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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소설
2014. 7. 23. 12:20
S는 침착하게 한숨을 쉬고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매번, 매일, 항상 그렇듯이 책을 읽었다. 새로운 창작의 영감을 색다른 곳에서 찾지 못하는 평범한 보통내기인지라 그것 하나는 일상 가운데서 꼬박꼬박 쉬지 않는 일과의 하나였다. 또 다른 이유를 하나 꼽자면 아이디어도 있지만 책 한권을 정독하거나 대충 보더래도 틈틈히 써먹고 싶은, 사용하고 싶은 표현이 하나 둘 눈에 띄인다는 것이다. 꼭 고급스러운 기법이나 어휘, 문구는 아니더래도 오히려 흔하면서도 괜찮은 그러면서도 짧은 말. 더없이 좋은 손쉬운 본보기다. 땀 흘리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쓰는 것도 좋지만 본인이 그런 타입의 작가였다면 이렇게 나이 먹고 뒤늦게 휴양지에 와서 거창하게 소설 쓴다고 폼 잡지 않고 이미 옛날에 책 여러 권 냈을 것이다. 그것도 스테디셀러로. 최근 S가 읽은 책에서 꼿힌 표현은 이거다. 뭐하며 뭐. 일상 대화에서 응용하면 A하면 B, B하면 A, A는 B 빼면 시체다. 또 빡빡하다는 말. 이 글이 빡빡하거나 글쓴이가 빡빡하거나, 혹은 독자? 이렇게 쓰이는 말은 핸드메이드 최고급 햄버거 문체로 씌여진 소설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또 최근 소설 제목만 보고 기를 받았다. 아무래도 서점에서의 그 일이 자꾸 신경에 거슬리기 때문에 아주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은 채로 서서히 기억 속에서 색이 옅어지기를 기다려야 할 것만 같다. 그 책은 호텔리어에 관한 아마존 베스트셀러였다. S는 그랬다. 왜 작가는 그 책을 소설로 쓰지 않았을까? 그건 작가 맘이니까 더 궁금해 하지는 않고 책 제목을 보고 힌트를 얻어서 지금 기거하고 있는 호텔을 옮겨 보기로 했다. 사람은 한곳에 진득이 머무르는 것도 좋지만 공간 이동도 적절히 필요한 법이다. 또 혹시 모른다. 새로 옮긴 호텔이 미스테리인지. 해저 대륙간 망의 엄청난 데이터를 세계 각처의 거물들에게 규칙적으로 베스트오퍼로 넘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운영하는 위장 호텔이라거나 무슨 단체에 속한 올드보이들을 주로 상대하는 목적의 호텔일지도 모를 일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렇게 S는 바로 짐을 싸서 일단 호텔을 옮겼다.
뚝딱, 시간도 금새, 어떤 사건 사고도 없이 신기하고도 특이한 우연이 여러 번 연속으로 일어나는, 완전 희박한 드문 확률인 일련의 해프닝은 호텔 이동 중에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중간에 딱 한 번 본인의 불확실한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순간이, 겉으로는 모른 채 자연스럽게 무시하면서도 속으로는 걷잡을 수 없게 슬픔의 의식이 확연해지는 우연이 있었다. 첫째, 옛날에 친구들과 놀러갔던 스키장에서 가벼운 뇌진탕을 겪고 나서 시나브로 본인의 기억을 왜곡시키는 (혼자 추측할 수 있는) 신종 증후군에 걸렸다는 것. 둘째, 존 파울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괴상한 단체가 의뭉스러운 재단이 실재 명맥을 유지하며 시대를 건너왔다는 사실과 본인이 어찌어찌하여 그곳의 실험 대상에 뽑혔다는 점, 그것도 과거 사례가 없는 매우 이례적으로 초장기적 실험 및 분석, 퍼포먼스 천연기념물 대상이 되었다는 점. 셋째, 두번째의 집단에 의해 거대한 유산을 상속 받고 첫번째의 원인에 의해 가족이랄지, 친구, 주거지, 과거의 모든 굴레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는 일. 어디선가 갑자기 음산한 효과음이 더해진 합창이 들리지 않는가? "절대 뒤돌아보지마."
그 짧은 몇 초 사이에 악몽과도 같은 울버린의 불완전한 일시적 망령을 떨쳐버리기 위해 새로운 환경에 대한 탐사와 구경을 뒤로 하고 S는 당분간 독서에 몰두하였다. 그러면서 텀블러에 올리기에는 약하지만 몇몇 괜찮은 문장들을 포스트 잇에 옮겨 적어 거울과 TV와 옷장 등에 붙여 놓았다. 그 밑줄 긋기는 다음과 같다.
찰스 디킨스/어려운 시절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더 좋아하는 게 없습니다. 어떤 의견이든 조금치의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다고 확언합니다. 이제까지 다양한 권태를 겪은 결과, 어떠한 의견이든 다른 의견과 마찬가지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는 확신(확신이란 단어가 이런 문제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게으른 감정에 비해 지나치게 부지런한 느낌을 주는 단어가 아니라면 말입니다)을 갖게 되었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멋진 이딸리아 표어를 가훈으로 삼고 있는 영국인 집안이 있습니다..."
D.H.로렌스/아들과 연인 그녀는 과거에는 〈그대〉라고 불렸던 적이 전혀 없었다. 다음해 크리스마스에 그들은 결혼했고 세 달간 그녀는 완벽하게 행복했다. 다음 여섯 달 동안은 대단히 행복했다.
