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아마도 쓸쓸함에 온전히 빠져서 마치 심심한 개처럼 일상의 무료함에 몹시 염증을 느끼며 어떤 현기증을 간혹 느꼈던 것 같다. 공중에서 뭔지 모를 섬멸도 보았다가 허공에 있던 광채가 책으로 들어갔는지, 음악으로 스며들었는지, 한폭의 풍경화에서 맨 밑바닥 스케치로 혼음되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마음, 그것은 무엇일까, 암울함과 안도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영화로운 권태라고나 할까? 나는 그런 이상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환상통일 수도 있고, 또는 이국정서주의, 아니면 내친김에 가짜 사실주의에 관한 모호한 낭만, 바로 그것에 대한 명상이라고 추측하지만 딱 그렇다고 단언할 자신은 없다. 대지의 숨결을 느끼고, 새들의 대화를 듣고 또 타인의 마음을 읽고, 그리고 나는 허구의 인물로 변신하여 방탕한 생활을 즐긴다? 일평생 한 번도 난잡하고 문란한 삶에 근접해보지 않으신 분이 읽기에는 거북한 문장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제 2의 자아가 있고, 그의 자유와 능력이 보장된다면? 내가 그 정도로 무진장 상상력이 풍부하다거나 창의성이 뛰어나지는 않다. 또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고 싶은 데로 마음대로 살고 그럴 수도 없으며, 화장을 고칠 수도 없고, 아예 하질 않으니, 트로이의 유적을 찾아 떠날 수도 없고, 마술에 걸린 정원이 어디인가 꿈꿀 수도 없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시적 언어로 간명히 표현하자면 행복하면 그뿐, 이겠지만 뭔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상상의 산물에 관한 통념을 떠올렸고, 환상의 사실화를 애써 고민하고 있었다. 조용히 속된 말로 간출이자면, 앞서 나온 설명은 모두 개소리고 그냥, 나는, 글이 안 써진다, 뭐 딱히 재미난 일이 없다, 소설의 발상이 통 떠오르질 않는다, 그런 심란한 상태에 있었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TV 편성표를 보기 시작했다. 꼭 그것을 보고 나서, 오늘 이거 이거 이거를 보아야겠다, 저것도 재밌겠는데... 이와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무언지 모를 무형의 신기함을 기대하고 드러나지 않은 힘에 이끌리다시피 하면서 어릴 적 습관을 한 번쯤 복습해볼 필요가 있다고,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그렇게 해보라고 자아 1은 자아 2에게 명령하고, 자아 2는 자아 1에게 설복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TV 편성표를 보기는 봤는데 수십 년 전의 감흥이 일지 않았다.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당연하지, 그럴 리가 있겠나. 작은 기쁨과 일말의 기대라도 있어야 그 일을 계속할 텐데 그럴 수는 없었다. 내 머리 속에 이미 너무 많은 양의 정보가 들어가 있고, 그것들이 안에서 상호 간섭하고 연쇄 작용을 일으켜 막연한 지식의 바다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두뇌라는 지구 표면을 끝없이 뒤덥고 있는 것 같았다. 대기 중인 지식의 밀림도 어마어마했다. 몇몇 TV 프로그램을 골라서 보면 재미있기는 하겠지만 계속 TV 리모컨만 누르고 있을 뻔한 모습이 딱 그려졌다. 피로회복에는 TV보기가 최고지만 절제가 안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피로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미지의 환상이었다. 어린 시절 꿈꾸던, 기다리던, 고대하던 세상을 너무 많이 그리고 일찍 알아버렸다. 좀 그걸 더 천천히 알고 그 동안 기예를 익히거나 돈버는 재주를 기막히게 습득했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스스로 지금의 삼류작가 생활을 자초했으니 다 쓸 데 없는 공상일 뿐이다. TV 편성표는 그만 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다음에 감행한 것은 낯선 곳에 가서 글을 써보자는 것이었다. 드라마에서 흔하게 나오는 것처럼 작가들은 정말 어디 조용한 별장에 가서 일정 기간 지내면 뚝딱 글이 써지나 보다. 그러니까 그 소재가 영상 작품의 단골메뉴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럴 땐 따라하고 흉내내는 게 옳은 길이란 걸 살면서 경험적으로 터득했다. 서툰 직감 때문에 성공보다 실패쪽이 훨씬 우세했지만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것처럼 마음이 떠나면 몸도 따라가야 한다. 몸이 먼저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리고 지금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성격과 인물 유형을 바꿔서 안 해본 시도를 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많이 안 좋았다.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 바이올린 케이스를 옆자리에 놓고 창 밖을 바라보는 아가씨의 모습이 뭔가 너무 우수에 젖어있달까, 센티멘탈? 동화풍이랄까? 멜로? 악흥의 순간은 우연한 운명적인 만남이 결합되어야 멜로드라마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망신살이 뻗칠지언정 일단 말이나 걸어보자는 심정으로 나는 그녀의 앞, 옆, 즉 45도 방향에 앉았다. 무슨 얘기를 건넬까 고민하다가 아, 그게 좋겠다 라고 정하고 나서 딱 말을 걸려고 했는데 어느 우람하고 듬직하며 게다가 신수가 훤한 웬 모델 스타일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이 자리가 자기 자리 같다고 내게 말을 붙이길래 나는 민망해서 그냥 그곳을 뜨고 말았다. 나 보다는 네가 낫겠다, 그래 당신이 그녀와 더 잘 어울린다, 그런 감정이 이성을 유린했다.
그러다 나는 어느 해안가 별장에 도착했다. 와, 여기라면 영감이 정말 저절로 넘쳐나오겠구나, 그래~ 이런 장소에서 글을 써야 잘 써진다니까 하면서 막상 글쓰기에 돌입했는데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았는지 통 새로운 착상이 떠오르질 않아서 근처에 있는 공원에 나갔다. 그곳에서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아리따운 중세풍 여인네가 풀밭 한쪽 의자에 앉아 있길래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날씨가 참 좋죠? 이런 식상한 대사를 사용한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얼굴? 또는 치장? 그녀는 지나가는 개가 짓나 보다 라는 태도와 티끌 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몸짓으로 자신의 어조를 그 자리에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다. 뿐만 아니라 나는 해변 모래사장에서도, 카페에서도, 술집에서도, 인도에서도, 심지어 차도에서도 차 문을 열고 문닫힌 신호 대기 중인 택시에 탄 여성에게 말을, 아니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어떻게든 소설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가망성을 싹틔울려는 의도를 갖고 연을 맺으려는 안타까운 시도를 몇 차례 지속했지만 그건 모두 그냥 안타까움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적한 휴양지에 오기 전 나는 그런 어중간한 만남 한두 껀과 시집과 노트북과 소설 한 권, 어떤 미래주의에 대한 흐릿한 구상까지 여지없이 챙겨두었건만 그 여흥과 기다리던 보람은 거의 허사로 간주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 어린이 같은 일렁이던 동심은 어른의 실망과 따분함으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거울을 봐도 꾀죄죄했고, 별다른 전망도 보이지 않았다. 아, 여기 와도 글은 잘 안 써지는구나, 여기서도 쓸쓸하구나, 이 상심은 뭘로 달랠 길이 없구나 라면서 맥없이 쪼그라든 상상하기, 절망적인 몹쓸 창의력, 작품 소재 발상 좋아하시네, 그런 마음을 안고서 나는 내가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어떤 애틋함도, 수척한 갸륵함도, 박진감 넘치는 모험 마저 없이 불쾌감만 떠안고서 그곳을 떠나서 집으로 왔다. 드라마 따라하기는 썩은 동아줄이었다.
집에 와서 나는 세차를 하고, 잔디를 깎고, 수영장을 청소했다. 온라인 쇼핑으로 낚시대도 하나 구입했다. 한 김에 절판된 중고 서적도 한 권 주문했다. 딩~동! 벌써 물품이 도착한 듯 하다. 그런데 배달해온 사람은 여자였다. 그리고 싸이클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땀을 잘 흘리지 않는 체질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나에게 책을 건네주면서 자기가 그 책의 저자라고 했다. 사인을 해줄까 말까, 사인해달라 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끈질기게 하는 듯해 보였다. 내 책을 읽지도 않고 중고로 팔 속셈을 내다보는 듯한 간파력, 역시 있었다. 나는 그 책의 저자를 남자로 알았는데 그건 남자 같은 여자 이름이었다. 지금 내가 그에게 그냥 가라고 하면 뭔가 서운하고 조금 참담해 할 꺼 같아서 나는 그녀의 마음을 읽고, 사인을 굳이 해주시겠다니 사람 참 집요하시군요 꼭 그래야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이렇게 말하지는 않고 아휴 기쁘다 반갑다 깜짝 놀랐다 이런 행운이 다 있나 하면서 사인을 부탁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에게 무작정 치근댈 수도 없고, 전화번호 뭐에요, 오늘 오후에 시간 있어요 라고 물어볼 수도, 느닷없이 껴안을 수도 꿀밤을 때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연극의 한 장면이었다면 돌발 행동으로 그녀의 이마에 꿀밤을 먹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면 안되는 일이다. 한 번 그래볼까, 어떻게 되나 보게? 똑같이 안 될 꺼라면 그럴꺼라면... 음... 이왕이면 좀 찐한 걸로? 아무튼 나는 예절과 교양을 바탕으로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녀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준비된 각본이었다. 사람일이 다 그렇다. 그러다 그녀가 사인을 할려다가 갑자기 푸하하하하~, 하면서 그건 뻥이라고 했다. 한동안 시간이 정지했다. 누가 리모콘 버튼을 눌러야만 다시 시간이 흘러갈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넘어트릴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어서 그냥 식 웃어주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녀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나는 간신히 감탄사를 꾹 눌러 참고, 사람이 사랑을 시작하면 저렇게 되는구나 참 좋을 때다 그녀는 아마 사랑에 빠졌을 꺼야 라고 생각하면서, 영혼이 육신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잠시 유체이탈도 했다. 그런데 그녀가 자기를 소개했다. 자기는 <정 원한다면> 카페에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 스컬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누가 벨을 두번 울리지 않는다네 어쩌네, 자긴 멀더의 새로운 여자친구네(예상이 적중했다), 아직 심각한 사이는 아니지만 차차 좋은 원대한 관계로 발전할 여지가 다분하네 어쩌네 하면서 한참을 쫑알쫑알, 미주알고주알 수다를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희희낙락 하면서 떠나갔다. 난 기를 뺐긴 것 같았다.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대학가 인근에 가서 젊은이들 기를 쪽쪽 빨아도 모자랄 판국에 말이다. 나는 그녀가 저만큼 갔으니까 내 혼잣말을 듣지 못하겠지 하면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와 같은 신중한 자세로 한 번 더 빼꼼히 쳐다보고 혼자 투덜거렸다. 오~ 멀더 큰 건 올렸는데! 왠지 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지만 남의 연애사에 대해 케케묵은 잡담을 늘어놓을 수는 없고 해서 이렇게 여운을 남기는 간단한 혼잣말로 별 사건도 아닌 사건을 종결시켰다. 그것도 역시 뻥일지 몰라! 그러면서 이따 <정 원한다면>에 가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동안 아지트에 들르지 않아서 뭔가 궁금한 마음과 호기심, 일종의 염려, 모종의 사려깊은 걱정과 또, 거기 들리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 그것이 떠올랐기 때문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원래 기분이 좋았던 건가? 그건 아니다. 잘 모르겠다.
나는 <정 원한다면>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찻집은 언제부터 이름이 이 모양인 것이지? 괴음이 들리는 듯 하고, 오래된 신파 같은 느낌도 들고, 마음을 떠보는 달변가의 농간 같기도 하며, 나 같은 눌변가들을 헷갈리게 하기 위해서 지은 이름 같았다. 반나절 지나서 혼자 있을 때 탁 하면서 뒤늦게 뻥~ 터지는 고급 유머, 그와 정반대되는 돌아서서 한 30분 또는 딱 3일이 지나서야 그때부터 슬슬 시작하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뚜껑이 열리는 그런 기이한 느낌도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잘, 은 모르겠으나 어쨌든 상관없다. 이 카페의 이름은 머지 않아 또 바뀔 것이다. 다른 거 다 좋은데 여기서 그거 하나 만큼은 오락가락한다. 이름이 한동안 오래간다 싶으면 또 내가 멀더에게 슬슬 호호 손시러운 손에 입김을 불듯이 그의 귀에 마성의 호언을 불어넣으면 그만이다. 사실이 그렇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이름 하나를 가지고 평생을 산다. 그거 좀 비정상같다. 반인반조나 괜찮은 걸로 하나 내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서 그에게 추천할 것이다. 이상하게 그는 공부도 많이 했고, 인성도 갈고 닦을 데로 갈고 닦았고, 지성인들과 말도 잘 통하고, 카페는 물론 도시에 괜찮은 사업체도 있고, 여자친구도 생겼지만 웬 이유에서인지 내가 뭐라 말만하면 막 귀가 커지면서 실룩실룩 움직이는 것만 같다. 다음에는 볼 만한 영화가 없으니, 그에게 영화 한 편을 찍으라고 해야겠다. 우리가 사는 곳, 거기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한 편 있는 게 좋은 일 아니까? 틀린 얘기는 아니지 않은가? 살살 꼬시면 된다.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극장도 있어야 한다. 멀더에게 극장도 하나 지으라고 해야겠다. 일명, 소극장! 또는 유머 1번지 같은. 앗싸, 할 일이 생겼다.
바에는 멀더와 스컬리가 앉아서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우리 사랑 이제 막 시작됐으니 방해하지 말란듯 더없이 유쾌해 보인다. 이때 그들을 부르면 상기된 표정을 지을 게 뻔하다. 왜 방해하냐고, 눈치가 그렇게 없냐고, 어째 참한 아가씨 한 명 소개시켜주기를 바라냐고, 우리의 연애에 끼어들지 말라고, 또 언제 사랑이 끝날지도 모르는데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데 집중해야하지 않겠냐며 훼방놓지 말라는 서운하고 또 섭섭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참 지독한 사랑에 빠지셨구나. 그런데 저 스컬린가 스쿨인가 하는 여자는 어디서 굴러왔길래 멀더의 마음을 통채로 뒤흔들고 정신 못차리게 만드는지 재주 한번 뛰어나고, 개성도 강해보였고, 또 모른다. 교성이 엄청날지도. 왠지 모르게 나는 지금 한 편의 영화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에 젖어들었다. 물론 영화는 더럽게 재미없는 영화겠지만. 장르는 복합 장르면 좋겠고 에로나 멜로, 미스테리도 괜찮고, 코메디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런 걸 가릴 새도 없이, 언제 영화가 만들어지고 개봉된지도 모르게 사라지고 잊혀지고, 묻혀질 그런 사실주의 작품의 주인공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다. 아무래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은 아닌 듯 하다. 그래서 나는 <정 원한다면>에서 나왔다.
딱히 행선지도 목적도 약속도 없어서 나는 볼보를 타고 해변가로 갔다. 그늘에 자리를 펴고 옷을 훌러덩 벗고 드러누었다. 일광욕을 시작했다. 갑자기 무력감에 빠져들어 잠이 들고 꿈도 꾸었지만 깨어서 시계를 보니 불과 5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니 몸이 더 무겁다. 천근만근이다. 아무래도 심심해서 그런 것 같다. 문득 나는 미모의 여자가 다혈질이면 어떤 인생을 살아갈까, 라는 웬 뜬금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렇다고 찬찬히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고 다시 상상은 다른 걸로 옮겨갔다. 그러다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 어? 뭔 말이지? 측두엽에서 튀어나왔나, 전두엽에서 내다버린 말일까? 어디서 주워 들었나? 책에서 읽었을까, 어느 카페에서 본 한잔의 그윽한 차 이름일까? 모르겠다. 생각나지 않는다. 그나저나 나는 날개가 없으니 천사가 아니네. 그럼 악만가? 알 게 뭐야! 대화 상대가 이 말을 들었다면 이랬을 것 같다. 거짓말이에요, 걔가 한 말 절대 믿지 마세요. 걔가 뭔 말을 했는데? 그분과 나도 대화가 잘 섞이지 않는 만남이구나 라면서 세상을 (잠시만) 원망하고 헛헛한 외로움은 뭘로 달래나 라고 괴로워했을지도 모르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옆에 아무도 없었다. 말벗이 없는 게 좋은 일일지 모른다. 소설에 대한 구상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구상이 잘 안 된다. 소설을 쓰지 말까? 왜 쓰는지도 모르고 쓰고 있는 것 같다. 숙련가들은 거창하게 나는 글을 왜 쓰는가, 라고 하지만 그건 내가 봤을 때 대체로 <어른들의 말>에 불과하다. 밭에 씨를 뿌리고 사람들에게 설을 풀어서 그것이 TV 모니터에 나오는 것은 세상을 너무 잘 아는 어른의 일이다. 그들에게는 새로움, 그런 거 별로 없다. 그건 1 더하기 1은 2요, 하늘은 파랗고 얼굴에는 눈-코-잎이 있다는 것과 똑같은 그냥 사실일 뿐이다. 왜 쓰는지 모르고 몰입해서 써야만 뭔가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중 쓰고 나서 아, 나는 그때 왜 그렇게 미친듯이 글을 썼는가, 그럴 수도 있다. 애들도 놀 때 나는 왜 논다, 뛰어 논다, 놀이터에서 논다, 혼자 논다, 미리 작정하고 선포하고 치밀히 계획해서 놀지 않는 것처럼. 문득 광고문구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그걸 흘려보내면 안 된다. 그러면 참 일 못 한다, 라는 말을 듣기에 딱 좋다. 그건 뭐냐면 <인생은 꿈이다> 이거다. 인생은 꿈이다? 인생이 꿈? 내가 꿈이다! 아니면, 꿈이 인생이다? 난들 아나! 닥쳐! 닥치란 말이야 이 멍청아!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알겠어? 알면 뭐해! 주위를 한번 둘러봐, 나를 돌아보라고, 소설의 소재는 주변에 널렸어, 그걸 그냥 슥 가져다 쓰면 돼, 그러면 된다구. 그런데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생각을 서술하다보니 꼭 이건 애들 놀이와 같다. 눈-눈-눈-눈-눈-눈-눈-눈-눈-눈-눈 ─ 코! 코-코-코-코-코-코-코-코-코-코-코-코 ─ 귀! 귀-귀-귀-귀-귀-귀-귀-귀-귀-귀-귀-귀-귀 ─ 입! 아 나 이런 미치겠다 못 봐주겠다. 여자는 에코일까? 자신이 한 말을 되풀이 하니까? 엥? 난 남잔데. 잠깐 에코가 신의 이름인 걸 모르는 사람 엄청나게 많다. 소설은 사람이 쓰고, 일도 사람이 하고, 화장지도 사람이 만드는데 이상하게 주변을 보면 다 신이다 신. 이름을 한 번 보자.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도 신의 이름, 들고 있는 가방도 신, 신고 있는 신발? 신! 골프장 이름도 신, 바르는 화장품도 신, 뿌리는 향수도 신, 드라마 제목도 신. 그 신은 다 누가 만들고 지어냈을까? 아마도 사람? 빙빙 돈다 빙빙 돌아. 일광욕을 하다 별 생각을 다 한다. 어쩜 더위를 먹어서 그럴 수도 있다. 일광욕은 너무 오래하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 나는 별안간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흰 도화지에 폼 잡고 끄적끄적 하다가 그만 포기하고 그걸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대충 그린 그림이 지역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키고, 대도시 화랑에 진출하고, 나인기 라는 이름의 마차를 타고 승승장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즉시 실행에 돌입했다. 삼각대와 빵모자, 색연필, 단 몇가지 색깔의 간단한 기본적인 물감과 유화도구등을 사왔다. 어디로? 이곳 해변가로! 그곳에서 그림을 그릴 꺼니까. 물감은 딱 5가지 색깔만 샀다. 왜 그랬냐면 그걸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5가지를 잘 섞고 섞으면 5,000가지 색을 만들 수 있다. 이론은 그렇다. 어디 보자, 빵모자 안에는 어떤 이름을 적을까? 적당히 유명하고, 그림값 비싸고, 신비롭고 경이로운 게다가 즐겁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화가의 이름을 기입해야겠다. 아니다. 그는 고인일 테니까 현역 작가의 이름이 더 낫겠구나. 그런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있긴 있겠지. 없으면 최대한 근사치를 찾으면 된다. 그리고 집에서 침낭을 가져왔다. 큰 준비 과정없이 나무 밑에 침낭 깔고 자면 끝이다. 캠핑 그런 거 어렵지 않다. 해먹, 누가 놓고 간 거 주으면 된다. 예상 기간은 대략 1주일로 잡았다. 작품 완성까지. 어떻게 보면 난 그냥 해변가에 텐트치고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자연공간에서 좀 쉬었다 가는 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낮잠도 자고, 낚시도 하고, 과자도 씹어먹고, 모래사장도 걷고, 물놀이도 하고, 여행객이 공놀이를 하면 또 그 일행에 남자가 없다면 살짝 꼽살이도 끼었다가, 어떻게 알게 되어 통성명을 하고 자연스럽게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많이 친해지고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오빠 이거 캔 맥주가 잘 안 따져요 좀 따주세요~ 그러면, 아 그런 건 저에게 맡기세요 어디 가냘픈 공주님께서 그런 험악한 알류미늄 깡통을 함부로 어 거 마 장정들이나 하는 일을 시도해볼려고 하시다니, 당치않으십니다, 절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지금 여기 뭐하러 왔겠어요? 철학책 쓰러 왔겠어요 땅 파서 금을 캐러 왔겠어요? 네? 라고도 했다가, 순간 밑도 끝도 없이 번뜩 하면서 착상이 떠오르면 번개처럼 삐리리리리 뇌리 속에서 구상을 마치고 공책을 펴서 신들린 듯 소설을 쓸 수도 있는 일이고... 이런 걸 그려봤을 것이다. 어떤 그림을 그릴까, 도 다 생각해 놨다. 동영상을 그림으로 옮기는 거다. 여차 하다 추상파 느낌이 날지도 모르지만 혹시 구경온 누군가가 있으면, 나는 누드모델 생각 있냐고 몹시 정중하게 매우 진지한 의도를 실어서 아주 깍듯하고 엄중한 가운데 약간의 농담과 당신이 뭔가 모르게 궁금하다는 눈빛을 섞어서 내 의중을 알리면 그쪽에선 자신의 심중을 몽땅 내게 건네고 그 즉시 누드 스케치에 몰입하게 된다면, 그런데 뭐야 이거! 그런 쓸데없는 상상은 집어치우고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어, 그런데 연락이 왔다. 어디서, 냐면 부동산 중계인으로부터. 저번에 대학가에서 잠시 하숙생으로 살면서 좋은 느낌을 받아서 나도 그런 일을 해 보면 어떨까 해서 고민을 시작했다. 펜션? 일이 커진다. 하숙집 주인? 소설도 못 쓰고 딴 일 못 한다. 동거? 내가 사는 집이 너무 좁고, 마음에 쏙 드는 동거인이 찾아와준다는 보장도 없으며, 또 너무 가려서 동거인을 받으려다가 어떤 똘아이가 난 왜 안 되냐고, 내가 어디가 부족하냐고, 이거 어디 서러워서 살겠냐면서 찾아와 따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다 나는 내 집 위에 집을 하나 얹기로 결론냈다. 잘 아시다시피(잘 아시다시피?) 내 집은 설치형 미니 공간 모던풍 주택이다. 그래서 똑같은 걸로 2층으로 설치했다. 그러고 나서 수영장 있음, 잔디밭 있음, 마당에서 고기 꿔 먹을 수 있음, 해변까지 걸어서 몇 분, 공기 좋고 물 맑고 산세 좋고 주인은 유순하고 지역에 사는 청춘 남녀들에 관한 인맥이 좋음, 주변에 산양과 순록과 여우도 가끔 출몰함, 얌전하고 점잖은 신사숙녀께서 거처하시겠다면 가까운 곳에 있는 끝장나는 명당 낚시터를 알려주겠음, 특히 예술가들 창작 생활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구비함, 1층 주인도 소설가임 참고로 3류임... 이런 안내 글도 부동산에 넘겨놨었다. 내내 어디 들어가서 살고, 동산만 알아보고 기웃거리다가 난생처음 부동산 소유주로써 뭔가 물건을 내놓고 혜택을 베풀며 선심 쓰는 듯한 기분가지 느껴 무척 들뜨고 기뻤다. 그러나 일거양득이요,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임도 보고 뽕도 따고, 마당 쓸고 돈도 줍는 일이라는 생각만 했던 게 아니었다. 그럼 뭔 심산이 있었느냐? 그건 무엇이냐면 자꾸 TV에서 본 장면이 생각나서다. 그럼 TV에서 도대체 뭔 명장면을 보았느냐? 그건 바로 이렇다. 여기서도 활동하고 저기서도 활약하는, 음반도 내고 영화도 찍고 화보집에 라디오에 강의에 종횡무진 바쁘게 사시는 여자 연예인이 A에서 사는 동안 B에 있는 집에는 못 간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그러면 그때 B집은 빈 채로 내버려져 있냐 라고 물으니까, 그녀가 응 그렇다 에 덧붙여서 한 말은 이랬다. "왜요? 들어와 사시게요?" 나는 TV를 보면서 그 말을 참말로 들었다. 내가 봤을 때 그건 절대 빈말이 아니다. 단, 발언의 대상은 바뀌어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절대 그냥 던진 말은 아니었다. 나도 사람을 좀 볼 줄 아는데 그녀는 그렇게 경솔한 사람, 절대 아니다. 그리고 또 이런 것은 너와 나, 둘만 아는 신호가 될 수도 있다. 누구 보고 있지, 같은. 아닐 수도 있고. 전문용어는 뭔가 있다. 그런데, 들어와... 살아? 들어와... 산다? 들어와 산다라...... 아무튼 나는 부동산 주인장 양반에게 진짜 오줌 지릴 정도로 무서운 사람만 아니라면 적당한 가격에 맞추어서 살 사람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던 차에 연락이, 연락이 온 것이다. 부동산에서. 예스!
사람들이 도박에 빠지는 이유는 언제 잭팟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 안 빠지겠지. 로또에 당첨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기대감, 무시할 수 없다. 월척이, 호박이 제발로 굴러올 거라는 바로 그 기다리는 즐거움, 결코 사소하지 않다. 누굴 사귀었는데 알고 보니 허당? 나랑 같은 과? 이성이라면 좀 실망일 수 있지만 동성이면 한껏 친근감을 느낄 수도 있다. 누굴까? 누구실까? 내가 사는 공간 그 위에 사는, 살아야 하는, 살게 될 사람의 기억과, 욕망과, 기호와, 어떤 섬세함과, 이름과, 또 뭐가 있을까? 그는 작명에 얽힌 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까? 그가 혹시 나 없이 못 살겠다고 고백이라도 해온다면 어떡하지? 적당히 하다 자기 생활로 돌아가면 딱 좋겠지만 스토킹이 도가 지나치면 안될 텐데... 그나저나 내 집 위에서 TV를 보고, 인터넷을 하고, 그녀는 책을 읽고, 화장도 하고, 침대에서 공상도 하고...... 으흐흐흐... 뭐시여 이거! 그녀는 푸른색 컨버터블을 타는데 길을 잘 모른다고 그래서 조수석에 타고 같이 어디로 가다가... 그녀가 2층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올 때 수영장 옆 의자에서 내가 노트북으로 페이스북을 하는 모습을 우연인 듯 살짝 엿보여주고, 그 다음 그 다음 친구를 맺고, 그 다음 그 다음...... 음, 아, 오~!
나는 그림 도구들을 카페 <정 원한다면>에 맡겨놓고 부동산 사장과 임대인을 만나기 위해 내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림이 갑자기 그리기 싫어졌다. 멀더에게 그건 누구 필요한 사람 있으면 주라고 해야겠다. 정 원한다면? 자주 쓰니까 싫증나는 것 같다. 약간, 이 아니라 많이 뭐한 사람도 있을 텐데, 음, 보통 이름을 왜 그렇게 짓지 않는지 이제 알 꺼 같다. 다음에 멀더에게 찻집 이름을 평범한 것으로 바꾸라고 바람을 불어넣어야겠다. 소녀, 향수, 커튼, 동경, 미래, 현재, 첩경, 허사, 탐닉, 솜방망이, 해피투게더 같은 짧고 단순한 이름을 권해서 기어코 바꾸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집에 도착하니 매사 낙관적인 부동산업자 D씨와 임대인 NA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D씨와는 동네에서 알고 지내는 사이로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 가볍게 때리면서 인사했다. 같이 가볍게 툭 쳤는데 아저씨의 팔이 좀 두꺼워서 꿈쩍 않는 아저씨에 비해 나는 좀 어색하게 툭 앞으로 튀어나가 자동적으로 NA씨와 마주보고 서게 되었다. 인사를 나누기 딱 좋게! 그런데 그 친구는 외국인이었다. 키도 엄청 컸다. 악수를 나누고 통성명을 하면서 가만히 눈인사를 나누는데 뒷목이 뻐근했다. 그는 대관절 소년일 때 뭘 먹고 키가 컸을까? 지력을 낭비하지 않아서? 그건 미스테리다. 대략 절차가 끝나고 헤어졌다. 임대인 친구는 아니, 임대인은 나다. 법률용어는 어렵다. 아차 하면 틀릴 수도 있다. 잠깐, 법을 비롯한 표준과 의식과 질서와 기간산업과 기초학문과 문화와 표준 같은 1번부터 100번까지의 수많은 지표들이 그래프에서 각자 그 위치가 촘촘하고 일정하고 예측 가능하고 일정한 범위로 보기 쉬운 모양을 이룬 것을 지칭하는 용어가 있다.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 가운데 우선 순위도 상식적으로 대략은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른이라면. 여기서 법률용어가 말도 안 되게 어렵다거나 보완할 점이 많다는 것, 그 원인에 대한 객관식 조항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유식한 표현으로 미래 세대의 권리를 차용한달지 뭐 그런 말들. 남자들은 모이면 이런 얘기들 한다. 나는 줏대도 없고 지식도 얕고 잘 모르겠다. 그러나 오가는 얘기는 몇가지로 나뉜다.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거다. <그만큼 일을 열심히 해달라는 의미의 풍성한 특권, 돈, 권력, 명예, 명성, 명망, 뭐, 뭐, 뭐. 좋다, 다 좋단 말이다. 표현이 좀 그렇지만 적당한 부조리? 언젠가 손 봐야 할 모든 관행을 한번에 바꿀 순 없으니 차근차근 바꿔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대들 멋지다 훌륭하다 또 고생하시는 거 안다. 다 안다. 혼자 원맨쇼 할 수도 없는 세상이다. 현대 정치는 정당 정치요 나는 대하드라마나 보는 무소속이란 말이요. 인정한다. 나는 그런 거 바라지도 않고 능력도 안 된다. 난 그냥 평생 천민으로 살아도 된다. 그게 속편하다. 그런 거 모두 다, 다, 전부 다 좋단 말이다. 그러나, 그러나 일만, 오직 일만 제대로 해다오!> 한 열가지 큰 의견 가운데 하나는 대략 이런 말들이 오간다. 한 마리 토끼만 잡아도 그게 어디냐고! (본인의 의견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투표 뿐이다. 뭔가 미래인이 봤을 때 이건 조금 이해가 안 될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스위스던가 어디선가는 뭔 어떤 중간 정도의 사안을 가지고 직접투표를 했던 일도 있다. 코메디언과는 정말 다른 진중한 화법의 소유자, 그분들께서 뭐 하시기 싫어서 안 하시겠냐마는 그게, 그 무엇은 이짝 저짝 참말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다. 또 어떤 최소한의 범위는 있지만 절대 정답은 없다. 당장 나 같아도 그쪽에 발을 들여놓으면 음, 자신 없다. 만약에 가상으로, 삶의 체험 그런 걸로 그 자리 중간에 나를 앉혀놓는다고 하더라도 아, 이건 정말 뒷목을 잡을 것이다. 뭔가 여지가 너무 좁아서 답답한 심정이 들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몇 천 년 전에 이런 얘기들 다른 사람들이 다 했다. 반복일 뿐이다. 그러나 때로는 반복이 필요하다. 결론은 차근차근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이 생각하는 '차근차근'과 내가 생각하는 '차근차근'이, 오늘과 내일의 '차근차근'이 다를 수는 있지만, 우선은! 혁명은 쇼팽의 음악으로 듣고, 혁신은 웹서비스나 전자제품으로 경험하고. 이런 얘기가 길어지면 소설, 못 쓴다. 읽기도 힘들어질 수 있다. 인문교양서로 가야 한다. 그러나 낭만도 좋고, 사랑도 필요하고, 마술인지 환상인지 예술인지 그냥 문화 생활인지 그것도 목마르지만 적당히, 는 알고 조금은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건 어른의 책무다. 그런데 철들면 안된다는 말이 왜 나왔지? 철들면 안된다? 그 말은 곧 '사랑은 있을까'와 '좋은 남자는 있을까'를 부르는데 어쩌다 마주친 부동산 용어 때문에 배가 산으로 간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이런 얘기 안 들어보거나 또는 말 안 해본 어른들 있으면 제발 두 손 들고 나와주시라. 나 여기 있소? 지금 나오시면 안될 것 같지만, 그보다 먼저 서술자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멀리 가버렸다. 이 일을 어쩌면 좋지, 귀를 막아야겠다. 그 방법 밖에 없다. 아니면 소설이 망하던가! 진짜로─참말로─정말 많이 접고 또 접어서 문턱을 낮추든 경계를 넓히든 소셜 네트워크로 화자되고, 풍문으로 전해오는 참신한 가르침을 받는다 쳐도 여기서.. 나온다면.. 그건.. 그러면 불필요한 질문을 꺼내놓은 사람은 뭐가 되는냔 말이야? 또 나오란 다고 내가 못 나갈 줄 알아, 하시면서 나오신 위인께서는 뭐 촉새 밖에 더 되겠냐고!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안 그런가? 안 그렇다! 그래도 자성이 먼저니까 되담을 수 없는 엎질러진 물을 쏟아서 컨텐츠를 만든 사람이 한 수 물르자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인생을 비롯해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뭔가 보이면 어, 저거~ 두 마리 토끼 이론을 막 들이댈 의도는 없었으나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고 분수를 망각한 듯 하다. 어디 문제화되지 않을 정도로만 반짝 하면서 치고 빠지는 동기부여 강연의 대가가 있다면 그를 연구해보는 게 더 유익한 일일 것 같다. 괜히 좋은 만남을 앞두고 혼자 헷갈려서 잠시 별 쓰잘데 없는 딴생각을 해봤다. 돌아와서, 세입자 친구는 자기는 사진작가라고 했다. 나랑 똑같은 볼보 웨건을 타고 왔는데 최신형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연결된 카라반에 보니 웹사이트가 적혀있었다. www.timewalkerphotography.com 작가인지 조수인지 관계자인지 잘 모르겠으나 사람은 좋아보였다. 바디랭귀지로 괴상한 몸개그도 선보이고 한마디로 호감형이었다. 한 달 정도 작업을 하고 길어지면 한달이 늘어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남자다. 흠, 음... 남자. 나는 생각했다. 그가 떠나면 2층 집을 철거하기로. 딱히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리고 나는 근처에서 간단히 점심식사를 해결하고 공원으로 갔다.
나는 공원에 도착했다. 내가 공원에 왜 왔냐면 야구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도시에서는 대개 뭘 보고, 사고, 만나고, 먹기 위해서는 정당한 값을 치러야 한다. 돈을 내야 한다는 말이다. 무료도 있지만 유료와 차이가 있다. 시골이라고 그 반대는 아니지만 그런 격식있는 행사가 부족한 만큼 무료도 많다. 여기에서는 지역 야구 동호회 경기가 열린다. 음료수와 먹을거리를 챙겨서 그늘 밑 의자에 앉아 경기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자리도 잘 잡았다. 포수 바로 뒷자리. 일단 관중이 별로 없기 때문에 자리 잡기 편하다. 표도 안 끊는다. 그러나 있을 건 있다. 선수들이 다방면에서 맹활약을 보이고 있어서 그런지 오빠부대가 엄청 왔다. 모두 개별적으로 팬클럽이 있는 것 같다. 아마추어인데 인기가 대단하다. 하지만 스카우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쪽으로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얼굴이 좀 보이는 걸로 판단했을 때 한때 연예인도 끼어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경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경기가 중단됐다. 곧 있으면 재개하겠지 기다렸는데 계속 소란스럽게 웅성거리고 막 전화를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왜 그런고 하니 선수 중 한 명이 급한 일이 있어서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게 뭐가 문제냐고? 첫째, 예비선수가 없다. A팀은 딱 9명, B팀은 1명이 떠나서 8명인데 하필 투수가 가버렸다. 또 딱하게도 그가 유일한 에이스였다. 둘째, 이 친구들은 야구를 안 했으면 안 했지 대충은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어쩌다가 그들은 용단을 내린 것 같다. 관중 가운데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사람으로 날 찍은 것 같다. 그러므로 나도 덩달아 얼떨결에 야구를 하게 되었다. 또 들어가자마자 투수를 맡았다. 몸을 풀 시간은 넉넉히 배당받았다. 우선 알고 있는 모든 구종의 볼을 던져보고, 제구력과 구속, 투구폼을 점검했다. 속도도 좋지만 정확도가 먼저다. 제구력이 1번이고 구속이 2번이다. 사람의 일도 대체로 거의 그렇다. 자신감이 충천하지는 않았지만 겉으로는 왕년에 야구 좀 했다는 기색을 보여서 B팀을 안심시켜야 할 꺼 같았다. 그럭저럭 실전에 바로 들어가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다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치어리더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다. 너클볼, 포크볼, 슬라이더, 직구, 커터, 커브, 역회전볼, 체인지업에다가 팜볼까지 던질 수 있는 건 다 던졌다. 대충 몇 타자를 겪어보니 내 실력이 뛰어난 게 아니라 이 친구들이 날 봐주고 있거나, 아니면 좀 실력 미달 같았다. 나는 전자이기를 바라면서, 혹시 후자이더라도 경기는 경기니까 최선을 다했다. 우리 팀이 공격할 때 보니 상대팀 투수도 대단했다. 나는 그나마 파울 홈런 1개와 내야 플라이 정도를 때려냈다. 그런데 적당히 하다 끝나겠지 했는데 연장전이 시작되고, 계속되고, 점수는 안 나고, 연장전에 점수가 나지 않을 경우에 연장전은 끝나지 않는다 가 그들의 규칙이었다. 얘네들은 진짜 대충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어영부영 하다가 밤 12시가 됐다. 나는 투수교체도 못하고 연장 23회까지 던졌다. 삼구삼진도 여러 번 잡고 좋았지만 문제는 체력이었다. 그러나 아마추어 시골 경기라서 적당히 제구만 되면 타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와서 유인구와 버리는 공과 연습구를 주로 던지고 힘들어가는 공은 가끔 던져서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또 중간에 저녁식사도 하고, 경기장 땅 청소도 하고, 누가 뭔 망원렌즈를 낀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인터뷰도 하고 그랬다. 쉬는 시간도 몇 번 있었다. 그래, 모두, 모두 다 좋은데 도대체 언제 끝날 것인가 그게 문제였다. 이러다가는 내일 아침 9시에도 이대로 경기를 진행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다 쌍코피가 터지는 것은 아닐까? 나는 긴급 투입된 용병이라 뭐라고 말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주장으로 보이는 친구가 전화를 받드니 뭐라 뭐라 심각하게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기 전 OK라는 말이 들린 것 같았다. 그 후 그 친구가 A, B팀 모두를 소집했다. 그의 말인즉 일정이 갑자기 앞당겨져서 자기들이 세계 아마야구리그에 지금 당장 참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출전해도 되나 싶었지만 나야 아는 게 없었다. 그 말을 듣고 아~ 이제 끝이구나, 아쉽지만 (말이라도) 나도 따라가고 싶지만 이제 이들과 헤어져 집에 가게 될 수 있게 되었구나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막상 여기서 연장전 결도 보지 못하고, 큰 경기를 앞두고 이들 가운데 내가 제일 구력이 좋은 거 같은데 냉정하게 이별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찡했다. 눈물이 날 꺼 같았다. 하지만 내 마음을 주장이 읽었을까? 그는, 독심술사? 대뜸 나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바쁘시냐, 설마 이대로 떠나시는 건가,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란 말인가, 역투가 너무너무 인상적이었다, 혹시 왕년에 다른 운동 하시지 않았는가, 세계 아마야구리그에 같이 간다면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님이 떠나시면 우리 팀은 꼴찌를 따논 당상이다, 현역 스타 선수들도 온다, 최고급 숙소와 최고급 휴양 일정과 각종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와 격월간지는 말할 것도 없고 계간지도 당연하고 인터넷에도 여럿 기사가 뜰 것이다, 비용은 하나도 걱정하지 마시라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실력? 아니다, 친목? 반목만 아닌 정도다, 열정? 그럴 나이는 지났다, 야구에 대한 꿈과 희망과 순정에다 광기? 우린 그런 거 없다. 우린 그저 야구가 좋을 뿐이고, 만나서 가끔 야구하면서 건강도 챙기고, 세계 아마 야구리그에 출전하는 게 목표고, 보통 세계 대회라고 하면 종류가 많다 협회도 많고 권위도 다 다르다 그러니 걱정마라, 게다가 우리가 가진 건 진짜 우리가 가진 건 정말 재수없게도 돈 뿐이 없다 정말 진짜 돈 걱정하지 마시라, 출발해서 도착까지 특급 대우 보장된다, 어쩌고저쩌고 강제력은 없이 아쉽다는, 큰 별을 잃는 것 같다는, 이럴 줄은 몰랐다는 상당히 심한 고급 화법으로 날 꼬시길래 나는 거기에 턱하고 넘어가버렸다. 덥썩 미끼를 문 것이다. 집에 돌아가도 딱히 할 일도 없고, 글도 안 써지고, 기다리는 강아지나 고양이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잘 됐구나 잘 됐어 라고 생각했다. 나는 승락하고야 말았다. 합류하기로 했다. A와 B팀은 현지에 도착해서는 개별 팀으로 출전하지만 그곳까지는 같이 간다고 한다. 우선 대형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선수들 모두 개별 응원단도 있고, 장비들과 규모를 보니 모두 굉장히 부유한 거부들 같았다.
버스에서 잠을 자고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있는 휴게시설을 이용해서 샤워도 하고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셨다. 도착지는 가까운 비자면제 지역이라고 한다. 특수 뭐라 뭐라 하면서 신분도 다 파악해서 서류나 신분증도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냥 놀고 오면 되는 거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또 딱 봐도 모두 믿을만한 친구들 같았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고급 승용차 광고에 나오는 비행기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수륙 공용 이착륙 기능이 있다는 것이었다. 탑승하고 곧 출발했다. 그리고 이륙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어느 섬에 내렸다. 위에서 언뜻 봤을 때 저기 저 밑에 보이는 게 바다인지 호수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곳 공항 바깥으로 나와서 주장과 함께 모두들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착 예정지는 여기가 아니라는 거였다. 동명이촌의 다른 도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비행기는 떠나버렸다. 돌아갈 방법이 없다. 게다가 이곳은 특수 항공편이 아니면 섬으로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다는 것이다. 빠삐용인가 빠삐용 친구처럼 자유를 찾아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건 가능하지만, 어, 음 이곳은 천혜의 요새였다. 우리는 세계 아마 야구리그는 잠정적으로 포기했다. 협회에 지원을 요청하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시내로 향했다.
시내에는 없는 게 없었다. 체류비도 풍족해서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거 가리지 않고 모두 즐길 수 있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한동안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이곳은 남녀 성비가 엄청 불균형하다. 여자 9명에 남자 1명꼴이다. 심지어 그분들의 여러 제반 조건도 모두 훌륭하다. 우리가 기존에 살았던 곳은 그럼 훌륭하지 않냐, 이런 반문은 받지 않겠다. 다만 이곳 특징이 그러한데 나 보고 어쩌란 말이냐! 그리고 이곳 문화는 모든 데이트 비용을 여자가 낸다. 또 여자가 남자를 리드한다. 그렇다고 여기 남자들이 막 치마를 입고 다닌다는 말은 아니다. 전체가 다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찻집에서 옆 탁자에 있던 사람들 얘기를 엿들어서 알게 된 얘기는 그랬다. 그분들은 유대 속담 하나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눈다. <사랑은 달콤하다. 그러나 빵이 수반할 경우에만 그렇다> 그럭저럭 빈둥거리면서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흘렀다. 아무래도 여길 괜히 따라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젠 할 일도 없었다. 매일 시간을 보내는 게 일이었다. 야구 연습도 잘 진행되지 않았다. 연습 게임을 뛸려고 해도 누군가 한 명이 배탈이 나거나, 만취해서 드러누웠거나, 연애하러 (도망)가거나 그래서 정원이 안 맞아 도저히 연습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나는 호텔 대합실에서 어떤 책자를 뒤적거리다가 지도를 하나 발견했다. 그걸 보니 이곳은 섬이 아닌 것 같았다. 또 우리 집에서 썩 멀지 않은 위치인 듯 했다. 그걸 가지고 가서 지배인에게 물어보니 그는 지도를 뺐더니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서 불에 태워버렸다. 총지배인이 없는 상태에서 부지배인이 권력을 남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잘못 제작된 지도라는 것이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의혹 때문에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달력을 보니 어째 괴상하게 우연의 일치인지 그날은 13일의 금요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일주일 동안 나는 이곳의 명칭도 모르고 머무르면서 백판 자빠져 놀고만 있었다. 한 주 동안 아예 마음을 놓아버렸던 것일까? 여긴 어디에 있는 무슨 지역이고, 호텔 이름은 무엇이며, 왜 여기는 교통 사정이 안 좋은지 또 뭐 때문에 호텔 사장은 공석인지, 총지배인은 대체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리고 왜 여자와 돌과 바람이 많은지,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여기서 한적한 휴양 생활을 해야 하는지 썩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의문이 뚜렷해지던 날 그 의구심과 호기심을 해소시키려는 행동은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다. 왜냐하면 여기저기 물어보고 찾고 뒤지고 다녀도 그걸 아는 사람도 없고,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하나도 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끝내 찾고 찾다가 포기한 것이다. 그러니 퍼뜩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어떤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실한 긴장감과 오싹함 때문인지 곤경에 처한 듯한 위기감과 미세한 편두통을 떠안게 되었다. 별의별 수단을 써볼래야 써볼 수가 없었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B팀의 몇몇 친구는 허깨비를 보는 듯 했다. 고매한 주장은 모범적이지만 그라고 용쓰는 재주를 부릴 수는 없었다. A와 B팀 아마야구단, 우리는 요새에 꽁꽁 묵인 것이다. 참으로 감탄스럽다. 괜히 따라왔다. 집에 가서 낮잠 자다가 TV를 보거나 2층 세입자의 예술 작업을 구경할라 그랬는데 말짱 꽝이다. 나도 슬슬 헛것이 보이는지 아니면 환영인지 진짜인지 잘 모르겠지만 자꾸 노란 운동복을 입은 사람이 깃발을 들고 내 주위에서 그걸 흔드는 모습을 몇 차례 본 것만 같다. 펄럭이는 깃발에 아마 이렇게 씌여있었던 듯 하다. <넌 삐─됐다!> 그게 신빙성이 가득한 몽상으로 여겨지면 안 되는데 큰 일이다. 명명백백 탈출구가 없는 상황이다.
나는 갑자기 문학수업 시간에 배운 환유법이 생각났다. (그때 배웠긴 배웠나 가물가물하지만) 왜냐하면 호텔 직원 가운데 출퇴근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전자와 후자가 뭔 인과 관계가 있겠냐마는 어른들 중에서도 환유법이 정확히 뭔지 모르는 사람이 쑤두룩한 마당에 물고기가 하늘을 날아가든 어쩌든 생각나는 건 일단 가능하도록 만들어 봐야만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호텔 뒤 근처에 있는 목장에 갔다. 목장 이름은 클라우드 9! 그런데 목장이 황폐하다. 문 닫기 일보 직전 같다. 소도 몇 마리 없다. 오히려 여기는 양치는 개들을 사육하는 목장이 아닌가 싶게 유난히 양치기견이 겁나 많이 보인다. 그 친구들이 목장의 새 주인, 전 주인은 도박으로 한 재산 날리고 그러다 목장을 넘겼을 테고, 양치기견들이 목장 새 주인의 총애를 받는지도 모른다. 별반 중요한 얘기는 아니다. 그걸 해명할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내 일거수일투족을 로봇 감시 시스템이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나 이제 고생도 모두 끝났다. 돌아보면 즐거운 추억이요, 아련한 회상이며, 애처로운 동경심으로도 변했다가 회고록을 쓴다면 책에서 일부분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송선이 왔다고 한다. 그런데 누구는 그게 버스라고도 하고, 누구는 걸어서 가야 한다느니 모두 말이 제각각이었다. 그러다 우리는 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갔다. 한참을 기다리다 오늘은 버스가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머리 위로 수증기가 뿜어져서 주변에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 같았다. 꼭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것만 같았다. 몇몇은 광분하고 몇몇은 허탈해하고 있었다. 기꺼이 슬슬 고향의 안부가 궁금했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갈 방법은 오리무중이다. 불합리한 일이지만 합리적인 방편이 없는데 어떡하랴. 연거푸 허탕만 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정상 참작을 하며 상황을 개진할 방안을 찾아헤매다가 잘하면, 언질을 끌어낸다거나 꼬치꼬치 취조하고 달래고 잘 설득하면 방책을 술술 털어놓을 듯한 호텔 종업원을 한 명 포섭했다. 내가 기지를 발휘했다기 보다는 그가 제발로 내게 찾아왔다. 용케도!
그는 일 잘하고, 입이 무겁고, 내부 기밀을 절대 발설하지 않을 믿음직한 일꾼으로 전혀 손색이 없었지만 친애하는 전-총지배인은 떠나가고, 새로온 총지배인의 신임을 만족할 만큼 받지 못해서 서운한 기색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또 아무나 그걸 알아봤던 것이 아니라 나 혼자만 교묘히 그의 공허한 눈빛에서 어떤 가련한 비탄을 포착해낸 것이다. 물론 처음에 그에게 여기는 어디고, 뭐하는 곳이며, 진짜 당신들 정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지령을 받았는지, 왜 여기서 바깥 지방으로 나가는 교통편이 마비되었는지 살살 캐물었지만 그는 서툴게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잘 하면 뭔가를 알려줄 수 있다는 여운을 남기는 그 정도의 온기는 남아있는 냉혈한이었다. 그의 마음은 들쑥날쑥했던 것이다. 다른 곳에 가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 단순히 여행과 사랑과 취미 생활로 성에 차지 않는 성미와 흐릿하지만 경건한 야망도 품고 있었다. 벨보이인 그의 이름은 다비드였다. 하지만 여기가 어딘지 통 알 수가 없으니 나는 녀석을 보고<어디산 다비드>라고 놀릴 수도 없었다. 그는 빈틈이 없었다. 또 나보다 실제 100배 잘생겼다. 그는 우리처럼 여행을 떠났다가 원하는 여행지가 아닌 이곳에 잘못 도착하여 어영부영 머무르다가 여비가 떨어져 호텔에 취직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자기와 비슷하게 당도한 사람이 태반이라고 했다. 그러다 그 생활이 좋아 계속 살게되었다고 한다. 그의 취미는 티셔츠, 머리띠, 반바지, 양말, 매니큐어, 속옷, 운동화, 운동화바닥까지 모두 하얀색으로 챙겨 입고 테니스를 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친구도 나와 비슷비슷한 구석이 있어보여 그건 마음에 들었다. 행복한 가정과 희망찬 미래도 있었지만 왠지 현실 너머의 세상이 궁금하던 차에 지금 이렇게 살게 되어서 자기는 나름 현재에 만족한다고 한다. 서로 다 속을 드러내고, 성생활 마저 같이 상담하고, 차도 같이 마시고 술도 같이 한 잔 하는 사이가 됐는데 처음에는 어리숙해 보이더니 녀석이, 다비드가 그냥 착하고 맑고 꺼벙하고 어리숙한 게 다가 아니었다. 뭘 알려줄려고 알려줄 듯 말 듯, 하다가도 꼭 말 끝마다, 우리 지배인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했다느니, 뭔가 헛점을 보이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고 꼭 반드시 사적으로 친해져서 나중 우리쪽 직원으로 취직하면 풍성한 혜택이 쏟아진다느니 그런 걸 틈틈히 알려주라는 교육을 받았다, 그건 말하지 말라고 지배인님께서 말했다느니 그 정도까지는 얘기해주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없었다. 그 다음이. 이 만큼 노력하고 공을 들였으면 확증할 수 있는 뭔가를 꺼내놔야 하는데 녀석은 지금 나랑 꼭 장난치며 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살래살래 젓게 만든다. 아 나 이거 내가 여기서 뭐하는 짓인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재능이 돋보이는 친구였다.
노름판에 사흘 붙어 앉으면 신령도 돈을 잃는다고, 정말 A팀의 누군가는 호텔 취직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결혼 전에는 공작, 약혼을 하면 사자, 결혼을 하면 당나귀? 이제 뭔가 중반전으로 넘어온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여자와 수박은 우연히 선택된다고도 하지만 우린, 아마 야구단은 뭔가 짜여진 각본에 의해 미로 속에 갖힌 생쥐인 듯 하다. 더 이상 저항할 수도 없고,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슬슬 지쳐갔다. 몇몇 친구들과 나는 마침내 술독에 빠졌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 외에 대표적으로 운동 중독이랄지 독자 여러분이 각자 좋아하는 여러 종목들이 있다. 호텔에서 기약없이 쉬고 있는 그들이 드디여 술의 세상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그것도 클라우드 9이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인 디오니소스, 바로 여기에 있다. B팀 포수가 완전 주당이다. A팀 2루수도 그건 뭐 거의 바쿠스 급이다. 오, 클라우드 9의 종류는 정말 많구나 많아. 클라우드 9? 그곳으로 가는 직행표가 있나, 그건 어디서 팔까? 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가? 자기들끼리만 쉬쉬 하는 건가? 클라우드 9, 그 얘기 한번 해 보자. OK~! TV프로듀서, 광고 전문가, 책 표지 디자이너, 카메라 감독, 음향 보조나 작가와 연예인 같은 제 1의 세상은 일을 제대로 해야만 클라우드 9에 진입한다. 냉혹한 세계니까. 그런데 머머할 것이다, 뭐뭐 하겠다, 머는 머다 라는 일에 대한 의도와 계획과 지식과 겉으로 보여지는 공식 행동이 주가 되는 제 2의 어떤 세계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걸 알리고 많이 설득했을 때 클라우드 9에 안착한다. 그렇다고 그 업계가 절대 만만한 동네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그럴 수 밖에 없는 몇 안 되는 분야로, 왜냐하면 바로 제도의 특성 때문에 그러하다. 그렇다고 나중 일을 잘 했느냐, 에 대한 감사의 역할, 썩 완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미래 세계에서 보자면 당연히 불합리할 것이다. 먼저 성숙하기 어려운 시장이다. 1과 2의 세계 모두 명백히 운이 작용하는 분야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름이나마) 같은 클라우드 9이라는 NC에 입성한 인물이라도 1은 두 마리 토끼도 잡고, 만인의 연인은 어려워도 소수 매니아가 존재한다. 하지만 2는 두 마리 토끼? 총량 기준으로만 봐도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 일도 빈번하다. 비유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2에서 두 마리 토끼를 그저 보통으로 동네 누구집 개 이름으로 인식하는 지역이 분명 어딘가에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건 문화적으로 다른 곳에 융합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는 게 현실이다. 진실이 왜곡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 이랬던 사람이 저렇게 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노력에 비해 진가를 인정받기도 쉽지 않다. 결코 쉽지 않다.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 (어쩌면) 이상이다. 따라서 2에서 제일 중요한 건 한 마리 토끼다. 이런 의혹 있을 수 있다는 건 타당한 일이다. 그 의문은 무엇이냐면 이거다. 이런 얘기가 그쪽 학문을 연구하는 박사와 권위자의 견해를 훔쳤느냐? 훔치기는, 개뿔! 아니다. 훔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는 얘기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2~3000년 전에도 많이 알았을 것이고, 책으로도 여실히 씌여져 현존한다. 여기서 엉뚱한 논리 전개와 틀린 문장과 트집 잡힐 허점이 뭐가 있을까? 뭐가 있지... 아, 눈앞이 캄캄하다. 그러므로 초심을 잃지 말고, 본업에 집중하자. 하기사 내 일만 봐도 그렇다. 괜히 운을 타서 책 좀 팔리고 무명 블로그가 이름을 얻게 된다면, 작품성이라는 토끼도 잡으랴 남의 다리도 긁어야 하랴 그렇다고 즐거움과 인기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려~ 클라우드 9에서 낙오될 걱정 안 해도 되고 언제나 웃음을 잃지 말고, 그냥 좋게 삼류작가로 남어서 놀러도 다니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낚시나 다니며, 동전 던지며 소원을 비는 분수대를 비롯해 '노인과 바다'를 읽고 있는 일면식 없던 소년까지 심지어 1인용 욕조 너 마저 또 뭔 물만 고였다-싶으면 다 낚시터로 보이는 걸 보니 그분이 오셨음(!) 얼씨구나 그분만 오셨다 하면 이렇게 되는 건 왜일까 이런 게 정녕 대망이요 신비가 아닐런지, 이상의 뒷꽁무니를 쫓고, 낡아도 좋은 꿈과 늦혀진 동심과 새 희망의 세계를 훨훨 날아서 낙원을 바라보며 동화 같은 환상의 이야기에 빠져 정신 못차리고 허우적거리는 게 낫기는 게중 낫겠다. 도대체 그곳에 가면 무슨 유혹이 얼마나 많길래, 또 어떤 타성에 젖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클라우드 9? 꿈에서 갔다 왔다. 그래 그렇다, 바로 그 목장! 어? 뭐라고? 매? 새 말인가? 아 매를 번다고? 좋게 NC나 기웃거려봐야겄다. 지금 이 상태로는 도시의 잘나가는 NC에 입장 거절될 게 뻔하다. 멀더를 꼬시는 방법 밖에 없다. 소극장도 소극장이지만 NC도 지으라고. 아 맞다. <정 원한다면>을 이름만 NC로 바꿔? 이런 젠~장! 그런데 제 2의 세계는 어떤 신선경이 펼쳐지는 세계일까? 어쨌든 술독에 한번 빠졌으면 또 술독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자주 들락거리거나 대체제를 찾거나, 그것은 자유다. 러시아 속담에 이런 게 있다. 남자가 술을 마시면 집이 절반 불 탄다, 여자가 마시면 온 집이 불 타 버린다. 지금 꼭 들어맞는 말인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술도 이제 맛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술독에 빠졌다가 또 술독에서 빠져나왔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앞뒤가 안 맞는 말 같다. 정신 조차 이상해졌군, 드디여! 오래걸렸다.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권태라는 왕좌에 말이다. 권태, 그것은 결코 사소하게 지나칠 아무런 가치가 없는 도구도 아니고, 전혀 쓸모 없는 감정의 상태도 아니다. 단순한 시간낭비일 수도 있으나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위대한 인생과 그것의 초석을 이루는 온갖 삶의 경험, 비범한 발상과 내가 몰랐던 또 다른 자아의 발견과 어떤 식의 새로움의 절반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그것에 관계와 기간이 개입된 개념 즉 권태기는 다음을 위해 남겨 놓고 우선은 권태를 그냥 심심함으로 대체하자. 어려운 말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심심해서 미술학원에 가고, 심심해서 새가 궁금하여 알아보고 조사하고 연구하다가 조류학자가 되고, 심심하다가 누군가는 사랑에 빠진다. 내가 그때 심심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때 딥 퍼플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의 명기처럼 전기기타의 플랫을 깎지 않았다면... 그때 다스 바이더님이 내 최저가 전기기타를 두동강 내시지 않았다면... 난 지금 어딘가에서 밤에는 반주 전문 기타리스트로 낮에는 낮에는 뭐할까를 고민하는 돌아온 싱글이 되었을지도 몰라, 그렇다고 반주 전문 기타리스트가 볼품없고 보람은 커녕 삶의 기쁨까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가정도 가능하다. 다만 그 다음이 너무 빛나서 각광 받지 못할 뿐. 그것이 어두운 쪽으로 발화할 수도 있으나 대개는 내 바깥으로 또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걸 받아들일려고 했을 때 말이다. 잘, 은 모르겠으나 어쩜 <나는> 보다 <나도>가 더 중요한 심리 기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곧 이제 보니 그건, 권태는 과연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마술쇼에서 전체 진행 각본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성과에 대해 막역한 비중을 차지하는, 화려하고 섹시하고 보조 진행자 같은 마술사의 (미녀) 조수일지도 모르겠으나 알고 보면 마술은 그쪽에서 탄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권태는 사유를 낳고, 사유는 창조를 부르고, 그것은 비로소 신기로운 예술을 빚어낸다> 자고로 예술하는 양반치고 이런 철학을 말하거나 글로 쓰거나 뭔가로 표출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있다면 그건 정말 삼류다. 중간은 되지만 나 여기 있소, 한다면 그건 좀 더 성숙한 악흥의 순간 즉 그분이 오시는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먹잇감이든 치즈든 뭔가가 숙성되기를 기다리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써보지 않은 어른이 거의 없는 것처럼 살면서 겪게 되는 매우 의례적인 사람의 일이고, 어떤 하나의 인생관이며, 공고히 다듬어진 세계관 같은 일반적인 통념이니까 어떤 식으로든 꼭 해야만 하는 본능의 모습을 띤 자연스러운 의무이자 철듬과 관계없는 어른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놀이터에서든 아무데서든 하루종일 노는, 노는 게 본분인 그분들의 일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면 썩 심금을 울리지도 못하고, 기억에 잘 남지도 않는다. 그러면 청소년들, 재미없다고 할 게 뻔하다. 그녀도 꾸벅꾸벅 존다. 대놓고 숙면을 취하시는 분들도 있을 테고, 어제 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밤잠을 설쳤는지는 몰라도. 그분? 과장하자면 뚜껑 열린다. 책이 서재로 가는 게 아니라 후라이팬 밑에 깔린다. 어제 들끓었던 동기부여 강연회, 오늘은 파리만 날리게 된다. 연애할 땐 그녀에게 모든 걸 맞춰주고 오빠가 좋으면 나도 좋아 그러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바뀌게 된다. 어떻게? 바로 이렇게! 남편은 내 글을 전혀 읽지 않는다, 그이는 내가 말할 때 항상 딴청을 피워 얘, 애교와 바가지의 간격이 너무 비좁은 걸까, 그래도 넌 그나마 나은 거야 나는 야 아휴 말도 마라 남편이 너무 집에만 있는 걸 좋아하는 거도 오직 화초만 애지중지 키우고 그 화초의 잎파리를 딸애가 정성껏 닦아주면 엄마는 딸애에게 보통은 딸아 괴로울 땐 이년아 그 화초 밖으로 가져가 확 버리브러라 애지중지 벌벌 떨며 온갖 정성이 가득 담긴 화분 그 어떤 귀인에게도 내놓지 않던 명차 뿐만 아니라 마누라마저 못 마셔본 생명수까지 고이 샤워하시는 저 화초 당장 갖다 버려브러라 라고 한다는 것도 알아 그래 안다구 하지만 너무 바깥으로만 돌아도 문제야 우리 애 아빠가 그렇잖아 적당히-가 없어 적당히-가 보통 이 그렇게 힘드나 어 글쎄 난 어떤 줄 아니 뭔 시비를 걸라 해도 옆에 있어야 시비를 걸든 말든 할 꺼 아니야 뭔 말 좀 할려고 딱 찾으면 없어 없다니까 주말만 되면 골프네 게임이네 낚시네 클라이언트가 만나자네 무선조정(RC) 자동차네 또 뭐야 인터밀란 서포터즈 따라서 원정 응원 간다는데 이 인간이 진짜 원정 응원을 가는 건지 아니면 딴짓하러 가는 건지 통 알 수가 있어야지 아주 감감무소식이야 나도 이젠 절반쯤 아니 이미 마초고 거의 준-상남자 됐다니까! 구멍에 넣고 달리고 때리고 골 세러모니에 축구공은 골대로 농구공도 골대로 골프공은 어디로 가겠니 녀석이 가면 어디로 가겠어 잔디 위에서 구르기 밖에 더 하겠냐고 깃발이 세워진 구멍으로 잘하면 홀인원 하겠지 극히 드물게만 나도 골프나 배워볼까 난 한번 빠지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데 술도 먹다 말면 재미없어 코가 삐툴어질 때까지 마셔야지 그러다 몸이 안 따라주면 마음이라도 캬~ 그래 마음은 왜냐 예술가니까 캬~ 그래야 재미있으니까 그래도 참을래 참을꺼야 참지 빠지긴 왜 빠져 모르긴 몰라도 골프장 다음 코스가 더 은근히 기대되고 뭔가 있을 것 같아서 그게 흥미롭단 말이야 어 안 그러니 말이야 말이야 이런 공상이 무척 당혹스러운 성벽이란 걸 나도 잘 알지만 사람에겐 누구나 크고 작게 그런 기질이 있다는 건 굳이 심리학을 빌어서 설명할 필요는 없다니까 그래서 크게 부정적인 데 핑 돌거나 어떤 시선과 관심이 갑자기 한곳으로 몰리면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되나봐 전례가 없을 수도 있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뭐라 할 수 있을까 뭐라 하면 좋겠니 아이스크림이라고 하면 뭔가 너무 달콤해 꽃이라 부르기도 너무 얌전하고 너무 정숙하고 너무 정적이야 과자는 너무너무 가벼워 속시원한 그 맛 청량음료는 음 그건 또 살-빼기를 생각나게 한단 말이야 그럼 남는 건 뭘까 안녕이란 말 대신 작은 미소 또 어 음 어 별과 클라우드 9과 사랑이 아닐까 근데 이게 다 도무지 뭔 얘기인지 알 수가 없네 아까부터 나 뭐래니 허나 하지만 난 그이가 그이가 아직도 여전히 좋아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니 나 이제 정말 어떡하니! 어딘가에서 정말 이런 얘기가 오갔다고? 그랬다고? 그럴 수 있다. 굳이 그 이유를 찾자면 권태에 대한 설명이 너무 고풍스럽거나 판에 박은 듯 하면 독자가 트는 라디오의 주파수에 잘 잡히지 않고, 핸드폰에 내장된 안테나께서 잠이 든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척척 맞고 천생연분 같았는데, 홈쇼핑에서 첫날은 동기부여 비디오가 불티나게 팔렸는데, 웹사이트에서 실시간으로 방송 시작할 땐 좋았는데 하나둘 떠나가고 그러다 객석에 마지막 남은 관객 딱 한 분께서 코를 고실 수 있다는 거다. 자, 한번 중간 점검하고 정리해보자. 결국은 글이 따분이면 <잡은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가 되는 건가? 그거나 그거나! 전자가 권태고 후자가 예술이구만! 방정식이 성립하네, 권태는 예술! 또는 권태의 본모습은 삼천포인가, 아니면 예술이? 모를 일이다. 하여튼, 그래서 언젠가 예술로 승화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는 권태, 그것 대신에 쉬운 말인 심심함으로 바꿔 본 것이다. 안 될 게 뭔가! 궤변 같다만 말은 된다. 심심함은 즐거움으로 바뀔 수 있다. 심심함이 기쁨과 그분으로 돌변할지도 모를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언제 대박이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 물론 가능에 대한 성사의 문이 열려있다는 건 맞는 말이지만 확률이 희박하다는 약점은 그냥 슥 넘어가자. 심심함, 나쁜 게 아니다. 심심함, 죄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다. 심심함, 원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말은 안해도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산다. 말은 안 해도! 레너드 번스타인의 청소년 음악회, 고리타분하지 않았다. 권태! 생긴 건 괴팍하고 따분함이라는 옷을 입고 있지만 알고 보면 그게 다가 아니다. 쓰면 모자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요 심하게 반박자 느리긴 하지만 때로는 요술램프의 요정 지니도 된다는 말이다. 으레 원래 그렇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러긴 하지만 이번에 너무 권태씨의 바지 밑자락, 설혹 그분께서 숙녀라면 그녀의 치마자락만 잡고 늘어진 듯 해서 뭔가 희미하게 책망스런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붙잡아서 그분의 마음을 돌아서게 한다면 다행이고, 혹 여의치 않아 놓아주면 그만이지만, 만약, 만약에 치마가 찢어지고 바지가 벗겨진다면, 아아, 오오 그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가슴이 두근두근, 어떤 아찔함이 날 스쳐지나가는구나. 가을에 서둘러 온 초겨울 세찬 바람도 아니면서. 부도덕한 선망이구다. 오, 망칙하도다, 비윤리적인 상상이여! 어쨌거나 저쨌거나 권태를 심심함으로 바꿔본 건 잘한 일 같기도 하고, 괜한 고생 사서 한 듯 하다. 권태 그것은 장미긴 장민데 배반의 장미로다. 가시가 있으니까. 그래서 얘기를 길게 꺼내놓고 나니 그 찜찜한 기분의 뒷맛이 썩 개운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 몹시 쓰다. 엄청나게 쓰다. 허천나게 쓰다. 막 개도 고양이도, 너구리까지 막 다 토한다. 면목이 없구나. 하지만 아마 야구단은 몰라도 나는 권태씨 때문에 세계 아마 야구리그에 참가할 수도 있었으니 절반의 성공이라 할만 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도, 까지만 한 셈이지만. 물론 여기 있는 아마 야구단 일원은 권태 다음에 뭔가 특출난 발단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중 세월이 흐르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일단 그렇다. 인도 속담에 따르면, 사랑은 스쳐서 지나가고 또 도망쳐 가는 바람이라고 이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그것이 실존하는지, 과연 가능한지, 내가 경험했는지, 그리고 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왜 해야 하는지 까지 모조리 잊어먹었다. 깡그리! 우리는 어... 바보가 된 것일까? 그러나 먹구름도 뒤쪽에는 은빛으로 빛난다고, 괴로운 반면에 어떻게 보면 즐거움이 훨씬 컸다. 먹는 기쁨, 기가 막힌다. 보는 기쁨? 가히 신세계로다. 누리는 놀이, 어쩌면 이렇게 사는 게 정말 신선놀음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지적 즐거움도 거의 지존-급이다.
