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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107

from 소설 2017. 10. 31. 19:08

   1

   환영식은 없었다. 예술관 친구들로부터 선물 받은 반 다이크의 마돈나는 그대로 사무실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제임스는 이름을 윌로 바꿨다. 머머일 것이다로. 왼쪽에 추리 오른쪽에 추측, 그처럼 양쪽으로 낮에는 예쁜 숙녀와 밤에는 아름다운 요부 아니 다소곳한 천사 같은 내 사랑을 누가? 그래, 바로 예언이 그 둘을 양쪽에 황홀하게 꿰찬 듯한 신비한 청록빛깔 공상 때문이었다. 맞다. 윌은 이제 이름 바꾸는 게 취미가 되어버렸다. 작명술도 점쟁이도 알고 보면 실력은 다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일 필요없이 스스로 학습에 응용에 실전까지 1인 다역을 맡기로 한 것이다. 지금 당장 잃어버린 낙원으로 떠날 수 있는 당첨권을 어딘가에서 따낼 수는 없지만 이름을 바꾸는 거라면 아무 문제 없었다. 사람은 원래 미세한 차이로 여러 외적 인격을 거느린다지만 서류상의 서명이 아닌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것처럼 필명 하나 갖는 건 죄도 아니고 벌도 아니니까.
   서두가 길었다만 인생을 일종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면 저번 편까지는 재미있을 뻔 하다가 말았고, 이번 편부터 진짜 흥미진진하고 기똥차게 즐거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라는 포부로 윌은 사무실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느꼈다. 예술관 친구들은 이제 거의 만날 수 없지만, 반 다이크의 마돈나나 거리의 옷가게에서 마네킹만 봐도 그 친구들이 생각날 것이라고. 그는 느꼈다. 친밀감과 연민, 감수성, 우정의 감정을 뒤로 하고 다시 호기심쟁이로써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윌이 그렇게 새로운 사무실에 입주한 후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특별한 전개는 없었다. 발단뿐인 삶이니까. 그는 마티니처럼 분위기 좋은 해변에 놀러갔다 왔고, 진짜 같은 호접몽도 수시로 꿨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상쾌한 해변에 당도했을 때 하필 뚜껑 없는 차 동호회 일당이 몰려와서 구닥다리 웨건을 타고 갔던 윌의 자신감은 슬픔으로 바꼈다. 당연히 어떤 낭만을 기대하는 젊음의 감성은 한없는 부러움과 질투심과 한숨을 불러왔다. 그 외 윌이 한 일이라곤 도시의 이곳 저곳을 둘러봤고, 오래된 모텔이란 제목의 단편소설을 구상하다 포기했으며, 문학수첩이란 장편영화용 희곡을 쓰다가 고배를 마신 게 전부였다. 그러면 그게 다냐, 아니다. 달리 아름다운 추억과 별난 무언가 비명을 지를 듯한 모험은 없었지만 무명 친구들과의 비공식 회동이 한번 있었다. 윌은 무명 친구들과 만나서 꾸벅꾸벅 졸지도 않았고, 싱글벙글 시종일관 쾌활한 면모만 고집한 것도 아니고, 바로 함께 공동소설을 썼다. 각자 1편의 단편을 써서 그 일곱 편을 억지로 이어서 어느덧 1편의 중편소설을 완성했다. 한데 그 작품은 젊고 세련되고 기발하지 못했다. 동경심을 꿈틀꿈틀 자극하지도 못했고, 번쩍번쩍한 절정이 나타날 뻔 하다가 느릿느릿 다시 발단으로 끝나버리는 평범한 이야기였다. 무명 친구들은 그 시시한 범상함의 원인으로 과작을 첫손 꼽았다. 하필 다작이 뽑혔다니, 윌은 속으로 뭔가 뜨끔했지만 침묵을 유지했다. 깜짝 행사와 특별 모임이랄지 이런 선심성 자화자찬식 작업은 예술가로써 남발하지 말자고 의견을 모았고, 퉁명스러운 소음없이 모두 그 뜻에 찬성했다. 말종 종마 막장 별종에 진부함, 식상함, 상투적인 인기나 어떤 모범이 아닌 전혀 뜻밖의 새로움을 추구하자는 데 모두 선뜻 동의했다. 그렇게 무명 친구들과 헤어졌지만 윌은 미처 몰랐다. 그 실패작이 불러올 낯선 만남을. 즉 그들은 졸작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블로그에 올렸고, 작품 말미에 보너스로 이런 안내문을 내걸었던 것이다. <당신의 소설을 써드립니다>라는. 그렇지만 상업 영화의 주인공을 일반인이 꿰찰 수는 없는 법. 무명 연극배우일지라도 어느 정도 물망에 오를 만한 조짐이 보이거나, 언젠가 나중 일약 스타덤에 오르면 나 잊지마라, 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 같은 의외의 인물이라면 모를까, 그 장난스런 머머해드립니다 라는 문구는 거느린 조건이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무명 블로그는 조회수가 초라했고, 심지어 그 대단한 조건에 걸맞는 최적의 인물이 거짓말처럼 짠 하고 나타나서 날 가져요, 아니 제 이야기를 써주세요 라며 제발로 나타날 리도 절대 없다.
   그런데, 어머머, 그런데 나타났다. 내걸었던 그 구구절절 까탈스러운 자격에 대해서 결격 사유가 하나도 없는 뽀송뽀송한 첫눈 같은 숙녀가, 새하얀 도화지 같은 아가씨가 말이다. 여기서 잠깐. 살짝만 곁가지로 얘기를 흘려보내자. 잠시만 모른 체 해 주시란 말이다. 고급 사교 클럽에서 여자들 하는 얘기, 최고급 생활 반경을 제공하는 호텔 커피숍에서 나누는 비밀스런 사적 담론 가운데 하나는 그거다. 어디에 오는 남자들 다 그만그만하다고. 어디 물 아 말 말라고. 여자는 보통 남자를 볼 때 최소 2가지를 본다. 물론 그 두 가지가 재력과 꽃 들고 쫓아다니기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게도 고급 회원제 클럽에서 볼 수 있는 남자라곤 딱 그 두 가지 요건에서 최소 1가지에 발목잡힌 여자들이 대동한 남자들뿐이라니, 어머나 세상에 나 같으면 어쩌고저쩌고 아휴 이러쿵저러쿵 쩜쩜쩜! 라고 하실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래, 혹시라도, 속으로는. 여자는 둘 중 한 명은 이런 말을 한다. 아마도 하지 않을까? 안 한다면 그건 셋 중 하나다. 친하지 않거나, 여자가 아니거나, 고상하면 좋을 곧 세련되기를 바래야 할 말로 포장됐거나! 거울을 비춰보면 남자들이 사석에서 하는 얘기도 마찬가지다. 그 말은 뭔가? 나는 최고의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다 라는 가정을 전제로 하는 말 아닐까? 아니다. 그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자는 그런다. 허영심은 필요하고, 허영심은 본성이며, 허영심이 50일 때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허영심이 기형이 아닌 이상 그게 정상인 것이다. 간접화법과 직접화법의 중간에 파랑새의 번역기가 있다는 걸 누가 모를까. 1000분의 1, 10000분의 1은 몰라도 10분의 1, 100분의 1은 왜 평균이 될 수 없느냐. 이곳 분위기는 별로다. 언니 고급 사교계라더니 글쎄 순 촌스런 남자들 뿐이 없잖아? 나 같으면 어쩌겠다 쩜쩜쩜. 나는 드문 소수라는 진실을 대전제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엷디엷은 소전제로 하는 말이 아니라고는 쉽게 부정할 수 없다. 바로 그런 드라마적 요소를 순수문학에서 보신 일이 있나요? 아마도 없을 것이다. 흔하다면 가르침을 받겠다. 있어도 드물고 매우 희귀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걸 순수예술에서 다뤄보자면서 무명 친구들은 헤어졌고, 영화처럼 눈부신 숙녀는 윌의 앞에 떡하니 나타나신 것이다. 일은 그렇게 됐다. 그건 제발로 걷는 호박이 아니라 순간 이동하는 신비라고 불러야 어쩜 마땅하리라.
   「당신의 소설을 써드립니다. 맞...죠?」


   2

   빰빰빰 빠─ 빰빰빰 빠─ 빰빰빰 빠...... 윌의 가슴에 운명의 멜로디 5번 교향곡이 울려퍼졌다. 그녀는 시인의 사랑을 만족시켜줄 만한 여자였다. 그렇다면 윌이 불만족할 리가 있나. 세상의 절반은 여자라지만 그녀는 그저 흔한 말괄량이는 아닌 듯 보였다. 엇그제 판도라의 상자에서 방금 깨어났고 이제 그 환희의 송가를 윌에게 대신 노래해달라는 형편이었으니 윌이 싫다하겠나 넌지시 마다하겠나, 아니면 질겁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만세 만세 만만세 라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이게 웬 떡이야 그랬겠지. 이거 정말 꿈인가 생시인가 막 그러면서.
   「설마 블로그에 독자가 없을 거라고 예상하신 건 아니겠죠? 만약 무리한 부탁이라면, 그럼 뭐 전 선생님 조수하면 돼죠. 안 그래요? 요정인데 예쁘지 않고, 마녀지만 수정구를 잃어버렸으며, 미남인데 심하게 말수가 적을 뿐더러 간혹 꺼내는 화제도 부적절함으로 모자라 특히나 목소리가 깬다? 제가 그런 드문 확률에 해당되는 건 아니겠죠? 아니면 됐어요.」
   윌은 고뇌하는 청춘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스쿠르지 영감처럼 노인이었다는 말이 아니고, 노인도 불행하다는 뜻이 아니다. 어쨌든 이미 사랑은 시작됐다. 외로움은 끝났다. 믿지 못할 느닷없는 연정이 애증으로 돌변할지 불면증과 몽유병을 파생할지는 몰라도 일단 그 사랑은 현실이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윌의 생활은 이랬다. 지긋지긋한 심심함에 신물나게 재미없고, 할 말도 할 일도 약속에 돈까지 없었다. 혹시나 둘 중에 한 명은 그럴 것이라고 말할 수는 절대 없다. 그런데 그 둘 중에 한 명이 바로 윌이었다. 그분들도 사는 낙이 있고 기다려지는 기쁨이, 사랑스러운 연정과 지고의 환희가 있겠지. 바라노니, 있어도 많지 않을 거라고 어찌 그처럼 경망스럽게 예상할 수 있으랴. 그처럼 긍적적인 낙관론을 내다버리지 않았기 때문일까? 윌에게 이와 같은 내 안의 그대로 아껴야 하니까 어딘가에 말하고 싶지 않은, 어쩌면 쉽게 믿을 수 없는 어젯밤 단꿈의 줄거리 같은 사랑이 나타난 것 아니겠나.
   윌은 헤헤헤 아이 좋아라, 입을 해벌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침은 흘리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지금은 그녀가 말을 많이 하고 있지만 언젠가 전세가 역전될 것이다. 그녀는 때가 되면 기대게 되어 있다. 의지를 해야 하니까 사랑받아야 하니까. 그때가 임박하면 어떤 작전을 편다? 그야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면 되겠지. 녹슨 실력도 실력이라면. 이럴 때 가장 좋은 전략은 멀리까지 내다보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수읽기보다 앵무새 따라하기의 시기였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게 먼저니까.
   그녀의 이름은 핍. 키는 148cm. 악당 험버트 험버트가 사랑했던 롤리타보다 자그만치 1cm가 컸다. 147과 148 가운데 뭐가 맞을지 헷갈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취미는 플룻 연주라는데 가만 보니 속눈썹광에 수다 떨고 소셜 네트워크를 떠돌며 여성잡지 1과 2사이에서 방황하는 숙녀인 것 같았다. 포도주에 조예가 깊을까? 아니다. 술은 마실 줄 모른다는데 내숭이 장기인 여자일 것이다. 보석에 대해서도 모를 테니 다이아몬드에 대한 지식을 읊어주면 처음에는 혹하다가 얘기가 길어지면 하품할 게 틀림없다. 가족 사항과 성장기, 물어보지 않아도 시시콜콜 술술 다 말할 것이다. 아마도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는 게 특기일 테고, 그 수다를 듣다 듣다 나가 떨어진 남자가 적지 않을 거라는 추측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녀를 사랑하려면 귀에 피가 날 각오를 해야 하리라. 그러나 의외로 이런 유형이 사귀기 쉽다. 왜냐하면 애초에 마음에 쏙 드는 상대와만 사랑을 시작하니까 마음을 포근히 내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꼬셨나 누가 먼저 홀렸냐, 그게 문제가 아니라 견디다 견디다 어느 때가 되면 퍼질 때 퍼지더라도 엑셀 파일에 그녀에 관한 정보를 모두 수집하고 1급, 2급, 3급으로 나누어 관리하면 그녀는 은밀한 애정을 오래오래 간직할 것이다.
   물론 그녀는 자기 얘기를 자기가 1인칭으로 쓰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에겐 소설가의 재능이 없다나 뭐라나. 소설가 가운데 소설가의 재능이 충만한 사람이 몇일런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핍은 장편소설을 끝까지 읽는 것 자체가 어려웠으니 주소는 잘 찾아온 게 맞다. 핍이 독보적인 질투심 유발자일까 일시적인 교태꾼일까. 최소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윌은 직감했다. 핍의 인생에서 고품격 소설의 주제로 삼을 만한 괜찮은 소재는 많지 않다는 걸. 맞다. 진짜다. 그녀는 잘생긴 색소폰 연주자를 흠모하고, 노래도 가사는 듣지 않고 멜로디만 좋아하는 전형적인 드라마퀸 부류였다. 좋게 말하면 천재적 연애술사. 윌은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아, 좋긴 좋은데 얘 좀 피곤하겠는데 라고. 유복한 어린 시절에 행복한 성장 환경으로 눈부시게 그러나 아담하게 성장한 인형 같은 숙녀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데, 아아 그녀는 완벽한 촌년일 수도 있겠구나 라고 윌은 생각했다. 내가 드라마 작가라면 좋았을 텐데 이걸 어쩐다, 라고 느꼈다.
   오, 이제 어떡한담! 윌은 점차 생각이 많아진 것이다.


   3

   핍은 이제 윌의 사무실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윌은 그녀를 처음 만난 날 들었던 그녀의 말을 기억했다. 토시 하나 틀리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나 90퍼센트는 맞다고 큰소리칠 수 있으니까, 어쩜 그녀의 말과 몸짓과 표정이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아 그녀의 말은, 만약 무리한 부탁이라면 그럼 뭐 전 선생님 조수 하면 돼죠, 그것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호칭도 선생님에서 오빠로 바꼈다. 이미 처음부터 편했으니까, 웃었으니까, 밝음으로 말했으니까. 여자는, 웃으면, 끝난다. 그래서 윌은 핍에게 시집을 한 권 선물해줬다.
   「와, 시집이다. 오빠 시 좋아해요? 난 좋아해. 그런데 무슨 말인지 잘 몰라. 하나도 몰라. 그래도 좋아. 나, 하나, 고백하자면 음 시인이 어떤 의도로 글을 썼건 해석은 내 맘이야. 은유? 오빠 난 정확한 사람이야, 숫자를 좋아한다고. 환유나 의인법은 괜찮지만 그림 조각맞추기처럼 시간과 공간과 사연을 마구 뒤섞어 놓는 낯설게 하기? 과연 내가 그런 깊은 뜻을 이해할까. 그래서, 나는 시를 읽돼 우선은 직유법으로 받아들여. 직설화법처럼 시인이 내게 직접 나직한 음성으로, 때로는 도톰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직접 묻고 답하고 혼잣말하는 그 구술을 듣는 것처럼 모두 직접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게 내가 시를 읽는 방법에서 첫 번째 원칙이야. 두 번째 이후로는 잘 모르겠어. 그야 뭐 직관이 주관하고 직감이 눈치채지 못하면 무의식이 알아서 하겠지 뭐. 아무튼 난 그래. 오빠도 그래 봐. 그거 의외로 꽤 재밌다. 그거 알면 몇몇 작가들은 아마도 낯이 두껍지 않은 이상 사뭇 당혹스러울지도. 어디 시인만 그러겠어? 전문가와 비전문가! 전문가가 하늘이면 아마추어는 바다라거나 풀밭인 경우도 있겠지. 들장미인 아마추어가 어디 천상의 궁전에서 산책하시는 전문가의 고견을 깨우치겠어? 쉽게 말해서 경우의 수가 몇으로 나뉜다고. 상중하로 봤을 때 말이야. 전문가의 글을 읽으면서 꺼벙한 비전문가와 찌질한 사색가, 허접한 한량이 만약 웃는다면 그분은 대체 왜 웃는 걸까? 아니 도대체 왜 웃는 거냐고! 아마데우스 이후로 아마데우스만한 음악가가 나온 적이 있나? 고전음악은 영원히 지속될 테지만 고전음악의 제1전성기는 끝났어. 이미, 완벽하게, 끝! 반론은 전무해. 없어. 있어봐야 의미 없고 필요도 없지. 진짜로 고전음악의 제1전성기는 완벽하게 종료됐으니까. 그건, 완성됐고 끝났어. 학계보다는 상업쪽에서 한껏 치켜세운다면야 어느 재주꾼을 새로운 신동을 제2의 피카소라고 제3의 헤밍웨이라고 제4의 드뷧시라고 앞으로 틈틈히 새로운 누군가를 칭찬하겠지만 그 제2의 제3의 제4의 그분을 진짜 제2의 피카소와 제3의 헤밍웨이와 제4의 드뷧시로 알아듣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치가 어렵다면 정치 앞에 모든 명사를 붙이면 되듯이 문학도 그래. 출판계에서 일을 하는 사람도 상도덕이 있고 철학이 뚜렷하며 나름 전문가일 테지만 어떤 말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더군. 예술은 계몽의 용도로서 어울리지 않죠 라고. 기다 아니다 맞다 틀리다, 의견은 자유야. 따라서 틀린 건 아니지. 그래서 헷갈린다? 그럼 갖다 붙이면 돼. 어떻게? 문학과 예술 앞에 계몽이란 낱말을. 소설은 계몽적 성격으로 적합한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는 전제가 성립한다면 게임, 영화, 장난, 농담, 행위예술, 거짓말등 이 세상에 예술 아닌 게 어디 있겠어. 계몽...에 적합한 과목이라면 그럼 도덕과 윤리, 종교, 예절 이런 거 밖에 없겠네. 나는 어딘가에서 그렇게 들었어. 한 사람의 글을 읽으면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도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들었어. 그 말은 뭘까? 다른 것도 그렇다는 뜻이지. 누구나가 그렇다는 말이겠지. 상식에 두루 정통하고, 교양미를 갖췄으며, 말귀를 알아듣고, 글귀에 밝은 어른이라면 실제 누구나 그렇다는 말이라고.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서 아이의 정신 건강을 진단한다거나 만나자마자 또는 오래 사겨 봐야 그 사람을 알게 된다거나 그런 거 말야. 교묘하게 피해가기는 하지만 상업에서 과장 광고는 법으로 규제를 해. 그것이 심하다 그러면 범법이라고. 그래, 관여한 사람은 범죄자가 되는 거지. 반면에 예술을 보자고. 예술에서 과장 광고를 하면 뭘까? 뭐긴 뭐겠어 미덕이지. 관행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네. 기준이 불명확하다고 하겠지. 불법이 아니니까. 의사소통에서, 청자와 화자의 의사소통에서 빚어지는 부조리랄지 오해에 관한 원인 여부를 놓고 따질 때 많은 경우 근원적으로 모순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거나 양측간에 균등히 생각이 짧지 않은 일은 흔하잖아. 그처럼 생산자보다 소비자의 선택에 책임의 무게를 싣는 분야가 있듯이 난 그래서 시를 읽을 때 내 방식, 곧 직유법으로 읽어. 시간으로 굳어진 내 방식이라고. 읽는 방법은 내 마음이니까. 예술의 양적 팽창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만큼 현대는 펠리컨인가 참새인가 각자의 정체가 훤히 드러나는 점은 매우 좋은 점 같아. 절대 속일 수가 없다구. 그런데 오빠한테 시집을 선물받아서 내가 너무 들떴나 봐. 미안 미안. 긴 말 요약하자면 난 시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부푼 허영심이 가라앉지 않는다, 따라서 시를 읽을 때 직유법으로 밖에 읽을 수 없고, 그래서 나는 어떤 책을 읽고 무슨 음악을 들으며 어디에 갔고 누구와 함께 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라는 내용을 열심히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는 삶을 산다구. 그래. 부끄러운 일은 아니야. 남들도 다 그래. 혹시 내 의견에 반대한다면 반론을 제기해 보세요 오빠. 오빠도 오빠의 취향이 있듯이 난 그래. 꼭 내 방식을 존중해달라는 말이 아니라구. 시에 대해서 어렵다, 따분하다, 시적이다 라는 말은 있지만 시를 1차적으로 읽지 말라 라는 말은 없거든. 내가 다시 초딩이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그래. 왜 그럼 안돼?」
   「안되긴. 핍이 그동안 할 말이 많았나 보구나. 이건 거의 평론가 수준인데 그래? 오빠도 가끔은 그래. 때로는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어머, 나랑 비슷한 사람을 만나니까 기분이 무척 좋은데? 그런데 있잖아. 그 시집, 똑같은 거였나 이젠 기억도 안 나지만, 그게 뭐 중요하다고. 아무튼 오빠가 오빠 친구한테 시집을 선물해준 적이 있거든. 푸르른 브로맨스의 불꽃이 강렬하게 불타오를 때 말이야. 당시 그 친구의 잿빛 단짝은 안색이 납빛이 되어가지고 막 쫓아다니고 난리도 아니었지. 어쩌면 삼각관계나 쩜오─1.5 그래 그러니까 나보고 알아서 반 반짝 물러나 주었으면 하는 의미에서─쩜오 정도를 바랬을 테니까. 그런데 그 시집을 선물 받은 친구가 말이야 얼마 있다가 여자를 사겼어. 진지한 만남이었나 봐. 그리고 내가 선물해준 시집을 똑같이 그 여자분께 선물했고.」
   「와! 그래서 어떻게 됐어?」
   「결혼했어. 그 둘이!」
   「우와. 음, 그럼 난 이제 어떡한담? 마음에 드는 남자가 안 나타나면? 오빠가 내 인생 책임질 꺼야? 오빠가 나 데리고 살 꺼냐고. 오빠, 그럴 수 있겠어? 그럴 수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보고. 그게 정말 가능할까, 아무 문제 없을까? 재미있을까 재미없을까. 궁금하네. 아 맞다.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리고 그 사연을 요약해서 난 블로그에 간단히 올렸어. 그런데 있잖아 그 뒤로 블로그에 올리지 않은, 올릴 수 없는 일이 있었지 뭐니. 아이쿠, 에고머니나, 어떻게 그 참...」
   「와! 그래서 그래서? 말해 봐 말해 봐. 어서 어서. 말해 줘 말해 줘. 뭔데 오빠?」  라고 그녀는 윌의 말을 끊자마자 맞받아쳤다.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는 것마냥.
   「그래서, 그 다음에? 그 친구가 바람 폈어.」
   「아 나 이거 진짜, 뭐야 그게? 여자는 시인이 되고 남자는 과학자가 됐다더라, 그런 거도 아니고 뭐 불륜? 내가 동네 아줌마들처럼 그럴 줄 알았어?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손뼉을 치며 어머, 진짜요? 그렇게? 인생 허무하네. 이러니 초딩들이 동요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가 있나. 난 기억나. 초딩 5학년 때 우리 반 합창단이었던 애가 선생님이 부탁하니까 엄청 이쁜 척 딱 손동작 막 이러면서 노래하던 거. 그 동요 제목이 뭐였더라? 그건 그렇고.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됐어?」
   「그 다음은 잘 모르지만, 잘 살겠지 아마? 그러지 않을까?」
   「뭐야 그게 다야?」
   「미안 미안.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고전주의자의 열정과 로맨티스트의 갈망에 대해 설명해주지는 못할 망정 꼬마 요정의 동심과 아리따운 숙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듯 하여 무척 쑥스럽구만 그래.」
   「그래 내 이번만 봐줄께. 하지만 다음엔 어림 없어. 알았지? 음. 기억해 두겠어. 그런데 있잖아. 오빠. 나 궁금한 게 하나 있어. 오빠. 남자는 여자를 어떻게 꼬셔? 아 오빠. 여자가 꼬리치고 미혹하며 걸어다니는 호박에 날아다니는 꽃잎 막 그런 거 말고. 응?」 
   부드러운 몸짓과 수상한 비음은 물론 교태와 애교라면 도무지 자신 없는 여자도 다 방법은 있다. 꽃 들고 쫓아다니고 돈 쓰고 시간 쓰며 꽃 들고 바보처럼 벌스듯 언제 어디서나 기다려야만 하는 슬픈 남자처럼. 슬프다? 좋아서 하는 일인데 슬퍼도 진짜 슬픈 게 아니다, 결과에 따라 쉬쉬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면 여자는 남자에 비해 뭔가가 너무 쉽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다 일장일단이 있는 것일 뿐. 아, 그러니까 본론만 말하라고? OK! 손이 차갑고 가슴이 이성적이며 애교는 체질에 안 맞고, 성질이 용납할 수 없으며, 인생 철학에도 도저히 어울리지 못한다! 라는 숙녀도 다 방법이 있다. 뭐겠나? 뭐긴 뭔가 그거지. 오─빠!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데? 으잉? 어인 일로? 왜, 미남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서로 널 차지하겠다고 시도 때도 없이 우리 핍을 자꾸 귀찮게 하는 꿈이라도 꾼 거니? 오빠가 꼭 네 꿈나라의 그 은밀한 줄거리를 엿본 건 아니지만 은근하게 씩 웃는 네 미소 하나면 어젯 밤 핍의 꿈 내용을 난 단박에 짐작할 수 있지. 암. 그럼. 땅 집고 헤엄치기요 식은 죽 먹기라네. 흐흐흐. 헤헤헤. 하지만 오빤 모른 체 하겠어. 그러니까 오빠한테 고마워하라구. 알겠니? 아, 사랑. 사랑이라... 이렇게 말해 볼까, 저렇게 고자질할까. 없는 헛소문에 멋진 풍문이라도 만들어내야 하느냐. 가만 있자, 의뭉스러운 그런 거 믿거나 말거나 험담 말고 뭐가 있을까. 자고로 기쁨과 젊음을 찬양함은 불변의 진리, 다정한 사랑을 애원함은 부동의 인기. 정다운 젊은 날 사랑하자. 천 곡의 노래와 만 편의 시가 말하는 주제가 무엇이더냐, 바로 그것. 허나 영화 같은 사랑은 드물 테지. 그래서 회상의 발명과 추억의 과장과 창작의 열망이 있는 법. 그러므로 우리는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샤를 보들레르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아느냐고 물어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내 사랑은 중요하나 그분들 사랑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기 때문, 곧 일단 뭔가 있어 보이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브랜드의 사랑에 대해서 물어보면 멈칫하기 때문. 즉 타인의 사랑에 대해서는 누구나 문외한이거든. 호감 있는 남자가 물어보면 선뜻 알고는 싶어지는데 정작 별 내용이 없는 걸로도 모자라 원래 관심 없던 나조차도 내 무관심을 잠깐 잊게 되는 거라고. 결론은 모른단 말이야. 자세히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적어도 남자는 그래. 아마도 여자도? 자, 그러면 그 다음엔 이렇게 운을 띄울 차례. (딱) 나는 이런 사랑을 했었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라고. 덧붙여 호들갑스런 오락적 색채가 짙은 어느 언론에 따르자면, 최근 프리미어리그에서 성적이 부진한 어느 팀 감독이 사뭇 볼썽사납게 경질당했다는데 하필 이름이 셰익스피어네? 아아 그녀가 생각난다, 셰익스피어! 우린 한때 꽤 잘 어울렸고 찐한 사랑을 했지. 에잇 그만하자! 라~고 한다면 그 친구는 영원한 허당, 백퍼센트 허당, 완벽한 허당이라네. 여대생 셰익스피어 근처 10미터 안쪽으로 접근하기나 했나 몰라. 하오나 숙녀가 그런 허당의 허세를 들어주겠나, 들어주지 않겠나? 그분은 남자친구한테 그렇게 말하고 여자는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까 쫓아다녀야지 별 수 있어? 어디 쫓아만 다녀? 보는 눈이 있는데? 기다려야지. 뒤쫓는 것보다 더한 정성이 필요한 바로 눈물 겨운 기다림 말이야. 곧 호박도 호박이고 꽃도 꽃이지만 남아도 나뉘는 법이지. 노력형이 있고 돈을 많이 쓰는 유형에다 거미줄 작전이 주특기인 부류도 있어. 그 가운데 축복은 뭐다? 바로 여자들이 가만 놔두질 않는 부류지. 진짜 괜찮은 남자는 여자가 가만 놔두질 않는단 말일세. 남자가 여자를? 아니야. 무슨. 아니라고. 에잇, 알면서? 오빠는 스쳐가는 눈빛 한번이면 대번에 알 수 있다네. 어허 저것 봐라. 거리의 어느 미남을 보고서 기쁨의 군침을 흘리는 줄 누가 모를 줄 아느냐? 허나 내 이번엔 특별히 모르는 체 하겠노라. 바로 이 '특별히'가 아마도 썩 드물지는 않겠지? 이번 연애학 강의는 여기까지.」
   윌과 핍은 이처럼 마술사와 조수인지 숙명적인 연인인지 분간이 어려운, 드디여 사뭇 부러운 친분을 뽐내는 사귐의 단계에 이르르고야 말았다.


   4

   윌은 핍을 광란의 무도회장에 데려갈 수도 낯선 별명을, 아첨의 여신 사교계를 누비다, 같은 문장형 애칭을 붙여줄 수도 없었다. 그는 유일한 목적, 핍의 인생 이야기 사랑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 옆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콧노래를 불렀다가 거울과 대화를 나눴다가, 핍은 내내 남 모르게 윌의 속을 태웠기 때문에 글을 잘 써지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그때 사무실 소파에서 핍이 TV를 보고 있는데 뉴스가 나왔다. 동물원에서 여우가 탈출했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꼬리가 1개인 정상 여우였다. 그와 동시에 바깥이 소란스럽길래 윌은 나가서 무슨 일인지 살펴봤다. 동물 구조대와 영세업체 소속으로 보이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뉴스에 나왔던 여우가 윌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는 걸 누가 봤다고 한다. 또 입주인 중 1명은 윌의 사무실 근처로 여우가 이동하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고 한다. 윌은 눈치가 없는 척 구경꾼인 듯 거동했다. 동물원에서 여우가 탈출했다, 그런데 내 사무실 앞에서 종적이 묘연하다, 그러면 핍이 바로 그 여우일까? 새로운 소식은 윌의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자극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는데 설마 소파에 여우가 한 마리 앉아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서. 설령 그럴지라도 그는 놀라지 않기로 다짐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윌의 잠잠했던 동정심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그의 총명한 추리력과 스코트랜드풍 상상력이 되살아났다. 따라서 윌은 무언가 감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핍이 어떤 삶을 살았고, 머스트 찰리 톰 스미스 게다가 델에 심지어 2부 리그 3부 리그까지 추종 세력을 든든하게 거느렸고, 문란...까지는 아니지만 이거 혹시 속칭 날라리가 아닐까 하는 핍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사무실로 돌아가 핍에게 먼저 퇴근한다면서 곧바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3박 4일간의 여행에서 핍은 돛단배를 탔고, 조랑말과 함께 사진을 찍었으며, 고성을 개조한 호텔에서 핍에 관한 소설의 줄거리와 구조와 인물 관계도에 대한 구상을 모두 마쳤다. 그는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소녀 감성을 한껏 부풀려서 인형의 마을 천사의 나라 꿈의 세계를 떠올리게 만드는 핍의 사랑 이야기를 들고서 사무실로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윌이 사무실로 가는 길에 라디오 뉴스가 나왔다. 집 나간 여우가 동물원에 돌아왔다는 내용이었다. 장엄한 자연 풍광과도 같은 평화로움과 TV 광고의 예언처럼 다행스러운 심심함과 일상의 상투적 행복이 제자리를 잡았겠다, 이제 남은 일은 핍의 소설을 완성하는 일만 남았다. 작품은 대필이지만 핍이 작가인 걸로 발표할 것이다. 못 견디게 사무치는 열정과 환성과 찬양은 모두 핍에게 떠넘길 테다. 왜냐하면 언제라도 얄밉지 않은 능청과 흥미로운 착오는 윌의 몫이고, 아름다운 꿈 행복한 기분 유쾌한 사랑 즐거운 인생은 발랄한 숙녀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윌은 조금만 더 있으면 나도 그나마 어디서 들어도 본 것 같고 보긴 본 것 같다는, 적당하지는 않지만 나름 불만족스럽지 않은 인지도의 순수예술가로써 위상을 공고히 다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기대감이 부풀었다. 이제 장난감 트럼펫과 장난감 삼지창도, 조촐하게 20명 정도 모이는 펜클럽 모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기쁨의 고양감에 사뭇 떨려왔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니 참을 수 없는 몽상, 멈출 수 없는 공상은 이쯤에서 자제하고 그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머나! 사무실에 핍은 없었다. 느낌이 쎄했다. 윌이 줄거리 구상을 완성한 날 핍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참을 성 없는 년, 라고 핍의 빈자리를 더럽히지는 않았다. 역시나 핍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기서 인연은 끝난 건가? 핍의 사랑 그 애절하고 장구하며, 어떻게 안 좋게 보자면 난잡하고 질펀한? 까지는 아니겠지만, 핍은 윌을 돌파리로 인정하고 떠나갔다? 상놈부터 목신까지, 씩씩한 뻔뻔스러움 숨기는 아름다움, 그 모든 사랑에 대해 기계처럼 스캔할 수 있는가를 마침내 깨달았는데 핍은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났다? 혼자 남은 윌은 그럼 약장수? 윌은 텅 빈 지갑 외로운 마음, 고딩 수업 시간에 들었던 표어 나를 가꾸세요, 살면서 깨닫고 체감한 긍정적 관점인 어차피 나중 의무방어전이든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라는 체념 어린 문구는 잘 아니까 유독 각별히 아꼈던 '인생을 탐구하자, 예술에 정진하자' 그런 순진한 다짐 같은 문장은 이제 지겨웠다. 챔피언에 올라야 지명방어전으로 매번 새로운 상대를 맞이하던지 말던지 할 텐데 내내 경기장 주변에서 맴돌기만 하고 구경꾼 주변에서만 서성거리는데 어느 세월에, 시무룩한 심정이 때로는 그처럼 자기를 지배했으니까. 그야말로 낙관과 긍정과 희망 찬 내일은, 머머해라 같은 브랜드 슬로건과 인문교양서적의 명령이라면 이제 신물이 났다. 허당의 자발에 골탕먹기 일쑤? 짜증났다. 아 됐고, 그러니까 언제까지? 짧든 길든 세월은 가고 행복은 챙겨야만 하는 것! 윌은 무턱대고 새로움만 쫓는 속물이 되긴 싫었는데...! 지금 그에게 남은 건 그렇다. 맞다. 많이 맞다. 돈에 팔려가는 환상과 병든 신비!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런 젠장!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사무실에 누가 찾아왔다. 오오, 이번에는 핍과 전혀 다른, 완전 색다른 스타일의 미녀였다. 예뻐 봐야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 자세히 보면 실망한다. 언뜻 보면 무수히 예뻐 보이지만 언뜻이 아니라 잘 보면 깨닫는다. 잘못 봤다는 걸. 거의 다 그렇다. 전부 조명발이고 대부분 화장발이다. 오래 봐도 괜찮은 미녀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새로움을 반긴다는 것. 그래서 여자옷의 종류는 그렇게나 다양할까? 아마도. 남자는 백화점에 가서 목적지에 도착, 선택, 계산 찍, 곧바로 공이든 게임기든 술집이든 어디론가 떠나는 게 행동 지침이지만 반면, 여자는 그런 남자를 홀리고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매번 꾸미고 새로워져야 한다니! 남자는 그러니까 눈치껏 상황 봐서 그녀보다 앞서 걷든가 아차 싶을 때 그녀를 앞서 걷게 만들 줄 아는 요령을 터득해야만 한다. 안 그랬다가는, 쉿!
   그건 그렇고 오오, 이번에는 핍과 완전 딴판의 분위기를 간직한 숙녀였다. 핍은 이미 머릿 속에서 잊혀졌다. 이 정도면 당신의 소설을 써드립니다 라는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었다. 전혀! 손색은 무슨, 대환영이었다.
   지구는 신비롭고 우주는 말이 없다, 그리고 인간은 사랑을 한다. 그래야 한다.


   5

   새로운 아가씨를 기점으로 그 다음 날부터 방문자는 쇄도했다. 그칠 줄을 몰랐다. 흡사 이래도 되는 거야 라면서 그런 헤드라인이 연상됐다. 화제의 인기 드라마 1058 : 1 경쟁률 뚫고... 몇 대 1의 여주인공 누구... 그러나 그건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계속 사람을 상대해야 하니까 윌은 정신이 없었다. 지금 바로 이곳은 기쁘기 그지 없는 낙원이었다. 이미 핍은 잊었다. 깨끗이 잊었고 깔끔하게 정리됐다. 일단 지금은. 심지어 이번에는 심사를 까다롭게 해서 아무나 받아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뿐인가? 윌은 샀다. 무엇을? 바로 번호표 뽑는 기계를! 룰루랄라 룰루랄라, 즐거운 인생 행복한 마음. 순정만화가 따로 없었고, 착각 탐정단은 바로 자신이었다. 바로 지금은 행복한 사춘기였고 내일은, 내일도 언제까지나 기쁨의 왕자일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 콩닥콩닥 설레고 떨리며 한없이 들떴다. 하루가 멀다하고 부케를 들어야 할 것만 같은 숙녀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끼니가 지나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붕붕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야옹야옹 고양이상도 있었고, 어떻게 저리도 고혹적일 수 있을까 싶은 말상도 있었다. 끊이지를 않았다. 매번 똑같은 상상을 할 수는 없으니까 한 명은 키스를, 이번에는 윙크를, 깜찍한 그녀와는 백허그를? 아아 이건 진정 천국이었고, 오오 아마도 이건 꿈이 아닐까 싶었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났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부터 방문자가 끊겼다. 완전 뚝 끊겼다. 잠깐 주춤하나 보다 라고 안심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파리만 날렸다. 이건 안심할 정도가 아니었다. 완전 정지된 듯 했으니까. 으리으리한 재산 탕진 후 빛 더미에 올라서니 1층에는 인기도 친교도 우정도 사랑도 돈도 아무것도 없더라, 바로 그런 심정과 똑같았다. 윌은 생각했다. 개의 팔자와 마술사의 새가 처한 운명을 비교했고, 그 가운데 무엇이 상팔자고 하수는 누구일까 궁금해 했다.
   「사실이지 말은 좋아하지도 않고 마권은 관심도 없으면서 승마용 채찍은 어디에 쓸려고?」  같은 대사를 끄적거려 놓은 창작 공책을 찢어서 구기고 뭉치고 물어뜯다가 집어던질 의욕도, 의지도, 기운도 없었다.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재기에 성공하다, 그럴려면 일단은 방탕한 시절이 선행되야 합당한 일이다. 퇴폐적인 난잡함이 합리적으로 전제되지 않고서는 그런 제목을 얻을 수는 없는 거다. 그러나 이건 어설픈 난봉의 단꿈을 꾼 것도 아니고, 찐한 사랑을 한 것도 아니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다. 호시절은 아주, 정말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윌은 그래서 동화에 싫증났고 성인극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다시 에로 비디오에 슬슬 관심을 기울일까 말까 고민하는 나날이 시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인형에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당신은 내 기쁨의 보배요 달콤한 사랑이며 행복의 원천이로다! 친구들로부터 습관적으로 질투 받는 여복에 기뻐하는 행운아에 그는 결코 등극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럴 수 없기 때문일까? 그러든가 말든가 알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는데 뭘. 하지만 잊혀지지 않았다. 눈웃음과 선웃음 그리고 창백하지만 애처로운 표정들을 기억했다. 저는 오빠가 너무너무 좋아요 라고 속으로 말하는 듯한! 과자든 꽃이든 뭐든 주변에 보이는 걸 콕 찝어서 저도 뭐를 정말정말 좋아해요, 라고 빗대어 말하는 모습을! 그것도 아주 선명하고 달콤하게. 그러나 기억이 전부다. 그것도 어디냐마는. 윌은 사랑에 빠진 걸까, 사랑에서 빠져나온 걸까? 그가 몰입했던 환상은 환락의 구렁텅이였나 희망의 신천지였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다. 엉거주춤. 어영부영. 얼렁뚱땅. 대충대충. 내 이럴 줄 알았다면 작가가 아니라 차라리 점쟁이를 할 걸 그랬나? 라는 의구심마저 쉬이 잠재울 수는 없었다. 뭐 점쟁이? 점쟁이로써 그런대로 중간만 간다면 홀리고 꼬시고 예언하고 점지하며, 거두고 게다가 맹목적 믿음에, 심지어 몸과 마음과 돈과 신비한 사랑까지? 퍼뜩 떠오른다. 바로 이런 말이. 물오른 젊음과 약오른 교태, 상큼한 맵시를 보아 하니 여한 없이 사랑할 사주군 그래. 바로 그러면서 손끝으로 살짝만 턱을 스치면서 관상을, 손을 덥썩 깜짝 놀란듯한 그녀를 다독거리며 안심시킴과 동시에 손금을? 이런, 젠장!
   윌은 예감했다. 당분간은 이 얼떨떨한 저기압이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6

   윌의 생활에 달리 변화는 없었지만 그가 언제까지라도 즐기듯이 무능함을 치켜세우고 운수 없음을 한탄하는 방랑자는 아니었다. 꽝일지라도 셀 수 없이 당했고 세상살이는 된통 헤매도 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털고 일어났다. 수줍음 많은 넉살꾼처럼 말이다.
   그런 다음 그는 은행에 갔다. 왠고하니 수중에 현금을 넉넉히 쥐고 있으면 그래도 꽤 힘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민한 건 좋은데, 그런데 명민한 당나귀라서? 차라리 토끼 아니면 유니콘이기를 바랬다. 새로운 향락은 몰라도 장난스런 딴마음은 물리칠 수 있다고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는 번호표를 뽑았고 기다렸다. 순서가 됐다. 걸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은행원과 대면한 다음 용건을 말할려고 했다. 그런데,
   「어떤 소설을 써드릴까요? 보아 하니 선생님께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을 것 같지는 않고, 갖은 풍파보다는 그런 제목의 일기를 많이 썼던 애인을 꽤 거느렸을 것으로 사료되는군요. 변덕스런 허영녀의 습관적인 공상이 되살아나다 같은. 변덕스런 허영녀라면 선생 애인의 친구를 가르키는 걸까요? 혹시 삼각관계? 그야 모르죠. 애꿎은 사랑의 균형감은 필시 누군가한테는 못마땅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음, 일단 제가 봤을 땐 주제를 이렇게 잡는 게 괜찮을 듯 하네요. 암탉의 허영엔 수탉의 허세와 허풍의 구애로, 숙녀의 낭만에는 신사의 품격으로, 연애란 어떤 미지의 세계에 존재하는 환상이랄지 혹은 후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전자였드라. 캬~! 어때요? 괜찮나요? 괜찮을 리 있겠어요? 아님 조금은 촌스러운가요? 어럽쇼, 조금이 아니라구요? 그야 어쨌든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먼저 큰 방향을 정하는 게 중요하죠. 그럼요. 인생. 사랑학. 환상론. 마법. 동화. 또는 멜로? 그렇게요.」
   어떤 헛생각이 그를 이곳에 데려다주었을까. 윌이 당도한 은행은 이율과 금리에 따라 화폐 가치의 기준을 거래하고 시장 가치의 표준이 통용되는 은행이 아니라 바로, 어느 작가의 사무실이었다. 그분은 여자였고, 중견 추리소설가였으며, 이름은 마를린 쿠퍼였다. 마를린 쿠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런 작가도 있었나,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아마도 전성기는 살짝 꺾인 듯 보였다.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편집장인 친구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면 금새 이력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윌은 무엇보다 정신을 차리는 게 급선무였다. 무엇에 홀렸는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사랑에 빠지다, 원래 이런 게 정상적인 흐름이지만 지금 윌은 그 어떤 우울한 잠재의식에 이끌려서 은행에 간다는 게 그만 이상한 흥신소 같은 장소에 와버린 것이다. 묘한 우연의 일치로 그곳은 우스꽝스럽게도 추리소설 작가의 사무실이었고.
   「혹시 어디 불편하신가요?」
   윌은 눈썹을 까딱했고 입술도 깨물었으며 울그락불그락 속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웬 깜짝쇼란 말인가. 사랑함과 사랑 받음도, 사랑도 사랑 없음도 일이고 삶이며 인생이다. 무슨 엉뚱한 말이냐구요? 그러니까요! 윌은 그처럼 황당하게도 자기 앞에 있는 여자와 사랑을 그것도 찐한 연애를 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이런 때 생각이 많으면 안된다는 걸 잘 아는 그였다.
   「그녀가 원하는 사랑은 더러운 사랑도, 지독한 사랑도, 파렴치한 사랑도 아닐 것이다. 뻔하디 뻔할지라도 애잔하다면 모를까. 왜냐하면 그녀는 이런 말을 좋아하니까. 미칠듯이 아름다운 너! 전설과도 같은 미모, 현기증을 부르는 아찔한 눈매와 고매한 몸짓. 눈부신 그대는 굳이 단장하지 않아도 꽃보다 아름답소. 영원한 젊음의 여신이여! 그렇지만 그런 그녀는 과거고 이제 제 앞에는 다른 사랑이 있습니다. 눈부신 천사 새로운 요정을 발견했거든요. 그게 누군 줄 아세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윌은 깨달았다. 앞에 앉은 숙녀에게는 작은 사랑이 단지 두어 번 있었을 뿐이고, 거의 다 짝사랑이었으며, 일단 표정은 미스테리했지만 의뭉스러움과는 약간 성격이 달랐던 데다 이미 속으로는 웃고 있다는 것을. 혹시라도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남자는 반하면, 반하면 끝이다 라고.
   「모른 체 하지 마시구요. 운명의 여신이 손짓을 하면 이미 큐피트는 제 소임을 다했고, 사랑의 성사라는 달콤한 향배는 그대의 결정에 달려있답니다. 수줍은 처녀의 연정을 모른 체 하지 않겠다는 사나이의 다정한 포부, 가련한 사랑으로 져버리게 하지 마소서. 마침내 이 몸은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으므로.」
   「혹시, 코메디언이세요? 제 블로그 글을 보고 오신 거 맞나요? 당신의 소설을 써드립니다 라는? 아니면 연극배우던가, 낯이 익숙하지 않은데.」 
   「쉿! 긴 말 하지 마세요. 내일 다시 오겠어요. 답은 내일 듣는 걸로. 그럼 안녕히.」 
   윌은 챙피했고, 자기 마음을 자기가 몰랐으며, 당장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금새 웃기지도 않은 소극이 벌어져서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몰랐으니까. 은행에 간다는 게 누가 자기를 이곳에 데려다준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윌은 다시 이분께 진지한 만남을 애원할 것인가, 실없는 고백을 후회하며 가택 감금에 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7

   번호표 기계 때문이었을까, 말없이 가버린 핍에 대한 그리움이 불러온 상심 때문이었을까. 윌은 언젠가 언뜻 본 가짜 뉴스를 기억하고 있었고, 자신의 냉혹한 이성은 그만 권좌를 장난기 풍만한 개구쟁이 윌에게 넘겨줘버린 것이다. 오두방정 유형이나 악바리 윌에게 주도권을 잠식당하지 않은 건 다행일 테지만, 개구쟁이 윌이 인기척도 없이 쌩하니 나타나 걷잡을 수 없는 촌극을 펼치다니! 하마터면 오래오래 순정을 지켜온 어느 여작가한테 심각한 결례를 범할 뻔 했다. 까닭인즉, 핍과 같은 열성 팬클럽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자만심과 떠나간 사랑에 대한 아픔과 시련이 만들어낸 착각과 허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게 무엇이었든. 슬픈 연금술사 미다스의 운명을 탓할 필요도 없고, 뜻하지 않게 발설한 사랑가 때문에 창피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분께 찾아가서 솔직히 말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니까. 만나서 실언이었다는 느낌을 전달할 듯 하다가 상대가 실망한 것 같으면 사랑을 밀어붙이고, 일단 웃는다 그러면 토크쇼 분위기로, 내내 진지하다 싶으면 용건을 말하고 선물을 전하고 나오면 그만이다.
   윌은 가벼운 마음으로 작가 마를린 쿠퍼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런데 그 입구에 당도한 순간 속으로 부담스러웠던 심정이 색다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평범한 대화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일까. 수다스러움과 은근한 기대와 은은한 예감은 부끄럽다는 것처럼 고개를 다소곳히 숙였다. 소란함은 시시하다는 듯이. 흥미진진한 어린 친구와 놀아주는 건 피곤하다는 것처럼. 언제는!
   윌은 작가 마를린 쿠퍼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오, 맙소사!
   그곳은 은행이었다. 평범한 은행. 불길한 예고의 부적중인가 응큼한 짐작의 얄궂은 불운일까. 사연을 알아본 결과 그곳은 옛날부터 은행이었다고 한다. 비밀 통로나 요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건물주도 만나 봤고, 주변인과 상담도 마쳤다. 듣자 하니 마를린 쿠퍼? 그런 사람은 이름도, 명성도, 소식도, 임차인도 금시초문이란다.
   윌은 그 순간 치명적인 매력과 의혹스러운 감탄이 동반함을 직감했다. 아주 여리게 음산한 공포감과 기기묘묘한 효과음도 들렸다. 마를린 쿠퍼! 그녀는 이미 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촌스러움, 호들갑, 산만함, 횡설수설, 수다스럽고 정신 없음에서 한 발짝 나아가 어느새 중년에 그것도 고상한 내면과 세련되 외모가 조화로도 부족해 어느 그래프의 정점에 이르렀으니, 그러므로 그 다음 경지에 심지어 안정적인 경제력까지 튼튼할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어떻게 펼쳐질 쾌락의 암시를 떠올린다? 아니다. 윌은 현실과 마법이 일치하는 그 완숙한 비법을 알고 싶었을 따름이다. 이미 마를린은 가슴 속의 꿈과 정신의 이상을 사로잡았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미완성이 웬말인가. 비로소 장화 신은 고양이란 제목의 동화를 다시 읽을 기회가 찾아왔다. 윌은 어렸을 때 집에 있던 어느 소설 책 제목이 생각났다.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 라는. 혹시라도 악령을 만난다 할지라도 아직 이별의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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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칠듯한 사랑의 예감,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유롭게 환상을 노래하는 동경심, 치명적인 매력에 고개 숙여 아름다움에 현혹됨을 인정하는 기대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떨림과 설렘을 양쪽에 꿰찬 환희. 사랑스러운 얼굴에 품위 있는 언사, 지적인 사고, 다재다능함에 대한 고품격까지 부족한 건 하나도 없었다. 바로 이와 같은 기분을 어떻게 자아내게 할 수 있을까. 남자를 안달나게 하는 재주, 그거야 너도 알고 나도 알며 특별한 기술도 특급 처방도 아니다. 신기할 것 하나 없는 그런 일상적인 연애사가 아니라 어쩜 알 듯 말 듯 스쳐지나가게 만드는 놀라운 인연의 뭔지 모를 궁금함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윌은 알고 싶어졌다. 윌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생활에서 드디여 번개처럼 느닷없고 첫눈처럼 의미심장하며 일몰처럼 아름다운 승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윌은 탐정이 되어갔다? 이미 됐다. 수사는 시작됐고, 탐구욕은 불타올랐으며, 벌써부터 마를린 쿠퍼를 5월의 신부로 상정했다. 나중 상황되면 달라질지라도 밀림의 사자는 그래야 한다. 호랑이가 아주 드물게 개처럼 풀을 뜯어먹더라도 우선은 그래야 한다. 잡은 물고기에게 밥을 주냐 마냐, 그건 그때 가서 따지고 승부사라면 현재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지금은 해결사니 도박사니 마주니 개의치 말고, 모든 상상력과 호기심을 마를린 쿠퍼에게 쏟아야만 했다.
   윌은 우선 집에서 차분히 검색부터 시작했다. 검색 사이트를 켠 후 이름을 입력했다.
   마를린 쿠퍼. 엔터.
   그런데 검색 결과는, 결과 없음? 어떤 검색어라도 일반적인 검색어라면 검색 결과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결과 없음? 어쭈, 이것 봐라! 지적인 자극이 시작됐으나, 윌은 점점 초조해졌다. 왜냐하면 예사롭지 않은 영리함은 턱없이 부족한 데다 자신은 <한다면 한다>유형보다는 그런 부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할까 말까, 탐스런 사과를 거의 딸 뻔 어머 어머 아직 무르익지 않았네 그러면서 흔들고 기다리며 베팅하고, 제비꽃과 튤립과 카네이션을 분석하고 연구하며 장단점을 운운함으로써 이미 지고의 사색과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눈부신 나체로 대리석 조각상을 만들 것인가, 말 것인가> 윌은 그처럼 조심스럽게 심사숙고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뭐, 결과 없음? 시작은 그랬다. 새로운 관심에 안달나고 몰입의 꽃핌에 목마르다, 진공청소기로 나중 열심히 청소해야 할 반짝이가 나부끼는 것만 같은 신바람이 그를 쥐락펴락했다. 바닷물처럼 밀려갔다 밀려왔고, 커피포트처럼 들려졌다 놓여졌다. 막 그랬다. 그런데 벌써 지쳤을까? 언제는 끈질긴 욕망과 해묵은 쾌락이 아닌, 귀가 만족하고 눈이 즐겁고 마음이 행복한, 신기한 환희와 찬란한 공감각으로 넘실대는 화려한 별천지의 그 새로움을 바란다며? 어? 이거다. 이거라고. 허당의 특징은! 첫 끗발이 개 끗발이다. 여자가 뭔가를 마음에 쏙 들어할 때 남자는 가만히 쓴웃음을 짓는다. 일부 꿈 많은 소녀와 자긴 소망이 좋지만 자꾸 야망을 가지라고 하니까 엉뚱한 욕심에 달아오른 소년은 부드러운 사랑과 수줍은 선망, 꿈 같은 동경심을 간직하다 어른이 되어 마침내 장비병에 걸린다. 그렇지만 그런 원인과 결과, 바람을 넣고 꿈이 변하는 그런 앞뒤와 맥락 없이 윌은 어려운 경기가 될 것 같으니까 미리 겁을 먹었다. 결과 없음? 예사로운 상대가 아니군! 핍일까, 피앙새일까, 아님 그 은행에 그냥 취직하라는 운명의 신호탄일까? 괜히 의욕은 좋았는데 벌써부터 마를린 쿠퍼를 밝혀내는 일은 난항의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염치없이 주제도 모르고 열 좋게 날뛰더니 응? 그러니까 글쎄 깐족은 체념으로, 자신감도 잠꼬대로, 토끼의 감미로운 꿈과 잉꼬의 사르르 녹아드는 동겸심마저 비탄으로 결론났다.
   하다 하다 윌은 무언가 억울한 마음에 괜히 전에 비싸게 구입한 번호표 기계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잘 분해될 리가 있겠나. 급기야 그는 번호표 기계를 박살냈고, 그 안에서 블랙박스를 찾아냈다. 올커니~! 해냈다. 이거야, 이거라고~! 으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그는 타인의 마음을 빼앗는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남자는 아니었으나, 사실 어떤 은밀한 기술을 간직했고 결과는 탁월했으며 여심은 늘 그의 편이었다. 기계에 대한 탁월한 감은 없었지만 극적일 때 이렇듯 절묘한 묘수를, 맙소사, 손에 넣는 운은 타고났다. 진짜 그랬는지는 알길이 없으나 지금 현재 점수로만 봐서는 봐줄 만 했다. 분위기 괜찮았다. 그는 상상했다. 한 떨기 장미꽃 탐스런 복숭아 향긋한 홍조 뽀얀 살결 매혹적인 눈망울. 그것에 덤으로 마를린 쿠퍼의 정체까지! 설마 설마 하다가 걸려든 게 아니라 치밀한 작전에 의해 헤어나오지 못하고 철저히 낚였는데 반전이 시작된 것이다. 반격은 이제 그의 차례였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름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여자, 신비, 환상, 비밀, 인생, 사랑, 낭만, 황금, 다이아몬드, 햄버거? 그 가운데 바로, 마를린 쿠퍼가 있었다. 이제 마를린 쿠퍼는 다 잡은 물고기였다. 보내도 보내도 끊이질 않는 호박 넝쿨, 새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이제 거의 구부 능선을 넘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윌은 그 블랙박스를 전문 업체에 의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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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이 번호표 기계를 부순 다음 찾아낸 블랙박스. 그것을 극비리에 분석 의뢰.
   결과가 나왔다. 어떻게 됐을까? 마를린 쿠퍼의 정체를 속시원히 밝혀줄 파일이 모두 복구되었을까? 정말로? 천사의 나팔이 울려퍼지자 쾌활했던 기분은 숙연한 분위기로 바뀌어 입 딱 벌린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 진짜로?
   그럴 리가 있나. 결과는 꽝이었다. 꽝! 한번 더, 꽝! 다시 한번 더, 꽝! 꼴도 보기 싫은 꽝. 어쩌면 반갑고, 때로는 미웁고, 대체로 다정하며, 기분 좋고 마음 편한 그런 꽝. 왜냐면 부담이 없으니까. 만약 꽝이 아니라 감당 못할 어마어마한 비밀결사대의 관리 서류를 알게 된다? 그 다음부터는 인생 피곤해진다. 안 봐도 뻔하다. 알고 보면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체념 전이라면 속속들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귀염둥이 희극배우? 윌은 신분도 재주도 인생도 우연마저 다 그만그만했다.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그만그만하다. 그만그만하다? 이런, 젠장! 언제는 깡총강총 뛸 듯이 기뻐하는 게 아니라 정말 정말 너무 좋아서 방방 뛰더니, 꼴 좋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누구라도 예상할 만한 결과였을 뿐이다.
   윌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천진한 몽상가로 돌아왔다. 포기가 빠르다는 점,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그는 현실을 초월할 수 없었다. 낭만조차 추월하기 어려웠다. 말도 어눌했고 말귀도 어두었다. 윌은 스피노자도 쇼펜하우어도 샤갈도 아니었다.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 라고. 그런데 아내가 있으면 자유를 박탈당할 테고, 강직한 권태와 내내 싸워야 할 것이며, 사과와 복숭아와 포도 같은 싱그럽고 탐스런 과일을 마구 마구 따먹지도 못할 테고, 아이는 아빠를 그대로 따라하니 모범을 보이며 철이 들어야 할 테니까, 그러므로 기다림의 기쁨을 만끽하며 현재를 즐기자는 게 현명한 결론이었다.
   그렇게 윌은 마를린 쿠퍼는 잊고 일상을 돌보기로 했다. 달콤한 케익을 먹으며 소파에서 추억의 만화영화 보기. 또는 스포츠나 다큐멘터리도 괜찮고. 그리고 마음껏 상상하기! 빨강머리 애인과, 가발도 나쁘지... 아니 가발이 더 좋겠다, 페퍼민트 빛깔 칵테일을 정말 심혈을 기울여서 애쓰고 애써 만든 다음 곧바로 엎지르고, 동네의 모든 개와 고양이들을 초대해서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니, TV 오디오 진공청소기를 한꺼번에 다 켜놓고, 조명도 모두 켜고 케첩을 뿌리고, 겨자소스를 큰 바구니에 한가득 부어서 머리에 붓고, 폭죽을 터트리며 가짜 마법 수정구를 깨트리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넥타르를 마시기. 단, 오직 상상으로만! 동경 기대 청춘 선망 희망 예감 추측 꿈 같은 미래를 고대하고, 추억 회상 수집 옛사랑 상식 지식 젊음 환락 경험 모험 축제 같은 어제를 기념하며, 바로 오늘을 살기로 했다. 비록 천재적인 인생이 아니고, 고흐의 구두를 신지도, 장밋빛 단꿈은 멀리 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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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은, 천사의 속눈썹을 본 것 같은 환영에 빠지도록 자길 초대한 핍과 마를린 쿠퍼를 누가 만일 만난다면 어떻게 해 주세요 라는 부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가 대신 소식을 전하고 어쩌고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대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자연의 해가 뜨면 해가 지고, 사랑의 밀물 뒤에는 썰물이 있듯이 애정이 뜨거워진 다음에는 식기 마련이다. 떠들썩한 사랑에 비해 너무나도 조용한 이별이 겁나서 도저히 헤어질 수 없는 숙명이 드물게 있겠지만 윌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과 핍과 그녀, 어딘가에서 필명으로 록스타로 명활약을 펼칠지는 몰라도, 마를린 쿠퍼는 자신의 운명이 아닐 거라고. 바로, 보고 싶은 마음이 한풀 꺾였으며 기존 삶의 리듬을 되찾은 것이다.
   그런 한편, 윌은 낮잠을 자다 꿈을 꾸었다. 꿈에서 도플갱어를 만난 것이다. 자신과 거의 닮은 사람을 이 세상에서 잘 찾으면 아마 막대 그래프로 표시할 수 있을 정도로 닮은 사람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그런 경험을 할 기회는 거의 드물다. 그러므로 꿈에서라도 그럴 수 있다는 건 불온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건 어쩜 윌이 무의식적으로 핍과 마를린 쿠퍼를 만나고 싶어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윌은 꿈에서 도플갱어를 만났다. 그런데 그 도플갱어는 여자였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남몰래 사겼다. 비록 그분이 남자였을지라도 서로 난감했을 테지만, 또 아마도 스쳐지나갔을 테지만 그것은 꿈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열애를 시작했고 뜨겁게 사랑했던 것이다. 이제야 찐한 사랑을 하는구나, 꿈은 그를 만족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환상적인 호시절은 길지 않았다. 이제 정말 꿈이 흥미진진해질려던 찰나에 낮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 낮에 꾼 행복한 단꿈은 짧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윌은 복권을 사러 나가지 않고 긴, 특별히 길다란 낚시대를 인터넷 쇼핑으로 검색해봤다. 그리고 마를린 쿠퍼는 검색할까 말까 하다가 지나쳤고, TV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친구를 만나서 클럽과 단란한 행복의 거리를 거닐면서도 유난히 많은 아가씨들이 핍과 마를린을 닮아보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물론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다. 원래 친구의 사랑은 유행가 가사요 내 사랑은 문학적인 듯 하니까. 그렇지 않나? 웬걸, 그렇지 않다. 기분이 좋을 때는 그렇고 분위기 쎄할 때는 그렇지 않으니까. 거 왜 물음의 까닭이 영 엉성하기 짝이 없군 그래. 최신 유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윌을, 게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이별과 상심과 차가운 회상에 마음이 아련한 윌을 놓고 말이다. 안 그런가? 안 그렇긴 뭐가 안 그래. 딱 그렇구먼.
   그러던 어느 날 윌은 핍과 마를린 쿠퍼를 동시에 만나게 됐다. 그러나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핍인가, 그분이 마를린 쿠퍼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치듯 동시에 왜 떠났냐고 차분히 물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만남의 장이 발생했던 영문은 이러했다. 윌의 친구인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편집장의 주최로 열린 수영장 파티에서 그녀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녀들 쪽에서도 윌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닌 듯 했다. 윌의 기분 탓일 수도 있고. 우연처럼 놀라움과 신기함은 계속되고 염치없이 계속 놀랍고 신기해 했다, 같은 일은 자주 일어날 수 없으니까 아마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파티는 평범했다. 그녀를 닮은 누군가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찌르르 전율감을 느끼거나 아찔한 혼돈에 빠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윌은 서둘러 파티장을 나가버렸다. 미지의 신비함 같은 건 원치 않는다는 듯이.
   자, 이제 정말 윌이 누구도 몰래 혼자서 울적하거나 기분이 이상할 때 찾는 어딘가, 만나는 누군가가 나와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제2의 아지트도 숨겨둔 연정도 새로운 취미도 없었다. 그러니까 실정은즉슨, 윌의 허무맹랑함은 되살아나지 않음. 일단 저리르고 본다 같은 행동 본위성도, 머머할 땐 머머하라 처럼 인문교양적 습성도 물론. 곧 그는 건성건성 잘 떠오르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살금살금 동물의 걸음걸이를 흉내냈으며, 한껏 꾸민 채 하이힐을 신고서 거리를 웃으면서 활보하는 숙녀들을 힐끗힐끗 훔쳐보는 게 전부였다. 먹고 마시고 놀고 춤추고 노래하기, 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것 같았으니까. 쇼핑도 소용없었고 열려라 참깨 같은 주문을 활용하는 브랜드 슬로건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하긴 윌은 노상 이런 시기가 틈틈히 늘 있었다. 시간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올 뿐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잊혀졌던 핍과 마를린을 떠올리게 하는 닮은 얼굴을 보게 되니까 윌은 생각했다. 내가 혹시 모르는 사연이 있었던 건 아닐까 라고. 곧 핍과 마를린 쿠퍼는 자매? 에잇 아닐 꺼야, 그럴 리는 없어 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친구에게 상담을 의뢰한다면 이럴 것이다. 원 별 소릴 다 하는군. 살다 보니 별 얘길 다 듣는군 그래. 따라서 이런 얘기는 분위기 좋은 술집에서 적당히 값 나가는 독주를 시켜놓고서 고고한 취향을 숨기는 바텐더와 독대하는 자리에서 꺼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많이 했다. 이미 많이 했다. 그래서 그런 뻔한 행보는 자중했다. 차리리 집 한쪽에다 바를 조촐하게 차리고, 핸드폰 인공지능 서비스와 대화를 나누는 게 더 재미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촌스럽게 그런 말 하는 사람, 분명 있을 것이다. 술은, 사랑은 인공지능에게 배웠어요 같은.
   그래서,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됐을까? 그는 꿈나라로 떠났다. 아무 생각없이. 이럴 땐 자는 게 상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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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은 다시 심심해졌다. 그는 아직 핍과 마를린을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다. 아마도 잊지 못할 것이다. 다만 시간의 춤에 따라 밀려날 뿐. 하지만 기억나도 상관없다. 나아가 인상적으로 기억할 것이다. 중요한 건 오늘이니까. 좋은 시기와 반가운 시간이 있었으니까.
   그는 동물원에서 늑대를 구출할까도 생각해봤다. 그래 봤자, 어떤 극적인 절정을 향한 긴장감이 가파르게 상승할 테지만 핍을 만날 수도 없고, 쿠퍼와 재회한 다음 새로운 모험에 빠질 가능성은 전무할 것이다.
   그러다 그는 평소처럼 집과 사무실을 오가는 생활이 계속되던 중 공원에서 어떤 여자 아이가 자기를 향해서 뛰어오더니 앵무새처럼 지저귀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 소녀는 과연 뭐라고 했을까. 아마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예쁘장한 꼬마 숙녀께서 장난이 심했나 보다. 왜냐하면 이처럼 태연한 듯 보이지만 속으로 윌을 뜨끔하게 만들었으니까. 뭐라고? 바로, 이렇게!
   「아빠!」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지구는 꼬박꼬박 태양의 주위를 돌아야 하니까. 그러나 개인적 시간은 느려질 수 있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아빠? 아빠라니! 설마, 진짜? 아닌데. 그럴 리는 없는데. 잠깐만. 얘가 몇 살쯤일까? 대충 얼마라 치고 음, 지금으로부터 얼마 전에 난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지? 윌은 생각이 많아졌다. 다른 정보가 필요했다. 표정이 이상해졌다. 꼬맹이 요조숙녀의 말을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의 내면 깊은 의중에서 지지하는 다음은 무엇일까, 웬만하면? 정 원한다면? 똑부러지게 머머하지 마? 알 수 없었다. 어른한테 장난치면 못써, 그러면서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 하나? 그러다 우락부락한 그녀의 진짜 아빠가 카리스마 넘치는 가죽잠바를 입고서 성큼성큼 걸어오면 어쩌지? 윌은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나의 공을 타인의 열정으로 돌리는 게 멋져 보이니까 자기도 그래야겠다고. 딱히 실천한 기억은 없다. 언제나 탄복 일변으로 항상 칭찬이 자자하며 감탄은 끊일 새가 없었던 건 다 드라마 주인공의 임무였으니까. 그러니까 왜 생각이 많아지게 살았느냐, 라고 꾸중을 들어도 뭐라 할 말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말문이 막힐 수 밖에. 하지만 그는 우선 색다른 탐험과 신기한 구경, 놀라운 체험 즉 바깥에서 펼쳐지는 신선한 놀이가 아닌 집안에서 발견했던 뭔가 이해가 어려운 일을 하나 떠올렸다. 그건 무엇이냐면 화장실 벽면에 노크했을 때 소리가 과거 언젠가부터 바꼈다는 점이다. 약간 무겁게 똑똑똑 소리에서 어쩌면 일부터 빈틈을 노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만큼, 그 정도로 가벼운 똑똑똑 소리로 바꼈다는 점 말이다. 그렇지만 의문이 발전하고 예측이 추리를 거쳐 심증을 추가해서 하나의 논리적 가설로 도약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 개구쟁이 꼬마 아가씨의 엄마가 나타나서 아저씨한테 그럼 못쓴다면서 죄송하단 말을 남기고서 훌쩍 떠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떠나간 후 윌은 잠깐 아찔했다. 왜냐하면 실제 꼬마가 발성했던 말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윌은 핍의 뒷모습을 닮은 어느 여인을 보게 됐다. 생각하고자시고 할 것 없이 그는 즉시 뒤쫓아갔다. 놓쳤을 리 없다. 놓치면 그건 허구고 이건 실화니까. 윌은 드라마처럼 그녀를 확 놀래키지 않은 채 가만히 앞서 걸으며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녀는 핍이 아니었다. 저런!
   윌은 그분께 살짝 실례가 많았다는 듯 의례적인 목례를 남긴 채 헤어졌고, 공원 한쪽에서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 구경하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그곳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마술사가 요술을 보여줄까 말까, 뜸을 들이며 좌중을 안달복달 달구고 조바심으로 요동치게 만들고 있었다. 웅성웅성 흥분의 도가니는 마침내 어떤 행동을 선보이게 만들었다. 바로, 마술사의 요술 방망이 얍~ 짜잔이라는 결연한 행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없었다.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야유 일색이었다. 그게 뭐냐, 장난하냐, 그런 요술이라면 나도 하겠다 등등. 그러나 딱 한 사람, 바로 윌은 그 마술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자기가 신고 있던 구두가 갑자기 새빨간 하이힐로 바껴버렸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윌은 어리둥절하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무척 난감해 했다. 진기한 마술의 효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윌이 유일했으니 사람들은 하나둘 흩어졌고, 결국 마법사와 윌만 남게 되었다. 윌은 내 구두를 돌려달라, 이 믿지 못할 요술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라며 따지지 않고 차분히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잠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거리의 관중들은 몰라도 저는 요술의 신기함을 목격했고 지금도 너무 놀라워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렵습니다. 물론 차마 그 요술의 비밀이 무엇인지 여쭤볼 수도 없을 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그대 진정 현대에 존재하는 마법사로써 큐피트의 직계 몇 대 네? 네. 음 그런 고도의 기술을, 현란한 요술 명맥을 이어받으신 요술쟁이라면, 부디 동화책에서 막 뛰쳐나온 게 아닐까 궁금한 유령 같은 귀인이라면, 부디 가난한 구경꾼의 소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윌은 그처럼 마술사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그분은 윌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지만 보는 눈과 듣는 귀는 많지 않을지언정 바람이 전하는 풍문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으니 길거리가 아닌 마술사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그렇게 그들은 그리 멀지 않은 마술사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은 바로 마를린 쿠퍼의 사무실이 있었던 은행의 바로 옆 사무실이었다. 어딘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윌은 그 사연을 차마 마술사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 한편 윌은 소파 앞에 있는 탁자에서 책 한 권을 보았다. 마를린 쿠퍼가 쓴 추리소설이었다. 어느 유서 깊은 헌책방에서 구했는지 그 책은 마술사보다는 어리고 윌보다는 연배가 높아보였다. 그러므로 윌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넌지시 관심을 보이며 호기심을 표출하자 마술사는 마를린 쿠퍼가 자기의 전처라고 말했다. 뭐 전처?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게로군. 아니면 사랑이 아직 끝나지 않았거나. 십중팔구 마를린 쿠퍼는 도망가고 마법사는 전처의 주변을 맴도는 모습인 듯 보였다. 괜히 어설픈 이방인의 책동도 아니고 이상한 삼각관계로 오해받으면 안될 것만 같아서 윌은 그만 깜빡 약속을 잊고 있었다면서 마술사와 작별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그는 낙담했고, 구두는 잃어버렸으며, 집에까지 맨발로 걸어갔다. 내 구두를 혹시 보시지 않았나요, 라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가 극명하게 청아한 하이힐은 고급 제품으로 보였지만 아마도 그걸 신으면 한층 더 기괴한 요술에 걸릴 것만 같아서 그건 그냥 마술사 사무실의 소파 옆에 대충 놓고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윌은 너무 피곤해서 씻지도 않은 채 바로 골아떨어졌다. 그리고 단꿈인지 악몽인지 불분명한 그런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건 자신의 두 발이 빨간 하이힐로 변하는 꿈이었다.


   12

   다음 날 일어나서 윌은 웬 초대장이 도착해 있는 걸 발견했다. 초대장을 열어보니 그건 청첩장이었다. 핍의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 뭐, 청첩장? 갈까 말까? 핍은 정녕 결혼행진곡이 울려퍼지는 식장에서 윌로부터 축복받기를 원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예의상 보낸 형식적 인사일까. 각자 인생을 살다가 아마도 언젠가 한 번쯤 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만나기 힘들 테니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는 그런 안부 인사 같은 의미를 지녔을까. 이런 애매한 초대장이라면 차라리 멋진 휴양지에서 애인에게 보낸 엽서를, 번지수가 잘못 배달된 낭만적인 엽서를 받아보는 게 백 번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핍과의 즐거웠던 시절 짧은 추억을 떠올리면서 이렇게라도 그녀의 소식을 알게 된 게 어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서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윌은 그곳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초대장도 진작 곱게 버렸다. 그러나 이미 다 외워뒀다. 그래서 윌은 그날 기분이 이상했고 서둘러서 옷을 챙겨입고 행사장으로 떠났다.
   결혼식장에 도착한 윌은 먼발치서 지켜봤다. 그런데 신랑이...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에 등골이 서늘했다. 그러니까 글쎄 신랑은 윌이 꿈에서 사겼던 도플갱어였다. 하지만 신부 친구들의 수다를 엿듣고서 알게 됨. 신랑이 사고 후유증 같은 피치못할 사정으로 성형 수술을 했다고 함. 운명론, 관상학, 인생관, 신비주의, 오락업, 환상머신 이론등 뭘로 따져도 불가해한 일은 아니었다. 윌도 왕년에 런닝머신을 팔아봤기 때문에 대충 돌아가는 줄거리는 알아챘다. 이로써 윌은 그들의 행복한 미래를 기도 드렸고, 급작스럽게 그의 관심은 신부 들러리에게 향했다.
   윌은 이제 핍과 마를린 쿠퍼는 잊기로 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마음놓고 지인들에게 소개팅 자리를 주선하고, 혹시라도 그분들께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되신다면 화급히 결례가 발생할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생각에 벌써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쇼핑도 하고 여행도 떠나고 각종 새로움을 탐닉하기 위해 열정을 불태우기로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윌은 깜짝 놀라 까무러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사무실에 걸려있던 반 다이크의 마돈나 그림에서 주인공 얼굴을 볼 때마다 매번 달라보였기 때문이다. 자꾸 그런 증상이 심해졌고 반복되어 심기가 매우 불편해질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림을 당분간 거꾸로 돌려놓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돌리려던 찰나, 청명한 효과음을 듣게 됐다. 퐁~! 그림 뒤에 무엇이 있었길래? 그곳에는 비밀 금고가 설치되어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 대신 선명한 키스 마크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하~! 그렇지만 잠깐 기분이 좋았지만 다음 날이 되니까 돌연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왜냐하면 비밀 금고가 설치되어 있어도 썩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그의 허영심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뭐 어쨌든 누군가 자기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는 조마조마한 긴장감 때문에 그는 오랫만에 조마조마 클럽에 갈까, 호박 카바레에 갈까 기분 나쁘지 않은 기쁜 고민을 시작했다. 지금 당장은 찬란한 환영식도, 산뜻한 소풍도, 정다운 누군가와 함께할 쾌락이 듬뿍 허용되는 생일 잔치도, 머리 싸매고 골똘히 매달려야 할 탐구 과제도 없었으니까. 따라서 윌은 현재 자신의 삶을 되짚어 보고자 했다. 선의 실천, 부의 실현, 행복한 인생. 그가 진정 추구하고자 했던 미지의 이상은 변하지 않았는지, 애초에 쫓던 토끼는 하나였는지, 자기가 쫓겼던 여우는 내내 자기를 사랑해 주었는지를. 그런 한편 자신이 앵무새나 딱따구리로 변신하지는 않았는지를. 젊음의 여신을 추종한다지만 어쩌다 어른이 됐는데 철들어야 한다, 철들면 안된다, 동심과 상상력까지 구출해야 한다는등 정체성의 혼돈에 안정된 질서를 부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지를. 바로 아침에는 피노키오, 낮에는 돈키호테요, 저녁에는 양치기 소년으로 사는 삶이 정말 즐거운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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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106

from 소설 2017. 10. 15. 22:08

   1

   송별식.
   시작은 송별식이었다. 그날의 주인공은 나였다. 우리는 어느 문학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고, 그것을 계기로 친해졌다. 당시 나는 출퇴근하는 사무실 즉 일하는 외부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의 살롱에 가서 일도 하고 놀기도 하고, 그럴 목적으로 그 친구들의 아지트인 예술관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예술관에 100일을 다녔지만 새로운 작품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색다른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예술관 친구들한테 작별을 고했다. 그런데 우리는 짧다면 짧은, 사랑하기엔 아쉽고 행복하기엔 부족한 백 일 동안 정이 들었던 것일까? 친구들은 날 고이 보내줄 수 없다고 했고, 나는 말끝을 흐렸으며,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송별회 당일이 되었다.
   우선 친구들의 이름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바비, 아론, 마이클, 소피아, 앨리, 비치, 그렇게 여섯. 나까지 일곱. 그 중에는 뭔가 슬픈 눈빛이 매력적인 친구도 있었고, 시도 때도 없이 들뜬 친구도 있었으며, 무인도에 데려가고 싶은 딱 한 명에 꼭 맞는 위인도 계셨다. 그러나저러나 우리가 먼 미래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든 시기를 놓쳐버린 고백을 하든, 지금은 각자 일에 열중할 시기였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는 송별식으로 오늘을 기념하고 내일의 희망을 얘기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물론 그날은 기쁨과 동시에 정결함의 기조를 이뤘고, 깜짝 발표랄지 일기장 수여식 같은 행사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편안하고 예스럽고 상식적이며 고상한 분위기를 추구했다. 누군가 나서서 자기 과거 비밀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도 않았고, 발랄한 노래도 귀여운 춤도 깜직한 애교도 선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를 제외한 그 친구들 모두가 사라졌을 뿐.
   그렇다. 즐거리를 친구에게 얘기해 주듯 말하자면 그건 전개부터 시작하는 영화였다. 또는 이미 시작된 영화의 앞부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헐레벌떡 극장에 당도한 청춘이거나.
   우리는 송별회에서 건전한 지성인이자 신비한 예술가답게 그런 놀이를 즐겼다. 마치 범생이가 어린애일 때 즐겨하던 놀이를 약간만 변형해서 그대로 재현하면서 정말 재밌다는 듯이 놀았다. 술래는 1명 나머지는 술래 뒤에서 술래를 향하여 전진. 그런데 술래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는 동안만 전진할 수 있고, 술래가 말을 마친 후 돌아봤을 때 모두 정지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이때 움직인 사람은 술래가 되든 옷을 벗든 벌칙을 받아야 함.
   그런데 술래는 나였고, 내가 돌아봤을 때 친구들은 사라졌다. 그것도 모두 함께. 즉 나만 빼고 모두 감쪽 같이 사라진 것이다. 아, 친구들의 묘연한 실종과 딱히 긴밀한 관계는 없을 테지만 혹시 모르니 그 주문을 소개하자면 이와 같다.
   밝은 미래를 간구하고 젊은 내일을 희망한다.
   뭐라고? 그러게 말이다. 툭하면 첫눈에 반하고 걸핏하면 포근한 향기에 취하는 TV 연속극의 촌스런 주인공 대사도 아니고 그게 뭐야. 이를 근거로 추론된 간접사실은 우린 모두 허당이고, 친구들의 사라짐은 불가사의라는 것.
   그래도 그렇지 마술도 아니고 과학도 아닌데, 녀석들이 어떻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꽤 당황스러웠던 데 비해서 난 쉽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차피 이별할 운명이었고, 나는 판타지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일은 더 이상 장난이 아니었지만 장난스러웠고, 온전한 놀이의 경지에 이른 송별회 깜짝쇼쯤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 송별회는 비정상적으로 막을 내렸고, 나는 그 친구들과 함께 했던 예술관 아지트 시절을 추억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2

   그 뒤로 하루나 이틀 간격으로 내게 연락이 왔다. 나는 그곳으로 더 이상 출퇴근하지 않고 집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바비가 혹시 연락이 되냐, 아론의 소식을 아느냐, 마이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아시나요 등등. 전화와 메일도 받았고 심지어 어떤 탐정은 우리 집까지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건 아마 비치 집안이 쟁쟁했으니 비치를 찾는 탐정일 것이다. 나는 내가 아는 사실을 그대로 얘기했고, 완곡어법으로 포장된 끈질긴 추궁을 받기도 했다. 혹시 마음이 바뀌면 아는 대로 얘기해 주라며. 나는 할 말을 잇지 못했고, 이때부터 슬슬 돌아가는 정황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연기처럼 사라진 친구들을 내가 일부러 고립시킨 건 아니지만 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아는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뭐 하나 짚이는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0에서 그 모든 것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아직 흥분이 극에 달하지는 않았고 나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허나 늘 순결한 상상도 재미없었기 때문일까, 허황된 꿈을 청산할 좋은 호재라는 느낌이 왔다. 잘만 하면 사건 해결 그리고 창작 소재 획득. 두 마리 토끼는 나의 키스 마크를 애달프게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나 다름없었다.
   우선 나는 예술관 멤버 중 나와 가장 각별한 우정을 쌓았던 앨리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나는 앨리의 단짝을 만나서 앨리에 대해서 듣게 됐다.
   「앨리요? 항상 생각이 딴 데 가 있는 친구죠. 한 번 부르면 싫어하고 한 세 번 정도는 불러줘야 느릿느릿 조용조용 대꾸하죠. 그래도 맹한 것 치고는 꽤 똑똑하구요. 애도 착해요.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과 사랑도 아름답기를 바라고. 특히 메모와 낙서광이에요. 또 만나는 남자마다 다 그 남자가 첫사랑이래요. 어쩐지 연애에는 영 재주가 없어보여요. 전적도 별로구요. 게다가 툭하면 그런다니까요. 나 또 차였어 라고. 더구나 한번 마음을 주면 오래간답니다. 최근에 무슨 난 아직 늙지 않았어 라고 항변하는 듯한 표정의 어느 가난한 무명 소설가를 짝사랑하나 보더라구요. 가시내, 미쳤어 정말!
   그리고 앨리는 어려서부터 꼬박꼬박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정들만 하면 헤어졌어요. 그래서 지금 앨리 친구는 저 말고는 없어요. 설마 앨리가 저를 우정의 2인자로 떠밀었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아는 선에서는 그럴 꺼에요. 아니 그런데 앨리는 어디 갔어요? 그리고 아저씨는 누구시구요? 혹시 앨리의 그 말썽쟁이 삼촌? 한세상 내내 놀기만 한다는 바로 그... 아닌데. 앨리가 형언했던 수다랑 닮지 않았어. 어떤 환상가의 얄미운 솜씨일지는 몰라도 앨리는 아마 잠깐 기분 전환할 겸 여행을 떠났을 꺼에요. 하염없는 공상 성난 허풍, 그런 건 이제 질렸을 테니까요.」 
   「저는요 공주님,」 
   「공주님? 어디서 수작이에요? 지금이 그럴 때에요? 어머, 어딜 넘봐? 어이없어. 흥! 호호호, 농담이구요, 다음에 앨리 통해서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하시면 그때 봐서 생각해 보겠어요. 지금은 참으시구요. 즉흥적인 거 좋아하는 여자애들도 있지만요 준비를 좋아하는 숙녀도 있으니까요. 아시겠어요? 그런데 아저씨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앨리랑 무슨 사이구요? 어설프게 거짓말하시거나 숨길 생각일랑 하지 마세요.」 
   「나? 나는, 내가 하는 일은 연극도 있고, 난 환상 문학 잡지에 소설을 연재하는 작가야. 앨리와는 작업실을 같이 쓰는 동료일 뿐이고. 내가 앨리를 귀찮게 하거나 뭐 어떻게 한번 해 본다거나 내내 시달리게 만든다, 그런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시게. 모르긴 해도 내 평판 그렇게 썩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나중에 앨리한테 들어보면 알 꺼야.」 
   「어머, 그러니까 소설가? 어련하시겠어요. 아저씨. 우리 친하게 지내요. 호호호호호 하하하하하 히히히히히. 그런데 아저씨 나중에 유명해지면요. 설마 벌써 탐욕스러운 호기심 순진한 감수성 극성의 마성으로 저명하신 건 아니겠죠? 그럼 됐어요. 아저씨는 어깨뽕 들어간 블라우스도 입지 않으셨고, 뭐 그런대로 싱겁고 어리숙하게 생겼으니까요. 제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음... 아저씨는 사기를 당하면 당했지 절대 남에게 사기칠 얼굴은 아니에요. 그럼요. 제게 좋은 투자처가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그런 감언이설에 넘어가시면 안된다구요. 아시겠어요?」 
   이렇게 나는 앨리의 단짝이란 친구와 통성명도 나누지 않은 채 헤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 처음에 미리 어디식 인사라도 시도해 볼 걸 그랬나? 어디식 인사는 무슨.
   어쨌든 나는 예술관으로 출퇴근하는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임대료를 연체해서 작업실에서 쫓겨난 가난뱅이 예술가는 아니지만 난 조촐하게 송별식 후에 새로운 변화를 꾀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내가 예술관을 통채로 빼앗은 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오전에는 예술관에서 내 일을 하고, 오후에는 탐정처럼 활동했다. 친구들의 주변인을 심문하고 그들의 행선지를 탐방하며 녀석들의 숨겨진 비밀을 탐색하는 일. 아마도 즐거운 내일의 탐정을 꿈꾸는 소년이라면 이런 내 생활에 궁금증을 느끼며 조금은 부러워할지도 모르지만 나도 그 친구들에게 어른으로써 할 말은 있다. 나도 잘 음 어, 세세히는 모르지만 명탐정, 대배우, 혹시라도 어느 예술계 천재 신인이라면 몰라도 이 생활 역시 어렵고 따분한 생활고나 긴긴 무명 시절을 버텨야 할 것이라고. 셜록 홈즈와 괴도 루팡? 현실은 내연남의 뒷조사나 고혹적인 정부의 재산 내역 파악이 아닐런지. 정신과 의사의 교묘한 언변과 탁월한 최면술의 실체처럼 상상과 현실은 도시의 걸인 해변의 미녀만큼이나 동떨어진 가정이다. 대개는 그것이 올바른 추정이고, 그러므로 추리소설과 정신 병원을 현명하게 분간하는 것이 뭐든 이로우면 이롭지 절대 해는 아닐 것이다. 아무튼,
   그처럼 이상한 송별식 때문에 결론 도출이 불가능한 작가 생활은 시작되고야 말았다. 오전에는 예술가 오후에는 탐정. 그 사이에는 심란한 마음도 풍부한 정감도 모험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그래 어린애처럼 기뻐하는 동심도 존재했다. 이 수상한 허영심과 진땀 빼는 긴장감이 어떤 성취감과 환상적 신비에 대한 심한 반발을 불러올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게임은 시작됐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을 남의 장단에 맞추어서도 안되었고, 따라서 나는 타인의 사랑에 격앙해서는 아니 되고 이 삶을 즐겨야만 했다. 절망 흥분 싫증 재미, 다 모르겠고 우선은 흡사 요술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대 예감 선망에 따라 나는 새로 부임한 미술관 관장이라도 된다는 듯 예술관에 새롭게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3

   내일은 뭔가 재미난 일이 있을 것이란 기대는 살면서 끝없이 반복된다. 그것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무엇일까? 인생이다! 곧 우리 삶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만 결과는 매번 실망이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법. 체념은 변절한 단꿈에게, 상심도 변심한 애인에게 맡기고 우리는 무엇보다 열을 가라앉혀야 한다. 평소에 열이 좋은 당신이란 건 알겠다만. 습관적인 추측의 적정성을 떠나서 대체 왜 항상 기대는 실망으로 판명나는가를 알아봐야 한다. 근본적인 재검토니 뭐니 추론의 보강이 어떠니, 인문교양서와 자기계발서에서 하는 얘기는 거의 이런 얘기다. 그러니까 상업에 많이 휘둘렸고 끝없는 유혹을 참아냈으며, 인생의 거친 파도를 체험한 결과 나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하오나 내가 새롭게 창안한 그런 거창한 신조를 설파하는 권위자는 아니다. 그래도 전문가인 척 헤헴 아는 척 한말씀 읊자면 그것은 곧, 지금을 즐겨라다.
   그렇게 나는 인간, 현대, 시간, 우주, 헬레네의 아름다움과 율리시스의 생애가 내가 기억하는 그 생애인가를 골똘히 심려하던 순간, (딱)! 나는 예술관에서 소피아의 일기를 발견했다. 무슨 비밀 금고도 아니고 소피아의 책상에서 그것을 찾아낸 것이다. 한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의 인생이 녹아있는 무엇과 그분의 인생관이 반영된 뭔가를 들여다보면 된다. 그래도 정녕 의뭉스러움으로 똘똘 뭉쳤다면 답은 하나다. 음흉함! 나는 소피아가 응큼할지 응큼하지 않을지는 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친구들의 행방에 대한 힌트를 얻고 싶었을 뿐.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소피아의 허락없이 대의를 위해 그녀의 일기장을 열어봤다.
   10월 8일 재미있는 개꿈을 꿈. 그런데 내용이 생각나지 않음.
   「라디오 시대에 '세상은 언제나 옳다'라는 문장은 내용에 포함됐다. 내용에. 그러나 TV 인터넷 핸드폰 시대인 지금은 그처럼 솔깃한 문장이 튀지 않는 행인1에 만족하게끔 절대 가만 놔두질 않는다. 따라서 '세상은' 대신 '나는'이 포함된 문장은 제목으로 쓰일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유별나지 못한 혹자는 궁금할 것이다. 왜일까 라고. 왜냐하면 자극적인 세상이자 유혹의 시대에 황금과 오락이 이끄는 오로라빛 쌍두마차에 탄 승객은 철학자와 사색가나 이방인 맞어 그냥 촌부일 수도 있지만, 역시나 세이렌과 판도라와 메두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월 9일 날씨 맑음.
   「재주가 변변치 못했던 고대의 어느 신이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깨닫는 건 뭘까? 만약 그런 가정이 이루어진다면 당사자는 그 일을 하나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육신으로 거동하고 인간의 육신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본능은 신성함보다 보편적인 인간성에 근거를 둘 것이다. 그러니까 요정 천사 악마 유령 외계인이 인간으로 환생한다, 환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모두는 상상력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처럼 누군가 인간이 되어 경험하는 경이감과 희노애락 가운데 좀 더 가치 있는 철학적이며 특별한 통찰이 하나 있다면 그건 정말 무엇일까? 지구는 아름답다? 사랑은 위대하다? 인생은 재미있다? 미래는 현실이 된다? 타임머신은 여행과 만남이다? 사랑과 우정은 거짓일까? 그건, 정말, 뭘까! 그런데 답은 알고 싶지 않다. 하오나, 내가 만약 그렇다면, 라고 감정이입을 시도해 보는 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됐어. 했어. 답 나왔다. 결론은? 와~ 인간은 이런 생각을 평소에 하며 사는구나~! 라고 느낀다면 이걸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것일까.」
   오! 나는 아차-했다. 혹여 타락한 허영심에 유린당하는 삶을 사는 게 아닌가 사뭇 걱정스럽던 소피아가 평소에 이런 진지한 고찰을 떠올릴 줄이야. 나는 부끄러워졌다. 유복하냐 가난하냐, 유쾌하냐 불쾌하냐, 행복한 사랑을 그리워 할 것인가 불행에 발목잡힐 것인가. 난 그처럼 즐거운 진력 설레는 타성의 단계에 머무른 삶을 사는데, 그런데 소피아는... 아아 나는 반성에 반성을 거듭했다. 그리고 곧바로 공책을 펼쳐서 나도 소피아를 따라해 봤다.
   「여심에게 가장 해묵은 감정은 무엇일까. 언제나 최상이어야 한다는 것. 언제 (사랑의) 최후일 것인가, 혹시 모르니 모든 것의 최하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 
   창조와 파괴니 잊혀진 소망이니 철학적인 통찰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소피아 흉내내기는 나중에 하고 내게 주어진 과제인 탐방 탐험 탐구생활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때 당시 나는 혹시라도 친구들이 먼 낙원으로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 행여라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떡하란 말인가 라는 두려움이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나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장담할 수는 없으나 예술관 친구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의 사라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똑같다. 미래 기술이라는데 과학의 발전을 눈부시다 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건 과학이 아니라 내겐 거의 마술이었으니까. 곧 나는 친구들의 귀환을 믿고 있었고, 그들의 사라짐은 아마도 믿지 못했다. 내가 쏜 큐피트 화살에 대해서 누군가한테 사랑할 것을 재촉할 수도 없고, 나는 예술관 멤버의 우정 회복을 위해서 친구들 찾기에 악착같이 매달렸다. 나는 그렇게 오전 오후 두 가지 업무에 안간힘을 썼다.


   4

   그러다 나는 금새 지쳐버렸다. 푸르른 창공을 떠다니는 환상을 잡을 기미는 보이지도 않았고, 추적 탐방 탐색 추리에 대한 조과도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소피아의 일기장을 봤고 앨리의 단짝을 만나봤으니까, 이제는 비치의 친구 조이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런데 조이라는 숙녀는 콧대가 높았다. 잘 만나주지를 않았다. 내가 이런 애들을 잘 아는데, 평소 같았으면 그녀의 감수성에 대해 견적을 낸 다음 그녀의 청순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명랑한 허영심을 유발했을 텐데 때가 때인지라 나는 어쩔 수 없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곧 나는 꽃 들고 그녀를 쫓아다니고,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비치의 친구, 조이를 만나게 됐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왜 그걸 저한테 물으시죠? 비치와 저는 서로 남자가 없을 때만 연락하는 친구였어요. 우린 그런 사이였거든요. 기구한 팔자 꾸준한 삼류 인생, 사랑은 애청하고 우정은 애송하라구요? 우리가 무슨 사춘기 문학 소녀인가요? 클럽도 가고 또 가고 비키니 입으려면 살도 빼고 각종 준비가 필요하죠. 뿐만 아니라 유혹술을 연마해도 될까 말까인데 때묻지 않은 순수한 사랑이 다 뭐냐구요? 안 그래요? 네, 아저씨? 아저씨도 잘 아실 거 아녜요. 제 눈에는 아저씨가 물고기로 보이는 게 어째 우리 처지가 좀 난처하군요. 아저씨가 생각해도 그렇죠? 그동안 살면서 체험이 물어다줬던 교훈, 실망이 가르쳐준 절규. 그게 어디 한둘인가요? 먹고 마시고 놀고 춤추며 사진 찍고 돌아다니는 거, 그게 인생 아니냐구요. 아저씨 같은 남자들은 그러잖아요. 친구들끼리 으쌰으쌰할 때 하시는 말씀이 뭐냐구요. 인생 별 거 있냐고 하시잖아요. 안 그래요? 주위를 봐 보세요. 누가, 어느 누가 아저씨처럼, 음, 뭐, 관대한 우정 헐떡이는 네, 순수한 사랑을 고민하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제 친구들은 안 그래요. 왜요? 설마 그런 질문 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이를 테면 그런 말요. 사랑은 평생 세 번이면 족할까? 족하다? 족하다는 말은 어감이 좀 그러니까 풍족하다가 낫겠군요. 아저씨 생각은 어떤가요? 사랑은 평생 한 번이면 행복이고, 두 번이면 낭만에, 세 번이면 풍년인가요? 그럼 남복 아니 여복이 좋다는 말은 대체 뭐죠? 네? 아시면 좀 가르쳐주세요. 그렇게 딴청만 피우시지 마시구요. 전 있잖아요. 복고풍 삼류 드라마 챙겨볼 시간도 없답니다. 아시겠어요?」 
   나는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고른 듯 했다. 얘는, 얘는 너무 노련했다. 좀 노는 친구라기 보다 많이 노는 친구 같았으니까. 그렇지만 인성은 괜찮아보였다. 그래도 나는 얘가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이 친구는 어쩌면 그런 부류일 것만 같았으니까.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느니라 이제 그만 하산하거라 도사님이 딱 그랬고, 그녀가 산에서 내려오니 동화 속의 양치기 소년마저, 하물며 피터팬조차, 심지어 톰 소여까지 아마도 막 감탄하면서 그러지 않을런지. 멧돼지가 나타났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비치의 친구인 조이와 헤어졌다. 그런 후 나는 며칠을 사무실에서 작전 수립하느라 힘을 썼다. 열정을 쏟고 심도 깊게 집중했다. 그 결과 이런 결론이 나왔다. 장기전이라 생각하고 급하게 마음 먹지 않기로.
   그러던 어느 때 앨리의 단짝한테 연락이 왔다. 그녀가 뭐라 했을까? 그녀는 날 보고 싶다고 했다. 참말일까 거짓말일까. 혹시 진실일지도 모르지만 난 거짓일지라도 이미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아! 언제였던가 내가 사랑을 시작했을 때가! 나는 혹시 불순한 청춘 반짝이는 권태일지 몰라도 의외의 환희를 만나기 위해 그녀를 만나러 갔다. 준비물도 있었다. 부케에 준하는 단아한 꽃다발. 그리고 나는 단추 많은 옷을 입고 나비 넥타이까지 포함해서 최신 유행하는 향수도 뿌렸다. 그런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녀를 만났다. 그런데, 어머나!
   나는 명색이 환상가라면서 미래를 예언하지 못하다니, 이럴 수가! 앨리의 단짝은 바로 조이를 만나고 있었다. 장소는 나이트클럽. 애로 사랑? 있었다. 복장이 비슷했기 때문에 자꾸 저쪽에서 또 입구에서 여러명의 웨이터분들이 날 자꾸 쳐다보는 것이다. 나 여자 좋아하요, 지는유 여자 환장헙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을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 앨리의 단짝과 조이의 목적은 그랬다. 내가 바로 술값을 계산하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 많이도 먹었다. 비싼 것도 시켰다. 평소에 내가 맛도 보지 못한 고급 꼬냑까지? 오 저런! 정찰제라서 술값을 깎아달라고도 못할 꺼 아냐. 아휴 증말, 비견할 데 없는 희열은 무슨, 꿈 깨고 속 차리란 무언의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왜 걔네들을 알게 돼서 말이야, 아휴 이런 무슨 아뿔사 같은 일이라니!
   그 친구들과 헤어진 후 나는 집에 가기 싫어졌다. 그러나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들의 아지트 예술관으로 갔다. 고달픈 인생 팍팍한 절망감, 괜히 혼자 분위기 한번 잡아보고 싶어서. 그런데 어머나 글쎄! 예술관에 불이 켜 있네. 출입 카드는 잠적한 친구들과 내게만 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누구지? 누굴까? 얘들이 돌아왔나? 설마 벌써? 나는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심호흡 후 운명의 사슬을 확인하기 위해 예술관으로 들어갔다.


   5

   처음에 나는 망설였다. 들어갈까 말까. 들어가지 말까 들어갈까. 이건 아마 올해의 기억할 만한 사건에 오를 테지만 만에 하나 운수 사납게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연에 휩쓸릴지도 모르니 일단 조심하기로 했다. 저곳에 들어가니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탈출하면 된다. 그전에 빠꼼히 몇 가지 신호를 보내서 반응을 살펴본 후 다음에 발생할 장면이 가녀린 떨림일지 거친 숨결일지 구분하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허영심 이상의 동경을 채워주지는 못한다손 치더라도 그에 못지 않을 만큼의 이상은 뭘까. 하수에겐 허세와 허풍과 공상이고, 고수에게 음 고수에겐... 사랑과 예술? 나도 이제 지쳤다. 무표정한 속마음으로 거짓말하기는. 그러므로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떠오르는 그대로 가까운 장래에 유망한 감정은 어쩌면 경이감일 것이다. 그러나 허탕일 가능성 역시 농후했다. 그러든 어쩌든 매한가지다. 거룩한 감동이든 잠정적인 광란이든 나는 못 올 데 온 게 아니었으니까. 드디여 올 것이 왔다. 나는 예술관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예술관에는 웬 마네킹만 여섯 명이 있었고, 다른 이상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시간의 구부러짐도 공간의 왜곡도 없었다. 마네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게 바로 누군가가 내게 보낸 신호라면 난 그 반짝이는 너와 나의 주홍빛 라이트모티프를 모른 체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왜 모른 체 하냐고? 왜냐하면 사랑의 줄다리기는 그렇게 시작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느꼈다. 그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꿈꾸고 만나기를 기다리며 우리가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은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고독한 여정에서 난 혼자가 아니란 것까지.
   이때부터 또 그분들 즉 마네킹에 대한 애틋한 친밀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나아가 첫째 날은 무변화 둘째 날까지도, 그러나 셋째 날부터 마네킹들은 미세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걸 어떻게 멋드러지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딱 거기서부터는 나만 알고 싶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고 난 왠지 그 마네킹들이 혹시 예술관 친구들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어떤 상징일 수도 있고 말이다. 말도 안되는 추측인 걸 잘 안다. 그게 다 예언과 계시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예상 추산 추정 추론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지성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두 헛된 상념일 뿐이고 친구들을 찾으려는 규칙적인 탐정 생활의 성과가 미천해서 빚어낸 몽상에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어느 배달업체에서 그 마네킹들을 모두 수거해 갔기 때문이다. 잘못 배달됐다나 어쨌다나! 참 나 이거 원, 난 이 부적절한 형편이 우스웠고 이 난감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너무도 엉성했다. 그러나 그분들은 연신 송구스럽다면서 정들었던 마네킹을 회수해 갔고, 난 그 모두를 멀거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난 아마도 아직 소년인가. 마지못해 사랑을 갈망하고 하는 수 없이 행복을 희구한다, 그런데 인생의 비밀을 난 아직 모른다?
   나는 다시 송별회의 순간을 애써 기억했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떠올렸으며, 꿈의 부재에 대한 식어버린 애정을 새롭게 했다.


   6

   예술관 친구들의 행방을 알아내서 그들과 조우해야 터무니없는 총천연색 행복감을 맛볼 텐데 아직까지는 그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바로 그런 희망하는 미래가 올 것인가 말 것인가, 지금으로썬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내 앞에 새로운 우정이자 사랑이요 요정 같은 천사처럼 해맑은 친구가 있다고 가정하고 반말로 말하자면 난 아마 이런 심정일 것이다.
   「난 있잖아, 인공지능 추리소설가가 활약하는 전성 시대가 올 것이라고 긍정해. 왜냐하면 '용감하다 낙천적이다 엉큼하다, 사랑 행복 쾌락' 이것만 해도 벌써 최소 9개니까. 그런데 예술관 친구들의 묘연한 사라짐을 어떻게 수사해야 하는지 그건 쉽게 긍정할 수 없다구. 그렇다고 부정적이란 말은 아니야. 그나저나 긴 흥미와 큰 환희가 가득하진 않았으나 그런대로 기분 좋았던 송별회. 파티 중 친구들이 갑자기 사라지다... 사라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게 가능하나? 그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승전결없이 그냥 연기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그걸 너라면 믿겠냔 말이야. 그러게 말이다. 나 같아도 못 믿겠다. 하지만 어떡하니, 사실인데.」
   나는 뜻 모를 궁금함과 희소한 이상향에 대한 눈물겨운 애착 같은 건 모르겠고, 녀석들과 다시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성과야 어떻든 나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애를 쓰고 어떻게 해서 만난 다음 나는 그런 문장을 적고 싶었다. 염세주의에서 즐거운 삶으로 회심했으나 인생 최고의 행복을 찾지 못했다 같은. 나는 요령을 몰랐던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저 기쁘고 편하고 즐겁게, 그러면서도 바라는 인생에 대한 최적화와 풍요와 멋을 그저 추구함이 아니라 뭘 해도 가뿐히 획득하며 사는 그런 요령을 몰랐나? 정말로? 누가, 내가? 응. 몰랐다. 몰라도 많이 몰랐다. 그런데 요령과 철든다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몰라. 모른다고. 그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인가. 아무래도 난 벌써 지친 것 같았다. 탐정 아무나 하는 거 아닐 테니까. 어려운 일은 전문가들한테 맡기고 나는 뜬구름잡는 공상이나 할까? 음...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내일 지구의 종말은 오지 않는다. 절대로. 간혹 이상한 사이비 운동이 눈에 띌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나는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내일 예술관 친구들과 만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집과 예술관을 오가는 생활이 무료해지던 무렵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다 꿈을 꾸었다. 예술관 친구들이 어렸을 때 모습인 듯한 인상착의로 보이는 아동 여섯 명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들 가운데 리더로 보이는 어린애부터 말했다. 나는 바비의 할아버지, 다음은 아론의 손주, 다음은 마이클의 전생에서 찐하게 사랑했던 여인 쩜쩜쩜. 나는 곧바로 응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그러자 꼬마들은 네가 정녕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이 믿게 만드는 수 밖에 없다면서 모두들 뒤통수에 달린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어른으로 자라나서 진짜로 친구들 모습으로 변했다. 그건 마치 식물이 성장하는 영상을 초고속으로 재생한 다큐멘터리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웃으며 포옹할 수도,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감격적인 해우에 대해서 정담을 나눌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친구들의 이마 정중앙에 큼지막하게 눈이 하나 생겨서 얼굴에 눈의 개수가 총 3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즉시 까무러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 외계인 같은 친구들에게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탄 다음 3탄으로 이야기가 계속 길어지지는 않았다. 곧바로 회심의 하이라이트는 시작됐으니까. 그 절정의 장면에서 친구들은 기절한 내 안면에 그것도 이마에 하나 턱에 하나, 그렇게 눈 2개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백안의 신이 신기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신화에서 조연이었고, 내 이마와 턱에 눈이 생긴다고 귀신 같은 직감으로 깨우쳤기 때문일까? 나는 녀석들이 작업에 착수하던 바로 그 찰나 곧바로 깨우쳤다.
   그래서 나는 개꿈에서 깼고, 책상 위에 널려있는 문학 서적─1740년작, 1833년작, 1927년작, 1992년작─에 침을 가득 흘린 광경을 지켜보며 잠시 정신을 차리느라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아 맞다. 깜작 놀라면서 깨는 바람에 팔꿈치를 의자의 뾰족한 부분에 찧는 바람에 아흐흑, 팔이 몹시 저려왔다. 더구나 생생했던 꿈의 그 이상한 내용 때문에 너무도 아찔했으므로 예지몽이 아닌가 두려웠던 데다 이 꿈에 대한 활용 방안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다리가 저렸고 팔도 찌릿찌릿했는데 바로 앞에는 내가 흘린 침으로, 아니 이게 무슨 초딩도 아니고 말이야, 어렸을 때 꿈의 말미에서 느낀 뜨듯함과 포근함의 대가는 엄마의 꾸중이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괜히 무슨 연구랍시고 논문이라도 쓴다는 듯이 책을 다 펼쳐놔가지고 이 무슨 추태를...! 지하철 안에서 침을 흘리고 잠들던 기억이 났다. 그렇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저린 다리로 절둑거리며 서둘러 바깥으로 뛰쳐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바로 로또 복권을 사기 위해서. 아무리 신들린 듯 꿈꾸고 상상해도 그런 기괴한 단꿈은 결코 조우하기가 쉽지 않은 법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인생 최대의 쾌락과 최선의 희망은 멀리 있어도 마음이 편했고, 그러므로 기대 예감 예고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사랑은 다음으로 연기하기로 했다.


