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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65

from 소설 2016. 1. 31. 23:27

   친구집에 놀러 가기. 이걸 그래프로 보자면 누군가는 나이들면서 서서히 안 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말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나이와 비례해서 계속 늘어만 가는 거라는 특이한 답변도 드물지만 내놓을 것이다. 대개는 비교적 어른이 되고서는 굉장히 좁은 범위로 한정되는 것이 아마도 퍽 엇나가는 대답은 아닐까─물론 누가 묻지는 않았으나 혼자 말하기로 보자면 그럴 수도 있을 듯─당신은 그렇게 생각한다. 안 했다고, 그럼 그렇게 생각해, 아니면 생각을 바꿔 또는 심지 굳게 주관을 지키든가. 아무튼 저번에는 케빈의 집에도 모였다가 하워드의 집에도 모여서 도시 소녀들도 거의 하지 않는다는 냇가에 뭘 띄워 보내는 유치한 장난도 했다가 조니가 먼저 탐방한 후 나중 사라진 제임스를 찾기 위해 나섰다가 헤맸다가 우연한 만남에 이르게 된 일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모두 각자 자신의 인생을 잘 살다가 알렉스의 집에 모이게 되었다.
   「이를 어째, 어쩐지 걱정되는데...」
   「뭐? 뭔데 그래?」
   「제임스가 장미꽃을 가져왔는데!」
   「저번에 장미꽃 키운다는 친구가 누구였지? 제임스 아니지 않나. 키우다 포기했다 그랬나? 제임스, 많은 선물 후보 가운데 왜 장미를 선택했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래도 돼. 이미 물어봤는데 뭘. 어려운 일도 아니고. 별 뜻 없어. 데이트 신청이 아닌 건 분명해. 오늘을 축하하자, 도 아니겠지. 그럼 뭘까? 내가 어디서 바람을 맞았나? 그게 아무래도 가장 가능성이 농후한데, 그렇지 않니?」
   「누구 사랑에 빠진 사람 있는 건 아닌가 몰라. 그건 그렇고, 닉! 오늘 일진 좋은데, 알렉스 집 창문이 잠겨져 있지 않았자나. 어떻게 된 거야? 모두 깜짝 놀랐다구. 신고할 뻔 했어. 멀쩡한 대문을 놔두고 왜 창문을 넘어 들어온 거야? 왜 그런 거야?」
   「왜긴? 너희들이 나 몰래 내 험담하나, 내 뒷조사를 했나, 칭찬 일색으로 누군가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나(그렇게 띄워준다는 건 뭐가 있으니까) 궁금해서 그랬지. 그냥 한번 멀쩡히 문을 열고 집에 걸어 들어오기는 왠지 모르게 싫어다고나 할까. 그런 거 같아. 자, 널 위해 준비했어. (알렉스를 주려다가 슥 방향을 틀어서 하워드에게 건넨다) 네가 찾더 고서적, 우리 동네 서점에 있던데. 횡재했지 뭐니. 그리고 이건 증말 오래된 걸로 하나 가져왔어. 블루 와인이라고 들어봤니?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특별한 거라고 나 먹으라고 하면서 선물받았는데, 귀중한 거 같아서 선보일려고 가져왔어.」
   「그나저나 바깥에 세워진 사이러스 뭐드라, 비전인가, V자 모양 꼬리 날개가 멋진 개인용 비행기는 누구꺼니? 굴곡이 너무 (회상이라 불러줘야 할 듯 아득한 상상을 하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슬프던데, 도대체 누가 그거 타고 온 거야?」
   「누가 타고 오긴. 그거 옆집 아저씨꺼야.」 집 주인 알렉스의 빈틈없는 정확한 답변.
   「그렇구나. 어느새 우리의 미팅 시간이 되돌아 왔구나. 딱히 일정을 정해놓고 드라마처럼 회의하는 건 아니지만 몇 번 하다 보니까 어쩐지 이 시간이 난 막 기대돼. 안 그래? 난 그래! 어딘가 모르게 설레고, 어딘가 모르게 들뜨고, 어딘가 모르게 뒤통수 맞을 것 같은 기분... 그런 거 있잖아.」
   「그게 뭐야? 그런 거 없어. 동네 정육점에 가서 찾아봐. 쟤 또 드라마 초장만 보다 그만 두고서 꼭 다 본 것처럼, 몇몇 지식만 가지고 매니아인 것처럼 보일려고 하는 거 다 보인다구.」
   「일단, 모였으니 좀 지성적으로 보여야 할 꺼 아냐. 저기 숙녀분도 계시자나. 소개는 좀 더 기다렸다 하는 게 좋을 거 같고. 원래 우리-식이 그렇잖아? 서로 지금 무슨 책 읽고 있는지 그거부터 얘기해보지 않겠니? 어떤 비즈니스 아이디어 있나, 그걸 얘기하기에는 지금 분위기가 딱 맞지는 않는 거 같아.」
   「난 제시 워렌 티블로우의 성공 커넥션이란 거 읽고 있어. 4단계 알고리즘을 따라하면 출세할 수 있다나 뭐라나,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있긴 있는 거 같아.」
   「난 애덤 그래트 있지? 그 왜 탈모 때문인지 그냥 좋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너무 영특해서 너무 두뇌쓰는 일만 하시는 양반이라 그런지 정수리가 반짝반짝하신 아저씨 있잖아. 말해도 잘 모를꺼야. 그분이 최근 발표한 거, 오리지널스!」
   「이쪽은 서점에서 2권 사서 아직 어떤 거 읽을 건지 결정하지 않았어. 하나는 민감한 진실, 존 르 카레. 두번째는 에릭 와이너의 천재가 되는 방법.」
   「여긴 페이지터너 더글라스 케네디의 비트레이얼. 우리 유명인들 이혼 얘기는 자제하자구. 알고 보면 모두 다 사연이 많드라구. 또 십대만 되도 남녀 사이라는 게 오래가기 쉬운 게 절대 아니란 걸 알게 되잖아. 교육적인 이유로 될 수 있으면 반듯하고, 항상 웃음 꽃 만발하고, 사랑이 꽃봉우리 맺는(포인트: 만개한 것보다 이게 꽃값이 비싸다는 점) 가정 같은 걸 꿈 꾸게 만드는 좋은 집안 분위기나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일반적인 현실로 착각하게 만드는 픽션들이 많지만 나이들면 다 알게 되는 걸 어떻게든 늦추고 싶은 심정, 있긴 있어. 나도 일찍 어른이 안 되었으면 했어. 그래서 일부러 애처럼 사는지도 몰라. 지금도 봐봐. 수다나 떨고 있잖아. 그래, 그만 바톤을 넘길께.」
   「어쩌다가 나는 주제 사라마구의 카인을 읽고 있네.」
   「난 뭐드라,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지금 핸드폰도 없고... 어떤 단편집이었는데 유명 작가들 단편만 추려서 모은 책. 아, 맞다. 히치하이킹 게임, 이라는 제목이다. 쿤데라, 칼비노, 나보코브, 도리스 레싱... 여기까지만 생각나.」
   「마지막 한 명 말 안 했어.」
   「어, 나야. 나는~야 알렉스, 아임 유어 다스바이더. 최근 너무 많이 읽었드니 머리가 좀 띵해서 지금 좀 쉬고 있어.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몇 편 몰아서 보고 있어.」
   잠시 정적만이 알렉스의 집안을 싸늘히 감돌고 있다. 머머 했다, 라는 과거형 문체는 주로 1인칭과 설명문이 많은 소설에서 많이 쓰인다면 대화체가 많으면 머머 한다, 로 가는건가. 문학과 학생들은 이런 거 잘 알겠구먼. 또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1인칭으로 글을 써서 그걸 3인칭으로 바꿔 발표하는 사람도 아마 있을 테고.
   「그런데 분위기가 어째 좀 이상하다. 꼭 영화에서 나오는 신흥 종교, 추적을 피하느라 교묘히 이동해서 모이고 막 미래에서 왔다느니 사랑이 부족하다느니 그런 기색이 느껴지는데.」
   「새삼스럽게 왜 그래? 항상 그랬잖아. 이제 이런 느낌이 좋은데! 안 그러니?」
   「그래 맞아. 이게 우리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어. 브랜드 포지셔닝처럼. 여자들은 사랑 이야기에 약하죠, 이런 대사처럼 말이야.」
   「그럼. 유감스럽고 딱한 상황은 아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딱 할 말만 하고, 군더더기를 모두 빼버린 잘 익은... 햄버거 패드, 그 느낌을 살려야 돼. 햄버거 패드는 냉동한 거 쓰면 안 되고 항상 생, 생으로! 뭔 소리야?」
   「이제 읽고 있는 책은 얘기했으니 다음 순서는 뭐지? 즐겨 찾는 웹사이트? 아니면 새로 생긴 취미? 그보다는 단골 술집 말하기? 에이 그거도 별로다. 촌스러워. 품위가 없어. 철지난 풋사랑 같아. 다 애들 장난 같단 말이야. 뭐 새로운 거 없나? 기다려 봐야지.」
   「아직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으니. 곧 재미있어질꺼야.」
   「그다려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나이가 들어도 점점 차분함을 필요로 하는 일까지 진득하니 참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잘 뭔가를 하게 되지만 난 말이야, 종종 그런 생각이 들어. 아직 난 어린 거 같아. 정말 그래. 나만... 그런 거니? 나만? 아마... 아닐 껄! 그런 의미에서 한마디 하자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말은 못하겠으니까, 나는 그냥 잘 들어주는 역할 맡을래. 그러다 보면 할말이 생각날꺼야. 어, 뭐 재미난 일 없니?」
   「왜 뭐, 폭로전 같은 거라도 할까?」
   「폭-로-전? 오, 예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 있잖아. 서머셋 모옴의 맥주와 땅콩 같은 소설, 재밌잖아? 맞잖아? 사적으로는 그렇고 그러면서 우리끼리 내외하는 거니? 여긴 여자 없는데. 아, 아까 저기 저 여자분. 이제 소개할 때도 되지 않았니? 누구와 함께 온 손님이야?」
   「... ...」
   「... ...」 모두 꿀 먹은 벙어리. 한동안 멀뚱멀뚱, 뚤레뚤레, 잘못을 저지르고 주인의 꾸지람을 교묘히 비켜갈려는 강아지처럼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모르겠는데. 누구지?」
   「그러게. 누굴까? 여인의 초상이, 저 상냥한 얼굴과 부드럽게 이어진 턱선과 이쪽을 잠깐 흘깃하며 아주 잠시만 쳐다볼 때 그 왠지 슬픈 듯한 뭔가 할 말을 애써 참고 있는 것 같은 눈망울. 그래 저 여인은, 아리따운 아가씨는 아마도 마크? 아니면 제임스...일 리는 없고, 알렉스..의 귀빈이실까? 어쩌면 하워드? 에잇, 말 좀 해봐. 왜 그래? 그만 뜸 들이고, 속시원히 말해줘. 왜 내 사람이라고, 내 님이라고, 내 사랑이라고, 바로 그분이라고 말을 못하는 거야? 뭐 죄지었어? 아니잖아!」
   「아무래도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야? 알렉스, 너가 집주인이니까 가서 조심스럽게 그리고 공손히 물어보는 게 어떠니?」
   그렇게 알렉스는 베이지 계열 색상 소파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별명이 혹시 기집애? 여우 같은 기집애? 나쁜 기집애냐고 물어볼려다가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다. 여기는 어쩐 일인지, 누구와 함께 왔는지, 왜 이렇게 어떤 우수 가득한 느낌을 숨기지 못하느냐고, 정말 그러기로 마음을 굳혔냐고, 우리 가운데 누가 제일 돈이 많을 것 같냐고, 우리 가운데 아니 우리가 모두 친구로 보이냐고, 우리 가운데 어... 용건만 말하자면 여긴 무슨 일이냐고. 딱히 물어보지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던 말은 이랬다. 참다 참다 도저히 그 요염한 자태를 보다 못해 이렇게 한판 따질려고 찾아왔다고, 사람이 너무 가식적인 거 아니냐고, 어쩜 이리 눈부실 수 있는거냐고, 이래도 되는 거냐고!
   금새 묻고 답하고, 답하고 묻고 대화하기가 끝났다. 그리고 조용히 알렉스는 그녀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당연히 이쪽에 남은 친구들은 소란스럽게 뭐야, 뭐야, 저 녀석, 이런 소도둑놈 같으니라고 하면서 쑥덕거리고 의논하며 추궁하고, 우리들만 쏙 놔두고 자기 혼자 저렇게 태연히 밀애를 즐기러 나가도 되는 거냐고 따지면서 사태를 정확하고 드라마틱하게 파악할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 잠시 후 알렉스 혼자 집에 들어와서 그들 곁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고 이렇게 말한다.
   「같이 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데. 옆집 아저씨 만나러 왔다는데. 그 아저씨와 어떤 사이라고는 말해주지 않아. 주소를 잘못 알았나봐. 그런데 말이야. 문득 말하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건 느꼈어. 이런~! 딱 보니 그 아저씨 얼굴을 모르고 있었던 거 같아. 아 저런, 꼭 한발 늦게 뭔가 촉이 딱 온다니까. 내가 그 아저씨라고 할 껄 그랬나? 그냥 잘 보낸거지? 다정하고 친절하지만 다소 수동적으로, 원래 항상 그렇듯이, 그래 아무 사심없이. 그런데 우리 가운데 제일 뭘 해도 안 될 것 같아 보이는, 뭘 해도 재미없어 할 것 같은 사람이 누군지는 말해줬어. 또 우리 가운데 가장 쎄 보일 꺼 같은 사람도.」
   「누군데?」
   「그래, 누구야?」
   「뻥이야! 그런 말 물어보지도 않았어. 나는 초면에 그런 말 꺼내지 않는 거 너네도 잘 알잖아. 잘 알면서 왜 그래? 초딩같이.」
   「에~이. 난 또 뭐라고!」
   「그러게. 꼭 뭐 있는 줄 알았잖아. 싱거운 녀석. 김샜다.」
   「그럼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아니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헉, 말이 헛나왔다. 미안!」
   「아쉽다. 세상에서 제일 남자의 마음을 잘 알아주고, 예쁜 친구를 잘 소개시켜줄 것 같고, 이 가운데 가장 멋진 남자는 바로 당신이라고 말해줄 것만 같은 그녀였는데, 아쉬워.」
   「그런데, 알렉스. 너 혼자 사니? 집에 꼭 누군가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딱히 막 뒤져보기는 사양하겠고.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저기 장농에 누구 숨어 있는 거 아니야?」
   「난 트집 잡힐 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너네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 치정? 그건 드라마에나 나오는 일이야, 여기서 찾지는 말아줘. 하지만 언제 어디에나 빠지지 않는 통속극의 기본 요소 가운데 가장 섬세하고 처연한 그것, 그것이 뭔지는 각자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서 딱히 불식시키고 싶지도 않아. 슬며시 경련이 일게끔, 납득이 안 가는, 통 안중에도 없다가 나타나면 깜짝 놀라면서 뒤로 자빠질 그런 걸 준비해 뒀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미리 언질을 주는 실수는 하지 않을 꺼야. 김새면, 재미없잖아.」
   「얘가 못 본 새에 이상해졌어. 꼭 뭔 탐정 같은 말투를 쓰고 그래. 너무 안 어울려. 섬망증? 화상이나 쌍욕과 욕설 또 몽매도 아니고 뭐랄까, 실눈 그래 실눈을 뜨게 만드는 어설픈 연기력이 엿보인다야. 연습 좀 더 해야겠어.」
   「어쩌다 저 녀석이 저 단계까지 내려갔지? 그럭저럭 전에는 쓸만 했잖아. 스무살 전에 이디스 워튼이나 조지 엘리엇도 거의 읽었겠다, 묵시룩에 대해서도 알고, 전리품의 사전적인 뜻도 정확히 읊어줄 수도 있고, 겸사겸사 잘 감추어진 듯한 저 천재성도 겸손하게 살짝만 가끔씩 들추는 센스도 있어. 저 고전영화에나 나올 법한 예법도 알겠다, 최고의 지식인들 끼리 통한다는 친교에 관한 예의에도 정통하겠다, 그런다고 막 가십란에도 오르내리지도 않아. 주변에서 입소문으로 그의 소식을 듣기보다 내가 그런 가짜 소문을 퍼트리는 게 훨씬 빠를테지. 저 정도면 괜찮지. 그럼. 어디 내놔도 안 빠져. 우리가 친구 하나는 잘 뒀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옆집 아저씨 잘 구슬려봐. 살살 달래고 의구심을 건드리면서 칭송 한 번에, 내 염문도 하나, 네 추문은 두셋 그리고 배후에 누가 있다고 흘려, 허구한 날 신비와 환상과 낭만에 정말 질려버렸다고. 아주(아조) 짜증난다고. 우린 상남자라고, 혹시 마초지수 몇이냐고 여쭤봐도 되냐고 말이야. 뭔가 뾰족한 수가 있을 꺼야... 그만 할까?」
   「언제 끝나나 했는데 잘 멈췄어. 힘들었겠다야. 수고 했어. 옆집 아저씨는 바쁘실테니 그냥 놔두자. 쟤랑 친하지도 않은 거 같아. 또 몰라. 등치 이만 하고, 전에 비밀스런 직종에 있었던데다 막 살벌한 포스가 넘칠지 누가 알겠어. 사람 일은 모른다고 괜히 엮여서 우리가 모험이 아니라 개고생하다 사기극에 끌려들지도 모르잖아. 그냥 우리끼리 놀자.」
   「그럴까? ... 그러자!」
   「나는 이상하게 친구집에만 오면 꼭 남자라면 어떤 화장품을 쓰는지 엿보고 싶고, 여자라면 화장실 바닥에 긴 머리카락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져. 그리고 내가 그곳에 일 때문에 방문했다면 그 사람의 서재를 딱 보면 감탄할지 실망할지 단 몇 초면 충분하고, 통장잔고를 확인하고 싶다고 실토할 수는 없으니 당사자와 내가 나이 차이가 나지만 서로 존중하는 사이라면 그 인간의 기호와 잠재적 성향을 가늠할 수 있는 주류 취향과 생활 습관이 짐작되는 신발들과 옷장과 비밀 창고를 살펴보고 싶고, 막 그 사람을 술 취하게 만들어서 속 이야기도 듣고 싶고, 주량도 알고 싶고, 뭔가 비밀을 캐내고도 싶어. 음, 딱히 좋은 취미는 아닌 것 같아. 그런 자질구레하고 시시콜콜한 사항들이 뭐가 그리 궁금하다고. 그러나 알게 된다면 그 앎을 거절할 수는 없지.」
   「그래. 어디가서 그런 얘기 하지마. 괜히 멱살 잡힐 수도 있겠다. 일이 커지면 침대로 갈 수도 있고.」
   「오, 알렉스. 저거 돋보기 아니야? 거기다 깃털 펜에 문진과 또 뭐라고 부르지, 편지 따개? 그리고 주사위, 트럼프, 언제 도박했니? 게다가 무지개 빛깔 성냥에 아크릴 물감과 초콜릿까지. 이게 다 뭐니?」
   「어 그거 잡지에 사진 찍어서 보낼 일이 있었어. 그게 다야.」
   「아, 그렇구나. 대화가 딱 끊긴다. 우리가 남자친구라서 다행이지 뭐야. 짜식 우릴 너무 경계하는 거 아냐? 좀 냉정해진 거도 같고, 상당히 이성적으로 보여서 빈틈이 보이지 않는 듯 하기도 하단 말야. 뭔지 모르게 어설픈 몸짓은 음 괜찮아.」
   「바깥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떠니? 날씨도 따뜻하고 바람도 선선하고, 어때?」
   「그럴까?」
   그들은 모두 알렉스 집의 마당으로 나간다. 그곳에는 초소형 골프장이 있다. 딱 퍼팅만 가능하다. 그리고 수영장도 있다. 이건 저번에 달인가 해던가 그분이 두 번 나타난 마술을 선보였던 그곳과 비슷하고 또 제임스 집 수영장과도 닮았다. 어느새 나와서 소파와 흔들의자와 이곳 저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닉은 서서 숨겨진 버튼이 있나 없나 찾고 있다.
   「여기 혹시 수영장 통로가 저번 그곳, 어디야, 사막의 자동차 경주장으로 연결되는 거 아니니?」
   「그럴리가. 아니다 에 커피 한잔 건다.」
   「그건 그렇고. 다들 어떻게 지내냐? 그냥 그렇지 뭐? 무슨 대답할지 다 알아. 실은 나도 그러니까. 그렇지만 알렉스가 우리에게 뭘 숨기고 있는 거 같은데. 귀를 만지고 팔짱을 낀 다음에 턱 주변에 손이 간다 그리고 시선이 불안정해. 읽혔어! 게다가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 자꾸 살피고 막 다음 행동을 분석하고 있어. 뭔가 있는데?」
   「헤헤, 그래? 그래. 실은 나 다음 달에 결혼해.」
   「... ...」
   「뭐야? 반응이 왜 이래? 나 다음 달에 결혼한다구. 언제는 뭘 실토하라고 닦달하드니.」
   「... ...」
   「그래 재미없다는 거 나도 알아. 식상한 농담이니까.」
   갑자기 우광쾅쾅, 쿵쿵쿵, 접시 깨지는 소리, 뭘 집어던져서 부닥치고 찌그러지는 음향과 너가 잘했냐 내가 잘났냐, 뭔 여자가 요리 하나 제대로 못해, 남자가 속이 그리 쪼잔해서 어디 무슨 큰일을 하겠냐 무거운 거도 못들고, 말 다했어? 그런 음성까지 모두 들리면서 한바탕 난리나는 소리가 들린다.
   「뭔 소리야? 여기까지 들릴 정도면 목소리가 그냥 큰 정도가 아닌데, 뭔 성악하셨나 연극하셨나. 내가 제대로 들은 거지? 가서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어 저 집 원래 그래. 옆집인데, 아, 아까 아가씨가 찾아온 집은 왼편이고 여긴 오른편. 항상 저러다가 또 좋아져. 보통은 그러다 어떻게 될 텐데, 둘이 잘 만났나봐. 그거도 힘든 일인데 말야. 잘 들어봐. 은근 재밌다니까. 막 웃겨. 완전 기분이 이상해져. 꼭 누굴 완전 웃겨주었다가 울려주었다가 다시 끝장나게 웃겨주었을 때 내가 마치 코메디의 신이 된 듯한 그런 기분, 까지 느껴져. 잘 들어봐!」
   「저분들은 집에 돈이 많나봐. 부자같아.」
   「어떻게 알았어? 저기 저 의자 있잖아. 꽤 쓸만한 중고차 한대 값이야. 저거 저 집에서 버린 거야. 특이한 이웃들이야.」
   「뭐야. 이제 앞집이나 뒷집에서 뭔 일이 날 것 같은데. 세상이 발칵 뒤집히는 거 아니니?」
   「이제 더 이상 그런 진부한 수다와 식상한 대화, 품위라곤 찾아볼 수도 흔적을 그리워하지도 못할 이런 말장난은 그만 하자. 그런 의미로 내가 하나 고백할께. 사랑고백은 아니지만. 또 내가 너희들이 끌리는 이성은 아니지만. 어느 날 나에게 전화가 걸려왔어. 갑자기. 기다리지 않은 전화였지. 원래 이렇게 말로 할 생각은 없었어. 뭐뭐 했거든, 뭐뭐 했냐, 난 어떻드라, 그렇게 말하듯 내면의 앙금을 털어내기보다는 나는 뭐뭐 했다, 그는 뭐뭐 하다, 그녀는 어떻다, 당신은 무엇에 대해 아시나요, 그렇게 글로 터트리는 게 더 멋져보이자나. 그렇지만 깜작 선언이라고 생각해주렴. 그렇게 걸려온 전화는 다름 아닌 독촉 전화나 광고 전화였어. 뭘 내라, 뭘 반납하라, 뭘 사라, 뭘 가입해라 등등등. 끝.」
   「뭐야 그게 다야? 기대하지도 않았어. 오히려 안심했달까!」
   「자, 고해성사 시작된거니? 어떻게 뜻밖에 기척도 없이 아주 조금만 왁자지껄 하다가 뜬금없이 진심을 담아서, 물론 안중에도 없었겠지만 그렇게 재밌는 말들을 꺼낼 수 있는 거지? 신기한데? 나도 하나 꺼낼께. 나 이번에 스파르타식 소설쓰기 학원에 들어가! 이번에 들어가면 음, 처음 들어가는 거지만 아마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할 수도 있어. 훌륭한 히트작을 내놓지 못하면 아무래도 그럴 공산이 크지. 그러다 한달이 가고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새걸로 바꾼 다음에 또 한번 바꾼 다음에도 계속 거기 잔류될 가능성도 있어. 그러다 보면 언제 내가 소설을 쓰고 싶어 했을까, 언제 레디 액션이라고 누가 신호를 보내서 여기 들어오게 되었을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싫증나고 재미없고 지루하고 따분할 걸까, 그러면서 고민하겠지. 그러다 정신병원으로 밀려날 수도 있을테고. 펄쩍펄쩍 뛸 일이지만 그래도 찬찬히 생각해보면 장차 달라질 새로운 인생을 상상해 본다면 슬며시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청운의 꿈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게 만드는 물욕도 다시 샘솟고, 여기저기 갈팡질팡할 필요도 없고, 다짜고짜 삶을 변경할 이유도 없으며, 타인의 환몽에 타지의 열광과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미망에 안달복달, 더이상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지. 이런 발언이 너무 새초롬한거니? 내가 꽁생원같아? 곤욕스러운 처신일까? 놀림감으로 딱 알맞을 수도 있겠네. 그 위에 조소를 덧칠해도 좋아. 어쩜 나는 착종과 교란과 불협화음 같은 광기와 말랑말랑한 감성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몰라. 그런데, 그런데 이게 다 뭔 말이지? 이거 꼭 뭔 이름도 모르는 그런 어떤 실험 같아. 그래도 신기하고, 보람차고, 아름답고 흡사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그런 일에 관한 양성소? 양자역학이나 그런 연구소 또는 천문대 같은 교습소, 이것도 어울리는 명칭은 아니야. 그곳에 가서 상담을 받고 일단 등록을 한 후에 딱 기숙사에 들어가잖아, 그러면 뭔가 대단한, 정말 까무러치는 역작을 하나는 분명코 만들어 내게 되어 있다드라. 그곳을 매니아들이 뭐라 부르는지 아니? 뭐라 할 꺼 같아? 아폴론? 아니야. 레버넌트, 성, 위대한 유산, 도 아니지. 그럼 비극의 탄생도 아닐 것이 뻔하고. 그렇다면 인간과 초인, 아이네이스, 유토피아, 주홍 글자, 자성록 모두 아니야. 환영이나 흡혈귀의 주말이나 심미안이나 비몽사몽 같은 어정쩡한 단어도 아니지. 그건 바로 '늬 까짓 게 뭔데?' 라고 한다더라. 늬 까짓 게 뭔데? 왜냐하면 음지에서 그렇게 불려야 정말 절실히 목마른 사람들만 모일 수 있다나 너무 많이 알려지면 안 된다고 그러던가 뭐 그런 이유 때문이래. 정말인 거 같지만, 아니 허황된 허구나 그냥 근거없는 소문 같지만 확실한지는 잘 모르겠어. 정말 거짓말인지 알고 싶어. 알고 싶다구. 신기하게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걔가. 그분이. 맞지? 걔가 그분이야! 꼭 거짓말 같지? 그런데 대략 더 공적인 용어로는, 소설 창작 아카데미, 이렇게 불린데. 어때, 간판을 바꾸면 완전 딴 판이 되는 거야. 요즘 잘 나가는 사람들 조사해서 공통점 찾아 보면 얘깃거리 꽤 나온다니까. 언제는 누구든 안 그렇겠니. 극적으로 말하자면 스승이나 혈통 같은 거로도 설명이 되고, 가장 손쉬운 예로는 일반적인 학벌과 학파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마법 학교, 잘 알지? 뭔지? 또 또 많이 있을 꺼야. 세상일이 원래 그런 법이야. 그걸 잘 아는 사람들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지. 하나는 전문가, 둘째는 사기꾼. 물론 1과 2가 겹칠 수도 있어. 발을 여기도 담갔다가 어딘가에는 이름을 올렸다가 빠져나갈 뒷문을 지금 당장이라도 언제 어디서나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사람을 뭐라 부르는지 아니? 뭐긴 뭐겠어, 어른이라고 하지. 그리고 그 소설이라는 자리에는 다른 명사나 숙어나 성어도 들어갈 수 있다고 해. 예를 들면 영화 창작 아카데미, 교향시 창작 아카데미, 낭만시 창작 아카데미, 이처럼 말야. 마크 너 곧 사진 전시회 연다며? 예술사진 창작 아카데미도 물론 있어. 그뿐이겠어, 조니가 혹시 특별-초빙-강사로 우리 몰래 활약할지도 모르는 카사노바 감성 아카데미도 있다고 하더라고. 알잖냐, 내 소식통 끝발 대단한 거! 알아줘야 해,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해. 그래서 거기 들어갔다 나오면 대체로 잘 모르는 사람이 아주 드물 정도의 유명인이 된다고 해. 현역 예술가 중에도 거기 출신이 상당히 많다고 그러든데. 하지만 졸업하지 못하면 계속 거기서 나이를 먹는 거지. 그냥 안 되겠다고, 재미없다고, 못 하겠다고, 짜증난다고, 질린다고 때려치울 수는 없다고들 그래. 우끼지? 뭐 그런 우스꽝스런 학원인지 사기꾼 집단인지 그런 곳이 꼭 대학원이나 비즈니스 속성 코스 과정이나 동기 부여 부흥회처럼 그곳도 일정 패턴이 형성되고 피라미드가 움직이고 돈이 이동하고 사람들이 옮겨다니면서 거의 1차, 2차, 3차 산업처럼 그렇게 세간에서 알게 모르게 생태계가 살아서 돌아간다든데. 정말로 그런 곳에서 꿈을 키운다는 친구들 아주 많고, 많았고, 또 많을 꺼야. 사람들 다 알아. 그럼 당연하지. 비슷한 사례는 흔해. 나도 그래서 이번에 한번 등록하고, 입소해서, 너네들에게 결과물 가지고 딱 나타나려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 거기 들어가기로 했어. 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야. 망했다. 이거 말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큰일났는데. 이거 비밀로 해 줄꺼지? 내 말은 나만 알고 있기 아까워서 조금만 알려준 거 뿐이란 말이야. 난 성직자가 아니잖아.」
   하워드의 기나긴 어쩜 잠시 동안은 기뻐 날뛰 듯 하면서 또 어설프면서도 왠지 모르게 궁금증을 슥 깔면서 빈틈만 엿보이면 몽땅 비밀을 파헤쳐서 혼구멍을 내주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만드는 이상한 화법에 따른 긴 명대사에 대해서 아니나 다를까, 제임스만 반응을 한다.
   「에이,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우끼지 마라. 하나도 안 우끼다.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있어. 믿기지도 안는다야.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던 옛날 시대의 비밀 집단 뭐 그런 거야? 안 속아!」 이런 말을 한다는 거 자체가 아예 믿음의 문제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이 되기는 힘들다는 의미다.
   「그래 그건 그렇고 좀 전에 하던 고백에 이어서 나도 하나 털어 놓자면 이번에 열었던 카페 리골레토 있잖아. 거기 문 닫았어. 너무 급하게 준비도 부족한 상태에서 서둘러 그 업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뛰어들었던 거 같아. 다음에 다시 도전할려구. 뭐 나는 이 정도야.」 최근 카페를 열었다 문을 닫은 친구가 한마디 하고, 이제 다음으로 하워드가 괜히 한번 던져본 농담에 어느 한 친구만 자꾸 긴가민가 믿거나 말거나 그 정체를 더 캐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곧바로 그 얘기를 하지는 않고 챙피한 줄은 알아가지고 은근슬쩍 돌려서 말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래 다음에 다시 잘 준비해서 가게 새로 열면 잘 될꺼야... 그런데 왜 자꾸 좀전에 하워드가 말한 소설 창작 아카데미라는 뚱딴지 같은 얘기가 자꾸만 어떤 애상처럼 느껴지는 거지. 기분이 이상한데. 그게 대체 뭐라고! 하필 이 가운데 나만 그런단 말이야. (분위기 살피고) 아, 맞다. 얘들아 있잖아. 나 엇그제 악몽을 꿨어. 예전 TV 코메디 프로에서 봤던 연예인 싸움 순위표 10에서 당당히 2등을 차지했던 연예인, 그 해적 같은 면상 같기도 하고, 뭔가 불한당처럼도 생겼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어쩌다 말과 행동이 어울리지 않는 게 귀엽게도 보이는, 스포츠계를 접수하고 코메디계로 넘어와서 또 정상에 오른 개그맨, 그 넘버 2 개그맨이 꿈에서 어느 날 내 집에 찾아왔어. 난 집에서 자고 있었거든. 꿈에서, 꿈에서 자고 있었어. 하도 문을 쾅쾅 두드리길래 시끄러워서 깼는데, 물론 꿈에서 꿈을 꾸다 깬거지, 그런데 막 문을 박살낼 것처럼 두드리면서 하는 말이 글쎄, 나와서 자기랑 한판 붙자는 거야. 헉! 자기랑 한판 뜨제. 뭘 떠? 이런 뭔 말도 안되는 상황이 꿈에 나왔다니까. 원 세상에나! 꿈이라서 망정이지 실제였으면... 아후 오금이 다 저린다. 도대체 인터넷에서 아무리 자기 혼자 끄적거리고 웃고 노는 블로그라지만, 드물게는 우연히 본 사람도 어이없어서 실소를 자아내긴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혼자 올리고 혼자 웃고 그래서 만족하는 개인 블로그라지만 왜 그 인간을 넘버 2에 올려놓은거야, 그 블로그 주인장은 말야. 그러니까 그 험상궂은 얼굴이 내 꿈에 나타난 거 아니야. 늬가 넘버 1이냐고, 자기보다 위냐고, 왜 자신이 넘버 2냐고, 그럼 이제 남은 건 뭔지 알겠냐고! 아, 십년 감수했어. 꿈을 완전히 깨고 나서 보니 식은 땀을 한 2리터는 흘린 거 같아. 처음에는 나도 거짓말인줄 알았어. 믿기지가 않았어. 땀 2리터를 한번에 흘렸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고. 그런데 그게 정말인 게 곧바로 내가 물을 몇 컵 마시고 그 뒤로 마신 거까지 더하면, 찬찬히 계산해 보니까 그게 딱 2리터야. 이런 뚱보 심술쟁이 곰탱이 삐─ 삐─, 삐─같은 놈, 어디 TV에서 사람들 웃겨주고 피로를 풀어주고 휴식을 안겨줄 것이지 남을 웃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내 꿈에 나타나 사람을 기겁하게 만들어? 그러다 이불에 실례할뻔 하게 만들어? 저런~ ...! 자기가 진짜 웃긴 줄 알아, 전성기 지나서 이제 별로 웃기지도 않아, 전성기 때도 하나도 안 웃겼어, 옆에서 다 해줬어, 그때나 지금이나 그냥 맡은 역할은 뭐겠어? 뭐긴 뭐야 병풍인지, 몸으로 웃길 줄이나 알지 고급스러운 유머와 여자들 찌릿하게 만드는 목소리와도 거리가 멀어. 보통 대개는 예술가들의 1집 앨범이나 첫 번째 소설과 작품이 가장 뭐랄까 기념비적이랄까 뭔가 모든 작품 목록에서 제일인 거 같고 어떤 최고의 빛을 발하는 거 같다는 건 모르는 사람은 없어. 어느 급에 이르지 못했다라는 가정 하에. 그런 면에서 계속 내르막 길이거나 그 색채를 유지하는 거지. 꿈에 나온 그 인간이 항간에 떠도는 헛소문, 너무 이상하고 말도 안되는 그 헛소문에 대해서 TV에서 특유의 근엄한 표정으로 냉소와 함께 어렵싸리 극구 변론하고 마누라에게 하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항변할 때 오히려 그때가 딱 그때만 제일 웃겼어! 그 녀석과 비슷한 후배 개그맨인지 가수인지 어느 유명인도 있잖아, 개미 목소리의 소유자, 등치는 몸개그에 딱 알맞게 생긴 데다 우락부락한데 목소리는 개민지 파린지 닮은 목소리, 잉잉~ 엥엥엥~ 그랬나봐 아아~ 너를 사랑했나봐 뭐라뭐라 응응 엥엥엥~ 아 생각해봐 엄청 크고 무섭게 생긴 개가 짓는데 나오는 소리가 응에응에 그러면 어쩌겠나, 백날 지가 음악 인생 산다고 예술을 외친다고 사랑 노래를 불러대지만 사랑에 시퍼렇게 멍든 가슴에 대해 징징 짜는 사랑에 대해 잔뜩 달아오른 애정의 감정에 관해 제대로 알기나 하겠냐고. 수도꼭지 틀듯이 울어본 적이 있어야 뭔 말을 하지, 누가 자기 좋아한다고 하면 앞뒤 안 보고 밑도 끝도 없이 '얼씨구! 좋았어! 오케이!' 그럴 꺼야 당연하지, 꺾고 돌리고 회유를 하나 넌지시 얘기를 할줄이나 아나 맨날 직진에 흔들고 지르고 그냥 달리기만 해 다른 건 생각조차 안 한단 말야, '당연하지' 같은 게임이나 좋아하고 말이야 그게 뭐야 그게 뭐하는 짓이냐고, 샹들리에 같은 단어에 대한 느낌도 전혀 없어, 뭔 단백질 보충제를 콘푸레이크처럼 우걱우걱 씹어먹고 지가 여자도 아니면서 맨날 거울보고 힘주고 자세 잡고 맨날 하는 일 없이 말야 그게 뭐 하는 짓이야? 찌질하고 허접하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 눈치는 어디 초딩들 저금통에다 헌납했나, 주위에서 보면 우낀 그런 괜한 오해를 살 소지를 자기도 모르게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긴 있어, 가령 눈썹이 완전 엄청 정말 길고 숱이 많은 사람이랄지 그런 사람들 말이야.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겠어? 그것도 몰라,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 클럽 문 앞이지, 물 좋은 NC 입구, 그곳을 지키고 사수하고 관리해야 할 꺼 아니야! 그도 그렇고 모두 그냥 덩치가 크니까 주위에서 거들어 준 거 뿐이라구, 저급한 유머에다 순전 타인들 겁줘서 일부러 웃게 만드는 이상하고 식상한 개그 코드의 소유자. 말이야 바른 말이지 진짜 웃겨서 웃는 거 아니잖아, 무서워서 '애쓴다 애써, 고생하네 고생해' 하면서 웃어주는 것일 뿐이잖아 안 그래? ...(침묵)... 물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게 절대 아니야. 그런 값싼 말로 어렵게 쌓은 내 품위를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구. 안 그러겠어? 나는 그분들이 좋은 사람들이란 거 다 알아. 그분들도 내 말이 진심이 아니란 것 역시 알지, 이런 유형의 코메디 학파인지 분파가 있긴 있다는 것까지도. 나리,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뭐랄까 단지 만약 그분들이 그런 말을 듣고서 열받고 수증기가 귀에서 빵 코에서 빵 얼굴이 만화영화에서 토끼가 좋아하는 홍당무처럼 빨개지는 상상을 하는 게 즐거울 뿐이지. 단지 그거 하나! 그렇지만 꿈에서 나타난 걸 생각만 하면 아휴 증말 그냥 저걸 콱 이런 삐─! 그런 인간들이 어디 라일락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비틀즈의 미쉘은 들어나 봤는지, 데이트하다 레코드점에 들려서 누가 연주하는 누구 작품 찾아달라고 하면 뭔 엄한 짓 하다 들킨 것처럼 눈이나 똥그래지고, 그들과 수줍게 문학에 대해? 겸손하게 지성적으로? 능청과 삶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알기나 할 꺼 같아? 그렇지만 사실 나는 그런 1차적인 유머도 좋아해. 그리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실은 그들의 광적인 팬이야. 정말이야! 하긴 나도 지금 당장 라일락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몰라. 커오는 동안 그렇게 라일락 꽃이 어떻네 뭐라 노래를 듣고 부르고 그랬는데. 비창 교향곡에서는 관악 파트가 어쩌고 럭비는 말이야~ 테니스로 말 할 것 같으면~ 그 다음에 딱히 멋드러지게 할 얘기가 없다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보면 걔네들이랑 나랑 동급이야. 아니지 그 친구들은 인생에 있어서 스무살을 넘어서면서 대중의 관심에 익숙해지고, 큰 부를 성취하고, 인기있는 친구들과 항상 함께 하며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다가 한눈도 팔고, 거짓말을 하는 재주가 예의상이든 어쩌든 탁월함을 넘어 예술에 다다르고, 뭐 어쩌다 이혼도 하고, 그러면서도 후배들에게 자리를 비켜주지 않고, 괘씸하게 꿋꿋히 현역으로 남아서 돈 버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이란 건 증명하면서 여실이 땀방울을 흘리는 반면 이쪽은 아아 이게 다 뭐래니. ... (침묵) ... 이러니 내가 어디 외딴 곳에 들어가고 싶겠니 안 그러겠니? 나도 알아. 무슨 뭐 아카데미, 그런 말을 진지하고, 논리적으로, 근거를 제시하고, 차근차근 알려주면서 마술적으로 설명하면 누가 속는데? 하지만 지금 내 사정이 이러니까 잠깐 혹 한거야. 아니, 아니야. 어쩌면 그건 진짜 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어디 조용히 외딴 섬으로 여행가거나 수도승처럼 골방에 쳐박혀서 새로운 샐리 포터, 샐리 포터를 쓰려고 일부러 막 괴짜로 보일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런 법인이랄지 단체, 시설, 교습소 같은 곳이 정말 이 지상에 존재한다면 말이야. 직업도 요즘은 얼마나 많이 생기니, 미래학자들이 내는 책들 보면 앞으로 어떻게 세상이 변할지는 말도 못해.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동물농장이니 1984니 멋진 신세계니 산업혁명에 대해서 그리고 그 다음에 대해서 뭔가 아득한 경이감을 가지고서 아주 말도 아니었다고들 하잖아. 왜, 내가 너무 심각하게 반응하는 건가, 아닌 것 같아. 반대로, 내가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것도 아니라니까. 딱 적절히 그 가설이, 아니, 그 말 그대로 딱 그만큼만 받아들이고 있고, 안 그래도 내가 예전부터 생각했던 내용들이었어. 하워드, 나랑 이따 좀더 진솔히 자세하게 그 일에 대해서 논의해보자. 하긴 뭐 누가 알겠어? 한 삼년 공들여서 그곳을 졸업하고 딱 궤도에 오른 후 매스컴에 노출되기 귀찮으니까 은둔형 작가니 뭐니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자나.」
   명소프라노가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 아리아를 부르고 있다가 잠깐 곡 중간에 멈칫 쉬어야 하는 음표와도 같이 좌중의 어느 한쪽에는 어느새 불현듯 냉혹한 한기가 서리고 그 노트의 겉표지에는 공포영화처럼 제목이 스르륵 써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제목은 소설 창작 아카데미를 찾아서?
   「제임스 도대체 왜 저러니? 덜떨어진 거도 아니고 일부러 맞장구 쳐주는 데 재미붙인 거도 아니고 이거 정말 뭐 하자는 거야?」 닉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겉으로 말하지는 않고 속으로만 생각했으며 그럴 듯한 의미의 눈빛만 다른 친구들과 공유한다.
   「난들 아냐? 그냥 던진 말인데 저렇게 낚여버리면 그 말을 꺼낸 난 대체 뭐가 되냐고? 그냥 웃자고 한 말인 거 모른 사람이 어딨어? 그러자나.」 하워드도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역시 내뱉지는 못하고 괜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발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다. 그래도 대화의 방향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는 않아서 다행이랄까!
   「야, 가자. 지금 당장. 어서. 어디야, 거기?」
   「그거 다 내가 지어낸 얘기야. 선연한 거짓말이라니깐 그러네. 생-거짓말! 됐어? 똑 부러지게 얘기하니까 이제 만족하냐? 딴 애들 다 알아먹었는데 넌 뭔 생각하다가 이제 와서 엄한 소리를 하는 거냐? 설마 원래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건 아니지?」
   「맙소사! 그걸 지금 나보고 믿지 말라고? 이런, 젠장! 믿겠다니까, 속겠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겠다고, 감화하겠다고, 거짓일 공산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 고백을 반듯한 자세로 멋진 어깨선을 유지하면서 감동한 척 하면서 늠름히 받-겠-다-고! 왜 지금 와서 그것이 가짜로 네말이 거짓으로 돌변해야 하는 건데? 그러잖아? 어서 신나게 그곳을 찾으러 떠나자고. 뭐라고 했지... 뭐 무슨 아카데미? 반짝반짝 신호가 오시는구나. 설령 우리가 찾던 그것이 개판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찾으러 떠날꺼야. 이런 내가 미친 것 같아? 와, 미치겠다. 장난으로 시작한 게 어쩌다 더 이상 장난이 아니게 됐어. 다른 게 아니라 비록 그것이 바라고, 꿈꾸고, 소망하고, 그려봤던 모습이 아닐지라도, 딱 거기에 도착했드니 그건 뭐랄까 그냥 인적이 끊긴 황무지에 불과할지라도 설혹 그렇다고 해도 나는 실망하지 않겠어. 게다가 그것은 내, 내? 내 거기일 리는 없잖아. 그곳의 정문에 딱 도착했는데 어쩜 그곳은 미래에 가까운 미지의 공간일테니까 내부로 들어갈려면 어떤 특수 판독기를 통과해야 되는데 글쎄, 그걸 그 금속성 평판 위에다가 올려놔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럴까 아닐까? 당연히 아니겠지. 여자는 어떡하라고. 아, 뭐 스캐너나 그런 장비가 있겠구나. 그건 모를 일이야. 아무튼 평생 속고만 살아왔을지라도 인생이라는 도박판에서 내내 허탕만 쳤다 해도 확률상 지금은, 이제는, 드디여 내 운명의 왈츠와 행복한 마권 그것의 부제는 바로 믿음이야 반드시 신뢰여야만 한다구. 하나만 찍다가 여기까지 왔어. 다른 건 하나도 몰라. 사랑 밖에 난 몰라. 어중간한 미련은 떨쳐버려야 해. 끝끝내 그곳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어쩌면 내가 그곳을 만들지도 모르겠지. 그 무슨 아카데미 그거. 그런다고 설마 폴리스 아카데미 같은 그런 한참 철지난 영화일랑 떠올릴 생각은 하지도 마. 그 길은 곧 그분을 만나러 가는 길이 될 꺼라구. 지금 신성하고 거룩하단 말이야. 나 심각해. 그래, 미쳤어. 그분이 꼭 이렇게 내 뇌파를 조정하고 텔레파시를 내게 보내니까 나는 지금 이렇게 이상한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 같아. 느낌이 와. (손가락 딱! 어디를 가르키고 윙크! 하이파이브는 생략!) 좋았어! OK! 이거야! 이거라구! 자, 가자!」
   「... ...」, 「... ...」, 「... ...」 어쩌면 좋을까 이 일을... 그런 분위기.
   「에이 왜 그래, 피자랑 햄버거 시켜 먹었으니까 커피 한잔 마시고 낮잠을 자던가 잠시 쉬는 시간 가지면 안 되겠니? 넌 꼭 애들마냥 뭔 새로운 일에 관심이 가고 호기심이 불붙으면 꼭 참지를 못하고 그 즉시 바로 확인하고 찾고 나서고 그러더라. 엉덩이가 근질거려서 참지를 못하는 거니? 그러면 사랑을 놓친다니까. 사랑은 기다림이야. 이별은 사랑이 다시 한번 만들어내는 변하지 않는 음률이라고. 나이 들면 나이값을 해야지 그게 뭐니.」
   「야, 하워드! 뭐가 어쩌고 어째? 늬가 아까 있다고 했잖아. 지금 와서 오리발 내밀 꺼면 아깐 왜 그렇게 진짜같이 막 허공을 휘저으며 온갖 수식어를 갖다 붙이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눈동자도 흔들리고 동공도 흔들리고 내 마음까지 흔들리게 만들었냔 말이야? 이 자식이, 정말 그러기야, 어? 이럴 꺼야? 지금 여기서, 몸의 대화를 나눠 볼까? 그래? 어? 그걸 원해?」
   「뭐야? 뭐가 어쩌고 어째? 아까부터 가만 듣고만 있었드니, 이런~ 이거 장난이 아닌데. 있을 꺼 같으면 너가 나가서 찾아봐. 난 몰라.」 이렇게 말할려다가 정작 꺼낸 말은 「에이 멍충아, 그런 게 어딨냐? 스파르타식 소설 창작 아카데미? 거기 나오면 다 대가되고, 떼돈 벌고, 행복을 찾고, 쾌재를 부르며, 즐거운 인생을 살게 된다고? 이런 미친 놈을 봤나! 미처도 아주 단단히 미쳤구만. 야 이 바보야 정신 좀 차려, 정신 좀!」
   「뭐?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거짓말이지? 거짓말이라고 말 좀 해봐. 어서. 지금 당장 말이야. 왜 다시 날 속일려고 그러니? 아니다. 왜 다시 날 속이지 않을려고 그러니? 너 원래 그런 애 아니었잖아. 우리 사랑이 이거 밖에 안 돼? 아 사랑이 아니라 우정. 그래 나 바보고 멍청이인 거 다 알아.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되잖아. 이래서는 안 된다구. 이렇게 끝낼꺼였으면 너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어. 어서, 빨리, 바로 출발하자, 아까 했던 말은 다 잊고 넘어갈께. 자, 가자!」
   「이런 삐─ 삐─ 삐─ 욕을 얼마나 얻어들어야지 정신을 차릴래. 그런 거 없다니까. 지금이 무슨 중세 시대인줄 아냐? 아휴 이런 초딩도 아니고 뭐야 이런 돌아이는, 어디서 굴러왔길래 이렇게 꽉 막혔어? 아휴 증말~.」
   「뭐? 뭐라고? 이 자식이 듣자 듣자 하니까 안 되겠는데, 너 이리와봐!」너 이라와 봐? 자기가 가면 되잖아!
   「야! 잠깐. 무식하게 흥분하지 말고 침착히 생각해보란 말이야. 야, 너 나 안 볼 자신 있어? 어? 앞으로, 나 안 볼 자신 있냐고? ... 나는, 있어 있어 있다구~.」
   「안 되겠다. 야, 우리 한판 뜨자!」
   「뭘 떠? 늬 얼굴이 노랗게 떴다? 컴퓨터 오락 게임 한판 하자고? 안해! 저번에 마지막 게임에서 내가 이겼으니까 더 이상 안해. 내가 이긴 걸로 그건 끝났어, 끝났다구.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껀데? 아이 계속 그렇게 쳐다보지 마. 그러지 말란 말이야. 아 놔 이 자식이 정말...」
   「대충 넘어갈라고 했드니 안 되겠는데, 자꾸 사람 성질을 돋구는데. 너 꽤 흥미로운 취미가 생겼구나. 퍽 재주도 좋아. 자, 시작하자!」
   「날 잡아보시겠다? 그래 잡아봐. 잡아보라고! 따라와 봐, 따라올테면 따라와 봐. 따라오라니까, 그래서 어디 내 근처에나 오겠냐? 어휴 느려터져가지고, 저... 저.. 아이 뭐라 불러야 할지 생각이 안 난다. 저 똘아이 정말 답 없다.」
   얘네들이 남자 대 남자인지 여자 대 여자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남자 대 여자, 그럴 일은 없고 그건 아니고, 그러던 중 한 명 도망가고, 한 명 쫓아가고, 한 명 따라가고, 나머지 모두 뒤쫓고, 그런 일은 일단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란 거다. 하지만 앞으로 일이 어떻게 풀릴지 급작스럽게 호기와 반기가 충돌할지, 너라면 정말 넌덜머리가 난다고, 너도 대책없기는 마찬가지다, 참다 못해 다 팽개쳐 버리고 뭘 때려 부술지, 천만다행으로 말다툼으로 그칠지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속수무책으로 시시각각 하나하나 모두 지켜만 보아야 할지는 아직,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 얘기가 딴세상으로 흘러가 버리면 또 갑자기 흥미로워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금새 묻고 답하고, 답하고 묻고 대화하기는 날아갔다. 어딘가로 멀리 저 멀리 날아가버리고 녀석은 쥐도 새도 모르게 갈대의 속삭임을 엿듣고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 산타는 없다고, 아직도 사랑을 믿느냐고, 권태도 이별도 체념도 별 것 아니라고, 너의 지난 삶은 모두 무효라고, 지금까지의 모험은 모두 약과에 불과했다고, 뻥을 진실로 둔갑시키지 말고 잠자코 행실을 바르게 하며 건전한 삶을 살라고, 뾰로통한 그런 표정 정말 지겹다고 그렇게 충고라도 해줘야 할까, 늬가 어디 초딩인줄 아냐며 그런 흉물스러운 능청은 그만두라며 꿀밤을 한대 쥐어박을까. 보물의 은닉처가 있기는 어디 있다고 자꾸 그곳을 찾아가자고 보채는지 무슨 예술 창작 아카데미란 곳이 정말 있다면 그리고 그곳이 진짜로 스파르타식이라면 얘는 아마도 그곳의 경비원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그걸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은데, 옆사람 머리 띵하게 만드는데 어떡하지, 그러다가 행여나 그런 곳이 정말로 있을 리는 없겠지만 나름 모두 신사의 품격과 함께 지성의 아찔함 너머의 솜사탕 같은 연애와 뜬구름 같은 작업과 목마와 숙녀 그리고 회전목마까지 인생의 법칙과 세상사에 모두 통달한 그들은 제임스에게 정신차리라고 이 친구야, 이렇게 오해하고 있는 사건의 진상을 그 망연한 진상을 툭 검정 단추를 턱 풀고 친절하게 알려줄 위인은 못되었다. 때문에 느릿느릿 감정과다는 잦아들고, 뜬금없이 소설 창작 아카데미를 찾으러 떠나는 절정의 길만 남은 꼴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지금 얘네들 행보는 어디로 튈지 모르고, 그런 예견의 결과는 항상 다르며, 누군가의 천재성을 긴요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알렉스의 집에서 그곳을 찾아 출발하던 당시 살찐 거위는 보이지 않았지만 황금알을 낳는 거위, 꼭 그런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요괴가 그들을 현혹했는지 무작정 분주함에 들떠 오른쪽 날개인 환상과 왼쪽 귀 신비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서 현실성을 점점 차츰 잃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왕왕 제정신은 들겠지만 그러다 말어.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의무 가운데 어떤 게 오른쪽이고 어떤 게 왼쪽일까. 진땀 뻘뻘 흘리면서 작문에 열중하는 문학청년에게 그 답을 구하는 것이 전적으로 덜 미망과 미완성과 실패와 결탁하는 일이 될 것이다. 덜!
   어느덧 그들은 출발했다. 앞에 어떤 전경이 펼쳐질지도 모르겠고, 그것을 찾아가는 길이 잘 닦인 반들반들한 비단길인지도 불명확하고, 격식 같은 거 따지지도 말며, 하워드는 나름 선행을 한 것일 수도 있다고 볼 수 있고, 혹시라도 만약 정말 어쩌다가 만에 하나 그들이 뜻밖에 애타게 찾는 소설 창작 아카데미를 발견한다면 꿈은 이루어진다, 는 말처럼 이 잔잔한 일상에 무지개와 오로라를 비처주는 그대의 삶에 달콤한 애환과 더 달콤한 매혹감을 불러일으키는 더없는 금상첨화의 선물이 될 것이다. 필경,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실망감에 돌아와 술 먹고 뻗은 후에 깨어나서 숙취로 괴로워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들은 무방비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금새 묻고 답하고, 답하고 묻고 대화하다가 한 사람이 좀 길게 얘기하다가 하나도~ (더럽게) 재미없이 알렉스 집에서의 일화가 끝나버렸다. 허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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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64