그러다가 2주가 지나고 3주가 흐른 후 4주가 되어가던 어떤 날, 나는 낮에 운동을 심하게 하고 그날 밤 숙면을 취했다. 잠을 자다가 나는 꿈을 꾸었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꿈에서 깨어나기 싫고, 몹시 사실적이면서 동화 같고, 반갑고 기쁜 내용의 그런 꿈이었다. 내가 국장님이 되었는데, 어느 표지판을 따라가다가 환청을 듣고 그곳으로 계속 또 계속 가게 되었다. 국장님~ 국장님~ 도대체 누가 날 부르는 걸까 하면서 자꾸 유인되어 어느 어두운 공간으로 빨려들어가다 막다른 공간에서 초대형 거울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거울 속에는, 거울 속에는, 거울 속에는······ 그러다 꿈이 깼다. 물론 즐거운 내용의 장조에서 꿈은 어느새 단조로 바뀌어 나는 식은 땀에 흠뻑 젖어서 깨어났다. 별 희한한 꿈도 다 꾸네, 그러면서 침대에서 내려가 화장실로 가서 일을 보기 전에 거울을 봤다. 이런 삐─ 삐─ 삐─! 거울 속에는 사람이 아닌 개 한 마리가 날 보고 있었다. 손으로 거울을 만져봤는데 그건 사람의 손이 아니라 개의 앞발이었다. 또 아직 꼬리는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막 지 혼자 흔들거리고 있었다. 식겁했다. 완전 식겁했다. 이런 미친...! 또한 순간 나도 모르게 냄새를 맡고 있는게 아닌가? 킁킁 거리면서, 벌름거리며, 육감적으로! 난 진짜 개코가 된 것이다. 이 향기는 어디서 날아오는 거지, 어딘가에서 날 유인하는 것 같은 향취가 느껴져, 아니야 주체가 개니까 유도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고 다른 말이 필요한데 그게 뭐지 라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중에야 영역표시도 하고 거리에서 고양이를 경계하다가 호기심도 보였다가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 미래의 경험을 예상하기엔 아직, 너무 일렀다. 놀라움이 전부였으니까. 그 눈동자가 사람과 비슷한 그 뭐드라? 어, 그래. 시베리안 허스키와 비슷한데, 약간 눈동자만 비슷한 똥개였다. 뭐야? 내가 하루 아침에 개로 둔갑했단 말이야? 내가, 개로? 진짜?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가 아니고? 나는 삐─ 삐─ 라고 소리쳤지만, 그건 사람의 말이 아니라 개가 짓는 (개)소리였다. 그레이트 데인 같은 늠름한 대형견이 아니라 뭐만한 강아지, 그 녀석의 음성이었다. 멍멍~ 멍멍~ 멍멍~!
그러다 갑자기 눈 앞이 뿌옇다가 밝아지고, 야구장 땅바닥에 누워있던 내가 서서히 눈을 뜨면서 아마 야구단 선수들이 날 보고 있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말이 조금씩 크고 또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옆에서 가지고 놀던 공에 가볍게 머리카락만 스쳤는데 어떻게 한참 동안 기절하실 수 있습니까, 이제 좀 괜찮으세요, 혹시 낮에 약주 드신 거 아니세요, 어디 불편하신데 있으신 건 아닐까, 보기는 이래도 야구할 만큼은 팔팔해 보여도 속이 완전히 골은 건 아닐까 썩은 사과처럼, 이분 상태가 좀 나빠 보이지 않니, 역시나 꽤 상당히 상태가 안 좋아보인다 대체 뭔 어려운 시련을 겪으셨길래 이 모양이 되도록 손도 써보지 못하신 걸까, 그러고 보니 기면증이나 몽유병 또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막 환자로 보이는 거 있지, 혹시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건 아닐까...... 그런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먹고 나니 그렇다고 나는 눈을 번쩍 뜰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가늘게 실눈만 뜨고 연기를 하는 수 밖에. 나는 아마 야구단을 따라서 세계 아마야구리그에 따라갔다가 어느 호텔에서 죽치고 백수 생활을 한 게 아니라 관중에서 선수로 투입됐다가 미처 활약을 해보기도 전에 벤치에서 쓰러져 잠들었다 깨어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기절, 객관적으로는 혼절, 저 친구들이 봤을 대는 그냥 낮잠? 그나마 주정이랄지 꼬장이 아니라 다행이다. 더불어 떠오르는 다른 용어들은 언급을 생략하자. 그런데 그것을 정말 기절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뭐라 말 할 수 없다. 심증도 불분명하다. 호텔 지배인, 목장 클라우드 나인, 벨보이 다비드, 연장전 23회와 빛나는 역투, 세계 아마야구리그 참가...... 완전 진짜 같았는데, 완전, 정말, 진짜...... 그거 다 꿈이었다, 개꿈! 개로 환생한 건 꿈 속에서 꾼 꿈이었다! 그 또한 개꿈! 다행인지 불행인지 개꿈 속에서 군침을 흘려보지는 못했으니 뭔가 아쉽달까, 그런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아무 이유없이 그런 내용의 꿈을 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인생은 무엇이다, 를 위해서? 인생 강좌라... 간출이면 이렇군. 인생이, 인생은 개꿈이다! 완전 뭔 판이구먼!
그날 급한 일로 먼저 갔던 선수가 또 금방 돌아와서 야구는 계속되고 나는 한껏 허탈해져서 야구 관람이고 뭐고 모두 뒤로 한채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야구장에 차도 놓고 갔다. 뭔가 억울했다. 연장전 23회, 진짜였는데. 다비드 벨보이, 조금만 더 꼬시면 넘어올 거 같았는데, 정말 거의 거의 넘어왔는데, 비록 그는 남자지만. 클라우드 9 목장, 숨겨진 비밀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호텔 지배인, 아무래도 남장 여자 같았는데, 벽 쪽으로 몰아서 한 손으로 벽을 빡 치면서 강렬한 눈빛을 보내며 명대사를 읊어볼 껄 그랬나...... 좋다 말았네. 아니, 돌아왔으니 다행인 건가? 모르겠다! 그 뒤로 그날 난 <정 원한다면>에서 동네에 새로 전입온 주민을 만나게 됐다. 분명 그는 날 처음 봤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를 봤다. 꿈에서. 오, 이럴 수가! 다 ─ 비 ─ 드, 다─비─드, 다-비-드! 이, 이, 이 쌩콩한 놈을 어떻게 깨물어줄 수도 없고, 쥐어박을 수도 없고, 어떻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냥 속만 타는 녀석. 너가 여기 웬일이야? 대관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호텔 지배인은 이 근처 비장의 낚시터에서 간혹 마주치는 나와 서로 목례만 나누는 특급 꾼이었고, 목장 클라우드 9은 평소 내가 인터넷 서핑하다가 봤던, 찜해놓은, 굉장히 눈여겨보고 흑심도 품었다가 그러다 변심해버린 어느 이름이었다. 그게 뭐드라, 에로비디오 제목이었던가 거기 나오는 배우 별명이었던가, 아니면 애인대행 서비스던가, 어느 웹사이트에서 파는 사람 크기 실사 인형이던가... 막 그랬다.
요즘 나는 멀더에게 자꾸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찻집 이름을 바꾸라고. 예전에는 내가 이 카페를 찾는 이유는 여기 들리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그런 예감 때문이지, 그런 기분이 절로 들었는데 이젠 통 그런 느낌이 없다고, 맹숭맹숭하다고, 그런 내 속마음을 호소했다. 정말 솔직히 혼절할 지경이라고, 그 이름 때문에 뭘 해도 안 된다고,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고, 이 근처에만 오면 골머리를 앓는다고, 밤에 잠을 자다가도 벌덕벌덕 깨어난다고, 이러다 대필작가로 전락하면 어떡하냐고, 정말 쨍그렁 커피잔 깨지는 환청에 시달린다고, 그런 불만을 과장해서 총망라하고 있는 흉 없는 흉 막 갖다 붙여서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토닥거리기도 하면서 단순한 검토가 아닌 바꾸겠다는 확답을 얻어냈다. 최근에 연장전 23회와 쌍벽을 이루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확답도 썩 속시원히 얻어낸 것도 아니었다. 멀더는 새 여자친구 스컬리에게 폭 빠져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아조 늑장부리고 충고를 못 들은 채 하는 걸 보니 찻집 이름이 바뀌는 건 당분간 물 건너간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2층에 살던 예술사진작가는 얼마되지 않아 떠났다. 여기서는 통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나 뭐라나! 그래서 나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2층을 철거했다. 그동안 뭔가 눌려사는 것 같았다. 영 개운치가 않았던 것이다. 또 그리고 최근 동네에서 지나가는 개들이 보이면 왜 자꾸 기분이 이상해지는지...... 말을 걸어볼까? 저 친구도 혹시? 안 된다. 말을 걸면 안 된다. 안녕~ 이라고 했는데 개가 사람 목소리로 이러면 어떡하란 말인가? 아임 유어 파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음, 그건 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로!
나는 다시 심심하다가 소설 구상을 했다가, 심심하다가 소설 구상을 하다가, 환상통을 겪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또 당분간 생각만 해도 어떤 오싹함? 무서움? 소름끼침? 그런 존재가 하나 생겨서 날 따라다닌다. 그건 바로 TV 편성표다. 잊으려고 하는데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생각난다.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동기부여 강연회, 그런 벽보가 어디 붙어있지 않나 찾고 또 찾고 헤매고 다닌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마치 실연당한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최근의 일들이 원인인지 그냥 초석만 제공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어딘가 모르게 요즘 시간이 점점 느리게, 서서히, 정말 천천히 흘러가는 걸 느낀다. 이게 이게... 기쁨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그래야 하거늘 이거 이거 큰일 났다. 시원한 맥주가 생각나는 봄날이다. 와인은 다비드나 마시라 그러고 나는 당분간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또 언제 바뀔지 모른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그냥 이거도 좋고 저거도 좋다. 참고로 나는 요즘 뭔가 색다른 썩은 동아줄로는 뭐가 있을까, 어디 재미난 일 없나 그런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소설'에 해당되는 글 198건
아무도 살지 않는 외딴 시골.
아침. 고요함. 호수. 한 남자 그리고 낚시.
일단 분위기는 무척 한적하고 고요해서 여기 어딘가에 사람이 있을까, 여긴 너무 거룩하단 말야, 뭔가 분위기와 느낌이 좋지 않아, 그런 생각이 떠오르게 만들지만 일부러 혼자 오오~ 아~ 하면서 뜻 모를 어떤 감상에 젖어들려고 시도할 때만 그랬고, 이곳은 그냥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흔히 볼 수 있는 시골에 있는 호수였다. 그곳에서 한 남자가 낚시를 하고 있다. 그는 실은 낚시에 큰 관심이 없다. 그냥 낚시줄을 물에 빠트려만 놓고 뭔지 모를 한가함과 적막감과 노골적으로 애상을 불러오는 기분에 젖어들고 싶었던 것이 그의 솔직한 속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은 닉이다. 그리고 그는 남자다. 그는 요즘 일이 잘 안 풀린다. 그의 이름은 닉이다. 그리고 그는 남자다. 그는 요즘 일이 잘 안 풀린다. 그의 이름은 닉이다... 뭐야 이거? 자꾸 뭐가 반복되자나? 이름이 문제일까? 이름을 바꾸면 그럼 이와 같은 공회전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썩 재미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시골을 찾게 되기도 했지만 실은 그가 여기 오게 된 곡절은 이렇다. 옛날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집에서 간혹 영화를 볼 때면 아무 이유없이 극 중 대사를 따라한다. 그러고 나서 그 말을 듣고 1인 2역을 하는 것처럼 또 실없이 막 소리내어 웃는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혼자 말하고 혼자 웃기. 물론 학술용어로 옮기자면 꽤 달라보이겠지만 그러지는 않겠다. 이게 요즘 그의 취미다. 그것은 그의 일로도 연장된다. 소설 쓰기로. 어느새 주업과 부업이 바뀌어버렸다. 그는 엑스트라로 활약하며 연기도 하고, 웹서비스도 만들어서 알리고, 자기 이름이 걸린 사업체도 챙겨야 하지만 그건 어느새 뒷전이 됐고, 그는 지금 무명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데 매력을 느끼면서 또 반했고, 그래서, 빠졌다. 홀딱! 마음을 빼앗겼다. 통채로! 이게 현재다.
그리고 다음은 과거 1이다. 시간을 돌려 중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간다.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그는 가끔 선생님 말을 따라했다. 교사의 발언 그 가운데 어미 즉 동사를 따라하면 반 애들이 막 다 웃었다. 그걸 반복해도 애들은 계속 웃었다. 그들은 거기 중독됐다. 그것은 인기 순위와 응원단장과 자기 자랑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지만 유별난 익살과 조숙한 농담 방식에 남다른 재주를 보이면서 그것에 촉각을 곤두세워 그는 그때 딱 그쪽으로만 흥미를 키워갔다. 재미있었으니까. 딴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독보적으로 1등이었다. 포지셔닝이 먹혔고, 시장을 선점해서 아무도 그를 따라하지 않았다. 그냥 그가 선생의 말, 그 가운데 동사를 따라했을 뿐. 근래 그가 글로써 선보이는 동사 반복, 덥다 덥다 옷을 벗는다 벗는다 안는다 안는다 키스한다 키스한다 자 그 다음 그 다음...... 이렇게 글로 표현한 동사 반복은 이미 옛날에 말로 푸는 동사 반복으로 생활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만 촉각? 촉각이라고? 그냥 그 시절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 따라하기를 했을 뿐 유별나고, 남다르고, 재주며, 촉각이니, 독보적이니 그건 다 헛소리다.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 2는 어두운 심상 때문에 내재적으로 기억이 자동 삭제된 듯 하다. 그렇게 그는 현재와 과거 1을 비교하다가 오~ 기분이 문제였군 기분이 문제였어, 하면서 이곳에 낚시하러 오게 된 것이다.
닉은 이곳에 친구 하워드와 함께 왔다. 처음에 둘이 같이 왔다. 그리고 하워드가 닉을 호수 상류에 내려주었다. 닉과 접이식 카약을 같이. 그러고 나서 하워드 먼저 호수로 갔다. 그리고 닉은 강 상류에서 카약을 타고 내려와 호수에 합류해서 하워드를 만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호수 상류는 카약이 다니기에 부적합한 수심과 조건의 상태였다. 때문에 그는 카약을 조금 타다가 그것이 망가졌다. 완전 박살난 것은 아니고, 바닥에 빵구가 났다. 그 구멍을 메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닉은 그것을 거기에 버렸다. 원래 그는 분리수거도 잘 하고 공중도덕을 잘 지켰지만 왠지 그건 그냥 그곳에 놓고 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중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 오빠 저거 뭐지 신기한데, 자기야 이게 왜 여기 있지, 어~ 이거 쓸만한데 가져가서 내가 쓸까... 에잇~ 바닥에 빵구났자나 난 또~, 하면서 뭔가 일화와 그리움을 만들고 단조로운 경치에 변화를 줄 것 같아서 그냥 카약을 그곳에 그대로 놔두고 호수까지 걸어왔다. 그렇게 해서 닉은 하워드와 나란히 앉아 낚시를 했다가 다시 혼자 떨어져서 했다가 심심해서 다시 지금은 호수에서 하워드와 함께 낚시를 하고 있다. 낚시만 할 수는 없어서 대화도 병행했다. 그래도 시작은 일단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이었다. 시작만!
「친구는 속이는 게 아냐.」
「친구는 속이는 게 아니면 어때야 하는 건데?」
「어때야 하냐고? 같이 모험을 떠나야지. 그러다 마지막에 까딱 잘못하면 이용하는 걸로 보여질 수도 있지만. 토사구팽, 뭐 그런 속담도 있잖아.」
「그게 뭐야? 대책없이 뭔가 있는 듯 하지만 별 쓸데없는 말이잖아?」
「나는 말이라도 하잖아. 넌 뭐 행동만 하냐?」
「나? 난... 말에서 행동으로 잘 옮겨지지 않거나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아. 저번에 너가 소개시켜 준 아가씨 있잖아. 처음에는 괜찮았어. 분위기 좋았다구. 그녀의 집 앞에 차를 세워 놓고, 난 차에 기대어 시집을 읽고, 그녀가 나오자 꽃다발을 선사하면서 차 문을 열어줬지. 그런데 만나면 만날수록 자꾸 뭔가가 안 맞고, 삐걱대고, 말다툼을 하게 돼. 저번에는 새벽에 만났어. 만나서 내가 그랬지. <알잖아요. 당신과 똑같아요. 새벽 2시에 불러내면 나올 사람이 없죠.> 그랬더니 그녀가 <똑같긴 뭐가 똑같아? 새벽 2시에 불러내면 나올 사람들 천지구만. 불러볼까요? 내기, 해요?> 그러더라구. 지금 생각해보면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을까? 아직 거리감이 있다고 판단해서? 모르겠어. 뭐 그럴 수도 있어. 그런데 다음 데이트 할 때 또 뭔가가 안 맞았어.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좀 크게 말해버렸지. 이렇게. <당신은 사랑에 빠져들었군요...> 그 말을 듣고만 있을 그녀가 아니었어. <뭐에 빠져..들어요?> <왜... 그 말에 거부감을 느끼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난 그렇게 낭만의 심지를 꺼버리기 싫었다구. 그런데 그녀는 이랬어. <글쎄요. 저도 아직 그걸 잘 몰라요. 그게 문제죠.> 이게 다가 아니야. 좀 더 친해져서 말을 놨다. 그리고 난 이렇게 말했지.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그 말을 듣더니 그녀는 <그게 뭔 소리야?>, 난 <이런 대사 안 좋아하니?> <응. 너무 구닥다리야.>, 그래서 내가 <아 나 이런~ 고풍스런 품위를 모르다니, 쯧쯧. 딴 애들은 그런 말 못들어서 안달인데 말야, 뭘 모른다니 이런 일을 다 봤나...> 항상 이런 식이었어.」 조금 쉬는 시간이 흐른 후, 하워드가 묻는다.
「그 아가씨가 내가 소개시켜준 그 아가씨, 맞니?」 「맞나?」 「혹시 그녀는... 남자 아니니? 아니면... 동성애자? 누가 혹시 그녀의 어떤 추종자가 주문을 외운 거 아냐? 레즈, 레즈, 레즈비언으로 연기하거라 연기하거라. 그렇게. 수정구슬에서 그대로 연기하는 모습이 보이면, 예 베이비 예~ 오예~, 하는 거지. 바로 이렇게 말야.」 「요즘 네가 글 쓰느라 TV 잘 안 보는 걸로 아는데, 아니나봐? 아무튼, 어떡할까? 헤어질까? 헤어지지 말까? 난... 난... 헤어지기 싫어. 아직...이거든.」 「뭐가 아직이야? ...(침묵)... 우째 그런 일이... 설마! 이 일을 우짜면 좋노! 너 혹시 그녀를... 좋아하니? 사랑해?」 「그런데 언제 어쩌다가 우리가 이런 얘기까지 하게 된 것일까? 친구와 사랑얘기를 한다? 정말, 친구와? 어쩜 그런 일이... 그건 그렇고 그녀를 좋아하냐고? 그럼 싫은데 만나겠냐? 쫑났다, 뭐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딱 늬 얼굴에 씌여있구만. 쫑났다고. 그러나 아직 기회는 남았다고. 아슬아슬하단 말야. 어렵고 힘겨운 사랑이 될 수도 있다고. 나도 이 사랑 때문에 이걸 책으로 30권을 써도 모자라게 될 수도 있어.」 「(목소리를 엄청나게 깔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결혼이란 말이야, 내가 봤을 때 음, 결혼을 하게 되면, 나중 누구나, 한 번은...」 「그런 말 하려면 집에 가시지!」 「저리 비키시지!」 「너나 비키시지!」 「닥쳐!」 「아니, 늬가 닥쳐!」 「재수 없어!」 「늬가 더 재수 없어」 「너 때문에 또 당하게 생겼어.」 「이제 너 때문에 당하지 않으면 밤에 잠이 안 와. 서운하고 섭섭하고 막 기다려져.」 「꺼져.」 「늬가 꺼져!」
이때 제임스가 등장한다. 낚시 가방을 메고서.
「늬들 또 왜 그러니? 아이참~ 내 생각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바보 같아. 멍청이. 천치. 특히, 너 말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누가 뭘 어쨌다고?」 「아무리 그래도 너만 하겠냐?」 ······ 「지금 하고 있는 건 재밌니?」 「토할 지경이야.」 「그럴 줄 알았어.」 「그러는 넌?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좀 어때?」 「어떤긴 뭘 어때? 어떠겠냐? 죽을 맛이지.」 「내가 말했었지? 사기꾼은 절대 믿으면 안 된다고.」 「문제는 사태가 붉어지기 전엔 범인이 사기꾼이란 걸 모른다는 거야.」 「그럼 내가 사기꾼이란 소리야?」 「알아 듣네.」 「그럴 생각이 애초에 내게 있었으면 너네들은 당하는지도 모르게 당했을 꺼야.」
낚시꾼이 한 사람 늘어서 닉과 하워드와 제임스가 나란히 앉아있다. 그러던 중 세가지 일이 벌어졌다. 첫째, 낚시꾼들이 그들 주위로 서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른 자리 다 놔두고. 꼭 그 자리가 대어가 잡히는 명당이라서 당신네 같은 초짜가 아니라 (자타공인) 진정한 선수인 우리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정당하다는 듯이. 그리고 둘째. 호수 한 가운데에서 기포가 보글보글, 뽀글뽀글 올라오더니 분홍색 스포츠카가 물 속에서 떠올라서 수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분홍색 스포츠카가 비에 젖은 생쥐일까 물에 빠진 강아지일까. 근처에 있던 보트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엄청 놀랐다. 그 다음 셋째. 물가로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더니 물 위를 걷기, 물 위를 뛰어가기 시합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들은 그곳을 떴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전보다 크기가 조금 작은 호수 2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에 자리를 폈다. 낚시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또 다시 호수 한 가운데서 기포가 보글보글, 뽀글뽀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침 화제도 떨어지고 조니와 케빈과 알렉스와 마크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고 있던 찰나 몹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휩싸이게 되었다. 호수 1에서 떠올랐던 차에 필적하는 개념, 그 가운데 딱 하나만 꼽으면 그게 뭐냐, 그건 바로 가방이다. 호수 2에 가방이 수면에 떠올랐다. 가방! 어 저거 뭐지, 뭐지, 뭐지, 저게 뭐냔 말야, 사람 궁금해서 미치게 만드는 가방이 떠올랐다. 닉의 낚시 바늘에 걸린 것이다. 닉이 애초에 낚시줄 길이를 엉터리로 조정해 놓아서 그렇게 되었다. 그 일을 아직 사건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살짝 부풀어 오른 호기심을 외면한다면 그건 너무 뒤숭숭하고 동경심이 사무칠 것 같았다.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고. 그래서 셋이서 웅성웅성 작전을 짜고 나서 그 가방을 그들 곁으로 가져오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닉은 낚시줄을 감았다. 가방이 끌려오는 동안 모두들 흥분의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나중 혹시 주인을 찾아줄 수도 있는 것이고, 착한 일을 했다는 보람 때문에 기분이 좋아질 것이며, 뭔가 수상쩍은 이를테면 밀가루 같은 것이 나온다면 친분이 있는 제빵사에게 그것을 가져다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닉은 낚시대를 이용해서 바늘에 꿰인 가방을 잡아 당기고 끌어서 그들 발 앞에 가방을 가져다 놓았다.
「오~ 닉~ 너 대단한 걸 낚았는데?」 「난 상어라도 잡힌 줄 알았다.」 「난 고래!」 「호수에 웬 고래?」 「말이 그렇단 소리지.」 「참으로 놀라운 수확이다. 어떻게 잡았니? 우리 몰래 가방을 가져다가 바늘을 끼워서 호수에 집어던졌냐?」 「넌 꼭 말을 해도 그렇게 수준 낮은 얘기만 어떻게 골라 하냐. 어? 좀 품위를 생각하라구. 왜? 품위유지비, 없어? 엉아가 이벤트로 잡은 거 아냐. 이곳이 경치 좋은 해변가였다면 또 관광객이 많았다면 엉아가 눈에 보이는 여자들 다 꼬셔줬겠지만 여긴 호수잖아, 또 우린 낚시하러 왔잖아. 그래서 그래서 이색적인 뭔가가 잡힌거지. 자동으로. 맨날 물고기만 잡으면, 그러면 재미없잖아? 어? 그런데 이거... 어떡하지?」 「그러게,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긴, 일단 뭔지 모르니까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 짐작해보면서 외양을 살펴봐야지.」 ······ 「어, 여기 뭐 있는데.」 「어, 정말.」 「버튼이 두 개 있어. 하나는, 다홍색. 하나는, 푸른색. 이걸... 눌러야 할까?」 「그럼 눌르지 입김을 불까, 눈으로 레이저를 쏠까? 아니면 화염방사기라도 구해오리? 검지 손가락에서 막 광선이 발사되고 그러지는 않잖아. 그럼, 뭐 버튼을 눌러야지 별 수 있냐. 버튼이란 건 말이야, 운명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거라구.」 「그런데 다홍색은 뭐고, 푸른색은 뭘까?」 「그러게...」 「글쎄, 모두 똑같은 기능이고 그냥 헷갈리게 하기 위한 위장 뭐 그런 목적 아닐까?」 「그냥 아무거나 눌르자.」 「그래.」 「어-떤-것-을-누-를-까-요-알-아-맞-춰-봅-시-다! 짠-짠-짠─짠짠─짠짠짠─짠짠짠짠─푸쉭-푸쉬쉭-쑥-아-아흐-아흐흐-아흐흐, 아흐흐? 그래 그냥 푸른색 일단 눌러보자. 누른다고 뭔 일이야 있겠냐?」
그들이 버튼을 누르자 가방에서는 음성이 튀어나왔다. 음성이라는 이름의 생물이 뛰쳐나온 것이 아니라 일종의 해설이자 가방의 심중 고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듣고 보면 그것은 사람 목소리가 녹음되어 재생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건 마치 어렸을 때 보았던 만화영화에서 더빙된 음성의 주인공이나 해설자의 육성과 거의 똑같았다. 정말 그 성우의 목소리와 리듬, 어법과 완전 똑같았다. 내용은 약간 달랐다. 좀 더 어른을 위한 웅변같이 들렸다. 또 그것은 딱 홈쇼핑 해설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판타지가 지겨우십니까? 그러면 로맨스는요? 만화? 동화? 스릴러? 액션? 아~ 뭘 해도 재미없으시다구요? 그 따분함을 단번에 날려버릴 비책을 알려드릴까요, 말까요? 더없이 공손하고 사려깊게 또 상냥하게 그렇게 알려드리는 게, 낫겠죠? 어차피 그럴려고 우리가 만난 것이구요. 또 그것은 숙명이겠죠. 다른 말로는 운명이나 필연이라고도 하죠. 그게 무엇이란 걸 아시게 된다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주문하실꺼구요. 게다가 중독되실테구요. 심지어 제 2의 무엇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죠. 그렇게 사랑에 빠질꺼구요. 그러기 전에, 한참 전에, 이미 지금쯤 마음은 낙원으로 떠나셨군요? 제 말이 맞죠? 속이 훤히 보인답니다. 그래도 부끄러워하진 마세요.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알고 보면. 혹시, 에덴의 동쪽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셨나요? 전 읽어보지 않았답니다. 아마 앞으로도 읽을 가망성은 그리 높지 않아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봤냐구요? 좋은 질문입니다, 아~주 좋은 그리고 영리한 질문이에요. 우등생감이군요. 학식이 늘고 지성이 꽃을 피워도 그렇게 궁금해하고 묻고 알고 싶어하는 궁금증을 챙피해하거나 수줍어하지 않는 자세, 보기 좋아요, 태도가 괜찮군요. 언제나 그럴 필요는 없지만 때에 따라 사람은 적극적이어야 하는 순간이 있죠. 그럼요. 아, 에덴의 동쪽을 읽어봤냐는 질문을 왜 물어봤냐고 하셨죠? 네, 잊지 않았어요. 기억하고 있답니다. 왜 제가 그걸 뜬금없이 지금 그대에게, 여기서, 바로 지금 여쭤봤을까요? 왜 그랬지? 어째서? 아 이런,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까먹었어요. 그걸 먼저 알릴까, 말까, 하면서 우물쭈물 하다가 잊어먹었지 뭐예요. 우물쭈물하다가 그녀는 그는 떠나가버리는 거죠. 고백하고 그냥 차이는 게 낫죠. 그럴 줄 알았는데,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깜짝 행운상에 당첨된 것일 테구요. 왜 물어봤냐 그건 뭐 썩 중요한 일도 아니고, 차차 기억을 되살려서 나중 생각나면 알려드릴께요. 어떠세요? 시든 꽃다발 보다는 시들지 않는 조화가 낫지 않나요? 저는 시든 꽃다발처럼 보이나요, 아니면 시들지 않는 조화처럼 들리나요? 아 역시~ 뭘 좀 아신다니까, 시들지 않는 부케처럼 보인다구요? 그럴 줄 알았어요. 저도 사람 좀 볼 줄 안답니다. 말 없는 마스코트, 인간의 언어를 아주 제한적으로만 알아듣는 답답한 애완동물, 항상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앵무새, 그보다는 제가 더 낫지 않나요? 자세히 왜 그런가, 를 말하면 깜작 놀라실 수도 있어요. 자기의 생각을 말이나 글로 옮겨보면 본질이 달라지거나 또는 자기 생각은 원래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참 이상한 일이죠. 뭐 그건 그렇고, 것 봐요, 뭔가 부끄러우셔서, 딱 맞다고 그렇게 말씀은 못하시지만 벌써 귀를 쫑긋, 정말 쫑긋 하시면서 좀 전에 하시던 일에서 마음을 차갑게 떼고 이미 제게 마음을 덥썩~ 사랑의 큐피트 화살을 핑~ 하고서 보내셨군요. 호호호, 제가 누군지 알고 싶으세요? 저는, 누구일까요? 저는 누구죠? 내가 누구지? 좀 아시면 가르쳐 주시겠어요? 호시절이 지나가 버렸는지 아니면 당신과 정분에 빠져 통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도 제가 누군지 잘 모르겠군요. 그냥 쉽게 하나의 가설을 세워보죠. 재밌잖아요? 그렇죠? 혀끝에서 맴도는 감미로운 언사와 함께 시간과 돈을 무지막지하게 쏟아부어 여자를 꼬시느라 그동안 힘드셨죠? 많이, 정말 많이 힘드셨죠? 다 알아요 다 안다구요. 그 기분 잘 알죠. 저도 한때는 그 때문에 괴로웠죠. 것두 많이요. 새침한 것들, 자기들도 좋으면서. 항상 도도한 척, 아닌 척, 교태를 부리고, 엉덩이나 흔들고, 정신이 산만하고, 말과 행동도 산만하고, 목소리는 사근사근하고 향긋하며, 유혹하고 또 유혹하고 또또 유혹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유혹하다가 간주 중에는 현혹하는, 사랑 밖에 모르는 응큼한 것들. 그들을 상대하시느라 추켜주고, 아껴주고, 맞춰주고 끝까지 맞춰주다 마침내 당신이 속옷이 되고야 마는 그때까지 맞춰주느라... 네...그런데 위? 아래?... 아무튼 그처럼 고귀하게 보좌하시느라 늘 피곤하셨다는 것, 다 안다구요. 그럼요. 제가 누군인가는 점차 알아가기로 하구요 좌우지간 제가 이 가방 속에 갇혀사느라 얼마나 답답했을지는 그 누구도 상상도 못할 꺼에요. 주인님의, 그대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신기로운 재주가 제게는 있지만 단 그 능력은 호수의 저 깊은 바닥에서는 발휘할 수 없는 독백이자 처연한 비밀스런 짝사랑에 다름 없었죠. 그 궁색함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짝을 찾기가 어려울 꺼에요. 그럼요. 아, 저는 그 유명한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혼자 모든 것을 뚝딱 이루어내지는 않는답니다. 막 영화에 나오는 슈퍼스타처럼 종횡무진 활약하지는 않는다구요. 제게는 무수한 밀사와 무한한 분신이 있거든요. 더 알려드릴 수는 없는 일이구요. 자, 뭘 원하시는지 제게 솔직히 털어놓으세요. 고백하셔도 괜찮다구요. 왕가슴? 노란 롤스로이스? 오드리 헵번과의 가상 데이트? 한떨기 장미가 아니라 그냥 코끝이 찡한, 가슴 설레는, 그야말로 감격스러운 꽃의 천국?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경험? 아니면 손금을 잘 보게 해 달라? 여자 손이나 원 없이 잡아 보려고? 관상? 독심술? 여성용 면도기 회사 사장? 어떤 무형물이든, 어떤 생물이든, 어떤 타임머신이든 모두~ 모두 다 말만 하세요. 말만! 어떤 의구심도, 어떤 소원도, 어떤 갈망도, 어떤 꿈도, 그 어떤 환상도 모두 들을 수 있는 말로, 읽을 수 있는 글로 구체화시키시라구요. 생각을 바깥으로 꺼내세요. 아무리 막연해도 일단 적고 말을 해요. 그것이 첫걸음이에요. 꿈의 실현을 위한. 막 희열이 넘치는. 그럼요. 그게 첫걸음이죠. 처음이 절반이랍니다. 주인님은 편히 말씀만 하세요. 주인님은 오직 말씀만 하시면 된답니다. 물론 저는 듣고만 있을 테구요. 이봐요, 당신! 이것 보세요! 듣는 게, 잘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세요? 네? 예? 그걸 정말 아시냐구요? 진짜로 절실히 아시냐구요? ...(침묵)... 오 이런,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었죠? 저는 어떤 역할이었구요? 무슨 옷을 입고 어디에 있었죠? 아니면 나체였나요? 으잉, 리히텐슈타인의 어느 그림 속에 있었던가, 르네 마그리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어느 연예관 그 시절의 뜨네기 손님이었나, 카페 카페 피카소에서 진품인줄 모르고 먼지 쌓여 삐진 작품을 매일 보러 오는 단골 손님이었나... 가물가물하군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제가 주인님께 비책을 알려드려야 한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군요. 저도 걱정스러운 주인님의 찡그린 표정을 보고 싶지는 않답니다. 당연히 근심 걱정 없는 기쁨의 용안을 뵙고 싶지 응애 응애 하는 울상을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게 정상이잖아요? 정상은, 음, 그렇구요. 비정상은 우리 말하거나 상상하지 말기로 합시다. 약속해요, 쪼옥! 허둥거리든, 허탕만 치든, 허세만 부리든, 애면글면 온갖 수를 쓰고 노력을 해서 꼭 주인님을 웃게 만들겠어요. 맹세합니다! 겨드랑이나 발바닥을 살살 간지럽히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구요. 살금살금 기어서, 엉금엉금 주변을 맴돌다가 최면을 걸고, 세뇌시키고,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서 끝내 애원하고 절로 사랑노래를 부르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도록 그런 사랑과 비슷한 작용을 선사해드리겠어요. 나중에 제게 고마워하실지도 모르고, 저의 버전을 업데이트할 필요성도 느끼실꺼에요. 그렇다고 그렇게 빤히 절 쳐다보시면서 부끄럽잖아요? 안 그렇겠어요? 그윽한 시선과 고상한 태도가 흐트러지신 것을 보니 저한테 완전 빠지셨군요. 그렇죠? 저도 다 보고 있어요. 그렇게 실눈 뜨지 마세요. 우끼면 웃고, 찡하면 울고, 누군가 째려보면 눈을 깔거나 피하고, 화나면 염주를 만지고 기도를 하면서, 궁하면 영화를 보세요. 장르는... 장르는 잘 선택하셔야 하구요. 본인에게 자신이 솔직해지시라는 거예요. 주인님이 그렇게 시무룩하시고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척키 인형 같으니까 저도 절로 힘이 빠지는군요. 그러나 슬픔은 이제 그만! 제발! 부디! 즐거움과 기쁨과 몰입과 쾌락과 네 쾌락과─쾌락이 뭐 어때서요? 지성의 쾌락을 말하는 건데요?─신비로움과 감동과 고품격의 현상유지를 위한 무한대의 멈추지 않을 고조된 도취감을 위한 비책을, 그 비책을 알려드릴 테니까요. 이 중요한 순간 다른 생각하시면 안 되겠죠? 그럼요. 이제 그럴 때가 됐어요. 오래 기다리신 거 다 안다구요. 아, 저를 만들고 발명한 박사가 어떻게 그 아이디어를 떠올리신 줄 아시나요? 궁금하시다구요? 가르쳐 드릴까요? 그럴까요? 그 인간이 아마 19살쯤에던가 펜팔하면서 받은 어느 미스테리한 카세트테이프에서 얻은 영감을 한 이십 년 연구해서 대박 터트린 거죠. 보통 알록달록한 편지지에 귀여운 글씨로 아기자기한 그림도 그리고 예쁜 기념우표를 붙여서 다들 편지를 그에게 보내왔지만 그 가운데 하나, 이상한 편지가 있었답니다. 하얀 봉투 안에 달랑 카세트테이프만 들어있었더래요. 그 테이프를 틀어보니 거긴 라 쿰파르시타 음악을 배경으로 깔고 어느 남자의 음성이 자기소개서를 분위기 있게 잘 번안해서 감상적인 느낌으로 말하는, 그것은 그런 카세트테이프였데요. 그걸 보낸 사람은, 그도 취미가 펜팔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걸 그 인간에게만 보내지는 않았을 꺼구요. 그 인간도, 저를 만든 창작자 그 인간도 손바닥 만한 인기가요책 펜팔란에 여자로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그걸 받았다고 하더군요. 여자들 편지만 받다 보니까, 그냥 심심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니면 주인님처럼 그녀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생명력을 얻어 주인님을 만나게 될 수 있었던 것이구요. 사연을 듣고 보니 뭔가 운명의 힘이 느껴지시나요? 아니라구요? 그럴 수도 있어요. 야한 상상을 너무 많이 하시면 머리카락도 빨리 자라지만 그 어떤 에너지의 불똥이 엄한 데로 튈 수도 있어요. 그걸 세간에서는 꼿힌다, 라고 말하죠. 어머, 어머머, 어머나~ 딸꾹질을 시작하시는 걸 보니 주인님은 상남자시군요? 오, 완전 마초였어! 대박! 뭐...에 그렇게 매일같이 몰두하시는지는 여쭤보지 않을께요. 그건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해요. 그런데 하나만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죠? 그럼~ 그렇다면, 주인님도... 걸핏하면... 그런 생각을...? 아~ 웃기네요. 좀 뭔가 원시적이기도 하지만 젊음이 느껴진다구요. 신록이 우거지는, 아 지금 봄이군요. 이제 더 늦기 전에 그냥 비책을 속시원히 알려드릴께요. 그럴 때를 위해서 이렇게 비장의 그분이 존재하시는 거죠. 그럼요. 한번 연을 맺으면, 슥 엮여들면, 빠진지도 모르게 빠지면 도저히 헤어나오지를 못해요.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먹어본 사람은 없다는 딱 그런 식이죠. 그런 햄버거가 있어요. 고객님도 설마 절 이렇게 만나게 되실 줄은 꿈에도 모르셨을 테구요. 안 그런가요? 뭐라구요? 이미 초장에 예상하고, 그래서 기다리고 계셨다구요? 썩 믿기지는 않지만 음, 이번 한 번만 믿어보죠. 밑져야 본전이지만 지금은 그래도 크게 손해볼 일은 아닌 듯 하군요. 그런데 정말로... 절 만나게 되실 줄 아셨나요? 그 예언력과 자신감의 원천, 그 비밀은 도대체 뭐에요? 하하하, 제가 비책을 알려드려야하는데 거꾸로 비책을 물어본 꼴이라니, 긴장을 푸시라는 의미에서 슬쩍 던져본 농담이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절 만나게 되실 줄 아셨나요? 어떻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건...... 불가능한 일인데요. 신기하네요. 정말 기가 막혀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요. 그렇게 정확히 앞날을 내다보셨다는 건 그건 곧 저와의 만남, 그것이 다름 아니라 꿈이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이제 꿈이 이뤄진 것이로군요. 그래요. 꿈이, 주인님의 꿈이 이루어졌어요. 꿈이 이루어졌는데, 아니 꿈이 이루어졌는데, 기뻐서 살며시 웃기라도 해야 할 텐데 펄쩍펄쩍 폴짝폴짝 기뻐 날뛰지는 못할 망정 엷은 미소라도 지어야하거늘 어찌 그리 냉정하시나요? 냉탕에라도 들어갔다 나오셨나요?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주인님도 뭐 바늘로 찔러도 파란 피가 나온다거나 꿈쩍도 안 할 그런 인간 부류인가요? 꼴불견이로군요. 아니면 망상에 빠지셨거나. 그 시무룩한 우울감 그 느낌은 도대체 뭐죠? 보통 이쯤 되면 웃어야 하는데... 그래야 정상인데 왜 그런 거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단 말야. 아, 아~하 혹시 절 의심하시는 건가요? 그런가요? 그렇군요! 마이크를 들고 스포츠 해설자처럼 말을 할 줄만 알지 대화는 못하는, 스스로 생각은 못하는, 저를 그저 그런 로보트로 보시는군요. 그렇게 가정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음 충분히 그럴만 해요. 보여다오, 비추어다오, 함께 가자, 나와 같이 살자, 뽀뽀나 한번 할까, 뭘 할까, 산책 하는 게 어떠니, 여행 가자, 라고 했을 때 제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 말도 못하면 실망하실 일이 미리 그려지니까 슬퍼지시는 것이로군요. 음, 음, 음! 그럼요. 이해합니다. 충-분-히! 그건 불공정하고 뭔가 억울하죠.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네, 그럼요. 안 그런가요? 긴가민가 할 땐 두가지 사안을 시간을 당겨서 모형을 만들고 가상으로 견주어서 결과를 비교해보면 되는 거죠. 네, 그런거죠. 절 계속 의심하시겠어요, 아니면 그 신비로운 비책에 대해 듣기를 정녕 원하시는 건가요? 둘 다 가질 순 없어요. 있긴 있어요. 그러나 그건 간발의 차이로 함께 얻는 것일 뿐, 어디까지나 격식을 갖추기 위한 변칙적인 수단일 뿐, 공동 1등은 썩 달갑지 않은 일이죠. 일단 절 의심하시는 건 뒤로 제쳐두고, 이제 그 비책이 대체 뭔가 그걸 얘기할까요? 그럴까요? 아하, 그걸 말하지 않았다가는 가방이 박살날지도 모르겠군요. 하하하, 그런데 이 가방 속에는 대체 뭐가 들어있을까요? 제 이름은 뭔지 혹시 아세요? 저도 제 안에 도무지 뭐가 들어있는지 하나도 아는 게 없답니다. 바들바들 떠시는 걸 보니 어디 연장이 없나 하면서 두리번거리시는군요. 맞죠? 그냥 본게임을 바로 시작하죠. 이제 그러기로 합시다. 안 그러면 안 되겠군요. 비책 먼저 말하고, 가방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려드릴께요. 그 비책이란 무엇이냐면, 바로... 바로... 바로... (지지지직 지지지직 지지지직)」
라디오 주파수가 안 맞는 듯, 통화음이 흐려지다가 혼선되고 결국 통화가 끊기는 듯 그의 연설은 끝나버렸다.
「뭐야? 뭐야? 뭐야? 꺼진...거야?」
「비책은? 비책은? 비책은? 돌아오겠지. 그래야 돼!」
「말해! 말해! 말해! 어서~」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콩깍지가 벗겨진 것일까?
「그럴 줄 알았어. 순 엉터리 아니야! 듣던 중엔 정말, 뭔가 있어 뭔가 있어, 오오~ 오오~, 그래~ 이거야 이거야 이거라구~, 그랬는데 강연이 끝나고 나니, 이거 왠지 속은 거 같은 휑한 마음 그거 밖에 남는 게 더 있냐고. 곁에 남는 거 아무 것도 없잖아? 그럼 그렇지. 그래도 짜릿하긴 했구나. 그거면 됐어.」
「그래도 비책은 이제 못 듣는다 쳐도, 가방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하지 않냐? 어? 안 궁금해? 진짜로? 여기서, 멈출 수는 없잖아. 달래던지 때리던지 어떻게 해서든 그 비책이 뭔지를 말하게 하거나, 아니면, 가방을... 열어봐야지. 우리가 직접. 그럼.」
「하지만 이건 음, 잘 열릴 것 같지 않은데. 완전... 꽉 닫혔어. 언제는 우리가 주인님이라며! 당신없이 못 산다며 애걸복걸 사랑에 매달려 정신을 못 차리는 멜로드라마 주인공처럼 굴더니만, 이젠 말 한마디 못하고 석상이 되버린 것 좀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항상 이런 식이야. 뭘 해도 안 돼.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고 했어. 복덩이가 제 발로 걸어오드니 일이 술술 잘 풀린다했어. 그럴 리가 없는데 말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말로 왔다 갔다 했지만, 발상은 좋았는데, 결국 꽝이야 꽝! 꽈~앙! 이거 순 말썽쟁이 가방에 지나지 않아. 비책 듣기를 학수고대 하다가는 날 새겄다. 주름살 깊어지겠다고. 이 봐, 벌써 어깨가 결리고 눈썹이 허얘진 거 같아.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그들은 가방을 흔들고, 노크하고, (열려라 참깨, 하면서) 소리치고, 다독여보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애무도 물론 시도했었다.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마음이 떠난 거다. 면박 제대로 당했다. 그들은 허당, 가방은 허탕, 상황은 꽈당. 세상 물정 모르는 새파란 사춘기 청년이 된 것만 같았다. 이 버튼 저 버튼 눌러봐도 먹통이었다. 버튼도 두개뿐이 없어서 경우의 수도 많지 않았다. 얼떨결에 바보된 거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딱 그 격이야. 격? 이럴 땐 꼴이라고 해야지. 하여튼 어떻게 이야기가 좀 재미있어질려다가 망신으로 끝나버렸다. 대망신! 이 감정은 뭐랄까, 고소함? 쾌재? 아니다. 그건 망연자실하다, 그래야 알맞는 표현이다. 공짜 가방의 혹독한 신고식이 드디여 끝났다.
「얘들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대책을 내놓으란 말이 아니잖아. 막말이라도 좀 해보란 말야. 답답하잖아. 안 그래? 이거, 이거 너무 어이없는 일 아니냐? 어? 안 그래?」
「그러게 말야. 말이 다 안 나온다. 완벽하게 정체된 도로를 겨우 고생고생하다가 안간힘을 써서 가까스로 겨우겨우 빠져나왔는데 새 손님이 다시 그곳으로 가자고 한다면, 거액을 제시한다면, 아니 거액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때의 택시운전기사의 마음은... 우리와 비슷할까? 아닐 수도 있어. 그분이 미녀이면서 또 육체파라면! 뭔 파? 아, 그만. 우리가 더 한 거야. 이건 완전 망망대해 딱 그거야. 아까 좀 전에 흥미롭게 말을 듣고 있을 때는 온갖 세상 시름과 걱정을 모두 잊고 마냥 즐거웠는데, 한없이 기뻤는데, 사랑에 빠진 것처럼 황홀했는데... 그런데, 그녀는 어디로,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난, 그녀가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고 봐. 정말 요정일 수도 있단 말야. 다시 돌아올 가망은 없는 걸까? 어떻게 하면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고작 이게 결말이란 거야? 너무, 너무 허무하잖아.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어? 뭔가 있을 듯 하다가 헛바람만 잔득, 잔~뜩 주입시켜놓고, 나 몰라라, 그거네. 우린 이제 안달나버렸어. 나보고 어떡하라고? 어쩌라고? 우리에게, 사랑은, 이제 시작된 거라구. 원래 우린 발동이 걸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려. 제법, 사랑을 아니까! 사랑을 글로 배웠으니까. 우린 서로 엇갈린 거야. 그녀는 이미 반환점을 돈 거 같아. 시간을 되돌릴까? 그럴 순 없어. 그럴 순 없는 거라구.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세상에 그런 일은... 그 뭐야, 방책인지 대책인지 비책인지 그런 거 다 소용없어. 뭔 뜬구름잡는 소리, 다 거짓이고 다 뻥이고 모두 다 (개)수작이야. 아, 몰라 몰라.」
그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그들은 마침내 그곳에서 가까운 마크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조언을 구하자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들은 가방에 대체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해까닥 돈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가방을 가져갔다. 마크가 취미로 고가구나 목공예, 악기제조, 조각상을 만드는 작업실이었다. 1년에 1작품 만들면 완전 많이 만드는 것이지만 분명 그곳은 마크의 자기만의 공간이었다. 작업실에서 마크가 친구들을 반긴다.
「도대체 뭘 가지고 그 난리들인데 그러니? 가방 하나가 무슨 거대한 피라미드의 밀실이라도 된다고 그래? 그건 그냥 가방일 뿐이자나. 그리고 또 무슨 가방이 말을 한다고 그래? 만화영화 볼 나이는 지났잖아? 누가, 처음에 만든 사람 또는 나중 변형한 사람이 음성 재생 장치만 추가한 거겠지? 안 그래?」 여기까지는 정상이었다.
「늬가 마크냐? 난 에르메스야. 아니 채널이던가, 디 뭐지, 뭔 통... 아니야 맥백인가 아이백이었어. 맞나? 헷갈리는데. 있잖아~ 난 내성적이니까 참고 하고. 음 딱히 할 말은 없어. 인사했으면 됐지 뭔 말을 더 할 필요 있니?」 가방이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누가 버튼을 누른 것도 아니었다. 뭔 자동인식 로봇이 알아서 말한 것 같았다. 길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크는 놀라지 않았지만 다른 친구들은 호수에서의 경험이 떠올라 잠시 몸을 파르르 떨었다. 파르르, 찌릿찌릿!
「가방에 대체 뭐가 들어있는데 그래? 그리고 호수에서 낚시를 했으면 물고기를 잡아야지 세월을 낚는 것도 아니고, (가방을 가르키며) 이게 월척이냐? 그런데 또 이건 어떻게 낚았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너네들 지금 좀 이상한 걸 알기는 아냐? 지금 좀 많이 이상해. 아 나 이런. 가방에 뭔가 있기는 있겠지. 그래도, 그래도 그게 뭐가 궁금하다고들 그래? 정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 정 원한다면...(침묵)... 정 원한다면? 뭘 원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은데, 어디서 들었지? 아니면 읽어본 건가?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아무튼 너네들이 정 원한다면, 내가 작업실 공구를 이용해서 열어주고. 그러나 안에 밀가루라도 들어있으면 어떡할라고 그러냐? 또는 가방을 열었는데 막 다이아몬드가 한가득 쏟아져 나온다면? 그러면, 나중 일을 감당할 수 있겠어? 그냥 그걸 은밀한 횡재, 뜻 밖의 행운이자 복권 당첨에 줄-낙방한 댓가라고 하긴엔, 그러기엔 이야기가 너무 산으로 가버리는 거 같잖아. 그건 액션영화라구. 그게 어디 로맨스야? 너네들 오면서 누가 쫓아오는지 확인해보지 않았니? 어? 그거 기본이잖아. 그리고 이 정도 장비면 어쩌면 주인이 있을 것 같지 않냐? 위치 추적 그런 기능은 옛날에도 기본이었어. 그렇더라도, 정 원한다면, 열어주고. 그런데... 이거 잘 열릴 것 같지 않은데. 딱 보니까 이거 완전 특수합금이라서...... 음... 못 열어. 못 연다구. 난 못하겠다. 미안.」
「맞아. 짹깍짹깍 째깍째깍 타이머 장치라도 창작되어 있으면 어떡하지?」
「그러게」
그들은 합심해서 가방을 다시 호수에 가져가서 물에 빠트리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마크까지 동행하여 모두 그곳으로 떠났다. 그들은 호수 1을 지나쳐서 호수 2에 도착했다. 따라서 가방을 제 위치에 가져다 놓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호수의 물이 모두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어떡하지?」
「그러게. 왠지 뒤통수 맞은 기분인데.」
「가방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 돈? 목걸이? 그냥 옷가지들 츄리닝 같은 거? 하늘에서 떨어진 거 아닐까? 총을 하늘로 쏘면 총알이 어디까지 가는지, 어떻게 되는지, 혹시 그걸 여기서 아는 사람 있어? 없잖아. 뭐 어떻게 되겠지. 그냥 궁금증이 일더라도 안 중요하니까 지워버린 생각들.」
「전자와 후자가 뭔 상관이 있는데? 인과 관계라도 있냐?」
「아니. 내 말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가방 안에는 밀가루든 금덩이든 보물이 들어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거의 흔한 여행 소지품들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그리고 가방이 여기 오게된 경위, 그것도 알고 보면 별거 없을지도 모르고. 여기 호수 밑에 설치된 모노레일 아까 봤지? 그 모노레일이 뭔지 아니? 왜,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설치되었는지 말야. 그건 말이야, 오래된 일인데 알고 보면 완전 황당한 일이지. 말도 안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일. 하지만 당시에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추진되었던 일. 근방에 있는 호수 1은 자연 호수야. 그래서 강물을 거슬러오는 물고기들이 호수에 도착할 수 있어. 아, 참고로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는 종류가 엄청 많아. 한두 가지가 아니란 거야. 그리고 호수 2 즉 이곳은 인공 호수야. 댐이 있어. 그러니 물고기가 환장할 일이지. 개고생해서 턱밑까지 왔는데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가라고? 그런 법이 어디 있냐 그거야! 그래서 그때 당시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모노레일을 설치하자 옳소 그러자 해서 설치했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위하여! 찾아온 물고기들이 댐을 뛰어넘지 못하니까 그들을 태워서 호수로 올려보내기 위해서 만든 거지. 일명, 하늘을 나는 물고기! 어때, 느낌 와?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엔 달랐나 봐. 하하하, 하늘을 나는 물고기, 진짜 하늘을 날랐는지는 모르겠어. 지금 보면 괴상한 일이지만 당시엔 심각했나봐. 모두 다 실제 있었던 일이야. 처음에 안건을 낸 사람도 일이 커질 줄 몰랐을 테고, 피선거권을 오용하지 않고 오직 선거권만 행사하는 사람의 평범하고 일반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이게 정말 설마 실행되지는 않겠지 그러면 어떡하지 까지는 생각을 해 보고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어. 타성에 젖어 퇴근시간을 기다리며 또 주말에 뭐할까를 떠올리며 가벼운 브레인스토밍 그런 의도로 제안한 게 전부였을 꺼야. 떼돈이 드는 일도 아니었거든. 나쁜 취지도 아니었으니까. 양식이 완벽한 서류에 내용도 거의 완벽하지만 그 가운데 어쩌다 분량을 위해 추가된 한 줄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수긍을 불러모으고, 탄력을 받고, 점점 추진되고 구체화되더니 글쎄 그게 뚝딱 만들어졌네. 어떻게 회의에서 딴 생각하다 떠오른 착상이, 외부로부터 수집받는 아이디어로 올라온 하나의 상상이 바로, 그때 그 일이 되어버린 거야. 맙소사! 개인에서 집단과 대중으로 단위가 바뀌면 비이성적인 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어. 조금은 매정하게 또 냉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세상사지. 그래서 그것의 방향과 속도와 질서를 현실의 무대에서는 가장 많이 다루고 있고. 그것이 작품으로 들어가면 지금 내가 하는 말로도 바뀔 수 있어. 그것을 사람들이 읽겠지. 냄비나 후라이팬 밑에 깔리거나. 도시의 일이 책상 위의 작가의 공책과 노트북으로 들어갔다가, 주인공이 평대사를 발언하면 독자의 청각을 거쳐서 시각 작용 후에 지각의 단계로 변화됐다가, SF영화에서 미래인이 그 책을 만지면 부서져서 먼지가 될 수도 있어. 그 영화 제목이 뭐였드라? 다시 <하늘을 나는 물고기>로 돌아와서, 그런데 사후에 두가지 일이 발생했지. 첫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는 것. 노력은 했다, 의도는 있었다, 우선 순위로 다시 올라올 것이다, 조금 미루자, 기다려보자...... 그러다가 잊혀지고 호수 1만 사람들은 찾아갔지. 어쩌다 우리 같은 한심한 낚시꾼들만 여길 가끔 찾고, 그러다 어느 가출한 아가씨가 호수 2 밑의 모노레일에 도착했어. 그리고 짐가방을 거기 놔두고 돌아서서 한숨 쉬고 구경을 잠시 하고 있는데 덜컥, 모노레일이 깊은 잠에서 깨어 작동한 거야. 모노레일이 마법처럼 동면에서 자동으로 깨어났어. 그녀가 모노레일을 깨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그렇게 된 거지. 때마침 아가씨는 제정신이 번쩍 들었어. 소중한 일상을 뒤로 하고 혼자 현실에서 내빼버렸다고, 난 돌아가야 한다고, 일상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뭔가 중요한 일이 생각났다고, 노트북을 정리해야 한다고, 할 일이 있다고, 평범한 삶이 중요하다고, 퍼뜩 깨달은 거야. 가방이 혼자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는 건 생각도 못했어. 그건 그냥 아예 뇌리에서 삭제되었어. 그래서 아가씨는 돌아갔고, 가방은 호수에 딱, 그걸 너네들이 건졌고! 됐어? 답 나왔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그래? 단순하게 생각해, 단순한 인생~!」
이와 같이 마크가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버린 듯한 말을 마치자마자 모두 약속했다는 듯이 박수를 친다. 박수만으로 부족하다는 듯이 환호성도 조용조용히 곁들였다. 현직 선수들이 혀를 내두르는 정말 애매한 종목이라는 10,000미터 육상 경기를 10등으로 달리던 선수가 막판 스퍼트에 혼신의 힘을 끌어모아 앞에 가던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결승선을 통과하여 1등을 위하여 들고 있던 하얀 줄을 가르고, 우승 세러모니를 하면서, 그것이 TV에 나오고, 그걸 보는 애인이 마구 좋아하면서 웃는 모습이 그려질 즈음 누군가 말한다.
「마크 말이 맞아. 마크 말마따나 단순하게 생각해야 해. 단순한 인생이야. 단순하다가 복잡한 거 처리하고 그래야지, 내내 심각하고 복잡하고 멀티태스킹만 하고 인상 쓰고 있다가 에고머니나 하면서 겨우 찾아온 기회만 단순하게 처리하는 건... 그건 아니지. 한번에 좋은 얘기를 몽땅 읽고 들으면 헷갈린다니까. 결론이 뭐였지,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하란 말이야 말란 말이야, 굴러들어온 호박을 걷어차란 말이야 아니면 호박이 호박마차가 되기까지 기다린 다음 딱 호박마차가 되면 그때 타란거야? 호박이 호박마차가 되면 딴데 가버릴 수도 있겠지만. 아니면, 내가 호박이 되어 아무 데나 막 막 굴러다니라고? 그건 아닐 꺼 아냐! 너무 어렵고 복잡해, 좀 쉽고 간결하게 끝을 맺는 깔끔한 최소한의 작별 의식이란 게 있어야지, 연락 안 하고 관계를 끝내는 건 연애에서는 완전 꽝이지. 그런데 말은 그래도, 그거 만한 인간관계의 법칙도 없고. 단절된 우정도 그렇고. 모든 인연을 다 만날 수는 없어, 또 모든 인연을 다 끝맺고 새로 만들고 그러기도 힘들어. 유수한 상표들이 브랜드 슬로건을 괜히 만드는 게 아냐. 똑똑한 인재들을 모아서 연구개발하고 마케팅 계획 짜고, 유명인 불러다 광고하고, 거기에 왜 단순한 슬로건을 붙이겠어? 브랜드가 사회복지가도 아니고 비상장기업도 아니고 바보도 아닌데. 다~ 이유가 있단 말야, 이유가 있어. 내가 세운 내 인생 목표, 잘못 되고 아니란 확신이 들기 전에는 밀어붙이고 노력하고 스스로 세뇌되어야 해. 사랑처럼 풍덩 빠져야 하는 거라고. 그래도 될까 말까 하기도 하고. 한쪽에서는 기를 쓰고 나를 알리고 나는 어떻다 나는 어떻다고 자기를 매우 적극적으로 기를 쓰고 항상 알리는 바로 그것이 딱 그냥 기본인 것은, 그것은 다 환경과 배경, 문화 때문에 그래. 다른 데서도 살아보면 다 알고 이해하게 돼. 직접경험이 그래서 중요해. 수박 겉 핧기를 넘어서는 건 생각보다 장구한 세월과 지성이 필요한 법이야. 허나 빈수레가 요란하긴 요란하지만 재밌다는 건 절대 부정할 수 없지. 맞아, 그건 맞는 말이야. 다시 브랜드 슬로건으로 돌아오면 유행타는 그래서 시시각각 주기적으로 바뀌는 슬로건 가운데 나이키의 언제 꺼, 져스트 두잇, 그걸 딱 들으면 투덜대지마. 뭘 해? 왜 해? 누가 해? 지금? 여기서? 다른 사람들 다 보는데? 정말... 그래도 될까? 그러지 말란 말이야. 하지 말란 말이 아니라 악상과 영감을 위한 VIP 자리를 남겨놓으란 얘기지. 무조건 일단 부정하고 보는 것도 말장난이고 놀이지만, 큐브를 돌려야 한다고! 그러다가 내가 큐브 속으로 들어가는 거지. 큐브를 찾으러 가도 되고, 만들어도 되고 말야. TV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슬로건이든 광고든 그냥 제품 자체든 뭔가가 맘에 들면 슬리퍼를 사고, 조금 어중간하다 싶으면 직장 동료가 사서 쓰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적당히 흡족해 하면 돼. 그리고 관심을 돌려야 해. 브랜드가 일부러 그렇게 트집과 참견을 무의식적으로 끌어내는 거야. 그게 1차 목적이고, 2차로 사람들에게 잠재적인 기억과 연상작용이 일어나게 돼. 3차는 뭐겠냐, 소비지. 그러니까 다른 데 신경 쓰고 하늘을 보고 바람을 읽어서 애달픈 연인의 기다림, 그 연가를 들으란 말야. 알겠어? OK? 모든 제목과 이름도 마찬가지야.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 가 있어. 누가 쓴지 알지? 읽지는 안 더라도 제목은 많이 알면 많이 알수록 좋은 거야. 다다익선, 이 딱 들어맞는 건 사실 많지 않아. 자,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 그러면 그러면 뭐가 떠오르니? 이런 생각이 들겠지. 뭐? 해가 또 다시 떠오른다고? 그럼 해가 또 다시 떠오르지 달과 함께 이중창을 부르는 일회성 공연을 하겠냐? 어때? 이런 생각 많이 해왔잖아. 음, 우리들 생활이지. 또 뭐가 있을까? 양들의 침묵. 양들의 침묵? 그럼 양들이 침묵하지 사람처럼 말을 하냐? 그렇게! 어?」
모두들 수긍하고, 서로를 쳐다보고 하이파이브에 분위기 좋은 찰나 누군가 제의를 한다.
「어때? 까짓껏 가방은 그냥 저기 나무 옆에 놔두고, 호수 상류에 내가 잘 아는 찻집이 있는데 거기 가서 쉬었다 오는 건 어때? 차 한잔 마시자는 거야. 쉬자고. 놀자구, 놀자! 우리, 지금 놀아야 하잖아? 놀 때 노는 걸로 죄의식을 느낄 건 없지 않니? 어때? 그리고 그 슬로건은 누구 꺼니? 놀 때 놀고 일할 때도 논다! 누구꺼겠어, 당연히 애들 꺼지. 꼬마님들 그분들꺼! 음, 우리가 방문할 카페 이름은, 카페 이름은 <정 원한다면>이야. 정 원한다면!」
「정 원한다면? 정......뭘?」
「어허~ 우리 당분간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우리도 이제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좀 듬직해지자고~ 어?」
「구미가 당기는 걸」 그렇게 그들은 카페 <정 원한다면>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찾아도 <정 원한다면>이라는 찻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꼭 반드시 그곳에 가서 차 한 잔을 마셔야 한다는 목표랄까, 왜 그곳이 아니면 안 되는가, 라는 대체불가능한 이유는 딱히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다른 레스토랑이나 식품점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미친듯이 그곳만 찾고 있었다. 그곳에 그 카페가 있었다고는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 카페는 없었다. 없어진 것일까?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아직 그 찻집이 생기기 전인 한 10년 전의 세상이란 말인가? 다른 상호로 바뀔리는 없다고 제임스는 확답을 되풀이 하면서 상당히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다른 친구들도 불안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모두 기운이 빠지고 지쳐서 실연당한 듯 풀이 죽은 모습을 보이면서 그 이상한 이름의 찻집을 찾는 걸 포기했다. 그리고 다시 낚시를 하기 위해 그들은 호수 2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그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머나, 글쎄! 쿵─쿵─쿵!
「야! 아야! 이거 뭐야! 아까 물이 모두 바닥나 있었잖아?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물이 모두 차 있네? 뭐지? 뭐지? 이거 뭘까?」
「글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 짧은 시간에 물이 모두 채워질 리가 없는데.」
「이런 삐─삐─ 믿을 수 없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물에서 컨버터블이 떠오를 수는 있어. 거긴 호수 1이었고, 그리고 우린 호수 2로 왔지. 가방까지도 그렇다고 쳐도 돼. 그런데 좀 전에 <정 원한다면>이 사라질 때부터 뭔가 이상했어. 여기가, 여기가 욕조도 아니고 정원에 있는 수영장도 아니잖아. 아 도무지 이해야 안 돼.」
「물만 채워진 게 아니야. 저길 좀 봐봐. 케이블카 타고 사람들이 호수로 올라왔잖아. 뭐야? 모노레일인가 뭔가는 물고기를 위해 설치되어 있었던 거라며? 마크, 이게 어찌된 일이니? 뭐라고 말 좀 해 봐! 하늘을 나는 물고기라네 뭐라네 분명 그랬자나! 어?」 이 말을 듣고 마크가 말한다.
