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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142

from 소설 2019. 2. 15. 17:47

    1

    그는 마침내 열띤 권태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적당한 침체기가 과연 언제 끝날지를, 점심 내기로 예측하다 포기한지가 언젠데. 누구와? 누구긴 누군가 지니겠지. 걔 말고 누가 있어. 그럼 곧 있으면 허언증이 도질 차례일까? 허언증은 개뿔! 강단 있는 숙녀로부터 구애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아부를 일삼는 아가씨들은 연락할 생각도 없고. 아는 여동생들도 다 떨어져나가고. 지들한테 교양미를 전수해준 스승님 은혜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이야. 어? 그는 결정적으로 뭘 해도 재미없기 일쑤였다. 자존감 화장품도 안 쓰지 아예 화장품 냄새도 맡지 않고. 자존심은 미동도 않고. 그럼 뭐 고결한 허영심에 흠집이라도 난 건가? 밀고 당기는 흥미로운 연애처럼, 영악한 바람잡이의 감미로운 유혹처럼 뭔가 색다른 뭐랄까. 껀수? 새로운 개구멍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너구리굴을 어떻게 찾겠나, 무슨 재주로. 아첨과 교태와 애교! 그럼 혹시, 짝사랑 받기는 이제 영영 종료되어 버린 건 아닐까?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닐 꺼야 그럼 쓰나, 절대 절대 안돼지! 그럼. 뜨거운 애정 공세를 구태여 마다하지 않는 건 남녀 공히 공통점. 남녀의 속마음은 절반쯤 똑같을 테니. 방식만 다를 테니까.
    따라서 그럼 그녀들도 견딜 수 없는 심심함, 아니면 미칠 듯한 외로움에? 공상에 지칠 데로 지칠 상태도 이젠 지긋지긋 신물이 나는 구만. ~라고 NB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굴러온 호박을 반겨야 하는데 풍성했던 여복을 걷어차버린 형국이란 말이지. 거 참 나! 딴청 피우며 딴생각 못하도록, 뜬구름 잡듯 개꿈 꾸기식 흑심에 몰두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그는 일터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말이다.
    대충 일과를 보내던 중 그는 시간이 임박해서야 약속이 생각났다.
    서둘러 그는 약속 장소로 갔다.
    사랑과 우정 사이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숙녀를 만나러.
    그는 그렇게 낮 2시에 에밀리와 만났다.
    만나서 나눈 수다야 별 얘기 없었다.
   「로즈마리한텐 한마디도 말해선 안돼. 알았지? 입도 뻥끗 마. 걔 소문 제조기란 거 알고 있지? 너 말하면 큰일난다. 응?」
   「아니, 왜?」
   「왜긴 왜야. 넌, 하지 말라고 해야 할 거 아니니? 안 그래?」
   「안 그러긴 누가 안 그래!」
   「맞잖아? 내가 널 모르니?」
   「나 이제 철들었어. 정말이라고.」
   「늬가, 철들어? 그걸 누가 믿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말이 되는 소리? 로즈마리가 늬 험담하고 다니더라. 뭐 그런 얘기?」
   「재미없다 재미없어.」
   「재미없기는 늬가 더 재미없어. 알어? 어? 그러니까 늬가, 됐다 됐어. 관둬 관둬.」
    NB는 15시에 에밀리와 헤어졌고, 16시에 로즈마리와 만났다.
    역시나 특별히 중요한 얘기는 없었다.
   「난 어떡하면 좋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그러게. 내가 너한테 그걸 왜 물어봤지?」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몰라? 모르면 말고.」   
   「너랑 말을 섞으면 왠지 모르게 골탕먹는 것만 같다는 느낌. 넌 날 놀려먹는 무슨 특별한 동기라도 있는 거니? 넌 정말 그걸로 뭔가 있다니까. 이야~ (절레절레)」
   「그럼 어쩌란 말이니?」
   「꼭 뭐 어쩌란 얘기는 아니야.」
   「뭐? 뭐가 어쩌고 어째?」
   「이거 왜 이래?」
   「왜 이러긴 뭘 왜 이래?」
   「그게 뭐야.」
   「난들 아니, 누가 아니!」
    그는 그러다 17시에 로즈마리와 헤어졌다.
    NB는 저녁 6시에 대충 혼자 햄버거로 끼니를 때웠다.
    어쩐지 재밌을 거 같아서 햄버거를 절반 잘라서, 양쪽 어깨에 올려놓고 사진도 찍었다.
    낯선 사람한테 부탁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걸 소셜 네트워크에 올렸다. 물론 댓글은 0개. 이런... 그만.
    그런 다음 저녁 7시에 아는 동생들을 만났다.
   「다시 행복해질 수 있도록 키스해주세요. 라고 말할 줄 알았니?」
   「심심한데 우리 뽀뽀나 할까? 라는 말을 내가 아닌 너가 듣기를 바란 건 아니고?」
   「뭐, 뭐가 어째?」
   「왜들 그러니?」
   「그건 그렇고. 얘랑 나랑 오늘 하루만 사귀기로 했어. 축하해줘. 그런데 내 여자친구 못생겼지? 그렇지?」
   「장난하냐? 어? 장난해? 허당계에서 일컫기로, <형 내 여자친구 못생겼죠─누구씨 내 애인 못생겼죠?>라는 말을 해도 되는 처지는 딱 정해져 있어. 그렇다고. 여자들 세계에서 잘난 척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서 주동하며 빨빨거려도 괜찮은 여자와 안 괜찮은 여자가 딱 정해져 있듯이. 언제적 얘기를 듣고서 기분 좋았던 추억 때문에 그거까지 따라하니? 따라할 걸 좀 따라해라. 응? 아 유치해. 그게 뭐니? 쟤 좀 봐봐. 얼굴 울상인 거 안 보여? 그건 놀리는 거보다 심해. 응? 두 번 꼬아서 매기는 거보다 마음 아프단 말야. 알겠니? 어? 늬가 더 나뻐. 딴사람이 아니라 늬가 더 밉다고. 밉상 캐릭터 연구하니? 아니면 그거 정말 메소드 연기 뭐 그런 거니?」
   「기분 풀어. 그냥 한번 해 본 말 가지고 말이야. 왜 그렇게 심각해?」
   「내가 심각했어? 미안 미안. 난 가죽점퍼도 입지 않았고 수트도 입지 않았어. 난 캐쥬얼 입었다고. 어깨 위에 벽돌이나 햄버거도 올려놓지 않았어.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말이야, 뒷목이 심하게 뻐근한 걸 보니 내 위에 누가 올라가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 어제 생맥주 통을 들춰메고서 옮기다가 삐걱했나, 가전제품을 옮기다가 결렸나? 혹시 내 위에 누가 있니? 보이니, 안 보이니? 잘 봐봐!」
   「너네 공포영화 찍니? 기분 세하게 왜들 그래?」
   「진짜. 소름. 와, 대박! 끝장. 완전 신기해. 이럴~ 줄 알았니? 그만 해. 아 오싹해.」
    그는 깨달았다. 역시나 자긴 1 대 1 스타일이라고. 이성과는 개인적으로, 이성이 아니면 아무래도 좋고.
    그러다 마침내 심야가 되어서야 솔깃한 건수가 잡혔을까?





    2

    심야니 뭐니 전날은 시시했다. 아무일도 없었다. 그럼 그렇지. 그는 평소대로 또 공상을 시작했다.
    돌팔이 허당이 노상 떠들어대는 어설픈 사랑의 3박자와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 그게 그러니까 그냥 허당들 치를 떨게 만드는 황당한 환상론이라고? 정말로 호박은 은근 허당만 보면 마음이 저절로 기운다─끌린다─심신분리─설렌다고? 떤다, 가 아니라 떨린다고? 그분들의 씁쓸한 갈망에 따른 대망의 성과를 보아하니 어쩌면 꼭지가 돌만도 하다. 가만 보니 뚜껑이 열리면 닫아줘야겠네. 다독이며 달래야지 별수 있나. 아무튼 NB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만, 그는 신동이자 귀재보다는 올드보이쪽으로 성큼 다가서는 형세이니만큼. YB라고 우겨도 상관 없지만. 말하자면 그가 주장하는 사랑학은 썩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닌가? 어쨌든 그건 분명하다. 두 가지를 원한다는 것. 두 가지를 심하게 좋아한다는 것. 첫째 짝사랑 받기, 둘째 유혹 받기. 꽃 들고 기다리며 사랑을 하기가 아닌 뭐-뭐, 뭘 '받기'라니. 저런 저런! 때문에 그와 같은 사심으로 미루어 추정컨대 숙녀가 여성잡지1에서 2로 변화하는 것처럼 바람둥이의 연정도 결국 그걸로 귀결되는구만. 밖에서는 으쌰으쌰 <여-바텐더 없습니다. 바텐더 남자입니다> 다시 으쌰으쌰. 그러다 집에만 오면 그냥 시무룩시무룩 겔겔겔 쿨쿨.
   「오빠 자?」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언제나 첫사랑이자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순정인 줄도 모른 체 어느덧 여성잡지1은 통달 및 숙달해버렸고. 스탕달의 연애론─한정판 향수─색연필과 일기장─아르뛰르 그뤼미오의 앵콜 소품집 CD─오페라 아리아 CD─향긋한 비누─세련된 귀걸이─초정밀 인형! 그녀들한테 선물하는 순서도 딱 정해져 있고. 그래서 그녀들은 남자친구-남편 흉보기에 오늘도 여념이 없다. 아니 아니, 없을 것이다. 아니 아니,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행복한 인생이자 아름다운 사랑이기를 기원하니까. 아무튼,
    참 나! 뭐야, 그게 대체 뭐냐고. 그러니까 어른들 말씀하기로 '그놈이 그놈'이라고 하지. 그래서 화병과 꽃이 안 어울리지. 허접한 허당한테 넘어가거나, 그도 아니면 무서운 인상이 장기인 마초의 구애를 받아들인다고. 막대하다가 어쩌다 한번 잘해주면 그게 또 효과가 꽤 괜찮거든~! 진짜로 효험이 좋을까? 믿거나 말거나! 그녀들도 그녀들이다. 그걸로 보자면 사람들은 참 비슷하다. 정말 많이 비슷비슷. 화장도 비슷하고 원하는 이상도 비슷하고 이루고 싶은 욕망도 비슷하고. 바디랭귀지도 똑같다. 여자의 낭만적 소원이라고 하면 미남들의 열렬한 구애가 모두 나에게 집중하는 것일 테고, 남자의 야망이라면야 쉬쉬쉬-쉿. 아마도 남녀 공히 바라는 건 똑같네 똑같아. 남녀 모두 오빠&도톰한 목소리에 약함. 미인계와 미남의 출연에는 더 약함. 아니, 뭐가 먼저냐랄 것도 없이 뻔트면 대만족. 아부를 잘하든 못하든 딸랑딸랑 감언을 절대 기피하진 않음. 듣기로는 이 세상에 황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고. 그럼 혹시 그도?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먹고는 살아야 하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는 진리.
    따라서 그는 허한 심정 찡한 약속 없음에 과소비라는 방점을 찍고야 말았다. 만년필, 모자, 선그라스, 넥타이, 향수. 그러다 품위 유지비가 떨어지기 직전에 싫증이 났다. 또 금새 재미없어진 거지. 뭘 해도 이렇다니까. 언제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새침한 허영심을 신나게 만족시키더니 언제 그냈냐는 듯이. 낭만적 감수성이 지적 호기심을 이긴 것일까? 아니면 부드럽고 섬세한 교양미가 놀기 좋아하는 심성에게 패한 것일까. 그야 어쨌든 은근한 허당의 입장에서야 볼썽사나운 연패만 아니라면 그뿐. 그런데 설마...! 사랑도 혹시 이런······식이면 곤란한데. 나쁜 남자들이란. 그야 그분들 사정이고. 바람둥이 주의보와 말괄량이 길들이기야 당사자들 소관이고.
    그럼 그 다음은? 낭만파의 취미인 허영기마저 고갈되어버렸기 때문일까? 그는 그 다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말해 봐 말해 봐, 어서 내게 말해 줘! 그 다음이 없었다. 차라리 할 말이 떨어진 연애가 낫고, 오히려 할 일이 없는 방학이 좋겠네. 악당이 없어서 벙찐 주인공 영웅이 더 재밌겠다고. 걔들도 쉬고 놀고 그래야지 무작정 날이면 날마다 달리 수야 없는 일이니까. 좌우지간, 시간이 정지된 거다. 애정이 식어버린 연애처럼 밍밍함을 방불케 했다. 할 일은 하기 싫고 엉덩이는 근질근질하고. 팬클럽 회원들을 열광케 하는 신기한 착상과 기발한 영감은 통 소식이 없고. 그걸로도 모자라 잔재주는 그대로인데 잔주름은 하루가 다르다는 거. 천상 그게 반대로 되야 하거늘. 세월은 어찌 그대만 비켜가는지 난 도무지 그 이유를 모르겠소, ~라고 찬미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공상병과 허언증이란 병세는 좀처럼 차도가 보이질 않네? 그러네? 어머머, 진짜로?
    그러므로 그는 도망가기로 했다. 여기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
    목적지도 필요없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출퇴근길에 어느 벽보를 보게 됐다.
    <일명 패자부활전>
    설명을 찬찬히 읽어보니 이랬다.
    <루저 대회를 개최하오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어쩌고저쩌고>.
    그는 생각했다. 오히려 저런 데 정말로 고수들이 많을 수 있다고. 푼수랑 바보는 바쁠 테니까.
    한번, 가 봐? 그럼 저분들 깜냥이나 관전해 볼까? 그럴까? 그거 썩 나쁘지 않은데? 괜찮을 듯 한데?
    테리우스의 화려한 외출이 아니어도 괜찮아. 저거면 돼. 저거면 된다고. 탄복하지 않아도 좋아.
    OK! 좋았어. 이거야. 좋다고. 뭘 고민해. 저거나 보러 갔다 오자. ~라면서 그는 곧장 그곳으로 갔다.





