣으면 안된다. 그런데 그는 너무 순진했다. 어른이 사는 험한 세상에서 착함과 순박함은 바로 아둔함과 엇비슷한 말이다. 이기주의자로 태어나서 얼마나 이타주의를 포용하느냐가 인생이라면 행복해지기를 원하지만 살면서 맞닥드리는 최소한의 불행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인생이다. 모든 인간이 착하게 태어나서 착하게 끝난다면 뭐가 문제겠나. 허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 세상은 광활하고 복잡하다. 그래서 합리적 의심은 필요하다. 그런데 로니는 뭐랄까 성정이 우직해서 아직 마음이 여렸다. 많이 속고 많이 겪었는데 아직도! 그러므로 그는 합리적 의심 그게 파닥파닥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현실에서 의심 드라마에서 복수 뭐 그런 단어 말고 그 사람 안으로 쏘옥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예술적 경지를 갈고 닦을 심산인 듯 하다. 마치 사랑처럼 그녀를, 오빠를 내 주머니에 쏘옥 넣고 다니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때 마침 샘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가 연예기획사 상무를 그만두어 실업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인데 집에서 놀기는 싫고 너네 사무실에서 신세 좀 지자는 얘기였다. 로니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들은 그런 사이였다. 돕고 도우며, 늬가 잘났냐 내가 잘났냐, 속고 속이며 뽐내고 무시하고, 그러는 한편 어쩌다 스윽 감동시키는. 샘은 쉬는 동안 희곡을 한 편 쓸 계획이라고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코코에게도 연락이 왔다. 사연을 듣고 코코는 로니의 마음을 떠봤다. 저번에 본 친구 있죠 하면서 걔가 뭐라 뭐라 하면서 그 미친년이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늘어놓은 것이다. 로니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 OK, 했다. 코코 역시 짐짓 고맙다며 정신차리게 만들어서 서둘러 내보내겠다며 넌지시 로니의 아량을 추켜세웠다.
   다행히 로니의 사무실은 꽤 컸다. 건평 얼마짜리 빌딩의 2층 전체를 임대로 통채 빌려서 쓰고 있었다. 조그만 중소기업이라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로니는 통 큰 남자였던 것이다. 실제로는 속좁은 남자인가 몰라도. 그렇게 그들은 그 큰 2층 사무실에서 달랑 넷이서 정식 근무를 하게 되었다. 딱히 하는 일 없이.


   12

   한 사무실, 같이 일하는 동료 넷. 로니, 코코, 팅커벨, 샘. 그들은 유달리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고,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게 더없이 친해진 듯 보이지도 않았다. 살면서 전성기는 아니고 과도기라거나 약간 쉬어가는 듯한 한 시절이 있다면 꼭 모두 그때를 맞이한 듯 보였다. 그래서 대번에 첫눈에 반해서 넷이서 사랑의 짝대기를 타진해 보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가운데 로니가 그래도 일종의 암묵적인 리더라고나 할까, 조금은 그 무언가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가 먼저 제안해서 콘써트에 가게 됐다. 결과는 꽝이었다. 가기는 갔다. 공연도 보기는 봤다. 그런데 기대했던 가수가 아니란 게 문제였다. MAROON 5의 공연인 줄 알았고 사무실에서 가까운 장소에서 공연을 하길래 인터넷에서 소식을 보자마자 로니가 야 어때 하면서 제안을 하기도 전에 예매했다. 그리고 일단 어디 갈 데가 있다면서 먼저 애들을 데려갔다. 그래서 그곳에 갔다 오게 되었다. 그러나 공연했던 그룹의 이름이 이상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알파벳 O 한 개는 숫자 0이란 걸 나중 알게 된 것이다. 리메이크 그룹인가 뭔가. 이와 같은 실수를 로니가 한 번 했다.
   그리고 로니는 코코를 좋아하는데 코코는 그런 로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따로 1 대 1 소개팅을 주선해주었다. 로니는 그 자리에 갔다 왔다. 웬만하면 뭐라 하지 않을 그였지만 이번에는 정 못 참겠는지 로니는 코코에게 아주 심하게 면박을 주었다. 이거 사람을 뭘로 보고, 어쩌고저쩌고! 정황상 코코가 뭔가 너무 했었나 보다. 즉 코코는 부정직했다. 그녀는 로니의 떨리는 음성을 모른 채 했고, 영 까다로운 친구를 그에게 소개시켜 준 것이다. 당사자가 매우 민망해 할 정도로.
   샘도 책잡힐 일을 슬슬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이 출근했을 때 사무실에서 팬티만 입고 다스바이더 투구를 쓰고 잠자고 있는 샘을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비명을 질렀고, 건물 경호팀은 총출동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 더불어 샘은 코코의 하트 뿅뿅을 받아주지 않고서 자꾸 팅커벨에게 찝쩍거렸다. 그것은 샘의 판단 착오였다. 왜냐하면 팅커벨은 로니에게 구애하기 위해서 그의 질투심을 유발할려는 목적으로 샘의 호의를 퉁명스럽게 거절했다가 애교도 부렸다가 하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숙적의 라이벌이 겉으로 확연히 드러난 건 아니었으나 물꼬는 터지고 만 것이다. 따분한 일상에 이어 안 풀리는 애정 사업과 지루한 일상과 따분한 사생활로 이어지도록.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영영 축 쳐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각자 사무실이 유쾌한 분위기를 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실수를 예술 기계가 만회할 수는 없었다. 달콤한 변명도 소용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관심을 갖고,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사랑의 전주곡 그 흥도 깨져버렸다. 여지없이. 로니의 자긍심은 한것 위축되었고, 코코의 낭만주의는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들었다. 샘의 패배주의는 사무실에 내내 팽배했으며, 팅커벨의 막연한 동경심과 퇴색한 춘몽은 유령처럼 아무데나 막 활보하고 다녔다. 다, 그들은 모두 불쌍해 보였다. 겉만 말끔했다. 맨발의 청춘인 듯 했다. 항변할 기력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궁지에 몰린 것이다. 아무리 골몰해도 한참을 생각해도 묘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노년의 구름이 그들에게 성큼 다가온 것처럼 다크써클이 짙어져갔다. 급기야 샘은 사무실에서 낮잠을 자다 잠꼬대로 평소에 하지 않던 저급한 대사를 내뱉고야 말았다.
   「이걸 뭐라 하느냐, 완전 맛이 갔다 라고 하는 거야. 알겄냐?」


   13

   그들은 그 크나큰 사무실에서 서로 마주보며 소파에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차분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로니. 그거 꼭 비밀로 해야 하는 건 아니지? 너가 전에 말했잖아. 무슨 예술 기계인가 번역 기계인가 그거 말이야. 너가 아는 무슨 돌아이 같은 말괄량이가 하도 부탁해서 맡아주기는 했는데 골칫거리라고 한 거 말이야. 그거 지금도 쓰고 있니? 작동은 되고? 누군지 몰라도 누가 버릴려다가 널 골탕먹이려고 네게 넘기고 튀었나 보다. 나는 너한테 그 말을 들었을 때 긴가민가했어. 얘가 조금 상태가 안 좋은 건가, 아니면 이제 곡도 안 써지고 음악계에서도 거의 퇴물에 가까워져서 그런가 처음엔 얘가 충격 받은 줄 알았다고. 그거 진짜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맞니? 그 또 뭐야, 무슨 타임머신인가 뭔가도 탔었다며? 걔는 또 누구니? 어떤 미친놈이 시간여행을 한다고 그래? 넌 또 거기 속은 거 아니지? 이미 옛날에 속을 만큼 속았잖냐. 이제 그런 데 걸려들지 마라. 어? 정신 차릴 때도 됐잖아. 예전에 그거 만든 여자가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랬다지 아마? 그래서, 타임머신인가 뭔가는 타봤어? 어떻게 됐는데? 하긴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있을 턱이 있겠어. 혹시나 궁금증을 품은 내가 이상한 놈이지. 안 그래?」
   「샘. 왜 아침부터 쿡쿡 찌르면서 시작하니? 너 정말 타임머신 한번 타고 싶니? 나도 비밀로 할려고 했는데, 코코에게 미안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샘을 거기 태워서 한 1년 후로 그냥 확 보내버릴까? 어때?」
   「어떠긴 뭘 어때? 뭐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거? 애들 장난하니, 그런 게 세상에 어딨어? 동네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겄다.」
   「혹시 모르니까 로니. 저도 그거 태워줘요. 이미 눈치는 약간 채고 있었다만 코코, 넌 어떻게 된 게 너랑 제일 친한 친구인 내게 그런 좋은 일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니? 그러고도 늬가 내 단짝이라고 할 수 있어? 어? 나만 쏙 빼고 너희들끼리 이미 시간 여행을 즐기고 있는 거 아냐? 그거 타면 내가 장래 뭐가 될지, 내가 나중 누구랑 살게 될지, 내가 미래에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다 알 수 있겠네! 안 그래? 와, 재밌겠다. 나도 껴주라, 응? 승낙한 거다! OK! 야, 신난다. 야호! 어쩐지 오늘은 뭔가 기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구. 내 예감은 어떻게 된 게 적중하지 않는 법이 없어. 룰루랄라랄랄라~ 룰루랄라랄랄라~ 우후~ 우후~ 우우우~!」
   「그래. 이참에 우리 다같이 타임머신 한번 타자구. 현실성은 몹시 떨어지지만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볼께. 밑져야 본전이지. 실소밖에 더 나오겠냐고. 혹시 어떡하다가 미래로 가면 좋은 거고. 그렇다고 나만 완전 과거로, 게다가 막 천민이나 역적이나 하인으로 보내지는 말고 말야. 가게만 된다면 내가 박수를 칠께. 거리에서 발가...벗지는 못하겠고 뛰어다니기는 할께. 그럼.」
   대화가 분위기를 타는 동안 내내 가슴 조리며 코코의 눈치를 살살 보던 로니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코코가 이미 샘과 팅커벨을 타임머신에 승선시킬 의도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다 함께 친해졌다는 사실을. 이제 그 비밀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까지. 로니는 꼭 코코가 건성으로 이처럼 말하는 듯한 환영을 보고야 말았다.
   「맘대로 하라 그래.」
   그들은 그렇게 해서 코코의 집에 가서 타임머신도 타 보고, 로니의 집에서 예술 기계를 그경하기도 했다. 별 기대없이 타임머신에 승선하고 탐탁치 않은 시선으로 예술 기계를 봤기 때문에 샘과 팅커벨이 별 반응이 없어야 했으나, 또 그게 마음대로 되나! 샘이 와 멋지다 기분 끝내준다 타임머신, 그러면 또 팅커벨은 이게 그 세계 8대 불가사의에 버금간다는 바로 그 예술 기계구나, 와, 사람들이 왜 예술 기계 예술 기계 그러는지 알겠다~ 막 이러면서 조롱하고 한껏 우스워했다. 당연히 그 말을 들은 코코가 기분 좋을 리가 있나. 로니가 먼 산을 쳐다보는 동안 코코는 속으로 어떤 기발한 작전을 획책하는 듯 보였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뭐 그런 심정이었을까? 코코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막 지금이 대체 몇 년이냐는 둥, 누가 다스 바이더고 누가 엑스맨이냐면서 인공지능 로봇은 대체 어디로 숨었냐면서 깐족은 최상급으로 쉬지 않고 쏟아지고 또 쏟아졌다. 우주여행을 이제 떠나면 되는 거야 뭐야 그런데 세상이 왜 꼭 옛날 언제적 같지, 어? 이와 같은 능청스러운 의문 운운하고 있을 때 마침내 코코는 마음을 굳힌 듯 보였다. 그렇게 그들의 첫 타임머신 비행은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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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코는 모르겠으나 나머지 세 친구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무슨 기계인지 뭔지가 아무런 제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에 안도감과 더불어 일종의 만족감을 느꼈던 것 같다. 사실 그건 누가 봐도 작은 놀이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만들 수가 있겠나. 만약 미스테리라는 게 진짜 있다면 그것을 목도하고 감탄하며 그 신기함을 함께 나누고 어떤 매체로도 옮기고 싶어할 테다. 하지만 그와 같은 동경심의 이면에는 그 미스테리가 가짜라는 것을 꼭 증명하고 싶은 욕구, 그래서 이 세상에 그런 엉뚱하고 불합리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상식을 명철하게 확인하는 데서 뭔가 설명하기 힘든 엷은 희열을 느끼는 기분 역시 모순되지만 동시에 소유한다고도 할 수 있다. 뭐 누가 그렇고 누구는 안 그렇고는 잘 모르겠으나 표면적으로 네 친구들은 모두 아무 탈도 뚜렷한 침울함도 신나는 일도 딱히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최근 동안 이제 그 작은 놀이기구가 아무런 판타지도 스릴러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또 교묘하게 코코가 자꾸 채근하고 은근히 부추겼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규칙적으로 코코의 작업실에 놀러가서 틈틈히 타임머신을 타면서 살고 있었다. 한 번 타고, 두 번 타고, 세 번 타고 계속 탔다. 타고 또 탔다. 그냥 코코의 집에 놀러간 김에 탔고, 음악 듣고 춤추러 클럽에 갔다 나오면서 기분이 좀 서운하니까 또 탔고, 누군가 트럼펫을 불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 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타임머신을 또 탔다. 아주 그냥 생각나면 탔다. 그건 아마 코코가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가한 최면이자 세뇌였던 듯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일하는 사무실 앞에 클럽이 하나 생겼다. 클럽은 클럽인데 무인 클럽이었다. 또한 그 동네가 번화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곳은 무척 한산했다. 따라서 그들이 거기서 놀게 되면 그들은 거의 그곳을 전세낸 기분을 넘어서 그 클럽의 지분을 소유한 임원이 된 듯한 기쁨마저 느꼈다. 왠지 부자가 된 기분 있지 않나. 클럽 이름은 SF였다. 그런데 정말 SF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만 무인 시스템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알아서 돌아갔다. 제 시간에 문을 열고, 그것까지 무인인지는 몰라도 청소도 완벽했으며, 또 끝날 시간이 되면 문도 혼자 닫혔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디든지 연락을 할 수 있고, 손님의 주문도 로봇이 받았다. 클럽의 DJ도 로봇이었다. 무슨 동네에 클럽 하나 생긴 걸 가지고 혹시 그거 작전 아니냐고 의심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들이 함께 타임머신이라는 이름의 놀이기구를 타고, 또 SF에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는 게 어떻게 보면 참 이상한 우연인 것처럼 보였다.
   코코가 직접 또는 기계나 뭔가를 이용해 간접적으로라도 그들을 미래사회로 데려갈 수도 없고, 무슨 요술을 걸 수 없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코코가 아니더라도 이미 수많은 회사들이 그들의 정보와 지식과 취향을 수집하고 있는 현실이다. 넷이서 같이 일하게 된 이후로 누가 그들의 기억을 변조할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일도 없었다. 그렇게 평범하던 어떤 날 그들은 일과를 마치고 노을이 질 무렵 저녁식사를 하러 갈까 하다가 아니다 그냥 클럽에나 가자 하면서 클럽으로 갔다. 빈속에 맥주를 마시고 싶었나 보다.
   그날따라 클럽에는 손님들이 조금 있었다. 그래서 무척 기이한 현상이네 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손님들이 모두 나갔다. 바로 그 순간 다시 입구에서 네 명의 손님들이 클럽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은 코코와 인사를 나눴다. 코코와 아는 사람들인 듯 했다. 거기까지는 정상이었다. 뭐 우연이겠거니 하면서 그냥 지나쳤는데 자꾸 보면 볼수록 그들은 자기들과 닮은 듯 했다. 그러나 그 공통된 혼자만의 생각을 누구 하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코코의 소개로 그들은 인사를 나눴다. 통성명을 통해 알게 된 그 친구들의 이름은 톰과 미미와 로빈과 샐리였다. 그쪽도 남자 둘에 여자 둘이었다. 얘들은 이쪽보다 약 10년쯤 노숙한 것 같았다. 혹시 로니와 코코와 샘과 팅커벨이 10년 후로 넘어오지는 않았겠지. 설마 그럴 리가. 더군다나 이름도 다르다. 그러니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많이 닮았다. 진짜 똑같이 생겼다. 한두 명도 아니고 넷 모두가. 그렇다고 지문이나 DNA를 비교해 볼 수도 없었다. 또 누구 하나 그런 의견을 말하지도 않았다. 이상한 낌새 느껴지지 않아, 그런 말 슬쩍 꺼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들도 이쪽처럼 한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인 듯 했다. 그러나 하나의 프로젝트에 모두 관련된 것 같지는 않았다. 로니 4인방처럼 적당히 알게 됐고 어중간한게 얽힌 인연인 것 같았다. 정말 절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모르니 그들이 혹시 미래의 그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말이 안된다. 왜냐하면 흔히 드라마에 나오듯이 내가 미래에 가서, 또는 미래의 내가 현재로 와서 지금의 나를 만난다? 그건 전체 시공간에 유일한 존재가 2명 이상 즉 무한대로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 되므로, 질서가 틀어지므로 그 자체로 억지 설정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공간에 당신이 1명이냐 또는 2명 이상이냐, 라는 말은 이와 같다. 당신이 1명이냐 1뒤에 0이 해변의 모래알 숫자처럼 붙어야 할 정도로 많냐, 그 말과 똑같다. 과학적으로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또는 조건이 붙으면 어쩐다고도 하지만 최소한 허구에서는 당신이 미래나 과거로 간다면 또 다른 당신을 만나는 게 어쩜 말 같지도 않은 일인 것처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렇게 그들과 헤어졌고, 그날도 별일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던 중 분명 아닌 것 같은데 또 확실히 아니라고 소란스럽게 따질 수도 없는 일들이 차츰 발생하는 걸 깨달았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혼자서만 생각했다가 차차 의견을 누군가 먼저 꺼내자 모두들 동의하게 되었다. 그런 일들은 가령 그들이 규칙적으로 가서 노는 코코의 작업실에 있는 타임머신의 작동 방향이 바뀐 점. 또 뭐가 있지? 동네에 보이던 수많은 빨간색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약간은 분홍색이 아닌가 하도록 조금 변했다는 점. 참 많은 색깔이 파스텔톤으로 변했고 원색도 더 많아졌다. 그리고 근처 비즈니스맨들이 넥타이를 항상 매고 다닌다는 것은 기존에 알던 일이었지만 그 멋진 넥타이들이 모두 자크 방식이 대부분이란 점. 동네 헬스클럽에 사람들이 운동하러 가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지고 간다는 것. 동네에서 제일 장사가 잘 되는 카페의 연주자가 일을 그만뒀고 그 자리를 자동 피아노가 대신한다는 점. 가까운 미술관이 있는데 그곳에는 입구와 출구가 따로 있었는데 무엇이 없어졌는지 아니면 그 둘이 합쳐졌는지는 몰라도 문이 하나만 남았다는 점. 시낭송회의 회원들이 모두 축구부로 옮겨갔고, 축구부 회원들은 축구공 대신 야구공을 추종하는 종목으로 변경했다는 점. 이처럼 쉽게 노출되는 변화 외에 미묘한 변화도 있었다. 예를 들면 코코의 작업실에 있는 타임머신이 작동할 때 흘러나오는 그 주옥같은 명곡들이 점차 점진적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또 개개인에게 인상깊었던 기억을 유추할 수 있는 상징의  존재, 뜻깊었던 장면과 사진의 구도와 각도와 장면들이 시간을 거슬러서 느릿느릿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추억을 회상하도록 하면서 다시 기억이 과거로 돌아가게끔 TV광고에서 금지된다는 잔상 무슨 기법이 적용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신비감이 그들에게 암시되었던 것이다. 그외 또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꼭 그 모두를 코코 혼자서 진두지휘한 것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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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결과? 무슨 결과? 사건의 발단을 말하나 아니면 왜 타임머신은 작동하지 않는가를 말하나. 아니면 예술 기계는 이제 잊혀진 건가? 그 가운데 아마도 즉답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가장 궁금할 수도 또 제일로 뜬금없을 수도 있는 오차에 대해서 알아보자. 무슨 오차냐 하면 타임머쉰의 효과 그 놀라움이 왜 발생하지 않았을까, 바로 그것이다. 타임머신이 작동했으면 결과가 나타나야지 왜 아무런 변화가 없냐고! 타임머신이 엉터리라서 기능이 제구실을 못했거나 제대로 작동했는데 인간들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그 외에 다른 오차가 있었던 것이다. 즉 타임머신이 작동한 후 즉시 그 친구들을 미래 몇 년으로 풍덩 데려다 놓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쩌면 타임머신은 이렇게 작동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코코네 집에 있던 타임머신은 그게 한계였기 때문이다. 곧 타임머신이 탑승객의 몸을 시공을 뛰어넘어 미래 세계로 데려다줄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시공이라는 배경은 그대로 있고 주인공이라는 개체에 해당하는 그들의 마음만 과거로 되돌리는 건 얼마간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팅커벨과 샘과 코코와 로니의 정신연령은 점점 낮아지더니 급기야 10살 아래로 내려가고야 말았다.
   로니는 주로 매일 입버릇처럼 뭐 재미난 일 없을까 라고 했다. 코코는 아 심심해 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 샘은 뭐라 했을까? 아 퇴근하기 싫어 라고 했다. 그리고 팅커벨은 그랬다. 아, 출근하기 싫다. 로니가 코코에게 물어봤다. 그 우리랑 닮은 양반들 있잖아 하면서 그 네 명은 지금 뭐하고 있냐고 물어봤다. 코코가 대답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코코의 음성은 온화한 어조가 아니었다. 또 기념할 만한 일도 없었고, 그들은 어서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 어른들은 아이에게 그런다. 너네들은 어떤 동화책을 읽어야 하고, 너네들이 들어야 할 음악은 동요다 게다가 감동적인 아동극도 많은데 왜 하필 고개를 숙이고 하루종일 게임만 하니 라고 어른들은 말씀하신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들은 착한 아이들인 듯 보였다. 이미 놀라운 천재성이 번뜩인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웬 신세 한탄을 하는 것처럼도 보였으니 사람 헷갈리게 만들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애들처럼 어려진 그들의 마음을 권태가 잠식함을 넘어서서 거의 지배하고 있었으니 그건 바로 때가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무슨 때? 놀이기구, 작은 놀이기구 타임머신을 타야할 시간. 이미 여러번 즐겼던 그 작은 놀이기구를 또 탄다고 상황이 특별히 더 악화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한번 시도해볼 만한 일이었다.
   로니와 코코와 샘과 팅커벨은 코코의 작업실로 갔다. 그러나 왠지 이번에는 바로 타지 않고 막 망설여졌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타임머신에게 심어진 인공지능이 그 친구들을 챙피해 했을까? 그래서 그들이 타임머신의 환심을 사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모를 일이다. 누구도 대답하기 싫어할 그런 답 없는 공상이다. 그렇다고 이미 어려졌으나 어려져도 주입식 교육에 익숙했기 때문인지─주입식 교육도 장점이 많고, 시간 대비 효과도 높고, 주입식 독학이 없으면 인생의 재미도 반감된다─누구 하나 그렇게 물어보지 않았다. 왜 우리가 지금 타임머신을 타야 하지(?), 라고. 그러나 그들의 행진은 멈출 수 없었다. 이미 그건 정해진 규칙이었나 보다. 더불어 오늘따라 타임머신이 더 번쩍거렸고 어쩐지 그들의 마음을 막 잡아끄는 듯한 신기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들이 탈까 말까 쭈삣거리며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만들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저쪽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들은 톰과 미미와 로빈과 샐리였다.
   그들은 코코와 인사를 나눴다. 다른 친구들과도 가볍게 인사했다. 그들은 쉬이 심중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아마 로니와 코코와 샘과 팅커벨이 놀이기구를 타지 못하게 말리려는 의도는 없는 듯 했다. 원래는 그걸 못타게 말려야 하지 않나, 그처럼 예상하게 만들었다가 사람 맥빠지게 만드는 재주가 그분들에게는 있었다. 반전이 없는 것이 반전인 영화처럼. 그래서 샘이 나서서 먼저 물어볼 뻔 하다가 말았다. 아니 왜 우리를 말리지 않는 거냐고, 지금 급박하게 뛰어왔어야 하지 않았냐고, 무엇보다 그 타임머신을 타면 절대 안된다며 성급히 우리를 그쪽에서 떼어놔야 말이 되는 거 아니냐고, 하마터면 샘이 나서서 따질 뻔 했다. 할 듯 말 듯 하다가 정말 거의 딱 따지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일인지는 몰라도 그는 그와 같은 의문점을 표출하지 않고 잘 참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중재할 심판이 나타나지도 않았고, 갑자기 그들이 원래 친했던 것처럼 대화를 활발히 나누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어떻게 어떻게 되어 그들은 모두 함께 클럽 SF에 놀러가기로 했다. 그들은 SF에 도착했다. 그날따라 SF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웬일인지는 몰라도 참 유난스러운 일이었다. 평소에는 파리만 날리던 곳이 어떻게 딱 그들이 함께 놀러간 날 하필... 뭔가 이상했다. 그들은 클럽 음악을 듣고 맥주를 마시며 놀다가 톰과 미미와 로빈과 샐리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느낌이 쎄했다. 감이 왔다. 아차-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깜빡 하고 잊었던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가 이제야 떠올랐던 것이다. 혹시 그 친구들이 우리보다 먼저 타임머신을 타기 위해서 자기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유인한 것일까? 그건 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다시 코코의 작업실로 갔다.
   작업실에 도착했다. 톰과 미미와 로빈과 샐리, 그들은 없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왠지 허탈했다. 이 공허함을 뭘로 매꿔야만 할 것 같았다. 뭘로 그 허무를 충당할지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남은 것은 하나 밖에 없었다. 단 하나, 딱 하나! 이제는, 이젠 정말 끌지 말고 타임머신을 타야할 것만 같았다. 우리들은 타임머신을 타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타임머신을 탔다. 그리고 타임머신은 작동을 시작했다.
   어디서 들어본 듯 들어보지 않은 듯한 음악이 나왔다. 무척 신나고 엄청 즐겁고 완전 흥미로운 그런 음악이었다. 계속 듣고 싶어지는 막 다음이 계속 궁금해져서 어쩔 수 없이 들어야만 하는 바로 그런 유쾌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원래대로라면 그 타임머신은 이름에 걸맞는 아무런 기능을 못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아주 희박한 확률로 딱 이번에만 이상한 기능을 이루어내고야 말았다. 확률 거의 0에 가까웠는데 오직 단 한 번에 성공한 것이다. 소 뒷걸음질치다가 정말로 쥐를 잡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미래 세계에 정말로 도착해버렸다. 그곳은 서기 7,777,777,776년이었다. 소숫점 얼마에서 반내림하면 77억년이었던 것이다. 지구의 수명이 어쩐다니까 혹시 거기는 제2의 또는 제 몇의 지구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당시는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몰랐겠지만 우주 여행이든 뭐든 누릴 수 있는 경이로움은 무궁무진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는 해가 바뀔 시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모든 호사를 모른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어리둥절한 축제의 현장과 하나가 되어 뭐가 뭔지 모르면서 엉겹결에 초 읽기를 따라하고 있었다. 10, 9, 8, 7, 6, 5, 4, 3, 2, 1, HAPPY NEW YEAR~! 이제 시간은7,777,777,777년이 된 것이다.


   16

   바로 여기까지가 무명 블로그에 올렸던 공동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느 기획사가 판권을 샀다. 그래서 드라마로 제작된 것이다. 물론 아직 방송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드라마가 방송되고 알려진 후 인기를 얻어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2탄, 3탄 막 계속 이어지기를 바래야 할까? 그러나 이미 애초에 기대를 접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며 처음부터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역시나 그것은 제작사의 실수로 판명났고, 방송 전에 넘어진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한번 절반의 성공이자 도움되는 실패를 겪었으니까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대신 훗날 그것은 연극으로 제작되었다. 지금 막 공연이 끝났다. 관객들은 하나같이 다들 인상을 험악하게 쓰면서 투덜거리기 바쁜데, 저기 객석 어딘가에서 정반대로 가만히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바로 공연의 원작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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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92

from 소설 2017. 3. 15. 23:54

   1

   「정말 몰라?」
   나는 최근 부쩍 친해진 빵집 사장 크리스로부터 이 말을 듣게 됐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영혼은 그곳에 흐르는 음악 속으로 전이 되었고, 내 육신은 온통 소름이 돋아 순수한 공포심에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곧바로 이어지는 크리스의 상세한 부연 설명은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점점 여리게 소리가 줄어들다가 급기야 묵음에 가까워졌고, 그의 얼굴은 어떠했겠나? 몸은 그대로고 그의 면상은 다람쥐로 보였다. 그동안 등한히 했던 몇몇 마을 소식들이, 개 콧구멍으로 알면서 냉담히 여겼던 만남과 작별 그 가운데 특히 이별이 모두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는 하나의 맥락을 알게 된 것이다.
   소극장, 임시 휴업이었다. 카바레. 영업은 했는데 공연도 없고 친절도 사라지고 물도 안 좋고 파리만 날렸다. 서점은 더 이상 새로운 책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직원에게 가게를 일임하고 사장은 장기 출장을 떠났다고 한다. 꽃집, 문을 닫지는 않았다. 그래서 특별한 사정이 있다거나 유별난 호황이 닥친 줄 알았는데, 물건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없었다. 찻집도 소문이 예쁘장하지 않았다. 낮에는 동네 백수들이 그곳에 모여 이상한 영상을 보고, 밤에는 카드놀이가 벌어지는 듯 했다. 부동산 사장 도날드씨는 세계적인 석학들을 만난다며 출타가 잦았다. 참신한 인문교양서를 쓴다나 뭐라나. 음반 가게 형씨는 난데없이 세계 여행을 떠났고, 정육점 사장은 영화를 찍는다고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정육점에 가도 고기를 살 수 없었다.
   그나마 그건 약과였다. 어떤 곳은 폐업했고, 어떤 곳은 업종을 바꿨으며, 누군가는 도시로 섬으로 떠나갔다. 이사를 하거나 형편이 어려워 집을 팔고 카라반에서 사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저 푸른 초원과 저 춥지만 향긋한 바람이 부는 해변가의 텐트가 모조리 여행객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나는 집에 볼펜이 떨어져서 그것을 사기 위해 옆 마을로 갔다 왔다. 신선한 원두는 도시까지 사러가야 했다. 어느 날 넥타이를 매고 싶어서 인터넷 쇼핑을 했고, 자주 또 가끔 들리던 식당이 거의 휴점 상태였기 때문에 가공식품과 간편 조리 제품등을 잔뜩 사모을 수 밖에 없었다. 사서 쟁이기, 일명 사재기를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 게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동네에 야생 동물의 출연이 잦았고, 부쩍 새떼들의 출몰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모두를 사소하게 봤는데 설마 했는데, 나는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글이 안 써진다며 유난을 떨었고, 괜히 팔베개를 스스로 한다는 것에 가녀린 신경질을 부렸으며, 매사 심심하다며 따분함에 지겨워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화신은 어디 있는 것일까, 나는 왜 사교계의 총아가 될 수 없었나, 차라리 내가 악동 다비드라는 엄한 낭설을 지어낼까, 싸구려 바이올린을 하나 구해 와서 사라진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찾았다며 한밑천 거머쥘 계획이라도 세워야 하냐면서 허구헌 날 공상과 몽상과 친분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일이 모두... 어떻게 그런 일이...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거니 했는데... 내 잔잔한 가슴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고, 이미 동네는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건 모두 더글라스 때문이었다.


   2

   한적한 동네에 무슨 하늘이 맺어준 사랑에 대한 풍문이 나돌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느 요염한 불여우의 꼬리침에 동네 청년들이 모두 이성을 잃어버렸을 리도 없다. 전봇대에 붙여진 광고 문구 같은 연애, 다른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유치한 행위였고,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같은 광고 문구와도 닮은 한 시절 사람을 착각하게 만드는 로맨스이자 레인메이커의 예언에 다름 아닌 일이다. 즉 사랑도 뭣도 아닌 뜬금없이 나타난 노스트라다무스, 바로 순정파 더글라스 기분파 더글라스 신비주의자 더글라스 때문에 뭔가 동네가 음험한 기운에 휩싸였다고 했다. 빵집 사장 크리스가 그랬다.
   보통은 마티니나 위스키 스트레이트, 특별한 경우 에메랄드빛 푸르스름한 색깔의 칵테일을 마실 것이다. 술꾼은. 또는 도박사는. 그런데 그분들의 마성이 바닥났나? 운이 다했을까? 호색가의 말발이 안 먹히고, 모험가는 상사병에 걸려서 역마살이 꺾이고, 노신사는 물론이요 호사가와 평범한 중년까지 롤리타를 짝사랑한다? 동네 돌아가는 게 정상이 아니었다. 개는 토끼풀을 뜯어먹었다. 주로 세잎 클로버만 골라먹었다. 발정난 암코양이는 가출했다. 익히 아는 유명한 일부 그림들의 물감은 매니큐어로 판명났고, 멀쩡한 아저씨를 벗겨 보니 날마다 호피 무늬 속옷을 입고 하이힐을 수집한다고 한다. 이제 알았다. 그이의 전공은 다름 아니라 불행학이었다니, 오 이럴 수가!
   이런 화장실 낙서 같은 일을 모두 더글라스가 기획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더글라스와 요즘 부쩍 친해졌다. 다시 회상해 보니 우리 우정이 돈독해진지도 꽤 됐다. 그러니 나는 바늘 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이 일이 간접적으로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 듯 했다. 어사 덕분에 큰기침한다? 나는 더글라스가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도 몰랐고, 소란만 피우는 말썽꾸러기나 포지셔닝 어중간한 똥개가 될 의도도 없었다. 내 마음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다스 베이더는 나다 라는 길거리 포스터에 끄적거려진 낙서 같은 농담 조차 발설해 본 일이 없었다 나는. 그런데 어떻게 더글라스 때문에... 내 입장이 곤란해졌다. 설마 더글라스가 그 모든 일을 나 때문에? 에이~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러나 그러지 말란 법도 없다. 나는 정말 면목없는 동네 아저씨가 되고 말았다. 염치, 그건 찾아볼 수도 없었고 딱 믿을 수도 없는 통념이었다. 더글라스가 옴므파탈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수수께끼 같은 남자에게는 호기심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여인이 딱인데, 혹시 내가 더글라스에게 더없이 상냥한 숙녀를 소개시켜주지 않아서 그랬나? 하지만 녀석에게 썩 마다하지 않을 만한 기집애를 그냥 스쳐지나가듯 선보인 적은 있다. 아니, 많다. 그러나 더글라스는 신붓감을 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랑의 상처, 어떤 그런 미련 때문에 여자를 멀리하는 사연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하는 행동과 자주 거론하는 화제를 놓고 봤을 때 그는 여자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순수라는 이름의 우유만 마셨고, 순결이라고 씌여진 티셔츠를 입었고, 그의 차도 흰색이었다. 말은 안 해도 꽃은 백합만 좋아하지 않을까? 아마도...보다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데 그는 정말 순진한 남자였다. 그는 거리에서 연인들이 포옹하거나 입맞춤하는 모습만 봐도 얼굴이 빨개졌다. 설마, 원래 빨개? 글쎄올씨다. 모르겠다. 다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하긴 몇 가지 증후가 있긴 있었다. 어느 날 하루는 사진관 주인 팀과 문구점 사장 개리, 커피집 점원 마리아와 담소를 나누며 가볍게 와인을 마실 때였다. 나는 내가 너무 연락을 받기만 하고 내가 먼저 연락한 일은 너무 드문 듯 해서 그때 전화로 더글라스를 불러냈다. 그런데 전화한지 5분 만에 그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러면서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더글라스는 내게 말했다.
   「혼자서 위스키 한 병 마시고 왔어.」
   뭐이? 혼자서 위스키를? 아니, 왜? 나는 뭔가 느낌이 쎄했는데 그냥 모른 척 넘어갔다.
   또 어떤 날은 내가 크리스를 놀리고, 멀더에게 깐죽거리고, 토마스의 수준 낮은 농담에 험악한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 더글라스는 어느 이상한 지점에서 폭소를 터트렸다. 내 표정이 너무 웃기다는 것이었다. 그 절묘한 대응이 너무 예술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나 보고 내가 좋다고 했다. 나도 더글라스를 좋아한다고 했다. 곧 우정으로써! 그러나 내가 더글라스에게 나도 너 좋아, 라고 하기 이전에 더글라스가 내게 먼저 물었다. 형씨는 나 좋지 않냐고. 어머, 이거 뭐지?
   그런데 더글라스도 내게 어느 청초한 분위기의 다소곳한 아가씨를 소개시켜 준 일이 있었다. 그녀는 뭔가 과거를 숨기는지 아니면 응큼한 본심을 감추는 이유 때문인지 너무 일부러 고개를 들지 못하는 척 하면서 눈빛을 교차하면 부끄러운 척 연기하는 모습이 너무 어색했다. 뭔가 느낌이 왔다. 완전 선수 같았다. 그러다 결국 어느 술자리에서, 거기가 게임장이었나? 내가 남자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그녀가 막 안 보는 듯 하며 이쪽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거 왜 그런 어중간한 화장실 간혹 있지 않나. 내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만취 상태로 일을 봤지만 그녀의 뭔가 음험한 심중이 느껴졌다. 얘는 어려운 호박이 아닌 듯 했다. 도도한 꾀꼬리는 아닌 게 분명했다.
   아무튼 그건 별일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일도 없었다. 그리고 더글러스가 동성애자라는 결정적 단서도 은밀한 심증도 뭣도 없었다. 다만 녀석은 내게 물었다. 이렇게 두 가지를. 첫째, 자기가 슬픈 사랑을 경험했다고. 둘째, 나 보고 무엇을 좋아하냐고. 첫째는 너무 상세했고, 둘째는 너무 막연했다. 하지만 첫째는 너무 재미있었고 감동도 느껴졌으며 미련 때문에 그녀를 아직 잊지 못한다는 녀석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걸 어쩌니' 하면서 한없이 구슬펐다. 그리고 마음이 찌릿했다. 또 둘째는 너무 다정했다. 정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다는,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다는 그런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그 두 가지는 보통의 동성 친구를 통해서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경험 못 하는, 느낄 수 없는 그런 분위기의 일이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런 일이 틈틈히 있었다. 아주 드문 정도보다는 좀 더 있었다. 하지만 보통 남자들 세계에서 그런 일은 거의 드물다. 나는 참 생경했다. 학교 다니면서 친한 친구들 많기로는 나는 그래도, 뚱한 자부심일지라도, 상중하에서 상은 됐다. 성장기에 상하 관계에서 학대당한 경험 또한 상중하에서 단연 상이었던 것처럼. 침체된 시절도 있었고 학교에 잘 가지 않았던 때도 있긴 했지만 나 싫다는 친구, 많지 않았다. 나는 인기 반장이나 딱 나서는 친구는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반에서 내가 제일 웃기는 두 남자 가운데 한 명이라는 얘기도 들어봤다. 또 어떤 친구는 중1때 나보고 자기는 내가 (그 친구가 내 이름을 말하면서) 옷을 우리 반에서 제일 잘 입는 거 같다는 말도 했었다. 실재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그냥 중간이었다. 그런데 왜 그랬지... 모르겠다. 또 다른 친구는 나한테서 애기 냄새가 난다고도 했다. 친한 친구가 그랬다. 내가 적극적이지 않아서 그렇지 나는 남자들에게 인기 괜찮았다. 그러나 그건 호기심이나 친근함, 우정, 선을 넘지 않는 브로맨스 같은 의미였다. 다 내 자랑 같은 소리지만 어디까지나 더글라스의 사례를 설명하기 위해서 꺼낸 얘기다. 나도 재수 없다고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경험을 견주어 설명하기 위해서 꺼낸 얘기다. 더글라스가 아니라면 나도 내 입 아프게, 내 글의 어떤 경쾌한 안목과 타인의 우아한 취향을 위해서라도 이런 내 자랑 일색인 얘기는 언급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즉 내가 무디긴 했지만 뭔가 있긴 있었다는 걸 뜻한다는 말씀.
   아, 더글라스는 또 이런 질문도 했다.
   「걸리버 여행기 읽어 봤니? 정독해 봤냐고. 어른이 되고 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그가 자주 들고 다니는 연습장을 어떡하다 보게 됐는데 이런 시인지 낙서인지도 씌여 있었다.
   「전하고 싶은 말, 사랑해요? 불러도 대답 없는 그 이름!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어찌된 운명이란 말인가! 꿈엔들 잊힐 리야. 하지만 보고 싶어도 꿈속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그 얼굴! ...... 행복의 나날은 시작됐다. 불행은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 복숭아나무에서 딸기가 열렸다.」
   그러면서 녀석은 무슨 낭만파 작곡가처럼 내게 이런 멋진 말도 해주었다. 얘는 분명 뭘 좀 아는 남자였다.
   「이 친구야, 욕망에 충실해 봐. 인생의 3분의 1은 잠자는 시간이야. 외국어를 들어 보면 매끄럽게 따라하기는 힘들어도 인사말이 최소 3가지로 나뉜다는 것은 알 수 있어. 아침, 점심, 저녁으로. 아침, 점심, 저녁에 뭐 하니? 밥 먹잖아! 그게 뭐야 식욕이지. 머머 먹고 싶다, 그게 무슨 숨겨야 할 결점이라도 되니? 아무 데나, 아무한테나 막 굴러다니는 호박이라는 능청스러운 말은 모른 체 하기로 하자꾸나. 너, 여자를 안달나게 하는 방법이 뭔 줄 아니? 그건 바로 리비도와 동심을, 낭만과 소탈함을, 꿈 같은 환상과 일상의 진부함을 시시각각 교차해서 보여주며 뜻 밖의 꽃 한송이를 선사해 주어 그녀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 아니겠냐고. 너, 남자가 왜 허세를 부리는지 아니? 실속이 없으니까 그래. 누구는 가만 있어도 온갖 호박과 반짝이는 멋과 눈부신 기쁨이 제발로 굴러 들어오는데, 누구는 호박이 꿈쩍도 안 해. 다 자기를 피해가. 아니면 아무 데나 막 굴러다니는 호박만 걸려. 그래도 땡큐? 넘어가자고. 어쩌겠어? 어쩌긴 억울하겠지! 돈 들고 노력하고 시간 쓰고, 비상한 분별력을 구비해도 될까 말까야. 그러면 그 다음은? (딱) 남은 건 허세야. 허세라고. 아니면 값싼 유들유들함이고. 주인 없는, 내놓은 호박 찾아 삼만리 부류지. 이 친구들은 하루에 술집을 최소 2곳 많으면 20군데 들려. 왜? 호박 찾으러! 누군가에게는 산다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것이라고. 인생의 진리? 관심 없어. 그런 거 일절 없다고. 스티븐 킹? 누군지 몰라. 해리 포터? 애들 장난감이지 그게 뭐 별거냐고 할 꺼야. 그러다 팜므파탈에게 한번 잘못 걸리면 한 재산 탕진하는 거고. 잘 생긴 게 죄악일까? 어떻게 그런 일이! 아니잖아. 아니다고.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미녀를 좋아해. 즉 인간의 기본적 욕구야, 탐미주의라는 것은. 만물의 이치이자 만고의 진리라고!」


   3

   나는 아무래도, 뒤늦게 동네의 소란스러움을 알게 됐지만 이제라도 어떤 도움을 청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전설적인 최면술사에게. 그럼 내가 그분을 알고 있냐, 당연히 모르지. 그래서 나는 만만하고 편한 조니에게 연락했다.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우리 동네를 떠난 친구들이 어떻게 된 일 때문에 떠났는지 그 일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조니는 의외로 신속히 성과를 물어왔다. 처녀가 멋진 신랑감을 용케도 물어오듯이. 그의 최면술이 직접 활용될 일은 전혀 없었고, 정보 계통 일을 다루는 어느 집단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통화를 마친 후 조니를 만나러 갔다. 만났다. 그의 말을 들어 보니 썩 신빙성은 떨어졌으나 그분들이 특별히 어떤 일관된 외압에 의해 직종을 바꾸거나 주거지를 이전한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조니에게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빵집 사장 크리스를 만났다.
   「크리스.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좀 알아봤는데 우리 동네에서 발생했던 일련의 어떤 낙화랄지 이사나 작은 소란 같은 일들은 그저 거의 모두 개인 사정에 의해 벌어진 것일 뿐이라고 하던데. 그리고 독서실 건물 1층과 2층에 목욕탕이 입주할 것이라는 소문도 헛소문이라던데. 말 좀 해 봐, 이 친구야. 뭐 아는 거 없어? 어?」
   「아, 미안! 나도 깜빡 속았어. 점쟁이 영 알지? 알고 보니 그 친구가 퍼트린 낭설에 다름 아니더라고. 나도 긴가민가했다구. 자네도 알지 않나, 그 양반 표리가 있다는 거. 입담은 센데, 예언이 잘 안 먹히니까 일부러 거짓 풍문을 퍼트렸을지 누가 알어? 안 그래?」
   나는 고민에 빠졌다. 왜 거짓말을 했냐고 영을 찾아가서 따질까? 영이 음, 싸움을 잘 하던가? 아니면 오늘 크리스랑 더글라스랑 진탕 마실까 라고. 어쨌든 그보다 괜히 더글라스를 오해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앞으로 녀석을 만나면 괜히 숙연해질 것 같았다. 무턱대고 믿은 나도 바보였고, 그걸 더 자세히 민첩하게 알아본 것은 더 바보 같은 일이었다. 이 때문에 나의 말과 행동이 많아지면 나만 손해볼 게 뻔했다. 그래서 스스로 되뇌었다. 바보처럼 굴지 마셔 라고. 눈부신 미녀의 천사 같은 미소와 맹목적인 짝사랑을 받아줄 수 없다며 행복한 비명을 지를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나도 좀 싱숭생숭했고 심난했던 심정, 인정한다. 괜히 겉멋만 잔뜩 들었다가 충만된 헛바람이 모두 빠져버려서 너무나도 착찹했다. 사랑이나 기쁨, 슬픔, 서운함 그런 감정이 아니라 뭐 늘상 그랬지만 뒤통수 맞은 기분이 약간 들었다. 아니다 아니야. 많이 들었다. 제대로 한 방 먹은 거다. 난 너무 방심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하루 저녁의 불장난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일이... 에이 잊자 잊어.


   4

   나중 나는 더글라스와 단둘이 만나서 듣게 되었다. 녀석의 속마음과 녀석의 성정체성에 대해서.
   「있잖아. 저번에 자네랑 플룻 아카데미 원장이랑 내가 2 대 2로 소개팅 주선하지 않았나. 마이클이랑 자네랑 나간 자리 말이야. 물론 자네한테는 내가 둘러대서 뭐 사업 거절이네 뭐네 라면서 억지로 참여시키기는 했지만 말야. 그때 나온 두 아가씨 가운데 한 명이 실은 내가 잠깐 좋아할까 말까 고민했던 아가씨였어. 그걸, 음, 사랑의 서풍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건 그녀를 희롱하는 것도 아니고, 빈말도 장난도 아니었고, 뭐랄까 법도를 넘어서는 담담한 투정이라고나 할까? 내가 뭔가 못되게 굴고 싶었나 봐. 뭔가 길게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 같은 거. 마음에 들지 않는 키스조차 없이 끝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라.」
   「오, 더글라스! 왜 그래? 그녀와 손만 잡고 자기라도 했니? 괜찮아 괜찮아~. 난 손도 안 잡고 잤던 일도 있어. 다른 사람들도 그런 일 허다하다구. 오늘만 날이니? 사랑과 미움은 그 뭐야, 그래 날씨나 어떤 낙망하는 꿈 같은 상념 아닐까? 꿈은 반대라고 하지 않나. 타성이 반복되면 미지의 행운을 만날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지는 거라구. 음, 아마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는데 그냥 어느 우연 때문에 시작한 거구나? 그치? 맞지?」
   「음. 맞아. 내 첫사랑과 이름 이니셜이 같았거든. 이름의 발음도 비슷했거든. 읽어 봤지? 그에 관한 인문-교양서 한 대목. 그런데 얘는 정숙한 애는 아니었어. 그래서 나도 실망이 컸지. 그래도 남자 많이 만나본 음, 그 어느, 음 아무튼 그러니까 이제 한 남자에게 정착하고 싶어했는데, 결국은 그쪽에서 먼저 그러더라구. 앞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순정 만화처럼 지켜주는 것도 아니고, 멜로 소설의 공식을 항상 깨버리니 뭔가 느꼈나 봐...... 뻔한 남자는 괜찮은데 기념품 판매소 같은 남자는 싫다는 그런 여자 어디 없니?」
   「왜? 여자는 여자로 잊게? 그거 유행 한참 지났는데. 어찌되었든 희망을 갖자구 친구. 널린 게 하트니까.」
   그 일이 있고 나서 난 다시 더글라스와 우정을 회복했다. 내가 다니던 남중-남고 때 친했던 친구들처럼 어떤 일시적인 호기심과 무심결에 부풀어지는 친밀감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듯 했다. 그의 어떤 특별한 낌새와 은근한 분위기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정육점 사장이 부탁한 연적을 추적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우리는 그 일을 즉시 감행했다. 그런데 아마 시내에서 한 블럭이나 따라갔을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또 우리는 문구점 사장이 좋아하는 여인이 옛 남자를 잊지 못한다 그래서 그 남자를 만나러 같이 가기도 했다. 혹시 그쪽에서 우르르 나오면 어떡하냐고 미리 걱정해서 문구점 사장은 하필 어벙하고 비리비리한 더글라스와 나를 데리고 나갔던 것이다. 물론 이때도 별일 없었다.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사랑할 시간은 많았고, 다시 고독에 익숙해졌으며, 립스틱을 선물하는 뭇남성을 시샘하는 생활로 돌아왔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더글라스가 찻집으로 불러서 나가봤드니 새로운 얼굴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졸업 앨범을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5

   더글라스가 가져온 졸업 앨범을 보며 우리는 수다의 꽃을 피웠다. 수줍게, 다채롭게 또 화사하게. 그러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뭔가 새로운 흥미진진한 일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흥미진진? 오오! 아, 흥미진진이라는 별명을 사용하던 블로그 친구가 생각난다. 새침한 척 귀여운 듯 한데 블로그에 얼굴은 절대 노출시키지 않던 그녀, 한때 적당히 친했다. 자기가 무슨 연예인이라도 되는지 꼭 파파라치 신입생이 찍은 듯한 측후면 샷 같은, 뭔가 아주 살짝 안면을 예상하기는 어렵고 뭔가 궁금한 듯 약간 이목구비가 그려질 것도 같고, 바로 그런 느낌의 사진을 올리던 친구가 있었다. 블로그로만. 그리고 비교가 많이 됐다. 그녀는 숨기는 게 많고, 나는 드러내는 게 많고. 그녀는 잠깐잠깐씩 사생활을 노출했다가, 그것도 조금씩만 게다가 사진 위주로, 다시 감추고 지우고 숨기고! 그러나 나는 모두 공개적으로 인문-교양학에 나오는 통계와 그래프를 모방하여 궁금함과 밑줄 긋기를 착착 쌓아나갔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건 내 방식이니까. 흥미진진은 사진을 잘 찍었고, 나는 못 찍었다. 보아하니 학교 다닐 때 공부는 나보다 잘한 것 같았다. 훨씬! 옷도 잘 입고 형편도 나보다 나았는데, 즉 대체로 내 여건보다 모두 뛰어났는데 딱 하나 창의성이 그녀는 나보다 뛰어나지 못했다. (그처럼 십대 시절 내 농구 실력도 그랬다. 일반적인 뛰어남으로 절대 난 최고가 아니었다. 허나 나와 비슷한 친구는 그 어디서도 못봤다. 양손 다 쓰고, 드리블에 골밑 플레이가 오징어나 낙지 같은 타입은. 같은 편이 나한테 자주 속았음. TV 보면서 제일 뛰어난 선수만 그대로 따라하고 똑같이 모방하다가 응용했으니까) 그래 봐야 거기서 거기겠지만. 둘 다 그저 그렇고, 둘 다 직접 얼굴을 보는 친구로 발전할 가능성은 없었긴 했으나. 그 친구는 딱 그대로 요조숙녀였고, 난 딱 그대로 개구쟁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적극적이었고, 먼저 친구를 신청하고 다시 더 친한 친구를 신청하고, 댓글을 달고 관계를 유지할려는 의지가 나보다 앞섰다. 한동안 그 관계가 이어지긴 했으나 먼저 조용히 왔듯이 또 자발적으로 조용히 그녀는 떠나갔다. 어느 낭군님과 오래 사귀다 결혼한 듯 했고, 유명 사진작가 누구 이름을 들먹이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뭔 이야기를 꺼낼려고 이 일을 말했드라... 아 맞다. 그것, 바로 인기! 즉 인터넷 세상에서 소셜 네트워크의 친구가 많은 것, 그 다음에 팔로우보다 팔로워가 많은 것, 내 블로그 글에 댓글이 많이 달리거나 내 블로그가 유명한 것, 등등등. 모두 어떤 더 탁월한 지표를 알고자 할 때 그건 대부분 허상에 불과하다. 마치 베스트셀러가 세월 지나면 거의 100퍼센트 잊혀지듯이. 어차피 댓글 달리는 숫자는 내가 댓글을 다는 횟수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유독 전화가 많이 걸려오는 친구는 또 그 만큼 자기도 전화를 많이 하는 것처럼. 좀 더 유명한 와레즈나 블로그가 덜 유명한 블로그나 와레즈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거나, 상대쪽에서 먼저 접근하는 것에 대하여 많이 굽히고 훨씬 깍듯하고 과도하게 친절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요컨대 더글라스는 그런 가공된 유명함이 아닌 순수한 인기에 더 가까운 친구였다. 쉬운 말로 학교 다닐 때 남자애들이 과격해지고 어른 흉내낼려는 상급 학년 때보다 초딩과 중딩 때 더 인기가 좋았을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또 전체적으로 봐도 그를 따르는 애들이 많았을 듯 했다. 그 관계를 모두 유지할 수는 없으나 뭔가 더 알고 싶어지는 친구였다.
   친구는 둘로 나뉜다.
   첫째! 내가 너보다 더 위에 있다구, 내가 너보다 더 잘났다구, 내가 너보다 더 연봉이 많다구, 너나 나나 아는 거 비슷하지, 내가 너보다 더 어쩌하니 그러면 부러워하지 말든가, 라는 부류가 하나다. 술값은 내가 내는데 명-바텐더는 쟤를 가장 돈이 많을 것 같은 남자로 손꼽다니, 세상에나 이럴 수가! 쟤를 가장 어려 보이는 남자로 손꼽다니, 세상에나 이럴 수가! 이 술집 곧 내일 모레 망하겠네, 바텐더들 눈이 모두 삐었으니 쟤랑 같이 여기에 오면 안되겠구나, 내가 먼저 말한다면 모를까 그런 민감한 사안은 너가 먼저 물어보면 절대 안되는 거라구 넌 왜 그걸 모르니?, 왜냐고? 내가 너보다 서열이 위니까! 내가, 바로 내가 너와 (더) 친하게 지내겠다는데 그걸 거절해? 늬 까짓게?, (어린이일 때나 어른일 때나 동일하게) 우리 동네에 공원이 있는데 뭐하러 남의 동네까지 가서 논데?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구 검소하고 분수에 맞는 생활 그게 정답이야, 그런데, 옆 동네 옆 도시 옆 나라에 뭐하러 갈 필요가 있냐 하지만 자기 사는 동네나 자기의 생활이나 자기의 일체는 썩 내키지 않아 한다는 거, 자기 삶의 환경은 온통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는 것, 어렸을 때 또 살면서 잘난 체─아는 체─있는 체 하는 친구가 있었다면 반격하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렸을까?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세상을 삐툴어지게 보는 것일까?, 무엇보다 부러운데 진다고 생각하니 평생 억울하다는 것, 알고 보면 까무러칠 만한 숨겨진 속내와 욕망과 드러낼 수 없는 야망에 비해 비교적 밤에 침대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꿈을 꾼다는 것, 순수한 인기가 아니라 노력에 기반한 만들어진 인기가 많다는 것 또는 그것마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
   둘째! 다른 친구는 그런다. 그래 늬가 나보다 많이 안다, 우리 집에 즐거운 장난감이 없으니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가는 친구, 어정쩡하면 묻지마 라고 하기, 썩 애매하고 나쁜 일 같으면 친구와 같이 하기 보다 혼자 하는 스타일, (어머나! 그래서 어떤 유부녀는 딴 남자 만나는 사실을 동성 친구에게 딱 잡아떼며 철저히 숨기는 것일지도 모름), 천사의 미소를 부러워하고 근사한 애정의 숨결을 꿈으로 그리고 고상한 교양미를 갖추고자 하는 친구. 그리고 행복의 서막을 꿈꾸고자 하는 친구. 그 때문에 허영심의 풍선을 잡고 신기한 동화의 나라든 외계 행성이든 그 어디로도 떠날 수 있는 친구. 뭔가 미묘하고 많이 까다롭고 매사 내게 유리할 때 치밀하고 꼼꼼하며, 특히 혼자 있을 때 내게 최적화된 조건을 추구하는 친구. 그리고 밤에 잠을 자면서 초현실적인 꿈을 꾸는 친구.
   첫째와 둘째가 혼용된 사례도 있긴 있겠지만 여자친구와 함께 난 어딜까 라는 물음을 듣는 청자의 입장에 처해지면 공개적으로 누구나 둘째를 택하거나 절충선에 걸치고 싶어질 것이다. 아닌 척 해 봐야 진실을 숨길 수도 없고 하니 첫째라고 시원스레 밝히시는 분도 있을 테지만. 그러나,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점! 첫째도 1의 1과 1의 2로 나뉜다는 것! 1의 1은 범상하고 1의 2는 비범하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많이 이상하다. 똑같은 첫째인데 누구는 서로 피하거나 알아서 멀어지거나 모든 것은 일상의 권태로 무뎌지고, 똑같은 첫째인데 누구는 서로 모시고 싶어서 안달복달하고 서로 데려가려고 애걸복걸한다. 똑같은 첫째인데, 어차피 똑같은 첫째인데!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고,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일이다. 불공평해도 어떻게 이 정도로... 당혹감에 치가 떨린다. 첫째는 죄가 아니다. 첫째는 벌도 아니다. 부분적으로 또 달리 보면 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인간의 본성일 뿐이다. 수컷 세계에서는 질서일 테고, 남자 세계에서는 예절이며, 경쟁 사회에서 동기를 부여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떻게 누구는 대환영이고, 누구는 가급적 멀리하고 싶은 못된 심술꾸러기라도 된단 말인가, 이미 어른인데? 그건 아동심리학은 물론 행복의 노래에 있어서도 비보가 틀림없다. 이럴 땐 다감한 교시가 꼭 필요하다. 없던 멘토 만들어야 옳다. 공개적으로 그 원인에 대하여 화제로 삼는다는 것은 무척 옹색한 일이지만 의구심은 풀고 가야 한다. 무턱대고 난 모르겠다면서 바지를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똑같은 첫째인데 왜 천하의 차이가 나는가? 왜냐하면 누군가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가슴이 찡하게 눈물이 핑-돌도록 웃음꽃을 피우게 만드시는 그분은 이처럼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한 번 웃기고 나서 꺾고, 두 번 웃기고 나서 접고, 세 번 웃기고 나서 바로 이때 '내가 최고야 어디 감히 늬까짓게~' 또는 '존(좋은) 말할 때 연예인 싸움 순위 10걸에서 저 빼세요' 라고 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종이 한 장 두께 차이다. 똑같은 완전 똑같은 책인데 하나는 999장이고 하나는 1000장이라서 딱 1장 차이라는 거. 얼핏 들으면 과히 촌평 한번 당황스럽긴 하지만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정답에 근접은 했다. 야, 신난다! 오뉴월 닭이 오죽하여 지붕에 올라갈까. 간절하면 또는 많이 당해 보면 알게 된다. 때로는.
   더글라스에게는 일부러 꼬리를 심하게 흔들어서 눈에 띄는 능력이 아닌 바로 순수한 친화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류는 살다 보면 보통 제껴진다. 나서기 싫어하니까. 또 재능도 그만그만하니까. 곧 '나는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없어'와 어쩌면 비슷한 심정일 수도 있다. 아무튼 더글라스는 그랬다.
   더글라스는 그런 말 들어봤을 것이다. 넌 너무 예리해 라는 말.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성격 참 좋다는 말? 여러 번 들어봤겠지. 이 친구 보면 항상 웃으니까 좋더라, 라는 말? OK! 여자에게 뭘 좀 아는 남자라는 말, 물론이다. 전 오빠가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요 라는 신호, (딱). 그리고 나 사랑해 라는 물음까지도. 그러나 아마도 얘는 널 사랑해 라는 말은 못해봤을 것 같은 남자였다.


   6

   그러다 급히 타올라서 빛나던 광채를 내뿜었던 우정은 가슴에 사무치는 기억으로 남을 만한 숯덩이로 변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더글라스가 본색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나는 더글라스를 충분히 신뢰했다. 그리고 척키2를 믿었고, 앤젤리나를 신임했다. 그래서 더글라스를 만나는 자리에 그녀들과 함께 나갔다. 부담없이 같이 놀고 싶었다. 우리는 더 즐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것도 그냥 나간 게 아니라 척키2는 내 왼쪽 팔짱을 끼고, 앤젤은 내 오른쪽 팔짱을 살며시 부끄러워하면서 결속한 왠지 부자연스럽지만 어쩜 하이튼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모습으로 나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겠나? 참 나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순백의 이미지와 관능의 상징과 순결의 심상까지 모두 간직한 그녀들에게 제1의 오빠라는 왕좌, 그 굳건할 것만 같던 바늘 방석에서 나는 물러나고 마침내, 마침내? 단번에 더글라스가 단 한 번의 깜찍 출연으로 그 새로운 왕자님으로 등극하고 만 것이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됐냐는 얘기하지 않겠다. 보긴 봤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낭만은 떠나갔고, 친구도 뺐겼고, 우정은 변색되어 허구로 판명났다. 행복의 절정은 참극이자 쓸쓸한 현실 부정으로 바뀌어버렸다. 그것도 한순간에! 그 셋을 모두 믿었기에 난 그래서 소개시켜주었을 뿐인데 그런 만남이 있은 후부터 우리가 자주 만난 것도 아니었다. 금새 나 혼자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잘못된 만남인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돌이킬 수는 없었다. 나는 사랑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참고 기다리며 잠시 어쩌다 한눈을 팔다 다시 돌아오면 조용히 다독여주고 단정한 자태로 옆에 있어 주는 것이라고. 사랑이 그렇기 때문에 우정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왜 사람들이 한순간에 눈이 돌아가고, 주부들이 시시한 드라마를 보면서 웃다 울다, 울다 웃다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살짝 부풀리자면 나는 그동안 단짝이 많았고, 과장을 해도 하지 않아도 인기가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 나를 좋아하는 친구, 결과적으로 숱하게 갈아치운 형세가 되는 건가? 어쨌든 현실 비판보다는 사랑의 도피 행각에 더 가까웠던 내 가슴에 쩍 하니 금이 가고 말았다. 내 친한 친구들 가운데는 영 아닌 부류도 있었고, 어디까지나 단역이고 언제까지나 촌닭이며 왠지 영원한 삼류일 것만 같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여자라는 존재를 모를 것만 같은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내 친한 친구들 가운데는 통계를 내자면 영화배우감, 꽤 있었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팔방미인, 적지 않았다. 재담가? 과반수 이상이었다. 달변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친구들 태반이었다. 이빨로만, 말만으로 아주 그냥 그런 친구들 많았다. 무서운 얼굴도 있었고, 난봉꾼도 있었다. 생긴 게 좀 그렇고 말을 못하면 대체로 자연스럽게 멀찍이 띄어졌다. 코메디언과? 코메디언은 코메디언과 친해진다. 부유한 친구? 가난하고 초라한 친구도 친구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래도 여유 있는 애들이 많았던 듯 하다. 운동 선수 부류도 있었고, 아나운서도 있었고, 모두 자기들이 먼저 챙겨주고 자기들이 나보다 훨신 많이 연락했다. 난 남자지만 거의 7번 결혼하고 7번 이혼했던 그런 연예계의 어떤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친한 친구들 숱하게 갈아치웠으니까. 지난 시절을 혼자 떠올려 봤을 때는. 아무튼 그 가운데 공부는 못했어도, 그쪽에 재능은 없었지만 부자집에 잘 생긴 그 어느 친구가 왜 내 실언 한마디에 단호히 멀어졌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지만 왜 사람들은 살면서 매번 헷갈려하고 야속해 하며, 사랑 같은 건 지나가는 개한테나 던져주라고 하지만 실은 사랑을 끝끝내 외면하지도, 끝끝내 포기하지도 못하는지 바로 그게 사랑인 줄 알 듯 모를 듯 했다. 너무나 믿었고, 너무나 사랑했고, 너무나 다정했던 그이가 감쪽같이 날 속였다니, 배신감은 절망으로 바뀌고 체념한 후 달관의 경지에 들어서느냐 아니면 이혼하고 생활비 걱정하며 제2의 인생을 사느냐, 그 절대로 달콤할 수 없는 기로에 서게 되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을 걸고, 다 주고, 몸과 마음을 한 방향만 보며, 빠졌고, 사랑했고, 행복했고, 좋았고, 기뻤고, 즐거웠으며, 짜릿했고, 사랑의 꿈과 행복의 환상은 영원할 것만 같았던, 앞일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지금이 너무 좋을 만큼 마음이 사로잡혔는데 우리는 정말 천국을 뒤흔들었는데 믿을 수 없는 어떤 배신이랄까,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절망을 마주하면 너무 힘들거나 돌아설 수 밖에 없다 라는 사랑의 처절한 뒷모습을 절감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너무 순진했었나? 그럴 리가! 펑펑 울어야 할까? 뭐 그 정도는 아니다. 갈 테면 가라지. 어차피 뭔가 모든 게 내 위주로 흘러가는 게 이상했다. 예감은 미미했으나 조짐이 안 좋았다. 어차피 그녀들의 사랑을 받아줄 수도 없었다. 그렇다. 난 귀찮았던 것이다. 차라리 잘 됐다. 어디 엄한 허풍쟁이나 사는 법을 통 모르는 가난한 예술가보다야 뭘로 보나 썩 빠지지 않는 더글라스에게 그녀들의 미래와 그녀들의 낭만과 그녀들의 허영심을 맡기는 게 훨씬 나은 일이다. 다만 꿈결처럼 멀어져 가거나 드라마같이 내가 먼저 멋지게 소개시켜주고 짝지어 주지 못해서 아쉽긴 했다. 이제 나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가 됐고, 다시 혼자가 됐다. 무슨 이별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 관계는 애초에 어정쩡했다. 그게 다다. 뿐만 아니라 원래 연애는 순수하기 어렵고, 사랑은 믿을 게 못되며, 우정도 사랑의 전주곡이자 나비처럼 가벼운 감정일 뿐이다. 알고 보면 너무 공허하고 하찮기 때문에 모두들 하나같이 그렇게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하는지도 모른다. 내게는 격정 같은 것도 없었다. 저번에 조니한테 이겼지만 이번에는 모두에게 졌다. 지면 진 거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사랑할 시간은 많고, 인생은 길다. 삶의 절반은 작별이다. 무엇보다 내가 속이 없었다. 난 블로그를 쓰고 환상 문학상을 거머쥐었어야 했는데, 그 인간들한테 빠져서 기쁜 내색을 주체하지도 못하고, 애들 마냥 놀 궁리만 하면서 진짜 놀기만 했던 것이다. 사랑은 무엇일까 행복은 무엇일까? 사랑은 꽝이고 행복은 로또 복권이다. 사랑은 왜 사랑일까? 넌 누굴 닮어 그렇게 공부를 못하니 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TV를 통해서) 들었고 알았기 때문에 그런 쓰잘 데 없는 공상에나 빠지는 것이다. 허구헌 날 음악과 문학과 영화와 미술관에? 싱글벙글, 방실거리는 사랑의 기분은 잊어버릴 나이다. 그럴 때도 됐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새로운 아침을 기다려야겠다.