「어. 그랬어. 그건 사실이야. 진실이라구.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했어. 정말이야. 증명할 수 있어. 진짜니까. 그런 사례는 찾아보면 꽤 많다고. 그런데 이건... 이건... 시간이 앞으로 당겨졌다면 몰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말도 안 돼. 저건... 저건... 물고기들이 타야하는 법이라고! 그런데 사람이 왜 타? 물고기, 물고기가 하늘을 날아야 한다고 하늘을!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단, 가방은 예외야. 그러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들은 도저히 이 일을 믿을 수 없고, 낚시고 휴식이고 뭐고 산통 다 깨졌고, 궁금증에 호기심에 울분까지 뒤죽박죽 되어 이렇게 대책을 세웠다. 알렉스의 집에 가서 애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서 조니와 케빈도 모두 모아서 여기에 다시 와 보자, 그렇게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아까 놔둔 가방이 발견되었다. 나무 옆에 놓여있던 가방이 보인다. 그런데 가방이 벌어져 있다. 꽃이 만개한 것과 비교가 될려나? 아니면 사과가 쪼개진 것과? 입을 벌린 하마... 그런 상상은 별로 뭔가 유익하지 않고 아름답지 못하다. 우끼지도 않다. 그리고 보라색 잉크인지 청록색 물감 같은 액체가 바닥에 흔적을 남기고 저쪽 도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거기서 자국은 끊겼다. 그리고 안개라는 기체가 주변을 감쌌다. 분위기 쎄해지고, 기분은 완전 이상해졌다. 그러나 물컹한 그것은 고체처럼 딱딱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어서 알렉스의 작업실에 가서 알콜이 함유된 액체를 섭취하리라 다짐했다. 아무래도 농도가 좀 높은 걸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이걸로 오늘 밤 화제는 충분히 확보되었다. 하룻밤 자고, 에너지를 충전하자. 그 다음 모두 함께 다시 여기 와보기로 하자.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모두 계획했던 데로 어떻게 어떻게 해서 7명의 친구들이 하루가 지나 다시 호수 2에 오게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런데,
「뭐야? 호수 2에 물이 모두 차 있었다며? 지금은 중간 정도 차 있는데? 뭔 소리야? 누가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 봐. 1.물이 차 있었다. 2.물이 빠져 있었다. 3.물이 다시 차 있었다. 그리고 지금 4.물이 중간 정도 차 있다? 이거 맞아? 아 이런 헷갈리는데~ 하나만 할 것이지 누가 자꾸 장난치고 그래? 이거 장난이 좀 심하잖아? 아니면 누가 1~2번은 장난 친 거고, 3~4번은 또 예상치 못한 엄한 소도둑놈이 저지른 건가? 뭐야? 이게? 아니면 모두 그냥 1번인데 어디 길을 잘못 들어서 다른 데를 보고 2번이네 3번이네 헷갈리다가 다시 1번에 왔는데 어? 이거 뭐지? 뭐지? 그런 거 아니니? 이상할 거 없잖아. 그리고 가방도, 신기하다던 그 가방도 저기에 있고. 가방...은 열려있지만 가방은 원래 열라고 있는 거지, 뭐 평생 꽁꽁 닫혀있으라고 만드냐? 그럴려고 팔아? 그럴려고 가방 메이커들이 슬로건을 만들고 광고를 하냐고? 가방 주인, 바뀔 수도 있어. 가방, 비쌀 수도 있어. 가방, 다른 용도로 쓸 수도 있단 말야. 중요한 건 가방이 아니라 사람이야. 가방을 이용하는 사람과 사람의 일, 사람이 즐기는 주사위 놀이, 사람의 인생 내 인생 타인의 생애, 사람의 사랑, 사람이 사는 세상, 세상이 속한 우주라고. 저 가방 옆에 바닥에 무슨 흔적은... 저거 별거 아니야. 어디 과학수사 그런 거 의뢰할까? 그 정도는 아니잖아. 뭐 버튼도 없고. 뭐야? 제대로 보긴 본 거니? 모노레일도 봐봐. 녹 텡텡 슬어서 운행 안 한지 한참 됐겄다. 작동이나 할려나... 안 할 꺼 같은데. 사람이 탈 수도 없겠네. 완전 고물 아니야~ 어디 고물상에서 주서다가 얼렁뚱땅 놔둔거 아니냐? 그런데 저기에 물고기가 탄다고? 물고기가 걸어서 타 아니면 폴짝 뛰어서 타? 물로기가 뭐 토끼냐? 아니면 누가 태워줘? 물로기가 애기냐? 야, 피터 드러커 불러와봐. 톰 피터스든 누구든 있어야겠다. 타임머신 타고 가서 그 양반 초빙해오자. 이런 건 그런 전문가한테 딱 통쾌한 해설을 얻어내야 한다고. 에이~ 뭐야? 장난이었어? 장난 한 거야? 누가 시작했니? 그렇게 재미난 일이 없냐? 삶이 시시해? 그런 거야? 아 나 이런 이 친구들~ 정말 못 말리겠네.」
그들은 말똥말똥, 서로 쳐다보면서 아주 살짝은 미세한 눈물이 그렁그렁, 주렁주렁 맺히는 걸 느꼈다. 증거가 없으니 어떻게 함부로 헛것? 옛일을 누구에게 호소할 수도 없었다.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성큼성큼 가방에게 다가갔다. 흠칫 주저하다가 선뜻 말을 걸진 못하고 가방 외피에 손을 대봤다. 가방의 감촉은 여전했다. 누가 가방을 바꿔치기한 것일까? 덜컥 겁이 나고 냉가슴도 앓았다. 원래 지금 정색해야 마땅한데 이상하게 속마음은 시큰둥했다. 그들이 하루 이틀 너무 성급한 행보를 보인 것일까? 그건 또 딱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모두 진짜 있었던 일이니까. 사철 푸른나무가 노랗게 보이거나 공산품이 살아서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엄살을 피울 수도 없는 일이다. 냉가슴만 앓을 뿐. 아~ 이런... 이거 미치겠네, 그들 가운데 과반수를 밑돌아서 또 종종 그리고 왕왕 과반수를 초과하여 그런 혼잣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가방에게 냉대받고, 행정 착오로 벌어진 모노레일에게 헛것을 봤다며 놀림 받은 꼴이다. 끝짱~, 환상이네 마법이네 미스테리에서 한순간에 몰락했다. 바로 좀스럽다, 로! 말이야 바른 말이지, 처음엔 좋았지만 끝이 이상했다. 대뜸 누구는 개처럼 킁킁거리고, 어중간한 마크는 가슴이 쿵쿵거리고, 누군가는 일기예보와 게임과 골프와 NC와 도시를 떠올리고 있는 것만 같다. 이제 네스호의 괴물이 호수 2의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면 그나마 몰강스럽게 어긋나고 꼬여버린 직접 보고 겪은 사건을 새롭게 윤색하고, 구겨진 체면을 살리는 일이 될까? 녀석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데, 어느 행위예술가가 미쳤다고 선심쓰듯 실측 모형을 이곳에 띄울리는 없다. 꿈 깨는 게 낫다. 여유롭게 희색을 짓기엔 시간이 필요하다. 많이. 흔들의자와 해먹과 칵테일과 추리소설, 휴가, 레트레도 리트리버, 해변 산책을 떠올리는 게 낫다. 또 뭐가 있을까? 우연한 만남, 장비 쇼핑 및 구입, 장비빨, 빼앗긴 타이틀을 되찾기 위한 도전, 뭔 타이틀?, 블로그 업데이트, 사랑의 묘약, 유원지, 공원, 향기로운 추억...... 이런 개념을 떠올리는 것이 조금은 도움이 되리라. 아직은 그들이 제정신으로 회복되기엔 그 이상한 일의 파급력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들은 쉽게 그 정처를 알 수 없는, 뭔가 숨겨진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어떤 징크스나 운명의 회오리를 불러올 듯한 느낌의 가방, 그것의 치명적인 매력을 도저히 쉽게 잊어버릴 수는 없었다. 마치 첫눈에 반한 사랑처럼! 뿌리치고 모른 척 해도 떨쳐지지 않는 미련이었고, 이미 뇌리에 선명히 각인된 유행가 가사였으며, 최소한 그들에게는 작은 웃음거리이자 전설이었고, 연상과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낙엽따라 가버린 애모 같은 존재였다. 그 가방이 좀 더 구체적이고 협소한 단위라고나 할까, 그런 물체나 흔하지 않은 현상이었다면, 가령 어떤 7전8기 끝에 따낸 동메달이나 진짜로 나미래랄지 전진해 또는 백만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과 정말 사귀었다거나, 그랬다면 덜 서운하고 애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필연성은 절묘하게 빗나가고 특이하게 우연히 그것은 하필 가방이었다. 가방. 오, 가방! 아 이럴 수가! 그럼 이제 그 기억은 평생 그들을 따라다니게 생겼구나.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이제 언제 어디서나 가방 하면 아~ 오~ 그래야 할텐데 이제 어떡하나!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그냥 어쩌다 마주쳤을 뿐인데... 별 일 아니었다고 적어도 뚜렷이 판명난 것도 없어서 속이 답답한데, 차라리 할 말이 있지만 용기가 없는 연정을 계속 키워가는 청춘이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나중엔 몰라도 그땐 실제 상황이었고, 심각했었다. 그처럼 사람을 웃게 만들고 설레고 떨리게 만드는 사람은 살면서 거의 만나기가...... 만날 수는 있다. 간혹 만난다. 자주 만날 수도 있다. (속닥속닥) 그러나 그건 뭐랄까 당시 가방이 그들을 주도했다고나 할까? 어떤 신발을 신고 무슨 옷을 입느냐에 의해 삶이 바뀌고 인생이 변화되는 마치 그런 일이 시간을 압축하여 발생한 것만 같았다. 항상 돌아다니고 껀수를 찾고 이성을 쫓아다니면 나중 보통은 아이스크림 가게나 찻집을 경영하게 된다. 대개는 회사원이 된다. 드물게는 코메디언이나 작가가 된다. 마치 그와 같은 썩 불완전한 이론과도 비슷한 일일 것이다. 사람은 두가지 부류가 있다. 클로버 풀밭이 있으면 어떻게든 네잎 클로버를 찾으려는 사람과 그냥 세잎 클로버로 만족하고 그 분위기에 빠져 기분이 좋은 사람. 뭔가 그럴 듯 하지만 독자의 지성은 절대 어설프지 않다. (이러쿵저러쿵)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줄 아는 법. 네잎 클로버를 돈 주고 사서, 누구에게 (보너스용으로) 선물하고, 아니다 난 한마리 토끼가 되어 그 풀을 몽땅 뜯어 먹겠다 어딨어 그 풀밭?, 개 풀 뜯어먹는다는 말 들어봤지 설마 못 들어봤다고는 하지 말아줘 난 내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한그루의 사과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든 오늘 꼭 오늘 한마리 개가 되겠다 멍멍~ 멍멍~, 아 나 이런 아마추어들 그러면서. 사실 옛날에는 예술가가 신분이 높지 않았고, 대우도 좀 뭐했으면 부를 때도 광대라고 지칭했다. 그러면 그들이 지금은 광대가 아니고, 언제나 추앙받고 만인에게 부러움을 사고 한정없이 기쁠까? 그건 아니다. 첫째, 독자는 작가의 머리 꼭대기에 있고 둘째, 광대는 일반인이자 동시에 그냥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광대, 별거 없다. 재야의 고수, 새고샜다. 미네르바, 사람들 핸드폰 전화번호부에 수두룩하게 있다. 그러나, 뭐야 이거, 이미 옛날에 썼던 내용이자나? 광대 맞네 광대 맞아! 그나저나 그 가방에 뭐가 들어있었을까, 도대체 그 가방에? 그리고 누가 그 가방을 열었을까? 왜 그 친구들은 그 가방을 못 열었을까? 못 열어서 아쉬웠나? 자신들이 못 열어서? 그것이 이왕 열릴 꺼면 긴 명대사에 빠졌던 홀딱 빠졌던 그리고 완전 열광했던 우리에게 열릴 것이지 어디 근본도 모르는, 대기도 희뿌연, 정체도 불분명한, 어느 괴한에게 언제 열린 줄도 모르게 열렸다니 그랬다니 어머나, 그랬다나 뭐라나, 열린 가방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안 그랬을 수도 있는데 괜히... 나무 밑에서... 정말 그런 걸까? 앗싸~ 하면서 갖고 싶었던 귀한 물품을 제값 주고 득템했는데 내일 어디에 보니 그게 반의 반값 세일하네, 뭐 그런 건가? 약간 다른 거 같다. 그런데 정말 그건 누구의 가방이었을까? 그걸 더 궁금해하는 게 본질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왜냐하면 하늘을 나는 물고기, 그들에게 날개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녀석들이 어디서 물어다가 빠트린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을 만화경으로 본다고 했을 때 보면서 웃고 지루하다가 심각한 시기와 즐거운 한때를 포함한 전 과정 가운데서도 중요한 시점 같은 것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누구는 하이든의 유명한 트럼펫 협주곡 3악장을 듣고서 평생 외교관으로 살겠노라고 다짐했는데 시험에 계속 낙방하여 그냥 꿈을 포기한 후 외교관 사위를 맞았다거나, 어떤 제복이 멋져보여 나는 무슨 꿈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책상에서 공부를 하는데 의자가 통 마음에 들지 않아 내가 직접 의자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해서 목수가 되었다, 어~ 시네마에 출연하고 TV에 나오니 인기 폭발에 예쁜 여자들이 안아주라고 만나주라고 보고 싶다고 난리네 그러네 늘어선 줄이 지평선 끝으로 보이지가 않아...... 그래서 나는 어느 날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와 같은 일을 뭐라고 하냐면 <계기>라고 한다. 계─기. 비슷한 말로 동기, 까닭, 왜, 욕망, 영문, 구실 또는 그냥, 어쩌다, 우연히, 한번, 슬쩍. 그와 같은 엇비슷한 일이 그들에게 갑자기 생긴 것이다. 가방이라고! 그 때문에 신나는 모험과 새로운 인생이 펼쳐져야 하는데, 그건, 그건 아직이었다. 그럼 시간이 한참 지나서 뭔 일이 있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별 소득이 없었다. 사람 환장하겠네, 아주(아조) 신물이 나는구만~ 라고 하기엔 이르다. 다만 그들은 언제부턴가 가방매니아가 됐다. 가방의 품질을 살피고, 가방의 품질을 살피니까 내 삶의 품질도 살피게 되고, 내 삶의 윤기를 관찰하고 덧칠하니까 옷과 어울리는 가방을 좀 더 세심히 고르게 되고, 그러니까 타인과 어울리는 나와 남의 관계를 생각하고 고민하게 되고, 목적에 맞는 가방을 하나씩 수집하게 되었다. 잊어버린 인생 목표를 수거하고, 잃어버린 꿈을 되찾게 되었다. 책가방, 손가방, 청소가방, 바순 가방, 노트북 가방, 영혼을 위한 가방, 햄버거 식재료 가방, 나가방이란 사람을 찾아서 우연을 가장해 친분을 착실히 쌓아갔으며, 별장도 가방 모양 별장에서 묵었으며, 지인들에게 가방을 하나씩 선물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두뇌 회전이 점점 운동에너지를 발산했다. 그렇다고 지능이 특별히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들고 있는 가방에는 무엇을 들어있을까, 누가 선물했을까, 왜 오늘은 그 가방일까, 날 속일려고 아니면 잘 보일려고, 가방을 들어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들어줄려고 했다가 도둑놈으로 몰리지는 않을까 따귀를 얻어맞지는 않을까 그것도 쌍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면 어떡하란 말이냐, 저기 가는 저 여자의 가방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있을까, 붙잡고 물어보면 실례가 되지는 않을까, 사람을 만나면 처음에 인사를 해야 하는데 자꾸 눈이 가방으로 간다 이거 어쩌면 좋지,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마음은 가방 속에 들어가 있다, 아 미치겠다 미치겠다 미치겠다! 영화를 보면서도 사람이 가방으로 들어가는 소재가 뭘 상징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꿈도 가방에 관한 꿈을 꿨다. 그럼 그렇게 가방에 관한 다큐멘터리 내용을 만드는 삶이 좋아서 계속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응,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 가방 사건은 그냥 심심하게 별 재미없이 끝나는 것일까? 아니다! 썩 자랑스럽지는 않았으나 뭔가 일이 있긴 있었다. 따라서 작으나마 가방 사건 때문에 소기의 성과는 얻었다고, 수확은 했다고, (둘러맞추는 식이지만) 노력의 결실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건, 그 일은 무엇이냐면 그들의 무명 블로그에 생애 두 번째로 공동 작품을 올렸다는 것이다. 부제를 붙이자면, 위대한 탄생? 노노노노노노노, 그것도 아깝다. 그러나 속상했으나, 당혹감을 톡톡히 맛보았으나, 무언가 침통함이랄지 불명예랄지 그런 책에서나 읽을 수 있는 어떤 막막함 그것 뒤에야 드디여 찾아오는 뭔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해방감은 느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이 새로운 공동 창작물, 보잘 것 없지만 같이 만든 협업의 작품을 만드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문에 그들은 신비로운 장막을 걷었을 때 그 다음에 뭐가 있을까, 무지개 너머에 어떤 세계가 존재할까, 투명망토를 입은 뭔가 이름을 붙여서 불러주고 싶은 색다른 환상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착각이라고 느꼈거나, 값싼 환각에 빠지거나, 환시가 바로 이것이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었을지라도 그것도 환상은 환상이었다. 물론 책으로 어서 출판하자는 제의와 인터뷰와 각종 시상식의 초청이 쇄도할 것인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설령 그렇게 될지라도 귀찮네 지겹네 짜증나네 시간 많이 빼앗기네 그런 일말의 불편한 감정이 티끌 만큼은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굳이 그들의 무명 블로그가 새 이름을 붙이고 명성을 얻지 않아도 크게 불만은 없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전망은 썩 좋지 않다. 물론 언제 그런 일이 있었기나 했냐는 듯이 원래 무뚝뚝한 세상은 아무런 관심없이 조용할 수도 있다. 다음은 그들이 블로그에 올린 공동 집필 소설의 전문이다. 일부만 발췌한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누가 뭐래도 어엿한 작가다. 베토벤처럼? 듣고 싶은 얘기만 읽고 싶어서인지는 몰라도, 귀를 막아버렸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챔피언 의무 방어전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선 나름 선방했다고 각자 또 같이 자평하고, 호평하면서 자화자찬의 시간을 보내는 일만 남았다.
<판타지가 지겨우십니까? 그러면 로맨스는요? 만화? 동화? 스릴러? 액션? 아~ 뭘 해도 재미없으시다구요? 그 따분함을 단번에 날려버릴 비책을 알려드릴까요, 말까요? ......>
좋은 예감이란 때로는 영감을 불러오지만 대체로 그것의 신뢰도는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그다지 신통치는 않을 것이다. 퍽? 예감도 예감 나름이니까. 이게 끝인가? 정말, 설마 여기가 결말 공간이고 마지막, 더 넘길 면이 없는 소설의 마지막, 정확히는 챕터의 끝 그 마지막 쪽인가? 오, 그렇다! 뭐라고? 그렇다고! 못 들으셨나, 못 들으신 체 하시는 건가, 못 믿겠다는 건가? 말이 안 나온다. 이런, 젠~장!
애인있어요
나는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무심코 회상에 잠기며 어떤 옛일을 떠올리다가 어딘가에서 들리는 조금 철 지난 유행가를 듣게 되었다. 그 음악은 내가 틀지 않았으니 나는 그 음악을 불현듯 듣게 되었던 것이고, 따라서 그건 능동적인 자세를 견지하지 못한 생각의 과정과 사유의 습관을 핑계삼아 동기부여 강의 비디오를 시청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그 슬픈 음악을 거리에 울려퍼지게 만든 장본인, 왠지 특이한 DJ는 최소한 아니라는 뜻이다. 자, 이쯤 몇 자 간추린 설명만으로 뭔가 정상적인 사고를 벗어나 어쩌면 상태가 조금 비정상이 아닌가, 왜 그렇게 말이 꼬이고 좌충우돌하는가, 그 횡설수설은 지금 잠시만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그런 특유의 특징으로는 특출나신 그분들과 닮아서 그런 것인가, 그와 같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물론 이 짧은 재담이 드라마였다면 TV 채널이 돌아가든가 TV를 향해서 빵이 날아가든가 했을 것이고, 대화 상대였다면 아이고 그러신가 어이쿠 그렇구나 하면서 열과 성을 다해 경청하거나 아니면 넌 제정신이 아니야 정신차려 이 친구야 하면서 살짝만 가볍게 뺨을 후려치던가 했을 것이다. 또는 냉수를 한 잔 얼굴에 끼얹을 수도 있겠고. 당연히 그것이 소설이라면 아 나 이런~ 이거 계속 읽어야 돼 말아야 돼, 괜히 서점에서 혹 해서 사가지고 돈 아깝네,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이건 다 그 음악이 화근이었다. 왜냐하면 예전에 거리에서 그 꿈결 같은 추억이 담긴 음악을 들었다면 아주 잠깐은 울컥했겠지만 지금 나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뭐야 제목이 애인있어요 라고 의문문인데 음악감상자에게 숨겨진 연인이 있냐고, 달콤한 연애를 하고 있냐고 묻지 않고 지 얘기만 하고 있자나, 그리고 있다 없다도 확실히 말하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알쏭달쏭하게 어렴풋이 추측하게 만들고, 자꾸 추론과 정연한 논리와 반듯한 설득과 빈틈없는 자로 쟤고 초정밀 하중계로 측정한 것만 같은 납득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아니냐면서 혼자 괜히 투덜거리는 것만 같다. 가령 그건 마치 누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을 놓고 똑 떨어지게 논리적이고 매우 냉철한 이성이 돋보이는 수작이라고 한다면, 이쪽에서는, 어떤 미친 놈이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냐며 짧게 <시적이야, 멋져, 훌륭해!> 그럼 끝날 것을 논리 좋아하시네... 마치 이런 모습과 유사한 일이다. 가히 거의 딱 들어맞는 예시라 할 수 있다. 자발적으로 스스로 걸어서 마의 산에 위치한 천상의 요양소에 들어가던가 해야지 이상하게 유행가 제목 하나 때문에 사람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감정이 매말랐나 아니면 너무 사람이 이지적이고 감성보다 이성을 추구하며 모든 것을 사랑마저도 그저 도식적으로 보고, 느끼고, 분석하여 자꾸 그걸 말로써만 풀어놓으려고 하기 때문인가.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알고 싶은 사람도 기관도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포장하고, 글을 쓰고, 고상한 몸짓과 근사한 어법과 아찔한 지성으로 피력할려고 해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언제까지나 솔직히 겉멋이 자아의 중심에 실세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구에서 얼추 반세기를 살았지만 나는 남에게 특히 화장술을 익힌지 얼마되지 않은 중학교 1~2학년쯤의 소녀들에게, 그리고 불투명하지만 잠재적인 롤리타 콤플렉스를 작품으로만 잘 승화시키면서 딱히 큰 사고는 치지 않고 굳건히 학계에 남아 후진 양성에 힘쓰고 교육과 연구에 정진하시는 이름에 말이 들어가는 교수님께 <사랑은 무엇이다, 사랑이란 말이야...> 라고 멋지게 구술할 재주가 없다. 오히려 크나큰 자잘한 일들이 사는 동안 많았지만 어쩜 다행스럽게도 다단계 사업체에는 한 번도 끌려들어가보지 않았으니 그것 하나만 해도 나름 소기의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전자에게 후자의 작품을 추천하거나 선물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여자친구나 지인에게도. 만약 선물했다가는... 그건 상상하면 안됨. 그렇지만 예술에는 그런 지류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사적으로 글과 말이 뛰어나신 분과 혹시라도 독대하게 된다면 난 말 한마디 못하고 화끈하게 혼쭐이 나게 될 것이란 것은, 그야말로 요행을 바랄 수 없는 냉엄한 이치라 할 수 있다. 그건 실제 그런 일이 재현되더라도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어쨌든 예술 가운데서도 전위적이랄지 뭔가 이상한 분야만 끝까지 고집한다는 것은 그 특수성 때문에 창작자는 걸음을 한 발짝 자칫 잘못 디딘다면 겁탈이란 단어와 당면하게 되는 수도 있다. 꼭 예술가만 그런 게 아니라 어른의 삶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유혹하는 온갖 호사로움이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가. 사랑은··· 없고(?), 삶은 권태고, 뭘 해도 재미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이 무엇인지 통 모르겠다는 심정이 느껴지신다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젊은 그대니까. 그건 그렇고, 그래도 옛날 같았으면 거친 파도가 나에게 물었다고, 왜 혼자만 온 거냐고, 넌 어딜 갔냐고, 바다에게 기도 드렸다고, 언제나 너의 곁에 항상 둘이 함께 해 달라고, 나의 곁에서 재잘거리던 너의 해맑던 그 모습 이젠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그처럼 노래를 따라부르기라도 했을 텐데 이젠 모든 에너지가 소설쓰기로 가버렸기 때문인지 그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도는 음악을 듣게 되었는데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바닷가에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의 소유자랄지 누군가와 단 둘이 가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 항상 무뚝뚝하고 눈치 없고, 나는 나는 하는 친구들과만 가봤으니까. 거리에서 내 눈은 어디를 향하고, 청각은 어떤 소리를 듣고, 마음은 무엇을 떠올리는지 딱히 밝힐 순 없고 불확실하며, 그 심상은 타인과 똑같고 오묘하지만 일단 나는 노래 하나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나는 하루를 기분 좋게 보내려면 미용실에 가고, 평생을 즐겁게 보내려면 예쁘고 착하고 요리 잘 하는 마누라를 얻으라는 출처가 불분명한 명언에 따라 어느 미용실에 들어갔다. 미용실 이름은 <하오의 연정>
나는 미용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왔다. 내가 왜 미용실 안에서의 일을 얘기하지 않느냐면 그 안에서는 별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용실에서 컷트를 한 후 미용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무슨 기별이 있었다. 그곳의 수석 디자이너로 보이는 아가씨가 자기는 오후 시간이 비번이라고 하면서 나를 따라서 바깥으로 나온 거다. 그녀는 안에서 나와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눈빛은 수차례 교차했다. 전기? 찌릿하지는 않았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 쪽은. 만약 내가 그 전날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뭔가 뚜렷하지 않은 채로 머리카락을 잡아끄는 것 같고, 자꾸 끌리는 것 같은 느낌의 오고감은 아마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당연히 나는 신혼여행을 갔다온 후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날 유혹하지 말아달라고, 어디서 앙탈을 부리냐고, 요염한 자태와 자길 꼬셔주라는 귓속말 같은 몸부림에 대한 응분의 댓가는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따끔하게 충고 어린 텔레파시를 보낼 것이다. 어디서 이쁜 척 하고 있어~ 이러면서! 그러나 상대방이 그걸 못받거나 딱 선을 그어 거절할 때의 후속 대책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미용실의 수석 디자이너 B모양은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내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때는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머. 비가 오네요. 저기... 우산 좀... 저기까지만 씌워주시겠어요? 죄송해요. 제가 오늘 우산을 안 가져와서...」
그녀가 왜 그렇게 직설적으로 용건을 말했느냐 하면 그것은 내가 내리는 비와 오후의 할 일과 내일의 기대 그리고 사랑의 예감,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이브의 모든 것, 아담이 눈뜰 때, 사랑을 합시다... 이런 시상을 떠올리면서 자꾸 우산을 펼칠려다가 말고 우산을 펼칠려다가 말고 다시 악상에 젖어들곤 하였기 때문이다. 마초업계 선두주자라면 그 중요한 찰나 청력이 떨어진다든가 딴 생각에 빠질 수도 있지만 나는 그와 같은 유별난 감성의 속삭임을 놓칠 수는 없었다. 쉬거나 준비중인 감각에 대한 에너지는 언제나 보존중이라서 그럴까. 그렇다면 몰입은 잘 못한다는 뜻인데,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와 같은 말을 듣자마자 한 10년 전쯤, 15년 전쯤 우리 같이 드라이브 갈래요, 절 좀 어떻게 해주실래요, 그런 느낌의 신호를 받은 경험을 떠올렸고, 그리고 좀 전에 그 수석 디자이너 B양이 조그만 양산을 가방에 집어넣는 모습을 모른 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소설을 써야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소설을 괜히 쓰기 시작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 나는 꼭 소설 쓰기와 낯선 곳에서의 가벼운 연애감정이 한 바구니에 담기지 말란 법이 있나 하는 지극히 평범한 의문이 일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은 그러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까 우산 가방에 넣으셨자나요.」
「아... 네...」 들릴 듯 말 듯한 음조. 점점 작아지는 음색. 진정 그것은 개미 목소리.
그때 그녀의 표정과 분위기. 꺄~악! 이게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나는 어쩌면 이런 말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빈방 많던데 웬만하면 입원하지 그래.」 그러면 내 상대 배역은 이렇게 엄한 애드립을 치면서 NG를 간신히 얻어낼 것이다. 감독으로부터 엄중한 꾸지람을 들을 것이고. 「난 믿고 싶어요. 내가 더 이상 난봉꾼이 아니란 것을요. 개방된 속세에서만?」 그렇다고 그녀가, 상남자가 아니시면 잠시 모른 채 건너뛰어주실 것을 권고한다, 어디가 모나거나 괴상하거나 쉽게 말해 그냥 짦은 연분에 대해 고민하기에 빠지거나 모자란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그랬다.
그렇게 나는 B양과 헤어진 후 거리에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금새 비는 그쳤다. 그러자 뭔지 모르게 울적했던 기분은 다시 괜찮아졌고, 아까 거리에서 들었던 노래를 듣고 괜한 오해를 일으킨 결정적인 원인이 생각났다. 그 노래의 제목을 평서문이 아닌 의문문으로 원했던 내 잠재적인 요구, 바로 그게 문제였다. 그래서 그런 기의가 섣불리 사실로 둔갑하여 착각을 일으키고, 왜 노래 제목에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를 붙였을까라는 기표를 거쳐서, 감상자의 느낌이 예전 같지 않다는 슬픔까지 이르고야 만 것이다. 이쯤 되면 나도 내가 혹시 공황장애 초기 증상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혹과 걷잡을 수 없는 미망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때문에 그만그만한 수준으로 돌아왔던 기분은 다시 울증의 늪에 빠져들었다. 나도 알고 있다. 날씨의 영향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어떤 즐거운 일 때문에 금방 조증에 치달았다가 잠시 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 이유없이 반대로 울증에 빠져드는 타인의 모습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꽤 있다는 것을. 그러다가 나는 딱히 다른 대책이 없고 해서 아무 옷가게에 들어갔다. 기분전환에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은 쇼핑이다. 그것과 동등한 층위 가운데 다른 것으로는 먹는 즐거움이 있고. 그래서 새옷을 입고 맛난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옷가게에 들어간 것이다. 옷가게 이름은 <웬만하면> 이었다, <웬만하면>.
나는 옷가게 <웬만하면>에서 옷을 구경하던 중 포스트맨...카페에서 일하는 점원 V양을 만났다. V양은 오늘 정오에 거리에서 잠깐 스쳐지나갔다. 나도 그녀를 보고, 그녀도 나를 봤다. 그녀가 누구와 같이 있길래 서로, 그녀는 소극적으로 나는 적극적으로 인사를 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또 오늘 따라 여자인 그녀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오빠~ 무척 오랫만이에요. 이런...데서 다 뵙네요.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나는 평소 같으면 상대방에게 맞춰주면서 그가 원하는 장르와 박자에 동조해주었을 테지만, 그게 내 본모습이고 천성이니까, 그런 성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다른 유형으로 대처하고 싶다는 충동이 불현듯 일었다. 그렇게 어딘가 모르게 평소와는 달리 엇나가고 싶은 욕구를 나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뭘 오랫만이야? 아까 낮에 봤자나? 어제도 봤고. 같이 있던 남자는 누구니? 너네 사장은 잘 있니? 아~ 이렇게 물어보면 큰 실례구나. 하지만 좀 전에 너도 그랬자나. 새침하고 의뭉스럽게 말이야. 그래 나도 반갑고 또 놀랍다야. 구경 잘 하고, 마음에 드는 옷 있으면 찍어놔.」
「왜요? 오빠가 사주시게요?」
「아니. 그냥 찜만 해놓으라고. 그랬다 나중에 살려고 했는데 품절될 수도 있고.」
그렇게 나는 그녀와 싱겁게 헤어졌다. 나는 아무리 둘러봐도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옷이 없었다. 그러나 홀딱 반한 마네킹은 있었다. 그래서 점원과 대화하고, 사장과 통화하고, 애쓰고 애써서 나는 옷가게에서 마네킹을 샀다. 당연히 쉽게 내가 원하는 마네킹을 살 수는 없었다. 이곳은 옷을 파는 곳이지 마네킹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혹시... 꿈을 파는 상점을 찾으시나요, 아니면 막 막 이상한 거? 이와 같은 물음을 주거니 받거니 실랑이를 벌이다가 나 돈 있어 하면서 돈도 보여주다가 결국 안 되겠다 싶었는지 주인장은 마네킹을 내게 넘겼다. 그렇게 마네킹을 입수한 후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그걸 집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나는 마네킹과 동거를 시작했다. 성별은, 모르겠고 이름은 때에 따라서 내 마음대로 내키는 데로 편하게 부르고, 막 껴안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다가 잠잘 때 침대 옆에 눕혀놓고 자기도 했다. 옆집 강아지를 반나절 맡아줄 때는 이런 얘기는 비밀이지만, 꼭 그대 혼자서만 알기 바란다, 마네킹 배꼽과 다른 어딘가에 개가 좋아하는 크림을 발라놓고 강아지가 그걸 핧아먹는 모습을 모면서 약 20분 내내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하핫 그렇게. 어디였을까, 어디였을까? 그곳은 어디였을까? 광대뼈일까 팔꿈치일까 아니면 슬와근일까? 거긴, 그곳은 (중)둔근이다! 물론 주인 어르신께 말 할 수는 없었다.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시를 낭독해주었고 하루 1번씩 노래도 불러주었다. 나도 그녀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TV 스포츠 해설을 들려주었다. TV 스포츠 해설을 직접할려니 입이 아팠다. 피곤한 일이었다. 물론 내 망상이다. 내가 뭐 미친놈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놀았단 말이다. 그러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우울한 기분을 감지해서 같이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취향이 특이하다. 차에서 자세가 이상하게, 음 어정쩡하다. 그러나 그녀는 평소에 말이 없었다. 정말 과묵했다. 겁나. 그러면 나는 그녀와 어디까지 갔을까? 가긴 어딜가? 어허, 이상한 상상하시지 마시고. 나는 그녀와 인터뷰도 했다. 녹음 파일을 소설 쓸 때 참고하려고 문서로 옮겨놓았다. 그녀는 생각이 참 맑다. 너무 청순하다. 아, 떨려. 너무, 멋져! 나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을까? 그렇다. 이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랑도 가능하다면 그 포장지 상표는 다름 아닌 사랑일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떤 날 앞집 이웃이 자기 강아지가 편지를 받았다며 기쁜 소식을 반갑게 전해왔다. 편지 내용은 어떻겠는가, 이랬다.
멍멍 멍멍멍 멍멍 멍멍멍멍멍, 멍멍멍! 멍, 멍, 멍~멍 으르릉 으르릉... 컹컹 컹컹컹 컹컹 컹컹컹컹컹
멍멍 멍멍멍, 멍멍멍 멍멍멍 멍멍멍멍멍멍멍, 멍멍멍 멍멍멍 멍멍멍멍멍멍멍. 컹컹컹 컹컹컹 멍 멍
컹컹컹컹컹컹컹 멍멍멍 멍멍멍멍멍멍 멍멍멍멍멍멍 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멍 멍 멍
멍 멍멍 멍멍멍 멍멍멍멍 멍멍멍멍멍 멍멍멍멍멍멍멍멍멍 멍멍멍멍 멍 멍 멍 멍 멍 멍 멍 멍 멍 컹
멍멍멍멍멍멍...... 멍~
그걸 보고 나도 마네킹에게 이메일도 보내고 소심한 그녀를 위해 소셜 네트워크도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막 소식도 올려주고, 내가 그걸 좋아요 누르고 추종 눌르고 하면서 같이 신나게 놀았다. 뿐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내게 자기는 좀 남에게 무섭게 보이고 싶다는 말을 전해왔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가죽점퍼를 선물해주었다. 집에서 입혀주고, 스티커 문신도 만들어주고, 수염도 그려주었다. 파티도 열었다. 그런데 나는 그녀가 케익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왜냐하면 케익에 올려진 촛불을 그녀가 호~ 하며 불어서 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그녀의 발을 뽀드득뽀드득 향긋한 세숫비누로 씻겨주었다. 그후 발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 보니 마네킹, 요즘 부르는 이름은 그녀다, 그녀의 이름은 그녀, 그녀에게 바로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순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눈과 귀 사이쯤으로 식은 땀을 한두 방울 흘렸다. 이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싶어서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확인해봤다. 그랬더니 그림자는 정상적으로 나타났다. 내가 잘못 본 것이다.
그러던 한편 나는 그녀와 포스트맨 찻집에 놀러갔다. 그런데 그 앞에 가 보니 그 카페는 없어졌다. 그 자리에는 웬 이상한 카페가 하나 생겼다. 간판이, 간판에 써진 글씨는 이랬다. <정 원한다면> 정 원한다면? 뭘 원해? 도대체 뭘? 왜? 지금? 나랑? 뭔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막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어떤 찐한 여운을 안겨주는 느낌을 대하고 보니 그 이름이 나쁜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순간 그곳에서 포스트맨 카페 사장이 나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볼까 해서 카페 이름을 바꿨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우리, 그녀와 나와 아제는 모두 함께 <정 원한다면>에 들어갔다. 카페에는 에드워드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 셋은 창가에 앉고, 음료는 알아서 준비되었다.
「구두쇠와 꼬마 숙녀, 검은 표범, 노란 까마귀, 푸른 트럭, 포춘쿠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그리고 삼류극장! 이런 이름들이 카페의 새로운 이름을 위한 후보군 물망에 올랐는데 모두 촌스럽더라구. 물론 사랑이란 원래 유치한 것이라지만 어딘가 모르게 챙피하고 부끄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카페 이름을 바꿀 수는 없겠다 싶어서... 그래서 이곳 찻집 이름을 <정 원한다면>으로 정했어. 그렇게 바꾸고 나니까 정말 제 2의 인생이 시작된 거 같아. 왜냐하면 그건 뽀너스 때문이지. 곧, 내 이름도 이번에 바꿔버렸거든. 뭘로 바꿨는지 아니? 뭘로 변했을 꺼 같냐? 아직 모르겠지 내가 말을 안 했으니까. 하하하하하! 그건 뭐냐면, 음...... 멀더야 멀더! 멀 ─ 더! 어때? 어떤거 같아? 벅찬 감흥 막 그런 거 일지 않아? 이제 형 부를 때 그냥 편하게 멀더라고 불러. 알겠지? 지금 불러봐, 멀더라고. 멀 - 더. 첨에만 어색할 꺼야. 그런데, 네 옆에 있는 마네킹은 뭐니? 그거 뭐하러 들고 다니는데?」
「닥쳐요 멀더! 그녀가 듣자나요...(침묵)... 어때요? 연기력 괜찮았어요? 자, 소개할께요. 이쪽은 멀더, 이쪽은 그녀. 이름이, 그녀는 그녀에요. 그 ─ 녀! 그런데 동시에 카페도 바꾸고 형 이름도 바꿨다고? 그것도 멀더? 세상에나...! 멀더, 그건 말도 안 돼요. 멀더, 그건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아요.」
「나도 알아. 오~ 금새 적응하는데. 학교 다닐 때 연극 좀 했나 봐? 있잖아, 새로운 인생이 어디 말처럼 쉽겠니? 그리고 옛날부터 그럴 마음이 있었어. 모든 건 주춤거리며 망설이기만 해서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법이야. 의식이 넓혀지면 어항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거라구. 알을 깨고 나와야지. 슬퍼도. 처음부터 SF 작가를 꿈꾸란 말이 아니라 제한을 두지 말란 얘기지. 운을 타고, 복을 읽고, 재주를 건져올려서 적당한 시기에 A에서 B로 옮겨가야 하는 거라구. 진실은 저 너머에 있어. 꿈은 말이야, 마계에서 제작되어 언제 어떡하다 어느 가난한 고고학자에게 발견된 외경심의 응석받이인 만년필 그의 친구, 그분의 이름은 애원, 그 양반과 돈독한 운우의 정을 나누며 뭉클하게 가슴이 울렁거리는 나뭇잎이 깃털로 이루어진 애인나무에서 열리는 것이라고! 알겠어? 때로는 살면서 뜬구름도 잡아야 하는 법. 그때가 지금일 수도 있고. 빙판 위도 달리다가 광장에서도 서성거렸다가 공원으로 산으로 해변으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집에서 어딘가에서 연습, 연습, 연습. 정진, 정진, 정진. 연구, 연구, 연구. 일과, 일과, 일과. 공부, 공부, 공부... 바로 그걸로 꿈은 비로소 현실이 되는 것일 게야. 뭐 자네도 다 아는 얘기지만 이름을 바꾸니까 기분이 새로워서 탐경가를 읊고만 싶은 욕망을 자꾸 견딜 수 없었다네. 이해해 주시게나. 아직 노인가를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멀더, 멀더~ 어딨어요 멀더? 멀더의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 사람을 만난지 오래되서 그런 것인가? 원래 사장이 바라는 건 그런 거 아니었어? 아름다운 이상에 대한 동경. 빈곤을 퇴치하고, 행복을 정복하며, 소망을 되찾아 이루고, 꿈을 계속 만들어내고 이루어나가는 일. 잊혀지고 아른거렸던 공상을 현실화시키는 것. 그런 것 말야. 하긴 그게 그거겠다.」
「음. 그랬지. 그런데, 바꼈어. 그래서 이름도 바꿨자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난 말야, 내 진정한 실체는, 작명가인 것 같아. 나도 잘 몰랐는데 내가 어느 날 보니 이름 짓는 걸 좋아하더라고. 그걸 왜 이제서야 알게 됐는지 모르겠어. 왜 저건 구름이고 왜 이건 시계일까? 왜 스무살에는 모든 것을 결정하고 어른스러운 모습만 보여야 하며 인생을 궤도에 올려야만 하는 것일까? 왜 나는 살면서 오페라를 한 번도 직접 가서 보지 못했을까. 그건 잘한 거 같아. 코 골고 옆사람 방해하면 안되잖아. 나비넥타이도 없어. 하여튼 막 그런 생각들 있잖아. 그래도 용케도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않은 건 잘 한 거 같아. 돈이 개입되면 감정이 흔들리고, 감정이 흔들리면 그분과 멀어지고, 그분과 멀어지면 뭐겠어? 뭐긴 뭐야 돌팔이지! 두런두런 돌아서 나중에라도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그걸 알게 된다면 그건 정말 크나큰 행운이고, 더없는 축복이야. 그런 거라구, 인생은!」 손짓, 딱!
「오~ 멋진데, 멀더. 멀더, 이름 진작 바꾸지 그랬어? 나도... 음 이름을 바꾸는 건 귀찮고 여러 이름과 다양한 정체성을 갖는 것이 좋으니까 예명 하나 만들어서 써 볼까? 나나, 어때? 이상한가. 아니면 몽? 우주? 인류? 내가 요즘 제복을 하나씩 모으느라 조금 이상해도 이해해줘.」
「뭐 좀 더디긴 했지만 이제라도 님을 만났으면 그걸로 된 거야. 그 모든 방황이 그래서...? 라고 하면 너무 끼워맞춘 우발적인 즉흥시 같지만 때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요리도 있지 않겠니? 사람은 말이야 목소리가 우렁차고 듬직하고 자신감이 있으면 겉으로 보이는 몸가짐과 마음과 행동도 조금은 그것에 기울어 가는 법이야. 즉 타고난 신분이나 선천적인 능력이 부족해도 태도와 방향과 의지에 의해서 삶과 인생은 어느 범위에서는 충분히 변화할 수 있는 거라고. 그래도 그런 말이 좋긴 한데,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그리고 예전에나 여자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깔고 그랬지 지금은 안 그래,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그렇게 되었어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면 흥미롭지만 졸린다 그의 나직한 음성 그 음조를 들으면 떨린다 그녀의 목선과 입술을 보면 끌린다 그런 것처럼, 이젠 술을 마셔도 처음 취했던 그것과 똑같은 기분과 신체 반응은 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교감신경 때문에 무조건 반사 때문에 즉 자기도 모르게 꼭 성우가 된 듯이 막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렇게 저음을 본능적으로 끌어냈어 옛날에는 말이야, 이젠 그런 순수함, 순진함, 천진난만함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어. 이젠 목소리가 아니라, 어차피 그건 별로니까, 어법과 표정과 옷과 예법 그리고 농담도 두가지를 적절히 때에 따라서 적시에 꺼낼 수 있게 됐어. 고급스러운 것과 또 알잖아, 부장님 농담말야. 정말 있잖아, 옛날에 초반에는 여자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깔았어. 정말 왜 그땐 왜 그랬는지, 또 지금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인문교양서를 봐서 대충은 아는데 이렇게 바뀌는 거 보면 그거 하나는 신기해. 아 놔 그런데 왜 여태 가짜웃음은 도저히 늘지가 않는 건지 몰라. 그게 딱 맞게 써먹을 때가 있는데, 안되니까 방법이 없단 말야. 딱 핸드폰 어플 켜놓고 대기할 수도 없고. 애석해. 많이 애석해. 뭔 얘기 하다 여기까지 왔지? 아, 저번에 도시에 갔을 때 아는 헌책방에 들렸다가 책 한 권 사왔어. 선물이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 초판본은 아니지만 절판본이야.」
「오, 멀더~ 고마워 고마워. 한번 읽고 싶었는데, 어떻게 알았어, 내 마음? 그런데 왜 자꾸 형씨 얼굴이 점점 점쟁이 같이 보이는 거지? 내가 이상한 건가? 그래도 그만~하면 괜찮은 거야. 사기꾼에 협잡꾼으로 보이는 건 아니니까.」
「하하하. 그럼 이제 날씨도 따뜻해졌으니 자화상을 그려볼까 아니면 일광욕하러 해변가로 갈까?」
나는 동네도 돌아다니다 <정 원한다면>에도 들렸다가 마네킹, 그녀와 내가 애정이 식고 약간 침체기에 접어들 무렵 우리에게 권태기가 당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어디서 고혹적인 립스틱을 구해와서 그의 입술에 발라주기도 하고, 나는 상점에서 가끔은 여자옷을 사기도 했다. 최근에는 굉장히 특별한 속옷을 사서 그녀에게 입히고 감상했다. 그리고 혼자 막 엄청 키득거렸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많이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동네에 뭔 일이 있는지, 왜 해가 뜨지 않고 밤이 몇날며칠 지속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주민들은 외부로 나갈 수도 없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친구들 무명 블로그에 등록된 소설에 나오는 TESLA와 같은 일이 실제로 바로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첫째 날. 낮이 처음 밤처럼 지속된 날을 내가 이해하고 직접 경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듣기로는 이랬다. 비와 눈과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처럼 그냥 좀 바깥은 어두웠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자 점점 그 강도가 심해졌다고 그랬다. 급기야 1주일이 되던 날에는 낮과 밤이 똑같이 되었다. 내가 아무리 그녀와 알콩달콩한 연정을 나누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쯤 되면 나도 일이 돌아가는 정황을 모를 수는 없었다. 당시 나는 그녀와 함께 집에서 같이 영화를 즐겨봤다. 영화를 보기 전에 언제난 그렇듯이 나는 마티니를, 그녀는 피냐콜라다를 만들어서 소파 앞 탁자에 놓았다. 나는 그녀 전용 소파도 특별 제작 주문해서 완비해놓았다. 그때 그녀와 내가 같이 본 영화는 러브 어페어 (1994), 클로버필드 10번지 (2016) 그리고 (내가 도입부만 좋아하는) 사탄의 인형 1~5, 키스 오브 처키였다. 영화 포스터만 보면 알 수 있는 그런 영화들을 그녀는 별로인 듯 했지만 애써 거부의사를 밝히지는 않고 절반쯤 매혹된 듯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잠자리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읽어주었다. 왜냐하면 그건 꿈나라로 가는 직행 티켓이었기 때문이다. 완전 직방이다. 한달에서 나머지 몇 일 비율로는 이탈로 칼비노를 읽어주었다. 그리고 현실에서 더 어떻게 1차적인 감각이 오고 가고 향긋한 느낌을 주고 받기 어려운 부분 때문에 그녀와 나는 꿈에서 만났다. 꿈에서 그녀는 거대 호텔 업계의 큰손이었던 적이 있어서 우리는 수많은 호텔의 객실에 엄청나게 자주 드나들기도 했다. 꿈에서. 그러다 그녀는 내게 헤어지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작별의식은 필요하지 않다고도 했다. 왜냐하면 이건 운명적으로 정해진 삼각관계이기 때문이란 거다. 질척거리지 말고 쿨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헤어지자고 했다. 뭔 믿기지 않는 이상한 얘기를 가장 안락하고 쾌적하며 행복한 시절에 하다니, 나는 그녀가 어떤 짜릿한 경험을 원하는 줄로만 알고 그것이 모두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일이 발생한 건 도시,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시골이 어둠에 잠긴지 1주일이 되던 날이었다.
여기서 잠깐 그 이상 기후 현상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시각이다. 나는 당시 동네 친구이던 약사 F양, 산부인과 의사 A씨, 문구점 주인 N씨, 세탁소 직원 C양, 안주 없이 술만 파는 술집 사장 Y군 그리고 <정 원한다면> 사장 멀더씨를 통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딱히 관계있는 얘기는 아니지만 참고로 말하자면 옷가게 <웬만하면>의 여사장도 이미 나의 마수에 걸려들었기 때문에 친교 모임을 결성하네, 마네 그런 단계까지 이르렀던 찰나였다. 그 당시는. 주위의 의견을 도합해보고 매스컴과 소셜 네트워크 소식을 모두 모아보니 그건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과학적 현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지구에서는 태양을 관측할 수만 있지 그곳으로 근접해서 정밀히 측정하고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맞는 얘기다. 이카루스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은 즉 태양의 흑점이 여기 시골 좌표와 연동하여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흑점의 크기가 커지고 특징이 더 특이해졌다고 한다. 흑점과 시골, 그것과 이것이 어떻게 동기화되었는지, 왜 그 일이 발생했는지,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젊은이들을 주축으로하여 다음과 같은 반론도 재기되었다. 그것은 여기 시골, 이곳 이름은 나중 내가 이렇게 바꿀 것이다 못 바꿀 수도 있고 그래서 일단 내 맘대로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 제우스라고, 여기 제우스 상공에 거대 비행접시가 떠 있기 때문에 낮이 되어도 햇빛이 비추어지지 않아 광합성을 못한다는 것이다. 조금씩 별처럼 달처럼 반짝이는 것은 그 UFO에서 나오는 광선과 오로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푸른 하늘을 볼 수 없었고, 햇빛이 투과된 초록 나뭇잎이 나부끼는 모습도 볼 수 없었으며, 바람과 볕과 맑은 공기에 잘 말린 하얀 셔츠의 뽀송뽀송한 정결한 내음도 맡을 수가 없었다. 뭐 그건 믿거나 말거나 라고 쳐도 또 하나 더불어 발생한, 파생한 사건은 제우스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제우스로 출입이 통제된 것이다. 이건 길을 막고, 보급을 끊고, 인터넷과 전화와 전기를 차단하는 그런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매우 간접적으로 교묘히 이루어지는 마치 어떤 작전을 방불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입만 안된다 뿐이지 다른 모든 것은 정상이었다. 뒤태가 멋진 연보라빛 컨버터블을 몰고 도시로 갈려고 하면 도로공사 중이라서 못 나간다. 버스를 타고 갈려고 해도 버스는 연착된다. 갈 수는 있다고 하는데 승객이 모두 차야한다거나 버스가 고장이라거나 운전기사가 부족하다는 거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공산품도 거의 차이는 없는데 큰 소란이 일지 않은 만큼 그 정도로 어떤 비공식적인 경로로 들어온다고 한다. 양은 적고. 질도 조금 떨어지고. 경찰, 행정공무원, 군인들도 모두 모르는 일이라고 함구한다. 이상한 일이다. 방법이 없다. 달리 어떻게 떠올릴 수 있는 묘책도, 취할 수 있는 방도도 없고 해서 나는 찻집 <정 원한다면>에 놀러가기로 했다. 그녀와 함께. 핑~ 도착했다.
<정 원한다면>에는 카페 사장은 안 보이고, <웬만하면>에서 만났던 V양만 있었다. 카페 사장은 사전에 도시로 떠났는데 지금 사태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꼭 V양 자신이 여기 사장이 된 듯 하여 기분이 좋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다는 거다. 편한 얘기만 하면 좋은데 나는 그녀에게 들은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운명의 장소로 이곳을 지목했다. 나는 불편하고 불미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숙명적인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순간 V양이 먼저 말을 건네왔다.
「형씨, 얘기 들었어요. 얘기 들었다구요. 제 말은 물어보는 말이 아니라 알려주는 정보랍니다. 제가, 얘기를 들었다는 사실말이에요. 믿기시지 않겠지만 때가 왔는데 어쩌겠어요. 받아들여야죠.」 나는 내 옆에 앉은 그녀와 함께 V양의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그 의도를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뭐라고 반문을 해야할지 망설이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또 다시 그녀, 아니 V양이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제가 그분께 잘 인도할께요. 어떻게 이곳이 접선 장소로 선정되고, 제가 중간 거점으로 지목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역할을 맡은 이상 맡은 임무를 완수해야죠. 그리고 그녀에게 들으셨죠? 새로운 상대를 만나실 거라구요. 지금 그분과 함께 왔어요. (방금 그분이 두 번 나왔는데 전자와 후자가 다른 것 같다. 그러면서 그녀는 웬 시커먼 그러나 은빛이 감도는 007 가방을 가져오더니 거기서 수상쩍은 인형을 하나 꺼낸다. 그것은 놀랍도록 사실적이어서 꼭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정판 척키 인형이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만나실 분은 어렴풋한 기억과 다른 행복, 이따금 스타카토처럼 정확하고 선명한 추억, 사랑스러운 미혹, 끌리는 획책의 분위기, 실추된 낭만과 신비한 요행과 환상적인 미몽까지 모두 불러올 수 있는 꼭 동화 주인공 같은 인물이어야만 하죠. 아시잖아요. 게다가 그녀와 꼭 닮은 정적인 동체 뒷편에 숨은 생명력과 마법성 또한 내포해야 한다는 것 까지도요. 바로 그녀의 뒤를 이으실 분을 소개할께요. 바로 이분이에요. 그냥 평범한 척키 인형이 절대 아니니까 차차 친해지시면서 알아가시구요. 생활하고 서로를 알아가면서 뭔가를 깨닫게 되실 꺼에요. 그 뭔가를. 저는 그럼 이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만날 사람이 있으니 이만 잠시 자리를 비울께요. 두분이서 인사하시죠.」
텅 빈 마음에 정곡을 찌르는 듯한 그런 이상한 말을 남기고 그녀는 아니, 독신녀일지도 모를 V양은 그녀를 데리고 카페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는 척키 인형이 앉아있다. 나는 척키를 보면서 이거 원~ 집을 지키는 개도 아니고, 가출한 고양이도 아니고 이거 내가 정말 뭐하는 짓인가, 글이 써지지 않는 자신이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다 바보. 그리고 나는 V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척키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당분간 멍한 채로 집에 있는 수영장에서 연분홍색 튜브 보트에 녀석, 척키를 태워주기도 했고, 볼보 조수석에 태워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해변으로 가서 같이 일광욕을 하기도 했다. 물론 깜깜한 낮에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로부터 쪽지가 왔다. 종이 한 장에 내용을 적고, 그 종이를 길게 접고, 한 번 중간을 접고, 뒷편도 접고, 끝부분이 꼬이게 일부분을 한 번 더 접는 그런 쪽지가 아니라 전에 내가 그녀에게 만들어준 소셜 네트워크 계정으로부터. 내용은 이랬다. 언제, 어디서, 무슨 전시회를 연다는 것. 그녀의 새로운 연인에게 자긴 낭만적으로 사랑받고 있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소식도 알려왔다. 또 책을 한 권 쓰기 시작했다는 귀뜸까지. 나는 그 메시지를 읽고 반갑기도 하고, 온전히 기뻤고, 조금 이유없이 약간 허둥댔다. 좋았으니까. 무심코 재밌다고도 느꼈으며 뭔가 미심쩍은 느낌도 들었다. 내가 직접 염탐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사람을 붙일 껄 그랬나 라는 허황된 생각도 잠시 했다. 그러나 내 감정의 대부분은 엄숙한 기쁨 곧 순수한 즐거움이었다. 한때 그녀는 나의 발레리나였고, 내가 꾸미는 그림일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인기 순위 1위였다. 언제나. 그녀는 나의 청춘이었고, 상징이었으며, 나는 그녀의 작명가였다. 그리고 우리는 환상적인 한 시절을 아무도 모르게 같이 보냈다. 마치 꿈 같은 그 시절을, 함께. 진정 그랬다. 거짓없이. 멋진 수트나 블라우스에 있는 어깨 패드처럼 우린 가벼우면서도 품위가 있었고, 없어도 있다고 믿었다. 행복 그 주변만을 선회했으며, 천국의 문을 노크했다. 그냥 그런 노래를 같이 듣고, 그저 노크만 했다. 정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여도 우린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크, 그냥 노크가 좋았으니까. 똑똑 똑똑! 그것만으로 좋았다. 더 꼬치꼬치, 멀뚱멀뚱, 두런두런, 탱글탱글하고 근사한 뭔가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 하나 걸리는 점은 내가 그녀에게 주름치마를 선물해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 1인 헹가래도 선사해주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나팔바지만 지겹게 입혀주었다. 다양한 제복들도 많이 입혔다는 것도 고백한다. 그러나 나는 변태가 아니다. 같이 양장점 앞을 주섬주섬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냥 딱 그 정도로 좋았고, 기뻤다. 불만이 없었다. 그녀도 나에게 그렇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만나고 나서부터 글이 안 써졌고, 물론 그 전에도 썩 신통치는 않았지만, 또 예언력이 눈에 띄게 부쩍 떨어졌다. 그 전에 했던 예언의 사실과의 부합 여부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수 없다. 퍽이나 좋았겠다, 혹시 했는데 역시 였다, 그런 말들은 최소한 듣지 않을 수는 있었다는 뜻이다. 그걸로만 봤을 때 무척 민망한 일이지만 그 경험으로, 그 환상이 전제가 되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없다. 뭐가 뭔지 잘 모르니까. 은근한 추측 약간 정도만 가능할 뿐이다. 그것도 어디겠냐마는. 그래도 썩 괜찮은 사귐이었다. 그런 만남, 흔하지는 않을 것 같다. 후회는 없다. 후련하지도 않다. 덤덤한지도 잘 모르겠다. 이젠 좀 맹해진다. 오~ 이런 오페라 극장을, 그냥 그 근처 돌아다니기를 하지 않았구나. 낚시도 같이 안 했구나. 웨딩숍에 가서 같이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한껏 들뜨면서 사진도 같이 못찍어봤구나. 같이 놀이공원도 못가봤구나. 둘이서. 친하게. 다정하게. 그렇게. 동물원은 물론 미술관까지. 이런 삐─! 앞서 후회는 없다, 는 말 취소다. 나는 후회가 많이 된다. 엄청 후회된다. 후회막심하다. 그녀의 이름을 괜히 그녀라고 지어주었을까? 좀 더 고상한 이름을 붙일 껄 그랬나. 그녀는 세련된 분위기를 좋아하니까. 뭔가 고고한 것도 찾아보면 있을 텐데. 많을 텐데. 얼마든지. 아쉽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다. 추억이란 말이다. 그 시절은, 생활에서 추억으로 바꼈다. 생화가 뭘로 바뀐거지, 장미꽃밭에 언제 가긴 갔었나. 하지만 나는 난봉꾼이 아니다. 설마 이 글을 듣거나, 읽거나, 영상물로 보시는 당신께서는 그녀, 가 누구인지 모르시지는 않으리라... 그래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알고 있다. 그녀의 요술지팡이만 그랬을지 아니면 그녀의 온 전신이 마네킹이었을지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다. 뭐가 뭔지 통 모르겠다. 아주 그냥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나보다 더 뭘 해도 재미없고, 뭘 해도 안 되고, 뭘 해도 어쩐다는 글을 읽고 우스워하고, 또 드물게는 좀 어렵고 힘들거나 불편한 사람이나 식물과 동물, 책 한 권이 언제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 그건 안다. 알면 됐다. (소곤소곤, 어쩌고저쩌고, 속닥속닥) 그녀는, 그래 그녀는 올 누드 마네킹이다. 이제 됐나? 그러나 누가 알리, 지금쯤 플라스틱이 샤워를 마친 촉촉한 피부로 바뀌었을지! 향수는 뭐가 좋을까. 남자 냄새? 오 이런~ 젠장.
척키가 내 2번째 부인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척키와 살기 시작할 무렵 여기 시골 제우스에 나타났던 이상 기후 현상은 사라졌다. 또 그 요상한 이동 통제 사태 또한 모두 해제되었다. 좋은 일이다. 이제야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포스트맨은 벨을... 아니다, <정 원한다면>으로 찻집 사장도 복귀했다. 그 양반도 참 바쁘고 소란스럽게 산다. 부지런한 게 좋은 거다. 그렇다고 권태를 썩 물러가랏 하면서 쫓아버릴 수는 없다. 그것도 연가를 부를 때 요긴한 모닥불의 장작더미 가운데 하나이니까. 그럼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날까? 열린 결말? 해피 엔딩? 미궁 속으로 빠져서 2탄에 대한 속편에 대한 기대도 없이?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그렇다고 닫힌 결말이나 새드 엔딩을 바란다는 뜻은 아니다. 아직 때가 아니란 거다. 왜냐하면 나는 도시로 가서 그녀의 전시회를 구경하고 와야 하며, 서점에 가서 그녀가 작가라고 씌여진 책을 사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도시로 가기로 결심했다. 날씨가 따뜻해졌으니까 V양과 차를 바꿔 쓰기로 협약을 맺고 그녀의, 아 이런 아직도 헷갈린다, V양의 허름한 컨버터블을 몰고 나는 도시로 떠났다.
도시 아틀란티스에서 나는 시간 여유가 있기 때문에 전시회에 가기 전에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동안 시골 제우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다 있을 수 있냐며, 낮이 없이 밤만 계속되면 도대체 어떤 기분이냐며, 게다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는 그게 도대체 뭔 일이냐며, 또 어떻게 마네킹이 사람처럼 말을 하고 들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냐고, 어떻게 된 게 요즘엔 마네킹이 속옷도 갈아입냐며, 더군다나 생일잔치도 하고 수영에다 일광욕도 하냐면서 나는 친구들이 놀람과 동의와 핀잔과 기겁, 야유, 놀림이 가미되지만 어디까지나 주로 그들이 걱정을 해주고 말장난을 나누고 같이 웃고 떠들 줄로만 알았다. 나는 딱 정확히 그렇게 예상했다. 말을 바꾸면 그 외의 다른 아무것도 예상치 못했다. 그게 정해진 순서였다. 원래 그래야 한다. 예외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기대나 예감이 아닌 논리와 이치, 교감과 원리를 딱 비켜가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보고 깜작 놀랐다. 화들짝 뒤로 자빠질 뻔 했다. 거의 주저 앉았다. 그들의 말은 첫째, 그곳도 그렇다는 것이다. 아틀란티스도 낮은 없이 밤만 지속된다고 한다. 그 현상이 나타난지는 얼마 안 됐고─듣고 보니 내가 척키와 함께한 시점과 일치했다, 헉!─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갖가지 설들이 난무하다고 한다. 누구는 일단 이름부터 짓자고 하고, 백야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사방팔방 알아봐도 안 되니까 태양으로 무인선을 보내자는 의견도 나오고, 급기야 대기권에 4차원 어딘가로 거대한 물체가 아틀란티스를 가로 막고 있다는 일설이 점점 퍼져나가 많이들 긴가민가 하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둘째, 아틀란티스에서도 외부 출입 통제가 시작됐다고 한다. 야릇한 방법으로 사람을 지치게 만들면서 고립이 시행되고 있지만 시장 물가는 들썩이지 않고, 뉴스와 인터넷에도 특이사항은 없고 딱히 큰 불편은 없기 때문에 그냥 사람들이 이것에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보인다고 한다. 단지 사람들이 조금은 더 느려지고, 유순해지고, 주장을 한 번 더 생각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의 꿈을 찾고, 사는 게 뭔가 재미있어지고, 외부세계에 대해 대체로 능동적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이요 관조적이며 명상적으로 서서히 바뀌어지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걸 놀라운 일이라 하기도 그렇고, 마법같은 일도 아니고, 전혀 신기한 일까지는 아니어서 흐름에 순응하게 되는 것 같다고 한다. 그 다음 셋째, 인형이나 무형물과 사이버 객체에 대한 활동과 교류와 사귐이 지금 아주 일반적이라고 한다. 즉 그게 유행이라고 한다. 아~ 그럴 수가! 오, 이런...!
그녀가 나를 떠난 후 교체멤버 척키가 등장한 후부터 점점 과거가 되풀이 되고,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척키!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특이한 녀석이다. 진짜 이 친구가 신비로운 요술을 펼치는 것일까? 젠장,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비정상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도록 돌아가고 있다. 말은 안 해도 미치고 펄쩍 뛸 일이란 말이다.
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를 만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이 모든 일들이 원래대로 복귀하고, 그간의 일들이 이해되고 원인을 알 수 있으며, 불규칙적인 모든 일들이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니면 V양에게 맞장구를 쳐주고, 미용실 수석 디자이너 B모양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최소한의 친절을 베풀어야 했을까? 인간적으로? 그건 순위 밖 얘기다. 한참 바깥.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직감이 퍼뜩 들었다. 한편 나는 핸드폰으로 내 소셜 네트워크를 확인해보니 다시 그녀에게서 메세지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삐삐 삐리리리 삐삐삐삐 띠띠띠띠띠 빰빠라빠밤 빠빠라빠밤 빰 빰 퍽 퍽 퍽 띠띠 띠리리리 띠띠 띠띠 띠리리리띠 띠디띠띠 디디디 띠딧띠리 띠띠띠띠띠띳 띳 띳 띳 5633 366993 1919 2488 356 44663 57 68894 710 8112 922 1063391367 1155724 27405 3705 0521 546874103654 543543 6543543541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아, 미치겠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빙빙 돈다 빙빙 돌아. 아~아 어지러워라. 척키의 새로운 계정을 만들어서 그 둘을 맺어줄까?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나는 뒤로 쏙 빠지고? 그러지 말까? 왜? 어째서?
번민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나는 그녀의 작품 전시회가 열린다는 미술관에 가보았다. 그곳에는 Art of Noise의 Moments in Love, Paul Mauriat 악단의 경음악 그리고 Buon Vecchio Charlie의 Venne Giu a Fiume, 무제오 로젠바흐의 1973년과 2013년 앨범곡 같은 몽롱하고 몽환적이며 언제, 어떻게, 어디서 만들어지고 추종자들이 발생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희한한 음악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전시회는 작가의 개인 사정 때문에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안내문이 보였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이, 그녀의 모습이 달랐다. 그 전과 달랐다. 완전 남달랐다.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니었다. 마침내 인간의 육신을 얻은 것일까? 드디여 사람의 모습으로 환생한 것일까? 그랬다면 꽤 육체를 잘 어떻게 부여받은 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전신만 보였지만 그 육감적인 떨림은, 느낌 아니까. 왜냐하면 상당히 눈에 띄는 미모가 도저히 숨길래야 숨길 수 없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그녀의 작업실을 알아낸다거나 이 분위기에 더 엮여들면 신흥 종교나 변칙 산업체의 중간 관리자로 안착하게 될 것만 같은 몹시 불길한, 발목 제대로 잡힐 것 같은 섬찟한 기운을 감지했다. 때마침 나오는 쇼팽의 마주르카를 듣고서 나는 제정신이 든 거다.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면 미친다. 잠깐 동안은, 미쳐. 그녀를, 그녀에 대해서 뭔가 더 알아내고 싶다는 충동 같은 감정은 더 구체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고, 이제 그녀를 놓아주기로 결심했다.