   7

   로또 복권의 결과는 별들에게 맡기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집 사무실 집 사무실. 여기서 사무실은 예술관이다. 그리고 오전에는 내 일 오후에는 탐정 노릇. 아직까지 추정의 무효는 발생하지 않았고, 구축한 사실은 미미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으니까. 섣부른 성과가 있냐 없냐, 가능성은 크냐 적냐,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냉혈한일지도 모르는 이성적 펀드매니저도 아니고, 그대의 눈부신 젊음과 찬란한 미모가 그 언제까지라도 변함없기를 바란다며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서 언제 어디서나 게다가 누구한테나 립서비스를 남발하는 호색한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생활에 만족했다. 큰 걸 바라지는 않았다. 굳이 등 떠밀려서 문란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선에서 오락과 사치에 빠져야만 한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겠지만 일단은 딱 두 가지만 생각했다. 오전에 일을 하고 오후에는 친구들 찾기.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사무실에 들렀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사무실에서 아론의 책상에 웬 아리따운 소녀가 어느 고전음악을 틀어놓고서 혼자 마주르카를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궁금했다. 얘는 누구지? 쟤는 설마 심부름 센터 직원? 게다가 신입? 아마 아닐 것이다. 어느덧 난 뭔가 장밋빛 숙명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당황하지 않고서 그녀의 눈빛은 물론 오렌지색 마음을 읽었고, 자연스럽게 어떻게 왔는지 물어봤으며, 무엇을 원하는지 간접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떠봤다. 그녀는 아론의 동생이었다. 오빠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예술관 친구들 중 항상 밝고 쾌활하고 사뭇 심려 깊기까지 했던 아론, 바로 그 아론의 동생. 게다가 여자. 심지어 아마도 버릇이 장기로 변한 공상이 주특기일 미녀. 이름은 데이지. 그녀의 옷차림과 몸짓에서 풍부한 정감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그녀가 나중 열애를 알게 되기 전까지 그녀를 지켜줘야 한다는 것을. 그렇다. 우린 열애를 닮은 우정을 키워나가면 그만이었다.
   데이지와 나는 무엇보다 말이 통했다. 지금이다. 전후좌우 사정은 설명했고 경계심은 무마되었고 호감은 상승했다. 지금이다. 나는 떠나겠다면서 그녀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런데 그녀는 냉정했다. 가지마...세요? 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녀가 맹한 허당이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난 그것까지 감안했고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녀는 어떤 놀이를 하고 싶어하는지를 알아봤다. 그래서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잔잔한 어조로 들려주었다. 분주한 무도회장과 즐거운 사교 모임의 변천사랄지 멋진 남자의 종류와 사랑의 변화 과정까지 그 모두를. 당연히 최신 연예계 소식에 대해서 그녀에게 물어봤다. 내가 아는 최신이 진짜 최신이냐고 능청스럽게 스윽 물어보니 아니나다를까 그녀는 더없이 친절하게 호호호 웃으면서 언제적 얘기를 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나는 너무 행복했다. 기뻤다. 이 즐거움이 그 언제까지라도 계속될지는 몰라도 이건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젊음의 행복임에 틀림없었다. 이건 분명 내게는 부담스럽기 그지 없는 호사스러운 영광임이 분명했다. 맞다. 그렇다. 뭇사내들의 시샘하는 듯한 환청이 진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같이 나이트클럽에 갈 수는 없었다. 가기도 싫었다. 우리의 공감대는 쾌락과 욕망의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데이지를 마틸다로 착각한 것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녀에게 연애편지의 모범 사례와 어떻게 사랑을 고백받고 헤어져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난 잠깐 봤을 때 의젓한 어른이기는 하지만 뭐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든 어쩌든 데이지 인생의 꽃다운 시절이 길게 이어지고 적어도 나와 함께하는 동안 만큼은 행복해야 할 텐데, 그런 내 마음을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의 표정과 분위기와 드러날 듯 말 듯 두둥실 떠다니는 것만 같은 데이지의 기분에 난 그저 동조할 뿐. 그거면 됐다.
   데이지는 전공은 현대무용에 부전공은 정치외교학이라고 했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아아 내가 신문방송학과 교수라고 거짓말이라도 해버릴까, 무책임하게? 아니다. 그건 아니다. 어쨌든 나는 속수무책으로 반할 수 밖에 없었다. 그와 같은 상냥함과 섬세함에 넘어가지 않으면 그건 남자가 아니다. 어쩌면 그런 남자가 진짜 있냐 없냐는 몰라도 그건 아마 그냥 짐승일 것이다. 늑대 곰 맹수 하이에나, 많다. 그러나 그건 동물이고 자고로 남자라면 그녀에게 반한 척 연기라도 선보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게 맞고 그게 옳다. 당연히 첫눈에 반해도 홀딱 빠져야 정상일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1년간 쉬기로 했고 인생을 알고 싶다고 했으니, 우리는 매일 예술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너무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았고, 여성잡지 1과 2의 차이점 정도만 알려줬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데이지와 나는 연인처럼 사내 연애를 흉내내는 생활에 들어갔다. 만난지 첫째 날 우리는 빵을 사먹고, 모차르트를 들었으며, 어떻게 일류 배우로 활동하는 어느 여자 연예인의 미모를 함께 흉봤다. 솔직히 라는 수식어도 아깝네, 완전 못생긴 쟤는 왜 저렇게 유명하지, 게다가 저 허당은 왜 그처럼 자발이 심한거야 설마 자기가 허당이라고 광고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는 건가? 발악? 광기? 열정? 대망? 그런 거? 막 그러면서!
   그리고 우리는 둘째 날 야외 데이트를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양말도 사주고, 시집도 선물하고, 에르메스 매장에 겁도 없이 그녀를 데려갔다. 그나마 페라리 매장에 데려가지 않아서 다행이었을까? 다행은 (피식)! 그렇게 셋째 날 넷째 날 연인 흉내내는 삶은 계속 이어졌다. 진짜 연인이라고 해도 뭇남성과 고상한 숙녀들은 철썩같이 믿었을 것이다. 따라서 내 지출은 밑 빠진 독처럼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중 아론에게 다 청구하면 되니까. 아론이 쉽사리 아 그러냐 하면서 주란다고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갈 데를 가고, 할 말도 했고, 서로 많이 웃었는데, 그런데 그녀는 내게 계속 뭔가를 더 요구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 깨달았다. 아 이래서 개그맨과 영화배우와 예술가들이 사랑이란 주제만 나오면 딴청을 피우는구나 라고. 실상 원래대로라면 나는 이미 진도를 뽑았어야 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난 누가 뭐래도 무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럴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천상의 음률과 황홀한 카덴차가 들리던 것만 같던 기쁨의 시간은 금새 지나가버렸다. 그래서 프리허그네 어디식 인사를 가르쳐준다는 둥 어설픈 수작이 앞장설 수는 없으니 우리는 떠나기로 했다. 좋은 방법이었다. 힘찬 파도와 평화로운 야자수와 분홍색 비키니, 푸른색 컨버터블과 함께 새파란 바다를 보기 위해서.
   데이지와 나는 야호 외치면서 하트 뿅뿅을 남발하며, 콧노래와 발랄한 환호에 지치지도 않은 채 일광욕도 하고, 휴양지에서 낯선 타인을 누가 먼저 꼬시나 내기라도 하자면서 해변으로 떠났다.


   8

   그러나 꿈 같은 추억 만들기는 시도하자마자 끝나버렸다. 그 여행기만으로도 시네마 한 편과 장편소설 하나는 뚝딱 나왔을 텐데, 시도하자마자 끝나버렸다. 왜냐하면 내 통장잔고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인생의 허무는 이런 젠장, 바로 내 전공이었다. 타인으로부터 부러움을 한가득 받을 꺼라 예상하면서 좋아했지만 내게 부과된 선물은 다름 아닌 절망이었다. 가용 현금에 대한 판단 착오가 있었던 것이다. 우량 주식이나 안정적인 채권을 팔아서 생활비를 충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물론 원래 계획은 환상 문학상의 조촐한 상금을 생활비로 충당할 계획이었다. 허나 인생이 어디 계획대로 흘러가더냐.
   그야 어쨌든 나는 데이지에게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챙피하게 그걸 어떻게 말하나. 초라한 내 청춘 위신까지 초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보통은 합리주의와 실용성, 낭만을 추구하지만 이상하게 우리는 여자 옆에만 있으면 약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툭하면 그렇게 말한다. 남자는 폼이라고. 그런 말이 몇 가지 있다. 남자는 직진이네 어쩌네 같은. 맞다.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핑~하면서 미쳐버린다. 들뜬 인생 설레는 연정 애절한 애모 기쁜 질투심 뭉클한 감정까지 모두 바빠지는 거다. 오빠? 오빠! 우리는 오빠란 말만 들으면 말이다. 오빠란 말은 누군가에게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신호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나와 데이지는 이렇다 할 활약도 없이 사무실 예술관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머나!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웃기지도 않은 일이, 믿기 힘든 비현실적인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술관 친구들이 사무실에서 태연하게 각자 일하고 놀고 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내가 여행에서 복귀할 거라는 걸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그러다 예고도 없이 녀석들이 깜짝 놀랐지 하면서 본색을 드러낼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느낌이 괴상했으니까. 믿어야 하는데 왜 믿기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내내 찾았는데 이렇게 스스로 나타나면 힘 빠지니까. 대체 녀석들은 어디로 어떻게 사라진 거고 뭘 하다 이제야 돌아왔는지,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그 모두를 만화영화 주인공처럼 주저리 떠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반가움도 잠시였다. 왜냐하면 이번엔 데이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잠시 아이스크림이나 사러 갔겠지 생각했고 난 다시 얼굴을 돌려 얘네들한테 따졌다. 물어봤다. 도대체 어디 갔다 왔냐고. 그리고 어떻게 감쪽같이 순간이동을 할 수 있었냐고. 그거 과학이냐 요술이냐 라고. 혹시 내게 그 비법을 전수해 줄 수 있냐고 말이다. 그런데 녀석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일단 상태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왜 갔냐, 어떻게 사라졌냐, 왜 연락이 없었냐, 하나도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왜 물어보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대충 육감으로 하나의 답은 얻었다. 사라지는 것은 가능한데 되돌아오는 기술은 아직 습득하지 못했을 거라고. 그래서 늦었을 것이라고. 현 상황을 정리하자면 열정을 바치고 찬미로 칭송할 대상이 없어졌으나 그렇게나 바라던 재회는 맞이했다. 하나는 얻고 하나는 잃었다. 그 둘 가운데 어떤 게 진짜일까. 너무 아리송했다.
   좌우지간 시간이 지나도 아무리 기다려도 데이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히 물어봤다. 데이지를 처음에 만났을 때 그녀는 그랬으니까, 전 아론의 동생이에요. 나는 아론에게 물어봤다. 너가 없는 동안 네 동생 데이지가 다녀갔다고. 그런데 아론은 뭐라 했을까? 그렇다. 자기한테는 동생이 없다고 했다. 자기는 성장기 내내 동생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했다. 그러면, 그럼 대체 데이지는 누구고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나를 잊지 말아요 같은 눈빛을 나누지도 못했는데, 정식으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물론 예술관 친구들과 재회한 건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그렇지만 기쁨 하나와 서운함 하나는 비등했다. 아니다. 데이지의 사라짐이 최소한 내게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형편이 그랬다. 회복된 우정은 장래 점점 아름답고 덕망이 두터워질 텐데, 그녀의 빈자리는 너무나 아련하고 커져만 갈 테니까. 이렇게 그녀가 허무하게 가버릴 줄 알았다면 난 데이지와 맛난 음식이라도 실컷 먹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신선한 송로버섯과 림부르그 블루치즈! 퐁~ 소리가 경쾌한 스트라스부르그산 거위간 통조림까지. 아니다. 맞다. 내 통장잔고가 바닥난 걸 깜박했다. 그럼 그 대신 오색 들꽃이나 칸나를 안겨주며 에스토니아식 우울증이 치료된지 얼마 안된 듯한 안색을 감안하더라도 그대는, 당신은 더없이 아릅답소 낭자, 라며 그녀를 떨리게 만들어 줄 걸 그랬나? 그렇다고 들뜰 그녀인가 확인이라도 해 볼 걸 그랬나. 나중 만나면 보고 싶었다며 반갑게 인사를 하면 되고 일단은 떠난 그녀보다 반겨야 할 예술관 친구들과 못 다한 얘기가 더 중요했다.


   9

   「난 너네들을 혼내는 게 아니야. 그냥 알고 싶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사라졌다가 지금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응?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라도 되는 일이니? 왜 말을 안 해? 심술이야? 누가 시켰어? 말할 수 없다는 무슨 그런 열의를 져버릴 수 없는 이유 때문이니? 피치 못할 사정이란 것도 있을 수 있고, 떠올려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아픈 기억도 있을 수 있어. 하지만 어떻게 해서 어떻게 됐다, 대충 줄거리만이라도 얘기해달라는 게 응? 친구끼리 심한 요구는 아니잖니. 상투성이든 연민이든 너네들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안 그래? 내가 얼마나 기다렸고 찾아 헤맸는데. 내가 투시력이 있는 초인이냐? 아니야. 독심술은? 없어. 그렇다고 내가 돈이 많냐? 빈털털이야. 허나 너네들이 없는 동안 내가 내내 비몽사몽 탄식으로 일관했다는 말은 아니야. 왜냐하면 중간에 하나의 탄성이 있었으니까. 난 데이지가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거든. 그런데 내가 지금 고백을 왜 하고 있지? 실토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라고!」
   「......!」
   「아 나 이런 미치겠구만. 여서일곱살쯤 됐나. 어렸을 때 동네 형이랑 썰매를 탔는데, 엄마들 삼총사처럼 그 엄마들 아들도 친했는데 썰매를 같이 탔던 형은 나이가 나보다 좀 많았어. 난 엄마3의 아들인데 엄마2의 아들 둘과 내가 삼총사였지. 그 형은 엄마1의 아들이었고. 아무튼 그 형이 준 초록색 장갑이 썰매를 탈 때 난 왠지 투박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고 뭐랄까 남들 보기에 챙피했다고나 할까, 어린 마음에 그런 여러 감정들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장갑을 버렸어. 아니, 보라색이었나? 에잇 기억나지 않네. 그래서 그때 그 장갑을 구비했준 동네 형이 물었지. 그 장갑 왜 버렸냐고. 버린 건 버린 거니까, 헌 장갑 하나 없어졌다고 큰 일은 아니지만 왜 버렸는지 이유나 알자, 그 의미로 물어봤는데 난 정말 대답하기 싫었나 봐. 재차 형은 수차례 물었지. 대체 왜 버렸냐고. 왜 버렸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난 당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냥 난처하게 고개를 숙였을 뿐. 오줌이나 싸지 않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지.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아무 말도! 지금 이게 혹시 그런 상황과 비슷한 건가? 그런 거니? 응? 말 못할 사정 그런 거 말야. 아 됐고,
   그러니까 너네들이 두려워하는 게 어떤 현상이니 아니면 존재니, 것도 아니면 무슨 신비스러운 요술이니? 그것만 말해 봐.
   (......침묵......)
   아 얘네들 진짜 과묵하네. 너네들 원래 그처럼 내성적인 사람이었어? 송별식 기억 안 나? 어? 참으로 답이 없는 무기력한 정서로군. 하긴 모르긴 해도 보통 일은 아닌 듯 하니 나도 분위기를 일부러 산만하게 주도하고 싶지는 않네 그려. 나도 억지로 핑계처럼 뭉뚱그려진 답변은 듣기 싫다구. 일단 기다려보자. 기다려서 응? 기다려서 만나게 될 손님이 행운이든 청춘이든 아니면 꿈꾸기, 로맨스, 어둠의 세력과의 야합, 어? 존엄성, 농담이든 뭐든 일단 기다려 보세나. 어쩌면 지금으로썬 그게 최선인 듯 하니까 말이야.」
   나는 포기했다. 우리 오빠는 궁금한 건 못 참아요, 그이는 게임 밖에 몰라요, 우리 남편은 도무지 포기를 몰라요, 난 그런 말 듣는 남자는 아니니까. 나는 포기했다. 친애하는 사연 같은 건 들을 수 없었다. 하긴 그 신출귀몰한 공간 이동만 해도 아마 미래의 기술일 텐데 아무에게나 가르쳐줄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나도 과학에 대해서 대충은 안다. 알만큼 안다고. 음성, 영상, 가상 현실로 거의 모든 환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세계는 거미줄보다 훨씬 세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만큼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고, 난 거의 기정사실로 인정한다. 선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디든,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1 대 1로 만나고 통할 수 있다는 점. 매우 짧은 순간일지라도. 인터넷에 있는 정보? 이론적으로 모두 취득 가능하다. 큰 웹사이트 뿐만 아니라 이미 신제품을 발표하고 상업용 산업제를 팔고 예술적 작품을 퍼트리고 이미 그 단계에서 소인은 실재하고 내재한다는 것. 거의 모든 기계에는 극소한 환상머신이든 뭐든 소인이 있을 수 있다는 점. 나도 알고 있다. 뭔가를 구입하면 그걸 사는 순간부터 내 절반을 어딘가에 넘겨준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영상과 사진, 거의 완벽하게 편집할 수 있다. 친구와 영상 통화를 하는데 그건 참일까? 최신 유행가 순위는, 참일까 거짓일까? 게임 회사와 제일 밀접한 산업은 무엇일까? 흥행작의 인기와 판매량도 믿을 수 있는 건가? 맞다. 오락산업이 이 정도인데 그 어딘가에 인기 공장 같은 게 있을까, 없을까? 머쉰 앞에 아무 단어를 붙여도 된다. 그런 낱말과 어휘들 많지 않나. 유행도 그렇고. 일단 영상 통화만 해도 이미 기술적으로 로봇이 인간의 감성에 근접했다. 영상, 사진, 가상 현실을 거의 완벽하게 만들고 편집할 수 있다. 유리창의 떨림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적지 않다. 친구와 내가 음성 통화나 영상 통화를 하는데 그 친구가 진짜 내 친구일까? 호호호, 아닐 수도 있다. 가능한 일이다. 놀라운 정밀도로 아무나 통화해도 음성과 영상을 중간에 조작해서 송출할 수 있다. 풍향계처럼 바람만 가지고도 지름 얼마의 공간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물론 자동차가 석유 냄새만 맡아도 갈 수는 없다. 그 대신 많은 변화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태양계 내에서 무선으로 에너지와 중력파와 시간 에너지까지 전달할 수 있다. 사람의 생각 역시 모두 읽을 수 있고, 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1년과 10년까지는 아니지만 1초─1분 정도까지는 시간을 멈출 수도 있고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도 가능하다. SF 영화의 절반은 현존 기술이고, 나머지 절반에 대해서 50은 상상이고 50은 그저 시간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 첫키스를 못해봤지만 예술관 친구들의 비밀을 알아내기로 했다. 첫키스와 예술관 친구들의 비밀을 알아내는 게 뭔 상관이 있냐고? 상관 있다. 내가 첫키스를 해 봤다면 그 친구들의 비밀쯤은 알면 좋고 모르면 굳이 알고 싶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숫자와 싸워야지 시덥잖은 어? 애들 장난 같은 비밀? 내가 무슨 고스터 버스터즈인가? 그럴 리는 없다. 보시라. 첫키스와 비밀, 밀접한 관계가 있나 없나? 아무튼 세기초에 사는 그 친구들이 어떻게 벌써 아마도 금세기 말에 해당할 공간 이동 기술을 습득했는지 알아내고야 말 테다. 그들의 정서 기분 의식 분위기 사상 그 모두를 내 손에 올려놓고 쥐락펴락 들었다 놨다, 까지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사랑은 오직 하나인 것처럼 내게 그리고 지금 유일한 목표가 생겨버렸다.


   10

   조사 결과 환상 숭배 경향은 아니었다. 그것은 마술이나 속임수도 아니고 바로 과학이었다. 발단은 바비부터였다. 왜냐하면 아론과 연관된 데이지, 소피아의 일기장, 앨리의 단짝 그리고 비치의 친구 조이등으로부터 이미 정보를 입수한 결과 녀석들은 다 허당 중의 허당이라고 결론 났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은 사람은 둘 뿐이 없다. 바비와 마이클. 먼저 바비를 얼르고 달래고 다독이며 북돋아줬다가 다시 겁박했다. 우정과 의리는 물론 사랑도 들먹였다. 나는 바비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바비는 숙녀를 미소 짓게 하는 재주가 탁월하지만 의외로 이런 달변가들이 최면술에 잘 걸려든다. 나는 바비가 첨예한 논점을 피해서 핑계를 둘러대도록 유도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뻔한 변명은 금새 바닥났고, 그의 천진난만한 결심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래 버티는 바비의 굳은 고집에 개의치 않고 나는 그를 더더욱 밀어붙였다. 정말로 내가 고삐를 더욱 바짝 당기면 바비의 입이 실룩거리는 것만 같았다. 히힝 히히힝~! 그러다, 우리 사이가 결국 이거 밖에 안 되냐는 말에 바비는 딱 한마디 하고 말았다.
   「마이클. 마이클이 비밀 통로야. 그 이상은 절대 말할 수 없어. 내일 해가 또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OK~! 이제 거의 구분 능선을 넘은 거나 마찬가지다. 마이클은 뚝심이 대단한 녀석이니 괜히 섣불리 정면승부를 펼치면 안된다. 나는 그래서 나의 해킹 실력이 녹슬었나 녹슬지 않았나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시도했다. 녀석들이 모두 퇴근한 무렵 밤 12시에 나는 마이클이 놓고간 노트북에 접속하는 데 성공했다. 달콤한 자유와 뼈저린 노력을 투자한 결과 나는 아주 중대한 자료를 발견했다. 거의 완벽한 정보를 찾아냈기 때문에 황홀한 사교계니 밤의 황제니 뭐니 그런 몽상은 모조리 필요 없었다.
   내가 찾아낸 자료는 바로 1급 기밀 아니, 특급 비밀이었다. 그것은 바로 송별회를 하던 바로 그 순간을 모두 녹화한 영상이었다. 그런데 파일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즉 온도별, 시간별, 이온 균형별, 초음파 반응별, 에너지 파동에 따라 정밀하게 똑같은 영상이 수없이 나뉘어 있었다. 그 모두를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시간별에 해당하는 몇몇 파일만 보고 나서 나는 녀석들이 순간 이동 기술을 습득한 걸 믿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00분의 1초, 1000분의 1초, 10000분의 1초를 훌쩍 뛰어넘는 천문학적 단위까지 세분화된 영상을 살펴보니 나는 그 짧은 찰나 했던 일이 거의 없었는데 녀석들은 뇌파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뇌혈류 및 초감각과 기타 여러 기능들이 아주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다. (딱)! 이거다. 이거야. 바로 이거라고. 나는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이 비밀을 아무 데나 토로할 수는 없었다. 이건 절대 하찮고 소박한 일이 아니니까.
   그러므로 나는 녀석들이 이 고급 기술을 어떻게 익혔는지, 이제 그걸 알아내고 싶어졌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녀석들이 순간이동 기술을 이미 숙달했다면 그러면 유체이탈의 경지까지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투명인간? 여심 한두 개, 단순히 여탕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고, 나도 미친 게 아니었다. 이건 그야말로 판타지 2.0이 아니라 외계인이 될 수 있는 초유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예술관 친구들의 스승을 찾는 일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닌 듯 했다. 일단 너무 막막했고 너무 막연했다. 어떻게 찾는담? 어떡하지? 신기술을 전수한 스승을 찾는 건 좋은데 그러니까 아 글쎄 대체 어떻게 찾냐고. 잠깐, 혁명적 미래파 스승을 찾는 일이 합리적인 일인가 그거 먼저 검토해보자. 일단 그 방법이 맞냐 틀리냐를 따졌을 때 그건 맞다. 왜냐하면 예술관 친구들이 미래로 갔다 왔을 리는 없고, 독학으로도 그건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따라서 그들과 연결된 도사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은 타당하다. 음... 이 일을 어쩐다? 일단 좀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11

   나는 액자를 보면 그림도 그림이지만 액자가 혹시 무언가를 가린 건 아닐까, 그것이 궁금해진다. 그렇다. 중증이다. 그런 내가 미술관에 가면? 호호호. 그래서 난 미술관에 가지 않는다. 농담이고,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처럼 내 고품격은 허영심 때문에 순전 허당으로 낙인찍혔다. 그래서 매번 새로운 얼굴을 찾게 되는 것일까? 새로운 목소리, 오빠 오빠? 두 번째 농담이고, 송별회로 시작된 사건의 전개를 어떻게 하면 절정까지 끌어올릴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다. 꼼짝없이 떠안아야 할 다정한 행운은 거저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기쁨을 희롱하는 신비가 제발로 주인님 하면서 넙죽 찾아올 리는 없다. 새로운 꿈이 춤을 출려면 다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휴식도 필요하다. 걷고 생각하고 자고 놀고. 아, 먹고! 먹어? 뭘 먹어? 날름 아님 우아하게, 신선한 과일과 순수한 우유 향긋한 커피를! 그처럼 쉬면서 걸으면서 그러다 무의식에서 뭔가가 피어난다. 그렇게 하여 잠정적인 영감이 반짝반짝 빛나는 실체로 거듭날 것인가? 모르겠다. 일단 기분 전환할 겸 나는 일기를 쓰기로 했다.
   「나는 생각했다. 바보 같은 사랑에 빠져 연애의 천재처럼 키스했다. 누구와? 사랑 밖에 모르는 인형 같은 숙녀와! 그런데 그 상상은 틀렸다. 난 아직까지 첫키스를 못해봤으니까. 어젯밤 개꿈이 달콤해서인지 시큰둥한 소망을 경험으로 착각한 거다. 그게 다다. 내 친구 중에, 아마도 모두 훌륭하고 뛰어날 테지만 최근 겪은 시련 때문에 근래 가장 멍청한 친구가 혹시나 내 일기를 읽는다면 그분은 내 속마음을 금새 꿰뚫어볼 것만 같다. 머머 하고 싶다, 나는 머머를 좋아한다, 그런 동심을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일단 쓰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글쓰기가 헛생각을 물리치는 데 꽤 괜찮은 방법이고 그 방법이 내게도 효과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난 지금 당장은 막 써야 한다. 맞다. 이건 일기고 나만 읽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 얘기나 막 써도 된다.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다. 여기서는 내가 왕이고 내가 천사다. 일기장은 낙원이고 지금은 행복이자 내 마음은 천국이다. 더불어 일기장 발표회는 딱 1번만 열릴 테고, 그 행사의 초대권은 딱 3000매만 발부할 것이다. 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 마구 아무 내용이나 쓰는데 아직 기승전결에 대한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그 목적 하나 때문에 이런 덜떨어진 허접한 글을 쓰는 것이지 내가 맹랑한 개구쟁이도 아니고 어른인 내가 이런 투정에 응석으로 일관된 저급한 글을 쓰며 좋아할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꼭 교양과 기쁨과 고급스러운 욕망만을 갈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꾸준한 기쁨 짜릿한 쾌락 미지의 흥분 끊이지 않는 재미만 추구할 나이도 지났다. 사랑도 들을 만큼 들었고 할 만큼... 그건 아직 할 만큼은 못 해봤다. 뭐 사랑? 어쩌면 사랑은 마구잡이일까? 아니다. 사랑은 하나다. 사랑은 단 하나! 누군가 새로운 인생의 최신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아아 거짓말을 표정 하나 안 변하고 했더니 무척 쑥스럽다. 난 항상 내내 발단뿐인 남자였는데 어쩌다 전개를 만났다. 그런데 대체 그걸 어떻게 절정으로 발전시키느냐, 그것이 문제다. 이건 혹시 내가 모르는, 어쩌면 남모르는 대본에 의해 빈틈없이 움직이는 건 아닐까? 아니다. 한치의 방심도 허용할 수는 없다. 열쇠는 나한테 있다. 아직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딱) 하면서 아하~ 해야 하는데 아직이다. 좀 더 헛소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멍멍 멍멍멍 어떤 개 짓는 소리를 해야 하지. 컹컹 컹컹컹! 나는 탐욕이다. 나는 쾌락을 좋아하고 행복하기를 원한다. 초현실주의를 동경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OK~! (딱) (쉭─쉭─쉭)! 떠올랐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지금이라도 생각해냈으면 된 거다. 맞다. 송별회가 있었고, 파티 중 친구들이 사라졌다. 난 칩거 생활에 들어갔고, 친구들의 행적을 묻는 연락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건 내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탐방 탐험 탐구로도 모자라 탐닉 탐색 탐미의 시절이 시작됐다. 냄새를 맡아야 한다. 냄새를 맡아야 한다. 마네킹인가 척키 인형인가는 그냥 해프닝이었고, 감미로운 단꿈도 속임수였으며, 아론의 동생이라는 데이지와의 데이트는 음... 그건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오오, 아, 그만. 그만. 그렇게 데이지는 떠났고 예술관 친구들은 돌아왔다. 그 중간에 녀석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 그 친구들은 철저히 함구했다. 그럼 난 그동안 뭘 했냐. 뭔가 하긴 했다. 1급 기밀도 알아냈고. 그런데 그 다음이 없었다. 그 다음이! 머머해야 한다 머머해야 한다. 냄새를 맡아야 한다 냄새를 맡아야 한다. 그러나 새로움 2.0을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겠다. 다음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났다. 좋은 생각이 났다. 녀석들이 없는 동안 바로 소피아의 책상에서 발견한 소피아의 일기장을 읽은 일! (딱) 어렸을 때 누나가 학교 가면 난 누나 책상을 열어보며 막 구경하며 신기해 했다. 소피아의 일기장을 그 뒤로 읽지 않았다. 거기에 뭔가 이 난국을 파헤쳐갈 비밀이 적혀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 아무데도 쓸데없는 헛된 공상을 글로 옮긴 보람이 있었다. 음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오스카! 그는 누구일까? 오스카는 점쟁이다. 아, 오스카는 내가 소피아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알아낸 문제의 인물이다. 거기 다 나와 있었다. 오스카는 빼도 박도 못하고 내게 찍혀버렸다. 흐흐흐흐흐. 오스카는 미래에서 왔고, 사라지는 마술도 가슴 절절한 사랑도 고급스러운 농담도, 못 하는 게 없는 성인이라고 한다. 내가 아마 미스테리아 문학 잡지 편집장과 만나기 위해 도시에 갔던 날 오스카가 예술관에 찾아왔다고 한다. 오스카는 당연히 미래에서 왔기 때문에 예술관 친구들의 모든 장래의 영광과 행운과 어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불행과 몇몇 불가피한 비운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고 한다. 오스카는 승부사인가? 아니면 해결사? 아마도 전문가가 맞을 것이다. 그는 선수다. 만만히 보면 큰코다친다. 그 친구들은 오스카에게 홀딱 빠져버렸고 그 즉시 미래교 신자가 됐다고 한다. 미래교? 그 허상을 낫낫히 파헤치고야 말 테다. 하지만 오스카는 완전 사기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최소한 예술관 친구들한테 공간 이동? 순간 이동 기술을 전수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수는 아니란 말이군. 게다가 오스카는 일종의 멘토랄지 지인으로 남고 싶어했다고 한다. 오스카? 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이 인간을 내가 가만 놔두나 봐라. 나는 소피아의 일기장에 적혀진 주소로 찾아갔다. 액션 영화처럼 똘만이를 대동하고 어쩌고 그런 법석은 필요없이, 나는 당당히 오스카와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12

   미래 철학관.
   뭐야 오스카란 작자는 여기서 조수? 아니면 관장? 뭐 어쨌든 그를 만나러 왔으니까 만나야 한다. 순 엉터리기만 해 봐라, 내 이 녀석을 가만두나 봐라. 빨가벗겨서 아주 그냥 혼쭐을 내주고 말 테다. 그러나 일단 복비부터 점검하고 견적을 뽑아보기로 했다. 아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 먼저 물어보기로 했다.
   「당신이 오스카야? 미래 철학관? 촌스럽게 말이야 이름 누가 지은 거야? 요즘 그렇게 이름 짓는 사람이 어딨어? 안 그래? 미래는 무슨! 여기 관장 어딨어? 어딨냐고? 거기! 너 말이야 너. 그래 너! 너가 오스카야? 너가 우리 예술관 친구들을 꼬셔서 혼을 쏙 빼놓았냐? 어? 맞어 틀려?」
   라~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단지 나는 소피아의 일기장에 나오듯이 선생께서 존함이 혹시 오스카냐, 그대가 우리 친구들한테 순간 이동 기술을 전수해주었냐, 라고만 물어봤다. 그런 즉 그분의 답변이 명언이었다.
   「아닌데요. 전 오스카가 아니라 저스틴입니다.」 
   뭔스틴? 헉? 그래? 나는 실례했습니다 그러고서 철학관을 나왔다. 번지수를 잘못 알았나보다. 하지만 처음에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난 솔직히 매우 놀랐으니까. 이마와 턱에서도 눈빛이 빛났기 때문에 눈이 총 4개라는 걸 알고서 나는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착시였다. 헛것을 본 거다. 그건 그렇고 오스카는 철학관 관장이 맞아보이는데,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한담?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스카는 어떤 경로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적한 시골 다방의 에이스라고나 할까 어떤 화려한 분장의 아가씨를 불러서 손금을 봐 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래도 이 양반은 아닌 것 같아서 선뜻 이름을 물어보니 그는 친절하게도 자기는 오스카가 아니라고 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아무런 성과없이 예술관으로 돌아갔다.
   신기술에 대해 알고 싶은 지고의 욕망과 미지의 유혹, 그건 어쩜 이루어질 수 없는 갈망일 것이다. 낑낑대든 어쩌든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새로운 유희에 빠져들어 믿지 못할 체험을 잊는 도리 밖에 없었다. 천재적인 미래는 내 편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이런 씁쓸한 공상을 하다가 나는 예술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무실은 불꺼진 예술관이었다. 설마 혹시 또 얘네들이?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예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환하게 불이 밝혀지고 짜잔 하면서 폭죽이 터졌다. 이번에는 진짜 송별회였다. 저번에는 그럼 뭐 예행 연습이었단 말인가? 결과는 그런 셈이네. 그냥 아무 생각없이 흠뻑 취하고 신나게 놀면 그만인가? 뭔가 너무 척척 지나가는 느낌이다. 맞다. 난 살짝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상황이 그렇지 않나. 내가 언제 이번에 진짜로 송별회를 열어주라고 요청한 것도 아니지 않나. 억지로 등 떠밀려 나가라는 종용과 뭐가 다르냔 말이다. 이젠 우정은 종식되고 새로운 4번 타자를 맞이하시겠다? 어디 얼마나 예술을 사랑하는지 지켜봅시다. 하긴 나도 생떼 쓰며 남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언제 떠라더라도 떠날 생각은 내게도 했었다. 이상한 발단에 황당한 전개까지만 발생했기 때문에 나도 감은 잡고 있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전개까지만 이라고. 아마도 예술관 친구들과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듯 했다. 녀석들도 날 보낼 듯 말 듯 망설이는 숙고는 전혀 없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생각날 것이다. 잊지 못하겄지. 지네들이 이젠 나만 쏙 빼놓고 마음껏 신나게 노시겄다? 그러든가 말든가! 특별한 추억과 각별한 사랑 찐한 애정은 드물다 못해 희박했지만, 또 몰라 잘 찾아보면 나중 기억날지도, 하오나 뭔지 모를 애틋한 석별의 정이 느껴졌다. 고운 정 미운 정 짝사랑 첫사랑 막 그런 분위기까지 감돌았다. 그래도 좋은 친구들이고 다정한 사람들인데 여기서 각자 인생의 길로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하니 꽤나 섭섭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식상한 인사말과 정겨운 대화는 하나도 옮기지 않겠다. 실은 살짝 눈물이 감돌긴 했지만 눈물 방울을 흘리지는 않았다. 꾹 참았으니까. 뚜렷한 의혹과 선명한 고백은 없을 테니 우린 그만 조금은 냉정하게 헤어지기로 했다. 아, 맞다. 그런데 난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미처 이처럼 갑자기 서둘러 방출될지는 몰랐으니까, 그러나 친구들은 뭘 좀 아는 녀석들이었다. 그래서 걔네들은 선물을 내게 건넸고 나는 빈손을 진짜로 보여주며 고맙다는 말로 대신했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어쩔 수 없어서 경황이 없다보니 말로 때운 것이지 일부러 그런 게 절대 아니었다. 뭐 그래서 그런 다음 우린 이별했다.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행복하자, 어쩌자, 인생이 어떻고 그런 건 모르겠고 거부할 수 없는 검푸른 의혹에 휩싸이는 건 드라마로 만족하고, 우린 언제까지라도 놀라운 판타지와 신기한 환상 기발한 신비를 끝까지 추구하자, 그렇게 다짐하며 딱 냉정하게 뒤돌아섰다. 안 그랬다간, 질질 끌다가 녀석들은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는데 나만 펑펑 눈물 콧물 질질 짜며 울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우린 헤어졌다.


   13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잠자리에 누웠다. 오오, 깜빡했구나. 나는 예술관 친구들한테 받은 선물을 가지러 갔다. 볼보 웨건 트렁크에 실려있는 선물은 감히 누가 건드리지 않았다. 설마 중간에 누가 더 비싼 물건으로 바꿔치기할 리는 없고, 지금 다시 전화해서 녀석들한테 007 가방으로 바꿔주라고 따질 수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포장된 선물을 가지고 침대에 앉았다. 긴장됐다. 흥분됐고 대체 뭐가 들어있을지 궁금했다. 이 긴장감을 길게길게 이어가고 싶었지만 설레고 두근거렸기 때문에 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마치 눈부신 5월의 신부가 수줍게 기다리는 옷고름? 드레스 뒷 자크? 아하~ 면사포를 들어올리듯이 포장된 선물의 연분홍색 리본을 풀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빰빠라밤 빰빠빰 빰빠밤~! 그건 그냥 기분이고 딱히 특별한 선물은 아니었다. 그건 바로 반다이크의 마돈나였다. 앤써니경이던가 내 상식으로 아는 건 바로크 시대 대표적인 초상화가로 손꼽힌다는 정도. 이 작품을 그린 사람은 바로 루벤스에 버금가는 플랑드르파의 대가란 말씀. 이 작품이 진품이면 얼마일까? 내가 그걸 알아서 뭐하겠나. 나는 이 작품을 새 사무실을 얻으면 그곳에 걸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이 됐다. 나는 선물도 받았겠다 아침 햇살이 아름답다고 거짓으로 감성에 젖었다. 낯설게 까마귀가 진짜로 집앞에서 놀면서 울고 있었지만 난 그걸 파랑새와 앵무새, 팔색조, 백문조, 꾀꼬리등 예쁜 새가 잠깐 변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개구리로 변한 왕자님처럼 말이다. 그렇게 바로크 고전음악을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했고 멀더와 닉의 도움으로 불과 1시간도 되지 않아 훌륭한 사무실을 턱없이 싼 값에 얻게 됐다. 일단 개인 사무실이 생겨서 기뻤다. 나는 사무실로 가서 청소를 하고 어쩌고저쩌고 바쁜 하루를 보냈다. 사무실에 고혹적인 자태의 수영복 아가씨가 나오는, 커다랗고 선명하고 요염한 사진 밑에 요만~하게 숫자가 써진 달력은 걸어놓지 않았다. 사무실은 완벽하게 정리됐다.
   다음 날이 되어서 이제 정식으로 사무실로 출근했다. 그날따라 왠지 책상 건너편 소파 위 비스듬히 살짝 옆에 걸려있는 그림, 반다이크의 마돈나가 멋져보였다. 그래 유별나게 말이다. 나 혼자 외롭게 예술혼을 불태워야 하는데 유난 떨 일 있나, 어색한 수상함은 모른 체 했다. 그런데 그 그림을 내가 직접 벽에 걸었지만 난 바보처럼 슬쩍 그림의 뒷면에 뭔가 있지 않을까 하면서 그 뒷편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그러다 일을 했고, 쉬었고, 놀기도 했다. 그 가운데 인터넷 뉴스도 심심풀이 땅콩으로 구경했다. 어디 골동품점에서 400파운드에 산 그림이 반다이크의 진품으로 드러나 소유주에게 1천배 이상의 횡재를 안겼다나 뭐라나. 1천배? 그럼 4만인가, 아니 40만 파운드? 오 좋아 좋아! 그렇지만 그건 남의 일이고 내 껀 모조품이다. 게다가 그 인터넷 뉴스는 내가 심심해서 인터넷으로 억지로 검색에 검색을 거듭해서 옛날 옛날 뉴스를 찾아낸 거였다. 할 일도 없었나 복권을 살 걸 그랬나. 그래도 재밌기는 했다. 즐거운 상상이니까. 간혹 뉴스에 오르내리는 고급 주택 100채나 빛나는 노란색 페라리 마크가 붙여진 최신 페라리 웨건형 모델을 100대 살 수 있는 그림이 팔렸다더라 어쨌다더라, 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 꿈도 꾸지 않는다. 실상 미술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이름 들으면 알만한 사람들 작품도 저렴한 게 무척 많다. 그래 봐야 최저가 스케치가 아닐 바에야 월급쟁이의 봉급이나 연봉에 해당하겠지만 말이다. 좀 무리하면 스포츠 중견선수의 주급에 해당하는 작품을 평범한 일반인이 10년 일한 거 몽땅 투자해서 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작품으로써든 투자 목적이든 그 정도 관심과 호감은 없다. 다만 뭐 어떻게 어떻게 창고에서 천대받던 그림이 알고 봤더니 뭐였더라, 까지는 아닐지라도 안토니 반 다이크의 작품가 정도면 오오, 아아, 룰루랄라 랄랄라 룰루랄라 랄랄라~ 콧노래가 절로 나올 텐데. 왜냐하면 6개월에 한 번씩 그림을 공개할 필요도 없고 완전 딱이기 때문이다. 천문학적 재산은 부담스럽고, 세계적인 부호 몇 위? 눈총 엄청 받는다. 재계에서 유명하다? 일복 터진다. 대외적으로 유명하지 않지만 단순히 돈만 억수로 많다? 일명 마초계에서 유명해진다. 그 말들을 직접 들어봐서 안다. 아아, 장난 아니다. 으아, 그건 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오오, 그 호들갑 직접 들어보지 않으셨으면 말을 마시라! 그렇다고 복권 당첨이랄지 뭐 어떻게 불로소득?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행운이 따라준다면 왜 마다하겠냐마는 일단은 그렇다. 따라서 한마디로 안소니 반 다이크의 작품이면 이런 공상과학 영화 같은 상상에 최적화된 브랜드다, 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뭐 그건 그렇고, 그런데 바로 이때 일이 터졌다.
   예술관 친구들의 순간 이동 기술에 대한 비밀을 끝끝내 캐내지 못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능력 밖의 일일 테지만 적당한 선에서 물러났으니 저 높은 곳에 계신 어떤 섬광에 의해 내게 뜻밖의 선물의 의미로다 행운이 따라준 것일까? 아닐까? 순전 거짓말 같은 축복일까? 아니면 가짜 뉴스? 결혼식장에서 결혼행진곡이 울려퍼지며 신부로 신랑으로 등장해야, 당장은 종이 조각에 지나지 않지만 향후 어떤 가치를 불러올지 모를 주식이라 할지라도 재화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전에는 말 그대로 우리 집에 있는 금송아지일 뿐이다. 그런데 이 믿지 못할 소식을 난 정말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당연히 웃기지도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말도 안되지 그럼. 어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저 소파 바로 위도 아니고 45도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비스듬히 걸려있는 반 다이크? 바로, 안소니경의 마돈나가 진품이 아니라는 뉴스가 발표됐다.
   하지만 그거야 남의 일 아닌가. 전문 수집가의 착오일 수도 있고, 영화처럼 중간에 도난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설령 그런 가망성은 있지만 내 사무실에 걸려있는 바로 저 물품이 진품일 승산은 거의 희박했다. 아니 전무했다. 믿거나 말거나도 아니고 괜히 허파에 바람 들 일 있나. 뭐 펄럭펄럭 만화영화에 나오는 코끼리처럼 귀로 창공을 날아서 희망을 노래하고 이상을 동경하며 사랑의 씨앗을 뿌리라고? 그냥 아무 데나 막 뿌리라고? 때로는, 아니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는 논리든 법칙이든 그 때문에 나는 팔랑귀라고 당당히 인정할 수는 있으나 그건, 정도가, 지나친 일이다.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그러나! 그렇지만, 혹시 모르니 나는 몰래 감정을 의뢰해 봤다. (딱)!
   결과는?
   이거다. 이거여. 아따 이거시랑께. 바로 이거라고! 이거라니까~! 푸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기쁜 인생 신나는 세상 즐거운 예술 놀라운 우주 아름다운 지구 끝없는 사랑, 그 가운데 반다이크의 마돈나가 있다. 소녀들의 우상 여심을 뒤흔들다, 그거였다. 꿈과 이상과 행복과 3000개의 황금 막대가 내 손안에 쥐어지게 생겼단 말이다. 푸하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하트 뿅뿅 반짝반짝 나야 나~ 나야 나~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 나~! 내 기분은 삼박자 왈츠와 이박자 클럽 음악을 들으며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룰루랄라 나는 마법사고 좀비고 외계인이며 내가 전에 친구에게 지어준 별명도 다 내 차지가 됐다. 바로, 큐피트 황태자! 뿐인가? 나는 새로운 진공청소기다. 나는 환상머신이고 언더그라운드의 해리 포터였다. 누가 뭐래도 나는 무인도에 꼭 데려가고 싶은 1인이었다. 푸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상상력 씽싱 창의력 솔솔 흥미진진 쑥쑥! 더 나은 미래를 직면했다. 동경하는 희망이 코앞에 보였다. 얌체처럼 나만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않을 테다. 타인에게 행복과 사랑과 자신감을 샘솟게 할 수 있는 동기 부여의 신성이 되고 싶고, 그렇게 될 것이다. 멋진 인생을 알게 됐으니 아름다운 세상에 일조하겠다는 거다. 선행적으로 내 인생이 풍요롭게 됐기 때문에 꼭 선심을 쓰겠다는 뜻은 아니고. 아아, 뻐근하다. 초능력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쥐락펴락했더니만!
   그런데 이때부터 고민의 나날은 시작됐다. 과연 예술관 친구들과 다시 우정을 재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고. 뭐 딱 잡아떼겠다 그런 게 아니라... 뭔가 느낌이 쎄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나. 난 당장 내일 예술관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14

   통장잔고 그런 거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선물을 잔뜩 사들고 예술관으로 향했다. 뭐야 차 타이어가 빵구났나? 아 선물을 너무 많이 실었더니 자동차가 조금 힘들어하나 보다. 나중 차 바꿔? 아니다. 지금 이 차가 나는 딱 좋다. 한 5년은 더 탈 테다. 그래도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 뚜껑이 열리는 기분을 느껴봐야 하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사랑은 하나지만 좋아하는 작품이나 브랜드는 하나가 아닐 수 있으니까. 재미, 폭소, 감동과 기쁨은 매일 넘쳐날 것이다. 행복과 사랑을 양쪽에 꿰찬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는 그렇게 예술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사무실을 내놨다는 부동산 광고가 붙여졌다. 차차 연락하고 우정은 회복하면 된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도중 깜짝 뉴스를 들었다. 반다이크의 마돈나! 바로 그 명화의 진품을 찾았다는 뉴스였다.
   이런, 젠장! 망했다. 완전 망했다. 많이 망했다. 꽝이다. 모든 게 엉망이 됐다. 이럴 수가! 맙소사, 이럴 수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이건 무시무시한 요술도 아니고 뭐야 이거,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일이 벌어지다니, 어머머 나 어떡해!
   이건 한마디로 꽝이다. 괜히 미술품 감정비용을 아낀다고 허접한 업체에 감정을 의뢰한 게 화근이었다. 진품은 개뿔. 이런, 젠장!
   그러나 마음을 고쳐 먹자. 원래 반 다이크의 마돈나는 내 것이 아니었다. 허황된 꿈은 그만 잊자. 새로운 악마의 책동은 사양하고 한 권의 고전을 읽자. 지금은 가을이니까 내일은 비발디의 사계 가을을 듣자. 매혹적인 사랑 환상적인 호사 그 황홀한 격정이 몰아칠 날이 아마 당신께도 언젠가 올 것이다. 불행이네 질투네 고통과 좌절 같은 개념들일랑 모두 다 에메랄드빛 상금이 걸려있는 청록색 비누향이 떠오르는 청소년 문학상 도전에 밀어넣자. 꼭 그게 아니라도 방법은 많다. 공도 있고 연애도 게임도 있다. 사랑은, 온다! 사랑은, 있다! 미래는, 밝다. 꽝도, 재밌다.


   15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 이제 진짜 기다리고 기다렸던 SF 장르가 대타로 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와서 멀거니 바보처럼 멀뚱멀뚱 삼구삼진을 당하든 어쩌든 중요한 건 그거다. 이제 진짜로 흥미로운 절정이 기다려진다는 것. 하늘을 봤고 별을 딸 뻔, 정말 거의 완전 거의 내 손에 쥘 듯 탐나는 샛별을 거즘 딸 뻔 했는데, 바로 그런데 못 따 봐라. 상냥한 숙녀께서 좋아하시겠다. 퍽이나! 물론 사나이도 마찬가지. 질투로 유혹하고 굳이 교태 카드를 꺼내지 않아도 된다. 신비주의자는 원래 권태를 멀리하고 희망을 반기는 법이니까. 더군다나 폭삭 스타일 구겨졌던 허영심께서 되살아날 조짐이 엿보였다. 꿈은 믿고 상상력은 실현시키면 그만이다. 어제 오늘 내일 내내 허당일지라도 어쩌다 그 허당이 일낼지도 모른다. 막판 끝내기 홈런, 종료 5분 남기고 선수 교체해서 터트린 역전 결승골 같은 거. 뭘로 그렇게 확신하냐구요? 왜냐하면 예술관 친구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다.
   「기억났어. 우리가 사라진 다음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모두 기억이 났단 말이야.」 
   여기서부터는 전화로 들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순서란 게 있고 법도도 있으며 회심의 일타처럼 드라마틱함을 우리는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불행 끝 행복 시작이다. 이제는 마법 같은 판타지의 간곡한 간청을 들어줄 차례인 것이다. 일단 만나서 바람 빠지고 실망할 때 하더라도 지금부터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 바로 그것이 숨 막힐 정도로 재밌고 기쁜 최고의 순간일 것이다. 만약 만나서 그 다음이 예감에 부응하고 기대를 구박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예술관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만났다. 녀석들은 멀리 가지 않고 그 근처에 사무실을 얻었다. 친구들이 내게 알려준 건 정결한 열락도 비밀스런 마술 극장도 아니었다. 당연히 욕망의 환락도 유쾌한 안락도 아님. 그건, 음 그건 분명한 실체였고 확실한 증거였다. 친구들과 나는 당장 비밀 장소라는 그곳으로 갔다. 가는 동안 나는 설명을 찬찬히 들었다.
   「우린 애초에 낭만적인 꿈도 신비스런 환상도 바라지 않았어. 그런데 어쩌다 그 일에 휘말려들고 말았지. 결과적으로는 말이야. 물론 아직도 그 모두가 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본다면 말이야 우린 아직 그 미스테리 드라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 우린 정말 어떤 마성에라도 사로잡혔던 것일까? 아마도 그랬겠지. 그럼 지금은 불타는 모험심에 대한 격정은 가라앉았을까, 가라앉지 않았을까. 당연히 가라앉았다가 다시 탐구욕이 부풀어오른 셈이지. 핀란드식 수증기와 함께 말이야. 가만 있어 봐. 망고의 주 원산지가 어디더라. 에잇 넘어가고. 우리가 경험한 미쳐버린 새로움과 미지의 추상적 전율감에 대해서 간략하게 요약해서 설명해줄께. 우리는 말이야 송별회가 있던 날 정신을 잃었어.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만 일단 최대한 생각해낸 걸로 봤을 때는 그래. 당시 기억을 잃었다가 어디서 기억을 되찾았는가? 저기 보이는 저 거대한 농장 시설의 별관이 위치한 곳이야. 저기는 바나나나 항산화 요소가 풍부한 토마토 같은 싱그런 과일을 키우는 말 그대로 농장이야. 그런데 그건 다 위장이라고. 우리가 깨어났을 때 우리는 봤어. 그 뭐야,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장면 같은 거. 모두 다 진짜였거든. 거대한 투명 통에 사람이 들어가 있고, 알로에 성분이 포함된 점성을 띤 액체로 채워져 있고, 그들의 뇌에 반구 모양의 관이 씌여져서 뭘 뽑아내는 것 같았단 말야. 정말 그대로 똑똑히 봤다구.」  이때 나는 계속 듣기만 하다가는 완전 제대로 세뇌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재빨리 바비인지 아론인지, 오스카의 분신인지 모를 누군가의 말을 가로챘다. 바로 이렇게 트집 잡기 위해서. 「혹시 수제 맥주집에서 곤드레만드레하게 코가 빨개져서 뭘 잘못 본 거 아니니?」  「아 진짜라니까 그러네.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이야. 응? 그러다 우린 관리자가 들어왔을 때 기절해 있는 척 했어. 그런데 중요한 건 말이야, 그때 그냥 잠든 척만 한다는 게 진짜로 잠이 들어버렸다는 거지. 바보스럽게도 말이야.
   그 후 2차로 어디서 깨어났느냐? 어디지, 어디였더라? 이번에는 무슨 담배 공장인가 주류 공장인가 그런 곳이었어. 우리 체내의 무슨 이온 농도에 맞는 어떤 성분을 추출해서 그걸 주성분으로 어느 신비한 생명수를 만드는 것 같았어. 그러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우린 풀려났고 당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다고. 뭔지는 몰라도 우리가 실험 가치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우리의 기억만 지워서 발로 엉덩이를 뻥 걷어차서 내쫓은 거지 뭐. 일종의 방생이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어떻게 보면 윤리적인 덕성의 실천에 해당되는 일일 꺼야. 관점의 차이가 그래.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어. 음. 그래. 그게 다야.」 
   「그게 다라고? 그걸 나보고 지금 믿으란 거야? 뭐야 절정이 이제 진짜 시작될려나 보다 했더니만 다시 전개도 모자라 발단으로 주저앉아버렸잖아? 아 나 정말 이거 원! 너네들을 믿은 내가 미친 놈이지.」 
   「아 마네킹! 마네킹을 봤어. 우리의 정신을 뽑아내서 그걸 환상머신에 이양시켜놓은 다음 우리의 육체는 마네킹과 결합해서 우리가 일하는 예술관으로 보낸다고 했어. 그 대화를 들은 건 확실히 기억해.」
   「뭐라고? 마네킹? 어, 진짜 마네킹이 예술관에 있었어. 누가 쥐도 새도 모르게 그걸 가져다놨더라고. 나도 당시 마네킹이 살아있었다는 느낌을 분명 받았고, 기분도 분위기도 모두 이상했었는데 다음 날이던가 무슨 국제적인 택배회사, 가짜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아저씨가 와서 잘못 배달됐다면서 그냥 가져가버렸어. 최소한 그때 내가 두 가지 중 하나는 내가 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첫째 왜 그걸 가져가냐 어디서 오신 누구신가를 물어봤어야 하고, 둘째 그걸 왜 가져가냐 그건 내 꺼다 라고 따지는 거. 바로 그 둘 중에 하나는 물고 늘어졌어야 해. 그렇지만 그 뭔가 이상한 카리스마에 짓눌려서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어.」
   바로 이때 우리는 어느 농장인지 공장인지 커다란 산업 시설에 몰래 침입해서 뭔가를 탐지할려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저기 저쪽에서 아론의 동생, 아론은 불인정했지만, 난 그렇게 들었던 데이지가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왜냐하면 너무너무 반가웠기 때문이다. 인사도 못하고 떠나지 않았는가. 언제 만날지 기약할 수도 없고 말이다.
   「데이지!」 
   그 말을 듣고 데이지로 추정되는 여인은 도망쳤다. 그녀는 어쩜 데이지가 아닐 수도 있고, 내 부름을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쫓아갈 의지를 상실했다. 어딘가 그녀와 닮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우리가 그곳에서 무슨 특별한 시설이나 정황을 발견한 건 하나도 없었고, 친구들에게 색다른 기억이 새롭게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허무하게도 새로 이사한 예술관으로 되돌아갔다.
   사무실에서 친구들이 물었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성의껏 선물한 그림은 잘 받았니?」 
   「어. 고마워. 너무 마음에 들어. 최고야. 옛날부터 꼭 소장하고 싶었던 작품인데 어떻게 알았니? 반 다이크의 마돈나! 뭉크의 사춘기나 다른 유명한 그림들도 좋지만 마돈나. 분위기 좋자나?」 
   「뭐라고? 아닌데. 우리가 선물한 건 1800년대 소품과 1900년대 유화 한 점인데. 모두 진품이고 작가는 누구였더라. 아무튼 큐레이터들 사이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소장하고 싶어하는 작품이야. 은둥형 재력가의 눈독과 인상파 환상주의자의 흑심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으로 말이야. 물론 모두 진품이고. 어머 그런데 반 다이크의 마돈나는 대체 뭔 말이니?」 
   「뭐야 그럼. 중간에 물건이 바뀐 거네? 그림이 무슨 007 가방도 아니고. 그게 그렇게 큰 작전을 펼칠 만큼 대단한 값어치가 있는 거도 아니잖아?」 
   「그렇지. 맞아. 그런데 있잖아~ 방금 전에 했던 말. 그거 다 뻥이야! 으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깜빡 속았지? 메~롱! 오랫만에 네가 당황해하고 이렇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라구. 그치만 너무 속상해하지는 말라구. 다음 번엔 괜찮은 추상화가의 진품을 진짜로 선물할 테니까 말이야.」
   「뭐야 그럼. 아바타 영화에 나오는 그거랑 뭔가 기억났네 어쩌네 그거도 다 거짓말이었어? 그럴려고 일부러 날 부르고 어디 갔다 오고 그랬냐고?」
   「응.」
   「어허~ 저런! 흐흠. 나도 알고 있었어. 이미 눈치챘다고. 처음부터 말이야. 그냥 속아준 척 했을 뿐이라구.」
   「에게~! 아닌 것 같은데?」
   「정말이야. 진짜라고.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아휴 증말 속아주는 것도 진짜 재미없다. 아 맞다. 그런데 사라지는 요술은, 그건 정말 어떻게 가능한 거니?」
   「아 그건 너한테는 가르쳐주지 않을 꺼야. 그리고 몇몇만 거짓일 뿐 나머지는 다 진짜야. 모두 사실이라구. 엄정한 사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장면 같은 거. 거대한 투명 통에 사람이 들어가 있고, 알로에 성분이 포함된 점성을 띤 액체로 채워져 있고, 그들의 뇌에 반구 모양의 관이 씌여져서 뭘 뽑아내는 거. 모두 진짜였어. 마네킹까지 말이야. 뭐 나중 차츰 비밀이 밝혀질지도 모르지만 적지 않은 궁금함은 끝내 미스테리로 남게 될 꺼야. 두고 보면 알게 될 거라구. 아무튼, 둘 중에 하나 선택해. 금세기 최고의 마술사에게 불가능한, 미래의 환상가가 습득하기 꽤나 어려울 요술을 배울 꺼냐, 아니면 몇몇 진품을 선물로 받을 꺼냐. 너무 비싸지도 않고 아예 무명도 아니고 그런 괜찮은 작품들 많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대충 세어 봐도 한 4만점 되나? 못 잡아도 그 정도는 되겠군 그래. 근데 왜 4만이지? 너 혹시 4만이란 숫자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 부여라도 알고 있는 거 있니? 없으면 넘어가자. 아무튼 말이야, 꽤 구미를 당기고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치고 그래, 갖고 싶어지는 거 그런 작품들 말이야. 베르나르 뷔페, 잭슨 폴락, 로스코, 워홀, 드 쿠닝 진품도 몇 점 이미 구했다네.」 
   그 뒤로 우린 헤어졌고 지금까지 연락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아마 앞으로도 서로 인생을 살면서 굳이 시간내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원래 무얼 수집하고 짐이 많고 그런 거 싫어한다는 걸 깨달았다. 옷도 많으면 귀찮고 약속도 많으면 번잡스럽다. 그걸 바꾸어 말하면 뭘까? 그렇다. 최고가 아니면 싫다는 말이다. 일부러 내 안목이 드높다 그런 말이 아니라 온갖 호사품 쇼핑 가방을 모두 한 손에 들 수도 없고, 온갖 과장 광고들을 믿을 수도 없으며, 동물농장을 TV로 보는 게 편하지 호피 무늬 입은 숙녀를 찾아 NC에 가는 것도 이젠 체력이 뒷받침되기 힘들다 그런 말이다. 마네킹이라면 딱 1개 사서 가터벨트를 입혀볼 수는 있다. 그 이상의 괴상한 취미는 사양하고. 아마 나는 영원한 허당인 듯 하니까 굳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인 것만 같다. 변명 같지만 그게 다 예술관 친구들 때문이다. 왜냐하면 난 예술관 2.0 블로그 3의 새로움을 발견해야 한다는 숙명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그 어떤 독특한 새로움을 기다리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래서 내가 지금 기다리는 행사가 있다면 그 축제는 아마도 이런 이름이지 않을까? 영원을 약속하는 사랑 대신에 말이다.
   환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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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105

from 소설 2017. 9. 30. 23:48

   1

   첫 문장.
   첫 문장은 첫 문장이다. 일부러 그렇게 썼다. 혹시 모르지만 수소문하면 없지는 않겠지만 서술자는 아직까지 '첫 문장'이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아직까지 읽어 본 적이 없다. 변변치 못한 기억으로 검토해 봤을 때 일단 그걸로는 최초다. 그 무슨 대단한 위업도 아니고 쓸쓸한 욕망 엉터리 연애에 지나지 않는 일이지만 어쩜 이 일은 사양할 수 없는 흥미를 줄 듯 말 듯 하다 말았다. 그러나 아주 의미없는 시작은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인생, 환상관에 갔다 왔고 사랑론도 썼고 이제는 급기야 영화 신비론을 만드냐 마느냐는 판국에 까짓 첫 문장이라는 첫 문장이 문젠가.
   소설가 앵거스는 이와 같이 소설을 시작했다. 발단은 투지 전개부터 흐지부지될 망정 일단 저지르고 본 것이다. 그런데 다 완성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던가 글을 썼던 공책을 찢어서 구기고 뭉치다가 물어뜯어 먹는 수 밖에. 아니면 어차피 블로그 수준이니까 실패작이라며 그냥 발표해도 괜찮을 것이다. 맞다. 이런 앵거스의 상태를 누가 봤다면 아마 누구라도 의심의 여지없이 그를 괴짜라고 인정했을 것이다.
   그런 앵거스는 친구들을 평가하면서 기뻐했다. 보이드는 수재, 마르첼로는 천재, 아비게일은 바보에 순정남, 서먼은 환상가, 다이안은 미녀, 몰리는 선녀, 바바라는 연애의 귀재 그렇게.
   별칭이 썩 각별하지 않은 앵거스 친구들의 수동적인 우정 능동적인 사랑은 질서 정연하게 변해갔다. 마을에서 남자 넷 여자 넷끼리 친했는데, 그 중에 사귀는 짝이 셋이라서 앵거스와 바바라만 남게 됐다. 그래서 그들이 아지트에 모두 함께 모여서 정담을 나누던 어느 날, 친구들은 사랑의 표현을 스스럼없이 드러냈고 친구들은 이렇게 종용했다.
   「둘이 사겨. 뭐 해, 둘이 사귀라니까.」
   둘이 사겨? 미녀 다이안은 남 속도 모르고 마르첼로와 키스하다 말고 난데없이 친애하는 친구의 좌불안석이 애달파 보였는지 신경써준답시고 그처럼 말했다. 당연히 바바라는 일전에 서먼에게 부탁해서 앵거스와 사귀고 싶다는 진심을 전했는데 거절당했겠다, 다른 괜찮은 남자는 길게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고, 싫은 남자는 근처에서 은근 추근댔고 그래서 바바라는 투정을 부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옛날 자기는 앞서 걷고 서먼이 그랬는데, 바바라 어떻게 생각해? 서먼의 남자친구 보이드는 앵거스의 컴퓨터를 까 뒤짚었던 프로그래머였고.
   그런 일이 있은 다음 앵거스는 작품은 뒷전이고 전위적인 연극에 몰두했다. 곧 앵거스는 천재 마르첼로와 2인극 연극 장기 공연에 들어갔다. 작품은 출연진이 달랑 2명 나오는 제작비 거의 들지 않는 앵거스의 옛날 연습작이었고, 대사도 단 두 마디 밖에 없는 연극이었다. 그런데 단 두 마디 대사가 하나는 매우 짦았는데 다른 하나는 매우 매우 길었다. 그래서 그 긴 명대사는 아무나 소화할 수 없었고, 따라서 작품 원작자이자 연출가로서 경험을 쌓고 싶어하는 앵거스는 친구였던 천재 마르첼로를 설득해서 연극 감독으로 입봉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마르첼로. 괜찮은 작품이 있는데 말이야, 남자의 일생에 연극 주인공은 한번 해 봐야 하지 않겠니? 너의 인생에 뚜껑 없는 차만 탄 걸로는 부족하지 않냐 그 말이라고. 응? 어때? 꽤 괜찮아. 많이 괜찮다고. 작품이 아주 끝내줘. 기똥차 이 친구야. 승산은 반반. 그러나 잘하면 연극계의 거성으로 데뷔하자마자 연예인이 되는 거지. 응? 마르첼로에겐 젊음이 있지 않나.」
   「너 미쳤어? 이 인간이...... 그런 좋은 건수가 있었는데 왜 이제야 알려주는 거야? 그럼 이제 우리 공연 마치고 나면 바로 뜨는 거야?」
   물론 공연은 무사히 마쳤지만 공연이 끝난 후 텅빈 객석을 보며 마르첼로는 앵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관객은, 이게 다야?」
   「친구. 예술혼은 다른 게 예술혼이 아니라네. 자네 물수제비 별자리를 아나?」 
   「물수제비 별자리? 몰라. 넌 그 별자리에 대해서 좀 아니?」  
   「아니 하나도 몰라.」  
   「그럼 뭐하러 물어봤어? 뭔가 안다는 듯이 말이야. 것 참!」
   「그런데 있잖아 마르첼로. 내가 한 여자를 알게 됐어...(침묵)...」   
   「한 여자? 그래서? 그녀는 어떤 여자야? 소녀 처녀 약혼녀 5월의 신부 아내 이혼녀 과부, 물고기야 아니면 광녀야? 그냥 평범한 미녀나 선녀? 대체, 도대체 어떤 여자냐고? 그리고 어디에서 만났어? 광야에서? 나이트클럽? 거기 어디야 어디길래 그렇게 상상만 하고 있어? 나도 한번 가볼까 말까? 넌 항상 그게 문제야. 그렇게 망설이다가 사랑은 떠날지도 모른다구. 어? 그게 아니라 혹시 그녀는 네게 고개를 숙였니? 이미 넌 지아비쯤 된 거냐고. 아 글쎄 그러니까 정말 뭐냐고.」 
   어쨌든 앵거스는 이와 같이 실망한 마르첼로의 동정심을 사는 한편 신묘한 전위극이 장기 공연에 들어가는 다행스런 성과를 얻게 됐다. 아, 공연은 저번처럼 길지도 않은 인용문을 요약하네 마네 그럴 필요 없이 전문을 옮기자면 이와 같다. 알고 나면 깨닫게 될 것이다. 와, 이 긴 명대사라면 진짜로 천재 마르첼로가 아니면 도저히 안되겠구나 라고.


   2

   「친구. 내 블로그의 새 글 읽어봤나?」
   「아 그거? 그럼. 잘 봤네. 허허허 또 보고 싶네. 오 그럴듯해. 멋져 보여. 뭔가 있어 보인다구. 앞으로 말이야, 궁금함이 실망으로 연결되지만 않는다면 좋겠는데 아아 벌써 기다려지는데! 예감에 정확히 부응해서 기대만큼 놀랍고도 신기한 환상이 실현될까 두고 봐야겠는데! 보통은 아니지만 잘 찾아보면 자신에게 꼭 맞는 즉 한동안 가지고 놀거나 빠지거나 그냥 시간만 때우든가 그런 뭔가를 만나게 되는 듯해. 삶이란 건 말이야. 그걸 헤매는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놀 줄 아는 어른이 되는 거고. 그렇게 봤을 때 전문가의 영역은 꽤 불안정하단 말야. 자네가 저번에 추천해준 경제학 서적, 그것도 괜찮았어. 파라그 카나의 커넥토그래피. 한동안 인문교양서를 읽지 않았는데 때 아닌 월척을 만난 느낌이랄까? 문체, 문장 구조와 논리가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면도 없잖아 있었는데, 그게 왜 그런가 알고 봤더니 결국 단어 때문이었어. 낯선 명사 동사들 때문에. 분명 원론적으로는 경제학 서적인데 꼭 경제학 서적만은 아니란 점 때문에. 어쨌든 참 좋았어. 그런데 왜 그 수준을 자주 만나기는 힘든 걸까? 하긴 그렇게 따지자면 인간이 달에 갔던 때가 언젠데 지금은 어디까지 갔다 왔다 썼다 벗었다 줬다 뺐다 해야 하지 않나, 그렇게 되는군 그래.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안목만 높아져서 탈이야.
   하오나 내용은 별로더라도 가사 전달력이나 꿈과 현실의 경계, 이상과 허구의 사실적 마술성을 살짝 건드리기는 해야 된다고 생각하네, 직업인이라면 말이야. 아 그렇지 않나. 사실만 전달하는 사람이 웃으면 돼, 안돼? 두 말하면 잔소리겠지. 같은 메이저래도 아나운서의 화술에 과도한 감정과 지나친 기술이 들어가면 보는 사람 마음이 기쁘고 썩 편할 수만은 없단 말야. 발로 뛰어서 쓰고 황홀한 영감을 위해 진득하니 1000일 하고 하루를 더 기다릴 줄 알며, 전문가라면 말이야 최소한 나불거린다 적어도 나댄다, NDJM 같은 초딩이나 중딩들도 유행 지나서 사용하지 않는 전문용어는 듣지 않아야 한다구. 그런데 모순은, 딜레마는 바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점. 이론과 실제 다 그래. 5번 실패냐 5000번 실패냐, 당연히 후자가 성공 확률이 높다고. 그래서 중요한 점은 5번 실패하고 미래를 내다보고서 종목을 바꿀 줄 아느냐겠지. 그래, 수읽기. 비전문가도 이미 전문가야. 그래서 지금은 전문가의 권위가 예전 같지가 않아. 세상이 그래. 대중은 최고를 원치 않고 그저 시간만 떼우고자 한다고. 더구나 세상 사람은 모두 천사이자 예술가라는 것. 사람이 원래 그래. 공연 포스터에 나온 얘기나 대중매체의 사탕발림과 오락산업의 수요 때문에 지나고 보면 짧지 않기를 바랄 전성기 뿐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유명인으로 산 당사자의 마음은 바뀌고 변하게 되어 있다네. 제아무리 호평 일색의 투자보고서라지만 응? 화사한 광고성 꽃다발이라지만 처음에는 자기 작품에 대한 소개 글이 너무 과장됐으니까 당사자가 보면 막 부끄럽고 차마 화끈거려서 실소가 절로 나오겠지. 응? 처음에는. 그래서 고인이 된 어느 추리소설가는 출판 계약서에 명시적으로 표기했다네. 자기 사진을 실지 말라고. 그건 아주 드문 실례고 보통은 그렇지. 회사 홈페이지에 나온 CEO 사진 크기와 회사 실적이 반비례한다거나 요란한 홍보와 울긋불긋 짜릿한 내용이 매출과 밀접히 관계가 있다는 점, 그게 다 뭔가? 결국은 돈이야, 경제라고. 물론 모든 전문가들은 소비자들을 상대로, 일반인 또한 냉철한 이성으로써 낚냐 낚이냐, '나 사랑해?'라는 말을 듣느냐 사랑 밖에 난 몰라냐, 호박이 제발로 굴러오냐 꽃 들고 쫓아다니던가 돈을 왕창 쓰던가 뭐라도 해야 하느냐, 사랑의 시를 쓰냐 사랑할 수 밖에 없냐, 사랑 고백? 기억나지 않는다 믿었다 속고 속이는 그 줄다리기는 사는 동안 내내 지속되겠지. 작가도 그래. 몇 년 뭐뭐 몇 년 뭐뭐도 아닌데 벌써 당장 현실이야. 움직임이 시작되면 관성은 내가 제어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법이니까. 현실적 문제는 부딪히지 않을 수 없어. 문화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식솔과 옷값과 의료비, 품위 유지비 그게 다 어디서 나오겠나. 그래서 가수는 사랑은 연필로 쓰라했지만 고급 만년필로 글을 쓰는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만족하며 박수를 칠 수야 없겠지만 과찬이란 말은 어쩜 가식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무덤덤해질 수도 있어. 그런데 처음의 부끄럽고 화끈거림이 과연 얼마나 계속 될까? 한없이 지속될까? 줄곧 처음과 똑같을까? 그럴 리는 없다네. 그럴 리는. 아니 사람인데, 그럴 수는 없는 거라고. 딸랑딸랑 빰빠라밤 새콤달콤, 호호 기분이 좋거든. 나는 살면서 황금을 싫어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거든. 어쩜 그건 당연한 말 아닐까 까지는 아닐지라도 무뎌진다고. 무뎌져. 소근소근 딸랑딸랑 하트뿅뿅! 그래서 도취감이란 마법은 돌고 돈다네. 드라마는 영화로 영화는 다시 시네마로, 예술가는 연예인을 지향하고 코메디언은 다시 난 정말 순수예술가의 경지에 올랐으니까 자기가 자기 입으로 선을 그어. 자네들은 대중예술가 나는 아티스트라고. 다 그런 법이지. 사람 아닌가! 허세 허영 허풍! 저분은 왜 그럴까가 보이면 좋은 거고, 안 보이면 어리고 순진한거고, 그걸로 리더면 철부지에 푼수고. 응?
   하지만 말이야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란 말이 있듯이 조명이 빵빵 터지고 풍악이 뻥뻥 울리면 자세를 취해야 한다구. 또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게 돼 있어. 그래서 고수는 무대 체질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관객을 주인공과 연기자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가로써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이지. 쉬운 예로 애청자 엽서 같은 거. 뿐만 아니라 바로 그래서 미녀는 야수의 감언이설에 넘어갈 수 밖에 없어. 그럼~! 어떻게 이 정신 사나운 교묘한 언변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녀나 요정도 아니고 말이야. 눈부신 여신이라 예찬하면 단아한 숙녀께서 퍽이나 싫어하시겠네. 허허허. 음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여자는, 여자는 다 그래. 내 이상형을 만났지만 어머나 이상형은 꽃 들고 쫓아다니는 남자 유형이 아니네? 그 남자에게는 그런 가상한 노력을 나중은 몰라도 당장은 기대할 수 없다? 고급스런 농담이 아니라 값싼 자발을 선호하는 숙녀라면 그럴 수 밖에. 그녀는 졸졸 따라다니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듣기만 하거나 조용한 쳄발로 음률이나 신묘한 효과음 소리처럼 에코만 반향하는 돌쇠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거라네. 미남을 보내고 또 보내고 달변가의 끈질긴 구애도 마다하며 도톰한 목소리의 그 남자 주변에서 알짱대긴 하지만 하나도, 하나도 붙잡지를 못해. 그럴 수는 없으니까. 심지어 뭔 남자들이 한번 거절하면 뒤도 안돌아보고 가버리니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 라는 그 철지난 구식 속담을 여자들이 일시적으로 애원할 때를 알아보는 남자, 캬 남자! 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마련해 놓는다 라는 격언을 하필 사랑에 적용하는 남자? 넘어가자고. 콧대 높은 미녀는 재미없는 건지 짜증난 건지 싫증난 건지 모르겠지만 돌쇠 부류를 좋아하거나 얼굴은 전혀 안보는 여자들은 따로 있다네. 응. 여자니까! 그녀는 바로 나를 그 언제라도 꽃으로 예우하는 돌쇠를 만나야 하니까 말이야. 그래, 돌쇠! 첫 번째 돌쇠는 오래 사귀다 그녀를 먼저 차고 다른 여자와 행복의 결혼행진곡을 울리고, 두 번째 돌쇠를 만나 어떻게 산다더라 라는 풍문도 별 인기는 얻지 못한다고. 연예인도 아니고 뭐 볼 게 있다고 여성잡지 2에서 특종이라며 쫓아다니겠나, 안 그런가? 그런데 여기에도 1.5가 있겠지. 첫 번째와 두 번째 돌쇠 사이에 만난 소개팅 남자. 소개팅 중간에 그녀 친구한테 막 전화가 와. 전화는 불이 난다고. 왜냐하면 그 남자는 그녀한테 돌쇠 유형에 근접만 하면 딱이었거든. 그러다 그녀는 딱 그렇게 말하지. 바로 이렇게. 들었어요? 음 그렇게. 들어, 듣다니, 아니 잠깐만. 뭐라고, 들었어요? 들었다니! 듣긴 뭘 들어? 참 나! 제일 첫 번째 돌쇠가 오죽하면 하다 하다 내가 뭐 동화에 나오는 집사도 아니고 참 나 더러워서 돌쇠 못해먹겠네, 그러면서 헤어지자마자 결혼했을까. 그분은 신분 상승한 거지, 돌쇠에서 왕자님으로. 그게 다 치료될 수 없는 공주병이 부른 결과지 뭐. 여자가 다 그러지는 않는데, 들었어요? 처음 만났는데 듣긴 뭘 들어! 하지만 그녀만 그런 게 아니야. 잘 아는 여자애도 완전 똑같더라구. 들었냐고? 탐스런 과일을 따 먹고 그 남자는 떠났더라, 뭐 그 가슴 아픈 사연을 들었냐고? 내가 왜 그 얘기를 들어야 하지? 게다가 누가 그런 소문을 전해주는 어려운 역할을 솔선수범해서 자청하겠냐고. 너 같으면 그런 역할 맡을래? 손을 번쩍 든 친구는 한 명도 없던 걸. 일할 때는 지동설에 그녀를 만나면 천동설이라 음... 아아 쉽지 않아. 쉽지 않다고. 들었어요? 벌레 먹은 사과가 맛이 있다야 뭐야? 어? 오늘부터 썩은 사과는 동나겠다. 과일장사와 농업과 꽃장사, 잘만 하면 괜찮을 수도 있어. 정말 그래. 상품 가치 높은 과일을 제외하고도 상처 입은 사과인데 값은 싸고 맛은 매끈한 상품과 똑같다? 일거양득이군. 오늘부터 벌레 먹은 사과가 인기를 얻겠다고 오늘의 운세에 나와 있어. 벌레 먹은 사과? 그게 제발로 굴러가는 호박과 뭔 차이지? 그게 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휴......)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들었어요?'가 끝일 수는 없음. 왜? 왜냐하면 그렇게 성급히 마무리하면 많이 섭하니까. 사람 서운하게 말일세, 우리가 또 그건 그냥 못넘어가지. 아무렴. <들었어요?>와 똑같은 말이 있지. 꼭 같은 말이 있어. 딱 똑같은 말. 그건 뭘까? 그건 정말 뭘까? 그건 과연 무엇일까? 그건 뭐냐 하면, 바로 이 말이겠지. 내가 오빠 이럴려고 만나? 호호호 하하하 큭큭큭! 여자는 다 그런다니까.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말이야. 아 그녀들은 정말 못 말려. 하오나 여자에게, 왜냐고, 묻지 마시게. 절대! 그저 낭만을 찾고 사랑을 읊고 환상을 노래하며 젊음을 칭송하면 그뿐. 허세에 웃는 아가씨의 단짝은 뜬구름잡는 허풍을 믿고, 돌쇠를 환호하는 영심이도 여기 저기 거기 훤히 보인단 말일세. 물론 어느 고결한 숙녀께서는 사전에 먼저, 나 사랑해? 라고 사랑의 청약을 표하시겠지만 일단은 그렇다네. 그런데 중요한 건 이거야. 여기서 나뉘다는 점. 여기서 나뉘어. 그런 사랑의 밀어들을 들어봤다, 들어보지 않았다로. 사랑에 대해 묻고 답하지 않는다는 남자들의 불문율만큼이나 그녀들의 공통적인 대사에 대해서 화자였다, 청자다, 알긴 안다, 모른다로. 그 가운데 누가 사랑을 알까? 그 가운데 사랑을 하는 사람은 누구고,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은 누굴까? 그 사랑은 바로 그 시적인 사랑일까? 감히 지금 정답을 말할까 말까? 쉿! 그건 묻지도 따지지도 마세나. 어쨌건 사랑은 하나. 하트 절반과 절반이 만나서 그래서 사랑. 따라서 하트 절반이 말하는 사랑은 아마도 꽤 불완전할지도 모른다는 추론이 타산되겠지. 어쩌면 0.5는 잘 모를 수도 있다구. 동물농장론, 환상론, 신비관도 똑같아. 그럼 하나 궁금해지는 군. 백조는 제한적으로만 세이렌과 친할까 라는 것. 적어도 오리나 티티새일지라도 살면서 세이렌을 만나기는 힘들 걸. 그러니까 마에스트로라고 과연 판도라에 대해서 얼마만큼 통달했을까. 파란만장한 인생이 다채로웠던 환상가는 또 어떻고. 세상은, 아마존에 대해 풍문만 무성하고 메두사와 동심과 오락산업의 구분조차 힘들다네. 인생은, 수박 겉 핥기의 무수한 반복이고. 그러면 사랑은? 사랑이 심술을 부리건 애절하건, 남몰래 시작하든 소리 소문없이 끝나든 사랑에 대한 신뢰 동경 낭만 목적 장르는 다양할 테지. 때문에 그것이 단 한번의 파울 홈런이건 만번의 성과건 사랑을 쉽게 정의하는 건 어쩜 무리가 아닐까 라는 속셈이 간파되는 것만 같아. 다만 세상, 인생, 사랑을 간편하게 그냥 요술이라 칭하는 데 대해서 큰 반감을 사지는 않을 테고. 그래서 어쩌면 점쟁이의 훈수는, 아마도 마술사의 주문은 이렇지 않을까? 당신의 그 고귀한 인생에서 한번이라도 사랑을 하고 한번이라도 마지막 잎새를 그려볼 수만 있다면! 공상 과학과 현실의 절묘한 결합 같은 거. 그래. 사실적 마술주의? 마술적 사실주의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아니지. 아닐 꺼야. 왜냐하면 인생과 마찬가지로 행복 역시 수학공식은 아닐 테니까. 그런데 말이야 나는 정말 이럴려고 연극배우가 됐을까? 글쎄요. 왜지? 왜일까? 나는 왜 연극을 할까? 모르겠군. 그건 다음에 생각하지 뭐. 자, 그러면 말이야 내가 재미난 얘기 하나 해 줄까? 여자는 어쩌면 숙명적으로 평생 속고 또 속아야 할 수도 있다구. 으하하하하! 재미난 얘기는 개뿔! 저거 멋진데 우리도 하나 살까? 귀찮다 사지 말자, 어차피 다 짐이야! 어디 가서 뭐나 먹고 올까? 아 맞다 차 막히겠다 나중에 가자, 꼭! 아 맞다 패션쇼 제일 앞자리 초대장 내가 깜박 하고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내 후임한테 선물했지 뭐니, 그래도 착한 일인데 내가 양보했으니 기분은 나쁘지 않다구, 우린 그냥 다음에 가자 응?
   사랑은 무슨 특별한 요술이 아니라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친구들 몰래 혼인신고해서 같이 사는 남자 여자와 함께 했던 일도 있었네. 우리는 생맥주 3잔을 주문했지. 시간도 아마 대낮이었을 걸. 그런데 난 생맥주를 마셨는데 그 둘은 그걸 마시지 않대~! 작은 맥주컵도 아니고 말이야. 맥주도 가득 차 있었어. 아르바이트생이 신참이었던지 거품도 없었다고. 당시 친구집에 놀러 가서 그녀 일기장을 잠깐 엿보았더니 그 적나라한 과정이 다 나왔 있더라고. 머머 했다 머머 했다, 오늘 오빠가 뭐라 했다, 머머 했다 머머 했다, 나는 머머하고 싶다 머머했으면 좋겠다, 머머했다 머머했다. 완벽한 머머했다 문체. 소녀 감성을 바탕으로 이 사랑을 아끼고 다듬고 싶은데 그건 마음처럼 쉽지 않다, 전부 그런 내용들이었어. 그럴 수 밖에 없었나 봐. 그게 뭔가? 사랑이지! 음. 사랑. 그래서 그렇게들 사랑 사랑 노래를 부르나 봐. 생맥주를 마시지는 않더라도 어제는 짝사랑 오늘은 풋사랑 내일은 또 무슨 사랑이 찾아올지 모르는 법이거든.
   와 오빠 눈 크다 내 주변에 있는 남자는 죄다 눈이 단추 구멍만 해 순전 그런 남자들 밖에 없어 와 오빠 재밌다, 오빠의 저 숫검댕이 눈썹 봐 봐 어쩌고저쩌고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여자에게 어떤 말을 듣고, 친구들 다 모인 자리인데 바텐더에게 돈이 제일 많을 것 같은 남자로 손꼽히고, 사석에서 그런 말 하는 게 무슨 허물이라도 되겠나. 그런데 뭐 단춧구멍? 호호호 하하하 크크크! 그러나저러나 이 세상에 눈이 작은 남자가 대체 몇 명인데, 그런 말 못 들어본 남자의 심정은 어떨까? 하트 뿅뿅 윙크 앙큼 앙증 교태 애교 꼬리 흔들흔들 딸랑딸랑 반짝반짝, 여성스럽고 귀여움 만점등 사랑의 징표를 풍성하게 애정의 신호를 듬뿍듬뿍 받아보지 않았던 남자들을 위해서라도 겸손한 자랑은 한마디로 뭐다? 유난떨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재수 없어! 으~웩! 귀여운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고 파랑새는 황홀한 지저귐을 고양이는 멋진 그래 최소한 건장한 젊은이를 유혹해야 마땅하거늘, 어머나 글쎄 이 숙녀도 저 숙녀도 모두 그 남자 보기를 돌맹이나 나무 보듯 한다라... 그게 곧 삶이자 인생인 남자의 심경은 도대체 어떠할까? 다행히 사랑을 하고 있지만 불행인지 불만족인지 내 여자친구는 내 친구 얘기를 그렇게나 하고 또 한다? 그러면 어쩔 수 없겠지. 난 바쁘게 꽃 들고 쫓아다녀야 하는 고달픈 운명인데 누구는 뭐 호박이 제발로 굴러들어와, 그것도 평생 그렇다고? 그럼 하는 수 없지 않겠나, 뚜껑이 열릴 테지. 그분이 오신다구. 바로, 그분이! 오죽하면 그럴까. 그게 곧 삶이자 인생인 남자의 심경은 어떠할까? 정말 어떨까? 그대께서는 그분의 애처로운 마음을 헤아려 본 적이 있나요?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다네. 화장품이 내게 맞지 않아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그런 고초를 조금이나마 치른 일이 있다면 아마 잠시라도 알게 될 꺼야. 느낄 수 밖에 없어. 몸으로 느낀다구. 와 내 친구는, 그분들은 평생 이런 반응을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고? 여자들도 그래. 여자1이 여자2에게 그러지. 와 언니는 축복 받은 거야 완전 감사해야 해, 오오 저 가슴 아흐흐! 그처럼. 우광쾅쾅 액션 장르나 정확히 게임 같은 영화랄지 쾌락에 젖은 소설과 영상만 보는 게 아니라면 사람이 예술을 향유하며 즐김으로써 얻게 되는 크나큰 소득 가운데 하나 그것은 곧, 공감 능력의 증진이라네. 그런데 중요한 건 이건 참 묘하게도 현상 유지가 어려운 법, 올라가든가 내려가든가 밖에 없어. 갈 길은 둘 중 하나 밖에 없다구. 실력은 녹슬겠지만 왕년의 그 감이 어디 가겠나마는 그런 나만의 방식에 해당하는 최소한의 노력이 없다면 하루 이틀 지나면 내가 알고, 더 오래 지나면 남이 눈치채고, 심하면 뭐겠나 과장했을 땐 모세의 기적을 부르는 수도 있다네. 사람은 누구나 내 행복이 타인의 불행보다 더 중요할 수 밖에 없다는 어쩌면 비참한 진실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슬픈 존재이기 때문에 그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그래서는 절대 안되는 절로 숙연해지는 인간의 본분이라네. 남을 위로하고 으쌰으쌰 뭉치고 그녀에게 동조함은 모두 솔직히 따지자면 조금은 의식적인 행동 아닌가? 곧 무의식의 정반대! 즉 약간의 가식이자 예절. 잠깐 타인이 되보는 것, 그것이 꼭 고관대작의 무리와 어울리든 어쩌든 유서 깊은 오페라 극장에 가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저 잠깐 타인과 속 깊은 정담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겠지. 그 첫번째가 뭐겠나? 내 귀를 여는 것, 내 마음을 여는 것! 내 귀를 꽉 막고 잔소리를 노래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글쎄 잠시가 아니라 그처럼 평생을 살아야 한다라... 음... 한번 생각해 봐. 그런 남자가 곡을 쓰면 어떤 연가가 탄생할까? 아주 애절한 노래, 아니면 첫 번째 여자 두 번째 여자 세 번째 여자 쩜쩜쩜, 둘 중 하나일 수도 있다구. 그런 남자가 드라마를 만들면? 그러면? 모범적인 수작이 인기를 끌 수도 있는데 자기 좋아하는 거, 자기 하고 싶은 거를 드라마로 만들 수도 있어. 누가 죽고 어쩌고, 괜히 떠나고, 난데없이 여자들이 좋다고 쫓아다니며, 하늘에서 돈벼락이 쏟아지고, 좌충우돌 외계인이 침공하고 중구난방 작위적이며 개연성 없는 모험 이야기. 남자들이 원래 그래 바라는 게 그런 거니까. 반올림 1억부가 팔린 존은 끝에 가서 어쩐다 같은 작품, 남자들 중 몇몇은 물론 여자들도 꽤 좋아하지. 아 진짜 그거 내가 썼어야 했는데 아 정말 난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아무튼 대중은 그런 가벼운 오락물을 엄숙한 고품격 작품보다 훨씬 더 반기는 법이야. 명작과 함께 내 품격을 드높일 것도 아니고, 그저 시간을 떼우고 무료한 일상을 보내야 하니까 말이야. 그게 인생이데 뭘 어떡할 수 있겠나. 안 그런가? 질투가 절반의 존경이라고 어디선가 들었는데 글쎄 그보다는 '내가 최고'가 더 솔직한 표현 아닐까? 왜냐하면 예술은 곧 오락이니까. 따라서 난 예술은 예술이기를 바라네. 정치인은 정치를 하고 연예인이 예기를 뽐내는 게 정상이듯이. 재주가 많다면야 부르는 곳도 많고 호응도 크겠으나,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기 전까지는 부전공과 취미도 좋지만 많은 역할 가운데 사랑이 먼저 아니겠나. 모르긴 해도 아마 그 때문에 옛날에는 지금의 예술가를 광대라고 불렀을 수도 있단 말일세. 돈과 인기와 유행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면 다르겠지만 말이야. 그러긴 하나, 나도 어떻게 다시 그쪽으로 기웃거려 볼까? 아니 그냥 하던 거나 계속 해야지, 괜히 남의 떡이 커 보인다며 포지셔닝 바꾸기도 귀찮아. 아하 그러니까 왜 시간 때우기 예술품의 인기는 불변하냐고? 왜? 왜냐하면 남자들은 원래 삼류로 살고 싶으니까. 어째서? 사랑은, 사랑은 없으니까. 보는 눈도 많고 들리는 소문도 무시할 수 없고 무엇보다 말 많은 세상 아닌가. 나 좋다는 사람 많으면 인기 스타로 대접받지만 제약도 따르는 법. 그래서 우리 남자들은 그래도 전에 좀 활약했다면 전직 상비군, 국가대표 상비군 정도를 선호한다네. 무엇보다 남자끼리 사랑에 대해서 말해본 적이 한번도 없으니까 말이야. 한번도? 한번도! 그러므로 어쩌다 행운이 따라서 이름이 알려지면 사석에서는 따따부타 나는 만 명의 여자를 사랑했다 라고 하겠지. 그분이 작고하신 다음 시간이 조금 지나면 관계자일지도 모르는 분으로부터 진짜 몇 명을 사랑하셨다고 얘기가 나오게 되어 있어. 어디 업계 관계자께서 가만 놔두겠나. 그럴 리는 없지. 그럴 수는 없으니까. 답은 뭐 10분의 1 선을 넘었다더라 이러쿵저러쿵 어쩐다고 알려진다고. 얼굴 없는 가수의 1집이 멋졌는데, 당사자야 신비주의고 뭐고 그냥 당당히 음악으로 정당하게 평가받고 싶었는데 소속사에서 뭘 그렇게나 감추고 숨기고 비밀을 만들고 그러다 세월이 흘러서야 마침내 내 분야를 찾게 되는 수도 있을 테고 말이야. 이쯤 되면 주제가 외모인데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빠지면 또 한번 섭섭하지, 그럼. 잘생긴 사람에게 표를 주는 행동이 우를 범할 수도 있지만 외모에 비례하든 약한 상관관계가 있든 어쩌든 그 겉과 속이 긴밀히 연결되어 움직일 수도 있다는 어떤 면모도 읽을 줄 알아야 어른이라네. 사람들이 원래 그래. 불쌍해서 정치인에게 표를 주는 행동?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아. 전혀. 왜? 잘 먹고 잘 사는 게 최고거든. 누가? 내가! 모든 기준은 나고 모든 표준도 나니까. 사랑해서 떠난다, 참으로 일관되게 어려운 길을 가니까 연극표를 산다, 시간 되니까 또 무슨 새로운 이론이라면서 새 인문교양서를 쓰셨군 하여간 저 양반 알아줘야 해 훌륭하십니다 짝짝짝. 그런 법이지. 아 인생 아닌가. 사람이 사는 이 세상에서 흔히 보고 들을 수 있는 인간의 인생 말이야. 그렇긴 해도 인간이 사는 세상 그처럼 오묘하면서도 차가운 이치는 어쩔 수 없겠지. 빈자 가운데 그저 빈곤을 탈피하기만을 바라는 사람만 있겠나, 야망으로 똘똘 뭉친 사람 역시 존재하는 법. 월척과 대망을 바라는 이 내 소망이 뭐 나쁜 일은 아니지만 말일세. 어른은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예뻐하고, 노년은 청춘을 몸이 불편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을, 그 사이에 굳이 정확히 꼬집지 않아도 뭔가 심리적 차이 그냥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은 있지 않나 말일세. 하, 정말 이렇게 되고 보니 지난 시절 무섭게 생긴 인상을 부러워했던 게 거 참 쑥스럽구만 그래. 남자들은 겉으로 말은 안해도 뭐 좀 그런 게 있지. 허허허, 허세와 허영 사이에서 많은 방황을 하다 보니 뭔가 깨닫긴 깨달았던 것일까? 모르겠어. 통 모르겠다고. 하긴 그래도 친구 누나한테 공인 받은 다음 친구의 반응, 캬~! 1층 여자 목욕탕 2층 남탕 3층 독서실에서 독서실 멤버였던 동네 형들과 형 누구 집에 가서 비디오를 보고 나와서 그 형이 하는 말, 자 자 누가 누가 뽑혔을까 자 자 내기라도 할까 자 자 그건 뭐냐 그건 뭐냐 하면 누나들이 순위를 매겼어, 그런데 1위 2위 3위 밖에 없다 미안하지만 나머지는 다 꽝이다, 전부 꽝! 그래서 형들의 반응...... 크아~ 으아~! 그 형은 그처럼 말 많은 남자가 아니긴 했어도... 그 응답들, 캬~! 이때 1위를 해 본 사람 산술적으로 따져도 많지 않아.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 겸양 자족 인정 방관 열광 솔직함 가운데 대두되는 지표가 조금씩은 다를 테지만, 와 그때 기분은 정말 은하계를 내 손 위에 올려놓고 들었다 놨다 저글링하는 기분이었지. 캬, 남자, 어? 그게 다 뭐겠어? 딴 데 가면 난 완전 커피포트요 아마도 오징어가 된다는 말이고, 내가 백조 동네에 살지도 않았으며, 미운 오리 새끼도 아닐 테고, 내 인생은 전형적인 촌닭 인생이었던 데다 난 완전 촌닭 중의 촌닭이란 말이겠지. 그럼. 정말 그런가 봐. 그 관록을 어떻게 숨기겠나. 안 그런가? (...휴...) 어떡하다 자네 블로그에 올라온 새 글 감상을 얘기한다는 게 또 내 자랑으로 끝나버렸군. 아 나 이거 증말 거 원 참, 뭔 말만 나오면 내 자랑이라니,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구만 그래. 유령이 이 내 몸을 섭정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일세. 전에는 미처 잘난 체가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상상도 못했어. '나'란 말이 썩 불편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처럼 잘난 척 하는 나니까 친구들이 예전 내 말 한마디, 곧, 저것이 이쁜 척 하고 있어, 그 말을 듣자마자 웃었던 것일까.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다른 건 몰라도 나중 누구 주니어한테 과정 없이 갑자기 친한 척, 그러지만 않기를 바래야겠지. 무엇이 과거고 뭐가 현재인지 미래는 또 뭔지, 현실과 묵상과 망상까지 꿈과 몽상도 이젠 구분이 잘 안된단 말일세.
   이거 원 아줌마식 수다도 아니고 웬 이상한 푸념만 늘어논 듯 해서 많이 미안하구먼 그래. 자네 얼굴이 벌거니 영 말이 아니구먼. 귀까지 빨갛고 말이야. 자네 벌 스느라 고생했으니, 뭐 술값은 내가 내는 수 밖에. 그마저도 모른 체 한다면 난 정말 얌체는 커녕 험한 소리 듣기 딱 좋겠지. 아마 난 딱 거기까지인가 봐. 그리고 나는, 우리는 아마 오래 전에 좀 놀았던 게 틀림없어. 하오나 내게 있어 변화라면 예전만큼 '우리는' 화법을 구사하지 않는다는 것. 왜냐고? 왜냐하면 '우리는' 화법 말고도 쓸 게 많으니까. 껄껄껄! 그래도 좀 놀았더라도 남자니까 다행이지... 여자... 그만 그만. 실상 사람들 속마음이 그렇지 않나. 뭘 좀 아는 여자들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 줄 아나? 뭘 좀 모르는 남자는 그래. 여자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 줄 아냐고, 그러면서 상의는 셔츠를 입고 하의는 팽팽한 옷을 입는 남자를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무슨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하는 남자 말은 영 믿을 게 못돼. 따따부따 무슨 바보 머저리도 아니고 뭐 부러우면 지는 거다? 지가 무슨 복고풍 카피라이터야 뭐야? 그건 완벽한 하수의 어법. 부럽다가 부럽지 않다가, 숭상하다가 업신여기다가, 철들었다가 철들지 않다가, 햄릿형이었다가 돈키호테형이었다가 수비형일 듯 공격형일 듯, 생각이 막히지 않고 인습의 바닥을 엿볼 수 있는 그 모두가 자유자재로 가능해야 비로소 고수 세계의 문턱 주변에서 이제 방금 서성거리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지. 그럼.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나 마블 코믹스 만화에 나오는 신출귀몰한 첫번째 재주가 뭔가, 딱 하나만? 그래~ 변신이야 변신. 그거라고. 어디 무슨, 촌닭이라고 다 같은 촌닭인 줄 알어. 사람을 처음 보면 구두를 보네 어쩌네 고리타분하게 언제적 얘기를! 뭘 좀 아는 여자는 이런 남자를 좋아하지. 첫째 뭘 좀 아는 남자, 둘째 나만 언제까지라도 사랑해주는 남자, 셋째 뭘 좀 모르는 남자와 좀 놀아본 남자 가운데 하나를 뽑아야 한다면 고민없이 후자라는 것. 어리숙함이든 탁월한 학습 능력이든 황금이든 뭐든 그 모두를 다 갖추면 금상첨화고. 그러면 남자는 어떨까? 남자는 어떤 여자를 좋아할까? 곰을 선호할까 여우를 좋아할까? 뭐 고양이와 개의 장점을 모두 지닌 숙녀? 숙녀는 무슨! 남자는, 남자는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을 주지 않는다네. 먹밥을 뿌리긴 하겠지만 물밑에 뭐가 있는지 그 관상이 어떤지 몰라 모른다구. 관심도 없어. 사주와 팔자는 내가 다 만들어 줄 수 있거든. 뭘로? 말로! 소곤소곤 쑥덕쑥덕 이 말로써 말이야. 몇 마디 하고 중간에 운명, 몇 마디 하고 중간에 미련, 다시 몇 마디 하고 맟추기 쉬운 걸로 스윽 떠보면 그래. 와 오빠, 그거 어떻게 알았냐고! 여자는 다 그래. 그러니까 남자들도 그런 거 아니겠나. 잡은 물고기에겐 어쩐다? 그래 그렇다고. 남자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가, 남자는 어떤 관상의 여인을 선호하는가? 관심없어. 다른 거야 다 전망을 보며 견적을 산출하고 뛰어들 것인가 관망할 것인가 판단을 내린다지만, 아니 물밑이 통 보이지 않는데 그걸 어떻게 미리 정하고 사랑에 빠지겠나. 아니 그런가?」 


   3

   한 옛날 여자대학생부 1만 미터 기록보유자이며 중거리 3관왕이었던 러브양. 그녀는 왜 어느 대회에서, 본부석 앞 결승점 골인을 앞두고서 돌연 필드를 가로질러 곧장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가 화이트강으로 뛰어들었을까? 4위 골인이 유력해서였나 인성이 안된 3위의 뒤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을까, 아니면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기억했던 것일까.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있다. 가면 오고 밀면 당기고 들었으면 놔야 하는데 세상사는 변수라는 게 있나 보다.
   그런데 변수는 앵거스에게도 있었다. 마르첼로와의 콤비 공연이 점점 삐걱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꾸 서로 핑계를 대면서 자리를 비우니까 어쩔 수 없이 1인2역으로 공연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앵거스가 없는 날은 그나마 나았다. 앵거스 역은 식은 죽 먹기였고, 있으나마나 하나마나 있거나말거나, 대역도 필요없고 녹음 음원을 핸드폰으로 잠깐 틀었다 끄면 그만이었다. 사람 만큼 커다란 인형을 의자에 앉혀 놓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마르첼로의 빈자리였다. 마르첼로가 그럴싸한 변명을 대고 결석하면 앵거스는 완전 비상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그는 최신식 이어폰을 이용했다. 무슨 피부의 진동과 어떤 특수 작용 때문에 외부 소리나 내 목소리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채 음성 인식이 가능한 장비를 큰돈 주고 어렵싸리 구입해서 톡톡히 잘 써먹고 있었다. 그런데 연기가 어색했다. 마르첼로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앵거스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완전 마르첼로가 맡았던 역할은 장난 아니었다. 물론 앵거스가 맡았던 역할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그 긴 대사를 듣는 연기, 오히려 그게 더 고역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래서 앵거스는 공연 도중 이건 정말 아니다 싶어서 결국 한다는 일이 도망을 택했다. 한두 번 어쩌다 앵거스나 마르첼로가 공연에 빠지기는 했어도 그건 모두 한두 번에 그쳤다. 그래서 다시 둘이서 다정하게 공연을 하고 있는데 그는 공연 중 무작정 무대를 뛰쳐나갔던 것이다. 앞뒤 보지 않고, 관객은 퍼포먼스로 알든 어쩌든, 그는 무책임하게 떠났다. 그는 어쩌면 앵거스라는 정체성으로부터 잠시 떠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병적인 감수성이 도진 건지 새롭게 환상 증후군이 전면에 나선 건지 확실한 건 없지만 딱 하나, 그는 홀가분했다. 그는 해방감을 느꼈고,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산뜻한 기분이 길게 갈지는 아리송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전문 배우조차 기겁할 만한 긴 대사를 어떻게...  또 그것을 내내 듣고만 있어야 하는 역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능력 밖의 일이었으니까.
   떠나는 방법도 참 여러가지다. 그래도 참신한 구실인가. 전과 비교했을 때는. 이렇게 일을 벌인 다음 앵거스는 흥미진진한 모험에 빠지지도 않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환상을 체험하지도 않았다. 유치한 사랑도 물론 없었으며 낯선 도시에 정착하여 새 삶을 시작하여 추리소설 낭독 모임에서 누구를 만났다더라? 그런 거짓말 같은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당연히 앵거스는 저주 받은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방탕 방황 퇴폐 문란 천재성 영감 주색 자유분방한 광란과는 거리가 먼 해프닝만 있었을 뿐이다. 즉 옛날에 가출했을 때처럼 버스 타고 아무 도시에 가서 걷고 먹고 그곳의 시내버스를 타 본 다음 다시 자기 동네로 돌아오고, 독서실에서 하룻밤을 잔 다음 막노동을 하루 해서 그 돈으로 백화점에서 모자를 샀던 기억과 거의 흡사한 용기 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학교 친구한테 사찰에서 잤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녀석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에 그는 막노동에 도전했다가 1시간 후 어디 아픈 데가 도졌다면서 죄송하다며 현장에서 도망갔고, 학창시절에 품었던 이상과 꿈도 회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공연했던 소극장으로 돌아왔다.
   「앵거스. 천사의 권위인가 전문가의 위선인가. 모호하다 어째. 난 늬가 공연 중에 도망갈 줄은 미처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 중요한 용무는 봤고? 고로 까마득한 추억을 되찾고, 그토록 아름답던 사랑과 재회하기라도 했냐? 왜, 대체 왜 도망갔냐?」
   「왜냐고? 그냥 겁이 났거든. 난 그냥 재미로 연극을 해 보는 건데 혹시 이러다 평생 연극만 하는 건 아닌가, 그래서 난 결국 유명해지고 그런 말을 듣겠지. 아아 앵거스가 늙었어! 라고. 뭐 앵거스가 늙었어? 이 양반이 지금... 워 워 워! 때문에 난 별안간 발생한 공포심을 무마시키고 싶어서 떠난 거야. 미안. 나도 이런 내 행동이 비겁하고 못났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뭐랄까 불운과 비운을 미리 겪어야만 찬란한 내일이 눈부신 미래로 바뀌지 않을까, 뭔가 그런 연보라빛 마네킹의 송가가 느껴졌다고 하면 그건 너무 내 생각만 하는 거겠지?」
   「잘 아시네! 걱정도 팔자다. 웃기지도 않다고. 아무튼 공연은 잘 마쳤어. 보이드 불러서 즉흥 원맨쇼로 마무리했어. 그런데 오히려 반응이 더 좋던데. 보이드가 순식간에 관중을 꼬시고 부추기니까 아마 다 넘어갔나 봐. 치사한 귀빈들 같으니라고.」


   4

   아마도 괴상한 전위극의 장기 공연은 누군가에게 별로 탐탁지 않은 호사였을까? 앵거스는 생활고에 허덕이지도 않았고 나름 개구쟁이 호기심도 잘 돌보면서 살았지만 뜬금없이 그는 두 번째 공연 사고를 내버렸다. 관현악 공연장 무대에 난입한 강아지도 아니고 왜 자꾸 연극을 하다가 중간에 도망을 갈까? 병인가? 한 번이야 그럴 수도 있다지만 두 번이 되니 이젠 이건 중증이었다.
   앵거스가 도망가서 어떤 경험을 했었나는 불문에 붙이고, 왜냐하면 비밀도 필요한 법이니까, 돌아와서부터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이와 같다.
   「앵거스. 이번엔 또 왜 도망갔냐?」
   「글쎄. 난 정말 도망가지 않으려고 했거든.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된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 이건 어쩌면 머머증이 아니라 새로운 신드롬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봤다네. 아무튼 자세한 얘기는 말할 수 없고, 이제 다시는 도망치지 않겠네. 진짜, 진짜로. 믿어주게나 친구.」
   「판만 벌려놓고 수습은 깔끔하시다? 입심 좋은 남편감이군 그래. 표류 그만하고 이제 그만 허황된 꿈에서 빠져 나오시지. 앵거스, 너 그거 병이야. 일병이라고. 네가 지금 사춘기니? 아니면 뭐 도망 중독이라도 걸렸냐? 것도 아니면 차라리 필사적으로 쾌락에 매달리던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제나저네나. 대체 철은 언제 들래? 어쨌든 기억해 둬. 넌 내게 두고두고 잊지 못할 놀림감이 됐으니까 말이야.」
   「마르첼로. 마음에도 없는 농담 하지 말게나 이 친구야. 바보의 행진 천재의 후진 괴짜의 도약 가운데 내 역할이 꽤 컸다는 걸 이제 그만 인정하라고.」
   「얘 아직 정신 못차렸네. 아 상태가 영... 그런데 있잖아. 웬 연예기획사 사장이 다녀갔어. 늬 극본 사겠다는데! 출판권은 물론 공연권까지 모두. 또 무슨 인접권인가 뭐라면서 법률 용어도 말했는데 그건 잊어먹었어. 공연도 전체를 모두 녹화해 갔고. 게다가 이 말을 꼭 전해주라고 하던 데. 아무리 은둔형 신비주의자를 고집해도 자기들이 강제로 늬 작품을 띄우겠다고.」
   「너 뭐 잘못 먹었냐 아니면 잘못 들었냐? 허풍 떨지 마!」
   「장난 아니라니까. 얘가 사고도 자기가 치고 성내는 역할도 자기야? 아 나 정말! 아무튼 난 말 전했다. 알았지? 나중 후회하지 말고.」


   5

   마르첼로는 비록 연극이지만 하도 앵거스한테 내 블로그에 올라온 새 글을 읽어봤냐는 물음을 주기적으로 들으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앵거스의 블로그를 읽어야 할까, 앵거스는 블로그를 쓰는데 나는 연설도 명문도 사랑까지 내가 직접 할 수는 없고 언제나 간접 경험만 해야 할까, 유치하게 간접 키스했네 어쩌네 난 뭐 애들 장난 같은 드라마나 보고 있으라고? 마르첼로는 결국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누군 뭐 왕년에 잘나간 적 없었나 라면서 마르첼로는 자기 블로그에 글을 썼다. 그런데 그게 하필 주제가 정치였다. 것도 그냥 막연히 정치. 뜨아! 그리하여 그는 블로그에 글을 썼다가 지웠다. 그러나 그 글은 발행됐다가 지워졌고, 그러므로 당연히 앵거스는 마르첼로 이 녀석 다 커서 작문 연습을 하고 있네 그러면서 여유롭게 웃으면서 완전 좋아했다. 왜냐하면 마르첼로가 쓴 정치에 관한 습작은 완전 작문 연습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 글을 읽고 얼핏 드는 생각은 이랬다. 마르첼로 이 녀석 혹시 글에 대한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뒤늦게 깨우치는 건 아닐까? 그런 의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앵거스는 왠지 모르게 마르첼로가 쓴 글이 훌륭해 보였다. 또 어딘가 모르게 마르첼로가 글로써 나중 대성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작품 구상에 들어갔다. 그런 다음 새로운 착상이 떠올랐는가는 열외로 하고 마르첼로가 정치? 정치에 대해서 어떤 글을 썼는지 살펴보자면 이와 같다.
   좌우간 정치가 업이라면 몰라도 직업이 아닌 이상 정치관이 일평생 어느 명화의 비뚤어진 표정과 비슷하다면 그건 뭔가 이상하다. 그건 정상적이지 않다. 거긴 어디 텃밭 어디는 무슨색, 그럴 수는 있는데 그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시간과 인생을 초월해서 일방적이다? 그건 비정상이다. 그래서 그건 왜 지역과 사람이 그럴 수 밖에 없었나를 유추해 봐야 한다. 노력 대비 결실이 미미하거나 일하는 방향에 응하는 평가가 합당하지 않을 수도 있는 분야가 정치인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운 따라 피선거권자가, 복권 사듯 일부 선거권자가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며, 왜 불합리한 결과는 반복되는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정치는 순전히 스스로 좋아서 곡을 쓰고 흥이 나서 사랑의 춤을 추는 일과 달리 개인의 행복 추구와 나의 천직 사이에 등호가 성립하기 힘든 분야라지만 아무리 봐도 정치가 제일 이상한 분야인 것만 같다. 왜냐하면 30년 50년 정치인으로 산 다음 나중에 보면 정치인은 스포츠 선수와 아주 흡사한데 동일하지는 않고, 정치인은 연예인과도 비슷한데 또 같지는 않고, 정치인에 대한 말은 많겠지만 정치인 스스로 나는 무엇을 잘못했다 라는 말은 평소에 거의 듣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작가야 잔칫상은 출판계에서 준비하고, 배우야 조명은 연예계에서 비춰준다. 그런데 정치인은 시대 때문인가 몰라도 점점 오락산업과 밀접히 가까워져만 가는 듯 하다. 유달리 운이 좋든 저평가 받든 정치인은 그렇다 쳐도 피선거권자를 심판하고 감독해야 할 선거권자는 또 어떤가? 독실한 신자라면 종교니까 그분께서 어떤 기도를 드리든 그분의 자유다.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 역시 새로움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일관되든 노선을 바꾸든 정치 후원금을 납부하는 것도 아니고, 정치-사회-경제는 관심 부족인데 반해 정치를 로또 복권 사듯 인식한다는 것은 내 엄정한 기준이 어떻건 그건 문제가 있다. 어느 지역이 어떤 사람이 정치에 대해서 내내 빈틈없이 일방적이다? 비약하자면 그건 시험 문제 나오기 전에 답안지 먼저 작성하는 것으로 비유하게 만드는 일은 아닐까? 따라서 왜 그분은, 대체 왜 그곳은 그럴 수 밖에 없었나를 심도 있게 생각해 보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 그런 노력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기원전 몇 년의 어떤 군중이나 현재의 총명한 대중이나 거기서 거기일 뿐, 별 차이는 없게 될 것이다.