from 소설 2016. 1. 15. 19:02

   '뭐가 어쩌고 어째?'로 시작한 난장판, 그가 말하는 환락궁이란 이런 것인가, 누구 드디어 일내다 등등 이렇게 시시콜콜한 뉴스 제목과 연예기사 쓰기에 적합한 일이 터진 현장이 벌어졌다. 그곳은 좋은 취지로 모인 전성기를 갓 넘긴 유명 배우의 일대일 대국 생중계 자리였다. 체스나 바둑 또는 장기, 기타 지적 놀이 같은. 거기서 J는 사소한 훈수를 두다 묘하게 그날따라 초능력에 가까운 청력을 뜻하지 않게 발휘했던 행사장 주인공 스타와 멱살을 잡고 대면하며, 주위에서는 말리고, 사진을 찍고 그런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한편 그 자리에 있던 독립 저-예산 전문 영화감독의 눈에 띄여 J는 감독에게 지금 찍고 있는 영화에 딱 적당한 인물이네 뭐라네 하면서 출연 제의를 받고 다음날 그곳을 방문했다. 이걸로 한 5페이지 정도 분량을 뽑아야 두꺼운 그러면서도 진지하고 학구적인 소설이 되는데 너무 가벼운 느낌 때문에 드라마 제작 즉 가짜 이야기 티가 팍팍 난다.
   아무튼 장면이 바꼈다. 여기는 영화 촬영장. 어느 장면에서 출연진과 촬영 관계자의 사소한 말다툼 끝에 나 영화 안 해, 아 이런 영화 못 찍겠네, 여기 아니면 갈 데 없는 줄 아냐며 다투던 당사자는 두편으로 나뉘어 어딘가로 사라지고, 이런 건 익숙한 풍경이라며 원래 영화 판에서 이런 일은 흔하디 흔하다며, 1시간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상황은 정리된다며, 그동안 요 앞에 생긴 클럽에서 잠시 기분 전환을 하고 오자는 영화사 매니저 S양의 설득과 인솔에 의해 그는 새로 생긴 클럽에 들어간다.
   클럽은 크게 말해 두가지가 있다. 음악이 멈추는 클럽 즉 느린 템포의 음악이 간혹 빠른 박자 음악들 사이에 귀찮게 끼어드는 그런 클럽 그리고 음악이 아예 멈추질 않는 클럽. 매니저 S와 그가 들어온 클럽은 후자였다. 그런데 그들이 입장한 클럽은 한마디로 이상한 클럽이었다. 쿵쿵쿵, 방방방 리듬이 튀고 불빛이 번적번쩍, 깜빡깜빡, 반짝반짝 거기까지는 여타 일반 클럽과 똑같았지만 이곳은 그날 드레스 코드 때문인지 모두 제비복과 연미복, 커다란 드레스, 면사포 가끔 양산을 든 여인 등 그런 옷을 사람들이 입고 있고, 룸에서는 고급 카지노처럼 카드놀이를 하고, 벽면에는 인상주의 그림들이 걸려있고, 간혹 구석에서 E.M.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을 읽는 아가씨도 보이고 음향 시스템도 보아 하니 들썩들썩 그런 음악이 아닌 라라라라 아아아 우우 음 그런 음악을 위한 오디오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는 딱 견적을 내리기에 폐장된 고급 화랑이나 음악감상회장으로 짐작되며, 이곳의 주인은 거부이고, 홀로 살았을 것이고, 아마도 동성애자, 뜻밖에 젊은 애인을 남몰래 둔 게 아니라 먼발치서 조용히 흠모하며 간혹 한두 번 생면했다가 해후의 순간 그 짧은 시간을 그리워하며 미래를 과거로 보내며 여생을 보낼 것 같은 어떤 영화 주인공과도 비슷한 인물이 그 주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분위기를 파악한 후에 멀뚱멀뚱 더 신기하고 희한한 또 다른 숨겨진 뭔가를 찾고 있다. 싸구려 카페와는 전혀 다른 하지만 이상하게 그것과도 연결되는 어떤 복선이 깔려 있을 것 같은 이상에의 호소, 숨겨진 라파엘로 그림의 거래 현장, 백미의 신사를 보고서 아 저 사람은 인생의 3분의 1이 지났겠구나, 눈썹이 없는 이 아가씨는 세가지 슬픔에서 겨우 하나를 덜고 팔랑팔랑 흔들리는 불안한 일과를 보내던 중 적요, 적적하고 고요한 안정감의 손길에 익숙해지고 싶어하는구나, 그런 혼자만의 공상에 빠져 있는 사이 영화사 매니저 S양은 어디서 놀고 있는지 보이지를 않고, 그는 혼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어느 룸을 발견했다. 그곳에 가까이 접근하니 인적이 드물고 조명이 달랐으며 음조도 조용해졌다.
   묘한 흡입력에 끌려온 그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는 그 너머가 어떤 곳인가 를 파악하기 위해 한두 발 내디뎠고, 순간 문은 혼자 닫혔으며 또 잠겼다. 허걱. 그곳은 또 다른 클럽이었다. 딱 봐도 근처 경쟁 업체 같은 느낌의. 이건 뭐지, 라는 기분을 만끽하면서 그 동요된 감정을 어디에 하소연하지도 못하고 경련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상한 각성 상태에 빠져들었다. 왜 A 클럽과 B 클럽이 연결된 거냐고, 난 입장료 안 내고 공짜로 B 클럽에 들어온 거냐고, 인생에 공짜는 없다는데 이거 뭔가 어디에 걸려든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그러나 클럽 분위기, 음악과 열기에 들뜨고 춤추고 떠들고 술 마시고 뭔가 (개)수작을 모의하는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 탓에 그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놓쳐버리고 만다. 게다가 혼자다. 왠지 행색이 몹시 초라한 거 같아. 다들 멋있어 보이고 이쪽은 울적하고. 그래서 그는 클럽 내부 외곽을 빙빙 돌다가 에라 그냥 나가자 라고 다짐하여 보이는 문 아무데나 가서 손잡이를 잡고 벌컥 문을 열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걷고 한참을 구불구불 돌고 돌아서 어디 바깥이 나오겠지 하면서 나갔는데 도착한 곳은 미술관이었다. 자기가 출구를 잘못 알고 쪽문이나 개구멍, 비상통로 등을 이용했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이왕 미술관에 도착한 거 예술품 구경이나 하고 나가자 하면서 수준 높은 미술품들을 관람한다. 여러 거장들의 유화와 설치 작품과 신인 작가들의 그림까지 잘 보다가 한쪽에서 썩 거대한 그림을 주의 깊게 살폈다. 괴상한 마수의 얼굴 그림이었는데 감탄하면서 바라보다가 괴물의 치아 가운데 딱 하나 검은색 치아의 빛깔이 하도 특이해서 그걸 자세히 볼려고, 만져보고 싶어서, 아니야 느낌만 살피자 하면서 그 앞에 서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멈추지 못하고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마치 텔레비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모니터 화면이나 사진을 정상 각도에서 보다가 딱 멈칫해 그러다 그걸 아래쪽에서 쳐다보면 어 안 보이던 어 그러지 않을까 하는 것처럼. 아니다. 극장에서 관객과의 대화 중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던 관중 가운데 한 사람이 조용히 일어나서 걸어나가 배우 옆 빈 의자에 착석하는 것이 비슷하겠다. 그 괴물 그림이 그렇게 컸다. 또 마술적인 매력이 넘쳤다. 그리고 괴물의 치아는 검은 그것은 묘하고 은은한 줄무늬, 무늬만 줄무늬가 아닌 실제 줄로서 장식되어 있고 막혀 있는 게 아니라 그림 전체에서 딱 거기만 뚫려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안으로 공연 장치처럼 쑥 빨려 들어가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정신이 혼미한 채로 이게 샤갈 그림인가 아닌데 프란시스 베이컨인가 그것도 아니야 이런 얘기는 보도 듣도 못했는데 뭔가 도발적인데 끝없이 도발적이네, 입체파인데 그냥 입체파가 아니야, 원래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작품인가 보다 라면서 뭔지 모를 예술에 넋을 잃고 심취해서 걸어가다가 갑자기 스르륵 굽어진 길을 지나 살짝 낮고 눕혀진 어느 신축성이 좋은 연분홍색 소파에 털썩 걸터앉게 되었다. 딱 만화 영화의 한 장면! 
   자, 초대하지 않은 손님 '비교의 시간'씨가 당신을 찾아왔다. 간청컨데 <꺼져> 라는 말만, 그것만 참자. 젊은 사람들은 수채화를 그리기 힘들다고 한다. 왜냐하면 수채화는 칠했던 물감이 마른 후에 다시 칠하는 방법이 필요한데 그걸 기다리기 힘들어하기 때문에. 1번이 카랴얀이고 2번이 번스타인? 잘못 말했다. 1번이 프랑켄슈타인 2번이 토스카니니? re: 지금 장난해? 1번은 수채화고 2번은 햄버거다. 1과 2에서 1이 조금 길다. 그럼 바로 면사포를 벗기겠다. 1번. 추억의 영화는 대부, 지금 최고는 오려붙이기 놀이?, 유행 안 타기는 고전주의, 대세 화장법은 악녀 스타일?, 그리고 초현실주의 경향과 낭만주의 사조, 여기서 끝이 아니야 인기 장르는 판타지와 미스테리와 스릴러가 아니라 예능, 출처가 비공개인 대학생들이 제일 데이트하고 싶은 연예인 남녀는 누구. 1번 끝. 2번은 방금 소설의 한 장면. 2번 끝. 으아 숨차다. 이제 비교하는 시간, 1번이 2번보다 더 보편적일까? 1번이 2번보다 더 유명한까? 말끔한 광고 사진에서 웃고 있는 얼굴의 몇 번 치아에 까망색 칠하기보다 더? 천만의 말씀, 아니다! 그러니 예술에서 최소한 새로운 소설에서 당연히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할 소재. 그럼 이제 다시 이야기 속으로,
   그런데 그 소파가 놓여진 장소, 거기도 미술관이었다. 이 역시 A 미술관에서 B 미술관으로 연결된 그런 시적인 흐름이자 뭐에서 뭐로, 그런 신비스러운 위인의 모토 또는 브랜드의 표어 같은 일이 벌어졌다. 클럽에서는 일부 막, 기분이 침체된 분들을 위한 통로를 통행료 없이 그냥 이용했다가 다른 클럽에 당도했다고 쳐, 그리고 클럽과 미술관이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어. 인정해. 이럴 때 아량을 보이지 언제 생색을 내나. 거기다 바다처럼 넓은 포용력과 인내심과 유연함에 천재 행위 예술가의 응용력이 절묘히 결합되고 건물주의 농간 때문에 미술품에 통로를 뚫어 다시 미술관이 나왔다고 쳐, 다 괜찮아. 그럼 여기까지만 하고 끝나겠지 하면서 그는 더 이상의 뭐는 있을 수 없다, 그건 사기다, 팝아트가 아니라 다단계 피라미드다, 그런 반신반인의 포효는 있을 수 없다, 또 다시 그런 2연타가 나온다면 그건 그야말로 홈런이 아니라 파울이다, 아쉬우니까 그냥 파울은 아니고 파울 홈런일 뿐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번 슬쩍 둘러보고 입장료 없이 무료로 잘 구경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내심 이 서커스가 계속되었으면 시간이 멈추었으면 요모조모 재미난 선잠에서 깨지 말고 그냥 꾸던 개꿈 계속 꾸었으면 그랬으면 하는 바램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우주 공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미래 세계가 짠 하고 등장하는 것도 아닐 테니까. 곧 살짝 감추어진 여흥이 궁금하긴 했지만 내 사랑은 아닌 것 같아, 잘 단념하고 뒤돌아섰어, 어른스러워, 만족해 하면서 자축하고 생길까 망설이던 자괴감을 털어버리며 바깥으로 나와 도착한 곳은 공원이었다.
   나무, 풀, 숲, 청소년들이 수건돌리기를 하고, 일부는 구석에서 핸드폰을 보며 입담을 풀고 입담배만 피우고, 강아지와 뛰어 노는 아이들, 왜 미술관에는 혼자 있는 여자들이 많은가 에 대하여 골똘히 연구하는 고양이를 안고 있는 차가운 도시의 여자들 그리고 풍선, 값싼 불꽃놀이 축포 몇몇의 때 이른 대낮의 도약, 시가 써지지 않는다며 울상을 짓는 시인 친구를 달래는 매출이 바닥을 기는 운동선수 출신이자 전-음악가였던 어느 현역 일러스트레이터, 작별하는 연인들, 친구에게 하는 얘기 즉 TV에서 어느 유행곡 작곡가가 자기는 비행기 VIP 석에서 히트곡을 많이 만들었고 지금도 계속 그렇게 작곡하는 습관이 있다는 연예 프로그램을 보고서 힌트를 얻어 자기는 대형 화물선을 타고 다니면서 글을 쓸 것이라는 만담 곧 화물선에도 엄연히 일반 승객이 있고 여행 상품마저 있다는 얘기, 평범한 동네 아저씨들이 많이 보이는 범상한 공원 풍경이 보인다.
   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로소 어쨌거나 저쨌거나 드라마 같은 평행 운동, 병렬 진행에서 용케 빠져나왔구나 혼자 탄성을 지르며 안심하고, 혼자 서운해 하면서 쩔쩔매고, 타성을 억제하며, 드디여 심심하지 않게 되었네 이제야 나태와 작별하고 권태를 갇다 버리고 새로운 인생이 낡은 지난 삶에 참견하기 시작하면서 드디여 <바로 이거야!>라는 감탄사를 내뱉고, 아름다운 세계를 찬탄할 빌미를 잡을 듯 하다가 옆 사람에게 넘겨버릴려는 찰나에 단꿈이 깨버린 듯한 썩 개운치 않고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꼭 세상 물정 모르는 목동처럼. 아직 늑대를 한번도 못봤으니까. 양치기 분야에서는 천재적인 양치기견 보더콜리처럼. 혹시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까 라며 놓쳐버린 대어의 재물운이 다 보인다는 것 마냥. 그는 못내 아쉬워서 그러면서 공원을 몇 바퀴 거닐며 돌았다.
   저 앞에 오리-배가 보인다. 호수에서 페달을 밟아 떠다니는 백조를 닮은 오리, 오리와 비슷한 오리배. 옆에 어떤 유명 점묘화를 흉내내는 예술가들이 보여서 에잇 뭐지 뭐야, 라면서 J는 오리배를 탄다. 그러나 주위에는 모두 연인뿐이 안 보인다. 또 금방 다시 그는 지루하고 따분하고 심심하고 재미없어졌다. 그러니 애꿎은 페달만 밟고 또 밟고 영차 영차 힘차게 많이 밟으면 많이 밟을수록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워진다는 듯이 그것을 계속 밟아댔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다른 일행들과 멀리 떨어져서 고립된 것 같고,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곧 이어 내르막 길이 이어졌으며 이제는 오리배가 혼자서 막 계속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여기가 호수인지 바다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 커다란 강 같은, 13일의 금요일 같은 표제가 연상되는 듯한 호수가 나왔다. 그는 아직 이것이 제 3의 2연타 즉 첫째 클럽 안의 클럽, 다음에 등장한 두번째 연인 미술관 안의 미술관에 이은 3번째 환상인 줄 아직 낌새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멍청한 놈!
   그렇다고 물 위에 계속 떠 있을 수 만은 없으니 어딘가 가까운 육지로 오리배의 페달을 열심히 밟아서 갔다. 오리배는 육지에 닫았다. 그는 오리배에서 내려 뚤레뚤레 주변을 살피고 사태를 파악했다. 그대로 탐색을 계속하며 앞으로 쭉 걸어나왔다. 공터로 그리고 카페 앞으로. 그 찻집의 이름은 연애 소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여기에 들어가면 어떤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은 딱히 설레는 감정 같은 기분 좋은 사치감은 없었으나 그런 게 다 뭔 소용이냐며, 뭔가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 그런 허황된 기대는 이미 옛날에 포기해버렸다며 멈칫했으나 어떤 관성과도 같은 이끌림에 따라 카페에 들어가고, 어느 좌석에 앉아 술을 시켰다. 그는 여기 흐르는 음악이 모차르트의 레퀴엠으로 들리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컨츄리 음악이나 블루스, 재즈, 팝 음악으로 듣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그는 그냥 에스프레소 한잔과 최고급 위스키 스트레이트 한잔을 시킬려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웨이터에게 저기 저 잘 차려입으신 백작? 준남작처럼 보이는 신사가 마시는 술을 주세요, 그랬드니, 안 어울리게 완전 비싼 턱시도를 입은 웨이터가 하는 말이, 손님 저 술은 어... 저 술은... 음... 저건 안 드리겠다는 얘기는 아니고... 어... (자꾸 안절부절 못하면서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쪽으로 오시죠, 하면서 그 술은 여기서는 절대 안 된다, 큰 일 난다, 더 안쪽에서 마셔야 한다, 그 술에 어울리는 공간이 따로 있다, 그러면서 어느 깊숙한 밀실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를 따라가니 어떤 으슥한 기운이 느껴지는 내부 복도가 나오고 그 복도의 끝에 방이 하나 있고, 방에 이름이 있었다. "블랙잭!"
   그는 블랙잭에 아직 안 들어왔다. 그곳은 카페 안의 카페일 것이다. 연애 소설 다음에 블랙잭. 여기를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 길을 계속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누구 방해하는 작자는 없는가, 누가 날 말려주지는 않는가, 원래 각본은 이런 것일까, 각본이 필요한 것일까, 그게 있기는 있나, 언제 이 콘서트가 시작되고, 어떻게 연작이 이어지고, 무슨 결과가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관객은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를 생각하며 이 순간 순간에 각별한 애정을 품음과 동시에 아무 생각없이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블랙잭의 문을 벌컥 열었다.
   아, 보인다. 뿌연 오로라가 온통 주변을 감싸고, 새소리인지 하이든의 종달새인지 뭔가 음률이 귓가에 들리는 거도 같고, 불투명하고 상징적인 줄거리가 있었으니 이제는 결정적이고 청명한 본 게임이 시작될려나보다, 하면서 이렇게 뜸을 들이고 날 애태우게 만든 그 장본인은 대관절 누구일까, 그러면서 앞에 보이는 물체를 좀 더 빤히 들여다보니 예상했던 놀이공원이나 동물원, 해변 비치발리볼 경기장, 평범한 조각공원은 아니고 저 앞에 카페 사장이 문을 열고 날 부르고 있다. (그러면 그렇지. 내 그럴 줄 알고 있었어, 실망하는 몸짓!)
   아, 꿈이구나, 오 이런 이게 다 진짜가 아니었단 말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이리도 실감날 수가 있지? 경이감이라는 액자 안에 낭만으로 스케치된 경외감의 빛깔을 띈 환상의 윤곽이 서린 추상적인 신비한 현실의 꿈나라가 아니라니 이런 날샛구나, 하면서 난 그를 맞이했다. (이 꿈마저 현실로, 글로, 예술로 살리는 재주는 내겐 없나 보다. 고로 난 진지하고 진솔한 사람이다. 절대 허풍쟁이가 아니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고 연락은 안 되고 집은 가깝지 까페 한적하고 심심한 데다 걱정도 되고 얼굴도 볼 겸 해서 와 봤다, 얼굴 좋아보이네, 놀러와라, 좋은 건수 생기면 연락해줘(뭔 건수?) 하면서 그 상황은 마무리됐다. 내 표정을 보고 방금 꿈에서 깨어나 정신이 없고 대답도 못하고 있는 걸로 알았나 보다. 잘 봤다.
   그가 다녀간 후 꽁꽁 얼렸던 굳게 닫혀 있던 창작의 문 그 철옹성이 많이는 아니고 약간 꿈틀대기만 하면서 찬란한 영감이 잠자고 있는 녹슨 궤짝에 열린 고드름에서 착상의 단서 그 감흥이 뚝뚝 떨어질 듯 했는데 그냥 그럴려다 말았다. 윽 스팀!
   그렇게 하루가 시작된 후 일과를 보내면서 평소처럼 왜 글이 안 써지냐, 늘상 하는 생각으로 뭐 재미난 일 없나, 귀를 한 번 후비고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 엉뚱한 상상을 두번 쯤 하다가 아, 그건 어떨까 라고 생각했다. 그게 무엇이냐면 그건 뭔가 새로운 일을 해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아까 꾼 꿈을 살짝 바꾸어 보자면 착상이란 명패가 붙은 문을 열었드니 본격적인 소설 집필 사무실이 나오는 것처럼 뭔가 생각날 듯 한데 그것이 아직 구체화되지는 않았다. 변형시켜서 비유를 들면 좋은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일상에 지쳐 일을 하다가 무작정 회장님 비서와 노닥거리다 사장단 회의실에 갇힌 설정에 이어 그녀와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밀월 여행을 가버린다는 이야기, 이것도 아니다. 틀렸어. 꿈이 너무 또렸해서 현실과 잘 구분되지 않거나 꿈이 완전 가물가물하여 갸우뚱하니까 줄거리를 떠올려 보고 복기를 해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나는 한 손으로 딱, 손가락을로 전방의 허공을 가르키며 삿대질, 그 다음에 골 세레모니, 이거야, 이거라구, 바로 이거라니까 하면서 약간 실낱같은 희망으로 잔잔한 웃음을 미친 사람처럼 지었다. 만약 누군가 나를 보고 있었다면 그 행위는 생략되었을 것이다. 즉 옛날에 흔했고 지금도 특별하지 않은 글로도 영상으로도 곧잘 나오는 주제, '나는 어느 날 출근을 하지 않았다', '오늘 나는 갑자기 집에 가기 싫어졌다' 같은 도입부나 첫 장면의 해설! 그것으로 반틈은 독립된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뭔가 어떤 일을 시작하고, 그러다 일을 때려치고 떠난 후에 그 상태를 즉시 글로 옮겨서 그 다음에는 온갖 거짓말로 계속 모래성을 쌓고, 큐브를 돌리고, 요술 주문을 외우면 그만이다, 라고 생각한 끝에 새로운 일을 찾아서 취직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 말은 곧 내가 지겨운 일을 때려쳐 본 짜릿함을 경험한지가 오래됐다는 뜻이다. 이런 거 좋아하면 이상한 녀석이라고 의뭉스러운 작자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지만 남의 숨길 수 없는 심리를 치밀하게 파헤치는 것보다는 내 마음을 활짝 열어버리는 게 그게 차라리 편하고 쉽고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엄밀히 따졌을 때 소설 쓰기를 위한 위장 취업이기는 하지만 나름 대의를 위하여 멀리 보며 소일거리를 찾는 것이고, 또 일도 열심히 하면 보람도 느끼고, 어느 기간은 한동안 꾸준하고 성실히 근무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제목도 뭣도 생각나지 않던 에로 영화가 아무 이유없이 떠올랐기 때문에 게다가 집에서도 가깝기 때문에 나는 어느 고급차 매장에 찾아갔다. 새로운 일자리를 위해서 옛날처럼 취업 관련 웹사이트를 돌고, LinkedIn을 뒤적이고, 지역 신문을 챙겨 보고, 지인과 연락하고, 거리를 헤매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래서 더욱 부담감이 없어서 무턱대고 근면한 사람들이 일하는 남의 사업장에 어느 소심-남이 차를 사지도 않을 거면서 불쑥 방문할 수 있었다. 여기서 경험을 쌓는다면 고급품 세일즈 시장에서 통용되는 화법을 익히고, 운이 더한다면 그 언변에 뽀너스로 사적인 자리에서도 즉시 구사 가능한 응용 기술을 또한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될 썩 괜찮은 교육적인 직장인 것처럼 보였다. 언술이 글발로 변환 가능할 것으로 봤다. 그런데 낮고 굵직하고 안정되며 침착한 음성이 돋보이는 그곳의 중견 세일즈맨이 고급차 옆에서 어떤 모델을 원하시냐, 주말에 애인과 바닷바람 쏘이시러 떠나시는 건가, 사장님께서는(언제 봤다고?) 여성분들께 인가가 많은 타입으로 보인다, 손님께서는 브랜드 A와 B와 C가 어울리실 것 같다느니 그럼 이 모델은 어떤가요 하니까 나는 금새 취업 응시생에서 일찍 은퇴한 갑부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 매장에서 그 양반의 훌륭한 화술에 엮여들다보니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나도 모르게 더운 것 같아서 옷을 벗을 뻔 했다. 이상하게 그 순간에 말문이 막혔다. 도저히 나는 말을 길게도 짧게도 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갑자기 달아오르면서 더워지는 사람이 어디 나 뿐이겠는가. 그리하여 일단 거긴 취업 후보군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다 급히 서두를 일은 아니라는 판단 때문에 나는 주말에 도시로 연극을 보러 갔다오기로 했다. 주말이 됐다. 도시로 가기 위해 가차를 탔다. 기차의 어느 칸에서 앉아 창 밖을 옛 생각을 하는 것처럼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지겨워져서 잠시 바람을 쐬러 뒷편으로 갔다. 그런데 저만치에 반갑게도 카페 사장이 보인다. 나는 눈치도 없이 어이 형씨, 정겹게 부르는 말에 곧바로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물을 뻔 했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럼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응?」
   「사랑... 아니었어?」
   「아니긴... 알잖아. 내 마음.」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기뻐하는 일은 모두 할 수 있다 그랬잖아. 다, 다 말야.」
   이 상황인데 눈치도 없이 으흐흐, 으헤헤 하면서 그 사이에 낄려하다니 그랬으면 미움을 아주 많이 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그렇게 나는 도시로 가서 연극 한 편을 보고 시골로 돌아왔다. 기존에 알고 있었겠지만 새롭게 깨닫는 것이라고나 할까, 글쎄 혹시 처음으로 알아챘나, 정말 전에 신경쓰지 않았으니 몰랐던 게 아닐까 하면서 연극에는 등장인물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울고 웃고, 감동먹고, 그걸 일기에 쓰고 친구에게 권하고, 어딘가에 나 정말 오랫만에 연극 봤다고 알리며 자랑하고 싶어한다. 인기 정상의 드라마도 최고 작품도 절반은 등장인물이 많지 않다. 주인공 한둘이나 몇이 계속 뭐 하고 뭐 하고 또 계속 해먹는 이야기, 그게 다다. 그래서 또 어느 영화에서는 어떤 배역이 이건 시네마야 그건 TV 드라마고, 그건 불쉣이야 뭐라고 뭐라고 그런다. 또 원래 관중들은 많은 배역이 나오면 그걸 다 매끄럽게 이해하고 소화하면서 웃고 분석하며 글로 쓸 분량을 파악해 내기는 힘들어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휴식이나 감상이 아니라 일이나 공부다! 사람들은 등장인물 많은 거도 좋아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도 단 몇 명이서 다 해먹는 이야기다. 실은 대중은 너무 어려운 거도 꺼려하고 간단하고 쉬운 걸 선호하는 면이 분명 있다. 꼭 이건 마치 남성미 넘치는 마초이자 거친 상남자가 자기는 부들부들하고 낮고 갸름하고 기집애 같은 차는 못탄다, 딱딱하고 각지고 야성미 넘치는 그런 차 밖에 못탄다는 선호도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셰익스피어 희곡의 책 두께는 얇다. 그런데 읽는 사람은 어떠할까? 나는 주변에서 틈틈히 그것을 재독하는 사람을 보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을 찾고 싶고, 또 만나고 싶다. 만나면 어디 악수 뿐이겠는가 덥썩 껴안고 뽀뽀라도 쪽쪽 소리나게 해 줄 것이다. 단 그쪽에서 그걸 용인한다면! 그리고 또 상대방이 여자이고, 젊고, 미모에...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고결한 마음과 어여쁜 영혼이 더 중요하다. 훨씬. 난 괜찮은데 하도 사람들이 뭘 하드라도 사람 봐 가면서 해야 한다고 해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층위라면 아무래도 젊은이 보다는 음... 오우 저런, 그러면 대학생들이 아니라 대학 교수랑 어울려야 하는데 그건 난해하다. 만일 그런 지식인들과 만났다 하면 헤어질 것이고, 또 정말 우연히 마주치고 반가운 척 하고, 극적인 해후와 일상적인 상면 사이를 오간다면 참 애매하고 난감한 일이다. 때로는 마음에 들어서 가식을 던져버리고 친구 먹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제일 앞서는 예상 순번은 아니다. 목선이 우아한 뒤통수를 손쉽게 보여주는 큰손은 바로 이거다. 즉 그쪽에서도 날 안 받아준다는 것! 어디서...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어디에도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OK! 에라, 모르겠다. 그냥 나는 뭐뭐했다, 나는 뭐뭐했다, 로 가자.
   나는 시골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까페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에 찾아갔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생활정보-신문을 들고서 그곳으로 갔다. 볼펜을 쥐고 취직할 곳을 알아보며 따뜻한 차를 한 잔, 기분이 좋으면 칵테일 한 잔을 더 마시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나는 포스트맨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예술가들의 삶과 내 인생이 어떻게 다른지, 친구들과 운영하는 무명 블로그는 왜 팬이 없는지, 블로그 무명은 유명과 명성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궁금해 하면서 까페 주인장의 속마음을 맞춰볼까, 그는 내게 당분간 이 까페 운영의 전권을 맡길 것이다, 번창하고 친절하며 깨끗하고 유쾌하게 까페를 운영하라는 말이 아니라 딱 하루에 한 번 문을 열었다가 마감 시간은 내키는 데로 문만 닫아주라고 단지 원하는 것은 그게 다라고 필시 그런 의도를 구체화시켜 내게 말을 건넬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것이라며 그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나, 그 뚱딴지 같은 허겁지겁 때려 맞춘 핀볼 같은 예상이 쪽집게 도사의 점술처럼 그대로 적중해버렸다. 설마 그가 거미줄이 생기고 난장판으로 변용될 까페의 운명을 내게 순순히 의탁할 리는 없을 거야,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가 선심을 쓴 건지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잘못 내린 결정인지는 몰라도 내 낮의 예언이 여실히 틀렸다는 것을 고스란히 증명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는 당분간 중요한 할 일이 있다며 그것이 마무리되는 데로 돌아오겠다면서 떠났다. 아! 이게 도대체 뭔 일이지? 좋은 일인가, 실감나지 않는 하나의 사건인가. 아니면 미완성 소설을 위한 어떤 발단이자 똘똘한 동기가 되는 찬사가 될 것인가. 일단 뭔지 잘 모르겠으니 혼자 한마디 내뱉었다. 그것은 혼자 말하고, 혼자 듣기.
   「축하해!」
   그리고 1인 2역의 상대방은 시치미를 떼며 뭐 그런 대수롭지 않은 일로 축하를 다 하냐며 가까스로 고맙다 라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혼자서 파티를 해야겠다며 까페 주방 선반에 있는 고급 와인과 음식들이 있는 쪽으로 별로 기쁘지 않다는 듯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려봤다. 그래~ 이거라니까~ 하면서.
   얼렁뚱땅 넘겨받은 까페 경영권, 그것으로 달아오른 기분은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첫째 날도 그리고 둘째 날도 또 1주일이 될 때까지 거의 손님도 없고 별로 신선한 흥미도 없었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찻집? 술집? 혹시나 레스트호프 그런 까페 운영. 하고 보니 별 것 없었다. 이게 전부라면 까페 못 할 사람 하나도 없겠다. 그 인간이 한참 내르막의 정점을 찍는 시기에 넘겨주었나, 손님이 많으면 보통의 자영업자와는 반대로 나는 안 좋은 거니까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같이 놀 아르바이트생도 없고, 청소도 힘들고, 막 갇혀 지내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이 부탁을 딱 거절하고 어디 월급쟁이로 들어갈 껄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1주일을 돌이켜보니 매장 운영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카페 문을 여는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운영 시간 내내 파리만 날리고, 거의 개인 도서관이나 음악실, 그냥 자기 집이랑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생각해보니 여기 주인 양반도 전에 항상 눈이 풀려 있었고, 차림새도 좀 이상했으며 그가 읽는 책은 주로 호메로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단테 알리키에리, 안톤 체호프(!) 듣는 음악은 말러와 바그너와 어쩌다 베를리오즈, 드뷧시, 바르톡, 힌데미트 류의 음악을 많이 듣고, 이렇다면 미술 화보집은 어떤 걸 주로 보았을지 TV를 틀면 무얼 보는지 친구는 멀쩡한지 의외로 그가 자란 집안을 알게 되면 완전 반전을 안겨 줄지 어떨지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분은 이제 보니 꽤 수상쩍고 매우 특이한 인간 유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와서. 아흐. 뭐 그건 그거고 지금 와서 내가 점성술을 연구하거나 수학 공식과 과학 법칙에 대해 공부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것만으로 보자면 난 지금 꽤 행복한 게 맞다. 그냥 여기가 내 작업실이라고 생각하고 작품 구상에 들어가면 된다. 언제부턴가 손님은 아예 단 한 명도 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순진한 여대생으로 보이는 듯한 손바닥만한 가방을 사선으로 매고, 머리카락을 애들 마냥 두갈래로 묶고, 레이스 장식이 돋보이는 화사하지만 절제된 옷을 입고서 옆구리에 현대 시인 누구, 헨델의 모음곡 악보 그리고 블로그란 제목의 집에서 화분이나 냄비, 후라이팬 받침대로 쓰면 딱 좋을 듯한 정체불명 삼류 통속소설을 끼고(이렇게 가지고 다니면 무겁고 귀찮고 불편해서 거의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지만 드라마에서는 꼭 이렇게 나온다, 즉 이렇게 하고 다니는 사람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거나 외로움을 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하시길),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은 듯한, 잘못 썼다, 바람맞은 듯한 기색이 엿보이는 안면을 띈 아리따운 아가씨가 까페에 나타났다.
   그녀는 이곳에 불규칙적으로 들리더니 가끔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누고, 뭔가 호감을 나타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으며, 왜냐하면 그녀는 아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오는 손님이 오직 그녀뿐이라서 그녀가 혹시 내게 관심이 있나 라는 착각에 빠져든 것 같다, 나는 그녀의 신청곡인 30, 40년이 지난 유행곡이나 비올라 협주곡을 남겼던 여러 작곡가들의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어딘지 모르게 나의 숙원이자 엉뚱한 방학숙제 같은 텐미닛의 애제자의 급선무처럼 느껴졌던 그녀의 정확한 이름은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저번에 하숙 생활을 하고 왔던 그 근방 대학교에서 쳄발로 전공에 서양화를 부전공으로 하는 것 같고, 좋은 성장 환경을 거쳤으며 가본 곳도 많은 듯 하고, 간혹 같이 오는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녀가 이니셜 뭐드라, 발음하기 힘들다, 엇비슷하게 넬이라고 불리는 것을 뿌듯하게 알아냈다. 우리는 친해졌다. 금새 가까워졌다. 그러나 앞날을 약속했다 같은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어느 정도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지적 취향과 생활 습관이며 주로 즐기는 것과 좋아하는 무엇들을 언뜻 예측하고 점찍어 볼 수 있는 공유했던 정보를 나중 생각해보았을 때 많은 것이 잘 떠오르게끔 그런 인상을 풍기는 정도의 상당히 애매한 몇몇 대화를 보통은 때때로, 흐리면 가끔, 뭔가 좋은 일이 있거나 기대되는 약속이 있을 듯한 날에는 더 자주 나누곤 했다. 그냥 그게 다였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둔하다 할지라도 분명 뭔가는 느꼈다. 이걸 일선에서는 흘리고 다닌다고도 하고, 이런 쪽으로 헤프면 나중 혹시 두고두고 욕 얻어먹을 수도 있다. 살짝 호감 가는 인간미와 우린 모두 동물에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존재이며, 뭔가 보호하고 싶은 대상이 더 뚜렸해졌으면 싶은 막연한 선망과 마땅히 최근 탄성을 내지를 일이 없다는 경황을 서로 감지하고서 통성명을 은근히 일부러 미루고, 더 가까워지기를 애써 연기하는, 즉 유부남과 유부녀들이 조심해야 할 단계 딱 그런 기분이 오고 가는 까페 사장 대리와 손님의 관계였다. 그녀와 나는.
   인간사에 통달하지는 않더래도 중1 쯤의 농담과 중2 정도의 농익은 저난도 비꼬기, 초딩 수준의 몸개그 정도만 익히 아는 정도라면 이제 일이 어떻게 풀렸을지는 대충 어렵지 않게 눈에 선하게 그려질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 다음에 넬이 예비 애인으로 보이는 멋진 남자를 데려올 때 까지는. 그는 쉽사리 약점을 잘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뭐 하나 빠진 데 없이 너무 멀쩡했다. 그러나 딱 하나 단점을 꼽자면 매번 까페에 들릴 때마다 자동차 키를 탁자 위에 올려놓는데 그 브랜드가 매번 바뀐다는 점이다. 그쪽 관련 일을 하나 궁금하게 만듬. 그게 맞다면 좀 생뚱맞다. 약간 그녀쪽에서 과도한 애교를 부리고─혹시 나보라고?─데이트 비용에도 충분한 인심을 쓰며 한마디로 그녀가 애를 무척이나 많이 쓰는 듯한 (그냥 내 관점에서 편하게 부르는) 남자친구 1까지는 괜찮았다. 정말 딱 여기까지는.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남자친구 1은 보이지 않고 그와 또 다르게 탄복을 자아내게 만드는 목소리와 말끔한 외양, 훌륭한 예절, 코메디언 빰치는 능숙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농담 구사 능력과 카리스마와 가죽잠바와 아주 세세한 곳까지 챙겨주는 마음 씀씀이 등 모든 것이 좋아 보이는 새로운 얼굴, 남자친구 2가 나타났다.
   그러나 나의 부적절한 질문과 시의적절하지 못한 끼어듬, 분위기 깨는 음악 선곡, 이상하게 날 부를 때만 딴 생각을 한다거나 뭔가에 집중하거나 야한 상상을 하느라 아늑하게 까페의 품에 안겨 기분 좋게 차를 마시며 창밖의 낯선 아가씨를 쳐다보는 멋진 정물화의 구도도 얼굴 표정도, 분위기도 모두 깨트리고, 그래서 매번 넬의 남자친구 2에게 실망감을 누적시켜준 형세에 처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눈치도 없이 하는 말, 그 옷 또 입고 오셨네, 옷이 몇 별 없나 보다, 옷을 잘 못 입으시네 같은. 앞뒤가 심각하게 안 맞는 질문들, 저번에는 그녀가 케익을 남자친구 1과 드시더니 이젠 케익 모양 악세사리를 하셨네, 차를 모두 파셨나 봐요, 조금 피곤해 보이시네요 남자 쪽만! 우하하하하, 스킨 뭐 쓰세요 아마도 좋은 향수를 뿌리셨을 테지만 그 마 거 마 향이 못 쓰겠네 아 견디기 힘들어요 머리가 지끈 지끈 아플려고 한다니깐요 C나 D꺼 한 번 써보세요 아 H도 괜찮더군요 멀쩡하게 생기셔가지고 신경 좀 더 쓰셔야겠다, 옆에서 잘 챙겨주시질 않고 어디 딴 데 신경쓰실 데 있나, 저번에 넬이 남자친구 1에게 선물한 가죽장갑은 안 하시는 거 보니 잃어버리셨나 보다 등등등. 딱히 심술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냥 단지 궁금함을 해소하거나 가벼운 말 한마디 나누고 싶어서, 정말 솔직히 목소리 한 번 더 듣고 싶어서 일부러 말을 나누고 이어가고 끼어들었으며, 진짜로 나는 가끔 넬의 남자친구 2와 남자친구 1을 헷갈리는 실수를 반복했으며, 또 나는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 2와 조금은 친해졌다는 한참 잘못 집은 틀린 셈을 정답인줄 알고 있었다. 무의식에게 깜박 속아서 된통 당한 것일까? 누구 대성통곡할 일 만들 일 있나, 그분이 요즘 이상해지셨다. 자꾸 엄한 곳에 불쑥 불쑥 꼭 불청객처럼 등장하시다니 아 이거 미치겠네! 귀납법, 연역법 이런 걸로도 안 풀리는 불가사의다. 나는 괜찮지만 그녀와 그녀의 새로운 근사한 세련된 고상한 우아한 그러면서 웃기는 재능 또한 탁월한 그녀의 남자친구 2는 괜찮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뒤늦게 짐작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가, 막 궁금해질려는 판국이지만,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는 왠지 서운하다. 왜냐하면 그 이상한 행동 기제의 원인 때문이다. 도대체 이런 기술은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이것도 독학인가? 이걸 과연 기술, 아 이런 땐 외국어로 말하면 있어 보이니까, 스플렌디드한 스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심지어 그 어느 바닥에서는 극히 평범함에 불과할지도 모르는데 이걸 누가 인정이나 해 준다고, 허허. 정녕 나는 이런 화법의 정진을 위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읽다 팽개치고, 예술 영화를 보다 꿈나라로 떠나고, 어떤 높은 자리의 사람은 착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 잘하고 잘 생긴 사람에게 표를 던지고 (누가 들으면 나가 떨어질 일이다, 인정한다, 나 때문에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 이라고 한다면 할 말 없다, 아니 반성한다. 그래서 책 꾸준히 읽고 나름 인격을 수양하고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니까 여러면으로 가치가 대동소이하다면 물론 착한 게 좋겠지만... 옛날에 난 애송이였다. 뭘 몰랐다. 그렇다고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졌다고도 하기 힘들다. 아흐!), 바깥에서 친구와 다투고 집에서 밤에 꿈꾸면서 괴한과 싸우고, 헨리 롱펠로우가 생각나네 괴테가 이런 말을 했다네 사랑법과 문법을 비교하고 비유하며 세계에서 제일가는 은유법에 대해 고민했던가? 이럴려고? 어? 정말 이럴려고? 나 이런 맙소사! 정녕코 아찔한 지성의 단계 그 앞마당에는 이를 수 없단 말인가. 기껏 나이 먹고 한다는 게 염치없이 농담이라며 웃고 살자고 깐죽거리고 염장지르기라니. 이런 삐─삐─!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인성이 중요하다. 그 흔한 사랑, 못할 수도 있다. 어느새 세월이 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성은 사랑 안에서도 사랑 밖에서도 기본이다. 굳이 알고 싶지는 않으시겠지만 참고로 부언하자면 나와 불꽃 튀는 신경전을 벌였던 그쪽 진영의 주인공인 그녀는, 내 님은, 그래 그분은 인성이란 단어를 이름으로 하는 영화배우를 좋아한다. 그랬다. (여기서 번역자에게 고충을 안기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고 내심 섭섭하다) 음은 같고 뜻은 다를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좋은 뜻 1과 좋은 뜻 2의 차이 밖엔 없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인성씨에게 체격도 안 되고, 얼굴도 안 되고, 말도 안 되고, 카리스마도 안 되고, 뭐도 안 되고, 다 모두 비교도 안 된다. 천부당만부당하다. 골백번이든 몇번이든 따져볼 필요도 없다. 비교 자체가 기분 나쁠 일이다. 적어도 그분 팬클럽원께는. 그러나 앞서 말한 그 기술,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거 하나를 기준으로 봤을 때 인성씨는 나한테 상대도 안 된다. 쨉도 안 된다. 어허, 그럼! 이런 젠장! 뭔가 반성하고 자조적인 논조였는데 어쩌다가 어떻게 뒤집혀진 거지? 이거 원 꼭두각시도 아니고 삐에로도 아니고 참 나 뭐가 뭔지 모르겠다. 자랑할 게 그렇게 없나. 나 참 못났다. 응~에! 어쨌든 멋진 인성씨도 보고 싶다.
   다시 돌아와서, 어쩌겠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따라서 그녀는 어쩌면 남자친구 2와 결별하고 술 취해서 남자친구 1에게 전화해서 험악한 말들을 퍼붓고, 그 다음 날 후회 많이 하고, 까페 포스트 맨에 발길을 끊을 것이다. 그러나 괜히 억울하고 분이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러겠지. 그러므로 내가 봤을 때 그녀는 계속 이곳을 찾을 것 같다. 내 짐작이 맞았다. 아 아직이다. 내 예상이 적중할 것이다. 다만 그녀가 내게 물을 끼얹거나 뿅망치로 날 때리거나 그런 유사한 분풀이를 한다면 내가 응당 치르고 귀엽게 살려서 받아주어야 마땅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뭔가가 있을까 봐서 괜히 걱정이 되고 불안감에 오금이 저렸다. 때문에 나는 부산히 준비하고 확실한 대책을 강구했다. 이 동네 화술의 1인자이신(정말 저렴한 그런 말발 말고 확연히 다른 그런 거 있지 않나) 신사분을 긴급 호출할 수 있게 연락을 해놓고, 그녀가 들이닥치면 너무 성스럽지도 너무 속세 느낌도 나지 않는 적당히 경건한 음악 즉 최적의 칸타타를 준비해 뒀다가, 그녀가 짠~하고 등장하면 빠밤~하며 분위기를 살릴 준비도 마쳤다. 물론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까 그녀에게 사람을 붙이거나 다른 뭘 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카페에서 바흐의 칸타타만 하루 종일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칸타타 정말 지겹게 들었다. 칸타타라면 (지금은) 신물이 난다. (이 글을 쓰는 미래엔 모차르트의 미사 C단조를 듣고 있다) 축구선수 칸타바로, 야구선수 누구 있겠지, 음악용어 칸타빌레, 영화제 칸, 지명 캔사스 시티... 칸 뭐시기는 한참 동안 모두 피해 다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는 꽃다발,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요리와 여러 종류의 술과 매니큐어와 악세사리, 여성 월간지를 아예 통채로 섭렵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서 어느 만큼 든든히 대비한 후에 나는 그녀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녀가 통 방문하지를 않았다. 이사갔나? 그새 남자친구 3을? 취향이 바꼈나, 여자로? 여행? 아니면 뭐지? 연락처라도 받아놀 껄 그랬나. 아 내 연락처가 없지. 나는 그렇게 초조하면서도 느긋하게 때론 조증으로 때로는 울증으로 일관하다 변덕을 부리다 그러면서 그녀를 기다렸다. 나는 사실 언제부터 그녀를 기다린 것일까? 필경 처음부터? 아니 아니야. 뭐? 빠졌네 빠졌어? 아니다. 그녀는 내 스타일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무명 블로그에 올려서 황금 종려상부터 공로상까지 그야말로 싹쓸이해서 그것의 명성을 쌓고, 그 이름을 유명이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같은 신화에 나오는 이름이나 어떤 명화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바꾸고 싶은, 어디까지나 학구적인 욕심에 기인한 시적 감성을 필두로 하는 단순한 동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설레는 감정은 무슨, 나는 사랑 그런 거 안 좋아한다. 안 키워. 그거 한송이 피울려면 아, 말도 못한다. 난 그걸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최소한 그것의 귀함과 현존성과 가능성과 영원함을 찬미할 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사랑을 잘 모른다. 아직 성숙한 어른이 아니다. 그거 금방 변한다. 믿을 게 못 된단 말이다. 종류도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그건 학문도 아니고 정확하지도 않아서 수학적이지도 않고, 이제 와서 내가 그 길로 나갈 수도 없다. 늦었다. 또 나이 차이도 많이 난다. 고로 그녀는 내 추종 세력일 뿐이며 따라서 그녀는 나의 팬클럽 가운데 한명에 지나지 않는다. 틀림없다. 그래야 한다. 그럴 것이다. 그렇다. 이렇게 뭔가 정리하고 나니 개운하다. 이 느낌은 뭐랄까 꼭 그런 것 같다. 땀을 흠뻑 흘리고 운동한 후에 씻고 근사한 곳에서 당신과 함께 맛난 음식 배불리 먹고, 당신을 일찍 달콤한 스윗 홈에 들여보내고, 친구들과 만취해서 거리를 질주했다가 거리에 보이는 어느 가게의 문양인 태양의 신 표식에다 캔 맥주를 퍼붓고, 그 앞에 주차된 삼지창에 오줌을 누고 나서 고요한 새벽 어느 시간에 오페라 한곡을 가사도 틀리게 고래고래 불러서 마을 사람들을 왕창 깨우고 나서야 딱 속 시원한 정말 정말 상쾌해서 날아갈 듯한 막 기쁘고 들뜨고 후련한 그런 괴팍한 감정, 그것과 아주 조금은 비슷한 것 같다. 진짜로!
   하지만 그녀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내가 찾아나서야 하나? 보고 싶다. 그녀의 구두가. 그 뾰족 구두만. 그녀가 여기 다시 온다면 한잔의 차를 시킬지 브랜디를 시킬지 단지 그것이 궁금하다. 괜찮은 호남형으로 동네의 건실한 청년으로 소개시켜줄 어디산 누구, 도 준비 다 마쳤다. 자꾸 초조해진다. 일생일대에 아무래도 크나 큰 실수를 한 것 같다. 이 사태를 어떻게 만회한담? 어떻게? 불현듯 뜬금없이 미친 제인이 대주교에게 뭔 일을 따졌다나 뭐라나 그 시가 생각난다. 왠지 모르게.
   그렇다고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마치 불 같은 열정적인 드라마 주인공처럼 사랑에 빠진 것처럼 멍하니 그저 허공만 바라보며 넬만 생각하고, 넬 노래만 듣고, 혹시 그때 까페에서 다른 작업을 하다 우연히 만들어진 그녀의 대화 즉 음성이 담긴 녹음 파일이 남아 있다면 미친 놈처럼 그녀와 정물, 풀밭 위의 사람들에서 다른 사람들 다 빼고 그녀의 누구와 나의 누드를... 그런 그림을 그리면서 이어폰을 끼고, 중저가 진공관 앰프로 아니면 최고급 트랜지스터 앰프로 그 파일을 듣는 난해한 작업을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덜떨어진 일은... 생각만 해도 아질하다. (말은 이래도 그런 경험 못 해봐서 뭔가 그립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잘 몰입하지 못했던 책을 읽기로 했다. 왜냐하면 첫째, 그녀에 대한 생각이 조금 옅어질 것이고 둘째, 못 읽었던 귀한 작품에 빠져드는 행운도 덤으로 얻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고른 작품은 무언인가? 희곡과 SF! 또 그 가운데서도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필립 킨드레드 딕. (개인적으로 조금 뭐하다면 적당히 다른 인물로 대체하자) 장비발은 암만해도 좋게 말해서 안목이고, 사실적으로 봐도 병이다. 불치병. 사랑보다 더한. 주위에서 그런 사람 보신 적 있으신가? 장비발 매니아 말고, 셰익스피어와 필립 K. 딕을 동시에 기쁘게 즐겨 읽는 사람, 난 못 봤다. 한 명도. 저런 저런! 질문부터가 잘못 됐다. 희곡을 주로 읽거나 희곡도 너그롭게 무난히 읽는 사람, 드물다. 적어도 직업적으로 시나리오를 읽는 사람 즉 배우, 그분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선천적으로 뿐만 아니라 후천적으로 희곡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아무래도 어렵다고 본다. SF도 완전 그쪽으로 빠져있는 친구들 물론 많긴 하지만 그분들과 친하거나 알고는 지낼려면 교우관계가 좋아야 한다. 그분들이 비정상이란 말이 아니다. 그럴려면 성격 정말 좋아야 할 것이다. 막 욕해도 좋아 해야 하는지는 좀 애매한 문제다. 난 성질이 드센 상남자다. 하여튼 그 둘을 모두 섭렵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한 길을 가는 것조차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음!
   안되겠다. 나는 도저히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상대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득히 더 기다리고 싶지만 그러다 망부석이 되면 어떡하냐. 이게 대체 무슨 패배 의식에 물든 냉소주의란 말인가. 이러니까 옛날의 삶이 별로 재미없었던 것이다. 가만히 웅크리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인생을 수수방관하는 건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일어서서 움직이고 그녀에게 찾아가서 말 한마디 하면 된다. 미안하다고. 그녀가 무슨 과인지 친구 얼굴도 알고 그 누드 스케치 현장도 나는 저번에 봤다. 가서 하숙집 친구들과 인사하고 근황도 묻고 서로 담소를 나누며 혹시 축제 기간이라면 같이 놀다 오면 그만이다. 뭐 어려운 일도 아니네. 나는 바로 바다가 보이는 대학교로 출발했다.
   그곳에 도착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는 했는데 넬을 찾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르는 행인이나 학과 학생에게 무턱대고 물어본다는 게 쑥스럽기도 하고 또 어떡하다가 어렵싸리 그녀를 만나더라도 불쑥 전전? 전-남자친구의 소식을 물을 수도 없거니와 일단 같이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쉽지 않은 사이 같고, 이런 나의 마음을 표출하는 걸 정작 그녀가 바라지 않을 수도 있으며,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란 생각도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아 이건 아닌 것 같다, 하면서 나는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그냥 바빠서 까페에 오지 않았을 수도 있고, 괜히 잘 사는 사람에게 갑자기 찾아와서 너무 친한 척 하는 것도 실례인 듯 하고, 몇 마디 타인의 농담에 고민할 만큼 흔들려서 헤어진 청년이었다면 그 문제 이면에 혹 다른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난 왜 이렇게 느닷없고 부지런히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찾아온 것일까, 무슨 근거로 말이야.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가면서 근처 풍광을 구경하다가 해안 도로에 접어들었다. 얼마 머물지도 않을 거면서 금방 발길을 돌리는 걸 보면 꼭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가 자주 가는 찻집 골목길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핸드폰이 없었던 시절의 영화학도 같은 약간 수수한 운치가 느껴졌다. 그렇게 해변 도로를 드라이브하면서 혼자서 분위기를 좀 잡을려고 어느 까페에 들어갔다. 그냥 돌아가는 건 폼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남자는, 폼이다. 마술피리라는 이름의 그 까페는 좀 촌스러워보였지만 내부 인테리어와 안에 있는 사람들 층위나 행색은 바깥과 달리 여실히 촌스러워보였다. 하긴 나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그게 편하다.
   실내는 그래도 꽤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인다. 흔히 보기 어려운 색상 조합에 특이한 디자인이고, 공간은 원형과 타원형이 높이를 달리해서 엇갈려 있고, 무엇보다 창문이 매우 작고 띄엄띄엄 있었으며, 빙 둘러서 똑같은 문이 굉장히 많았다. 벌써 내가 어디로 들어왔는지 잘 모를 지경이다. 실제 문인지 그냥 벽면 장식인지 또는 작품인지 통 분간이 되지 않는다. 나는 한쪽에 앉아 차를 시켜 마시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이런 가슴이 콕콕 아린 모습이라니! 저 앞에 넬의 남자친구 1과 남자친구 2가 다정하게 무척 친밀히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면서 어떤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건 속없는 사람이 보든 나처럼 넬과 누군가가 같이 다니던 순서를 아는 사람이 보던 약간의 의심과 상당한 추론의 눈빛을 도저히 던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나는 한참을 촛점을 잃은 시선으로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오래 알고 지낸 듯한 기분이 드는 넬이 완전 불쌍하다고,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문난 연애술사의 총아처럼 보이던 그녀가 물 먹은 건가, 저들은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아니야, 사랑이 무슨 죄야? 또 확실히 아는 거도 없잖아, 그러면서 괜히 이상한 기분을 달래며 까페 내부 공간을 구경했다가 2층도 올라갔다와서 나갈 수 있는 문이 어떤 문일까 살피고 있었다. 저기 문 A? 아니면 문 B? C가 왠지 끌리는데!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문 C를 활짝 열고 그 문을 통과해서 그쪽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그곳은 또 다른 까페였다. 마술피리와는 다른 느낌의 찻집으로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차분한 분위기였으며 찻집 이름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였다. 좀전에 차 마시는 흥취가 좀 불안정했으니 여기서는 짜릿한 청량음료를 3잔 연거푸 원샷하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그런데 또 이게 뭔가. TV 코메디 프로그램의 화면 효과로 치자면 눈동자에 횃불이 켜졌다고 해야 할까, 주변에 변개 치는 모습이 나을까 아니면 그냥 눈에서 레이저가 지지직 하면서 나가는 게 좋을까. 저기 저 탁자 옆 푹신한 연보라색 소파에 앉아있는 인물은 다름 아니라 바로 넬과 까페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의 사장이었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까페 사장과 넬이라니, 세상에나! 이럴 수가!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오우 저런...! 그런데 왜 포스트맨은 벨을 딱 두번만 울릴까, 아니면 두번씩이나, 책을 안 읽었으니 당연히 모르지.
   딱히 나와 별 관계없는 타인의 삶이고, 내가 나설 일도 아니지만 내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어딘가에 넌지시 묻고 싶은 심정이다. 이건 고요하고 거룩히 차 한잔 차분하게 마실려는 단정한 나의 알리바이를 방해했으니 파란이요 풍파이자 손톱만한 연애의 찬양이자 추파가 분명했다. 이쪽에서만. 또 지금만. 이곳도 내가 쉬면서 소설을 구상하고 현실에 안주할 만한 차 한잔 고상하게 편안히 마실 찻집은 아닌 듯 하여 나는 또 그곳의 문을 박차고 나갔다. 진작 분발해서 떠나갈 것을 아니 아예 이 불분명한 목적의 여행길에 접어들지 말 걸 그랬다.
   찻집의 이름은 거창하게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혹시 옆사람에게 그게 뭔지 아시냐고 물어보자. 나는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까페에서 나가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정확히 어떤 것인 줄 몰라 앞에 보이는 2개의 문 가운데 아무거나 하나를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러자 저 앞이라고는 할 수 없고 두께와 넓이를 짐작할 수 없는 형체로 온 전체가 엄청난 밝음, 환한 빛무리, 하얗고 반투명한 캔버스, 모든 것이 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빗물도 하얗고 소리도 하얗고 화제의 신간과 꾸준히 팔려나가는 인문-교양서마저, 절대 놓칠 수 없는 들으면 젊어지는 최신 유행 음악 CD까지 모두 하얀, 그 무언지 모를 전체의 이름조차 하양이라는, 그리고 아마도 백야의 느낌에 가깝지 않나 싶은 바로 그 순간 서서히 시나브로 주변의 물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여기가 어디이고, 나는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천천히, 살며시, 은근슬쩍,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이곳은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까페의 바깥이고, 나는 까페 안에서 바깥으로 문을 열었으며, 내가 노출증 환자는 아니지만 팬티만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상한 심리에 휩싸이면서 이게 자각몽인지 단순한 일시적 몽유병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순간이동을 했는지 궁금해하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꼈다. 마술피리에서 마셨던 홍차는 진짜였는데, 아드리아네에서 봤던 옆사람이 마시는 음료수 돈 지오반니는 주황색이었는데... 그러면 기존의 그 까페는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가 아니라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리지 않는다, 가 맞나? 가만 넬이 남자친구 1과 다시 만나고 남자친구 2와 P 까페 사장이 만나기로 한건가? 저런, 넬을 부를 때 '경'을 붙여야겠군. 미친 제인까지는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귀신에 홀린건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은 어디로 갔나 아득해 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 차가 와서 멈췄다. 그것은 브랜드가 불분명한 P 찻집 형씨가 직접 튜닝하고 제작한 차다. 그 양반이 차에서 내려 내 쪽으로 다가오며 웃음 짓고 말을 건넨다.
   그동안 별일 없었냐고, 일이 잘 풀려서 금새 돌아왔다고, 자네 삼각팬티만 입고 거기서 대체 뭐하는 건가, 깜짝 선물이 무언지 궁금하신가, 하지만 꽃다발은 챙겨오지 않았다네, 우리 사이에 그러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고맙네 친구...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시간마저 느려졌다. 그리고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다. 새털처럼. 정말 저 앞에도 옆에도 큼직한 새의 깃털이 떨어져 있다. 혹시 펠리컨의 것인가? 아니면 펠리컨이 잡아 먹은 비둘기의 것인가! 늑대는 캐스팅되지 않았을 거 같고. 차츰 몸의 무게 중심이 위로 올라간다. 점차 가슴이 부풀어오른다. 긍정적인 기운으로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기도 하지만 가슴이 그것을 유방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처럼 커지는 것 같다. 뽈록! 균형은 잘 안 맞는 것 같다. 그럼 짝-가슴? 헉! 점차, 더더욱 가벼워진다. 어쩌면 나는 증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넬에게로, 아니 넬 경에게로, 그녀의 남자친구에게로, 다중인격체로 짐작되는 그분께, 그리고 나는 당신의 동네에 따사로운 햇볕과 싱그러운 바람과 함께 이윽고 당도했다. 그대와 눈높이가 얼추 비슷하다면 저는 뿌연 안개일 것이고, 저 멀리 떨어져 있다면 이 비천한 몸은 하늘을 나는 송골매가 입고 싶어하는 솜사탕 같은 멋지고 그야말로 그윽한 모피코트 같은 구름일 것이다. 반갑다, 친구야!
   어쩜 이처럼 지극히 사실적인, 명백히 백일몽 같은 몽상은 우리가 환영해야 할 미지의 세계와 한껏 흡사할 테지만 조금만 애잔하도록 너무 많은 걸 미리 이름을 정하고 뭔가를 정해놓치는 말자! 뭐가 어쩌고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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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63