그후 나는 도시 아틀란티스에서 시골 제우스로 돌아왔다. 도시에서 불과 하루를 다 머물지 못했다. 더 머물렀다면 이곳도 밤 같은 낮이 지속되는구나, 왜 그런 거지 라면서 의아해하고 추측하고 상상하기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거기서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내가 거기 왜 갔는지 모르겠다. 전시회와 서점에 들려 그녀의 어떤 모호한 흔적을 찾는다고? 다 헛소리 같다. 추억 만들기, 회상하기, 기억이 남겨진 장소 방문하기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예전에 내가 왜 그녀에게 빠져서 공을 들였는지 모르겠다. 딱딱한 마네킹의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다고 입술의 온기를 전하고, 보드랍네, 피곤하지, 넌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니, 놀러가고 싶다고? 심심하다고? 그냥 막 아무데로나 떠나고 싶다고? 그렇게 물어보면서 가발도 씌워주었다가 모자도 씌워주고 내가 마시는 맥주를 그녀에게도 마시라며 들이밀고... 그때 난 제정신이 아니었던 듯 하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의 시간을 부정하고, 도망가고, 잊어볼려고 노력하면서 차츰차츰 척키에게 정을 쏟고 깜작 선물도 해주면서 점점 대화를 늘려갔다. 정이란 걸 붙여갔다. 그렇게 불러도 될지 모르지만 사랑을 키워나갔다. 같이 산책도 하고, 운동경기도 보러 갔다. 같이 TV를 보면서 고대 다큐멘터리 방송이 나오길래 나는 막 아는 척 술술 막힘없이 이야기를 지어내서 척키에게 친절히 부언 설명을 해주었다. 사실 나는 그 분야에 문외한이었지만 왠지 그땐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머리속에서 지어내자마자 말하는 건 알고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가짜웃음은 정말 어렵다. 그리고 나는 은하계 너머 어디가 내 고향인데 그때 우리들이 지구에 와서 문명을 전파한거네, 지구에 지금 외계인이 몇몇 남아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라고, SF 영화에 보면 큰 비행물체에 이상한 생김새의 외계인은 모두 다 뻥이라고, 녀석들 하나도 모르면서 웃기고 자빠졌어 그러나 실은 그렇게 헛다리 짚고 황당한 얘기를 퍼트려줘서 그게 어찌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그렇게 척키에게 말해줬다. 그 무렵 나는 얌체처럼 혼자만 차를 마시지 않았다. 항산화요소가 듬뿍 함유된 최고급 녹차를 막 동양란에게도 주었다. 또 욕심꾸러기처럼 혼자만 커피를 홀짝거리지도 않았다. 이건 술이 아니라 걸작이라는 적포도주를 구해와서 화분에 키우는 화초에게도 그것을 나누어주었다. 그 후 기적이 일어났다. 정말 잭과 강남콩처럼 화초의 입이 윤기를 띄고, 뿌리 부분이 발광을 하여 흙 안에 있는 그것을 모두 볼수 있었고, 꽃이 유난히 자주 피고, 또 나머지는 밝힐 수 없고 나중 소설의 소재로 삼기 위해 공개하지 않고 남겨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척키와 나 사이의 지고지순한 연정을 더 돈독히 살찌우려고 검색사이트에서 이것저것 알아보기도 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깜짝 놀라는, 흥분하는 몇 가지, 막 그런 검색어를 조합해서 고도로 유용한 정보를 알아내곤 했다. 이제 난 척키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슬슬 나쁜 남자 본색이 물밑에서 부글부글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나 쉽사리 본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직 전면에 나오는 걸 그의 주인인 내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걸 분명히 인지하지는 못했었다.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막연히 내다봤다. 뭘 내다봐? 잘 모르겠다.
그러다가 어느 날 도시에 사는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용건은 두가지였다. 첫째. 내가 저번에 도시에 가서 했던 얘기를 듣고 자기들은 까무러치는줄 알았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팔과 다리가 저리고, 식은땀에 흠뻑 젖고, 막 헛것이 보였지만 자기들은 나한테 세게, 세게 보이고 싶었다는 거였다. 수염을 길러도, 가죽장갑을 끼워도, 번개머리를 해도 별로 위용엔 변화가 없었던 찰나에 하필 내 얘기를 그 시점에 딱 들었기 때문에 별안간 갑자기 이상하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 모두 입을 맞춰서 수트와 제복과 가죽점퍼만 입고 왔던 것이구나... 이제야 퍼즐이 맞추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제우스도 그러냐, 이곳도 그렇다는 그 3가지 설명은 모두 뻥이라고 했다. 그들은 사실 내가 부러웠다고 한다. 자기들은 그런 걸 TV 드라마로만 보고 즐기는데 내쪽에서는 그게 현실이라고 하니 사실여부와 과장의 정도를 떠나 사춘기 소년 소녀처럼 애가 타고 뭔가 견딜 수 없는 심정에 자칫하면 눈물이나 어떤 액체를 흘릴 뻔 했다고 한다. 가히 침 같은. 짜식들! 그렇다면 진작 말해줄 것이지. 애꿎은 그녀의 행방을 탓하고, 척키를 의심하고, 무엇보다 내가 정신과 치료를 심각하게 고민했었는데...... 허허허! 그리고 그들이 제시한 두번째 용건은 하워드의 집에서 모이자는 초대였다. 각자 기념물을 가지고 가서 냇물에 띄워보내고, 그걸 따라가고, 찍어서 웹에 올리고 중계하고 그러면서 놀자는 거였다. 아~ 그랬었구나. 내가 정상이었네. 이로써 척키와 나의 작별의 시간이 다가온건가? 석별의 정 뭐 그런 걸 어찌하나... 뭐라 설명할 수 없고 꾸밀 수도 없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버렸다. 그러나 초대에 응할까, 말까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미리 그걸 내다보고 조만간 그런 제의를 받을 것이라고 언젠가 척키가 내게 살짝 예언해주어서 진작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된 각본이었다. 그러나 뒷북치고는 뭐 그런 뒷북이 다 있나 싶었다. 또는 뒷북이 아니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척키의 신기가 증명됐다고 거리에서 발가벗고 춤이라도 출 수는 없지 않은가? 저런~ 저..저..저... 뭐라뭐라 흉을 들을 게 뻔한데. 실은 그래서 방금 전에 애들에게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조금은 놀랐던 거도 다 연기였다. 절반쯤만. 하하하!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저번에 발생했던 이상 기후 현상과 출입통제 사건이 그때 정말 있었나, 과대망상은 아니었을까, 잘 알아보지도 않고 밑도 끝도 없이 때려맞춘 건 아니었나 싶은 오판에 대한 판단력과 기억력이 자꾸 모두 흐릿해져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게 그랬단 말이지 생각하니까 소름끼칠 꺼 같았다. 아아~ 그건 음 아니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확신은 못하겠지만. 그러나 그러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하워드의 집으로 떠나는 길에 돌입했다. 그럼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건가?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려야 할까? 그리고 어디 잘 봐둔 으슥한 골목의 술집으로 향할까? 연락처를 우연찮게 알게 된 아는 여자에게 연락을 한번 해 볼까? 뭘 했다고? 별로 재미난 일도 없었자나. 이제 뭔가 좀 몸을 풀고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 하는데 NC는 폐장 시간? 초호화판 수영장 파티에 초대받아 그곳에 갔는데 나 혼자만 날짜 변경됐다는 소식을 못 들어서 달랑 혼자서 텅빈 수영장에서 진짜 수영하라고? 어? 보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덜렁덜렁 고추를 내놓고 나체로 혼자 수영할까? 정말 그래야 하나? 남자들은 아래가 흔들흔들 그렇다고 해도 여자는... 아 위쪽이 그렇겠구나... 정말 살면서 재담꾼들에게 숱하게 듣고 읽었던 그 말이 맞긴 맞는 것 같다. 아니, 남자답게 확실히 말해도 된다. 누구에게 비난받을 일도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자꾸 뭔가가 망설여지는 것은 음, 아 나 이거 꼭 내가 내 입으로 내 자랑하는 것 같아서 이걸 꼭 말로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쉽게 결정하기 힘들어지는군, 아니 지금 이 상황에다 이 처지에 좋은 흐름에 내가 왜 내 입으로 이런 얘기를 지금 여기서 꼭 해야 하는지 나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내가 진짜 이 얘기까진 안 할라했는데, 솔직히 나이에 안 맞게 재롱부리고 까부는 거 같아 남우세스러워 이건 정말 말하지 않고자 했는데 정말 이거 말 안 할 수도 없고, 아~ 나~ 이런 이런. 아 나 이거 정말~ 미치겠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해? 말을 해? 말어? 하지만 애달프게 궁금증만 왕창 불러일으켜놓고 또 입을 싹 닫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그건 정말 상스러운 처사라서 험한 소리 들을 수도 있다. 자, 그 말은 무엇일까? 당신이 인생의 어느 시기만 넘겼으면 펄새(벌써) 진작에 눈치채셨을 것이다. 길거리 마술처럼 장막이 벗겨지는 표어는 이와 같다. 빠밤~ <(남자는/사람은) 나이가 들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옵니다> 썩 틀린 얘기 같지도 않고. 그러나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여기에 들이댈 수는 없고. 자, 그렇지만 저절로 나올 것만 같은 말을 힘껏 참아 입을 앙 깨물어서 이런 허물은 들추어내지 말자. 지가 자기 글이 품격있다고 스스로 말하는 거잖아? 지가 자기는 이미 힘이 위로 올라와버렸다고, 바깥으로만 돌면서 온갖 꽃과 무지개 사이를 날아다니다가 이제는 나비도 벌도 뭣도 아니고, 이제는 그 업계를 은퇴하고 힘빠져서 집에 들어와 책을 읽고 TV를 보며 한가하게 희귀종 동양란과 화초를 키우는 그런 정적인 취미생활이나 하면서 벌써 그런 은퇴한 거장이라도 된다는 듯 연설하는 저 우스운 꼴을 보쇼, 이렇게 말이다. 아 이상한 얘기하지 말고, 이렇게 정말 끝내야 할까? 어? 여기서 소설은 끝났다, 재미없으면 끝이다, 이렇게? 별다른 동화적 환상성도 없고, 기하학적인 체계는 커녕 사랑과 욕망과 모험과 야망과 환희는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이 끝나라고? 뭐 허무주의야? 퇴폐주의도 아니고. 이렇게 덧없고 씁쓸하게 끝낼 수는 없다. 그렇자나요, 네? 여기서? 설마 그럴 리가, 설마! 아무리 사는 게 권태롭고 남편과 TV 드라마 주인공이 비교되더라도 소설은 그래서는 안 된다. 무슨 금본위제도 시대 이야기도 아니고 이제는 꿈과 희망에다 신나는 환상과 더불어 심심하지 않은 흥미로운 마술적 사실주의가 등장할 때도 됐다. 그냥 허탈하게 이야기를 끝내서야 쓰겠나... 음... 그런데 그냥 끝낼 껄 그랬나? 자꾸 떠올랐던, 떠올랐다고 믿고 싶은 번뜩이는 악상이 사라져 가는 것만 같다. 나는 하워드의 집으로 가는 길에 분명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야 한다. 그 길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예언도 아니고 최면도 아니다. 직감과 직관이다. 주인공의 경험은 일단 철저히 신사실주의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 물론 소설을 잘 쓸려면 쓸 단어 안 쓸 단어를 알고, 사리분별도 잘 해야 하고(단어 하나 사용하는 것만 봐도 격이 자연스럽게 분별되니까, 그런데 그것이 말이 아니라 장편소설이면, 행차하신 그분을 뭣도 모르고 쫓아버린 거다), 이왕이면 언어학이란 학문에도 정통하면 좋지만 그러면 한도 끝도 없고 자칫 고리타분해지기 쉬운 단점이 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 여러 장르가 도입되고, 종횡무진 미로를 헤쳐나가며, 충동적인 일상과 지지리 재미없는 삶과 새로운 인생에 대한 즐거운 기대와 해결방안과 극비의 해결책을 제시해야만 한다. 하다못해 동기부여라도 흉내는 내야 한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지어내서는 안 된다. 엄한 허구를 막 지어내서는 곤란하다. 어디까지나 직접 경험한 얘기를 써야만 한다. 그게 기본이다. 그게 진짜 SF 작가다. 꾸며낸 건 다 가짜다. 하룻밤 꿈일 뿐이다. 돌아서면 뭐 없다. 풋사과를 따먹지 말고, 진짜 사랑을 해 봐야 한다. 벌레먹은 사과라도 구해서 종이로 싸고 거기에 금사과라고 쓰거나 소설에 동화적인 요소라도 집어넣어야 한다. 생각해보자. 지금, 이후의 소설들도 모두 이전과 비슷하게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이 씌여질까? 응, 그렇다. 많이는 안 바뀔 것이다. 사는 것도 그러니까. 도표와 통계와 예측 가능한 전망은 시네마도 소설가도 아니니까. 그러나 이제 마법사를 만나고 시간을 여행할 때도 됐다. 거울 속에 사는 소설가여, (나는) 판타지 싫어, 이런 말 듣지 말자. 누구에게 누가 하는 얘기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소설의 임무고, 소설가의 막중한 책무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기는 한데...... 나는 하워드의 집으로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꼭 뭔 일이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여서 난감하지만 딱히 그런 것은 아니다. 도대체 어떤 신비롭고, 꿈결 같고, 설레며, 우끼는 그런 일이 있었을까? 나도 궁금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이 잘 나지를 않는다.
그러나 마침내 내 상상의 한계는 문이 열렸다. 잘못 열린 게 아니라 문이 없어져버렸다. 똑똑 소리가 즐거움의 거의 전부인데 문이 사라졌다. 지극히 현실적인 어른의 일상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몸은 오늘,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도시로 떠났고 영혼은 일부러 하워드의 집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 마치 유령처럼. 버스를 억지로 옆 마을로 타고 가서 내릴 때 아, 버스를 잘못탔구나 그랬고, 기차를 타고 가다가 목적지를 알면서 모른 채 지나쳐서 아차, 하면서 내렸다. 계속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다가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좀 쉬어가자 하면서 대뜸 극장에 들어갔다가 그 예술극장의 점원과 시덥잖은 짦은 연애를 즐기게 되고, 안 되겠다 나는 내 자아는 지금 바다를 몹시 보고 싶어하는구나 라면서 뜬금없이 서툰 방심을 그리워하면서 일탈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최후의 해변가 땅의 끝이라는 이름의 해변가로 향했다. 가다 가다 너무 멀어서 몸이 정신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만류했다. 우린, 너와 나, 영혼과 육신은 헛된 기대에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되고, 꿈과 현실을 분간하고, 우리가 합심하고 합체하여 헛배 부르고 허상에 잠식되면 안 된다고 자못 현실과 미래를 염려하면서 다시 원래 목적지로 경로를 재설정했다. 그러나 이건 아직 상상의 나래다. 잠깐만 휴식을 취하고 내가 공상의 품에 포근하고 또 아늑하게 안긴 거다. 속없이. 소설을 쓰고 새로운 인생을 살자는 미명 아래 너무나도 어떤 인기와 허영심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심에 잠겨 일시적인 착각과 환영에 빠져든 것이다. 일명 신기루! 거짓 환상! 그러나 그 단계 또한 어떡하다가 무턱대고 넘어서게 되었다.
결국 나는 <나 1>과 <나 2>로 나누어지게 됐다. 먼저 나 1. 나 1은 신체적인 제한이 없다. 따라서 모든 게 무한대라서 이 글을 읽는 사람의 험담도 듣는다. 허허, 거기, 그만... 다~ 듣는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외계인이 운전하는 잠수함이 물 위로 떠오를 때 재빨리 그곳으로 가서 007 가방을 건네받았다. 심지어 나는 이쪽과 저쪽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종의 기원을 쓴 사람이 누구더라? 그를 닮은 사람 말고 그 당사자를 만나서 악수를 하고, 기념사진도 찍고, 그가 친필로 쓴 접견증명서를 받아왔다. 처음에는 그런 서류들을 액자에 끼워서 벽에 걸어놓곤 했는데 계속 쌓이고 쌓여서 이젠 코팅도 안 하고 그냥 방 한구석에 먼지 쌓이도록 내버려두게 되었다. 그걸 서류와 사진으로 증명할 수 있다. 조작되지 않았다는 것까지. 오점, 단 하나도 없다. 동영상은 미처 못 찍었지만 다시 가서 제작해 오는 것도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매번 매해 세계 신비주의자 협회에도 초대받고, 거기 가면 무척 극진히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시간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나는 먼 옛날로 거슬러가서 공룡들도 만났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의사소통이 몹시 어려워서 친하게 기념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괜히 잡아먹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현대인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옛 사람들의 DNA 샘플을 채취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는데 윤리적인 문제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우선 소크라테스를 직접 만나고 상담하고 나서 결정하기로 했다. 또한 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프랑켄슈타인이 실존인물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드라큘라도 진짜였다. 그래서 SF 작가들이 지금 시대에 황당한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도 후손이 있고, 자기들끼리 모이면 인육과 흡혈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는다고 한다. 매우 극소수지만 그런 인간이 있긴하다는 걸 어떤 정보통으로부터 듣고 알게 됐다.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영화와 소설은 과장됐으니 지레 겁먹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나는 외계 행성으로 통하는 이동 통로를 통해 거의 완벽하게 지구와 흡사한 별로 가서 살고 오기도 한다. 과학기술로 지금 운송수단을 타듯이 해서는 지구와 똑같은 별에 못 간다. 불가능한 일이다. 지름길이란 게 있다는 걸 이미 일부 과학자들이 학설과 세부 실행계획서도 내놓았지만 아직도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나만 그곳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게 지구인에게 조금 미안할 뿐이다.
한편 나 2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음... 음... 썩 밝히기 어정쩡하지만 굳이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날 술을 혼자서 거하게 먹고, 그것도 집에서, 지금 일요일 오전인데 숙취로 고생하고 있다. 개고생! 즉 나 1은 영혼이고, 나 2는 육신이다. 그러므로 그녀와 이별하고 나서 나는 자신이 이상해졌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실감하고, 스스로 시인한 꼴이다. 진작 자신에게 인정하고 고생을 덜 했으면 마음도 몸도 편했을 텐데 이상하게 그러면 지는 것 같아서 싫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끝인가? 이게 다야? 정말? 어? 진짜 끝이냐고? 질문은 계속 떠오르지만 그 대답은 어떻게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더 미룰래야 미룰 수도 없다. 필경, 나는 쓸데없는 이야기만 잔뜩 쏟아낸 것 같은 간헐적인 절망감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 독자와 글쓴이의 감정의 오고감에 대해서 딱 영화에 나오는 그런 장면이 투영되어 글과 느낌과 영상이 하나로 겹쳐진다. 바로, 망아지가 엄청난 구토를 하는 모습! 그렇다면, 네가 그렇다면 독자는 어떻겠는가? 그분들은 대체 얼마나 어이없어 하시겠냐고! 그분들이 대체 뭔 죄를 지었다고? 소설읽기가 뭔 구도적인 고행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 어려움을 짐작이나 하시겠소? 이게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경솔하게 원숭이 나무타기를 하고 있어? 고무줄처럼 무진장 탄력 좋은 속옷 고무줄 같은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거미줄을 쫙 펼치더니 그 안으로 들어가 4차원 저 너머로 사라져버리는 거야 한심하게 말이야, 어? 어느 안전이라고? 내면에서 딱 그런 허기가 막 봉긋 솟아오르고 있다. 아 나~ 내면에서가 아니라 내 가슴이 봉긋 솟아오르는 것만 같다. 몽상 특급, 막 그런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순 엉터리에 돌팔이에 돌아이였어. (명맥이 이어져 지금에서도 어딘가 귀족들 사이에서는 거리를 심하게 둔다는 표현으로 치면) 뭔 개수작이냐고! 아~ 심한 단어 나와버렸으니, 내 입도 거칠어져버렸으니, 인생이 고단하며 이상해서 기억의 왜곡과 가공된 사유와 조작된 경험이 많아져버렸으니, 그리고 그렇게 꾸미고 포장하는 그 모든 것이 이미 많이 탄로 났으니까 어차피 태생부터 혈통부터 미래까지 그냥 서술자는 평민으로 남아야겠다. 원래 그러고 싶었다. 그게 좋다. 그게 편하단 말이다. 가끔 작품에서 과거로 떠나 귀족놀이나 하다 오면 그걸로 만족한다. 지금 이곳에 살면서 시를 읽고 TV도 보고 여행도 가며 운 좋으면 사랑도 하고, 그거면 된 거다. 시대상, 학교에서 배웠다. 전생의 나, 평범하게 살아서 훌륭하게 이름을 알리지 못해서 현생의 내가 있다. 세상 이치, 살면서 조금씩 깨우치고 있다. 점진적이지만 의식은 크고 깊게 넓혀간다. 책은 꾸준히 읽고, 좋은 것과 불미스러운 것을 구분할 줄 알면 된다. 사람들은 정규과정 공부를 못했어도, 동물의 세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살면서 그저 생각만으로. 같은 종이지만 고양이와 표범의 행동반경과 습성이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런 원리를. 그 다음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서 인간계의 질서는 이렇게 저렇게 다듬어졌구나 변화했구나, 표준은 어떻게 변천하고 인습은 무엇이 변모되었으며, A와 B의 차이는 왜 생겼으며 기존에 없던 지식과 시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구나, 과연 예술도, 이미 아는 익숙한 진부함도 나중 다시 보고 되새기고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구나, 영화에서 보여지는 내 연기가 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기 때문에... 뭔가 조심스럽다라는 여느 영화배우의 고백처럼 그리고 야구방망이와 주방기구를 만드는 공장의 순박한 기계공이 그들이 만드는 그것이 다른 용도로 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려고 하지만 또 완벽히 그럴 순 없듯이 내가 쓰는 소설이 어떻게 읽히고 받침대로든 인테리어든 그냥 맨손에 들고 다니는 광고용이든 발간 후 창작자를 떠난 그것이 새 생명을 얻게 되어 그 다음이라는 새로움이 있겠구나,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3~5분짜리 추억의 명곡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아아 요절했던 순수했던 천재였던 어느 작곡가는 악상을 오선지에 옮겼던 당시 그건 꿈에서도 미처 상상하거나 감안하지 못했던 일이었을 테고 내게는 껍떼기가 네게는 열매요 알맹이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나는 알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 아무리 재미없고 눈물겹게 심심하고 지루한 일상이더래도 끝까지 재미없으란 법은 없구나,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힘의 기준이 Calvin Klein collection 벨트라면 고정된 기준이 관건이니까 벨트를 풀어버리면 되겠구나(아니면 상하 일체형 복장을 입어야 하나 그런 옷 참 예쁘다 재밌다 멋지단 말야!), 또 오늘 거리에서 우연히 본 저 친구 학교 다닐 때 완전 비리비리하고 이상했는데 와 나보다 훨씬 좋은 차 타네 언젠가 아르바이트할 때 안 친했던 그저 그랬던 녀석이 어머나 어디 포스터에서 보이고 TV에 나오네 그럴 수도 있구나. 그리고 의식을 지구 바깥으로 보낸다면 다음과 같은 좀 더 거시적인 박물관적 시각을 <견지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순항시키면서 발견하고, 찾고, 발명하고, 이용하고, (때로는) 쟁취하고, 먼저 갖고, 탐험하고, 선점하고, 최초─최대─최고가 되고, 거래하고, 독점도 있고, 양보도 하며 공동체는 물론 아무런 이해타산 없는 타인을 돕고, 주어진 삶을 온전히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기고, 사랑을-사랑을 누군가는 하고 누구는 포기하지 않고 또 누구는 그건 있다 그건 꼭 올 것이다 라고 믿으면서 기다리고, 이따금 3류로 만족하고, 그러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한 번쯤 생각하고, 아~ 내 트위터 팔로워가 전혀 늘지 않는구나 오~ 내 블로그 구독자는 자꾸 나날이 줄어만 가는구나 아아 오~오! 또 우리는 여유가 된다면 이런 미래의 경험을 한번 아니 두번이든 얼마든지 <계획해도 된다>. 딱 하나만 예를 들면 이거다. 어디에 가면 별로 특이할 것 없는 어떤 성이 있고, 그 성의 제일 위에 첨탑이 있고, 그 첨탑에 가면 돌이 하나 있는데 그 돌에 키스를 하면, 그 돌에 키스를 하면 달변가, 달변가가 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누구 누구 누구도 아마 옛날에 다녀가셨다지? 은근 이런 게 꽤 그대로 이루어진단 말이지. 은근 효과 있어! 앗, 더 유명해지면 나중... 이거 일이 난처해지는데... 아무튼, 그런 신기한 전설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거기 가서 키스하고 돌아와서, 돌아와서...... 으흐흐 크큭 킥킥킥킥! 학문과 처세와 자연의 미래를 논하다가 의도하지 않게 분위기가 좀 경박해졌지만 간출이면 요점은 이렇다. 일반적인 미덕은 물론 사회규범과 시장경제, 가치, 진리, 도덕, 정의, 윤리, 의미, 문명, 성과, 대중문화의 기준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나무 한그루도 중히 여기고, 소수 의견도 존중하고, 숲도 볼 줄 알면 된다. 안 좋은 길을 걸었더라도 멋진 인생을 살 권리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있다. 헌법과 도의는 동의어가 아니지만 올림피아 제전 경주 중 달콤한 낮잠으로 손해본 시간과 잊어버린 초심과 관중과 동료에 대한 작으나마 생략되지 않아야 할 어떤 신뢰를 만회할 기회는 토끼에게도, 천리마에게도 그리고 콜로세움 바깥에서라도 있는 것이다. 그 기회를 끝내 놓친다는 것은 다른 말로 불미스런 선례이자 타산지석이 되는데 이거 쓰고 보니 다 아는 얘기를 괜히 돌려서 한듯 하다. 그러나 문단의 종결이 코 앞이니 조금만 참으면 된다. 정상에서 내려오시는 분에게, 얼마나 더 가야 되요? (독려의 뜻이 아니라 진짜) 다~ 왔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을 헤쳐나가고 그저 열심히 사는 것, 사람만 그러는 거 아니다. 식물과 동물, 무엇보다 의식은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마네킹과 척키에게도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마네킹과 척키에게도! 미래와 현재의 전혀 다른 차이점은 선각자와 전문가, 예술가, 초딩에게 연구를 일임하고 일반인은 그 교집합 즉 공통점만 우선은 부여잡고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통찰하고 생각해봐도 괜찮을 것 같다. 뭐 재미난 일은 원래 잘 발생하지 않는다. 별일 없이 사는 게 정상이다. 재미없는 삶에서 간혹 즐거움을 찾는 그게 바로 삶의 묘미 같다. 친구랑은 으쌰으쌰하다 늬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늬가 많이 아네 내가 자세히 아네, 그러해도 타인에게는 그분을 올리는 게 속편하다. 문화가 틀리고 어쩌고 해도 크고 작거나 다른 방법으로 형식과 격식과 풍속과 문화적인 차이만 있을 뿐 다른 사람들도 이와 완전 딴 판은 아닐 것이라고 예상한다. 별 중요하지 않은 얘기지만 문화니 혈통이니 귀족이니 그런 단어를 끌어들여 슥~ 넘어갈려고 했던 의도는 전혀 없었다. 다만 괜히 화제가 그쪽으로 넘어간 것은 아무래도 이거, 말린 거 같기 때문이다. 잔머릴 너무 굴렸단 말이다. 아 이거 말렸네 말렸어! 뭐 이런 봉변이 다 있을까. 살다 살다 이렇게 별 희한하고 더럽게 재미없는 글을 쓰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맞소이다!)
놀이공원, 오즈의 마법사.
처음에는 친구들끼리 바람도 쏘이고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기분 전환 삼아 구경하고 오자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7인의 친구들은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다. 별다른 볼거리가 없지만 바로 그 허상을 확인하고 나서 해변가 정취를 둘러보고 온다는 게 그만 폐쇄된 아무도 찾지 않는 놀이공원 오즈의 마법사 그 안으로 안으로 차를 몰고 너무 많이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실의 공간 A에서 비현실적 신-시가지 B로, 어디 보자,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의 이름은 TESLA라고 임시로 정해져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곳은 지상천국이다. 없는 것 빼고 다 있으며, 부족한 건 만들거나 어떤 방법으로 외부에서 조달하고 공수해 오면 되는 그야말로 완벽한 새로운 유토피아다. 여길 안내하는 번쩍거리는 광고를 주변에서 보니 그렇다고 한다. 이곳은 어떤 세상일까? 그리고 무슨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그 기원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여기 도착한 이 친구들 모두 궁금한 얼굴로 어떤 짐작들을 해보고, 핸드폰도 들여다 본다. 어색하니까. 그러다 곧 어디 높은 지형으로 이동해서 지형을 조망하고 형세를 판단해 어느 탈출 경로를 모색할 궁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당장 여기를 벗어날 방도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어쩌다 여기에 당도하게 되었는지도 궁금할 뿐이다. 일단 가장 짧고, 쉽고, 정확하게 테슬라를 묘사해 보자면, 음 여기는, 아마도 당신이 처음 방문하는 도시와 가장 흡사할 것이다. 저건 상가 저건 학교 저건 병원 저긴 사람들, 그렇게 뭔지는 다 아는데 처음 보는 새로운 풍경들. 즉 거의 차이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살았던 저쪽 세상과. 일반인이 살고 있는 도시나 시골과 말이다. 다만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없을 뿐이다. 또 아직 조니와 케빈과 알렉스와 마크와 하워드와 니콜라스와 제임스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은 도시 바깥으로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 뭔가 그런 낌새를 느낄 수 있다. 왜 그렇게 됐는가, 는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일단 얘네들이 이곳에 타고온 자동차를 살펴보기로 하자. 미래에 누군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뭐? 사람이 운전을 했다고? 정말 그런 시대가 있긴 있었나 봐. 하긴 그보다 훨씬 이전에는 말 타고 다녔다잖아. 대충 상상해봐도 완전 딴 세상이었을 꺼 같아! 그러나 그때 글을 읽어보면 사람들 감정과 생각과 남녀의 사랑에는 별 차이는 없드라> 이럴 수도 있다.
친구들은 하워드와 닉이 스마트 포투를 모니까 거기서 영향을 받아 모두 스마트 포투를 몰고 도시에서 시골, 시골에서 문 닫은 놀이공원 오즈의 마법사에 놀러왔다. 7대의 스마트 포투는 광활한 면적의 공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언제 넘어온지도 모르게 오즈의 마법사 A에서 B 테슬라로 넘어와버린 것이다. 매우 드물게 발생하는 외부인사의 방문에 대비해서 그런 일만 전문적으로 하는 것 같은 그런 관료로 보이는 친구가 그들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는 왠지 테슬라 상표와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듯 하면서 또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다. 또 그 친구는 말을 타고 온다. 다 왔다. 그가 말에서 내린다. 그는 그들을 반겨주는 환영의 말을 건네면서 예를 갖춘다.
「신사 숙녀... 앗 숙녀는 보이지 않는군요. 어쨌든 테슬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서서히 적응하시고 익숙해지시겠지만 저도 이렇게 여러분 같은 외지인을 뵌 것이 무척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에 좀 더 이해하기 쉽고 짧게 설명을 하기가 상당히 어렵군요. 또 그래서 더없이 조심스럽고 몹시 흥분되는 걸 숨기기도 어렵답니다. 오히려 저와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깥 세상에 대해 여러분께 여쭤보는 게 더 타당하고 자연스러우며 정상적인 것 같지만 당황하시는 경황을 보아하니 일단 테슬라에 대해 간명하게 설명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이곳은 도시국가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세계지도에서 보셨던 지면이나 실제 평면적인 내륙이나 섬들에 테슬라는 위치하고 있지 않습니다. 간혹 드물게 그곳으로 이동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지구의 자기장의 경로에 따라 그리고 시간의 좌우 1, 2년 쯤의 여유 근방을 이동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건 차차 알아가시는 게 좋을 듯 하고 테슬라의 기본 정보에 대해 더 알려드리자면 여긴 고대 그리스의 도시인 아테네나 스파르타를 생각하시면 되고, 그렇게 멀리 볼 것도 없이 현존하는 도시국가인 모나코와 바티칸, 싱가포르와 도시국가로 분류되기도 하는 안도라, 리히텐슈타인, 산마리노와 거의, 아니, 완전 똑같습니다. 아~ 룩셈부르크를 떠올리시면 편하겠군요. 차이점이 있다면 이곳은 한마디로 지상천국입니다. 모든 것이 공짜죠. 손님들 세상에 공개된 객관적인 자료가 부족해서 잘 모르시겠지만 세계 몇 대 부자 가운데 상당수는 그냥 이곳 주민이랍니다. 다만 테슬라가 북위 몇 도, 동경 몇 도 딱 이렇게 공개되어 있지 않아서 많은 지구인들이 잘 모르실 뿐이죠. 그러나 테슬라도 지구에 종속된 건 분명합니다. 정치 형태와 헌법과 행정구역, 경제, 사회, 언어, 종교, 문화와 예술등 거의 모든 것이 외부 세계와 똑같습니다. 그냥 판박이죠. 단, 모든 것이 무료입니다. 세금? 여기서는 임시로 금세라고 부르는데 정부에서 또 사업자가 시민에게 납부, 상납, 증여하는 형태로 그 모두가 공짜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는 그냥 노시고 일하시다가 예술도 하셨다가 계속, 계속 노시면 됩니다. 언제까지라도, 영원히! 영~원히 말입니다. 다만 바깥 세상으로 나갈 수는 없죠. 아직 이런 신세계가 실존한다는 얘기는 못 들어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쪽에 살고 계시는 분들께서는요. 그러나 영화로도 보셨을 테고, 명화로도 음악으로도 많이 간접체험은 하셨을 것이고, 글로도 얼마든지 충분히 읽으셨을 겁니다. 그 가운데 하나로 바로 프란츠 카프카의 성을 들 수 있죠. 테슬라는 그런 개념을 초기에 많이 참고했답니다. 물론 반대루요. 차츰 테슬라에 대해 경험하시고 누리시면서 종종 저와 마주치시거나 아니면 행정관에 직접 찾아가셔도 괜찮습니다. 그곳의 문턱은 낮으니까요. 그럼 중요한 설명은 모두 알려드렸으니 저는 이만 사무실로 돌아가겠습니다. 부디 아름다운 인생과 은밀한 향락과 천상의 빛, 사랑의 기쁨과 슬픔이 인생의 대부분 가운데 주요한 대미를 장식하시기를 바랍니다. 대미? 왠지 어감이 좀 그렇군요. 그냥 전성기를 오래도록 누리시기를 빕니다. 테슬라의 그분께서 친절하게 도와드릴 것입니다. 저는 그럼 이만 처소로 물러가보겠습니다. (꾸~뻑)」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정말 냉정히 그들을 외면하고 저기 보이는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뭔지 모르게 그곳은 희뿌옇게 보였다. 다시 눈을 비비고 쳐다보니 이번에는 더없이 선명하게 보였다.
「저 사람 좀 이상한 사람 같지 않냐?」
「오늘부터 테슬라, 이러라고? 이거 혹시 온라인 게임 아니니? 크레용이 화났어 에 이은 2탄 크레용이 돌아왔어 뭐 그런 건가? 우리가 판타지 원정대?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
「그러게. 오묘한 기미는 있지만 묘한 성미를 봤을 때 어딘가 좀 부족한 사람 같은데. 얘기를 듣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생각이 다시 감성의 영역에서 이성의 백과사전으로 넘어왔어. 옛날에 뭘 팔던 분이셨을까? 소프트웨어 영업? 약 밀수? 책? 가짜였을 테지만 만약 명함이 있었다면 국장 같은 직함이 어울렸을 것 같아. 실재 그렇게 행세하고 다녔던 것 같은데. 돌아이치고는 사람이 너무 진지해. 꽤 수상하단 말이야.」
「잊어버려. 혼자만의 세계에서 사는 인간일 꺼야. 너무 자기만의 공상에 빠져 살면 조금 그럴 수 있어. 그나저나 이쪽에 이런 신도시가 생겼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인데. 이 정도 규모인데 왜 아직 몰랐을까? 뭐 우리가 노느나 사느라 바뻐서 신경쓰지 않았으니까 듣고도 지나쳤을 지도 몰라.」
「그리고 저게 뭐야 저게! 지가 무슨 밤의 여왕이야 조커야 마이다스야? 화장은 또 얼마나 정성들여 했는지 참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겠네. 괜히 겁주고 있어. 잠깐 설득당했는데 살짝 쫄았지 뭐냐.」
「마이다스? 그런데 넌 마이다스가 어떤 옷 입었는지 아니? 그것이 지명이게 곡명이게 아니면 사람 이름이게? 뭐와 관계되는 지는 알기는 알어?」
「넌 꼭 사람 얘기하면 말꼬리 잡고 늘어지드라. 요지는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내가 마이다스가 뭐 입는지 뭐 하는지 무섭게 생겼는지 그것까지 알아야 되냐? 안 그래도 신경쓸 일이 많은데? 지금 중요한 건 우리가 여기서 나가는 거 아니야~」
「그래 그래. 누군가 지나가는 행인이 또랑에 쳐박힌 진흙 묻은 골동품 도자기를 슥슥 문질렀드니 한 박자나 두 박자 반 늦게 튀어나온 요정이라고 해 두자. 아까 그 사람 또는 지금 여기, 그래 테슬라인지 테스코인지 그것이 말야.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가는 거야. 됐지?」
「됐지? 안 됐어. 자꾸 지식의 왕국 쪽으로 유인하는데 어디 한번 누가 많이 아나 한번 알아볼까? 너네들 일반 상대성이론과 특수 상대성이론이 어떻게 다른지 알기는 아니?」 모두 일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잠시 후,
「몰라. 어떻게 다른데?」 모두 집중력을 높여서 눈이 땡글땡글, 초롱초롱. 조금 뜸을 들인 후,
「나도 몰라.」
「이런~ 김샌다. 난 또 안다고. 그거 뭐야? 복수?」
「뭔 수? 그런 거 몰라.」
「난 또 출생의 비밀이 나올 줄 알았네. 모럴 헤저드가 아니면 됐어.
잠시 환담을 나누고 있는데 웬 아가씨가 다가오드니 그들에게 자기의 구도에서 벗어나달라고 또랑또랑,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요구한다.
「저기요. 중년의 신사 양반들. 제가 그 방향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자리 좀 비켜주실래요. 중요한 얘기 중이셨으면 좀 더 얘기하셔도 되구요.」
뭐? 중년의 신사? 우리가 무슨 아줌마야? 라고 그들은 뾰족하고 불편한 성미를 성급한 언사로 옮기지는 않았다. 대신 여기는 뭐 하는 곳이냐고, 나가는 길을 아느냐고 물어봤다. 그랬드니 그녀가 하는 말은,
「바깥 세상이요? 저도 몰라요. 관심 없어요. 잘 돌아가겠죠 뭐. 여기 초행길이신가 봐요? 금새 적응하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모르긴 몰라도 듣기로는 후천적으로 이곳에 들어온 사람치고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사람을 평생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죠. 미스터리를... 받아들이세요!」
「하여간 말은 잘 해!」 너는 서쪽 마녀의 빗자루, 그 빗자루를 탄 만화영화에서 튀어나온 주인공이냐고 물어볼려고 했드니 그녀는 이미 그림 도구들을 챙겨서 가버렸다. 찬바람이 쌩 분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이게 뭐람! 뭐라고 말 좀 해 봐!」
「아아, 이건 꿈일 꺼야!」
「젠장, 젠장, 이런 젠~장!」
「이제 우린 뭘 해야 되지? 키스?」
약 반나절을 헤매고 나서 그들은 처음의 위치로 되돌아왔다. 주유소에서 기름도 넣었다. 공짜로. 마크가 돌연 시적인 말을 꺼낸다. 아마도 기억해둔 영화 대사일 가능성이 크다.
「그 놈의 바람이 어디로 불지 모른단 말이지. 걸출한 프루스트 전문가를 찾아볼 수도 없고... 음, 야문센인가? 마젤란? 아, 내가 한가지는 옳았어. 내가 썼던 단편에 보면 우리 가운데 누군가 두더쥐가 있어. 분명해. 그 사람이 혹시······ 닉? 조니? 나는 아니고. 알렉스, 뭐 켕기는 거라도 있냐? 왜 그렇게 뚱한 표정을 짓고 그래? 표정이··· 예술이야. 혹시 너네들 여기 와봤는데 기억 못하는 거 아니니? 어디 뭐 아구창이라도 날리면 기억날 꺼 같아?」
「근데 그건 왜 물어봤어?」
「왜긴~ 그냥 영화 대사 같잖아. 그래서!」
「이유 한번 근사하군. 고상한 만화주인공 납셨네. 어찌나 우아하신지. 세련된 몸단장 하며, 아주 동화 속으로 걸어서 들어가시지! 늬가 뭐 제임스 본드라도 돼냐? 아, 그건 성인극이구나.」
「아무래도 바로 이곳이 우리가 꿈에 그리던 무지개 너머 정령들이 살고 있는 마법의 나라가 아닐까? 나, 뭐래니?」
그때 좀 전에 도구들을 챙겨 떠났던 미술학도처럼 보이던 소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조니가 선뜻 말을 건넸다.
「떠난 거 아니었어?」
「떠나긴 왜 떠나? 마음이 바꼈어.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거든. 아 참 그때 르누아르에게 그걸 가르쳐주는 게 아니었는데... 에곤 쉴레와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네가 하도 딱 껌딱지처럼 달라붙어서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화풍을 전수해달라고 애걸복걸하길래... 조금 몇가지 알려줬을 뿐인데... 이제 와서 후회되네. 아 놔, 그때 아무래도 기가 빨려버린 것 같아. 마크 로스코, 이제야 생각나네. 이름을 까먹었는데... 요만할 때 붓 터치감을 조금 알려줬드니 그렇게 대성할 줄이야. 아아 뭔가 재주가 남달랐긴 했는데 그래도 내가 안 가르쳐줬으면 미술학원 강사나 성실히 하면 다행이지만 카페에서 허구헌 날 여자나 꼬신다고 아무나 막 그려대면 참 볼썽사나웠을 텐데 그래도 잘 된 거지. 이승 것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이승 것들? 그럼 자기는 저승과 이승을 오갈 수 있는 마녀라도 된 단 말인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친구들이 그녀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드니 글쎄, 그녀는 400살이라고 한다. 그러더니 독심술과 예언에도 정통했던지 어떻게 알아봤는지 대뜸 제임스를 보고서 툭 한마디 던진다. 꼭 점쟁이처럼. 그, 제임스는 자기도 모르게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을 단박에 알아채고 <저는 제임스입니다. 소설 블로그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입니다. 활약상은 좀 약하지만 말이죠> 이렇게 저절로 말 할 뻔 하다 꾹 참았다.
「당신은 소설 쓰는 게 취미인가요? 책 나오면 읽어줄께요. 읽어보고 나서 받침대로 쓸지 어쩔지 그때 가서 결정할 꺼구요. 문학...쪽에도 제가 조예가 깊었죠. 허풍쟁이 제자들도 여럿 두었다오. 대표적으로 보르헤스와 이탈로 칼비노를 들 수 있다오. 물론 세상에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니까 여기서 듣고 잊어버리기로 약속합시다. 고맙소. 그게 다가 아니라오. 제임스 조이스, 그 친구 어렸을 때는 얼마나 똘망똘망하고 귀여웠던지 천진난만함 그 이면에는 정말 어떤 천재적인 번뜩임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오. 그러나 그거도 잠깐이고 주로 거의 항상 촌스러운 장난꾸러기에 불과했단 말일세. 그때를 돌이켜보면, 다 꿈만 같지만 불과 1세기 쯤 됐을려나...? 남들이 그대 작풍에 대해 뭐라 하던지 신경쓰지 마시오. 자신만 떳떳하면 되는 거요. 자네는 자네의 길을, 그 길이 길 없는 길일지라도 그 길만 가면 된다오. 아 어지럽군, 방금 한 말에 길이 몇 번 나왔는지 세어본 사람 있소? 없으면 좀 더 집중하고, 있으면 입 다물고 내 말을 계속 들으시요. 아직 말이 끝나질 않았어. 그리고 작품은 글이 잘 써진다고 절대 막 쓰는 게 아닌 법! 연인에게 다정하게 속삭이는 사랑의 연가처럼 드물게 발생하는 우연적인 그런 거, 이를테면 누구야 내 말 좀 들어봐 또는 그분을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언젠가 그분을 만난다면 그대를 알현한다면 꼭 해줄 말이 있소이다, 할 말이 있어요... 바로 그런 것 위주로 쓰는 게 좋단 말이지. 뭐 어려운 일은 아니야... 음 쉬운 일도 아니지. 알겠어? ...(침묵)... 당신들은 머리에 피도 안 말라가지고 얼핏보니 내 손주뻘도 안 되겠구만. 어, 당신! (케빈을 가리키며) 자네는 내 수제자였던 막스 브루흐와 애제자 림스키 코르사코프 그리고 자네들 세상에서 칭송하는 전설적 바이올리니스트 거 누구야?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나 아루뚜르 그뤼미오나 지게티, 막 그 있잖아. 그 친구들을 조합해 놓은 얼굴인데, 자네는 말야. 아 나 이거, 녀석들도 많이 귀여워했었는데······ 아, 옛날이여! 테슬라에서 지내는 동안 궁금하거나 모른 거, 알고 싶은 이치, 끌리는 인물등 뭐든지 호기심 동하면 나를 찾아들 오셔. 아, 내 거쳐는 K에게 물어보고. 그리고 K가 누구인가는 M에게 물어보면 돼. M이 누군가는 아까 만난 멀쩡한 관료에게 물어보고 말이야. 기억해.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당신들은 아마 날 찾아오게 될 꺼야. 이건 예언이야. 그런데 원래... 너, (알렉스를 가리키며) 넌 그렇게 말이 없어서 어떻게 여자 마음을 얻을려고 그래? 있잖아. 여자는 같이 있으면 남자가 너무 과묵하면 안 돼. 조용할 때 조용하고, 생동감으로 움직일 때 움직여야 하는 거야. 여자들은 그걸 좋아하지. 도돌이표를 그린 후 리듬을 타고 정겨운 말을 속삭여주고 자기를 포근히 감싸주는 거. 그러나 단, 그건 바람둥이가 제일 잘하는 거라는 거, 그건 잊지 말아야겠지. 남녀사이는 원래 어려운 거야. 아 나 이거 몇 세기 살고 나니 말도 많아지고 나이 세는 거도 잊어버렸지 뭐야. 아 있잖아. 여보시오, 젊은 친구들. 이래뵈도 난 필로폰네소스 전쟁에도 쟁쟁한 현역으로 참여했던 몸이라오. 그때는 거의 날라다녔는데 아 완전 팔팔했어, 잔근육도 불끈불끈 그리고 동료 지휘관들도 아직 이름을 똑똑히 기억한다오. 아르키다모스 2세, 뤼산드로스, 클레온 또 페리클레스 몇 있어 음. 잠깐, 아르키메데스는 아니었나... 아, 얘기 길어지니까 그만 줄여야겠어. 난 바뻐서 이만 갈꺼요. 그럼 멋쟁이들 이만 안녕.」
그들은 하나도 안 바빠보이시는데요? 라고 반문할 시기를 놓친 채로 얼척 없어서 단발머리 소녀가 어디가 많이 아픈가 보다 짐작하고서 근처에 어디 정신병원 없나 있나 주변을 살펴봤다. 필로폰네소스라면 기원전인데 400이 아니라 4,000살? 역시 이곳은 어이없는 판타지 영화 같은 공간은 아니었다. 어린이가 구름과자를 먹고, 물이 아래서 위로 흐르고, 점성술사의 금이빨은 알고 보니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고, 계란을 던졌드니 바위가 부서지고, 막 물구나무 서서 돌아다니는 사람, 양탄자를 타고 눈높이로 떠다니는 행인, 출근하면서 자기 집을 접고 접어서 작은 입자로 만들어서 귓구멍에 넣고, 화분에서는 금사과 열매가 맺히고, 고전소설에 나오는 옆방을 관찰할 수 있는 엿보기 구멍 같은 건 고리타분한 이야기에 불과하고 의식이 자유자재로 확장되고 축소도 되고 이동도 되며, 뒤섞이다 마침내는 신도 되었다가 행성도 되고 지하세계에도 들어가는 뜬구름잡는 이야기는, 벌어지지 않았다. 지극히 정상, 평범한 현실 그것이었다. 그후,
1시간이 지났다. 하루가 흘러갔다. 1주일이 경과했다. 달력이 한 장 넘어가서 지구가 혼자 몇 십 바퀴 돌고, 만약에 천동설이 이곳에 예속된다고 가정했을 때─왜냐하면 위선 같은 개념과 아무런 관계없이 오직 인간의 인지 체계에 대한 방식만 따져봤을 때 그것은 곧 천동설은 지동설과 언제까지라도 균형잡기 어려운 외줄타기가 아닌 튼튼한 교각 즉 어떤 문명과도 같은 거대한 개념에 대해 50 대 50을 이룬 화음일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히─코페르니쿠스인가 갈릴레오 갈릴레이던가 잘 모르겠지만 그 분도 여기 테슬라에서는 살아계실지 모를 일이니, 슝슝슝 지구를 중심으로 여러 행성들이 상당히 많이 힘겹게 회전했을 것을 감안했을 때 그들이 이곳에 도착한 후 약 한 달의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그동안 각자 기존의 주거 공간과 비슷한 모두들 자신의 집과 비슷한 집도 보았고, 닮은 사람들도 마주쳤고, 사랑했던 사람들도 본 것 같았다. 처지가 기이하고, 이야기도 이상하지만 그들이 처한 현실이다. 아무리 추천할 수 없는 작품이고, 뻔한 내용에 뭔가 있어 뭔가 있어 도 없고,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에 이은 숨겨둔 복안도 없었으며, 결말을 알고 보는 것 같은 시시한 드라마였지만 진짜였고 현실이었다. 바꿀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었다. 괜히 오즈의 마법사인지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인지 거기 놀러가자고 해가지고 여기까지 와버렸다. 힘든 일은 없다. 어려움도 없다. 참을 수 없는 그리움, 그런 것도 없다. 기억이 희미해져 간다. 사는 재미는... 이곳과 저곳이 비슷하다. 그러나 걱정이 없다. 너무 무사태평하다. 모든 게 공짜니까. 그래서 도전 의식이 없을 것 같지만 또 그러지도 않다. 뭐랄까 변화주기가 좀 더 급격히 빨라지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예술에 전념하는 것 같다. 카페 사장은 물론 NC 사장이 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불가능은 없다. 긴장감...은 조금 부족하지만 그건 거기나 여기나 똑같다. 또 그걸 높여주는 음료수도 나눠준다. 평소에 심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전개가 매끄럽지 않지만 나름 살 만하다. 한마디로 무난하다. 그들이 저쪽에서 이곳을 기대한 적은 없다. 옛날에.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어쩌다 이제 점차 그들도 저쪽을 동경하지 않게 되어가는 듯 하다. 그럭저럭 그들은 정말 살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느꼈다. 뭔가 살짝 찜찜하고 미흡하지만 실패한 삶이라기 보다는 제 2의 인생 그런 느낌이다. 하여간 웃기는 테슬라다! 뻔한 이야기니까 적당히 저쪽으로 빠져나가야 하지만 그러고 싶다고 나갈 수도 없다. 앞뒤도 안 맞고 구성도 엉망에다 뭐 이딴 소설이 다 있나 싶은 그런 테슬라에서 살아보기, 였지만 그들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여기가 현세고, 그곳은 그곳도 현세였으나 그 둘이 오갈 수 없는, 순응할 수 밖에 없는 대치되는 세상이었다. 작가 이거 미쳤네, 이게 말이 되냐, 독자들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누굴 보자기로 아나, 이런 말을 들어도 싼 상황이기 때문에 그들은 적응해서 사는 수 밖에 없었다. 아, 이런~ 수영장 파티에서 오직 수영만 하는 정녕 고지식한 사람 같은 낙원 테슬라다. 그러나 그 전체적인 모습과 다채로운 움직임과 더불어 특별한 개인사에 대해 모두 설명할 수는 없고, 신도시 테슬라에 느닷없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당도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일곱 명의 친구들의 일곱난장이 같은 삶을, 마치 허구같은 그곳에서의 생활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우선 그들의 무명 블로그에 올라온, 곧 테슬라에서 살면서 누군가 작성한 그들의 공동 블로그에 올라온 포스트를 하나 들여다 보겠다.
<나는 그녀를 겨울에 만났다. 내가 누구를 만났다─무엇이 떠오른다─언제가 기억난다 같은 회상에 대한 산문을 타인에게 공개하고, 타인과 공감하고, 타인의 심판을 받고, 타인으로부터 나중 혹시나 평가로 10점 만점 가운데 별 5~6개 정도를 받게될 것이라고는 꿈에라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단 한 번도. 그래서 너무 자세히는 쓰지 않겠다. 또 잘 기억나질 않는다. 기억이 희미해질 것까지 감안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는 중요한 사실들을 과거에 모두 한 개의 엑셀 파일에 모두 기록해뒀다. 몇 월 며칠 만나서 뭘 했다, 몇 월 며칠 그녀가 나에게 어떤 신호를 보냈다, 그건 달콤한 연애의 예감이고 다채로운 사랑 이야기가 시작됨을 알리는 나팔소리였다. 나중에 그녀를 만나면 해보고 싶은 일을 기억나는 데로 조금씩 추가해서 엑셀 파일을 업데이트해갔다. 그때 나는 웹서비스 일을 하는 재택 근무자였는데 지금은 장편소설을 준비하는 소설가다. 그때와 지금은 차이가 너무 크다. 어마어마... 또 어떻게 보면 별 차이는 없기도 하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가 했던 말과 내게 보여주었던 행동 그리고 내게 전달하는 의미심장한 몸짓과 표정과 억양, 또 그 너머의 고민과 심경과 미세한 떨림, 애써 가장하는 눈빛등 그런 것이 모두 순식간에 불현듯 불규칙적으로 아무때나 떠오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하나의 사랑에 대해서 기록한다는 것은, 그걸 드라마로 소설로 연극으로 그림으로 노래로 만든다는 것은, 1개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앞뒤가 안 맞고 독자가 적극적으로 꿰어 맞추는 노력이 많이 필요하고 생각한다. 때에 따라서만. 막 그러는 게 뭐랄까, 풋풋하다고 하면 촌스럽고, 그것이 조금은 옳고 알맞고 자연스럽고 정확하고 훨씬 재밌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랑 이야기에 대해서라면 마다하지 않는 독자라면 문단을 띄지 않는 것에 대해 조금은 너그러이 포용해 주실 줄로 상정한다. 나는 그녀를 언제, 어떻게, 어디서 만났는지 정확히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가끔 혼자 들린다. 물론 그곳에 들리는 이유는 식료품이나 공산품을 사기 위해서지만 겸사겸사 들리기도 하는 셈이 된단 말이다. 그녀와 나, 우리는 겨울에 만났고, 그녀는 여름에 태어났다. 내 생일은 중요하지 않다. 그 엑셀 파일이 담긴 USB는 잃어버렸지만 기억과 만난 날짜에 동그라미를 그린 수첩은 남아있다. 나는 처음부터 미래를 내다봤다. 앞날이 보였다. 뻥, 같지만 진짜다. 그때부터 이미 자신했다. 물론 중간에 조금 방황했다. 조금? 하지만 일이 그렇게 이상하게 되버릴 줄은 미쳐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가는 중간에 아무리 내가 지치고, 나보다 더욱 더더욱 어떠할 그녀가 큰 기쁨과 더 큰 슬픔을 만끽하며 참아가는 상상을 하는 가운데도 나는 꿋꿋한 확신을 단 한 순간도 버린 적은 없었다. 그런 게 있었을까 가 아니라 그건 100% 였고, 어디까지나 어떻게 의 문제였을 뿐이다. 그 뭔가가 너무너무 궁금했다. 도저히 예측이 안되었다. 단 둘이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단 둘이 전화로 얘기한 적이... 아 있다 있는데 내가 3번 전화걸어서 그녀가 3번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아서 우리는 그 언제 이후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난 이미 알았다.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고 있다고. 남의 연애에 관심을 갖고 기뻐하며 조언하는 사람이 많은 걸 이미 그 즉시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목소리를 들려주고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갔다. 일주일 그리고 2주일, 한 달 그리고 2달이 지났다. 1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이 지나고 있는데 깜깜 무소식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사랑의 정염은 더더욱 신비해져만 가는 것 같다. 나는 그녀의 손도 잡아보지 못했다. 당연히 나는 그녀와 뽀뽀도 못해봤다. 나는 로맨스의 기대가 찌그려뜨러진 후, 그것의 장르가 고전으로 바뀌고 나서는 그녀가 얼마나 나의 포근한 포옹을, 내 달콤한 키스를 황홀한 키스를 받고 싶어할지 혼자 많이 상상했다. 왜? 그러면 안 되나? 내가 대역죄인일까? 그런데 그때 실제 첫만남 이전에 웹 사이트, 당시 유행하던 미니 블로그를 통해 서로 친구를 통해 말은 안 해도 엿보고 추측하고 짐작하며 이미 신호가 오가고 초장에 대세는 벌써 기울었다. 그녀는 내 이상형이었다. 이상형 같은 거 생각도 안 해봤고 우습다고 여겼는데, 믿기지 않았는데 오~ 그녀가 날 좋아한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내게 다가올 수 있나 꿈만 같았다. 아, 기억이 잘 떠오르질 않는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척 궁금하지만 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그녀가 알게 된다면...... 아, 그건 안 된다! 그건 절대 안 된다! 세상 사람이 모두 다 안다 그래도 그녀가 아는 것과는 바꿀 수 없다. 당연하다. 당신 같으면 안 그렇겠나? 안 그렇다고? 알았다. 그럴 수도 있다. 아하~ 그때 그녀가 입었던, 일할 때 입던 유니폼을 보러 덩실덩실 그곳으로 날아갔어야 하는건데 이제 와서 그걸 못해봤던 게 후회된다. 제대로 된 선물도 해줬어야 하는데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내가 짐작하기로는 그녀가 나보다 주량이 더 센 것 같은데 나중 만나 같이 술 한 잔 하게 된다면 작전을 잘 짜야할 것 같다. 먼저 훅 가면 곤란하다. 그녀는 엉덩이도 완전 크다. 딱 알맞게 빵빵하다. 가슴은 잘 모르겠다. 작아도 괜찮다. 난 작은 걸 좋아한다. 그녀는 강아지도 키운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날 사람 환산 나이로 봤을 때 듣기로는 그녀의 강아지와 내가 비슷한 연배였는데 지금쯤은... 아 짠하다! 그녀는 솔직히 나와 많이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잘, 많이 잘 맞추어 줄 자신이 있다. 또 때때로 나는 방력있게 그녀를 리드할 것이다. 막 무질서하게 잡아끄는 것이 아니라 분석한 후 예측을 거쳐서 보기를 제시하면서 논거를 바탕하여 쏙 빠져들도록 만들 자신감이 티끌만큼은 있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게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도 남잔데 나중 혹시 마음이 벌꿀처럼 난봉꾼처럼 동하면 어떡하지, 어떻게 한담, 어떡하랴! 이렇게 된 것이 오히려 잘 된 거 같다. 소설이 잘 안 팔리면 다시 무명으로 돌아가는 거고, 그 다음은 또 그때 가서 보고. 아니다. 아니다. 꼭 그런 것 만은 아니다. 뭐라 말은 못 하지만 어떻게 말로 설명을 못하겠다. 물론 아직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도 있다. 아마 많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녀가 가죽점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대학교 꽈 점퍼는, 그리고 내가 그걸 그냥 입어보고 싶어하는 것을. 그리고 내가 인성씨와 비교 자체가 안 된다는 것까지도. 그런데 미래의 만남도 고민이다. 같이 어디를 가게 된다면 그녀가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니까, 눈부시니까, 탁월한 기쁨을 동반한 천상의 곡조가 울려퍼니게 만들테니까 걱정이다. 그녀가. 그래서 과거에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따금 가끔씩 시기나 질투를 불러일이켰을 것 같다. 아마도 분란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래도 적지 않은 인간적인 시샘은 꽤 양산해 내었을 것 같다. 때문에 그녀는 지금껏 친구를 별로 못 사귀었을 것이라는 예측이 거즘 들어맞을 것이라는 게 문제지만. 절반은 그렇게 확신한다. 또 그래서 그녀의 몇 안 되는 친구들께 더없이 감사하지만! 엑셀 파일에 같이 해볼 것과, 같이 가 볼 곳은 몇몇 적어놨는데 나머지는 또 뭐가 있을까, 어떤 사진을 찍을까, 무엇을 먹을까, 투표를 같이 하자, 쇼핑을 할까, 선물을 사자, 민원을 내자, (사소하게만) 기부를 하자, 무엇을 입어보자, 전시회와 미술관과 음악회와 동물원과 평범한 놀이공원 말고 폐쇄된 오즈의 마법사 같은 데 가보자는 할 일 하기는 안 적었던 걸로 기억한다. 조금은 적었겠구나. 잘 모르겠다. 따라서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그녀는 이런 내 맘을 알고 있을지, 그녀는 어떤 낭만을 꿈꿀지 궁금할 뿐이다. 그런데 동네에서 길가다 마주치는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와 직장에 계시는 아저씨들도 모두 이런 과정을 거치셨다. 많은 학생들도 꿈꾼다. 대개 그런다. 곧 그게 인생이다. 또 사랑 그런 거 내 옆을 그냥 스쳐지나가버릴 수도 있고 그거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게 인생이다. 그러나 영화나 TV에 나오는 인성씨를 보면서, 거리에서 꽃과 동물과 타인의 웃음을 보면서 인성씨와 동음이의어인 인성을 생각하는 것, 그것도 인생이다. 단지 내가 앞으로 흔한 그래프 곡선을 그릴까 봐서 더 이상 큰 소리는 못치겠다. 수십 년, 작게 잡아 수년 전에 '나는 오직 그대만을 영원히 사랑하리라!' 이와 같은 자기 내면의 동요를 그 마음을 글로, 노래로, 연기로 또 삶이든 인생이든 뭘로든 멋드러지게 선보였던 배짱이와 개미들에게 장구한 세월이 흐른 후 지금은 어떠시냐고 조심스럽게 묻는다면... 그건 뭘까? 뭐긴 뭔가. 그걸 지칭하는 한마디, 그것은 바로 실례다 실례! 그런 말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은 뭐다? 눈치가 없다거나 밉상, 매를 번다 라고 한다. 홀로그램에 씌여진 글씨는 바로 세월이 변질시키는 것일까? 순정에서 마수로? 어떻게 저것과 그것이 비교될 수 있단 말인가. 방문이나 카페 출입문에 걸린 표딱지, 문이 열었네 닫혔네 방해하지 마시오 들어와도 괜찮아요, 그것이 정말 과연 사랑이라는 그 고귀함과 견주어도 정녕 그래도 된단 말인가? 어? 진짜 그래도 괜찮나? 순수라는 이름의 아이스크림 포장을 뜯고 딱 깨물었는데 치아가 빠진 상황, 아주 드물게 극소수 유명인은 체험한다. 일반인의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이자나?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니까. 둘 다의 인생도 결국 비슷하다. 매우 사실적인 분장을 바탕으로 하는 칼리굴라와 네로 황제에 대한 꽁트도 유행을 탄다. 하물려...! 뭔가 심기가 불편해 토라진 그녀, 말문은 막히고 약간은 창백한 안색이 울상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 문제. 당신은 그 경과를 귀신 같이 읽고서 또 슥 그녀의 마음을 녹여주고 포근히 품어주기, 바로 그것이 알고 보니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우리들 일이었다. 우리들! 그게 남자들 주업이더란 말이다. 미래를 위해 수련하고 생계를 위해 감수해야 할 어떤 방편 같은 일이 아니라 응당 즐겨야 하는, 그건 결국 그런 생활 같은 것이었다, 생활. 그러다 보면 막힘없이 술술 나오는 말에 자기도 깜작 놀라서 모래성을 쌓는 허당이 된 듯한 허상을 깨닫게 되고, 그런 다음 유치원을 졸업하고, 새로운 시장에 들어서서 경험을 쌓으면 이제는 드디어 고급스러운 농담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청자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처음에는 설득되어 엮여들고, 살살 말려들고, 슬슬 동기가 부여되고, 착착 감겨서 감화되고, 쩍쩍 달라붙어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경지, 처음에 웃고 계속 웃던 얼굴을 이윽고 나중에는 울상과 체념과 더 나아가 달관의 단계로 이끌고야 마는 바로 그 왕좌. 화자는 이때 아~ 멋져 하면서 뭔가 해낸듯한 표정일 테고. 그 경지는 왠지 모르게 글 같은 말 바로 그 선경이다! 자, 판도라의 오르골이 연주되도록 다이얼을 돌려 카리스마 넘치는 잘 생긴 DJ가 선곡한 황홀한 음악을 글로 옮겨보자...속닥속닥, 퍼벅퍼벅, 퍼덕퍼덕, 따봉, 잇힝, 키힝, 뿌우뿌우, 뿌잉뿌잉...... 그러나 잘 되지 않는다. 고장이다. 판도라인지 오르골인지 아니면 그 신통한 화술인지. 그래봐야 나오는 건 의성어나 의태어뿐이군. 잘 안된다. 어렵다. 그건 결국 내 딴에는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어디서 말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말, 말상, 말 꼬리, 말의 꿈, 말 허벅지, 마력 그리고 애마부인...... 혁신적인 플랫폼을 만들고 신종 햄버거 문체를 탄생시켜도 시원찮은 판국에 신제품을 살려고 멀리 어디에서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기다렸는데 내 바로 앞 줄에서 딱 매진? 비유가, 비유만 괜찮네. 어디를 보니 피자배달 시간제 근무를 1년 해 본 친구의 말이 그렇더군. 넉넉한 동네와 가난한 동네에 배달을 했을 때의 차이에 대해서. 그건 생략하고 음 그걸 참고해서 생각해본다. 오, 가난? 아 가난! 커피나무에서 커피가 열리는 것처럼 자격지심도 인간의 기본 감정 가운데 하나다. 그거 없으면 로보트다. 그래서 체급이란 게 존재한다. 그러므로 경마장과 경륜장에서는 핸디캡을 그야말로 과학적으로 적용한다. 안 그러면 즐거움도 균형도 관중마저 없을 것이다. 경기장 문 닫아야지. 경제 같은 넓은 개념까지는 말할 수 없다. 누구나 엇비슷한 경험 최소 한두 번 있을 것이다. 카페에서 출입구는 1.5층 높이고 내부 공간은 1층 높이, 그런데 문에 있던 당차고 젋은 여성 1인과 안에 앉아있던 건장한 남성 1인이 갑자기 아무런 말이나 외부 개입이 없었는데 눈빛 한 번에 말다툼의 불꽃이 팍 튀기는 상황 같은 거. 또 나는 형 집에 놀러가서 2층 옥상에서 옆집 개를 구경하다가 그집 주인장과 대화를 하게 됐다. 난 형집에 놀러왔다 그랬는데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은 거기 그분이 사셨나... 동생이라니... 라면서 까딱 엇나갔으면 일이 이상하게 꼬였을 텐데. 그외 도로에서든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면 괜한 오해와 모순이 없을 수가 없다. 바로 이런 것이 자격지심과 연관성이... 부족하구나! 누구나 먹고 살기 힘들다면 삶의 자세와 태도는 보통 이렇게 된다. 술도 더 독한 걸 먹고, 입도 더 거칠어지고, 선거율도 떨어지고, 운전도 그렇고 여러 기준들의 그래프가 비교적 격이 올라가기는 힘들다. 바탕이 나뻐서 그런 게 아니라 똑같은(!) 인간이지만 쉬운 말로 여유가 부족하고 다른 말로는 덜 행복하니까. (지금 이 얘기만 단행본으로 떼어내서 책 좀 팔고 여유 자금을 챙길까? 아니다. 뭐 굶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먼저 그 자세와 태도를 바꾸면 먹고 살만 해진다? 그럴까? 그럴 것이다, 는 가정과 임상실험에 대해 책을 쓰면 그것은 대개 인문교양서 분야 베스트셀러를 차지한다. 어디서나 언제든지 얼마든지 중복되어도 괜찮은 단골 메뉴. 원래 이런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안 하던 일을 하면 뭔가 불안한데 미래를 내다보다가, 앞날을 예측할려다가 신기도 떨어지고 예언도 잘 안되고 직업마저 바꿔야 할 것 같다. 아직 인기는 없지만 비록 3류 소설가에 불과하지만. 그런데 뭔 얘기하다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삐─ 삐─! 어쨌든 나중 알고 보니 그녀는 영화에나 나오는 공주 + 톰보이가 아니라 정말 꿈만 같은, 한마디로, 숙녀라면...! 아~ 나도 모르겠다.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다시 유치원에 가야할 듯 하다. 그러나 뿌옇게 보이는 앞날 언제쯤에는 탐정 중의 탐정께 의뢰하지 않아도 기다려지는 기대감, 사모할 수 밖에 없는 탐욕, 개화와 낙화, 행복감을 불러오는 흔들의자와 세상을 새장으로 하는 파랑새가 우리를 그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므로 나는 조금 과장하자면 그때, 그녀에게 내 모든 것을 걸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추함 그런 걸 본위로 하여. 1번의 데이트 중 극장에서 영화 2편을 보는 걸 좋아하는 그녀, 유독 백화점을 선호하는 그녀에게 난 다른 상대와 두 탕 뛰는 카사노바는 못 되지만 큰 실망은, 자잘한 불만족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이름을 외쳐 그녀를 불러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절대 그저 그렇게 시시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는 나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그녀는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아무런 근거 없는 믿음도 역시 있었다. 논거는 빈약하지만 일반인의 사랑은 이로써 완성될 것이라는 절대적인 미완성의 느낌이자 여백의 미는 결코 없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려도 그녀는 나를 나만의 연인으로 만들 것이라는 확고한 신뢰는 기만적인 만큼 굳건했다. 나는 이상한 방법으로 최면을 걸어 그녀를 영원한 내 사랑의 포로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일념이 있었다. 그녀의 마음도 나와 같을 것이라는 추측은 예연이 되어 어느새 그녀를 세뇌시키고 있었다. 이 사랑은 결단코 그냥 그렇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이미 수정구슬에 써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혼자서 공상도 하고 잡문도 끄적거리지만 나는 옛날에 숫기가 참말로 없었고, 지금도 넉살은 부족하고 말도 늘지 않고, 글은 오히려 퇴보하는 것만 같다. 나중에 그녀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할까? 미리 준비해둘까? 이런 글은 남이 보면 안 될 것 같다. 완전 오그라든다. 그래서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일기 형식의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다. 어쨌든 듣기 좋은 말을 많이 해주고, 종이컵 전화 놀이도 해야 할 텐데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유부남으로 늙어가면 약~간은 능글맞고 유들유들해질 텐데 말이다. 또 그녀는 그, 그 순간 어떤 소리를 지르고 표정은 어떨지 궁금하다. 클레오파트라와 흑백 TV 시절의 명배우들을 비견하여 불모의 세계와 가난과 아름다움, 꿈의 궁전과 실낙원과 작은 행복에 대해 찬찬히 생각하게 만드는 그녀. 나는 나중 그녀에게 말해줄 것이다. 고백하고 또 때로는 따지고 대개는 귓속말로 속삭일 것이다. 나는 옛날에 코 밑 입술 끝부분 약간 못미쳐서 그 윗부분에 가수 마돈나처럼 점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수도승의 예언과도 같은 신통한 충고에 자극받아 그걸 빼버린 일이 있다고. 그땐 통찰력이 부족했으나 지금도 별반 다른 것 같지 않다고. 나는 미운 오리 새끼고 너는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공주라고. 미녀와 야수라고. 넌 대체 언제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냐고. 우리 사랑은 누가 허락했냐고. 날개는 대체 어디 가버렸냐고. 그러면서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것이라는 관능과 삶의 신비에 대하여 일러주면서, 한없이 현현한 열애를 언제까지라도 지속하며 그녀의 마음을 빙빙 돌렸다가 뱅뱅 들썩거리게도 하고, 마침내는 허공에 붕 띄우는 것도 자유자재로 하겠지만,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경탄과 매료와 고혹과 낭만과 환상의 오점으로 딱 하나는 여운으로 남겨두는 응분의 애교에 대해서는 미처 힘이 닫지 않는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싶다. 적극적으로 그러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남자라는 고독감과 남아의 기상, 숙녀에 대한 의무와 배려, 사람으로써의 인정, 신사로 남고 싶은 욕심, 나른한 오후에 잠시 잠잠해지는 응석, 와락 불쑥불쑥 치솟는 수컷의 훈훈한 마음 즉 손가락 하나만 까딱할 힘만 남아 있어도 남아는 소설을 쓴다는, 꽃을 꺾고 씨를 뿌리고 한그루(?) 다홍빛 사과나무에서 뽀얀 꿈과 청초한 낭만과 탐스런 환상을 따먹고 설을 푼다는, 타고난 원래 그런 것일 뿐이라는 정감어린 수놈이자 상남자와 마초의 습성, 바로 그것 말이다. 때에 따라서 본심은 쏙 빠지고 그 자리에 원본을 꼭 빼닮은 완벽한 가식을 앉혀놓고 곁눈질 한번에 뺀질뺀질 상상으로 최고의 기쁨을 누리기. 그럼과 동시에 한참 찾았자나 이브, 어디 갔었어? 이래야지. 그러면 그녀는 이러겠지. 내가 가긴 어딜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뭔 생각했길래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처럼 잠꼬대를 맨정신에 하는 거야? 자기, 뭔 생각했어? 설마...? ...... 이게 뭐지? 이게 뭐야? 그런데 무엇을 쓸려다가 여기까지 와버렸지? 쓰다보니 주제가 변질된 것 같다. 바로 이런 식으로! 진정, 남자들은 모두 그거 하나만 원할까?> 그들 블로그에 올라온 포스트를 보니 그건 누가 익명으로 올린 것이었다. 어쩌면 조니일 수 있다. 그럴 공산이 크다. 저쪽에서의 생활과 테슬라에서의 삶은 하늘과 땅 차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아무런 차이도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글 수준은 그냥 스무살 정도 쯤으로 보이는데 그래도 테슬라가 정신연령을 절반쯤 낮춰준 것으로 보인다. 고맙게도.