세스 노터봄/의식 p.66 "그리고 자네는 직장을 그만두게나. 내 생각에 그 일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자네는 일 년가량 그냥 책을 읽거나 여행을 하게나. 자네는 누구 밑에 예속되는 게 어울리지 않아." 오 그대 신비로운 주술사의 요술 수정과도 같은 판타지와 신화에만 존재하는 블루&핑크 드래곤의 여의주와 동급의 그것도 아니라면 기네스 캔맥주와 시세이도 선크림 안에 잇는 구슬 만큼은 영롱한 영혼을 지닌 고귀하고 아름다운 그대 독자는, 왜 작가가 첫째 둘째 셋째 같은 억지를 막 갖다 붙였을지 궁금해 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우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이건 소설 초반에 밝혔듯이 명백히 섬이름을 확정하여 기록하지 않은 것처럼 독자 한명, 한명, 한명이 주인공이 된 것 같은 환영을 주입하기 위한 목적과도 같다. 지금 시대 사람들은 영화의 명대사, 드라마의 웃기거나 감동적인 장면들을 무수히 기억하고 즉시 대화에 인용하면서 관련된 자동차를 마주하고 살아간다. 폭스바겐 투아렉...? 벤츠 E클래스 왕눈이...? 또 뭐 뭐 뭐. 보통 사람들은 모두 예리한 기억력의 소유자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설 속의 절대절명의 순간이나 기막힌 반전, 명문장, 꼭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마음 속에 담아두었다가 일상의 대화에서 써먹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마도 거의 없다. 양철북 초반에 나오는 커다란 드레스에 숨겨진 도망자, 드라마로 응용만 된다. 누군가가 끝까지 읽지 못한 어느 소설에 나오는 가슴골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여자 또 어느 영국 소설에 나오는 열기구, 비행기 조종사가 태양을 2번 연이어 보는 장면이나 적절한 예를 (능력껏) 들지는 못하지만 그런 경향이 많다. 반면 영화나 드라마와 텔레비전에서는 싱크대에 오줌 누는 외과 의사, 세면대에 오줌 누는 청년, 영화 The Master (2012)의 세면대 그것도 아니면 자동차 엔블럼에 오줌 누기는 못봤고 자동차 타이어에 오줌 누는 장면은 어느 상 받은 영화에서 봤다.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 드라마틱한 장면들은 활자 예술에 비해서 영상 작품이 더 사람들의 전두엽에 각인되게 만들 수 있는 최대 장점이다. 그래서 묵직한 소설에 비해서 스토리 위주의 소설들은 사건을 죽 나열해서 우연 + 우연 + 우연...같은 (실현 확률과는 좀 거리가 있는) 기법과 스토리를 많이 선보인다. 그래야 흥미롭다. 그러면, 그렇다면, 그러니까 일반 독자들은 소설과 영화를 보고 그걸 따라할 수가 없다. 기억하기 힘들다. 흉내내어선 안되는 것 투성이다. 똑같이 재현했다가는 큰일 난다. 그래서 억지를 막 갖다 붙이지는 않더래도 간혹 그 억지가 필요한 이유는 따라하기, 모방, 흉내내기, 귀감, 알리고 싶은 것, 재미난 것, '이런 거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야', '이런 글 나도 쓰겠다' 같은 질투에만 기반하지 않는 감수성이라는 인간 본능에 근거한 이타심 자극하기, 상상력 넛지, 창작 욕구 발화, 진짜 공유할 만한 것, 신기하고 특이한 그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왜 최근 들어 여성작가의 글을 그렇게 안 내켜하는지 그만 생각해야 하니까 음악을 들어야겠다. 그래도 남성 작가 소설도 처음 읽을 때가 기분이 가장 좋다. 처음의 감동 그건 재차 만나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일회성 때문에 더더욱 감동의 섬광이 타오르는 것일까? 젊은이에게는 감추고 싶은 어른의 솔직한 속마음이 그렇지 않은 고매한 인격을 지니신 분은 이와 다를 수도 있다. 나중에 읽으면 더 좋다, 시간을 두고 여러 번 읽어야 한다, 나중 다시 봤드니 어떻드라, 고전이란 그런 것이다 등등등. 그런 거짓말은 못 하겠다. 다른 사람들은 진짜 그런가 보다. 곧 본인의 사상이 더없이 고상했으면 좋겠고 다시 읽으면 또 다르고 좋지만 그 대상은 무척 드물어야 하지 않을까, 그 기간은 상당히 소원해야 하지 않나, 첫느낌은 (어쩌면) 각별하다? 그냥 그렇게만 생각한다. 이 다음엔 스토리 중간 중간에 어떤 절규가 이어질려나. 자메 드 라비! 이 말랑말랑하고 간질간질한 기분에 동조하지 않으려면 얼른 디베르티멘토를 듣던가 땀을 흠뻑 흘리고 운동을 하면 좋을 것이다. 쇼핑이나 다른 무엇도 괜찮다.
from 소설
2014. 7. 22. 16:16
S의 심연을 휩싸고 있는 불안한 기분의 분위기를 묘사했으니 잠시 작가의 집필 의도에 대해서 설명하는 시간을 가지겠다. 고품격에 이골이 나는 독자들에게까지 불친절한 작자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삶도 인생도 그 무엇도 더 이상 재미없어 할텐데 소설까지 신물나면 그러면 안되니까, 보다 더 정확한 기획의도는 끝부분에 나오겠지만, 지금 즉흥적으로 떠오른 '왜 쓰는가'의 답은 이와 같다. 환상 소설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는 없고 다만 독자를 골탕 먹일 의도는 전혀 없다는 점 그리고 소설은, 소설이란, 모름지기 이야기란 이렇게 쓰면 안된다는 그 말을 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누군가는 크게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쯤이면 누군가는 아니 아마 상당수는 (몰입도는 처음부터 없었고) 슬슬 재미없다는 표정을 짓고 혼잣말을 하실꺼다. 작가도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들을 읽으면서 '뭔가 있어, 뭔가 있어, 이제 뭐가 나올꺼 같아. 그러다 끝나'라면서 나가 떨어졌으니 일반 독자들은 당연히 그보다 훨씬 저급한 수준의 이와 같은 소설은 읽는 중 집어던질만 하다는 결론이 쉽사리 나온다. 참 얇은 독자층의 평균 연령도 점점 내려간다. 처음부터 청소년용 하이틴 모험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소설 제목에 대해 쓰거나 고민해보지 않은 작가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당연히 이 책도 여지없이 그 과정을 거쳤다. 그래도 나름 소설이라고 것 참. 이거 저거 요거... 엄~청 생각했다. 그러다 i envy you. 어 이거 괜찮네. 그런데 또 생각이 바뀌었다. 블로그,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냐면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또 누군가 다급하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라고 애원하는 듯한 환영을 꿈꾸듯이 타의적으로 언제부터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이 안 써진다는 얘기 만큼이나 만인에게 공통되는 인간적인 주제다. 하지만 이 얘기는 길어지면 재미없으니까 이만 줄여야겠다.