from 소설 2015. 12. 31. 17:16

   어느 날 나는 내 핸드폰을 부셔뜨렸다. 그건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다.
   잃어버렸다, 아니다. 고장났다, 아니다. 맨 정신에, 핸드폰을, 벽에, 확, 집어던졌다. 내 방에서.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떠오르는 단어는 절규. 그러나 명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 그런 행동은 아닐 것이다.
   그걸 해먹었을 때의 앞날이 예견되는 심정과 이제 난 어떡하지 하는 절박함 그리고 앞으로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이 일의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하냐는 돌연한 처절함과 그래도 당분간 쌓였던 뭔지 모를 울분은 어쩐지 모르게 흐릿하지만 조금은 해소된 것 같기도 하고 안 그런 것 같기도 하는 이상한 기분이 감돌았다. 그때 나는 저질러 보고자 하는 잠재의식, 무심코 터트려보고 나서 생각하자는 앳되고 막연한 장난스런 감정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거짓말이다. 딱 그런 건 아니지만 핑계를 대자면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친구에게 듣거나 어디서 보거나 그렇게 알게 된지 오래되었지만 실행에는 옮겨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한번 해보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순도 높은 골드바나 불순물이 희박하리만치 섞이지 않은 예술적인 마약에 포함된 티끌만한 오점 만큼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일은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한 번쯤 또는 습관적으로 그렇지 않으면 단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과 그 다음과 나중 돌이켜 보았을 때의 이상한 기쁨과 오만가지 감정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하는 일이다. 어쨌든 아 또, 아니 처음으로, 난생 처음으로 하나 해 드셨구나 하는 여운이 메아리치면서 서서히 멀어져갈 때는 그야말로 우아한 아리아나 가곡이나 3박자 왈츠 또는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최신 유행곡이 귓가에 진짜 들릴 수도 있다. 정말로. 그럴 것이다. 그렇게나 가슴이 찡한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지 분위기가 막 뮤지컬처럼 환상적인지 궁금하다면 그 호기심을 도저히 떨쳐버리지 못하겠다면 한 번 그걸 따라 해 보면 된다. 진짜 날개 달린 아기 천사가 공중에서 나팔을 불고 저 45도 각도 윗 편 2층 쯤 높이에서 무작정 허공에 문이 하나 생기고 주변이 울창하게 밝아지면서 반짝반짝 그분이 내려오시고 반짝반짝 나의 마음은 부르르 떨리면서 반짝반짝 그분을 영접함과 동시에 그분을 알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반짝반짝 손을 잡고 찌르르 광기를 느끼며 반짝반짝 허리를 꼭 껴안으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달아오르는 그 어떤 감정을 한껏 달군 후 그분의 옷을 하나씩 스르륵 벗기면 눈부신 나신을 어쩔 수 없이 지켜보아야 하는 그런 상상력이 헛된 공상이 아니라 흥분을 가라앉히고 지금 당장 해야 할 매우 중요한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안 드는지는 실제 한 번 해보면 알게 된다. 아마도 안 그럴 것이다. 그 가녀린 떨림 딱히 권하지는 않겠다. 아마도 과격한 상남자를 앞에 두고 말이 길었던 것 같다. 주제넘게, 어이쿠, 부끄러워라. 혹시 내 사진이 어느 전단지에 잘못 찍혔는데 길바닥에서 그것이 사람들의 무수한 발눌림에 의해 불가사의한 마법과도 같은 신념에 휘둘리고 그 영향이 여기까지, 아하, 간헐적으로 통각점이 반응하는구나. 그러나 괴상망측한 경우엔 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뚜껑이 열리면서 수증기가 막 솟구치는지 아닌지 별로 궁금해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을 쓰다 보니 마치 내가 이런 글을 써보기 위해서 친구들과 운영하고 있는 무명 블로그에 괴물 같은 소설을 올리고 싶어서 일부러 이와 같은 일을 벌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이 옮겨 가면서 불쑥 뭐야 내가 변태란 말인가, 그건 어디 드라마나 어떤 작품에서만 나오는 건데 아닐 꺼야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힘겹게 내쉰다. 그럴 리가 없지. 나는 전부터 핸드폰 없이 살아보고 싶었단 말이야. 때문에 나는 변태가 아니다. 더군다나 변태는 그냥 이방인 같은 개념일 뿐이다. 달리 더 순화된 표현도 있을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럴 것 같다. 원래 빈자리는 커 보인다고 있다가 없으면 허전해서 못 견디고 불편하여 잘 살지 못할 것 같지만 또 없는 상황에 적응하여 살면 또 시간은 지나간다. 핸드폰 없을 때는 다 어떻게 살았냔 말이야. 그래도 있는 게 나은 거 같다. 괜히 욱 해서 핸드폰 하나 해 먹고 별 거지 같은 쓸데없는 잡담만 늘어놓고 있다. 그때 열을 세어 볼껄, 백을 세어볼껄, 천은 너무 많고 천이라는 뜻이 포함된 이름을 찾아볼 걸 그랬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과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지심리학에서 통계와 그래프로 매끄러운 이론을 내놓지 못하는 분야 가운데 대표적으로, 아니 많은 곁가지 가운데 하나로 불륜을 놓고 봐도 그 알 수 없는 불안감의 동기에 대해서는 설명이 되고도 남는다. 뭐 불륜이란 단어를 쓰자니 왠지 모르게 내가 무슨 못된 꿍꿍이 악극을 벌일 궁리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어째서 이것과 저것, 불안감과 불륜이 함께 다루어져야 하냐는데 생각이 닫으면 나름 어딘가 모르게 사적인 죄스러운 감정은 가라앉고 하던 설명 마저 끝내야 한다고 심기가 안정된다. 어느 소설에 보면 주인공이 그런다. 자기는 불륜을 저질렀다고. 그 단락을 읽으면 독자에게 딱히 대놓고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꼭 삿대질을 해 가면서 고함치면서 따지고 주인공이 책에서 튀어나와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의 멱살이라도 굳건히 휘어잡을 기세가 느껴진다. 소설 속 주인공의 웅변을 떠올리자면 어떻게 어떻게 몸짓을 곁들여 말을 하면서 처음 불륜을 알고 그것에 대해 고민하다가 어쩌다 그걸 감행했을 때 어디 기분이 좋은 줄 아냐고, 누군 뭐 거리에서 빨가벗고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기쁜 줄 아냐고, 내가 어디 그렇게 재미있어 보이냐고, 정말 기분 완전 더럽다고 한마디로 죽는 소리 한다. 나도 모르게 카르텔을 깨버렸는데 난 더도 덜도 없이 좀도둑이 딱 적당한데 그것에 더없이 흡족해 하는데 내가 훔친 이상한 빛깔의 수정으로 장식된 열쇠가 에구머니나 판도라의 상자와 한 쌍이라니 이런 거지. 그러나 어느 주인공은 고백한다. 짜릿한 즐거움 이면에 훨씬 커다란 이런 삐─ 같은 느낌도 다 지나가 버린다고, 처음에만 그렇다고, 잊혀진다고, 기억은 나겠지만 먼지 쌓인 회고록의 한 페이지 만큼 무게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고, 나중엔 뻥을 치는 걸 도덕 선생님이 혹시 허락하신다면 난 이렇게 말하겠다고, 이젠 고속도로를 달리는 일만 남았다고. 물론 소설에서 주인공이 이렇게 길게 또 과장해서 우스꽝스럽게 말하지는 않지만(또 몰라 그런 작품이 있을지도) 하여튼 비슷한 얘기다. 그런데 첫 경험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누가 그런 희한한 말씀을 퍼트리시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으로써 식물이든 동물이든 다른 시대 다른 세상에서는 살아보았지만 이곳 그리고 지금 사는 이 땅에서 무엇도 아닌 사람으로 살기를 처음 경험하시면서. 그러고 보면 그 처음은 꽤 길고 다양하며 참 많이도 얘기가 반복된다. 아무리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짦다 하지만. 그러므로 나는 처음으로 핸드폰을 부셔뜨린 게 매우 난감하고 막 기분이 썩 좋지 않게 두근거리고 딱 가슴 한구석이 실연한 것처럼 훵하고 시리고 아픈 것 같다. 이제 핸드폰 부셔뜨린 사태에 대한 속마음이 조금은 설명이 되었을까? 조금은 무슨, 말은 꼭 은근하고 자조섞인 반성과 은밀한 다짐에 매우 중요한 비밀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 같지만 이런 삐─삐─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돌리고 돌리고 넌지시, 그럴려다가 재산 다 말아 먹어. 지금 내게 핸드폰은 얼마나 큰 자산인데, 소설 쓰기와 밀접히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상당한 배역을 떠맡고 있는데 그걸 박살내버리다니, 아아 나는 바보다. 멍청이다. 천치다. 이런 개뿔!
   저번에 썼던 글에서는 소설이 망해가더니 이제는 핸드폰이 박살났다. 전체 독자 가운데 약 1%는 만족해 하실 것이다. 개판이라고. 괜찮다. 기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본인은 더 대 만족. 뭘 해도 재미없고 뭘 해도 안 된다. 사실이다. 적어도 돈, 복, 운, 사랑, 행복, 명예, 오락? 그런 단란한 개념으로 짚어 봐도 썩 틀린 말은 아니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스팀, 푸쉬쉬쉭! 신세 한탄과 허풍과 험담과 욕설을 남아로써 모두 잘할 필요는 없지만 살면서 이따금 아니 매우 적은 빈도로 혼자서라도 그걸 이왕 할 꺼면 잘 하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다 말았다. 아닐 수도 있다. 그냥 못하는 게 백번 낫다! 그렇지. 나이와 비례해서 느는 건 다른 주제고.
   핸드폰 안의 자료가 동기화 안 되었으면 메모장에 기록한 자료 다 날라갔다. 그래도 뭐 알람 안 울리면 늦잠 실컷 자고(안 그래도 실컷 자고 있지만) 돌아다니면서 핸드폰 주머니에 잘 들어있나 매번 꼬박꼬박 확인하지 않아도 되고 항상 대기하면서 전화오면 빠짐없이 받지 않아도 되니 편하기는 하다. 더군다나 누군가 날 추적하고 미행한다면 그분들이 너무 고생하시지 않게 신경써야 한다는 괜한 망상 안 해도 된다. 뿐만 아니라 이제 핸드폰 요금 덜 내도 된다. 핸드폰 전자파가 없으니 미미하겠지만 전립선 건강에 대한 걱정도 덜었다. 날 왜 이리도 성가시게 하는 거야 라면서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 같은 노래 제목을 연상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다. 핸드폰이 없으니 골초가 어느 날 담배를 끊고서 느끼는 것, 단언컨데 시간이 갑자기 왕창 늘어나서 그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주체할 수 없어서 다시 뭔가 공부를 시작해야 하나 하는 것처럼 기분이 아주 새로웠다. 녀석이 없으니 완전 홀가분하고 속이 다 시원해서 두 발 뻣고 아주 숙면을 취하다가 야한 꿈을 꿀 것만 같다. 야호, 이제 나는 자유다! 후훗!
   영화에서 삐삐삐 울리다 폭발하는 목걸이, 드라마에서 무거운 쇳덩어리와 이어진 한 손에 매인 특수 수갑을 어딘가로 떠나면서 어느 부위를 잘라버려야 하나 과감히 망설이는 장면, 소설에 나오는 바닷물 속에서 손바닥이 화살에 맞아 배 밑 어디에 그것이 고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한다는 이야기는 알렉산드리아 사중주 네번째였나. 화사한 꽃다발을 받고 기뻐하는 한 떨기 장미 같은 처녀가 그랬나 꽃집을 운영하면서 행복과 낭만을 전도하면서 여자에겐 미모와 젊음을 남자에겐 사랑과 야망과 NC 자유이용권을 추첨해서 선사하는 어느 꽃집 사장이 그랬나, 아니 그랬나. 아득한 먼 옛날에. 사내는 글쓰기에 지치고, 계집은 사랑하기에 지친다고! 자, 이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매우 앙증맞고 쪼그만한 소설 분량은 나왔으니 시간을 되돌려서 핸드폰이여 살아나시거라. 흩어진 파편이 내가 밤에 자고 있을 때 마법에 따라 모두 원위치되어 내일 아침에는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풍악을 울릴 것이다. 개 짓는 소리로. 아아,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나는 잠깐 뭔가에 씌워 메피스토 펠레스에게 영혼을 일시적으로 매도한 것일까. 분할 매도. 그런데 뭐야 가치는 대폭 하락하고 그분은 발을 슬그머니 빼시고 당분간 반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 아, 물렸다, 판돈. 왕창! 자금 순식간에 날렸어. 아니 내 영혼을. 게다가 그 중요한 재산 목록 특급인 핸드폰까지. 아, 내가 못 살아! 에게, 겨우 이거 쓸려고 핸드폰 박살낸 거야? 이런 미련 곰탱이 변태 같은 놈, 삐─ 삐─ 삐─!
   오, 시간을 돌리는 방법은 없나. 아, 들린다 들려. 수많은 영겁의 세월 동안 버클리에서도 칠레 최남단에서도 초능력자도 일반인도 소냐도,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공통된 독백. 이게 뭔 퍼포먼스 예술도 아니고, 인기가 바닥을 기는 사랑을 최고의 사랑으로 되돌리기 위해, 못 해봤던 도전과 모험과 보물섬 짓기를 실현하기 위하여, 시간이 되돌려질까? 안 되니까, 어차피 안 되니까 한 번 말이나 해 보자. 20살로 되돌아 간다면, 20살로 되돌아 간다면 당신은? 그대는? 넌? 어? 더 격렬하게 후회없이 놀고 싶다─남자를 많이 만나야지─직장 때려치고 무작정 대책없이 동쪽으로 서쪽으로 남쪽으로 또 북쪽으로도 떠날 것이다─아니야 난 북북서로 진로를 바꿀 것이다─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화가가 될 것이다─소설을 쓰고 싶어─악기를 배우겠다─새하얀 와이셔스를 입은 남자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새하얀 와이셔스 입은 모습을 보여줘야지 단추 많이 달린 근사한 복고풍 수트도 같이 입고서내가 바라는 것이 정말 뭔지, 나는 왜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를 잘 몰라서 그걸 다른데서 찾는지,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자아와 주관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어다 필요 없고 연애─그래도 난 지금의 그녀와 다시 그대로 똑같은 경험을 하고 똑같은 추억을 쌓고 똑같은 데이트를 하고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리다 그럴 것이다? 정말? (웃으면 안돼, 제발)─스포츠카를 살 것이다─이혼할 것이다, 뭐 할 것이다, 뭐 하고 싶다, 무엇이 되어야지, 어떻게 살아야지, 누구를 다시 만나고 싶다, 내 사랑을 찾고 싶다 등등등. 그래서 그것 때문에 시간을 되돌린다고? 그럼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다시 또 지금의 그녀와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러라고? 그렇게 안 사는지 못 사는지 어쨌든 나중에 그런 얘기를 듣고 하고 읽을 지금의 스무살 청춘은 뭐 바보야? 지금 20살이 뭐 멍청이냐고! 누군 뭐 연애하기 싫고 놀기 싫어하고 밑도 끝도 없이 떠나기 싫고 스포츠카 탈 줄 모르냐고! 그렇게 시간을 많이 되돌린다면 많은 마초들 한숨 쉰다니까, 뒷목 잡아, 주전자 머리 위에 올려야 해, 어? 귀와 코와 입에서도 압축된 수증기가 나오는 모습이 저절로 상상돼. 안 그렇겠어요? 어? 그러니까 따라서 시간을 딱 1주일만 되돌리자구. 일주일도 너무 길어. 딱 하루 아니 단 얼마 만이라도 돌려보잔 말이야. 째깍째깍 흐르는 시간을 깍째깍째 아날로그 시계마저 아니면 달랑 마음 만이라도. 핸드폰을 다시 살려내고 싶어. 그러면 더 더욱 착하게 살겠어, 열심히 살겠어, 어쩌겠어. (하이드 음조) 뭐, 더 그러겠다고? 그런데 말이야 참 흥미로운 미래가 보이는데. 있잖아, 마법의 수정 구슬을 보니 새해 1월 1일에 이렇게 나와 있는데, 동영상으로 막 동화처럼 만화영화처럼 보이는데. 12월 31일 방구석에서 혼자 술 마시며 영화를 보다가 뻗었는데 다음 날인 1월 1일에 하루종일 숙취로 끙끙 앓는다고. 재밌는데. 당사자는 아니겠지만. Happy New Year 이런 거 챙기시는 스타일 아니신가봐! 이 시간 쯤 혹시 만약 누군가 자신의 유머 코드와 소설이 서로 통했다면 그래서 기쁨과 즐거움이 기다리는 잭과콩나무의 이상한 나라에 당도했다면 그렇다면 일부 어른들은 이런 생각하시지 않을까? 아마도! 아들 딸이 자기는(아이) 나중 커서 행위예술가가 되겠다고 하면, 오~ 저런! 하시면서 이보게 아들아 딸아 평범한 삶이 얼마나 큰 축복인데 아니 대체 왜 우리 공주는 왕자는 그걸 모르시나요 하시면서 자기는(어른)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릴 것이라고!  아아, 님은 갔습니다. 영영. 그러나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분명 눈을 뜨고 왼손을 뻗으면 (깰 때 엎어져 있다면 오른손인가) 아이폰이 잡힐 것이다. 항상 옆에 있으니 무척이나 고맙고 귀중한 존재였다는 걸 잊어버렸어. 여러분, 썩 멋진 말을 하지는 않겠어요. 한마디만 할께요. 화 난다고 핸드폰을 벽에 집어 던지지는 맙시다. 그건 너무 철없고 속 좁고 찌질하며 푼수 같은 행동이에요. 결코 멋진 낭군의 행동이라 할 수는 없단 말이에요. 그 있잖아요, 꼭 자기 낚시 장비나 게임기나 골프채를 아내가 몽땅 갇다 버렸다고 확 이혼하거나 자기 먹을려고 남겨논 케익 다 먹어버렸다고, 애완견이 나보다 위냐고 내가 개 만도 못한 존재냐면서 (턱시도 입은지 얼마나 됐다고 나중 법적 처리 후 친구에게 하는 말로, 내가 개한테 밀렸다면서, 마이크 타이슨) 결별하는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다구요. 장기 스트레스는 단기 스트레스로 운동으로 취미로 말로 예술로 무엇으로 사랑으로 풉시다. 운전하면서 짜증난다고 뚜껑 열리지 말고 그분을 생각하거나 염주를 붙잡고 돌리시거나 징표나 오늘의 명언, 공익 광고와 자신의 모토와 내 장르, 멋진 차와 귀공자 같은 남자를 떠올립시다. 멀고 크게 보기가 힘들면 내일 만날 수상한 그녀와 오늘 그분과 함께 마실 와인과 달콤한 초콜릿과 탐스런 고기, 고기 요리를 떠올리자구요. 따지고 보면 TV와 인터넷만 봐도 지구촌 같고 대화를 터 보면 마음을 나눠보면 그러지 않아도 알게 되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내가, 내가 왜 핸드폰을 벽에 집어 던졌지? 글이 안 써져서?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분은 그런다고 오실 분이 아니다. 그래서 그분이 오신다면 그건 변태가 아니라 병정이나 기사나 고양이나 강아지나 다 유명 가수되고 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누구나 다 유명인이 되겠다. 당연하지. 혹시... 핸드폰의 새로운 바탕화면 사진 때문인가? 그건 억측이다. 막 따분함, 그냥 그래서? 이건 억지다. 키보드에 물을 엎질러서, 이것도 아니다. 그럼 어째서? 왜? 오늘이 그날인가? 그날? 아닌데, 난 남잔데. 뭐 이유는 잘 모르겠고 일단 내일 핸드폰님이 되돌아 오시리라는 가냘프지만 썩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 희망을 가져본다. 그렇게 되면 양말 진짜 불티나게 팔릴려나. 그리고 텔레비젼에서 많이 나온 고-난위도 마술쇼에서 미리 경고하는 말, 절대 따라하시면 안됨! 그건 다 이유가 있으니 보는 걸로 그칠 것을 권고한 것이다. 차라리 해변에서 흐린 날 일광욕을 하시라. 그러나저러나 난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 몸은 금붕어인가, 뭔가 할 말이 있었는데 뭐였지, 깜박깜박!
   핸드폰이 박살나고 나니까 이젠 먹는 바나나도 핸드폰으로 보이고, 쾨헬 550번 관현악도 핸드폰으로 들리고, 빗방울과 눈송이는 모두 핸드폰으로 어쩌면 고추도 핸드폰으로 보인다. 진정한 환시다. 여기도 아이폰 저기도 아이폰, 앉으나 서나 비가 오나 눈보라가 휘날리나. 꼭 상사병이라는 현상이 그러하듯이. 마치 외로운 도시남녀에게는 어지간한 일반인들이 모두 어떻게 보이는 것처럼. 해리포터 매니아들이 한창 해리포터 소설과 영화에 빠져있을 때 고전음악이 출렁이는 음악회장에서 백발의 마에스트로가 휘젓는 지휘봉이 '익스펠리아르무스' 마법주문이 소용돌이치는 마법의 지팡이로 보였을까? 나는 왜 해리포터가 재미없을까? 어른이라서? 하긴 엇그제 극장에서 스타워즈 보면서도 졸았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꿈도 꿨다. 내가 하는 일이 다 이렇지 뭐.
   핸드폰이 박살남으로서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즉 이 일은 내게 첫 경험이다. 두 번째 이후라면 백전노장 대가의 경험담이 녹아든 관록미 넘치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아니라면 단연 첫 경험 얘기가 즉 신인 작가의 데뷔작이 의미 있다. 물론 중간 지대도 좋다. 여기서 말은 그렇다. 꼭 그래프 어느 영역이라고 해서 미숙하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재미있거나 재미없고, 불미스럽거나 미적 가치가 뛰어나거나 딱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의 처음에 대해서 누구나 속으로는 사적으로는 일부 겉으로도 대중은 적어도 본인처럼 허접하고 비굴하며 꺼벙한 일반인들은 열광한다는 게 솔직한 속마음이 아닐런지 궁금하다. 왜냐하면 아주 확신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관의 한 부분임은 분명하다. 찾집에서의 대화를 삶에서 빼놓을 수는 없는 법. 또 첫 경험하면 왜 불이 켜지나, 단 둘이 있을 때 열정이 타올라야지 지금 그 얘기 하는 게 아니지 않나. 다른 것도 많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키를 타던 날, 마지막 사랑인 그녀와 처음 만난 날, 첫 이별, 첫 차,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 처음으로 술 취하고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많은 학과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훌러덩 (추측이지만) 벗은 일 그런 거 말이다.
   그래서 생각난 게 OX가 등장한다. 두둥~ 짜잔! 지금. 나는 와인 1병을 식품점에서 계산하지 않고 가지고 나오면서 도난 경보 장치의 울림 소리를 듣고서 가슴이 뛰고 두근거려본 경험이 있다 없다, 난 있다! 물론 그러면 안 된다. 3류 대학교 2학년 째 학업 성적 때문에 1학년 신입생들과 수업을 받던 시절 하숙집에서 살았는데 하숙집 멤버가 알게 된 다른 대학교 여자애와 3대2로 만났는데 (우리가 3 그리고 우리쪽 1명은 주선자) 그 후 여자 1과 나중 다시 1대1로 만나서 데이트를 하고 나서 버스 정류장에서 서로 먼저 들어가라고 배웅을 미루다가 이상하게 갑자기 그분이 오시는 바람에 서둘러 내가 먼저 버스를 탔던가(이건 아닌가) 억지로 그녀를 먼저 보냈던가 했던 경험이 있다 없다, 있다! (아마 그녀가 할머니랑 같이 살고 오빠는 군대 갔다고 해서 어떻게 나중 그 항구도시 인근 섬 본가에... 뭐 그런 생각 때문인가, 그 뒤로 다시 그녀를 만나지는 않았고 그녀의 과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통화는 했었다, 거기까지. 핸드폰도 없었고, 삐삐도 없었던 때. 그리고 당시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바닷가 신도심 지역으로 가서 피아노 학원 두 곳을 다니고 있었고, 그래서 '넌 한 달 용돈 얼마니?' 이렇게 물으면 '난 용돈을 규칙적으로 받지 않아.' 라고 답하는 시절은 지났지만 또래 친구들 다 여유는 그만그만한 것처럼 나도 그랬으니 돈도 없고, 게다가 그땐 어중간한 만남이나 아는 여자 그런 개념은 몰랐음. 그리하여 그녀는 착하고 참하고 예쁘고 꽃 한송이를 떠올리게 했지만 그녀는 결국 나중 내가 밑줄 그었던 카림 라시드의 글을 화평한 당시의 추억이라는 시간 관념으로 증명하게 된 순박한 아가씨가 되었다.). 그리고 스토킹까지는 아니지만 난 남자친구의 집에 놀러갔는데 남자친구가 집에 없길래 그 집에 혼자 들어가서 남자친구의 컴퓨터를 봤는데 이상한 동영상이 다운로드되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없다, 내 얘기는 아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하다가 내야 안타를 치고서 그쪽만 쳐다보며 1루로 달려가다가 1루로 정한 봉 한 개 짜리 농구대에 퍽 부닥쳐서 파닥 쓰러지고 드러누워서 헤롱거리다 애들 부축을 받고 양호실로 가서 턱을 꿰맨 기억이 있는데 그런데 그 자리가 거의 그 자리에서 도스도예프스키가 앓았다는 간질 발작으로 괴로워하는 누군가를 본 기억이 있다 없다, 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침에 학교로 출발해서 교실에 들어섰는데 등교한 친구들이 몇 없었다, 그런데 등치 크고 제일 뒷자리에 앉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 가운데 한 명이 갑자기 "뭐야 내 가방 어딨어?" 이러면서 혹시 내 가방 보지 못했냐고 하면서 자기는 교실에 들어와서 책상에 가방을 놔두고 교실 뒷편 벽에 장식된 소식과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다가 다시 뒤돌아 섰는데 난데없이 내 가방이 없어졌다고 하니까 아이쿠 맞구나, 나도 정말 그 친구의 가방을 본 것 같아, 어디갔지? 가방? 그런데 대관절 너 꺼 가방은 어데로 가버린 것일까 한참을 친구와 고민하면서 어리둥절해 하고 수업이 시작할 때 선생님께 알리고 모두들 이게 대체 뭔 일이냐고 하면서 이건 도저히 4차원으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오 신비감이 교실을 휩싸면서 그 날 하루는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친구가 학교에 멀쩡하게 가방을 가지고 왔고 전 날 가방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며 조그만 보조 가방만 들고 학교에 갔다고 자기 엄마가 알려주셨다고 알리니 선생님도 웃고, 친구도 웃고, 나도 웃고, 반 애들 다 웃고, (영화 '내 차 봤냐?'에서 누구야 애쉬튼 커처던가 그것과는 다른가?) 전날 가방 안 가지고 와서 지 가방 없다던 녀석이나 또 옆에서 자기도 그 가방을 봤다는 녀석이나 너네들 왜 그러니 참 웃겨서 못 살겠다고 선생님이 그러시니 다시 한번 반 전체는 들썩들썩 뒤짚어진 경험 있다 없다, 있다! 에잇, 이것도 재미없다. 
   참 핸드폰이 없으니까 핸드폰으로 고전음악도 못 듣는다. 안 되겠다. 이참에 오디오 하나 사야겠다. 골드문트 고급 모델로. 이 친구 소리가 썩 괜찮다는데 이거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된 거지만 어차피 잘 됐다. 오디오 하나 사고 귀가 호사하고 귀를 위한 것이 하나 들어왔으니 타인에게 오감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신나고 감동적이며 아름답고 끝장나게 재미있는 소설을 한 권 쓰면 된다. 쉽네. 자, 이제 다시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로 돌아왔다.
   나는 나름 혼자서 내 박살나버린 핸드폰에게 이름이란 걸 붙여주었다, 전에. 신비라고도 불렀다가 아니야 뭔가 고리타분한데 하면서 환상이라 불러줘야 그래도 청혼, 약혼, 언약식, 애원 그런 단어를 들었을 때의 느낌이 나니까 그게 좋겠어 하다가도 왠지 모르게 촌스러워 보여서 다시 고품격으로 애칭을 바꾸며 갈대처럼 그리고 여자의 마음과도 같이 혼자 이름 붙이기 놀이를 간혹 즐겨하곤 했다. 그땐 진정 내 유일한 친구 같았다. 예전의 이끌림과 그리움이 되살아나자 돌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볼도 귀도 빨개지는 거 같고 A형 피의 색깔마저 페퍼민트 칵테일 빛깔로 바뀌는 것 같아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조니워커 블루 한 병을 큰 걸로 샀다. 전에는 막상 위스키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또 딱 그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음유시인, 태양계에서 가장 낭만적인 남성복 디자이너 이런 수식어가 붙는 디자이너가 만든 옷도 몇 벌 구입했다. 한없이 참을 수 없이 가볍다고 해서 런닝화도 새로 장만했다. 차도 바꿨다. 신형 2016년식 911로. 것도 노란색 하나 푸른색 하나. 막 99몇 98몇 그런 거 모르겠고 저기 진열된 거 가운데 제일 좋은 거 둔탁한 거 말고 제일 예쁜 거 네네 그것으루요 아가씨 인상 참 좋네 얘기하는 사람 참 마음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기분 좋아졌어 많이 살짝 윙크 그리고 카드 결제 찍! 그리고 1인용 소형 잠수함도 하나 알아보고 있다. 2인용 호화 보트는 최신형으로 이미 구입했다. 소셜 네트워크는 한동안 읽지 않기로 했다. 사용하는 비누도 바꿨다. 이름은 모른다. 유명한 파스타 음식점에 혼자 들어가서 무작위로 스파게티 요리 5가지를 시켜서 혼자 다 먹어치웠다. 꾸역꾸역! 착즙기도 하나 사서 그건 카페 사장에게 선물로 주었다. 집 마당에 무럭무럭 자라는 잔디를 깎기 귀찮다. 수영장 물을 빼고 비밀 통로가 있나 없나 살피고 청소를 해야 하는데 도저히 힘이 나질 않는다. 대신 그 옆에서 혼자 고기를 구워 먹고 혼자 술을 마시고 취해서 괜히 울적해서 울었다. 하루는 얼만큼인지 셀 수 없이 많은 장미꽃을 사와서 꽃잎을 따서 모두 마당에 깔고 그 위에 나체로 누워 일광욕을 했다. 봄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는건가, 한 겨울에? 해가 중천인데 뭐가 보인다고 저 별은 너의 별 저 별은 나의 별 하면서. 실은 옷 사고, 운동화 사고, 차 바꾸고, 소형 잠수함은 구매 대기에 2인용 보트를 샀다는 거 다 뻥이다. 멍멍, (개)구라다. 그냥 그런 물건들이 소개되어 있는 잡지를 한두 권 샀을 뿐이다. 컹컹. 위스키는 사서 마셨다. 고급품이 아닌 소설 한두 권 값 하는 걸로. 귀촌 하느라 집과 땅을 사느라고 허리가 휘었다. 자산 빠듯하다. 일부러 거짓말을 해서 독자님을 골탕 먹이고 싶은 의사는 절대 없었다. 아무래도 핸드폰이 박살난 다음에 사람이 좀 이상해진 듯 하다. 상태가 매우 안 좋다.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닌데 외로움에 취한 것도 아니고 행복하기 직전의 상태에 매달리는 것도 아니며 지금 나는 아무도 없는 문 닫은 무도회장에서 음악도 없이 흥취도 없이 미친 놈처럼 로보트 마냥 혼자 내 앞에 허공에 마녀가 있는 것처럼 그녀와 함께 춤을 추는 것 같다. 몽유병 환자가 추는 막춤 그런 것처럼.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떠나기로. 목적지는, 없다.
   여기서 시점이 바뀐다. 1인칭 운전자 시점에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집에서 TV 드라마로 극장에서 영화로 술집과 찾집에서 하는 얘기로 주인공의 실종을 들 수 있다. 어느 날 모험이 시작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미래 세계 몇 년, 추리소설의 몇 가지 전형적인 형식과 첩보물의 모법 기법, 드라큘라나 흡혈귀나 좀비의 출현과 같이 이건 뭐 저건 무엇에 대한 이야기 그런 압축적인 단어와 1줄평, 그것이 작품에서가 아니라 아주 간단히 실제로 벌어졌다.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다, 이제 시작한다. 제임스가 연락이 안 되니 처음에는 핸드폰이 꺼져 있겠지, 잠깐 잠수 탔나봐, 바쁜 거 아닐까, 작품 구상에 몰입하다가 드디어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 작품 집필에 들어간 건 아닐까, 떠돌이와 외곽을 전전하는 선수들을 모아 지옥훈련을 거쳐 갑자기 나타나 프로리그 연승을 거듭하다 전승하고 막판에 어떻게 된다는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제목의 만화 같은 이야기는 다 옛날에나 가능했어, 요즘 전화 안 되고 전기 안 들어 오는데가 어딨다고 지금은 잘 나가는 창작자일수록 도심지에 살거나 그 주변을 배회하고 인기를 즐기지 괜히 어디 쳐박혀서 연락도 안 되고 뜬금없이 괴물 작품을 만들어 돌아온다는 건 다 허황된 이야기야, 그런데 전화도 안 되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쪽지에도 답장이 없어, 연락이 도저히 안 된단 말야, 이거 어떻게 된 거지, 단순 가출이나 여행일 수도 있지만 왠지 느낌이 이상해,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그래 그거네, <실종> 아니 어떻게 이렇게 영화 같은 일이 이리도 쉽사리 생길 수 있는 거지? 너무 어렵게 생각해던 건가. 그러다가 7인에서 1명 빠진 6인의 친구들이 조니를 필두로 제임스를 찾아 떠나기로 했다.
   조니가 제임스 사는 곳을 알기 때문에 선두에 섰다. 곧 그들은 각자 차를 몰고 원정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우선 조니는 보유한 클래식 카가 있으니까 그걸 타고 선두에 섰다. 1969 싱어 포르쉐. 그리고 2번째 주자는 케빈으로 그가 선보인 차량은 1956년식 페라리 250GT Berlinetta Competizione 였다. 오, 완전 복고풍! 멋져! 눈이 다 동그래져 완전 호강해. 3번째 주자 알렉스가 선정하여 선보인 차는 1960년식 페라리 250GT SWB Berlinetta Competizione 였다. 풍경이 호사로워지고 눈물이 다 날려하고 청각마저 들뜨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이렇게 경이로울 수가 있나 하면서 할 말을 잊게 만들고 침까지 슬쩍 아니 뚝뚝 흘리게 만드는 보배로운 존재들. 이런 색조감은 도대체 어디다 주문해야 짠 하고 등장할 수 있나 궁금해서 미치게 만든다. 4번째 주자 마크는 클래식 카가 아니라 그냥 까레라 2016년식을 몰고 나왔다. 그리고 5번째 선수 하워드는 닉으로부터 구입한 스마트 포투를 또 6번째 선수 닉은 자기 꺼 중고 스마트 포투는 하워드에게 넘겼으니 신형 스마트 포투를 구입했다. 그러나 녀석은 차고에 고이 놔두고 이번에 선택에서 소개한 차량은 1967년식 마세라티 기블리 슈퍼 블랙 에디션이었다. 얘네들은 분위기가 이래서 정말 제임스의 실종을 해결하러 가는지 그냥 자기네들끼리 놀러가는지 잘 분간이 되질 않게 보였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 표정, 어조와 분위기를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킥킥, 깔깔, 낄낄 지금 딱 중 2다. 유년의 꿈이 경주용 차를 천천히 모는 클래식 카 애호가인 듯한 그림이 딱 그려진다. 올해가 가기 전에 기어코 찾고 싶은 1인, 실종된? 사라진, 잠적한 미지의 은둔자 제임스를 찾는 제 1의 목적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고 고전주의자이자 클래식카 광신도로서 어디까지나 노는데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저 차들 가격도 만만치 않고 관리도 쉽지 않은데 말이다.
   제임스 찾기 초반에는 그랬다. 녀석이 뭐 톰과 제리도 아니고 미스터 빈이나 몇몇 만화 주인공 정도를 떠올리면서 쉽게 찾아서 기쁨의 재회 후에 광란의 파티장에서 뭔가 놀라운 파란과 낭만적인 사건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거 이거 땅에 박힌 파이프의 귀족적인 색깔 자주색 뚜껑을 열어보니 이거 영 일이 잘 풀리질 않고 있다. 도시에서 출발한 이후 이곳 시골에 도착하여 여기 저기 찾으러 돌아다니고는 있는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선두인 조니부터 제일 후방 1967 마세라티 기블리까지 거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연락도 서로 잘 안 되고 길도 헤매고, 일단 차량이 올드카가 아니라 성능 빵빵한 최신형 차주는 잠깐 어느 까페에 홀로 들어가서 촌스러운 아가씨를 꼬시질 않나 잠적한 친구 찾기 행진이 아주 뒤죽박죽 되버렸다. 그 전에는 드라이빙 고급 기술에 대해 서로서로 심도 높은 강의를 하고 또 듣고, 핸드폰이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제임스의 시계나 차에 심어진 고유 칩을 위치 추적하자, 아니다 CCTV 뒤져보면 녀석의 행적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 없다 그런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이냐 도대체 누가, 기초적인 심문과 탐문 작업부터 시작할까, 어느 세월에, 무인기나 영화에 나오는 거 같이 인공위성으로 그냥 내리찍어서 확인해버리면 되지 않냐, 증거 1 심증물 2 단서 3 하나 없는데 우리가 지금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 이래도 된단 말이냐, 내가 봤을 때는 아무리 봐도 리더가 문제다 조니 뒤로 빠지고 마크를 선두로 보내자, 아니다 아니다 그건 안 된다 마크를 앞으로 보내면 클래식 카 뒤에서 갤갤대다 퍼진다 그러면 답 안 나온다, 그러니 아무래도 속 편하게 탐정을 고용하는 게 어떠냐, 이건 정말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할 문제다, 아니 뭐 우리의 능력치가 겨우 이거 밖에 안 되는 거냐, 인근에서 제임스가 들려볼 것 같은 장소는 모두 탐방했다, 대관절 요 홀연히 사라진 몽상가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조니 너가 아까 끝까지 달리자며 왜 이제는 먼 산만 쳐다보고 있냐, 너네 라 페라리 운전할 때는 운전만 하란 말이야 하나만 생각하라구 진정해야지 제임스 찾아야할 꺼 아니야, 그럴려고 모인 거 아니냐구 우리가 뭐 여기 놀러왔어? 아, 놀러온 건 맞긴 한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러면서 배가 산으로 가고 있는데 저쪽에서 막 방송 차량이랑 그런 무리로 차 몇 대가 다가온다.
   아니나 다를까 케빈과 알렉스와 닉이 몰고온 복고풍 차량이 모두 협찬 받은 거였다. 자동차 잡지와 자동차 전문 방송에 기고문과 영상을 보내야 하는데 케빈은 원고 마감일을 어겼다고, 알렉스는 담당자 선정에 착오가 있었다며, 닉은 행사장에서 인터뷰만 해달라니까 대책없이 냅다 차를 몰고 도망가버리면 어떡하냐 이러쿵저러쿵 소란스럽게 그들은 케빈과 알렉스와 닉이 몰고 있던 노신사 트리오를 모두 데리고 가버렸다. 1956과 1960년식 라 페라리 그리고 1967년식 마세라티 기블리 미스테리 블랙! 그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어딘가에서 울리는 효과음을 듣고 있다. 꺄악~ 꺄악~ 꺄악~. 효과음 안바뀌네, 이것도 고전이야.
   특수 버튼을 누르면 조종석에서 하늘로 붕, 2~3층 높이 정도로 적당히 낮게 붕 떠올라서 소형 패러글라이더가 펼쳐질지도 모르는데 존재감은 곤두박질치고 기대와 흥분, 사치, 로맨스 그리고 애련까지 다 날아갔다. 이제 뭐가 남았나, 무엇이 보이는가, 돈 데 보이.
   이들은 남은 차에 나누어 타서 일단 쉬어야 한다, 작전 회의가 필요하다는 구실을 삼아 번화가로 들어서서 어느 한적한 펜션을 찾아 들어가고 그곳에 묵는다. 이제는 그들이 이곳에 온 목적일랑 잊어버리고 클래식 카를 회수 당한 기이한 낭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데 모여서 놀고 싶다는 욕망을 반신반의하며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딱 학생들이 공부하기 싫지만 공부하는 것처럼. 수학 문제 풀다가 등이 가려워 등을 긁다가 손톱에 뭐가 튀어나왔어 정리해 다시 문제 풀다가 눈이 침침해 세수하러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며 이뻐질려고 막 고민해 연구해 다시 문제 풀다가 눈 영양제 한 알 먹고 아빠한테 전화와 엄마가 뭐 해달라고 불러서 갔다 오고 다시 문제 풀다가 볼펜 돌리기 연습해 이제 아예 문제는 쳐다도 안 보고 소셜 네트워크 둘러 보다가 문제집 덮고 10분 휴식 여기에 0이 하나 더 붙어, 이렇게!
   펜션에서 그들은 냉큼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펜션 안에서 영화를 보고, 펜션 안에서 음악을 듣고, 펜션 안에서 책을 읽고 시를 짓고 무얼 할까 궁리하다가 술에 취해 골아떨어져 꿈나라로 떠나서 시간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 이곳은 어디인지 혹시 내가 숨겨논 애인과 밀애를 떠나서 모처에 당도한 것은 아닌지 잠꼬대를 하고 꿈에서 현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고 한껏 사색적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어디 놀러가도 실내에서 모두 해결하고 피곤하게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듯이. 한편 객실을 내준 주인장 어른은 얘들을 보고 내내 두문불출하며 실내에만 콕 틀어박혀 통 밖에 나오지 않는 이 친구들은 진짜 뭐하는 놈들이란 말인가, 어디다 신고를 해야 돼 말아야 돼 라는 생각도 언뜻 스치며 손님들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고 유유히 낚시질 하시러 떠나신다.
   여기까지는 좋다. 여유로운 노년, 바다 앞에 홀로 서서 세월을 연주하며 인생의 풍상의 울림으로 수면 밑의 어류의 움직임을 얼마나 감지할 수 있느냐 감지는 안 하고 그들과 대화만 나누어도 흥겹다, 물고기가 안 잡히면 육고기를 생불에 구워 먹겠다, 도락의 정취와 격이 떨어지는 노름판에는 끼지 않겠다, 나는야 홀로 노인과 바다일지니 더 무엇을 바란단 말이냐, 다 좋단 말이다, 다만 여기까지는. 즉 펜션 주인 어르신께서 리모콘으로 주차장 자동문을 잠그고 낚시터로 가신다는 게 6인의 친구들이 놀거나 자고 있는 별장의 전체 칩입 방지 시스템 활성화 버튼을 깜빡하시고 잘못 누르신 것이었다. 그래서 이 친구들은 이유도 모른 채 갇혔다는 사실마저 모르는 상태로 영락없이 가택감금 되었다.
   마침 초현실주의자 조니는 근래에 대작 온라인 게임에 빠져있었는데 펜션 안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가 또 게임상의 장비에 불만이 폭발했다. 어디서나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중요한 것이고 로봇 청소기를 장만하고 기막힌 칵테일 제조 비법을 익히고 시가 커터에 하이힐 선물을 모두 마련했다고 다가 아니다. 하나 바꿨드니 다음 순번은 계속 이어져, 청소 한 번 하고 끝이 아닌 것처럼. 게임에서도 장비발이 너무 중요하니까 전 레벨에서는 막 주변에서 추앙받고 딱 더없이 좋았는데 (현 레벨) 여기 오니까 완전 얘네들에게 까이고 천대 받고 막 슬퍼져. 그러다 잠시 게임에서 누군가와 다투고 말싸움하다가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해버렸다. 현피라고! 실제 벌어졌던 사건들에는 코메디도 있고 전혀 그렇게 부를 수 없는 일들도 있다. 그 용어는 온라인 게임에서의 다툼이 오프라인에서의 몸의 대화로 이어진다는 뜻인데 200년쯤 전에 벌어졌던 지금은 현실감이 없는 단어 결투를 떠올리게 하지만 결코 좋지 않은 일이고 어리석은 짓일 뿐이며 지는 게 이기는 건데 결국 조니가 욱해서 여기로 녀석들을 오라고 부추긴 거였다. 상대는 이름이 초딩1, 초딩2 길래 진짜 초딩 아니면 순진한 이상주의자일 테니 말로 잘 타이르고, 구슬리고 얼르고 다독거려서 잔정을 슥 깔아주고 멋진 인생을 바라는 동경심을 불어넣어주고 건강한 삶에 대한 밝은 긍지를 샘솟게 만들어주면 그만이다, 그건 바로 딱 내 숨길 수 없는 장기이자 특기 아니야, 그랬는데 사태가 그렇게 이어지지 않았다.
   별장 바깥으로 건실한 많이 건실한 청년 2명이 찾아왔는데 문이 안 열린다며 투덜거리고 초인종을 누르고 또 눌렀다. 조니는 친구들에게 사태를 설명하며 일이 커져버린 것을 판이 벌어졌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행히 안에서도 밖에서도 서로 오갈 수 있는 통로를 여는 일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6인의 친구들은 마침내 짐을 싸서 지하실로 피신하기로 한다. 차는 사태 마무리 되면 찾으러 가면 된다. 뒷문이 어딘가에 있겠지 하며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그곳으로 피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지하 세계를 탐색한다. 마치 그곳이 그동안 꿈꿔왔던 신천지랄지 영광의 그날을 위해 장구한 인고의 시간을 감내하며 군침을 흘려온 신비한 여체, (누군가에게는 남체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집대성한 성과물?), 조각과도 같은 홍조 띈 그녀의 환상적인 나신라도 된다는 듯이!
   그러나 그곳을 찾아왔던 청년 둘은 별장 주인과 낚시를 같이 하기로 한 상냥한 노총각이지만 나이보다 젊어보이고 유달리 건장해서 어쩌다가 오해가 일어난 것이었다. 청년들과 펜션 주인장 어른이 약속 장소를 서로 잘못 집어 고대했던 대어 낚시의 웅장한 만남이 미루어져서 노신사를 찾아왔고 그냥 그게 다였다. 청년과 노신사는 이미 6인의 친구들이 여기 오기 전부터 만나기로 굳게 연인처럼 약조를 했다. 바로 이와 같은 낚시의 개론에 대해 젊은이 두 친구는 배울게 아주 많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이만 많지 않다면 꼭 한량이라고 술꾼이라고 불러도 그리 틀리지 않을 듯한 노인에게 말이다. 어르신께서 젊은이에게 어떤 강연을 보여주셨을까. 아마도 이런 내용이었겠지. 낚시는 말이야 철학이 있어야만 해 그냥 낚시줄 던져 놓고 물고기 잡는 건 낚시가 아니야 낚시의 3대 기본 요소가 뭔 줄 아니? 거 봐 아직 기초도 모르잖아 낚시는 본질적으로 고된 기다림이란 성 위에 지어지는 요술과도 같은 귀걸이의 반짝임과도 비슷한 찰나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어 당숙이 가르쳐 줄께 배울 때 확실히 배워도 다 나중에 도움이 될 꺼라구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오들 못해 그럼 절대로 정말 그렇다니까 나중에 아 이게 세간에서 그렇게나 말하는 그 사랑이란 것이로구나 그런 것처럼 중요한 시기가 지나서야 깨닫게 되는 환상 그것은 낚시에서도 찾을 수 있다구 단 나에게 배운다면 말이야 어때 알고 싶지 않아 정통으로 불세출의 낚시 기인에게 대대로 전수해져 내려오는 비밀스런 낚시법을 배우고 싶지 않느냔 말이야 낚시와 비슷한 게 뭔 줄 알아 한 학문을 오랫동안 연구하다 보면 옆자리에 있는 다른 과목에 대해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야 비유가 조금 부적절하지만 낚시의 이웃은 뭐냐 그것은 바로 술이야 나처럼 주색에 통달한 사람은 아 나는 그렇게 표현하지만 다른 문하생들은 고색창연한 어휘를 사용하니까 오해하지는 말라구 너네들 앞에 있는 삼촌은 말이야 술이 있으면 아예 안 먹거나 아주 코가 삐툴어지게 먹거나 둘 중에 하나만 한다구 간단해 왜? 예술가니까! 낚시도 이와 같단 말이야 자 이제 낚시의 세계로 본격적으로 떠나 볼까?
   곧 청년들은 바닷가로 되돌아갔다. 또 6인의 친구들은 얘들아 이것 좀 옮겨봐, 힘 써, 힘 왜 안 써, 어디 딴데 썼어, 젊은 놈이 왜 그리 부실해, 좀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옮긴 장농 옆으로 비밀 통로를 발견하고 영혼을 제압당한 것처럼 그곳으로 빨려들어간다. 어떤 자궁을 떠올리게도 만드는 정갈히 잘 만들어진 복도는 그리 길지 않았다. 최종 도착지에 도착하고 보니 조니가 외친다. 으슬으슬 부르르 떨면서.
   「뭐야! 여기는 제임스 집인데! 그곳 마당에 있는 수영장이라구!」 어느 새 그곳에 수영장 물은 어디 딴 데로 다 빠져 있었다.
   여기서 잠시 해설을 더하자면 그 복도에서 두갈래 길이 나온다. 거기서 첫번째 길은 제임스 집 수영장으로 통하는 길이고, 두번째 길은 교향악 연주회장 무대 밑으로 통하게 되어있는 비상 통로였다. 약간 믿거나 말거나 무책임한 발언처럼 들리지만 진짜다. 뭔가 꼭 꼴불견 같지만, 변심한 애인의 마음과도 닮았지만 꾀병이나 미신이 아닌 진짜, 거짓이 아닌 참말, 한 대 아니 여러 대 호되게 쥐어박고 싶은 구라가 아닌 진실이란 말이다. 이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마무리하고 다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되돌아 가서 거리를 배회하는 제임스에게 조명이 비춰진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빙빙 돌면서 나는 맵시 있게 잘 차려 입은 노인에게 잠시 눈길을 건네며 어여쁜 꼬마는 잘 보이지 않으니 도시에 살고 있는 녀석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닉은 족제비 목돌이를 장만한다고 사방팔방 외치고 다니더니 지금쯤은 장만해서 조금은 가짜 족제비와 친해졌을까? 하워드는 닉에게 스마트 포투를 샀다는데 그걸 타고 잘 돌아다니고 있는 것일까, 진짜 닉에게 정상의 중고차 매매가의 2배에 샀을까, 하워드가 친구 닉에게, 하워드는 설마 저번처럼 가제트 형사 놀이나 소꿉놀이를 하고 있진 않을까! 마크는 자기 집에 꼭 한번 놀러오라고 하면서 기어코 내게 확답을 넘어 맹세를 얻어내고야 말았는데 정말 마크 말대로 걔네 집에 놀러가도 괜찮을까, 설령 진의가 부풀려지고 마크의 웅변술에 놀아나서 나는 사교의 예법을 위배하고 깜작 방문했을 때 그의 얼굴 표정을 보고 어조를 알아채는 순간 아차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그땐 나도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를 것이다, 길거리에 오줌을 누어야 할지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서 못 부른 노래를 불러야 할지. 그리고 알렉스. 새롭게 문을 연 레스토랑에 들리면 특별 요리를 공짜로 준다했는데 진짜 무료로? 아니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추운 날 나는 왜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 거야. 사춘기 가출 소년도 아니잖아. 그렇다고 그냥 맥없이 들어가면 또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드는데, 아니면 물망초나 금어초를 한다발 사들고 집에 갈까? 에이 그건 꽃집에서 안 팔아 게다가 꽃송이 한 다발 살 돈이면 생선이나 돼지고기를 사오지 그랬냐고 잔소리를 들려줄 아내도 없단 말야. 카네이션을 들고 찾아갈 보고 싶은 은사님도 없어. 거 원 인생 참 뭐 하다. 남들도 다 이런가. 요즘 질투의 대상이 딱히 불분명한 게 불만일까. 누가 날 유혹하질 않아서 불행한가. 아아 너무 개성없는 투정이다. 최근 관심가는 그녀 신비한 사람 내 맘에 쏙 드는 관심사는 무엇이었드라. 이거 소설도 안 써지고 낚시도 재미없고 왠지 허탈한 데다가 비밀도 재미도 짱돈에 마지막 믿는 구석 무엇마저도 없으니 술만 땡기네. 그러다 또 술 마신 다음 날 얼굴 찡그리고 식은땀 흘리며 우웩 우웩 토하고 두통약도 안 들고 숙취로 새빠지게 개고생한 다음 다시 금주 선언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심사숙고. 선언은 뭔 놈의 선언, 관심있는 사람 하나 없는데, 이런 젠장! 너나 잘 하라고? 뭘 해도 요란 법석을 떨어요 아주. 아, 인생살이 쉽지 않아. 환청이 인식돼. 단기 스트레스 어쩌고저쩌고? 너나 잘 하세요! 어설픈 상남자는 사랑의 변화에 절망하지 않고 술이 약한 체질에 마음 아파하나? 그러나 영화 행오버 1,2,3가 우끼다는 내 취향 타인에게 들키면 곤란해. 아 미치겠다 언제 철들지. 이러니 오만 인상 안 쓸 수가 있나. 멋진 남자가 될 자질을 갖추는 것은 진즉 글러먹었네 이런 말을 뜻하는 듯한 눈초리 밖에 더 받겠냔 말이야. 지금 이건 장난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야. 어리광도 엄살도 난 이제 재미없다구. 지금 심각하다구! 어?! 이런, 또 종착역의 이름은 윽 권태야. 그래 이젠 우리 친구하자. 내꺼 하자. 뭐 어쩌겠냐. 핸드폰 박살나서 친구들에게 연락할 수도 없고 새로 만들기는 싫고 우연히 선물받고는 싶고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탐사하러 떠날 용기를 북돋아볼까?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삐─! 
   그렇지만 기분이 이상해서 견딜 수 없어. 지금이 연말인데 꼭 세기말 같단 말야. 이런 젠장 등대는 보이지를 않고 그분은 영영 오시지를 않는구나. 그분이 꼭 한 분을 지칭하는 건 아니지만. 스키장? 퇴색한 나이트 클럽? 뜨는 NC? 혼자서? 더군다나 멀어. 안 가. 어, 저기 뭐야, 인상주의 특별전? 뭐시여, 술집이잖아! 아 수증기 팍팍, 쉬이이이익! 거리를 마구 돌아다녀도 갈 데가 없다. 벌써 구닥다리(그러나 이 정을 결코 떼버릴 수 없어, 영화의 한 장면 때문에) 볼보 왜건에서 내린지 2시간째 아니 3시간 다 됐어. 길바닥에 버려진 (부도)수표가 없나 계속 고개 숙이고 걸었드니 뒷목 주변도 뻐근하고 상당히 피곤한 거 같다. 초대받지 못한 파티에라도 대책없이 쳐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송별회가 열릴 듯한 근사한 건물은 주변에... 눈을 씻고 둘러봐도 보이질 않는단 말이야. 외로운 사람 따로 있고 고독을 즐기는 겨울의 도시 남자와 행복의 문을 노크하는 쓸쓸한 미모의 도시 여자는 따로 있는 건가. 대체 여기가 어디야? 청춘남녀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오, 사랑이 멀어져가네!
   그러나 계속 기분이 저조하고 우울한 단조 음악만 지속되란 법은 없는지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그것도 조금은 (꽤) 저속한 것으로. 오냐, 잘 걸렸다! 왜냐하면 저 앞에 동상이 하나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상은 여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 주위에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순간 딱히 성적인 상상을 했었는지는 아마도 한참 시간이 흘러도 정말 그러했는지 하는 사실의 여부 확인과 함께 다른 무엇을 연상한 걸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상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어쩌면 미리 추측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그녀의 가슴에 내 손을 얹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요술에 힘입은 흡입력 절반과 과학적인 가속도, 척력, 인력, 원심력 등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솔직히 그 손을 떼고 싶었다. 하지만 동상의 생각을 내가 읽었다고나 할까, 비록 동상이지만 그러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조각상일 수도 있는 애처로운 그녀의 생각 그 느낌을 내가 읽었다고나 할까, 그 까닭은 잘 모르겠으나 왠지 그 순간 경거망동을 하면 안 될 것 같고 너무 빨리 서로의 갈 길로 돌아가는 건 무척 매정하며 한참 예스런 행동이 아닌 듯 여겨졌다. 영화에서는 무엇을 있을까.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정신병원에서 환자가 간호사에게 그리고 제목은 생각나지 않고 배우는 생각나는 길거리에서 아 이런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그 동상의 분장술이 뛰어났으며 예술적인 가치가 드높은 데다가 실제 사람과 혼동을 일으킬 만큼 정교히 만들어졌고 그래서 나는 그 일시적인 환영과 혼돈 때문에 잠깐이나마 그곳이 무인도라거나 에덴 동산인 것으로 착각을 했었던 것 같다. 내가 너무 처량해 보였기 때문에 지나가던 설치예술가가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가련한 내게 아나 여기 있다 이거면 됐냐 얘 몸엔 차가운 파란색 피가 흐르고 있다구 원래 임자는 정해져 있는데 내가 급한 볼일이 생겨서 아무나 골라 잡은 행인이 바로 당신이라구 운 좋은 줄 알아 이 친구야, 마치 이런 독려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다고 하면 누가 믿어줄지 아닐지 미친 놈이라며 혀를 찰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미 필름은 돌아가버리고 작품은 나와버렸으니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다. 이건 내게 단서 1이거나 뜬금없는 데칼코마니,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와 같은 매개체였을까. 이게 바로 그 극적 장치, 라이트모티브였단 말인가?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부족해서 혼신의 정력을 모아 겨우겨우 퍼포먼스 입체상에서 손을 떼내고 보니 저 앞으로 사람들이 줄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지금 약속도 없고, 할 일도 없으며, 글도 잘 써지지 않고 뿐만 아니라 실은 조금 뭐 하나 걸려라 하는 심정도 약간은 있었고, 또 뭐 재미난 일 없나 하면서 핸드폰 없는 것도 잊은 채 막연히 잘 울리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 어쩌겠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미터 가서, 사실 조금 더 멀었지만, 그저 나도 거기 동참하는 거 뿐이 없었다. 안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막 조바심 지수도 올라가던 찰나였다. 그런데,
   오 하마의 하품이여, 아아 펠리컨의 사냥으로부터 간신히 도망친 낙화한 비둘기의 전철을 밟지 않은 요염한 고양이여! 내가 아무 생각없이 선 줄서기는 그냥 줄이 아니었다. 적당한 간격으로 줄이 줄어들면서 내 차례가 되니 뒷 사람 음료수 값 지불하기인 줄 알았냐면서 아니라고 뿅망치 맞기에 당첨됐다고 축하한다고 우끼지? 하는 그런 거도 아니고, 다음 날 아침 신제품을 사려고 장시간 대기하는 그런 줄서기도 아니었다. 그건 첫째, 줄을 서되 몸을 180도 틀어서 서고 둘째, 줄 뒷편으로 (지금 말한 방향은 생각하지 말고) 새 줄을 서는 것이 아니라 줄 앞편으로 줄을 서는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사람이 내 쪽을 보고 있었으니 내가 몹쓸 짓을 하는 걸 보지 않았냐고? 그건 마지막 사람이 덩치가 컸는데 몸을 옆으로 돌리고 있었고 길 모퉁이를 막 돌아서 줄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못 본 걸로 결론났다. OK! 좋아!
   그러다 얼마 안되어 나는 이게 뭔 일이지 하고 있는데 내 앞으로 푸드트럭 같은 차량이 당도한다. 그런데 그 안에는 점원이나 음식은 없고 웬 슬롯머신 같은 오락기가 하나 뎅그렁 있다. 차량 색깔은 연분홍색이다. 아기 돼지 같은. 오락기는 하늘색 그리고 알록달록 장식되어 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금은 딱 슬랩스틱 코메디 무언극 형식이다. 그럼, 그건 내 전문이야. 사람들 뒤에서 기다리니까 오락기의 커다란 손잡이를 잡아서 내렸다가 약간 정지 그리고 다시 마지막으로 움직였다가 손잡이를 부드럽게 살포시 놓았다. 음악소리와 나팔소리 그리고 딴따라 기계음이 울린다. 삐리리릭, 삐리리릭, 삐리리릭! 오~예! 화면에 화면에 가로 3줄, 세로 3줄, 합이 9칸 전부 7이란 숫자가 등장하고 반짝반짝 축포도 터지고 들썩들썩 거품 방울이 나오고 안내하는 아가씨가 귀에 장미꽃 한송이를 꽃아 주면서 오락기에서 나온 봉투를 하나 건넨다. 이건 고액이 들어있는 돈 봉투 같기도 하고, 돈 주고 사기 어려운 행운권이나 크리스마스 축하카드나 연하장처럼 생겼다. 안 그래도 이번 성탄절 외로웠는데 집에서 혼자 술 마셨는데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뭐지 뭐지 하면서 난 이제 자리를 떠야할 꺼 같아 슬슬 그곳을 떠나 길 모퉁이를 돌아간다. 아직까지도 그곳에 있던 친구들이 최신곡 메들리를 불러주고 분위기 좋고 애교와 교태와 축하는 끊이질 않는다. 약간, 약간은 그게 날 위한 게 맞나 하는 의심이 들지만 스스로 찬물을 끼얹지는 않고 흐름을 타고 행운을 띄워 길일에 초치지 말고 행복의 장타와 쾌락의 연타를 이어가야만 한다. 희열이라는 부록과 조랑말 환희와 다정한 숙녀의 기쁨과 친애하는 희망까지. 그래 좋아, 좋아 이거라구, 이거라니까! 왠지 아까 너무 침체되고 우울하다 그랬어, 다 이런 막판 뒤집기가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구 으하하하하 으하하하하 하면서 마냥 좋아하면서 무심코 어딘가로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완전 신났다!
   이제 카드를 열어볼까, 또 친절하게 3분 후에 읽어보라고 씌여 있네. 꼭 느낌이 3분 즉석음식 같아 히히. 아 매력 덩어리 깨물어주고 싶은 천사들 하하 그만 뜸 들이고 뭐가 나올지 궁금하니까 열어봐야겠다며 나는 카드를 열었다. 이런 삐─ 삐─!
   '꽝' 이라고 적힌 종이가 나왔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이용해주라나 뭐라나. 다음 기회는 뭔 다음 기회, 내가 다시는 속나 봐라. 순 사기꾼 같으니라고. 어른 놀려먹는데는 아주 선수야 선수. 아흐 저걸 증말...... 한편으로는 아 다행이로다 그래도 아무 글도 아무런 그림이나 표식도 없는 기분 벙 뜨는 백지는 아니구나 어쩜 그렇게 그이의 마음이 참 친숙하게도 느껴질 수가 있구나 아아 고마워라 그랬다. 하지만 내가 뭔 이런 어려운 생각을 다 하고 있지, 하면서 그리고 이제 나는 사람들의 이름을 많이 불러줘야지 (지금은) 사랑한다 말 대신 듣고 싶은 이름을 많이 불러줘야지 라고 다짐했는데 아 핸드폰이 없구나 그러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있잖아. 이제야 생각난다. 어쩌면 아까 마주쳤던 그보다는 더 서사가 있었던 풀어 설명해야 할 뭔가가 있던 그 정지한 대형 피규어가 아마 동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얼핏 드는 생각. 어쩐지 동상의 눈동자가 움직인다 했어. 게다가 따뜻하더라구. 심지어 고혹적인 향까지. 그땐 모른 척 한 건가. 어째 그 온후한 혈색과 미세한 억양과 명시의 낭독과 명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 오묘한 표정, 으흐흐, 내가 뭔가 이상하다 그랬어! 아, 아찔하다. 이거 뭐지? 너무 이상한데 어떻게 된 일일까? 왜? 어째서 그녀는 가만 있었던 거지? 그 유별난 감촉이 왜 하필 지금에야 더 생생하게 생경히 느껴지는 것일까? 소름끼치지는 않고 막 흥분돼! 혹시 지금 동네 청년회나 헬스 클럽 동호회, 운동 좀 하는 촌락 아저씨들 때로 때거리로 몰아서 쫓아오는 거 아니야? 아, 뒤를 못 돌아보겠다. 누군 돌아보고 싶지 않아서 안 돌아보냐구. 회상 좋아하시네! 어쩜 좋아. 대체 어쩌면 좋냐구 이 일을!
   그러나 딱 끊고 돌아보지 않을 수도 없고 또 뒤돌아 보지 않고 신경을 아예 꺼버릴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살짝 낌새만 파악해보니, 안 본 척 하면서 딴데 보는 것처럼 사르륵 곁눈질로 돌아가는 기미를 파악했드니 사태가 심상치 않은 듯 했다. 오 이런, 삐─됐다! 얼른 집에 가서 그냥 TV 보고 케익 사다가 와인이나 마시며 책이나 읽다가 씻고 자야겠다 라면서 나는 얼른 집으로 허둥지둥 되돌아갔다.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 36계 줄행랑 밖에는. 또 거리에서의 방황에 나는 체력이 고갈되고 몹시 지쳤던 것이다.
   (다시 3인칭 시점으로)
   제임스가 마침 집에 도착하니 친구들이 웬 물 빠진 수영장에 서서 멀뚱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간이 그 시간이었는데 곧 시각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는데 한쪽에서 커다란 무엇을 숨기는 것 같았고 한쪽은 그걸 눈치 챌 여력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왜냐하면 아직도 그 이상한 일과의 기억 때문에 밤잠을 설칠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말문이 막혀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어찌 되어 연락이 안 되어 애가 탔다, 클래식 카를 타고 왔다가 회수 당했다는 말은 안 하고 수영장이 아담하다, 공기가 참 좋은 거 같다, 그런데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냐, 연락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우리 보고 싶지 않았냐, 이 나이에 친구야 보고 싶다 이런 말 낯 간지러워 잘 못하겠구나, 정말 그래, 그래도 노력해 보자꾸나, 산세가 좋고 바다가 가까워 예술적인 착상이 잘 떠오를 거 같다느니 서로 변두리를 돌면서 우정의 겉 주변을 떠돌며 속으로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이 장면을 봤다면 이건 재회라 부를 수도 없고 편한 대화 같지도 않고 딱히 직업적인 관계는 아닌 것 같고 무슨 사이인지 왜 만났는지 친한지 안 친한지 잘 분간하지 못하고 가히 매우 이상한 설정에 처했으리라고 보았을 듯 하다. 서로 마음을 빼앗겨버렸나? 아닌데. 혹시 뭔가에 홀렸나, 그건 모르겠군. 참으로 싱거운 만남이로구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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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62