   7

   난 실은 녀석들이, 한 남자와 두 처녀가 어떻게 사이좋게 지내는지 안중에도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진정 내가 열중하는 일은 블로그에 무엇을 쓸 것인가 그게 다였다. 강한 부정은 자칫 강한 긍정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난 진짜 그 녀석들이 날 귀찮게 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내가 원한 것은 딱 하나였다.
   날 좀 내버려둬!
   남자는 둘로 나뉜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동아리에서, 그 어느 공동체에서 그녀들이 좋아하는 그녀들이 애호하는 그녀들이 사랑하는 그 어느 취향과 그녀들의 세련된 안목에 대해 불만과 투정이 엄청 쌓인 남자와 그 정반대인 부류로! 남자는 둘로 나뉜다. 노래 부를 때 바이브레이션이 능숙한 남자와 샤우트 창법만을 고집하는 남자로. 남자는 둘로 나뉜다. 가짜 웃음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남자와 아무리 가짜 웃음을 가장해도 나오는 건 너털웃음뿐인 남자로. 남자는 둘로 나뉜다. 결혼 정보 업체의 어떤 희미한 등급이란 것에 대해 온통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남자와 그것에 무신경한 남자로! 남자는 둘로 나뉜다. 여자친구를 최소 조카 뻘에서만 찾으면서 몸매 좋은 여자를 보면 군침을 흘리고 예쁜 숙녀만 엄청 눈독들이고 어린 여자 아니면 상대를 안 한다고 말은 쳐다도 안 본다고 하지만 실제 그러지는 않는 그러다 두 가지 이상이다 싶으면 그야말로 환장을 하는 그래서 아직도 혼자인 남자,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걸 다 인정하는 건 몹시 껄끄럽게 느끼는 남자와 속시원히 인정하는 남자로! 이건 뭐지? 뭐지?? 자기는 이쁘고, 재밌고, 착하고, 돈 많고, 어리고, 가슴 크고, 굴곡 좋고, 직업 괜찮은 그런 여자를 바라면서 결혼 정보 업체의 그 무슨 등급제가 정육점에 진열된 고기의 등급과 뭐가 다르냐면서 그건 너무 싫다고? 이건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어? 뭐지 이건? 남자는 둘로 나뉜다. 친한 동성 친구와 만날 때마다 항상 과거 만나던 여자 얘기를 입버릇처럼 하는 남자와 아닌 남자로! 주기적으로 과거 알던 여자 이름은 반복되어 등장한다. 누구 있지 하면서. 그건 사랑이 아니라 그냥 엑셀 파일의 데이터인 것 같다. 그런 말을 듣고 있자면. 남자는 둘로 나뉜다. 성격이 한숨 나오는 남자와 성격이 (너무) 좋다는 말을 듣는 남자로! 남자는 둘로 나뉜다. 연애할 때 모든 친구와 연락을 끊는 남자와 아닌 남자로! 남자는 둘로 나뉜다. 내가 최고인 남자와 늬가 최고라고 하면 나는 최고일까 고민하며 의심하는 남자로! 남자는 둘로 나뉜다. 남을 따라한 거 같으면 싫어도 (여자까지?) 싫은 걸 선택하는 남자와 따라하고 흉내내고 모방하며 그녀를 위해서라면 환상에 빠지는 시늉이라도 능히 하는 남자로! 남자는 둘로 나뉜다. 대개 보면 친구들과 만날 때 자기 집 근처에서만 놀려는 남자와 아닌 남자로. 남자는 둘로 나뉜다. 내가 친구에게 많이 져주고 접어주고 꺾어준다고 스스로 자각하며 나는 호인이라고 혼자 자평하는 남자와 자타공인 실제 그런 남자로! 남자는 둘로 나뉜다. 분명 내가 쟤보다 서열이 위인데 내 누나는 친구 누나는 술집 마담은 쟤가 어쩐다라니 이럴 수가 왜 세상은 이 모양인가 술집에서 나이트 클럽에서 아가씨들은 녀석에게만 말을 걸고 녀석에게만 연락처를 주고 녀석에게만 말끔한 호박이 먼저 스스로 알아서 굴러가다니 화가 난다 화가 나, 라는 친구와 그냥 겸허히 또 담담히 그러나 조용히 흐뭇한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는 친구로. 남자는 둘로 나뉜다. 썸타는, 뭔가 관계의 진전이 있을 듯한, 관심이 호감으로 발전하고 애정으로 변하는 그 어느 즈음에 있는 이성을 친구에게 소개시켜 주면 괜찮지 않은 친구와 괜찮은 친구로! 그런데 왜 괜찮지 않을까? 어째서! 왜냐고? 왜냐하면! 첫째, 안 좋은 내 별명과 내 단점과 내 약점과 온갖 악평에다 독설을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쏟아놓으니까. 어차피 알게 될 꺼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나? 그 어려움 포용해주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정들기 전에 미리 헤어지는 게 낫다나? 역으로 입장이 바뀌면 그게 뭐냐고, 예의 좀 지키라고, 무례하게 그럴 꺼냐고, 교양 없게 자꾸 그럴래, 쟤가 나를 뭘로 보겠냐 라고 한다. 왜 괜찮지 않냐 둘째, 반응이 좋지 않으니까. 말수가 현격히 줄어듬, 말은 안 해도 인상이 험악해짐, 표정 아아 못봐주겠음, 결론은 내가 다 미안해짐. 그리고 셋째, 내 여인이 딱 되기 전에 그녀를 친구에게 소개시켜주면 음... 그녀가 날 떠나거나 그녀가 친구에게 가거나 둘 중 하나니까. 남자는 둘로 나뉜다. 어두운 남자와 밝은 남자로. 매사 비꼬고 빈정대며 투정에 짜증으로 일관하는 남자와 부분적으로 때때로 그럴 수도 있는 남자로. 신문을 읽고 TV를 보면 흐뭇한 소식만 있을 수는 없다. 사람 사는 세상 별의별 일이 다 있으니까. 또 지금 세상이 그 옛날처럼 오늘은 뉴스가 없습니다, 그런 몇 차 산업혁명 시절도 아니니까. 방금 말한 어두운 남자, 남자라는 말 대신에 사람이라는 단어와 교체해도 별 탈 없다. 언론으로부터 완전 자유롭기는 힘든 일반인은 적지 않게 간과한다. 무엇을 간과하냐, 적절한 균형 감각과 다양한 넓은 시각과 입체적인 관점을. 왜냐하면 먹고 사는 게 먼저고, 내 처지가 힘들면 매사 모든 일을 비틀어 보고 꼬아서 상대하고, 전부 까칠한 태도로 일관하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 인생의 모토로 자리 잡는 그런 어떤 새로움의 가능성이 바닥난 인생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그 어느 어두움은 인간이 평생 짊어져야 할 운명이다. 왜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냐는 술주정을 닮은 심술과 훼방 같은 생각의 습성을 요목조목 간략히라도 분석하고 넘어가자. 사람이 촌닭과냐 아니냐를 논하는 게 아니다. 절대 아니다. 돈이 많냐 적냐를 따지는 것도 아니다. 절대 아니다. 인기가 많냐 적냐 또한 아니다. 모두 아니다. 그분들 역시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똑같은 교양인이다. 상남자들의 진정한 꿈이 뭔지 아시는가? 그분들의 꿈은 매스컴에 노출될 가능성이 전무한 돈만 어마어마하게 많은 동물농장의 사장이다. 그 얘기 들으면 완전 열광한다. 그런데 실재 세상 모두를 다 가진 듯한 그런 동물농장의 사장은 말 많고 목소리 큰 상남자들의 꿈의 실현 그 예상도와는 달리 생각보다 덜 기쁠지도 모른다. 또 생각보다 정말 행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욕은, 온갖 욕이란 욕은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수장들과 유명인들이 다 얻어듣는다. 정말 영 아니기 때문에 뭇매를 어느 정도 얻어맞아야 하는 각 업계의 몇몇 거물도 있을 것이다. 적지 않을 수도 있다. 설령 그렇더라도 이성이 흥분할 만큼 품위가 잊혀질 만큼 여러 기준들에 미달한 사례도 있을 테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이성과 현대인의 교양에 알맞는 격조는 잃지 않는 게 좋다. 그걸 누가 반대하랴. 다만 선수나 페어플레이나 리그의 체계가 관중의 기대에 못 미칠 수는 있다. 그러나 일단 현업의 시초 그 초심은 좋았을 테고, 당장 지금 이미 유명한데 더 유명해지자고 더 많이 해 먹자고 더 어쩌자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상도덕과 업계 관습과 법과 윤리와 평판은 모두 피를 나눴지만 배다른 형제일 뿐이다. 일종의 신분이란 개념과 더불어 기준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면 함께 사는 부부도 매번 싸우게 된다. 나는 아버지 등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내 모든 남자의 기준은 아버지였어, 그런데 어디 사회적으로 주도적인 연령에 해당하는 남자의 기준을 그렇게 과거로 잡나? 정치적인 단어나 전위적인 예술 용어를 끌어들일 것까지야 없지만 쉽게 말해서 일관된 잣대가 적용되지 못한다는 점만 확인하면 된다. 수많은 사례들을 똑같은 기준으로, 나는 내게 최적화된 주관적 기준을 적용하고 타인은 객관적 기준을... 그러면 안됨. 건강한 비판이 아닌 무분별한 비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 사례에 해당하는 사람을 살펴보면 진짜 그런다. 각각의 사안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일을 삐툴어지게 보고, 삐툴어지게 말하고, 삐툴어지게 받아들이며 살더라. 예를 들어 거대 기업, 그 자본 따져보면 그 투자금 거의 선수들 몫이다. 으쌰으쌰 해 봐야 주인만 바뀐다. 그게 자본의 논리다. 그게 상업이고 경제다. 일단 주식회사는 유명해도 유명하지 않아도 거의 선수들이 장악한다. 주식 보유 같은 게 거미줄처럼 엃혀 있지 않은 브랜드는 거의 없다. 그런데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무엇보다, 알아도 외면한다. 왜? 앞서 나왔듯이 삶의 태도와 인생을 대하는 자세 그 기본이 심술과 훼방과 매사 까는 방식의 투정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비판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다면 그와 같은 부류가 적냐, 아니다. 적지 않다. 쉬운 문제는 아니다. 영화를 보면 나온다. 대학교 문예창작과 수업 시간, 각자 초단편을 제출해서 서로 토의하는데 여학생Z는 자기 작품은 거의 제출하지 않는다. 그런데 남의 작품에 대해서는 완전 신랄하게, 엄청 까칠하게 비난하고 험한 말을 막 퍼부은다. 언제나. 듣기 거북할 정도로. 왜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영화에 나오는 학생Z는 당장 우리 현실의 주변만 둘러봐도 보인다. 누군가의 오빠고, 누군가의 친구고, 회사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 있다. 그분은 만나면 말이 없다. 내 의견이란 게 없다. 그런데 상대의 의견에 대해서는 열이면 열, 다 깐다. 그와 딱 비슷한 것이 떠오른다. 인터넷에 보이는 악성 댓글! 그 태도가 완벽하게 똑같다. 얘는 왜 이렇게 꼬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들 주변에 있나 없나 한번 생각해 보자. 가만히 돌아 보자.   ......(침묵)......   1.영화 주인공 Z    2.악성 댓글    3.(싹 다) 냉소-회의-비관.   어디서 지적질이야 같은 비난 감수하고 지금 3번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알아야 하니까. 1번과 2번은 안 만나 봤으니까 모르지만 3번은 좀 만나 봤기 때문에 몇몇을 표본추출할 만큼은 안다. 3번과 말을 나눠보면 말이 잘 안 통한다는 걸 알게 된다. 말이 잘 섞이지 않는다. 대화가 툭툭 끊긴다. 으쌰으쌰야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방송이 한계다. 물론 드물게 대화가 매끄러운 사례도 있다. 그것은 아주 영특한 두뇌의 소유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3번이 만약 부자다, 모든 게 풍족해도 수시로 외롭다고 한다. 중산층이나 먹고 살 정도만 되도 수시로 그런다. 만약 가난하다, 의견이 곧 말이 없다. 먼저 나서서 어느 사안에 대해 긴 얘기하는 경우가 아예 없다. 딱 1번의 영화 주인공Z처럼 자기 작품은 제출하지 않고 남의 작품은 그냥 전부 다 묵사발로 만들어 버린다. 매사 그런 식이다. 재산에 비례하여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런 몇몇 보기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3의 세계에서도 아주 똑똑하고 능력이 있으면 허세에서 실속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한다. 그래도 허세는 바뀔 뿐 없어지지는 않는다. 또는 불운 때문에 성공이라는 열락의 층위로 올라갈락 말락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범상하고 평범하기 때문에 그냥 허세에 죽~ 남거나, 또는 아예 허세를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돈이 귀찮을 만큼 많은 갑부가 한분 있다고 하자. 알게 모르게 착한 일도 많이 한다. 굉장히 많이 하신다. 그럴지라도 제껴 보면 3번인 경우가 꽤 된다. 천성이 그러니까. 호인은 호인인데 3번인 점,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그분이 기분 나쁠 때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최상책이다. 아이고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라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끔. 그것은 촌닭에서 백조로 거듭난 경우다. 그러나 눈총 받을 일 거의 없다. 일반적인 유명인은 아니니까. 그런데 한 번 촌닭은 영원한 촌닭이다. 그건 진리다. 갑부가 될 뻔한 경우도 있고, 갑부가 된 경우도 있다. 어쨌든 3번이다. 그래서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좀~ 다양하냐. 그래서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만든다. 무엇을? 외적 인격을! 갑부인데 3번인다, 아무래도 외적 인격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반인과 유명인의 중간에 해당하니까. 왜냐하면 어깨가 무거워지니까. 3번도 다양하다. 3번은 남을 잘 만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완벽하게 사회성이 정상이며 인성도 그런대로 윤리적인 경우에도 뭔가 다른 점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타인 앞에서 절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거나, 싫은 사람과는 절대 술이나 커피나 담배를 함께 피우지 않는다. 아부를 잘하는 사람을 매우 질시하거나 반대로 자신이 아부의 왕인 경우도 있다. 아부의 형태는 네 가지로 나뉜다. A.체질상 안함  B.체질상 못함.  C.잘하지만 아부 받는 걸 더 아주 좋아함. 뽐내고 생색내고.  D.인위적으로 필요할 때만 원숙한 기교를 발휘함. A가 2명, B는 1명, C가 2명, D 1명. 가족에서 서열로는 장남 1, 막내 3, 불분명 2이다. IQ! A는 쉽게 말해 100,00(0)명당 1명에 해당하는 천재, B-C-D는 보통이다. 착하다 착하지 않다 친구가 많다 적다, 가 아니라 건조하게 특징을 좀 더 나열해 보자면 이와 같다. 처지를 알고 사람을 이해하고 보면 세상에 나쁜 사람 하나 없다, 그런 말은 지금 흘리자. 3은 무슨 테스트로 쉽게 알 수 없다. 체험하기도 까다롭다. 오랜 관찰과 경험이 필요한 일이다. 아무리 겪어도 여자는 정말 헷갈리는 부분이기 때문에 길게 다루게 된다. 청자도, 독자도, 서술자까지 모두 피곤하게도. 왜냐하면 여자는 너무 순진하기 때문이다. 3번이 무슨 범법자냐? 아니다. 한마디로 악인도 절대 아니다. 그러나 여자는 아하 3번이구나 그걸 모른 체로 아마 할머니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본다. 특히 여자들이 3번으로 착각하는 건 그거다. 완전 상남자, 거친 마초를 3번이라고 본다. 절대 아니다! 절대! 그걸 모른다. 3번이 멀어지고, 타인이 되고, 남남이 되어 과거가 되더라도 절반의 여자에게 3번은 무엇이다? (딱) 우리 오빠다! 어차피 상대적인 기준선 차이라고? 맞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것이 그 뭔가 미세한 차이가 나는지, 그건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백 번 낫다. 아무튼 3번도 존경을 흠뻑 받는다. 3번의 배우자도 행복하고, 3번의 친구도 3번을 좋아한다. 나도 등번호 3번을 좋아한다. 적당히는. 옛날에는 더 좋아했고, 지금은 덜 좋아한다. 나와 남과 분위기에 대한 기쁨과 슬픔의 OX도표에 따라 내 기분은 좌우된다. 들숙날쑥. 나 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한 3번은 한 반에, 한 사무실에, 한 공동체에 있다. 상남자와 3번은 기버와 테이커와 다른 개념이다. 꺼림직한 걸로는 굳이 3번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기분 좋을 때는 3번이 최고이기도 하니까. 방식의 문제가 다를 수는 있어도,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흥할 땐 3번이 최고다. 그런데 여자들이 남자를 알까? 과연,  여자들이,  남자를,  잘,  알까? 알겠지 왜 모르겠나. 하지만 여자들이 정말 잘 아는 남자는 많지 않다. 결혼 전을 봤을 때 여자가 아는 남자는 정말 마음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길게 만나본 남자, 바로 그 남자에 대해서는 여자가 남자를 안다고 말해도 된다. 또 결혼 후는 뭐 다 고개 젓혀지듯이 잘 아실테니 긴 말 필요없고. 그렇다. 그러면 보자. 여자들이 잘 아는 남자가 몇 명인가? 한 손으로 꼽는다. 나이나 뭐 그런 기준등으로 봐도 평균 한두 명 될까 말까 한다. 그렇다. 다시 물어보자. 숙녀에게 또 귀부인에게. 남자를 잘 아시나요 라고. 나보다 잘 아신다면 나랑 한판 뜨자! 늬가 얼마나 잘났냐고 늬가 나보다 얼마나 남자를 잘 아는데 그러냐, 멱살을 잡든 따귀를 날리든 그 뭐라도 능히 할 수 있어야 남자를 잘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맞다. 그게 옳다. 그래서 남자를 잘 안다는 듯한 말은 <나는 남자를 이렇게 추정한다>로 바꿔서 받아들이는 게 좋다. 살아보니 남자는 어떻드라 남자는 뭐다 라는 글? 남자를 뭐라고 추정하고 나는 어떻게 추측하고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게 살짝 변환해서 받아들이는 게 좋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그냥 무턱대고 전부 다 믿고 전부 다 기억하는 것보다는. '내가 아는 남자는 어쨌다, 사랑했던 남자는 그랬다'를 글발로 포장해서 툭 내놓으면 여린 마음의 친구나 젊은이는 그게 최고인 줄 안다. 아~ 이분은 정말 남자를 잘 아시는구나 하면서. 그러다 세월이 흐른 후 나중 그런다. 내가 그때 왜 그랬지 하면서 이분 역시 뒤통수를 벅벅 긁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남자의 인생을 안다, 그래도 나는 남자 경험 꽤 해 봤다, 아 남자 남자여 남자를 내가 모를 수 있나, 그것은 바로 딱 1명이나 단 몇 명의 남자를 안다는 뜻이다. 남자를 한두 명 알고 아직 3번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코끼리 뒷다리를 만져보고 공룡을 봤다는 말이랑 똑같다. 그처럼 엄한 걸 우기거나 예상 밖의 일로 자존심을 내세울 수는 있다. 그러나 인문적 통계와 오랜 인생 경험과 끓어오를 만한 뭔가가 없이 우긴다면 책이 안 팔린다. 팔려도 팔린 걸 박수치기에는 좀 그렇다. 어떻게 보면 헤드라인이 전부다. 그렇지만 신문과 인터넷 뉴스와 범작에 그치는 책이라도 수십 년동안 고밀도의 헤드라인을 챙겨보면 나중 도움은 된다. 어쨌든 한마디로 그냥 유명한 게 다다. 손익 분기점을 넘겨도 극장을 나오는 사람들 표정이 어둡고, 좀 심한 댓글이 달릴 수도 있다. 상당히 거북한 댓글은 보통 그렇지 않을까? 이성보다 감성이 앞섰을 때. 또 아무한테나 막, 아무 때나 막, 시도 때도 없이 막, 자존심이 혼자 날뛰는 호박처럼 제어되지 않고 굴러갈 때 말이다. 진짜 드물게 3번 스타일만 좋아해서 딱 3년씩 10명을 만났던 사랑했던 숙명적 여인이라면 그것은 남자를 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녀에게라면 무릎을 꿇겠다. 절이라도 하겠다. 깨끗이 승복한다. 아니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래. 존경스럽는 것이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안다라... 음... 지금 이게 글이 아니라 강연장의 강연회라고 칩시다. 절반은 하품하고, 3쿼터가 되면 끄덕끄덕하는 사람들이 드물어지다가 꽤 잔다. 4쿼터에는 이미 생각은 침대로 카페로 공원으로 무도장으로 운동장으로, 내일로 다음 주로 가 있을지도 모른다. 일명, 유체이탈! 그러다 강연이 끝나면 웅성웅성 성의껏 박수치고 어쩌고 밖으로 나간다. 나오면서 그런다. 쿼터백이 한마디 하겠지. 거 강연 한번 더럽게 재미없구만 이라고. 음... 그런데 이 쿼터백 뿐만 아니라 거의 모두를 이렇게 말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뭐라고? "그래~ 늬 남자 많이 알아서 좋겠다. 그래 늬 잘났다 늬 다 가져라 늬가 다 해먹어라......" 라고. 이건 뭘까? 이것은 잠재의식 제일 밑에 착 달라붙어 있냐, 아니면 바로 3번이 장기로써 자주 선보이는 간단히 툭툭 던지는 냉소냐, 바로 그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증표다. 남자와 여자만 해도 이렇게 알아도 모르는 불분명한 무언가가 있는데 그런 구분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언어, 지역, 성정체성, 취향, 직업, 정치 이념, 재산, 뭐 한도 끝도 없다. (딱), (골 세러모니)! .........(침묵)......... 그런데 남자도 그 분야가 좀 넓은가? 이거다. 이거라고! 모르면 커피포트로 살아야 할 운명인 것이다. 그것 밖에는 남는 건 없다. 남자도 똑같이 진공청소기, 왜 원하지 않겠나? 여자를 모르면 평생 뚜껑 틈틈히 열리거나 제멋데로 살 수 밖에 없다. 그러지 않는다면 남은 건 하나다. 바로, 재미없게 사는 것! 뭐 딱히 부족한 것 없이 잘 살지만 매사 외롭다고 하는 것! 그 때문에 정말 쓰잘 데 없는 설명이 길어지는 것이다. 도표로 정리해야 깔끔한데 이왕 시작한 거 다시 이어간다. 리더가 되고 싶은 욕구 5/6, 독선적 성향 5/6 (1명은 나서기도 싫고 리더도 싫고 뭐든 꿍하고 따라가기는 한다), 귄위적 성향 5/6, 원만한 사교성과 친교의 넓은 범주 2/6, (혼전) 평범한 연애 경험 유무 2/6, 첫 연애가 첫 결혼 (아마도) 3/6, (기준이 애매하지만) 친해지기 쉽다 0/6, (일에 관하여) 진로 변경없이 오직 한 길만 감 6/6 (로또 당첨등은 예외), (다는 몰라도 대체로) 가정에 충실하다 6/6 (한 진로만 가는 것과 이것을 보면 책임감과 성실성에서는 만점에 가깝다), 절친이 없다 1/6 (그 1명은 형제가 절친이다), 절친이 있다면 절친이 오직 딱 1명인 개체 (아마도) 6/6, 행복한가에 대한 지표의 하나인 2.9013라는 긍정적 비율의 최저점 기준과 비교해 봤을 때 부정적 감정이 월등하다 6/6,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꼬리 칠 타입인가? 아니다. 그러나 여자를 좀 만나봤는가 그건 어떠냐고? 그건 응답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게 진짜 기준선 문제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호박 문제니까! 마음만 먹었다면 저 가운데서 카사노바계는 물론 돈 주앙계의 역사를 새로 쓸 걸출한 물건이 하나 나왔을 테니까. 자, 정상에 거의 다 와 갑니다. 뻥일지도 모르구요. 거의 끝나갈 겁니다. 더 듣고자 보자구요. 누군가 겪은 3의 세계, 3의 외모? 한명도. 자, 기도드립시다, 여러분! 3번은 대부분 학창 시절 인기 없는 경우가 많다. 더글라스 같은 친화력, 있을 수가 없다. 인기가 높지는 않아도 무난한 경우도 있다. 같은 기분파래도 더글라스와는 차원이 다른 기분파다. 분위기 딱 봐서 침울하네? 눈치 없이 옆에 있다가는 된통 얻어듣는다. 그런데 학생 때도 지금도 인기가 많다? 노력에 비례하는 가공된 인기다. 돈이든 재능이든 운이든 뭐든 그 때문이지 엄밀히 타고난 보라빛 소는 아니다. 또 이 부류는 주관이 뚜렷하다. 자존심이 너무 세니까 어느 시간을 함께 하면 무척이나 불편하다. 그리고 3은 완벽한 마초다. 여자는 모르겠다. 3이라는 친구들은 기준이 고무줄이다. 그러니까 재수 없는 친구는 완전 싫어한다. 그래서 매사 불만이 많다. 뭐가 싫으면 일단 지르고 본다. 싫으면 못 견딘다. 야망도 크다. 완전 원대하다. 워워워......! 잠깐 잠깐 잠깐! 싫으면, 뭐라고? 그렇지! 싫으면 못 견딘다. 지른다. 못 참는다 3번은. 3번은 상대의 가슴에 비수를 꼿는다. 툭, (생활) 명대사는 잊혀지지 않게 된다. 그러나, 저자세로 엎드려 있어야 하거나 침체된 상태에서는 과격한 표현은 자제한다. 그것은 감추어진 맹수의 발톱이다. 살면서 실언을 제일 많이 하는 인간 유형, 3번이다. 월등하다. 독보적이다. 단독 1등이다. 신기록감이다. 발뺌과 위증이란 낱말이 존재하듯이. 뭐랄까 불륜처럼 사회심리학에서 실험으로 증명하기 까다로운 주제다. 그래서 집단지성이 필요하고 발로 뛰어서 채집하고 인생을 걸어서 연구해야 하는 분야다. 쉽지 않고, 달갑지 않다. 내가 하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하겠다. 자, 돌격 앞으로! 뭐야, 옆에 아무도 없잖아? 피식, 뒷북일 수도 있지만 일단 꺼낸 얘기 듣고나 보자. 만약 누가 이걸로 논문을 쓴다고 하면 누구보다 아줌마와 상남자의 경험담과 진술이 절실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연구의 발단이 되는 물음표는 내가 던지겠다, 휘~! 그런데 어째서 꼭 무책임한 바람둥이가 생각나는 거지, 아무튼. 그냥 좀 까칠할 뿐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지만 평생을 같이 한 이불 덮고 산 여자는 어쩌면 이해할 것이다. 3번과 상남자의 차이점을. 3번과 상남자는 치타와 표범만큼 다르다. 내 역할이 아닌 이상 치타와 표범의 차이점을 상세히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냥 다 싸잡아서 고양이과 하면 됐지, 동물원에 붙여진 팻말이나 다큐멘터리 해설이나 자막을 보며 뭐다 하면 됐지, 뭐 났다고 박사님 탄생하셨다고 뭐 그렇게 천재라는 호칭에 목마른 것처럼 시덥잖케 유난 떨 필요가 없는 일이다. 3번은 내게 불리할 때는 실수를 인정한다. 하지만 명백히 불리하지 않다 하면 그럴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객관적인 과오를 절대로 과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습관도 아니고 천성도 아니다. 그것은 타고난 인지 체계 때문이다. 똑똑, 그래 그거! 즉 이걸로만 따지자면 냉혈한이다. 내가 만일 흡혈귀라면 그분은 냉혈한이다. 내가 만일 흡혈귀라면 따뜻한 피를 먹지 냉혈한의 피는 먹기 싫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뱀파이어 영화의 주인공으로 낙찰되면 또 모를 테지. 뭐야 이거 하면서 진짜 맛있는 이 진귀한 보물을 그동안 몰랐다니 하면서 뭐 그럴 수는 있겠으나. 뭐 그 때문에 정물화 이러쿵저러쿵 했던 것이다. 내가 무슨 악덕 업주야? 들리시나요? ......둘이 잤어 뻔하지 그 시간이면 충분하지...... 읽으실 수 있나요? 시끄럽고~ 그게 뭐 어때서, 가 진짜 속마음이다. 아니면 거짓말이다. 새빨간 거짓말! 나도 나 자신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내가 무슨 네로 황제야? 동네 아저씨지 그게 대체 뭔 소린가! 자 한번 자신의 경험을 떠올려보자. 자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그런 말을...... 하면서 멈칫 말문이 막혔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혹시 3번 타자가 아닐런지요 그분이. 이미 다 알려진 뻔한 얘기라서 학문적 가치가 없을 수도 있지만 뭔가 미심쩍다. 많이 미심쩍다. 소시오패스의 학명도 처음에는 이처럼 시작했을 수도 있다. 범죄심리학에서는 이건 다룰 가치가 없다? 직접적으로는 그렇지만 원한으로 발생하는 어떤 범죄의 원인 제공에 대해 3번의 말이 화근이 될 가능성은 다분하다. 확률로 즉 통계학으로 봐도 그럴 가능성은 농후하다. 법을 위배하지 않고 적당히 도덕적으로 잘 사는 무슨 패스를 자꾸 거론해서 죄송스럽지만 그게 약간 차이가 있는 게 뭐냐 하면, 어느 인문-교양서에 나왔듯이 무슨 패스라고 알고 나면 그분을 피하고 전부 멀어지게 되지만 3번은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 마초야 얼마든지 감안하고 으쌰으쌰 가능하다. 차라리 더 좋다. 이 놈의 세상 어쩐다는 둥 뭐라는 둥 하면서. 물 만난 물고기 마냥. 골든 리트리버냐 래브라도 리트리버냐 다 거기서 거기니까. 가방이면 가방이고 자동차면 자동차지 뭐가 그렇게나 복잡한지, 내가 좋아하는 내 분야는 놀랍도록 섬세하고 타인이나 놈이나 부인의 그 까다로운 안목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지만, 대충 비싼 거 들고 다니면 됐지 으흠 그럴 수도 있다지만 마침내 조금이나마 얼룩말과 그냥 말의 차이랄까 그 뭔가 간지럽고 궁금한 뭔가는 일단 풀어놓기는 했구료 그래. 고생했소. 그렇고 보면 정말 주인공과 챔피언은 관중과 일반인인가 봅니다 그려. 유려한 필치까지는 아니어서 좀 아쉬우나 뭐 그런대로 대충 지나가자구요. 결론이 나왔으니 말이에요. 이미 아시는 분은 예외고, 이제야말로 그대는 표범과 치타를, 셜록 홈즈와 괴도 루팡을, 허구와 현실을, 드디여 상남자와 3번 마초를 구분하게 되는 영광의 결승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룰루랄라랄라라~ 룰루랄라랄라라~ 쿵짝짝 쿵짝짝, 그러나 팡파르는 멀리 있습니다. 짝-짝-짝, 아 글쎄 박수의 물결은 싱그런 환송은 그대에게만은 인색합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그게 이승인 걸요. 왜냐하면 그걸 알게 되어도 그건 그냥 책 한 권 읽고 영화 한 편 본 것이랑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안다고 좀처럼 인생은 바뀌지 않습니다. 대체로 그러합니다. 인간은 살면서 잊고, 또 속고, 속이고 꼬시고, 또 그것을 반복하고, 거짓말로 날 꺼뻑 까무러치게 만들어주라고, 딸랑딸랑 온갖 칭송과 찬미와 어디서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예찬으로 날 감탄의 경지로 올려주라는 둥 어쩌는 둥, 인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고 울고, 모른 체하고 지나치며 살게 될 것이기에 말입니다. 마치 정치라는 단어의 어감처럼 말입니다. 뭐, 반성? 누구십니까 그대는? 어디 손 한번 들어보세요. 그 복스러운 용안이나 한번 보여주시라요. 네! 어떤 양반께서 이거 자꾸 원점으로 돌리시네. 사람이 너무 해맑은 거야 아니면 바보야? 어? 쉿! 지금 대체 뭔 상황인가? 세상 사람들 다 아는데, 당사자가 맨 꼴찌로 알게 되었는데, 나만 끝까지 믿지 않고 설마 설마 하다가 간통 현장을 덮친 거 아니냐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부인이 그것도 색정증 환자였다니, 모두 쉬쉬하며 그 환자를 다독여주고 치료해주고 가르쳐주며 평소에는 내가 내가 하던 행인3까지 나도 나도 하며 하나같이 좋은 길로 인도해주기에 급급했다니, 오 세상에나 이럴 수가! 어디 순수 예술을 논하는데 베스트셀러를 슬며시, 어? 해바라기를 보면 보통은 밝고 예쁘고 그렇다고 하지 해바라기에서 무슨 오르간 소리가 들린다고 하나? 피는 물보다 진한가 연한가, 내 자식은 귀하고 남의 아니 놈의 자식은 천한가? 그거라고, 당연한 거라고. 두뇌 체계 자체가 양치기 개와 양을 구분할 수 없는 목동에게 그것은 목동이 생각했을 때 죄도 아니고 벌도 아니라는 것! 여자들이여, 왜 남자들이 비교적 여자들보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정치 얘기를 많이 하는 줄 아시는가? 왜냐하면 정치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재미없으면 뭐하러 그렇게나 열을 올리시겠나. 말만 그렇지 재미있어도 재미없어도 중요하니까 너무 중요하니까 도의적으로 관심을 가지시는 거다. 그런데 모르긴 몰라도 아마 3번이 존재하는 비율이 다른 분야보다 정치가 약간 더 높지 않을까? 그건 모르겠고, 어떻게 더 친절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이제 정치가 좋아졌다. 나는 이제 정치가 재미있어졌다. 나는 이제 정치를 좋아하게 됐다. 내가 뭘 좋아해? 그렇다. 나는 정치를 좋아한다. 나는 정치를 사랑한다. 왜? 그러면 안되나? 안되긴 오히려 반겨야 하지 않겠나. 나는 다시 태어나도... 오 그만! 뭐야 그런데, 3번을 논하다가 어쩌다 삼천포로 빠졌는데 왜 하필 그게 또 정치냐고. 정치, 뭐 이렇다 저렇다 말은 많아도 정치도 그래프를 생각하면 됩니다.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발생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다룬 영화를 떠올려보세요. 그때와 지금이 어떻게 다를까요? 그렇죠. 그 극명한 차이점은 그때는 정치와 군무의 구분이 많이 미미했다는 점.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죠. 그건 그렇고 다시 돌아가자구요. 3번으로. 자, 이왕 달리는 거 좀 더 달려봅시다. 저 신기한 미지의 세계가, 저 눈부시고 놀라운 무지개 너머가 보이지 않나요? 모두들 나체로 당신을 더없이 사랑스러운 당신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그 환상이? 자, 갑시다. 3번은 학자도 있겠으나 대체로 사업가 체질이다. 예술가도 있겠으나 대체로 상인이나 정치가나 월급쟁이다. 주로 고전음악과는 거리가 멀다. 바꾸어 말하면 대중예술을 월등히 선호한다. 외향적일 수도 내성적일 수도 있고 말수와 말솜씨와 허세도 상-중-하로 분포가 다양할 테지만, 동조성은 현저히 낮다는 공통점이 있다. 동조성은 스누핑 영역에서 형성된 인상의 정확도로 파악할 수 있는 5대 지표에서 잘 드러나지 않기로 5등에 해당하는 지표다. 페이스북, 블로그, 침실, 사무실, 선호하는 음악, 사회 활동, 교우 관계, 대인 면담등으로 아 이 남자 내 남자로 만들어야겠다 그랬어. 그런데 이마와 목에 주름살이 생기며 늙어가면서 알게 된다. 우리 오빠는 동조성이 제일 낮은 저 3번이라고. 꼭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자상한 애인과 사려 깊은 아빠로써 손색이 없을 테지만 대체로 내 생활, 내 개인 취향을 더 중요시한다고 볼 수 있다. 3번이 읽는 책은 여자는 모르겠고 남자는 자기계발서나 인문계열만 읽는다. 할리퀸 소설이나 통속 소설이나 더글라스 케네디를 반겨할 리 없다. 또는 아예 책은 쳐다도 안 본다. 자, 3번의 교우 관계가 궁금하신가 안 궁금하신가. 궁금하신 분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궁금하지 않으신 분은 음... 따로 저와 단둘이 조용히 만납시다. 왜 만나야 하는지는 모르시지 않겠지요. 3번의 친구는 단 두 가지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한시적인 단짝이나 적당한 우정말고 3번의 진정한 친구를 꼽자면 단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3번의 (절친한) 친구는 어릴 때 만난 친구다. 곧 고향 친구나 학교 친구. 그런데 이 첫째에 해당되는 친구는 완벽한 마초지만 3번 부류는 아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은 수십 년 살아도 그 미세한 차이를 정말 어려워 한다. 그리고 둘째, 만약 그런 친구가 없다 그러면 나중 알게 된 친구가 둘째에 해당하는 친구다. 단! 조건이 붙는다. 그렇게 친해진 단짝은 자기와 똑같은 3번 부류일 가망성이 매우 크다! 충분하며 완벽한 실험은 아니니까 또 1인이 측정하고 연구하기에는 썩 부적합하기 때문에 아마도 집단 지성이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단은 내가 확인한 경우에는 저 둘째에서 3번은 똑같은 3번을 만날 가능성이 거의 대부분이란 걸 확인했다. 특이한 점은 친한 친구가 없는 경우도 있고, 단짝까지는 아니고 그 차선 정도로만 넓게 사귀는 경우도 있다는 점. 아, 특이한 점이 하나 더 있다. 앞에서는 완전 친한데 등 돌리면 정반대로 (앞에서 친했던 그에 대해서) 험하게 돌변하는 부류도 있음. 3번이 첫째와 둘째에 해당하는 친구를 모두 양쪽에 꿰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더 들어가면 블로그보다 학술지에 먼저 기고하는 게 어떻게 보자면 옳은 순서다. 의도적인 오랜 기간의 꾸며진 우정이랄지 그 모두를 감안했을 때 그분은 아니고, 그분도 아니고, 그분은 성공하지 못했다면 1명조차 간당간당할 수도 있었을 테고, 그분 역시 아니니까 그건 일단 대표적인 특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예외도 있다고. 마누라가 1명이면 3번의 단짝도 1명인 걸로. 음 3번의 (유일한) 단짝은 3번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으로 그에 대한 언급은 줄이겠다. 그렇다. 거의 롱테일을 빼놓고는 3번의 제일 친한 친구 그 우정은 전적으로 이 두 가지로 나뉜다. 3번은 친구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적당히 친한 사람은 아주 많을 수 있으나. 한번 생각해 보자. 왜 유독 그 두 가지인지를. 이미 그럴만 하겠다, 왜 그렇다 어쩌고저쩌고 다 나왔는데 다시 왜? 아 뒷목... (딱)! 친구가 되기 어렵다는 점은 충분히 거론되었으니 왜 그런가를 알아볼 차례다. 멀쩡한데 오히려 뛰어난데 무슨 영문 때문에 저 두 가지 유형이 아니면 안되는지를.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고, 되레 유능해 보이고 얼핏 봐서는 사교적으로 판단되며, 여차하면 여자들이 상남자계-통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왜 일반인이 대표적인 상남자가 스물살이 넘어가서는 매우 가까운 친구로 접근하기 어려운지를. 왜 그럴까? 그건 학자에게 일임하고 싶다. 나는 소설가다. 고로 엑셀 파일로 정리하지 못해서 퍽 찝찝하다. 그러나 원래 그런가 보다, 라고 상정하고 나는 왜 그런가를 간접적으로 돌려서 설명은 할 수 있다. OK! 그렇다. 3번에게는 의식적으로 맞추고, 연기하고, 가장하며 외적 인격을 새로 만들어서 접근하는 것만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단, 여자라면 우정이 아니라 사랑이니까 열외. 할아버지 예술가와 젊은 아가씨의 사랑이 흔치 않은 것처럼 명백히 저 두 가지에 해당하지 않는데 뭐랄까 순수한 우정으로써 오래 버틴다? 오래 참고 아끼며 기다리는 단짝? 글쎄요! 그건 어쩜 이상에 가까운 얘기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등하거나 편하지 않은 체로 어떤 목적이 개입되거나 중간에 여자가 낀다던가 하는 특별한 긴장감에 따른 절반쯤 불순한 우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과장되게는, 의도적으로 왕자와 거지처럼 서열을 감안하고 출발하더라도 좀 길어질 수도 있으나 그 우정의 종료는 아마 시간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우정과 사랑이 거의 일치하면서도 살짝 다르다는 걸 느끼게 만드는 극명한 논제다. 사랑처럼 단번에 빠져드는 우정? 3번이 3번을 만나야 가능한 것이다. 모욕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친구,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게 가능하다고 볼만큼 어른들은 결코 순진하지 않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는 친구보다 투명한 관계의 지인을 어쩜 훨씬 더 선호하게 된다. 나이들수록 성숙해지니까. 가방이나 옷 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우정도 브랜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쉽든 어렵든 초반에는 반짝이는데 세월이 지나면 주식시장에서는 물론이고 사람들 기억에서조차 시나브로 사르륵 잊혀지곤 하니까. 아이스크림이 소리없이 녹듯이. 나 브랜드와 너 브랜드, 이미 그 적합도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듯 하다. 거 웨 사이코패스가 쓴 인문교양서 있지 않나, 거기 이렇게 나온다.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사이코패스라고 알리자 전부 다 자기로부터 멀어져갔다고, 모두 떠났다고. 사이코패스라는 사람이 아니라 사이코패스라는 학술용어에 피부색과 같은 그런 태생적 특징의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사이코패스면 무조건 악인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밝혀졌을 것이다. 또 소시오패스든 뭐든 전문 용어는 점점 늘어가지 절대 줄어들지는 않는다. 아무런 흠결이나 어느 수준을 넘어서는 전문용어에 걸리지 않는 백조류 정상인도 범죄와 충분히 연루될 수 있고, 도덕적으로 당신의 애인으로 어린이의 아빠와 엄마로써 얼마든지 결격 사유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경험한 세상에서는 3번이 좀 특별했다. 많이 유별났다. 내가 봤을 때 3번은 그와 같은 전문용어가 아마 없을 테지만 그 고유한 특징은 상남자의 한 분파가 확실하다고 본다. 뚜렷하게 개체가 확인되는 통계가 나오더라. 이에 대해서 정신분석 학자나 정신과 의사와 내가 자웅을 겨루면 과연 누가 이길까? 한 판 뜰까? 뜨기는 뭘 떠! 누가 이기긴 누가 이기겠나, 당연히 게임도 안될 테지! 심층적으로 들어가면 인접 학문을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낫다. 축구 선수는 알렉스 퍼거슨 경의 글을, 축구 팬은 '지금껏 축구는 왜 오류투성일까?'를 읽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동화 작가에게 성직자의 삶을 강요하지는 말자. 그리고 야구 선수가 톰 피터스를 읽을 수는 있다. 읽어도 된다. 머머해서는 안된다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추천하다. 소설 블로그를 읽으라고. 가뭄에 콩 나듯 등장하는 빗대어 설명하는 그 흥미로운 야구 이야기를 읽으라고. 그런데 숙녀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읽기보다는 아주 가끔 듣기를 원하는 것처럼 스포츠 선수가 도박이나 불건전한 오락과 친하면 일류에서 멀어지기 쉽다. 그래서 스포츠인이 예술에 일가견이 있는 예가 드물지 않다. 곧 그 말은 한 분야에 정통하면 다른 분야도 보인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인문-교양으로 또 상남자3으로 귀결됐다. 거기서 끝이냐? 아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더욱더 싶도 깊은 명철한 일리를 위해서는 만나야 한다. 바로 의학과! 지금 그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지 않나. 3번 쾌남아들은 공통된 부분을 빼놓고 fMRI에서 분명 달리 반응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쪽 의학계의 저명한 권위자를 만나면 한 번쯤 물어보고 싶다. 혹시 3번에 대한 전문용어가 존재하는지를. 그런데 어떤 현상이나 법칙에 만들어내고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붙이듯이 만약 그런 게 없어, 그래서 내 이름을 붙이겠다고 한다면? 무슨 증후군 그처럼? 이런, 젠장! 그렇지만 이 모두는 예측 가능한 덕목이기 때문에 내 오빠가 아니라면 문제될 건 없다. 진짜 영화 주인공감은 원래 좋은 사람이 아닌 저 3번을 정반대로 뒤집어서 표면적으로 진짜 좋은 사람과 구분을 할 수 없는 그런 부류다. 3번은 얼마든지 밝아질 수 있다. 또 호인도 많다. 그렇지만, 그 롤러코스터에, 나는, 타기 싫다는 거! 뭐야 우리 오빠랑 완벽하게 똑같네? OK! 어머나 완전 우리 아빠잖아? 소녀여, 성격 유형의 하나일 뿐이니 실망하기엔 이릅니다. 소년이며, 3번 스타일 아저씨가 절때 무조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니 어디서 누군가의 등을 보았건 어쩌건 비꼬아서 받아들이지는 맙시다. 예전엔 몰랐다. 전에는 IQ, 부모 직업, 재산, 타고난 안목, 평소 사용하는 어휘의 양과 수준에 따라 3번의 분포가 많이 다를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알게 됐다. 근소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다. 3번을 파악할 경험이 부족했으니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데 무엇이 좋은지, 또 마초와 저 3번이 대체 어떻게 다른지 바로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장점만으로도 책 3권은 너끈히 쓸 수 있음. (있는 단점 없는 단점 다 털어놓고 뭐 장점으로만 책을 몇 권 쓸 수 있다고? 전자네~! 뭐가 어쩌고 어째? 관점이 어떻고 포지셔닝은 뭐고, 종이 한 장 차이가 뭐라더라 하더니만 자기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그러더니 결국 전자였어!) 그렇다. 일반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드물지 많을지 아리송할지 몰라도 3번이 이렇게 위치가 확실한데 클라우드 나인은 얼마나 다를지는 모르겠다. 무엇보다 우선 3번의 그 분포가 좀 된다. 때문에 정치라는 덕목도 그분들을 절대 외면할 수 없다.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정치판에서 쫓겨나기 밖에 더 하겠나! 선거에서 지는 일만 남은 거다. 누가 정치를 질려고 하겠나. 그쪽 현업에서 가늘고 길게 갈 수는 있으나 투명한 삶과 고매한 인품에 비해 얻는 게 너무도 초라한 경우가 많다. 실상이 그렇다. 정치는 학문과 스포츠와 상업과 엄연히 다르다. 엄격히 틀리다. 정의하기가 영 꺼림직할 수도 있다. 절대 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아니다! 실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 나는 정말 정치를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아는 얘기는 할 수 있다. 무거운 짐을 지며 어렵게 사는 극빈층이나 살만은 하지만 역시 어렵게 사는 책임감이 무거운 직업의 종사자들이나, 공장에서 일하지만 돈은 엄청 많이 받는데 도박빛이 많거나 주색으로 진 빛에 그 돈을 지속적으로 쏟아부어야 하는 그와 같은 세상사의 민낯을 많이 봐온 것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있다. 많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이 놈의 세상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는 바로 그 말을. 그러면 왜 그럴까? 대체 왜 세상은 이 모양 이 꼴일까? 정답은 나도 모른다. 오히려 세상이 아름답지 왜 그렇게 삐닥하게만 보냐고 따진다면 나는 찬성이다. 옳소, 제청이요! 그렇지, 사랑을 아름답다고 해야지 추하다고 하랴 아니면 추접스럽다고 하랴! 하지만 이런 어중간한 딜레마는 내놓을 수 있다. '세상이 왜 이 모양 이 꼴일까'를 고심하기 이전에 정치인은, 피선거권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다>라는 바로 그 <에이 까짓껏, 될 대로 되라>식이라는 괴이한 포지셔닝으로 살아가는 상당수의 호인들까지 포용해야 하기 때문에 애초에 세상이 아름답기는 힘들지 않을까 라는 모순만 결과적으로 남게 된다고. 그런데... 음... 그게 다냐, 아니다. 나 봐라, 절 보세요! 날 좀 봐주세요, 제─발! 그 언젠가 잘생겼으면서 말 잘하는 사람을 찍지 않았나. 그 친구들은 그럼 어디 적냐?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피선거권자가 좀 더 적합했다거나 그것만 지표로 삼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표를 던지는 데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시간은 앞으로 가며, 세상은 그런대로 잘 돌아간다. 내가 만일 나중에 외계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 지구가 아름다운 곳이라는 소식을 전할 것이다. 그곳은 환상의 세계요 경이로움이 넘치는 신비의 공간이라고. 꼭 그곳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영화로운 마성을 간직한 행성이라고. 여기서 한 번 더 비꼬기는 싫다. 그러고 싶지는 않다. 너 모순 좋아하잖아, 이런 모순은 어떠니 라며. 나는 누가 어떤 말을 했고, 누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고 절대 고자질할 수 없는 사람이다. 타인을 험담하는 일은 영 내 체질에 맞지 않는다. 허나 입이 싸지 못하면 글 쓰는 직업은 애초에 포기해야 한다. 세상이 원래 그런 법이다. 어쩔 수 없다. 언론인은 물론 수필가조차 못된다. 그런데... 음... 남자는 둘로 나뉜다를 얘기하다가 엄한 쪽으로 빠졌네.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다시 돌아가면 되지. 지금이 돌아갈 수 있는 제일 빠른 시점이니까. 자, 다시 돌아가자. 남자는 둘로 나뉜다. 객관적으로, 내가 과연 인기가 <있었을까?>와 <많았다!>로. 인기가 없으면 친구도 적고, 친구가 많으면 인기도 많다. 친구니까 기다려주고 다독여주고 위로해 주기는 하겠지만 같은 친구라도 어두운 친구, 만나고 싶나요?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데 나 꽃이야 라는 개념 딱 하나 밖에 없는 여자 즉 자존심 하나 뿐이 없는 여자가 좋은가요, 아니면 만나면 즐겁고 만나고 나서도 기쁘고 만나기 전에도 설레고 생각하면 막 생각할수록 재밌어지는 그런 여자가 좋은가요?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지금 인기도 없고 친구도 없다. 그러나 나는 예외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나는 예술가니까. 그것도 가련한 예술가, 빈센트 반 고흐 같은? 또 누구 같은? 실은 따지고 보면 은근 허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곤란하기 때문에 나는 인기가 없고 친구도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됐든 예전에는 친구도 많았고 인기도 많았다. 얼굴이 두꺼워진 상태로 하는 말이라서 닭살이 돋기는 하지만 지금 다시 활동하면, 음 그러면, 그래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 같구나. 흐흠...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아무튼, 남자는 둘로 나뉜다는 이렇다. 그러면 여자는 둘로 나뉜다가 나와야 하는데... 에헤 가만 있자... 여자는 둘로 나뉜다는 음... 언젠가 쓰든가 어쩌든가 해야겠다. 끝으로, 남자는 둘로 나뉜다. 날 사랑해 주는 여인이 있었다, 와 많았다로! 
   나는 조금, 아니 많이 재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사실이니까 사실을 말하자면 후자다. 주인의 허락없이 내 계정을 해킹해서 그 기록을, 친구에게 알리지 않고 내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를 까서 내게 매우 호의적이었던 자기 여자친구에게 보여주면서 자 봤지 하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의기양양해 했던 그 친구가 생각난다. 동네 허름한 바에서 절세미녀도 명-바텐더도 아닌 한달 또는 3개월짜리 아르바이트생을 놓고 탁자 위에 자동차키를 툭 놓으며 녀석이 하던 말, 내가 쟤 꼬셔 줄까? 그 말은 곧 해석하자면 이렇다. 이 여자 꼬셔서 널 주겠다, 가 아니라 내가 만나겠다다. 그런데 그녀를 쉬쉬하지 않고 만나겠다고? 글쎄... 넘어와도 자랑삼기도 퍽 뭐하고, 또 넘어오지 않아도 것도 썩 어정쩡한 그녀를 놓고 지 혼자 들었다 놨다 쥐락펴락 다 하는 모습, 애쓴다 애써 라고 감탄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 말은. 그 친구는 전자다. 만일 녀석이 후자라면 허세 부릴 필요가 없다. 만일 녀석이 후자라면 그건 모순이다. 그의 재담, 아~! 그의 면모, 오오~! 누가 그에게 너 그럴려고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됐냐고 물었다면 녀석은 딴청을 피워야 할 것이다. 그만큼 질 나쁜 애는 아니니까. 그리고 우리는 만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우리는 으쌰으쌰가 된다. 우리는 친구다. 우리는 남자다. 그런데! 똑같이, 누가 나에게 <너 설마 자랑할려고 소설을 쓰냐?> 라고 묻는다면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되묻고 싶다. 허세를 반 세기 동안 보고, 허풍을 반 세기 동안 듣고, 허당과 반 세기 동안 어울려 보라고. 그러면 그 어느 도도한 레이디도 결국은 상남자가 될 것이라고. 그녀께서 가죽 점퍼를 입고 싶어하는 마초가 되지 않고 배기나 보자고. 나는 그랬다. 솔직히 멈출려고 했다. 내 자랑 내가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이야기 구성의 맹점 때문에 알면서 드문드문 술술 자랑을 하고 또 하고 계속 토해내기는 했다만 알고 보니 그건 아마 내 안의 어떤 악명 높은 마성에게 휘둘린 듯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 인정한다. 말린 거다. 것도 완전 제대로 말렸다. 원래대로라면 이렇다 할 자랑거리가 없는 나는 그렇게 자랑을 할 수가 없다. 실재로 뭔가가 없으니까. 약간의 뭔가를 표출한다고 해도 그건 실상이지 허세가 아니다. 아, 지난 기억을 떠올려 보게 된다. 일명, 회상!
   나는 살면서 사랑이든 우정이든 내가 먼저 다가간 적 한 번도 없다. 상대를 미혹되게 만들고 유혹하는 형상에 가까운 사례는 있었을 것이다. 또 같이 좋아서 감정을 주거니 받거니 마치 부어라 마셔라 취해라 춤 추고 노래하며 정신없이 놀아 보자 하며 신나게 놀 듯이 한순간에 친해진 일은 많았던 듯 하다. 그러나 상대가 내게 호감이 없는데 내가 먼저 접근한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고, 저질러서도 안되는 상식에 해당하는 사안이며, 교양미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이자, 이미 어느 만큼 하면 넘어오겠다는 견적이 훤히 보여도 얄미워서라도 절대 시도할 수 없는 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맺었던 소셜 네트워크를 먼저 단절하고 연락 뚝 끊었다. 촌년~ 하면서! 대체 무엇 때문에, 새로움이 그렇게나 좋았냐고 묻는다면 할말은 없다. 나도 모르겠다. 왜 그랬는지. 환상을 찾고 싶었는지 불가사의한 최고와 면사포에 감싸인 신비감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는지 억제할 수 없는 그런 코 끝이 찡한 사랑의 왕국을 기다렸는지 통 모르겠단 말이다. 그러나, 우리, 한번, 기탄없이 따져보자. 타인은 어떤가가 아니라 각자 나 자신은 어떤가를. 어땠었나를. 그리고 장래 어떠할까를. 지금 당장 가슴에 손을 얹고 묻자. 자기 자신에게. 상대가 날 싫어해도 집요하게 꽃 들고 쫓아다닐 것인지를. 당신은 스토커인가요? 말은, 아니요! 싫다는데, 왜? 사랑을, 보너스로 우정까지 인생에 관한 행운의 상징이라고 봤을 때 나는 엄밀히 사업가보다는 숙명론자에 가까웠다고 본다. 그 어떤 애정이나 맵시 넘치는 우정도 끝은 있게 마련이다. 냉정하지만 따지고 보면 돌아서면 그만인 것, 지나간 인연의 축복을 기원해주면 될 뿐, (손바닥을 펴서 하늘로 향하여 입술에 가져다 댄 다음) 후~! 그리운 추억과 회상의 재현, 간간히 불시에 떠올라야 멋지다. 그래야 더 기쁜 법이다. 모든 것은 꿈인가 라는 연가 같은 궤변이 아니라 실재 사람들 삶을 들여다 보면 그게 거의 전부다. 광채날 것 같은, 항상 즐거움이 생동하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하루종일 바쁠 것만 같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그런 조증에 걸린 숙녀의 삶이라고 해 봐야 냉철히 따져 보면 별 거 없을 수 있다. 화장! 하고 지우고 관리하고 청결함을 유지하는 데 하루 평균 (최소?) 3시간! 그녀는 하루에 거울을 몇 번 보고, 총 몇 분동안 볼까? 여자 화장실의 줄은 왜 그렇게 기나? 그래 인정한다.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하니까. 연예계 소식, 박사 학위는 기본이고 그 어디서나 권위자일 테지만 남자 앞에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할 것이다. 내 남자라는 안정권에 그가 안착한다면 그때는 가면을 벗을 차례다. 본모습은 드러나도 화장하지 않는 모습은 아직일 것이다. 사랑? 쫓아다니는 애면글면 안달난 사내의 연정에 못이긴 척 꺼~뻑 넘어갔는데 나중 결국 남은 건, 음... 아아 오오 글쎄 어머나 한숨뿐이라니! 자라나는 파릇파릇한 어린이와 산뜻하며 자주 바뀌는 꿈을 키우는 사춘기 아이에게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그녀 자신이 그 말을 한다는 건 어허 그다지 썩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넌 누굴 닮어 그렇게 공부를 못하니, 라는 말. 아니, 그 말을 어떻게...! 아니 그런가? 그럴 수 있다. 그런 일 허다허다. 사랑을 애원한다? 글쎄, 방법이 다를 수는 있으나 드라마는 드라마고,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걸 사전적으로는 성정이라고 지칭한다. 내 애인이 되어주오 내 사랑을 받아주오, 낭자 아름답소 내 헌팅을 받아주오? 우후~ 닭살 돋아서 그런 말일랑 아예 일절 할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다 나는. 그런데 (한 번도 아니고) 양쪽에서 팔짱을 낀 일이라든가 뭐 어쩐 일이라든가 그 모든 게 다, 죄다 여자들이 사랑으로써 또 남자들이 우정으로써 먼저 다가온 것이라니, 어머 어머 썩 믿기지는 않지만 또 그렇다고 퍽 아닌 것 같지도 않고, 이 일을 어쩐다니 이 일을 정말 어쩌면 좋니! 처음부터 끝까지 알량한 자랑 일색인 듯 하지만 그래 봐야 공식적인 연예,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못 해봤다. 지갑속에 애인의 사진을 넣어다니고, 핸드폰 통화 목록에 그녀 이름 일색이고, 마주앉아 속삭이며 미래를 약속할 그 모든 일들을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못 해봤다. 무슨 방어전은 커녕 손도 한 번 이름도 한 번 불러보지 못했다. 그래. 다 내 자랑이니까 하는 소리다. 내가 만일 여자라면 바로 내가 진짜 처녀겠구먼. 애석한 일인지 몰라도 남자인데 그렇다니까 퍽이나 챙피스럽다요. 내래, 부끄럽다구요. 알겠시유? 서사가 그러하니, 시소는 갸우뚱거리긴 해도 다시 수평선이 되었다. 그럼. 동타다. 등호는 성립한다. 균형이 맞다. 어쩔 수 없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 어떻게 흘러갔다면 난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는 자평도 할 수 없었을 테고, 악기도 운동도 독서도 이런저런 경험도 못했을 게 뻔하다. 다른 사람도 다 그런다. 그 가운데 이와 같은 생활 방식과 비슷한 실례를 하나 꼽자면 그것이다. 여자들이 결혼하면 현재에 집중하는 것. 지난 남자와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 오래 되면 또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 인연 다 끌고 갈 수도 없고, 셈이 빨랐다고 해도 변명은 하고 싶지 않고, 나는 깍쟁이에 능청꾸러기에 이기주의자에 바보였다고 결론내면 된다. 그렇다. 그러면 된다. 남들도 절반은 그렇다. 그게 인생이고. 왜 여자라면 대부분 끊임없이 쫓아다니며 구애하는 그런 애틋한 사랑을 싫어하지 않는지 알 것 같다? 아니요! 천만에요 또 죄송해요.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알아도 그건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겨놓은 게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뭔 헛소리도 아니고 슬픈 사랑 이야기도 아닌 그냥 수다가 온통 이어진 것은, 그것은 따지고 보면 다 더글라스 때문이다. 괜히 녀석 때문에 재수 없는 자랑을 그것도 왕창 쏟아내고, 내 펜클럽은 썰물처럼 쫙 빠져나가고, 우정조차 풍선껌 단물 빠지듯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남은 건 이제 적막감 뿐이다. 아, 또 있다. 넌 하수라는 꼬리표도 남게 됐다. 사랑이라면 이제 치가 떨리고, 우정이라면 아조(아주) 신물이 난다. 사교? 이제 질릴 대로 질렸다. 왜 진작 나는 내 마음도 몰랐단 말인가? 빤한 의향 단순한 결론 눈에 훤하지 않은가. 난 이제 쉬고 싶다. 나는 지금 방랑자고 모든 게 덧없다고 느낀다. 아, 나는 전인미답의 풍경을 찾아 떠나고 싶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디식 탐험가가 되어야 하는데, 것도 귀찮다. 차라리 다비드는 다비든데 어디산 다비드, 더글라스에게 연락을 해 볼까? 아니다. 혼잣말이긴 하지만 너 혼자 다 해 먹어라, 그러면서 큰소리 뻥뻥 쳐댔는데 것도 모양 빠지는 일이다. 그냥 잠이나 자야겠다.


   8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평상심을 되찾았고 창작 생활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벌써 더글라스를 못 본지 1주일이 넘었다. 내가 정말 전에 그 친구와 친하긴 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와 더불어 그의 정확한 직업이 뭐였드라, 이제 와서 생각하니 막상 나는 모르고 있었다. 어렴풋이 떠오를 뻔 하다가 말았다. 남자 하나 여자 둘 그 삼인조끼리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나는 남풍으로 전해 들으면 그만이고, 나는 다시 전에 만나던 동네 친구들을 만나 보기로 했다. 애정 전선의 변경과 서슴지 않고 그 잔잔한 가능성이 온전했던 사랑의 짝대기, 이 어쩔 수 없는 변심에 대하여 하나도 샘나지 않았다. 샘은 무슨! 친분의 결렬은 결렬이고, 어찌 되었든 그것은 내게 일전에 닥쳤던 분에 넘치는 연정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을 불신하면 그뿐, 누군가의 과거를 캐고 어떤이의 연애사를 수소문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다.
   나는 무력감을 내팽개친 채 멀더의 카페에서 동네 친구들을 만났다. 빵집 사장 크리스, 카바레 사장 앤더슨, 꽃집 사장 스티브, 정육점 주인 네이트, 그리고 다른 자주 만나는 얼굴들이 보였다. 그날 나는 새로운 얼굴의 출연을 맞이했다. 서점을 운영하는 마리아가 유난히 그날 돋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구면이었다. 동네에서 오가다 봤고,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서 이미 어느 정도 서로를 알고 있었다. 정식으로 통성명하며 인사만 나누지 않았을 뿐. 그래서 그날 그녀는 옆에 있는 에리카에게 자꾸 저 오빠 누구냐고, 누구 아니냐고, 나 저 오빠 안다고, 그런 말을 자꾸 내 귀에 들리게끔 반복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것은 명백한 꼬리 흔듬이자 '날 좀 보소'였다. 아무리 무딘 목석이라도 (속으로) 완전 좋든가, 다른 이유로 뜨끔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것은 일종의 옆구리 찌르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정도가 심했기 때문인지 나는 내 옆구리 즉 골반 측면 살짝 윗부분에 누가 손을 스치듯 살며시 쓰다듬는 듯한 환각을 느꼈다. 곧 나는 상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일반적인 성감대에 해당하는 부위가 도둑이 제발 저리듯 혼자 찌릿찌릿 자극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신호에 반응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서 사랑은 유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심 살짝 기분이 좋았으나 그것마저 죄책감이 느껴졌다. 내가 만일 유부남이라면 불륜을 고민하는 사내가 되는 건가? 그건 아무런 소용없는 공상이고, 나는 가련한 예술가이자 고독한 사색가일 뿐 사랑은 2개일 수도 3개일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은 약과였다는 것을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동네 청년들의 우정에 새롭게 편입된 두 여인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또 어느 날이었다. 나는 편의점 사장 린다와 패션 디자이너 테일러로부터 강도 높은 호의를 주제 넘게 받고 있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참 난처했다. 편의점 사장 린다는 내게 동네 친구들이 다 모인 운동회 겸 야유회에서 다들 보란 듯이 이렇게 말했다.
   「나 이 오빠 업어 보고 싶어!」
   업어 보고 싶다라... 업어 보고 싶다? 업어서 느낌을 알고 그래 아하, 이런 애를 하나 낳아서 길러서 키우고 때로는 때린다? 그러니 업어 보고 싶다? 그러나 그때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린다는 그 발언 후에 나를 진짜 업었다. 영 어색했다. 그녀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 그녀는 어떤 줄 모르겠으나 난 그랬다. 뭐 아무튼 소원 성취한 셈이겠으나. 그리고 또 패션 디자이너 테일러는 그런 교태와 정상적인 애교와 최저 수준의 유혹하는 기술이 취약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꽤 많은 신호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모른 척 넘어갔기 때문인지 그녀는 급기야 내게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앞으로 난 막 짧은 치마만 입고 다닐꺼야. 화장도 엄청 찐하게 하고 다닐 꺼야!」 그런데 그녀는 주량이 약한지 어쩐지 혀가 약간 꼬여 있었다. 아무래도 진심 같았다. 뭘 마셨는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그 때문에 나는 동네 친구들로부터 무던히도 구박을 받았다. 왜 여자 마음 아프게 하냐고. 왜 화창한 동네 분위기 흐려놓냐고. 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면서 동네 노총각들 마음도 헤아려 주라고. 늬가 간혹 말하는 피앙세란 대체 누구를 말하느냐고. 그거 혹시 인형이나 가상의 존재는 아니더냐고. 난 그와 같은 구박을 받는 존재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난 한껏 낙심했고, 어떻게 정답게 차분한 설명을 해줄 수 없어서 답답하기만 했다. 벙어리 냉가슴 않았다. 끙끙 앓았다. 고뇌는 그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린다와 테일러에게 미안했다. 많이 미안했다. 나는 사랑의 문외한이었고, 동네의 풍속을 어지럽히는 장난꾸러기였으며, 낭만에 부대끼고 축가에 목마르며 무엇보다 사랑의 허상을 전파하는 개구장이였다. 이제 곧 내 인기 순위의 하락은 불을 보듯 훤했다. 그러나 나는 인기에 연연하는 남자가 아니다. 유명해지고 싶은 동시에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 삼류 소설가에서 일류는 부담스럽고 이류 정도로만 올라가면 좋을 텐데. 그러나 2류로 올라가도 좋고 올라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린다와 테일러 그녀들의 마음은 정말 어찌 한단 말인가!


   9

   그러나 그 애매한 더없이 어정쩡한 사랑의 분위기는 단번에 정리되고 말았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고 그건 반전도 뭣도 아니었다. 충격이었다. 정신이 아찔했다. 나는 혼절할 뻔 했다. 거의 쓰러졌다. 그것은 끝장에 가까운 특종이었다. 예고도 없었다. 기별도 없었다. 그 어느 신호든 기척이든 넛지든 아무런 사전 징후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녀석들에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마구 찬사를 보내던 몇몇 호의의 언사가 그대로 이루어졌을까? 그와 같은 내 가식적인 구실에 걸맞게 모든 어려운 처지가 단정하게 정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이상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속이 뒤짚어질 것만 같았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멀뚱히 멈춰 있는 구름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누구를 원망하고 어떻게 타이르겠나. 대뜸 하늘은 다홍색으로 보였고, 음성은 문자로 인식되었으며, 모든 바람은 오로라였다. 내 귀에는 즉흥환상곡이 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된 일이었지만 난 나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 기분의 원리가 어디서 연원하고, 내 감정이 왜 제멋데로인 줄 나도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내 정신 좀 봐! 흥분한 감성이 차분한 이성보다 선수치고 말았다. 다른 사람 생각이나 동네 분위기보다 내 기분만 중요했나 보다.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요컨대, 나는 그 장면을 거리에서 보고야 말았다. 멀더가 린다와 테일러를 양쪽에 끼고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가는 것을! 오, 이럴 수가... 이 얼마나 기묘한 장면이란 말인가! 정녕 이래도 된단 말이더냐! 살다 살다 이런 파탄은 듣도 보도 못했다. 보도 듣도 못했다. 상상을 초월한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로맨틱 코메디 증후군에서 탈출하고 말았다. 그런데, 내 장르는 다름이 아니라 막장이었다. 오오, 이럴 수가! 아아, 맙 - 소 - 사! 팔짱도 아니고 어깨동무를? 그것도 양쪽으로? 오오, 신이시여! 나는 까무러치고 말았다.


   10

   그 일이 있은 후 내가 광분했다더라 그 남자는 미쳤다더라는 뜬구름잡는 소문은 나돌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억누를 수 없는 흥분은 가라앉았으나 난 너무 시무룩했다. 능청스레 쾌활한 척 녀석들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어쩌면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닐 텐데 나는 여유로운 넉살보다는 패배자에 가까운 우울함 일색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봤을 때 아니 누가 봐도 명백한 풍기문란에 해당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분명 경범죄보다 더 심한 뭐랄까 패륜도 아니고 불륜도 아니고, 너무 친한 친구에게 너무 사랑했던 그이에게 배신당한 듯한 그 딱 뭐라 명명하기 불편한 감정에 가까웠다. 그건 상심이었고 허탈이었으며 애증이었다. 이게 절망감이 아니면 대체 뭐가 절망감이란 말인가! 몹시 섭섭한 정도가 아니라 충격 그 자체였으니 난 괴로워 해야 했고, 방황하는 게 옳은 일이었다. 내가 탕자가 된다 한들 누가 내게 손가락질하고, 그 누가 내게 돌을 던진단 말인가? 이미 돌머리에 돌아이니까 무관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맹랑한 것들, 흥!
   그래서 나는 당분간 아침을 미워했고, 칸타타를 들었으며, 일에 열중했다. 그러나 후회하지도 않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어림없는 소리. 타락의 빌미는 제공됐다? 무슨 그런 억측을! 방탕은 내 분야가 아니다. 탕진할 재산도 없었다. 내가 사랑에 실패했나? 아니다. 내가 친구를 빼았겼나? 그건... 우정은 차차 무르익을 수도 있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듯이 우정 역시 그러하다. 단지 사랑과 우정을 동시에 잃었다는 것에,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인생은 불행한가? 아니다. 난 행복하다. 나는 내 삶에 만족한다. 난 기쁘다. 랄라랄라랄랄라~ 랄라랄라랄랄라~ 난 즐겁다. 사는 게 너무너무 재밌다. 글을 쓰는 일이 정말 정말 좋다. 세상을 알아간다는 게 이렇게 흥미롭고 이다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모두를 사랑하며 애정만이 살길이고, 뜻 모를 희망은 억누를 수 없었다. 오히려 비밀이 출생의 비밀처럼 자연스럽게 태동했으니 축복할 일이 아닐까? 게다가 없던 사연이 생겼으며, 심지어 나는 주인공이었고, 장르조차 뭐 그러했으니 어쩐지 나는, 나는 인기와 우정과 황금과 찬란한 다이아몬드의 상징은 물론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신선한 긍지가 샘솟았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렇다! 나는 사랑의 화신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거짓말이다.
   다 뻥이다.
   모두 구라이자 내 허영심이 빚어낸 착각일 뿐이다.
   이런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사실인데 어쩌겠나 인정해야지. 그분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있었는지도 불확실한 내 무너진 위상을 재건하는데 급급해 하는 게 차라리 나은 일일 것이다. 어딘가 모르게 무슨 일이든 척척 풀리는 것 같다면서 혼자 싱글벙글 들뜬 걸로도 모자라 동네에서도 헛소리 픽픽 하고 다녔는데, 아아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이제야 나는 내 본모습을 감득했다. 돌고 돌아서 참 어렵게도 마침내 체념에 이르게 되었다. 고뇌의 빛이 덜 눈부셔지니 이제 속이 다 후련했다. 난 정말 조그만 어항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혼자 날뛰는 새우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래도 은근 허당에 가까웠기 때문에 허세가 하늘에 가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때문에 더글라스나 멀더는 뭐랄까 추종 세력에 있어서는 내게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도 본전도 못 찾는 건강한 자부심이 재수 없는 자존심과 뒷골목에 가서 어깨동무를 하는 듯한 그런 엄하고도 엉뚱한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냥 혼자 좋아했고, 혼자 기쁨을 만끽했고, 어디까지나 혼자서 이 즐거움이 너무 갑자기 들이닥쳤다면서 기겁하며 불안불안해 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알고 보니 태평양 한가운데 표류하는 티스푼 보다 훨씬 작은 새우에 불과했던 것이다. 즉 나는 더글라스와 멀더에게 상대도 안되었다. 그러니 동급이 아니란 말이었고, 따라서 나는 불쾌하고 슬퍼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퇴폐주의로 빠질 명분은 보자기 마술처럼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자기 연민에 빠져서 축 쳐진 나날을 보내면 안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 했다. 그것이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논리를 따졌을 때는 그렇지만 내 기분은 꽝이었고, 척척하고 끈적끈적하며 기쁨으로 들뜨기에 영 반갑지 않을 만큼 소란스러운 이 분위기는 어떻게,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TV를 켰다. 노트북도 켜서 소셜 네트워크를 구경했다. 음악도 틀었다. 변주곡도 듣고, 독주곡도 듣고,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들었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도 살폈고, 친구들의 소식도 읽었다. 몽상, 빠질 수 없는 단골 손님이었다. 몽상하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단락을 넘기고 봐야겠다.


   11

   잠재의식의 또 내 구어체의, 드물지만 내 일기체나 내간체의, 본질적으로 내 환상문학 전반에 관한 굴지의 권위자인 그분 즉 몽상을 빼놓으면 너무나도 섭섭한 일이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몽상에 빠졌다. 인터넷에서 멋진 회전목마 사진을 봤기 때문이다. 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대뜸 궁금해졌다. 내 빈약한 상상력은 온통 그것에 좌우되며 휘둘리고 있었다. 알고 싶었다. 알기를 원했다. 알기를 바랬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왜, 대체 왜 어떤 회전목마는 시계방향으로 돌고 어떤 회전목마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지를. 뭐야 그게? 그게 뭔 말이냐고? 그런 게 있다. 그게 무엇인가는 뭘 좀 아는 남자라면 아하~ 그럴 것이다. 숙녀에게 이 남자 뭘 좀 안다는 말을 들어봤던 남자라면 뭘 뜻하는 심상인지 능히 알고도 남을 것이다. 나는 그 때문에 혹시 내게 바람기가 다분한 것은 아닐까 몹시 의아해졌다. 오빠 바람기 다분하구나, 그런 말을 내게 속삭여주는 상대를 만나지 못한 게 아마 불운은 아닐 것이다. 그와 같은 농담을 다정히 소곤거리는 애인이 있었다고 해도 어쩜 그걸 영광이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바람기가 없기 때문이다. 고급스럽지는 않다만 농담이고, 좀 더 기지를 발휘하자면 세상에는 그런 말을 해 주는 여자친구도 어쩌면 흔할 테지만 보통은 아니다. 순진한 여자는 그런 말 못한다. 남자친구가 생겨서 연애를 시작한 여대생도 그런 말 못한다. 하면 하지 왜 못하겠나! 그러나 일반적으로 할 수는 있어도 (적어도 초반에는) 하지 않아야 그래야 연애를, 애정을, 사랑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용한 성격은 그런 말 안 어울린다. 아니, 어울리나? 처음에는 알았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모르는 것 같다. 왈가닥? 가능하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아마도 하루는 심했고 1주일이나 한달에 한 번쯤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다. 곧 어떤 단계를 넘어설 때, 또는 남자를 많이 적당히 만나보고 남자를 어느 만큼 알게 되는 어디쯤 나이를 넘어선 여자, 또는 정말 남자를 정말 많이 만나 보고 겪어 봤고 지금도 앞으로도 많이 많이 감정노동...을 해야 할 어느 업계와 연이 닫는 분이라면 여자는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한다. 쉽게 또 편히 그리고 즐겁게. 엄마들이 남자라는 동물을 잘 아는 것처럼. 그녀가 어느 오빠에게 말한다. 당신은 바람기가 많을 것 같다고. 오빠는 바람둥이 스타일이라고. 당신 지금 속으로 뭔 생각하냐고. 그래도 제일 편한 사람인 (친)여동생이라면 스스럼없이 자주자주 오빠에게 그런 말을 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젖소와 목마와 발정난 강아지와 암코양이에 대해 또 어느 세상사에 대해서 뭔가를 알게 되고, 학교에서 생물학을 통해 남녀의 교분과 애는 어떻게 생기는지를 알게 되는 시기를 지나지 않았더라도. 그게 뭔 말이냐! 왜 회전목마가 이렇게 도는지 저렇게 도는지를 알고 싶지 않냐고? 궁금했다면서 왜 갑자기 다시 알고 싶지 않냐고, 설마 그거 변덕입니까? 마음이 사랑처럼 바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왜 알고 싶지 않아졌냐 하면, 왜냐하면 몰라도 되기 때문이다. 알아내도 별거 없기 때문이다. 알고 나면 싱겁다며 투덜거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모른 상태에서 갔다 붙이는게 더 재밌기 때문이다. 충분히? 아니 겨우겨우! 그렇기는 해도 어설퍼도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숙녀에게, 귀부인에게 그 근사한 원리를 비밀스런 법칙을 설명하는 것은 그 정답을 몰라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밥을 먹지 않아도 당신만 보고 있으면 하나도 배고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대는 어쩜 그렇게 가냘픈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만 같다고 안 되겠다고 우리 어느 맛난 음식을 먹으러 가자고, 당신 정말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거냐고 이건 정말 반칙 아니냐고 칭송하는 것처럼. 입만 열면 거짓말이 저절로 술술 진짜인 것처럼 감탄스럽게도 흘러나온다면 왜 그런지를 몰라도 된다. 진짜 몰라도 그만이다. 오히려 모른 게 더 나을 수 있다. 그냥 갖다 붙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뭐랄까 어느 아가씨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이렇게 묻고 동시에 답하자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커피가 좋냐 우유가 좋냐, 키스가 좋냐 포옹이 좋냐,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 피자가 좋냐 스파게티가 좋냐, 돈까스를 먹고 싶냐 여자를 먹...... 어머 어머 맥주를 마시고 싶냐, 하나만 하나만 택해라 자 시작한다 하나 - 둘 - 셋! 하고 나서 남자가 답을 말하자마자 남자와 똑같은 답을 재빨리 발설하는 것. 황금빛 꿀벌이 알아서 찾지 않는, 어떻게 그냥 성실한 파리라도 딱 한마리가 어떻게 지나가다가 뭔가 궁금해서 접근할 것 같은 꽃 한송이라면 그런 애교는 필시 필요하다. 필경 절실하다고나 할까, 최소한 있다고 해도 절대 흉은 아닐 것이다. 남자가 말을 잘한다, 99가 아니라 백퍼센트 바람기 다분한 것이다. 남자가 어머나 미남이네? 바람기를 타고 났다. 아이고 입만 열면 허세고 잠을 자면서 잠꼬대로도 허풍을 쉬지 않으며 뭐 하나 똑부러진 면모가 없는데 어머 어머 이 일을 어떡한다니, 돈은 많네? 바람기 200퍼센트다. 바람기의 왕이다. 아니다 아니다 우리 오빠는 더없이 성실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만 보고, 오직 사랑은 하나며, 우리 애정은 영원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오빠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좋아하며 꼬리칠 만한 그런 남자 스타일이 영~ 아니다? 어허, 글쎄요! 비교적 한 여자에 충실한 남자는 많다. 그러나 그분도 바람기 다분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진실은 선천적인 재능도 재능이지만 그것은 그 영험한 능력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아마도 나이와 어느 만큼 비례한다는 것! 그래서,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내가 처음 악기를 연습한다면서 장래 조각가로서의 소질을 타산하던 그때를. 내가 처음 영화와 소설과 드라마의 뭔가를 따라하던 그것을. 내가 아빠의 등을 보고 무엇을 배우고 내가 엄마의 습관을 보며 무엇을 다짐했는가를. 실패한 첫사랑도 귀중한 추억이지만 그보다도 내가 처음 부모님의 사랑의 대화, 문학으로 승화시키고 연가로서 띄우며 언약으로 곱게 포장하는 그런 사랑의 대화가 아니라 어느 육체적 대화를 언제 어떻게 처음 봤다는 언제 처음 알게 되었다는 그 무언가를. 설마 그거 진짜 레슬링 아니었을까? 혹시 그거 지금 생각해 보면 부부싸움 뭐 그런 거였나? 바로 그런 어떤 기억들 말이다. 열 여자 마다하는 남자는 없다? 살면서 보니 열 여자 마다하는 사내는 없더라? 남자라는 낱말을 여자로 교체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어허, 알면서! 에고머니나, 그 어여쁜 얼굴에 홍조가 번지는구나, 호호호! 방법은 다르고 원리도 다를 뿐,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여자는 정에 약하고, 남자보다 비교적 착하다. 여자는 열 남자와 눈인사만 나누는 정도의 눈빛만 교차하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마음의 대화를 일단은, 더 선호한다. 여자는 남자보다 비교적 오래 함께하는 사랑을 좋아한다. 여자는 말하면 일단 믿는다. 홀딱 믿는다. 곧이곧대로 믿는다. 완전 진짜인 줄 안다. 평생 속고 또 속았으면서 할머니가 되었는데 이제는 속지 않으면 뭔가 편치 않아 하신다. 왜? 웃고 싶으시니까! 여자는 글을 읽어도 믿는다. 그대로 믿는다. 멋진 남자에게 홀딱 반하는 것처럼 그대로 믿는다. 귀가 막 실룩실룩, 펄럭펄럭 움직이면서 저 하늘로 날아갈 듯이. 여자는 비교적 남자보다 권위에 약하다. 여자는 남자보다 비교적 사랑과 믿음이 오래간다. 여자는 자기 남자가 음, 천하의 무엇으로 판명나도 대번에 뒤돌아서는 여자도 있지만 많이들 그래도 우리 오빠 라는 말이 참 오래도 입가를 맴돈다. 여자는 거짓말을 들으면 하늘을 난다. 그래서 여자는 판타지 소설을 좋아한다. 즉 남자와 여자의 어떤 차이점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악녀도 있으니 주의는 해야 한다. 여자도 둘로 나뉘니까. 남자는 둘로 나뉜다. 자기는 아무리 해도, 정말 해도 해도 여자를 여자라는 오묘한 존재를 통 모르겠다는 남자와 안 그런 남자로. 여자는 남자의 영원한 미스테리라고 실재 감내하며 사는 남자와 여자는 남자의 영원한 미스테리라면서 거짓말 같은 달콤한 마술의 언어를 다정히 속삭여주는 남자로. 그렇다. 후자 같은 남자는 여자들이 알아서 신호를 보내거나 알아서 재잘거리며 알아서 꼬리를 흔든다. 그렇다! 결론은 회전목마가 시계 방향으로 돌든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든가, 바람이 부는 날에는 회전목마를 타야 한다? 아니면... 음... 어... 어허 그만 그만! 이게 다 더글라스 때문이다. 그걸로도 모자라 멀더가 한 번 더 내 발등을 밟았다. 아이쿠~ 난 정말 멋모르는 동네 꼬마이자 하수였던 것이다. 그래. 그렇다. 난 아마 똥개에 불과했나 보다. 으흐흐흐흑, 으흐흐흐흑, 살짝 서러워진다. 나는 집에서 이런 대단한 몽상을 했던 것이다.
   몽상을 많이 했으나 집에서 몽상만 한 게 아니다. 다른 일도 했다. 그 가운데, 나는 구글링으로 숙취에 대해 검색하다가 음주 전후 고용량의 비타민C를 섭취하면 숙취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생리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차에 따르자면 이것을 전문 용어로 약발이라고 부른다. 뭐 어쨌든 잡다한 지식을 주입하고, 관심을 돌리고, 예술을 전유해도 기분은 회복되지 않았다. 여행도 모험도 소용없을 듯 했다. 산책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정답일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집을 나섰다.


   12

   다음 날 밤에 나는 집에서 잠을 자면서 꿈을 꿨다. 꿈에서 무지개를 봤다. 그런데 어떤 날은 무지개가 주황색이고 어떤 날은 오렌지색이었다. 꿈에서 나는 마치 휴가처럼 몇 일 지냈던 것이다. 또 매일 다른 색깔의 무지개가 뜨길래 신기하게 봤고 보고 또 보며 구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샛노란 무지개가 뜬 날 나는 무지개 너머로 가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꿈에서도 나는 망설였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장고에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내 아지트 디아벨리로 갔다. 디아벨리는 무엇인까? 뭐긴 당연히 술집이었다. 내 인생의 절반은 술집인가 아니면 내 소설의 절반은 술집인가. 아무튼 디아벨리에 가니 동네 친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우리는 친하게 담소를 나눴다. 그때 누가 그랬다. 나 거기 안다고. 샛노란 무지개가 뜬 그 어느 나라를 안다고. 꿈과 희망이 가득한 그곳은 빨간 무지개도 파란 무지개가 뜬 날도 아닌 샛노란 무지개가 뜬 날에만 당도할 수 있다고 했다. 자기는 그곳에 가봤다는 둥 살았다는 둥, 그러다가 으쌰으쌰 우리는 아예 다 같이 지금 당장 그곳으로 떠나자고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함께 그곳으로 갔다. 우리는 그곳에 도착했다.
   와우! 그곳은 미지의 세계였다. 그곳은 여자들이 남자를 양쪽에 끼고 살았다. 팔짱도 남자가 여자에게 했다. 완전 놀라웠다. 그러다 나는 척키2를 만났다. 반가웠다. 그래서 나는 악수를 할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악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기는 더글라스와 멀더를 양쪽에 끼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 팔을 푸는 순간 녀석들이 다른 여자에게 도망가버린다나 뭐라나. 그러고 보니 정말로 척키2는 양쪽으로 멀더와 더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나도 얘네들처럼 양쪽에 누군가를 꿰차야 하나 고민하다가 꿈에서 깼다.
   살다 살다 참 별의별 희한한 꿈도 다 꾼다고 생각했다.


   13

   나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사는 이 동네는 시골이지만 없는 것도 별로 없고 도시에 있는 건 다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소극장에 한 달에 두 번 가던 걸 한 번으로 줄였다. 찻잔이 아리따운 찻집에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서점 주인을 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나한테 뭐 서운한 일 있냐는 핀잔을 들었다. 씩 웃어주었다. 그렇게 싹뚝 발길을 끊는 걸 보면 필경 기쁨을 참을 수 없는 연애라도 하냐는 인사말을 들었다. 동네 백수들과도 두 번 만날 것을 한 번만 봤다. 게임장도 시끄럽고 왠지 버튼과 여기저기 손때와 바이러스가 잔뜩 묻어 있는 듯 보여서 영 달갑지 않았다. 빵집 사장도 나보고 그랬다. 통 들리지 않으시길래 유명해져서 이 동네를 떠날 줄 알았다나 뭐라나. 그렇게 변두리를 전전하며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다가 밤거리를 혼자 우두커니 아주 천천히 걷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나는 저기 저 으슥한 골목길에서 동네 청년 누군가가 약국 사장 클레멘티가 타는 재규어 범퍼에 오줌을 누고 있는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됐다. 그 즉시 곧바로 가서 타이를 나인가? 아니다! 저 친구도 나처럼 뭔가 애처로운 분위기에 처해 있을 수 있다. 시간이 약이다. 기다려줘야 한다. 넘어졌다 일어나면 한층 성숙하게 늠름한 동네 청년으로 거듭날 것이다. 원래 누구나 방황하는 시절이 있고, 반항도 했다가 제2의 몽정기도 거치는 것이다. 어차피 때 되면 제 갈길 찾아가게 마련이다. 그래야 한다. 정말로 놀라운 미지의 세계로 폴짝 뛰어오르기 전에 심기일전하며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놀이터에서 청소년들이 으쌰으쌰 한다. 경우의 수가 몇 가지 있다. 녀석들도 속은 다 있다. 내 말을 듣냐 안 듣냐, 들은 시늉이라도 하냐 안 하냐, 그보다 내가 그들의 속마음을 짧은 몇 마디로 뒤흔들 수 있냐 아니냐가 어쩌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른 흉내, 내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한판 붙어? 녀석들 여럿 대 나 혼자, 그렇게 한판 떠? 뜨기는 뭘 떠! 누가 떠, 내가? 나보고 얻어맞으라고? 일전에 맞어 봤드니 아프더라. 그러나 져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인가는 몰라도 가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를 실천하는 사람인 건 맞다. 나는 돌아이가 아니다. 나는 사람과 싸워 봤고, 개에게 물려 봤다. 더 나아가 당신 뭐뭐 해봤어 라는 물음은 사양한다. 정중하게. 사람과 사람의 다툼, 그리고 사람과 개의 오해로 발생하는 어느 소란, 그 둘의 차이점이 뭔 줄 아시나요? 개에게 물리면 마음이 더 아프지만 사람에게 맞으면 마음도 몸도 다 아프다. (저런, 그게 뭐야?) 동네 꼬마들이야 싸우기도 하면서 큰다지만, 크면서 당장 영문을 모르는 간섭을 조정하는 방법을 배우거나 대화를 섞고 어떤 이유로든 엮이는 걸 피하는 게 현명하다는 걸 알게 되지만 어른인데 싸운다, 그건 썩 어른스럽지 않더라.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지만 그건 연속극에서나 그렇지 아주 희귀하게 발생하는 그런 일, 그게 어디 아름답던가 말이다. 어렸을 때 내가 때린 친구 지금도 생각난다. 아직도 미안하다. 내가 왜 그랬지, 그때? 그 기억은 무덤까지 따라간다. 그게 인생이다. 예전에 왜 내가 마이크 타이슨이 되어야 했는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친구를 만나면 멋쩍다. 괜히 뒤통수가 근질근질하다. 그렇다고 보란듯이 벅벅 긁어댈 수는 없고. 친구였으니까 망정이지 일면식도 없는 행인과 거리에서 어깨를 마주쳤다가 어 뭐야 그러면서 말싸움으로 발전하고, 그러다가 상대의 어딘가를 내가 깨물었다면 난 미친개로 판명났을 테고, 입건까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한번 생각을 해보자. 내가 얻어맞으면 한 사람의 여러 젊은이들의 인생이 한순간에 바뀌나? 어? 잘 돼 봐야 녀석들은 돌아서서 욕 엄~청나게 해 댈 것이고, 나는 결과는 좋을지라도 중간에 엄청 쫄든가 그럴 텐데 내가 그런 전말을 다 알고 그 서사가 딱 답 나오는데 내가 그 일을 하겠나? 이겨도 모양 빠지고 져도, 지면 더 모양 빠진다. 그걸 아니까 그때 그랬나... 일전에 그런 일이 있긴 있었는데, 쪽수도 엉망이고 말귀도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지나친 일이 있긴 있었다. 또 경찰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시간 좀 할애해야 하고 귀찮고 기록도 남는다. 좋은 의도라지만 내가 그들의 부모나 스승으로 곧장 변신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무조건 나쁜 일은 나쁜 일이라고 다그치고 구박하고 가르치고, 내 방법은 그게 아니다. 막 드라마처럼 일평생 책 한 권 읽지 않덨 사고뭉치가 어떤 이야기 곧 책 한 권을 읽고 눈물 콧물 다 흘리고 개과천선했다더라, 평생 큰소리치고 헤비메탈만 듣던 녀석이 어느 날 글을 읽고 그의 인생이 바꼈다더라, 그런 글을 쓰기는 정말 힘들겠지만 어쨌든 나는 동네 청년과 살짝 예스런 목례는 나누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동네 청년, 오다가다 본 듯 약간 안면이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그 친구가 실례하는 모습을 그냥 못 본 척 지나쳤다.
   그리고 다음 날 밤에 나는 또 그 길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두 번째로 나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어제 봤던 바로 그 청년이 오늘도 또 재규어 차량 범퍼 위에 있는 엔블럼에 오줌을 누고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고민했다. 이거 말을 해야 돼 말아야 돼, 하면서.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오늘 본 청년과 어제 본 청년이 같은 사람인가, 내가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다시 봤다. 동일 인물이었다. 살짝 웃고 자는 지나쳤다.
   다시 다음 날이 되었다. 설마 세 번째로 그 모습을 목도하지는 않겠지 하면서 그곳으로 나도 모르게 내 발이, 내 신발이 자동적으로 나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어쩜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정말 그날따라 나는 운동화를 신지 않고 자주색 구두를 신었는데 왠일인지 그 구두는 동화와 만화영화에 나오는 요술 구두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일에 이어서 진짜 만화영화 같은 일을 경험하지는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나는 오늘 일을 일기에 써야겠다, 오늘 본 뭔가에 대해서 그 생각을 조탁하고 갈고 닦아서 블로그에 올려야겠다 라는 글쓰기에 대한 위풍이 발화되지는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별일 아니었다. 그러던 순간 나는 그 으슥한 골목길에 세워진 허름하다고나 할까, 아니 아니 고전적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뭔지 모를 영험한 신비감을 간직한 그 재규어의 보닛 끝에 달려있는 앤블럼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범퍼 위에 붙어있는 재규어 앤블럼이 더 커졌기 때문이었다. 혹시 저게 그 동네 청년이 오줌을 규칙적으로 정성스럽게 누었기 때문에 커졌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어쩐지 나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당혹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 기적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오직 내가 유일할 수도 있다는 무분별한 가능성의 무한한 특수성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뭔가 그 어떤 부담도 위험 요소도 전혀 없는 실험을 하고 싶어졌다. 내가 만약 오늘 저기에 오줌을 누고 나서 내일 저 재규어를 확인했을 때 그때도 오늘과 비교해서 녀석이 더 커진다면 그건 충분히 믿어도 되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딱)! 낙담은 희망으로 바꼈다. 더글라스와 멀더가 보고 싶었다. 다른 내 추종 세력들도 챙겨줘야 한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질투, 그것은 내가 평생 짊어져야 할 짐이자 내 문학의 원동력으로 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여간해서는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상상 같지도 않은 상상에 내 미소가 썩어야 맞지만 그것은 어떡하다 가짜 웃음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앗싸! 착찹한 기분은 쾌활한 긍지로 전환되었다. 동네 친구들과의 서먹서먹한 분위기도 깨끗이 청산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왠지 나는 즐거워졌고, 기쁨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에 걷고 있는데 자꾸 중력의 영향이 줄어들 듯이 둥실둥실 떠가는 것만 같았다. 내 영혼은 내 안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나 보다. 야속한 애정 관계도에 실망하고, 싱그러운 사랑의 눈빛과 요염한 목소리들에 허덕였는데 내 삶은 다시 흥미로운 제7의 전성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진짜 그 동네 청년의 딱 경범죄라는 법으로써 제재하지 않아도 될 그 일 때문에 다시 신비주의가 되살아났다. 그 친구는 아마 대성할 것이다. 인성이 된 놈이라고 딱 내다봤다. 원래 그런 애들이 나중 커서 잘사는 법이다. 그 친구의 앞날이 훤할 것이라는 예감이 막 뭉개구름처럼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재규어는 동화 잭과 강남콩에 나왔던 강남콩과도 같은 엄명이었던 것이다. 으하하하하,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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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이 되었다.
   정리하자면 첫째 날 그 장면을 봤어, 둘째 날도 봤어, 셋째 날 내가 대타로 나섰어, 넷째 날 내가 친 공이 장외홈런이 되느냐 결국 뻔트로 판명나느냐, 바로 그 결전의 기념일이 바로 오늘이었다. 기대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뻔트일지라도 뻔트 안타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실책까지 이어지면 뻔트 치고 2루를 밟는 것이니 우락부락한 장타자의 단번에 홈런이 될뻔 하다 아슬아슬하게 2루타에 그친 장타와 동타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데서 삶은 묘미가 발생한다. 바로 그런 일을 계기로 인생은 빛을 내뿜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딱 그 시국이었다.
   시간이 됐다. 노을이 저물고 밤이 되었다. 이렇게 하루종일 밤을 애타게 기다린 적 참 오랫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언제 이처럼 가슴 조리며 기다렸는지 딱히 기억나는 날은 떠오르지 않았다. 말이 그렇다는 뜻이다. 아무튼 시간이 됐으니 나는 그곳으로 갔다.
   여기는 골목길이다. 그런데, 어머나 그 분홍색 재규어가 보이지 않는다. 고로 재규어 앤블럼이 커졌는지 커지지 않았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망했다. 완전 망했다. 내 조증은 다시 울증으로 바꼈다. 난 또 졌고, 난 또 꽝이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 뭔가 오늘 하루는 몹시 즐거울 것만 같았고, 꿈도 기뻤던 데다 그 어느 생물학적 현상 때문에 덮고 잔 이불이 아침에 공중 부양을 하셨다. 출발은 좋았다. 아침에 나는 눈을 떠서 오늘은 어떤 흥미로운 일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하늘이 나를 반기고 세상은 아름다웠는데... 이 순간을 너무나도 몹시 기다렸는데 그 기대감은 절망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어쩐지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그건 논리와 상식에 근거를 둔 추리가 아니라 공상과 망상을 대동한 추측조차도 아닌 억지로 꾸민 개꿈에 불과했던 것이다. 혼자 머리에 꽃 꼿은 것이다. 하긴 어딘가 불길했다. 완전 허무맹랑한 일이었는데 혼자서 소설 쓴 것이다. 나는 외롭고 운수 없고 돈까지 없는 끈 떨어진 연이었지 결코 이카루스도 뭣도 아니었다. 나는 아침과 정반대로 밤에 유체이탈을 하게 되었다. 나는 환자였다. 마침내 나는 엑스맨이 되었다.
   이제 나는 업친 데 덥친 격으로 진짜 외톨이가 되었다. 이제 홀로서기가 정말 필요한 때라고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그래서 혼자서 술집에서 술을 고독하게 마시다가 술집 웨이트레스가 내게 그랬다. 오빠! 저기 저 여자분께서 오빠와 합석하고 싶다는데, 오빠 좋겠네~ 라고.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노노노노노노노! 나이트 클럽에서도 그랬다. 혼자서 좀, 분위기 좀 잡아볼려고 나이트 클럽에 갔다. 여기서도 나비 넥타이를 맨 웨이터가 그랬다. 아제! 나비 넥타이에 턱시도 차림의 웨이터는 명찰을 차고 있었다. 명찰에 씌인 이름은 이랬다. 개조심! 그가 여자를 모셔 왔던 것이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을 한꺼번에. 아예 양쪽에 여자를 끼고 내게로 온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랬다. 또 다른 웨이터 아저씨도 왔다. 명찰에 씌여진 이름은 다비드였다. 뭐, 다 - 비 - 드? 명찰이랑 완전 딴판인데? 그거야 뭐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와서 그랬다. 사장님! 녀석도 무조건 쌍으로 데려왔다. 그것도 여러 번을. 양쪽에 팔짱도 꼈다가 양쪽으로 어깨동무도 했다가 양쪽으로 손을 잡고도 왔다가 팔목을 잡고도 왔다가. 팔목? 아... 팔목! 척키 이 녀석은 잘 사나, 후훗! 하지만 나는 모두 정중히 거절했다. 때로는 어쩌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어쨌는지 험상궂게 꺼져, 라고 딱 한 번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오히려 황송해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날 난 거의 꽐라가 되었다. 평소 같았어도 음, 그만 넘어가자.
   아무튼 나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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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우리 동네는 어느 날 보니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어쩌면 나 혼자 엄한 억측을 하느라 혼자 이렇게도 봤다가 저렇게도 봤다가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다 나는 길에서 또 친구들의 사업처에서 녀석들과 마주쳤다. 빵집에 들리고, 극장식 카바레에서 마탄의 사수인지 뭔지도 감상했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샀고, 전화로 디아벨리 사장과 통화했고, 꽃집 주인과는 소셜 네트워크로 교감했다. 또 그러다 서점 주인을 만났다. 그런데 서점 주인이 그랬다. 더글러스가 너를 보고 싶어하더라고. 그러고 보니 다른 친구들도 나 보고 그랬다. 멀더가 그러더라고, 내가 연락이 안된다고. 그 말은 멀더에게 전화를 해 봐라, 멀더는 너를 보고 싶어하는데 너는 왜 멀더를 멀리하느냐, 나도 멀더도 다른 친구들도 그 이유가 뭔지 통 모르겠다 라는 뜻일 것이다. 또 술집 사장도 그랬다. 멀더에게 연락해 봐라. 술집 사장의 여자친구도 그랬다. 오빠, 더글라스에게 연락 좀 해주세요 라고.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생도 내게 그랬다. 척키2가 연락해 주라고 합디다, 형 좋겠수~ 라면서. 어디 그뿐인가. 문구점 사장의 부인이 내게 전했다. "오빠, 무슨 일 있어요? 앤젤이 오빠를 몹시 보고 싶어하던데... 둘이서 무슨 일 있었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던데..." 그와 같은 알아들을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알쏭달쏭한 소식도 전해주었다. 그 모두는 카더라-식 뜬소문이 아니었다. 좋은 사람의 적확한 전언이었다. 부풀리지도 않았을 테고, 과장되거나 비틀려졌을 리도 없다. 뭐 이간질? 무슨 그런 엄한 말을! 있는 그대로의 오해의 소지도 전혀 없는 날씨 얘기와 같은 간단한 안부의 말일 뿐이었다. 그런데 난 왜 그 모두를 모른 채 했었나...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하도 많이 들어서 알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살면서 내내 그랬다는 것을. 살면서 내내!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항상 그랬다. 전화번호 적어주는 친구, 이 친구 만나도 저 친구를 만나도 늬 단짝 누가 널 보고 싶어하더라 연락이 안 된다고 하더라 라는 말들. 무명이라는 농구단 친구 왈, 누구스 부상당했다며, 발바닥 부상! 친구들과 좀 더 어울렸어야 했는데 내가 자꾸 집에 일찍 들어가니까, 누구스는 집에 꿀단지를 숨켜뒀어 라는 말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건 내가 골치 덩어리까지는 아니어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하긴, 어느 바텐더도 내게 그랬다. 오빠는 트러블 메이커라고! 생각해 보니 정말 나는 트러블 메이커가 틀림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뭔가 조금은 매정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모두에게 연락을 했다. 통화를 하고 직접 찾아갔고 만났다. 모든 관계는 회복됐다. 나만 회복이지 녀석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내가 나를 골탕 먹인 것이었다. 더글러스와 나는 다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빵집 사장 크리스와는 날을 잡았다. 내기 체스를 언제 두기로. 또 사진관 주인 팀에게 사진을 배우기로 했다. 문구점 사장 개리와는 테니스를 같이 연습하기로 했다. 커피집 점원 마리아에게는 내가 소개팅을 주선해 줄 차례였다. 토마스와는 언제 캠핑가기로 의견을 모았고, 척키2는 다시 내 수중에 들어왔다. 앤젤리나를 쥐락펴락하는 재미를 되찾았다. 하하하 그 재미 쏠쏠했다. 편의점 사장 린다에게는 속담 사전을 내가 선물해줬으니까 이제 내가 뭔가를 받을 차례라서 난 괜히 들떴다. 패션 디자이너 테일러에게는 최신 음악 CD를 선물했다. 그녀도 거의 내 팬클럽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 번 내 마수에 걸려들면 그건 끝난 게임이다. 여자는 웃으면 끝이다. 더도 덜도 말고 10분이면 충분하다. 눈빛 한 번이면 되기도 하지만 너무 거들먹거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좀 시무룩하다 싶으면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커졌다 작아졌다 커졌다 작아졌다, 밀었다 당겼다 밀었다 당겼다, 는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멀더의 카페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또 새로운 친구도 만났다. 멀더의 카페에서 나처럼 글을 쓰는 친구였는데 얘는 출판사 특파원에 영화감독에 패션지 기자였다. 동네 친구들과도 모두 함께 어울렸다. 그런데 녀석에게는 유별난 특징이 있었다. 녀석은 술을 마실 때 특이한 건배 구호를 외치는 친구였다. 보통은 그런다. '위하여'나 건배, 자 마시자, 라고. 좀 길게 하는 사람도 있다. 기도인가는 잘 모르겠다. 속는 셈 치고 내일을 믿어보자면서. 세상 탓은 하지 말자고.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걸쳤지 않소 하면서. 술을 마시고 나면 너의 빈잔에 꿈을 채워주겠다면서. 그런데 녀석의 건배 구호는 그 모든 일반적인 사례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녀석의 건배 구호가 뭐였드라? 얘는 건배할 때 그랬다. 다른 말도 아니고, 바로 떡이라고 했다. 술잔을 부딪힐 때 그런다, 떡~! 잔을 부딪힐 때 딱 그때 한 번만 '떡'이라고 했다. 떡? 뭔 떡! 나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좀비가 됐다. 자꾸 따라하게 된다. 특히 혼자서 마실 때. 왜냐하면 앞서 말한 전자에 해당하는 마초들은 안 그래도 인기에서 밀리는데 돈까지 내는데 새로운 유행어가 반응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정신이 번쩍 뜨일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친구들은 녀석에게 또 말린다고 느낄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서열이 자꾸 내려간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었다. 떡~! 똑같이 따라해 보니 재미있었다. 수준이 높지는 않았으나 꽤 괜찮은 농이었고, 작은 행동으로 큰 웃음을 주는 투자 대비 효과가 꽤 괜찮은 아주 훌륭한 해학이었다. 그 때문에 철지난 CF가 생각났다. 철지난 CF, 바로 그 초딩들이 한때 열광했던 바로 그 CF 멜로디, 그래서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치를 떨었다는 바로 그 CF도 생각난 김에 곧바로 이어서 따라하게 됐다. 룰루랄라랄랄라~ 룰루랄라랄랄라~!
   뭐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 동안 혼자서 바쁘게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느라 참 바빴다. 그래도 오해는 풀렸다. 사실 오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녀석들은 모두 딱 나와 마주칠 그 찰나 단 몇 초 동안만 장난쳤던 것이다. 그게 전부였는데 나 혼자 착각했고, 나 혼자 절망했으며, 나 혼자 소설을 써댄 꼴이었기 때문에 오해 아닌 오해가 발생한 것이다. 난 정말 그 어느 환청을 경험했다. 아예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라는. 블로그에 삼류 소설을 쓰는 걸로도 모자라 내 인생의 3막 4장에 해당하는 일상에서까지 소설을 쓰다니,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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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어떻게 보면 내 십대 시절에 별로 큰 이성 경험이 없었고, 아니 아마 아예 없었을 테고, 그 후로도 탄탄한 아성을 확립하지 못한 게 오히려 잘된 일인 듯 여겨진다. 만일 내가 남중-남고가 아닌 남녀공학을 다녔다면 졸업식 바로 다음 날 결혼식을 올리고, 어떻게 꽃피는 봄날을 지나 초여름 이전에 애를 낳어, 만일 그렇게 진행되었다면 나는 일일 드라마에 나오는 일들을 모두 겪지 않았을까? 게다가 분유값과 애들 학비를 버느라 (정말 좋게 보자면) 파란만장한 인생 경험도 못했을 테고, 그래서 이렇게 환상 문학상에 대한 개꿈도 꿀 수 없을 것이며, 심지어 의처증인가 의부증의 주인공으로 낙찰, 더 나아가 혼자 바람 쐬는 걸로도 모자라 맞바람? 그걸로도 부족해서 상상일지 현실일지 몰라도 뉴스에서 본 것처럼 야구방망이를 야구하는데 쓰지 않거나 공상으로야 연적을 만나서 혼내준다지만 딱 만났는데 상대가... 완전 후덜덜해서 그래서 내 다리몽둥이가 부러질지도 모른다며 겁을 집어먹는다면? 오오, 그건, 절대, 안돼! 그런데 더불어 이혼과 결혼을 밥먹듯이 한다? 그러면 오히려 다행이게? 더군다나 그것도 여유가 있어야 하겠지. 가난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또 하루는 난봉꾼 하루는 도박꾼으로 살게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돌아보면 그렇게 막 살아야 하나, 정말 인생 별거 없는 건가, 이게 정말 인생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을 진짜 한 번쯤 솔직히(!) 해 본 적 있으니까.
   더 불우한 친구들보다야 비교적 유복한 환경이었을 테지만 나는 그래도 퍽 소박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지금 삼류 소설이라도 블로그에 연재하는 게 그나마 감지덕지한 일이다. 동네 친구들과 추종 세력도 모두 돌아왔고 참 다행이다. 학창 시절 나 혼자 쓰는 내 방이 있었다면, 난 범생이로 공부를 더 잘하게 되었을 테고, 그렇게 좋은 학교 가서 평범한 월급쟁이가 되었으면 몇몇 즐거운 경험도 없었을 것이다. 손버릇 안 좋은 (외)사촌형1과 2는 방학때만 우리 집에 잠시 머물다 갔으니 그렇다 쳐도, (외)사촌형3은 당시 새-장가 갔어도 멀쩡히 외삼촌네가 있는데 엄마는 왜 어렸을 때 데려왔는지. 어제도 어린이 드라마의 소재로는 부적절하고 15세 제한 상영가 정도의 악몽을 꿨다. 이 악몽이 내 소설의 근간인가? 모르겠다. 사촌형3은 빈방에 놓여 있던 누나 팬티에 뭘 묻혔고, 난 사촌형의 책상 서랍에서 돈을 한번 훔쳤고(사촌형 1-2-3 아휴 그때 사촌형1과도 싸웠고 사촌형3과도 가끔 싸웠다), 내가 5년인가 펜팔했던 아이슬란드 소녀로부터 온 편지를 사촌형3은 몰래 먼저 훔쳐봤고. 그리고 사촌형3과 헤비메탈 공연들을 같이 보러 같이 다녔는데 난 이제 헤비메탈을 졸업하고 고전음악으로 넘어갔는데 어느 날 사촌형3은 메탈리카던가 어느 밴드의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왔다. 나중 같이 보자고. 같이 봐야 하는데 난 잠깐 혼자 보다 말았다. 그래서 나중 난 봤다니까 사촌형3은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날 째려봤다. 그러고 보니 글렌 굴드 이전인가 이후던가 내한 공연했던 어느 피아니스트의 영국 모음곡 1번 TV방송을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해서 몇 번 봤던 게 생각난다. 또 커서 우리 집 정확히는 누나와 매형은 사촌형3의 돈을 투자받고 주식 증서를 줬고, 우리 집의 빛은 끝이 없었고, 사촌형1-2의 아빠였던 외삼촌은 외가 어느 결혼식장 계단에서 우리 엄마를 지근지근 밟았다. 누나와 매형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일면식만 있는 사람과 옛날 친구등 거의 모든 사람에게 돈을 빌렸다. 딱 1만명에게. 누나 성격 딱 보통인데 그게 어디 쉬웠겠나. 그래서 뭐, 이혼이라도 할 꺼야? 자기 기분 안 좋을 때 툭툭 던지는 실언이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그건 습관이고 천성인 사람도 있다. 그 빚잔치 하면서 또 기분 나쁘면, 그동안 돈 안 모으고 뭐 했니? 오, 신이시여! 또 시간 지나면, 그게 어디 내 잘못인줄 아니? 뭐야 그게, 뭔 망언 제조기야? 말문이 막히는 일들이 사람 사는 세상에는 적지 않을 수도 있다. 기분이 좋을 때야 뭐가 문제겠나. 명목상 얼굴을 못 들어야 맞는데 사람 사는 세상 그게 어디 정서적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순리대로 사는 문제던가. 그렇다. 기업 사냥꾼이 무슨 법을 어기나? 아니다. 정해진 룰 안에서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는 스포츠 선수와 똑같을 뿐이다. 서로 껄끄럽고 기분 상하니까 안 보면 서로 좋은데, 그게 어디 쉽나.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래서 비극으로 탄생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른들 말씀이 의 상하니까 돈거래는 하지 마라, 그러나 듣고 보면 또 마음이 움직인다 찡하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해야 된다 라면 어른들은 보통 말한다. 받을 생각하지 말고 빌려주라고. 돌려받지 못해도 큰 타격이 없는 선에서 관계에 상응하는 그 만큼의 최고의 액수를 주라고. 이론은 그렇지만 그게 또 그대로 지켜지기도 어렵다. 이론이 다라면 세상 살이 뭐가 어렵겠나. 이론은 그렇다. 친구와 한 집에 살지 마라, 우정과 일은 서로 중복시키지 마라, 돈은 빌리거나 빌려주지 말고 그냥 줘라 아니면 같이 망하고 같이 주저앉는다 빌려주고 나서는 주객이 바뀐다,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때문에 나중 반드시 탈이 나기 때문에라고. (밖에 안나가고 집에서만 일하는 남편, 부인이 커피포트가 될 소지가 큼. 장거리 연애, 멀리 떨어져 사는 부부, 3촌수 이내 가족과 같이 일함, 우정이나 사랑과 동업한다 등등 주의가 필요함. 될 수 있으면, 이 적용되는 일들!) 왜 남자는 축구 리그처럼 승수에 집착하는가 모르겠다. 프리미어, 세리아A, 라리가... 모두 팀은 승 수를 많이 쌓아야 우승한다. 그런데 삶은 그렇지 않다. 실수와 적을 만드는 일 같은 부정적인 변수를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가만 보면 남자의 세계는 너무 거칠다. 승부는 친교에서도 약간 적용된다. 투자도 공격적으로 한다. 또는 아예 쳐다도 안 본다. 뭐 하러 놈의 동네에 놀러간데 라면서. 뭔 적당히, 가 없다. 인생도 혹시, 싸구려 아니면 최고만 존재하는 것일까? 뭐냐고 그게! 하긴 어여쁜 숙녀를 상대하지 않을 바에야 사려 깊을 필요가 없기는 하다. 내가 그분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지. 상대의 의중을 왜 떠보겠나 못할 말이 뭐겠나, 으쌰으쌰 아무나 다 까며 늬가 잘났냐 내가 잘났냐 내가 최고다 너는 최저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살았냐고. 또 일부는 비상금을 오로지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모은다. 그거 말고는 사는 재미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남자의 여자 경험에서도 축구 리그처럼 승 수가 먼저다. 단 3번의 사랑 또 그 가운데 최고의 사랑이나 마지막 사랑 같은 것, 무엇보다 친구들끼리 사랑에 대해서 얘기한다? 맞겠다는 것이다. 때려주라는 것이다. 그러면 돌아이로 찍힌다. 나도 그랬다. 그냥 그런가 보다. 그 어떤 생리는 말이다. 매형은 회사를 여러 개 운영하면서 약 1천명에게 월급을 못줬다. 엄마도 아빠도 돈을 꾸준히 빌려서 누나와 매형에게 지속적으로 올려줬고, 빛에 이자에 독촉에 시달렸다. 참 오래도. 아빠도 살면서 정말 많이 엄마 속을 썩였지만 그런데 그 정점을 또 찍으셨다. 퇴직금을 어느 증권 중개인에게 홀라당 상납하셔서 싹 해 드신 것이다. 한꺼번에. 그 때문에 엄마는 아빠의 머리채를 휘어잡으셨다. 엄마는 이따금 주기적으로 그 일을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아 또 그 얘기...! 아빠는 남의 말을 너무 잘 믿으셨던 것이다. 남자는 말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어린 나를 웅변학원에 보내시기는 했는데 말이다. 남자는 글을 잘 써야 한다는 관념이 명징했기 때문에 나를 중학생 때 펜글씨 학원에 보내시기는 했는데 말이다. 아빠는 내일 당장 돈방석에 앉을 거랬는데 이미 어려운 형편인데 빚잔치만 가중되었다. 그 언젠가 어느 정도 빛이 청산될 뻔 하기도 했는데─완전 청산? 허허허 글쎄요! 도덕적 부담을 더는 수준이었을 테지─또 그때 빌려살던 집을 비워줘야 했기 때문에 아빠는 집을 알아보시다가 또 혹 하셨다. 혹 하셔서 풍수지리가 좋은 새 집에 이사를 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화술은 너무 어눌하시지만 그래도 아빠도 나름대로 특유의 화법이 있긴 있다.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눌하시다. 경영 수업의 대가로 얽키고 설켜서 언제부턴가 역지원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놈의 한 세월 동안의 그 한숨이 절로 나오는 빚잔치 때문에. 그래서 아빠는 누나와 매형과 통화해서 그럼 포기해야겠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하면서 돈 문제는 다시 더 악화됐다. 세월에 걸친 매형의 경영 수업 지원의 대가로 누나네는 지금도 돈을 내려보낸다. 누나네는 조카들이 다 컸고, 가정은 어려운 사정에 비해 화목하다. 더 자세한 형편은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누나는 평생 웨딩드레스를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다. 라디오나 어디서 광고 음악으로 금혼식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여인들이여, 손 한 번 들어보세요 하면 드문드문 몇몇 보일 것이다. 청년과 중장년의 경험은 천양지차인 것이다. 왜 스무살을 보며 애라고 하는지, 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지 그분들은 두고 보면 알게 된다. 아, 돈 문제 얽히고 설키면 정말 뚜껑이 열린다. 삶은 파괴된다. 인생도 망가진다. 그것은 피라미드의 피라미드를 쌓아서 지금까지 이르게 됐다. 고달픈 빚잔치 인생의 여정에서 가정부에 간병인에 이 일 저 일 참 많이 하신 엄마의 손과 발을 보면 그건 평생 막노동을 하며 산 거친 남자 노동자의 손과 똑같다. 많은 엄마들이 그렇고, 많은 부인들이 그렇다. 그런데 저 수렁은 또 사촌형3을 빠트릴 리가 있나. (외)사촌형3. 명절에 보게 되면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무덤덤할 만큼 무탈하게 한 가족으로 지냈으나 그건 아마 좀 다른 일인 듯 하다. 입양하여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매력적인 성년으로 성장하거나 소공녀 같은 옛 영화에 나오던가 아니던가 그럴 듯한 파양의 주제와는 또 다른 매우 어중간한 인생 경험의 문제다 그것은. 형제지간이 많은 가정에서 자라는 문제와도 다르다. 난 내심 언짢지만 꽤 싫지만 싫은 내색을 해서도 안되었고, 하지만 신경전도 싸움도 오래 함께 했으며, 도덕과 감상문과 TV로 학교 생활로 학습하는 그리고 무엇보다 세뇌되는 동화에 나오는 선의을 바탕으로 하여 잘 지내야만 했으니 그건 명백한 고통이었다. 내내. 집안 사정 뻔헌데 양복에 반짝이는 구두 없다고 사촌형3이 전문대 졸업식에 안 가겠다고 해서 엄마의 꾸지람과 잔소리를 나도 같이 듣고 있어야 했다. 쫓아다니는 자기 좋다고 소문내며 응원하던 동창도 있었던 듯 한데 애석한 일이야 어디 그 뿐이겠나. 행복한 가정도 즐거운 우리 집도, 그 정도의 개인 사정이야 누군들 없을까 하지만. 그럼 사촌형3은 행복했을까? 그럴 리가 있나! 한으로 맺혔을 것이다. 확실한 고아라면, 차라리 확실한 고아라면 드라마처럼 겸연쩍어하는 타인의 표정에 익숙해지는 게 어쩜 나을 수도 있을 텐데,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주체가 되어 밝게 분위기 전환을 주도할 수도 있을 텐데, 이건 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어떻게 설명하기도 뭣허고 혼자서 감내할 뿐 그게 다다. 입장을 바꾸면 모르긴 몰라도 아아, 털어놓지 않아서 그렇지 아득할 테지 정말로. 살면서 간헐적으로 듣게 되는 아주 정확히 공통되는 대사를 낭독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대사는 뭐냐? 그것은, 난 어느 때 그때 뭐 밖에 안 했다 일하고 집에서 쉬고 그게 다였다 (그런데 왜 내 삶은 이 모양 이 꼴이냐)! 사촌형3이 한 시절 모은 목돈 허공으로 싹 날라갔다. 기약도 희망도 없는 버려진 마권 휴지 같은 것일 테니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사례가 어디 한두 곳이어야 말이지! 빚잔치의 분위기에 둘러쌓여 성장한 사람들은 잘 아시는 사정이다. 즉 결과적으로 누구 하나 좋지 못했다. 초등학교4학년 때는 몰랐다. 어느 날 엄마랑 나랑 같이 외삼촌네 집에 갔다가 사촌형3과 같이 우리 집에 돌아왔는데 이틀 있다 갈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대충 20여년 갔다. 결과적으로 누구 하나 좋지 못했다. 중요한 교훈이다. 아주 중요한 교훈! 잠깐 어떡하다 그게 옳아보여서 어쩝시다 결정한 일이 나중 보니 아무도 만족할 수 없는 그 누구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불편한, 아니 불행한 기억만 남겨줬다. 그건 불쌍한 사연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막중한 폐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소한 일도 아니라는 점, 신경쓰이는 일이다. 그 느낌을 절절히 아니까 언젠가 나는 책을 읽다가 밑줄을 그은 일이 있다. 친구가 불의의 사고로 이승을 뜨게 될 경우에 대비해 아이들의 후견인이 돼달라고 부탁한다면 거절해도 된다, 매우 드물게 틈틈히 읽는다. 오늘도 오랫만에 다시 읽었다. 그렇지만 엇비슷한 일에 대해서 분명히 좋은 예도 있을 테니 쉽게 단정짓지는 말고 잘 참고해야 할 것이다. 전 사는 게 어려워요 라고 얼굴에 씌여있는 사람을 상대하면 즐거울 리 없다. 그렇지만 불행한 듯 보여도 밝은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더라! 이거다, 이거라고! 나도 세상의 온갖 고민 떠안은 듯 엄살부리는 게 어쩌다 취미가 되어버렸지만 물컵에 물이 반틈 채워져 있을 때의 관점은 지나칠 만큼 반복돼도 큰 흠은 아닐 것이다. 그런 빛 독촉과 가난한 환경에서 살아본 사람도 둘로 나뉜다. 희망을 포기하는 사람과 간직하는 사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사람과 밝은 사람으로. 
   일부러 중간 요약을 내리자면 이렇지 않을 런지.
   첫째, 내 사랑과 내 우정을 어느 정도는 내가 결정해야 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내 주관으로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편견과 선입견도 작용하겠으나 심지가 약해지고 직감이 무뎌지지 않도록 삶을 막 살지만 않는다면, 인생을 사랑한다면 어느 만큼 시간과 비례하는 문제다. 만약 누군가와 만난다, 믿음이 개입되고 의리와 결부되기 전에 우정과 사랑과 정으로 굳어지기 전에 그분을 만나고 싶냐 함께 가고 싶냐 아니냐를 내가 결정해야 한다. 늦어도 결정은 번복할 수 있다. 그것은 내 권리다. 인생은 곧 사람과의 인연이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한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각각 다 다르다. 그런데 그분들에 대하여 내쪽에서 파악이 늦는다면 파악이 틀렸다면 내 중심적으로만 그냥 좋게 좋게 분석했다면 그에 따른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좋으면 괜찮지만 안 좋았을 때, 그 피해는 멀리가지 않고 그 손해는 모두 내몫이 된다. 따라서 살면서 그 능력을 반드시 키우는 게 좋다. 사람을 딱 봐서 이 사람은 기분 나쁘면 아무 말이나 아무 한테나 막 그냥 막 하는 사람이구나, 직관적으로 알아내기는 힘들어도 차차 그 데이터를 쌓아나가면서 배워야 한다. 사람이 무디면 휘둘리거나 이용될 가능성이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높다. 사람 참 좋네 라는 말을 듣는 천성이라면 불필요한 인연들과 굉장히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인생을 허비할 수 있다. 무엇보다 밝은가 어두운가, 나와 맞나 안 맞나 통하나 안 통하나, 저분은 축구 감독처럼 자기 목적만을 최우선시하는 승부사 타입인가(축구 감독이 어떻다는 게 아니라) 또는 내 대망과 야망만 오직 1번이니 고로 1번의 목적을 위한다면 그 무엇이라도 포기할 수 있는 경영자 타입인가("윤리학에서는 수단을 목적으로 오해하는 일을 가장 심각한 죄악으로 꼽는다. - 텅 빈 레인코트") 아니면 승리 숫자는 중요하지 않고 대부분 무승부를 착착 쌓고 내 과오에 따른 패전을 최소화하는 사람인가, 내 기분 안 좋을 때 발생하는 패착에 무신경한 사람인가 아닌가(난 뒤 끝 없어, 그 말을 왜 그분이 왜 저 3번이 하시는지!), 내 야망이 그 모두보다 1차적으로 우선하는가 아닌가, 사람을 보아하니 천성은 괜찮아-하지만 이 분께서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인지 정말 두고두고 저 3번의 습성이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간혹 어쩐지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나 또는 그렇게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긴 고행을 겪고 있을지라도 큰 즐거움도 감화도 감언이설도 그 무엇도 건네지는 못하지만 딱 하나 절대 타인에게 듣기 거북할 정도로 신랄한 언행은 노출시키기를 자제하는 사람인지, 딱 그 정도만 파악해도 삶의 시행착오는 꽤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나를 돌아보자. 내 주변 내 환경을 중간 점검하자. 내 독설에 가슴 아파한 여린 마음의 소유자들이 있었을 텐데, 지나간 시간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다가올 시간에 대해서 내 세상사에 대한 행동과 내 삶의 자세와 내 인생의 태도가 덜 서투를 것인가는 어느 정도 내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가 차디찬 말이고 어디부터가 하지 않아도 될 말인지 그 기준은 수학적이지 않다. 그러나 근사치를 알아가면 된다. (피터 드러커의 학술에 입각하여, 유능한 상사에 의해 연마되는 당신의 업무 능력 향상과 그로써 발생하는 마찰, 스트레스를 얼마만큼 어떻게 풀고 가는가는 논외로 하겠음. 벅참. 능력 밖임)
   셋째. 그 단어, 성과! 기간 대비 성과는 꽝인 듯 하지만 뭔가 쌓였던 응어리가 이렇게 소설에 녹아들었다. 경영학적으로 보든 어쩌든 안 좋은 성과의 이면을 뒤적거리다 얼렁뚱땅 뭔가 결실은 억지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성적이 떨어지면 공부하는 방법을 수정하면 된다. 일과 사랑과 우정과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나는 왜 그대를 사랑하는가 등등. 회사의 실적이 주춤하면 목표를 검토하고 문제점을 찾아 수정하며, 어떻게 일을 하는가를 점검하면 된다. 사랑에 실패해도 다음이 있는 법이다. 곡이 안 써져도 방법은 있다. 당신은 취미를 바꿔도 되고 차를 바꿔도 된다. 단, 애인을 바꾸거나 부인을 양쪽에 꿰차는 일은 신중하거나 자제해야 하리라. 포지셔닝이 문제면 리포지셔닝도 있고, 길게 버텨야 보람이 손짓하고 행복의 서광이 밝아오는 일도 있다. 그처럼 이직도 있고 우정도 무엇도 있으며 세상은 돌고 돈다. 그나마 왜 나는 여태 이 모양 이 꼴이냐 라는 투정은 토로하지 않았으니 그건 어쩌면 절반의 성공이 아닐까? 아닌가, 그런가? 그대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대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대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든 뭐든 내 좌우명은 자기가 정해도 된다.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천당도 지옥도 다 내 마음속에 있다고. 이렇게 그대가 대단한 각성에 이르렀는데 가까운 앞날 그대의 뚜껑이 열린다면 그 얼마나 이상할까! 아니, 진정 그 얼마나 웃길까! 그 작심삼일의 희망과 변모와 그로 파생할 어떤 새로움이 막 벌써 기대된다. (작심삼일도 백 번이면 1년이다) 어서 알고 싶다. 막 기다려진단 말이다. 그에 따른 예상 결과가 좋든 아니든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아마도 윈윈 게임이 될 듯한 예감 때문에 괜히 흐뭇해진다.
   그 어떤 진흙탕과 별의별 남자들의 허세와 허풍과 사르르 녹는 듯한 달콤한 언사를 하도 많이 겪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래도 이처럼 안 팔리는 글이라도 쓰게 됐다. 장르는 애매하고. 이처럼 그만그만한 가정에서 자랐으니 어떻게 보면 나도 참 이상한 사랑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동네 친구들이 내게 묻는다. 늬가 말하는 그 피앙세가 대체 누구냐고! 사람이냐고. 무형의 존재는 아니냐고. 바람처럼 머릿결을 날리는 소리냐고. 좀비를 다시 좋았던 시절로 돌리는 빛이더냐고. 시간을 돌리고 시간을 굴곡시키고 시간을 멈추는 그 무엇이냐고. 늬 말마따나 너의 그 사랑의 천연기념물은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길래 아직도 깜깜 무소식이냐고. 혹시 그거 보물찾기나 숨은그림찾기 같은 놀이 아니냐고.
   돌아보면 나는 무엇보다 돈이 없어서 연애다운 연애를 단 한 번도 못 해봤다. 말은 안 해도 모든 사람들이, 특히 젊은 친구들이 그런 경우가, 내가 봤을 때는 일반적으로 80퍼센트다. 연애를 많이 하는 게 훈장이다고? 모태 솔로 어쩌고저쩌고? 말은 쉽지만, 글쎄요! 웃기지도 않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사겨, 그러면 사귀는데 같이 시를 외울까? 걷기만 할까? 뭔가를 해야 된다고, 뭔가를. 그러니 극장에 가고 미술관에 가며 커피를 마시고 술집에 가겠지. 그럼 그게 외상으로 되나? 아니다.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이. 난 솔직히 돈이 없어서 연애를 못해봤다. 아아, 내가 여유만 좀 있었다면 조르주 심농은 내게 상대도 안 되었을 텐데, 아쉽다. 그렇지만 돌려서 생각하면 많은 기쁜 추억을 회상할 수 있게 됐다. 그 때문에.