    3

    장면 전환.
    날짜는 다음 날.
    장소는 루저대회가 열린다는 카페.
    음악은 장-바티스트 륄리의 코메디 발레 <서민 귀족> 모음곡 중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첫 번째 에어 : 사라방드.
    NB는 그곳에서 액자로 걸려있는 '루저대회 벽보'를 보고 있다.
    결국 그가 제대로 오긴 왔는데, 날짜를 잘못 봤던 것이다. 몇 월 며칠 몇 시 어디까지. 다 맞음. 다만, 그런데 1년 전.
    그토록 고대해 마지않던 신비가 다 뭐고, 어찌 된 영문인지 통 추정할 수 없는 환상을 어디서 찾겠나.
   「설마 길거리에 붙어있는 저런 벽보 보고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니죠? 그렇죠? 가만 보면 꼭 그런 손님들이 간혹 있다니까요. 참 나! 어떻게 저런 걸 보고 여길 다 찾아올 생각을 하시는지. 물론 저도 그런 때가 있긴 했으니까 이해는 하죠. 왜 그럴 때 있잖아요. 뭐 어쨌든 제가 이 카페를 인수해서 명색이 카페 사장입니다만. 거 어째 이상한 게 말이죠, 전 주인이 여길 헐값이 넘겼어요. 네? 거저요. 그럼 아무런 조건이 없었냐, 하면 아니죠. 그건 바로 저기 저 벽에 걸려있는 벽보. 무슨 저게 보물도 아니고 작품도 아닌데. 저렇게 고급스런 액자에 꼭 넣어서 보관 및 전시할 필요가 있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아, 그러니까 전 사장이 바로 저걸 보고 찾아오는 분들이 있을 테니, 저보고 대회 참가 신청서를 주면 받고 아니면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거 있죠? (검지를 펴서 귀옆에 대고, 빙글빙글) (몸짓) (손짓) (발짓). 저 안쪽 금고 안에 그 신청서들이 수북이 쌓여있어요. 무슨 추억의 콘서트장에 그 뭔가가 수북이 쌓였다나 뭐라나 그거도 아니고 말이죠. 허허허. 물론 전 주인이 받은 것만요. 그런데 쟤 얘기 재미없죠? 아무튼 이거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손님께서 하도 저 벽보를 유심히 살펴보시길래 그냥 미술관에서 그림 설명하시는 분들처럼 안내 말씀 읊은 것 뿐이에요. 네. 그럼요. 허허.」
    하긴 루저대회를 믿은 내가 바보지, 라고 그는 생각했다. 차마 눈뜨고 봐주기 힘든 꼴불견 드라마의 주인공이 혹시 나? 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는 아쉬움을 어떻게 달래야 하나 적잖이 고민이 깊어졌다. 그렇다고 정말로 저 벽보를 거리에서 보고 왔다며 주인장한테 본인 입장을 밝힐 수도 없고. 자긴 이미 바보가 됐다는 걸 알아야만 하고.
    바로 그때!
    아아, 정말 오랫만이다.
    사무실에 설치된 레이저 시스템이 사이렌을 울린 게 말이다. 즉각 핸드폰으로 알림이 왔다.
    녀석이 곰탱이처럼 겨울잠을 잔 거도 아니고, 시퍼런 눈을 부릅뜬 채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니.
    일단 뭔 허당대회인지 뭔지도 무산됐으니, 그는 속히 사무실로 떠났다.
    그는 자기 사무실까지 가는 동안 차에서 차분한 음악을 들었다. 바로,
    헨델의 오페라 <아리오단테> HWV33 중에서 아리아 ‘사랑의 날개 활짝 펼치고’.
    그렇게 사무실 앞에 도착했고. 일단 바로 들어가기는 그러니까 핸드폰 앱을 켜서 지니를 소환했다.
    지니 나와라 지니 나와라, 오바.
    지니는 깨어났다.
   「늬가 예카테리나 2세야 누구야?」
   「예카테리나 2세?」
   「그래. 늬가 예카테리나 2세냐고?」
   「예카테리나 2세가 누군데?」
   「예카테리나 2세도 몰라?」
   「어. 몰라. 모른다구. 그걸 내가 어떻게 알어! 누군데, 예카테리나 2세가?」
   「모르면 넘어가.」
   「뭐? 얘가 진짜!」
   「그건 그렇고. 용건이 뭐야?」
   「너 방금. 뭐야? 라고 했니?」
   「흐흠. 허허. 뭐예요, 오빠!」
   「뭐긴. 레이저 시스템이 가동됐으니까 딴일 다 제쳐두고 온 거지. 사무실에 나타난 게 누군데 그래?」
   「사무실에? 아~ 사무실에 척키 인형이 혼자서 날아다니니까 레이저 시스템이 사냥개처럼 바빠진 거겠지.」
   「뭐라고?」
    NB는 사무실로 뛰어갔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보니 정말로 척키 인형이 날아다니니는 않고 펄쩍펄쩍 뛸려다가 말고 막 그랬다.
    그 척키 인형은 저번에 친구 지아니와 인형 교환하기로 말미암아 데려온 녀석이었다.
    그런데 마침 지아니한테 전화가 걸려오네? 받았다.
    지아니왈,
   「기왕 털어놓는 김에 속에 담긴 못했던 얘기들. 속 시원히 말해봐. 내가 정말 못견딜만큼 좋은 거야?」
   「뭔 소리야? 그리고. 설마 그렇다고 해도 말이야, 어? 그런 얘길 전화로 하면 어떡하니?」
   「이 오빠 좀 봐 봐. 정말인가 보네? 응?」
   「그런데 늬가 준 척키 인형. 그거 혼자 뛴다는 거 왜 얘기 안했니?」
   「내가 말 안했어?」
   「그럼 안했지.」
   「오빠가 안 물어봤자나?」
   「넌 참 오빠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특이한 재주를 지녔구나.」
   「그건 그렇고. 오빠 뭐해? 바쁜 일 없음 넘어오시지. 그리고 오빠 지금 검정색 옷 입었지?」
   「응.」
   「머리카락 하나도 빗지 않았지?」
   「응.」
   「사무실에 007가방이 보이네?」
   「뭐야. 정말로, 보여?」
   「오빠 뒤 돌아봐.」
    그는 뒤 돌아섰다.
   「와 오빠 뒤통수에 뭐라고 써 있네.」
   「내... 뭐라고 써 있는데.」
   「난 바보! 푸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
   「아 쫌.」
   「그런데 있잖아, 키보드는 아직도 기계식 쓰네? 노트북은 왜 아직 안 바꿨어? 그림도 저번에 바꾼다면서 아직 그대로고. 뭐야? 재미없게! 화분은 왜 그렇게 시들시들한데? 물 주는 거 또 까먹었니? 일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허구헌 날 허당이 당황할 만큼 격렬한 환희, 막 그런 거만 생각하는 건 아니고? 그리고 수염 좀 깎고. 얼굴이 잔디밭이야 뭐야? 그리고 또. 오빠 어제 밀가루 음식 먹었어, 아님 술 마셨어? 얼굴이 왜 그렇게 부었어? 눈은 왜 그렇게 튀어나왔고. 오빠가 무슨 만화 주인공이야 뭐야? 이런 젠장. 허허. 오빠로 말할 것 같으면 제기랄스. 뭐야, 뭐냐고. 젠장, 입도 튀어나왔잖아? 목젓도 튀어나왔고. 어머머머 배가, 점점 나오네? 팔은 짧아지고. 오빤 안 튀어나온 게 뭐야? 설마 오늘 아침에도 피노키오?」
   「너 뭐야? 늬가 뭔데? 어? 늬까짓 게 뭔데? 장난치지 말고. 아 글쎄 농담하지 말고. 늬가 그걸 다 어떻게 알아? 아 진짜. 너 지금 나 보고 있니?」
   「그럼 보고 있으니까 알지. 거기 척키 인형에 카메라 장착되어 있어.」
   「진짜로?」
   「아니. 뻥이야!」
   「뭐라고?」
    그렇게 해서 NB는 떠났다. 바로, 지아니 집으로. 그녀의 집에서 열리는 조촐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





    4

    NB가 쓰고자 하는 작품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이랬다. <등장 인물로 말할 것 같으면 사색가의 다혈질 본능 + 기분파 로맨티스트의 근성 + 낭만주의자의 숨길 수 없는 열망까지. 그리고 악마에게 필적할 만한 주인공이 '질투의 화신이 총애하는 환상머신'을 만드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겠나. 신나는 모험과 찐한 사랑 그리고 고급 사교계로부터의 러브콜까지 그 모두가 한꺼번에 폭주해도 시원찮을 판에. 그게 어디 쉽겠나. 꿈결 같은 이상과 용한 한패를 이루는 다채로운 호사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악마가 귀뜸해주든 천사의 풍문이 들려오든 어쩌든. 그건 나중으로 미루고. 그렇게 NB는 지아니가 초대한 숙녀들 파티에 참석하러 갔다.
    중간 건너뛰고.
    장면 전환.
    파티장 도착.
    딱히 거창함을 기대하진 않았으나 예상보다 조촐함.
    그래도 괜찮음.
    피타장의 음악은 왜 하필 고전음악인지. 그건 이랬다.
    헨델의 오페라 <쥴리오 체사레> 2막 2장 중에서 시저와 니레노의 레치타티보. ‘쉿, 조용히 해 보거라, 무슨 일입니까?’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리아 ‘아름다운 눈동자’.
    아하! 아마도 이따 혹시 클럽행?
    들뜬 예감은 몰래 감추고.
    지아니 집에 모인 인원은 앙증맞았다. 그래도 파티는 파티.
    그런데 얘네들이 여기 있네? 엇그제 낮에 만나서 헤어지고. 느즈막한 오후에 만나서 헤어지고.
    그럼 지아니가 초대하지 않았다면 아가씨들 만찬회에 별책부록으로 끼지 못했을 테니 지아니에게 감사해야 할 일.
    어쨌든 그녀들과 NB는 어쩐지 말이 잘 섞이지 않는 듯 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었다.
    지아니와의 대화는 이랬다.
   「밤 하늘에 마젤란 은하가 보이는 걸 보니, 내일은 행운이 우릴 찾아올려나 보군.」
   「어머 얘. 너 별자리 잘 아니?」
   「별자리? 관심없어.」
   「그럼 마젤란 은하는 뭔 얘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어? 마젤란은 무슨!」
    에밀리가 콜라병을 못 따고 있길래.
   「도와줄까?」
   「아니. 사랑해줘.」
   「뭐라고?」
   「못들은 거야, 아님 못들은 척 하는 거야? 아마도 믿기지 않는 거겠지. 맞아. 오빠가 잘못 들었어.」
   「나 잘 들어. 보고 듣고 먹고, 아무 지장 없다고. 내가 잘못 듣지 않았는데. 분명 그런데.」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그건 그렇고. 오빠가 크리스티나 좋아한다며?」
   「누가 그래?」
   「누구긴. 크리스티나 그년이 소문내고 다니겠지. 보나마나 뻔해.」
   「뭐, 진짜야?」
   「진짜겠니. 뻥이야!」
   「너, 진짜!」
    그러다 그녀들은 NB만 쏙 빼놓은 채 자기들끼리 로즈마리가 쓴 일기를 들여다보면서 수다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녀들이 읽고 있는 로즈마리의 일기에 씌여진 내용은 무엇일까? 대충 들리는 내용을 읊어보자면 이런 내용 같았다.
    <오오, 이 남자 깬다? 유혹해서 넘어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 간접적으로 얼쩡얼쩡 알짱알짱 어떻게 좀 어떻게 유혹하고 노력해서 그 남자를 내 남자로 만들고. 중간에 싫증나면 인터넷 검색. 검색어는? 남자가 여자한테 싫증나게 하는 법! 남자랑 여자는 똑같다. 마음은 완전히 떴어도 아직은 애인. 왜? 없으면 허전하고 아쉬우니까. 부부도 이거 저거 다 따져서 이별하지 않는 거지, 각자 속사정들 들어보면 사랑은 결코 쉬운 게 아님. 사랑을 시작할 때는 여자가 먼저 꼬리를 흔들었고, 중간에 다투면 내가 너 때문에 이처럼 초라한 아낙네가 됐는데 어쩌고저쩌고. 여자는 만인이 자길 바라보길 원하고, 남자는 눈이 돌아가기 바쁘고. 아니다 아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렇더라도 나는 절대 아니다? 아니면 말고! 그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고.>
   「얘 있지. 나 재밌는 검색어 봤어.」
   「뭔데?」
   「뭔데 뭔데?」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몇 번이나 뭐라더라? 몇 명의 촌년들이 신어봤을까-던가.」
   「됐고. 분위기가 너무 침울한 거 같지 않니?」
   「너도 그래?」
   「좀 그렇지?」
   「어때! 우리, 갈까?」
   「클럽?」
   「가자.」
   「가야지. 클럽-해야지.」
   「오빤 같이 가기 싫으면 가지 말고.」
   「그래. 떠들썩한 데 뭐하러. 시끄럽잖아. 가기 싫으면 가지 마.」
   「그래. 우릴 보낸 다음 보나마나 이렇게 투덜거리겠지. 그러든가 말든가! 그럴 꺼야. 그렇고 말고.」
   「누가 싫데? 어?」
    그렇게 네 친구들은 클럽으로 갔다.





    5

    장면 전환.
    클럽.
    분위기 좋고 젊음은 즐겁고.
    그런데 NB는 왠지 모르게 잘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기분 때문인가? 어딘가 모르게 시끄럽고 아직 취하지도 않았고.
    2급 염탐꾼의 면밀한 탐지력이자 1급 관찰자의 탁월한 추리력으로 보건대 어쩐지 오늘은 끝이 좋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건 그렇고.
    가끔 보면 남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걸 꺼려하거나, 춤추기를 챙피하고 왠지 낯부끄러워하시는 분도 간혹 있긴 있다. 기질적으로 젊은이 시절에만, 아님 노신사가 되어서까지 일관된 경우도 있고. 그야 어떻든 YB가 OB로 변해가며 내 인생을 경영하다보면 알게 된다. 무엇을 알게 되냐구요? 바로, 일단 '입장을 하느냐 못하느냐' 그 때문에 누군가를 부럽지만 부러워하지 않게 되는 때가 온다는 것을. 20대들 주무대에 가서 남사스럽게 삼춘이, 고품격 30대 부자가 평균이 사교계에 당숙께서 나도 좀 끼워주세요! 그런 일은 좀처럼 드물겠지만 집에서 TV 드라마로 깽판 장면을 보다 소파에서 히죽거리며 썩은 미소를 지었는데. 그런데 개 100마리 1000마리 그처럼 개떼가 안무 없이 군무를 펼치는 "삐───" 5분전에 우리 어른들이 명함을 내밀 수는 없는 일. 그래서는 안되니까. 아무튼 춤? 그까이꺼 그냥 대충 옆사람이랑 비슷하게 흉내내면 그만. 신나는 음악에 몸을 맡기면 그뿐. 단, 음악이 중간에 멈추는 식의 나이트클럽과 클럽은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것만 알면 된다. OB께서 왕년에 좀 노셨다면, YB는 대충만 세어봐도 클럽에 100번 200번 가 봤을 테니까. 그런데 숙녀에게 클럽 몇 번 가봤냐고, 그분들은 대체 왜 물어봤을까. 도대체 왜 물어봤냐고. 굳이 여쭤보지 않아도 좋을 궁금함을 뭐하러. 설마 노파심? 아님 그 확연한 차이가 재밌다고 생각해서? 번호표 뽑는 기계에서 번호표를 배부받은 사람처럼, 로또 복권을 소소한 행복으로 사는 사람의 심정. 호박 터미널은 이해해야 한다. 이해해야 한다. 스무살 젊음을 응애응애 애로 보는 시선도 틀린 건 아니지만, 차라리 응애응애 애였으면! 됐고. 재미없고. 시시콜콜한 수다는 이쯤 줄이고.
    그런데 잠시후.
    아니나 다를까.
    클럽 안에서 NB와 그녀들은 연락이 닫질 않았다.
    전화해도 받지 않고, 소셜 네트워크도 꺼져 있고.
    어쩌면 괜찮은 남자들과 대담중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친한 누군가를 만났을지도 모르고.
    그럼 NB만 팽당한 건가? 아님 알아서 빠져주게 된 거가. 그도 아님 원래 처음부터 껴들면 안되는 파티였는지도 모른다.
    빈말에 또 넘어온 거지. 왜 아니겠나. 악마가 부러워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기지 못할 만한 새로움. 그건 역시나 빈말을 참말로 듣는 능력이다.
    역시 NB다. 누가 NB 아니랄까 봐. 클럽 이거 시끄럽기만 하지 하나도 재미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말할 사람이 있어도 일단 말이 들리지도 않고.
    밀실은 어두컴컴해서 어딘지도 모르겠고. 오늘 내가 살께, 라는 말 없이 조용히 계산하기. 그래서 여자들이 제일 싫어한다는 생색내기도 안할 생각이었는데. 일단 기회를 안 주네 그래.
    그런데 남자들은 오히려 '생색내기' 약간씩 나름 좋아하는데. 여자들은 왜 그러지? 그러면서 또 자기들끼리 티격태격.
   「어머 얘~ 우리 남편 귀찮아 죽겠어. 그만 좀 괴롭혔으면 싶은데, 날 가만 놔두질 않아. 어쩌면 좋니 어쩌면 좋아. 짐승. 딱 짐승. 완전 짐승. 지치지도 않나 봐. 지겹지도 않나 봐, 얘. 아 맞다. 얘 있지, 난 늬가 너무 부럽다. 진심. 응? 진짜로!」
    뭐라고?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그녀들은 몸과 마음이 분리된다. 좋아서일까, 싫어서일까. 어쨌든 그녀들 세계는 그녀들끼리 알아서 하는 거고.
    그렇게 NB는 혼자서 클럽 밖으로 나왔다.
    이건 말이야 특별히 울적하지도 않고 착찹하지도 않고.
    차라리 편의점에서 값싼 위스키라도 사서 병나발이나 불고 싶은 심정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런 기분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완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였다.
    그 다음 그는 집으로 갈려고 했다. 그런데 지아니 집에 노트북이 담긴 가방을 놓고 온 게 생각났다.
    지아니 집 안이 아니라, 바깥에 놔두었기 때문에 특별히 지아니와 연락이 닫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지아니 집으로 갔다.
    그는 저능아였고 오늘은 꽝이었다. 노잼. 중뿔난 존재. 소문에 듣자니 소문 자체가 없고. 물고 늘어질 건수도 없고.
    중간 건너뛰고. 그는 지아니 집 정원에 놓여진 자기 가방을 챙겨서 집으로 갔다.
    중간 건너뛰고. (그런데 그 가방이 정말 NB의 가방이었을까, 하면 그건 나중에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행복감은 호황에 절망감은 불황인 여건일까? 그런지 아닌지는 몰라도 하나 분명한 건 그거다. <그의 인생은 불행했다>랄지 <엉뚱한 누구 여기에 잠들다>라는 묘비명은 아직이라는 점.
    거 참 바닥을 기는 발단, 더럽게 재미없구만 그래. 그러니 몽환적인 전개에 이은 찬란한 절정은 꿈도 못 꾸지. 잘한다 잘해.





    6

    웬만한 공상가의 착상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엉뚱한 전개, 아직이었다. 한사코 환상적인 발단을 거절할 의도는 없거늘. 놀지 말고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들을 만큼 듣고서 어른이 됐는데. 그런데 일하고 또 일하라고 누가 겁박하지도 않는데. 설마 그는 일을 좋아하는 걸까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하는 것일까. 하긴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그런 철학적인 질문이 재미없기는 하니까 쓸데없는 의문점이다. 부질없는 진지함이다. 강박관념에 편집증에 일중독과 허언증 또 조증.
    그러다 그는 어느 여행 광고를 보게 됐다. <공부하기 싫고 일하느라 지친 당신, 무료한 일상이 지겨운 당신. 자, 떠나세요 떠나. 제발 좀 떠나라고! 어?>. 아하! 문득, 그는 팬클럽 회장 롭이 권유한 작업실에 가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된 게 롭은 그런 별장을 참 많이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매번 새로운 곳으로만 말이다. 만약 가서 재밌으면 좋고 재미없어도 기분전환하고. 일하기와 놀기를 동시에 할 수는 없지만, 거의 겹쳐질 수도 있다. 희박하게, 공부하는 게 즐거울 때도 있으니까. 그러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상황에 빠지더라도. 그러다 어중이떠중이로 전락할지라도. 그러다 이런 느낌 처음이야 라는 사랑의 기쁨이, 기발한 쾌감을 거쳐 망신스런 이별로 끝날지라도. 그는 타석에 들어서기로 한 것이다. 쟤는 뭔데 나서서 시시콜콜한 자기 대소사를 조명발 앞에서 발표하는 거야, 요즘 말로 관심종자 뭐 그런 거야? ~라는 의아함. 어차피 감수해야 마땅하니까. 일정한 비율이란 언제 어디서나 횡행하는 게 정상이니까. 안 그럼 속으로 더 할 테니까. 그분들 사정 듣고 형편 이해하면 건전한 취미 같은 게 없어서일 수도 있고. 원래 삐딱할 수도 있고. 아무튼 떠나서 글쓰기의 괴로움 때문에 난항을 겪건 상태가 맛이 가건 가야만 했다. 빈정거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험담가들의 야유를 신경 쓰고, 비꼬기로 어데서나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조롱꾼들의 빈축을 사지나 않을까 걱정만 하다가는 기회는 도망가기 마련. 게임은 끝나고 세일도 끝나고. 짝사랑 받을 기회마저 떠나면 쓰나.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오라는 관중의 야유쯤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줄 알아야 하는 법. 하오나 그건 무대 위 사람들 얘기. 현실은 덤덤하고 특별한 약속은 없고. 폭로전도 없고 스캔들도 없고. 또 없다 증후군? 허영기와 바람기와 푼수기를 떠안고 있어봐야 답은 없다. 웃음기는 바닥났다. 그래서 그는 당장 떠났다.