from 소설 2015. 12. 30. 20:14

   환경, 그것은 최근 자주 바뀌었고 내가 그것을 주도했다. 카푸치노 향이 나는 분위기, 조금 따분할 수도 있지만 그런 뭔가 그윽한 생활이 지겨워져서 선수 교체를 했다. 잔디밭과 수영장이 있는 집을 팔고 카라반을 한 대 사서 항구도시의 변두리, 위성 시골 같은 촌락의 어느 한적한 도서관 인근 주차장에 정박, 금새 갈대처럼 변덕이 일어서 이것도 아니다, 뭔가 새롭지도 않고 사는 기쁨도 느껴지지 않으며 무엇보다 글 쓰는 영감을 받을 만한 지형이 아니야, 그래서 또 옮겼다. 이거라니까, 이거야, 젊음의 거리, 발랄하고 새록새록 파릇파릇한 대학생들이 많은 어느 항구도시 위성 시골 대학교 앞 하숙집에 입성! 이곳은 마치 콜라 같아, 청량감으로 지성이 번뜩 하면서 깨어날 수 있는 환타, 배고픔도 잊고 잠도 모른 채 신들린 듯 쉬지 않고 글을 쓰게 만드는 에너지 음료. 이 생활도 좋긴 좋았는데 아무래도 겉도는 느낌이었어. 맨날 놀러만 다니고 항상 뭐 하고 놀까 그 궁리만 하고 연구했었지. 간출이면 1번은 잘못 제조된 맛 없는 카푸치노를 예로 들수 있는 시골 생활, 2번 맹숭맹숭 김빠진 저가 탄산수, 3번 다시 젊어진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만드는 대학가 앞 하숙집 생활, 관현악과 문학을 사랑하는 마초가 마시는 청량음료와 싱그런 과일, 탐스러운 붉은 빛깔 립스틱을 바르고 향그러운 칵테일을 마시는 뒷모습까지 꺼뻑 넘어가게 만드는 꿈결 같은 긴 생머리 그녀의 귓볼 그리고 반짝이며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크리스탈 귀걸이 그리고 드라마틱한 목선, 단아하며 청초한 이쁜 맑은 햇살과 향긋한 바람에 잘 말렸을 것 같은 하얀 웃도리 그리고 풍만한 엉덩이? 이런 뭐여!
   아무튼 내 주제와 처지를 되짚어 보고 다시 1번으로 돌아왔다. 잔디를 깎고 수영장을 청소하는 일상으로! 인생은 객관식 문제가 아니건만 괜한 헛소동을 부렸을까. 글쎄, 두고 봐야겠다. 개, 큰 개를 한마리 키울까? 귀찮아. 좋긴 좋은데 똥을 여기저기 막 싸고 어떡하다 그걸 내가 밞으면? 오 그림이 안 좋다. 일단 소설 1권 완성할 때까지는 그건 참자. 동네에 어디 어디 개들이 사는지 다 아니까 산책할 때 녀석을 계속 주시하고 구경하며 행복한 상상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당분간 글이 잘 써질 때까지 술을 끊어 보기로 했다. 그동안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뭔가 허전하고 아쉽긴 하지만 좀 내 몸을 혹사했다. 그랬다. 그러나 (자칭) 대주주 신분을 잃지 않기로 했다. 술 회사 의결권 없는 배당이 듬뿍 꼬박꼬박 나오는 우선주, 그건 현재의 생활비이자 미래의 노후 자금이니까 지금 팔면 안 된다. 금주는 금주고 그건 그거다. 별개의 샛별, 개입하지 않고 침범하지 않는 낮 생활과 밤 생활,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림을 그리고. (미래를 예견해서 하는 말은 아니고 괄호가 미래에서 지금으로 당도하여 하는 말이다만 금주 선언은 썩 길게 가진 못했다, 윽 저런!) 또 나는 예전에 하던 1주일에 한 가지 일만 하기, 그걸 다듬어서 하루에 한 가지 일만 하기로 정했다. 하루 종일 팔굽혀펴기와 물구나무서기만 하려다가 이건 안 되겠다 싶어 포기하고 종목을 금방 바꿨다. 하루 종일 운동하고 하루 종일 야한 상상만 하기, 하루 종일 1곡만 듣기, 하루 종일 돌아다니기. 그 가운데 하루는 쇼핑만 했는데 이때 구입한 품목은 망원경, 헐크 가면과 장갑처럼 손에 끼는 헐크의 녹색 손, 거위털 이불, 침낭등을 구입했다. 그러나 이것도 금새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고 지겨워졌다. 특히 쇼핑에 매달리다가는 재산 금새 거덜날 것 같았다. 어설프게 이런 데다 참을성이니 진득함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밑도 끝도 없이 들이대면 몸도 마음도 쉬이 지칠 수 밖에 없다. 요령이란 게 필요하다. 일리 있는 얘기다. 그래서 일단 나는 프리지아 꽃을 한 송이 사서 그걸 들고 포스트맨 카페를 다시 찾아갔다.
   카페에는 헨델과 코렐리의 리코더 소나타가 흐르고 있었다. 카페에는 사람이 없었다. 한 명도. 나는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웹 공간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패션잡지 사이트를 보았다. 거기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의 이메일이나 소셜 네트워크 계정을 바탕으로 머머닷컴 뒤에 붙는 URL(알파벳)을 검색해서 그 사람에 대해, 그가 보고 먹고 노는 것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 심심한가 보다. 외로운가 보다. 그가 아니라 내가. 대충 그것만 살펴봐도 어디에 갔구나, 무엇을 했구나, 뭘 좋아하네 까지 또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앞날은 어떠할지 대강 보이니까 그 느낌이 좋았다. 얘는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얘도 즐거운 일이 없나 보구나, 사람들은 비슷하고 또 다르구나 하면서. 그러나 이것도 금새 싫증 났다. 나는 비로소 권태에 빠졌다. 어렵게 드디어 그것에 빠져서 포근함을 느끼다가 마치 변태처럼, 그럼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라면서 자기 반성을 했다. 그러다 전화가 걸려왔다.
   「허걱. 오 이런... 네가 전화해서 놀랐어.」
   「제임스 왜 그래. 뭐 잘못한 일 있어? 한적한 전원 생활을 즐기다 보니 너무 소심해진 거 아니니? 엽서 받았지? 훌쩍 커버렸지만 우리도 손편지도 보내고 엽서도 보내고 선물도 주고 받고 그래야지. 저번에 할로윈에 할로윈 콘서트 볼까 말까 망설이다 검색해보다가 결국 술먹고 뻗었자나. 이번 크리스마스 모두 기대가 크다구. 너도 예외는 아닐 거 같은데. 안 그래? 이번에 루돌프를 기다려보자구. 술꾼의 빨간 코보다는 말야. 제임스, 있잖아, 운치, 우린 말이야 고상하고 우아한 멋을 너무 잊고 살고 있어. 안 그러니? 엽서에 나와 있듯이 준비 많이 했으니까 오래되었을 테니 이번에 한번 도시에 올라와서 바람쐬고 기분 풀고 구경도 좀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인생을 좀 즐기고 한숨 돌리고 그런 다음에 다시 내려가서 창작에 전념하는 게 어떠니? 그러면 글이 더 잘 써질 거 같지 않니? 우리 블로그에 올린 네 단편 읽어보니까 딱 너가 좀 외로움을 타는 거 같던데, 안 그래?」
   「하워드 뭘 또 그렇게 신경 써 주고 그래? 엽서 보니까 뭔 유명한 메조 소프라노에다가 그 뭐야 초대한 손님들도 아주 굉장하던데 어떻게 그 사람들과 다 친하게 지낸거야 대단한데? 난 생각도 못했어.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동기부여계의 떠오르는 화신인 닥터 뭐드라, 이름이 닥터였나 아무튼 그 인간까지 불러서 강단에 서게 만들다니 오 놀라운데! 당연히 가야지. 안 그래도 뭔 재미난 일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마침 잘된 거지, 땡 잡았어! 다른 애들도 모두 온다 그랬지? 모인지 오래됐는데 한번 만나야지. 괜히 블로그에 소설 올린다고 모두 시험공부하는 것처럼 과도하게 진지해져서 너무 실내에 파묻혀 지냈던 거 같아. 그래 올라가서 보자. 하워드」
   제임스는 이렇게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 다 놔두고 왜 하워드가 이 파티를 열었을까. 하워드는 차가 없기 때문에? 앗, 일설에 그런 얘기가 있다. 하워드가 처음으로 차를 구했다고. 그런데 그게 중고차라고. 게다가 그걸 넘긴 친구가 닉이라고. 뿐만 아니라 닉이 스마트 포투의 정상적인 중고 매매가의 2배를, 자그만치 거의 정확히 2배를 닉이 하워드에게 받아냈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다. 나중 애들 사이에 분명 말이 나올 것이다. 오, 닉, 대단해! 아님 하워드가 후덕한 건가? 아 또 하워드가 파티를 주최한 이유는 그가, 아직 첫 애마를 입양한 게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니, 차는 없고 요트만 있기 때문에? 심심해서? 돈이 남아 도니까? 파티 한번 열어보고 싶어서? 아무래도 첫째 같았다. 첫째?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아무렴 어때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도시로 올라갔다.
   짠 하고 공간이동했다. 이곳은 배구나 농구나 아이스하키가 열릴 것 같은 실내 체육관이다. 백구의 대제전, 배구 경기에 나오는 후위 공격을 볼 수 있는 경기장. 아이스하키도 가능하고 프로야구나 풋볼은 불가능. 농구는 가능. 쓸데없는 얘기는 생략한다. 그리고 하워드의 말이 이어진다.
   「화장실 갔다 와서 설명할께.」 하워드가 화장실에 갔다 왔다. 다시 그가 이어서 말을 한다.
   「너네들에게 엽서를 보낼 때는 나도 모르게 우쭐했어. 혼자서 으스댔다고. 막 명장면이 그려지는 거야. 왜 그런 거 있잖아. 소설에 보면 나머지는 다 별로인데 대화체, 한 사람이 긴 호흡으로 빼는 페이지 한두 장 금새 넘기는 말,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긴 명대사처럼 그렇게 한 번에 쭉 빼는 대화가 정말 기막히게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뭔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그런 소설의 한 일면 같은 그와 같은 느낌, 그게 내 마음에 한순간 나부꼈다니까. 신년 음악회나 레드 벨벳을 밟고 등장하는 그런 무슨 발표회 같은 화려함을 떠올리면서 너희들에게 해줄 말도 떠올라서 준비해 뒀다구. 이렇게. '난 과도하게 아부 받는 걸 원치 않아. 좀 은근하고 좀 근사하고 좀 간접적으로 그렇게 뭐 그런 거 있잖아' 이렇게 말야. 그래. 그땐 그랬어. 그런데 이게 뭐니. 아 놔 이런. 돈 많이 썼는데. 준비 많이 했는데. 기분 이상하네. 시도 한 편 외웠는데. 학교 다닐 때, 연애할 때, 남들에게 있어 보이고 싶을 때 그렇게 외워야지 외워야지 다짐만 수없이 하고 자세만 잡다 포기했던 시, 시를 바로 내가 외웠다고, 짧은 거 말고 긴 걸로. 이런 젠장!」
   하워드의 말이다. 도시, 실내체육관, 썰렁한 파티, 그것에 대한 헌사? 회심, 아쉬움, 왜 그럴까 를 생각하면서 얘기한 것이다. 즉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를 했건만 파티는, 파티는 하지 않으니만 못하게 되었다.
   「괜찮아, 하워드. 그럴 수 있지 뭐. 다들 바쁜가 보지. 다른 약속이 있었거나. 못 온 친구들이 운이 없는 거야. 안 그래? 이렇게나... 음 그러고 보니 좀 훵 하네. 기운 빠져. 기분 탓인가.」
   「그래 기분 풀어. 연말이면 다 그런거지. 의무적으로, 습관적으로 항상 그랬듯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늘 그랬던 것처럼 그냥 술 마시고 웃고 떠들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그게 다잖아? 별거 없어.」
   「인생은 게임이야, 즐기라고. 그렇다니까. 파티도 게임이야, 이 파티 저 파티 살면서 여러 파티에 들리다 보면 좀 썰렁한 파티도 있지 않겠니?」
   「또 하워드가 일부러 우릴 놀릴려고 그런 거도 아니잖아. 행복이 오는 걸 가로 막고 저지하는 걸 설마 하워드가 바라겠어?」
   「그래 하워드. 꽁하게 오늘의 망가진 파티를 마음에 담아두지마. 그럴거지?」
   「그러지 말고 우리 영화 보러 갈까?」
   「영화도 준비했어.」 쇼 호스트, 하워드의 말이다. 무슨 영화인지 말은 안 하지만 조그만 큐브같은 기기같은 걸 틀면 어디 비추어져서 영화가 나오는 거 그런 거 준비했었나 보다.
   「이러다 기적이 일어날지도 몰라. 이제 시무룩해져서 모두 정리하고 이곳을 나갈려고 문을 여는 순간 짜잔 하면서 뭔가 펼쳐질 거 같지 않니? ... 안 그럴 거 같구나.」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아리아가 들리면서 관중석의 중간이 열리면서 회전목마가 나타나. 전율이 일어남과 동시에 이곳은 낙원으로 바뀌고 우리는 축배를 들어야겠지. 올해는 뭔가 역부족인 듯한 한 해지만 이 연말 파티를 만끽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다짐하며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꿈꾸며 저기 저 초콜릿을 먹는 거야. 반짝반짝 색종이들이 휘날리고 촉촉한 입술 자국이 갑자기 내 하얀 셔츠에 찍혀 있어. 왜 몰랐지? 어떻게 내가 키스자국을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하지만 사람이 기분이 너무 좋다 보면 살짝 흐트러질 수도 있는 법. 딸랑딸랑 강아지 목에 걸려있는 방울 소리가 들려. 원래 고양이 목에 걸려야 한다고 동화에는 나오지만. 저 녀석, 좋아서 미친듯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꼬리를 흔드는군. 이 친구 사족을 못 쓰고 속마음을 드러내는구나. 오 부르르 떠는데, 오줌을 지리나. 괴상망측한 남아로군. 아니 뭐가 없어, 아가씨야. 뒤돌아보지 마. 세이렌이 저기 공중에 나타났어. 뜬금없이 실로폰 소리가 들려. 윤기나는 그녀의 머리카락. 광택 스프레이를 뿌렸나. 어머나 곡예사도 준비되었군. 차와 케이크가 빠질 리 있겠어. 게다가 스프링클러에서 나오는 건 샴페인이야. 최고급 샴페인. 그렇다면 바깥에 준비된 수영장에 있는 액체는 알콜 도수 43도 짜리 위스키? 미친 짓인가. 저 친구들은 체스판 앞으로 간다. 너의 다음 해 애정운을 봐줄까.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나와 있네. 지금 이곳은 이제 디오니소스적 술판이 벌려지는군. 파란색 도취감이 꿈틀거리고 누군가의 안색은 창백해. 아조 잿빛이야. 아 하품이 난다. 이제 잘 시간인가. 아니 약 먹을 시간이야. 어때, 내 즉흥시?」 
   「그럼 그렇지. 충격 받은 거야?」
   「서점가서 랜덤으로 시집 아무거나 아무 페이지나 펼쳐봐. 그리고 읽어봐. 방금 읊은 거랑 어느 만큼 어떻게 무엇이 차이 나는지. 그거 누가 냉정하지만 즐겁게 설명해주면 내가 책 한 권 선물해줄께.」
   「소설이 망해가고 있어. 아니다. 파티가 끝나가고 있나?」 전에는 대화체가 안 써진다 했는데 이젠 대화체만 겨우 써지는 건가. 어쨌거나 처음부터 끝까지 글은 잘 안 써진다. 그건 맞다.
   「우린 열과 성을 다해 무명 블로그에 전념했어. 죄가 있다면 그거 밖에 없어.」
   「어이, 저게 도대체 뭘까?」
   「뭐?」
   「뭐긴. 미니 회전목마 아니야. 흔들면 반짝이는 그 있잖아. 안에 뭔 물 같은 게 들어있고. 태엽을 감으면 이쁜 소리가 들리고. 그 있잖아.」
   「춤출까, 자기?」
   「자기?」
   「그냥 한번 말해봤어.」
   「얘는 아예 수다쟁이가 다 되었군.」
   「각자 뭔 일 생겼나 털어나봐. 새로운 소식 없어?」
   「난 차 바꿨어.」 조니, 콰트로포르테 2015년식.
   「난 헤어스타일 바꿨어.」 마크, 투톤, 한쪽은 스킨헤드 직전 한쪽은 살짝 길다랗게.
   「난 사는 곳을 바꿨어.」 닉, 동네에서 동네로.
   「난 수영장 물을 바꿨어. 드라이 진으로. 드라마나 소설이나 시에 잠시 한 단어 나오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은 많이 거북한 단어, 코케인을 준비할 수는 없잖아? 난 건전하게 살래. 술로 만족해!」
   「난 마누라를 바꿔어. 결혼은 미친 짓이야.」 얘 누구야?
   「뭐라고?」 이구동성.
   「농담이야! 원래 이런 말 할려고 했던 게 아닌데. 이상하네. 왜 그러지?」
   「재미없어.」
   「그래.」
   「일단 여기를 뜨자.」
   「벌써? 아직 관중석이 갈라지면서 회전목마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관중석 안 갈라져. 여기 설계 단계에서 그거 빼먹고 지은 거 같아.」
   「나가서 뭐하지?」
   「조니 집에 가볼까?」
   「안돼. 집 난장판이야. 청소 하나도 안 했어. 꼭 오기로 고대했던 그분은 올 생각이 하나도 없나봐. 사람 슬퍼지게 말이야. 너네들 차례되면 말할께.」
   「바다보러 갈까?」
   「추워.」
   「영화?」
   「지금 재미난 거 안 해.」
   「낚시?」
   「엇그제 했어.」
   「게임?」
   「게임도 이제 재미없어.」
   「술 마실까?」
   「안 땡겨.」
   「뭘 해도 재미없구나.」
   「그러게 말야.」
   「야 조니. 너가 저번에 그랬자나. 여하튼 삶은 로맨스가 거의 전부라며?」
   「서로 멋진 말들 하는데 뭔 말인들 못하냐? 그냥 해본 소리야. 로맨스도 필요한 때가 있는 법이야. 아무 때나 부를 수는 없어. 걔도 바쁘다구. 그리고 나만 그랬냐? 제임스 너, 자고로 인생은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며? 이게 재미있게 사는 거냐? 하워드는 그래도 노력했다구. 힘 썼으면 됐어. 하워드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또 누구지 케빈, 인생은 무릇 현실적이되 판타지와 SF이어야만 해? 그래서 넌 SF에서 살고 있다며? 지금 우리가 영화 찍냐 영화 찍어? 넌 아직도 어떻게 된 게 지금도 초딩 같아, 어? 그리고 마크, 열정과 모험과 감수성에 목마르다며? 갈증이 나면 물을 마셔, 뭔 감수성을 어디서 찾고 난리야,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말야. 지금 애들은 옛날 애들이랑 달라. 괜히 말 한마디 잘못 걸었다가 욕 바가지로 얻어먹는 수가 있어. 파티가 기대했던 그 파티가 아니라서 괜히 횡설수설 했다야. 잊어버려. 하긴 여자 꼬시려면 뭔 말인들 못하겠어. 지금 이 자리에 여자가 한 명 숨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로맨스에 대해 내가 예전에 했던 말에 대한 변명이야. 글긴 그래. 그럼.」
   「닉, 너 무슨 일이야? 저번에 올린 사진 보니까 작은 꽃밭을 농작하던데? 뭔 일이야?」
   「어, 아가씨에게 꽃을 선물해줄 일이 생기면 꽃집에 가서 꽃을 사서 선물하기 보다는 내가 키운 꽃을 선물하고 싶어졌기 때문이야. 돈도 절약되고 또 요즘 다른 거도 그러고 있어. 최근 집에 유리세정제가 떨어졌거든. 예전 같으면 새로 샀을 텐데 뚝딱 하나 만들었어. 집에 먹다 남은 술이랑 이것 저것 넣어서 만들었어. 재미 붙였다니까. 또 집에 세숫비누가 떨어졌거든. 안 샀어. 하나 만들려고 연구하고 공부하다가 포기했어. 우끼지? 당분간 그거 없이 살아볼려구. 그리고 내꺼 노트북 고장났자나. 그동안 너무 컴퓨터 많이 가지고 놀았어. 당분간 끊을려구. 이게 끝이 아니야. 집에 읽을 책이 떨어졌어. 우리 블로그도 읽고 또 나 요즘 책 쓰고 있잖아. 인문-교양 분야로. 재미있게 사는 법, 뭐 그런 거. 최근 막 이래. 요즘 사는 게. 그 다음은 뻔한 얘기야.」
   「저런 녀석이 뭐가 좋다는 거야? 그래도 닉의 인기는 저물 줄을 몰라. 미스테리야. 꽃씨를 뿌린다는 말로 시작해서 이 꽃이 피면 첫 송이를 당신께 선물해 드리리다, 그대여, 이런 말로 어느 묘령의 아가씨 그녀의 여심을 농락했을까? 이제 사교가에 농학자에 기술자와 만담가에다가 익살꾼으로도 모자라서 예술가, 학자, 시인까지 하시겠다? 상상력이 엄한데로 뻗치는 거 아냐. 언젠가 미지의 이상과 뜻밖의 상상력과 환락을 보는 능력과 오락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심이 사라지면 어떡할려는 거니? 그때가 되면 뜬소문에 이상한 얘기 들리는 거 아니야?」
   「기분이 되게 이상해. 분위기 한참 좋게 파티를 즐기다가 갑자기 맥이 딱 끊긴 느낌이야.」
   「우리 파티 아예 시작도 못했다구. 그래서 그래.」
   「그런거야? 그렇구나.」
   「그래, 바로 이거야!」 손짓의 소리 딱, 골 세러모니 그리고 어깨를 움츠리고 양 손을 벌리며 두 눈을 지긋이 감기. 다섯 손가락 끝을 한 지점에 모으며 그걸 살짝만 앞으로 들이밀기.
   「뭐가?」
   「술집 사장한테 연락왔어. 술 마시러 오래. 술집 사장 마담이야. 화보집도 냈어. 인생의 행적이 막 궁금해지는 그런 스타일이야. 확인은 안 해봤어. 가게 가까워. 안 멀어.」
   「뭔 신나는 특별한 행사에 가는 거도 아닌데 꼭 그런 분위기 같은데. 누구 어디 가다! 나갈까?」
   「그럴까?」
   「집에 누구 기다리는 사람 없니? 꽃밭에 물 줘야 하는데... 커피포트 고장나서 커피포트 하나 만들려고 전자공학 공부하고 있는데... 집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 밥도 줘야해...」
   「나중에 해.」
   「그래.」
   드디여 이 친구들은 체육관 바깥으로 나왔다. 때마침 승마를 즐기는 동호인들인지 누군인지 말을 타며 비글을 몰며 양을 쫓아 가는 것처럼 보이는 친한 사람들 무리가 보인다. 실내체육관의 관중석이 갈라지면서 회전목마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야외 경마장에, 스크린 경마장에 가지도 않았는데 말 몇마리와 개 몇마리를 봤으니 기분이 좋아졌고 그럭저럭 큰 불만은 없었다.
   「저 봐봐. 바로 옆에서 공연하네. 록 공연. 대형 콘서튼데. 초대받은 친구들 다 저기로 간 거 아냐?」
   「오 진짜!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거 같은데.」
   「날에다가 장소도.」
   「엎지러진 물이네.」
   친구들이 오늘을 위해 임시로 마련한 대형 밴 차량에 모두 타서 출발하기 전에 음악을 듣는다. 어디로 갈건지 정하지 않았으니까.
   「난 저 한심한 노래를 잊으려고 무척 노력했어.」 도대체 무슨 노래가 나왔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하다. 그 노래가 이거다 라고 밝혀지면 그 노래를 작곡한 사람과 가사를 쓴 사람은 어떻게 되고 그리고 그걸 좋아했던 사람은 뭐가 되며 또 왜 어떻게 한심한 건지 일단 따져봐야하지 않을까 망설이게 만드니 슬쩍 넘어가는 게 묘수다. 좀 어설프지만.
   「기분 풀어. 노래가 좀 한심하면 어때? 무슨 연관된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거야? 일단 아까 누구니, 카페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 우선 그쪽으로 슬슬 가볼까? 어쩔 셈이야?」
   「그래. 딱히 목적지도 없는데.」
   「그럼. 우리에게 내일은 없어.」
   「그러자.」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다 좋았단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날 아무도 가지고 오지 않았던 007 가방이었다. 즉 그들의 차량과 그들이 머물다 나온 체육관 옆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는 대형 슈퍼스타의 차량이 같은 종류, 같은 연식, 같은 색깔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딱 차에 타자마자 이상하게 자 시작이다 라는 것처럼 수많은 관중이 그들의 차량으로 뛰어오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는 조명과 카메라와 마이크와 풍선을 든 팬들과 마스코트 인형과 기괴한 복장을 한 사람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그래서 이 친구들은 저거 뭐야 처음에는 이랬다가 어 아닌데 하다가 장난 아닌데 하면서 삐─ 라고도 했다가 어쩔 수 없이 차를 출발하게 되었다. 뜬금없는 추격전. 어느새 그들을 따라서 또 어디서 막 쫓아오는 차들도 밑도 끝도 없이 생겨났고 바짝 따라오는 스포츠카들도 있었다. 뭔 시트콤 드라마도 아닌데 이런 일이 다 있다니 그랬는데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상황은 이어지고 그렇게 그냥 대충 끝나지 않았으며 도망가고 따라가는 릴레이 경주는 계속되고 있었다. 믿기지는 않지만 말도 안 되지만 실제상황이었다.
   「아 이게 아닌데. 원래 지금 이 시간이면 난 단골 카페에서 이런 대사를 들어야 하는데. 오늘 뭐 재밌는 일 있으신가 보죠, 알렉스씨?」
   「오 지금은 아니지만 나도 예전 같으면 이런 말 듣지 않았을까? 케빈, 걔 가슴 그만 좀 봐라!」
   「어쨌든, 어떻게 된 거야?」
   「쟤들 뭐지? 우리가 슈퍼스타야? 우린 파파라치를 원하지 않아. 조용히 살고 싶다구. 뭔 중요한 정보, 아는 거 하나도 없어. 건질 거 전혀 없단 말야.」
   「이런 일이 내게 닥치면 정말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 해본 듯도 한데 실제로 거짓말처럼 정황이 그렇게 돌아가니까 또 그다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지는 않은데...」
   「난데없이 웬 메리에지지 블루? 긴장 풀면 안돼. 여차 하면 장르가 바뀔 수도 있으니까.」
   「너네들 내게 모른다고 하지마. 혹시 뭐 숨기는 거 있어?」
   「너 요즘 읽는 책 뭐니? 챙겨보는 드라마가 뭔데? 아니면 아직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그녀가 이런 거 좋아해? 취향 특이한데.」
   「오 저거 뭐야?」
   「이런 삐─삐─」
   「삐─── 오오 이럴 수가! 완전 멋져! 내가 바란 건 바로 이런 거였어. 바로 이거라구.」
   「그래 그건 알겠는데. 쟤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왜 지금 또 왜 하필, 아니지! 잘 등장한 거지. 그렇지?」
   「그럼. 그렇지. 봐, 아름답잖아. 딱 봐도 얼마나 예뻐? 오, 멋쩌!」
   바로 직전의 설정은 이랬다. 7인의 친구들이 탄 밴 차량이 선두로 달리고, 그 뒤로 펠로톤을 형성해서 그들을 추종하는 취재하길 원하는 얘네들을 대형 록커인줄 알고서 쫓아가는 팬들이 V자 형태를 그렸다가 모양을 바꿨다가 다시 V자 형태로 따라 붙었다가 약간 뒤쳐졌다가 그랬다. 그런데 그림이 바꼈다. 선두 진영에 갑자기 어디서 툭 튀어나왔는지 모를 밴 차량 동호회, 일단은 그들이 누군인지 왜 모였는지 어떻게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같은 디자인에 똑같은 색깔의 차량인지는 모르니까 밴 차량 동호회라고 임시로 부르고, 그들이 무더기로 왕창 선두권에 진입하는 바람에 그 전에 펠로톤을 형성했던 선수들은 거의 점점 후미로 밀려나며 안 봐도 비디오로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들이 눈에 선하게 되었다. 어찌된 일인지 대형 록커와 아이들이 탄 차량이 헷갈리게 동일한 밴이 뜬금없이 확확 늘어나는 바람에 도무지 누굴 쫓아가야 하는지 이대로 계속 따라가야 하는지 이미 두목은 어디로 새버리지는 않았는지 걱정하면서 다른 중요한 할 일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나 슬슬 걱정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덩달아 에라 차라리 살금살금 미행할 걸 그랬네 뒷일을 생각해야 해 라면서 성큼 우리가 지금 왜 여기서 이런 이상한 질주를 하는 것일까 라는 정념으로 좌중의 의견이 모아지면서 슬슬 대형 록커 추종 파파라치 차량들의 탑승자들은 큰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게 굽이진 길을 지나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현재를 음미하면서 연적이 내곁에 있나 있었나 있을까 살피는 가운데 기존의 펠로톤 그룹은 흩어져서 어느 머나먼 공원으로 떠나버린 것 같고 대형 밴 차량 일행들은 어딘가 커다란 공터로 들어서면서 슬슬 속력을 줄이고 진영을 갖추면서 하나둘 차를 주차시키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행선지의 먼발치를 보니 자동차 극장이라고 커다랗게 간판이 보인다. 이름은 없이 그냥 자동차 극장이라고.
   이렇게 되고 보니 조니와 케빈과 알렉스와 마크와 하워드와 닉과 제임스는 차량 바깥으로 나가서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고 다짜고짜 따질 수도 공손히 여쭤볼 수도 그렇다고 그나마 그 가운데 상냥한 면상의 소유자와 시선 접촉을 시도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영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은 무엇일까? 나도 궁금하다. 그걸 봤던 사람은 아는 귀공자는 그 영화 더럽게 재미없어, 에이 뭐야 다른 영화 다 놔두고 하필 그 영화라니, 거기 나오는 어느 여배우가 어쨌다드라, 그런 잠언을 유발시킬 수 있으니 소설가와 귀족은 같은 길을 갈 수는 없으니 전자와 후자가 동의어는 절대 아니니 옛날 사람들의 그 조용조용한 어조를 떠올리며 영화 제목에 대해서는 각자 알아서 상상하기로 하자. 단, 영화 포스터에 월계관이나 월계관 잎파리 같은 형상이 나와 있는 거 정도라면 썩 불친절한 설명은 아닐 것이라는 애원을 우물쭈물 어딘가에 띄워보낸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소설이 망해간다고! 그 말이 맞다면 내가 그랬자나 라는 초반의 윽박지르는 어감의 선언이나 발광하는 느낌의 예언이 똑똑히 맞아떨어진 것이고 (오 예스!), 혹시 그것이 틀리다면 오 그럴 수 있다면 아 그랬으면 좋겠다. 곧 이래도 오 예스, 저래도 오 예스! 툭하면 엄살, 피곤한 시늉, 멋모르고 당하는 생욕 그것은 초보자와 젊은이 그 둘이 하나일 때만 가능한 것일 것 같다. 소설 쓰기의 전문가인데 젊어, 아니야. 안 그러지. 그러면 못 써. 소설가 지망생인데 늙어? 아니 한껏 고상하며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선망에 골몰하게 만들 만큼 연로하며 관록미가 쉴새없이 넘치고 그런데 나이가 많다? 이 또한 그분들이 가실 길은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아무렴 그렇고 말고. 그분들도 어쩌다 한번 그분이 오실 때나 어린이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시거나 그분이 아니 오실지라도 성실하게 일을 하다가 우연히 그러나 자주 그런 화풍의 그림을 내놓으실런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체로 그건 아니다. 둘 다 가지면 안 된다구. 욕 얻어 먹는다. 쓰고 보니 또 불필요한 말이야. 논리, 이미 망가졌어. 내용, 엉터리. 그래도 그냥 그대로 놔둘꺼야. 경우의 수는 낮게 잡아서 최소 4개가 나와야 하는데 그건 독자 알아서 생각하라지. 아후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 같으니라고. 소설, 한물갔어. 제대로 가버렸어.
   자, 영화가 끝났다. 영화 종료 후 모처럼 대형 밴 차량에 타 있던 사람들이 차량 바깥으로 나온다. 우리의 주인공들이라고 차에서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긴다. 한두 명 사르륵 잠이 들어 코오~ 꿈나라를 헤매고 오즈의 마법사와 정령에 대해 설전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깨어있는 친구들의 부추김으로 모두들 차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 이제는 대놓고 빤히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 직접 화법이든 무력감을 동반하여 속마음을 아른거리게 만드는 언행을 불러들이는 교묘한 꼬드김이든 이제는 저들에게 이들이 명쾌히 물어보고 또 화답을 슬쩍 요구해도 된다. 그래서 나왔고 또 나오니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상쾌한 분위기에 기분이 새로워지면서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며 뭔가 궁금했던 게 더 궁금해지던 찰나에 갑자기 전체 인원이 또 자동차 극장의 스크린 옆에 준비된 광장으로 옮겨가서 캠프파이어를 하기 시작했다. 일정이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준비도 사전에 다 되어있었던지 모두 다 매우 부드럽고 매끈하게 진행되어 어떻게 지금 딱 맥을 끊고 무례하게 아무나 붙잡고 겁없이 아무개와 말을 튼다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참 일의 진행이 매우 이상하지만 딱히 설명할 수 없는 흐름에 의해서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일이 이어지고 있었다. 불꽃이 타오르는 화무 주위로 사람들은 대학생들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옛 연인처럼 어색한 분위기로 호감가는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다정한 행실로써 또 그것을 선회하는 뭔가의 일치된 암묵적인 약조이자 서둘러 하나된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며 구호를 외치고 으쌰으쌰, 으쌰으쌰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7인의 친구들도 그 가운데 끼어 정확한 가사는 모르니까 발음을 살짝 뭉개서 잘 아는 듯이 노래를 따라부르고 과장하면서 구호를 그들과 비슷하게 외치다가 한발 앞서서 또 불분명한 발음으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면서 그들과 일체가 되어 뭔지 모를 그 의식이자 놀이를 거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밴 차량 동호회, 그냥 그렇게 부르자, 일원이 모두 캠프파이어에 열중하는 사이 어느새 밴 차량들은 모조리 배에 선적되고 있었다. 자동차 극장의 쪽문과 개구멍과 북서쪽 통문과 후문과 정문 모두 저쪽 언덕을 넘어서는 부두와 연결되어 있었다. 자동차 극장과 캠프파이어 장소에서는 부두가 보이지 않지만 길이 살짝 꺾이기만 하면 바로 바다가 보이는 항만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캠프파이어는 종료된다. 이제 노래도 다 끝나고 구호도 이미 다 외쳤고, 으쌰으쌰는 지나갔다. 그리고 함께 했던 사람들은 모두들 뛰어서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큰 배로 이동한다. 모두 그곳으로 뛰어간다. 때문에 자, 이제는 물어봐도 되겠지 했지만 무작정 던지는 질문에 대한 절묘한 적기를 놓쳐버린 것 같다. 여기서 경우의 수는 2가지. 첫째, 그들을 따라간다. 따라갈까? 아니. 지금 왠지 모르게 힘이 나지 않는다. 의욕이 차오르지 않는다. 둘째, 그들을 따라가지 않는다. 당연히 경우의 수는 이걸로 끝맺어야 하는데 일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이 타고 왔던 밴 차량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딨어, 밴? 우리의 밴? 화이트 밴?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럼 이제 남은 건 경우의 수 1번이다. 구관이 명관이 되어버린 건가. 그게 이건 아니지만 딱 어쩔 수 없이 서로 멍하니 쳐다봤다가 쳐다봄을 당했다가 눈빛이 왔다 갔다 갔다 왔다 하면서 거의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얘네들은 저 힘껏 뛰고 있는 동호인들의 뒤를 쫓아 뛰기 시작한다. 아 놔,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그건 그거고 뛰고 있는 몸은 몸이다. 숨이 차오른다. 평소에 운동 좀 할 걸, 같은 생각도 들고 저들을 따라가면 어디가 나올까, 이렇게 몇 시간 뛰는 건 아니겠지 라는 생각도 든다. 이따금 왜 뛰고 있는지도 잊어버린다. 그냥 뛴다. 마치 그냥 사는 것처럼. 우리들 말이야 하워드의 요트를 호출할까 라는 텔레파시를 누군가 보낼려다가 아직 바다가 보이지 않아서 민첩하게 그만둔다. 일단 이 친구들은 동호인들보다 상당히 뒤쳐졌다. 초반에 출발이 늦었고, 뛰는 주력에서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동차 극장과 캠프파이어를 했던 장소에서 어느 만큼 이동해서 바다가 보이고 밴들이 실려진 동호인들이 뛰어서 승선한 배가 보인다. 그리고 그 배는 출발한다. 그들은 꽤 멀리서 소리만 듣는다. 뱃고동 소리, 빵~~~~ 빵~~~~!
   「......」
   「뭐야?」
   「저 배는 동물원일까?」
   「도대체 쟤들 정체가 뭐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따라가야 돼 말아야 해?」
   「뱃고동이 울렸는데 왜 아직 출발하지 않은 거야?」
   「지금 배가 출발하면 우리에게 좋지 않은 일이잖아?」
   「저 소리는 그 소리가 아니야. 원래 뱃고동은 두둥~ 이렇게 울려. 큰 차에서 애들 장난감 뛰뛰빵빵 소리가 나겠니. 거구에 날렵한 데다가 무섭게 생긴 마초의 목소리가 기대를 깨버리면 슬픔이면서 코메디고 동시에 그건 뭐랄까 이도 저도 아니게 돼. 뭔가 될려다가 말아버린 언제인지 모르게 잊혀져버린 어릴 적 꿈 같은 거. 기다려 봐. 아니야. 우리 밴 차량이 저 안에 있잖아. 가야지. 뭐해? 뛰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맞어. 저 배에 정말 동물들이 타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 그것도 고등동물로. 그들은 사람처럼 말을 한다구. 우리보다 더 똑똑해. 동물농장? 이걸 놓쳐도 될까?」
   「우리가 또 그렇게 매정하진 않잖아. 자 슬슬 뛰어야지.」
   재빨리 배 근처까지 왔는데 그 배는 두둥 소리를 내면서 떠나고 있다. 출발할려면 차라리 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움직일 것이지 애타고 아쉽게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잘 하면 될 듯 하기도 한데 하면서 마음을 접지 못하도록 애매하게 약올리는 거도 아니고, 대뜸 배가 멀어지는 걸 보니 잊고 살았던 유명한 가곡의 한 소절이 각자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게 아닌데...」
   「저 친구를 이대로 보내면 우린 뭐가 되는 거지?」
   「오 세상에나... 이런 장면을 보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야...」
   「오, 배가 멈췄는데? 맞지? 배가 앞으로 안 가.」
   「오오, 정말! 아, 그런데 다시 간다. 에잇 뭐야 저거! 괜히 여운을 남기고 있어. 우리가 배웅하는 거 알고 있는 것처럼.」
   「아주 멋진 생각이 떠올랐어.」
   「뭔데?」, 「뭔데?」, 「뭔데?」, 「뭐냐구?」, 「어서 털어나봐?」
   「그건 말이야...」 침묵하고 뜸을 들이면서 혼자 어떤 음률을 느끼는 듯한 표정이 지나간 후, 「그건 말이야... 저기 보이는 나룻배 보이지? 딱 봐도 주인 없을 거 같지 않니? 저거 타고 우리 딱 100미터만 쫓아가 보는 거야. 100미터 갔는데 가망 없다, 그러면 돌아오고. 어때? 그 정도는 해줘야 할 꺼 같지 않냐. 지금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중의적으로 상황을 해석할 수는 없어. 어때? 할꺼야 말꺼야?」
   「끝내주는 생각은 아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 같다. 난 찬성이야.」
   「그래 넌 아무래도 육식체질 같아.」
   「여부가 있겠어? 자, 가자!」
   얘네들이 나룻배를 타고 딱 80미터를 쫓아가니 마치 서로 짠 것처럼 배가 멈춘다. 왜 배가 멈췄냐 하면 누군가가 애완견을 바다에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개헤엄을 아주아주 잘 하는 녀석이다. 게다가 녀석은 선박보다 얘네들 나룻배에 훨씬 가까이 있고 마침 그들을 향해 헤엄쳐오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개를 구조하여 배 근처로 갔다가 배에 승선하게 된다. 여기까지 와서 배가 어디 먼 바다로 떠나 대륙을 건너가지는 않고 배는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향했다. 항구를 떠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바다에서 많이 멀지 않은 도시의 강변에서 멈추었다. 그 정박지에서 보이는 간판은 적십자 마크가 보였다. 좀 더 자세히 보니 글씨가 씌여있다. 정신병원이라고. 뭐야? 그리고 배는 밴 차량들을 모두 토해냈다. 일하는 사람들은 뭔 일인지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고 조그만 정보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다. 단단히 세뇌 당하고 교육받은 것 같았다. 또 배 안에는 동물도 없었다. 아까 구조한 강아지가 다였다.
   에잇 하나도 재미없네. 소설이 망해가는 거 맞네. 그랬자나 정말로. 작품성, 진작 포기했어. 흥행? 언제부터 흥행을 알았다고. 남이 어렵게 직장생활 오래해서 착실히 모은 돈으로 차린 사업이 종지부를 찍은 걸 놓고 망했다고 뻔히 수근거린다면 아무래도 좀 미안하면서 충분히 겸연쩍은 일이겠지만 내 소설 내가 망했다는데 누가 뭐라 그래? 이 소설은 위대하다, 나 글 잘 써, 내 소설을 왜 그렇게 재밌다고들 하는지 난 도무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 제 소설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정말 그대를 사랑해 그대가 나를 떠나도, 이런 것도 아니잖아. 심지어 그 말 듣고 읽고 누가 웃기라도 한다면 몇 박자 늦게 언젠가 웃을 것이 미리 예견된다면 그거야말로 대박 아니야? 원래 일반인들은 절대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니까! 하여간 인문-교양서와 시집 주변을 오락가락 서성거릴 때부터 (네가) 알아봤어. 뭘 해도 안될 줄 말이야.
   세상에는 추위를 참는 걸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소설을 읽거나 쓰는 걸 제일 마음 내켜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공기없이 살 수 없다. 조금 찬 공기, 더운 공기보다 시원한 것 뿐이다. 그처럼 인문-교양서나 시도 소설과 같은 글이다. 형식만 다르지. 그걸 소설처럼 읽거나 쓰는 차이는 있고. 한때는 그렇게도 싫은 게 많았다가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서도 여전히 싫은 게 많고 매사 재미없는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런 보통의 어른들이 공통적으로 매우 오랫동안 선천적이면서도 후천적으로 딱히 반가워하지 않는 것을 복권 당첨장에서 뽑는 7번 번호가 적힌 공처럼 하나 뽑아보자면 바로 이것이다. 대사로 치면, 난 사람 말 많은 걸 제일 싫어해.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기분이 좋을 때는 또 안 그런다. 게다가 기분이 그냥 그럴 때도 말수가 많은 것에 대하여 그 내용이 웃기고 재밌으면 괜찮다고도 했다가 별 신경을 쓰지 않기도 한다. 내가 왜 이런 거지 같은 형편없는 글을 써야하지? 이런 확 마 그냥 잡히는 거 딱 아무거나 거 마 막 때려부셔 버리고 싶구만! 왜 이렇게 인생은 짜증나는 일 투성이일까 내 마음 누가 알아줄까(으 오글오글)! 완전 속시원히 얻어걸린 뭔가를 초전박살 내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야, 하늘에서 고액 지폐가 아니라 빗방울 대신 개구리가 내리는 것처럼 동전이 쏟아지면 어떨까, 정말 아주아주 드물게 어쩌다 아주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만 이런 삐─삐─삐─ 독자와 친해졌다는 핑계는 정당하나, 말이 되나? 안 될 건 뭐야. 내가 미친거도 아닌데 가만 멈춰있는 사물이든 뭐든 식료품 하나를 들고서 그 원료를 읽어볼라 하면 그 미친 원재료 글들이 혼자 살아서 움직여 살아서 움직여 가만히 서서 거울을 봐도 거울 속의 나는 춤을 추면서 난리를 쳐 반 고흐가 그린 그림의 구부러진 그런 모양처럼 아 미치겠어 세상이 빙빙 돌아 빙빙 돈다구 모든 것이 빙빙 돈다구 라면서 지금 현재 글을 쓰는 사람의 기분이 별로이니 그 글을 읽는 사람의 기분 또한 그와 비슷해야 하겠지만,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 오히려 그분들은 나와 정반대로 그야말로 날아갈 듯이 기분이 상쾌하고 즐거우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면서 행복해하고 고귀한 진리를 칭송하고 밝고 한껏 유쾌한 삶을 살아가면서 기쁨의 아리아를 부르고 아름다운 인생을 찬양하며 한 편의 사랑 노래를 찬미하면서 난 너무 예뻐 난 너무 기뻐 난 너무나도 즐거워 미치겠단 말이야 그랬으면 좋겠다 그분들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얼굴을 모르는 그대와 지존과 공주님과 왕자님과 그분들이 말이야, 진심으로! 그러나 설혹 그렇지 않다면 그건 뭔가 대체 뭐란 말인가, 에 대하여 7인의 친구들은 말하고 있다. 정신병원 앞에 있으니, 밴 차량은 무사히 찾았지만 그곳에 있으니 사람이 좀 이상해지는 것 같다. 괜시리. 그러면서 또 무엇이 좋아, 전에는 뭐가 좋았어, 뭐를 하고 싶어, 어떤 인생을 살고 싶었어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최근에 내가 살고 있는 행태를 보면 나는 예전에 이렇게 살기를 바라지는 않았어 이렇게 살게 될 줄은 꿈에서도 꿈속에서 꾸는 꿈에서도 몰랐다구 라고 말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를 나는 최근에 즐겨보고 있어... 이렇게 일선에 놓여질 것 같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대화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곳은 정신병원(앞)이니까. 그래서 일단 차를 타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처음 우울한 파티가 시작되었던 그곳으로. 그리고 그들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그냥 어떡하다가. 완전 제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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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61