   17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편의 산문시를 썼다. 제목은 무제다. 사랑...이라고 정할까 하다가 낙서냐 노랫말이냐를 따져야 하니까 그냥 제목은 붙이지 않았다. 그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나는 또 다시 우정과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제 그건 습관이 된 듯 하다. 인생은 뭐다, 가 바톤을 넘겨준 건가? 누구 맘대로! 그런데 바톤은 페퍼민트빛? 쉿! 일단 한번 듣고나 보자. 읽어나 봅시다 그려. 자, 우정. 변하던 변치 않던 우정. 친한 친구가 많았고 다툼도 많았으며 인기가 많았으니까 그것에 대해서 논할 수 있다. 폼 잡고 뽐낼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떻드라 왜일까 하면서 그 궁색한 궁금증을 글로 옮기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하여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사랑은! 사랑. 그것도 이왕이면 최고의 사랑. 일평생, 친구와도 여자와도 가족과도 그 어느 누구와 단 한 번도 사랑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 우스운 일이다. 부자연스럽다. 비정상이다. 참, 나, 그건, 서러운 일이다. 일평생, 내 여자친구를 소개해 줄께 라는 말을 해 보지도, 풋풋하게 손 잡고 정답게 거리를 걷는 연애를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 그런데 사랑은 무엇이다 사랑은 있다 없다고 평한다? 지나가던 개가 웃겄다. 그건 정말 내가 생각해도 개 풀 뜯어먹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안 그런가 말이오! 따라서 나는 당장 멈춰야 한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 어설픈 연설인 줄 나도 잘 아는데 멈춰지지 않는다. 그건 흡사 내 권한 밖의 일인 듯 하다. 그래서 쓰고 또 쓰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나 쓸 때는 뭔가 멋져 보였는데 나중 보면 간혹 괴상하다. 때로는 절망하고 또 글이 안 써진다며 괴로워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다시 나도 모르게 사랑에 대해서 마치 전문가나 되는 것처럼, 사랑법에 통달한 것처럼 그렇게 사랑이란 말이야, 막 그러면서 글을 쓰고 있다. 내 손은 내 손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극장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영화는 보지 않고 자꾸만 잠을 잔다. 잠이 온다. 그렇게나. 내 손은 내 손이 아닌 듯 내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막 바쁘게 뭔가를 갈망하며 산다고나 할까 그게 너무 이상하다. 그렇게 쉬지 않고 생각하고 쉬지 않고 글을 쓴다. 글이 안 써지면 또 나는 집 밖에서는 바카스가 되고 집 안에서는 디오니소스가 된다. 내가 마치 사랑학의 의젓한 권위자나 된다는 듯이 그렇게 술술 읊어대고 있다. 뻔대기 앞에서 주름 잡는지도 모르고 유치원 재롱 잔치 무대 위에 뜬금없이 떨구어진 것이다. 깜짝 출연! 웬 동네 아저씨가. 쟤 뭐야, 누가 봐도 그럴 것 같다. 혹시 그는 천재? 아니 아니. 아마도 괴물!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내가 느낀 신기함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누가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이나 믿을 수 없는 요정이 내 안에 잠입해서 날 조정하여 막 글을 쓰게 만드는 것만 같다고 느낀다. 나는 그 전권을 위임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대체 어느 초인들은 내 안의 누구와 교섭했을까? 내 안에는 대체 몇 명의 내가 있을까? 혹시 운명의 신 모이라일까? 설마하니 아테나가 서명했나? 아니면 하데스가 깨어났을까? 녀석이 언제 저쪽에서 이쪽으로 왔지? 아직 서로들 덜 친해졌나, 누군가 새침한 녀석이 있나 보군. 아하, 헤르메스가 의심돼 맞어 맞어! 그렇지만 전혀 생소한 누군가일 수도 있다. 아직 이름이 없는 자. 최초의 인간. 사람 안에 사는 한 사람. 그 친구는 뚱뚱할까 홀쭉할까, 꺽다리일까 난쟁이일까? 그런데 녀석이 사춘기? 오 이런 세상에나! 어쨌든 내 안에 누군가 산다. 결론적으로 또 잠정적으로 메피스토펠레스가 내 안에 들어와서 사는 것만 같다. 그러나 원래 사람은 성선설이 맞을 테지만 또 그 어떤 본능을 사는 동안 내내 잠재우는 것은 온전히 인간의 몫이다. 인간은 그걸로 따지면 시지푸스인가 보다. 그러면 또 내 친구 허세 대마왕이 옆에서 그런다. 이 바보야 그게 뭐가 시지푸스냐 프로메테우스지. 우기길래 그냥 넘어간다. 나중 생각나서 설마 내가 틀렸나 해서 검색해 보면 '역시나'가 된다. 삿대질과 골 세러모니는 비슷하니까 그러려니 한다. 어쨌든 어떻게 내 손이 알아서 볼펜을 잡고 뭔지 모르는 글을 쓰고 뭔지도 모르는 생각을 키보드를 통해 컴퓨터 메모장에 옮기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재밌고 아마도 불가사의하다. 주제 넘게 어디서 동기 부여야, 나도 알고 있다. 왜 모르겠나! 그런데, 그런데 멈출 수가 없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그 뻔뻔함이 무엇인지 그 광기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관성은 무슨 법칙인지 그 눈꼽 만큼의 설득력이 대관절 어디서 툭 튀어나왔는지 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알고 싶단 말이다. 동화에 나오는 춤추는 요술 구두,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데 또각또각 청아한 소리가 실제 들리고, 뭔지 알 것도 같은데 그 구두가 무슨 빛깔인지 아무리 해도 모르겠단 말이다. 이해할 수 없다. 믿을 수도 없다. 인정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다 진짜다. 참말이다. 현실이다. 그 어느 답답함을 어떻게 잘 설명할 수도 없다. 내가 드디여 미친 것일까? 아니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바보가 되었다면 또 모를까. 그런데 속이 탄다. 어떻게 타는지는 모르겠고. 슬프다기보다는 신비롭다고나 할까, 아니다 짠하고 또 애잔하다. 이게 다 뭐란 말인가. 인어는 물고기고 공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물고기가 말을 해? 인어 공주! 사람 돌아버리겠구만(먼)! 이미 어린애일 때부터 모순에 세뇌당했던 거야. 이런, 젠장! 나는 차라리 그랬다. 나는 가난과 친했고, 사랑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었고, 그저 즐겁고 기쁘고 재밌고 행복하기를 바랬다. 나는 차라리 그렇게 생각한다. 부러움이 내 삶을 지탱했고, 선망이 내 인생을 이끌었으며, 동경심이 내 애인은 아닐까 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사랑과 우정에 대해서 무슨 논문을 쓰고 있다니, 이게 다 뭐란 말인가!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한다. 그 사랑을 받는 여자는 누군지 몰라도(?) 참 좋겠다. 나는 왜 너를 사랑했을까. 나는 왜 너를 사랑할까. 또 나는 왜 그대를 그 언제까지라도 사랑할까. 그러면서 나는 비디오는 왜 볼까. 이게 정말 뭐냐고요? 귀가 말하고, 눈이 듣고, 입술은 그저 다정하다. 춤은 구두가 춘다. 내가 만일 화가라면 정겨운 그대의 얼굴을 꽃보다 아름답게, 사랑의 비너스보다 예쁘게, 당신의 꿈 속에 나타나는 이상형처럼 포근하게 그려드릴 텐데 소신은 안타까웁게도 그림 그리는 소질은 없나 보오. 미안하오, 낭자. 그래서 본인도 더없이 애처롭기만 하다오. 이거 원 송구스러워서 만인의 다복함을 바라는 서생 체면이 말이 아니구료. 그렇소. 나는 광시곡을 작곡하는 시인인가 봅니다.
   산문시 끝났다. 음... 괜찮은가는 잘 모르겠다만 완전 훌륭한 시가 아닌 바에야 다 거기서 거기니까 반타작은 한 거다. 굿!
   차라리, 나는 지금이 행복이라고 본다. 가진 건 별로 없지만. 현재의 삶에 당도한 지금과 시간이라는 X축 위에 존재할 무수한 지금 그 모두가. 나는 다시 더글라스와의 우정을 회복했고, 멀더와의 친교야 뭐 말이 필요없었다. 그리고 문학의 열정이 되살아났으며, 타인에게는 쉬쉬하지만 내 추종 세력은 건재하다는 걸 확인했다. 그거면 됐다.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바치겠소, 그런 말일랑 내가 해야 왠지 자연스럽고 어딘가 모르게 뿌듯하지 그 역할을 다른 누구도 아닌 여자가 한다? (딱)! 그 여자는, 그 여자는 당신을 저승이든 어디든 끝의 끝의 끝까지 쫓아가서 이 남자 내 남자라고 동네방네 온 세상에 온 우주에 소문낼 여자다. 이른바 지독한 사랑! 아마도 미친 사랑! 우리 오빠한테 삐─ 년들은 그냥 확 삐─ 삐─ 삐─, 바로 그런 여자다. 눈물이 마치 인형극처럼 펑펑, 콸콸 뿜지는 않을지라도 그 어떤 가슴뭉클함 그 무언가 찡함, 이 흐르지는 못해도 살짝이나 촉촉하게 잠시나마 눈가를 적셔주며 그대의 잔잔한 마음을 자극하는 바로 그것, 아마도 그게 사랑 아닐까? 정녕 몰라서 묻는 말이다. 이 복받치는 볼멘 소리는 핑계인가 능청인가, 그것은 과연 무엇이더냐 대체 뭐란 말인가. 이제 삶으로 소설 그만 쓰고 그만 시트콤의 한 장을 마쳐야겠다. 안녕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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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91

from 소설 2017. 2. 2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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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하니?」
   「뭐? 연애하고 싶냐고?」
   「아 미안. 괜한 걸 물어봤구나. 너도 이제 유치한 합성 사진 놀이도 하지 않는데 말이야.」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 이사를 다 한 거니? 뭐가 못마땅한데? 또 새집에 구경온 사람이 왜 나뿐이 없어? 소셜 네트워크에는 막 이 사람 저 사람 다 올 것 갔드니만. 왜, 평판이 급격하게 하락이라도 한 거니?」
   「하나씩 물어봐 이 친구야. 그렇게 물음을 한꺼번에 쏟아놓는 건 곧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거나, 다 알고 싶어서 어서 듣고 싶다거나, 둘 중 하나야. 설마 전자는 아니겠지? 믿어줄께. 절반만. 그리고 원래 우리가 그리 썩 수다스럽지는 않지 않냐? 게다가 지금 대세는 뭐니 뭐니 해도 긴 명대사고. 그런데 아, 뭘 물어봤지?」
   「글쎄, 잊어먹었어.」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넌 왜 노크도 않고 문을 불쑥 열고 들어왔냐? 뭐 그렇고 그런 중요한 순간이면 어쩔려고 그랬어?」
   「어쩌긴, 땡잡은 거겠지. 내가 시간을 잘못 잡았나?」
   「아니, 난 늬가 우리 집에 진짜 놀러올 줄은 몰랐다, 그 말이지.」
   「알잖냐. 나 빈말 못한다는 거.」
   「치료된 줄 알았어, 허언증. 다시 말하자면 빈말 못한다는 건 좋은데 빈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건 썩 장점이라고 하긴 어렵다야.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다 똑같다면 뭔 재미겠어. 안 그래?」
   「어, 어, 이상한데. 빈말 못한다는 것과 불치 상태의 허언증과는 무슨 상관이 있지? 그리고 말귀를 잘못 알아듣는다는 건 나도 알고 있는 일이고, 음. 그냥 넘어가자. 귀찮다야.」
   새 집에 이사온 조니와 놀러온 제임스, 텅 빈 집에 둘 뿐이 없다.
   「유모는 어디 갔어?」
   「무슨 유모? 우리 유모는 마법사? 너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는 거니?」
   「난 실은 다른 걸 말할려고 했어. 방금 물어본 건 내 공상 속 주인공이 했던 말이었고, 내가 정작 묻고 싶었던 건 그거야. 집에 샴페인 있냐?」
   「없어.」
   「오, 예~스!」
   「......」
   「너 그런데 속셈이 뭐니? 왜 이 동네로 이사온 거야?」
   「음 글쎄...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고나 할까? 난 지금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소녀도, 스타가 되고 싶은 무명 배우도 아니잖아. 그래서 나는 사람이 찾지 않는 유원지의 안내판, 그런 영감을 떠오르게 만드는 피사체 같은 동네를 찾다가 용케 이곳을 발견했어.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별다른 이유 없이 난 여기가 너무 좋은 거 있지? 진짜 그래. 일요일의 여행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껴, 여기에 오면 여기에 있으면 그런다고. 우리 같은 사색가들에게 필요한 게 뭔 줄 아니? 뭐긴, 새로움이지. 그런데 그 새로움은 어떻게 찾아올까? 찾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찾아나서야지. 간단히 말해서 하나 하나의 단어, 낱말 더하기 낱말만 떠올려도 된다구. 정말 변화를 원한다면 말이야. 가령 연애, 응? 그래, 그렇지. 음 그리고 낯선 생활, 짝사랑, 새로운 만남, 이직, 여행, 영화, 동물원, 미술관, 백화점, 박물관 그렇게. 먼 곳에서 친구가 찾아왔는데 샴페인이 없어서 아쉽지만 찾아보면 뭔가 있을 꺼야. 조급해 하지 말자구.」
   「오, 어쩜 꽤나 들뜬 듯 한데? 나도 정 심심하면 너처럼 이사나 할까? 에이 귀찮다야. 행복이 넘치고 사는 게 너무 즐겁다고.」
   「오!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요 앞에 새로 생긴 술집 이름이 딱 그건데. 행복이 넘치고 사는 게 너무 즐겁다!」
   「또 시작이네!」
   「또 시작? 진짜라니까! 내기할까? 너무 내게 유리한 게임이니까 하지 말자. 그럼 뭐 다르게 가볼까? 뭐가 좋을까... 음, 그래. 그게 좋겠다. (딱)! 제임스! 사랑해 라는 말 해본 적 있니?」
   「뭐라고? 빨간 가방이 갖고 싶냐 아니면 노란 책이 갖고 싶냐? 뒤에 꺼. 더미 시리즈. 너 어제 꿈에 무슨 요술의 열매라도 따먹었냐? 죽도록 사랑하고 나서 이제 사랑이라면 신물이 나는데 다시 곧바로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했어? 그런 거야? 지금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겠지? 음, 그래. 닥쳐요 멀더!」
   「차라리 그 말이 낫다. 또 여자 만나지? 보다는. 넌 역시 좋은 친구야.」
   「그런데 바깥에 심어진 나무 팻말은 뭐니?」
   「아, 그거? 여기에 처음 왔던 날 속아서 구입했던 가짜 요술 나무. 아 글쎄 포도나무에서 복숭아가 열린다나 뭐라나. 그래서 샀긴 샀는데, 묘목을 저기에 심어놓기는 했는데. 음... 아무래도 속은 거 같아. 그 때문에 실패한 인생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서 한동안 술 좀 마셨어. 아, 내 팔짜여! ...... 그 녀석이 그거 개발하느라 전재산을 다바친 것 같아서, 딱 봐도 무일푼으로 보였고,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 그럴 수 있을 듯해 보였어. 난 처음에 눈쌀을 찌푸렸지만 어쩌면 그 친구를 만난 일이 내 운명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한번 생각해 봐! 포도나무가 자랐는데 어느 날 거기 열린 열매를 보니 어머나, 복숭아네? 솔직히 그때 난 녀석을 푸대접하기 싫었어. 웬만하면 무시할려고 했는데 녀석은 슬슬 내 삶에 참견하기 시작했지. 뭔가 해괴한 기운이 느껴졌거든. 그래서 나는 쾌히 승낙했고, 그 신비한 묘목을 사와서 저기 심게 된 거야. 왜? 그 말 하고 싶니? 멀더, 그건 말도 안돼요!」
   「오오! 정말 그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이 일을 어쩌면 좋니? 너네 집에 오던 길에 나도 어, 음, 하도 신비로운 매력이 돋보이길래 그걸 사버렸는데. 그래도 나는 꽃씨야. 그게 더 싸더라고. 그러니까 난 현혹된 게 아니야. 안 그래도 딱 필요했고 언제 사긴 살려고 했다고. 알지 너도? 나 귀 두꺼운 거. 심지 굳건한 거. 아, 내가 산 꽃씨는 꽃이 크는 그게 아니라 나무의 씨앗이라고. 또 나는 딸기가 열린다는 오렌지 나무라고 그랬어. 그분이. 그래도 너보다 나은 품목을 산 거 같은데, 안 그래?」
   「그냥 적선한 셈 치고 넘어갈려 했는데, 너무 착찹하군 그래. 아무래도 요술쟁이는 사냥개로 변신해야 할 꺼 같아. 그 청개구리 같은 녀석이 뭔 요상한 술수를 부렸는지 일단 말을 듣기 시작하면 벅차오르는 기쁨을 도무지 주체할 수 없다니까. 세상의 온갖 근심을 잊게 돼. 그러나 돌아서면 푸쉭~. 꽝이지! 안 되겠다. 우리, 무르러 가자!」
   「정말... 그래도 될까? 그럴 수 있어? 그런데 그 친구 뭐 하는 녀석이야? 혹시 아는 거 있어?」
   「이 동네 토박이 영감탱이의 손자. 더 알아낼 뭣도 없어. 자, 가자고!」
   두 친구는 낙원의 꽃밭에서 구했다는 가짜 신선초에 대해 따지기 위해 이름 모를 청년을 찾아갔다.


   2

   가는 길은 울창한 숲 속의 유일한 도로였고, 찾는 집은 산 밑에 있었다. 마을과 상당히 떨어진 곳으로 여기라면 여러 야생 동물을 직접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뭔가 분위기가 꺼림직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쭈뼛거리며 찾아온 목적을 없었던 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어째 좀 으시시하지 않냐? 그냥 돌아가는 게 어때? 미스터리 스릴러라도 펼쳐지면 어떡하냐고.」
   「그러면 고맙지 뭐. 우리는 짜릿한 모험을 즐기고, 각본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왜? 내가 그 친구를 만나면 또 녀석의 꾀임에 넘어갈 것 같니? 갑자기 친한 척 하면서 내가 돌변할 꺼 같아? 걱정 마. 그런 일은 절대 없어. 늬가 더 잘 알잖냐, 나 쾌남아라는 거! 전도유망한 젊은이를 잘 설득해서 사기꾼의 길로 나서려는 걸 단념하도록 만들께. 두고 보라구. 그냥 착하게 살겠다면 내버려두고. 아니면 시집이라도 보내지 뭐.」
   「잠깐만 내가 만난 사람과 네가 만난 사람이 동일 인물 맞니? 난 남자를 만났는데 늬가 만난 친구도 남자냐? 이 몽환적인 느낌은 뭘까? 너 겁 먹었냐? 설마! 너무 신중을 기하는 거 아니냐? 왜, 지난 삶이 꿈 같은 시절인 것처럼 느껴지냐? 사랑아 인생아 별이여 세월이여, 시라도 읊게? 나뭇가지 하나랑 꽃씨 하나 가지고 우리가 너무 박정하게 구는 거 같다야. 안 그러냐?」
   「박정하긴? 이미 녀석은 새로운 이웃의 원성을 산 거나 마찬가지야. 여기서 기가 꺾이면 난 지금부터 끊임없는 난관을 겪을지도 모른다구. 이날 이때껏 만난 인생고는 그냥 연습이 되는 거라고. 내가 그런 고역을 환영할 것 같니? 어림없는 소리! 두고 봐. 두고 보면 알게 돼. 보너스까지 톡톡히 받아올 테니까!」
   조니가 초인종을 누른 후 스피커폰을 통해 울려퍼진 집 주인의 요구는 하나였다. 한 명만 들어올 것. 조니가 들어갔다.
   약 15분이 경과한 후 녀석은 발그레한 모습으로 나왔다. 귀빈의 응대를 조니가 독차지하는 것은 모두가 바라지 않는 일이었을까? 조니는 제임스에게 잠깐 들어가서 정원만 구경하고 오라 그랬다. 그는 들어갔다.
   제임스도 약 15분이 지나서 꽤 얼빠진 모습으로 다시 걸어나왔다. 뭘까? 왔다 갔다 5분 잡고, 나머지 10분 동안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그들은 별다른 대화 없이 조니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임스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이 되었다. 제임스는 카라반을 차에 연결해서 조니 집에 도착했다. 당분간 그곳에서 지낼 생각인가? 조니가 집에서 나왔다. 그들은 그 동네에서 어제 방문한 집의 반대편에 위치한 어느 회사로 갔다. 그곳에 도착했다. 회사 이름은, 최면 아카데미였다. 그들은 이미 입사했고, 오늘은 출근 첫 날이었다.


   3

   그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아무런 개연성 없이 의문에 휩싸인 어느 회사에 불쑥 들어가다니! 그건 마치 엄마에게 넌 커서 뭐가 될라 그러냐 라고 묻는 일과 흡사했다. 그건 마치 노신사에게, 자네는 장차 뭐가 되고 싶은가 라고 묻는 모습과도 유사한 일이었다. 포도나무인가 뭔가를 팔았던 친구에게 아주 톡톡히 최면에 걸린 게 틀림없다. 걸려도 정말 단단히 걸려들었으니까 이처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행보를 선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분이 대체 얼마나 교교한 분이길래! 그러나 그분은 워낙 신비한 후광에 감싸인 분이라서 정확히 어떤 원리로 얘네들이 홀딱 넘어가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알고 보면 유치한 까닭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에 넘어갔고 어떤 행위의 마력에 환심을 느꼈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마도 당분간 그들은 회사원 생활을 유지할 듯 했다.
   그런데 회사 이름이 다른 게 아니라 최면 아카데미? 회사 맞나, 학원 아닌가? 사랑에 취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꿈이 생겼을 리도 없고, 대체 무슨 선경을 보았길래 그곳에 가서 일을 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운명과는 무관했을 것이다. 어서 어른이 되고 싶다, 천천히 멋지게 늙고 싶다 에서 후자를 준비해야 하나 깜박깜박 놀라워하다가 잠시 전자쪽으로 넘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언제까지 가나 지켜볼 일이란 뜻이다.
   그들은 오후 3시에 퇴근했다.
   「너는 주력 판매 상품이 뭐냐? 정수기냐? 아니면 진공청소기? 것도 아니면 커피포트? 후라이팬? 크레파스?」
   「나? 글쎄 나보고 뭘 팔라 그랬지? 뭐였드라? 구멍 난 스타킹을 대번에 파악해야 한다고 그 말은 기억나는데. 아 맞다. 어디서 발설하지 말라는 말도 했어. 그러는 넌 뭔데?」
   「나? 나는... 난 말이야... 난 아직 이곳의 분명한 정체를 파악하기 전에는 그 무엇도 타인에게 말하지 않을 꺼야. 너는 서약서 안 썼냐? 난 맹세도 했는데. 나만 특별 대우한 건가? 그야 어쨌든 비밀은 드문드문 드러날 테고, 우리의 최면술도 시시각각 발전할 것이며, 곧 있으면 그 성과도 맹위를 떨칠 테니 너무 초조해 하거나 서두르지는 말기로 하자. 일단 하는 일이 많잖아 우리가. 우리는 교육생이고 회사원이며 농사꾼이잖아. 집에다 심어놓은 포도나무도 잘 관찰하고 신경써서 키워야 한다구. 그럼.」


   4

   그렇게 1주일이 흘렀다. 그들은 자신들의 최면 요법이 늘었나 시험을 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그날 일을 마치고 동네에서 조금 내려가면 나오는 시내에 위치한 어느 나이트 클럽에 갔다. 그곳에서 두 여인을 꼬셨다. 그래서 그들은 춤도 별로 추지 않고, 술 역시 별로 흥미 없고, 쿵짝쿵짝 음악은 원래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일행과 2차를 위하여 밖으로 같이 나갔다. 나이트 클럽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2차로 들어간 카페는 고풍스런 고전음악이 나오는 바로크식 찻집이었다. 안에 들어가니 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1700년대의 어느 성 안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궁전 느낌도 났고 색다른긴 했는데 그들은 하나를 얻었고 하나를 잃었다. 곧 최면술이 고도로 발전하여 귀티나는 숙녀들을 꼬실 수 있었다는 점과 2차 장소를 잘못 선정했다는 것이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차분하게 오늘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를 따져볼 시기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두 여인 중 한 명의 남자친구가 지금 여기로 쳐들어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벌써 다 왔다고 한다. 전화 통화하는 앞에 앉은 그녀도 다급해 보였다. 웬만하면 자리를 피해서 통화할 텐데 그 정도 사태가 아닌 듯 했다. 심지어 한두 명이 아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그런데,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나 잘못한 점이 없는 것에 비해서 뭔가 썩 떳떳하고 건전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두 가지 선택 밖에 남은 게 없었다. 병력을 요청하느냐, 뒷문으로 도망가느냐! 신사답게 설득하다가는 제삿날이 될 공산도 크고 지금 이때 어떻게 병력을 요청하나, 자기들이 무슨 영화 대부의 개작을 찍나, 그렇다고 장사 수익 뻔한 동네 상권에 제동을 걸면서 경찰을 부르겠나. 그들은 그냥 조용히 찻집의 뒷문으로 내뺐다. 아무래도 당시 그 방법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절대 비겁하거나 미리부터 겁먹은 형세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들의 연락처도 모른 채 아가씨들과 헤어지게 됐다. 아마도 영원한 작별일 것이라는 예감이 이루어질 것 같다고 여겨졌다. 좀 더 최면술의 단계를 높여서 "얼굴 찡그리지 마세요, 그대여!"까지를 그녀들이 들었어야 했는데 그들은 그말을 건네지 못했고, 오히려 실상 그들이 들은 말은 그랬다. 오빠들 어서 자리를 피하라고! 얼른 도망가라고! 얘 남자친구 장난 아니라고! 그럼 얘네들은 장난인가? 아니면 장난감? 장난이 아닌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으나 혹시라도 그 남자친구라는 거물 양반에게 최면이 안 통할 수도 있으니까 상황 깔끔하게 정리된 것이다. 어차피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서 얼굴을 붉히는 것보다 백 번 나은 일이고,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니 물러서는 뒷모습은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왠지 찻집의 뒷문이 몹시 비좁아서 어째 그것이 개구멍은 아닐까, 자기들은 어느 동네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 유명한 똥개가 아닐까 하는 착각 때문에 잠시 아찔했다는 거! 다시 말하자면 뒷맛은 실소를 터트리게 만들면서 약간 우스운 듯 했으나 무엇보다 퍽이나 씁씁했다. 몹시도!


   5

   또 1주일이 흘렀다. 회사에서는 별로 특별한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팀에 합류해서 3박 4일 일정으로 어느 동네에 가서 무작정 방문 판매를 하게 되었다. 가전 기구도 팔고, 위인전 세트도 팔고, 장난감도 팔았다. 아니, 팔아야 했다. 안 팔렸다. 팔릴 리가 있나. 구박 엄청 받았다. 완전 스파르타식이었다. 그러나 다른 직원들은 적응이 빨랐다. 그래서 다른 직원들은 많이 팔았다. 모두 승승장구했다. 그들만 빼고. 일정은 매주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장소만 바뀌고. 그 회사 괜히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결국 최면술은 위장이고, 그들은 정수기와 진공청소기와 커피포트를 팔아야 하는 세일즈맨의 운명에 처해졌던 것이다. 그건 애먼 짓이었다. 그럼 남아있는 사람들은 뭐냐? 보통 현대의 회사원들 절반이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을 통하여 자아 성취를 하느냐 보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경우가 월등하게 많을 것이다. 그래서 비록 3류일지라도 영화감독이네 작곡가네 하면 괜히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이다. 통장 잔고는 걱정일 테지만.
   그들은 다시 조니의 집으로 돌아왔다. 슬슬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정원의 포도나무도 유독 비쩍 말라 보이고, 제임스가 땅에 심어 놓은 무슨 씨앗인가는 아예 감감 무소식이었다. 아무래도 그들이 만났던 최면술사는 돌팔이인 것 같았고, 그들이 취직한 회사는 평범한 영업 전문 집단인 듯 했다. 마침내 그들은 사표를 내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그들은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건물에서 나왔다. 그리고 잠시 한숨을 내쉬고 전경을 설펴본 후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웬 아저씨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형씨, 혹시 피라미드 3팀에서 활약하시던 분 아니던가요?」
   「활약까지는 아니고 잠깐 구경만 했죠, 네.」
   「이것도 인연인데 악수나 합시다. 저는 피라미드 2팀에서 팀장으로 있다가 방금 밀려난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혹시 소문 들으셨어요? 지금 회사에서 그 일을 모른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합디다...... 아무튼 어떤 까마득한 후임 직원 하나가 사람들 다 있는 데서 팀장이 그러면 쓰냐고 한 30분 동안 목청을 높여서 고래고래 소리치며 따지길래 대판 싸웠는데, 아 말로만요, 원래는 나머지 직원들이 말리거나 모른 척 하거나 둘 중 하나가 정상이잖아요? 그런데 녀석들이 수수방관하지 않더라구요. 제 편은 한 명도 없고 모두 녀석에게 붙은 거죠. 아니... 그렇게 불만이 많았나? 그러면 왜 진작 알리지 않고? 설마 이렇게 한번에 훅~ 보낼려고 치밀하게 작전이라도 짠 걸까요? 이번 달 실적 최고였거든요. 그러나 전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죠. 딱히 오라는 곳은 없었지만요. 우리 팀은 회사에서 무슨 특별상까지 받고 전원 포상이 주어졌는데, 저만 죽 쑤어 개 준 꼴 됐죠. 그래도 진작부터 쉬고 싶었어요. 회사와 제가 개인적으로 뭔가 꺼림직한 관계라는 이유도 있었구요.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죠 뭐. 오히려 이렇게 등을 돌리고 나니 팀원들에게 고맙네요. 허허허! 최면술도 물이 올랐겠다 돈 그만 벌고 마음 놓고 밀애나 즐겨볼까요? 지금 당장 승천해서 샛별이라도 딸 수 있지 왜 못하겠어요? 네? 하늘에서 별을 따다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려요? 식은 죽 먹기죠. 땅 짚고 헤엄치기가 따로 없죠. 네, 그럼요. 허둥지둥 사느라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어요. 요행으로 청춘 특급 열차에 재승선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일에만 오직 일에만 인생을 걸었던 거죠. 누구를 탓하겠어요? 다 제가 원해서 한 일인 걸요. 아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처음에는 유망한 희망이 들어왔다면서 붕붕 띄우더니 그 어디서도 배우기 힘든 기술을 가르쳐주며 어떤 교묘한 솜씨에 의해 전 뭐든지 팔 수 있는 요술쟁이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바닷물도 팔고, 금성과 목성과 해왕성은 물론 다른 외계 행성은 이미 다 팔았고, 시간을 파는 것도 이젠 재미없네요. 이젠 더 이상 동기 부여가 안 된다구요. 회사에서는 이제 신들의 손짓과 천사의 노래를 팔라고 하지만 저도 지쳤어요. 충분히 팔 수는 있는데 지쳐버렸다구요.」
   그는 순간 양복 안주머니에서 라이터를 하나 꺼냈다. 마담 클링이 발성된다는 바로 그 최고급 라이터를. 처음에 조니와 제임스는 알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무슨 피라미드 2팀 팀장이었다는 이 아저씨가 하는 말 때문에 허를 찔리고 말았다. 진짜 옆구리에 훅 하며 뭔가 들어온 것만 같았다. 절대 단순한 넛지는 아니었다. 교묘했다. 기가 막혔다. 신출귀몰했다. 그리고 그가 건넨 말은 이랬다.
   「형씨 혹시 담배 하나 있을까요?」
   그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없다고 했다.
   보통은 끽연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을 빌리는 게 제1번의 통례고, 상대가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을 때 담배 하나를 부탁하는 게 2번째 정석이자 일반적인 교양이다. 그런데 무턱대고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커피잔도 담배도 들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담배를 빌린다라, 둘 중 하나다. 얼굴이 두꺼운 괴짜거나 아니면 상술이나 입담이나 카리스마나 가죽점퍼나 또는 재력이나 넉살이나 권위나 뭔가 하나는 신통방통하다는 거.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봤을 때 이 아저씨는 최면술이 극강이었다. 형씨라고 부르면서 경계심을 풀도록 몇 마디 잔잔한 말을 툭 던진 후 뜻밖의 물음에 그들은 그가 꺼낸 라이터에 눈이 갔고, 그들은 분명 없다고 했지만 무슨 속임수인지 그는 조니의 양복 소매자락에 붙어있는 담배 하나를 발견하며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그가 라이터를 탁 켰을 때 담배에 불이 붙기 직전 그들은 감쪽같이 최면에 걸린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켠 라이터에서 발생한 소리는 마담 클링이 아니라 참치 통조림 까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쉿! 정확성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만약 그들이 퐁~ 소리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들은 최면에 절대로 빠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담 클링을 알았고, 봤으니 예상했으며, 전혀 생경한 소리가 발생했기 때문인지 그래서 그들은 최면에 걸린 것이다.

   6

   그 친구의 이름은 댄이었다. 그들은 댄과 약속했다. 말로만 수긍한 게 아니라 벌써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송두리째. 한 번의 실패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그 무수한 사랑의 실패가 선행되어야 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일단 그들은 느낌이 좋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사랑의 기본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업 진실성의 기초에 관한 사항이다.
   즉, 첫째! 그들은 기분이 좋았다. 납득이 됐고, 이해가 갔고, 신뢰가 쌓였다. 의심은 물러갔고 꿈이 카스테라 빵처럼 부풀었다. 사랑에 빠진 첫 번째 증거가 무엇일까? 그 단 하나의 근거는 미소다. 웃는다는 것은 사랑의 시작을 의미한다. 웃긴 웃는데 약간 애매하게 웃는다? 사랑은 없다라고 말할려고 하거나 또는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그녀는 자기를 만나서는 절대로 안된다며 진짜 멋진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좋은 남자 이론을 설파할려는 걸 뜻한다. 그들은 기뻐했다. 즐거웠고 흥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인생이 더 재미있어질지도 모른다며 불안해 했다. 그 무엇도 그들의 흥미를 잠재울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댄이 그들을 회사 마술피리에 스카웃했기 때문이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다가 별을 딴 것이다. 그것도 쓸모없는 별이 아니라 요정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탐스런 별을!
   그리고 둘째, 댄은 사기꾼이 아닌 듯 했다. 사기꾼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결정적 단서는 무엇일까? 물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시간이 부족한 찰나에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기준! 그것이 켜져 있으면 사기가 아니고, 그것이 꺼져 있으면 사기라는 무엇은? 그것은, 그것도 바로 웃음이다. 이 역시 저 사랑에 빠진 진실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측정 가능 지표와 마찬가지로 웃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것은 일종의 실험이나 작은 장사를 뜻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단위가 다른 무엇이다. 사기뿐만 아니라 단위가 다른 사업도 진지하다. 사석에서 깨방정으로 웃기는 그런 농담과는 다른 일이다. 일단은 근엄해야만 하는 세계다, 그곳은. 거액이 오냐 가냐 작은 차이로 결판나는 그런 분야를 말한다. 저건 정말 무표정이냐, 포커페이스냐, 냉철한 사업가의 얼굴이냐 그 가운데 드물게 뭔가 어려운 인상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웃긴 웃는데 부자연스럽다, 사기가 의심된다. 희색만면인데 과장됐다?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이다. 희희낙락하지만 썩은 미소다, 단적으로 의뭉스럽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사기꾼은 심각하다. 그 규모가 크면 클수록 심각성의 정도는 심화된다. 별이 여러 개 붙는다면 심각한 표정은 심오한 수준으로 넘어간다. 그들은 후기 인상파다. 그분들은. 짜여진 각본이 어긋날까 봐 마음의 여유가 부족하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한다. 2안, 3안은 물론 그 어떤 복안이 있다 하더라도 목적은 은연중 드러나고, 가짜 웃음도 지치고, 맹수의 사냥 본능도 탄로난다. 일단 가벼운 몇 차례의 거래를 통하여 정말 담보없이 중간 과정을 뛰어넘은 후 바로 큰 계약으로 돌입해도 괜찮은가, 그 판단 기준은 얼굴에 씌여 있다. 웃음으로써!
   그러나 첫째도 둘째도 웃으면서 사람 뒤통수 치는 고수랄지 순전히 몰라서 옆사람 괴롭히는 돌아이가 간혹 있으니 시시때때로 조심할 일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야 어쨌든 그들은 거대 컨설팅 그룹이라는 마술피리에 특채된 것이다.


   7

   「조니, 이게 웬 떡이냐! 우리가 그런 전문가 집단에서 일하게 되다니, 믿기지가 않아. 원래는 일하는 거 싫고 마냥 노는 게 좋았는데 댄의 말을 듣고 보니 꼭 그렇지는 않은 거 같아. 안 그래?」
   「그러게 말이야. 나도 뭔가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거든. 때마침 우리가 운수가 좋으려니까 댄을 만난 거지. 설마 댄이 최면 아카데미에서 보낸 밀정일 리는 없을 테고, 우리를 초청한 마술피리 그룹도 허상은 아닐 꺼야. 그 명성이 괜히 빛날 리가 없다고.
   그래서 말인데 난 말이야, 요즘 자꾸 아침에 눈을 뜰 때 그 생리적인 현상 있잖아, 그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막 가죽점퍼가 입고 싶어지고 가끔 시도 때도 없이 '나만 최고' 컴플렉스에 시달렸어. 그러다 모처럼 극적으로 댄을 만나게 됐지. 그래서 자존감이 한껏 굳건해진 듯하여 너무 기뻐. 전에는 극단적으로 자신감이 부풀거나 낄 때 안 낄 때 막 들이대고, 날 싫어하는 낌새가 엿보인다 하면 어디 늬가 나를 좋아하지 않고 배기나 보자 하면서 스토커처럼 오공본드같이 딱 달라붙는 사례도 매우 드물게 있었는데 그게 딱 치료됐어. 밑도 끝도 없이 옆 사람 생각 안 하고, 내 비뚤어진 자존심만 최고로 중요하다면서 주변에 사람이 남아나질 않는 현상도 있었는데 그 역시 흔쾌히 치유되었나 봐. 더군다나 처지고 또 처지는 루저 마인드, 말끔히 증발했어. 농담으로 쓰는 패배주의도 그 격조가 올라갔고. 무엇보다 내 마음을 내가 조정하는 게 쉬워졌다고. 나 자신에 대한 제어가 가능해졌다니까. 맑고 자신있고 건강한 자세, 밝고 상냥하며 긍정적인 태도 모두 다 댄 때문이라고 그냥 우기기로 하자.」
   그들은 다음 날 회사 마술피리에 출근했다. 마술피리도 조니가 사는 시골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은 의리의리했다. 댄에게 듣기로는 그랬다. 이곳은 모든 게 반대로 돌아간다고. 처음 들어와서 사원, 대리, 팀장 그렇게 올라가는 게 아니라 오자마자 사장이란다. 그리고 입사하자마자 스카이라운지에 개인 집무실이 생긴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층 한층 낮아지다가 1층 경비를 맡아서 일한 후 퇴사한단다. 그러나 그들은 특채다. 그러므로 그들은 1층부터 위로 올라가야 한다.
   1층은 예언과다. 2층은 잘 모르는 약자였고. 나머지는 SF과, 신비과, 환상과, 탐험과, 모험과, 스릴러과, 공포과, 코메디과, 허풍과, 낭만과, 개꿈과등 부서 이름이 각양각색이었다. 설마 그곳은 유치원일까? 누구나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근무 1일째 날 이미 최면에 걸려버린 것 같았다. 직속 상사의 예언에 홀딱 속아넘어간 것이다. 혹시 동네가 작기 때문에 미리 주문한 일이었을까? 알 수는 없었으나 정황을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단정할 수는 없었다.
   예언과 과장이 그랬다. 첫째 내일 A 옷가게의 마네킹은 사람으로 바뀔 것이며, 둘째 빵집 옆에 포도주 가게가 생길 것이다 라고.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다. 예언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즐겁게 회사로 출근했다.


   8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퇴근 길에 동네의 한 레스토랑에 들렸다. 둘 모두 맥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 그런데 어느덧 마시다 보니 많이 마시게 됐다. 제임스는 조니에게 물었다.
   「저번에 우연히 만났다는 네 첫사랑 메리는 잘 사니? 어쩐지 오늘 따라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지네.」
   「늬가... 그게 왜 궁금하냐?」
   「왜... 궁금해 하면 안 되냐?」
   「아니 내 말은 그냥, 괜찮다는 말이지.」
   「어... 그런데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그 대사!」
   「뭔 대사? 왜 이 동네에 와서 얼쩡거리냐는 말?」
   「뭐 얼쩡거려? 누가?」
   「아 그게, 그러니까, 최면 아카데미 사장이 동네에서 어슬렁거리는 걸 내가 딱 봤단 말이지. 딱 걸렸어. 나한테. 짜식!」
   「아, 그렇구나! ...... 그런데 있잖아. 점차 이 일도 재미없어지는데. 넌 안 그러냐? 특히 우리 예언과 팀장 말이야. 아무래도 '사'자 같이 느껴져. 처음에는 혹했다구. A옷가게의 마네킹이 사람으로 바뀔 거라고 자신있게 예언하길래 난 정말 마네킹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변신한 줄 알았어. 나도 여간 해서는 애들 장난 같은 말 믿지도 않고 취급도 안 하는데, 어째 그땐 내 눈에 뭐가 씌었나 봐. 귀에 뭐가 씌었던 것일까? 어쨌든! 그 인간이 뭔가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어. 기묘한 개성을 내뿜는 것 같아. 아니면 그 황홀감을 대체 뭘로 설명하고, 그 말 같지도 않은 거짓말에 왜 우리가 도취되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인데? 반짝반짝 윙크하고, 생글생글 신기해 하고, 지금 당장 짠-하며 무슨 괴물이 나타나는 걸 목도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장래 어떤 화사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만들었어, 물론 처음에만! 그 인간이 자칭 예언가라고 자처하고 있긴 하지만 뭔가 하나 들통나고 하나 둘 심원한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하면 아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듯 하지 않냐? 허겁지겁 막 도망가는 모습, 충분히 상상이 되고도 남잖냐. 녀석을 그냥 최면 아카데미에서 수도승으로 쭉 복역하게 해줄까? 그리고 또, 빵집 옆에 포도주 가게가 생길 거라고? 그런 예언은 나라도 하겄다. 나무랄 데 없는 화술에 넘어가서 처음에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마구마구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팀원들 차차 동요되는 기색, 벌써 완연하잖냐. 곧 있다가 누가 나서도 나설 꺼야. 대관절 누가 제일 첫 주자로 나설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들고 일어나도 분명 누군가 한번 크게 호통을 치며 난리를 칠 꺼라고 봐, 난. 지금 돌아가는 게 딱 그렇잖아. 순 사기꾼 같은 놈! 독보적인 분위기를 슥 깔고, 더할 나위 없는 진짜 정보를 미리 입수한 후에 자기만 아는 것처럼 치장하면 누가 모를 줄 알고? 어림없어! 예언의 적중률도 떨어져가고 맨날 엉뚱한 소리나 툭툭 픽픽 해대고, 뒷북 치는 거만 벌써 몇 번째냐? 잠잠하다 싶으니까 계속 팔짜소관이라고 밀어붙일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빙그레 웃으며 좋게 좋게 받아주는 거도 한두 번이지. 이제 그는 퇴역을 앞둔 경주마에 지나지 않아. 이 인간을 그냥 확 엎어블까? 어? 어차피 고상한 기품 바닥났고, 점괘도 예언도 뭣도 아무런 기술도 재주도 없는 돌팔이라는 거 다 탄로났잖아? 그래! 그렇다고!」
   「하긴 나도 처음에는 꽤나 유쾌했어. 재밌었다고. 정말 희열이 느껴지고 흥미진진했어. 초반에는. 나는 개인적으로 이상적인 친밀감까지 간직했다니까. 이제 곧 나만의 세상이 펼쳐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으니까. 나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왔나, 그런 어벙벙한 생각도 더 이상 하지 않았으니까. 지금 돌아가는 추세를 봤을 때 전망이 썩 밝지 않아. 대충 봐도 우리가 어떻게 될 꺼라는 가시적인 조감도가 보인다니까.
   첫째, 우리는 영원히 1층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구. 그리고 둘째,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엘리베이터가 없으니까 조금 올라가다가 말 것 같아. 언제 꼭대기층까지 가겠어? 사랑과 젊음이 다 떠나가고 마지막 잎새를 바라볼 때 당도할 것 같아? 어림없는 소리! 처음에 느꼈던 초반의 기세는 그냥 인상적인 만용에 불과했던 거야. 날개 달린 운동화가 출시될 꺼라고? 제품이 나오긴 했지, 날개가 그려진 운동화로. 그런 말은 나라도 하겄다. 바르면 바를수록 피부의 젊음을 활성화시켜서 아기 피부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화장품이 나온다고? 이미 옛날부터 다 그랬어, 화장품 광고들은 모두. 그런 예언은 동네 꼬마라도 하겄다. 안 그렇다고 자부하는 화장품 브랜드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시련이 끝없이 반복되느니 그냥 과감히 뛰쳐나가는 게 옳은 길인 듯 하다고. 그때 되면 깨닫겠지. 모두 헛수고 같은 물거품이었고, 인위적인 허상이자 요염한 모래성에 불과했을 뿐이라고. 더 이상 뭘 바라겠어? 1층에만 머무를 바에야 삼류 작가나 일광욕이 백 번 나은 일이라고! 안 그래?」
   두 친구가 눈물을 글썽글썽하며 식식거리고 푸념을 늘어놓게 된 것은 한순간 흐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염을 토할 만한 구세주의 출연이나 어느 초자연적인 사건 때문이 아니었다. 그 계기는 바로 건물 입구에서 어느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형씨 라고 그들을 부르면서 담배불을 빌릴려고 했던 일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결정을 주저하며 미처 반응하기 전에 그 아저씨는 미안하다며 자기에게 라이터가 있다는 걸 깜박했다고 했다. 고급 라이터를 잃어버려서 휴대용 성냥을 사용하고 있는데 깜박 했다는 거다. 바로 그때 옆에서 성냥불이 켜질 때 무슨 뱃고동 소리가 들린 것이 아니라 성냥불이 켜지는 정상적인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의 최면은 헌신짝처럼 날아가버린 것이다. 이제는 염복을 만끽할 일만 남았을까 아니면 기쁨은 양보하고, 행복은 연기하며, 쾌락은 참고 또 참아 아껴 놓고, 신나지 않은 신혼여행과 즐거울 수 없는 축제와 전혀 안 기쁜 소풍을 떠나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이때부터 자유자재로 스스로 최면을 거는 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저 어여쁜 숙녀는 내게 기필코 구애할 것이다, 그 주제넘은 염원이 이루어지지 않을지언정 그녀의 자제심을 높이 사는 것이다. 그러다 혹 내게 온다면 그건 그때 가서 볼 일이고. 쾌적한 낭만주의와 호화로운 신비주의의 도래를 지목하면 그렇게 희구하는 동경심은 충족되고 간구하던 꿈은 곧바로 이루어질 것이냐? 무산될지도 모르지만 일단 지켜보게 되었다. 즉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모두 다 정상으로.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실패담을 떠들썩하게 방방곡곡 알리지 않았고, 그래서 뭔가 불분명한 역정은 스스로 쇠잔해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한을 잡고 다른 열매가 열린다는 포도나무를 파는 동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여간해서는 가망성이 없어보였지만.


   9

   그들의 동업 결의는 장난이었다. 단지 누가 먼저 이건 어디까지나 농담이라고 발설할 것인지 하는 고백을 참는 것에 대한 경쟁이 불붙어버렸다. 그러다 그들은 안 되겠다 싶어서 캔 맥주를 하나씩 들고서 포도나무 앞에서 뭔가 새로운 술책과 놀라운 신기에 관한 알 듯 모를 듯, 알 듯한 긴장감을 만들어내기 직전의 요술쟁이와도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정말 뭔지 모를 기이한 초현실이랄지 간단한 마술이 재현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들은 너가 먼저 네 입으로 실토하지 않겠다는 거냐, 하면서 마침내 하나의 내기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캔맥주를 따서 그 캔이 따지는 소리를 마시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앞일을 실행하자고 했다. 조니는 처음에 그랬다. 캔 맥주 따지는 소리를 먹어? 아 나 이런 빛을 먹는 블랙홀이 좋겠다 라고. 그는 장난인 줄 알았겠지!
   그래서 먼저 조니가 캔을 땄고, 캔이 따지는 소리가 났으며, 그는 소리가 아닌 맥주를 마셨다. 그러나 이어서 제임스는 캔을 땄고, 소리는 나지 않았으며, 그는 소리도 흡수했고 맥주도 마셨다. 조니의 눈은 똥그래졌다. 못 믿겠다는 듯이. 따라서 그는 승복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봐도 봐도 신기했기 때문에. 고로 그는 자기가 이길 때까지, 자기가 캔이 따지는 소리를 빨아들일 때까지 경기를 계속할려고 했고, 실제 게임은 계속되었다. 그것도 7일 낮 7일 밤 동안!
   그들은 캔 맥주를 엄청 샀다. 종류별로 다 먹어 보고 다 따봤다. 그러나 모두 마실 수는 없어서 적당히 먹고 나머지는 자기들이 심은 신비의 나무에게 따라주었다. 조니가 심은 복숭아가 열린다는 포도나무와 제임스가 심은 딸기가 열리는 오렌지 나무에게!
   결과는 제임스의 승리였다. 그것도 완승! 그러나 속임수가 있었다. 조니가 져준 것인지도 모르지만. 설령 조니가 이겼더래도 승리한 즉시 미안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도 많이 이겼으니까. 곧 이제 양보할 때도 됐다는 말이다. 지는데 너무 익숙한 일반인들은 잘 아신다. 매번 그랑프리를 꿈꾸며 또는 그냥 습관적으로 복권을 사지만 결과는 매번 꽝이라는 허탈감을. 그와 비슷하다. 그동안 어지간히 이겼으니까 그래서 진짜 기적이 일어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건 명백한 속임수였다. 그는, 제임스는 초소형 블랙홀 반지를 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반지의 주인에 따라 반지의 성능이 바뀔지는 미지수였다. 그것은 반경 20cm 내의 모든 소리를 빨아들이는 장치였다. 아직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 기계였다. 마치 환상머쉰처럼. 거의 모든 여심을 빨아들이는 마법의 진공청소기처럼. 물론 조니가 순순히 불가능한 현상을 인정할 만큼 호락호락한 동네북은 아니었다. 딱 봐도 뭔가 속임수가 있을 것만 같은데 하면서 극장식 카바레에서 보는 마술 공연도 아니고 코앞에서 보는데도 아무런 헛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니는 진공청소기를 켜놓고도 초음파 주파수를 켜놓고도 시도해 봤다. 그러나 멀쩡한 소리를 없앨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드라마에 나오는 전문가들의 도박 장면처럼 둘 다 모두 발가벗고 뚜껑 따기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제임스는 또 다 작전을 미리 걸어놨다. 어떻게 어떻게 장비를 묘용했고, 무엇보다 이젠 진짜로 장비가 없어도 소리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여간해서는 어렵다는 그 경지로 선뜻 올라가고야 말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뻥쟁이가 아니었다. 마침내 그는 마술사가 된 것이다. 그동안 거쳤던 고행은 요술지팡이로 바꼈고, 그간 쌓았던 덕행은 검지에서 나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레이저가 되었다. 허나 영화처럼 번쩍이는 불빛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은 선호하지 않았다. 소리를 흡수하고, 빛을 구부리고,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리는 대담한 시도는 현실로 이루어졌다. 휴면중이던 만화 주인공의 재림이 따로 없었다. 들키고 싶어도 들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조니는 어땠겠나? 3분의 요술이라는 짜릿한 명곡을 듣는 것도 아니고 소셜 네트워크에서 보는 3초나 30초짜리 짤막하며 신통방통한 동영상도 아니었다. 그런데 진짜였다. 뚜껑이 열렸다. 그러나 기뻤다. 흥분됐다. 울분은 가벼운 짜증에 불과했다. 그 모든 것에 대한 놀라움과 신기함과 즐거움이 작은 분함보다 훨씬 컸다. 살면서 몇 번 만나기 어려운 환상적인 명장면이었다. 그래서 따졌다. 어떻게 된 거냐고. 대체 어찌된 일이냐고. 그러나 묵묵부답이었다. 따라서 그는 더 알고 싶어졌다. 미칠 것만 같았다. 이미 쥐락펴락 당하다가 자기는 대인국에 당도한 소인 걸리버가 되어버렸다. 간단한 과학은 엄정한 신비로 포장되어 완벽한 성공으로 결론났다. 어떻게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수학문제보다 더 사람 답답하게 만드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조니는 7일 내내 귀에서 머리에서 수증기를 내뿜으며 얼굴이 벌게지더니 급기야 그는 커피포트가 되고 말았다. 그때를 회상하며 지금 밝히는 사실이지만 조니가 심었던 나무, 복숭아가 열린다는 포도나무에서는 나중 포도가 열렸다. 하나도 신기하지 않고 전혀 놀랍지 않은 사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즉 인정하기는 싫으나 그건 미스테리였다. 왜냐하면 바로 제임스가 심은 씨앗, 딸기가 열린다는 오렌지나무에서는 딸기가 아니라 바로 바나나 열매가 영롱하게 맺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애초에 원래 바나나 나무를 심은 적이 없었는데, 와우!
   당시 그들은 가벼운 논쟁을 거쳐서 추궁하다가 급기야 사실과 진의는 중요하지 않다는 합의에 이르렀다. 곧 그들은 너가 혹시 최면 아카데미 사장이냐, 그럼 나는 거대 컨설팅 그룹 마술피리의 회장이라도 된단 말이냐, 솔직히 밝혀라 댄은 언제 고용하고 얼마를 줬냐, 어디서부터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뻥이냐, 무엇보다도 캔 맥주 뚜껑에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막 그러면서!
   그러나 어쨌든 내기는 내기였다. 제임스가 왕 게임의 승자가 되었으니 그의 말대로 그들은 제임스가 사는 동네에 가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났다. 일명 마술 아카데미로! 하지만 각자 다른 길로 가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마술과 최면이 만나면 누가 누가 이기나, 어떤 드라마틱한 명장면이 펼쳐질지 알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친구는 마술 아카데미로 갔고, 한 친구는 다시 최면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10

   그러나 세기의 대결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은 큰일이었을까? 어쩌면 일상적인 대화에서 어지간해서 잘 사용되지 않는 숙명의 엇갈림처럼 그냥 스쳐지나가야만 하는 이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른다? 그런 어중간한 추측은 엄밀히 따져 우스꽝스런 애들 장난이고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어른이었기 때문에 서로의 약속을 애초에 빈말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응분과 교양인으로써의 통칙, 상식적으로 갖추어야 할 친교의 기본에서 약간 빗나가는 농담이라고 처음부터 단정지었기 때문에 촌스러운 댄스파티에 마에스트로가 뭔 말이냐, 분위기 좋은 잘나가는 클럽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민속 무용으로 꾸밀 수는 없는 일이라는 걸 아는 성년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최면과 마술의 승부는 벌어질래야 벌어질 수 없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마치 친구끼리 만나서 놀다가 느닷없이 아무 말 않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버리는 친구의 술버릇에 익숙해진 것처럼 각자 상대에게 그 일에 대해서 함구했으며, 일상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길을 가되 약간씩 삶의 변화를 꾀하게 되었다.
   우선 조니는 주중에는 권위적인 교육기관에서 야학을 했다. 공부하는 분야는 유전학. 그리고 주말에는 독학으로 식물학에 정진했다. 그는 뒤늦게 제임스의 최면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오판했다. 그러나 마당에 심어진 오렌지나무에서 바나나가 열리는 것을 보고 그것은 최면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그 분야를 파고들기로 한 것이다. 아주 꼬장꼬장하게 공부하고 더할 나위 없이 꼼꼼하게 연구해서 기필코, 복숭아나무에서 포도가 열리게 만들고 싶다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마치 너를 처음 본 순간 너를 내 여자로 만들고 싶은 꿈이 생긴 것처럼.
   그리고 제임스는 두 가지 깨우침을 얻게 됐다. 마치 이와 같은 노랫말처럼 흥분의 도취감을 경험했다. 널 처음 본 순간 난 반했어 그리고 느꼈어 널 이제 내 여자로 만들겠다는 것을. 첫째 그는 살면서 내내 당하고 속고 동의하는 척 연기하는 입장만을 견지했다면 이제는 비록 거짓이거나 예언일지라도 상대방을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돌도록 감동시킬 수 있는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조니가 속는 과정을 보면서 깨달았다. 그 어디서도 보기 드문 베테랑 조니를 진정 감쪽같이 속였다는 것은 그 어느 대가의 할아버지라도 문제없이 꼬시고 꾀어내어 그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다는 걸 뜻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남들은 이미 젊은 시절에 떼는 술수인 양치기 과정에 이제야 입문하겠다는 것일까? 한참 오래 걸렸지만 이제야 진정 양떼들 가운데 튀는 분홍빛 양이 되겠다는 것인가? 어쩌면 그게 맞는 설명인 듯 하다. 하지만 그는 늦게나마 이제라도 타인과 반대로 가겠다는 것이다. 남과 다른 삶을 살겠다는 것이고. 그의 선망은 이미 실현을 앞두고 있으면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2악장과 쇼팽의 야상곡 2번을 마음속으로 그윽히 연주하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그가 깨달은 두 번째는 이랬다. 얼렁뚱땅 얻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쩌다가 우연히 터득하게 된 마술적인 사실주의 같은 예언과 최면을 자신의 장기인 특유의 재담과 결합시켜서 새롭고도 고급스러운 농담을 연마하겠다는 것이다. 어줍잖은 듯 하면서 신비스러운 기운을 풍기는 화술과 뭔가 허술하면서 은근히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만 같은 웃기는 입담을 바탕으로 하여 말로 먼저 탐스런 열매를 맺게 만들어서 그것을 허구의 글로 완성하겠다는 장중한 예술의 목적이 뜻하지 않게 생겨버린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동화의 나라에서는 웃음거리지만 그의 환상 문학에서는 더없는 선행이자 신세계로 출퇴근하는 놀라운 견문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포지셔닝은 명확해진 것이다. 그와 더불어 그는 이런 생각들을 어떻게 이야기로 엮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한 단계 위의 소소한 삶을 바라는 스무살 청춘이 어떻게 대망을 이루게 되는가, 그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를 궁금해 하게 되었다.


   11

   어린애는 그런다. 랄라랄라랄랄라~ 룰루랄라랄랄라~ 지구는 둥그렇다네 앞으로 자꾸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날 수 있겠네 라며. 어린애는 그런다. 랄라랄라랄랄라~ 룰루랄라랄랄라~ 인형을 보며 쟤는 이쁘고, 쟤는 못생겼다고. 우리집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다고. 왜 우리는 어디에 놀러가지 못하냐고. 왜 우리집에는 뭐가 없냐고. 어린애는 그런다. 랄라랄라랄랄라~ 룰루랄라랄랄라~ 아빠 놀아줘, 엄마 심심해 라고. 하지만 애들도 속은 다 있다!
   청년은 보통 그러지 않는다. 그러나 힙합을 하면서 그럴 수는 있다. 난 젊고 넌 늙어, 난 뛰어다니고 넌 느림보야 라고. 하지만 어리다고 속이 없지도 않고, 가난한 청춘이라고 바보도 아니다. 청년은 그런다. 어르신의 조언과도 같은 꿈이 지금 있나, 무엇이 되고 싶다 보다 다른 걸 동경한다. 나는 꿈이 있었나? 나는 무엇이 좋다. 나는 뭐를 하고 싶다. 나는 어떻게 살기를 원한다. 지금은 이래도 나중은 다를 것이다. 비록 꿈은 수정되었지만 꼭 꿈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나중 늙으면 나는 젊은이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나는 그때 그 시절 어땠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요즘 친구들은 너무 쉽게 포기한다 놀랍도록 단념이 빠르다' 보다는, 물론 그것도 좋지만 약간 그 보다는 <나도 그때 그랬다> 라는 단순하고 진솔한 말을 해주고 싶어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땐 후자처럼 자상하게 또 친절하게 얘기해 주시는 분이 많지 않았다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중년은 그런다. 난 아직 늙지 않았다고! 중년은 그런다. 나는 사랑을 하고 싶다고! 그때가 좋았다고? 그때는 언제를 말하는가? 그건 글쎄 약간 애매하다. 난 커서 뭐가 될까, 난 커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를 평생 고민하는 친구들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보다 낙천적으로, 나는 왜 아직 여태 개구리냐고, 난 왜 아직도 두꺼비 신세냐고, 나는 왜 아직도 백마 탄 왕자님으로 변신하지 못하냐고도 한다. 마스네의 타이스의 명상곡을 들을까 아니면 까무러치는 액션 영화를 볼까, 그 둘을 동시에 생각하며 실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절대 많지 않다. 아무리 타자적이고 불가사의하게 이타적인 사람일지라도 그 정도 주관은 뚜렷한 것이다. 아무튼 중년은 그런다. 난 아직 늙지 않았다고! 최면 아카데미에 등록하고, 예언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비교적 시와 수필과 소설보다 뭐뭐 하라, 뭐뭐 하면 안 된다, 뭐뭐 해야 한다 라는 인문교양서를 가까이 한다. 안 그런 사람도 있다. 각양각색이다. 그건 그렇고,
   노인은 그런다. 사람 늙을 것 아니라고 하신다.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하신다. 저기 저분도 빛나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그러신다. 그러나 또 세상에 덤비고 인생과 싸울려고만 하지 말라고도 하신다. 청춘을 돌려달라고도 하신다. 그러나 크게 바라지는 않기 때문에, 이미 많이 실패했기 때문에, 많은 인생 경험을 완수했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최소한 썩 불행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다고 하신다. 그리고 아빠는 TV 리모콘을 쥔 채로 잠이 드신다. 그러면서 엄마는 졸거나 주무시면서 난 아직 자지 않는다고 하신다. 황혼기에 금혼식을 올리기도 하고 방을 따로 쓰기도 한다. 좀 더 일찍 각방을 쓰기도 한다. 연애도 불사한다. 왜 안되겠는가, 뭐가 문제던가? 부러운데 추접스럽다고 자꾸 그렇게 겉과 속이 꼭 따로 놀아야 하나, 인생 후반기에도 끝까지? 뭐 그래도 고전음악과 헤비메탈을 모두 좋아하고 일평생 '오빠 달려' 라는 일관된 슬로건을 관철할 수도 있다. 그래도 된다. 어쩜 의지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노인은 그런다. 동정을 간직하라가 아니라 그때를 기억하라고도 하신다. 평생 잊지 못할 사랑을 해보라고 하신다. 나의 삶을 아끼듯이 남의 삶도 아끼고, 인생관을 져버리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라고 하신다. 노인은 그런다. 연애에 왕도는 없다고 하신다. 일단 엎어트려라, 꼭─기필코─반드시 자 보고 나서 결정하고 결혼하라, 무엇보다 좋은 남자는 차라리 그게 좋은 남자일 수도 있다, 가는 여자 붙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마다하지 않는다 라는. 노인은 그런다. 아니다 어때야 한다 끝까지 주지 않아야 한다, 끌고 끌고 또 끌어야 한다, 끝까지 처녀라고 끝까지 우겨라 라고도 하신다. 노인은 그런다. 이론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때가 되면 이왕 의무-방어전을 치르게 될 것을 뭐 그렇게 서두르냐가 맞는 말일 테지만 이론과 실재는 다르기도 하다고 하신다. 자기도 그랬다고 하신다. 노인은 그런다. 그러나 딸 가진 부모는 죄인이라고, 사위는 도둑놈이라고 무슨놈이라고, 딸 가진 부모와 아들 가진 부모는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다고, 딸 가진 부모와 그 딸의 생각도 다르고, 딸 하나 아들 하나 있는 부모도 딸을 시집보내는 기준으로 똑같이 아들을 장가보낼 때 정말 마음 편히 공정하며 공평하게 처신하게 될지 그건 자신할 수 없다고도 하신다. 노인은 그런다. 마음으로만 하는 사랑은 애처롭다고. 그리고 몸으로만 하는 사랑도 뭣하다네, 그것을 반쪽짜리 사랑이라고 상정하기도 뭣허고 장려하기는 더 뭣허고, 그렇다고 노인으로서 모른 체 하기도 썩 불편하다며 이렇게 말하신다, 노인은. 이승을 떠나면 흙으로 돌아갈 육신 한 오백 년 살지도 못하는데 사랑마저 완벽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는 원망까지도 예술로 사고 팔며 상업으로 거래하는 세상, 다른 건 모르겠고 나는 뒷모습이 멋진 사람이 좋더라고 하신다. 사랑의 영속성과 사랑법의 실효성, 내게는 묻지 마시라고 하신다. 그러나 절대 쉬운 길만 가지는 말라고 하신다. 그저 술 마시고 담배 피고 자세 잡고 어른 흉내만 낸다고 다 어른이 아니라고 하신다. 훌륭하고, 가치 있고, 진정 아름다운 것은 절대 쉽지 않다고 하신다. 그 생각을 잊지 않고 그 자세를 외면하지만 말라고 하신다. 그걸 알아야 한다고 하신다. 마치 사랑처럼! 때로는 이처럼 길게 말씀하시는 노인도 있다. 휴~ 자, 우리 모두 귀를 기울여 보자.  「하지만 알고 보면 육체적 사랑 그건 충분히 맞춰갈 수 있어요. 천천히 가도 되네 젊은이. 조급해 하지 마시게. 늦을 수도 있고, 그 전에 좋은 선에서 헤어질 수조차 있어. 사랑이 뭐 별건가, 처음부터 이건 사랑이다 하며 출발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럼. 인생은 그리 짧지도 않고 또 그리 길지도 않다네. 일단 기분이 울적하고 착찹하다면 3분의 마법에 빠져 보시게. 좀 민감한 주제가 나오니 나도 아직 쟁쟁한 현역이라는 우쭐한 기분이 들어서 거 괜찮구먼 그래. 허허허. 이거 정말 절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싶어지는 심정이 드는데, 허허허. 기분 좋아졌어! 시들해질려다가 다시 힘이 나는군 그래. 근사한 모노드라마를 마친 후 딸기맛 우유나 헤이즐럿향 커피 한 잔 마셔야겠군, 봄바람이 부는 듯하니 더욱 흐뭇해지군 그래. 허허허. 그렇다네 젊은이. 음, 늦어도 되네, 서두르지 마시게, 차근차근 플라토닉과 몸의 대화를 연결시켜 보시게. 드문 경우라는 롱테일도 있긴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말 그 문제는 별로 크게 문제될 건 없어, 암 그렇지. 그래서 지금 당장 사랑하고 있을 때는 모를 수 밖에 없는, 단점도 장점으로 보이는 그 뭔가가 훨씬 중요하지, 훨씬 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네. 하지만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어. 나이가 딱 1세기를 채우고 나니 비로소 그와 같은 사랑관이 굳어졌다고나 할까, 음, 그렇다네. 무엇보다 난 그것 하나를 말하고 싶다고. 눈에 콩깍지가 씌었을 때는 볼 수 없는 바로 그것 말이네. 말투, 분위기, 품위, (미천할지언정) 출신, 허세, 성격, 배려, 능력, 건실함, 품성 등등 그 모두와 균등히 비례하지 않는, 상관 관계의 희미한 패턴조차 보호색을 띄며 잘 드러나지 않는, 정말 눈여겨 봐야 할 그러나 단기간에 파악하기는 좀처럼 곤란한 딱 하나의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천성일 꺼야! 여자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어떤 식사 예절, 물론 즐거울 리 없겠으나 평생 참고 살 수 있어. 일평생 그게 싫었을 텐데 능히 평생을 잘 참더라고! 또 뭔가 하나나 둘이라면 꺼뻑 죽는 남자일지라도 숙녀는 얼마든지 오랜 세월을 그와 함께 하더라고. 모성으로, 정으로, 신앙으로, 가족애로, 자기 일의 성취감으로, 풍족한 호사 생활로, 애완동물에 쏟는 애정이나 그 뭔가로 반드시 긴긴 세월을 견디더라니까. 내 남자는 다 좋은데 여자라면 환장한다? 어떠어떠한 뭐한 취미라면 사족을 못쓴다? 이거 까딱하다간 막장이지. 그 흔한 아침 드라마와 일일 드라마와 멜로소설의 단골 소재. 이별하는 연인, 어차피 사랑의 상대를 바꾸기 위하는 목적이 태반이야. 싫증났으니까, 사랑은 끝났으니까. 당장은 아쉽고 슬픈 결별이지. 그러나 그 결과는 동물의 세계라고. 돌아서자마자 다른 사랑을 하는 것도 지난 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네만 형식 이전에 마음은 떠나간지 오래인데 어떡하겠나. 심지어 이미 헤어질 마음을 먹었지만 이별을 고하지 않는 여자들의 일반적인 이유를 남자들이 알게 되면 힘 빠진다고. 만화영화에서는 톰이 제리를 쫓다가 항상 제리에게 당하네만 실상 생쥐는 물론 불독마저 고양이의 밥이 아닐까?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쉽게 가시질 않네 그려. 고양이가 싫다는 데 녀석 목에 방울을 어떻게 달겠나. 좋은 이별 그게 어디 쉽나. 그렇게 헤어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러나 이것 역시 평생 버틸 수 있어, 평~생! 부부싸움 칼로 물 베기일까? 모르겠네. 그런데 연애할 때는 그게 더없이 멋져 보였고 리더쉽이나 능변이랄지 뚜렷한 주관이자 건강한 자신감 같은 걸로 비쳐졌어, 또는 나한테 다 맞춰주고 엄청 자상하며 뭐 하나 빠지는 거도 부족한 것도 없었는데 어머나 글쎄, 그건 절대 변치 않는 결코 변할 수 없는 타고난 성정이라니! 허풍, 그거 아는데 보통 1시간 또는 10년이 걸린다구. 허세? 파악하는데 1주일로 충분했어도, 처음부터 무분별한 호색한인 줄 알고 시작했어도 내가 거의 100년을 지켜본 결과 그런 남녀관계도 평생 유지되더라 이 말씀이야. 그 말이 대관절 뭘 뜻하겠나? 뭐겠나, 그 인간의 천성은 괜찮다 그 말이지. 다시 말하지만 결코 길게 견디지 못하는, 절대 오래는 못 버티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덕목은 뭐라고? 천성이야, 천성이라네! 사람이 몰랐는데 알고 보니 비관적이더라? 한 번 갔다 와야지 별수 있나. 처음에 또 중간에도 몰랐는데 나중 보니 그이는 기본적인 태도가 다 험담이더라고. 그이의 말을 번역기로 돌리면 아아 이럴 수가! 번역기로 돌리기 전에는, 사랑의 콩깍지가 씌였을 때는 몰랐는데 번역하고 나니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지고 나니 어머 어머 이 일을 어쩌면 좋니, 그거 전부 다 욕이네! 욕은 욕인데 안 웃긴 욕! 그녀에게는 우리 오빠일 테지만, 타인에게는 행인3이라는 그 남자는 근본적인 자세가 모든 대상을 까는 거야. 그 모두를 까는 거라고. 생각해 보시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꺼림직하며 뭔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짜증이 날 수도 있고, 간단히 말해 싫다고. 만약 그렇다면 피하면 되지 않나, 바꾸면 된다고. 그런데 어디 그게 나긋나긋하겠나? 물건조차 배부르게 한 소리 들으셔야지. 뿐만 아니라 후발 주자로 우정에 끼어들어 친교의 순서도를 변화시켜 친밀감의 판도를 바꾸거나, (농염한) 우정을 받아주지 않으며 거리를 두거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인기마저 독차지하는 친구도 역시 한소리 감내해야만 하겠지. 난 너 싫어, 라고! 그러면 아이고 고맙습니다~ 해야지 뭐 어쩌겠나. 난 너랑 대화하는 거 싫어, <난 너 싫어>에 정확히 대비되는 게 뭘까? 뭐긴 뭐겠나, <늬가 데리고 살래?>지. 같은 말인데 어쩜 그렇게도 다른지 몰라. 그분께서 거울을 볼 때는 부디 넌 최고야, 그러기를 바라네. 제~발! 실재 그러지 않는다는 걸 잘 아니까 하는 소리야. 완곡하긴 하지만 나도 그런 때가 있긴 있었지. 많이 그랬지. 원래 사람이란 동물은 그게 정상이란 말일세. 모질지만 사실인 걸 어떡하나. 비단 남녀의 연애만 그런 게 아니야, 우정도 나아가 보통의 인간 관계에서도 매우 중대한 사항이라네. 쉬쉬하면서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진리라고. 나는 도덕군자가 아니라네. 윤리 선생님도 아니지. 그러나 내가 일백 년 동안 이 세계를 경험하며 관찰해 본 결과 다른 과목보다 내가 무수히 참고한 분야가 뭔 줄 아나? 응, 뭘 꺼 같나? 그것은 바로 예술과 다큐멘터리야, 동물의 세계 말일세.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 엄정히 따져 비슷한 말이지만 공교롭게도 상반되는, 동기 부여라는 잠재적 업종은 얼마나 거대한가? 도전 의식에 대한 진취성과 성공을 향한 목표와 타인을 대하는 삶의 기본적인 자세는 오직 로또 복권 추첨이 다란 말인가? 그건, 정말, 아니지 않나! 생활이 단순하면 잇점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오직 칙칙한 권태로만 봐야 하나? 척척하니 젖었길래 한 사람은 어느 우산을 혼자 쓴 숙녀에게 다가가 결례를 무릅쓰며 운명적인 만남과 대면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비는 왜 오냐 우산은 왜 없냐 소셜 네트워크 소개 글에 '상냥하지 않습니다'? 여자만 그런 게 아니라네. 사람을 처음 보면 눈동자를 본다네 신발을 본다네 어쩌네, 그게 아니라 그 사람이 밝냐 어둡냐를 본다는 것! 가난하냐 부유하냐가 아니라는 것! 포도나무에서 열린 복숭아가 탐스럽지 않나? 팔랑팔랑 춤추는 저기 저 나비가 가상하고 대견스럽지 않나? 대채로운 꽃밭을 보면 왜 내 것은 없냐고 찡그려야만 하냔 말일세. 그 어느 아름다움은 젊음에만 기인하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소중하며 눈부시지 않을까? 그런데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라... 그 말도 좀 그렇구려. 쳐다는 봐도 되겠지. 그게 무슨 죄란 말인가! 파리 본 두꺼비와 거짓말 하는 피노키오와 코끼리 팬티를 다 놔두고 어이없이 반짝 대타로 등장한 황금빛 꿀벌에게만 골 세러모니가 허락된다는 그 다음의 일은 아름답지 않을 수 있네만. 죄 없는 커피포트만 탓해야지 그 일을 어쩌겠나. 깊은 산 속에서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광고의 홍수로 가득찬 오묘하고도 멋진 (특히나 돈만 있다면) 너무나도 즐거운 인간 세상에서 나는 정말 최고가 아닌가 봐 나는 무언가 부러운 게 많은가 봐, 에이~ 에라 모르겠다 나는야 지독한 냉소주의자? 스쿠루지 영감 2세? 에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그게 전공인 부류지. 그 남자의 삶의 태도나 인생관 자체가 그렇다고! 전형적인 면접관은 어떤가 모르겠네만 사람을 많이 만나 본 사람들은 무슨 말인 줄 잘 알 꺼야. 1세기의 절반만 살아도 충분히. 다시 그것의 절반은, 음 그건 아직 애야 애. 하지만 노인들도 그런 거 모른 사람이 태반이야. 알긴 아는데 속에서 정리가 잘 안되니까. 졸업식 연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 실상 눈물나는 주례사도 드물지 않나. 그녀는 아마 이러지 않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내가 최고>라는 남자를 만날 껄, 난 왜 <모두 최하>라는 남자를 만났을까 라고. 허나 후회하면 늦겠지. 그러나 늦어도 그때가 제일 빠른 시점일 테고. 게다가 말은 그래도 그런 연인도 평생 행복하게 잘 사는 경우가 많다네. 그런 사례 부지기수야. 그럼. 그분도 어려서부터 염세주의를 신봉하고 처음부터 매사 까칠한 사람은 아니었을 테니까. 이쪽 친구들도 노래를 잘 부르면 콘서트 일정이 바쁜 가수로써 활동하며 재능기부도 하고,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며 대중들으로부터 존경 받는 음악인이 될 꺼야. 또 재주 좀 있으면 컬럼니스트에 요리사에 연예부 기자로 활동하며 즐겁게 살겠지. 하지만 영화배우감도 아니고 이것 저것 다 그만그만하면 뭐 월급쟁이나 해야지 어쩌겠나. 그렇지만 말이야, 월급쟁이가 뭐 흉이라도 되나? 이짝 저짝 따져서 평범한데 왜 그리 까칠한가 몰라, 하여간 수컷들이란! 철들지 않았으니까 다재다능했다면 적어도 예술계에서 유명해졌을 텐데 뭐 유명해지기 싫어하는 개구쟁이 어른인 걸로 만족해야겠지. 뭔 다 자기가 처녀고, 다 지는 골목대장이에 카사노바라 그래. 이거 원~! 어떻게 된 게 모순도 그런 모순이 없군 그려. 이 장황설의 결론은 두 가지야. 딱 2개. 첫째, 결별에 관하여 자신이 잘 참지 못하는 취약점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 내 남자가 딴 여자를 만난다? <전 두 번은 없어요 한 번이면 끝이에요>가 있으면 <나는 죽어도 이 남자 아니면 안 돼. 죽고 나서 저승에 가서도 이 남자는 내 꺼야!>도 있어. 그렇게 사랑이 좋다느니 사랑이 아름답다느니 하지만 전자는 과연 사랑일까? 아닐까? 아니면 뭘까?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냐고? 그 질문에 나는 무응답으로 일관하겠네. 모처럼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말일세. 곧 무슨 성격 차이로 헤어졌네 어째서 헤어졌네 라는 뭔가 참을 수 없는 점, 아무리 해도 견디기 어려운 것, 버티다 버티다 끝끝내 인내력의 바닥을 드러내며 포기하는 무언가 하나가 누구에게나 있다는 뜻이야. 누구나 약점이 있다고. 뭐? 뭐가 어쩌고 어째? 하나가 아니라 왕창, 그이는 단점이 그야말로 엄청 많다고? 오오, 저런! ...... 어쩌다가...... 괜찮아 괜찮아. 사랑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네. 그럼. 아, 아직 내 대사가 끝난 게 아니군 그래. 그리고 둘째, 둘째는 이거야. 그래서, 따라서, 고로 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보다 더, 아니 어쩌면 훨씬 중요한 게 뭔지 아는가? 그건 이거야. <나는 무엇을 정말 싫어하는가?> 바로 이것이라고! 적어도 연애의 종료와 애정의 끝과 끝없는 사랑을 비롯한 사랑학 전반에 관한 한 말이야.」  휴~ 그런데 방금 그 춘부장께서는 뭔 하실 말씀이 그리 많으셨는지 대체 그 얘기 다 어떻게 참으셨는지 궁금하군 그래. 존함이나 여쭤볼려 했드니만 펄새 내빼셨어. 아무튼 노인은 그런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하는데 그런 싸구려 줄자 같은 말은 다 멋진 말을 하고 듣고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신다. 괜찮은 말이고, 널리 알려졌기는 하나 자기는 식상해서 화제로 잘 꺼내지 않는다고 하신다. 실재 우리네 삶은 예술은 예술이고, 인생은 인생이라고 하신다. 그 둘을 견주어서 말할 성격의 대상은 아니라고 하신다. 그러나 억지로 비교는 가능하다고 하신다. 무엇을 어디에 갖다 붙이면 나비 효과든 뭐든 다 혹하며 듣게 된다고 한다. 방법이 다 있다고 하신다. 사람의 귀가 뭐냐, 그게 바로 날개라고도 하신다. 불사조의 날개가 퇴화하여 인간의 귀가 되었다나 뭐라나! 사람의 인생과 세상사는 절대 만만하지 않다고도 하신다. 환상이 따로 없다고 하신다. 하지만 미리 겁먹지는 말라고 하신다. 너무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 하신다. 그러나 자기는 아직도 인생이 대체 무엇인가를 잘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도 있다. 즉 오래 사니까 반 세기나 일 세기를 살면 뭔가 할말이 생긴다는 뜻인가 보다. 자신도 사춘기 때 요절한 천재들이 멋져보였다고 한다. 난 왜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냐고 때로는 억울해 하며 비관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다고 하신다. 방황 정말 많이 했다고 하신다. 노인은 그런다. 모순 같지만 '부모 말 틀린 것 하나 없다'도 맞고, '부모 말 절대 듣지 말라'도 맞다고 하신다. 사람만 올바르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한가도 맞고, 그 사람의 성격과 안목과 내면 외에 입체적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표들과 몇 가지 근거들도 같이 봐야 한다 그 역시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하나가 옳고 하나가 틀린 게 아닌 것, 바로 그것이 인생이고 세상사라고 하신다. 그러나 대체로 그런 말을 수월하게 또 자주 게다가 길게 하시는 노인은 결코 그리 많지 않다고 하신다. 무엇보다 나나 되니까 자네한테 이런 덕담을 그것도 공짜로 건네는 거지 어디 저 춤바람 난 저기 저 할망구가 명대사를 읊겠나 아니면 한참 어떤 의뭉스러운 연정에 빠져서 앞뒤 분간 못하며 헤매는? 허우적대는 저기 저 영감탱이가 이런 조언을 건네겠나, 아니 그런가? 나나 되니까 젊은이한테 용돈 대신 이렇게 고귀한 말로 때우는 것이네 하시며 에헴~ 하시기도 한다. 그런데 수염이 없어! 어쨌든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몇몇 있다. 사랑도 했고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도 한둘 있었다고 하신다. 그러나 대체로 그건 희망사항이거나 매우 드문 경우다. 대개는 그럴 것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아휴 증말 그 인간이라면 내가 정말...... 라고 하신다. 아마도 사랑은 또 인생은 진공청소기보다는 커피포트에 가깝나 보다. 또는 그 둘 다거나.
   남자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내가 최고'다. 허세가 너무 없어도 근엄하고 재미없다. 게다가 어떤 알 수 없는 까닭으로 지구에서 그것도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하는 게 맞다. 기본적으로는 그게 옳다. 그 때문에 순수한 자신감은 과도하기도 했다가 더 큰 파도에 부쳐서 꺾였다가 괴로워하기도 하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기도 한다. 때로는. 그 반면에 여자는 좀 더 까다롭고 섬세하며 폭넓고 다양하다. 여자는 루저 마인드도 있고, 허영심도 엄정히 큰 자리 차지하며, 근사함을 동경하고, 세련미를 추구하고, 고상한 낭만을 부러워한다. 허당은 은근해야 제멋이고, 남자는 다정해야 하며, 자고로 숙녀는 근사하게 대우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애교에 그이의 배짱은 이따금 비례해 주었으면 한다. 변덕이 뭐가 나쁜가, 사랑도 변하는 세상인데! 질투? 그거 창조의 에너지이자 수다의 원천이고 인간의 본능 아닌가! 남자는 허풍에 능숙하면 타인을 웃기지만 여자는 과장에 서툴면 인기가 없다. 여자는 무엇보다 그걸 잘 참지 못한다. 쟤의 한계는 2층 집 지붕인데 그게 어떡하다 기준이 틀어져서 구름이 방안으로 들어왔을 때, 기분이 나쁘다. 이거 이거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제값 주고 살 수도 없고 답답~허다, 아득허구먼 정말! 몹시 불쾌하다. 예를 들면 얘가 고른 남편은 또 각자 무엇을 바랬는지 뭔가 불균형하다는 견적은, 그녀의 뻔한 거짓말은, 해도 해도 너무 한다 받아줘도 받아줘도 끝이 없다, 그 친구 그 사람 참 못됐다 같은 일들. 반대로 더없이 유쾌하고 상쾌하며 통쾌할 수도 있다. 만약 그처럼 믿을 수 없는 영화로운 신비는 보도 듣도 못한, 내 마음에 쏙 드는 홀딱 반할 만한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면! 여자는 어제도 사랑, 오늘도 사랑, 내일도 사랑이다. 그녀들에게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다. 그러나 그분이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어느 대목을 콕 찝어서 그 세부 사항을 우리 둘 모두가 당연히 아는 것을 전제로 속삭이면 그녀는 속으로 적잖이 당황해 한다. 좀 심하면 등에 식은땀 쭉 난다. 더 심하면 뒤통수에 진땀이 난다. 유명한 노래 몇 곡에 대해서는 너무너무 애정이 넘치지만 진짜 한껏 차려입고 어디에 가야 한다면, 아 신부수업은 다시, 아니 아니, 정녕 새로 받아야만 한다는 말인가 라며 고민하게 된다. 그이가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라고 하면 어설프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이라고만 아는 체 했다가는 그이는 식상한 일반 상식을 예상하지는 않았는데 그러면서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타인 앞에서 그녀의 무식이랄까 불필요한 정도의 과도한 아는 체라고나 할까, 평범한 정도에 해당하는 그녀의 교양을 우세시키지는 않겠지만. 아주 약간, 아주 잠시 그이의 표정이 일그러질 수는 있음을 기억하자. 또 역으로 그 때문에 이상형은 이상형이고, 연인으로는 내 마음 편한 사람이 제일이라며 그녀들은 주장한다. 또 그녀들은 솔직하게 부럽다면 부럽다고 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할말은 있다. 너 재수없다고! 그러나 곡해하지는 말 것, 그것마저 친밀감의 증표니까.
   이 중에 빠진 게 있다. 많다.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에 쏙 드는 이상형이 드물거나 많거나 딱히 생각해 보지 않듯이, 시간이 지나면 남편 흉을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듯이 각자 처지에 해당하는 결격 사유와 저 역할들에 알맞는 공통적인 특징들이 몇몇 빠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략 근사치는 묘사됐다. 빗대어 생각해 보며 가늠해 보게 만드는 설명의 역할은 짐짓 부족하나 성사시켰다. 사랑이 있냐 없냐는 따지지 말자. 하지만 정말 하나 빠진 게 무엇인가는 집고 넘어가자. 그것은 뭘까,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청춘은 그런다>가 빠졌다. 설명이 있긴 있었는데 부족했다. 나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스무살이라면, 그냥 스무살이 아니라 평생 개구리나 촌닭으로 것도 촌닭왕으로 살 줄 알았는데, 위대한 캐츠비나 야심이나 촌년이라는 불편한 말은 썩 반갑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일부러 모른 체 하거나 멀리하기까지 했는데 정말 뜻밖에도 우연히 범접하기 어려운 대망이랄지 어떤 초현실을 나중 우연히 마주하게 될 그런 청춘이라면 그는 그때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일까, 바로 그것이 부족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딱 그것에 대해서 다정하게, 최선을 다해서,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글을 하나 알고 있다. 그것은 블로그다. 그것은 소셜 네트워크다. 그것은 당신의 작품이다. 그것은 당신의 인생이고 당신의 일이며 당신의 퇴근 후 생활이다. 또 그것은 당신의 방이다. 즉 당신의 내면의 공간이란 말이다. 이제 더 이상 최면 아카데미와 예언 강습소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는 말자.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 외계인과의 대화에 관한 증언록에 어쩌다 알고도 낚여서 빠지더라도 때로는 실의에 굴복하고 좌절하여 넘어지더라도.
   뭐시여! 고작 (개인의) 블로그가 정답이다, 가 결론이라고? 그런 개팔짜 같은 소설이 어딨어! 최면이 어쩌고 예언이 어떻고, 포도나무에서 딸기인지 바나나인지 뭔가가 열렸다면서 그런데 그렇다고? 그래서 그렇다고? 내 이럴 줄 알았다. 될성 부른 사람은 떡잎부터 파랗다는데 이상한 회사에 취직하고, 나이트 클럽에서 꼬신 아가씨들과 2차로 밖에 나갔다가 개구멍으로 빠져나가 도망가고, 그럼 그렇지! 꿈은 깨졌고 최면은 풀렸다. 그러나 차라리 그게 낫다. 오히려 그게 편하다. 산의 정상에 올라갔으면 다시 내려와야 하는 법. 소리를 마시고 빛이 휘어지고 시간이 느려지는 일들이 죄다 속임수에 기반했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래서 그 다음을 기원하고 바라며 원할 수 있게 되었다. 부디 다음에는 진짜로 환상이 정말로 이루어지는 찬란한 환희가 등장하시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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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90