   6

   앵거스가 다시 도망가기를 감행했을까, 감행하지 않았을까? 앵거스는 도망가지 않았다. 제2의 자아가 명령하고 나는 그 사주를 받아 도망간다, 그런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연극하다가 도망가면 돼 안돼? 안된다.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없이 이성과 감성 모두 안된다에 따른다. 밀가루를 닮은 약이랄지 뭔가를 취한 다음 상대방 얼굴이 당나귀나 코불소로 보이는 그런 일은 없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그건 아마 세 가지 경우 가운데 하나에 해당될 것이다.
   첫째, 진짜 당나귀 옆에서 피로회복제나 청량음료를 마셨으니까 그걸 마시기 전이나 후나 당나귀 면상이 당나귀 면상으로 보이는 일.
   둘째, 매우 드문 확률로 기가 막히게, 절묘히 약발이 받아서 진짜로 사람 얼굴이 당나귀 용안으로 보이는 일. 이건 거의 하늘이 천명해야 가능할 일일까, 그건 별님에게 물어보자. 자, 그리고 셋째!
   셋째, 이게 중요하다. 셋째는 자줏빛, 살구빛깔, 황금색, 칠흑처럼 검은 앵무새와 치타와 하마가 아닌 이상 무색하여 어쩔 줄 몰라하며 기뻐하는 일은 드물다는 것. 곧 사랑에 처음 빠질 때의 기분은 그 그윽하며 세련된 분위기가 더 최고조로 길이길이 이어질 수도 있으나, 보통은 고상함의 반대편으로 근사함의 반대말로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쉬운 예로 술에 제일 처음 취해서 천장이,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경험, 장래 두 번 다시 경험하기 힘들다. 엇비슷하게 재현될 수는 있으나 진짜 환상에서 기분만 환상으로 변한다. 밀가루와 케첩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자세히는 몰라도. 모르긴 몰라도. 교묘한 만족을 갈망하건 군침을 꼴깍 삼키며 도파민이 분비되건 어쩌건, 순조롭고 이쪽 저쪽 모두 따졌을 때 중독되어도, 설혹 그것이 병이 된다고 할지라도 아마도 무해한 일이 하나 있긴 있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우주도 나를 위시하여 빙빙 돌며 기쁨의 시간이 춤을 추는 일. 그것이 반복되어도 약물중독도, 정신병도, 타성도 권태도 불행도 아닌 일. 전혀. 그것은 무엇일까? 무엇이겠나, 사랑이지! 또는 건전한 방법의 몰입감 같은 거.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사랑에 빠진다. 매일. 여기를 봐도 사랑 저기를 봐도 사랑. 오늘도 사랑 내일도 사랑. 하루에 최소 12번. 그렇게 날마다. (하이파이브)! 우리는 변화가 필요하다면 몰라도 좌우명은 일단 그것이다.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을 주지 않는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별 이미 땄는데 뭘 또 따나? 안 그런가? 그러나 숙녀의 엄격한 잣대는 짐짓 시치미떼면 되나 안되나? 안된다!
   서론이 길었는데 볼론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셋째는 누군가의 면상이 당나귀로 보인다면 그건 처음 1번만 그렇다는 것. 하지만 예외도 있다. 가령 어머나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공부하는 게 날아갈 듯이 즐겁네? 그런 일. 이를 테면 몰입. 일하는 게 따분하고 지겹고 재미없는 게 아니라 바로 일이 미치도록 좋네?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건 일이라구? 그야말로 미친듯이 행복하게 일하네? 그런 거. 또는 날마다 생일 잔치 같은 조증을 타고난 듯한 응? 좀 많이 부유해 보이는 백치미 가득한 미녀가 나 좋다고 날이면 날마다 쫓아다니네? 전화하고 또 전화하고 내가 이따 전화할께 또 불러내서 고기 사주고 이러쿵저러쿵. 난 눈이 단춧구멍 같은데 말이다. 바로 그런 거! 그런데 이 얘기를 왜 했지? 아, 앵거스는 바로 이런 사정들을 고려했을 때 이제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았다, 를 설명하기 위해서 했다. 따라서 앵거스는 이제 무대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오렌지색 환상과도 같은 일에 당도하고 말았다.


   7

   신비론.
   앵거스는 아직 신비론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지는 못했으나 그 말만큼이나 눈부신 한 여인을 만나고 말았다. 그녀는 어쩌면 천사의 날개와 악마의 구두가 공존하는 요정이 아닐까. 그런 기분 때문에 앵거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자상한 남아의 제정신은 어디 무지개 너머 난장이 나라로 놀러가버린 게 아닐까, 싶도록 이성을 마비시키며 명석한 지능이 묘연해지는 현상이 발생할 정도였다. 짝사랑에 저절로 빠져들게 만드는 남자가 있다면 그녀 역시 공손한 애정으로 사랑의 찬가를 절로 부르게 만드는 숙녀였다. 바로 누구에게나. 그러나 앵거스는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왜? 그는 전문가니까. 진짜로 그는 연극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으며 공연을 하고 있지 않나. 저번에 잠깐 소란을 피우기는 했지만 이제는 도망가도 재미없고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은 그였다. 그래서 앵거스는 수다스럽고 설레는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마디했다. 그런데 때가 때인지라 마르첼로는 당황했다. 지금 그 긴 명대사를 읊고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연극 제목이 바로, 긴 긴 명대사였다.
   「침착해야 한다 침착해야 한다.」
   이때부터 천재 마르첼로는 버벅대기 시작했다.
   「난 생맥주를 마셨는데 그 둘은 그걸 마시지 않대~! 작은 맥주컵도 아니고 아 그런데 그게 500cc 였나 1000cc였나. 1500cc는 아닐 꺼 아니야.」 그처럼.
   그러다 마르첼로는 대사를 그대로 옮기지 않는 즉흥연기에 들어갔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물론 헤어졌지. 끝날 수 밖에 없는 사랑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다음에는? 물론 남자는 탕자이자 난봉꾼에 도박사로 이름을 날렸고, 여자도 나름 여자의 인생을 살았지. 그런데 재미난 게 뭔지 아나? 세월이 흐른 뒤에 말일세, 아 글쎄 그 둘이 다시 만나더라구. 다시 사귀기 시작했냐고, 재결합 같은 거? 걔들이 무슨 연예인인가 연애소설 주인공인가? 젊음의 나이트클럽 풋사랑도 아니고, 핸드폰 데이트 앱으로 가볍게 만나서 오직 단둘이서만 만나다 헤어지는 가벼운 만남도 아니고, 불륜도 아니고 열애도 아니며, 사랑이라 부를 수도 없는 이상한 재회만 틈틈히 이어졌다는 후문이 전해지더군. 남녀의 애정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마르첼로는 바로 이렇게 악보에서 외도를 했다가 어정쩡하게 어떻게 어떻게 해서 다시 극본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간택을 해도 하필 어떻게 그런 일을... 그러게 말이다. 오, 어머나! 환청인가 에코인가. 내 말이?
   천재 마르첼로의 실수를 유발한 앵거스의 독백은 바로 이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곧 그날 연극을 보기 위해 모인 구름 같은 애호가들 덕분에 모처럼 객석은 발 딛을 틈이 없었다. 일명 만석 매진. 보통은 최소 1명에서 많아야, 많아야... 숫자를 말하면 슬퍼지니까 넘어가자. 그런데 참 이상하게 그날은 객석이 꽉꽉 찼다. 저번에 무슨 연예기획사 대표가 다녀갔다는데, 혹시 그것과 관련이라도 있을까? 그걸 내가 어찌 알겠나. 다만 아는 건 이 정도. 하도 관객이 없길래 앵거스가 한마디 했겠지.
   「마르첼로. 만석은 언제나 기대할 수 있을까? 난 통이 작지도 않고 속 좁은 남자는 아니라구. 카드 게임도 큰 판을 좋아하고, 피자도 큰 거, 꿈도 대망, 물고기는 대물에 쇼핑 목록도 만선에 여자라면 풍성한 여복? 여자는 어떻게 아담하고 앙증맞고 귀엽고 응? 그런데 이게 정말 뭔 얘기야? 아, 환호성에 목마른 이 내 청춘이여! 마르첼로, 천재 마르첼로여. 정녕 기립이란 낱말 다음에는 무엇이 와야 할까? 박수? 묵념하다?」
   「일어서긴 뭘 일어서? 일어서면 앉아서 하는 걸 못해. 공부 같은 거. 누워서 상상하거나 탄복할 만한 꽃 한송이를 꺾을 수도 없다구.」
   한편, 신비론에 절묘히 일치한다는 아가씨와 만석 공연은 대체 뭔 상관이 있을까? 상관관계가 있다. 연관도 그런 연관이 없다. 왜냐하면 숙명이라는 간지러운 단어로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저 하늘의 구름을 다정한 솜사탕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까. 그건 바로 공연 관람자가 100퍼센트 눈이 작은 남자였기 때문이다. 100퍼센트 눈이 작은 남자로 객석은 꽉 찼다. 꽉꽉. 그런데 자세히 보니 100퍼센트에서 1퍼센트랄까 뭔가 은근히 오점이 섞인 듯 했다. 찬찬히 살펴보니 눈이 작은 남자가 100퍼센트는 아니었던 것이다. 무릇 눈이 덜 작은 남자도 간혹 있었고, 나비넥타이나 선그래스도 있었으니까. 심지어 자타 공인 진짜로 단춧구멍처럼 눈이 작거나 갸름한 사람도 최소한 절반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건 너무 심했다. 어떻게 반올림하면 전 관객이 모두 단춧구멍이라니! 물론 사적인 표현의 남용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그런데 우연치고는 믿지 못할 우연인지 한 여자가 있었다. 애지중지 아껴온 비밀을 얼렁뚱땅 발설하게 만들 것만 같은 우연의 일치 때문에 앵거스는 그녀를 운명적으로 주시하게 됐다. 그녀는, 그 전원 단춧구멍처럼 작은 눈망울의 소유자들 틈에서 군계일학격으로 존재했다. 맞다. 진짜로 그 말마따나, 군계일학! 객석 중간쯤에 우아한 자태를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매력이 발산되는 한 아가씨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조용히. 다소곳이. 착하게.
   그래서 이건 기막힌 후광 효과를 불러왔다. 한오라기 터럭도 섞이지 않은 무서운 흑표범이 눈동자를 힘주어 뜨면 이와 같을까 다를까. 서술자의 표현이 아니라 사석에서 여자가 말하는 어법에 따르자면, 객석은 온통 단춧구멍 남아로 가득찼는데 어떻게...! 서술자의 표현이 아니라 사석에서 여자가 말하는 어법에 따르자면 단춧구멍 99에 절세미녀 1명이란 말인가?


   8

   단춧구멍 단춧구멍 하면 진짜로 눈이 작은 사람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이참에 아예 집고 넘어가자. 남자들이여, 돈 싫고 명예 싫고 숙녀들의 인기를 한몸에 독차지하기를 진정 싫어하시나요?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로 호사와 풍요와 행복과 기쁨을 싫어하신다면 그걸 경하드려야 할지 만류해야 할지 분간이 안되는 일이다. 어디에 수소문할 필요도 없고 남자들끼리 으쌰으쌰하는 것처럼 사석에서 사적으로 만나보고 친해지면 알게 된다.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라는 것을. 일단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보는 혜안에 따르자면 그렇다. 으아~ 캬~ 남자~ 남자~? 여자도 똑같다. 여자도 똑같다고. 여자를 안다는 것이 그거다. 남자는 허세 여자는 허영의 차이도 상황 되면 희석된다. 분위기 갖추어지면 알고 보면 남자든 여자든 허세와 허영을 양쪽에 꿰차게 되는 것이다. 최소한 여자는 여성잡지1에서 2로 변하지 그 반대 양식은 단지 허구에 불과하다.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지라도 말이다. 여자는 다 그런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다. 여자는 다 그래. 여자에 대해서 블로그에 누누히 설명을 했지만 해도 해도 끝이 없지만, 여자~ 캬~ 여자, 참으로 말 못할 사연도 있지만 때로는 길게 해명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극명하게 딱 하나 단어 하나로 그 모두는 끝나기 때문이다. 구구절절한 해명과 심각한 논평을 모두 수줍게 만들어버리는 그 단어가 대체 뭐냐. 뭐냐 하면 바로 단춧구멍이다. 그러나 꼭 기분 나쁠 필요는 없다. 사람은 돈이 많을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고, 키가 큰 사람이 있으면 뚱보도 있고 핸드폰을 사는 사람이 있으면 만드는 사람도 있으니까. 뚱보란 말도 똑같다. 뚱보라고 해서 얼마나 놀리고 비난에 차별에 야유에 해당하겠나. 오히려 친하면 친할수록 뚱보라 부를 수도 있다. 괜히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뚱보라고 하지 않아도 이미 후덕한 사람은 이미 그 말을 한두 번은 들어봤기 때문이든 유치원에서 배웠기 때문이든 이미 안다. 단춧구멍도 똑같다.
   그러나 사석에서는 다르다. 뚱보와 단춧구멍이 친할 수도 있는데 우정과 사랑은 또 다르니까. 단춧구멍의 우정을 받아주지 않으면 에게~ 응애~ 난리난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원래 자기 단짝이었는데 새로운 우정이 나타나서 삼각관계도 아니고 나만 낙동강 오리알이 되버렸다? 슬리퍼 찍찍 끌고서 황급히 택시 타고 현장에 쫓아간다. 뭘 부수고 소리 지르고 트집 잡고 없는 생트집가지 잡고 여자친구한테 쟤 단점을 알리고 비난하고 찌르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 남자의 질투? 워-워-워!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와 만화영화를 보고 자란 남자들 세상에서 경쟁 심리를 알고 우정과 사랑의 차이점에 대해서 평생 고심해보면 남자의 질투를 알게 된다. 괜히 사랑은 일부일처제 우정은 일부다처제라고 한 게 아니다. 우정도, 때로는 우정도 일부일처제일 수도 있어서 하는 말이다. 오히려 사랑은 평생 길게 유지되든 어쩌든 사랑은 대체로 변한다. 그러나 우정은 사랑과는 조금 다르다. 가까운 우정은 평생 간다. 자주 볼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그게 우정이다. 여자는 친구끼리 대화를 많이 하는 반면 남자는 친구끼리 사랑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잘 지킨다. 남자와 여자 간에 우정의 형식은 다를 수 있지만 남자 여자 모두 우정이든 사랑이든 내가 누구에게나 내가 어디서나 나는 1번이고 싶은 마음은 똑같다. 이게 뭔가? 본능이자 인기다. 상업적 인기가 아닌 사석에서 진짜 웃기고 만나고 싶고 반기는 사람이 많다는 바로 그 인기. 그래 삼지창 같은 거. 도톰한 목소리 같은 거. 사랑은 끝이 있고 우정은 끝이 없다. 마음에 안 들면 바꾸는 건 똑같다. 그래서 어쩌면 반대로 사랑이 일부다처제요 우정은 일부일처제일 수도 있다. 그건 곧 현실과 이상의 절충선은 우정도 사랑도 모두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단 말인군, 오 저런! 단춧구멍. 우정과 사랑에 대해서 나는 평생 적극적이어야 하는데 왜 나만 적극적이어야 하는가. 단춧구멍. 우정과 사랑에 대해서 주로? 거의? 타인이 내게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그분의 심정을 잘 모를 수도 있다. 이해한다고 말은 한다. 그분의 결별과 이별과 실패 그리고 어떤 짠함과 뭔지 모를 심심함을 위로하며 함께 놀 수도 있다. 그러나 위로를 받고 행운이 따르더라도 그분의 무의식에는 언제나 그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잔존한다. 항상 그리고 평생 잔존한다. 사랑에 대해서 나는 평생 적극적이어야 하는데 왜 나만 적극적이어야 하는가가. 왜냐하며 내가 적극적이지 않으면 내게는 우정도 사랑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많이 크다. 사람 봐 가면서 꽃 들고 쫓아가고 기다리며 귀찮게 하고 시간 쓰고 돈 쓰고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느냐 음 그렇게 사람 봐 가면서, 그게 아니라 기다리기만 하면 호박이 넝쿨째 제발로 굴러오느냐.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늑대가 물고기일 수도 있다. 그래서 늑대는 사람 봐 가면서 적극적이어야 하는 운명을 간직한 물고기와 화사한 꽃밭에서 여기 저기 거기 어디나 서성일 수 있는 꿀벌로 나뉘는 것만 같다. 늑대는 늑댄데 물고기과냐 꿀벌꽈냐. 아아 쉽지 않다. 쉽지 않아. 단춧구멍. 그럼 여우는? 잘 아시지 않는가!
   저분은 왜 그럴까, 긴긴 시간 깊게 생각을 해 보면 희미했던 까닭이 조금은 선명해진다. 사랑도 아닐 텐데 왜 저 단춧구멍 친구는 내게 그토록 집착하고 집요함으로 살갑게 굴었을까, 쟤는 왜 저렇게 천성이 냉소적이며 속에 숨겨논 얘기를 더 꼭꼭 숨기며 인터넷 뉴스가 삶의 전부인 것처럼 핸드폰만 쳐다보는 의뭉스러운 삶을 사는 걸까, 게임은 싫어하는데 게임 같은 작품만 열광하는 저 친구는 대체 왜 항상 매사 까칠할까. 관찰! 관찰하면 선연히 들여다보면 답 나온다. 그래도 때 이른 상심은 사양할 것. 왜냐하면 남자는 야망과 꿈이 있기 때문이다. 여자에게는 수다와 상상이 있듯이. 그런데 사랑의 나비와 황금의 이상이 어디 쉽게 손에 잡히던가. 그래서 로또 복권의 인기는 영원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랑프리를 꿈꾸지만 결과는 매번 꽝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꽝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남자는 그래도 사람과 상황 봐 가면서 사랑의 설을 풀고 연정의 즉흥 시를 읊고 춘몽을 노래하며 애모의 씨를 뿌린다지만, 그래 꽃의 아름다움을 찬미한다지만, 수선화도 제비꽃도 튤립도 장미도 한송이 들국화도 꽃잎은 시들 수 밖에 없다는 점. 잡은 물고기한테 밥을 주면 되지 왜 밥을 주지 않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숙녀들은 다정하고 친절하며 자상한 남자를 좋아하지만, 문제는 그 남자는 숙녀들한테 인기가 많다는 것. 젊을 때 안 이쁜 여자도 있나 뭐, 늙어 봐라, 늬들도 그런(늙어서 어쩔) 때가 올 것이다, 늬는 안 늙을 줄 아냐, 라는 말을 누가 언제 왜 하는지 모를 수 없다는 점 역시 우정 및 사랑과 밀접히 관계된다는 점. 우정과 사랑 가운데 과연 무엇이 일부일처제고 뭐가 일부다처제인가, 흥겹고 기쁘고 좋아서 나아가 궁금해서 하는 말이니 오해는 금물. 사람의 생각은 각자 다 다르지만 한 사람의 생활과 심리를 분석해보면 답 나온다. 자주 연락하는 친구와 지인등을 분석해보면 타순처럼 1번부터 9번까지 딱 답 나온다. 1번부터 9번은 절대 동등할 수 없다. 차리라 그걸 감안하고 인정하는 게 편하지 남자 대 남자니 우정이니 어쩌니 눈치 없이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자기만 힘들 수도 있다. 학교에서 뚱보였고 사회에서 '우리는' 화법만 구사하는 철부지로 낙인찍히며 여자한테는 단춧구멍 첫인상으로 동네에서만 유명하더라도, 아무리 투정하고 불만에 응석이 날 괴롭혀도 어딘가에는 나를, 그대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TV를 틀어서 다큐멘터리와 뉴스를 보지 않아도 되고 병원에 찾아가지 않아도 아는 일이다.
   그리고 잘 찾아보면 나만의 재주와 나만의 특기랄지 소질이 있게 마련이다. 굼뱅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는 수도 있다. 첫술에 배부르랴. 다 팔자소관이다. 그걸 골라서 태어나는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지만 다만 차이라면 이 정도다. 0에서 출발해서 안락한 삶을 사느냐 마느냐, 토끼 같은 자식과 여우 같은 마누라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느냐 희망하느냐, 인생관이 있냐 없냐 인생이 멋지냐 멋지지 않냐, 소소한 기쁨과 잔잔한 행복에 만족하느냐 떠나느냐. 하오나 현재의 평판이야 훌륭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으나 시간이 지나서 아 그 사람 하고 떠올리면 '괜찮았어'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인생도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두 마리 토끼 이론은 말 그대로 이론이니까. 인생을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하나를 쥐면 하나를 놓아야 하는 게 바로 인생이다 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B.C.356~B.C.323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던 알렉산더 대왕쯤은 평이 괜찮네, 그럼 일을 참 많이 했다는 소리네 그러면 통과, 그냥 현세에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왕으로 태어났다면? 궁녀가 몇 명이든 그건 확률적으로 희박한 일이다. 비율은 다를 수 있으나 1을 위해 99가 자유와 평등과 행복을 제한적으로 감내해야 했던 시대가 바로 옛날이었으니까. 노예로나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꿈도 야무지다. 꿈만 크면 삶이 어떻다, 어른들은 모를 수 없다. 궁녀와 애첩? 꿈 깨고 냉수 마시고 속 차리는 게 차라리 나은 일이다. 단춧구멍, 단춧구멍이 그거다. 금빛 삼지창과 풍요 안온 기쁨 부귀영화 재미 즐거움 미소 행복과 함께 하는 동메달 같은 삼류 인생, 그 가운데 은빛 단춧구멍이 있을 뿐이다. 단춧구멍에 해당하는 크고 작은 열등감은, 적어도 '난 부럽지 않아' 같은 자존감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쉬운 예는 타인보다 나를 본보기로 삼는 게 제일 편하다. 나! 그리고 그대! 지난 일기장이 있다면 먼지를 털어 그것을 읽어보자. 지금 다시 읽어보면 완전 빵 터져야 정상이야. 왜냐하면 그때 쓴 일기는 완전 다 욕이던가, 완전 소녀 감성이었던가, 아니면 시시한 투정과 온갖 욕망을 주로 1차적으로 기록한 초딩 일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기록을 남기지 않았거나 버렸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 그리고 거울을 보자. 나는 눈도 튀어나왔고, 몸의 비율도 썩 뛰어나지 못하며, 가난한 데다 심지어 줏대도 없다. 더불어 에로비디오도 더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미 많이 봐버렸다. 그래서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남자가 되어버렸다. 으흐흐흑 으흐흐흑. 어떤 여자가 이런 남자를 좋아하겠나. (하여간 엄살은!) 어쩔 땐 이상한 상상도 해 봤고, 때에 따라 내가 좀 더 험상궂게 완전 무섭게 생겼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숙녀를 생각하면 또 미소년의 외모가 부러워서 잠을 설치기도 한다. 어제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뜬눈으로 긴긴 밤을 지샜다. 그런데 꿈은 꿨다. 내용은 잊어먹고. 무엇보다 난 살면서 그동안 공식적으로 여자와 사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사귄지 1일 2일 벌써 1년 2년 그런 거도 못해봤고, 그걸로 넌 지금껏 뭐했냐 라고 누가 날 꾸짖어도 낯선 타인이 윽박지르건 친구가 우린 뭐 클래스가 안되냐고 짜증내건 넌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라고 걱정해주건 어쩌건, 이젠 이제는 다 귀찮다. 반박하기도 피곤하고 게다가 모두 사실이지 않나. 그걸로 날 비하하면 대체 얼마나 비하하겠나. 그냥 지나가는 거다. 또 반틈은 빈말이자 가식에 진심은 무슨 거의 무관심을 예의로 포장한 경우가 태반이다. 그게 다다. 부러움 가운데는 이상하게 그런 거도 있다. 하루에 딱 3시간만 잠자는 단상성 수면을 타고난 사람. 열심히 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남이 9시간 자는 거랑 똑같다는 3시간도 많이 잔 거라는 수면자 말이다. 하루 평균 2~2.5시간 수면이 보통 사람의 8시간과 동일한 효과를 나타내는 정도. 그렇지만 11, 12시간 자는 사람도 있고, 시간이 많으니까 긴긴 여유가 좋기는 좋겠으나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을 수 있으니 그냥 중간이 좋은 걸로. 때로는 그분들이 부럽지만 난 현재 잠 원없이 자며 게으르게 살고 있다. 또 미술계에서 작품 총량 및 총 가치가 파블로 피카소를 1위로 알고 있었는데 연평균으로 따졌을 때 빈센트 반 고흐가 있으니 꼭 그렇지는 않다, 촌스럽게 이런 소식에 자연스럽게 눈이 간다. 그리고 나는 학벌도 고2 초반부터 공부는 놔버렸고 고3 내내 거의 전교 꼴찌 수준이었으니 삼류대학도 의미 없고 중졸이나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난 친구를 놀리면 기분이 좋다. 기분이 많이 좋다. 그런데 친함의 척도를 놀리는 걸로 따지는 친구 사이만 있지는 않고 몇몇 유형으로 나뉜다. 맞다. 난 기억나는 3대 길티플레져도 있다. 난 정말 그런 허접하고 덜떨어진 머저리 실용주의자다. 구제불능이다. 집안도 비리비리하고 뭐 하나 변변치 않지만 반론이고 뭐고 다 귀찮다. 기분 나쁜 비판을 들어도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일이 아닌 사안에 대해서만 생각을 사유로 연결시키지 그게 아니면 다른 데 신경 쓰는 게 낫다. 할 일을 하고 할 말을 생각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소망 동경 욕구 선망을 심심하면 떠올린다. 누가 자랑하면 대체 얼마나 자랑할 것이고, 어디서 비하하면 또 어느 정도 심하게 놀리겠나. 다른 사람도 다 그런다. 왜? 왜냐하면 시행착오 할 만큼 했고 세상사가 보이며 인생을 아니까. 내 허세 허영 허풍 깐족지수 역시 33 24 37 50 150 그처럼 스스로 잘 아니까 말이다. 그런데 끝에 150은 뭐지? 혹시 IQ? 꿈 깨야 한다! 그건 허당기다. 100을 훌쩍 뛰어넘는 은근 허당기. 심지어 나는 둔재다. 페라리에 에르메스와 밤의 제왕과 언더그라운드의 황제에 대한 공상이나 하며 허언증은 언제 도질지 모르지 무슨 증후군이 창시되면 내 이름이 붙을까 봐 사양할 걱정 먼저 하는, 단춧구멍에 버금가는 아니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얼간이 코흘래개 똥싸배기가 틀림없다.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나는 헛된 단꿈으로 허황된 일상을 보내기 일쑤다. 뚱보니 단춧구멍이니 다 비슷한 얘기다. 내가 좋아하는 단춧구멍 단짝과 친구들도 있고 풍만한 여자가 나는 좋더라. 뚱뚱한 아이는 한없이 귀엽더라. 여유로운 성인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뚱뚱한 게 뭐 어때서! 영화배우처럼 눈매가 서글서글하지 않다는 게 뭐 어때서! 뚱뚱한 동시에 단춧구멍이라도 우정과 사랑 얼마든지 가능하다. 뿐인가? 단춧구멍 뚱보 중에도 어디산 다비드는 분명 있다! 적지 않다. 완전 많다. 내가 여자한테 듣던 말 가운데 제일 재밌었던 말 가운데 하나는 그거다. 오빠 눈 튀어나왔어, 입도 튀어나왔어! 그때 난 완전 배꼽 빠지게 웃었다.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단점을 열거할 수도 있다. 눈이 크면 상대에게 감정을 읽히기 쉽다. 협상 테이블 구경은 꿈도 꿀 수 없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기도 쉽다. 마스카라 화장품 값도 많이 든다. 다른 여자들이 눈독득일 확률이 비교적 높지 않을 수 있으니 마누라는 안심한다. 고로 친구한테 드라마 명대사를 들려주지 않아도 된다. 내 남편한테 껄떡대지 마 이년아 라고. (뭐~ 껄떡~?) 여자가 속편하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란 말인가. 여자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내적 가치 추구. 그야말로 이상이다. 안 그렇소? 안 그럴 수도 있다. 말이 그렇다는 말이다.
   기준을 달리하면 몰라도 일단은 단춧구멍과 뚱보에서 자유롭다고 너무 말을 쉽게 한 듯 해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모험가도 탐험가도 도전자도 아니면서 사랑의 방랑자요 험한 세상의 방관자 주제에 따따부따 주장만 앞섰고 말만 많았다. 남의 일 타인의 입장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동자승의 민들민들한 정수리를 초강력 자석 같은 인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속 시원~하게 웃으면서 슥슥 문지르다가 결국은 핀잔을 얻어듣더니, 그때나 지금이나! 하오나 숨길 수 없는 핑계 하나 첨언하자면 설령 일부러 불쌍해 보이기 위해서랄지 흡족한 만찬과 동떨어진 삶을 살기 때문에 뚱보가 되지 못했다 같은, 어중간하게 커피포트를 부를 듯 말 듯 뚜껑을 은근히 돌려서 여는 것만 같은 그런 말일랑은 하지 않겠소. 옛말에, 아 그만 오 제발! 원컨대 이 무지몽매한 바보의 불찰과 경거망동을 부디 널리 굽어살펴주옵소서! 전하, 통촉하여주옵소서! 아무리, 아무리 그래도 기분이 편치 않은 단춧구멍도 있을 수 있다. 그럼 그땐 그분을 탐구해보자. 그분의 속마음을 파헤쳐보자. 그러면 서로서로 알게 될 것이다. 타인의 내면을 들여야보면 마치 거울처럼 나와 타인은 놀랍게도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그 오묘한 교집합을 일부 발견한다는 것을. 우리 주위에는 자기 약점을 들으면 사둔 남말 하시네 라며 발끈하는 촌닭이 있을 텐데, 그런데 그분께서 만약 단춧구멍이다? 그 촌닭은 인기 없다. 전혀 없다. 그래도 중간은 간다. 허나 사람은 중간만 가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는' 화법을 간헐적으로 구사할 줄 아는 대인배가 되자. 왜? 왜냐하면 와 오빠 눈 크다 라는 말을 직접 하거나 또는 그런 속마음을 감추는 어떤 여자를 들었다 놨다, 쥐었다 폈다 그래 쥐락펴락, 밀었다 당겼다 까지는 힘들지라도 우리는, 천신만고 끝에 신비감을 점령해야 하니까. 그래야 한다. 따라서 목표가 있으면 구체적으로 적자. 이때 막연한 것보다는 자세하고 명확한 편이 좋다고 한다. 그동안 우정과 사랑으로 상중하에서 무엇에 해당하는 인생이었더라도 지금 당장 단짝이 없고 사랑이 멀리 있어도 희망을 갖자. 그동안 단짝이 많았고 교체가 심했던 데다 지금은 단짝 자리가 냉랭히 공석이더라도 새로운 포지셔닝을 꿈꾸자. 그래, 4번 타자! 어차피 1번 단짝은 단점이 없을 수가 없다. 다양성을 추구하기도 힘들고 장타를 날릴 수도, 경기장 밖으로 도망칠 수도 없다. 귀찮다. 어쩔 땐 짜증난다. 나는 초라할지라도 친한 인맥이 그룹으로 A, B, C, D가 있고 대타도 기자도 응원단까지 있는데 내 단짝은 뭔가 허전하다? 우정 즉 1 대 1 단짝 체제를 공고히 유지할려면 힘 꽤나 든다. 노력이 부족하면 단짝은 교체될 수 밖에 없다. 그건 진리다. 안 그러면 거짓말이다. 게다가 1번 단짝이 있으면 자유도 제한된다. 단짝이 괜히 단짝인가. 냉정하게 따지면 아무리 친해도 끝은 있으니까 어차피 나중 등 돌릴 일만 남은 거다. 피곤하다. 1번 단짝과 내내 놀아줘야 하다니 한심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말이다. 어떤 단짝을 개별적으로 각자 만나서 얘기 들어보면 아주 가관이다. 서로 저 불쌍한 것을 거들어준다는 식으로 말하니까. 아 드물게 단짝이 셋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는데 셋은 몰라도 넷부터는 또 짝이 지어지기 좋은 여건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사랑은 몰라도 우정은 4번 타자 라는 새로운 좌우명에 관한 수필을 쓰자. 만약 목표가 없으면 잘 먹고 잘 살며 중간이라도 가는 게 어떨까. 꼭 거창한 갈망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당장 떠오르는 구체적인 목표점이 없을지라도 행복한 삶에 대해 생각을 하고, 상상도 예측도 추정도 옳커니 예언에 내기도 하면 어떨까. 무엇이 불편하면 왜 그럴까 생각─생각─생각을 하며, 이상형이 있으면 그 이상형에 걸맞게 나를 변화시킬 노력을 하면 어떤가요. 롤모델이 있거나 랩배틀이든 뭐든 한 판 뜰 상대가 있으면 책상 위에 그분 사진을 떡 하니 붙여놓자. 평소에도 비관적이며 매사 냉소적인 데다 단점 듣고 짜증내는 그런 인기 없는 사람으로 긴 인생을 산다면 영 재미없을 테니까. 단춧구멍? 선그라스가 있지 않나. 배짱도 있고 행복을 추구하며 잊혀졌거나 기억나지 않아도 꿈도 있다. 적어도 꿈은 있었다. 최소한 로또 복권 꽝은 그 언제라도 보장된다. 그럼 된 거다. 물론 말은 그렇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단춧구멍론, 일단은 여기까지만.


   9

   좌우지간 공연내내 긴 명대사는 마르첼로의 일이었으니까 앵거스는 적당히 표정 연기만 하면서 그녀에 대한 꿈을 키워 갔다. 그 꿈이 인생 역전의 꿈은 아니지만 왠지 느낌이 왔다. 예감이 좋았고 설레는 기대로 그는 이미 들뜨기 시작했다. 고조된 분위기는 청춘의 특명이었다. 풋풋한 연애를 졸업하고 시시한 사랑을 청산할 생각을 하자 앵거스의 기분은 꿈동산을 헤매고 있었다. 이 사랑이 힘겨운 연정일지 시대를 뛰어넘는 사랑이 될지 그건 모른다. 하지만 앵거스는 이미 사랑에 빠져버렸다. 얼떨결에 사랑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이제 남은 건 그녀의 마음을 빼앗는 일 밖에 없었다. 달리 도리가 없었으니까. 웃음 꽃 만발하던 젊은 날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앵거스는 속으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손으로 (딱) 소리를 냈고 골 세러모니를 선보였다. 물론 공연 중인데 말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천재 마르첼로는 눈만 살짝 치켜떴을 뿐 다행히 극본을 벗어나는 무모한 시도는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러다 연극은 막을 내렸고, 앵거스는 행동을 개시했다. 비로소 특급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10

   결과부터 말하자면 앵거스는 그녀를 꼬시는 데 성공했다. 꼬시다? 앵거스는 어디까지나 정중했다. 허튼 꾀임도 아니었고 헛된 수작도 저급한 언사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알고 봤더니 숙녀였다. 여자. 전형적인 아가씨. 도회적이며 촌스러움도 조금. 앵거스는 한눈에 직감했다. 그는 대번에 눈치챘다. 그녀는 바로 남몰래 질투 받는 매력녀들로부터도 질투 받는, 어쩜 역술가가 오해할 수도 있는 여인이라는 것을. 원래 이런 부러움을 독차지하는 숙녀는 놀랍도록 섬세하고 신통하리만치 부드러운 사랑에 약한 법이다.
   앵거스는 그녀를 따라갔고, 뒤에서 이렇게 주문을 외우듯이 말했다. 그대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 그대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마치 그 주문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카페에 들어갔다. 때문에 앵거스의 짧은 미행은 미행이 아니었고, 그녀의 뒤를 밟는다는 사실 역시 발각되지도 않았다. 물론 뭘 좀 아시는 분들은 슬쩍 일부러 신호를 보여야 한다는 현장 경험론도 있겠지만 일단은 그랬다.
   그리고 카페 이름은 이상했다. 사랑병. 카페 이름은 사랑병이었다. 일병과 사랑병이 만난 건가? 아직은 안심할 수 없었다. 일단 앵거스는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분위기를 살피고서 용단을 내렸다. 카페 사장한테 오르간 소나타를 신청한 것이다. 하지만 앵거스는 그녀에게 노골적인 애정 공세를 펼치지는 않았다. 그가 건넨 말은 당돌한 거짓말도 으리으리한 허풍도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바로 옆도 아니고 아주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먼저 통화하는 것처럼 어느 대사를 낭독했다. 물론 실제 전화를 받은 건 아니었다. 그러므로 통화하는 척 연기하고 있는 그 와중에 전화벨이 울린다면 그건 망한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고 핸드폰을 끄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일이다. 따라서 앵거스는 고수니까 그 모두를 운에 맡겼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세상에게 불친절을 인생으로부터 몰인정을 받지 않았기를.」
   그렇게 통화를 마친 후 앵거스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독백으로.
   「오늘이 행복한 밤이라면 백야면 좋겠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백야. 짧은 사랑은 슬퍼!」 윽 손가락 오그라드는 대사를 어쩜 그리도 태연하게 할 수 있는지 미스테리다.
   그녀가 앵거스의 대사를 못 들었을 리는 없다. 그러므로 앵거스는 쉬지 않고 말의 고삐를 당겼다.
   「오늘 나 낯선 남자한테 고백받았어. 있잖아 있잖아 나 있잖아, 오늘 누가 날 걱정해주며 내게 말을 거는 거 있지?」  그래~ 그렇다니까. 그래. 이 말을 남자가, 바로 남자가 했다. 앵거스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녀 보고 잘 들으라는 듯이? 그건 각자 생각하기.
   처음의 통화 연기가 타인의 일이었다면 이건 독백도 아니고 정식 구애도 아니었다. 유부녀로써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사는데 정식으로 청혼을 받아본 여자들이 없기는 없는 것처럼 정식으로, 당신이 맘에 드오 내 사랑을 받아주오 라며 사랑의 시작이 확실하지 않는 부류도 적지 않을 것이다. 소개로 만났건 나이트클럽에서 오다 가다 만났건 남녀의 사랑은 오묘하다. 또 남녀의 사랑만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과 우정의 중간도 있을 것이다. 종류는 많고 운명은 모르며 소문의 여신은 건재하다. 어쨌든 앵거스는 2.0 다시 1.5 그렇게 다가갔으니 이제는 1.0으로 수위를 높이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이 낯뜨거운 정공법을 이 자리에 옮길 수는 없는 법. 왜? 낯뜨거우니까! 그러나저러나 바로 그런 과정으로 그들은 그날부터 사귀기로 했다.
   그런데 앵거스가 누군가? 누구긴 누군가. 그냥 앵거스지. 그래서 그는 처음 만난 날 그녀의 손을 잡고, 두 번째 만난 날 백허그를 했으며, 세 번째 만난 날 미래를 예언했다. 앵거스는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을 훔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는 다르게 가고 싶었다. 물론 그는 처음 만난 날부터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매일 그녀와 만났다. 격렬한 기쁨이 언제 쓴 웃음으로 바뀔지 모르겠지만 앵거스는 내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앵거스는 꿈 많은 청년이었고, 그녀의 방심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짧은 인생 우리 사랑하세나 같은 복고풍 발언과 고고한 고전미를 냉혹하리만치 구분하는 그녀였으니까.


   11

   즐거움이 주렁주렁 열리며 날마다 재미있기 그지없는 기쁨의 낙원 같은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앵거스의 애인이 되었던 그녀, 이름은 에이미였는데, 에이미가 앵거스를 떠났기 때문이다. 어쩐지 불 같이 타오르는 사랑인가 싶었다.
   그리고 저번에 천재 마르첼로가 했던 말은 진짜였다. 공연을 녹화해 갔고, 출판권을 비롯한 무슨 인접권을 모조리 사겠다던 연예기획사 대표 얘기. 그런데 그분의 전폭적인 투자 예측은 오판이었고, 딱 1번에 불과했던 전석 매진도 모두 어설픈 쇼에 불과했던 것으로 판명났다. 즉 투자 철회 소식을 들은 에이미는 앵거스가 왠지 초라해 보였는지 어쨌는지 앵거스에게 어색한 사색 슬픈 사랑의 고뇌만 남기고 떠난 것이다. 물론 추측이다.
   앵거스는 에이미를 공연에 참여시킬까 아니면 같이 살까 그런 공상까지 했었는데, 이제 다 부질없게 되었고 그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해줄 걸? 그럴 걸! 밉살스러운 연정은 더 밉살스럽게만 느껴졌다. 사랑이 원래 이렇다.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 알다가도 모르고 모르다가도 아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어떡하다 앵거스는 못이긴다는 듯이 그런 상상까지 했다. 바로, 미녀 99명에 단춧구멍 1의 비율로 공연이 길게 만석 행진을 이어가는 극구 만류해야만 하는 몽상. 냉혹한 현실에 탄식할 뿐 누굴 원망하랴. 앵거스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술하는 놈이 여자가 웬말인가. 그는 그녀가 제발로 떠나갔으니 그녀에게 은근 감사함을 느꼈다. 속이 다 시원했다. 그런데 정말일까? 글세요!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켜버린 것만 같았으나 실연 한두 번 당하나. 앵거스는 하는 수 없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앵거스 마르첼로 콤비는 공연을 계속했다. 마치 돈키호테가 풍차와 싸우며 조랑말한테 환상론자의 신비에 대한 애착을 설변하며 새파란 모험을 지속하듯이.
   공연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앵거스가 무리한 즉흥 연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연극 대본은 원래 그 대사로 시작해야 정상이다. '친구 내 블로그의 새 글 읽어봤나?'로. 그러나 앵거스는 최근 어쩌다 사랑 엇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마르첼로를 당황케 만드는 첫 대사를 멈출 줄 모르며 길게 이어갔다. 흡사 이런 생각에 기인한 호기심 때문인지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
   「마르첼로 너만 긴 명대사를 읊으며 주인공 배역임을 과시하고 명연기를 뽐내란 법 있냐? 난 뭐 언제까지 병풍만 서고 신부 들러리나 서며 내내 늬 꽃다발이나 대신 들고, 쫄망쫄망 늬 꽁무늬만 졸졸 쫓아다니라고? 내가 뭐 병아리냐? 아님 참새냐? 어? 난 뭐 꽃 피는 봄날 없었을 꺼 같냐? 어? 이제 때는 왔어, 어? 알아? 전설적인 전성기의 종말 그리고 오랜 암흑기를 벗어난 부활로써 빛나는 반짝이 의상과 상큼한 레몬향은 물론 미녀 선녀 처녀 숙녀 애첩 마담 귀부인과 함께 모든 단춧구멍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단 말이야. 나도! 바로 내가 말이야. 어? 전망 좋은 해변의 마술 같은 이 기가 막힌 요사스런 사이렌을 한번 울려 볼까? 자, 제3세계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유령선 같은 이 주체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서 상심한 광기가 내뿜는 얘기에 우리 귀기울여 보세나.」 
   라~고 앵거스는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회상하는 듯 애처로운 눈빛과 함께 말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마르첼로는 이렇게 말했겠지. '너 술 마셨냐?' 라고. 그러나 이건 평소와 다른 상황이었다. 연극이었으니까. 당연히 굼뜬 천재 마르첼로는 어떻게 임기응변에 임해야 할지를 눈치채지 못했고, 앵거스는 기어코 일을 저지른 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초장에 잡아라 같은 구연으로 전해지는 어설픈 조언을 엄한 데 적용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은 급기야 관객의 반응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친구. 내 블로그의 새 글 읽어봤나? 라~고 물어볼 줄 알았지? 마르첼로, 난 늬 허세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만약 그처럼 묻는다면 넌 백퍼센트 은근슬쩍 늬 자랑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으니까. 내 말이 틀렸니? 너도 인정할 건 인정해. 안 그래도 바닥인 늬 인기 찾아볼 수도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알겠어? 알겠냐구 이 친구야. 그리고 넌 뭘 그렇게 음악을 크게 트냐? 어? 설마 벌써 잘 안들리는 건 아니지? 걱정되서 물어본 거야 이 친구야. 얼굴 표정은 또 그게 뭐니? 남자가 속이 그렇게 좁아터져서 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어? 안 그래? 저번에 우리 연극 끝나고 같이 식사할 때 내가 먼저 서둘러서 먹은 다음 내가 그랬지. 넌 식사를 왜 그렇게 천천히 하니 라고 한마디 하니까 넌 아주 발끈하더라? 그렇다고 내가 무슨 왜 그렇게 굼뜨냐고 윽박지른 거도 아니었고 말이야. 평소에 나는 늬 자발 다 들어주고 잔말 말고 따라오라는 늬 성미 다 맞쳐줬는데, 늬가 무슨 동화 속에 나오는 왕비라도 되냐? 어? 늬가 여자냐? 늬가 숙녀냐고. 뭔 밥을 2시간 동안 먹냐 너는? 그러고서 또 쪼르르 달려가서 다른 친구랑 삼자대면한 자리에서 보란듯이 고자질을 해. 너도 그 친구 재수씨랑 똑같아. 속마음이 요만~해! 툭 던지니까 앞에서 돌려서 화자되거나, 생각해서 어떤 얘기를 툭 던졌는데 한바퀴 돌아서 나한테 오니까 말이야. 요만~해. 대인배야. 그렇지? 아 나 이거 진짜 답답해서 얘랑 같이 연극 못하겠네 증말! 게다가 넌 주량도 약한 녀석이 술은 또 왜 그렇게 급하게 먹냐? 넌 모든 일이 다 늬한테 최적화되야 하냐? 이런 쫌팽이 같은 녀석 어휴 여자도 모르고 이런 밥통 천지 바보퉁이 같은 놈! 늬가 무슨 5살 꼬마냐? 어? 너 친구 없지? 아 있다고? 있어 봐야 내가 봤을 때 늬 친구는 딱 1명이다. 그런데 그분은 혹시 단춧구멍? 그러거나 말거나. 내 말이 틀리냐? 틀리면 틀리다고 말을 해 봐. 왜 말을 못해. 벙어리냐? 어? 꿀 먹은 벙어리냐고. 심지어 그 친구한테 늬가 10번 전화하면 그 친구는 마지 못해 전화 걸고 응해주기는 하는데, 그런데 10번이면 10번 다 전부 늬가 연락하지? 그랬지? 통계 내 봐. 완벽한 사실이니까 말이야. 넌 사랑도 우정도 인생도 다 그만그만하다야. 알긴 아냐? 어? 대학가 주변에서 서성거리면서 이 여자 저 여자 남의 여자 구경만 하는 아저씨로 젊음의 거리 그 환희의 공간에 대한 평균 연령만 깎아먹는 녀석 같으니라고. 너 어디 가서 내 친구라고 하지 마라. 에잇 이런 한심한 친구야. 넌 대체 언제 정신차릴래? 어? 넌 이미 철들긴 일렀다. 너란 인간은 답이 없다고. 어떤 비너스가 너를 좋아하겠냐? 어? 하지만 말이야 사람 운명은 모르는 거다. 어른들 말씀이 왜 어린 친구들을 시피보지 말라고 하는지 너도 알지? 인생의 전반기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지. 혹시 모른다는 말이라고. 그래서 중반전에 들어간 너처럼 로또 복권, 술, 담배, TV, 한가한 취미가 사는 낙의 전부인 너를 보면 내가 정말 답답하다 답답해. 내가 다 처량하다고. 늬가 뭐 여자라도 되냐? 다리 털 부숭부숭 나가지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 진짜 애처로운데 얼굴에 수염 기른 늬 모습을 보면 난 꼭 그게 생각나. 시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똥개. 똥개 중에서도 주둥이 주변이 시컴헌 개. 딱 그 생각이 떠올른단 말이야.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미리 실망하지는 마시게. 왜냐하면 난 그런 시골 똥개를 좋아하니까. 얼마나? 몹시도! 더군다나 난 예외고 너만 그렇다는 게 아니야. 나도 똑같다구. 그렇지만 똥개 얘기로 빠질 수는 없고 하던 얘기 계속 하자면, 늬가 아가씨도 아니고 모든 걸 늬한테 전부 다 맞추라는 그 자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얼굴은 갔고 머리카락은 아 말 말자. 그래도 너 여자 좋아하지? 그런데 또 여자를 앞에 데려다 주면 싫대! 그게 뭐야? 싫어도 그냥 싫은 게 아니라 친구한테 화내거나 여자한테 따져. 그게 뭐냐? 그게 대체 뭐냐고! 아침에 눈 딱 떠서 밤에 막 잠들기 직전까지 흑심은 널 도무지 놔주질 않을 텐데, 도대체 왜 그래? 여자관계야 늬 팔자소관이니까 그러든가 말든가 관심 없다만 다 늬 생각해서 치어리더 바로 앞자리로 갔는데 멀쩡하고 건강한 남자가 대체 왜 화를 내냐고? 난 아무리 해도 이해를 못하겄다. 내 머리로는 말이야. 으쌰으쌰 나이트클럽 야 나이트클럽? 가? 가? 나이트클럽? 그래서 나이트클럽에 가. 갔어. 도착했어. 그런데 가면 뭐해? 담배나 퍽퍽 피워대고, 술도 안 마셔, 여자도 부끄러워서 그런지 여자도 싫대. 즉석만남을 위해서 웨이터가 여자를 데려다 주면 말도 못해. 춤? 춤도 못 춰. 그게 뭐야? 매출 떨어진 삼류 나이트클럽에 뭐 적선이라도 하고 싶다는 거냐? 그게 뭐냐고, 그러니까 나이트클럽들이 골머리를 앓는 거 아냐? 늬 같은 진상이 얼쩡거리니까 말이야. 촌닭이면 촌닭의 장점을 살려야 할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그게 뭐냐 남자가? 어? 너만 보고 있으면 내가 정말 답답~하다 답답해! 왜 말이 없어? 뭐야, 얼굴 표정으로써 말하는 거니? 얼그락불그락 어머나 단풍들었네? 넌 사랑이 뭔지 알기는 아냐? 우정은? 우정과 사랑의 차이점은? 모른다는 거네. 그러면서 뭘 또 그렇게 아는 척 말은 많냐? 귀는 꽉 막혀가지고 앞뒤도 꽉꽉 막혀가지고 말이야, 그게 뭐니? 그래서야 되겠니? 정말 그게 뭡니까? 그러니까 늬는 소개팅 나가면 맨날 결과가 안좋다구. 이미 소개팅도 반올림하면 백번이잖아. 백전 백패? 이거 지어낸 얘기니? 아니잖아. 다 사실이잖아. 내가 뭐 거짓말했냐? 아니잖아. 그럼. 그러고서 오빠란 말만 들으면 또 유체이탈이 된단 말야. 순진한 척 하지 마 이 바보야. 늬가 바보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데 뭘 그렇게 부끄럽다고, 아휴 이걸 진짜 그냥 콱...! 연기하지 말라구 이 친구야. 인생은 연극이 아니야. 어? 넌 안돼 넌 안된단 말야. 그러니까 늬가 안되는 거야. 어? 알아? 넌 그러니까 삼류라고. 아 답답해가지고 말야. 아휴 말 말자. 말해 봐야 내 입만 아프다. 늬가 항상 거울 보면서 감탄하는 네 그 용왕님 같은 핼쓱한 안색으로 추론하건대 이런 얘기 딱 질색이란 말이구만. 나도 알아 임마! 이런 젠장, 다 늬 생각해서 해 주는 얘기라고. 너도 눈치껏 말귀를 알아먹고 보는 눈이 있으면 보란 말이야. 저 고요한 열광을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너 그럴려고 예술가가 된 건 아니잖냐. 너 정말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었냐? 어? 그러고도 늬가 연극배우라고 할 수 있어? 설마 너 아마추어는 아닐 꺼 아냐. 그러든가 말든가 난 언제나 오빠란 말만 듣고 싶다? 하여간 남자 아니랄까 봐. 남자가 남자인 건 좋은데 늬가 내 친구라서 하는 얘기야 이 한심한 바보퉁이야! 다 늬 생각해서 하는 소리라고. 어? 무슨 낭만과 환상도 모르고 멋도 풍류도 신비감도 없고 넌 정말 뭘 모르는 남자야, 알어? 어? 이게 다 늬 생각해서 해주는 얘기다. 난 뭐 이런 얘기를 하니까 좋은 줄 아냐? 좋겠냐, 퍽이나 좋겠다. 마르첼로. 몸에 좋은 약이 원래 입에 쓴 법이라네. 응? 너도 생각이 있으면 내 말 오해하지 말라구. 그러고서 무슨 자기가 옛날옛날 대하드라마에 나오는 왕으로 태어났다면 자기는 삼천궁녀 각자가 다 외로울 테니 모두 다 1 대 1로 침소에 들어야 한다고 혼자 막 밑도 끝도 없이 즐거운 상상을 해 대. 아주 그냥~. 어허. 아휴. 습관적으로 말이야. 그게 뭐니? 어? 그래서야 되겠니? 아 나 정말 한심해도 어떻게 그렇게 한심할 수 있니? 그게 말이 되니?
   (...휴...) 아 또 있다. 멈출 수가 없네 그려. 그래. 말 나온 김에 가자. 뭐 가 보자구. 끝에 뭐가 있나 보게 말이야. 뭔가 있긴 있겠지. 그럼. 그래. 일레븐. 어디 대학교 무슨과 축구클럽. 넌 선배 걔들은 후배. 축구단 동아리 이름은 일레븐. 넌 아직도 거기 나가고 싶냐? 걔네들 불쌍하지도 않냐? 후원금이라면 모를까 어르신 원맨쇼도 아니고 애들 노는 데 가서 꼭 그렇게 휘젓고 싶냐? 뭔 머리카락 송송 빠진 웬 올드보이 한 명이 와서, 그것도 꼬박꼬박 자주 나와서 재주껏 노는데 함부러 몸싸움도 못하겠고 나오지 말란 말도 못하고, 걔네들도 답답하겠다. 하기사 일레븐 클럽 애들은 올드보이한테 두손 들었다지만 저번에 다른 팀이랑 경기할 때 보니까 늬가 뭐 최전방 공격수? 살짝 스치면 휘청이고 옷깃만 부딪혀도 너는 나가떨어지든만! 그게 뭐니? 개발이야 아님 그냥 개야? 어? 아 나 허세하고는, 못 말린다니까. 아무리 아마추어라지만, 아무리 스포츠라지만 그걸 보는 내 기분이 좋았겠냐? 당연히 좋았지! 농담이고 것 참 안스럽기 그지없더군. 내가 정말 민망했겠냐 민망하지 않았겠냐? 난 그냥 고개를 돌렸다. 음.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늬가 봐도 그렇지? 그래, 안 그래? 그리고 그런 너를 틈틈히 봐야 하는 늬 후배들은 또 뭔 죄냐. 걔네들이 뭔 생각하겠냐, 저 인간은 데이트도 안하나 애는 안 키울까 다른 할일은 대체 없는 걸까 우리를 무슨 노예로 아나, 그럴 꺼 아니냐고. 아 말 말어. 그리고 늬네 시골 친구들. 내가 저번에 늬 생각해서 널 늬 친구들 앞에서 일부러 띄워주니까 뭐라고, 쟤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그러면서 넌 왜 밤에 잠을 잘 때 그렇게 이를 가냐? 뭐가 억울해서? 불만족이 뭔데, 불만이 그렇게나 많냐? 도대체 뭘 원하냐고! 그러면서 포르쉐 운전대 잡아봤냐고? 너 이번 모임 나가지 마라. 친구들이 널 반기기야 하겠지만 애들 형편이 많이 폈드라. 어. 많이. 알겠니? 또 넌 섬 출신이잖아. 그래 나보고 영법 수영이니 뭐니 인정해주는 건 좋아. 다 좋다고. 그런데 네 여자친구는 평소에 불만이 많았니? 친구들 다 있는데 자기 남자친구한테 그러잖아. 개수영이라고! 푸푸 쏴쏴 푸푸 쏴쏴 푸하하하하하하 푸푸 쏴쏴! 또 있다. 계속 나온다. 너가 뭐 옛날에 운동할 때 로키산맥을 울통 벗고 뛰어다녔다고? 그래서 너가 옛날에 레슬링 국가대표 상비군이라도 했냐? 누가 들으면 국대급은 되는 줄 알꺼 아냐. 하여간 그 놈의 허세하고는. 병이다 병. 또 늬가 저번에 그랬어. 나 군대 있을 때 쩜쩜쩜. 워워워 쩜쩜쩜. 뭐 쩜쩜쩜? 누가 들으면 둘 중 하나로 알겠다야. 제이슨 본 아니면 허풍쟁이. 그 병 어떻게 못 고치냐? 어떻게 안 돼? 진짜 어떻게 안 돼? 내가 입만 뻥끗하면, 넌 아주 그냥, 아 그냥 말 말자. 말 말어.
   그리고 뭐 사랑과 우정이 부딪히면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아냐고? 한 여자를 두고서 친구끼리, 한 남자를 놓고서 친구인 여자 둘이 서로 포기하냐 사랑을 쟁취하냐 그 기로에 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냐고? 넌 또 그걸 어디서 주서들었길래 나한테 그런 잡담을 전했니? 우정은 회복되니까 사람 마음은 풀어지기 마련이니까 사랑을 택해야 한다? 그 사랑 택해서 그래서 늬가 지금 그렇게 집에 어떻게 하면 늦게 들어갈 핑계를 찾고 회사를 옮길 궁리를 하고 어떻게 하면 공공연한 일탈이 가능할까를 고민하냐? 뭘 택하든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게 정답 아니냐? 처음부터 서로들 다 안다구. 그게 무슨 청소년 드라마도 아니고 그게 뭐니? 사랑은 떠나가고 친구는 돈 떼먹고, 그럼 그건 뭐냐고? 아 나 이거 아직도 여기서 들은 말을 저기서 내가 생각해낸 듯이 설을 푸는 사람이 있다니. 그게 바로 내 친구라니. 세상에나 맙소사! 그래도 저번 달에는 내가 미안했다. 난 살면서 여자한테 다른 여자 이름을 불러본 일은 한번도 없다만, 내 일이 아니면 그런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몰랐거든. 늬 후배 저번달에 만났을 때 난 걔가 일전의 그 여자랑 결혼한 줄 알고 그녀 이름을 말했는데, 당시 난 그녀 얼굴은 안봤으니까, 그런데 녀석 무척 당혹해 하던데? 아 미안했어. 내 실수, 인정. 내가 뭘 몰랐단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상황이 되니까 그럴 수 밖에 없더라구. 꼭 내 실수라고 할 수도 없잖아. 안 그래?
   그게 다냐? 그럴 리가 있나. 이제 시작인데. 최근 최고의 인기 여자배우가 누구니? 각계에서 몇몇 있잖아? 세상 사람 모두 6단계만 거치면 모두 연결된다는데 그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까? 그 누군가를 내가 과연 알까 모를까? 그냥 알기만 할까 아니면 그 각별한 친밀감을 숨겨야 할까? 어때? 어떻게 걔, 소개시켜 줘? 혹시 모르잖아? 만약 걔가 너 같은 스타일을 좋아한다면 넌 어떡 할래, 라~고 내가 물어보면 넌 그러잖아. 짜증내다가 결국 딱 그래. 오 땡큐지~ 라고. 완전 빵끗 웃으면서. 그래서 난 나중에 또는 다른 친구들이 너한테 이런 농담은 못할 꺼 같다. (내 마누라) 늬가 데리고 살래? 라고! 호호호 하하하 큭큭큭. 오 땡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거 무슨...! 대충 보면 사리분별 바를 것 같은데 그냥 쉽게 말려 쉽게 말린다고. 말발은 좋은데 또 속기는 금새 속아넘어간다고. 아휴 저 팔랑귀! 아 나 증말 불사조의 날개가 따로 없다야. 우리 아지트 앞 식료품점에 새로운 아르바이트생 완전 괜찮다고 엄청 이쁘다고, 그냥 한마디 툭 던졌는데, 그랬더니 아 글쎄 쪼르르 달려가서 벌써 확인하고 오대? 아 진짜 못말리는 친구들 하고는. 그냥 생각없이 던졌는데 스스로 알아서 낚여! 나 원 참. 에잇 연극이 끝나면 난 그냥 집에 가서 포도주 한잔 따라놓고 척키 나오는 영화나 봐야겠다. 오늘은 각자 놀자.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뭐 평소에 내가 꼭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단 말은 아니야. 그냥 이건 무대를 핑계로 재미삼아 몸만 푼 거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한심한 동네 아저씨 같은 친구가 아니라 유부남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라네. 난 유부남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자, 한번 시작해 볼까. 아 짧아. 금방 끝난다고. OK!
   탐스런 사과든 판도라의 상자든 한번만 따먹고 한번만 열어야지 날이면 날마다 따고 열면 그건 사과가 탐스럽지 않다는 거 아니요? 그건 판도라의 상자가 개나 소나 아무나 살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의 가짜 신비주의 문학이라는 거 아니냔 말이오. 공장에서 마구 찍어내고 예술 작품조차 판화나 사진도 7장까지를 뭐 어쩐다는데 너무 아끼지 않으면 신비감이 없지 않냔 말이오, 내 말은. 그러면 그건 그냥 거리의 약장수 쇼나 마찬가지니까. 따라서 우리는 바로 그래서 가족영화를 보면 잠을 잔다네. 왜? 달콤한 꿈에서 악당을 물리쳐야 하니까. 안 그렇소? 유부남들이여 내 말이 틀렸냔 말이오! 이미 저 하늘의 별을 땄지 않소. 네, 우리는. 우린 이미 초인적인 기쁨을 맛보았지 않냔 말이오. 남자 대 남자로써 얘기하는데 나나 당신은 아니오. 절대 아니오. 허나 우리는 알고 있잖소. 늑대의 이상형은 바로 새로운 얼굴이라는 것을 말이외다. 성과 언제나 성과를 생각하고 업무 목표는 내려갈 수 없는데다 남자친구로써, 남편으로써, 아빠로 가장으로 사회적 어른으로 어두운 거리에서 불의를 모른 체 하는 거야 쓰윽 넘어간다지만 로맨티스트인 척 사는 거 정말 힘들지 않냔 말이오. 아니 그렇소? 이런 자기 내면의 음성을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요. 유부남들이여! 자, 우리 다 같이, 우리 모두 다 같이, 함께, 들고 일어섭시다? 워─워─워! 바람둥이 기질 다분한 개구쟁이는 2군에 내려보내고 지금은 달콤한 행복을 측량하며 소네트를 읊을 줄 아는 숙녀의 오빠, 만인의 연인을 연기합시다. 꾹꾹 눌러참았던 말 못할 무언가는 이따 우리끼리... 우리끼리 속닥속닥... 쉿! 큭큭큭 하하하 호호호 푸하하하하하하!
   라~고 일단 분위기를 띄웠으니 이제 진짜 연극을 시작해보세나 친구. 이만하면 몸 풀린 거 같은데? 응? 자, 가 보자구! 저 희망 찬 환희의 내일로 말일세.」 
   「친구. 내 블로그의 새 글 읽어봤나?」
   잠깐 아슬아슬한 감정의 흔들림은 있었으나 마르첼로는 연기를 이어갔다. 아마도 정신이 혼미했기 때문인 듯 했다. 인간 군상의 운명도 연극배우이자 삐에로의 비애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는 듯이.
   「아 그거? 그럼. 잘 봤네. 허허허 또 보고 싶네. 오 그럴듯해. 멋져 보여. 뭔가 있어 보인다구. 앞으로 말이야......」  


   12

   그러나 연극은 중도에 위기를 맞았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마르첼로가 독백 도중 도망갔기 때문이다. 이걸 어쩌나. 어쨌든 연극은 즉흥연기로 어떻게 어떻게 마무리됐다. 그런데 마르첼로는 대체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앵거스는 순식간에 절망감의 또랑에 빠져버렸다. 연가를 불러주지는 못할 망정 악담만 거침없이 늘어놨기 때문에 아무래도 마르첼로가 받아들이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앵거스는 생각했다. 내가 심했나 라고. 그가 무리하긴 무리했다. 누가 봐도. 그것도 무대에서. 오색 풍선이 가득한 리본 커팅식이나 날마다 생일 잔치를 열어줘도 모자를 판에 태연한 척, 조곤조곤 마르첼로의 뚝심과 가녀린 성정을 간질간질 건드렸으니 그가 삐질 만 했다. 그래도 확인할 길 없는 소문도 아니고 백퍼센트 사실에 만감이 교차하는 진실인데 앵거스가 너무 했나? 너무 했다. 많이 심했다. 청컨대 행위예술이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는 제발! 허나 앞일은 모르는 법이다. 이런 식이 아니라면 친하지 않다는 반증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지금은 마르첼로를 찾는 게 급선무다. 마르첼로가 어느 정도 상심했을까? 어느 정도? 흠씬! 보면 모르나. 그런데 천재 마르첼로를 어디 가서 찾는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앵거스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사과할 것이고 마르첼로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쳐야 하며,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그들은 다시 예전 우정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럴려면 일단 마르첼로를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그를 찾냐고. 지금 이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억측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억지가 앵거스를 선동했고 이상한 전율감도 그를 괴롭혔으며 천사의 교성과도 흡사할 듯한 전조가 느껴질 듯 말 듯 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앵거스는 없는 괴력을 발휘할 수는 없고, 우선 할 수 있는 일은 기초적인 탐문 수사였다. 따라서 앵거스는 자연스럽게 엉거주춤 탐정이라도 된 것 마냥 주변인을 만나서 마르첼로의 소식을 물어봤다.
   우선 천재 마르첼로의 연인인 다이안을 만나봤다. 다이안을 미녀임에도 불구하고 영재였는데 다이안은 마르첼로가 어디 가건 언제 오건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집나간 개야 때 되면 돌아오는 법이고, 철부지 개구쟁이야 돈 떨어지면 들어올 텐데 뭘 미리 사서 고생하냐는 듯한 태도처럼 보였다. 앵거스는 다이안으로부터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보이드의 직장에 찾아갔다. 수재 프로그래머인 보이드는 마르첼로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뭔가 알아도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결과는 꽝이었다. 보이드와 마르첼로는 누구나 인정하듯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단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둘은 실상 상대의 일상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만나면 서로 각자 따로 떠드는데 뭘 들었는지는 하나도 몰랐으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그외 환상가 서먼과 선녀 몰리에게서도 괜찮은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앵거스는 어쩐지 조금은 기대했던 추적 탐문 역습 모험은 물론 경건한 비밀에 대한 실마리는 커녕 부풀었던 예감에 부응하는 결과는 하나도 얻지 못한 채 소극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생각했다. 마지막 남은 조커는 하나 밖에 없다고. 결국 바보이자 순정남 곧 비슷한 캐릭터인 아비게일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비게일은 그들 사이에서 마르첼로와 매우 흡사한 인물 유형이긴 하나 지능에서 약간 차이가 난다. 마르첼로는 천재 아비게일은 둔재는 아니고 범인. 왜 마르첼로는 도망갔을까, 아비게일이 과연 내 간곡한 요청에 부합할 만한 뛰어난 정보를 알려줄까 말까, 그런 생각에 심취하다가 앵거스는 소극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객석에 척키 인형 99명과 앵거스 친구 중 유일한 단춧구멍인 아비게일이 객석 중간에 앉아있었다. 객석이 정확히 몇 석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저번에 단춧구멍 인상착의인 사람들이 가득했고 에이미가 그 한가운데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와 같은 모습이 반복됐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객석에는 전부 척키 인형이 앉아있었고, 객석 정중앙에는 아비게일. 그건 곧 아비게일이 앵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고, 이건 전개도 뭣도 아니라 이미 절정과 결말까지 다 정해져있다는 거나 다름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설정인 듯 했다.
   「아비게일. 오랫만이야. 그런데 네가 척키 인형광이란 건 처음 알았는데? 왜 그동안 말해주지 않았어?」
   「늬가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지금이라도 물어볼까? 우리 사이가 그리 팍팍한 사이는 아닌데 말이야. 그렇지?」
   「말도 꺼내지마. 라~고 하지는 않겠어. 어쨌든 넌 뭔가를 알고 싶고 난 어떤 이상주의의 목마를 원하지는 않고.」
   「아비게일. 우리들이 널 좋아하는 거 너도 알잖아. 왜 그래? 싱겁게 말이야. 무섭잖아. 괜히 분위기 잡고, 그러지 말자고. 넌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 이 친구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도 괜찮아. 안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니? 아무튼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답하자. 너 마르첼로 어딨는지 알지? 그렇지?」
   「내가 마르첼로가 어디 있다는 걸 알면? 너한테 가르쳐 줄 것 같니? 왜 내가 그걸 너한테 가르쳐줘야 하는데? 그 이유를 한 100개만 말해줄래? 아니 그런데,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냐? 넌 속 좁은 마르첼로가 토라져서 도망갈 동안 뭐했냐? 안 그래?」
   「말도 꺼내지 마. 마르첼로? 밴댕이 소갈머리 같기는, 걸핏하면 토라지고. 쫌팽이도 그런 쫌팽이는 내가 살다 살다 첨 봤다. 대충 너도 알잖아? 안 그래?」
   「응. 나도 알아. 인정!」
   「아 그러니까 어서 알려줘.」
   「앵거스. 마르첼로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니, 알고 싶지 않니?」
   「아 몇 번을 말해. 장난치지 말고. 알고 싶다고. 알고 싶어~(고함)!」
   「난 또 늬가 그냥 의무적으로 그냥 한번 해 보는 몸짓인 줄 알았지 뭐니. 그런데 있잖아. 늬가 원하는 새로움의 정체는 뭐니?」
   「새로움은 또 뭔 새로움? 아 장난하지 말고 진짜 그 마 어디 있는지만 말하라니까. 아비게일. 너 정말, 너 정말, 좀 가르쳐줘 아비게일. 응?」
   아비게일은 앵거스에게 마르첼로의 행선지를 알려줬다. 마르첼로는 딴 데도 아니고 앵거스를 차버린 에이미를 만나로 갔던 것이다. 왜인지는 알수 없지만. 마르첼로는 대체 어디로 도망갔을까, 그 정답을 알고 나니 뭔가 너무 허무했다. 알게 된 답안지는 결국 경이로운 동화의 세계도 아니었고, 동경해야 할 꿈의 낙원 역시 아니었다. 요술상자나 액자 뒤 금고의 발견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실망감은 너무 야비하게도 커다랬다. 정감 어린 낭만도 흥미로운 판타지도 뭣도 아니고 마르첼로가 에이미를 찾으러 가다니! 최대의 행복 고상한 기쁨 최고의 쾌락 세련된 흥미, 그 무엇도 찾을 수 없고 마르첼로는 에이미를 찾으러 떠났다니. 이걸 어쩌나. 괜히 앵거스는 마르첼로에게 미안해졌다. 난 그렇게 심하게 꾸짖고 깐죽거렸는데 마르첼로는 앵거스를 위해서 그랬다니. 난 입에서 화염방사기의 화염을 내뿜었고, 난 눈에서 레이저도 나갔는데. 그런데 마르첼로는 앵거스를 위해서 그랬다니. 앵거스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에이미가 사는 동네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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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도중 마르첼로가 도망갔다. 전에는 앵거스가 1차 도망 2차 도망을 갔다 온 후 정신을 차렸는데, 이번에는 앵거스가 3차 도망을 떠나지 않고 대신에 마르첼로가 떠난 것이다. 앵거스는 마르첼로가 왜 떠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아마도 자기 때문에 꽤 속상했기 때문에 도망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어쩌면 1퍼센트쯤 자기처럼 마르첼로도 홍일점 묘령의 여인을 낯선 여행지에서 만날지도 모른다는 고풍스런 공상이 마르첼로를 잠식했을 것이란 예측 역시 추산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앵거스는 자신의 행동이 심했음을 절감했고, 때문에 마르첼로가 조금 걱정됐으며 그가 더더욱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앵거스는 마르첼로를 수소문했다. 그러다 척키 인형광인 아비게일과 만나서 마르첼로의 행방을 알게 됐다. 그렇게 앵거스는 마르첼로를 만나기 위해 에이미가 사는 동네로 갔다. 그러나 앵거스는 에이미도 마르첼로도 만날 수 없었다. 애초에 에이미에 대해 아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녀와 다시 시작할 가망성도 전무했다. 아마 마르첼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는 마르첼로는 그냥 액션만 취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앵거스는 돌아왔고 먼저 와 있는 마르첼로를 소극장에서 만났다. 둘은 화해했다. 결과는 해피엔딩. 대리석 같은 그들의 우정은 굳건히 유지되었고, 투덜거림을 부르는 앙금은 한층 완화되었다가 코메디로 결론났다. 일단 여기까지가 최근 앵거스에게 발생했던 사건의 전부다.
   그런데 잠깐. 앵거스가 에이미와 다시 시작할 가능성이 거의 전무하다고? 그건 모른다. 혹시 모르니까. 결혼행진곡이 울려퍼지고 신랑으로써 신부로써 걸어나가야 그런가 보다 하지, 앞일은 모르니까 말이다. 더구나 결혼에 골인해도 게임은 이제 시작된 거다. 세상일 쉬운 게 하나 없다. 그야 어쨌든 에이미가 돌아오더라도 너무 늦지는 않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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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거스는 집에서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영화를 볼까? 공포물? 여행을 갈까? 해변에서 여자를 꼬실까? 다 재미없다. 모두 부질없는 일이고 철없는 행동일 뿐이다. 허튼 모험과 쓸데없는 추억 만들기, 바라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소?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앵거스는 뭔가 궁금했다. 브란덴부르크 모음곡 2번을 들어도 소용없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내면에서 본인을 잠식한 요정이 이렇게 말하는 듯 했으니까. 어떻게 좀 해 봐! 추리소설을 읽을까? 음악을 들을까? 아니면 새로운 작품 구상을 할까. 그는 최근 희곡을 한편 썼고, 마르첼로와 함께 극작가인 자신이 연극에 임하고 있으니 차갑고 뜨거운 그런 타인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결론은 이랬다. 과학적인 보고서 읽기. 왜냐하면 앵거스는 진술증거와 간접증거, 논증도식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더 알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아무래도 과학과 어떤 체계가 지금만큼 덜 발달했고, 인터넷의 자유도랄지 활성화가 미진했으며, 007 가방에 의해 알다가도 모를 일들이 적어도 애매하게 (더) 실제했을 꽤 오래된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읽기로 했다. 신뢰도 높고 논리정연한 재판에 관한 한 편의 보고서를. 꽤 분석적인데 반해 몰입도가 평탄하고 흥미는 독서 진행 대비 하락세가 뚜렷한 추리소설을 한 편 읽느니 차라리 그게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공부가 재밌다, 일이 즐겁다, 난 사랑에 빠졌다,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 같은 개념에 그나마 살짝은 근접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일시적으로는 말이다. 게다가 생소한 분야였기 때문에 구미를 당겼고.
   따라서 그는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다, 뭐뭐 하고 싶다를 넘어서서 뭐뭐 해야 한다 라고 느끼는 단계에 이르렀다. 나아가 그는 글쓰기에 관해서 한 수 배웠다. 이미 알고 있는 단순한 원칙은 비유, 경험, 연결어, 논리, 짧은 문장, 중복을 피하고 최대한 건조해야 하나 그와 모순되게도 최적의 꾸밈어가 꼭 필요하다 같은 점. 뭐가 최적인 줄 알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아마 덜어내면 덜어낼 수록 좋다는 말이 많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듬. 허나 그건 글쎄요! 말과 글의 차이를 불분명하게 인식하는데 최적의 낱말이 쉽게 제발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건 어쩜 희망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름. 아, 한 수 배운 그것은 무엇이냐면 언제 문단을 띄어야 하는가 그것이다. 그 보고서에서 문단을 띄울 때 첫 번째 단어가 무엇인가를 눈여겨 봤다. 예를 들면 이렇다. 본 사례는. 한편. 이처럼. 따라서. 첫째로. 종래. 이와 같은. 이 무엇을. 비단. 핵심질문은. 물론. 하지만. 이 가운데. A와 B는. 무엇은. 우리는. 이를. 위 그림에서. 반면에. 마지막으로. 요컨대. 본 장에서는. 그렇다면. 형사소송법. 등등.
   물론 앵거스는 과거보다 지금 덜 내성적이지만 평소에 말이 많은 남자는 아니었으므로, 그는 그 보고서에 대한 감상문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일기도 쓰기 싫었다. 그러므로 그는 가장 핵심적으로 자신에게 인상을 남긴 사실에 대해서만 자신의 창작 공책에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그는 글을 쓰듯 생각하며, 글을 쓰듯 말을 하는 사람이니 만큼,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다음 작품 구상과 관련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로 주요 내용은 간과하고, 그는 어떤 보고서에서 무엇을 면밀히 살펴봤나 그 중에서 매우 중요한데 별로 중요하지 않게 판단됐던 그 무언가에 대한 사실만 옮기자면 이처럼 조촐하다. 다음과 같은 단편적인 몇몇 사실에 대한 기록만 읽더라도 어쩜 영화 한 편, 1주일에 한 명 태어날까 말까 하는 그런 불세출의 천재 신인 작가가 발표한 처녀작 추리소설을 읽는 것보다 어쩌면 더 재미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혹시 훨씬 더 재미있을지도 모름. 물론 탐구의 의미이자 작품의 소재 활용도로써, 재판 과정에서 빚어지는 절차상의 불이익과 법리 해석에 대한 불합리가 최소화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말이다.
   각설하고, 끝으로 사실과 법의 심판이 어떻게 차이를 보이든 어쩌든 다음 내용은 어디까지나 세 가지 판단 근거에 따라 기록함을 밝힌다. 첫째 앵거스가 읽은 글 곧 사건의 재구성과 심판의 전과정을 활자로 옮긴 글이 그에게 깊은 인상이라는 성과를 얻었는가, 둘째 그 짧은 문장이 추리소설 한 권보다 더 흥미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셋째 그 모두를 요약한 내용인가. 이 세 가지를 만족했을 때만 앵거스는 다음 문장을 자신의 창작 노트에 기록했다. 서술자는 앵거스의 속마음과 무의식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사고가 논리적인지, 연역적인지, 귀납적인지 또는 카르네아데스와 아라우카리아를 아는지 그것을 알지 못함을 전제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건 꼭 영화 시작 전에 나오는 그런 안내문 같은 느낌이다. 이 영화는 사실에 근거하여 만든 허구 어쩌고저쩌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보너스는 바닥났다. 다만 베니스의 상인과 명백한 차이가 있는 만큼 간략한 사건의 개요를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언제, 어디서, 누가 숨진 채 발견됐다.
   추정 시간이 앞이든 뒤든 다 맞음. 사건 발생 후 어디서 누구를 만나서 하는 말, 나 어디서 언제(몇 시 몇 분에) 나갔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양측에서 동원한 전문가 증인의 상반된 주장.
   수많은 진술증거와 간접증거 등이 존재함에도 재판부의 합리적 의심 없는 유죄 심증을 끌어내지 못한 점. (왜?)
   전문가 증언 판단의 불합리. 
   알리바이, 사망 시간, 동기, 기회, 준비물, 무수한 간접사실등 그 모두가 무효화됐다고? 
   결론. 판결 요지. 어떻게, 오 이럴 수가! 
   심증은 매우 방만함. 완전 드라마. 신빙성 부족하고 비과학적인 부분이 분명 있음. 재판부의 합리적 의심 없는 유죄 심증이라... 그 모두가 합당하다면 동시에 전례와 전문가 증인의 상반된 주장에 대한 재판부의 여유로운 대응과 검증에 빈틈의 여지가 있다면 무슨 추정 원칙, 그런 일반론을 뒤집어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됨. 오오, 그 수많은 수고스러움과 눈물과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서사가 결국 모두 헛일이라니! 따라서 '너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에 해당되는 게 좋을 수도 있겠구나. 논외로 007 가방이 대체 얼마나 어디까지 영향을 미쳤길래 라는 궁금증도 조금.
   액션 영화에서 비중 약한 조연이 연기하는 전형적인 대사 가운데 하나는 그거다. 죽고 싶어? 그런데 전문가나 행동주의자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머머 못할 줄 아냐, 같은 말. 즉 주연은 대체로 하수가 아닌 법. 도식화 과정에 따른 헛점을 차치하고라도 영화가 끝나면 이런 명제를 떠올려보는 재미가 있다. 그 하나의 가설은, 내가 만일 피고인이라면! 만약 내가 피고인이라면 나는 몹시 머머하고 싶었을 것이다 라고 앵거스는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 공감하는 건 쉽다. 왜냐하면 내가 만일 피고인이라면 그 상황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때 발생하는 문제는 이성을 감성이 제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다. 그 수모를 싹 다 감수하고 결론적으로 범인 불명의 타살로 결론난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너 나 사랑하냐, 아니다. 헤어지자. 아니 넌 나를 사랑해야 한다, 아니다. 넌 나를 사랑할 것이다, 아니다. 나중 사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다. 그럼 우리 사이는 뭐냐, 뭐긴 뭐냐 각자 인생을 살자 이제 그만 끝내자.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절대 없다....... 노래 가사처럼 쓰자면 이런 내용의 반복인데 있는 그대로 표현되었을 때 그 불미스러운 커피포트를 도대체 누가 어디까지 참고 견딜 수 있을까. 그 암담한 변주가 무슨 아기 별 주제에 의한 것도 아닌데 그 누가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런 여자는 거의 없다. 있다면 그 유형을 부르는 지칭어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건 이미 심리학적으로 충분히 예고된 결과이지 않을까 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게 가정할 수 있다.
   앵거스는, 이처럼 한 편의 추리소설을 꽤 흥미롭게 읽었다.
   한말씀 더하자면, 치밀한 준비에는 애완견을 상대로 예행연습까지 포함됐다. 내가 갖지 못하면 죽이겠다, 그만큼 갖고 싶다, 그런데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사랑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언젠가 결심했다 어떻게 하기로, 그리고 작전은 꼼꼼하게 수행됐다, 그래서 죽였다 까지가 전말이다. 그게 사랑일까? 그게 사랑이라니! 완벽한 계획 범죄. 그리고 무수한 도움으로 무죄. 식겁한 정황증거는 자그만치 10,000개. 그런데 물질증거가 없다, 고로 무죄다, 어머머 무죄라고? 무죄는 2가지가 있다. 죄가 없는 것, 죄를 증명하지 못한 것. 그렇게 두 가지. 그래서 옛날에는 엄한 증거를 갖다 붙이고, 기준이 바뀌고, 조작이 통하며, 목표가 해서는 안될 수단에 경도되는 일이 잦았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는 현재진행형일 테고. 포섭된 죄인들과 다 함께 그 크고 작은 죄를 무덤까지 안고 간다라? 그러면 객관식 문제로다.
   1.죽어도 자성은 없음.
   2.죽기 직전 참회.
   3.육신의 영면과 함께 영혼도 소멸.
   4.다음 생에서 계산.
   대도는 움찔도 안하는데 작은 녹을 받거나, 개인적 불이익을 미연에 방지했거나, 비겁했다는 벌을 면한 사람이 오히려 왕왕 떨 가능성이 크다. 각계각층에서 직간접으로 관련된 사람이 적지 않을 테니까. 경험하기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니까. 당시 사회가 그렇게나 구식이었을까? 그렇다. 그분의 가문이 로스와일드나 듀퐁가도 아닐 텐데, 모세의 기적을 생애 내내 즐기는 건 아닌가 의심스럽다는 의구심은 쉽게 지워버릴 수 없다.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악마일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필설로 설명하고 싶지 않은 전문용어 몇몇들. 꼭 어떤 특별한 파란만장함을 기쁨이나 즐거움이라 지칭할 순 없어도 당사자가 아니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기이한 감정은 모두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낙심하지 않아도 된다. 심판은 불합리하게 늦을 수도 있지만 그와 더불어 이런 일에 최적화된 덱스터랄지 이런 일을 좋아하는 한니발과 이를 위해 파견된 연옥의 반신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
   앵거스는, 이처럼 웬만한 추리소설 어지간한 걸작 영화보다 훨씬 사실적인 재판보고서를 읽었고, 추후 관련 소식을 드물게 듣었으며, 해당 사건과 관련된 기고문을 간헐적으로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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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104