from 소설 2015. 11. 29. 17:25

   나는 한동안 소설을 못 쓰고 있었기 때문에 또는 간혹 매우 적은 양의 글을 쓸지라도 거의 핸드폰이나 중고로 구입한 노트북에 글을 썼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볼펜을 쥐고 수첩에 글을 쓸 때의 오묘한 즐거움은 잊은 채 살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그야말로 완벽한 왼손잡이에서 오른손잡이로 전향했다. 뻥이다. 왼손잡이로 전향할려다가 어중간하게 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3가지 방법과 더불어 말을 녹음하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래도 제일 비중이 높아야 할 그것은 그러고 싶은 것은 단연 손글씨다. 글이 어떤 방식으로든 잘 써진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어차피 방법의 문제이지만 육필로 쓴 글은 그 경험을 원하는 것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매력과 함께 어설픈 이유가 있기는 있다. 왜냐하면 펜으로 필기를 할 요량과 깜냥이면 그 쓸 것에 대한 씌여질 뭔가에 대한 막연한 그림이 어느 정도 머릿속에 구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핸드폰이나 키보드를 두드려 글을 쓰는 것 보다는. 적어도 초고는. 내용이 어디로 갈 것인가, 는 제쳐두고서. 그래서 나는 지금 뭔가 잘 안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왜 그런가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당연히 명료하게 그 이유는 찾지 못했고.
   그러다가 나는 차를 운전해서 무작정 시골과 도시와 바닷가와 번화가를 돌아다닌다. 분명코 정처없는 움직임이지만 굳이 왜 그렇게 뭘 찾는지 모르는 것처럼 정신없이 찾아 헤매는가 그 동기를 부여잡고 날 추궁하고 널 추적해 봤드니 이런 소묘적인 단상이 언뜻 내 옆구리를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아마도 좀 더 비현실적인 공간들이 모여 있는 지극히 이상적인 장소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를테면 오롯이 현대적이지만 상당히 촌스럽고 추상적이면서도 전위적이지만 그런데 왠지 모르게 자꾸 끌리고 뭔가 기분이 좋은 그런 동네. 그런 데가 어디 있을까. 어디 있긴 젊음의 기운이 넘치는 거리나 이성의 비율이 유독 불균형한 동네, 새롭게 뜨는 시내, 이것이면 그나마 후보군으로서 완전히 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건 내가 찾는 전시회가 아니다. 내가 찾는 서커스단은 이런 게 아니야. 은근히 암시한 다음 서서히 달아오를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자, 7번 장면 들어간다. 그녀를 만났어. 눈빛이 만화처럼 확 불타오르면 안 돼. 다가가. 다가가. 키스를 할 듯 하다가 볼에 한 번, 키스를 할 듯 하다가 이마에 한 번, 키스를 할 듯 하다가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여, 키스를 할 듯 하다가 정말로 할 듯 했는데 순간 개처럼 개처럼 그녀의 코끝을 핥아, 코끝을! 그러면서 막 강아지처럼 흥흥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해 본격적으로 개처럼! 마치 상대가 혹시 감지할지 모를 감미로움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황홀함이란 무엇인지 그 전에는 미처 한 번도 생각조차 상상조차 못했다는 것 같이. 에로 영화 감독이 가차 없이 요구하고 정중히 주문하는 바로 그것. 아름답고 신비로운 젊음의 무지개가 느껴지는 그런 뭔가, 그것이 지금 나 자신과 내 환경에 없다는 허전함. 찾아봐도 둘러봐도 그런 건 없다, 없어. 내가 찾는 놀이공원은 이런 거였다. 3번 연속 바이킹을 타도 구토감이 일지 않는 곳, 3번 연속 청룡열차를 타도 실제로 구토하지 않는 촌락, 3번 연속 우연히 놀이공원에 놀러온 멋진 연인들의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아도 작가나 미술가나 음악가 커플이 생각나지 않는 그런 예술촌. 그게 뭐야? 생각해 보니 그것은 과거의 시공간이나 문학에나 나오는 게 그나마 제일 그 감성에 가까울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이다. 거리를 둘러보면 모두 세련된 건물과 고상한 이름들과 은은한 디자인에 최신식 설비를 갖춘 건물들과 행인은 (반올림해서) 100% 영화배우들. 너무 했나? 즉 거리에 보이는 카페, 빵집, 문구점, 편의점, 식당, 서점, 음반 가게, 극장, 전자제품 가게, 의류점, 백화점의 간판을 보면 하나 같이 1) 좋은 의미의 이름 2) 나름 생각해서 지은 이름 3) 구식이 아닌 그나마 새로움을 찾으려는 기미가 보이는 애쓴 흔적이 느껴지는 작명에 시간 좀 들인 듯한 이름 4) 현대적!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순간 나는 몸짓으로 뭔가 있어, 안면으로 두근거리는 의심을, 손동작으로 재담꾼의 소리내기와 듀퐁 라이터의 극렬한 시간의 구부러짐의 입체적 구현, 동시다발적인 움직임을 선보이면서 나는 그것이 대충 뭐란 것을, 무엇일 것이다 라는 호기심을 일으키는 예감을 떠올린다. 그 예감을 하기 전과 후 모두 나는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고 있다.
   간출이면, 내가 원한 것은 이랬다. 찾집 이름은 소설, 만년필 이름은 환희, 아이스크림 가게 이름은 낭만, 극장 이름은 신비, 음악원 이름은 불가사의, 미용실 이름은 예술, 후라이팬 이름은 세계 3대 후라이팬, 그대 이름은 내 수준은 10억명 중에 1명, 립스틱 이름은 화장발, 마스카라 이름은 윌, 바디클렌저 이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은 예뻐지고 있다, 사전 이름은 행복, 웹사이트 주소는 iLike.com, 내가 사는 곳은 너의 마음 속, 멜로 영화 대본을 쓰는 극작가 이름은 춘화, 한때 필명은 JS(진상), 내 뽀얀 엉덩이는 누가 누가 봤을까, 마을회관 이름은 꿈, 도시 이름은 내 사랑, 학교 이름은 초현실주의, 행위예술을 위한 공원 이름은 환상관, 옷집 이름은 애인, 근사한 음식점 이름은 천국, 미술관 이름은 돈 그리고 당신의 나이트 클럽 이름이나 집 이름은 고품격 그렇게! 곧 적당히 촌스러우면서 현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시간을 앞선 느낌이 들고 동시에 시대에 뒤쳐진 느낌과 함께 고급스럽게 복고풍을 지향하는 상당히 우아한 정말 어려운 이름짓기가 아닐까, 그런 느낌이 드는 동네를 찾은 것이다. 마침내. 오 이럴 수가. 써야 하는 소설은 안 쓰고 지가 무슨 연예기획사 캐스팅 매니저야? 뭘 해도 꼭 이렇게 살짝 돈 느낌의 정신이상자 취향의 변태의 일관성을 두루 갖춘 마치 이런 단어를 난데없이 떠올리게 만드는 추구 성향과도 같다. 날개, 키스, 환송, 성염색체, 소변 보는 개, 소풍가서 도시락 먹기, 나체로 춤추기, TV와 성채, 대부와 인형,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무슨 소설이 장난이냐!
   이 신기루와 같은 공간을 찾은 그날은 가을치고는 여름처럼 후덕했고 풍향은 맞바람이었으며 또 우연히 근처는 해변가 모래사장이고 나무와 풀과 바람과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카페들이 많은 살짝 낙후된 지역이지만 시골인 것을 감안했을 때 나름 상권도 형성되어 있고 경치도 그런대로 받쳐 주는 동네다. 그래서 나는 어떤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난쟁이처럼 행진하고 똑똑똑 하며 동화 속 등장인물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노크를 하고 싶어졌다. 그것의 하늘거리는 불확실한 종착역은 무기력한 불감증일지라도 살아 있음의 징표이자 최근 또는 예전에 어딘가에서 유행했을, 아마도 유행을 타지 않는 게 더 나을 단어 '치유'를 떠올리면서 요즘 실패했던 따라하기에 재도전하는 기회를 즉시 그곳에서 붙잡아 실행에 돌입한다. 나도 모르게 예고 없는 흉내하기 감행이 벌어진 것이다.
   해변가, 모래사장, 바닷물이 철썩, 갈매기가 끼룩끼룩, 바람에 날려오는 이국적인 시상과 난데없이 떠오르는 어떤 친구의 이혼 소식과 한물 간, (영영) 갈 유명인의 파경! 해변가로 시작해서 파경이라! 가히 기분이 좋았던 것일까. 즉 나는 그 근처에 주차하고 트렁크에서 커다란 수건을 꺼내고, 화장실에 가서 속옷을 벗고 은은한 꽃무늬 수영복 팬티를 입었으며, 철지난 시집을 한 권 들고 해변가로 갔다. 그렇게 모래밭에 큰 수건을 깔고 팬티만 입은 채 엎드려 시집을 읽는다. 시집 제목은 당신이 괜찮게 생각하는 것으로 아무거나. 찬 바닷바람을 맞고, 썬그래스를 끼고, 핸드폰으로 오래된 유행가를 틀고서. 원래대로-라면 난 지독한 독감에 그 즉시 걸려야 한다. 그건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얄미운 각본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말이다. 다른 말로는 숙명. 그러나 운명은 변하는 것일까? 여자의 마음처럼? 갈대와 같이? 아니면 호르몬 분비가 순간 너무 극적이었단 말인가. 나는 비록 닭살이 심하게 돋았지만 그 맹추위? 우수? 뭔지 모를 서글픔? 그 어떤 불편함을 잘 참을 만 했다. 일단은. 아 이 따라하기는 연이은 실패가 아니다. 어설픈 충동에 따른 시늉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것은 진정 재도전에 이은 축복이구나. 왜냐하면 나는 곧바로 기침을 하면서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니까. 하루가 지나도 독감에 걸리지 않을 것을 충분히 이유는 잘 모르지만 예상할 수 있었다. 저기 또 다른 낭만파가 있구나. 마침 혼자 왔구나. 여자다. 어떠하다. 어쩌면 좋은가. 그런데 특수부대 출신에 가죽점퍼에 가죽장갑을 낀 무섭게 생겼지만 상당히 멋진 모습의 남자친구가 음료수를 사러간 줄도 모르고 혼자 있는 왠지 뒷모습이 슬퍼보이는 분홍색 하이힐을 신고 엎어져 최신곡을 경청하며 로맨스 소설이나 여성 월간지를 읽는 여인에게 말을 걸어볼까? 지금 심정은 낯선 미인에게 뺨 한 번 맞는 게 뭐 대수란 말인가 그와 같다. 설령 그렇게 될지라도 오히려 정체가 수상한 알 수 없는 그녀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이쪽의 무모함에? 그녀가 한번도 그런 터무니없는 치근댐을 혹시라도 살면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을 만큼 그 정도로 몹시 도도한 여인네였다면 그건 당연히 그 자리에 있던 당신의 건장한 남아로서의 불충임이 분명하리라. 물론이지. 이곳에서 나의 고조된 감정은 딱 이 정도다. 즉 난 감기에 걸리지 않았단 말이다. 그것만 해도 어디야.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이 나이 먹고 그거라도 내 마음대로 해봐야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나는 추위를 잊고 싶었던 것일까.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옛날에 나는 드라마에서 봤다. 영화에서도 봤다. 실제로도 봤다. 나만 아는 나만 생각할 수 있는 특별함이 아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손쉬운 낭만, 그것을 나도 그리고 당신도 봤다. 딱 봐도 멋져 보였어, 이미 옛날에. 보자마자. 그동안 따라하지 못해서, 안 해서, 언젠가 따라했다가 실패하고 낭패를 겪어서 끙끙 앓았나 봐. 이제야 성공했다. 몇 분 전에. 이게 낭만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낭만이겠나. 단어를 외국어로 바꿔도 그것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느낌이 오히려 더 배가될 뿐. 고양이의 뿔 달린 펑크 목줄이 그것이라면 그나마 나을 것이다, 하루 온종일 게임을, 1주일 내내 낚시를, 1달 내내 스포츠카 여행을 그것이 낭만이라고? 진짜로?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개뿔이 낫겠다. 낭만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건 남자끼리 따로 얘기하자! 여자애들 가운데 드물지만 그런 거 좋아하는 애들도 있으니까! 누구? 어? 걔?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쉿!) 낭만은 그런 게 아니다. 낭만은 해변에서 큰 수건을 깔고 애인과 같이 수영복만 입고 엎어져 있어도 춥지 않은 척, 전혀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연기하는 것, 전혀, 바로 그게 낭만이다. 그걸 간과했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낭만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름이 돋아도 참아야 한다. 꾹! 안 그러면 낭만은 다른 사람에게 가버린다. 휘발성이 강하니까. 자기는 여자와 살아 보니 남자는 음식을 잘 만드는 여자를 만나는 게 좋겠더라 그러니까 당신은 요리사와 결혼해라, 당신은 집 앞에 잠깐 우유를 사러 갔다올 때도 까탈스럽게 옷 입는 걸 신경 쓰신다 음 그렇다면 한창 뜨는 패션 스타일리스트나 유명 패션 디자이너와 결혼하여라,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한다면 이건 낭만이 아니라 막 던지는 호언장담이다. 낭만과 낭만이 아닌 것의 차이점, 유의해야 한다. 다시 낭만으로! 한겨울에 매서운 눈바람이 날려도 멋지게 수트를 벗어서 그녀의 양 어깨에 걸쳐주자. 춥지? 하면서. 이게 낭만이다. 절호의 찬스에 등장하는 교체 선수. 이게 낭만이라고. 여기서 반대하는 사람은 다 보통 남자다. 난색을 표명하는 여자는 뭐다? 그냥 조연감 수다녀일 뿐이다. 차라리 수녀가 낫다. 훨씬 낫다. 진짜 도도함이 무엇인지 여자들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어금니 꽉 깨물고 웃지 마시라. 이제 그럴 때도 되지 않았나. 정녕 이 모습이 낭만이 아니라면 어디서 로맨스를 찾고, 언제 미래를 위해 기도하며, 어떻게 함부로 시를 읊조리며, 카메라에 이 순간이 잘 담겨지나 내 고백을 그녀가 감동적으로 잘 흐느낄까 하면서 이 시간을 만끽하면서 즐기겠나, 어떻게? 그래, 숙녀에게 말이다. 숙녀와 함께. 그냥 여자, 가 아니라 숙녀! 말만 들어도 뭔가 근사한 느낌이 묻어나는 숙녀! 사모하는 여인이 혼자서 상상을 하고 드물게 (음흉한?) 악몽을 꾸며 연애 소설을 읽는 그녀의 방 창문 밑에서 세레나데를 불러보지 못했다면 이건 진정한 멋쟁이로 거듭날 수 있는 필수 과정이자 역전의 찬스이며 필요충분조건 아니겠나. 해변 백사장에서 추울 때 수건 깔고 수영복 입고 일광욕 하기. 그렇게 엎어져서 찬바람 맞으며 책 읽기. 설마 그 책이 이 책? 말문이 막힌다. 그곳엔 샌드위치와 가벼운 음료가 있어도 괜찮다. 수줍은 음악도 함께 한다면 더욱 그럴싸하다. 겨울이 코앞이다.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지 말자. 시간은 빠르다. 설령 그때 당신이 그녀와 함께하지 않을지라도 춥지 않다면 그것을 살짝 참는다면 그때는 예술적 감성과 천재적 영감이 뻥뻥 터질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곳에서 따라하기 대성공했다. 와우!
   그 다음에 나는 그 근방을 돌아다니면서 정착할 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둘러보았다. 그러다 괜찮은 장소를 찾았다. 항구도시에서 도심지를 조금 벗어나 새로 조성되고 있는 신도심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대학교 그래 여기다. 딱! 나는 하숙을 하기로 결정한다. 자가, 월세, 전세, 여인숙, 유스호스텔, 게스트 하우스, 텐트등 주거 방식이 많은데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하숙이 딱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는 대학생도 있겠고 야간 경비원과 도시에 있는 회사에서 출장 나온 직원, 대학교 강사, 특파원, 여행지에 글을 기고하는 사람등 새로운 친구들과 젊음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대학가, 바다, 도시 그것이 모두 다 같이 근방 얼마 범위 내에 있으니까 여길 뜨면 미련한 짓이라고, 그건 바보가 틀림없다고 느꼈다. 운수 대통!
   나는 하숙집에 입성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절차도 간단했다. 나는 짐도 많지 않았다. 차로 카라반을 끌고 하숙집에 당도해서 하숙집 주인장과 담판을 짓고 계약하고 끝. 나는 하숙집에서 넘버 투였다. 나이순으로. 아 알카트라스에서도 넘버투였는데. 그때도. 이곳에서 나는 평균 연령을 조금 깎아 먹는다. 그렇지만 애들 맛난 것도 사주고 드라이브도 같이 하고, 하루는 낚시를 하루는 선탠을, 닉과 하워드와 마크와 알렉스와 케빈과 조니, 내 친구들이 도시에서 여기 놀러오면 멋진 차도 구경시켜 주었다. 금새 나의 입지는 안정되고 탄탄한 권위 또한 구축되었다. 든든하게. 하숙집의 멤버는 대략 많으면 20명 적어지면 10명, 보통 15명이 하숙집 구성원 평균 숫자다. 그 가운데 여자친구가 있는 친구도 있고 없는 친구도 있는데 녀석들은 꼭 남자 기숙사처럼 모두 거의 남자 대학생들이었고, 나는 좀 이상하게도 여자 기숙사의 노처녀 사감 같은 그런 기분에 빠져들었다. 히스테리는 느낄 수 없었다. 그거 별로다. 아침에 애들과 함께 밥을 먹고 녀석들은 학교로 몇몇은 직장으로 갔고 나는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 가운데 대학교 교직원도 한 명 있어서 대학교에도 놀러가고 그곳 도서관에 자주 들르게 되었다. 그곳에는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스쿨룩 옷을 입은 상큼한 신입생도 많았고 밤에 술집에서 일하는 것 같은 그냥 그런 의심이 드는 학생도 보였으며 어느 강사를 꼬시기 위해 여학생이 차를 대학교에 몰고 와서 남자 강사와 해변가로 놀러가고 해변가에서 모래사장에 큰 수건을 펼치지 않고 차 안에서 노트북으로 영화를 같이 보다가 성급하게 여학생이 남자 강사에게 부끄러워하면서도 대담하게 입맞춤을 시도하다가 거절당한 것처럼 보이는 새침한 여대생도 눈에 띄는 것 같았다. 축제 기간에는 유명 뮤지션과 헤비메탈 그룹 공연도 구경하고 학교 정문 옆에서 나를 교수인 줄 알고 인사하는 남학생도 있었다. 그땐 거의 회춘하는 기분이었다. 나를 교수로 착각한 것을 알아챘을 때가 아니라 그 이전과 그 이후가. 하긴 것도 그냥 괜찮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하루는 하숙집 멤버였던 미술학도를 따라가서 강의실 창문 너머로 누드 스케치 현장도 훔쳐봤다. 절대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다. 볼이 빨개졌다. 홍당무처럼. 많이. 아흐. 또 하루는 매일 헬스클럽에 다니는 다른 하숙집 멤버를 따라가서 헬스클럽을 구경하고 나와서 녀석의 여자친구와 그녀의 여동생과 함께 넷이서 더블? 어정쩡한 데이트도 했다. 어느 날 대학교 가로수길에서 유명 주류회사가 시음 행사를 해서 나는 낮술에 거나하게 취하기도 했다. 내가 마치 대학생으로 환생한 것 같았다. 학교 교정 잔디밭에서 술을 마시며 인생을 논하고 미래를 예견하며 참치를 잡고 고래를 보고 바다의 신을 만나러 떠나자며 떠들고, 사랑 노래도 불렀다가 오페라 아리아도 흥얼거렸다가 잔디밭에서 침낭 하나 달랑 놔두고 거기 쏙 파고들어가서 아침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후,
   오늘은 이곳에 첫눈이 내리는 날이다. 토요일이고. 우리들 하숙집 멤버들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미팅을 할지 헌팅을 할지 그것도 아니면 공부를 해야 할지 NC에 쳐들어 가야 할지 망설이면서 들뜨고 초조해 하면서 최신곡을 듣고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물리적으로 어른이 되었지만, 그대들은 화학적으로 아직이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있을까, 누구 고액의 복채를 내고 저명한 포춘텔러를 만나본 사람 있냐고 물어보고, 각자 어떤 아르바이트를 해 봤는지, 특별하고 기억나는 야사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결단을 내렸다. 시간이 막 흘러내리고 줄줄 새면서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듯하게 쪼여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심이 무엇이냐면 대략 이랬다. 첫눈 오는 날을 이렇게 무의미하고 지루하게 보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뜻 있게 기억에 남는 일을 만들어야 한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으며 청춘은 그 단어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면서 슬슬 나는 애들에게 펌프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어설픈 동기부여지만 틀린 말도 아니고 나도 심심했다. 애들아 우리 하이틴 드라마를 한 편 찍어보자꾸나, 돈키호테처럼 저기 도시까지 걸어서 오직 걸어서 가보는 거다, 어때, 그동안 우리들끼리 단합대회 한번 해보지 못했다, 하면서 자꾸자꾸 그들에게 명분을 고취시키고 그 줄거리를 상상하게 만들고 따라서 나도 주인공이다, 뭔가 중요하면서도 재미난 일이 있을 것이다, 나중에 보면 이것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라는 마법적인 주문에 심취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했다. 차츰 하숙집 멤버들은 나의 허황된 낭독과 어느 연가의 가사를 급한데로 갖다 붙인 탄식에 그들은 그야말로 홀딱 빠져버렸다. 이 순간만은 나는 신흥 연예기획사의 잘나가는 대표고 승승장구하는 개그맨이고 고품격 소설을 지겹도록 출간해대는 작가가 된 것 같았다. 저 하늘의 빛나는 별인 것 마냥. 애들은 꼭 그곳의 A급 배우이자 가수이며 한창 기예를 갈고 닦는 후보생인 것처럼 느껴졌다. 애들에게 청초한 꿈을 주입시키다 나도 최면에 빠져버린 것이다. 마치 역발상 투자처럼 역최면에 빠진 것이다. 약간 부족한 감이 있지만 거의 애들의 환심을 샀고 그것을 어딘가에 저당 잡히고 대출도 받았다. 이미 할 건 다 했다. 추가 환심까지 덥썩 손에 쥐게 되었다. 앗싸, 라는 환호성을 내뱉지는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표정과 그윽한 미소와 덤덤하며 차분한 어조로 바람이 빠지지 않게 주의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 순간이 언제까지라도 지속될 것 같았다. 그 환각이 풀리면 그냥 행사가 파토날 수 있으니까, 어떻게 빠트린 환청과 환영과 환시를 동반한 각성 상태인데 여기서 물거품처럼 멈출 수는 없다, 고삐를 쥔 김에 바싹 바짝 당기기로 마음 먹었다. 내심 점점 내가 B급 사기꾼이 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지만 솜사탕 같은 첫눈을 보고서 딴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고 결정적인 연설에 돌입하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다짜고짜!
   「지금 우리, 저 도시까지, 첫눈을 맞으면서, 함께 걸어가는 거다. 행진! 끝없는 행진을 해보는 게 어떠니! 낙오해도 좋다. 멋진 추억으로 남지 못할 수도 있어. 그렇다고 마냥 방구석에 앉아 TV만 보고 마셨던 술 또 마시고, 했던 게임 또 하고 공부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여러분, 젊음이여, 청춘이시여 지금 이렇게 첫눈이 내리는데, 그렇게 기다리던 고운 내님 같은 그대를 생각나게 하는 첫눈이 내리시는데, 안 그래? 너네들 젊음의 생동감을 느껴보라구. 혹시 알아? 이 가운데 한두 명은 눈부신 여자친구를 만나게 될지. 어떤 스타일 좋아하는데? 말해보렴, 부담갖지 말고 말해봐. 어떤 스타일? 단발머리? 미니스커트? 펑크? 생머리? 꽉 끼는 청바지? 처음부터 끝까지 예쁘고 착하고 청순한 스타일? (손동작 딱) 그래 망사 스타킹? (또 한 번 딱) 레이스? (마지막 딱) 가터 벨트? 사람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거야. 그게 인간의 운명이야. 너네들이 바로 그렇다구. 제아무리 재주가 좋다 한들 신이 아닌 이상 앞날은 모르는 법이야. 무한한 낙관도 음울한 비관도 다 정답은 아니야. 가능성은 열려 있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아무도 모른다구. 한번 생각해 봐! 우리랑 똑같이 음악과, 약학과, 무용과, 미학과 여자애들이 그들끼리만 우리랑 똑같이 목표를 향해 저 도시까지 걸어가지 말란 법은 없어! 왜?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거든, 마음이 움직일 수 밖에 없어, 들뜬다구! 여자들은 첫눈을 좋아하는 법이거든. 많이. 그거야. 하지만 (침묵) 그러나 일단 도시까지 가는 동안 기쁘고 즐겁고 계속 재미있기만 하진 않을 꺼야. 중간에 불량배를 만날지도 몰라. 그래도 우리는 숫자가 앞서. 젊어. 패기가 넘쳐. 형도 있어. 청년들, 형 요즘 운동 한다. 난 도망치지 않을 꺼야. 아주 사소한 사고가 터질지도 몰라. 손가락 조심해야겠지. 다리 아프다고 힘들다고 지겹다고 누군가는 울어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어려움을 이겨내야지. 역경을 헤쳐나가야 해. 알잖아? 파도타기, 등산, 달리기, 숨이 차도 힘들어도 끝까지 묵묵히 계속 가는 것! 알잖아? 대마왕이 진짜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니? 이 다음에 어떤 화면이 나타날지, 어떤 내용이 나올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낭만, 동경, 신비, 환상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모른 채로 미래의 사랑에 대한 기대도 없이 아무런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대학교 졸업할 꺼야? 그럴꺼야? 어? 그게 뭐야? 그게 뭐냐구! 곧 있으면 방학이야. 한동안 우리는 헤어진다구. 지금은 연락하고 친하고 술 마시고 게임하고 떠들고 몰려다니고 그러면서 이 우정이 평생갈 꺼 같지만 천만에! 10년 20년이 아니라 1, 2년만 지나도 언제 알기나 했냐는 듯이 서로 모른 채 살게 돼. 사람의 인생살이가 원래 그렇단 말야. 너네들도 이미 알고 있는 거야. 하지만 누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우긴다면 너희들의 그 확신은 슥 모습을 감춰버리지. 슬그머니. 그런거야 아직은. 장기적인 비전, 찬란한 꿈, 그렇게 멀리 보지 말고 오늘, 나는, 이런 추억을 만들었다, 오늘, 나는, 이런 학습을 했고, 멀리서 멀리서만 좋아했던 그녀에게 말을 걸어 봤고, 나는 비로소 꿈을 내 꿈에 대해 생각해 봤다, 오늘, 나는, 그렇게! 첫눈 오는 날은 이거만 생각하자, 이거만! (침묵) 어때, 다들?」
   그렇게 우리들은 떠났다. 행진을 시작한 거다. 부푼 가슴으로 뭔지도 모를 기대와 함께. 우리는 대학교 앞 하숙집에서 시골길을 지나서 도로 갓길을 걷고 철길을 건너고 다리를 건너고 추위에 떨며 많이 떨면서 눈송이도 먹었다가 캔 맥주도 마시며 뚝방을 넘고 등대를 바라보며 신도심지를 지나 구도시의 NC까지, 그 근방 시내 산 중턱의 카페까지 가는데 성공했다. 마침내 성공했다. 완주를 하기는 했다. 그러나 우리는 막심한 체력 고갈과 예상을 초월한 굉장한 시간이 걸렸고, 낭만은 초반에 이미 포기했고, 분위기 급-저하에 눈이 엄청나게 엄청나게 내려서 겨우 겨우 다음 날 오전 조금 덧붙이면 거의 정오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중간에 쉬어가기도 했다. 도저히 걸어서는 끝을 낼 수 없다는 걱정에 사실 중후반 끄트머리에 다른 교통 수단을 조금 이용했다. 안 그러면 진짜 끝이 안 날 것 같았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하숙집 멤버들의 표정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상당히 어둡고 딱히 말로 하기 처참할 만큼 많이 안 좋았다. 굉장히 어두웠다. 낭만이라면 아주 신물이 난다구 같은 말이 이마에 딱 씌여 있다. 내가 전생에 낭만의 애첩이었냐고, 그거라면 속이 다 울렁거린다고! 천만다행인 게 그날 멤버에는 하숙집에서 우리들 보디가드 역할인 권투부, 학과 이름은 잘 모르겠다, 그 친구가 개인사정으로 빠져서 불의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다. 즉 리더인 나의 면상은 추위에만 허덕이고 그럭저럭 현상은 유지했다는 것이다. 같이 간 친구들, 그만하면 인성은 꽤 괜찮은 걸로 판명났다. 날 때리지 않았으니.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상황이 급변해서 뭔가 낌새가 달라졌드래도 나는 그 기세를 잘 가라앉혀 불상사를 사전에 방지했을 것이다. 주변에서 주워듣고, 보고, 배운 게 있어서 멜로드라마가 화려한 액션극으로 둔갑될 위기를 모면할 정도의 통빡은, 내게도 있다. 그분들 만큼은 안 되도 알게 모르게 어딘가에 내재되어 있긴 해. 때문에 남자는 배짱이요, 여자는 애교라고 그러나 이곳에 여자는 없으니 그 자신감을 잔꾀로 격하시키고, 따라서 그걸 꽁트로 승화시키는 건 일도 아니다. 여차하면 TV에서 자주 봤던 좋아하는 코메디언 흉내내기, 에 돌입하겠지. 어깨동무 먼저 꽉 하고(이게 중요해), 그런 다음 설 풀어, 형이 너한테 싸움진다, 애석하게 일이 이렇게 됐다, 하지만 다음 주 너네들을 위해서 5 대 5로 1차 소개팅 잡아놨다(당연히 거짓말!), 새로 부임한 김교수는 잘 있냐(re: 김교수란 사람은 없는데요 또는 지금 그 자리 공석인데요), 이렇게. 그러나 애들은 착해, 품성이 좋아, 잘 컸어! 그러나 이 친구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정말 우리랑(어쩔 수 없이 묻어가자면 나까지 슬며시 포함해서) 비슷한 여자애들 10명 20명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내가 미쳤지. 그러나, 만일 우리 중에 여자애들이 조금만 있었으면 얘기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런 계기로 결혼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여대생은 없었다. 무모한 모험단 일행이 남자 100%가 아니었다면 설혹 그랬다면 그것은 나중에 그냥 희뿌연 기억이든 기꺼이 찾아오는 추억이든 하염없는 낭만이든 해맑은 회상이든 그 무엇이든 그것은 분명코 훗날 시간이 지나서 떠올리자면 정말 어떤 눈부신 재물과도 바꿀 수 없는 뭔가가 틀림없이 되었을 텐데 그러고도 남았을 텐데, 아쉽게도 오, 아, 그건 아니었다. 그러하여 별다르고 유별난 사랑이나 즐거운 젊음의 시기를 딱히 기쁘지 않고 심심하게 그냥 그렇게 지내고 난 다음 어느 시점 이후 눈부신 재물이 제 발로 찾아오거나 행복한 생활에 사뿐히 안착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이땐 이랬다, 여기까지. 여기까지? 얘네들 입장에서는 그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서 이상하지만 그 무엇이 유달리 크게 보일 수 밖에 없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느니 개미와 배짱이라거나 토끼와 거북이요 어려서 너무 조숙했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었을까 어쩌네 그때 재미없어서 지금도 재미없네에 고진감래 같은 말까지 마술사의 뒤집힌 채도가 높고 명도가 낯은 검정색 모자 안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지는 그때가 지나고 나서야 결정된다, 마치 꿈의 해석처럼. 그래서 첫눈이 내리는 주말은 그냥 그렇게 개고생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하숙집 멤버들에게 신임을 잃었고 그후 애들이 같이 놀아 주지도 않고 슬슬 은근히 날 피하기 시작했다. 이미 예정된 시나리오인 것 같았다. 이런 결과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어떻게... 우째 이런 일이. 
   하숙집에 사는 이 친구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대화를 나누며 이런 미래를 그리고 산다. 인생은 아름답다! 사랑은 있다! 사랑을 믿는다! 사랑은 또 온다! 판타지는 못 봤지만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이다! 우리도 동화처럼 살 수 있고 아직 이름이 없는 내 인생의 장르는 내가 선택할 수 있으며 복권은 꽝일 수 있지만 삶은 의미가 있다! 엄마 난 노을을 보면 왜 슬퍼지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빠 인생이란 무엇인가요! 우린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뭐 재미난 일 없을까! 우리 앞에는 왜 멋진 남자가 아니 여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왜 우리는 연애를 못할까! 우리 동네 서점은 문 닫았고, 우리 동네 꽃집은 폐업했고, 우리 동네 고양이 카페 사장은 장사가 안 된다고 망할지도 모르다며 매일 독주를 들이켜! 동네 산책하다가 어느 찾집 앞을 지나면서 더럽히고 싶은 새하얀 도화지처럼 생긴 여인이 홀로 쓸쓸히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푸른 커텐 틈 사이로 보이길래 몰래 날 잘 숨겨줄 것 같지 않은 나무 뒤에서 훔쳐보고 있었는데 그렇게 내 마음은 그쪽으로 건너갔는데 왠지 발이 따뜻해 바람불고 추운 날이었는데 양말을 안 신었거든 게다가 발만 빼고 무척 두툼하게 입었는데 발만 슬리퍼 차림이었어 그래서 이상해서 아래를 쳐다봤지 그러니 글쎄 근방을 돌아다니는 똥개가 내 발에 오줌싸고 도망갔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녀석이 착각했을까 자주 오줌누는 나무와 내 육중한 다리를 놓고? 새 신발인데 비싼건데 아직 할부 남았는데! 데이지꽃을 안겨줄까 라는 말을 듣고 기분은 좋겠지만 정작 여자친구에게 데이지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향기를 품고 있는지 꽃말이 무언지 아냐고 물어보면 그런 걸 왜 내게 묻느냐는 표정을 지어 그러다 30분이 지나면 이유없이 날 꾸짖어! 나는 나 술 잘 마셔 그러지만 여자친구는 그래, 사람들이 왜 나보고 글을 잘 쓴다고 노래를 잘 부른다고 춤을 잘 춘다고 말하는지 잘 모르겠어, 항상 그런 식이야! 나도 전-여자친구랑 서로 너무 안 맞아서 헤어졌어, 그녀는 착한데 정말 착하기는 해 예뻐 그런데 그런데 너무 이상해 막 이상해 많이 이상해, 처음에는 말하는 거도 어린애 같고 행동하는 거도 귀엽고 재밌었어, 세상의 끝은 손가락이라며 우주의 비밀은 모아이 석상에 담겨있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그녀, 햇볕이 따뜻한 공원 잔디밭에 엎드려 서로 턱받침을 하고서는 눈싸움을 하던 그녀, 무엇보다 <남몰래 하는 사랑>을 속마음과 달리 감추고 드러내지 않기를 잘 참지 못하는 그녀, 몰래한 사랑 바로 그것에 무척이나 목말라하면서 견딜 수 없도록 가차없이 그 언제라도 궁금해하며 애달파하는 그녀 그리고 그녀와 많이(?) 비슷한 그녀-들, 하루는 연애편지처럼 그걸 접어놓고 일해야 하는데 하루는 한 권의 인문-교양서처럼 잠시 제쳐두고 그것의 도정을 위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상남자 환장하게 남드는 사랑 그것이 뭐길래, 아니나 다를까 그녀 역시 그랬어, 그땐 애교 있고 우끼고 새롭고 얜 뭔가 다른 것 같았어, 자기도 그랬어 난 특별하다고, 처음에는 그랬다고, 중간에도 그랬고, 치근댐을 너무 받아 이젠 '치'자만 들어도 깜짝깜짝 놀란다고 이쁜 건 알아가지고 그러면서 내 남자친구 얘기를 친구한테 모른 사람에게 또 어디가서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셀 수 없이 계속 반복해도 오히려 좋았다구, 내 여자친구니까 자랑이 반복되도 한 얘기 또 하고 또 해도 투정부려도 그러려니 했는데 뭔 심도있는 말을 하면 블로그와 신춘문예에 매번 도전하는 글을 읽어 보면 도대체 뭔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읽을께 읽을께요 했지만 도저히 못 읽겠더라구 읽었다고 거짓말했지 호평 위주로 아쉬운 점을 곁들여 얘기해 주면서, 순전 지 자랑에 시기와 질투에 다시 자랑, 그래서 헤어졌어, 다른 애들과 똑같지 않을 줄 알았는데 금방 싫증나지 않을 꺼라 기대했는데, 그러다 헤어졌어, 참다 참다 더 참아야 하는데 그건 어려웠나봐, 내가 모자랐지만 내가 많이 부족했지만 그녀의 다음 남자친구는 좀 더 품이 나보다 넓었으면 좋겠어 그녀도, 다음 사람에게는, 그래도 좋아했는데 아직 좋아하는데 설혹 애정이 애련으로 바꼈을지 모르지만 하지만 난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쩜 이제 와서 보니 그걸 사랑이라 불러도 크게 흠잡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그때 몰입해서 노력하고 하나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나도 변했나봐,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 노래 가사처럼 모든 걸 다 주니까 떠난다네 남자를(여자를) 울렸으면 책임져야지 니가 뭘 알아 여자의(남자의) 마음을 여자는(남자는) 다 똑같나봐 우린 미치도록 사랑했었지 그러면서, 그런 사랑 해 본 사람 주위에 보면 별로 없어 책을 몇 권 써야만 하는(막상 써 보면 또 분량은 쉽사리 잘 안 나오는) 그런 사랑을 해 본 사람은 거의 없다구, 그러나 어쩌겠어,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나 만나고 나서는 변했대 줄 듯 줄 듯 하면서 안 준다는 남자들이 제일 꺼려하고 짜증나는 헤프지도 않고 안 헤프지도 않은 이상한 여자애로, 소문 다 나는데 소문만 나겠어 길게 따라다닐 껀데 평판이 무슨 비밀도 아니고, 몸이랑 마음이랑 따로 노는 애들은 또 뭐야, 이건 나 때문인가, 자기 인생이 틀어진 게 다 내 탓이라는 뜻인가 대관절 뭐가 그렇게 꼬인거야 심사가 어떻게 뒤틀렸길래 그런 것인지 난 도무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아무래도 가만 보니 소식통이 가져온 정보가 잘못된 것 같아 녀석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또는 그냥 생각없이 뻥을 친 게 틀림없어, 왜 난 아직도 거짓과 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일까,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남의 말과 타인의 글을 덥썩 믿어, 거짓말이 아니겠지, 우기는 게 아니겠지, 뭔가 근거가 있고 타당한 얘기겠지 하면서, 하지만 그나마 이젠 좀 나도 바꼈어, 어른이 되어가나 봐 이제야, 살다 보니 사랑이 다가 아닌 것 같아, 남의 주장은 일개 의견일 뿐이고 살면서 사랑 없이 못 살 것 같지만 또 그렇지도 않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 그냥 사는 듯 해, 그렇다니까, 그런데 세상은 세상은 그렇게나 사랑을 부르고 부르고 또 불러대지, 사랑이 무슨 죄를 지었나, 사랑이 공기와 같은 것인가, 사랑을 말하고 듣고 연구하지 않으면 못사는 것일까, 사랑이 도대체 뭐야 뭔데 그 난리야, 사랑이 무슨 컴플렉스일까, 사랑이 무슨 환상일까 그림자일까, 사랑이 어디 나뭇가지에 앉은 파랑새인 것처럼 부르면 꼬리를 흔들며 날 반겨주는 골든 리트리버인 것처럼, 왜 그런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 죄다 사랑 노래야, 그 주제 아닌 연극을 볼려 해도 거의 없어 책을 읽어도 그래 노래를 들어도 그래, 왜 그런줄 모르겠어, 엄마 말을 빌리자면 사랑이 뭐 밥 먹여주나 사랑을 하면 돈이 나오나 집이 나오나, 그래도 어른들 사석에서 말하는 거 들어보면 사랑은 아주 잠깐이고 형식이며 거의 돈 보고 수준 맞춰가며 결혼하는 거래, 안 그런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어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 내심 아는 거니까 어른이 되면 다 그렇게 변하나봐, 인간을 동물이 아닌 별종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이 이어져온 기간을 100으로 잡고 그 가운데 사람에게 사랑이 심각하게 중요시되고 최대 쟁점이 된 건 1이나 될까? 안 될까? 그럼 나머지 99는 그 대신에 그 자리엔 뭐가 있었을까, 그게 바로 이 세상의 비밀인가봐! 나는 마로니에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이상하게 노랫말로 들으면 내가 그걸 잘 알고 있다는, 내 추억과 마로니에 나무는 메타 데이터로 연결된다는, 내 사랑도 그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들어! 어떤 그래프의 가파른 곡선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난 그녀가 진짜 아픈 줄만 알았어, 많이 아프면 어떡하지 어디가 아픈걸까 지병인가, 설마 이 나이에 병원 놀이? 중2병은 아닐꺼 아니야! 한 편의 연애시를 읽고서 뭔지 모를 우수와 동경과 낭만이 느껴지지만 그 시가 뭘 노래하는지 그것에 대한 정연한 해석은 못할 수도 있어, 입 떡 벌어지게 그것에 대해 멋진 말을 하는 녀석들이 이상한거야! 그림 한 점을 보고 멋져 비싸겠네 뭐가 생각나 라면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이걸 그린 인간이 뭘 말하고 싶었는지 하나도 감 잡을 수 없다 해도 예술과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착하고 젊고 풍성한 모발에 피부가 탱탱하고 웃음이 많은 친구들. 느낌표가 몇 개 나왔는지는 몰라도 얘네들은 분명 상냥하고 꿈 많고 착하고 다정하고 밝고 멋진 대학생들이라는 건 아주 잘 알겠다. 내가 바로 얘네들에게 꽃다발이 아니라 실망감을 안겨줬다. 그들은 한동안 꽤 우울에 찬 외로움과 초록의 싱싱함을 놓쳐버린 상념에 젖은 나날을 보낼지도 모른다. 내가,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랬을까. 의도는 좋았는데. 처음엔 부푼 꿈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사랑에 빠진 것처럼 설레기도 했는데, 첫 눈에 반한 것처럼 가슴이 저미며 너무 좋아 그 아픔을 즐기는 것처럼 신나는 모험이지만 어려움을 이겨내면 정말 즐겁고 보람찬 감정을 공유할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게 내다봤는데... 무모한 장거리 도보 여행에 뭔가 신나는 일이 함께 할꺼야 라면서. 내가 동기부여에 환장한 놈도 아니거늘. 한심한 녀석. 네가 그들에게 괴로움을 선물하고 패배의식을 은밀히 심어줬다구. 알기나 해? 꺼벙하게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낼꺼야' 같은 산뜻한 긍지를 내비추는 다짐은 커녕 이불에서 나오기 싫어 아주 온갖 어린양을 다 보이지. '영화에서 본 것처럼 내 손이 나도 모르게 조금 친분이 있는 어느 여자 또는 그저 낯선 이성이며 타인인 그이의, 언제 봤다고, 그이의 볼록한 가슴에 덥썩 손이 자석처럼 끌려가서 붙으면 어떡하지?' 같은 얼빵한 상상이나 하면서 말야. 자책이 뭔 취미야? 유행이야? 어머나 세상에나 12살이랑 하나도 다를 게 없자나. 아아 몹시 허무하다. 지금 심정은. 
   낙심한 나는 교수진에 줄을 대볼까, 하숙집을 바꿔 볼까, 이것도 정착 생활이니 어디 여행이라도 갔다 올까 라면서 혼자 괜히 울적해진 기분에 밤거리를 막 쏘다녔다.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딱히 옛날에 잘 나갔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래서 나는 거리를 방황하다가 혼자 어떤 술집에 들어갔다. 술집 이름이 앞서 말한 것처럼 특이해서 들어왔다. 단란주점! 뭐뭐, 뭐한, 무슨, 그것이 아니라 그냥 단란주점! 단란? 판타지? 스릴? 그런데 바깥에서 보는 것과 달리 안에 들어가니 그곳은 보통 술집이 아니었다. 술집 안의 어떤 특별실로 안내되어 들어가고 그곳에 술과 안주가 세팅되고 아가씨들이 10명 들어와서 앞에 일렬로 섰다가 나가고 또 10명 또 10명이 들어왔다 나갔다. 내가 어떻게 뭔 결단을 내려야 했는데 어리버리 했나 보다. 뭔가 이상했다. 무서웠다. 느와르 영화에서 본 딱 그런 상황이었다. 난 그냥 뒤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 뒤로 날 누가 쫓아왔던지는 잘 모르겠다. 그 다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하숙집까지 뛰어왔던 것 같다. 혼자서 시골길 마라톤을 한 거다. 그 뒤로 나는 아,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라면서 멍하게 노을을 바라보고 괜히 길고양이를 찾아다니고 다시 바닷가로 가서 이미 첫눈이 내렸는데 다시 수영복 팬티를 입고 큰 수건을 깔고 선그라스를 끼고 일광욕을 시작했다. 길게는 못했다. 나는 슬럼프에 빠진 것이다. 깊숙히. 아마도 꽤 오래갈 꺼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침울했던 시기는 그렇게 길게 가지 않았다. 아직 갱년기는 아닌 것이었다. 그렇다고 발정기라고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하숙집 멤버들과 조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하숙집 멤버들 모두 1일 1실을 쓰고 식사 시간에 모두 모이는데 개고생 도보 여행 사건 이후로 나는 다른 방에 놀러 가고, 놀러 오고, 식사하며 대화하고, 저녁 식사 후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 참석하고 동석하는 횟수에 변화를 준 것이다. 애들이 공부하는 동아리방이나 일하는 친구들의 개인 사무실에도 잘 놀러가지 않았다. 일전에 같이 술을 자주 마실 때는 몰랐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애들이 착해서 그렇지 조금 꺼려하는 분위기가 있긴 있었던 것 같다. 한 10분 20분은 같이 술 마시고 떠들고 하며 좋았다가도 그 고비를 넘기기 시작하면 슬슬 애들 표정이 부쩍 어두워지고 미래를 걱정하며 자꾸 술을 많이 마시고 살면서 언짢았던 일도 얘기하면서 나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기들끼리 말다툼을 하고 사소한 시비도 붙고 내기도 하게 되고 그랬던 것 같다. 내가 눈치없이 골든 타임을 넘겨서 이제 교수들 쪽으로 가든 혼자 방황하든 그래야 하는데 괜히 혼자 들떠서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거다. 그래서 그때는 그걸 잘 알아채지 못했다. 빈말을 그냥 믿었던 것이다. 바보같이!
   그렇게 애들과 어울려 노는 걸 좀 자제하고 평소처럼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예술과 삶에 관해 생각하면서 거리에서 사람들 얼굴을 관찰하며 일상을 보냈드니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절대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무엇을 그렇게, 무엇을? 사람들이 딱히 뭔 일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평일에는 해질녁에, 일주일에는 금요일과 토요일에 괜한 기대감을 모두 조금씩 갖는다는 것을. 별일 없을 걸 미리 알면서도 어차피 다시 무료해지고 좀 맹한 모습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을 잘 모른다는 듯이. 인생은 그렇게 즐겁고 기쁘지 않다, 라는 것을. 남들도 다 그렇다는 것을. 특별한 일은 자주 생기는 게 아니란 것을. 그래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고로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일과 놀이에 정진하지는 않더라도 말로 남을 우끼지는 못해도 긴장감을 풀고 남의 기분을 웃기 직전의 상태로 만들고, 글로써 타인을 감동시키기는 어려워도 뭔지 모를 흥분이 섞인 감정을 태동시켜 보려는 시도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조금은 그렇게 했다. 그러니 그 뒤로 가끔 글이 써졌다. 그리하여 나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따라서 기분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곧바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저번에 떠나온 집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아주 잠깐 장소가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옮긴 후에 다시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종의 회귀본능일 수도 있고 그냥 아무 이유없이 변덕 때문에 그런 판단에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 왜 그랬냐, 는 별로 상관없다.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 참 단순하다. 나는 돌아가서 다시 잔디를 깎고 수영장을 청소할 것이다. 그동안의 생활을 글로 옮겨서 신작 소설이라고 우기면서 친구들과 운영하는 무명 블로그에 글을 올릴 것이다. 하숙집 친구들과 작별하고 하숙집 주인장과 인사 나누고 떠나는 일은 의외로 간소하고 조용히 잘 마무리했다. 그리고 나는 떠났다. 옛집이 팔리지 않아서 부동산 웹사이트 담당자와 다시 돌아간다는, 매물을 취소한다는 얘기도 마쳤다. 가기만 하면 된다. 설마 가다가 중간에 뭔 사건에 꼬여든다거나 하숙집 멤버의 전-여자친구가, 현-여자친구의 여동생이 아저씨 사랑한다고, 떠나지 말라고, 이 사랑을 나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사태는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다행이지만 그래서 좋은 일이고 안심이 됐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금 서운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는 걸 나는 부인할 수는 없다. 그랬다.
   그래서 나는 다시 돌아왔다. 잔디깎고 수영장 청소하는 집에 도착했다. 그동안 잔디가 많이 자랐다. 수영장에는 물이 아니라 꼭 콜라같은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흙탕물인지 탄산음료인지 잘 모르겠고 아무래도 괜찮다. 청소하면 된다. 나는 다시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리지 않는다 카페에 자주 들리고 1주일 단위로 1가지 일만 하는 생활 주기에 다시 빠져들었다.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오니 뭔지 모를 긴장감과 안정감, 그 둘이 친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지금 상황에 딱 맞는 속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동떨어진 말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 시점에 필요한 말 같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2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카라반이 생겼다. 중고 노트북도 생겼으니 긴요하게 써먹어야겠다. 다시 팔지 않겠다. 먼지 쌓이고 고장나고 타이어 바람이 빠질지라도. 그리고 둘째! 둘째도 중요하다. 둘째는 그곳이 변했다는 것이다. 많이. 그 집터와 집이 변한 게 아니라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가 변했다. 그렇다고 확 바뀌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예전에 있던 모든 단층이 지금은 2층으로 바뀌고 1층에는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는 그런 가상 현실 같은 얘기. 그러나 예쁜 초소형 주택과 얇거나 작고 앙증맞은 주거형 몇층짜리 빌딩도 하나둘 들어서고 있으며 시골이 점점 세련되고 고상한 모습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내가 봤을 때 딱히 장사가 될 것 같지 않은데 미래 투자가치도 별로 높지도 않고 거의 없을 것 같은데 호텔도 하나 들어섰다. 건물주이자 운영자의 일생일대의 소원이라서 큰 돈 버는 게 목적이 아니라서 지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유럽 3대 오페라 극장이나 유서깊은 카페와 관광명소, 천혜의 비경, 손꼽히는 고대 성벽, 영화에 등장한 그곳 등 그런 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래서 오히려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 갑자기 대도시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평소에 괜찮고 만족했던 평상심에 살짝 일시적인 흠집이 갈지도 모르지만 그땐 외딴곳으로 피신하거나 그냥 그런 저조한 기분도 솔직하게 터놓고 고백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지만 놀러오는 친구들이 없다. 글도 잘 안 써진다. 사실 나는 이런 권태로움이 마음에 든다. 이젠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건 마치 내 인생 컨셉 같다는 것을. 폭풍전야, 구질구질하고 험상굳고, 위협적이며 칙칙한 날씨, 행위예술, 생활연기, 여기서 들은 말 저기에 넘길까 말까 흥정만 하다 약만 올리고 냉큼 포기하기, 1년 내내 여행 계획만 짜다 끝나기, 무서운 얼굴은 물론 사람들의 화장과 옷차림과 단정한 구두와 스킬레토 힐을 훔쳐보다가 지쳐서 대놓고 빤히 쳐다보기, 초록색 피를 상상하기, 내가 막 그런 걸 좋아하는 걸 보니 나는 꼭 변태 같다. 이제 보니 시골이 딱 내 수준이다. 오랫동안 부풀린 바람을 빼고, 인생을 어느 만큼 겪고, 읽고, 듣고, 보고, 경험하니 내게 적합한 호사는 이 정도가 딱 알맞는 것 같다. 예전에는 간댕이가 부었던 게 틀림없다.
   자, 그러니 이제 나는 그리고 그대는 작품 속의 화려한 주인공을 꿈꿔 봐도 되고, 현대적이고 세련된 도시 생활과 최상층의 유희와 최고급 생활을 호시탐탐 노릴 것이다. 꿈만 꿀 것이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거, 이룰 수 없는 걸 꿈이라고 생각하니까 비논리적인 거도 아니고 이젠 그래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정말 꿈에도 몰랐던 마법에 걸린 청개구리가 된 것 같다. 만일 멀쩡한 청개구리를 왕자로 만드는 동화가 때로는 아주 우연히 정말 귀하게 믿을 수 없지만 있을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현실이라면 다른 말로 전설이라면 그걸 구현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고 게다가 그것이 자신에게는 결코 끊을 수 없는 권태로움의 즐거움이라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바로 권태라는 제일 아끼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뭘 해도 재미없다는 바로 그 감정이라는 사색가가 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세상은 넓으니까. 세상 살이가 원래 그렇다는 유대감도, 만물은 그럴 것이다는 동질감도, 기쁘고 즐겁거나 잔잔한 음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프고 처량한 노래도 있다는 엄연한 사실도, 죄의식을 동반한 즐거움도(이걸 언어에 따라 딱 1개 단어로 또는 2개 이상의 단어로 에둘러 말하는 차이는 있다),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도, 천사의 근사치와 빈자리도, 천사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도, 그 희망도, 그 진득한 희구도, 어떤 죄책감도, 혼자만의 그러나 결코 혼자만의 것일 수 없는 짠함과 쾌감도, 사랑의 복종과 그것의 항복도, 단지 인간이라서 그렇다는 종교에서 말하는 원죄나 과학에서 뜻을 짓고 설명을 하는 어떤 여러 단어와 현상과 조금 중복되며 축도의 차이가 있는 뭔지 모를 복죄 또한. 그가 그인가 그것인가 그 명사인가 바로 당신인가? 그대인가? 아닌가? 아니면 그분인가? 그는 누구인가. 그가 인간인가. 정녕 누구라는 말인가. 이것이 전보다 더 뒤쳐지고 더욱 덜떨어진 사념이 아니라면 좋으련만 꿈도 야무지다. 그런 엉터리 허구가 어딨나.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시작한 신화적 영웅담을 부풀린 온라인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마법사도 게임 소개 영상에서나 멋지지 실제 게임상에서는 맨날 지겹도록 돌아다니고 털리고 사기 당하고 대기하고 그게 절반이다. 아, 잘 모르니까 아마도 그럴 거라고 짐작한다.
   일단 여기서 단락을 넘겨야겠다. 나도 다른 소설을 읽을 때 그런 생각 많이 한다. 여기까지 읽고 다른 일을 해야 하는데 밥을 먹어야 하는데 나가봐야 하는데 묵직함도 좋고 달릴 때 달려야 하지만 소설의 다음 단락이 나오지 않으니까 많이 불편한 기분에 대해서. 이 소설은 워 얘는 뭔 문단을 나누지도 않고 꽉꽉 채워서 막 인정사정없이 쉬지도 않고 빼곡하게 썼을까, 하여간 소설 더럽게 재미없네, 뭔 소설 속에 불만과 의문이 그렇게 많아, 설정 인물 1명 정해놓고 자기가(소설가) 하고 싶은 거칠고 험악한 말을 전부 그 친구에게 일임한 거 아니야, 그런 불평이 참 많았는데 이제 보니 나도 그러고 있다. 귀 간지럽게 말이야. 나이 먹고 수다만 늘었어. 그만 쓰고 다음 장으로 넘기자. 그래 그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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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60