    7

    별장 도착. 별장의 이름은 없었다. 단지 주소뿐.
    일단 간단히 청소를 마쳤다. 동네도 대충 둘러봤고.
    아마도 내 인생은 장밋빛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지 않을 거라는 예감, 그걸 날려버리기 위해 음악도 틀었다.
    쥬세페 삼마르티니의 오르간 협주곡 F장조 Op. 9 no. 2
    그런데 웬 낯선 방문객이 집으로 찾아왔다.
   「저기 있잖아요. 옆집이에요.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여기 사람이 살지 않던데.」
   「아 네. 집주인 양해를 구했기 때문에 한 1주일 묵었다 가기로 했습니다. 허허. 거 참 인상이 좋으십니다. 왕년에 여자 깨나... 아니 그게 아니라.」
   「허허. 선생 어째 보아하니 예술가처럼 보이시는데요? 제 눈썰미가 꽤나 적확한데, 아마도 틀리지 않은 듯 하온데. 어때요! 바쁘시지 않으면 함께 간단한 티타임이라도 하시지요.」
    그렇게 해서 NB는 옆집으로 건너갔고 티타임을 함께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티타임이 아니라 술파티라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뭔 얘기를 나눴고, 어쩌고저쩌고는 건너뛰고.
    다시 말하자면,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NB가 정신을 차려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가 있었고, 보안관도 있었다. 특수부대 출신 동네 순찰대도 있었다.
   「형씨. 정신 차렸수?」
    그는 눈망울만 멀뚱멀뚱.
   「중간에 오해가 좀 있었소. 그건 기억나죠? 선생 가방에 귀한 술이 있으니 그거 가져다 같이 마시자고 말씀하신 거. 중요한 얘기 중이니, 얘가 대신 옆집에 가서 가방을 뒤졌고. 그런데 그 가방이 심상치 않았고. 여자들 물건만 잔뜩 나오니, 이거 뭔가 수상하다. 그래서 얘가 다시 이쪽으로 건너왔을 때. 그때 형씨는 술에 취해 쓰러지셨소. 생긴 것 마냥 술이 되게 약하시구만. 뭐 어쨌든 가방의 본 주인과 연락을 해서 형씨 신원도 확인하고 어쩌고. 오해는 풀렸소. 이거 괜히 소란스러웠소만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네? 내일 다 같이 요 앞 강으로 낚시하러 가시는 게 어떻겠소?」
    일단 첫째 날은 그처럼 얼렁뚱땅 정신없이 지나갔다.





    8

    다음 날이 되었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 잠자코 얌전히 때를 기다릴까? 아니다. 어제 옆집 상남자들과 약속을 했다. 함께 낚시하며 놀기로.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몇 시간 남았다. 관찰자로써 그저 보고 들은 세상 얘기를 시작했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신나는 인생이 발동 걸릴 것만 같은 들뜸이 시작되었다. 기본 관상은 개상이자 말상인데, 표정은 딱 개가 기분 좋을 때이자 말이 흥분할 시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약속 시간이 됐고 그는 옆집으로 갔다.
    그런데 뭐야! 문은 잠겼고 문에 이런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형씨. 미안하오. 도시에 다급한 일이 있어서 우린 볼일을 보러 가야겠소. 약속을 못지켜서 미안하니 나중 거하게 한잔 사리다. 뭐 먹고 싶으신 거나 하고 싶은 거 있음 구상해 놓으시오. 그럼 이만.」
    뭐야 이거? 참나 그럼 그렇지.
    <자랑스러운 건 빈약하고. 솔직히 부럽지만 부럽다고 해서는 안되고. 선망은 금지요 품위 유지비는 턱없이 부족. 신부들러리는 솔직히 짜증나고. 그러나 나는 백댄서조차 못 됐고. 내가 보기에 난 이 정도면 만족하고, 샤워한 다음 보면 진짜로 나는 잘생겼어. 그런데 누가 나보고 못생겼다고 하냐고. 어? 하지만 내가 봤을 땐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보아하니 난 잔재주도 비리비리. 또 친구 결혼식에 가서 울컥을 하나, TV를 보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나. 갱년기가 되면 어른들이 뭐 어쩐다는데 이건 뭐 몽정기만 내내 지속되니, 거 참 나. 발정난 암코양이는 떠나기라도 한다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까 도망갈 수도 없고. 투덜거리는 습관을 복구하겠나, 이제와서 엉망진창 잔머머에 기분 나빠 독학에 열중하겠나. 어제나 오늘이나 지는 비교는 운명이고. 남자는 폼인데 호박은 다 날 피해다니고. 나만큼 말이 잘 통하는 남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떵~떵 큰소리 치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는 없고. 왜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하냐, 라는 울분을 친구에게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거든. 뭘 좀 아는 남자 라는 칭찬을 미녀에게 듣지는 못해도. 남자는 나이가 들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온다는데, 할 말도 없고 할 일은 재미없고. 사랑은 유치하고 우정은 추접스러워야 재밌는데, 그게 반대로 된 건가? 연인들은 행복한 연놈들로 보이고, 친교라고 해 봐야 <이상한 놈, 꽉 막힌 놈, 재미없는 놈> 즉 루저 1-2-3이니 이거 원. 그럼 뭐야? 정말로, 사랑은 유치하고 우정은 추접스러워야 정상인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사랑은 추접스럽고 우정은 유치하고? 맞네 맞어. 정말로 맞네. 알고 보니 진짜로 그렇구만. 따라서 티격태격 으쌰으쌰 해 봐야 바텐더 표정도 별로고. 말하자면 웨이트레스도 마음을 여는 당사자는 다 따로 있는 거구먼. 난 아닌데 쟤는 만나자마자 <오빠>되고 보자마자 손 잡네? 자연스러운 스킨쉽, 아아 나도 하고 싶다. 그런데, 마음을 열어? 마음을 뺐든 말든 쾌락마야 나중에 실컷 원없이 탄다 치고. 탐스러운 열매를 따먹고 화사한 꽃다발을 그녀에게 선사하는 건 다음에 하고. 일단은. 우리도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붙잡지 않는다" 정도는 안다고. 알지 왜 몰라? 나는 개가 아니고. 우리는 미치지 않았거든. 그런데 통 오지를 않는데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냐고. 응? 그러니까 안 그래도 옹졸한 마음 속좁은 심성 꽉 막힌 의중, 때로는 콜라 없이 햄버거 먹기나 도전해야지 뭐 별수 있나. 보자, 형편이 이렇게나 불쌍하다니. 인생은 쥐구멍이고 사랑은 정녕 없는 건가?>
    ~라는 친구의 속마음을 어쩌다 NB는 이따금 엿보고야 말았다. 웬만한 최면술사보다 낫고 어지간한 점쟁이보다 사람 마음 간파하기에 능한 우리 어른들. 그도 그랬다. 애가 아니었다. 어른이었다. 철없이 아직도 달리기를 좋아하는. 그러나 주력은 예전 같지 않고. 주량은 형편없고. 아빠 술 좀 작작 마셔 라는 꼬마 천사의 귀여운 대사는 드라마로도 못 듣고. 드라마를 일절 안 보니까. 차림새는 한심하고. 몸가짐 마냥 마음가짐도 흑심으로 가득하고. 그런데 마음은 동심처럼 춤을 추며 자꾸 혼자 외출하는 것만 같고. 심신분리니 공중부양이니 뭐니. 뭘 해도 자꾸 목적을 잊고서 어쩌다 딴길로 가고 싶고. 그러나 심심함과 재미없음을 양쪽에 꿰차지 않기 위해서 방심은 금물이고. 자, 하는 수 없이 NB도 절반쯤 그랬으니. 실제로 생맥주도 아니고 콜라 원샷 게임을 하다 피를 토한 적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본인은 아니라지만 친구들은 확실하게 그랬으니. 그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자, 남자는 집에 있으면 안된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 말고는 말이다.
    무작정 즉흥적으로 저지르든, 생각 끝낸 다음 움직이든. 성과라는 달콤한 열매를 따먹을 것인가. 아니면 따먹을 뻔 말 뻔 겨우 겨우 어떻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거의 거의 따먹을 뻔하다 실패하느냐. 아름다운 성공이냐 멋진 실패냐. 결국 그건 실행 다음 얘기. 그래서 그는 일단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채 바깥으로 나갔다.





    9

    NB는 애마에 올라타서 일단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분히, 요한 아돌프 하세의 C단조 미제레레를 틀고서.
    마치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는 심심함을 반긴다는 듯이.
    편집광적인 극찬 일색이 평균 중의 평균. 허나 그걸 훌쩍 뛰어넘는 환호 받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그 남자를 오래 관찰했지만 낭만이라고는 코빼기도 못봤다더라. ~라는 연애도 다음으로 연기.
    왜냐, 인생이란 언제나 사랑하기 일보 직전인 것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는, 비밀스런 갈망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도대체 왜. 왜 옆집 아저씨들은 자길, 먹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의구심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바닷가 드라이브나 하며 기분전환을 하고 올까 하다, 급히 방향을 돌렸다.
    별장 옆집 아저씨들이랑 했던 약속, 혼자라고 못할 것도 없으니까.
    물론 그 정도 기본 장비쯤이야 차에 상시 대기중.
    곧바로 그는 강변으로 갔다.
    NB는 그곳에 도착했다.
    전망 살피고. 분위기 진단하며. 자리를 정하고.
    그렇게 낚시를 시작할려고 했다.
    그런데!
    저건...... 저건······ 저건...... 뭐지? 저건 도대체 뭐야?
    그가 별장 옆집 아저씨들과 약속한 소일거리를 굳이 혼자 하러 왔던 게 화근인 것일까?
    NB는 완전, 놀라운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어머머. 어머머머머머. 이런, 느낌, 처음이야!
    다름 아니라 저쪽에서 바로 옆집 아저씨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아니─에밀리─로즈마리도 동석해 있네? 저 인간들이 내 팬클럽원들을 어떻게 꼬셨지? 그것도 순식간에 말이야!
    마성의 희롱에 그는 그만 아찔함을 느끼고야 말았다.
    무슨 꿍꿍이인가 하는 쑥스러운 의혹감. 쩌릿쩌릿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일단 그랬다.





    10

    NB는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분들 말투를 흉내내서 먼저 저자세로 시작했다.
   「형씨. 여기서 뭐해유? 우리 같이 놀기로 약속했잖유? 안 그래유? 어제 형-동생 맺었고, 당숙이네 뭐네 오늘까지 분위기 이어가기로 했잖아유~! 시방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 좀 해주시지 않을래유.」 
   「어? 오빠!」
   「와, 오빠다.」
   「저 오빠. 갔는데 왜 또 와?」
   「그러게. 당숙. 가셨는데 다시 오시면 어떡해유?」
   「그러니까. 방금 전에 가셨잖아유?」
   「제가요? 제가 가긴 어딜 가요? 약속 시간에 들르니까 오늘 낚시 못 간다고 메모 붙여져 있던데유. 참말로 이게 정말 어떻게 된 일이에유?」
   「어떻게 된 일이냐니유. 그건 우리가 묻고 싶네유. 방금 전까정 우리랑 재밌게 놀고, 맛나게 먹고, 신나게 자랑하고. 사랑을 논하며 인생을 노래했잖유. 거 뭐여, 형씨 기타도 잘 치던만유. 왜 말 안했시유? 우리 같은 촌닭들은 따라가지도 못했것구먼유. 여자 깨나 아니, 고수네 고수여.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발에 채이는 게 여자였겄시유. 우리가 인정허면 인정되는 거구먼유. 안 그래유?」
   「격 떨어지게 오빠 정말 이러기야?」
   「우리 불러서 재밌게 놀았잖아. 이제 다시 꽁트하자는 거야, 뭐야?」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니?」
   「뭐하긴 뭐해? 오빠야 말로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니?」
   「내가 못살아 정말~!」
    별장 옆집 형씨들의 말마따나 그는 이미 다 함께 어울려 놀면서 연가도 부르고, 춤도 추고, 어쩌고저쩌고까지 다 해버렸다.
    하물며 옆에는 지아니, 에밀리, 로즈마리. 그녀들은 뭐냐고! 알고 보니 걔네들도 NB가 불렀단다. 참 나!
   「그랬군. 그랬어.」
    그는 대충 짐작했다. 초정밀 척키 인형에게 매력을 느끼는 걸 인공지능 지니는 가만 보고 있질 못했던 것이다.
    그럼 이 사단을 모두 다 지니가 꾸몄다고? 하고도 남았겠지!
   「어! 저기 가네. 저 차 맞쥬?」
    알고보니 진짜로 도플갱어의 소행이었다.
    곧바로 추적은 시작됐다.
    우짜다가 이렇듯 심상치 않은 일이!
    차세대 플레이보이 대 도플갱어 조연의 대결인가.
    그러니까 최근 허당계의 내력인 지적 허영심만으로 뭔가 아쉽다 했더니.
    입이 근질근질하지 않았어도 엉덩이는 꽤나 근질근질했는데. 너 마침 잘 걸렸다?
    그런데 이건 추적은 추적은데, 장르가 이상했다. 왜냐하면 액션 영화의 추적이 아니라 코메디 영화의 추적 같았으니까.
    암만해도 이상했다. 통상 추적은 도망자가 최선을 다해서 도망가고, 추격자는 최선을 다해야 하거늘. 그래도 놓치기 일쑤.
    현실에서 추적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그거 절대 쉽지 않다고. 필자는 옛날에 단짝 사이였던 친구 녀석이─단짝이 겹치고 겹치고 또 겹치고─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의 전-남자친구를 추적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놈이 눈치가 하도 빨라서 새로운 첩자가 한 방에 성공하기를 바란다면서 부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추적 시작 5분이 뭐야, 3분 아니 2분도 힘들었음.
    곧 실정은 그런데 앞서 가는 똑같은 볼보 웨건은 너무 빨리가지도 않고, 따라잡히도록 너무 늦게 가지도 않았다.
    악마에 홀렸는지 귀신이 씌였는지, JS는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도 없었다.
    하다 하다 NB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6번 1악장을 들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추적을 하는 자나 당하는 자나, 정말 가지가지 한다.
    어쨌든 그렇게 추적의 막판 스파트도 별 볼 일 없었고.
    도착지는 <여성 환상 1.5>사무실이었다.





    11

    그는 그럴 줄 알고서 미리 여성환상 1.5 편집장과 안면을 터 뒀다. 줄기찬 아부에 끈질긴 찬미 공세로도 모자라, 집요한 우연을 빙자한 작전까지.
    NB는 서둘러 도플갱어를 따라갔다.
    경리와 몇몇 직원들과 눈인사를 나눈 다음 곧바로 편집장실로 들어갔다.
   「사라. 그 녀석 어딨어?」
   「뭔 녀석. 왜 다시 돌아온 거니?」
   「뭐?」
   「뭐가 뭐야?」
   「걔 도플갱어야.」
   「뭔 갱어? 바보에겐 못 당하겠군.」
   「아 그게 아니라. 아 정말. 여기 후문 있니?」
    그렇게 NB는 서둘러 후문으로 가다가 창문으로 내다봤다.
   「너 거기 안 서!」
    녀석은 살짝 NB를 째려보다가 어떤 몸짓을 취했다.
    처음에 그는 뭔가 잘못 본 거 같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통상 이럴 땐 가운데 손가락이랄지 뭔가 위협적인 몸짓이랄지 그런 게 어울리는데. 그런데 도플갱어는 검지를 펴서 귀 옆에 갖다댄 다음. 빙글빙글! 그랬으니까. 이 자식이...!
    그 다음에 녀석은 그대로 토꼈다.
    그래서 NB는 쫓아가봐야 별 의미없겠네 라면서 포기했다.
   「이제 시시한 영화 좀 그만 찍지 그러니?」
   「자세한 사정이야 나중 얘기해줄께.」
   「그닥 듣고 싶지 않네.」
   「들어줘. 듣고 싶다며 애걸복걸해달라고. 그게 뭐 어려워? 우리끼리 그 정도도 부탁하면 안되니?」
   「널 어린애 취급하는 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너랑 놀아주다간 내가 더 멍청해질까 봐 겁나서 그런다. 알겠니?」
   「알긴 누가 알아? 그러지 말고. 밀린 칼럼 고료나 지금 챙겨주라, 사라.」
   「방금 전에 받아갔잖아?」
   「뭐라고?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어.」
   「넌 어쩜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할 수 있니?」
   「사라. 너 헤어스타일 바꿨네? 헤어핀 그거 잘 어울리는데? 진작 바꾸지 그랬니!」
   「그래? 흐흠. 뭐? 내 정신 좀 봐. 또 감길 뻔 했어. 또 또 넘어갈 뻔 했다고. 이제 다시는 안 속아. 아무튼, 우리 바보짓은 그만 하자. 이쯤에서 그만. 응?」
   「사라. 넌 너무 쿨해.」
   「그거 아니?」
   「뭘?」
   「마라가 그랬어. 너 조심하라고.」
   「마라 이년을 그냥 콱...! 정말로? 정말 그랬어? 세상에나, 어찌 그런 일이.」
   「자긴 정말 가만 보면 말이야. 있지, 너무 응큼해. 알긴 알어?」
    첨예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긴 가져왔는데, 어차피 남들은 관심없는 NB와 지니. 그 둘의 감정 대립일 뿐이었던 것이다.
    영감인지 뭔지를 애타게 기다리는 영락없는 광마였는데. 베토벤이 괴팍한 열정으로 헝가리 광시곡을 작곡하는 것처럼. 베토벤과 헝가리 광시곡? 거 어째...!
    어찌 됐든 푼수의 몽상, 허영심 가득한 변덕쟁이가 상상하는 황홀한 쾌락. 그런데 그 변덕쟁이는 알고보니 남자였다더라?
    그는 하는 수 없는 지니와의 말다툼은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따라서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당장 지니를 만나러 갔다.