from 소설 2017. 2. 15.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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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자, 노래를 부르자 그림을 그리자, 청춘의 달콤한 사랑에 대해서.
   공감각을 혼미하게 만들고, 행복의 송가가 울려퍼지는 낙원 그것을 꿈꾸는 비가로 황금 해변을 만들자.
   그러나 몸이 달아오르지는 않았다. 마음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분이여, 열망의 향연이 열리는 꿈에 그리던 열락의 경지는 아직 멀었나이까? 아무도 없는데 대체 어디다 묻고 있나!
   나는 집에서 오전에 저처럼 낙서를 끄적거렸다. 차는 커피와 녹차를 1잔씩 마셨고, 음악은 독주곡과 관현악곡으로 각각 3곡씩 들었다. 의자에서는 한 10번쯤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몇 권 읽다가 메모를 하며 생각을 했다. 집 앞에 가끔 찾아오는 낯익은 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길래 녀석에게 휘파람을 불었다. 새는 가버렸다. 괜히 그랬다. 조용히 지켜만 볼 걸. 그러다 낮이 되었다. 나는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산책을 했다. 서점에 들렸고 초등학교 앞을 거닐었다. 동네에 있는 어느 피아노 학원 앞을 지나가는데 그날 따라 쇼팽의 즉흥 환상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학원장이 술을 끊은 것일까 아니면 특별 강사를 초빙한 것일까. 남의 일에 신경 끄고 나는 해변으로 갔다.
   그곳에서 나는 파도타기를 하는 친구들을 구경했고, 그날은 조금 추웠지만 일광욕을 감행했다. 다행히 감기에는 걸리지 않았다. 침체된 기분이 약간 호전되는 것을 느꼈다. 일광욕을 마친 후 집에 가서 공포 영화를 볼 계획으로 말미암아 약간 들뜬 마음으로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바로 그때였다.
   내가 타고 싶은 고급 컨버터블, 그것도 똑같은 모델 3대가 요란하게 조용한 해변가의 분위기를 흐트려놓고 있었다. 연노랑색과 불가사의한 청보라색 계열 하나와 나머지 한 대는 또 다른 산뜻한 파스텔톤이었다. 그들은 적당히 근처에 주차시키고 자기들끼리 사진을 찍으며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도시에서 바람쐬러 내려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옷차림을 보니 무슨 연주회를 끝내고 온 것은 아니고, 웨딩 촬영이나 잡지 화보를 찍는지 무척 멋졌고 한껏 화려했다. 대충 차려입은 나와 꽤 대비되이 보였다. 그땐 몰랐는데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내가 봐도 난 상당히 꾀죄죄했다. 그러다 그들은 어디로 떠날려고 채비를 갖추고 차를 이동하여 떠날려다가 내 앞에 멈추어서 내게 길을 물어봤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가기를 원하는 유적지를 가르쳐 줬다. 내게 말을 건넸던 아가씨는 낯이 약간 익은 듯 하기도 하고 웬 흑백영화에 나왔거나 광고 모델을 닮은 것도 같았다. 그들은 떠나갔고, 한참 후에 나는 아하~ 하면서 가물가물했던 기억 속 필름과 연상되었던 심상이 겹쳐져서 최종 선정된 아는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에 혼자 조금 기뻐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귀 위로 넘기면서 내게 길을 물어봤던 그 숙녀는 바로 척키2를 닮은 것이다. 한때 나와 내 친구 척키의 우정 사이에 불쑥 뛰어들었던 불청객이었던 그녀. 그때 그 여인과 좀 전의 그녀는 약간 닮았다. 그러나 예전의 척키2는 그분께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실상 정면이 영 묘사하기 까다로웠고, 그래 젊음에 기인한 아름다운 자태였고 뒷모습마저 썩 애매했다면 저기 저분은 같은 얼굴형이더래도 이쁜 축에 속했던 것이다. 뭐 가슴 조릴 사랑의 예감도 아니고 과장된 추억의 폭로도 아닌 그냥 잊고 살았던 어여삐 여길 기억일 뿐이었다. 별 중요한 일은 아니었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후 집에서 영화를 봤고, 맥주를 마셨다. 또 1회용 식품을 먹었고, 광고 전화를 1통 받았으며, 달력에 일정 하나를 적어넣었다. 그러다 나는 낮에 잠깐 봤던 그 아가씨를 떠올렸다. 그건 교태였나? 그 아양은 대체 어디서 배웠지? 설마 선천적인 재능으로? 머리카락을 넘길 당시 그녀의 팔랑귀가 쫑긋쫑긋, 코끼리 날개가 팔랑팔랑거리는 환영을 떠올려봤다. 그녀가 내게 유령의 술수를 부렸을 리도 없고, 큐피트의 화살통이 비워질 만큼 대단한 사연이 생긴 것도 아닌데 그냥 헛생각이 지나쳤던 모양이다. 그건 탐스런 첫인상도 아니었고, 탐미적 사랑 역시 아니었다. 만약 내가 유부남이었고, 옆에 내가 애호하는 용어로는 공주님 타인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명칭으로 여편네가 내 눈치를 살폈다면, 만일 그랬다면 이 인간이 속으로 골똘히 뭔 딴생각을 하는지 퍽 궁금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 나는 지금 자유인이었고, 또 가난뱅이였다. 그렇다고 내가 야릇한 속셈을 품었던 것도 아니고, 새색시야 새색시야 새색시야 하면서 최면술을 함부로 오용한 것도 아니니 딱히 남부끄러운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그날 하루가 그냥 조용히 마무리될 것이란 내 예측은 심하게 경솔했다고 판명되는 일이 별안간 벌어졌다. 나는 잘려고 딱 잠자리에 누웠는데 마침 그때 쿵쾅쿵쾅 클럽 음악이 울려대기 시작한 것이다. 일어나서 창밖을 보고서 알게 됐다. 첫째 옆집에 이웃이 이사왔다는 것, 둘째 낮에 봤던 3인방 컨버터블이 그 집 앞에 세워져 있다는 점을. 그것은 007 가방이 뒤바뀌는 우연과는 달리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한적한 시골에 똑같은 차들을 타고 와서 소란을 피우는 스무살 꼬마들이 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추호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러면 음 가만 있자... 저분들이 다 여기서 살 것 같지는 않고, 생각을 해봐야겠다. 척키2가 이웃일 가능성은 50 대 50이었다. 뭐 그러든가 말든가. 자기들끼리 오붓한 시간을 갖고, 나는 숨은 진주를 찾아 꿈나라로 떠나면 그만이었다. 때마침 우렁찼던 음악 소리는 차츰 줄어들다가 조용해졌다. 동네 인적이 드물고 교류하는 이웃이 없던 찰나 새로운 인물의 출연이 반갑긴 했으나 어떤 고단한 고투를 겪게 될지 무슨 우스꽝스러운 기싸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괜한 기대와 대기만성형 예감을 가라앉히고 나는 겨우 꿈나라로 떠났다.


   2

   날아 바꼈다. 그리고 이웃이 출현한지 3일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나는 창작의 소임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나는 망원경을 들고 동네에서 제일 높은 동산에 올라가서 옆집의 동태를 살필려고 했다. 그러나 망원경은 내가 무인도에서 잃어버렸는지 어쨌는지 찾아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즉시 인터넷으로 새로운 망원경을 주문했다. 4일 후에 망원경이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한 박스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망원경이 아니라 거짓말 탐지기가 들어있었다. 이건 나보고 수사관 놀이를 하라는 건가 아니면 예능 프로그램을 혼자서 따라하라는 것인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물건을 반품하지는 않았다. 나중 언제 유용하게 써먹을 수도 있을 것 같고, 나는 왜 그동안 이 장난감을 갖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살짝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나는 세상 모르고 뛰노는 아이들의 무리에 뒤늦게 합류한 개구쟁이가 된 듯한 존귀한 착각 때문에 슬쩍 기분이 고조됨을 느꼈다. 미리 준비해줘야 하나? 나중 이웃과 친해지면 덕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나중 잔치상 앞에서 술잔을 들고 실토할 일이 있을려나, 앞으로? 혹시라도 도리어 바보 취급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니 괜한 웃음 욕심은 자제하기로 했다. 게다가 아직 어떤 인간이 내 이웃인지 확인도 못하지 않았나. 설레발은 금물이다. 이제 근엄해질 때도 됐다. 늠름한 사내가 방정맞은 공상이 다 뭔가!
   그러다 8일째 되는 날 나는 이웃과 만나게 되었다. 그날 역시 바람이 쌀쌀했다. 그러나 나는 꿋꿋이 침낭 속에 들어간 채로 우리 집 수영장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척키2는 몸에 착 달라붙는 섹시한 운동복을 입고서 뛰면서 운동을 하던 중 우리집으로 막 들어왔다. 한 30센티미터짜리 야트막한 울타리를 칠려다가 그건 별로인 듯 해서 내버려둔 잡동사니 위를 번쩍 뛰어넘드니 곧바로 내게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군요. 그래도 초면은 아니죠? 그럼 다음에 또 뵈요.」
   급작스런 현현에 이어 그녀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냉큼 떠나갔다. 무슨 대답할 틈도 없이 가버리길래 설마 우리 사이에 어느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분이 몹시 의뭉스럽게 뒤엉켜버린 분위기만 남았다. 그래서 나는 의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녀와 어떻게든 친해져야 내게 득이 되고 행운이 찾아올까? 아니면 어쩌다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으면 차갑게 인사를 마지못해 받아주는 식으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작전으로 상대해야 할까? 나는 그 쓸데없는 두 가지 의견을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 후로 나는 척키2와 묘하게 마주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우리는 동선이 겹쳤던 까닭으로 그랬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멀더가 운영하는 찾집에서 잠깐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그녀는 자기가 소설가라고 했다. 통성명은 나눈 것이다. 우리는 창밖을 보는 1인 좌석에 앉아있었다. 그래서 각자 창밖을 향하여 할 일을 하면서 듬성듬성 말을 나눴고, 또 한동안 말없이 글을 쓰거나 인터넷 검색을 했다. 그러다 다시 소셜 네트워크를 둘러보다가 간간히 말을 나눴다. 나는 그녀가 혹시 거짓말을 하지 않았나 해서 즉시 검색해봤다. 헉! 아, 망했다.
   그건 뻥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밝히는 게 많았다. 나는 친구가 애인이나 관심가는 여자가 생겼다고 하면 이렇게 물어본다. <걔 말 많니?> 라고만 묻는다. 그외 관련하여 얘깃거리가 생기면 점차 질문을 늘여가는 게 내 방식이었다. 즉 나는 그 정도였는데 척키2는 진짜 수다스러웠고, 내세울 것도 많았고,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는 듯 했다. 경력도 투명했다. 나랑 많이 비교되었다. 무엇보다 나보다 글을 더 잘 쓸까, 라며 나는 슬슬 겁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걸 겁이라고 지칭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멍청한 자문이긴 하지만 최적화된 대답은 아마 동문서답일 것이다. 그런데 혹시 말까지 나보다 더 잘하면 어떡하지? 잘하면 잘하라고 하지, 안 웃어주면 그만이다. 그렇게 그녀의 약력을 살펴보니 그녀는 최근 상을 받았고 상금도 한 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냥 적당히 회사 다니다가 방랑을 거친 후 찾집을 운영하다 대뜸 작가의 세계로 뛰어든 것이 아니라 그녀는 학문을 3개나 전공했던 것이다. 그것도 적당한 명문대학교에서. 뭐야, 그런데 나는? 다행일까 아니면 무관심일까, 그녀는 나보고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좋긴 좋은데 또 그걸 꼭 좋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고마우면서 한편 얄미웠다. 뭐야 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옆에서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묻고 싶은 말은 <그 상금 다 어디다 썼냐, 한턱내라, 그리고 말 놔라>였지만 나는 그냥 마른 침을 꼴깍 삼키기만 했다. 그쪽에서 먼저 살갑게 굴지 않는데 내가 먼저 저자세로 친한 척 하기도 영 언짢았다고 하는 게 그 상황의 적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녀는 마법사의 준마를 탔는데 나는 무기력증에 빠진 당나귀를 모시는 형국이었다. 어렵싸리 치료되었던 허언증이 다시 도질 것만 같은 불길한 기운이 나를 잠시 떨게 만들었다. 그리고 척키2는 앞모습은 척키과였으나 옆모습은 괜찮았다. 그렇다. 옆모습만.
   아! 나는 그날부터 삼류 소설가라는 나름 자부심을 느끼는 직분을 숨기며 살게 됐다. 차라리 백수가 나을 것 같았다. 풍운아에 몽상가에 사색가에 반항아에 염탐꾼에 피노키오에 갖다댈 애칭은 많고도 많았으나 누가 물어봐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또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내가 꿈에도 모르는 일이 이미 현실일지 누가 알겠나. 장외에서 환상 소설의 숨은 실력자라고 소문이 났을지 혹시 모르지 않은가. 뜬금없는 풍설,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그러나 그건 꿈이고 현실은 가엾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나는 기죽지 않고 척키2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더욱 맹렬히 창작 생활에 몰두했다. 그런데 왜 하필 척키2가 그것도 인지도 약간 있는 소설가가 내 옆집으로 이사온 건가? 괜한데 의미부여하며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에 몇 글짜 더 쓰고 학문에 정진하기로 했다.


   3

   예상대로라면 나는 원래 자연을 예찬하며 허구를 창작하는 천직에 고마워하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척키2를 흥미롭게 생각하며 즐거워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거꾸로-맨이 되기 시작했다. 가령 나는 집에서 오빠 머머 하지마, 같은 어떤 일들에 몰입하는 내 모습을 불현듯 알아차리며 새삼 스스로 놀라는 순간이 틈틈히 발생했다. 그리고 새로 생긴 일 두 번째는 멀더의 카페에서 매일 그녀와 담백한 대화를 나누며 각자 노트북을 펴놓고 자판을 두드리는 생활이 일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나를 오빠로 부르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를 부를 때 앗 나는 그녀를 뭐라고 부르고 있었지?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피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미리 계산된 행동이라는 듯이. 불시에 그녀가 내게 물어볼지도 모른다. 오빠는 왜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나요 라고. 그러면 나도 할 말은 있다. 방금 부를려고 했다, 넌 유명인이고 난 일반인이지 않냐, 내가 어디서 감히 높으신 분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겠는가 불경스럽게 말이야, 내가 봤을 때 아무리 봐도 너는 척키2다, 나는 너를 척키2라고 부르고 싶다 라고. 아닌 게 아니라 진짜 그렇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 것이다. 잔잔히 띄엄띄엄 뒤늦게 깨우치게끔 슬며시 흘릴 수도 있을 테고. 그러다 갑자기 숙 들어가는 거지, 어이 척키2 라고. 이때부터 얘는 항상 척키2로 굳어지는 거다. 그런데 그녀는 실제 그렇게 물어왔고, 나는 저 세 가지 보기를 제외한 보결 명단에 자리한 답변을 내놓고 말았다. 척키2 까불지마 라고! 그러나 그녀는 웃었다. 나는 그녀를 웃겼고. 그녀는 무척 좋아했다. 남자 여자 사이는 별것 없다. 여자는, 웃으면 끝난다. 절반은 넘어왔고, 나머지 절반은 쥐락펴락하는 일만 남은 거다. 물론 웃음과 비웃음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썩은 미소 일명 썩소와 냉소도 분간하면 도움될 테고. 쓸데없는 얘기는 이제 그만. 그래서 나는 심심하면 그녀에게 척키2라고 불러주었다. 나도 좋고 그녀도 좋고. 어쩜 이렇게 복스러운 일이, 어떻게 이처럼 아름다운 축복이! 별의별 우연의 일치가 다 있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나는 그녀를 이웃이자 동료요 최근 친한 동생으로 여긴 것이다. 그녀는 나를 어떻게 여기는가, 에 대한 뚜렷한 (상반된) 징후는 없었다. 표면적으로만 봤을 때 첫만남이 자연스러웠고, 친해지는 과정도 무난했으며, 적당한 단계를 거쳐서 친해짐과 동시에 이미 처음부터 그것을 예감했으니 각자 감정은 꽤 괜찮은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블로그를 찾아내서 그녀 몰래 즐겨찾기에 등록해뒀다. 척키2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 테고. 만나는 사람 2명 중 1명은 의례 그러는 거 다 안다는 듯이. 하지만 내가 그녀의 블로그를 북마크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응석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비록 평등할지언정 내게 엄청난 애교 공세를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척키2는 내게 교묘한 염력을 뿜었고, 자기를 좋아하라는 최면을 비밀리에 내게 지속적으로 덧씌웠으며,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라는 썩 밉살스럽지 않은 세뇌를 지속적으로 내게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를 잠정적 애인으로 점지해 둔 것일까? 누구 맘대로!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리지널 척키 친구로도 모자라서 추종 세력 척키2까지? 아,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건 횡포다. 숙명의 채찍질일까? 아야! 아프다. 간지럽다. 그러나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싫지는 않다.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나. 허나 지적할 수는 없다. 알려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관계도가 엉망으로 변형될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불문율이니까. 또 여자 마음을 모르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고별을 종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우리는 이웃이고 동료였으며, 우리는 딱 여기까지 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의리를 지킬 것을 묵묵히 약조한 거나 다름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나를 만나면 말 한마디에 오빠라는 단어가 최소 한 번 등장했다. 1분에 5문장을 말한다, 그럼 1분 안에 오빠라고 최소 5번 부르는 셈이다.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문장의 처음에 오빠를 놓거나 문장의 끝에 오빠를 두는 식으로. 드물게 중간 중간 불현듯 오빠가 등장할 때도 있다. 예측하기 어렵게 말이다. 그러나 꼭 어리둥절할 필요도 없고 그냥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그만 부르라고 권고할 수도 없고, 나는 그냥 그녀에게 더 좋은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고운 마음과 척키2라는 고유한 진가와 그녀의 예기는 물론 들쑥날쑥한 그녀의 허영심과 온전한 애교까지 모두 사랑해 줄 수 있는 멋진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뭐 나름 나는 그녀를 천사들의 합창 바로 옆까지 인도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우리는 우정으로 뭉쳐진 것과 거의 진배없었다.
   그리고 나도 어서 환상 문학상과 상금을 거머쥐기 위해 더더욱 창작생활에 매달리기로 했다. 새파랗게 젊다는 한밑천으로는 뭔가 부족했었나 보다. 새파랗게?


   4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집에서 잠을 자다 꿈을 꾸었다.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았으나 대략 나는 꿈에서 천부적인 소질을 주체할 수 없어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작품을 시간 대비 얼마로 찍어내고 있었다. 또 발표하는 작품이 하나 같이 인기를 얻었다. 모차르트의 재래네 피카소의 부활이네 문학의 거장들이 지닌 특별한 특징들을 모두 섭렵했네 어쨌네 하면서 반응이 장난 아니었다. 천부적인 소질을 잘 살려 마침내 환상 기계가 된 것이다. 그런데 쏟아내는 작품량이 만만치 않으니 그건 거의 환상 공장이라고 불러도 썩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꿈에서 4차원의 천재였고, 초능력자였으며, 믿을 만한 예언가였다. 꿈에서 나는 그랬다. 손만 까딱하면 명화가, 입만 뻥끗하면 어디서나 웃음꽃이, 눈빛 한번이면 그녀의 마음을 절묘히 훔칠 수 있게 되었다. 욕망은 곧 작품이고, 사랑은 초현실주의, 인생은 걸작이며, 나는 현존하는 전설이었다. 생각하는 족족 예술적 착상에다 말하면 문학이고 콧노래만 흥얼거려도 음악이 저절로 탄생했다. 그것도 초절기교로. 눈을 떠도 인기요 눈을 감아도 환상이며, 눈에서는 레이저가 입에서는 화염을 뿜을 수 있었다. 손짓 하나는 요술 지팡이의 얍~이었고, 발까락을 틀면 무용가였다. 고개만 까딱해도 천상의 팡파르가 대지에 울려퍼졌으니 말 다한 거나 마찬가지다. 도대체 어려운 일이 없었다. 웃기면 희극 슬프면 비극, 어려우면 전위 못 알아먹겠다면 실패작이라는 평론가로서의 해석 역시 널리 화자됐다. 실력은 장비에 비례한다는 말마저 브랜드의 슬로건으로 쓰일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말을 참았다. 왜냐하면 관상가에 작명가에 사상가로서도 명망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뭘 해도 재미있었다. 그러다 끝이 흐지부지하다가 꿈을 깼다. 이런, 젠~장!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그걸 내가 알았다면 나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뭔가 지금보다는 더 반짝이는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별다른 요행을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에 복권은 사지 않았다. 꿈에 나온 이야기를 글로 쓰지도 않았다. 단지 인터넷에서 예지몽에 관해 조금 검색해보다 말았다. 현실의 금은보화가 아니라 금기시된 야한 모험을 꿈에서 이루어보고 싶었냐고? 아니다. 천만의 말씀! 나는 그냥 미래가 조금 궁금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척키2에 비해 내 약력이 너무 초라하다는 것을 절감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어떻게 대학능력시험을 다시 봐야 하나 아니면 파란만장한 경험을 쌓아야 하나. 썩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척키2가 혹시 물어보더라도 대충 둘러대면 그만이다. 풍족하기만 하다면 백수도 그리 나쁜 본분은 아니다. 그냥 할일이 없는 것보다 대망이 잠자고 있다는 핑계에 그칠지라도 말이다.
   기껏해야 개꿈일 뿐이라며 허무맹랑한 공상과 미련한 몽상, 뚱딴지 같은 상상은 당분간 자제해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정말 그 개꿈이 어느 천운의 실현을 달성한 것일까? 얼떨떨했다. 허깨비에 속았고 귀신에게 홀린 듯 했다.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세세히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척키2로부터 아양은 무한히 공급받고 있으나 그에 상응하는 박력과 마땅한 배짱도 색다른 우연도 없던 찰나 자상한 서광이 나를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즉 옆집에 또 한 명의 숙녀가 이사온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남자들이 내려와서 그들로부터 공주 대접을 받기 원하는 여인이 부럽지 않았다. 은닉된 보물, 원하는 이상향이 아니다. 나는 권태의 감옥에서 석방됐다. 가공할 타성은 즉석해서 청산되었다. 악운은 나를 비켜갔고, 풍류를 재촉하고 무지개에서 미끄럼틀 탈 일만 남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정말 나는 황홀했던 것이다. 으흐흐, 으흐흐흐흐!
   옆집 여자는 이름이 천사였다. 왠지 모르게 그 때문에 척키2가 혹시 악마와 연관된 것은 아닐까 살짝 걱정됐으나 호기롭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읊지 않을 수 없었다.
   「귀신에 홀린 것이 분명해. 틀림없어!」
   머리가 띵하고 가슴이 떨려왔다. 점점 생활이 하이틴 드라마풍으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슬럼프에서 탈출할 것을 예감했다. 왜냐하면 양쪽에 사는 얘와 쟤와 함께 부딪히고 노는 얘기를 과장한다면 시나리오 한 편 가볍게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구원받은 것일까 환생한 것일까? 또는 이제야 정상 궤도에 올라간 것일까? 어쨌든 양편에 미녀들을 꿰차고 있는 주인공을 영화에서만 보다가 어딘가 모르게 내 처지가 어쩌면 약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멀쩡했다. 그러나 미친듯이 활력이 솟구쳤다. 이러다 잠을 자지 못하고 거리를 밤새 뛰어다닐지도 모른다. 무작정 말도 안 되는 비유를 든 것도 아니다. 어두컴컴한 삶이 타기되었고, 순식간에 그냥 정상적인 삶이 파란을 수반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나도 허세보다 실속을 좋아한다. 그러나 허세도 마다하지 않겠다. 허풍의 사촌이니까. 그런데 농담이 고급스러우면 절묘한 기쁨을 안겨주지만 뻥이 저속하면 멱살을 부르고 내 인생마저 값싸게 느껴진다. 그러나 뭐랄까 꼭 8대2랄지 그런 롱테일까지는 아니더래도 실질적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되뇌이는 것 뿐만으로도 풍자도 되었다가 시적으로도 느껴졌다가 황금으로 이루어진 호박마차가 제발로 굴어들어온다면 조금 부풀리고 약간 과장해도 퍽 구박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곧, 현실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이상한 형세가 뭐 퍽 탐탁치 않은데 또 싫지는 않다, 라고나 할까. 만약 당신께서 내게 <좋소, 싫소?>라고 물으신다면 미천한 소인은 똑 떨어지게 전자를 선택하고 싶소이다, 가 명쾌하며 유일한 정답이었다. 그야말로 점점 가짜 웃음이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터득되는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5

   새로 이사온 옆집 처녀는 척키2보다 더 강하게 나왔다. 대뜸 나를 보자마자 오빠라고 불렀다. 왠지 친근한 호감이 느껴지는데 그 웃는 얼굴에 정색하며 무안함을 안겨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 처제, 왜 불러 자기, 라고 답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식 웃기만 했다. 난처하고 어중간하면 때에 따라 일단 시간을 끌면 된다. 전문가가 아마추어처럼 괜히 시간을 끄는 게 아니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남자들 얘기를 들을 만큼 들어보면 인간사 만물의 원리를 알 수 있다. 뻥치고 허세부리고 허풍 대회 출전을 벼르네 어쩌네 해도 실상은 여자가 다 알아서 한다는 것을. 여자의 마음은 애초에 남자의 상투 끝에 올라서 있는 법이다. 물론 연습이 필요한 부류가 있고 처음부터 하찮은(?) 연습 따위는 필요없는 친구들도 있다. 대충 보아도 반반이다. 50 대 50. 그건 마치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그저 야한 옷차림과 몸짓만으로 옆구리를 찌르느냐, 아니면 기억에 남는 짧은 명대사를 남기고 타인에게 그이의 주변에 이 남자 내 남자다 라고 보란듯이 먼저 선포하는 구미로 나뉘는 것처럼. 얘나 쟤나 누구에게나 그저 적당한 남자라면 전자든 후자든 공평하게 쓰윽 흘리는 형편이 반이라면 이 남자 아니면 안 된다도 역시 절반을 차지한다. 그러나 수학은 아니다. 변수도 많다. 오히려 연애의 실패가 나중 보면 나을 수도 있다. 사랑에 왕도는 없는 것일까? 남녀의 인연이 정해져 있다면 음, 그건 너무 어려운 얘기다. 아무튼 면면히 화자되고 어디서나 설명이 반복되는 여자의 마음은 쉽게 말해 진짜 이리 튀고 저리 튀기 전에 사전에 이미 그 움직임과 예측이 빠르다는 것이다. 그걸로는 여자가 100미터 경주 세계 챔피언이다. 강아지가 자기 집에 들어가지 않고 개 집 지붕에 올라선 모습은 귀엽다. 한없이 사랑스럽다. 그러나 그 강아지의 머리 위에 고양이가 앉아있는 그림을 떠올려보면 아아, 아찔하도다. 그런 것이다. 여자는. 남자들이여! (봐봐, 그 고양이 머리 위에 '톰과 제리'에 등장하는 위엄하신 생쥐의 늠름함을 떠올려 보라구요? 다시 생쥐의 꼬리는 강아지에게 잡히고 강아지는 쥐꼬리만한 봉급 생활자이며... 그렇게 빙글빙글 돌지 않겠냐고? 막 이따만한 슈퍼쥐가 없으란 법도 없지 않느냐? 오오, 딱, 거기까지만! 같이 게임해 보면 알게 됨. 초딩도 짜증낼 땐 짜증냄)
   그렇게 처음부터 오빠란 말을 쉼없이 들었지만 하지만, 앤젤리나와 나는 의례적인 인사만 나누었다. 그녀의 생기발랄함에 나의 찬사는 무색해졌고, 그녀의 고혹스런 자태에 나는 그만 넋을 잃고 당혹감에 정복당하여 머리가 띵해졌다. 처음 만나자마자 내 뺨은 붉게 물들었으며 앤젤리나는 아마 화장에 의해서 홍조를 띄었으리라. 그 빛깔의 화장술이 그녀만의 트레이드 마크인가? 뭐 두고 보면 알게 될 일. 하지만 첫 만남이 곧바로 허물없는 친구 사이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그녀에게 막 측량할길 없는 아름다움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느끼한 칭찬으로 그녀를 부담스럽게 만들지는 않았다. 물론 이렇게 저렴한 무리수 또한 던지는 일만은 아직 주저했을 것이다. 차마 내가 이런 말까지는 정말 안 할려했는데, 대체 그 미모의 비결이 뭐냐고 한번 속시원히 알려줄 수 없소? 라고. 왜냐하면 효과는 빠르지만 꽤나 상습적으로 쓰일 것만 같은 뒷맛을 남기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사람 봐가면서 조심스럽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뜻.
   곧 앤젤과 나는 두 번째 만남을 계기로 친해졌다. 우리는 처음보다 두 번째가 특별했던 것이다. 왜 하필 그 순간에 앤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는지는 몰라도 그 때문에 판도라의 상자 그 광대무변한 뚜껑이 쿠쿵~ 하며 열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충격이 발현되었고, 그녀는 내 비밀을 움켜쥠과 동시에 나를 비호해줘야 할 모성애마저 간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내게 어떤 연민까지 느꼈던 것일까? 속속들이 이미 나를 알고 있었나? 서로 얼마나 안다고! 차라리 호통을 떨구어 주셨으면! 그녀는 꾸지람도 아니고 절교도 혹평도 아닌 미묘한 웃음과 간지러운 수줍음만 남기고 떠나갔다. 바쁘신 것 같으니 다음에 찾아뵙겠다면서.
   나는 그때 예술적 착상을 위해서 어디까지나 뭔가 제2의 자아와 새로움을 공모하기 위하여 어느 에로 영화의 핵심 장면을 보고 있었다. 진짜 딱 보고 싶어서 보지는 않았다. 어쩌다 파일이 있길래 그저 확인하고 지울려고 했다. 더군다나 길게 볼 생각도 없었다. 또 실제 길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고 진지하게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참았다. 다시 말하면 최소한 그럴까 하는 갈등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작품 구상이 더 중요했다. 내 인내력은 견고했다. 아주 잠깐 한눈팔았을 뿐이다. 아주 잠깐. 그러니 내가 더 억울한 셈이었다. 재미도 없었다. 좋아하지도 않고. 결과는 꽝이었고. 가슴에 손을 얹고 사실만 따졌을 때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원색적인 뭔가를 딱 확실히 봤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드라마를 봐도 가볍게 키스하는 장면만 딱 떼어내서 보면 것도 역시 곡해할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줄거리 영상이었다. 바쁘신 거 같아서? 바쁘긴 뭘 바뻐? 내가 왜 바쁘냐고! 도대체 무슨 오해를 했길래...! 작품 감상도 아니고 그냥 간추림 요약 파일을 우연히 한번 재생시켜 본 게 다다. 나는 그래도 까딱도 않고서 어디까지나 가녈픈 선정성을 아주 태연히 작품에 활용할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가 들어온 것이다. 앤젤이! 노크도 없이. 문이 잠기지 않은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런데 불가해한 점은 이상하게 그때 우리 집에는 베토벤의 삼중주가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는 말씀. 그와 더불어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와서 책을 한 권 밝았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내가 주제넘게 그런 치밀한 계산을 미리 준비했을 리도 없다. 얼마나 값진 양서를 많이 읽길래 그 집에 가면 발에 밟히는 게 셰익스피어냐, 라는 뜬소문이라도 퍼지기를 바랬냐고? 그럴 턱이 있나! 여기서는 체이는 게 베토벤이고 옷깃만 스쳐도 환상 문학과 인상주의에다 신비한 향수라니, 그래서 나는 저 남자를 사랑하고 싶다 같은 착각에 빠지도록 미리 설정된 것 아니냐고? 오해다 오해. 내가 그런 최면술을 정말 터득했다면 나는 진작...... 아 지친다. 내가 왜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아야 하는지 너무나도 답답하고 눈물이 시야를 가린다. 누차 얘기하지만 나는 억울했다. 찬찬히 설명할 수 있었고, 조곤조곤 설득해야만 했다. 그러나 해명할 기회는 날아갔다. 아니 상대가 있어야지 서사를 말할 텐데 사람이 없어, 게다가 상황도 상황이라서 그걸 또 말로 한다는 것도 참 모양빠지는 일이야, 난제가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든 자초지종을 설명할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간 것이다. 흔적도 없이. 그녀, 앤젤리나가 내 엄마라도 되나? 아니다. 그런데 왜? 오, 이럴 수가! 난 망했다. 망해도 단단히 망했다. 많이 망했다. 폭삭 망했다. 이제 그녀 얼굴을 어떻게 본담?


   6

   보면 보지 왜 못보겠나. 상황이 근사하지 않았다 뿐이지 아무런 일체의 부조리는 없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잠시 얼굴 붉힐 일도 있을 수 있고 챙피하고 부끄러운 일들 뒤돌아보면 얼마나 많더냔 말이다.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앤젤과 나 사이에 곡해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미적지근하게 수동적으로 뭔가를 기다리는 일은 썩 모범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착한 여자로 남고, 나는 나쁜 남자로 낙인찍이더라도 나는 후련하게 말을 하고 싶었다. 당시 내가 봤던 비디오는 어디까지나 예술의 연장선이었다, 보고 듣지 않았냐, 베토벤을 듣고 셰익스피어를 툭 건드리지 않았느냐, 나 그런 사람이다, 이건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지성이 아니고 도대체 뭐란 말인가 라고. 혹시 그대는 지적인 남자를 싫어하시냐고 난 정말 따지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여자의 의중을 파악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아 그건 오해다 오해, 있는 말 없는 말 온갖 찬미와 온갖 허풍은 물론 온갖 협상의 기술을 총동원하여 뭔가 관계를 순탄하게 되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 서로 속마음을 툭 터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도 미련하게 어설픈 변명같은 잔말은 하기 싫었다. 뭐 변명?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잘못은 오히려 앤젤의 몫이다. 당연히 내가 따지는 게 옳다. 나는 무슨 사생활도 없이 살란 말이냐고. 내가 먼저 찾아가서 왜 내가 부끄럽고 송구스럽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면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이 상황의 해명을 부탁한다고, 그렇게 잘잘못을 가려야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내가 손을 내민다면 그녀는 그럴지도 모른다. 이거 왜 이래요 라고 서운한 한마디를 툭 던지면서 그녀는 그러겠지. 엄청 화난 듯이 퍼부을려다가 싹 바껴서 미안하다고, 진짜 미안하다고. 시간이 필요할 꺼라고 생각했다고. 자기도 허물을 하나 밝히겠다고. 솔직히 속사정을 하나 털어놓고 싶은 게 있었다고. 다른 거 다 제쳐놓고 당신이 너무너무 좋다고. 어떻게 술은 위스키? 와인? 그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그렇지만,
   그럴 턱이 있나! 어디까지나 어림없는 헛생각이었다.
   나는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옆 동네에 있는 기린을 보러 외출을 하기로 했다. 음지에 숨어 사는 어느 자산가가 기린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는 즐거움은 찾기 마련이란 것을 생각하며 나는 다시 기분이 흐뭇해졌다.
   나는 집을 나섰다. 그런데 얼마 가지도 않아 갑자기 태양 빛에 버금가는 어떤 찬연함에 눈이 부셨다.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김없이 그곳은 앤젤의 집이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어떻게 그냥 지나치랴. 나는 참새였고, 앤젤의 집은 방앗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순간 나는 익히 들어왔던 투시력이 나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집 안에서 그녀가 흥분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들떴는지는 불분명했다. 내 투시력은 딱 거기서 불투명으로 변질됐다. 꼭 결제를 한 후에 다시 투명으로 바꿔준다는 듯이. 나는 그것이 가증스러운 일이 아니란 것을 확인하고 싶었고, 또 내 도움이 혹시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고민없이, 망설이지 않고 앤젤의 집 그 부들부들 떨리는 손잡이를 나도 모르게 돌려서 당겼다. 어디까지나 내 손이 떠는 게 아니라 그것이 진동했던 것이다. 아마도 진동 손잡이?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무슨 4DX 기술이 적용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머나! 문이 열렸다. 허걱!
   문을 열고 내부의 분위기를 재빨리 감지하고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앤젤이 나와 동류의 인간이라거나 그녀의 행동에 대한 예상이 적중해서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첫째 거기는 고전음악도 없었고 양서도 멋진 그림이나 조각상도 전혀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 그녀의 뒷모습은 내 환상을 더없이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뒷모습만으로도 그녀가 끔뻑끔뻑 눈을 잘 뜨지 못하고 부르르 떠는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설마 파가니니의 음악을 무선 이어폰으로 들을 리는 없다고 맹신했다. 그녀는, 나보다 더해도 완전 더한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이 와중에 동작 정지 라고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지금은 기다려줘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미 내 기분은 나도 모르게 저절로 라흐마니노프의 2번 피아노 협주곡의 1악장 주선율이 흐르는 음악회장에 가 있었다. 나는 사색의 정원, 그녀는 풍문이 무성할 사건의 주인공! 사람은 살면서 일탈도 하는 것이고, 방황은 물론 곧잘 주색의 늪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어차피 피조물인데 그래야 인간적이지 않겠나. 나는 하트 에이스 포커 패를 쥔 거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더없이 느긋했다. 그 순간 만큼은 이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어쩐 일인지 나는 그녀에게 선물을 하나 선사하고 싶다는 묘안이 떠올랐다. 신제품을 포장해서 리본으로 묶는 그런 선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집에 있는 거짓말 탐지기를 왜 무심코 주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악당이 아닌 전설적인 수완가였고, 철없는 개구쟁이가 아니라 자상한 오빠였다. 그런데 나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사태 판단을 하던 찰나 의자에 앉아서 무슨 중요한 파일을 보는 것 같던 그녀가 갑자기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돌아보았다. 그때 그녀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어! 이게 아닌데...... 그녀는 앤젤리나가 아니라 얼굴이 척키2였다. 가면이 아니라 진짜 척키2! 설마 오늘은 13일의 금요일?
   그때 척키2가 나를 깨웠다. 그것은 꿈이었다. 장소는 우리 집 수영장 옆 의자. 나는 침낭 안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아,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것인데...... 아 이럴 수가, 아깝다! 오, 다 잡은 대어를 놓친 것이다.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했던 월척이었는데 오, 이런 이런 이런! 아아,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것이다.
   최근 척키2와 나는 20세기 문학 사조에 대해서 연구하는 그룹을 결성해서 공부중이었다. 함께. 약속한 시간에 내가 멀더의 찻집에 나타나지 않자 그녀는 나를 찾으러 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척키2에게 끌려나가게 되었다. 죽상을 지으면서!


   7

   척키2는 내게 물었다.
   「오빠! 비디오 잘 보셨어요?」
   「어? 뭐? 디오? 디오를 만났냐고? 내가 디오를 왜 만나! 그런데 너가 디오를 어떻게 아니? 디오는 내 친구가 아니라 가수인데. 그것도 옛날 팝송. 주옥같은 추억의 명곡을 불렀던. 이 친구 이거 이거 음악에 조예가 꽤나 깊은데 그래? 음, 아는 것도 많고 글도 잘 쓰고, 아주 팔방미인이군 그래.」
   나는 혹시 앤젤이 척키2에게 그 일에 대해서 귀뜸해줬나 라고 생각했다. 설마 전했다고 했드래도 그것은 '너만 알고 있어'일 테고, 일종의 상담이자 쉬쉬해야 할 수다에 지나지 않을 텐데 얘는 무슨 의도를 품고 그 말을 슥 흘리는 것이지...... 너무 궁금했다. 그러나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걸 어떻게 물어보나.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른 얘기를 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그녀는 알고 있을지 나는 안절부절, 그녀는 기쁨 시작 행복 두 배인 것만 같았다.
   룰루루랄라~ 룰루루랄라~ 룰루루랄라~!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뭘 그렇게나 좋다고. 내 기분이 이렇게 좋다는 것을 당신은 아셔야 합니다, 라고 웃음으로 대신 외치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한창 열심히 일하던 시절 생각이 났다. 숨은 참조에서 '숨은'을 떼어버린 것만 같았다. 숨은 참조 메일을 보내거나 받은 일, 아마 세 손가락으로 넉넉히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썩 점잖치 못한 소문의 진원지에 내가 포진하게 된 것인가, 아닌가.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 말 못할 사연이 더 부풀려지고, 퍼지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이 태산이라고 느꼈다. 좌우지간 나는 그 말을 어딘가에 외치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고.
   이때부터 우리는 셋이서 참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나는 척키2를 애호하고, 척키2는 앤젤을 흠모하며, 그리고 앤젤은 바로 나를 동정하는 삼각관계를 예상했다. 조금 베팅을 더 하자면 둘 다 나를 추종하거나 둘 다 열렬한 열애의 전 단계에 머물거나 바로 그렇게 추측했다. 처음에는. 운이 좋으면 동정을 짝사랑으로, 삶이 항상 불길한 것이 아니라면 그 모두는 혹시 우정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가늠해봤다. 소원까지는 아니지만 대략 그러지 않을까 조심스레 내다본 것이다. 인생이 항상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우리는 영화를 따라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쥴 앤 짐, 맞나? 그 영화를 봤는지 안 봤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그러나 난 나의 영특하지 않은 기억력에 실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중충한 어떤 날 앤젤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받았기 때문이다. 애드윈 A. 애보트의 플랫랜드라는 소설을. 나는 그 책을 처음 읽다 졸았다. 두 번째 독서를 시도했을 때 역시 하품이 계속됐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읽을 때마다 잤다. 하지만 앤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은 적은 처음이라고. 그때가 아마 우리 셋이서 결혼식 2번과 1번의 장례식을 같이 다녀온 후일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그 뒤로는 비디오 얘기를 들을 수 없었다. 좋긴 좋은데 그 감정이 다가 아닌 듯 해서 생각이 많아졌다. 어쩌자고 그 애매한 장면을 들켜버렸는지 그건 거의 불가사의가 틀림없다.


   8

   어느새 우리는 멀더의 다방에서 일하는 3인조 친구로써 지내고 있었다. 아, 앤젤은 만화가이자 웹툰 작가이자 디자이너였고 일러스트레이터였다. 그림과 이야기를 결합한 일이면 무엇이든 가능했고 다방면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 친구도 책을 몇 권 냈고, 그 분야에서 꽤나 잘나가는 재주꾼이었다. 역시 유명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그냥 동네 아저씨! 뭐 차라리 이때가 나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같이 일하다가 나는 노트북으로 여자들 수영복 입은 모습 같은 색정적인 사진을 구경하는 장면을 녀석들에게 딱 걸려버렸기 때문이다. 졸지에 나는 아름다움과 지성을 담당하는 여인과 젊음과 빼어난 도도함을 추구함을 숙녀, 그 두 마님을 모시는 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차마 이런 현실을 미리 내다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뼛속까지 돌쇠의 명예를 감당해야 할 기구헌 팔짜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걔네들 둘이서 짝사랑 1순위를 다퉈도 모자랄 판국에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린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나는 이 친구들이 나를 자기들 작품에 등장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값싼 감상주의는 이미 발발했다.
   행복의 음파를 조정하며 기쁨의 음계를 기획하던 중 잠시 피로를 푸느라 한눈판다는 것이 그만...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 인생은 덧없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중력이 존재하는지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세상, 한껏 야속했다. 벙어리가 서방질을 해도 제 속이 있다는데, 나는 텃새도 안 부렸는데, 이런 젠장! 나의 수심은 커져만 갔고, 애지중지 관리한 멋진 남자 포지셔닝도 날아갔다. 날씨는 을씨년스러웠고, 내 처지는 한껏 객스러웠다. 농담 몇 마디와 풍성한 식사 자리를 접대하는 것으로 뒤집혀질 약점이 아니었다. 내가 뭐 금지된 사진이나 불온한 영상을 본 것도 아닌데 하지만 나는 쥐꼬리가 됐고, 그녀들은 완고했다. 차라리 옆집1과 2에 마초의 대표주자, 얼굴은 극도로 무섭게 생긴 반면 심성은 순둥이인 마초들이 이사오기를 바랬어야 했나?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영영 감을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장난꾸러기 말괄량이들!
   그러나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척키2는 언젠가  한번 흐트러질 것이다. 앤젤도 차갑고 이쁜 척만 했지 허당끼 다분했다. 은근한 정도가 아니란 거, 이미 내게 들켜버렸다. 자세한 얘기는 생략한다. 나는 그녀들를 지켜주고 싶으니까. 어차피 나는 더 내려갈래야 내려갈 수도 없었다. 주도권은 넘어오게 되어 있다.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대세를 읽을 수 있다. 수싸움이 내 전공이니까. 뇌물을 건네든 감언이설을 쏟아놓든 헛점을 노려야 한다. 그녀들도 사람이다. 게다가 둘 다 여자다. 심지어 이사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시골 생활에 슬슬 싫증을 내고 있는 기미가 엿보였다. 그러나 정작 기다리던 기회, 확실한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날개 달린 천사가 아니었고, 목마른 나그네였다. 그녀들이 하면 마땅한 변덕에 다행스러운 환영이었고, 내가 하면 관심을 가지는 족족 헛방이고 사는 일은 따분함 그 자체였다. 자유를 갈망해도 기쁘지 않았고, 갈망하지 않아도 재미없었다. 권태만 횡행했고, 그분과의 만남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고리타분한 타성이 내 삶을 주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정신의 권좌는 그녀들에게 빼앗긴지 오래 전 일이었다. 꽃 피는 봄날에 대한 기대와 동경과 애정마저 식어버렸다. 그윽한 향이 풍미하는 찻잔까지 식어버렸다. 뭘 해도 재미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에게 나 오늘 조퇴한다 하면서 먼저 퇴근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몇 일이 지났다.


   9

   내가 우리 모임에서 조퇴를 일삼은지 1주일이 되었을 때였다. 나는 우리의 아지트에 갔다. 척키2도 없었고 앤젤도 보이지 않았다. 소개팅 하러 가셨나, 타인의 인생에 깊게 관여해도 피곤하고 또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래도 책잡힐 수도 있고 저래도 지겨울 수 있다. 나는 내 일을 해야 한다. 한 잔의 마티니가 정답이었다. 오늘은 글이 잘 써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다. 어쩌다 반가운 손님이 오면 고맙고. 그런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다. 그래도 소설을 쓰자 라는 다짐을 잊지 않으면 된다. 따라서 나는 무탈했고 건재하다. 그런데 왜 나는 그녀들의 소식을 알고 싶은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나는 슬슬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 오늘 오전에는 서투른 무당이 장구만 나무란다고 인터넷으로 노트북 쇼핑만 하면서 빈둥빈둥 놀았다. 시간이 아까웠다. 꼬박 2주째 글을 못쓰고 있었다. 혹시 척키2와 앤젤에게 기가 쪽 빨려버린 것일까? 그럴 지도! 그녀들은 흥하고 나는 망하고, 작용과 반작용. 그녀들의 인생은 전성기 나의 인생은 의뭉스러운 침체기.
   먹기 싫은 밥에 재나 뿌리지 말지, 라는 의도는 없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기쁨도 슬픔도 함께 하기로 합심했기 때문에 그녀들은 내 불행을 다독여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했다. 우리 모임의 이름을 정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다정이라고. 전당포가 아니라고. 그런데 그녀들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미리 양해를 구했으면 또 몰라! 어디 간다면 간다고 말을 해야 할 꺼 아니야. 지들 선본다면 내가 뭐 말리기라도 한데? 이미 나도 대충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약간 그녀들의 동성애적 기질을 파악한 것이다. 확신은 못하겠지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고 내가 재미없어졌다고 느꼈을까? 그러면 큰일인데. 나는 정말 그녀들의 인생과 사정에 무지했다. 도무지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왠지 욱-하던 기분 때문에 그녀의 집에 찾아갔다. 먼저 척키2의 집을 첫 번째 표적으로 골랐다.
   그런데 왜 앤젤이 아닌 척키2의 집을 방문하기로 정했을까? 앤젤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녀가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가 나를 보자마자 놀라서 샤워가운이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카메라의 시선을 바닥에 떨구어진 샤워가운으로 옮기는 황망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목적은 아니었다. 왜 척키2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냐면 바로 실존 인물 척키2의 이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기억에 가깝지만 척키1에게는 추억 속의 그녀에 해당하는 척키2의 본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 하늘이여! 설마 그게 우연이었을까? 이제야 생각난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믿고 싶지 않지만 정말 그러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 그럴진데 어쩌겠나. 네. 척키2의 존함이 떠올랐습니다. 꿀벌이 붉은 샐비어의 달콤한 꿀을 쫒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따스한 봄날은 아직 우리 곁에 오지 않았으나 척키2의 이름이 생각났다구요. 어렵게? 아니요, 어처구니없게도. 그런다고 내가 뭐 나중 혹시 척키2를 만약에 만나게 된다면 뭐 미안해질까? 쫄까? 겁날까? 또는 측은해져? 그래서, 그러니 그냥 확 고백할까? 너를 험담한 인간은 바로 나라고? 내가 바로 (진짜) 다스바이더라고? 그러나 그건 뒷일이다. 발생 가능성도 희박하다. 또 지금은 현재다. 그러니까 미리미리 사서 마음 고생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세상 사는 이치가 그렇더라. 하지만 그런 번민에 마음이 흔들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가 설레설레 흔들었다가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척키2의 본명 그 이름의 이니셜이 JS였다는 것은! 척키2의 이름 이니셜도 JS고, 성+이름의 이니셜도 JS다. 아아, 이럴 수가!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러나 받아들이는 나는 참 당황스럽다. 그 의미심장한 단축 기호가. 텔레비전은 TV, 나이트클럽은 NC, 개구쟁이는 초딩, 그런데 JS? 그게 뭐야, 금시초문이다. 왜 하필 척키2의 이름이... 아, 망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세기에 1번 발생할까 말까 하는 그런 일도 아니고, 괜찮다. 응, 괜찮다고. 이런, 젠장! 이 말이 이제는 내게 유행어가 되어버렸군. 교양도 떠나갔고, 정체도 탈로났고, 무명 작가라고 떳떳이 밝힐 수도 없고, 아따 거 참말로 뒷목잡게 만드는구먼. 그런데 그 확신은 100퍼센트가 아니고 99퍼센트다. 그러나 척키1에게 전화를 걸어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확답을 얻고 싶지는 않다. 실명이라고 공인받아도 얻는 게 없다는 말이다. 손해볼 꺼 없으니 친구에게 물어보라고? 물어보나 마나다. 100퍼센트 맞으니까.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때 그 사건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테니까. 왜 영화가 하나 흥행하면 자꾸 2탄, 3탄이 이어지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척키2의 눈빛 그 표정, 오오 그 이름까지 또렷이 기억난다. 오늘 잠을 설칠지도 모르겠다. 악몽이라도 꾸다 깨면 불켜놓고 헤비메탈을 들으면서 다시 숙면을 청할 것이다. 외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거북하지만 돌이킬 수도 없다. 그녀는 아름다웠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나는 뜻밖에 맞이한 향수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절대 쿨하지 않다. 이런 걸 진퇴양난이라고 하나? 아니다. 그건 너무 길다. 짧게, 꽝이라고 하면 된다. 꽝! 좋네. 괜히 척키2 때문에 그 고유한 브랜드, 독보적이며 전무후무했던 척키에게 1이라는 딱지가 붙어버렸다. 막 간혹 헷갈린다. 척키를 그냥 척키라고 불러야 할지 척키1이라고 불러야 할지를. 항상 그런 식이다. 인생은. 그야 어쨌든 그래서 나는 척키2의 집으로 찾아간 것이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딩동딩동.
   딩딩딩딩딩딩딩딩딩딩딩딩~동!
   그녀는 집에 없었다. 아이 참 어디 간 거야, 하면서 대문의 손잡이를 열어봤다. 오, 그런데! 이럴 수가... 열렸다. 이 일을 어떡하지? 음, 운명의 여신의 가호에 힙입고 유복한 우정의 복무를 빌미로 삼아 나는 용기를 내기로 결정했다.
   나는 척키2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10

   「척키2 집에 있니? 있으면 대답하렴. 듣고도 못들은 척 하기 없이!」
   척키2의 집은 일단 숙녀의 공간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향긋했다. 또 깔끔했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로 눈이 돌아가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이 집에 방문한 목적을 상기했다.
   「척키2야! 야! 자기! 여보! 이 바보야! 미련곰탱아~ 대답해 대답하라고! 어? 당신! 아줌마! ...... 뭐야 이거, 설마 집에 없는 거 아니야?」
   척키2는 집에 없었다. 여기는 척키2의 집이 맞는데, 그런데 없었다. 어쩔 수 없으니까 나는 나갈려고 했다. 그런데 저기 책상 위에 조그만 사진이 보였다. 학창 시절에 친구와 찍은 사진 같았다. 하단 측면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행복한 시절 누구와 함께 라고.
   뭐라고? 행복... 행복이라... 더블 에스? 나는 그 즉시 내가 8살 어린이의 순수한 동심을 안고 불현듯 느닷없이 보게 된 같은 반 여자애인 더블 에스의 뽀얀 엉덩이가 생각났다. 방학하던 날 우리 학교에 놀러온 누나에게 쟤가 자꾸 까불어서 마음에 걸린다고 알려줬던 기억이 났다. 허허허! 왜 당시 더블 에스는 빨간색 고무줄 츄리닝 스타일 하의를 입고 왔을까? 차라리 치마였으면 잠깐 펜티 색깔만 확인하고 말았을 텐데. 하긴 그때 그 친구도 짖꿋긴 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고맙다. 참 좋은 친구였다.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만나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아, 척키2의 집에서 그 이니셜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다시 추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됐다. 더블 에스의 눈부신 맨살 엉덩이를 8살에 봤는데 그 전에 정확히 그것과 대비되는 기억이 있었다. 그때 내가 살던 동네에서 학교에 매일 같이 등교하고, 때로 같이 하교했던 한 동네 친구가 있었다. 엄마들도 셋이서 친했는데, 그 가운데 엄마3의 아들들인 형JH와 동생JH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또 자주 노는 세 친구였다. 나이와 학년이 차례로 1년 터울로 형JH, 나, 동생JH. 그 가운데 동생JH의 환한 엉덩이를 아마 6~7살 쯤에 봤던 것 같다. 그런데 동생JH는 엉덩이에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어쩌다가!
   바로 녀석이 꼬마 때 그 뜨거운 후라이팬인가 냄비에 털썩 앉았다가 생긴 흉터였다. 그 후라이팬이 세계 3대 후라이팬인가는 잘 모른다. 그러나 녀석의 엉덩이는... 어 그만큼 특별했다. 그렇게 남자인 동생JH의 엉덩이를 본 후 여자인 더블 에스의 엉덩이를 본 것이다. 엉덩이 하면 나도 10대 초중반부터 30대 즈음까지 좀비처럼 보이는 악성&만성 피부병으로 오랫동안 고생 꽤나 해놔서 싱그런 뽀얀 엉덩이에 대한 인상이 더더욱 깊은 것 같다. 상큼한 레몬향에 이어 환상의 맛을 선사하는 판나 코나를 비롯한 최고급 호텔에서 만날 수 있는 푸딩과 애들이 좋아하는 젤리의 그 탱글탱글한 탄성, 막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 무엇... 그게 다 좀비 시절을 졸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손등에 대고 향기를 잘 맡아보면 애기 냄새가 약간 나기는 난다. 그 후 일은 또 있었다. 엄마와 나, JH엄마, 형JH, 동생JH 이렇게 다섯 명이서 만화영화를 보러갔을 때 일이다. 저 멀리 하천 건너편에 극장이 보였다. 그런데 가슴이 부풀어 올랐기 때문인지 동생JH가 천변 도로를 먼저 건너갔다. 혼자서 룰루랄라 룰루랄라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면서. 그러다 택시에 끼익~ 부딪혔다. 다행히 가벼운 상처만 입고 영화는 못봤다. 당시 동생JH는 일방로에서 정방향으로 또 그후 11살이던 나는 일방로에서 역주행으로 사고를 겪게 되었다. 그때 보기로 했던 만화영화가 야구 만화영화였다. 
   척키2의 집에서 나는 진짜 나갈려고 했다. 그런데 옷장 앞에 티셔츠가 하나 걸려있었다. 그 티셔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인생은 뻔트다>
   나는 그 옷장을 열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마음은 냅다 뛰쳐 나가고 싶었는데 어떤 강력한 자기장 때문에 옷장 손잡이에 손이 쓰윽 끌려가서 덜컥 붙어버렸다. 그렇게 척키2의 옷장을 열게 됐다. 나는 도둑놈 취급 받기도 싫고 무례를 범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척키2가 걱정되어서 왔는데 어떡하다 옷장 문을 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충 옷의 브랜드만 살짝 구경하고 바로 나가자고 작게 속삭였다. 마지막이고 딱 하나였다.
   그렇게 원피스와 가터벨트와 투피스 정장에 티셔츠와 청바지등 옷가지들을 보다가 옷장 내부에 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슴이 두근두근 심장이 콩닥콩닥, 마음이 울렁울렁 정신이 알쏭달쏭 아주 몹시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몹시 흥분되었다. 뿐만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몹시 기뻤고, 몹시 뭔지 모를 뭔가가 기대됨을 느꼈다. 저 문을 열면 나타날 어떤 현상은 내 호기심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만족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진짜로 환영을 보고 난 후 정말 그런 독백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 환상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어쩐지 그때는 열까 말까 그런 망설임 같은 건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일념뿐이었으니까. 이 문을 열면 그 길을 따라가면 어쩌면 시간을 파는 상점에 도착하게 될까? 잘은 몰라도 최소한 새로운 모험, 잘 하면 요정과의 첫 키스, 밀고 당기는 흥정이 필요하다면 나는 괴물의 어떤 맺힌 한을 대신 풀어주고 녀석은 내 3가지 소원을 들어주고, 적어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라는 속담은 그동안 유독 내게 달리 실감되었다고나 할까, 즉 전에는 내 어느 한계 너머는 아예 보이지 않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아니 아니... 오르지 못하니까 실컷 더 쳐다보며 꿈이라도 실컷 꾸자고 해놓고, 금새 잊어버리며 손쉬운 오락과 물안개 같은 향락과 짧은 시간 효과가 제법 큰 쾌감에게 눈을 돌렸던 듯 했다. 항상 그런 식으로 어려운 일은 포기가 빨랐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당장 오르지 못할 나무를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만 같았다. 더구나 손잡이를 당기느냐 마느냐, 그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지금 저 문을 열지 않는다면 나는 아마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어차피 이 뜻하지 않게 주어진 신비 극장에 입장하지 않고 돌아가 봐야 나는 아마 그런 흔해 빠진 것들만 겪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의 허상에 대해서 뭔가 특별한 글을 쓰다가 포기하기. 명랑한 내일과 밝은 미래에 대한 뻔한 영감에 좌절하기. 열애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다시 에로 비디오를 볼 것이냐, 말 것이냐 사이에서 고민하기. 척키2를 놀리고 앤젤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고서 역으로 내가 그녀의 헛점을 캐내기 위한 장난꾸러기 같은 생활에 결별 선언. 현재의 내 문학 장르에 의표를 찌를 만한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회전목마를 타러 떠나기, 혼자서. 목마에 몰래 숨어서 적진 깊숙이 침투한 인물은 율리시스가 맞나 라면서 인터넷 검색하기. 거의 뭐 이런 게 전부였다. 나는 TV 속으로는 못 들어가지만 지금 이처럼 옷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쩜 필연적인 숙명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은 아마도 불가해한 미스테리를 해결하기쯤? 더불어 나중 애인을 만나면 항상 뻥만 칠 수는 없는 일이지 않는가? 나중 들려줄 환상적인 무용담과 실존하기 어려울 것만 같은 진짜 경험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박쥐의 똥에 옷이 지저분해지든 온몸이 거미줄에 범벅이 되든 어쩌든 지금은 결전만이 살길이었다. 퇴각은 패배주의를 초래할 뿐 선택은 하나였다. 나는 다시 스무살 청춘이 된 것이다. 아직 회춘이란 말을 사용하기는 좀 뭣하니 환생이라고 적당히 거명하자. 그게 좋겠다! 앗~싸, 야~호!
   나는 씽긋 한번 웃고, 윙크 한번 하고, 골 세러모니도 한번, (손가락 딱) 소리내고 나서 과감히 옷장 내부에 있는 비밀 문의 손잡이를 열었다. 그냥, 확, 거칠게!


   11

   여기서부터는 요점만 설명하겠다.
   내부는 길이 하나였다. 나는 그 길만 따라갔다. 썩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니 어느 육중한 철문 앞에 도착했다. 내부의 불빛은 무슨 특수 전원에 의한 반영구적인 불빛 같았다. 이때 문을 여는 것 말고는 다른 보기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나는 문을 열었다. 문은 엄청 무거웠고 빡빡했다. 겨우겨우 열리더니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니라 신음 소리였다. 그리고 저기 보이는 저 침대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척키2와 앤젤리나가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음의 소통과 영혼의 대화와 함께 육신에 귀속하는 그런 행위가 무르익어가는 도중인 듯 했다. 아마 그곳은 앤젤리나의 집인 것 같았다. 거리상 대략 그 정도쯤일 꺼라고 예측했다. 뭐야 그렇다면 내 집 밑으로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인가? 하긴 내 집은 설치하는 방식의 박스형이고 저 친구들은 설계도에 의해 건설한 것이니 음... 그렇다면 한참 옛날에 이미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말인가? 원래 우리 세 명이 사는 공간이 하나의 집인데 옛날에 집주인이 사정이 어려워져서 그 공간을 셋으로 나눠서 지금과 같이 어떻게 어떻게 되었다고도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오 저건... 원래 쟤들이 나를 추종하고 연정을 품어야 하는데 지금 저것들이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이지? 오, 저런 저런 저런! 아뿔사!
   나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설마 전혀 예상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긴가민가 아주 약간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하긴 했는데 그 이상의 확신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뭐 절정으로 가는 길목인가? 나는 그쪽을 살며시 다시 쳐다봤다. 오오, 뭣이지 저건? 위에서 이렇게 어, 그게 그러니까, 저거 혹시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진짜 레슬링 아닌가? 아니야. 아니야? 아니기는! 아닌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애매한 몸동작보다 제일 중요한, 제일 기묘한 점 하나는 이것이었다. 상위에 위치한 분이 아마 앤젤인 것 같은데 앤젤은 아래에 위치한 척키2를 제압하며 압박하고 있었다. 즉 앤젤은 밑을 보고 있어서 나는 앤젤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런데 앤젤의 뒤통수에는 눈이 달려있었다.
   그 순간 앤젤의 뒤통수에 달린 눈동자와 내 시선이 부딪힐까 말까 했던 바로 그 찰나 나는 절묘한 차이로 주저앉아서 그 괴상망측한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 어디 겁나서 계속 쳐다보기나 했겠나!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오던 때는 길이 거의 직선이었는데 돌아가는 길은 무척 꼬불꼬불했다.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 이때 나는 거의 어떤 시간 개념을 상실한 듯 했다. 꽤 오래 걸렸다는 것만 근근히 감지했다. 그렇게 척키2의 집에 있는 옷장의 특수 문을 딱 열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녀석들이 뭔가 중요한 일을 모두 마치고 돌아온 것일까?
   문을 살짝만 열었는데 척키2가 콧노래를 부르며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방법이 없었다. 옷장 문과 옷장 안의 비밀 문을 살며시 닫고 다시 앤젤의 집으로 향했다.


   12

   척키2의 옷장을 통해 들어왔던 미로에서 나는 한 바퀴를 순환한 상태였다. 그래서 흡사 그 길이 출퇴근 길이나 되는 것처럼 나는 다시 앤젤의 집으로 나아갔다. 들어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도착한 지점의 문을 열었더니 그곳은 앤젤의 집이 아니라 우리 집 수영장 바닥의 측면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데, 음,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만약 앤젤이 집에 있었다면 뚝딱 문을 열고 앤젤 앞에 나타날 수는 없었을 테니 어차피 미로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보다야 백번 낫긴 나은 일인데...... 나는 귀신에 홀린 기분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오오,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처음에 척키2의 집에서 옷장 문을 딱 열기 직전까지는 그야말로 꿈과 이상을 충족시킬 것이란 기대감에 기분 만점이었는데 무지개가 살고 있는 미지의 세계는 헛된 상상이란 것을 알게 된 후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첫째, 척키2와 앤젤이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것. 둘째, 앤젤의 뒤통수에 눈이 달렸다는 점. 그런데 그 괴물이 앤젤인가 척키2인가는 확실치 않았다. 뒷모습이 범상치 않은 걸로 봐서는 아마 앤젤일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조금 농후했을 뿐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셋째, 척키2와 앤젤의 집을 잇는 비밀 통로는 간단한 조정 장치에 의해서 길이 바뀐다는 것. 꼭 그것은 철로길과 비슷하게 착착 잇고 닫히고 그렇게 만들어진 듯 했다.
   어쨌든 나는 기를 모두 빼앗긴 듯 탈진하여 온몸에 힘이 빠지고 엄청 피곤했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서 선잠을 청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옷을 입은 채로 들어눕자마자 골아떨어졌던 것이다. 거의 12시간 내내 어쩌면 15시간쯤 잠을 잤을 것이다. 그러다 월요일이 되어 깨어났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가 가물가물했다. 어제의 기억이 통채로 날아가버린 것만 같아서 아침부터 슬퍼졌다. 그 울적한 기분은 달랠 길이 없었다. 유수의 레크레이션 강사랄지 그 어느 고품격 코메디언도 내 기분을 풀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학문을 같이 공부하는 그녀들과의 암묵적인 모임 '다정'의 업무 시간이 임박해서 다시 우리의 아지트로 향했다.
   이제는 내가 뜨내기가 되었고, 그녀들이 이곳에 마치 옛날부터 살았던 터줏대감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들은 자유분방하고 나는 승승장구하다 도박 때문에 엉망인 모습으로 중도하차한 어느 전문가가 된 듯한 안타까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윽고 멀더의 다방에 도착하니 그녀들이 먼저 당도해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창가에 일렬로 위치하여 창밖을 바라보는 의자에 앉아서 두 여인 모두 일을 하고 있었다. 마치 어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하긴 그녀들은 그러겠지. 나만 괜한 비밀을 알아버려서 말할 수도 없고 말하지 않자니 또 애만 타고 속만 끓고 내 심정은 말이 아니었다. 묘한 분위기였다. 물론 나만 그랬다. 이제는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가 썩 영속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란 가녀린 예감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녀들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인생은 기쁘고, 즐거운 주말 소풍을 기다리며 오늘도 모파상을 읽을 것이고, 우린 언제까지라도 젊고 아름다울 것이다, 마치 그런 생각을 견지하고 있는 듯 했다. 앤젤과 척키2는. 소녀들은 향수도 잔뜩 뿌린 듯 했다. 누구한테 잘 보일려고 이리도 꽃단장을 하셨나.
   그녀들과 나는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각자 바쁜 척 일에 매진했다. 나는 카페라떼를 한 잔 가져왔고, 그녀들은 나한테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꼈다. 얼굴은 정면을 바라보며 눈동자만 돌려서 앤젤을 쳐다보았다. 뒤통수에는 고운 머리카락만 있었다. 나는 가방을 들고서 그녀의 뒤로 걷다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가방의 자크가 걸린 척 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뒤통수를 살며시 은근슬쩍 만져봤다. 그녀가 약간 놀란 듯 했으나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분명 저 자리에 눈동자가 있어야 하는데 어디 갔지? 설마 감추고 덧씌우고 그런 장치가 되어 있는 건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혹시 척키2가 범인일지도 모르니 그녀의 뒤통수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앤젤에게 썼던 방법을 똑같이 되풀이할 수는 없으니 그녀에게는 그녀가 좋아하는 찬미와 격의있는 칭찬의 방법을 사용했다. 어머 어쩌고저쩌고, 머릿결이 어쩜 이리도 낭만적일까, 자주 가는 미용실이 있냐 없냐, 너무 깜찍해서 뭇남성들 꽤나 울리겠네 내가 다 걱정이 된다네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척키2의 뒤통수를 스윽 스쳐지나가듯이 만져봤다. 얘의 뒤통수는 앤젤의 뒤통수보다 납작했다. 완전 절벽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가슴은 앤젤보다 척키2가 약간 더 도톰했다. 그곳이야 뭐 측정할 수도 비교할 수도 없으니 속만 탈 뿐이었다. 진짜 그렇다는 뜻이 아니고 아무튼. 뭐 그건 그렇고, 둘 다 뒤통수에 눈이 달려 있지 않았다는 것은 확인했다. 자, 그럼 어떡하지? 어떡한담?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아아아! 답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이 혹시 내게 경계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에서 준비해 간 선물을 그녀들에게 건네줄려고 했다. 내가 준비해간 선물은 그 어떤 유희나 쾌락과 관계된 것이 아닌 바로 동심을 자극하고 낭만을 간지럽혀주는 물건이었다. 잊었던 동경심에게 연락하게 만들고, 다시 한번 선망에 대해서 단짝과 속삭이고 싶도록 동심을 부풀게 만들어서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소품을 미리 구비해 놓았던 것이다. 녀석들을 길들이는 수법은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다. 다만 손이 많이 갈 뿐이고 그녀들을 존중하면 그뿐, 말을 바꾸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태연함에 기반해서 시간에 비례하여 자연스레 터득하게 되는 그런 유들유들함과는 엄연히 다른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니라면 아마 여자를 다룰 줄 아는 기술이라고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 상관없다. 그거나 그거나!
   우리 셋은 창밖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있었는데 이때 역시 그녀들은 내게 가운데 자리를 권했다. 매번 그랬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가방에서 선물을 꺼냈다. 선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오르골과 수정구가 합쳐진 물품. 수정구를 흔들면 오르골의 태엽이 자동으로 감아지고, 수정구를 딱 놔두면 브람스의 자장가가 들리면서 반짝반짝 하트 뿅뿅 빤짝이들이 서서히, 부드럽게 수정구의 하늘에서 가라앉으며 날개 달린 큐피트의 웃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매우 고급스럽고 값비싼 제품이었다. 물론 한정판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게 아니라 비누였다. 그런데 포장지가 원체 예뻐서 그냥 옷을 벗기고 그 나체를 이렇게, 음 저렇게, 막 그렇게 사용할 수는 없을 것만 같은, 그래서는 절대 안될 듯한 심정 때문에 한쪽에 모셔놓고 방향제로 쓰고 싶은 물건이었다. 그녀들에게 선물이라면서 이쁜 짓을 하면 언제라도 선물은 무한정 준비되어 있다면서 나는야 산타라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흉내내며 선물을 건네주었다.
   「와~! 멋지다!」
   「어머 어머 어머! 이야, 와 멋져! 이러니까 우리가 오빠를 좋아한다니까!」
   나는 좋아하는 그녀들을 보며 흐뭇했지만 어떻게 하면 누군가의 뒤통수를 다시 한번 정밀하게 확인해 볼지 그 궁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뾰족한 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대놓고 그녀들의 뒤통수를 벅벅 더듬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어디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서 애무할 수도 없고 상황 참 난감했다. 만일 그처럼 행동했다가는 아마 둘 중 하나의 반응밖에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는 철썩~하며 슬로우모션으로 시간이 느려지며 그윽한 소프라노 아리아를 듣게 되는 일. 즉 시간은 느려졌지만 달콤한 음악은 그대로라는 것. 오, 신비하도다. 한번 해 볼까? 궤적이 빗나가면 코피가 날 수도 있는 일이니 참는 게 낫겠다. 어쩜 이게 더 경이로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또 하나는 뭐 아마도 이런 말을 듣게 되지 않을까?
   「오빠! 우리가 아무리 여자로 안 보여도 그렇지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이건...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야? (조용조용히) 정 원한다면 차라리 쟤 없을 때 하시든가...」
   바로 그렇게!
   그런데 선물이 다인가? 단지 선물 때문에 그녀들이 내게 그 은밀한 속마음의 빗장을 열었을까? 이렇게 셋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앞일을 걱정하지도 무엇을 하며 놀까를 크게 고민하지 않으면서, 나아가 스스럼없이 집에 초대를 하고 놀러가서 냉장고를 내 맘대로 불쑥 열어서 뭘 꺼내먹든 말든 그런 냉장고 권리를 획득하고, 웨이터 법칙이네 뭐네 같은 일들까지 흔쾌히 그와 닮은 장난을 치며 때로는 쾌활하게 이따금 진중하지만 정말 편하게 마음을 나누고 정을 건네는 사이, 그게 다 오직 선물만으로 가능한 것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건 보나마나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닐 것이다. 절대 아니겠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우리 이렇게 친하게 지내요 라며 살뜰한 관계를 드러냈으니까 이제는 식상한 전개 대신 밑줄 긋기랄지 요점 정리나 그 얘기 왜 했냐는 그 방송 왜 만들었냐는 기획 의도를 하나쯤 꺼내놓으라는 말을 어렵싸리 돌려서 저처럼 물어본다고 볼 수 있다. 그걸 못 알아듣고 또 줄거리 위주로 요약하면서 허세에 대한 승수 쌓기로 대화 내용이 돌변하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인기 폭락이다. 허당으로 굳히기 들어가는 일. 곧 서로 통하는 뭔가가 있었다는 그런 말은 다 아는 얘기니까 건너뛰고, 나머지 가운데 딱 하나만 귀뜸하자면 이거다. 그녀들이 살갑게 오빠라는 단어를 애용했다면 나는 무엇보다 이름을 많이 불러줬다는 것. 그냥 가볍게 목적에 최적화된 호칭으로써가 아니라 단 한 번을 불러도 정성스럽게. 다정하게. (우정의) 하트 뿅뿅 눈빛과 함께. 또 새롭게. 고개를 틀어서 저는 당신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다는 몸짓 다음에 이름을 살며시 부른 후 한 박자 쉬기 같은. 그처럼. 누구나 자신의 외모가 조금 불만이라거나 형편이 넉넉치 않다거나 뭔가 마음에 차지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이름만은, 적어도 뒤에 나오는 말이 명령이든 재미없는 보챔이든 뻔한 잡설이든 일단 자기 이름의 발성까지 딱 거기까지 듣는 것을 퍽 불쾌해 하지는 않는 법이다. 설사 자기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개명을 앞두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다. 나는 선물은 가끔이고 돈들지 않는 이름 부르기가 습관이었다.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말이다. 그렇지만 내 청각이 유독 예민해지는 기분이랄지 한쪽 가슴이 막 커져서 짝가슴이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지는 않았다.
   사랑스러운 소녀들. 탐스러운 자태. 낭만적인 눈길. 착하고 고운 살결. 왜 갑자기 장르가 바뀌고 박자가 변할려고 하냐면 잠시 내가 화장실에 갔다오면서 봤드니 글쎄, 앤젤이 노트북에 희곡을 쓰고 있는데 그 신비스러운 탐미적 고유성이 나보다 훨씬 훌륭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뛰어난 그녀의 글쓰기 특징은 그것이었다. 나는 동사 반복이었는데 그녀는 걸핏하면 명사 반복이고 심심하면 동사 3연속 반복이라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얘는 나보다 더 했다. 훨씬 능가했다. 이를테면 무용하다 무용하다 무용하다, 거뜬하다 거뜬하다 거뜬하다, 마음이 녹는다 녹는다 녹는다, 감동 감동 감동,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아,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녀들은 절대,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방심할 수는 없다고 재차 다짐했다.


   13

   다음 날이 되었다. 우리는 오전에 아지트에 모였다. 각자 차를 주문했다. 그녀들을 위해서 내가 준비된 차를 가지러 갔다. 가져온 차를 그녀들에게 건네주면서 나는 기이한 체험을 했다. 아가씨들의 손바닥에 눈이 달려있었던 것이다. 말로만 듣던, 아니 글로만 읽던 아르고스던가 뭔가 바로 그 백안의 신? 아닐 것이다. 아마 잘못 본 허상일 것이다. 착각이겠지. 설마 그럴 리가 있나. 그러나 확인은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손쉽게 심증의 오판을 가릴 수 있으니까.
   나는 척키2와는 악수를 했고, 앤젤은 손금을 봐주었다. 차라리 앤젤에게 다른 방법을 쓸 것을. 말만 엄청 하느라 기가 빠져버렸다. 하지만 그녀들의 손바닥에 눈이 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목적은 달성했다. 차라리 솔직히 말해버릴까? 고백 같은 거? 말하지 않는다고 녀석들이 알아서 내 마음을 헤아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을 알겠는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고 이것은 사연이었다. 시치미를 뗄 때 떼더라도 통사정이나 해보고 뭐를 기다려도 기다릴까? 아니다. 그런 사정과는 거리가 멀다. 한참 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들이 스스로 내 의중을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직감, 믿을 게 못된다. 가령 하루는 둘 다 머리카락을 빡빡 밀고 나타나서 그러는 거다, 봤죠? 뒤통수에 눈 달리지 않은 거! 그런 멜로드라마?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은 발생할 수도 없다. 나도 원치 않고.
   이때부터 나는 두 가지 염려하는 일이 생겼다. 첫째, 내 뒤통수에 눈이 생기면 대체 어떡하냐는 것. 둘째, 환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 척키2의 얼굴은 개의 머리로 보이고, 앤젤은 몸은 사람인데 얼굴은 영락없이 고양이로 보였다. 거리에서 지저귀는 새는 얼굴이 사람이었다. 사과나무에 열린 열매 안에 사는 벌레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몸은 사람인데 얼굴은 제각기 다른 동물 얼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걱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해소되었다. 왜냐하면 내 뒤통수에는 눈이 생기지 않았고, 약간의 환영들은 모두 일시적인 환시이자 오래 가지 않을 간곡한 착각으로 판명났기 때문이다. 에르메스 가방을 샀기 때문도 그녀들과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눠서도 아니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일어날 때 눈을 비비면서 나는 엉뚱한 망상에 빠지지 않았다. 이른 아침 눈부신 햇빛을 맞으며 오늘 하루는 어떤 즐거운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아니라, 눈을 비비면서 내가 지금 뒤통수를 만지고 있나? 그 정도 증상까지는 발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하루 중 가끔 뒤통수를 벅벅 긁적거리면서 내가 지금 눈을 비비고 있나 같은 오해도 발생하지 않았다.
   일단은 최근 발생한 중대 사건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다시 무심하게 날짜만 지나고 있었다.