from 소설 2015. 11. 21. 17:19

   내가 요즘 고민하는 주제는 딱 세 가지다. 첫째는 소설쓰기다. 둘째, 둘째가 뭐드라 벌써 막히면 안되는데... 음 그건 따라하기다. 뭘 단념하고 뭘 새로 따라하지 무엇을 흉내낼까 어떤 걸 배우고 익히고 그냥 한번 해볼까 그것이다. 그리고 뭐 재미난 일 없나, 가 셋째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찝어서 활자화시킨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자아가 미성숙한 십대 청소년이 철이 한참 지난 드라마도 아니고 감정을 주고 받는 사실적인 그것도 아니면서 괜히 한번 해보는 행위, 잎파리가 열 개 이상 달린 나뭇가지를 꺾어 가녀린 잎파리를 그로부터 분리하면서 궁금증 하나, 애처로운 그것을 또 하나 눈물을 떨구듯 떨쳐 내면서 질문 하나, 다시 청초한 꽃을 꺾듯이 잎파리 하나를 꺾으면서 의문문 하나를 청각화하는 장난처럼, 날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날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가 어떤 억측을 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상상이 날아갈 곳은 어디인지,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새로움을 바라는지, 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무엇인지, 최소한 어떤 실체를 바라고 뭔지 모를 허상을 꾸미고 싶은지와 종종 뭐가 갖고 싶은지, 적어도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왕왕 뭘 먹고 싶은지만이라도 알고 싶고 종국적으로 그걸 알아내게 되었다면 그것의 흐릿한 화면을 맑고 선명하게 다듬고 싶은 충동, 내면에서 그것이 넘실대다 만개하여 드디어 바깥으로 넘쳐나기를, 가능하다면 그걸 좀 더 보기 좋게 포장했으면 다소 멋진 말과 유려한 글로 옮겼으면, 그러길 바라는 의뭉스러운 의욕이 일었기 때문이다. 고민하는 주제에 대하여 1+2, 2+3, 1 - 2 - 3, 3 - 2 - 1 그런 건 생각하기 귀찮다. 그건 영입하지 않은 멤버다. 장점 본뜨기로 혼자 알아서 생각날 수도 있고. 일단 첫째를 얘기하자면 이렇게 나는 소설을 쓰고 있다. 둘째와 셋째는 이것이다, 라고 명확히 지금 밝히면서 저거야, 라고 친절하게 언젠가 설명하면서 제시하든 은근슬쩍 생략하든 앞으로 여기에 기록할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의 손에 키스해 본 적이 있는가? 손가락 오그라들게 만드는 '이마에 키스하기'는? 없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봤을 때 그건 아마도 친한 친구든 그대 인생의 협력자든 누군가가 그 물음을 당신께 건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는 생각을 해 본다. 당신의 경우는 내가 알 수 없으니까 내 경우를 말하자면 나는 태어나서 그런 아름다운 의지를 자신있게 행동으로 옮겨본 기억이 없다. 비슷한 예로 <나 사랑해?>, <좋아해요!>라는 말 또한 들어보거나 말해본 사람보다 못 들어보거나 말 안 해본 사람을 세는 게, 아니, 나 그런 말 들어봤어 해봤어, 라고 말하지 않는 게 더 낫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 나는 1인칭으로 고급스럽게 글을 쓰지 못한다. 하지만 글이 잘 안 써지기 때문에 1인칭으로 글을 쓴다는 것을 참고로 밝힌다. 게다가 요즘 괜히 뭐든지 어떤 외부 반응에 '나는' '나라면'을 짝지어 생각해 보느라 그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멍청한 놈! 뜬금없이 쓸데없이 과도하게 낭만적인 어떤 실행에 대해 당신께 여쭤본 것은 소설의 발단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생소함, 새로운 경험, 뜻밖의 발언? 그것은 소설이 잘 안 써지는 소설가들은 물론, 뭘 해도 재미없다며 총각시절의 기행을 일삼는 식의 행동, 그것의 실현에 대해 더 이상 수줍어하거나 서슴거리지 않는 남녀노소 일반인들까지도 꼭 놓치지 않고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손해는 안 볼  것 같다. 곧 비논리적인 산문을 어떻게 하면, 어떻게든 논리적인 소설로 다듬을 것인가 하는 그에 대한 직접적인 시도, 미션 임파시블, 살면서 하도 듣고 읽어서 지겹고 짜증나고 억하게 되는 평이한 이상이라서 뭘 뜻하는지 더 이상 궁금해지지도 않았던 그 말, 불가능을 꿈꿔라, 그걸 직접 해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쩌다 신남, 어쩌면 즐거움, 설마 우스움이 동석한다면 행운이고. 그것이 앞서 말한 첫째의 목표 즉 순엉터리 포지셔닝이다. 재미없으면 끝이다, 웃겨야 산다, 알지? 이건 우스꽝스런 글쓰기를 시도하는 어떻게 보면 정신병자와 돌아이와도 비슷한 작가가 듣고 떠올리는 환청과도 같은 다짐이자 연담이고 각오다.
   자, 목표는 밝혔으니 다음으로 넘어간다. 왜 쓰는가? 옛말에 이런 게 있다. 남자는 문지방을 넘을 힘만 있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만 남아 있으면 소설을 쓴다. 정말? 희귀하게도 그런 격언이 어디에선가 유서깊게 또 정말 힘겹게 전해져 왔다. 지금까지. 그래서 쓴다. 첫 소설쓰기와 그 동기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느냐고, 뭔 말도 안되게 어떻게 그 A와 B를 억지로 연필로 잇냐고, 뭔 A는 <내가 입만 뻥~끗하면 큰 일날 사람 많다>고 B는 <나는 그 어떤 도도하고 눈 높은 여자든지 딱 10분이면 끝낸다. 나는 10분이면 이 세상 모든 여자를 다 꼬실 수 있다> 이거야? 초딩이나 동심을 간직한 어른이 사용해야 할 연필은 그와 같은 데 사용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쓰는데 필요한 거라고, 썼다가 지우개로 지울 수 있게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라고, 그런데 그 요술 연필을 여기에서 함부로 쓰다니, 이런 이런 이런 뭣한 곳에 쓰다니, 첫 소설에 그리고 어떤 처음에 왜 그렇게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냐는 응수와 불만족이 없을 것 같지는 않다. 모를 수야 없지. 하지만, 그러나 당신의 지난 삶의 검은 리본을 풀면,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면, 사귀는 남자친구의 모든 것을, 같이 사는 공주님의 모든 옛일을, 속으로 순간순간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갖고 어떤 지각과 관념과 감정이 발생하는지, 언제 도파민이 솟아오르고 당신의 호르몬 분비량의 변화는 과연 세상 사람들의 불평불만으로부터 자유로운지 모든 독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 당신의 논리와 행동과 말과 글과 인생과 당신만의 세계가 따로 논다는 것을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모두 모두 다 꺼내서 TV로 방송하고 인터넷 뉴스로 알리고 소셜 네트워크에서 실시간으로 알린다면 어떨까? 당신의 그것을! 숫제, 차라리 두뇌에 반도체를 심고 뇌파 측정도 마다하지 않고 fMRI를 비롯한 온갖 두뇌 측정 장치까지 끌어다 모은다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해부한다면. 뭔 생각이 그렇게 많냐고, 뭔 생각할 게 그리 많냐고, 좋으면 그냥 좋은 거지 그게 다 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다. 이런 문제로 넘어가면 단순함이 다가 아니다. 사람들 생각은 다 다르다. 괜히 난 이렇게 생각해 라고 페이스북에 글이라도 쓰거나 어디 뉴스에라도 엮인다면, 오, 요즘에는, 정말 하루 아침에 바이런이 되었다가 또 바로 축구공이 되기도 한다. <이론과 실재>는 다르다. 많이. 하늘 땅 별 땅. 타자적인 타인과 조금은 이기적이고(어쩜 이건 정당하고 보편적인 것인데 왜 어감이 달갑지 않게 느껴지는 것인가) 보통의 공통된 어떤 사안에 대해 표상적인 나도 그렇다. 남자와 여자, 이성과 감성, 낮과 밤, 내가 아는 너와 내가 모르는 너, 당신이 아는 나와 당신이 잘 모르는 나, 시와 소설, 멘델스존과 바그너, 예시는 끝이 없다. 그런데, 그런데 이론과 실재가 같다? 그건 좀 그렇다. 안 그렇다면 순진한 사람들이 왜 해피엔딩을 좋아하는지 그걸 깊이 파고 드는 게 낫겠다. 만화와 동화를 보는 어린이와 친구들과 어울려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며 수다를 나누는 젊은이가 보는 세상과 정말, 어른이 되어 보는 세상은 같을 수가 없다. 분명 차이가 있지. 부디 많이 다르지 않았으면 하는 부질없는 바람도 그 중간 어디에 있겠지만. 그건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그거 빼놓고 말하기는 쉽다. 도덕적인 댓글을 달기는 쉽다. 정의를 말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면 좋겠다는 수채화는 그릴 수 있다. 불합리와 모순에 즐거움을 끼워넣어 말하기는 어렵다. 나와 너가 하나가 되는 것 또한 말이 안 된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사회 생활도 다르고. 광고는 예술이 아닌가?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왔는데? 오, 오, 내가 모자랐다. 한참 부족했단 말이다. 놓쳤다. 남자는 부풀리고 여자는 감추고 낮추며 깎는다는 본능을. 그냥 다르다는 것을. 사고방식과 모순과 다름의 미학은 아예 건드리지도 못했다. 남자의 능력과 여자의 외모에 감가상각이니 진입장벽이니 미래가치니 취향과 정서를 포함하고 어울림을 감안한 가치판단과 특정 기준의 가중치니 어쩌니 뭐니 그런 사소하고 민감하며 흔한 주제까지도.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아름답니, 귀엽니, 착하니, 네가 가난한 로맨스라는 힘든 길을 가도 응원하겠지만 난 솔직히 자신없다거나 난 겉으로는 자신있는데 혼자 생각으로는 사양한다는 내 기준과 남의 잣대가 동일한지 동일했는지 언젠가 동일하게 될지 더 이상 난 모르겠다는 독자엽서에 나올만한 내용까지도. 여성 잡지를 슬쩍 억지로 들여다 봤을 때 남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것의 읽을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라는, 그러나 그런 정보를 잘 알고 착착 적용하는 여자를 남자가 좋아한다는 역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가 여성 잡지에만 빠져사는 걸 바라지 않는 자상하고 멋지며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최고의 남자, 그런 남자를 여자들이 가만히 놔둘리 없다, 끝내주는 남자는 모두 짝이 있다, 아니면 동성애자다, 결국엔 유부남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무섭게 생긴 남자나 그저 그런 남자, 이미 결혼해버린 남자 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 이런 이론에 솔깃하다니, 나이먹었나, 맙소사! ······ 우아한 당신은 이렇게 평범하고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 세상에나! 무엇보다 고귀한 당신은, 고상한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람이란 걸 간과했으니.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읽어보고 또 읽어보는데 비약이 지나치지만 그 비약, 왠지 날 잡아끄는 구석이 있다. 그 이면에 두서없이 놓여진 블럭을 맞추어 감정가를 매기고 큐빅을 돌리면 뭔 말인지 잘하면 알아들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재미, 그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그나저나 첫 소설을 너무 잘 쓰고 싶은 욕심, 그것은 죄다. 지금은. 목표에 이어 이유는 이만 줄이고,
   자, 그러면 그 다음에는 글을 소설을 어디다 쓰지, 어디에? 그건 블로그에 쓴다. 사람들은 일기쓰기의 경험을 잘 안다. 훌륭하게 잘 쓰는 사람도 있겠지만 절반에 대해서만 얘기하자면 오랫동안 많이 썼든 아니든 다시 읽어보면 그건 거의, 거의 욕이다. 온갖 투정에 짜증과 험담에 음, 아마도 90%는 욕이다. 혼자 글쓰기를 연습하는 것이니까 그럴 수 있다. 게다가 현실에서도 사례는 많다. 따뜻한 남방의 시골에서는 친한 사이일수록 욕을 많이 쓴다. 그냥 생활이지. 그런데 안 친하면 욕을 잘 안 써. 그럼 일기와 나는 친하니까 그래서 일기장에 그걸 따르는 것일까? 에스프레소에 차디찬 우유를 쓰듯이? 그건 억측 같다. 아닐 꺼야. 일기는 혼자 쓰고 혼자 보는 것이다, 두 사람만의 비밀인 편지와는 다르다, 다 순박한 말일 뿐이다. 선수끼리, 적어도 성년을 훌쩍 넘어서는 대인은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혼자 좋아서, 볼수록 예뻐서, 원래 예뻐서 그래서 거울을 들여다 본다? 취미가 거울보기? 혼자를 위하여? 글쎄. 쓰고 만들고 그리는 모든 행위는 나중에 누가 볼 것이라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그래 주면 좋겠다는 전제하에 쓰는 것일 수도 있다. 처음부터. 그러나 시작에 대한 다짐에서는 그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그러니까. 나 혼자 쓰고 나 혼자 읽는 말과 비슷한 욕이 섞인 글이 남도 읽고 타인이 호응하는 점잖고 경망스럽지 않은 글로 탈바꿈하면 좋은데 그래야 하는데 잘 늘지 않기 때문에 결국 포기. 그러다 다음 단계로 발전한 사람도 있지만 보통은 여기서 포기한다. '낮에 먹은 샌드위치가 맛있었다거나 오늘 내 고양이가 얼마나 이쁜 짓을 했는지 따위의 작은 행복을 좀 기록해 놓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하지만 초등학교를 과거에 졸업했지만 실은 결국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핀잔을 받을 만한 일기 쓰기,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일기 그거 뭐하러 쓰는데, 왜 써, 쓰면서 살아도 안 쓰면서 사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오히려 그냥 귀찮을 뿐이야, 다 내숭이고 가식이야, 라면서 그냥 일기를 쓰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가파른 언덕 오르기를 단념하고 그냥 사는 것이다. 작심삼일의 안쪽에서는. 난 글보다 말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고, 그러면서 어쩌면서. 손글씨로 그러다 그만둔 후 얼만큼 시간이 지나서 또 인터넷에 블로그를 만들고 블로그에다 글을 쓴다.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면서, 뭔가 중요한 일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처럼. 이 단계에서도 또 절반은 좌절한다. 방문자도 없고, 올릴 내용도 없고, 누가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재미가 있는데 아무도 찾아주지 않고 관심 가져주지 않고 댓글이나 방명록에 글도 안 남는다. 블로그 친구의 페이지를 방문했는데 얘를 보니 사진을 잘 찍기는 잘 찍는데 딱 보니 거의 다 따라하기다. 흉내내기. 아마추어. 그러나 장비는 좋다. 장비발에 경험을 더하니 그 정도는 나오는 것 같다. 즉 보편적인 사진만 찍는데 댓글과 방명록에 글은 많다. 시간 엄청나게 투자하나 보다, 딱 보인다. 마치 핸드폰처럼 내가 전화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많이 해야지만 어느 정도 비례해서 나에게도 상당한 양의 전화가 걸려오는 것처럼. 가는 게 없으면 오는 것도 없다. 아니라면 정말 포스트 품질이 높거나. 그건 드물고 어렵다. 돈벌기도 어려운데. 그 층에서 멈추면 NC 사장실 근처에도 갈 수 없다. NC 사장을 알게 되는 걸로 넘어가자면 경주마 시리즈로 넘어가야 하니 이쯤 생략한다. 스카이라운지를 목표로 삼는 것도 좋지만 일단 멈추면 안 된다. 계속 쓰고 또 쓰다 보면 글이 늘 수도 있다. 보통은 잘 안 는다. 그걸 뭐라 하느냐, 재능이라고 한다. 이런 걸 깨닫게 되면 꼭 노력이 90이나 99%가 아니라 재주가 그런 것 같다. 좀 살아보면 또 그게 어느 정도 맞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 태반은 거짓말쟁이로 보이게 되고. 뭐 어쨌든 목표가 있고 어디에 어떻게 쓴다가 나왔다. 그 다음으로 계속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경영이니 성과와 혁신에 프로페셔널의 조건과 자기혁신 아이디어가 나올 수는 없다. 그건 인문-교양서에 다 나와 있다. 여기서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제 어떻게, 로 넘어왔다. 어떻게 쓰는가, 글을 어떻게 써, 소설을 어떻게 쓰냐구! 일전에 이런 허접한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익히 알려진 탐정물에 보면 사건이 나온다... 명탐정이... 편지를 본다. 읽는다... 발견해 낸다. 기발한 표어 그런 거... 세로로 씌여진 편지의 각 행 첫 문자나 첫 단어를 이으면 하나의 문장이 된다. 자, 여기서, 여기서 그 비문은 이 소설이다. 탐정은 그대, 독자다. 범인은 서술자다. 편지는 그의 수많은 생각들이다.> 이걸 떠올리며 나는 자기 나이에 곱하기 2를 했을 때 적절히 발휘할 수 있는 어휘에 대해, 어휘력은 나이와 비례한다는 그래프를 생각하다가 그걸 지금으로 끌어당겨서 구사해보자, 라는 마음에 그동안 써보지 않은 단어나 문구를 틈틈히 어딘가에 기록해둔다. 그리고 그걸 탐정이든 독자든 누군가가 읽을 것이라고 상정하듯이, 작사 먼저 하고 작곡 그 다음에 하듯이 그렇게 글을 쓰기로 해 본다. 일회성일 수도 있고 이따금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단어와 문구를 닥치는 데로 끌어모으는 것은 아니고 뭔지 모를 감정이 날 확 잡아끄는 기운이 느껴질 때만 살며시 기록해두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먼저 다음과 같은 단어를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해 두었다가 노트북을 펴고, 아 노트북이 없으니까 데스크탑을 켜서 메모장을 펴고 단어를 먼저 기록한다. 그리고 조각상을 만든다. 굳이 이 기법에 이름을 붙이자면 <낯익게 하기?> 가령,
   농담
   희끗희끗
   격렬함
   충동
   안개
   딱따구리
   남남
   빗방울
   작별
   나직이
   연둣빛. (그리고 한 개의 단어보다 긴 문구도 기록한다.)
   첫 눈이 내릴 때.
   어둠을 껴안다.
   하늘을 쳐다보지 마라.
   부드럽게 어루만져 다오.
   나를 사랑한 스파이.
   플라톤을 베낀다.
   우연에 기대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그녀로부터 문득 청첩장이 날아올 것 같다.
   이처럼 <추리소설─명탐정─편지─암호─첫 행 또는 첫 단어를 이으면...>을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소설쓰기에 적용해 보는 거다. <첫 행 또는 첫 단어를 먼저 기록─암호─편지─명탐정─추리소설> 이렇게. 또는 재즈 콘서트에서 기본적인 코드는 사전에 정해 놓고 그걸 바탕으로 각 파트별로 즉흥 연주를 이어가는 것처럼. 이게 최근 한번 해 보는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도 잘 안 풀리거나 지겨워질 때가 있다. 그 때는 반드시 온다. 그럼 또 다른 방법을 찾거나 기다리고 그분에 대해 생각하고 새로움에 관한 상상을 해봐야 한다. 소설쓰기에 대해 몇가지 설명이 나왔으니 이제 곧바로 삶으로 넘어간다. 간접적으로 돌아가고 뭘 거치고 하지 않고 바로 뻔히 대놓고 들어간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지난 추억으로 어떤 놀라움이 있었는가, 새롭게 펼쳐질 희망과 사건과 호기심은 무엇인가, 평범한 일상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재미없다고 해도, 별 내용이 없다고 해도. 물론 잘 안다. 당신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고 있으니 정말 잘 써야 한다는 음 뭐랄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없는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고 싶어지는 그 마음. 형씨만 바쁘고 일정이 빡빡한 게 아니다. 나도 그렇다. 우선 떠오른 할 일은 이렇다. 잔디밭을 깎아야 한다. 수영장 물도 갈아야 한다. 아, 내가 사는 집에는 잔디밭과 수영장이 있는데 완전 고물이다. 그래도 괜찮다. 집값은 싸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주택이다. 항구도시에서 조금 멀찍히 떨어졌지만 바다가 가깝고 땅값이 비싸지 않는 곳에 위치한 단독 주택이란 말이다. 어느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인터넷으로 집을 주문했고 옛날에 사놨던 땅에 몽당연필 같은 집이 하나 턱 들어서게 됐다. 나는 그곳에 혼자 산다. 나홀로 살고 있다. 이 옷 얼마짜리에요, 이거 얼마짜리에요, 야 차 좋지, 멋지지, 꼭 그렇게 나 허영, 나 허세, 이런 모습처럼 나 혼자 산다, 나 혼자 산다, 지금 꼭 그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종이 한 장 차이가 뭘 뜻하는지는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누가 속시원히 가르쳐줬으면 좋겠다. APPLE OS를 처음 사용해 봤을 때도 그랬다. 누가 동기화에 대해서 짧고 알기 쉽도록 상냥하게 가르쳐줬으면 좋겠다 라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매우 조용한 동네다. 더군다나 혼자 살고 있으니 좋기는 한데 사람이 좀 어벙해진 느낌이고, 어 뭔가 허전하고 그리고 외롭다. 항상 이런 식이다. 매번 그래.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중학교는 어떤 곳일까, 남자애들이랑만 놀다가 이성과 논다면 이와는 다르겠지, 학교에 있을 때는 감옥을 벗어나 저 드넓은 세상이 궁금하고, 날마다 회사에서 일하고 퇴근하고 다시 출근하고 퇴근하다 보면 회사원에게 제일 부러워 보이는 것은 백수 생활이다. 끝나지 않는 휴가, 예술가, 자기 세계에 폭 빠져 사는 사람들 그리고 다운증후군. 사람들이 많고 생동감 넘치고 즐거운 분위기에 있다 보면 또 몹시 조용하게 혼자 있고 싶어지다가 또 막상 그렇게 되고 나면 마음은 이게 아니라고 강아지 마냥 자꾸 뭔가 궁금하고 들떠 있으며 새로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클럽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그 차이. 한 여자를 알게 되고, 만나고 연애하다 결혼하고, 애를 낳고 행복한가 라고 생각하다가 그러다가 그러다가 이혼? 이런 젠장! 왜 생각의 진행은 왜 매번 꼭 이렇게 그런 쪽으로만 쏠리는 걸까. 그런 쪽? 그게 뭐 어때서.
   한적한 시골에 혼자 살면서 그냥 쉽게 말해서 안 해 본 게 없다. 낚시를 한번 해 봤는데 잘 잡히든 잘 안 잡히든 일단 시작해버리면 그게 1주일 간다. 1주일 내내 낚시만 한다. 다른 건 안 한다. 딱 하나, 소설이 써진다면 낚시는 때려치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없다. 또 하루 종일 소파에서 TV만 보기, 물론 겪었다. 그것도 많이. 그래서 이건 좀 자중할 만한 일이란 것을 잘 알게 되었다. 최근에는 엉클 그랜파나 고품격 음악 방송이라는 수상한 제목의 코메디 프로그램만 주로 본다. 그리고 날마다 잠자기 전에는 잠이 바로 들지 않기 때문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연예계 싸움 순위 같은 동영상도 잠들기 전에 본다. 객관성을 조금 배제하고 개인적 친분을 많이 참고하여 연예인 싸움 순위 정하면서 말로 웃기는 프로그램 있잖아. 개를 비롯한 갖가지 동물들 영상과 예술, 문화, 예술, 다큐멘터리, 예술 영상도 꼬박꼬박 감상한다. 예술? 문화? 진짜?
   딱히 권태롭다고 하기는 뭐한데 그렇다고 누군가 나에게 '넌 권태에 빠졌어' 라고 말한다면 또 썩 심하게 부정할 수는 없는 상태다. 일단 하루 일과는 이렇다. 아침에 일어나서 남들처럼 먹고, 씻고, 커피를 마시고, 페이스북과 트위터와 인스터그램을 둘러 보고, 소설을 읽고, 가끔 집에서 영화보고 때때로 극장에서 영화보고. 1주일에 사나흘 운동을 하는 평일에 비해 주말에는 미술관이나 동물원에 들린다거나 새로운 장소를 찾아서 떠나거나 음 별일, 색다른 건 없다. 그래서 나는 수필이나 경제, 자기계발, 사회, 과학, 공학, 예술, 취미, 생활 등등 관련 서적은 잘 읽지 않는다. 그래서 읽는 건 소설이다. 어쨌든 나는 주로 소설을 읽고 간혹 인문교양서나 시집을 읽는다. 그나마 지금 생각하는 작은 소원이라면 소설을 읽는 비중이 소설을 쓰는 시간으로 살짝 바뀌어야 하는데 그건 안 바뀐다. 마음데로 안 된다. 어쩔 수 없다. 가뭄에 콩나듯이 번쩍하며 소설에 대한 영감이라는 섬광이 떠오르거나 이름없는 얼굴없는 그분이 오시면 그분이 오실 때만 나는 소설을 쓴다. 그래서 그 순간이 닥치면 몹시 당황스럽다. 장소도 불문이다. 도서관에서 그분과 영접하거나 핸드폰 메모장에도 썼다가, 수첩에 볼펜으로도 썼다가,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멍청하게 YouTube에서 흑백 앨범커버가 화면의 사진으로 돋보이는 고전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소설을 쓰곤 한다. 지금은 Vladimir Sofronitsky가 연주하는 Scriabin의 시곡 op.41을 듣고 있다. 최근에는 손글씨로 글이 잘 안 써져서 주로 컴퓨터 메모장에다 기계식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글을 쓴다. 그것도 가끔만. 그러다가 게 눈 감추듯 그분이 두말없이 차갑게 떠나시면 뭔가 허전해서 남들이 그냥 생각없이 습관처럼 읽는 인터넷 뉴스를 읽는다. 그러면서 어느 날 인터넷을 둘러보다가 폴란드 속담을 하나 읽었다. 최대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 다음은 개의 사랑, 그 다음이 연인의 사랑이다. 그걸 읽고 드는 생각은 1) 아 그렇구나 2) 번역이 설마 잘못된 건 아니겠지 3) 개, 강아지가 좋기는 한데 키우기 어려워 4) 말로는 이쁘지 귀엽지 요요요요 메롱 하면서 강아지를 부르고 강아지가 그걸 들었을 테지만 청자인 개가 화자인 사람을 무시하면 남자들은 처음에는 귀여워 보였던, 처음에는 쉽게 꼬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던 상대인 녀석을 보며 '저 삐──' 라고 하지(물론 이건 애매하지만 아슬아슬하게 경계에 걸쳐진 고급 코메디를 넘나보며 그들을 만족시키는 저급 유머다). 이 정도다. 그래서 이것도 그냥 통과다. 그러다 도시에서 이곳 시골로 친구 녀석이 놀러왔다. 친구는 내 집에서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이 엿보였는데 나는 녀석을 근처에 있는 카페로 데리고 나갔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우리는 카페에 왔다. 아 카페의 이름은 좀 길다. 이름은 이렇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그것을 포스트맨이나 더 짧게 P 카페, 그것도 귀찮아서 그냥 P라고 줄여서 부른다. P를 알게 된 후 초반에 몇 번 들렸을 때는 나는 왠지 모르게 이 카페에 들리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은근한 기대감이 부푸는 그런 분위기가 감도는 카페였는데 그런 감정은 냉정하게 날 떠나버렸다. 그래서 이젠 카페 주인장과 간혹 같이 술을 마신다. 처음에는 약한 도수의 술로 시작하며 짐짓 사회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문학과 영화에 대해서도 얘기하지만 그건 그냥 구실일 뿐이고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고 그러다 그냥 맛이 가버린다. 그래서 아예 도수가 높은 술로 시작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어쩌다 또 얘기가 술로 가버렸다. 카페 하면 술인가, 어쩐지. 아무튼 우리는 그곳으로 향한다.
   「어머 얼굴 잊어먹겠어요. 연애라도 하시나 봐요. 오늘은 친구분이랑 같이 오셨네. 와, 그 옷 또 입으셨군요. 그거 제가 이쁘다 그래서 또 다시 입으신거죠?」 딱히 나이를 맞춰보기 힘든 전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밑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분위기의 아가씨가 그들을 반긴다. 웃음과 몸짓과 표정으로 아가씨와 주인장과 대화를 나누고 자리에 앉고 음악을 듣고 주위를 살피며 창밖을 내다 보며 카페에 감도는 무언가를 감지하며 그것에 동화되는 동안 시간이 조금 지난다.
   「제임스, 요즘 어떻게 사니? 시골로 내려와 사니까 좋아? 나도 그냥 도시를 뜰까? 그런 생각 가끔 하긴 하지만 막상 떠나면 어떨까? 하고 고개를 들면 휭 하고 두뇌를 회전시키면 또 다시 그런 생각은 잠재워지는 것 같아.」
   「여기와서 처음에는 많은 것이 다르니까 다르다는 그것만으로 좋았던 듯 하지만 또 시간이 지나고 이곳 생활에 적응하니까 도시에 살 때나 여기 살고 있는 지금이나 별 차이는 없는 것 같아. 어쩜 드라이브하고 여행하는 걸로도 절반은 몸으로부터 달아나려는 그 떠돌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충족시키는 게 아닐까, 그렇게 다들 생각하잖아. 또 나도 나중 올라갈꺼야. 근래에는 내가 한 곳에서 오래 못 살잖아.」
   「음, 그렇구나. 그런데 단 몇 마디지만 약간 네 태도와 말하는 방식이 바뀐 듯한 뉘앙스는 느껴지네.」
   「그건 아마도 여기 사람들 걷는 속도 때문일 꺼야. 느리잖아. 안 바뻐.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파란불이 꺼지기를 기다리는 신호 대기 차량에 신경이 쓰이는 정도, 그 기울기가 다르니까.」
   「그래 요즘 뭐 재미난 일은 없고?」
   「항상 즐겁지는 않아. 매일 매일 신나면 그럼 도시는 모두 텅 비어버리게? 근처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면서 애들 노는 거 구경하거나 강아지 키우는 집을 먼발치서 바라보는 것. 그거 외에 요즘에는 음 뭐가 있지. 그래. 그거도 해 봤어. 드라마에 보면 주인공들이 밤에 잘 때 팬티만 입고 자잖아. 연예인 가운데서도 알몸으로 잔다는 사람도 있고. 또 가을에 바닷가에서 수영복만 입고 모래 위에 큰 수건을 깔고 눕거나 엎드려서 책 읽기. 모두 다 따라했는데 감기 걸렸어. 오래 가더라구. 한동안 못 일어났어. 괜히 따라했어. 그거랑 나랑은 안 맞나 봐. 몸에 열이 엄청 많아야 하든가 아니면 영화가 뻥이든가. 그리고 강에서 흰새들 먹이 먹는 거 구경해. 뜨고, 날고, 내리는 모습이 우아한 새 있잖아. 하얀 새. 모딜리아니 그림처럼 목이 길고. 부리도 길고. 날개도 길고 다리까지 긴 새. 백로, 왜가리, 두루미 그런 새들. 녀석들이 강가나 천변에 앉아 있을 때, 아니 서 있을 때 뭐하나 봤드니 먹이를 먹는 움직임을 보게 됐어. 계속 멀뚱멀뚱 근처를 보드니 한참이 지나서 조그만 물고기를 부리로 집어. 그런데 긴 부리와 부리에 집힌 물고기는 십자 모양이라서 물고기를 못 삼겨. 거기서 2단계로 넘어가드라고. 부리로 살짝 틀어서 물고기를 부리와 동일한 각도로 옮기는 작업을 해. 이 단계가 중요해. 그러다 어렵게 잡은 물고기를 놓치기도 하더라구. 그때 녀석의 표정은 상당히 난해해. 완전 포커페이스는 아니고 뭔지 모르겠어. 그것은 어찌 보면 진정 고색창연한 사색가의 안면과 비슷할꺼야. 새가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 어조를 느껴보게 말이야. 2단계에서 실패라... 운수 좋게 마지막 식사 후 금방 잡았을 수도 있으나 혹시라도 3시간만에 잡았을지 마지막 식사 후 3일만에 잡았을지는 모를 일이야. 3일만에, 하지만 놓쳤어. 그런데 재미없어? 재미없군! 웃길 뻔 하다 만 거지. 반면 물고기 입장에서는 저승의 문턱에 이르렀다 되돌아온 건가? 부활이라 부르기엔 어색하고 환생이라 하기에도 좀 그래. 복원이나 복구도 아니고. 그리고 나는 방관자? 아니 관중? 그냥 지나가는 사람 3쯤 되겠지. 그 다음은 뭐겠어. 3단계 꿀꺽이지. 이게 뭐 재미나다고! 대체 이게 뭐 우끼다고! (침묵) 
   종이 한 장 차이로 웃기기는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잘 하는데 또 종이 한 장 차이로 꾸미고 포장하여 단계를 둔하리만치 따지고 자기를 낮추거나 주변의 분위기로 내 위치를 파악하거나 그 반대거나 돌리고 꼬고 비틀고 내 역할로 친구의 비위를 맞추는 건 남자들은 여자들만큼 잘 안 해. 목표 지향적이고 분석하며 논리적이니까. 직관에도 안 맞고 성향에도 안 맞아. 잘 못해. 원래 그러니까. 마초만. 설을 푸는데 바쁘니까. 하지만 그건 나쁜 게 아니라 마초계에선 질서야. 상남자의 본색을 잃으면 애완용 동물로 사람과 같이 사는 표범과 재규어와 호랑이와 사자, 대개는 고양이나 개가 된다구. 밀림과 산림에서는 살지 못해. 야성을 잃어버려. 당연히 그러니까 말이 좋지. 훨씬 좋아, 말이, 여자들보다. 으르렁 으르렁. 그래서 남자들 분위기에서 듣기만 하다가는 말 못해. 그냥 관찰자가 된다구. 그건 나중에 글 쓰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는 막 치고 들어가야 해. 소곤소곤, 안 돼. 꼭 손님으로 슈퍼스타 1명 모셔 놓고 진행자 1명과 얘기하는 품위 있는 코메디 프로가 아니라 유명인 잔뜩 나와서 막 달려들어야 하는 그런 개그 프로그램에 가깝지. 살아남아야만 해. 우선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다시 말로. 여기서 글은 아무런 힘을 못 써. 거울아 거울아, 그거 필요없어. 거울아 거울아, 는 글이라는 종목에서도 크게 대우받지는 못하고. 그래서 남자는 밤에 잠을 자면서 초현실적인 꿈을 꿀 필요가 없어. 하지만 반대로 낮에는 말도 안되는 SF 영화나 현실과 완전 동떨어진 게임과 장르를 즐겨야만 해. 말로 도. 가령,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릴려고 황새가 물고기 먹는 모습, 그 재미를 모르고 살았지? 이렇게. 또 뭐가 있지? 어쨌든 마초의 덕목 가운데 둘째 가라면 서러운 걸로 첫손 꼽히는 건 말솜씨야. 마초긴 마촌데 말을 못한다? 그걸 뭐라 하냐, 허당이라고 하지. 마초이면서 말을 잘하지 못하는데 그런데 허당이 아니다? 그건 뭐냐, 얘는 도대체 뭐냔 말이야! 그걸 바로 카리스마라고 하지. 음. 아니면 뭐다? 가죽 점퍼! 드라마로 넘어가면 가죽점퍼 위에 수트가 있다는 대사도 나오고 그래. 이 동네에도 그런 사람이 있드라구. 저번에 마주쳤잖냐. 오 쫄았어. 딱 쫄았어. 완전 쫄았어.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 오, 남자라! 그럼 여자를 같이 말해야지. 그래야 등식이 맞지. (침묵)
   정원이 있는 집, 잡지에 나오는 그런 집 있잖아. 그걸 보여주면 여자는 그런다. 꿈을 꿔. 상상해. 조금 뭐해도, 지금 행복하지 않아도 언젠가, 그이와 그네를 타면서, 아니면 어때, 설령 어찌 되어도, 그래도 만약, 잔디를 깎고, 수영장을 청소하며, 아이를 배웅하고, 남편을 기다리며, 와인을 마시며, 강아지가 제일 좋아하는 건 뭐냐 그건 남편의 양말이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면서 음악이 들리고 공중부양을 하게 되지. 그래 그렇다구. 반면에 남자는, 남자는 말이야, 정원이 있는 집을 본다면 우선 동네 상권을 둘러보고 들려 볼 만한 술집을 파악해야지. 괜찮은 술집을 찾을려면 시행착오를 많이 거쳐야 하거든. 이건 돌아갈 수 없는 길이야. 부딪히지 않을 수 없고 피해가지 못해. 그렇다고 밤의 황제 그런 게 되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 집의 액면가와 미래 가치, 007 가방을 짱박을 만한 장소와 주차 공간과 내 공간, 통장 잔액, 내가 보유한 주식의 지금 시세 등등 남자는 정원이 있는 집을 본다면 바로는 아니지만 시간이 남는다면 그런 생각을 해. 자, 다시 NC를 예로 들어볼까? NC에 들린다. 남자가. 일단 견적과 물을 파악하겠지. 이건 여자도 마찬가지고. 아 좀 더 시각을 달리해서 말하자면 남자는 NC를 보고 설계도와 조감도, NC 사장실, 예상 탈출 경로를 그리고 다크호스는 누구인가를 떠올린다고 할 수 있지. 그와 달리 여자는 드레스 코드와 음악이 3박자인가, 웨이터의 나비 넥타이, 소파가 안락한가, 탁자에 깔리는 샴페인과 와인과 언제 이곳을 뜰 것인가, 저 아저씨의 취향과 기호와 비위는 어떨까, 왜 멋진 남자는 안 보이는 것일까, 를 생각하지. NC 사장실에서 소설을 읽기에는 부적합하니까. (침묵)
   오, 이런. 인생 꺾여가는데 아직도 남과 여, 그 주제라니. 오히려 남들과 반대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 놀라운 재주가 없어도 평범한 사람들은 대체로 알잖아. 속으로 드는 느낌으로. 아, 이 양반이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라고. 어, 나는 신비로운 글을 쓰고 싶다, 라고. 이야 이 친구 이거 이거 뭔 새로운 깜작 놀랄만한 신기한 발명품을 만들고 또 그걸 가지고 연기하고 싶어하는구나, 라고. 콕 찍어서 그 뭔가가 무엇인지 어려서는 많이들 잘 몰라. 자신에 대해서도. 재능이 있고 욕심이 뚜렷하면 쉬운 문제지만 둘 중 한 명은 그렇지 않거든. 재능도 없고 욕심도 없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 남의 일도 아니고 내 일인데 그렇다니까. 그런데 어른들은, 책에서는, 영화에서는, 방송에서는... 그러지. 난 그냥 놀고 싶어, 평생 놀고 먹고 싶다고, 어쩌란 말야. 이게 정답 아니야? 자, 청소년들이여! 공부에 찌들어 매일 지치고 재미없고 지겹고 바쁜 청소년들이여 열광하시라. 공부 뭐하러 하는데, 돈 벌려고 하는 거 아니냐고, 왜 쉬쉬 하는데, 왜 솔직해지면 안 되냐고, 도대체 왜? 욕심이라는 단어조차 말하고 잠깐 마음에 품기조차 주의해야 하는 친구들도 분명 있어. 나도 비교적 지금보다는 예전에 그것에 가까웠고. 그런데 난 지금 이상하게도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할 말이 있거든요? 나는 지금 보통 이런 생각을 한다? 난 원래 말수가 많은 아이가 아니었는데, 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데? 이걸 왜 지금 하는데, 아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만학도가 되어야 하는 건가. 잘 모르겠어. 이게 다 콤플렉스고 자격지심인가. 아주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꺼야. 공부에 관한 말도 그래. 옳소 옳소. 그러나 그러나, 그래도 공부하지 말라는 말도 약점은 있어. 많이. 공부는, 하기는 해야 해. 에잇 좋다 말았네 그럴꺼야. 하지만 난 안 해도 돼. 길을 걷다 엄마가 끄는 어느 유모차를 보면 나도 저 유모차에 누워서 음식도 엄마가 먹여 주고, 오줌을 싸고 싶을 때 옷이나 아무데나 막 싸고, 잠도 아무 때나 실컷 자는 아이가 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면 또 커서 지겨운 지겨운 공부를 해야 할 꺼 아니야. 그러면 차라리 개가 어떨까, 개 팔자가 상 팔자라고 하잖아, 그런 헛생각도 하게 돼. (침묵)
   음 잠시 얘기가 샜지만 돌아와서, 재미난 일, 뭐가 있지? 음, 하루는 풍선껌을 불고, 하루는 막내 녀석의 혼담에 대해 걱정하는 어느 노인장의 얘기를 듣고, 사나운 개 콧등 아물 틈이 없다는 영국 속담도 처음으로 동네 술친구에게 듣기도 해. 그쪽 속담 하나 더 말하자면, 내 개는 나의 친구, 내 아내는 나의 적, 내 자식은 나의 주인, 이라는 말이 있데. 거기 사는 친척이 있나 어렸을 때 집이 부유했나 그 아저씨 학식이 풍부하더라구. 아 또 있다. 헝가리 속담, 개에게는 뼈다귀를, 아내에게는 몽둥이를. 헝가리나 티파니나 카프리해에 놀러가지는 못해도 아저씨들의 그런 만담을 들으며 벨기에 맥주를 마시면 그것도 나름 괜찮더라구.」
   「오 재밌는데. 평소에 말을 못하고 살았니? 어디 한동안 무인도에 가서 낚시라도 하고 온 거니? 시골에 내려와서 한동안 친구가 없었구나. 그래. 그런 것 같아. (침묵) 아, 아내는 나의 적? 뭐를 누구에게? 아내에게는 몽둥이를? 뭔 뜻이지? 개 하면... 음... 알렉스와 케빈이 키우는 강아지의 트위터 계정이 있는데. 그거랑 이거랑은 별 상관 관계가 없네. 억지로 찾고 이을려면 가능하지만. 아 그런데 나도 벌써 좀 늘어지는 느낌이 드는군.」
   「그러지 그러지? 좀 그런 뭔가가 있다니까.」
   「그래서 여긴 젊은 사람들이 비교적 덜 사는 건가.」
   카페의 음악이 장르가 바꼈다. 보사노바에서 고전 음악으로. 어떤 고전 음악이냐 하면 클래식을 많이 들어봤던 사람들이 딱 듣고서는 어 누구 음악이지? 누구? 누구...는 아닌데, 누구도 아닌데, 그렇게 갸우뚱 하게 만드는 좀 덜 알려진 그 시대의 작곡가의 작품으로. 어지간한 작품이라면 고전 음악을 30년 들어 봤으면 한번에 누구라고 즉답을 꺼내지는 못해도 틈틈히 들어서 익숙하고 매우 자연스러워서 대충 짐작은 한다. 그 짐작이 조금 빗나가도 아하 그렇지 그런다. 그러나 그쪽 시장에도 그래프가 있다. 그 그래프 선의 이쪽은 물론 저쪽만 살펴봐도 내가 왜 이런 음악을 모르고 있었지, 50년 동안 고전음악과 함께 살았는데 왜 몰랐지, 라는 느낌이 한 3초간은 들 수 있다. 이와는 다르게 40년 동안 클래식 음악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 가운데 누군가는 왜 지금 세상에는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나오지 않냐고, 내가 작곡가라면 그런 유형의 음악을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겠다고, 그러면 되지 않느냐, 못할 꺼 없지 않냐며 큰 소리를 칠지 모르지만 덜 유명했던 수많은 고전음악을 알게 되고 들어 보면 다 그런 이유가 있겠구나, 쪽으로 생각이 기울게 된다. 지금 카페에는 바로 그런 음악이 흐르고 있다.
   「어, 조니! 카페 사장님이랑 너랑 같은 옷 입었는데? 어찌 이런 우연이 다 있을 수 있는고. 와, 완전 똑같다. 커플룩? 저거 저거 폴 삐 스미스 같은데. 너도. 어어. 오오 어쩜 좋아.」
   「어? 정말! 이런 이런 이중적인 느낌이 드는군.
   첫째, 같은 차를 타고 같은 음악을 좋아하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을 만났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은 것! 담배를 핀다면 같이 담배 한대 피우면서, 커피를 마신다면 같이 커피를 마시면서 어, 그 양복 어디서 사셨어요? 로 시작해서 금새 화제가 풍성해질 것이라는 예감. 그러다 진짜 그렇게 이루어진다면 뭔가 물어보고 듣고 답하고 물어보고 또 물음을 요구해야지. 전공이 뭐냐, 어디서 일했냐, 누구 아냐, 거기 가봤냐, 뭐 좋아해요, 어 그 영화 봤어요, 저는 수영하는 거 좋아해요, 저도 뛰는 거 좋아해요, 어디 사세요, 언제 술 한잔 합시다, 트위터 팔로워인데 왜 못 알아봤지 등등. 공통점을 찾고 차이가 하나씩 드러나도 쉽게 실망하지 않는 일. 대화를 즐기며 서로를 알아가는 것. 남자와 여자라면 정상적인 좋은 발단에서 이성간의 신선한 교제로 발전하고 사귀고 뽀뽀하고 결혼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귀결 또는, 또는 그만. 나도 그리고 너도! 음 그 다음에는,
   둘째, 기분 나뻐! 뭐야 저 양반 딴 옷 다 놔두고 하필 오늘 하필 저 옷을 입고 하필 여길 왔지? 편한 자리이면서 사적인 감정이 뚜렷하고 좀더 좀 더 짧은 시간에 좀더 좀 더 명확한 의사를 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면 때로는 약간 쎈 표현이 필요해. 그래야 그거 넘기고 웃고 떠들고 뭐할까 라는 여유가 생기니까. 어떻게 냐면 이렇게. 이런, 개나 소나 다 입네, 타네, 아네, 말하네! 여기서 잠깐, 고상하고 품위가 어린 완곡 어법과 요상한 마술적인 화법에 빠져들면 넌 말 한마디도 못하고 시간 다 가버려. 날새. 시행착오만 하다가 정작 자기 자신은 알지도 못한 채로 수업은 끝나고 회사에서 쫓겨날 수 있고 나이만 먹다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다구. 그렇게 인생 꺾여. 남을 잘 믿고 귀가 얇으면 사기 당하기에도 안성맞춤이야. 그래서 아무도 믿지마, 절대 뒤돌아 보지마, 라는 명대사는 두고두고 길이길이 남는 거라니까. 다시 돌아갈께. 쎈 표현이 필요해. 이렇게. 이런, 개나 소나 다 뭐뭐뭐 하네! 자, 따라해봐. 분위기를 살려야지. 즉 내가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잖아? 이 근방에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는 사람이 적어도 두명이란 말이잖아. 뭐야! 여고생 친한 친구들 써클 가입에 대한 희소성과 차별화란 1차 기준에서 탈락이야. 완전. 학교 다닐 때 나는 평소 관심 갇는 가수, 배우, 작가가 자주 바뀌지만 호기심은 너무나도 쉽게 금방 달아나지만 요즘은 지금은 하루 걸러 한 번씩 듣는 음악은 The Smiths의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 그 곡 말고는 스미스의 앨범을 전부 들어본 일도 없고, 스미스의 기원이나 멤버나 화풍도 모르고 그걸 알고 싶은 충동도 일지 않고, 그냥 간혹 그 음악 틀어놓고 가끔만 말야 딱 틀어만 놓고 딴 일하는 것, 그냥 영화보다 우연히 중간에 사운드트랙으로 잠시 듣는 것, 그 정도만 좋아. 간결하지. 그런데 쟤는 같은 반의 스타킹 매니아 그녀는 스미스 전문가? 팬클럽 회장? 그 그룹 프로듀서가 사촌 오빠? 스미스를 하루 종일 들어? 웬 스미스 귀신이 붙었나 뭔 스미스 한이 맺혔나. 참 말 많다. 유난 떨어. 소신 있어. 항상 같은 말.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그거 밖에 몰라. 자기가 사랑 밖에 난 몰라, 뭐 노래 제목이야? 이런 삐─! 내가 제일 좋아하지 않는 음악이 스미스고 제일 지루하고 제일 잠오는 음악도 더 스미스야. 어쩐지 음악이 너무 평이하고 고루하다 그랬어. 어쩐지 멜로디도 다른 음악이랑 비슷비슷하고 가사도 촌스럽다 했어. 다 누구 따라한 거 같아. 종일 듣는 애도 그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말이야 분위기를 몰라 사회성도 떨어지고 사교적인 거랑은 안 친해. 시도 때도 없이 거울만 들여다 봐. 거울도 때락 커. 교양없게 그게 뭐니? 스미스가 뭐야 스미스가? 앤드 웨슨? 콜트? 베레타? 비비탄? 요원? 첩보? 스 미스? 스미 스? 에라 스매싱이 낫겠다. 차라리 스매싱 펌킨스가. 아 짜증나. 얼척없어. 완전 재수없어! 오~ 이럴 때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야 하는 것일까? 지지지직 지지지직!
   그러나, (침묵), 나는 분명히 첫째라는 거! (손동작) 딱! 어때? 설명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지? 입에서 화염이 살짝 나갈려다 불발된 느낌이다야. 입만 열면 자동반사적으로 무지개가 나와야 하는데 말야. 그게 잘 안 돼.」
   「오, 조니! 살아있네 살아있어. 대단해.
   처음 나를 좋아했던 여자는 한 명이 아니었고, 무려 세 명이었고, 곧 동시에 구애를 받았는데 그 짜릿하고도 엄정한 사실을 빼면 남는 건 별 허접한 술자리의 수다뿐이라는 거! 너무 좋은데 또 너무 허무한 그런 느낌? 내게만 특별하고 타인에겐 머저리 같은 낱말에 지나지 않는 일. 뭐 그런 느낌인데? 아니면 삼류대학교 도서관에서 손때 묻은 책 아무거나 한 권 골라서 강의실 제일 뒷자리에서 보면서 시간 때우다 강의 중간에 땡땡이쳤던 기억이 너무나도 각별한 건가? 습관적으로 그래서? 자주 그래서? 그 때문에 연속 학사 경고에 재입학에 어쩜 대학교 졸업했던 기간이 뭐 레지던트야? 1년 후 다시 1학년들이랑 어울리게 되고 동기들은 2학년으로 올라가서? 그래서 그때 만난 재수해서 들어왔던 내 단짝은 내 인생의 전체적인 단짝들에 대한 어떤 평균에 모자라도 좀 많이 심하게 모자랐다는 거? 다 읽지도 못할 거면서,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주변에서 유행가처럼 흔히 들먹이는 대명사이자 대중적인 그때 그 시절 상표나 기호 같은 거? 아~ 맞아, 아하! 처음으로 실제 봤던 연예인이 하필이면 그분인가, 막 그런 것인가 보군! 이왕 제일 처음 보는 유명인이라면 목소리는 환상적이고 잘 생기고 길고 후광이 비추며 멋진 말만 짧게 시적으로 툭 던지는 눈빛 와~ 표정 오오~ 그런 영화배우를 딱 처음으로 봤어야 하는데 에잇~ 아휴~ 하필이면...... 뭐 그런 느낌이군! 헤헤헤, 웃겨! 재밌다고. 진짜 우습단 말이야. 재밌네 재밌어. TV보고 꿈을 바꾸고, 잡지 읽고 꿈을 또 바꾸고, 다음 날 친구에게 몇 마디 듣고 다시 꿈을 수정하는 일과 같잖아? 인생이 뭐 그런 거지. 하긴 나도 그래. 고등학교 1학년 어느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이 기억나. 제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저는 대학교 1학년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던 말씀! 그러니까 너네들도 공부 열심히 하라는. 거짓말일 수도 있겠네. 그래도 좋아. 하긴 나도 딱 생각은 안 해봤는데 그치만 대충 그 정도가 제일 좋은 거 같아. 지금이랑 별반 다르지는 않겠지만. 교정은 얕은 산의 중턱이고, 비스듬히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데 그 뭐야 짠 내음이 연하게 느껴지는 그 무언가 나를 두근거림도 아니고 설렘도 아니면서 괜히 약간 들뜨게 만드는 분위기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기분 나쁘지 않아. 괜찮아. 아니 좋아. 기뻐. 사랑해. 동경한다고. 왜? 대학교 1학년이니까. 돈만 내면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진짜 삼류대학교. 스무살에 곱하기 2를 하던 3을 하던 정말 아무 때나 누구나 들어갈 수 있어도, 그래도 대학생 아니야? 맞자나! 그것도 1학년. 아아, 그녀들이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줬는데! 단체로! 강의가 끝나고 멀리 바다를 보며 남서풍을 맞으며 나는 긴머리 휘날리고서 혼자 내르막길을 내려가는데 당시 한참 인기 있던 드라마 주제곡을 그녀들이, 단체로! 나도 그 드라마를 즐겨 봤는데 뭐야 그녀들도 모두 그 드라마를 애호했다는 거 아니야? 어쩜 그럴 수가! 어머나! 생각난다. 그때 그녀들. 내 착각인가? 그러면 어때! 난 믿어, 그럼! 뭘 해도 좋아, 누구와 있어도 기뻐, 항상 즐겁고, 언제나 흥미로워! 대학교 1학년! 스-무-살! ...청춘! ...오, 멋져!... 과점퍼는 못 입어봤어. 말은 그래도 실재 뭐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말이야. 심지어 평균 연령 스무살의 무리와 나도 함께 한다는 것. 일 때려치고 어디 하숙집에 들어가서 글이나 쓸까? 그림을 그릴까? 곡을 써? 그런데 재능이 있어야지! 에잇 돈만 많아가지고 귀찮아서 큰일이네. 많아도 좀 많아야지! 돌아갈 수 있을까? 미래에는 말이야. 뭐 못 돌아가면 말지. 돌아가면 막 그럴 꺼 아니야? 코피, 쌍코피 막 터지고 막 울렁울렁 그런 거 영화에 나오는 거. 그냥 지금 여기가 좋을 뿐, 지구 바깥으로도 과거로도 돌아가지 않을래 난. 우린 무엇보다 딱 만 명을 못 채웠잖아? 그치 않냐! 좀 납득이 되는 그런 거, 사실적 마술주의든 마술적 사실주의든 우리가 원하는 건 엄밀히 따져서 그거잖니! 요컨데, 사랑이라고! 」
   한동안 말없이 웃음의 잔상이 이어지고 웅변에 따른 에너지 손실을 보충할 시간을 갖고서 다음에 어떤 말을 할까, 방금 멋졌어, 아까 2시 방향에 있던 그녀는 어디 갔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잠시 시간을 보낸다.
   「조니, 요즘 어떤 책 읽어?」
   「어 좋은 질문이야. 최근에 나는 영화 타이타닉을 봤고, 지금은 해리포터를 읽어. 남들 다 봤는데 나만 못 본 그런 작품들 있잖아. 나는 왜 그때 그걸 못봤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야.」
   「해리포터? 그거 애들 보는 거잖아!」
   「어이쿠 이 친구야. 우리끼리 하는 얘기니까 괜찮지만 누가, 아니 그 팬들과 작가가 이 얘기를 듣기라도 해 봐. 큰일난다니까. 옛날에 꼬마였을 때 해리포터 열심히 읽었다면 이제는 컸을 테니 힘깨나 쓰는 거칠고 투박한 젊은이로 변모했을지 누가 알겠어. 소나 말, 고양이와 애지중지 함께 사는 사람들이 그런다잖아. 언짢은 얘기는 녀석들 앞에서는 하지도 않고 나쁜 일은 보여주지도 않는다고. 이 친구 이거 도시를 떠나드니 감이 좀 떨어졌는데. 조심해, 여기도 당연히 은퇴한 정보요원이나 한물간 다혈질 키덜트들이 있을 테니까.」
   「에이, 농담이야 농담이라구. 뭐 좀 들으면 어때. 난 재미없는데 억지로 재밌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건 그렇지. (침묵) 저기 저 사람이 여기 카페 사장이지?」
   「어 맞아. 사람 괜찮아. 참 좋아. 나에게 잘 해줘. 술도 사주고. 여기 카페에서 같이 한잔할 때 자기꺼 조니워커 블루라벨 깠어. 완전 호인이야.」
   「어쩐지 끌린다 그랬어. 인상 좋아. 멋져. 그런데 오늘은 우울한 건가. 얼굴 표정이 뭔가 근심이 있는 것 같은데. 어두워. 저 아저씨 혹시 전직 광고 문안가 아니야?」
   「왜? 당신 맘에 안 들어, 이런 말 해 주게? 그런데 왠 광고 문안가?」
   「그냥 찍었어. 별 뜻 없어.」
   「아, 여기 앞에 새로운 카페가 생겼거든. 꼭 절박하게 생계를 목적으로 카페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 뭔가 경각심이 들면서 긴장감이 감도나 봐. 그래도 웃껴. 우끼잖아, 애들 같으니까. 아까 봤지? 카페 미라보 다리라고.」
   「아 그렇구나. 엥, 미라보 다리? 그거 기욤 아뽈리네르 시 제목이잖아. 요즘 그거 젊은 친구들에게 안 먹히는데. 아 여기는 시골이지.」
   「조니 넌 요즘 어때? 행복해?」
   「행복? 이제 우리도 그 단어를 대놓고 물어보는구나. 딱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예전에는 그거 금기어였어. 불문율이었다구. 음, 난 행복하나? 행복했어, 행복했지, 괜찮은 인생이었어.」
   「아이 뭐야 왜 그래? 그렇게 과거형으로 말하면 어떡해?」
   「하하하, 그런 반응, 그걸 요즘 즐겨. 짓궃지? 그런데 이거도 별로야. 지겨워졌어. 마지막으로 써본거야. 이제 안 해. 딴 거 할래. 이젠 연기력도 많이 떨어지고, 코메디에 집중도 잘 안 돼. 뭘 하지? 뭐가 있을까?」
   「고심해서 해봤는데 얻어걸리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우연 아니겠어? 뭘 해도 재미없다가 우연히 알게된 무엇, 도파민 팍 엔돌리 빡!」
   「제임스~ 거 단어도 그렇고 말하는 게 좀 점잖치 못하네, 친구.」
   「아, 혼자 있다보니까 아주 엷은 조울증 의증이 생겼을까. 아닐 수도 있어.」
   「헛소리 집어치워!」
   「알았어. (침묵) 우리 영화보러 갈까? 아 여기 극장 없다. 혹시 너 사고치고 이곳으로 피신한 거 아니니? 그럼 쉬었다가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올라가면 되지. 음. 맞아. 이따 저 카페 사장이랑 술 한잔 할래? 아저씨가 그래 뵈도 호탕하다니까. 그분이 오시잖아 그러면 재밌어. 좋은 술 막 나온다니까.」
   「어... 그럴까?」
   「흥분돼?」
   「그럼. 그렇다고 아저씨한테 내가 꽃을 선물해 줘? 아니야. 아저씨와 같이 란제리 가게에 갈까? 것도 아니지. 내가 스타킹 신은? 입은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잖아. 그럼.」
   「개는 물 깊이가 귀 높이에까지 차지 않으면 헤엄을 못 친다.」
   「뭐야 그 말은? 나 놀리는 말인가?」
   「아니야. 그냥 생각났어. 러시아 속담이야. 요즘 개에 관한 속담이 이상하게 뇌리에 착착 달라 붙어.」
   「은연중에 그냥 생각났다? 그럴 수 있어. 어, 그러면... 내가 개란 말야?」
   「어허,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래 알았어. 안심할께. 으이, 아니지! 개로 비유된다고 나쁜 거도 아니잖아. 얼마나 좋아. 그렇지. 음 그래.」
   「특파원 놀이 해 볼까. 아니 점성술사? 어떤가요? 제 미래...! 제 삶은요?! 잘 살고 있는거죠? 그쵸?!」
   「그거도 별로 재미있어 보이진 않는구나. 병원가자!」
   「그냥 또 다른 나를 찾고 싶었을 뿐이야.」
   「그만하면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하니까 걱정하지마.」
   「그럴까? 그럼 다행이고. (침묵) 애들은 어떻게 사니? 나만 쏙 빼고 좋은 데 막 다니는 건 아니야?」
   「어떻게 알았어? 아조 그냥 물 만난 물고기 마냥 실컷 놀러다니고 있어.」
   「안 속아. (침묵) 그너저나 우리 무명 블로그에 올린 소설 읽어 봤니? 다들 색다른 소재와 새로운 이야기로 모두 괜찮다고들 하던데, 그런데 말이야. 누구라고 딱 말하긴 뭐한데 조니 네 소설은 너무 수준 이하라 그러던가. 뭐랬드라... 잘은 모르겠는데, 웬만하면 좀 잘쓰지 이게 뭐니, 라는 어감을 풍기며 어디선가 흠을 잡았다는 것 같던데? 내가 봤을 땐 괜찮던데 말이야. 응?」
   「아 뭐 소설 처음 쓰는데 그럴 수 있지. 그런 말들 참고하여 또 다음에 더 나은 작품 만드는 거고.」
   「그래, 그렇기는 한데 뭐랄까, 서사의 시점도 문제고 이야기가 이어지는 논리적인 근거도 불분명하고 뭘 말하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데. 그동안 어떻게 살았길래 이런 이야기를 쓰는지 모호하다고, 도대체 이거 쓴 작가가 누구냐고 그러던가.」
   「음... 그래?」
   「그래 내가 그랬지. 일부러 그런 의문점을 추스려내서 실존적 불안을 형상화시키고 주체를 흐리고 의식이 자주 바뀌게 만드는 고도의 기술이지 않을까, 그랬지.」
   「그랬더니 뭐래?」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하냐고 그런던데.」
   「...... 그...... 누구야? 누가 그래?」
   「아니 딱히 그와 똑같이 말했다는 게 아니라, 누가 비공개던가 동물인가 인형이 주인인 소셜 네트워크를 운영하는데 그런 얘기가 있었다는 거지. 에잇 신경쓰지마.」
   「그래. 아무 일도 아닐 꺼야. 그런데 있잖아. 저번에 그러던데, 닉이. 제임스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고 먹는 한량이라고. 그렇게 소설이 써진다면 아무나 다 소설가 하겠다고. 하워드도 그랬어. 너가 아무 일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고먹는 돌아이 같다고. 마크는 애들 다 듣는데 대놓고 그러든데. 손끝으로 물만 튀기는 녀석이라고. 아 미안 미안. 미안해. 농담이야. 설마 애들이 그랬겠어? 아, 알렉스도 한마디 거들었지. 제임스! 힘들꺼야. 걱정마라고 해 곧 더 힘들질테니까. 또 케빈이라고 빠지겠냐? 개 팔자 상팔자라더라. 아, 농담이야!」
   「그래 다 알아. 그럴 애들이 아니지. 초딩도 아니고 말야. 오, 조니. 많이 늘었는데? 전에는 실수 연발이더라도 실명으로 딱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는데. 아주 웃음 바다가 터졌겠구나.」
   「그런데 어쩌다 우리 대화가 이 지경이 됐지?」
   「그러게 말야. 항상 이런 식이지 뭐. 이젠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아. 오히려 이렇게 돌아가지 않으면 못 견뎌. 재밌다니까. 정말이야.」
   「너도 그러니? 나도야. (침묵) 쟤 뭐야? 이제 카페 바쁜 시간인가. 손님들이 조금 들어오는데.」 영화에 나오는 험상궃은 악인 유형의 인물이 카페에 들어온다.
   「딱히 그러지는 않고. 모두 뭐 재미난 일 없나 아니면 여기 오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 때문에 들린다고나 할까.」
   「우리가 그만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일까?」
   「마침 그래야 할 꺼 같은데. 카페 사장 아저씨가 나가서 한잔 하자고 하는 거 같아.」
   「오 그래? 좋지.」
   「그런데... 잠깐. 잠시만. 아까 한 얘기. 케빈이 진짜 그랬어? 개 팔자? 상팔자?」
   「아 이 친구 못 말리겠네. 농담이라구. 잊어버려. 거 쓰잘데기 없는 걸 가지구 왜 그래? 너는 걸어다니는 소설이야. 고품격 소설을 써야한다구. 자꾸 그걸 까먹으면 어떡하니? 이렇게 흥분하는 모습을 비추고 어쩌다 험악한 말이라도 나오면 그게 뭐냐?」
   「그렇지? 그냥 한번 말해봤어. 그렇지만... 애들 다 듣는데서 손끝으로 물만 튀기는 녀석이라고? 이 삐─  아, 아... 안되겠다. 닉 집에 지금 당장 가자.」
   「가기는 뭘 가. 전화해 보렴. 전화해서 물어보면 될 꺼 아니야.」
   「전화? 아니야. 아까 닉이랑 통화했어. 마침 조니가 우리집에 왔는데 너네 집에 놀러가도 되냐고 물어봤드니 대환영이라는데. 그렇고말고.」
   「진짜? 어-어. 이게 아닌데.」
   이 친구들은 카페 사장과 한잔하기로 한 암묵적인 약조를 깨고 불숙 닉의 집으로 놀러가는 인생의 모험을 감행한다. 조니가 새로 뽑은 콰트로포르테를 타고 그들은 출발한다. 출발하기 전과 출발할 때, 출발한 후로 계속 조니는 투덜투덜댄다. 닉네 집에 놀러가는 게 좋기는 한데 왜 하필 지금이냐고? 진짜 물어볼 꺼냐고. 제임스는 몰래 조니를 놀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조니가 제임스를. 어쩌면 서로 다른 속마음을 품은 것인지도.
   「닉이 그랬단 말야? 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닉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거 참 사람 일은 모른다니까. 아, 조니. 닉이 전에 그랬어. 너 없을 때 험담했다니까. 조니 그 녀석은 꼭 생긴 거는 영 영화판에 안 어울리게 생겼는데, 운전도 못하면서, 글도 못 쓰고, 친구들 모이면 맨날 늦게 나오고, 어디 놀러가자고 하면 시큰둥하고, 또 이제 철들 때도 됐는데 왠 뻥이 아직도 그리 심하냐고 난리든데. 속절없는, 기대나 꿈이나 환상이나 기다림은 전혀 없는 참담한 애달픔과 절망적인 허망한 친교와 후회 섞인 교우감을 내보이던 걸. 어떻게 된 거야? 닉이랑 언제 다퉜니?」
   「닉이... 그래? 녀석 내가 학교 다닐 때 불량한 애들이 못 건들도록 지켜줬는데. 내가 얼마나 감싸줬다구. 불쑥 이제와서 염치없이 교양미를 일부러 흘려? 이런!」
   「야 조니. 그냥 우리 닉네 집에 가지 말까? 출발한지 대충 15분 정도뿐이 안 됐어. 나는 아까 막 많이 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냥 한번 던져본 말이었는데. 너가 별로 말리는 거 같지 않길래. 여기 터널 지날 때까지만 드라이브 좀 하다가 돌아갈려고 했지.」
   「어... 그럴까? 실은 나도 썩 내키지는 않았어. 그래. 돌아가자.」
   그들이 제임스의 집에 다시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누군가가 제임스의 집을 들어갈려고 하는 기운을 감지한다. 혹시 도둑일지라도 큰 도둑은 아닐 것이고, 어디 잘못한 일도 없고, 큰손들이 개입될 사건에 연루될 일도 없으니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집으로 가까이 가 본다. 동네 살며 알게 된 젊은이가 자기 여자친구와 함께 뭔가 집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간구하거나 어딘가에 숨겨진 열쇠를 찾거나 지문 인식과 홍채 인식 그리고 혈류 인식, DNA 인식등의 과학적인 방법에 대해 고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앤드류! 여기서 뭐 하니?」
   「아 이런. 미스터 제임스, 제임스경. 미안해요. 어떡하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 있어. 그래도 다른데 다 놔 두고, 너무 성급하게 서두른 거 아니야? 포스트벨 사장님에게만 물어봐도 좋은데 많이 알려줄 텐데. 바쁠텐데 어서 움직여. 서둘러야지. 시간은 그대를 기다려주지 않는다구. (침묵) 아 집에 놀러오고 싶었다면 미리 말을 하지 그랬어. 한번 초대하는 거였는데 내가 미안하게 됐군. 집이 완전 종이 상자만 하지만 그렇게 비좁지는 않아. 할 건 다 해. 있을 건 다 있어. 그냥 종이 상자가 아니야. 아트박스라구.」
   「오오 미안해요. 나중에 설명할께요. 그런데 형 친구분이세요? 영화 주인공으로 많이 뵌 거 같은데...」
   「아아 신경쓰지마. 악역이야 악역!」
   「제임스 오빠. 나중에 봐요. 어느새 제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명 인사 되셨던데요. 뭔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앤드류 여자친구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그들은 제임스의 집에서 떠나갔다.
   그 뒤로 조니는 도시로 떠났다. 재미난 일이 없다고 심심하다면서 떠나갔다. 그가 가기 전에 우리는 이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대략은 기억난다. 지금 네가 사는 이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사는가, 네가 자주 가는 그 카페에는 누가 오는가를 이야기했다. 그것을 조니가 물어보자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카페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지만 내가 자신있게 말해 줄 수 있는 멋진 말은 없다, 그러나 대략 이렇지 않을까 라고 추측했던 생각은 두엇 있다고. 그게 무엇이냐면 그곳에는 나처럼 글이 잘 써지지 않는 사람들이 올것이라고. 그 사람이 글을 쓰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만화가 잘 그려지지 않는 만화가라거나, 곡이 잘 써지지 않는 한때 잘 나갔던 대중음악 작곡가일 것이라고, 소싯적에는 영화배우 부럽지 않게 인기가 많았던 멋쟁이였지만 지금은 상태가 많이 안 좋은 아무도 찾지 않는 마초일 것이라고, 그 인간이 그림을 그리는 미술가라면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그 카페에 들릴 것이라고,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뭘 해도 재미없다고 적어도 뭐 신나는 일 없냐고 그렇게 현재라는 허무한 삶을 살며 일상을 지루해 하며 뭔가 기쁘고 즐거운 일 없냐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이곳에 들릴거라고, 나는 그렇게, 그렇게만 조니에게 대답을 해줄 수 있었다. 그 외 답할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훌륭한 답변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할 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다음의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곧 나는 글이 잘 써지기 위해서 이곳을 떠야겠구나, 이제 하산할 때가 되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외 조니가 떠나기 전에 별다른 사건은 없었고, 그처럼 조니는 도시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설치형 소형 주택을 팔았다. 그렇게 생긴 금액으로 카라반을 중고로 하나 구했다. 그래서 지금 내 차 볼보 이천몇년식 왜건에 카라반을 연결해서 주거지역을 옮겼다. 땅을 팔고 사는 건 잘 아는 웹사이트를 이용했다. 이번에 이동한 지역은, 이번에? 꼭 상당한 기간동안 그렇게 살아온 사람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해야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번에 짐을 푼 지역은 전에 있던 곳에서 해안선을 따라 해변에 조금 더 가깝고, 해안 도시가 더 가까운 곳이다. 이번에는 그렇게 도시 외곽 지역의 새로 생긴 도서관 주차장에 차와 카라반을 놔두었다. 아, 전에 살던 곳과 인연을 금방 끊어버려 매정하고 서운한 기분이 들지만 어디에 외상을 졌거나 사고를 치고 도망치지는 않았으니 그걸로 된 거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두번 울리지 않는다? 던가 그곳 사장님과도 핸드폰 번호를 주고 받았다. 언제 서로 연락을 하고 또 받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젠 그런 데 별로 신경쓰고 살지 않기로 했다. 네안데르탈인이나 유목민, 호모사피엔스등 옛날에 살던 사람들의 장점을 뭔가 느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쓰잘데기 없이 잔디 깎고 수영장 청소하고 술만 (퍼)마시다 시간을 허비했다. 그래서 소설이 잘 안 써졌던 것이다. 그래 그렇다. 게다가 땅 기운이 나와 안 맞았다. 그곳의 산세와 지형이 뭔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게 분명하다. 단지 새로운 환경이 주는 기쁨이 내면에 깔린 불만을 억누른 느낌이 이제야 느껴진다. 바이오 리듬만 잘 맞았어도 운수만 좋았어도 별자리만 크게 엇나가지 않았어도 글이 잘 써졌을 텐데. 심지어, 그 다음은 모르겠다. 하지만 카라반은 잘 입수한 거 같다. 내가 집이 있고, 직장이 확실하고, 도시에 살고, 야구모임이나 부부동반 동호회에도 꼬박꼬박 들려야 하는 평범하고 고독한 도시 남자라면 카라반이 불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고, 그런 프리랜서고 도시를 떠나 유목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지금은 카라반이 필요하다. 사람들도 다 안다. 캠핑카와 카라반을 사고 나서 내가 그 괴물을 왜 샀을까, 이동도 불편하고, 어차피 가서 기능도 별로 못쓰네 어쩌네 그러지만, 요트는 살 때와 팔 때만 기분이 좋다지만 꼭 그렇지만은 안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다른 거도 다 마찬가지다. 왠지 카라반에서 소설쓰기, 뭔가 있어 보인다. 전직 정보원의 기분도 느껴지고.
   새로 옮겨온 주거 지역에서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없다. 그래서 일단 그 동네에서 술집은 어디에 있고, 식료품점은 어디에, 산책하기 좋은 곳은 어디인가를 먼저 탐방하고 그 다음에 거점으로 삼을 만한 NC를 알아보고, 단골로 들릴만한 카페를 알아보았다. 뭔가 서둘러 할 일을 찾고, 바삐 움직이며 글이 잘 써질 순간을 무작정 기다리면서 계속 기다렸지만 <드디여 때가 왔다!> 라는 혼잣말을 내뱉을 기막힌, 짜릿한, 황홀한 찰나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당연하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 거의 모든, 아니 전부 다 이렇다. 왜 몰랐을까? 모른긴 뭘,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행여나 신나고 즐거운 흥미로움이 새롭게 날 반겨주고 안녕하며 인사를 건네오지 않을까 라고 그냥 무심코 잠자코 공상을 떠올려본 거지. 무척 데면데면하다. 데데하다. 그러니까 사춘기 소년 소녀처럼 뭘 훔치고 싶은 마음의 상태는 어른이 되면 거의 찾아오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헷갈린다. 뭐가 순진한 것인지 뭐가 순진하지 않은 것인지. 맞죠? 뭐가 맞어. 이젠 혼잣말까지 한다. 다시 도시로 돌아갈까? 아니 그럴 수는 없다. 3류 소설이라도 건져야 한다. 정 안되면 도색 소설도 괜찮다. 환상 문학상에서 기대치가 많이 낮아졌다. 다행이다. 아 기분 좋다. 끝짱이다. 완전 날아갈 것 같다. 머리카락을 쥐어 뜯던가 과도한 총각 기행을 다시 반복해서 자학을 하던가 해야지 내 마음이 하늘로 날아가버릴 것만 같다. 물론 거짓말이다. 솔직히 기분이 꿀꿀하다. 많이 꿀꿀하다. 뭘 해도 재미없다. 소설만 잘 안 써지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욕구불만 상태다. 새로운 생활이 좀 안정된다면 정신과에 찾아가 볼 것이다. 어디에서는 정말 정신병에 가까운 사람만 정신병원에 간다고 하고 어디에서는 그냥 요가학원이나 예술영화회 정기모임에 들르는 것처럼 정신병원에 가서 정신과 의사와 독대를 한다지만 그건 그쪽 얘기고 다 듣고 참고만 하고 잊어버리고 나는, 한번, 정신병원에, 가서, 상담을 해볼 것이다. 그래야 한다. 어, 가만. 소설이 안 써지니까 정신병원에 가는 건가? 정신병원에 갔다 왔드니 소설이 잘 써진다면 날마다 정신병원을 찾아가고 아예 거기 취직해야겠다. 그래도 실은 궁금해! 정신과 의사는 말을 어떻게 할까? 그들은 어떤 고급 화술을 구사할까, 카네기식? 또 내 정신 상태는 멀쩡한지 그리고 그들이 정말 내 최면술에 걸리는지를, 아닌듯한 술수를 금방 알아채는지를. 어쨌든 정말 해도 해도 안된다면 특급 에로 영화 촬영장에라도 쳐들어가서 카메라 감독의 멱살을 휘어잡든가 총감독을 날라차기로 쳐버리든가 조명 기사 보조로 취직하든가 뭔가를 해야 한다. 지금 도시로 돌아간다면 그건 너무 모양 빠진다. 도시가 나에게 빈손으로는 절대 돌아오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행색도 초라하고 허무하며 다음을 기약할 자신감은 바람 빠진 풍선이나 어 음 뭐처럼 쪼그라들 것이다. 혼자 휘파람이라도 불면서 겸사겸사 서점에도 들리고 동네에 있는 건설이 중단된 폐허 건물에도 들어가 보고 뭔가 발악을 해야 한다. 하다못해 사람들이 많이 들리는 소문난 식당과 술집에서 혼자 처량하게 술잔이라도 기울여야 한다. 오, 좋아, 이거야, 이거라니까, 드디여, 마침내, 고진감래라더니, 견마지로라더니, 아 이건 아니겠다, 그분은 오시지 않았지만 이젠 당분간 날 찾아오시지 않기로 작정한 듯 하지만 괜찮아 왜냐하면 유령이 인기척하면서 자기가 부메랑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 부메랑이 혹시 당신이 찾던 그분이 아니냐는 꿈같은 황홀경에 빠져드는 완전 매료될 수 밖에 없는 요술 피리를 건네줄지도 모르지 않냐는 상상을 해보지만, 어쩜 좋아, 역시나 낮잠 자다 꾼 개꿈에 불과한 거다. 꿈 속에서 글을 쓰긴 썼는데 그게 어떤 계시가 되고 오래 각인되어서 그대로 현실로 원고지로 옮겨지지 않고 그냥 단꿈으로 날아가버리고 있다. 
   그런데, 소설이 안 써진다, 아무리 해도 소설이 잘 써지지 않는다, 라는 수동태 문장을 읽으면, 듣는다면 거짓 슬픔을 보이거나 부쩍 과도하게 저조한 분위기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설마 사람이라는 동물에게 이런 잘난 못되지 않은 감정의 한가지 유형이 있기는 한 것일까? 사뭇 궁금해진다. 살짝. 아마도 절반은 완전 웃기다고 하지 않을런지. 소설이 잘 안 써지니까, 뭘 해도 재미없으니까, 타인이 뚜껑 열린다니까 그리고 심심하니까. 독자의 관심을 그분들의 일상의 즐거움을 독차지할 기회는 끈 떨어진 풍선처럼 멀어져만 가는 것 같다. 천만에! 천만에, 라고 썼는데 그 다음이 안 나온다. 일단 한 번 써봤다. 혹시 모르니까.
   그러던 중 닉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하도 오랫만에 통화하는 것이라서 나는 닉이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신형 최고급 카브리올레 차량을 샀는데 말야, 여자친구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러니, 동화책 1권을 출간해서 정식 동화작가로 등단하기 전까지 제임스에게 그것의 사용을 양도하라는 그런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해줄줄로만 알았다. 아주 잠시 동안만 좋다 말았다. 정작 닉이 나에게 하는 얘기는 이랬다. 자기도 동화가 잘 안 써진다고, 그래서 너에게 놀러가도 괜찮냐고. 그래서 나도 그러라고 했다. 언제라도 환영이라고. 하지만 나도 글이 잘 안 써진다고. 지금 실정은 환경이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고, 어쩌면 환경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아직은 그렇다고 답해줬다. 그리고 최근에 만난 공원 관리원이 있는데 그분과 가진 술자리 얘기도 해줬다. 같이 술을 먹다 보니 완전 사람이 괜찮았다고. 게다가 말도 완전 잘 한다고, 거의 조니와 동급이라고. 진짜 입만 열면 청산유수라고, 가짜가 아니라 진짜 전설 속의 텐미닛이라고. 그런데 이 양반이 나보고 제안을 하나 했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자기의 푸드트럭과 내 카라반을 바꾸자고 했다. 자기는 공원을 평일에 관리하면서 해당 행정기관으로부터 임금을 받는데 그게 썩 양에 차지 않아서 주말에는 푸드트럭을 운영한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푸드트럭을 운영하고 보니 이게 돈은 되는데, 되긴 되는데, 돈은 정말 많이 벌리는데 영 적성에 안 맞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 돈이 돼? 푸드트럭이? 정말? 그것도 많이? 그래서 덥썩 그 자리에서 그러자고 했다. 세세한 면면을 살피자면 내가 엄청 손해보는 장사였지만 그 자리에서 듣고 보니 혹해서 또 녀석의 말발이 워낙 뛰어나서 나도 모르게 냉큼 그러자고, 나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구두계약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 술이 깨서 생각해 보니 이런 내가 미쳤지, 내꺼는 완전 새거고(중고지만 기분은) 푸드트럭에서 뭘 파는지도 모르고, 푸드트럭이 재미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고, 돈을 많이 번다는 그 말도 다 구라에 뻥일 수 있는데 섣부르게 말만 앞선 게 아닌가 버럭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인지 땅인지 바다인지 누가 돕긴 도왔을까. 공원 관리원 아저씨가 술 먹고 중반에 필름이 끊겨서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계셨다. 이젠 정말 더 이상 두번 다시 줏대없이 주관을 잃어버리지 않고 쉽게 남의 말에 혹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호사다마, 대마불사, 딱히 들어맞는 격언은 아니지만, 그 일로 큰 불이익은 발생하지 않고 교훈만 약삭바르게 낼름 얻어낸 것 같아 좀 달콤쌉살하고 떨떠름하지만 앞으로, 앞으로 좀더 잘 살고 소설을 잘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소 도둑놈 같은 그 원탁의 기사에게 청렴결백하고 알뜰하게 모은 적금 전부를 몽땅 헌납하고, 마음의 빗장을 열고 활짝 열고, 이것은 사랑이라고, 분명코 사랑이 맞다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 그에게 몸의 언어로도 날 정말 어떻게 생각하냐고, 어디 같이 도망가는 건 어떠냐고, 그녀를 버리고 나에게로 오라고, 다 아니라면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면서 슬프고 영 거시기한 사랑에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아, 그게 아니라서 천만다행이구나, 하면서 액땜 했으니까 로또 한장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 닉과 통화한 내용이다.
   혹시 때부자들이 복권을 사지 않을 꺼라고 생각하시나? 틀렸다. 그들도 복권을 산다. 그분들이 경마장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자.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그들은 복권을 사지 않을 수도 있다. 뭐 자기들끼리 꼭 약속한 것도 아니지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복권을 사거나 카지노에 한번 가보거나. 왜냐하면 돈은 이미 넘쳐나도 어떤 걸 해서 극히 드문 확률로 뭔가 터트리는 즐거움을 놓치고 산다는 것은 인생에서 큰 기쁨을 포기한다는 확연한 오산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을 위해 살지 않는다. 그냥 산다. 하루가 48시간이면 좋겠다는 말, 대체로 뻥이다. 진짜 그걸 바라는 사람들은 그런 말할 새도 없이 촌각을 다투며 뭔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삶의 균형이 무너지기도 한다. 위험 부담은 있다는 말이다. 소설을 쓰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다. 월요일에 출근하는 보통 사람들의 표정 그것이 나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농도로, 다른 느낌에 다른 뭔가로 다가왔다는 거다. 어차피 회사 다니면서 월요병에 걸리나 회사 안 다니고 월요병에 안 걸리고 소설을 써야 한다는, 쓰고 싶다는 막중한 부담감을 안고 살거나 피차일반이다. 남자는 마누라뿐만이 아니라, 사람은 같으면서도 다른 고민 하나쯤은 누구나 덤으로 데리고 산다. 그 덤이 거꾸로 본인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스폰서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녀석이 말한다. "내가 보여주께. 내가 힘이 되어줄께!" 녀석은 어느새 처음엔 메피스토펠레스로도 보였다가 하이드로도 보였는데 어느새 영험한 그분으로 탈바꿈한 것일까? 그 덕분에 당신은 머나먼 창공을 힐끔 내다볼 것이다. 남자라면 비단 커오면서, 젊었을 때, 먹고 공부하고 입고 이것 저것 막 해보고 도전하고 그런 여러 주제보다, 어떤 꼼지락꼼지락 그것에 대해 고민 안 해본 사람은 없다. 한명도. 그게 아니면 여자다. 설마 여자도? 나는 당신의 비밀을, 그녀들의 심연과 환상을, 숙녀만의 은밀한 꽃밭을 더 이상 경박하지 않은 품위를 더하여 지켜주고 싶다. 일단. 말만이라도. 잠자기, 먹고 마시기, 친교 그리고 꿈꾸기 같은 본능은 삶과 영원히 동행한다. 야구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야구 인생 초반에 나는 너무 선발투수로 과도하게 등판한 것은 아닐까, 나는 중간계투로 너무 많이 대기해서 체력을 완전 소진한 건 아닐까, 나의 투구 창의력이 벌써 고갈되었나, 내가 투수로서 야구선수로서 언제 창조적이기나 했을까, 나는 진정 (피터 드러커류 경영 서적에 나오는) 프로페셔널이 맞는가, 나는 지금까지 숭고한 지력을 너무 혹사시키지는 않았나 같은. 그렇다. 당신은 영화를 너무 많이 봤고, 음악과 미술을 포함한 예술과 심미주의에 너무 열중했고, 아주 가끔만 밤의 세계에 탐혹했으며, 책을 너무 많이 읽었으며, 지금 너무 열심히 회사에 다니고, 너무나도 타자적인 삶을 사는 동시에 좀더 좀 더 아름다운 인생을 바라고 있다. 하나 더하자면 그중에 하나, 일기 쓰기나 소설 쓰기 같은 과업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 이런 엉뚱한 생각들이 과히 심각하게 이상한 북극성으로 날 유인하고 데려가서 그곳에 딱 앉히고 누군가 나의 나신을 상상하지는 않을까 라는 몹쓸 걱정마저 버리지 못하며 자꾸 해괴한 의심을 습관처럼 되풀이하게 만드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리모콘 어디갔어? 그건 뭐랄까, 그것의 어떤 불명확한 동기는 카라반이 세워진 도서관 주변에 심겨진 나무 때문이 아닐까? 그 나무의 이름은 무엇인지. 누구야 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이름 말고 그것의 종류말야 계, 군, 목 등등. 그건 사과나무일까 복숭아나무일까 오리나무일까? 자작나무는 아니야. 그럼 뭐야? 자꾸 소설가 근방에 놀러간 문체가 거기 새로 이사온 점쟁이 말발로 기우는 느낌이다. 여기에 적합한 속담은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딱히 알맞지는 않다. 하여튼 고급 햄버거, 수제 피자, 천상의 스파게티 문체에서 그쪽으로 완전 변했어. 자, 예시를 들자. 즉시. 너! 당신말야. 그대는 집에 마당이 있는가 없는가? 일단 있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여유를 보여주시라. 설혹 지금 빈궁하더라도 당신은 곧 부자가 되실 것이다. 근거있는 예언이다. 그 정원에는 나무가 한그루 있다. 자, 정원에 심겨진 그 나무가 그 나무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한여름 유행하는 공포영화처럼 당신 자신이 또는 당신의 집에 놀러온 조카나 손주가 오줌을 규칙적으로 부어서 말라 죽은 나무는 있다고? 심하게 훼손되어 그 종을 잘 모르겠다고? 오오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거참 딱히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이 느껴지는군. 진즉 말하지 그랬나. 마당이 없다고! 딱, 그거야! 그거라니까! 일단 지금은 마당이 없어도 괜찮아. 수영장에 잔디 깎고 옆집 앞집 뒷집에 모두 미인(미남)이 이사오고. 왜냐하면 당신의 현재 운수와 당신의 미래를 보여주는 마법의 수정구슬에 따르자면 당신은 지금 한그루 사과나무를 심으면 안되기 때문이지. 절대. 따라서 아직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 그분은 지금 원정가셨어. 원정 도박이 아니라 유람일껄. 고로 너는 기다려야 해. 그리고 할 일을 하셔. 소설을 쓰든가 아님 사랑을 하든가. 네가 좋아하는 걸로. 뭘해도 괜찮아. 다. 그 시간 당신 꺼니까! 하다못해 뭘해도 재미없다는 말이라도!
   드디여 문단의 막을 내릴 시기가 되었구나. 계절이 자주 바뀐다는 생각이 들면 매사 어떤 감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원래 깜냥도 그릇도 뭣도 안 되었고. 그건 어쩔 수 없다. 다시 진짜 같은 잎새를 그리며 해변에서 상어 지느러미가 달린 수영복을 입고 비밀 스노클링을 해서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비범한 미녀를 놀래켜주고 비키니를 입은 그녀의 평범한 친구에게 뺨 맞을 수는 있지만 (세상에는 술 사 주고 뺨 맞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 다음에 코피가 흐를지 말지는, 그걸 동영상으로 찍었던 카메라가 중간에 배터리가 나갔던 말던, 그 일행을 잘못 건드려서 일을 걷잡을 수 없이 키워버리든 어쩌든 그것은 청자, 화자, 당사자, 한때 사기꾼, 방관자, 독자, 양심을 전당포에 맡긴 언제 어디서나 비상구를 확보해 놓는 소임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 약삭빠른 서술자 그리고 누구의 소관도 운명도 그 무엇도 아닐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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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59