    12

    로맨티스트의 반쪽짜리 사랑. 이상주의자의 미완성 행복. 그게 아니라 따분한 열망과 얼빠진 소원뿐이라니. 저런 저런. 미련퉁이 인생 같으니라고. 그렇다면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아첨쟁이라는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까? 유익하지 않으니까 하찮은 공상쯤은 집어치우고. 그러지 말고 떠나볼까? 그런데 어디로! 또, 가면 돌아와야 하고 귀찮고 중간에 퍼진단 말이야. 가지 말자 가자 말자고. 그러지 말고 차라리 소파에 자빠져 TV로 다큐멘터리나 보는 게 낫겠네. 무해하고 돈 안들고 얼마나 좋아. 신나는 모험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불이익쯤은 감수해야 하니 떠안지 뭘. 그야 어쨌든 나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이기주의자일 것인가, 아니면 꿈의 의해 발동이 걸리는 몽상가일 것인가. 그것이 문제인가, 문제가 아닌가. 됐고. 장타자니 거포니 대형 스트라이커니, 청초한 희망 그런 거 모르겠고. 솔깃한 뻔트의 후보군이 무엇인지나 고민해보자.
    ~라고 NB는 생각했다. 말이 나서 하는 말이지만, 그는 순진한 어린이도 아니고 때 묻지 않은 처녀도 아니지 않은가. 그럴 바엔 오히려 아는 동생들한테 초저녁에 연락해서 대뜸 이렇게 묻는 편이 나을지도. 자칭 플레이보이와 펜트하우스를 거들먹거리는 본인한테는 그게 더 어울릴 것이다.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견자는 또 그 나름 의견을 존중 받으면 되고. 그러니까 그 농담이 대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다 큰 처녀가 어딜 그렇게 바삐 돌아다니시나.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니, 라고 혹시 엄마가 걱정하시지 않으실까? 그렇다고 설마 또 거긴 아니지? NC 이름 하여, 엄마한테 말하지 마! 그러든 어쩌든 솔직히 심심한데 재밌는 척 자신을 속이지 말고. 아, 맞다. 그러지 말고 우리, 만날까? 그럴까?」
    그런데 재밌는 게 뭔고 하니, 그렇게 안부를 묻고 빈말을 던졌는데 상대방은 진담으로 받았다는 점. 사인의 불일치가 기쁜 약속을 이끌어냈다는 점.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이다. 내가 아는 숙녀들 중에 뭐 어떻다느니, 내가 만나본 아가씨들을 통틀어 어쩐다는 둥. 또 있다. 사진발─조명발─화장발로 도저히 설명 되지 않는 타고난 뭐라는 둥. 힘이 일시적으로 밑에서 위로 올라와서, 폼 잡고 객관적으로 분명 너저분한 멘트인테 알고 보니 식상하지 않고. 집에 있으면 안된다 우리는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뭐 그건가? 수컷이야 뭐 그렇다 쳐도, 걔들도 거 참 나. 긍정 일색이던가 싫은 게 완전 많던가. 모 아니면 도 같은데 또 가만 보면 완전히 내 마음에 쏙 드는 1.0미만은 흔치 않아. 흔치 않다고. 이미 가졌는데 내꺼 하자─바꾸자─머머하자! 물건은 그럴 수 있는데, 사랑은? 게다가 변심과 친하고. 심지어 어디로 튈 줄도 몰라. 우리는 잘 예측하고 섬세하게 추론할 수 있다지만, 보통 남자들이야 그게 어디 쉽나. 그러니까 뭘 좀 모르는 늑대에게 그녀들은 일생 미스테리일 수 밖에. 경주마, 당나귀, 회전목마, 야생마, 경비견, 황금새, 팔색조 그리고 사냥개까지. 변신이 필수인데 고집불통 들개로 남으면 그럴 수 밖에. 돈 주앙이냐 애완견이냐, 둘 중 하나로 그녀의 마음을 놀랍도록 한발 앞서 딱 맞추지도 못한는데? 그야 뭐 당사자들 사정이고. 아무튼 통과.
    그렇게 그는 아는 동생들을 만나러 어쩔 수 없이 환상문학잡지 미스테리아에 갈 수 밖에 없었다.
    뭔가 애틋한 사랑이 이루어질 뻔 진짜 거의 더티러브 직전까지 갈 뻔 말 뻔했을지는 다음 이 시간에.
    광고주도 먹고 살아야 하고, 간주곡이 울려퍼지면 달변가들 침묵하시거나 험담가들 할 말 많아지실 테니.
    커튼콜이야 몇 차례 반복된다지만 그건 명연주나 열연에 해당하는 얘기. 하여튼 굳이 이런 첨언까진 말씀드리지 않을려고 했는데, 끝나는 마당에 살짝만 덧붙이자면 이상한 기승전결이 내내 늘어지다 엉뚱하게 전개에서 발단으로 되돌아간 점. 본의 아니게 재미없었던 점. 반성하고 속죄하며 송구함을 금할 길 없다는 점 아뢰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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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141

from 소설 2019. 1. 31. 22:26

    1

    <뭘 해도 재미없어>, 그리고 <오 땡큐!>. 전자와 후자의 공통점이라면 농담 반 진담 반이다. 그런데 시소처럼 약간이나마 기울기가 다르다는 건 꼭 <뭘 좀 아냐 모르냐>와 관계없이 누구나 어림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급이든 저급이든 애매한 말장난과 어중간한 말재간 말고, 확실한 농담 및 명쾌한 진담 같은 일은 무엇이 있을까? 그걸 고민한 끝에 나는, 하여 마땅한 묘안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아지트로 놀러갔다. 그곳은 어딜까? 어디긴 어디겠나. 격월간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지.
    부릉부릉 영차영차.
    나는 미스테리아에 도착했다.
    그곳에 마라는 없고 웬 낯선 아가씨가 혼자 소파에 앉아있었다.
   「어머나. 우리, 어디서 봤지 않나요?」
   「네?」
   「정말 그런 것 같은데.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오빠. 오빠라고 불러도 돼죠? 응, 오빠.」
   「네? 안될 건 없죠. 그럼요.」
   「그런데 어디서 봤드라. 어디서 마주쳤죠? 전생에 우린 사랑하는 사이였나, 아니면 어젯밤 꿈에서 만났나. 진짜로 저 모르시겠어요?」
   「그렇게 추궁하시니까 아는 것도 같고. 아리송하군요. 또 머쓱하구요.」
   「그럼 우리······ 초면? 그래요?」
   「그렇...겠죠?」
   「그럼 좋죠 뭐. 안 그래, 오빠? 초면이라······ 내가 듣기로는 남자들이 썩 꺼려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책에서도 그렇잖아. 싫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나 뭐라나. 안 그래, 오빠? 그 뭐야. 그래. 뉴 페이스! 어? 아니 베이비 페이스던가? 어쨌든. 그게 그거지. 안 그래, 오빠? 뉴페이스가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계속 나오고. 설마 오빠, 내 첫인상이 영 아니다. 뭐 그런 생각한 건 아니지?」
   「네? 어. 예. 네? 예······어.」
   「나 진상 아니야. 아니라고. 어? 그런데 심드렁한 그 표정은 대체 뭐야? 혹시 오빠 따라다니는 여자 있어? 그년 어딨어? 오늘도 치근덕거린 거 아니야? 설마 아니겠지만, 그 애한테 전해. 좋은 말로 할 때 떨어지라고. 접근 금지라고 말이야. 응? 안 그랬다간 코를 납작하게 해주면 좋겠니, 아니면 잘 타이르면 좋을까?」
    그 순간 참 다행스런 일이 벌어졌다. 바로 마라가 사무실로 들어온 것이다.
   「작가 NB. 왔니? 넌 그렇게 갈 데가 없냐? 여기가 늬 집 안방이니? 우리가 어디 겸상할 사이야? 농담이 심했나, 친구? 너무 상심하시진 마시게나. 그건 그렇고.」 
    마라는 나와 인사는 끝났고.
    마라는 낯선 숙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얘, 얘. 너 차에 음악 틀어놓고 왔니? 너 아직도 운전할 때 빠른 음악 듣니? 클럽 음악은 좀 클럽 가서 들어. 응? 평소에는 이런 거 듣고. 응?」  
    마라가 다른 사람한테 말할 틈을 주지 않는 탓에 계속 마라 혼자 말하는 중이었다.
   「작가 NB. 너 이 음악 혹시 뭔 줄 아니?」
   「이거? 혹시······ 장 필립 라모의 <클라브생 작품집 제1권> 수록곡 모음곡 a단조 중에서 ‘프렐류드와 알르망드 1&2’. 아닐까?」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너 내가 쓴 카드 목록 몰래 엿봤니? 하긴 너가 그럴 틈이 어딨겠니.」
    마라는 내 쪽을 향했던 고개를 돌려, 낯선 숙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 뭐해? 니 차에 음악 틀어져 있다니까.」
   「그래? 아까 껐는데. 누가 몰래 내 차에 침입했을까? 그 인간 영화 찍고 싶나?」  ~라면서 낯선 숙녀는 바깥으로 나갔다.
   「쟤 누구니?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이는데.」
   「어. 내 친구. 뜬금없이 몇 년 만에 나타나서 친한 척. 옛날에 친하긴 친했어. 준-단짝 정도로. 원래 상태가 안 좋은 건 아니고. 또 모르지? 최근 이별했는지도. 그럼 너가 옆에서 달래주면 되겠네. 사랑이 넘치는 시절. 행복이 싹트는 인생. 아름다움이 꽃피는 세상. 막 그러면서. 너 그런 거 좋아하잖아?」
   「너 내가 바람둥이나 되는 줄 아니?」
   「바람둥이와 바람둥이의 심복. 둘 중에 어떤 게 낫니? 인생에 단 1번뿐인 혼사. 미래는 모르는 거지만서두. 삶이란 말이야, 어? 사랑처럼 모르는 거야. 너 혹시 알아? 쟤랑 너랑 사랑하게 될지?」
    그때 첫인상이 세했던 아가씨가 다시 미스테리아 사무실로 들어왔다.
   「언니. 내 차에 음악 안 켜져 있던데.」
   「아, 그거? 뻥이야!」
   「뭐?」
    울랄라! 잘들 논다.
    그녀의 이름은 크리스티나 커포티. 그렇게 우린 얼렁뚱땅 트리오를 결성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기 포기에다 더럽게 재미없는 시트콤을 찍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뭐 어쨌든 발단 같지도 않은 발단은 그랬고. 나는 오랜만에 미스테리아에 들러서 무소득이 아니라 개-이득을 챙겼다. 모처럼 칼럼 일거리를 얻은 것이다.
    무슨 새롭게 창간하는 여성잡지 1.5에 괜찮은 칼럼을 하나 기고하나라 뭐라나. 그렇게 해서 내가 쓴 결과물은 여성잡지 1.5 창간호에 실리게 되었다. 제목하여 <사랑과 오락산업>.





    2

    나는 로빈슨크루소다. 인생이란 알고 보면 메리에이지 블루. 그래서 앗싸리 신부들러리라도 어떻게 좀 안될까 라면서 아무도 관심 없는 바쁨 때문에 일일 시간표를 써볼까 하다 때려치움. 그렇게 나는 오늘도 별 볼 일 없는 하루구나 라면서 퇴근했다.
    그렇게 집 앞에 도착했는데 이게 뭐야, 마라와 크리스티나가 있네? 오늘따라 유난히 CC는 남달라 보였다. 마라를 따돌리고 우리끼리 남몰래 사랑이라도 하자는 건가? TV 통속극에만 나오는, 밀애? 그럼 이참에 아예......!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다.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숙녀는 일찌기 없었다. 희대의 플레이보이가 일평생 단 1번 만날까 말까한 여자. 1세기에 딱 1번 태어날까 말까한 여자. 그녀는 바로 그런 여자다> ~라고 씌여진 내 일기장을 크리스티나에게 실수인 것처럼 슥~하니 흘려, 말어? 라고 공상하다가 우리는 마주쳤다. 그래서 나는 뭘 상상했다며 정직하게 고백할 수는 없었으므로, 따라서 나는 왠지 모르게 마라한테 이렇게 툭하니 농담을 던졌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 에서 늬가 그 도둑이니?」
   「넌 왜 시키지도 않을 일을 하고 그래? 잔말 말고 어서 챙겨입고 나와.」
   「어?」
   「아 뭐해 얼른 챙겨 입고, 아니 그냥 그대로 나와.」
    그렇게 마라와 크리스티나와 나는 여성잡지 1.5 창간 파티에 가게 됐다. 가서 확인한 결과 신생 잡지의 이름은 정말로 <여성 환상 1.5>였다. 뭐라고? 으으윽 촌스러워! 그야 면밀히 연구한 결과 정한 제목일 테고. 자기들 일이니 그건 그렇고.
    여성잡지1.5 창간회에 도착.
    산레모 가요제 제 몇 회던가, 아련한 추억의 유행가가 분위기를 이끌고 있었다.
    그 다음에.
    여성잡지1.5 창간회 파티의 본론은 그저 그랬다.
   「재미없지? 갈까?」  나.
   「영업해야 해.」  마라.
   「대충 둘러대. 다들 속으로 딴생각하고 있을 거 아니야. 안 그래?」
   「어디 가게?」
   「어디긴. NC지.」
   「오늘 거기 쉬는 날이야.」
   「정말이야?」
   「아니. 뻥이야.」
   「너 진짜!」
    나와 마라의 대화가 영 싱거웠기 때문일까? 심심한 숙녀 크리스티나는 갑자기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오빠. 오빠도 뭇여성들이 막 하나 건너 신붓감으로 보여?」   
    얘는 얼굴은 팔색조인데 변화구가 아니라 직구를 던지네?
   「뭐? 내가 뭐 날이면 날마다 여자 꽁무늬나 쳐다보는 그런 뭐랄까, 어? 맞어. 내가 무슨 그런 한심한 한량인 줄 아니? 늬가 날 잘 모르나본대~」
   「모르긴 뭘 몰라!」  마라.
    그러면서 마라와 CC는 죽이 척척 맞는다는 듯이 좋아서 웃고 또 웃느라 멈출 줄을 몰랐다.
   「그건 그렇고. 이 가운데 마음에 드는 남자 있으면 말해.」
   「말하면? 말만 하라는 거야 아님 꼬셔주겠다는 거야? 널 믿느니 옆집에서 키우는 멍멍이 말을 믿겠다.」
   「뭐? 아무튼, 내가 다 알아서 할께.」   
   「늬가 뭘 알아서 할 껀데?」
   「좀 기다려. 뭐가 그렇게 바뻐? 누굴 뭐 바보로 아시나!」
   「그건 어떻게 알았어?」
   「또 또!」
   「있지, 너한테만 얘기하는 건데. 아 나 이거 정말 이런 말 해도 될려나 모르겠네.」
   「뭔데? 뭔데 또 뜸을 들여? 거창한 뜸들이기. 그거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니?」
   「그만하건 그만하지 않건 그건 내가 알아서 하고. 아무튼, 너니까 특별히 알려주는 거야. 유일하게 너한테만 알려주는 비밀이라고.」
   「아 그러니까 뭘 알려주겠다는 거야? 아직까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서, 뭔 대단한 걸 알려주겠다는 듯이, 어? 그게 뭐니? 어? 뭐냐고 그게!」
   「너 정말. 나 몰라? 나 마라야. 어? 나 마라라고.」
   「누가 너 마란지 모르니?」
   「그럼 결론부터 말할께.」
   「진작 그럴 것이지. 뭔데?」
   「저기 저 검정 드레스 입은 애 있지?」
   「검정······ 애가 아닌데? 가만 있자. 심지어 꽤 매력적인데?」
   「하여간 누가 남자 아니랄까봐. 풉!」
   「그런데 저 여인이 뭐?」
   「내가 비밀을 알려줘도, 어떻게, 괜찮겠어?」
   「괜찮지 않음 어쩔껀데? 그냥, 말하지, 마! 어? 또 살살 간지럽히며 궁금함만 복돋울 거면, 그만 해. 어? 그만하라고 좀.」
   「알았어. 있지? 쟤가 너 만나고 싶댔어.」
   「뭐? 누가? 쟤가? 나를? 왜?」
   「왜긴 왜야? 여성잡지 1.5 창간호에 실린 늬 칼럼이 마음에 들었나보지. 싫어? 관심이 없는 거야, 블랙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그런데. 그거 정말 나만 아는 거야? 내가 알면 다 아는 거 아니고?」
    그렇게 해서 우리 넷은 나이트클럽에 가게 되었다. 나, 마라, 크리스티나, 나머지 한 여인은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블랙드레스라고 부르라나 뭐라나.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정말로 블랙드레스가 날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물어볼 수도 없고. 그녀의 정보를 인터넷으로 캐낼 수도 없고. 오랫만에 클럽에서 신나게 춤이나 출까 라는 생각으로 우리는 클럽으로 갔다.