오 드디여 사무치도록 안타깝게 사건이 없는 이 가여운 소설에 이제야 그 발단을 이어갈 매치 포인트가 생겨났다. 자생했든 따라했든 삘 받았든 어쨌든 하나의 실마리가 생겼다는 것은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을 품고 있던 가운데 S 본인이 궁금해하던 시간의 구부러짐 현상을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발견했다. 그 믿을 수 없는 미스테리는 아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과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어느날 S가 기분전환 삼아 들렸던 어느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아담하고 조용한, 산뜻하지는 않지만 천장이 낮은 서점에서 본인이 집필했던 이야기가 단행본으로, 어엿한 한 권의 책으로 출판가의 유명한 과장된 찬사들과 함께 월계관을 포함한 조잡해 보이는 여러 마크가 덕지덕지 붙여진 책으로 출판되어 지금 이 순간 팔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존 베스트셀러,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 뭐뭐뭐... 마치 거짓으로 보이는 그 마크들은 믿음직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멀더와 스컬리 요원이 부럽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가 캘리포니케이션 주인공을 따라하는 모습을, 행위예술이라는 교향곡을 작곡한다는 착각과도 같은 환영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몹시 흥분해서 곧바로 그 서점을 뛰쳐나와 호텔까지 질주해 줄곧 내달렸다. 시간의 구부러짐을 확실하게 또박또박한 목소리와 차분한 어조로 설명해 주었던 바텐더와의 일화 뒤로 자신이 쓴 이야기가 책으로 출판되어 나온 기적을 보고 나니 그는 순간 다잡을 것 같았던 대물을 눈앞에서 놓친 그 허망함이라는 감정을 느꼈을리 없다. SF 영화나 소설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건 개인의 타인화라고 해야 할까, 살아 있는 실존 인간의 DNA 표본 화석 박물화라고 불러야 하나, 도무지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급기야 S는 그 무수한 감정을 뒤로 한 채 어떤 오로라와도 같은 모험과 꿈과, 이상, 초록색 정치함과 로맨틱한 기분에 둘러 쌓여 지구 끝까지, 우주 저 너머까지 가고 싶은 본심과 가봐야 겠다는 이상한 의무감이 심연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을 스스로에게 숨길 수 없었다. 그 불가해한 불가사의 사건을 보고 나니 일단 자신의 착각이 아닌가 의심하며, 자기 자신이 혼자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혼잣말을 주문처럼 되뇌이면서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난 미치지 않았어.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 일순간 파닥하고 안도감을 느꼈다. 어찌되었든 그 놈의 수준은 낮지만 자위 행위, 섹스, 탈출, 도망, 살인, 추격, 모험, 액션, 저격, 암살, 성애의 묘사, 흔들기 같은 젊은이들이 조금 더 솔깃해 하는 주제를 다루지 않았던 게, 되려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낼 재주가 없는 무능력에 대해 예전과는 다르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알싸한 테마들에는 이런 이야기도 포함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비성년용) 동화를 주로 썼던 JK 롤링이 발표한 탐정 스릴러에 나오는 내용이랄지 영화 크래쉬 (1996)의 모티브와 딱 하나만 닮은 어느 미스 유니버스 지역 수상자의 교통사고와 체념과 뒤이은 결혼이라는 여정. 그리고 스포츠 튜닝카를 모는 터프가이가 무수히 많은 그 첫만남들에서 여자를 태우고 먼 고속도로까지 가서 어떤 선택형 질문을 건넸을 때 딱히 묘사하기는 까다로웁게 그곳에서 도시까지 걸어가는 여자는 거의 없었다는 일화 같은 이야기들. 어느 시골 마을 꼬마가 방바닥에 몸을 밀착시켜 엎드린 후 약간의 움직임을 반복하던 찰나 꼬마의 엉덩이를 아빠가 지긋이 발로 밟았던 일과 꼬마가 그 행위를 페니스(그땐 모국어만 알았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운동이라 불러서 온 동네 아줌마들을 웃겼던 일(이건 퍼포먼스 아니다), 그 꼬마가 성장하면서 그리고 성장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았는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앞으로 소설을 더 쓰게 된다면 따라하기, 흉내내기, 장점 본뜨기, '만일 이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로 나오게 된다면'이라는 가정등을 재차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그런 쌈박한 내용을 집어넣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런 상황에 그런 안심이라니 참 안 어울린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S의 이야기가 신기하게 책으로 벌써 나와 버렸던 것일까? 혹시 잘못 보았을까? 그 쇼크는 마치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하다가 마주 오는 사람과 머리를 빡하고 부딪히는 충격과도 비슷하다. 당사자에게는 경악스러운 일이 틀림없을 것이다. 당사자가 아닌 이 소설의 독자는, 거리에서 길을 걷다 마주오는 샤넬 넘버 파이(π) 향기가 나는 상큼한 이성과 (누군가에게는 동성) 맞닥드려 한 7번 이상 한켠으로 비켜줄려다 계속 똑같은 방향으로 마주했을 때의 상황과 아주 약간 닮은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대가 말이다. 아무래도 희망사항 같다. 제조사에서 노트북에 프로그램을 심은 채로 판매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경로에 의해 바이러스가 침투한 것일까? 또는 너무 오버해서 지나친 억측으로 만들어낸 일시적인 조현병 초기 증상일까. 시간의 구부러짐 현상도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기 버겨운데 자신이 썼던 노트북 안에만 존재했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다니, 결국 다시 그 서점으로 가서 확인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같아서 바쁜 일도 없으니까 그 서점으로 갔다. 그런데 가는 도중 또 버럭 겁이 나기 시작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 서점이 없어져 버렸으면 어떡하지? 그 서점에 갔는데 그 서점 주인은 없고 그의 딸이 그 서점을 운영하고, 그 주인은 10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해서, 되물어 볼 수 밖에 없다면?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S가 오해했던 그 책은 S와 이름이 비슷하고 약력이 아주 일부 유사한 데다 저자의 사진도 없고, 내용도 상당히 판타지와 흡사해서 결코 자신이 기록했던 내용이 외부로 유출된 후 책으로 나왔다고 볼 수 없었다. 사건 전후 시간들을 다시 떠올려보기 보다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금 이대로 안심하는 편이 더 좋을 듯 했다. 본인도 어떻게 보면 그걸 간절히 바랬다. 이 소설의 학술적 가치가 어떻고, 달달한 로맨스처럼 얼마나 은근하고, 평범하지 않은 정도에 필사적으로 천착하는 것도 중요할
테지만 좀 더 쉽게 펼쳐질 이야기의 기대감이라 부를 수 있는 마음을 잘 구술할 수 있느냐의 관건은 그 전대미문의 핵심은, 마초의
스팀을 선한 의미로 얼마나 뽑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 가벼운 입맞춤 하나에 두꺼운 책 한 권이 몽땅 소요되는데
누군가 그 책을 다 읽었어, 권태나 결혼생활, 예전 연인 사이였는데 지금은 그 연인을 가족이라 부르는 걸 설명하는데도 상상하기 힘든 기다란 설명이 필요한
글을 누군가가 묵묵히 꾹 눌러 참고 모두 봤어, 그러한 스팀이 모이면 커피 두잔을 위한 티포트를 끊일 열기가 아닌 거대한 규모의
빌딩, 바로 그곳의 난방 시스템을 가동시킬 수 있을 정도의 스팀이 된다. 오렌지 빛 얼굴의 단발머리 소녀나 와일드한 빨간색 숏컷
주근깨 아가씨가 한숨을 이마로 불어 앞머리를 올린다면 그건 누군가의 미소를 덥히는 정도의 매직 버블이다. 현실과 드라마에서는 후자가
멋지고, 재미나면서 진중하고 괜찮은 소설을 쓰는 데는 전자가 요긴하다. 물론 바꿔도 된다. 적도의 태양, 지하 세계의 마그마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더 이상 뭘
바라겠나.