from 소설 2015. 10. 31. 22:43

   내 이름은 조니다.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부른다. 나의 애마는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다. 어느 날 광고를 보고 덜컥 구입을 결정했다. 어차피 메르세데즈 S63 급이 아니라면 성능은 모두 심하게 말해서 그만그만하다. 광고와 더불어 내가 얘를 산 결정적인 이유는 외양과 내면의 극명한 차이 때문이다. 여자를 예로 들면... 어... 말 말자. 그 광고에서 표어는 괜찮더라. Live The ART. 차 뒤로 보이는 배경이 마음에 들어 덥썩 사버렸다. 그 차를 타고서 세계에서 유명한 자전거 대회에 구경가 삼지창을 들고서 응원할 것이다. 그러려면 삼지창을 만들고 뿔 2개 달린 모자와 복장도 챙겨야 한다.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다음 연도 나의 목표다. 목표는 하나가 아니다. 또 목표는 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전보다 지금 이후로 양복을 더 자주 입을 것이다. 구두를 더 자주 신고 싶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하지만 너무 과도하면 행동이나 생각에 각이 잡히고 발도 피곤하니까 너무 자주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지는 않을 것이다. Elegance is an Attitude. 문득 말의 볼과 엉덩이를 쓰다듬고 싶다. 망아지와 대형견과 함께 뛰어놀고 싶다. 가죽 옷도 입어보고 싶다. 뭔가 터프해 보이는 옷차림. 가끔은 버번 위스키도 홀짝이는 여유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 참고로 나는 버번 위스키의 '버'자도 모른다. 나이 들수록 겉멋도 좋지만 힘을 빼고 지적으로 성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는 김에 집에 진열된 읽지 않은 책도 읽을 것이다. 그리고 시계. 사실 사람들에게는 이제 손목에 차는 시계가 필요없다. 그러나 걸작, 특별함, 품위, 우아한 곡선미, 아름다움, 광채 그런 것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도 시계를 찬다. 나도 귀찮지만 1주일에 하루는 시계를 차야겠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스타일와 품성까지 완벽한 사람들은 손목시계를 좋아한다고 한다. 근거는 없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멋진 손목시계를 보면 저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일까, 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지만 드물게 그런 생각을 잠시 하긴 한다. 즉 시계는 좀 의뭉스럽지만 사람의 외모와, 남자의 가냘픈 지적 수준과 연결된다. 시각이 청각과 이어진 것처럼.
   예전에는 몰랐는데 수필을 쓴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일은 더 즐거운 일이다. 수필을 쓴다는 것과 소설을 쓰는 일, 전자와 후자를 왜 비교하고 엮는지 모르겠다. 왜 전자와 후자를 '그러나'라는 접속 부사로 이어서 문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가. 알 게 뭐야. 그걸 알아내고 파고드는 것보다 무드와 낭만과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게 나의 포지셔닝이다. 마음 설레는 로맨스를 할머니가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 같나? 할아버지는 쫙 빼입고 베레모를 쓰고서 컨버터블을 타지 말란 법이 있냔 말이다. 오라, 그럼 나도 이번 주말엔 집시처럼 어딘가로 떠나야겠다. 계절이 바뀌면 좀 그럴 필요가 있다. 센티멘탈!
   나는 스무살 초반 청춘시절에 멋도 모르고 반짝이는 십자가 모양 목걸이를 하고 다녔다. 큐빅으로 장식된 번쩍거리는 목걸이. 몸에 문신을 새기거나 약을 하고 별난 기행을 하는 것 보다는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막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져 그러다 말았다. 그렇다고 립스틱을 태어나서 1번이라도 발라본 건 아니다. 어렸을 때 누나가 내게 그걸 크레파스 대신 칠했나, 잘 모르겠다. 새빨간 립스틱. 오랜 결혼생활에 무뎌진 남편이 뜬금없이 부인에게 뭐 잡아먹었냐고 건넬 수 있을 법한 그런 빨간색. 차로 시작해서 옷차림과 시계 그리고 새빨간 립스틱으로 건너왔다. 하나도 연결이 안 된다. 이런! 그렇지만 다 그런 이유가 있다. 엎어진 카드를 뒤집지는 않겠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뒷면의 모양이 이쁘다. 실망하기 싫단 말이다. 타인 위주로 관점을 바꾸자면 미리 낙담시켜드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다음주에 나는 친구들을 만난다. 케빈, 알렉스, 마크, 하워드, 닉, 제임스. 모두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잘 살고 있겠지. 궁금하다. 보고 싶다.
   친구들은 친구들이고 요즘 난 이사갈까 생각 중이다. 동네에 들어서는 새로운 집들이 너무 촌스럽기 때문이다. 그 돈을 들이는데 왜······ 그렇게...... 그런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인근의 어느 새 도심지 공원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느 해외 뉴스를 보니 그걸 뭐 활성화 어쩌고저쩌고 해서 뭐 나름 집, 건축, 경제로 그 범위를 넓히고 키워서 보는 시각이 있다는 걸 보도한다. 그 말을 들으니 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말은 된다.
   아차, 차를 바꿨으니 드라이빙 슈즈도 하나 마련해야겠다. 이런 젠장! 소설 쓰고 있는데 순전 뭘 하고 싶다, 뭐 사고 싶다, 뭐 샀다, 시시콜콜 수다떠는 것 같다. 30년째 글을 쓰는 작가인데 그동안 필력이 제자리를 지키는 매우 고집 센 양반같다. 지금 남 얘기할 때가 아니다. 누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아, 향수. 향수는 섹시함의 아이콘이다. 참자. 지성과 격조. 차라리 한 편의 시를 읽겠다. 사람들은 시를 안 읽는다. 시인은 가난하다. 가난해도 좋으니 나도 시를 쓸 수 있는, 잘 쓸 수 있는 재능이 있으면 좋겠다. 그 능력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돈이라도 많아야 하나?
   사실 이건 마누라가 쓴 글이다. 내가 이런 형편없는 습작소설을 쓸 리는 없다. 게다가 그걸 수첩에 그리고 싸구려 플라스틱 볼펜으로? 어림없다. 그러나 이 말은 뻥이다. 이 말만 뻥일까? 이번엔 여기까지만 쓰고 다음 번에는 좀 더 사색을 다듬고 사유를 발전시키고 지성을 드높여서 훨씬 고급스러운 글을 쓸 것이다. 반드시! 이 말은 진담이고 예언이다. 예언이여, 들어 맞아라. 딱 맞게 실현되기를 빈다. 아, 그리고 나는 마누라를 사랑한다. 언제 어느 때라도 꼭 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은 절대 별하지 않는다. 절대, 절대, 절대, 절대. 한 번 더 절대! 그녀가 혹시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이 완성되면 그녀가 몰래 법정 대리인으로 출판 계약을 맺을지도 모른다. 나도 내 부인의 약점을 하나 캐내야 하는데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실은 자신이 없다.

   나는 케빈이다. 케빈은 나다. 나는 요즘 소설을 쓰고 있다. 아마도 제임스 때문에 어떤 알 수 없는 영향을 받아서 친구들 가운데 어쩌면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은 친구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도 물론, 나 요즘 글 써, 라고 발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건실한 놈으로 일단 하나를 완성한 후에 발표해서 애들을 깜작 놀래켜주고 싶다. 우린 꿈에도 몰랐다, 언제 그런 일을 꾸몄니, 첫 소설인데 장난이 아니네, 혹시 걔가 걔니, 그 행위는 진짜 따라한 것이었냐, 같은 다정한 말을 듣는 걸로 시작해서 기쁜 대화를 나누고 싶다. 소설을 발표하면 아무래도 속마음을 너무 많이 드러내는 헛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내 인생에 소설가라는 직업을 하나 더하는 게 급선무다. 게다가 그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타자를 위한 일, 즉 작품성이 손톱만큼 더해지고 사춘기 소년의 삶에, 꿈 많은 소녀의 먼 미래에 뭔지 모를 작은 보탬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소설 쓰는 일이 나의 삶에 크나큰 낙이 되었다. 실패하면 낙담할지도 모르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고 골방 한구석에 꿈을 쳐박아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더 낙담해서 괜한 데다 분풀이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실패한다고 해도 매해 말일 날 샴페인을 터트리고 자축할 것이다. 새해에는 재도전할 것을 다짐하면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처음에는 그 주제로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통 진도가 나가지를 않는 거다. 그래서 생각하다 종이에 썼다가 그 종이를 찢어서 구겨서 집어던지고, 그걸 몇 차례 반복하다가, 에라 이렇게 된거 모르겠다, 그러면서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바꿨다. 어영부영 작문에 대한 좋아하는 감정이 그 콩만한 것이 달만한 창작욕으로 변해버린 거다. 그러다가, 소설 남자의 미래를 바꾸다, 라는 문장이 문득 떠오르면서, 번개처럼, <아! 이거다> 라는 깨달음을 필두로 거창한 글쓰기가 시작됐다. 장비든 뭐든 몽땅 갖추고 일을 크게 벌리고 뭘 시작하는 그 습성이 도진 거다. 그게 내 스타일인데 뭐 어쩌겠나. 나는 그게 좋다.
   소설을 쓰는 데 특별한 비법은 없다. 그걸 알아내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소설 쓰는 법, 소설의 기술, 문학이란 무엇인가, 같은 책들이 도움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쉽게도 난 그 축에 못낀다는 걸 금방 운 좋게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했다. 지금도 골똘히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놀랍고도 재미난 소설을 쓸 것인가를. 그래서 난 마침내 한량이 되버린 느낌이다. 종내는 승려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다. 사랑을 쟁취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렇게 내면의 감정이 꼬일지라도 나는 그 느낌이 싫지 않다. 결코. 그 전에도 그랬지만 뭔가 예전 보다는 사람이 더 진중해지고, 내 안에서 뭔가 울컥 올라왔다. 그냥 출퇴근에 게임하고 TV보고 술 마시고, 그것도 좋지만, 그게 다가 아니란 느낌, 뭔가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칼을 뺐으면 호박이라도 찔러 봐야 한다고. 운동과 여행과 낭만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그런 내게 어느 날 소설이 다가왔다.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꼬시듯이, 부분적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구애하듯이 그렇게 안정되고 단조로운 일상의 보편성을 벗어난 소설이란 명제와 내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소설 쓰기, 이것으로 삶의 활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내 이야기만으로는, 쉽게 말해 주황색에 한정된 명도와 채도만으로는 제한적일 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 얘기를 귀담아 들었다. 전에도 알기는 알았지만,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누가 잘 들어주는 걸 좋아한다. 최소한 그걸 싫어하지는 않는다. 많지 않아도 자기 글을 꼬박꼬박 읽어주고 음반을 사고 간헐적인 전시회 관람을 잊지 않는 애호가를 어느 예술가가 싫어하겠나. 그 바닥과 일반인 생활, 다를 거 없다. 그러다 보니 내가 남 얘기를 잘 들어주니까 나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호감도가 올라가서 평판도 좋아지고 내 기분마저 덩달아 좋아진다. 물론 자아의 색깔이 옅어지거나 개성이 조금은 희미해질 수 있다는 반작용도 약간 있을 수 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만 줄이고 즐거운 이야기를 써야 한다. 장미에 대해서만 장황설을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장미꽃밭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장미 가시에 한번이라도 찔려본 다음에 인생을 논하라는 충고를 넌지시 건네며 뭔가를 아는 척,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뭐가 나올지, 뭔가 나오겠지, 하면서 자꾸자꾸 읽고 싶게 만들고,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향수를 불어일으키고, 추억을 되살리고, 때로는 따끔한 일침을 놓으면서 껄끄로운 일마저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버거운 길마저 마다하면 안 된다. 그냥 해보는 것은 없다니 하냐 안 하냐만 있나니, 그것도, 그냥 한번 해 본다는 것도 안아서 그냥 해보는 게 왜 중요한가를 정말 친절하고 재미있게 설명해서 상대방을 감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맨땅에 헤딩하는 독학처럼 기초 서적부터 최고급 과정까지, 아동용 판타지와 청소년 소설부터 인생이 이 경험도 저 경험도 두루 알려준 어른을 위한 내용까지 모두 포함한 소설, 그것을 써야 한다. 그러면 괴물이든 실패작이든 뭔가 나오겠지. 헉, 그런데 이 이야기는 언제 시작되고 왜 등장인물들이 안 나오고 대화도 없는 거지? 등장도 안 했는데 엄청 심약하고 소심하며 완전 말 수 없는 그런 사람들 두서넛 나오는 소설, 그런 건 딱 이곳의 목표와 반대되는 부류다. 그러나 솔직히 그렇게라도 잘 시작하고 싶다.
   인문-교양서에 주로 나오는 뭐뭐 하라, 뭐뭐 하지마라, 딱 이것과 확연히 다르게 소설에서는 사람을, 사람에 대해 알려야 한다. 범위의 테두리를 불명확하게 만들고 조금은 간접적으로. 그래야 사건이든 발단이든 절정이든 생기게 된다. 처음부터 이건 뭐다, 저건 뭐다, 라고 단정짓고 가는 건 아는 게 많고 지성이 받쳐줘야 한다. 사람의 분석, 그럼 그것은 뭘로 다가가야 하나. 치밀한 논리와 도표와 수치와 반전과 상징? 아니다. 딱 문장 하나면 된다. 바로, <나는 무엇을 좋아한다> 바로 이것이다. 특히, 자아가 흐리거나 억압되고 주관이 희미한 사람들께서는 충분히 새겨들을 말이다. 나는 아니지만, 나와 친분이 있는 내가 잘 아는 어떤 분은 이걸 아는데 무려 40년이 걸렸다고 한다. 어떻게, 40년씩이나! 연애를 시작할려면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하다가는 그녀는 달아난다. 그녀를 여러 호색한과 색마와 멋쟁이들이 가만 놔두질 않는다. 블로그를 시작해서 여심을 공략하든 그녀와 친한 사람들을 포섭하든 우선은 날 드러내야 한다. 챙피하고 수줍은 느낌이 들어도 할 건 해야 한다. 그대여 가면을 벗어라. 그리고 그것을 짓이기고 뭉개고 구겨서 버려라. 진짜 삶을 살란 말이다. 껍데기는 저멀리 던져버리자. 그러든 어쩌든 대화나 사건이나 뭔가가 안 나오고 설만 푸니 참 슬픈 일이다. 어쩔 수 없이 내 얘기를 먼저 꺼내야겠다.
   나는 최근에 차를 바꿨다. 난 원래 차를 여러 대 가지고 이 차 저 차 막 타는 성격이 아니다. 그럴 여유가 되어도 안 그런다. 하나를 짥고 강렬하게 사랑하면서 그 다음 그 다음 콩콩 건너뛴다. 차는 그렇지만 연애는 안 그런다. 이번에 바꾼 차는 애스턴 마틴 라피드S다. 내가 이 차를 선택한 이유는 첫째, 얘와 함께라면 행복하니까 둘째, 여자들에게 먹힌다. 앗, 좀 멋드러지고 격조 있는 표현을 써야 하는데 간혹 까먹는다. 여성분들의 숨겨진 은밀한 동경심과 은근한 낭만적 추구 성향을 자극한다고나 할까. 그다지 향그러운 설명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리고 셋째, 이걸 타면 현실과 꿈, 영화, 촬영 보조 그 가운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잘 분간이 안 된다. 그 떠도는 아련함과 표리부동한 자아, 그런 게 참 좋다. 성능이나 미션, 뒤쳐진 몇몇 사양과 투박한 옵션들 모두 그냥, 괜찮다.
   우선은 여기까지 쓰고 환상관에 다녀온 후에 다음 이야기 구상에 들어가야겠다. 이건 장편소설의 챕터 하나지만 너무 급작스럽게 마무리되는 감이 없잖아 있다. 자고로 남자란 치고 빠질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안녕. 내 이름은 알렉스야. 알파벳 A, 내 이름의 첫 글자. 여자친구는 나를 카푸치노 같은 남자라고 해. 왜 그러냐고 물어본다면 딱히 이유를 댈 수는 없어. 그게 다야. 그게 뭐냐고? 그게 뭐냐는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다. 꼭 정신지체, 지적장애, 뭐, 그런 말이 떠오른다는 거 다 알아. 그게 뭐냐는 말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야. 그러니 그 좋은 말을 한 번만 듣고 멈출 수는 없지. 한 번 더 가야지. 그래. 사람이 미래를 장담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이상한 일이지만 난 내 여자친구의 주근깨가 너무 좋아. 언제까지라도 그럴 꺼 같아. 카푸치노와 주근깨가 뭔 상관이냐고, 말하지 않아도 네 맘 다 알아. 그러나 어쩌겠어, 이상하게 그게 좋은 걸. 내가 너무 애 같은가? 아닐 껄. 난 평균이야. 그럼.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나기 전에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친구들을 자주 만나니까 자꾸 친구들이 나를 놀리는 그런 취미가 있었나 보다. 그런데 난 그게 빈정대는 농담이 아니라 참말인줄 알았다. 즉 난 친구들 때문에 내가 여자 꼬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줄 알았다. 물론 친구들끼리 장난치고 으쌰으쌰할 때만. 어찌됐든 그동안 알았던 여자들도 지금 다시 잘 생각해 보니 그녀들의 덫에 걸려들거나 미끼에 혹하거나 어떻게든 요사스런 유혹에 끌린 게 대부분이었다. 누가? 내가. 하지만 그건 과거다. 지금은 현재고. 이런 내 앞에 미래가 있다.
   나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내가 왜 소설을 쓰기로 결정했냐면 어느 날 문득 평생 너무 말만 하고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고 연기를 할 수도 있는데 살면서 난 너무 말만 하면서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퍼뜩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 순간 내가 어디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공원에서 낙엽을 밝고 쓸쓸히 걷다가 그랬나, 술 취해서 집에 휘청거리면서 들어오다가 혼자 노래를 부르던 그곳이었나, 잘 모르겠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그 깨달음이 있고 난 후 쉬는 날이면 강변을 걷거나 동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놀러가서 사람들을 쳐다보고 구경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째 저렇게 사람들은 그리고 남자들은 음, 그럴까, 그런 생각을 했다. 축구 골대에 공을 넣을려고만 하고, 농구 골대에 농구공을, 야구공을 때리고, 테스스공을 직장 상사의 얼굴이라 착각하면서 스매싱을 하고, 앞으로 계속 달리고, 모여서 자꾸 어디를 가고, 술집을 전전하고, 산을 정복하러 산에 오른다. 정복은 뭔 정복. 그리고 부릉부릉 하면서 목적없이 스포츠카 동호회 일주를 즐기는 모습들이 보인다. 똑같은 자동차들이 일렬로 여러 대 질주하는 장면, 그건 경기도 아니고 어디까지 중요한 일을 치르러 가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디까지 갔다가 커피 마시고 돌아오는 게 다다. 그 구간이 멀다면 그리고 그 행위를 이끄는 리더가 자동차 튜닝 가게 사장이라면 한번씩 그렇게 나갔다 오면 자기 주머니가 두둑해질 것이다. 당연히 동호회 회원들에게 술 한잔 사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곧 이렇게 몸으로 부딪히고 달리고 공을 넣고 아니면 웅변하고 허풍에 술 마시고 취하고 여자 꼬시고, 그게 과연 타인 삶의 전부인가, 그게 진정 남자의 진면목인가, 그게 바로 내게도 동일시되고 동기화되는 현상이란 말인가? 이건 너무 단순하지 않나, 이건 좀 뭔가 대단한 게 없다, 어떤 진실한 즐거운 환희를 느껴보고 싶다, 그런 의문과 욕망 때문에 소설을 쓰기로 결정했다. 머머하라, 머머하지 마라, 그런 인문-교양서 보다는 항상 설을 푸는 게 내 생활이었으니까 다른 걸 하고 싶었다. 그 다른 게 소설이었다. 아이이자 어른이고, 남자이면서 여성일 수도 있으며 하루는 여행가, 내일은 애마부인, 그런 다면적인 이상한 가상의 주인공을 바로 소설 속에서 만들어 내고 싶은 열의를 품게 된 것이다. 그건 아마도 우연일 것이다. 그게 능동적인 사고였다면 음, 재수없다.
   소설 쓰기의 발단은 그랬는데 그 잠재된 욕구를 바깥으로 끄집어내게 된 동기는 다름 아닌 시시콜콜한 TV 연예 뉴스였다.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그때가 있어 지금이 있다. 책을 읽는 독자가 있으니 작가가 있는 것이고, 그대가 볼 것이기 때문에 나는 소설을 쓰고, 나는 당신이고 당신은 소설가다. 뭔 말이냐면 어느 날 연예 뉴스에 유명 연예인의 결혼소식이 나왔다. 쉽게 말해 최고 스타의 결혼, 그런 특종 말이다. 그 유명 배우가 신부로 맞이한 여인도 연예인이었다. 한때 가수. 그런데 그녀의 이름 이니셜이 SJ였다. S─J. 오, S─J! 내 친구 제임스는 이것과 반대로 이름과 성의 이니셜이 JS다. 제임스가 딱 밝히지 않는 신비한 진주귀걸이를 닮은 그녀, 그녀 이름의 이니셜도 JS라고 한다. 그녀가 옛날에 <못생겼네!>라는 말을 들었다나 뭐라나. 정리하면 연예계 특종으로 알려진 결혼 소식에서 신부될 여인의 (이름) 이니셜이 SJ, 제임스는 (이름과 성) 이니셜이 JS, 제임스가 술 취해서 언뜻 속삭였던 그 녀석 꿈 속의 그녀 (이름) 이니셜도 JS. 뭐가 막 복잡하지만 여기서 SJ만 남기면 되고, 서두가 긴 이유가 있다. 두근-두근-두근, 전주곡이 반드시 필요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어야 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 S─J, 그 기억을 나는 평생 안고 산다. 원래 사람의 인생은 그렇다. 누구나. 그게 나에게도 있다는 거다. 물론 당신에게도. 아무튼 SJ라는 이니셜을 들으면, 듣지 않아도 옛날 그 일이 생각난다. 그런데 뉴스에서 특종, 하면서 종소리가 울린 거다. 뭔 일이냐면, 일단 문단을 바꿔야겠다.
   뭔 일이냐 하면 시골에 있는 3류 대학교를 다닐 때 일이다. (지명이나 도시명은 가상이다.) 그 학교는 대충 텍사스 어느 촌구석에 있었다. 나는 그 학교가 생긴지 2년째가 되었을 때 그곳에 입학했다. 지금 이야기가 있던 시간은 내가 학교에 들어간지 6년째던가 7년째던가, 그렇다. 중간에 난 특수부대에서 약 2년을 보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학교에서 나는 기숙사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또 그때 제일 친한 친구와 같이 지내면서 겪은 일이다. 그 친구는 걸음이 굉장히 빠르다. 그보다 더 빠른 걸음걸이, 아직 못 본 거 같다. 말도 빨랐다. 게다가 말이 막히지도 않는다. 언변도 훌륭하다. 전형적인 재담가다. 그런데 좀, 많이 횡성수설이다. 대화 내용 수준도 좀 그렇다. 키는 매우 작다. 얼굴은 처키 인형을 닮았다. 그래서 현실에서 그 녀석이 여자를 꼬시기는 힘들었다. 얘는 운동은 못한다. 아예 안 한다. 글도 읽지 않는다. 비논리적이고 즉흥적인 성격. 어려운 하나를 막 파고들지 않고 공부 못하고. 게임은 좋아함. 쉽고 단순한 것만. 그는 누드사진 동호회 회원이었다. 동호인 모임에 나가 야외에서 누드모델의 눈부신 나신도 실제로 봤다. 처키는 가짜 웃음의 권위자다. 나 같은 너털웃음으로 일관한 아재들이 시급히 보고 배워야 할 그 거짓 미소. 그리고 척키는 여자친구가, 지금의 부인인 그녀가 녀석보다 넉넉히 키가 컸다. 힐을 신으면 좀 더 훌쩍. 또 어깨동무도 그녀가 먼저 한다. 그랬다. 녀석은 당시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 인간도 자유인이다. 그리고 그때 인터넷 채팅이 유행이었다. 나는 못하는 외국어로 Yahoo.com에서 베네주엘라 처녀와 룩셈부르크 아가씨와 그쪽 언어로 신기해 하며 막 채팅하고 그랬다. 그러나 내 단짝 처키는 국내 채팅에만 열중했다. 물론 처키도 나를 신기하게 봤다. 그렇게 처키는 사이버 세계에서는 카사노바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기숙사에 살다가 주말이면  달라스에 있는 집에 갔다가 월요일 아침에 다시 학교에 왔다. 처키는 집이 멀어서 언제나 기숙사에서 살았다. 녀석 집은 시애틀인가 플로리다던가? 입만 열면 뻥이라서 잘 모르겠다. 그러다 어느 날 처키가 채팅이 잘 되어서 껀수를 잡았다. 녀석이 채팅으로 약속을 잡은 장소는 내 집이 있는 도시 달라스였다. 약속 시간은 주말이었다. 그래서 처키가 나에게 대타로 나가라고 했다. 그냥 심심해서 채팅하다가 뭔가 걸렸고, 별거 없겠지 그랬나 보다. 그리하여 나는 주말에 뭐 별 생각없이 그 자리에 나갔다. 그날 나는 검정색 ARMANI EXCHANGE 니트에 청바지는 DKNY, 구두는 KENZO 그리고 GUCCI가 아니라 어떤 향수를 뿌리고 나갔다. 그때 Calvin Klein Collection 외투는 사기 전이었다. 줄무늬나 베이지색 Calvin Klein Collection 수트를 사고 싶었는데. 그때 그걸 보고서 완전 홀딱 반했다. 그걸 입수했다고 해도 입고서 딱히 어디 갈 자리가 없었다. 혼자 거울만 봤겠지. 그리고 첫사랑을 처음 만났던 카페에는 KENZO 니트에 저 DKNY를 입었음. 지금은 좀 대중...신비감이 폭등하진 않은 듯 하지만 그 당시 kenzo.com에 흐르던 음악, 으으으. 내가 개였다면 아마도 오줌을 지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만. 그때 삶의 스트레스를 신용카드 사용하는 걸로 풀었다. 그렇게 과소비에 빠져들어 당도한 엄청난 파국에 대해서는 할 애기가 많지만 아니 어두워서 밝힐 수 없지만─일반인은 잘 안다. 그 늪에 빠진다면 보봐리 부인을 반추해? 내 앞이 캄캄한데 그럴 수는 없다. 저항하기엔 어쩜 너무 무기력하고 음성적인 '어차피 이런 게 된 거' 효과와 신고 나면 자동적으로 불가능한 무도가 현실적으로 시작되어 그 다음에는 '어쩜 좋아'라면서 추는 춤을 절대 멈출 수 없다는 동화에 나오는 그 구두와도 닮은 가속도 앞에서 힘을 쓸 수 없게 되는 일도 있다지만─지금은 삼천포로 빠지지 않겠다. 그날 그렇게 그녀를 만났다. 막 밝고 화사하게 딱 그렇지는 않았지만 또 분위기가 딱히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그녀를 처음 만나서 둘이서 식사를 하고, 영화를 한 편 보고, 베스킨라빈스에 들려 아이스크림을 먹고, 또 영화를 봤다. 그때는 미니 극장이 유행이었다. 인터넷 채팅이 유행이었듯이. 1번째 영화는 뭘 봤나 기억이 안 난다. 2번째 본 영화는 제목이 '섬'이었다. 그건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감독의 초기작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호감이랄까, 첫만남에 대한 아니 그것을 넘어서는 아무 일 없는 따분한 일상의 삶과 그것의 별 기대없는 미래에 대한 궁금증과 뭔지 모를 막연한 기다림과 어쩌면 설렘의 감정이 그 자리에 함께 했었나 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2번째로 본 섬이란 제목의 영화와 함께 에구머니나, 뭔 교감이 있었다. 수수께끼에 휩싸인 그런 거. 그날 나는 비로소 여자의 어떤 오묘한 불가사의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날 난 내가 파가니니인줄 알았다. 나는 그날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전의 나는 그냥 동네 꼬마였다. 땅꼬마. 그녀는 정녕 미지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신비라는 이름의 놀이동산에 있는 천국행 은하수 열차의 승객이었단 말인가? 우주를 여행하는 비행선에 탑승한 특별 손님? 피임은 생각도 못했다. 그때는! 이런 단어조차 말하는 게 무척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걸 털어놓기에 그러므로, 왜 유수의 영화제나 명망 높은 문학상 같은 데서 괴롭고 불편하고 쓰디쓴 주제나 언짢은 내용과 사건과 모순된 애매함을 다룬 작품들이 아마도 반쯤은 그 영역을 굳건히 지키고 또 그래야 하는가, 그런 적어도 내게 있어서 평범함 저쪽에 있는 관념적인 냉엄한 경지를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된다. 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것도 경험을 해봐야지만 꽁꽁 눌러서 내면의 무의식 몇 번 방에 잠자고 있는 그것을 꺼내 봐야지만 그 절심함과 사소하지 않음에 아차,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날 나는 그녀와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지고 처키에게 전화를 걸어서 통화를 했다. 그리고 그 날이 지났다. 전화로 그 안개에 가득한 내막을 듣고서 처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에 빠졌던 걸일까, 오, 오, 오! 그게 화근이었다. 월요일이 되어 나는 아침에 학교에 갔다. 그렇게 기숙사에서 강의실에서 녀석의 갈굼은 시작되었다. 뭔지 모를 눈빛과 이심전심까지도. 그때 단짝 처키에게서. 들들 볶고 웃고, 웃기며...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호인이 받는다? 그런 속담 있지 않나. 채팅은 누가 해서 그녀의 마음을 사로 잡았는데 금단의 열매인 탐스런 선악과는 정작 엄한 놈이 따먹었던 것일까. 별일 아니지만 큼직한 골드바 5개 짜리 값어치인 판도라의 상자 열쇠를 얼렁뚱땅 말발에 속아서? 잃어버리고 실수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라니. 부아가 치밀고 억울하며 화딱지 나서 그 갈굼은 절정에 달했다. 그래서 결국 못 견디고 얼마 후에 두번째 만남의 장소에는 내가 아닌 처키가 나가게 됐다. 그때까지 시간이 좀 있었다. 다른 곳에 살며 다른 학교에 다니고 각자 다른 생활을 하느라. 두번째 만남에서 녀석이 청춘의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마음이 너무 조급했던 걸일까, 문제는 그게 아닌 것일까. 그날 그녀는 결국 울고불고 야단나고, 처키는 기숙사로 낙담하고 많이 실망해서 돌아오고, 나는 그녀에게 전화했고 다시 연락하지 말라는 울분의 말을 들었다. 그녀의 이름 이니셜이 SJ였다. TV 뉴스에 나온 연예게 초-특종 대스타의 아름다운 신부 이름과 똑같은. 철없는 사나이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철학과 이상과 꿈과 모험에 굶주린 킬리만자로의 하이에나? 표범? 고독한 도시의 사냥꾼. 더 이상의 수식어는 필요없다. 왜냐하면 처키와 나는 또 다른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 문단을 띄우고, 문단을 띄우고? 아하! 그러기엔 뭔가 아쉽다. 왜냐하면 그때 대체 뭔 일이 있었나 더 듣고 싶어하시는 독자가 분명 있긴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래 당신 친구 같은 사람. 웃고 있는 그대. 바로 그런 데서 인생의 갈림길이 갈리고, 생애의 판도가 뒤바뀌는 건데 그저 세부적인 그림과 사실주의만 신봉하고 젊을 때 열정을 불태우고 꿈을 쫓고 해야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데 뭘 망설이냐고, 속시원히 말해달라고, 알려달라고, 풀어놓으라고 떼쓰고 조르는 뭘 좀 의아해 하시는 일부 젊은이에게 이젠 나도 한소리 하고 싶어졌다. 그래, 그게 노파심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래도 일단 읽고나 보자. 앞서 그때 대관절 뭔 일이 있었나 더 세밀히 여기서 뭔가를 더더욱 자세히 묘사하는 건 에로비디오의 재생버튼을 눌르는 것과 같다. 장르가 에로면 그나마 다행이고. 고전적인 카메라 각도를 무시하고, 고풍스런 음악도 뒤로 빠지고, 어떻게 해서 연정에 이르게 되었다는 낭만의 과정과 있어 보이는 대사와 되돌아보게 만드는 신비로움 그건 다 포기하고, 단일 구도로 실제 상황을 찍은 듯한 그래서 극도로 사실적인 직접 화법. 비디오 킬 더 레디오스타, TV 다음에 INTERNET, 전자에서 후자로 오면서 비밀이 없는 세상에서 미스테리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더 커졌다. 지루함과 심심함과 권태는 물론 예술과 상업이 발달한 것처럼. 그뿐만 아니라 영상 예술 또한 그랬고. 그 한쪽에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쾌락주의와 향락주의도 있을 것이다. 세네카의 작품이나 금욕주의 그런 범위까지는 건너가지 말자. 방대한 양의 어떤 영상들이 범람한 시조에 그와 비슷한 글은 뭘 좀 모르는 남자 같다. 그쪽에 집중하고 그쪽에 빠지면 언제 멈추어야 하느냐, 도 애매해지고 다른 쪽에 할당될 에너지도 그쪽으로 몰릴 것이다. 그 길만 가게 되는 거다. 인생처럼. 삶에서도 통속극 작가에게도. 하지만 그것도 환상이다. 명백히 사랑의 일부분 아니 크나큰 요체요, 핵심에 관계된 거다. 사랑은 관능도 플라토닉러브도 육체적 사랑도 모두 포용한다. 당연히, 후생인류학에서 말하는 종족보존 본능의 근간인 정념의 불꽃과 정염의 흥취까지도. 추억의 신청곡도 몸이라는 물아를 전제로 노래한 것이다. 청춘을 돌려다오. 못다 핀 꽃 한 송이. 그러나 저 환상과 그 어떤 환상은 똑같은 환상이 아니다. 말초적인 동영상과 생물학과 예술을 혼합하여 말로 풀면 반가운 입질과 확실한 손맛을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팀 보울러식 동화풍 성장소설은 못 읽고 어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은 이제 팀 보울러를 읽을 수 없다. 읽을 수는 있는데 감상은 못한다. 그 시기를 지나버렸다. 지금 돌아보면 조금 늦었더라도 청소년문학상 후보작이라도 읽고 나서 어른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나는 이따금 하곤 한다. 마틴 핸드포드를 찍고 제프 키니를 거쳐 앤서니 브라운을 독파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어른도 기회는 있다. 애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 잠들거나 귀찮아서 읽어줄까 말까 뭐라고 핑계댈까 고민할 시기는 늦어도, 거치게 된다. 아니면 홀가분하게 독신 생활을 즐기면서 거리에서 마주치는 애들과 강아지와 완구 용품과 회전목마를 보면서 웃음지으면 그만. 무뚝뚝함으로 위장할지언정. 어떤 단위와 배경이 작게 시작되었더라도 그래서 더더욱 그래프는 드라마틱할 수 있다. 제 시기에 걸맞는, 시간 보내기에 유용한 보기들을 제시하고 안내하고 도와주고, 주변에는 그런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걸 잘 활용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이제야 보인다고 하면 딱 훈시 어구 같지만 그냥 지나처버리기에는 미련이 남는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많이 남는다 미련이. 그 뒤로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에로비디오의 재생버튼을 눌렀다. 지금도 뭔가 망설인다. 내 친구는 임신한 부인에게 핀잔을 들었다.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에서 컴퓨터를 켜놓고 뭔 이상한, 자꾸 어떤 이상한 걸 혼자서 막 자주 본다고, 자주. 다시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로 돌아가 동심을 숙련하고 득달하여 새로운 어른으로 거듭날 수는 없다. 뭐 어쩌겠는가. 사랑을 기다리는 동안 나를 가꾸던가 그녀를 감동시키는 비법을 익히던가 해야지. 그러나 남자는 어른이 되기 전에 괴물의 시기를 (꼭) 거치게 된다. 그것이 통과의례인가는 비뇨기과 의사가 아니라 인지심리학자가 주도한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어려울 수도 있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몇 번 방의 문을 꼭 잠궈놓고 공개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고. (멈칫) 그래, 말하자면 내 책상 3번째 서랍에는 볼펜으로 조그맣게 써놨다. 판도라라고. 그래, 난 이렇게 산다. 어차피 크면, 어른이 되면 의무방어전은 챔피언만 치르는 드문 일이 아니란 것을 다 알게 된다. 또 자기 인생은 자신이 설계하여 만들고 살아가면서 챔피언도 되었다가 때로는 좌절도 겪고 다시 아카디아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사에 대한 호기심과 왕성한 지식욕을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애정으로, 교묘한 화술로, 환상적인 사랑으로, 화사한 예술로 또 그 무엇으로도 승화시키는 법을 일찍 깨우쳐서 원숙한 인생 경험을 서둘러 취득할 수도 있다. 그건 노력이고 행운이지만 그런 쪽으로 조숙하지 않다고 하여 불행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아쉬운 대로 번드르르한 언변과 세심한 눈치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또 타인은 뭘 바라고 기대하고 원하는가, 표출되지 않는 그 의중과 내 욕구와 우리의 취향과 인간사에 대한 해박한 이치에 관하여 후천적으로 더디게 터득할 수도 있다. 조금 늦어도 된다.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제 발로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을 그냥 걷어찰 것인가, 과...연 그것이 정답인가 차선인가 차악인가, 그건 퍽 까다로운 문제이지만 적어도 여기서 그리고 쉽게 결론내리는 것이 심히 부적절한 처사라는 것은 꽤 타당한 일일 것이다. 진리와 지혜는 글 속에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승에 있고, 따라서 사랑은 탐미적인 육신과 함께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의 아름다움은 유한성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은 없을까? 좋은 남자도 없을까? 철들면 안 될까? 이쯤 하면 됐다. 자, 이제 진짜 문단을 띄우고, 
   기분이 괜시리 훵한 어느 날이었다. 맑거나 흐린 낮이 지나고 저녁이 찾아왔다. 바람이 살살 불고 장소는 바닷가 방파제였다. 기숙사에서 선배와 후배와 친구들이 모두 함께 방파제 바다 낚시를 갔다. 낚시하는 사람은 하고 술 먹는 사람은 먹고 처키와 나는 따로 둘이 놀았다. 방파제 이쪽을 가봤다가 저쪽을 가봤다가, 술자리에도 낚시하는 데도 기웃거렸다가. 그러다가 처키와 나는 달리기를 하기로 했다. 마침 킥보드를 그날 누가 가져왔다. 그래서 처키가 킥보드를 타고 나는 그냥 뛰고, 그렇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달리기로 했다. 연인처럼. 아니 어린애처럼. 누가 빨리가나 시합을 시작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둘이 엉켜 넘어졌다. 나는 흙먼지를 털며 일어났는데 처키는, 처키는 일어나지를 않았다. 엄청 괴로워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다가 잠시 후 이렇게 소리쳤다. 담배, 알렉스, 담배! 처키의 새끼손가락이 부러진 거다. 기숙사에서 나는 꼬박꼬박 우유를 사서 마셨는데 처키는 맨날 인스턴트 식품만 먹더니만. 그렇게 사건이 터지고 처키는 바로 병원에 입원했다. 녀석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양치질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내내 껌만 씹었다. 나는 자주 문병가서 위로하며 달래며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간호사가 녀석을 찾아올 때마다 침대에는 내가 누워 있고, 옆에 보호자 의자에는 처키가 앉아 있었다. 왠지 환자의 침대에 누워보고 싶었다. 내가 환자가 되고 싶었나? 아님 그냥 생활 자체가 환자? 그것도 아니면 간호사에게 흑심을? 일주일인가 있다가 퇴원했다. 병원비는 반땅이었다. 아니다. 내가 조금 더 냈던 거 같다. 나의 신용카드는 그렇게 달리고 또 계속 달렸다. 녀석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기숙사에서 같이 샤워하면서 붕대에 감싸인 처키의 손을 다시 비닐로 감싸서 서로 비누를 칠하네 마네 엄청 다퉜다. 한두 번, 여러 번 도와주고 그랬는데 슬슬 또 팽팽한 신경전이 시작된 거다. 자주자주 막 삐졌다가 풀어지고 잔뜩 토라졌다 잘 안 풀리고, 그 전이나 그 후에나 뭐 비슷했지만 그땐 좀 더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경전의 파수병, 은은한 노란색 CLINIQUE 로션을 듬뿍 퍼줄껄 그랬다, 처키에게. 그러다 새끼손가락의 철심을 빼고 슬슬 녀석의 뼈부러짐은 회복되어 갔다. 그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그 후로,
   기숙사 시절에 척키가 또 다른 껀수를 잡기도 했다. 응, 채팅으로. 다른 대학교 경영학과 학생 3명. 학과성적 상위 1등, 2등, 3등. 셋이 친구. 그 가운데 한 명을 척키가 채팅으로 꼬셔서 3:3으로 만나기도 했다. 결과가 좋았겠나, 걔네들도 공부만 잘했지 낭만을 몰랐어. 다 시골살고 거기서 거기였다. 척키는 그런 놈이다. 여자친구가 아닌 단짝인 내게도 뜬금없이 꼿히면 전화를 받을 때까지 40통, 70통 연속으로 거는 녀석이다. 그건 한동안 못보다가 뉴욕에서 연락이 닫아서 만날까, 하던 그때 그랬다. 얘는 그후 해외 어디로 유학가서 꽤 수상쩍은 시기를 보냈다. 또 얘는 영화상의 브루스 윌리스급 골초다. 그런데 술은 못 마셔. 그래서 어쩌다 술자리에 껴서 술 마시면 토한다. 그래서 술은 잘 안 먹고, 주로 설만 푼다. 다 헛소리. 논리 필요없다. 원래 논리적인 친구가 아니다. 여기저기 먼저 연락은 많이 하는데 딱 회신은 많이 없는, 그런, 음 그런 꽈다. 돌아보면 이처럼 단짝이 한동안 있다가 뜸했다가, 있다가 혼자였다가, 쭉 짝궁이 없다가 있다가 그랬다. 뭘 해도 항상 같이 하는 그런 1번 말이다. 또 그런 1번들 가운데는 술 마시고 비틀거리면서 토한 입으로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키스를 하려다 실패한 친구도 있었다. 그 녀석은 한때 등번호 1번이기는 했는데 언제던가 또 그런 얘기를 했었다. 넌 나의 1번이 아니라 2번이라고. 뭔 영구결번도 아니고 말야. 그 뒤로 이와 비슷한 얘기를 다른 데서 몇 번 더 들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도 다 그렇다. 선수들처럼 등번호를 줄곧 일관되게 유지하고 공개하기엔 사람의 삶은 뭔가 너무 까다롭다. 뭐 대단한 발견이나 깨달음은 아니지만 인기가 많으면 피곤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견제, 시기 뭐 그런 걸 받을 수도 있고.
   그렇게 처키와 나는 (지금은 그 이름이 사라진) 3류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반가웠다. 다시 옛날로 되돌아갔다. 또 쳐키가 실력 발휘를 했다. 녀석이 채팅을 해서 여자를 꼬셨다. 그녀는 학생이었다. 실력이 많이 줄었는지 1명만 꼬셨다. 그녀를 같이 만났다. 2 대 1로. 처음보는 그녀와 처키와 나. 어허! 불온한 상상은 마시라.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 전에도 거의 다 뭔 일 없었다. 난 다만 청춘시절을 즐겁게 보내고 싶었다. 처키 역시 그랬을 것이다. 물론 둘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와서 확인할 방법은 없다. 안 그래도 된다. 난 아직 늙지 않았다. 아니 늙었다. 그냥 나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오 이런, 엄마가 항상 난 늙었어, TV를 보시며, 쟤도 늙었어, 라고 하시면 난 그때마다 펄쩍 뛰곤 그랬는데, 워워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나중 꼬부랑 할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새 소설을 쓰게 될지 지금 쓰는 장편 소설을 그때까지도 계속 쓰고 있을지 딱히 그림은 그려지지 않는다. 처키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저번에 통화했을 때는 애 낳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았다. 처키는 어쩌면 지금도 간혹 채팅을 하는지도 모른다. 아마 다른 뭔가를 하긴 할 것 같다. 아, 맞다! 아아 맞어! 오오 하마터면 잊고 넘어갈 뻔 했다. 와, 깜짝이야.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으쌰으쌰, 물 빠지면 배가 산으로 갈 수 있다. 비밀은 마저 털고 가자. 빠샤, 추억을 간직하고 새 희망의 내일을 맞이하자. 그렇다. 그때 3류 대학교 기숙사 4인실에서 같이 합숙할 때 오, 아아 그건 숙명이었을까? 그때 척키를 좋아하는 후배가 있었다. 여자 후배. 그런데 문제는 그녀도 척키 인형을 완전 쏙 빼닮았다는 것이다. 이런 삐─ 삐─ 그렇게 감탄사가 나올 만큼. 진짜! 오차, 거의 없이. 어쩜 그럴 수가 있는 거지... 그런 신기함에 현기증이 일어서 넘어질 뻔 하다가 지나가는 아가씨에게 어떤 실례를 해서 겨우 안 넘어질 것 같은, 그 정도로 빼닮은 외모였다. 척키를 좋아했던, 여자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여자 후배는. 이른바 척키 2! 뭐 영화 제목도 아니고 지성의 전당에서 그것도 잘못된 만남? 척키 1과 척키 2의 불륜? 왜냐하면 척키 2가 처키 1의 여자친구에게 전화해서 따지네 마네 둘이 데이트하고 있을 때 척키 1의 여자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척키 2는 뿔나서 막 울긋불긋. 척키 1은 척키 2를 설득하고 세뇌시키고 마성을 주입하고 감성을 자극했으니까. 자주. 또 나는 척키 2와 장난으로 핸드폰 문자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여행갈 의도 일절 없이 전혀 없이 같이 여행가자는 장난스런 말을 건넸었다. 그 삼각관계는 어떻게 됐나 궁금해서. 연락이 먼저 와서, 뻔하니까 척키 1을 궁금해할 테니까, 장난 길게 하고 싶지 않아서, 척키 1이 어떻게 사나를 쫑알쫑알 알려주기 귀찮아서. 척키 1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그런 적은 없지만 오다가다 편하게 보고 웃고 그랬으니까. 진짜로 척키 2와 단둘이 여행을? 할 상상이 있고 못 할 상상이 있다. 주부 10단이 아닌 대학생이더라도 그런 꼬이고 꼬이는 장르를 좋아하는 친구도 있겠지만. 그런데 척키 2는 정말 사랑에 빠졌는지 그게 장난인지 진담인지 구분은 설마 했겠지만 척키 1을 못잊겠다는 건지 이건 이제 더이상 몰래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인지, 그녀가 척키 1에게 나를 불한당쯤으로 보고를 했었다. 그랬으니까 척키 1이 그걸 또 내게 알렸음. 척키 1이 척키 2를 어떻게 한번 해볼려고 했는데 잘 됐었나 잘 안 됐었나 어쨌나 모르겠지만, 이래저래 척키 1과의 추억이 많았다. 척키 1은 나의 첫사랑을 알고 있었고, 중간에서 도움을 줄려고도 했다. 그런데 어디서 난데없이 척키 2가 나타나서 뭔 풋사랑도 아니고 순애보도 아닌 듯 이상한 감정을 들고서 (척키 1의 예를 들면 캘리포니아와 플로리다) 장거리 연애와 교내 우정, 브로맨스 사이에서 그리고 사랑은 무엇일까 를 고민하는 지성인들이 공부하고 연애도 하는 꿈의 둥지에서 교란과 소동을 일으킨 것이다. 척키 2는 척키 1의 볼수록 매력있는 어떤 매혹에 매료되어 사랑의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여자라서 척키 2가 인정하긴 싫을 수도 있겠지만 바로 이런 게 사랑이란 것이다. 아니면 뭐란 말인가? 적어도 척키 2에게는! 정말 그녀는, 척키 2는 현-본부인 즉 당시 척키 1의 여자친구로부터 척키 1을 빼앗고 싶었던 것이다. 정말 선수 교체라고나 할까 교통정리라고 해야 할까, 그녀에게 정말 그런 굳은 의지가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사태가 흘러가지는 않았다. 척키 1은 여자친구로부터 꼬박꼬박 꾸중을 얻어들었으니까. 거미줄 작전 펼치지 말라고. 어장관리 때려치우라고. 늬가 거미냐고 스파이더맨인 줄 아냐고. 오빠가 어부고 오빠가 뭐 어촌 계장이라도 되냐고. 정신 좀 차리라고. 제발 철 좀 들라고. 그걸 보고 나는 아 여자가 사랑에 빠지면 이렇게 되는구나, 드물겠지만 머리끄댕이 잡고 불미스런 줄거리나 조마조마한 사건은 정말 가능한 일이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이미 아는 일이겠지만. 사랑에 빠지고 일이 커지며 그건 걷잡을 수 없이 되는구나, 그런 현실에서의 인간의 사랑은 바로 서사 민요로구나, 그 과정을 알게 됐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가까이 또 멀리 직접 보거나 듣게 되는 치정, 그게 모두 사랑 때문이로구나 그런 깨우침이 있었다. 저런, 척키 2는 경호학과였다. 학교에서 제복을 입고 다녔다. 그후 경호원이나 탐정이나 요원 또는 경찰이 되었는가 못되었는가, 는 잘 모르겠지만. 됐으면 여경, 못 됐으면 그냥 언제까지나 척키 2? 지금쯤 그녀가 여자 경찰이 되었다면 그녀는 공부도 잘 했을까? 척키 2는 척키 1과 달리 할 때 하는 강단이 있었던 듯 하다. 그러니까 그 후 여경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의 일이니까 선을 그어야겠다. 원래는 척키 1만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했는데, 척키 2는 음 별로 궁금하지 않지만 워낙 진짜 워낙 너무너무 척키 인형을 빼닮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게 된다. 혹시 그때 척키 1과 척키 2가... 아... 저런! 쉿, 그만! 이게 또 이상한 게 거리에서 경찰을 보면 척키 2가 생각나겠구나. 척키 1로도 모자라서.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막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데, 그냥 놔둬야지. 그분들을 생각하면 음, 우끼다. 웃을 일이 있다는 건 나쁜 게 아니다. 허나 그 때문에 어떤 고상함과 숙달된 듯한 세련됨의 기운과 고급스러운 농담을 바탕으로 한 고품격 교양미는 청바지 물이 빠지듯 싹 빠져버렸다. 아 미치겠다. 이러니 내가 가짜 웃음이 늘 리가 있나. 아무리 유명인들의 바디랭귀지를 흉내내고, 말발을 탐구하며 따라하고, 아재개그도 알아보고 부장님 개그도 연구해보지만 그거 다 쓸데없는 짓에 불과한 것이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어쨌든 이런 말, 뒷담화 같지만 오히려 하고 싶다. 할 수도 있다. 왜, 친하니까. 왜? 친했으니까. 친구니까. 게다가 추억이니까. 심지어 엄정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재미있었으니까. 만에하나 취미로 시작했다가 소명에 가까울 직업이 아니라 천명의 빛을 띨 뻔 하다 미끄러져 타성에 젖는 삐에로를 닮은 광대가 된다면, 혹시라도 앞으로 무명 블로그가 유명해진다면 그래서 척키 1이 이걸 알게 된다면 이젠 연락을 끊을 수도 있다. 그러면 속좁은 녀석으로 판명나는 거지. 원래 녀석에겐 그런 구석이 다분하긴 했지만. 그래도 믿고 싶다. 그는 대인배라고! 그건 그렇고 그나저나 처키가 보고 싶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친구에게, 가족에게, 지인에게 전화 한 번 드리자. 연락 한번 하잔 말이다. 
   그래서 저번에 하워드 집 앞 하천에서 종이배 놀이를 할 때 나는 처키 인형을 가지고 나간 것이다. 맞다. 처키의 (이름과 성씨) 이니셜은 더블 S다. 뭐야, 더블에스? 초딩 2때 우연히 봤던 새하얀 엉덩이의 주인공인 그녀도 더블에스다. 달덩이처럼 뽀얀─최고급 푸딩처럼 탱글탱글한─TV처럼 시선을 끌고 핸드폰처럼 인력이 특출난 그러나 (일단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나서, 그 낭군님께는 미안하지만 어린시절 향수니까 뭐 괜찮을 것이다) 지금은 혹 언젠가 아마 조금은 쳐질지도 모르는, 바로 그 새하얀. 무심결에 떠올랐다. 잊을 수 없으니까. 이름과 얼굴. 크큭. 또 처키, 그 녀석이 우리 대학 동창 여자애들을 건드리다가 자제했다나 뭐라나 그 얘기도 들려주었다. 남자들은 대체로 그런 얘기를 서로 공유한다. 안 그런 남자도 있다.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리면 처키가 손가락이 쑤신다는데 지금은 어쩌나 모르겠다. 아, 갑자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사만다가 제임스던가 누군던가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만다 맞나? 어쨌든. 그렇고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녀에게 미안하다. 그녀가 어딘가에서 잘 살며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부자가 되었기를 바란다. 적어도 사랑받는 여자이기를. 