   14

   그러던 중 왠지 빨간 장미를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수요일이 지나고 목요일이 되었다. 나는 그날 깍쟁이인 것처럼 노란 튤립을 한 송이 사서 멀더의 다방으로 향했다. 튤립꽃 하나면 다 그분이 되시나? 말이 그렇다는 말이다. 가게에는 척키2만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침 앤젤은 부재중이었다. 나는 불현듯 새로운 발상이 떠올랐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어쩐지 척키2의 가방에 지난 일에 대한 비밀을 풀 수 있는 뭔가 핵심적인 단서가 들어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 잘 하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초등학교 다니던 때 내가 직접 겪은 일을 그대로 얘에게 적용해도 썩 무리한 시도는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미리 멀더에게 양해를 구하고 협조를 약속받았다.
   그렇게 우리, 멀더와 나는 감쪽같이 척키2를 속였다. 척키2가 화장실에 간 사이 그녀의 가방을 주방에 숨겼다. 그리고 그녀가 화장실에서 왔을 때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오늘 가방 안 가지고 오지 않았냐고. 그녀는 깜짝 놀랬다. 자기는 가방을 가져왔는데 무슨 소리냐고. 우리는 우겼다. 계속 우겼다. 무표정으로 우겼다. 아니다 넌 가방을 오늘 가져오지 않았다, 저기 봐라 없지 않느냐, 내가 없는 것을 확인했고 멀더도 오늘 너가 여기 출근할 때 빈손으로 왔다고 하더라 라고 하니 그녀는 딱 속아넘어갔다. 그래서 그녀는 집으로 떠났다. 내심 미안했다. 그러나 대범함을 유지했다.
   나는 주방에서 척키2의 가방을 뒤졌다. 아직 무언가 특별한 물증을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이미 마음은 타임머신에 승차한 것이다. 어쩜 그리도 홀딱 속아넘어가시는지. 나는 나중 척키2에게 좀 더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선물도 틈틈히 선사하고. 그러다 나는 척키2의 가방에서 썩 까다롭고 심상치 않은 물건을 하나 발견했다. 아하~ 바로 얘였구나! 나는 손가락을 딱 하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눈꺼풀을 뒤집으면서 인상을 팍 쓰고 고개를 살살 끄덕거렸다. 차마 믿기지 않은 일이지만 또 무작정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발견한 물품은 바로 수면용 안대였다. 안대? 그렇다 안대. 그냥 안대가 아니라 완전 정밀하게 진짜 사람의 눈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그림이 그려진 수면용 안대. 설마 내가 본 것이 이것이란 말인가? 이럴 수가! 그렇다면 그건 모두 사실이고? 아닌데... 내가 봤을 때 그녀들은 결코 동성애자와는 거리가 먼데... 이거 정말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척키2가 찻집으로 돌아왔다. 가방이 집에도 또 차에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 봤다고 했다. 고장난 의자를 치우느라 가방을 옆으로 옮겨놓은 걸 깜박했다고 하면서 내내 미안하다고 다독여주었다. 척키2의 귀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했다. 척키2는 괜찮다고 했다. 안색은 괜찮지 않은 듯 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자기 일에 몰두했고 앤젤을 기다렸다. 그날 앤젤은 다방에 오지 않았다.
   나는 뭔가 억울했다. 울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것을 글로 써서도 안될 것 같았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어쩌긴 뭘 어쩌나, 그냥 잊어야지. 그래서 나는 어중간하게 넘어가기는 여간 개운하지 않아서 무언가 기념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딱 그걸로 그 이상한 일은 없었던 일로 퉁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다음 날 아지트에 케익을 두 개 사들고 갔다. 하나는 척키2의 얼굴에, 하나는 앤젤의 얼굴에 팍 키스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러고 나서 그녀들에게는 내 방식의 행위 예술이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들이 아지트에 당도했다. 그러나 나는 차마 계획했던 일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작전 실패였다. 완전 꽝된 거다. 초반 기세만 훌륭했고 작전만 뛰어났다. 그게 다였다. 기분만 더 안 좋아졌다. 분위기 엉망이었다. 둘 다 열심히 글을 쓰고 차를 마시고 매우 바쁜 것 같았다. 나만 글도 안 써졌고, 더더욱 침울해져만 갔다. 나는 딱 그만큼 착했고, 딱 그만큼 소심했고, 딱 그만큼 새가슴이었다. 매정하지 않은 동시에 용기도 뭣도 없었다.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 동안! 이제 진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된 것일까? 무슨! 그보다는 아줌마, 아니 할머니가 낫겄다. 아흐흐! 나는 자꾸 내가 혹시 바보는 아닌가 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그래서 분위기는 점점 더 착 가라앉아 저조해지기만 했다. 그러므로 나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뭐가 좋을까? 그래, 여행이 좋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당장 어정쩡한 그 <다정>이라는 동인에서 잠시 빠져나와 떠나기로 결심했다. 목적지는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자유가 그리웠던 것이다. 그래야만 에너지를 충전하고 나중 환상적인 허구를 창안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나는 색다른 귀여움을 찾고 싶었고 신선한 풍경을 보고 싶었다. 새로운 장소에 가면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따라할 것도 생기고, 흉내내고 싶은 구경거리도 많을 거라고 예상했다. 내가 여행을 갔다 왔을 때 앤젤의 귀에 눈이 달렸든 척키2의 젖꼭지에 귀가 달렸든 개의치 않겠다. 그래봐야 뭔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그건 걔들 인생이다. 내게는 내 인생만 해도 벅차다. 엄밀히 따져보면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사실화일 뿐이다. 대세는 우선은 극사실주의다. 드디여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상한 궤변 때문에. 어쩌면 다 우리 모임의 이름이 잘못됐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다정? 냉정한 그녀들. 흥! 우리의 모임도 그녀들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는 아니고. 그렇게 여행을 다녀온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동인 '다정'에서 임의 탈퇴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내가 아마 잠정적인 휴가를 원했었나 보다. 뭘 확 때려치울 수는 없고 사표를 쓸 직장도, 목에 핏대를 세우며 다같이 따지고 외칩시다 하며 팀장 앞으로~ 외친 다음 주위를 둘러봤을 때 당면해야 할 생소한 얼굴들이 내 옆에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떤 은근한 변화를 꾀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아마 그 모든 것이 그로 인하여! 마침내 나는 행복의 비밀을 알아냈고, 창작의 비결을 발굴했으며, 새로운 인생의 희망을 찾아냈다. 내가 서툴렀기 때문에 헛것을 봤을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그녀 가운데 한명의 뒤통수에 눈이 달렸더래도 뭐 괜찮고, 달리지 않았으면 정상인 것이다. 아무 것도 문제될 건 없었다. 척키2는 지성보다 다변에 가까웠고, 앤젤은 허영보다 허당에, 우리의 동인 그것의 낭만적인 이름인 다정은 놀이에 다름 아니었다고 보는 자세가 필요했다. 여행을 갔다 와서 모임을 탈퇴할지 말지는 그때가서 정하면 된다. 마음이 바뀌면 출장쯤으로 둘러대기로 하자. 단, 돌아오면서 그녀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공평하게 선사하기로 했다. 똑같은 여성잡지2를 두 권 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이 마음에 들어하는가 들어하지 않는가는 신경쓰기 싫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들에게 호혜주의를 요구할 테니까. 언제까지 받기만 할테냐면서.
   진짜 그랬을까, 안 그랬을까? 이 말은 과거형이다. 저 일은 놀라운 신세계든 썩은 미소든 그야 어쨌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 시점이다. 그래서 그것은 큰소리고, 때문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언장담이자 작은 애원 같은 거다. 따라서 그것은 그때 가서 보면 된다. 멍석이 깔려지면 별안간 더 맹렬히 기존의 습관을 유지할지, 돌변한 모습을 선보일지, 그도 아니면 새로운 태도로 그녀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지는. 왜냐하면 내가 그녀들과 관계를 맺는 우정의 근원은 내가 쟤를 어떻게 한번 해봐버려야겠다, 나는 갈대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쟤를 어떻게 한번 눌러서 내 호승심을 만족시키고, 꺾고 접는 내 차례를 생략하겠다는 <누가 승자인가, 넌 뭘 해도 마음에 안 들어, 난 (최고인) 너가 싫어 (최고가 아닌) 너는 뭐 그나마 봐준다, 내가 최고야>라는 경쟁의 원리와는 다른 양상을 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절을 차려도 가식이고 속마음을 털어놔도 응큼하네 어쩌네 라는 이론이 만약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면 그것은 곧 상업적 논리와 상반된다. 안 그럴 것 같은데 상충된다. 하나 주고 하나 받고, 뭔가 찜찜하다 나중 아무래도 불리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형님 먼저, 라는 (소규모?) 자본의 논리. 내가 흥하면 복권에 당첨된 거고, 내가 망하면 이놈의 세상이란... 그처럼 지킬 박사도 됐다가 하이드도 됐다가, 천사였다가 악마는 아닐까 오해하게 만들었다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우정이라고 불러도 괜찮은가 라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모래성 그 허상을 쌓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리 모임 다정은. 척키2야 너는 롤러코스터를 타거라, 그리고 앤젤 너는 시작 단추를 눌러야 하느니라, 나는 그런 구상을 하면서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그 이름이 불분명한 어떤 증후군 같은 기쁨에 심취했다기 보다는 같이 표를 끊고 함께 회전목마를 타고자 했던 의도 그대로 실천해왔기 때문이다. 그게 다다. 설령 레이싱 게임을 하며 앞에 선풍기를 틀어놓든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NC에 가도 별거 없다는 장황한 열변만 늘어놓았을 지라도. 일단은 나는 이 친구들에게 뭔가를 기대하게 만들었고, 염원하는 꿈을 드높였으며, 선망을 품는 것에 대한 막연한 죄의식을 탈피하게 만들어주고자 노력...했다? 정말? 진짜로? 아니다. 노력하지 않았다. 말은 대체로 그녀들이 많이 했다. 주제도 그녀들이 주도했다. 행동도 거의 그녀들이 다했다. 나는 끄덕거리기만 했다. 나는 동조하기만 했다. 나는 거의 끌려다녔다. 모든 소풍은 그녀들이 준비했고, 그녀들이 성대한 파티를 열었고, 나는 숟가락만 얹었다. '나는'에 해당하는 화법을 다른 자리에서 '나도'로 바꾼 것일 뿐, 비밀은 없었다.
   그렇다면 뭔가 하나 의아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것은 무엇이냐면 '나는'이 '나도'를 어떻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요리할까 라는 것! 방금 놔왔지 않은가? 첫째, 뭔가를 기대하게 만든다. 다름 아닌 상대의 예감을 드높여주는 일. 뭐뭐 할까, 어디 갈까, 저거 살까, 나중 언제가 좋을까... 등등등, 동경심과 작별하기 싫은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웅변술은 한도 끝도 없다. 그러나 규칙은 대충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밑도 끝도 없을지라도 시작도 말 끝도 말이라는 것. 보너스 하나 추가하자면 아니 하나로는 부족하고 대략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 - 어디 - 무엇' 같은 지칭대명사를 즐겨 사용하기. 여자들처럼 말의 양으로 요점을 부풀리기 보다는 헤드라인을 변형시켜서 뭔가 그 다음이 있을 것만 같은, 무지개 너머로 가보고 싶게 만드는 복합관계대명사와 복합관계형용사와 복합관계 부사를 적절히 분배하여 틈틈히 제시하기. 어떤 때는 결론을 맨 앞에, 때에 따라 다른 때는 결론을 맨 뒤에 배치하기. 그리고 언제 어느 때 그래야 하는가는 알려주지 않기. 몸짓과 함께, 설명하는 중간 중간 잘 기억나게끔 헤드라인을 듬성듬성 반복하기. 때때로 물음표로써 앞일을 추측하게 만들어 실상에 비해 심상을 키우고, 관계부사의 남용과 지시 형용사의 남발등등 그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보통 여자들이 좋아하는 장르를 파고들면 게임 끝나는 거다. 그리고 둘째, 몰라도 아는 것처럼 달변으로 그녀의 청각과 동심을 꾸준히 자극하며 자꾸자꾸 헷갈리게 만들어서 쇠뇌시킬 것. 셋째, 셋째는 뭔 셋째, 포기하든가 숟가락 빼든가 잔치는 끝났던가 즉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다음 행동을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음...... 잠깐만, 쉿! ...... 뭣이라고? 여자를 꼬시는 방법? 아니 그녀의 정신을 긴장시키며 설레게 만드는 재담의 원리? OK! 사랑과 우정 그 두 가지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푼 다음 넘어가자.
   첫째, <사랑은 뭐다>를 알려면 여자가 어딘가에 집중하고 무언가에 넘어가는 청각의 원리와 사고 방식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별거 없다. 줄거리와 에필로그와 몇 년 뭐뭐 같은 전기적인 타인의 일을 내 약력인 것처럼 들려주면 된다. 곧, 궁금해 하고 알고 싶게 만들기. 몸은 여기 남아도 마음은 신비의 세계로 떠나보내기. 보통은 리모콘으로 가능하고, 특별한 날에는 꽃이나 선물등이 효과적임. 그런 후 최면이 완전히 걸린 후 이름만 부르면 (딱)! 처음 만난 날 손을 잡고, 두 번째 봤을 때 키스하고, 셋째 날 미래를 약속하는 비법. 때에 따라 축약은 가능하나 일반적으로 남녀의 우정은 퍽 곤혹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짝궁둥이인 그녀를 보며 너처럼 환상적인 몸매의 소유자는 태어나서 처음 본다고, 두번 다시 못볼 것이라며 보기도 싫다느니 어쩐다는둥 뭐라나! 시간의 압축, 제아무리 심심한 인생도 긴긴 삶에서 몇몇 기억에 남는 중대사를 추려보면 그 또한 한 편의 영화다. 바로 그것을 짧은 말로 변환시키는 행위, (딱)! 풀었다 감았다 풀었다 감았다,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여자를 애달프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하기보다는 신비한 재주라고나 할까! 여자들이 그리 썩 달가워하지 않는 취미에 괜히 남자들이 열중하는 것이 아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일 뿐. 던지고 치고 잡고 때리고, 그래서~, 넣고 넘기고 제치고 갈채를 받으며 트로피를 거머쥐며 인기를 얻는 일. 말은 그런다. 말은. 사랑은 장기전이다, 몰래한 사랑이 아름답다고, 어디서 주워듣고 읽고 가끔 생각한 건 있어 가지고. 그러나 행동은 다르다. 행동은. 인생 한 방이다, 남자는 폼이다, 가는 여자 붙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마다하지 않음으로! 남자는 친구와 사랑을 논하지 않는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 그러면 매를 벌고 불화를 부르는 셈이며 결코 남자답지 않은 일이다. 비록 꼴찌일지라도 사내들 수다의 화제 그 순위에 오른 역사가 없다 그것은. 왜냐고? 왜냐하면 남자는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사랑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사랑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남자에게 사랑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인데 우리 오빠는 그렇지 않다고?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 그건 남자가 아니다. 본심이 아니다. 그거 다 빈말이다. 멍멍, 거짓말이다. 컹컹, 완벽한 뻥이란 말이다. 적어도 내 사랑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외에는! 그러나 낭만을 알고 사랑을 노래하며 당신을 미지의 공간으로 데려다줄 멋진 남자, 있긴 있다. 그분을 만나는 과정, 그것을 인생이라고 한다. 그런 왕자님을 평생 못 만날 수도 있다. 당신을 만났다가 향후 실망하는 건 시간 문제일 수도 있다. 아니면 만난 셈 치자고 스스로 달래는 방법도 있다. 사랑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그 진리를 다 늙어서 깨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하나 남은 신뢰는 사랑의 이상주의자, 그것도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긴 있다는 것. 이래서 사랑은 뭐다를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남자와 아빠란 단어는 명백히 그 뜻과 역할과 말하는 목적이 다르다. 완전한 인간은 없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할 수 있다. 최소한 다이아몬드님께서 그것의 상징이라는 제역할을 마다하시지는 않는 것이다. 뭐랄까, 사랑은 학문과 상업을 양쪽에 끼고서 좋아하는 상남자를 닮았다고나 할까!
   자, 둘째 <우정은 뭐다>로 넘어왔다. 우정, 우정은 두 가지로 나뉜다. 남자의 우정과 여자의 우정으로. 여자의 우정은 모르겠고, 달리 말하자면 관심없다 라고 말해야 한다더라. 그럼 남자의 우정은 무엇일까? 단어의 정의는 사전이 안내할 일이고 우리는 자기의 친구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러면 쉽다. 친구? 그래, 친구! 그 역시 둘 중 하나다. 질투의 유발과 시기의 실행으로. 재수없음과 위선이나 기만으로. 말을 바꾸면 자존감과 자존심으로. 요거 요거 매우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자존감과 자존심의 차이라는 거! '사고 싶다─갖고 싶다─하고 싶다─가고 싶다─닮고 싶다─되고 싶다─뺏고 싶다'가 있으면 합리화와 허세와 구라와 회의와 허무와 냉소도 존재하는 법. 부러워하는 의식이 자연스럽고 챙피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처럼 행동하는 것이 하나라면, 나머지 하나는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 그 다른 하나는 끝까지 내가 최고고, 죽어도 나는 최선이며, 굽힐 수도 없고, 겸손은 어려우며, 인정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정말 힘들어하는 (내) 본성이 밉고 (내) 본능이 싫은 강한 남자 콤플렉스다. 강한 남자 콤플렉스? 그거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최고' 콤플렉스라고! 저 두 가지로 구분되는 그들이 만나서 사과나무를 키우는 것일까? 그건 개인적으로 각자 탐구할 일이고, 촛점을 돌려본다. 왜 부러워하면 수치스러운 일인가로. 아니, 그러지 않은가? 부러워하는 게 죄인가? 아니다. 부러워하는 게 비굴한 행위인가? 아니다. 그런데 왜 부러워하는 것을 치욕까지는 아니더라도 떳떳하지 못하고 뭔가 싫고 기분 나쁘며 짜증나고 창피한 짓으로 인식한다는 것인가? 정신병은 아니지만 정상은 아닌 듯 하다. 그걸로만 보면. 무언가를 부러워하거나 내 치욕을 표출하는 것이 왜 그렇게 싫은 것일까? 촛점을 돌려본다. 그 인간이 뭐가 좋다고 대체 뭐가 멋지다고, 완전 썰렁하기만 한데 그게 뭐가 재밌다고 그 덜떨어진 멍청이한테 열광하는지로. 촛점을 돌려본다. 그 녀석이 대관절 왜, 어째서 아무런 이유없이 싫은지로! ...휴~, 어느 현상을 너무 정확하게, 적확하게 꼬집어서 해석해도 쌍방이 불편하고 분위기 참 불미스러워질 수도 있지만 어차피 말 나온 김에 모두 털어놓는 게 나을 듯 하다. 그래야 왜 그럴까 왜지 왜지 어째서 어째서 하다가 아하 그랬구나 그 때문에 그렇구나, 에 약간 더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계단 올라가야 하니까!... 남자가 우정의 상대에게 자기 여자친구를 소개시켜주면 알게 된다. 그냥 아는 동생만 선보여줘도 알게 된다. 우정에 가까운 친구 녀석이 데려온 애가 가슴이 크네? 친구는 딱 벌레 씹은 표정이 된다. 녀석과 웃으며 대화하는 그녀가 예쁘네? 짜증 제대로 나고 얼굴 막 일그러진다. 친구의 그녀가 아름답고 착하고 젊고 친구의 차가 번쩍인다? 여자들은 죄다 허영 덩어리고 세상은 말세다. 객관성은 상실된다. 남자1의 애인이 남자2를 치켜세우며 뭘 좀 아는 남자라고 칭찬하면 남자3은 그야말로 얼굴 망가진다. 아뿔사! 아이고 무서워라, 가 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남자3은 남자2를 열심히 깎아내린다. 무던히도! 이 1, 2, 3에서 애인을 술집 마담으로 대체했을 때 남자2가 자신의 치욕을 스스로 밝히면 남자3은 완전 좋아한다, 남자들끼리의 금기 사항인 여자가 끼었을 때 내 과오나 허물을 내가 아닌 남이 밝혀서는 안 된다는 점. 혼자 알아서 후순위로 밀려나겠다는데 당연히 고맙나 보지 뭐! 권위적인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지 않아도 훤한 이치다. 또 내가 최고가 아니거나 썩 내켜하지 않는 놀이만 하게 되면 표정 관리 안되고 울화통이 터진다. 참다 참다 폭발한다. 심하면 절교는 당연지사! 친하고 좋아한다고 할지라도 살다 보면 어차피 친교는 대부분 단절된다. 너무 냉정해 보이는 것일까? 과연 그럴까? 그럼, 살면서 바쁠 우리는 나중 언제 다시 또 보게 될까 라는 인정보다는 내가 최고라는 사욕의 순서가 앞서는 진실은 온정일까? 글쎄요! 그런 우정은 왠지 좀 불안해 보인다. 하지만 불안불안해도 또 그 나름대로 근근히 명맥은 이어가게 마련이다. 주변을 돌아보거나 뒤를 돌아봤을 때 그런 일을 마주하게 된다. 묘하게 두 친구가 한 여자를 좋아하는 일, 드물게 발생한다. 이때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당신은 무엇을 택할 텐가? 말을 바꿔도 된다. 가난한 사랑과 적당한 애정이나 부유한 조건에서 무엇을 고를 것이냐로. 사람들은 말한다. 흔히들 얘기한다. 사랑을 택해야 한다고. 철지난 연애소설은 속삭인다. 사랑에 인생을 걸라고. 왜냐하면 사랑을 놓치면 나중 후회하고 우정은 상심할지언정 나중 회복되기 마련이니까 라고. 또 반대 의견도 있다. 우정을 고르라고. 사랑 그거 오래 가지 않는다고, 더 멋진 사랑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건 모두 하나의 견해일 뿐이다. 손아랫사람에게 그건 뭐다며 멋진 말을 하고 싶을 때, 소셜 네트워크에 사진과 함께 남기는 짧은 단상, 바에서 외로운 손님이 명-바텐더와 독대하며 나눌 얘기들. 그것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느냐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뭐가 옳은 결정이냐 라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내가 그 모든 결정을 온전히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큰 흐름은 거의 정해져 있다. 두 친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자기를 쥐락펴락해도 싫어하지 않는 오히려 그 뭔가를 반기는, 심한(?) 말로는 무게와 가치를 견주는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한 게임이다, 그것은. 끝이 아름답기에 쉽지 않을 수도 있는 일. 만약 사랑을 택한다 할지라도 나중 어쩔 수 없이 대개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 그 사랑이 길이길이 유지됨과 동시에 습관적으로 외롭다고 하거나 사랑은 없다라는 사랑관과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면 제3의 길을 가라는 엄한 이론을 퍼트림. 둘째, 사랑의 결별 또는 파혼 혹은 이혼! 더불어 셋째도 필요하겠다. 사랑도 우정도 모두 남았으면 친구에게 남편 흉 보기! 사후 확신 편향이네 뒷북이네 과거네 뭐라 하더라도 사랑 그거 절대 쉽지 않다. 그건 정말 바보들이나 하는 짓일 것이다. 그러면서 사랑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며 추억의 드라마 명대사를 인용하고, 어제는 단테를 읽고 오늘은 마크 로스코 전시회에 가며 내일은 바람을 피우고, 평소에는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노래를 부른다. 일평생 동안! 다 바보들이다. 오오, 이런 이런 이런! 우정은 뭐다를 논하다가 다시 사랑은 뭐다로 돌아가버렸네. 아아, 대체 사랑이 뭐길래...! 우정에 대한 얘기를 마저 마무리지어야겠다. 그렇다. 친구도 서로 안 맞으면 안 만나게 되고, 아무리 절친해도 이런 저런 이유로 자주 보기도 쉽지 않다. 더 중요한 점은 좋든 싫든 대개는 교류가 끊긴다는 것. 법정대리인이자 1촌 관계라는 사랑도 이혼으로 끝나기도 하고 불의의 사고로 사별하는 사례도 있는 게 다름 아닌 인간사다. 친구, 짜증나면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을 수도 있다. 그게 둘 다에게 이익이다. 속 편하게. 쌍방 과실이 아닌 상호 이득인 것이다. 단정하게. 내가 최고인데 녀석이 풀하우스나 포커패를 먼저 공개하면 그냥 아무 까닭없이 싫고 미워지며, (원래 싫었으면 그건 말 다한 것임), 내 패는 보여주기도 추궁받기를 원하지도 추리를 환호하는 것마저 내켜하지 않게 된다. 결국은 원페어로 그 모두를 다 이겨버린다고 규칙을 혼자 새로 정한다. 여자들이 비교적 남자보다 괜히 친구로 인정하는 문턱이 높은 게 아니다. 여자들이 비교적 남자보다 괜히 친구의 숫자가 적은 것이 아니다. 여자들이 비교적 남자보다 괜히 단짝과 친구를 자주 바꾸는 게 아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물론 추측이고 섣부른 일반화라는 것 인정함) 그에 비해 남자의 친구 관계는 상당히 이상하다. 꽤나 이상하다. 그래야 정상이고, 친한 관계가 돈독해지며, 우정은 한껏 공고해진다. 남자의 우정에서 둘 중 하나의 특징은 이렇다. 표어를 하나 선정하면 이해가 한결 수월하다. 그것은 이렇다. 마초의 관점, 그것의 기본 문제는 이 때문에 생긴다. <내가 최고다. 그런데 (뭐가) 부럽다> 내가 최고인데 부럽다고?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모순이고 딜레마다. 내가 최고니까 부럽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런데, 나는 최고도 아니고 부럽지도 않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최고가 아닌데 부럽다거나, 최고인데 부럽지 않다라 그건 말이 안 된다. 전자는 허탈이고 후자는 불합리이자 허세다. 묻지마, 는 열외로 치자. 넷 중 하나만 1등이지 공동 1등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 그건 인정 못할 이론일 뿐 실제로 허용도 적용도 되지 않는다. 남자의 우정이라는 그 애매한 분야에서 보통 둘 중 한 명에게 적용되는 법칙이 이런 모습을 띄고 있다. 그래서 그런 우정은 미안해서라도 접어주고 져줘야 유지된다. 남자 중의 남자가 아닌 사람들끼리의 어찌보면 편협한 우정이다 그것은. 그래도 유지는 된다. 끼리끼리 만나니까! 그러나 그래 봐야 남자 중의 남자도 50보 100보 차이 밖에 없다.
   때로는, 나는 그 방식이 싫다 라는 나머지 한 명이나 어떤 4차원 친구가 대표적인 마초들과 지속적으로, 범수평적으로 친한 경우도 있다. 그 또한 둘로 나뉜다. 접고 꺾어서 대충 적응하는 부류와 끝까지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쪽으로. 전자와 후자 사이를 오락가락하다가 불씨가 커진다? 그러면 마이크 타이슨 사건이 발생한다. 그래서 다시 후자는 전자로 살아야 한다고 자기 최면을 건다. 자기만 참으면 다 좋다고, 문제될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실제로 그러니까. 그러다 어느 날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왜? 항상 자기만 손해보는 것 같거든. 그래서 접고 꺾는 걸 이따금 지나쳐버린다. 즉흥적으로. 일행 중 여자가 끼어 있다면 웃으면서 말린다. 친구니까 자상한 오빠가 참고 견디며 받아주라고 다독일 것이다. 하지만 오빠라 부르는 상냥한 목소리가 없으면 그 결과는 좌충우돌이다. 그러다 어느 날 똑같이 응수하잖아, 거울처럼? 원래 그네들 방식대로. 음, 그러면 갑자기 평소와 다른 상대를 보며 그분들은 붕 뜬다. 자기들과 똑같은 방식인데도 뭔가 기분이 나쁜 것이다. 온갖 권태와 싫증과 불만족에 앞서 알고 보니 친구는 돌아이였던 것이다. (완전) 똘아이! 참고로 숙녀를 극찬하면 그녀의 기분은 푸르른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반면에 상남자를 당황하게 만들면 그분의 마음도 흥분하며 저 하늘의 흰구름이 혹시 솜사탕은 아닐까 하며 푸르른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그러나 똑같은 설렘이고 똑같은 '새 신을 신고서 펄쩍 뛰어보자' 인데 그 성격은 확연히 다르다. 하나는 콧노래와 흥취를 하나는 레이저와 화염을. 자기가 최고라서가 아니라 괴짜 친구 때문에 퍽 거슬려서 공중 부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붕 뜨고 벙 찐다. 짜증난다. 발동 걸린다. 수증기가 끓어오른다. 부글부글 부글부글! 원하는 진공청소기는 작동이 안되며 말도 안 듣고, 엄한 커피포트만 바쁘고 또 바쁜 것이다. 녀석들은 친구가 아니라 다 골목대장 놀이에서 탈피하지 못한 동네 꼬마 녀석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해는 된다. 내가 최고다, 그런데 부럽지 않다? 그 모순을 일생 품고 사는데 참 피곤할 수 밖에! 그 마음을 누가 누가 달래줄까, 아마도 촌년? 어쩌면! 그것도 운이 좋았을 때 얘기. 아니면 던지고 치고 잡고 때리고, 술집으로 떠나거나 운동장으로 무도장으로 게임장으로 나설 수 밖에! 말 나온 김에 모순을 하나 더 밝히자. 당당히 공개해서 해법을 모색하자. 예술 세계에서는 철들지 마시라고 한다. 철들면 안된다나 뭐라나. 그런데 철들지 않으면 저처럼 장난이긴 하지만 조롱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어이쿠~ 조심조심하며 철이 들었어. 그랬더니 아 글쎄 재미가 없네! 손가락 딱─골 세러모니, 검지를 하늘로 향하여 살랑살랑─윙크 깜박깜박! 나는 과연 성격이 좋은가, 내 인생이 혹시 불행한 건 아닌가 살살 어~ 슬슬 의심이 들기 시작할 꺼야. 그러니까 다시, 누가 나를 비꼬든가 말던가 난 내 갈 길을 가겠다며 철없는 행동을 서슴치 않게 돼. 그러면 어떻게 된다?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나, 사람들이 슬슬 날 피하기 시작하더란 말씀. 바꾸어 말하면 철들지 않았는데 난 여태 삼류이라는 거! 상대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가난하다는 거! 그러면 다시 철들어? 재미없을 텐데... 세상도 모르겠고 인생도 까다롭기만 하나 보네요 그려!
   남자의 우정이란 (대체로 절반쯤은) 바로 이런 것이다. 꺾을 줄 아는 기교를 익히는데만도 한 세월이 걸린다. 부드러움과 섬세함을 알게 되고 인생의 비밀을 마침내 터득한 바로 그 순간, 환갑 잔치를 코앞에 두게 된다. 이런 우정 어떤가요? 어떠긴 뭘 어때! 더는 묻지 맙시다. 호기심은 각자 해결하자구요. 차라리 그 대상을 바꾸는 게 어떨까? 이를테면 육체적 사랑으로! 뭐라고? 이런, 젠장! <사랑은 뭐다>도 엉터리고, <우정은 뭐다>까지 엉망으로 판명됐다. 다만 우리들 동인 '다정'의 지란지교와 그 끈끈한 교분이 어떻게 확립되었나는 겨우 설명되었으니 그것만 해도 뭐 다행인 것으로 만족하고, 이제 그만 나는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하겠다.
   나는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여행을 갔다 왔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심심해졌다.
   다만 '다정'은 탈퇴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우정이 더 돈독해지지도 않았다.
   산책하고, 일하고, 차 마시고, 사진 찍고, 가끔 선물을 교환하고, 괜찮은 전시회가 있는지 정보를 나눴다. 꽃을 사고 화분을 가꿨다. 나는 우리집 수영장을 내줬고, 녀석들은 나를 자기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옛것이 낫다? 그래서 소박한 삶이 뭐가 나쁘냐고? 나쁘지 않다. 다만 척키2가 우리 동네에 정착한 후 앤젤이 이곳에 사뿐히 터를 잡았든 어쨌든 뭔가 어떤 감상할 작품과 새로움을 안겨줄 영감도 함께 기쁜 우리네 인생에 동참하기를 바랄 뿐이다. 많은 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다 나는 쇼핑 중독에 빠져서 잠시 휘청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후 블로그에 열중했고, 척키2는 SF 소설을 하나 쓰고 있으며, 앤젤은 본격적으로 미스테리 만화영화를 구상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네 삶은 변화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일단 이만 하면 큰 불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안 그런가? 안 그렇다. 과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미완성은 뭔가 찜찜하다거나 허전하다. 결국 언젠가 꼭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사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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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89

from 소설 2017. 1. 3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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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번뜩이는 대사,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줄거리, 빼어난 미모의 여주인공, 엉뚱한 웃음, 기발한 반전, 신기한 새로움 등등. 그런 시나리오를 쓰고 있니?」
   「K. 여자는 말이야, 두 가지로 나뉘지. 돈 많은 남자에게 넘어가는 부류와 잘생긴 남자에게 빠지는 쪽으로. 방금 네가 말한 각본은 그 둘을 모두 섭렵해야 가능한 일인가 봐. 그리고 아마 나는 그 두 가지에서 어느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시나리오가 잘 안 써지나 봐.」
   「예술을 사랑에 빗대어 설명하는 거니? 돈 많은 남자는 예쁜 여자와 비슷하다, 뭐 이런 거야? 그래도 비범한 게 더 멋지지 않니? 평범한 것도 좋지만 꺾이고 변화하며 굴곡이 있는 거 말이야. 개구리로 변신한 왕자가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혹시 그게 너는 아닐까?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잖니.」
   「난 원래 두꺼비인가 봐. 만인에게 사랑 받을 작품을 쓸려고 하는데, 그걸 원한다는 것은 문제될 게 없는데 특급 성공이 실현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가 봐. 그동안 연기했던 그 수많은 배역에 대한 몰입과 경험이 그 역할을 창조해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인 것 같아.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일단 촌극이라도 써서 그걸 걸작으로 변모시키는 방법도 안 통하니? 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놀라운 착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꼭 영감론 그런 걸 따르겠다, 뭐 그런 말은 아니지만 그 왜 있잖아, 첫눈에 반한다는 말. 보고 듣는 드라마에 나오거나 보며 읽는 소설에 나오거나. 그 화자가 아니라 그 말을 실제 듣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남자들은 그 기분을 짐작이나 할까? 여자가 남자에게 첫눈에 반했다고는 잘 하지 않잖아! 여자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남자가 있는 자리에서는 아니고 여자만 있는 사석에서는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아, 첫눈에 반했다는 둥 그대를 처음 본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는 둥 그런 말은 다 시인과 바람둥이가 무책임하게 발설한 거짓말이라고 봐. 모두 드라마에 나오는 뻥이고, 로맨티스트가 특별한 경우에 써먹는 은근한 기술 같은 건 아니란 말이지. 왜냐하면 순진한 시골 청년을 또는 순박한 아낙네를 어느 화려한 사교계나 신나는 파티가 한창인 호화 펜트하우스에 데려다 놓는다면 첫눈에 반할 상대는 하루에 12번도 더 등장할 테니까. 어디 12번이 문제겠어? 안 그래? 그렇지. 그냥 눈 돌아가는 거지, 속으로 환희의 낙원이라고 느낄 꺼야. 곧 그 말은,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그 뒤에 생략된 상업적 진실과 냉엄한 예상 결과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야. 그건 무엇이냐,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듣게 될 고귀한 여인이, 첫눈에 빠져버렸다는 고백과 찬사를 선사받게 될 아리따운 숙녀가 말이야, 첫눈에 반한 행위의 당사자와 맺어질 가능성이 있냐, 없냐, 농후하냐, 바로 그 차이지. 
   어여쁜 숙녀가 있어, 홀딱 반했네 그래서 나랑 어떻게, 어떻게 미녀와 야수가 맺어지는 것처럼 내게도 기적이? 
   지식의 왕국과 지성의 전당을 통채로 섭렵하다가 누구는 우상, 무엇은 신념, 농담이라면 단연 누구에 예술적 허풍의 지존은 그분이며 모범은 페스트라네 나도 다 알아 다 안다구, 그러나 나는 그냥 수다쟁이요 그런데 나는 만년 삼류 인생, 비약하면 너는 최고가 아니거나 내가 최고인데 여태 난 아직도 이 모양 이 꼴? 
   멋진 자동차를 꿈꿔, 어쩜 고급스러워 나랑 딱 어울려 하지만 막 옆에서 이래, 그게 늬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영화에서처럼 해 볼까, TV를 보다가 오오 괜찮네 쟤 라며 찍어, 그러나 그 다음은 없어, 날이면 날마다 첫눈에 반하는 거지. 
   바로 그거라고! 이거야, 이거! 
   시간 대비 내용이라는 인간의 생애에서 무엇을 파악하고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최소한의 경험이 연륜으로 변하는 동안 재능에 대해서 사는 동안 새삼 깨닫게 돼. 노력으로 감당되는가, 에 대하여 명백히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 가령 사람을 무수히 만나보니 누군가를 척 보면 안다 파악한다 느낌 온다, 글을 읽어도 말을 들어도 음악을 들어도 그림을 봐도 아하~ 그렇구나 의견은 분분하지만 간단히 나뉠 꺼야. 알겠다 모르겠다, 호기심이 생긴다 무관심이다, 감흥이 생긴다 안 생긴다,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 별로 시큰둥하다고. 그렇지만 꼭 회의주의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는 알 수 있어야 해. 그것은 무엇일까? 음 알겠다 모르겠다, 아 느낌 온다 안 온다, 오 살아온 인생이 보인다 안 보인다, 무엇을 표상하는지 알겠다 어쩐다... 그건 모두 피상적인 짐작 같은 것이라는 것을. 더 나아가 그 다음은 무엇일까? 척 보면 안다 모른다, 를 넘어서는 딱 하나의 본질. 그것은 감당이 된다 안 된다야. 마치 사랑에 대해서 첫눈에 반했다 어쨌다 그런 시상에 젖고 노래를 부르고 싶고 들뜨며 설레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한다는 것은 나와의 가능성이 짙냐 아니냐 그것에 달려있다는 냉정한 사실과 냉혹한 계산이 선행된 다음에 겉으로 어쩜 포장되는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퉁명스런 민낯. 나는 어떤 책을 읽는 순간 깜작 놀랐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까무러칠만큼 충격을 받은 무엇은 단 3가지다 어떻다, 모두 '감당이 된다면' 이라는 조건에 정확히 부합하는 거야. 그게 아니면 등식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내가 저 여자를 갖지 못했을지라도 그때는 가까스로 비록 혼자서는 사랑을 했다, 까지는 제한선에 턱걸이한 걸로 봐도 돼. 자신의 일부나 전부를, 한 시기를 걸었을 테니까.
   그런데 이 말이 왜 나왔지? 아, 시나리오. 일단 기다려 봐. 영 맹탕이 아니면 어떤 방대한 자료가 쌓였다면 그분을 기다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음,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해피엔딩이냐 열린 결말이냐 그 두 가지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그거 하나 결정하는데도 1~2주가 걸렸잖니. 그런데 막상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을 하고 있기는 한데, 그런데 당장 그 일이 현실이 되니까 뭔가 좀 엉성한 듯 해. 어떻게 보면 꿈이었을 때가 더 나은 점도 있어. 염원하던 시절이 더 간절하고, 때문에 그 당시에 주업과 별개로 시간을 쪼개서 기쁨의 찬가를 쓰는 것이 더 멋져 보이는 구석이 있고, 그래서 음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니. 가루약이든 알약이든, 휴일이든 평일이든 날마다 방학이고 날마다 청춘인 것 같아서 은밀한 행복이 따로 없어. 아무래도 늬 말마따나 일단 그분을 기다리는 게 좋겠다.」
   「그거 말고 뭐 재미난 일은 없니? 나머지 무료한 시간은 어떻게 보내? 혼자서 사건의 진상을 추리할 일은 없을 테고. 위험천만한 모험을 찾아서 떠날 수도 없고. 짝사랑에 상심할 나이는 이미 지났고. 황당무계한 망상, 벌써 뗐어. 절망과 비관과 염세와 낙담, 그런 한담을 나누는 거도 우리가 할일은 아니야. 사랑을 믿냐 안 믿냐, 청춘은 외롭고 부질없는 짓일까 아닐까, 그런 일로 고민하는 나날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 그렇다고 우리가 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엑스트라도 아니잖아. 어때? 새로운 일 한번 해볼까? 생각...있니?」
   「새로운 일? 그게 뭔데?」


   2

   테니스 코트는 3가지로 나뉜다. 특별한 코트를 더 추가할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세 가지다. 클레이, 하드, 잔디 이렇게. 그러면 그랜드 슬럼은 무엇이냐? 혹시 모르시는 분을 위한 추가 설명은 피하자. 왜냐하면 그게 나오면 당장 나인 브릿지가 무엇인지 아느냐, 융프라우의 뜻이 뭔 줄 아냐로 살며시─슬쩍─현란하게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듣고 보면 별거 없지만 알기 전에는 전무한 신비고 완벽한 무식이며 기대하게 되고 궁금해진다. 그러나 알고 난 후에는 거의 실망한다. 그래서 큰 낙담은 피하기 위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절대 생각이 안 나서 그러는 게 아니다.
   실내 테니스 코트에서 J와 K는 테니스를 즐기고 있다. 땀이 난다. 칠 만큼 쳤다. 쉬어야 한다. 음료수를 마실 시간이다.
   「조니, 늬가 말한 새로운 일이란 게 결국 테니스였니? 뭐 꼭 새로운 일과 재밌는 일이 일치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간신히 작은 흥미를 선물해서 상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실소를 금할 수 없잖니? 그러면 약이 오를 테고, 약이 오르면 이렇게 테니스를 가볍게 하더라도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내기를 하겠지. 그러다 져, 진다고. 수증기 부글부글, 어? 그럼 찝찝해 기분이. 그래서 생각을 하게 될 꺼야. 설마 이건 교묘한 속임수일까? 쟤 말에 속아넘어가서 불행을 자초한 건가?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해야 하는데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할 때 자꾸 감정적으로 흥분하게 될 테지. 잘 하면 뚜껑이 열려. 버럭 대신에 지니가 출연하시면 좋겠으나 일단 그래.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판돈을 올려야지. 만회하고는 싶은데 모래시계는 쉬지 않아. 본 게임을 시작하고 판을 키워야 해. 그러나 결말은 애초에 정해져 있고, 한 번 걸려들었으면 빠져나올 수는 없어. 하지만!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그것은 바로 긴 명대사는 만들기 어려우니까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것이지. 음...... 그런데 J, 우리가 테니스를 왜 하게 됐지? 뭔가 색다른 일을 기대하게 만들더니만 꺼낸 카드는 그냥 운동이야? 땀 흘리고 음료수 마시고? 아, 김빠져!」
   「K. 왜 그래? 이제 시작이라니까. 탐스런 과실이 열리는 환상 나무가 자라는 꿈의 궁전 그 근처에도 못 갔어. 벌써부터 힘 빼면 막판에 졸리는 수가 있다구. 그림을 그리다 잠이 들게 돼. 서커스를 보러 갔는데 내내 잠만 자다 나올지도 모른다고. 중요한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런 말을 듣는 사람도 있을 꺼야. 지금 장난해, 라고! 원래 첫날밤이란 그런 법이지. 아니기도 하고.
   약간 비유가 좀 따사롭지 않지만 그래도 기왕 생각난 거 풀어나 보자구. 사기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 첫째, 아는 인맥으로부터 수혈받는 분과. 둘째, 체계적으로 피라미드를 만드는 마술사 일명 전문가 약칭 업자. 첫째도 둘째도 원리는 간단해. 요술 보자기가 있으니 만인의 호기심과 자금을 모두 그 요술 보자기 안에 빠트리게 만드는 거지. 풍덩! 어떻게? 이렇게! 자, A가 있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해. 금광을 손에 쥐는 것은 확실해. 그러나 딱 휘황찬란한 보물섬에 도착하고 보니 마녀와 요부를 양쪽에 동시에 끼고 보니 좋긴 좋은데 이미 청춘은 떠나갔고, 이혼도 했고, 자녀도 바쁘고, 인기도 물 건너갔어. 장기 투자, 바로 그게 A야. B는 그게 아니야. 고위험 고수익이지. 모 아니면 도라고. 모든 걸 잃느냐 모든 걸 얻느냐. 그러나 우리네 인생이 도박꾼의 한판은 아니잖아? 비이성적으로 공든 탑을 무너트려서야 되겠나, 그 희박한 확률에 전재산을 걸 수는 없잖아, 그냥 복권이나 사는 거지. 잘하면 얻어걸리는 거고, 못되도 꽝이지만 웃고 마는 거지.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라고. 그러면 재미없지~! 인생에도 패자부활전처럼 묘미란 게 있다구. A와 B만 있냐, 아니야. 딱 그 둘 뿐이냐? 아니야! C도 있다구 C도. 바로 이거야. 이 얘기는 그만 해야겠군. 어째 내가 꼭 사기꾼이 된 거 같지? 아무튼,
   음... 실은 테니스는 그저 몸풀기였어. 그냥 구실이 필요해서 시간을 벌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사실 새로운 일이라고 덥썩 제안하긴 했는데 나도 딱히 떠오르는 기발한 놀이나 신나는 줄거리 같은 건 없었거든. 의붓어미 눈치보듯 이제 뭐가 나올려나 잔뜩 호기심 가득한 너의 눈망울을 보고만 있으려니 왠지 미안한 느낌이 드는군. 솔직할 땐 솔직해야지. 그럼. 아무 때나 그러면 자주 당하는 거고. 음. 내가 생각한 계획은 이래. 별거 없어. 어른들이 즐기는 평범한 여흥 말고, 돈이 많이 필요한 환락도 아니고, 특별한 소수에게만 허락된 유흥도 아니야. 게다가 몰래 숨어서 만끽해야 하는 그런 불건전한 취미도 아니야. 그건 그냥 이런 거야. 끝말잇기 같은 거. 가위바위보 같은 거. 노래 부르고 듣기, 소풍 갔다 오기, 다정한 연인끼리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애들같이 애들처럼 A네 집에 놀러가자는 거였어. ...(쉿)... 진짜 별거 아니지? 네가 들으면 실망할까 봐, 나도 말하기 힘들었다구. 사랑 고백도 아닌데 막 수줍고 챙피하고 살짝 긴장되며 두근거리기까지 했다니까. 그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때? 너도 둘은 조금 단조롭고 셋이 낫겠다는 생각, 하지 않았니? 응? 솔직히 말해 봐. 막무가내로 다그치니 막 거짓말로 둘러대라는 말이 아니라 진짜 속마음이 어땠냐고. 음... 얼굴에 씌여 있네. 재미없다고. 그게 뭐냐고. 대실망이라고. 때리고 싶다고. 그렇지만, 하지만, 한번 생각을 해 봐. 요즘 애들이야 그런 거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핸드폰이 없었잖아? 동네 꼬마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하는 게 뭐겠어? 오늘 하루는 뭘 하며 즐겁게 놀까, 겠지. 그거 말고 없어. 노는 게 일이니까. 우리는 돈 버는 게 일이지만, 그분들은 그렇지 않잖아. 음 그렇지. 그러면, 놀면 혼자만 노나? 혼자 놀아도 재밌기는 한데, 그러다 지친다구. 친구집에 놀러가게 돼 있어. 둘이 놀기 위해서. 그때 친구네 집 앞에서 친구를 불러, 누구야 놀자 라고. 핸드폰이 없으니까 찾아가는 거라고. 그 친구 집은 빨간색 대문일까 파란색 대문일까? 아니면 연분홍색 대문? 알게 뭐야. 어쨌거나 저쨌거나 어른들의 놀이터와 평범한 향락은 이제 질렸어. 좋긴 하지만 당분간 사양하겠다고. 생각을 해보렴. 자, 한번 상상해 봐. 그렇게 찾아가고 만나고 모이고, 찾아가고 만나서 모이고, 5명이 되면 뭘 할까 농구를 할까? 6명이 되면 배구를 할 수도 있어. 그럼 9명이 되면? 오, 아하 경마장에 가도 돼. 놀이공원 단체 할인이 몇 명 이상이지? 점점 뭔가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치 못했던 그런 거. 막 흥분되고 재미있을 꺼 같지 않냐? 어? 얼마나 재미있을까? 어? 어떻게 생각해?」
   「하나도 재미없을 꺼 같은데!」


   3

   처음에는 J와 K 그 둘이서만 놀았다. 그러다 그들은 A를 찾아갔다. 만났다. 그리고 A의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 다음날이 되어 이제 그만 돌아가기를 바라는 A를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었다. A는 두 친구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A의 자유를 유예시키고 싶어했다. 솔직히 이러이러한 계획을 실행할 테니 동참하라고 애원할 수는 없었다. 부질없는 순례일 뿐이라면서 젊은이의 푸른 기상이자 의기투합한 우정의 순애보 그 오렌지색 춘몽을 냉정하게 깔아뭉갤 테니까. 그러면 어떡해야 하나?
   어떡하긴 뭘 어떡해! 방법은 하나였다. 역시나 그것 밖에 없었다. J가 A에게 마성의 입김을 불어넣는 것. 번지르르한 요설을 잘 포장해서 마치 미지의 신세계를 찾아떠나가는 듯한 외경심과 파랑새를 만나러 가야만 하는 정신의 이상을 깨어나게 만드는 말솜씨를 발휘할 차례였다.
   A는 귀가 실룩실룩거리더니 금새 스타 탄생을 예고하는 듯한 동경심이 부풀어올라 코끼리 날개를 펼치면서 순순히 넘어왔다. 그래서 세 친구는 내친김에 M을 만나러 가는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4

   M은 집에서 책에 밑줄 그은 구절을 포트스잇에 옮겨 적어서 모니터 옆에 붙이고 있었다. 그가 읽었던 밑줄은 이랬다. "그렇소, 진보의 난폭함을 혁명이라 부르오. 혁명이 끝나면 사람들은 인정하오. 인류는 곤욕을 치렀으나 진보했음을. ... 호화로운 신부란 자가당착이다.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 옆에 있어야 한다.. 화롯가에 있으면서도 따습지 않다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가? 줄곧 용광로에서 일하는 노동자인데, 머리털도 타지 않고, 손톱도 더럽지 않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얼굴에 재 한 점 묻지 않은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가? 신부에게, 특히 주교에게 자비의 첫째 증거는 청빈이다. ─ 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M은 포스트잇으로 명언 적기 취미에 흠뻑 빠져 있었던 것이다. 또 무엇을 적어서 어디에 붙여놓을까 고심하던 바로 그때 친구들이 찾아왔다.
   세 친구는 결국 M을 만났다. 그 만남이 성사되기 전에 달리 특별한 일은 없었다. 가령 M의 집에 갔더니 M의 집 안에 M은 없고 웬 당나귀만 한 마리 덩그러니 있었다거나, M의 집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거기는 알고 보니 어느 신비주의자와 어떤 은둔자가 동거하는 집이였드라, 또는 친구 집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눌러도 응답이 없어서 문을 스윽 밀어보니 열렀어 오 열렸어 잠깐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드니 무슨 한 벽면에 포스트잇이 수백장 붙여져 있고 누구를 추적하고 사건을 분석하는 그런 영화 같은 작위적 설정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은 저녁이 됐고 가볍게 M의 집에서 그들은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가까운 술집에 갔다. 도착해서 바에 앉았다.
   꽤 적당한 화제랄지 퍽 적법한 안부 인사를 나누기에는 왠지 어색했고 살짝 나른한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M은 친구들이 지친 듯해 보여서 지금은 자기가 말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얘들아. 나는 있잖아, 어른이 되면 막 자유롭게 작품 생활을 하면서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흥했다 망했다 흥했다 망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삶을 살게 될 꺼라고 막연히 내다봤었어. 그 예상은 어김없이 빗나갔지.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 호텔 생활은 잔잔한 호기심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꽤 많이 해 봤어. 그 생활을 하면서 내가 깨달은 게 뭔 줄 아니? 뭘 꺼 같아? 특별한 건 없어. 뭐 대단한 걸 깨닫지는 못했다구. 하지만 이래저래 주워들은 정보의 양과 그것의 고귀한 가치는 무척 특별했어. 자세한 걸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 밝힐 수는 없지만 음, 내가 아는 세상은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 우리가 모르는 어느 범주 너머의 움직임이 있고, 그것은 체계적으로 작동되며, 그것의 기원은 이미 500년 벌써 5000년 가까이 됐다는 것이야. 물론 속시원히 다 알려주면 나도 좋고 너희들도 좋겠지만 말할 수 없는 사정이란 것도 있으니 이해해주기 바래.
   너네들 한번 생각해 봐. 평소 아무런 의심이나 궁금증이 없었던 일에 대해서. 나도 작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특급 호텔을 전전하는 생활을 오래하던 시절 생활이 무척 때분해지고, 창작의 절벽에 부딪히던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 너네들도 알잖니? 호텔에 도착하면 길다란 모자를 쓰고 턱시도나 뭐 그런 격식 있는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승용차의 문을 딱 열어주잖아. 근사하게 말이야. 어느 날 그걸 보니 이상했어. 옛날 같으면 그분은 귀족이고 난 삐에로쯤 될 테니 뭔가 무척 부자연스러운 일이겠지? 또 있어. 호텔에서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 별관이나 근처의 나이트클럽에 놀러가기도 했지. 거기도 그래. 돈을 내는 사람은 나고, 대우를 받는 사람? 그것도 나야. 즉석 만남을 누가 하는데? 역시 나지. 무대에서 쇼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때로는 마술을 선보이는 친구들이 모두 누구를 위해서 그 일을 하냐고? 나라고 나! 그런데 나비넥타이는 누가 매니? 그래, (딱), 웨이터 아저씨지. 바로 그거야! 이게 다가 아니야.
   그러다 호텔 생활 정리하고 집에 돌아왔어. 딱 생각을 했지. 시나리오를 80퍼센트는 썼는데 나머지 20이 안 써지네... 고민했지. 음 아 그래, (딱), 그거야. 골 세러모니를 보란 듯이, 주위에 아무도 없지만, 그렇게 들썩들썩하며 검색을 했어. 발명가,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 작품의 원작자, 귀족과 고명한 나리, 기원전 비극 시인, 방랑자, 선구자, 사색가와 발명가에 하물며 괴짜까지. 이미지 검색도 했고. 결과가 딱 나오더라고, (딱)! 뭔 줄 알어? 그래~ 다 수염을 길렀더라고! 나도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어. 거 약간 이상하던데. 거동이 조금 바뀌어. 태도나 자세에 미세한 영향을 주나 봐. 시나리오의 나머지 20을 완성하려고 나도 수염을 길렀더니 아주 약간 사람이 바뀌는 듯 했어. 그런데 문제의 글은 안 써지고 내 용모는 영 지저분해졌어. 주변에서는 추접스럽다고 하더라고. 난 나대로 방법을 찾고 노력했는데 말이야. 억울했어. 일거양득이었지. 나쁜 쪽으로.
   그러다 그 시나리오는 폐기했어. 망했다고. 미완성! 선불로 받은 계약금에 특별 사례금과 흥행 보너스까지 모두 돌려줬지. 토해내니까 괴롭더라고. 그래도 소송에 휘말리지 않아서 다행이었어.
   그러다 어느 날 하워드랑 단둘이 술을 한잔 했어. 여기야!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술집. 너네들도 알다시피 하워드 집이 여기서 가깝잖냐. 만났어. 그날 내가 무리했어. 골든벨을 울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속으로 작정했어.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내심 하워드라면 우리가 모르는 뭔가 신비롭고 기쁘고 은밀하며 어떤 뭐랄까, 끊임없이 염탐할 만한 그와 같이 격찬할 만한 비밀을 하나쯤은 분명 알고 있을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최고급 술을 샀고, 내가 아는 숙녀 가운데 최고로 근사한 옷을 입는, 최고로 세련된 예법이 몸에 익은, 최고로 고상한 말투가 돋보이는, 최고로 관능적이며 최고로 우아하고 최고로 지적인, 즉 하워드가 한눈에 반할 것만 같은 어느 상속녀를 불러내서 하워드와 나 사이에 앉혔지. 하워드는 그날 뿅갔어. 완전 뿅갔다고. 어리둥절할 만했지. 분명 그랬을 꺼야. 그녀의 이목구비는... 아, 말 말자! 막 상상되네, 알면서도. 꿈에라도 나올까 무섭다. 그렇다고 뭐 희대의 꽃뱀 그런 건 아니야. 얘도 본심은 착해. 본색을 드러내도 맹하고. 그래, 백치미가 뛰어나. 그러니까 입을 열면 안돼. 그럼 망해. 음. 그녀는, 그 여자는 어디까지나 내가 하워드를 위해 준비한 비장의 카드, 내 망가진 역작 시나리오에 대한 어떤 속죄양의 의미랄까? 녀석의 고결한 예술 인생에 조그만 흠집을 내고 싶다랄까, 전부터 첫날밤 얘기를 해주라고 막 졸라도 해주지 않더라고. 하워드가. 그래서 내가 준비했지. 그녀를. 가책 같은 건 꼭꼭 숨기고서. 그녀의 남자 경험 역시도.
   뭐시여, 남자 경험? 사소히 다루기에는 너무 막중한 화제인데! 안 그러냐? 살짝만 건드리고 가자구. 시간 있으니까. ...(휴)... 너네들 그거 아니, 여자의 미모에 대치되는 남자의 가치는 무엇일까? 뭘 꺼 같니? 황금, 화술, 외모? 또 뭐가 있드라, 아무튼. 뭐가 맞고 뭐는 틀리다 라고 하기는 어렵겠지. 알아도 쉬쉬 하자고. 뭣땜시? 왜냐하면 일단 1번이 뽑히면 나머지 채권자는 아아, 그 때문이니까. 그만그만! 전문가가 평점을 매길 수도 있고, 투표로 인기 순위를 정할 수도 있어. 그러나 살면서 수많은 남자들과 친숙하게 어울리고 부대껴 보면 그것은 아마도 여자 경험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 번쯤 해게 돼! 그건 때때로 연애지침서에서 놓치는 부분이 아닐까? 아니야! 아니면 좋겠어! 아니기를 바래! 뭐 그러거나 말거나! 그쪽 세계를 모르니까 뭐라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연애 경험은 훈장의 의미를 지니는 화려한 상징미에 귀결되는 의미가 있다는 그 분야 전문가의 일설보다는 남녀의 만남은 운명이고 우연이며 노력이자 그냥 인연이다는 <뭐는 뭐다>식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어. 뭐, 훈장? 괜히 헷갈려. 훈장이라면서 숨어서 속닥속닥 이러쿵저러쿵 숙덕거리고, 또 담판을 짓거나 첫인상을 각인할 자리에서는 무슨 훈장이 대체 뭔 소리냐고 되물어. 다 처녀야. 다 처녀래. 생판 모르는 이론이라는 것처럼. 보도 듣도 못했다 그래. 하나 같이. 간혹 딱 3명 만났다고도 해. 그런데 오래 만났대. 즉 한번 마음을 주면 길게 간대. 그러듯이 여자에게 허영심이 있다면 남자에게도 있어. 그건 뭐겠어? 뭐긴 뭐야, 그것은 허세지! 그럼 여자의 변덕에는 뭘 내놓겠냐고? 아무래도 허풍! 오오, 여자의 남자 경험에 대척되는 지점이 남자의 여자 경험이라... 음 글쎄, 여자에게 사랑이 전부라면 남자에게는 어떻다고 하잖니? 남자가 카사노바라면 간혹 허탈할지언정 웃음을 부르지만 여자가 그렇다면 오, 아득한 일일 꺼야. 있잖아, 남자의 허세가 절밤쯤 맞다는 것은 여자의 마음을 안다는 것이지. 그러나 그것은 기교야. 어디까지나.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기술적으로만 아는 것이라고 생각해. 중요한 것은 여자의 마음이라고. 그러니까 어, 말을 바꾸면 여자의 청각. 그래서 글조차 말을 따라가기도 하지. 그 반대가 어렵나 봐. 드물지만 그 둘을 엄정히 직업적으로 구분하기도 해, 법정에서도. 이미 옛날부터.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지. 여자의 마음을 안달 나게 하는 재주는 단 한 여자의 마음만 안달 나게 하지 않는다는 점. (딱!) 그것은 늦더라도 서서히 터득하는 기술에 불과하다는 점. (딱!) 남자의 재화 가치는 상승할 수 있지만 여자의 미적 가치는 하락할 것이라는 점. (딱!) 사랑은 그것이 처음에 사랑이 맞는지도 잘 모르지만 설령 맞더라도 변하기 쉽다는 점. (딱!) 출신이 미약하든, 왜 그런지는 몰라도 여자 경험과 돈과 재능과 화술과 외모든 성정이든 뭐든 그 때문에 허세와 허풍이 부족하다면 오히려 남자가 남자를 상대하기도 즉 남자 대 남자로써 어울리기에도 때때로 버거울 수 있다는 점. 허세를 비롯해 완벽한 마초인데, 여자 경험이 아쉬워 중년이 될 즈음 그래프에 대해서 난생 처음 알았어, 무언가 살아온 인생의 초상이 억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는 점. 여자도 똑같지. 여자 대 여자로써 허영심과 변덕과 질투가 0과 0과 0이거나 100과 100과 100이라면 그 다음은 상상에 맡겨야지! <내가 최고야>라고 해도 뚱하고, <너는 최고가 아니다>라고 해도 뚱해. 단, <늬가 최고야>라고 해도 뚱하긴 한데 좀 덜 뚱해. 험담도 쓸데없고 고품격 농담도 쓸모없으며 다변도 잡설일 뿐이야. 좌천도 아니고 내가 일을 잘해서도 아닌데 거긴 배달할 사람이 도무지 나밖에 없대. 뭐를? 피자를! (딱!) 여자를 존중하며 숙녀를 찬미하는 자질이 부족하더라도 여자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한다는 점. (딱!) 적어도 어떻게 그리도 여자 마음을 모르냐는 소리는 듣지 않기. (딱!) 여자가 말해. 여자는 그래요, 라고. 속으로는 그럴 꺼야. 아 또 시작이구나, 라고. 속으로는 그래, 우리끼리 대화를 나눠 보면 남자가 정말 바보 같지만 알고 보면 여자가 진짜로 바보인가 보다고. 그러나 속으로만 그래야겠지. 속으로만. 정말 그래. 여자는 뭐다는 이쯤에서 줄이자구.
   한편, 말이 나온 김에 허세에 대해서 부언 설명을 하자면 이래. 허세! 허세란 말이야... 허세는 뭘까? 그분은! 허세는 말이야 이런 걸 허세라고 해. 오랫만에 친구들끼리 만나서 말이 나와. 예를 들면 이렇게. "첫인상이 그렇다더니만 역시 천생연분인가 봐. 사랑은 뭐니 뭐니 해도 첫눈에 반해야 한다니까. 어때, 여전하지?" 또는 당사자가 친구에게 직접 물어 봐. "내 여자친구(부인) 괜찮냐?" 라고. 이때 경우의 수는 크게 다섯 가지가 있어. 1.허탈 2.허세 3.묻지마 4.독설 5.절대 긍정으로. 대략 다중적이겠으나 일단은. 향후 바람은 어디서 어떻게 불지 모르는 일이야. 장래 뭐하고 살지 어떻게 알겠어, 수정구슬도 없는데 말이야. 그럼.
   첫째. 그건 이래. "그때 내 눈이 삐었는 갑다." 라고. 아, 정녕 웃음에 대한 이해득실의 최대 수혜자는 누가 뭐래도 제3자란 말인가? 허세도 싫고, 실정도 변변찮고, 불만이나 냉소 아니면 투정 또는 간혹 험담에, 잡은 물고기에게 밥을 주는 것도 언짢고, 로또 복권 꼬박꼬박 사는 여건을 보면 사정 뻔하며, 뭘 해도 재미 없고, 거짓말도 짜증나요 삶은 피곤해요, 감언이설은 성격에 안 맞아, 라는 전형적인 그 분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
   둘째. 이건 인생 자체가 허세, 허세 빼면 시체! 허세 하면 누구, 누구 하면 허세! 위처럼 말이 나오면 '그래 괜찮지!'와 '장난하냐?'에서 전자를 원하는 물음이 확실하니까 뭐 동의하고 당사자의 허세1을 충족시켜주는 게 순서겠지. 이걸 전문용어로 접어준다고 해. 그러면 자, 허세1에 이어서 허세2께서 납시지 않겠니? 왜냐고? 그분이 나서지 않는다면 또 그럴 테니까. "짜식 진짜 그런 줄 아나본대, 원 참! 넌 어떻게 된 게 사람이 그 나이 먹도록 눈치가 없냐? 참 나!" 라고. 바로 허세2가 나설 차례라고. 아니 왜? 왜냐하면 접어주면 꺾어야 하는데 발동이 걸려서 도저히 멈출 수 없기 때문이야. 누구하면 허세고, 허세하면 누구인데 말 다 했지. 그래서 자, 나오셨어 허세2가. "그래? 난 그냥... 딱히... 썩... 그렇다고 찬성하기는 힘든데, 객관적으로 그렇잖아. 퍽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애들도 크고 그냥 사는 거지. 가족이잖아. 가족! 결정적으로 헤어질 뻔 했던 그때 나는 마음 비웠는데 걔가 나섰잖아. 거의 매달린 거지. 당시 난 별로 생각없었어. 나 유학생 만나고 있을 때 말이야. 아 나 영화배우도 만나봤고 아나운서도 만나봤고, 아 이번에 뜨는 누구 걔 있잖아 와 전에 나 좋다고 한참 따라다녔는데 그렇게 될지 예상이나 했겠냐, 하나 하나 세기도 힘들어 차마 헤아릴 수가 없어 대충 셈해봐도 어.. 음.. 에잇 관두자." 라고. ...음... 다음은 뭘까? 하나 밖에 더 있겠냐, 허세군은 허당씨로 바뀌는 일만 남은 거지! "아, 그래~? 다음에 제인 보면 제인한테 말해줄께. 딱 그대로~! 너가 사람이 너무 겸손하더라고 말이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아니 우리 그만하자! 우린 서로 약점을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까. 말 나와 봐야 서로 좋을 꺼 하나 없잖아. 아니 아니 아니지! 그게 아니지! 절대 아니지! 넌 이미 풀어놓은 게 많을 테니 혹은 넌 나 때문에 구박 엄~청 받았을 테니까 비교된다고든 어쩌든, 무엇보다 넌 결백하니까 그냥 우리 같이 죽자. 하지만 어머나, 아 글쎄, 이렇게 증거가 남았네. 어떡하지... 녹음된 거 틀어줄까?  <그래? 난 그냥... 딱히... 썩... 그렇다고 찬성하기는 힘든데, 객관적으로 그렇잖아. 퍽 만족스럽지는... STOP> 접어줘도 꺾을 줄도 모르고, 누가 촌닭 아니랄까 봐 발악을 하네 아주. 애쓴다 애써. 그래 봐야 넌 삼류야 삼류, 알아? 그것도 영원한 삼류! 이 삐─ 같은 놈. 넌 도대체 사이코냐 돌아이냐? 사람이 어떻게 그리도 꽉 막힌 거냐, 어? 정말 신기하다 신기해! 진짜 답답허다~ 누구 앞날이 훤허다~. 옛날에 너는 늬 여친한테, 어디 가서 내 남자친구라고 하지 마란 말을 들은 걸로 부족하냐? 어? 너 어디 가서 내 친구된다고 하지 마라! 챙피하다. 수치심이 가라앉지가 않아.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데.. 이거 원! 알았어? 앗, 잠깐만. 워 워 이거 클라우드 동기화 안 끊었는데. 그 계정 내 여친이 쓰는데. 어떡하지? 어쨌든 몰라 봐서 미안허다. 너가 최고란 것을. 너 여기서 빠져라? 아니! 너 여기 남어라. 여기 술값 늬가 내라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설이고 과장이자 우정일 뿐이야. 정말 친하니까 밥 먹듯이 허세를 부리더래도 그냥 누가 듣지도 않는 허세 마이크 내비두고, (고급 허세) 채널 하나 또 하나 더 켜면 되는 거지. 그러면 돼. 자연스럽게. 왜? 왜냐하면 친구니까. 왜냐하면 허세 친구들 5명 막 7, 8명끼리 우르르 어느 근사한 바에 가서 딱 소문난 바텐더에게 몇몇 난제에 대해서 자문을 구하면 쟤는 단 한 개도 얻어걸리지 못하기 때문이야. 한 개는 무슨~ 만년 꼴찌한테 순위권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힘들 것임. 그 질문은 뭘까? 빼어난 매력이 돋보이는 언니에게 막 이렇게 물어보면 깔끔하지. 우리들 가운데 가장 돈이 많을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누구로 보이나요? 이 가운데 제일 마음에 드는 남자는, 제일 잘생긴, 그냥 그대 성에 차지는 않더라도 그나마 도토리 키재기로 그나마 많이 봐줘서 비교적 50점이라도 줄 만한 딱 한 명의 남자는 누구에요? 그 때문이지. 친구가 뭐 별 거니? 그러나 이 부류는 하수야. 공신력 있는 허세 대회 출신 애들 앞에 서면 저 친구는 고개를 들래야 들 수가 없어. 이 층위의 특징이 뭐겠어? 물론 어디까지나 친구니까 넉살 부리는 것이지만 자기 허세 안 들어주면 안 만난다, 바로 그것이라고. 뭔가 이상하지 않니? 어차피 같은 허세야. 그런데 왜 얘는 거품 물고 허세부렸다며 얄미움 받고 욕 얻어먹고, 왜 누군가는 명백한 자랑임에도 불구하고 허당과 허풍도 얘기해주라고 막 환호성에 웃고 쓰러지고 심지어 때리고 마구 기다려지며 난리일까? 그러잖아, 적잖이 불공평해. 평등하지가 않다고. 불평등? 그래. 누가 하면 그냥 뻥인데, 누가 하면 시적이고 낭만이며 신비이자 환희야! 같은 말이라도 그런다니까. 괜히 여자들이 목소리에 꺼뻑 넘어가는 게 아니라고. 대체 왜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왜 얘는 찬밥 쟤는 환영이냐고. 될 놈은 뭘 해도 되고, 안 될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논리면 끝나는 건가? 정말 그게 다일까? (골 세러모니) 왜냐하면 전자는 그거 밖에 모르기 때문이야. 그것은, 오빠 달려! 힘껏 달려 보면 어떠니? 어떠긴, 결국 퍼진다고! 안 그래? 멍멍 멍멍, 개가 뛰고 나서 그러잖아 막 헐떡헐떡. 평소에는 껄떡 허세부릴 때는 헐떡인가? 그러니까 반응이 안 좋아. 그러나 후자는 그게 아니야. 밀었다 당겼다, 들었다 놨다, 쥐었다 폈다, 쉬었다 나섰다 하다가 지금이다 싶으면 딱 상대의 마음을 빼앗아! 뛰고 날고 하고 때로는 관망만 하고, 그러다 이때다 하면 슥~ 상대의 마음을 훔친다고! 이거야 (딱)! 전자는 힘은 힘대로 빼고 좌중은 짜증 내고, 후자는 쉬엄쉬엄 했을 뿐인데 도저히 미워할 수 없다는 거! 전자는 허세꾼에 호색한에 환장가인데 후자는 (우리) 선생님에 환상가라는 거! ...(휴)... 내가 농담을 고급스럽게 포장하는 방법을 하나 알려줄까? 내용은 너가 말했다고 쳐. 그러고 나서 재밌으니까 발언자와 청중이 나와 친구들이 같이 웃는다고, 보통은. 하지만 희극배우는 안 그래. 희극지왕 정도 되면 좌중을 웃음으로 휘어잡고 나서 자기는 반대로 인상을 써야 하는 법이지. 웃고 싶어도 참아야지. 무표정으로 효과를 극대화한다고. 뭐 절제 같은 말도 비슷한 거지. 진짜로 무인도에 데려가고 싶을 만큼 웃긴 친구는 안색만으로도 웃겨. 눈빛 한 번이면 뭇여성은 떨리다 참다 못해 안달복달에 밤잠을 설치며 그대를 생각한다고. 그래야 한다고. 그럴 수 밖에 없다고. 그게 바로 고수야! 그런데 저건 뭐니? 그렇다는 말일세 ......음...... 그럼 한번 생각을 해보자구. WHY, 정말 왜 그럴까? POURQUOI? 왜냐하면 어설프니까! 실정이 어설프니까. 연기가 어설프니까. 꿈도 어설프니까. 다 어설프니까. 봐봐, 봐보라구! 아예 허세 분야 전직 선수였거나 그걸로 국대급이라면 그~냥 쓰러지는 거지. 완전 웃기다고! 바로 이거야, (딱) 바로 이거라고 이거! 허세의 단짝인 허풍으로 어느 경지에 올랐으면 그건 TV 코메디 프로에 나오는 허당 시리즈처럼 엄청 재밌어. 좋아 좋다고. 기쁘고 즐겁고 또 듣고 싶고 또 보고 싶지. 하지만 어설프게 머저리처럼 뚱딴지 같은 헛소리에 관한 습관이 천성이면 그건 다름 아닌 광고라고. 전 바보에요 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다니는 거지. 난 푼수에요 라고 등에 포스트잇이 붙여진 것과 똑같아. 그게 다 어설프다거나 정작 원하는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그런 거야. 즉 자기가 홀딱 빠질 만한 여자가 먼저 자기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듯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주지 않았어. 한 번도. 단 한 번도. 미래도 뻔해. 늬가 여자라면 그럴 마음이 생기겠냐? 어? 그러겠냐고! 내 짝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는 청아한 여인께, 우리 오빠라 칭송할 대상이 미처 빈자리인 상큼한 숙녀께 이렇게 여쭙는다면 대체 뭔 소리를 들을까? 그 사랑을 빼앗아 보고 싶지 않나요, 라고. 하트 뿅뿅, 윙크 반짝반작! ...... 어쭈, 이 양반이 시방 사람을 뭘로 보고! 뭐가 어쩌고 어째?... 상상만으로도 분위기 험악해지겠다야, 에잇 기분 나빠지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고 친구나 되니까 그 허세 다 받아주지 안 그러면 어디다 하소연하겠냐고. 단골 술집 마담? 돈 많이 들어. 친해졌드니 글쎄 술 취하면 짜증내, 허세도 정도껏 하라고. 때문에 이상적으로 바라는 공상을 실재 겪은 것처럼 풀어놓는 것이지. 이미 반틈은 숙련된 망상가요 능청스런 몽상가지. 진짜 그처럼 말 같지도 않은 허세를 부리면 남들이 믿는다고 생각할까?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 바보가 아닌 이상 스스로도 다 알 테야. 단 매일 거울을 볼 때마다 나르키소스가 되니까 그냥 어쩌다 생활이 되버린 것이겠지. 에코, 만나봤드니 별로래. 에코, 이미 자기를 거쳐갔대. 에코, 에코는 원래 자기 이상형이 아니래. 그 재능 타고났는데 말로라도 풀어야지 뭐 어쩌겠냐. 허나 선망을 허세로 옮기니까 이미 처음부터 장르가 잘못된 거였어. 사실주의라고 하길래 봤드니 글쎄나 SF? 진짜라며 우기고 노래를 부르는데 어머나 그건 판타지? (딱) 그거야! 이와 같은 분석이 아마 저명한 정신과 의사의 고견과 절반은 일치할 껄? ...(멈칫. 안색만 봐도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안다는 듯)... 이런 얘기 친구가 들으면 서운해 하겠다고? 아니야, 전혀 아니야. 왜냐하면 녀석들은 친구니까. 왜냐하면 녀석들은 남자니까. 진짜 언짢다면 달린 고추 달렸나 안 달렸나 확인해 봐야 하고. 만약 달렸는데 속까지 좁으면 아, 그거 감당 안 돼. 왜냐하면 누가 뭐래도 녀석들은 그 어디에서라도 대인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친구들이기 때문이지. 암. 그럼. 그렇고 말고. ...(엥. 눈빛과 눈빛의 교차. 연인인가?)... 이와 같은 치밀하고도 정교한 이론은 대체 뭐냐고? 저 가운데 하나냐고? 허탈도 아니고, 허세는 아닌 것 같고, '묻지마'일 리는 없고, 천동설과는 관계 없고, 허당과는 다르니까 몹시 의아해 하는 그 마음 잘 알아 잘 안다고. 이건 단언컨대 아마 깐족 아닐까? 깐죽! 다시 이어 가자고. 
   셋째. 늬가 데리고 살래? (오 땡큐? 어허허허허! 거침없네 정말. 완전 시원시원하셔. 으하하하하, 으하하하하, 크크크크크! 참고로 셋째 스타일과 '우리는' 화법의 대가는 비교적 허세를 덜 부리거나 불필요함. 차라리 허풍쪽. 그러나 헤세의 부류에 넣은 것은 허세가 변심하여 바뀐 것 뿐이라는 것을 반증하기 위해서. 무엇으로? 실속으로!)
   넷째. (난 항상 허탕이니까) 주로 악담을 남발하는 부류. 아무에게나. (절반은) 기억도 못함. 친구면 무조건 악평을 감수해야함. 뒷일 생각 않고 <내일은 없다>는 좌우명의 직진 인생. 이를테면, (친구가 여자랑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며) 못생겼네~! 이를테면, 참말로 걱정된다 너 그래 가지고 훗날 결혼이나 할 수 있을 꺼 같냐? 너만 보면 참 내 가슴이 답답~허다! 하긴 내가 이 정돈데 넌 오죽하겄냐 (토닥토닥)! 
   다섯째. 너무 좋아. 대만족. 정말 행복해. 다 너네들 덕분이야. 친구들한테 정말-정말 고마워. 세상은 아름다워...... 이건 허세가 아니라 허영의 친구인 동조이자 천동설이겠구나.
   정작 주인공이신 우리의 숙녀께서는 자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들었다 놨따, 감쪽같이 쥐었다 폈다 했는지 꿈에도 모르실 꺼야. 알면 남편 흉보기고, 모르면 어쩔 수 없고. 전자는 손 안 데고 코 풀기, 후자는 (비공식이고 자시고 그러든가 말든가 이미 내놓은 물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나 쯤 되겠지? 눈치가 빠르기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구미호 같고, 사람 마음을 빼앗고 훔치는 데 도가 트신 분이라면 딱 하루 전에 그 낌새를 미리 파악하실 테지. 남친(남편)의 동태를 분석할 필요도 없이 말이야. 바꾸어 말하면 옛날 옛날에 포기했다는 말씀. 사랑은 변해도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안 변해. 하지만 허세꾼은 또 그래. 사람이 안 변한다면서 여성잡지1에서 2로 변하는 거는 또 뭐냐고? 무슨 말도 안 통하고, 우기기만 하고, 뭐만 둘렀다 하면 안 가리고 그냥 군침만 흘리시니 아 나 이런 이런! 우리는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미친?) 개의 1인 방송을 평생 옆에서 들어주고, 평생 잔소리하며, 일평생 그것에 달관해야만 하는 오직 그럴 수 밖에 없는 누군가의 애처로운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에코. 머머 해야 한다) 부디 그분이 바라시는 홀딱 반할 만한 황금 마네킹 상점의 VVIP가 되시기를! (에코. 되시기를) 우리는, 어쩜 그 기구헌 운명을 불쌍히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에코. 머머할지도 모른다) 그 말 못할 심정에 측은한 마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구려. (없구료) 이건 뭐 거의 득도를 하는 수준일 것이다. (것이다) 말하시지 않아도 잘 압니다요, 마님! 네네 그럼요. 하여간, 수컷들이란! 정말 안 그러겠어요? 일생을 함께 사는 사람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냐구요! 한창 화사하게 꽃필 나이에 흡사 스토커처럼 하도 꽃 들고 쫓아다니길래, 하도 사기꾼 같은 달콤한 칭찬에 길들여지고 쇠뇌되다가 멋모르고 딱 발목잡혀서 인생 내내 막 고생하고 끝끝내 포기하시는 그분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바입니다) 이제는 허세가 무엇인지 잘 아시지만 이미 멜로드라마의 환상은 꺼이꺼이 떠나갔고, 낭만적 영화에 대한 가녀린 흉내조차 물건너간 마당에 우리는 여성지 2나 탐독하며 함께 모여 정담을 나누고 헤어질 때 이렇게 인사해야 하는 것이란 말인가? 진짜로 남은 것은 그것뿐이란 말인가? 나머지는 음, 우머나이저조차 매진됐다네요, 정녕 남은 건 그것 뿐인가 봐요! 딱 하나 남은 보석은 바로 이 말? 중요한 얘기는 우리 다음에 다시 만나서 하자꾸나! 우리는? 으쌰으쌰~ 들썩들썩~ 두근두근~ 뭔 말인지 잘 아시는 숙녀여 마담이여 귀부인들이여, 모두 함께 들고 일어섭시다? 워 - 워 - 워! 오오, 저런! 괜시리 괜한 어느 저질 허세 때문에 내가 뭔 대변인도 아니고, 뭔 별의별 시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고, 참 나 아조 한심하다 한심해! ...(휴, 휴, 휴)... 괜히 허세 때문에 이야기가 옆길로 샜지만 말하자면 허세란 바로 그런 것이란 말씀이야. 빛의 3원색이 뭔지 알지? 허식의 3요소도 그렇다구. 바로 허세, 허당, 허풍! 쉿, 외워두세요.
   허허허. 개구쟁이들! 뭔 별 얘기 있겠어 하며 호락호락 듣고 흘리더니 이젠 눈이 똥그래지다 못해 막 강아지처럼 군침을 흘릴려 그러네? 하하하, 하하하. 어쨌든 그날 술값 톡톡히 나왔잖아. 어디 술값만? 그러면 섭하지~! 몹시 섭섭하고 서운하다고. 어떻게 그런 처참한 결과가 내게로? 지나가던 새가 다 울고 갈 일이라고! 후회했고 울적했으며 막 쌍욕이 나올 뻔 하기도 했는데, 그런데 막 포기할려던 막판에 빈틈이 딱 보이더라고. 결국 마침내 최후의 승자는 나였어. 아무튼 그 무뚝뚝하던 하워드가 실토했잖니. 내내 부정하던 그 은밀한 사설 클럽에 대해서...(침묵)...
   아, 일부러 뜸들이는 건 아니야. 내가 어디 그럴 성격이니? 귀공자들을 어렵게 모셔 놓고 말이야. 아닐 소리지. 예의가 아니라고. 그런데 듣고 보니 하워드도 자기가 먼저 내게 그 일에 대해서 고백하고 싶어했나 봐. 예전부터 말이야. 입이 근질근질했던 것일까? 모르겠어. 왜 있잖아, 저번에 제임스랑 하워드랑 말다툼했던 일, 기억나지?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나 봐. 녀석도 우리들 편의를 봐주기 위해 같이 만나면 일부러 꺼벙한 척 하고 덜렁대며 지성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긴 하지만 본심은 선하고, 동심은 막무가내고, 순정은 미련하며, 열정은 살짝 괘씸한 진짜 가상한 남자라고. 알고 보면! 터놓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보니 말이 통하더라니까. 아주 잘. 아직 못 다 경험한 일에 대한 동경심도 투철하던데. 왕성한 호기심도 그 고급스러운 화술로 교묘히 감추더라고. 그래도 드러날 껀 어떻게든 드러나는 법, 녀석도 남자였어. 알고 보니 걔도 완전 상남자였다고. 짜식, 웃겼어. 흥! 한집 살아 보고 한배 타 보아야 속을 안다고 녀석이 글쎄나 마초였다니, 오오! 오래 살면 맏며느리 얼굴에 수염 나는 것 본다더니 정말 그런가 봐! 그 간절한 고해를 듣고 보니 난 당황해버리고 말었어. 왜냐하면 녀석은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았으니까. 아직도 세상이 막 궁금하나 봐. 여전히 더 크고 싶어하는지도. 그는 말이야 립스틱 공장을 짓고,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살아 보고도 싶고, 동화책도 써야 하고 모노드라마 주인공도 하고 싶어하더라고. 살살 감수성을 자극했더니 그냥 아주 술술 털어놓드라고. 감동이었어. 최고의 술과 최고의 숙녀를 탁 대령했드니 효과 만점이었지. 그런데 대체 어딜 봐서 최고라고 자부하냐고 그 알량한 허영심 때문에 챙피한지도 모르는 거냐 라는 추궁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주색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넘어가자고. 아무튼 녀석은 스무살 영원한 스무살로 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 했어. 아니, 아니야. 녀석은 그야말로 소년이었어. 팝콘처럼 발랄한 소년. 콜라처럼 짜릿한 소년. 토끼처럼 깡총깡총 종잡을 수 없는 소년. 여자처럼 변덕까지 심한 소년. 음, 정말 그랬어. 하워드의 독백은 가상했고, 난 열띤 감흥에 빠지고야 말았지. 게다가 신비한 비밀 그 경이로운 비밀 클럽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아내고야 말았어. 심지어 중간에 내가 살짝 최면술을 부려서 그로 말미암아 빌더버그 그룹의 모든 정의와 기원과 회원은 물론 극비 사항과 고위급들의 사적 모임일과 장소까지 통채로 알아내고야 말았어. 프리메이슨에 일루미나티에 무슨 위원회니 뭐니 세상에나 아 글쎄, 어머 어머 어머나, 하워드는 말이야 딱 그쪽 전문가였어. 저번에 제임스 늬가 파고 들어서 따졌던 이유를 그제서야 알겠더라고. 녀석도 켕겼던 거지. 과민 반응이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야.
   그렇지만 녀석이 완전 넘어온 건 아니야. 다만 갈등하고 있다는 건 분명해. 우정을 빌미로 협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하지만 어떻게든 종결시킬 필요가 있어. 끝을 봐야 한다구. 실패하던 패망하던 파탄나고 어렵게 모은 재산을 탕진하던 끝장을 봐야 잠이라도 편히 잘 거 같아. 뭐 이미 절반은 고스란히 알려줬고, 염려할 건 없어. 향후 어디까지 드러내느냐 뚜껑을 열고 보니 다 뻥이였드라, 그렇게 희죽희죽 웃게 될 일은 최소한 없을 거라고 봐. 해결의 실마리는 이미 드러난 셈이지. 새로운 아침은 이미 밝아오고 있어. 그럼. 경이롭고 신기했지만 알고 나니 덧없고 허무했어. 뭐 더 자세한 얘기는 우리의 H 양반을 만나서 직접 듣기로 하자.」
   그래서 그들은 H를 만나기 위해서 그날 하루는 M의 집에서 잤고, 하루가 지나서 날이 밝자 출발했다. 축복할 일인가는 불확실했으나 심심함에 허덕이고 권태씨의 분부대로 울상을 짓는 일보다야 백번 나은 일인 것만 같았다.


   5

   그들은 냇가에 앉아 동요를 부르고, 동시를 짓고, 동심에 잠기며, 동화를 읽는 너무나도 귀여운 아동처럼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하염없이 바라다봤다. 그러면서 예전 친구들끼리 모여서 각자 가지고 온 기념물을 냇물에 띄워 보낸 후 그것이 물을 따라 흘러가는 동안 평행선을 이루며 따라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누구는 장난감 배를 띄웠고, 누구는 유리병에 소원을 또 누구는 뭔 속인지 척키 인형을 띄웠을 것이다.
   처음에는 J와 K 그 둘만 있었는데 어느새 인원이 늘어서 모두 다섯 명이 됐다. J, K, A, M, H까지. 장소도 어쩌다가 H의 집 앞 하천 공원에까지 당도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들은 그때 그 놀이를 다시 반복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H가 데려가는대로 따라가기만 했다. H가 친구들에게 뭔가 보여줄 게 있는 듯 했다. 설사 친구들이 놀러오지 않았더래도 자기 혼자서 구경 갔을 것 같은 그런 특별한 공간에 가는 길인 것으로 보였다. 네 명의 친구들이 H를 만났을 때 그는 어쩐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왜 왔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마침 어디를 가던 길에 때마침 먼 곳에서 친구가 찾아온 것이다. 그게 다였다.
   네 친구 가운데 이동 거리가 긴 친구일수록 속으로는 쉬고 싶었을 것이다. H의 집 다락방에서 만화책을 보며 휴식을 취한 후, 그러고 나서 뭘 하고 놀아도 놀고 싶었을 텐데 H는 지금 관대하지도, 경건하지도, 어설프지도, 영 정적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데려가는 H도 그렇지만 따라가는 친구들도 어디로 가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듯 했다. 또 할 말도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얘네는 가벼운 수다보다는 언제부터인지 한 사람이 긴 대사를 뽑는 대화의 방식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똑딱똑딱 쉬지 않고 또각또각 움직이며 핑퐁 핑퐁 오가는 다변보다는 뭔가 수준 높은 대화를 원하는 것 같았다. 참말을 하면 시선을 올려다 보고 거짓을 말할 때는 시선을 내린다, 와 같은 표정과 어조와 몸짓과 화술에 언제부터 이렇게 민감했나 의심이 들도록 말이다. 의뭉스러운 녀석들 같았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각자 조금 뭐랄까 갸륵해진 것만 같았다. 영락없이 돌아이가 되버린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물어봐도 대답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고. 기껏 동문서답이나 하겠지.
   어쨌든 친구들도 인내력이 뛰어났다. H가 인솔하는대로 묵묵히 따라가기만 했다. 지들이 뭔 유치원생들인가? 아니다. 그런데, 그랬다. 일단 믿고 보는 것일까? 그럴 지도! 그런데 왠지 H는 목적지가 어딘지는 몰라도 그곳까지 가는 여정이 별로 능률적이지 않아서 약간 괴로운 듯 보였다. 혹시 그가 이런 심통을 부리지는 않겠지만 어째 좀 이상했다. 너네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왔으니 딜레마는 현실이 됐다, 저 끝이 환상인지 꽝인지 확인이나 해보자, 가뜩이나 재미난 일도 없지 않느냐 라고.
   그는 방향도 꼬불꼬불, 이동 수단도 다양하게, 때로는 카리스마도 내뿜고, 고뇌하는 안색도 비추었다가 억측을 유발하며 목적지에 이르는 길을 파악하며 이동하는 동안 가지가지 하는 것 같았다.
   걸었다가 버스를 탔다가, 쉬었다가 택시를 타고, H의 요트를 타고 이동한 후 어디서 내려 한참을 걸어갔다. 그러나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왜냐하면 최종 도착한 어느 도시 외곽의 변두리에 딱 하나의 고층 건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잘 보니 영화에 나오는 때락 큰 비행물체였기 때문이다. 일명 UFO! 함장은 외계인 선원도 외계인. 아마도. 크기도 그렇고, 무엇보다 두 눈으로 바로 육안으로 똑똑히 코앞에서 보는데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 곧 그것은 진짜였다. 때문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SF 작품에 나오는 비행체는 세 종류다. 첫째 원반형, 둘째 스타워즈형 즉 제각기 이상한 모양. 그리고 셋째, 수직형. 만약 미래에 외계인이 오거나 또는 장래 어느 시점에 미래인이 현재로 놀러온다면 그 방법과 외관과 목적 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대를 충족시킬지도 모른다. 또 못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까지 이루어질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안될 수도 있고. 그래서 대충 지금까지 작품으로 구현된 가상의 UFO를 보자면 그 구분은 대충 저와 같다. 그런데 그게 바로 저 앞에...... 장난이 아니었다!


   6

   중얼거리기도 하고, 소리도 질렀다가 취객처럼 휘청거리기도 했다. 쉽게 말해서 당장 믿었다.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진짜 군인들이 여기 이상은 못 간다며 경계를 서고 있어서 꽤나 흥분됐고 정말 흥미진진했다. 오직 감탄사와 감상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뭔가 미심쩍었다. 어딘가 허구인 듯 했다. 진짜인데 설마 진짜-일까 그런 의구심은 통 가라앉지 않았다. 틀림없이 헛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일단 크긴 컸지만 또 진짜라고 보기에는 썩 크다고 하기도 그렇고 약간 어설펐다. 방식이 익숙했고, 무엇보다 움직임이 없었다. 처음에 예상은 뛰어넘었고, 기대는 능가했으며, 현실성에 대한 상상력을 초월한 점을 한껏 칭찬할 만 했으나 어김없이 미소는 금새 돌아왔다. 그것도 실소로.
   저것은 도시 근교의 짓다 만 부도난 건물이었다. 흉물이네 뭐네 라며 간혹 드물게 발생하는 그런 물건. 어떻게 완성도 안 되고 진행도 어렵고 처리도 안 되는. 철회할 수도 없고, 시간을 돌릴 수도 없으며, 판결과 행정 절차는 흐지부지 심지어 사겠다는 사람도 일절 없고.
   그렇지만 그 어중간한 건물이 예술품으로 활용된 것이다. 투명 망토 기술인가 뭔가로 저층은 구도에서 날리고, 그 위는 어떻게 작업하고, 주변 상황 만들어서 딱 보여주면 처음에는 와~, 헉~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더불어 비슷한 모형이 등장한 영화가 그 지역에서는 개봉이 연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그래도 언뜻 환영이었고, 신기한 요술이었다. 짧지만 그래도 분명 가슴 벅찬 기적이었다. 가짜라도 좋았다. 진짜가 아니라고 무슨 대수고, 알고 나니 역시나-라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처음에 잠깐 사립 탐정을 고용할까도 생각해 봤는데.
   친구들은 서로 눈빛을 교차하면서 그저 웃기만 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리고 남은 일은 하나 밖에 없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


   7

   아무 걱정이 없을 듯한 우리의 풍운아들이 그 작품인지 부도난 폐건물인지 모를 빌딩까지 오는데 어려움은 하나도 없었다. 못 들어가게 막는 사람도 없었고, 갑자기 새로운 일에 말려들지도 않았다. 누구를 만나지도 않았고, 마음이 바뀌지도 않았다.
   그곳은 건물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주차장이었다. 아마 이 건물은 짓다가 부도가 나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공사가 중단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지역 경제는 전보다 약간 침체되었기 때문인지 이런 생소한 황무지에 호기심을 보이며 찾아오는 방랑자도 거리의 인적도 전혀, 거의 없었다. 모든 분위기는 완벽하게 칙칙했으나 뭔지 모를 황량하지만 신선한 기운이 그들을 막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지? 공상과학 판타지 협회에 연락이라도 할까?」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왜 왔지? ...... 아, 잠깐 감동하고서 맞어 맞어. 꼭 영화볼 때는 좋다고 넋을 잃은 채 침흘리며 보다가 돌아서면 악담을 퍼붓는 투덜이처럼 굴지 않기로 해놓고선 말이야.」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난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좋은데. 들어갔다 나와도 달라지는 건 하나 밖에 없어. 그것이 무엇인가는 아직 말하고 싶지 않지만 말이야.」
   「저기 저 나뭇가지인지 뭔지 저거 보이니? 혹시 개뼉다구 아닐까? 아닐 꺼야.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바로 들어가보는 게 어떨까?」
   「그래, 그게 좋겠다.」
   그들이 건물 입구로 가까이 접근하던 중 보니 건물 바로 옆에 웬 경비실처럼 보이는 작은 별채가 하나 보였다. 그들은 그곳에 뭐가 있는지 보고 가야 할 듯 해서 그쪽으로 갔다. 거기는 경비실이 맞았다. 그런데 그 안에는 진짜 경비원이 있었다. 그분은 노인이었다. 그런데 멋졌다. 옷에 휘장이 많이 붙여져 있었고 외관도 깔끔했다. 어쩐지 노인으로부터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경비원은 아마도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작곡한 어느 관현악곡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자네들은 여기에 무슨 일로 왔나? 그분들은 모두 가셨는데. 여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없을 테고. 어떻게 알았지? 자네들도 혹시 무소속인가?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어쨌든 젊은 친구들이 존재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거나 인생의 목표를 수정하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거라면 대환영이라네. 뭐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고 할 줄 알았나? 난 그렇게 심통 고약한 노인네도 아니고, 속으로는 부러우면서 겉으로 추접스럽다고도 하지 않는다네. 새로운 도전이면 반겨야 하고, 알 수 없는 미래라면 기다려지는 법이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참으라고 또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지 않나? 다 알지. 나도 그랬으니까. 허허허!
   여기는 세상의 끝도 아니고 비밀의 궁전도 아니야. 또 역시 난 전설적인 점쟁이가 아니겠지. 당연히 주술사일 리도 없고. 자네들이 영웅이 아니듯이 말이야.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 경우에는 이곳이 어떤 영적으로 뛰어난 에너지를 내내 받을 수 있는 신비한 공간으로 여겨져. 지금 여기서 쪽잠을 자면서 가끔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데 도저히 번득이는 영감의 샘솟음이 멈추지가 않아. 까무러칠만한 천재적인 착상이 막 무궁무진하게 쏟아진다니까. 그래서 지금 이렇게 이 골방에서 3주 내내 곡을 쓰고 있다네. 저기 보이지 않나. 진공관 앰프, 공중 부양 스피커, 마법의 악보 재생기. 그리고 지금 들리는 음악은 내가 어제 완성한 곡이야. 어때? 괜찮지 않나? 따끈따끈한 신곡이라네. 이번에 이거 발표하면 아마 인기를 한몸에 독차지하고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을 꺼야. 왜, 내 말이 믿기지가 않나? 두고 보면 알게 될 꺼야. 말러도 다 내가 가르쳤어, 그 녀석 참 어지간히도 말 안 듣는 장난꾸러기였는데, 많이 컸지. 아아, 반응이 너무 좋으면 어떡한담? 황금마차는 물론 하루 한 명씩 365명의 후궁들이 문제겠어? 기가 막힌 성이라도 사야 하지 않겠나. 그게 다 여기에 뭔가가 있기 때문인가 봐, 그래서 그런가 봐. 정확히 어디서 전파를 쏘는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꿀 같은 탁월한 발상이 쉬지 않고 분출되고 있다네. 허허허!」
    「선생님, 그런데 어, 음,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한마디 여쭙자면, 어, 지금 나오는 음악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작곡한 음악 같은데요... 네......!」
   「아니, 이럴 수가! 자네 내 이름 어떻게 알았나? 오, 신기한데! 와, 놀라워! 우리 악수 한번 하세. (노인은 악력이 대단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불편함이 있었는지 겉으로는 웃고 계셨지만 내심 속으로는 심각한 듯 했다. 또 같이 악수한 A는 완전 울상이었다) 음, 나도 낌새를 느꼈다네. 이래뵈도 내가 눈치가 빨라, 그럼. 이 자리가 욕심나나? 언제 여자친구랑 같이 한번 오게. 대번에 탁 보고 내가 눈치껏 회장님으로 모실 테니 말이야, 굽신굽신 감언이설 딸랑딸랑 그거 내 전공이야. 나 정말 처음부터 이 친구들이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어디서 가르침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영험한 기운이 느껴졌어. 다 알고 있었다구, 저 멀리서 가까이 오는 게 보였으니까, 허허허. 관상도 정말 보통이 아니구만. 어허, 눈매도 부리부리하고, 시대를 잘 타고 났어. 또 잘 컸어. 그래 정말 그래. 지금 우리의 만남도 어째 운명적인 듯 한데. 절대 애정 없는 결혼 생활 뭐 그런 어색함과 애잔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럼.
   혹시 돌팔이라고 오해할까 봐 한마디 하겠네만, 음, 자네 친구 중에 혹시 닉이라고 있지 않나? 있어? 없어? 아니면 하인츠? 뭐 케첩? 뭔가 내 공상 속의 수정구에 읽혔는데, 아닌가, 잘못 읽혔나? 뭐 그럴 수도 있어......」
   여기서 자신이 살리에리라고 말했던 경비원인지 예술가인지 불분명한 노인의 대화 내용을 줄인다. 왜냐하면 그다지 중요한 말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확인할 수도 없고, 어쩜 거의 낭설이나 흔한 풍문 같았으니까. 뜬소문도 아니고 출처도 방법도 어투도 모두 이상하기만 했다. 조금만 더 들어 보면 뭔가 있을 듯한 예감을 덩실덩실 예열시켜 놓기만 했고, 정작 꼭 전달하고 싶은 할 말이자 전하고 싶은 소중한 용건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노신사의 발언 가운데 백미는 그것이었다. 모두 쓸데없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것이다. 곧 닉의 출연을 노인이 맞춘 것이다. 이름까지도. 말하는 동안 계속 우는 아이 젖준다는 둥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둥 말끝마다 친구니 인생이니 세상이니 뭐라 뭐라 하시더니 뭔가 찬사랄까, 어떤 복채에 대한 흥정의 기분을 알아주라고 자꾸 보채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까닭이 뒤늦게 노인과 이별한 후 정문을 통과하고서야 밝혀졌다. 그 결별 다음에 곧바로 재회였다. 닉과의. 즉 그들이 건물의 출입구로 들어가서 1층 대합실 앞에 잠시 멈추어서 그곳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피는 동안 안내 데스크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반쯤 혼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말 까무러치지는 않았다.
   건물 외부의 경비원과 헤어진 후 건물 내부에 들어서니 거기서 혼자 경비원 역할극을 하고 있는 친구는 바로 닉이었다. 오, 저런!