from 소설
2014. 7. 22. 15:09
A는 오래전 한때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를 꼽으라면 1초의 주저하는 몸짓이나 표정, 의구심 없이 즉각 극동의 어떤 소설가를 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래도 극동식 이야기만의 장점이 있고 묘한 분위기가 있으며 뚜렷한 컬러와 명료한 전개, 고정팬 외에도 뭐라 설명하기 곤란한 그런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에 대해 도대체 그 매력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함을 풀어내지는 않고 그냥 그렇게 외적 나이에 맞는 책을 읽고 내적 취향에 따른 소설에 대한 컬럼을 쓰고 적절히 자타의 기호에 부합하는 책들을 번역하는 가운데 본인이 앞으로 소설이라는 것을 쓴다면 어떻게든 극동식 소설의 비밀이랄지 장점이랄지 뭐라 부르기 애매한 그 뭔가를 꼭 포함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람들은 거의 자기 이름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물론 자기 이름이 마음에 안들어 바꾸고도 싶어하고 영화처럼 다른 이름의 여권이 여러 장 있다거나 정체성이 다른 여러명의 '나'로 살고도 싶어한다. 그러면서 인터넷 검색창에 자기 이름을 입력해서 검색해 보는 것을 썩 싫어하지는 않고 또한 질문을 받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 이야기를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면 매우 흡족해한다. 책에서도 자주 나오는 게 그거다. 당신은 행복한 편인가?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먹고 싶은 것은? 어디에 가고 싶나요? 만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예요? 하고 싶은 일은요? 나중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나요? 이야기속에서 A가 B에게 묻더래도 독자는 A나 B로 자신을 대입시켜본다. 일상 생활에서 친구들이, 술집에서 남자들이 하는 얘기도 그렇다. 어떤 멋진 영화에 나오는 차를 타고 싶다. 그 차를 갖고 싶다. 으으으! 언제는 영화에 나오는 허름한 볼보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으리으리한 차 이름들? 이 소설의 전체 독자 가운데 반틈은 남자다. 남자들은 럭셔리카 이름만 들어도 좋아한다. 라디오헤드처럼 팬들이 자유롭게 가격을 매겨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여건도 네임밸류도 없다. 물론 독자 수요 예상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가상 독자와 인세를 놓치면 아마도 슬플 것 같다. 상심이 크겠지.
빠에서 마담이 손님에게 묻는다. - 마담: 오빠 왜 결혼 안 해요?
- 손님: 음 그냥 돈 좀 더 벌고 나서, 좋은 차 몰고 돌아다니다 놀면서, 여러 이성을 좀 더 만나보고, 나중에 정착해야지.
- 마담: (함박웃음) 이봐, 이봐. 남자들 다 이런다니까.
극동식 소설의 장점으로 되돌아와서 그 가운데 하나를 들자면 내 욕구에 충실하다는 것과 여러 규격의 다중적 공동체 가운데 속해 있는 개인의 의무와 질서에 대한 미묘한 역동성을 잘 다룬다는 점이다. 전자는 그러한 거 같고 후자는 다른데도 다 그런가 아니면 그냥 평면적이고 수평적이라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다. 전자, 하긴 그게 뭐가 나쁜가. 스누핑은 어디, 어디가 낫다. 스케일과 표현은 또 어디는 어떻고 어디는 어떻다. 개인적 취향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추리소설과 대작 온라인 게임은 닮았을까? 그런 대작 온라인 게임 광고를 보면 완전 꿈과 이상, 모험, 사랑, 인생, 우주... 뭐든 다 있을 것 같지만 실제 해보면 극명하게 호불호가 갈린다.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젊은이라면 드물지 않게 유명 화가의 화보를 간직하거나 학교 도서관에서 보기는 했을 것이고, 유독 어떤 가수나 작곡가를 좋아했을 것이며, 특정 브랜드에 꼿혀 있을 것이다. 매장을 기웃거린다든지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에 전화를 걸어 카달로그를 받아본 일들이 1인칭 소설의 밀도에 포함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은 중년에게는 덜 흥미로울 수 있으니 결국 정말 중요한 주제는, 시점은 2인칭이라고 생각했다. A도, J도, S도. 그리고 당신도, 오 그대도. 너와 그대 사이 그리고 삿대질과 골-세러모니. 한편 S는 최신형 레몬 노트북이 왠지 진부해 보여 글이 안 써지니까 도구를 탓해야 하니까, 뭔가 변화가 필요해서 매니아들만 로망으로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한다던 수동식 타자기를 하나 마련했다. 그가 섬에 내려와서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고 행동에 옮겨 실행한지 거의 시간이 몇 달 정도 상당히 지나간 것 같고 틈틈히 무인도에도 갔다가 산 꼭대기에도 올라가고 비밀 클럽은 물론 마라톤도 뛰고 인근의 여러 작은 섬에도 놀러갔다가 조금 멀리 떨어진 섬으로 가서 싸이클 대회에도 참가했었다. 그런데 이렇다 할 성과가 없길래 마음을 편히 먹고 뭐 안 써지면 어떠냐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휴양생활에도 더욱 편안히 전념해야겠다고 스스로 본인을 다독거리던 차에 어느덧 월드컵 시즌이 찾아왔다. 그래서 가벼운 대화도 할 겸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올라가서 칵테일을 한잔 하면서 바텐더로부터 얘기를 듣고 보니 본인이 그 호텔에 묵은지 벌써 수년이 되어 간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호텔의 여러 직원들과 사장과 이사단은 물론 근방에 상당히 유명한 인물로 소문이 났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공간 이동을 하고, 시간을 리셋하며, 장자 사상이며 나비효과도 있고, 현실에서 초일류 과학자가 시간의 구부러짐에 대해 학설을 내놓아 학계를 발칵 뒤집었다가 다시 학계를 세계 3대 후라이팬에 올리기도 한다지만 지금 이 순간, 어떻게 그런 일이 바로 이곳에서 벌어질 수 있는지 의아해 하면서 하나하나 꼬치꼬치 차분하게 참을성 있게 이것저것 확인하고 검토해 보았다. 그러던 중 아주 기가 막히게 신기한 현상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 팔자 좋은 파라다이스 생활을 하고 있으니 더 믿기 어렵겠지만 그 불가사의한 현상이 일순간 환하고도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즉, 시간의 구부러짐. S의 개념상 1년이 객관적 세상의 몇 년과 대충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아련히 유추해 볼 수 있는 근거가 셀 수 없이 많은 가운데 과거의 그 비개인성이 점점 탈개인성으로 바뀌어져 가는 서사를 어렴풋이 조금조금씩 깨닫고 놀라면서 어쩔 수 없이 발아들이면서 좀 전의 흥분이 가라앉고 태연하게 그 비상식의 여정을 모두 인정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우주여행도 아니고 가당키나 한 일일런지 참 어이없는 깨달음이었다. 잠을 안자는 또는 못자는 사람이라거나 영화 주인공과도 같은 초인도, 만화에서나 나오는 괴물이 아니라 남들과 똑같이 아니 남들보다 덜 뛰어나지만 완전 똑같이 살고, 일상을 겪어 나가고, 음식을 먹고, 도시에 살고, 사람을 구경하고, 사람과 대화하고, 바다를 바라보지만 하루나 한달이라는 기간에는 깨닫지 못하는 하지만 몇 년이 흐른 후에는 알게 되는, 마치 스토리의 반전, 학문 이론의 역설과도 같은 무척이나 설명하기 까다로운 그런 시간의 구부러짐 현상이었다. 혹시 S는 그가 쓴 소설에서 J가 받았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제의가 역으로 자신의 현실로 옮겨져 지금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아닐까 하는 당연한 의혹과 얼어붇은 의심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