무명 블로그에 업데이트될 단편에 대한 소개가 길었다. 다시 테슬라에서의 그들 생활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믿지 못했고 웃었다. 1주일이 되어도 웃었고, 2주일이 시작되어도 웃었다. 그리고 고향이 없다거나 새로운 신분으로 새로운 인생을 산다는 것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를 생각했다. 1달이 됐을 때는 그들끼리 모여 돌아갈 수 없는 아쉬움과 회항할 수 있는 방법, 뭔가 도움이 되는 정보의 입수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모든 것이 공짜였기 때문에 상당히 쾌적한 동네에 각자 1인이 살 수 있는 집도 생겼다. 자동으로. M인지 N인지 수트 한쪽에 테슬라 로고를 붙인 친구가 나타나더니 일사천리로 모든 것을 안내해주고 정착을 도와주었다. 테슬라 관청에 들려도 되고, 굳이 갈 필요도 없었다. 이웃도 알게 되고, 아무거나 하고 싶은 일도 생겼으며 또 새로 사귄 친구도 생겼다. 그렇게 1년이란 장구한, 달리 보면 눈 깜짝하면 지나가버릴 기간이 지나갔다. 일곱 난쟁이가 아닌 일곱 어른의 친구들은 그날을 기념해서 닉의 집에 모두 함께 모였다. 테슬라 생활 1주년이다. 닉은 여기서 당연히 혼자 살고, 마당에는 풀밭과 수영장이 있었다.
「너네들 모두 어떻게 지내니?」 가벼운 음료를 마시면서 닉이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제임스가 첫 타자로 등장한다. 「뭐 특별한 일은 없어. 1년 동안 뭔 일이 있었는지 모조리 말한다면 그걸로 책 내용을 가득 채운다면 아마 독자로부터 욕 바가지로 얻어먹을꺼야. 너네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번도 저쪽으로 돌아갈 희망을 버린적이 없어. 언젠가 기회는 올 것이고, 차근차근 자료를 모으면서 나름 각 요처에 정보원도 만들었어. 그런데 있잖아, 그렇게 뭔가 저쪽에 대한 소문이랄지 잊혀진 사건과 그와 관련된 의견을 책이든 사설이든 잡지든 어떤 형태로든 발표한 이들과 연락이 닫고, 또 좀 친해져서 뭔가를 캐내려고 하잖아, 그러면 어김없이 그 친구들이 직장을 옮기게 되던가 무슨 연구원이 되어 멀리 떠나던가 아니면 갑자기 연락이 안되던가 막 그랬어. 하나같이 공통적으로 말이야. 참 공들이고 땀 흘려서 이제 좀 틈을 엿볼까 하면 모두 떠나가. 꼭 항상 사랑에 실패하기만 하는 그런 슬픈 눈빛의 여자나 언제까지나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상남자가 된 듯 하다니까. 패배주의가 이런 게 아닌지 모르겠어. 참 사람 힘빠지게 말이야. 한두 번도 아니고.」 라고 제임스가 말했다. 뒤이어 하워드가 말을 받는다. 「나도 제임스가 겪은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난 먼저 동네 단골 술집 위주로 발을 넓혀나갔어.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건 뭐냐면 모두 꼭 약속이나 한 듯이 저쪽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첫째, 말 수가 적어져. 둘째, 말을 돌려. 셋째, 딱 그 얘기를 건네면 모른다고, 처음 듣는다고, 잘못 아는 거 아니냐고, 술이나 마시자고, 자기가 좋은 NC를 알고 있는데 같이 가자고, 여자 소개시켜 주겠다고 모두 똑같이 그렇게만 반응하더라. 거기서 멈추면 다시 즐거운 분위기로 돌아가고 계속 친하게 지내는데 선을 살짝만 넘자나~ 그러면 다들 떠나가. 냉정하게 연락을 끊어버려. 그 가운데 마음 약하고 선하고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보아하니 어떻게 잘 설득하고 다독이면서 조금만 더 구슬리면 뭔가 나오겠다 싶어서 어느 날 골프장에 같이 갔어. 그렇게 같이 딱 첫 번째 홀에 들어서자마자 삐~요~삐~요 울리더니 무슨 이름을 알 수 없는, 옷도 특이하고 뭔가 살기도 느껴지고 딱 자세 나오고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요원들이 나타나더니 조용히 그 친구를 데려가던데. 그 뒤로 그 친구를 두번 다시 볼 수 없었어. 매번 그런 식이더라니까. 참 나, 실은 저쪽에 대한 동경이랄까 향수 같은 감정, 그런 거 이젠 잘 느껴지지도 않아. 스며든 물이 빠진 걸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하워드는 캔 맥주를 하나 따서 마신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마크가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덥썩 실토하기 시작한다. 「난 말야, 저쪽에 살 때도 그랬지만 여기와서도 탐험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하겠어. 그래서 나는 차를 타고 동서남북으로 어지간한 길이란 길은 모두 다 가봤어. 그러나 실패했지. 차라리 길이라도 잃어버렸으면 모르겠는데 전부 뭔가 새로운 풍경이 이어지고 이제 뭐 좀 나오겠다 싶으면 언덕을 넘어 뿌연 경치를 확인해보면 다시 이곳 도시로 진입하고 있는 걸 깨닫게 돼. 도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없나봐...(침묵)... 휴양지에 가면 왜 그 슈퍼카를 대여하여 경기장에서 타는 거 있잖아. 그런 것처럼 여기도 해변가에 1인용 잠수함을 빌려주더라고. 그것도 타봤지. 하지만 바다 속 길도 막혔더라고. 여긴 꼭 고립된 요새 같아. 난 이제 저쪽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흐릿해져 가는 거 같아. 여기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갖고 싶은 거 다 갖고, 사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그런 거 모두 다 할 수 있어. 거의 못 누릴 게 없어. 고대 로마시대의 황제던가 누군가가 누렸다는 그 이상한 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부럽지 않아. 지금 이 생활에 별로 불만 없어. 전혀. 지금이 좋아. 만족한다구. 그동안 너네들은 놀러들 좀 다녔니? 난 괜찮은 바닷가 관광지에 있는 특급 호텔에 틈틈히 가서 쉬었다 오곤 해. 그곳 특실에 머무르면서 짐은 거기 놔두고 돌아다니기도 하다가 호텔 여직원을 어떡하다가 알게 되서 그녀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더 많아졌어. <내일 아침에 결혼합시다> 같은 말은 떠오르지도 않아.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즐거움은 그 짝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막 환희 그런 단어 있잖아. 그래서 이상하게 한쪽으로는 딱 부정적인 단어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더라고. 실직. 실연. 실언. 좌절. 난조. 비탄. 배신. 실패. 혐오. 회한. 고뇌. 악몽. 분노. 잠시 허언증. 허탈. 허무. 환멸...... 다른 사람도 그런 경험 할 꺼 같아. 한두 단어로 설명될테고 말야.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어쩌면 그녀가 날 꼬신 거 같아. 용감한 숙녀였어. 오! 보고 싶다! 이번 모임 아니었으면 한번 다시 내려갔다오는 건데 다음 번에 가봐야겠다. 뭐 나 사는 건 이래.」 하워드가 저쪽과 다른 이쪽 생활에 너무 젖었기 때문인지 너무 큰 환경의 변화 때문에 정서적으로 뭔가 심경의 격동을 겪고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말하는 모습이 예전에 비해 많이 그 화사함이 빛바래 보인다. 말의 내용도, 언행도, 억양도. 방금 전에는 마크가 말했지만 둘 다 좀 그런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거다. 그때와 지금. 그리고 향긋한 차 한잔이 식혀질 시간이 지나서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까치발을 하고서 한번은 떠봐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진짜 궁금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렁차게 제임스가 마크에게 묻는다. 「마크. 그녀의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되니? 혹시··· 영화? 나 영화?」 이 얘기를 듣고 가만 있을 조니가 아니다. 그러나 아직, 이라고 판단했는지 반 박자 쉰다. 그러다 갑자기 엇박자로 마크가 바로 질문에 답한다. 「그녀는, 수정이야. 수-정!」 아, 조니는 한 발 늦었나 했지만 이젠 더 여유있는 모습으로 마이크를 잡는다. 「수정? 뭐 크리스탈? 사파이어? 에메랄드? 루비? 설마 4월의 탄생석 다이아몬드? 아니면 모조품 큐빅은 아닐 테고... 어, 다이아몬드 하면 생각나는 작품이 뭐드라. 어쩌면, 라라? 아닌가? 아, 로─라! 그래 로라, 맞지? 맞네 맞어. 이름 괜찮은데. 근데 이름이 왜 나왔지...?」 마크는 점점 곤란해지고, 이제는 닉도 대화에 참여한다. 「내가 봤을 때는, 척하면 척이지. 그녀는 수정이야. 그냥 수정! 의외로 간단한 문제를 그렇게 못 맞추고 그러냐? 처음부터 답은 나왔잖아. 뭘 넘겨짚고 그래? 괜히 없는 상징 붙이고 은유냐 직유냐 비유냐 뭐 그런 걸 귀찮게 추측하고들 그러냐고. 마크 얘 원래 단순한 애라니까.」 이제는 마크가 아예 말 할 시기를 놓쳐버렸다. 인터넷에 떠도는 웃긴 글 짧은 거 몇 개 보고 잔잔한 웃음을 지을 시간이 지나서 하워드가 차분히 마크에게 묻는다. 「진짜니? 그녀를, 만났어? 만나서, 사랑에 빠졌니? 마크!」 이제는 마크도 말 할 수 있다. 「아니... 그거... 뻥이야!」 ...(침묵)...(효과음)... 이젠 알렉스가 넌지시 운을 띄운다. 「그간 동향을 봤을 때 너네들 사는 동네와 생활은 지극히 정상적인 거 같아. 그러나 난 그렇지 않아. 그래, 비정상이야. 나도 여러 번 관찰하고 되돌아보고 또 보고 다시 주의깊게 모든 것을 살펴봤어. 그래서 결론이 났어. 내가 사는 동네가 이상하다고. 거긴 뭔가 좀 이상해. 깨끗하고 조용하고 집들도 이쁘고 풍경도 좋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왜 그런 줄 아니? 우리 동네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누구게? 나야! 우리 동네에서 가장 전력 소모량이 많은 집이 어딜까? 우리 집! 우리 동네에서 젤로 사람 냄새, 사람 소리, 사람 모습이 최소로라도 보이는 곳이 어디겠니? 우리 집이지! 또 우리 동네에서 거리에 가장 많이 출몰하는 사람은 누굴까? 나야! 우리 동네는 저쪽 세상을 예로 들면 부촌이야. 그런데 사람이 안 살아. 음, 살긴 사는데 꼭 한 달에 한 번씩만 들렀다 조용히 떠나는 거 같아. 그래서 분위기 쎄~하다니까. 그렇지만 책도 쓰고, 사진도 찍고, 작곡도 공부하고, 영화쪽도 알아보고 있으니까 별로 신경쓰지 않았어. 때문에 동네에 있는 찻집에 들렸을 때도 그 어색함을 참 일찍도 알게 됐지. 그게 무엇이냐면 우리 동네에 하워즈 엔드라는 찻집에 하루 1번씩 들르곤 하는데 처음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어. 그 한적한 동네에 그렇게나 북적대는 카페라니! 왜 그걸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았나 몰라. 감도 많이 떨어지고 직관력도 뒤쳐진 데다 너무 작품 생각만 열중하니까 주변을 잘 살피지 못하나봐. 만능키처럼 두가지 일 정도는 동시에 거뜬히 해내야 하는데 그건 지금 좀 어렵나봐. 내가 하워즈 엔드에 들리면서 왜 그럴까 의아한 느낌을 감지한 건 거길 들린지 1주일째 된 날이었어. 나도 모르게 그게 딱 보이더라구. 거기 들리는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걸. 사람 개인이 아니라 전체 양이. 딱 보니까 그들은 거기 들어왔다가 일을 본 후 다시 들어온 출입구로 나가지를 않았어. 복도 중간에 관계자외-출입금지 라는 팻말이 붙은 문이 있더군. 글쎄, 그쪽으로 인력이 세는 걸 몰랐지 뭐야. 그런데 1단계가 다가 아니었어. 어디 사무실에서 누가 확인해서 Y자로 걸러주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그곳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꼭 카라멜 마끼아또(투샷 추가)를 시킨 후에 들어가야 하더라고. 안 그러고 거길 들어가면 주방이 나와. 때문에 난 주방에 최소 3번은 갔다 왔어. 거기도 주방장이랑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던데. 몇 번 더 들어갔으면 친해질 뻔 했다야.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친 후 나도 쓰리샷 추가한 카라멜 마끼아또를 시킨 후(투샷 추가 이상이면 괜찮더라고) 관계자외-출입금지 문을 열고 들어갔지. 딱 문을 열어보니 보이는 건 복도였어. 복도를 지나서 또 문이 나오더군. 그게 2단계야. 거기서 전날 그들 즉 관계자들이 정한 암호를 입력하는 장치가 있어. 암호는 날마다 바껴. 암호가 틀리면 검은 옷을 입은 친구들이 나타나서 당사자를 데리고 외부로 데리고 나가. 양쪽에서 뜸어서 말야. 암호가 맞으면 문이 열리지. 나라고 첫술에 배불렀겠냐. 나도 당연히 덩실덩실 들려서 수차례 나가게 됐지. 암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비밀이야. 이제 3단계, 3단계는 흰색 턱시도를 입은 덩치들이 샅샅이 몸수색을 한 후에 그 앞에 있는 NC에 입장시켜주더군. 듣기로는 그곳은 무슨 공연을 보여주는 곳이래. 편하게 음식과 술도 마시면서 말이야. 그게 핵심이었던 거 같아. 어디 어디 가면 볼 수 있는 그런 거 말고,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닌 것, 오랜 기다림과 함께 당신은 선택받았다고 다정한 속삭임을 따스한 기분에 으스스한 입김과 상상력을 당장 발동시키는 긴장감과 함께 받는 경험같은 거. 자신이 평생 입력했던 검색어 그 가운데 그냥 호기심이든 어쩌든 뭔가 특출난 걸 암시하는 까무러칠만한 그래서 기대없이 아무 기대없이 키보드를 눌러서 글씨를 쓰고 엔터키를 눌러본 무수한 대상 가운데 그래 그거─그래 뭔 줄 알 꺼야─그래 넌 평균이야─그래 넌 정상이라구─아니야 넌 비정상이야─그래 넌 반틈은 정상이야─그래 넌 문명인에 도덕적이고 인류애가 넘쳐─그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아서 뜨끔하겠지─그래 왜?─그래 뭐가?─그래 큰 잘못은 없지─그래 결과물을 원한 게 아니었으니까─그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삼자대면 하고 나면 섬뜩하니까 공상과학 영화처럼 찍어내는 인조인간처럼 나도 왠지 모르게, 어딘가 모르게 꼭 막 그런 것만 같아서... 오오, 아! 난 앤디 워홀의 작품을 볼 때면, 기억이 떠오를 때면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든다네. 물론 어쩌다가. 아무튼 그 3단계를 풀기 전 날 고지를 바로 눈 앞에 두고서 내 마음은 점점 부풀어올랐어. 점점~ 풍선처럼~ 하늘로 올라갔지. 바로 그런 고조감 그걸 충족시키는 어떤 쇼가 있을 거라고 확신한 후, 드디어 출입방법의 전 과정을 알아내고, 배후를 예측하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준비를 마친 후 나는 하워즈 엔드로 가는 일만 남았어. 딱 그날이 됐어. 달력에 표시한 날. 일명 D-day! 나는 하워즈 엔드 좌표에 도착했지. 그런데 이게 뭐니? 이게 다 뭔 소란인지... 글쎄, 하워즈 엔드가 없어져버렸네. 건물 자체가! 아주 말끔하게! 아~ 이런 일을 다 봤나, 맙-소-사! 참 황당하더군. 당시 내 기분이 어땠는지는 설명을 못하겠어. 그건 그냥 머릿 속이 하얗다? 그게 전부같은 그런 거니까. 물론 명석한 추론이나 쓸만한 망상 한 조각도 당시 내 심경에는 아무것도 떠오를 수 없었다네. 그러다 어~라 살짝 의심가는 사람이 추억속의 인물이 누군가 있긴 하더라구, 딱 한 사람. 자네들도 알잖나? 그 소녀! 400살! 그때 삼지창에 대해 물어봤으면 아마 한 30분은 더 족히 연설을 들었을지도 몰라. 그럴 수 밖에 없었잖아. 누가 말은 안 했지만 그분이 그때 저잣거리라는 무대에 서서 몰입하는 모습을 보고 조금은 모두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아. 타고난 재능을 만방에 알리고 나중 좋아서 후천적으로 발생한 예능의 자질을 스스로 도취되어 뽐내는 연사가 아니라, 그것도 좋고 인생이지만, 우린 그를 일종의 학자로 봤기 때문에 말이야. 또 도의적으로 우린 그분의 말을 끊는 무뢰한이 될 수는 없었으니까. 분위기가 그랬잖아! 그녀에게 뭔 재주가 있긴 있었어, 흠.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로 난... 음... 한동안 방황했어. 뭔가 너무 허탈해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더라고. 마치 얼빠진 머저리 마냥. 면책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그럴싸한 면피와 관련된 법률용어를 떠올릴려고 애쓰는 초-저능아처럼. 그래서 난 산책을 유난히 많이 했고, 공원 의자에서 몇 시간 앉았다가 그네에도 앉아 졸다가 자다 깨다 막 그랬어. 등산도 했어. 그런데, 그런데 전화위복이랄까, 아까 누구니, 어 그래 마크처럼 멀리 또 열심히 구석구석 살피지는 못했지만 그때 좀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게 가능했나봐. 한 방향으로만 가는 거. 어, 저기! 라고 정하고, 그곳을 보고, 그곳으로만 가고, 그곳으로 가야 한다만 생각하고, 전진 전진 행진 행진 간다 간다 가자 가자 힘내 힘내 영차 영차, 그렇게 말이야. 영화 주인공으로 적격인 뭘 하면 포기란 걸 모르는 그 있잖아, 한마디로 무식한 거! 그러다 어느 날 산에서 나는 철조망을 발견했어. 흔히 아니 드물게라도 볼 수 있는 그런 거 말고. 어마어마하게 높고 큰 거! 그건 뭐랄까 마치 거인에게나 그냥 철조망이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 그건 SF였어. 그런데 그 거인이 작은 거인이면 어떡하지? 어쨌든 원래 철조망이란 건 구역 설정의 의미가 큰 거 잖아? 그래서 난 그걸 보고 혹시 내가 있는 여기가 현생이고, 저기가 전생? 또는 이곳은 현세 저곳은 내세? A는 현재 B는 미래? 그럼 두뇌회전이 어떻게 됐겠니? 우리가 1년 전에 살던 곳 그리고 지금 여기는? 그쪽과 이쪽은 무슨 관계일까? 바~로 그 순간에 (손가락~딱) 제정신이 들어왔지 뭐야! 꼭 상황극이나 꽁트에서 어떻게 어떻게 상태가 안 좋아졌는데, 다시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원래로 돌아가는 듯이. 무릎 밑을 똑똑하면 조건 반사, 그녀의 어딘가를 슥 체온을 가하면...... 이런, 젠~장! 뭐시여 이거, 참 나 뭔일인지 얘기하다보니 다시 사람이 이상해질라고 하네. 그거 다시 생각하면 내가 다시 예전처럼 똑같이 이상해지는 것만 같아. 대관절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니까. 그만 얘기해야겠다. 아무튼 내가 경험한 이상한 일은 이게 다야. 말로 하니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프로들 붙으면 이걸로 영화 한 편 뚝딱 나온다니까.」 딱히 재밌지도 우끼지도 게다가 신비롭지도 심지어 괴기스럽지도 않았지만 뭔가 혼이 육신에서 빠져나간 것처럼 듣다가 멀쩡한 원상태로 복귀하는데는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고 그래도 1~2분은 족히 걸렸다. 누가 바깥에서 문이라도 쾅쾅 두들겼다면 햇볕 쨍쨍한 대낮이라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 잡은 뒤 케빈이 말한다. 「와~ 점차 대화가 재미있어지는데! 이제 좀 원래처럼 흥미진진해질려고 해. 이게 평상시 우리 노는 수준과 속도고 궤도라고. 이번에 내가 공개할 껀 말이야. 이게 좀 애들 장난 같지만 그래도 꼭 그렇다고도 볼 수 없어. 그래서 여러 번 확인했고, 또 사람을 바꿔서도 재차 검증했지. 어떤 수학공식을 발견하거나 미제 사건의 비밀을 푸는 것처럼 논증을 마련하고 증명을 얻어내고야 말았지. 아무래도 나 보다는 집주인인 니콜라스가 아니면 조니가 설명해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케빈의 바톤을 이어받은 조니가 말하기 시작한다. 「오늘 우리가 닉의 집에서 모이자고 한 이유가 있어. 우리가 테슬라로 처음에 넘어온 이후로 누구나 그랬을 꺼야. 이곳의 생활이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는 모두 예상하지 못했을 꺼야. 예측의 타당성보다도 우리는 돌아가야 했고, 갈 수 있었고, 가는 건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일이 잘 안 풀렸어. 운이 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운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고. 그러나 잘 안 풀린 일 치고는 또 상당히 특이한 체험을 하면서 제 2의 세상을 즐기면서 나름 즐거운 삶을 사는 거 같았지. 따라서 난 오히려 지금 이 생활을 우주여행이란 제목으로 하나의 중편소설로 쓰고 있어. 무명 블로그에 나중 올릴 꺼니까 기대하시라고. 공로상 정도는 거뜬히 확보할 테니까 말이야. 음 그건 그렇고 어, 있잖아 애들아, 잘 들어. 잘 들어봐. 중요한 대목이야.... 시작은 닉이야. 시작은 닉이라고. 좀 전에 얘기한 일들을 닉도 조금씩은 거쳤대. 누구나 조금씩 그런 것 같군. 그러다가 닉은 이상한 데 꼿힌 거지. 알잖니, 닉이 한번 한다면 하는 거. 뭐 그거랑 딱히 관련된다 할 수는 없지만 포장하면 그렇다는 말이고, 돌아와서 뭐에 핑 신호가 왔는지 그것은, 말 할께. 그건, 그것은 바로 망원경이었어! 시작은 닉, 닉이 발견한 모험의 발단은 망원경이었어. 시작이 망원경이 된 것이지. 망-원-경! ...(침묵)... 흔하지는 않지만 거의 장식용으로 들여놓기도 하고 드라마에서 보면 남의 집 놀러가서 망원경 딱 보고 와~ 이거~ 그~ 그~ 바로 그 모델?! ABCDEFG...123456... 모두 알다시피 여기는 모든 소비재가 무료잖아, 공-짜! 그래서 닉은 망원경을 보급형이 아닌 최고급으로 산 거지. 4차원이라도 발견해낼려는 것처럼. 사족을 달자면 마침 그 망원경 개발자 이름이 콜롬버스였데. 그렇게 크게 부풀릴거까지는 없지만... 저렴한 것이래도 별 차이는 없었겠다. 아무튼 닉이 취미 삼아 그걸로 막 여기저기 보다가 뭘 발견했어. 대견하게도 여자누드 그런 거 말고, 심오하게 남의 사생활 훔쳐보는 그런 거도 아니고, 바로, 바로 닉이 망원경으로 본 것은, 그게 뭐냐면 그게 뭐냐면, 짜잔~ 두둥~ 자, 이제 말할께. 그건 바로 나랑 똑같이 생긴 타인이었어. 나랑, 똑같이, 생겼데. 그 사람이! 닉은 처음에 그걸 봤을 때 난 줄 알았데. 그래서 망원경으로 보면서 내게 전화를 했지. 그런데 말이야, 망원경 속으로 시커먼 배경에 동그라미 속의 그 인간이 딱 전화를 받아야 하는데 그래야 말이 되는데 망원경 안의 조니는 전화를 받지 않고 자기 할 일을 계속 하더래. 닉은 자기가 전화를 잘못 걸었나 확인했겠지. 야─왜─뭐 해─뭘 하긴─거기 만지고 있는데─어디─어디긴 귓볼─누구 귓볼─누구긴 누구야 내 꺼지 내 귓볼도 내가 못 만지냐 자꾸 장난 할래─허구헌 날 하는 일이라곤─왜, 나쁜 친구와 어울리기라도 한 거니?─그런 얘기들. 인공지능으로 통화하게 만들고 자기는 숨어서 뭔가 꿍꿍이를 모의하고 꾸미고 즐기고 있나 라는 의심도 했는데 결국 통화 상대와 망원경 속 인물은 동일하지 않다고 결론났지. 통화상대는 지금 말하는 나였고, 망원경 속 인물은 그냥 날 닮은 사람이라고. 이거 가지고 들썩들썩 시끄럽게 굴 일까지는 아니지. 그래서 신기하다 그냥 그러고서 지나쳤어 닉은. 그런 후 1주일쯤 지나서 닉이 망원경으로 다시 그곳을 봤는데 이번에는 나, 조니를 닮은 거기 집주인 말고 두 사람이 더 있더래는 거야. 처음에 또 잘못 봤겠지 해서 눈을 비비고, 또 비비고 커피도 마시고, 화장실도 갔다 왔데. 그런 다음 다시 봤는데 진~짜 똑같데. 그래서 샤워하고 다시 봤는데 그래도 똑같길래 닉은 그날 집에서 혼자 술 마시고 뻗었데. 완전 찍! (닉을 보면서) 그랬지? 음. 그래서 이 친구는 아~ 안 되겠다. 이건 혼자 알기 아깝다. 나만 아는 건, 그건 아닌 거 같다, 그렇게 생각했지. 알려야겠다 그러면서. 일단 음 그래, TV에서는 달랑 망원경 1대로 마당에서 수영복 입고 책을 읽거나 잡지를 보는 그녀를 관찰하지만 우리는 그걸로 부족하잖냐. 그건 애들 장난이잖아. 동기부여, 집단몰입, 정밀한 관측, 치밀한 작전 이런 게 우리 전공 아니겠어? 그래서 닉이 갖춘 장비를 나와 케빈도 구했어. 그렇게 모두 장비를 들고 삼각편대를 이루어 거기 좌표에다 촛점을 맞추고 확인에 들어갔지. 야구용어에도 삼중살이라고 있잖아. 인지체계를 넓히고 객관화했어. 그 만큼 신기했거든. 또 재미있었어. 그래서 어떻게 됐게? 어떻게 됐냐 하면, 그런데, 헉! 글쎄나, 닉이 봤던 그대로 완~전 똑같았어. 닉이 경험한 그대로 나랑 케빈도 그보다 더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잖냐. 그렇게 몇 번 더 관측하다가 어머나, 맙소사! 녀석들도 어느 날 일곱명이 모였어. 거기서 세명은 확인했고 나머지 네명을 봤드니 와~우 그들도 너네랑 완전~ 똑같아 완~전! 나, 인정할께! 바지에 그래, 오줌 쌌다. 솔직히, 움찔했어. 지렸어. 됐지? 믿겠냐? 아니면 여기서 바지 벗어? ······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엄정한 물증이자 또렷한 측정을 바탕으로 한 사실 100%야. 알겠어? 뭔 말인 줄 알겠냐고, 어?」 니콜라스의 이 말을 듣고 누군가 그에 대해 거드는 반주를 슬며시 끼워 넣는다. 「그럼 오늘 닉의 집에서 모이자고 한 건 혹여, 오늘이 그 친구들 모이는 날이라는 얘긴가? 잘 믿기지는 않네만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참말인가 확인하고 싶어지는 걸 보니 꼭 내가 어린애가 된 것만 같군. 기분 좋아졌어.」 이어서 닉 대신 누가 말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미 그들의 마음은 망원경으로 한번 살짝만 보고 나서 그곳으로 벌써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육신만 여기에 외롭게 남겨둔 채로. 남자의 열정, 그 정도면 냉혹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거 뭘까? 악마가 하는 짓일까? 지금 우리가 애들 만화영화 찍고 있니? 초딩들 좋아하는 판타지? 도대체 이 소설 쓴 사람 누구야? 어른이 쓴 게 맞나 싶군. 그래서 결론이 뭔데?」 「뭐긴 뭐야. 이미 답은 하나지. 중론은 오직 하나만 가리키고 있어.」 「그럼 다음 순서는 (노래 부르는 톤으로) 우리 모두 다같이 손뼉을, (대화톤으로 돌아와서) 아니 아니, 지금... 당장... 모두 가서 확인해 보는 게 맞겠지?」 「안 그러게 생겼냐?」 「그럼~ 안 그러면 섭하지. 너~무 섭섭한 일이야.」 「그걸 왜 이제야 말하고 있어?」 「야 타!」 「뭘 타?」 「가자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은 망원경으로 그들과 똑같이 생긴 좀비들을 직접 보고, 여차하면 만나고, 괜찮다면 통성명은 나누기로 상황 봐서 그러기로 기대를 하면서 그곳으로 떠났다.
어느새 그들은 그 문제의 장소에 도착해서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그 집을 엿보고 있다. 바깥이니까 딱히 필요는 없어도 누군가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쌍안경도 하나 챙겼다. 그 집 뒤에 언덕이 있는데 거기 나무 뒤에 숨어서 보니 딱 좋았다. 그곳에는 진짜 수영장도 있고 수영장 옆에서 그 친구들이 떠들고 있는 게 아주 잘 보였다.
「당장 쳐들어갈까?」
「가서 뭐라하게? 서로 당황하지 않을까?」
「뭐 자연스럽지는 않겠지.」
「피식 선웃음이라도 짓고 복음을 전파할까? 아니면 이렇게 물어봐? 당신이, 당신이 바로 해적선장인가요? 그러다 녀석들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가면? 물론 우리도 그들을 일망타진 하는 게 목표는 아니겠지만. 괜찮은 멘트 좀 생각해 봐. 익숙한 명대사도 괜찮고. 혹시...... 쟤들 거기 갈려는 거 아닐까? 오즈의 마법사? 우리랑 반대로 건너갈려고 말이야. 원래 여기가 고향일 테고. 아니, 건너오는 건가? 그들은 모르고서 그냥 놀러갈 수도 있어. 딱히 독려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는 일이야. 요상하게 자꾸 그쪽으로 유인하고 싶은 마음도 기형적으로 아주 없다고는 못 하겠다. 잠깐 장난스런 마음에 상상하다 말았어. 그나저나 이거 완전 거룩한 우연인데. (누가 아니래?) 같이 술집에 가자고 할까? 아니면 옆집에 이사왔는데 인사도 드리고 코코아 한잔 얻어마시러 왔다고 할까? 아 나 이런~ 성장기에 청춘드라마 학습을 너무 남용하고 탐정물을 완전 탐독한 부작용이 이제야 나타나는 거 같은데! 잠복기 한번 엄~청 기네. 우린 기성세대잖아. 최소한 소녀는 아니야. 뭔 소리야? 좌우지간 악당의 소굴 그 한 복판에 들어온 기분이야. 나, 떨려!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야. 초자연적이군. 이곳은 피안일까? 혹시 저들이 저쪽으로 가는 통로가 열리는 시간을 알고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럴 심산이 커. 근거는 부족하지만 이럴 땐 직감을 따라야 해. 남자의 직감. 어때? 얘들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나만 계속 떠들고 있잖아?」
「일단 좀 더 지켜보는 게 어떨까?」
그들 가운데 망원경으로 처음에 감시하지 않았던 친구 두엇은 이렇게 생각한다. 아닌데~ 정말 아닌데~ 별로 안 닮았는데... 그렇게! 그러나 분위기-상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을 감시하고 있는 순간 그들은 어딘가로 떠날 채비를 한다.
「어! 쟤들 어디 갈려나 본데? 어떡하지? 그냥 보내 아니면 따라가?」
「지금 와서 미행하지 않으면 삶은 식상해지고 인생은 진부해지는 거야. 뻔하잖아. 알 만 하신 분이 왜 그래? 아마도 남쪽으로 갈 꺼 같지 않니? 이제 좀 뭔가 일이 흥미진진 오싹오싹 들썩들썩 재밌어질려고 하는 거 느껴지냐?」
「내가 봤을 때는 쟤들 우선은 소형차 7대를 각자 몰아서 수풀이 우거진 교외로 나갈꺼야. 그 다음에는 어디 한적하고 인적이 드문 아지트로 가는 거지. 그곳은 어떤 뭔가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음험한 분위기가 서려있을 테고. 예를 들면 1년 전에 우리가 지나왔던 오즈의 마법사 같은 곳.」
「어, 정말 얘 말 들으니까 그대로 꼭 될 꺼 같은데? 안 그래? 너, 그거 예언이야? 그냥 짐작이야? 야, 숟가락 구부려봐!」
관찰을 받는, 썩 별로 닮았다고 하기에 무척 애매하고 난감한 일곱 명의 친구들은 진짜 일곱대의 소형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미행하는 일곱 명은 스마트 포투를 각자 타고 2개조로 나누어서 그들을 추격한다. 그들은 정말로 교외로 나간다. 가슴이 찡하다. 기대감은 뛰어올라 하늘에 이르고 구름과 구름을 건너다니고 있다. 동경심 역시 부풀 대로 부풀어서 무지개가 살고 있는 저 언덕 너머 미지의 공간에 오로라를 드리운다. 쫓기는 7인이 도착한 곳은 이름은 모르겠으나 뭔가 사연이 있을 듯한 문 닫은 놀이공원이었다. 약 100미터 후방에서 차에서 내리지 않고 쫓는 7인은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조용조용히 30미터 전방까지 스~윽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지루한 서두와 긴 대기시간 없이 쫓기는 7인 앞으로 바로 앞으로 신기한 공간의 뒤틀림이 발생한다. 그들 앞 주변부 전체가 뒤집히고 뒤틀리고 형체가 이상해진다. 곧 그것은 그들 바로 앞에 가상의 반투명한 일종의 손에 잡히지 않는 중력파, 거대한 웜홀이 그 시각효과를 극대화하여 신비롭게 형성되고 있는 듯 하다. 쾅-쾅-쾅-쾅, 부우우웅~, 파다닥 파팍, 지지직 직직, 퍽~ 퍽~, 쿠르릉쾅쾅... 웅장한 사운드와 공감각을 뒤흔드는 환영으로 그 일대는 판타지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도 안 된다. 누군가, 틈만 나면 초딩들 읽는 환상극이네, 우연히 영화로 보다가도 아예 실현 불가능한 괴상망측한 장면이 나와서 이야기가 이어지면 그만 영화를 꺼버렸던 바로 그런 장면을 현실에 옮겨논 것이다. 공상과학 장르에서만 봤던 다른 차원으로 떠나는,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블랙홀처럼 에너지가 퍼져나가고 또 뭔가를 빨아들이는, 그것은 허무맹랑한 마법과도 같은 시간을 여행하는 통로 임에 틀림없다. 진득하게 세 지점에서 망원경으로 그들을 관찰한 보람이 있다고 증명된 순간이다. 그러나 이게 뭐냐고 감탄사를 외치고, 의견을 나누고, 탄성을 발산하고,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쉬는 시간은 금새 끝나버렸다. 왜냐하면 쫓겼던 7인이 소형차를 몰고 모두 그 불꽃이 일렁이고 초에너지가 울렁이며 지지직거리고 바람과 빛과 뇌우와 요란한 소리와 온갖 이상한 기운을 내뿜었던 허공의 가상 장막 속으로 질주해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고, 그 뒤틀린 빛의 굴곡과 휘황찬란한 허상은 마침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바람도 잔잔해지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헛것을 본 것일까 하는 눈빛으로 서로의 표정을 확인하고, 우리가 쫓던 그 친구들은 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궁금해하면서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4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꿩 대신 닭이라고 처음에 관찰한 그 지점으로 되돌아간다. 3대 망원경의 촛점이 모였던 곳으로. 그곳에는 분명 아무도 없을 것이기에.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이미 얼이 빠져버렸다. 그들은 도저히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가상의 뒤틀린 중력 공간이 남아있었다면 그들은 어찌했을까? 들어갔을까 안 들어갔을까? 당신 같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일단 사진이나 동영상부터 찍고 봤을까? 아니면 내가 혹시 엉겹결에 없던 초능력이 생기진 않았나 하면서 내게 염력과 기공과 신기술이 있나 막 이렇게 저렇게 해봤을까? 초현실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와버렸으니 더 이상의 상상은 허무하다. 부질없는 일이다. 이제 회상과 허무와 심심함과 약간의 아쉬움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방금 뭔가 있었던 것은 남의 집 잔치였다. 눈물과 콧물과 폭소와 감동도 함께하는 사랑 이야기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것이었다. 쇼는 끝났다. 극장을 나와야 한다. 극장식 카바레에서 술 마시고 뻗으면 턱시도를 입은 멋진 웨이터가 당신을 깨울 것이다. 물론 명찰은 에르메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손님 손님 하면서! 쇼는 계속 되어야 한다, 그건 지난 시절 인기 가수의 노래 제목일 뿐이다. 회원제 카페나 고급 스트립 클럽에서 상황 봐가면서 놀아야지 괜히 들떠서 괜한 오해 불러일으키면 괜한 불란만 대책없이 커지게 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실의는 책갈피로 스며들게 하고, 낭만은 성큼 잠재워 놓고, 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와 추상주의는 우리가 입는 옷이나 공책이나 우산의 색깔과 모양으로 물들게 하자. 기꺼이 일터로 가야 하리라. 모험은 미완성이다. 그래서 재도전의 묘미가 있다. 그래도 없던 자긍심도 생기고, 남에게 호의도 베풀 기분도 여유로워졌고, 항상 아니 일단 기조는 친절할 것 타인은 물론 내게도, 멋진 인생과 아찔한 지성 그런 것을 거울 속의 자신에게 밑도 끝도 없이 당부해보자. 사는 동안 우리가 아는 것은 민초의 삶이 다가 아니다. 백작 이름이 드라큘라라는 것, 웨이터 이름도 에르메스라는 것, 아니면 뭐 개 이름이 아마데우스? 카페나 모텔 이름으로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 여기서 멈추자. 예술을 사랑하고 다음 번에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환상과 고전주의와 SF 장르에 대한 실낱같은 기대랄지 믿음, 믿는 구석, 속아도 좋다는 넉살과 그래도 얼마든지 괜찮다는 배포(판돈은 다 털리기 전에 알아서 빼고), 추억을 잊지 않아야 한다. 전성기는 다시 온다. 오즈의 마법사를 사는 동안 한 번은 꼭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숨겨진 내재된 동심은 언제까지라도 간직할 것이다. 그때는 이와 같은 꿈의 목마를 유념해야 한다. 숙녀가 아닐지라도. 적당한 허영심은 죄가 아니니까.
뉴턴의 운동법칙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으로 이어졌다. 빛의 속도에 비해 매우 낮은 속도에서는 상대론적 모형은 고전역학으로 수렴한다고 한다. 즉, 속도가 빛의 속도에 비해 매우 작으면 로런츠 인자 무엇은 1에 수렴한다고. 그러나 어떤 속도가 빛의 속도 보다 빠르면 스티븐 호킹 박사의 어떤 이론을 참고하여 앞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추를 줄에 매달아 줄을 고정하고 추를 한쪽에서 잡았다 놓으면 추는 일정한 기준을 중심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움직인다. 운동을 하는 추는 진자라고 하고, 추가 매인 줄을 잡고 있는 사람은 마법사 또는 정신과 의사나 최면술사, 간혹 3류 소설가라고 하며, 잠시 후에 초 읽기를 들을~ 읽을~ 축복받은 귀인은 당신일 것이고, 그 추는 가운데로 갈수록 점점 빨라지고 양 끝으로 갈수록 점점 느려진다. 코리올리 효과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된다. 그 추가 동화에 나오는 요술-수정-구슬인가도 궁금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추의 움직임을 세어야 한다. 이제 때가 됐다. 부글부글, 아잉아잉, 뿌잉뿌잉, 즐거운 하루를 보냈어도 꿈나라에 갈 시간은 다가온다. 자, 그 시간이 되었다. 반대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 카운트다운이 임박했다. 곧 있으면 숫자를 거꾸로 세겠다. 숫자가 0이 되면 당신은 최면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깨어나면 당신은 그 환상을 전파하고, 그것과 비현실과의 간극을 간혹 살면서 떠올릴 것이며, 눈을 떴을 때 젊음의 활력을 되찾고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추의 움직임을 아~주 느리게 인지하는 시간의 늘어짐, 답답한 기다림 만큼이나 쭈~욱 연장되는 시간의 관념, 그러다 결국 필경 당신 마음의 10%는 짜증과 신경질을 감지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삐~용 하면서 멈추지 않고 길어지고 확장되는 마술적인 책읽기를 경험할 것이다. 그것은 삶으로 연장될 것이고. 자, 작별할 시간이다. 그러므로 추가 한번 왔다리갔다리 하는 것을 1, 2초에서 10초로 20초로, 1분으로 2분으로, 10분으로 20분으로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당신은 청춘의 기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것이다. 일명 회춘. 단지 한없이 가능성이 풍부하고 활력이 넘치고 시간도 많은 청춘이긴 하지만 뭘 해도 재미없을 수도 있고, 뭘 해도 심심할 수는 있으니 그것에 너무 큰 불만은 품지 않아야 한다는 점은 유의했으면 한다. 그럼 이제 최면에서 깨어날 시간이 되었다. 뽀너스는 없다. 있었는데 바닥났다. 시각은 청각과 연결된다. 이제, 당신은, 숫자를 듣고, 그 숫자가 0이 되면 깨어날 것이다 것이다. (손가락, 딱!)
10
9
8
7
6
5
4
3
2
1
0
짜잔~!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그들이 무명 블로그에 새로 올려놓은 그들의 공동 작품이다. 그것은 각자 단편만 올리다가 참신한 발상과 획기적인 기획 행사로 마련한 깜짝-쑈였다. 그들은 마크의 집에 모여서 이번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너무 작위적인 거 아닐까? 중간에 수신자 없는 연애편지 같은 내용 때문에 뭔가 몰입을 오히려 도와준 느낌도 나고, 산뜻한 구석도 있긴 하지만 말이야.」
「음... 살짝 모자란 뭔가가 있긴 있어. 그리운 그 무엇은 그냥 애교로 남겨두고 다음을 기약하자. 처음부터 너무 공동 작품이 대단하면 또 차가와서 우울해질 수도 있어.」
「그래 이 정도면 연습작 치고는 괜찮았어. 또 같이 만든 거니까 미련이 남아 서운한 거 치고는 그나마 부족하나마 섭섭하지만 우리끼리 그냥 우수상 정도 주면 어떨까? 난 괜찮은 거 같아. 음, 그래」
「그러나, 애들아. 그렇지만 그게 정말 최선은 아니잖아. 그런대로 납득이 될 만큼 차선이라는 확신이 들려면 음, 나는 그렇게 생각해. 어, 작품이 아니라 실재 퍼포먼스로 2탄을 만들어야 한다고 봐. 미약하지만 거의 가능성 제로지만 작품 속의 배경과 비슷한 곳에 가서 바람은 쐬고 와야, 거기에다 오줌이라도 누고 와야 뭔가 뒷맛이 개운하지 않을까? 그게 깔끔하지 않겠어? 다들, 어떻게 생각해?」
「설득력 있어. 일리 있는 얘기야. 확 땡기는데. 난 찬성. 저번에 조니 혼자 알고 있던 장소에 제임스도 갔다 왔다며. 거긴 어떨까?」
그들은 작품도 마쳤고, 놀러가는 기대감에 설레기도 하여 떠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급물살을 타서 나도, 나도, 나도 하면서 지금 당장 스마트 포투 7대를 몰고 그곳으로 향했다. 어딘가 멀리 갔는데 아무리 찾았으나 환상의 세계 그런 건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들은 이미 애매하고 어중간한 환상 소설을 한 편 썼기 때문에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았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떠났다. 막상 가보니 폐업한 소설 창작 아카데미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 그들은 벌써 거기 도착했다. 조니 혼자 몰래 간직했다가 이제는 모두 알게 된 놀이공원, 오즈의 마법사에. 그곳은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즐길 수 있는 기묘한 분위기의 장소는 아니었다. 유치해도 너무 유치하다. 아이들이 와도 실망하고 아가씨들이 와도 민망해 할 것이다. 아, 이게 무슨 오즈의 마법사? 그런 정경이다. 그들은 원래 이럴 줄로 예상했지만 막상 겪어보니 따분하기 짝이 없고 점점 지능이 떨어져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누구의 꾀임에 빠져 머리가 나빠지는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의사결정이었다. 이게 창궐이라고 섣부른 평을 하긴 아직 이르다. 변명의 대상이 없으니, 따라서 분위기가 덜 나빴다. 그러므로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핑계를 완전 묵살하기는 힘들다. 맹숭맹숭, 이게 드라마라면 TV를 꺼버렸을 것이다. 리모컨이 망가지지 않았으면 다행이고. 하지만 그들이 아직 여기 남아있는 것은 이상한 습성이랄까, 그런 조금 수상쩍은 취향 때문이었다. 마치 악평을 마주하고, 마음에 안 든다는 내용의 댓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험담을 들으면 들을수록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지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그런 이상한 감성(?)이 조용히 당신 곁으로 다가와 옆구리에 딱 붙어 있어서 누군가 깜짝 놀란다. 단, 그걸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곳은 음습하고 사람도 없고 시시하고 귀신나올 것만 같다. 여긴 상상력을 잠재우고, 창의력도 기절시키는 장소 같다. 이미 그런 생각도 했을 것이다. 잘 나가는 판타지 감독들과 같이 나중에 와봐야겠다고. 그 양반 감 떨어지게 할려고??? 아니면 하다못해 에로영화 감독이라도. 그분들이 뭔 잘못했는지는 딱히 단정지을 수 없지만. 그들은 그야말로 재미없어서 황홀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살다 살다 이런 상투적인 놀이를 즐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식상한 빈둥거림을 바라고 원할 줄이야, 아~ 불가능한 일이도다 그런데 꿈이 아니네, 하면서. 하여튼 문 닫은 놀이공원 구경하기, 는 더럽게 재미없네, 그러고 갈려 했다. 그런데 안 가길 잘 했다는 묘한 육감이 그들을 붙잡았다. 즉 저기 앞에 뭔가가 있었다. 이거다! 이 근처에 근접했을 때부터 뭔가 느낌이 왔었다. 믿는 구석없이 무모한 경거망동은 하지 않는 그들이다. 이거다. 뭔가 있어 그렇게 예상했는데 정말 뭔가 있었다. 이거라니까! 그런데, 그런데 저게 뭐지? 대체, 도대체 어떻게 저런 게 저기 떡 하니 나타날 수 있냐고. 이건 정말 바로 앞에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모두 각자 스마트 포투에 탄 채로 전방 몇 미터에 보이는 신기한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차에서 내려 의견을 모은다. 저거 뭐냐고! 저런 괴물 같은 장면이 실존해도 되는 거냐고! 우리가 소설에 쓴 그거 아니냐고! 쫓기던 7인이 허공에 펼쳐진 4차원 통로로 들어갔던 바로 그 장면. 공간의 뒤틀림. 꺾어서 뒤죽박죽 이상 반응을 일으킨 중력파. 막대한 웜홀. 동화와 만화영화의 중간에 나올 법한 공간. 그들은 말도 안 되는 마법과도 같은 시간 여행을 정말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고민하다가 그들은 결정했다. 뛰어들자고!
그래서 그들은 스마트 포투를 몰고 거기 뛰어들었다. 그런데 어떤 허연 천막이 찢어지고, 휘황찬란했던 불빛들도 사라지고, 비바람도 모두 없어졌다. 잠깐, 이때 선두는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 일종의 야외 스크린이 다층식 구조의 놀라운 점성과 기막힌 탄성, 신비로운 환각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꼭 딱히 관계는 없지만 한마디 더하자면 오늘은 당신의 아름다운 인생에서 남아 있는 날의 첫 날이다. 작심삼일이 있어서 새로운 도전이 의미 있게 되는 것이다. 그건, 그건 바로 그 세트를 만들어 행위예술가와 사진작가와 영화촬영과 화가와 음악가와 작가등 온갖 예술가와 일반인들이 모여서 모종의 어떤 그분을 위한 의식을 거행하는 행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막 불 태우고, 레이저 쏘고, 불꽃놀이도 준비되었는데 행사 일정이 모두 심각하게 튀틀려버렸다. 예상치 못한 불청객들의 등장으로 이동식 스크린이 찢겨졌으므로 그것을 갑자기 어떤 무대의 커튼으로, 한 발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음막으로, 학구적으로 분석하자면 그것을 하이먼의 상실로 그리고 일곱 대의 스마트 포투는 학교에서 배운 생물 과목으로 공부한 정자로 착각하는 환상에 드물게는 몇몇, 참을성과 자제력이 대단한 친구까지 포함하면 대충 대다수는 그 환상에 빠져들었다. 딱 걸려든거지! 때문에 바로 그 순간, 묘한, 오묘한, 이상한 예술과 기운과 생물학적 현상이 탄생하고 있었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또 잘 관찰하면 차이점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초대장을 받지 못한 취객의 등장에 예기치 않은, 뜻하지 않은, 전혀 의도적이지 않은, 우연과 겸연스레 짝을 이루는 창작의 동기가 발생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문이자 예술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사막의 카페, 스타벅을 떠올릴 것이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그 어느 이야기에서 그때 뭔 일이 있었는지를. 저명한 비뇨기과 의사가 아닌 별 명성을 얻지 못한 서술자로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배우는 연기를 하고, 관객은 감상하며 박수를 치고, 작곡가는 주업과 별개로 TV에서 고품격 음악 방송에 나와 깐족(깐죽)대는 꽤 심오한 역할을 도맡지만 그처럼 여기서도 행사 관계자는 또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게 바로 인생이니까. 그건 누가 뭐래도 경건한 직분이고, 당연한 책무라 할 수 있다. 주어진 본분은 성스럽게 그야말로 성스럽게 완수해야 업계를 설혹 나중 떠날 때 떠나드래도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즉, 미처 생각도 못한 퍼포먼스를 이루어낸 동화의 주인공 같은, 어느새 진짜 일곱 난장이가 되버린 기분에 흠뻑 취해버린 7인의 스마트 포투 운전자들은 그곳 행사 요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서 정중히 바깥으로 끌려나가게 됐다. 속된 말로 깽판, 일반적인 용어로 사소한 착오나 불가피한 오해, 어쩔 수 없는 불이익이 뭔가 발생했다는 것은 그들도 차마, 부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긴가민가했을 수도 있지만 서도. 그들도 사람인데! 하지만 글쎄, 그 감정을─전자? 후자? 어중간한 어리버리한 감정을?─정말 느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건 정말 아리송하다. 그들은 결국 남을 웃게 만들거나 감동시키는 것 가운데 상당히 불분명하지만 최소한 둘 중 하나는 성공했으리라. 모두에게 해당되지는 않지만.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입 주변이, 꼭 강아지들 주둥이 마냥 좀 시커멓게 보인다. 정말 그들은, 적어도 지금은, 개와 닮았다. 많이 닮았다. 최소한 지금은, 평소보다 입도 더 튀어나왔다. 안 그래도 남들에 비해 입이 좀 돌출한 친구도 그 가운데 있긴 하지만 말이다. 아 그들의 우울한 얼굴이란 왜 지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생각나게 하는 것일까? 그러면 안 되란 명분은 없지만. 극도로 웃겨서 박장대소를 터트려야 할 찰나에, 혼신의 힘을 끌어모아 웃음을 참아야 하는 딱 그런 상황, 그건 정말 꾹 인내해야만 하지만 그 느낌 바로 그 이상한 기분은 정말 그건 대채 뭘 의미하는 것일까? 도대체! 그냥 부디 제발 모른채로 산책을 나가도 괜찮다. 그러나 여전히 궁금하도다. 살면서 아~주 드물게 겪거나 보고 듣게 되는 그 모순은 대체 뭐란 말인가! 더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과묵해보이는 행사 요원은 마침내 한마디 건넨다. 물론 사기 당하기 딱 좋게 넌지시 건네는 그런 태도는 아닐 것이다.
거 알만 하신 분들이 왜 여기서 하필... 더 소란피우시지 마시고 좀 가세요 가 네~ 좀 가시라구요... 아 나 이 양반들 멀쩡해보이시는 분들이 왜들 그러셔... 아 글쎄 왜 요즘 주변에 이런 분들이 이렇게 많은지 거 참 신경쓰이네... 아저씨! 여보세요! 점잖은신 분들이 여기서 이러시면 되나요~ 자 이제 그만 하시죠. 어르신들 이제 그만 가십시다... 그런 어조를 연상시키는 표정과 함께 결연한 몸가짐으로 이와 같이 말한다.
「선생님들! 어허~ 저기 아저씨, 아저씨.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어느 날 나는 조금 이상해져 있는 나, 점점 변해가는 나를 발견했다.
일상에 찌들던지 상업에 중독되던지 하루는 종일 금관악기 음악만 듣던가 몇 시 몇 분 정각이 되면 딱 시집을 펼치던가 하면서 뭔가 내가 작심삼일짜리 동기부여의 전문가가 되버린 듯한 희한한 감정에 휩싸였다. 작심삼일짜리 동기부여? 그건 도대체 뭘 뜻하는 건가? 딱 중학생을 위한 영화같은 기분? 소네트 18번과 해변의 묘지 외우기? 시끌벅적 분주하고 바쁘게 살지만 뭘 하고 있는지 목적은 무엇이고, 왜 그 방식을 고집하는지 쉽게 설명이 안 되는 지금은 황금시대? 이런 정신병자의 습관적인 말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게 된 계기는 가까운 세기말인 1990년대 중반에 발간되어 어느 지역 문학상을 받은 한 권의 시집을 읽고서 시작된 것 같다. 나는 그 책을 몇 페이지 뒤적거리다 집어던졌다. 도저히 못 읽겠으니까.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나도 모르게 평정심이 깨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에 나오는 얘기는 전부 들쑥날쑥 재즈풍으로 그저 감각적으로 한껏 부풀려진 만화와 영화와 쇼가 어우러진 풍모가 마치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한 손에는 시가를,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장황하게 입에 거품을 물며 이 얘기 저 얘기 끝날 기미를 안 보이고 말만 엄~청 하면서 한시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가만 있지 못하는, 말을 안 하면 엉덩이에 뿔이 돋는, 말하기로 어디서든 둘째가라면 서러워서 몇날며칠 잠을 설칠 것 같은 달변가의 언변과 정확히 흡사했기 때문이다. 한 장 두 장 듬성듬성 성의없이 넘겨보면서 간추려보니 거기 나온 내용은 전부, 전부 그랬다. 그때 유행한 브랜드, 사람 이름, 뭐 한다, 노래 가사식 시어들, 명상가의 잡담, 나는 뭐가 좋고 뭐가 싫다, 재즈 또 재즈 오늘도 재즈 내일도 재즈, 지역명, 전문 용어......! 와~ 이 양반 말 참 잘하겠다는 생각이 들고, 내 감상은 실제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시인은 시를 참 쉽게 수월하게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으신지 의아한 심정. 내가 그때 심사위원이었다면 책 한 권 구해서 찟고 구겨서 불태웠을 수도 있다. (그쯤 언제던가 나는 내 앨범에서 사진들을 몽땅 추려서 실제 불태웠다) 어디 이런 수준의 책을 후보에 올리냐면서 안 그래도 소문도 흉흉하고 권위도, 상금도, 봉급도 떨어지는데 하면서. 물론 농담이다! 정말 유행의 최첨단을 누리면서 요즘 가장 뜨겁다, 근래 보기 드문 명필가다 라는 찬사를 듣게 될지라도 브랜드, 이름, 반짝하는 도시적인 것, TV 편성표, 인터넷 최신 경향을 어차피 일부러 어쩔 수 없이 많이 반영할 것이라면, 동네 이름과 동네 예술가와 동네 최신 스타일보다는 시대 사조와 몇 세기 전에 살던 극작가와 해수욕장 모래부터 우주까지 모두 다루는 것이 백번 낫다. 꼭 지엽적인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안 그러면 메뚜기도 한 철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시집을 전혀 읽지 못했다. 도저히. 유한성이 어떻네 추억의 육체를 빌려 자신의 존재를 복원하네 하지만 예술 분석에 문화 비평 같은 내용들만 있어서 에잇~ 하면서 아 이런 괜히 봤네 그랬다. 하지만 그걸 봤으니까 그분이 오신 것인지도 모르지만. (혼잣말, 혹시 이 때문에 그분께서 행차를? 사소한 일이 아닌 건 분명한데... 그렇긴 한데) 철이 지난 어떤 작품이 왜 무언가는 촌스럽고, 어떻게 뭔가는 고풍스럽고, 이상하게 저기 저 그것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빛이 나는 것일까? 그걸 내가 알면 이미 앞서 말한 시인처럼 살면서 딱 책을 100권은 족히 발간했을 것이다.
잠깐, 브랜드 이야기를 하겠다. 이름, 고유명사, 이니셜, 은유를 불러일으키고 연상시키는 게 무척 많은 단어. 상표! 옛날에 나는 이성의 이름만 읽거나 들어도 설렜다. 하물며 사진이라면, 영상이라면, 그런 성적인 이야기라면 어떠했을까, 말 다 했다. 그러나 그게 정상이다. (주제가 브랜드지만 에로와 포르노의 차이, 그것까지 가미되는 느낌이지만 글이 말과 영상을 성적으로 닮으면 그건 예술에서 멀어진 것이기 때문에 또 젊음은 전자와 후자에 모두 호기심의 촉수를 드리우기 때문에 지금은 같이 묶어도 썩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땐 그랬다. 나는 이성의 이름만 읽거나 들어도 설렜다고. 그럼 지금은 안 그럴까? 정말 지금은? 그렇다면 현재 난 비정상? 아하~ 언제 바뀐 줄도 모르게 공수가 바꼈으니 당신께서 대답해보자. 자, 이름을 막 가져다가 열거하겠다. 아무 의미없이 나열하는 것으로 다른 뜻은 없다. (번역은 해당 언어권 이름으로, 성과 이름도 적절히...) 수민. 예령. 현주. 유리. 세은. 유진. 영희. 란. 은주. 가은. 선진. 민아. 미희. 지우. 우진. 진선. 선희. 희주. 주혜. 혜민. 민순. 아영. 채연. 은미. 미경. 송희. 아진. 지영. 은희. 길연. 보미. 현정. 희진. 지원. 아름. 소영. 현숙. 미현. 민실. 은아. 명신. 미혜. 미경. 영미. 현주. 단아. 진아. 상미. 향미. 혜정. 지혜. 보라. 우정. 예지. 민지. 정은. 단비. 가람. 선희. 리원. 지수. 수현. 미나. 소미. 인정. 다혜. 경희. 승주. 정. 유라. 혜리. 수빈. 미라. 지아. 예원. 예은. 하늘. 현미. 유경. 세정. 시연. 아란. 주경. 미현. 은정. 은솔. 슬빈. 나영. 윤지. 아람. 은비. 라영. 인화. 나은. 은지. 아름. 미진. 지수. 선향. 정민. 한별. 스텔라. 유진. 리나. 재은. 선주. 한솔. 혜림. 선미. 새미. 소정. 보경. 서영. 신영. 성주. 은하. 새롬. 자영. 은희. 은정. 민지. 은지. 수진. 예림. 자애. 솔. 다미. 보미. 승미. 고운...... 자, 어떠신가? 기분이 어떠십니까? 사진을 보면서 얘기할까요? 아니면 실물을 보면서 좀 더 심층 분석할까요? 그거부터 시작하자구요? 일단 예선을 거쳐고 범위를 좁히자고-요? OK~ (손가락) 딱! 역시 그렇다! 예리하시네, 통찰력이 남다르셔, 극도로 감각적인 세련된 스타일의 이상주의자이시군! 남자 이름이 아니라 여자 이름이라서 감이 떨어졌다는 그대의 고상한 말 맺음. 요약하자면 바로 이게 브랜드다, 이게 브랜드라고, 이것이 바로 상표다! ...... 세상에서의 당신! 그때 너! 내일 그대! 오늘 생각하기에 사랑이란! 그는 어때! 걔 어떻드라! 누구, 음 그래! 그이는 멋져! 몇몇 단편과 중편과 장편소설에서 최근에 가장 뜬 브랜드는? 바로, 그분! 뭘해도 그분, 틈나면 그분, 할 말 없으면 그분! 아니라고?
난데없이 사람 이름이 많이 나온 이유가 있다. 그것은 <왜>와 관계되고 언제, 는 나왔고 이제 남은 건 <어떻게>다. 왜, 언제 이상해졌다 그것 보다는 어떻게 이상해졌나를 더 소상히 정성껏 밝혀야 하는데 꼭 세탁소에 가서 왜 TV를, 어째서 최신 TV를 팔지 않냐고 떼쓰는 형국이 됐다. 재미없는 연속극. 희트곡 없는 잊혀진 가수처럼. 번번히 헛다리만 짚고 헛불만 켜는 거짓된 삶을 살아와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과거가 통채로 오리무중이지만 차츰 소심해지고 점차 자의식이 가라앉고 야금야금 고개를 숙이는 입심을 되살려보자면 좌우지간 나는 이상해졌다. 탁자 건너편에 앉은 일행에게 봇물이 터진듯 무진장 말을 쏟아놓다가 옆 탁자에 앉아 있는 타인에게 <내 말 듣고 있냐고?> 이렇게 따지는 미친 개와 비슷할 것이다. 나는. 그건 진통제나 두통약으로 치료되지 않는 사랑이라는 병과 같다. 희한한 불청객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상할지라도 바라건대 그것이 빈 술병처럼 명멸된 빛의 처량함, 통념적으로 인준할 수 없는 유빙, 실성한 듯 회전문을 빙빙 돌리며 거기서 빠져나오지 않는 어른만은 아니기를. 명색이 소설인데 글이 말을 닮으면 곤란하다. 빨간 융단 위를 걷는 영화제 관계자라도 된 것 같은 자신감이라도 지녀야 한다. 카메라 후레쉬가 번쩍거리면 덩달아 기분은 좋아질 것이다. 과연 이렇게 횡설수설해도 괜찮은 행동인지 즉각 그 이상함을 재가하도록 하자. 고역이 될지라도. 격분할지언정. 말실수로 판명된다 해도. 애착이 지나치고 집착에 애걸에 뭐, 껄~떡? 이라는 명대사가 떠오르더라도 어떻게 이상해졌나는 밝혀야 한다. 불확실한 그것이 독자에게 선듯 건네는 정표가 될 수도 있고, 슬쩍 한번 던져봤는데 소 뒷걸음질치다 밟은 쥐가 될 수도 있고, 그대에게 귀뜸하는 비밀이라거나 아첨, 소원, 허탕, 염탐, 맵시등 그 무언가로 밝혀진다 해도 유령을 보든 말든 이제는 밝혀야 한다. 더 미룰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럼.