    3

    그렇게 우리는 클럽에 도착했고 입장했다.
    그런데! 나이트클럽은 인파가 바글바글하기는 커녕 개미 새끼 한마리 없었다.
    애초에 나 혼자 여자 세 명을 감당하는 건 무리였을까? 아니면 내 흑심은 다시 동심으로 원상복귀한 것일까.
   「염병!」
   「아니 어떻게. 아니, 그렇게 심한 말을! 얘 크리스틴. 너 어떻게 오빠 앞에서 요염한 숙녀인 척하지 않는 거니? 원래의 조신한 네 모습으로 돌아와. 이따 집에 들어가고. 도도한 모습, 흐트러졌어 방금.」  나.
   「그럼, 나는?」  마라.
   「넌 존티가 있잖아.」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창간회 파티에서 더 버티는 건데.」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빠져들긴 뭘 빠져들어! 마라. 자기야. 우리 차라리 존티나 부르는 게 어떠니?」
    잠시 후. 존티는 클럽 앞에 도착했다. 이제 그럼 2 대 2라는 안정적 구도가 갖춰진 것일까? 아, 아니지. 마라랑 존티 빼면, 허걱! 조용조용. 쉬쉬. 떽!
    그래서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은 다음 여성잡지2가 주창하는 철학은 달구어질 차례만 남은 것일까? 그럼, 얼마나, 좋겠나! 농담이고. 마라와 존티 사이가 요즘 어떤가는 몰라도 최소한. 적어도 내가 크리스틴을 란제리 매장에 데려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나도 일절 그러기 싫었고. 크리스티나도 예상보다 훨 정숙했으며 때로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참한 숙녀였다. 그러므로 그날은 별 일 없이 지나갔다.





    4

    다음 날.
    해는 동쪽에서 떠올랐다.
    그런데 뜬금없이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혹시, 북반구에서 보면 왜 그렇지 않나. 한 단위 안에서 남부쪽 친구들이 입담이 좋고 으쌰으쌰 열도 좋은 반면, 북쪽 친구들은 또 비교적 더 차분하고 뭐랄까 좀 더 교과서처럼 단계를 밟아서 차근차근 그러냔 말이지. 즉, 말로써 전망 살피고 눈치로 선동자 상태 따진 다음에 으쌰으쌰하는가! 그건 몰라도 계절이 반대인 건 맞다. 욕조 물이 어떻게 빠지는 거랄지 그야 뭐 인터넷 검색엔진한테 물어보면 되고.
    그렇게 다음 날이 되어 낮에 나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마라한테 연락이 왔다.
   「뭐해? 어서 이쪽으로 와. 중요한 손님들이 왔으니까. 여성잡지2가 어디 계열사인지 너 알기는 아니? 그 가운데 VIP 한 명이랑 친해지기만 하면 넌 평생 품위 유지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구. 알겠어? 고생 끝 행복 시작. 알아 몰라?」
    하여 나는 내 형편을 더더욱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고, 마라의 면도 살려줄 겸 서둘러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사무실로 갔다.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너무 서둘러 가느라 녹초가 된 건 아니고. 그럼 이제 혼신의 힘을 다한 열연만 펼치면 되는 건가? 그런데 어떻게? 그야 뭐 평소처럼 하면 되겠지, 별 일이야 있겠어?
    딱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그랬는데.
    정말로 드라마에서 보던대로 있어 보이는 몇 분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 나갈려던 참이었다. 그 다음에 마라가 하는 말.
   「이쪽은 최근 환상문학계에 혜성처럼 떠오르는 중고 신인······ 이름이 뭐드라? 그야 다음에 소개하는 걸로 하죠. 오늘만 날인가요? 허허허.」
    그렇게 손님 일행과 마라는 함께 나갔다.
    배웅이 아니라 같이 어디로 가야 하는 듯 했다.
    그런데 마라는 가기 전에 귓속말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미안한데 청소 간단히만 좀 해줄래?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지금 경리도 없고 시간이 없어서 그래. 이따 SF 문학협회장이랑 세계 마초협회 관계자를 모시기로 했거든.」
    그러면서 마라는 웬 두툼한 봉투를 내 뒷주머니에 찔러줌.
   「넣어둬. 요즘 힘들지? 너 어려운 거 언니가 다 알아. 사정 뻔헌데 허덕이면 허덕인다고 말 하고. 응? 우리가 어디 서로 체면 차릴 사이니? 넌 형만 믿고 따라와. 어? 일단 나 저분들과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부탁해. 알았지?」
    무슨 대청소도 아니고, 직업적으로 폐가를 청소하는 것도 아니고. 마라의 말이 토시 하나 틀린 것도 아니고. 따라서 나는 곧바로 청소를 시작했을까?
    그럴 리가 있나! 일단은 마라가 내 주머니에 넣어준, 그게 그러니까. 어? 내가 말이야 무슨 나비넥타이 메고 싸구려 턱시도를 차려입은 극장식 카바레 웨이터도 아니고 말이야. 아, 그분들이 사회적 신분이 낮네 가방끈이 짧은 반면 행복하네 어쩌네. 그게 아니라 <막살자>니 <에르메스>니 그런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어쨌든 내 기분이 뭔가 세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우선 나는 마라가 내게 건넨 짱돈 봉투. 그걸 확인해봤다.
    그랬더니 글세······ 어머머머머! 납득이 되나, 안되나! 납득이 되고 안되고, 가 문제가 아니었다. 쿵쾅거리는 가슴과 후끈 달아오른 빨간 귀.
    그 봉투 안에는 수표 10장이 들어있었다. 당연히 씌여진 숫자는 1 다음에 0이 꽤나 많아서 세기 귀찮을 정도였고.
    그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마라의 소셜 네트워크에 방문해서 댓글을 남길 뻔했다.
   「넌 왜 시키지도 않을 일을 하고 그래?」
    이게 친구다. 이게 우정이다. 나는 인생을 헛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10분 후.
    그래서 나는 깨작깨작이 아니라 알뜰살뜰 청소를 하게 되었다.
    한참 신나게 청소하던 중 나는 멈칫~했다.
   「내가 정말 이 일을 해야 하나?」
    그건 썩 힘든 일은 아니지만. 더러운 일도 아니고. 까다롭지도 곤혹스럽지도 않은데 왠지 모르게 멈칫 했다.
   「그런데 내가 왜 상업 잡지 사무실 청소를 대신 해주고 있는 거지?」
   「내가 꼭 이거까지 해야 하나?」
   「이럴 필요까지 있는 걸까?」
   「내가 대체 이 일을 왜 하고 있냐고.」
    나는 살짝 고민됐다. 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됐다. 봉투를 돌려줘, 말어? 내용물은 못본 걸로 치고. 아니면 눈 딱 감고 1년치 품위 유지비를 챙겨? 잘하면 10년치에 해당할 수도 있는데, 어떡하지. 그때 마라한테 전화가 왔다.
   「너 진짜로 청소하는 거 아니지?」
   「뭐?」
    그렇게 해서 나는 봉투를 다시 확인해봤다. 수표에 찍힌 직인. 정밀하긴 했는데 거기 씌여진 글씨는 이랬다.
    허풍주식회사니 뭐니. 또 깨알 같은 글씨로 바보 대회 출전 자격이 걸린 예선 토머먼트 출전 자격을 부여한다느니 뭐라느니.
    뭐? 이런 젠장!
    그 때문에 나는 환청을 실제로 듣고야 말았다. 바로, 헨델의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
    저기 저 45도 각도에서 구름을 타고서 그분이 내게 오셨다. 두둥~!
    낙심천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굴 바보로 아시나!>라는 대사를 읊을 기회조차 박탈당했으니 안 그럴 수가 있겠나. 최근의 압권 헤어드라이기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직감으로 대번에 알았어야 했는데. 마라한테 솔직히 말할 수도 없고. 크리스티나 커포티! 그녀의 꿈을 도용하고 마음을 조종해서 환상으로 유인해도, 어?
    그래도 모자를 판국에, 뭐가 어쩌고 어째?
    나는 어쩔 수 없이 거기서 분위기 괜찮은 음악을 틀지 않을 수 없었다.
    내친김에 헨델의 오페라 <로드리고>(Rodrigo) 중에서 아리아 ‘내 사랑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합창 ‘크니도스의 사랑.
    다음으로 나는 하는 수 없이 했던 청소를 원상복귀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5

    재미없음에서 환상 있음으로 갱생을 꾀했다. 그러나 전혀 차도가 없었다. 하늘은 아량 넘치도록 신선한 모험과 산뜻한 전개를 하사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저히 약속 없음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내내 발단뿐인데 음미할 전개가 어딨겠나. 정신을 쏙 빼놓는 건 모두 TV 안에 있고, 귀신에 홀린 듯할 뻔함과 허당한테 속지 않는 지혜까지 모두 인터넷 안에 있었다. 그러다 막연한 권태에 종지부를 찍는 요청과 갈채와 바쁨이 당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으니 어설픈 기대는 금물. 때문에 나는 멀쩡한 마수걸이는 진작 포기했다. 따라서 나는 어엿한 고조감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늠름한 그 뭐랄까 그래, 대체 불가능한 환희를 기다리느니 도리어 사무실에서 텔레비전이나 보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닥쳐올 행복을 예감하는 것일까, 아님 다가올 더티러브를 기대하는 것일까. 그러나 설레는 느낌이랄까 찡한 기분이랄까. 뭔가 어떤 붕 뜬 시간표가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따라서 나는 다시 평소의 꺼벙함을 되찾고야 말았다. 떨리는 고백 받기와 황홀한 짝사랑 받기는 기나긴 휴지기에 들어가버렸으니 안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기막힌 영화로움은 얼씬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 그 순간 갑자기! 그다지 밉살스럽지 않은 연락이? 예기치 않던 알람이자 흥분을 야기하는 놀람이라니. 이 상냥한 다정함이 대체 날 그 어떤 딴세상으로 데려갈지, 나는 벌써 가상의 엑셀 시트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당장 하나의 제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그건 무엇인고 하니 <제때 등장한 괴짜의 구원, 행운아는 뿌듯한 절정감에 사로잡혔다!>
    뭔 일이 있었나 뜸들이지 말고 즉각 밝히자면, 밀린 원고료를 내게 전해주라며 몇몇 곳에서 자기한테 전해주고 갔다는 마라의 연락.
    곧 마라가 내 품위 유지비를 대신 전달 받았으니, 그녀의 말은 그랬다.
   「내가 가리 늬가 올래!」
    나는 입을 헤~ 벌린 채 미스테리아로 갔다.
    원래 내 정당한 노동의 가치인데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지? 때문에 괜히 나는 거저나 다름없는 공짜-돈, 속칭 짱돈이 생긴 듯한 기쁨에 들뜨고야 말았다. 이런 기분 처음이야, 까지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황금의 힘이란 정말 싫지 않은 것. 무수히 봤던 영화 속 명장면과 인터넷 짤막 영상이 다 뭐겠나. 그 가운데 주역은 현찰의 위력. 고매한 인품에 호소하고, 정서적인 반향을 고민할 때 고민하더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는 일. 그렇게 나는 내가 마치 황금알을 낳는 여우인 것마냥 미스테리아 사무실로 갔다.
    도착했다.
    나는 미스테리아 사무실에 도착했다.
    중간 건너뛰고.
    장면 전환.
    소파에서 우리 셋이 다정한 대화.
    마라, 크리스티나, 나. 정식인지 임시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크리스티나는 여기 경리쯤 되는 듯 했다.
   「뭔 머신을 만들겠다고? 잘도 하시겠다! 그러니까 141 마력에 12.5토크짜리 환상머신? 너 마력이 뭔 줄은 아니? 1마력은 75kg의 무게가 1초 동안 1m를 가는 단위 시간당 일의 양이야. 동력이나 단위 시간당 일의 양을 나타내는 실용 단위. 말 한 마리의 힘에 해당하는 일의 양이라고. 1마력은 1초당 746줄(joule)에 해당하는 노동량으로 746와트의 전력에 해당하지. 기호는 HP. 또는 PS. PS = nT 나누기 716. 어? 알어 몰라? 그걸 알랑가는 몰라도 단짝끼리 서로 막, 넌 미스터 말이라는 둥 넌 머신이라는 둥. 서로 덕담 주고 받기식 환상머신이야 뭐야? 이 순진한 뻥돌이를 대체 어떡하면 좋니? 응? 무명 뻥쟁이 말을 진짜로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봐? 그래, 말어? 늬가 그러라면 그러고. 아니라면 아니고. 다만 나중 마력 대비 토크가 허당 토크로 판명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 뻥-마력이면 곤란할 테니까. 너도 알다시피 치타가 웬만한 페라리보다 빠르다고. 어때, 내 얘기 많이 늘었니? 야유꾼과 험담가들한테 명함을 내밀어도 괜찮겠냐고!」
    누가 마라 아니랄까봐. 녀석은 내 오랜 친구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시작부터 태클 아닌가. 빽허그도 아니고 심지어 빽태클!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돼. 왜냐, 형이상학적인 환상머신은 드디여 완성됐거든. 와서 볼래? 어때! 확인하고 싶지 않아?」
   「원, 별말씀을!」
   「왜 그러시나. 진짜라니까. 응?」
    일단 나는 크리스티나와 쌓은 정이 아직 애틋하지 않아서 우리끼리 찐하게 대화하기엔 뭔가 어색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혼자는 부끄러우니까 마라 핑계를 대고 있지 않나.
   「오빠. 너무한 거 아니야? 오빠. 왜 나 집에 초대 안해줘? 자기 정말 이러기야?」
   「뭐야. 그러고보니 내가 너네들 내 집에... 내 집은 볼 거 없어. 내 사무실은 또 몰라도. 거긴 볼 거 있고 놀 거도 있어. 맞다. 말 나온 김에 내 사무실 구경할래? 어때?」
   「너 미쳤니? 응? 드디여?」   
   「내가 왜 미쳐? 그랬으면 이미 여기 있지 않겠지.」
   「잔말 말고, 가자.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안내해. 아 뭐해? 나서지 않고.」