from 소설 2017. 9. 15.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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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 라는 짧은 사설 분량의 글을 읽었는데 뭔가 꺼림직했다. 뭐랄까 어떤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너무 불편해서 도저히 생각을 털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나 할까. 왜 그런가 생각해 봤더니 아하 하면서 그 이유가 선명해졌다. 왜 그럴까, 그것은 왜냐하면 첫째 남성중심적인 시각이고, 둘째 논평의 끝을 <머머 하고 싶다>로 끝냈기 때문이며, 셋째 글의 구조가 역삼각형 구조였기 때문이다. 인용문 전부를 발췌할 수는 없고 그에 대한 요약과 내가 왜 기분이 찜찜했나를 따져보자면 이와 같다.
   인용문 요약.
   서론: 내부 승진이 옳냐 외부 영입이 맞냐, 전자가 옳다. 관료의 분야니까 관료의 최고봉은 관료가 적임자.
   본론: 교수의 권위, 직업 선호도 그래프, 교수의 하는 일이 어떠함. OB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에 익숙함. 따라서 OB & 교수는 관료로 부적합.
   결론: YB의 활약상이 필요함. 그러므로 OB&교수가 장관이 되는 기현상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이건 결론이라 할 수 없는데... 서론으로 회귀인가?)
    거북한 원인.
   첫째, 남성중심적인 시각. 뭐가 문제다 단점은 뭐다 라는 관점은 성공적이다. 그러나 반틈짜리다. 그래서 그건 사설이 아니라 반쪽짜리 촌평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에 대한 진단 역시 반틈만 맞았다. 그러니까 댓글은 댓글만 부르게 된다. 어디 출신 감독이 아니네? 썩 (냉큼) 내쫓아다. 대학교에서 영화를 배우지 않았는데 영화감독? 챙피한 줄 알아라다. 뭐시여 회사원 하다가 뜬금없이 예술을 하겠다고? 미친놈이다. 관료 출신이 아니라 어디서 굴러온 시장이라? 입이 근질근질하게 생겼다. 아이쿠 총리인데 정치학 학위가 없다, 다른 분야 출신이다? 호호호! 어머나 순수쪽에서 대중쪽으로 넘어왔네? 텃새도 그런 텃새가 없다. 아이고 이런, 법조계에서 정치계로? 이 양반이 지금 장난하는 거야 뭐야다. 새로 온 사장이 나이가 많다는데, 그런데 하필 여자래? 안돼 안된다고 꼰대라고 난리일 꺼 아냐 게다가 하필 뭐 여자라고, 안돼 안돼! 나이 많으면 안돼? 그건 정확히, 승진 한계 연령이 정해진 계급 방식이다. 태양은 가득히에서 알랭 드롱이 잡았던 운전대를 맡겨서는 안돼, 응, 알어?, 페이스북 봐봐 안되겠다 마크 주커버그 데려와 뭐 머이 바쁘다고?, 그럼 어떻게 마크론... 아무튼 YB를 영입하자고, 이참에 그냥 아예 법으로 정해버릴까? 동창 모임도 아니고 누가 곗돈 갖고 튀었다가 나중 뭐한 놈이 성질 내겠군, 너 여기서 빠져라 라고. 대체 OB의 연륜은 언제 필요한 거야? 아니면 아예 한 분야에만 매달리라는 거야 뭐야. 장인 정신 뭐 그거처럼? 옛날처럼 고향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음 그렇고, 목수 아들은 평생 목수로 살아야 하고,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논리다. 지금이 어디 평생 한 분야에만 몸담았던 사람만 최고가 되는 세상이던가. 정통성 없는 사람 정말 서러워서 살겠나. 장관 자리는 차라리 정치가가 낫다? 그렇게 따지자면 관료 출신 정치가가 아닌 이상 정치가도 기피 대상 1호다. 정치가 중에 정치학과 출신이 대체 몇이고, 신문방송학과 학생들이 나중 전부 신문방송쪽 일만 하던가? 좀 쓸 만하게 되면 YB는 OB에게 자리를 물려주라는 건가, 그럼 무대에서 쓰러지고 싶다는 개그맨과 예술가들은 다 뭐야. 바보야 어중이떠중이야? 뭐 축구대표팀 세대 교체인가? 휴~! 내부 승진의 최고봉은 군인과 경찰이다. 그건 곧 사회도 그처럼 완벽하게 피라미드 구조로 돌아가야 된다는 말이고, 예술은 물론 스포츠 역시 연고지 팬들의 의리를 무시하고 딴 구단으로 가지 말라는 논리다. 그래 봐야 군인과 경찰도 입구와 출구는 물론 출신과 정치성등 따질 거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 수장을 혹시 연예인 같은 대표가 임명할 수도 있다. 게다가 선수일 때 빠짝 벌어야 하는데 은퇴 후에 대해서는 난 모르겠고 평생 한 개의 유니폼만 입어달라는 요구가 응석인지 섭섭한 희망인지 통 분간이 안된다는 말이다. 글쓴이는 40년 동안 보이저호를 관리해온 팀에 대해 한 분야에 정진하는 모습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시는데, 40년 한 길만 달렸던 사람만 오직 관료를 해야 한다는 논리다. 앞뒤가 안 맞네. 안 맞어도 많이 안 맞다. 만약 그분 말씀대로만 되면 시간이 오래 지나서 당연히 다음에 하실 말씀은 뻔하다. 바로, 관료주의! 또 예를 하나 들겠지. 과거 영국 식민지가 줄어듬과 동시에 관료는 반대로 점점 가파르게 늘어났다고. 할 일이 많은 세상, 할 말도 많다. 많이 컸다! 나 클 동안 넌 뭐했냐! 철 들어서(늙어서?) 좋겠다! 이게 글이 아니라 말이라면 문맥은 그쪽으로 들어설 수도 있겠다. 내부 승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1부터 10까지 모든 단계를 거쳤든 고위직만 거쳤든 관료주의에 대해서 알아보자. 고위직만 거쳐서 최고위급이 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밑바닥을 박박 기고 슬슬 눈치 보며 살금살금 걷다가 위태위태하면 자세를 낮추며 그러다 끝끝내 살아남아서 최고가 된 예를 찾아보잔 말이다. 지금 달라스에 택시 회사가 80에서 100개가 있다. 그 택시 회사의 사장은 대부분 택시 운전수 출신이다. 이른바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으나) 관료주의 100퍼센트. 나는 옛날에 택시 운전수로 일할 때 교통사고가 났다. 꽤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멀쩡히 서 있는 차를 박았다. 앞 차 운전수는 뒷목을 잡고 내렸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분은 나와 같은 택시회사에 다니는 동료였다. 차이점이라면 그분은 베테랑 나는 신참. 그때 어쩌고저쩌고 해서 나는 우리 택시 회사 사장과 대판 싸웠다. 멱살 잡고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다방을 난동판으로 만들었다. 완전 못된 인간이었으니까. 택시 운전수를 하면 정치를 알고 사회를 읽으며 미래를 예견하는 사상가가 된다. 비약이나 풍자가 아니라 그만큼 실물경제에 민감하다는 뜻이고, 택시운전수도 택시회사 사장도 좋은 사람은 좋다는 말이다. 그런데 젊었을 때 택시운전수를 했던 사람이 뭐가 문제고 세금은 어떻고 체계가 불만이다 뭐다, 그 모든 걸 다 깨달았던 사람이 장래 택시 회사 사장이 되면 실무자가 행복한 일터, 모두가 기쁨과 화합에 춤을 추는 회사, 돈이 먼저가 아니고 일을 사랑하며 친절과 봉사까지 솔선수범하는 꿈의 회사를 만들까? 진짜 그럴까? 과연? 밑바닥을 모두 경험해서 택시 회사의 사장이 되면 정말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구요? 감히 인간이 낙원을 꿈꾸고 그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사람이 파라다이스를 동경하고 이승을 천국과 흡사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가상하다. 왜 아니겠나. 그렇지만 인간과 천사 사이에 등호가 성립될 수 있는가를 먼저 따져야 할 것. 연예인이 국회의원이 되고 주지사가 됐으나 선례가 그만그만했던 사례, 많이 알려졌다. 건설회사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서 중기업과 대기업의 대표로 발탁되고, 승승장구 하다가 시장도 되고 국민의 대표까지 되었지만 쉬쉬해야 할지 어떡해야 할지 난감하고 동네 챙피한 사례, 멀리서 찾을 필요 없다. 모두, 관료주의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제일 대접받는 건 위대한 업적보다는 소소한 중간이다. 그건 진리다. 혁명이 그렇고 혁신 또한 그렇다. 실제 그런 건 몇 번 없으니까. 택시회사 업주로 돌아와서, 자기 젊었을 때보다 더 나쁜 악덕 업주가 되는 사례는 아마 없지 않을 것이다. 자세히 어느 정도인가는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택시회사 사측에서 정치권으로 또 뭐가 흘러가지 않을 리가 없다. 그게 뭐냐, 관료주의다! 관료주의의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다. 의식이 앞서지 않는 이상 그늘이 양지보다 더 클 수 밖에 없다. 내 친구는 법원에서 일한다. 시험 보고 들어갔냐고? 아니다. 그럴 리가 있나. 아버지가 법원에서 일하시다 은퇴하셨기 때문에 그 직업을 물려받은 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항상 열심히 일해도 별로 티도 나지 않고, 험담이나 듣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 직업이 몇몇 있다. 업무 특성상 불가피하게 불미스런 일의 매듭을 지어야 하는 일 같은 거. 그 정도 중차대한 업무에 대해서는 아니겠지만 미미한 자리라면 좋게 좋게 조용조용 넘어가는 일들이 적지 않다는 것, 외면해버리기엔 좀 그렇다. 아무리 지역-사회라지만 지방자치니 뭐니 의식이, 의식이 못따라가는데 그게 과연 잘될지 어떨지 걱정이 앞선다. 군청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친구 말을 들으니 거기도, 아직도 관건은 돈이다. 대하드라마에서만 매관매직이 나오는 게 아니라 시대만 바꼈지 정도는 달라도 뭐 비슷하다. 지금이 뭐 중세인가? 또 다른 내 친구는 공기업에서 일한다. 시험 보고 들어갔냐고? 재주라고는 오직 난봉꾼과 노름꾼의 재주 밖에 없다. 술도 노는 것도 취미도 멋과 낭만과 다른 오락은 다 싫어한다. 오직 여자와 도박 딱 2가지 밖에 없는 초라한 인생이다. 그런데 시험을 보고 공기업에 들어갔냐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녀석과 나는 이런 말 해도 되는 사이의 친구다. 그 친구는 시험 보지 않고 어떻게 들어갔다. 그 친구 아버지는 상중하에서 직급 상에 근접하셨기 때문에 아들 둘과 딸 하나가 모두 그렇게 사회생활을 한다. 나도 어떻게 그렇게 안될까 많이 기웃거려는 봤으나 실패했다. 시도 했으나 실패 했으니 나도 똑같은 사람이란 뜻이다. 똑같은, 사람?
   나는 놈 타인은 그분! 나는 뻔뻔 남은 자성!
   나는 비겁한 패배주의자요 그대는 정의의 사도!
   그러나 미완의 광시곡은 새로울 것. 가능하다면,
   허락된다면 끝없이 재미있을 것. 언제라도 젊을 것.
   하지만 원숙한 지혜와 노을빛 슬기도 포기 못함.
   놀라운 신기와 미지의 환희 그 아름다운 꽃밭을 상상한다.
   쨍 하며 해뜰 날 만국기를 두르고서 그곳을 뛰어다닐까,
   다채로운 싱그런 과일을 마구 따먹을까.
   나는야 돈과 인기는 싫다. 사랑과 이상만이 살길이고 유망한 희망이다.
   뭔망? 그러니까 사랑은 유일하지 않아도 되고 영원할 필요도 없다?
   돈과 인기는 진짜, 정녕 싫다? 어디 정말 그런가 지켜보자. 허허허 흐흐흐!
   삼천포란 개코는 또 뭘 눈치챗길래 엄한 신비를 탐하는 거야.
   돌아가자 돌아가자, 돌아왔다 돌아왔다. 그리고 옛날에 달라스에서 다 쓰러져가던 자동차 회사를 큰 회사가 인수한 일이 있었다. 거기도 그런다. 아버지가 정규직이었으면 자식이 정규직을 고용 승계한다.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매해 파업을 하는데 피라미드의 투명성과 건강함을 위해서 파업을 하는지 무척 의구심이 생긴다. 물론 견해차가 크면 필요할 것이고, 어떤 발전을 위해서는 불가피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매번 협상의 결과는, 그 결과를 밖에서 자세히 안다면 어쩜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이 어쩌고저쩌고 좋은 말도 많은데, 말도 안되는 체계는 또 이상하게 다 갖고 그대로 미래로 간다. 마치 국회의원에 대한 조촐한 혜택처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하지만 자연계는 그런데 인간계는 자연과는 약간 다르다. 평균률의 법칙 때문에 위와 아래가 조금은 비례한다. 그게 뭐냐 하면 단계고 과정이다. 3급수 2급수 1급수 이렇게 점차 맑아져야 정상인데 3급수에서 대충 겉으로나면 모양새만 1급수로 뚝딱 바뀌면 탈도 많고 말도 많다. 나는 진짜로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았는데, 순리대로라면, 제자들 역시 내 그림자를 밟지 않아야 하는데 날 밟고 올라서라고 해야 된다니. 어머나 세상에나! 난 개구멍으로 들어왔고 상석에 오를 때 적지 않은 값을 치렀는데 이제 투명하게 공정한 게임을 하자고? 스포츠 룰이 바꼈어? 언제 바꼈어? 왜? 난 개구멍이든 자리 배치든 나도 뭔가를 받아야 공평한 건데 그럴 수 없다니. 세상에나 맙소사! 아아 뚜껑이 열리겠구나! 그러면 멀뚱히 하늘만 올려다 볼까? 그럴 리가 있나. 친구도 성격 좋은 친구가 한명 있으면 약 올리고 놀리며 어디서든 깐족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친구도 있다. 피자배달부의 경험에서 배웠듯이 아랫 동네에서는 아저씨의 입에서 화염방사기가 발사되고 아줌마들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갈 수도 있다. 사회 체계는 그렇고, 가족에서 아빠 만큼 성공한 자식은 둘러보니까 결코 쉬운 게 아니더라. 그런데 교육비와 최적의 환경만 최고의 최고로 30년간 자식 농사에 투자했어. 그런데 결과는? 둘 중 하나일 수 있다. 평범한 월급쟁이 아니면 아들 녀석이 개그맨이 되겠다고 하네? 투자 대비 수익률, 꿈의 실현 및 대망과는 거리가 있겠지만 내 소망에는 그런대로 부응하는 반면 주위의 기대에 다소 모자를 수도 있다. 행복하면 그만이라지만 뭐 좀 그런 게 있다. 이론이야 질서와 이상이 당연한 거지만 본전 생각은 인간의 본성이다. 가족 내에서는 그렇고, 친척이나 지인으로 범위를 넓히면 바램이야 오손도손 정분이 두터우면 좋겠지만 빈번한 왕래 없이 큰 불화가 없는 것이 어쩌면 친교의 으뜸이자 친족의 중간 정도 원만함이고 그것이 곧 화목일 것이다. 친구야 티격태격 으쌰으쌰 한다지만 바텐더 마음 따라 웃기도 울기도 하는 우정이 아닌 이상 서먹서먹한 게 좋을 수도 있고 많은 경우 그게 정상이다. 혹시라도 속 좁은 여자의 마음이나 옹졸한 남자의 성정이 끼여든달지 어떤 사연에 따라 날씨는 달라질 소지도 있지만 말이다. 많은 경우 싸우지만 큰 소란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중간이다. 남성중심적인 시각이 어떡하다가 관료주의로, 중간에 뜬금없이 가족 친척 동료 사이에 중간이란, 관료주의가 어쩌다가 노동조합까지 와버렸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노동조합, 말이나 꺼내 보자. 노동운동 뭐라 하면서 투쟁은 하는데 노동조합이 깨끗할지 투명할지 건전할지, 정녕 피라미드의 하층을 위해서일지 다소나마 우려스럽다. 알고 보면 관건은 경제적 줄다리기가 전부다. 그러면 노동조합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회사는 뭘까? 노동조합이 있는데 투쟁과 파업이 없는 브랜드는 뭘까? 비상장 기업인데 인기도 좋고 평판까지 좋은 기업은 대체 뭐란 말인가! 노동조합이 있든 없든 노동자는 노동조합원 명부에 이름을 올릴지 말지를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 마치 한 나라의 국민이 특정 정당의 당원일 의무가 없는 것처럼. 내 친구 중에서 내가 알기로는 정당 당원 후원비나 연회비를 내는 당원은 한 명도 없다. 정당은 무소속을 포함해서 다수인데 반해 큰 기업의 노동조합은 하나 아니냐구요? 겉은 하나요 속은 분파가 갈리지 않을까? 밖이냐 안이냐, 그 차이 아니냐구요. 세계사처럼요. 노동조합에 소음이 없을 리가 없다. 알력 다툼 왜 없겠나. 정당 당원과 노동조합을 직접 비교하는 건 부적당하니까 일단 이건 잘 모르는 사안이니까 넘어가는 게 좋겠다. 노동조합 가입 비율에 대해서 최소한의 지식은 갖고 출발해야 하니까 그쪽 지식에 대해서는 난 문외한이니까. 그렇지만 나는 한 명의 선거권자인 동시에 피선거권자이자 정당 당원이 아닌 사람의 입장으로써 생각할 때는 최소한 그게 중간이라고 생각한다. 정당 당원이면 정당이 잘하든 못하든 어쩌든 대부분 정당편으로 기울게 되어 있으니까 이건 중도적으로 보자면 명백히 불합리한 처사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완전 비이성적인 처사다. 그러니까 정치 뉴스가 나오면 매번 하는 말은 그게 그거다. 다 똑같다. 지겹지도 않은지 매번 똑같은 말만 한다. 차라리 그럴려면 말을 아껴주세요, 네? 다 그런 건 아니다. 보면 보인다. 모처럼 바른 말을 하시는군, 정치인이 정치를 하네, 귀감이야. 보면 보인다. 여기는 현대식, 저기는 아 진짜 대체 어떤 선거권자들이 저분을 뽑아주시는 거지? 내가 이해력이 부족한 건가 몰라도 이해를 하고 싶어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따따부따가 언제 어디서나 건재할 수도 있다는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치와 오락산업과 예술이 무슨 빛의 삼원색도 아니고 일평생 저 포지셔닝으로 일관하겠다는 건데 할 말이 없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그게 다 선거권자들 때문이다. 보면 보인다. 이쪽은 괜찮네, 그런데 저쪽은 아아 TV꺼 오오 당장 꺼! 정치가는 연예인 흉내를 내면 이미 게임 끝난 거다. 운 좋게 그 바닥에서 오래 버틸 수는 있지만 주피터도 하데스도 포세이돈도 웃으며 재롱을 보시겠지만 뭔지 모를 회한과 쓸쓸함은 길이길이 남을 테니까. 그게 다 남의 떡이 커보여서 그러는 것일까? 예술가는 때로는 연예인을 부러워하고, 연예인은 이따금 정치인을 꾸짖고, 정치가는 간혹 코메디를 선보인다. 가끔이라면 다행일 테고. 뭐 어쩌든 다 포기해도 미몽에서만은 깨어날 수 없다라, 정 원한다면! 지금 당장 봐도 글쓴이의 문제가 뭔가, 그 직업병은 혹시 연예인병? 꿈도 야무지다! 그 뿐만이 아니다. 타성? 권태? 투정? 궤변? 익살? 계속 나온다. 멈추지 않는다. 허영. 농. 능청. 판타지. 미스테리. 모험. 괴씸죄. 흑심. 할아버지가 됐다가 아이도 됐다가 뭐 하나 피해 갈 수 있는 게 없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오락산업을 목표로 정진할 걸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정치만 그렇다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정치! 그래서 정치에 대해서 해결책은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첫째 국민을 정치인 만큼 살게 만들어주던가, 둘째 정치가가 국민 만큼 스스로 낮추든가. 상식적으로 봐도 둘째는 어림없으니까 첫째를 만족시켜야 한다. 매번 똑같은 얘기만 하지 말고. 둘 중에서 둘째는 어려우니까 첫째를 목표로 내일로 나아가는 게 옳다. 아무튼 정당 당원은 그렇고 노동조합원으로 돌아와서 노동조합원이 사측의 입장에서 생각을 한다, 사측이 노동조합의 의견에 100퍼센트 동의한다, 둘 다 어려운 얘기다. 그래서 객관적인 지표가 필요하다. 이때 중요한 게 사원이 회사의 주주인가, 복지는 어떤가, 주식시장에 등록되어 있으면 회사의 정보가 공개되는 만큼 노동조합의 투명성도 그에 걸맞게 따라가는가, 공장이 있는 도시의 평균 임금과 회사의 근로 수준과 비교한다면 어떠한가, 연평균 1회 파업과 투쟁의 목적과 결과가 과연 피라미드의 하단과 건강한 구조를 위한 것인가 등등. 최대주주 구조가 불만이다 그래서 그 체계를 모두 바꾸자? 그건 조금만 부풀리자면 사기업을 공기업으로 바꾸자는 말과 같다. 공기업이 사기업이 되는 사례는 실패한 사례가 많다지만 그 반대는 글쎄 작았을 때는 몰라도 커지면 감당할 수 없다. 어차피 말만 많지 주인만 바뀌는 거다. 그게 뭐냐? 전문가들의 영역이다! 한 도시의 환경을 기준으로 거대한 노동조합 개개인이 어느 만큼 버는가에 따라 조용하냐, 들쑥날쑥하냐, 파업이 방학처럼 연례 행사냐에 대해서 그걸 바라보는 도시인과 주위의 시선은 곱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걸 모두 제도의 시행 그 첫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에 악순환은 반복되는지 모르겠지만 쉽게 말해 고급 브랜드들도 그런지 그걸 정말 알고 싶다. 만약 내가 한 도시에서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에 다니는데 벌 만큼 벌고 업무 만족도가 중간은 되며 퇴근 후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을 해야 한다 라면 나는 노동조합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건 이론이고 실제 당사자가 되면 또 다를 것이다. 하지만 회사의 대표가 회사를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내내 조용했는데 심하다 심하다 많이 심하다 이건 정말 아니다 싶어서 파업을 한다? 파업 하는 게 옳다. 그건 반대를 해야 옳다. 대체로 문제는 뭐고 원인은 무엇이며 왜 일이 커졌다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찬찬히 알아보면 대부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상한 관행을 비롯해서 선순환이 어려워 보이는 구조, 그 일례가 뭐냐? 관료주의다! 관료주의의 단점이 뭔가? 권한이 막중한 역할은 정작 밑바닥 생활을 겪어보지 않았거나 알아도 요원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최하단에서 시작해서 어느 세월에 최고위급이 되나? 못된다. 절대 불가능하다. 그런 예는 극소수다. 장발장 같은 사람이 나서서 시장이 된다? 지금 시대에 글쎄요, 낙관만 할 수는 없다. 내부 승진해서 중간만 해도 좋은데 중간은 못하는 일도 많으니까. 물론 업적이 수긍할 만한 도약이면 귀감일 테고, 신기루에 도전했다 실패하면... 오오 그건 쉿 그만! 당연히 외부 영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외부 영입이 아닌 사례를 찾아보면 그걸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리 쉽지 않다고. 딴지와 비판과 주장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는 남성적 사고를 바탕으로 업계에 종사하는 증권분석가가 뭐 사지 마라 뭐 어째라 하면서 개미에게 워렌 버핏처럼 보고하는 증권 분석 보고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더라. 그분들이 솔직하고 정의로우면 증권회사는 문 닫아야 한다. 보험회사도 마찬가지다. 주식회사는 다 그런다. 창업 역시 일단은 풍요와 이상 두 마리 토끼를 쫓기 위해 시작하는 거다. 차라리 장사치가 낫다. 덩치가 크면 그럴 수 밖에 없다. 앞뒤가 다르다. 과장하자면 다른 데서 500년이 걸린 시스템을 50년만에 대충이나마 규모와 형식을 비슷하게 만들었으면 그 그늘의 골이 깊을 수 밖에 없다. 거기서 끝이 아니고 이미 가속력이 붙었고 시장의 법칙이 정통에서 약간 벗어난 면이 없잖아 있다. 따라서 사람으로치자면 그 인생은 기본보다 성과가 중요시 된다. 인생의 보람과 의미가 아니라 이력서와 통장 잔고를 위한 인생이 된다. 변화가 심하니까 인생으로치자면 파란만장한 거다. 다시 인생을 세태로 바꾸면, 그래서 나중 세대뿐만 아니라 다 같이 내내 생각한다. 대체 문제가 뭐냐고, 왜 이렇게 풀 수 없게 꼬인 거냐고, 대체 왜 이래야만 하냐고! 그러나 답은 없다. 중요한 단계와 꼭 필요한 연습과 필요한 과정을 다 뛰어넘어버렸으니까. 그래서 답은 시간이고 표준이다. 선수와 코치와 감독과 팬의 생각이 각자 다 다르니까. 그게 다 바닥에서 시작했고, 구시대적 정치와 묵묵한 희생이 있었고, 군대와 비슷했던 사회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인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꼈다. 멈출 수도 없다. 시대는 계속 바뀐다. 대충 형식과 규모는 갖췄는데 인생을 돌아보니 문제점이 많았고, 살아갈 날을 보니 결코 수월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대표적인 문제는 이렇다. 기준이 없거나, 기준이 있어도 잘못됐거나, 기준이 있어도 지키지 않거나! 그게 뭐냐? 기본이다 기본! 그러므로 실전에서 활약한 장수와 프로 리그에서 맹활약하는 명망 높은 선수보다 때로는 학자와 전략가가 기본에 대해서 뭐가 문제인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냐 라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특정 업계에서 한눈팔지 않고 일하는 사람의 결심을 불렀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기본! 응? 기본. 나는 사람을 처음 만나면 그의 신발을 본다? 어쩜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군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 뭐라 비트겐슈타인이 그랬다? 그분이 오시는군요! 데미안이 어떻고 지드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진공청소기와 커피포트를 놔두고 무슨나이저만 날개 돋힌 듯 팔리는 겁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무엇이 있을까요? 남자는 어른이 되기 전에 운동을 뭐 하나 해야 한다, 자기가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가 있어야 한다? 솔직해 고백하고 자기만 알자.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 가운데, 독학을 했던 학원에 다녔건, 메트로놈과 함께 연습했는가를! 피아노 학원 0~10곳, 11~100곳 가운데 후자에 다녀본 결과 나는 알게 됐다. 왜 사람들이 피라미드의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지를. 아마추어는 아마추어다. 많은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누거나 수필을 상당량 읽어보지 않아서 타인의 경험은 모르겠으나, 모르긴 몰라도 메트로놈과 철저히 어떤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 연습한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천리안에 천리마에 온갖 요술과 신기한 재주로 놀랍기만 한데 뭐 기본기? 메트로놈? 연애교본 집어던지고 당장 소개팅을 하던 운명적으로 만나던 실전에서 진짜 사랑, 플라토닉과 육체적 사랑을 하고 싶어하지 누가 읊었고 어떻게 노래했던 사랑의 경구를 고집하며 한 사람만 영원히 사랑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메트로놈, 자세, 마음가짐, 철학 그게 다 뭔가? 기본이다 기본! 그 어떤 천재든 재주꾼이든 요행과 행운과 기발한 자질도 튼튼한, 탄탄한 기본기를 당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중 미다스는 후회를 했던 것이다. 재능과 기교가 수준급인데 기본을 생각한다? 재능과 기교가 최고인데 전후좌우 사정을 고려한다? 어쩌면 그걸 바라는 게 어리석을 수도 있다. 사람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기도 한다. 하는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자발적으로 부담을 떠안는 경우도 있다. 이를 테면 공격적인 투자가 있고,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사랑과 우정, 사랑과 야망,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 애정과 조건, 꿈과 현실, 이상주의와 007가방을 들 수 있다. 그 순간, 무엇과 무엇에서 이상하게도 지킬이 아니라 하이드가 결정권자가 되기도 한다. 공격적인 투자로 돈 좀 잃는 건 그나마 낫다. 그런데 야망을 택했는데 사랑을 잃었다? 까딱 잘못하면 빠삐용이 될 수도 있다. 그게 뭐냐, 기본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같은 거. 알지만 잘 알았지만 나중 박사님은 지극히 현실적인 박사님으로 살게 되는 점. 법원에 가면 볼 수 있는 표식 같은 거. 재산 목록 1호 같은 거. 그게 다 기본이다. 자칫 잘못해서 딱 한 번 뭐 어쨌는데 다시 기본으로 돌아간다? 어려울 수도 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음은 돌아가고 싶어도 이미 루비콘 강이 아니라 어떤 강을 건너서 하데스의 용안과 마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게 다 뭐냐? 기본이다! 그처럼 남성중심적인 시각은 어디까지나 남성적인 시각이다. 남자는 배짱이 좋고 주관이 뚜렷하고 열이 좋다. 그런데 열만 좋을 수도 있다. 훌륭한 사업가의 열정이 기교만 남았고 혹시라도 비열할지도 모르는 업자가 되는 것, 한순간이다. 천동설에 기반한 여성적 시각이 아니니까 내 생각이 중요하지 왜 상대방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까는 절대 중요하지 않다. 일절 관심 없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에 대한 분석에 대해서 남성적 사고와 여성적 사고 두 가지가 있다면 남자는 남성적 사고 밖에 할 수 없다. 반쪽짜리다. 아동과 어른 곧 생각의 유연성까지 감안하자면 반의 반쪽짜리도 어려울지 모른다. 비전문가는 그래도 된다. 비전문가는. 그러나 전문가는 그러면 안된다. 그런데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중간에 뭐가 있는가? 오락산업이 있다. 선거권도 있고 피선거권도 있으며 각종 술수와 어쩜 반칙까지 난무한다. 그 말은 곧 반쪽짜리 전문가한테 돈과 인기가 몰릴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거 무슨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도 아니고 말이다. 모든 것을 반쪽으로 보는 것은 반쪼가리 자작만 그랬던 게 아니었구나. 내가 행복하면 세상 사람 모두 행복한 거다. 내가 가난하면 이 세상 같은 지옥이 따로없다는 거다. 나는 백문백답을 완전 좋아한다, 남들도 모두 그렇지 않나? 허허허 웃기고 자빠졌네! 웃자고 쓴 글에 죽자고 달려드냐는 씁슬한 환청은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보아넘기기에 그건 너무 생각이 짧다는 거다. 군중의 우둔성에 관한 명언이 전해지고, 비이성적 인간의 행동에 관한 가설을 실험으로 증명하는 일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아 그건 내가 잘못했다 그건 내가 틀렸고 당신이 옳다 당시에는 내가 무책임했다, 에 대해서 과도하게 부끄럽고 챙피해 하면 인생과 사회 분위기는 아름답지 못한 합리주의로 흐를 수 밖에 없다. 내가 틀렸다 내 생각이 짧았다에 대해서 인정하고 계획을 수정하는 데 대해서 그에 합당한 반성과 성찰이 따라야 하긴 하겠지만 말도 안되는 굴욕과 통렬함 또는 아집이 수반되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게 인습으로 굳어지면 먹고 살기 각박한 세상이 된다. 반쪽짜리라는 남자의 생각은 따라서 여성적인 시각을 포용하고 수긍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온전히 균형잡힌 생각이 된다. 여자의 생각 구조인 천동설에 비해 남자의 생각 구조는 좀 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긴 한데, 하지만 그게 너무 내 생각을 합리화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나만 옳다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아니, 그런 성향이 매우 강하다. 그러니까 남자는 내 생각을 바꾸고 꺾고 접는 게 쉽지 않다. 사랑에 있어서야 말로는 접고 꺾는다고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내부 승진만 놓고 봐도 내부 승진 100퍼센트도 정답은 아니다. 조직이 어느 규모를 넘어섰을 때 말 없고 탈 없는 완벽한 내부 승진 방식은 불법적인 다단계 방식뿐이 없다. 출신과 입구와 출구와 중간 과정의 변화와 정치적 영향이 다를 뿐 관료계에서도 최말단에서 최고봉의 꽃까지 모든 과정을 다 거친 경우 그건 신화라고 한다. 인용문에서 이상이 무엇인가는 밝히지 않았지만 유추해봤을 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장관은 오직 최하급으로 시작했으면 최하급부터 높은 자리까지 모든 직급을 다 경험해야 하고, 고위급 시험을 봐서 들어왔으면 솔선수범해서 최하급부터 시작해서 모든 직급을 거쳐야 최고 직급에 접근 가능하고 모든 직급을 거치지 않았으면 스스로 옷을 벗어야 하고, 그것을 만족했을 때 모든 과정을 초고속 승진만 해야 하고, 사고 방식은 젊은이이면서 대사상가 수준에, 최첨단 기기의 사용은 물론 고급 프로그래머 수준의 코딩 능력까지 겸비한 전설적인 공무원을 뜻한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어디 숨어 계실까? 있다면, 제발, 한번만 알려주시라!
   둘째, 논평의 끝을 <머머 하고 싶다>로 종료. 머머하고 싶다 라는 욕구는 두 가지로 나뉜다. 개인적이냐 개인적이 아니냐. 진담이냐 거짓말이냐로. 혼자 있을 때 머머하고 싶으니까 머머를 한다? 누가 뭐라 하겠나! 온전히 내 권리에 대해서 머머 하고 싶다 라고 의견을 당당히 밝힌다, 왜 안되겠나. 사랑을 한다 그런데 연인이지만 뭐뭐 하고 싶다 라고 투정할 수 있고 말장난 해도 된다. 그러나 개인적이고 사랑이고 예술에 장난에 농담이 아닌 사안에 대해서 머머 하고 싶다? 그것이 보편타당하고 합리적이며 뛰어난 혜안으로 머머하고 싶다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보편타당하지 않고 갓난아기 오줌 누고 있는데 멈추게 하고 바지를 입히는 것처럼 뭔 말을 하다 만 듯하면 그건 무책임하다거나 어쩜 막말에 가까운 폭거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면 멋모르고 끄덕끄덕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무심코 던질 돌에 연못의 개구리는 뭐 어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멋진 영화배우가 말하지 않나, 내 말 한마디에 청소년이 받을 영향을 잘 아니까 무척 조심스럽다고,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이고 농담에 장난에 허풍이야 머머 하고 싶다는 둥 뭐라는 둥 다 괜찮지만, 대안과 성찰과 형식과 글발로 포장된 머머 하고 싶다와 악성 댓글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이게 된다. 그게 대체 뭐가 다를까, 일시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다. 게다가 어머나 경력이 출중하고 뭐 어쩌네? 말을 아끼는 줄도 모르고 뭐든지 쉽게 쉽게 말하네? 다방면으로 활동하며 왕성한 정력을 뽐내며 설을 풀고 글로 유명하다? 일부 사람들은 천재로 떠받든다. 세계적인 천재로 말이다.
   셋째. 글의 구조. 모래시계 구성의 논조가 아니고 반쪽짜리 역삼각형이다. 다른 글은 모르지만 일부분만 놓고 보면 대안은 모르겠고, 내가 제일 잘하는 건 댓글식 분석이고(철저한 조사와 진지한 탐구는 생략된 채), 창작은 관심없고 내 별명은 에코다? 글쎄요! 불만과 분석과 타당한 근거 제시는 좋았다. 머머해서 머머하니까 나는 머머가 싫다 나는 머머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딱 거기까지는 합리적이었다. 딱 거기까지만! 때문에 글을 읽고 뒷만이 개운할 수 없었고, 그러므로 역삼각형에서 끝날 게 아니라 그에 이어서 삼각형 논조를 갈때기처럼 제시해서 역피라미드 구조로 전체를 끝맺어야 옳은 일이었다. 곧 일리 있는 역삼각형으로 문제 제기를 했으면 그에 이어지는 삼각형으로 결론은 뭐다 그것을 분명히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듬. 그런데 다행히도? 슬프게도? 어쩔 수 없이 대개 글쓴이는 물론 관객과 독자가 대부분 여기까지다. 대세는 합리주의니까. 왕권은 오락산업이 쥐락펴락하니까. 그러나 그러면 밑 빠진 독에 물 붙기가 된다. 와 재밌다 볼 때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또는 혹시 뭐 있나 했는데 끝나고나니까 뭐 하나 남는 게 없다 돈 아깝다 어쩐다 등등. 예술과 사상이 아니라 그 모두가 쾌락과 유희와 게임에 가깝다. 사안에 대한 적합한 구조가 모래시계였는데 역삼각형만 꺼내 놓고 돌아서는 모습인 듯 하다. 꼼꼼한 듯 하더니 무슨 일을 하다 마나. 할려면 끝까지 해야 하는데 뭘 하다 만 느낌이다. 발단은 매우 뛰어났다. 그런데 발단으로 시작해서 발단으로 끝났다. 소설은 그래도 된다. 그러나 픽션이 아닌데 그러면 곤란하다. 발단 다음에 뭔가가 있어야 한다. 외부 출신이 특히 어디쪽이 많다라, 그러면 결과는 셋 중 하나다. 독불장군이냐, 중간이냐, 얼굴 마담이냐. 현대인은 모를 수 없다. 지구가 거꾸로 돌지 않는 이상 대부분 결과는 중간이라는 것을. 물론 애매한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해서는 회피하지 않는 게 옳지만 말이다. 너도 알고 나도 알다시피 어떤 청량음료가 더 상쾌하다는 건 알지만 많은 경우 당장은 시끄럽지만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면 많은 경우 그래도 중간에 해당하는 사례가 훨씬 많다. 그래서 정작 심리적으로 이리 휘청 저리 휘청하지 말고 진짜 문제에 더 많은 시간을 할당해야 하고, 생각 무엇보다 생각을 해야 한다. 저 역삼각형이 꼭 모래시계 구조이지 않아도 된다. 32─24─36이든 음료수병이든 아니면 그냥 드럼통처럼 일자여도 괜찮다. 쥐꼬리만한 봉급에 해당할지라도 결론은 공과 사가 구분되야 마땅하다. 나는 머머를 좋아한다 나는 머머하고 싶다, 그 표현이 어디에 어떻게 쓰여도 좋다. 다만 이타주와 이기주의가 같지 않듯이 글과 말은 다르듯이 욕구와 논리의 결합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용문 요약이 사실과 다르거나 내 기분이 왜 상쾌하지 못했나에 대해서 남의 다리를 긁었을 수도 있으나 지나칠 수 없는 몇 가지에 대해서는 적어도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결론은 이렇다.
   하나, 인용문을 왜 썼는가와 시작에 대한 논조는 매우 훌륭함.
   첫째, 남자의 시각 그 논리적 한계.
   둘째, 개인의 사회적 욕망은 왜 비전문적일 수 밖에 없는가.
   셋째, 글의 구조 곧 왜 글은 말과 비슷해서는 안되는가.
   끝으로 글쓴이는 어떤 사고 체계를 지닌 사람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소셜 네트워크에서 그분의 다른 글들을 살펴봤다. 왜냐하면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십년에 한 번도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내가 그런 천재는 아니지만, 최소한 관찰은 할 수는 있고 어떤 사고 구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것이 궁금했고, 또 그것을 알고 나면 더 이상 그와 비슷하거나 똑같은 글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 낭비라면 차고 때리고 넣고 야외로 나가도 괜찮고, 차라리 TV가 나으니까. 대략 살펴보자면 인용문의 글쓴이는 이런 심상의 소유자로 보여졌다. 물론 틀렸을 수도 있음.
   자, 역삼각형은 마쳤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삼각형 구조를 시작해볼까? 남의 다리는 많이 긁었으니 이제 어여쁜 내 님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자.
   (전혀 다른 어족의 언어로써) 최소 2개국어 능통. 학벌 최고 IQ 최고. 인용문 분야에 대해서 비전문가지만 발단은 전문가 수준. 그런데 발단만. 이론과 실제, 이상과 현실이 왜 다를 수 밖에 없냐에 대한 의견을 더 듣고 싶은데 그런 글을 못찼았고, 소설과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끝난 느낌. 글쓴이가 박학다식하고 감은 좋은데 주장이 너무 강함. 요즘 시대 감 좋은 사람 결코 드물지 않음. 자료야 조사하면 다 나옴. 약간 어중간하면 좀 더 자세히 알아본 다음에 말하겠다는 태도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음. 내가 좋아하지 않거나 나와 다르면 이해할 필요 없음. 모 아니며 도. 무엇보다 말이 많음. 다른 사람 글을 읽으면서 상대방 입장 좀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본인이 제일 상대방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 부류. 내가 좋아하면 찬양하고 내가 싫어하면 깔아뭉갬. (그건 누구나 똑같지만 여기서 품위가 드러나고 촌닭과 백조가 갈림. 표현이 셀 때 대체 왜 표현이 센가, 단순히 싫어하니까 좋아하지 않으니까냐 아니면 다른 어떤 뭔가 영롱한 이유가 있단 말인가. 잘 보면 곧 관찰하면 알 수 있다. 그냥 따따부따인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가를. 그 차이는 결코 경시할 수 없음). 능력은 출중한데 개인적으로는 완전 피곤한 스타일. (기분이 나쁠 때) 동조성 제로. 여자들 참 좋아하겠다. 가장 큰 재주는 뻔한 말을 어렵게 말하는 능력. 이런 분이 산업쪽으로 진출해서 그렇지 정치계나 예술계로 왔으면, 아아 그만! 본인은 다른 전문가를 폄하할 생각이 없다는데, 정작 그걸로 알고 보면 자타공인 최고임. 의사 표현이 너무 쉽다. 와 어떻게...! 자존심 최고. 너무 똑똑해서 그런가 신중함이라곤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음. MBA 출신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을 너무, 정말 너무 쉽게 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인데 구태여 꼭 활자화를 할 필요가...! 모르겠다 궁금하다 알고 싶다 꿈꾸다 좋아한다 기도 드린다, 는 여간해서는 어울리지 않는 완벽하게 딱딱한 고체다. 물음표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생각과 말 사이에 오직 등호만 존재하는 건가? 생각을 정제하고 꾸미고 다듬고 가린 다음에 기표로 전달할 수는 없단 말인가. 그러니까 젊은이와 어린 친구들은 고리타분한 늙은이와 친구가 되기는 좀처럼 어렵다. 사석에서 같이 차와 술을 마실 수는 있으되 무슨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도 아니고 15분을 넘어가면 슬슬 인내력의 한계가 다가오는 것이다. 노인이 되면 어쩔 수 없기는 하다. 듣기 싫은 게 아니라 잘 안들리니까. 노인과 살아보면 알게 된다. 그게 뭐냐? 인기다. 노인도 함께 하고픈 노인이 있다. 노인뿐만 아니라 젊은이도 숙녀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내가 소년과 인사를 나누던 미녀와 사랑에 빠지던, 인기 많든 인기 없든 중견 예술가가 한달에 1곡씩 꼬박꼬박 꾸준히 발표하는 성실함을 존경하든, 동네에서 마주치는 노인에 대한 인상이든 어디를 가든 무엇을 보던, 쉽게 구분해서 세 가지로 나뉜다. 좋다, 그냥저냥, 싫다로! 상중하로! 그런데 내적으로 감흥하는 느낌에 대해서 그 세 가지를 표출하는 방식 또한 각자 다르다. 노인 역시 그렇다. 노인이 다 그런 게 아니다. 단계를 모두 거치고 낭만과 함께 느긋하게 연애를 해볼까? 내일 모레도 아니고 오늘 갈지 내일 갈지 언제 갈 줄 모르는데, 오히려 청춘의 사랑보다 노년의 연정이 더 급하다. 잘은 모르는데 그런 면이 없잖아 있다고 한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용건을 확인했고 이제 안부랄지 인사로써 여유롭게 통화를 끝낼려는데, 갑자기 뚝 끊는다. 갑자기 뚝. 뭐야 이거! 우리 마누라도 그래요? 갑자기 뚝 끊는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뚝. 목적 지상주의다. 황금만능주의는, 통과. 윤리학에서 뭐 어쩐다는,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리지 않았으니까 최소한 꽝은 아니다. 내가 가냐 늬가 오냐 지리를 설명하는데, 어떻게 어떻게 잘 설명을 해 드릴려고 하는데 어머나 글쎄, 통 듣지를 않으시네? 이 양반 연세 많이 자셨구만! 흐흐흐. 스핑크스의 퀴즈에 나오듯이 노인과 닮은 아바타는 애다. 똑같다. 그런데 차이는 있다. 노인은 거친 파도를 넘고 험난한 야전을 누볐던 백전노장이자 이 세상을 꿈과 희망과 기쁨으로 보자면 그 모두를 알고 두루 경험했던 낭만파이자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면서 지혜로만 보자면 천재가 따로 없는 신비주의자, 그분은 바로 노인이다. 응애응애 아이는 놀아주면 끝난다. 그야 물론 힘들긴 하지만 아이는 그렇다. 그러나 노인은 아이 더하기 노인이다. 연장자와 노인에 대한 예의와 공경이 심한 지역도 있지만 지구상에 연장자와 노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공경심이 없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언어를 예로 들면서 어디는 반말이니까 뭐 어쩐다? 모르는 소리! 그 어디나 연장자와 노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완벽하게 백 퍼센트다. 그걸 감안할 뿐더러 만물박사에 요구와 지적이 많으시고 응애응애 아이와 닮으셨다면 대처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노신사가 되서 어디 자기보다 더 연세 드신 노신사를 보좌하며 딸랑딸랑 빠릇빠릇 굽실굽실 행동하시기를 좋아하는 노신사가 대체 몇이나 될까. 늙은이란 말은 그렇다 뭔가 약간 짠하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무엇을 보든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다 그 나름의 특색이 있을 뿐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그런데 진짜 진짜 중요한 점은 생각에 새로움이 들어설 수 없는 사고 방식의 소유자를 그냥 대충 노-책사랄지 모사꾼 줄여서 쉽게 노인이라고 가정하자면(일단은 잠시 한 단어를 약간 부정적으로 사용하겠음), 젊은 사람들 가운데도 노인은 많다는 것. (딱) 이거다! 겪어보고 속을 알고 친해지면 좋겠지만 일단은 이 분과도 적지 않다. 소시오패스, 냉소주의자, 비판적 이성주의자, 험구가, 호사가, 속으로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고 통 말이 없는데 입을 열었다 하면 여간해서는 좋은 소리 듣기 힘든 과묵한 사색가? 몸은 젊어도 정신은, 마음은 완전 노인이다. 따따부타 따따부따 완전 노인이다. 이미 노인이다. 젊은데 그런데 우리 동네에 공원이 있는데 뭐하러 놈의 동네까지 가서 논데? 이미 노인이다. 말은 많지 않아도, 따따부따 떠들지 않아도 완전 노인이다. 에게~ 땅꼬마처럼 옹졸하고 앵앵~ 모기처럼 조잡스러우며 윙윙~ 파리처럼 꾀죄죄한 기상은 절대 아니고, 오히려 참으로 잘나시고 회전 반경 넓고 심원한 인생관을 지니신 마음은 노인 몸은 젊은이시다. 그 야망 워워 장난 아니다. 겪어보면 알게 된다. 연애할 때는 모른다. 절대 알 수 없다. 크아 워워 이야 캬, 가히 대장부답다. 특정 타입의 노인, 이를테면 기분이 어땠을 때 아줌마, 말과 글과 뭐든지 쉬운 모르는 게 없는 냉소적인 분석가 유형, 뭘로든 보통의 일반인도 기분이 처졌을 때, 그 역시 똑같다. 나는 SF 소설을 좋아한다? 그럼 뭐하나! 고상하지 못한 범속한 표현으로 이런 양식을 꼬다 까다 꼿다 나댄다 발르다 까칠하다 꼰대 라고 하지 않나. 내 귀는 꽉 막혔는데, 남 귀는 피나게 만들어도 좋다? 듣거나 말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만 좋으면 그만인가? 기교와 주관은 정점에 달했는데 유독 회의적인 측면으로만 바라보는 것만 몹시 좋아한다? 내 맘에 들지 않는 건 다 꽝이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반칙왕이 스타가 되고 합리주의가 득세하는 세상이라지만 좀 심했다. 여자에게 특유의 횡설수설이 있다면 남자에게는 고유한 비관주의가 있다. <여자는 횡성수설 남자는 비관주의>.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타고난 생물학적 성에 따른 천성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그런데 비관주의가 횡설수설을 만난다면! 횡설수설이 비관주의까지 겸비한다면! 것도 아니면 횡설수설이든 비관주의든 꿋꿋이 포장을 잘하고 의연하게 인생을 걸고 철옹성을 쌓는다면! 그만큼 극단은 드물겠지만 재주꾼은 세상에 차고 넘친다. 당연히 여자의 횡설수설을 남자가 흉내낼 수 있고, 반대로 여자가 남자처럼 비관주의에 일가견일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자제하고 웃음으로 승화시키며 농담으로써 마침표를 물음표로 바꿔서 안델센과 볼보와 스피노자를 연상시키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 역시 상중하로 나뉜다. 만약 남자가 여기서 상에 해당한다, 그런데 말발의 특징이 표독한 댓글과라면 완전 기분 나쁠 한마디를 툭툭 던지는 식인데, 어머나 글쎄 말을 잘한다? 그러면 모든 기교와 지식을 총동원해서 비관주의의 금자탑을 쌓는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무언가에 대해서. 말이든 글이든. 게다가 기분 나쁠 때는 최악이다. 또 만약 여자가 여기서 상에 해당한다? 잘 아시다시피 온갖 일들이 막 튀어나오며 갖은 신경질과 심술을 부린다. 질투가 예의인가 그것은 넘어가자. 그건 그나마 낫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드물게 악녀도 있다. 음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20대 초반의 천재적인 힙합 뮤지션이 자기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 자기를 스토커로 여긴다? 남자에게 주사기로 독약을 주입해서 잠들게 한다. 영원히 잠들게 한다. 사랑으로 꿈꾸게 하는 것이 아니라. 포근히 잠들다라...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는가! 그러고서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은 무죄 3심은 황당하게도 공소기각으로 종료되어서 성형수술 후, 어디 숨은 것도 아닌 채 뉴욕의 번화가이자 부자 동네에서 수십 년간 행복한 삶을 누리며 잘 먹고 잘 산다. 당당하게 그리고 꿋꿋이! 그래도 할 말은 많다. 누군 뭐 그 생활이 좋았는 줄 아냐고. 주객전도다. 그만 좀 해라?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 힙합이 왜 들리지 않았나 큰 관심 없었지만 난 글쎄 수십 년 동안 자살했던 비운의 천재 뮤지션으로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수십 년을 슬픔으로 살아왔을 텐데 여태 난 그것도 모르고... 어머나! 이번에 처음 알았다. 당시 사회가 그랬다. 인터넷이 일반화되지 않아서 거의 무인터넷이었던 시절, 일부 사업가만 겁나게 커다란 핸드폰을 드물게 사용하던 때 멀쩡한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되고 그 후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세계를 보면 역사적으로 거의 초기화되었다가 새롭게 시작한 사례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습에서 근대기와 산업혁명의 적용을 건너뛰고 현대로 넘어온 사례는 거의 없다. 그걸 건너뛰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 그 문제에는 사람들의 인식과 의식도 포함된다. 반쪽짜리는 커녕 반의 반쪽짜리가 평균이 되는 일도 어쩌면 겪어야 할 수도 있다. 그걸 뭐라 하냐, 단계라고 한다. 껑충 그런데 따따부따! 껑충의 문제를 보는 시각의 차이가 그래서 발생한다. 늬가 반쪽이냐 내가 반의 반쪽 사상이냐로. 힙합 뮤지션은 물론 힙합 팬과 사회의 공분을 사서 존엄한 어떤 사회적 체계와 정의가 무너지는 사례, 그것도 혹시 주홍글자 아니냐고? 그건 단계를 건너뛰었기 때문에 미래 세대가 감당해야 할 주홍글자 맞다. 마녀사냥의 마녀도 시대가 지나서 주홍글자로 인정된다. 그러나 그냥 악마와 분명한 악녀는 주홍글자 아니다. 그럼 아무나 주홍글자되라고! 그러면 주홍글자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겠다. 여자 덱스터인데 덱스터처럼 악인을 향하는 그게 아니라 뭐 그런 건가? 모세의 기적이 하루도 아니고 날마다 연출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옛날에 전설로야 모세의 기적이 있었다지만 과학적 의미 부여와는 따로 생각하더라도 그건 정녕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버린 건가? 일단은 그렇다. 이런 일이 한둘도 아닐 테고, 현실적으로 모세의 기적이 재현되는 일이 적지 않을 테니 말이다. 기적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닌지도 모를 지경이다. 행복한 가정도 사랑도 풍요로움도 모든 것을 얻었을 텐데! 남의 얘기를 안 듣고 사회적인 선과 악 인도적인 죄와 벌에 대한 개념과 단절한 채 내 말만 내 신호만 내 삶만 앞세우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모세의 기적이 신화든 전설이든 사실이든 아니든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한가? 모세의 기적 같은 일이 옛날 옛날에 몇 개 있었는지 지금 탄소 뭐 측정이라도 해야 하나? 정작, 정작 중요한 건 어디서든 언제든지 모세의 기적이 실존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게 진짜 중요한 거 아니냔 말이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을 놔두고 사생활은 지동설 이론에 대해서만 천동설식으로 말하는 신도는 백퍼센트 그런 식이다. 내게 유리한 부분은 의역, 내게 불리한 부분이랄지 어떤 권세와 찬양에 대해서는 직역! 그게 뭔가? 일관성은 가출했나 출가했나 아니면 뭐 환속했나? 정말 그런가? 그게 무슨 자연의 섭리인가 천사의 눈물인가? 청자와 화자, 작가와 독자, 관객과 배우, 친구와 친구, 사랑의 연인, 유명인과 일반인 사이에서도 그렇고 개인이라는 단위 즉 나와 나 사이에서도 그 구분은 나뉠 수 밖에 없다. 대부분 참고 넘어가고 접고 꺾고 무시에 무관심등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회피할 방법은 많다. 그걸 대부분 잘한다. 그러나 롱테일의 법칙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그 어디에나 무엇이나 누구라도 상극은 있다. 상극! 그건 피할 수 없다. 가령 TV에서 아니면 학교에서 유독 싫은 사람. 딱히 이유가 타당하지 않지만 괜히 싫은 사람. 있긴 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그건 없을 수 없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러면 친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아니면 그로써 자극을 받아 그걸 오히려 내게 유리하도록 내 꿈에 도움이 되도록 역이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불가피한 예도 있다. 일 때문에 그런 경우. 돈 버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또 이를 테면 형제자매끼리 싸우는 것. 대부분은 잘 지내지만 하지만 해도 해도 상극인 유형도 있다. 그런 경우 몇몇 사례를 주위에서 보게 된다. 아예 인연을 끊는다, 얼굴은 보는데 말은 섞지 않는다, 아니면 인연을 끊지도 서로 외면하지도 않은 채 사는 동안은 살아만 있다면 고인이 아니라면 끝까지 싸우는 경우, 끝까지 싸우는데 사이가 좋은 경우와 심각한 경우. 부모 재산 문제로 그렇게 됐든 부모 재산 문제가 아닌데 그렇게 됐든, 문제는 문제다. 이 또한 상중하로 나뉜다. 똑같이 잘못하고, 똑같이 악순환이 반복된다지만 잘 보면 심한 쪽이 있다. 심한 쪽의 심리를 분석하고 그 마음을 치유하는 건 당사자의 문제니까, 무엇보다 당사자가 당연히 인정하기 싫을 테니까 넘어가고, 그에 앞서 이론적인 처방은 어쩜 이렇지 않을까? 일단 원인은 확실하다. 원인은 있다. 서로 상극인데 귀가 막히고 남의 귀 피나게 하던가, 사람 참 못됐다 싶도록 마음이 착하지 못한 쪽이 꼭 있다. 쉽게 말해 6 대 4든, 7 대 3이든, 8 대 2든. 이런 경우 아무리 중재를 하고 2와 3과 4가 아무리 노력해도 관계 개선은 불가능하다. 방법은 하나다. 져주는 수 밖에 없다! 의학적으로 검진하고 심리학자가 진단하면 어디서 어떻게 무슨 원인으로 그렇게 됐다 라는 분석이 도출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처방전을 갖고 관계 개선이 되느냐, 사람이 바뀌는가, 그건 둘 중 하나다. 네 또는 아니요!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대체로 아니요고, 사람을 놓고 봤을 때 많은 경우 아니오에 무게가 실린다. 조련사의 도움으로 우리 강아지가 변했어요? 동물 감정 교정가의 처방 덕분에 우리 고양이가 밝아졌어요? 사람은 동물이 아니다. 사람과 동물은 다르다. 흔히 말하는 다양성과 달리 틀림과 다름이 모두 적용되는 사항이다. 전문가 얘기는 거의 같다. 사람이 변할 수 있는가? 사람이 변할 수 있냐 없냐에 앞서든 다음이든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개선의 여지가 있는가? (사춘기든 성년기든) 어느 시점 전에는 가능하나 어느 시점 이후에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또는 처음부터 어울리는 인연이라고 하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어려운 궁합이라고 한다. 물 한컵을 생각하면 된다. 일단 비관을 전제하고 간혹 낙관으로 볼 것인가, 그 반대로 볼 것인가. 딱 떠오르지 않는 전문용어, 그거다. 사람의 생각도 그와 똑같고, 사람의 인성도 똑같은 이치다. 완곡어법으로 말하자면 여간 해서는 사람은 바뀌기 힘들다는 뜻이다. 안 그러면 사랑의 맹세가 깨질 걱정을 왜 하겠나. 황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 오락산업의 빛과 그늘, 전-남자친구과 현-남자친구에 대한 무의식적 비교, 전처와 후처 사극으로치자면 그냥 첩과 애첩이 왜 나뉘겠나. 말과 행동이 다를 필요도 없고, 호박이 제발로 걸어다니고, 씨를 뿌리기 위해 설을 풀고, 잡은 물고기에게 밥을 주냐 마냐 어쩐다는 둥, 그게 다 뭔 필요가 있겠는가! 사람이 쉽게 바뀌고 개인이든 관계든 개선이 손쉽다면 말이다. 아니 그렇소? 동물을 예로 들어보자. 겉은 개 속은 고양이, 곧 개고양이. 겉은 양, 속은 말, 곧 양말. 개고양이와 양말이 어울리는가. 어울릴까? 각자 생각합시다! 겉과 속을 나누면 어려우니까 하나만, 여우와 두루미? 백조와 촌닭? 독수리와 비둘기? 방법은 하나다. 그렇다. 방법은 하나! 져주는 수 밖에 없다. 답은 없다. 져주는 수 밖에! 지는 게 이기는 거고, 참는 것도 이기는 거다. 앞에서 이겨 봐야 모양새만 엉망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걸 뭐라 하냐, 소탐대실이라고 한다. 남자들이 괜히 져주고 꺾고 접고 술값 늬가 내라, 그러는 게 아니다. 내 귀는 피가 나도 좋다. 다만 남의 귀에 피가 나든 어쩌든 남자들은 대체로 각자 마이크 잡고 따따부따 자기 얘기만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어째서 음 뭐랄까, 왜 져준다는 말이 싫으신가? 그러면 다른 말도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이타적인 삶. 어렵게 역위임. 고급스럽게 호혜주의! 그외에도 여기서 져주고 다른 데서 기쁨을 찾아면 된다. 당장은 마음이 아파도 슬플지라도 말이다. 완전 져주기 싫으면 2만큼 3만큼 4만큼 한발짝 만큼 더 져주고 양보하면 훨씬 나을 것이다. 물론 말은 쉽고 행동은 어렵겠지만 말이다. 나는 악마다 나는 악녀다 내가 최고다 또는 너는 악마다 너는 악녀다 너는 중간이지만 꽤 심했다, 라는데 뭐 할 말이 없지 않나. 방법도 없다. 전문가도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그건 그래도 더 낫지 않을까? 9 대 1 보다. 10 대 0보다.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그분을 영원히 잠들게 하는 것보다는 말이다. 피를 나눴으니까 피는 물보다 진한 게 맞지만, 처지가 영 불가피하다 그러면 쫌팽이 쪼다 머저리 얼간이가 왕좌에 앉도록 져줘야 한다. 그 쫌팽이 쪼다 머저리 얼간이가 잘생겼건 손윗 사람이건 어쩌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아니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진짜 그런가 의역을 직역으로 해석해서 실험하고 확인을 해 봐야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무엇이든지 약점을 찾아서 파고 들고 어떻게든 비판적으로 볼려는 태도, 언제 어디서나 최악에 대비하는 자세, 그 역시 꼭 필요하다. 반드시 필요하다.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서 그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최악을 생각하는 버릇, 꼭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건 될 수 있으면 자기 분야에서만 사적으로만 개인적으로만 또는 비판이되 건강할 것. 크고 멀리 넓게 볼 것. 어쩌다 퇴폐주의에 빠졌을지라도 선풍적인 재기에 성공하여 즐거운 시절로 도약할 것. 그런데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최악의 경우의 수를 참고하는 게 아니라 그걸로 자질이 특화된다? 따따부따 웃기지도 않는데 따따부따 방면을 가리지도 않고 따따부따 그 뭐든지 따따부따? 그건 정확하게 판타지를 상상하는 학생들이 좋아하고 친해지고 싶은 선생님 유형이 아니다. 그건 전형적인 타석 지상주의다. 최고의 코치야 승부욕을 자극하게 만들고, 협상가는 담판을 장사꾼은 흥정을, 난봉꾼은 노력을? 뻔뻔함을? 여자를 다루는 기술을? 경영학도는 말싸움을?, 백조야 고품격을 추구한다지만 말도 쉽고 포기도 인정도 브랜드도 (단기?) 이익 창출도 지속 성장도 산업 동향과 전망과 분석도 성과도 끈기도 그 모든 게 다 쉽다면 그건 대체 어떤 인생 철학일지 궁금함. 받아들이고 설득하고 이해하며 시간을 갖고 생각을 한다, 곧 숙고한다? 아마도 불가능할 수도 있다. 즉시 생각해서 즉각 겉으로 표출하는 기술로는 세계 최고니까. 모든 게 가위바위보처럼 명쾌해야지 애매하면 끝이다 라는 인식에 기반하는 사고의 소유자인 듯 하다. 하지만 공학도 인문학이 뭐 어쩐다, 에 대해서는 또 말이 많을 것이다. 아는 게 많으니까. 그러나 새로움은 별로 없다. 많든 드물든 다 남이 아는 것 위주다. 생각에 대한 발표의 기준이 새롭냐 새롭지 않냐가 아니라 내 생각이기 때문에 그것은 고유한 것이고, 따라서 그런 낡은 관점에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고 체계에 따른 결과인 듯 하다. 정녕 새로움은 각광받지 못하고, 정말로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건 곧 굳이 내가 아니라도 남이 다 할 수 있는 내용이란 뜻이다. 대체 불가능한 능력이 아니라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재주다. 얼마든지. 예술이든 뭐든 모든 것을 게임과 승부의 관점으로만 판단한다? 진정한 고수는 아니다. 비평가지만 비전문가다. 스포츠로 치면 인상 험악한 관중이다. 훈수는 잘두는데 웬만하면 모든 수를 악수로 본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옆에 있어도 시끄럽고 승부사로 나서도 시끄럽다. 말로 체스 두는 양반이니까. 호랑이로 치면 풀 뜯어먹는 호랑이다. 덩치에 맞지 않게 다람쥐만 추격하는 사자다. 설마 험담가로써 이름을 날리려고 MBA를?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 행색을 보면 꼭 아닌 것 같지도 않다. 실전에서 일을 배우지 않고 공장에서, 아카데미에서 기계적으로 일하는 기술을 연마한 기계 같은 사람의 생각처럼 느껴진다. 그야 어쨌든 우려되는 점은 무엇이고 어떤 점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다. 바로 그와 같은 사고방식의 시점! 돈과 인기를 표준으로 따졌을 때 그것에 대해서 당사자가 흡족할 만한 성취감과 눈에 또렷이 보이는 성과가 기준선 위냐 아래냐, 명쾌히 아래다. 기준선 아래이기 때문에 통쾌하다는 뜻이 아니라 현상태가 그 아래라는 사실을 근거로 막중한 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는 거다. 돈과 인기에 대해서 현 시점이 엄지 척의 반대라는 건 절대 부정할 수 없다. 스스로야 내가 최고가 맞지만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기준선을 넘지 못했다. 돈과 인기의 기준선을 넘지 못했는데 지금 이 정도라면, 만약 돈과 인기의 기준선을 넘어서게 되면? 만약 그렇게 되면? 그에 대한 전망과 예측은 이미 그처럼 세계적인 거장이 되신 수많은 분들을 참고하면 된다. 세계적인? 반쪽짜리라도 세계적이라는 성의 없는 수식어는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나도 너도 누구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자, 아무 데나 가리지 말고 숟가락 얹어봅시다. 올려지면 좋고 아니면 말고! 그런 반면, 그와 동시에 자신감 자존심 자존감 자부심에 자의식 과잉 역시 허세와 허영과 허풍처럼 그것이 알카리성인가 산성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능력이 더욱더 절실히 요구된다. 호호호 짝짝짝, 거 참 MBA답다! MBA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하기사 분석─관측─측정─추정─연구─예측이 전문인데 만사 해결과 예언─상상─관망─추측─만담과 유머에 창조까지 죄다 능통하면 정치계든 연예계든 그 어디든지 MBA 출신은 인기 폭주할 꺼다. 물론 실제 그렇지는 않고 말만 봐서는 이 분야 저 분야 뭐 하나 망설이지도 않고 마다하지도 않는다. 안다박사니까. 그리고 실상 박사가 맞음. 그렇지만 이성적 사고로 최고인 사람은 현시대에 절대 귀하지 않다. 계속 쌓이고 영원히 쌓인다. 그야 어쨌든 아무리 그래 봐야 반쪽짜리다.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아마존, 구글, 애플등 유명 회사의 창업자들이 인기와 돈은 월등하지만 MBA 학위가 없기 때문에 MBA 출신보다 아마도 한 수 아래가 아닌가 그렇다는 뜻으로 알아야겠다. 누구 누구는 하수 MBA는 고수, 그렇게.
   바이올린 여제가 제자를 떠나보내며 말한다. 모든 것을 잊으세요. 당사자가 아닌 이상 어디까지 잊어야 할까 애매하다. 수년간 수발들고 시중드느라 무술은 커녕 암것도 못배운 문하생한테 스승이 어느 날 그런다. 넌 이미 마술사이니라. 그런데 진짜 마술사가 됐어. 어쨌든 경영학스쿨은 어떤 혹독한 수련을 치르게 만드는지 모르지만(대충 수박 겉 핦기식 귀동냥이야 있지만) 놀랍게도 스포츠와 닮은 구석이 크다. 모든 걸 근육이 기억하고 본능으로 숙달하고 직감으로 움직이며 완벽한 기량을 갈고 닦아라 그런 것만 같아서. 아는 게 너무 많으니까 생각이 절대로 틀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나는 아니다 절대 아니다 난 그래서 SF 소설을 즐겨 읽고 뭐 어쩐다? 완벽한 어른이다. 이런 어른이라면 차라리 응애응애 스무 살이 낫다. 만약 말로 진다면, 자기 주장을 굽히라고 압박 받으면 참 좋아하시겠다! 더군다나 이런 이성주의자는 절대 말로는 지지 않는다. 삶이 곧 논쟁이니까. 자기 생각 바깥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결정하고 판단하기 애매하네, 그러니까 자세히 알아보고 나중 말씀드리리다? 하수에게 그런 자상한 답변을 기대할 수는 없다. 어른과 아이의 차이점이 그거다. 어른은 꽉 막혀 있다. 앞뒤가 꽉꽉 막힌 존재가 바로 어른이다. 때로는 귀까지 막혔을 수도 있다. 어른은 주장한다. 어른은 우긴다. 어른은 내 생각을 굽힐 수 없다. 어른은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이해할 수 없는 거다. 공감을 못하겠으면 관심 없다고 한다. 넌 나의 단짝이지만 하지만 넌 내게 넘버 투라고 한다. 내가 최고다. 드물게 모두 최하도 있다.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하지 않으면 그건 어른이 아니다. 앞뒤 꽉꽉 막혀 있지 않으면 그건 대체로 어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건 곧 사회성이란 말로도 바꿀 수 있고, 자존심이라는 단어로도 치환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그런데 말까지 많다? 아는 건 나만 알든 나만 모르든 전부 다 말과 설로 풀어야 한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건 그냥 기계다. 내 귀가 막혔지만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쉼없이 습득하며 남의 귀를 피나게 하는 기계. 만화 캐릭터만 떽떽거리는 캐릭터가 있는 게 아니라 꽥꽥 꼬끼오 꼬꼬꼬꼬댁, 사이코패스만 흔한 게 아니라 촌닭도 어디든지 여러 분야에 차고 넘친다.
   고품격 브랜드는 값에 상응하는 물품을 생산하고, 장인은 이름과 인생을 걸고서 명품을 만든다. 나아가 풋사랑의 기대는 어쩔 수 없이 체념으로 결판나고, 사랑의 예감 역시 그 행복은 짧을 수도 있다. 그러거나 어쩌거나 약력이 출중하면 그 약력에 걸맞는 혜안을 내놔야 하는데 그냥 쉽고 간편하게 따따부따?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만사 따따부따? 애들 장난하나! 어? 애들 장난하냐고! 오스트리아에는 뭐 캥거루가 있다야 뭐야? 기교만 봐서는 장난 아닌데 다 거품이다. 껍데기! 생각이 귀찮거나 모르는 사람이야 포장과 내용이 비례하는가 비례하지 않는가를 잘 분간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건 명백히 가짜다. 그래서 난 스무 살인가 19살인가 진짜 당첨된 줄 알고 즉석복권을 들고서 은행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런데 복권을 당첨금으로 바꿔줄 줄 알았는데 은행원은 그랬다. 얼마 라고 써진 건 맞는데, 위 숫자와 아래 숫자가 같을 때만 당첨금을 지급한다고. 은행원이야 옅은 미소였겠지만 그분께서 뭐 얼마나 날 한심하게 여기셨겠냐마는 난... 내 복권은 물론 내 기분도 완전 꽝이었다. 이러니까 난 어제 개꿈을 꿨다. 친구 소개로 호화로운 혜택이 풍성한 대학교에 방문했고, 온갖 부귀영화를 소개하며 신입생으로 들어와달라 러브콜이 폭주했다. 물론 계약금 연봉 퇴직금을 모두 대학에서 제공. 그런데 난 왠지 이 대학에 다니면 안될 것만 같아서 같이 온 옆 친구에게 한마디 했다. 실은 이곳이 전에 유치원이었다고. 유아원을 대학교로 개조한 거라고. 그런데 그 순간 대학교 고위 관계자께서 뒤에 갑자기 나타나서 앉아있던 내 어깨를 두손으로 턱 짚으시면서 그러셨다. 선생께서는 아니 대체 그걸 어떻게 아셨냐고!
   고로 허풍 대회, 열어도 될 꺼 같단 말이다. 나 원래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닌데, 뭐에 낚였는지 모르겠지만 따따부따 말 많은 소음 기계가 되어버린 듯 해서 착찹한 기분 도저히 잠재울 수가 없다. 소원은 환상머쉰 희망은 진공청소기 현실은 만화캐릭터? 주방기구? 여러분, 부디 통촉하여주옵소서! 오락산업의 노비도, 백정도 육식주의도 채식주의자도 아닌 어중간한 소비자에, 만인을 웃기는 재주 하나는 똑부러진 광대도 못되는 주제에 이 미천한 것이 일부러 그러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방정맞게 잘난 체를 했사옵니다. 피터 드러커는 발가락 사이에 낀 때만큼도 못하리마치 훌륭하신 경영학자이자 사업가와 지성인들 앞에서 내가 무슨 경영학 원로라도 된다는 듯이 어? 어느 안전이라고 허튼 소리가 많은 채 수다를 뽑냈습니다. 맞다. 나도 심했다. 하오나 문제는 뭐다 중요한 점은 무엇이다 현실은 어떻다를 똑똑히 아뢰었고, 이미 뻔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는데 어쩌겠습니까. 허허허. 이 내 마음 바텐더에게 위로를 받아야 할까요, 아니면 무언극 1인 다역으로 원숭이나 피에로 연극 공연에 나서기라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 참담한 심정을 대관절 어떻게 달랠꼬! 일기를 쓰든 NC를 가든 반성해야겠다. 나는 판돈은 없고 말만 많은 구경꾼일 테니까.


   2

   머머 하고 싶다.
   나는 미스테리아 편집장 마라에게 위 제목으로 기고문을 하나 보냈다. 아, 미스테리아 편집장 실비아는 주류 언론으로 진출했고, 우리 집 근처에 있던 미스테리아 사무실은 연구실로 바꼈다. 미스테리아 편집장 실비아가 도시로 떠나가면서 미스테리아 연구실 실장 마라를 소개시켜주었다. 나는 그렇게 마라를 알게 됐고, 마라는 부동의 불행이든 줄기찬 재미든 뭐라도 좋으니 단편 분량의 수필을 하나 부탁했고,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마라에게 보낸 글은 위와 같다. 내가 왜 욕구에 민감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하나의 욕망을 놓고 그것의 시작점을 파헤치기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서 마라가 잡지 뒷면에 실릴 기고문을 주문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렇게 일은 일단락됐고 나는 마라 사무실에서 원고료도 받았다. 그렇지만 마라는 온라인으로 붙인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딩동. 딩동. 딩동!
   나는 뜨끔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비판 받은 당사자는 그 무언가를 알고, 느꼈고, 깨닫든 무시하든 어떤 생각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보자면 나는 저지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맞다. 나는 최근 같이 노는 친구들도 없고 누구 하나 날 만나러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누가 갑자기...? 이건 백퍼센트 작품 주인공이다. 그래서 나는 뜨끔했다. 그런데 그분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혼자일까 여럿일까? 그렇지만 그 글이 픽션도 영화도 아니고, 유명하지도 않았으며, 기분이 좋든 나쁘든 당사자가 알아챌 리가 없다. 멀리 전달될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 절실히 공감했다. 어느 블로거가 연예인 싸움 순위 10이라는 글을 발표하니, 그 순위의 1위 연예인은 2위 연예인이 언제 별안간 들이닥칠까봐 두 발 뻣고 집에서 마음 편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심경 고백을. 내가 너무 어리석었나? 그분의 고귀한 성품과 천재적인 재능에 대한 2탄 글을 실어달라고 미스테리아 연구실장 마라에게 부탁이라도 할까? 아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큰 죄를 짓지 않았고, 누군가의 괜한 명예를 실추시키지도 않았다. 겁 먹을 필요도 없고 쩔쩔매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나는 당당히 나가서 방문자가 누군인가 확인했다. 물론 내 속옷은 이미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안녕하세요. 저 먼저 이걸 받으시고. 네. 업다이크경께서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업다이크경의 비서인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뭐? 물러가? 뭘 물러가? 내가 상전이었어? 나는 받은 물품을 돌려주거나 자세한 사정을 듣기 위해 그분을 쫓아가야 했으나 미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모두가 검정빛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저 수상한 인물도 검은색 양복, 구두는 세무, 검은색 넥타이. 내게 전한 물품도 검정색 007 가방. 이건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저 인간이 뭐 카이저 소제야? 그럼 난 뭐야? 어머, 별꼴이야! 대체 이 가방 안에 뭐가 들어있길래... 나는 귀를 쫑긋 세우며 어쩜 유체이탈이라도 발생하여 육신이 정신을 환송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업다이크경? 경은 무슨!
   아마도 가방 안에는 거액 곧 현금 다발이 들어있을 것이고, 그것은 어쩌면 원고료일 것이므로, 따라서 나는 이미 정당한 원고료를 받았기 때문에 당사자가 다시 찾으러 올 때까지 007 가방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뭔가 착오가 있을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어찌 어찌, 어떻게 어떻게 잘못 전달된 거금일 거라고 추측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나의 공상이다. 바램이고 애원이자 공상이었다. 즉 나는 가방을 열어보지 않았다. 원래 주인이 따로 있겠지 그러면서 나는 저 구석에다 가방을 쳐박아 뒀다.
   언제나 그렇듯이 불새 같은 사랑은 그 정체를 노출하지 않았고, 번뜩이는 행복과 전율감의 극치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미래를 미리 알 수 있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전개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래를 알 수 있는 재주가 없었고, 장미와 잔꾀와 더불어 뭔가 재미있는 새로운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시작이라면 시작이었다.


   3

   순결한 사랑과 불결한 사랑에 대해 고민하던 중 나는 미스테리아 연구소에서 실장 마라와 약속이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나는 연구소로 갔다.
   「안녕, 마라.」
   「오! 표정이 좋아보이네 오빠. 무슨 좋은 일 있어?」
   「좋은 일은 무슨. 그런 거 없어.」
   「혹시 누가 찾아오지 않았어?」
   「누가 찾아왔냐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왜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길 할까?」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라면서 나는 살짝 유도 심문에 넘어갈 뻔 했다.
   「신경쓰지 마. 그냥 물어본 거니까. 아 맞다. 원고료는 잘 받았지?」
   「원고료? 무슨 원고료? (난 원고료 이미 받았는데... 혹시 잊어먹고 또 주겠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보너스? 그럼 그 가방? 대체 얼마를 줄려고 그렇게 큰 가방에다가...) 그럼. 그럼. 그런데 말이야. 내가 할 일은 픽션을 쓰는 건데, 거 어째 점점 컬럼니스트가 되가는 것 같단 말이야. 눈시울이 뜨거워질 만큼 감동해야 할지 천부당만부당 하옵니다 하면서 일을 거절해야 할지 잘 모르겠단 말야.」
   「오빠는 습관적으로 초현실을 꿈꾸는 사람이니까 지금처럼 우리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런데 있잖아 오빠. 나 할 말 있어.」
   「할 말? 무슨 할 말? 날 사랑한다고?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인생에 대해서 묻지만 않는다면 오빠가 성심성의껏 답해주리다, 낭자. 자, 여쭤보세요. 아, 질문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숙녀처럼 주저하지도 처녀처럼 망설이지도 말 것이며, 여신처럼 신비롭고 요정처럼 아이로 변하는 요술을 까먹은 듯이 말해보렴. 응, 마라!」
   「오빠는 넘치는 엉뚱함이 특기인 남자구나. 아무튼 할 말은 이거야. 우리가 오빠한테 환상 문학 잡지 성격에 맞지 않는 단문을 요청한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야. 듣고 놀라지나 마셔. 오빠. 정말 그러기 없이다? 응? 알았지? 약속해! (윙크)
   실은 있잖아. 우리가 주기적으로 오빠한테 연애 상담이나 논평이나 환상론 같은 글을 주문한 이유는 따로 있어. 일단 오빠 글이 실리기 전에 우리 잡지는 꽤 괜찮았어. 그래, 잘나갔다고. 환상 문학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애독자 위주로 정기구독 비율이 높았고, 작가들 쪽에서도 작품을 실고 싶다는 요청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그래프 선이 꺾이게 되었지. 왜? 선주가 바꼈으니까. 그런데 어쩜 그 모양일지 몰라, 선주가 괴팍한 건지 꺼벙한 건지 돌아이였어. 그래서 만선을 싫어했나 봐. 돌아이 맞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시점부터 서점에 판매하는 책에 열어볼 수 없게 완품 포장을 시작했고, 판매처를 줄여나가다가 결국 오프라인 판매는 중지시켰어. 그리고 월간 발매하던 주기를 격월간으로 바꿨지. 게다가 다른 성격의 글도 싣고, 가짜 광고도 넣고, 이윽고 오빠의 기고문도 등장했고 말이야. 그러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겠지? (딱) 정기 구독자 수가 점점 줄어들다가 드디여 우리가 원하는 수치에 드디여 도달했어. 그래 맞아. 우리는, 미스테리아는 비상장 회사니까 시끄러울 일도 없고 우리가 원하는 건 소수 정예였거든. 아, 우리가 누구냐고? 그건 새로운 경영진이지. 물론 대외적으로는 실비아 언니가 사장이고, 전면에 나서지 않는 실권자는 나야 나. 오빠. 나라고. 오빠 있잖아. 내가 돈이 좀 많거든.」
   「많아? 마라가 (돈을 나타내는 몸짓을 선보이며) 이게 많아?」
   「응. 많아. 오빠 한번 맞혀봐.」
   「작은 빌딩 하나?」
   「좀 더.」
   「집에 동물원이 있고, 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기 부여 비디오 그거 있어?」
   「어떻게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할 수는 없겠니, 오빠? 응?」
   「구단? 하나? 둘?」
   「구단은 관심 없어.」
   「뭐야 그럼. 천문학자시네!」
   「아 그건 농담이고 어쨌든 중요한 건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의 미래야. 오빠 있잖아. SF 같은 판타지, 어차피 가짜인 줄 알면서 읽는 환상 문학, 히야신스 꽃다발과 바꿀 수 있는 신비한 이야기는 이제 진력이 났거든. 그래서 실비아와 나는 다짐했어. 시대를 앞서가자고. 가짜 예견과 허황된 허구를 멀찌감치 따돌리자고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최소한의 신실한 독자 100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고, 그분들께 모두 초대장도 발생했고, 개별적으로 만나서 서명도 받았어. 그건 바로 우리의 환상촌에 입주하는 거야. 어때 오빠? 뭉클한 궁금증이 꿈틀대지 않아? 발전하는 욕망 같은 거 그런 거 없어? 하지만 말이야, 예상치 못한 행운이 예측되지 않는다고 용납될 수 없는 운명을 핑계로 삼는다면 거절해도 좋아. 억지로 갈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나는 마라의 얘기를 듣는 즉시 그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난 원래 변심만큼이나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고, 변덕처럼 막연한 허언증에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빠져드는 남자니까. 그래서 나는 마라의 얘기를 나 좋을 대로 각색해서 듣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것은 첫째 오빠 사랑은 큰맘 먹고 시작하는 건가요 였고, 둘째 오빠 더할 수 없는 기쁨의 낙원으로 우리 단둘이서 어서 떠나요 였다. 나중 일은 모르겠고, 그래서 내가 답한 말은 이랬다.
   「오 마라! 더 고민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소.」
   이거 뭔가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거 같았지만 그래도 이건 분명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마는 발단임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집에 가서 확인해본 결과 007 가방에는 진짜로 돈다발이 들어있긴 했는데, 각 다발의 제일 앞 장만 진짜 돈이고 나머지는 다 백지였다. 왜 추가 원고료가 이 모양 이 꼴인지는 나중 자초지종을 듣던지 잠자코 기다리던지 할 테고, 따라서 나는 낙원인지 환상촌인지 또는 신세계일지도 모를 그곳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4

   처음에는 설렘이 거의 전부였고 걱정은 터럭만큼이었는데,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잘 돌아간다 했다. 순진하게 무슨, 다 커서 황홀한 예감에 다 들뜨고 말이야. 내가 어리석었다. 많이 어리석었다. 나는 속상했다. 그러나 다른 어디에서 절망의 원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어쩜 뜬구름잡는 얘기에 난 너무 쉽게 속아넘어갔던 것이고, 더군다나 완전한 탈락이 아니라 완성의 시점만 약간 미래로 당겨진 것 뿐이었다. 딱히 손해본 것도 없었다. 오히려 환상촌은 미완성이었기 때문에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볼 수도 있다. 어차피 미스테리아 연구소인가 뭔가 그 실장 마라를 나는 절반만 신뢰했기 때문에 무슨 포춘 쿠키 점괘만도 못한 일에 상심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환상이니 신비니 다 부질없는 춘몽에 불과하고 나는 내 길을 가고, 할 일을 하며, 할 말이 떨어졌음을 완강히 부인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나는 몽환적인 호사에 대한 염원이 앞날의 번영을 눈독들이지 못하게끔 영을 맑게 하고, 짜릿한 도취감 같은 헛꿈은 아예 불신하기로 마음먹었다. 환상촌? 환상촌은 무슨.
   하지만 내가 미라와의 교분을 아예 포기한 건 아니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조커는 남겨두어야 했고, 그녀와 나는 어디까지나 사업상 동반자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틈틈히 환상 문학지 미스테리아 연구소에 들렸고, 색다른 소식이 있는지 산뜻한 풍문이 떠도는지 탐색했고, 어엿한 어른으로써 내가 달리 도와줄 일이 있는지 막 호기롭게 마라의 주변에서 서성거리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내가 한 일은 인터넷 쇼핑이었고, 새로운 척키 인형이 발매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척키 인형을 즉시 주문했다. 그런데 5분 후에 문자가 왔다.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인기 폭주로 물량 공급이 어렵기 때문에 상당 기간 기다려달라는 문자였다. 그래서 나는 주문을 취소했고, 극장에 가서 어느 SF 영화를 봤다. 물론 혼자 갔고, 물론 영화를 보다 중간에 잤다. 그러다 직원이 깨서 영화가 끝난 줄 알게 됐다. 비이성적인 소비 때문에 돈만 날아갔다. 그렇다고 나의 방황이 계속 이어질 수는 없었다. 운동으로 도파민을 분출시키든 일광욕으로 엔돌핀과 멜라토닌 분비량을 끌어내든 어떻게든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그러나 문제는 의욕이 없다는 것이다. 왠지 나는 환락도 탐욕도 타락도 모두 싫고 방전된 전지도 아니고 박살난 핸드폰 마냥 집으로 돌아갔다. 갈 데는 집 밖에 없다는 듯이.
   그렇게 집에 거의 다 갔고, 서점에 들렸다 올걸 그랬나 라는 생각을 할 무렵 낯선 방문객이 우리 집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사기가 고무되는 현상과 정반대로 겁이 덜컥 났다. 또 누굴까? 아 이제 처음이구나, 그런데 누구지? 혹시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나는 코끝을 스치는 가을 바람에도 노랗게 물드는 나뭇잎에도 마음 졸여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뜨끔했다. 저분은 대체 왜 날 찾아왔을까? 누구 올 사람이 없는데 전혀 없는데, 기다리는 사람과 이상형과 첫눈에 반하기 대회가 만약 있다면 거기에 먼저 나갈지 허풍 대회에 먼저 출전할지 꽤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지만 낯선 방문자는 너무 뜬금없었고 한없이 수상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당신 누구냐, 뭐하러 왔냐, 그러면서 골 세러모니를 연기할 수도 없었다. 바로 그 순간,
   「혹시 이곳이 미스테리아 연구소입니까? 선생께서는 그 마라? 아닌데. 내가 알기로 마라씨는 여잔데... 그러면 마라의 남편? 아니면 숨겨둔 애인? 그도 아니면 오빠인 그 방탕한 마수? 허허허 농담이고, 환상촌 이주 문제 때문에 상의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글렌이라고 합니다.」
   글렌? 나는 글렌에게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면서 미스테리아 연구실이 어디인지 친절하게 가르쳐줬고, 우리는 작별했다. 글렌과 대화할 때 나는 은근슬쩍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펴봤다. 특별한 단서랄지 의심의 기미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으나 다만 한 가지, 셔츠 가슴 주머니에 100이라고 씌여진 작은 브럿지가 돋보였다. 100? 뭔 백? 그야 어쨌든 글렌은 그가 원하는 행복의 나라로 갔고, 나는 바로크 오르간 협주곡이 울려퍼지는 모험과 신비와 희망의 세계인 즐거운 우리 집에 도착했다.
   허세 지수가 내려가면 허영이 앞장서고, 허영심이 잠잠하면 다시 허풍 대장을 위한 위풍당당 행진곡이 울려퍼진다. 때문에 아마도 내 허욕은 어느 때고 들뜨지 않을 수 없는 것일까? 몰라서 묻는 건 아니다. 그냥 혼잣말이니까. 그래서 나는 지칠 줄 모르는 공상을 가라앉히고 다시 잔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근사한 건수가 생기든 예측 불가능한 팬클럽이 창단되든 나는 새로운 걸작을 탄생시키기 위해 구상에 몰입했고, 스르르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5

   꿈에서 나는 이런저런 다사다난한 활약을 펼치다가 운동화인지 구두를 빨았고 신발끈을 매고 있었다. 그러나 환상적인 꿈 속의 오늘은 현실적인 내일의 불청객 때문에 그 달콤했던 환희는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신데렐라야 밤 12시가 운명에 관련된 중요한 시각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동화 속에 살지 않는 이상 잠자는 시간을 내일이라 부르기는 썩 애매하다. 때문에 정신없이 비현실을 부정하는 꿈나라는 엄밀히 따져 내일이라고 볼 수 없고, 따라서 아침에 눈을 떠서 흑심으로 출발하든 의식이 깨어서 동심으로 시작하든 그 시점을 새로운 오늘의 서두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그러므로 나는 단꿈을 침해당했기 때문에 찌푸둥한 하루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쾅쾅쾅 딩동딩동. 쾅쾅쾅 딩동딩동~!
   아침부터 누구야? 누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거야 그러면서 나는 한마디 할려다가 참았다. 먼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소, 환영합니다, 인생 연구를 같이 시작해볼까요 라고 한마디 꺼낼려다가 멈칫 생각했다.
   누굴까? 누구지? 왜 나를?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그런데 남자일까 여자일까? 그냥 모른 체 할까? 하긴 꼭 내가 연예인 싸움 순위 1위에 등극한 건 아니지만 옛날에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 인생의 어두운 시절 호색적인 인터넷 일을 하던 때였는데 YAHOO 같은 포털 사이트 내에 포럼을 새로 자꾸자꾸 만들어서 마케팅하는 게 유행이었다. 그런데 그쪽 업계가 좀 음습하고 야했고 뭐했는데 또 거기에도 약삭빠른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이 새로 개설된 포럼을 YAHOO에 신고하면 YAHOO에서 개설자의 권한을 빼앗았고, 그 포럼의 주인은 공석이 된 상태가 되니까 누군가 포럼 권한을 상속받고 싶다고 신청하면 쉽게 받아들여지는 기현상이 몇몇 있었다. 그래서 어느 열 받은 분이 생쥐를 잡으러 신상 정보를 잘못 알고서 우리 집까지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건 비밀이다.
   더욱이 나는 미스테리아에 몇몇 기고문을 발표했고, 그 글이 어디에 게재되고 어떻게 퍼졌으며, 무슨 일이 있는지 하나도 모르는 처지였기 때문에 낯선 방문? 가슴이 뜨끔했고, 이미 혼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불안감이 훅 들어왔고 어떤 뜻모를 자책감에 위와 아래가 찔끔했다. 설마 머 묻은 개가 머 묻은 개를 나무라지야 않겠지만 내가 놀라지도 않고 겁나지도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어쨌든 대결은 코앞이고 결전은 임박했으며 나는 숙명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야 어떻든 그와 내가 정서가 다르면 얼마나 다를 테고, 가죽 점퍼를 입었든 혼자 오지 않았든 나도 다 수가 있다. 그건 무엇이냐면 옛날에 앞집 아저씨가 딴 살림 차려서 앞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분의 본처와 아주머니들께서 으쌰으쌰 우리 집에 찾아온 일이 있었다. 와, 기세 장난 아니었다. 나는 사실대로 번지수는 우리 집이 아니라고만 말했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그때와 지금은 다른가? 마주쳐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사람 인연이란 것도 있을 테니 꿇릴 거 없다 하얀 거짓말이니까. 그러므로 이번에 혹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면, 여차하면 나는 엇비슷한 방법을 쓸 계획이었다.
   변죽은 그만 울리고, 주위는 그만 맴맴 돌며, 뜸 들이지 말고 신속 정확하게 결과만 말하자면 이렇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하나 없더라, 바로 그런 결과였다.
   날 찾아온 이방인은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니라 미스테리아 연구실을 찾아왔던 것이다. 게다가 뭐 이번에는 여자, 것도 숙녀, 어쩌면 미모와 지성은 물론 사랑과 야망까지(여자가?), 심지어 투피스 재킷에 작은 브럿지까지 달고 있었다. 씌여진 글씨는 99번. 뭐 99번? 뭐가 99번? 99번의 성공 1번의 남의 다리 긁기? 그녀는 99 나는 그럼...? 이런 젠장!
   나는 그녀를 보냈고 묵상에 잠겼다. 이미 달콤한 인생은 물 건너갔을까? 키스하는 소리는 정녕 소음이란 말인가?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젊음은 또 어떡하라고.
   그러나 며칠이 지나서 나는 알게 됐다. 98, 97, 96 계속 왔다. 더불어 나는 계속 지쳤다. 긴장했다가 김빠졌다가. 뜨끔했다가 안도했다가. 겁 먹었다가 한시름 덜었다가. 전전긍긍 근심하고, 전전긍긍 떨었고, 전전긍긍 두려워하며, 계속 전전긍긍 이랬다 저랬다? 나는 시름시름 풀이 죽어갔다. 완전 침울해졌다. 그러니까 대체 누구야, 이번에는 또 뭐야, 왜 나야, 언제까지 이럴 꺼야 라면서 불안에 초조에 근심에 뜨금하고 겁먹은 감정이 나를 온전히 지배했다. 어차피 맞을 매면 빨리 맞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매를 왜 맞어? 입장이 바꼈다. 그럼.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나는 뜨끔했고, 전전긍긍 불안감과 안도감은 팽팽하게 기우뚱거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전전긍긍 뜨끔하고 쫄고 겁먹고 그러다가 정반대의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어쩌다가 어느 때부턴가 그분들을 기다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완전 괴로웠던 시기를 지나고 나니 그건 흡사 U자 곡선처럼 다시 날 달콤한 솜사탕 같은 꿈의 궁전으로 띄워보내고 있었다. 누가? 무엇이? 왜?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이 그랬다. 정확하게 어느 시점부터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막 기다려졌다. 만나고 싶어졌다. 다음에는 누굴까 막 궁금해졌다. 혹여 설렜던가 들떴던가 사랑처럼 가슴 조렸던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꼭 그렇지 않다고 딱 잡아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나는 살아났다. 어째서?
   바로 96번 방문객 다음에 95번을 건너뛰고 94번 방문객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왜 95를 건너뛰었지? 설마 나에 관해 누군지 모를 상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마다. 나는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스테리아 연구소로 찾아갔다. 마라를 만났다. 하지만 마음이 바꼈다. 마라를 만나서 다짜고짜 따지던 어쩌던 결판을 낼려고 했는데 마라의 얼굴을 마주하니 그런 결심은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내 속마음을 모두 노출할 수는 없었고 어쩌면 그게 현명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불안불안, 위태위태, 조마조마. 조마조마? 그 친구들은 잘 지내는지 궁금했다. 아무튼 나는 탐색전에 돌입했다.
   휴, 한숨 돌리고 가야겠다.


   6

   나는 마라를 찬찬히 관찰했다. 내가 안 좋게 볼려고 또는 신묘한 시선으로 봤으니까 약간 밉상으로 보였다 뿐이지 마라는 알고 보면 꽤나 매력적인 숙녀였다. 그러나 내 흑심이 절정에 도달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절망의 유혹과 고혹적인 선망 가운데 뭘 선택하느냐, 가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어떤 새로움을 찾아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나는 마라의 책상 밑에 붙여진 지도를 우연히 보게 됐다. 일부러 동전을 떨어트리고 그걸 주으면서... 뭐 그런 꼬맹이 호기심 같은 일은 없었고, 마라가 없는 틈에 나는 재빨리 사무실 탐색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어엿하게 그 비밀 지도를 발견했다. 나는 일단 나의 새로운 지각을 마라에게 비밀로 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마라는 출장을 갔다. 나는 미리 미스테리아에 몰래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아직은 빈 사무실에 내가 있어도 될 정도의 친분을 쌓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창문을 하나 열어놨던 것이다. 나는 연구실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한 일은 마라가 앉는 의자에 앉아서 책상에 발을 올리고 거만한 자세를 잡는 일이었다. 혼자 그런다고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외에 다른 할 일은 없었고 나는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지도를 봤다. 이제부터 그 비밀 지도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내 애정의 대상이었으니까. 지금 내 행동이 이런 내 이상 욕구가 사랑의 종말일지 풋풋한 사랑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도저히 이런 내 탐구욕을 멈출 수 없었다. 갈 데까지 가보는 수 밖에. 나는 마침내 뛰고 싶어 환장한 강아지처럼 지도를 탐했고, 주인에게 배를 보이며 드러눕는 듯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이 순간 마라가 들어온다면 참 난감하겠지만 마라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지도에는 홍일점과 청일점 그리고 회색점으로 동그랗고 작은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지도는 가까운 도시인 것도 같고, 알 것도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또 스티커는 총 100개가 붙여져 있었고, 그 모양이 마치 별 모양인 듯 했다. 당장 그 삼원색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낼 수는 없었고, 시간이 오래 걸려도 알아내기는 힘들 것으로 추측했다. 더불어 이런 현황판이 있다는 것은 분명 엑셀 파일로 그 백 명에 대한 신상 정보를 관리할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내가 사실이냐를 밝혀낼 수도 없고, 마라와 그 정도로 곧 마라가 자기의 모든 지식을 내게 공개할 정도로 단기간에 가까와 지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판단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라는 것을. 첫째, 94번 이후 날 찾아오는 사람이 뚝 끊겼다는 것은 그들이 마라의 연구실로 직행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어설프게 마라와 회원의 미팅 자리를 엿보느니 내가 그들을 탐문하고 정찰하며 탐색하는 게 더 재미있을 것이고, 둘째 그것으로 어느 정도 감을 잡는다면 나는 어쩌다 도발을 감행할 것이다. 즉 마라의 책상 밑 지도에 표시된 별표의 중심부로 찾아가리다. 그래서 나는 혹시 모르니까 일단 지도를 사진 찍었다. 그런 다음 내일부터 회원들을 내가 직접 탐방하기로 했다. 이윽고 사랑에 빠진 듯한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빛나고 있었다.


   7

   그런데 내가 아무 근거도 없이 무작정 미스테리아의 열혈 회원을 찾아나섰을까? 그럴 리는 없다. 그럴 수도 없고. 그건 바로 확실한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특종이란 무엇이냐? 그 믿기 힘든 증거라는 것은 저번에 업다이크경의 비서가 남기고 간 007 가방에 부착된 USB였다. 물론 그것은 숨겨져 있었는데 내가 발견해냈고, USB 안에는 아무런 파일도 없었으나 그 또한 내가 지워진 파일을 특수 기술로 복구해낸 것이다.
   나는 완전 보통의 인간인지라 친구들처럼 뭐 재미난 일 없나 괜히 두리번거리고, 동네 아저씨들처럼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사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런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나 된다는 듯이 진짜 그런 것처럼 막 참을 수 없는 환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지금 가능한 추론은 대략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환상 문학 잡지가 자본의 힘에 넘어가서 그것이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된다는 점. 즉 최종 목표가 종교가 아닌가 그런 의심이 발생함. 둘째, 전문가 집단에 의한 고도의 작전에 따라 미스테리아는 일부러 최저점을 찍고 실화 같은 일들을 바탕으로 신작들을 쏟아내어 그 파격적인 뛰어난 재치로 문학계는 물론 상업과 연예계까지 주름잡는다, 즉 돈과 꿈! 1번은 사익 및 신앙, 2번은 상업과 야망! 내가 아마 헛다리 짚었을 수도 있지만 은밀히 엿듣거나 어설프게 도청하거나, 물론 할 수도 없고 마음 먹을지라도 그 귀찮은 걸 어떻게 다 할 수도 없고, 다 필요없고 나는 오직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또는 어쩌면 그냥 마라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은 여기까지가 내 유쾌한 상상력이고, 그 다음은 능력 밖이며, 혹시나 믿는 구석은 역시나 밑도 끝도 없는 드라마적 전개다. 곧 우연한 행운에 이은 제2의 신비 제3의 환상을 아이 같은 순수함으로 아낌없이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은 앞으로 어떤 흥미진진한 전개와 가슴이 뭉클하고 코끝이 찡하며 눈물이 핑도는 절정에 이어서 이름 모를 환한 행복감으로 가득찬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측이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소설이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다. 그것은 등장인물이 점차 늘어나야 하고, 이제는 뜸 좀 그만 들이고 본격적인 사건이나 구체적인 절정이 무르익어야 하며, 그 모두를 놓치고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둘 중 하나는 기필코 획득해야 하리라. 그것은 무엇일까? 언제나 이런 식이야! 즉답성은 항상 연기되거나 생략된다고. 그것은 바로 돈과 인기, 아니면 사랑과 우정! 이참에 그냥 두 마리 토끼는 물론 세 마리 너구리와 고양이 카페와 개 운동장 아니 그냥 동물원을 사버릴까? 밤하늘 별이 빛나건만 선물 먼저 상상하고 상금 타면 뭘 할까, 맛난 음식 먹고 싶은 요리 명단부터 떠올리는 습관, 극구 칭찬할 만하다. 브르르르르르르!


   8

   나는 파일 내용을 근거로 미스테리아 회원을 찾아갔다. 당연히 내가 입수한 파일이 속임수일 수도 있고, 거기 숨겨진 함의에 대해서, 또 내 생각과 동선을 모두 예상하고 추적하며 기록한 다음 그것을 어디에 보고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떠올려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달리 알아낼 수 있는 사연은 저 멀리 있을 뿐더러 어떤 충격적인 사실이 없을지라도 나는 이런 낯선 탐사를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표본을 보고 괜찮다 싶으면 계속 하고, 아니면 멈추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밑도 끝도 없는 탐정 흉내내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산 경험이 필요했던 것이지.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하지 않나. 무지개 너머는 바로 여기고 지금이다. 거리에는 화사한 꽃이 피어 있고, 그 주위에는 나비와 꿀벌과 바람이, 어... 음... 그게 그러니까... 뭔가 멋진 말을 해 볼려고 했는데 생각이 막혔다. 이런 때는 솔직하게 고백하고 멈추는 게 최선이다. 안 그러면 억지로 분량이야 때우겠지만 그러면 기교만 남고, 좌우에 미모와 몸매가 좋은 여자를 꿰차는 것처럼 방긋 웃으며 관능미와 형식미를 앙편에 보듬겠지만 그래 봤자 고전적인 마지막 잎새가 아니라 세계적인 따따부따 밖에 더 되겠나. 아, 생각났다. 보너스가. 술꾼이 뭐라 그러나? 자긴 술 취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나. 행복에 겨운 현대인을 생각해본다. 그래 나 말이다. 또는 그대일 수도 있고. 행복에 겨워 보라. 행복에 겨워 보라고. 사랑이, 행복이, 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며 여자친구를 설득하며 그 행복에 안주하지 않고서 행복2를 추구하고, 다시 여자친구를 훈계하거나 세뇌 후 환상론을 탐구하고, 동기 부여 영상을 본 다음 환상론2를 창시할려고 하지 않겠나. 그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쨌든 이건 모두 내가 93번 회원의 집 앞까지 오면서 떠올렸던 쓸데없는 공상이었다.
   「안녕하세요. 견딜 수 없는 환희, 저는 미스테리아의 연구 위원입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환상 문학을 탐독하시며 각별한 애정으로 오래오래 고결하신 애호가로 남아주신 데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저희쪽에서 달리 여성잡지 1이나 2를 창간했기 때문에 그걸 알리고자 방문하지는 않았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그렇게 유들유들한 위인도 못될 뿐더러 무턱대고 넙죽 꿈틀대는 환희와 푹신한 안락과 고객님의 즐거운 일상을 깨트릴 의도는 추호도 없답니다. 네 전혀요. 그러니까 좀 더 심층적으로 용건에 대해서 상세히, 그리고 조곤조곤 설명을 드리자면 이럴 것입니다. 우리 미스테리아는 진심 어린 매혹의 경험을 보장할 것이라는 점. 다시 못 올 추억은 물론 지겹지 않은 회상까지 잡지 말미에 수필로써 챙겨드린다는 점. 무엇보다 미스테리아는 아낌없는 사랑에 목말라 한다는 점.」
   그런데 갑자기 93번 회원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내 말을 빼았았다. 그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에 나는 내 선공 즉 말로써 뿐이 그를 설득하고 납득시킬 수 없는 내 최면술을 빼앗겨버린 듯 했다.
   「형씨!」
   「네?」
   「하고 싶은 말이 뭐요?」
   「하고 싶은 말이요? 하고 싶은 말이라면 에 음 어 가만 있자, 그러니까 그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구요. 이런 상상을 한번 해봅시다. 꽃 피는 봄날 청춘의 사과나무는 불순해졌다 라고. 설마 사랑을 큰맘 먹고 시작한다고 생각하시지는 않겠죠?」
   「선생. 선생은 어디 소속이요?」
   「네? 소속이요? 저는 그게 그러니까 무소속... 아니 미스테리아죠. 네. 그렇죠.」
   「선생은 숙녀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있소? 보아하니 없구만. 그대는 누군가에게 꽃다발을 받고서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뻐해본 적은 있소? (딱) 없구료. 사랑을 한다 편지를 쓰다 책을 읽다 커피를 마신다, 그 가운데 선생이 한 일은 운수 좋게도 번지수를 잘 찾아오셨단 말이오. 그래요. 나는 한때 환상 문학에 빠져 살았소. 미스테리아? 한때는 경쟁 잡지를 창간해볼까, 그런 생각도 해 봤소. 그런데 내가 원대한 대망을 위해 별짓 다 해 봤지만 내 사업은 번창할 수 없었고, 내 꿈은 번번이 고배를 마셨소. 실패에 실연에 낙방에 낙선에 낙오는 물론 좌절과 낭패로 점철된 아주 암울한 인생을 살고 있었단 말이오. 오래 전에 말이외다. 난 말이오 그렇게 족히 30년간 바닥을 기었수다. 아아, 아무리 동분서주 노력해도 그 그 어두운 암흑기의 끝은 보이지 않더란 말이오. 지지리 운도 없고 한없이 복 없는 숙명 때문인지 당시에 난 정말 개팔짜를 참으로 부러워했소이다.
   나는 좀 전에 선생을 보고서 생각했소. 어쭈 요것 봐라, 라고 말이오. 혹시 무엇을 팔러 왔소? 아니면 얼굴만 뵙고 싶어서 뭐 그런 변명을 준비한 거요? 설마 나와 연애하러 이 누추한 곳까지 행차하시진 않았을 테고. 음 가만 있자. 누가 보냈소? 선생을 누가 이곳으로 보냈냔 말이오. 그리고 뭐하러 왔소? 괜히 왔단 생각은 들지 않소? 젊은이는 혹시 3대 영업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계신가? 사랑, 환상, 신비에 대해서 말이오. 너무 그렇게 경직된 자세는 그다지 좋지 않다오. 긴장을 풀게나 이 양반아. 자네를 보니 꼭 내 젊은 날을 보는 것만 같아서 그렇다네. 허허허. 허허허허허. 자, 먼저 이걸 받으시게 형씨.
   (그는 원 네트워크라는 의미심장한 브랜드에 대해 설명된 투자설명서인지 사업계획서인지를 내민다)
   혹시 일이 꼬이는 건 아니오? 친구, 미친 여자를 만나본 적 있소?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은? 속없던 청춘 시절이 후회되는 건 아니오? 안타까운 일은 끊이지 않는다거나 뭐 그런 사연 말이오. 오오 오늘은 날씨가 이렇게나 쾌청한 걸 보니 복된 운수의 기운을 탈 것 같은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내 그대의 팔짜를 봐주겠소......」
   이때부터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마치 거부할 수 없는 매서운 주문에 걸려버린 것처럼 청각을 비롯한 지각 현상이 둔해졌고, 슬퍼하지 말라는데 정말 슬퍼하지 말아야겠다고 속으로 되뇌었으며, 철없는 사랑에 대해서 뜻모를 꿈을 꾸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내 손에는 원 네트워크라는 사업설명서가 쥐어져 있었다. 내가 거기 왜 갔지? 왜 하필 그 인간을 만나서 본전도 못찾은 거야? 누군가 혼쭐을 당하긴 하겠지만 왜 하필 그게 나냐고! 나는 정녕, 과학과 황금 만능의 시대에 풍요를 누리며 독보적인 인기를 구가하다 바나나 껍질을 밟고서 그만 미끄러지고 마는 운명이란 말인가. 아니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줄기차게 92, 91, 90번 회원까지 탐방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업다이크경의 비서라는 작자가 남기고간 가방에서 발견한 파일은 헛된 미끼였다는 것을. 값싸고 흔한 먹밥만도 못한 장난스런 파일이라니, 오 저런! 헐레벌떡 뛰어가서 운 좋게 행운의 의자에 철썩 앉았는데 엉덩이와 의자 사이에 겨자소스가 흥건한 느낌. 나는 망했고 그 모두는 헛수고였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헛소동이 아니란 걸 나는 미스테리아 연구실로 어느 날 찾아가서 알게 됐다. 내가 찾아가서 만난 네 명의 인물들이 연구실장 마라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내가 찾아갈까 말까 망설이다 찾아가지 않은 미스테리아의 회원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조셉과 펜과 팝콘과 앤과 친구가 됐다. 장래 나와 이 친구들의 우정이 어디까지 발전할지는 미지수지만 뭔가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청춘의 끝은 어디일까. 사랑의 완성은 있을까. 어쩌면 나는 멍멍멍 컹컹컹 아무한테나 마구 짓는 개였고, 마라는 혹시 내 주인이 아닐까 그런 의구심에 나는 몸서리치고 말았다.


   9

   등장인물이 적다고 어딘가에 적을 두어 막 50명의 친구에 대해서 설명하는 건 지금 큰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조셉의 재산이 얼마인지, 펜은 지금까지 몇 번의 사랑을 했는지, 팝콘은 과거에 인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앤이 이룬 소망은 무엇이고 춤추고 노래하는 데 자질은 뛰어난지, 그 모두를 묘사하고 설명할 수는 있다. 그건 가능하다. 그걸 모두 친절히 설명하고 소상히 전하옵고 신비롭게 쓰고 낫낫히 보고할 수는 있는데, 나는 지금 미스테리아가 나아갈 방향에만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친구들과의 교분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장 마라와 데이트를 하고 밀월 여행을 떠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마라를 물고 늘어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딱 보니까 조셉은 허당, 펜은 허세, 팝콘은 허영, 앤은 허풍의 대명사라는 견적이 산출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하루는 제비꽃 한송이를, 때로는 연분홍색 머리핀을, 비가 내리는 날에는 기분이 이상해지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은은한 향이 절묘한 향수를 선물했고, 미스테리아 연구실에서 마라에게 들릴락 말락할 정도로 유명 아리아를 불러렀다. 막 불러댔다. 쉬지 않고 불러댔다. 테너도 가능했고, 메조 소프라노라고 거절할 수 없었던 데다 콘트랄토까지 도전했다. 예상 결과야 있었지만 다가올 결과는 관심없었다. 자신감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만용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마라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작전을 멈출 수 없었다. 더더군다나 나는 그녀와 대화할 때 발성에 신경썼고, 스타카토 같은 발음에도 유의했다. 그러면서 나는 미스테리아 특별판을 준비하는 그녀를 위해 어깨 마사지를 독학으로 연습했다. 그러나 막상 스스럼없이 그녀의 부드러운 그 뒷머리카락 근처에 내 마음대로 손을 올릴 수는 없었다. 다만 허허실실 기회만 엿보았을 뿐.
   그러다 그녀는 본사로 출장을 떠났고, 나는 황급히 그녀의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비밀 지도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런데,
   어머나, 맙소사!
   지도는 사라졌다. 그건 곧 마라가 뭔가 눈치를 챘다는 뜻이다. 또는 내가 미끼를 덥썩 물었고, 마라가 OK~ 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그림을 상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마라는 혹시 내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서 놀고 거닐며 날아다니는 존재가 아닐까 라고. 그녀는 황금빛과 청록색깔 큐피트 화살도 쏠 수 있고, 풍문을 퍼트리는 건 식은 죽 먹기에, 미남을 꼬셨다가 원하는 정보를 습득한 후 그 남자 보기를 돌맹이나 나무 보기처럼 하는 건 장기이자 전공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불현듯 느껴졌다. 그런데 감히 내가 멋도 모르고 그녀에게 도전장을? 차라리 우정으로 다가갔다가 일부러 흑심이 발각된 듯 연기라도 해 볼까? 아니면 정공법으로 그냥 막 허둥대면서 그녀가 보고 싶었다고 고백이라도 할까? 그러다 난 정말 사랑에 빠지고 그녀가 날 가지고 놀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이건 실로 진퇴양난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가는 분위기는 딱 좋은 밀착 감시인데 그녀는 한치의 빈틈이 없었고, 나는 미스테리아의 미래가 궁금해서 정신을 못차렸으며, 난 아마 마라의 신비감에 혹했고, 그녀의 권위에 미혹된 채 파르르 떨면서 내 기분의 참을 수 없는 허허로움에 대해서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었다. 한량이 따로 없었고, 그 별명 누가 지어준 것인지는 몰라도 환상가란 애칭은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야 어쨌든 조금만 기다리면 비밀이 밝혀질까? 어느 세월에! 또 무슨 비밀? 내 말이!
   그런데 말이다,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해 고민하던 순간 뜻밖의 행운이 찾아와서 궁금증은 해소됐다. 바로 마라가 내게 직접적으로 제의를 건넨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에게 또는 미스테리아에 내가 얼마 정도 존재감이랄지 어느 정도 이용 가치가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인 듯 했다. 출장 갔다 돌아온 마라는 이처럼 말했다.


   10

   「오빠. 무섭지 않아? 뭔가 느껴지지 않냐고. 혹시 오빠 실비아와 계속 연락하고 지내? (마라야 하나씩만 물어보지 않으렴?) 그러든 아니든 그야 뭐 오빠 마음이니까 내가 뭐라 할 것까진 없는데, 다만 하나 걸리는 점은 이거야. 오빠가 언제부턴가 우리 미스테리아의 내부에 너무 깊숙이 관여해버린 듯한 느낌. 더 심하게 개입할 수 없을 정도로. 여기까지는 호기심 다음부터는 장면 전환, 지금까지는 장난 반 진심 반 이제부터는 모험. 아마도 그럴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 오빠, 응? 앞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신비를 조우할 수도 있겠지만 침울한 악영향과 무뚝뚝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구. 오빠, 괜찮겠어?
   아, 이게 다 무슨 업보란 말인가. 막 눈앞에 큐피트의 화살을 맞은 자주색 꽃잎이 떠다니는 것만 같네. 그건 꼭 동화책 표지에 표시된 문구 같아. 경고. 한번 빠져들면 절대 헤어나올 수 없음. 그런 거. 오빠 설마 나 없을 때 내 책상 몰래 훔쳐본 건 아니지? 아니면 됐어.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야. 내... 숙녀의 엉덩이나 몰래 엿보지 않으면 된 거지 뭐.
   환상촌이네 D-day네 해서 오빠는 그 모두를 애들 놀이처럼 여길지도 모르지만 맞아. 그건 신나게 뛰어놀다 돌아서면 엄마 심심해 라고 말하는 애들의 투정과 푸념 같은 장난일지도 몰라. 그런데 중요한 건 말이야, 그 모두가 꿈처럼 느껴지든 동경하는 대망을 떠올리게 하든 어쩌든 한번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이야. 우리네 인생처럼.
   저번에 업다이크경의 비서란 사람이 찾아온 일 있었지? 실은 그 사람 내가 보냈어. 혹시 그 가방에 숨겨진 파일은 열어봤을까? 내 책상 밑에 붙여졌던 지도를 볼 때 어떤 생각을 했어? 미스테리아가 격월간 잡지가 아니라 미스테리아는 설마 실화나 어떤 희귀 현상이랄지 고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인 한 집단의 행동 방침이랄지 마케팅 기법 같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지? 오빠가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의 편집장 실비아로부터 구원의 편지를 받는 일, 있었을까 없었을까? 오빠 같은 작가 입장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실토하고 싶을까, 아닐까? 만약 아직이라면 곧 있으면 그런 일이 발생할까, 발생하지 않을까? 그런 단계가 과연 필요할까? 감히 무리한 요구에 억측에 사치에 호사요 단꿈이자 그 모두는 억측에 불과한 것일까?
   오빠. 조셉도 그렇고 펜과 팝콘 그리고 내 화법이 좀 낯설지? 괜찮아. 곧 나아질 꺼야. 시간이 지나면 적응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아직은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하나도 종잡을 수 없겠지만 조만간 다 깨닫게 되어 있다네. 그럼.
   어쨌든 내가 그 모든 배경과 처지를 하나하나 속시원히 알려줄 수 없다는 점은 나도 답답하게 생각해. 이렇게 밖에 운을 띄우는 수 밖에 없어서 착찹한 심정 뭐 어쩌겠나. 그래도 어쩌면 우리도 중간에 위치한 존재니까 어쩔 수 없어. 우리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다 모두 기록으로 남게 될 꺼야. 당연히 그 전부는 자기 DNA에 저장되고 말이야. 인류가 발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거야. 사는 동안 모든 인생사를 DNA에 기록하고, 넘어지면 스스로 DNA가 복구되고 치유된다는 점. 아무튼 우리는 아직 인간이야. 그리고 미스테리아의 최소 회원이 기다리는 그날, 100명의 회원이 100일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분만 알 수 있으니까 그건 나중에 알면 되고. 그날이 되면 우리는 요정으로 변신하는 거야. 그저 그런 요술이나 신기한 둔갑술이 아니라 쉽게 말해 화학 변화 같은 원리로 바뀌는 거라고. 우리는 탄소 기반 생명체이기 때문에 다 가능한 일이라구. 오빠 설마 모르는 건 아니지? 그렇게 되면 인간은 요정을 볼 수 없고, 요정은 인간을 볼 수 있어. 오빠 어깨 쪽에 모기 물리지 않았어? (끄덕끄덕) 보아하니 오빠 어깨를 밟고 악령이 서 있네. 그런데 그게 다 이유가 있어. 일부러 마귀를 부른 거지. 왜냐하면 오빠 등쪽 근육이 찌푸둥해야 하니까. 어때, 어깨 뒤쪽으로 좀 뻐근하지 않아? 응? (끄덕끄덕) 날개가 돋을려나 봐.
   오빠. 999일을 참아온 여우의 전설을 알아? 알 꺼야. 오빠는 알고 있어. 분명코. 카운트다운이 0이 되기 직전 그러니까 3일 2일 1일 전에 각각 선물이 전달될 꺼야. 일단은 3일 전 선물만 미리 알려줄께. 3일 전에는 오빠한테 007 가방이 전달될 꺼야. 저번에는 업다이크경의 비서가 장난쳤지만 이번에는 업다이크경이 진짜를 건네줄 꺼라고. 제일 앞장만 진짜인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응 오빠. 알겠어?」
   얘 뭐래니?
   나는 마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고서 생각했다. 얘가 뭘 잘못 먹었나? 무슨 밑도 끝도 없이 요정에 악령에... 얘가 남자의 사랑에 애달파하는 걸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아닐까 라고. 물론 그와 동시에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느낌도 들었다. 깨져버릴지 이루어질지 꿈의 그날이 가까와 온다고 하니 딱히 싫지는 않았던 것이다. 남자는 포크를 들 수만 있으면 어쩐다는데 경주마에 올라탈 수도, 말로나마 종마가 될 수도 종마를 영입할 수도 없고, 오늘 밤 회전목마를 같이 타며 웃음으로 대화를 나눌 숙녀는 어제의 그녀가 아닐지도 모른다. 즉 어제의 마라와 오늘의 마라가 다를 수도 있으니 내일의 마라가 어떤 모습일지 장담하기 어렵고 섣불리 속단하고 앞서서 예견하는 건 조심스럽게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마라 때문에 나까지 영 상태가 이상해진 듯 했다.
   그렇게 나는 매일 집과 미스테리아 연구실을 오가면서 다시 누군가를 기다리게 됐다. 올 꺼면 빨리 와라, 대체 누구냐 왜 날 만나려고 하느냐, 막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허구만 쓸 걸 괜히 시사 평론이나 수필쪽에 고개를 내민 것만 같아서 몹시 후회스러웠다. 그래도 궁금했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알고 싶어졌다. 그분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막 상상이 되고 각본도 구상했고, 숨겨진 비밀까지 떠올리게 됐다. 누굴까? 언제 올까? 진짜 날 찾아올까? 그분은 어디에 살고 어떤 인생을 살았던 사람일까? 찾아올지도 모를 그분은 알고 보면 잔망스러운 사람일까, 다정한 사람일까? 설마 사람이 아니라 좀비나 유령은 아닐까? 그런데 왜 찾아올까? 뭐하러? 만나야 할 이유는 타당하고 그렇게 절실할까? 만난다면 우리가 만나서 뭘 할까? 설마 키스? 혹시 포옹? 단, 여자라면! 아니지. 뜨끔해야 정상인데 난 지금 비정상적인 몽상을 하고 있다니, 이런 세상에나! 그러니까 뭐하러 꼭 만날 필요까지 있냐는 거지. 대체 왜? 오긴 올까? 한달, 혹시 1년, 설마 30년을 기다려야 하나? 그러니까 왜 나냐고! 왜 어째서? 왜냐고!
   나는 어쩌다가 마라의 화법을 말로 따라하는 게 아니라 생각으로 본뜨고 있었다. 오, 저런! 그럼 난 속은 앵무새 겉은... 쉿!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없던 버릇이 생겼다. 도저히 생각을 잠재우고 멈출 수도 없었기 때문에 밤에 TV를 켜놓고 잠을 자게 됐던 것이다. 원래 어둡고 조용한 상태에서 잠이 드는 편이지만 상황이 그렇게 됐다. 다가올 그분이 신사든 숙녀든 환상촌이 진짜 있다고 믿었고, 요정이 되든 어쩌든 그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말이다.


   11

   한편 미스테리아 관련하여 특집 기사를 취재 중인 기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중도에 포기했다. 왜냐하면 조사해도 뚜렷한 성과가 없었고, 더 붙잡고 있어도 별다른 내용은 기대할 수 없었으며, 무엇보다 극소수의 애호가가 전부인 미스테리아에 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D-day는 점차 가까와 오고 있었다. 내 생활이 특별히 변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마라에게 궁금한 세부 사항을 모두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고, 뭔가 미심쩍고 엉성하게 일이 진행된다는 점 그게 더 나를 미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만약 환상촌이 계획대로 건립되고, 나는 특별회원 자격으로 입주하고, 그랬는데 바라던 이상이 아니다? 그러면 탈출하면 된다. 오는 건 마음대로였지만 가는 건 마음대로일 수 없다? 그에 대해서 나는 1차, 2차, 3차 안전 대책을 마련해놨다. 진작 비상 계획은 강구해놨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고 극비는 극비로 남아야 한다. 그리고 준비물은 필요없었다. 사실 나는 헛된 낙원 같은 동화는 그리 신뢰하지 않으니까. 이 시대에 영웅이 웬말이고, 비밀의 보물섬이 설혹 있다고 해도 실망할 게 뻔하다. 나는 그렇게 큰 바램없이 마라를 따라가서 놀다 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D-day 3일 전에 업다이크경으로부터 007 가방을 건네받기 전까지는.
   그렇게 3일 전이 됐고, 나는 뜬금없이 업다이크경으로부터 007 가방을 받았다. 그는 우리 집에 찾아온 낯선 방문자였고, 우리는 서로 할 얘기가 없었다. 그러므로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나는 그에게 말없이 가방을 건네받았고 그는 곧바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내 가슴은 엄청 두근거렸다. 오묘한 공포심과 기이한 경외심은 날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대체 이 가방 안에 뭐가 들어있길래...! 정말 이 안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만약 저번처럼 첫 번째 지폐만 진짜 돈이고 나머지는 하얀 종이라면 조소라기 보다는 단비 같은 안심이자 한숨 돌리는 다행일 것이다. 오히려 놀라움 가득한 번영의 전주곡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전부 다 고액권 현찰? 내가 무슨 영화 주인공도 아니고 덜컥 겁이 나기 시작할 것이다. 막상 기다렸던 낯선 이방인은 아직까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나는 미스테리아 사태에 중요한 용의자로 발이 묶여버렸으니 그때부터는 진짜 장난이 아니게 될 것이다. 차라리 그냥 열어보지 말까? 그래도 그렇지 받았는데, 누가 보낸건지는 몰라도 준 사람 성의가 있지 않나. 더구나 어디에 돌려줘야 할지도 모르고, 이에 상응하는 나의 할 일이랄지 할 말, 또는 어떤 가치 역시 불분명했다. 곧 이건 이미 멈출 수 없는 게임인 것만 같았다. 잘은 몰라도 이 시기만 힘겹게 넘기고 나면 아마도 밝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져도 내게는 환상촌이 있고, 그마저도 실패로 판명난다 할지라도 그 모두를 원작으로 만들어서 영화사에 거액에 넘긴다고 상상하니 적이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즉시 가방을 열었다. 남다른 로망은 날 절망으로 몰아가지 않았고, 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심지어 못 추는 춤까지 막 추고 싶어졌다. 그것도 야한 저질 댄스로. 그렇다. 007 가방 안에는 제일 위 1장만 진짜 돈이 아니라 전부 다 진짜 돈이었다. 설마 이건 돈벼락? 그런데 속없이 마냥 기뻐해도 괜찮은 건가. 무슨 대가가 있을 거 아니야. 그건 혹시 저번에 마라가 말한 요정이 이러쿵저러쿵? 헉! 순간 내 기분은 섬뜩해졌다. 마라는 괴물 난 희생양? 염소는 어디 있고 늑대는 누구인가, 추리할 정신도 없었고 이제부터 진짜 손에 땀나는 수싸움이 시작되는 듯 느껴졌다. 이 극도의 흥분감, 나는 짜릿함이 좋긴 했으나 갑자기 심심함이 그리워졌다. 왜냐하면 내가 꺼낼 수 있는 카드는 몇 개 되지도 않고 그마저도 별 볼 일 없는 듯 했으니까. 모험이냐 사랑이냐, 차라리 무작정 헌팅을 시도하다 뺨을 얻어맞을 걸 그랬나. 그리하여 나는 느꼈다. 내가 시간여행을 싫어한다는 것을. 환상이니 신비니 다 농담에 허세고 평온함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난 현실주의자라는 것을.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려봤다. 결전의 날까지 얌전히 기다린다. 무심코 정처없이 도망간다. 마라에게 찾아가서 가방을 돌려주며 나는 그만 게임에서 빠질께 라고 말한다. 또는 마라에게 선공을 펼친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게 말이다. 나는 점점 현실과 상상이 구분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서포터즈 조마조마 애들에게 연락해볼까? 형이 잠시 피신할 데가 있냐고. 너무 뜬금없을 것이다. 그건 아닌 듯 했다. 그러면 이틀 동안 이 돈을 다 써버릴까? 그러다 체포되면 어떡하라고. 와, 이제 정말 어떡하지! 내가 원래 이렇게 잔꾀와 잔기술과 잔재주가 영 부족한 사람이었나? 뿐만 아니라 소심하기까지?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아, 이걸 대체 어쩐담? 오오, 이제 진짜 어떡하지?
   (딱) (쉭─쉭─쉭)!
   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환상촌으로 떠나지 않는 이상 나는 미스테리아와 협업자이자 동반자, 일종의 의뢰인, 미스테리아 연예기획사의 넘버 쓰리 소속 작가이고, 환상촌으로 떠난다면 내가 선발대로 간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설령 그렇게 되어도 별다른 물의를 빚지는 않을 듯 했다. 그렇다. 맞다. 지금이다. 다음은 없다. 절호의 찬스다. 떠나자. 당장 떠나자. 이만한 새로움은 사는 동안 자주 찾아오는 게 아니다. 절대 아니다. 놓칠 수 없는 행운의 길일이자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다. 분위기는 뜨겁고 가슴은 쿨하다. 아니 그 반대인가? 어쨌든 지금 내가 할 일은 샤워도 여행도 쇼핑도 아니고, 바로 그곳으로 즉각 떠나는 것이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마라의 책상 밑에 붙여진 지도를 다 사진으로 찍어놨던 것이다. 하하하! 음하하하하하하하! 시간이 없다. 쫓길 수도 있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신나서 어쩔 줄 몰라했고, 마음은 이미 몸을 떠나버린 듯 황홀한 열락의 경지에서 발가벗은 채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라의 책상 밑에 붙여졌다 사라진 지도에 나타난 표식, 꼭지점 몇 개짜리 별의 중심부를 향해서 떠났다.


   12

   나는 별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별달리 특별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나의 몰입감도 별로였고, 분위기도 그만그만했다. 맞다. 여기는 저번에 마라와 같이 왔던 환상촌인가, 아직 한창 공사중이던 그곳과 비슷해보였다. 난 당시 마라가 장난치는 줄 알았기 때문에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았는데 이제야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여기는 인적은 없지만 온갖 로봇 시스템으로 관찰과 방어와 겁주기는 물론 긴장감 유발등 수많은 자동화 장치가 되어있을 것만 같았다. 아, 맞다. 혹시 잊어먹고 들고 오지 않았나 놀랐는데 다행히도 가방을 들고 왔다. 거기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진짜가 가짜로 탈바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데는 대략 3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가방은 계속 나와 함께 있었으니까. 지금 기분과 가장 흡사한 건 어쩜 그게 아닐까? 십 년 다닌 회사를 그만 두고서 막 회사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그날 클럽에서 신나게 놀기, 그 다음 날 낯선 곳에서 정신 차리기. 단, 그곳이 길바닥만 아니기를.
   아마도 누군가 나타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나는 저기 보이는 사원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여기에 갈 데라고는 거기 밖에 없었으니까. 뭐 혹시라도 지금 이 모습을 마라가 책상에서 노트북으로, 소파에서 핸드폰으로 지켜보고 있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라는 마라고 나는 나니까. 이건 꿈이 아니니까 말이다. 만약 내가 마라의 술책에 걸려든 것이라 할지라도 나중 내게도 설욕의 기회가 있지 않겠는가. 내가 만약 장래 유명해진다면 나는 이 순간에 대해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며 함구할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몰라도 어쩐지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마라 일당이 날 잡으러 딱 들이닥치면 난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니까, 나는 그만 덜렁대고 저기 보이는 저 푸른 사원으로 들어갔다.
   사원 안은 텅 비어있었다. 흡사 부동산에 내놓은 것만 같았다. 나는 뜬금없이 공상을 떠올렸다. 여기서 나와 마라가 동거를 한다? 마라 너도 싫니, 나도 그다지 댕기지는 않아. 미스테리아 연구실장 마라의 고백 직전에 내가 도망친 듯 해서 난 조금은 마라에게 미안했다. 혹시라도 마라가 날 좋아하고 있었다면 그 사랑을 모른체 한 내가 정말 나쁜 남자일 테니까 말이다. 그런 헛된 몽상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마라와의 처음 만난 장면을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이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상상은 그만하고 나는 뭔가 수상한 흔적이나 이상한 작동 버튼 같은 걸 찾아봤다. 없었다. 게다가 유달리 조용했다. 적외선 카메라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쓸데없는 짓이다. 가져와도 소용없었을 테니까. 나는 아마 내가 별의 중심에 잘못 찾아온 건 아닌가 설핏 의문이 들었고, 바깥에 나가서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갈려는 순간 출구 위의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그 거울을 보니 거울의 반대편에 또 거울이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갔다. 거기 있는 거울에는 비너스상이 비춰져 있길래 나는 또 비너스상 앞에까지 갔다.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비너스와 악수를 나눴다. 왠지 그녀는 도도한 숙녀인 것만 같아서 나는 예의상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파이프 오르간이 울리면서 조명이 어두워졌고 천장위의 미러볼이 작동했다. 요염한 분위기가 연출된 것이다. 그리고 비너스상의 뒷편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 옆에 있는 쪽문이 나타났다. 미세한 균열도 없는 대리석 장식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쪽문이 스윽 나타난 것이다. 나는 흡사 그곳에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저절로 그곳까지 걸어갔고 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개구멍이 아니라 마법의 문이었으니까.
   거기서부터는 마치 놀이공원에 있는 귀신의 집이랄지 마법의 집, 그런 데 있는 기울기가 뒤틀리는 효과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중력이 틀어지는 듯 느껴졌고, 나는 저기 저 무지개빛 공간까지 계속 걸어갔다. 아마 나는 90도 정도 틀어졌을 것이고, 그러나 나는 멀쩡히 땅 위를 걷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그런 다음 다시 쪽문을 열었고 나는 환상촌에 도착했다.
   뭐야, 이게 환상촌이었어? 촌스럽기는, 라고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나는 일단 분위기를 살폈다. 그곳은 위압적인 큰 건물의 1층 로비였고,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분홍색 안내 책상에는 아리따운 안내양이 있어야 정상인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고, 웬 고운 연노란색 편지 하나가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편지를 꺼내서 읽는 것뿐. 새하얀 편지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우리는 요정 너는 인간, 안녕. 미스테리아를 부탁함. 나중 인간으로 변신해서 놀러가겠음.」
   뭐야, 이게 끝이야? 마라, 넌 역시나 촌년이었니? 싱겁기는! 아마도 마라는 이미 떠난 듯했다. 벌써 요정이 되어버린지도! 그러면 그녀는 나보고는 시간을 어기지 말라고 해놓고서 자기는 나보다 더 먼저 가버린 거야? 인정 못해! 믿을 수 없어! 말도 안돼! 아, 잠깐!
   내 가방! 007 가방! 내 돈 가방! 내 돈!
   나는 아까 그 사원으로 돌아갈려고 했다. 좀 전에 갑자기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울리길래 잠시 전망을 살핀다는 게 그만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말았던 것이다. 뭐야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어쩌지? 나는 정말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요정이 되는 것도 실패했고, 가방도 꿈도 환희도 다 날아가버렸다. 모두 놓쳐버렸다. 괜히 좋다 말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항상 이런 식이니까.
   그렇게 해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미스테리아 연구실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13

   나는 목적 달성에 실패했을까? 애초에 뚜렷한 목적이 없었으니 성공도 실패도 아닐 것이다. 다만 007 가방만 그리울 뿐. 그러면 나는 지금까지의 체험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나는 이제 학교를 졸업한지 오래 되서 배운다는 태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학습보다는 기대와 욕구의 진행과 흥미와 몰입을 즐기고 쾌감과 동경심을 해소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어쩜 나는 미스테리아 연구 과업에 대해서 한 발만 담그고 있다가 결과적으로 보면 발을 슬쩍 빼버린 듯 했다. 흡사, 딱 백 년 가는 사랑을 해 보고 싶다면서 심심하면 애인을 갈아치우는 탕자가 되버린 듯한 느낌, 도저히 종식시킬 수 없었다. 패배감은 확 다가와서 뜻모를 홍조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긍정적인 요인도 있었다. 반전은 없었지만, 아니면 흐름대로 죽 가야 했을까? 그래도 새로운 변화는 있었다. 바로 미스테리아 연구실장이라는 감투를 얻은 것이다. 바로 내가. 복선이야 지금부터 만들면 그만이고 놀라운 국면 전환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더불어 미스테리아는 다시 건재했던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고, 판매 실적도 과거 전성기 수준으로 회복됐다. 따라서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하나 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비서를 뽑는 일. 유능한 일치고 비서가 없는 사례는 별로 없다. 거기다 열망이 가득하고 선망까지 푸짐하다면 가히 멋진 비서는 어쩌면 필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비서를 면접보는 재미로 소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미스테리아 전임 실장인 마라와 왠지 흡사한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듯한 어느 숙녀를 비서로 뽑았다.
   그 뒤로 어느 날 나는 미스테리아에 업다이크경의 비서가 찾아오는 꿈을 꿨다.
   그는 007 가방을 돌려달라고 했고, 나는 빈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그 비서는 사무실 소파에 무례하게 드러누웠다. 일명 뻗는다는 작전에 돌입한 듯 했다. 버티기에 들어간 거지. 그러다 잠시 후 제2, 제3의 그와 똑같이 생긴 비서가 계속 찾아왔고 사무실은 그들로 꽉 차게 되었다. 그러다 사이렌이 울렸고 나는 사무실 윗면에 있는 비상구를 열어서 바깥으로 나갔다. 그런데 밖이 2층 건물 옥상이 아니라 어느 로보트의 두뇌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로보트의 두뇌 뚜껑을 열고 무중력 상태인 미지의 공간으로 훨훨 날아서 탈출했다. 그러다 꿈이 끝났다. 아무 의미없는 개꿈이었던 것이다.
   그외 별다른 일이라면, 내가 잘못본 것인지는 몰라도 거리에서 우연히 마라를 닮은 여인을 틈틈히 마주쳤고, 마을을 떠났던 옛 친구들이 하나둘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굴러온 돌에 밀려났던 박힌 돌이 다시, 굴러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두고 온 007 가방이 자꾸 생각났기 때문에 환상촌과 지도에 표시된 별의 중심부에 가봤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결과는 허탕 나는 허당 마음은 허영 미래는 허풍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14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왔다. 미스테리아는 건재했다. 달리 새로운 일이라면 멀더가 어느 사설 클럽을 소개시켜 준 일이 있었다. 이름은 원 네트워크. 나는 고개를 돌렸고, 한동안 멀더와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포터즈 조마조마로부터 연락이 왔다. 왜 연락이 없냐, 복권이라도 당첨 됐냐, 보고 싶다는 둥 어쩐다는 둥. 나도 보고 싶다면서 언제 한번 나간다면서 의례적인 통화를 마쳤다.
   그러다 쨉 다시 쨉에 이은 스트레이트가 훅 들어왔다. 그것도 강력한 설렘으로. 난데없이 미스테리아의 전-편집장 실비아가 되돌아온 것이다. 칭찬도 뻔한 빙자도 원치 않는 상태에서 나는 선뜻 생색낼 권리를 박탈당했다. 나는 내심 상석을 내주기는 싫었지만 소식 들었지 어쩐다 라는 다변, 정식 통보장, 책상용 새로운 명패, 미스테리아 웹사이트의 새단장등 뒷받침되는 근거는 하나둘이 아니라서 나는 내가 밀려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초심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007 가방의 내용물을 구경이라도 했으면 됐고, 그건 본주인이 따로 있을 것이며, 내 일을 위한 최적의 상태로 돌아왔으니 피장파장이다. 괜히 소란스러워 봐야 들뜨기만 하고 막 놀러가고 싶기 밖에 더 하겠나. 나는 실비아에게 실장 자리를 흔쾌히 내주었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심지어 날시도 썩 상쾌하지 않았고, 통쾌한 기쁨이 저 멀리 떠나가버린 걸로도 모자라 은근한 재미까지 완전 달아나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실비아가 못 보던 사이에 세련된 아가씨로 변했고, 고상한 화장술에 도가 텄으며, 유난히 허영끼가 돋보여졌다는 점이다. 곧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처사였다. 남자는 허세 여자는 허영을 벗어나는 지점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그건 바로 허세와 허영 모두 100 - 100 클럽에 가입하는 것. 그외 특별한 사례로 남자가 허영 여자가 허세에 일가견을 보이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건 곧 허당이 '은근'이란 수식어를 마다하고 99점 허당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그렇게 실비아는 기분이 튀면서 춤추고 사뿐사뿐 나비처럼 꽃 향기에 취한 듯 하길래 나는 최대한 동조성의 역량을 발휘했다. 얘가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도시에서 뭘 좀 보기는 보았나 보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이 실비아에게는 퍽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일까.
   「어머머. 오빠. 그 표정 뭐니? 날 믿지 못하겠다는 거야? 정말 그래? 정중한 몸가짐에 의젓한 호의와 넌지시 맞장구를 쳐주었다면 한뭉치 딱 떼줄 생각도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거 왜 생각을 고쳐먹게 되는군 그래. 그거 알고 있니 오빠?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는 거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말이야. 내 말은, 너가 없을 때 일이 좀 있었어. 그래서 그래 실비아.」
   「일? 무슨 일? 무슨 일이 있었는데? 말해 봐. 말해 보라구. 왜 말을 못하니?」
   「그런데 그게 말이야. 믿기지 못할 일이라서...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이 걸려서 그래. 하지만 내게는 모두 진짜였지. 설령 알게 되더라도 누가 믿겠어 그 일을.」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구? 그럼 사실이 아닌 거네. 지어낸 거라는 말이잖아? 오빠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니? 그게 그러니까 무슨 일이야? 못 보던 사이에 오빠가 좀 이상해졌는데. 왜 그럴까? 그나저나 이 남자가 날 아주 몰인정한 괴물로 만드네? 이 거 원 친구 앞에서 새 옷도 입지 말라는 거야 뭐야!」
   기분이 쎄했고 느낌은 쌩했으며 분위기는 아주 잠깐, 당시엔 몰랐지만 꽤 오랫동안 싸늘했다. 내 007 가방이 실비아에게 전달된 게 분명했으니까. 실비아의 저 홍조. 얼마지? 대체 얼마길래? 저 C로 시작하는 초록색 가방은 뭐고, 이 라일락 향기로 가득한 전조는 다 뭐냐고. 실비아는 내가 알기로는 완전한 촌년이었다. 겉모습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생각의 구조와 사고 체계가 완벽했기 때문에. 그런 측면을 바탕으로 지금 실비아의 말과 행동은 완벽히 뭔가 놀라운 변화가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 변화는 달리 특별한 게 아니라 형편이 풀렸다는 거 말고 딴 건 없는 듯 했으니까. 앗, 이전 대화를 그대로 옮기지 않아서 그렇지 실비아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서 어떤 새로움에 관해서 생각을 말하고 또 말했다. 그 말을 각색하면 뻔했다. 새로운 구단주가 출연했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와 직접 계약을 맺었고, 실비아는 독립된 연구실에서 특별 임무를 보장받게 된 것이라고. 그러면 새로운 대표라는 작자, 곧 발행인은 설마 업다이크? 나는 그분이 업다이크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게다가 갑자기 실비아가 행복해진 원인이 무엇인지 역시 추궁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다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내색도 비추지 않았다. 심지어 무슨 좋은 일 있냐, 화색이 좋아 보인다, 요즘 어떻게 지냈지 라면서 정답게 화답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연기가 어색했다는 점. 실비아는 그 즉시 내 빈틈을 슥 파고들었다. 눈치 빠른 년! 하늘에서 뚝 떨어진 황금의 원-주인이 나인 줄도 모르고.
   그 후로 실비아,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연구실장 실비아의 허영끼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실비아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하면서 내게 아낌 없는 친밀감을 표현했다. 우리는 다시 허물 없는 친구이자 사업 동반자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마라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실비아가 있다는 게 적잖이 불편했다.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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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던 어느 날 실비아는 취재차 인근 산촌으로 떠났다. 신비한 숲이라는 어느 특급 제보 때문에 출장을 떠난 것이다. 나는 불시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즉시 사무실을 샅샅이 살피면서 혹시 모를 단서랄지 마라와 관계된 문건이 있는지 면밀한 관찰에 들어갔다. 결과는 없었다. 대실망.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실낱 같은 희망을 찾다가 행운에 편승해서 소탈주에 이어 감격스럽게 자유를 맞이하게 될지 누가 알겠나. 그렇게 나는 촉박한 시간 내내 사소하든 중요하든, 뭐 하나만 걸려라 하면서 찾고 또 찾았다. 그러다 나는 마침내 절망했다. 나의 갈망은 좌절로 판결났기 때문에 내 열망을 그냥 덮자는 의미에서 나는 고개를 들고 몸을 45도 틀어서 뒷목을 잡고 한숨을 내쉴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사무실 천장에 문이 보였다. 저건 아마 배기통이나 조명, 전기 시설을 위한 정비용 통로일 텐데 그래도 확인이 필요했다. 나는 그 문을 열고 사무실 위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글쎄 그곳은 폐쇄된 밀실이 아니라 SF 영화랄지 신화의 한 장면을 그린 명화 같은 공간이었다. 나는 분위기를 한번 슥 훒어보았다. 그러고 나니 여긴 아마도 완충지대인 듯 느껴졌다. 아래 사무실과 건너 신세계를 잇는 레테의 강 같은 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사다리를 발견했고, 돔 형태의 천장 중간 쯤에 있는 창문 같은 문까지 도달했으며, 그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랬더니 글쎄 그곳은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사무실이었다. 책상에는 연구실장 마라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마라는 남성 정장 스타일의 고급 여성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반가워서 마라를 불렀다.
   「마라! 어떻게 된 일이야? 이게 다 뭐지? 너는 이곳 건물주니 아니면 주피터의 정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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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 나는 발이 가려워서 발을 잠깐 긁적거리다가 잠이 깼다. 실비아는 출장에서 돌아왔고 나는 소파에서 잠을 자다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잠꼬대가 심했던 날 보다 못해 실비아가 내 발가락 부분을 툭툭 걸드렸던 것이다. 에잇, 이런 젠장! 불가사의이자 미스테리였는데 개꿈이었다니, 좋다 말았다. 삶의 기대, 신비감에 대한 소망, 환상의 희망은 확 확 사그라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순간 거짓말처럼 실비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미스테리아 회원들 제보가 있었어. 회원 명부 1기부터 6기까지 회원들 천직부터 무직까지 빅데이터를 분석해보면 미스테리아에 계속 투고를 하고 있는 은둔형 도사를 알 수 있다네. 혹시 신이 쓴 게 아닐까 의아하게 만드는 인기 연재 소설을 쓰는 천재 작가의 은신처가 나타날 거래. 그분과 인터뷰를 해달라는 회원들 요청이 아주 아우성이라구. 방금 전에 빅데이터 센터에 갔다 왔던 마라를 닮은 비서와 거기에 갔다 올께. 사무실 잘 지키고 있어 오빠. 오빠, 심심하면 피자라도 한판 시켜 먹고. 알았지? 갔다 올께!」
   뭐 심심하면 피자라도 한판 시켜 먹어? 내가 피자를 만들어서 먹든가 해야지 이거 원! 그리고 사무실을 잘 지키고 있어? 내가 뭔 집 지키는 개도 아니고! 나는 꿈에 대한 해석과 새로운 선망에 대한 예감과 잠시 아련하고 아찔했던 작품 구상에 대한 분위기와 낭만적인 산통이 모두 다 깨져버린 듯 해서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러다 마음을 되돌려서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니까 이제 진짜 사무실 탐색 시간이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괜히 실비아가 사용하는 실내화나 서랍에 숨겨진 물건에 탐닉하더라도 지금의 이 거부할 수 없는 환영에 대한 탐구 시간은 내게 더 없는 행복감을 불러올 테니 나는 내게 주어진 기쁨의 추적 시험을 통과해야 했고 시간을 헛되이 써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중요한 시간인데 실비아는 내게 뭐 피자나 탐식하라고?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금 시간이 지나서 사무실 탐사가 헛손질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났고, 그런 다음에야 실비아의 배려심이 꽤 적절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진짜로 피자를 주분했고, 피자가 배달되는 시간에 정말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슥 훒어봤다. 낯선 사람을 보든 신사든 숙녀든 누굴 처음 보면 알게 모르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슥 훒어보지 않나. 그런데 만약에 모르는 환상의 통로랄지 비밀을 추적할 수 있는 최후의 단서가 존재할지도 모르는 사무실을 그냥 넘어가라고? 이름까지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연구실인데?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종 탐험에 들어갔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참으로 놀랍고도 기발한 의심의 증거를 발견해냈다. 그 의뭉스런 물증은 다름 아니라 방금 전 꿈에서 봤던 바로 그 천장의 문이었다. 그렇다. 그건 어디에나 있는 일종의 흔한 건물 설비일 뿐이다. 그러나 확인과 판타지는 별개이고, 예지몽과 이상은 한쌍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천장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랬더니 글쎄 신기한 풍경의 뭔가가 펼쳐졌냐? 아니다. 그냥 평범한 설비 시설은 아니지만 옥상 문 옆에 있는 협소한 공간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2층인가 3층인가 옥상에 나가서 인근 전망을 살펴봤다. 그랬더니 저 멀리 무지개가 보였다. 게다가 엄청 컸다. 와 이런 풍광을 이처럼 진짜로 본 게 실로 얼마만이던가. 그 순간 뭔가가 떠올랐다. 혹시 저 무지개 반원이 내가 예전에 꿈꾼 로보트의 두뇌가 아닐까 라고. 따라서 나는 좀 더 정밀한 관측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글쎄 무지개의 한쪽 끝은 저번에 마라보다 내가 발빠르게 당도했던 그 사원이었고, 나머지 한쪽은 미스테리아 전-연구실장 마라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함께 찾아갔던 공사 차질로 인해서 미완성에 머물렀던 환상촌이었다. 그럼 처음에 마라는 내게 엉터리 거짓 정보를 흘렸고, 나중 내게 스스로 진짜 환상촌으로 찾아오라는 계획이라도 품었단 말인가? 이제 와서 그게 다 뭔 소용이 있겠나. 이미 실비아는 돌아와서 저렇게 의욕적으로 편집장 일을 하면서 연구소장 일까지 도맡아서 맹렬히 업무에 매달리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관망에 들어갔고, 추세를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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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나는 틈만 나면 옥상으로 올라갔다. 건물 내부가 아닌 바깥에 비스듬한 구석에 나선형 계단이 있기 때문에 그걸 타고 2층 건물 옥상까지 편하게 올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사무실 내부에 있는 특수 통로를 이용해서 올라가는 데서 색다른 흥미를 느꼈다. 유별난 쾌락마저 동반됐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특별한 재미를 경험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난 어느새 그 일련의 놀이에 중독되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법석을 떨며 그것을 하나의 취미로 발전시켰고, 고로 그것은 타인과의 교감을 필요로 하지 않는 혼자만의 순수한 즐거움이었다. 그렇다고 꼭 천사의 노래를 부르자 같은 시상을 떠올리고 예술적인 영감을 부르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오선지도 악흥도 007 가방도 이와 같은 새로운 아지트에 대한 기쁨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즐거움과 복권 당첨 가운데 딱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그런 매정한 질문은 거부하고 싶다. 왜냐하면 '돈이 좋기는 좋구나' 그런 말은 듣거나 읽는다면 몰라도 내 입으로 말하기엔 썩 부적절하고, 딱하며, 가엾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무엇이 불쌍하다고?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막연하지만 가을 나그네가 생각났고 측은함이 느껴졌다. 괜히 미숙한 연민과 서투른 자조로 살짝 흐를 뻔 했다마는 돌아와서, 내가 가진 장비들을 가지고 내 아지트로 방문하는 횟수는 부쩍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지트에서 나는 혼자 고기를 구워 먹고, 술도 마시고, 오르간 협주곡을 듣고 책을 읽으며, 영화를 봤다. 틈틈히 글도 썼고, 무지개가 있든 없든 나는 자주 망원경으로 전망을 살폈다. 게다가 텐트도 쳤고 잠까지 잤다.
   그렇게 단망경으로 시작했던 경관 보기는 점점 정찰과 관측으로 발전해갔고 나는 마침내 측정병이 됐다. 내게 어딘가로부터 주목 받고 싶은 동심이 있었겠지만 그런 타인의 동심을 엿보고 싶은 욕망 역시 동시에 존재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떡하다 나는 전문적으로 무언가를 지켜보며 관찰에 대한 육구가 점차 커져감을 깨달았다. 그러다 나는 천문학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고가의 장비까지 아지트에 들여다 놓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급기야 나는 새로운 고성능 장비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뭔가 은밀한 장면을 보기는 봤다. 그러나 많이 보지도 않았고 거기에 빠지지도 않았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무지개 너머였으니까. 그렇게 주문한 장비가 배달되어 왔을 때 박스 안에는 웬 쪽지가 들어있었다. 쪽지 내용은 이랬다.
   「무지개를 바라보는 지점과 무지개의 양 끝자락을 가상의 선분으로 이었을 때 도형의 모양은 무엇일까요? 그 정답을 www.망원경브랜드.com 에 입력해주세요. 정답이면 상품 오답이면 ......」
   쪽지에서 ......부분은 지워져 있어서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또 다시 뜨끔한 심정을 지울 수 없었다. 아 어제도 뜨끔 오늘도 뜨끔, 이젠 지겹지도 않고 신물나지도 않았다. 어쨌든 내 모든 행적을 들켜버린 듯 했다. 저번에 쓴 기고문 때문에 누가 나를 찾아올지도 모르는 데 시간만 끌다 아무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난 더욱 좌불안석이었는데, 이번에는 아마도 아니겠지만 뭔가 어떤 은밀한 경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철렁 하면서 두근거렸고, 과거 내가 저질렀던 나쁜 일, 어쩌다 벌어진 악행 가운데 상위 1, 2, 3위와 견주어도 손색이 있고 방심에 금이 갈 정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그 장비들을 모두 중고로 내다 팔았고, 더 이상 아지트에도 들르지 않았다. 발길을 뚝 끊어버렸던 것이다. 마라와의 추억과 모종의 사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일을 당분간 잊고 살기로 했다.