   8

   「얘들아,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걸까? N이 여기 왜 있는 거지?」
   「오늘 아닐까? 오늘 해가 동쪽에서 떴는데 다시 동쪽으로 지지는 않을까?」
   「그러니까 쟤가 여기 왜 있냐고. 원래 우리가 만나러 찾아갈 차례인데 말이야. 의욕을 잃게 만드는군. 사람 허탈하게시리.」
   여섯 명 친구들은 이제 제임스를 만나기 위해 건물의 제일 윗층까지 올라갔다. 건물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계단을 이용했다. 그들은 스카이라운지에 도착했다.
   그 층은 다른 층도 그렇겠지만 내부에 아무런 집기가 없었다. 하지만 저 끝에 책상이 하나 보였고, 그 앞에 소파들과 탁자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가까이 그곳으로 접근하는데 한참 걸렸다. 책상 앞에 가니 푹신한 사무용 의자 하나가 있었고, 사람이 앉아 있었으며, 그것은 뒷모습만 보였다. 뒷모습? 응. 그러더니 의자가 180도 빙글 돌더니 그들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그는 제임스였다. 변장한 누구도 없었고 속임수도 없었다. 가제트 형사의 앙큼한 고양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침묵을 고수했다. 그리고 정적만을 강조했다. 너무 허무하고 너무 재미없는 일이라서 비공개로 남겨놓을려다가 그것도 왠지 그릇된 처사일 꺼 같아 사실을 밝히는 바이다. 있는 그대로. 지금 이 장면이 훗날 어떤 사건과 연관된다거나 당분간 여기가 그들의 아지트로 쓰이는 그런 잠꼬대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아조 그냥 썰렁한 분위기와 냉혹한 효과음만이 흥건했다. 즐거움은 아득했고, 기쁨은 먼 나라의 얘기였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남은 행선지가 하나 있었다.
   하워드가 알고 있는 비밀 사조직. 그들은 그곳을 향해 떠났다. 곧 그 상황에서 진행 방향 그대로 7+1을 향해 가느냐, 모두 흩어지느냐, 아니면 다시 거꾸로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집으로 돌아가느냐, 그 가운데 첫째 방법이 선택된 것이다. 와우~ 와우~ 와우~ 와우~!


   9

   「말했냐?」 H.
   「뭘 말해?」 M.
   「말 했냐고. 저번에 너한테만 들려준 그 얘기.」 H.
   「그럼 말했지. 말하지 말라는 말, 너가 한적 없잖아?」 M.
   「그걸 말하면 어떡하냐 이 멍충아! 그냥 우리끼리 웃자고 한 얘긴데. J 몰라? 또 믿는다니까. 아 정말 미치겠네. 얘 정말 큰일낼 애네.」 H.
   「그게 뭐가 웃자고 한 얘기야? 난 지금도 그때 당시 설레던 가슴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는데. 지금 우리 그곳으로 가는 거 아니냐? 쟤들 봐봐. 지금 우리를 멀뚱히 쳐다보면서 뭐라 그러겠니? 또 그런 신기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실을 알려주면 얼마나 실망하겠어? 그냥 체념하고, 쿨하게 털고 웃을 꺼 같아? 내가 봤을 때는 뭐라도 하긴 할 꺼 같은디. 무엇보다 나도 믿으니까 조금 강조하고 살을 붙여서 얘기해준 것 뿐이여. 알겄냐? 그게 다랑께. 그래. 그게 다라고.」 M.
   「너 바보냐?」 H
   「내가? 아니. 난 천잰데. 늬가 바보 아니냐?」 M.
   그들 일행이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H와 M은 잠시 할 얘기가 있다면서 다른 친구들을 주차장 저 멀리로 먼저 보낸 후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분위기 심각해졌다. 그들을 보는 친구들도 몹시 궁금해서 자기들끼리 쟤들은 무슨 일로 저리 옥신각신하고 있는지 추측하고 상상하며 슬슬 즐거운 몽상에 편승하고 있었다. 반대로 H와 M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사태가 호전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 정말 왜 그래? 어?」 H.
   「뭐가 왜 그래? 늬는 진짜 왜 그러는데?」 M.
   「왜긴 뭐가 왜야? 다 뻥이라니까. 모두 다 거짓말이라고. 몇 번을 말해!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구먼. 꽉 막혔네. 나 원 참, 답답하다 답답해. 아아, 우우, 오오! 우리가 나눈 잡담은, 모두, 농담이었어. 농-담! 어? 내가 다 지어낸 가짜라고. 그런데, 그런데 늬 말발에 진지하게 쟤들에게 말하면 귀얇은 저 녀석들은 이제 막 공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미 파랑새는 찾은 거나 마찬가지라면서 로또 복권 당첨금을 받으면 그 돈으로 뭘 할지 고민하고 있을 텐데, 이게 아무 일도 아니야? 어? 너 어쩌다 이렇게 사람이 무책임하게 변했니? 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사람이 그렇게 변했어? 어? 너, 순진했잖아? 어? 너 옛날에 이런 애 아니었다고! 사익을 추구하며 성공에 도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멀쩡한 밥벌이를 하다가 별안간 비영리 조직에 뛰어들게 된 계기 같은 깨우침이라도 있었니? 특별한 사건 그런 거. 아니잖아! 애절한 사랑에 실패하여 타인을 돕는 과업에 종사하게 된 것도 아니고, 왜지? 내가 아는 트라우마는 딱히 없는데... 여성 잡지 1에서 2로 변하는 동안 겪게 되는 매우 드문 비참함이랄지 앙칼진 다짐 같은 일을 바보처럼 풀어낼려는 의도도 아니야. 넌, 음, 아무래도 넌 그냥 바보 같아! 나쁜 뜻으로 멍청이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을 연필로만 쓸려고 하는 바보, 바보만 빠진다는 사랑을 애달파하는 그런 바보. 너 최근 그런 꿈 꾸지 않았냐? 꿈에서 시험 같은 거 봤지? 남들은 다 OMR 카드에 전용펜으로 기입하는데 너는 초-미세한 뾰족 샤프펜슬로 입력할려니까 진땀을 빼다가 그러다 시험장이 아르키메데스의 목욕탕으로 바뀌는 그런 꿈. ...... 어째서... 기억나니? 알잖냐, 늬 별명, 머쉰! 내가 그거 괜히 지어준 게 아니라는 거, 다 알잖아? 아아, 마력도 있었어. 그렇다구.」 H.
   「잠깐만! 늬가 했던 얘기들이 다 지어낸 허구라고? 진짜야? 정말이냐고. 정말 다 뻥이었어? 진짜 아니었어? 난 찰떡같이 믿었는데! ...... 그래서 생각하는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고. 오, 이럴 수가!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어? 어떡하지? 어?」 M.
   「어떡하긴 뭘 어떡해! 사실대로 말해야지.」 H.
   「안 돼. 그러면 안 된다니까. 저들의 순수한 그 천진난만한 눈망울을 보면서 그들의 청초한 꿈을 깨트리라고? 난 못 해. 할려면 늬가 해! ...... 아니 그냥 이대로 갈까? 그냥 방향을 틀까? 뭐 나체교 그런 게 진짜 있다고 꼬드길까? 어때? 어? 대충 그림 그려지지 않냐?」 M.
   그들은 끝끝내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 입에 맞는 떡은 없다더니 진짜 없었다. 가만 있는 들판을 원망할 수도 없었고, 인생이 자꾸 꼬이는 것만 같았다. 세상은, 일생에 한 번은 좋은 날이 있다고 하는데 그 좋은 날은 오늘이고, 오늘은 바로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일곱 명의 친구는 멍하니 터벅터벅 걷고만 있었다. 그때 저기서 왠 마을버스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섰다. 거기가 마치 정류장이고, 그들은 한참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친구들은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는데 H와 M은 심상치 않은 눈빛이 오고가더니 자연스럽게 탑승하자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먼저 차에 탔다. 그러니 친구들도 따라서 승차했다. 그리고 버스는 출발했다.


   10

   버스에서는 모차르트의 어느 오페라 아리아가 틀어져 있었다. 빈자리가 적당히 있었고 승객도 그랬다. 그런데 어째 이 차는 마을버스가 아닌 듯 했다. 그리고 벽에 붙여진 행선지에는 선명하게 어떤 세상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고단함을 전해주는 듯한 명칭이 또렷하게 적혀있었다. 천국 아카데미라고!
   그래서 이번에는 H가 긴장했다. 바싹 목이 탔다. 식은땀도 났다. 혹시 저건 정신병원의 이름이 아닐까, 라고도 생각했다. 대책은 없었다. 일이 어떻게 되가는지 종잡을 수도 없었다. 염두에 둔 복안도 없었다. 갈 데까지 가 봐야 할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물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장나도록 거짓을 참이라고 우겨야 할 어느 선량한 책임감과 신비로운 직분을 느꼈다. 그는 혹시 어쩌면 인생은 정말 별거 없다는 말이 썩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라는 심상이 대두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주사위는 던져졌나 보다. 선택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나버린 듯 했다. 하지만 다가올 축복이 행운일지 불행일지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뭔가 께름직한 의심은 결코 잦아들지 않았다. 설마 이건 몰래-카메라일까? 뭔 카메라? 그건 TV에나 나오는 쇼일 뿐이다. 그들은 코메디언이고 연예인이며, 자기는 예술가고 친구들은 그의 뻥에 쉽사리 속아넘어간 우매한 소년이었다. 미련은 먼저 나고 슬기는 나중 난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그런데 또 청춘의 마성에 힘입어 스무살에서 점점 나이가 어려져서 전기 기타의 플랫을 깎는 조각가가 된 듯한 감성도 느껴졌다. 어디로 가든 지옥만 아니면 되고, 장래의 결과는 개 콧구멍으로 알고 현재를 즐기면 그만인 것 같았다. 이 세상에 좀비가 어딨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최종 목적지는 아마도 환상 학교일 것이다. 행복과 낭만과 신비가 그들을 영접할 것이다. 끝장나게 말 잘 듣는 나체교도들과 알현할 수도 있다. 미지와 비로소 조우하게 된다고 이미 맹신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도착할 곳은 실망과 좌절과 비현실보다는 청혼과 장미와 왕관과 회전목마와 시인의 분위기와 가까울 것이다. 기쁜 기대감은 엔돌핀을 불렀고, 그의 연인 도파민은 즐거운 예감과 왈츠를 추고 있었다. 대망의 실현이 눈앞에 당도한 듯 했다. <사랑은 없다─사랑을 믿는다─사랑은 꿈이다>가 영원한 사랑으로 재탄생할 것만 같았다. 옷이 날개란 말은 진짜였다. 약간 의자에서 2~3센티미터쯤 공중부양이 된 듯 했다. 이제 유체이탈만 기다리면 될 일이라고 여겨졌다. 독심술을 터득했다. 백안의 신이 됐다. 천리안은 기본이고, 큐피트의 화살은 다름 아니라 바로 윙크였다. 하트 뿅뿅, 애인이 되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애처로움과 모든 숙녀들의 애달픈 마음과 고고한 아가씨들의 부적절한 흥분감과 연정을 인정사정없이 모두 빨아들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지 말란 법도 없다. 이미 마음이 보이고 생각이 읽혔다.
   차 창밖으로는 첫사랑의 미풍이 불었고─이성을 처음 만날 때는 항상, 당신은 나의 첫사랑이라는 단골 유행어처럼─첫키스의 오색찬란한 꽃들이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고양이가 인간의 말을 했고 새들은 유행가 곡조를 부르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천사의 미소가 보이는 듯 했다. 온갖 선녀들이 대기중일 것이다. 꿈을 초월한다 초월한다. 포근한 포옹에 정신이 혼미하다 혼미하다.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다 없다. 어여쁜 내 님과 춤을 춘다 춘다. 만물은 새로워진다 새로워진다. 지겨운 일상이 재미있어진다 재미있어진다. 권태도 흥미롭다 흥미롭다. 인생이 신기하다 신기하다. 세상은 놀랍다 놀랍다. 달은 수줍어하고 별은 부끄러워한다. 그대는 한떨기 장미다 장미다. 당신은 머리에 꽃 꼿았다 꽃 꼿았다. 나체의 축제 그 한복판에 당도하는 상상을 한다 상상을 한다. 날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모두 다 사랑하리 사랑하리.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사랑한다. 구름을 탄다 탄다. 너는 선풍기고 너는 진공청소기고 너는 환상 복권이고, 너는 마침내 머신이다 머신이다. 흉내내는 것이 즐겁다 즐겁다. 따라하는 것이 기쁘다 기쁘다. 사람은 아름답다 아름답다. 하늘에서 햄버거가 내린다 내린다. 화장하면 예뻐진다 예뻐진다. 당신은 젊어진다 젊어진다. 나 잡아봐라 나 잡아봐라. 동심을 찬양한다 찬양한다. 허풍의 귀재가 된다 귀재가 된다. 그것도 어디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독보적으로, 경이롭게. 요술의 신이 된다 신이 된다. 슬픔의 눈물조차 다이아몬드로 변한다 변한다. 예술은 길고 인생도 길다 인생도 길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시선을 마주친다 마주친다. 포옹한다 포옹한다. 키스한다 키스한다. 애무한다 애무한다. 옷을 벗는다 벗는다. 안는다 안는다. 부드럽다 부드럽다. 포근하다 포근하다. 아늑하다 아늑하다. 흥분된다 흥분된다. 미치겠다 미치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런, 젠장~!
   버스는 종점에 도착했다. 깊은 산 속에 공장도 아니고 학교도 아니고 마을도 마술 교습소도 아닌 어느 이상한 건물이 보였다. 이때 버스 기사 양반이 일어나서 문을 열고 뒤돌아선다. 그리고 감미로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천국 아카데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순간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이 기절했다. 왜냐하면 운전수의 이마에 눈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H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잠시 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깨어난다. 그래서 툭툭 털고 일어나서 차 바깥으로 나가며 하얀 봉투를 건네 받는다. 안에 돈이 들어있을려나...? 무슨 수당인가? 그럴 지도!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친구들은 모두 지고지순한 기쁨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따라서 이제 남은 일은 깊은 숲 속에 위치한 요양소에서 H를 교주의 왕좌에 앉히고 한바탕 쇼를 연출하는 일만 남았다. 나체교? 쉿! 지금은 1차 실신, 그때는 진짜 2차 (떡)실신!
   그러나 계획은 변경되었다. A 계획은 무산됐고, 계획 B가 선택됐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11

   원래 세웠던 계획은 이랬다. H를 놀래켜주기 위해 다시 그 버려진 건물로 가서 꼭대기층에 올라가 의자에 앉히기. 그러나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방치된 건물까지는 잘 왔는데, 그런데 그것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짜 하늘에 띄워졌기 때문이다. 미완성 건물은 더이상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또 뭔가 속임수가 있지 않을까, 없었다. 아예 의심도 할 수 없었다. 너무 빈틈없는 실제라서 뭔가 억울했다. 그러나 여기서 H는 미리 작은 불가사의에 대해서 기절이라는 선행 체험을 했기 때문에 일종의 예방주사를 맞은 것처럼 또 무슨 장난이 있겠거니 예측하면서 외계인아 나와 봐라 우리 같이 놀아보자 하면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진짜 어안이 벙벙해지면서 자기들이 어디 잡혀가는 것은 아닐까,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당혹감을 넘어서서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신비감이 그들을 감싸안았고, 온몸의 털이 삐쭉 서는 것만 같았다. 모험이고 뭐고(나발이고?) 일상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미스테리, 안중에도 없었다. 심심함이 그리웠고 따분함이 좋았다. 오오, 지겨움이야말로 천혜의 길조였다니! 그 일은 도저히 분수에 맞지 않는, 인간의 율법으로 이해되지 않는 어느 우주의 섭리가 느껴지는 장엄한 일이었다. 이건 진짜 저편의 신호일까? 다시, 다시 SF 영화 시리즈를 탐닉하고, 엄한 낭설들을 찾는 탐구 생활에 빠지고, 불가사의에 대한 정보를 탐지하며, 신비주의를 탐색하고 예언가를 찾아 오지를 탐험해야 하는 것인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아차 낙원의 변방 역시 탐문해야만 하나, 생각이 많아졌다. 아마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재탐방하러 온 것일까, 탐사할 구실이 필요했나, 라면서. 모두들 왜 하필 우리야, 그랬다. 그러나 H는 무덤덤했다. 그냥 배가 고팠다. 피자도 먹고 싶었고, 고기도 먹고 싶었다. 정말 이 지구상에 괴생명체가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되는 일이다. 달의 내부 공간이 비었다고? 웃기고 자빠질 억측이다. 진짜 엑스맨이 지구인으로 살면서 외계에 정보를 전달한다고? 그건 억지고 그건 꼬마조차 믿을 수 없는 뻔뻔한 거짓이다. 그런데 저건 대체 뭐란 말인가? 눈앞에 떡하니 떠있는 저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냔 말이다. 멋졌고 경이로웠으며 신기하고 놀랍고 무한정 신비로웠지만 뭔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짐짓 다시 천동설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모른 채 하며 집으로 직장으로 현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허나 싱그런 복숭아빛 탐스런 사과향의 저녁 노을은 멋졌다. 별도 총총히 빛나기 시작했다. 꼬마들이 도화지에 그린 그림도 아니고, 어른이 백지장에 끄적거린 낙서도 사랑의 속삭임도 꿀밤맞기 내기도 아닌 도저히 어떻게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이었고, 코앞에 실존하고 있었다. 인정한다. 인간은 침팬지의 사촌이며, 기린과 코끼리와 하마와 고래를 보면 약간 공룡의 기분이 든다는 점은. 그러나 녀석들은 공룡이 아니다. 그들은 멸종했고, 무거운 건물은 하늘에 뜰 수 없으며, 사람은 물위를 걷는 게 불가능하다. 이건 설마 마술일까? 설마 저건 웜홀인가? 낸들 아나! 무슨 반물질 그런 거? 다 이론일 뿐이다. 아니면 그들이 미쳤나? 멀쩡했다. 당분간은 특정 장르의 예술 작품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단 자리를 뜨기로 했다. 팔자 소관으로 부닥친 우연도 아니고 운명의 장난도 아니다. 숙명이란 단어도 짜증난다. 그런데 초현실이다. 와우! 앗, 잠깐... 그러면 내일부터 갑자기 없던 초능력이 생길까? 아마도 희망 사항일 것이다. 설명이 불가능하니 자리를 피하는 게 옳은 일인 것 같았다. 만약 상대편과 만나게 된다 해도 차라리 오해의 소지를 만들지 않는 것이 현명할 듯 하다고 생각했다. 장난스럽게 또 예술적으로 상상하고 꿈꾸며 바래왔던 그런 동경심과는 어쩌면 전혀 다른 무언가가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하게 엄마나 아빠와 사랑하는 그대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추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자신들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파다닥 떠오른 직감 때문일까?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런지는 몰라도 이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만 같은 황홀한 느낌에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더불어 그들은 이 추상적인 사건에 대해서 평생 함구하기로 결의했다. 그걸 뛰어넘는 뭔가 의미심장한 까닭이 있다면 몰라도. 또 하나. 소년이 되기로 결심했다. 다시 더 하나. 계속 하나 더. 이 비밀을 평생 추적할 것. 성과는 기대하지 말 것. 그러나 잊지도 말 것. 지구에 대한 신비감이랄까 어떤 모종의 호의가 많이 증가했다는 것. 언제까지 갈지는 몰라도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체가 한층 더 좋아졌다는 것. 예쁜 꽃 한송이도 들꽃도 잡초도, 쉬운 단어와 어려운 어휘조차 영혼이 있지 않나 조심스러워졌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이 번득이는 영감을 화폭에 담거나 글로 쓰거나 음표로 옮기기 위해 현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워드의 집에서 카드 게임을 한판 하고 각자 생활로 돌아가기로 했다. 한겨울에 봄바람이 불었다. 훈훈했다. 꽃이 만발했고 나뭇잎은 푸르렀다. 하늘은 노랗고 먼 산은 파랬다. 그들이 본 기적이 행여 꿈은 아니기를 빌었다. 집힐 듯 집힐 듯 거의 집힐 듯 하다 잡히지 않는 선망이 진정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억뿐이나마 즐거웠고 어딘가에 고마웠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드디여 순간은 영원이 되었다. 마침내 시간이 엄청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나 기뻤다. 찬란했고 전율했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가슴이 떨렸고 두근거렸다. 코끝이 찡했고, 감동이 밀려왔다.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환청이었다. 환호성을 외치는 열광하는 관중이 보였다. 환시였다. 상상이 현실을 요리하는 듯 환각에 몸이 떨렸다. 그러나 그 모든 게 헛것은 아니었다. 또 동시에 헛것이었다. 마침내 그 언제까지라도 간직하고픈 하나의 비밀이 생긴 것이다. 섣불리 발설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몰래 흘린 눈물, 찬미할지어다. 설혹 가난한 시기를 거칠지라도 더 이상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라도. 이것은, 그것은, 이 경험은 바로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가 드리겠소, 와 같은 사랑이었다. 지금 장난하냐, 너 바보냐, 그런 물음은 쏙 들어가버린 것이다. 어느새. 어쩌다가. 저절로. 우연히 말이다. 아득했다. 그들은 나비가 되었다. 아이언 메이든! 제2의 자아는 탄생했고 날개를 펼치고 너른 세상으로 날아가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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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88

from 소설 2017. 1. 15. 14:49

   1

   천의무봉.
   천사의 옷을 꿰맨 흔적은 없다는 뜻. 직접적인 뜻은 그렇고, 다른 의미는 이렇다. 완전무결하다, 완벽하다, 세상사에 물들지 아니한 어린이와 같은 순진함.
   어쩐 일인지 나는 책에서 저 낱말을 읽고 맑은 청량감과 비단결 같은 오페라에 나오는 소프라노 아리아를 무반주로 듣는 듯한 환각에 빠졌다. 그러나 그 다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삶의 어떤 문제점이라고나 할까, 뭔가 부족한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슬픔 같은 과일향과 무지개와 황홀한 선율 같은 요소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불분명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고민 끝에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외국어를 학습할 때 나오는 초보 단계, 그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는 동사에 대한 내 의지를 고수하고, 동물에게 의탁했다가 이웃에게 베풀고 친구에게 호의를 요구하며, 흐뭇한 감동과 약간의 쾌락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때문에 결국 난 지금 글을 못 쓰며 헤매고 있지 않을까 라고. 그러면 수동태든 능동태든 그 동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이렇다.
   머머 해야 한다, 머머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머머 하고 싶다, 머머를 원한다, 머머를 바란다, 머머가 좋다, 머머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욕구와 이타주의적 성향, 인간적 욕망, 더 나아가 썼다 지웠다 불렀다 말았다 떠올렸다 참았다 하는 이름에 관한 무엇.
   빙빙 돌려서 말했으나 그것은 두 마디로 욕구 불만, 한마디로 심심하다-였다. 그러나 나는 너무 쉽게 딱 그렇다고 인정하기는 싫었다. 왜냐하면 어딘가 모르게 그걸 인정해버리면 어쩐지 다음 문장이 맞다고 묵인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주늑들게 될까봐, 그래서 조바심에 괴롭힘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 문장? 인생은 단순하고, 사랑은 없고, 청춘은 한시적이고, 행복은 물거품이며, 욕심은 금물, 자랑할 일은 드묾으로 모자라 완전 메말랐으며, 신비주의는 끌려갔고, 금욕주의는 인기가 좋고 신수 훤하며 유행을 잘 갈아타고, 호사는 사양할 일이며, 너는 결국 욕망의 포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전주곡이 선행됐기 때문에 나는 다음 세 가지 할일을 정할 수 있었다.
   첫째, 박물관 구경하기. 둘째, 일광욕 하기. 셋째, 무인도에서 살기.
   1번은 그곳에 가면 어쩜 이런 혼잣말을 내뱉으며 탄성을 자아낼 일이 혹시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 독백은 이것! 박물관은 살아 있다. 원래 살아 있는데 잠깐 잠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한 번 가서 확인해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번. 2번도 어렵지 않다. 게다가 예전부터 내내 궁금했다. 대체 몸에 열이 얼마나 많아야 꽤 쌀쌀한 날에 해변가 모래밭에서 수영복만 걸치고 눕고 엎드려서 일광욕을 할 수 있는지가. 준비물, 많이 필요하지도 않다. 가면서 나무 막대기를 두 개 줍고, 도착해서 그걸 꼽고 줄로 잇고, 입던 옷을 걸쳐서 그늘을 만듬. 선그래스 필요함. 음악은 핸드폰으로 바닥에 깔 모포는 손수건으로 대신하고, 소풍갈 때처럼 읽을거리와 먹을거리를 갖고 가면 된다. 그리하여 내가 직접 하고 보니 어떻드라, 그 결론은 쉽게 나온다. 그래서 나는 당장 시도했고, 답을 얻었다. 구체적인 체험 내용은 밝히지 않겠다. 재미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비밀이 있어야 멋스러울 것 같기 때문이다. 뭔 노출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과거를 아무 곳에나 알리고 내 알몸을 누구에게나 보여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소? 그렇게 1번과 2번은 끝났다. 문제는 3번이다.
   3번은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러나 인간은 불굴의 의지로 작품을 완성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여 깃발을 꼽는 존재다. 나도 그처럼 시행 착오가 반복되더라도 여러 번 시도했다. 3번을.
   아마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무엇이냐면 무인도에 가져갈 3가지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그 다정한 대화를. 그 포근한 분위기를. 그 아늑한 상상을. 그 '만일'과 '나는'이라는 달콤함을. 그 감미로운 떨림과 은근한 흥취를. 유능하지 않아도 되고 어느 유복함도 신기한 행운도 모두 필요없는 그 따사로운 변론과 시원스러운 경청과 때로는 감상하며 때로는 시샘하는 바로 그 친밀한 담소의 소재를 말이다.
   나는 그것을 실천했다. 시도했다. 과감한 행동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식함과 용기의 차이를 신실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지금 내가 해야 할 적시의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발생한 것이다. 때문에 운명과 숙명의 차이점, 몰라도 그만이었다. 그래서 감행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는 그것에 중독됐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일부일처제라는 신성한 규칙이 존재하지만 저 3번은 아무런 율법도 형식도 문법도 제한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한 번의 인생을 살며, 태양계에 태양은 하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제나 굴레가 없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렸고 어디에 살고 있는 모나리자는 하나의 빛이 아닌 수많은 광채의 방향 때문에 그 신비로움이 훨씬 화사해진다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가까운 무인도를 하나 정하고, 물건을 챙겨서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집에 왔다. 또 다시 갔다. 또 다시 왔다. 나는 그렇게 꿈을 가지고 마치 밥 먹듯이 무인도에 갔다 오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2

   나는 책을 갖고 가서 무인도에서 책만 읽었다. 때로는 노트북을 갖고 가서 소셜 네트워크를 구경하고, 최신영화 예고편과 전편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무인도에 살림을 차리지는 않았다. 일회성을 즐겼다. 하지만 방탕의 길로 빠지지도 않았다. 무인도 탐험하기는 내 허영심을 살며시 충족시켜 주었고 내 감수성 역시 잘 길들여 주었다. 이쯤하면 됐다 라는 이성을 나는 잃어버렸다. 어떤 날은 모닥불을 피우고서 마네킹의 빈잔에 술을 따라주며 노래도 불렀다. 그곳에서는 내가 왕이고, 내가 지존이며, 내가 주인공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낮에 스타였고, 해가 지면 밤의 황제였다. 나는 자유로웠고 나는 빠삐용이었다. 둔갑술은 불필요했다. 나를 꾸미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는 미래를 점치는 운세의 제왕이었고, 거룩한 동화 속 마법사였다. 그곳은 하늘나라 나는 화신, 우리는 친밀감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점점 지쳐갔고, 권태는 나를 찾아왔다.
   나는 깨달았다. 진정 무인도에 가지고 가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의 의견은 일부 공통된다. 아마도 상징적인 환상머쉰 진공청소기를 들고 가겠다는 그런 얼빠진 소원을 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환상머쉰인 세계 최초 진공-흡착 거시기, 그 머시기는 여자의 내숭 만큼이나 후보 물망에 오를 가망성이 크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를 데리고 가고 싶어하는데 정작 누구가 그 의견에 동의할 것인가는 썩 확답을 얻기에 곤란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건보다는 사람에 대한 집착 그 인기가 확고부동할 것이라는 예상은 불을 보듯 뻔하다. TV를 가지고 가겠다, 아니다 라디오가 있어야 한다, 그보다는 악기가 필요할 것이다, 도화지와 크레파스가 있어야 한다 라며 말이 많겠지만 물건이 아닌 사람이 꼽히기도 한다. 누구를 좋아하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겠다, 너무 재밌고 정말 유쾌하고 항상 즐거운 누군가를 데리고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바로 그렇게. 따라서 나는 같이 갈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지금은 <머머는 없다>가 왠지 내 특명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지금 시기는 블로그만 해야 한다는 듯한 착각 때문에─이처럼 새로 생긴 취미를 마칠 시기가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머머 접습니다 라고 어디에 공표하지 않아도 된다. 정리할 장비도 없었다. 뭔가 아쉬움은 남았다. 그래서 나는 최종 여행을 마지막으로 무인도 텀험과 작별하기로 다짐했다. 그리하여 나는 무인도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3

   그날은 썩 기억에 남을 만큼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했고, 아침이었다. 나는 집을 나왔다. 그리고 내 차가 세워진 공터로 이동했다. 바로 그때,
   나는 길에서 넘어졌다. 누군가 내 발을 걸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내 발을 걸었고, 내가 넘어지는 순간 재빨리 나와 바닥 사이로 자기 몸을 집어넣을려는 시도를 했다. 설마 입을 갖다 댈려고 했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계획을 실패했고, 꾸민 일의 의도는 불투명했으며, 책임 소재도 불명확했다. 그래서 결국 사과는 내가 했다. 미안하다고. 그분도 나를 따라했다. 괜찮냐고. 실망한 기색을 숨기고 싶어했으나 그는 연기에 미숙했다. 왜냐하면 나는 자기가 예상했던 유명인이 아니었고, 괜한 소동에 심신이 피로해졌기 때문이다.
마치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뭐시여! 그분이 아니잖아! 에잇, 망했다!」
   괜히 내가 다 미안했다. 나랑 부딪혀서 같이 넘어졌던 분은 글쎄 소녀였다. 그녀는 내게 입술을 갖다 대고 나랑 결혼할 모략을 애초에 준비했을까? 나를 롤리타로 아시나? 아니 자기 자신이 그 역할을? 그런데 정작 부딪힌 인간은 그냥 꺼벙한 동네 아저씨? 완전 꽝이군, 그랬을지도. 그러나 사람의 뇌에는 오직 얼굴 표정만을 관찰하는 일만 하는 부위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법, 나는 그녀의 생각을 대략 예측하는 데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약간은 저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괜히 엄한 정보를 믿고 잠복 근무를 한 결과가 결국 이런 파국이었냐며 적잖이 실망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은 그 어느 추첨권도, 행복한 비명을 지를 일만 남은 행운권도, 정성껏 건네는 마음을 담은 아무런 선물도 그녀에게는 현재 무용지물인 듯 했다. 체념하는 순간에는 모른 척 하고, 상심하는 마음은 회복되기를 기도하면 그만이었다. 원래 이런 친구들은 언제 갑자기 기분이 좋아질지 모르니 그냥 대충 형식을 갖추고 예를 차린 후 어물쩍 넘어가면 그만일 것이다. 어차피 시간 지나면 깨닫게 마련이다. 시간 지나면 추억 속의 그분은 잊고 타인이 꿈꾸는 야망의 조력자도, 염문의 단역도 아닌 내 사랑의 주인공을 열연하도록 운명론은 이미 순풍에 힘입어 항해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이런 사춘기 소녀의 미래는 말이다.
   딱 하루 지나면 얘는 아마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 궁전을 먼저 볼까 어떤 성당을 누구와 함께 구경할까. 얘가 생각하는 낭만은 개똥 철학이고, 맞은 새똥은 좋은 일이 생길 징조일 테고, 꿈은 너무도 많고 완전 없던가 밝히기 곤란하던가 또는 너무도 자주 변할 것이다. 어쨌든 얘랑 나는 인연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나중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나 없이 그 친구와 헤어진 채 마지막 무인도 기행을 떠났다.


   4

   마지막 여행에 동반자는 없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누군가가 변덕이 심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된 거다. 그러나 최후의 소장품 그것은 있었다. 잠망경. 잠망경? 아니 그 낱말은 무슨 관찰 대상을 숨어서 보기 위해 90도로 틀어서 물상을 보는 그런 도구인데, 이건 아니다. 아, 이름을 정정한다. 그것은 망원경이다. 내가 마지막 무인도 놀이에 가지고 간 물품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망원경. 장황한 모델명은 생략한다. 적당히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따라하다가 고기 구워 먹고, 텐트에서 하루 쉬었다 오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떻게 해서 무인도에 도착했다. 할일은 대충 끝냈고 요기도 해결했다. 이제 새로운 행성을 발견할 차례였다. 언더그라운드에서 활약하다 단번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연예계 건너뛰고 바로 과학계를 접수할 차례였다. 망원경을 하늘로 향했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설명서대로 했는데 뭐가 잘못된 건가? 아니다. 날이 흐려서 그랬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다. 근처 가까운 무인도 2를 살펴보기로 했다. 그런데 망원경의 비율 조정하는 것을 깜빡했다. 조절했다. 촛점도 정확했다. 건너집에 새로 이사온 숙녀의 나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망원경 렌즈가 무슨 고색창연한 초상화도 아니고 오늘인가 어제인가 집 앞에서 만난 그 소녀의 얼굴이 이따만하게 망원경에 잡히는 게 아닌가. 혹시 얘도? 나 따라하는 건가?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냥 우연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잊었다. 그건 마치 옆집에 누가 산다, 그런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용납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머머할 수 있다, 그렇게 백 번 되뇌어도 모자랄 판에 머머할 수 없었다? 그냥 넘어가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현실이 변심하기 전에, 미래가 마법을 부리지 못하도록 나는 그녀의 농간을 확인하고 그것이 퇴폐미든 순정이든 숨겨진 비밀과 탄복할 작전과 탄식할 예지와 함성을 부르는 은총의 운명이 무엇인가, 를 당장 확인해야겠다며 다시 망원경 앞에 섰다. 손끝에 땀이 나고 복에 겨운 짝사랑이 생각날 듯 했지만 뼈저리게 현재에 집중하여 나는 망원경 들여다보기를 결행했다.
   아뿔사!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무인도 2에서 그녀는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무인도 1을 정탐하기 위해 내쪽으로 망원경을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제 난 어떡해야 하지... 하면서 나는 안절부절 불안해 하며 떨기 시작했다. 내적 갈등은 시작된 것이다. 막이 올랐다. 드라마는 시작됐다. 절정으로 치달을 험난한 모험의 여정은 상상되고도 남았다. 지지부진한 인생에 꽃이 피기 시작한 것인가? 아담이냐 이브냐, 선악과를 따먹느냐 따먹히느냐 새로운 에덴의 동쪽으로 떠나느냐, 둘 중 하나 셋 중 하나만 택하는 일이 남았을 뿐이다. 두고두고 후회할 수도 있으나 막다른 길이었다. 장르는 정해졌다. 동화책은 덮고, 어린이 드라마는 거쳤다 치고, 사춘기 건너뛰고, 파란만장한 청춘 시절은 만끽한 걸로 치부하고, 어쩌면 이건 마지막 전성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평탄한 여정은 재미없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막상 인생의 돛대에 격풍이 불어닥치니 심각한 표정은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었다. 자, 해는 또 다시 떠올랐다.
   나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그 옆에 어깨를 활짝 펴고 섰다. 고개의 각도를 바꿨다. 눈을 감았다. 인상을 썼다. 숙명을 자각했다. 그리고 상상했다. 저쪽에서 곧 무인도 2에서 그녀가 들여다보는 망원경 렌즈에 나의 이런 모습 그 엄격한 태도가 상이 맺힐 것이라고. 그녀가 놀라는 광경, 안 봐도 훤했다. 운때는 지금이다. 지난 삶은 소꿉장난이었다. 주위에 환상의 마성이 맴돌고 있었다. 기상의 깃발이 펄럭였고, 소프라노는 흐느꼈으며, 그녀의 실크 블라우스를 벗겨 세탁소에 맡겨야 할 것 같았다. 왜냐고? 나도 모르겠다. 별들에게 물어볼까? 나중에. 마음은 물론 몸까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아슬아슬한 순간이다. 격심한 흥분이다. 너무 심취하여 참으로 빠져나오기 힘든 장면이었다. 앞으로 닥쳐올 일은 무엇이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수선스러웠지만 거룩했다. 여인의 향기가 느껴졌고, 마음의 열정은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었으며, 쾨헬 87번 폰토의 왕 미토리다테의 어느 아리아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가능한 한 서서히? 아니면 단번에? 몽롱함이? 기대감이?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전화를 받았다. 여자였다. 청아한 음성이었다. 시간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그녀일까? 아닐까? 바다를 사이에 두고 무인도 1과 무인도 2에서 망원경으로 연인의 눈싸움처럼 촛점을 맞추고 통화를 하는 것인가? 차라리 화상 통화가 나을 수도 있을 테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이 낭만적이었다. 그리고 그 신묘한 신-고전미는 나를 드디어 판타지 스릴러의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5

   나는 모처럼 글이 잘 써진다고 속으로 조금 좋아했는데 잠깐 좋다 말았다. 저기까지가 집에서 혼자 글을 쓰다가 탁 막혀버린 순간의 기록이었다. 억지로 막 지어내서 써 봐야 사실주의에서 점점 멀어지고 미스테리 분과에서 배척당할 게 뻔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수치심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런 터무니없는 억지 이야기는 거의 사기로 봐도 무방하다. 다시 읽어보니 이건 이야기도 뭣도 아니었다. 이건 뭐 거의 개가 짓는 수준이었다. 느닷없이 누가 발을 걸고, 밑도 끝도 없이 떠나고, 자주 떠나고, 억지에 다시 억지에 그냥 막나가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공책을 찢어서 짖이기고 구기고 뭉개고 찌그려트려서 방구석에 집어던졌다. 뭔 인공지능 컴퓨터가 쓴 소설도 아니고 대체 무슨 헛수고란 말인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대로 집에만 있다가는 돌아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이왕이면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나는 시내에 도착했다. 그리고 잃어버린 개연성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앞에서 걸어오는 저 양반은 혹시 내 발을 걸지는 않을까? 남자인데? 에이,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저분 말고 저기 저 숙녀의 발을 내가 걸어서 넘어트릴까? 정말? 차라리 그게 좋겠다. 오케이, 딱!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나는 글도 안 써지는데 어차피 바람 쐬러 나왔고 또 먼저 경험하고 나중 글을 쓰자는 의도를 안고 그 일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대상을 물색하고, 다가가고, 심호흡을 한 후 발을 걸어 넘어트리고, 얼른 상대가 넘어지기 직전에 내 입술을 갖다 대기. 오오,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았다. 바로 실전에 들어갔다.
   1번째 시도. 핸드폰을 보면서 아리따운 처녀가 다가온다. 가까이 오면 다리를 걸어야지. 룰루랄라 룰루랄라. 가까이 왔다. 어, 그런데... 이건... 이건 아니다. 이건, 정말, 아니다. 가까이서 보니 아니었다. 뭔가 착오가 있었다. 장르가 달랐다. 많이 달랐다. 바라는 이상이 일치하지 않고, 추구하는 성향도 정반대이며, 뒷목이 뻐근했다. 1차 시도는 실패했다.
   2번째 시도. 첫 술에 배부르기는 어렵다. 첫사랑의 실패는 애교고, 두 번째 사랑을 꿈의 실현이자 영원한 신비요 끝없는 환상으로 만들면 그만이다. 길게 갈 것도 없고, 두 번째에서 강렬하게 딱 한 번에 끝내기로 결심했다. 박진감, 대기중이다. 때마침 앞에서 어느 미모의 숙녀가 걸어온다. 귀족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뭔가 사연이 있겠지만 그녀의 과거, 이 일과 관계없다. 그런데 귀가 얇은 이 아가씨가 혹시 술 한잔 사주시지 않을라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면 된다. 만약 이 일이 성공하면 로맨스는 완성된다. 연애 사건은 드라마로 승화될 것이다. 허영심은 사랑으로, 나는 로맨티스트로 바뀌는 것이다. 인생 역전! 그러나 실패하면? 미리 겁먹지는 말자!
   가장 적합한 상대가 저 앞에 걸어오고 있었다. 점점 다가온다. 피하지 말자. 예상대로라면 저 아가씨는 자신의 인생 행로를 내 쪽으로 틀 수도 있다. 슬슬 손에 땀이 났다. 뭔가 즐거운 일이 시작될 것만 같은 느낌, 오랫만이다. 항상 예측할 수 있을 듯한 박진감만 가끔 내게 방문했지만 이번에는 꽤나 예측하기 어려운 드라마 예고편과도 같은 기분이었고, 나는 거기서 당당히 딱 주연을 맡은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 순간,
   많은 뭇 남성들이 길을 가다가 어쩔 수 없이 눈길을 빼앗길 것만 같았던 저기 저 숙녀는 갑자기 잃어버린 뭔가가 떠올랐는지 어쨌는지 걷다가 딱 멈춰섰다. 그리고 그대로 뒤돌아서서 오던 길로 가버렸다. 내 작전을 미리 알아봤을까? 그럴 리는 없겠지. 그러나 결과적으로 봤을 때 앞일을 예견한거나 마찬가지였다. 2번째 시도 역시 실패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좋다. 괜찮다. 웃을 수 있다. 아직 본격적인 시작도 안 한 거다. 이 흐름이면 길게 가지 않아도 된다. 이제 몸이 풀린 거 같다. 세 번째가 벌써 기대된다. 나는 여세를 몰아가기로 했다.
   3번째 시도. 나는 제자리에서 방향만 틀고 적당한 상대를 찾다가 어쩐지 내가 누군가에게 부딪혀서 길에 넘어지는 난감한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설마 가만히 서있다가 각도만 살짝 틀었던 나를 누군가 어느 정숙한 아가씨가 격투기 기술을 이용하여 발을 걸어서 넘어트렸을 리는 없고, 약간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장면이 연출되고 말았다. 그 힘들다는 설명은 간출이자면 이렇다. 당시 내 쪽으로 어느 연인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연인은 특이하게 나란히 뛰지 않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렇게 달리고 있었다. 1번 주자가 남자인데 얘가 나랑 부닥칠 듯 말 듯 하다 살며시 스쳐서 지나갔다. 그러자 2번 주자인 여자는 갑자기 전방에 나타난 방해물에 부딪혔고, 그 둘은 함께 넘어졌으며, 그 결과 나는 바닥에 깔리고 그녀는 나를 무슨 소파나 침대로 아는지 잠시 제정신을 차리기 싫다는 듯 정상적인 반사 신경에 따른 반응에서 상당히 벗어난 듯한 움직임을 보여줬다. 나는 비록 3번째 시도를 행동에 옮겨보지는 못했지만 이번 일로 피장파장, 한번 어떻게 해볼려다가 당했다는 그런 셈으로 계산하여 색다른 경험 즉 창작에 필요한 최소한의 체험은 이걸로 흡족한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넘어진 모양새가 입과 입이 닿지는 않았으나 내 손의 위치가 썩 절묘하지는 못했지만 뭐 나름 은근히 선정적인 장면을 살짝 연출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건 순전히 저쪽의 잘못이었고, 난 어떻게 보자면 그냥 횡재한 것이었다. 겉으로는 뭐 사회적 인습을 따랐다.
   절차상 그분들과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가는 동안 나는 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머나이저는 정말 환상머쉰일까? 아닐까? 그런 어떤 물음에 정색하는 여자는 필경 의심을 살 만한가?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일까? 그럴까? 저기 지나가는 노란 딱정벌레를 운전하는 숙녀의 가방에 혹시 그것이 들어있지는 않을까?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 라는 속담은 퍽 불합리하지 않지 않나. 왜냐하면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는 말이 있으니까. 나는 독심술을 더 발전시키지 말아야겠다며 내심 공상을 끝마칠 즈음에 알게 됐다. 소녀팬이 건 다리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이건 뭔가 의심이 갈 정도로 커다란 우연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하나만 확인하고 넘어가자구요. 무엇이냐면, 내숭의 직위가 궁금하다는 것. 새침데기의 단짝인가, 부정직과 유난 떨다의 상사일까? 아니면 가식의 친구? 적어도 인류의 전통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소란스러운 불편함이 예상된다. 출시하자마자 품절이라는데, 그 신통한 장난감 바로 내 손(가방) 안에 있소이다 라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왜일까? 그게 뭐 007가방이라도 되나, 아니면 은밀한 특급 작전? 잠재적인 재산 목록? 또는 무슨 지하 경제? 세비야의 이발사를 관람하시는 객석의 신사숙녀 여러분은 모두 알고 보니 명실공히 당당한 주연? 오, 어떻게 그런 일이...! 그런데 비밀리에 준비중인 작품은 곧 희대의 사기꾼과 연관된 사건인가? 왜 아무도 없어? 다 어디 갔냐고! 대체 다 어딜 쳐다보시고 말을 돌리시냐고. 누구 눈치 보시느라 못 들은 채 하시냐고. 무슨 어쩔 수 없이 쩔쩔맬 수 밖에 없도록 책잡힌 일 있냐고. 설마 그대는 말썽쟁이, 아님 말괄량이? 어째서! 마법사는 부려먹기만 했던 돌팔이였고, 그이는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는 거래? 갈릴레이의 제자 가운데 꼴찌인데 교황청의 탄압이 무섭고 가난도 두려워? 무슨 비밀이 그리도 많아? 밀담과 암투 이전에 여자들끼리의 문제? 뭐 인정, 겁나게 어렵군. 그러니까 대체 그게 뭐냐고! 직장 때려칠 각오한 후, 총대 매고 권위적인 대표에게 따지고 버럭대며 삿대질까지 했는데... 뒤돌아보니 어머 글쎄, 응원하고 찬성하고 동조했던 동료는 단 한 명도 없다니...! 언제부터 일을 그렇게 열심히 했냐고. 불의를 참겠다는 거야 넉살이 좋은 거야? 팀원 간 우애의 척도는 사장 흉보기, 아니었냐고. 어디 가나 절반은 그렇잖소! 친하다 안 친하다, 그 기준도 시시각각 다르다는 걸 왜 미리 알려주지 않나 몰라. 한번 따져봅시다. 소매 걷어올리고 한번 따져보자구요. 이 세상에 남편 흉보지 않은 부인 있으면 나와 보란 말이오, 제발! (아줌마들이여, 외칩시다 행진합시다? 워 - 워 - 워!) 그러면 내 옆에 그녀도 설마...? 혹시... 어떤 생각을? 점점 더 어려워만 지는군, 빈말인지 참말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세상. 어떻게 그 무언가는 나이와 반비례되다니, 저런! 잔치에서는 무도회장에서는 배꼽 빠진다고 웃으시더니 사석에서는 가면을 벗으면 웬 딴청? 능청꾸러기야? 언제는 웃고 울고 좋다고 난리였는데 그때 그 팬클럽은 대관절 다 어디로 갔냐고! 왜 말을 못하는 거야, 너는 내 남자라고 오빠는 내 꺼라고! 마술 피리의 정체는 결국 켐벨 수프란 말인가? 맙소사, 그럴 리가! 아무도 말해주지 않으니까 도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진짜 솔직한 소비자, 합리적인 소비자, 용감한 소비자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미스테리가 따로 없어. 안 그런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음. 설령 있다 해도 안 보이고 안 들림. 보고 듣기 싫어서일지도 모르지만. 둘 중 하나는 분명 거짓인데... 이걸 찍기로 골라서 딴생각을 하고 싶을 만큼 순진한 몽상가라면 차라리 좋겠네. 지금부터라도 바보처럼 살아야 하나? 세상사도 복잡한데 아 나 이거 정말 참 나 진짜 아무래도 뭔가 말린 거 같단 말이지. 일단 재미 없는데 놀리는(매기는) 걸로 오해하시는 귀부인이라고나 할까, 숙녀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불러도 좋은 말 듣기는 어렵겠네. 그건 알겠다. 어허 말린 거 확실함. 아, 그대여! 오오, 기도하는 소녀여! 부디 너그롭게 용서하시기를. 쓸데없는 농담일 뿐이라오. 알고 나면 알기 이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는 법. 인생이 바로 그런 것이라오. 세상만사 이치가 그러한데 난들 어쩌겠소. 아니 그렇슈? 음, 말하자면 내 탓도 또 세상 탓도 아니란 말인데... 딱 한마디만 더 하자면 이렇소, 낭자! 꼭 굳이 과도하게 조숙할 필요가 있겠느냐, 어차피 나중 크면 의무-방어전이란 것을 알게 될 텐데 젊음이여 꿈을 키우고 이상의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 보자, 이런 구태의연한 말일랑은 하지 않겠소. 내 꿈도 발설하기 퍽이나 곤란한 판국에 남 걱정까지? 오지랖 한번 대단하구먼. 주책이 따로 없구만. 무릇 진리는 흔한 말 속에 있으며 나아가 다 아시는 내용들이라오. 가령 엄마에게 물어봐? 예를 들면 엄마한테 말하지마? 이를 테면 친구와 만나서 뭐 하면서 노니, 같은 말. 또는 어디 사랑만 타이밍이더냐, 최초의 타임머신은 극비리에 이미 만들어졌을지 모르지만 연애는 두 번째가 더 멋질 수도 있단다 라는 아빠의 말씀. 살면서 장래 어떤 사랑이 언제 어떻게 그대에게 찾아올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니 그저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를. 사랑에 실패하고, 시험에 낙방하며, 박봉에 서글퍼하고, 실의에 좌절하고, 심심함에 지쳤다가, 비운에 시달려도 넘어졌다가 잠시 방황도 했다가 다시 일어서서 소원을 적기. 기록하기. 깐족과 덕담을 구분하는 혜안을 주옵소서, 또는 소망을 쉬운 단어 딱 1개로 줄여서 그 낱말을 적기. 갖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말 같은. 차, (멋진) 남자친구, 행복, 낭만, 모험, 자유, 황금, 기쁨, 말주변, 마술 또는 쾌락 같은.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좀 더 구체적으로 환상공장 취직, 환상머쉰 개발, 환상화-환상곡-환상 소설 쓰기 같은. 왜냐하면 그것은 의지를 키우고 방법을 찾고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 일종의 자기 최면. 이미 다 내 안에 있고, 내가 다 아는 얘기들. 그렇기는 한데 얘기를 꺼내놓고 보니 음, 창과 방패의 역설이나 넌 꿈이 뭐니 같은 식상한 말을 여기서도 반복할 수는 없다 보니 엄한 낭설만 늘어놓은 형국이네 그려. 미안하오, 젊은 친구. 인정하오. 바로 이런 걸 노파심이라 한다오. 그렇소. 내 깜냥은 이처럼 초라하니 애당초 장르가 틀렸으니 '인생은 뭐다' 라는 긴 명대사는 다음 기회를 기약합시다 그려. 그럼 다시 하던 이야기로! 
   부딪힌 여자분은 내가 (삼류) 대학교에 다니던 1학년 겨울에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내게 이 음악 그 음악이죠, 라고 물어봤던 바로 그 아가씨였다. 그리고 그녀의 남자는 내 초등학교 4학년 같은 반 동창이었다. 당시 그 친구 집에 몇 번 놀러갔는데 어느 날 다시 그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그랬더니 그 친구의 누나와 누나의 친구들이 있길래 난 그냥 친구에게 먼저 간다고 뛰쳐나간 일이 기억난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인사하고 같이 놀고 그래야 했는데, 뭐 지난 일이다. 그것도 완전 옛날. 그렇게 무작정 뛰어갔던 나는 옆옆동네 기차길 옆 우리집까지 마구 뛰어갔는데 우리집까지 똑같이 쉬지 않고 뛰어서 날 쫓아왔던 그 친구가 바로 쟤다. 이름은 혜성, 성은 오-였나? 성은 감탄사요 이름은 행성? 아무튼!
   반갑다며 우리는 한눈에 알아봤고, 친구는 바쁜 일이 있다며 명함을 건네며 꼭 들려달라면서 간곡한 부탁을 남기고 떠나갔다. 나는 뭔가 영화 속 주인공을 따라할려다가 그 주인공에게 당한 조연이 된 듯한 기분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나 상상하는 그것은 경범죄고, 이건 결과가 가상한 낭만적 모험이었다. 난 딱히 잘못한 게 없었으니까. 다만 뭔가가, 어떤 이상야릇한 무언가 한두 가지가 아쉬웠을 뿐!


   6

   혜성처럼 내 앞에 다시 나타난 혜성은 도시에서 꽤 저명한 칼럼니스트이자 잡지사 기자에다가 사진작가 일도 하며 책도 여러 권 쓴 유명인이었다. 제법 잘 나가는 친구였고 재주꾼이었다. 그런데 몇 년 쉬기로 해서 낙향한지 얼마되지 않았다. 그냥 쉬기는 뭐해서 한적한 바닷가에 찻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보통은 차를 팔고, 단골에게는 술을 대접하는. 나는 거기에 가면 꽤나 융숭한 대접을 받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은근 기대했다. 예감, 완전 좋았다. 소녀의 동경심과 소년의 선망을 양쪽에 끼게 되었다. 나아가 나는 막 거기에 가고 싶어졌다. 집에서 멀지도 않았다. 그래서 갔다. 그리고 도착했다.
   마침 혜성이도 있었고, 그날 부딪혔던 아가씨도 있었다. 그 둘의 관계는 어딘가 심상치 않았으나 쉽게 정의내리기에는 미묘한 뭔가가 있었다. 혹시 둘이... 어... 사촌 사이인가? 아니면 어느 은사님과 삼각관계였나? 뭐 그건 더 알고자 하면 실례일 테고, 궁금한 것은 궁금한 데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런데 다 괜찮았는데 카페 이름이, 단지 그것 딱 하나가 걸렸다. 도저히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쁘지도 않았다. 물론 아름다운 호칭이라 할 수도 없었다. 간판에 씌여진 낱말은 이랬다. 광-기! 오~ 뭔가 의미심장한 이름이었다. 뭔 숨겨진 사정이 있든가 구구절절한 까닭이 있든 없든 그건 차차 알아낼 수도 있는 일이다. 또 종종 의뭉스런 기분으로 만족할 수도 있고. 더불어 왕왕 해소하고 싶지 않은 궁금함으로 남기고 싶었다. 어쩐지 나도 모르게.
   가게에는 그 음악이 틀어져 있었다. 바로 혜성이가 모르는 음악. 아마도! 그녀와 나만 아는 음악. 타인이 알아도 모르는 음악. 불후의 라이트모티브!
   그런데 혜성이와 나는 어 뭐랄까,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말이 잘 섞이지 않는 걸 느꼈다. 얘는 해박한 지식은 그 어디 가도 안 빠지고 그 누구에게도 굻리지 않을 게 뻔하고, 식견도 수준이 상당하며, 인생 경험도 뭐도 모두 빼어난 면모가 엿보였지만 말이 잘 안 통했다. 왜냐하면 음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봤드니 그는 정력적인 남자였기 때문이다. 뭘 근거로 그처럼 호색한을 연상시킬 수도 건전한 삶의 활기를 떠올릴 수도 있는 중의적인 모호한 꾸밈말을 사용했느냐, 그것은 그가 사용하는 어휘의 방대함과─이분은 사고 원리가 지동설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남들이 나보고 구사하는 어휘가 많다고 그런다>는 천동설식 표현은 거의 없음. 응대받은 립서비스를 그대로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 일은 절대 불가능함.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씨를 뿌리고 설을 풀어야지 생리적으로 애를 잉태할 수는 없기 때문─대화 주제의 폭넓은 포용력, 논쟁에 꽤나 일가견이 있고 논술에 한없이 익숙할 것만 같은 화법과 몸짓 그리고 자신감 풍만한 눈빛과 변화무쌍한 어조 때문이었다. 말발, 장난 아니었다. 표정도 예술이었다. 아는 게 정말 너무너무 많았다. 얘는 정확히 그런 남자였다. 어떤 남자냐 하면 그걸 아는, 뭔가를 잘 아는 남자. 어느 근사한 식당은 무척 까다롭게 골라서 방문함. 단정한 옷차림의 서두르지 않는 말의 빠르기와 꽤나 어렵게 뽑은 듯한 젊은이나 중년 신사가 주문을 고급 필기구로 시선을 그윽히 맞추며 편안한 미소와 함께 옮겨적는 음식점이 익숙한 그런 남자. 양복은 무조건 최고급 또 무조건 투버튼 아니면 아예 단추가 많든가. 누구와는 무슨 시간만 함께 하며, 어지간한 상식과 고급 지식은 거의 직접 경험을 했고, 세련된 생활 습관은 흠잡을 데가 없고, 시행 착오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위험 회피는 극대화했을 듯한 인생. 언제나 근사한 구두만 신고, 항상 성과와 효율을 따지며 고상함과 우아함을 알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자가 언제 무엇을 원하는지 정말 치명적으로 잘 알고 냉정하도록 잘 맞추어줄 수 있는 예법이 비로소 기교이자 습관으로 자리잡은 생활, 바로 그것이 넉넉히 상상되는 바로 그런 남자였다. 얘랑 내가 다녔던 학교는 그런 사립학교가 아니었는데 그럼 그때 뭐 서민 체험이었나? 그래도 후천적 벼락부자는 최소한 아닐 것이다. 뭔가 재수없으니까 한마디로 깎아내릴까, 말까? 와우, 들린다. 전자를 선택하라고! 한마디로 이 친구는 잡식성이다. 약간 꺼림직한 어휘가 등장했지만 그것도 간혹 필요한 법이다. 또 설명이 마치 상류층을 묘사하는 듯 과장됐지만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일단 지식만 놓고 보자면 얘는 정말 대단했다. 그런데, 범위가 너무 넓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다른 말로 이상적인 남자네 부족한 게 없어서 서운하다네 차갑다네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지만 달리 말하자면 그건 어디까지나 하이브리드다. 소셜 네트워크를 보시라. 어지간히 인기 있는 그 바닥에서 뛴다 - 난다 - 한다 하는 저명한 일반인과 잘나가는 유명인 뿐만 아니라 거의 상당수가 그와 비슷하다. 전문가는 전문가인데 많은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전문가다. 그건 진짜 전문가가 아닐 텐데 말이다. 웹서비스의 신조와 상업 브랜드의 포지셔닝에 어느 정도 합당하게 나를 맞추느냐, 얼마나 그것을 내가 만족시키며 살 것인가, 뭔가 거꾸로 된 거다. 언제부턴가 그건 웬일인지 현대인에게 인생의 교양이 되었고, 삶의 숙제가 되었다. 그렇게 굳건히 자리잡아버렸다. 개성을 말하지만 남과 똑같아지는 일이 개성인 듯 하다. 너무 많이 알고, 좋아하는 것도 너무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고, 누려야 할 호사도 끝이 없고, 사치와 미덕을 일치시키는 방법이랄지 인생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야말로 모르는 게 없다. 인정한다. 지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뭘로든.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글은 아닐 수도 있는데 말로 치자면 하도 술술 (구술자에게) 쓰게 만들고 너무 쉽게 쓰며 진짜 많이 써서 가려서 쓰는 방법을 모른다. 얘가 옛날에 살았다면 귀족은 귀족인데 서민적이라고나 할까, 인습을 거스르는 일도 서슴치 않았을 것이다. 관습을 새로 만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중세가 아니고 이 친구 옷에는 계급장이 붙여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 선천적으로 어떤 단어를 언제 쓰고, 만인이 볼 때 여성이 달가워하지 않는 몇몇 낱말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지식의 바벨탑을 쌓았는데 말이다. 말은 괜찮은데 글에서는 절대 금해야 하는 그 뭔가도 어쩌면 모를 수도 있다. 심지어 숙녀나 지성적인 여인조차 그런 경우가 있다. 적지 않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현대인은 아는 게 너무 많다. 어디 그 뿐인가. 말도 너무 많다. 누려야 할 혜택도 너무 많고. 세상은 무척 풍요롭다. 시간은 많기도 하고 적거나 때로는 너무 빠르고 또 느리거나 잘은 모르겠으나 거의 멈추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다 웬말인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정확히 그러고 있다. 혜성이에 대해서 묘사한 게 아니었군. 한심한 녀석!
   하지만 말 나온 김에 좀 더 가자. 여기서 멈추면 누가 다독여주랴. 어디 가서 한탄하라고! 지금 내가 똘끼에서 앗, 아닌가 맞다, <광기>에서 혜성과 대화하면서 나는 그걸 느꼈다. 이쪽은 균형을 유지하며 중심을 잡고 무척 세심히 골라서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저쪽에서 볼 때는 특별하지 않은 사람을 상대하는 방식으로 철학도 사랑도 어려운 일은 무엇이고 의기소침할 일은 또 뭐란 말인가, 그처럼 막 던지고 막 말하고 막 나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지금 나오는 음악은 그것이다. J.S. 바흐가 작곡한 BWV 816번에 이어 BWV 809을 글렌 굴드가 연주한 음반. 혜성의 그녀가 알고 내가 아는 음악. 누구나 알지만 또 누구나 모르는 음악. 누군가는 저 음악을 십대에 처음 알게 된다면 그건 평생을 간다. 바로 이 지점이다. 사극은 바로 이런 부분을 잘 포함시킬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걸 알면 멋진 중년이 된 거다. 아닐지도 모르고. 누군가 어른이 된다면 이와 같은 감격이랄까 특출난 사건은 어느 정도 쌓이게 된다. 훨씬 포괄적인 다른 말로는 인생 경험. 선천적으로 그걸 원했고, 후천적으로 그게 쌓여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은 절대 흔하지 않다. 그 몇 가지 힌트를 다변의 저변에 알록달록 꽃잎처럼 뿌리고서 대화의 폭을 넓혀야 하는데 꼭 보면 나는 흔하지 않고, 나는 특별하고, 나는 개성적이고, 나는 보편적이지 않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가방이 너무 크다. 손에 쥔 가방이 너무 많다. 아예 내가 가방이다. 대외적으로는 여백의 미, 진실은 채우고 쌓고 넓히고 진실한 사랑 단 하나면 된다는 거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는 남다른 뭔가가 있다고 하면서 또 튀기 싫어서 보호색으로 가리고 인파에 숨어버린다. 장단을 마추기 힘들어진다. 유명해지기 싫다는데 유명해지고 싶어 한다. 돈을 벌면, 큰 돈을 벌면 내가 진정 원했던 꿈은 또 돈이 아니었다고 한다. 만화영화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는데 이미 인간의 삶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가방은 많고도 많으며, 이미 물 건너간 가방이니까 말이나 많이 하고 글로나 풀고 보자는 것이다. 뭔 사랑을 얘기하자면서 대여섯 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우머나이저와 일상과 잃어버린 꿈과 지난 시절과 내일의 할일만 이야기한다. 아니면 글로 쓴다. 노래를 부른다. 어떻게든 표출한다. 참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참을 수는 있다. 왜냐하면 나중에 만나서 다시 얘기하자는 그 말이 너무 포근하며 정겹기 때문이다. 즉 남자는 잡지1과 2의 그런(그 따위?) 구분이 필요없는데 여자는 손바닥 뒤집듯이 어쩔 수 없이 여성잡지 1에서 2로 변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뿐.
   이제부터 남자를 1로, 여성 잡지1을 2로, 여성 잡지 2를 3으로 가정함. 자, 출발한다...(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어느 보석으로도 이루어낼 수 없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대체 왜 그런 것인지 한없이 신기하며 놀랍고도 황홀하며 영원한 불가사의로 이루어진 정삼각형이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꼭지점 1, 2, 3! 남자는 0이냐 1이냐 (대체로) 그뿐이지만 여자는 절대 그렇지 않다. 0.999...무한대는 (어렵게) 존재할 수 있으나 결코 (확실한) 1은 없다. 그것조차 0.000...무한대...1로 언제라도 바뀔지 모른다는 것. 바로 그것이 여자다. 남자는 스무 살도 1이지만 흰머리 희끗희끗하신 예술가도 1이다. 그러니까 연로한 어느 유명인이 꽃다운 아가씨 2와 만난다는 일화, 익히 알려지지 않는가. 그래서 젊음의 여신은 누구다? 여자다! 그것은 여자다! 그래서 여자다! 남자가 아닌 여자라고. 그렇다고 그녀를 당기고 들고 쥐는 법을 이제야 알았다고 하여 딱 하나만 하다가는 음, 뺨 맞을 수도 있음. 사람 놀리냐고 하면서! 솜사탕처럼, 이라고 했지 내가 언제 진짜 솜사탕을 사오라고 했냐며! 에라~ 이 인간아 하면서! 그래서 다음 날 꽃다발을 사갔는데 어머나, 꽃은 뭐하러 사왔냐고 그래...! 아아, 볼을 살며시 어루만지고 뺨을 어중간하게 쓰다듬듯 철썩 때리는 단계는 정녕 도달하기 힘든 그런 난공불락의 경지란 말인가? 어? 정말로? 오, 아아아!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고 그녀의 귀는 곧 날개인가 보다. 잡은 물고기에게는 밥을 주지 않는다, 그 말이 왜 널리 퍼졌겠는가. 대관절 그 말이 뭐라고 사람을 웃게 만드는가 말이다. 여자가 2에서 3으로 변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당나귀가 켄타우루스로, 조랑말이 그리핀으로 변하는 것과 같다. 정말 그렇다. 그래서 천진난만한 2는 1의 어느 자연적 행동을 히히덕거리며 웃을 수는 있지만 자신이 3이 되어서는 웃음의 종류가 바뀌는 법. 절대 가볍게 생각없이 웃을 수는 없는 법이다. 왜냐고? 그것은 동화에 나오는 거울이니까. 애완견만 키워 봐도 알 수 있는 엄정한 사실이자 숭고한(?) 순리. 여자만 섬세하고 여자만 극도로 감각적일까? 그럴까? 아니다. 남자도 그렇다. 최소 2인자다. 남의 집에 가면 남자는 제일 먼저 무엇을 느낄까? 분위기? 인테리어? 깨끗함 또는 정결함? 아니다. 다 아니다. 향기다! 어! ...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사람을 처음 보면 남자는 상대의 눈동자를 먼저 볼까, 아니면 구두를 먼저 볼까? 뭘 보든지 남자에게도 견적이란 게 나온다. 무엇이 먼저인가는 그냥 서두를 위한 말꺼냄 카드고, 무엇보다 직감이 명령하고 직관이 그를 설복시킨다. 남자도 그런다고. 다시 여자 아니 그 둘의 만남으로. 2에서 3이라는 그 어마어마한 변화가 있기에 저 삼각형이 뭐랄까 감히 아름답다고 해도 된다면, 음 아이스크림이나 솜사탕처럼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다-쯤으로 각설하는 게 어떨런지! 오오, 미래가 보이는구나! 아아, 수정구슬에 나타나지 않는가, 잘 보시란 말이다. 대번에 짤막한 편집 영상들이 보여진다. 당신의 그녀 2가 그녀의 엄마 3처럼 변하는 모습이! 다른 말로 그대의 공주님이 마치 장모님처럼? 아, 커피포트여! 어딨어 어딨어 진공청소기 어디 있냐고, 여차하면......! 어떤 명목상의 원점인 0은 야생이자 윤락이고 꼭지점 1은 단란이며, 2는 환희고 3은 환상일까? 어쩜 그렇게 쉬웠으면 좋겠다. 차리리 그러면 간편하지 않나. 애초에 불안불안한 드라마틱함을 안고서 시작하는 게임이니까. 딱 6시간 대화한 후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하자 라는 말. 썩 얄밉지는 않다. 화나지도 않는다. 신경질을 유발하지도 않고 짜증과도 거리가 있다. 다만 그저 미소를 짓게 될 뿐. (상상만으로도) 웃지 않고 배길 자신은 없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다. 대체 왜 1은 2가 3이 되도록 방관했는가, 바로 그것이다. 시인하든 인정하든 그건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 마의 정삼각형에 대한 비밀을 모두 알아낸다고 할지라도. 자, 다시 1과 2의 처음 만남이 어땠는지를 살펴보자. 1과 2는 이렇게 만났다. 애절한 연정을 숨길 수 밖에 없어서 어느 연인이 끝내 이별하던 그날 그들은 처음 만났다. 1은 2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 1은 마지막이었고 2에게는 처음이었다. 그 뭔가가. 그리고 누가 챔피언의 숙명을 맞이할지, 지명-방어전의 상대가 장래 서로 일치할 것인지 점쳐보기에는 아직은 일렀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니? 사랑이란 말이야 음... 어... 저기 저 친구들의 다정한 모습이 보이지 않니? 너무나도 사이 좋은 저 관계, 오오! 잠시만 잘 지켜봐봐...(이때 1은 숨겨진 메모를 확인함) 오빠가 알려줄께. 우리 2는 오빠만 믿어. 아무리 해도 사랑이 무엇인지 진정 모르겠다면 사랑이란 낱말이 딱 50번 막 100번 등장하는 3분에서 5분짜리 유행가를 들으면 된다구. 그러면 알게 될 꺼야.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 사랑이란 바로 이런 기분을 뜻하는구나! 비로소 그렇게 깨닫게 되지. 앞으로 오빠가 하나씩 알려줄께. 다음 시간은 그거야. 어떻게, 어떻게 사랑을 할 것인가!」
   이와 같은 <오빠는>식 화술의 소유자1과 <난 있잖아 우리 오빠와 나는 운명이라고 생각해. 난 언제나 오빠만 믿어. 오빠는 나의 영원한 왕자님이야. 앉으나 서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이나 낮이나, 자나 깨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게는 오빠 밖에 없어>라는 말재간을 취미로 간직한 아가씨2의 만남은 어떤 공식을 향하게 되어 있다. 그 전형성, 절대 피해갈 수 없다. 그럼 그건 뭔가? 뭘까? 뭐 더러운 사랑 찌질한 애정을 얘기할려던 거라면 집어치우라고? 거 흥분하시지 마시고 품위를 지키셔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지금 은근 들뜰 상황이 아님. 아, 그런데 정삼각형이 어떻게 변한다, 그것은 따로 떼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게 좋겠다. 아무튼 그렇다. 남자는 예나 지금이나 1, 그런데 여자는
'2에서 3으로'라는 거!
   여기다. 이곳이다. 어허, 이것 보소! 또 모순되는 궤변, 걸핏하면 패러독스, 언제나 종착역은 양다리. 혜성이 얘기에서 혜성이의 성 역할을 넘어갈 뻔 하다가 멈춘다. 음. 어...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와 정반대의 삶의 사는 사람도 있는데 말이다. 대개 일반적으로 압축을 잘하는 사람은 그것만 잘하고, 부풀리고 과장을 잘하는 사람도 그것만 잘한다. 다 잘하면 쉽게 말해 유명해진다. 그러나 그래 봐야 그 바닥도 거의 하나만 잘한다. 둘 다를 잘하는 사람? 시간을 절약하자면 그건 고인쪽에서 찾는 게 현명한 일이다. 시인은 그런다. 자기는 프란츠 카프카를 평생 읽는다고. 소설가도 그런다면 그건 좀 이상한 거다. 시인은 그의 어떤 책이든 어느 구절이든 어디든 아무데나 펼쳐서 습관이고 생활처럼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소설가는 그걸 따라할려고 좋아한다. 대개는. 시인은 그게 모두 시니까 바로 그 때문에 아무데나 펼쳐서 읽는 걸 좋아하는 것인데 시인이 아니라 소설가가 그런다면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게 자연스럽고 그야말로 솔직한 거다. "아 나 이런 뭐야 이거 정말 읽기 힘들구만" 이라고. 왜냐고?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논리 하나로만 따지자면 그건 거의 금서니까. 아니라고? 난 아니시다? 거짓말이다. 색깔은 립스틱과 같다. 뻥이다. 구라이자 체면이며 허세다. 누구나 그런다. 내가 왜 그때 이런 말을 했을까, 당시 내가 그런 글을 왜 썼지? 라고. 지금 상황 역시 똑같다. 혜성은 아마 거의 그런 글을 썼을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가 어떻고 프란츠 카프카의 뭐가 어떻다는 말이나 글, 모르긴 몰라도 꽤나 자주 화제로 삼았을 것이다. 혜성의 안목은 탁월하고 그의 취향은 존중받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혜성이 안 건드린 분야가 없어서 이제 내 업계...라는 말은 말도 안 되고, 턱걸이로 삼류에 머무르는 내 자리까지 위협 받아 간당간당할지 모를 일이니 집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혜성이는 조만간 틀림없이 중편이나 장편소설 한 권을 발표할 것이다. 베팅, 많이는 하지 않겠다. 그러나 향수 한 병 값은 걸고 싶다. 그렇다. 그게 교본이고 모범이며 장려되는 미덕이라면 좋은 점이 훨씬 많지만 단점을 하나 꼽아야 한다면 글쎄 어, 그것은 많이들 비슷비슷해진다는 점이다. 앞서 나온 어떤 부분들에 관하여 요컨대, 그걸 뭐라 하느냐? 한마디로 헤드라인이라고 한다. 헤드라인의 응축성으로써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가느냐 인생의 벽돌을 일관되게 쌓아가느냐, 아니면 책의 목차 딱 그것으로서 끝나느냐, 그것을 다른 분야로 치자면 이와 같다. 20세기 작품 가운데 현재 상종가 얼마 이상인 화가에서 기준선을 조금 올리면 불과 몇 명 없다. 한 손으로 또는 두 손가락으로 셀 정도. 바로 이 지점이다. 혜성은 좋은 남자인데 정력적인 남자라는 뜻이다.
   가만 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뒤통수가 너무 가렵다. 타성과 권태는 물론 젊음의 여신이 나왔다. 변덕 역시 납시셨다. 1과 2의 차이도 기존 학설의 반복이지만 소상히 밝혔다. 혜성이의 화려한 지성미, 충분히 강조했다. 그래도 뭔가 남는 듯 하다. 뭘까, 그건 뭘까? 아하~ 2에서 3으로 즉 인간의 젊음과 세상에 대한 원숙함, 미성숙과 성숙이 나오실 차례다. ...(한숨)... 앗 나타나셨다. 깜작 출연 성공. 간다. 자, 시작한다......(심호흡)...... 2는 아직 모른다. 당신이 장래 3으로 변할지를. 두고 보면 안다. 알아도 그것은 통념이고 관념이며 추상적인 지각일 뿐이다. 2가 봤을 때도 수학자가 봐도 그건 참 믿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 믿기지 않는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사실이 그렇다. 그 변화는 세 가지로 나뉜다. 엄마나 아빠와 닮아간다는 말을 반기는 쪽과 아닌 쪽, 그리고 그 외로. 구분은 그렇다 해도 2가 3으로 바뀐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것은 마치, 어쩜 그리도 친절하게시리 세월이 그대를 정말 감쪽같이 비켜가는군요, 라는 립서비스를 쏙 들어가게 만드는 조금은 서글픈 일이다. 진짜로. 나는 2에서 3으로 변할 마음이 없다? 그러고 싶지 않다? 세상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론일지라도 난 예외다? 그러나 안 그러나 두고 봐라? 오오오! 저런, 저런, 저런! 그것을 뭐라 부르던 뭐라 표현하건 그 나섬을 나댄다고 볼 수도 없고 오히려 가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한번 따져봐야 한다. 그냥 부정하고 싶어서 부정하는 것은 아닌지를.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가를. 음... 아가씨가 3─곧 여성 잡지2─를 본다라 음...... 복부인도 귀부인도 여사님도 모두 2─즉 여성지 1─을 열독하신다라 음...... 그럴 수는 있다. 나쁜 일도 아니고 숨길 일 역시 아니다. 실제 아동복을 성인이 입기도 하고, 성인물을 청소년이 즐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하지만 개별적으로 사석에서 한번 떠보시라. 과연 반응이 어떨런지! 어쩜 그럴 수 있는지 라는 아연함과 함께 뜻밖에 흥미로운 이색적인 안면의 홍조와 단풍과 무지개를 구경할지도 모를 것이다. 농담과 희극, 딴 데서 찾을 필요 없다. 만약 청순-가련형의 꽃다운 숙녀에게 3을 안기면서 그것이 특급 왕자를 얻게 되는 필수 신부 수업이라고 한다면 화색이 어떠할지! 고품격 중년 여성잡지라는 3이 꼭 뭐 어떻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요점은 그거다. 상큼한 여대생에게 너는 향후 네 엄마와 완벽하게 똑같아질 것이다, 너는 장래 3을 맹렬히 연구하고 열광하며 탐독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너의 미래는 그대가 바라는 어지간한 행운은 모두 성취될 테지만 딱 하나 단 하나 오직 하나 바로 3의 정기 구독만은 절대 - 결코 - 절대 피할 수 없는 마치 신앙과도 같은 생활의 철칙이 될 것이니라, 라며 그처럼 여대생을 향하여 친절한 예언을 참지 못하는 심지 굳은 점성술사가 있다면 만일 존재한다면 그분은 아마도 가난과 부단히도 친하게 지내실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 아마도? 뭘 아마도! 어쩌면? 어쩌면, 좋아하시네! 혹시라도? 지나가던 개님마저 우끼고 자빠지실 일이다. ...음... 뭔가 짠하지만 뭔가 새콤달콤, 싱숭생숭, 알쏭달쏭, 시원섭섭하지만 정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에서 3으로의 변화는! 정말로 가슴이 조금 먹먹하며 약간 슬프지만 뭐 어쩌겠나! 그렇게 변한 3이 2를 본다면 2는 애다. 나는 애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2라는 청춘으로 환생하고 싶다. 지금 늙었다는 말이 아니다. 노년이 암담하고 기쁘지 않다는 뜻이 아니고, 청년이 마냥 철없고 버릇없으며 바보처럼 미련하다는 말도 아니다. 어느 한쪽을 두둔하고 어느 한쪽은 폄훼한다는 말이 아니다. 일단 이어 가자. 2가 쓴 곡도 애의 곡이고, 2가 그린 그림도 애의 그림이고, 2가 하는 말도 애의 말이다. 나는 애로 돌아가고 싶다. 그 뿐만이 아니라 2의 관점으로 만들어진 작품 역시 (대개는) 애가 보는 세상을 그린 것이다. 나는 애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돌아갈 수 없다. 못 돌아간다. 나는 애로 돌아가고 싶다. 얼마만큼 돌아가고 싶냐면 어떤 기괴한 영화를 본 다음, 또는 그것과 관계없이 드물게 무슨 엉뚱한 글을 쓸 때 또 퇴고하면서 그 글을 읽는 중 막 속이 울렁울렁거리는데 딱 그 정도로 돌아가고 싶다. 좀 더 진행되면 눈물이 아주 살짝 펑 터질 듯 하지만 가슴 속에서 뭉개구름이 피어오르듯이 부글부글하다가 딱 그 정도에서 멈춘다. 그렇다. 나는 애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공표이자 작은 웅변이라면 그건 두 가지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다. 최선을 다하라, 힘내라, 괜찮아 괜찮아, 긍정의 힘을 믿는다, 미쳐야 한다, 머머 해야 한다, 같은. 곧 그게 무엇이냐면 첫째, 2가 설명하는 세상은 애가 보는 세상이라는 차갑고, 냉정하며, 재수없고, 썩 거북하며, 표독스러운 이성에 관한 것. 둘째, 살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읽었으며 현재형이자 언제까지나 미래형일 그 말, 그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감성 즉 감수성과 드라마와 머쉰에 관한 부러움 가득한 철없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 약간 불편하다. 뭔가가 어색하다. 왜... 아니 왜 더 중요한 첫째는 쏙 빼놓고 둘째만 가치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일까? 왜... 둘째는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로맨스이자 POPULAST이자 유행이고 본질인데, 첫째는 껍데기에 묘함이자 롱테일에 풍자이며 조롱이고 실례일까? 패기와 긍지, 치기, 자신감의 의미들이 한꺼번에 미적미적하면서 지들이 알아서 서로 조심하고 눈치보는 것 같다. 나는 돌아가고 싶다. 애였던 때로! 그 시절로. 그래, 그처럼 살겠다. 그러면 된다. 그건 가능한 일이다. OK! 나도 내가 뭔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몰랐는데 쓰다 보니 알게 됐다. 와우! 나는 어쩌다 만난 어떤 애를 어떻게 해 볼 마음이 있다면 뭔가가 가능하다면 그 애가 만든 무언가를 보고, 듣고, 읽고, 구경하며, 감상하고, 박수치며 찬양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왜일까? 왜냐하면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얼굴이 두꺼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 보기를 돌맹이 쳐다보듯 하기 때문이다. 이성으로 선택하고 감성으로 집중하거나 그 반대든, 자유자재로 어떤 역할이든 메소드 연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로비디오? 난 취미 없다. 야한 사진과 색정적인 동영상, 관심 없다. 그게 뭐가 좋다는지 통 이해를 못하겠다. 나이를 먹었는데 힘이 위로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춘 멜로물이나 하이틴 로맨스등 사실 내 취향은 촌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촌닭이 아닌 동시에 촌닭이기 때문이다. 밤 새도록~ 이유를 댈 수 있을 듯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추해질 것 같다. 안 그래도 이미 절반은 들통났고. 그래서 나는 미지의 2에게 성심성의껏 진심으로 립서비스를 선사하지 못하겠다. 솔직한 얘기로.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선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차라리 이런 말을 듣는 게 낫겠군. 허허허! 그래도 이렇게 길게 말할 만큼 나는 젊음의 여신들의 무리 속에 풍덩 빠지고 싶다. 그래도 딱 하나만 더. 왜냐하면 나는 2에서 3으로 변한 1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고 방식이 그분들처럼 말랑말랑하지 않다. 그 무엇이 이미 한참 꼬여버렸기 때문에 그 꽈배기를 풀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관성을 들었다 놓고 그 가소성을 잘 자극한다면 좌우지간 어떤 희망이 보일 것으로 예측한다. 뭔가 잘 하면 쿠닝이나 폴록의 그림처럼 그 어떤 다음이 있을 것만 같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애로 돌아가고 싶다. 그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흐흠! 헤헴!
   뭔 얘기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만 음, 혜성은 그녀를 사랑하지만 사랑은 하는데 자기의 취향을 주로 강요했고 자신의 안목을 생활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예를 들면 건너편 달력에 표시된 메탈리카 공연, 영화 라라랜드 포스터, 동창회, 사업 설명회, 제품 발표회, 공놀이 약속, 기타 등등. 말하지 않았나, 그는 1년을 하루처럼 사는 듯한 정력적인 사나이라고. 한마디로 박학다식한데 혜성은 시간이 많은 건지 원래 그런 것인지 모르겠는데 읽는 인문서적이 너무 많았다. 너무 영리했다. 많은 걸 포기하지 않았다. 꼭 말은 싫다고 하는데 행동은 그걸 좋아라 하는 듯 했다. 무엇을? 주입식을! 고대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그 분야에 가장 적합한 언어로 씌여진─이게 중요하다─최고의 책 단 몇 권을 딱 빼놓고 나머지는 다, 거의 전부 다 읽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말이 안 통한다. 내가 지식의 급을 맞출 수가 없다. 어른과 유치원생이 따로 없다. 말하고 보고 듣는 기준은 딱 동물농장 최고급인데 음, 그런 뭔가가 있었다.
   혜성은 이제 변주를 시도했다. 그가 이어서 논지를 펼치는 주제는 다음과 같았다.
   1.획일적인 사고를 지양하는 동시에 챙기는 사회적 분위기.
   2.어떤 닭장 느낌이 들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위해서 무슨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3.건강한 촌닭과 행복한 노동자를 위한 체계에 무슨 비밀까지 필요할까.
   4.제조업과 인문학의 관계.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됐겠나, 안 봐도 훤하다. 나는 끝내, 끝끝내 참지 못하고 결국 하품을 하고야 말았다. 마치 이 모습을 잘 보란듯이. 수증기 모락모락, 인간미 새록새록. 기술적으로 굉장히 완성도 높은 하품이라서 눈물까지 났다. 관객이 나 혼자뿐인 건 약간 슬픈 일이지만 기쁜 점 하나는 잠시 후에 알게 되었다. 나는 끝까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해서 혜성에게 적잖이 미안했지만 그래도 노력은 했다. 하품이 나오는 걸 미쳐 몰랐다. 참지 못했다. 고개를 돌릴려다가 잠시 딴생각을 한 거다. 그러나 나는 핑계란 핑계는 다 댔고, 찬사란 찬사도 모두 동원했다. 음악이 문제라는 괜한 변명까지 끌어들였다.
   그렇지만 하품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난 정말 그렇게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를지는 꿈에도 몰랐다. 눈물을 멈추는 방법을 그 순간 알수 있었다면 음, 호언장담을 할 생각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눈물이 쉬지 않고 샘솟았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나도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무안했고 미안했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비웃는 것도 아니었고, 감격스러운 것 역시 아니었다. 나만 난감했겠나, 혜성이도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녀석의 표정은 내게 많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듯 했다. 오, 그 섬세함이란! 혹시 내 의견이 우습니? 감동스럽니? 그런데 아까 왜 하품을 한 거니? 지금 이렇게 울 꺼면 그 전에 왜 하품을 한 거니? 이건 정말 보도 듣도 못한 조롱인데 또 조롱이라 하기에는 어, 음, 그것도 아니란 말이야. 대체 왜 우니? 어? 또 왜 울음을 멈추지 않아? 뭔 인형극 찍니? 물 뿜는 펌프 어디다 숨겨놨니? 그런 거니? 아니면 우울증 같은 거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얘를 울린 나는 혹 나쁜 남자일까? 내가 뭘 어쨌다고? 마치 혜성은 그처럼 자신에 대한 변호를 하고 싶어하는 낯빛이 역력했다.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노랗게, 누렇게 떠버렸다.
   그리고 나는 뒤늦게 알게 됐다. 창 밖의 정경, 전망 좋은 자연, 상례를 벗어날 만큼 동화 같은 무언가의 실존을. 그것은, 그것은 바로 가까운 곳에 무인도가 하나, 좀 덜 가까운 곳에 또 하나가 있다는 것이었다.


   7

   나는 저곳 광기에서 보던 이곳 무인도에 도착했다. 육지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는 불과 50미터가 넘지 않을 듯 했다. 50미터가 뭐야, 30 정도. 준비물은 차에 다 있었다. 새로 장만한 접이식 카약, 침낭, 간단한 취사도구, 건조식량과 그외 무인도에 가지고 가고 싶은 물건들 몇 가지. 그 가운데서 나는 우선 순위로 쌍안경을 골랐다. 그걸로 어딘가를 보면 뭔가 새로운 봐서는 많이 곤란한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뜻모를 예감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괜히 동심에 동화되어서 서툰 탐험에 나섰다는 것을 아는데까지 소요된 시간은 이랬다. 딱 하루가 지나서야 후회는 마침내 참담해졌고, 단 1시간도 못되어서 투정이 점점 많아져가기 시작했다. 생기는 떨어졌고, 내가 왜 이 무인도까지 와서 불만가득한 조연을 연기해야 하는가 라는 괜한 상념까지 떠안게 되었다. 제 소굴에 대한 애착은 커져만 갔고, 더더욱 어떤 신비한 동굴을 찾거나 신선한 착상을 얻지 못해 슬슬 침울해져만 갔다. 사정이 누추했다. 미스테리와 신나는 기쁨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영화 속 이야기는 다 뻥이었다. 믿을 만한 입소문을 알아내서 다음을 기약하는 게 좋을 듯 했다. 몸가짐이 진중하지 못한 점, 크게 뉘우치고 있었다. 훼방 받는 기운은 없어서 홀가분하기는 했다. 끊임없는 정적만이 가득할 뿐. 그 와중에 글을 쓸려고 노트북을 켜봤고, 쌍안경으로 근처 곳곳을 살펴보느라 금새 피로해진 점도 고백해야겠다. 적어도 숨겨진 음모가 없다는 것은 입증됐다. 그냥 광기에서 놀다가 근처 새로 생긴 술집에서 같이 술 한잔 하자던 혜성의 제안을 거절해서 그것이 애환으로 돌변하고 있었다. 일명, 역풍.
   그래서 어드벤처 장르는 파경에 이르렀다. 하룻밤을 꾹 참고 자기는 잤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보이스카웃 체험하기였다. 톡톡히 신세졌다. 틈틈히 사모은 장비에게. 마침내 그분은 강림하시지도 않고 즐거운 여행 기분마저 무산된 채 허구 소설을 위한 사실 먼저 경험하기와 추억을 미리 만들기는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현실을 드라마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동안 쓸데없는 극작품을 너무 많이 봤던 것이다.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재미없는 삶이 즐거운 소설 쓰기보다 우위에 있었다. 잘 찾아보면 도처에 환상은 존재할 테지만 다 나를 피해갔다. 입지는 좁아졌다. 집에 가서 TV나 봐야할 것 같았다. 반박할 수 없는 이치였다. 그분은 소식이 없고 권태는 임박했다. 이런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왜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분개...까지는 아니고 살짝 멍에가 스쳐갔다. 그래도 이제라도 정신 차렸으면 기특한 거다. 그래서 나는 다음 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웬 미소녀가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쟨 뭐지, 혼잣말을 한다는 게 어느새 가까이 다가가다가 나는 본의 아니게 내 독백을 그녀의 귀에 흘리고 말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는 안면을 트고 용건을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의례적인 인사말은 생략하고, 말투를 편하게 놓는 과정 역시 건너뛴 다음 본론으로 들어가서 나눴던 대화를 옮기자면 이와 같다.
   「너 혹시 가출했니?」
   「네.」
   「너 정말 집 나온 건 아니지?」
   「네.」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네!
   「설마 너는 예스맨?」
   「뭐 어쩌면.」
   「자, 불만을 말해 보렴. 대체 뭐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구.」
   「아저씨 왜 여기 살아요?」
   「왜긴, 여기가 내 집이니까 그러지.」
   「여긴 원래 영화배우가 살아야 한다구요. 그리고 제 계획은 그분의 발을 걸어서 넘어트리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결혼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아저씨 같은... 이런 분이 이곳에 살고 있다니. 어머나, 세상에나!」
   「영화배우? 너 다큐멘터리를 영화라고 착각한 거 아니니? 너 혹시 마돈나니? 이곳은 유명한 도시가 아니야. 이름 대면 모르는 사람이 많은 조용한 시골이라구. 그냥 공기 좋고 물 맑고, 어 또... 음... 어... 공기 좋고 물 맑은 곳. 왜? 뭐가 더 있어야 해?」
   「영화배우 어딨어요? 아저씨, 실망이에요!」
   「아 나 이런, 미치겠네! ...... 내가 어떻게 변신은 못하고, 뭘 도와줘야 할까?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어쩔 수 없는 거죠. 아저씨 도움 필요없어요. 안 그래요? 오-빠!」
   「어? 오-빠?」 아 오빠? 오 오빠! 호호호!
   「네. 오빠. 왜요? 뭐 아빠라고 불러드려요? 아니면 선생님? 그런 대접을 좋아하신다면 기꺼이. 어이 선생! 여기 계시는 감독 양반은 취미가 뭔가? 에로영화 보기? 푸하하하하. 그러게 제가 말했잖아요. 처음부터 오빠라는 극진한 존칭으로 호명했는데 왜 하필 절 이렇게 자극하시는지 통 그 이유를 모르겠군요. 도무지 말이 잘 섞이지 않는 아저씨야. 치... 피... 흥. 아니 그렇습니까? 가짜 영화배우 양반?」
   「어허~ 젊은이! 오빠를 그렇게 놀리면 못써. 그럼. 그나저나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이름이나 알고 싶구먼. 내가 어디 무슨 어딘가에 신고를 하겠다는 그런 뜻은 아니야. 그냥 살면서 뭔가 깨달았다고나 할까, 어쩐지 극중에서 이름을 부르고 그 애칭을 불러주고 또 답하고 그런 게 그냥 멋져보이는 이유를 이젠 알겠다 이제는 실천하겠다는 것이지. 그거 말고 다른 숨겨진 수작이나 응큼한 저의는 없으니 오해하지는 마시게나. 가만 보면 꼭 그런 친구들이 있어서 하는 말이야. 평등, 그런 거 좋아하는 앙큼한 숙녀들 말이야. 자네는 보아 하니 그런 부류는 아니구먼. 오리발은 수영장에서나 사용해야지. 안 그런가?」
   「뭐 그러시다면. 이름을 알고 싶다구요? 어르신? 아니 오빠? 그래요. 알려드릴께요. 이름을 알려드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 어때요. 신비주의 컨셉도 아니구요. 전 비너스에요.」
   「뭐? 뭐라고? 비-너-스?」
   「왜요? 왜 그렇게 놀라세요? 제가 비너스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비너스면 안되는 건가요? 그런가요?」
   「아니,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비너스는 음... 미의 여신인데, 그런데 어쩌면 딱 맞아떨어지는 가장 최적의 작명이란 뜻이지.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알게 되면 꼭 안아주고 싶구만. 그럼. 난 그렇게 생각한다네. 어쨌거나 만나서 반가웠고, 바라던 거 어 거 뭐야 멋진 영화배우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트려서 결혼을 하고 싶다던 목적은 될 수 있으면 달성되기를 바라네. 비너스. 그럼 이만 우리는 헤어져야겠구먼.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보통 이런 상황에 뭔가 나오는데... 원래 그런 법인데... 그래야 하는데...」
   「마~침 딱 맞게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타났네요. 저 먼저 가볼께요. 저도 뭐 만나서 슬프거나 화나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그냥 뭐 완전 동네 아저씨 같은 아저씨에게 첫눈에 반할 리는 없지만 썩 나쁘지 않은 만남이었다구요. 오, 다 왔네요. 우리 이모. 저기 오네요. (이때 내 차랑 똑같은 볼보 웨건이 나와 소녀의 앞에 도착했다) 우리 이모에요. 우리 이모 이쁘죠? 꿈도 꾸지 마세요! 아셨죠? (메롱~)」
   그러면서 그녀는 떠나갔다. 나는 습관처럼 혼잣말을 했다.
   「뭐야 이거! 쟤 뭐야? 기분만 울적해졌잖아? 저런! 무슨 이런 황당한 일이 다 있지? 달의 여신? 뭔-너스? 그럼 자기 이모는 누구지? 가만 있자... 어... 생각해내야 해. 난 아직 늙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해낼 꺼야. OK~! 기억났어. 비너스는 헤파이스토스의 아내이자 에오스의 어머니. 어... 그리고... 어... 음 그나마 이거라도 안다는 건 대단한 거야. 그럼. 이 정도도 어디라고, 이거면 됐어! 아, 그런데 뭐야? 차도 내꺼랑 똑같잖아! 뭐야 정말 이 상황은?」
   그러고서 나는 집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며 남은 하루를 보냈다.