from 소설
2014. 7. 22. 14:31
J는 클림트, 뭉크, 마티스, 뒤피, 쉴레, 피카소, 앙리 제르벡스, 조반니 볼디니, 모네 같은 그 이름을 열거하기 곤란한 미술계 거장들의 그림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현장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자기 고장에서만 살면서 여권에 도장 한번 못찍고 20년 내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면 앞서 열거한 사람들 수준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는다. 재고할 가치가 없는 일이다. 자크 루지에나 바흐 스폐셜리스트의 음반을 굳이 틀어 놓지 않아도 사람들은 누구나 약간의 힌트만으로 능히 비슷하게 또는 다른 패턴으로 변주를 할 수 있다. 다음은 앞서 나왔던 외모로 사람 이름 늘어놓기에 대한 응용 놀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줄리언 반스, 밀란 쿤데라, 오르한 파묵, 하워드 제이콥슨, 찰스 디킨스... 그 다음에 갑자기 (______)! 괄호 안에는 그 누구의 이름을, 당신의 이름을 넣을 수 있다. 넣지 말라는 현행법도 없고 그 어떤 관습이나 풍속도 없다. 그런데 당신의 이름을 이 괄호 안에 넣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정말 판이하게 산성과 알칼리성처럼, 홍해의 기적처럼 구분하기 순쉬운 2가지로 나뉜다. 이런 식의 유치하고 꺼벙한데다가 상태가 몹시 의심스러운 말장난에 대한 반응은 사람에 따라, 성별에 대해, 혈중 알콜 농도의 영향에 의해, 뭐에 근거해, 뭐에 따라 왜 그렇게 다른 것인지 참으로 신기해 보인다. 초딩이 아닌 어른들이 봤을 때도. 이 단순한 유머가 게으른 변명이 더해지는 글쓰기 중압감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일단 S가 그리고 J가 글을 막 쓰게 만드는 얼마간은 불흉한 화근이 되었다. 블로그 검색어는 물귀신이다. 밀란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을 읽다가 옛날에 극장에서 동성 친구와 '빠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1996)'를 보고 나오던 낮 시각의 뭔지 모를 어지러움을 떠올리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그런 낯선 느낌을 소설에 적는 게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일런지... 모차르트 K.183번을 듣고 있는데 어, 갑자기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가 잔뜩 담긴 여러 개의 풍선을 한가득 들고 지면에서 발이 떨어질락 말락하는 기분 같다고나 할까. 아마도 그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겠지만, 감정의 기복 때문에라도 누구나가 그러하겠지만, 어쩌면 그래서 그러한 감정이 증폭되고 배가 되는지도 모른다.
때는 바야흐로 2014년 왠지 모르게 기분 좋은 어느 날, 누가 무엇을 발표하고, 어디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왜 어떤 동물이 자다가 개꿈을 꾸고 몽유병자가 된 날이 언제였는지 바로 그런 날이었다. 정말 마침내 거짓말처럼 S는 믿을 수 없는 유레카의 순간을 맞이했다. 한적한 바닷가에서 팔자 좋게 낮잠 자다가 진짜 번개를 맞은 건지도 몰랐다. 소설의 구상이 딱 떠올랐다. 제목은 '소설가가 된 여자, 개가 된 남성' 살다보니 이렇게 놀랍고도 기이한 그럼과 동시에 찬란한 경험을 하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흐뭇한 어떻게 보면 음흉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읽는 중에 쌍코피 터질 정도로 뛰어난 그런 놀라운 연애소설을 쓰고 싶은 여자들과 신종 느와르 영화를 보거나 만들거나 연기하고 싶어하는 남성들처럼. 그런데 다음날 도서관에 들러서 보니 그와 비슷한 제목과 내용으로 이미 발표된 소설이 있었다. 삶이 참 허무하다. 이런 제길슨. 그렇지만 이로써 한가지 깨달았다. 제목을 먼저 뽑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확정은 아니더래도 말이다. 하지만 제목 먼저 뽑고 글을 써내려가기에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나 재즈계의 거장들도 까무러치는 즉흥연주의 귀재 만큼의 능력과 가망성이 없어서 제목 짓기는 차차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름답고, 문학적이고, 희귀하고도 재미있는, 애달프게 눈길을 책으로 잡아 끄는 뭔가 빠져들 것만 같은 그런 제목... 어디 없나? 그래서 J는 하는 수 없이가 아니라 흡사 상류층 귀부인들이 견적을 자동으로 계산해 내는 반사 신경과도 같은 직관력으로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여자 주인공 A가 기필코 소설을 쓰게끔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알파벳 A는 주홍글자를 연상시키고 동시에 해치(시비와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 컬러 텍스트로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한 이름이자 너글러운 문자다. 지금껏 소설에서 이름을 이니셜로 표기한 예는 까마득히 많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비록 많지 않을지라도, 단 4명일지라도 어쩌면 매우 지성적인 전문가일 것이라는 것을 쉽사리 예측할 수 있다. 설마 앞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당신의 지성을 굳건히 믿는다. A는 번역일을 하는 중 틈틈히 연애소설 작품 구상에 들어갔다. 원래는 신종 추리소설을 계획했는데 추리소설은 이제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게다가 어지간히 써서는 눈에 띄기도 힘들다. 그리고 꼭 연애소설이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대사가 포함되는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런 대사는 다음과 같다. 청소년은 잠시 두 귀를 막는 게 좋겠다. 아, 이건 드라마가 아닌 소설이니까 단락을 잠시 건너뛰는 게 낫겠다. - '유난떨다' 구글링 검색결과 첫빠 (순위가 하락했을지도 모름)
- 째가 이쁜 척 하고 있어.
- 저 잘난 체 하는 모습이라니.
- 지금 속으로 뭔 생각해? 내가 맞혀볼까?
- 레슬링 선수 출신 어느 유부녀의 인생이 담긴 말 "임자 있는 남편한테 꼬리치는 년들은 허리를 그냥 확 접어브러야 돼."
- 내 남편한테 껄떡대지마 이년아! : 뭐 껄~떡?
- 내 인생에 달라붙어 단물 쪽쪽 빨아먹는 낙지 빨판 같은 년!
- 돼지뽄드 같은 년!
- catty behavior에 충실한 어떤 여자의 경우 옥타곤에 직접 올라가지 않고 마술피리를 불어서 남자친구를 대신 올려 보내는 일.
그녀는 이 시대의 예술가와 전문가, 일반인은 물론 다음 시대의 지성인에게도 잊혀지지 않을 널리 읽혀질 고품격 소설로 기억될 만한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여자는 그래요. 외모? 잘생기면 좋죠. 말빨? 여자는 그런 거 중요하게 생각치 않아요. 여자는 남자의 사소한 모습에 반한답니다. 능력? 그 다음 구구절절. 순진한 하이틴 로맨스라... 어디 잡지에 애독자 엽서를, 어느 라디오 방송에 애청자 편지를 보낼 일 있나? 멜로드라마적인 케미컬한 요소는 살짝 품어 한켠에 놔두고 더없이 모던하고 격조 높게, 코스모폴리탄이란 단어를 떠올리면서 감탄사를 유도하는 그런 소설. '나는 뭐뭐 한다'라는 대사나 묘사와 설명을 읽는 독자가 적어도 '너만 그러니'라고 느끼지 않게끔 만드는,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우리'라는 말을 제일 나중에 쓰는 그런 소설.