   18

   여기는 미스테리아 사무실. 모처럼 바쁘지 않은 시기가 찾아왔다. 실비아는 한가하게 손거울을 자주 들여다봤고, 마라를 닮은 비서는 인터넷 쇼핑을 하는 듯 했다. 나는, 나 역시 무슨 재미난 일 없나 하면서 빈둥거렸지만 틈틈히 마라에 관한 소식, 마라의 인터넷 흔적, 당시 미스테리아 소수 회원들에 관한 기록, 마라와 함께 처음에 방문했던 환상촌 지역에 관한 지적도와 토지 대장 조회, 미스테리아에 실렸던 내 글에 관한 반응을 인터넷으로 알아봤고, 이 모든 일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서 어떻게 허구로 쓸 것인가를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 한편 우리는 직장인들의 영원한 고민 대상을 잡고 늘어졌다. 바로 점심 때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러던 바로 그때, 사무실 카페트가 들썩거렸다. 뭐야 쥐야? 저 정도 들썩거릴 정도면 쥐가 아닌데? 그럼 뭐야? 지하의 인간? 저번에 꾼 꿈처럼 천장 문을 열고 올라갔드니 글쎄 우리 사무실이었드라? 무엇인지 궁금했고 일단은 신기했으니까 우리는 카페트를 제쳤다. 그러자 벌컥 하면서 문이 열렸다. 그런 다음 누군가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올라왔다. 알고 보니 그분들은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의 새로운 발행인과 고위급 임원들이었다. 뭐야 위에도 문이 있었고 아래에도 문이 있었다? 원래 1층은 주차장, 2층은 사무실, 3층은 옥상인 구조의 건물이었다. 그런데 주차장에서 올라올 수 없는데 어떻게... 그야 어쨌든 나는 그 찰나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 뭔가 행복했었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나는 그 잠시 동안 인기척이 느껴졌을 때 아직 나타나지 않은 그분들이 혹시 어쩔 수 없이, 하는 수 없이 이별한 마라와 과거 쇠퇴기 미스테리아의 열혈 회원들일까 하면서 가녀린 바램이 잔잔하게 내 매마른 감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 기대는 여지없이 물거품이 되었고, 역시나 헛된 예감의 결과는 최근 내 아지트의 취미처럼 뒤끝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 내 상념을 제정신으로 돌린 건 뭐랄까 꿈을 이뤘기 때문에 매사 외롭다는 말이 입버릇처럼 되버린 듯한 어느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말로만 환상 문학 뭐 그럴 꺼에요? 우리가 누굽니까? 아무리 그래도 문학계 인사 아닙니까. 이 정도가 뭐 어렵나요? 안 그런가요? 게다가 좋아서 하는 일 아니냔 말이에요. 옷이야 빨면 되지 먼지 좀 묻은 게 뭐 어쨌다고... (조용조용히 비서로 보이는 옆사람에게) 뭐 케찹? 겨자 소스? 으흐흠. 뭐 그래도 암울한 시절은 아니잖아요. 최소한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이 있다, 뭐 먼저 들을래? 이런 대사도 유행이 지난지 한참 되지 않았냐구요!」
   그분들의 등장이 극적이었기 때문인지 그분들이 가져온 소식은 좋았다. 나야 좋든 싫든 사업상 동반자에 엄밀히 외부인이니까 큰 영향은 없다만 실비아의 반응으로 봐서는 좋은 일인 듯 했다. 무슨 거대 언론 재벌도 아닌데 미스테리아의 새로운 발행인은 사업을 확장하는 중인 것 같았다. 연예기획사, 언론사, 출판사, 부동산업등으로. 하긴 온라인이 주축이 된 세상에 먹고 살기 힘든 서점에만 가도 그런다고 한다. 출판사가 서점의 일정 부분 진열대를 부동산처럼 산다고. 그야 물론 당연한 경제 논리라고 할 수도 있는데 왠지 좀 마냥 반갑지는 않은 지식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럴 수 밖에. 과정이야 어쩌든 나는 미스테리아에서 이상한 체험을 겪었고, 미스테리아는 상업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그처럼 미스테리아의 앞날이 밝다는데 나는 다시 업무 공간을 카페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19

   나는 카페에서 일하는 데 진력이 났다. 듬직하지 못한 이런 내 모습 어쩌고저쩌고, 소녀 감성을 흉내낼 수는 없고 나는 깔끔하게 마라에게 되돌아갔다. 마라는 새로운 기고문을 요구했다. 아 마라가 아니라 실비아. 자꾸 헷갈린다. 어쩌면 나는 마라를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사랑했을까? 감정극으로 빠지면 안된다. 아무튼 나는 착상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지금은 어렵다고 했다. 그렇게 다시 예전의 모습대로 우리는 각자 자기의 일을 했다. 그러다 실비아는 비서와 함께 출장을 갔다. 무슨 일 때문에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그녀는 내게 심심하면 피자라도 시켜먹으라는, 의리로 다져지고 우정으로 똘똘 뭉쳐진 오랜 마누라 같은, 어떻게 생각하면 조금 무정한 언사는 남기지 않았다.
   자, 혼자 만의 시간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그 즉시 정신 나간 소리와 말도 안되는 발상이 떠오른 건 아니다. 다만 쾌활한 시도에 대한 의혹이 불거졌을 뿐. 왜냐하면 그동안 내가 이곳에서 겪은 일만 놓고 봐도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꿈에서 천장으로, 현실에서 천장, 카페트 밑 비상구에서 발행인이 튀어나오고, 번호표를 달았던 사람들 하며, 007 가방과 또 뭐야, 너무 많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렇다. 작가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자는 은밀한 무언가는 모른다. 할말이 많은 말 많은 사람도 알 수 없다. 가슴 속에 간직한 내밀한 비밀은 어쩐지 꼭꼭 숨겨두고 싶은 심정을. 곧 나는 지금까지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공개할 수 있고 그러기를 원하지만 진정한 불가사의 하나쯤은 비공개로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신비롭든 놀랍든 어쩌든 그게 도대체 뭐냐? 그건 찾아봐야 한다. 지금 찾으면 된다.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공간 안에 모든 미지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긴 아마도 미래에 존재할 슈퍼 컴퓨터의 두뇌 내부 같은 그런 기운이 흐르는 것만 같으니까. 찾을 수 있다. 있을 것이다. 없을 수가 없다. 이미 많이 속고 수없이 실망했고 끝없이 기겁했으며 무던히도 뜨끔했으니까, 이제는 마지막 대마왕이 나타날 차례의 시기인 듯 느껴졌다.
   그렇다. 이제는 옆이다! 이제는 옆이라고. 책상 밑, 꿈에서 천장, 현실에서 사무실 천장, 사무실 바닥, 외부의 공간, 찾아오는 사람들. 다 나왔다. 모두 나왔다. 이제는 옆이다. 이제는 옆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 저기 왼쪽에 보이는 황금 마네킹 상점인가 뭔가, 진품은 아니다. 그리고 이쪽 뭉크 그림에서 주인공만 만화 캐릭터로 바뀐 그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절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단,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꽝일 작품을 건드리면 비상벨이 울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추측이다. 근거도 없다. 하지만 잃을 건 없다. 미리 조심한다고 해될 건 없단 말이다. 내가 언제까지라도 이 사무실에서 오래도록 일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모험을 걸어도 된다. 그래야 한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승부사가 되었다. 현대극이냐 고전주의냐, 곧 고전의 패러디냐 복사판일지라도 변함없는 고전이냐. 값싸고 부담없고 합리적인 선택을 할 꺼냐, 똑같은 값어치라면 눈길을 끌고 정신을 매료시키고 고혹적인 신비감이 서려있는 진짜 같은 가짜를 고를 것인가. 물론 나는 후자였다. 영원한 후자. 물론 나는 비록 가짜일지라도 고전주의다. 따라서 나는 벽에 걸려진 황금 마네킹 상점인가 뭔가 그 액자를 떼어냈다.
   아아, 내 비이성적인 추론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딱 들어맞았다. 이 순간을 위해서 그 수많았던 절망과 후회와 체념과 더불어 실망과 회외와 실패가 필요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지금 목도한 환상은 진짜였다. 나아가 벽에 부착된 뭔가는 어설프게 비밀 금고가 아니었다. 그 비밀번호를 내가 어떻게 풀겠나. 어디서 청진기를 구해올 수도 없고 구해 와도 내게는 그런 기술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벽에는 문이 있었다. 그냥 열면 된다. 잠겨있지만 않다면. 여기서 우연은 한번 더 내편이 되었다. 그 문은 잠겨있지 않았으니까. 나는 문을 열었다. 기다림을 즐기지 않고 멋진 자세도 잡지 않았다. 생각하고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언제 실비아와 비서가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고 내 마음은 더 촉박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었는데 그곳에는 미래로 가는 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황홀함으로 뿅 가게 만들어주는 나이트클럽 홍보 마담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그럴 리가! 예상 가능한 상품은 아마도 007 가방일 것이다. 그러나 절정은 예측대로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수틀리면 다시 전개나 발단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지금이 그렇다.
   나는 비밀 특급 문을 열었다. 힘차게 열었다. 여는 건 한번인데 열었다는 말은 줄기차게 반복하니 조금 겸연쩍기는 하나 그만큼 인상적이고 그처럼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나는 문을 열었고 나는 놀라서 까무러칠 뻔 했다. 기뻐서 주저앉을 뻔 좋아서 아이 좋아라 방방 뛸 뻔, 하다가 어안이 벙벙하게 되었다. 바깥 공간은 바로 전망 좋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며칠 쉬었다 오고 싶은 휴양지 풍경. 영화로운 정경. 저 멀리는 호수인지 바다인지 그리고 넘실대는 초록색과 하늘색. 야외 수영장에는 분홍색 튜브와 주황색 수영복. 그리고 연두색 우산. 잔디밭에는 커다란 살색 인형. 뚜껑이 없는 푸르른색 멋진 차도 있고 동네 분위기가 괜찮은 풍경. (딱)! 들어갈까 말까! 보통 때라면 나는 두말없이 당장 뛰어들었겠지만, 그러나 나는 왠지 지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 라고. 무턱대고 돌아올 수 없는 미래의 문 너머로 이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나는 사무실 바깥으로 나가서 확인했다.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사는 아마 어느 소설책에서 보고 영감을 얻어 이렇게 지었을 것이다. 루빅큐브를 어떻게 어떻게 다듬은 그런 모양. 그 건축 설계도에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지는 몰라도. 그건 그렇고 바깥에서 봤을 때 황금 마네킹 상점이 걸려있던 벽면 너머에는 나무가 있어야 했다. 나무 이름은 모르겠고, 거기는 그냥 거리처럼 공기만 있는 공간에 나무가 있고 그 너머는 그냥 평범한 거리였다. 그래서 나는 밖에 나가기 전에 사무실에서 낚싯대와 야구방망이와 긴 물건 한둘을 그 문에 걸쳐뒀다. 그런 다음 나가서 확인했다. 그런데 단단한 대리석만 보였다. 안에서 문에 걸쳐뒀던 낚싯대와 야구방망이와 긴 물건의 나머지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환영이건 환각이건 밖에서 봤을 때 나머지 부분이 보여야 했는데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문도 없었고 꽉 막힌 벽이었다. 그러므로 이건 환상이 확실했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다시 미스테리아 사무실로 들어왔다. 환상 문학 잡지 그 이름 때문일까? 이걸 믿어 말어? 믿어야 하나 믿어서는 안되는 것일까? 모든 것을,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저변에 깔린 모래알 하나까지도 모두 작품으로 용해해낼 수 있지만 단 하나 나만의 비밀을 남겨둬야 한다면 그건 아마 지금 보고 있는 이 망설임일 것이다. 들어갈까 말까. 들어가지 않으면 나중 내내 생각날 테고, 들어가면 혹시 못 나오는 거 아닐까? 나오면 되지 왜 못 나와? 아마 저기에 들어가서 돌아다니다 보면 혹시 미스테리아 전-연구실장이었던 마라와 그 회원들을 만나게 될까? 그 외에 또 다른 어떤 환상과 신비와 꿈과 희망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기다리지 않을까? 열망이 실현되고 소원이 이루어지며 요술 주문을 외울 수 있기는 커녕 고생만 원없이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밑도 끝도 없는 함정에 걸려들었으니 살다 살다 이런 모험은 처음이라는 그런 기행을 거치고 나서 가까스로 탈진한 다음에야 탈출하게 되는 걸까? 사전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액면에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하는 듯 했다. 아아 긴장됐다. 떨렸다. 설렜고 찡했으며 조마조마했다. 두근거렸다. 흥분됐고 아찔했다. 그러나 두려움은 사라졌다. 무섭지도 않았다. 그러나 쫄망쫄망 사랑에 빠진 듯한 소녀처럼 애타는 심정 역시 없지는 않았다. 슬며시 기쁨이 중력을 무력화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계속 망설여졌다. 왜냐하면 5분 앞서갈려다가 50년 먼저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천국과 지옥을 두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의 신 넵투스의 삼지창이라도 있었다면 사과나무에 열린 바나나라도 푹 찔러봤을 텐데. 아쉬운 데로 저기 보이는 아무 피뢰침이나 가져다가,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포크가 낫겠다. 남의 집 잔치는 물론 어느 축제라도 불청객 자격으로 동참할 수 있도록.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가슴 아픈 지난 사랑을 고백이나 해 볼걸 그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지. 그러다 옛날에 발목 잡혔으면 잡혀도 여러 번 잡혔겠지. 그러면 무책임하게 도망칠 수도 없고, 이런 판타지는 꿈에서도 상상도 못했을 꺼 아니야. 항상 관망만 하고 언제나 밑밥만 뿌리는 작전은 결과적으로 유효했던 걸로. 매우 효과적이었던 걸로. 그건 그렇고 나는 무한정 기다리고 관찰하며 고민할 수 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비서와 실비아가 곧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애꿎은 이 내 상황은 기정 사실이었고 무를 수도 없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혼을 빼놓는 광기로 가득하며 운명이 걸린 일생일대의 모험이었으니까. 그녀들에게 이 비밀 통로를 들켜서는 절대 안된다. 나만 알아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결정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20

   여기는 바로 그곳이었다. 거금이 들어있던 007 가방을 놓고 왔던 바로 그 사원.
   지난 일을 돌이켜보자면 이렇다. 마라 책상 밑 지도가 사라짐. 마라가 눈치를 챈 듯함. 마라가 설명함. D-day를 꼭 기다려야 함. 3일전에 007 가방을 받게될 거라고 예언함. D-day 3일 전 날. 업다이크경이 찾아와 007가방 수여함. 내용물을 확인. 나는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별의 중심으로 찾아감. 별의 중심에 도착. 사원만 있고 안으로 들어감. 어떻게 어떻게 해서 개구멍에 들어감. 위압적인 건물에 들어섬. 나 혼자 그곳을 환상촌이라고 착각함. 그러나 별 볼 일 없음. 그래서 나갈려고 했는데 뜻밖의 술책에 걸려듬. 출구 위에 있는 거울, 또 거울, 다시 비너스상인가가 있어서 악수 그리고 비밀문. 미스테리한 공간으로 들어감. 신기한 건물 1층 로비에서 편지를 발견. 마라는 이미 떠난 듯함. 요정이 되어버린지도. 앗, 007 가방 007 가방! 돌아갈 수 없음.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옴. 미스테리아 연구실장에 취임함. 실비아가 돌아와서 나는 미스테리아 연구실장에 오르자마자 낙마함. 이런, 젠장!
   이와 같은 서사가 있었는데 나는 그 사원에 도착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액 돈뭉치가 가득했던 007 가방을 손에 쥐었다.
   으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하!
   그래~ 이거야~ 이거라고!
   가방을 열어보니 빳빳한 지폐는 모두 그대로 있었다. 얄팍하고 허접하게 첫 장만 진짜가 아니라 전부 다 진짜였다. 그래서 나는 흐뭇했고 그것을 들고 바깥으로 나갈려고 했다. 그런데 바깥에는 바로 범인을 잡기 위해 경찰과 기자들과 구경꾼들이 가득했다. 뭐야 그럼 내가 범인? 심지어 현상금도 꽤 되는 듯 했다. 방법이 있나,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그 비밀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007 가방을 놓고 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는 그림을 찢고서 미스테리아 사무실로 나동그라졌다. 장난의 신이 내 소망을 엿들었던 것일까? 거짓말 같은 환상의 결과는 두 그림 가운데 황금 마네킹의 손을 들어주었다. 즉 나는 뭉크의 원작에서 주인공만 만화 캐릭터로 바뀐 그림을 찢고서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분명 리본 커팅 행사장의 귀빈이었고 주위에는 아리따운 궁녀와 애잔한 애첩들이 자그마치 총 대기중이이었는데, 여흥과 담소와 다과 다음에 어떤 궁극의 본 게임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다 떠나버린 아무도 없는 경기장에서 겨우겨우 혼자서 쓸쓸하게 결승선을 통과하기나 했다는 듯이 나는 저 앞에 있는 그림 황금 마네킹 상점을 바라봤다. 그렇게 황당하게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면서 놀라워하며 나는 황금 마네킹 상점을 계속 바라봤다. 아마도 원망의 시선으로 째려봤다는 표현이 어쩜 더 정확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거 싹 다 필요없고, 제일 중요한 거 하나는 그것이었다. 가방! 오직 가방! 나는 이번에는 절대 포기할 수 없고 실패해서도 안되기 때문에 내 손에는 굳건하게 007 가방이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으흐흐흐흐! 으흐흐흐흐! 푸하하하하하하! 이거면 됐다는 이거면 충분하다는 그런 웃음일까?
   나는 즉시 가방을 열어봤다. 그런 다음 즉각적으로 실의에 빠졌다. 상심은 멈출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가방 안에 돈뭉치들이 가득하기는 한데, 그런데 모두 첫 장만 진짜 지폐였고 나머지는 다 하얀 종이였기 때문이다. 밀가루와 베이킹소다, 설탕물과 생명수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마저도 춘몽으로 착각하며 헛된 몽상에 빠져버리기를 즐기는 얼간이에 머저리가 분명했던 것이다. 난 정말 뭘 해도 안되는 건가? 오, 저런! 그 순간 나는 저번에 대면하지 못했던 피자 배달원이 혹시 마라가 아닐까 그런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출장 갔던 실비아와 비서가 돌아왔다. 나는 꾸지람받을 게 뻔하니 정다운 음성으로 먼저 이렇게 한마디 했다.
   「오,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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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103

from 소설 2017. 8. 3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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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론.
   유혹하는 방법은 여자마다 다르다. 숙녀의 단아한 몸짓에 매료되다, 그런 노래 가사에서도 안 받아주는 만남은 열외하고 여자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신호를 보내는 쉬운 예를 들자면 이렇다. 그냥 한번 팔짱, 팔짱도 1인이 끼는 팔짱이 있으면 양쪽에서 끼는 팔짱도 있음 심지어 딱 한번이 아닌 경우까지 있음, 그래 오빠, 나 저 오빠 엎어보고 싶어, 뜨거운 또는 은근한 눈빛, 노출을 동반한 몸짓,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다가섬 들이댐 알짱알짱, 노골적인 또는 약한 한마디 여러 마디, 여자가 먼저 전화하고 또 전화하고 계속 연락하고 고기 사주고, 사진을 찍어서 간직하고, 그냥 직진, 풋사랑, 언제까지라도 기다리는 마음, 헤어스타일의 변화, 몸으로만 마음으로만 또는 둘 다 등. 그 모두와 다른 하나, 끈질긴 구애 곧 장기전까지! 불행일지 모르지만 이런 호감을 받아본 경험이 빈약하다 할지라도 다 방법은 있다. (딱)! 꽃 들고 쫓아다니기 꽃 들고 기다리기, 또는 어딘가에 계실 인연을 내 님을 기다리기, 그 동안 나를 가꾸기 복권 사기 돈 벌기 유명해지기. 중간을 달리는 여자의 직접 경험과 보고 듣는 얘기와 친구와의 수다만 가지고도 책 1권은 뚝딱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서운하게도 대개는 10권이든 20권이든 다 그 내용이 그 내용이다. 때문에 그것은 즉 사랑은 여자에게 일종의 손님이자 불청객이며 왕자님이고, 여자는 문구점 주인이다. 여자는 꽃 남자는 꿀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여자는 양이자 여우 남자는 늑대, 여자는 고양이 남자는 강아지. 뭐이, 여자는 물고기 남자는 어부? 아, 또 있다. 여자는 호박 그런데 발이 달렸어, 남자는 신비 그런데 가난해. 그러므로 뜨내기와 단골이 들리는 동화 같은 문구점은 정답고도 다정하며 단정하지만 문구점 주인들의 무수한 또 조용한─열렬한─간절한 애모를 애써 모른 체한 남자의 사랑이 어쩌면 더 애절하지 않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게 옳지 않다면 말도 안되는 이론일 뿐더러, 그게 옳다면 숙녀들이 결코 좋아할 리 없기 때문이다. 혹 그렇더라도 사랑의 목적이 행복이냐 본능이냐 쾌락이냐, 그 보다는 사랑은 그저 기쁨과 밝음과 사랑이라는 믿음이 미약하나마 납득되고 믿음직스러우면 사랑에 대해 주연과 작가의 신분까지 보장된다는 상상이 더 재미있을 것이다. 물론 재미없을 수도 있고, 물론 문구점 주인은 여자고 장난감 기업 대표는 남자라는 어디 무슨 그런 짜잔하고 쪼잔하며 찌질하고 허접한 가설의 역설 역시 성립되므로, 따라서 하수인 양은 설핏 또는 해맑게 웃을 테지만 고수인 양께서는 아마도 훨씬 여유롭겠지. 그런데 간혹 자칭 전문가라면서 연애의 첫 신호라는 것은 압도적으로 일방적이라는 견해가 일설로 나돌기도 한다. 그런 청초한 이론은 가볍게 웃어넘기자. 딸랑딸랑, 가뿐히 웃어주자. 피식! 왜냐하면 동물의 세계는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고, 왜냐하면 신호를 보내도 보내도 답이 없거나 기다려도 기다려도 신호가 무슨 외계인이 보낸 외계인에게 보낸 신호도 아닌데 통 신호를 받아보질 못해서 허세 지수만 폭등하는 실제 사례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며, 왜냐하면 전문가가 혹시 중간인가 아닌가 설혹 자기 전적에 대한 투정이 일반화된 게 아닌가 라는 진단까지 참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녀가 있으면 선녀도 있듯이 친구 커피포트의 허세를 친구 진공청소기가 받아주지 아니 그걸 누가 받아주겠나. 뚜껑이 열리고 귀에서 피가 나더라도 친구니까! 허세의 단짝은 허영 주류는 허당 할 말은 허풍, 그래도 할 일은 사랑.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 뭐라 뭐라, 발터 벤야민에 르네 지라르에 일리치니 뭐라 뭐라 쑥덕쑥덕? 사람으로 변장한 미네르바와 비너스와 큐피트가 아닌 이상, 그건 안 봐도 백퍼센트 허당의 허상. 더군다나 쾌락 위에 사랑이 있다고는 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러면 사랑보다 쾌락이 젊어보이지 않나 라는 썩 의아한 의문이 발생하기 때문. 잡은 물고기에게 밥을 주는 게 어디 쉽더냐. 나는 다시 태어나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다, 그녀는 나보다 멋진 남자를 만나야 하니까, 그녀는 현생에서 날 만나 사랑도 했지만 아픔과 슬픔도 함께 겪었으니까 라고 고수는 때로 역설적으로 말한다. 달달한 연애 교본? 엄마들도 말한다. 그런 책 읽으면 멍청해진다고! 그런데 그런 책만 보고 그런 방송만 보고 그런 화법의 소유자만 만난다면 진짜 멍청해질까, 멍청해지지 않을까? 굳이 실험해 볼 필요는 없다. 실험으로 증명할 가치가 없을 뿐더러 설령 그랬다가 진짜 멍청해지면 대체 그건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결과야 어찌됐든 적어도 똑똑해지지는 않을 것이란 점,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추정이다. 그렇긴 해도 우리 소녀와 아가씨와 일반인께서는 그와 같은 달콤한 연애론을 열심히 탐독하시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누구한테 좋을 것인가? 바로, 그 때문에 하류 일반화가 되어서 어설픈 중간이 은근슬쩍 고품격에 숟가락을 떡 하니 얹을 수 있는 기회주의자이자 고품격 신봉자에게. 그렇게만 되면 그건 정말 하늘이 내려주신 행운의 길일일 텐데 어디 보자, 아무래도 아직은 때가 오지 않았을까 이미 늦었을까. 사랑은 가기도 하고 머루를 수도 있고 오기도 하는 것. 결론은 사랑이 대등하건 귀하건 1 대 1이건 사람은 남녀 공히 평균 100번의 사랑을 한다는 것. 최소 0.5? 1? 뭐라고 현실적으로 100에 100 더하고, 다음은 다시 100 더? 그게 아니라 최대 1000? 아니 10,000? 뭐야 베팅이야 무제한이야, 것도 아니면 진정한 허풍쟁이? 신호가 어쩌고저쩌고 첫눈에 반하고 이러쿵저러쿵, 다 필요없고 사랑은 거미줄이다. 사랑은 거미줄! 토너먼트의 하단이건 상단이건 남자건 여자건, 사랑은 하나 아니면 거미줄일뿐 그 중간과 과거는 현재와 최고의 사랑만 못하다는 점. 곧 사랑은 선수 개개인이자 팀이고, 토너먼트 주최측이 진정한 연애술사이며, 인생이라는 대회가 곧 사랑론인 것이다.


   2

   어느 날 스컬리라는 여자가 도날드 덕을 찾아왔다. 그녀는 캠핑카에 온 짐과 전재산을 챙겨서 왔다. 아 참, 도널드 덕은 과거에는 나미래, 새공식이라 불리던 남자의 새로운 애칭이었다. 스컬리는 덕에게 당신의 연애 컬럼을 읽고 감흥을 깊이 받아서 당신을 만나보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덕은 덜컥 의심이 들었다. 친구인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편집장에게 보낸 수필이 미스테리아에 실리지 않고 혹시 여성잡지 1이나 2에 실린 것은 아닐까 라고. 덕은 이처럼 애호가가 직접 찾아오는 적극성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순간 당황했다. 그렇다고 그녀 앞에서 하느님 맙소사 라며 감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 이런 일 수도 없이 겪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덕은 스컬리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했고, 지극한 겸양과 극진한 감사와 스컬리의 예술론에 대해 어쩜 사탕발림이 아닐까 하는 격식 있는 대화를 이어갔다. 흡사 이런 일은 종종 찾아오기 때문에 대처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듯이. 그런데 스컬리는 매우 교양 있고 뭘 좀 아는 숙녀였기 때문에 뭔가 미숙한 화술과 서투른 몸짓을 선보이는 덕을 놀리지도 않았고, 적당히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서 헤어졌다. 그때는 덕도 스컬리의 등장을 별다른 예견없이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다. 그때까지는.
   덕과 스컬리의 만남은 낮에 있었던 일이었고, 덕은 저녁에 바텐더 캐롤을 만났다.
   「캐롤. 너 그거 아니? 왜 사랑을 다이아몬드에 비유하는지.」
   「황금의 상징 때문에? 비싸니까? 낭만적이니까? 가짜와 구별이 어려우니까? 평생 다이아몬드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까?」
   「아니야. 모두 아니야. 캐롤, 왜 사랑을 다이아몬드에 비유하냐면 첫째 다이아몬드는 대부분 30억년 전에 생성되었기 때문이고, 둘째 다이아몬드는 절대 흠집이 나지 않기 때문이지. 무기여 잘 있거라 라는 제목이 중세에도 씌였고 근대에도 씌였는데, 다이아몬드에 흠집이야 나겠지 왜 안 나겠니. 다만 모스 경도계에 따라 1부터 10까지 각 광물은 아래 단계의 광물에 흠집을 낼 수 있으나, 위 단계의 광물에는 흠집을 낼 수 없어. 거기서 10이 다이아몬드고. 바로 그래서 다이아몬드를 사랑에 비유하는 것이지.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응? 알겠니, 캐롤?」
   「아 그렇구나. 오빠. 너 참 많이 안다? 그럼 너도 어느 예술가나 무슨 증후군처럼 모든 게 음악으로 보이고 소리가 다채롭게 느껴지니? 대리석을 볼 때마다 그 속에 어떤 사내가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심심하면 돌 속에서 잠자고 있는 천사를 깨워 자유롭게 해 주고 싶냐고. 오빠, 그냥 평소처럼 해. 이상하다구. 설마 내가 여자로 보이는 건 아니지? 꿈도 꾸지 마!」
   「그래도 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니라서 난 약간 섭섭한데 이걸 어쩌니. 난 정말 늬가 그렇게 물어볼 걸로 예측했어. 이렇게. 오빠 혹시 그거 이런 때 멋진 말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외운 거니? 꼬시고 싶은 여자가 그럼 나란 말이야?」
   「진짜 그렇게 물어볼려고 했는데 이 오빠 선수치는 거 좀 봐. 오빠 요즘 무슨 독심술 학원이라도 다니는 거 아니야?」
   「허허허. 그건 아니고, 실은 내가 오늘 널 찾아온 건 말이야, 저번에 우리 중에 제일 돈 많아 보이는 사람을 꼽으라고 했을 때 왜 날 선택하지 않았는지 따지러 왔어. 용건은 그거야.」
   「그러니까 오빠가 안되는 거야. 난 또 꽃이라도 전해주면서 이의 제기를 할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심한 걸 바랬네. 어 맞네.」
   「사랑이라는 명분이 왜 나쁘겠나. 다만 너무 남용되어서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뿐. 난 캐롤에게 장난스럽게 다가가기 싫었을 뿐이라구. 그것만 알아둬 캐롤.」
   「하여간 말이라도 못하면!」  ,  「그런데 있잖아 오빠. 사랑과 우정은 어떻게 달라?」
   「사랑과 우정이 어떻게 다르냐고? 다르지 않아! 누가 다르다고 하든? 누군데? 어딨어? 오빠가 그 양반이랑 한판 뜰까? 오빠 아직 살아있어, 응? 아 농담이고, 사랑과 우정은 다르지 않다네. 캐롤은 왜 같을까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다를까를 생각했네 그래. 음 착한 아가씨군. 정말 기특하다. 다 큰 처녀야. 심성이 곱고. 음. 캐롤은 앞으로 풋사랑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랑을 하게 될 꺼야. 아가씨. 숙녀여, 오빠의 예언이라네. 기억해두렴. 토시 하나 빠트리지 않고 장면을 기억하기, 남자보다 여자가 낫긴 낫지. 명대사든 푸념이든 졸작의 밑줄이든 말이야. 있잖아 캐롤. 사랑과 우정은 똑같아. 그 둘은 같다고. 단순한 차이점만 빼고는 말야. 그래서 사랑과 우정으로 나뉘는 거지. 누가 오빠고 누가 동생인지는 몰라도 되지만 같다는 건 분명해. 그런데 있잖아요. 차라리 바람둥이한테 사랑이 뭐냐고 사랑을 아냐고 물어보지 그러니? 음 글쎄 그건 뭐랄까, 사랑은 일부일처제 우정은 일부다처제? ...까지는 아니겠지만 형식적 차이는 있어도 그 둘이 얼마나 닮았는지 설마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그럼 왜... 어째서 내게... 너 혹시 날 떠보는 거니, 아니면 날 평가하고 싶은 거니? 하여간 그 속마음을 통 알 수가 없단 말야. 아 정말 여자의 마음은 미스테리야. 영원한 미스테리! 사랑과 우정,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할 필요 하나 없어. 닥치면 잘 하잖니. 그런데 뭐가 궁금한데? 사랑과 우정. 할 만큼 해 봤다면, 단짝이 바뀔만큼 바꼈으면 설마한들 모르지는 않겠지. 겸양이 지나치면 뭐다? 재수없다고 하지! 별꼴이야 증말, 나도 한번 실제로 들어보고 싶네 그려. 캐롤. 인정할 건 인정하라고. 선수여. 그래야 마음이 편해질 테니까. 뭐 다른 꿍꿍이라도 있다면 모르지만 말이야. 사랑과 우정. 인기가 있었냐 없었냐 까지 따질 필요없이 어른이 되면 모를 수가 없겠지. 그럼. 앗 그런데 있잖아. 잠깐만 있어 봐. 그럼 뭐야. 1번 단짝은 애첩이고 밀려난 2번 단짝은 싫증나고 지겨워진 여자란 말인가? 나아가, 삼류 작가인 난 그럼 사랑도 우정도 모두 넘버 쓰리? 심지어 가난해? 더구나 심심해? 게다가 인기는 하락세? 그리고 외롭다? 그런데 바텐더한테 심각하게 저평가당했다? 이런, 젠장! (......) 그나저나 캐롤은 우정 백 번 사랑은 혹시 천 번? 흐흐흐. 흐흐흐흐흐. 농담이야 농담.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놀래니? 어머나 눈도 흘길 줄 아네? 이거 뭔가 수상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코끼리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건가? 캐롤. 캐롤. 걱정 마 캐롤. 오빠야 캐롤. 오빠라구. 응? 오빠를 봐 봐. 오빠가 또 눈치가 빠르잖니, 응? 크크큭. 크크크크큭. 크크크. 크크크크큭.」
   캐롤은 다소곳이(?) 덕을 째려보고, 덕은 슥 딴 데로 눈길을 돌렸다. 그래서 덕은 효과적으로 캐롤의 따가운 시선을 회피함과 동시에 그는 효율적으로 그윽한 눈빛을 띤 채 딴생각에 몰입한다. 캐롤은 기분이 이상했고 덕은 최소한 지금은 얄미운 남자였다. 다만 제3자가 없다는 게 아쉬울 뿐!
   지금까지 등장 인물은 셋. 사건은 스컬리가 마을에 등장한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은 발단이었다.


   3

   전개는 때 이르게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물밑에서 바쁜 움직임이 있었고, 아직은 전개가 나타나면 안된다는 암시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바로 동네에서 기존 주민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났고, 그 빈자리를 슬슬 스컬리의 친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건 암시도 전조도 아니고 낯선 등장이 여러번 겹치는 정공법인 것만 같았다. 물론 귀뜸과 힌트는 있었지만 덕이 모두 묵살했다.
   「덕. 잘 지내니?」
   「오, 로잔나. 네가 보고 싶은데 그럴 리가 있겠니? 어떻게 지내? 그래도 시골보다는 도시가 좋지? 마을 사람들과 놀아줄 필요도 없고 말이야. 홀가분하게 얼마나 좋아. 안 그래?」
   「응 뭐 그냥 그렇지. 그런데 있잖아 덕. 내 말 잘 들어. 너 당장 짐 싸서 그 마을을 떠나. 너네 마을이 어떤 이상한 기운에 잠식당했단 말이야. 네가 배짱이 두둑하면 몰라도 넌 실은 겁이 많은 애잖니. 좋은 말 할 때, 마을을 떠나!」
   「로잔나. 왜 그래? 내가 마을을 왜 떠나? 뭐 우리 동네에 스컬리라는 여자가 이사온 다음부터 너네들이 모두 밀려났다는 거니 뭐니?」
   「응. 밀려났어. 자세한 사정은 말할 수 없고.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구르는 돌이 박힌 돌을 밀어냈다는 거야. 너 아직 못 느꼈니? 마을에 지금 너랑 캐롤 말고 누가 있니? 옛 친구들 모두 떠났다구.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내가 봤을 때는 로잔나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같아. 난 그냥 쫀쫀한 남자로 남을래.」
   「내가 봤을 때는 늬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같다. 지금은 쫀쫀한 남자일지 몰라도 곧 있으면 겁쟁이 덕으로 바뀔 걸. 아마 그때 가서 오늘 내 얘기가 생각날 꺼다. 덕, 그냥 흘려듣지 말라구. 덕, 그러면 안 돼. 말 좀 들어 이 친구야!」
   차후에 어찌될지 모르지만 덕은 수완가가 아니었고, 친구의 충고를 무슨 자장가처럼 듣는 개구쟁이였다. 눈동냥 귀동냥은 물론 세상 모든 일이 드라마이자 행복과 권태의 뫼비우스 띠였다. 덕은 현실감이 몹시 떨어지는 인물이었고, 속으로 사랑의 미래와 비논리적 괴물작을 꿈꾸고 있었으니까. 머지 않아 커다란 감정의 기복을 불러올 전개가 들이닥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4

   덕은 맥스가 운영하는 음식점에 들렸다. 그곳 간판 색깔이 어떻고 이름은 무엇이며, 맥스의 외모를 설명하고 어떤 음식인가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생략한다. 덕은 음식을 주문했고, 식사가 나왔고, 식사를 모두 끝마쳤다. 그래서 바에서 덕과 맥스는 커피를 같이 마셨다. 덕이 말한다.
   「모두들 스컬리 친구분들이라면서요? 새로운 분들이 오셔서 동네에 활기도 넘치고, 기존 주민이라곤 이제 저와 캐롤 뿐인데 막 새로운 바람이 잔뜩 주입되는 기분이네요. 이건 행복의 희망일까요 새 인생을 개척하라는 운명의 서막 같은 어떤 상징일까요? 제 말이 좀 이상하죠? 생각과 말이 따로 놀거나 생각이 말을 지배해서 그런 것 같아요. 말이 생각을 제압하면 아마도 평범해질 텐데 그게 쉽지 않나 봐요.」
   「뭐 그럴 수도 있죠.」
   덕은 생각한다. 이분은 무척 진지한 분이신가 보다 라고.
   「그런데 정말 고맙다고 해야 할지 그냥 우연 때문인지 캐롤과 저는 가만히 앉아서 전학간 아이가 된 듯한 기분 때문에 요즘 부쩍 친해졌어요.」
   「네.」
   덕은 생각한다. 나랑 대화를 나누기 싫어하시는 건 아닌가 라고.
   「오 그런데, 몸이 아주, 워워, 오오 아무리 봐도 정말 대단하신데요?」
   「과찬이십니다.」
   「설마 주민등록이 말소됐거나 무정부주의에 대해 공부하셨던 건 아니시죠? 아니면 됐죠.」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주민등록이 말소됐습니다. 자세한 사정이야 아직은 알려드릴 수 없지만 심각하게 법을 위배하지 않는 이상 법의 구속을 받지는 않습니다. 물론 추방으로부터 자유롭고 게다가 저는 방종은 싫어하며 취미는 게임이고 예술을 사랑합니다.」
   「뭐야 이 인간! 얘 뭐지? 뭐지? 완전 과묵하던가 완전 근엄하던가. 둘 중 하나잖아? 얘 혹시 돌아이 아니야?」 라고 덕은 생각했고, 이 말을 겉으로 소리낼 수는 없었다. 덕은 하는 수 없이 그날도 캐롤을 만나러 갔다. 이젠 캐롤이 거의 여편네? 친근하고 언제나 사랑스러운 마누라처럼 느껴졌다. 캐롤도 덕을 영감탱이로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캐롤. 사람들이 이상해. 멀쩡한 인간들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넌 그런 거 못 느꼈니?」
   「매상이 올랐어. 그것도 두 배로! 좀 이상하더라도 신선하고 색다르다고 생각하렴. 응, 오빠!」
   「캐롤. 오빠 오빠 그거 너한테 안어울리는 거 아니? 아무튼 캐롤 침대로 가요, 그런 남자가 태반이래두? 진짜 그렇다니까. 지금 돌아가는 거 이거 정상적이지 않다고.」
   「혼자 있게 해 주세요!」
   「아 장난치지 말고.」
   「당신과 말하고 싶지 않아요.」
   「너 설마 쟤들한테 넘어간 건 아니지? 벌써 좀비 흉내내는 거니?」
   「당신이 지구 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라도 싫어요.」
   「아 나 이거 정말 이래가지고서야 어디...!」
   천궁과 바다와 저승 그 세 왕국의 자리를 놓고 제비를 뽑아 그 땅의 왕이 된 저승의 신 플루토. 암흑 세계의 무단자 하데스 역시 큐피트의 화살을 피할 수 없는 법. 혹시 스컬리는 큐피트? 자기가 자신에게 처방이라도 내렸나? 캐롤은 날 도망가고 싫어하라는 저주의 화살이라도 맞은 걸까?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 할 상황인 듯 했다.
   덕과 캐롤. 그리고 스컬리와 요리사 맥스까지 현재 등장 인물은 넷. 아직은 발단 아직까지도 발단.


   5

   덕의 의심이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스컬리가 마을의 리더라는 점. 곧 동조성 지수가 높은 덕은 스컬리에게 동화될 수 밖에 없었고, 덕은 어느새 스컬리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스컬리가 누구인가? 딸랑딸랑 빙글빙글 반짝반짝, 아부의 제왕 립서비스의 황제, 아양의 신 애교계의 이단아가 아니던가. 즉 스컬리도 둘 중 하나였다. 기쁨과 쾌락, 그것도 아니면 못마땅한 표정.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런 조증과 울증이 들쑥날쑥한 스타일이 오히려 비위 맞추기가 손쉽다. 다정이면 다정, 사랑이란 사랑, 카인과 아벨, 사라와 마르크스등 말 많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얘기만 노래하는 귀가 꽉 막힌 양반보다는.
   덕은 캐롤이 수지 맞는 장사 때문에 사람이 변한 것 같아서 캐롤과는 거리를 두기로 했다. 대신에 스컬리와 움직였다. 옆에서 보면 그건 마치 스컬리는 5선 의원으로 선거 운동을, 덕은 굽신굽신 이상과 현실에 대해 옥신각신 혼자 고민하는 스컬리의 에코인 듯 여겨졌다.
   덕은 스컬리의 영향을 받아서 스컬리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즉 유명 추리소설가를 만나러가고, 에로영화계의 거장한테 찾아가서 인사하고 사진 찍고 당장 친구가 되고 소셜 네트워크까지 굳건히 결속하는 바쁜 행보들. 그러나 그러다 포기했다.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은 절대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이 그의 약점이라면 약점이었다. 그는 그냥 스컬리 옆에 있다가 떨어지는 사과를 받아먹고, 나부끼는 콩고물도 선별해서 감식하며, 꼬박꼬박 열리는 정말 정말 탐스러운 복숭아를 손쉽게 딱 따먹고, 제발로 굴러온 호박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며, 애정의 착복을 경계하고 삼각관계를 연구하고, 순수한 사랑을 동경하는 어느 인어을 낚았을 때 과연 그 인어에게 밥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만 심사숙고하면 그만이었다. 때문에 덕은 스컬리를 만나기 전에는 꽝 지금은 손속, 꽃놀이 패를 들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덕은 결벽증이 치료됐고 허언증은 실현됐다. 지금 같아서는 술집이든 체육관이든 장난감 가게든 박물관이든 뭘 해도 될 것만 같았다. 다만 자본이 좀 부족했을 뿐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이 없어도 괜찮았다.
   그러던 어느 날 덕은 간파했다. 스컬리가 은근한 허당도 못 돼고 아예 그냥 허당 꽝 허당이라는 진실을. 어디서 펠리컨 행세를, 어느 안전이라고! 덕은 경주마에 잘못 올라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덕은 스스로 경주마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또는 혼자는 외로웠기 때문일까, 뭐랄까 사정이 참 딱하게 된 건 아니지만 그는 에반스라는 블러거와 친해진 것이다. 물론 에반스도 스컬리의 친구였다. 요약하자면 스컬리와 덕은 명콤비가 됐다가 결별, 다시 덕은 에반스와 단짝이 됨.


   6

   에반스는 타고난 험담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동네 친구들의 단점과 연애사와 집안 내력에다 재산 사항은 물론 자잘한 습관까지 다 알고 있었다. 때문에 누구의 익숙한 패턴이 유익한 탐구심인지 섣부른 눈독 같은 악습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반스가 에반스라면 덕은 덕이었다. 덕은 천부적인 심미안은 부족했으나 그간 떼인 돈이 얼마며, 만난 사람이 몇이고, 읽고 본 작품이 얼마인데! 덕은 에반스 몰래 에반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훓어봤다. 들켜도 상관없었다. 팔의 동선과 고개의 각도는 고상했고, 눈빛의 방향과 차분한 어조는 단아했으며, 말끝마다 오빠 라고 부르는 숙녀들이 꽤 잘 따를 것 같은 남자로 보였다. 그래? 정말 그래? 일단은 그랬다. 그러나 배짱 좋고 열 좋고 추진력도 좋은데, 막판에 결정타가 부족한 사람으로 보였다. 거품만 많고 승부구가 없었던 거지. 이때다 싶으면 춤을 추든 고백을 하든 계산을 하든 속된 말로 깽판을 놓든 결론을 제시하고 성과를 얻어야 하는데, 사람 김빠지게 말이야 딱 애원하는 스타일. 그래도 차라리 에반스가 낫지 덕처럼 허당에 몽상가에 허울만 좋은 낭만파에 그걸로도 모자라 천덕꾸러기라면 철드는 건 애초에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오락에 길들여졌고 쾌락만을 탐닉하며, 드라마는 잘 알지만 여전히 추리를 좋아하고, 극적인 공포를 두려워는 하는데 절대 마다하지 않고, 사랑과 모험과 환상 가운데 최소 두 가지를 추구하는 남자. 그의 이름은 바로 덕이었다. 떡! (왠지 건배 구호 같은 느낌이 없잖아 느껴진다)
   그런 덕과 에반스? 단짝의 우정이 앙숙으로 돌변하지만 않는다면 다행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덕은 캐롤과 함께 기존 우정을 유지한 채 새로운 친구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 친구들은 각자 자주 하는 농담이 있었다. 그 친구들은 모두 자기가 전에 인간이 아니라고 했다. 한두 번 말했을 때는 웃었다. 세 번 네 번 말할 때도 웃었다. 그 다음부터는 술버릇이나 지적장애가 아닌가 헷갈렸고, 결국 듣는 사람의 뚜껑만 열렸다. 듣고 믿고 또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블로거 에반스는 뭐 흡혈귀? 늬가 흡혈귀면 난 드라큘라 백작이겠다, 라고 무안을 안겨줄 수는 없지 않나. 아 그러냐 그렇구나 라고 옹호했을 뿐. 그리고 요리사 맥스는 좀비, 천문학자로 평탄한 삶을 살기에는 뭔가 섭섭한 아가씨 리플리는 마녀, 스컬리는 큐피트라고 했다. 아주 가지가지 했고 아득바득 떼 쓰고 작작 놀고 있었다. 그냥 몇 번이야 농담이라고 쳐도 이건 정말 구제 불능이었다. 원래 녀석들은 모두 외톨이였고, 리더인 스컬리를 위주로 새롭게 결성된 모임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들은 서로 친교가 확장됐고 좀 더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들은 모두 혼자 살기 때문인지 동물을 하나씩 키운다는 것. 에반스는 닭, 맥스는 고양이, 마녀 리플리는 파랑새, 큐피트 스컬리는 개를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캐롤은 작고 예쁜 물고기가 사는 어항을 관리하고, 유일하게 식물만 키우는 덕은 동물을 키우는 캐롤과 친하다. 물론 주종관계일 수도 있으나 아마도 가족 관계에 버금가는 우애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최소한, 설마 동물들을 잡아먹기 위해서 키우지는 않을 것이다. 닭은 모르지만 개는, 새는, 너무 작나? 기린을 어쩐다는 소리는 내 살면서 한번도 못들어봤지만 고래는... 그 얘기는 그만 하자.
   어쨌거나 저쨌거나 여전히 발단이지만 끝까지 발단일 리는 없다.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곧 계속 발단이지만 엉뚱한 일이라면 감히 말하지만 새로 이사온 친구들이 모두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고 지나치게 강조하고 고백하고 증언한다는 점. 그건 단지 괴상한 농담이지 특이한 전개 축에도 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전개? 어림도 없다!


   7

   덕은 집에서 일기를 썼다. 그 내용은 이와 같다.
   대개는 천국 일부만 패자부활전, 그러나 예외는 필요하다. 법의 일관성이 무너졌거나 우리 할머니처럼─우리 할머니의 명복은 빌겠으나─죽기 하루던가 3일 전이던가 그때 참회하면 너무 늦다. 이미 이승에서 어쩔 수 없이 법적으로 큰 죄인이 되어도 참회했으니까 하느님께서 천국행 땅땅땅, 이미 이승에서 법망을 용케 피하면 떵떵거리며 풍요로운 인생을 즐기고 고대 황제처럼 행복을 누리며 제우스보다 재밌게 산 다음 천국행 아니면 혹시라도 패자부활전? 일부에 대하여 대표적으로 요한계시록은 부분적으로 적용되야 옳을 것 같다. 1심에서 손바닥을 내미네 그런데 2심부터 손바닥을 뒤집네, 또는 1 - 2심 모두 손등을 내밀다가 3심에서 손등을 뒤집네, 그러면 법의 대리인은 아 그러세요 호호호 그러네요 짝짝짝 그렇군요 라며 일관성 없이 참 예쁘고 귀엽고도 아름다운 일관된 전례를 남기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똑같이 따라하면 시시각각 결과가 다를 거라는 말이군. 허허허. 애기들 장난도 아니고 완전 엿장수 맘이다. 돈이 신이니까 돈이 장난을 치는 세상. 그래서 이승에서 드물게(?) 죄는 선이 된다. 그러므로 그건 하는 수 없이 저승에서 악은 벌이 되야만 한다는 논리를 불러온다. 결과적으로 때린 자는 행복 맞은 놈만 불행? 그건 아니다. 악마가 다른 어떤 멋지고 희한한 존재가 아니고, 천사가 진짜 날개가 달렸고 큐피트처럼 생긴 미지의 당신이 아니다. 인간이 천사고 인간이 악마다. 지구가 타임머신이고 그 탑승자가 인간인 것처럼.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인간의 일은 인간의 일이고, 그러므로 신앙이 있든 없든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은 오직 하나다. 내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오락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의 적용도 같은 이치. 그러니까 이승에서 중간과 기준과 선의 개념은 모호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얼핏 보면 아름다운데 달리 보면 요지경이 따로 없다. 우주야 엔트로피라는 물리 법칙이 적용되더라도 이승의 너머 곧 다음 생에서도 무질서가 통용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어서는 곤란하다. 무엇보다 우리 할머니처럼 뒤늦게 후회한다면 늦다. 저승의 신 플루톤의 주변에 있는 쟁쟁한 분들을 모르니까 그러는 수 밖에! (현생 다음을 어떻게 부르든) 다음 생은 생각하지 않으시니까 그럴 수 밖에!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천진한 동화 같은 발상이다. 따라서 까마득한 옛날 완성된 종교적 교리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효과에 대한 명철한 해결책을 현재의 인지심리학만큼 제시했는가에 대해서 썩 긍정하기는 어렵다. 옛날 옛날에 은하계 바깥으로 지구의 문명을 전하는 지금과 같은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개인의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비운이 발생했을 때 기도하고 용서하고 참회하고 믿어라 그러면 천국행이다 드디어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그보다는 그 시점 이후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상쇄하는 행동을 권장하는 게 낫다. 2000년의 시행착오가 그것을 증명하니까. 우리는 인간인 이상 선에 크게 저촉되지 않을 정도로 내 인생을 살면 된다. 지구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랑도 하고, 사랑이 있으면 이별도 있고, 사회적인 삶을 살며, 꿈을 먹고 자라는 청춘으로 이상의 날개를 펼치고, 연정의 밭에 씨를 뿌리고 사랑의 썰을 푸는 인생론을 노래하며, 행운의 법칙을 측정해도 좋고 새로운 행복론을 창안하며 색다른 쾌락 이론을 발견해도 괜찮을 것이다. 다 좋단 말이다. 다만 때로는 달콤한 하이드의 간청에 넘어갈지언정, 대개는 천국 일부만 패자부활전이라는 범주만 넘어서지 말자 그처럼 살지는 말자. 독실한 신자 1이든 2든 아니면 무소속이든 무관심이든 상관없다. 전혀 상관없다. 왜냐하면 최고의 관건은 선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운 좋으면 골 세러모니 보통은 중간, 슬픈 비운 때문이든 무정 때문이든 또 다른 골 세러모니. 전자를 추구하는 삶을 살자.


    8

   아직도 전개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조만이 독자와 서술자를 괴롭힐 뿐이다. 게다가 특별히 암시랄 것도 없다. 그러다 뜬금없이 SF로 장르 변신을 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활동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테니까.
   그러던 언제부턴가 덕은 새초롬한 음식이 유난히 댕겼다. 그래서 덕은 밑도 끝도 없이 케첩을 먹기 시작했다. 게다가 케첩을 먹는 양이 점점 늘어났다. 그렇다고 하루에 한 끼를 오직 케첩 하나로 해결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마치 케첩에 중독된 듯 케첩과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덕은 초지일관 캐첩만 애호했지 겨자 소스 막 이런 걸로 좋아하는 종목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새로운 습관에 대해 분석해 보자면 대충 그럴 것이다 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바로 덕은 어느 날부터 스컬리가 말하면 로잔나의 목소리가 들리고, 스컬리를 얼핏 보다가 로잔나의 환영이 보였기 때문에 유난스레 케첩을 탐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와 엇비슷한 일은 없었다. 캐롤이 시도 때도 없이 갈색 설탕을 숟가락으로 마구 퍼서 먹는다거나 리플리는 콜라에, 에반스는 하다 하다 기저귀를 차고 다닌다더라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럼 이게 다냐? 다는 아니다! 술래도 없고, 사건도 없고, 재미도 없고, 발단으로 시작해서 발단으로 끝나는 소설? 그럴 바엔 차라리 만화책을 읽고 말지 그래서는 안된다. 커튼콜이 생략되든 입장료를 환불하든. 왜냐하면 그런 이유 때문이랄까 뭐랄까, 만약 맛이 없으면 재미가 없으면 진짜가 아니면 10배 100배로 갚아드린다는 자신감 마케팅? 상황이 상황인지라 없던 추억을 불러내고 거짓말이라도 해서 이 실화에 대한 포장은 해야 한다. 맨땅에 헤딩하고 게릴라 마케팅이라도 해야 할 차례다, 지금은! 허나 일부러 사실주의라고 통사정하지 않아도 된다. 기가 막힌 즐거움과 놀랄 만한 반전과 괘씸할 만한 흥미를 보장한다고 처음에 공언했다가 나중에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리며 안절부절하며 바쁜 것 보다는 그게 나을 수도 있다. 하여간 조심스레 말하자면 드디여, 마침내 전개가 태동되었다.
   얍, 전개 탄생! 두둥~, 짜잔~!
   질겁할 만한 전개는 바로 동네에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지겹고 지루하고 권태로우면 환호에 갈증나고 축제와 색다른 만남을 원하게 되지만 잡은 물고기한테 밥을 주든 어쩌든 뜨거웠던 사랑은 따듯한 사랑으로 서서히 식는 법. 어느 단계에 접어들면 연인끼리 재미난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야만 하듯이 발단이 그 얼마나 따분했으면 전개가 제발로 나타난 것이다.
   전개는 바로,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그대 두손에 가득 드려요, 같은 사랑이 각자에게 생겼다는 게 아니라 마을에 새로운 인물이 출연한 것이다. 남과 여, 곧 마법사 연인이 마을에 나타났다. 당연히 남자가 마술사고 여자가 조수였지만, 여자가 출중한 외모로 시선을 끌고 그 빈틈으로 헛점을 파고들어 마술사가 몇 개 되지도 않는 저급한 마술을 선보일 테지 아마도 특별한 건 없을 것이다.
   일단 그들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마술사는 안소니였고, 마술사의 숙녀는 마고였다. 물론 그들은 마을로 이사를 왔고, 토끼를 한 마리 키웠으며, 당연히 스컬리의 오랜 우정이었다.
   다른 친구들이야 이미 안소니와 마고를 알겠지만 덕과 캐롤은 처음이니까 인사를 나눴고, 친해졌고, 찬찬히 그들을 지켜봤다. 지켜본 결과 뭔가 냄새가 났다. 우선 그들의 화법은 너무 전형적이라는 것.
   「세상 참 좁네요.」  그 다음에 할 얘기를 잊어먹는다.
   「우리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없다. 속 보이는 대사다. 유행도 아니고 복고도 아니다. 낯선 남녀가 정말로 외로울 때가 아니라면 권장해서는 안될 화술이다. 이거 정말 때릴 수도 없고!
   「우리, 춤추실래요?」  맥스의 생일 날, 대뜸 이러더니 정작 춤을 출 줄 모름.
   「당신 정말 멋지네요.」  그 다음 말이 이어지지도 않고, 딴 데를 쳐다본다. 와!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아마도 반어법 같다. 주변을 살펴 보면 꼭 그런 화법을 틈틈히 또는 습관처럼 구사하는 친구들이 있다. 충족되지 않는 욕구 때문일까? 여기서 만족할 수 없는 비통한 현실 때문에? 그야말로 왕성하고도 왕성했던 욕망에 비해 그것을 달래 줄 여력은 시나브로 지나칠 만큼 초라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가능하면 긍정 내가 불가능하면 부정? 내가 주인공이면 호평 내가 찬밥이면 독설, 내가 하면 합리 남이 하면 간사함 쪼잔함 찌질함. 그러든가 말든가 언제 어디서나 초지일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선전.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독심술을 구사할 상대방의 권리를 너무 일찍 빼앗는 것,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일 것이다. 상대가 독심술을 알든 모르든 눈치가 빠르든 늦든, 난 상관없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허세와 허영과 허풍처럼 가식과 위선과 허위도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일정 범주라는 게 있지 않을까? 머머하고 싶지 않다, 머머하면 재미없다, 머머는 좋지 않다, 머머가 되고 싶지 않다, 날마다 머머하면 재미없다, 머머할 필요없다, 죄다 쓰잘데기 없는 일이다 등등등. 그건 모두 다 반대로 들으면 된다. 반대로! 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없어? 유명해지면 좋고 아니면 말고, 어쨌든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말이다. 황금, 캬! 날마다 놀면 재미없어? 인생 목표가 평생 놀고 먹는 거다. 매력적인 아가씨라, 산전수전 다 겪었겠네 내 화술이 뭐 저렴하다니 나도 관심 없어? 예술은 길고 욕망도 길다. 날마다 주색을 탐하면 재미없다라? 날마다 주색을 탐하고 싶다는 거다. 공을 차고 때리고 달리고 게임하고 장비를 수집하고 작업하고, 매일 그러면 재미없다? 매일 그러고 싶다는 거다. 날아가는 철새도 타오르는 태양도 모두 다 사랑하리? 완벽한 탐미주의자다. 세상 사람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건 사색가이자 환상가요 시인이다! 싱그런 복숭아와 달콤한 망고고 뭐고 다 지겹다? 저 신선한 과실을 다 따먹고 싶다 저 화사한 꽃밭에서 마냥 뒹굴고만 싶어라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아아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다. 손날로 목을 그냥 콱...!
   그런데 와! 설마 했는데 안소니와 마고는 진짜 마술사였던 것이다. 와, 아찔함에 살짝 어지러우니 잠시 쉬었다 가자.


   9

   그날은 에반스의 생일이었다. 모두들 에반스의 집으로 모였다. 블로거로 집에서 일하는 에반스의 집에는 흡혈귀 가면과 물 대신 술을 채운 수영장과 정원에서는 닭이 뛰놀고 있었다. 평소에는 몰랐는데 그런데 닭이 나는 재주가 있다는 걸 몇몇은 처음 알았다. 멀리는 아니지만 까마귀처럼 짓고 매처럼 노려보며 호금조나 카나리아처럼 주인의 어깨 위에 앉기까지 하더라. 그리고 음악은 에반스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왔다. 바로 추억의 유행가. 생일잔치니까 당연히 춤과 술이 빠질 수 없었다. 다 즐겼다. 그럼 이젠 장기 자랑이랄지 누군가 나서서 실감나는 감동을 안겨줘야 할 시간이다. 케익도 먹었다. 닭에게 모이도 주고 사진도 찍었다. 할 건 다 했다. 그래서 조용해졌다. 그러나 갈 데까지 간 건 아니다. 그렇게 적막이 흘렀다. 바로 그때,
   무슨 보도 듣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안소니와 마고가 등장했다. 옷차림은 누가 봐도 아 마법사와 조수구나 라고 느낄 수 있을 만한 복장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캐롤과 덕은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마술이 재미없으면 딴 일을 하던가 적당히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짜잔한 무대요 뻔한 속셈일 꺼라고 예측했다.
   「여러분. 마술에 대해서 잘 아시죠? 화면에서 또는 무대 위에서 마술사가 기다란 모자를 들고 어떻게 딱 하면 모자에서 앵무새나 꾀꼬리가 나오고, 시시한 카드 마술에 도구를 이용해서 몸이 2개 3개로 분리되고. 그래요. 물론 미리 정해진 참가자를 무대로 불러서 다 어떻게 박수를 이끌어내죠. 무난하게 말이죠. 네. 그러나 그건 몽땅 가짜라는 것. 설마 모르시지는 않겠죠. 왜냐하면 정말 그건 가짜니까요. 그렇지만 실제 극장에서, 최고의 마술사가 펼치는 대향연을 바로 로얄석에서 지켜보신 신사 숙녀 또한 거의 없다는 사실, 그건 뭔가 석연치 않아요. 그건 썩 개운하지 않다구요. 깔끔하게 가짜다, 어? 다 열어놓고, 어? 당당하게, 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이거다, 이건 진짜고 이건 가짜다, 내 최고의 장기는 이거라고 왜 말을 못하냐고요! 대체 왜!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네. 괜히 그러는 게 아니겠죠. 무대는 어디까지나 쇼고, 마술사도 광대이자 관객도 실은 마술사의 조수가 선보이는 그 신비한 미소와 상냥한 표정과 다소곳한 움직임을 보고 싶어하죠. 마술사가 실수하면 공연 실패고, 실수하지 않아도 식상한 행사 밖에 더 되냐고요. 안 그렇습니까?
   대체 우리가 언제까지 그분들 재롱에 들러리를 서야 하는 겁니까? 신부 들러리 많이 선다면 누가 상이라도 준답디까? 마술사면 다에요? 저라면, 저라면 차라리 재미없을지라도 속고나 보자 라면서 삼류 극장식 카바레에 가서 스탠드업 코메디를 보거나 한물 간 거물의 열창을 듣겠어요. 같은 시간이라도 우리들은 남자들끼리 으쌰으쌰 삼류 스탠드바에 가겠다구요. 여러분, 마술의 시대는 지났어요. 좋은 시절은 가버렸다구요. 왜, 왜일까요? 왜냐하면 마술은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실력자들은 모두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명맥은 죄다 거의 끊겨버렸어요. 마술사는 대부분 은둔형 신비주의자로 돌변해버린 것이죠. 여러분,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술사인 거 모르시죠?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라클리투스 피타고라스의 3번째 수제자였어요. 2.5? 아니 3번째. 그런데 재능은 출중한 반면 노력은 하지 않았죠. 차라리 재능이 형편 없고 끈기라도 있었다면 더 나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죠. 그래서 그는 스승에게 뺨 맞고 문하에서 쫓겨났어요. 얼씬도 하지 말라면서요. 바로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때부터 철학을 공부하게 된답니다. 아시겠어요? 방금 전에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전설적인 마술사 헤라클리투스 피타고라스의 제자가 지금 시대에 과연 현존할까요? 아니죠. 없죠. 안보여요. 명맥이 끊겼으니까요. 그러면, 그러면 말이죠, 혹시 1812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건 아시나요? 전 몰라요. 전 모른다구요. 아 농담이구요, 전 그때 한참 스피노자를 원서로 읽고 있었고, 마키아벨리 추종자들을 설전으로 아주 오줌 지리게 혼쭐을 내줬고, 전 그때 당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내연녀였던... 음...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전 당시 그녀의 꽁무늬를 한참 네 맹렬히 쫓아다녔으며, 에 또 가만 있자, 아 맞다, 미셸 푸코가 한참 나중 발표했던 학설은 물론이요 이미 그때 저는 반오이디푸스 사상에 대한 연구도 끝마쳤어요. 깔끔하게요. 이게 다 제 자랑 같죠? 네, 맞아요. 사실인데 뭐 숨길 수도 없고 어쩌겠어요. 당시 초현실주의를 예견하고 5차 산업 혁명을 조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 밖에 없었으니까요. 누구요? 동시대인지 어렴풋하지만 네, 모차르트? 은근 허당이었죠. 아이쿠, 에고머니나 호호 베토벤? 와, 허세 정말 캬 장난 아니었죠. 아 말도 못해요 말도 말어. (설레설레) 아니야. 아니야. (설레설레)
   자 그러면 마술계로 넘어와서 로버트 후딘의 라이벌이었던 스코트랜드의 존 헨리 앤더슨! 그 양반께서는 쇼맨쉽 덕에 그나마 사기꾼 신세는 면했죠. 당시 탈출 마술한다고 정통 마술에 대한 정체성을 흐트려놨지만 데이비드 커퍼필드나 랜스 버튼과 20세기 마술사중 가장 뛰어나네 어쩌네 라던 다이 버넌? 열심히는 하는데 너무 보이더군요. 그게 다가 아니죠. 발 발렌티노는 저를 만나면 차마 고개를 못듭디다. 어디 그뿐인가요? 유리 겔러는 제가 딱 1분 만에 제압했어요. 자존심 살려줄려고 했는데 자꾸 깐죽거리는 모습이 눈에 거슬리더라구요. 하지만 여기서 멈출께요. 숨겨진 비화를 알게 되시면 아아 그만, 그만. 예언계까지 넘어가지는 않겠어요.
   여러분 말이죠, 마술은 대학교에 전공으로 자리잡는 데도 실패했고, 마술업도 이제는 간당간당해요. 그게 다 그 친구들 비리비리한 실력 때문이에요. (캐롤과 덕을 가리키며) 우리 신사 숙녀분 께서도 벌써 속마음을 들키셨잖아요. 이미 방심하셨고, 이 양반이 대체 어디까지 하나 보자 라고 저의 그 건방진 입방정에 꽤 불편해 하시고 계시는데, 이게 다 작전입니다. 저는 간질간질 자잘한 에게 응애응애 그런 거 다 필요없고, 확실한 것 한두 가지만 보여드립니다. 제 방식이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서론이 길어지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자신 있으니까요. 그럼요.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이게 다 뭐였냐? 멍석을 깐 거에요! 먹밥을 뿌린 거라구요. 저는 실력으로 승부하니까요. 뭐 예술가의 자존심 자존심 하는데 그거 다 허세에요! 우리쪽에서도 조수에게 눈독들이게 하는 거? 원하옵건대, 간청컨대 우리 그러지 맙시다! 흑심을 탓하자는 게 아니라 오락산업이 싫다는 것도 아니고 작품이든 무대든 진짜를 내놓자는 저의 절실한 네? 간절한 애원이라구요. (이런 때 시의적절하게도 탁월한 바디랭귀지라는 손바닥을 펴서 마주보며 손가락부분을 맞대는 장면을 안소니는 연출한다) 휴~, (...오른쪽으로 몇 걸음 왼쪽으로 몇 걸음. 골똘히 뭔가를 생각함...) 뭐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와 UFO다, 괴물이 나타났다, 믿을 수 없는 신기함의 극치다? 후~! 그게 뭡니까. 그게 뭐냐구요. 코흘리개 똥싸배기 뭐 기저귀차고 박수치고 들러리나 서다가 인생 종 치라구요? 인간의 삶이 진정 그처럼 시시하다구요? 인류 문명이 그렇게 네? 어디 그처럼 장난스럽게 금자탑을 쌓아올린 겁니까? 네? 그게 뭡니까! 네? 우리, 그러지, 맙시다. 더 이상은! 그게, 그게, 아 아니야 아니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어른들이 애들 보는데 그게 다 뭔... 아 아니야 아니야. (그는 멋진 척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한숨을 앞이나 옆이 아니라 이마를 향해서. 물고기의 구강 구조를 흉내내면서)
   ...... ...... ......
   자, 갑시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만 귀가 따가우셔서 피곤하신 게 아니라 네. 저도 입 아픕니다. 많이 아픕니다. 저도 이런 제가 싫어요. 네. 실은 제가 말 많은 사람이 아니니까요. 제가 말을 많이 하거나 말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저는 피곤해요. 완전 피곤해서 막 괴로워요. 저는요. 싫고 짜증나요. 막 때리고 싶어진답니다. 그러나 자학은, 참아요. 리듬을 타야하니까요. 그렇다구요. 그러나 단, (쿵) 지금까지는 모두 2부를 위한 1부였습니다. 기대하시라. 자, 드디여 2부가 여러분 앞에 선을 보일 차례입니다. (어떻게 준비했는지 또 이상한 음악이 흐른다)
   (마술사 안소니는 먼저 그날 옆 동네에서 놀러온 리플리의 친구를 앞으로 불러낸다)
   여러분, 앞에 한분의 미녀가 계십니다. 저는 마고가 옆에 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요. 왜냐? 이분의 손에서 블랙홀 같은 기운으로 저의 손을 끌어당기기 때문이죠. 으윽.. 아아... 철컥! 그래도 뭐 악수죠 이게 뭔 대숩니까? 어디식 인사까지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한바퀴 돌리고 제가 한바퀴 돌고 춤을 추는 것 가능한 것 보셨죠? 그리고 악수를 했죠? 그 다음에 뭐 키스라도 할까요? 손금은 봤지만 해몽은 참겠습니다. 허허 농담이고 이분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더 이상 여쭤보지 않겠다구요. 다만 지금 잠시만 이분께서 주인공이시니까 조금만 집중해주시라는 것 뿐이에요. 정말 이쁘잖아요? 네. 그럼요. 제가 만약 마고를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부터 제가 어떻게 이성을 잃을지 차마 장담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튼 이제 악수도 했고, 손장난도 쳤고, 할 건 다 했습니다. 갈 데까지 갔어요. 네, 사랑 빼고는 할 건 다 했어요. 갈 데까지 가지만 않았다 뿐이죠. 그렇죠?
   두근두근두근두근, 밤바라밤 밤밤바 밤바라밤 밤바밤, 빠라밤 빠라밤 빰빠빠밤...... 짠! 자, 보세요. 이분의 손이 마네킹처럼 굳었어요. 어떡하죠? 제가 말했잖아요. 어중간한 점쟁이처럼 YES만 요구하는 끈 당기기를 하지 않겠다고. 내내 NO만 주문하다가 제일 쉬운 YES로 놀래켜주기?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 잘 아시잖아요. 그럼요. (팔꿈치 밑으로  손이 의수처럼 굳어버린 리플리의 친구분은 울상과 놀라움으로 범벅되어 어안이 벙벙한 상태가 되었다)
   아, 이 다음에 제가 이분의 의수를 정상으로 돌려들릴 순 없어요. 왜냐하면 이건, 여기서부터는 마술이 아니라 진짜니까요. 그래도 걱정하진 마세요. 7시간이나 7일이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올 테니까요. 저도 알아요. 이딴 술수로 마술했냐고 폼잡냐는 거. 들리지 않는 비아냥. 그럼요. 지금까지는 몸풀기였죠. 그럼요. 호호호호호! 허허허허허! 흐흐흐!
   분위기를 이어갑시다. 다른 분들은 저와 친분이 있으니까 곤란하고, (딱) 네, 눈을 피하시지 마시고, 제 눈을 피하시지 마세요. (캐롤과 덕을 앞으로 불러낸다) 긴장하지 마세요 마세요. 전혀 다른 마술이니까요. 한숨을 두 숨으로 나누어 쉬시고, 푸른 초원과 시원한 해변을 상상하세요 상상하세요. 환상을 영접하고 신비와 사랑에 빠집시다 빠집시다. 인생 뭐 있나요? (윙크)!
   자 눈을 감으시고 감으시고, 그대로 손에 계란을 쥔 듯이 손을 오므리세요 오므리세요. 그대로 팔을 들어올려 눈에 대세요 대세요. 살짝 오므린 손이 망원경인 것처럼 것처럼. 네 잘하셨어요 잘하셨어요. 그럼 이제, 우린 숫자 그런 거 세지 맙시다. 아마추어도 아니고 그런 거 건너뜁시다 건너뜁시다. (쾅─딱─슉) 자, 눈을 뜨세요 뜨세요. OK!
   이제 우리 앞에 서있는 이 분께서는 천리안이 되셨습니다. 마침내 이 분들은 천리안이 되셨습니다. 자, 우리 모두 확인해볼까요?
   스컬리 집에 있는 귀여운 강아지가 보이나요?」
   「네. 진짜 보여요! 어, 이거 어떻게...」
   「와. 진짜에요! 오오... 아아... 와...」
   「그러면 말이죠, 리플리 집에 있는 새는 자고 있나요, 심심해 하고 있나요?」
   「자고 있어요.」
   「네. 꿈을 꾸나봐요.」
   「캐롤이 띄워놓고간 물고기의 특식은 어떻게 됐죠?」
   「다 먹었군요. 네 수면이 깨끗한 거 보니까 녀석들이 다 먹었나 봐요.」
   「옆 마을은 보이나요?」
   「네. 사람들이 누구지... 뭐 하는 거지? ... 아, 우리 험담을 하고 있군요.」
   「그럼 바다 건너 미남들이 사는 나라는요?」
   「거기는 제가 말할께요. 아직 살짝 보일락 말락 하네요.」
   「그럼 우리 신사 숙녀께서 너무 빠지시면 안되니까, 다른 마술과 겹쳐봐야겠네요. 직렬이 있으면 병렬도 있으니까요. 제가 알기로는 맥스가 키우던 고양이는 한 마리에요. 그런데, 보이나요? 맥스 집에 지금 고양이가 몇 마리가 있죠?」
   「두 마리요.」
   「어머나! 맥스가 고양이로 변신했을까요? 그럼 어쩌지? 에반스네 집은요? 뭐가 보여요?」
   「에반스네 집은... 에반스는 보이지 않고 닭이 두 마리 보이네요.」
   「에반스가 설마 닭으로? 좀 전까지만 해도 에반스와 맥스는 우리와 함께 있었죠 네. 그렇죠? 그럼요. 나중 확인해 보면 알겠지만 에반스와 맥스는 어디 가지 않았을 꺼에요. 우린 모두 그 친구들를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두 분 모두는 모르겠는데 아마 한 분게서는 어제 이런 꿈 꾸시지 않았나요? 자기가 거인이 되서 도시 조감도 모형을 앞에 놓고 장난감 조립하듯이 모자 달린 다리를 지으셨죠? 다리의 모자로 쓰일 만한 건 잭과 강남콩에 나오는 커다란 나뭇잎을 이용했구요. 그런데 그게 진짜 도시였구요.」
   「와! 저에요. 제가 그와 똑같은 꿈을 꾸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와, 말도 안되. 오 이런!」
   「어떻게 알긴요. 찍었죠! 그런데 꿈이 잘 기억나지 않다가 지금 제가 말하니까 왠지 그런 꿈을 꾼 것도 같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죠? 아무튼 이제 그만 쌍안경을 벗으셔도 좋습니다. 어허, 저기 선생님! 아 나 이런 증말, 여자분. 숙녀여!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혹시 설마 지금 남탕을 꿰뚫어보시고 있는 건 아니시죠? 어디 가나 꼭 이런 분 계시다니까요. 저번에도 한번 이런 일이 발생했어요. 참 난감합디다 그려. 호호호. 이런 분께서 진짜로 사춘기 시절에 목욕탕을 훔쳐보다가 엉덩이를 걷어차였을지도 모르죠.」
   그런 다음 어떻게 어떻게 에반스의 생일잔치는 끝났다.
   아, 그 뒤로 마술쇼의 대미가 있었다. 까딱하다가 잉꼬 없는 찜빵이 될 뻔 했는데 마술사 안소니가 무리를 했을 수도 있다. 힘드니까 상급 난위도 마술을 건너 뛸려다가 유종의 미는 커녕 험한 꼴 당할지도 모른다는 직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어쩌면! 최종 마술은 말이 많지 않았다. 속임수도 아니었다. 놀라웠고, 완벽했고, 신기했다. 그것은 곧 마술사 안소니가 스컬리한테 중력파를 쏘았고, 손가락 검지로 파파팍, 스컬리가 쿵 하면서 사라졌다. 다들 코앞에서 보고 있는데 말이다. 물론 꽝 소리와 불꽃과 연기는 물론 불꽃놀이 냄새까지 진짜였다. 그 모두가 완전 진짜. 와 이건 말도 안되, 완전 이건 궁극적 신비감이자 극도의 환상이었다. 이에 비견할 수 있는 일은 그거 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고 사람의 입에서 화염방사기의 불꽃이 내뿜는 일.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진짜로 안소니의 손가락에서 지지직 번개 같은 중력파가 나갔다. 지가 무슨 해리 포터야? 그걸로만 봐서는 그랬다. 진짜 그랬으니까. 이건 정말 꿈으로 치자면 심신이 쇠약할 때 꾸는 기분 나쁜 꿈도 아니었고, 욕망에 관한 꿈이라는 잡몽도 아니며, 신화적이고 영적인 영몽도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환상이었고 어디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신묘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기똥찬 마술에 모두, 아니 주로 덕과 캐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다 분위기가 이상해졌고, 모두들 파티를 서둘러 끝냈다.


   10

   다음 날이 됐다. 큰 변화는 없었다. 스컬리에게 물어보니 술에 만취해서 어제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땅거미가 질 즈음에 모두들 캐롤의 카페에 모였고, 그때 물어 물어 확인한 결과 에반스와 맥스를 어제 이후로 본 사람이 없다고 했다. 심지어 에반스네 집에는 닭이 한 마리 늘어서 총 2마리라고 한다. 게다가 맥스네 집에도 고양이가 한 마리 늘어서 총 2마리라고 했다. 에반스와 맥스가 각각 닭과 고양이로 변신했을 리는 없고, 뭐라 논평하기 곤란한 일이었다.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1일 지남.
   우연일 테지만 개인 일정이 있겠지만 스컬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스컬리 집에 한 마리였던 개 옆에 똑같이 생긴 개가 한 마리 더 있었다. 총 2마리. 스컬리는 개가 아니고, 개도 스컬리가 아니겠지만 스컬리가 개로 변신하지 않았다고 장담하기도 어려운 면이 없잖아 있었다. 더군다나 잘 보니 녀석은 스컬리와 닮아보이기까지 했다.
   2일 지남.
   천문학자 리플리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리플리가 키우던 새의 개수는 홀수에서 짝수로 바꼈다. 긴가민가했으나 남은 사람들은 점점 불안해졌다. 뭐가 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캐롤은 운동 중독에 빠졌고, 덕은 집으로 뛰어가서 퐁~ 소리가 나는 라이터를 찾아봤는데 없었다. 오, 저런!
   마을에서 오다 가다 마술사 안소니를 만났을 때 덕은 물어봤다.
   「안소니! 너 우리도 변하게 할 꺼니?」
   안소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행복하든 불행하든 관심 없다는 듯이. 다만 말없이 윙크만 했다. 많이 해 본 솜씨 같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음 동작이 뭔가 의미심장했기 때문이다. 안소니는 그러더니 검지와 중지로 V자를 만들더니 손가락 끝을 자기 눈을 향했다가 다시 덕쪽을 가리켰다. 덕은 식겁했다.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았다.
   덕과 캐롤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며 작전을 짤려고 자세를 잡다가 포기했다. 그들은 짱구를 굴렸으나 딱히 뚜렷한 방법은 없었다. 다만 에반스-맥스-스컬리-리플리 집에 있는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씩 있는 동물들을 챙겨주느라 힘이 들었을 뿐. 밥 주고 응가를 치워주고 놀아주고! 그들은 생각했다. 안소니는 왜 나타났을까? 대체 왜 안소니는 마술을 남발했을까? 그 마술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가짜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진짜라면, 진짜면 안되는데...! 그런데, 안소니와 스컬리는 설마 라이벌? 그럴 리는 없다. 그 둘은 친구다. 아니다. 오히려 마고가 더 의심스럽다. 지금은 지켜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 일단 더 두고 보기로 했다.
   아, 그 외에 덕은 겉도는 대화를 원했는데 캐롤은 심각하게 어느 화제를 물고 늘어졌다.
   「캐롤. 엇그제 세기의 대결 있었잖아. 권투와 격투기의 대결. 재미있게 봤니?」 덕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캐롤은 표정이 살아났다.
   「응. 아주 재밌었어. 그래서 손과 발에 땀이 많이 났어. 그렇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단,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평은 다소 덤덤. 기쁨과 분석에 대한 시각이 약간씩 다르더군.
   시작부터 일단 코너는 손해볼 게 없었지. 지면 당연한 거고, 이기기는 어렵지만 선전만 해도 성공. 반면 플로이드는 애초에 절대 승산 없는 게임이 아니었고, 질 리는 없고 이겨도 본전! 시간 끌다 후반에 승부 보는 건 당연했어. 그러니까 주인공은 선수가 아니라 도박사일 테고. 
   일단 성사된 게임 자체가 코메디이자 행사 성격이지만 같은 타격 양식치고 그 둘은 달라도 너무 달라. 권투와 격투기? 많이 다르지. 레슬링과 유도 만큼. 세팍타크로와 풋살만큼. 스키와 스노보드만큼. 테니스와 베드민턴 배드민턴과 탁구만큼. 유도 선수 옷 벗겨서 레슬링 선수와 붙여봐, 재밌겠다! 바다낚시나 민물낚시나? 운칠기삼과는 달리 요행과 행운은 통하지 않는 분야가 그거야. 수십 년 동안의 땀 100퍼센트라고. 권투는 말이야 춤처럼 스텝이 기본이지만, UFC의 기본은 레슬링, 단게임 정면 승부가 특징이야.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쉬는 날 없이 농구는 매일 슛 2천개, 권투는 줄넘기만 매일 2시간, 그렇게 세월을. 아무리 천재라도 그 기본없이 대등함은 불가능해. 올림픽에 종목이 있냐 없냐, 종목의 역사가 기냐 짧냐, 아마추어 기반이 탄탄하냐 아니냐, 그 둘은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고. 권투가 훨씬, 훨씬 기술이 촘촘하고 기술과 기량의 폭이 넓고 세밀해.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를 폄하하는 면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건 대개 낭설이고 농담이자 다름의 다른 표현일 뿐. 더구나 그 뭔지 모를 빈자리를 자본과 인기가 매꿔주지 않나. 순수예술과 대중예술도 크게 다를 건 없어. 발레리나가 살사레나? 살사리노? 아무튼 그분을 질책한다? 그 둘이 절친이고 장난이란 거 어느 누가 모르겠나. 건들건들 힙합 뮤지션이 프리마돈나의 사생활을 비꼰다? 뒤에 나오는 좋아한다 사랑스럽다 알고 싶다까지 듣지 않으면 비꼬는 게 맞겠지. 그 뿐만이 아니야. 관람평이 코끼리 뒷다리 만지기까지는 아닌데 좀 약해. 코너의 복싱 완벽 적응? 완벽 실패지! 자세가 완벽하게 빵점인데? 포먼이나 소렌스탐등 몇몇 기본을 벗어나는 예가 드물게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분야라고. 응? 자기 분야! 옛날에는 독학으로 세계 최고가 가능했어. 지금도 가능할 수는 있어. 그러나 지속적으로는 불가능하지. 타분야에서라면 두말하면 잔소리고. 체급만 바꿔도 모험인데 타 분야? 글쎄요. 전설적인 농구 선수가 은퇴 후 골프선수로 데뷔한다? 호호호!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그랑프리를 위해서라면 도전은 의미 있지만 결과는 그것도 코메디지. 일반인이 운동 신경 괜찮으면 뭘 해도 다 잘하는데, 직업과 프로와 챔피언은 달라. 물론 은퇴해서 아마추어와 놀게 되면 잔잔한 비아냥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할 테고. 돈도 돈이지만 구경꾼을 위해서 도전 정신을 위해서 당당히 남의 업계에서 패자가 될 가능성이 다분한데도 불구하고 행사에 참여한 사기를 높게 사야지. 또 챔피언이 바보도 아닌데 후반 승부가 뻔함에도 불구하고 행사에 참여한 것도 역시나. 잘해야 이겨도 본전인데 뭐하러? 무엇보다 오락산업이 큰 몫을 담당했고 말야.
   그런데 있잖아 다만 아쉽다면 말이야, 최고 중의 최고에게라면 내 스타일보다는 자세를 택했어야 했지만 음, 그건 어쩔 수 없었어. 이직이 아니라 옆 동네에 잠깐 얼굴만 비췄던 거니까. 스포츠의 처음과 끝은 자세거든. 그래, 기본기! 적응에 대한 준비랄까 전략이 좀 그랬어. 그래도 프로도 아니고 아마추어도 아니고 1회성 데뷔전인데 평생 그 길을 걸었던 2인자, 3인자 만큼 했으니 패자도 낙승감. 프로선수들 가운데도 리그와 국가대표 경기의 차이가 보이기도 하는데 그에 비하면 몸을 사리지 않으며 휘청휘청 아슬아슬, 격투기 선수들 특기지 않나. 남자? 응? 남자! 이건 드문 행사지만 상업적으로 권투나 다른 스포츠 선수가 격투기로 넘어가서 암담했던 전례는 드물지 않아. 젊은 제2의 플로이드가 그쪽 업계로 가서 행사를 해도 결과는 똑같겠지. 아니 오히려 훨씬 뭐하지. 그쪽 시장이야말로 월등하게 화려하니까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챔피언을 바라보거나 벨트를 맺던 운동선수의 스포츠 인생이 상업 때문에 타분야로 이직해서 뭐랄까, 꽝되는 안타까운 모습이 돈 때문이었던 사례가 있다는,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좀 씁쓸하지. 보는 사람이야 오락이고 휴식이자 장난이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재밌기는 했어. 관람 포인트는 첫째 경기가 가까와 오면서 또 경기 당일 최고의 쇼맨쉽, 둘째 경기 직전 선수 소개, 셋째 눈으로 보고 감으로 주먹을 피하는 장면들. 원래 권투 선수가 타 분야로 가서 경기는 완패해도 몸놀림을 보고 감으로 피하는 장면이 압권인데, 경기는 같이 하지만 그것만 보면 어른과 초딩 차이인데, 오오 이번에는 그게 반대로도 가능하던데. 괜찮았어.
   하지만 글러브 큰 거 끼고 수비 축구 자세 잡으면 때릴 곳도 때릴 의욕도 없을 것 같은 기분은 공감이 되네. 한 쪽은 규칙과 기술을 100퍼센트 활용하는 최고의 백전노장, 한쪽은 프로도 아마추어 데뷔도 아닌 딱 1번 재미. 경기 중 등을 보이면, 등을 보이면 거 어째 자세가 좀 응? 이상한 생각하는 사람도 없진 않을 꺼 아냐. 거 왜 좀 웃기잖아? 산업적으로 보자면 권투가 하락세를 겪은 것 가운데 하나는 뭐니 뭐니 해도 다른 말로 하자면 수비 축구 때문이야. 라디오가 TV와 인터넷과 핸드폰에게 자리를 양보한 건 음 것도 운명이지. 권투는 축구와 반대로 기반이 약해졌던 데다 몇몇 요인이 있었어. 경기 전 경기 중 경기 후, 조르주에게 코치진이 요구하는 건 딱 하나야. 오직 과학과 이성. 오로지 그거 하나 밖에 요구하지 않아. 그래서 이기긴 이겨. 하지만 재미없어. 완전 재미없다고. 그러니까 비슷한 상대나 상대적인 강자를 만나면 고전을 면치 못한다고. 플로이드가 조르주랑 완전 똑같아. 제일 재밌게 뛰는 선수와 조금 심심한 성향의 선수, 정반대의 경기 스타일을 붙여놨으니 뭐 그렇지. 하루종일 과학과 이성을 연구했는데 밤에도, 쉬는 시간에도 과학과 이성에 지배당하는 놀이를 보라고? 프로의 세계야 냉정하지만 프로가 아닌 우리야 그 빈틈을 보는 재미로 멍청하게 화면을 쳐다보는 거잖아. 안 그러니? 내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애호가라면 모를까, 그런 경기를 끝까지 보기는 힘들어. 채널 돌려야지. 안 그러면 스트레스 풀려다가 오히려 스트레스 더 쌓이라고? 선수와 비선수의 입장 차이가 그렇게나 극명하다네. 하지만 그 스타일 아니면 그런 성적은 거의 어려운데 어쩌겠나. 다른 분야도 아니고 말야. 스포츠라는 게 원래 그래. 체급이 세세한 종목이 있는 반면에 없는 종목도 있는데, 먼 미래에는 또 모르겠어. 같은 체급이라도 체격에 따라 결과가 많이 달라지니까.
   아바타가 있었다면 상대방을 완전 똑같이 따라한 채로 거의 쨉만으로 승부는 판정까지 갈 텐데, 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혹시 마이크 타이슨 스타일? 정상에서 고고히 내려오고, 서서히 멀어지며, 유유히 인기와 관심과 조명을 모두 내려놓는 일은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을 꺼야. 그건 곧 <끝까지 무대에서> 라는 일에 대한 신념과 <최고는 나>라는 포기를 모르는 집념이 점점 상충할 수 밖에 없기 때문. 자만심이 끌고 자부심이 밀어서라도 어깨 뽕 위에 악마를 세워서라도 1인자일 것, 그게 안되면 에잇 그냥? 난 아마도 마이크 타이슨 스타일인가 봐. 그러면 내게는 승부사가 아니라 도박꾼 기질이? 어머나! 달리 말하자면 한때 최고였든 길게 최고였든 꾸준한 모습이 멋지다고들 많이 말하지만 최고일 때 한번에 딱 돌아서는 뒷모습, 그게 오히려 더 극적이고 멋지지 않나 이거야. 어쩔 수 없는 사고 때문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제발로 내려오는 일이 어려운가 쉬운가만 생각해 봐도 돼. 괜히 십대의 문학적 감성으로 스타의 요절을 멋지게 보는 게 아니라고. 그러나 인생 기니까 예술도 기니까 꾸준한 모습이 더 멋진 것으로 하는 게 좋겠군 그래. 오오 기도하는 소녀여, 벌써 얘기가 그렇게 됐나? 하여간 아무리 그래도 전설은 타이슨이고, 카리스마도 타이슨. 무패 다체급 석권도 훌륭하지만 플로이드는 은퇴한 챔피언, 타이슨은 전설! 아 스치기만 해도 캬, 스치기만 해도 으아, 아 치아와 치아 사이에 살짝 끼기만 해도 얼마, 그 음식 이름이 뭐드라? 내 치아 사이에도 한번 낑겨 봤으면...! 다시 타이슨으로, 스치기만 해도 캬 으아 오오, 캬 말 말어 와 한 경기 한 경기 정말 오오 그때는 아직 복싱의 전성기였을 꺼야. 진짜 재밌었어. 완전 멋졌어. 복싱이라는 올림픽 종목에 대한 애정이 있으니까 이런 관심이라도 있지 것도 없으면 진짜 슬퍼져. 그야 어쨌든 결론은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오락산업의 쾌거라는 점. 목적이 쇼인 만큼 행사는 대성공.
   검투사끼리든 사람이 야수와 맞붙든 콜로세움에서 있던 일은 당시 거기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만 볼 수 있었잖나. 나머지는 전해 듣거나 소식을 읽는 것만 가능했을 테고. 악보가 없으니 명곡을 귀로 따서 연습하다가 기타리스트가 됐드라? 요즘엔 그러지 않아도 돼. 독학도 쉬워졌고 천재도 많은 세상이니까. 9년부터 79년까지 살았던, 콜로세움과 신전의 건설에 착수했던 고대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누리던 축복뿐만 아니라 마법의 양탄자니 알라딘의 마술램프든 뭐든 모두 현실이고 (대체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 그런데 재밌는 건 말이야 또 현대인이 그 풍요에 취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도록 가만 놔두질 않는다네, 우리의 오락산업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살짝 비켜서 상위 몇 퍼센트가 얼마의 부를 차지한다는 헤드라인을 거리에서 지나가다가 슬쩍 보거나 매일 지구 어디선가 발생하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들이 있을 테니까 말이야. 대표적으로 국제 구호 단체, 응? 북극곰을 살립시다, 응? 기쁜 소식 슬픈 소식, 길흉화복 흥망성쇄. 음 그렇지. 가까이만 봐도 일이 많아. 주피터의 서자인가 헤라클레스가 천상에 올라가기 전 지상에서 모두 해결했다는 열두 난제? 지금은 그 모두가 창과 방패야. 보완하면 또 헛점을 파고 들고 어쩌고. 응? 뜨고 지고 왔다 갔다 커졌다 작아졌다 밀었다 당겼다 쥐었다 폈다 들었다 놨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응? 그렇다니까. 뭐야, 그런데 왜 갑자기 콜로세움이니 마술램프니 독학에다 밀고 당기기가 나왔지? 그게 다 오빠 때문이야, 어? 알아? 너 때문이라고! 삼천포로 빠질 것 같으면 오빠가 말렸어야지, 응? 거 무슨 뭐, 난 아무 말도 안했어요? 아무 말 안했으니까 꾸지람 받는 거라고! 오빠 눈치 없기는 여전하시군. 흥! 오빠가 쫌~만, 뭔가가 쫌만 부족했으면 나한테 더 혼났을 텐데, 호호호 넘어가자구요. 좌우지간,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은 기량이 최고라는 공통점에 반해 경기 양식은 정반대니까 1회성이 아니라 왔다 갔다 그렇게 짝을 맞춰 2부 예고가 있어야 공평하지 않을까 라는 상상은 너무하다는 점. 그건 안 돼. 상인과 예술가는 물론 닭과 거위까지 두루 관심 끌고 만족시켰으니까 아마도 스포츠보다는 오락이었고.
   오빠. 오빠 얼굴을 보니 썩 좋아보이지 않은데, 그게 혹시 지금 이 연설 때문이야? 미안 미안. 나도 바텐더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사람들을 보면, 어떤 관찰을 지속하면 뭔가가 보여. 그래서 그래. TV를 내다버린 어느 사람의 얘기가 그러더군. 부자들은 볼 것만 보고 빠진다고. 자기는 그게 안되니까 그래서 TV를 버렸다고. 여기도 그래. 여기서 독주를 마시는 분은, 나야 고맙지만 오히려 주머니가 얇은 양반들이 더 많은 것 같아서 뭔가 착찹한 심정이 없잖아 있다네 오빠. 그렇지만 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오빠. 응, 오빠.
   관전평 한마디가 왜 길어졌나면 마술사 안소니 때문이야. 아무래도 안소니는 그저 그런 흔한 마술사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안소니 전공이 뭐니? 마술이라고. 마술이 그래. 정신분석학과 사회심리학이 학계와 업계와 일상 생활에서 그 지위를 탄탄히 하고 분야를 공고히 하는 동안 마술은 어떻게 됐냐고. 마술은 그동안 뭐했어? 어? 잠잤어? 낮잠이야 밤잠이야? 아니면 뭐 바람이라도 폈어? 유행하는 그런 거, 협업? 그건 그렇고, 그런데 안소니의 그 믿을 수 없는 신공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냐고. 우린 말이야. 안소니를 결코 쉽게 봐서는 안될 것 같아. 절대로 말이야.」


   11

   사라진 친구들은 돌아올까 돌아오지 않을까? 안소니의 마술 때문인지는 몰라도 점점 더 이런 일이 늘어날까, 늘어나지 않을까? 혹시 안소니와 마고가 그들에게 소풍을 가자고 제안하고 그곳에 가면 그 친구들은 만날 수 있을까 없을까? 설마 이대로 전개가 끝나 버리는 건 아닐까? 앞으로 새로운 일이 과연 있을까, 없을까? 캐롤과 덕은 선수를 쳐야 할까 아닐까? 그런데 선수를 쳐야 한다면 어떻게? 그러게 말이다. 게다가 안소니의 마술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무슨 사이비 신도들을 거느리다가 1대 교주 스컬리가 2대 교주 안소니에게 권좌를 물려준 것일까? 아니면 뒤통수를 맞은 걸까? 뭐 하나 뚜렷하지도 않고 선명한 기운은 모조리 종적을 감춰버렸다. 어디다 호소할 데도 없었다.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저 높은 곳에서 안소니가 모두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서늘한 느낌 때문에!
   이거 무슨 동물원에 취직한 거도 아니고 날이면 날마다 닭, 고양이, 새, 개를 것도 두 마리씩 꼬박꼬박 밥 주고 똥 치우고 놀아주고 지켜봐야 하다니... 아 맞다. 그래도 하나 믿는 구석은 있었다. 바로 캐롤과 덕은 동물이 아니라 식물을 키우기 때문에 안소니가 그들에게 마술을 써서 자기들을 무슨 생쥐나 너구리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 그러나 그건 추측이자 못미더운 신뢰이며 희망 사항이고, 자기들은 거의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아 참, 덕은 아니지만 캐롤은 물고기를 키웠다. 물고기가 물고기를 키워? 특종도 뭣도 아니다. 아무튼 이제 마을에서 짧은 반경 안에는 안소니─마고 짝과 캐롤─덕 짝만 남았다. 잘 됐네. 2 대 2! 뭘로 붙을까? 테니스 복식? 비치발리볼? 걱정도 팔짜고, 몽상도 정도껏이다.
   그렇게 1주일이 조용히 갔고, 새벽에 덕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나가 보니 리플리였다. 이 시간에 리플리가 왜? 리플리가 무사했으니 반갑기야 했으나 남의 집 돼지나 우유나 신문을 훔친 것도 아닌데 너무 뜬금없는 방문이었다. 그래도 덕은 쉬쉬 하는 몸짓의 리플리를 따라 갔고, 마을 외곽까지 걸어가서 어느 시커먼 차량에 올라탔다. 그것은 일명 특수 차량! 안에는 방송, 해킹, 염탐, 작전 수립, 작전 회의, 상황판등 휴식도 가능하고 어떤 염문까지 가능한 바로 탐정 단계를 훌쩍 뛰어넘는 국가 정보 기관 정도가 운영할 것 같은 그런 특수 차량이었다.
   그 안에는 에반스, 맥스, 스컬리, 리플리는 물론 정보 요원과 조수들이 있었고 사정을 듣고 보니 모두 이해가 됐다. 그들은 말 그대로 정보 요원이고, 안소니의 초능력을 밝혀내는 특수 임무를 맡고 있는 중이란다. 그건 녀석들이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게 아니라 진짜였다. 와우! 그럼 이제 어떡한담?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덕과 캐롤이 두더쥐가 되는 수 밖에!
   일단 특별한 지시는 없었고, 아무것도 모른 체 행동하라는 주문만, 주문? 별다른 지령없이 그들은 덕을 돌려보냈고, 덕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절대 무리하지는 말고 안소니에 대한 정보를 캐내라고 했다. 그렇게 덕은 철수했다.