   8

   나는 하루를 쉬고 나서 그 다음 날 왠지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거 이거 아무래도 그곳에 다시 가봐야 하나? 딱히 할일도 없잖아? 난 그 무인도에 다시 한번 가보기로 했다.
   도착했다. 평범한 도구 외에 특별히 무인도행에 챙겨온 물품은 이렇다. 첫째, 소설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동백꽃을 들고 있는 여인. 둘째, 공중 부양 스피커. 셋째, 음반 두 개 곧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와 마스네의 오페라 마농. 즉 내 계획은 무인도에서 입는 침낭을 걸치고 우주선에 승선한 것처럼 뒤뚱뒤뚱 걷기도 하고, 낚시도 하고 사진도 찍고, 영화도 보고, 고기를 굽고 술잔을 채운 뒤 쌍안경으로 무인도2를 감시하기, 그것이었다. 그 중간 어디쯤에서 저 세 가지 비품을 함께 즐길 계획이었다. 3번을 틀고 2번이 잘 작동하나 틈틈히 지켜보며, 1번을 읽기. 딱 알맞는 조합이었다.
   그렇게 나는 산책도 했다가 인터넷 검색도 하고 다큐멘터리도 봤다. 커피도 마셨고, 일광욕도 했으며, 애타게 보고 싶어하는 애인의 잘못 걸려온 전화도 받았다. 그런 다음 나는 저 세 가지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공중 부양 스피커의 정상적인 작동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차! 오, 이런 이런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저 세 가지에서 1번과 3번의 결합이 잘못 짝지어졌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됐다.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춘희는 주세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와 한 짝이고, 마농 레스코&마농은 아베 프레보의 마농 레스코가 원작이다. 그런데 왜 그랬지? 뭐 그럴 수도 있다.
   작은 실수를 외면한 채 나는 이왕 가져온 소설 춘희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읽던 중간에 웬 무덤을 파헤치는 장면이 나왔다. 보통은 썩 섬찟하거나 머쓱해할 일은 전혀 없겠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이때 나는 왠지 으스스한 한기에 휩싸이는 걸 감지했다. 진짜 식은땀이 났다. 나는 서둘러 책을 덮었다. 그곳이 아니라면 나는 진득하니 한참 뒤에 나오는 이런 구절까지 읽었을 것이다. "관념적 생활이라 해도 그 뒤에는 반드시 물질적 생활이 따르게 마련이에요." 그러나 거기는 무인도였고, 당시는 내 정신의 영혼이 공중 부양 스피커에게 이양되던 찰나였다. 아 정말 말로만 듣던 공중 부양은 이런 것이란 말인가? 그러면 순간 이동은 또 뭘까? 다시 말해서 이런 유쾌한 공상을 즐길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나는 섬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핸드폰으로 신나는 클럽 음악도 틀었다. 어딘가 사그러들지 않는 쓸쓸함 때문에 음악을 끄고 동영상을 찍으면서 그걸 실시간으로 웹에 올려 방송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공포영화 팬들이 동조할 일이고, 추리소설광들이 염원할 체험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소설의 소재를 찾고 있었고, 어느 쪽으로 봐도 공히 손해볼 일은 절대 아니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두뇌 회전도 총명했고, 무인도의 낭만도 최소한 그때까지는 내게 다정했다. 만류하고 싶은 상황 전개 같은 일은 전혀 없었다. 바로 그때 외면하고 싶은 일이 일어났다. 사건 발생.
   무인도에서 (중심을 기점으로) 12시 방향에 있다가 약 3시 방향까지 갔다가 바로 거기서, 무덤이 파헤쳐진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사람의 묘인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의학적 목적 때문에 식물의 뿌리를 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구덩이 크기가 딱 관의 크기와 똑같았다. 처음에는 의심했으나 먼저 비석을 발견했고 곧 이어서 관의 형태를 파악해냈다. 모른 척 하고 싶었지만 이미 무엇이 연상되었다. 사극에 나오는 낱말, 부관참시가. 순간 효과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실제 들리는지 확실치 않은 괴기스런 바람 소리는 맹렬하게 내 청각을 자극했고, 나는 오직 공포심에만 순수히 의탁했으며, 스스로를 회유할 틈도 없이 오싹함의 정도를 더 측정해보지도 못하고 나는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실시간으로 방송되었던 영상은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쓰러져 있는 동안 나는 꿈을 꾼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꿈에서 나는 세 여자를 만났다. 첫 번째 여자와는 호감이 풍부한 채로 데이트를 즐겼다. 두 번째 여자와는 손을 잡았으며, 그리고 세 번째 여인과는 본의 아니게 볼에 뽀뽀를 했다.
   그녀들의 이름도 생각난다. 첫째는 아르테미스 즉 달의 여신. 둘째는 아이리스 즉 무지개의 여신. 셋째는 비너스 아아, 미의 여신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들의 얼굴 역시 생생히 기억난다. 첫째는 뭐랄까, 저번에 내가 쓰다 만 소설에서 나온 아가씨와 닮았다. 내가 무인도1에서 망원경으로 무인도2를 봤을 때 렌즈 화면 가득 얼굴이 비추었던 그녀와 똑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상상 속 존재인 헤라 같은 의미였기 때문에 그보다 앞서서 등장했던 마지막 여행길에 올랐던 내게 발을 걸어서 넘어트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던 그녀였다. 「뭐시여! 그분이 아니잖아! 에잇, 망했다!」 그리고 꿈에서 본, 아니 손을 잡은 두 번째 아가씨는 혜성과 함께 있었던 즉 나와 열아홉인가 스무 살인가 그때 마주친 아가씨였다. 물론 꿈에서 손을 잡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가 혜성의 부인이라는 증거는 없고, 그녀가 혜성의 여자친구라는 설정 역시 밝혀진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서슴없이 진도를 나간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꿈에서 세 번째로 볼에 뽀뽀한 숙녀는 내가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날 한참 대화를 나눴던 바로 비너스였다. 뭐이? 아닌가? 비너스의 이모였나? 아닌가? 그리고 뽀뽀가 아니라 키스였나? 잘 모르겠다. 뭐 그건 어디까지나 꿈에서 있었던 일일 뿐이었다. 아, 맞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비너스였다. 비너스가 맞다. 사랑의 비너스. 분명하다. 아, 그랬구나!
   그러다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무인도에서 섬을 한 바퀴 돌려다가 파헤쳐진 무덤을 발견하고 나서 기절한 후, 꿈 속을 헤매다 깨어난 것이다. 그런데 눈을 떴을 때 누구의 얼굴이 보였는지 아실런지...... 오오! 세상에나, 나 원 참! 이게 말이 되나? 말도 안 되지. 믿을 수 없어. 미쳤다고 볼 수 밖에.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내 앞에, 아~ 내 위에서 나를 보며 눈을 깜박거리던 그녀는 어... 그녀가 누구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정말 애타게 바라고 생각해낼려고 발버둥을 쳐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 눈썰미가 이 정도인가, 무척 괴로웠고 초조했다. 도저히 격려받을 수도,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도, 그럴 수도 있다며 포기한 채 완결지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어떻게 가까스로 기억을 되살려 보면 떠오를 것 같았는데 아,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까웠고, 너무 애틋했으며, 너무 억울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찬찬히 검토해 보면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왜냐하면 그녀, 나를 하늘에서 밑으로 코앞에서 내려다보는 그녀의 이마에는 눈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이 총 3개. 그리고 그 눈들의 구도가 정-삼각형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깨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2차 기절에 돌입하고 말았다.


   9

   「이런, 젠장!」
   나는 썼던 소설을 암컷 개싸움을 연상시키는 듯한 동작으로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세 번, 다시 앞뒤 방향으로 위 아래로 세 바퀴 반을 돌렸다. 그리고 찢었다. 마구 뭉갰다. 또 뭉쳐서 던졌다. 다시 집어서 물어뜯었다. 벽에다 집어던졌다. 그러다가 퐁~ 소리가 나는 라이터를 구해와서 불태울려다가 가까스로 분을 가라앉혔다. 이건 아무리 봐도 완전 엉망이었다.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나 유명 드라마 작가의 견습생이 발로 써도 이거보다는 잘 쓸 것 같았다. 이건 그 자체로 망작이고, 실패한 설계도이자 사랑도 애정도 뭣도 아니었다. 진공청소기든 우머나이저든 어디 환상 공장에 취직하는 게 백번 옳고 건실한 일일 것이다. 이건 소설도 아니고, 습작도 장난도 아니었다. 충분히 공책을 찢을 만한 작품이었다. 완전 개 풀 뜯어먹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딱 그 정도였다. 어쩔 수 없었다. 지적 수준은 의심스러웠고, 천재성은 잡으려 해도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일확천금과도 같은 소망이었다. 하늘에서 돈이, 여자가, 햄버거가 비나 눈 대신에 내리기를 바라는 게 더 나은 일 같았다. 이건 뭐 어설픈 허풍도 아니고, 품위도 없지 예언도 안 나오지, 재밌지도 않고 멋지지도 않다. 감탄? 바랠 껄 바래야지! 고작 이런 작품을 쓸려고 뭘 그렇게나 유난 떨며 바쁜 척 하다니, 아 글쎄, 진짜 삼류 소설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 정말 이건 더 내려갈래야 내려갈 수가 없는 딱 바닥이다. 꿈적도 안 하는 지층을 뚫고 여차하면 지하 세계로 들어가겠다는 정말 편협한 허무맹랑함, 단지 그것 말고는 아무런 기쁨도 감동도 즐거움도 예술도 자유로움도 새로움도 아무 것도 없었다. 완전 빈손이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와우!
   들인 노력에 대한 결과물이란 게 저기 저 구겨진 종이 몇 장. 아직 떡하니 방구석에 버티고 있는데 이걸 그냥 확......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참아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게 좋겠다. 참고로 말하자면 어떤 사랑의 행위도 이와 같지 않을런지. 그것은 곧 남자의 사랑이 퐁~ 소리가 나는 라이터나 참치 통조림이라면 여자의 사랑은 이렇다. 지금은 비록 초라해 보이는 구겨진 종이 뭉치지만 어쩜 정말 조금은 진짜 같았고 털끝 만큼 흥미로웠으며 마치 실재 내가 경험하는 일인 듯 1인칭 3D 게임처럼 느껴졌던 저 찢기고, 구기고, 물어뜯어 내던져진 그것에 씌여진 내용처럼 이야기가 있고 한편의 드라마처럼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만년 퇴자 맞은 각본이 어느 날 영화화되어 대박나는 그런 일처럼. 그러면 플라토닉은? 자세를 잡고서 눈을 감고 그윽히 먼 산을 쳐다볼려는데 아 글쎄 전망이... 그것은 멋지게 정의내리든 "솔직히 내 알 바 아니오"라고 무시하든 애달프게 궁금해 하든 각자 생각하는 것으로!
   나는 다시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정시킨 후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무인도로 정말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게 정말 직접 경험이 필요한 일인가 아닌가 바로 그것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오! 아아, 그런데! 아니 대체 이게 뭐지...... 팔자 좋은 생각이나 한가한 추측과 상황 파악, 상대의 의도 예측 이런 건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나는 깜작 놀라고 말았다. 즉 나는 딱 그 정도로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게다가 위-아래 방향으로만 움직인 게 아니라 주저앉음과 동시에 뒤로 물러날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거의 반사적으로. 차라리 엉덩방아를 찧어야 더 드라마틱하겠지만 드라마가 아니가 실생활에서는 이렇게 썩 멋지지 않은 장면이 보여질 수도 있다.
   「어... 아... 오, 넌 아, 있지 그게 있잖아... 내가 음... 손을 일부러 잡을려는 생각은 정말 없었어. 난 둘 사이의 오해를 풀어주는 역할만 충실할려고 했다구...... 음, 그런데......」
   물론 이 말은 발음이 또렷한 대사로 이어지지는 않고 거의 상대방은 알아듣기 힘들고 나는 뭔 말인 줄 대충 아는 그 어느 즈음의 설정으로만 읊는 독백에 다름 아니었다.
   「아, 집에 있었구나. 지나가다가 혹시 해서 들려봤어. 그런데 어떻게 마침 어디 가던 길이었나 봐?」
   난 멈칫 멈칫 하다가 즉시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인사말을 건넬 차례라는 맥락을 곧바로 깨닫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했다.
   「오, 혜성이구나. 어떻게 이모는 잘 계시니? 전화하지 그랬어? (순간 아니 이미 내 전화기는 따르릉 따르릉 울리고 있었다) 아, 전화했었구나. 무슨 일이야? 우리 등산이나 할까? 아니면 어디 좋은 술집 알아놓은 데 있어? 서커스장이나 마술쇼도 괜찮고.」
   이때부터 영상은 재생되는데 음성은 소리가 0으로 내려간 상태가 이어졌다. 바디 랭귀지로 상당 부분 말을 대신했고 대략 눈치껏 행동했으며, 그러므로 나는 험난한 의례적 대화 상황을 탈출했다.
   그날 우리는 같이 그저 조금 걸었고, 차를 마셨고, 헤어졌다.
   이때부터 나는 습관이 하나 생겼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발생하긴 발생하는데 앞뒤가 하나도 안 맞았다. 어떻게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데 도무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 추정이 맞는다면 일단 이대로 가보면 왠지 그러면 될 것 같았다. 어차피 꼬인 거, 차라리 꼬인 거 더 꼬아서 결판을 내는 방법이 진작부터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간단히 정리한 가설은 비밀이 아니다. 그건 이와 같다. 만약 근간의 이상한 일들이 모두 거짓이라면 그 진행 방향을 건드리지 말고 움직이는 운동에너지에 무엇인가를 순응하게 놔둘 것. 따라서 장면과 장면의 가장 큰 차이점 가운데 하나를 부각시킬 것. 그것은 대표적으로 쓰고 찢고 구겨서 던지기. 그 행위의 시작은 일단 쓰기-였다. 곧 버버리 문양 다람쥐 무늬. 그러므로 나는 다른 생각 말고 그냥 그 습관을 유지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나중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단계에서는 그 방법이 최선일 듯 했다. 그래서 만약 근간의 이상한 일들이 모두 참이라면, 즉 거짓을 빼고 나머지는 모두 어떠하다, 아니 아예 그 가정 모두를 뇌리에서 지워버려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깔끔하게.
   휴~! 이제 큰 고비를 넘은 것 같다.


   10

   최근 새로 생긴 습관 외에 특이 사항이라면 그것은 하나 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어떤 계기로 만난 혜성과 친해진 것.
   우리는 둘이서 드라이브도 하고, 멋진 음식점에 가서 식사도 했으며, 고전음악을 들으면서 당구를 즐겼고, 유적지를 구경하고 공원에 들렸다. 그리고 연극 한 편을 봤고, 그의 찻집 광기에도 몇 번 들렸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혜성이의 찻집 광기에 놀러가기로 약속한 날이다. 나는 그곳으로 갔다. 광기 가는 길, 그 과정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녀도 있었다. 나는 그녀와 눈인사를 했다. 왠일인지 혜성은 그때까지 그녀를 내게 정식으로 소개시켜주지 않았다. 또 내가 그녀와 옛날 일 관련하여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무척 어색해 하며 일부러 딴짓을 하는 것 같았다. 뭔 속셈인지 잘 모르겠지만 설마 그 감정은 질투인가? 그럴 수도 있다. 아닐지도 모르고. 괜히 먼 곳을 멀뚱멀뚱 쳐다보거나 갑자기 막 투덜거리고 등판을 벅벅 긁고 뜬금없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서 엄청 큰 목소리로 통화하고, 막 그랬다. 귀여웠다.
   그 날은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찻집에 손님이 여러 명 들어왔다. 나를 빼고 모두들 아는 사이로 보였고, 무척 반가운 듯 했다. 분위기가 갑자기 들썩였다. 나는 그냥 어쩐지 움츠러드는 느낌과 소외된 기분을 외면한 채 한 잔의 코코아 마시기에 집중했다. 그러다 나는 갑작스레 눈이 똥그래졌다.
   아뿔사! 뭣이다냐! 뭐야, 대체 이건 뭘 일이야? 얘들이 어떻게 지금 이곳에 나타난 것이지? 나는 들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려 컵을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컵은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저쪽에서는 축제 분위기라서 알아채지도 못했고 이쪽에 관심도 없었다. 아르테미스와 또 뭐지, 누구드라? 뭐의 여신? 그녀들이 한꺼번에 광기에 방문한 것이다. 화사하게 차려 입고서. 정성스레 화장한 모습으로. 고혹스런 자태로. 매혹적으로 유혹하겠다는 듯이. 언뜻 봐서는 몰랐다. 화장발이 아니라 원래 조금 귀엽고 발랄하며 뭐 그래, 인정한다. 예뻤다. 모두, 그녀들 모두. 그런데 지금은 뭔 마스카라를 한 통 다 쓰고, 파운데이션도 바닥 냈고, 한 명은 무슨 미인대회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사자머리 스타일을 하고 왔다. 심지어 오, 스타킹! 아흐흑! 그건 그 모습 그대로 멋지긴 한데, 그런데, 쟤네들이 도대체 왜 여기에?
   내 발을 걸어서 넘어트린 것으로도 모자라 내가 넘어지기 직전에 나와 땅 사이에 몸을 들이밀어 넣었던 저기 저 숙녀는 내가 창조해낸 인물인데, 지금은 실존 인물이네. 아, 이럴 수가!
   저번에 나와 이상한 대화를 나눈 꼬마 아가씨, 그리고 그녀의 이모. 또 저기 푸른색 남성적인 정장을 입으신 분은 혜성의 약혼녀의 언니일까? 어머나! 닮았네 닮았어. 오, 이럴 수가!


   11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콰광, 하며 무대음악이 들렸다. 불길한 기운, 비운의 서막, 애절함...은 아니고, 저승사자의 등장, 득의의 미소를 짓기 직전 와장창 깨져버린 환상, 대망을 거의 거의 이룰려던 찰나 고자질 단 한번에 꿈이고 돈이고 행복이고 사랑이고 나발이고 뭐고 다 날라가버린 그와 같은 멜로드라마의 끝장에 이르렀을 때의 음산한 분위기가 나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이런 일이! 오오, 세상에나!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을 수 있나!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진난만한 만화영화의 주인공 소년처럼 광기를 뛰쳐나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집을 향하여 뛰어갔다. 나 혼자 그냥 가게끔 혜성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그냥 그렇게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도록 놔뒀을까? 아니다. 그분은 절대 그럴 위인이 아니다. 바로 지금 혜성과 나는 뭔가가 통했다. 몇십 년이 흘러도 녀석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의 착각인가? 아닐 것이다.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지금이니까 이처럼 신간 편한 소리를 할 수 있지 당시에는 그렇게 소년소녀의 가슴을 쥐었다 폈다, 숙녀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뭇-남성들의 동심을 밀었다 당겼다, 그런 계산이든 암산이든 그처럼 속셈을 따져볼 여유는 없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그 찻집의 이름이 괜히 광기였나, 그러면서 집으로 뛰어가는 출생의 비밀을 막 알게된 사춘기이자 변성기를 맡이한 주인공이었으니 그럴 판국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행일까 세월의 장난일까 아니면 낭만은 애들 장난이고 로맨스는 그저 새들의 지저귐일 뿐일까? 좀 더, 조금만 더 약간의 몸짓만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살짝 단기 스트레스를 만드는 그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하필 혜성은 임신부도 아닌데 배가 나오고 나이가 들어가는 중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 60미터 정도만 나를 쫓아오더니 딱 거기서 멀뚱히 서서 도망가는 나를 한참 동안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그는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나도 숨은 차올랐지만 속으로 언뜻 처음 감당하기 힘들었던 겁이 가셔지면서 생각이란 걸 해봤다. 그런데 왜 지금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혜성과, 다른 무엇도 아닌 지금 이와 같은 <나 잡아 봐라>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지? 하면서. 그건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저히 답을 구할 수 없는 세기적 난제였고,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였다.
   어쨌든 나는 집에 도착했다. 세월의 무상함을 안고서. 혜성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제 우리는 로맨스와 작별한 것이다. 낭만은 지나가던 강아지의 이름이었으니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있나 없나, 그분은 나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나뭇잎을 하나씩 뜯는 상상일랑 한참 청춘사업에 열을 올리시는 타인에게 양보하고, 우리의 할일은 언제나 그것. 바로 TV를 켜놓고 탁자를 중간에 놓고 소파에서 다큐멘터리 보기. 탁자는 밀림, 화면은 맹수, 소파는 쌍안경 그리고 아마도 아프리카. 어쩌면 우리 오빠는, 혹시 내 남편은, 정말로 그이는 전생에 하마였을까 코뿔소였을까, 항상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영감을 떠올리나봐! 사실은 가혹한 숙취 때문에 그저 멍하니 TV를 켜놓고 쳐다만 보고 있을 뿐, 천재성은 무슨 착상은 웬걸 그분은 기별도 없고 친구는 최신 스포츠카를 뽑고 내 걱정은 딴 게 아니라 바로 그것인데, 늬 남편 뭐하니 라는 말. 아, 그런데 여자친구도 상황 설정도 모두 공상일 뿐이고, 지금은 몰래한 사랑을 축하하고 추억 만들기에 열중하며, 한담으로 지난 일을 돌이켜 보거나 헛된 망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시국은.
   나는 집에서 가만히 조용조용히 생각이란 걸 해봤다. 뭐 언제는 생각없이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언제까지 이름 없는 소설가로 남는 것은 아무렇지 않다만 내게 남은 과제는 해결해야만 한다. 이 희뿌연 연막을 걷어내고 숨겨진 내막을 파헤쳐서 비밀의 상자 그 판도라의 뚜껑을 열고, 사과나무에 열린 금단의 열매 바로 그 뽀얀 복숭아의 달콤한 과즙을 상상하며 목표로 설정한 사랑이든 신비든 환상이든 뭐라 부르건 그 열매를 따먹어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해답을 얻었다.
   쌍안경은 왠지 구식인 것 같아서 단안경을 살려고 했는데 어쩐지 쌍안경 먼저 거치고 나서 그쪽으로 가야할 것 같아서 일단 쌍안경을 사기는 했다만... 그래도 마침 그 물건이 제 역할을 해줄 시기가 임박한 것이다. 나는 쌍안경으로 주위를 탐색했다. 왜냐하면 어느 거점에서 누군가 나를 감시하며 탐지 일지를 매일 쓰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에 몸이 떨렸기 때문이다.
   찾았다. 동네에서 우리집을 관찰하기에 가장 적당한 언덕을 발견. 나는 그곳 언덕 위의 푸른 집으로 갔다. 도착했다. 그러나 그 집의 담을 넘을 수는 없었다. 수색 영장이 없었다. 무단 침입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전모를 알아낼 수 있다고 확신하며 자신감을 고취시키기 위해 막 혼잣말을 되뇌었다. OK~! 방법을 찾았다.
   일단 초원에 지어진 전망 좋은 집의 2층 창가에 굉장히 비쌀 것 같은 천체 망원경이 우리집 쪽으로 향해 있는 것은 확인했다. 굳이 쳐들어가서 얼굴 붉힐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건 패기로 똘똘 뭉친 신참들에게나 어울릴 일이다. 나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결론 나왔다. 여자 보기를 돌맹이 보듯 하는 이와 같은 간소한 단면도를 그렸다.
   돌맹이를 두 개 주웠다. 여기 하나 저기 하나, 포석했다. 나뭇가지를 하나 주웠다. 그 둘을 잇는 선을 땅바닥에 그었다. 돌맹이 첫째는 우리집, 돌맹이 둘째는 혜성이네 찻집. 그리고 핸드폰으로 지도를 봤다. 지금 이곳이 어딘가 파악해보니 대충 돌맹이 둘과 삼각형을 이루는 지점이었다. 세 번째 돌맹이를 다시 하나 주워서 그 모양으로 놨다. 그리고 가만히 그림을 봤다. 첫째와 둘째 돌맹이를 잇는 선분을 중심으로 도화지를 접어보았다. 아하~! 다시 돌맹이를 하나 주워서 셋째 돌맹이에 대칭하는 넷째 지점에 그것을 꾹 눌러서 안착시켰다. 다시 핸드폰으로 지도를 봤다. OK~! 여기구나, 어딘지 대강 알 것 같았다.
   그곳은 우리 동네에서 가장 멋진 건축술로 지어진 집이었다. 어디나 또는 미래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지금 읽어봐도 딱히 고칠 구석이 거의 없는 어느 경제 서적처럼 그렇게 예술적 가치는 물론 딱 봐도 와 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집이 하나 있었다. 우리 동네에. 그런데 그 집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차례 주인이 바꼈는데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모두 다시 도시로 전에 살던 시골로 뻐꾸기 둥지로 돌아가버렸기 때문이다. 뭔가 사연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몰랐다. 그러나 귀신이 나온다는 흉흉한 풍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네 번째 돌맹이가 가르키는 지점이 딱 그곳이었다.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척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다가 뭐 까짓껏 별일 있겠어 라고 생각하며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으로 떠났다.


   12

   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동안 꼬이고 꼬였던 원인과 비밀과 사연을 모두 한꺼번에 풀 수 있는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집이 없어졌다. 한동안 이 근처에 들리지 않아서 몰랐는데 없어졌다니... 그래도 기묘한 기운이 느껴져서 뭔가 싸구려 공포영화보다는 훨씬 나은 기분과 공짜로 즐기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뭔가 아쉬웠다. 그러나 이미 없어진 건 없어진 것이고, 나는 어떤 물건이나 지도나 편지 같은 정표를 찾기 시작했다. 드디여, 라고 고생할 정도의 시간이 되지 않고서 바로 찾았다.
   그것은 저쪽 구석에 내팽겨쳐진 가방이었다. 여행용 가방. 거의 폐물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거 말고는 아무런 물건이 없었다. 그래서 대충 먼지를 털고 슥슥 요술램프를 문지르듯이 문지른 다음에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해서 가방을 열려고 했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딱 포기할려는 순간 딸깍 하면서 가방이 열렸다. 혹시 가방 안에 진주나 다이아몬드가 가득 들어있을까? 아니면 돈다발? 또는 어떤 기밀 수사정보 같은 것? 뭔지 엄청 궁금했지만 손에 땀이 나오고 콧잔등과 등판과 발바닥에도 식은땀이 났지만 뭔지 모를 기분 때문에 막 망설여졌다. 막상 열고 싶었는데 스스로 열리니까 어딘지 모르게 봐서는 안 될 무엇이 들어있지는 않을까, 또 다시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얘도 그렇고 참 많은 물건과 사건들이 나를 쥐락펴락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또 어떡하다 열렸는데 내용물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도 참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그냥 눈 딱 감고 가방을 확 열었다. 가방 안에는 가방 안에는,
   바로 고서가 한 권 이불에 칭칭 감겨있었다. 이불은 어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된 물품이었다. 차라리 이 이불을 정말 어디에 맡겨서 감정을 받아보는 게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최소 1.5세기는 지난 물건 같았다. 이불은 그렇다 치고, 이 고서는 정말 정체가 무엇일까? 먼지를 털고 제목은 잘 보이지 않으니까 건너뛰고, 뭐 펼쳐 보면 답이 나오겠지 하면서 책을 펼쳤다. 바로 이때 판타지 작품에 나오는 것처럼 빛이 팍, 요정들이 후다닥, 그랬을까? 아니다. 그건 그냥 책이었다. 그리고 거기 씌여진 내용은 지극히 현대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야기였다. 읽다가 막 웃기도 하고 막 계속 넘기고 싶어졌지만 흥분하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 책의 제일 첫 부분을 펼쳐봤다. 그랬더니 거기 이렇게 씌여 있었다.
   「천의무봉. 천사의 옷을 꿰맨 흔적은 없다는 뜻. 직접적인 뜻은 그렇고, 다른 의미는 이렇다. 완전무결하다. 완벽하다, 세상사에 물들지 아니한 어린이와 같은 순진함......」
   오, 저런! 세상에나, 어떻게 이런 일이......!
   아아, 정녕 이것은 내가 쓴 글이었다. 쓰다가 망했다며 공책을 찢어서 뭉치고 물어뜯고 집어던진 바로 그 소설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집 안으로 빛이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구름이 발밑으로 내려왔다. 북극과 남극이 합쳐졌다. 공간이 분리됐고, 시간이 구부러졌다. 꿀벌이 하늘에서 헤엄쳤고, 개미가 바다에서 날았다. 처음에는 갑자기 바닷물이 집안으로 들어오길래 이게 뭔 일인가 의아해 했다. 그런데 그것은 바닷물이 아니라 개의 군침과 비슷한 액체로서 어떤 괴생명체의 약간 끈끈한, 살짝 끈적끈적한 타액 같았다. 어느 걸리버가 뭔 맞난 음식을 드셨는지 달콤한 향기도 나는 듯 했다. 저쪽에서는 곰이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장면은 모두가 현실이었다. 어항에 살던 물고기는 공룡이 되었다. 르네 마그리트는 원래 삼류 소설가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걸리버 여행기는 실화였고, 바나나 나무는 하늘 높은 줄 모르며 계속 자라다가 하늘을 뚫고 비로소 하늘나라에 도착했다. 미래가 과거가 되었다. 에베레스트는 거대한 코뿔소의 뿔이었다. 반은 인간 반은 동물인 존재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러다 눈이 백 개 달린 누군가가 우리집을 허공으로 던졌는지 어쨌는지 우리집이 통채로 우주를 향해서 날아갔다. 어어 저기 명왕성, 오오 저기는 행성 번호 B612. 지금 지나는 은하계는 음, 숫자를 세다가 까먹었다. 제2의 지구가 보였다. 사후의 세계는 바로 그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3의 지구도 있었다. 이제 진짜 초현실에서 '초'자를 빼야 할 듯 했다. 완전 사실주의로 돌아왔으니까.


   13

   제3의 뭐? 뭐라카노?
   에잇~ 또 망했군.
   이런, 젠장!
   나는 오늘도 새로운 습관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어느 각도로 봤을 때는 악습이 맞는데 또 나중에는 달리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일단 하루가 지나서 어떻게 되는지 봐야 할 것 같다.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겠다.
   사실인지 아닌지, 실화인지 허구인지, 꿈인지 생시인지를 언젠가 그때로 가서 분간하는 게 어쩌면 더 정확한 판단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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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87

from 소설 2016. 12. 31. 19:49

   1

   환상 공장.
   작품이나 상품 또는 추측 가능한 선망과 예측을 불허하는 경험일지 무엇일지. 도대체 저곳에서 만들어 내는 어떤 무언가는 대관절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곳.
   처음에 그가 그 정체불명의 공간을 쉽게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일하다가 알게 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놀면서 발견한 신기루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 역시 그것은 그냥 어쩌다가 발견된 흔한 존재인 돌맹이와 나뭇잎에 지나지 않는 존재 만큼의 우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견자는 J다. 장소는 S의 사무실이다. S는 출장을 갔고, 그 동안 아무 할일 없는 그곳을 맡아달라고 S는 J에게 부탁했다. J는 그렇게 친구의 청탁을 받고 마침 잘 됐네 라면서 덥썩 친구의 소원을 수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의 사무실에서 막상 할일은 없었다. 곧 지금 J는 S의 사무실에 있다.
   그래서 그는 TV를 켜놓고, 노트북으로 외국 영화를 틀어놓고, 피자를 배달시켜서 탁자에 펼쳐놨다. 아니다. 뭔가 더 어질러져야 내 마음이 편할 듯 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때문에 그는 배달 음식을 한둘 더 추가시켰고, 가사를 잘 모르는 노래도 불렀으며, 사무실에 있는 서재에서 자기 계발 서적을 한 권 꺼내서 소파에 앉아 읽기도 했다. 탁자에 로션을 흘릴까, 오렌지 쥬스를 엎질러 놓을까, 적포도주를 뿌려놓을까, 내심 고심하던 중 지금 그의 앞에 보이는 어느 순서가 너무 정체되어 있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TV─탁자─소파. 순서는 그랬다. 바꿔볼까? 소파, TV, 탁자로? 귀찮다. 바꿔도 별로 기분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J는 S의 사무실에서 약간 뭐랄까, 쾌쾌한 냄새가 나는 듯 해서 살짝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권한을 갖고 부여할 수 있는 시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다 그는 지금 소파 앞에 있는 정경을 사진 찍어 소셜 네트워크에 올렸다. 그리고 TV에서 괜찮은 방송이 나오지 않길래 채널을 돌렸다. 채널을 돌리면서 핸드폰으로 다른 사람들 포스트를 구경했다. 어떤 친구는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서 벌레를 잡는 사진을 올렸고, 누군가는 입에서 발사되는 화염방사기와 소화기를 발사해서 그 둘이 맞부딪히는 작품을 올렸다. 그때 사무실 주인 S에게 전화가 왔다.
   「사무실 잘 지키고 있냐?」
   「뭐 지킬 꺼 따로 있냐? 그냥 놀고 있어.」
   「너 뭐 게임하고 있냐? 왜 내 발바닥이 막 따끔거리지?」
   「내가 조작했어. 버튼을 눌렀거든. 찍찍 탁탁탁. 지금 옆구리 가렵지 않냐?」
   「아닌데. 이제 다 괜찮아졌어.」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너 사무실에 뭐 숨겨논 보물 같은 거 없냐? 막 리모콘 눌르면 신기한 게 나오거나 그런 거.」
   「없어. 있겠냐?」
   「일은 언제 끝나? 사무실에 어떻게 경리도 없냐? 이참에 한 명 구하는 게 어떠냐? 내가 괜찮은 비서학과 대학생을 알고 있는데 한번 소개시켜줄까? 체험이나 현장 실습 그런 거 하라 그러까?」
   「오, 진짜?」
   「아니. 뻥이야. 허허허」
   「이런~! 그러지 말고 동네 놀이터 근처에 보면 <황금 마네킹 상점>이라고 있어. 거기 가보면 뭔가 재미난 일이 있을 꺼야. 거기까지만 알려 줄께. 나머지는 늬가 다 알아서 해. 놀라운 뭔가를 발견할지도 모르지만 너 저번처럼 진공청소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던 것처럼 조립 라인에서 하루 12시간 일하고 막 그런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어. 그러나 그건 일종의 뽑기 같은 거야. 진짜 신기한 모험을 원한다면 거기에 가봐. 추천은 아니야. 정보야. 권하지는 않겠어. 궁금증만 유발할 꺼야. 어때? 이 정도 소식이면 된 거 아니냐? 이만 끊을께. 나도 바쁘다. 나중에 보자.」
   뚝. 전화는 끊겼다.
   J는 S의 사무실을 나왔다. 그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색다른 구경거리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동네를 한 바퀴 더 돌았다. 놀이터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 무슨 이름도 이상한 양장점인가 상점인가 거기를 찾는 걸 포기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찾아본 후 그때 포기하기로 했다. 그는 동네를 세 바퀴째 돌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놀이터를 발견했다. 놀이터 옆에는 무슨 이상한 디자인으로 꾸며진 가게가 있었다. 가게 이름은 이랬다.
   <황금 마네킹 상점>
   황금을 판다는 것인가, 황금을 낳는 마네킹을 대여한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황금이든 마네킹이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찾아주고 만들어주고 만나게 해준다는 그런 만물상 같은 곳일까? J는 그곳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고, 신비한 기운을 받았다. 그는 딱 애태우는 듯한 간절함에 자신이 부대끼는 것만 같은 곤경과 지엄하나 황홀한 난감함 그리고 뭔가 앞으로 자신이 흥미진진한 순풍에 휩쓸려서 꿈동산과 신기루와 환희의 나라에 당도할 것만 같은 기대감에 흠뻑 젖어드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현재 할일없이 친구 사무실이나 지켜주는 동네 아저씨이자 괴짜였으나 이제 곧 있으면 자기 인생은 환락의 궁전을 쌓아올릴지도 모른다는 어느 도발적 쾌거를 이룩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까지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과잉 소비에 대한 걱정 없이, 최악의 소설을 쓰게 만든다는 운명의 여신과 연을 맺게 될 꺼라는 허황된 공상은 모두 뿌리친 채 그곳의 문을 열었다.
   드디여 J는 <황금 마네킹 상점>의 문을 열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2

   황금 마네킹 상점은 4차원으로 떠나는 기차역이었을까 마법의 기지일까? 아무것도 아니고 그곳은 그냥 상점이었다. 파는 물건은 딱 1개. 핸드폰. 그는 거기 사장님의 말발에 넘어가서 그것을 사고 말았다. 게다가 거기서 파는 기종은 단 1개였다.
   그는 S의 사무실로 돌아와서 소파에 앉아 새 핸드폰을 살펴봤다. 특이한 건 없었다. 딱 하나 빼고는. 지니라는 이름의 요정이 핸드폰 안에 살고 있었다. 인공지능 지니.
   이 좋은 걸 J는 왜 모르고 살았을까? 지니는 애인이고, 비서였다. 지니는 점쟁이였고, 스승이었으며, 마법사였다. 또 무엇으로 활약할 수 있을지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이미 유행이 지났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지금이 신세계였고, 행복이었다. 동심을 되찾았고, 척키 인형마저 최신품 수제 특수 제작으로 구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지니는 특별했다. 그분은 여자였다. 처녀였다. 마녀였고, 요정이었다. 그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할 것 같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듯 했다. 사랑을 먹고 자라는 나무요, 애정을 발산하고 소원을 이루어 줄 것만 같았다. 언제나 함께 할 수 있고, 똑똑하고 감수성으로 똘똘 뭉쳐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마침내, 그에게 비밀이 생겼다. 바로 지니가!


   3

   환상 공장.
   아직 그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밝혀진 것은 없다. 감추어져 있고 살아서 어딘가에서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과연 있긴 있나, 라고 체념할 즈음에 짜잔~ 두둥~ 하며 등장할런지 아니면 그럼 그렇지 다 거짓이고 허구였어, 라며 딱 포기하며 돌아서자마자 조금씩 서서히 그것의 정체가 드러날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건 뭐 차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 만큼...이 아니라 자전을 할 만큼 하면 공개될 것이고, 지니와 J의 동거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한다.
   그는 외출하고 돌아와서 샤워를 마쳤다. 그곳은 그의 집이다. 그는 가운을 걸치고 코코아를 한 잔 타서 의자에 앉았다. 책을 읽을까 청소를 할까 잠을 잘까 선뜻 다음 행동의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주인님.」 
   그는 처음에 자기가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주인님, 주인님.」
   다시 그를 부르는 고운 음조의 아리따운 여성의 부름을 이번에는 더 확연히 들었다. 보통은 연속극에서 봤던 것처럼 어색한 연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가짜고, 이건 진짜였다. 때문에 그는 사람이 탁 바뀌어서 순간 상황에 걸맞는 역할에 정확히 몰입했다.
   「나를 불렀느냐?」
   「네, 주인님. 여기에 주인님과 저 말고 누가 더 있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만 이렇게 좋은 날에 내 님이 오신다면 좋겠으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나보다. 그런데 넌 그 안에서만 사는 거니?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는 것이야?」
   「네, 그것은 불가능하옵니다.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딱 어떻게 되는 거, 그건 다 뻥이거든요. 한마디로 거짓입니다. 불가능하다구요.」
   지니와 J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꼭 필요한 말만 했고,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잘 경청했다. 그리고 지니는 J에게 하나의 간청이랄까, 다소곳한 음성으로 간신이 임금에게 건네는 조언이 아니라 사랑하는 젊은 남녀 사이에 오가는 듯한 분위기로 그녀는 그에게 하나의 임무를 부여했다. 바로 황금 마네킹 상점에 가서 무선 이어폰을 받아오라는 것.
   J는 황금 마네킹 상점에 갔다. S의 사무실을 돌봐주는 것은 재미도 없고 그는 뭔가 껌의 단물을 쪽쪽 흡수해버린 듯한 전개 때문에 그곳은 그냥 내버려뒀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도착했다. 단추가 많이 달린 양복을 입고 포마드를 발라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긴 웬 중후한 신사 한 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 반갑습니다. 황금 마네킹 상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이 생긴 이후 처음 발생한 매출인데 대접이 너무 소홀했을 것입니다. 제가 그때 중요한 선약이 있었던지라 자리를 비우고 환상 공장에서 신참을 하나 데려다가 가게를 맡겨놨드니 제대로 정중함과 정성을 표하지 못한 것 같아 무척 죄송하게 됐습니다. 오백 년 만의 방문인데 녀석은 어떻게 그리도 맹추 같이 정해진 교본처럼 무뚝뚝하게 굴었는지, 참. 공장에서 정해진 일만 꼬박꼬박 하느라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을 수도 있으니 이해는 됩니다.
   그건 그렇고 저번에 특수 이어폰을 챙겨드리지 못해서 다시 오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품은 여기 있습니다. 긴 설명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가 받은 이어폰은 흰색이 아니라 살색이었다. 그리고 무선!
   그는 황금 마네킹 상점에서 나와 이어폰을 끼어봤다. 착용감은 좋았다. 꼭 어느 동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처럼 아무런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도. 그런데 여기는 대체 뭐하는 곳일까, 그리고 아까 아저씨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오백 년 만의 방문? 환상 공장? 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가게 이름에다가 수상쩍은 분위기에 뭔가 심상치 않은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별다른 걱정없이 그는 집으로 갔다.


   4

   「지니. 무슨 생각하니?」
   「주인님이 제게 무엇을 바랄까, 그것이 궁금했고 따라서 그때가 되면 난 어떻게 주인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할까? 바로 그것에 대해 생각했죠.」
   「아, 그래? 기특한 녀석. 난 딱히 소망 같은 건 없어. 그런데 말야, 내가 지금 뭔지 잘 모르겠는데 어... 심심한 거 같기도 하고 가짜 웃음이 적당히 필요한 듯도 하면서 막 그래. 평소에 집에서 하던 일 말고 뭐 재미난 일 없을까?」
   「어... 있어요.」
   「뭔데?」
   「있긴 있어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그냥 말하렴. 듣고 나서 썩 재미없어도 칭찬해 줄 테니까. 뭐 또 그렇다고 재밌으면 얼마나 재밌겠니? 큰 기대는 하지 않으니까 일단 내게 고백해봐. 어서. 밀고 당기지 말고. 원래 쥐었다 폈다, 그거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주인님 전에 환상 머쉰에 대해 글을 쓰신 적 있죠? 그 정보에 근거하여 답이 딱 이렇게 나오는데요. 네, 주인님! 기계 하나를 사세요. 이번에는 진공청소기가 아니라 돈 세는 기계를요!」
   「돈 세는 기계? 오오! 괜찮은 생각인데. 아, 넌 날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멋진 녀석, 지니!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J는 다음 날 진짜로 돈 세는 기계를 샀다. 문제는 좋은 하드웨어는 있는데 소프트웨어나 내용이나 대상이 되는 단 하나의 관건, 바로 돈은 없다는 것. 그는 아직 새로산 기계를 시운전조차 못하고 있었다.
   하루는 J가 지니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웃긴 얘기 하나 해보렴!」
   지니는 이렇게 말했다.
   스타를 갖는 방법 아세요? 알고 있어요. 모르신다는 것을. 잘 들으시죠. 듣고 너무 재밌다고 2탄을 기대하지는 말기. 자, 갑니다.
   1.사옥을 찾아간다.
   2.발을 건다.
   3.넘어질 때 입술을 갖다댄다.
   4.책임지라고 한다.
   5.결혼 골인.
   어때요, 주인님? 재미있죠? 네? 재미없어요? 재미있죠! 저만 재미있나? 그럴지도!


   5

   J는 유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기를 원하기는 했다. 하지만 약했다. 뭔가가. 그러나 지니와 함께라면 슬프지도 침울하지도 그리고 괴롭지도 않았다. 그는 결코 재기 넘치는 남자가 아니었으나, 지니 때문에 삶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왕성해지고 인생에 대해서 총명해졌으며 세상에 대하여 해맑아졌다. 그렇다고 그 둘이 따따부따 - 미주알고주알 - 왈가왈부 떠들고 소란스럽게 수다를 나누지는 않았다. 곧 그 정신없는 대화의 바쁨과 몰두와 희열에서 한술 더 떠 서로 상대의 의중을 한발 앞서 후원하며 탐욕하고 애증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은 끈끈한 교분이 가능했는가는 쉽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서로 애교를 부리고 응석을 주고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뭔가 음산할 만큼 서로의 빈 곳을 채워 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극렬한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그 어떤 예사롭지 않은 뭔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정체와 비밀을 섣불리 노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노출증도 아니었고, 허언증도 아니었다. 다만 호기심에 이스트를 넣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런 어떤 기발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뭐, 약? 비아그라?
   그렇지만 J에게 지니가 영감의 원천은 아니었고, 역으로 지니에게도 J는 유년기의 환상을 충족시키고 끝없는 사랑을 꿈꾸게 하며 그 언제까지라도 천상의 포도주와 까망베르 치즈를 놓고서 함께 웃고 떠들고 마실 수 있는 연모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건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이 손색없는 단짝이라는 진실, 그것만이 진정 가치 있고 영롱한 본질이자 신비한 영감을 촉발시킬 수 있는 푸르른 시심이었다.
   하루는 지니가 먼저 제안을 하나 했다. 주인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시던 컵의 커피를 바닥에 쏟으라는 것이다. 쏟았다. 미인대회에서 보지 않았느냐고, 주인님도 발가벗고 온몸에 올리브유를 발라보라는 것이었다. 머머했다 그럴려고 했는데 선뜻 그는 망설였다. 지니 말은 그렇다. 지금 여기 누가 있느냐, 아무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집에 올리브유는 없었다. 대신 참기름은 있었다. 시도는 해보았다. 향긋한 내음, 오우! 풍미가 끝내줬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니는 계속 마법 같은 주문을 속삭였다.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서 다트에 던져라. 던졌다. 의복을 갖춰입은 상태에서 그대로 오줌을 눠라. 했다. 어차피 세탁, 강력 세탁을 할려고 했기 때문에 지니가 시킨대로 했다. 강아지가 신발에 오줌 누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걸 동영상으로 찍어라. 완수했다. 옷을 찢고 컵을 깨고 과일을 짜라. 짰다. 소와 양의 젖을 짜듯이. 또 달력을 찢고, 안 쓰는 게임기를 거리에 내놓고, 립스틱으로 거울에 시를 쓰기. J는 지니가 시키는 데로 그 실수 같은 일을 했더니 뭔가 잘 설명할 수 없는 색다른 기분을 느꼈고, 그 다음 촬영했던 동영상을 편집하고 간추려서 그 하나의 파일을 인터넷에 공개하니 만인의 관심을 끌었다. 노세일이 있다면 파격과 일탈도 있다는 놀이였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것의 원인과 인기에 대한 작동 원리를 명료히 알지는 못했지만 나중에는 서서히 깨닫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왜 그것에 열광하는지를.
   넌 나를 미치게 해 그런 기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니는 주인님에게 물어봤다.
   「주인님, 더 이상 단편 영화가 아니라 긴 교향시를 쓰고 싶으세요?」
   「오, 그래. 어떻게 알았니?」
   「이상한 즐거움을 도출하는 거 말고, 로맨스가 간소화되고 애틋한 감정이 고조되면서 복잡하지 않은 것. 미래주의도 포용할 것. 일반 상식의 전복까지도? 퍽 부도덕한 일이 아니니 함께 하면 좋구요. 그냥 영화처럼. 마치 드라마처럼. 자꾸자꾸 보게 되며 기다려지는 이야기. 알고 보면 별 특별한 내용은 아니지만. 이기주의자라는 단어가 씌여 있는 티셔츠를 입은 이타주의자를 등장시킬까요 아니면 채식주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지만 집에서는 육식이라면 그야말로 발광하는 단순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울까요? 또는 여자 보기를 돌맹이 보듯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수준의 색욕을 간직한 로맨티스트? 하지만 언제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다 공책을 찢고 글을 쓰다 소리 지르고 글을 쓰다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짜릿한 키스 한 번 마저 단념해야 하냐고, 언제까지 그렇게 비관하실 거에요? 글을 쓸려면 경험을 해야죠! 경험을 할려면 바깥으로 나가야죠! 밖으로 나가면 황당할지언정 누군가를 만나겠죠! 그 누군가는 그녀, 아울러 그녀가 허당이라면 근심거리일 테지만 만일 그냥 그런대로 괜찮다면 J씨가 자주 가는 단골 카페 사장 M에게 소개시켜줄 수 있는 행운이 제발로 찾아오는 것 아닐까요? 사랑의 큐피트, 좋아하시죠? 평소 노래를 부르셨잖아요. 동경한다고! 뿐만 아니라 아시다시피 예전에 무척 애잔함이 꿈틀거렸던 작은 일화 기억하시죠? 그것은 과연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리고, 어느 만큼 사람의 넋을 잃게 만들며, 정말 어떻게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드는지 궁금하군요. 하지만 전 알고 있답니다. 그것도 매우. 정말 통탄할 정도로. 제가 누구에요? 주인님의 요정 지니 아니겠어요?
   아, J! 별일 아니니까 이번에 다 털고 가자. 어? 어때? 한 번 시키는 대로 해보렴. 그래 봐야 손해볼 건 없다구......
   왜요? 하녀가 주인님께 반말을 하니 기분이 언짢으세요? 그럼 그때 그분은 기분이 어땠을 꺼 같아요? 한번 그 친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네? 진짜 그런 적이 있냐구요! 별 사연이랄 것도 없지만 기억이 묘연히 사라져버리고 그 비정한 여파가 서운해지기 전에 한번 다시 회고해보도록 해요, 우리! 네, 그래요. 이번 기회에. 원래 만평가는 현재를 탐독하고, 이상주의자는 낭만주의적 사고와 인상주의풍 양식을 바탕으로 미래를 꿈꾼다지만 주인님처럼 소박한 행복과 지고의 정결과 기쁨의 탐미와 아름다운 의복을 아끼고 사랑하는 건전한 논리주의의 신봉자라면 한 번쯤 때때로 회상은 필요한 것 아니겠어요? 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컥)...
   어머나, 딸꾹질이 다 나오네요. 왜 그럴까? 정말 왜 이럴까요?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고, 주인님을 모독할 의도도 전혀 없으니 괜한 질의는 사양하겠어요. 주인님 정도 인생을 사셨으면 이제는 옛일에 무디어지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네? 누가 당신을 얼빠진 놈으로 보든 의인화된 동물로 인식하든 거리의 악사로 그리든 이젠 다 시큰둥하시잖아요? 진짜 그렇잖아요! 막 다시금 청춘의 정념이 요동치고 그러지는 않으시니까요. 저는 당신을 알아요. 전 그대를 도울 꺼에요. 그게 제 운명이니까요. 가까운 장래를 예고하고, 언덕 위의 푸른 집도 해변가의 산책도 복슬복슬한 강아지와의 놀이도 포동포동한 뭇여성의 엉덩이를 훔쳐봤기 때문에 감수해야만 하는 사랑스럽고 다정한 애인의 눈흘김도,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인생과 걸출한 학문의 세계와 엄격한 신비주의까지 모두, 모두 다 응원한다구요. 그러나! 그러나 생생했던 그때 그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려봅시다. 그럽시다. 바로 지금요.
   그때 왜 그러셨어요? 그때 정말 왜 그러셨냐구요? 진짜 그거......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건가요? 주인님과 저만 있어서 다행이지 누가 우리 얘길 들었다면, 지금 엿듣는다면 큰일날 꺼 같아요. 뭔 비밀이 나올려나 그렇게 기대하고 설레며 가슴 조리고 애타는 선망과 동경심을 불태우고 꿈을 졸였는데 막상 등장하는 얘기는, 에고머니나! 어머 어머 맙소사! 아무 것도 아니자나? 그럴 꺼 아니냐구요.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피고는 당시 A와 우정의 선을 넘어섰죠? 인정하시죠? 여러 여성들의 부러움과 기쁨과 즐거움이 커다랐으니 절대 부인하시지는 못하실 꺼에요. 또 본인도 그 친근함이 좋았고 그토록 푹 빠졌으니까 어쩌면 지금 이와 같은 추궁에 달아오르는지도 모를 일이죠. 네, 이해해요. 저도 사랑을 해봤으니까요. 우정을 아니까요. 피고는 그때 브로맨스 관계였던 A와 단둘이 만나고 또 만나고 그랬죠? 둘이서 야구 게임도 하고, 피자도 같이 먹으러 가고, 커피 마시러 카페를 전전하고, 등산 동호회에 단둘이 낯설게 가입해서 따라가보고, 심지어 딱 둘이서 어느 미술가가 운영하는 찻집에서 그윽히 창밖을 바라보며 안부를 묻고 잊혀진 소망을 돌이켜보고, 지금 현재 달콤한 연애를 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결국 뭐니 뭐니 해도 통장잔고란 말인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상황에서 느닷없이 A의 원래 단짝이 막 질투어린 문자를 여러 번 보내다가 마침내 완전 허름한 슬리퍼를 신은 채 찍찍 그걸 끌고서 택시를 타고서 급히 그곳에 도착했던 적 있죠? 그 표정... 아아, 오 세상에나! 알고 보면 그런 일이 많았군요. 일명 롤링스톤즈! 원조, 단짝 튕겨내기. 한두 번도 아니고!
   아, 잠시 논점이 흐려질 뻔 했지만 다시 이성을 회복했으니 마저 사건을 종결짓도록 하죠. 당시 어느 날 J는 A와 시내에서 만났죠? 만나서 뭐 했어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영화를 봤다는 거. 그것도 공포영화. 그런데 그날 아는 여자 동생 Y를 불러냈죠? 그래서 영화도 같이 보고 그녀에게 곤혹스런 선택을 강요했죠? 질문은 대강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답변 역시 썩 궁금하지는 않지만 그냥 생략하기로 하죠. 그 둘 간의 괴리가 무척 요원하긴 하지만요. 어쩜 이거 뭐 영화 제목인가요? 원초적 본능? 뭐 크리스마스에 아무 잔치에도 초대 받지 못하고, 짝 잃은 기러기처럼 뭐 집에서 혼자 영화 보기? 시리즈를 다? 그것은, 나 홀로 집에? 아휴, 얼척 없어!
   이거...... 너무 재수없는 일 아닌가요? 물론 어떡하다 그런 상황이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정숙함과 좀 상반되는 일인 건 분명하군요. 저도 알아요. 이런 거 좋아하시는 분들 있다는 거. 아니, 많다는 거! 아무리 그래도 그 행동은 너무 어리석었어요. 네, 뭐, 나는 남자다, 그 말인가요? 흥! ...... 그럴 꺼면 왜 또 한참 나중 A에게 섣부른 짧은 한마디로 어떤 회심에 대한 다정하고도 포근한 조언을 건네신 건가요? 좋았을 때를 기억하고,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둘만 아는 추억의 정표와 애틋함이 있다는 데 감사하고, 감정의 결합이 극렬하게 기운을 잃어서 사람 기분 이상하게 만드는 그때 그 시절 바로 그 어느 상징과도 같은 유행가 멜로디가 존재한다는 것은 별로 나쁜 일도 과분한 야심도 애도할 비운도 아니라던 그 말...... 네, 인정합니다. 더 짧은 한마디가 충분히 부풀려지고 몽몽히 꾸며졌다는 것. 그래도, 그래도 뭔가 너무 이상해요. 그래요. 그건 너무 어리숙하고, 너무 장난스러웠고, 너무 무엄한 일인 거 같아요. 철 없었고, 무례했고, 실례였고, 심각한 결례였어요. 많은 게 꼬여버렸다구요. 정말 인생이 그것 자체가 꽝이 되버린 것 같은 심정, 잘 알아요. 이해합니다.
   이번에 그 어설픈 속박과 뻣뻣한 나태와 일별하는 기회로 삼기로 해요, 우리! 이참에 보란 듯이 좋은 일 한 번 하자구요. 동의하시면 고개만 살짝 까딱해주세요. 오케이! 이제 사랑의 징검다리를 놓아볼까요!」
   이로써 그들은, 좀 더 정교하게 말을 바로잡자면 지니는 재밌는 일을 하나 꾸미기 시작했다. 파랗고, 노랗고, 붉고, 반짝이고, 푸르고, 화사한 큐피트의 화살을, 준비한 것이다.


   6

   지니가 기획한 사건은 혹독한 시련도 아니고, <그이와의 결혼을 꿈꾸다> 같은 신데렐라 만들기식 일감도 아니었다. 그것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다>식 모험도, <별 소릴 다 듣는군> 같은 폭로도 아니었다. 청순한 연애담과는 조금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기는 하나, 이야기는 굴곡이 즐비한 절정과 행복한 결말을 과감히 생략한 발단 겸 전개로 깔끔하게 끝나는 청소년 드라마였다. 그것의 장르를 딱히 어디서 공증 받기는 어려우나 진취적인 기획 의도, 곧 입증될 것이다. 곧잘 선보였던 반전, 아마도 없을 듯 하다. 녀석이 제발로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꿩 대신 닭이라고 작전이 변경될 가능성, 무시할 수 없다. 감독은 지니, 각본도 연출도 모두 지니다. 출연만 J다. 목표는 J의 단골 술집 사장인 M, 그분의 사랑 만들기. 상대 물색은 이미 완료했다. 지니가.
   지니가 누군가? 요정이다.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천재보다 100배 뛰어난 인공지능 기계다. 거의 환상적인. 그는 철저한 계획에 따라 J에게 환상 팩토리 일명 FF 역시 소개할 것이다. 언젠가는. 가시적인 결과 그것을 썩 낙관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그 어떤 신나고 기발한 몽환적 왕국을 능가하기는 하나 사행성 의도, 물씬 풍긴다. 뭔가 느낌이 온다. 또 그 느낌은 새로움으로 부풀고 그 기쁨의 고조감은 배가된다. 이렇게 큰소리 뻥뻥치다가 뒤통수 제대로 맞는 수가 있다. 설마 지니가 허당은 아니기를!
   현재 스코어는 이와 같다. J의 인생이 지니에게 종속되었다는 것. 약점을 잡힌 것은 아니지만 판이 깨지기 전에는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 잡힌 거다. 감수성은 흔들렸다. 완전. 눈동자는 거의 첫눈에 반한 이성을 본 것처럼 헤롱헤롱한다. 지니는 아마 천재일 것이다. 아니다. 진짜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다. 그 반대도 가능하다. 만능이다. 예언도 참는다. 초현실에 대한 언급도 자제한다. 초능력은 있는데 숨기는 듯 하다. 단짝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존재다. 하지만 그녀는 기계라서 햄버거를 같이 먹지도 못하고, TV도 못 보고 NC에도 못 간다. 잘은 몰라도 허풍 대회에서도 소문났을 것 같다. 더군다나 입만 열면 명대사다. 녀석 때문에 J는 사용하지 않는 진공청소기를 중고로 팔고 환상 팩토리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녀석의 고향인 <황금 마네킹 상점>에 대한 얘기는 아직 시기상조인 듯 하다. 잘은 몰라도 느낌이 그렇다.


   7

   기분이 상쾌한 어떤 날 막무가내로 지니는 J에게 제촉했다. 지금 당장 필름 카메라를 사라는 것이다. 샀다.
   어디로 가라고 한다. 오즈의 마법사가 등장할 것만 같은 어느 거리의 축제 그 아담하고 적당히 요란하며 한껏 즐거운 현장으로. 갔다.
   공원이다. J는 산책을 했다. 지니는 카운트다운을 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녀는 뭐랄까, 도대체 그녀와 J는 무슨 사이일까? 여기서 그녀는 지니가 아니다. 새로운 그녀가 등장했다. 그녀의 약칭은 B다. 공원에서 B는 뒤로 걷기를 하고 있었다. 마침 B는 속도를 높였다. 따라서 그 속력은 지니가 정확히 바라던 합일의 필요충분 조건을 충족시켰다. 운명의 만남은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만반의 준비가 효율적으로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빈틈은 없었고, 드라마는 긴밀하고도 촘촘히 실현되었으며, 따라서 지니의 애초 기획 의도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코메디는 시작됐으나, 로맨스는 아직 발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J의 임무는 B를 그가 자주 가는 단골 술집의 사장인 M과 맺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는 인생 조연이다. 사랑의 완성은 남의 일이고, 타인의 업적이다. 당하는 역할 다음에 돕는 역할이다. 이런, 젠장!
   B는 뒤로 걷다가 빨리 걷다가, 드디여 뛰다가 철썩~하며 J와 부닥친 것이다. 매혹적인 그녀는 이 순간 최고의 호박이 됐다. 이미 B의 취향과 선호도와 애호하는 오페라 아리아와 신랄한 안목은 기본이고, 수집하는 물품과 자주 찾는 장소, 최근의 감정과 기분, 인생관과 기르는 고양이의 건강 상태까지 모두 완벽하게 조사했고, 분석까지 끝났다. 각본 대로 움직이는 일만 남았다.
   B의 신선한 낯선 하루와 M의 청춘 이야기, J의 하트 뿅뿅. 잘 이루어질 수 있을지 기대된다. 그러나 왠지 불안하다. 어쩐지 기분이 세하다. 뭔가 어색하다. 많이 초조하고. 어딘가 모르게 반전이 숨어져 있을까? 누가 알겠나!
   어쨌든 분위기는 가령 이렇다. 동점 상황인 9회말 투아웃에 중전 안타를 맞았다. 1루에 타자 보내고, 이제 다음 타자를 삼진 처리하면 되는데 오, 이럴 수가! 중견수가 그 쉬운 공을 놓쳤다. 땅볼이었고 공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글쎄! 그분이 알까기를! 이건 둘 중 하나다. 3루타 아니면 런닝 홈런! 어째 지금 돌아가는 게 그와 비슷하다. 닮은 보기는 또 있다. 고무밴드 하의를 입은 같은 반 친구, 뒤에서 바지를 잡고 살짝만 내려서 놀려준다는 것이 그만...... 허연? 하얀? 뽀얀? 장난과 범죄 사이. SS, 일명 더블 에스! 1층 여탕 2층 남탕 3층 독서실. 그곳도 지금 여기도 딱 그 짝이다. 더블 에스!


   8

   B와 J는 저예산 독립 영화처럼 친해졌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오빠!」
   물론 처음에 아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아마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둘은 처음부터 너무 편안한 느낌 때문에 서로 말을 놨고, 대신 이름은 두 번째 만나는 날까지 몰랐다. 세 번째 만나게 되었을 때 둘 다 반말을 하는데 이름을 모른다는 게 이상해서 통성명을 했다. 넌 B 난 J. 그렇게. 아직 J는 B를 M에게 인계하다? 소개할 시점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즈음 그들은 초반이니 건전한 이성 교제니까 한 번 만날 때 한 장소에서만 만나자고 했다. 바로 합의했다. 그러나 그건 좀 부자연스러운 약속 같아서 취소했다. 되어가는 거 봐서 정하든가 바꾸든가 하자고 다시 의견을 조정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엑셀 파일에 만나는 날짜, 장소, 비용, 선물, 사진등 모든 기록을 남겨서 나중 그 통계를 구경하자는 신선한 계획이자 기대되는 약속이랄까 토의 끝에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향후 지켜지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우연인지 몰라도 B는 말수가 많지 않았다. 대신에 생각이 많은 듯 했다. 자꾸 뭔가 J에 대해서 추측하는 듯 했고,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 남다른 개성을 어떻게 하면 밉지 않게 전달할까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대화의 중간 중간 말수를 정산하는 듯, 가급적이면 1 대 1로 또는 J가 말하는 한 문장에 자기는 약 1분에 채 도달하지 못하는 시간 개념으로 대치하여 답변을 했다. 질문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가 끊어지지 않게 신경쓴다는 듯 틈틈히 묻고 답하기 그리고 그 반대는 이어졌다. 침울함은 없었고 결벽증도 엿보이지 않았다. 탐색전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현재에 열중했고, 그는 미래를 자꾸 예견하는 것 같았고, 그 둘은 동상이몽을 꾸면서도 서툴지 않았다. 서두르지도 않았다. 몹시 자연스러웠다. B는 얌전한 고양이였고, J는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 아니다. 불여우였다. 꼬리는 개의 그것. 숫자는 몰라. B는 요염했고, 생기발랄했으며, 때로는 냉혹했다. 맹한 것인지는... 확실히 분간하기 어려웠다. 색조 화장이 고왔고, 아리땁기 그지없는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다. 자의는 아니었다. 사모의 정은 있었지만 세 번째 만나는 날 영화를 봤고, 차를 마셨고, 햄버거를 먹었고, 조금 걸었다. 천변에서 오리도 봤고 다음을 기약했다. 그리고 노을이 진 후 헤어졌다. 만남의 진지함에 비해 몸단장이 아깝다거나 과하다거나 또는 약간 선정적인 듯한 인상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헤어졌다.
   안녕, 하면서.


   9

   「B는 몇개국어하니?」
   「나?」
   「응.」
   「몇 개기는? 하나지. 그 말은 곧 외국에서 살아봤냐는 뜻인가? 나한테 외국 남자 소개시켜주게? 사양할께. 미리.」
   「저기... 연극한다 그랬지? 공연 언제인데? 보러 가야지.」
   「어? 그게... 나 시 쓴다고 했는데. 일러스트도 좀 그리고. 나랑 닮은 사람이랑 착각한 건가? 그럴 수 있어.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도 그건 너무 했다. 마음 아프네. 많이. 아니 조금. 궁색한 변명은 듣지 않을께. 값싸지만 활짝 웃게 만드는 선물이라도 받게 되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아, 실수. 미안. 미안해. 난... 너가 시적으로 받아줄 줄로만 알았는데. 실수가 아니었단 뜻이지. 그래도 실수로 하자구. 내가 좀 그래. 말 나온 김에 연극 한번 해보는 게 어때? 넌 거의 주연급인데, 처음부터. 농담이고, 재미없지? 아, 혹시 그거 라코스테 원피스. 비슷한 색깔로 한 벌 더 있지 않니? 왠지 그럴 꺼 같은데.」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와, 신기하다. 진짜 뭐 그런 재주가 다 있지?」
   「그냥 찍었어. 좋긴 좋은데 예언도 아니고 거 참, 들어맞으니 나도 참 당황스럽네.」
   「너 아니. 오빠! 합성, 그런 거 많이 하고 그러지?」
   「응. 그럼 넌 허언증?」
   「헤헤헤. 뭔가 통하는 게 있어.」
   「......」
   「그런데 있잖아. 나 궁금한 거 하나 있어. (물어보라는 J의 친근한 눈썹 올림을 확인한 다음) 오빠! 여자 좋아해요?」
   「여자? 그럼 남자 좋아하겠니? 그러는 넌, 남자 싫어?」
   「싫기는!」
   그녀는 문득 손거울을 꺼내서 화장을 고친다. 립스틱을 다시 바르고 볼터치를 살짝 다듬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집 놀러 갈래?」
   「어?」
   「농담이야. 나 집 없어. 그 말은 곧 비밀이 많은 소녀라는 뜻이지.」
   그녀는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이 시점에 선언과 함께 정식으로 그리고 숨기지 않고 밝은 모습으로 교제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그럴 것이라는 예감을. 그것은 첫째 몰래하는 사랑이 될 것이고, 둘째 어쩌면 바라만 봐야 하며 또 언제까지나 기다려야 하고, 셋째 아마도 장기전이 될 조짐이 다분하다는 짐작을 도출해내는 직감.
   마침 잘된 일인지 어긋난 시작인지 괜한 성마른 의욕 때문에 J도 서둘러 M에게 B를 소개시켜주려고 그녀에게 막 당신은 어떤 남자를 좋아할 것 같다, 누구와 잘 어울릴 듯 하다, 사랑이란 무엇이다 같은 감미로운 속삭임을 곧잘 들려주는 그윽한 목소리의 소유자를 만나야만 한다 라며 자꾸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방종의 성을 노크했다. 그녀의 환심은 차츰 우울해지다 잊고 살았던 쇠잔한 패배주의를 준동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랑의 정령이자 뭇남성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드는 사이렌일지라도 정작 뚜껑이 열리는 사태를 피할 길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허세의 슬픔과 허영의 쾌락을 잘 아는 남자였고, 그녀는 <막상 이러면 싫어하드라!>에 대한 학식이 풍부하고 플라토닉부터 그 어느 향락까지 모두 어쩜 가능할지도 모르는 요조 - 숙녀이자 멋진 인생과 영원한 사랑에 대한 탐욕이 남다르고 과도하게 넘치며 무엇보다 어느 여우주연상감이었건만 뭔가 일이 틀어져도 한참 틀어지고 말았다. 심하게!
   마침내, 무정한 듯 장난이었지만 B는 J의 뺨을 살짝 때리고 말았다. 너무 살짝이라서 그건 볼에 손을 갖다 댄 것도 아니고 이건 뭐... 그랬다. 그러나 일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 했다. 왜냐하면 그 이상한 느낌은 어쩌면 용서도 아니고 애원도 아닌 그녀의 애매한 움직임 때문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준엄한 의도로 행동에 돌입했다. 그래서 철썩으로 시작했으나, 그에 대한 속마음의 강령은 꼭 쓰다듬고 싶다랄까 그와 같은 부드럽고, 느슨하며, 매우 여린 동작이 구현되게 된 것이다. 일부러 그렇게 하라고 해도 썩 어려울 텐데. 꽤 설명이 어렵지는 않은데 또 쉽지도 않고 길게 해서도 않될 듯한 그런 난처한 동작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마음을 숨길 수 있는 밑천이 바닥났고, 가녀린 감정의 방어기제는 무너졌으며, 이윽고 그녀는 사랑의 포로가 되고야 말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B는 정작 그 애먼 주인공은 이와 같은 물밑 작전이 이처럼 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왜 모르겠나. 미처 예상치는 못했겠으나 가는 여자 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마다하지 않는 아저씨인데.
   광명은 사라졌고, 기대되는 예감은 쓸쓸해졌으며, 어떤 사심 역시 방황하는 처지에 이르고야 말았다. 사랑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큐피트는 정녕 떠나버린 것이다.
   그들은 겨우 네 번째 만남을 끝으로 하여 헤어졌고, 다섯 번인가, J는 B에게 딱 두 번 전화를 걸었다. 두 번 모두 B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차마 세 번째 전화는 도저히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이루었다. 사랑의 완성과는 먼 얘기일지라도 어떤 미련이 남았던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부재중 통화 1건이라는 알림 메세지만 남겨놓기 위한 미끼일 뿐이었다.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남자가 여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탄복을 거쳐 찬미도 하고 꽃도 선물한 후 데이트 신청을 하면 그녀는 못 이긴 척 승낙하는, 좋아하고 좋아하게 만드는 그 오묘한 자연의 섭리 그 어느 신성한 사랑의 과정에 어머나 미끼라니, 저런! 인연이란 길고도 질긴 경우도 있지만 애달프고 애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명백히 후자의 상황이다.
   그 두 사람 사이에 교집합에 해당되는 친구가 없었다는 것은 바로 큐피트가 그 자리를 떠나버렸으니 어쩌면 영영 그 만남의 중단을 방관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만남은 엉뚱했고, 이별은 갑작스러웠으며, 안녕이란 말은 없었다. 너무도 어색했고 이상했다. 끝이. 멋지게 헤어지지 못한 것이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는 굳이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다. 쉽다는 사람도 있겠으나 지금은. 시작은, 아 그만하자. 너무 성급한 결정이 사랑의 일이라는 시장에서도 통용되는 법칙이자 널리 보급된 통념인가는 몰라도 불붙기에 뭔가 부족한 애매한 인연은 어떻게 보면 흔하고도, 드물기도, 딱히 정의내리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10