소설은 뭐다, 또 그렇게 쓸줄 아셨는가. 소설은 뭐다라는 소설계의 불문율을 그만 쓸려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해야겠다. 소설은 상심이다. 왜냐하면 비밀이다. 일단 광대한 독서 경험을 거치고 수없는 상심을 경험한 후에나 무슨 얘기인지 더 잘 알게 될 것 같다.
from 소설
2014. 7. 22. 11:54
어느 봄날, 날씨가 어떠한 기분이 뭐한 상태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강아지나 고양이와 약속된 것처럼 눈빛을 맞추고 싶은 어느 봄날, 먼지 쌓인 책상에 놓여진 시집을 펼쳐 보면 미세한 감정의 동요를 느낄 수 있다. 바다코끼리, 버찌, 무지개...같은 단어 만으로도. 하지만 J는 긴장을 풀 수 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독자를 꼴보기 싫은 직장 상사라고 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걸 알아야 하는데?" 독자가 이 문장을 응용하지 않게 해야만 독자와 작가 모두 불이익을 감소할 수 있다. J는 집에서 집필에 또는 집필 구상에 열중하고 있으면서 소셜 네트워크에 가뭄에 콩나듯 컨텐츠를 업데이트한다. 어느 날 Instagram에 '좋아하는 축구 선수의 이미지를 인쇄한 사진'을 사진 찍어서 올려놓았다.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달았다. "아이마르, 프리메가에서 멋졌는데... 이 친구 나중에 이쪽에서 잠시 뛰어 주면 좋겠다!" 그런데 어느날 거짓말처럼 아이마르가 그곳 축구팀으로 이적하여 활약을 할 것이라는 스포츠 뉴스가 발표되었다. 물론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또 꼭 기적과도 같은 일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SF에 사는 어느 축구팬이 캔맥주를 야금야금 마시면서 트위터에 첼시 누구 우리팀으로 오시는 게 어떨까..라고 글을 남겼는데 그 일이 진짜 그냥 우연히 벌어졌어. 옛날 베컴 사례도 있고 원래 스포츠 업계의 속성이 그러니까 전혀 문제될 소지는 없다. 선수들이 벤치 멤버보다는 주전으로 뛸 수 있도록 나이와 비례해서 몸값이나 장소를 바꾸는 게 보통이지만 다만 그 행선지가 약간만 쌩뚱 맞은 것만 이상할 뿐이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아니겠지 하고 그냥 넘어갔다. 소설은 강아지다. 깨물어 주고 싶도록 귀여울 때도 있지만 혼수상태에 빠질 만큼 몰입하도록 소설이 당신을 깨물기도 한다. 심지어 그것도 퍼포먼스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J가 틈틈히 구독하는 블로그를 통해서 그 블로그 운영자가 새 손그림 기념엽서를 발간한다는 소식을 보았다. 그래서 곧바로 그 기념엽서를 주문했다. 제품 주문 방식은 e메일이었다. J는 메일을 보냈다. "머머머 엽서 주문합니다. (입금액, 입금자, 입금일)"라고. 그런데 주문상의 착오가 있었다. 곧 제품을 보낸다는 답신 후에 제품을 보낼 주소가 적혀있지 않았다는 e메일이 다시 왔다.
블로그 운영자: 어? 보내려고 했더니, 주소를 안적으셨어요 저도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알았네요 혹시 메일 일찍 보신다면 제게 문자로 넣어주시겠어요? 어차피, 나가는 길이라. (전화번호) xxx-xxx-xxxx
J가 보낸 답신은 이랬다. "ㅎㅎ 죄송 일부러 그런건 아니었는데 우스운 상황이 연출됬군요. 네 문자보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그림 많이 그려주세요, 감사합니다." 딱히 별 사건은 아니지만 이런 주제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써볼까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또한 평범한 듯 해서 다른 구상을 떠올려 보려고 Tumblr와 Blog, Flickr, Twitter, Facebook등을 더 살펴보았다. 여태 J의 행적에 대해서만 썼는데 왜 S가 J를 만들어 냈는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잠시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통 남자들은 이상향을 썰로 푼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원래 그렇기 때문에 평생 변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환경에서 살다 보면 정말 돌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껴서, S는 그 이상향을 말 할 상대가 없어서 글로 적기로 한 것이다. 남 얘기만 듣다가 소셜 네트워크만 읽다가 고품격 소설만 선정하다가 인생이 급작스레 종칠 것 같다는 절박감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달라스 3대 말빨,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내 이야기를 써 봐야겠다고 퍼뜩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S는 자신의 소설에 왜 구체적인 지명을 밝히지 않고 그냥 섬이라고만 했을까? 뭐하고 뭐한 어떤 섬, 그냥 섬. 그건 왜 그러냐면 거의 모든 독자를 주인공으로 착각하게끔 홀리기 위한 전략이기 때문일 것이다. 발음도 비슷하다. 섬, 썸. 그런 건 어디서 배웠냐면 어딘가에서 정확한 스킬을 전수받거나 터득한 것이 아니라 침착하게 세상을 관찰하니까 그냥 여기저기서 보인 것이다. 남자가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물론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뒤바뀌는 경우도 허다하고 실제 대부분은 여자쪽에서 먼저 미끼를 던진다, 95%― 말빨로 여자를 꼬시는 것이 아니라 말빨로 여자의 정신을 어지럽게 하여 세뇌시켜서 결국엔 마취되어 넘어오는 연애사가, 그 모든 사랑 타령의 시초가, 드라마가 전개될 내용을 예상하는 어른들도 그렇다. 설령 "여자는..."이라는 독백을 시작하시는 독자가 있다면 세상을 썩 그렇게 오래 사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고매하신 독자의 관심을 S의 직업으로 옮겨본다. 왜 S의 직업을 그렇게 설정했냐 하면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직업이 변호사라거나 수의사, 큐레이터, 서점 주인, 개패 사장, 동사무소 직원인 것 보다는 작가 또는 소설가 지망생, 시나리오 작가 겸 주부, 창의력 개발연구소 소장, 영화감독, 학생, 강사, 백수, 예술가, 탐정, 탐정에게 쫓기는 사람, 요원으로 설정하는 것이 훨씬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풀어가기에 쉽고 편리하면서 유리하다. 즉 소설가 초년생이 1인칭으로 소설을 쓰는 게 더 낫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막 쓰는데도 적절한 쓰기의 패턴이 있는 것이다. 치밀하고도 숨막히게 그런 설정을 만든 게 아니라 그냥 쓰다보니 일상생활에서 여행지로, 주거지에서 휴양지로 가뿐히 공간이동한 것 뿐이다. 글쓴이든 누구든 절대 그걸 싫어하지 않는다. J는 자신이 쓰고자 하는 소설에서 주인공의 직업 외에 글이 잘 안 써진다고 고민하는 소설가의 모습을 떠올리면 뭔가 자기도 모르는 웃음의 숫간이 찾아오기 때문에 또 왜 그런가에 집중했다. 웃는 표정이 참 희한했다. 마치 여배우가 그 부위를 가리는 테이프를 손에 들고서 "감독님, 그냥 이거 떼고 하면 안되요?"라고 말하면, 그 핀잔을 듣는 사랑씬 촬영장에 있는 에로영화계 추장의 안면 근육의 꿈틀거림과도 닮았다. 다른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연기, 연출, 창작, 영감등의 단어를 떠올리는 가운데 불현듯 필연을 우연으로 바꾸는 그 놀랍도록 이상하게 이어지는 연속성에 대한 화두를 잡고 늘어지면 뭔가 이야기가 나올 것도 같은 예감이 들었다. 멋진 영화배우가 말한다. 청소년들이, 젊은 친구들이 스타의 영향을 얼마나 받는지, 어느 정도나 쉽사리 따라하는지 잘 알기 때문에 가끔씩 때로는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도 조심하고 생각하게 된다고. 슈퍼스타들이 그렇듯 당신이 리처드 브랜슨이 아니더래도,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때려 잡아 주라는 클라이언트에게 복제 분신으로 가장한 인형을 꽂고 찔러서 괴롭히는 주술사가 아니더래도 자신이 쓰고 적고 말하고 바라만 보아도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면, 그렇다면 글이 잘 안 써진다고 고뇌하며 인상 찌푸리고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 술 한잔 하는거도 그리 처량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겠지. 참고로 S는 J에게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를 읊게 했지만 그가 정작 20여 년 전 현실에서 외웠던 시는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 가운데 한 편이었다.