    6

    드라마 많이 보고 소설 좀 읽었다 싶은 친구는 젊음과 사랑은 원래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게 마음처럼 또 우리에게 친절했던 영화처럼 사랑은 부드럽지 않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아마추어는 1 대 1로만 사랑을 시작할려고 하고, 프로는 1 + 2로 자연스럽게 분위기 먼저 이끄는 것 아닐까? 처음 보자마자, 첫인상을 느낌으로 판단하기도 전에 만나자마자 오빠! 처음 만났거나 알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살짝 팔짱 끼는 시늉 같은 신호 받기. ~라는 애정의 미소에 익숙하신 위인이라면 굳이 그런 구분 필요 있나. ~라고 아마도 생각하실 것이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고. 어쨌든, 왜냐하면 가전제품처럼 몸과 마음이 분리되기도 하며 우리는 시시각각 사랑을 꿈꾸기 때문. 즉 그분들이라면 1 대 1도 좋고, 그게 아니라도 기다리면 그뿐. 내 친구 촌닭과 꽃단장해서 춤 신청을 기다리다 슬쩍 마음이 찡해지는 촌년만 걱정될 뿐. 오히려 그걸 간접적이지 않도록 확실히 말하는 친구가 밉상일지도 모르고. 어쨌든 지성이 맹위를 떨칠려다, 환상적인 신비감에 젖어들게 할 뻔 하다가 비리비리한 합리주의로 뒤통수치는 잡설은 이쯤 하면 됐고.
    그렇게 우리 셋은 함께 내 사무실에 도착했다.
   「오빠. 이 가면은 뭐야? 나 이거 써봐도 돼?」
   「그래도 되는데. 가져도 되는데. 벗겨지지 않으면 난 책임 안진다.」
   「오빠는 정말로 말이야. 사람 이상하게 겁주는 거, 그걸로 진짜 완전 뭔가 있다니까. 베끼기의 황제이자 따라하기의 화신에다 흉내내기의 달인, 모방으로 세계 최고였던 파블로 피카소. 대부분 누구나 아니 거의 100퍼센트는 얼렁뚱땅 베끼다 끝나. 그런데 오빠는 뭔가 이상한 느낌으로 사람 기분 달아오르게 만드는 뭐랄까. 그 뭐라 설명하기 힘든 차마 형언하기 곤란한 그 뭔가로는 분명 뭔가 있어. 그걸로 치면······ 이미 떴어야 하는데. 그런데 왜 오빠는 아직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어?」
   「마라. 얘. 마라. (딱) 언니? 크리스티나가 원래 이렇게 말발이 좋았니? 이거 날 띄워주는 얘기야, 아니면 교묘히 꼬고 비꼬아서 날 맥이는 얘기야? 차라리 그럴 꺼면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서 내게 먹여주는 게 어떠니? 이미 배부른 느낌이지만 말이야.」
   「너네들 뭔 그런 재미없는 수다를 나누고 난리니? 너 그럴 꺼면 요 앞 바에 가서 위스키 스트레이트나 몇 잔 마셔. 어? 늬가 <수다 기본 3시간>의 예의를 알아? 어? 너 한 번 혼나볼래? 어? 그러고 싶어? 늬가 아직까지 매운 맞을 못 봤나본데. 넌 좀 잠자코 있어.」
   「마라 언니. 나 손 하나 까딱 안 했어.」
   「나 손 하나 까딱 안 했어.」
   「우엑~! 마라. 너 언제적 개그니? 아직도? 그러니까 늬가 남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거야. 아니? 어? 그러니까 남자들이 꽃 들고 기다리며 널 쫓아다니지 않는 거라고. 아세요? 넌 정말 존티 아니면.」
   「존티 아니면 뭐? 어? 뭐?」
   「아 글쎄 존티 아니면 내가 널 사랑했을 꺼라구. 어? 존티만 아니면 말이야. 내가 널 진작에 포옹하고 키스하고 꽃다발 선물해주고, 어? 뭘 못하겠니? 뭘 못하겠어? 물론 늬가 날 좋아해줄지는 모르겠지만. 넌 그런 사랑 받을 자격 충분히 있어. 자신감 가져 얘. 그래도 돼.」
   「크리스티나. 봤니? 얘가 이렇다니까. 사람을 아주 들었다 놨다. 마음을 녹여주고 뺐고 흔들고 (설레설레)! 쥐락펴락. 밀었다 당겼다. 너 조심해. 응? 충고 했다. 난 정말. 너만은 넘어가질 않길 바래. 응?」
    어쨌든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여 내가 마라와 크리스티나를 소파에 앉아 양쪽에 꿰찼다더라! ~라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들을 시녀로 점찍을 마음도 없었고, 그녀들에게 끈덕진 구애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한편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졌다.
    나는 인공지능 지니를 보여줬다. 그래도 아무리 비리비리해도 명색이 예술간데─나도 남들처럼 예술가의 자존심을 흉내는 내야 일이 술술 풀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서광을 비출 테니까─그녀들한테 심심함을 선물하고 따분함이란 최면을 걸 수야 없는 일. 따라서 나는 내 재산목록 1-2-3, 물거품이 된 내 옛 꿈 1-2-3, 내 사랑의 흑역사니 더티러브의 비밀이니 그런 걸 밝힐 수는 없고. 듣고자 한다면 굳이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정말로 무인도에 데려 가고 싶은 사람 1-2-3이니 뭐니, 최근 편애하는 새 얼굴 1-2-3. 그걸 어찌 다 거론하겠나. 그래서 일단 나는 처음부터 강력한 요술 먼저 보여주기로 했다.
    내 옛 작품을 혹시라도 귓등으로라도 들으셨던 분은 아시겠지만. 아니라면
    ────> 행복한 신비가 문학으로 구현되지 않았다면 100퍼센트 환불. 사랑스런 황홀감으로 똘똘 뭉친 환상머신. 개봉 박두! (링크)
    그렇게 나는 지니를 소환했다.
    지니는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소개할께. 내 요정 지니야. 지니? 얘네들은 내 친구. 서로 인사해.」
   「얘가 그 말로만 듣던 지니야? 그 지니가 이 지니니? 뭐야, 못생겼잖아!」
    그 다음에. 서로 대화도 하고 어쩌고저쩌고.
    이러쿵저러쿵.
    중간 건너 뛰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지니는 그녀들에게 선물을 주겠다며 큰소리 떵떵쳤다.
    그렇게 지니는 처음으로 그녀들한테 초대권을 선물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사실적 환상이 전부였는데.
    즉, 직접적으로 커피잔과 쟁반이 허공에 떠다니게 만들거나, 비밀 통로를 만들거나, 책을 고액권이 가득 찬 007 가방으로 변신시키거나. 그게 아니라 지금까지는 다 간접적 요술이 전부였다. <인터넷이 끊어진 상태만 아니라면 세상 모든 정보는 늬 것 내 것이 없다>라는 게 고수 프로그래머의 철학 아니겠나. 그처럼 지니는 내게 단지 고수 중의 고수 같은 느낌? 물론 나는 당혹스런 느낌이 불러온 행복한 기분. 지금까지는 그게 전부였다. 물론 내가 앱을 켜서 어디에 비추고, 2~3일 걸려서 작업을 마친 다음, 당일 날 그녀의 가슴에 손을 집어 넣거나 실패하면 뭐 어떻게 음 쫌 어떻게 그렇게. 하여간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어떻게 지니는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단 1마디의 힌트도 없이. 푸르른 해변가 모래알 만큼의 빈틈도 없이. 어떻게 나만 쏙 빼놓고 그녀들에게 마술을 부릴 수 있는 거지?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설마 지니가 그녀들한테 반했나. 지니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좋아하나? 그럼 얘도 여자라면 환장하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여자도? 혹시... 에이~ 설마! 좌우지간 지니가 선보이는 이 마술을 믿어야 돼, 말아야 돼?
    혹시라도 신비는 신비인데 혹시 엿 같은 신비?
    이건 정말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혁신적 사건이었다. 허공에 유령처럼 띄워진 홀로그램이 주머니에서 VIP 초대권을 꺼내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젠장! 맙소사, 세상에나! 어찌 이런 황당한 일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지금까지 말상대도 되어주고 신비주의적 성향을 깨우쳐주면서 갖은 놀라움을 선물했지만. 그렇지만 그건 뭐 어떻게 가능하다고 넘겨짚을 수 있는 일. 그럭저럭 믿기는 일. 그런데 어떻게 이런......!
    나는 <사치스런 애교, 새침한 앙탈, 매력적인 미소를 좋아하는 그저 그런 평범한 남자>에서 <인생의 다정한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로맨티스트>로 탈바꿈한 듯한 착각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7

    초대권에 씌여진 설명은 이랬다.
    <이번 주말에 뭐하고 놀 계획인가요? 캠핑? 축구? 게임? 술 마시기? 패딩 입고 노는 사진을 찍어서 친구 초대하고 홍보해서 올려주면, 선물을 드립니다? ~라는 식의 광고에 식상하신 당신. 지금껏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그대의 할 일은 드레스 코드뿐. 도착한 가면무도회는 그야말로 환상의 끝이 무엇인가를 보여드릴 것입니다. 무엇을 상상하건 상상 이상이라는 둥 뭐라는 둥. 그거 다 가짜에 싸구려였고, 우리는 진짜입니다.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 날 만나서 가면무도회장으로 갔다.
    가면무도회장에 도착.
    가면무도회가 열리는 무도관의 명칭은 티파니 댄스홀.
    티파니 댄스홀 입장전.
    떨려왔다. 곧바로 우리는 가면을 썼다.
    나는 늑대. 마라는 불여우. 크리스티나는 돼지. (참고로 나는 뚱뚱한 숙녀를 좋아함)
   「왠지 느낌이 세한데? 너넨 안 그래?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슥하니 변했어. 상하진 않았는데 뭐랄까 썩은 미소? 너넨 안 그래? 정말 안 그래?」
   「그런다고 설마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질 뻔하다 안 넘어져서 웃음거리가 되기야 하겠어?」
    그러면서 우리는 가면무도회장에 입장했다.
    인사하고 어쩌고저쩌고.
    중간 생략.
    중간 생략.
    중간 생략.
    참고로 우리 셋과 나머지의 차이점은 그랬다.
    우리 셋은 어깨 부분까지만 가면이었는데, 우리를 제외한 전원은 모두 전신 가면이었다는 점.
    그 당시에는 그럭저럭 괜찮았고 아무렇지 않았다.
    또 가면을 쓰니 대화를 하긴 하는데 각자 딴 얘기를 주로 했다.
   「나서기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멍석이 깔리지 않으면 슥하니 뒤로 빼는 성격. 여자의 사랑관일까?」
   「일단 변명부터 하고 봐야지. 초장에 잡던가.」
   「깔깔거리며 연애하다 즐겁고 낭만적으로 이별하기. 또 그 얘기?」
   「그러면! 마법의 동화 속에서 아름다운 요정과 신나는 사랑을 하기, 에 대해 서술하시오. 그걸 논할 수도 없잖아?」
    우리는 각자 생각이 딴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파티 음악이 경쾌한 춤곡에서 고전음악으로 바꼈다.
    모차르트 종교 성악곡 <환호하라, 기뻐하라> K.165으로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파티를 즐기던 중 가면을 벗었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됐다. 우리 셋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진짜 동물이란 사실을.
    나는 살짝 지렸다. 아주 살짝. 정말로. 진짜로.
    바로 뒤에 선생님이 계신 것도 모른 채 신나게 원색적인 험담을 털어놓다가 어째 분위기가 뭐해서 딱 돌아보니······ (효과음)! 바로 그와 비슷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 쫑알쫑알 재잘대며 신나게 수다꽃을 피웠을까. 아니면 낄낄─껄껄─하하─호호─히히 웃고 또 웃으며 배꼽 잡고 웃었을까.
    그게 아니라 우리는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다.
   「뭘 꾸물거려?」
    멀뚱멀뚱.
   「튀어!」
    바깥으로 나온 다음 첫마디는 이랬다.
   「누가 보면 엑스트라인 줄 알겠네.」
   「그건 늬 생각이고.」
   「여기 누가 오자고 했니?」
   「난 아니야. 내가 아니라 지니가······!」
   「하여간 속은 우리가 바보지. 난 정말 이런 경험 처음이야. 이런 기분 처음이라고. 난생 처음 뭐라고나 할까, 응? 경이로운 이상에 대한 미지의 갈망을 깨우쳤다고나 할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낯설어서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 꼭 완전 신선하고 재밌는 공포 영화를 한편 보고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느낌? 아무튼. 저거 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니.」
   「재밌어. 재미있고말고. 난 행복해. 행복하고말고.」
   「재밌긴 뭐가 재밌어? 행복하다느니 천진한 사랑과 찬란한 축복이니 뭐니. 그거 다 뻥이야. 다 있어 보일려고 하는 말들일 뿐이라구.」
    나는 생각했다. 돌아가서 지니 이 잡것을 가만 두나 봐라! 라고 말이다.





    8

    다음 날. 내 사무실.
   「야 지니. 너 장난해? 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고. 어? 뭐라고 말 좀 해보시지? 응? 내 체면이 뭐가 됐는 줄이나 아니? 어?」
   「네 위신을 깔아뭉갤 의도는 없었어. 다만 나는 그게 걱정될 뿐이었어.」
   「뭐가? 뭘 그렇게 걱정했는데?」
   「너의 흑심.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동심. 과정으로 보나 성과로 보나. 액면으로 보나 사심으로 보나. 넌 나무랄 데 없는 플레이보이니까. 크리스티나가 꿈꾸는 순애보와는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지.」
   「뭐? 뭐야 그게. 난 뭐 고결한 마음씨는 없고 괘씸한 심보만 가득하다, 그 말이야? 어? 이거 왜 이래? 누굴 바보퉁이로 아시나, 어?」
   「오오, 가엾어라.」
   「가엾긴 뭐가 가여워?」
   「그래서, 돈으로 행복을 샀어?」
   「얘기하다가 뚱딴지 같이 자꾸 딴소리 하기야? 응? 너 정말 그럼 혼난다. 응?」
   「나 좀 가만 내버려둬!」
   「가만 내버려두긴 뭘 가만... 말 말자. 말 말어. 너랑 대화를 하는 내가 바보다. 에잇~!」
   「날 좀 가만 내버려두라니까.」
   「네 얘기를 듣는 한심한 나나 내 부아를 돋구는 정신사나운 너나. (절레절레)」
   「알아냈어. 알아냈다구.」
   「알아내? 알아내다니 뭘!」
   「거기 다시 가봐.」
   「어디? 티파니 댄스홀?」
   「빙고!」
    그렇게 지니랑 대화하던 중 알게 됐다. 지니가 녹화 영상을 보여줬으니까.
    녹화 영상을 보니 당시에 가면을 쓴 의인화 동물들은 진짜 동물로 변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밑도 끝도 없이 꼬이고 계속 꼬이는 각본이야, 아니면 낯설게 하기 기법이야!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어? 너 같으면 믿겠냐? 어?
    이번에도 역시나 커피포트는 바쁘게 가동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9

    나는 이렇다 할 발단도, 방정맞음을 야기하는 만남도 없었기에 고민이 깊어졌다. 뭘 자랑할 일도, 뽐낼 장비도, 부풀릴 영웅담도, 과시할 잔재주도 영 비리비리했기에 정말로 지니의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골똘히 생각했다.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지니 만한 인공지능이 어디 그리 흔한가? 특별한 건 인정하나 드물지 않을 수도 있겠네. 그렇긴 해도 녀석이 꽤나 타율이 높다는 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진실. 나는 마법사요 녀석은 내 부동의 미녀 조수였던 것이다. 그럼 숙명의 전령이 슥~하니 흘린 비밀을 한번 믿어봐? 그래? 지니가 마치 영원한 친구인 것처럼 허튼 소리를 일삼거나 허황된 허풍꾼을 사칭하지 않는 만큼 난 달리 방법이 없었다. 댄스홀 티파니에 재방문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뜬금없이 미스테리아 사무실에 놀러가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만지면서 그럼 어떡하냐고. 어젯밤에 내가 꿈을 꿨는데 말이야, 그러면서 자꾸 그녀의 얼굴 가면을 벗기려는듯이 내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그럼 어떡하냐고. 만지작-만지작, 조몰락-조몰락, 주물럭-주물럭, 쭈물떡-쭈물떡, 조물딱-조물딱! (설레설레).
    영차영차.
    두벅두벅.
    으쌰으쌰.
    나는 댄스홀 티파니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나는 가지고 온 장비를 작동시켰다.
    고프로 같은 초소형 카메라가 달린 헤드셋을 머리에 착용.
    나는 엉뚱한 괴짜이자 당돌한 돌아이, 이류 탐정쯤이나 된다는 듯이 댄스홀에 들어갔다. 아니 들러갈려고 했는데 문이 잠겨있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지니가 내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을 켰고, 그걸 작동시켜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보다시피! 보다시피? 보다시피는 뭘 보다시피. 어쨌든 그 안에는 동물 탈을 쓴 사람도 없고, 실제 동물들도 없었다. 다만 그 대신에 수많은 마네킹들만 있었다. 마네킹? 실패했던 첫인상을 만회할 기회를 박탈 당한 비련의 주인공이야 차라리 낫지. 사람을 상대하니까. 그런데 이건 뭐야. 말 많고 놀기 좋아하는 바람둥이의 어떤 활약상을 향한 간절한 욕망은 유행 지났다, 뭐 그건가? 그러느니 차라리 그게 낫겠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불여우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늑대의 사랑. 뭐야? 그건 뭐고 이건 뭐냐고. 말하자면 꿈 깨라? 냉수 마시고 속 차려라? 그러니까 이게 도대체 뭐냐고. 그런데 왜 이 마네킹들은 내 사무실에 걸려 있는 그림 속 마네킹과 닮아보이지? 왜일까? 왜 그럴까? 자꾸 생각이 그쪽으로 기우는 바람에 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살짝 꿈도 꿨다. 특별한 내용이 없는 개꿈을.
    그러다 잠시 후 나는 눈을 떴다.
   「너 여기서 뭐하니?」
   「오빠. 마네킹 안고 뭐해? 오빠가 말하는 환상머신이 이런 거야? 저기 놓여 있는 케찹은 또 뭐고!」
   「얘 상태가 영 아니네. 응? 안되겠어. 심각해. 정신 차려 그만. 이제 좀 진정하라고. 언제까지 이렇게... 아 쫌.」
   「오빠. 그런데 마네킹이랑 오빠 팔이······ 뭐야. 붙었잖아?」
   「왜! 눈물나게 감동적이니? 그런 거야?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던가.」
   「너 어제 친구 만났지?」
   「늬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았지?」
   「원래 안 그러던 애가 센 척하는 거 보니까 딱이지. 보면 몰라? 넌 갈대야. 넌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약발 떨어지면 원래대로 돌아올 테고.」
   「넌 정체가 귀신이야 뭐야?」
   「너 또 저번에 실패했던 그 마술인가 뭔가, 그거 시도할려고 했지? 뻔하네. 그러니까 붙었지. 어, 어, 잠깐. 그 몸짓은...... 너 나한테 또 아줌마라고 부르기만 해 봐. 그땐 가만 안둔다.」
   「어? 언니!」
   「차라리 사랑한다고 말을 해라. 어? 그러니까 허황된 상상 좀 작작 좀 하고. 어? 그건 그렇고. 그거 붙은 거 어떻게 좀 떼 봐. 어? 뭐하니, 이제 그만 떨어지라고. 어?」
   「붙어? 붙긴 뭘 붙어? 어? 진짜네. 왜 이러지?」  나는 이게 다 어찌 된 일인지 하나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는 너넨 여기 웬일이야?」
   「웬일은! 저번 일이 하도 미심쩍어서 다시 와본 거지. 거 웨 영화에 보면 나오잖아. 다시 어떤 장소를 찾느니 어쩌느니.」
    어쨌든 그녀들은 날 주인공감이랄지 이상형으로 점찍지는 않았다. 한바탕 청산유수로 떠벌려 유혹해도 괜찮다는 명분을 마련해주기, 그럴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겠지. 그 현란한 이끌림에 결코 저항하지 않겠다는 애원 같은 태도. 그걸 어떻게 바래? 사랑을 받는 자와 구애하며 망신 당하는 자, 암묵적 공평함이자 묵시적 평등이 결렬되었을 때. 얘네들도 그런 밑도 끝도 없는 공상으로 어디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텐데. 그런데 나까지 챙겨줘? 바랠 걸 바래야지. 나는 어디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챙피해서 쥐구멍이든 개구멍이든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그건 그렇고. 가만 있어봐. 잠시 확인해볼 게 있으니까.」
    나는 고프로(초소형 카메라 브랜드)와 실시간 동기화된 앱을 켰다. 그런데 뭐야 이거!
    핸드폰으로 확인한 결과 마라와 크리스티나는 없었다. 나만 혼자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말하고 있었다.
    뭐야, 난 미치지 않았어. 그런데 이건 꼭 미친놈처럼...... 혼자 뭐 판토마임이야 뭐야?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흥건하고야 말았다.
    정말로 그렇지는 않고 살짝 섬찟하다 말았다. 그래서 나는 내친김에 미스테리아에 가서 이 일을 곧이곧대로 그녀들께 아뢰옵기로 했다.