   12

   다음 날 덕은 캐롤의 카페에서 안소니를 만났다. 말문은 덕이 먼저 열었지만 인사를 마치기 전에 안소니가 덕의 말을 조속히 가로챘다.
   「혹시 애들 만난 건 아니지? 앞으로 말이야 좀 더 신중하게 처신하는 게 좋을 꺼야. 간혹 환청이 들린다거나 헛것을 볼 수도 있으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두시게. 설령 그 친구들을 만나더라도 쉽게 속아넘어가지 말고. 그쪽에서 먼저 선공을 펼칠 테지만 그건 아마 유인책일 꺼야. 알겠니 덕?」  
   「어? 무슨... 아 몰라. 뭔 얘기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관심도 없어.」
   덕은 뜨끔했다. 얘가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지? 설마 그건 진짜 환상이랄지 착각이나 꿈이 아니었을까? 아닌데. 모두 진짜였는데. 완전 생생했으니까. 그런데 안소니가 어떻게 알았냐고! 얘가 정말로 내 머리 위에서 노나? 덕은 그렇게 생각했다. 안소니가 실제 가상의 요원들을 보냈을 수도 있고, 덕의 꿈을 조작했거나 최면을 걸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덕은 대화의 맥이 끊기기 전에 물어보는 게 좋을 듯 하다고 생각했다.
   「친구. 그거... 예언인가?」
   「뭐, 현실이든 꿈이든 가까운 시일 내에 사라진 친구들을 만나게 될 거란 말? 예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적어도 믿거나 말거나는 아니겠지.」 안소니가 눈썹을 쑥 들어올리며 덕에게 의뭉스러운 눈길을 건넨다.
   「안소니. 그럼 하나만 더 묻겠네.」
   「소심하게 왜 그래 덕. 한 열두 가지를 물어도 괜찮네 친구. 날 심하게 다뤄도 얼마든지 괜찮다고. 어? 어허, 형씨가 알고 보면 사람이 참 순박해. 그래서 난 자네가 마음에 들어. 걱정 마. 내가 자넬 어떻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난 그런 말 듣기 싫거든. 너 마술 그럴려고 배웠냐 같은 거. 물론 결코 들을 기회가 없겠지만 말이야.」
   「그래? 어쨌든 내 하나 묻겠네. 그건, 비밀이었나? 아니. 지금 비밀인가 비밀이 아닌가?」
   「비밀이냐고? 비밀이었냐고? 뭐 말인가? 은밀한 비밀 아니면 비밀 다음에 비밀이 계속 이어지는 비밀? 재미있는 비밀 재미없는 비밀? 그러니까 대체 뭐? 아, 그거? 비밀이라면 비밀일 테지. 그래. 맞아. 비밀이든 비밀이 아니든 아마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 하지만 말이야. 난 자네를 믿기 때문에 괜찮은 정보를 알려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슥 흘렸던가 확실한 구두점을 찍었던가. 논리적으로 봐도 그렇잖나. 내가 자네를 속일 이유가 없어. 안 그런가?」
   덕은 슬슬 안소니에게 말려들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술이야 안소니가 월등하고 덕에게는 별다른 재주가 없고 말로도 안되고, 덕은 점점 초조해졌다.
   「안소니. 그럼 말이야. 날 믿는다면 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을 보여줘. 나도 안소니란 마술사를 알게 된 게 더없이, 뭐랄까, 음, 그게 말이야, 음 그러니까...」
   안소니가 덕을 다독였다. 툭툭 어깨의 위를, 톡톡 견갑골의 후면을 두드리면서 천천히 걷자는 듯 슥 움직임을 부드럽게 시작하며 말을 꺼냈다.
   「차차 여건을 보고. 돌아가는 분위기를 봐서. 아, 하나만! (잠깐 멈춤) 나도 실은 내 마술에 대해서 아직도 확신을 못해. 확실한 것 하나는 말이야, 난 그 어떤 마술사보다 최고라는 점인데 그게 편차가 좀 심해. 나도 제어가 잘 안된다고. 쥐를 풀벌레로 풀벌레를 쥐로도 만들 수는 있어. 그런데 문제는 처음의 의도와 나타난 결과가 다른 경우가 상당히 흔하다는 점. 나도 아직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어. 앞으로도 아마 미해결된 숙제로 남아있을 거고. 알겠나?」
   「어, 알겠어. 여부가 있겠나. 내가 어떻게 말귀를 못알아들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런가?」
   덕은 그날 집에서 꿈을 꾸었다. 자기의 코털이 매우 매우 길게 자라났고, 물론 그것은 꿈에서 꾼 선잠을 자다 깨서 발견했고, 그 줄을 잡고서 끝까지 따라갔다. 그 끝이 대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그 머나먼 무지개 너머에는 과연 어떤 보물과 수많은 궁녀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다리지 않을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덕은 줄을 잡고 계속 갔다. 계속 갔다. 밧줄은 마을 뒷산으로 이어졌다. 계속 줄을 따라갔다. 줄은 마을 수호신의 의미가 있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끝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빛을 발하듯 반짝였다 빛이 사그라들었다, 그것을 반복하는 상자가 있었다. 그는 상자를 열었다. 그런데 열려고 했는데 열리지 않았다. 뭐 안 열려? 열리나 안 열리나 보자, 늬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하면서 덕은 계속 힘을 썼다. 마치 열려라 참께 같은 주문은 필요없다는 듯이. 이것만 열면 그 안에는 마술에 관한 비서가 들어있고, 그걸 숙달하면 마술계의 1위로 덕이 당당히 등극하게 되고, 안소니는 하는 수 없이 2위로 밀려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했다. 드디여 상자가 열렸다. 그런데 상자 안에는 고서나 비서는 없고 잘 접힌 쪽지가 있었다. 덕은 그것을 폈다. 씌여진 문장은 이랬다.
   「일어날 시간이다 덕. 덕, 개꿈은 끝났느니라. 덕이여 일어나거라! 어서 일어나거라! 어서 덕!」
   덕은 꿈을 깨고 일어났다. 이런 젠장, 이라고 말할 기운도 없이 허탈했을 뿐.


   13

   다음 날이 되었다. 절정은 없었으나 약속은 있었다. 마술사의 그녀 마고가 캐롤을 찾아갔다. 혹여 마고는 캐롤을 전담 마크하기 위해서? 아니면 설득이라도? 그러니까 뭘 설득? 덕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아마도 여자들끼리 비밀리에 할 얘기들이 있을 것이다. 어쩜 많을지도.
   그리고 마술사 안소니는 덕과 같이 어디에 가기로 했다. 그들은 일단 만났고 덕은 놀랬다. 왜냐하면 안소니가 시골 아저씨로 완벽하게 변신했기 때문이다. 덥수룩한 가짜 수염을 붙였고, 허름한 멜빵 바지에 살까지 찌운 걸로도 모자라 바구니인지 젤리인지를 배에 붙였고 옷으로 가렸다. 감쪽같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교당이었다. 평범한 교회와 성당과 법당 같은 공간과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딱 하나만 달랐다. 그건 바로 교주가 안소니라는 것. 사진도 안소니, 흉상도 안소니, 그림도 안소니, 기도 드리는 기도문도 안소니를 위하여! 뿐만 아니라 안소니는 덕을 대동하여 뒷문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그곳 교당의 넘버2로 보이는 인물에게 007 가방을 건네받았다. 그렇게 소일이 끝난 후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헤어지면서 안소니는 007 가방을 열어서 그 내용물을 덕에게 보여줬고, 그 가운데 한 뭉치를 덕에게 줬다. 가방 안에는 돈 뭉치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덕이 받은 뭉치도 돈뭉치. TV에서만 봤던 거! 덕은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거절했다가 안소니가 자기를 여우나 사슴으로 만들어버리면 어떡하라고! 오늘부터 덕의 손은 뭐랄까 검어졌다고 하면 인종차별적 표현이라 오해할 수도 있으니, 덕은 오늘부터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인물인 안소니와 일종의 동반자 관계를 묵인한 셈이 되었다. 덕은 지금까지 스컬리와 콤비가 됐다가 결별했고, 에반스와 단짝이 됐다가 갈라섰으며, 이제는 마술사 안소니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느낌이 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덕은 딱 하루를 고민했고, 다음 날 그 지폐 뭉치를 안소니에게 돌려줬다. 그래도 될 것 같다는, 그래야 한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소니는 웃으며 그것을 받았고, 돈뭉치를 세어보지는 않았으며, 별다른 일은 없었다.


   14

   그 후 특별한 일은 없었다. 곧 전개는 절정을 부르지 않았고, 발단으로 퇴보한 형세가 되었다. 하지만 꼭 패배자의 초췌한 표정을 떠올릴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비유하자면 이건 모종의 장기전에 해당하는 줄거리의 흐름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겉으로 확 드러나는 고백이나 계약, 떼돈 같은 큼직한 권위나 명목이나 행사성 사건은 없었지만 잔잔한 발단, 곧 10개가 모이면 혹 전개의 값어치에 필적할지도 모르는 부제 같은 일은 있었다.
   어느 때던가 덕은 예술적 착상이 잘 떠오르지 않아 공원과 해변과 옆 마을, 옆 고장등을 돌아다닌 일이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점이 뭐냐면 가는 곳마다, 전부는 아니지만 여러 곳에서 마을 친구들이 기르는 동물들을 한꺼번에 보게 된 일이 있었다.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닭 한 마리, 말 한 마리, 재규어 한 마리를 따로 따로 볼 수는 있지만 그 모두를 한꺼번에 본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일상에서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는 이상 거의 목도할 수 없고, 동물원이나 아프리카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혹시 에반스, 맥스, 스컬리, 리플리가 주가 지수처럼 덕보다 한발 앞서서 그가 나타나는 곳마다 모여 있었다?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러면 마술사 안소니의 최면 혹은 마술? 안소니가 그렇게 한가한 친구도 아닐 뿐더러 그런 미스테리가 발생하게 만들 만큼 덕으로부터 뽑아낼 고유한 비밀이랄지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싹 다 우연? 아마도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 현실에서 있었다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덕은 결론을 내렸다.
   아, 잠깐! 주가 지수처럼 덕보다 한발 앞서서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나란히 걷는 모습의 균형이 깨져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건 둘 중 하나다. 번번이 듣고 읽고 기억해도, 반복해서 말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 일. 첫째 그야 어쨌든 <잔말 말고 날 따라와>, 둘째 <의전> 오오 의전! 첫째는 들뜸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닌 바깥을 향하는) 경쟁 자발, 둘째는 존경 동심 호감 사랑. 첫째는 귀에서 피가 나는 거고, 둘째는 귀는 날개가 되고 당신은 천사가 되며 이곳은 마침내 천국이 되는 것. 단 첫째에서, 경쟁과 자발과 들뜸 이 셋의 차이는 꽤나 심하지만 누군 뭐 좋겠나 일단은 한편인 걸로! 조증과 울증도 때로는 한 침대를 쓰는데 인자한 들뜸께서 접고 꺾어서 자발을 품어안아야 하지 않겠나. 왜냐하면 그 반대는 상상하기 어려우니까. 주장이 있으면 얼굴 마담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있잖아요, 걸음만 그런 게 아니라 말도 마찬가지. 말도 잔말 말고 날 따라와 아니면 의전. 글도 역시. 식상하거나, 혼자 가거나, 한 문장 한 페이지 슥 보면 책을 덮게 만들거나, 계속 맴맴 돌기만 하는 글도 역시. 중독 아니면 시간 낭비, 응애응애냐 응애응애 아니냐. 물론 롱테일에는 중간도 있고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바쁜 행보가 주특기인 경우도 있음. 사람이 살면서 항상 새로운 화제만 꺼내고 재밌는 말만 하고, 새로운 작풍만 추구하고, 꾸준히 계속 기발한 새로움만 선보일 수는 없다. 이 또한 둘 중 하나다. 했던 말 하고 또 하는데 도저히 싫지 않은 진공청소기가 있으면, 친구한테는 그 얘기 했잖아 하면서 지적하고 자기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는 커피포트도 있다. 말 빠르기 즉 말의 속도 때문에 혹하기도 혼미하기도 짜증나기도 하는 수박 겉핥기 스타일 화법과 NC 웨이터 에르메스식 화풍은 뻥뻥 빵빵 터트리는 (장)타율과 비례하지 않고, 예언의 적중률도 형편없을뿐더러, 그러므로 우정의 교분과 사랑의 대화에 있어서 면밀한 관찰이 요구되는 지점은 무엇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오고감 곧 화자와 청자가 작품과 관객이 얼마나 어울리느냐 라는 친화력과 의역 간접화법 새로움 신선함 정다움 지성 고급스러움 그리고 빙하 같은 내면과 무의식이라는 심연이고, 걸을 때 눈에 훤히 보이는 누가 앞서가나 그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잊어서도 간과해서도 안될 중요한 하나는 우선은 내가 나를 존중하는 것이고, 처음부터 슬기롭고 언제나 아찔할 수는 없을지라도 먼저 찬찬히 생각을 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날 모르고서 남을 아는 것은 헛다리 짚기일 테니까. 선구자로 남을 것인가 언제나 회상의 노래만 부르고 지나간 전성기만 그리워할 것인가, 그도 아니면 그 모두를 아우를 것인가. 열두 난제를 해결했던 헤라클레스가 상상도 못할 문제로다 문제야. 그래서 중요한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자 라는 그대의 요점은즉슨, 그이가 뻥뻥 우리 오빠가 빵빵 터트리는 건 바라지도 않고 잔잔한 미소라도 포근히 안겨줬으면 소원이 없겠다? (피식)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그렇지만 우리 멋진 남자들은, 무슨 방어전 만큼은 똑소리 나게 치르는 치를 수 있는 적어도 의욕에 불타는 우리는, 잡은 물고기에게 밥을 주자. 그렇지만 우리 멋진 남자들은 아기자기한 소품도 챙기고 단꿈에 대한 할 일과 대망에 관한 할 말에 앞서 소녀에게 처녀에게 숙녀에게 타인에게 친절하자. 그러고서 비싼 계산은 물주인 친구가 치르고 나는 운전할 때 애모하라고 큼직한 염주를 선물해서 그 술값과 퉁치자. 그럽시다. 그러나 저러나 본론으로 돌아가서,
   물론 그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덕은 입이 근질근질했고 그런 발설에 대한 욕구를 참기 어려웠다. 적당한 대화 상대가 당장은 캐롤 밖에 없었다. 그래서 덕은 캐롤을 만나러 갔다. 만났다. 그런데 덕은 착하고 예쁜 캐롤한테 그렇게 험상굳고 울분을 토하는 절규의 능력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캐롤에게도 할 말이 있고 확고한 처지가 있었다. 바로 덕이 외지로 떠도는 동안 친구들이 기르던 동물들이 탈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롤은 겨우겨우 정말 개고생해서 닭과 고양이와 새와 개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것도 각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씩을.
   「너는 간다면 간다고 말을 해야지, 이게 뭐니? 숙녀가 무슨 궁녀니, 조수니? 하인이나 뭐 내가 심부름꾼이냐고? 어? 들려 안들려, 듣고 있니? 어? 내가 늬 전처냐고 후처냐고 임마! 이런, 젠장! 그러고도 늬가 친구냐 그러고도 늬가 오빠냐, 어?」
   캐롤은 화가 단단히 났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좋았다. 캐롤의 마음도 풀어졌고 현실로부터 배격당하지도 않았고, 이상으로부터 배신당하지도 않았다. 다만 덕이 미래의 문이라는 카페를 방문하기 전까지는.


   15

   덕은 캐롤에게 어디 간다고 보고를 하고 뒷산에 올라갔다. 운동하고 기분 전환에 명상도 할 겸, 겸사겸사 다녀오기로 했다. 그런데 덕은 산행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려고 할 때 생각났다. 자기의 창작 노트를 산 중턱에 있던 카페 미래의 문에 놓고 왔기 때문이다. 덕은 돌아갔다. 도착했다. 그리고 창작 노트를 찾았다. 그런데 주인 양반이 웬 동영상을 즐겁게 보고 있길래 뭐지 라면서 유심히 살펴봤다. 그건 다른 게 아니라 안소니와 마고가 한편이고, 에반스─맥스─리플리─스컬리가 한편으로 서로 마술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상대를 생쥐로 만들었다가 복수하면 얼굴은 양 몸은 늑대로 변하는 영상이었다. 카페 사장은 가짜인지 쇼인지 알고 봤을 테지만 세상 사람 다 몰라도 덕은 알고 있었다. 그건 서커스도 프로레슬링도 허접한 카드 마술도 아니란 사실을.
   덕은 허겁지겁 마을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캐롤에게 뛰어갔다.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그런데 덕은 캐롤의 카페까지 달려가는 동안 마치 시간이 느려진 듯 슬로우모션 현상을 경험했고, 분위기에 알맞는 3분의 마법 즉 신나는 유행가가 들리는 환청을 체감하고서 황홀한 사랑을 막 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상사병에 빠지고 향수병에 그리워하고 꿈을 먹고 꿈을 노래하고 꿈에 취해 춤을 추며 꿈과 함께 자라는 요정이 된 듯한 기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사라졌던 맥스가 자기 집 정원에서 꽃과 나무에 물을 주고, 에반스는 잔디를 깎고, 리플리는 수영장을 청소하며, 스컬리는 강아지와 놀다가 덕에게 눈인사와 꼬리 흔들기와 하트 뿅뿅은 물론 사랑의 윙크까지 듬뿍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했고 덕의 눈만 똥그래졌다. 원래 눈이 동그란 건지 모르겠지만.
   즉 마을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덕도 제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캐롤은 이제 슬슬 본게임이 시작된 것 마냥 내내 심심하다가 왕왕 재미없고 종종 따분하던 일상에서 마침내 신나는 모험이 시작되기라도 한 것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덕. 이제 수수께끼가 풀린 것 같지 않니? 더 이상 숨은그림찾기라는 꼬마들 미로 같은 관점에 얽매일 필요는 없게 됐어. 왜냐하면 판이 커졌으니까. 판돈을 올리고 승부를 걸어야 할 시기라고. 넌 언제까지 안소니의 사냥개로 만족할 건데? 그런다고 마술사 안소니가 널 1급 매로 인정해 줄 것 같니? 늬가 아무리 안소니를 보필해 봤자 넌 영원한 비운의 책사일 뿐이야. 늬가 그 모양인데 나라고 행운의 시녀랄지 자유의 천사일 리 있겠니? 안 그래? 우리 시대에 뭔 놈의 신데렐라, 호박 나이트라면 모를까!
   이제 우리 삶은 신비롭지 않아도 되고, 우리 인생도 굳이 환상적일 필요가 없게 됐어. 우리가 요술에 걸리지 않아도 좋고, 우리가 마술사가 되지 않아도 괜찮고, 우리 삶이 신기하지 않아도 좋다구. 미래의 문은 이미 열렸고, 때문에 우린 요정과 유령들과 대적할 수 밖에 없어. 일이 그렇게 됐다고. 따라서 지금은 행동을 취할 때라는 거지. 속임수가 아니라, 거짓이 아니라, 바로 행동을! 지금 상황이 그렇다니까. 안소니와 마고가 사라졌고, 안 보이던 4인방이 돌아왔다고!
   넌 누가 뭐래도 허당이니까 아마도 몰랐을 꺼야. 하지만 난 아냐. 허영이든 허풍이든 끝을 봐야 뭐가 중간인지 알게 될 테니까 은근 허당은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고. 난 말야, 그래서 마술사 안소니에 대해서 좀 조사를 했지. 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하!
   덕. 있잖아, 작가의 운명이 뭔지 아나 친구? 작가는 말이야, 작가는 말을 잘하든 못하든 모든 대상의 뒤를 봐야 해. 너의 비밀, 나의 과거, 마술사 안소니의 뒷모습. 미래까지 회상으로 내일까지 상상으로 바꿔야 한다고. 또 그는 모든 동사를 과거형으로 치환해야 한다고. 사랑한다? 사랑했다! 동경한다? 동경했다! 좋아한다? 좋아했다로! 왜냐하면 그래야 픽션의 생명력이 살아나고, 행동에 속도감이 부여되며, 창작에 대한 구상이 탄생하기 때문이야. 그런 반면 미래학자는 미래를 내다보지. 헛다리 짚을 수도 있지만 말이야. 작곡가? 해 봐야 시간 예술이야. 그러나 미래를 현재로 데려오거나 나중 일을 엿보는 운명도 있어. 일명 점쟁이, 약장수? 그건 빼고 허풍쟁이도 빼고 그래 예언가! 또 있다, 마술사 안소니! 나머지는 뭘까? 다 현재를 사는 거야. 사랑을 하고 인생을 즐기고 복권을 사고. 바로 그래서 우리가 안소니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라고. 그러니까 우린 지금까지 안소니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아무리 뛰고 날고 연구해도 우린 안소니의 밑이고, 마고의 비위를 맞추며 아양 떨고 그들 앞에서 재롱 피울 수 밖에 없었어. 너도 조금은 알고 있었잖니? 게다가 늬가 제일 잘하던데? 심지어 애교까지? 뭐라고 덕이 애교를, 오오 미처 몰랐네, 아 글쎄 덕이 애교를? 두고두고 놀려먹어야지. 난 늬가 여잔줄 알았다. 나랑 바꼈다고. (흠칫 째려봄)
   그러므로 우리가 이 총체적 난국을 타파할 비장의 묘수, 궁극의 비책, 최고로 기막힐 신의 한 수는 뭐다? 뭘까? 뭐지? 강력한 핵심과 겁나 훌륭한 요점, 결정적인 해결책이 있었는데 까먹었네. 뭐더라? 뭐였지? 아, 생각났다 생각났어. (딱) (쉭─쉭─쉭) 인문교양서에 뭐라고 나오니? 머머 해라, 머머하면 안된다, 머머하면 머머할 것이다, 머머할 수 없다면 머머하는 게 좋다, 장담컨대 어쩔 것이다, 개인 브랜드가 어떻다,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라고 하지 않나. 얘기하다 보니 넌 젊은이 난 늙은이가 된 듯 해서 기분이 어째 좀 이상하지만 요약하자면 이제 드디여 때가 된 거야. 우린 어쩔 수 없이 마술사가 돼야 할 숙명이라고!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안소니가 뭘 했는지 아니? 1년 전 안소니는 동기 부여 강연회에서 떼돈을 벌고 있었어. 여기를 봐봐. (캐롤은 노트북으로 인터넷에 존재하는 증거를 보여준다) 자료 다 있잖아? 시간당 강연료가 자그만치... 그건 안 나와 있네. 아무튼 우리가 상대하는 안소니는 거물이고, 우린 상대도 안되는 미미한 존재야. 그러나 이렇게 모든 걸 승부의 관점으로 보는 이유가 있어. 인터넷에 기록이 다 남았거든. 여기를 봐봐. 에반스와 맥스, 리플리와 스컬리도 모두 전직 마술사였어. (딱)!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니? 응?
   심지어 결정적으로 늬가 봤다는 그 뭔가! 이건, 이건 확실해. 우린 거대한 게임에 휘말렸고, 이미 주인공이야. 으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자, 한번 시작해볼까!
   뭐해? 안 따라오고!」
   결론적으로 저번과 달리 안소니와 마고만 사라졌고, 안소니와 마고가 키우던 토끼는 1마리에서 총 3마리가 됐다. 에반스부터 스컬리까지 그들의 동물 친구들도 다시 각자 1마리가 되었다. 그리고 캐롤은 덕을 데리고 가서 안소니네 집을 뒤졌고, 정원에 있는 화분 밑에서 어느 고서를 발견했다. 그런데 제목은 글쎄,
   마─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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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한 마법의 책 마술론에는 어떤 내용이 씌여져 있을까? 일단 캐롤과 덕은 입수한 비서를 다른 친구들에게는 알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덕의 집 창고로 가서 조용히 비서 마술론을 펼쳤다.
   그런데 마술론에는 특별한 내용은 없고, 마술관이란 곳의 주소와 그곳 그림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갔다. 다행이 멀지는 않았다. 그들은 마술관에 도착했다.
   마술관은 파르테논 신전인가 그와 비슷했고, 인적은 개미 새끼 한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고, 설마 이런 곳이 여기 있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할 정도로 장소와 시간과 대상이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었다. 그런데 들어가는 문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러다 어떤 문양이 있는 벽에 잠시 기댔는데 문이 열림. 그 안은 한마디로 천국!
   여기까지, 이 모두가 한 편의 영화였다.
   여기까지 그 모두가 한 편의 영화!
   그렇다. 지금까지는 영화였고, 지금 엔딩 자막이 올라간다 올라간다. 박수 소리가 안들린다 안들린다. 어쩌면 기립박수? 영화는 망했다 망했다. 관객들은 야유한다 야유한다. 그분들 표정이 안좋다 안좋다. 아주 안좋다 아주 안좋다. 장난 아니다 장난 아니다. 뚜껑이 열렸다 열렸다. 하지만 마지막 화면은 관객쪽을 향해 일사분란한 카메라와 조명 세례. 거 무슨 그게 그러니까 관객이 주인공이란 뜻일까? 아무튼.
   결과만 놓고 보자면 영화는 흥행 순위 10위는 커녕 간신히 최소 상영관과 최소 상영 기간과 극미한 애호가만 확보했을 뿐 주목할 만한 성과는 없었다. 전혀.
   그러나 어디에나 무엇이든 예외는 있는 법. 목적이 어떠하든 덕이 사는 시골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 바로 그게 중요한 진실이다. 어떤 작품을 보고 나면 그곳에 가서 구경하든 사진을 찍든 또는 보물을 찾던가 꼭 그런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더블린을 보시라. 고장의 상징은 물론 학계에서도 어디서도 유명세는 영원하다. 비틀즈 앨범 재킷을 따라한 사람 역시 부지기수다. 목적과 의도는 각기 다르지만 사람들은 많든 적든 그곳으로 모여들게 되어 있다. 비서 마술론을 찾으러, 또는 마술사 안소니가 혹시 진짜로 거기 사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서든. 그런데 우연짢게도 관객 중에는 묘한 운명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주인공의 이름과 똑같은 사람이 있었다. 한 명 또 한 명, 기다리니 다시 한 명. 시간이 흘러서 영화의 배경과 영화의 실존 인물과 영화의 환경이 거짓말처럼 현실로 갖추어졌다. 한다하는 마술사들이 모두 모여들었을 것이고 그 가운데서 자웅을 겨뤄 엄선된 인재들만 남게 되었을 것이다. 마치 거짓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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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로의 메이저 아르카나에 속하는 카드 마술사. 정위치의 의미는 기원, 가능성, 활기, 재능, 기회, 감각, 창조. 역위치의 의미는 혼미, 무기력, 슬럼프, 배반, 겉돎, 바이오 리듬 저하, 소극성. 히브리 문자는 물론 마술사의 모든 것을 연구했다. 바로 덕과 캐롤은. 당연히 그들은 마르세유판 타로의 권위자가 됐다.
   아마도 이제 캐롤과 덕은 마술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했는데도 아직이라면 좋게 마술사의 꿈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라고 누군가 조언해줄지도 모르지만 결과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덕과 캐롤은 그들의 마법을 써먹을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 분위기가 조성됐고 여건이 갖추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점. 보도 듣도 못한 허접한 영화사에 판권을 팔아서 영화 원작자라는 간판은 얻었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흡사 영화처럼 방방곡곡에서 마술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중에 모르긴 몰라도 토너먼트로 영웅호걸들만 남은 듯 했다.
   그래서 덕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영화 마술론 2를 제작할 것인지 아니면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마술사로 활약할 것인지를. 일단 마술사만 되면 그 근접 분야는 덤으로 딸려올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막 최면을 걸어서... 쉿!
   하지만 그들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불안의 이면을 파헤쳐보면 덕과 캐롤의 반응은 확연히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캐롤은 그럴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부터 정말 정말 삶이 흥미로워질지도 모른다는 입장. 그런 반면 덕은 겁이 나서 도저히 이 동네에서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딱히 이사 가기는 싫고, 이사 갈 수는 없고 귀찮고, 만약 이사를 간다고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마술사들이 자기를 따라다닐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때문에 그는 자발적 가택 감금이 아닌 거의 정황상 피치 못하게 가택 감금에 돌입했다. 덕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 했다. 돌아이가 1명도 아니고 자그만치 6명씩이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꾹 참고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갈려고도 해 봤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상상했고 캐스팅 됐던 배우와 닮은 친구들을 보고서 그는 부랴부랴 집으로 도망쳐 들어갔고, 그런 운명이 야속했으며, 소문의 여신 파마는 옛날에는 딱 1명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한두 명이 아니라 차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캐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재 작전에 들어갔고, 어렵게 만남의 약속은 성사됐다. 이어서 덕이 캐롤의 간청을 수락했고, 다른 친구들의 애원에 자애롭게 대처하자고 자청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캐롤의 집에 모였다. 왜냐하면 오늘은 캐롤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스컬리, 리플리, 캐롤, 마고, 안소니, 맥스, 에반스 그리고 덕까지.
   「덕. 오해하지 마시게나 친구. 우린 그렇게 이상한 마술사가 아니라니까. 우리가 어디 그렇게 꽉 막힌 돌아이처럼 보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에반스 저 머저리 같은 놈이 설마 흡혈귀로 보이는 건 아니겠지? 그래. 심지어 맥스는 허당이야. 안소니는 어떻고. 공인인지 비공인인지 어느 이상한 기관에서 주최하는 마술사 시험에서 자랑스럽게 떨어졌대. 우리들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도 유분수지 말야. 나? 아직 스승을 못 찾고 있지 않나. 실력이 금새 바닥나니까 지금까지 떠돌이 인생을 살아야 했다고. 어느 스승이 좋아했겠나, 자질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데. 난 가끔 착각한다네. 나는 집시일까, 내가 노래를 부르면 그건 보헤미안 랩소디? 그렇게 말야. 자네가 그 설움을 알긴 아는가?
   마고? 생성, 소멸, 변형 기술이 전부야. 모자에서 꽃이나 새가 등장하고, 옷장을 열었더니 사람이 나오고. 그거 다 뻥인 거 자네도 잘 알잖나. 동전 마술 그거 초딩도 따라한다고. 그리고 리플리는 복구, 이동, 탈출이 전문이고. 그래서 우리 중에는 그나마 스컬리의 실력이 제일 출중하지. 공중부양, 예언, 투시, 생각을 읽기, 초능력 마술은 물론 순간 이동과 물 위를 걷기까지 가능하니까. 그러니 이제 그만 우리에 대한 경계심을 허무는 게 어떻겠나? 내 이렇게 간청하는 바일세 친구. 응, 덕 그만 마음을 열어주면 고맙겠네.」
   그러던 중 생일 파티 음악이 등장하고, 축복이 터지며, 선물 증정식에 이어서 샴페인에 다과에, 그러다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시간이 돌아왔다. 이미 덕은 특별 회원으로 마술사 그룹 명부에 등록됐고, 마고와 춤을 추게 되는 행운의 주인공으로 낙찰됐다. 그야말로 더없는 행운에 당첨된 양상이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판단됨.
   덕은 그래도 녀석들이 준비를 꽤 많이 했다고, 그리 나쁜 친구들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안심했다.
   그렇게 덕은 마고와 즐겁게 춤을 추던 중 어떡하다 고개를 숙이게 됐다. 그런데, 어머나 맙소사! 오오, 이런... 세상에나, 어떻게 이런 일이!
   마고는 치마 밑으로 구두가 없었다. 구두가 없었으니 맨발이냐고? 발도 없었다. 그럼 공중 부양? 거기서 멈추면 실망하고 몹시 섭섭해 할지도 모른다면서 더없는 배려가 이어졌을까? 그렇다. 정말 그랬다. 참으로 친절한 친구들 같으니라고. 마고는 내친김에 달려서 고삐를 늦추지 않고 둔갑술까지 감행한 것이다. 덕이 놀래서 딱 고개를 들어 마고를 봤는데 글쎄, 그건 마고가 아니라 마술사 안소니의 면상이었다. 만약 덕이 덜 놀랬다면 그는 안소니를 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정신이 어디 있겠나. 더 나아가 안소니가 개상이나 말상, 원숭이상이 아니라서 그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만약 덕이 약간만 더 이성적일 수 있었다면 그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라도 드렸을 것이다. 좀 늦게라도 그러는 게 나았을까? 숨돌릴 틈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덕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남자였고 소심했고 순진했으며, 잔뜩 겁을 먹었기 때문에 거의 바지에 오줌을 지리기 직전이었다. 그는 결국 기겁해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집으로 도망갔다.
   그렇게 다시 덕의 가택 감금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다른 친구들은 덕의 집 문 앞에 가만히 책을 한 권 놓고 갔다. 책 제목은 당연히도,
   마─술─론!


   18

   마술론은 그저 그렇고 그런 동화책일까 아니면 어느 명망 높은 마술사 가문이 대대로 보물로 전수하여 후세에 전해진 신비한 마술론일까? 그 안에는 소설이나 수필이나 논설, 설마 만화가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진짜 불가사의라도? 아닐 것이다. 모두 아닐 것이다. 그러면 저번에 덕이 쓴 극본처럼 마술관을 찾아갈 수 있는 마술관 지도와 주소가? 그 역시 아닐 것이다. 그 또한 아니다. 확실히 아니다. 왜냐하면 덕이 미처 가택 감금에서 스스로 풀려나 자기 집 문을 열고 나오기 전에 그 책을 어느 개가 물어가버렸기 때문이다.
   일명 천재견!
   그리고 덕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마술사 친구들은 죽 쑤어 개 좋은 일만 시킨거나 마찬가지인데, 아니나 다를까 진짜 개가 나타나서 고귀한 비서를 덥썩 물어가버린 것이다. 친구들이 몰래 선물했던 마술론으로 남 좋은 일만 시키 결과가 되어버렸다. 남도 하필 강아지를 말이다. 친구들이야 공치사를 늘어놓을 리도 없고, 엎드려 절 받는 식으로 덕의 마술 기교를 늘려주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됐던 것이다. 어쩌면 쉽게 토라진 덕이 문제였을 수도 있고. 그럼 결정적 공헌 때문에 주인공은 개요 덕은 개만... 쉿! 저기 팡 쿵 어디 콩 룸 톰 우리 훡 칫 퍕 사랑 툽 킁 붼! 왜 하필 강아지였는지... 나 원 참.
   그 천재견, 괴도 루팡 같은 여심을 감쪽같이 빼앗는 카사노바 같은 천재견의 목적지는, 바로 덕의 마술사 친구들과 대척 관계에 있는 마술사들인 마술단의 은거지였다. 어떻게 이런 바이런적인 우연이? 그러게 말이다. 이 무슨 초현실적인 우화란 말인가? 내 말이! 귓가에 들리는 가상의 음률은 브라질 풍의 바흐? 그 무슨 때 아니게 태교 음악 모차르트도 아니고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필름을 돌려서 줄거리만 요약하자면 이렇게 됐다. 덕 친구들과 마술단은 마술 시합을 펼쳤다. 덕의 친구들은 물론 덕이 마술론을 모두 마스터한 줄 알았다. 그때까지도 천재견의 활약상은 꿈에도 생각치 못한 것이다. 덕도 마술론의 존재 자체도 몰랐고. 결과는 마술단의 압승! 안소니와 덕과 친구들은 참패! 마술 대회가 아니라 차라리 허풍 대회였으면? 이미 지난 일일뿐 돌이킬 수 없는 실패한 사랑 같은 일에 불과했다. 그리고 상금이자 내기에 걸린 자랑할 만한 보물은 바로 마술사 안소니를 교주로 알고 있는 어느 집단의 이권이었다. 무슨 나이트클럽 이권 타툼도 아니고 참 나! 즉 이제 안소니는 변신해서 그곳 이상한 교당에 더 이상 출두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다. 덕이 바로 안소니의 수고를 덜어준 형세가 됐다. 누가 제일 머쓱했는가는 불분명해도 덕분에 안소니는 음지에서 탈출했고 더 이상 느와르 영화계에는 발도 붙일 수 없게 됐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성과라면 마을에 다시 평화롭고 잔잔하며 심심한 일상이 찾아왔다는 것.


   19

   덕은 최근의 소란스런 사건들을 뒤로 하고 자기 일에 정진하기로 했다. 원래 그는 처음부터 그 친구들을 돌아이로 규정했다. 심성이 고운 친구들이었으나 자기와는 사는 방식이 너무 다르고 추구하는 양식 또한 상반되는 것 같았으니까. 놀라운 일은 놀라운 일이지만 정말로 기적이나 진짜 환상은 아니었고 좀 특이한 일이었을 뿐이라면서 덕은 지난 일이자 추억의 멜로디라고 상정하고 잊기로 했다. 곧 그는 기존 친구들과 만나고 놀고 떠들기 위해서 도시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점, 그것만 높이 평가했다. 왜냐하면 집에서 몇 발짝만 가면 연예인도 유명인도 개그맨에 예술가에 마술사까지 상시 대기중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자기만 재력가로 거듭나면 되는가 까지는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는 새로운 예술 창작에 대한 구상을 위해 한 5일쯤 휴양지에서 쉬고 오기로 했다. 그는 짐을 챙겨서 즉시 떠났다.
   5일 후, 덕은 휴식의 기간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왔다.


   20

   덕은 5일간의 휴가로 심신의 피로가 풀릴 뻔하다가 반틈만 풀렸고, 그런대로 최근 겪은 놀람과 심리적 불안, 문학적 공포, 현실적 신비는 그런대로 치유됐다고 느꼈다. 실제로 그랬다. 기분이 좋았다. 사람은 사랑도 해야 하지만 여행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돌아왔으니 또 얼마나 징글맞은 깜짝 쇼가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꽤 괜찮은 작품을 어쩜 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을에 돌아와서 보니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특별한 건 아니고 녀석들이 어떤 색다른 기분과 새로운 선망과 설레는 동경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인지 다들 대문과 지붕을 뜯어고친 모습이 역력했다. 파란 지붕 노란 대문도 있고, 노란 지붕에 파란 대문도 있었다. 게다가 차도 바꿨다. 전에는 그만그만한 차들이 많았는데 검소하고 합리적이던 이 친구들이 웬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찼는지 고급 차에 뚜껑 없는 차와 바닥에 딱 달라붙어가는 스포츠카가 보였다. 인생을 즐기자 뭐 그런 취지일 수도 있는데 이건 어딘가 모르게 그런 모습이 연상됐다. 베풀 만큼 베풀었고 꿈도 이뤘고 많은 인생 경험을 했고, 사랑도 운우의 정을 나누는 장미꽃과 나비만이 아니라 튤립과 꿀벌의 사랑도 한 골백번쯤 했으니, 이제는 백발을 휘날리며 빨간색 스포츠카와 뚜껑 없는 노랑이를 몰며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독서를 하자,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사는 노인들의 동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덕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녀석들 허영심 하고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마술사는 개뿔! 차라리 나한테 연애운이나 물어봐라. 나도 복돈 좀 챙기자 이 친구들아.」 
   그러면서 덕은 별다른 희소식을 기대하지 않았고, 황금빛 햇살이 부러워지는 어두컴컴한 날씨에 흡족해 했으며, 기쁨과 행운과 길몽에 대한 비밀스런 예감을 남몰래 간직했다. 이제 그만 공회전은 멈추고 글만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간지럽히는 상상 속의 미지의 세상에 대한 경험을 기록으로 옮기는 즐거운 작업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를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설레였다. 물론 뻥이다. 그는 그냥 약간 좋았고, 몸 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마음까지 상쾌했을 뿐이며,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채 기분도 괜찮았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횡재는 바라지도 않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현실 만족을 막론하고 친구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모두 노인 분장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덕은 피식 웃었다. 애들이 심한 건가 아니면 애들이 미친 건가. 드디여? 아마 마술 실력이 부쩍 늘어난 것 치고는 장난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뻔한 이야기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어설픈 변장 지겹다고 꾸중할 수도 없었고 속아줘야지 안 그러면 녀석들 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써 피곤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덕은 녀석들에게 맞춰줬다. 궁짝궁짝, 짝짜꿍 짝짜꿍, 칙칙폭폭 칙칙폭폭, 나비 훨훨 회전목마는 빙글빙글.
   그런데 문제는 점점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나 싶었는데, 그게 모두 진짜란 것이었다. 노인으로 분장한 에반스가 이제 그만 에반스로 돌아와줬으면 싶었는데 에반스는 장난을 그칠 줄을 몰랐다. 덕은 참고 또 참았다. 짜증이 나고 또 났다. 그래서 덕은 아휴 이걸 그냥 하면서 수증기를 가라앉히고 에반스의 볼을 잡아서 이라 갔다 저리 갔다 흔들흔들 해버렸다. 에반스는 아파서 난리였다. 덕은 꼭 고양이처럼 에반스의 얼굴을 할퀴려는 듯이 그의 가면을 벗길려고 했다. 그런데 에반스의 쭈글쭈글한 안면 피부는 진짜였다. 가짜가 아니였던 것이다. 이분이 설마 에반스의 할아버지일 리는 없는데... 그러면서 자기들의 공통된 경험을 얘기하고 가장 최근의 추억을 같이 회상하면서 덕은 이 에반스가 그 에반스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면 이 에반스는 덕이 잠깐 여행을 다녀온 사이에 훌쩍 늙어버렸다는 말인데? 덕이 5일 휴가를 다녀왔는데 마을은 50년이 흘렀다고?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공상은... 일에 도움이 되니까 너무 뭐라 하지는 말자며 덕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렇지만 녀석들에게 또 속을 생각을 하니 슬슬 부화가 치밀었다. 그게 말이 되나? 말이 안된다. 그건 다 허구고, 이건 현실인데 말 같지도 않은 장난 그만 좀 하라고 덕은 마침내 호통을 쳤다. 그래서 에반스가 뭐라고 했을까?
   「뭐라고? 안들려. 안들려 이 친구야. 덕. 덕. 좀 크게 말해줘. 응? 뭘 그렇게 속삭이나 이 친구야. 나랑 뭐 연애라도 하잔 말인가? 이 마당에 우리가 자서전을 써도 어중간한 마당에 뭔 연애여? 아 그라고 난 여자 좋아한다구 이 친구야.」 
   덕은 이게 정말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에반스 상태는 진짜 같은데 무작정 그를 때릴 수도 달랠 수도, 젊음을 돌려주겠다고 장담할 수도, 청춘을 되찾으라고 닦달할 수도, 정신 차리라고 들들 볶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 나 미치겠네 와 아휴 아 증말 나 원 이거 완전 돌아버리겠네, 덕은 딱 그런 상황이었다. 일단 그는 에반스와 헤어지고 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에반스와 작별했다.
   설마, 마술? 아닐 것이다. 일단 그는 녀석들 페이스에 말려들지 말자고 다짐했고, 일단 시간을 벌자고 생각했다.


   21

   다음 날이 됐다. 그런데 에반스 뿐만이 아니라 맥스도 안소니도 마고도, 캐롤과 리플리까지 모두 노인이 되어버린 모습을 보니 그는 환장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스컬리는 이사를 갔다고 했다. 자기들은 마술계에서 은퇴 했고, 당시 마술 대회에서 상대편 마술단에게 혼쭐이 나서 각자 사진작가로, 농부로, 조류 학자로, 상인으로, 기술자로 제2의 인생을 살다가 이렇게 늙어버렸다고 했다.
   덕은 도망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패배주의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불균형의 비밀을 어떻게 풀 수 있나, 못푼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묵묵히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 궁금해졌다. 그러면 내 50년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라는 것! 내 50년만 막대 그래프에서 뚝 떼서 앞으로 옮겨졌다고? 그건 말이 안된다. 그런데 상황은 그걸 받아들이라고 종용하는 것만 같았다. 이미 몽정기는 과거인데 사춘기는 생각도 나지 않는데, 이제 와서 물리학을 독학하라고? 오 세상에나! 이게 대체 뭔 상황이란 말인가. 뻔한 드라마도 아니고 따분한 극장 데이트도 아니고 일상이자 현실인데 말이다. 그래도 언젠가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란 믿음을 덕은 잃지 않았다. 그의 사실주의에 대한 신뢰는 그 언제라도 굳건했으니까.
   다음 날이던가 그들은 모두 전직 요리사였던 맥스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전직 요리사 맥스는 오랫만에 실력 발휘를 하지 않은 채 음식을 모두 배달시켰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식사 중에 하던 얘기 가운데 공통된 숙어가 '내가 젊었을 때 말이야'도 괜찮았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고 칵테일을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아직 초저녁인데 모두들 졸음을 참지 못하고 의자에서 다들 코를 골며 잠을 자는 게 아닌가. 전형적인 노인의 습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덕은 맥스가 예전에 기르던 고양이가 어딨나 찾아봤다. 고양이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옆에 있었다. 하나 이상한 점은 그 고양이는 예전 그대로인 것만 같았다. 맥스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덕이 봤을 때 얘는 옛날 그 녀석이 맞았다. 고양이의 수명이 얼마인데 주인이 늙을 동안 고양이는 뭐 회춘이라도 한 건가? 아니면 영생? 주인만 보내고 자기는 불멸하시겠다? 이건 뭔가 정상이 아니었다.
   덕은 지금이 바로 생각을 해야 할 시기라고 판단했다. 선명한 해결책을 명시적으로 내놓지는 못하더라도 일단은 한발 떼서 사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갔고 집에서 TV를 보다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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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은 심사숙고 후 모든 정황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그 내용은 이와 같다.
   객관적 시간은 정상이고, 친구들의 심리적 시간이 늘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급격히 늙어버렸고, 따라서 그들은 외부로부터 어떤 마성의 주술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 술법은 아마도 사람에게만 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키우는 애완동물에게는 그 효력이 적용되지 않았으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살을 날린 일당들이 그렇게 허허실실 만만한 상대는 아닐 테고, 사람을 동물로 변신시킬 단계의 마술까지 통달했을지는 몰라도 그 반대는 불가할 것이다.
   이처럼 덕은 아침 시간 곧 두뇌 회전이 잘되는 시간에 현재 무엇이 문제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다 딱 떠올랐다. 저번에 마술 대회에서 맞닥드렸던 상대측 마술단의 주장이라는 인물을 어딘가에서 꼭 본 듯 했던 것이다. 그냥 스쳐지나간 건 아니고 분명 낯이 익었다. 것도 많이. 누구지? 누구지? 곰곰히 생각하다 그는 드디여 손으로 딱 소리를 내며 탄성을 내질렀다. 아하! 그분이다 그분이야. 그는 생각이 났다. 이쪽 친구들은 자칭 마술사이면서 단체의 이름이 없었지만, 그래 무명이지만, 당시 상대했던 팀은 이름이 마술단이었고 그 마술단의 수장은 덕의 학창시절과 연이 닫아 있었던 것이다. 덕은 또렷이 기억해냈다. 그 마술단의 리더는 바로 덕의 중학교 앞에서 기다리던 이상한 종교인지 학파인지 그런 재단에 소속된 도인이었던 것이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그들의 인연은 서점에서 시작됐다. 중학생이었던 덕은 주말이면 꼬박꼬박 서점에 들렸다. 서점에서 책을 보던 중 어떤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저기 혹시, 도를... 아세요?」  라고.
   지금은 철지난, 유행 지난, 안 먹히는 다가섬의 방법이지만 당시에는 그게 일종의 대표적인 포교의 한 방법이었고 순진한 학생은 그 교묘한 화술에 척 하며 걸려들었던 것이다. 덕이 지금 생각해보니 그 종교인지 학파인지 주술 사단은 정확히 피라미드 네트워크 방식으로 운영되는 단체였다. 보험 영업과 비슷하게 어느 점수제에 의해서 포교에 헌금에 뭐에 어떻게 해서 계급이 올라가는 방식. 덕은 회상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옛날에 성인이 약 500년 주기로 태어났고,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어떤 말의 어원을 분석해보면 뭐라 뭐라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덕은 당시 그분이 선물하면서 권해준 책을 읽었고,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보다가 선생님께 걸려서 반성문도 썼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교문을 나설 때 친구들이 막 웃었다. 어떤 이상한 아저씨가 교문 건너편에서 그를 기다린다고. 그러다 어느 제당이랄지 그곳 본거지에 따라갔고, 어떤 입단 의식을 치렀고, 단체로 진행하는 명상에도 참여했다. 그때 명상하면서 무슨 주문인가를 모두 읊었는데 경력이 오래된 사람은 외워서 읊었고 아닌 사람은 실눈을 뜬 채로 보고서 읽었다. 그러다 덕은 졸았다. 그래서 많이들 아다시피 나무 막대기로 어깨를 탁 맞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어깨 뽕이 튀어날올려고 하면 그때가 생각나기 때문에 어깨 뽕이 다시 쏙 들어간다. 겸손이네 교만이네 뭐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통증과 수치랄까 그런 오만가지 감정들의 선선한 기억 때문이다. 그 모두가 말이다. 그러다 그때 딱 한 달인가 지나서 그만 두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누나가 알아보니 어떻다고 해서 누나 친구와 함께 합리적인 정보를 제공받아서 생각했고 마음을 접었고 얼렁뚱땅 그렇게 끝을 맺었던 기억이 덕에겐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술 대회에서 상대팀 마술단의 수장은 바로 그분인 것 같았다. 아니, 그분이 맞다. 확실하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그 표정. 그러면 그 아저씨는 어느 낯선 종교인가 학파인가 주술계 쪽에서 마술계로 넘어오신 것인가? 그러면 그분도 마술사? 그렇다면 그 말은 곧 그쪽 업계를 완전히 제패하고 새로운 분야로 진출했다는 뜻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목적은? 마술계를 평정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분은 내공이 상당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고, 그 마술단 역시 모두 실력이 출중한 고수들일 것이며, 때문에 내 친구들이 한순간에 노로해진 원인을 그분이 제공했을 가능성이 농후했고, 따라서 그쪽에서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면 친구들은 다시 본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 그랬구나, 아 그렇구나! 덕은 희미한 희망이 엿보이는 걸 느꼈고, 가슴이 부풀어오르며 뭔가 잘 하면 모든 걸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덤으로 영화 마술론 2에 대한 극본도 자동적으로 챙길 수 있을 듯 했다. 상금을 받으면 뭐에 쓴다? 일단 맛난 음식을 맘껏 배불리 사먹고...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새로운 경험에... 아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을 이이갔다. 저번에 마술 대회 전에 친구들이 덕에게 물어봤다. 마술론 혹시 못 봤냐고, 너네 집 문 앞에 놔두었던 마술론을. 덕은 그런 거 못봤다고 했고, 친구들은 혹시... 하는 눈치였다. 덕은 이제야 딱 그림이 그려졌다. 이때 악당에 해당하는 마술단의 손에 그것이 들어간 것이라고. 그러면 마술단을 어떻게 찾는다? 친구들은 이제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단 말이야. 음, 어떡하지? 이제 어떡하지? 아하! 덕은 자기가 쓴 희곡을 떠올렸다. 비록 보도 듣도 못한 삼류 영화사에 판권을 팔았고, 흥행에 여지없이 실패했지만 자기 글이 영화로 즉 그 장면이 영상으로 옮겨진 신기함이자 첫경험을 몸소 체험했다. 교묘히 분장한 마술사 안소니가 덕을 어느 교당에 데려가서 007 가방을 챙기고, 돌아와서 뭉치돈을 덕에게 건네는 장면. 게다가 극본에서 마술론에는 마술관의 지도와 위치가 나와있었다. 당시 그는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뭔지 모를 풍문이 있는 듯 없는 듯 은은히 들려오는 어느 사당을 그곳으로 정해서 극본에 적었다. 덕은 즉시 그곳으로 출동했다.
   지금은 캐롤도 할망구가 되버렸고, 나머지는 모두 꼬부랑 꼬부랑이고 스컬리도 이사를 가버렸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단독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그만 과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만 넙죽넙죽 받아먹을 게 아니라 스스로 먹이를 찾아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제발로 굴러다니는 호박만 기다릴 것인가? 이제는 진정한 사랑도 해 봐야 하지 않겠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는 마술단과 마술단의 수장과 맞장을 뜨든 담판을 짓든 뭐든 하겠다고, 뭐든 할 수 있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거짓말처럼 영화에 나왔던 교당이 있었고, 몰래 정찰하니 교당에서는 어떤 예배 형식의 수업이나 강의 같은 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뭘로 그들을 상대할 것인가? 마술론도 뺐겼고, 덕은 마술사도 아니고 오히려 허당이고, 친구들을 제모습으로 돌이켜줘 라고 하면 녀석들이 고분고분하게 응할 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을까? 이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자기는 극본에 가짜로 썼는데 영화에서는 진짜로 에반스, 맥스, 스컬리, 리플리의 요원 신분에 대한 정보가 노출되었다. 심지어 무리한 과장이 필요했기 때문일까? 그 교당은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어쩌고저쩌고에 대한 죄목이 상당했고, 그들을 비밀리에 쫓는 민관군 연합 세력이 존재했던 것이다. 군에도 정보 집단에도 초능력에 관한 전담 부서가 존재한다고 영화에서는 설명했다. 그 정보를 근거로 덕은 그곳에 연락했고, 정말 믿지 못할 정도로 빨리 그분들은 출동했다. 그래서 마술단은 일망 타진됐고, 친구들은 정신도 육체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신비의 비서 마술론은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덕은 하는 수 없이 자기가 마술론2라는 극본을 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편은 실패했지만 2편까지 실패하란 법은 없으니... 영화가 흥행에 성공...까지는 아니어도 반타작만 해도 판권에 보너스에, 클럽에 먼저 갈까 쇼핑을 먼저 할까? 그는 언제나 김치국부터 마시는 친구였고,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는 부류였다. 그러니까 아직도 뭘 해도 기쁘고 여전히 아침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어나고 내내 즐겁고 그 모두가 재미었었던 것이다. 뭘 하더라도 말이다. 


   23

   그 길었던 과정을 간출이자면 이렇게 됐다. 그렇게 그럭저럭 그는 작업에 들어갔고, 극본을 거의 다 썼다. 거의 다. 그러다 덕은 피곤해서 TV를 틀었다. 그런데 TV에서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를 기점으로 앞과 뒤가 많이 달라야지 '그런데' 라는 부사가 적합한 건데, 그 말은 곧 영화는 덕의 기대에 부합하는 결과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으니까. 덕은 코메디나 동물 방송을 원하고 있었나 어쨌든. 개봉 영화 가운데 재미없는 순서로 TV에서 바로 방송되는데, 얼마나 재미가 없었으면 개봉일과 별 차이없이 TV로 영화가 나왔다. 그러다 영화를 유심히 살펴보니 그 영화는 그가 지금 쓰고 있는 마술론2와 거의 똑같았다. 뭐야 이거! 마술론1이 끝난 후에 웬 구경꾼도 아니고 매니아라면서 찾아온 친구들이 처음부터 작품 2를 위한 목적으로 찾아왔다고? 이런 젠장! 그럼 결국 이건 뒷북인가? 아니다. 아예 뒷북으로 쓸 수도 없게 되버렸다. 이럴 수가, 워 난 망했다. 이런 젠장!
   그러나 덕은 삼류를 면할 정도의 경사를 안을 뻔 하다 놓쳤지만 하늘은 내내 무심하지 않았던 것일까. 왜냐하면 그는 마술론3이 아니라 전혀 다른 1탄 즉 환상론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환상론이라는 착상을 떠올리게 된 계기는 미처 최근 이어졌던 엉뚱한 일들 때문인지 원상태로 복귀한 마술사 친구들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환상론이라는 영감이 떠올랐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상금만 받게 된다면, 바로 그 공상 때문에. 덕이 완전 독자적으로 스스로 상상력을 가동하고 창의력은 물론 예술적 재능까지 총동원해서 환상론을 생각해낸 건 아니었다. 그건 바로 집에서 허탈해 하는 허당 덕의 허공을 바라보는 무심한 심상이 빚어낸 허구에 불과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그가 집에서 실의에 빠져있다고 할 수도 있고, 멀쩡한 사람이 봤다면 틀림없이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오나, 뭔가 나사 하나 빠진 듯 최근 절망을 경험한 사람이 봤다면 그건 혹시 사실이 아닐까 착각하게 만들만큼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며, 밑도 끝도 없는 억지와 정반대로 매혹되면서 어? 잠시 아찔하면서 응? 홀랑 홀린 채로 '완전 좋아' 라는 혼잣말을 저절로, 자동적으로 툭 내뱉으며 뭐랄까 이건 정말 진짜가 아닐까 하며 포근히 그 사태를 찬찬히 지켜보고 싶게 만드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즉, 대반전!
   그 일은 바로 라디오와 TV와 인터넷에서 가리키는 시간과 공간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이었다. 시련에 빠졌을 때 아무 생각없이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덕은 기분이 저기압일 때 라디오 드라마를 들었고 라디오와 TV와 인터넷을 동시에 켰다. 우선 라디오. 소리만 절달되는 라디오의 특성상 영상은 듣는 사람 맘대로 그릴 수도 있고, 사실적인 설정은 라디오 드라마가 도와주며, 최고로 황홀한 목소리로 극본은 내내 진행되기 때문에 빠져들지 않을래야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다 중간에 광고가 나가고, 뉴스도 나가고, 그러면서 현재 시간이 어떻다 지역 방송 어디다 라는 안내가 나왔는데 그것이 가르키는 시간과 공간은 완전 딴 세상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울적하니까 그는 TV로 다큐멘터리를 봤고, 인터넷으로 각종 블로그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 각자 다른 시간대와 다른 공간을 사는 듯 뭐가 뭔지 하나도 맞지 않았다. 따라서 덕은 어쩜 당연하게도 환상론을 써서 첫째 환상 문학상에 도전하고, 둘째 아동 문학으로 편집해서 동화작가로 등단하고, 셋째 동네 마술사 친구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이다. 무엇보다 마술론은 물 건너갔으니까 녀석들에게 뭔가 내면의 빚을 갚고 싶었던 것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손해볼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당장 그 일에 착수했다. 어차피 더 몰릴 궁지도 없고 내내 바닥인데 이제 둘 중 하나일 테지. 훌쩍 사뿐히 껑충 뛰어서 구름 위로 올라가느냐, 아니면 가 봐야 동네고 생각해 봐야 뒷북이냐 라는 것.
   하오나, 하나 분명한 건 그가 희구하던 소설 환상론이 덕에게 인생은 딸기쨈이 될지 부푼 예감에 이어지는 서툰 실망이자 도도한 절망으로 판정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하여간, 그 제목은?
   환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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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102

from 소설 2017. 8. 15.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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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 캘린더에 기록된 일정은 없었다. 받고 싶은 상이 아동문학상으로 바뀌지도 않았다. 환상 문학지 미스테리아는 책상 위에서 주인님께 사랑 받지 못한 채 먼지만 쌓여갔다. 새로운 진공청소기가 출시되었고, 아직 그 인기는 미풍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나는 무슨 나이저가 품절이라는 어떤 동향에 힘입어 새로운 진공청소기를 사기 위해 어느 판매점 앞에서 텐트를 치고 기다려야 했다. 왜냐하면 신제품 진공청소기의 인기를 미풍에서 선풍으로, 선풍에서 강풍으로 드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풍선이 허공에 떠다니는 헛것을 본 마냥. 그러나 그건 얼핏 스쳐지나간 생각이었다. 나는 그렇게 문학적 상상력이 뛰어나지도 않고, 그런 쓰잘 데 없는 공상에 꽤 타산적인 어른도 아니니까. 그러니 나는 차라리 이야기꾼보다 장사꾼을 해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흥정의 재미를 채 터득하기도 전에 폭삭 망하고서, 아 사업은 결코 쉬운 게 아니로구나 라며 정신을 차릴 테니까. 어쨌든 글이 잘 써지는 것도 아니고, 어울리지 않게 혼자서 어리광에 투정에 혼잣말만 늘어서 큰일이었다.
   곧 이 전형적인 일련의 패턴은 떠남을 의미해야 마땅하나, 이번에는 내가 미처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전에 나를 여기서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예사롭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궁금하고 알고 싶고 어쩌면 보고 싶기까지한 어떤 신비로운 분위기를 간직한 여자가 우리 동네에 출연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번처럼 내 옆집이나 앞집으로 이사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운하다는 뜻은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여자가 몰지각하지 않고 매우 예의 바르며, 차갑거나 도도하지도 않고, 무척 다정하며 매혹적인 기운을 내뿜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여기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거의 모든 동네 청년과 우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다. 즉 내가 3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어떻게 겨우 일구고 겨우 확보한 남자들만의 친교와 뭇여심을 뒤흔드는 교우까지 모두, 그녀는 단 3일만에 거뜬히 거머쥔 것이다. 그러니 내가 기쁠 리가 있겠나. 얘 뭐지 라면서 나는 탐구 과제가 생겼다면서 좋아했고, 우리 동네의 올해의 신인상과 깜찍상─아차상─인기상과 우수상까지 한꺼번에 그녀가 독점할까 봐 난 바싹 신경이 곤두섰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나와 같은 업계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름은 로잔나. 나이는 대충 30. 장르는 SF였고, 지식은 나보다 아는 게 많은 느낌이 들었다. 대적하기 부담스러운 감이 없잖아 있었으니까. 본업은 소설가에 영화부터 작사에 화가에 코메디 극작가, 방송인에 뭐 뭐 정말 다방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요즘 나와 친한 사이먼과 머큐리와 가펑클과 브랜든까지 모두 그녀의 고혹적인 모습에 홀딱 넘어갔다. 그녀는 재주도 많고 웃기고 돈까지 많았다. 활동 무대도 넓었고, 활기와 열정과 정력까지 출중한 걸로도 모자라 몸매까지 풍만했다. 어머나 어머나. 
   나는 솔직히 따지고 싶었다. 그렇게 요조숙녀처럼 굴지 말고 본색을 드러내라고. 우리한테 왜 접근했냐고. 그러나 아직은 로잔나의 숨겨진 의도에 대해 반의 반도 예측할 수 없었다. 따라서 지금은 하는 수 없이 관망해야 할 시기였고, 때문에 나는 일단 그녀를 지척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2

   로잔나가 어떤 행성 충동설에 대해서 얘기하면 녀석들은 상식과 과학은 뒷전인 체 모두 호응하며 환호와 갈채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들의 그렇게 열성적인 모습은 처음 봤다. 미세 중력장을 조절하네 어쩌네, 자기가 쓴 책을 나눠줄까 물어봤고, 동네 청년들은 극구 사양하며 직접 서점에서 로잔나가 쓴 책을 구입하기까지 했다.
   로잔나는 세례명이 안데르센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자기를 부르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타락한 거네. 어쩐지 처음부터 수상하더라.
   「위선이란 악이 덕에 바치는 찬사인 거죠.」
   나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인인지 철학자인지 어느 옛 사람이 했던 말이란 걸 지적하고 싶은 욕구가 목젓에 턱 하고 걸렸던 점. 그런데 그녀를 알게 된지 얼마나 됐다고 내 친구들은 모조리 그녀의 꾀임에 빠져 로잔나의 본가에 다녀왔다. 나만 쏙 빼고. 물론 일정 때문에 난 자연스럽게 외면 받았지만, 설사 같이 가자고 애원했더라도 난 거절했을 것이다. 녀석들은 사유지가 어떻다는 걸 처음 알았네, 어떤 건물을 대학교로 착각했네, 분수대의 조각상은 대체 얼마나 오래된 어떤 기법으로 누가 만든 작품이냐며 동네 청년들은 모두 꼭 넋을 잃은 듯이 오직 찬양 일색이었다. 저러다 한번에 훅 넘어가는 수가 있는데 모두 정신을 차리기 싫어하는 듯 했다. 물론 나는 그 어떤 핀잔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넌 왜 미운 오리 새끼처럼 혼자 놀고 그러냐? 꼭 일부러 바쁜 척 하는 거 같은데 말야. 너 사춘기도 아니잖아? 만나는 여자, 없잖아. 그런데 너 요즘 왜 혼자 노는데? 대체 왜 우리랑 어울리지 않냐고. 우리가 뭐, 챙피하냐? 어?」
   어떤 날은 단체로 분홍색 옷을 맞춰입었다. 나 말고 모두 다. 촌스럽게 말이다. 그런데 그날 나만 하필 우중충한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고, 고의는 아니었으나 한숨과 아쉬움과 섭섭한 눈초리는 피할 수 없었다. 난 원래 그녀의 사이비 교주 같은 느낌이 왠지 꺼림직했는데 우린 어쩔 수 없이 영영 멀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것만 같았다.
   이제 나는 거의 당연스럽게도 왕따였다. 누가 같이 놀자고 찾지도 않았다. 하지만 딱히 경쟁 구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슬슬 조바심이 일었고 걱정 돼기 시작했다. 친구를 빼앗긴 건 아니지만 녀석들이 이 시절을 나중 회상할지 후회할지 그게 염려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잔나 일당은 1박 2일로 여행을 떠났다. 당연히 마을은 텅텅 비었다. 그래서 나는 홀가분했고, 친구들 가게를 대신 봐 주면서 동네의 모든 술집과 빵집과 찻집과 아이스크림 가게를 내 손으로 쥐락펴락했다. 그러다 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났다. 하지만 나는 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로잔나의 정체를 알아내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로잔나의 집으로 갔다. 그녀의 집 앞에는 웬 스핑크스 모형이 있었다. 지가 무슨 클레오파트라야 비너스야? 그렇다고 무단 침입은 감행할 수 없었다. 혹시 친구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모를까. 물론 로잔나파는 다음 날 돌아왔고 나는 뒷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3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하여 일부러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바깥에 나가 동네에서 마른 오징어 취급을 받느니 오히려 집에서 혼자 대학생도 되었다가, 청춘을 부담스러워도 했다가 흔해 빠진 독서를 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인내심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집을 나섰다.
   역시나 밖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은 로잔나파가 해변에서 무슨 단체로 춤을 추면서 괴상한 작품을 찍는다는데 나도 따라할 걸 그랬나? 아니다. 일없다. 난 나다. 난 괴짜도 돌아이도 아니다. 처음부터 로잔나가 선녀였다면 모를까, 처음부터 로잔나가 선녀였다면 나의 어떤 강직함이 더욱 고고해보였을 텐데 그건 그거고,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그러나 오랜 외출에 따른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걷고, 먹고,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간단히 인사만 하고, 공원에 갔고 호수를 봤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좋은 소식을 들었다. 바로 로잔나파가 누드 자전거 타기 라는 행사에 다녀온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도심 한복판에서 모두 옷을 벗고 자전거를 탄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 웃고 놀자는 행사니까. 존중하면 그뿐. 그러나 그 날은 내게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날 나는 로잔나의 집에 들어가서 로잔나의 정체를 샅샅이 파헤치고 말 테다 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좀 섭섭하긴 하지만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 말하자면 몇 일이 지나서 그날이 됐고, 내가 로잔나의 집 문을 따고 있을 때 나는 듣게 됐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상냥한 목소리를. 그녀는 바로 로잔나였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다음을 기약하는 수 밖에.
   난 괜히 초등학교 때의 어느 기억이 떠올랐다. 초6때 우리 반 공금이 사라졌고, 선생님은 모두 눈을 감고 가만히 당사자만 손을 들라 했다.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수소문 끝에 유력한 용의자는 둘로 좁혀졌다. 나도 거기 포함됐다. 난 집에서 용돈을 아마 거짓말로 타 내서 비자금을 조성했고, 내 소비 행위가 애들에게 유달리 평소와는 달리 보였던가 보다. 결국 담임 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후 셋이서 면담의 자리를 마련하셨다. 그러다 나보고 운동장 저 끝에 있는 데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오라고 하셨고, 나는 거기까지 갔다 오는 길이 무척이나 울적했으며, 나와 친했던 다른 친구가 뭐 어떻게 됐고 그랬다. 그렇게 기분이 몹시 나빴던 적이 있다. 완전 꽝이었던 기억이다. 꼭 공금을 횡령한 친구보다 내가 더 나쁜 소년범이 된 듯 했으니까.
   아 또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쪽지 시험 시간. 옆반 선생님이 1번부터 5번까지 답을 칠판에 먼저 썼다. 그리고 당연히 이걸 악용하면 안되겠죠, 그런 말씀을 하셨겠지. 그리고 시험을 보다가 선생님께 들켰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동네에서 같이 놀고 학교도 같이 다녔던 삼인조인 JH형, 나, JH동생 가운데 JH형이 그 소식을 알게 됐다는 점. 그건 아직까지도 미스테리다. 진짜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나? 어떻게, 정말 어떻게 알았냐고. 그날이던가 다음 날이던가 JH형이 짧게 에이 어쨌냐 그렇게 지나가는 말을 잠깐 해서 알았다. JH형은 한 학년 위였고 학급도 몇 개 나뉘어 있을 텐데, 범인이 나라는 걸 서로 모두 알았다고? 맙소사! 교육학에 그런 교습법이 아마도 있을 테니까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친구들 잘 찾아보면 있을 것만 같다.
   나는 로잔나의 집앞에서 뭔가 꼼지락꼼지락하는 모습을 들켰기 때문에 어딘지 그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고맙게도 로잔나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중을 내비추었다. 의뭉스러운 가시내, 멋진 척 하기는!


   4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혼자서 관람회에 갔다. 내가 만들 수 있는 범작과 수작은 불가능한 듯 보였고, 구상도 떠오르지 않는 데다 착상 역시 아리송하기만 해서 명화들을 감상하고 오기로 했다. 당연히 혼자서.
   나는 가서 전시회를 봤다. 감상 끝났다고.
   그림 하나당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며 또 보고 오래 보고, 그건 전문가나 애호가들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그러나 나 같은 미술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대충 보든 작정하고 보든 나름의 감상법이 있다. 그건 무엇이냐면 그림을 오래 보지 않는 것이다. 통과 통과 통과 또 통과. 멈추어야 할 때는 직관이 알려준다. 17세기 18세기에 미술 대전이 열리면 그랬다. 황태자가 공주와 함께 슥 지나가면서 눈길을 줄 듯 말 듯도 아니고 진짜 슥 지나간다. 샤르륵 그렇게. 그러다 한마디 툭 던지지. 옆에서 관료는 귀를 기울인다. 작가에겐 미안한 일일 수도 있지만 간택과 감정도 결국은 사람과 비슷하게 한 사람에게 주목받는 일이다.
   어쨌든 나는 작품 감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로잔나가 우리 집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크나큰 마음의 빚을 갚는 기분이 들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는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란 걸 알게 됐다. 그러나 나는 섣불리 로잔나를 정답게 부르지도 않았고, 비방하지도 않았으며, 그녀의 뒤통수를 빡 하며 때리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숫제 그때 그냥 속 시원하게 빡 하며 그녀의 뒤통수를 때릴 껄 그랬나 라는 생각도 가끔 든다. 솔직히 고백하는 바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난 그녀의 뒤통수를 빡 하며 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상대가 돌아서면서 날 발견하며 깜짝 놀라 눈이 똥그래지고 어찌할 바 몰라 하는 장면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로잔나의 남모르게 키워 온 소원 같은 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바로 이 순간 만큼은 앳된 요정이 아리아를 부르고 수줍은 천사는 나비처럼 내 앞에서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하하.
   그런데 사람 힘 빠지게 로잔나는 뒤돌아서며 날 발견했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나도 놀라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히려 전세는 역전됐다. 나는 괜한 심상 때문에 응큼한 속마음을 들킨 듯 했고, 로잔나는 남자가 뭐 그렇게 쪼잔하냐며 잔뜩 약을 올릴까 말까 망설이는 듯 했다. 로잔나는 은밀한 기쁨 때문에 살짝 턱을 앞으로 머리는 뒤로 기울였다. 얘가 원래 이렇게 목이 길었나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이때 그녀의 목을 손날로 빡... 그러다 말았다. 나는 사정이야 어쨌든 수모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외 별다른 일 없이 서로 인사하고 안부를 묻고 헤어졌다. 모두들 분위기 좋은데 내가 유독 혼자 놀길래 안스럽다나 뭐라나. 꽁꽁 언 마음은 더 꽁꽁 얼어버렸다.
   뿐인가? 어정쩡한 느낌은 또 다시 재현됐다. 동네에서 오다가다 친구들끼리 담소를 나눌 때 우연히 내가 로잔나 옆에 앉게 되었다.
   「와, 잘 어울리는데!」
   「쟤 부끄러워하는 것 좀 봐. 저런 표정 얼마만이니?」
   「이참에 둘이 사귀는 건 어때?」
   나는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잘 어울리긴 뭐가 잘 어울려! 뭐 난봉을 부릴 일 있니? 당치 않은 일!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지금 무슨 동물의 세계를 찍는 거도 아니고 이게 뭐니? 흡사 마법에 걸린 듯 내가 청혼이라도 해야 하는 거니? 어? 오, 로잔나, 난 완전히 넋을 잃은 채 그대의 매력에 풍덩 빠져버렸답니다? 난 차라리 동네 벽면에 그려진 동화 속 주인공에게 구애를 하고, 도시로 가서 아무 여자한테나 원없이 찝쩍대는 게 낫겄다. 난 할 수 있어. 다 꼬실 수 있다구.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못해서 이처럼 조용히 사는 게 아니라구. 이거 왜 이래, 사람을 뭘로 보고? 너네들도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걸 아마? 아 말 말자!」
   「넌 농담으로 한 마디 던진 걸 가지고 왜 그렇게 정색하고 그래? 얘가 정말 분위기 이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 그쪽으로 아주 소질이 탁월해. (박수 짝짝) 야, 로잔나는 뭐 숙녀도 아니니? 아 심하다.」
   「음 너무 했다.」
   「그래. 심했다.」
   「정말로.」
   모두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약간 지나치기는 했다. 속으로만 생각했던 장난인데 진짜처럼 속마음이 그대로 노출돼버린 듯 해서 나도 놀랐다. 안 그래도 그 어떤 미미한 대립 구도는 와해되기는 커녕 더욱 공고해져만 갔으며, 나는 고독을 자초했고, 오랜 우정과 인심 좋은 친구들은 술렁이며 날 외면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난 그 뭔가를 도저히 멈출 수는 없었다. 암만 해도 돌아서지지가 않았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딱 하나 절대 나에게는 지기 싫었고, 뭔가 결코 쉽게 가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양해를 구하고 타협하고 구애와 열애와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슬픔에 대해서 녀석들과 일말이라도 공유하게 된다면 앞으로 나는 꿈이 없는 삶으로부터의 탈출은 꿈도 꾸지 못할 듯 했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하여튼 괜히 로잔나가 얄밉고 꼴 보기 싫고 재수 없어서 그랬던 건 확실히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러나 결과는 내가 바라는 이상은 모조리 안개처럼 사라지고, 꾀병처럼 허기와 회개를 불러올 게 뻔했다. 꿈꾸던 인생 동경하던 사랑 기도하는 미래 좋아하는 풍경 심심한 오늘 내일의 기대, 사랑을 측정하고 꿈을 관측하다? 왜 그런지는 정말 모르겠으나 그것과 저것을 바꿀 수는 없었던 거다. 내 마음이 대체 왜 이러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자기선전광이 될 껄 그랬나? 그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제발!


   5

   나는 반성했다. 내가 로잔나에게 너무 했다는 걸 깨닫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너무 어린애처럼 탐애하고, 그녀에게 너무 박대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아니 많았다. 내가 상과 벌을 주면서 그녀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행동을 그녀는 괴팍한 친절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내 선의를 그녀는 놀림으로 인지할 공산이 컸다. 그렇다고 자기소개부터 우리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물어봤다. 로잔나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녀석들이 순순히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었을까? 그럴 리가 있나! 로잔나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냐고 물어보니 하나같이 공통된 반응을 보였다. 우선 주위를 빙빙 돌다가, 전형적인 패턴으로 녀석들의 대응은 일치했다. 자기는 무엇을 좋아하고, 자기는 어떤 걸 하고 싶고, 자기는 어떻게 살고 싶고, 자기는 누구를 만나고 싶으며, 그런데 넌 불가능한 미스테리와 신들린 초현실주의가 궁금하지 않냐고. 그건 곧 내 영혼을 좀먹는 논리적 귀결이었다. 혹시라도 녀석들의 귀가 막혔을지도. 사이먼과 가펑클과 머큐리와 브랜든, 비숍과 마리사는 모두 남의 일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재기발랄한 친구들 같으니라고.
   나는 내 잘못이 명백한 만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주저하지 않고,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서 로잔나에게 찾아갔다.
   결과만 말하자면 우리 사이에 사무치는 그리움이 있을 리도 없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사랑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도 없어서 용건만 간단히 끝마쳤다. 간지러운 대화 내용을 모두 옮길 수는 없고 결론은 이랬다. 로잔나와 나 사이에 울화가 치밀 일은 없었다는 걸 확인했고, 그런 의미에서 내가 로잔나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마무리는 둘 다 멋쩍은 웃음이었다.
   로잔나의 부탁은 이랬다. 자기 친동생한테 자신의 친필 서신을 직접 전달해달라는 것이었다. 편지로 보내면 될 것이지 뭐 그런 사소한 일을 이렇게나 유난... 자매끼리 좀 심하게 다퉈서 불가불 그런 격식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는 예복을 갖춰 입고 로잔나의 동생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다. 그런데 자꾸 어리석은 예감이 동하는 걸 계속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예측 불허일 수도 있는 추측은 둘째였고, 처음은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욕구였다. 대체 이 거창한 서신에는 어떤 비속한 내용이 적혀 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실로 하이틴 드라마의 주인공이 따로 없었다. 이를 어쩌면 좋아, 라면서 편지를 몰래 열어봤는데 설마 그 모두를 로잔나가 내다보고 이렇게 전언을 남겼을 수도 있다.
   비너스의 아들 큐피트, 아폴론에게 꾸중 듣다. 난 큐피트 넌 아폴론. (로잔나를 얕잡아봤다라...!) 잘 아시다시피 큐피트의 화살은 두 종류. 하나는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것. 둘째는 사랑으로부터 영영 도망치도록 만드는 것. 넌 날 영원히 쫓아다니게 될 것이니라.
   아흐흑! 난 음험한 상상을 물리치고 몹쓸 유혹에 빠지지 않기로 했다. 비록 이런 고행의 대가로 신종 사업의 번창이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때로는 호기심이 큰 값을 치를 수도 있으니까. 로잔나가 미리 손을 써놓았을 테니까 나는 어떤 기미가 엿보이기 전에 선수를 쳐서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기로 했다. 모처럼 만에 나는 득의양양해졌다. 로잔나의 편지가 특급 비밀이건 어쩌건, 로잔나의 동생이 실제로는 그녀의 애인이건 어쩌건 난 관심없었다. 그들의 사랑이 지고하고 지순하든, 불결하며 오직 물욕으로만 똘똘 뭉쳐있든 어쩌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었다.
   나는 1인 다역으로써 전조를 읽는 자 테이레시아스도 됐다가 에르메스도 입었다가 박카스를 마시면 그만이었다. 그나저나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적자가 아니나 태생의 사연이 꽤나 특별하던데 현대 과학을 당시 미리 예견했던 것일까? 디오니소스 별명이 그렇게나 많은 걸 보면 말이다.
   아무튼 나는 바람직한 일을 하는 만큼 로잔나의 편지만 그녀의 동생에게 전해주고 딱 깔끔하게 돌아오기로 했다.


   6

   꼬리를 감추는 사람이 있으면 꼬리를 흔드는 사람도 있다. 나는 로잔나의 동생이 어떤 여인인지 궁금했다. 막 만나고 싶어졌다. 나도 모르게 분위기는 차츰 고조됐고, 기분은 붕 떠올랐다. 물론 낯선 숙녀에 대한 궁금증은 성욕 과도증처럼 비합리적인 욕망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청춘의 문턱에서 나풀대는 호의에 다름 아닌 일이라서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 그래서 나의 공명심은 낭만감으로, 여타의 예감은 조증으로 뒤바뀌는 탄력을 받았다. 사뿐하게 말이다. 더구나 로잔나 동생의 집은 거리도 가까웠다. 우리 동네에서 옆-옆-옆 동네였다.
   그러나 이 모두가 헛고생임을 눈치까는 데는 그 어느 절묘한 통찰도 필요치 않았다. 나의 설렘은 무익한 열정이었고, 들썩였던 비밀스러운 복음은 열악한 무상함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로잔나의 동생은 처음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고, 그 다음에 내가 로잔나의 어설픈 책략에 허수아비처럼 고스란히 놀아났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로잔나의 동생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난 겨우 이해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로잔나를 믿었던 게 문제다. 나는 로잔나에게 하수 애칭을 붙여주고 함부로 나만 고수로 진급했는데, 알고 보니 로잔나는 내 머리 위로 어느새 껑충 뛰어올랐던 것이다.
   나는 로잔나의 편지를 열어보고 결국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로잔나는 선녀가 아닌 만큼 악녀이자 마녀였고, 나는 악역도 목동도 아닌 그냥 행인1에 불과했다는 것을. 편지 내용은 길지도 않았다. 동생 같은 건 없고 어서 돌아오라나 뭐라나. 아예 메롱이란 말조차 없을 정도로 그녀는 불친절하기만 했다.
   이 일을 어쩔꼬! 나는 나이를 먹는 일이 무색해지며 로잔나 그 수선화 같은 갸륵한 아가씨에게 기쁨의 사냥감이 되어준 것이다. 아 기쁘다. 랄랄랄랄라라! 랄랄랄랄라라! 난 너무도 행복했다. 빙긋 웃고 또 웃고 아예 실성을 했다. 만류하는 사람도 없겠다 나는 그야말로 미소 짓는 커피포트가 되었다.


   7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난 차라리 어떤 불가해한 오해에 의해서 이런 어이없는 허탕이 벌어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마 로잔나는 나를 골탕먹이려는 게 아니라 내가 자기 여동생과 어쩜 천생연분인 것처럼 느꼈기 때문에 우연을 가장해서 소개를 시켜주기 위한 의도를 품고 있었을 것이고, 단지 일이 좀 꼬였을 것이다. 뭐 아닐 수도 있지만 나도 로잔나와 대면하게 되면 할 말은 있다. 처음부터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누굴 바보로 아냐고. 그래 나 바보다. 됐니? 예측한 그대로 바보라고. 이제 만족하니 라고. 난 원래 그런 데서 이상한 쾌감을 느끼는 쾌남아니까. 그렇지만 속으로 한 1퍼센트쯤의 괜한 기우도 없지는 않았다. 돌아갔는데 만약 마을이 텅텅 비어버렸으면 어떡하냐는. 그러면 난 투덜거릴 테지 별수 있겠나. 그런다고 내가 너네들을 찾아나서기라도 할 줄 알았니 라며. 보통 극중에서는 평범한 인물이 불세출의 탐정으로 거듭나지 않나 왜! 그러나 그건 픽션이고 이건 냉엄한 현실이었다. 어쩜 가혹할 수도 있는.
   그런데 마을에 도착했더니 진짜로 조용했다. 하지만 그건 평소에도 그랬다. 그래 봐야 로잔나를 필두로 한 골목대장 놀이와 추종 세력 단합대회 때문에 원정 경기를 떠났을 게 뻔하다. 이 밤중에 로잔나한테 찾아가서 거침없이 기습 키스를 하던 자초지종을 따지던 담판을 지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집에 가서 잤다.


   8

   1일째. 마을에 나 혼자만 있으니 홀가분하고 기분 좋았다. 녀석들 있어 봐야 시끄럽기만 하고 하나하나 그 정신 연령에 맞추어 놀아줄 수도 없는 일이니까 난 좋았다.
   2일째. 지올라의 음악 감상실에서 고전음악을 감상했다. 오디오가 워낙 좋다 보니 이건 어쩌면 생음악보다 더 환상적이지 않을까 그런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조지의 카페를 청소해줬고, 마틴의 작업실에서 나름 내 일도 했다. 동네가 조용해진지 얼마나 됐다고 무턱대고 자발없이 로잔나의 집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었다. 만일 그녀에게 찾아간다고 해도 답안지에 선택될 객관식 보기는 대략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로잔나 집 초인종을 딱 누르는 순간 로잔나가 어딘가에서 짠 나타나 내 엉덩이나 뒤통수에 겨자 쏘스를 찍 뿌린다. 아니면 전처럼 이름만 부르거나 어깨를 톡톡 건드릴 수도 있다. 또는 연기력 출중한 개님이 등장하실 수도 있고. 그리고,
   둘째. 어떻게 내가 로잔나의 집에 들어갔다고 가정하고 딱 로잔나 로잔나 부르다가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방에 막 들어섰는데 못 볼 껄 본 거지. 그래서 나는 화급히 뛰쳐나오고, 하루가 지나서 다시 찾아가고, 그 모두는 이불 속에서 마네킹 둘이 단순 작업중이며 이상한 음원이 무한 반복중이란 걸 알게 되는 장면.
   뻔했다. 속아넘어갈 수는 없다. 어림 없지. 흥!
   아니 아니. 속아넘어가는 척 한번 가볼까? 아니다. 그건 별로다.
   3일째. 슬슬 심심해졌다.
   4일째. 엉덩이가 근질거렸다.
   5일째. 로잔나가 보고 싶어졌다.
   6일째. 나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내가 좀 굽혀서 녀석들 무리에 인턴으로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한다.
   그리고 7일째. 보고 싶은 공포 영화가 있었는데 볼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저 하늘의 구름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을을 순찰하고 정해진 산책로를 걷고, 특이 사항은 없나 하면서 동네를 둘러보다가 나는 꼭 해야 할 일을 했다. 주인이 출장간 틈을 타서 자유로운 한때를 보내는 강아지와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물도 주며, 주변을 청소하는 일. 하지만 나는 괜한 공상은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길에서 우연히 봤던 분홍색 가화는 몇 개, 평소에 보지 못한 벽면 광고가 왜 하필 그곳에 붙여져 있는지, 동네에서 짝수─홀수─소수 번지 집들의 공통점과 연관성등. 그 가운데 묘한 우연과 신기한 점도 있을 수 있으나 모두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다 8일째. 나는 TV를 보며 깜짝 놀랐다. TV에서 지역 뉴스를 방영하는데 우리 동네에서 한 명이 실종 상태라는 것이다. 인적 사항을 보니 그건 나였다. 취재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동네 주민이었다. 나는 동네에서 날 빼고 나머지가 모두 여행을 떠난 줄로만 알았는데, 실제로는 동네에서 나만 사라졌다는 말인가? 그럼 여긴 어디고, 동네 친구들은 왜 날 찾지 못하는 거지? 이게 혹시 일종의 배경 복사 현상이라도 된단 말인가?
   나는 급히 차를 몰고 동네 입구로 가서 확인했다. 이정표는 이상 없었다. 그래서 로잔나의 동생 집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나는 마을에 도착했고, 친구들은 모두 나의 귀환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가, 환호하던가, 서운했던 일에 대해 토로하는 친구도 있고, 그저 말없이 지긋이 바라보기만 하는 친구도 있었다. 시간이 제자리걸음을 했던 게 아니라 나의 7일간 행적이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로 되어버린 것이다.
   그 틈에 먼발치서 꽤 애매한 옅디옅은 미소를 띄우며 돌아서는 로잔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에 괘념치 않고 어리둥절한 채로 친구들과 회포를 풀며 너스레를 떨기에도 그날이 바쁘다는 걸 알게 됐다.


   9

   그건 혹시 밀랍 인형 괴기 영화에 나오는 마을에서의 한때였을까? 밀랍 인형은 발견하지 못했으니 그건 아니다. 그럼 좀비의 마을? 좀비는 보도 듣도 못했으니 그 역시 아니다. 어떤 원리 때문에 발생한 일인지 알아낼 수도 없고, 어쩌면 만화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일 수도 있는 황당한 체험 때문에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오랜 잠을 잤고, 꿈을 꾸었으며, 다음 날부터 다시 정상적인 삶을 이어갔다. 굳이 말하자면 현실을 초월했던 경이로운 경험을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라는 말을 들을 기행이나 말취담 정도로 치부해버렸다. 그럴 수 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아, 전날 꿈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꿈에서 나는 전쟁 영화에 나오는 용사였다. 그러나 주인공은 아니었다. 조연인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꿈이니까 당연히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됐고 나는 화자였다. 그러므로 주연인가 조연인가 관객인가는 의미없는 궁금증일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거인 아틀란스가 맹주로 있는 거인족에 항거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형 선박에 탑승한 소인 해병이었고, 우리는 어딘가로 출격했다. 아틀란스고 거인족이고 그건 과장법이고, 시대 배경은 현재였고 배는 항공모함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후방에서 일해야 할 수병인데 어떻게 복장이 비슷하거나 어떤 착오 때문에 거기에 휩쓸렸을 수도 있다. 우리는 운행을 이어갔다. 그런데 하필 나는 제일 선봉에 위치했다. 그러다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그래서 선발대를 꾸려서 작은 배를 띄워 우리는 거기에 타서 뿌연 안개 속으로 나아갔다. 분위기는 지옥의 묵시록이었고, 본선에서는 멀어졌으며, 게다가 거기서도 난 어떻게 된 게 제일 앞자리였다. 당연히 총을 들고 있었다. 그러다 전방에 무언가 나타났다. 이때 경우의 수는 세 가지다. 첫째, 자 돌격 앞으로 라고 외친 후에 나는 상황을 알리기 위해 본부로 급히 피신하는 것. 둘째, 이 선발대에 애초에 아무도 자원하지 않을 꺼면서 말로만 으쌰으쌰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네 어쩌네 난리길래 내가 나서서 나 혼자 선발대로 돌격하는 일(이건 복장이나 규율이 다른 단체에서 드물게 일어날 법한 일이므로 이미 물건너 갔음). 셋째, 실제 상황이고 상대와 마주쳤고 하필 내가 제일 앞자리 즉 최악의 상황 즉 주어진 자리에서 현실과 부닥치기. 역시나 여기서 세 번째 경우에 해당됐다. 그때 빠방빠방 따다다다 뚜두두두 뭐가 막 파닥파닥했고,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야 이렇게 가는 거야 하면서 자꾸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생각은 그렇고 겉으로는 즉답성에 부응해서 정말 뭔가를 맞은 것처럼 으악으악 찡그리고 몸부림치고 그랬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길어졌고, 그러다 기억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골짜기에서 일행 몇 명과 함께 깨어났고, 나는 총을 잃어버렸고, 우리는 걸어서 어느 사거리까지 갔다. 거기서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탄 차가 보이길래 그들을 세워서 차에 탔고 어디까지 갔다. 다음 장면은 취조실. 어두컴컴한 방에 달랑 조명 하나만 있고 어쩌고저쩌고. 그러다 꿈은 끝났다.
   복기하자면, 세상 사람들 말로는 꿈에서 케찹을 봤으면 길몽이고 아니면 개꿈이라고 하는데, 이번에는 개꿈이었다. 전율은 현실감 가득했는데 개꿈이라니. 이런, 젠장!


   10

   다음 날이 됐다. 나는 로잔나가 무서워졌다. 어쩐지 우리 동네에 로잔나가 처음 그 오묘한 기운을 끄는 듯한 모습을 나타낼 때부터 난 썩 반갑지 않았다. 지금 세상에 귀신은 없을 테고, 그녀에게 신비한 능력도 없을 테지만 그 어떤 영험한 일이 내게 닥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러므로 난 멋대로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최근 7일간의 그 불가해한 시공의 부재가 일상에 대한 불신을 증명하고 있었다. 심지어 벌써 나는 이름까지 붙였다. 신비 2.0이라고! 왜냐하면 새로운 소설을 위한 괜찮은 소재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뚜껑은 열어 봐야 알겠지만 그저 그런 흔한 일은 절대 아닐 거란 감이 왔다. 물론 나 혼자만의 잘못된 추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승부는 시작됐다. 성급한 일반화? 두고 보면 안다. 제7의 감각을 믿고 가는 거다. 로잔나는 내 탐구욕에 불을 붙였고, 내 호기심에 발동을 걸었으며, 애처로운 이 비-로잔나의 가슴에 결코 엄살로 끝낼 수 없는 뜻 모를 모험심에 대한 연민을 자극했던 것이다. 로잔나는 로잔나고, 환상은 혼자가 아니었다. 엉뚱한 순환 논리의 끝은 어디일까? 가 봐야 알지 그걸 벌써 어떻게 알겠나. 도박사의 오류도 잘못된 추정도 모두 불확실했고, 퇴로는 차단됐다. 나중 기발하냐 재미없냐, 신기하냐 짜증나냐, 놀랍냐 실망이냐로 나뉠 수는 있지만 게임은 이미 시작됐고 조건은 모두 갖추어졌다.
   어찌되었든 나는 동네에서 로잔나를 잘 피해다녔다. 나는 그런 틈틈히 인터넷 검색으로 시간을 보냈다. 쏠쏠한 재미와 톡톡한 흥미는 많지 않았으나 따분한 영화를 감상하는 것과 지루한 업무 회의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괜찮았던 시간이었다. 검색은 주로 과학쪽에 집중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겪은 그 이상한 일 때문이었다. 빙하기, 빙기, 간빙기와 다가올 빙하기 그리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 대륙의 움직임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 까지 찾아보았다. 그와 더불어 밀란코비치 주기도 검색해봤다. 그건 쉽게 말해서 하나의 가설이긴 하지만 관측되는 기후의 주기성이 궤도 주기와 상당히 잘 맞는 덕분에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이론이고 실재와의 사이에 잔존하는 문제점은 남아있다고 한다. 요지는 이랬다. 첫째 지구의 자전축은 도는 팽이처럼 요동을 하면서 약 26,000년마다 한 바퀴 세차운동을 하고, 둘째 지구의 자전축이 41,000년을 주기로 21.5도에서 24.5도 사이를 오르내리는데 현재의 각도는 23.44라는 것. 또 나는 지구 자기장의 방향 전환 주기도 검색해봤다. 신기했다. 인간의 수명이 지금과 같아서 그걸 지식으로 알고 영화로 보고 웃고 수다를 나누지, 오래 살아서 그 일을 실제 다 겪는다면 참 고독하고 쓸쓸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 더불어 무거운 주제에 대해서 찾아보고 생각하고 의문도 떠올려봤다. 그 다음은 얘기가 길어서 문단을 나눈다.