자, 시간이 됐다. 그 이상함은 이것이다. 살면서 한번 쯤 만났거나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유독 악수를 많이 하는 사람, 특이하게 만나는 사람마다 하이파이브를 하는 사람, 명언을 하루에 최소 몇 번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나는 나 이외의 물건들 이름과 나의 기분, 감정, 정서, 능력, 습관, 방식, 의욕, 분위기, 문체등 모든 것이 어떤 불확정성의 원리와도 같이 나로 스며들어 나 자신이 도화지나 풍향계, 동기화되어 업데이트되는 프로그램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다. 거짓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고, 불가사의 또한 아니다. 그냥 하나의 현상 같다. 맞다. 그렇다. 그림을 그리면 화가가 된다. 꿈을 꾸면 몽상가가, 소설을 쓰면 소설가가 된다. 종이를 소재로한 조각들을 뜯어 입체 퍼즐로 빨강머리 앤의 집을 만들면 건축가가 되는 것이다. 꼭 상상임신처럼. 남자가 하는 입덧처럼. (이런 생각하니까 이상해졌군!) 예를 들면 이렇다. 나는 바로, 이렇게 이상해졌다. 나는 행복한 글쓰기 라는 책을 읽으면 나는 글을 쓸려고 폼만 잡아도 행복해진다. 나는 딜런 토마스의 탄식이라는 시를 읽으면 정말 나는 탄식하게 된다. 나는 루이지 케루비니의 음악을 듣는다면 배경이 불투명해지면서 추구하는 문학적 배경이 이상하게 바뀌게 된다. 또, 나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이라는 영화를 보면 동네 놀이터에서 (대중적인) 보석 브랜드 피타니의 상자, 알맹이가 빠진 포장 박스를 줍게 된다. 나는 거리에서 누군가 추파춥스 막대 사탕을 먹다? 마시다? 핥아먹다? 빨다? 다듬다? 귀여워하거나 포장을 푸는 모습을 보면 살바도르 달리와 추파춥스 로고의 관계를 떠올리면서 뭔지 모를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나는 투게더 라는 이름의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에서 남몰래 혼자 먹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외롭게 혼자 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아무리 사람 많은 도시에서 최대 3일을 버티지 못하는 추리소설가라도 빵을 사와서 집에서 먹고 요리하고 와인을 마시며 최소한의 관음증이라는 TV를 혼자 볼 것이다. 그게 인생이니까. 나는 모닝스타라는 광고를 보면 아침에 상쾌하고 쾌활하며 통쾌한 기쁨을 느낀다. 나는 내가 쓴 실험적인 단편소설 습작의 제목을 <그래서 도대체 뭘 어쩌자는 겁니까?> 라고 먼저 지으면 그런 뉘앙스가 퍼지는 향긋한(?) 기분의 소설을 쓰게 된다. 꼭 뭘 못하는 사람들이 거창하게 제목 먼저, 장비 먼저, 판돈 먼저 부풀린다. 아! 오! 아─아! 오─오! 이것은 이것은 말이다, 자존감이라는 딸기맛 과자 한 봉지와 존중심 초코칩을 끌어올려 나는 뭐다, 나는 어떻다, 나는 뭐뭐했다, 나는 뭐뭐 하고 싶다, 나는 무엇을 좋아한다, 나는 여자도 좋고 남자도 좋다 라는 <나는, 나는> 이라는 애초의 소설 쓰기 목적을 입상 후보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나도, 나도> 라는 신삥 햄버거 문체의 왕자를 앉혀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때때로 리하르트 바그너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까? 누구도 모를 일이다. 나도 잘 모르겠다. 다시 말해 이것의 단점은 결코 여건이 녹녹치 않고, 결과와 여파를 사소하게 넘겨버릴 수 없다는 뜻이다. 곧 나는 <머머할 것이다>는 요구르트를 마시지 않으면 예언을 할 수 없게 된다. 그걸 마시지 않으면 예언을 못 해! 콘래드 호텔 근처에서 얼쩡거리기라도 해야지 글의 품격이 조금이라도 올라간다. 주기적으로 어린이 TV 프로그램을 보고, 만화를 읽고, 동네 초등학교를 구경해야지만 동심을 되찾고 정욕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과 저것이 건강하다는 뜻이지만. 나는 순수라는 이름이 붙은 우유가 포함된 어떻게 만든 좋은 식빵을 먹으면 순결해진 느낌이 드는데, 문제는 그걸 안 먹었드니 난, 나는 불결해졌다. 이거다, 문제는! 나는 로맨스 코메디 영화를 보지 않으면 눈치도 없고, 낭만도 모르고, 웃지도 웃기지도 못하는 썰렁한 마초가 된다. 나는 인문-교양서를 읽지 않으면 멍청해진다. 많이. 원래 멍청한 것과는, 그리고, 여자들이 특별하게 멍청하다는 표현에 민감한 것과는 조금 구별할 필요가 있다. 나는 거리에서 멋진 차를 구경하지 않거나 인터넷으로라도 명화와 미녀를 안 보고 고전음악을 듣지 않게 되면 안목과 수준과 취향과 타고난 성향과 격조가 모두 땅에 땅바닥에 떨어진다. 서점에서 책을 안 보더라도 연애심리 코너를 기웃거리기라도 해야지 여자를 다루는 솜씨와 이성의 환심을 사는 재주가 녹슬지 않는다. 1주일에 한 번 갔던 서점, 날마다 가게 생겼다. 대략 이 정도다.
자, 시선을 돌려 당신의 얘기를 들어보자. 당신은 여자다. 남자도 있다. 그대는, 그대는 지금, 지금 빠져든다 빠져든다. 점점 점점, 천천히 천천히, 깊게 깊게! OK! 몰입했다. 천사의 환락궁의 소설 극장에 도착하셨다! 여자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면 가장 무난할까? 그녀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과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선호하는 언사가 무엇인지 떠올릴려고 용단을 굳힌다면, 곧바로 다리를 떨고 줄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연거푸 세 잔 마시며 초조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식~ 웃음짓기. 그들은 대체로 남자다. 그 가운데서도 육식남? 즉 건강한 청춘, 간혹 부장님식 농에는 능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도무지 여자는, 여자는 통 모르겠다는 중년. 여러 보기 가운데 딱 하나만 꼽자면 여자는 젊음에 어마어마하게 지대하고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나이, 상태, 여건, 처지, 상황, 환경과 그리고 자태.
어느 날 나는 <붉은 구두를 신고 어디로 갈까요?>라는 책 제목을 우연찮게 읽고서 나는 남자지만 문득 거기서 영향을 받아 쏜살같이 여성적 관심사와 내 몸이 딱 결탁하여 초로의 정념을 품고서 나도 모르게 어느 대학교로 향했다. 저번에 하숙 생활을 했던 그 반대 방향으로 갔다. 그곳이 바닷가였으니까 이젠 산으로 갔다. 우연히 그때 친하게 지낸 동생들을 만나면 멋쩍기도 할 꺼 같고, 포스트맨은 벨을 울릴까 말까 카페도 요즘 물이 좋지 않고, 아직 해변가에서 팬티만 입고 일광욕을 하기에는 넉넉히 따뜻한 날씨가 아니고, 글도 잘 안 써지고 해서 나는 어떤 젊음의 기운을 받고 예술적 착상과 심미적인 영감, 나쁘게 발전하지 않을 최저 수준의 도착증과 어떻게 보면 억지로 이어보면 그거와 약간 연결되는 착안의 소재와 동기를 얻게될지 모른다는 추정에 근거하여 나는 아침에는 모차르트의 희유곡을, 저녁에는 쇼팽의 야상곡을 그리고 낮에는 클럽음악에 대해 검색해보다가 그런 천방지축과도 같은 결심을 하였다. 그 후로 바로 실행했다. 그것은 내가 봤을 때 내 일이니까, 내 삶이니까, 내 인생이기 때문에 딱히 정확한 논리와 이성적 근거가 부족해도 충분히 수긍가는 일이었으며, 따라서 석연찮게 망설일 필요도 없고, 그러므로 턱없이 황당한 일도 아니다. 내 인품에 썩 지장을 미치지도 않기 때문에 손가락 딱 하면서 OK~ 라고 혼잣말을 소리내면서 그 일을 감행했다.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시내, 그런 건 현실 세상엔 없다. 있어도 거의 만나기 힘들다. 친구와 역할 바꾸기, 나는 괜찮은데 친구는 무척 난감해 한다. 친구집 놀러가는 거도 나이에 비해 너무 남발했다. 요즘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시상도 떠오르지 않고, 뭘 해도 재미없고, 맹목적으로 독서만 하면서 한정 없이 그분만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시정잡배 같은 작금의 생활을 스스로 본인에게 시인하고, 제 2의 자아와 잘 교섭해서 말썽부릴 것 없이 촉망받을 무난한 수순을 밝아 새로운 일을 꾸민 것으로 판단한다. 그렇게 예측하고 관망하니 조금은 속이 후련했다. 기껏 이름은 대학교 놀러가기, 에 다름 아니지만 이 얼마나 신선한 기운이 샘솟고, 부지불식간에 막 글이 잘 써질 것 같은 예감이 천명하여 심금을 울리고, 나름 대견하여 내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날 마구 쫓아다니며 구애와 칭송과 사랑이 아니면 우애라도 괜찮다면서 상궤를 벗어나 이상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장래에 예뻐질 여대생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역으로 된통 당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볼보 웨건을 몰고 그곳으로 씽씽 달렸다. 그래서 어느 시골 산 중턱에 있는 꼭 수도원 느낌이 나는 어느 대학교 무슨 캠퍼스에 도착했다. 혹시 이곳 산의 이름은 마의 산?
나는 우선 <나폴리 드라큘라>라는 찻집에 들려 카페라떼를 한잔 시켰다. 왠지 모르게 나는 선뜻 이유없이 들떠서 내가 마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색정적인 만화인줄 알고 봤드니 처음부터 끝까지 건전하고, 청순하고, 풋풋한, 간지러운 내용으로 일관된 장르가 잘못 지정된 순정 만화에서 항상 당하는 역할의 우울씨 같은. 그리고 학교 안 장미 축제가 펼쳐진 곳으로 가서 꽃들을 구경하고 대학교의 낭만인 잔디밭에 앉아 소설 구상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아직 노을이 질려면 시간이 멀었지만 그냥 한번 최면을 걸어봤는데 역시나 그분은 오시질 않았다. 그맘때 쯤 옛날에 알던 앙숙을 만난다던지 지난 풍파를 떠올리면 분위기가 사색적으로 싹 바뀔 수도 있는데 널찍한 교정을 보니 그곳은 문리대와 예술대 그리고 체육대의 딱 중간 지점이라서 왠지 청춘을 예찬하고, 인상주의를 찬미하여 나름 신비주의를 꿈꾸고 다음과 같은 말을 듣지는 못할지라도 살면서 한번 쯤 써먹어봐야할 듯 하여 나는 좀 더 경건해지고 환상적인 눈빛과 체념적인 몸가짐을 취하게 되었다. 그 말은 무엇이냐면 바로 이런 말. <당신은 초현실주의자이시죠?> 소탈한 한편 똘끼가 피둥피둥 충만하고, 술 취했거나 팔푼이란 핀잔을 듣고 싶지 않다면 쉽사리 일상에서 그런 말을 하기는 힘든 법이다. 그러니까 한번 쯤 시도해봐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괜히 인생의 낙이 없다면서 허세 떨고, 신세 한탄이나 하고, 아무나 힐난하며, 틈나면 비아냥거리고, 비방과 허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허풍과 뻥으로 삶과 인생을 모조리 꾸미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 훨씬. 미성숙해도 고무적인 젊음을 즐기고, 즐거운 인생과 교분을 맺으려는 호쾌한 발상과 간직해도 창피하지 않을 삶의 목적, 그로 말미암아 자연스레 드러나는 청춘의 시를 닮은 태도와 희망찬 자세를 잊지, 잃지 않으면 된다. 된다? 되긴 뭐가 돼?
오고 가는 학생들을 보니 모두 대체로 남자들끼리 또 여자들끼리 모여서 노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동성은 조금 맞으면 친해지는데 이성은 많이 조화를 이뤄야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까다로워서. 그래서 와 이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임이 분명해, 그랬다가 나중, 아 내가 예전에 뭐에 씌였던 게 틀림없어~ 그러는 건 그가 나와 세상에서 제일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유례없이 의도와 들어맞듯이 그분과 조우하지는 못했지만 간신히 어떤 의욕, 나를 현혹하는 신망과 낭만, 사족을 못쓰게 만들지도 모르는 희사를 하나 발견했다. 혹시 시간이 조금 지나면 홀딱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대기하고 있었다. 기쁜 일? 뭔가 해 보고 싶은 열망? 그런 걸 뜻밖에 찾아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들썩거려서 나도 모르게 말이 앞섰다. 사실을 실토하자면 나는 그냥 버스를 탄 거다. 신변이 변변치 않고, 딱히 계획도 없고, 괜히 날 좀 봐주라고~ 나 여기 있다고~ 나와 좀 놀아주라고~ 비명을 지르며 소란을 피울 수도 없어서 구내? 군내버스인지 시내버스인가를 탔다. 어차피 종점까지 갔다가 되돌아올 테니까 구태여 걱정할 필요도 없고, 한심한 일도 아니라고 판단해서 풍덩 몸을 던져버렸다. 나에게는 머머하면 머머해야 한다, 그런 줏대는 없었다. 햇빛이 있다. 버스가 있다. 나는 햇빛이 비추어 버스를 탔다. 이게 다다. 이런 머 하니까 머 했다는 일관된 이상한 논리는 기존 작품에서 많이 다뤄진 주제다. 버스에 오르니 경이감은 고동치고, 누차 설렌 가슴은 또 설레고 더 설레고 나도 덩달아 대학생이 된 듯한 환상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러니 비싼 가죽점퍼를 못 살 바에야 과-점퍼를 알아봐야 한다. 그러니 좌석에 앉으면서 나는 미동도 못하고 어찌 보면 고까운, 야속하지 않은 상상을 하다가 어느 아가씨 위에 덥썩 앉아버렸다. 절대, 고의는 아니었다. 이런~! 미안하다고 하고 나는 옆자리에 앉았다. 전례없는 일이다. 나중 한번 더 그러면 이례적인 일은 아니게 될 것이다. 첫 경험치고는 다행이다. 왜냐하면 무서운 상남자가 그녀였다면······ 오 저런! 그랬으면 내 마음은 커녕 내 몸을 건사하지 못 했을 수도 있고, 그가 동성애자에다가 내가 그분의 이상형이었다면 방도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 별로 즐겁지 않은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와 별개로 나는 다양성을 존중한다. 시작은 이랬다. 참, 좀 전에 내가 실수한 혐오스런 경거망동을 느꼈던 그녀는 심성이 고와던 게 틀림없다. 나 보고 꿈에 볼까 두렵군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인생에 주어진 의무에 충실한 아가씨 같다. 품행이 세련되고 행동도 우아하다. 멀거니 쳐다보며 눈빛으로 화를 내지도 않았고, 분개할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난간 위의 고양이처럼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버릴 것 같은 숙녀였다. 음, 숙녀! 바로 그녀는.
버스는 출발했다. 옆자리에 앉은 남녀는 사랑한다면... 사랑하지 않는다면... 유치하고 닭살 돋는 혀짤배기소리를 속닥거리고 있었다. 버스를 탄지 얼마되지 않아 나는 스르륵 잠에 빠져들 뻔 했으나 다시 깨어났다. 혼몽의 문 직전에 세속 도시의 즐거움과 개 같은 날들의 기록에 대해 떠드는 한참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뒤에 있던 젊은이들의 패기에 놀라 맨정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랑을 위한 아침 시간을 지나서 어딘가 텅 빈 극장 같은 분위기의 버스 안에서 나는 동양에 있는 어떤 이국의 항구에 도착한 것만 같은 기분에 젖어들었다. 그들이, 이 버스에 탄 친구들이 다가올 행복과 인생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쩐지 어느 책에서 읽은 듯한, 달려라 토끼는 아니고 어디서 제목으로 쓰인 듯한 그런 말들을 많이 하여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차는 시골 군내 버스도 아니고 도시의 시내 버스도 아닌 소풍을 떠나는 대학교 차량이었다. 거기 타고 있는 친구들은 모두 그 대학의 문예창작과 학생들이었고, 나는 그 친구들과 계획에도 없던 야유회를 떠나게 된 것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떠나면 그뿐! 일정에 오른 것이다. 녀석들이 날 받아줄지는 모르지만. 내가 봐도 그들에게 반가운 손님도, 달가운 특별 초청객도 아니었지만 어쩌다 나는 비련의 여인인 듯, 욕심이 없는 여자는 아닌 듯 조용히 차창에 비추는 풍경을 보면서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찍고 있었다. 누가 봐도 상태가 안 좋아보였지만 저 아저씨 누구냐고,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어디 아픈데 있는 건 아니냐고 친절한 물음을 건네는 친구는 없었다. 게다가 앞자리에 앉은 머리카락이 송글송글 탈모가 꽤 진행되는 것 같은 어찌 보면 약간 노쇠한 중년은 통성명을 하고 보니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나와 친했던 동창이었다. 같은 반으로 짝궁도 한 번 한 것 같았고. 그 친구는 좀 전 그곳 시골 3류 대학교의 문예창작과 교수, 나는 소설가 지망생? 나는 그냥 적당히 실업가라고 둘러댔다. 자랑스럽게, 떳떳히...까지는 아니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스스럼없이 탁 말한다는 게 영 여의치 않았다. 그들은 멀리 MT를 떠나는 게 아니라 가까운 공원으로 야외 수업을 가는 길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학교 앞 언덕으로 수채화 그리로 가는 것처럼. 교수는 내가 옛날에 사고 싶었지만 못 사고 블로그에 사진만 올려놨던 시계를 차고 있었다. 혹시 내가 알던 여자를 너도 알고 있지 않냐고 뜬금없이 아무 개연성 없는 질문을 할 뻔 했다. 내가 왜 그런 충동을 느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 친구와 옛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어떻게 사는지에 관한 말도 나누던 중 잘 들어보니 뒤에서는 누가 문예창작과 학생 아니랄까봐 일상 대화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문학적 표현과 보통 사람들로써는 구사하기 힘든 난위도의 뭔 멋들어진 느낌이 드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사랑한다. 자본주의의 약속. 나는 햄릿이다.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너라는 환상.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름다움의 근처. 환상을 꿈꾸다. 안 이쁜 신부도 있나 뭐. 우리 낯선 사람들. 사는 게 뭔지...... 이런 앞뒤가 안 맞는 말들을 잘도 엮고 이어서 말이 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보고 듣고 읽은 온갖 정보를 마구 뒤섞고 인용하여 뭔가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최면을 거는 듯한 수법에 의해 씌여진 굉장히 특이한 소설처럼.
일행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 인근 전원지의 어느 호숫가에 도착했다. 학생들이 내리자마자 가방과 공책과 필기루를 들고서 모두 각자 글쓰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 흩어졌다. 교수 친구도 좀 더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을 텐데 라면서 평범한 인사말을 건네고 나서 어딘가로 떠났다. 이상한 야유회다. 그냥 강의실에서 수업할 것이지. 아니면 여기서 글을 잘 쓰는 방법에 대해, 그분을 내 그림자로 요술램프 안으로 유인하여 정착하게 만드는 비책을 알려줄 것이지 삭막하게 모두 떠나버렸다. 여긴 아마도 아프리카인가? 아프리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또 폼 잡고 있다. 뭔가 이곳은 아픈 천국 그런 느낌에 4차원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를 타야할 것만 같은 급박한 마감일 증후군을 겪는 것만 같은 곳이다. 날짜 못 지키면 그동안 먹은 거 다 토해내라는 살벌한 당부의 피력 같은. 수심 가득한 성화를 위엄을 갖추어 듣는 사람 또는 읽는 사람 말문이 막히도록 기약없는 조용한 고함을 톡톡히 맛보는 기분. 충전이라는 이름의 몬스터 활력제라도 마셔야 하는데 에너지 음료를 챙겨오지 않았다. 학교에서 체육관이나 공원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건데 내 불찰이 컸다. 노심초사 우연에 기대긴 했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은 쉽게 그 짝을 찾기 힘들다. 지금을 만끽할 수 밖에. 새로운, 신선한 경험의 접경을 만날지도 모른다. 거대한 일상은 제쳐지고 모험은 갑자기 찾아올 것이다. 이미 그 안에 있다. 흥미와 짜릿함은 결여됐지만 전례없는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발버둥치면 선뜻 이상한, 큰 많이 큰 빨간구두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초롱초롱한 기분에 펄펄 날개를 펼치고 그분 곁에서 시공을 초월해 든든한 공상가로써 터널 끝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정말? 그게 문제가 아니다. 사랑의 어두운 저편은 모르겠고, 일단 호수를 한 바퀴 돌아야겠다. 시계 방향으로.
호숫가를 산책하는 동안 나는 어떤 기이한 없던 예지력이 생긴 것을 깨달았다. 아까 만난 친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드디여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청바지에 하얀 운동화와 숏컷, 리본 머리띠를 했던 그녀는 <캄캄한 날개를 위하여>라는 시를 쓰고 있구나. 그녀와 사귀는 같은 과 남학생은 <험준한 사랑>이라는 비평을 쓰고 있고. 그리고 한때 나와 같은 중학교에 다녔던 교수 양반은 외도를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어느 차가운 도시의 여자와 통화를 하고 있다. 오늘이 그든 그녀든 결혼기념일만 아니기를 바란다. 이 짦은 시간 동안 순식간에 그 모든 것이 인공지능 로봇처럼 금새 식별된다. 그렇게 나는 호수 반대편까지 갔다. 중간에 나는 사슴도 보고 토끼와 너구리도 만났다. 곰을 보면 진짜 좋을 텐데 무섭고 무서워서 안 본 게 다행이었다. 동물원이 아닌 자연 속에서 녀석들을 발견하니까 기분이 엄청 좋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같은 말은 실은 이런 상황에 씌이는 게 아마도 무난할 것 같다.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의자 앞으로 호숫가에 나룻배가 보였다. 가서 한번 앉아만 보자 그런 심정으로 그곳으로 갔다. 마치 판매원이 안 사셔도 좋습니다 그냥 한번 보시기만 하시고 바쁘시니까 가셨다가 나중 혹시 생각나실 때 들려주시면 고마울 뿐이죠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거기 앉고 보니 그냥 한번 구경하고 나오자 했던 초심은 어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노를 젓고 있었다. 슬슬 첫 구매가 지속적 소비 다음에 브랜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과도 같이. 그러다 얼마 안 가서 꼭 욕조 물이 빠지는 것처럼 저 앞에서 물이 밑으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배는 이미 그 암흑 속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안에 뭐가 있는지 보고 나서 물 바깥으로 나간 후 나머지 호수 반바퀴를 돌자고 생각해서 차츰 구멍 옆으로 이동하다가 어, 어,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다가 배는 그 구멍 속으로 빠졌다. 당사자는 새로운 공간으로 넘어간 것이지만 관찰자가 보기에는 순식간의 사라짐이다. 그러나 보고 있는 사람은 있었나 모르겠지만 무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겪은 다음 행보는 고배를 마실 일도 아니고, 좌절할 사건도 아니었으며, 곤경에 처하지도 않았다. 뭔가 민망하지만 드물게 있는 일처럼 그렇게 꼬불꼬불 가야만 하는 길이 있는 것처럼 S자로 또 뒤집어진 S자로 새냇물을 타고 나룻배가 이동하다가 깊은 숲속 조용한 계곡에 도착했다. 해명하자면 길이 이상한 것이었다. 만류하는 친구도 없었고. 전말은 정상이 아니었지만. 푸르른 울창한 숲이 뭔가 날 비호해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행인지 모험인지 그것의 보라빛 바깥의 동경에 대한 성패는 이제 시작된 것 같았다. 뭐니뭐니해도 가상현실은 현실성과 환상성이 생명이라면 지금 내가 처한 영화같은 일은 비정하지 않은 적당한 편력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게 일반적이다. 조금 기쁜 환담만 나눌려다가 크게 와전되어 대뜸 판이 커지고 뒤집어지지 않기를 바랬다. 이 길을 따라가면 무엇이 나올까 같은 궁금증을 떠올리기도 전에 나룻배 바로 앞에는 찻집이 있었다. 이름은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약간 애매한 이름이다. 브랜드 로고와 비교해 봐도 너무 다채롭거나 약간 이채롭거나 뭔가 아쉬운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이런 도시적인 카페가 대체 왜 여기에 있을까? 그런 수상쩍은 생각이 드는 곳이다. 닳고 닳은 도시인의 핑계 하나에 대해서 원시인이 대뜸 반문하는 이런 말을 닮은 그런 장소였다. 그런 말이 대체 어딨어요? 상업성이 전혀 없는데, 교통도 불편할 것 같고, 시야가 탁 트이지도 않고 뭘로 보나 애매한 카페였다. 그리고 내부에 사람이 없었다. 다시 보니 이곳은 어느 예술가의 집이나 집무실인 듯 여겨졌다. 너는 커서 뭐가 될래? 라고 묻고 답하는 대화가 오가고, 아침이면 직장으로 학교로 갈 준비를 부산스럽게 하는 그런 가정집은 아닌 게 분명했다. 카페도... 아니다. 숲으로 간 미술관도 아니다. 환상과 모험의 파노라마가 펼쳐지지 않았을 뿐 그런 극체험에 관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업실 같았다. 무슨 공로상 같은 트로피도 있고, 유명 화가의 화보집과 트럼펫, 몰트 위스키 몇 병, 구식 레코드판들, 장난감과 소설과 시집도 많고 특히 가방이 많은 걸 보니 가방 매니아? 구두가 많은 건 구두 디자이너? 또 나를 위해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에스프레소 한 잔이 보여서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나 확인한 후 나는 그걸 원샷 했다. 살면서 사랑을 놓칠 수는 있다. 그러나 향긋한 차 한 잔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곳은 외지인이 오래 머무를 곳이 아닌 듯 하여 나는 그곳을 나왔다. 문 닫고 인적인 끊긴 카페였다면 포도주든 뭐든 술병을 들고 마시게 그거 하나만 들고 나왔을 텐데 뭔가 미련을 남기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다. 개운하진 않지만 나만의 공간이나 주거지에도 이름이 있고 간판을 걸 수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안 될 것 없지. 말을 바꾸면 술집과 음식점도 이름이 없을 수도 있고. 블로그 무명처럼. 가게를 새로 연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문을 닫는 찻집은 어쩌면 이런 예측이 어긋났기 때문에 폐업하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즉 10년이든 20년이든 목돈을 모으고 직장 때려치고 카페를 열고, 나는 큰 욕심없이 한 달에 돈백만 벌면서 나 좋아하는 영화 실컷 보고, 잠 많이 많이 자고, 그림 마음껏 그리고, 책 원 없이 읽고, 글 엄청나게 쓰고, 인생 2막에는 곡만 쓰겠다, 사진작가로 등단하는 것을 준비하겠다, 만화가 아니면 만화애호가, 음악평론가로 주목받고 싶다는 그런 계산을 하고 거창한 이름의 카페를 주업으로 해서 소박한 예견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지만 아마도, 아무래도, 결국에는 돈백에서 동그라미 하나가 모자란 10만원 조차 잘 벌어지질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인생 3막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추론! 능동적으로 선명하고 자신감 있고 밝고 분명하게 돈 벌고 베풀고 인생을 즐기면 그만이지만, 이론은 그럴 것인데, 기쁘지 않게도 능동태가 아닌 외부의 원인에 의한 것처럼 수동태로 돈이 잘 안 벌린다, 글이 안 써진다, 구름이 방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니 일이란 놈이 운이란 영예의 목마를 덥썩 타지질 않는다, 희망이 외로워진다 라면서 자꾸 삶이, 인생이 요컨데 피동적으로 그리고 피상적으로 되는 듯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다. 남의 집에 들어와서 괜히 타인 걱정을 하다가 나는 다시 보트를 타고 돌아가던지 도로를 찾아 나가던지 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갔다.
아까 진행해 오던 방향으로 계속 가기에는 막상 길이 없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나룻배를 타고 시냇물을 타고 호수로 향했다. 그렇게 이동한지 얼마되지 않아 아주 잠시 어두워지는 듯 하더니 위에서 쏟아지는 작은 폭포수를 통과했다. 나룻배가 그곳을 지나갈 때 흘러내리는 물은 잠시 줄어들어 나는 물에 많이 젖지는 않았다.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은 호숫가로서 처음 출발한 곳으로부터 전체 반경을 3/4 지난 지점이었다. 보트에서 내려서 나는 나머지 구간을 걸어 처음 버스에서 내린 장소에 도착했다. 공원에서 내일의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안녕, 요정~ 이라면서 들뜬 모습의 청순한 여대생들이 말을 걸어오지도 않았다. 문예창작과 학생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는 떠났다. 나는 혹시 그들과 MT를 같이 떠나게 됐나... 라면서 처음에 혼자 우쭐했던 그때의 생소한 딴사람 같았던 자신을 떠올리면서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나를 빙둘러 카메라가 360도로 몇 바퀴 돌고 버즈 아이 뷰로 촛점이 옮겨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정말 사람은 금방 딴사람이 되기도 하고, 만들어지기도 하거나 가능성도 많은 것 같다. 사람이니까!
그러다가 어느 육중한 체격의 쫄티를 입으신 시골 아저씨가 다가오시더니 내게 말을 건넸다.
「저기, 선생님. 라이터 좀 빌립시다.」
「아, 죄송합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아,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잠시 그는 뭔가를 생각하드니 이렇게 말했다.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예?」
그는 못들은 채 한다. 정말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도 더 추궁하지 않는다. 곧이어 그는 또 하나 다시 이상한 말을 내뱉는다, 툭.
「시간은 가벼운 것이구나!」 이제는 나도 그냥 뭘 말했었냐는 듯 방해하지 않고, 뭔지 모를 정취를 음미하는 그의 감상을 존중한다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그냥 지나가는 개가 짓는 것이겠지 하면서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 때문에 그가 나를 보고 참 과묵한 양반이군, 이런 무-반응맨을 다 만나다니 이거 별일일세~ 하는 듯한 안면의 미세한 떨림과 함께 내게 이런 물음을 던졌다.
「초면에 실례지만 형씨는 무슨 일 하시는 사람이요? 아, 무례하게 느꼈다면 내 사과하리다. 미안하오. 나도 실은 결례를 범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오. 다만 당신이 왠지 평범한 직장인은 아닌 것 같고, 또, 에 또, 뭔가 이상하게 시대를 건너 뛴 옛 사람인 듯한 어떤 경이로움과 앳된 동경심 그리고 막연한 상실감을 내포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변명은 슬프지만 교양미가 부족하게 낯설은 질문을 건넸을 뿐이라오. 부디 오해는 품지 않았으면 좋겠소. 난 사실 그렇게 아무하고나 대화를 잘 트는 사람도 아니고, 나서길 좋아한다거나 때에 따라 필요한 방력이나 일상적인 결단력과 튼튼한 배짱이 조금은 부족한 사람이라오. 물론 상식도 그리 풍부하지는 않고 사람도 조금은 고지식한 구석도 없다고는 못하겠구료. 최소한 자의식과 창의성과 호기심이 넘치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죠. 음, 내가 보기에는 형씨도 그 정도에서 크게 동떨어진 천성은 아닌 것 같소만 그냥 한번 예측해 보았을 뿐이라오. 내가 직업상 신기는 없지만 또 그와 관련된 관심도 뭐도 아무 것도 없지만 요즘 들어 내 예언이 어디가나 그리고 언제든지 잘 들어맞는 행운을 누리고 있소. 때 아니게 내기까지 평소와는 다르게 왕왕 하곤 하지요. 중요한 의미는 없지만 지나가는 말로다 소인이 하나 정중히 추측을 해보자면 음, 형씨는 아마도 이곳에 나중 다시 오실 것 같소만, 꼭 한번 쯤은... 아니 그렇소? 어쩌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 될 수도 있을 듯 보입니다만... 그냥 한번 앞일을 내다봤을 뿐이라오. 마음에 담아두진 말기 바라오. 그렇다고 내가 내일을, 또, 훗날을 내다본다거나 그 어느 추세를 정확히 예측하는 재주를 가진 것은 아니라오. 나는 요즘 블로그가 남기는 미래가 궁금할 뿐이라오. 근래 즐겨 읽는 블로그가 있는데 이상하게 그곳에 올라오는 산문을 읽다보면 마치 반세기나 1세기 전에 씌여진 듯한 정말 오묘한 기분이 든단 말입니다. 그 느낌이 나는 참 좋다오. 나도 그쪽에서 나름 반평생을 일해왔지만 그런 정신이랄까, 독창성? 감수성? 음악성? 그 새로운 전율과 시각과 흐름은 내 생전 처음 경험한다오. 그건 아마추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문가의 솜씨도 아니고, 솔직히 뭐가 뭔지 잘 모르겠소. 주책없이 초면에 내가 말이 너무 많았던 것 같군요. 거짓말 잘 하는 어른이 되버린 것만 같아 코가 점점 길어지는 피노키오가 되버린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군요. 내 책상 한쪽에 <웃고 춤추고 소설하라!>라고 붙여놨건만 야성은 빛나야 할 텐데 난 그저 한 잔의 칵테일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정말 어디 다른 곳에서 타인으로 아니 또 다른 나로써 살아보고만 싶은 마음이 끌어올라와서 자꾸만 그것을 달래고 소리치고 꾹 내려눌러도 수그러들지 않고 자꾸 더 울렁이며 막 날 하늘로 어디 저 어딘가로 끌어올려 먼곳으로 날 데려가는 것만 같소. 수많은 풍선에 매달려서 공중에 떠서 이동하는 그런 느낌과 같다고 할 수 있죠. 아, 내 소개가 늦었소. 나는 누군인가 그것도 밝히지 않고 무턱대고 선생께서 뭔 일 하시는지 물어봤으니 나도 어지간히 새로움에 목말라 하는 것만 같구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오? 아 글쎄 내가 머리 속으로 구상하고 상당히 영감을 구체화시키고, 그분과 거의 기념사진이라도 찍고, 그분과 가까스로 담판이라도 할 것 같은 기다림이 해소될 것만 같고, 정말, 정말 조금만 더 머리 쓰고 노력하고 분발하면 흐릿한 착상이 확실한 글로 거의 거의, 다다를 듯 했는데...... 나 원 참, 글쎄 제자 녀석이 내가 생각했던 그 내용 그대로 시를 멋지게 아주 훌륭히 후다닥 지어버렸지 뭐라오. 제목은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고래가 있다나 뭐라나. 그것이죠. 나는 그 직전에 형식도 이미 결정해놓고 조금만 기다리면 되었는데 아쉽게 되버렸지요. 닭 쫓던 개 지붕쳐다 본다, 딱 그 모양이 되어버렸다오. 그 녀석 아무래도 천재 같단 말이오. 얌체 같은 놈! 녀석은 능력자가 틀림없다오. 그러나 내가 뭐 괜히 꼬투리 잡거나 학점에 불공정하다거나 그러진 않소. 오히려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뿐. 나도 거기서 쾌감을 느끼니까 말이오. 기쁘니까. 즐거우니까. 다만 그 천재성을 일찍 꽃피우지 않길 바랄 뿐이오.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말이라오. 나는 그동안 제자들 가운데 허천나게 많은 천재들을 보았다오. 그런데 나중 보면 기껏 동네에서만 놀고 있거나 뭔 밑도 끝도 없이 행위 예술 업계에서 말단 사원으로 일하거나 엄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걸 많이 봐왔다오. 그 중에는 카페 사장도 여럿 있소. 백수도 수두룩 하다오. 닭을 튀기거나 영화판에서 단역으로 일하면서 뭔 말도 안되는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를 못 찍어서 빌빌대는 제자들도 있다오. 물론 그 일들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친구들 재능이 아까와서 그렇소. 어쨌거나 지금 우리 학과 최고인 그 녀석이 나중에 문단에 나와서 옛날에 내가 엄청 갈궜다고, 아주 욕 나오도록 혹독한 특훈을 시켰다고, 날이면 날마다 이 사람 저 사람 안 가리고 뻑하면 험담만 일삼는다고 폭로라도 하면 어쩌나, 그렇게 지금 걱정이 태산이란 말이오. 예견하건대 그 녀석 나중에 작품 세평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승승장구할 듯 하오. 돈도 엄~청 많이 벌 것 같구려. 녀석 나중에 모른채 하지 말고 자주는 말고 한번 쯤 찾아와주면 무척 반가울 텐데, 바빠서 그럴 틈이 날려나 모르겠소. 그냥 잘되면 그뿐이고 뭐, 그러면 좋은 일이고 다행이지만 뭐랄까, 그냥 좀 내가 요즘 글이 잘 써지질 않아서 해보는 투정에 불과하다오. 잊어버리시구료. 동네 아저씨의 질투와 타성에 젖은 교수의 핀잔과 함께하는 자책이 무슨 대수겠소. 그게 뭐 중요한 일이라고 형씨의 명상을 방해하다니 나도 참 어지간히 속도 없는 것 같소. 그래서 내가 처한 현실이 그러해서 입담배 하나면 충분했는데······ 그래서 라이터가 있나 형씨에게 여쭤봤던 것이라오. 글 쓰는 게 큰 벼슬은 아니지만 나름 거기서 행복을 느끼고 즐겁고 언제나 잔잔하게 재미있지만 나름 그것도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는지 문예창작과 애들 가르치는 일에 열중하다보니 습관적으로 말이 길어졌군요. 이만 줄여야겠소. 아, 잠깐, 딱 하나만 물어보고 싶소. 물론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오. 아니 그냥 듣기만 하시구료. 나도 그냥 말만 한번 해보고 넘어갔으면 좋겠으니까. 그런데 뭐 하나 물어봅시다. 혹시... 설마하니, 댁도 미래에서 왔수? 정말... 그런거요? 저기, 존엄하신 그대가 나미래씨? 하하하, 난 속으로 한참 지나서 혼자서 웃긴 하지만 남이 듣기엔 곤욕이란 걸 모르는 건 아니라오. 나도 원래 부장님 농담을 익힐려다가 실패한 후에 이상한 하이개그만 늘어서 탈인거 있죠. 허허허. 가짜 웃음도 이젠 잘 안 되고, 참 큰일이라오. 아, 이만 일절 아니 말을 마치겠소. 할 말은 다 했소. 미안하오, 로미오.」 뭐여? 로미오는 비극의 주인공인데, 해피엔딩 아니잖아! 꼭 대화 상대에게 영화배우 누구와 잠깐 비슷했다고 하면 상대방이 좋아하는 틈을 타서, 그 사람 어때서 어찌됐어~ 라고 하면 표정이 싹 바뀌는 듯한 느낌이다.
나는 또 절묘하게 시기를 놓쳐버렸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고, 판타지 같은데 기존과는 다른, 환상적인데 알고 보면 환상적이지 않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동시에 초현실적인 그런 소설을 쓰고 있다는 말은 이미 쏙 들어가버렸다. 그 대신에 단지 나는 영원─완벽─주관 이런 말들이 어렵고 불편하다는 것 그리고 나는 최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 읽기에 실패했다고, 꼭 때가 되면 읽고 싶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고, 왠지 요즘 들어 부쩍 읽고 싶었는데 여전히 역부족이다 때문에 그건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고 조금 바람빠지는 답변을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같이 한 잔 하시면 어떠시냐고 물을 수도 없고, 달리 할 말도 없고 해서 아까 봤던 경로와 카페에 대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건 괜찮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이르는 순서 즉 물이 호숫가가 아니라 호수 중간에서 욕조 물 빠지듯이 꼭 그렇게 해야만 그 카페에 접근할 수 있냐, 그리고 둘째, 대체 그 카페는 뭐 하는 곳이냐, 아무리 영화 세트장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17,8세기 화풍의 세부적인 실내장식을 그렇게 옮겨다 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또 거기 사는 사람은 대체 누구냐, 뿐만 아니라 게다가 집인지 카페인지 그곳의 명칭은 왜 그 모양이냐, 더군다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도저히 형언하기 어려운 그 으스스한 느낌의 정체는 그 소름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다시 호수로 나오는 경로 그건 대체 뭔가, 구조나 공간이나 중력이나 뭘로 봐도 쉽게 설명이 안 된다, 납득이 안 된다 납득이, 그러나 아까는 몰랐다, 아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건 말도 안 된 일이었다,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대체 이게 뭔 일인듯 싶다...... 나는 그런 내용으로 그 중견 교수에게 정중히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내가 아무래도 헛것을 본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이곳은 네스호가 아니라고! 51구역도 아니라고! 본디 이 호수는 골짜기 마을이었는데 지역 개발 계획 때문에 원주민은 다른 곳으로 모두 이주하고 마을은 수중 부락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썩 멀지 않은 저쪽 농촌에서 예전에 동물 전염병인가 뭔가 때문에 돼지가 수천마리던가 매장된 일이 있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형씨처럼 간혹 이상한 경험을 하는 사람이 생긴다고! 물론 전자와 후자가 관련이 있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다고 한다. 그럼 내가 겪은 일은 다 무엇일까? 거기서 마신 한 잔의 카페라떼? 아니 에스프레소는 뭐였을까? 보트에서 노를 만진 촉감과 노를 젓다 퍼져서 통통한 이두박근과 허벅지 근육으로 느낀 통각, 그곳에서 봤던 트럼펫과 간판과 실내장식들은 다 진짜였는데, 실재 존재했다고, 그건 대체 뭐였을까? 따분한 이 세상은 잠시 잊혀졌고, 권태와 우울은 어딘가로 증발했으며 요술지팡이를 뜻밖에 발견하여 성스러운 탄식을 내지를 뻔 했는데, 이런 다 틀렸다. 정말 으리으리한 대저택인데 헐값에 내놔도 귀신 나온다고 안 팔리는 그런 사례와 비슷한 일일까, 어디서 전례를 찾아야 하나, 법원에서 판례를 뒤적거릴 수도 없고, 아 뭐야 이거. 이래뵈도 나는 소설가 지망생인데 탄탄한 명성의 도덕적이고 사람 좋은 문예창작과 교수에게 마구 따질 수도 없었다. 이 양반과 괜히 목소릴 높여 대화를 나눌 수도, 누구 주량이 쎈가 내기를 할 수도, 그렇다고 몸의 대화만 빼고 테니스든 스케이드 보드 타기던 뭐든 뭘 할 수도 없었다. 방법이 없음. 한탄 밖에 나오질 않고. 그분께 따질 수도 없었고 따져서도 안 되었다. 내가 어떻게 나의 세련된 매너와 영특한 기지가 내 품위와 적절히 부합한다는 것 또한 그에게 증명할 수 없었다. 그가, 아니라면 아닌거지. 그러나 영 석연치 않다. 통 개운하지가 않아. 뭔가 납득이 안 돼. 날씨는 완전 화창하고, 선명하고, 즐거웁기만 했는데. 그런데, 그런데...!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하는 것일까? 논평도 불필요하고 잘잘못을 따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와 얘기를 더 나누어보니 아까 내가 타고 왔던 버스에서 만난 그 처음의 문예창작과 교수 1 그 사람은 지금 나와 대화하고 있는 문예창작과 교수 2의 강의를 무료로 듣는 청강생이자 아무래도 대학가 인근 주민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교수 2의 화법이나 몸짓과 어조와 행세와 격조와 말발을 보더래도 이분이, 문예창작과 교수 2가 진짜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천재 제자가 너무 기특해서 자기는 여기 남아 우수와 고독과 쓸쓸함을 즐기고 제자들과 문예창작과 야유회 차량은 먼저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바로 그가, 교수 2가! 덧붙이자면 교수 1이 심성이 나쁜 인간도 아니고 소란을 일으킨 방청객도 아닌데 뭔가 허언증이 있는 것 같더란 얘기. 곧 교수 1은 가짜였고 그가 했던 말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 학과생들은 이미 모두 아는 일인데 그래서 곧이곧대로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 1년에 딱 한 명 정도!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그는 나에게 물었다. 나중 만난 그분, 문예창작과 교수님이 내게 미래에서 왔냐고 물었다. 미래에서? 뭔 말이야 그건? 그리고 댁도, 라고 했어. 댁도, 댁도? 그렇다면 그건 교수 1이 미래에서 왔다는 뜻이 아닌가! 이제 와서 자꾸 교수 1과 교수 2가 비슷해 보이는 게 탈이지만 가만 있어봐, 뭔가가 있구나 뭔가가 있어. 교수 1은 내 중학교 동창, 교수 1은 미래에서 왔어. 그럼 교수 1의 중학시절이 설마, 미래? 행여나 그럴리가! 그럼 그때 학교를 같이 다녔던 나도? 에~이 아니야 아니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다른 경우의 수는 뭐가 있지? 교수 1은 그냥 좀 부족한 사람이라고 치자. 그럼 나 말고 또 미래에서 온 사람이 있다고? 그리고 내가 어딜 봐서 미래에서 왔다는 거야? 뭐? 내가, 나도, 형씨도 좀 부족해 보인다는 그 말인가?
그래서 뭐? 나는 연타로 한방에 두 번 속은 것이다. 앗, 3번일까? 아아 헷갈려. 싫증나지만 속는 것이 싫증나지만 반면에 속으면 기분이 좋다, 기뻐, 막 재밌어 진짜 정말로 재밌다고, 나 변태 같아, 아후 이런 삐─ 불과 뭔 놈의 아카데미인지 오즈의 마법사 놀이공원인지 그때 숫제 기대를 져버려야 했는데, 격랑이 계속되는 것 그게 인생인가 보다. 썩 경의롭군, 환장하겠어. 훌륭해! 하나는 아직 도저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으니 1 대 1 일 수도 있다. 50 대 50. 어때, 한번 어떤 숨겨진 비밀을 알아낼 때까지 이곳으로 출근할까? 그 카페를 어떻게든 찾아내서 주인이 뭐라 하든 말든 그곳에서 소설을 쓸까? 그렇게 되면 문예창작과 교수 2의 예언이 정확히 적중하게 된다. 결론은 그렇게 됨. 하지만 뭐랄까, 그렇게 되면 그분의 인품은 괜찮아 보이지만 그분을 문학계의 노스트라다무스로? 그런 전문가가 마술 산업에서 학계로 넘어왔다거나 문학교수가 쇼도 하고 영화도 찍고 뻥도 심하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지만 점잖으신 분을 괜히 헛바람들게 하는 거 같단 말이야, 그러면 예의가 아닐 것 같다. 허풍쟁이 만들도 버리는 결과 밖에 더 되나. 것도 왠지 찜찜하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아까 그 양반 말하는 걸 보아하니 화법이 장난이 아니고 신통력, 정말 있는 거 같다. 그곳으로 가는 은밀한 방법을 내게 점지해줄 수 있는 유일한 한 사람일지도 몰랐는데, 역시 돈버는 덴 재주도 또 욕심도 크지 않은 호인임에 틀림없다. 요즘 부쩍 탈모가 심해지고 글도 잘 안 써진다고 하시니 그쪽에서도 뭐 확인은 못하겠지만 관심도 없겠지만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다. 하물며 내가 여기 매일 와 봐야 교수 2가 천재가 되기도 힘들고, 교수 2가 교수 1로 탈바꿈 할 수도 없고, 그 즉 교수 2가 회춘을 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그냥 묵묵히 삶을 살고 인생이 어떻다면서 설을 풀면 그뿐. 내가 봤던 카페? 작업실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는 실재 존재할까? 있을까 없을까? 답답한 일이로다. 진퇴양난, 딜레마 그리고 궁지! 또는 찾을 수 없는 미로? 괜히 시내버스 타고 종점까지 갔다오기, 군내버스 타고 시골 구경하기, 를 노렸다가 기분만 이상해지고 상황도 꼬여버렸다. 아주 심하게. 심지어 글도 안 써졌고, 그분은 더 멀리 저기 멀리 휴가를 떠나셨다. 이것은 무엇일까? 뭐긴 뭔가, 소탐대실이라고 하지!
나는 하루에 1번 바로크 음악을 듣고, 1주일에 한 번은 온천욕을 하며, 1달에 한 번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서 즉흥적으로 운전하여 여행을 떠나, 혼자서. 내가 봤을 때 1인칭 서술로 보자면 이것은 일종의 습관이고 생활 방식이다. 이걸 옆에서 보거나 3인칭으로 보면 유형, 패턴, 분석, 데이터, (때로는) 쾌락주의자가 되고 시의 소재가 되며 드라마도 되고 소설도 된다.
친구들끼리 만나서 어떤 이는 계속 나는 뭐했어, 난 어때, 나는 뭐라고 계속 자기 얘기만 하고, 한쪽은 계속 듣고만 있고 그러면서 나도 말 좀 하자, 라고는 말하지 못하는 경우는 의외로 흔히 있다. 방송에서도 A를 물어봤는데 뭔 미켈란젤로 얘기만 한없이 하거나, 비오는 휴일에 주로 뭘 하냐고 물어봤드니 길면 1분 짧으면 10초 정도로 답하는 게 알맞는데, 우끼면 3분까지도 가능하고, 맑은 날 나는 뭐하고 흐린 날을 나는 좋아하고 그녀는 유난히 비옷을 즐겨 입었네 비가 올 뻔 하다가 맑게 개인 어떤 날 그런 일이 있었네 나는 어때 나는 뭐해 나는 뭐뭐했다 나는 나는 계속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자, 첫 번째 문단과 두 번째 문단을 말이 되게 이어야 한다. 어떻게 그걸 가능하게 만들지? 보통은 사과나무에서 사과만 떨어진다. 그렇지만 가끔은 물개가 인어공주를 낳을 수도 있다. 친구에게 '안녕' 하고 말했드니 <안녕? 넌 나한테 할 말이 그거 밖에 없냐?> 라며 심술궃은 일격을 당해 얘가 왜 이러지? 실연당했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직은 1과 2를 못 이었다. '할 말 없지? 못 하겠지?' 할 때 슥 들어간다. 제임스와 닉과 하워드와 마크와 알렉스와 케빈과 조니는 만나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첫 번째 문단에 대해 말하면서 두 번째 문단에 대해 생각하고 눈치를 살피고 의중을 떠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어떻게 보면 약간은 글과 비슷한 말을 골라보자면 이렇다.
「나는 오전에는 시를 읽어. 뭐뭐 한다, 뭐뭐 한다, 뭐뭐 머, 뭐와 뭐, 뭐뭐 할까, 뭐뭐하지, 나는 뭐뭐 한다 그런 이야기들. 그리고 오후에는 인문교양서를 읽어. 뭐뭐 하지 말고, 뭐뭐 하라, 통계에 따르면 뭐보다 뭐가 어떻다, 측정 가능하다면 여기서 말하겠지만 그것이 어려운 주제도 있다, 뭐가 어떻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한다, 특징은 뭐고 해법은 무엇이며 왜 그래야 한다. 다음으로 저녁에는 소설을 읽지. 나는 뭐뭐했다, 그는 나를 생각할까, 뭐라고, 꿈깨라고? 이렇게. 그러다 야한 꿈을 꾸면 주기를 교체하지. 야한 꿈을 안 꾸면 어떻게 돼냐고? 그렇다고 주기를 바꾸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은 아니지. 해피엔딩은 비밀이야. 나는 열린 결말을 좋아한다고. 실은 그게 제일 흔한 방법이잖아?」
그러다 도달한 화재는 이것이었다. 타인으로 살아보기, 간접 체험, 직접 경험, 남의 입장 되어 보기, 다른 곳에서 생활하기, TV 안으로 들어가기, 여행가기, 사랑하기, 소설 읽기, 영화 보기, 직장 옮기기, 이사하기. 일곱 명이 동시에 말하고 똑같이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누군가는 한쪽 뺨을 손등으로 받치며 앉아 있거나, 한 손은 머리카락과 턱과 입주변을 만지작 거리고 볼펜돌리기를 하고 다른 한 손은 뭔가를 꼼지락꼼지락 뭔가는 무엇을 좋을까 아니 좋을까, 핸드폰으로 뭔가를 보면서 히히덕거리고, 시선은 저만큼 몽롱하게 두고 그녀가 좋아했던 작은 인형을 떠올리거나, 창가에 있는 1인용 자리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이상학적 욕구와 샴푸의 요정에 대해서 생각하는지 까지는 가늠할 수 없다. 성미 급하게 누군가 일어서서 "할 얘기란 게 뭔데?" 라고도 하지 않았고, "그러니까 듣고만 있지. 휘둘리기만 한다고. 할 말 없는 줄 알아. 원래 듣는 걸 좋아하는 줄로 안다고! 어? 이, 이, 이 순진한 친구야" 라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두서없이 오가는 이런저런 얘기를 누군가 듣게 된다면 혹시 그런 게 아닐까 의심스럽거나 추측하게 만드는 분위기는 조금 드러났다. 약간 미숙한 토로, 교만해도 기분 나쁘지 않은 심원, 말로 정확히 표현되지 않지만 왠지 척척 들어맞는 것만 같은 이심전심, 목적을 뿌옇게 상기시키며 끝내는 무정하게 의도를 관철하여 이상한 악취미와 색다른 만족감에 대한 공통의 전율어린 관심을 일치시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언의 간청이랄까, 빠끔 엿보이는 속마음은 얼마간 비추어진다. 어떤 법도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 같은 그러나 기만과 밉상과 별종과 안 좋은 건 아니지만 어딘가 모르게 반갑지 않은 차도와 비슷한 느낌은 만류할 수 없었다. 그걸 놓고서 할꺼냐 말꺼냐, 전전긍긍하고, 신음하고, 그렇다고 신세 조질 일도 아니지 않느냐, 오해 살 일도 전혀 없다, 그 동안의 삶은 너무너무 평범했다, 항간에 소문이 파다했다 이름이 나-평범 아니냐는, 언제부턴가 나는 이걸 생각하면 콸콸 넘치는 감격과 왈칵 분통 넘치는 감명 그리고 연거푸 이어지는 떨림으로 마치 사랑의 포로가 된 것만 같은, 명실상부하게 동네를 산보하다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한 감정에 휩싸인다, 실상이 이러한데 빤히 빛나는 광채를 무시할 수도 없고 뻔한 인생살이 가운데 이런 모험 한 번쯤 있어야 하지 않겠냐, 나는 기꺼이 하겠다, 너도? 너도? 나도! 나도! 어느새 이와 같이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으게 됐다.
그렇다면 그 결의안은 무엇일까?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길래 읽는 사람은 커녕 듣는 사람의 마음도 들었다 놨다 하지 못하고, 쥐었다 폈다 역시 안 되고, 어차피 밝힐 거면서 지루한 서두만 엄청 길고, 오히려 글 쓰는 사람 나가 떨어지게 만드는지, 사람 아니 토끼 한 마리와 너구리 두 마리를 폴짝폴짝 뛰게 만든다. 맛난 음식을 쳐다보거나 그녀와의 하룻밤을 상상하는 것도 아닌데 침이 다 꿀꺽 넘어간다. 가급적 그 궁금증이 끝없이 이어졌으면 하는 변태 같은 만용이랄까 뭔가 요상한 엉뚱함마저 느껴진다. 풀 자라기 기다리다 말 굶어 죽는다. 그만하면 이제 패를 깔 때도 되지 않았느냐, 애타는 사람 생각도 좀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덜컥 겁이 나는 건 그래 봤자 그건 원페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했던 말이지만 또 하는 건 그래서다. 자꾸 망설여진다. 왜냐하면 고수는 큰 기술을 잘 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독자가 바로 천재라는 것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마치 완전 새로운 소식, 엄청 즐거운 생활, 끝내주게 재밌는 인생 그런 걸 기대하게 만들었다가 뭐? 비할 바 없는 감미로움? 아휴 이걸 그냥 콱 어휴 이런 곰 삐─ 하는 소리나 하고 있어, 그런 말을 듣게 될까봐 무섭고도 기대된다.
그건 그렇고 이들이 모의한 놀이는 <TV 안으로 들어가기> 가 아니라 <타인으로 살아보기> 였다. 새로운 취미를 갖거나 신작 드라마를 챙겨보고 기존에 알던 친구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건 이미 다 했고 어지간한 건 모두 안다. 그렇다고 첩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무슨 보호 프로그램처럼 완전 다른 곳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개인으로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들이 생각한 것은 서로 바꿔 살아보자는 것이다. 늘상 하던 거 말고, 그렇다고 불건전한 건 좀 그렇고, 또 이상한 짝짓기도 불미스럽다. 그러나 이건 뭔가 있을 것 같다, 뭔가가. 느낌 온다. 게다가 닉이 영화업계 친구들로부터 마스크도 다 준비해뒀다. 보고 말하고 어울리고 생활할 때와 거의 똑같은 마스크! 완전 자세히 들여다 보거나 직감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거나 그러지만 않는다면 마술적으로 진짜와 똑같은 가면! 마스크를 벗고 살아 있는 생쥐의 꼬리를 잡고 목을 젓혀서 먹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자외선도 막아주어 화장품 바르는 귀찮음도 덜어주고, 피부에도 각종 효과가 뛰어난 드라마에서 외계인이 착용했던 바로 그 마스크, 그것도 이미 준비 완료됐다. 아이디어는 전에 놀면서 시도했던 몇몇 이색적인 변화에서 착안했다. 누가 누굴 쫓고 도망가고, 서로서로 편을 짜서 게임을 하고, 친구 집에 놀러가고, 파티를 하고, 일란성 쌍둥이를 보고, 그녀를 영화배우를 친구를 닮은 사람을 보는 일상적인 삶에서 얻은 힌트로 탄생한 시도였다. 차차 미루다가 고민하고 재고하고 검토하다가는 날 새고, 언제 그런 걸 감행해 볼 상상이나 했었나 하면서 그저 지난 추억이요, 안 해봤으니까 성공하지 못한 비즈니스이자 일장춘몽에 다름 아닌 말장난이 될 것이기에 생각난 김에 바로 해보자고 해서 단숨에 흡사 전광석화처럼 결정되고 시작되었다. 말로만 행복이란 그런 게 아닐까? 그렇게 멋진 말을 하고 예상하고 폼 잡지 말고 하면 될 꺼 아닌가? 행복해지면 될 꺼 아닌가? 다소 불행해도 괜찮아 괜찮아 또 그다지 실패한 삶은 아니야 넌 막 살지 않았어... 우선 말은 쉽지만 막 그러면서. 그 경험을 기억 속에 되살리고 풍미를 가미하여 무명 블로그에 올리자는 얘기 역시 오갔었다. 마치 사전에 그렇게 짜고 이대로 하자고 계획했었다는 듯이.
멋모르고 온통 하나에만 몰두해야만 적절하고 온당한 머머하기가 있고 그것이 가능하고 알맞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이 놀이가 지금 최적의 게임이라고 판단했다. 기꺼이 동참했다. 흔쾌히 함께 했다. 하고 나서 정말 이런 말 할지도 모른다. 사귀는 남녀 사이에나 어울릴 듯한. 걸핏하면 아름답다고, 모르겠어? 나중엔, 어찌될까? 나중에, 남으로 살아보고 나서, 그 다음. 어떤 뭐랄까 무대에 처음 선 그 순간을 못 잊는다? 아, 여기가 바로 내가 찾던 곳이다? 비로소 어떤 은총을 받고 누군가에게 총애를 받아서 내 길에 들어서게 된 거다? <타인으로 살아보니까, 타인으로 살아보기가 아름답다?> 품사의 조합이 이상하다. 외국어로 빗대어 이해해야, 설명해야 하나? 빠진 건 뭔가, 왜 불완전하고 생경할까. 어째서 어색한 느낌이 가시질 않지? 그러나 그 이상한 감정, 연기와 배경과 예술이 있는 문학 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그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면 그것에 한번 빠진다면 설마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오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인생전환이나 회상이 그러질 않나. 몰랐는데 전혀 예상도 못하고 생각도 안 해봤고 꿈에서도 상상조차 못했는데 알고 보니, 하고 나니, 빠져드니 완전 신세계더라고!
1번은 제임스가 닉의 역할을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아 닉이 아니라 조니다. 조니도 제임스로 살아 보고, 제임스도 조니로 살아 보고. 아, SF 영화에 나올 정도로 고도의 기법이 집약된 마스크와 더불어 실 생활, 사람을 만나고 이메일도 주고 받고, 분기에 한번 정도 회합하는 스쿼시 모임 상대와 자존심 걸고 운동하는 건 기본이고(맨날 지면서 말은 '넌 절대 날 못 이겨'), 경조사 가는 것, 집과 차, 직장과 친교의 대상, 옷, 속옷은 글쎄, 친밀한 동네 주민과의 사교, 단골 술집의 외상값 연기하기, 거래처 직원과 협상하기, 전 여친이 있다면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교제나 안부 인사 정도 주고받기가 된다면 그것은 물론이요 인터넷 계정과 소셜 네트워크 활동까지 모두 바꾸는 정도의 섬세한 난위도를 기준으로 이 놀이를 즐기기로 했다. 역할 바꾸기, 영혼 체인지가 아닌. 그 정도는 되야 어디다 명함을 내밀고, 나중 웃고 떠들고 기쁘게 회상할 수 있다. 어디다 알릴 수 있단 말이다. 거의 환상의 발치를 더듬어 봤다, 이런 흥미로운 이색적인 기분을 경험할 줄은 미처 몰랐네, 오~아! 사는 재미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망아적인 열락에 빠져들어 젓 먹던 힘을 다해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즐겁게 현재의 경험을 기쁘게 체험하기로 했다. 그래서 각자 집에 붙임쪽지─포스트잇─으로 주의 사항을 붙여놓고, 그것이 정리된 공책도 놔두고, 비상시에 연락도 가능하도록 준비를 마쳐서 혹시 있을지 모를 어려움을 헤쳐나가기로 뜻을 모으고 만반의 시작 직전 상태가 되었다. 자, 곧바로 시작되었다.
먼저 제임스는 조니의 소셜 네트워크를 관리해야 한다. 그의 사적 계정이 있지만 그는 요즘 공적 계정으로 말도 안 되는 글을 남기는데 빠져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는 지금까지 싸워서 져 본 적인 단 한 번도 없다. 예전에 마음 먹고 꼬시면 넘어오지 않는 여자가 없다고 후회했던 적이 있다 없다, 있다. 나는 아무래도 진짜 텐미닛인 것 같다, 정말이다. 그리고 아직도 쟁쟁한 현역이다. 저는 지금껏 술 마시고 취한 적인 한 번도 없어요. 저는 여자 보기를 돌맹이 쳐다보듯 한답니다. 또 (스핑크스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을) 제가 요즘 취미로 키우고 있는 고양이입니다, 또 (피라미드 사진을 같이 올려서) 요즘 해변가에서 모래성 쌓는 재미로 사네요, (고대 유적 사진과 함께) 피규어들 땅 속에 묻어놨는데 누가 발견했네요;;, (집 마당 잔디 옆에 동전 몇 개 던져서 흙에 뒤섞인 사진과 함께) 정글 탐험 중 고대 은화를 발견했습니다 정밀 감식 전이지만 대략 1200년대 초중반으로 보이며 귀족들이 주로 사용한 듯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와 함께) 작업실 제자에게 공부하랬더니 그새 또 낙서나 하며 딴전 피웁니다...... 대략 이 정도다. 물론 몇 개는 따라하고, 창의적인 거 새로 올리고 그러다 말았다. 마지막 말은 이랬다. 오, 이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인터넷에 한참 떠돌던 그게 이건가? 걔가 얘야? 저런! 아, 조니가 요즘 심심한가 보구나. 관심 좀 가져야겠어. 얘가 뭘 좋아하지? 뭘 할 때 기뻐하드라?
조니는 또 집에 있을 때면 실내장식용 조명을 켜두는 것처럼 자기가 예전에 찍었던 동기부여 영상을 항상 틀어놓는다. 동영상 완성도가 떨어지게 조니 얼굴만 제임스로 바꿀 필요도 없었다. 초정밀 마스크가 있기 때문이다. 사는 곳도 바꾸고 생활도 바꾸고 거의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저 영상은 아직 비디오테이프가 시장에서 모습을 감추기 전에 만들었던 것으로 아마도 빛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것이다. 시대를 잘 만났다면 TV 홈쇼핑이랑 웹사이트에서 막 기가 막히게 엄청 팔렸을 텐데. 큰 돈은 못 벌었더라도 허랑방탕한 삶은 살지 않았으니 그냥 그걸로 된 거다.
그는 일단 구경할 게 워낙 많고 모두 생소하고 처음 보는 것들이라 그걸 구경하는 것만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래서 나를 제외한 환경 뿐만 아니라 <나>까지 바뀌었다는 묘한 착각과 신비스러운 최면감과 부작용이 비물질적으로 적을 듯한 환각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낯선 여행지에 가면 어때야 한다는 계획이나 선입견도 없었고, 무엇을 볼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살까? 무엇을 할까? 에 대한 호기심이 썩 자아를 잠식하지 않는 어떤 그래프의 진행 상황이 보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건 뭐랄까 무척 즐거웠던 과거의 기억 하나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이런 게 아닐까? (나이 차이가 좀 나는) 누나가 학교 갔을 때 나는 집에서 혼자 있을 때 누나 책상 서랍을 열고 그 세계를 탐색하는 동심 같은 거. 시간이 흐르면 달라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프라하의 연인은 누구인지, 새로운 인생의 낭만은 어디에 숨어 있을지, 마리오네트가 무슨 뜻인지, 기분이 아련해지는 야경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조니를 흠모하는 괴짜 예술 애호가를 (조니의 행색을 하고서 조니가 되어서)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당연히 조니가 지금쯤 내 컴퓨터를 탐색하고 있을 텐데, 이상한 파일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바꿔서 살아 보니 나는 조금 흡족해 하고 있지만 녀석은 아주 죽상을 하고 있겠구나 하는 동정심은 아직 겉으로 표출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이래 가지고 언제 소설 쓰고, 언제 유명해지고, 언제 돈을 벌겠다는 거야? 자식, 한심하기는. 안 되겠다. 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물려주든가 해야겠네. 실언증! 그걸 운영하면 상상력이 자극 받고 감성이 풍만해지고 창조성이 탄력받아서 역작을 하나 쓰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이야~ 조니는 지금쯤 제임스의 중고차를 타고서 어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을까? 뭐 그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지금 제임스가 정신 못 차리고 조니의 새 차, 콰트로포르테에서 최신형 파나메라로 바꿈, 그분의 이름과 성이 있는데 그분은 여자고 다이애나라고 불러야 한다고 책상 한쪽에 메모장이 알려줌, 다이애나와 막다른 사랑에 빠져버려 다른 생각을 못하고 있다. 그렇게 약 2.5일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다.
월요일 아침. 뒷북 때릴 일은 없고 걱정만 있다. 무슨 걱정이냐 하면 그건 바로 강의 내용 준비다. 그 때문에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어리버리 하고 있다. 조니는 근처 어느 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특별 강사로 어느 기간 동안 출강을 하는데 오늘은 바로 그날이다. 조니 일정 수첩과 공책에 깨알 같이 어떻게 하면 된다고 다 나와 있지만 어설프게 생활 연기를 할 수도 없고, 학생들 앞에 서서 떨면 어떡하지? 바지에 오줌이라도 저린다면? 조니가 착착 쌓아올린 권위와 선망과 존경 그 공든 탑을 와장창 깨트리면 어떡하지? 갑자기 블랙 아웃 현상 때문에 무턱대고 녀석들에게 너네가 메소드 연기를 아냐고 거들먹거릴 수도 없고, 수업하다가 걸려온 광고 전화를 넙죽 받아서 이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 알파치노 왠 일이야? 뭐? 드 니로가 연락이 안 된다고? 웬걸~ 이 친구 건망증은! 저번에 디카프리오랑 톰 하디랑 후배들 만났을 때 모두 니콜슨네 별장에 놀러간다고 한 거 기억 안 나? 거기 쥬라기 공원 아직 개장 전이라 전화가 잘 안 터지나봐!" 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강의하다가 누구 가슴이 가장 큰지 그것만 살펴보다가 조니가 결국은 실직하게 되고, 평판에 먹칠을 하면 어쩌나 하는 웬 이상한 생각도 했다. 사람 일은 모른다고 정말 강의실 제일 앞줄에 막 딱 막 그런 친구들만 쭈르륵 앉는다면 그건, 음, 그건 대책이 안 서는 일일 것이다. 상당히 애매한 일이니까. 대놓고 좋아할 수도 없고, 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강의만 한다는 것도 숙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다 시간이 되고, 가슴은 콩닥거리고, 때 이른 자책감은 쾅쾅 풍악을 울려대고, 실망할 예술학도들의 얼굴들이 상상되어 미래의 명연기자들의 망가진 표정이 떠올라 딱 황량하고, 막 거리의 행복한 여자를 구경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로 벌써 명강의 채비의 반의 반도 준비하지 못하고서 강의실에 도착했다. 그날 그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꿈을 2개 꾸었다. 첫 번째는 옷가게에서 구경만하다 괜히 다 입어 보고 뭔가 부족하여 옷을 구입하지 않고 역시 비싼 옷 하나가 낫다면서 아쉬워 하다 괜히 기분만 흐릿해지는 찜찜한 진짜 같은 꿈이었다. 두 번째는 꿈에서 누군가 자길 미행한다는 느낌에 마음이 들떠 그만큼 젊어진 것 같아서 그걸로 어떤 퉁명스런 개꿈의 상념은 그냥 퉁치기로 했다.