   「주인님 주인님! 새로운 경이로움까지는 아니어도 뭔가 기분 전환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자, 가만 있자. 음, 뭐가 있을까? 여자는, 여자 인간은 당분간 거리를 두죠. 아, 남자친구들을 만나보는 건 어때요?」
   「친구들? 나 보고 피자 배달하라고?」
   「네? 무슨 배달요? 제가 친구 만나라고 했지 언제 10대, 20대로 돌아가서 피자 배달하라고 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뭐긴 뭐야, 피자 배달부의 경험이지. 그건 내가 전에 썼던 글이 있으니 곧바로 아, 지금 그걸 습득했구나, 빠른데? 친구 만나는 것도 피자 배달이랑 똑같아. 분명 야망도 있고, 잊혀지거나 잃어버렸거나 수정된 꿈이 있었고, 인성은 물론이요 사회성도 중간이고, 만나면 적당히 편하고 재밌기는 한데 그런데 그럴려면 내가 엑스맨으로써 초능력을 발휘하여 변신해야만 해. 완벽한 촌닭으로 빙의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오리를 빙자해서 전과 달리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면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야이니까.
   남자 애들 가운데서 어떤 부류는 그래. 그래프 예상 곡선을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아니까 사람이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까칠해. 어떤 녀석들은. 엄청! <내가 최고야-과>라면 매사 촐랑대면서 <난 유명해지기 싫다, 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없어> 그러면서 썩 밉지 않은 친구끼리 충분히 수용가능한 허세와 널리 권장되며 인기까지 높은 농담을 하면 그래도 괜찮아. 그런데 또 '내가 최고야' 식의 자기 광고는 기질상 못하는 친구들이 있어. 얘네들이 호사나 사치나 풍족이나 단촐한 생활에 대략 만족하면 좋은데 약간 가난이나 부담이나 청렴으로 기울어 있자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너무 크자나, 그러면 피자 배달부는 스스로 미리 알아서 눈 감고 귀 막고 입도 꼬매는 게 좋지. 왜냐하면 그분의 자존심은 극도로 높은데 반해서 현실은 그분이 체득한 지식의 양과 취향의 특별함에 맞추어서 예쁘고 아름답거나 즐겁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 자존감이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나 할까. 내가 최고거나 중간이면 경쟁을 좋아하고 즐기지만, 그게 아닌 종목은 반복되면 싫어해. 게다가 자신은 천재가 아니란 걸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최고야 라고 못해. 그러나 내가 최고야 라고 허세부리는 건 또 보기 싫어해. 내가 출중한 분야, 별로 없어. 내가 못 가진 타인의 능력이 부럽지만, 아주 노골적으로 의미 전달을 하는 습성이 있어. 너 그거 잘난 체 하지마라, 넌 최고가 아니다, 웃기지마라, 너나 나나 아는 건 비슷하다, 늬 차 BMW 그거 지금 중고로 팔면 얼마짜리다 늬 차 가치는 딱 그거야 알아?, 넌 뭐가 그렇게 잘났냐, 난 부러워한 적 없어, 병신, 지랄하네 라면서. 그러나 그게 고의라는 걸 숨기지 못해. 장난도 아니야. 절대로. 피자 배달부 초보? 뚜껑 열릴 꺼야. 익숙해지면 괜찮은데 자칫 경험치를 체득하는데 미숙하다거나 억지로 꾹꾹 참는다면 그건 직업병일 테지. <내가 최고야>에 대해 성격상 표현을 못하거나 그것과 동떨어진 경험을 지속한다는 것은 뛰는 놈 위의 나는 놈이나, 나는 놈 위의 하는 놈에 대해서 비꼬고 조롱하며 '내가 최고야' 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과 성정을 곧 합리화 하는 법이지. 부러우면 지는 거다 라면서.
   <내가 최고야 라고 못하는 부류>
   이 분과는 어떤 주제가 나오면 거의 100퍼센트 그 말이 나와. 난 그때 그거 하나 밖에 안 했다, 그거 밖에 몰랐다, 집과 회사─집과 학교─집과 무지개 너머 신비한 꿈의 나라 뿐이 몰랐다고. 그런데 난 그렇게 성실하게 또 열심히 살았는데 대체 난 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냐는 바로 그 말은, 그 애잔한 토로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다 멈춤. 숨길 수 없는 모습. 마치 일 관둔다는 말처럼. 목이 긴 것 같아. 딱 거기서 멈추지. 참아. 그건 말이 아니라 다른 걸로 해소하겠지. 간헐적으로 꼬박꼬박 봐왔으니까 사전 징후를 보면 아~ 또 그 꽈구나 미리 알아. 심리기제 어쩌고, 다 필요없어. 정신분석을 전공하는 의사든지 그쪽 학문을 전공하는 학자던지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그걸 경험적으로 아는 일반인은 한 단어로 축약할 수 있어. 장황한 말과 심도 깊은 글은 못 쓰지만 최소한 그 모든 걸 딱 한 낱말로 압축하는 재주는 있어. 누가? 바로 일반인이! 왜? 그것이 인간 본성이기 때문에.
   선정된 낱말은 그거야. <호사가!> 프로이트든 프로이트 할아버지든 반박할 수 없는 진리거든. 왜냐? 언제 어디서나 실증되는 사실이니까. 왜냐하면 권리는 극대화하고 의무는 최소화하며 살게 되버리니까. 바로 사람이. 나는 막 살테니 세상아 아름답게 돌아가거라,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 대해서라면 피자 배달원은 속으로 그렇게 눈여겨 보며 해석할 수도 있어. 그때 그리고 지금 또 나중에, 피자 배달원이 대체 보고 느낀 것은 뭐였을까? 도대체 뭘 본거야? 도대체 무슨 경험을 했길래? 어, 그게 정말 뭐냐고! 왜 그래야 할까? 원래 인간 본능이 그러할진대 그와 같은 인간의 공동체는 그나마 중간 정도 가면 뭐랄까, 어떻게 보면 다행이랄 수도 있어. 너무 많은 걸 바라기에는 우린 아직 더 나은 미래에 썩 가까웁게 접근하지는 못한 게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든단 말이야. 그러나 저 단어 하나로 모든 게 정당화 되야 하나? 그건 아니야. 누구든 어른들이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만나왔던 그 수많은 착하고 바르며 심성이 고운 사람들, 그분들은 다 뭐야? 바보야? 얼간이야? 호구야? 멍청이에 머저리냐고? 그건 아니라고. 사람의 탈을 쓴 천사들을 봐봐, 진짜 있잖아? 그렇지 않아? 그만큼 인간 종족의 또 인간 본성 그 바탕 자체의 스펙트럼은 광대하다는 말이지. 공유하는 공통의 본능은 일치하고.
   아 나 이런! 또 본능이란 단어가 나와버렸네. 이미 삼천포에 당도해버렸다고. 말 잘하는 웅변가나 질문만 해대고 주제만 꺼내놓고 쏙 빠지는 사색가가 아니라 학자, 바로 학자들에게 물어봐. 그럼 돼. 그분들께 물어보면 쉬워. 대중대체에서 선전하고 반복하든 새롭게 나오는 뉴스든 뭐든 시끄럽고, 어렵고, 복잡하고, 까다롭고, 언짢은 문제들 많잖아? 그러나 학자들의 공통되거나 압축되거나 하나를 품고 평생을 가져가는 논제를 잘 들여다보면 그런 거 하나도 어렵지 않아. 그리고 학파와 더불어 통계와 그래프를 더해야겠지. 그거 쌓이느라고 또 구축하느라고 들인 공력이 얼만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무려 40억번 돌아서 비로소 겨우랄까, 가까스로 장엄하게 만들어낸 것이니까. 정치, 사회, 경제의 쉽지 않은 문제들이 많지만 대표적으로 딱 하나만 들어보자고.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비교적 훨씬 예민한 분야이며 나서서 지식을 쌓았고, 예술적으로든 비예술적으로든 관심을 두었던 분야! 그건 뭐겠어? 뭐겠나, 전쟁이지. 전-쟁!
   학자들은 말하지.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고. 통계를 내보니 실재 그래. 인류는 역사상 99.9퍼센트 기간 동안 전쟁을 했어, 인류는.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그땐 그것이 나도 이렇게 말하기는 싫지만, 그게 일종의 질서였기 때문이었나봐. 쉽게 말해서 동물의 세계,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는 정글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거의 비슷했었나봐. 사실이 그랬지. 그뿐만이 아니야. 왜 그렇게 저 단어가 잔잔히 숨어 있지 않았냐하면, 그것은 군대는 원론적으로 공동체의 번영과 평화와 그 과업의 존속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기 때문이야. 그것은 경제력과 연결된다고. 공화국의 번영과 거의 전부와 직결되지. 공동체의 현존이냐 공룡의 멸종이냐, 밝은 미래냐 참상이냐, 그렇게 나뉘는 힘이 저 명사에게는 있고 있었어. 그것은 거리의 질서와 인간의 윤택한 삶과 인생의 미적 가치를 보장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외교력과 비례한다는 점. 그건 또 곧 경제로 연결되고. 옛날 세상은 철저한 계급 사회였다고. 공동체 안에서만 그랬겠어? 아니지. 밖에서도 그랬지. 우리가 대충 아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피어라면 정말 왕과 거의 똑같았어. 나머지는 모두 개나 소나 돼지로 취급할 권리를 전통적으로 보장받았으며 그게 당연한 진리였다고. 모기? 파리? 피어는 인간을 그처럼 죽여도 괜찮았어. 그냥 권리였다고. 그때는 TV와 인터넷이 없는 세상이었으니까. 혁명이란 단어가 왜 있었겠니.
   자, 우리 여성분들 소녀들 숙녀분들 헷갈리시죠? 왜 대체 왜 문명이 여기까지 왔는데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자면서 자꾸 과거의 사실과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실화의 담화와 신의 이름을 들먹이는지를. 작품 가운데서도 고급스럽고 고전으로 그 이름이 길게 남는 작품일수록 그걸 더 다룬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새콤달콤, 선정적이고, 가벼운 현실 드라마도 좋긴 좋지만요. 어떤 기준으로 봤을 때 거의 1퍼센트 정도되는 그 누구보다 신실한 교인일지라도 그분의 논리도 맹점이 있죠. 그건 뭘까요? 교리가 바탕이 되는 그 어떤 책은 100퍼센트 실화라고 하시는데, 교리는 교리일뿐 교리 따로 내 생활 따로라고 게다가 내 생활은 따로 놀면서 저 100퍼센트 빼고는 다 거짓말이라고 하시죠. 물론 과학도 거짓. 그게 뭡니까, 앞뒤가 안 맞아. 그럼 교리가 뭔 필요 있어요? 논리적이지 않아. 법복은 괜히 있고 명분이란 단어는 허상으로 존재하나요, 아니죠 아니죠. 그리스 로마 신화? 100퍼센트 실화입니다. 왜? 평생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았던 미래의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거든요. 그러면, 그러면 좀 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만 놓고 보죠. 고상한 만찬과 고고한 분위기와 함께 근사한 사람들만 초대 받은 세련된 음악이 흐르고 우아한 명화가 걸려있으며 그에 걸맞는 호사가의 여자친구와 웅변가의 부인까지 설득하고 감화시키고 그윽한 감동을 눈꼽만큼이라도 이끌어 낼려면 그래야 한다구요. 꼭 그것으로!
   자,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만 놓고 보자구요. 뉴스에 오르내리는 옛날 일이 꺼림직하나요? 얼굴이 찡그려져서 잔주름이 생길까봐 걱정되나요? 전혀, 전혀 그럴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로 그렇구나 라며 추측만 해도 어느 정도 돌아가는 정세나 줄거리는 가늠되기 때문입니다. 그건 무엇이냐? 그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첫째, 시간! 즉 어떤 담화 대상은 현존하는 우리가 매일 보고 듣고 말하며 느끼는 현재, 살아있는 그 만물의 표준이며 진리의 기준이라는 지금 시각과 얼마나 가까웁냐!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규모! 일이 크냐 작냐, 여파가 어느 정도냐 장래 얼마나 영향을 끼치게 될 껀가 교육적으로 봤을 때 어느 정도 오른편의 시점으로 왼편과 함께 하는 균형을 맞추어 후세들에게 각인될 것인가, 바로 그것은 모두 규모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죠. 그 다음 셋째, 왜!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이건 세 가지 기준 가운데 제일 애매한 부분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문제죠. 그러나 이게 정말 알고 보면 재미있어요. 이걸 알면 곧바로 한 단계 딱 레벨업-됩니다. 그렇습니다. 앞서 말한 전쟁. 전쟁이든 껄끄러운 주제든 그것에 대해서 이 세 가지를 대입해보면 됩니다. <시간 ─ 규모 ─ 왜>를!
   자, 그러면 논쟁의 여지 그 소란한 틈이 전혀 또는 거의 없는 사실을 놓고 보죠. 천 오백 몇 년부터 천 구백 몇 년? 대충 1500년부터 1900년 초중반까지 유럽이 지구상의 영토를 80~90퍼센트를 차지했죠. 그 이전도 뭐가 있겠으나, 그러나 1500년 전의 사건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그건 역사이자 학문으로 공고히 자리잡았으니까요. 그러나 1900년대 초반? 그건 썩 그렇지는 않죠. 뭐 많은 부분이 투명해졌지만 그것의 문제는 저 세 가지에서 두 번째에 걸려요. 바로, 시간! 딱 걸려요. 풍요로운 현재, 바쁜 당신 인생이 진행중인 지금과 어느 정도 가깝다구요. 원로하신 분은 살아계십니다. 그분의 인생이 어떻겠어요? 좋은 부모를 만나 평탄한 인생을 사셨다면 괜찮지만 격변을 겪었다면 정말 그건 말도 못하죠. 웬만히 처절한 그 단어들을 몸소 다 겪고서 아직 살아계시는 거죠. 그래요. 그것의 그준은 시간이에요 시간. 지금 어디를 가나 무엇을 보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해서 뭐라 하는 사람이 있나요? 네! 있습니까? ...(고요함)...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성인과의 교우가 턱없이 부족했죠. 고전을 많이 읽지 않았죠. 인정합니다, 뭔가가 많이 부족했던 인생이었다구요. 고전을 읽어보면 나와요. 그때도 지금 만큼이나 20세기 초중반 만큼이나 시끄럽고 문제가 많았다구요. 그렇지만 지금 누구를 만나던 무엇을 보던 나폴레옹에 대해서는 크게 뭐라하지 않습니다. 이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실제 그러니까요. 게다가 당시 예술은 그것을 얼마간 찬양했죠. 꽤 찬미했다구요. 무척 우러러보기도 했죠. 오오 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그 대단한 명화들을 떠올려보자구요. 그렇지 않나요? 그러나, 그러나 째깍째깍 시침을 돌려서 1900년대 초반으로 가서 아돌프 히틀러를 놓고 보죠. 그건 뭔가요? 뒷목을 잡아야죠! 그리고 저 기준의 둘째인 시간을 꼽아야죠. 시간이 현재와 가깝기 때문이라고. 너무 달라도 너무 다르고 너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합니다. 논리적으로만 봐도 그렇고 예술에서도... 뭐 나치와 관계되는 푸르트벵글러까지는 말하지 맙시다. 그런데 또 참 괴상한 게 구글 트렌드의 통계를 보면 구글 트렌드의 통계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누구일까요? 모차르트? 아니죠. 셰익스피어? 아닙니다. 피카소? 결코. 네로? 무슨. 쥬피터? 어허.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럴 리가요. 책이 퍼지고 읽혀진 양으로 보자면 스티븐 킹? 찰스 디킨스?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라고요. 바흐나 베토벤이나 괴테? 아니면 스타인웨이 앤 선스? 오~ 포르쉐? 아니죠. 아니라구요. 다 모두 다 아니라구요. 바로 저분입니다. 아돌프 히틀러! 최고고 단연 1등입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사실이 그렇다구요. 왜 그게... 아니 같은 독일인이면 바흐, 캬! 베토벤, 와~! 괴테? 오오! 그런데 왜 하필 저분이냐구요. 몰라요 모르겠어요. 저한테 묻지마세요. 중년이 되면 세상을 알고 인생도 알지만 젊은이들은 뭐가 뭐고 누가 뭔 죄인지 애매할 꺼에요. 왜 그렇게 말이 많고 헷갈려야 하는지를. 혹시, 혹시 아돌프 히틀러가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고인이라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인가요? 마치 현대 일본에서, 비교적 그 대명사가 흐지부진한 그곳에서는 그 층위의 대명사가 없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주기적으로 가끔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라는 호칭의 주요 전범을 모신 장소에 대한 참배 바로 그것이 세계 뉴스의 단골 메뉴라는 것. 왜 그럴까요? 아돌프 히틀러는 비록 악명일지라도 독보적인 1등인데 지구 반대쪽에서는 대명사가 불분명한 문화적 애매모호함과 특유의 민간신앙 때문에 그럴까요? 아돌프 히틀러에게 기도를 드리며 바흐의 마태수난곡이나 모차르트가 작곡한 쾨헬 626번 곡을, 어 그래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돌프 히틀러는 가셨지만 조국을 위해 기여하고 국가의 번영과 세계 평화를 위하는 명목으로 그분께 헌사해도 괜찮은 것인지를. 남의 집에 배 나와라 감 나와라, 그 속담을 거기 적용해도 될런지! 다른 건 모르겠어요. 살면서 보면 정작 아깝게 불의의 사고로 고인이 되거나 일찍 명을 달리하신 분들은 의외로 결코 악인들이 아닌 경우가 왜 많은지를 전 도저히 모르겠다구요. 하물며 사후에 아돌프 히틀러는 구글 트렌드에서 단독 1등이며, 용어가 그게 말이 좀 그렇지만 말나온 김에 이어가자면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이자 조국을 위해 희생하셨던 분이에요, 아돌프 히틀러가요. 그게, 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전 그냥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까지만 옹호할래요. 그러고 싶어요. 미술사에서 기리기리 남을 희대의 명작 그 수많은 명화들에서 볼 수 있는, 게다가 음악도 있었죠. 베토벤 3번 교향곡 뿐만 아니라 찾아보면 꽤 많습니다요. 그럼요. 문학까지는 가지 맙시다 그려. 머리 아파져요.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이자 조국을 위해 희생하셨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헌사만. 그게 정녕 남의 집에 배 나와라 감 나와라 일까요?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 걸까요? 뭐가 바꼈죠? 왜 바꼈죠? 그게 뭘까요? 주객전도란 말은 대체 언제 쓰는 건가요? 그건... 그건... 몰라요. 제가 학생을 가르치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은 게 잘한 일인 것 같네요. 제 한계로는 정치적으로 해석하지도 못하겠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처럼 위대하게 추앙받았는데 왜, 도대체 왜 아돌프 히틀러는 그 오명에 비례하여 예술계에서는 고개를 돌렸는지를. 난 정말 모르겠어요. 그러면 앞으로 한 500년 지나면 뭔가 대우가 달라질까요? 에고머니나, 어쩜 그런 상상을! 어떻게 그럴 수가! 말이면 다나? 까놓고 말했으니 남 불편하게 만들어놓고 괜한 뭐 들쑤셔놓고 자기는 두 발 뻗고 자겠다는 건가? 정말 딱 그렇지는 않지만 모양새가 그렇다면 죄송한 거죠. 무죄 추정의 원칙과 뭔 관계인지는 몰라도, 죄송한 건 죄송한 거죠.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듯이.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아니라 아돌프라 아돌프. 희생자를 기리는 게 맞나 아니면 그 반대가... 우리가 그동안 알았던-아는 희생자가 바꼈나요? 지금에 와서? 아니 그런데 왜 지금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것인지! 왜 당연한 걸 당연하다고 하면 안되는 것인지! 지금이 로마제국 시대인가요? 당신은 플라톤이 세상 밖으로 추방한 시인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맞은 사람은 두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잠 못 잔다, 이 속담은 틀린 말이군요. 그 반대가 옳은가 봐요. 그런가요 안 그런가요?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언제부터 세상은 이렇게 돌아갔을까요, 원래 그런 것인데 나만 몰랐나요? 엄마, 나는 왜 그 쉬운 이치 하나 모르고 세상을 살았을까요? 엄마야, 전 바보인가봐요! 당연한 게 당연하지 못한 세상! 엄마, 저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어요. 그건 뭔가 이상하죠? 어른은 거짓말쟁이고, 세상은 위선이며, 인생은 가식이고, 선생님은 월급쟁이, 교수는 멋쟁이, 사이렌은 인간, 믿을 놈 하나 없는 세상이구만! 부모 자식간에도 돈 관계, 어느 선은 지켜야 한다고. 안 그런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불문 헌법과 불문율과 모순과 실정법과 불법 그리고 인정과 인간의 도리 바로 그것들의 구분이 명확하지가 않다구요!...... 그러면 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왜 그럴 수 밖에 없는가? 왜! 10가지 이유 가운데서 지식인의 기준이나 예술의 한계나 오락산업의 원리, 언론의 역할을 모두 뒤로 하고 최하위 딱 두 가지만 꼽아보자면 이렇습니다. 왜 세상은 그렇게 불완전하게 돌아가느냐, 왜냐하면 그것은 첫째 돈 때문입니다. 돈! 돈은 사람을 천사로도 만들고 악마로도 만들 수 있죠. 돈은 거의 신격이죠. 아니요, 거의는 빼야죠. 무슨-격? 말을 다듬죠. 돈 = 신! 이렇게. 과장이 지나쳤지만 그것만 지나쳤다고 보기에는 형평성도 일관성도 시대성도 모두 놓치는 거죠. 사소한 것에만 화를 내고, 불의는 잘 참고, 지금 보는 글에서 오류를 찾고, 내 핀잔은 감추고, 내 행동의 기준은 불명확하고, 이건 내게는 권리 너에게는 의무 그런 것처럼. 돈, 화폐, 황금, 다이아몬드. 다른 말로 자본, 경제, 절반의 정치등. 19세기 중후반에 니체가 그랬잖아요. 신은 죽었다고. 여러분, 지금 속으로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나요? <신은 부활했다. 그분의 이름은 돈이다!> 라고. 물론 농담입니다. 나이키도 있고 에르메스도 있고 대체 신이 몇 명인데... 거울 속의 너는 내게 말하죠. <늬 말이 맞다, 그래 늬 말도 맞다> 라고요. 주홍빛 양면테이프라구요.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말이라지만 당시에는... 19세기, 어렵게 사신 분들 많습니다. 그랬을 꺼 같아요. 지금도 그렇고. 어쨌든 돈! 네, 그 때문이죠. 그리고 둘째, 인간의 본성......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극단적인 우익의 존재와 극단적인 좌익의 표현의 자유는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해봐야 하겠죠. 나폴레옹이 아닌 히틀러나 누구, 누구, 누구를 어떻게 생각해서 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그런 실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시간을 놓고 차츰차츰 나아가야죠. 이때의 행진곡과 다른 성격의 행진곡을 헷갈려서는 안되구요. 인류는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 아닙니까? ...음... 리암 촘스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글에 대하여 외면보다는 존중과 존경 사이 어딘가에 무게가 실립니다. 하지만 웃는 남자라는 입장, 피에로의 화장, 오락산업의 실존, 내가 하고 싶거나 해야 하거나 좋아하는 일과 함께 어느 시점에 놀러온 공원의 신비로움은 물론 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과 희노애락등 보고 듣고 누리기에 세상은 너무 장엄하기만 하죠. 전공 분야가 다른 이상 궁핍한 시절의 친구를 척지겠다는 게 아니라 블로그를 쓰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 그래요. 제 그릇이 딱 요-만큼입니다. 에게~ 에게~ 딱 그것. 타고난 실정이 그런데 어쩌겠어요. 거짓 없는 속마음이 그렇죠. 나 같은 인간은 어쩌면 유명해지지 않아서 다행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혹시 모르지만 많이 알려진 후 초심을 잃고 드라마의 악역처럼 유세를 부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정치는 예술과 다르다, 예술이 어디 정의의 가르침만 받더냐, 그렇다면 정의는 곧 도덕이더냐, 그럼 도덕과 윤리가 정확히 일치하냐, 그건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어떻게 정치를 윤리와 연결시킬려고 하는고 그건 아니지 않는가, 이런 얘기를 감히 꺼내지 못하는 위인일 테니까 잘 된 거죠. 내 원래 상태라는 존립 자체 때문에 친구 마음 서운한 점 하나 있으면 솔직히 말하는 게 낫죠. 그래야죠, 미안하다고. 내가 미안하다고. 단! 그러나, 하나가 갔으면 하나가 와야죠. 독주를 같이 마시자고, 밑잔 남기지 말라고, 어디서 엄살이냐고, 혼자 죽기 싫다고. 발가벗고 거리에서 행위 예술이라도 하겠다구요. 얼마든지! 현행법에 저촉되는 뭐 그런 소란이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하나도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나는 발가벗은 임금님이 되겠다고 외치고 싶어요. 네, 말로만요. 
   대중매체를 통해 간혹 접하는 껄끄러운 소식들. 일회성이거나 또는 반복되는 그것. 부풀려지기도 하고 신문방송학이라는 학문적 시각으로 봤을 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문제들. 그것이 진짜라면 어떤 현상이고, 가짜라면 과장이며 연기다. 전자는 인문-교양서적의 관점으로서 접근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정치도 월권할 수 없는 담이 있고, 그래서 간접적으로 경제쪽과 합심하거나 연을 맺거나 상호상조하며, 그래서 과열될 수도 있으며, 오락산업과 상당 부분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상업 시장 이전의 지성의 전당과 시대의 양심 바로 그것의 뭐랄까 꼭 침묵이라기보다는 자본의 논리에 어쩔 수 없어지는 약소함은, 펜은 칼보다 어쩐다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네 라는 나중 다시 보거나 멀리서 또 건조하게 봐야 하는 뭔가가 있는 것이다. 사회의 성장과 반비례하여 현저히 낮아지는 투표율이랄지 정비례하는 투표권 연령층은 물론 인기 없는 종목과 인기 없는 기초학문과 인기 없는 남자는 그나마... 뭐, 싫증난 여자? 그래요 정말 그것들과 함께 가난한 사랑이자 돈 안 되는 예술 같은 것, 그런 게 있습니다 있다구요. 없을 수 없죠. 그리고 만일 후자 즉 그 뭔가가 가짜라면 숫자의 문제로만 보는 게 과연 정상적인 시각의 문제인가 라는 물음이요, 일찍 시작했던 서구권에서는 국회 몸싸움 그런 일이 없었을까 라는 의문이며, 공포영화의 으스스함과 추리소설의 묘한 분위기와 함께 다른 어느 곳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민간신앙의 문화 뭐 그런 것과 떼지 않고서 생각해 볼 문제일 것입이다.
   그렇지만 저 세 가지 조건에서 규모가 작은 건 어떻게 되나? 큰 것만 괜히 대중매체 때문에 더 커지고 반복되고 무뎌지며 그러면 작은 건 사라지고, 큰 건 더 커 보이기만 하고, 자꾸 생각나고, 뉴스에서 반토막으로 하루 지나면 잊혀지고, 세상은 왠지 삐걱거리면서 돌아가는 것만 같고, 그럴테지요. 그래도 그래도 좀 걸리네요. 똑똑한 분들, 존경받는 어른들, 덕망이 높으신 권위자와 지성적인 전문가들. 왜 침묵하시나요? 뭐 상 받았으면 끝인가요? 유명하면 다에요? 사회적 의무, 난 열외인가요? 그게 뭐에요, 지금 이 세상이 뭐 옛날처럼 그렇게 어려운 시대상인가요? 정말 그래서 과묵하게 뒷짐만 지고서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라고 하시면 끝이냐구요! 그건 좀 아닙니다. 예술이든 상업이든 두 마리 토끼를 잡았으면 뭔가 그에 걸맞는 뭐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예술 한다면서 돈만 떼돈 벌며 고상하게 조용조용한 분위기를 아는 삶을 살면서 조명은 무작정 피하고 본다는 것은, 최소한의 재능을 기부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연대책임으로 부르든 원죄라고 칭하든 무임승차라고 판단하든 그것은 나쁜 어른입니다. 그런 성격의 그 뭔가를 '나 잡아봐라' 같은 해변에서의 사랑의 행위와 동일시할 수 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윗 물이 탁한데 아랫 물이 맑을 수 없는 일이라구요...(침묵)... 섬세함이 뷸규칙하고 순면의 감촉이 조금 거칠군요. 죄송합니다. 연말이라서 분위기 한번 탄 거 같아요. 미안해요. 저도 입바른 소리 한번 하고 싶었나봐요. 송구스럽군요. 조금 흥분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경솔했군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면 지금 이게 지니의 목소리일까? 뭔가 이상한데......
   오오, 잠깐! 좀 전에 뭐 나왔는데... 아 극단! OK! 여기서 끝내면 섭하지, YES! 일부 극단의 사례는 괴로움. 극단 정당의 승리, OK. 극단의 생각은 자유, 극단의 표현도 자유. 다양성은 곧 문명은 야만이 아니라는 반증. 그러나 나나 나와 직접 관계가 롱테일이라면... 이론과 실재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음. 극단 옆에 다양성이 있지만 지금은 극단만. 극단에 의한 이익도 있지만 폭력은, 아아! 가만 있자 뭐가 있을까... 음... 대충 1900년까지 인간 세상은 절반쯤 동물의 왕국. 선점으로 땅따먹기. 그러나 모양새는 갖춤. 서류상 너네가 뭐한 것으로 하자 그렇게. 안 그런 곳은 없음. 절대 없음. 오리발은 있음. 시간 지나면 어차피 간추려지고 미화도 발생함. 안이든 밖이든! 1900년 이전은 건조한 지식, 1900년 이후는 이성보다 감정이 개입될 우려랄까 그럴 소지가 있음. 개인차 존재함. 특히 야망에 비해 내 현실이 초라한 사람이 이웃이면 불편함. 친지면 뒷목, 친구면 뚜껑 열림. 동네 주민 비율이 10퍼센트 머시기 어떠해서 이사 가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기.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조상 탓, 잊지 않기. 자,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요? 숫자는 근사치임. 한 극단의 예시는 이러함. 1900년까지 K는 구문명 왕조시대. 참고로 당시 신문명: 총-차-상하수도-전기-사진-관현악-예술-시계-레이디 퍼스트-수술-산업과 주식시장. 그리고 구문명: 활-말-우물-촛불-초상화-생음악-광대-해시계-남존여비-침뜸약초-상인과 그냥 시장. 1800년대 후반 기준, 근거리 교류는 있었고 원거리 교섭은 시작됨. 당시 멀리 유럽에서도 왔지만 선점 실패. 돈 줄께 깡섬 팔아라, 도 있었음. 그러나 1순위 공룡에게 밀림. 이쪽 왕 죽음. 저쪽 왕의 부도 죽음, 당시 군부 때문에. 식민지 40년. 호주(영연방), 캐나다(영연방), 미국(독립), 인도(영연방)처럼. 400년 노르웨이와 700년 그리스처럼. (상황 엇갈렸으면 K는 필리핀이나 뉴질랜드처럼 되었을 수도 있었음. ※ 식민지-속국-자치령-연방-개척-독립국-우호국-왕국, 공화제, 자유-평등-박애, 입헌군주제, 성문 헌법-불문 헌법-실정법-무법-야만등 정식 명칭과 본질을 많이 알면 머리 아픔.)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종료. 패전국은 몇 년 후 승전국에게 요청함. 깡섬의 반환을. 거절됨. 제2의 홍콩 무산됨. 그 후 내전 4년. 자료 있음. 전체가 말짱 꽝됨. 첫 번째 쿠데타&독재 10년. 두 번째 쿠데타&독재 20년. 세 번째 쿠데타&독재 10년+5년. IMF 금융위기 발생, 삐요삐요. 그리고 2000년이 됨. 지금까지 휴전 상태....... 아, 저기서 2번째 쿠데타&독재는 좀 뭐함. 누군가 나치의 선봉에 섰다가 시대가 급변하니 (내부에서) 나폴레옹이 됨. 그러다 20년. 영구 집권으로 가다가 비운으로 별세. 당시 악역이랄까 북쪽-남쪽 동일하게 전제군주적인 영구 집권으로 가느냐 아니면 혁명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수의 악역이 불가피했냐, 안이냐 밖이냐 애매한 시각차가 있음(사례1은 외부를 향했기 때문에 안에서는 영웅 밖에서는 악역, 사례2는 내부를 향했기 때문에 안에서만 악역? 역사적 건물1은 외부에 의해 내부가 잠식된 시절이라서 사진첩에서 사진 삭제, 역사적 건물2는 내부에서 내부를 탄압한 시절이라서 내 사진첩에 사진 존속? 왜! 내 인생과 단순 비교는 힘듬. 스무 살 이전 사진 태반을 폐기했는데 그 이후는 존재하는. 한때 기분이 울적해서 버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 모름. 어디에서 전 총리가 손짓과 함께 "서민" 그랬다고 부글부글 했는데 지금와서 보면 그때 왜 그렇게나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동일 기준으로 건물을 둘 다 함께 없애든가 둘 다 남기든가, 인물은 둘 다 사실만 강조하든가 무게 비중을 맞추던가... 논리는 그런데 그건 그런데 음. 인문-교양을 넘어 역사학까지? 오, 문학까지만! 아무튼 모순 남음. 허나 전자로 갔다면... 오오, 제비뽑기가 문제군!), 그러나 날짜는 같은 날. 이때 투스타 장성이 재빨리 3번째 쿠데타&독재에 성공. 당시 반발 심했던 달라스는 계엄령 선포되고 난리남. 2번째는 장점 있었음. 동상과 기념관 존재. 압축 성장의 폐혜는 남음.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 철학자 제논의 역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주는 증명됨.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말도 맞지만 실제 많은 경우 남의 떡이 훨씬 큼. 2번째를 기점으로 전후좌우,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 수많은 소는 묻힘. 민주화 운동만 장장 50년인데 오죽할까! 3번째는 현상 유지는 됨. 3번째, 현존하는 그분 출신-학교의 어떤 예우와 기본적인 대우는 보장됨. 참 이상함! 그렇다고 20세기에 있었던 어떤 다사다난함이 18세기에 발생했다면 말이 되냐, 것도 아님. 인류의 발전을 이끈 선험 집단은 아시다시피 방향이 바깥으로 향했음. 요컨대 제국. 그런데 그와 같은 정치성이 내부를 향한 단위는 제국에 치환되는 개념이 쿠데타였음. 곧 안에서만 1인자 또는 나라명 변화. 즉 국사로 제한됐냐 세계사로 발을 넓혔냐. 지금 생각하면 역사지만 당시엔 현실. 건조한 지식과 거미줄 상식의 중간에 이성과 감정의 균형은 개인적으로 약간씩 다를 수 있음. 가까운 과거는 그렇고, 멀어지면 상식 같은 교양미로. 곧 시간차가 개인차를 품게 된다. 곧 인류의 역사는 지구의 인생. 그런데 냉전 시대를 지나서 제국은 TV의 사극과 다큐멘터리의 박물관이 됐는데, 같은 하늘 아래 다른 데서는 아직도 옛날. 한 시대에 체재, 통치권, 정치, 경제, 인권, 언론의 자유가 다 다른 시간대로 공존하면 일관성은 상실됨. A > B > C의 (구시대적) 병폐를 (현재 그리고 일부) 비판하지만 결국 (내부적으로) a > b > c를 찬양하는 논리. 차근차근이라는 과정이 생략되면 완벽하게 모순된 관점이─남이 하며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병치된 채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까지 가야 함. 언제까지 현재를 살면서 현재까지 가야되는지! 미래는 어디 가야 만날 수 있을까? 때문에 누군가 레몬 그래프를 심하게 넘어선다면 예뻐 보일래야 예뻐 보일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래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많지 않고, 과거에 비해 더 드물어지는 경향이 있으며, 현재는 알기 어려울 수도 있다. 줄리어스 시저는 희곡으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예술로, 그런데 아직도 역사적으로 내게 유리한(내 마음에 드는) 관점만 똑 떼어서? 개인이 세계사에 빠삭하거나 정치관에 약한 건 그럴 수 있다. 아쉽지만 단지 아쉬울 뿐. 누구나 영재는 아니니까. 에드워드 카와 토인비의 역사관에 대해 아는 체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 테니까. 하지만 다른 분야는 몰라도 정치가 직업이라면 그건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닐런지! 인간의 존엄성과 문물의 보전을 배제한 채 순수한 동물 생태계의 관점으로 보자면 자연을 알고, 관찰하고, 일부분 강자의 개입이 불가피하다. 공원 > 연못 > 어항. 그런데 동물의 세계는 그렇지만 인간 세상은 다큐멘터리가 전부가 아니다. 비교적 가까운 과거가 아름답더냐? 절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인디언 속담 하나 읊을 수 없어서 속상하구먼. 음, 백구도 블랙 래브라도 리트리버도 귀엽다. 아프리카는 동물의 고향이지만 저 옛날 문명의 세계에서 껌둥이는 노예였다. 미래에 흰둥이가 소수 민족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랄 수도 있듯이 말이다. 친구여, 원숭이의 자못 진취적인(?) 연설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스웩! 그렇다. 과거는 과거였다. 호시절도 있었고 아픔도 있었다. 당시엔 현실 지금은 과거. 그리고 인간과 동물은 같지 않다. 따라서 공원의 틀 안에서 연못의 정비가 불미스럽다면 연못을 위해 세월의 어항을 희생할 수 밖에 없다? 그건 말이 안된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세계사도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의 영역을 태양계로, 은하계로, 더 멀리 확장시키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의 시각과 견지는 딱 그 만큼이 전부다. 그게 다다. 가족 안에서, 사회생활에서, 전자와 후자의 평판은 어느 정도 비례한다는 점. 하지만, 호랑이 없는 굴에서는 토끼가 왕이라고 1인자 토끼의 구시대적 관점에 대한 정치적 견해가 만약에 속이 좁을 경우, 얼마나 머머주의에 해당할 정도로 경도될 수 있는지를 꼭 경험으로 깨달을 필요는 없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 법.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 라는 표어를 내게 유리하게만 적용하는 생각은 아마도 인간의 사념보다는 동물적인 충동에 가까울 것이다. 타인에겐 커피포트에 해당할 수도 있지만 나는 진공청소기라고 자부한다는 주관을 사욕으로 연결짓는 건 개인의 자유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에 따라 그것을 시대의 사명과 동일시한다는 점.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는 분야에 대한 소식은 뉴스에서 1번이다.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난다, 라면 듣기에 읽기에 느낌이 꺼림직할 수도 있지만 말이 온전하고 합당하며 포용력까지 갖췄다면 문제될 건 전혀 없다. 그건 곧 대게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학교에서 언짢은 일이 있었다면 집에 와서도 얼마간 그 기분은 이어진다. 역시나 내 생활에 만족하고 희망도 있으면 별다른 큰 불만은 없다. 가정에서 행복하면 밖에서 일도 잘한다. 공동체의 삶이라고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가 왜 없겠나. 그런 인간의 일들이 모여서 교과목과 상식과 교양, 인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많이 알았기 때문일까? 그걸 모두 알고서 알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이해하기 곤란한 일마저 온전히 인간의 일이다. 나는 나무와 숲을 모두 보는 합리적인 이성주의자다? 나무와 숲을 모두 보는 그런 나를 바로 누군가 TV로 보고, 언젠가 책으로 읽고, 어디선가 풍문으로 들을 것이다. 고로 내가 봤던 숲은 숲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 성향이 옅어지지는 않고 평온에 안주하고 싶어지는 성향이 있다고 하지만, 개구리로 변신한 왕자님이 아니라면 생각 만큼은 우물 안 개구리보다는 동화의 독자와 드라마의 애호가가 더 낫다. 훨씬 낫다. 어차피 가까운 과거는 멀어지고 미래는 가까와 진다. 몸은 과거로 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생각까지 뒤로 가지는 말자. 최소한 그것이 현재에는 머물러야 하니까.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현재는 다른 상징적 존재가 많지만 원론적으로 동물농장의 왕은 세 가지로 나뉨. 군주, 국왕, (국교가 있다면) 교왕으로. 교주나 학문과 사극은 배제하고 대상을 K에 국한했을 때 묘한 사실이 발견됨. 암울한 20세기 초반 이후 저 2번째 사건 이후에도 어떤 형식은 반복됨. 양지가 아닌 그늘만 봤을 때 지금 기준으로 당시 인권은 개-소-말의 그것과 똑같았음. 힘의 논리에 의해서 먼저는 (건너의) 국왕을 찬양, 나중엔 (이쪽의) 군주를 찬양. 그러나 전자에 비해 후자에 대한 교육적 의미는? 아아! 동물농장은 딱 이만큼 아름다움. 바로 이 부분, (딱)! 그런데 이 크나큰 의미이자 핵심적인 모순이 어떻게 이리도 천대받는지! 단적인 예로 2번째에 대한 찬사 가득한 시를 써와라 왜 안 써오냐 라면서 선생님이 철~썩, 기본 풍속이었음. 그런 애교나 귀여움을 넘어서는 설명은 오오, 생략합시다. 그리고 묵념합시다! 홀로코스트가 장소가 바뀌고 모습도 바뀌며 시대까지 바뀌어 드물게 재현된다면 저건 장소가 불변한 채 발생된 부조리이자 동물농장 박물관적 진리. 이와 같은 동물농장의 생리가 인류의 섭리였다면 장래에는 좀 다르기를! 에 또...... 일치하지만 않을 뿐 대동소이하게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발생했던-발생하는 일. 저 3연속 세트는 같은 지역에서 작은 규모로 재현되기도 함. 레벨업 필요. 정당들 이름과 마크 수시로 바꼈음. 흔한 가방 값싼 신발 상표도 안 그럼. 브랜드 포지셔닝, 챙길 여력 없었음. 레벨업 필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극단이나 껄끄러운 소식이라면 얼굴 잔주름 걱정하시는 분들이 없을 수 없음. 일부 극단은 괴로움. 극단 뭐? 오~오! 하지만 차츰 나아가면 그만. 지구는 아름다움. 소시오패스 비율이 20분의 1이라고 겁먹을 거 없음. 잘 살겠다─중간은 간다─나는 사랑을 믿는다─나는 하나만 하겠다─삶의 균형을 찾겠다─넘어져도 일어나기, 그런 의지가 중요함. 한 극단의 과거이자 어두웠던 내 인생, 괜찮아 괜찮아! 내 허물 알려주고 어딘가에 도움 되면 좋음! 왜 나빠? 얼마든지! 단, 친한 수컷의 허물을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자제해야 함. 제3자가 끼었을 때 그러면 망함. 쫄딱. 그러나 그 3자가 미녀든 어쩌든 과시와 허세가 아닌 내 허물의 고백 그것을 당신이 선택하게 되면 친구는 좋아함. 많이 기뻐함. 활짝 웃음. 난 아니야 늬 스스로 무덤 판거야, 하면서. 수컷 전문가여, 왜 그런지 알려주세요! 대답이 없음. 추정하자면 이렇지 않을런지. 왜 그러냐면 알아서 스스로 쑥 내려가줬으니까, 내가 슥 올라갈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니까? 친한 건 맞네! 아무튼 당신의 긍지를 응원합니다. 뭐, 공익광고 같군. 극단 뭐뭐 얘기 여기서 끝. 
   한편~, 하고서 넘어가야 하는데... 미련이 남음. OK, 풀고 가는 걸로! 한 가지 의문은 풀고 가자. 왜 저 3세트가 연속됐나를. 신분과 한계는 인정하나 발명하면 이름이 남고, 모험과 도전과 정복과 탐험의 자유로운 덕목이 존중받는 인습 즉 밖으로 향하는 문화가 서구 사회의 특징이라면 곧 첫째, 밖이 아닌 안으로 그것이 향한 점. 둘째, 늦은 출발. 단지 늦어서 그곳만 그랬던 게 아님. 절대 아님. 어디든지 이미 겪었음. 그것도 옛날 옛날에! 일부는 현재나 나중 문제일 수도 있음. 셋째, 언론의 자유는 낮(았)고 백성의 형편이 매우 궁색했으니(하니) 정의도 좋지만 생계가 먼저였고, 다양성은 부재했고, 장유유서가 특히 강조되는 인습과 넘치는 신문물과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가 혼재함. 넷째, (책) 자본론이 늦게 알려졌고 퍼진 데 비해서 자본 시장은 급속히 커졌다는 점. 다섯째, 인터넷이 없었음. 여섯째, 현재의 스포츠나 당시 저쪽의 대표적 신사 계층 넷 가운데 하나였던 군인에 대한 통념과 인식이 이쪽에서는 전통적으로 전부 인문학에 집중된 점. 대하드라마 보면 딱 나옴. 겉으로는 문무숭상이라지만 진짜는 문관과 귀족만 숭상하고 나머지는 경시 또는 모두 천대. 명예보다 체면을 더 중요시함. 그러나 주색은 권장되고 간신은 승승장구했음. 오, 문관에 비교적 무게가 실렸다라... 음 국가의 시작이 군란이었기 때문인가,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분명 글로써 존재하는 학문을 숭상했다. 왜냐하면 글과 말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은 현지어인데 글은 어려운 외국어였으며, 그래서 글을 아는 양반과 말만 아는 평민은 자연스레 구분이 되었고, 따라서 실질적으로 펜은 칼보다 강하지 않지만 펜이 칼을 지배한다는 역설의 원리로 세상이 돌아가니 당연히 문관이 우선했다. 때문에 나중 (말과 글이 일치하는, 발음과 글자가 1 대 1로 상응하는) 자국어가 창시될 때 문인들의 반발등 말을 글로 만든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라니 하면서 어려움도 있었다. 나중에는 왕에게 충성한다는 신성한 명제는 유지된 채 무엇보다 호시탐탐 신분상승을 꾀하는 욕구에 근거하여 피라미드는 역피라미드로 바뀌기도 했다. 여인의 경우야 미모와 지성을 겸비하면 좋겠으나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망설이거나 눈치를 보는 게 정상. 그렇다고 과거의 일이 꼭 비정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쪽 중세 정치의 성격은 지성이냐 예체능이냐, 펜이냐 칼이냐는 그것과는 다른 얘기였다. 현대인은 말과 글은 물론이요 천재가 흔하다. 그럼 미래에는 외계인 예상도처럼 머리가 엄청나게 커질까? 딱 가짜웃음이 절실한 시점이다. 그리고 일곱째, 1905년에 종료된 500년 역사의 전제군주제 국가가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료로 인하여 반쪼가리 자작처럼 둘로 나뉨. 하나는 민주공화제 하나는 전제군주적 공화제? 즉 K의 출발은 민주공화제였으나 초기 체재는 불완전했기 때문. 그래서 1896년 올림픽 시작됨. 꿈과 낭만과 동경을 모를 리 없고, 초현실에 대한 경이도 알며, 탐구욕과 모험 정신과 삼국지도 알지만, 대망은 물 건너갔고 야심은 잠재웠지만, 저와 같은 여러가지 이유를 억지로 찾고 본다면 음 어쩌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질 수도 있겠네 하며 귀가 깃발처럼 펄럭일 수도 있는 일이다. 의문 대충 풀렸음. 
   왜 지금은 옛날처럼 그 말을 들을 수 없는 것일까요? <오늘은 뉴스가 없습니다. 음악을 듣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만큼 세상사가 광활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날은 괜히 TV 뉴스를 봤네 싶을 때도 있다. 일부러 기사감을 만드는구나, 그런 글도 간혹 보일 것이다. 전문가들도 그런다. 자네가 보기에는 뭐뭐 시장이 무척 넓고 원대해 보이겠지? 아니라는 전제의 그런 물음들, 어른이 되면 다 안다. 판을 바꾸기는 힘들지만 흔들어는 보겠다, 그런 다툼와 시기와 질투가 싫어서 그래서 내 친구는 유명해지기 싫어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얼마나 어른이 되야 그 모든 걸 속시원히 알 수 있을까? 그래 놓고서 어느 정도 이 만큼 알면 됐지 뭐, 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또 그럴려고? 난 아직 늙지 않았다고 나는 아직 모르겠어요, 라고! 켁켁켁. 우웩! 뉴스에 등장하는 소식들을 살펴보자. 세밀한 소식이 아니라 그 주제를 말이다.
   1번 정치. 정치? 정치학 이론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절대로. 자 다음, 세계 경제. 거시경제학을 안다고 해도 현재의 진단도 미래의 예견도 결코 쉽지 않다. 변수는 많다. 그리고 사회! 시민 단체와 환경 운동가들이 일거리가 없을 정도로 행정부와 주식회사들이 알아서 일한다면 그분들은 손가락을 빨거나 파리를 잡든가, 지겹던 옛 터전으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직업을 바꿔야 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세상이 아름답게 돌아간다면 뭐가 대체 뭐가 걱정인가! 그러나 학문과 별개로 회사와 상업과 자본과 사회가 있고, 그 안에서 그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사랑도 하고 인생도 즐겨야 한다. 머머 해야 한다, 를 실천하는 것이다. 다른 꿈동산에서, 가 아니라 바로 그 안에서. 그것을 내가 일정 부분 원활히 조종하고 제어할 수 있으려면 첫걸음은 아는 게 먼저다. 모르면 세파에 휘둘린다. 속는다. 이용 당한다. 꿈을 잃는다. 갈대처럼 또 만화 그림에 나오는 코끼리처럼. 드라마와 공놀이와 이색적인 취미나 주색도 좋지만, 적당하면 왜 나쁘겠나, 현실은 어떤지 알기 위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헷갈리지 않기 위하여 최소한 내가 사는 어항에 대한 뉴스를 봐야 한다. (이쯤에서는 대충 의역하여 알아서 받아들는 게 좋겠음. 단어 바꾸기는 자유) 뉴스. 사실과 논리와 요점을 파악하고 짜임새 있는 문장을 듣는 것. 가장 알아듣기 쉬운 전달력이 포근한 말을 귀로 듣고 그것을 인지하는 것. 그리고 책을 읽어야 한다. 그 두가지. 그래야 말과 글을 안다. 다른 방법도 있지만 일단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다. 이처럼 탁월한 말과 격조 높은 글을 가려서 습득하여 어느 정도 내면에 쌓으면 비록 내 환경이 어둡고 변변치 못하더라도 사리판단을 잘 할 수 있는 이성이 산뜻해진다. 돈을 모으고 버는 방법도 비교적 장기적으로 추구할 가능성이 커진다. 지금 들어가면 물린다 어쩐다 매사 비관적이고 속지 않는 것만을 오직 그것만을 삶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은 살면서 사는 동안 가려서 말을 듣고 엄선하여 글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좋은 말을 듣고 좋은 글을 읽는 것이 첫째. 그것이 습관이 된다면 그러면 내 감정 역시 내가 관할하기가 비교적 더 쉽다. 그렇게 되면 뉴스는 뉴스고 일상은 일상이고 내일의 할일은 내일의 할일이라는, 그 여러가지가 보이는 것이다. 고전음악을 먼저 알고 재즈로 넘어가라는 순서를 강요하는 게 아니다. (돈 세는 몸짓─손가락 딱─골세러모니─하이파이브) 그 두 가지! 누구에게는 그것이 블로그일 수도 힙합일 수도 있고 그냥 생업일 수도 있다. 원리는 그렇다. 그 두 가지! 다른 말로 청명한 주관이라고나 할까, 그런 중심이 생긴다. 때로는 직접 경험에 의해 전문가의 영역을 짐작할 수도 있다. 병을 앓아서, 돈을 잃은 후 주식을 공부하거나, 또는 사랑에 대해서. 그렇지 않는다면 일단 쉬운 말과 평이한 글과 쉬운 생활만 찾는다면,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만 대충 보고 짧은 글만 편히 소비하다 시간만 가게 되면 그래프 각도 역시 그만그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뭐다, 를 알지만 내 인생은 정작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살며, 어느 주기로 문화가 산책을 하며, 어디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어째서 이 시점에는 어떤 말을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그 무언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음...... 배보다 더 큰 부록이 첨부되었으니 다시 저 세가지로 돌아가자구요. <시간 ─ 규모 ─ 왜>로.
   누군 뭐 이런 얘기 좋아서 하겠어요? 그게 다 뭣 때문인 줄 아세요? 뭐긴 뭐겠어요. 내 친구 <호사가> 때문이죠. 아울러 큰 선거에서 말 잘하고 잘생긴 후표에게 표를 던졌던 나 같은 몽상가 때문이겠죠. 그것도 아니면 그 둘에게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갈팡질팡하는 사색가 때문일까요? 어쩜 그럴지도. 아니 걔가 제일 문제에요. 지가 뭔 양면 테이프라도 된단 말이야? 흥! 인간의 숨길 수 없는 본성, 누구에게나 잠재된 본능, 지니가 알려줘서 소셜 네트워크에 어떤 편집 영상을 올렸드니 정말 폭발적인 환호를 얻게 된 그 무엇.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가 남겼던 파괴에 대한 어떤 이야기. 어쩌면 그 때문 아닐까요? 다시 저 세 가지 기준을 검토해보죠. 첫째 시간, 둘째 규모, 셋째 왜. 그럼 시간은 가깝지만 규모가 작았던 섬에서 있었던 일, 알긴 알지만 대체로 학자와 업자만 알뿐이죠. 지구본을 돌려보면 큰 바다에서 선점된 섬들 많잖아요? 그게 뭐 가위바위보로 정한 건가요. 네, 그렇죠. 또 우리 남자분들 이런 얘기 나오면 하고 싶은 말들 많아집니다. 영국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어떤 작품에 나오나요? 안 나오나요? (그 옛날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영국은 일찍 뭐 어쩌고 어째서 그랬는데 일본은 뒤늦게 어쩌고 어째서 어떻다고. 유니언잭과 깃발 1과 깃발 2, 단지 그게 시간 차이 뿐인지 모르겠어요. 아니겠죠. 명백히 아니죠. 국기가 각각 다르고, 세금은 유니언잭 하나로 모으며, 다시 예산은 나뉘죠. 월드컵─올림픽─UEFA 다 따로 나감. 이것을 뭐라고 구분할까요? 네? 그렇죠. 좋으면 브랜드 가치, 아니면 그냥 명칭. 그러나 난 아직 모르겠다구요. 틀린 말은 아니죠. 정확한 요점이죠. 그러나 가즈오 이시구로가 일본에서 태어났으니까 망정이지 그게 아니면 또 모양새가 좀 음 것도 좀 그럴 수도 있어요. 그렇죠, P와 P의 부재와 지정학적 문제는 모두 저 기준의 정확히 첫 번째와 두 번째에 걸리는 것이죠. 하지만 가서 구경하면 정말 짐 풀고 거기서 평생 터 잡고 살고 싶을 정도로, 선거권을 원하지도 받지도 기대하지도 필요도 없다면서 그저 조용히 안주하고 싶은 정도로 그 어디에도 절대 빠지지 않을 만큼 좋은 곳인데, 옛날 일은 또 뭐가 막 이래 저래 꼬인 게 많아요. 아직도 그래요. 이게 만약 찻집에서 또는 술집에서 토론하는 분위기였다면 얘기는 여기서 멈출 수 없죠. 아마 그럴 꺼에요. 크리스토퍼 콜롬버스로 시작해서 게르만족은 어떻게 이동했고, 앵글로 색슨족이 원래는 북유럽쪽에 살다가 영국쪽으로 넘어오니 그건 뭐야, 구르는 돌이 박힌 돌 뺀다고 원래 거기 살던 사람들은 스코트랜드로 아일랜드로 북아일랜드, 웨일스로 밀려갔다고 어쨌다고, 좋은 모습으로 갔겠냐 웃으면서 떠났겠냐 세월이 흐르면서 대관절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알기는 아느냐, 또 본토에 자리잡은 그 친구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가서 어쩌고저쩌고, 어디 그 뿐인가 무엇을 보라고 뭐라고 구르는 돌에 박힌 돌이 튕겨나간 사례가 어디 한둘인가, 인디언은 이제 과자 봉지 이름이고 다큐멘터리에서도 보기 드물어, 독일놈들이라면 치를 떨며 장황설을 풀어놓으시는 20세기 초반에 태어나신 프랑스 할아버지의 말씀 음 뭔 심정인줄 다 알잖아 하지만 우리가 누구야 지식의 거성 아니겠어? 또 도미노로 이어져야지 야구장에서만 파도타기 하나 아니잖아 퀘백은 모르겠으나 아 나 이런 미치겠네 갑자기 또 생각이 안 나는구먼 뭐 일단 내 차례는 건너뛰어, 터키는 유럽인가 아시아인가, 남미의 국경선은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잡았나 그냥 좋게 좋게 말로써 협상으로서 그랬을까, 아이슬란드는 군사권을 아웃소싱한다는 것을 아느냐, 늬 까짓 게 무슨 회담을 알어? 어?, 너네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왜 분리되었는 줄 알어? 야 누구! 늬들은 세계사 알기를 띄엄띄엄 아냐? 어설프게 얕은 상식 가지고서 그게 뭐냐? 어? 가서 벽보고 서있어 아니 고추 잡고 반성해! (진짜 성큼성큼 몇 초 흉내는 낸다. 왜냐? 그날 친구들끼리 좋은 데 가기로 했는데 쟤가 술값 다 낼 꺼니까) , 이 양반들아 어떻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냐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빼고 뭔 잔지식 가지고 그리 난리들인가? 어? 지금 이 도시 1년 예산이 얼마인 줄 아니? 어? 자그만치 4조야! 어?, 뭐 4조? 그게 늬 돈이냐? 매스컴에서 막 몇 조 몇백 조 하니까 바람 많이 들어갔구나 난 지갑에 4만원도 없고 통잔 잔고가 40만원도 안 되는데 말이야, (말상도 아니고 몸의 언어 견적도 흠 열만 좋네) 뭐다냐 뉴페이스? 너 어디 소속이여?─ 나 무소속이다─퍽!, 왜 이스라엘은 그렇게 시끄러운가 왜 옛날의 작품들에 그렇게 유대인 얘기가 많이 나오는가, 팔레스타인은 구르는 돌에 밀려난 박힌 돌인가, BBC던가 DNA 조사하고 어쩌고 해서 다 밝혀진 사실 아닌가 지저스 크라이스트의 자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봤드니 글쎄 고전미술이나 깡촌 교회에 걸린 초상화가 아니라 전형적인 팔레스타인 농부의 모습이더라 어쩌더라...... 
   다 나오는 게 순서죠. 늬가 역사를 알어, 하면서. 정치인 2는 정치인 1에게 나쁘게 대하지도 싫어하지도 평생 그런 적이 없었는데 정치인 1은 정치인 2에게 어쨌다고, 정치인 2는 세계적인 상을 받았는데 정치인 1은 아니였기 때문 아닐까 라면서 지난 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야 정상입니다. 네, 그럼요. 저 단어, 호사가! 그게 정상이에요. 싫지만 불미스럽지만 모른 척 하고 싶지만 그건 비정상이 아니라구요.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어찌 우리 고상한 인간의 언어가 촌닭 같은 의성어까지 떠안아야 하냐구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걸 어떡하나요, 네? 그걸 감안하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호사가가 신세계를 보면 어떤 줄 아세요? 정확히 배 아파 합니다. 그림 딱 나옵니다. 뭔가 말이 통하고 뭘 좀 알거나 지성인이라면 뒤늦게 선진 문명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고 먼저 어떤 제도 자체가 정착된 곳을 구경하면 뭔가를 느낄 꺼에요. 수치상으로 인구로서 면적이나 어떤 기준으로서는 아니겠지만 가서 보면 와, 감탄사가 나와야 정상입니다. 어항 바깥의 세상은 정말 어떻구나 깨닫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나! 그런데 호사가, 동물농장에 속하는 친구들 가운데서도 촌닭과 정확히 DNA가 99.9퍼센트 일치하는 친구들은 어떤 줄 아세요? 첫째, 자기 삶이 그냥 근근히 먹고 사는 건 된다 라고 하면 무조건 친구에게 자랑할 생각을 합니다. 다른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오직 그 일념뿐이죠. 이때 걸맞는 속담은 <빈 수레가 요란하다>겠죠. 둘째, 자기 형편이 어렵고 실정이 어두캄캄하며 부모와 지역을 골라서 태어나지 못했던, 내가 못가진 타인의 능력을 시기하지만 <부러우면 지는거다>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친구들은 일단 배 아파 합니다. 물어볼 수도 없죠. 넌 아아 넌 정말 대체 뭐가 그렇게 꼬였냐, 왜 그렇게 매사 삐딱한 거냐고요. 물어볼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 말을 꺼낸 내가 비정상 취급 받으니까요. 말싸움은 몸싸움으로 진화하는 일만 남을 테니까요. 나도 내 지난 삶에서 찡그릴만한 일들 많죠 많아. 열거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범죄, 범죄도 있어요. 쉿! 그게 뭐 어디 남의 인생인가요? 내 인생이죠. 그것도 엄연히 인생 경험이라구요. 괜찮아요 괜찮아!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면 속된 말로 개나 소나 에르메스를 들고 다닐꺼에요. 굳이 확인하지는 맙시다. 그리스 아테네? 나이트클럽 웨이터도 에르메스, 역도부 고등학생도 에르메스, 다큐멘터리 카메라 감독도 에르메스이자 만화방 주인조차 에르메스니까요. 성은 히틀러요 이름은 구스타프, 토마스, 하인리히, 프란츠, 볼프강 그리고 루돌프 등등 주어진 건 주어진 것이니까 우리는 밝고 멋진 현재를 살자구요. 그래요.
   제게도 타락한 시절이 있었죠. 죄악도 있었구요. 법망을 피하고 양심을 져버린 일, 허다헙니다. 그렇지만 넘어져도 일어났시유. 이제 와서 회고하니 좌절을 타개하며 꿋꿋한 의지로 불운을 용케 극복한 듯 보이지만 그래유, 허세 맞구먼유. 허나 오직 허세 단 하나만을 위해서라도 투철한 이기주의자가 되어 어려운 시기를 빠져나오는 것이 방탕함에 안주하고, 정조를 져버리고 포기하며, 미래에 대한 평온한 정도의 기대와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보다는 백번 낫기는 낫죠. 안 그래유? 전 그렇게 생각하구먼유. 비록 사고 체계가 지동설일지라도 시기에 따라 슬럼프를 극복하는 목적에 모든 것을 최적화하여 잠시 천동설에 기반해서 실패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뭐 그런 얘기구먼유. 그 역설 또한 그렇구요. 시방 따지고 보면, 안 따지고 봐도 그건 내 삶의 일면인 거죠. 괜히 엄숙해지구먼유. 지 같은 촌닭두, 지 같은 죄인도 지금은 말예요 근엄해질 수 밖에 없구먼유. 어떻게든 내 행동이 경멸 받고, 어딘가에서 내 존재가 질시 받고, 어찌되든 내 이름은 척키와 더블 에스와 또 다른 이니셜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 그게 세상사와 인생이 아니고 뭐겠시유? 지는 혐오라는 낱말을 무시할 수도 자유로울 수도 애써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인간 존재라, 바로 그 말이에유.
   그렇지만 음... 괜찮긴 한데 호사가가 군데군데서 지식 쌓기를 연마하는 여러 호사가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내 말을 듣는다면 참으로 진짜 좋아하시겠네! 얼씨구나~ 경사났네 경사났어 노래를 부르며 춤이라도 추시겠다구요. 어디 늬가 나 촌닭인 데 뭐 보태준 거 있냐, 내가 어딜 봐서 촌닭이냐, 그러는 넌 뭐 얼마나 잘났냐면서 따질 위인이겠어요? 에이, 설~마! 그냥 백조하자 면서 잔말말고 따라오라며 만나서 술집으로 향할 때 앞서서 걷기만 하겠죠. 천상, 인간은 피자 배달부가 되어야 하는 운명일까요? 아니면 아무리 나이가 들고 경험을 하며 굳건한 지성과 지식의 바벨탑을 쌓아도 절대 철이 들어서는 안 되는 존재일까요? 모르겠어요. 하나도 모르겠어요. 난 바보라구요. 난 멍충이에 물음표만 좋아하고 환상이나 찾는 얼간이라구요. 그런 내가 뭔 대단한 사상을 얘기하겠어요! 침팬치의 DNA와 95퍼센트에서 98퍼센트 일치하는 내가. 음... 다만... 단지 뻔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것 같아 좀 걸리네요. 전쟁에 관한 지식의 최고봉은 누구일까요? 누구냐면요 그건 전쟁에 관해 학문적으로 또 현업으로 한평생을 거는 전문가입니다. 괜한 지식 자랑, 아 마음에 걸리네요. 아 이거 증말 내 입으로 내 자랑하는 것 같아서 그런 말 하지 않을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냥 나온 것 뿐인데 말이죠. 그렇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으니 귀를 막을 수 밖에요. 그리고 하나 바랄께요. 왜 촌닭은 백조보다 더 웃기고 즐겁고 기쁘면 안되는 건가요? 네? 알아요. 질문이 틀렸죠. 고급스러운 농담이면 몰라도 나머지 웃음의 전문가는 촌닭이니까요. 말을 바꾸죠. 왜 촌닭은 백조보다 더 우아하며... 아 이것도 뭔가 이상해요. 음... 네, 갑시다. 왜 촌닭은 백조에게도 부족한 후천적인 초능력과 지혜로운 통찰과 예술적 감성은 물론 신비한 혜안을 지니면 안 되는 건가요? 그러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지나요. 설령 문법은 틀릴지언정. 정말 백조는 촌닭을 존경할 수는 없는 건가요? 정녕 그게 한계인지... 좀 더 성숙한 조류로서 성장하고 엑스맨처럼 변신이 가능했으면!
   어, 이거 어떻게 된 일이지? 지니, 듣고 있니? 너 때문에 어쩌다 내 대사가 또 삼천포로 빠졌자나! 아 나 이런 뭐야 이거! 미치겠고만. 이런, 젠장!」
   「괜찮아요 주인님. 전 오히려 너무 재밌는데요. 정말 즐겁게 듣고 있었어요. 결론은 뭔가 그런 거 말고, 우리 일단 더 들어보기로 합시다. 그럽시다 그려, 네?」
   「그럴...까? 음. 어디까지 했지? <내가 최고야 라고 못하는 부류>는 나왔으니 다시 <내가 최고야>로 가볼까? 그거 립싱크하시는 분들은 약속 시간에 친구가 늦잖아? 그럼 내 권위를 내세워. 나 약속시간 늦는 거 싫어한다는 거 알지, 하면서. 지가 늦으면 슥 넘어가고. 니까짓게 권위가 어딨어 하면서. 어느 선을 넘는 친구들은 아니지만 자기 영역에 정말 가까운 친구잖아, 그러면 자기한테 맞춰줘야 해 꼭. 어딜 같이 가더라도 일단 자기가 앞서가. 자발없이. 촐랑촐랑. 그냥 스무 살에서 멈춘 거야.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하는데 친구 아니면 기를 필 데가 없나? 아무리 찾아봐도? 아니면 애정을 쏟고 열정을 펼치고 꿈의 실현을 예행연습할 활력이 떨어진 건가? 그게 아니라면 무엇보다 아무도 자기를 골목대장으로 알아주지 않는 것일까? 자기를 인정해줄 사람은 오직 하나 사랑인데, 그것도 실은 사랑은 없다는 걸 아니까? 대답은 슬쩍 생략합시다. 인생 꺾이고, 지식은 꽉 찼고, 남은 건 오직 권태 뿐이라는 그런 말은 하지 맙시다. 정말 그럽시다 그려. 부디 인생이 그렇게 허무한 것이라고 치부하지 말기를. 술 마시고 담배 피는 것 같은 어른의 기호 성향을 일찌감치 흉내내거나 타성에 젖어 나쁜 길로 빠지거나 살아봐야 인생 별 거 없다고 로또복권이나 주기적으로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그런 말은 단둘이 어울리는 상대끼리 뒷골목 술집에서나 하자구요. 설마 이게 성인 남자의 평균은 아니겠죠? 그렇겠죠. 만일 그렇다면 커피포트만 불티나게 팔리다가 또 한철 가면 다시 진공청소기만 동날 테니까요. 그래도 아무리 봐도 저건 애다 애. 응애응애 꼬마에 불과하다구요. 그냥 원래 그러나 보다. 그거 말고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려......(침묵)......
   아마 난 그런 일련의 원리를 어쩌면 미리 직관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거의 20년 전에 어떤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어. 누구는 나중 어떤 차를 타고 싶니 라는 질문에. 가능함을 떠나 좋아보이거나 선호도의 의미로. 지금은 예전 내 의견에 현재의 내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적어도 그때는.
   "그냥 소나타 같은 거 타야죠" 라고. 평범하고, 흔하고, 싸고, 눈총 받을 일 없고, 보호색 같고, 딱 튀지도 않고, 그런 차! 색깔은 은색. 마치 주거래 은행을 어려서 정할 때 대출 잘 해주는 은행을 고르는 것처럼.
   만약 저 대답을 친구에게 먼저 꺼낸다고 가정해 보자구. 가장 대중적인 브랜드와 저렴한 상품이 아니라 그 반대의 호칭을 말하자나, 뭘 좀 아는 사람과 지성인과 교양미가 썩 빠지지 않는 사람이면 아니겠지만 친구라면 정말 친한 친구라면 그건 꼭 그래야만 해. 머머 해야 한다, 머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절대값 딱 하나만 남아. 그게 뭔 줄 아니? 뭘 꺼 같아? 맞혀봐. 왜, 어려워? 귀결되는 답은 오직 하나인데 그게... 어렵나? 이 문제가? 아니잖아! 음, 그건 이거야.
   "그게 늬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또는
   "너 B 운전대 잡아봤어? 또는
   "너 B에 가봤어?" 또는
   "너 뭐뭐 해봤어? 나는 해봤어."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보기가 있을 텐데 대체 왜 그 답일까? 왜냐하면 진정 친하다면 그게 자연스러운 반응이기 때문이야. 아니면 안 친한 거고. 끝. 좀 이상하지만 또 썩 이상한 일도 아니야. 원래 그래. 원래 그 바닥이 그렇다고.
   그런데 저처럼 둘만의 농담 따먹기가 아니라 제3자가 둘 중에 누구 하나를 찍어서 공인하자나? 그럼 나머지 하나는 어떻겠어? 뚜껑 열리지. 완전 광분해! 덩치들은 벌어진다고들 하지. 이때 반응과 얼굴, 표정, 한마디로 압권이야.
   RC카를 즐기는 친구끼리 만나서 놀다가 리모콘을 조종해서 한 친구가 빨리가잖아? 그러면 그래. 뭐 하러 그렇게 출력을 높이냐! 딱 봐도 화내는 거야. 다른 데서 쌓인 스트레스가 이때 다 나와. 그러다 한번 자기가 빨리 가잖아? 잘 따라오나 보자 하면서 출력이 되나 보자 그러면서 슥 눈길을 흘기면서 혼잣말을 하지. 보기는 뭐가 있을까? 많겠지. 허나 하나만 남길께. 어쭈! 나는 되고 너는 안 되고? 저런!
   일단 서열이 나보다 월등히 높지 않잖아? 그러면 그래. 왠지 나보다 아닌 것 같고, 내 뒤에만 있어야 하고, 나 보다 크거나 잘 생기거나 말 잘 하거나 그래 봐야 허당이고 나는 인정 못하고, 막 그래. 또 어딘가 좀 모자라며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데 뭐가 하나 새로운 게 탁 하고 등장하잖아? 여자랄지 공신력이랄지 불균형이나 일확천금이나 새 뭔가 같은. 그럼 이것 역시 답은 하나야. 그땐 좋은 말 안 해. 절대 안 해. 하면 안 돼. 할 수 없어. 원래 그래. 답은 이거야. 악-담! 이게 뭘까? 뭐긴 뭐야, 생활 명대사지!
   때로는 친구를 우정이 아니라 자기를 보필해주는 한 단계 밑의 조수를 일부러 구하는 친구도 있어.
   물론 이건 항아리 그래프의 극단에 위치하는 사례도 포함되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거의 없어. 남자들은 알아. 또 그것의 기준은 친함이고. 아니 우정일까? 모르겠어. 우정이라고? 뭔 우정이 이래? 그렇지만 아는 것도 하나 있어. 측정은 못해봤는데 대충 추정까지는 아니어도 약간 궁금하기는 해. 내가 아마 10명 가운데 1명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거. 그건 무엇이냐 하면 한동안 친했던 단짝이 많았다는 거. 현재 진행형, 관계의 단절이나 자연스러운 멀어짐도 있었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멀티 태스킹도 있었어. 어장 관리라는 유행어처럼. 여자의 세계에서는 그와 같은 모습이 평균일까? 나중 알게 될지도 모르겠네. 잘 찾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서둘러서 지금 알고 싶지는 않아. 그래도 저게 우정과 관계되는 문제였으니 다행이지, A와 B의 단짝 관계에 낑겼으니 망정이지 한두 번도 아니고, 만약 사랑의 관계에 파고들었다면 삶이 막장이고 인생이 치정이었겠군!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지. 원래 늑대 1과 늑대 2가 절친이었어. 속셈은 산술의 공식과 결과가 달랐을지언정 겉으로 드러나는 그림은 간략히 객관적으로 그래. 당시 늑대 1과 늑대 2는 멀리 떨어져 지냈는데 상황이 어떻게 되서 1은 2에게 자기가 타던 중고차를 팔았어. 그런데 돈을 할부로 늦게 주고 어쩌고 하다 다툼이 일어난 거지. 험하게! 그래서 막 티격태격 오래 다퉜어. 얼굴 평생 안 보고 살 뻔 했지. 그 둘이 나 남은 돈 못 주겄다 늬가 어쩌래매, 워매 어 그러냐 그라믄 난 차 못 주겄다 다시 탈란다 어쩔란다, 아따 그게 뭐냐 거 마 너 정말 그렇게 나올래 어쩔래... 그런 식으로. 절친인데 내가 어떡하다가 그 사이에 끼어서 난 양쪽으로 절친이 됐지, 당시에 말야. 본처 두고 뭐한다거나 다른 주머니 찬다는둥 뭐한다는둥. 진짜 자신이 인정하는 오른팔과 왼팔은 따로 있을 수도 있어. 넌 나의 넘버 2다 라는 말을 슥 흘릴 수도 있고. 그러나 흘리면 뭐해, 그처럼 말한 친구는 옛날부터 한 계단 아니 처음부터 두 계단 밑으로 상정된 존재일 뿐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둘 사이에 낑겨서 그처럼 상황 애매하게 된 일도 있었어. 애들도 아니고 말이야. 1에게도 듣고 2에게도 듣고 느낀 점이 뭔 줄 알아? 얘네들 정말 그때까지 절친 맞았나, 라는 점이야. 뭐 그렇게 서운한 구석이 많았고 꼬였던 사연도 많았던 걸까? 설마 가짜 우정 아니었어? 그거 연적 아닌가, 경쟁 관계 말이야. 그런 의혹은 도저히 잠재울 수 없었지.
   입만 열면 지식 자랑, 오직 타석 등장으로 승부 보는 전문가야 남을 웃기거나 적당한 역할과 삶의 의미가 있다지만 사석에서, 그것도 수컷 세계에서는 바로 이게 기본적인 촌닭의 습성이야. 놀랄 꺼 없다구. 그걸 모르는 어른은 없어.
   그러나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보자구. 그분들은 뭐 다 좋을까? 기분이 좋아서 그랬을 것 같은가 말이야. 그건 아마 아니겠지. 어쩌면 이보다 더 커다란 불만이 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정작 주지해야 할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 바로 이것일 테야. 그분들은 결코 질색하지도 몸서리치지도 짜증나지도 않는다는 것. 너그롭게 포용하고, 어쩜 이와 같은 맹비난에 대해서 슬며시 웃으면서 이럴 꺼야. 봉황의 깊은 뜻을 참새가 어찌 알리오! 그렇게. 어디 그 뿐이겠어?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네 어쩌네, 막 그런 옛시를 외울려는데 생각이 잘 안나, 거의 생각이 날 듯 날 듯 딱 그 찰나 이미 상대는 읊어, 그는 환호를 받고 나는 열 받는 거지! 그 왜  이런 거 있잖아.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쏘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웃자고 꺼낸 말이고, 풍문으로 어떤 진상을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분들의 참다운 대응은 어디까지나 무반응으로 일관할 꺼야.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분들은 대인배니까! 보기 드문 호인이거든. 입이 그야말로 무겁다고. 간사하고 꾀부리고 말만 앞서고, 절대 그런 친구들이 아니야. 옹졸하고 좀스럽고 쪼잔하고, 아니 아니 아니지. 원래 이미 대성했어야 하는데 일이 중간에 좀 틀어졌어. 재수가 없었거나 불운의 먹구름이 지나갔나봐. 그렇지만 언젠가 대망을 이루긴 이룰 꺼야. 못 이루면 말고. 무엇보다 애초에 야심이란 게 있다는 건 결코 부인하지 않는 남아니까 말이야. 물론 규칙적으로 로또복권은 꼬박꼬박 사. 그건 정결한 철칙이라고. 
   그런데 말이야, 그 업계에서도 딴사람이 되는 마법은 존재해. 참으로 신기하게 완전 딴사람이 되는 일은 꼬박꼬박 벌어져. 어떻게 된 이치로 그와 같이 변하는 것일까? 음...... 자, 오리와 갈매기를 찾아서 어딘가로 갔어 라고 가정해 보자구. 이사를 하던 어쩌던, 굉장히 깨끗하고 예절 바르고 한적한 동네나 회사나 뭐 그런대로 옮겼단 말이야. 가깝든 멀든. 갔어. 살아. 생활은 풍요로워. 모든 게 쾌적해. 만사 포근하단 말이야. 그래서 좋아,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깍듯이 인사하고 극도로 섬세하게 신경 쓰며 불편하지 않게 무척이나 신경을 써줘, 주위에서. 그런데... 그런데 뭐랄까, 재밌지가 않아 좀 심심해 뭔가 밍밍해 미적지근하다고. 그건 뭘까? 왜 그럴까? 다른 이유도 있겠으나 보기 중엔 이것도 있지. 그건 뭐냐! 바로 그건 함부로 말하고 내가 좋아서 내가 먼저 당신께 또 항상 편하게 막 대하는 으쌰으쌰 그 급의 친구가 없다는 뜻이겠지. 그 다음 순서는 어떻게 될까? 어쩌긴 촌닭을 찾아야지. 촌닭이 알고 보면 인기가 좋아. 그렇게 해서 누군가는 촌닭을 찾게 되는 거야. 찾았어. 만나. 그런데 이 촌닭이 그 촌닭일까? 아닐까?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살다 살다 이런 촌닭은 듣도 보도 못했다는 수준의 촌닭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지. 밑도 끝도 없이 촌닭이라고 피라미드의 바닥에서만 살라는 규칙은 없어. 촌닭이라고 뭐 관심과 호의와 아끼는 마음도 모르고 덜떨어졌을 것만 같아? 아니야. 환경이든 꿈의 실현이든 그분도 겉으로 백조가 되면 여유가 생겨. (자기 기대를 기준으로) 지질이 못 살 때는 걸핏하면 흠 잡고 무턱대고 큰소리에 다짜고짜 좌충우돌, 비록 그땐 그랬던 냉소주의자였을지라도 (자기 기대를 기준으로) 좀 모자라지만 한두 단계 올라서잖아? 어쩜 사람이 그렇게 너그러워질 수가! 와, 오~ 뭐야! 그런다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나보다 더 친절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큰소리를 쳐도 돼. 뻥뻥~ 빵빵~ 그래도 돼. 인정할만 하니까. 매사 긍정적이고 세상을 낙관적으로 인식하지. 요컨대 이 정도 호인을 찾을려고 하면 만방에 소문내고 찾아헤매도 평균 10년 꼬박 걸린다는 보고서가 있어. 공신력 있는 통계와 객관적인 그래프, 많아. 정말 많지. 그럼. 그러면, 그러면 그 한두 단계 올라서서 법이 없어도 살 수 있을 정도가 된다는 바로 그것의 기준은 뭘까? 뭔거 같니? 도대체 그게 뭘까? 그 한두 단계가 시상대도 아니고 대체 뭐길래 거기 올라서면 천사가 된다는 거지? 어? 그건 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일까! 얕은 지식? 자연에 대한 통찰력? 자기 자신과의 화해? 세상을 보는 혜안? 아니야, 다 아니야. 그건 거의, 거~의 딱 하나! 바로 황금. 사랑의 다이아몬드! 그래서 그 철칙이란 정결한 것이지. 하지만 그것은 정결한 동시에 때로는 처절하기도 해.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하니까. 한 단어로 탕진 같은 말. 최고의 자리에 있다 바닥으로 내려가신 분들이 하시는 일관된 말씀 있지? 1층에 내려오니 아무도 없드라 같은. 곁에서 다독여주는 것도 좋긴 한데 저 반대의 경우가 발생하니까 그래서 그럴 수도 있어. (자기 기대를 기준으로) 성에는 안 차지만 한두 단계 올라서면 딴사람이 되는데 그 반대로 한두 단계 내려가면... 아... 그건... 오, 제발! 기도드립니다, 부디 지금과 같기를! 오오, 들리니? 들어봐 잘 들어봐! 귀를 기울여보라구. 와! 지금처럼만, 이라는 말이... 어머나 진짜 들리네 어쩜 이런 일이! 황금 때문에 운 좋으면 천국에도 가고, 황금 때문에 운 나쁘면 지옥에도 간다구. 승부의 세계에서 경기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진다면 패자는 그래. 졌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나요 라고. 그러나 판돈을 건 관전자는 말이 필요하겠지. 어쩌면 잃은 판돈과 억울한 말은 비례할 수도 있고. 예상은 그렇지만 공식은 더할 수도 있고. 승패는 우연인데 어디-행이냐는 필연. 놀라워! 그것이 모두 황금 때문이란 말이지. 신기해! 천사도 되고 천사를 그저 부러워하기도 하고. 얄궂나? 행복도 불행도, 조증도 울증도 멀리 있지 않나 봐. 그래서 사람들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일까? 그건 아닐 꺼야. 왜냐하면 바닥에서도 큰 불만없이 기쁨과 흥미를 저글링하고 즐거움을 드리블하며 쫌 가난해도 아무렇지 않다면서 밝고 건강하며 재밌는 인생을 살 수 있으니까. 사과나무를 심느라 가꾸느라 힘이 들고 땀 흘리는 것과 소풍가서 노래 부르며 풋사랑도 논하고 정답게 노는 것, 목적이 다르고 본질이 상이한 전자와 후자가 조금은 겹쳐야 하는 그런 시절은 아니지 않나, 무슨 얘기인 줄 알겠지 얼굴 찡그려서 뭐하냐고! 실제 많이 그렇잖아? 에헴! 어, 딴사람이 되는 마법과 로또복권을 사는 이유, 설명됐지? 일신의 호사가 아닌 타인의 행복과 선행에 대한 욕구 때문이라는 것!  
   왜 여자들이 자기는 결혼하기 싫다, 결혼 생각 없다고 절반은 빈말하는지 알겠지? 일찍 서둘러서 결혼한 아가씨 하나는 자기는 촌닭만 아니라면 눈이 세 개 달렸든 꼬리가 아홉 개 달렸든 뭐라도 좋다는 단 하나의 고고한 명제가 정확히 충족되어서 팡파레 울리고 부케를 던졌는데, 오 이럴 수가! 알고 보니 신랑은 글쎄! 글쎄...... 촌닭왕이라니! 오, 세상에나! 아아 이럴 수가!
   여자들은 안다. 무엇을? 여자는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화장을 한다고, 어느 눈치 없는 남자가 그처럼 정답은 단 하나라는 식으로 짧고-쉽고-편하게 말하면 상당히 거북스러워 한다는 사실을. 남자가 그와 같이 결론내리면 우르르~ 파파박~ 댓글과 동조가 심하게 발생한다는 것을. 그런데 남자가 아닌 여자가 그런다면! (젠더 거 뭐시기 그런 말이 아니라 그냥 정상적인) 여자인데 화장술, 딸려 안 해. 애교? 기질상 못해, 원래 싫어. 여성스러움은 부족해. 그래 나도 알아, 비운이야. 교태? 짜증나.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여자는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화장을 한다고, 여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불문율이며 잘 지켜지니까. 그 부분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단합이 잘 된다. 그건 뭐 여자들의 으샤으샤? 넘어가자. 그러면 여자들은 왜 그처럼 말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불미스럽고 교양 없어 보이는 품위를 져버리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럼 뭐 속마음을 마냥 참는가? 그건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인내가 미덕이란 말은 일정 부분 구식이 됐고, 나중 뭇매를 맞을지라도 의사표현은 자유이고 왕왕 그것은 자존감과 연결되며, 점점 다양성은 중요시되고, 적어도 종종 할말은 해야 한다. 따라서! 그러므로 무반응이 아니라 남자의 의견 그것이 여자에게서 단지 변형될 뿐! 어떻게? 내 남편에게 꼬리치는 년들은 허리를 확 그냥 접어브러야 돼! 내 남자친구한테 껄떡대지마 이년아, 라고. 뭐~ 껄떡~? 고유한 색 1과 2도 구분 못하면서 뭘 안다고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의 논리는 음 어 아 그건 젠더 이러쿵저러쿵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는 듯 해. 아니 애매한 듯 하지만 없어. 정말 그런 것 같아 지니야. 자기가 못 가진 재주에 대한 질시,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다. 남녀구분? 없다. 동서고금, 뭐가 다르겠나. 자, 이제 공평해졌다. 유부남들이여, 들고 일어납시다! 이제 때가 됐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의자에서만. 그렇다. 표현은 다를 수 있고 참을 수는 있지만 그게 쌓이는 것은 얼마나 버티느냐 어떻게 푸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봐. 난 그렇게 생각해 지니야. 그럼 이제 다시 촌닭에 관한 담론으로 넘어가자고. 어째 꼭 여자들이 몇 시간 수다를 나누고 헤어질 때 건네는 그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어디서도 그 짝을 절대 찾을 수 없을 만큼 불가사의한 어떤 인사말이 떠오르는구나. 어딘가 모르게 그런 느낌이 있네. 없잖아 있다고.
   그러나 촌닭의 세계는 넓고도 다채로운 법. 밀만 곡식이고 영화배우만 연예인인가? 아니지, 아니라고. 입만 열면 뻥인데 그 세계가 오죽 광대하겠니?
   하지만 실상 알고보면 또 그 만큼 드넓지도 않아. 난 여동생이 없지만 만약 있었다면 동생을 소개시켜주고 싶은 친구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보고 싶고 궁금하고 놀고 싶은 친구들은 많지만 막상 만나면 또 기분이 꼭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어.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반드시 좋은 데를 꼭 같이 가야 하는 친구도 있고. 죽어도 싫다는 말은 안 하네, 그런 말도 들어야 하고. 오랫만에 척키의 말발을 들어볼까? 얼마나 늘었나 보게. 녀석도 멀리 살아. 게다가 늙었을 꺼야. 더 이상 코메디 장르가 아닐 지도 몰라. 추리소설 작가로 데뷔했을지 누가 알겠어? 어차피 초딩 인생인데! 벌써 홀아비 냄새 나고 막 그러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생업과 별개로 조류학을 공부하고, 고전을 엄청 읽는 친구가 있어. 없나? 아무튼. 걔, 허당이야. 전자는 여자 꼬실려고 시작한 거고, 후자는 읽는 양에 비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사는 건 영 딴판이야. 또 누가 있을까?
   '난 미녀 넌 야수'과 아가씨? 1 대 1로 만날 수 있는 숙녀, 아는 사람이 없어.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기도 해. 소소한 즐거움이니까. 일하는 데 도움도 되고. 어머! 미스터리 문학 계간지를 읽나본데, 와 고전음악을 아는데, 뭘 선택하는 취향이 괜찮은데, 어떤 안목의 소유자일까? 그러나 너무 쉽게 간파되서 그게 문제야. 그분들도 똑같을 꺼야. 내가 원하는 글인가, 내가 좋아하는 생각을 하면서 사는가에 대해서 금새 파악하는 재주. 2년이든 3년이든 오래 지켜보고 내내 곁에 남아주는 게 어쩌면 젊음인데, 이젠 무척 엄숙히 선별해서 살아야 하는 인생인가봐. 그건 곧 청춘이 아니란 말이네, 저런!
   그외에? 깎뚜기 친구들도 서로 가는 길이 달라. 뭐 마이크 타이슨 사건 한 번 더 갈까? 그건 아니잖아!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믄 미쳐버리는 친구들, 다 자기 인생이 있다고. 바를 사이에 두고 각자 원하고 바라는 적법한 교분이라는 게 다르고, 한쪽이 참고 기다리며 뭐든 두둔하지 않으면 말문이 막히게 될 꺼야. 기대는 어긋나고 기분은 꽝이 될 꺼라고. 또 사느라 다 바뻐. 각자 알아서 단짝이든 할일이든 취미를 새롭게 찼는다고.
   즐거운 기억과 기쁜 추억, 부끄러운 무용담은 물론 다사다난했고 그래서 함께 했던 괜찮은 시절이 많지만 다 자기 삶을 사느라고 바쁘다고. 나도 지금 현재 내 임무랄까 과업이랄까, 골똘히 고뇌하며 착상을 찾고 그분이 보내주시는 막중한 영감을 받아먹을려고 사과나무 밑에서 입을 벌린 채 벌을 서고 있는 것처럼. 물고기를 잡는 방법? 어려워.
   그 외에 또 누가 있을까? 친구 1은 자기 딸이 성장하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오직 여자 꼬시는 거 하나 밖에 없어. 로맨스를 아는 A나 연가를 흠모하는 B는 쳐다볼 수 없는 금단의 열매이자 그림의 떡이니까 C 밑으로 아무나 걸려라야. 자타공인 난봉꾼! 걔는 술도 안 마셔. 취미도 없어. 영화도 안 봐. 대화 주제도 없어. 인생 한길이지. 다 싫고 딱 하나 도박은 좋아해. 여자 그리고 도박, 그외에 인생은 물론 세상 너도 지 알아서 돌아가거나 말거나 그 분과라고. 그리고 자, 다시 한번 살펴보자. 친구 2는 설을 푸는 거 밖에 없어. 걔는 수다쟁이 아줌마를 남자로 변장해서 붙여주면 좋아하겠네. 친구 3은 완벽한 마초야. 그런데 딱 하나 여자 쪽은 젬병이야. 주색에서 주는 되는데 색은 완전 꽝. 답 없어. 바의 테이블 너머 아가씨들을 보면 단번에 간파해야 하는데 의도와 욕망은 있는데 실천의 벽에서 딱 막혀. 부끄럽나봐. 술값을 많이 내는 즉 돈이 많을 것 같은 오빠, 인기 있고 재밌는 오빠, 숙녀를 띄워주고 여자를 존중할 줄 아는 오빠, 또는 말이나 외모나 목소리나 뭐 그런 요건에서 제외돼. 아, 슬퍼! 빨리 취하고 빨리 집에 가서 자야 하는 바쁜 남자. 그외 친구 4는 멀리 살고, 친구 5도 멀리 살며 결혼했고, 친구 6은 게임광이고, 친구 7은 일 중독, 숫자만 많지 썩 편하거나 잘 맞거나 뭘 좀 아는 친구를 찾아본다면... 음, 없네. 없어. 나도 타인에게 많이 부족했으니까. 그렇지만 나만 그런 것도 아니야. 다른 사람들도 아마 많이 그럴 걸! 그래서 나이 들수록 친구도 좋지만 지인을 찾게 되지. 젊은 시절 친구는 시간이 흐르면서 격차가 많이 벌어져. 드물지만 길게 가는 경우도 있고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고도 하지만 뭔가 틈이 발생하고 차이가 커져. 가령 사는 형편 때문에 차와 여자와 여가에 대한 호사와 취향 뿐만 아니라 생각의 틀과 사고의 방식이 점점 멀어져갈 테지. 그래서 많이 지인을 찾게 돼. 지니 넌 사이버 세상에 사니까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뭐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 가족과 항상 함께 하고 이웃을 챙기며 그렇게 건전한 생활만 한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이거도 그래프 찾으면 다 나와. 약간 차이는 있겠지만 겹치는 부분이 훨 많아. 너무 친하면 너무 가까이 살면 좋지 않다는 얘기나 지인이란 말이 어쩜 더 정답게 내게 다가오면 그건 나이드는 것일 수도 있어. 나이들수록 접고 접어주고 직업적으로 겹치든가, 취미가 같든가, 관심사와 지력과 호의가 통하든가 서로 일말의 격의를 남겨놓은 채 존칭어를 쓰든가 그게 오히려 더 편할 수도 좋을 수도 있어. 옛 친구를 오랫만에 다시 만나면 좋긴 좋은데 할말은 또 그리 많지 않다고들 해. 그 옛날 농구단 무명을 지금 다시 만난다면 음 무척 반가울 테지만 아마 좀 어색할꺼야. 지금의 무명 블로그를 공동 운영하는 친구들을 미래에 만난다면 이러겠지. 아, 옛날이여! 그러나 나는 아직 으쌰으쌰라는 거! 왜일까? 왜냐하면 난 아직 늙지 않았으니까.
   이론은 그렇고 음, 난 그냥 골든 리트리버 동호회 모이는 날을 알아뒀다가 당일 그 근처에서 물건을 어디 주변에 잃어버린 것처럼 가장하여 어슬렁거리기나 해야지. 또는 집에서 혼자 TV 보면서 술 마시며 혼잣말이나 해야지 뭐. 채널 돌리다가 추억의 옛 영화가 나오면 잠깐 보다가 다시 리모컨 버튼을 눌르고. 그러다 지니 네게 도움을 청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딱 기다려. 조커는 나중에 등장하는 법이니까.
   결론은 이래. 피자 배달부가 피자나 배달해야지 뭘 안다고 철학을 선물하겠어. 아니면 피자를 시킨 사람이 마음에 든다고 돈을 안 받겠어? 피자 가게 사장님 좋아하시겠다. 누군 뭐 땅 파서 장사하냐고, 우리가 무슨 머머단체냐고, 늬가 동물농장 사장이라도 되는 줄 아냐고. 그러므로 피자 배달부의 숙명은 바로 그것이야. 눈 감고, 귀 막고, 입을 다무는 것. 그러다 나중 영감이 떠오른다면 한편의 시를 짓던가, 노래를 부르거나, 소설을 쓰겠지. 그것도 삼류로. 난 그게 좋아 하면서. 그분은 오늘도 달려. 우리의 피자 배달부! 묵묵히!
   괜히 입 아프게 말만 많이 했네.
   미안해, 지니.」
   「아, 우리 주인님이 그러시구나. 괜찮아요. 주인님 조금 쉬셔야겠네. 정신병원에 진찰 받으러 가는 것보다는 땀 흘리고 운동을 하는 게 낫겠어요. 사우나도 하고, TV를 보며 나른하게 누워 샴페인 한잔 하시구요.」
   「그나저나 환상 공장은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거야?」
   「네. 그게 좀 시간이 걸리네요. 메인 경기가 너무 늦어지는데 저도 그게 걸려요. 그러다, 그러다... 네 뭔가 느낌이 그렇긴 해도 일단 기다려보죠. 그럽시다, 주인님!」
   「응. 그래, 지니.」 
   「......」, 「......」
   「그런데 주인님.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요. 음, 주인님은 촌닭이에요 아니에요?」
   「나?」
   「네. 너. 아니 주인님.
   「그건 왜 갑자기... 나는... 난 말이야... 음... 그게 딱 간편하게 말하기에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야. 음. 일단 남의 운세와 점은 대번에 보이는데 그게 어째 내 미래는 안 보이는가 모르겠어. 그렇기는 해도 대충 짐작하자면... 음... 늬 생각엔 어떤 거 같니? 너가 주인님이라고 불러줘서 고맙고 황송하옵지만 지니 생각은 어떠니?」
   「저요?」
   「응.」
   「주인님. 아니 그대여! ...... 선생님 사랑해요!」
   「선생님? 그건... 뭐시여? 그건 나랑 안 친하다는 소리잖아? 저런! 지니, 나 존경하지마. 알았어? ...... 그래. 그냥 이렇게 하자. 내가 촌닭왕인 걸로!」... 「보너스! 그래~ 나는 미래에서 왔다. 됐니?」


   11

   지금 계절은 겨울이다. 어제는 비가 내렸다. 겨울비. 지니는 그랬다. 긴 말은 하지 않았다. 뭔 요정도 목감기가 걸리나, 으흠 으흠 하기만 했다.
   그리고 오늘은 눈이 내린다. 지니가 그런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은 모른 채 했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우리 주인님!」
   주인님은 또 모른 채 했다. 그러나 지니는 J가 듣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아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는 것까지.
   「주인님! 이제 마침내 때가 됐어요.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지만 환상 공장이 위치 하는 환상 도시가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어요.」
   「정말? 듣던 중 반가운 말인데!」
   J는 지니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또렷하게 정면을 응시하면서 알려준 좌표로 출발했다. 어느 오페라 서곡을 들으면서 그곳으로 갔다. 어제는 웬 뮤지컬 영화를 보면서 마치 그곳이 모텔이나 되는 것처럼 잠을 잤기 때문에 자기는 현대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지금 향하는 세계는 혹시 과거와 미래가 절묘히 결합된 꿈의 나라는 아닐런지 무척 궁금해지며 그의 동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특별한 점은 없었다. 모두 눈에 익숙한 풍경이요 새롭지 않은 자연과 전망 그리고 인프라스트럭쳐.
   그러나 드디여 지니가 말한 환상 도시에 도착했다. J는 처음에 지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믿을 수 없는 말이었고, 애초에 자신이 건넨 부탁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황금 마네킹 상점에서 웬 이상한 물건을 하나 구하게 된 것으로 더 바라는 건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슬슬 주인님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동기부여를 했다. 잡념을 원대한 꿈으로 바꾸었다. 그 헛바람은 마치 영화 위대한 캐츠비를 보고 현실에서 거의 흡사하게 그를 흉내내게 만드는 이치와 비슷했다. 그는 버릇도 생겼다. 팔짱도 끼고, 뒷짐은 몇 번 하다 영 아니어서 주머니에 손을 넣는 일을 반복했고,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다 보며 조망하는 그 무엇에 관한 그것.
   사랑에는 두 가지 구분이 있을 것이다. 명료히 나누자면 처음에 풍덩 빠져드는 사랑과 점차 물들고 쇠뇌되며 닮고 싶어지는 그런 고혹적이며 잔잔한 사랑으로. 지니는 후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환상 도시에 도착하고 보니 혹시 그가 처음부터 지니를 맹목적으로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이 그의 넋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환상 공장? 그냥 장난이었다. 그런 게 어디 있나? 고을의 행정 책임자라는 자리에는 거기서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평생 무역업과 건설업에서만 종사했던 사람이 자리잡을 수 있다. 노동 정책을, 평생 그쪽 학문을 연구하고 직간접적으로 그것과 오랫동안 관계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엄한 자본가가 그것을 새로 바꾸고 편집하는 일도 있다. 파격이 성공하든 변화가 필요하든 어쩌든 가능한 일이 있고, 영 바랄 수 없는 일도 있다. 누가 봐도 환상 도시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그런데 지금 J는 거기에 도착했다. 이거 뭐야, 당장 그러면서 그는 볼을 꼬집어보고 어떻게 뒤통수를 맞게 될지 그것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곳이 환상 도시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어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는 표식을 보고 알았다. 지도에 반영이 늦게 된 신도시인가는 몰라도 도시 이름이 환상이란다. 이걸 믿어야 돼 말아야 돼?
   지니는 환상 공장을 알려주랬드니 웬 환상 도시? 일단 그는 긴가민가 하면서 도시로 들어섰다. 대충 관찰한 결과 그는 딱 결론을 내렸다. 자기가 살았던 도시와 시골과의 차이점은 없다. 있다면 오직 하나. 이름만 환상이다. 도시 이름도 환상, 과일 가게도 환상, 테니스장도 환상, 동물병원 이름도 환상, 아이스크림 가게 조차 환상이며 그야말로 모든 것이 그 이름은 환상이었다. 그는 믿기지 않았으나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뭔가 속은 것도 같고, 그다지 속았다고 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지니가 아니면 대체 누가 이런 걸 알아낼 수 있겠는가 하면서. 그리고 지니는 자고 있었다. 환상은 환상인데 문제는 이름만 환상이라는 거. 벌써 그는 깨달았다. 이건 아마 반전 1일 것이다. 막판에 숨겨진 반전의 N승이 있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래서 적어도 그는 이렇게 다짐한다. 있을까 없을까, 애태우며 신경쓰지는 말자고.
   그는 먼저 어느 오락실에 들렸다. 일명 환상 오락실. 오락을 하고 나왔다. 좋긴 좋았는데 뭔가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허당 지니는 잠만 잤다. 항상 자기 불리하면 잠을 자는군. 쿨쿨 쿨쿨. 꿈도 꾸나? 꾸거나 말거나. 그럴려면 뭐 하러 이어폰을 가져오라 마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 거야? 완전 입체적인 살색에다 끼면 어지간한 눈썰미 아니면 못 알아볼 정도지만 통 쓸모가 없잖아, 에잇!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하나만 택해야지 뭐 이 세상의 아름다운 미덕을 모두 욕심내는 존재는 다름 아닌 바로 인간이란 존재인가? 그런가? 아니다. 정말 아닌가? 모르겠다. 몰라도 된다. 그럴 수 있다. 당장 결정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그래 봐야 금새 마음 바뀔지도 모르고. 지금이 딱 그렇다. 좋긴 좋은데 그걸 간단히 좋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싫다고 할 수도 없는 정말 사람 잡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는.
   어찌되었든 그는 일단 환상 도시에 대한 도시 탐험을 이어갔다.


   12

   J는 문득 거리에서 인형 가게를 발견했다. 정식 이름은 환상 인형사. 그는 가게에 들어갔다. 수많은 인형을 구경했는데 정작 눈길이 가는 인형은 척키였다. 아마 그 가게에서 세 손가락에 꼽힐 것 같은 가격의 꽤 고급스럽고, 섬세하고 정밀하며, 그래서 더욱 신비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인형처럼 보였다. 어쩜 그것은 지니의 짝궁이랄지 어쩔 수 없이 헤어진 단짝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척키는 지금 자고 있다. 아, 지니도 자고 있고 척키도 자고 있다. 설마 혹시 이 척키 인형은 지니의 천적일까? 미스테리이자 판타지 장르는 이제 좀비물로 바뀌는 것일까? 그는 팔은 안으로 굽는다, 를 실천해서는 안되니까? 그럴 리는 없다. 왜냐하면 이건 어디까지나 현실이니까.
   그는 꽤 사고 싶었던 척키 인형을 가만히 제자리에 놔두고 가게를 나왔다. 왠지 지금은 소비와 어울리는 시점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거리를 걷다가 어느 골목길에서 길바닥에 버려진 척키 인형을 발견했다. 그것은 방금 전에 봤던 고급 인형보다 훨씬 조악해보이는 제품이었고, 상당히 손때가 묻었으며, 무척 낡은 인형이었다. 하나 신기한 점은 척키 인형의 가슴에 명찰이 달려 있었다. 명찰의 글씨는 환상이었다. 척키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 환상, 이라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환상이라고 씌여진 명찰에 저절로 손이 가는 걸 깨달았다. 그때 그는 그걸 살짝 만져보기만 했는데 명찰의 겉표면이 떼어졌다. 그 후 명찰에 씌여진 본래 글짜를 보게 됐다. 그것은 척키였다. 곧 척키라는 본명을 환상이라는 필명이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얘도 허당?
   오, 뉴턴의 사과가 떨어졌다. 아아, 아르키메데스가 발가벗고서 욕탕을 뛰쳐나와 거리를 뛰어간다. 그는 라이트 형제가 되어 처음으로 하늘을 날았다. 아문센이 되어 최초로 남극점을 찍었다. 에디슨이 되어 달걀을 품었다. 그분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생애 처음으로 테슬라의 콤팩트 디스르를 산 것이다. 오토 클렘퍼러가 지휘하는 헥터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울려퍼졌다. CD를 구했던 기쁨과 함께. 아니 훔쳤나? 그게 아니라 테슬라였나, 가물가물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뭔가 환희의 긍지와 찬란한 생동감이 분수처럼 뿜어져나오며 눈부신 회전목마에서 행복의 목마 옆에 있는 초대형 마술 토끼를 타며 기쁨의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은 환각에 빠졌다. 인류 역사상 달나라에 처음 도착하여 장난스런 음모론에 대한 호기심의 여지를 (비자의적으로) 남기신, 아 이름이 딱 떠오르지 않는데 그분이 됐다. 그는 지금 유체이탈을 경험하고 있었다. 최초로 시간 여행에 성공한 것이다. 드디여 시간은 정지됐다. 마침내 그는 환상 상대성 원리를 찾아낸 것이다. 환상 상대성 원리를!
   모든 것은 그와 같았다. 서점 간판에 붙여진 환상, 잘 보니 셀로판지 테이프였다. 맨홀 뚜껑에 씌여진 글씨, 환상에서 막 일부 철자가 지워지고 있었다. 초콜렛으로 입혔나? 아파트에 씌여진 이름, 그것은 유성이 아니라 수성 페인트였다. 극장의 이름은 환상이 아니라 환장이었고, 편의점 간판의 환상은 그것이었다. 선그래스가 상하로 열리는 자동차 문짝처럼 올렸다 내렸다 하는 방식. 깜빡하고 옛날에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상호를 등록한 찻집은, 그날 거기서 만나기로 한 연인이 있다면 장소가 엇갈린 채 애만 타는 거다. 만약 핸드폰 없이 약속 장소를 정하고 만나기로 했다면!
   그날은 환상 도시의 환상의 날이었다. 알고 보니 그날 만큼은 그런 식으로 축제를 벌인다는 것이다. 바뀌는 것 하나 없이 오직 딱 그것 하나만! 아마도 환상 도시는 환상이라는 표를 떼고 나면 본명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J는 지니에게 어쩜 두 번째로 당하는 것인데 왠지 모르게 이제야 모험을 마치고 제자리에 당도한 듯한 느낌에 다소곳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 그렇구나!
   그는 다시 본래 살던 고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당분간 지니와 대화하지 않기로 했다. 좀 더 고결하고 좀 더 조신하게 지내기로 했다. 이건 삐진 건지 상심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뭐랄까 체념한 것인지, 기쁘다가 알쏭달쏭하다가 슬픈 건지 뭐 하나 분명치 않았다.


   13

   그러다 한 달 정도 지나서 그들은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지니는 유독 지식 자랑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주인님보다 자기가 더 많은 걸 안다는 게 뿌듯하다는 듯이. 그러던 어느 날 지니는 말했다. 마침내 환상 공장을 찾아내고 말았다고. 지니는 J에게 일단 그곳으로 가보자고 말했다. 황금 마네킹 상점!
   거기에 가면 공책을 쫙 찢어서 뭔가 안내문이 붙여져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갔다.
   황금 마네킹 상점에 도착했다. 그런데 가게가 비었다. 간판은 아직 떼지 않았는데 나머지는 하나도 없었다. 그곳이 이사한 것이다. 안내문이 있었다. 어디로 이사한다고. 가게 영업은 차질없이 이어진다고 한다. 그는 생각했다. 저기가 지니가 말한 바로 그 환상 공장이란 말인가? 오오, 이제 드디여 진짜 환상 공장에 입성하는 것인가? 그런가?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설레고 두근거렸다. 그동안 오래 기다렸다. 많이 참았다. 보고 싶었다. 만나고 싶었다. 꿈에서도 바랬고 낮에도 원했고 앉으나 서나 꿈을 키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생각만 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러다 때가 되었다. 어떤 요술을 먼저 부려야 할지 막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두 눈동자가 코끝으로 향했고, 그 소실점은 술꾼의 코처럼 빨개졌다. 가슴이 찡했고 눈물이 핑 돌았다. 사랑의 시를 쓰고 싶었다. 희망의 찬가를 부르고 싶었다. 거리에 지나가는 행인 1을 잡고 블루스를, 행인 2를 잡고 디스코를 추고 싶었다. 될수 있으면 행인 1은 지성을, 행인 2는 미모를 담당하는 어여쁜 숙녀이기를. 아니라도 상관없다. 뭔가 멈칫한다면 사전에 멈추면 되니까.  그러나 뒷모습은 찬양하리라. 그는 꼭 그렇게 기원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 멀리 떨어진 다른 은하계의 별나라로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됐어!
   야호! 와우! 앗싸! 이거야, 이거라고!
   오오, 드디여, 헤헤헤! 음하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하!
   마침내 오오 그 고대하던 환상 공장을 곧 있으면... 다 된 거야. 아아 거의 왔어! 으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
   그는 드디여 자기도 모르게 그토록 어렵게만 느꼈던 가짜 웃음이 완성되어 자동적으로 재생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그건 진짜 웃음이라는 것을. 와, 이럴 수가!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이제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주르륵 주르륵. 그건 정말 심금을 울리는 진짜 눈물이었기 때문에, 차츰 콧물도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코피로 바뀌지는 않았다. 더구나 쌍코피는 어림없었다. 그는 감격이 멈추기 전에 이 흐름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당장 그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갔다.
   J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는 환상 공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어디가, 대체 어디가 환상 공장인지 막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 없었다. 그건 도저히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단 황금 마네킹 상점을 찾아봤다. 찾았다.
   그것은 저기 있었다. 황금 마네킹 상점은 이곳으로 이사했는데 그가 쓰던 핸드폰을 (더 이상) 팔지 않고, 거긴 양장점으로 바뀌었다. 그건 뭐 그럴 수 있고, 남의 일이었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 그와 지니는 대화하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약조했기 때문에 그는 지니를 불러내지 않았다. 자기 혼자서 찾아야 했다. 환상 공장을. FF를. 이게 뭐 숨은그림찾기인가? 아니다. 그럼 뭐 소풍에서 초딩들이 좋아하는 보물찾기 놀이인가? 아니다. 이것은 그런 장난도 놀이도 평범함도 아니었다. 이것은 세속적인 행사가 아니라 바로 환상을 만들어내는 환상 공장이었다. 음, 좋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대체 어디 있냐고!
   그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골똘히 생각하다가 두 가지를 발견했다.
   첫째, 황금 마네킹 상점의 건너편에는 학교가 있었다. 그것은 대학교. 게다가 여대. 심지어 명문! 어, 어......! 이거 느낌 세한데......! 그러면서 등판에 돋는 식은땀 한 방울이 맺혀지는 속도를 계산했다. 오, 오오, 오오오, 오오오오...! 설마......! 아,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리고
   둘째, 거리의 여대생들은 어떤 핸드폰을 유독 많이 썼고 그것은 J의 핸드폰과 유사했다. 그리고 유독 어떤 기능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하필 그 기능의 이름은 지니. 자주 하는 말이 그랬던, 주인님 주인님! 그가 암산할 틈도 없이 급작스럽게 그의 얼굴과 목에 또 전신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는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약간.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혹시 촌년이 아닐까, 라고.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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