   11

   나는 집에서 인터넷 검색을 했다. 영국이 한번도 침입하지 않은 국가들에 관한 (색상 구분) 세계 지도도 봤고, 성비 불균형에 관한 블로그 게시물도 구경했다. 과거는 과거고 스타워즈는 스타워즈다, 라고 간략히 정의하면 말은 간단하지만 실상은 이 세상이 결코 그렇지 않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작은 반경에서 조용하고 편안히 살았더라면' 이랄지 '어떤 역사상의 폭군이 없었다면' 이랄지 몇몇 가정과 상상은 다양할 테지만, 수많은 분쟁과 잘잘못을 모두 과학자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아임 유어 파더, 다스바이더가 역사상 어떤 불운 때문에 건재했기 어려웠을지라도 나중 그 비슷한 인물은 어떻게든 나오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역사와 실화에 대해서 간단히 사실만 말한다면 주관과 세계관이 무르익지 않은 젊은이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유를 하고 시에서는 은유를, 문학에도 상징이란 게 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 늬가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제국! 제국 하면 한두 개가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주 많다. 그 모두를 지금 다시 또 매일 재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수많은 사례는 전문가와 학자에게 맡긴다쳐도 제일 가까운 근대에 대해서는 권위자와 언론과 상업에만 맡겨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러면 지구의 미래는 너무나 어두울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근대에 들어서서 은하계의 평화는 무너지고, 악당이 이끄는 은하 제국의 독재 체제가 은하계를 집어삼킬 위기에 봉착했다. 즉 냉전에 직면했다. 물론 악당은 H고, H 악당을 제외한 지식인과 시민은 어쩔 수 없었다. 칼이 펜보다 강한 세상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음. 오히려 지금도 펜은 인기와 돈을 주로 추구하지 바른 말과 옳은 소리 별로 못함. 하더라도 음 글세요) 그때 착한 편은 다행스럽게도 권선징악의 교훈을 현실에 적용했고, 그렇게 합심하여 악당 무리에게 치명타를 가해서 평화를 되찾았다. 기존 은하계의 일원은 아시다시피 제다이와 C-3PO, R2-D2와 착한 친구들이고, 악당은 대표적으로 다스 베이더다. 결론은 착한 편이 이겼고 악한 편이 졌다. 그런데 간혹 뉴스에 나온다. 과거 다스 베이더측에게 치명타를 가했으니 사과하라고. 어머나 맙소사! 다스 베이더측에게 치명타를 가했으니 사과하라고? 누가 누구에게, 그게 대관절 무슨 얘기인지... 설마 코메디는 아니겠지만 뭐 퍼포머스라도 되는 걸까... 왜 그렇게 되었는지... 가해자쪽에서는, 내부에서 다 해결되었다는데? 아돌프 히틀러의 영을 기리기까지 하는데? 그런데 가해자측에서 새롭게 사과를 받고 싶다고? 이렇다. 시민 따로 정부 따로다. 많은 부분 노력하고 고생하며 시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힘쓰지만 정부와 시민의 마음이 똑같을 수는 없다. 그 A와 B가 어디 한두 가지던가. 불미스러운 일이 하나 생기면 작게는 하루면 묻힌다. 방송과 지면에서 다루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작게나마 보도되어도 이틀이 지나면 잊혀진다. 사흘을 넘기면 또 다른 일이 층층이 쌓여서 사건 사고는 그냥 과거가 된다. 그러다 기억에서 멀어진다. 사과는 하는 것도 받는 것도 둘 다 껄끄럽다. 그렇지만 부조리와 딜레마와 모순과 크고 작은 오해는 차마 셀 수가 없다. 그렇다고 연례 행사나 축제처럼 매번 반복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깔끔하기가 도통 쉽지가 않다. 제국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에르메스나 페라리라는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손꼽자면 대표적으로 공자(BC 551 ~ BC 479), 석가모니(BC 463 ~ BC 383 혹은 BC 563 ~ BC 48), 소크라테스(BC 469 ~ BC 399), 예수(BC 4 ~ AD 33)를 들 수 있다. 제국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영토 야욕이 없는 국가는 없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와 그것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 아이가 아빠한테 물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른이 되면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신물이 날 정도로 듣고 읽고 보고 살았다. 최근 기준으로 세계 경제 61%를 생산하는 세계 18% 인구가 사는 지역의 어느 경계선에 위치한, 그래 정확히 말하자. 위도 어디 경도 어디 해서 <독도>라는 콩알 만한 섬이 우리 땅이라는 표어와 노래와 경구와 논설과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와 행사와 뉴스와 온갖 컨텐츠를 신물이 날 정도로 듣고 보고 읽고 자랐다.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고, 그 후까지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점. 왜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왜냐하면 에르메스와 페라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영토 야욕이 없는 국가 역시 없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이 명맥이 끊겼다가 세계 올림픽이 다시 시작된 시점 전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는 사람을 나는 지금껏 만나본 적이 없다. 잘 찾아보면 있겠지만 일단은 그렇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과 아돌프 히틀러. 그외에 스탈린, 무솔리니, 프랑코등 누구 누구 많다. 지역과 시대를 넓혀서 논하자면 아이고, 날새겄다. 어느 세월에! (학생: 저는 국사 과목을 좋아하지 않아요. 어두운 내용이 많고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춘부장: 괜찮아요 괜찮아요. 한 지역에서만 그런 게 아니랍니다. 어디든지, 국사만 놓고 보면 어디든지 한숨이 나온답니다. 어디든지요. ─ 설마 쟤가 나보다 많이 알지는 않겠지. 난 노인이고 쟨 애송인데 그러면 안되지 흐흠. 그런데 자꾸 꺼림직한 게 옷 입는 거 하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 노인은 술꾼 학생은 천재였으니까)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만천하에 행사하셨던, 그걸로만 보자면 신격화에 가까운 분들 정말 쑤두룩하다. 물론 지구와 사람이 타임머신이지만 지금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지, 어떤 걸로 봐서 어떻고 뭐라 뭐라? 지금이니까 신간 편헌 말씀하시는 거다. 그때로 돌아가서 산다면 아아아, 오오오 답 없다. 답 없어! 사람 목숨은 파리와 개미와 하루살이 목숨만도 못했으니까. 진보는 공짜가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그 언제든지 인간이 지구에 존재하는 이상 지구의 자전 방향에 대해서 불만 있는 사람이 많았다. 것도 매우. 게다가 힘과 황금은 그분들이 다 가졌다. 과거에는 그랬다. 인류의 문명이란 게 다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른 거다. 차마 세세히 들여다 보기가 겁날 만큼. 그 모두를 뜻하는 단어가 무엇이냐, 역사다. 그러니까 지금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과 아돌프 히틀러만. 나폴레옹과 아돌프 히틀러! 전자는 미술의 전성기는 물론 다른 예술계에서도 크나큰 호응을 얻었으나, 반면에 후자는 악명으로 첫손 꼽힌다. 그 중간에 뭐가 있냐 하면 바로 올림픽이 있다. 옛날 옛날에 멈췄다가 근대에 새로 시작된 올림픽. 올림픽이 나왔다고 약물이니 축구 올림픽이라는 피파의 비리라는 곁가지로 빠지지는 말자. 크고 작은 이권 다툼은 인간이 사는 세상인 이상 없을 수가 없으니까. 기원전 776년 또는 기원전 876년쯤에 처음 올림픽이 시작됐고, 명맥이 끊겼다가 1896년 아테네에서 올림픽이 다시 개최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세계 지도의 색상은 수없이 변했다. 대표적으로 예를 들자면 이렇다. 첫째, 스페인 영토에 있는 영국령 해외 영토인 지브롤터 국제 공항. 둘째, 영국 연방 국가 중에서 대표적으로 캐나다. 셋째 홍콩, 넷째 (남한 영토) 독도.
   첫째 <지브롤터 국제 공항>. 자치의회와 자치 정부가 설립되어 있고 EU에 가입되어 있다. 즉 속된 말로 성공한 알박기. 만년 후는 몰라도 지금은 엄연히 영국 땅이다.
   둘째 <영연방>. 그에 해당되는 여러 국가에서 하나의 예로서 캐나다는 법에 명시되어 있다. 영국 여왕을 어쩌고저쩌고. 그 조항의 삭제를 요구했다가 시기상조로 결론난 전례가 있다. 그 조항이 없는 대표적인 국가가 미국이다. 일명 식민지였다가 독립했고, 모종의 제국으로 불릴지도 모르는. 뉴스에서 보면 어른들은 안다. 외교적으로 국가의 수장이 가고 오고, 왕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가 있으니까, 영국의 황태자가 미국까지 와서 국가 수장을 만난다는. 또는 다른 쪽 수장이 어디를 방문해서 왕과 1대1로 마주보며 악수를 나누는 장면. 왕이 현존하는 나라에서야 그 나라 시민에게는 왕이지만, 왕이 현존하지 않는 나라의 사람에게 다른 나라의 왕은 단지 그냥 외국인일 뿐이다. 존중하지만 똑같은 사람. 신이 아닌 인간. 예우와 품위와 명성은 하늘과 땅 차이일 수 있으나 존엄성과 자존감은 엄밀히 따져서 동격이다. 사람 대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남자 대 남자로써 하는 말이 아니다. 태어나고 보니 어떻다는 유대감과 더불어 피라미드 도형에 대한 발상 자체가 지금 세상에서는 제한이 없다는 뜻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어디에 가거나 누구를 만나거나 사랑에 발목잡히거나 발목잡히지 않거나, 즉 자유로만 따진다면 그냥 그만그만하게 사는 게 정말 최고의 행복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화려한 삶은 일단 멋지다. 그러나 멋진 만큼 책임도 따르고, 소소한 행복은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비록 절반일지라도) 아름답다면 귀감이라 하고, 보통은 숙명, 불미스럽다면 비운이라고 한다. 우와 저처럼 되면 정말 좋겠다 그러다 진짜 그렇게 되었는데, 막상 살아보면 클라우드 나인의 삶은 놀랍도록 제한적일 수 있다는 것. 일반인의 자유를 헌납한 다음에 무대 위의 인생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누구나 아주 드물게 경험한다. 정말 정말 웃겨서 미칠 듯이 웃다 보면 안면 근육이 혼자 논다는 걸. 그게 직업인 사람도 있다. 때로는 드물게 억장이 무너져도, 가슴이 미어져도, 속에서 피눈물이 흘러도 웃어야 하는 웃겨야 하는 운명도 있을 수 있다는 것. 무조건 다람쥐 챗바퀴를 돌려야 하니까. 게임이 시작되면 당신은 웃어야 살 수 있고, 반드시 웃겨야만 살 수 있다. 그런데 그 게임이 인생이다? 오오, 그럴 수도 있겠다. 전진 전진 또 전진 항상 전진, 계속 전진 쉬지 않고 전진 막 전진, 앉으나 서나 전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진, 자도 전진 깨도 전진 꿈에서도 전진. 아 또 생각난다. 전진뭐라는 친구와의 우정이 있기 전에(전인가 후인가 헷갈림) 인터넷 채팅으로 전진뭐라는 숙녀의 이름이 웃기길래 딱 만났는데, 그랬는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수 있다는 점. 아아아 수증기 푸쉭! 멋드러진 진공청소기 박스를 딱 열어 보니 글쎄 그 안에는, 뭐야 이거 아 나 또 뭐야 이거, 커피포트가 들어 있더라? 뭐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보통 높은 자리라는 게 쉽지 않다. 남녀의 사랑이야 보통은 둘만 좋으면 그만이지만 다수의 이익이 공통적으로 만족된다는 건 어떻게 보면 그건 정말 꿈 같은 목표다. 잘 하면 잡을 것 같은데 간발의 차이로 잡히지 않는, 잡힐 듯 잡힐 듯 잡는 사람 약을 올리는, 짜증도 나겠으나 그러다 마침내 톰과 제리가 정 들게 되는, 그런 어떤 신기함과 놀라움과 경이로움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공동의 이익이라는 목표는 말이다. 경영학이 딴 게 아니라 그게 경영학이다. 하여간 남자 대 남자가 있으면 상사와 하급자의 개념은 어디서든 불가피하고 절실히 필요하기까지 한다. 차라리 서열이 불분명한 것보다 삼각형 구도가 안정적이라는 걸 우리 남자들은 잘 안다. 어릴 때부터 괜히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를 보는 게 아니니까. 신 밑에 왕, 왕 밑에 인간, 인간은 다시 신을 만들었다가 없앴다가 평가했다가 또는 나를 인간을 신격화했다가 아니면 채식주의자로 살다가 끝끝내 포기하고 미친듯이 소와 돼지와 닭과 칠면조와 참치를 막 날마다 미친 듯이 폭식하는 바로 인간! 인간은 간단히 말해서 한 남자와 한 여자. 그 남자와 여자는 플라토닉이 먼저일 수도 있고 육체적 사랑이 선행될 수도 있음. 헉! 밖에서 뼈 빠지게 돈을 버는 남자 위에 여자, 그 여자 위에 그레고르 잠자, 그레고르 잠자 위에는 다시 남자. 남자? 남자! 캬, 남자! 남자는 집에서 곤충학과 조류학을 공부하다 이쁜 우리 아가의 과학과 우주와 동화와 신화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무거운 짐까지 들어서 옮기다 어머나 또 출근 시간, 다시 뼈 빠지게 일하는 남자. 그래서 우리 남자들은 뻥과 거짓말과 립서비스와 아부와 농담과 장난과 허언증에 도가 트고, 그러므로 허풍 대회 출전을 벼를 수 밖에 없는 남자. 남자? 남자! 그처럼 교황도 교도들에게 교황이고 옛날 시대에나 교왕의 힘이 셌을 뿐, 도저히 식을 줄 모르는 인기는 오직 황금이시다. 그러나 지금도 교황 밑에 뭐 뭐, 서열은 튼튼하다. 옛날에는 신 밑에 인간, 바라건대 앞으로는 신 위에 인간 그와 같은 착상처럼. 
   셋째 <홍콩> 잘 아시다시피 영국령이었다가 중국에 반환됐고, 향후 언제까지 홍콩 정부의 독립을 유지하기로 약조됐다.
   넷째 <독도>. 넷째는 첫째-둘째-셋째와 달리 유명하지 않다. 그러나 속된 말로 알박기에 실패한 사례인 건 분명하다. 역시나 A지역에서는 정부에게만 유명하고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고 거의 100퍼센트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B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단 1명도 없이 100퍼센트 안다. 과거-현재-미래까지 100퍼센트로.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A와 B의 외교 관계? 딴 거 없다. 과장하자면, 그거 하나가 거의 유일하다. 그 문제로 조용하면 이때만큼 좋은 시절이 없다고 하며, 그 문제로 정치권이 요동치면 남극보다 더 급냉기에 들어간다. 그 땅은 많이들 잘 모르시다시피 역사적으로 국제법상으로 누구땅이라고 나는 정말 신물이 날 정도로 듣고 읽고 봤다. 그런데 일본은 독도가 자기땅이라고 한다. 근거 없이. 제2의 홍콩을 전쟁 패전(종료?) 직후 승전국 미국에 요청했다가 거절당했으니 제2의 홍콩은 옛날에 물 건너갔고, 세계2차대전 종료가 100년이 가까와 오니 일본 정부는 타국가의 영토인 독도를 자국 땅으로 이미 편입시켰고, 그처럼 명시적으로 학생들에게 교육을 한다. 이마저도 들쑥날쑥. 겉으로는 세계 평화, 좋다. 그런데 세계 지도상에 있는 무슨령 어디섬 아주 많은데, 그곳을 우리땅이라고 100년 1000년 우긴다고 가정해보자. 100년 1000년 후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겉으로는 세계 평화, 물밑에서는 야금야금. 꺼림직한 거 빼놓고는 다 좋은데 그 얘기라면 아주 신물이 나서 그런다. 한쪽에서는 사람 미치는 건데, 다른 한쪽에서는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고 껄끄러운 소식은 기피되며 관심도 없는 실정이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현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시점부터 지금까지 계속 있어온 역사이자 현실이니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반올림 1세기를 그랬는데, 앞으로의 전망? 그건 넌센스다. 국방백서에 넣다 뺐다 넣다 뺐다, 국방백서에 넣다 뺐다 넣다 뺐다,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가르치지 않았다, 지금은 13년 연속 등재중이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냉전 때처럼 싸우겠나 어쩌겠나, 명백히, 현재에 시행 가능한-조용한 침략의 한 방법이다. 더군다나 한쪽에서는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사과를 미국에게 요구한다. 실제 매해 8월 15일이 되면 그런다. 세계에서 유일한 피폭 국가라고. 원인과 선전포고의 유무와 침략과 종전에 대한 반성과 자성? 찾아볼 수가 없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일까? 왜냐하면 최고의 인기 스타는 엄중히도 극우파이기 때문이다. 또는 극우파가 태반일 수도 있고. 지식인들은 냉전 시대나 지금이나 돈과 인기만 쫓는 동물이 되버린 것일까? 모르겠다. 돌아가는 걸 봐서는 그런 것 같다. 냉전 시대야 시대가 그랬다 쳐도, 지금도 설마? 역시나다! 동시에 루돌프 아 아돌프 히틀러는 길이길이 헌화 받고 기도 받고 영을 모신다. 문화라는데 그걸 그냥 문화로만 봐야할지 난 도무지 모르겠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과 유명인과 거장들은 모두 입 닫았다. 벙어리가 따로 없고 귀머거리인지조차 의심스럽다. 관심이 없다는데 할 말이 없는 거지. 과거인데 어쩌라고, 그건가? 그건 과거라 쳐도 제2차 세계대전의 발상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거북한 점 빼놓고는 다 좋은데, 다윗과 골리앗도 아니고 헤비급 옆에 있는 라이트플라이급 스파링파트너는 정말 지겹고, 신물이 나고, 울분도 터지고, 인생 내내 견디고 참고 버텨야 한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만 참을성이 아니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이분 저분 그분들이 모두 까무러치고 일어날 일인데, 정작 멀쩡히 살아있는 이 시대의 양심들과 인기와 덕망과 자본을 챙기시는 유명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만약 천벌이라는 게 있다면 사후에 값을 치러야 마땅할 것이다. 일반 시민들조차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당연한 걸 당연하다고 말하면 안되는 시대이기 때문일까? 지금이 아직도 냉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조용한 냉전? A에 사는 일반인 입장은 그렇다. 관심 자체가 없다. 문제가 있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다. 정말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 거의 항상 일반인이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때에 따라 대표자 역시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 거의 100%. 지구 반대편에 존속하는 먼지 만큼도 관심이 없다. 일단 문화적으로 그렇다. 식사할 때 금기해야 하는 주제는 단연 정치니까. 뭐가 문제입니까 우리는 친구입니다, 아무 문제 없다는 거다. 맞는 말이다. 일반 시민이야 인지상정 말과 마음을 나눠보면 아무 문제 없다. 문제는 정부와 뉴스가 만드니까. 그러나 B에 사는 일반인 얘기는 그렇지 않다. 절대 그렇지 않다. 나, 바로 나! 태어나서 지금까지 지겹도록 듣고 읽고 봤다. <독도>는 우리네 땅이라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뭘 잘못 아시는 것 아니냐구요? 천만에요. 전혀 그렇지 않답니다. 원리를 살펴보면 된다. 페라리와 에르메스를 싫어할 이유가 없는 인간처럼 넓은 땅과 풍요와 안락과 성대함을 싫어하는 정부는 정부가 아니니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찬미했던 그 나라는 돈도 있을 만큼 있고, 땅도 넓을 만큼 넓고, 문화적 우수성은 물론 규모만이 아닌 그 뭘로 따져도 세계 상위 1퍼센트다. 아니 그런데 왜? 달랑 사람 몇 명 상주하는 콩알 만한 섬에 그 무슨 비밀이 있다고?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면 가정을 해 보면 된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속담처럼 담장으로 넘어온 감을 우리 꺼라고 했다가 남의 꺼라고 했다가, 일관성도 포기했고 줏대도 피도 눈물도 없을지라도 계속 주장하면 미래 세대는 그게 진짜인 줄 알 수도 있다. 그 담장은 누가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자,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렇다면, 그 다음은 없을 수가 없다. 어디에서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가 누구에게는 어디인데 누구에게는 거기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다 정치적으로 잠잠해지면 양측에서 병 주고 약 주고. (한쪽의) 민중들만 일상적인 수증기를 감내할 수 밖에. 그것도 일평생. 정치가 무슨 내수용이었다가 손바닥 뒤집 듯이 국제용도 되고 막 그러는 것만 같다. 시민을 대변하는 정부가 아니라 정부 따로 시민 따로다. 제일 윗선 극소수의 참으로 대인배다운 집요함 때문에 어느 100퍼센트는 아주 돌아버리겠다. 미쳐버리겠다. 해도 해도 너무 한다. 해도 해도 너무 했는데 앞으로는?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그 어느 낭설이 대체 왜 생겼겠나. 세계에서 일본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하는 나라는 하나 밖에 없다고. 아 정말 너무나도 답답한 일이다. 유치원에도 규칙이 있고, 동네 꼬마들도 지킬 건 지킨다. 껄그러운 거 빼고는 다 좋은데 말이다. 다스 베이더에게 사과를? 예를 들어보자. 왕호는 엄청 기니까 생략하고 지금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윈저>가 조선에도 있었다.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여왕 명성황후를 일본의 한 병사가 장칼로 무참히 베어 죽인 일이 있다. 현재의 영국 여왕에 해당하는 어느 왕국의 여왕을. 그래서 그곳은 현재 프랑스나 미국처럼 왕이 없다. 그 칼을 모신 성전은 물론 코 무덤과 귀 무덤 등등도 어디에는 있다. 물론 국가를 위해 희생하셨고, 따라서 매년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다수로부터 헌화와 절과 예우를 받는 다스 베이더 몇몇 분들에 관한 성전도 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그러면 그 일의 사과를 요구하는 게 맞을까 맞지 않을까? 맞지 않다. 1900년 이전이고, 사과를 요구한다고 받겠나? 순진한 발상. 그런데 문제는 그런 역사가 대충 반세기다. 그 반세기 동안의 차마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는 참상을 가지고 일개 개인은 사과를 요구하고 싶지 않다. <와 너무 많네, 그냥 덮자>다. 인생을 살아 보니 사과란 형식에 불과할 수도 있고, 세상을 겪어 보니 그게 그렇게 큰 의미는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물론 개인적 의견이다. 그래도 남자들과 으쌰으쌰 우정을 나눈 경험을 통틀어서 봤을 때 사과는 귀찮은 일인 경우가 많다. 의미? 없다! 절대 없다. 의미는 있을 수 있는데 귀찮다는 말이다. 술 한잔 마시고 털면 되지 가시내들처럼 그 무슨. 왜 남자들이 살면서 단 한번도 친구와 사랑에 대해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살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냥 그러더라. 의미를 찾는 건 다른 분들이 하면 되고, 나는 다른 의미 부여에 곧 내 할 일에 집중하면 그만이다. 바로 내 방식에 말이다. 당연히 그건 개인사고 저건 역사니까 다른 얘기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껄끄러운 인사말이 반복되면 피곤한 것 역시 사실이다. 아무튼, 제2차 세계대전의 침략국 즉 전범국가인데 다스 베이더측에 손해를 입혔기 때문에 사과를 받아야 한다? 개인이 아니라 개인이 많이 모여서 으쌰으쌰?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한다? 그게 대체.... 허허허! 껄그러운 거 빼고는 다 좋은데 말이다. 그러나 이쯤 되면 둘 중 하나다. 첫째 입국금지, 둘째 입국하든 말든 먼지 만큼 일고의 관심도 가치도 없는 존재. 이미 블랙리스트에 오를 가망성이 먼지 만큼은 존재하는 거, 나는 어차피 엠마누엘 칸트처럼 달라스에 평생 살면 된다. 뿐더러 돈도 없다. 무슨 먼지 만한 존재도 못되는데 수입불허에 입국금지에 상영금지에다 뭐 대단하다고 금서로 지정되겠나. 그러든 아니든 시골에서 조용히 살면 되지 뭐가 걱정인가. 큰 재주는 없어도,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주제 파악은 좀 한다. 속 편허게 변방에 머물러야지 괜히 어디 기웃 저기 기웃 해 봐야 물만 흐린다. 나라고 평균 연령 깎아 먹으면 기분 좋겠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뒤통수 먼저 긁적거릴 잔머리를? 가관이다. 꽃 들고 쫓아다니며 쫄망쫄망 선물 들고 여기서 저기서 거기서 기다리는 성격이 아닌 이상 나 싫다는 데 엄한 멘트 날릴 수는 없는 법이다. 하긴 거절할지라도 그런 제의 들으면 여자들도 기분은 좋겠다. 들어본 여자와 들어보지 않은 여자로 나뉠 테니까. 아가씨 아름답소, 나의 헌팅을 받아주오! 왜냐하면 남자인 나도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내 부인) 늬가 데리고 살래? 인류는 지금까지 그랬다. 신 밑에 왕, 왕도 국왕과 교왕과 통치권자, 그 밑에 사람. 사람도 무신론자와 교도와 있든 없든 관심 없는 사람과 교주도 여기에 속하나, 아무튼 사람도 쉽게 말해 옛날에 간혹 지금도 9단계. 상상 상중 상하─중상 중중 중하─하상 하중 하하. 일명 신분. 그 체계만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에 대해서도 분파는 수없이 많고, 신조차 셀 수가 없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런데 속으로는 이미 옛날부터 신 위에 사람이 있었다. 괜히 피라미드 역발상 아이디어가 나온 게 아니다. 겉과 속이 다르단 말이다. 옆 나라가 그렇다. 제일 친하게 지내야 할 나라가 그 언제나 겉과 속이 다르다. 낚시꾼들은 안다. 잘 안다. 자주 찾는 자리에서 가슴이 뛰는 깜작 놀랄 만한 대물을 잡을 뻔 하다 놓쳤다면, 반드시 그 자리를 다시 찾게 된다는 것을. 꼭 그러고 싶다는 것을. 한 단위 바깥에서 먼 과거의 여왕이 잘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어디에 불상사가 발생하면 박수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이다. 즉 인간의 본성에 위배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 속에는 천사도 악마도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관된 이야기니까 각 나라별 비하 얘기를 이어 갈까? 뭐 이렇게 된 거 가 보자. 못할 게 뭔가. 자, 시작한다.
   <토끼> 급하다. 바쁘다. 금새 좋았다가 금새 싫었다가 금새 사랑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헐뜻는 일도 다반사다. 열은 좋은데 대체로 열만 좋다. 주방기구로도 비유된다. 끓었다 식었다 끓었다 식었다. 솔직하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음(그걸 좋게 보면 쿨한 건데, 나쁘게 보면 질서가 아쉽고 단합이 어렵거나 주관이 강하고 제멋대로의 소지가 있음) 그래도 역시 인심은 후하다. 멍멍멍 개다. 아니 닭인가. 그런데 유럽 일부에서 말을 먹는 사례처럼 일부 개를 먹는 구시대 문화 있음. 낙지도 먹음. 돼지 발도 먹음. 닭 발도 먹음. 소의 꼬리도 먹고 소의 피도 먹음. 소의 피? 두부나 달걀찜처럼 소의 피를 굳혀서 스프에 첨가하여 먹는 식. 너무 짧나. 순박하고 열정도 있고 시원시원하다. 너무 짧다. 강아지라... 바깥에서 보면 야만적인데 안에서도 그렇고 아직은 (일부) 구습. 진짜냐고? 사실이다! 구습? 구-구습은 토끼, 꿩, 자라, 그만 그만! 아무튼 모두 사실이다. 숨길 게 뭔가 사실인데. 쉬쉬할 거 없다. 진실이니까. 더불어 구시대에서 신시대로 넘어오는 간격이 매우 짧았으니까 그런 관습이 남았을 수도 있지만 핑계가 될 수도 없고, 엄정한 현실일 뿐 픽션도 연극도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토끼가 모든 개를 먹는다는 건 아니고. 하여간 동네의 구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구태의연함이 싫다면 충분히 밝힐 수 있는 일이고, 자진 납세하겠다는데 문제될 게 뭐겠나. 자성이 먼저지 하다 하다 시기를 놓치면 뒷북 치고 싶어도 못칠 수도 있다. 모양새가 그렇다. 일단 안에서 먼저 내 흠을 꺼내는 게 순서다. 많은 경우 그게 어려우니까 그 반대가 당연시되는 세상이지만. 완전하든 상대적이든 내 잘못을 들추는 게 차라리 낫지 나 외의 불합리를 들추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없다. 너무나도 신나니까 거리에서 발가벗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인가 아닌가, 그에 대한 추정은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 보면 된다. 돈과 인기가 좋지 돈과 인기를 베팅했다가 두 마리 토끼도 뭐도 다 놓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석에서나 소극적으로 의견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대외적으로 나 외의 불합리를 들추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절대 없다. 서로 미루고 외면하며 넘어가고 그렇게 달콤함만 추구하다가는 지구는 거꾸로 돌아갈 수도 있다. 누군가는 총대를 멜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백경에 나왔던 식인종이 여관에 터벅터벅 들어올 때 뭘 들고 들어왔나? 누군가는 단순히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허먼 멜빌의 백경과 코엘 매카시의 카운슬러를 떠올릴 수도 있다. 메두사의 머리를, 커피포트의 뚜껑만 떼서 드는 것처럼 들었을 때 그걸 보면 어떻게 되더라 라는 신화 속 이야기. 지금도 있다. 많다. 대부분 내 삶을 살아서 그렇지 그에 상응하는 강렬한, 그러나 무뎌진 부조리와 딜레마와 모순들 조금씩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어디에나 존재한다. 어디는 그 난제가 자연재해일 수 있고, 제도나 인습이나 인위적인 환경일 수도 있다. 일단 의식주만 놓고 봐도 얘기 길어진다. 범위를 좁히면 영화에서 닭싸움과 새 점이 나온다. 그런데 그 뿐이겠나 싸움, 상업, 음식의 대상에 대해서 지식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시는 척척박사님께서는 오히려 거꾸로 없는 걸 꼼꼼히 지적해주실 것이다. 알면서 모른 체 하고 싶고, 쉬쉬하며,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한 하늘 아래 어쩔 수 없이 우리와 공존하는 현실일 뿐. 어쩜 그럴 수 밖에 없는. 영화에도 악역이란 게 있듯이 누군가,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천사의 임무는 맡아야 한다. 더럽고, 힘들고, 어렵고, 재미없고, 억울하고 위험하기도 하며, 표도 안나고, 보상은 적고, 보장된 돈과 인기와 호사와 행복은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보람도 적고, 바뀌지도 않고, 오히려 구박만 받을 수도 있는 일. 꽝은 무수한데 비해 1등은 독보적으로 하나인 건 무엇일까? 복권이다! 그러면 그걸 뒤집으면 된다.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일, 총대 메고 어쩔 수 없이 누군가는 해야 한다. 이 세상은 그 비율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 해 볼 수 있다. 한번쯤이라도. 직장 상사가 악마 같으면 대체 얼마나 악마 같겠나. 드라마에 나오는 얘기는 대체로 과장. 왜냐하면 작품은 극적이어야 하기 때문. 악역을 상사라고 가정하고 아아 그 인간 히스테리 아 뚜껑 열려, 그 인간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니, 넉살이 좋은 거야 눈치가 없는 거야, 지가 무슨 저능아야 정신 박약이야 지 돌아이인 줄 우리가 뭐 그거까지 알아줘야 해? 아,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정말 아니다. 마침내 한 사람이 빡 돌아서 휙 결심하고 딱 나간다. 상사한테. 이게 뭡니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건 정말 아니지 않습니까, 뭐라 뭐라 입에서는 화염방사기가 눈에서는 레이저가 나간다! 그런데 결과는 효과음 또 효과음!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해? 원래대로라면 전부 다 같이 일어서서 으쌰으쌰해야 하는데, 그와 정반대네? 왜 나 혼자 밖에 없어! 그게 뭐야. 눈치 없는 인간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분이었더라, 그럴 수도 있다. 정의의 사도 흉내내는 건 애들 전문이고, 어른은 그럴 수 없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른은 그럴 수 없다. 어두운 시대상일 때야 못했다면 변명이나 가능하지만 지금은 그런 변명도 할 수 없는 세상이니까. 용돈은 아빠한테 타고 왜 그런지는 엄마한테 물어보자. 어차피 아빠한테 물어봐도 엄마한테 여쭤보라고 하실 테니까. 엄마는 천재, 귀재, 수재이자 재간둥이로도 모자라 아마도 대천사일 테니까 말이다. 알렉스 퍼거슨경이 그랬다. '제가 봤을 때 월드 클래스는 단 두 명뿐입니다. 메시와 호나우두. 나머지는 모두 잠깐 월드 클래스를 연출할 뿐입니다.' 완벽하게 맞는 말이다. 언제부터 언제까지랄지 업계 소식은 잘 모르지만 행사성 경기가 끝난 다음 서로 내가 옷을 바꿔 입겠다고 상대편 선수끼리 치열하게 다투는 대상은 그 2명이 맞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왜 호들갑과 찬사는 끊이지 않는 것일까? 왜냐하면 오락산업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게 뭘까? 돈이다, 경제! 경제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제가 있는 반면 지하 경제도 있다. 예를 들면 코카인. 인류는 한번 어떤 식물의 쾌락을 알게 된 이상 알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절대 못 돌아간다. 그러면 방법은 뭘까? 나름의 기준을 개선하는 것뿐. 그런데 그게 한번에 또 쉽게 되겠나.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도 안된다.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합심하고 얘기를 하고 그럴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생각을 하는 게 먼저다. 그게 최선이다. 그러나 생각, 생각을 한다는 게 어디 쉽던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기업의 제품 때문에 수많은 소비자가 하늘나라로 떠난 전례가 있을 것이다. 여기 저기 어디, 그렇게.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생각이란 게 균형적이고 상당히 이성적이기를 바란다는 건, 그럴 것이라고 무구하게 믿는다는 건 너무 애들 같은 생각이다. 때문에 하나의 말이 나오면 있던 생각은 흔들리고, 없던 생각은 표류하게 된다는 것이다. 꼭 사이렌이라서 대중의 귀가 얇은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생각을 하며 사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뜻이다. 생각하는 인간이란 조각상을 괜히 만든 게 아니란 말이다. 수많은 영혼들은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브랜드는 굳건함으로 모자라 오히려 사과까지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보수적이네 선수들이 무슨 애도 아니고, 차라리 웨딩드레스 입고 경기를 해라 뭐라 뭐라. 한쪽에서는 기쁨과 환희와 호사로 즐거운 것으로도 모자라 불난을 즐기지만 한쪽에서는 왜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야 하는지 이해를 못한다. 아니 정말 그렇지 않소? 그러게 말이다. 그렇다고 채식만 할 수도 없고, 그게 완벽한 정답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급기야 지글지글 지글지글 고기 굽는 환청이 들린다. 그러니 이만 토끼에서 개구라에게 바톤을 넘겨야겠다. 
   <개구리> 어디로 튈 줄 모른다. 정작 뛰어야 하는데 안 뛰고, 뛰지 말아야 하는데 뛰며, 엄한 데로 뛰기도 한다. 중요한 돈 계산을 해야 하는데 자고 있다. 꿈나라에서 마왕과 싸운다나? 웃고 떠들고 신나고 분위기 좋다가 차례가 와서 재밌는 얘기를 해야 하는데 당사자는 운다. 잠깐 한눈 팔았더니 그 친구는 다시 화낸다. 왜 관심을 가져주지 않냐고. 그러다 뜬금없이 싸운다. 그런데 그 싸움은 사랑 싸움으로 변한다. 그러다 백년해로할 수도 있고 물론 바람날 수도 있다. 그러다 틈틈히 밑도 끝도 없이 따진다. 호박NC 갈 꺼냐 신비NC에 갈 거냐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다 예술가다. 숟가락을 아예 들고 다니며 발상 자체가 자유로우니 예술가일 수 밖에 없음.
   <헤비메탈 롹커> 나이 들지 않아도 나이 들어도 인생 직진이다. 철들지 않는다. 철들어서는 안된다. 안되는 거는 안되는 거다.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한다. 남자는 나이가 들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온다. 숟그락을 들 수만 있으면, 방 문턱을 넘을 수만 있다면 숙녀에게 자상하다. 잡은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잠깐만... 뭔가가 들림... 그분이 오셨음... 네? 왜 잡은 물로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냐구요? 원래 그렇다. 나만 그런 거 아님. 헤밍웨이도 그랬음. 피카소도 그랬음. 슈베르트도 똑같음. 셰익스피어라고 아마도 다를 것 같지는 않음. 왜냐하면 여자를 모르면, 일평생 한 여자만 알았다면 명작은 탄생할 수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그 질문은 이쪽이 아니라 내 남자한테, 세상 남자들에게 물어야 함. 아니 대체 그게 뭔 소리냐, 잡은 다음에 먹이를 주면 되지 않냐,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계속 잘 해주면 되지 안될 게 뭔가? (고개를 설레설레 검지 설레설레) 안된다. 그럴 수는 없다. 밀림의 왕자인 사자가 촐삭맞게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방방, 한 달 내내 미친듯이 날뛰는 거 봤나! 그처럼 쉬지 않고 날뛰다간 정작 좋은 기회가 나타나면 힘 못 쓴다. 그렇게 되면 나이트클럽의 웨이터인 미스터 에르메스가 되고,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다. 임금님은 돈이나 많지. 먹이감을 눈 앞에서 놓치면 돈도 명예도 인기도 풍요도 다 날아간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볼 정도면 그나마 고수게? 하루 종일 한 달 일 년 내내 평생 날뛰는 야수, 그건 돌아이다. 먹이감을 잡을 때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먹이감을 잡을 때만. 그건 한마디로 생사의 문제니까. 개 팔짜가 상 팔짜라고 개처럼 베짱이처럼 인생은 미완성이라면서 내내 핑핑 놀다가, 절호의 찬스를 살리는 것, 다른 게 아니라 그게 바로 로맨티스트다. 물고기를 잡을 때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 그런데 잡고 난 다음에는 과연 물로기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라는 주제로 동기부여 강연회를 열어야 함. 왜냐하면 물고기는 이미 잡았으므로 새롭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도전해야 하니까. 진짜로 잘 하면 인기와 돈은 물론 기쁨과 새로운 황금 물고기까지 만날 수 있으니까. 어찌 됐든 물고기를 잡은 다음은 힘 썼으니 어? 고생했으니 어? 쉬어야 한다. 푹 휴식을 취해야 함. 물론 애초에 물고기를 잡고 나서 먹이를 줄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은 잘해줄께 사랑할께 아낄께, 그러면서 마음을 녹여주고 기분을 띄워주며 아이스크림도 먹고 반지를 주며 분위기를 슥 잡고서 고백했겠지. 그러나 이미 전력 질주는 끝났는데? 메달 따든 못 따든 경기 끝났는데 경기장 바깥에서 또 경기를 하라고? 아니다. 그건 아니다. 대회가 끝났으면 휴가를 가고 친구도 만나고 책도 봐야 한다. 그게 인생이니까. 원래 세상이 그렇다. 뿐인가? 물고기도 속으로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말은 사랑한다고 하지만 말이다. 또 있다. 호랑이가 배고프다고 풀 뜯어먹더냐. 단지 개는 간혹 풀을 뜯어먹는다. 그렇다고 여자는 물고기 나는 개란 말이 아님. 그게 다 공주님께서 아름답고 착하고 고결하기 때문.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얼마나 그대가 사랑스러웠으면 당시 주군께서 그처럼 뜬구름 잡는 명대사를 속삭였겠어요? 딸랑딸랑! 그러니까 지금은 둘 중 하나겠죠. 첫째 그때 뭔 얘길 했는지 통 기억이 안난다거나, 둘째 사랑의 고백은 기억하긴 하는데 잡은 물고기에게 밥을 주지 않는 것. 첫눈에 반했으니까, 애초에 운명이었으니까, 딸랑딸랑, 처음 만나 홀딱 빠졌는데 뭔 얘긴들 못했겠어요! 아니,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잡은 물고기한테 밥을 주지 않냐구요? 왜, 왜냐, 왜일까, 왜냐하면 잠깐 슬럼프였기 때문입니다. 단지 잠시 주춤했을 뿐, 이제 다시 하트 뿅뿅 그대는 사랑받을 꺼에요. 딸랑딸랑! 걱정마세요. 걱정을 마시라니깐요. 딸랑딸랑! 연애할 때야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바치겠소 어? 으쌰으쌰! 그런 다음 나중에? 비리비리, 시무룩 끙끙! 사냥이 그렇다. 관찰과 집중. 스포츠도 그렇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스트라이커는 금새 퍼진다. 힘 빠져서 은퇴식도 못하고 쫓겨날지도 모른다. 엉덩이 뻥 차여서. 전문가 뺨 치는 혜안과 아르고스의 안목을 지닌 관객께서 언제까지 기다려주실 만큼 한가하지 않음. 승부의 세계는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참지 못하고 외치신다. 당장 한말씀 하신다. 야 등번호 몇 번, 너 그래 너 너 말야 들려 안 들려 어? 고무신 거꾸로 신은 옛 애인 생각하냐 어? 이, 이, 어? 이 선수야! 정신 못 차리지? 어? 그렇지? 잘한다 잘해. 너는 자세부터가 틀렸어. 좋게 가서 유니폼에 광고 된 거 그래 들리긴 들리구만 그래 그 회사 맥주나 팔아라. 뭐 이미 그럴 생각이었다고? 몸은 둔한데 눈치는 빠르군. 그건 마음에 든다. 그래도 실력은 너무 아쉽다. 늬가 선수면 난 선수 할아버지다. 야 얘들아, 도대체 쟤 누가 영입했어, 어? 라~고 하신다. 바로 그렇게. 그 뿐만이 아니다. 선수 교체 명단엔 쟁쟁한 새내기와 걸출한 노장들 즐비하다. 물고기를 잡기 직전은 기회고, 물고기를 잡은 다음은 평안이다. 물고기를 잡기 직전은 인상 쓰고, 잡은 다음은 요리할 궁리를 해야 한다. 물론 (나 같은) 진정한 낚시꾼은 방생도 하긴 하지만, 그건 이별이자 파혼이니까 자세히 논하지는 말자. 물고기를 잡기 직전은 모든 정력을 집중, 잡은 다음은 한눈 팔기. 잡기 직전은 왕성한 원기, 잡고 나서는 아 피곤해. 잡기 직전은 혼신의 노력을 다하기, 잡고 나서는 귀여운 토끼 예쁜 요정 요염한 고양이를 상상하기. 원리가, 원리가 그럴 뿐이다. 그러나 당신의 남자는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책임은 못진다. 그걸 내가 왜 책임져야 하나. 복채라도 두둑이 내놓은 것도 아니면서. 거 왜 너무 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소? 안 그렇수? 내 남자 바람기를 뭣땀시 엄한 데다 따지냔 말이요. 와 그라노? 혹시 집이도 그라요? 아니제 그건 아니제, 그라믄 안되제. 홍조를 띈 거 보니 여전히 부군을 사랑하시네. 와, 멋지다. 아름답다. 대단하다. 너무 애틋해. 난 다변, 그대는 다정, 그이만 과묵이군 그래. 허허허, 아니면 음흉? 어쨌든 난 흑심 같은 거 없으니까 안심하시고. 그래도 보아 허니 그 남자는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할 것이오. 믿어도 좋소. 예언이란 말이오. 허허허, 허허허허허! 아가씨의 오빠는 잡은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이란 말이오. 허허허, 허허허허허! 아 나 이거 정말 괜히 물고기 타령 때문에 얘기가 길어졌음. 다시 가자. 가는 여자 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의무방어전, (혹시라도) 저기서는 패자부활전.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다. 즉 꼬리를 흔들 때와 감출 때를 안다. 그런데 첫 끗발이 개-끗발인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도 열이 좋다. 그러다 나이가 든다. 계속 든다. 배가 나온다. 배가 많이 나왔다. 팔도 짧아졌다. 뭐야 올챙이야 외계인이야? 이런, 젠장! 비켜 비켜 비키란 말이야, 걸리적 거리지 말고 비키라고 어 알아들어? 어? 너 뭐야? 너 뭐냐고. 그런데 거울을 보는 것 같은 존재와 마주친다. 완전 판박이다. 바빠진다. 견적을 내야 하니까. 때로는 이쪽 숫자와 저쪽 숫자를 세어보기도 한다. 간혹 밖에서 따로 바텐더를 만나야 직성이 풀리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저번에 왜 그 허접하고 꺼벙한 녀석을 첫손 꼽았냐며 따져야 하니까. 그걸로도 모자라 아예 술집을 사버리는 일, 구단을 통재로 인수하는 일, 상상이 아니라 그저 일상이다.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린다. 여자를 다루는 기술에 최적화된 여자가 오빠라고 불러도, 그 우스꽝스런 이론에 중간쯤 호응하는 여자가 오빠라고 불러도, 그 얼마나 부질없는(?) 환상에 잘 부합하지 않는 여자가 오빠라고 불러도.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린다. 포기도 모르고 한계도 없고 누구나 인기 스타다.
   <고양이> 겉과 속이 다른 경우도 있다. 겉은 천동설 속은 지동설. (허나 달리 보면 이건 장점도 됨. 왜냐하면 겉과 속이 같은 경우, 인사도 안 받아주거나 안 보이는 데서 감정 소모에 힘쓰는 경우도 있기 때문) 속마음 안에 또 속마음이 있고, 다시 그 속마음을 열면 봉투가 있다. 물론 봉투를 열면 열쇠가 있다. 열쇠로 코인락커를 열면 지도가 있다. 보물지도인지 뭔지는 몰라도 거기에 찾아가서 최고급 VIP 카드를 발견한다. 그 카드를 가지고 클럽에 간다. 클럽에 가서 친구를 만나고 우정을 키우다가 단짝이 된다. 그런데 친교를 이어가다가 어느 날 알게 된다. 나는 친구한테 90퍼센트 열었는데 친구는 10퍼센트였다는 걸. 친구 맞나? 물론 과장이다. 그래도 어쨌든 믿을 수가 없다. 참말? 없다. 다 빈말이고 다 예의다. 너무 깍듯하다. 과도하게 친절하다. 우직하고 정확하고 조용함. 질서 있고 규칙을 잘 지킴. 여간, 여간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음. 대충이란 없음. 엄격에 준법에 완벽! 누구나, 독일은 소크라테스 일본은 예스맨. 사생활은 자유이자 존중이지만 공적이라면 다름. 극장에서 영화가 최고건 최하건 끝맺음자막 다음에 화면이 꺼진 다음에 스탠딩. 독일인과 매우 비슷한 반면 대비되는 점이 많음. 독일은 기차 연착 많지만, 일본은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100% 완벽. 독일인이 놀랍도록 이성적인데 반해서 이쪽은 분란 자체를 싫어하거나 있어도 멀리함. 보이지 않는 상하관계 뚜렷. 사람 대 사람은 개인적이지만 사람 대 사회는 절대적으로 숲이 우선. 시위가 없는 걸로 세계 최고. 유럽과 아메리카 시위 정도가 아니라 바로 옆만 봐도 시위의 나라라고 까무러침. (일장일단 있음. 시위 필요 없도록 이상적이면 좋은데, 그게 아니면 시위 해도 효과는 미지수에 그외의 옵션 애매함) 문화적으로 개인보다 조직, 수평보다 수직, 여자보다 남자 곧 삼각형 구도가 확실함. 남자와 권력자에게 유리. (군사적으로 보면 역사적으로 로마제국과 현재의 해군이 발달한 영국 외에 공룡들과 잠룡들이 많지만, 문화와 특징으로만 본다면 일본과 독일이 최적의 조건) 인도와 영국보다 약한(?) 신분제. 무사 문화. 불가피한 불미는 숨기는 게 미덕. 가령 다스 베이더 행적이랄지 성형외과의 위치, 숙녀가 흡연하는 모습은 부끄러워요. 로버트 같은 정확함과 천사 같은 배려에 대한 그늘이 있을 수도 있음.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배울 점이 훨씬 많음! 자세한 수치는 찾아보지 않았고 전후좌우 사정은 있겠으나 듣기로는, 위증 사례만 해도 어디에 비해 반틈이 아니라 무려 뒷자리에서 0이 하나 빠진다고 함. 아무튼 그러니까 고양이 또는 여우. 그러나 가면을 벗으면 닭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 결론은 친해지기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친해지면 평생 갈 수 있다.
   <곰> 대륙적 기질, 안되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다. 통이 크다. 그래도 대인배다. 정이 많음. 가식적이지 않음. 불의를 보면 못참음. 호탕함. 찡그렸다 풀어졌따 웃을 락 말 락 했다가 다시 화냈다가, 끝은 해피엔딩이다. 웃는다. (지식이 딸려서 간소히 적은 게 아님. 절대 아님)
   <베짱이> 시간 개념. 세계적으로 문화적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중간은 있다. 예를 들어 1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어, 늦을 수도 있다. 피치 못하게 불의를 못 참거나 무언가에 휘말릴 수도 있고 핑계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5분 전이든 후든 만나야 한다. 10분 늦은 건 괜찮다. 15분... 이해 한다. 그러나 더 늦을 수도 있다. 20분 25분 기다리면 얼굴이 어두워지고, 30분 지나면 뚜껑이 열리고, 1시간 오오 2시간 기다려도 애타게 기다려도 오지 않길래 우정은 끝나고 사랑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애교에 해당하는 곳도 있다.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또 친한 사이에 해당하고 뭐 그런 게 있겠지만 그걸로 특화된 곳도 있다. 마세라티 행사에 누군가 가 봤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무리 기다려도, 6시간 기다려도 시작하지 않길래 토라져서 돌아왔다는 사람도 있다. 마세라티식을 몰랐던 거지. 그래도 잘생겼으면 용서된다. 여기도 닭? 개? 오리? 어찌 되었든 분명 지역 정서라는 게 있긴 하지만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고, 생각은 다양하며, 때와 장소와 시간에 따라 바뀜. 심리학도 있고 본능도 있음. 현지 입장만 놓고 보면 위 내용이 (대체로) 당연하고, 뭐한 부분은 나중 개선될 여지가 있음. 뭐든 보기 나름, 표현하기 나름, 이해하기 나름. 사람은 사람이니까 다른 점 빼고는 다 똑같음. 세계가 그렇다. A와 B의 기준선 자체가 다르다. A에서는 환상적─마술적─세계적이란 수식어는 겨우 졸작을 면하고 악평을 피했다는 뜻인데 반해, B에서는 부정적 평은 거의 드물고 대부분 긍정 일색. A에서는 중간이 귀하고 표현이 실제보다 주가지수처럼 선행되고 수다처럼 과장되는 관성이 당연한데, B에서는 기준선 자체가 내려가서 부정1에 긍정9다. 절대 긍정이 기본이고, 기본이 절대 긍정이다. 곧 부정 1은 예의에 어긋남에 가깝고, 그러므로 부정1이 무엇이건 터부시될 소지가 다분할 가능성은 잔존한다. 하지만 고전음악의 재연이 아닌 초연에서 반응이 거북했던 사례가 꽤 있었듯이 아마데우스홀에서 어설픔은 절대 통하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니까. 거긴 중간이 없을 것이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도무지 중간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같이 본 친구는 재밌다는데 난 잤다? 푹 잤다? 중간은 어렵다. 어쩌면 제일 어려운 게 중간이다. 망하거나 흥하기보다 더 어려운 게 중간이라고. 그러니까 관객의 기립박수 아니면 공연자의 식은땀과 눈물과 콧물과 비탄 정도? 좋아서 광란하거나 형편없어서 야유하는 공연 문화에서 쓴 맛을 많이 봤던, '고작'에 실망하고 '기껏'에 절망했던 예술가라면 지금 당장 어디로 가시라! 손만 까딱 해도 입만 뻥끗 해도 박수는 기본이고, 탄성은 예의에 덤으로 열성팬까지 형성되는 행운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청순하게 마음을 놓으면 곤란함. 1차 성공에 흥이 북돋아 음반 발매에 들어가는 거냐, 현재 분위기 괜찮다 검토하자 뭐 어쩐다, 라고 하길래 딱 믿고 기다렸다가 그때가 언제라고 아직도 기다리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대장부까지는 아니겠지만, 제 앞가림하고 신수 훤한 젊은이가 어쨌다더라? 완곡한 탈락 결과를 못 알아듣고 바보처럼 여전히 채용 소식을 기다린다는 투정, 들린다. 로맨티스트의 부드러운 거절에 여태 떨리는 감정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미련한 사랑을 못 잊는 사연, 전해질 것이다. 허나 가끔은 YES or NO! 차라리 개방적인 연애와 달콤한 풋사랑이 인상적이었다는 지인의 아련한 회상, 기억난다. 문화가 그렇다. 예술도 그렇다. 괜히 사극에서 그런 게 아님. 민중이 글을 깨우친다? 말도 안되는 일일 테지. 전 세계 언어는 13개 어족으로 나뉘지만 대체로 탄생의 기원이 불분명하다. 그런데 드물게 문자의 기원이 분명한 곳에서는 그랬다. 삼각형 구도는 외국어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다가 내국어의 탄생 때문에 도형의 구도가 바뀌지는 않았지만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백조도 그렇다. 오리와 까마귀가 파울로를 들고서 백조야 놀자? 친구가 될 수는 있다. 북극곰을 살립시다 라는 아카펠라 그룹에서 만나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어림 없다>가 정상이고, 북극곰을 살립시다가 비정상이다. 백조는 흩어지면 흩어졌지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어디 백조만? 촌닭왕도 그런다. NDJM! 놀고 있네! 웃기고 ...! 라고. 일반인과 유명인도 그렇다. 촌닭 일반인에서 부자 유명인으로 발전할 수는 있지만, 동물의 종이 탄생하거나 소멸할 수는 있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바뀔 수는 없다. 그러나 이종은 실존한다. 쉬운 예로 동성애자가 있고, 멀리는 미래 생활 사전이 대기중이며, 비현실적으로는 괴물 같은 프랑켄슈타인이 있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동성애도 TV도 인터넷도 예측은 커녕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까운 예는 이종이 아니고 틀린 게 아니며 너도 알고 나도 알다시피 다른 거다. 다양성이 그렇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여우와 두루미는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그걸 알면 편하고, 모르면 고생하며, 좋아하면 사랑을 얻는다. 지적인 남자를 좋아하는 미녀도, 선녀도, 요정과 천사까지. 요사스런 술법으로 세계, 문화, 예술, 인생, 동물, 광대까지 머머론 머머관으로 포장한 듯하여 괜한 소란만 피운 것 같아서 귀빈께 송구스럽고, 서술자인 돌쇠한테는 어깨 뽕 들어간 그 촌스런 블라우스는 제발 참아주란 말이 목젓에 턱하니 걸린다. 물론 틀렸을 수도 있고, 과거 기준일 수도 있으며, 웃음과 교훈 둘 다 놓쳤을지 모른다. 그런데 말이야 가만 보니 뭔가 이상하지 않소? 언제는 비하하네 분석하네 어쩌네, 지가 무슨 인문학자라도 된다는 양 분위기 슥 몰아가더니 아 글쎄 듣고 보니 순전히 아첨꾼이구먼! 돌팔이에 약장수가 따로 없어. 병 주고 약 주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아조 난리도 아니야. 하여간 깐족하고는 정말, 허허허. 이런 인간이 말까지 잘했으면 딱 사기꾼인데 아아 그러면 곤란해. 말까지? (피식, 어렵쇼) 글쎄요. 아무튼 그처럼 사람은 누구나 개나 고양이와 닭으로, 물론 곰으로도 의인화할 수 있음. 이쯤 되면 마침내 관상론이 등장하실 차례인데 그러면 얘기 길어지겠다, 그만하자. 이래가지고는 허풍 대회 출전은 어림도 없으니까.
   그렇다. 나는 뭐랄까 불행하게도?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쩌다 저 1퍼센트가 아니라 100퍼센트에 속했다. 이미 몸과 마음도 다 커버렸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그 어느 뜻을 끊임없이 보고, 듣고, 읽고 그래야 한다. 정말 양자의 그 집요함은 거의 신적이다. 종교도 도덕도 다 필요없다. 돈과 힘이 최고인 세상이니까. 합리적인 역사적 근거와 증거와 물증이 지구상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국방백서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명시한 것으로도 모자라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그랬다 안그랬다 무슨 사춘기 연애도 아니고 수시로 그런다. 기다 아니다 기다 아니다, 국방백서에 넣었다 뺐다 넣었다 뺐다, 이게 대체 뭘 뜻하는지 통 모르겠다. 국경이 바다인 곳도 이 정도인데 육지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은 곳은 오죽하랴. 나아가 뉴스에도 잊을 만 하면 간혹 나온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왜 학생에게 가르치냐는 극우파의 항의가 있다고. 현대판 사이렌인 오락산업의 말만 듣자면 인기 스타는 누가 뭐래도 (쉭-쉭-쉭) 극우파다. 지식인들? 암 말 못한다. 암 말도 못한다. 벙어리가 따로 없다. 아 말은 한다. 극우파에게 시달린 적 있다고. 딱, 그 정도. 그러다 인기와 돈만 챙긴다. 그러다 인터뷰하고 사진 찍어주면 좋다고 폼을 잡고 조명을 받는다. 때 되면 사진과 이름을 알리고, 때 되면 자본을 챙긴다. 대체 누가 그분들을 지식인이라고 하는지 묻고 싶다. 그게 모두 현대의 신 때문이다. 바로 돈! EU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제일 클까? UN에서는? 유네스코는? 당연히 돈을 많이 내는 순서로 목소리가 클 수 밖에 없다. 원리가 그러니까. 목소리가 크다고 박수만 치면 끝나는 게 아니다. 회사에서도 친구끼리도 상대편 기분 맞춰주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세상사가 그렇다. 기준은 힘과 체급과 돈이다. 살면서 누가 하와이를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나요? 없다! 일절 없다. 있을 수가 없다. 먼저 선점되었고 그 뒤로는 의문의 여지가 없으니까. 그러나 힘과 체급과 돈이 급격한 차이가 나거나 조지 오웰식으로 빅 브라더에 의해서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안다. 독일 내에 사는 내국인과 외국인들도 잘 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영화와 드라마와 책과 노래와 전시회가 발표되었을 때 독일 정부가 급박하게 나서서 성명을 발표하기 급급한 사례가 과연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있는지 없는지를. 법으로도 정해졌고, 법은 잘 지켜지며, 인습으로도 굳건하다. 유럽 사람들은 잘 아신다. 그러나, 그러나 절대 처음부터 그랬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데 그 에너지가 뭉친다면 더 하면 더했지 결코 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그 반대편에서는 상황이 정반대다.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작품이랄지 전시물이랄지 무언가 쟁점이나 기념작이나 예술이 발표되면 각자 정부가 나서서 성명을 발표하기 바쁘다. 최고로 바빠진다. 왜, 도대체 왜 그럴까? 왜냐하면 전부 다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없다. 가해자는 사라졌다. 그렇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지는 한참 지났지만 침략국과 패전국은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아니다. 아예 가해자와 피해자는 확 뒤바뀌어버렸다. 최고의 인기 스타는 누가 뭐래도 다스 베이더니까. 책임도 끝났고, 그것은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오히려 다스 베이더 측에 사과를 해야 한다고 한다. 서구인 여행가가 관광차 독일의 정반대편인 일본에 방문하면 의구심이 하나 생긴다. 몇 년 뭐뭐 몇 년 뭐뭐, 그렇게 옛 유명인들도 연대기라는 게 있는데 여기는 몇 년부터 몇 년까지는 통채로 아예 빈칸이니까. 문화적인 이유가 있겠으나 내 문화가 중요하면 다른 문화도 중요한 법. 그 문화의 옆이 아니라 위에 세계관과 인생관이 있는 법. 유럽과 비유럽의 차이는 잘 드러나지는 않아도 뭔가 있다. 왜냐하면 유럽은 세계에서 제일 먼저 모든 시행착오를 두루 겪었기 때문이다. BBC만 봐도 그렇다. 1982년 4월 2일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한 다음 BBC는 먼곳으로 달려갔다. 눈물을 취재하기 위해서. 그 일을 다른 쪽에서는 일부분 개인이나 시민단체가 대신 한다. 그럼 정말 아직도 미래에도 물밑의 분쟁은 멈출 수 없는 것일까? 아마도! 꺼림직한 거 빼놓고는 다 좋은데 그런 뭔가가 있다. 나는 군복을 입던 시절에 내가 입던 군복 측면에 붙은 사단 마크가 이스라엘 국기와 비슷했다. 하던 일도 특수 임무인 땅굴 탐지였다. 엇그제 뉴스에 나왔다. 이스라엘에서 지하 국경을 만든다나 뭐라나. 그건 진짜일까 가짜일까? 답변은 통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반면에 왜 그렇게 골이 깊은지를 세세히 잘 아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자료는 쉽게 찾을 수 있는 반면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그렇다. 이기주의와 사익과 돈이 먼저니까. 그 뿐만이 아니라 중동 하면 뭐라 말할 수 없이 멈칫하는 그런 어중간한 느낌이 있다. 그래서 중동 하면 그냥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캬, 돈과 황금 우와, 슈퍼카 워워), 중동 하면 세계적인 대재벌 만수르 정도만 많이들 떠올릴 것이다. 세계 지도를 보면 어느 곳이던지 국경선이 꼬부랑인데 딱 하나 캐나다와 미국 국경은 상쾌할 만큼 반듯하다. 그런데 그 역시 세세히 들여다 보면 막 어떻다는 사진을 인터넷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가는 그래프도 그와 똑같다. 매끄러운 직선과 유려한 곡선인 듯 하지만 알고 보면 거칠기도 하고 슬프기까지 한다. 찰리 채플린의 어떤 말처럼.
   대체 왜 다스 베이더측이 사과를 받아야 할까?
   대체 왜 아돌프 히틀러의 명복을 기원해야 할까?
   그러면 지금 현재, 그 화려한 전성기의 영국처럼 전세계를 침략해도 된다는 논리네?
   그 질문에 맞다고 가정하고 이유를 들어보자. 이유는 뭘까? 전세계를 침략하는 악역을 자처해도 되는 이유. 그 이유는 이렇다. 왜냐하면,
   첫째, 성공하면 제국이 되기 때문이고
   둘째, 실패해도 나중 사과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며,
   셋째, 실패해도 전범국이라는 표시는 스르륵 희미해지다가 결국 피해자로 남게되며,
   넷째,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일지라도 어디 그 뿐이겠나, 갖은 보물과 노예와 상대적으로 만행이겠지만 당사자에게는 더없는 최고의 행복까지 덤으로 딸려오기 때문이고,
   다섯째, 법적으로 나라는 나라를 침략할 수 있기 때문이며(개인 대 개인과 달리 보통 국가라는 게 그렇다. 그 국면에 들어간다면, 종교? 아무런 쓸모도 필요도 없다. 휴지와 쓰레기 1장만도 못하다. 그게 종교다. 그런데 종교니까 세금 내기 싫다? 허허허! 종교니까 민법과 상법과 형법에서 자유로우시겠다? 그건 코메디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종교가 피라미드의 제일 위였던 시대가 아니다. 그게 다 왕좌에 그분이 앉아계시니까 발생하는 뚱딴지 같은 논리 때문이다. 그건 곧 교주가 신이 아니라 교도 각자가 다 신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이다)
   여섯째, 역사는 반복된다는 경구처럼 앞으로─나는 러시아를 좋아하시만 어쩔 수 없이 톨스토이의 작품 때문에 그냥 불가피하게 러시아를 예로 든다. 이걸로 지탄받아야 한다면 나는 응분의 처분을 달게 받겠다─러시아가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면 역사는 반복되어 더 먼 훗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일각에서는 지금처럼 전 세계에 사과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계를 침략한 러시아가 반대로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앞으로 자성과 반성은 스윽 게눈 감추듯 감추다 아예 없애버리고, 피해의 사실만을 기념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 1900년 이전을 보자. 서로 티격태격 다툼이 많았다. 노예만 끌려갔겠나 금은보화가 얼마나 많은데. 그러나 낙장불입, 가져가면 가져오면 끝이다. 정의와 도덕과 윤리라는 게 그렇다. 인도적으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맞지만, 그러면 수많은 유수의 박물관과 미술관들 텅텅 비게 될 일 뻔하다. 그럴 일은 만무하다. 그래서도 안된다. 왜인 줄 아십니까? 대체 왜 그래서는 안되는 줄 아시냐구요? 이렇게 물어보면 십중팔구 모른다. 어른도 십중팔구는 대답 못한다. 하물며 젊은이야 오죽하랴. 듣고 나면 알고 있는 얘기라고 하시겠지만 당장은 말문이 막힐 수 밖에.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지만, 빈 수레와 일명 지식인들께서도 고개를 숙일지는 미지수다. 당연히 그러기 싫으시겠지, 인간의 본성이니까. 뭐 어쨌든 이제 그만 봉투를 열고 답변이 적힌 종이를 읽자. 왜냐하면 인간은, 인류는 둘 중에서 단 하나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 그 둘은 뭐냐? 첫째 과거를 표현이야 어떻든 다시 생각하는 것, 둘째 미래의 문명을 보호하는 일. 우리는 그 둘 중에서 하나만 골라야 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둘 다를 선택하는 건, 다시 말해서 둘 다를 놓치는 일일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게 최선이고, 안타깝게도 그럴 수 있어서 그나마 축복 받은 일일 것이다. 그처럼 지금처럼 과거는 과거대로 놔두고, 차라리 미래를 걱정하는 게 낫다. 그 모두가 다 인간에게 신이 시키신 일일까?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일은 인간의 일이니까. 신이 무슨 초딩인가! 그러고서 돌아서서는 신에게 기도를 드린다. 나는 좋으니까. 침략하고 식민지배를 받는 사람은 그들 입장이 있겠지만 나만 좋으면 그만이니까. 더군다나,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인류는 이렇게 발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간과하고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인류의 역사를 보고서 참담함을 금치 못할 것이다. 아니 정말 그렇지 않겠나? 신을 위하여 그렇게나 떠받들고 노래하고 칭송하며 기도를 드리는데, 돌아서서 으쌰으쌰 난리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역사상 강대국과 강대국이 싸운 일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의 축을 놓고 보면 현대에 가까울수록 줄어들다가 거의 없다가 0으로 수렴된다. 왜? 왜긴 왜겠나 같이 둘 다 파국을 맞이하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귀결되는 논리는 무엇일까? 남은 건 하나다. 체급이 딸리는 플라이급, 라이트플라이급, 주니어급, 밴텀급만 괴로워지는 거다. 그냥 아주 죽 쑤는 거지. 물론 역으로 밑에서 위로 뭐 어쩐다면 전혀 다른 얘기지만 말이다. 하이틴 드라마에서는 덩치 크고 억세고 입이 험한 친구들이 가녀린 범생이를 귀찮게 하지만, 역사적-국제적으로는 그와 정반대다. 범생이는 다 가졌고, 저 뒤쳐진 친구는 공부를 놔버린 걸로도 모자라 가냘프기까지 하는데 항상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범생이가 예기를 뽐내는 동안 그는 소꿉놀이나 몽상으로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룡─새우─공룡이 있으면 중간에 낑긴 새우만 죽어나는 거다. 물론 역으로 밑에서 위로 뭐 어쩐다면 전혀 다른 얘기지만 말이다. 공룡과 공룡끼리는 서로 조심하니까 만만한 건 새우 밖에 없다. 공룡들은 서로 천리안도 광선검도 모두 가지고 있다. 것도 많이 가지고 있다. 성능도 최고다. 그런데 공룡이 아니라 새우가 광선검이 아닌 방어를 위해서 애들 장난감 같은 미니 천리안을 들여놓으면 공룡들은 성명을 내기에 바빠진다. 그것이 즉시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미 다른 공룡들은 다 가지고 있으며, 서로들 천리안으로 항상 주시하고 있는 게 현실인데 그건 자유고, 불문율의 불가침조약이자, 남의 일이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내내 그랬다. 현재도 그렇다. 게다가 지금은 과학 기술이 인류 역사상 최고로 발달한 시기다. 앞으로는 더 할 것이다. 지금도 다스 베이더는 존재한다. 작은 다스 베이더는 존재하는데, 그런데 큰 다스 베이더 곧 빅 브라더는 애매하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으르렁으르렁, 오락산업의 소식을 듣고 읽고서 최소한의 얘깃거리가 생긴다. 지루한 일상에 영화처럼 없던 악당이 생겨난다고! 외교든 정치든 쉬쉬하는 골자는 하나다. 딱 하나! 바로 남을 믿지 못한다는 것. 믿을 수 없다. 믿다가 뒤통수 맞으면 끝인데 남을 어떻게 믿겠나. 속고 속이는 세상인데 말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 뿐이겠나, 평화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상상 가능한, 상상 불가능한 그런 거 다 있다. 몰라서 그렇지. 3급-2급-1급-무급 비밀. 사춘기에 우정을 배우고 애정기에 사랑을 하듯이 전시는 싸움이고, 평시는 외교다. 그런데 인류는 유독 전자를 편애했고, 겉으로는 후자를 총애했다. 외교라는 게 정말 그 얼마나 냉혹한 낱말인데! 외교는, 그 흔한 친분이랄지 우정이나 사랑과는 얘기가 다르다. 전혀 다르다. 외교의 세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고 하지 않나. 피도 눈물도 없는 진정한 분야 가운데 하나는 바로 외교다. 대외적으로야 웃고 부드럽고 말끔하며 신사답고 정중해 보이지만, 또는 특유의 몸짓과 눈빛으로 외교 대표자는 예절과 격식과 엄격함까지 챙기지만 외교는 바로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다. 인류가 지금처럼 덜 싸우게 된 원인이 과학 기술의 발달도 있지만 TV와 인터넷 때문이기도 하다. 외교적 한계를 바로 TV와 인터넷이 매꾼다는 점, 쉽사리 허튼소리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 절대로 미래를 쉽게 쉽게, 좋게 좋게 낙관만 할 수는 없다. 절대로! 일생을 한 분야에 바치는, 모든 것을 다 거는 군사전문가들이 기나긴 장황한 논평을 기고하더라도 결론은 하나다. 게다가 짧다. 그러나 그것은 헤드라인에 슥 한다리만 걸친다. 결국 2는 1를 믿지 못한다는 것. 전문가는 그렇게 글을 쓰고, 비전문가는 사석에서 말을 한다. 2는 언젠가 1에게 등을 돌릴 거라고. 사과? 반성? 자성? 큰 의미는 없다. 절대 없다. 있어도 시류에 따른 일이거나 온도차 때문일 수도 있고, 있어도 가짜일 수도 있다. 더구나 지금 사람들이 한 일이 아니고, 게다가 시대가 변했으며, 심지어 누구나 시간과 지역과 가문을 골라서 태어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말과 속마음이 같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과거와 현재가 천양지 차이듯이 현재와 미래도 역시 그럴 것이다. 거론하는 단어가 양호하다면 표면적으로야 모양새는 좋다. 바로 그래서 더욱 더 의미가 없다. 아무 의미 없다. (일단은 비관의 논조를 이어가자. 비관도 필요한 때가 있고 들어봐야 알게 되기도 하니까) 그건, 별 의미 없다. 절대 없다. 외교의 세계에서 앞과 뒤는 절대 같을 수가 없다. 빈말과 참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예의가 다른 게 예의인가, 거짓말이 예의다. 그래 (딱) 립서비스! 그에 비해 종교는 힘 없다. 역사적으로 오히려 종교 때문에 더 싸우기만 했을 뿐. 호시절 태평시절에야 분위기 따지고 재미와 낭만과 멋과 풍류며 예절를 따지지 돌아가는 기운이 험악하고 죽고 사는 문제인데 기도 드립니다가 웬 말인가. 그건 차원이 다른 얘기일 뿐이다. 앞에서 웃는다고 순진하게 속마음도 미소일 거라고, 입장 표명이 있다고 아무런 계산 없이 한말씀이 툭 튀어나올 수는 없다. 우울하게시리 왜 그렇게 냉소적이냐구요? 인류의 역사가 그 모두를 증명하니까요. 백분율이나 수치는 넘어가자. 그러면 진짜 슬퍼지니까. 그처럼 공동체에 대한 이익의 충돌이었던 문명의 발전도 있지만 개인의 선이라는 미래의 희망도 있다. 쉬운 예로 버려지는 버려졌던 반려동물이 얼마인데 그런 소식을 듣기 쉽던가요? 나는 같이 살던 개를 버렸다, 나는 기르던 고양이를 몰래 버렸다 라는 회오! 사람은 사랑을 고백하지만 대개 사랑만 고백한다.
   자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세계 평화라는 어휘가 드물게랄지 간혹 쓰이기 시작한지가 대체 얼마나 되었는지를. 희곡 한 여름 밤의 꿈이 발표된 시기였을까? 돈키호테나 칼맨이 공연된 즈음일까?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초연될 때였을까? 잘은 모르겠으나 그 용어가 일반화된지가 반올림해서 불과 1세기나 되었을지 의문이다. 겨우? 기껏? 라는 환청이 다 들린다. 다스 베이더가 가장 큰 수혜를 입었던, 조지 루카스 사단이 만들었던 영화 스타워즈를 현실로 가져와서 기업의 리콜 같은 문제로 비유해봐도 된다. 세계적 기업이 잘못된 물품을 팔았는데 엄청난 역풍을 맞았다고 가정해보자. 소비자의 피해가 일파만파로 퍼졌다. 세계적 기업이 물의를 일으키든 국가의 잘못이 시대를 넘어서서 화자되든 누구나 그런 소식이 반가울 리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잘못이 큰 쪽에서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한번 굽히면 끝까지 굽혀야 하니까. 많은 경우 문제가 발생해도 가해자측의 최고 직권층도 사과는 이미 다 끝난 일이라는데? 기업의 잘못 때문에 빚어진 중차대한 사태에 대해서 기업은 할만큼 했다, 피해 본 소비자는 하늘이 무섭지도 않냐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그러므로 기업에서 소비자에게 사과를 받아야겠다? 그게 정말 어떻게 된 일이냐고 어린이가 어른께 묻는다면 어른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간혹 나타나는 불매 운동, 그거 그냥 잠깐이다. 어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에서는 딱 그 만큼이 최선이니까. 그런데 도대체 왜 다스 베이더측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일까? 진짜 다스 베이더측에게 사과를 하는 게 맞는 것일까, 아니면 다스 베이더측은 모든 책임을 다했을까? 입장이 바껴도 많이 바꼈다. 이때 적용될 속담은 두 가지다. 첫째 주객전도, 둘째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어허 이거 정말 장난꾸러기들과 호사가들 좋아할 일일 수도 있겠구나. 세상 이렇게 된 거, 소비자가 기업에게 사과하자. 모든 잘못은 소비자에게 있고 영화 스타워즈에 나왔던 착한 편에게 있다. 모든 잘못은.
   사실을 간출이자면 이렇다. 주객이 바뀌어 사과를 요구하는 일은 첫째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둘째 다스 베이더를 위시한 악의 무리의 은하계 침략에 따른 결과였다. 사과를 받을려면 다스 베이더에게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오히려 다스 베이더에게 절을 한다. 가해자가 가장 큰 폐해를 입고 피해를 입었다고 딱 그것 하나만 기념한다. 더불어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라고. 논리가 그렇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다스 베이더와 아돌프 히틀러 무리가 작고하셨으니 또 어떤 피해를 입었으니, 우리는 다스 베이더에게 헌화하며 영을 기리고, 스타워즈의 선량한 무리들은 사과를 해야 마땅하다 라고. 만약 당시에 먼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면 이랬을지도 모른다. 도리어 다스 베이더를 위시한 악의 무리에게 먼 미래에 사과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해리슨 포드도 빠지고, 누구도 모른 체 하고, 그래서 다스 베이더측이 은하계를 장악하게 되는 시나리오! 또는 먼 미래에 사과를 요구할지도 모르니까 사이좋게 말로써, 차분한 협의로써 종전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고(그러면 아이고 그러십니까 하면서 웃으며 응수하겠다), 그래서 다스 베이더측이 은하계를 장악하게 되는 결과! 그렇게만 일이 착착 진행되어서 성공했다면 침입 대비 장악이 균등하지 않았던 영국의 전성기 정도가 아니라...... 아 그건 그만! 그러나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호주도 일부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했고, 아시아는 물론이요 태평양도 반틈은 장악했다. 설마 나중에 다스 베이더측이 사과를 받아야 하니까 아예 호주를 꿀꺽 했더라면 차라리 더 나았을까? 그 무슨 망언 같은 소리인가. 그래도 오락산업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오히려 다스 베이더측은 사과를 요구하고 착한 편은 사과를 거절하고, 그게 낫겠다. 어른들도 이상한 뉴스가 나오면 자칫 갸우뚱하는데 어린 영혼들과 젊은 친구들과 여린 심성의 소유자들이야 오죽하겠나. 이제는 누가 누구에게 사과해야 하는지 진짜, 정말로, 의문이 든다. 세월이 100년 지나서 딱 여기서 여기까지를 뚝 떼서 보면 당연히 잘못이고 과오이자 슬픔이다. 당연히 그렇지 왜 아니겠나. 단, 뚝 떼서 딱 그것만 본다면! 우리 모두는 다스 베이더와 악의 축에게 사과해야 마땅한 것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문학? 좋다. 왜 나쁘겠나. 그러나 현실을 보시라. 사실을 직시하자. 다스 베이더가 사용했던 레이저검이 지금 현재 이 지구상에, 대체 이 세상에 몇 개나 실존하는지를. 다스 베이더라고 광선검이 왜 없겠나. 무슨 소리를. 오히려 광선검 분야까지 다스 베이더는 언제나 세계 1퍼센트다. 그러면 지구상에 광선검이 자그마치 총 12개일까? 에게, 라니요! 그 개념은 무시무시하지만 말이란 게 이렇다. 말은 쉽다. 글은 더 쉽다. 말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말과 글도 약간 그런 측면이 있다. 수박 겉핥기와 마지막 잎새, 그게 과연 어디 종이 한 장 차이인지 난 도통 모르겠다. 아무튼 시간이 오래 지나서 결과를 따지고 보니 그렇다. 제일 큰 일로 대표적인 것만 언론에서 작품에서 간혹 다루고 넘어간다. 그게 다다. 심지어 그에 따라 인기와 돈은 어떤 호박처럼 제발로 걸어서 엄한 쪽으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점. 전쟁은 호혜주의도 무역주의도 종교적 자비와 선량한 인심이 다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이상하게 가해자에게 노른자가 가는 것은 아닐까, 역사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나중 잘 살더라 아니면 잘 살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것일까, 떵떵거리며 얼굴을 알리고 떼돈을 벌고 인기를 구가하는 세간의 말로 대가라는 위인들께서는 왜 이런 의문점을 단 한 번도, 많이 다루셨을 테지만 그래도 왜 정말 멋질 정도로 제시하기는 싫어하시는 것일까? 설마 못해서? 악역은 맞기 싫으니까? 그건 아니겠지. 아니기를 바란다. 부디! 부끄럽지도 않으시나 보다. 이런, 젠장! 그게 무슨 대가야 뒷골목 약장수 만큼도 못되네. 완벽한 합리주의! 아, 장난이다. 그러고도 일류라고 폼 잡고 좋아하시다니, 물론 농담이다. 상인과 농부와 기술자들은 성실히 일하고 가정의 평화를 지켰다쳐도, 예술가는 뭐했나? 예술가의 자존심은 대체 어디에 숨겨뒀냔 말이다. 지금이 아직도 냉전의 시대인가? 그러고서도 챙피한 줄도 모르신다. 조명발은 언제나 진리니까. 남의 다리나 긁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물~론, 극소수 일부만 그렇다는 말이다. 지레 도둑이 제 발 저리지 않아도 되고, 실로 그러지 않는다. 너 촌닭 나 촌닭 우린 모두 최고니까. 인기와 돈을 챙겼는데 위대한 거장이신데 건드리면 안된다. 훌륭하시니까. 뛰어나시니까. 아름다우시니까. 올치~! 존엄하시니까 말이다. 으잉, 개구멍을 잘 찾아보면 있다고? 뭐가, 예술가의 존엄성이? 아, 뻔트? 그러면 뭐 하나. 팔이 안으로 굽는데! 다, 모두 다 자기가 피해자래. 가해자는 어딨어? 한 명도 없다. 시대도 바꼈다.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감감무소식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다 잊어버렸단 말인가? 정녕 사과를 받고자 하는 사람만 남았고, 지난 일은 지난 일이기 때문에 그냥 잊자, 그게 다인가? 정말 그런가? 아니 당연히 희망찬 미래를 향하여 우리 함께 밝고 자신있게 나아갑시다, 이거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아 정말 이거 나 원 참, 맙소사! 호메로스가 펜을 놓은 게 언제고 고대 그리스-로마의 웅변가들이 어떤 철학을 남겼는데 아직도 살살 간지럽히고, 슬슬 아부하고, 딸랑딸랑 좋은 말만 듣고자 하시는가. 요컨대 실제로 시대의 비극과 참상과 비창과 만행 99 다음에 1의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매번 반복되다시피 불미스런 사실은 굳이 들출 필요가 없고 미래에 도움되지 않으니까 침묵하는 게 옳다, 그러므로 99는 묻고 덮고 1은 만천하에 알리고 기념하고 사과를 받자? 그건 아니다. 그건 아니지. A부터 Z까지 곳곳의 식사 예절이랄지 문화가 다 다른데, 딱 하나의 식습관과 단 하나의 인습이 세계관보다 위에 있다는 논리니까. 뿐만 아니라 부정 99는 부정 999까지 갈 수 있었다. 실패하지만 않았다면! 게다가 사실 99는 잊혀져가고, 99에서도 99만큼의 아픔에 대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선을 말하고 신에게 기도를 하며 예술이 반복될지언정 그 모두는, 시간만 끌면 끝난다. 그게 다다. 딴 거 없다. 어차피 시대의 비극과 참상과 비창과 만행 99는 상식이 되고, 역사적 사건 1이 제일 유명해지며(99를 아시나요? 그렇다! 99는 쉬쉬 1은 모르는 사람이 없음), 비운이긴 하지만 다스 베이더만 기리기리 화자된다. 더군다나 공식적으로 99는 쉬쉬하는 분위기에 오히려 1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는 경도된 윤리, 그냥 책과 박물관과 다큐멘터리 속으로 들어갈 뿐, 그 모두는 기억과 사실보다는 점점 문자와 기록으로 각인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은 앞으로 흐르고 예술과 오락뿐만 아니라 자유와 방종조차 그 구분이 희미해져갈 수 밖에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인간이 구현하는 논리는 두 가지다. 첫째 그 모두를 법으로 규제하던가(실제 얼마만큼 제지하는지 아는 사람은 안다), 둘째 조지 오웰식으로 SF 영화처럼 부도덕을 생각만 해도 계획만 해도 처벌하는 것. 첫째와 둘째가 공존하는가는 잘 모르겠지만 1과 2는 이미 일부에서 엄정히 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언가 쉬쉬하는 느낌과 잔잔한 분위기가 없잖아 있었던 99에 비해 1의 비중이 큰 것은 미래에 대한 걱정의 취지가 원대한 것이지 1의 슬픔만 기억하고 간직하자가 아니다. 조용히 하늘나라로와 생지옥의 비율과 그 발단이 있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99에 대해 매해 내내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사과를? 날새겠다! 단, 1에 대해 묵념하고 다스 베이더의 명복을 기리는 건 절대로 빠트릴 수 없음. 팔은 안으로 굽으니까. 그럼 화합은? 9번 교향곡 있잖아요. 공연장 많고 연주단은 물론 거장까지 많은데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원주율 같은 수학 법칙은 시간이 해결해 줄 수 밖에. 알카트라즈에서 죄수 번호가 파이였기 때문에 원주율을 소숫점 세 자리까지만 기억하는 사람이 생각했을 때는 그렇다. 정치권의 모양새나 온도 차이 때문에 일반인의 주관과 인지상정 다 같은 사람의 온정이 시달릴 일은 사는 동안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감안하지 않으면 안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라며 아 또 그 얘기, 100년 안쪽의 근대사긴 하나 조상들의 일이니까 난 상관없어 라면 선긋기, 격에 맞지 않는 태도, 어떤 불균형에 대한 불합리, <처음부터 끝까지>에 대한 비이성적 판단등에 대해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만큼, 참혹한 불상사가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만큼 할 말은 해야 옳다. 어버버버, 말을 못하거나 귀가 들리지 않는 이상은! 딸랑딸랑 응애응애 참새 짹짹 병아리 꽥꽥, 애가 아니라 어른인 이상! 감추고 숨기고 모른 체 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 그럴수록 정면돌파를 하면 된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하면 된다. 그렇다고 정면돌파만은 피해야 하는 상황에 청개구리가 되서는 곤란하고. 그러므로 왜 역사적 사건 1이 있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명제를 내게 유리하게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명제에 해당하는 사안인가 아닌가, <처음부터 끝까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일인가 아닌가, 그걸 먼저 아는 사람이 되야 한다.
   여러분. 존경하는 여러분.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세월이 흐르니까 비록 악명일지라도 정녕 다스 베이더가 제일 유명해진 것 같지 않나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솔직히 그렇다. 난 스타워즈 하면 무조건, 무조건 다스 베이더다. 아 그리고 광선검. 영화 스타워즈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단연, 단연코 다스 베이더다. 장난꾸러기들도 그렇다. 무슨 미스테리 어쩌고저쩌고 그쪽에서 제일 구닥다리 인기 최고 가운데 하나는 히틀러의 남극인가 남미던가 실존설이다. 엄한 낭설은 이미 옛날에 인기 하락했겠지만 그 유명도는 끝없는 특급이다. 오명일지라도 유명세는 유명세고, 지금은 어디까지나 오락 산업이 대세이니 우리는 그냥 대세에 따르자. 그러면 된다. 뿐만 아니라 어른들과 현재의 아동과 미래 세대까지 오히려 다스 베이더에게 사과하고 뭔지 모를 명복까지 빌어야 한다. 이왕 그렇게 된 거 그럽시다. 뭐 어쩌겠수! 그게 어디 제 허물이유 형씨 잘못인가유, 그게 모두 세상탓 아니냔 말이에유! 실제로 일부 정치인들은 루돌프, 앗 아돌프 히틀러의 명복을 기리기리 기리신다. 더군다나 생각이 자유로운 철없는 마초도 적지 않다는 것은 물론 모든 인간의 본성과 그늘과 원죄와 두뇌 과학과 한두 가지 단어나 어떻게 부르든 음성적인 구석이 있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무엇보다 현재는 자유와 예술과 오락산업과 그리고 1인칭 시점이라는 나, 이기주의자라는 나, 인기와 돈도 모자라 존경까지 바라는 내가 최고이자 최선인 세상이니까. 이쯤 되니 9개인지 10개인지 교향곡을 썼던 구스타프 말러에게 내가 다 미안하다. 미래에 나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셨는데, 왜 하필 교향악을 녹화했던 방송 카메라는 청중쪽을 비춰서 관중들의 뚱한 표정을 남겨놨는지 지금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주 울기 직전이었는데 설마 내가 잘못봤을까? 미천한 이 내 몸이 잘못 봤기를 바래야지 별수 있나. 내 눈이 삐었는갑다. 진짜로!
   오오, 신이시여! 왜 인간의 일은 인간의 일이어야만 합니까. 아아, 인간이시여! 인간은 상대적으로 모종의 신에 해당할 만한 영장인데 언제까지 서로 다퉈야만 하는 겁니까.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기도문 성격의 노래 제목 같은 게 생각 났을 뿐 다른 뜻은 없다.
   어쨌든 요점을 몇 개 간추려볼까. <처음부터 끝까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게 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야 하는 사안도 있다는 점. 정부는 어디까지나 최우선적으로, 태생적으로 울타리 안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그 목적만 충족해도 낙점인데 그마저도 얼마나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이상과 윤리와 소수와 민심을 균등히 또 보편적으로-이상적으로 지향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 사람 사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보통 사람의 마음이야 이심전심이라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건 리더의 관점이라는 점. 승선원은 따라갈 수 밖에 없으니까, 안 그러면 배가 산으로 가는데? 그게 모두 총괄적으로 어떤 요인의 총합이 그렇지 않을까 추측하게 된다는 점, 곧 한쪽과 반대쪽의 서구화의 총량과 2000년 이상 지속된 문화의 일반화와 그것에 대하여 후발주자라는 점, 더불어 경제적 지표의 총량도 월등히 차이가 난다는 점, 나아가 지형적으로 또 시대적으로 교류가 유럽보다 덜 원활할 수 밖에 없다는 점 등등.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과거 시점과 이타적인 관점과 거시적인 <처음부터 끝까지>를 살펴보기에 이 세상에서 악역은 불분명하다는 것. 왜냐하면 그런 작품상의 악역은 나일 수도, 너일 수도, 오락산업일 수도, 아직 없다면 만들어야 하나 의구심이 들 만큼 낙원도 지옥도 아닌 이곳은 천태만상 요지경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나 더. 우리 남자들의 로망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군단을 구현한 레고 인형 세트만 봐도 우리는 가슴이 울렁울렁한다는 점. 그러나 여자라고 면죄부는 없다. 대표적으로 아마존을 생각하면 되니까. 암울한 시대에 펜은 시퍼런 총칼에 억눌려 말할 수 없었고, 지금처럼 좋은 시대에도 역시 다른 이유로 특별한 말 하지 않는다. 지식인의 옳은 소리는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도 있으니까. 괜히 어설프게 오락적 예술가가 순수예술가와 학자를 흉내내다간 손가락 빨기 딱 좋기 때문에. 그렇게 파리 날려 봐야 뭔가를 깨닫고 다시 전공으로 돌아간다. 핑핑 놀다가 영감이 딱 떠오르거나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도 주머니가 궁하면 뭐 어떻게 작품 내서 우량 배당주식을 살 수 있는 돈을 벌고, 인터뷰 몇 번 해 주고 사진도 같이 웃으면서 찍어주고, 사인? 못할 게 뭔가. 나 좋다는 데 인기와 황금을 주겠다는 데 호응하지 않으면 손가락질 받지 않겠나. 똑똑한 양반 뿐만 아니라 말만 많고 타율만 높은 작가들도 명색이 작가지만 그분들도 주로 돈과 인기를 신봉하는 게 현실이다. 바디랭귀지가 세계의 공통 언어라고? 단, 돈 다음이다. 만국 공통어인 음악이랄지 표정이랄지 그런 가치? 단, 돈이 먼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작가라고 다 같은 작가가 아니다. 물론 대체로 그렇다는 뜻이다. 한 여자가 말한다. 우린 사랑이었는데 그때 그 오빠가 왜 아무런 말없이 날 떠나갔는지, 나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고 도저히 모르겠다고. 모르신다 모르신다? 정녕 모르시겠다? 자, 자, 새겨들으시라. 기억하세요. 다만 원하는 답이 아니라면 잊읍시다. 잊혀질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그 남자가 왜 떠나갔을까요? 별명이 진공청소기였던 그 남자가 대체 왜? 그 남자는 바로 어떤 이유로 그녀를 떠나간 것이다. 그것은 둘 중 하나다. 첫째 사랑이 아니거나, 둘째 그녀가 들고 다니는 책은 파울로 코엘료였기 때문에.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은 진리지만 일단은) 삐삐─ 삑삑─ 워워 커피포트 바빠지겠네. 것 보세요. 어두운 시대에는 압제 때문에 할 수 없었다쳐도, 밝은 시대에는? 밝은 시대에 이처럼 사랑을 노래하고, 이와 같이 사랑법의 설을 풀고, 이렇듯 사랑업의 씨를 뿌린다면 실연 당한 그녀께서 퍽이나 좋아하겠네요. 듣고 싶은 답이 아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 없다 안된다 안된다, 아니다 아니다 알려주라 알려주라, 떼쓰고 우기던 끝에 투정을 도저히 잠재울 수 없고 닦달은 해도 해도 끊이질 않길래, 아무리 그래도 말을 듣지 않길래 부득불 어쩔 수 없이 원치 않는 정답을 떡하니 가르쳐줬는데, 어머나 세상에나 점성술사를 쥐잡듯이 잡네그려! 뭐 사랑의 본질에 관해 자상히 응? 소상히 알려줬는데 그녀가 화를 내? 뭐 지는, 어? 자기는 고고한 숙녀라면서 말투하며 막 그랬는데, 겪어 봐도 딱 봐도 촌년이네 촌년! 그런데 상담자가 만일 남자라면 그는 희대의 난봉꾼으로 돌변하지 말란 법도 없다. (딱─골 세러모니)! 실정이 이렇다. 인간 세상의 실정이 딱 이 만큼 친절하시다. 솔직한 점쟁이와 시대를 앞서 가는 누군가는 당대에 인정 받기가 어렵다는 점,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상식일 뿐이다. 지식인과 유명인과 예술가들이 절대 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란 말씀. 아니 그런가요? 그런데 유명인과 지식인만 그런 게 아니라 일반인도 똑같다. 옛 시대에 지식인은 어쩔 수 없이 바른 소리를 못했고, 지금 시대에 지식인이 그런 작품을 발표하면 대중은 싸늘히 외면한다. 실익과 정보와 쾌락과 오락과 합리와 잔잔한 기쁨을 원하는데 이따 만한 두꺼운 책? 이걸로 누굴 때리란 거야 베고 낮잠이나 자라는 거야? 그래서 잤다 일어나서 냉수 마시고 속 차리라고? 이 양반이 지금 나랑...... 워─워─워! 그처럼 일반인께서 오해하시기 십상이다. 현실이 그렇다. 그래서 누구나 어쩔 수 없이 황금과 인기를 쫓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가령 인생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나인가, 나는 나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없을까, 나는 나에게 문제적이다,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천국에 못 가는 이유, 내가 원하는 천사,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등등 이런 작품을 쓴다? 지금은, 이런 작품을 쓸거라면 당연히도 가난을 각오해야 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이다. 가난한 남자와 싫증난 여자? 말만 들어도 기쁘고 설레며 들뜨지 않나요? 가끔 가난한 사랑도 있고 순수한 사랑도 있긴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먹고 싶은 거 못 먹고, 비리비리하게 살고, 쥐꼬리 만한 월급에 벌벌 떨고, 우울한 인생이지만 하지만~! (쿵) 쉿? 쉬쉬하지 않아도 된다. 당당히 밝힐 수 있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도덕적이고 비교적 떳떳하니까. 지킬 건 지키니까. 나는 외우는 시도 한편 있고, 외워서 부를 수 있는 노래도 몇 편 되며, 나름대로 누구에게나 할 말 하고, 잘 들어주며, 생긴 거 그래도 이만 하면 아주 빠지지는 않고, 교양도 있고 인정도 두텁고, 잘 찾아보면 나에 관한 미담도 꽤... 아마 없지는 않을 것이고, 어디 가도 내 존재감 있으며, 뭇여성들에게 깊은 인상을 자주 남긴다? 게다가 전직 화가였다? 어, 예술가? 그런데, 그런데 가난하다? 그러나, 그러나 난 좋다? 행복하시다? 세상은 아름답다? ...... ...... 그것은 기쁜 우리 젊은 날이다. 어머 어머 세상에나 아니 글쎄 어쩜 나와 그렇게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완전 똑 닮았다. 나도 그렇다. 나도 완전 그렇다. 나도 딱 그렇다. OK! 그대는 하고 싶은 일을 하시면서 근근히 먹고는 사신다? 와우! 세상에 이보다 더한 기쁨이 그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 그렇소? 그것은 어디서 언제라도 그 짝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행복일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라 내 솔직한 마음이다. 증명할 수 있다. 근거 있다. 왜냐하면 난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승부사, 해결사, 도박사, 로맨티스트, 사색가, 몽상가, 만담가, 신비주의자, 예언가, 호색한, 괴짜, 모험가, 구경꾼, 황금만능주의자, 초현실주의자, 환상가, 고전주의자 등등 그렇게나 별명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별명 다 내가 지었고 스스로 수여했어. 피식! 여러분, 어두운 시대에 살아남은 글을 한번 읽어보세요. 요즘 세상에 그런 글이 나올 수 있을까요? 있겠죠 왜 없겠어요. 실제 훨씬 더 훌륭하고 재밌는 작품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나오지 않나요. 고품격 예술 전성 시대니까요. 그렇긴 해도 아무래도 그 어떤 뭔가는 좀처럼 어렵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너무나 풍족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시대니까요. 그런데 내가 원래 추구하는 이상형은 이런 게 아닌데... 정말 아닌데... 요점이 간명한 동시에 감동적이어야 하는데... 그래, 강렬하게 임팩트 빡! 아 글쎄 결론이 도무지 끝날 줄을 모르네. 원래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는 이렇다. 그것은 바로 역피라미드형 글쓰기. 뭔가 있는 듯이 분위기 잡고 상황 몰아가고, 기분을 붕붕 띄워주고 살살 간지럽히면서 좌중을 모아서 휘어잡고, 기대와 예감과 궁금증과 호기심은 물론 감수성까지 아 꿈과 희망과 선망까지 쥐락펴락 쥐락펴락, 그러다 막판에 내가 홀연히 연기처럼 딱 사라지는 마술! 그런데 요즘 그게 잘 안되서 그냥 쥐꼬리 만한 동시에 허무한 결론만 내놓기. 일명 허당. 은근 이란 수식어에 무던히도 목말라 하는. 다른 말로 기승전결 없고 발단만 있는 글쓰기. 누군 뭐 전개로 가기 싫어서 발단에만 머무를까, 내가 뭐 못할 줄 알아? 들린다 들린다. 막상 해보니 안되더라. 입만 살았네. 사람들은 안다. 그 말은 곧 안하겠다 못하겠다는 뜻이라는 걸. 그러나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기나긴 발단에 이어 파격적인 전개로 발전하기를. 그런데 말이다, 해도 해도 안되더라 라는 말씀은 차마 못드리겠다. 그렇다. 송구스럽게 됐다. 그래도 일단 시작한 거 끝까지 가야 한다. 그러니 칸을 띄어서 나머지 요점을 정리하자.
   사람들은 말한다. 살다 보니 와 저분은 정말 천사가 아닐까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어떻게 자기 잇속 하나 챙기지 않고 무식할 만큼 이타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고. 정말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까지 어려운 길을 가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중간만 가면 나중 낙원에서 천상의 기쁨을 누릴 것이며, 이승에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 말 못할 슬픔의 한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천국에서는! 따라서 어지간하면 패자부활전은 모면할 것이다. 다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과거 기준의 신화와 전설과 신성한 어떤 진리는 당시에는 미처 지금 만큼의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란 점. 상상하기 어려웠으리라는 점, 십분 이해해야 한다. 잘 아시다시피 지동설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어느 어느 법칙이 공식적으로 일반화되기까지 정말 까마득하게 장구한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겨우 받아들여졌다는 점, 그것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 명백히 부정할 수 없는, 부정해서는 아니될 착오와 잘잘못은 있을 수 있다는 점. 오늘의 완벽함과 정의가 내일은 풍선과 솜사탕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 그런 모종의 착오를 가정하거나 상상하는 건 절대 나쁜 것도 아니고, 어느 선행이나 일련의 신앙들에 결코 먹칠하는 게 아니다.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신이 있든 없든 많든, 일관성이란 기준을 만족시키는 예는 보기 힘들다. 종교는 보험이 아니다. 토속 신앙에 대한 정성도 저승에서의 부귀영화를 장담은 할 수 있으나 아직까지 확인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래서 신이 있든 없든 많든 교양과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인생을 즐기는 것 역시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루에 착한 일 1가지를 기록하는 어린이의 그림일기처럼. 신이 있든 없든 많든 관심 없든 어느 가설이든 모두 일리 있고 존중할 만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개념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선이다. 신이 있든 없든 많든 관심 없든! 좌우지간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제일 경계해야 할 개념은 지구를 거꾸로 돌리는 일. 무엇보다 지구와 사람이 바로 타임머신이라는 점. 누가 봐도, 정말 너무 안타깝도록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분들처럼 노력하지 않더라도, 중간만 가면 낙원은 그대를 반길 것이다. 전후좌우 사정 역시 참작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중간이라는 기준선이 썩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 더구나 개인의 잘잘못과 과오야 있을 수 있지만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쉽게 말해 파급력이 큰 사람의 잘못된 악행은 단순히 개인만의 과실일 리 없다는 점,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그 모두가 단순한 희망 사항일 수도 있다. 하지만 뚜껑은 열어 봐야 안다. 뚜겅을 열어 봐야! 제우스가 모든 죄악과 재앙을 넣어 봉한 채로 판도라를 시켜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냈다는 상자, 바로 판도라의 상자! 처음의 주문이 이행됐든 이행되지 않았든, 중간의 내용이야 어찌 됐든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그런데 역으로 그와 비슷한 예가 하나 있다. 즉 언젠가 관 뚜껑은 닫힌다는 점. 아이언메이든? 오오 존엄한 인간이시여 위대한 인간이시여! 그의 인생은 불행했다? 중차대하게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행복을 추구하시기를.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진정한 사랑을. 개인의 행복과 단위의 이상이 잘 어울리기를. 다운증후군의 그 순박한 미소처럼 무언가 조화롭기를 바란다. 보너스. 살다 보니 소신이 찾아가지 말아야 할 고장이 생기고, 방문해도 괜찮은지 입국을 거절당할지도 모르는 나라도 생기며, 어쩌면 누군가는 주홍글씨와 금서와 소문과 파란과 미래파의 주인공도 모자라 어쩔 수 없이 악역으로 어쩌다 굳혀지고, 만나서는 안될 만날 수 없는 멀리서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만 할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것만 같은 인생도 존재할 수 있다는 점. 에르메스와 페라리는 요원한데 아예 블랙리스트에 일치감치 올랐으니 참으로 경축할 일이 따로 없구나. 아이 좋아라 아이 좋아라. 형씨, 지는 뭐 이 일이 좋아서 헌 일인 줄 아시유? ...... ...... 좋아서 했시유. 지가 좋아서 헌 일이구먼유! 선생도 참말로 천진하시기는.
   아아 들린다 들린다. 오오 보인다 보인다. 와와 진짜다 진짜다. 네, 뭐라구요? 두고 봅시다? 우리 저승에서 만납시다? 이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당신은 하데스요 누구요? 냉큼 대답하시오. 어 조용하네. 누가 방금 말했는데. 그대는 정녕 누구신가요? 네 뭐라구요, 단테 알리기에리가 쓴 연옥편이 모두 진짜라구요? 대표적으로 요한계시록도 실제 어떤 곳인지 곧 있으면 알게 될 거라구요? 뭐에요 정말요? 쫄기는! 뻥이다. 그러나 진짜인지 아닌지는 정녕 가 봐야 안다는 것. (딱)!
   끝으로, 우리는 신나치주의에 대해서 알아봐야 할까? 아니다. 차라리 우리는 독일 정부에 사죄해야 한다. 뿐이냐? 기업은 어제 소비자를 천대했건 우대했건, 오늘은 소비자를 우롱하고 학자를 천시하며, 내일은 그 모두를 희롱하고 농락하며 끝끝내 소비자로부터 사과를 받자. 그러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선과 악, 죄와 벌. 인간은 현대 문명의 혜택을 입는 만큼 인류의 어떤 과오를 상쇄하는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 하리라.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죄는 내가 짓고 벌은 타인이 받을 수도 있다. 이승에서 운 좋게 벌을 피해 갔다면 저승에서 외상값은 충분히 이해타산될 것이다. 용케, 이승에서 승승장구했을지라도 저승에서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만약 다스 베이더가 저승의 신이라면 모를까 다스 베이더가 신이 아닌 이상, 이승에 계신 인간께서는 생각 잘 해야 할 것이다. 지옥행 티켓이 무엇인지 모른 체 해 봐야 소용없다.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러셨다. 사는 동안 내내 우리 엄마한테 못되게 박정하게 대하시다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사과하셨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그래서 우리 엄마는 뭐라고 하셨을까? 좋게 좋게 호응하셨을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서슬퍼런 저주를 선언하셨다. 종교가 그렇다. 언젠가 귀의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그건 우리 할머니의 우리 엄마에 대한 과오와 똑같다. 종교는 완벽하지 않다. 종교의 틀린 점 가운데 하나는 대표적으로 그것이다. 회개하면 된다는 점. 좋은 의미지만 쉽게 악용되거나 오용될 소지도 크다는 점. 그것은 인생을 99.99% 막 살고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천국행이라는 뜻이다. 그건 아니다. 그건 말도 안된다. 그건 틀렸다. 하지만 그건 직역했을 때 오해의 소지가 크다는 것이고, 의역하자면 이런 의의가 담겨 있는 것 아닐까? 인문-교양서처럼 머머해라 머머하지 않으면 안된다 머머할 수 있다, 그처럼 넘어져도 게으름에 빠져도 지쳐도 포지셔닝을 점검하고 슬로건을 검토하며 인생 모토를 잊지 말라는 뜻. 그건 곧 후세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만들어서 남긴 뜻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의역하라는 뜻이고, 때문에 오뚜기처럼 실패와 좌절과 허물을 범했을지라도 이겨내라는 의미를 뜻할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하면서 악마의 길로 들어서지 말고, 오뚜기처럼 일어나 뚜벅뚜벅 내일로 나아가라는 뜻이다. 세상이 하늘과 땅 차이 만큼 변한 이상 옛날 기준으로 설정된 직역만 고집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물론 100퍼센트 나쁘게 사는 것보다야 나을 수도 있다. 그나마 우리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엄마한테 진심으로 펑펑 우시며 사과하셨으니까. 사는 동안 인간은 그 삶이 자기의 인생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면 된다. 마음대로 살라 마라 말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단 이승에서만! 단 저승에서도 마음대로-일 수는 없을 것이다.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내 입장이 아니라고 인간 이하, 인간 미만의 삶을 사는 것은 인간으로 사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니까. 줄은 어디에 서도 좋고, 뭘 해도 자유고, 다스 베이더의 영을 기리고 그분께 기도하며 절을 해도 괜찮다. 인간은 최소한의 도덕률을 지키며 살면 그만이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다스 베이더와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 즉 양을 탈을 쓴 늑대─실제로 늑대는 어떻다고 하지만─는 사후에 응분의 처우를 달게 받게 될 것이다. 좋든 싫든. 늦게나마 그때에 가서야! 지옥에 당도해서 그때야 깨닫는다면 늦다. 그건 몰라서 늦은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알았지만 뭔가가 싫었기 때문이고,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 아시다시피 어느 교주도 요절했다. 과거의 다스 베이더도 이승을 떴고, 현재의 다스 베이더는 어떤 숙명으로 어디서 잘 살 테지. 신은 믿어도 믿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건 선이니까. 다만 신이 인간의 죄를 모두 사하여 줄 것이라는 순진무구한 직역은 권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2000년 동안 지켜봤더니 신이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뚜렷하게 증명됐기 때문이다. 무엇을 믿고, 속지 않고, 직역하고 의역하고 번역하고, 상대의 숨겨진 속마음을 추측하며,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 모두는 자유다. 그러나 이승에 법이 있는 것처럼 이승 다음에도 무언가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도 신도 초딩이 아닌 이상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원리다. 인류는 그간 놀이터에서 즐겁게 아름다운 나비와 뛰어놀았고, 공원에서 신나게 오리배도 탔고, 소풍 가서 사랑의 보물찾기도 했다. 슬플 때도 있었지만 많이 기뻤고, 흥미진진했으며, 행복했다. 그래서 인류는 이제 유아기를 졸업하고 걸음마를 마친 만큼 아장아장 걸어야 한다. 자장가도 행진곡도 환상 장난감도 풍요롭다. 그러므로 이제는 4사원을 발견하고 외계인도 만나야 한다. 그게 맞다. 옛날에 달나라에 갔다 오신 분들이 괜히 미지의 존재를 믿었던 게 아니다. 우주의 신비함에 할 말을 잊어을 테니까. 어쨌든 인간이 상상했던 온갖 유령과 귀신과 천사와 악마들이 하늘나라에 실존할 수도 있다. 우리는 과학으로써 그 모두를 알게 됐지만 그 이상으로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지켜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두고 보면 안다. 두고 보면! 따라서 우리는 현생에서 인류의 어떤 과오를 상쇄하는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 하리라. 그런데 패자부활전으로는 도저히 부족한 귀신감이다? 별수 있나. 흡혈귀든 좀비든 유령이든 동물이든, 뭘로든 변해서 이승에 내려가서 그 값을 톡톡히 치르는 수 밖에. 그러지 않는다면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의미가 없다. 꼭 없는 건 아니겠지만 부족하단 말이다.
   단조는 서운하니 그래도 기쁨의 팡파르를 울립시다. 해피엔딩을 원한다구요. 진짜, 이제 찐짜 끝나간다. 자 빠져 봅시다. 개를 먹는 토끼.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리는 토끼. 잡은 물고기한테는 먹이를 주지 않는 토끼. 의무방어전을 열망하는 영원한 아마추어 토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고,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는 당당히 주연을 꿰찼던 토끼. 그런데 토끼의 친구들은 왜 개를 버릴까, 어른들은 왜 술을 마실까. 전자는 우리 반성합시다, 후자는 우리 그렇게 살지 맙시다. 또는 매정하게 우리 그러지 맙시다? 두 마리 토끼는 물론 시대를 풍미했던 어느 개구리. 그것의 상징적인 동물은 닭. 닭을 먹는 개. 개 위에 고양이. 고양이 위에 그레고르 잠자. 동물농장을 읽고 동물농장2를 고민하는 백조. 백조의 친구는 원숭이.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정열 정열은 사랑. 사랑은 커피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독수리 독수리의 마누라는 비둘기, 고이 숨겨둔 첩은 파랑새? 아무리 그래도 아이들의 인기 스타는 곰과 사자와 호랑이 그리고 늑대까지. 그러다 어린이가 사춘기를 맞이하면 헤비메탈을 듣고, 어른이 되면 고전음악을 듣는 베짱이가 된다네. 왜냐하면 베짱이는 숙녀를 꼬시기 위해서. 그나저나 베짱이에겐 두 가지 재주가 있지. 스스로 날아오르던가, 타인의 기분을 붕붕 뜨게 만들던가. 그런데 문제는 그런 베짱이는 대체로 허당이라는 것. 그냥 허당 또는 은근 허당. 전자가 대다수고 후자는 보기 힘듬. 뭐 무슨 보호종 천연기념물? 무엇보다 만물의 영장은 일단 얼굴과 몸이 다르더라는 점. 얼굴은 개 몸은 새, 개새. 얼굴은 양 몸은 말, 양말. 그처럼. 뭐 어찌 됐든 왕좌에는 물고기를 앉히는 걸로. 왜냐하면 우리 남자들은 고수이니까. 그런데 알고 봤더니 몸과 마음도, 어제와 오늘도, 오늘과 내일도 다르더라는 것. 따라서 고수는 여자 나는 하수인 걸로!


   12

   괜히 집에서 검색 몇 번 해보다가 제국이란 단어 하나에 헤롱헤롱한 듯 해서 어지럽다. 모두 아시는 얘기로 또 뒷북을 쳤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생각을 왜 해, 가 아니라 모두 속속들이 아시는 내용인데 말이다. 그래도 판도라의 상자에서 이것 저것 튀어나오긴 했어도 희망도 나오셨으니 기쁜 미래를 기원하자. 하긴 나도 중학교 3학년 때 교내 명맥이 이어져온 농구 서클 사이클원을 탈퇴한 다음 우리끼리 따로 농구단을 결성했는데, 그 이름을 짓는다는 게 이제와서 기억해보니 바로 '엠파이어'였다. 제국! 오오 저런. 당시 농구단 무명과 시합하기 위해 인근 중학교를 방문했고, 제국이라 씌여졌나 아마 다른 글씨가 씌여졌고 앞면은 민 무늬에 전체 흰색에 뒷편 그림이 요란한 나이키 티셔츠를 우리는 입었고, 게임을 했고, 우리는 완패를 당했음. 그 뒤로 그 티셔츠 별로 입어보지도 않게 됨. 학창 시절에 책과 TV로 그 단어를 알고난 다음 어른이 되어 새삼스럽게 그것을 다시 아는 것은 또 다를 것이다. 아무튼 그 외에 내가 했던 다른 일은 이랬다.
   여름이니까 나는 추리소설을 탐독했고, 시원한 칵테일 만들기에 몰두했으며, 가택 감금이 지겨워져서 여행 계획을 짰다. 일정은 특별하지 않았고, 곧바로 출발했다. 그것은 가까운 시골로 차를 몰고 가서 이름이 웃긴 모텔에 짐을 풀고, 딱 3일만 쉬었다 오기. 가서 할 일은 복잡한 생각을 간단히 정리하는 것이었다. 로잔나는 로잔나다웠을 뿐 내 청춘과 내 젊음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뭘 모르는 남자가 많을까, 뭘 모르는 여자가 많을까. 진짜 판타지를 현실에서 체험하기, 과연 당대에서 가능하겠나. 그런 것들. 착상도 떠오르지 않고 영감도 딴 나라 얘기일 뿐이라면 하다 하다 해변으로 달려가서 무작정 참한 숙녀라도 꼬셔볼 테다.
   그렇게 3일을 보내고 나는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13

   「어. 왜 문이 안 열리지?」
   나는 열리지 않는 우리 집 문을 열려고 재차 시도했다. 이랬던 적이 없는데 하면서 계속 문을 열려고 하던 찰나, 뒤에서 누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누구시죠?」
   대화를 나눠 보니 자기가 집주인이란다. 결과적으로 나는 문을 못 열었고 그는 문을 열었다. 결론은 그분은 집에, 우리 집에 들어갔고 나는 쫓겨났다. 그분은 아마도 기쁨을 맞이했고, 나는 어쩌면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다. 이거 정말 한두 번도 아니고, 나는 번지수를 잘못 찾기 일쑤였다. 그러나 뚝 뚝 눈물을 떨구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됐을까?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기억에 의지해서 로잔나의 동생 집을 찾아갔다. 그 방법 말고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즐거웠을까? 천만에요.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그곳에 찾아가는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며 홀가분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러다 결국 중간에 길을 틀어서 우리 동네에 도착했다. 진짜 우리 집. 태어나 처음으로 천상의 왕국에 도착한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우리 집에 들어가서 씻지도 않고 곧바로 침대에 쓰러졌고 잠이 들었다.


   14

   집에서 일어났을 때 SF 영화처럼 전혀 낯선 곳에서 깨어나지는 않았다. 게다가 내가 나를 발견하여 그의 뒤를 쫓는 심리 스릴러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익스트림토네이도투어 닷 컴에 들어가서 예약을 했다. 지킬 수 있을 계획일지는 몰라도 일단 등록은 해 놨다.
   그리고 나는 텅 빈 동네를 혼자서 싸돌아다니며 마음껏 활보했다. 혼자서 술집 사장도 했다가 제복도 입었다가 거리에서 눕기까지 했다. 물론 소리를 질러도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자유다!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어찌나 크게 외쳤던지 메아리가 울렸다. 말 없는 사람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에코 즉 앵무새 따라하기가 주특기인 사람. 둘째, 동조가 아닌 무조건 반대 곧 때로는 혐오스럽다거나 불편한 내용을 위주로 짧은 논평만 일삼는 사람. 첫째는 기분이 좋으면 말이 많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둘째는 기분이 좋아도 말은 많아도 논조는 똑같다. 비관! 둘째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긍정 대 부정의 비율이 어떻다는 건 학문에서는 명문화했고 어른은 살면서 깨닫는다. 그래서 사람들의 교분은 가까와졌다가 멀어졌다가 이합집산은 반복된다. 제목만─결론만─핵심만─댓글만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관심이 없거나, 주변만 내내 빙빙 돌거나, 말을 아끼거나, 뭐가 뭔지 통 모르겠다거나, 전체를 조망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어쨌든 난 지금 우리 동네에서 에코와 단둘이 존재하는 환영에 빠져들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아니라고 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이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하면서 하루 이틀, 일주일 이 주일, 그렇게 나는 피안에서나 가능한 일을 경험하고 있었다. 나는 번듯한 대표작은 없었지만 이 분위기라면 박봉에 시달릴지라도 괜찮은 환상 소설을 잘 하면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때로는 아동문학인 구스범스를 필사하며 정혼에 대한 소망은 뒤로 한 채 때로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동네에 하나 둘 사람들이 돌아왔다. 사이먼, 가펑클, 머큐리, 브랜든, 비숍과 마리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잔나. 그렇게 우리는 옛날로 돌아갔고, 나는 결국 로잔나의 수하로 들어가서 한 마리 개가 되었다. 멍멍 멍멍멍 컹컹 컹컹컹컹컹! 나는 개였다. 멍멍 멍멍멍 컹컹 컹컹컹컹컹! 그러나 사냥개는 아니었고, 매도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린 모두 로잔나의 집에 놀러가게 되었다. 난 그때 알게 되었다. 눈치를 챘다. 로잔나가 우리 동네와 똑같은 복사본을 만들었다는 것을. 아직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아직은 로잔나가 동네에 나타나기 전에 나는 옆 마을과 옆-옆 마을에 가 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대체 왜 그 모든 일을... 진짜로 로잔나가? 다른 이유라면 모르지만 난 일전에 잘 속아넘어갔다고 생각했다. 로잔나의 심중을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그것은 차차 알아가기로 했다.
   아아, 이게 바로 환상이구나! 누누히 말했듯이 난 고수가 아니었고, 뭔가 멋진 말을 하기 위해 멈칫했다.
   「비평가들이 말하기를......」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계속 모른 체 할 것이며, 금욕적 생활이든 퇴폐주의든 뭐가 됐든 마음을 사로잡는 어떠한 탐구심이 발동하는 걸 느꼈다.
   그 후 나는 로잔나와 친구들이 비밀을 알려주기 전에 우리 마을의 복사본으로 틈틈히 혼자서 놀러다녔다.


   15

   나는 갈망한 다음 실망했다. 소망했고 절망도 했다. 나는 자주 욕망을 희망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막연한 대망은 언제라도 지망한다. 닿을 수 없는 신비는 최고의 로망이기 때문이다. 도망가는 꿈을 쫓는 삶은 곧 청춘이고 젊음이며 인생이다. 전망은 어두울 수 있다. 하지만 밝은 미래를 조망하면 된다. 그곳에는 어쩌면 환희와 행복과 사랑이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오오 애타게! 아마도 풍요와 쾌락과 기쁨도 풍족할 것이다. 살다가 절망에 익숙해지면 때로는 어렴풋한 희망과 순결한 탐구욕과 만족스런 탐험심을 염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새로움에 대한 열망 때문에. 따라서 불행은 극복될 것이다. 잠시 뒤돌아보자면 무시로 환상에 대해 생각했던 습관적인 공상은 아주 헛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과연 소망이 사랑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게 대체 무슨 우스꽝스런 상상인가. 글쎄 사랑이란 무엇일까 도무지 모르겠다. 차라리 어떤 복고풍 야망을 지망해야겠다. 그러는 게 좋겠다. 그런데 설레는 기대는 패망했을까. 모르겠다. 그러니까 가슴이 뭉클하고 코끝이 찡하며 눈물이 핑도는 사랑은 대관절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알 수 없다. 괜히 예감만 고조되고 덧없이 단꿈만 고양됐다. 비망의, 이 무슨 비망의 그 얼마나 대단한 청춘소설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결국은 머머하고 싶다 라는 어망에는 아무 것도 걸려들지 않았다. 도저히 낚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마침내 촉망 받던 예술적 착상은 엉망이 됐다. 어쩌다 보니 경망스럽게도 그렇게 됐다. 그러나 원망 같은 건 없다. 순전히 나의 책망인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까망에 가까운 타성일 수도 있다. 황망한 변명도 이젠 지겹다. 맞다. 신물이 난다. 부푼 개꿈만 다망했을 뿐이니까. 그래도 언제까지라도 초현실에 대한 경외감은 사양하지 않겠지만 현실로부터 도망갈 수도 없다. 꿈을 쫓는 열망이 첫째고 인기에 대한 명망은 둘째다. 여심에 대한 여망과 무분별한 선망, 여러 별명들로부터 믿음직한 덕망까지 후보군은 많고도 많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으로부터 신망을 얻는 게 먼저일 것이다. 좌우지간 마음이 습관적으로 약해질지언정 민망한 미망은 발설하지 말 것. 돌아보니 삶이란 게 그렇다. 좋아함은 약간 희미했으나 꿈은 항상 다망했다. 허영과 허세와 허풍을 앞세우는 허당의 성과란 이처럼 허무와 패배감을 남긴다. 그것은 곧 몽상가의 직업 섬망일 수는 있으나, 잠깐 재미는 있겠지만 그게 문제다. 크고도 중요한 문제다. 애잔한 로맨티스트의 선망이라는 게 늘 이렇다. 그래서 결론은 항상 갈망과 소망에 대한 새로운 열망과 놀라운 희망이 필요하다는 건가. 아마도.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시시때때로 실망과 미망과 절망에 빠져 살색 탐욕에 괴로워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을 과연 모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없을까? 없다! 가망없는 얘기일 뿐이다. 뭐라고 노망했냐고? 아니다. 왜냐하면 난 아직 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노로함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젊은 미소가 요망할 뿐. 그러므로 이 가운데 제일 유망한 덕목은 아무래도 소망과 열망쯤일 것 같다. 사춘기를 기억한다. 일기장을 생각한다. 소설을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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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101

from 소설 2017. 7. 3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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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니는 배가 불렀다. 그런데 헛배만 불렀다. 행복은 짦았다. 할 말은 떨어졌고, 할 일은 없었다. 역시 재미도 없었다. 선물은 주지도 받지도 않는 것. 찬가를 부를 기분이 아니었고, 송가를 지을 분위기도 아니라는 사실. 기쁨에 겨웠고, 행복에 흠뻑 취했으며, 달콤한 사랑에 빠졌고, 온갖 쾌락에 젖었다? 딱 그 반대였다.
   낭만적 정서가 턱없이 부족한 남자 포니는 원래 호기심을 원했다. 그러나 그에게 도착한 감정은 무료함과 권태와 타성이었다. 재미없음. 그래도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류 작품을 꼬박꼬박 착착 발표해서 친구들과 거의 엇비슷한 수준의 수입을 올렸다. 엇비슷...은 거짓말이고, 녀석들 턱밑까지 빠짝 뒤쫓지는 못했으나 나름 선전했다. 먹고 살 만큼은 벌었으니까. 먹고 살만 하고, 예술가 신분에다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천국은 멀리서 찾을 일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영감이 바닥났다는 거. 애초에 있었는가도 의문이지만. 할 말이 떨어졌고, 할 일은 있는데 따분하고 왕성한 의욕이 주춤하다는 거. 즉 꿈틀대는 욕망은 일과 놀이가 아니라 선정적인 사진과 피상적인 주색과 말초적인 에로 비디오 보기로 갈 듯 말 듯 하고 있었다. 그는 세파에 시달렸고 온갖 유혹에 유린당했다. 그래서 포니는 무너진 자신감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거울을 보며 동기 부여 강연회에서 배운 표어를 따라해 보기까지 했다. 너는 스탠드업 코메디의 제왕이다. 너는 스탠드업 코메디의 제왕이고 환상 소설 작가다. 그러나 그렇기는 한데, 그는 일어서기만 했다. 그분은 떠났고, 글도 안 써졌다.
   그러던 어느 날 실비아로부터 연락이 왔다. 실비아는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의 편집장이자 그의 친구였다. 잡지 분량이 부족해서 그러는데 잡지 말미에 낑겨넣을 세태 풍자문을 하나 써달라는 용건이었다. 물론 그들은 친했기 때문에 시작은 정중함이었고, 중반부터는 따지는 말투였다. 말이 자주 겹쳤고, 말이 이상하게 섞였다. 실비아는 명령조였고, 포니는 상냥한 부탁으로 해석했다. 동상이몽. 강물이 돌을 굴리지 못한다고 실비아의 인재 욕심에 대한 조바심은 포니에게 승부욕을 불러왔다. 곧 실비아한테 포니는 비싼 돈 주고 부리기에 부족하다는 것. 너 그런 거 못하잖아, 싫어하잖아, 비평만 하지 창작은 탐스러운 코코넛과 달달한 망고에 아기 천사의 고추같은 거잖아? 늬가 하는 일이 분수대에서 물이 쉬지 않고 나오는 아기 천사의 고추를 틀어막거나, 양말 벗고 바지 걷어서 거기 들어가 영원한 사랑과 찬란한 행복을 염원하는 소원이 담긴 정성스런 동전을 훔치거나, 괜히 지나가다 살짝 스쳤는데 그러잖아. 딱 봐서 마르세이유 악동과다 싶으면 눈 깔고, 만만하면 팔 소매를 걷는 시늉을 하며, 매력적인 숙녀라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둥 뭐라는 둥 하며 기껏해야 여심을 탐하는 것 말고 늬가 할 줄 아는 게 뭐냐! 라~며 실비아는 포니를 구워삶았다. 그래도 아무리 삼류지만 너에게는 매니아가 있지 않냐. 설마 없냐? 있겠지 잘 찾아보면. 내 말이 틀렸냐? 소수의 광팬과 해바라기의 순수한 짝사랑을 너 지금 무시하는 거니 라면서. 살살 간질간질 꼼지락꼼지락,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실비아는 전화로 그 모든 요리가 가능했다. 그러므로 포니는 당연히 뚜껑이 열렸고, 반나절이 뭐야 쾨헬 몇 번 틀어놓고 노래 끝나기 전에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다. 그동안 들었던 비아냥과 놀리고 비꼬는 장난만 모아도 극본 하나는 뚝딱인데 짧은 수필은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말은 쉬워도 실행은 약간 낑낑거리기는 했다.
   수필. 살면서 어느 즈음에 수필이란 장르가 꺼려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 파형의 골을 벗어나면 깨닫는다. 수필만큼 재밌는 게 없다는 걸. 곧 돌고래나 사슴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어떤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구나 라는 감별안이 형성된 다음이라면. 이성과 감성의 심지가 어느 만큼 견고해졌다면. 그와 동시에 아동의 귀여움에서 젊음의 무지개까지 그 어딘가에 있을 신선한 상상력과 천재적인 이해력 곧 세상과 인생을 아는 동시에 말랑말랑하게 상대의 두뇌를 읽고 가슴까지 느낄 수 있다면. 수필은 느낌, 체험, 인간성 무엇보다 허구가 아닌 사실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 따지고 보면 논설도 수필이고, 노래 가사도 수필이며, 일기도 수필이다. 그렇다. 수필도 예술이다. 수필과 비슷한 여러 낱말이 있는데 어원을 분석해보면 소설은 허구고 수필은 실화 즉 논픽션이기 때문에, 빙빙 돌리지 않고 파리처럼 앵앵거리며 걸리적거림 없이 즉시 독자를 때리던가, 껴안던가, 뽀뽀하던가, 옆구리를 푹 찌른다. 넛지! (꼭 그렇지는, 많이 그렇지는 않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이번 만큼은 긍정적인 장조로 가자) 그래서 수필은 그만큼 편차가 크다. 내게 맞나 안 맞나 라는. 그처럼, 우리 오빠는 나와 말이 통하는 남자였다? 호호호 호호호호! 수필은 주관식─처음부터 끝까지─다양성의 문제에 대해서 좀 매정한 듯 하나 굳이 말하자면 점수랄지 평가와 호불호도 금새 드러난다. 뛰어나기만 하다면 참으로 놀라운 장르 그것은 바로 수필이다. 그건 곧 0점부터 70점까지를 까마득히 만든 다음에야 비로소 80점짜리를 쓸 수 있다는 말이고, 그러므로 우수작을 쓸 수 있기 전까지는 무수한 졸작을 만들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수필은 인생과 똑같다. 다만 대중 매체에서 떠받들고, 인기가 증명하고, 어디서나 환호하길래 지난 작품들이 대체로 80점은 되는 줄 알았는데 한번도 80점이었던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용당했네 팽당했네 헛살았네 라며 비화도 생긴다. 총아였다가 뜨거운 감자로 취급될지도 모르지만 예술도 분명 하늘만큼 땅만큼(?) 오락산업의 수하에 들어있으니까. 뭐라구요 똘만이요? 공생관계라고 합시다! 편애 받을지는 몰라도 수필의 상위 개념인 예술도 응당 지주기업인 오락산업의 산하 브랜드로 보는 시각도 있을 테니까. 왜냐하면 그것 역시 산업이니까. 누구나 귀가 따갑도록 듣고 읽고 보고 때로는 스스로 뜬소문의 주인공으로 내가 당첨되기도 한다. 가령 쓴소리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성명문. 그러나 그건 공식 논평이고, 사적 정담까지 그러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쓴소리를 무수히 들어서 호평받을 만한 작품을 내놓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쓴소리를 듣는 데서 쾌감을 느껴서 그쪽으로 가버리는 예술과 개인 브랜드 포지셔닝 역시 없을 수가 없다. 내 인생만 멋진 게 아니다. 내가 보는 세상이 다가 아니다. 따라서 요점은 이렇다. 수필 역시 인생과 마찬가지로 연습과 실전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라는 점.
   아무튼 그것을 실비아는 포니에게 한번 해볼래, 어때 할 수 있겠니, 못하면 하지 말고 라면서 권유했다.
   그래서 포니는 기고문을 실비아에게 보냈고, 그것은 미스테리아 뒷편에 익명의 제보라는 제목으로 글이 실렸다. 비록 거액은 아니지만 포니는 짭잘한 고료를 챙겼으니 이제 역할을 바꾸는 일만 남았다. 구경꾼에서 요술쟁이로. 탐미주의자에서 낭만적 탐험가로. 모사꾼에서 여행가로 말이다.
   그가 쓴 기고문이란 건 별 얘기 없었다.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 딱 거기까지. 그래도 한번 살펴나 보자면 이렇다.