   나는 마크다. 내가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은 토끼다. 나는 토끼가 좋다. 토끼를 좋아한다. 토끼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토끼를 키우게 된 이유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나 운명이다. 왜냐하면, 왜지? 모르겠다. 그 숙명의 까닭은 모르지만 내가 왜 토끼를 키우게 되었는지는 안다. 그것은 내가 옛날에 존 업다이크의 소설 '달려라 토끼'를 읽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소설은 더럽게 재미없었다. 옛날에 다 읽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위에서 많이 호명하거나 기억하는 어떤 작가들의 작품도 생각해 보니 나는 단 한 번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그러나 폴 오스터의 희곡집은 하나 읽어봤다. 끝까지 읽기를 실패한 그의 작품을 놓고 하여간 소설 더럽게 재미없네, 라고 말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크나큰 실례다. 무례이고 낭패며 돌이킬 수 없는 결례다.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나는 험담을 싫어한다. 그리고 비교적 해피엔딩을 선호한다. 그냥 근소하게 비교적으로. 그건 그렇고 혹시 독자 중에 업다이크의 팬이나 그 분야 학자, 혈연이나 지연, 학연등 관계가 있거나 난 정말 그걸 허벌라게 재미있게 읽었다, 라는 분이 계신다면 미안한 말씀이지만 송구스럽지만 앞에 쓴 말은 절대 취소할 수 없다. 그러나 그분들께는 죄송하다. 내가 나중 돈을 많이 벌게 된다면 존 업다이크 생가에 방문할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즉 나는 그 책을 더럽게 재미없는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그 책이 좋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와 같은 라이트모티프나 키치, 짧은 단상등은 많다. 누구나 다 그렇다. 누구나 다. 아, 맞다. '달려라 토끼'는 TV 단막극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그 책을 들고 있어서 알게 되었다. 뭐야? 결국 토끼는 TV에서 책 제목에서 보고 키우게 되었다는 말이네.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요즘 나는 사는 게 재미없다. 생각을 좀 해보니 심심하고 무료하고 뭔가 부족한 게 끝짱나게 재밌는 것보다 조금은 나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끝짱나게 재미있게 상황이 바뀔 수 있는 그 미지의 가능성 때문에. 좀 가난해도 괜찮단 말이다. 즐거운 인생이자 신나는 세상이다. 하지만 요즘 나는 사는 게 재미없다. 왜 그러지? 나도 잘 모르겠다. 제임스 본드, 그 전설적인 주인공의 최근 배역 배우가 광고모델로 나오는 그 시계를 사서 찰까? 그러면 재미있어질려나? 일단 그건 보류한다. 시계 하나 차서 인생이 즐거워진다면 세상에 기쁘지 않은 사람 한 명도 없겠다. 즐거운 하루, 재밌는 일주일, 밝고 흥미롭고 희망찬 학창시절, 시간가는 줄 모르는 찬란한 직장 생활, 내내 달콤하고 기쁘기만한 결혼 생활? 그런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게 과연 있기는 있을까? 맹목적인 환상과 괜한 기대, 그건 잡지에나 나온 말인가? 어느 로맨스 소설이 어떻게 1억 2,500만부가 팔리지? 지금은 더 훨씬 더 팔렸을 꺼 아냐. 나는 나름대로 삶의 무궁무진한 아름다움과 비현실적인 로맨스, 광고 표지 같은 인생, 우아한 취향, 끝끝내 잃지 않고 포기해버릴 수 없는 동심, 별과 바람과 순수와 고결함 그런 뭔가 풍성한 단어들이 내게 적격이라고, 날 설명하기에 모자라지만 아쉬운 듯 부족하지만 나름 근접은 했다고 생각하기에 막 2시간 3시간 짜리 판타지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간다. 그렇게 극장에서 판타지 영화를 보면 보통 최소 3번은 자다 깬다. 자기 코고는 소리에 자기 자신이 덥썩 놀라 깨는 장면, 간혹 그것도 여지없이 극장에서 재현된다. 그럴 때 참 민망하다. 최근에는 예술적 가치가 있는 영화를 극장에서 보다 코를 심하게 크게 골다 깨서 챙피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러던 내게 그저 그런 일상에 삶의 기적이 일어났다. 어느 여자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 나는 그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 이름만 불러도 그 이름이 상처받지 않을까, 그녀의 사진만 보아도 내 두눈이 시퍼렇게 멍들지나 않을까, 그녀가 그것을 알고 가슴 아파하지 않을까, 그녀를 생각만 해도 손에 진땀이 나고 엉덩이 쪽에도 식은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많이는 아니다. 그녀에게 먼저 연락할까, 연락을 기다릴까,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전할까, 꽃다발을 선사할까, 고민을 많이 해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그녀를 지금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지금 만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나는 그 사랑을 지금도 키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는 다소 그렇게 비춰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닐 수도 있고. 무엇보다 남의 일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리라. 자신에게. 나는, 많이는 아니고 지금도 가슴이 가끔 울컥한다. 그렇다. 이게 그렇게나 사람들이 말하고 노래부르고 뭐라 뭐라 표현하는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당장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렇게 부를 수는 없다. 나중에 어딘가 모르게 그것이 흔적도 없이 기억할 수 없도록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변색되지 않을까, 그 감정의 이름이 바뀐다면 난 어떡하란 말인가, 그런 의문과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너무 이야기가 뭐해지니까 이건 여기서 멈춘다.
   가만 있자. 최근 내 일정표 스케쥴이 어떻게 되지? 난 핸드폰이나 구글캘린더나 일정 수첩에 일일이 계획하고 기록하고 깨알같이 적고 꼼꼼하게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다. 삶이 좀 평이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저번 주에 나는 고물차 뱅거 레이싱에 참가했다. 뱅거 레이싱은 폐차되기 직전의 고물 자동차나 그럭저럭 얼렁뚱땅 만든 고철 자동차로 경주를 펼치는 경기다. 그곳에는 우체부, 햄버거 가게 사장, 간병인, 대학생 그리고 나처럼 투자자? 작가? 백수도 참가한다. 여기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딱 1번만 하고 그만하기로 했다. 그 생각도 많이 하면 안 된다. 중단 선언을 번복할 위험이 있다. 그 얘긴 그만해야겠다.
   문단이 바꼈다. 앞의 문단과 이번 문단이 매끄럽게 논리적으로 연결되면 좋겠지만 바랠 껄 바래야지, 지금 그럴만한 정신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일관된 글쓰기가 아닌 순간 퍼뜩 떠오르는 단편적인 생각들을 기록하고 모으고 막 써서 그걸 소설로 묶고 그 글이 반짝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그런가? 정말이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집어치워야겠다. 위선과 가식은 집어던지고 가끔은 내가 나쁜 짓을 하고 싶을 때도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그렇다고 험하고 지독한 그런 내용이 아니라 2시 방향에서 10시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바나나 껍질을 밝고 넘어져, 그가 무의식적으로 옆에 걷던 아가씨의 스커트를 잡아채고, 그러면 남자는 어느 큰 인형 위로 넘어지고, 여자는 팬티가 노출되어 바로 그것이 내 눈에 딱 띄는 거지, 이런 상상 말이다. 또는 알고 지내는 여자애가 연락해서 만났는데 같이 술 마시다가 그녀가 이러는 거지, 나 오늘 집에 안 들어갈래! 이런 거? 별로 관심없다. 그건 내 취향 아니다. 그리고 나는 약점을 노출시키고 싶기도 하다. 통제력이 풀리는 시기도 있다. 그러나 그건 잠깐이고 모차르트를 듣고, 시집을 읽고, 서점에 일주일에 한두 번 들리는 생활을 반복하고 지속하다 보면 불평을 그만하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에서 보는 노인이든 무서운 인상의 젊은이든 모두 다 아장아장 걸으면서 귀엽게 말하고 춤을 추던 애기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고 마치 점쟁이처럼 남의 과거를 투명하게 들여다 보고 또 예언가처럼 내 미래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내가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이렇다. 이런 사실을 여기 남기면 핀잔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래 소설이란 분야 자체가 형식에 제한이 없는 게 매력이지 않나. 물론 소설만 그렇지는 않지만. 즉 집필 동기는 바로 친구들끼리 모여서 야, 우리 문학지 한번 만들어 보는 게 어떨까? 라는 제의가 점점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어 나갔기 때문이다. 우리끼리만 보는 문학지 그런 거 말이다. 격주간이든 월간, 계간이든. 게다가 십대 시절에 이미 우리는 그와 비슷한 놀이를 했었다. 그때는 이런 걸 다뤘다. 손글씨로 글을 쓰고, 만화를 그리고, 누가 저번주에 뭐 했다, 다음주에 우리가 뭘  하네, 그런 소식 위주. 그것이 어느새 어른이 된 지금은 시나 소설과 희곡 같은 글 위주의 학문 곧 문학으로 바뀌었다. 아직 시작이지만 또 변할지도 모른다. 또 당시에는 원본을 복사하고, 스템플러로 붙인 후 직접 만나서 모여서 한 부씩 나누어 주고 한자리에서 같이 보면서 웃고 얘기 나눴다면 지금은 웹사이트를 만들고, 그곳에 각자 완성 작품을 올리는 것으로 모든 과정이 끝나게 된다. 게다가 그땐 농구와 소식지가 중심인 반면 지금은 즐기고 체험하면서 작업할 수 있는 대상이 훨씬 다양하고 넓게 확장됐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중간에 흐지부지될지언정 뭔가를, 어른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잠자고 있는 동심에 기초한 작은 소망과 협착하여 어떤 중요한 일을 은근히 꾸미고 있다는 별거 아닌 긴장감 때문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아직 이름은 정하지 않았다. 친구들끼리 만들기로 한 블로그의 이름. 그래서 지금은 일단 무명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뭐였드라,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 모임이 시작된 농구단 이름이 무명이었다. 나는 그 무명 농구단과 가끔 친선 경기를 하는 다른 팀 일원이었고, 그때는 중학생이었으며, 고딩이 되어 새롭게 멤버를 짜서 뭉친 것이다. 물론 멤버가 너무 좋고 실력도 좋았지만 노는데 집착하느라 지역대회에 나갔다가 예선 탈락했다. 강력한 우승후보라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어이없이 예선 탈락했다. 그날 몇몇은 울고 막 화내고 그러다 괜히 뜬금없게도 지나가는 모범생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다. 난 친구들 달래주는 역할을 맡았다. 이제 다가올 제1회 무명 문학제가 열리면, www에서, 첫 편집본이 웹에서 완성되어 발표된다면 서로들 누가누가 재밌고, 누구는 신인상, 누구는 특별상 그러면서 웃고 술 한잔 마시면서 단체 블로그이자 문학제인 그것의 태동과 탄생을 축하할 것이다.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어딘가에 외쳐야 할지 끝까지 꿍꿍이로 남겨야 할지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상이 하나 있다. 말...할까? 들어주실까, 그분이? (여기서 그분은 당신이고 그대이면서 만인이다) 까짓것 말하자. 그것은 바로, 인-기-상! 하지만 아무래도 아무래도 알렉스가 걸린다. 때문에 아쉽게 놓칠 수도 있지만 서운하겠지만 그냥 미리 포기한다. 거의 그건 알렉스가 따논 당상, 이미 찜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뭐다? 그건, 그건 주목할 만한 시선상! 오, 괜찮은데! 흔히 말하는 자기 삶을 돌아보고 인생을 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나중 친구들 가운데 한 명쯤은 3류 소설가, 두엇은 본격적인 허풍쟁이, 또 누군가는 개인 블로그만 운영하므로써 분명 어딘가에서 러브콜이 폭주할지도 모른다. 벌써부터 내가 뭔 작품 만들었나 다시 읽어 보고 싶고, 친구들이 뭔 소설을 구상하며 쓰고 있을지 궁금하다. 군침이 돈다. 아마도 이걸로 삶이 아주 조금은 재미있어졌다. 아 수동태 문장이니까 능동태로 말하자면 요컨데, 음, 어쩌면 난 지금 멋지고 즐거운 일을 하고 있다? 쑥스럽지만 다른 애들에 비해서 분량이 너무 유별나면 어색하니까, 처음이니까 첫 작품은 여기서 줄여야겠다. 독자이신 그대와 오늘은 여기서 작별하고 자, 다음 작품을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쿵쿵쿵! (나는 누군지도 모를 그대를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슥샥슥샥! 굽실굽실!)

   나는 하워드다. 소설을 시작하자마자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줄 수는 없다. 간질간질하게 하나씩 하나씩 옷을 벗는 것도 내 스타일이 아니다. 옷벗기 게임을 하는 날, 나는 벗어도 벗어도 절대 알몸을 내보이지 못할 만큼 많은 옷을 챙겨 입는 성향으로 태어나서 그런 성격을 보완하고 연마하여 비로소 이젠 제법 마술까지 어느 정도 손에 익혀 그 어느 속임수도 떡 주무르듯 할 수 있기 때문에 보일 듯 말 듯한 게 그나마 가장 근접한 설명일 것 같다. 즉 엎어지고 일어섰다가 모순에 반전을 겪는 것이 내 스타일이다. 하지만 나는 간혹 화끈하게 내가 가진 판돈을 되받지 못할 것을 미리 알면서도 흔쾌히 건네주는 담력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통이 크다, 원하는 건 가져야 한다, 책에서 읽든 사람들 얘기를 듣든 TV에서 보고 손가락으로 찍든 한 번 마음먹으면 이루고 말거나 원하는 순간 보물상자가 내것이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단언하는 위인도 되지 못한다. 차라리 호구에 가깝지. 그것도 국가대표로. 그래서 소설 초반이지만 조금은 힘이 빠진다. 그러므로 짐작하시겠지만 내 입에서 연애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결혼하고 이혼하기, 뭐 이런 얘기를 듣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마시라. 한 여자와 일평생 아니 영원한 사랑을 할 것이라고? 어떻게 험담 가운데서도 그런 섬뜩한 험담을 하시나. 아, 농담이다. 꼭 말을 하고 제낄 건 제껴야만 알아 듣고 만족하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근래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조그만 소극장에서 연기를 하는 것이다. 당연히 내가 그곳에서 열심히 배우의 길을 걸어 나중 대성하여 이름 대면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슈퍼스타가 될 가망성은 확률 제로다. 나도 그걸 원치 않는다. 단지 할 일 없이 심심하던 어느 날 오후 3시 무작정 혼자서 연극을 보러갔는데 소극장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삶이 왠지 모르게 낭만적일 꺼 같아서 그들이 가난하고 근근히 살아갈 것을 충분히 예상하지만 나도 모르게 털끝 만큼도 생각이 없는 극단의 일원으로 지원한 것이다. 그렇게 극단 가입을 신청했는데 어떻게 고기 못 잡아 혈안이 된, 대물에 환장한 낚시꾼의 낚시 바늘에 낚인 것처럼 가입 신청 하자마자 그날 바로 극단의 신입배우로 환영한다는 환대를 받고 그날 바로 연극 끝나고 뒤풀이하는 자리에 가기로 한다. 그렇다. 내가 노린 건 뒤풀이다. 그리고 여배우들을 노렸다. 여배우의 몸이 아니라 같이 그냥 기념사진 찍기를. 그렇게 극단에 주말마다 몇 번 나가다가 극단 사무실의 여직원과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금새 친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사적으로 너무 많이 친해졌다는 거다. 안 그래도 극단 사람들 눈치가 빠른데,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그 여직원을 사모하는 남자 배우와 따라다니는 남자 관객들이 많았나 보다. 극단 동호인도 막 가세하드라. 괜히 몇몇 이상 징후들이 보이고, 페이스북에 누가 경고성 메시지도 보내고, 내 자동차 타이어에 누가 오줌을 싸놓고, 엔블럼에 뭔 오물이 투척되어 있어서 자의 반 타의 반, 뭐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극단 생활을 그만두고 그녀와도 헤어졌다. 짧은 만남이었다. 멀어질 땐 말없이, 뭐 그렇게 된거네. 그래서 나는 다시 심심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입닥쳐! (아, 오해하지 마시라. 글쓴이의 다중인격체 중에서 상당히 독특한 친구, 항상 조용했는데 요즘 부쩍 말수가 늘어난 녀석이 있어서 소설에 대한 걔의 짧은 소감은 될 수 있으면 기록하고 지나갈려고 한다. 나중 봤을 때 많이 이상하다면 지워버리면 그만이고, 뭔가 의미가 있다면, 꼭 그렇진 않드래도 의도하지 않은 색다른 효력이 발생한다면 그냥 그대로 둘 생각이다.)
   나는 특별히 신나는 일 없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딘가 모르게 억울한 심정을 모른 채 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야박하고 음침한 놈이 아니다. 우리 같이 심심해 하자. 아니면 같이 웃고 같이 떠들잔 말이다. 심각하게 인상 팍 쓰고 진지한 얘기만 하고 어려운 작품만 잡고 씨름하지 말잔 말이다. 오늘을 잡아라? 잠시 쉬어라. 당신은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소설은 사건 해결 일지도 아니고 부케도 아니며 콘써트 티켓도 아니다. 하지만 소설은 영화를 위한, 결국은 읽는 즐거움을 위해 소비되는 옷과 구두와 신용카드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머머 해야 한다, 는 부담감을 내려 놓자. 나 지금 내 귀중한 시간 쪼개서 소설 읽고 있다구, 극도의 즐거움이든 감명이든 교훈이든 뭔가 내놓으란 말이야, 그러면 서로 힘들어진다. 그러니까 둘 다, 그대와 그대의 똘만이, 즉 소설가 이렇게 두 사람이서 1 대 1로 놀자는 말이다. 그렇게 놀아보셨나? 잘됐네, 아직이니. 그럼 뭐하고 놀까? 레슬링? 그것보다는 시공을 초월한 지적 게임 어떨까? 너무 어려워도 곤란할 것이다. 음 있다 있어. 자, 진실게임 한 번 해보는 게 어떤가? 당신은 다음 문장을 선서하듯이 또박또박 소리내어 읽는다. 또박또박 소리내어 다음 문장을 읽는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여자친구를 좋아하겠다. 나는, 지금의, 아내를 사랑한다, 나는, 이 사랑을, 또 다시 태어나도, 똑같이, 반복하고 싶다. 간절히?> 간절히, 는 빼자. 선언이 끝났다. 음 기분이 어떤가, 현재 분위기가 어떠신가. 먼 산을 쳐다보는 게 낫겠다. 그대의 연인은 이렇게 애처로운 그대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다 알고 있을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1년 후 어떤 깜짝스러운 탄식을 안겨줄지까지도. 뭐? 갑자기 이 소설이 싫어진다고? 포커페이스가 그렇게 힘드시나. 당신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여자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은 물론 그녀의 마음을 녹이고 쥐었다 푸는 것 모두 가능하겠지만 일단은 이럴 것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면 그녀의 방 그 창문 밑에서 가곡을 부르며, 널 처음 봤을 때, 너에게 나는, 나에게 당신이란, 내게 소원이 있다면,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아가씨~ 풍문으로 들었소, 라고 고백하면서 그녀의 뒷-꽁무늬를 쫓아다니지 않겠다, 내 아내는 나처럼 쪼잔하고 제멋데로인 탕아를 만나서는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훨씬 친절하고 자상하고 멋진 남자를 만나야 한다, 까지는 좋은데 그럭저럭 괜찮은데...... 나는 조그만 장난감 병정 나팔수가 되어 뭔지 모를 이국적인 정서를 풍기는 달콤한 발라드 한 편을 들려주는 것, 내 특기야. 그 버릇 어디 가겠어?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는가, 그 망할 놈의 사랑까지 들먹이며 막판에 그녀를 근사하게 띄워주는 것까지 다 돼. 다 된다구. 좀 부풀리지 않아도 너끈히 식은 죽 먹기야. 아조 뿅가게 만들지. 그럼.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자꾸 얼굴 근육의 미세한 떨림과 속내를 드러내는 자잘한 웃음 같은데서 걸린다고, 뒤돌아서서 밤중에 혼자 부엌이나 거실에서 위스키 스트레이트를 마시다가 취해서 많이 취해서 흠뻑 취해서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 그녀의 귀에 들어가고 만다고? 그래 사랑에 관한 셰익스피어의 명언은 꺼내지 말자. 꼭 보면 그렇게 말을 빼는 범상한 평균치가 많다. 비범하게 가잔 말이다. 노란색이든 빨간색이든 끝끝내 동심이라는 이름의 카드는 깊숙히 남겨 놓자. 그냥 끝까지 상남자로 남자. 그게 낫겠다. 비록 연기력이 출중해도 막판에, 중요한 순간에는 들통나는데 이제 와서 독심술을 배워 뭐하겠나. 밑지고 들어가는 게 속 편하다. 그런데 뭔 장난이 이렇게 얄궃은 것일까? 이상하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분이 내려오셨나? 잘못 내려오신 거 아닌가. 아님 뭔가에 씌였나. 거-참-나.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상상은 좀 힘들다. 엄청 힘 빠진다. 화자와 청자 모두. 약간이 아니라 많이. 마음에 안드는 답변이나 몸짓을 보기가 당황스럽고 난감하단 말이다.
   시간아 너는 왜 우리를 기다려 주질 않니? 그러면 소설에 대한 막연하고도 허황된 기대를 결국에는 져버릴 수 없자나. 아니다. 아무래도 나는 소설 쪽에는 별 소질이 없는 것 같다. 개그맨의 길을 알아볼 걸 그랬다. 어딘가 틈새 시장이 있을 것인데 이제 와서 그걸 찾아도 괜찮은 건가. 찾았다 치고 10년 공들였다 쳐, 공들인 탑이 안 무너진다는 속담이 언제나 참은 아니다. 아마도 분야를 잘못 골랐을 것이다. 그래. 다시 소설로 돌아간다.
   나는 최근에 재미난 일이 없어서 느닷없이 결정했다. 라틴어를 배우기로. 언어에 관한 책을 보면 어족이 비슷한 언어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포르투칼 사람들은 거기서 태어나 평생 고향에만 살면서 외국사람도 별로 만나보지 않았을지라도 스페인 말을 들으면 3분의 2나 80%는 대충 알아듣는다고 한다. 그 말이 진짜인가는 기회되면 박사님들께 여쭤보고 일단 색다른 무엇을 새로 배운다는 건 좋은 일이다. 우선 기분이 좋다. 물론 시작은 독학이다. 그것이 내 인생 철학이다. 독학! 언제들어도 반가운 말. 무심코 떠올려도 정다운 이름. 괜히 웃음 짓게 만드는 재간둥이. 지나치게 식물성 유형인 거 같아 구식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독학 때문에 난 여기까지 달려왔고 좀처럼 뭔가에 대해 주기적으로 독학을 하지 않으면 몹시 께름직해서 참을 수 없다. 많은 전문가들이 난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다, 난 그냥 연기하러 태어난 것 같다, 일을 빼놓고는 내 인생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지만 그것이 내 경우엔 독학인 거 같다. 어느새 이 녀석과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 없는 교분을 쌓아버렸다. 정분이 넘치고 넘친다. 독학을 하는 순간에는 말라깽이와 글래머가 영혼과 육신이 결합하여 뒤에서 나를 백허그하는 느낌이 든다. 소신의 3급 비밀을 알려 드리자면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탄복할만한 환상 그것은 바로 독학이다. 당신은 이따금 실패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심한 말을? 당신의 마음을 이리 줘 봐. 그래. 바로 그거야. 자, 뭐가 떠오른가? 그거라구. 모범답안은 상상에 맡길께요. 행운을 빌어요. 독학은 이렇게 영락없이 헛소리를 발설하게 되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 그러나 의외로 그 느낌이 좋다. 마침 이번에 배운 라틴어에 이런 단어가 나왔다. <외모 밝히는 사람> 그 옛날에 이 말이 진짜 있었을까? 이 말에서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있나 없나는 모르겠고, 하나 고백하자면(고백을 너무 자주 하나? 나 양치기?) 나는 거리에서 무섭게 생긴 사람을 보게 되면 지나치면서 꼭 한 번 더 보게 된다. 드물게는 어쩌다 두 번. 목에 힘 빡 주고 안 볼라고 하는데도 자동적으로 시선이 쓱 돌아간다. 그래서 간혹 미녀들이 그들과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는 것일까? 그건 그녀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또 그 친구들은 자신에게 호감있는 이성에게 어쩌다 한 번 잘해줘도 그 효과가 딴 사람보다 월등히 크다. 뭐야, 그럼 무섭게 생긴 사람들은 남자들에게도 덕망이 두텁고, 여자들에게도 니치 마켓에서 먹힌다고? 오, 개뿔!
   나는 다시 라틴어 학습을 포기했다. 나는 포기가 빠르다. 안 되는 거 잡고 있어 봐야 답 안 나온다. 그것을 잘 해봐야 써먹을 데도 없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뭔가에 써먹을 만한 걸로 새로 배울 무엇을 다시 찾아봐야겠다. 여차하면 바다보러 떠날 수도 있다. 책도 사놨다. (어느 섬 이름) 여행백서. 물론 그와 반대 방향으로 떠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소설을 써야 한다. 여행지에서도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글이 잘 안 써진다는 것이다. 분위기를 바꿔야겠다. 허세의 상징인 두꺼운 금목걸이를 매고 펑크 스타일로 꾸며야겠다. 일단 경박함에 빠져 있으면 악흥이 떠오를 수도 있다. 나도 무서운 인상과 보는 사람의 혼을 쏙 빼앗는 흡입력을 풍겼으면 좋겠다. 젠장, 참으면 안되겠다. 나 오늘 당장 검정색 가죽 점퍼 산다.
   앗! 착상이 떠올랐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다음 편에 이어진다. 자, 여기서 안녕.
   귀뜸 하나 하자면 친구들끼리 블로그에 연재소설을 같이 따로따로 올리기로 했는데 내가 너무 잘 쓰면 시샘을 받을 수도 있다. 분량도 길고 매번 완성도가 너무 높으면 그 녀석들은 매번 매주 신부 들러리 서서 부케 받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난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다. 질시, 안 할 테니 최대한 많이많이 쓰라는 어떤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다. 미개봉된 첩보 영화같이 내 머리 속에 특수 칩이 심겨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상하다.
 
   나는 닉이다. 이번에 친구들끼리 문학 블로그를 만들어서 글을 쓰기로 약속했다. 낯간지럽게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도 했다. 그래서 그곳에 이번주까지 나의 첫 소설을 발표해야 한다. 처음엔 대범하게 시원스레 그러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손해보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산문 쓰기는 내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이번에는 내가 접어주고 다음에는 유행가 가사나 짧은 웹 드라마를 찍어서 그 블로그에 올리자고 제안해야겠다.
   최근 케빈이 차를 라피드 S로 바꿨다. 조니도 지금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를 타고 다닌다. 알렉스의 카이엔 터보는 언제봐도 이쁘다. 마크의 까레라는 말할 것도 없고, 아, 한숨이 절로 난다. 저번에 사막에서 엉겹결에 몰아본 파나메라를 혼자 타고 그냥 도망가버릴 껄 그랬나. 너무 비싼 차 얘기만 한다고 뭐라 하지 말아주시길. 또 언제 걷거나 자전거타기로 바뀔지도 모른다. 나는 대중교통을 친구들 가운데 가장 많이 이용한다. 게다가 사실 나는 스마트 포투를 너무 좋아한다. 아직도 그곳에는 그녀의 체취가 묻어 있다. 녀석을 몰면, 보기만 해도 그녀가 떠오른다. 그럼. 그렇지. 남자들은 원래 차도 좋아하고 말도 좋아한다. 개도 좋아하고 경마장도 좋아한다. 남자들에게는, 여자들에게도 친하면 친할수록 경쟁 심리란 게 있다. 있기는 있다. 호승심도 있다. 있기는 있다. 친하니까. 아, 맞다. 심리학과 교수나 정신과 의사가 이 블로그를 볼 수도 있겠구나. 아무리 내 전공이 아닐지라도 좀 기품이 엿보이는 글을 써야겠다. 첫 작품이라서 좀 더 특별하지만 그래서 가슴이 설레어 학교 숙제하는 것처럼 어디서 베끼거나 막 짜집기라도 하고 싶은 콩알만한 마음이 없었는데 갑자기 생겼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냥 이번에는 우수상이니 특별상이니 다 애들에게 양보하고 이번에 나는 실험 컨셉으로 그리고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그랑프리를 노려야겠다. 말이라면 자신 있는데 글이라서 값싼 단어를 막 쓸 수도 없고, 딱 술술 풀리지도 않고 상당히 난감하다. 말로는 생쥐처럼 어디로나 빠져나가고, 대부호가 되었다가 천하의 카사노바도 문제없고, 말 한마디로 장벽이란 필요없고 모든 게 가능하다. 10분이면 끝난다. 나는 10분이면 이 세상 모든 여자를 꼬실 수 있다. 멋진 차로 인한 장비발, 감싸여 있는 책과 악보등 지성미, 꺼뻑 넘어가는 영화배우 빰치는 외모, 다 필요없다. 말발이 있으니까. 10분도 많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완벽한 허당이다. 은근 허당이 아닌 순도 100% 허당. 너무 쉬우면 재미없다. 문하생은 받지 않는다. 기술 전수 사절. 아무튼 말은 자신 있는데 이건 말이 아니라 글의 문제다. 아, 미치겠다. 다른 애들도 지금 이러고 있을까? 옆길로 새면 안 된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촌각을 다퉈 마감일을 지켜야 한다. 지금은 이게 뭐하는 짓인가란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친구들과 그 결정을 했을 때는 어쩜 완전 거룩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만장일치의 결정이었다. 나도 그렇게 요술을 느끼고 신기루를 보는 듯 해서 막 뭔가를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는. 지금이 아닌 그때는. 그때는 그랬다. 우리, 변하지 말자고. 우리, 이 마음을 이어가자고. 그 결정이 무엇인가는 직접적으로 여기서 밝히지 않는다. 아, 방금 적었구나. 그러니까 음, 더 절절한 사연에 대해서는 동료 작가의 작품을 읽으시면 알게 되실 것이다. 그건 그렇고,
   어쩌다가 드는 생각이지만 내 꿈은, 내 꿈은 과거나 미래에 갔다 오는 것이 아니다. 우주에 가보는 것도 아니다. 벼락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조르주 심농을 능가하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이 왜? 눈치없긴. 내 꿈은 이 세계를 창조한 신의 작업실을 몰래 엿보고 외계과학자의 정신을 쏙 빨아들여서 내것으로 흡수하는 것도 아니다. 다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언젠가 술에 취해서 생각해 봤는데 내 꿈은 그런 것 같다. 꿈의 벤치멤버 수없이 교체되었다. 꿈의 변경, 할 만큼 했다. 꿈다운 꿈, 그것은, 나의 그것은, 내 꿈은 점쟁이다. 특수한 점쟁이. 말만 번드르르한 말만 막 던지는 그런 가짜말고, 진─짜 점쟁이! 정말 그 영험한 경지에 올라서 마법을 터득한다면 내가 예언하는 대로 내가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그것, 즉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꿈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기는 꿈을 바꾸고, 꿈을 꽃꽃이 하고 재수정하며, 꿈을 뻥 차고, 꿈과 팔짱을 끼는 그 온갖 변덕과 생동감, 그 총체 그것이 진짜 꿈 아닐까? 꿈도 그렇고 그만치나 궁극적으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단어, 사랑도, 그것이 그것인가는, 그렇게 불러도 괜찮은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미친 놈! (소설 중간에 하이드가 잠깐씩 끼여드니 이해하시라.)
   그래서 나는 지금 소설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왜 쓰는가? 쓰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누가, 왜 읽는가? 무엇을! 어차피 사람은 둘 중 하나로 나뉜다. 소설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으로. 안아 줘, 키스해 줘,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줘, 나만 봐, 라고 하는(또는 그런 행동을 유도하는) 사람과 안아야 할 때 적시에(적시에만!) 안고 무언중에 지금이라고 느낄 때 '키스해도 돼?' 라고 묻지 않고 키스하며 그녀를 푹신한 안락함을 제공해 주는 솜사탕처럼 입이 아닌 눈보다 더 은근한 상상력을 호사시키는 어딘가로 그녀를 데려가면서 음 어때 음 달콤해 오오 생각만 해도 멋져 음 그런데 아 그런데 처음 들어보는 어색한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독실한 그만의 관습에 따라 부르는 사람으로. 그런데 그 이름이 남자나 여자 이름이면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수영복을 반드시 입어야 하는 보통의 해수욕장에서 나체로 수영을 해 본 사람과 안 해 본 사람으로. 물론 더 세부적으로 나뉘고 이리저리 얽힐 수 있다. 그렇다 치고, 자, 당신은 어느 부류인가? 그냥 생각없이 다짜고짜 덮치는 스타일? 뭐시여, 이 사람 큰일 날 사람이구만. 그러다 잡혀가. 구속된다구. 고소당해. 이 양반이 지금 어디에다 정신을 팔고 있는 거시여? 집중하라고, 집중. 너는 지금 소설을 읽고 있어, 소설.
   뭔 설명은 장난 아닌데, 뭔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 이런 머저리 같은 놈. (From 하이드 비공인 수제자)
   글이 안 써진다. 왜 안 써질까? 감정이 안 잡히니까! 왜 감정이 안 잡히는가? 연기자가 아니니까! 연기자가 아니어도 글이 잘 써질 수 있지 않는가? 그러면 좋겠지만 몰입되어 정신을 쏟고 영감을 받고 글을 쓸려면 그분이 내려오셔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까! 그분은 누구인데? 나도 그분이 누구인지 잘 몰라! 그분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마냥 기다린다고? 응, 그래야 하니까! 그분은 왜 안 내려오시는데? 나도 몰라! 이제 그만 물어!
   무엇을 쓸까. 사랑의 종류와 사랑의 행위와 사랑의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새벽에 문득 깨어나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한다고. 영화에 보면 그런 거 나오잖아. 정신과 의사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드물게 환자가 인생을 이야기하고 그와 얘가 사랑에 빠진다거나 그런 거. 그런 거? 그런 건 이야기가 아니라 공상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허영. 질투. 절반의 존경. 선망. 동경. 경외. 몽상. 추리 말고 추측. 상상 계속 상상. 그래서 생각한 건데 정말 잘 짜여진 이야기를 쓸 게 아니라면 독자를 연애 상대로도 봤다가 날 쫓아다니는 정체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짝사랑에 빠진 조수로도 봤다가 이 얘기 저 얘기 정신없이 하다가 마침내 뭔 얘기를 하는지도 몰랐는데 나중 끝나고 나니 대충 이야기는 되는 약간만 탐탁치 않은 그런 거, 그런 게 뭐가 있을까. 살면서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열렬하게 구애를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거, 얘도 아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그런 일련의 일관된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는 것, 역시 아니야.
   글이 안 써질 줄 알고 있었다고? 그럼, 그동안 널 지켜봤으니까, 널 연구했다고, 내 전공이 너야!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몰라서 물어, 난 너의 내면의 목소리야, 제2의 자아라구, 감정이 안 잡힌다며, 연기자가 아니라며, 그럼 작가가 되면 될 꺼 아니야!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쉽나, 신문에 글 한 편 실리면 언론인이고, 관광지를 단체로 여행하다가 혼자 길을 잃어서 헤매던 곳 사진을 찍고 블로그에 올리면 그 즉시 탐험가되고, 아무나 예술가하고 누구나 학자가 되게? 뭔가 뭔질 모르겠네, 이게 뭔 모노로그 연극도 아니고, 그냥 딱부러지게 글을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든가! 왜 그걸 알고 싶으실까, 왜 그걸 알고 싶은지 생각해 봤어? 지금 장난해, 이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자, 자, 그거야, 지금 그 감정이 뭐라고 생각해, 지금 그 상태, 지금 그 변화, 세포분열, 환상을 깨야지만 여명이 밝아오듯 서서히 나타나는 환상, 비밀의 문을 어렵게 활짝 열었을 때 바야흐로 드러나는 또 다른 비밀의 기미, 신비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모두 애들 장난 같은 거라고 돌맹이 보듯 도외시하며 세월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신비라는 마에스트로가 몰래 당신의 곁으로 다가와 뒤에 있었는데 돌아보면 보이지 않듯 관심을 보이는 그런 신비, 보통의 지각으로 알아낼 수 없는 그것, 눈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걸 붙잡아서 구체화시키란 말야, 왜 그걸 못해, 왜? 못하긴 뭘 못해, 아직도 여태 그분이 오시질 않았다니까 그러네, 아 미치겄다, 너 때문에!

   이렇게 닉의 첫 소설은, 밑도 끝도 없는 추상적이고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소설은 급작스럽게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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