from 소설
2014. 7. 22. 11:22
주인공의 블로그에 이상한 댓글이 하나 달렸다. 그게 뭐 그리 대수겠냐마는 왜 그런고 하니 나중 그것이 그의 인생을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S도 또 S에 의해 글을 쓰고 있는 J도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거리에서, 서점에서, 호텔에서 또한 집에서나 어디에서나 눈이 막 돌아가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원래 그랬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뭐랄까, 의도적인 전술이랄까, 그들의 인기와 품위를 그리고 인격과 인생 격조의 X스팟을 고양시키기 위한. 피노키오의 코는 참 뭔가를 연상시킨다. 일시적이 아니고 줄어들지 않는다면 큰일나겠지만. 블로그에 어떤 글이 달렸는가는 밝힐 수 없다. 추리초설의 기법과는 관련이 없고 약간의 궁금함은 남겨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일은 모른다고 나중 고도로 치밀한 전략으로 짜여진 미끼로 던져진 말장난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아무튼 그 블로그에 씌여진 대강의 짧은 뜻은 그와 같은 포스팅을 꾸준하게 지속하고 점진적으로 그 수준을 올려달라는 주문과도 같았다. 그러니까 J는 그냥 하던 데로, 살던 데로 지내면 되는 것이다. 뭔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지만 어차피 J는 억만금 원고료 환상문학상 같은 거창한 덕목을 바라지도 않고, 도전할 깜냥도 안되고, 솔직히 그 스타일의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로 보는 것을 훨씬 좋아하기 때문이다. 강한 남성들은 그 반대일까? 고품격 소설 대신에 (쉬는 날 TV로 시작해서 TV로 끝나는 하루 가운데) 강연, 뉴스, 토론, 스포츠를 보고, iPad로 읽는 이야기도 환상, 추리, 스릴러, SF를 선호하는 것인가. 환상, 추리, 스릴러, SF 소설도 좋은데 그것에 빠지지 못하는 사람은 뭔가 두뇌 구조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하드보일드와 (값비싼 우황청심원, 녹차, 세계 항산화 10대 음식이 성장제로 쓰여진 재료만으로 만든) 수제 햄버거 문체, 극동 스타일 문장(장소 기준이 안 밝혀졌으니 어느 동쪽을 가르키는지 모호하지만)들이 대부분 훌륭한 환상, 추리, 스릴러, SF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이건 킨제이 보고서나 다른 무슨 보고서에서 이미 밝혀낸 내용일 것이다.
TV는 스타게이저풍 주인이 잠드는 순간에도, 주인이 꿈나라에 가있는 시간에도 쉴 수 없다. 불쌍하다. 초갑부와 빈자가 오랜 세월 우정을 유지하는 경우가 드물게 존재한다. 그 드문 사례 가운데 빈자가 초갑부에게 맞추는 경우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결혼식 날 당일에도 신랑은 평소와 다름없이 눈이 돌아간다. 연로하신 할아버지도 강하다. 남성은 평생 강한 남자다. 험담은 그칠 날이 없다. 알겠다. 닥치겠다.
어느 소설들에 보면 시와 소설의, 시인과 소설가의 비교가 드문드문 나온다. 멋진 설명을 인용하기는 너무 기니까 짧은 문장만 이용하자면 어느 여고생 배역의 대사가 있다. 그 소설은 읽어보지 않았으나 영화로 만들어져서 그것만 보았다. 그 대사는 이것이다. '시가 소설보다 높은 거야?' 소설가들이 방대한 양의 글을 써야 하니까 책을 덜 읽는 것일까? 양으로만 봐도 소설가들이 고된 업무에 시달린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치만 소설가들이 책을 덜 읽기는 뭘 덜 읽겠나. 그냥 요리 환경과 요리사들 스타일, 요리 재료등 식재료를 비롯한 나머지가, 사람이,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지. 고급 레스토랑 손님의 까탈스러운 취향, 검소하고 낙천적인 소비자의 기호와 게다가 장소, 기분, 상황들 하며 세상에는 왠 변수가 그렇게나 가난하면서도 많단 말인가, 나 원 참. 은유란 무엇인가? 시원하게 설명하는 사람조차, 어른조차 별로 없다. 옆사람 눈치보는 게 당연하다. J의 혼잣말, 남이 알고 있을지라도 본인이 새로 알게 되는, 새롭게 깨닫는 것을, 궁금한 것을 주로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막연한 공상을 하였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어차피 전 유럽 서점가의 판을 새로 짜는 조명을 받는 건 불가능하고, '왠지 모르게 이건 꼭 써야만 할꺼 같다'하는 그 감정을 순도 높은 초티타늄 핀셋으로 잘 잡어서 그것에 '왜 그런 것인가?'라는 마술의 조명을 Film Riot의 기교를 본따 흉내내어 비춰보면서 그려볼려고 하는 그 행위가 거의 유일무이한 가치를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J는 대단치 않은 자신의 창작 능력이 고갈되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잠을 충분히 자서 모공수축과 피로 회복을 하고, 반나절이면 충분한 깜작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바다를 본다는, 바다를 보면서 캔맥주를 벌컥벌컥 마신다는 낭만도 있지만 그곳까지 가는 기차에서만 즐길 수 있는 행위예술을 오랜 만에 시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퍼포먼스의 자세한 내막을 공개하기는 차마 껄끄럽다. 그가 진짜 기차 여행을 다녀왔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단락을 넘겨야 하니까, 그날 J는 자기 전에 YouTube에서 동영상을 보고 잤다. 검색창에 쓴 글씨는 이랬다. dog vibram.