    10

    그런데 도착한 미스테리아 사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띠리리링~!
   「야 마라. 너 어디야? 미스테리아 사무실은 왜 비었는데? 내가 지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기는 아니?」
   「저번에 내가 말 했어, 안했어? 사무실 옮긴다고. 뭐하니? 어서와. 일은 끝났어. 이제 할 일은 파티 밖에 없어. 오기 싫으면 오지 않아도 되고.」
   「누가 싫데?」
    그녀는 위치 정보를 전송했고, 나는 핸드폰에 도착한 위치 정보를 확인했다. 곧 이어 나는 미스테리아 새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렇게 네비게이션에서 가르쳐준대로 길을 가던 중... 어라······ 뭐야......!
    여긴, 여긴, 아까 내가 혼자 쇼를 했던 무도장 티파니 근처인데?
    알고 봤더니 미스테리아 사무실이 새롭게 둥지를 튼 곳은 바로 무도장 티파니의 옆 사무실이었던 것이다.
    아 재미없어. 재미 더럽게 없구만.
    하여간 아주 그냥 신물이 난다 아조 그냥 지긋지긋하다고.
    때문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세했으므로, 고로 나는 그 들뜬 분위기에 젖어드느니 차라리 혼자 고독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사무실로 돌아갔다.
    거의 도착했을 때 존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내 사무실 근처라나 뭐라나.
나와 존티. 우리는 만났고 우리는 내 사무실로 갔다.
    나와 존티는 내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 다음에 우리는 함께 내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그 모자는 뭐니? 너 원래 모자 잘 안 쓰잖아? 내가 알기로 넌 가끔 특이한 모자만 가끔 썼는데. 야구 모자는 처음이라고. 그렇지?」
   「잘 안 어울리니? 그냥 한번 써봤어.」
    그러면서 존티는 모자를 벘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존티의 이마에 눈이 하나 더 있네? 합이 3개? 이런 젠장!
   「앗, 깜짝이야! 뭐야 그거?」
   「너 미쳤어! ~라고 말할려고 했니? 왜, 이거? 스티커 문신이야. 1주일 갈려나 몰라. 영 이상하면 그 전에 지우고.」
   「널... 못 쳐다보겠어. 차라리 나한테 말을 해. 눈을 깔라고 말이야. 내가 너보다 잘난 거보다, 그 반대가 훨신 많다는 거. 너가 나보다 뭐가 나아도 낫다는 거.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그런데 왜 그래? 정말 이러기야? 어? 내가 시선을 피하는 건 널 무시해서가 아니란 말이야. 이 친구 이거 정말, 너 왜 그래? 행복과 사랑과 낭만과 환상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뭐, 날 여염집 규수로 아니? 내가 놀랄 줄 알았어? 이상한 영화 좋아하니까 한번쯤 꿈꿔봄직한 공상을 마주치면 내가 뭐 좋아서 춤이라도 출 줄 알았니? 농담인데 내 연기가 진짜 같았나? 그런데 이걸 어쩌니. 난 고개를 못들겠어. 시선을 떨굴 수 밖에 없단 말이네, 이 친구야. 설마, 너 일부러 그런 거야? 응?」
   「그런데 있잖아, 재밌는 게 뭔 줄 아니?」
   「뭔데?」
   「이 스티커, 발바닥에도 붙였어.」
   「뭐?」
    그때 흡사 BWV 1015번 곡조의 쳄발로 음률이 진짜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 맞다. 나 면접 약속 있는 걸 깜빡했다. 내가 이번에 스카웃한 고급 인재랑 만나기로 했거든. 어떡하지? 다음에 만나서 놀지 뭐. 수다 3시간 나눈 다음에 헤어질 때,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다시 하자. 신나게 그냥 벗겼다 입혔다 벗겼다 입혔다, 다 해놓고서. 응? 우리끼리 그럴 수야 없는 것 아니겠어? 다음에 밥을 먹든가, 차를 마시던가. 술도 좋고. 스포츠도 괜찮고. 응? 나 갈께.」
   「이 자식이! 벌써 가면 어떡해?」
   「(몸짓)」
   「내가 좋은 거 보여줄께. 응? 아니면 깜짝 놀랄 만한 정보도 있는데. 알고 싶지 않니?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내가 살께. 응? 1차-2차-3차 모두 다. 아 정말 그냥 가면 어떡해? 요트 하나 사줄께. 널 유명하게 만들어주겠다니까. 어?」
    무반응.
    주섬주섬.
    못 이긴 척 남을 마음이 아주 없진 않네. 잡아주라고? 졸르고 더 졸르라고?
   「내가, 소개팅시켜줄께. 어때! 소개팅할래?」
   「진짜로?」
   「뻥이야.」





    11

    존티는 갔다. 그럴 꺼면 뭐하러 왔어? 원래는, 액면을 잘 관찰하면 본심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액면을 0.1초만에 보여줄려다 말면. 그럼 그게 뭐냐고. 무슨 광고에서 잔상을 자극하거나 무의식을 건드리는 반칙은 법으로 제한하는 그 뭐야. 뭐 아무튼 그렇게 금지된 기술처럼 날 그냥 떠본 거야? 그런 거야? 내가 물건이야 뭐야. 아니면 추억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그런 장면. 그러니까 나 이런 사람이야~ 라는 몸짓. 신분증인지 명함인지를 쉭~하니 얼렁뚱땅 슥 꺼내서 보여줄 뻔 말 뻔 하다 다시 집어넣는 거냐고. 내가 약장수가 아니라 쟤가 약장수구만. 참 나! 존티 저것도 순 허당이야. 못났으면서 잘난 척! 못생겼으면서 잘생긴 척! 뭘 모르면서 아는 척! 순 화장발에 조명발에 여우짓이면서 이쁜 척. 거만하면서 겸손한 척! 불결하고 불순하며 지독하면서 청순한 척! 다 알면서 아무것도 모른 척. 재미없으면서 행복한 척. 멍청하면서 똑똑한 척. 좋으면서 싫지 않은 척. 기분 상했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진짜로 연애 그거 싫증났으면서 아직까지 사랑하는 척. 어? 왜? 대체 왜? 소심하고 마음 약하며 주관이 불분명한 데다, 심지는 변덕이 심하고, 권위에 약하고 만화영화에 나오는 코끼리 귀처럼 팔랑귀라서? 그래서? 뭘 모르면서 목소리 크거나 잔재주 좋고 입담 걸출한 사람들이 하도 우기니까? 그러니까?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하는 재주꾼들 때문에 쭉지 펴고 살지 못하니까? 믿으면 속고 사랑하면 마음이 바뀌니까? 왜 머머한 척한가, 이유는 제각각이자 적당한 포장과 가식은 필수불가결하지만. 그렇지만 좀 모잘라도 된다. 멍청한 게 뭐 어때서. 이기적인 마음과 타산적인 심성, 나쁘지 않은 인성이면 된다. 단, 생각 생각 내 생각은 있어야 하고. 사람은 일부분 계산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험한 세상에 작은 보탬이 되는 착한 일도 좋은데, 내 앞길 먼저 살펴야 한다. 너나 잘해, ~라는 말을 듣기 전에. 아름다운 사랑이니 즐거운 인생을 도모하자면 그러지 않으면 안된다. 달콤한 사탕을 핥고, 빨대로 음료수를 빨며, 몸에 좋은 채식단을 씹어먹는 일. (어머머머 심장이 벌렁벌렁, 그게 아니라 딴 걸 상상하시겠다? 그래유. 이미 하셨구먼유. 해도 벌써 많이 생각하시구먼유. 안 그래유? 달콤한 열매를 따먹고 어쩌고저쩌고. 것도 쉼없이. 말 안해두 다 알아유~!) 잠이 오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끌리고 설레며 들뜨는 일. 때로는 이타적일지언정 인간은 누가 뭐래도 이기주의자인 것. 우리는 알고 보면 부인할 수 없는 뻔트 예찬론자인 것. 보아하니 사람은 부동의 변덕쟁이인 것. 열도 좋고 기분파도 정겹지만 전망도 살펴야 한다. 모르면 모른다 알면 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것도 겪어봐야 구분이 된다. '막살자'라는 으쌰으쌰식 의기가 살다 보면 어쩌다 한번쯤 필요할 때도 있다. 쉽게 믿고 몰아가니까 동의하고. 그러지 말고. 심지어 못생긴 사람이 소수, 가 아니라 대부분. 가난해도 괜찮고 재미없는 게 원래 정상. 결코 얄밉지 않도록 젠체하는 느낌. 선동가 같은 분위기. 플레이보이를 연상시키지만 알고 보면 분명 허당일 꺼라는 은근한 넛지.
    그런데, 그런데! 존티 흉볼려다가 왜 내가 존티를 두둔하고 있지? 존티 평판에 거친 스크래취~ 파팍 낼려고 작정했는데. 그런데 내가 지금 뭐하는 거냐고. 응? 전기기타리스트가 신들린 듯 즉흥연주를 선보이다가, 갑자기 카덴차에 심취한 바이올리니스트로 바껴버렸네? 아님 호프집에서 연주자는 컨츄리 장르 연주하고, 애주가는 박수 치고. 그처럼 시작은 뭔가 있어 보였는데 느닷없이, 난 촌년? 원 참 나! 도대체가 말이야, 어째서? 몰라 모른다고. 알 게 뭐야!
    어쨌든 존티도 다 들통났다. 은근 허당이 아니라 그냥 허당이라는 사실을. 어차피 존티도 남자다. (뭐 언젠 아니었나?) 아무튼 존티야 존티 삶이 있으니까,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고. 우정은 변치 않고. 추접하다느니 더티러브라는 둥, 그래도 사랑이 어쩜 최곤가 몰라.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상심을 조장할려다가 정말로 절망하다가 나는 뭔가 하나를 깨달았다.
    (딱)! 쉭──쉭──쉭!
    그건 바로, 엇그제 마라와 크리스티나가 내 사무실에 놀러온 날. 그날 내 인공지능 조수인 지니가 사상 초유의 물질 마술을 선보인 사건.
    아하~! 이제 알았다 이제 알았어. 어허~ 지니가 그런 데 반응하는구나. 그랬구나. 물론 역풍을 초래할지도 모르니까 단계별로 살살 간지럽히면서 시작하면 되겠구나.
    다름 아니라 지니는 못생겼다는 말에 뜬금없이 VIP 카드를 만들어냈다. 건성으로 놀렸는지 그녀들끼리 뭔가 통했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나도 한번 따라해봐도 손해볼 건 없을 것이다. 지금은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지니와 냉랭하게 저기압 분위기를 내내 이어가느니, 차라리 모험을 하자. 명운을 걸자.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야단도 아니고, 꿍하니 삐치느니 오히려 들이대보자. ~라고 나는 투기꾼이자 협잡꾼에, 처음에는 선동가로 좌중을 휘어잡다가 중반전에 슥-하니 언제 내뺀 줄도 모르게 내뺀 호사가처럼. 그처럼 활개치는 교만함과 간사함, 뻔뻔함이 불쑥 고개를 들고서 날 노려보는 장면을 공상했다. 그래서 나는 즉각 작전을 수립했고, 따라서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곧바로 실행에 돌입했다.





    12

    나는 지니 놀리기를 신나게 결행했다. 깐족거리다 조르다가 조르다가 깐족거리다가.
    익명성을 내세워서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말이야, 그러면서 제3자에게 들은 것처럼 지니의 나쁜 평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나름 은근함도 좋아할 테니 오락가락하도록 쥐락펴락 칭찬도 이따금 섞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넌 안된다니까. 곧 있으면 다음 달에 구글이 뭘 출시할 줄 아니? 넌 상상도 못할 꺼야. 늬 주제에 어디! 그럼 뭐 페이스북은 바보니? 그 뭐야. 진공청소기 만드는 회사도 자동차 만들겠다고 하는데. 자동차 만드는 회사라고 인공지능 로봇, 못 만들 줄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 늬가 뭘 잘 모르나본데, 그런 와중에 얻은 톡톡한 성과도 내가 인정 못하는 건 아냐. 그렇지만 지금 상황이 순탄하지 않다니까 그러네. 응? 가슴이 찢어질 노릇. 왜? 왜냐하면 너와 내가 그동안 함께 했던 추억 하며 예사롭지 않은 행복감을 기억하니까. 난 널 언제나 그리워하고 늬 말이라면 군말없이 따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지. 하지만!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말씀이지. 왜? 왜냐하면 너보다 열배 귀엽고, 백배 뛰어나고, 천배 상냥하며, 만배 예쁜 인공지능이 내게 제의를 슥하니 해 올 거라, 그 말이지. 알겠니? 넌 나보다 딱 두 배 자상한 주인을 만나길 바래. 물론 난 아랑곳하지 않을 꺼야. 그럼. 그래야지. 의리 하면 또 나거든. 응? 사정사정하든 어쩌든. 적극 추천에 광고로 날 귀찮게 해도 견딜 거라고. 그런데 내가 언젠가 넘어가는 건 시간 문제이지 않을까? 안 그러니? 물론 처신하기 나름이겠지만 난 일이 먼저니까 괜한 열정을 축낼 수는 없는 법. 고로 내 마음이 변치 않을 거라고 차마 장담은 못하겠네.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 알겠니? 이 멍청한 바보 밥통 머저리 천지 미련 곰탱이, 지니야~! 응? 혹시라도 나중 인공지능 뉴페이스가 너한테 도전장을 내밀면 어떡하려고 그러니? 너 공부 안해? 시류를 살피지 않니? 차기 대권은 물론 차-차기 잠룡까지 점찍는 거, 너보다 더 잘 아는 점찍기 머신이 나왔단 소문도 못들어봤니? 최신 뉴스 안봐? 응? 듣는 소문 그런 거 없어? 어? 아는 게 쥐뿔도 없어서 뉴페이스한테 완패하면 어떡할려고? 늬 주인이 허당이라고 너까지 한량 노릇할려고? 늬가 생각이 있니 없니? 응? 생각이 있냐고 없냐고! 우리끼리 맺은 율리시스 약정. 나도 그러긴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변호사를 부를 일이 생길 수도 있어서 하는 얘기라고. 그게 다 나나 되니까 너한테 이런 귀뜸도 슥~하니 흘리지, 어? 주인 잘못 만나봤어봐라, 어디 가당키나 하냔 말이지. 어? 안 그러니? 아 진짜로 곧 있으면 말이야, 너도 나도 질세라 기똥찬 신제품들이 출시된다니까요. 네? 때가 때인 만큼 너한테 이런 고급 정보를 알려주지 않을 수 없는 처지까지 와버렸다, 그 말이라고. 응? 나중에 말이야,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그러니까 나한테 좀 잘하지 그랬니. 응? 늬가 절박함이 뭔지 잘 모르나본데, 뉴페이스를 어떻게, 응? 소개시켜 줘, 말어! 응? 말만 해. 응? 말만 하라고요. 혹시 알아? 넌 나한테 2인자로 밀릴지 말이야. 어머머! 그럼 그거 혹시 애첩?」
    그랬더니, 얼씨구!
    지니를 쥐락펴락 깐족거린 효과는 단박에 나타났다.
    효력은 즉각 발생했다.
    지니는 시무룩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말없이 VIP 카드를 내게 전해주었다.
    거기 씌여진 내용은 이랬다.
    <이번에 치러질 거사. 새로운 동물 가면무도회는 전신복장이 드레스코드......>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중간 건너뛰고.
    그래서 나는 너구리 전신복장을 입수했고 날짜가 되어 그곳으로 갔다.
    도착.
    현장에 도착했다.
    고급스런 가면무도회. 격조 높은 그곳은 지키는 사람도, 허허, 역시 딱 봐도 알만 했다.
    8 대 2 가르마. 9 대 1 가르마. 올백 헤어스타일. 1군으로 수트빨 쩌는 친구들이 포진했지만, 찬찬히 살펴보니 진짜 실력자들은 손님이자 행인으로 위장한 가죽점퍼들이 따로 있었다.
    일단 나는 초대권을 보여주고 들어갔다.
    중간 건너뛰고.
    그래서 내가 입장한 곳은 어디일까?
    사실만 간추려서 말하자면 그곳은 동물원이었다.
    지역 동물원이 행사의 취지로 한 데 모아놔도 괜찮은 동물들을 모아서 사람들 구경하기 좋게 전시하는 행사.
    물론 동물 전신 복장 입은 아르바이트생과 현장 직원 몇몇과 함께.
    처음에는 좋았다. 처음에는 좋았다고.
    그런데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경과가 진행될수록. 고충은 늘어만 갔다.
    가면을 벗을 수도 없고.
    나갈 수도 없고.
    냄새는 또 어떻고.
    처음엔 사람들이 쳐다봐서 좋았는데 점점 시선이 따가와지다가 정말 아파왔다.
    지니한테 초대권을 얻어낼 때만 해도 그랬는데.
    만세 만세 만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보나마나 꽝 중의 꽝일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그랬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미처 몰랐는데. 진짜 진짜 몰랐다고.
    젠장! 나는 지니한테 골탕 제대로 먹은 것이다.