   2

   어느 대회 복장 규정 강화 논란.
   이런 뉴스가 보임. 과연 이건 논란의 대상일까, 아닐까?
   오락적으로는 그렇고, 상식적으로는 아니다. 정도의 문제에 대해서 물밑에서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최소의 품위를 갖추자>라는 취지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관람자의 태도가 관조적인가는 선택의 문제일지라도 적어도 선수의 선수다움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소극적인 선수라 할지라도 경력이 늘면 세러모니 실력도 덩달아 늘 수 밖에 없다. 그거든 뭐든 어디서나 앞뒤 보지 않은 체 무조건 반대만 일삼는 개구쟁이는 많지 않다. 곧 이건 어디까지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잡담의 소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식이 재밌는 게 뭐냐면 별 얘기 아닌데 지극히 상식적인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이 얼마나 다른가를 엿볼 수 있다는 것. 오락 산업이 먹고 사는 이유다. 반응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 재밌다. 이런 데서 상식과 교양과 예의의 기준이 조금은 갈리고, 때문에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는 없을 수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적극적인 반대 의견은 몇 가지로 취합된다.
   1) 말 그대로 프로선수인데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지 까다롭게 뭘 규정까지 하냐, 그건 좀 아니지 않냐?
   그럼 비키니 입고 골프쳐도 된다는 거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최소한의 품위를 정하고 정하지 않고는 개인이 하기 힘들다. 그건 시대가 가고 세월이 흘러야 하니까. 그래서 기본적인 지침은 위에서 정하는 게 맞고, 추가적인 방침은 의견을 모아서 검토하는 게 좋다. 곧바로 단점 먼저 떠올려서 빈틈만 반박만 할 게 아니라 잠깐만 생각을 해보면 된다. 나는 나이트클럽의 요구에 응하고, 고급스런 레스토랑의 불문율을 지키고, 숙녀에게 양보하며 꽃을 선물한다. 고급 사교 클럽에 가는 이유는 급이 되는 교양인으로 형성된 클럽이기 때문이다. 난 고품격을 아는 신사니까. 게다가 내 취미인 테니스 때문에 우리 집에는 흰 옷만 애교로 100벌. 난 수 틀리면 난동을 피우는 장난꾸러기가 아니니까. 정치인에게는 모범만을, 나는 탈세와 불법과 자유와 비밀스런 방종까지. 난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꽉 막힌 사람이 아니니까. 야한 옷을 입든 자유분방하든 어쩌든 다른 아가씨의 옷차림이야 그분의 자유. 내가 무슨 권한으로 그분들 자유를 반대한며 침해한단 말인가, 오히려 감사하다면 모를까. 단, 내 여자는? 내 여자가 아니라 남의 여자라, 오 땡큐? 그런데 이게 과연 시대를 역행하네 어쩌네, 그런 문제라도 된단 말인가. 어디까지나 최소의 드레스 코드는 주최측의 권한. 내가 돈과 인기와 행복을 성취하면 품위를 찾고, 그게 만족스럽지 못하면 내 친구와 타인과 세상은 품위를 찾거나 자랑해서는 안된단 말인가? 모르겠다. 자율로 다 된다면 헌법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2) 주최측 입맛에 맞게 웨딩 드레스를 입고 하지 그러냐?
   이분은 격식 싫다는 거다. 정규 뉴스 앵커는 양복을 입어서는 안되고, 구두를 뭐하러 신나 슬리퍼만 끌고 다니면 되지. 졸업식에서 시위를 하고 결혼식에서는 무조건 신부보다 튀어야 만족하며, 장례식에서 소란 피우는 건 그건 참자. 그리고 오페라 극장에는 가죽점퍼에 반바지에 요란한 헤어스타일에 풍선껌으로 풍선을 불며 들어가자는 거다. 단, 내가 주인공이면 얘기는 다르고. 미래 생활 사전을 지금 당장 도입할 수는 없고 많은 전형은 차츰 일부분 변하겠지만, 불편해서 아름다운 격식이 있음과 동시에 내가 편해서 불미스런 모습도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3) 넘 보수적인 규정 아니냐?
   이건 보수냐 진보냐, 그런 개념과 관계가 없지 않을까. 100년, 1000년이 흘렀으니까 노출이 심한 옷을 입든, 뜨겁고 찐한 장면을 드라마에서 자세히 묘사하든, 옛날에 첩이 10명이었든 지금 결혼을 10번 하든 그건 모두 개인의 자유 아니냐? 그건 개인의 자유고, 이건 대회의 규칙. 상상의 자유는 각자 인생의 즐거움이자 예술의 소재일 수 있다. 그러나 사사로운 동시에 (정치적인 표현으로) 전혀 중도적이지 않은 의견을 법과 도덕과 인습과 동격으로 봐서는 좀 곤란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표현의 자유와 시원한 노출은 개인 자율이지만, 예스런 전통을 고수하는 건 자율보다 더한 노력 곧 백만 가지 자율에 대한 적정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집에서야 팬티만 입든 나비넥타이를 매든 자유지만 열린 공간 아닌가. 수영장에서는 수영복, 볼링장에서는 볼링화, 골프는 장비발. 게다가 대회 심지어 전통과 권위가 있다? 어렵게 쌓은 전통과 권위 무너지는 거 한순간일 수도 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 그건 과거에는 널리 통용됐으나 지금 적용하기에는 조금 모호한 속담이다. 잘나가는 나이트클럽 폐업하는 거 하루 아침이다. 일부러 규제를 완화할 수는 있어도 그 규제가 가치를 불러올 수도 있다. 갖은 스트레스와 불만족스런 야망의 실현을 삐닥한 시선으로 연결하시는 건 그래 봐야 그분들에게 안된다. 그쪽도 전문가가 계시다는 말씀. 그분들 세계에도 계급이 있다. 빈수레는 요란하지만 전문가의 전문가께서는 아무 말씀없이 조용히 뒷짐만 지고서 저 달을 바라보실 것이란 말이다.
   4) 지금이 무슨 구시대냐?
   글쎄요. 단순히 현대적인가 고풍스러운가 그 문제는 아닌 것 같음. 돈에 대해서 피라미드가 있듯이 타고난 인생관과 안목과 의식의 차이는 수직적은 아닐지라도 수평적으로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좋은 격식은 지키고─따르고─참자, 에 대해서는 구분이 훨씬 간단하다. 딱 3가지로. 좋다─싫다─모르겠다로. 여기서 옳냐 그르냐 찬성이다 반대다, 는 정작 덜 중요하다. 왜냐하면 저 세 가지 가운데 모르겠다의 비중이 예상외로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 비중은 묵과하기에는 결코 적지 않다. 말수, 주관, 천성, 나이에 따라 모르겠다, 관심 없다 라는 유동표가 꽤 된다. 그러므로 청춘은 말수와 예술을 바라보는 안목, 어떤 사안에 대한 감별, 농담을 선호하는 관점, 화려한 외면을 응시하면서 만족함과 동시에 내면을 꿰뚤어 볼 수 있는 혜안, 고상한 인생에 대한 기준과 대개는 돈과 경험이 부족하고, 때문에 젊어서의 연애는 멋지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소수 괴짜와 돌아이를 보는 기쁨이랄지 특별한 맛배기든 짜릿한 눈요기든 형식에 얽매이기 싫다면 반대 의사를 견지하는 것 역시 존경은 힘들더라도 무시보다는 소수 의견에 가까울 것이다. 누구나 백조, 아무나 예술가, 기나긴 롱테일을 포용하는 민주주의가 그렇기 때문이다. 말은 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아무 이유없이 싫은 사람, 왠지 모르게 끌리는 남자, 어쩐지 매혹당했음을 부정하기 싫은 여자, 나와 캐릭터가 일부 겹치는 사람, 있지 않은가. 그러면 또 잘 모르겠다는 분은 반대도 합리적 이성주의인가 막 그러면서 헷갈리신다. 이렇단 말이다. 그처럼 귀가 팔랑팔랑할 때 광고의 잔상은 남고, 달변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쑥 들어온다. 훅!
   경기의 목적이 뭐냐, 경기장 밖에서야 몰라도 경기장 안에서야 경기를 잘하는 게 최고 아니냐, 경기의 본질인 경기만 잘하면 되지 귀찮은 규제가 다 무슨 필요 있나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 진짜 그러할까? 그러면 사랑은, 사랑한다면 사랑하기만 하면 되지 배경과 능력과 성격과 비전 그런 게 다 뭔 필요 있나? 그 모든 조건 다 필요 없고 사람만 좋으면 된다? 그 모든 조건 다 빼놓고 진정 그 사람만 사랑한다면 모를까 실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어른들은 잘 아시지 않는가! 남자와 여자는 다른 점이 너무 많다. 밤에 TV를 켜놔야만 잠이 들고 자는 시간 내내든 반틈이든 TV를 반드시 켜놔야만 잠을 자는 남자와 숙면을 위해서는 고요와 암흑이 필요한 여자의 차이는 그것 말고도 무궁무진하다. 더군다나 인습을 떼놓을 수도 없다. 대륙A와 대륙B, 가장 큰 차이 가운데 하나는 거리에서 남자의 상의 탈의다. 한쪽에서는 그거야 뭐 별로 신경쓰이지도 않고 음 그렇고, 한쪽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종교적으로도 조금 그런 측면이 있다. 의식과 문화적 차이가 있단 말이다. 그 모두를 지구에서 제일 먼저 겪은 곳은 제일 많이 싸운 곳이다. 바로 유럽! 그것은 곧 다양성이 아니라 기본에 관한 사항이고, 모던함과 규칙과 자율에 앞서 예절의 문제라는 성격이 짙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되는데...? 생각을 왜 해! 똑똑한 핸드폰과 환상적인 인공지능이 있는데. 젊은 당신이자 멋진 그대는 저분들이 우기면 아차-하신다. 주관이 무디고 마음이 여린 당신께서는 인간의 날개라는 귀가 펄럭이게 되어 있다. 강한 부정을 먼저 들어보시라. 별 관심도 없는데 부정의 정담함과 의견의 강함에 대한 동기가 불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어쩜 새로운 장을 만들어야 할 것만 같을 것이다. 우기면 멈칫하고, 의견이 강하면 동조하고, 많으면 달라지고, 분위기 좋으면 따라간다. 영문이 불확실한 열정은 언제 어디서든 대기중이다. 예술도 그렇고, 상업도 똑같다. 대세는 언제라도 합리주의다. 과거의 서커스는 현재의 예술이 됐고, 상술도 상업과 경영학이 됐다. 그러나 요술은 아직도 요술이다. 요즘 세상에 더 이상 듣고 읽는 수요가 없는데 동요를 누가 짓고 동시를 누가 쓰나. 공급은 어른들이 만들고 어른과 아이 모두 퍼트리며 좋아하는데, 어른들은 왜 내가 만든 동화는 안팔리냐고 투정한다. 마법사의 입지는 좁아졌고, 도박사도 환영받는 곳이 많지 않은 세상. 광고도 일부분만 규제한다. 왜냐하면 동심을 사로잡으면 그 보답은 '에게'라는 감탄사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슥 넘어가자. 기교적인 글발에 납득되는 말발과 솔깃한 화술이면 많은 분은 딱 넘어간다. 돈 쓰고 시간 쓰고 인생도 기울어진다. 내 경험만 보자면 난 솔직히 그랬다. 여자들은 대체 왜 그러는 거냐 막 뭐라 뭐라 하면 끄덕끄덕, 남자들은 어쩜 그렇게 무심할 수 있냐 뭐라 뭐라 또 끄덕끄덕. 촌닭이 떽떽거리면 오리는 시끄러워서라도 넘어가고 백조는 그저 웃는다. 그 반대일 수도 있고. 스탠드업 코메디가 딴 게 아니다. 말수가 적고 꿈이 없고 돈까지 없으며 젊음만 있으면 혹시 저건 기본의 문제가 아니라 주관식─처음부터 끝까지─다양성의 문제가 아닌가 아차 하고 움찔하며 헷갈릴 수도 있다. 우왕좌왕 세력 확실히 있다. 그러나 어느 대회 복장 규정 강화 논란에는 휘말리고 헷갈려도 된다. 얼마든지 괜찮다. 실제 남자들은 약간 그런 소란스러움을 즐긴다. 아무리 해도 여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으니까. 그 반대 경우도 있듯이.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내 꿈을 수정하고, 배우자와 미래를 약속하며, 어딘가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피선거권자를 선별하고 심판하기 위해 엄정한 선거권을 행사하는데, 그런데도 이와 똑같이 잘 모르겠다? 글쎄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되는데...? 상식이 그렇게 쉽고, 교양이 어디서나 잘 통용되고, 예절이 잘 지켜지며, 누구나 법과 종교와 도덕에 앞서 선을 실천했으면 이 세상이 지금과 같이 아름다운 동시에 이상한 딜레마 역시 발생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거다.
   예를 들어보자. 문학박사이자 명문대 교수직을 은퇴하고 시인과 소설가와 강연가와 평론가로써 장장 100권의 책을 발표했고 하나에만 일평생을 걸었던 독보적인 작가가 말한다. 글로써. 소설을 읽는 목적은 오로지 재미라는 쾌락을 얻기 위해서라고. 지금이야 누구나 당장 어떻게 그러냐고, 뭐가 그렇게 쉽냐고 하실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 천만의 말씀! 자의식 과잉에 굳건한 자존심과 명쾌한 주관과 든든한 배짱을 가지고서 어떤 사안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 라고 말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친구들이 진짜 얼마나 될까? 불특정 다수는 시원한 맛이 없으니 숫자로 똑떨어지게 가정한다면 대략 2명 중 1명일까, 아닐까? 평균 연령을 낮춰 현행 교육 체계가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젊은 친구들은 "소설을 읽는 목적은 오로지 재미라는 쾌락을 얻기 위해서"라는 어느 권위자의 말씀에 얼마나 동의할까? 최소한 나서서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앞장서서 반박하는 사람은 썩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첫째 어느 정도는 그런 사견에 동의하기 때문이고, 둘째 내 사유가 별반 뚜렷하지도 않은데 굳이 의견을 대립해서 논쟁하고 싶지도 않고(멋모르고 감히 나섰다가 제대로 꾸중 듣고 나면 기분 참 좋겠다), 셋째 그분께서 어쩌면 쾌락주의자에 신비주의자에 저명한 전문가이자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신 박사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확고하게 주장하시는 논리적인 영문과 뭔가 그럴만한 동기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쩜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라면서 여지없이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조금만 과장하자면 전문가나 권위자라고 할지라도 어차피 오십보백보다. 오히려 미네르바는 언더그라운드에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수다로 흔히 말하듯 이상형이 누구세요 라는 물음에 곧 누구의 목소리와 누구의 외모와 누구의 뭐에 궁시렁궁시렁, 그처럼 전문가의 탁월한 기술과 비전문가의 참신함, 원숙한 노련미와 푸르른 새로움, 업계의 상업성과 비상업적 독립 영화의 도전 정신을 모두 한 바구니에 담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러지 않아도 중간에 정치가 개입되고, 질서 뿐만 아니라 도덕와 동물농장론까지 행복의 정복에 도달하기까지 넘어야 할 허들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라는 자의식은 오직 개인의 것, 라는 법칙에 따라 당연히 그와 같은 의견은 설득도 얻을 것이고 반대도 있겠으나, 그건 지금 세상에서 어디까지나 예술론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다, 자유! 자유라고. 현재 그렇게 말하고 글을 쓰는 건 요술도 상술도 아닌 예술이다. 대상은 예술, 당사자는 예술가! 캬, 멋지자나? 어? 음! 캬, 폼 난다고! 그러나 과거에는 만일 그렇게 했으면 죄수복을 입고서 법정에 선 다음에 형무소에 갇혀서 내가 대체 뭘 잘못했을까를 고민하는 삶을 살았다. 문학박사이신 그분께서는 실제 그러셨다. 멋 옛날도 아니고 불과 언제쯤에 말이다. 그런데 자기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로 일가를 이루신 또 말상이신 그분을 대가나 거장이라고 불러도 될까? 된다. 그래야 한다. 그게 맞다. 집중한 분야가 좀 그래서 그렇지 온 인생을 내던진 학문적 성과로서 봤을 때 응당 그래야 옳다. 일관성으로만 봐도 그래야 당연하다. 대가 누구, 거장 누구라고 해야만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지 않는다. 절대 그렇게 불러주지 않는다. 일관적으로 한 분야만을 오래 연구해서 양산해낸 작품으로 본다면 짜잔한 삼류, 졸렬한 이류, 비겁한 일류를 모두 아래로 하고서 그분이 대가가 되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처럼 합리적이더냐. 꼼꼼하고 불친절하며 괴팍한 데다 능력 만큼은 절대적인 1인자 마에스트로를 관혁악단 단원들이 백퍼센트 반길 리가 없다. 예술이라는 직업과 별개로, 지인을 만나고 꽃을 사고 여행도 갔다가 사랑을 아는 내가 상사병에 빠진 친구를 챙겨야 하는 내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80점 짜리 작품을 만드는 인자한 리더를 반기지 미칠 정도로 100점만을 추구하는 괴팍한 기인을 좋아할 리는 없다는 것이다. 퇴근 필요 없고, 연습실에서 형사처럼 잠복근무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시향 단원이면 그래도 나름 중견 음악가이자 교양인인데 무슨 조련사가 어느 날 갑자기 떡하니 나타나서 연예인 지망생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듯이, 그래 닭 잡듯이 단원들을 잡는다면 퍽이나 좋아하시겠다. 그처럼 전문적인가 일관적인가로 따졌을 때 그 문학박사님께서는 대가이자 거장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상의 이치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인들은 팔랑팔랑한 군중의 귀에 바람을 불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줘야지 내 주관적 성향과 학계의 성토에만 귀 귀일 수는 없다. 돈을 번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순수예술가야 돈을 받고 연주하는 만큼 전문가로써 그 값을 해야 하나, 대중예술가와 직업인들도 그래야 한다? 그건 넌센스다. 순수예술로써만 밥 먹고 산다라, 스포츠 선수 가운데 정확히는 몰라도 0.1퍼센트만 얼굴을 알리고 나머지는 다 20대에 새로운 인생길을 찾아야 한다. 스포츠는 다르지만 많은 분야는 그게 다 모든 기준이 돈과 인기 때문이다. 날 보시오 나를. 대가가 아니니까 이런 날 선 비판을 할 수 있지 돈과 인기는 되는데 돈과 인기만 되는 분이 뭐 대단한 철학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 없다. 대체로, 대체로 못한다. 할 수 있고, 실제 하고,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분은 주변만 빙빙 돈다. 일명 수박 겉 핥기. 그래서 돈과 인기를 챙긴 거니까. 치과의사가 과잉 진료에 대해서 고백만 해도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지 않는가. 내부 고발이니 뭐니 이 세상이 어떤 원리로 돌아가나? 돈과 인기다, 돈과 인기! 왜냐하면 저 세상이나 다음 세상은 몰라도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학문적 성과보다 돈과 인기를 거장이나 대가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맞다. 말상이신 어떤 학자이자 예술가는 돈 없고 인기도 없다. 한때 화제가 되고 연예인처럼 조명을 받고 이름을 알리기는 했으나 과거에도 현재에도 가난하고 알려진 이름만큼 어디서 찾거나 누가 애써서 기억하지 않는다. 그게 다 대가와 거장의 기준이 오직 돈과 인기이기 때문이다. 돈과 인기가 따라주지 않는데 학문적 성과로 만리장성을 쌓았다? 세상 사람들도 대중 매체도 고개를 돌린다. 싸늘하게 외면받는다. 반대로 학문적 의미는 그만그만한데 돈과 인기는 월등하다? 쉽게 거장이 되고 누구나 대가가 된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니까. 그런 예를 찾기는 식은 죽 먹기요 땅 짚고 헤엄치기다. 안 그렇소? 합리주의든 운이든 뭐든 뜨면 끝이다. 돈과 인기가 날 띄워주는데 내가 손만 까딱해도 입만 뻥끗해도 대중은 반응하고 열광하며 자기들끼리 설전을 벌인다. 그렇다. 그것은 수학도 아니고 넌센스 퀴즈도 아니다. 너와 나는 다르고, 딱 세 가지가 최고라는 논리인 듯 하다. 자유와 돈과 인기. 그래도 다시 확인해보자. 왜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은지를. 소설을 읽는 목적은 오로지 재미라는 쾌락을 얻기 위해서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맞다 틀렸다 라고 심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실제 사람들은 그렇게 살기 때문이다. 아직도 윤리적으로 뭔가 의심스럽다면 '소설'대신에 다른 낱말을 넣어보면 된다. 음악을 듣는 목적은? 나이트클럽에는 왜 갈까? 시가는 왜 피우고. 맞다. 사랑은 왜 물어보냐고 얼굴을 붉히실 수도 있다. 만약 "소설을 읽는 목적은 오로지 재미라는 쾌락을 얻기 위해서"라는 명제가 백조 모임이든 어디에서든 호응으로 단연 1등이라면 거슬러 올라가서 <왜 쓰는가?>에 대한 해답 역시 자명해지지 않을까. 왜 쓰는가! 왜 쓰냐고? 왜 쓰겠나, 읽는이에게 오직 쾌락만을 주기 위해서지. 아니 그런가요? 아니다. 딱 아니다. 왜냐하면 너 그럴려고 프로그래머가 됐냐 라는 말을 들어마땅한 사람이 있다면, 너 설마 자랑할려고 소설을 쓰냐 라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 역시 합당한 추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작곡을 오로지 돈 벌고 인기를 위해서만 한다,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이 좋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시대를 앞서가는 어떤 그림만을 그린다, 나는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쓰는 나만 좋으면 됐지 읽는 타인이 좋든 싫든 그게 뭔 상관인가, 소속사에 가면 건물 전체가 내 공연 포스터요 방송가에서도 어디에서도 러브콜은 끊이지 않고 아이 좋으라 아이 좋아라 내가 사는 이땅은 진짜 천국이구나 나는 아마도 천사가 맞는구나, 나는 구설수에 휘말리는 그 즐거움 때문에 이상한 말을 가리지 않고 막 퍼트린다 내 진짜 속마음은 그렇다 난 그런 내 인생이 너무 마음에 든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타인의 시선이 대체 뭔 상관이란 말인가. 나만 좋으면 그만이란다. 나만 좋으면? 어른의 스승은 아이들이라면서 어른들은 그런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지, 이 사회가 나한테 해준게 뭐냐고 아름다운 세상 그런 거 생각치 말고 나만 잘난 줄 알면 그만이라고 한다. 시대에 따라 자유가 늘고 법의 굴레가 줄어든 만큼 이 세상은 돈의 논리에 따라 오락 산업이 왕관을 쓸 수 밖에 없다. 예술은 무슨! 돈이나 벌고 인기나 챙기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 라는 말이 바로 이래서 나왔구나. 옛날 옛날에. 광고를 규제할 필요가 뭐 있나? 없다! 전혀 없다. 더이상 성인용이란 고리타분한 교훈은 지나가는 개한테나 던져주자. 스포츠 선수로 활동해도 일류가 아니면 먹고 사느라 허덕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심판을 매수해서 돈이나 벌자. 안될 게 뭔가. 불륜도 걸리지만 않으면 그뿐이라는데.
   저급하게 비꼬는 말이긴 하나 실상 꼭 그렇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하는 말이다. 비꼬아서 하는 말을 비꼬지 않은 뜻으로 받아들이시는 분이 간혹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진짜 그렇다. 드라마에 나오지 않나. 소시오패스가 직설법으로 말을 했는데 일반인은 의역해서 받아들이는 예. 너와 나의 다른 생각은 정말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의견과 구미는 너무나 다양하다. 천차만별이다. 그 어떤 악행이나 불명예나 과오와 망작과 죄라 할지라도 입장은 다 있다. 우주처럼 드넓은 개인의 자유와 상상처럼 기발한 표현의 자유, 존중받아야 할 취향까지 그 모두의 양극단은 꽤 애매하다. 그래서 법보다 베니스의 상인 같은 교훈이 필요하고, 그래서 종교가 태동했으며, 바로 그래서 인간에게는 양심이 사회에는 윤리가 있다. 개구멍은 없을 수가 없단 말이다. 촘촘한 법망과 고결한 예의와 단아한 인성을 벗어나는 일에 대한 변명 가운데 제일 흔한 게 몇 가지 있다. 장난이야, 농담인데 뭘, 뭐 그런 거 가지고, 퍼포먼스임, 프라이버시다, 예술 또 예술, 내셔널 지오그래픽인데 말리지 말지 그랬어, 착각했다, 처음에는 한번으로 멈출 생각이었다 시작은 작았다 등등. 또 있다. 애 보기에 곤란한 행동 남이 볼까 민망한 의식 짜잔~, 그런데 오오 고마워라 아아 감사해요? 핑계 없는 이별 없고, 사연 없는 무덤도 없다. 불가피하게 마찰이 발생하는 모순과 딜레마에 대해서 내 분야에 99를 할애하더라도 적어도 예술가라면 1은 그것을 다뤄야 한다. 최소한의 책임을 회피한 체 돈과 인기만 쫓는 예술가는 예술가가 아니라 업자다. 상인과 장사치는 종이 한 창 차이이듯이.
   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이렇다. 나는 이 세상에 나르키소스가 그렇게나 많은 줄은 미처 꿈에도 몰랐다. 와, 살면 살수록 정말 너무나도 놀랍고 또 놀랍다. 물론 표현이 적극적이고 선천적으로 말수가 많은 사람의 컨텐츠가 책과 라디오와 신문과 TV에 주로 노출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나르키소스도 종류가 많겠지만 나르키소스의 일반적인 특징이라면 글쎄 말수의 빈도는 차치하고 주관이 뚜렸하고, 이기적이고, 말이 많다. 여자만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는 게 아니라 남자도 똑같다. 내가 표출한 기호가 말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내 의사가 전달되면 반응이 어떨까>보다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발표하고 싶은 욕구가 훨씬 더 강하다. 내가 표출한 기호가 말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내 의견은 고유할까, 공통적일까>보다 <내 의견이 고유하면 어떻고 공통적이면 어떤가>가 월등히 우세하다. 그러므로 표출하지 않은 내 내면의 기호가 말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그것은 은연중에 또는 곧바로 드러난다. 속에 담겨진 무엇을 바깥으로 표출해야만 만족하는 듯 보인다. 견딜 수 없으니까. 젊음을 어떻게 참나. 내 것은 모두 나라는 유일한 객체의 생각이니까, 따라서 내 생각은 모두 고유하고, 고로 내 속에 담겨진 무엇 가운데 고유한 것만 추려서 내놓는 게 아니라 선별 과정 없이 내놓는 것만 같다. 때문에 나르키소스의 기표는 거품이 많고, 살짝 시끄럽다. (거품뿐인 맥주도 맥주라면) 포도주보다 맥주 같고 우유보다 청량음료 같다. 리본을 풀고 포장지를 벗기면 슝 하고 선물은 사라진다. 항산화물질도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쨍 하며 기쁨이 지속되야 하는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그 경험이 오래 반복되면 빡 돈다. 빡 빡 돈다. 그래서 나르키소스의  '또 그 얘기'에 비-나르키소스로써는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고, 만일 그분이 친구라면 술을 권해서 취하게 만들고 나는 그의 취한 모습을 보고서 쾌감을 느끼는 걸 선호하면 그만이다. 능력자는 나르키소스가 비-나르키소스보다 많다. 잘은 몰라도 그런 것 같다. 왜냐하면 나르키소스가 적극적이니까. 맞다. 나르키소스는 능력 있다. 글발 있고, 말발 좋고, 발표하는 음악과 연기와 여러 컨텐츠도 작품성 있다. 끼도 충만하다. 인기와 돈이 따르니까 장비발도 좋고 생활은 풍요롭다. 수입이 느니까 생활이 풍족하고 옷발도 된다. 옷걸이는 모르겠고. 때문에 전형적인 나르키소스의 얘깃거리는 늘어나고 경험도 늘고 발표는 반복된다. 그리고 오락산업이 그 모두를 주도한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건 모두 애들 장난 같다. 바로, 학예회! 아니 노인잔치일까? 학교 축제? 농담이고, 하여튼 나르키소스는 남이 나를 촌닭으로 보든 촌년으로 보든 그런 타인의 사소한 시선 같은 건 중요하게 생각하시지 않는다. 처음부터 아예 안중에 없는 듯 하다. 1년 동안 100명의 낯선 여자에게 말을 걸어서 넘어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 1년 동안 100명의 남자가 내게 빠지도록 유혹해서 넘어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실제 그처럼 꼬시면 많이 넘어오니까, 10번 사랑하는 동안 100번의 연애가 있었으며 1000편의 영화를 보고 무려 10000권의 책을 읽어서 내 생각만 발표하면 그만인 것 같다. 실상 글발 있고, 말발 되고, 능력 있고, 기교가 되고, 방법을 안다면 돈 벌고 유명해지는 건 시간 문제인 것 같다. 능력자들이야 일도 아니겠지. 그런 반면 내 인생 내 것인데 남이 뭔 상관인가, 바로 그처럼 따지실까 봐 이렇게 소심하게 의견을 발표하는 비-나르키소스도 있다. 한 명의 비-나르키소스가 봤을 때 이런 나르키소스의 특징들은 도저히 따라하고 감행할 수 없는 자신감이다. 감히 흉내도 못낸다. 범접할 수 없는 일종의 장점이다. 아무리 해도 흉내낼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러니 일부 비-나르키소스는 성장기에 카페 사장을 꿈꿨다가 어른이 되서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내가 만약 앞으로 어쩌다 카페 사장을 하게 된다면 나는 회원제 카페를 운영할 거라고. 아마 카페 사장 꿈을 포기하긴 하겠지만.
   나르키소스 반틈에 말수 없는 친구, 핸드폰과 모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 생각하지 않는 사람─로댕이 혹시 하늘나라에서 이곳 소식을 듣는다면 까무러치며 놀라자빠질지도 모름. 사람들은 대체 왜 생각을 하지 않느냐 하면서. 아무리 봐도 자기가 보기에는 인공지능과 인류 지능의 발달 그 이면에 드러나는 딜레마인 것 같다고 하실지도 모름─뭘 해도 재미없다는 사람, 사랑 같은 거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 코메디언, 예술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등. 왜 어른들이 간혹 가다 스무살과 20대를 응애응애 오리 꽥꽥 참새 짹짹이라고 하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니다. 알 듯 모를 듯 하다. 왜냐하면 X축 시간이 갈수록 Y축 여러 지표들이 변하는 것처럼 쾌청한 솔일까 라일까 시일까, 여자들의 육체가 커지는 만큼 여자들의 목소리가 낮아지는 것처럼 저 20이라는 숫자도 점점 올라만 가는 듯 하니까. 아니, 그 숫자는 언뜻 희미함도 모자라 사라지는 것만 같으니까. 세상이 점점 더 나르키소스를 원하는 듯 하니까 말이다. 그 말은 곧 젊음은 새로움이고, 새로움은 가능성이며,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실상 어른의 취향은 청춘에 비해 고루하고 딱딱할 수 밖에 없다. 청춘의 신선한 시각과 노익장의 지성을 함께 취득하면 좋겠지만 말이다. 결국은 통속적으로는 돈, 달리 말해 소비, 학구적으로 말해서 경제가 지배하는 세상, 글발과 말발과 기교와 겉모습이 전부인 듯 하다. 사정을 들어보고 말을 나눠 보면 끄덕끄덕,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어딨겠나. 꼬끼오, 꽥꽥, 짹짹,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비약하자면 철학보다 쾌락이란 말인가? 아니었으면! 통찰보다 핵심? 생각이 먼저이기를! 꼭 그렇지는 않기를. 낭만보다 그저 겉멋? 허세와 허영와 허풍이 5도 95도 좋으니 음악성을 띄고 리듬을 타기를. 그런데 정신분석학에서 정의하는 나르시시즘과 성격 유형으로서의 나르시시즘, 그 둘은 일치할까? 일치하지 않는다. 일치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곤란하다. 전자는 만약 과했을 때 인격적인 장애 증상에 가깝고, 후자는 자긍심과 자존감에 더 후한 점수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 의심스러운 것은 바로 이 세상이 그 둘의 구분을 불분명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한다는 점이다. 과도하게 자기애적이지 않은 사람은 자의식이 과잉된 사람의 성화와 따따부따의 등쌀에 못이겨 괴로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크게 염려하지는 않아도 된다. 커피포트가 있으면 진공청소기도 있는 법. 나르키소스에게도 천사성과 천재성이 듬뿍 내재하며 이 세상이 원래 정글일 뿐, 알고 보면 각자 성격과 특징과 매력과 끌림이 다르고 작은 차이가 존재할 뿐, 사랑에 상심하고 기대에 절망하며 들뜬 예감이 답 없는 허당으로 판명나는 일은 살다 보면 부지기수이니 미리 걱정하지는 말자.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직관을 키우고, 현실은 이상으로도 환상으로도 기적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는 자명해진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잠깐만 그렇게 생각하자. 그렇다면 주입식 교육도 장점이 있다고 믿는다면 길게 생각할 필요없이 답은 나온다. 50퍼센트든 20퍼센트든 나르키소스형 인간이 아닌 이상 어차피 인생의 전반기는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보다는 세파에 휘둘리고, 타인의 주장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정부의 교육 체계가 그런 게 아니라 인생의 전반기 자체가 주입식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의 삶 자체가 인생의 전반기에서 입력과 경험이 너무나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듯 하다. 당신이 나르키소스형이 아니라면 말이다. 음 그건 농담 반 진담 반이고, 결론은 이렇다. 결론은 삼천포다. 모든 다양성을 뒤로 하고 <백조-하자>는 이해할 수 있는데, 촌닭-하자? 이상하다! 출세하다, 부자되세요, 낙향하다, 내꺼-하자, 오늘 취하자 젖어라 빠져들어, 글마 인생은 모르겠고 성님 성님은 말이유 인생이 성님께 친절을 베풀었길 바라네유 등등등. 그건 들어봤다. 누구 행운의 경주마를 타다 같은 헤드라인도 읽어 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가능할지 모르지만 '촌닭하자, 촌닭되자'라는 경구는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못 들어봤다. 저주나 악담이라면 모를까. 따라서 개인적으로 백조를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결국 그 문제인 듯 하다.
   인문학에서 말하는 혁신, 업계에 간혹 등장하는 천재, 쇼팽의 연습곡 혁명, 시대가 바뀌는 개혁이 증명하는데 지금 세상에 웬 구시대적 착오네 뚱단지 같은 발상이네? 그보다는 고집스런 장인 정신, 바보 같은 참을성, 배고픈 소크라테스에 가깝지 않을까? 우직한 땀방울 그것 말이다. (하지만 또 그분들 모이시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면 쏙닥쏙닥 으샤으쌰하는 건 일도 아니다. 대타로 나갔다가 신세계를 발견했고 횡재했고, 척키는 열 받고 광분하고) 흔한 말로 뒷북이란 축제와 축하와 회상까지 끝났는데 마음이 경기장을 떠나지 못하고 내내 남든가 틈틈히 찾는 일을 뜻한다. 얼핏 봐서는 복고풍과 비슷할 수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뒷북을 다르게도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서지 않고 믿고만 듣고만 보고만 있다가 외면한지 함참 지나서 뒤통수 맞는 일. 더 더 나아가서 어른들이 오직 돈 벌려고 순전히 떠들었다는 걸 아이가 커서 뒤늦게 알게 되는 것. 그분들의 정치성과 행복론과 사랑학과 철학과 행동주의와 낙천적인 세계관에 순응하다가 다 커서 동물농장의 생리와 본질을 알고 난 후 감탄하게 되는 것. 바로 그것도 뒷북일 수 있다. 세상이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페라리와 에르메스가 내게 어울리지 않을 수는 있어도 페라리와 에르메스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그것이 나의 일상적인 소비 범주에 들지만 나는 턱을 내밀며 그쪽은 쳐다보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 형편이 못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음을 돌려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진짜 페라리와 에르메스를 싫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경기의 본질인 경기만 잘하면 되지 다른 규제가 다 무슨 필요 있나? 만일 그렇다면 선수들끼리 암묵적으로 지키는 불문율은 뭔 필요가 있나. 만일 그렇다면 선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되고, 예술가는 예술의 의의와 예술인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덕목 그런 거 필요없이 돈과 인기와 명성만 챙기면 그만이다. 홈런 치고 나서 상대측을 야유하며 1-2-3루 한 바퀴 돌고, 수비가 끝나면 내야수들 들어갈 때 투수 자리 마구 짓밝고 지나가고, 선수들 경기하는 순간뿐만 아니라 경기 전과 중간과 후에는 무조건 주머니에 손 넣고 건방진 자세로 뚱한 표정으로 아무나 째려보며 다니자. 축구선수는 골을 넣고 마음 놓고 속시원히 상대편 선수들 보란듯이 깐죽거리면 되겠네. 얼씨구나 재밌겠네! 잡은 물고기한테 밥을 왜 주나. 바보도 아니고. 솔깃한 말로 사람들을 혼미하게 만들어서 수박 겉만 핥으면 그만이지 어렵고 진지한 얘기를 왜 하나. 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고, 해 봤더니 남의 다리만 피나게 긁었으며, 실상 자신도 재미없고, 무엇보다 그러면 재미없다고 어렵다고 사람들은 외면한다. 어렵게 쌓아올린 돈과 인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데 당장 새로운 시도는 철수된다. 당연히 그렇다. 돈과 인기로 승승장구한다? 내 어깨에 뽕이 이따만하게 튀어나와 있는데, 자존심과 자만심과 자부심까지 굳건한 예술가인데 누구에게든 내가 먼저 아는 체 할 이유 절대 없다. 인사를 받아야 정상이고 상대가 무조건 굽혀야 한다. 나는 왕이고 나는 최고고 나는 우주 대스타다. 나는 언제나 옳고 남은 항상 틀리다. 무조건. 내가 먼저 넌 나중. 복장이고 뭐고 돈과 자유와 인기와 탈규제가 최고다. 동물구출대 환경운동가 시민단체 그 밥통들! 극장에서도 영화볼 때 시끄럽게 통화하고, 고전음악을 감상하면서도 옆 사람과 수다를 나누자. 바이올린 제1수석의 찌질한 외모를 지적하고 지휘자를 험담하고, 그러면 재밌겠네. 야호 신난다! 와,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식장에서 이 결혼 무효야, 장난이에요. 너무 빡빡하게 그러지 맙시다.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모두 농담이라구요. 내빈 여러분, 유감스러운 이 세상 웃자구요 그냥 웃어버리자구요.
   신사 숙녀 여러분. 아무 걱정 마시라. 그래도 전망 좋은 쾌락 산업의 미래는 밝으니까요.


   3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 샤라라라라라 샤라라라라라라, 룰루랄라랄랄라 룰루랄라랄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포니는 드라이브를 떠나서 정처없이 떠돌다 일광욕과 모험과 젊음의 해변가에서 푸치니를 듣다가 올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손님은 신디였다. 신디는 새로 이사온 앞집 여자다. 직업이 앞집 여자. 이웃사촌. 포니에게 신디는 아직 서먹서먹했으나 신디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 했다. 신디는 한마디로 노력파였다. 신디는 포니를 세뇌시키고 있었다. 나 같은 여자친구가 어딨어? 오빠! 우리! 누가 들으면 이미 그들은 천상의 연인이나 다름없었다. 딸기, 사과, 포도, 가끔 포도주까지. 오늘은 혹시 케익과 샴페인이 아닐까? 포니는 신디의 불타는 정열을 막을 수도 말릴 수도 없었다. 절반은 이미 넘어갔으니까. 홀딱-까지는 아니지만. 신디와 포니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데이트를 했다.
   「오빠. 장미꽃은 향이 원래 없어?」
   「내가 알기로 장미에게 가시는 있는데 향기는 없어. 있긴 있겠지. 그래도 꽃인데 왜 없겠니. 하지만 프리지아라면 모를까, 장미가? 하긴 이해하기 쉬우면 그건 추상이 아니지.」
   「뭔상? 가만 보면 오빠는 속으로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설마 날 탐하는 건 아니지? 어림도 없어, 흥! 아 그런데 말이야. 오빠. 복사꽃 알아?」
   「복사꽃? 복숭아는 향긋하고 맛난데 그 꽃은... 그런데 그건 왜 묻니? 뜬금없이 말이야. 너도 그러고 보면 은근 허당이라니까. 밑도 끝도 없이 복사꽃이 왜 나와? 참 나 이런 귀여운 꼬마 숙녀를 봤나.」
   「오빠. 행복과 자유와 사랑 중에 둘만 고를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래? 이런 걸 물을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왜? 웃기시네, 놀고 있네, 사랑 좋아한다 라고 할려고 했는데 내가 여자라서 말문이 막히셨을까? 응, 오빠.」
   「너 요즘 드라마 대본 쓰니? 징글징글하건 맹숭맹숭하건 청춘은 청춘이네. 누가 숙녀 아니랄까 봐. 하지만 뭔가 있어 보이기는 했는데, 그냥 그러다 말았어. 너무 감각적이었거든.」
   「어머나, 약간 멋져 보이기는 했어? 그러면 이건 어때? 시시해지면 끝이야, 만족하면 끝이다, 재미없으면 끝난다. 그건 말이야. 내가 한 말은 아니야. 유명인들이 흔히 하는 말일 뿐이고, 일반인들도 틈틈히 구사하는 대사일 뿐 꼭 누구왈 명언 그런 건 아니라고. <뭐는 뭐다>식으로 문장에 <끝이다>만 붙이면 다 말이 돼. 뭐는 없다 처럼. 모든 낱말 앞에 '개'나 '뭐'만 붙이면 느낌이 확 달리지는 것처럼. 그런 건 너무 많아. 흔하다고. <사랑의>도 있고 말이야. 응? 그런데 있잖아 오빠. 허당이 무슨 뜻이야?」
   「허당? 기대와 예감이 전부인 사람. 막판 반전이 없는 사람. 허당도 둘로 나뉘지. 호감 가는 허당과 답 없는 허당으로. 진공청소기와 커피포트처럼.」
   「그렇구나.」
   「아 그런데. 갈 꺼니?」
   「어디를?」
   「알잖아.」
   그녀는 생각한다. 할 꺼니? 무엇을? 알잖아. 라고. 그러다 다시 대화는 이어진다.
   「희구하는 게 뭐니? 유쾌한 사랑이야 뼈아픈 회한이야? 물론 뼈아픈 회한은 아니겠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니.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그러니까 진짜 늬가 원하는 게 뭐냐고, 이 말이지. 그처럼 한 손으로 턱을 괴고서 날 빤히 바라보지 말란 말이야. 어? 내 얼굴에 뭐 묻었니? 아 챙피하잖아. 무안하게 말이야. 내가 뭐 애들처럼 부끄 부끄 막 그럴 줄 아니? 어? 그럼 어떤 남자가 반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니? 안 그래? 그리고. 그 내민 입은 이제 그만 후진하고. 응?」
   「오빤 보면 꼭 그래. 사람을 2층으로 올려보냈다가 거기까지는 좋은데 다시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게 문제라고. 응? 나 원래 입이 나왔어. 원래. 응? 오빠는 눈 튀어나왔잖아?」
   「그럼 내가 뭐 턱을 내밀면서 냉소를 머금겠니, 어쩌겠니? 어쩔 수 없잖아. 안 그래?」


   4

   호기심.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거나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
   포니는 궁금했다. 자신이 쓴 기고문의 반응이. 그래서 그는 환상 문학지 미스테리아 웹사이트에 들어갔고, 자기가 쓴 글을 봤다. 그는 놀랐다. 반응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완전 무관심이었다. 게다가 미스테리아가 휴간에 들어간다는 안내문을 볼 수 있었다. 웬일이지? 그는 나중 실비아를 만나서 자초지종을 알게 됐다.
   「우리 잡지 폐간했어. 망했다고. 포니 네가 쓴 글 영향이 컸네. 고마워.」
   「뭐, 폐간? 휴간이라던데?」
   「그거나 그거나.」
   「내가 쓴 글이 어쨌다고?」
   「음 논조는 좋았어. 풍자에 성공했고. 소란스러움을 쉽게 해결했어. 그런데 너 그거 사실 확인은 한 거니?」
   「아 그거야 당연...... 보나마나 뻔한 거지. 하나마나한 얘기들이잖아. 그게 무슨 큰일도 아니고 말이야.」
   그들은 그 자리에서 확인했다. 어느 대회 주최측의 제재가 지나쳤다는 것을. 결국 포니는 남의 다리를 긁었고, 엄한 사람을 꾸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판매 부수도 시큰둥하고, 언젠가 닥칠 일이었어. 너의 수준 높은 지적에 힘입어 그 시한이 앞당겨진 거고 말이야. 사주가 뿔났나 봐. 삐진 건지도 모르지만. 잘은 몰라도 말이 씨가 된다고 늬 글처럼 비정상적인 일들이 자꾸 늘어만 가는데 이걸 어떡하니? 넌 조롱과 풍자였지만 읽는 사람은 직설법으로 받아들였나 봐. 그래서 지금 축구계에서 7부 리그 팀이 무슨 큰 대회에서 우승 직전이야. 왜냐고? 네 말처럼 우익수는 라면을 끓이고, 농구 선수는 잊었던 꿈을 찾는다며 요리사로 전향하고, 유명 감독까지 영업사원을 해보겠다는데 피라미드가 흔들리는 건 어쩜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렇게 된 거야.」
   실비아의 설명처럼 장안에 이상한 일들이 점차 늘어만 가고 있었다. 설마 그게 다 포니의 기고문 때문에?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일말의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었다.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고, 어쨌든 이미 없질러진 물이었던 데다 하나하나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그맨은 논설 위원이 되고, 정치인은 개그를, 연예인은 농부와 어부로, 연예계의 그 빈자리는 평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우리의 예술가들이 모두 차지했다. 나이트클럽은 오페라극장으로 바꼈고, 시장과 백화점의 주고객 역시 뒤바꼈다.
   포니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약간의 침울함을 느꼈다. 하지만 유행가가 자주 바뀌고 번화가가 북쩍거리는 것을 보면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고매하신 군중은 언제까지라도 천박한 합리주의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것. 그래서는 안되는 것.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민중은 글을 깨우쳐서는 안되는 것. 누군가는 영원한 소금기둥을 바란다는 점. 문맹과 빈곤을 퇴치의 대상으로 여기는 풍요로운 세상이라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시민들은 고품격을 알아서도 안되고, 타인으로부터 백조라 공인받을 수도 없다는 점. 피라미드의 구조는 변함이 없다는 것. 물론 사람은 레밍쥐나 조류가 아닌 똑똑한 포유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 3가지가 있다. 바로 사랑과 촌닭과 촌년.
   아이고 잘한다 뿌잉뿌잉 뿌잉뿌잉! 에고 예뻐라 딸랑딸랑 까꿍 까꿍!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여기 보세요 귀여워요 우리 아기, 멋져요 우리 공주님! 첨벙첨벙 물장구치는 천진난만한 저 모습 어쩜 이리도 어여쁠 수가 있을까요 우리 왕자님! 갸륵한 친구들 같으니라고 허허허허허! 아주 이쁜 짓말 골라서 한다니까, 아 글쎄 내가 요즘 재간둥이들의 깜찍한 재롱을 보는 재미로 살아요! 하하하하하, 꺄르르륵 호호호호호! 지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최고입니다 아름다우십니다! 그처럼 립서비스에 절대 인색하지 말 것! WHY? 찬밥 돼 봐라. 표정 망가진다.
   그리고 그는 뉴스에서 어느 초현실주의 미술가의 관이 열린다는 소식을 최근 알게 됐다. 친자 확인 때문에 DNA를 검사 및 대조해야 한다는데 그걸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와 더불어 희안하고 기묘하며 엽기적인 일은 많냐 적냐 뿐이지 틈틈히 발생하는 문제인 것 같았다. 계속 있어 왔고, 현재도 발생하며, 미래에도 있을 일. 다만 과거보다 지금은 전국구와 지구촌인 만큼, 미래에 인간은 우주로 활동 영역을 넓힐 것이란 예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거리에 십자가가 보인다. 공동묘지에 가도 똑같은 문양이 있다. 비슷한 표식 가운데 대표적으로 한 예일 뿐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2000년 이상 그 표식 때문에 상상 가능한, 인간의 본능으로 기인한 운명과 숙명과 우연과 필연과 불멸과 필멸 같은 개념 때문에 상상 불가능한 온갖 경우의 수가 다 존재했다. 요컨대 역사. 그 모든 과정을 거쳐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적을지 과할지 아마도 과하겠지만 인류는 제값을 치렀고 문명을 일구었다. 그만큼 장래 희망은 밝다. 그래야 하니까. 그런데 장소를 달리하면 그 기간이 몇 분의 1, 몇 십분의 1인 곳도 있다. 문명의 혜택과 고유한 풍습과 특징적인 문화와 미적 가치는 근소한 차이를 빼놓고는 모두 비슷하겠으나, 2000년 이상 동안 상상 가능한 모든 시행착오를 거친 곳과 그 기간이 불과 10분의 1, 5분의 1에 해당하는 곳은 상식적으로 봐도 뭔가 차이는 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아니 바보라도 알겠다. 이건 신앙 얘기가 아니다. 규모는 동으로 서로 넘어갔지만 주로 규모가 넘어갔다. 재미없는 책 읽기, 돈 되지 않는 글쓰기보다 쇼맨쉽을 알아주는 세상이니까. 그 차이가 무슨 차이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규모가 거대해지면 소음도 증가하는 법. 어차피 인간의 세상인 만큼 신과 신화와 예술과 환경과 다큐멘터리와 장르로써 세상에 대해 얘기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형식이고, 본질은 나 자신이다. 내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기준은 그것이고 표준은 사익이다. 우리는 이기주의자이지만 이타적으로 삽시다, 천천히 빨리 와, 박수 받고 싶은데 박수를 쳐야 해? 모순이다! 십자가 표식이 있는 어느 사원의 주차장에는 온갖 종류와 연식의 자동차들이 보인다. 이미 옛날부터 경제 논리는 이 세상을 지배했다. 사원에서도 꽉 막힌 목사는 인기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인데 정치적이지 않고 사회성이 부족하다면 돈과 인기는 포기하는 게 맞다. 아니면 수도원행 티켓을 끊던가. 어김없이 진정한 왕좌에 대해서는 쉬쉬해야 하지만 언뜻 그런 생각이 든다.
   포니는 괜히 실비아에게 꾸중 아닌 꾸중을 듣게 되어 집으로 가는 도중 그런 생각을 했다. 세계적인 거대 기업과 맞먹는 경제성이 굳건한 저곳은 좋은 역할과 긍정적인 의미와 선행과 모범을 베푸는 만큼 세금을 잘 낼까 라고. 만약 세금으로 광범위한 특혜를 누린다면 그건 중세가 아닌가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뭐 알아서 다 원활히 돌아가겠지만 저기서 추앙 받고 저기서 인기가 있으면 자칫 잘못하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처럼 바벨탑은 바로 그곳일 수도 있을 테니까.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마'가 있으면 '역시'도 있으니까. 미래학과가 있으면 청교도적 바른 생활로 일관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상황과 장소가 바뀌면 호박을 수박으로 부르는 예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포니는 실비아의 푸념과 충고를 귀담아들었고, 글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만큼 한 번 더 생각하고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5

   포니가 이 정체된 기분을 전환하고자 선택한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 어떤 감별사도 아니고, 와인에 대한 식견도 턱없이 부족하며, 삶이 무한정 기쁘지도 다채롭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장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무모한 시도였다. 포니와 고3시절을 한 반에서 같이 보낸 친구는 안다. 그거 알고 엄청 웃었다. 배꼽 빠질 정도로. 포니는 당시 공부하기 싫어서 책만 읽었고, 가출도 해 보고, 하다 하다 불경 독송 카세트테이프도 들었다. 포니는 고3때 운동회에서 배구할 때도 그랬다. 동네 축구도 체계가 있는데 녀석들은 전원 스트라이커에 전부 하이에나였으니까 그는 운동회 배구 경기를 할 때 뒤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 넣고 있었다. 배구인데 뭔 럭비처럼 인원이 많았고, 으쌰으쌰 거의 전원 공격수였다. 중3때 운동회 배구 경기에서는 그가 당당히 공격수였지만 고3때는 하이에나들 사이에 끼기 싫어던 거다. 그처럼 고3때 운동회 배구 경기를 할 때 주머니에 손 넣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공이 왔고, 포니는 당황했고, 같은 반 친구는 엄청 웃었고, 때로는 날라차기도 불사하지 않았던 담임선생님은 표정이 안 좋았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누구나 그런 기행에 관한 기억은 있다. 흔하다. 그도 그랬다.
   그처럼 포니는 지금, 분위기를 바꾸고자, 앞집 여자 신디에게 뭐라고 했다. 그것은 청혼은 아니었고, 청탁도 요청도 청원도 아니었다. 그럼 뭐였을까? 뭐긴 포니는 신디에게 사귀자고 했다. 왜냐하면 진실한 마음을 받아줄 것도 아니면서 시간만 질질 끌고 특별한 추억도 없이, 각별한 내통도 없이 좋은 시절을 보내버리는 것은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빠가 웬일로 내게 잘 해주지? 이상한데. 뭔가 속임수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거 없어.」
   「그럼 우리 사랑은 찐한 사랑이야 뜨거운 사랑이야? 아니면 몰래한 사랑?」
   「아니야. 아니라고. 순수한 사랑도 불순한 사랑도 아니야. 불결함은 멀리 있고, 심심함은 작고, 기쁨은 특별하고. 나는 늑대 너는 양, 그런 거 재미없어. 내가 수시로 여자를 갈아치우는 나쁜 남자나 돌아온 탕자는 아니지만 콩스탕이 너한테 지나치게 추근거리는 모습이 보기 싫었을 뿐이야.」
   「뭐야 그럼, 우리 사랑은 초딩식 사랑이네! 12살도 아니고 6살짜리 사랑? 이거 정말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아 나 이거 진짜 뭐야 시시하게. 아 그리고, 콩스탕 오빠가 뭐 어때서? 오빠가 나 데리고 살 거도 아니잖아.」
   「그냥 싫어. 마음에 안들어. 그 녀석만 보면 짜증나. 글마하고 내는 안 맞아. 안 맞는다고. 재수 없어.」
   「알고 보니 우리 포니 오빠 귀여운 면이 있었구나. 몰랐는데! 오빠 같은 지식노동자의 표상, 참 보기 좋네. 웃기다고. 음.」
   신디는 투명하고 솔직하며 단순한 숙녀였다. 쉬운 얘기를 어렵게 말하는 재주는 애초에 그녀에게 없었다. 그녀는 4차원도 아니었다. 적당히 세상 경험을 쌓았고, 인생과 남자도 알았다. 그래서 신디는 포니의 사귀자는 놀라운 고백에 벅찬 감격으로 응대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신디는 포니를 다 믿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포니와 신디 가운데 지쳐 버린 사색가는 해당사항이 아무한테도 없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어쩌면 꼬맹이들의 놀이와 비슷할지도.
   다음 날.
   그들의 연애는 순탄하기 힘들다는 점이 증명된다. 좁은 동네, 포니를 짝사랑하는 미셸이 가만 있을 리가 없다. 다행이었을까? 포니의 애정은 진심이라기보다는 연기에 가까울지도 몰랐는데 미셸의 출현은 포니의 떠남을 불러왔다.
   「오빠. 쟤랑 왜 같이 있어? 오빠는 내 꺼야. 어? 야! 신디인지 신파인지 너 혼이 나야 정신 차릴래? 이런 쪼잔한 암탉 같은 년이 어디서 우리 오빠한테 꼬리치고 있어. 어? 너 안되겠다. 이리 좀 와 봐. 따끔하게 손 좀 봐줘야겠네. 아 나 이거 정말 오늘 몸 제대로 풀겠는데.」 미셸.
   「오빠 뭐야? 양다리야 뭐야? 쟤가 왜 아직도 여기 있어? 너 이사 안 갔니? 이거 진짜 뽄드야 뭐야? 이제 그만해라, 제발! 짝사랑을 졸업하란 말이다 아가야. 어? 못 알아듣니? 너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했지? 그럴 줄 알았어. 형편없는 년, 괴씸한 년, 멍청한 년. 혼은 늬가 나야 해. 어? 알어? 알긴 아냐고!」 신디.
   「이런 얼간이 같은 호박이 어디서 굴러와가지고 난리야? 나 원 참 맙소사!」 미셸.
   「얘가 가만 보니 개념을 상실했네. 촌년이 상태가 몹시 안좋아. 영 아니야. 너 정말 많이 아파보인다. 그런 말 많이 듣지? 그렇지? 그래. 그럴 꺼야.」 신디.
   「뭐가 어쩌고 어째? 슬슬 열이 올라오는데. 너 말 다 했어? 어디서 이런 쬐그만 썩은 미니 사과 같은 꼬맹이가 나서고 있어? 너 진짜 혼 좀 날래? 어? 왜 쪼잔한 암탉으로 성에 안 차니? 더 센 걸 원해? 진정 더 센 걸 원하냐고!」 미셸.
   「말 다 못했다. 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오빠도 뭐라고 말을 해 봐. 왜 얘기 안 했어?」 신디.
   「그러니까 내 말은......」
   포니는 꼬리가 잡혔다. 독 안에 든 쥐. 이제 그는 없는 개구멍을 억지로 만들고, 뻔트를 댈 차례다. 꽁꽁 숨겨둔 연정이니 모든 것을 거는 사랑이니 그런 거 모르겠고, 연가도 필요없고, 그는 떠나야 했다. 양심의 가책이니 씩씩한 사랑이니 머리 아펐다. 명분 마련했고 구실 생겼다. 그는 그곳에서 도망쳤고, 무작정 떠났다.


   6

   포니가 떠난 이유는 실은 주위 사람들과의 불화 때문일 수도 있다. 황홀한 사랑과 달콤한 여행, 신비로운 추억, 행복한 일상이 왜 싫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최적화되기 어렵고,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의뭉스러운 참말을 습관적으로 한다. 사람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고, 이 미지의 세계 역시 불가해한 공간임에 틀림없다. 꼭 신나는 모험에 허덕이고, 반박할 수 없는 기쁨에 전전긍긍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사실이 그랬다.
   포니의 주위에 있는 친구들은 주로 그랬다. 술은 나 같은 신사에게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못된 술버릇을 터득하니까(이런 말을 하는 친구의 술버릇은 이런 말을 술 취하면 반복한다는 것). 여자는 질문 받는 것을 좋아한다, 물어볼 질문을 외국어 공부하듯이 꾸준히 숙지하며 생활한다면, 고로 나처럼 모든 여자를 단 10분이면 다 꼬실 수 있다. 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너무 좋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고, 남이 뭐라 하건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면 전혀 관심 없다. 다들 백문백답 같은 거 좋아하지 않나?
   다들? 내가 만일 천재일지라도 남들도 다 천재는 아니다. 내가 기쁘다고 남들도 다 기쁜 건 아니다. 내가 통장잔고가 바닥났다고 남들도 다 그런 건 아니다. 포니는 달랐다. 다르고 싶어서 다른 게 아니었다. 요컨대 차라리 '묻지 마'에 가까운 친구였다. 공부해라? 놀자! 왜 머머하냐? 이유 그런 거 없다! 사교계냐 경마장이냐, 오페라 극장에 갈 꺼냐 나이트클럽에서 놀고 싶냐? 내가 용의선상에 올랐나 아니면 피고인가 원고인가, 그도 아니면 나와 사랑이라도 하자는 건가? 아니다. 예 아니오, 0과 1 이진법을 강요받기 싫은 유형이었다. 그래서 포니는 어쩜 무책임하게 현실에서 한 발만 빼지도 않은 채 눈 질끈 감고 도망쳤을 것이다. 젊음은 아름다운 것,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방황을 하고 세상과 싸워 보란 말로 들린다. 머머하지 마라?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곧 그는 청개구리였던 것이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들긴 뭘 빠져들어!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OK, 드디여 빠져들었다! 그런데 뻥이다. 거짓말이다. 포니의 삶은 가짜였단 말이다. 포니는 아직 고뇌하는 청춘이었고, 기억의 잔상이 부른 가상의 환영과 씨름하고 있었다.
   포니는 떠났다. 결국 그것이 현실 부정이든 청춘의 끝이든, 꿈과 희망의 세계를 향한 도전이었다가 부질없는 소망으로 정체가 밝혀졌든 그는 떠났다. 그런데 떠나긴 떠났는데 외부로 떠난 게 아니라 그의 집 마당에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비밀 통로로 들어간 것이다. 포니의 집 잔디밭 마당에 무슨 비밀 저장소도 아니고 특수한 문이 왜 생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마당에 잔디가 길었길래 잔디를 깎았고, 그러다가 이상한 문을 발견했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7

   일단은 1인의 모험이다. 그를 찾으러 뒤쫓는 일행도 없다. 포니는 자유였고, 그 길은 신비였다. 아직은. 그 길을 따라가면 정신병원에 도착할지 놀이공원의 개구멍과 연결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포니는 염치 불구하고 그 최후를 알고 싶어졌다.
   그런데 의외로 종점은 금방 나타났다. 통로의 끝에는 2층 버스가 있었고, 거기 탑승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톨아갈 수는 없으니 그는 버스에 탔다. 보기는 두 가지다. 저것은 타임머신이거나, 그냥 버스거나. 그러나 결과는 셋째였다. 그것은 꿈이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2층 버스에서 포니가 계단을 내려가서 딱 지면에 착지하는 순간 환호성이 울리고, 축포를 쏘고, 팡파레가 울리며, 비로소 그가 떠올렸던 기쁨의 공상이 현실로 실현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어떤 공상?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보며 어느 가난한 시인은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건 사색이 아니라 진실일 것.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일확천금이 코앞에 가득? 아니다. 그게 아니라 아마도 저 45도 각도에서 내려오시는 바로 저분이 허공에서 짠 하며 나타나시는, 바로 그 천국행 버스에서 내리는 무대 위의 포니에게 던져진 그것이겠지. 그래. 이정표 같은 것. 포스터 말이다. 노노노노노노노. 나이트클럽 벽면 광고나 제품 전단지가 아니라 수북하게 포니의 발 밑에 쌓이는 것은 낙엽도 돈도 아니고, 다름 아니라 바로... 쉿!
   결론은, 그건 꿈이었다는 것이다. 개꿈. 포니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완전 진짜 같은 꿈에서,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깨어났다.


   8

   포니는 아쉬웠다. 걸핏하면 꿈, 습관적으로 복권은 꽝, 떠나봐야 동네, 재밌어도 잠깐이고 멋져 보여도 결국은 혼자였다. 그래도 신디와 미셸이 자기 앞에서 머리끄댕이를 잡고 개싸움을 벌이는 것보다야 낫다. 미셸과 신디, 당장 걱정되는 우정이다. 어떻게 보면 그런 게 진짜 같다. 우정은 우정인데 서먹서먹한 우정, 사랑은 사랑인데 조마조마한 사랑. 신디는 고흐와 모네 정도는 안다. 그러면 벨리니나 발레리는? 페라리는 알겠지. 하긴 옆집 여자였다가 이사간 엔질과 척키2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프리마돈나가 노래하는 일편단심 사랑은 정작 노랫말은 큰 의미가 없는 듯 해. 거의 분위기가 전부인 듯 하니까. 그런데 신디만 그런 게 아니라 미셸도 그랬다. 신디와 미셸은 모딜리아니 그림처럼 목이 유난스레 길지는 않았으나 펄럭펄럭 긴 날개를 휘저으며 고고한 몸짓이 흡사 무용하는 듯한 새의 세련된 성정과 정갈한 단정함을 타고났는데 발터 기제킹은 몰랐다. 신인 배우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다. 아마 잘 찾아보면 없으란 법도 없으니까 말이다. 여자는 다 똑같다. 남자도 그렇다. 잘 알기 전까지는.
   그래도 이상보다는 현실이 먼저다. 어떻게 하면 앞집 여자 신디를 짝사랑하는 콩스탕에게 신부의 아버지처럼 손을 건네줄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그렇고 방금 전에 꾼 꿈은 너무 생생했다. 도저히 꿈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겁이 났다. 그러나 사실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포니는 마당으로 나갔다. 에이 하며 이게 다 무슨 애들 장난 같은 일이냐며 그는 수영장에서 일광욕이나 하려 했다. 그래도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니까 그는 꿈에서 봤던 그 위치로 갔다.
   멈칫멈칫. 어리둥절. 설마 설마 했는데 거기엔 진짜 비밀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그의 뇌리에서는 톰과 제리가, 지킬과 하이드가 다투고 있었다. 이 바보야 뭐해? 들어가 들어가라고. 늬가 그렇게나 노래 불렀던 판타지와 신비와 SF가 눈앞에 있는데 뭘 망설이니? 어? 아니야 아니야. 그건 속임수일 꺼야. 틀림없어. 앞집 여자 신디의 수작이라고. 보면 모르겠어? 그게 아니라면 탈출이나 그런 범죄 관련 일일 수도 있고. 그래. 맞어. 전-전-전 집주인이 만들어 놓았을지도 몰라. 아마도 그럴 가망성이 크겠다. 그래도 몰라. 이 친구야. 뭐하니 포니? 지금 당장 신고하지 않고!
   포니는 그 특수 문을 열었고, 그 심상치 않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빡 하면서 괴물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 그 환희와 이 이 미래 세계에 막 막 당도하지도 않았다. 그럼 어떻게 됐냐? 빨리 말하라고. 어서. 지금 당장.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 어떻게 됐지? 슝 슝 하며 시공간을 압축해서 전혀 색다른 장소에 도착한 게 아니라 그의 집 마당 옆에 있는 수영장 바닥과 벽에 있는 ㄴ자 문과 연결되어서, 거기서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짠 짠 하면서 뭔가 나타날 듯 하더니만 막상 나타난 건, 실망과 절망과 체념이었다. 이런, 젠장!


   9

   100일 후.
   포니의 신변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앞집 여자 신디가 이사 갔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하나 있으면 기쁜 소식이 나올 듯 하다가 주저하는 법이다. 바로 포니를 짝사랑하던 미셸이 포니의 앞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신디가 떠났으니 신디를 짝사랑하던 동네의 멋쟁이 콩스탕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처지가 됐다. 끝으로 포니는 동네 친구들인 미키와 노튼과 발머, 멜리사, 멀더와 대화를 나눠본 후 알게 됐다. 다들 포니와 똑같은 체험을 겪었다는 것을.
   그건 꽤 오래 전에 설계된 뭐지? 실험, 프로그래머가 숨겨놓은 비밀 코드, 설마 꿈이 조종되고 있는 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개구멍은 없을까? 그러나 그들은 허둥대지 않았다. 아직 확실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신디처럼 동네를 떠나간 친구에게 물어봐도 새로운 힌트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가급적 똑같은 삶을 살면서 특이 사항이 발생할 때 그 일을 공유하기로 했다.
   트럼펫과 테니스, TV와 NC, 술집과 인터넷, 캠핑과 서점 방문. 그들은 예전으로 돌아갔다. 금욕주의냐 누려 마땅한 쾌락이냐. 다시 말해서 꼬끼요 꼬꼬꼬꼬꼬-일 것인가, 요정의 요술봉으로 반짝이는 환상을 선물할 것인가. 그들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감과 불가해한 불가사의에 사로잡혔네, 탄복하다 탄식하다 감탄하다 놀라며 호들갑 일색이다가 이제는 새까맣게 그 공통적인 경험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징징거리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유난히 예술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미키는 일기장에 이렇게 쓰기까지 했다. 행복한 시절 우리는 그 행복에 겨워 그것에 도취했고, 가장 멋진 낭만으로 기쁜 삶을 포장하고만 싶었다, 완전히 숨어 살 수도 투명인간이 될 수도 없기 때문에.
   그 믿을 수 없는 새로운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10

   「얘들아. 혹시 그레이 홀 읽어봤니?」
   「그거 후발 주자야. 그래도 인기는 괜찮았고. 오히려 뒷북을 더 알아주더라고.」
   「무슨 내용인데?」
   「내용은 간단해. 블루 홀인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바닷물 유출이 시작됐고, 바닷물이 모두 사라졌고, 그러면 어떻게 되겠니? 일 많아질 것 같지 않니? 지금 드라마도 시즌 2, 3 계속 나오고 있어.」
   「난 그걸 미키의 소셜 네트워크로 알았고, 미키는 노튼이 얘기해줬고. 그런데 문제는 우리 가운데 유일하게 발머만 그 판타지류의 최초작을 읽었다는 말씀. 발머! 얘기해주지 않으렴?」
   「믿기 어렵겠지만 말이야, 그거 실화래. 그래서 작품들이 그처럼 끊이지 않고 나오는 것이고.」
   「뭐? 그걸 믿으라고?」
   「재미없어 발머. 왜 그래? 바보같이.」
   「정말이야?」
   「진짜야?」
   「말도 안돼.」
   「장난치지 마 발머. 그게 어떻게 말이나 되니? 빙하가 녹고 있는데 어떻게 바닷물이 없어져? 인간의 수명, 지능, 부가가치, 인구, 물가, 과학기술, 예술의 깊이와 넓이, 주가지수등 어지간한 건 다 올라가고 종의 다양한 종류는 감소할 꺼야. 그래. 무엇보다 바닷물의 수위가 점점 높아져가는 건 상식이라고. 시장경제의 하락과 여자들의 치마 길이가 상관관계가 있다던가 아니라던가 그건 말이 돼. 그런데 바닷물이 사라져? 그걸 누가 믿냐. 뉴스에도 안 나오잖아. 응? 조용하다고! 뭐가 문젠데?」
   「뉴스? 여기서만 안 나와. 그거 차단하는 게 무슨 일이니? 아직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 느낌 안 오냐고!」
   「뭐야 그럼. 기어코 저번 일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말이야? 말도 안 돼.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첫째 그건 불가능한 일이고, 둘째 우리 동네에만 사실과 지식을 제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안 그래?」
   「그건 콩스탕 말이 맞는데, 정말 그럴 하등의 이유가 없다면 확인은 해 봐야 하지 않을까?」
   「뭘 확인해? 바닷물이 진짜 있나 없나를? 농담 재미없다. 지금 인터넷으로 봐 봐. 실시간으로 어지간한 지역은 동시간대로 전세계 어디에서나 실재 영상을 볼 수 있어. 아 나 정말 안되겠네. 얘네들 언제부터 이렇게 의심이 많아졌지. 자 봐 봐. www...... 여기를 보면... 뭐야 진짜 없네 바닷물!」
   그들은 직접 바닷가를 향해 떠났다. 주저하지 말고 SF 장르는 다 뻥이란 걸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도저히 못 가게끔 방해하는 작전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만든 환상에 동화되었다. 한편 염려하기도 했다. 바닷물이 없어지면 그건 바다가 육지라는 말인데, 소란은 불을 보듯 뻔했다. 탐험가들 바빠지게 생겼고, 운행했던 배는 모두 쉴 것이며, 사라졌던 배도 모두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타이타닉도 물론! 그건 정말 유례없는 어떤 혁명적인 일이 될 것이란 건 결국 부정할 수 없었다. 재미없기 그지없던 친구들 꽤나 들썩거리고 즐거워할 모습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만약 그 일이 진짜라고 한다면! 그러나 부정적인 일들 역시 당장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으리라는 점, 합당한 예측이다. 과연 진짜일까? 아니면 가짜? 궁금하다. 그들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떠나온 것이고.
   결론만 말하자면 그들은 바다에 도착했고, 바닷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이 우세했고, 막연한 실망이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반짝 반짝 작은 별, 돌아오라 소렌토로, 오 나의 태양, 노래를 불러주기도 어색한 순간이었다. 꼭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또 모른다. 그 가운데 두더쥐가 있고, 그가 일부러 바닷물이 남아있는 이곳으로 그들을 데려왔을지도. 결과는 경하할 만 했으나 여행의 목적을 이룬 만큼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듯 했다. 부둥켜안고 울 수도 없었고, 대놓고 축하할 일도 아니었다. 당연히 누군가를 추궁해서는 안될 것이며, 원망 역시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운치 있는 전망은 괜찮았다. 왠지 현실이 부당한 것 같았고, 초딩들에게 진 듯한 패배감은 숨길 수 없었다. 훗날 이 순간이 기억날 것이다. 그것도 아주 또렷이. 다분히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데 하나의 돼지꿈과 여러 몫의 행운을 건다. 큰 유감은 없었으나 남달리 센티멘털해졌다. 모두가 말이다.
   그들은 홈그라운드로 돌아왔고, 한동안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 민망했으니까. 사랑하다 차인 듯 했으니까. 특별한 감정은 아닐지언정 패자끼리 웃는 얼굴을 보이지 말자는 일종의 유달리 순진한 결의 때문인 듯 했다.


   11

   그 후 포니는 몰래 혼자서 저번에 친구들과 같이 다녀왔던 바닷가에 갔다 왔다. 왜냐하면 당시 그는 어 어 그 바닷물 감소 사건을 아마도 믿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지극히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포니는 친구들 가운데 두더쥐의 실존을 의심했다. 세간의 정보는 걸러서 자기들한테 유입되며 자기한테 미션이 주어졌고, 그의 할 일은 두 가지였다며 남들은 아무 관심도 없는 공상을 거의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할 일은 첫째 주어진 미션을 연구하고 탐사하며 숨겨진 비밀을 밝혀낼 것, 둘째 그 미션을 하사한 미지의 실체를 알아낼 것. 그는 이 비밀을 밝혀내고 싶은 강렬한 탐구심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포니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건 마치 전에는 애인과 둘이서 즐겁게 뛰어놀던 바닷가를 혼자서 다시 찾은 것 같은 모습과 비슷했다. 그러면 파도가 그에게 묻겠지. 애인은 어디 가고 왜 혼자 왔냐고.
   다시 찾은 바닷가에서 썰물 때문에 드러난 일부 바닥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이건 욕조의 물이 빠지듯 욕조 바닥 구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분명 달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곧 그는 점성술을 독학해야 한다는 데 결론이 이르렀다. 음 음 그렇다고 미키는 커다란 접시 모양 전파 망원경이 있는 관측소에 취직하지는 않았다. 노튼도 중성자 입자 연구소로 달아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아무 말 하지 않고 발머 혼자 공로를 세우기 위해 비상 대책 위원회를 꾸리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아니 처음부터 정상이었고, 포니는 환상 문학 잡지 미스테리아를 정기구독하고 있었다. 저번에 편집장 실비아가 했던 말은 우윳빛 농담에 불과했다. 그 무렵 새로운 앞집 여자 미셸의 애정 공세와 구애의 열기, 불굴의 집념은 대체 어디로 가버렸냐는 듯이 미셸의 끈질긴 애원은 이어지지 않았다. 사랑 같은 거 어쩜 허상일 수도 있고, 사랑이 인생의 전부든 전부가 아니든 그 둘 사랑과 인생은 온전히 독립된 객체라는 걸 깨닫는 게 먼저인 것 같았다. 포니는 소설을 쓰는 둥 마는 둥 했고, 환상에 대한 몰입과 중독은 남의 얘기였다.


   12

   한편 어느 날 옛 친구 신디가 포니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애정에 관한 문제도 아니고 설욕전 그런 거도 아니었다. 당시 겉으로 드러난 정황만 봐서는 포니의 잘못이란 건 너무도 확연했으나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 때문에 포니는 신디를 피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신디가 포니 앞에 나타난 순간 포니는 깨달았다. 자신의 육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신디는 실로 한적한 동네에 묻혀 살 만한 범인이 아니었다. 마치 그녀에게서 후광이 비추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주위에는 최소한의 보디가드가 있었다. 포니가 보기에는 그건 흡사 레이더망처럼 가시거리 안에 몇 팀, 그 밖에 몇 팀 그 정도로 움직이는 요원들로 보였다. 그분들을 멀찍이 떼어 놓고 공원에서 신디는 이렇게 말했다.
   「오빠 잘 살았어? 설마 날 까맣게 잊어버린 건 아니지? 나도 알아. 오빠가 속으로 생각이 많았단 걸 말야. 그걸... 알아채는 남자는 그리 많지 않은데 말이야, 오빤 조금 달랐던 거야. 하긴 나도 순수한 사랑이라고 맹세할 수도 없거니와 좀 장난스럽기도 했어. 그렇지만 이제는 말하고 싶어. 사실을 고백한다고. 털어놓고 싶어서 많이 참았어. 내가 오빠한테 접근한 목적. 그것은 오빠의 아이를 갖고 싶어서였어. 만나고 사귀고 사랑해서 아이를 낳으면 되지 왜 처음부터 상대방이 아니라 아이를 먼저 생각했냐고? 왜냐하면 처음부터 목표 인물을 정하고 오빠에게 다가갔으니까. 오빠의 DNA가 내가 바라던 최적의 조건과 일치했거든. 그래서 다가갔던 거야. 그래. 나 그런 의도로 오빠한테 접근했어. 멜로드라마에 나오듯이 그래도 중간은 어쩜 사랑이었을 꺼야. 그런데 만나보고 나서 뭔가 오류가 있었던 건 아닐까, 살짝 의아해 하긴 했지만 말이야.
   그래. 실은 난 보통 사람들과 좀 달라. 아니 사람은 똑같은데 속한 집단이 달라. 사는 형편에 따라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상류층이나 그런 게 아니라 이건 일종의 부족 개념 같은 거야. 그게 다른 방법으로 체계화된 걸 사람들은 신흥 종교네 뭐라 부를기도 하지만 우리의 방식이 오히려 훨씬 앞서지. 호모사피엔스 그 이전이니까 말이야. 종교란 게 인류에게 일반화된 게 실은 얼마되지 않았어. 과학의 혜택은 최대한 챙기고, 현대에 존재하는 최고의 풍요는 누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존재할 최상의 경제권까지 사람들은 신경 쓰지만 이 세상엔 부조리가 적지 않은 만큼 우리 부족 역시 세상에 공식적으로 존재를 드러낼 수는 없어. 그래서는 안되거든.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줄께.
   말이 좀 길었나? 쉬운 말로 우린 아마존 같은 집단이야. 그렇다고 신화 속 이야기처럼 막 그렇지는 않아. 무서워하지는 마 오빠. 하지만 일부 방식은 그와 똑같아. 그게 모두 가능한 것도 우리의 재력이 밑바탕됐고 말이야. 얼핏 보면 사적으로 끈끈히 형성된 부의 인맥으로 보일 수도 있어. 또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을 내주지 않고 주류로서 인정하지 않는 사교계일 수도 있고. 백조의 호수 같은 무용극 있잖아. 그런 거야. 아니면 피라미드? 그렇다고 왜 이제 와서 정체를 밝히느냐 의문을 갖지는 마세요. 난 그냥 오빠를 보고 싶었고 그래서 찾아왔고, 만났고, 얘기하는 것일 뿐이니까 말이야. 그게 다야.」
   신디의 말을 간출이자면 이런 얘기였다. 요는 현대판 아마존이다? 그래도 믿거나 말거나 같지는 않았다. 저것은 개가 짓는 소리, 그런데 그 개는 미친개 일명 광견, 그런 어설픈 농담도 아니었다. 분명 뭔가 있었다. 그러나 포니는 신디에게 더 자세한 사정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느낌은 왔다. 이건 진짜라는 것. 그는 물어볼까 말까 살짝 망설였다. 혹시 바닷물의 감소 현상에 대해 아는 것 있냐는 물음을. 그런 황당한 일설을 신디에게 물어보면 괜한 실례일 것 같았다.
   아무튼 포니는 신디와 헤어졌고, 그녀는 나중 놀러오라며 주소를 하나 남겼다. 뿐만 아니라 신디는 다시 동네로 돌아와 살겠다고 했다. 즉 일주일은 그들과 함께 놀고, 일주일은 먼 곳에서 산다는 거였다. 포니는 신디가 남긴 명함을 본 체 만 체 하며 책상 구석에 밀쳐놓았다. 어찌되었든 그는 아마존에 걸려들지 않았고, 오히려 그쪽에서 인정을 했고, 교류를 하자 정보원으로써 활동해주라는 일종의 스카웃이었기 때문에 기뻐야 했다. 그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포니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다. 따라서 그는 다시 가택 감금에 들어갔다.


   13

   포니는 심약한 상념에 잠겨 있었다. 때문에 그는 핑 핑 놀거나 쨍쨍 내리쬐는 햇빛에 일광욕만 하고 새 작품을 심사숙고하고 그러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희곡을 썼다. 즉 영화 시나리오. 사라진 바다라는 드라마는 인기의 화신이었으나 아직 영화로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시네마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장르가 미스테리와 SF 쪽이다. 그에게는 약간 어색하고 생소한 분야다. 교본을 볼 시간은 없고, 모범작을 참고하기도 귀찮고, 그는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그 방면에서 또 내놓으라 하는 인재는 차고 넘친다. 그 중에 한 명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참고하기로 했다. 포니는 베르나르 취향은 아니지만 일이니까 분석에 들어갔다. 베르나르의 예술 세계를 썩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으나 대충 흉내내기에 들어갔다. 그러다 잘 안됐다. 그래서 그는 하다 하다 안되서 그냥 막 쓰기로 했다. 그래서 희곡을 어느 정도 1차 완성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바닷물이 사라졌고, 바다 위에 떠 있는 시추선은 바닥에 안착했다. 남자들의 탐험도 있고, 여자들의 여행도 시작됐다. 잠수함과 항공모함은 움직일 수 없는 기지가 되어버렸으나 장갑차의 할 일이 생겼다. 그러나 군인 뿐만 아니라 과학자, 언론인, 일반인, 방송가까지 모두 그곳으로 총출동하게 된다. 역효과도 있다. 해상 물류 이동이 안되니까 괴로운 일이 발생한다. 기압 문제도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지프차를 타고서 세계일주를 하고, 심해에 산다는 괴물의 정체가 밝혀진다. 새로운 도시가 생기고 새로운 국가도 탄생한다. 초딩의 영원한 인기 스타 미스테리는 부활한다. 반면에 육지의 호수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곳의 가치가 폭등한다. 낚시꾼들은 울상이다. 그런데 인간만 바빠질까? 그럴 리가 있나. 우리의 동물들께서 너도 나도 진출하신다. 반인반마 곧 인어공주는 단박에 스타가 된다. 고대의 도시 아틀란티스는 박물관이 된다. 소풍갈 장소가 많아진다. 지구본을 만드는 공장도 바빠진다. 왜냐하면 바다가 없어졌으니까. 사람들의 잃어버린 물건도 상당량 주인에게 돌아간다. 먼저 선점해야 할 물품들도 꽤 된다. 패션쇼도 마라톤도 모두 그곳으로 몰린다. 비밀 기지가 발견된다. 생선은 금값이 된다. 인공 소금이 만들어진다. 논문도 속속 발표된다. 비가 내려 바다가 다시 바다가 되려면 이라는. 시민운동도 일어난다. 수돗물을 채워서 바다를 메꾸자는.
   이건 느낌이 왔다. (딱)! 이건 한마디로 광맥이고 열려라 참깨라고. 흔히 말하듯 시리즈1보다 나은 2, 3, 4는 없다는 속설이 적용되지 않는 예이지 않을 수 없다. 시즌1, 시즌2, 시즌3 점점 갈수록 흥미로워지고 갈수록 보고 싶어지며 시리즈가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고, 끝나지 않기만을 바랄지도 모르는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미 인기 드라마로 방영되는 중인데 포니는 자기가 마치 최초의 작품을 완성한 것처럼 들떠서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포니는 서둘러서 대충 쓴 희곡을 들고서 신디를 찾아가기로 했다. 왜냐하면 신디는 거물이고, 자기와는 친하고 인연이 깊은 데다, 이 정도 영화 제작비가 신디에게는 거의 껌값일 것이기 때문이다. 신디는 착하니까 또 내게 호의적이니까, 무엇보다 이건 예술이고 상업적 가치도 뛰어나니까 투자하지 않고는 베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 적중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포니는 신디를 찾아갔다. 가서 딱 신디가 알려준 주소지에 도착했다.


   14

   딩~동!
   네, 누구세요? 삐리리릭 삐리릭! 그런데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어머나 웬일이야! 맙소사! 오 저런, 세상에나! 그는 바로 미셸이었다. 얘가 왜 여기 있지? 혹시 미셸과 신디가 미리 짰고, 포니의 몸은 미셸이 소유하고 포니의 마음은 신디에게? 웬걸! 그렇다고 미셸이 신디의 엄마거나 그 반대도 아닐 꺼 아니야!
   포니는 대충 얼버무리며 변명을 했고, 미셸은 거기가 자기 엄마 집이라고 했다. 그런 다음 포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말도 안되는 시나리오를 만든 것, 아니 상상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포니가 무슨 미다스의 손도 아니고 뭔 욕심이 그렇게 많길래 이 난리를. 머머머하다는 정평이 자자하다는 혹평을 그렇게나 듣고 싶었나? 만사 제쳐놓고 예술가로 만족할 수 없고 기어코 연예인이 되겠다는 건가? 어디서든 빼는 법이 없구만. 칭찬을 절대 사양하지 않는 포니. 그에게 거장다운 면모는 허락되지 않았다. 하기야 요즘 세상에 특수 아닌 게 어딨고, 유명하면 다 대가다. 농담 따먹기라면 모를까. 마음 속에 흑심만 가득해가지고 말이야.
   그는 깨달았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을까?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기는 뭘 할 수 있어!
   그는 놀랄 만한 동기 부연회를 새롭게 발견하기 전까지 자중하고 쉬기로 했다.


   15

   영화. 지구의 자전이 느려져서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영화가 나왔다.
   드라마. 지구의 바닷물이 급속도로 감소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드라마틱하게 그린 드라마가 절찬리에 인기를 끌고 있다. 곧 포니의 시나리오는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았고, 전문가는 그걸 이미 현실로 구현했다. 억지로 갖다붙이면 종이 한 장 차이.
   학설. 어느 지질학자가 고도 0 미만에서 중력의 각도가 변한다는 이론을 발표해서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최근 인기 드라마와 딱 맞아떨어지는 이론이라서 곳곳에서 강의 요청이 쇄도한다. 학계의 논문은 대중매체에서 귀빈으로 대접받고, 학자는 연예인이 된다. 제2의 아인슈타인이란 닉네임을 떼고 당당히 개인 브랜드로써 우뚝 선다.
   현실. 실제 지역에 따라 해수면이 높아지기도 낮아지기도 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각계각층이 동참하고, 모든 시선이 집중된다.
   말도 안되는 SF는 말 그대로 말이 안된다. 그러나 지겹고 질려도 그 SF 말고는 지구 바깥으로 나가거나 새로운 불가사의를 맞이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TV에서 방영중인 바닷물이 줄어드는 드라마에 열광했고, 그러므로 SF 멀리서 찾을 필요 있냐 라면서 지구를 탐사하고자 하는 운동이 새롭게 부흥기에 접어들었다. 아직 못 다 찾은 신비가 지구 안에도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실제 그렇다. 달에 가 본 사람보다 심해에 가 본 사람이 더 적다. 이미 많이 알려진 광활한 우주보다 남극 밑과 심해에 뭔가 있을 것만 같으니까. 따라서 포니도 물론 들썩이지 않을 수 없었다. 포니라고 빠질 수야 있나. 그는 드라마 한 편 보고 나서 차를 몰고 해변으로 가서 낚시 대신 양수기로 바닷물을 육지로 펐고, 드라마 한 편 보고 나서 바닷가로 가서 일광욕 대신 양수기로 바닷물을 육지로 펐다. 비키니 미녀가 왠 말이고, 비치발리볼이 다 뭔 고생이란 말인가. 그처럼 물을 퍼내다 보면 바다의 바닥은 드러나지 않을지 몰라도 분명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는 하나 떠오를 듯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마 그에게 무슨 신화 속에 나오는 대홍수에 대한 대책으로 마련한 복안이 이와 같은 꺼벙한 장난과 황당한 놀이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평소에는 진공청소기를 동경하고, 막연한 이상을 경원했기 때문에 양수기를? 어디 어떻게 하나 두고 보는 게 좋겠다.
   포니가 그 무슨 말리고 싶지도 않은 기행을 실행하는 동안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기한 발견과 놀라운 영감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웬 곡식이 근처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건 마치 영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 가방이나 차에서 밀가루를 흘리고 주인공이 그 흔적을 따라가서 조연을 추적하는 모습을 떠올리는 증거였다. 포니는 뭔가 느낌이 왔다. 그는 그 껍질을 까지 않은 곡식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쌀인지 밀인지 보리, 수수, 조, 설탕, 옥수수 등등. 그걸 아는 사람이 더 대단할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옆 사람과 얘기해보자. 맥주를 무엇으로 만드는지, 커피와 녹차와 향정신성 그런 약을 무엇으로 만드는지를 그걸 보고 분별할 수 있는지를. 의외로 모르는 사람 적지 않다. 그런데 말은 어떻게 풀만 씹어먹는데 그렇게 우락부락할까? 말상인 여자는 혹시...... 그런 쓸데없는 공상을 멈추고 포니는 그 곡물을 따라갔다.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농가 근처에서 갑자기 그것은 뚝 끊겼다. 뭐야 헛걸음인가? 그럴 리가 있나. 포니가 주인공인데! 바로 그때 냄새가 났다. 웬 이상한 냄새였다. 향수 공장이나 술 공장에 가 본 사람 뿐만 아니라 일명 개코인 사람들도 그 정도 냄새에는 민감하다. 포니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름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 위해 냄새를 맡고 또 맡았다. 마치 자기가 한마리 개라도 된다는 것처럼. 그 수상한 내음의 진원지는 바로 저 창고였다. 농가에 흔히 보이는 창고. 포니는 그곳으로 가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디. 너 여기서 뭐 하니?」
   「오빠야말로 여기 웬일이야?」
   「동네에 웬 처녀가 나타나서 트랙터 타고 다니며 미친 여자 흉내를 내고 떠돈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래서 내가 여기 왔을까?」
   「여전하네 오빠는. 오빠는 아이참 못 말린다니까. 아직도 싱겁다구.」
   「그런데 싱겁다는 말은 정확히 어떤 느낌을 표현하는 거지?」
   「왜? 어떤 미녀가 오빠 보고 싱겁다고 했어? 내 동생 같으면 꿀밤 쥐어박으면서 꿈 깨라, 공부나 해라 라고 했을 테지만 오빠니까 뭐. 아 그런데 여긴 정말 어떻게 알았어?」
   신디는 그 주체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재력을 여기에 쓰고 있었다. 포니의 치졸한 졸작 시나리오는 연습작에 불과했고, 포니는 신디에게 투자 받지 못했으며, 투자가 다 뭐야 말도 꺼낼 기회가 없었지, 한편 때 마침 사라진 바다라는 드라마는 열풍을 몰고 왔고, 신디는 여기에 연구소를 차린 것이다. 비밀 연구소. 바닷물에서 다이아몬드 성분을 추출해서 그걸로 보석과 화장품과 생명수와 만병통치약과 신비의 숙취해소제를 생산한다는 목표라나? 아마도 신디의 상태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신디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의뭉스럽기로는 콩스탕과 미셸과 실비아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위인들이었다. 그러니까 신디의 달콤한 언변에 넘어갔든 달달한 꾀임에 빠졌든 그들은 끈끈한 팀웍으로 진짜 바닷물을 이용해서 뭐라도 만들어낼 것처럼 그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포니의 연습작 정도는 아마 누구나 생각해 봤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실행력이고, 지금 보시다시피 사라진 바다라는 드라마의 성과는 조용히 잘 살고 있는 사나이와 숙녀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모험심을 자극하며, 잊었던 호기심을 되살아나게 했으며, 개꿈 꾸며 단잠 자는 감수성까지 일깨웠던 것이다.


   16

   포니가 사는 예술촌에는 크게 두 세력이 존재한다. 양대 산맥. 미키파와 신디파. 좀 전에 농가 창고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신디와 미셸, 콩스탕에 실비아가 신디파다. 그리고 미키파는 미키, 노튼, 발머, 멜리사가 주축이 됐다. 한쪽은 몸으로 한쪽은 말로, 한쪽은 직접 한쪽은 간접. 관심사도 달랐다. 신디파는 장비를 만드는 데서, 미키파는 장비발로 현장을 누비는 데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드라마 보기, 그 중에서도 <사라진 바다>. 그러나 그 둘이 앙숙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썩 절친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 가운데서 포니는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양쪽과 교교한 친분을 유지했다. 그 불안한 친교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포니는 지금 이대로 괜찮았고, 그 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진짜 재밌었다. 실제로 그는 학교 다닐 때도 그랬다. 포니는 A와도 B와도 친했는데 A와 B는 싸웠다. 퍽퍽, 코피 파팍.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신디파는 드라마를 보고 난 다음 할 일이 없어서 그러는지 생각이 좀 모자란 건지 농가 창고에서 전전긍긍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미키파는 바로 게임에 빠졌다. 무슨 게임? 사라진 바닷물 때문에 바다는 육지로 변했으니 거기에 도시를 짓고, 거인족을 탐사하며, 모험에 사랑에 판타지가 펼쳐지는 게임에 퐁당 빠진 것이다. 흔한 말로 그들은 게임에 꼿혔다. 드라마 하나의 파급 효과가 이렇다. 뭔가 하나 인기를 끌면 오락산업은 풍문을 키우고, 사나이들의 객기를 자극하며, 양치기 소년은 순조롭게 스타가 된다. 한창때 인기가 한낱 허상과 거품에 허당과 허영으로 판별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무가치하면 어떤가, 전문가들이 유행을 가만 놔둘 리가 있나. 전문가의 촉이란 전성기때는 믿고 가도 된다. 멈춰야 할 때가 어정쩡하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분들이 쾌락에다 교훈과 순수한 기쁨과 짠한 사랑까지 덧붙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래서 짧았던 행복은 긴 행복이 되고, 따라서 사라진 바다라는 드라마는 게임으로, 영화로, 잡지로, 책으로, 패션으로, 캐릭터로 닥치는 대로 번지게 된다. 보통은 그 틈에 재주껏 내게 맞는 컨텐츠를 챙기고 시간만 때우던가, 아니면 전력을 다해서 내 예술관이라는 인생에 집어넣으면 그만이다. 파블로 피카소가 그랬다.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마침내 포니는 유망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타락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포니는 신디파의 건재함을 확인했으니 이제 미키파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는 미키파를 찾아갔다.


   17

   미키파에서 대장은 물론 미키다. 노튼은 중간 보스고, 발머는 쫄병이었다. 그리고 멜리사는 혼자서 대변인도 하고 관계자도 되었다가 최측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찾아갔던 아지트에 멜리사 혼자만 있었다. 포니는 물어봤다.
   「멜리사. 왜 너 혼자 뿐이니? 애들은 어디 갔어?」
   「안녕 포니. 너 저번에 발머가 바다를 향해서 대형 선풍기를 트는 모습을 보며 꾸중했던 일 기억하니? 어지간히 깐죽거려서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을 꺼야. 글쎄 어쩌면 좋니. 사라진 바다, 요즘 장안의 화제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그 작품 있잖아. 그거 발머가 쓴 거래.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어.」
   아니 이럴 수가! 그 바보 같던 삐리한 녀석이 그랬다고? 포니는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인데 어쩌겠나. 게다가 발머한테 크게 미안한 일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은 친구였고, 각자 인생이 있었다. 단지 그들은 모두 사라진 바다라는 드라마를 즐겨보는 은둔형 사색가였고, 잠옷을 입고서 길몽을 꾸는 것일 뿐. 간혹 꾸는 악몽과 꽝만 반복하는 복권 탓을 모두 발머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누가 뭐래도 각자 인생은 각자 책임이 크다. 인생이 원래 그렇고 세상도 원래 그렇다.
   「멜리사. 그런데 혹시 너 크로노스니? 크로노스는 유피테르 6남매를 모조리 삼켰다가 다시 토해냈고, 그래서 유피테르 6남매는 시간을 극복했다던데... 발머는 유명해졌고, 멜리사 너도 뭔가 있는 것만 같아. 넌 절대 그저 그런 아가씨가 아닐 꺼야. 신디파의 대장 신디도 알고 보니 물건 중의 물건이던데! 저 봐 봐. 시계가 멈췄어. 그럼 정말 시간이 정지된 거니?」
   「아 저거? 시계 약 떨어져서 그래. (포니의 이마를 만져보며) 열은 없는데. 왜 그러지?」
   「뭐 어쨌든 녀석들이 없으니 심심한데.」
   「어, 드라마 촬영장에서 미키는 엑스트라로 노튼은 조명 보조로 뛰나 봐. 아마 영화판이 궁금했나 보지. 아 이번 편 봤어? 사라진 바다 말이야. 바닷물을 채우자는 세력이 등장했나 봐. 이론상 전혀 말이 안되는데, 그런데 또 드라마로 보면 재밌단 말야. 알 수 없어 알 수 없어.」
   「알 수 없어? 난 알 수 있어. 할 수도 있고. 어? 여기에 우리 둘 뿐이네. 아, 그냥 둘 뿐이라고.」
   「그래서 뭐? 카드 게임이라도 하자고? 사람이 부족하잖아. 그렇다고 신디파에 합류할 수는 없고 말이야.」
   「그래~! 그게 좋겠다. 같이 놀자 이렇게 된 거. 응?」
   포니는 깔끔하게 인사도 남기지 않고서 어중간하게 멜리사를 뒤로 남기고 돌아갔다. 일부러. 살짝 서운한 감이 들었다가 돌아오면 더 기쁜 법이니까. 멜리사는 당연히 저 인간 뭐야,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18

   그렇게 포니는 돌아서서 집으로 갈려다가 멈추었다. 이대로 가는 건 어딘가 모르게 실패자와 낙오자가 된 듯 했다. 왜냐하면 포니는 환상가이자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가짜 환상과 사랑의 마법이라도 필요했다. 우선은 쉽게 3분의 마법 곧 멜리사가 좋아하는 최신 유행가를 핸드폰으로 틀면서 다시 멜리사에게 다가갔다.
   포니 그 인간이 사랑을 방어하고 신비를 거부할 리 없다. 낭만을 놓치고 환상만을 쫓을 수도 없다.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니까. 그의 목표가 너무 형이상학적으로 비춰질 수는 있다. 그러나 포니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연구하자 연구하자. 알아내자 알아내자. 탐구하자 탐구하자. 그는 내심 다짐했다. 자신의 이상과 모험과 도전이 구구한 억측과 구차한 억지와 구슬픈 변명으로 결론날지언정 지금은 행동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사색가나 지식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지금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포니는 무심한 멜리사를 설득했다. 기쁨과 환희를 찾고 싶니 라고. 따분하고 재미없는 이곳을 떠나 행복이 끊이질 않는 신디파에 합류하자고 설득했고, 종용했으며, 마침내 최면을 걸었다. 오오 멜리사여,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아아 아름다운 숙녀여,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들었다! (딱)! 순진한 멜리사는 꺼뻑 넘어갔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천부적으로 착한 심성을 타고난 연민 가득한 멜리사는 포니의 감언이설에 경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포니는 애초에 이미 알고 있었다. 좌뇌보다 우뇌가 발달한 유형이 최면에 쉽게 빠진다는 것을. 곧 멜리사는 자신의 최면과 환상 요법과 사랑의 마법에 걸려들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까지. 그러나 포니가 멜리사를 속인 것도 아니고, 그 모두가 뜬구름잡는 이야기도 아니다. 아직 저 너머는 미지의 영역이니까. 신디파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대체 알기는 하니, 최고의 흥미와 최대의 즐거움과 최선의 재미를 네게 안겨줄 것이다, 라고 달콤한 사이렌의 음률을 포니는 멜리사의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너무나도 다정스레. 흡사 연인의 사랑스러운 재잘거림처럼. 멜리사는 환영이 보이는 듯 했고 어쩜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만 같았다. 멜리사는 생각했다. 포니는 나를 예언가로 만들어줄 것이며, 신디파 친구들은 나를 로맨티스트이자 어여쁜 공주로 거듭나게 해줄 것이다 라고. 더군다나 짝사랑을 졸업하여 합리적인 쾌락과 온갖 환락마저 멜리사를 귀찮게 괴롭힐 것이라는 상상에 그녀는 아마도 떨렸다. 그러나 포니에게 묻지는 않았다. 오빠 나 떠니 라고. 포니가 예고하니 멜리사는 추측했다. 포니가 예견하니 멜리사는 추론했다. 추정은 행운의 당첨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포니가 납득시키니 멜리사는 달콤한 공상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헤어나올 수 없었다.
   「멜리사. 너 신디 집에 안 가봤지? 난 가봤어. 신디가 초대했거든. 최근 친구들에게 회자되는 두 가지 희소식이 뭐니? 첫째 미키파에서 발머의 부흥, 둘째 신디파에서 신디 그 마녀의 숨겨진 정체에 대한 발로. 알잖니 그 둘이 한꺼번에 우리에게 알려진 것 말이야. 그런데 있잖아, 신디네 집에는 회전목마가 있어. 그렇다고 그 회전목마를 타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회전목마가 작동을 시작할 때 그 어떤 기이한 음악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신디가 설계한 회전목마에 몸과 마음을 맡긴다면 설마 이건 천국의 경험이 아닐까 착각하게 된다는 거야. 나만 탄 거 아니야. 미키파에서는 미키와 노튼과 발머가 탔고, 신디파에서는 콩스탕과 미셸과 실비아가 탔어. 아 무소속인 나도 탔지. 그럼 뭐야? 너만 못탔네? 이걸 어쩌지! 어머나 주인공이 빠지셨네 그래. 허허허 이걸 어떡하니. 아 슬퍼 아아 슬퍼라. 괜찮아 괜찮아 멜리사. 하지만 그렇게 시무룩할 것까진 없어 없어. 그러지 않아도 된다구 된다구. 다 방법이 있으니까 있으니까. 응? 오빠 믿지 믿지? 멜리샤 오빠 알잖아 알잖아. 흐흐흐흐흐. 보편적 행복이든 특별한 기쁨이든 아니 특유의 환상감이든 우리가 그 모두를 전유하게 될 꺼야 그럴 꺼야. 상상해 봐 봐 상상해 봐 봐. 그렇게만 된다면 이라고. 자 떠올려 봐 떠올려 봐. 안 그래도 넌 선녀이자 미녀에다 인기 만점에다 깜찍하기만 한데 멜리샤 인생은 다시 제7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 아니겠니 아니겠니? 세계적인 인터넷 기업과 TV 다음에 인터넷으로 세상이 발전하면서 이름을 알린 부호들이 자기집 창고에서 일을 시작해서 그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 너도 알잖니. 바로 그 창고에 넌 무상으로 입주하게 되는 거라고. 게다가 초라한 창고도 아니고 신디의 투자가 집중된 창고이고 말이야. 그건 무임승차가 아니라 엄정히 봐도 엄밀히 따져도 엄연히 스카웃이야. 그럼. 스카웃 스카웃!
   왜 증거? 좀 더 합당한 이유, 매달릴 수 밖에 없는 동기, 어디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전대미문의 영문이 좀 더 필요하시다고? (딱)! 자, 그것을 시각화해서 살펴보자구. 멜리사. 이쪽을 봐 봐. 칠판을 보세요 멜리사 학생.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재미없는 강의는 아니니까 걱정하지는 말고. 언제까지 행복한 미래를 꿈꾸기만 할 꺼니? 응? 이제는 사뿐히 날아올라서 은하계를 여행하는 우주선에 탑승할 때라고. 아니 그렇소 아가씨? 아직 멜리사의 표정이 '워매 좋은그' 까지는 안 왔어. 약간 부족해. 살짝 아쉬워. 살살 섭섭해서 가렵다고. 그대는, 뭔가, 더, 듣고 싶다는 말이군. 낭자, 마음의 문을 열어다오. 인생이 변하고 팔짜가 바뀔 테니까 동참하고 싶다면 참여해도 괜찮아. 그래 주오. 빠져다오. 창문을 열어주소 공주여. 단, 다만 억지로 권하지는 않겠어. 그러면 안되지. 그건 멜리사의 자유고 선택이자 권리며 인생인데 그럼 안되지. 하지만 우리는 최근 봤지. 무엇을? 우리가 무엇을 봤을까? 사랑의 나비일까 인생의 교훈일까 신비의 재래일까. 우리는 봤어. 바로 사라진 바다의 작가 멀더의 성공을. 그리고 우리가 미처 몰랐던 신디의 숨겨진 비화를. 말해 뭐 하겠어 상황이 이런데. 안 그러니? 아 이름? 이름은 아직 안 정했대. 설마하니 문장형 책 제목처럼 브랜드 명칭을 작명하지는 않겠지. 안 그러니? 이를 테면 이런 것 말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랄지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랄지 내가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 같은. 그건 차차 정하면 되고, 맞다. 그림 그려서 설망한다는 게 또 깜빡했네. 오빠가 쉽게 설명해줄께. 자, 봐 봐.
   (포니는 하얀 칠판에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초록색 펜으로 동그라미 하나. 파란색 펜으로 동그라미 둘.)
   멜리사? 안쪽에 있는 초록색 동그라미는 지구야. 그리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파란색 원도 역시 지구고. 바깥쪽을 A 안쪽을 B라고 했을 때 A와 B 사이에는 뭐가 있을까? 그렇지. 땅이 있고 바닷물도 있고 광물이나 용암이나 공룡의 화석이 있겠지. 그 가운데 바닷물이 사라졌다는 가정으로 허구를 만들어서 발머는 떴어. 성공. 대박! 캬~ (엄지 척!) 지금 어디서 축배를 들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신디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신디파는 지금 발머가 쓰고 제작팀이 만든 드라마에서 감흥을 받아 실제 바닷물에서 뭔가 불가사의한 물질을 추출해서 그것을 주원료하는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고 있어. 발머의 극본은 허구고, 신디 일당의 작전은 아마도 혁신보다는 허위에 가깝겠지. 곧 그것은 헛일이고 그들은 허당이고. 허당은 은근이란 수식어가 붙지 못하면 불운이자 비운에다 불행이야. (딱) 완전 꽝이라고. 그들에게 뭔가가 부족하다구. 그래서 어떻게 됐다? 신디파는 그 사업을 접게 돼. 그 다음에 그들은 해체했을까? 그럴 리가 있나.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는 법. 그들은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비를 찾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 왜냐하면 사라진 바다라는 드라마는 도무지 끝날 줄을 모르면서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야. 아무튼 신디파의 수장인 신디가 뭔가 기발한 발상을 떠올리게 됐어. 그건 뭘까? (칠판의 동그라미 두 개를 가르키며 똑─똑─똑) 멜리사여 여기를 보세요. 집중 집중, 칠판 칠판, 멜리사 멜리사, 사랑 사랑. 응? 그래. 자 보자구. A 안에 있는 B, A에서 B로 진짜 바닷물이 사라지는 원인을 찾겠다는 거지. 그거 가짜 아니냐고? 요즘 분위기가 증명하고 있지 않니? 그렇다고 무턱대고 달려들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 그래서 (쉭─쉭─쉭) 신디는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에디슨처럼 달걀을 품고서 엉뚱한 공상을 하는 게 아니라 치킨 요리를 먹어. 풍미 캬! 한잔 쫙! 군침이 절로 도는 요리를 말야. 왜? 왜일까? 신디는 왜 그런 생뚱맞은 행동을 한 거지? 왜냐하면 신디는 조카가 보는 동화책 제목을 보면서 뭔가 느낌이 왔기 때문이야. 그 영감이 구체화될려면 시간이 필요했거든. 아 그 동화책 제목이 뭐였드라? 그래 그거야. 뉴턴 사과로 우주의 비밀을 열다. 맞아 그거야. 뉴턴 사과로 우주의 비밀을 열다.
   멜리사, 뭔 생각하니? 나무 밑에서 한량처럼 입 벌리고 사과가 제발로 굴러떨어져서 철썩 꼭 껴안듯이 스스로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거리의 걸인에게 푼돈 대신에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는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춰 줘야 하나, 둘 중 어떤 생각했니? 뭐시여 전자도 후자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호박이 제발로 굴러와서 최고의 왕자님을 물어올까 그 궁리를 하고 있었다고? 나 원 참 세상에나! 어쨌든 전자든 후자든 그건 중요치 않고, 진짜 중요한 건 이거야. 신디는, 바로 신디는 관성 즉 물체가 밖의 힘을 받지 않는 한 정지 또는 등속도 운동의 상태를 지속하려는 성질의 시작과 끝과 방향을 생각한 거야. 방금 전에 오빠가 동그라미를 그릴 때 어떻게 그렸지? 왜 잠 오니? 금방 끝나요, 착한 어린이. 생각해 봐 멜리사. 오빠가 좀 전에 A와 B를 똑같이 그렸는지 다르게 그렸는지를. 그처럼 신디는 뭔가 의문점이 생긴 거야. 그녀는 숙녀니까 그 호기심을 잡고 늘어진 거라고. 오빠가 말했나? 신디네 집에 회전목마가 있다고 말이야. 신디는 그 회전목마가 왜 시계반대 방향으로 도는지를 궁금해하지는 않았어. 신디는 동화책을 읽고 동시를 짓고 동요를 부르는 상상력이 풍부한 애기가 아니니까 말이야. 관심조차 없었다고. 그러다 신디는 집에서 샤워를 하다 욕조에서 여성잡지1을 열심히 응? 아주 맹렬히 읽던 중 무언가 알고 싶어졌던 거지. 왜, 왜 오빠의 설명이 꼭 구연동화 같니? 그러면 어때. 흐흐흐흐흐! 아무튼 눈부신 육체파 아가씨인 신디는 빛나는 알몸으로 욕조 바깥으로 나왔어. 그때 그녀는 아르키메데스처럼 소리쳤지. 유레카라고? 아니야. OK 라고. 신디는 욕조에서 물이 빠질 때 언제부턴가 물이 회오리치지 않고서 스르륵 빠진다는 걸 발견한 거야. 남반구든 북반구든 원래대로라면 물이 시계방향이나 시계 반대 방향으로 빠져야 정상이거든. 신디는 바로 거기서 이상한 점을 눈치챘어. 재빨리 말야. 신디가 그러고 보면 응큼한 데가 있어. 의뭉스러운 아가씨 같으니라고. 속으로 뭔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있나. 퍽하면 몽상에 걸핏하면 추측이야. 신디같은 애가 나한테 교육을 좀 받으면 세계적인 숙녀로 거듭날 수 있는데 말야. 흐흐흐흐흐! 어쨌든 그런 다음 신디는 곧바로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한 10개국어로 검색을 해서 그녀가 원하는 정보를 찾았어. 그것은 무엇일까? 그건 말이야 최근 발생했던 용오름 현상과 토네이도를 모두 확인한 결과 단 몇 곳에서 비정상적인 움직임으로 그것이 발생했다는 거야. 그 단 몇 곳에서 발생한 그것은 시계 방향이나 시계 반대 방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지. 정상적인 방향이 아닌 걸 딱 찾아냈어 그녀는. 그래서 그녀는 확 깨달았지. 이건, 뭔가, 있다 라고!
   (똑─똑─똑) 칠판을 보렴 멜리사. 드라마 사라진 바다가 방영되는 시점이 정확히 그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던 시각과 일치해. 따라서 신디는 A와 B 그 사이에 우리가 아는 지구과학 상식을 전복시키는 획기적인 원리를 찾는 작업에 들어갔어. 즉 그녀는 A와 B가 어쩌면 따로 움직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정하고 연구에 들어간 거지. 그래서 지금 신디파 애들이 정신없이 바빠. 어째 이상하지 않았니? 최근 카바레나 나이트클럽이나 술집이나 아무 데서도 녀석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말이야. 지금 생각해보니까 정말 그렇지? 그렇다고. 지금 그렇게 된 거야. 어때? 우리가 여기 이대로 낙심한 채 멀더의 멋진 성공을 부러워하고, 신디와 아이들의 일과 놀이가 하나가 되는 몰입의 경지를 신기한 듯 선망하기만 해야겠니? 언제까지 드라마 다음 편만 기다릴 꺼야? 날이면 날마다 거울만 보고 환상 문학지 미스테리아의 재발간만 기다릴 꺼야? 정말 그럴 생각이니? 어?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이럴 때가.」 포니는 인상을 팍 쓰면서 폼을 잡았다.
   드디여 멜리사는 자각했다. 포니 오빠와 행동을 함께 하기로. 포니 오빠는 어쩌면 고대 그리스의 웅변가가 아닐까 막 멋져 보였고, 그 어디서부터 명맥이 끊겼던 신비주의를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환상가인 듯 보여서 애태우며 부대끼는 동경심을 품고서 오빠를 바라보았다. 그건 아마 꼭 멜리사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감동을 받거나 탄복에 겨워하며 환장했을 수도 있다. 환장? 정정한다. 그 누구라도 환상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허약했고 의기소침했던 그녀의 가슴은 뛰었다. 핑 하며 신호가 왔고, 짠 하며 다짐했다. 그녀의 탐구심은 확고해졌던 것이다. 우주 바깥에서 외계인을 발견하는 것과 외계에서 전파가 지구에 당도함을 알아차리는 것은 학구파들에게 맡기고, 자기는 외래가 아닌 내부에서 두더쥐일지 불가사의일지 모를 신비감을 찾겠다는 의욕이 불쑥 솟구쳤다. 솟구쳐? 의욕이! 마치 익명의 제보를 받고서 조사해보니, 옛날 소설에 흔히 나왔듯이 자기는 알고 봤더니 거액의 상속자였다더라, 마치 그런 기분마저 느껴졌다. 분위기 좋았고, 열망에 부풀었다. 없던 너스레까지 생겼다. 한마디로 이건 굉장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방치하고 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멜리사는 화사하게 꿈이 벙글었다. 마음은 팍 팍 불꽃을 피웠고 이미 천궁에 도달했다. 나아가 꽃을 피우고 꿀벌을 모아서 전혀 새로운 동기 부여 대부흥회를 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막 막 꿈과 희망과 돈과 인기와 사랑과 행복과 분홍색 환상까지 모두 다 사로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신세계로 발전할 것이고, 멜리사는 현재에 사는 미래인이 되는 거다. 이 세상에 대한 답례는 그때 가서 생각하고, 브랜드 마크는 역피라미드. 새로운 사용자 경험의 틈새 시장은 발견된 거나 다름없었다.
   포니와 멜리사는 신디파에 합류하기 위해 문을 열고 나섰다. 당연히 장면은 슬로우 모션. 물론 포니는 신디에게 멜리사를 데려갈꺼라고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심 살짝 걱정을 하긴 했다. 혹시라도 신디가 멜리사 앞에서 자기를 면박 주면 어쩌나 하고. 예를 들면 이런 말.
   「넌 왜 시키지도 않는 일을 하고 그래?」
   심지어 신디파가 아직 창고에서 여전히 헛물켜고 있을지 어쩔지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바닷물이 진짜로 사라질지까지. 아직 진짜 환상과 진정한 신비는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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