from 소설
2014. 7. 19. 16:35
그의 뇌를 열고, 까고, superMRI로 찍을 수는 없으니까 쭉쭉 그의 의식을 S가 파헤치고 있다. 그 기법이 의심된다면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를 놓고 이 소설과 동시에 읽어보시길 바란다. 당장 J의 생각은 이렇다. 1인칭으로 쓰지 않겠다. 머머 했다, 머머 했다, 머머 했다... 아니야. 완전 재미난 스토리를 직접 체험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고, 좀 웃긴 일도 많았지만 모두 그저 단편적인 것이었던 데다가 요즘 독자들은 풋내기도 아니고 수준도 그렇고 최소한 비교에 능하다. 요즘 독자들은 이런다, 옛날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제 책은 외국에서는 잘 안 팔립니다.'라는 중견 작가의 글을 읽고 '안 팔리게 썼네'라고 그러고 책 뒤 표지에 마치 누구+누구 같다는 평이 있으면 적당히 어떻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도 서로들 모른 체 하지 않을 만큼은 순진하지 않다. 겉으로 표출되지 않는 혼자의 다듬어지지 않는 유약한 생각은 다소 냉정하고 영악한 면이 없잖아 있다. 일상에서 너무 솔직해도, 드라마에서 연기를 너무 잘 해도 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일반 독자와 프로페셔널 장사꾼은 놀랍게도 상당히 닮아 있다. 어떤 점은 까무라치게 빼다 박았다. 다음은 한켠의 짧은 생각에 반하는 모든 소음을 종료시키는 전문가의 한마디다.
- 익명의 프로모터: "현재 가치로 봤을 때 최고는 U2거든요... 떼창 만으로 뮤지션의 자존심을 충족시킬 수 없죠..."
- 어느 무대전문가: "장난해요? 폴은 세 번 공연 만으로 25만명을 모으는 레전드입니다."
대개는 일반 기업체가 남의 다리 피나게 긁는 자선구호 단체가 아니듯 가려운 자기 다리를 열심히 긁는 보통의 소설 독자들은 자신의 시간 자원을 소중하게 사용하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J는 시점이고 주제고 플롯이고 다 필요없고 앞서 생각한 것처럼 막쓰기로 작정했다. SF 주인공처럼 또 원점에 왔나? 아무튼 보도 듣도 못한, 밑도 끝도 없는, 전무후무한 누보로망 스타일로 쓰기로 했다. 누보로망을 잘 아는 사람, 0.1%는 될려나. 보통의 독자는 여자들이 생각하는 남자들처럼 그렇게 친절하지가 않아서 틈틈히 주의를 환기해주고 조금은 격이 떨어지는 솔깃한 얘기도 집어 넣고 웅변가 같은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독서에 집중하게끔 끊임없이 유도하고 다그치고 다독이면서 독자의 정신을 마취시켜야 한다. 그 놈의 유난떠는 수준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고품격 소설을 일일이 오른손이나 될 수 있으면 양손으로, 이왕이면 몽블랑 한정판 몇 주년 기념 만년필로, 의식의 진화를 위해서 꼬박꼬박 필사하는 게 필요하지만 세상엔 속성 마스터 방법이란 게 비밀스럽게 존재한다. 안되겠으니 하드보일드든 아마존 베스트셀러 스타일이든 뭐든 흉내 내서 막 쭉쭉 빼야겠다. 일단 주인공이 한명 있어야 한다. 주인공은 남성이고 실업자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남들처럼 아이폰이나 데스크탑으로 트위터, 인스터그램, 페이스북을 본다. 그리고 데스크탑으로 뉴욕 타임스와 Revision3도 본다. 옛날에는 Diggnation을 봤지만. 그가 하루 화장실을 몇 번 가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데 돈이 없어서 그냥 대충 때우는지, 취미나 기호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도 당연히 남성이니까 고급 자동차를 좋아한다. 다만 소리와 디자인이 좀 더 섬세한 타입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는 본인 만의 차도 없고, 노트북도 없고, 애인도 재산도 이성 친구도 게다가 비밀이란 자산까지 단 하나도 없다. 없는 게 뭔 자랑이라고 말이다. 그런 그를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는가? 완전 가난한 얼간이, 탕아, 국가대표 호구다. 재산목록 1호, 2호, 3호... 그런 거 당연히 없다. 나이도 있는데 소설 제목만으로 끝말 잇기도, 자동차 이름 끝말 잇기도 못한다. 수많은 자동차들 옵션은 물론 가격의 제일 끝자리 단위까지 모두 꿰고 있는 남성은 신기한 경탄의 대상이다. 존경스럽다. 또 말빨도 시원찮고 영화배우 같은 외모도, 든든한 재산도 없이 몸만 썽썽하다. 하긴 그게 한밑천이다. 답답허다. 커서 뭐가 되겠다는 것인지. 아 이미 다 컸다. 그래도 원래 이런 삐리한 인물을 내세워야 독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흥미를 느낀다. 원래는 수식어가 필요없는 최고 만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어디 그만, 어디 상남자들만 그러겠나. 최고를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말한다면, 거의 모두 최고를 좋아하지만 귀찮아서 잘 움직이지를 않는다. 세계 대도시의 번화가 빌딩 위에서 돈다발을 뿌린다면 막 우르르 몰려 들겠지만. 최고를 싫어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런다면, "이 자식이 나꾸 나와라 마라 하고 있어." 또 그런 식이다. 하여튼 최고라, 최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대충 얼추 때려 잡아도 10억명이다. 나 10억명 가운데 1명이야, 나 10억명 가운데 1명이야 그런다면 초딩도 아니고 그 이전 단계라는 뜻이다. 대니얼 길버트의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330페이지 지문fingerprints에 대한 신화를 읽어본다면 누군가는 뜨끔하면 괜찮은데 그마저도 힘들면 곤란하다. 하여튼 의뭉스러운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지적 욕구가 풍부하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지적 욕구가 풍부하다. 어떤 지적 취향인가는 좀 의심스럽다. 그런 그는 개인 블로그를 하나 운영하고 있다. 꼭 탐 피터스가 '블로그가 내 인생을 바꿨다'라고 해서도 아니고 게리 바이너척의 "내 영혼을 걸겠다."는 조언 때문도 아닌 그냥 그런 지식을 알기 전부터 기록도 남기고 재미난 이야기와 궁금한 것들 정리해 적어 놓고 심심풀이 땅콩으로 가지고 있는 거다. 다만 굳이 한가지 장점을 꼽아보자면 포스팅의 수준이 가파르게는 아니고 아주 미미하게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블로그에 이상한 댓글이 하나 달렸다. 누가 장난하는 것으로 여기고 아무렇지 않게 넘겨 버렸는데 그게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앗 어디선가 리드미컬한 하품 소리가 들린다. 이쯤에서 요점을 반복하고 단락을 넘겨야겠다. 주인공의 블로그에 이상한 댓글이 하나 달렸다. 누가 장난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냥 넘겼는데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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