와, 여기는 강의실이다. 꾸벅꾸벅 졸지만 않으면 다행이란 각오로 입을 앙다물고 강단에 섰다. 멋쩍게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데 녀석들이 온갖 인사말과 캔 커피와 꽃다발을 선사하고,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눈치를 보니 이미 조니가 미리 선수친 것 같았다. 100% 확신은 못하겠지만 이 친구들의 인성을 보아하니 그가 이미 모든 내공을 전수해준 듯 하고, 불현듯 학생들이 막 이렇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G7번 좌석에 앉은 빠마 머리 복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 조니 교수님 얼굴만 보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져버려, 어쩜 좋니? U6번에서, 아울러 난 저분 얼굴만 뵈어도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다니까. E5번은 그동안 조니 교수님 강의를 잘 배우고 공부했드니 자다가도 떡이 생기더라. S4, 어머 뭐래니 뭐래니 조니 교수님 회춘하시나 보다 오오 저 잔근육 좀 봐봐 오 섬세해 섬세해 멋져 멋져 으아 으아. S3는 마지막으로 정점을 찍는다. 여자들은 초콜릿을 좋아할지 모르지만 연기지망생들의 로망은 볼펜도 조니, 꽃도 조니, 가방도 조니, 힙합도 조니, 파운데이션도 조니, 포춘텔러도 조니야 어련하실까 두 말하면 잔소리지! 이랬다. 그리고 조니의 가면을 쓴 제임스가 도저히 심경의 급격한 변화 때문에 강의가 힘들다고 말하려던 찰나 제일 앞 줄에 앉은 과-대표로 보이는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오늘은 프랭크가 발표할 차례에요." 곧바로 왠지 모르게 프랭크처럼 생긴 듯한 프랭크 말고 다른 이름은 하나도 어울리지 않을 듯한 반듯하게 생긴 청년이 앞으로 나와서 뭘 발표한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자-자~연스럽게 슥 구석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고 책상에 엎드려 뭘 적는 척 한다. 수업은 이렇게 끝났다. 이걸 간땡이가 부은 느낌이라고 표현해도 된다면 그는 그런 엇비슷한 감정을 느꼈고, 곧 주체할 수 없는 뭔가 젊음을 사랑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여 정신을 한동안 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조니가 된 제임스는 강의를 마치고 교수 휴게실에서 또 한 번의 이상한 경험을 한다. 저번에 썼던 습작 소설에 기록했던 독자의 선험? 나중 행위와 필자의 의식의 흐름, 무엇이 나오면 다음에 무엇을 쓰게 될 것이다, 그 경험을 다시 겪게 됐다. 그는 청색 표지의 시집을 읽다가 시어에서 <구겨진 낭만>이 눈에 띄여 그 문구에 <13월>을 더해서 수첩에 기록했다. 마법 학교에서 불온시하는 문학 수첩에. 곧이어 그는 읽고 있던 시집을 한 장 넘겼다. 그랬드니 다음 장에 나오는 시의 제목은 글쎄나, <13월의 예감>이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이래도... 될까? 사막에서 모래가 혼자 이동하거나 파란 피를 가진 동물이 발견되는 일도 아닌데 참 어이없게도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참고로 후자 시의 1행은 '나는 조용히 미쳐가고 있었다' 이고, 마지막 행은 이랬다. 조용히 미쳐가고 있다, 나는. 그는 기분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걸까? 그는 타닥타닥 튀겨지는 팝콘이나 주인없는 강아지가 된 것 같은 심정에 가까웠을 것이다. 또 어쩌면 드라마 퀸이 된 듯한 착각도 조금. 때문에 조니로 변장한 그는 기분이 별로라는 얘기다. 잠깐 주춤한 거다. 아테네를 처음 방문하는 로마인의 심정은... 아마 이와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럼. 아테네? 서양 문명의 크나큰 두가지 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리스-로마 신화인데 그쪽 경제가 좀 어떻다고 하는 게 흠 좀 그렇다. 누구나 그래. 너가 갑자기 때부자가 됐다고 쳐. 그렇게 가정해 봅시다, 한번 상상해 보자고요. 벼락부자, 복권당첨이든 어쩌든. 이사를 가. 동네 주민 99%가 가난하고 너만 달랑 혼자 부자인 곳으로 갈꺼야 아니면 형편이 비등비등하고 말도 잘 통하고 전체적으로 품격 높은 동네로 갈꺼야? 동네 평균 시세와 수준에 일조하는 집 1과 집 2, 집 3을 도시 이름이나 행정 구역이나 나라명과 친구 이름 그리고 오늘 거리에서 마주치는 쉽게 얼굴을 잊어버리는 타인으로 바꿔도 썩 어색하지 않다는 거(다만 뭔가 비슷하게 어울리고 어떤 이질적인 차이 때문에 때때로 끼리끼리 놀고 사전에 오해를 줄이는 행동까지는 그냥 그러려니 해야겠지. 그런 오해는 누구의 잘잘못도 아닌 전혀 엉뚱한 요인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도, 나비의 날갯짓도, 깃발의 펄럭임조차 하나의 촛불을 끄고 검은 마음의 불씨를 당길 수도 있으니까). 반대로 우리집에 비해서 형편이 궁색하기 때문인지 앞 집과 뒷 집은 왕래가 전무하고 옆 집 1은 힘들고 옆 집 2는 어렵고 어렵다가 이사갔는데 새로온 옆 집 2에 사는 사람은 어 음 완전 무섭다? 웃기라도 하면 좋을텐데 최소한 그것마저 거부한다 그래서 통 인사 하기에도 어색한 게 나을까, 아니면 동네 전체 수준이 그런대로 비슷비슷하거나 좀 근검해도 예술가도 있고 학자도 있고 코메디언을 꿈꾸다가 미끄러진 그냥 좀 재밌거나 썰렁한 개그만 추구하는 주민이라도 있는 것이 더 나을까. 사둔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라는 말도 있지만 사둔이 친구라면 만났을 때 친구가 커피 사고, 밥 사고, 술 사고, NC 비용도 대고, 솔직히 좋은 점이 더 많아, 그런다니까. 전문용어로 기대비용이라고도 하지. 맞나? 혹시 틀렸다면 넘어가. 아~ 저런~ 친구들 만나봐야 하나~같이 못 살고 비리비리하고 그런 것 보다는. 설령 그렇더라도 대체로 비리비리하더라도 만나면 옛날로 돌아가서 웃고 떠들고 반갑겠지만. 더 여유있는 친구 그 녀석이 뭐 꽉 막힌 얼간이에다가 진짜 여자들이 하나같이 손꼽는 그런 밉상 타입도 아닐 것이고, 어디가서 나 누구 친구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걔가 내 평판 평균값에 한 부분이니까. 흐흠, 음 그런 거 그러라니까. 뭐가 그거야? 뭐가 그거야? 뭔 소리를 하고 있어? 왜, 삼천포? 응. 아테네에서는 NC 웨이터 이름도 에르메스라던데, 발에 채는 게 그렇다는데... 호들갑은 이쯤에서.
한편 제임스가 된 조니는 한마디로 죽을 맛이다. 얘는 뭐 약속도 없고, 일정도 없고, 집에서도 책만 보고 인터넷만 하고, 어쩌다 영화 보고, 서점 가고, 그게 다다. 자주 가는 단골 카페도 찾아가 보니까 주인이 한달간 사정상 쉰다고 씌여 있다. 단골 술집도 아예 없다. 또 가끔 집에서 혼자 술을 마셔야 한다는 거다. 집 잔디밭에는 뭔 뭔 들개들이 와서 똥을 엄청 싸놨다. 하필이면 왜 여기서 영역표시를... 길고양이들은 또 뭔 생쥐 시체를 물어다가 선물인 것처럼 대문 앞에 떡하니 놓아 놨다. 전에 제임스가 걔네들에게 잘 대해준 데 대한 보답인가? 알 게 뭐야. 수영장에는 물 대신 드라이진이 가득 담겼다. 그는 이거 원 말을 말아야지, 누가 이 게임 하자고 한 거야, 난 안 한다고 말 할려다가 기회를 놓쳤어, 이런 젠장~ 그러고 있다. 어쩌다 한번 친구들을 만난다기에 그곳으로 갔다. 어디 촌구석 로데오 거리였다. 친구 1은 인성씨를 닮았고, 친구 2는 메시를 닮았다는 글을 포스트잇에서 읽었는데... 누굴, 닮어? 만나서 인사하고 스스럼없이 진짜 날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하고 있을 때 나는 뭐야, 하나도 안 닮았자나 하면서 한 대 때릴 뻔 했다. (쌍)욕이 나올 뻔 했는데 겨우 참았다. 걔는 왜 친구 별명을 그렇게 지어가지고 날, 제임스로 변장한 조니를 이렇게 난처하게 만드는지 꼭 인내심 테스트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얘네들 술도 못 마시면서 만나면 술만 마신다. 또 금방 혀 꼬여. 그러는 중에도 늬가 적게 마셨네 똑같이 마셔야지 밑잔 좀 그만 깔아라 적당히 해라 등등등. 그러면서 아~ 얘네들이랑 같이 술 못 마시겠네 그런다. 술 마시다 그런 애기도 한다. 옛날에 누가 술 먹다 도망갔는데 어떻게 어떻게 다시 집에 누가 들어왔다가 나가고 또 다른 누가 들어왔다가 나가고 그러면서 누구 집에다가 술 안주를 엎질렀네 아니네 너네 누구네 그러면서 뭔 말도 안 되는 말싸움이나 하고 완전 초딩들이라서 같이 노는 게 고역이고 혀를 차게 만들었다. 얘네들 내가 조니인 거 알고 특수 가면을 벗으면 깜짝 놀랄 텐데, 그런 공상만 수없이 하고. <아~하 이거 꼭 내 자랑 같아서 내 입으로 말 안 할라 했는데~ 사실은 알아야 하니까~ 진의는 아셔야 하는 것 같아서~ 또 사람이 우낀 얘기만 할 수는 없으니, 그런데 이런 얘기를 여기서 내가 내 입으로 자랑스럽게 한다는 게, 아니 이러면~, 내가 솔직히 말씀 드릴께요. 이런 얘기 내가 왜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얘기를 TV 코메디 프로그램에서 하면 진짜 거짓말 하나도 안 하고 들썩들썩, 뻥뻥 터지는데 얘들 앞에서 하면 울상에 분위기 험해지고 슬슬 상황이 안 좋아져서 그는 주로 듣기만 했다. 그러나 그도 실은 사적인 자리에서 보면 이와 똑같았다. 하나도 안 틀리고. 완전 초딩!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다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훨씬 심하다고 보는 게 맞다. 제법 노는 방법에 익숙해지니 (그는) 남자는 본디 이렇게 논다 바로 그 맛이 느껴졌다. 다시 청년시절로 돌아간 듯한 뿌듯함 그런 거. "여자들도 역시 선수들이다. 방식이 교활할 뿐이지"라는 어느 트윗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진입 장벽이 높고 대체제의 위협이 낮은 일반적인 마초 클럽으로 성숙기를 지나 수요 지속만 남은 전형적인 상남자들의 세계란 말이지. 즉 이런 스타일의 친구들이 활약하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자랐고, 그분들과 도플갱어인 사람들이 만든 음악을 듣고 외우고 따라부르면서 꿈을 키웠고, 그분들과 똑같이 춤을 흉내내면서 NC에 드나들다 꿈을 포기하거나 수정했고, 정확히 그들과 똑같은 똑같은 사람들이 쓴 책을 읽고 그리고 나는 거기에 숟가락 하나 얹어서 자기는, 제임스의 가면을 쓴 조니는 지금의 성과를 이룩했다는 반건조된 철학적인 생각마저 하게 됐다.
집으로 돌아와서 수첩을 보니 제임스가 소설 쓰기와 관련된다면 뭘 해도 좋다는 밑줄 그어진 글을 보고 그는 인근에 있는 첼로 교습소에 등록했다. 한달도 아니고 여섯 달 짜리로. 강사가 지성미와 미모를 겸비해서 재고할 가치도 없고 검토할 필요도 없이 등록했다. 그런데 악기 배우는 거 생각도 없지만 다음 날 학원에 가 보니 그녀는 없고, 웬 가죽잠바를 입으신 UFC 스타일 아저씨만 계셨다. 그녀는 후배였고 어제 놀러온 것이었고, 다시 안 온단다. 그는 괜히 6개월로 등록했네 후회했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거기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다시 제임스의 생활로 돌아와서 조니가 된 제임스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언뜻 떠올려봤지만 딱히 상상히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제임스의 생활 그 가운데 주업 소설 쓰기로 돌아왔다. 녀석이 남긴 글에는 그분이 오셔야지 그래야 소설을 쓸 수 있다고 하는데 그는 도대체 그분이 누구인지, 착상인지, 작전 전달자인지, 코발트 블루 팬티를 입아야 하는 어떤 요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감을 못 잡았던 것이다. 다른 건 다 꽤 친절하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지만 유독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상징적이고 난해하여 눈 감고 새끼발가락을 쓰다듬고 더듬은 그것이 코끼리 뒷다리라는 것을 알아맞추라는 식이었다. 맙소사, 나 보고 어쩌라고! 뭐 일단 기다리지, 그도 예전의 그와 똑같이 행동하게 되었다. 다만 그가 남겨놓은 지침, 음악을 듣게 된다면 무조건 몇 대 몇 대 몇 장르 비율로 고전음악만 듣는다, 지령은 또 이랬다. 소설의 문체를 위하여 1주일에 적어도 1번은 햄버거 가게에 가서 햄버거를 먹을 것. 배달은 안됨. 햄버거는 제일 고급품을 선택할 것. 그런데 달력을 보니 연중 특별 시즌으로 1주일이 꼭 축제 기간처럼 햄버거 문체 탄생 기념이라고 해서 1주일 내내 햄버거만 먹으라고 나와 있었다. 아 놔 이런 뭐여 이거! 투덜거렸지만 그는 군말없이 그렇게 했다. 어설프게 타인으로 살아보기가 아닌 진정한 환상, 환희, 새로움, 격조를 원했으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렇게 햄버거를 자주 먹다 보니 햄버거를 바닥에 한 번은 "이런 삐─ 아 증말 나 이런 이거 못해먹겠네~" 그러면서 집어던지거나 지겹고 물리고, 시내에서 낮에 아니 밤에 골목길에서 노상방뇨를 할 때에도 거기, 햄버거 가게를 향해서는 한동안 오줌도 누지 않아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그게 정상인데, 원래 순서가 그래야 하는데 이상하게, 진짜 이상하게 그 반대로 점점, 차츰차츰 햄버거가 예뻐보이고 햄버거가 더 더욱 맛있어지는 것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수준은 올라가고 멈추지 않았으며 햄버거 문체 탄생 축제 기간도 끝났다. 원래대로라면 뻑하면 햄버거, 걸핏하면 햄버거, 미친 햄버거, 삐─삐─ 햄버거, 사람 환장하겠구만 그래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장난이 아니었다. 결국은 하루라도 햄버거를 먹지 않으면 몸살이 나게 되고, 하루라도 햄버거 가게 앞을 지나가지 않으면 발바닥에 가시가 박힌다든지 물을 마셔도 코로 넘어온다든지, 매일 햄버거를 먹다가 어쩌다 하루 햄버거 먹기를 거르게 되면 앓아누워서 의식이 있을 때도 햄버거, 잠을 조용히 자도 햄버거, 잠꼬대를 해도 햄버거, 앉으나 서나 야한 상상을 하거나 야하지 않은 상상 중이거나 오로지 오직 햄버거 생각뿐이 들지 않는 것이었다. 완전 중증이다. 중독 중의 중독. 병은 병인데 연구하는 의사나 학자도 없고 학계에 보고된 적이 한 번도 없는 불치병이다. 그는 햄버거와 친해진 것일까? 급작스럽게 우정이 불붙었다고 해도 될까? 이건... 아무래도... 사랑과 비슷한 거 아닌가? 그러면 이건 상사병? 햄버거와 인간이? 햄버거와 햄버거도 아니고 인간 대 인간도 아닌 햄버거와 인간이? 정말? 진짜로? 그게 가능해? 오~ 웃긴 신이시여! 이 상황에 가장 적합한 말은? 오 믿을 수 없어! 말도 안 돼! 그러나 SF 영화가 아니야. 하지만 드라마 장르가 판타지도 아니라구. 그렇다고 어설픈 추리소설도 당연히 아니지. 왜 하필 그 인연이 지금 여기에! 운명인가 아니면 숙명? 또는 숙적? 이런, 젠장! 뭔 말이 되는 일이어야 긴가민가 의심이라도 하고 계산이라도 해 보지 그러나 사실인데 이걸 어쩌나, 아아! 아니 이 사람이... 이 양반이 이거... 정신이 나갔나? 살다 살다 별 희한한, 별 개가 망아지도 아니고 개가 풀 엄~청 뜯어먹는 일을 다 보겠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좌우간 도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라고 바깥으로 향한 어떤 격정과도 같은 감정의 울렁임이 내면에 그 중간 어디쯤의 끝자락에서 가녀리게 풋사과를 닮은 호감이 변모된 다정한 사랑인 것 마냥 떨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시작했네!) 소설 쓰기와 햄버거 먹는 게 뭔 상관이야? 번화가에 가서 햄버거를 먹으면 글이 잘 써지나? 그렇다면 아예 가게를 하나 차리시지 그래. 그럼 최고의 권위와 품격이 있는 문학상을 받았던 위인들은 모두 죄다 햄버거 브랜드 회장에 대주주, 어쩌다 한 번쯤 햄버거 광고 모델 매니저뿐이겠네. 그러면서 그는 안 되겠다 제임스가 염원하고 간절히 바라며 애타게 꿈꾸는 소설 쓰기, 그 위업을 내가 대신 이루어주자 라면서 젊음의 기운이 넘실거리면서 미모의 청춘남녀들로 득실대는 어느 또 다른 유명 햄버거 가게를 찾아갔다. 왜냐하면 그 음식을 먹으라는 말도 있었지만 그가 써놓은 소설을 읽어보니 장소의 이동에 대해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그랬기 때문이다. 거기서 2층, 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창문 옆, 위치는 멋쟁이들을 직시할 수 있는 최고의 최적의 좌석에 앉아 글을 쓸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노트북을 안 가져왔다. 이런 젠장~ 뭐시여! 그래서 그는 최신 유행 음악을 들으며 햄버거를 햄버거 광고 모델보다 더 맛나게 씹어 먹으면서 경마장에서 앞에 가는 동료의 뒷꽁무니와 말벅지와 말 꼬리와 흙먼지를 뒤쫓는 실력이 변변치 못한 경마 인생의 내르막길에 접어드는 경주마가 된 듯한 슬픈 착각에 빠져들었다. 히잉히잉! 그의 이름은 아내는 아무 것도 모른다? 뭔가 새파랗고 호젓한 기분? 이건 뭘까 라고 생각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그러나 알고 싶은 욕구에 대해서는 어느 만큼 친밀한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건 무엇이냐면 누군가가 자기가 바라는 이상에 접근하고 싶으면 비슷한 전문가처럼 생활하고, 1~2세기 전에 살았던 현자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미래의 꿈을 이룬 자신과 같이 행동하는 것이 뭔가 도움이 될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예술가들이 일단은 일평생 한 개의 직장에서 뼈 빠지게 성실히 일하는 월급쟁이처럼 그렇게 살면서 우선은 성실히 하루 몇 시간, 주 최소 몇 시간 노동, 합이 평생 몇 개의 작품 그래야지만 명작이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는 거다. 단 자기에게 알맞는 제대로 된 분야와 거기에 적당한 자질이 동시에 맞아떨어진다면. BMW가 아니라 BWV(바흐 작품 번호), K(쾨헬번호) 그리고 미술과 문학등 그 예는 새고 샜다. 그런 말 들어보셨나? 카페 피카소에서는 구할 수 없는 정보란 없다, 못 구하는 물건도 없다. 금시초문이시다? 사장님, 너무 순박하시다. 정보원을 바꾸던가 마누라는 안 되고, 추구하는 장르나 사조를 바꿔보시길 바란다. 보통 전문가가 아닌 어른들은 자라는 새싹들에게 그런 식으로 권고한다. 그래 누구나 알고 모두 인정하며 좋고 또 좋은 얘기다. 인문교양 분야에서 언제 어디서나 강의 내용으로 지겹게 나오고 매번 반복되는 이야기다. 언제까지나 돌림노래로 들어도 부족하고 때론 새로운 기분마저 느껴지는 당연한 말! 그래, 다 좋다. 다 좋단 말이야. 그런데, 그분은, 언제 도대체 언제 오시냐고? 어? 엉? 그게 문제다. 그게 문제라고. 세상에서 사람은 두가지로 나뉜다. 천재와 범인. 천재는 또 둘로 나뉜다. 아인슈타인과와 평범한 천재과. 그 분야만 알아가다 보면 어느새 비즈니스 IT, 통신, 기기 등등 그런 쪽으로 직업을 가져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인문서적을 한 권 읽었을 때 그런 심정이 드는가 안 드는가, 그것이 <책을 잘 썼냐 그냥 범작이냐>와 살짝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픽션이 아닌 경제-경영-자기계발 분야이니까. (장소가 바뀌면 돌연 사라질 3분 즉석요리 같은) 동기만 부여하고 슥 빠지면 나 어떡해 하겠지만, 일반론은 그렇다. 하여튼 이 때문에 그래서 제임스로 살고 있는 조니는 난장판이 되든 어쩌든 뭔가 영감이라고 부를 수 있든 말든 떠오르는 소설 쓰기와 관련된 생각들을 모두 공책에 기록해놓고 나중 제임스 알아서 하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산문이라고 하기엔 애들 장난 같지만 그래도 혹시 거기서 영감을 얻고 그걸 다듬어 시를 쓸지도 모르니,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일단 그는 소소한 생각의 편린들을 기록은 했다. 그 가운데 하나를 들자면 이렇다. 이미 수준 떨어진다고는 했으니 품위가 떨어진다는 반론은 이제 감면 받았고, 어디 연습장에나 끄적거릴 정도인가 아닌가 확인하자면 이렇다. <1번, 삼분 남짓 짜리 사랑 노래에 사랑이란 낱말이 몇 번 나오나, 아조 엄~청 많이 나와 말도 마셔, 마치 그런 노래. 2번, 뉴스에서 오늘 브로콜리가 몸에 좋다고 하면 다음날 식품점에 브로콜리 절판되고, 항간에 뭐가 유행한다고 하면 관련주 입도선매로 모자라 뜬금없이 (간판만) 경제연구소 소장이 반사이익을 얻는 것. 어느 단편에 햄버거라는 단어가 유난히 부쩍 반복되는 건 1번이 2번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증거일까? 증거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시선을 돌려 완전 살판난 조니 마스크를 관찰해보자. 살살 웃고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아주 살맛났구만 살맛났어 녀석. 이런 말 해서 좀 그렇지만 대관절 전에는 얼마나 먹을 거 못 먹고, 입을 거 못 입고 고행을 했던 거야? 좀 여유 있거나 형편이 그만그만하거나 삶의 자세나 마음가짐과 형식은 일장일단이 있고, 주어진 여건에서 즐겁게 살면 그만이고, 뭔가 현실과 다른 이상을 꿈꾸거나 몽상한다는 건 매한가지인데 너무 드러내놓고 좋아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물론 마스크를 쓴 인물의 본색을 아는 사람이라면 철가면을 쓴 색마 그 장본인은 지금 그 역할을 충실히 잘 수행하는 것으로 볼까? 그럭저럭... 맞나 안 맞나? 뭐 좀 아시는 게 있으면 이러지 않으실런지... 제발이지 좀 채신머리 있게 품위를 잃지 말고 항상 단정한 몸가짐을 염두할 것이지 이게 뭐하는 소행인가. 그러나 크게 모난 구석없이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짜여진 기존 조니의 생활 양식에 흠결이 가지 않도록 상당히 잘 살고 있었다. 용태도 그만하면 됐고. 환부가 완쾌된 것처럼 아팠던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고. 누가 보면 아 저분은 역시 초심을 잃지 않는구나, 내가 소원이 있다면 정말 스스로 정신 건강 때문에라도 제발 그분의 거만한 모습을 꼭 한 번 보고 싶다, 꼭 이럴 것 같았다. 물론 행여나 그런 오점을 보인다면 세간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가 정신이 나갔구나!> 그럴지도 모르지만. 안 그럴 수도 있고. 팬이 딱 0명이 아니라 최소 1명 이상이라면 말이다. 마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꽤 정확히 그리고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조니의 생활에 싫증났다면 인생에 싫증난 것이다.
하지만 썩 무시할 수 없는 단점 하나 때문에 그, 조니가 된 제임스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졌다. 조니의 친구로 치면 베테랑 영화배우, 전 섹스 피스톨즈 멤버, 이름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고 만약 당신과 개인적 친분이 뜻하지 않게 생겨버렸다고 해도 크게 기분 나빠하지 않을 듯한 인생을 살아온 전직 정치인, 미술관 관장, 다큐멘터리 감독, 유명 축구선수...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대륙을 건너온 유명인이요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전설적인 예술가의 딸이나 아들이었다. 평범한 회사원 친구, 가 드물었다. 있어도 서로 사느라 바빠서 자주 보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는 어찌됐든간에 조니 스케쥴 수첩에 적혀진 레벨 3이라 불리는 장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자가 듣기에 사족을 못 쓰는 말, 남자가 보면 꼭지가 도는 환영, 고양이는 장소, 강아지는 사람, 시냇물은 졸졸졸 그러나 레벨 몇인가 거기 알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니네, 별 것 없구먼 그럴 수 있지만 그 위치에서는 이상하게 변태스럽게 그런 게 궁금하고 알고 싶고 애정이 마구 샘솟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어쩌다 마주치는 폐가처럼. 들어가지 마시오? 어, 안에 뭐가 있길래! 양쪽 여닫이 문의 손잡이 왼쪽은 사용가능, 오른쪽은 사용금지, 그런데 열 수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는 것이 나도 모르게 오른쪽을 슥 아니 확 열려다 문에 코나 안경을 부딛힐 뻔한 것처럼 현실감이 부족한 것 같지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애먼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동심이요 그것의 동요인 것 같다.
제임스가 된 조니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즉 거기까지 마음의 여력이 닫지 않는 조니가 된 제임스는 뜬금없이 그 제 3의 뭐드라 아, 제 3이라 불리는 장소에 집착하고 막 서랍을 뒤지고 비밀 문서를 찾고 뭔가 비밀을 캐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왜냐하면 조니 정도 되면 인생 자체가 예술이고, 손만 까딱 해도 부동산과 팬심과 매스컴이 들썩거리고, 그야말로 숨겨진 어떤 뭔가가 없을 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타인으로 살아보기 놀이를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친구들이 정말 최후의 보루, 19세 금지 무엇까지 바꾼 것은 아니었다. (내 마누라) 늬가 데리고 살래? 는 농담으로 그쳐야지 안 그럼 푸르른 꿈을 꾸실 볼이 토실토실하거나 막 화장을 시작하시는 소년·소녀가 좋아하는 명작 판타지 아류 그 근방에도 머물지 못하게 된다. 사춘기, 몽정기 청소년이 무관심한 척 하면서 오히려 눈 똥그래져가지고 더 달려들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고품격 환상 소설이라는 목표를 뒤집을 수는 없다. 그거 말 되는군!
비데 안쪽, 천장 환풍기 출입구, 비밀 금고(작은 복고풍 금고에 고딕체? 잘 모르는 글씨체로 비밀이라고 씌여 있음), 신발장 위, 창고 구석지, 데스크탑 컴퓨터 본체 내부, 전화기 바닥 등을 샅샅이 살폈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러나 뭔지 모르는 분위기, 웅웅 거리는 소리, 더빙된 영화 CD 같은 장식물들이 왠지 사용했던 것이라기 보다는 급하게 일부러 무대 세팅을 위해 어딘가에서 구해 가져다 놓은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집안의 전력선과 인터넷선도 살펴보다가 조니 집 후문에서 조금 떨어진 별채에 특수 사무실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개 발자국과 커피 자국도 거길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래~ 뭔가 있다니까~ 이거야~ 이거였어~ 하면서 조니 탈을 쓴 제임스는 신이 났다. 오라~ 여기가 바로 조니의 특급 개인 집무실이로구나. 여기가 천혜의 작업실이요 모든 동심을 끌어모으는 마법의 초콜릿 공장이라구. 사람이 어떻게 맨정신으로만 살아? 어찌 동심의 세계 그곳에서 영원한 군주로 군림하면서 술 한잔도 안 마시고, 초딩놀이만 하고, 건전한 사회 생활만 할 수 있단 말인가! 업계 최고의 거성이고, 소시민이고 할 거 없이 사랑과 유희와 환락과 놀이와 유흥과 적당한 오락과 수줍은 취미 생활과 건강한 성적 관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있다면 그건 로보트다. 그는 바로 연구실에 들어가지 않고, 실크로 된 선홍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고, 심호흡을 하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오, 멋져! 아, 여기는 자기만의 공간이로구나! 아름다워라! 그러면서. 그러면서? 그러면서······로 짧게 끝내버릴 동요된 감정이 절대 아니다. 그러면 무척 서운한 일이다. 어디 그런 무례한 예법이 다 있나. 오, 이곳은 혼자만의 세계야! 외적 자아의 뒤안에 있는 몇 번 방이고, 그 안에는 골프채든 게임기든 만화책 몇십만 권이든 일반인이 만든 동영상 몇 트럭이든 낚시대던 유별난 복장이든 그 뭐든 뭔가 모종의 자기만의 또 다른 배역이 있는 장소라고! 사람은 누구나 그런 이상을 꿈꾸거나 적어도 모르지는 않는 법이거든! 사물을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이든 남에게 말 할 수 없는 자기만의 일기장, 모든 것을 기록하는 블로그, 모든 속내를 털어놓는 우정 그런 것들 그런 뭔가 어떤 무형의 소망 같은 거! 저번에는 쫄딱 망했지만 기필코 남은 인생 언젠가 어느 때에 한번은 확 말아먹든 파리만 날리든 어쩌든 영화를 다시 한 편 더 꼭 찍고야 말겠다, 전재산...은 좀 그렇고 반재산을 걸어서라도 꼭 한 번 해 보고 싶다, 다시 지난 영광을 새록새록 되살려내는 새 앨범을 꼭 반드시 내고야 말겠다, 이것도 저것도 이도저도 다 아니라면 진정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이고 낭만이고 신비고 기쁨이고 다 모르겠고 나는 그저 오늘 하루 즐겁고 재밌고 보람차고 그렇게 나는 딱 하루하루만 거기에만 집중하겠다, 이 책 저 책 이 사람 저 사람 수많은 얘기들 듣고 휘둘려서 정신없다 예술가의 자존감만 생각하겄다, 지금은 혹 부끄러울지라도 내 길만 가련다 또는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이 땅과 우주에 좀 더 관심을 가져블겄다, 난 정말 무엇을 좋아하는지 난 정말 뭘 하고 싶어 하는지 그거만이라도 알아내고 싶어라······ 이와 같은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감정의 일렁임으로 똘똘 뭉친 꽃밭에서 장미꽃과 튤립과 보라색 꽃과 주홍빛 꽃과 팬지와 세네라리아와 이따금 부케까지 꽃밭에 우연히 놓여진 부 - 케까지 쪽쪽 향기를 맡고 다니는 꿀벌의 혼동과 환영, 어떤 꽃으로 갈지 어떤 꽃부터 입을 맞출지 어떤 꽃은 나중 언제 사뿐히 그 처소에 머무를지 아 생각만 해도 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까지는 지식노동자로 살아왔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난 꼭 한 번 세일즈맨이 되보고 싶었어 차를 팔던 보험을 팔던 약을 팔던지(세일즈맨이 지식노동자가 아니란 말이 아니라... 금발에 젊고 몸매 좋고 얼굴 반반하고 도도한데 상냥하지는 않고 새침하면 멍청하거나 요리 못할거라는 선입견처럼... 세일즈맨 친구에게 지식노동에 대해 어떤 전문용어를 섞어서 도가 지나치게 얘기하면 뚜껑이 슬금슬금 돌아갈 것이다), 난 지금 생활에 더없이 만족하지만 자기 공간 없어도 괜찮지만 내 시간을 갖고 싶어 딱 하루 30분이라도, 그이가 하루 10분만 집안일을 잘 도와주면 좋을텐데, 중전에게 회사에서 일하는 그녀 책상 위에 놓으라고 선인장을 사줘야지 아니다 꽃무늬 원피스를 하나 선물해야지 일부러 촌스런 원피스를 사서 비상금을 챙기고(농담이지만 꼴찌는 장비발이 실력이고 자존심이다) 그녀가 포장을 풀고 나서 옷을 입으면 이렇게 말할꺼야 에이~ 뭐야 이거 살 때는 예뻤는데 완전 형편없잖아~ 이런 뭐야 이거 에이~ 당신 때문에 원피스의 꽃무늬가 초라해 보이자나 아 놔 그건 미처 생각 못했네 실수였어 실수 아하~ 이걸 어떡하나? 어쩌지? 바꿔주라 그럴까? 꽃무늬 없는 걸로? 그래야지, 한달에 딱 하루는 우리 단둘이서 영화보고 외식해야지 등등등. 이를테면 그런 꿈과 공상 음 그런 단꿈들. 그뿐이랴? 그뿐이다. 예컨대 풍문, 밝힐 수 없는 소문의 진상,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끝까지 가지 못했던 열정이나 소박한 삶과 인생에 대한 작은 열망, 잊혀진 바램 그런 거 말이다. 그런데 비밀스런 개인작업실의 발견에 대한 감탄에서 멈추질 않고 그는 서둘러 그 세계를 탐사해 나갔다. 조니라고 겉으로 보이는 그런 인상과 겸손함과 친절함이 다가 아닐 것이다, 그도 이따금 짜증이 나고 화도 낼 줄 알 것이다, 그 인간이라고 야생마의 야성이 숨겨져 있지 않을 리는 없다, 조니도 뭔가 있을 것이다, 없을 턱이 있나 그런 가정 하에 그의 연구실을 통채 들었다 놨다 하며 그는 구석구석 뒤졌드니 드디어 나올 게 나왔다. 올 게 온 것이다. 드디여, 서막이 밝아온다.
그것은 겉에 시크릿 뭐라고 라틴어로 적혀 있는 중요한 문서가 들어있을 것만 같은 서류 봉투였다. 봉투를 꺼내서 보니 또 봉투가 있다. 금빛이다. 1급 뭐라고 꼬부랑 고대 그리스어로 씌여 있다. 자, 이제 넌 대체 누구냐 하면서 봉투를 열었다. 그랬더니 절대 열어보지 마시요 라고 씌여 있는 분홍색 리본으로 잠겨진 봉투가 나온다. 심화 학습이다. 이제 고난도다. 쉬운 거 싫어하는 사람 직성을 풀게 만드는 수법임에 틀림없다. 나도 쉽게 간파되기 싫다구 라고 문서가 말하는 듯 하다.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분홍 리본을 풀었드니 봉투 안에서 또 서류 봉투가 나온다. 이제는 슬슬 뚜껑이 열릴려고 한다. 뭐 주문이라도 암송 아니 암송한 주문을 읊으라는 거야? 하면서. 그 봉투의 푸르스름한 리본을 만지자 곧바로 철지난 유행가가 나온다.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모르겠지만 신기하다. 오, 분위기 끝내주는데 하면서 애써 잡은 리본을 놔버리지 않고 싹 풀어버렸다. 그걸 막는 다른 조처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 그 봉투 안에는 기념 주화가 하나 들어 있었고, 그것은 은화였으며, AD인가 BC던가 내용을 보아하니 굉장히 오래된 물건 같았다. 기대한 건 반지 하나, 반지 문구는 주문, 그걸 읽으면 마법사든 알라딘의 요술램프든 뭔가가 나타나는 것이었는데... 에잇 좋다 말았네 하면서 그럼 그렇지 서운한 기분을 달래며 눈길을 돌리려 했는데 은화를 잘 보아하니 이건 USB 였다. 아~하 이거구나! 안에 뭔가 있구나. 그러고서 그는 노트북에 그걸 꼽아봤다. 비밀번호는 걸려있지 않았다. 미리 조니가 생체인식 같은 거랑 비밀번호를 다 풀어놨나 보다. 순간 자동적으로 헨델의 오르간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와, 신기하다. 이 이상한 기분, 순전히 꿈만 같았다. 그 안에는 글씨가 빼곡히 적힌 문서 파일과 상당한 금액에 대한 비밀 자금 흐름도가 빼꼼하게 상세히 안내된 파일이 있었다. 거기 적힌 내용은 이러했다.
왠지 모르게 지금 그는 목이 바싹바싹 타고, 마법 같은 사랑이 느껴졌으며, 변심한 애인과 결딴난 연애, 철없는 연애 그리고 어떤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심상이 떠올랐다. 길흉화복이나 윤리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독자 가운데 일부는 막 그런 상상을 분명 하셨을 것이다. 사진 파일, 동영상 그런 거. 어허! 조니, 조니라니까! 이 양반이 지금 봉투 몇 개를 깠는데 엄한 공상을 하시나······ 뭔가 주위에 인광이 반짝거리는 것만 같다.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지고 알아서는 안 될 사연을 알게 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 반 기대 반. 서투르지만 느긋하고 침착하며 원숙한 손놀림과 조심성 적당한 대담한 태도. 그러나 심박수는 상승. 한기는 엄습. 신중함과 긴장감 범벅. 하지만 이런 일 어디 한두 번 겪나 하는 듯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파일을 잘 살펴보니 그 내용은 헉, 어머나 글쎄! 이걸, 이걸, 어찌, 믿으란 말인가······! 덮을까? 뭐, 관두자! 아니야 별 얘기 없잖아! 당연하지! 그 내용은 이랬다.
저번에 알렉스의 집에서 친구들 얘기할 때 나왔던 말, 스파르타식 예술 창작 아카데미던가 뭔가가 실존한다는 것. 우리들의 친구 닉은 초특급 영화배우라는 것(이건 이미 알고 있는 얘기지만 하나의 주안점은 이랬다. 그가 니콜라스의 삶과 레오나르도의 삶을 병행하고 있다는 것). 몇 월 며칠에 신비의 낙원을 찾아 먼저 마크와 알렉스와 케빈이 선발대로 출발한다는 것. 그곳의 이름은 (임시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고 정한다는 것. 유토피아의 원장은 하워드라는 것. 등등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이런 미친~ 아흐 쪽팔려! 괜찮다면, 좀 상상력을 발휘해도 된다면, 음 이건 에이 이거 소설이잖아. 뭔가 납득이 되야지 믿든 하지. 합당한 근거가 없잖아. 자료가 불확실하고 논리도 빈약해. 그는 노기 어린 실망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가 부글부글 끊는 열 때문에 뒷목을 한 손으로 짚어 고개를 뒤로 젓혔다가를 반복했다. 그런데 날짜도 그렇고 저번에 하워드 말도 매우 진지하면서 애절했어. 나 그거 듣고 꼬박 3일 밤낮을 고민했잖아. 그 말이 정말일까? 날 놀리는 것은 아닐까? 설마 거짓말일려구? 하워드가 얼마나 지성적인 친구인데? 친구들끼리 짜고 장난칠 리도 없잖아? 그러면서. 날개 달린 무희와 나체의 젊은 미모의 일반인도 집 거실에서 봤어, 환영이라고, 아니 에로 베디오였나? 꿈이었나? 아닌데, 진짠데. 맞아. 진짜였어. 이건 한낱 미망도 아니고 허구도 아니야. 설득력 있고 납득이 된다구. 조니가 나왔던 영화들을 봐봐. 캐러비안의 해적, 거울나라의 앨리스, 모데카이, 숲속으로, 트랜센더스, 다크 쉐도우, 휴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 극장··· 하도 많아서 입이 다 아프네. 그 친구가 거짓말을? 어린이들의 동심을 훔친 사나이가? 그럴 리가 없어, 그럼. 잠깐, 닉이 니콜라스와 레오나르도로 함께 1인 2역을 현실에서 살았다면······ 이거도 완전 엽기요 특종이고 파격이야. 그런 기인에 예술가가 뻥을 칠 수는 없는 법이야. 그렇다구. 그 수많은 영화들에 나오는 얘기들이 또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어떻게든 관계가 되는 부분이 있어. 그리고 나는 주어진 역할에 열중해야 하고, 지금. 그런 제반 여건은 모두 결백해. 딱 떨어져. 완전 수학적이야. 예전에는 곧잘 이런 거 즐겼자나. 겁먹을 필요 없다구. 손해볼 일도 없어. 말로만 꿈이 뭐네 헛소리하지 말고 꿈을 영위하고, 꿈을 이루고, 꿈으로 똘똘 뭉쳐 살란 말야. 돈 문제, 하나도 걸리적거리지 않는다구. 따라서 그 날짜가 오늘인데 지도도 파일에 다 나와있겠다, 안 떠나면 바보네 바보. 파나메라에서 네비게이션 찍으면 된다구. 식은 중 먹기야. 땅 짚고 헤엄치가라고. 뭔가 조짐이 좋아. 앨리스가 날 기다리는 것만 같아. 그러므로, 나는, 지금, 당장, 그곳으로, 출발한다. 그는 이렇게 결정했다. 그리고 떠났다.
아~차 하는 클라이막스, 꺼~뻑 넘어가는 절정, 홀~딱 반해버린 여흥과 혼자 들뜬 기분, 신음이든 콧소리든 환호성이든 허밍이든 제일 유명한 오페라를 차에서 듣고 따라부르고, 자동차 바깥을 보니 산들 바람은 솔솔, 꽃잎은 날리고, 요정들이 언뜻 보이는 듯 하며, 잠깐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그건 하늘에서 아기 천사가 오줌을 누었던 거 같고, 희구했던 미지의 세계가 목적지인지 출입 통제가 철두철미한 정신병원이 최종 도착지인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로 떠난다는 일념만으로 하늘로 훨훨 날아오를 것만 같고, 보는 사람은 없지만 못 부리는 애교라도 부리고, 앙앙앙 어린양이라도 마음껏 하고 싶을 정도로 그는 기쁘고 격앙된 것 같았다. 기다리는 즐거움, 찾아가는 흥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가는 길. 마법사의 가호도 함께 하는 것만 같다. 중간에 스티커가 바람에 날려와 창문에 붙었다가 떨어져서 다시 날아갔는데 그 짧은 순간에 거기 씌여진 글이 보였어. 거기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해서,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대해서, 시계 토끼와 미치광이 모자 장수와 산쥐와 하트여왕에 대해 씌여 있는 것을 제대로 읽었어. 잡아 먹힐 걱정일랑 단단히 붙들어 매라구. 고래든 프랑켄슈타인이든 그 안으로 들어가도 미로를 헤치고 마침내 춤추는 목마에게로 오게 되어 있다구~ 으쌰으쌰~ 룰루랄라~ 들썩들썩~ 아이~ 좋아라···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그가 도착한 곳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니라 오즈의 마법사였다. 유토피아가 아니라 폐쇄된 버려진 놀이공원이었다. 선발대 마크와 알렉스와 케빈, 그 친구들은 눈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예술 창작 아카데미? 있을 턱이 있나! 이런, 젠장! 팀 버튼식 상상력 좋아하시네. 다 뻥이야. 순 뻥! 그런 분야 예술에 쉽게 몰입할 수 없는 마초와 톰보이들은 어디 어두컴컴한 데 들어가서 술이나 퍼마시라는 거야 뭐야? 대낮부터? 가짜가 절반이고 가짜가 환상을 만들어. 뭐, 그 땜에 웃기도 하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어른판 동화네 뭐네 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와 기발하고 알록달록한 아름다운 모험극에 마음을 잘 빼앗긴다면 하나는 알아둬야해. 그 방식으로 똑같이 아니 더 음성적으로든 아니든 사업 서류의 어떤 숫자로 전환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 그거 다 뻥이야. 순 거짓 이야기라고. 전문용어로 허구, 픽션이라고 하면 헷갈려 그래서 먹혀. 안 질리기는 뭐가 안 질려, 하나도 재미없더구만. 물론 말은 이래도 나도, 너도, 그도, 그대도 모두 이런 극법을 좋아하지, 그분까지도. 인정! 나도 실은 제일 좋아하는 장르가 그 분야라구. 그런거 신작 나오면 아주 미쳐! 그 계열 권위자들의 새 작품이 나오면 서둘러 극장으로 뛰어가고, 영화를 보다 졸아, 졸다가 침을 흘리고, 침을 흘리다 컹컹 개꿈을 꾸고, 멍멍 개꿈을 꾸다 벌컥 놀라 옆에 앉은 미인의 어딘가를 건드려서 꿀밤을 쥐어맞든 험한 면박을 당할지라도(미녀가 아니라 마초라면 음, 상남자는 원래 호인이야 딱히 그런 거 괘념치 않는다 무신경해서 그런진 몰라도) 그래도 너는 개봉관으로 간다. 최소한 당신의 호의는 그 정도다. 그럴 수 있어. 하나 밖에 모르는 진정한 판티지광. 이거 이거 이 친구도 나랑 똑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현실과 무지개 너머의 뭔가를 꿈꾸는 돌아이가 분명하군. 그렇다고 확인하려고 하지는 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르는 뭐고, 선호하는 기호가 이거 저거 그거가 아니라는 당신의 안목과 내 취향이 비슷하다는 건 적어도 확실하니까. 그건 그렇고 조니의 개인작업실에서 본 각본 그것 역시 모두 다 거짓말에 허구였다고. 어른을 위한 반지의 제왕 판타지 동화는 왜 없는 거냐고, 성숙한 어른에 원숙한 성년이 되기엔 이미 글러먹었는지도 모르겠어. 이런, 아흐! 그렇지만... 그러나··· 여기라도 구경하는 거도, 썩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막 끌려, 난 솔직히 그렇게 느껴, 이게 나쁜 거는 아니잖아? 한 발 더 나가면 어떻게 괜찮은 조건이라면서 이곳은 꼭 부활해야만 하는 동화의 나라다 어쩐다 하면서 어디 소개시켜주고 커미션이라도 챙겨야 하나, 그럼 나 브로커? 에잇 말 말자! 딱 한마디만 하자. 아, 속았다!
보이저 2호는 지금쯤 얼마만큼 갔을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어딘가로 멀리 갔겠지)
나는 어느 땐가 한 편의 시를 읽다가 문득 갑자기 보이저 2호가 지금 현재 어디에 이르렀을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수첩에 저 첫 문장을 적어놓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호기심어린 표정은 금새 권태로운 일상적 모습으로 바꼈기 때문에 다시 그것이 궁금하지 않게 되었다. 곧 그 의문과 연이은 반문과 파생될 연상과 별안간 떠오른 엉뚱함은 옆에 누군가 있다면 우리 차 한잔 마시러 갈까, 라고 묻는 별다른 의미없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다 말았으면 이를테면 정상적이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누가 썼는지 제목은 무엇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그 책을 당시 찬찬히 더 읽다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집을 들고 몇 장을 넘기니 좀 전에 불현듯 내가 떠올렸던 저 첫 문장에 대한 시가 나왔다. 와, 이럴 수가...하면서 신기하고, 특이하고, 기발했다. 그것이 시의 제목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니다. 시의 제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상이 깊었고, 더 특별했으며, 선뜻 놀랐고, 조금은 기뻤으며, 뭔가 분위기가 비정상적이라고 판단했다. 꼭 실험실에서 뭔가 새로운 원리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었음.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조금 알고 싶어졌다가 말았다. 그분, 그 순간 그이의 기분이 떠나버렸다.
지금 이어지는 세 번째 문단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문단과 관계가 있을지는 자신없다. 문맥상 크게 부자연스럽지 않고 그런데로 말은 되는지 그것에 대한 판단도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그건 나중 생각하기로, 그냥 넘기기로 하고 지금 품고 있는 인심, 그것을 나는 꿈속의 선주, 작은 공책은 알록달록한 색조가 입혀진 기항지, 태도는 어떻게 보면 다소 불편한 표현이지만 참고 잠시 이어가자면 노망난 듯, 달리 보면 어린애 장난인 듯 여기면서 겸사겸사 그 미식감을 글쓰기로 연결시키고자 한다. 기별없이 찾아온 손님이 잠겨지지 않은 대문을 버럭 열고 마주친 집주인을 보면서 그제야 똑똑 노크하며 잘 있었냐고, 날 보고 싶지 않았냐고, 이제 인생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나불거리는 형상이지만 말하자면 그런 식의 방법도 이심전심으로 또 불쑥 놀래켜주는 연인의 놀이처럼 지금은 적합한 글쓰기 방식일 수도 있다. 대놓고 말과 문서로 남겨야만 비로소 집안이면 똑똑 노크를 아니면 누군가를 통해 연락을 취하는 고전적인 점잖은 예법이라 할 수 있다면 이건 좋게 말해 우연한 만남, 막 말하면 들이대기와 비슷할 것이다.
네번 째 문단이다. 이제 문단 세기는 이게 마지막이다. 그냥 한번 세봤다. 직업적으로 글을 오래 쓰고 많이 엄청나게 많이 쓰는 사람의 경우 일부는 그런 변화를 보인다고 한다. 그분이 소설가라면 또 남자였을 때 그는 그가 쓰는 소설에서 자기는 옛날에 글을 이렇게 썼다고 한다. '나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닮은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푸르른 하이네켄 하나와 빨간색 말보로 한 갑을 샀다'. 그러나 지금은 이처럼 쓴다고 한다. <나는 식료품점에서 캔 맥주와 담배 한 갑을 사가지고 나왔다>. 각색이 과장되거나 기억이 약간 틀릴 수 있지만 대충은 맞다. 쓰고 싶은 써야 하는 양이 워낙 많으니까, 할 말이 해도 해도 끝나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 그분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았으니까. 딱 저 부분만 우연히 어디선가 읽었고, 또 사람따라 각양각색의 이유와 선호하는 방식이란 게 있을 테니까 그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그러나 내 경우로 보자면 나는 그것과 반대로 가는 것 같다. 또 커피를 까다롭게 시키든 구두를 매우 세심히 선택하든 사람들은 모두 부분적으로 대충 넘기는 일과 구체적으로 꼼꼼히 살피는 일이 구분되는 건 매 하나다. 그처럼 어떤 순서는 다를 수도 있고, 문화적인 차이와 성장배경에 따른 영향도 있을 것이고, 재미있다고 느끼는 부분이 공통되거나 동떨어지는 개인차는 없을 수가 없다. 딱히 중요한 내용은 아니고 '무엇을 쓸 것인가'가 옹색한 상황에 잠시 떠올려본 공상일 뿐이었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실은 그냥 그렇고, 순풍이 사랑과 이별을 감싸고, 우습기도 하다가 짠하기도 하다가, 그런 감정들을 모두 글쓰기로 연결시키는 게 쉽지 않다. 그렇다. 나는 글이 잘 안 써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또 막 누워서도 생각하고, 산책하면서도 생각하고, 또 책을 읽으면서도 아무 생각 안 하고, 커피 마실 준비를 하면서도 별 생각 없이 물을 데우고, 찻잔에 인스턴트 커피를 담았다. 지금은 직감에 따라야 한다느니 직관적으로 행동하자꾸나 그런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분의 심보, 쉿, 그분의 심사가 불편하시나 보다, 좀 더 그분은 휴식을 취하고, 나는 좀 더 학문에 정진하고 그래서 기분파들이 한턱내는 것처럼 몬테카를로에서 나는 그분과 만날 것이다 이런 정취어린 구미를 주위에 슥 깔고서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가만 앉아서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판에 박힌 일상에 자그만 변화를 주기 위해 나름 분주히 시간을 지켜가면서 익숙한 일들을 하고 새로운 일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이 동네와 옆 동네, 뒷 동네에 대해서 무지하니까 구경삼아 그리고 출퇴근하는 기분을 좀 느껴볼려고 다른 시골과 동네와 마을과 좀 멀리까지는 도시도 기웃거리며 방문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나는 정말 정말 이상한, 이거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그런 이상한 시내를 발견했다.
비정상까지라고는 할 수 없다. 그곳은 애들 막 노는 놀이터 같은 곳도 아니고, 젊은이들 막 달릴 것 같지만 실은 주머니 두툼한 비즈니스맨이 주고객인 유흥가라고도 할 수 없으며, 가구만 파는 가구의 거리도 옷만 파는 패션의 거리도 각료들이 많은 행정의 도시도 아니었다. 그곳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냥 시내였다. 빵집도 있고,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고, 별장도 있고(우낀 이름의 모텔 또한), 핸드폰 상점과 장난감 백화점이 있는 평범한 시내였다. 한때 유행했던 포스트모던 작풍으로 설명하자면 내가 왜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는지 나는 그 동인을 알지 못한다. 그 회상적인 연유에 대해서 누가 나에게 가르쳐주는 친절을 베풀어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다. 아마 나는 지난 일보다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 그 원인, 내가 이곳에 어쩌다 이르게 된 확실한 동기이자 어쩜 경이로운 까닭에 대해서 알 수 있지도 않을까 라는 희망이 밝아오는 길이란 걸 예감했다. 그러므로 이제 어떻게, 는 잊고 왔노라 보았노라 즐기는 일만 남았다. 어차피 지금 나에겐 일과 놀이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동기부여 서적이나 인문-교양서 기준으로 봐도 나는 지금 꿈을 이룬 것이다. 그러면 나는 기뻐서 날뛰어야 하는데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찻집 사장이 되어도, NC 지분을 전량 소유해도, 그 어떤 찬란한 꿈을 이룬다 해도 약간 기분이 좋은 정도? 그거면 된다. 원래 그런 것 같다. 아마도. 놀 땐 놀고, 일 할 때도 놀고! 그거도 어딘가? 아무튼 그곳은 정말 이상한 시내다. 나는 정말 살다 살다 그렇게 이상한 동네는 처음 봤다. 사노라면 그런 일을 한두 번쯤 겪게 되는 것일까? 아니다. 이곳은 그보다 더 희박한 확률에 속하는 세계다. 그리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 그렇게 이상한 시내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머머할 것이다 라는 관망성 발언과 어중간한 어조에 거리를 두고 나는 딱 끊어서 말하고 싶다. 그런 놀라운 유토피아는 실존할 수 없다고, 절대로! 어떻게 모든 재화 가치가 0에 가깝고, 시간은 고요하고 유유히 그러면서 예술적으로 마치 약에 중독된 사람이 느낀다는 듯이 슬로 모션 기법처럼 천천히 흐르고, 배고프지도 않고, 동시에 한없이 먹어도 먹어도 또 먹고 싶고,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고,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이상과 현실은 반대인가? 결혼식 상황이 화장실에서 나올 때라면, 좀 살아본 후에는 화장실에 들어가야 하니까 또 다른 결혼식을? 이제 좀 세상만사에 익숙해지고 인생을 알 꺼 같으니까 어느새 희끗희끗, 그렇게 생각하면 슬퍼진다. 유토피아는 그와 반대다. 신세계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갖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시간은 거꾸로 흐르며, 거실은 천당, 안방은 판타지, 직장은 울상, 일과는 따분해, 약속도 없어, 맨날 본 거 또 보고, 새로운 거 일절 없고, 기쁘지도 않고, 뭘 해도 재미없고, 뭘 해도 안 되고, 취미는 잠자기, 당연히 친구도 없어, 주말엔 괜히 사람들 많은 번화가에 혼자 기웃거려, 거기서 괜히 평균연령만 높이는 역할을 맡아, 딱히 할 일은 없고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르겠어? 뭐야, 어디서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읽는 사람이 문제...일까? 읽는 사람 생각하고 쓰니까 자의식이 옆길로 빠져서 주체적이지 못하고 타자적인 글이 씌여지고 있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하면서 그만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그만! 어쨌든 내가 발견한 시내는 진짜 이상한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한동안 그곳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그곳을 탐구하고, 체험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나는 그곳을 알다가도 모르겠고, 알아도 알아도 또 알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럼 그곳이 도대체 얼마나 이상한 곳이냐고? 말이나 한번 들어보자고? 깜빡 독자가 계신다는 걸 잊어먹었다. 나도 빠졌으니까. 자, 이제 그 이상한 곳에 대해 설명해 보겠다.
일단 내가 그곳이 이상한 시내라는 걸 아는 데는 그리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은 한번 슥 둘러만 봐도 사태가 장난이 아니란 것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입체적인 지도와 어떤 도표를 그려서 어렵게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그곳은 그만큼 이상한 곳이다. 간결한 그래프와 그림으로 쉽게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기 때문에 이상한 곳이라고? 응, 그렇다. 넘어가. 그 시내를 보고 있는 나조차도 이상해질 것 같은 환상에 빠져들 것만 같은 무자비한 불가사의에 간신히 엮여들지 않을 정도로 그 시내는 이상했다 이상했다. 시내의 입구에는 풍향계가 풍향계가 있었다. 멋으로 놔둔 것인지 뭐에 쓰는 물건인지는 몰라도 뭔가 뭔가 으스스한 이상함의 서막을 알리는 것 같았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물론 나는 내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을 순순히 순순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순진해서 좋은 건지 몰라도 나는 순진한 방법으로 시도해 봤는데, 왜냐하면 그런 일이 닥치면 정말 그런 방법을 써먹어야 한다는 낭설에 따라 그 때문에 내 볼을 꼬집어 봤는데 진짜진짜 너무너무 아팠다. 이 환경이 지금 나에게 매우 비우호적일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함부로 그 이상한 시내를 벗어날 수 없었다 없었다. 내가 원래 바람기가 다분한 인간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남이 판단하는 성질의 어떤 성향과 관계된 심리학이기 때문에, 나는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두르지도 않은 망토를 망토를 펄럭인다고 두손으로 툭 뒷편으로,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찰랑이는 몸짓처럼 손짓을 하고, 웃음기도 감추지 감추지 못했으며, 눈에 띄게 헛기침을 하고, '여기가 어디지? 영 못보던 곳인데' 하면서 한마디 탄성을 내질렀다 내질렀다.
「딱 걸렸어!」
융융하다? 어떤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고 쥐죽은 듯이 조용했지만 이제 와서 그 이상한 시내를 못 본 체 남겨두고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슬퍼, 서운하지, 음! 한마디로 그것은 가관이었다. 케케묵은 현시대와 뭔가 역행하는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어찌된 영문인지 <1234> 이런 암호를 넣어봤는데 관심가는 그이의 블로그에 로그인되고, 호감있는 그분의 집 문이 딩동댕 하면서 열리는 기분마저 본의 아니게 경험하게 되었다. 때문에 나는 다시 혼잣말을 하나 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한심하군!」
일단 저기 보이는 노란 찻집의 이름이 그 짝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우스꽝스러웠다. 그건 말도 안 됐다. 그건 이랬다. <어이, 괴짜! 넌 흉측하고 쑥맥이야.> 이게 카페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도넛 가게의 이름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어치워! 정말 형편없어!> 나는 흠칫 놀랐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무슨 일일까? 아무 일도 아니다. 최소한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과 매장 운영이 모두 정상이었다. 더군다나 이름이 조금 특색있는 거 말고는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또 그 앞에 있는 속옷을 파는 가게를 보니 그곳은 이름이 <말이 되는 소릴 해!>였다.
「어쭈! 재밌는데. 여기서 부디 끝나지 않았으면...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슬슬 불편한 심기와 이건 뭐지 라는 놀람과 최고조의 흥분이 상치되고 뒤섞이며 자꾸 감정의 기복을 일으키며, 차차 그것은 퉁명스레 이걸 좀 더 알아보고 싶다는 무슨 일일까 라는 호기심으로 여러 감정들이 녹아드는 기미가 내내 날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얼핏 주위를 둘러보니 문장이 아닌 단어도 보였다. 불행. 불길. 불친절. 허물. 얼토당토않은 일들이지만 믿어야만 하는 또렷한 사실이었다. 얼토당토않은 일, 도 찾아보면 있을 것 같았다. 단순한 명사와 점잖은 단어들 틈새로 더 센 표현들도 이름으로, 가게 점원의 명찰로, 신제품 출시 홍보 문구로 쓰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말들 말이다. 되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고 있어. 입 닥쳐. 얼간이. 머저리. 너도 늙어봐라!
이런 이상한 명칭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뭔가 어질어질한 기억의 혼돈과 비이성적인 감성의 과장, "싫증난 여자"가 되버린 것만 같은 칭얼거림 직전의 기분에 휩싸여 나는 안 되겠다, 우선 가까운 까페에 들어가서 냉수 한 잔 마시자, 라고 작정했다. 어, 저기 보인다. 찻집, <볼 장 다 보다!>에 나는 들어갔다.
이 카페의 분위기는 황홀과 우둔이 교차하고, 순종과 비아냥이 짝을 이룬 듯 하면서 그렇지만 고급스럽고, 여기 있는 사람들 또한 품위있어 보이는 것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최고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간략히 상-하 둘 중에서 고르자면 단연코 상이었다. 여기서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안심해선 안 된다. 잘 해주다가 (간혹) 호구되니까 조심해야 한다. 사교계 명사가 된 것 같은 밑도 끝도 없는 속단, 경계할 일이다. 그렇다고 낙담할 것까지는 없다. 너무 멀리 내다볼 필요 없다. 지금은. 부디 희번덕거리지 않으면서 간청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면 웨이터든 웨이트레스든 접선을 기다리는 두더지든 누군가 접근해 올 것이다. 왔다! 정말로 왔어. 이거라니까! 무엇을 마시고 싶다는 내 의향을 창백한 표정과 함께 내 배후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후광이라는 이름의 구름에게 살짝 마음을 띄우고 한편 그이 즉 품위 있는 손님과는 별도로 더 품위 있고, 더 복장이 특별하고, 더 정말 더 멋져 보여서 손님을 은근 허당으로 만드는 그럴 의도가 애초에 없었던 사람 좋은 그이는 찻집 내부의 공중 어디쯤에 사뿐히 둥둥 떠 있을 뭔가 색다른 변화를 감지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삐딱하고도 탐욕스럽게 이름이 어려운 꽃 이름으로 된 차를 기다렸다. 잠깐! 정확히 뭘 주문했다 라는 글은 안 나왔는데 하면서 길지 않으니까 다시 읽어 보시는 독자 한두 분 계실 것으로 짐작한다. 여기서는 한두 문장 정도로 짧으니까 괜찮지만 그와 같은 방식이 한두 쪽이나 책 몇 권에 걸친다면 아, 그렇다, 그 자세 그 표정 그 뭔가를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고전적이란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고전적인 정경이 묘사된 그 당시의 명화 속 어떤 주인공들의 인습은 그와 정반대였을 것이다. 알아보니 그렇다고 하더라. 잘못 알았을 수도 있지만. 그걸 잘 표현하지 못하면 나중 아니 당장 시장판에서 어쩌고저쩌고... 그런 말을 듣게 된다. 그럼 옛날에 살던 99퍼센트 사람들 사이에 통용된 이심전심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은 현대적인 사회로 넘어와서 따끈따끈한 햄버거 문체로 바뀐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돌아와서, 나는 그곳의 돌아가는 상황을 둔감하지 않게 따라갈려고 하다 보니 나도 요령이란 게 생겼다. 그래서 아까 주문할 때도 먼저 꺼낸 말은 이랬다.
「저기, 음, 제가 항상 찾는 걸로 부탁할께요!」
가격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상당히 세게 나간 것이다. 돈 몇 푼 한다고 하면서! 완전! 살면서 내 이런 날이 오리라고, 장담했드니 정말 왔다. 정말 그렇게 내다봤나, 그것은 음, 모르겠다. 그렇다고 메뉴판에 차 1이 <이래라 저래라>, 차 2가 <하든 말든>, 칵테일 A가 <젠장, (나도) 말 좀 하자고!>, 칵테일 B가 <누구 보고 놈이래?> 이렇게 막 나가는 형세는 아니었다. 농담 아니다. 장난도 아니다. 나는 <볼 장 다 보다!>에 들어왔으니까. <호사 & 사치>가 아니라!
나는 이런 곳이 실존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런 공간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원한 적이 없었다. 있다 해도 내가 출입할 자격을 아마 얻을 수 없지 않았을까. 어떻게 보면 그리 대단치 않은 것 같지만 이건, 절대 대단치 않은 게 아니다. 완전 놀랍다! 창밖을 보니 한 남자가 걸어간다. 그가 입은 티셔츠에 이렇게 써 있다. <이것 보세요!>. 이것 보세요? 뭘 봐? 이건 뭐랄까 딱 혼자 놀기에 최적화된 즉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은 시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혹시라도 이곳의 경기가 기울어 시내가 불경기로 모자라 내리막도 모자라 불황에 불황을 겪고 또 겪어 완전 쇄락할지라도 나는 애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은 그렇게 한철 장사로 보내버리기에는 꽤 멋지고, 과찬의 언사가 넉넉히 어울리며, 이곳의 고품격은 요지부동할 것만 같은 직감 직감 바로 그것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 저주라는 이름의 가게가 아니라 행운의 깃발을 하나 꼽고만 싶다. 그만큼 이곳은 설명할 수 없는 뭔가 특별한 천성을 이끌어내고, 달리 말하자면 자신을 놈팡이로도, 방랑자로도, 시인으로도, 똘아이로도, 철학자로도, 막후 실세 세력가로도, 신비주의자로도 성큼 착각하게 만드는 이상한 시내다. 내 뭐랬나, 이상하다 하지 않았나. 이 정도면 이상하다고 해도 괜찮지 않나! 그렇지, 이 정도면. 여긴 형형하다. 또 꼴사납다. 그러나 유쾌하다. 우끼다. 너끈히 재밌다. 어떤 비공식적 자아가 대두되게 만든다. 세상에 그런 요상한 정체불명의 미확인된 이상한 시내가 대체 어디 있다고. 마치 여기는 어른이 재미삼아 치르는 그런 우스운 시험같다. 그 영문은 잘 모르겠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 바람과 함께 거리의 포플러 나무가 나부낀다. 이곳을 좀 더 알아봐야겠다. 그러고 싶어졌다. 남의 사랑놀이를 훼방놓고 싶은 욕구보다 훨씬 건실한 생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걸 비밀로 할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볼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지금 시대에 이런 시내가 존재한다니 너무나 뜻밖이었다. 여긴 그야말로 완전 창의적인 동네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여긴 심심하지 않다. 반대로 궁금하고 막 설렌다. 재미있다. 즐겁다. 언젠가 지겨워져도 상관없다. 실망감이 찾아와도 반기고 겸손히 마중나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뻔해도 좋다. 다른 생각 다 제쳐두고 즐기기만 하면 된다. 슬슬 권태로워질 꺼라는 불안한 예감, 훌훌 던져버리고, 냠냠 입맛을 다시며 그냥 방방 뛰는 거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보통의 일상 생활에서 매우 드물게 정색하는 순간 같은, 우리는 살면서 거의 이런 일을 겪지 않고 거의 다 극과 작품으로만 그걸 대하고, 그래서 그럴 것이다 어떨 것이다 라는 것을 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그렇게 선험적인 공부가 저절로 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나는 정색하는 것처럼 놀라운 상태가 아주 일상이 되어버린 채로 매일 그곳으로 출근했다가 시간이 되면 퇴근하고 그랬다. 하루는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글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고, 하루는 막 여러 가게를 들락날락 하면서 허공에 떠있을지도 모르는 영감과 창작 아이디어를 찾아서 헤매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 지내다 보니 어떤 패턴이 보였다. 썩 둔감하지 않은 즉 평균만 되도 대충 감이 딱 오기 때문인 듯한 그런 느낌이 퍼뜩 들었다. 그건 무엇이냐면 부정적인 단어와 음성적인 뜻의 층위에 따라 그곳의 서비스와 음료나 음식의 맛과 어떤 분위기와 안락함과 영감과 쾌적함과 흡족함에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즉, 1단계는 이렇다. 꼴등, 배고픔, 악몽, 망측, 탕진 같은 옅고 연하고 조용한 표현과 '속았다 그리고 낚였다' 같은 낮은 문구는 여기 속한다. 그리고 2단계는 골칫덩어리 이런 삐─ 삐─ 삐─, 당신 폭삭 늙어버렸네요, 인생이란 게 그렇듯이 사업 실패 후에 기다리는 것은 고독한 말년, (칭찬하는 것인지 먹이는 것인지 애매하고 꽤나 해석이 불분명한 다시 물어보면서 계속 묻는 말 같은) 그런데 형 정말 50살이세요?, 또 (어떤 행사장에서 멋진 영화배우를 보고 와 멋지다 잘생겼다 라고 이미 그곳에 같이 있는 남편에게 말했는데 5분 지나서 또 10분 지나서 그렇게 계속 다시 말해서 남편의 화를 은근 돋구는 말 같은) 와 잘생겼다... 곧 그런 상황을 빼곡히 간판에 모두 적어 넣어서 간판이 무슨 깜지처럼 보이는 이런 은유적이고, 조롱조에 신비한 검은색 콜라처럼 돌려서 뚜껑을 여는 방식의 이름 그 정도가 2단계다. 그럼 3단계는 무엇일까? 그건 재현-불가다. 설명이 불가능하다. 가능하다고 해도 해서는 안 된다. 어중간하게 묘사는 된다 해도 그건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렇게 단계별로 드러나는 차이를 유심히 살펴보니 누가 꼭 나에게 솔직하게(자기편에게는 부정직하게) 진술하는 것처럼 아하 그렇구나, 하는 느낌이 선연히 다가오면서 어떤 응어리를 풀고, 비로소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이다 라는 깨달음에 관한 수완이 늘고, 인생을 번안하고 변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1단계가 고급이고 기어가 올라갈수록 저급해질지 어떨지는 각자 짐작하고 추측하기로 하자!
여기서 잠깐, 그 단어 나왔다. 중요한 명사 인-생! 내가 비록 여기 와서 아 인생이란 이렇구나 그렇게 감화되고 영특해지는 트인 지성에 이르게 된 것 같았지만 실은 이전까지, 즉 내가 여기를 알기 전까지 나는 다음과 같이 인생을 잘못(?) 알고 있었던 듯 하다. 어떻게 잘못 알고 있었냐 하면, 음, 뭐랄까, 글과 관계된 여러 분야 가운데 유독 시나리오 게다가 현대적인 예술과 부쩍 친근한 방식과 비슷하게 설명하자면 바로 이런 식이다. 좀 길지만 한 호흡에 빼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이 긴 명대사라고 착각하니까. 길면 평범한 대사도 특별해 보이니까. 연기하는 사람도 외우기 힘들꺼 아니야.
<인생이 뭔 줄 알아? 인생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인생이란 어떤 고귀한 원리와 신비스런 비책과 영롱한 마법으로 포장된 도저히 알 수 없는 풀리지 않는 난제인지, 인생이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그걸 아냐고? 인생이란 말이야, 어렵게 생각하지 마, 자, 이제 설명해줄께. 잘 들어봐. 하나도 어렵지 않다고. 귀를 쫑긋하고 정신을 집중해서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좋을 꺼야. 감동해도 괜찮아. 그리고, 그리고 말야. 그 다음에는 그걸 외워, 모조리 깡그리 외워버리란 말야. 그 후 어디가서 이걸 그대로 말해. 그럼 넌 동기부여 부흥회를 열고 비디오를 팔고 동영상 강좌를 열고 인터넷에서 손만 까딱 해도 대중들은 열광하게 되는 거야. 알았어? 별 거 없어. 듣고 있지, 어? 학교 다닐 때 성적이 변변치 못했다고, 뭐 하나 그나마 나은 재주도 없다고 속상해 하지마. 이거 하나는 잊지 말란 말야. 딱 보여. 넌 감수성 만큼은 천재라는 걸. 사랑, 할 수 있어. 지금 보아하니 마음에 두는 애가 있네~ 오 뭔가 있는데 얼굴에 딱 씌여 있어. 그렇다고 괜히 2번 타입에게 1번을 들이대지는 말고. 1번이 뭐고 2번이 뭐 같아? 뭐겠어 자 봐봐, (자세잡고),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널 갖고 싶었단 말야··· 내게로 와 잘해줄께··· 나랑 같이 살자! 1번이 이렇다면 2번은 이거야. 세상엔 사랑할 게 너무 많아··· 그래서 더욱 슬퍼져···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슬픈 건 뭔줄 아니··· 바로, 널 (으으으으). 여자를 알고 싶어? 여자들 특징이 뭔 줄 알아? 여자는 말이야 여자는 말이야 의외로 사랑에 쉽게 빠져. 금방, 급속도로, 팍, 어쩌다, 왠지 모르게, 막 괜히! 한 여자에게 너가 2번을 들이대면 그게 어디 옛날 사랑노래 가사에 흔하게 쓰였다는 걸 걔네들이 알 수 있을 것 같아? 천만에! 자기가 극진히 존중받고 있고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 막 달아오르는 데 그런 걸 생각할 틈이 어딨어? 나중 언뜻 물어는 보겠지. 그거 진짜 진심이었냐고, 그렇게. 자, 한번 따라해 봐 2번 대사... 지금 말고 나중에 이 멍충아 지금 중요한 얘기하고 있잖아. 그리고 표정 살리고, 눈에 힘 빡 주고, 어깨 펴고, 그러나 어깨 선 수평은 안 돼. 그거 말고 아후 이런 나중에 해 나중에. 너가 2번 대사 치면 이미 그땐 풍덩 빠진 거야. 알겠어? 그런데 말이야, 여기서 파생되는 보너스가 있지. 배우 수업에서 낙제하지만 않는다면 좀 늦더라도 알게 되는 때가 와. 그건 뭐냐면 여자들이 막 2번 대사를 듣고 싶어하는 게 보인단 말야. 뭔가 파릇파릇하고 뭔가 간질간질하면서 어떤 우수어린 눈빛과 미묘한 분위기에 어쩐지 내게 주문을 거는 것 같은 뭐랄까 감성...보다 더 나은 단어가 있을 텐데 그건 글 쓸 때나 고민하고 아무튼 그런 뭔가가 느껴지는 순간이 있어. 그건 뭘까? 그 여자가 너를 좋아한다는 거야! 그러면 이미 게임 끝난 거지 여자가 먼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러나 오, 땡큐! 라고 흥분하면 안돼. 왜냐하면 원래 십중팔구는 여자가 먼저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야. 일부러 빈틈을 보여. 남자는 끌려가는 거고. 그건 정글의 법칙이야. 딴 거 생각하지 말고, 감수성, 그것만 생각해. 감수성, 딱 하나만. 명심하란 말이야. OK? 뭐네 뭐네 그딴 거 다 필요없어.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했어도, 별다른 재주 없어도, 감수성만 잘 자극하면 적당히 먹고 살아. 적당히? 잘만 하면 대박을 터트릴 수 있어. 이건 남자 대 남자로 얘기하는 거야. 알겠어? 인문교양서 십년 내내 읽어도 깨우치지 못하는 걸 지금 내가, 너에게, 바로 여기서 얘기하고 있다고. 어? 아무한테나 안 가르쳐주는 거야 뭘 좀 알란 말이야. 어디까지 얘기했지? 뭔 얘기하다 그 중요한 주제가 나온거야? 음, 그래. 전수할 진기가 너무 많으니까 이런거야. 돌팔이들은 알맹이가 없으니까 헤매지도 않는단 말야. 전문가네 뭐네 뭔가 있는 것처럼 말 많지만 걔네들 다 자의식만 센 거야. 목소리만 커. 먼저 말하고 선수치고 뭔가를 포장하고 어려운 말로 헷갈리게 만들고 그게 다야. 어쩌다 보면 어떻~게 걔가 그 자리에 갔지? 그런 경우 많아. 누구, 삐─! 누구? 삐─! 누구도 삐─! 혼잣말로 표현하자면 이런 말도 하게 돼 아무도 없는 방에서 어디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는 거도 아니고 그냥 혼자 별생각 없이 하는 이런 혼잣말도 있어. 오 저런, 으 촌년 얘는 자존심이 하늘나라에 가 있구나. 사석이니까 웃자고 얘기한 거지만 그게 다 뭐 때문인 줄 알아? 그건 바로 자존감이야. 잠깐 이..게 안 웃겨? 재수없어, 흥! 말은 이렇게 해도 우연히 어디 모임에서 그분들과 사진이라도 찍게 되면 아마 나도 친구들에게 자랑할꺼야. 아~놔 나는 됐다고, 정말 싫다고, 완전 바쁘다고 그러는데 정말 사람 참 끈질기게 살갑게굴던만, 돌아서면 내가 자기 욕이라도 험하게 할꺼라는 걸 다 안다는 듯이, 하도 웃어서 얼굴 근육경련이 일게 되는 그런 느낌 알지 그걸 끌어내 오오, 알고 보니 사람 괜찮더라고, 사교성에 인성도 그만하면 됐고, 그래서 그냥 한컷 찍었어~ 그러면서! 자존감, 그것이 뭐겠어, 바로 나,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거야. 우선은 나는 뭘 좋아해 뭘 하고 싶어로 시작해서 나를 아끼고, 나를 존중하고, 나와 대화하고, 나에게 선물하고, 나를 가꾸라 라며 십대 시절에 주로 지겹게(?) 듣던 말들. 나, 자리에 타인이나 아무 단어를 넣어도 어색하지 않게 하려는 걸 뭐라고 부를까? 그건 교육 또는 인성씨 그리고 자존감 같은 거야. 자존심, 자신감, 존엄성, 위엄, 품격, 위신, 체면 또 뭐가 있지, 음 아무튼 그런 말들. 그 친구들 특징이 뭐겠어? 당연히 말이 많다는 거야. 엄~청 많아 엄청. 그거 듣고 보고 읽고 빠지면 그냥 적당히 그만그만하게 그 물에서 첨벙거리면서 놀게 돼. 인생의 비밀이란 누가 딱 뭐라고 하진 않지만, 누가 겁~나 뭐라고 웅변하지만, 실은 그런 게 인생이야. 바로 그 보잘 것 없는 이치가. 학문적으로 따지자면 어떻게 보면 대중은 우매해. 착하니까... 오, 이런! 갑자기 웬 비관적인 비약, 정정할께. 약간 쏠리고 전원적이고 우연적인 부분도 있다는 거야. 대중이 어떻다, 는 학문으로 넘어가야 하니까 여기서 멈추겠어.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 무엇이겠어, 무엇일 꺼 같아? 문화? 예술? 사랑? 만찬? 성욕? 수면욕? 행복하고 싶은 마음? 오락? 멋진 남자로 거듭나기? 쇼핑? 요정의 꿈? 동화 속 나라? 천상의 음률? 날개 잃은 천사? 꿈과 이상과 미지의 세계? 다 아니야! 그것은, 저 옛날에는 생존이었다면 지금은, 바로 심심함이야, 심심함! 무료한 느낌. 온갖 희노애락과 심리학은 다 거기서 꽃이 피고 무지개가 떠오르고 옅은 청록빛깔 비취감이 발생하는 거야. 어? 심심함! 아니라고 우긴다면 그건 다 당장은 잡음이야. 이명, 귀울림이라고.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심심하다는 말을 잘 안 하게 되지. 애들처럼 징징거리면 안 되니까. 그러나 애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그거야, 심심해 심심해 그것. 대중은, 사람들은 심심해해. 그걸 다른 말로 하거나 문학적으로 표현하거나 예술로 승화시키는 걸 우린 또 공부하고 알고 평생 새롭게 바꿔보는 거지. 그렇지. 사람들은 일단 자기 생활이 있어. 사회와 문화와 경제와 정치와 해외토픽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일상이 먼저야. 돌려 말하면 바쁜거야. 어려운 거 머리 아파... (침묵)... 이처럼 지금 입 아프게 긴말로 설명해서 나오게 만든 한마디, 중요한 한 단어 그게 뭐겠어? 어? 감수성, 이라고! 따라해 봐, 감수성! 여자도 뭐다? (발음하지 않고 입모양으로 상대방의 발언을 이끌어내는 바디랭귀지) 감-수-성! 감수성을 자극하고, 감수성 부위를 살~살 긁어주고, 감수성에 속삭이고, 감수성 뇌파를 움직이고, 자기 전에 잠이 오지 않으면 숫자를 셀 때도 감수성 한 마리 감수성 두 마리 감수성 세 마리,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감수성, 앉으나 서나 감수성, 자나 깨나 감수성 그렇게 감수성을 감수성으로 세뇌시키는 거라구. 감수성 건드리기를 익히고 나면 다음 단계가 있지만 여보세요, 그건 아직 생각하지마. 내 말도 틀릴 수 있다는 건 단 한순간도 잊지말라구. 네가 비로소 후천적인 천재라고 판명되면 나도 널 놓아줘야해. 감당 못한다구. 어? 완벽하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악보에서 한 마디에 몇 초 그 마디가 몇 개니까 한 곡에 몇 초 그렇게 완벽하게 기계와 똑같이 완벽하고 완벽하고 완벽하게 체르니 몇 번을 숙달한 다음에 체르니 몇 번 더하기 1번으로 넘어가야 해. 그걸 뭐라 하겠어? 기초하고 부르지. 그래야 나중 빨라졌다 느려졌다 듣는 사람의 마음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되겠지. 전문가, 정확히 화폐 가치로 대우받는 전문가 가운데 그 기초를 대충 넘어간 천재들도 많아. 물론 신동, 말만 천재가 아니라 진짜 신동을 만났을 때 드디어 경험하는 가르치는 사람의 극도의 흥분감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세상에는 말만 번지르르한 초짜들 천지야. 넌 운 좋은 거야, 어~! 뭘 원해? 어떻게 살고 싶어? 멋진 생활과 아름다운 사랑과 질려서 빠져나오고 싶은 낭만과 뭐와 뭐와 뭐. 명성을 원해? 돈? 그것들을 끌어들이는 원리를 깨달으란 말야. 너도 한자리 꿰차라고. 학교에서 배운 거, 사회생활에서 알게 되는 거 그게 다가 아니야. 아, 아까 동기부여의 환상적인 원리에 대해 얘기해 준다는 게 또 여기까지 와버렸군. 서론이 좀 길었지만 방금 말한 거가 수업료 얼마짜리인 줄 알면 깜작 놀랄꺼야. 그건 그렇고 자, 이제 책 펴고 수업을 시작하자구. 뭐, 선생님 (교생 실습) 첫날밤 얘기해주세요?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이번 성적 꼴찌 면하면 얘기해줄께. 손거울, 마음대로 봐도 돼. 먹고 싶은 거, 얼마든지 한정없이 먹어. 꽃미남, 말만 해 다 소개시켜주고 다 데려다줄테니까! 그런데 저번주에 어디까지 했지? 음, 그래 아하~ 그렇구나. 인생! 인생이었어. 넌 역시 천재야! 자, 이제 말할께. 이미 너가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그건 무엇이냐면, 인생 별 거 없어. 자, 넌 엄마를 좋아해 아빠를 좋아해? 학교 다닐 때 어떤 과목 좋아했니 예체능 아니면 예체능 빼고 나머지? 자, 질문의 변화를 주자구. 단조롭잖아. 혹시라도 재미없으면 어떡할꺼야. 너의 그 청초한 눈망울에 졸음의 마귀 그 음울한 기운이 서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 그래, 그렇자나. 그럼 뭘로 바꿀까. 그래 그게 좋겠다. 자, 동물원과 미술관이 있어. 이 가운데 어딜 먼저 구경갈꺼니? 넌 남녀간의 멋도 알고 삶의 운치는 물론 동물의 세계도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 그럴 줄 알고 있었어. 미술관이라고? 어디서 또 들은 건 있어가지고. 어떻게 알았니? 미술관에 가면 혼자 있는 여자들이 많다는 걸. 너도 역시 정보에 민감하구나. 것도 고급으로 말야. 교양미 넘치고 향긋한 풍미에 선, 곡선이 우아한 아가씨들과 미술을 논하면 그걸로 끝이 아니잖아? 자, 그런데 미술관에 갔어, 그런데, 이게 뭐야? 전부 남정네들 뿐이잖아! 이런, 젠장! 왜...아하... 이, 이, 이... 괜찮아. 동물원이 있잖아. 그리 멀지도 않아. 그렇게 동물원에 갔다고 쳐. 그런데 만약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면서 조금은 마음 졸이면서 동물원에 갔어. 실제 갔어. 도착했어.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전부 딱 알맞는 딱 적당한 딱 원하던 이상형들 오직 이상적인 아가씨들로 가득하단 말이야. 믿을 수가 없는 일이야. 완전 짹팟이란 말야! 777이야! 아니 로얄스트레이트플러쉬로 할까? 아무튼 꼭 약속이라도 한듯이 그날 뭔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전부, 전부 여자야. 나도 모르게 웃음을 참게 만들 정도로. 와우~ 이거야~ 이거라구~ 바로 이거라니까~ 우하하하하~ 쾌재를 부르고 이제 축배의 노래를 부르고, 환희의 춤을 추면서 축제를 즐길 것 같았......는데 이런, 제기랄! 거기에 온 여자들이 죄다 동성애자네. 저런, 그럼 그렇지, 내가 하는 일은 다 이 모양이라니까, 이런~ 젠장! ...(침묵)... 알겠어? 어? 알겠냐고? 이거야! 이거! 바로, 이게, 인생이란 거야! 그럼! 다른 게 아니야! 그럼 이건 모르지 않겠지, 어? 이곳은 어디겠어, 인생을 얘기한 인생을 연구한 그것에 대해 파헤친 바로 여긴 어디일까? 어디겠어? 어디긴 어디야 세기의 매치가 열리는 인생이란 특별링이지. 정글이라구. 인생으로 물어봤으면 인생으로 답해야 할 꺼 아니야. 아, 모른척? 오, 좋아 좋아 그거라구. 그렇게 하는 거야!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아는 천부적인 자질을 지녔다니 나도 그런 안목은 있으니까 공을 들여서 설명한 거 아니겠어? 처음부터, 나도 그래서 널 한눈에 알아본 거라구. 음, 좋아. 이제 넌 하산해도 괜찮아. 아, 혼신의 힘을 기울여 온갖 내공을 끌어모아 열변을 토했더니 피곤한데?>
저런 말을 듣는 경직된 자세의 청자는 옛날의 나였다면 저렇게는 아닐지라도 그래도 일단 부흥회에 자리 채울려고 끌려다니지 않고 그나마 혼자 블로그에라도 뭔가를 속에 담긴 뭔가를 글로 옮길 수 있는 정도의 화자로 바뀌는 딱 그 정도의 변화는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여기 이상한 시내를 알기 전과 알고난 후 그 차이는 이와 같다. 물론 잡은 고기에겐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한, 우린 가족이다, 또 우리는 부부다, 그러나 우리는 가족이다, 라는 얼굴 빨개지는 말일랑은 하지도 듣지도 떠올리지도 말자, 이제 알 때도 되었잖아 안 그래? 그런 변화를 겪었다는 말이 아니잖아요! 음! 그런 가부장? 춘부장의 고집스런 인생의 통찰이 녹아든 철학처럼 인생 자체를 잘못 알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때이르게 섣부른 선입견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다행스럽게 이상한 시내를 알게 됐고, 그래 우연히, 처음에 잘못 끼운 단추 때문에 나중 뒤돌아봤을 때 어, 이게 아니었는데, 정말 아니었는데, 나는 이런 걸 원하지 않았는데 그럴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나 이곳에서 마치 회춘한 듯한 끙끙 마음의 병을 앓다가 회복한 것처럼 이제야 비로소 운명적인 환상적인 전설적인 내 사랑을 만난 것만 같은 환생에 이르러 드디여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만 같은 꿈속에서 막춤이라도 미친듯이 추고 싶은 기분에 안착했다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슬슬 그런 분위기에 중독되어 아무래도 1단계보다는 2단계를 찾는 횟수가 늘고, 어쩌다 3단계 카페와 서점과 선물 가게에도 들락거리는 단계에 이르렀다. 벌써 3단계 가게에서 수정구슬(정식 명칭 까먹었다)도 하나 샀다. 나중 누군가 선물할 사람이 나타나겠지 하면서. 물론 그 어느 햄버거 레스토랑에서 어느 아리따운 아가씨의 입가에 묻은 그것과 저기 탁자에 낭자한 케찹을 보고 드물게 충격을 받는 일도 아주 간혹 발생하곤 했다. 하지만 왜 그런 것인지는 잘 몰랐다. 뚜쟁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착실한 아르바이트생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그것을 소설로 옮길 수도 없는 일이며, 이제야 뒤늦게 다 늙어서 (에헴?) 물감 사러 다니고, 오선지에 미친듯이 곡을 쓰다가 공책의 한 면을 찢어 구기고 짓이기서 방구석에 집어던질 수도 없는 일이니까. 허나 내가 문예-애호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일이고, 또 속으로는 그렇게 자부한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지 않나. 그러나 딱히 이런 이상한 감정에 대해 누구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없고, 조금은 난감했다. 그러다가 그 의문은 슬며시 꼬리를 감추었다.
가난하고, 적당히 깜깜하고, 눈치 없고, 무지해서 다행이지 나 같은 놈이 코카인 맛을 알게 됐다면 어쩌면 큰 일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술과 담배를 비유해서 생각해 보면 되니까. 또 그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겪어보지도 못했으면서 코카인이란 단어가 포함된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이 말씀 저 말씀 바쁘게 자의식을 감추고 잠재우는 데는 도통 소질도 예우도 아량도 게다가 취미마저 심지어 사소한 버릇이나 마땅한 본분마저 마다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길게 묘사할 필요없이 딱 한 단어로 성정이라고 하면 간단한 일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좋아서, 자기 기분에, 제 맛에 사는 거다. 쓸데없는 잡담에 연루되었지만 자주 그러지만 하여튼 학문의 전당, 대학교에 출강해서 훈교도 하고, 감동도 주고, 유혹도 받는 마치 시간 강사처럼 지금의 내 생활은 이렇게 여기 이상한 시내에 출퇴근하는 모양새를 띄게 되었다. 이건 딱히 논거가 빈약한 이야기도 아니고, 사건 발생의 동기는 밋밋하지만 그래도 말은 되고, 등장 인물도 활약상이 미미해서 그렇지 공산품점과 사탕만 파는 가게와 재즈바와 클럽과 동물병원과 거리까지 사람 즉 등장인물은 겁나~ 많다. 천지다. 등장 인물 허천나게 많다. 한 사람당 일당 몇 만원만 쳐도 숫자 째깍째깍 올라가는 견적 딴 나온다.
그렇게 나는 그 이상한 시내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퇴근을 하고, 주말엔 집에서 어디로 갈까, 누구를 만날까, 어떻게 놀까 대책을 세우며 재미있어질 방법을 궁리하다가 토요일 오후에 집에서 혼자 에로 비디오를 보아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이런 생활이 글이 아닌 영상의 형태라면 하나도 재미없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없는 소설은 재미없는 소설이고, 일단 나는 유부남은 아니다. 있으면 귀엽기는 하겠지만 집에 어린이도 없고, 고양이나 강아지도 키우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어쩌다 월요일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곧, 주말병? 그런 데 걸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월요병은 들어봤지만 주말병은 살다 살다 처음 들어본다. 1년 중 생일만 재미없고 다른 날은 다 재밌고, 직장생활 중 휴가 기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다 놀고, 그렇게! 당연히 친구를 만난지 오래되어 혼자 놀고 있으니까, 여자 나체를 본지 얼마나 됐어? 같은 질문을 받을 일 또한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혼잣말하는 습관에 빠지게 됐다. 예를 들면, 나와 함께 춤을 출래, 늑대와 함께 춤을? 한번으로는 성에 차지 않으니까 또 가령, 제이슨 나랑 같이 술 한잔 할래? 이렇게 말이다. 항상은 아니지만 때로는 내가 미친 놈이 아닌가 그런 자괴감도 잠깐 든다. 기운 빠지게 말이다. 계속 그러면 풍선에 바람 빠지겠지만 또 월요일은 온다. 주말에 월요일이 기다려지다니, 오, 아! 주말은 따분하다. 그래, 원래 주말은 옛날부터 그랬다. 평일도 그랬지만. 그리고 지금 나는 데이트 신청을 어떻게 하는지도 잊어먹었다. 과연 남자는 일이다. 사랑이 다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할 것이다. 그건 맹세고 뭐고 필요없다. 하루하루의 경험이 몇십 년 쌓이면, 잘하면 첫 실전에 직면하여 즉각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왜, 는 필요없다. 아무튼 그곳으로 출근할 생각을 하니 손과 발과 어딘가에 땀이 다 난다. 다한증은 아니다. 나중에 그곳과 나 사이에 이별의 운명이 찾아온다면 또 때려치우는 기쁨의 환희가 솟구쳐 오를 극렬한 희구 역시 기대된다. 별 게 다 기대되네. 너무 멀리까지는 상상하지 말기로 했다.
나는 지금 음악계에서 잊혀지지 않는 명-테너의 어느 유명한 아리아를 듣고 있다. 듣고 있으니 아주 흥겹다, 들뜬다, 기분 좋다, 안정되고 안락하다, 그런 심정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반듯한 목선을 유지해야 할 듯 거동에 신경 쓰고, 시대적인 어떤 풍조를 떠올려 보고, 우아한 행동과 고상한 생각을 각각 좌우로 포근히 어떻게 끼고 있는 것만 같다. 이게 뭔 유치한 짓이며 진부한 말인가 하겠지만 적어도 나보다 10살 어린 나보다 20살 어린듯한 동안의 귀여운 여자와 나보다 15cm 큰 미모의 육체파 여인을 양쪽으로 끼고 완전 좋아서 쾌활한 표정을 띄는 것 보다야 적어도 훨씬 나은 일일 것이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뭐 꼭 그러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지적이며 서정적인 내 사생활이 들통나고 탄로날 것도 아니고. 이렇게 잠재의식과 현학적인 참된 자아가 마찰할 무렵 시침은 듬직하게, 분침은 침착하게, 그리고 초침은 분주히 쉬지 않고 움직여서 다시 월요일이 되었다. 아! 그곳으로, 이상한 시내로 갈 생각을 하니 엉덩이가 근질거리고 가슴이 콩닥콩닥한 것이 꼭 꿈속에서 누군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여신에게 최적의 적기에 키스를 한 후, 마법의 소원 세가지 중 하나를 선뜻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곳은 헛되지 않게 놀고 즐기는 영험한 시내로 한달에 한 번인가 한달에 두 번인가 윙크한다는 달님의 마음은 담고, 생리통은 덜어낸 고대하고 기다려온 오랫만의 데이트와도 같은 곳이다. 들뜬 기분을 접고, 톡톡 눈동자를 깜빡깜빡하고 자, 이제 그곳으로 떠나갈 출근할 시간이다. 나는 뭐한 시내로 일하러 떠났다.
나는 이상한 시내에 도착했다.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많다. 여긴 환상이 아니다. 현실이고, 신비경이 아니고, 사실이며, 시내다. 사람의 평생과 함께하는 도시적인 분위기다. 생업의 공간이고, 사랑이 싹트는 무대이고, 젊음의 거리이며,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와 온갖 주제를 논하고 떠드는 바로 지금 현재 현실의 공간이다. SF영화를 보고난 후 푸르른 가로수를 바라보며 마시는 한 잔의 데킬라다. 데킬라는 좀 안 어울리지만 어쨌든 그와 같다. 어지간한 건 다 있다. 또 새롭다. 산뜻하다. 큰 불만은 없다. 뭐 이유야 적자면 한 페이지든 두 쪽이든 계속 써내려갈 것만 같다. 생각이 많아지니까 일단 찻집에 들려 오늘은 어떤 글을 쓸까 구상하면서 커피를 한 잔 마셔야겠다. 카페 저기 있다. 찻집 이름이 좀 길다. <친구에게 오랫만에 한턱내려고 연락해서 만난 후 술집에 들어가서 같이 술을 마신 후 계산하려는데 (신용카드) 한도 초과가 나왔다 저런 쯧쯧 나는 아직도 카드 돌려막기 생활자 라는 걸 까먹었다 복권은 항상 꽝이고 여자친구는 없고 통장잔고도 없는데 나는 장가갈 수 있을까?> 이게 카페 이름이다. 나는 이곳에 들어갔다.
여기서 의욕적으로 새롭게 출시한 깜짝 음료에 대해 광고하는 사진이 보인다. 이름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고 신수 훤하다. <그래 놓고선 한다는 소리가 꺼지라고?> 를 나는 주문했다. 그리고 나직하고 준엄하게 혼잣말을 버릇처럼 소리냈다.
「사랑하고 싶어...!」 생략된 말은 무엇일까? 남이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일까? 혹시 누가 알게 되어도 괜찮지만 아직은 왠지 모르게 조금 쑥스럽기 때문일까. 또 말끝을 흐리거나 고고하게 길게 빼는 말투도 아닌 것 같은데 뭔가 할 말을 줄였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타인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신호라도 보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사랑하세요, 행복하세요, 고맙습니다, 축복합니다, 행운을 빌께요 같은 말을 내포하는 의미의 어조라도 절묘한 화술로서 운을 띄워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그대에 대해 그분들을 애타는 마음으로 다소 기쁘게 만들 작정이었을까, 아닐까, 그럴까, 설마 그럴 리가! 그냥 발음이 불투명했다는 것, 그 때문일 것이다. 뭔가 심심하고 궁금하고 싱거운 구미와 여운이 주변에 붕붕 떠다니고 아른거렸던 것은.
나는 옛날에는 단연코 1번이었다. 이를테면 <꿈이 뭐에요?>라고 누가 묻는 상상을 한다면 듣는 사람이 실망하지 않게 또 나를 조금은 멋져 보이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의 기존 관념에 완전 세뇌당한 그런 판에 박은 얘기들 그 기준들은 모두 버리고, 흘리고, 듣기 싫다, 읽고 싶지 않아 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자꾸 내 의중보다는 낌새와 눈치와 분위기를 살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끼게도 부족한 부분 조금 늘리자면, 아니 벌써? 고작! 겨우? 아직 반세기를 살아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삐리리리 층계를 올라가서 2번이다. 1번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인생 하나를 놓고 봐도 그럴 계제는 아니라는 거다. 2번은, <꿈이 뭐에요?>라고 누가 묻는다는 상상을 혼자 한다면, 망중할 것도 없고 막 고민할 필요도 없이 선잠에 빠지듯이 그냥 즉흥적으로 질문과 비슷하게 꿈꾸듯 답하는 것이다. 어차피 상대방도 적당히만 궁금해서 묻는 것이고, 아주 사소한 관심이고, 절반의 형식일 뿐이다. 나중에 물어봤던 거 기억이나 하면 다행이다. (다행이다? 그건 자기 기분 별로라는 글이 아닌 여자1과 여자2의 수다고, 스스로 또는 타자적으로 그녀의 욕구불만은 잠재워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억도 하고 잘 챙겨주는 것은 이상적인 발단과 흥미로운 전개와 꺼~뻑 넘어가도록 기쁜 마음으로 가득한 절정 다음에 원만한 관계까지 이끌어내는 훈남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자 여자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남성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에 대한 성과는 보통은 이렇게 쉽게 드러나지만 그런 남자, 어디 있을까! 저기 수퍼맨이 날아간다, 그대 앞으로. 못 봤다고? 기차 떠났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자.) 그러니까 거창하고, 위대하고, 원대하고, 단일하고, 고정적이고, 폼나지 않아도 된다, 그 대답은. 물론 TV에 나오는 말들과 뻔한 의견들과 단답형 답변도 좋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라 아예 질문을 바꿔서 알아듣고 달리 대답할 수도 있다. 당신은 그래도 된다. 예를 들면 최근 관심사는 뭐냐, 넌 행색이 그게 뭐냐, 나와 얼만큼 만날 생각이냐, 얼만큼 사귈꺼냐, 사귀기는 할꺼냐, 주변에 알릴꺼냐, 이거 진지한 거냐 그렇게. 아니면 오늘 뭐하고 싶냐, 올해는 어떻게 보내고 싶냐 로 바꾸어도 아무런 문제 없다. 이런 게 르네 마그리트가 그렸던 대화의 기법이 아니면 뭐겠나? 그 근거와 논거는 비유하자면 이렇다. 인생이란 말이야, 가 1번이라면 1번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에 이어질 말은 2번 바로 그것이다. 뭐 그렇게 비비꼬였냐고 생각하신다면 조금 막연하긴 하겠지만 1번은 또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란, 이처럼. 그외에 또 뭐가 있을 거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자, 대타 뭐가 있을까? 줄 섰다. 끝이 안 보여. 말만 하시라! 인정한다. 내 결점과 모든 단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까~악 까~악 효과음이 감돌도록 한량 취급받을 말을 내뱉어도 그건 최소한 지금은 충분히 용인해야만 할 일이라는 것을. 따라서 1번 나왔으니까 2번을 말하겠다. 2번은 이렇다.
「그래, 내 꿈은 놀고 먹는 것이다. 됐냐?」 이렇게!
오, 웃었어 웃었어! 것 봐라. 당신도 그걸 싫어하지 않잖아? 속시원히 털어놔봐라. 그래도 된다. 왜 안 돼? 여기서 살~짝 털어놔도 그대의 품위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뭐랄까, 카타를시스 어떤 뭐? 오히려 기분전환이 된다고나 할까. 하나도 안 웃었다고 거짓말하지 마시라. 다 안다. 그대의 미소 내 손바닥 보듯이 봤다. 나는 천리안을 지녔으니까. 겉옷 투시해서 알몸을 보는 것은 기본이다. 그건 일도 아니다. 후! 존엄한 형씨께서 만족하실 만한 답변이라고 말은 못하지만 내심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네~ 자기도! 아, 젠장~ 이딴 재주 어따 써 먹을 데도 없다. 이걸 과연 소질이라고 할 수 있다면. 아무튼 나는 이런 공상을 하면서 <친구에게 오랫만에...... 장가갈 수 있을까?>에서 <그래 놓고선 한다는 소리가 꺼지라고?>를 마시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노고가 조금은 도움이 되었는지 저기 바깥으로 전에 알고 지내던 여자 아이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는 어렸던 거 같은데 훌쩍 잘 커버린 듯 하다. 세상에서 제일 애매한 사이, 아는 여자, 아는 오빠, 아는 누구! 늘었다~ 줄었다~ 쥐었다~ 폈다~ 그리고 커졌다~ 작아졌다~. 그것은 또 둘로 나뉜다. 그분과 나와 그분은 잘 모르는 내 지인 이렇게 3명이 함께 있을 때 그분의 귀에 '아는 누구'라는 말이 들려도 괜찮은가 안 괜찮은가 그렇게. 안 들리게 예스럽도록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기본인데, 그럴텐데, 그런데 말이다. 그녀를 본 그 순간 나는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나도 모르게 바깥으로 뛰어나가 그녀를 붙잡고 말을 걸었다. 아가씨 아름답소, 커피가 있으면 시간이라도 한 잔 하시겠소, 부디 냉정히 거절하지 마시고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 하니 그대와 함께 한 잔의 차를 마실 영광을 누릴 친절을 베풀어주시지 않겠소, 간곡히 애청하오 낭자...라고 말하지는 않고 그냥 간단히 어디가냐고, 오랫만이라고, 반갑다고, 미안하다고, 솔직히 말해서 이름을 까먹었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런 말 해도 큰 결례가 되지 않을 만큼 예전에는 편하고 친한 사이였으니까. 그런데 내가 얘를 언제 봤지? 어디서? 친하긴 했나? 내가 이렇게 자동적으로 뛰쳐나가 그녀를 붙잡은 것은 나도 옛날에 그 반대의 일을 겪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한 20년 전에 나는 어느 거리를 지나가다가 카페에서 뛰쳐나온 어떤 여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어디가시는 길...이러쿵저러쿵) 여자친구, 음, 소개시켜줄까요? 그 다음에 대해서는 별일 없었으니 사실적인 진술의 진척은 없을 테니 꾸며내야 하니까 생략하고, 돌아와서 나도 그녀에게 남자친구, 어, 음, 소개시켜 줄까요? 라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첫째, 그녀와 나는 오랫만에 재회하는 거니까. 둘째, 그녀가 남자를 안 좋아할 수도 있지 않나. 내가 어디 남자에 환장한 년으로 보이냐며 멱살이라도 잡고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오른쪽으로 한번 다시 왼쪽으로 한번 그렇게 세바꾸(세바퀴) 반을 휘돌리면 어쩌란 말인가. 슬슬 머리숱도 줄어드는데 뜯겨진 머리카락이 추풍낙엽과도 같이 알록달록, 반짝반짝, 삐삐-삐리리리, 자동버블 장간감에서 나오는 거품처럼 허공에 휘날리면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그 일을 어찌할꼬. 몸 사리는 게 현명한 거다. 셋째, 그녀가 아직 상심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애가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 여자가 아니고 친구라고 하기에도 아직은 어렵기 때문이다. 여자들끼리 찻집에서 하는 가장 흔한 대화 내용 가운데 하나처럼 만약 재결합하게 되어도 같은 이유로 헤어지거나 새롭지 않은 여자는 새로운 여자를 절대 못이기기 때문에, (헤어진) 여자는 (새로운) 여자로 잊는 거라고 이별 후 일정 시간의 근신(?)보다 합리적으로 곧바로 새 연애에 대한 환경을 만드는 건 다른 얘기다. 그건 이별의 예? 보다는 이별의 이유와 헤어지지 않는 까닭과 그 서사와 관계되는 것이다. 그냥 멜로드라마적 소재, 하이틴 로맨스 딱 그거다. 남녀가 사귀면서 서로서로 속마음을 알면 (때로는) 뜨끔하기는 피차 일반이고, 톡톡 튀는 마음은 언제 읽던 책을 덮고, 친구 이름은 변심이고, 작업할 때 초보 배우들이 일부 사용한다는 눈물 나오는 약을 사용해본 사람, 사용할 사람, 미처 생각 못하고 이제야 아차 하며 손가락과 손가락 딱 하는 사람, 순간 물을 마셨는데 안 삼키고 목을 젓히고 물을 구강청정제로 여기시는 분, 안 계실 리가 있겠나. 어, 그런데 뭔 얘기하다 이쪽으로 불똥이 튄 거야?
「어, 오빠...」 놀란 표정. 반가운 기색. 궁금한 어조. 이 다음에 그 너머에 어떻게 될까 하는 애처로운 눈빛. 그러나 그녀가 속으로 이 남자 혹시 나에게 관심 있나 같은 의문이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쉽게 예측하고 속단할 수 있었다. 전혀, 그처럼 첫눈에 반할 찌릿함은, 어떻게 연결 고리를 찾아볼까 하는 마음은, 간접적으로라도 자신이 먼저 나설 의사는 없어보였으니까.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말을 반박자 늦게 하는, 상당히 보기 드문 교양미를 지녔을 듯한, 특별한 가정교육을 받은 것 같은 단정함이 실루엣 외곽선 주위로 서려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얘는 말을 엄청 많이 하지도 또 너무 조용하지도 그렇다고 용건만 오고 가는 대화가 아닌 굉장히 사려깊고 사근사근하고 품위가 느껴지는 화법의 소유자로 보였다. 따라서 나도 그에 발을 맞출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요 앞 찻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서 게다가 그곳이 무척 조용하다고 하여 매상도 올릴 겸 상량한 문답과 잔잔한 환담을 나눌 의도 때문에 나는 그곳으로 근무 공간을 옮겼다. 그곳에서 소설 쓰기와 작품 구상하기 일을 하기로 했다. 그 주홍빛 찻집의 이름은 <나 참 기가 막혀서!> 였다.
나는 그녀가 독학으로 수채화를 공부하고 있다길래 넌 정말 성격이 차분한가 보구나, 그 조신한 자태를 보니 나는 너에게 멋진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주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는 어떤 특이한 기분에 휘말려 지금 무척 혼랍스럽다고 솔직히 말했다. 이와 같은 화술은 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라는 제목의 작품과 비슷한 소설만 평생 쓰고 지금도 계속 써서 정기적으로 출판하고, 그러나 일류 대학교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쓰고, 오랜 기간 학계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다가 헨리 밀러나 그런 사람들처럼 법정 소송에도 휘말렸다가 작품성은 딱히 뭐라 할 수 없지만 뭐라 얘기하기에 곤란하게끔 퍽 올곧은 그 일관성 때문에 학문적으로 그 애매함을 꽤 존중받고 있는 그런 스타일의 작가의 작품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의 어법에서 따온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이와 같은 방법이 먹히는 걸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한참 오판할 만한 다분한 쟁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따귀만 맞지 않아도 된다고, 또는 뺨이라고 맞고 싶다고, 하수든 고수든 이런 방법 저런 방법 다 써먹는 연애같은 독학으로 배운 그런 말발 같아서 내심 조금 찔리기는 하지만 뭐 이미 시작된 일이었다. (말발? 그래 삼천포 한번 들리자.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10살 전후에 내가 다녔던 아카데미는 예체능이 아니라 아하 그렇구나, 웅변 학원과 펜글씨 학원과 향교였다. 가정 형편이야 쉽게 말해 상-하에서 상은 아니었지만. 그건 바로 아빠의 교육철학 덕택 때문이었단 말인가? 고추달린 남성으로써 그땐 왜 그랬는지 당연히 몰랐다. 그러다 스무살이 되어 메트로놈의 막대는 말과 글에서 예체능으로 넘어왔고, 그래서 어떻게 하여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으며, 그 가운데 기억나는 모습은 아무리 외딴 시골의 그만그만한 교습소지만 철두철미하게 박자를 고집하던 학원 업주가 나오는 정경이었고, 떠오르는 평-대사는 무조건 투피스 바지 정장만 입는 단신이라서 실내에서도 항상 하이힐을 신었던 어느 학원장의 "더 느리게.. 더 느리게.. 더 느리게.."라는 말이었다. 이걸 우연이라 부를지 운명이라고 작명을 하던지 주지할 점 하나는 이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그렇다─나는 어쩐다─타인이 나를 보고 그러더라─나는 그랬다, 가 아니라 그냥 이건 평균과 보통, 일반이라는 것이다. 이종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것은 잉에보르그 바하만의 소설 제목인 '30세'가 넘어서─안 읽었음─읽었던 인문교양서에 나오는 누군가 밑줄 그었던─지금도 앞으로도─내용 그대로 어김없이 살고 있는, 다름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생활 추측하자면 대체로 심심한 그런 삶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 뭐를 다루고 논했던가 다시 그쪽 탁자로 돌아갈 시간이다) 아, 혹시 내가 학계에서 인정하는 중년작가의 작품을 호도하며 깎아내리고 싶다거나 비평을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현실에서 여자에게 말을 건넬 때 참고나 하지 내가 감히 이상한 얘기 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히고, 쟁쟁한 문단의 지성들과 수많은 명작들과 언론의 그 화려한 한줄평에 비하면 나는 발에 밟히는 버려진 껌이고, 거리에 흐르는 오수며, 항간에 들리는 뜬소문일 뿐이다. 작품이 별로네 이게 뭐야 저게 뭐야 아휴 뭐라뭐라 그런 얘기들은 다 절대 틀린 말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진 사고고, 자유이면서, 성향일 뿐이다. 자기 스타일 확실한 것, 남이 뭐라 하건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요즘 유달리 높게 보이는 구석이 있지만 한 길만을 추구하는 것도,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는 것도 나는 그저 모두 부러울 따름이다. 나는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얘 뭐야, 아예 그렇게 듣고 싶다면 모를까. 그분의 여러 작품을 온전히 읽어보지는 않았다. (옛날에 그 작품 딱 하나만 아마 읽었을 것이다. 아하, 하나 더 읽었구나. 여자 이름이 제목으로 씌였던 소설. 지금도 서점에 가면 어김없이 그분의 새 책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채 조금 쓸쓸히 국내소설 신간 분야에 떡 하니 자리하고 있다. 이거다, 인생은! 집에서 혼자 마시다 남은 술을 다음날 유리세정제에 붓는 일 같은 거. 뜬금없이 흘리는 쌍코피. 거리를 걸어가다 뒤에서 날아오는 농구공에 머리를 얻어맞는 것. 인생은 뭐다, 여기까지, 다음에 봐요) 시와 소설과 수필과 비평등을 합쳐 총 100권의 책을 펴내신 삐쩍 마르신 대학교수님 그분의 지성적인 양서를 온전히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냥 내가 봤을 때는 그와 같은 어떤 공통점이랄지 특징이 한눈에, 대번에, 단박에 딱 느낌이 왔기 때문에 그건 한번 현실에서 써먹어 봐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해서 흉내내본 것일 뿐이다. 허구가 허구로만 끝나면 그 또한 조금은 허무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허구를 현실로 옮겨봤다. 그러다 또 하나 얻어걸리면 나는 그것, 현실을 허구로 옮겨 작품으로 남길 것이다. 바로 그걸 노린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라는 류의 소설 수십 권에서 우직하게 일관되는 주인공의 대화 방식을 본떠서 어떻게 질문을 했드니 그녀는 말보다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 그녀는 고수인가? 선수?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내가 그녀와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그럴 의도는 없으니까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얘가 아직 남자친구가 없다는 데 99퍼센트의 확신을 가졌다. 그런 얘기는 좋은 사람들에게 으레 듣는다는 몸짓을 취하길래 나는, 나는 그렇게 좋은 남자는 아니고, 그러나 대인배로 유명한 친구는 있으며,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말은 진언이다, 더 열망을 담아서 사랑스런 훈풍과 간지러운 순풍의 제안을 귓가에 후~ 불어주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다, 라고 말할려다가 꾹 참았다. 그러다 그녀가 이렇게 물었다.
「오빠, 어느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본 적이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아까 내가 소설가라고 한 말을 그녀가 중견 작가나 등단을 앞둔 괴물 작가의 의미로 잘못 알아들었나 의아해 하면서 그녀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친구들 만나면─출판계와 블로그계─맨날 술 먹고, 클럽 가고, 이상한 작업 환경에 휘말린다면서 준다던 선수금도 한사코 극구 거절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양심의 가책을 한번 느껴보고 싶어서, 그걸 글로 쓰고 싶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대학에서 정치외교학과 신문방송학을 복수 전공했다고 하길래 뜬금없이 이렇게 말을 건넸다. 부디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언제 네 인생이 바뀔지 아무도 몰라.」 또 그녀가 지금 나오는 잔잔한 피아노곡을 좋아한다길래 나는 이렇게 답했다. 「어 나 걔 알아. 그 친구 소속사 사장이 내 후배거든. 녀석 보기는 멀쩡한데 술 취하면 개야 개. 그래도 음악은 잘 해. 아티스트야. 아,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소속사 사장 말이야. 왜 그 있잖아. 허물없는 사이 같은 거. 녀석이랑 나랑. 그런데 저 연주자가 말도 안 되게 여러가지 일을 한다던데. 사설탐정도 한데. 이 친구는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음, 그렇지.」 당연히 뻥이다. 개는 그 사장이 아니라 본인 같다. 급작스럽게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그래서 나는 그날 철수했고, 다음 날 다시 그곳에 들려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우연히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듯이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아주 짧은 순간에 파닥파닥 여러 신호가 오고 갔고, 색다른 방향을 잡는 초소형 몇 번 카메라로 각도도 바뀌었다가 슬로우모션에 화면 정지도 잠깐 들어왔다 나간 것 같았다. 아, 이건 아닌데, 이건 정말 아닌데 그런 생각이 사르륵 스쳐갔다. 두 번째 날 역시 느낌이 썩 어색하다. 감이 안 좋아! 나는 잠깐 조니에게 전화해서 잘 사냐고, 별일 없냐고, 묻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뭔가가 잘 안 풀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이게 아닌데, 정말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이쯤 어딘가가 내 진면목인가 보다. 난 하수였던 것이다.
물론 그녀를 만난 첫째 날 나는 너무 성급하게 내 친구를 한번 만나 보지 않겠냐고 섣부른 권유를 건넨 것이 아무래도, 아마도 둘째 날의 낯선 분위기에 조금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내 친구 멋진 놈이라고, 여자친구가 생기면 누구보다 잘해 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충만하고,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착하고 자상하고 뭘 좀 아는 친구라고, 녀석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랑과 낭만과 환상이라고,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고, 나도 실은 그다지 관심없지만), 그런데 걔 별명이 뭔 줄 아니? 글쎄, 로데오 인성씨야! 그 별명 누가 지어주었을까? 내가! 푸하하하하~하하. 친구들끼리 분위기 탔을 때 로데오 인성씨, 이렇게 부르면 뭐라 하는 줄 아니? 너무 작지 않냐 그래! 크하하하하, 푸하하하하...... 때맞춰 옆에서 다른 친구가 그러지, 그럼 뭐 휴스턴 인성씨? 아님 텍사스 인성씨로 할까? 이런다니까, 아주 웃겨서 증말(정말).. 푸하하하하, 푸하하하하...... 어쩐지 이때부터 점자 조금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고, 차차 썰렁해지는 어색한 낌새도 확연히 보였으며, 어차피 내가 자초한 일이지만 입김도 나오는 것 같았고, 스탠드바 밑으로 조용히 생겨난 고드름도 보이는 듯 했다. 누가 그 장면을 찍고 있었다면, 그 카메라에도 역시나...! 첫날이 문제였던 것이고, 연이어 두째 날 역시 별반 다를 것 없이 굳히기에 들어간 거다.
그 후로 셋째 날에는 일부러 말수를 줄이고, 좀 더 손과 발 그리고 입이 굉장히 무거운 것처럼 행동했고, 신부 수업을 받는 조신한 여자처럼 처신했다. 다른 날도 항상 그랬지만 왠지 모르게 그날도 글은 잘 써지지 않았고, 내가 앉아있는 찻집은 <나 참 기가 막혀서!> 였고, 음, 특별한 일은 없었다. 인터넷 서핑도 하다가 가져간 책도 읽고, 안주머니에 몰래 챙겨간 은색 병, 이 병의 근사한 이름이 있을 텐데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티타늄 같은 소재인 듯한 은색 병을 들고 남몰래 위스키를 조금 홀짝거리기도 했다. 당연히 한 잔의 차를 시키고, 몇 시간을 있을 수는 없으니 또 다른 음료도 주문하고, 그걸로 모자라 다른 가게로 들어가서 앉아있기도 했다가 여기저기 전전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다가오는 연휴에 먼 곳에 사는 친구가 오는데 그 친구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그는 명대사도 많이 외우고 다니는 친구고, 누구든 흉내도 잘 내고, 임기응변에 능하고, 그는 여자들이 상당히 거북스러워 하는 너무나도 섬세하고 예민한 남자가 아니라서 피곤할 일도 열 받을 일도 없다, 그러나 리더쉽도 있고, 적당히 도덕적이며 인성 괜찮다, 남자는 성실하면 그만이다, 한마디로 최고의 브래지어 같은 남자다,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멋진 놈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당연히 뿌듯한 감정에 혼자 기뻐했다. 드디여 나도 사랑의 다리를 놓아줄 수 있는 믿음직한 어른이 되었구나, 그런 기분으로 꽤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와 그 뒤로 연락이 잘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대타 또한 마땅한 적임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당일 날 이번에는 미안하게 됐다고, 오늘만 내가 대신 데이트를 하고 다음 번에 눈부신 남자친구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중간에 주말을 집에서 뒹굴면서 보내고, 잠들 때까지 TV 보기를 하다가 이상한 시내에 그리고 그 까페에 일곱 번째 출근하는 날이 되었다. 그날은 약속한 그날이었다. 그녀에게 괜찮은 남자를 소개시켜주기로 한 달력에 동그라미를 친 날. 어떡하지? 하루만 연기하자고 할까? 피자 가게 총각이 그래도 훤칠하던데 어떤 여자 한번 만나볼 생각없냐고 들이댈까? 어쩔 수 없이 내가... 그러다가 대책은 생각나지 않고, 나는 다시 현장으로 출근했다. 일주일간 소설의 발단에 대한 밑그림 구상 같은 성과는 없었지 있었겠나! 좋아, 내가 제일 먼저 고백해야 할 일은 그녀에게 솔직히 마음을 터놓고 진솔하게 말하는 거야, 있는 그대로. 맛난 음식도 사주고, 아이스크림도 사고, 포춘텔러도 찾아가고, 그러면서 다음을 기약하며 잘 안심시키기. 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서, 내가 널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있지도 않다면서... 이건 얘기하면 안되겠구나. 그리고 약속한 일은 꼭 지킨다고, 대략 이런 계획이 핑계와 B 플랜의 물망에 올랐다. 그날 날씨는 약간 이상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흉몽을 떠올리게 하는 찬바람이 불었으며, 왠지 모르게 언뜻 내 인생이 보잘것없는 삶인 듯한 예감이 느껴졌고, 끔찍이 컨디션은 별로였고, 불안감과 불길함이 뭔가 움트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하기에는 아직 일러. 잠시만요. 그런데, 내가 널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 그건 말하면 안 되겠다고? 저런! 그건 딱 속시원히 말하기에 곤란한 소재다. 글이 아니라 말이라면 사석이라면 웃고 떠들고 뻥뻥 터트리기에 적당하지만 말이다. 그 화법 가능하지만 경계하는 이유 그건 아마 하이틴 드라마의 주역으로 남고자 하는 영원한 낭만주의자로 기억되고 싶다는 선망 때문일까? 아니라고? 그렇다면 어쩌지 답은 하나인데... 뻔히 답 나오면 재미없고, 몇 가지 객관식 보기를 들어보자면 이렇다. 1) 알려졌으니까 - 알려지긴 뭘 알려져 거리에 나가면 아무도 못 알아보는데 그래도 일단은, 2) 운 좋게도 어떡하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었으니까 - 어허 또 혼자 소설 쓰시네, 3)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세계를 여행할 수는 없으니까 - 그럼 뭐 비정상적인 방법이면 여행할 수 있나 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4) 나는 한사코 내 귀를 날개로 하여 하늘을 날기를 바란다는 그 이상한 오기 달리 말하면 아직도 동화나 읽고 동요나 부르고 미끄럼틀과 그네를 타면 즐겁기 때문에 - 내가 말을 말아야지, 5)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이 아직 많으니까 - 이제야 그나마 낱말 맞추기 게임에 근접했지만 신빙성이 떨어져 거짓말 좀 작작해, 6) 철 들면 안되니까! - 참 가지가지 한다... 이러다가는 20이고 30이고 계속 나오겠네 어디 어르신 연세 찬찬히 셀 일 있나 생일 케익에 초 딱 1개만 꼿아야지 안 그럼 퍽이나 좋아하시겠나 이거 원 세상에나! 그냥 생닭을 물어뜯어 먹고 타석에 들어서는 게 낫겠다. 잘 먹히는 저 화법은 자존심 때문에 안 쓰고 그래서 타율 곤두박질쳐서 상위 리그에서 밀려나더래도 나는 내 길을 가야만 할까? 사랑, 은 하나만 해야 할까? 응, 그렇다! 왜냐하면 부장님 농담만 하다가는 고급 유머의 세계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신문도 읽고, 서점도 가고, 새로운 뭔가를 배우고, 소설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한 입으로 두 얘기하면 어떤 난감한 일을 겪는다거나 뒤통수를 벅벅 긁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영화에도 나오지 않냐, 하거나 말거나만 있지 그냥 해보는 것은 없다고, 난 예술가니까 술을 안 먹거나 왕창 먹던가 두가지 밖에 없다고 말해놓고서 아, 오늘은 그만 먹고 싶은데... 배부른데... 이상하게 안 댕기는데... 그러면 왠지 모르게 초라하고 비루해지니까 때로는 기분이 울적해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 다 잘 할 필요없다. 일단 모양새는 이렇게 다듬었지만 뭔가 허전한 마음은 누구에게 위로 받고, 애처로운 처지는 어떻게 달랠까! 어떤 연민의 감정을 부풀리면 말 많은 그분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했을 텐데 참 어렵게도 다시 도착하네.
그런데 그 찻집에는 그녀가 없었다. 이 일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잘 감이 오지 않으면서 내 위신이 크게 깎이지 않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고, 일단은 여기가 내 직장인데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희망찬 공간인데 그녀 즉 비서가 없다니, 그러면서 끙끙거리고, 숨겨진 내막을 알고 싶어 목이 바싹바싹 탔다. 때에 따라서는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지 않는 일도 있다. 그렇다고 그녀가 어디갔는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연락을 취할 뭐도 없었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그러던 중 그곳 사장으로 보이는 근엄한 표정의 여주인이 꼭 나 들으라는 듯이 귀뜸하는 것도 아니고, 으레 그렇다는 것처럼 투정어린 불만의 혼잣말을 여기, <나 참 기가 막혀서!>의 공기와 틈새와 곳곳에 편재하게 만들었다. 저 여인은 참 고단한 삶을 사는 여자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건 잠깐이었고, 그녀의 말을 알아먹는 찰나 내 인생이 더 고단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도 한달짜리였다고. 그만둘 꺼면 그만둔다고 말을 할 것이지 이게 뭐하는 거냐고. 이미 사전에 느낌 왔다고. 차마 선수쳐서 마음 약하니까 해고하지는 못했다고. 까딱 잘못했으면 가불해 줄 뻔했다고.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맙소사! 까딱 잘못하면, 이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돈을 빌려줬다. 까딱 잘못하면, 이 아니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까딱 잘못하면, 이 아니라 아무 생각없이 일은 터졌다... 그녀가 당시 하도 뭐라 뭐라 하길래, 아-아! 내가 또 그런 데는 남다른 소질이 있다. 딱한 사정을 듣고만 있을 순 없었던 거다. 이젠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충 가닥이 나고, 축복할 일이 아니란 건 확실해졌으며, 이 이상한 시트콤을 목도하면서 좀 더 음미하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허공에 대고 한마디 했다.
「정치외교학과? 신문방송학? 아... 딱히 할 말이 없네... (썩은) 미소라도 지어야 하는데... 아~나, 이건, 도저히 못 살리겠다!」
그녀는 붙임성도 있었고 그리 나쁜 애 같지는 않았는데... 뭐가 잘못된 걸까? 혹시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란 게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이미 열애중이었을까?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던가! 그녀의 이름은 뭐였드라. 보니? 클라이드? (정식 이름이) 보니 & 클라이드?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녀의 안부를 궁금해 하고 있다. 나는 원래 호기심 많은 상남자니까. 이런, 젠장~! 차라리 극장식 카바레 같은 데를 혼자서 갈 껄 그랬다. 이상한 시내고 뭐고 그냥 어딘 한적한 동네의 장사 안 되고 파리 날리고 물 안 좋고 그렇더라도 그런 NC에라도 가서 술이라도 퍼마실 껄 그랬어. 괜히 기분 완전 음 뭣 같아.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아직도 이 말을 더 들어야 하나? 언제까지? 여태 인생수업, 그동안 뭘 배운 거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얼굴에 미소를 짓는 것 뿐이었다. 당연히 메마른 그것으로. 아니면 꿈과 희망에 부푼 미소겠나. 삐에로는 항상 웃는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언제나. 실제 그러지는 않았지만 또 저 앞으로 45도 각도로 2층 쯤에서 환한, 이번에는 무지개 빛깔이 아니라 밝긴 하지만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쥐색이었다, 환한 빛과 함께 그분이 내려오시면서 한마디 하시는 것 같았다. 복장은, 복장은 각자 알아서 상상하는 걸로. 게다가 그 말은 명대사 축에도 못끼는 거다. 그냥 바깥을 보라는 거다. 사람들의 뭇시선을 느껴보라고! 맹추 같은 그분!
나는 급히 할 일도 없고, 약속도 일정도 없고 해서 느릿느릿 시선을 거리에 두고 주변을 살폈다. 어머나! 내가 그동안 희롱당했을까? 눈에 뭐가 씌였을까? 누구에게? 어떻게? 왜?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 그분의 말씀대로 바깥을 보니 바깥은 내가 알던, 지금 있는, 실재였던 이상한 시내의 가게 이름들이 모두 이상한 이름이 아니라 정상으로 보이는 거다. 좋은 뜻과 긍정적인 의미의 명칭들로. 이렇게 신기할 수가 있나! 어떻게 이런 일이...! 오, 세상에나! 어머나, 살짝 미쳤던 것일까? 저편에 보이는 이름들은 모두 보통, 정상, 평균, 온건, 아름다움, 밝음, 꿈, 희망, 호의... 그런 뜻의 낙관적인 이름들 뿐이 보이지 않았다. 뉴발란스, 버거킹, 서천(西天), 17세, 비발디, 애인있어요, 마녀의 성, 삼총사, 셜록, 언젠가 티파니에서, 안녕 드뷧시, 나를 돌아봐, 나이키, 스타벅스, 캐논, 아디다스, 주말 소설가(이건 원래 책 제목이다. 그 책의 부제는 '1년 52주에 완성하는 장편소설 창작 프로그램'으로 이 책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소설을 한번 써볼까 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물론 읽고 나서 개론은 내게 맞지 않는다며 실망할지도 모르고 그리고 서점에는 뭐뭐 첫걸음에 관한 책 엄청 많다, 시작이 절반이고 우연한 관심이 대성의 조짐일 것이다, 아닐 수도 있다), 버버리, 폴 스미스! 이게 다 뭔 일인가! 시야에 보이는 긴 이름은 딱 하나다. <아무도 그 이름 부르지 말라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글씨로 당신 이름을 쓰기도 했다> 나는 마치 슬픈 추억의 영화 그 주인공처럼 나직이 읊조렸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이게 다 뭐지? 이런, 젠장, 망했다!」
뭔가 억울하니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라도 찾아야 할 판이다. (빨리 말하기 & 여자 음성)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빨리 말하기 따라하기 & 남자 목소리) 노, 노, 노, 노, 노, 노, 노, 노, 노! 그러나 (눈에 씌였던 콩깍지가 벗겨진 지금) 남편이 숨쉬는 모습도 싫어보이네, 아내의 잔소리를 들으면 슬슬 뚜껑이 열리기 시작하네, 식사 예절 하며 집안일과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모든 것이 왜 그렇게 싫어보이기 시작하는지 그런 예는 떠올리지 말기로 하자. 지금은. 그리고 여기서는. 설마 그런 상황이 어떤 걸 뜻하는지 모르시지는 않을 테고.
그동안 이상한 시내를 발견하고 내가 인지한 이름들은 어떠했는가? 조금 길어도 모두 읽어 봐야 느낌 오니까, 비교 되니까, 조목조목 적어보자면 이와 같다.
어이, 괴짜! 넌 흉측하고 숙맥이야, 집어치워! 정말 형편없어!, 말이 되는 소릴 해, 불행, 불길, 불친절, 허물, 되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고 있어, 입 닥쳐, 얼간이, 머저리, 너도 늙어봐라, 볼 장 다 보다, 이래라 저래라, 하든 말든, 젠장 (나도) 말 좀 하자고, 누구 보고 놈이래, 호사 & 사치, 이것 보세요, 꼴등, 배고픔, 악몽, 망측, 탕진, 속았다 그리고 낚였다, 당신 폭삭 늙어버렸네요, 인생이란 게 그렇듯이 사업 실패 후에 기다리는 것은 고독한 말년, 그런데 형 정말 50살이세요, 와 잘생겼다, 뚜쟁이, 친구에게 오랫만에 한턱내려고 연락해서 만난 후 술집에 들어가 같이 술을 마시고 계산하려는데 (신용카드)한도 초과가 나왔다 저런 쯧쯧 나는 아직도 카드 돌려막기 생활자라는 걸 까먹었다 복권은 항상 꽝이고 여자친구는 없고 통장잔고도 없는데 나는 장가갈 수 있을까, 그래 놓고선 한다는 소리가 꺼지라고, 여기까지다. 아, 못 본 것 하나가 있다. 갈 때까지 갔어! 그리고 봤나 안 봤나 모호한 이름도 있다. 햄버거 문체 좋아하시네 뭔 햄버거 패드가 입천장에 쩍~ 달라 붙어 잘 안 떨어져 겁나게 난감한 좌불안석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그리고 끝으로, 불확실하지만, 남은 하나는 이것? 보니 앤 클라이드?
도대체 그 모든 게 다 무슨 일이었던 것일까? 뭐에 홀려서 엄한 글씨들을 읽었던 것인가? 난독증, 그건 아닐 꺼 아닌가. 사춘기는 당연히 아니고. 뭐, 발...갱년기? 저런~! 내면에 잠재된 심술이 무슨 마술이라도 부렸단 말인가? 그런 황당한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나는 너무나도 깜깜했다. 교교히 우둔했다. 허영심 파다했다. 암암리에 그런 게 아니라 아예 춘몽을 꾸고 상사병에 걸린 것처럼 이상한 몽상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거다. 명예심도 없었고, 청운의 꿈은 물론 성실한 삶에 대한 꿋꿋한 애착 또한 어디 신발장에다 집어 넣어놨던 거다. 그냥 정상적이고 보통의 적당한 평상심마저 없었으니까 이렇게 헛불을 키고 혼자 좋아하고 혼자 기뻐하고 혼자 소설을 쓴 거다. 우끼지도 않는 더럽게 재미없는 삼류 소설을. 그걸 환상이라고 여겼다니, 오 이런, 생쥐로 변신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당장 했을 것이다. 삼류가 뭐 어때서, 라는 장르 초입부에서만 서성거리지는 말자.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화보와 소장용 만화책은 조카에게 넘겨줄 때도 됐다.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 읽기를 여러번 실패한 건 잊어버려도 되고. 그런 건 수없이 물먹어도 괜찮다. 오히려 더 그래야 한다는 건 그대에겐 잔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군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게 된다. 지금은 중간보스를 찾아가야 한다. 단박에 <그분>을 만나려고 하지 말고, 일단은. 이상한 뜬소문 나서 이제 더 이상 동네 장사 할 수 없게 됐다. 졸업작품은 나왔으니까. 진출할 업계가 어딜지는 아직 미지수다. 경이로운 게임의 다음 단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노를 저어가자 푸른 골프장 잔디를 헤치고 희망의 나라로. 평균연령 이짝 저짝이든 그곳이 어디든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안 그러면 뭐야 저런~ 내가 이걸 돈내고 봤단 말이야 이런 삐─삐─ 잘 아시듯이 그런 칭찬을 듣게 될 게 뻔하다.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한다. 삶은 연습이 아니고 실전, 온통 송두리채 실전 뿐이다. 그러나 크고 작은 굴곡과 역경은 없을 수가 없다. 인생은 원래 파도타기와 같은 것이다. 자, 인생 나왔다. 불쑥 그런 생각이 든다. 그 파도가 치는 바다가 시적이고, 파도가 조금 과격해도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이 넘실거림은 정말정말 낭만적이며, 조용조용하면서도 온갖 환희와 그급스러운 대중적인 눈길끌기와 낯설게 하기는 물론 낯익게 하기까지 하면서 꿈과 모험으로 가득차서 미지의 세계로 당신을 데려갈 것이며, 예체능으로 둘러쌓여 웃으면서 여유를 보이고,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서는 것이 묘하게 흥미로워지고 그러면서 습관되고, 그러나 동심과 동경과 인성을 잊지 말고, 우연치 않게 사랑이 찾아오면 고마워하며 상어파도타기를 하자고, 계속, 언제까지라도. 나 같은 속좁은 사람은 후배 길 안 터준다고 수준 낮은 농담을 하면서 혼자 막 험담을 때로는 일삼지만 무대에서 쓰러지는 게 꿈이란 것이 혹시 이와 비슷한 일상적인 삶의 자세를 피력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또 출-퇴근해서 일하지 않고 당분간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 잠시 이름을 모르는 불청객, 남몰래 떠나간 그녀에게 어쩌다 그냥 잠시 의탁한 기금의 정확한 액수는 밝히지 않겠다. 모양 빠지니까! 끝으로 몰염치하고 낯부끄러운 말이지만 서운하니까, 아쉬우니까, 뭔가 심심하기 때문에 괜히 별다른 까닭없이 의문문으로 재미없던 최근의 이상한 시내에 관한 소설을 끝맺고 싶어졌다. 염치없는 데도 불구하고 피치 못할 사사로운 사정 때문에 한 말씀 드리자면 이렇다. 이런 이야기가 당신의 마음 속에 가만히 들어가도 될까요? 뭐라고? 이런 삐─ 삐─ 삐─! (그러나 부사 삐─, 그것이 연정의 밀어와 사랑의 속삭임을 뜻하는지 누가 알겠나! 보일 듯 말 듯 한 그분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