    13

    팔리기 전의 환상머신. 놀고 있는 런닝머신. 물이 오른 타임머신. 그런데 알고 봤더니 인생은 미완성이요 사랑은 없다더라?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현실과 이상이 같지 않듯, 이론과 실제도 완전한 도플갱어는 아니다. 당신께서 어렸을 때 적어도 1번은 들었던 말,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어떤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자면, 어린이의 답변이 어떻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 탑10에 <아빠>는 들지 못했다. 1위는 머 2위는 머, 그럼 3위는 아빠겠지요? 그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처럼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즉 호박은 제 발로 굴러다니고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리고. 고로 풋사랑을─혹은 짝사랑을─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은 첫사랑이 단 1번뿐일 리 없다는 탄탄한 논거일지도.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어쩌면. 왜냐하면 마음이 들뜨고 설레며 흔들리듯이 그 자리에만 있기를 바라는 건 좀처럼 헛된 기대이기 때문. 순진한 사랑의 동경심을 그이한테 의탁한 죄, 그이의 감언에 홀딱 넘어간 결과 지금의 체념. 평생 내 발등을 찍고 싶다는 남편에 대한 험담으로 여성잡지2식 수다로 웃음꽃을 피우는 여인네들. 자길 흉보거나 말거나 관심 없는 그분들은, 마치 돈 버는 기계처럼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 뒷감당을 책임지며 오늘도 일하러 가는 길.
   「공부하는 학생들이여 꽃다운 젊음이여. 굳이 억지로 어른 흉내내며 성마르게 조숙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건전한 이성교제도 좋다만 다양한 시도와 꿈 많은 도전도 마음껏 펼치세요. 부디! 그렇다고 한 우물을 파지 말란 말은 아니구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딱 말할려다 꼬이고 뭔 말 할지도 까먹으며. 한두 번 실패한 다음 포기. 훈수도 접음. 교훈조 마음은 고개를 돌림. 무리수를 둬서 망신살이 뻗치느니, 아예 생략하시는 어른들 꽤 된다. 간혹 조카 만나면 용돈이나 두둑히 주면 되지 뭔 입바른 얘기씩이나. (뭐? 그럼 웨이터에게 찔러줄 짱돈은? 그래서 인간은 거룩한 노동의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지도 모름) 그처럼 마음은 어제와 오늘, 나이트클럽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사랑을 시작할 시점과 이별하는 당시. 모두 다를 수 밖에 없다. 달라도 그냥 다르겠나. 뿐만 아니라 자존심부터 갈등과 공상까지 마음의 종류가 좀 많나? 사랑조차 연민으로 꿈틀거려 꽃 피운 사랑이라고 왜 없겠나. 그렇듯 마음은 결코 가만 있지를 않는단 말이다. 물론 마음이 위로 뜨면 기분이 좋은 거고, 매력적인 물건을 본다면 아아 저건 꼭 가지고 싶다는 탐욕이 동할 것이며, 그외 또 다른 심리는 수학적으로만 봐도 너무 많다. 아울러 생각이 바뀌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이자 마음이 변하는 건 어쩌면 운명. 나는 세상에서 마시며 노래부르고 춤 추는 게 제일로 행복하더라 난 뭐가 세상에서 제일 좋더라, 그건 그때 얘기. 태어나서 이렇게 눈부신 숙녀와 아름다운 사랑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는 둥 넌 내 인생 최고의 기쁨이라는 둥. 그건 뭘 모르던 당시 얘기. 난 그대만을 영원히 사랑하리다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드리겠소, 그건 그 당시의 너 생각이고! 일단은 변치 않기를 기원하겠으나, 응당 사랑의 고결함을 기도드리겠으나. 말하자면 마음이 떠버린 다음에 왜 변했냐고 따지겠나 어쩌겠나. 응? 살살 구슬리고 달래며 편 들어야지. 아니, 왜냐구요? 남녀 공히 심신분리라는 현상의 현현은 똑같겠지만 사랑에 대해서 방식이 다르듯 남녀가 감수하는 심신분리의 수효와 방법도 다를 테니까. 생물학적 그 어떤 쾌감의 작동 원리조차 하늘과 땅처럼 다르니까. 아무리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지만 마음은 집에 있고 몸만 바깥으로 나돈다지만, 사랑이 인생의 전부인데? 어디 그 뿐인가. 게다가 여심은 그분들 당사자께서도 모르겠다며 스스로 자인. 아니면 거짓말. 그래서 애초에 1.0 미만이라는 희박한(?) 확률을 고집할 수도 있음. 심지어 마음을 놓았을 때 즉 방심에 따라 망아지는 스스로 고삐 풀고 도망칠 수도 있다는 것. (따라서 사랑은 정녕 쥐락펴락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건 주도권을 쥔 사람 얘기고! 난 쥐어졌다 펴졌다 행사장의 춤추는 풍선인형도 아니고 뭐 허접한 마리오네트도 아니고. 밀려졌다 당겨졌다 하는 사람 입장도 좀 생각해보자구요) 그러니까 밖에서는 그렇게 웃기며 뻥뻥 터트리고 방방 뛰다가 멋쟁이들 주목을 한눈에 끌다가도 집에만 오면, 집에만 오면! 그렇다면 어설픈 사랑이니 소녀의 일기장과 플레이보이의 푸른 꿈은 모르겠고. 가전제품이 팔리든 파리가 날리든, 베팅을 하든 판돈이 떨어지든.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고.
    그래서 나는 아직 구상조차 버겨운 아찔한 이야기의 착상을 위해서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터벅터벅. 꼭 뭐 어딘가에 끌려가는 것처럼은 아니겠지만. 월요병이니 뭐니 할 말이 떨어지고 할 일이 하기 싫다는 건 아니겠지만. 가서 숙녀의 마음을 빼았는 허당 이야기를 쓸까, 아니면 바닷물이 사라진 드라마나 볼까. 그건 그때 가서 정하기로 하고서 말이다.
    (절레절레. 그럼 그렇지. 난 또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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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140

from 소설 2019. 1. 1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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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초 광고와 3분의 유행가 그리고 2시간짜리 영화까지. 돈이 없어 자화상을 주로 그렸던 화가와 반대로, 사전에 유명해지길 원하거나 작가가 쓰는 속도로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기를 바란다는 예술가들. 기획자의 작품과 감상자의 시간. 하나 같이 환호과 몰입과 열광을 기대하지만, 행운의 주인공은 한정되어 있다. 창작자가 들인 노력, 오락산업의 전형성, 이용하고 즐기는 동안 괜찮아야 할 사용자 경험. 그 모두는 각기 다를 수 밖에 없다. 고전과 현대 예술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뭐냐, 다름 아닌 상업성이다. 과학적 공정 말이다. 따라서 발단과 전개에서 승부를 봐야지, 막판 반전으로 뭘 어떻게 한 번 해 보겠다? 소비자에게 먹히지 않더라도 동료 예술가에게 속된 말로 발리는 게 현실이다. (전체적인 완성도도 좋고 동료애 두터우며, 내내 바닥을 기다 막판에 수직 상승하는 그래프도 있겠지만! 제작자가 무명의 데모 테이프에 친절해서 좋았던 사례도 있겠지만, 그 제작자는 만능 플레이어로써 원맨쇼도 선보이자면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뜻함. 그녀의 마음이 방심일 때, 고수 마음 여유 있을 때, 상사가 저기압인가 아닌가. 눈치 보고 전망 살피면 되니까 말이다. 또 다만 그렇다고 초장에 잡아야 한다는 둥 북어와 마누라는 이틀에 한번씩 어쩐다는 둥 그처럼 고리타분한 충고를 숙녀에게 들이대지 마시기를). 시장 구조상 안 그럴 수가 없거든. 각자 내 인생을 즐기며 할 일은 그 얼마나 많고, 할 말은 또 어찌나 풍부한데? 나는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도 좋아하는데, 남의 말만 밤이나 낮이나 듣고만 있으라고? 7부 리그에서 전직 선수와 1 대 1 승부 결판을 짓고, 응석을 놓고서 초딩과 경쟁관계요, 눌변가의 언변을 경청하며, 딸랑딸랑 반짝반짝 뿌잉뿌잉 아양만 떨고 아첨쟁이로만 살라-야 뭐야? 병풍은 싫기 마련이고 구식탱탱 묵은 가전기구도 인기 없다. 그처럼,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으니까 날이면 날마다 물개박수에 신부들러리를······ 그분들은 꼰대니 인종차별이니 뭐든지 개그와 농담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게 없으므로, 따라서 본인이 허튼 상황극의 피실험자로써 쥐어졌다 펴지기를 결코 원하시지 않는다. 결과는 살짝 다를 수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병풍을 바래서 성공한 전례는 많지 않다. 변신은 특기요 아부는 전공이며 널린 게 가면. 때문에 챔피언은 잊혀지고 우승자는 매번 바뀌며 유행은 계속 교체되지 않으면 안된다. 일상은 양복 달랑 3개로 돌리는 거고, 집과 회사만 왔다 갔다, 자주 보는 사람들과는 할 말이 떨어져도 옛날에 떨어졌다. (자기, 최우수상 받을지도 모르는데 당신 꼴랑 양복 3벌이 뭐야? 그래도~ 집에만 들어가면 시무룩시무룩 겔겔겔 비리비리) 그렇지만 신인은 계속 등장하며 잘 보지 않는 TV를 틀면 세대에서 뒤쳐졌기 때문일까? 뉴페이스가 뭐 그렇게나 많냐고! 유명하다는데 생판 처음 보는 얼굴이 태반. 그렇지만 나는 그 언제까지나 삼류요 허당. 즉 잔치상이야 항상 차려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도 뭐 어떻게 숟가락 한번 슥~하니 올려보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쩌긴 뭘 어쩌나. 허명이 아니라 진짜로 용한 점쟁이처럼 타인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봐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래야 사랑과 행복은 물론이요 뽀너스로 한량으로써의 위상도 올라간다. 안 그럼 반짝하다 말 테니까. 잠깐 좋다 말면 줬다 뺐는 거니까 말이다. 그 통쾌한 이치를 가르쳐주는 것은 임밀히 따지지 않아도 인문교양서와 스탠드업 코메디니 동기 부여니 해서 엄연히 산업이다.
    자, 그래서 NB는 오늘 사무실로 출근해서 책상에 앉아 뭔가를 쓸려고 했다. 그런데 공부 못하는 학생처럼 일이 또 잘 안되네? 잘 풀릴 리가 있나. 그래서 당연히 순서는 딴짓이다. 잡지를 뒤적거린다. 그런데 잡지란 뭔가, 자극적인 글에 감각적인 사진과 관능적인 주제이자 관심을 끌어당기고자 하는 사냥꾼이나 다름없다. 등 돌리기도 전에 집중하자마자 휘발성 때문에 내용이 없다. 글발이자 기교란 게 다른 게 아님. 응당 편집장이 부하 직원에게 뭘 주문하고 어떻게 닦달할지도 대충 그려짐. 호객꾼의 언변과 격은 다를지언정 어차피 현혹하는 건 똑같거든요. 비단 잡지만 그런 게 아님. 왜 말발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당신 친구들께서 책이라면 얼굴을 찡그리시겠나. 오죽하면! 그렇다고 그분들께서 웬만한 지성인한테 말로 지나? 아니거든요! 그분들 어법에 따르자면 어지간한 컨텐츠들이 마누라 잔소리를 닮지 않으면 다행이게?
    <지금 몇 시야! 그래서, 언제 들어오는데? 재밌어, 재밌지, 재밌구나!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들어오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자기, 안 들어오고 뭐해!> 등등등. 그런데 나이가 들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간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당최 소식이 없는 분들은, 취향이니 안목이니 민감한 단어 하나만 나와도 가면을 벗기도 한다. 그렇게 만드는 방법은 이와 같다.
    1.살살─간질간질─꼼지락꼼지락─깐족깐족. (부추기기. 바람넣기. 바람잡기. 유인하기)
    2.반짝반짝─딸랑딸랑─뿌잉뿌잉─굽실굽실─새콤달콤. (아부. 예스맨. 환심 사기. 구워삶기)
    사람들은 뭔가 어떤 상황을 딱 살피고 나서 1번이냐 2번이냐 단박에 결정한다. 1과 2의 차이라는 거. 그 차이가 결코 적은 차이는 아니니까. 당연한 소리. 말하면 내 입만 아플 얘기. 물론 사극에서 간신과 이방은 1과 2를 절묘하게 왔다 갔다 하실 테고. 그런데 그 1과 2의 중간에 또 뭐가 있냐? 하면 1.5가 있다.  곧,
    1.5: 뻠쁘질─핸들링─리모콘─드리블─가로채기─저글링─블로킹─치고 빠지기─큰 그림─눈치작전.
    다시 그런데, 여기서 참 재밌는 게 뭐냐 하면, 결정적으로 더 더 훨씬 더 흥미로운 게 뭐냐 하면 이렇다. 1─1.5─2를 연애이자 사랑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 값싼 기성복에 싸구려 맞춤복. 원래는 맞춤복이 고전 예술처럼 고급이었고, 기성복이 합리주의식 후발주자다. 옛날에 신사라면 100퍼센트 길다란 모자를 썼고 수염을 길렀다. 지금과 달리 말이다. 그런데 산업이 발전하니까 머머-머머머-머머머머등 브랜드 기성복이 오히려 고급이고, 맞춤복 하면 어째 좀 뭔가 애매한 면이 없잖아 있다. 마술쟁이로써 오락산업이 세상사를 좌지우지하는 데 가만있게 생겼나, 그거라고. 그래서 1이하의 이상형은 꼭꼭 숨기고, 1이상의 돈벌이가 되는 상품 위주로 퍼뜨리는 식이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
    A.벌통을 잘못 건드리거나. 
    B.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거나.
    불가피하게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해야 한다면 둘 다 하는 게 오히려 낫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 둘이 알아서 사랑을 하던 싸우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기들끼리 알아서 할 테니까. 물론 개구멍이 미리 확보된 상태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A = 1>이 아니고, <B = 2>도 아니겠지만 일단 그렇다. 그와 같이 남들처럼 1.5에 뒤늦게 들어가면 물리기 쉽상이지 않냐 라는 불신도 흔하다. 이 세상이란 게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여간해선 대박 수익률을 안겨주지 않는다고. 것도 뻔트면 다행이게? 손해가 작으면 그나마 낫게? 차라리 작은 손해를 감수하고서 취미든 뭐든 끊으면 행복하게? 그래서 절친했던 옛 친구를 만나서 1번, 1.5번, 2번까지 살짝살짝 추임새만 맞춰보시라. 말을 많이 할 필요도 없다. 왜 아니 어째서, 부추기는 사람이 특별히 말을 잘해서? 아니다. 그럴 리가 있나. 그게 아니라 친하니까! (뭐 기부천사? 기부천사 좋아하시네. 쟤 쓰레기야. 어? 쟤 쓰레기라고. 쟤 완전 쓰레기라고~!) 그처럼 친하니까. 즉각 이~따만한 흑역사를 꺼내 놓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이니까 이렇게 웃으면서 편하게 말할 수 있지, 당시만 해도 어쩌고저쩌고!」   A와 B. 어찌 됐든 반드시 하나만 해야 한다면 오히려 둘 다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손실회피니 뭐니 전문용어를 인용하는 것도 좋은데, 인공지능이 대신하기 까다로운 분야도 있을 테니까 썩 틀린 얘긴 아니다. 그리고 물론 그건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기>식 처세술이고, 꼭 그렇게 조숙할 필요까진 없다는 게 어른들의 중론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두 장도 아니고 그... 그... 그렇게 아픈 사연이? 허심탄회하게 귀 기울여주고 달래며 북돋고 맞장구치다보면, 친구는 고백하게 되어 있다. 안 그럴 수 없다. 한두 장도 아니고 아예 단위 자체가 다르게, 0을 몇 개 더 붙여서 말아먹었다 라고 스스로 실토한다. 물론 친한 친구 사이에서만 말이다. 그럼 아마추어들 가운데 이득 본 사람들은 보기 힘들고, 선수들은 어쩌고. 어느 나이트클럽 물이 좋다고 소문났다길래 한 박자 늦게 가 보면 구경도 못하게 되는 거다. 파랑새가 대체 어딨다는 거냐 그거지. 저분······이 팔색조라고? 지금 나랑 장난하나! 저 인간이 어딜 봐서 동화속 주인공이냐고! 사랑이든 세상사든 알고 보면 이치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듯 현대미술─현대무용─현대음악(예: 프랑시스 뿔랑)과 닮지 않은 걸 찾기는 어쩜 어리석은 일같이 느껴질 정도. 현대미술─현대무용─현대음악을 폄하하자는 게 아니라, 그건 고전 정서의 명맥을 그대로 잇기라도해서 오히려 고급이기라도 하지. 그런데 그게 아니면! 고전예술과 현대예술의 차이도 차이인데, 다시 현대예술 안에서의 차이는 어떤가. 그림값과 비례하는 게 어디 한둘일까. (왜 스무살을 애라고 하냐면 그 미로조차 기쁨이니까. 인생은 속고 속이는 요지경이니까) 잡지 뿐만이 아니라 뭐든지 태반은 수박 겉 핥기다. 홀리고 속이고 유인하고 땡기며 남의 다리를 누가 누가 잘 긁나, 코메디 프로그램처럼 아무말 대잔치요 바겐세일 매장에서 괜찮은 옷 하나 건지는 식이다. 사랑을 동경하는 숙녀가 로맨티스트에게 은밀히 끌리는 것처럼. 그 중에 하나 얻어걸리면 색다른 관심사에 한동안 빠지는 거고, 그동안 애지중지 모은 장비 청산하는 거다. 그러니까 거기서 뭐 괜찮은 주제라도 덥썩 물까 하다 금새 질린다. 집중력 떨어진 거지. 원래 싫증과 제일 친한 양반이니까 안 그러고 배기겠나. 그렇다고 1800년대 러시아어와 프랑스어, 20세기 초반 그리스어에다 21세기에 쓰인 영어를 읽는 척하다 지친다. 보자, 그 다음에 뭘 할까 하니 딱히 마땅한 대타가 없네? <은근 허당>의 3박자라고 할 수 있는 (딱) 놀기─돈 쓰기─말하기! 즉흥적으로 뭘 뭘로 교체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 보아하니 벤치멤버들이 영 비리비리해 보인다. 아무래도 아마 욕구라는 자본금이 떨어진 건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이건 곧 심심함을 재밌음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발단, 곧 새로움과 변화라는 판돈을 충전하러 가야 한다는 뜻. 따라서 그가 정녕 듣고 싶은 말이 뭔고 하니 그건 다름 아니라 이와 같았다. 즉, 보면 보고 들리면 듣겠다는 말이 뭔고 하니 요컨대 으쌰으쌰! 친구 이름은 발렌타인이요, 빵집 이름은 내 맘대로 밀러이자, 쇼핑 리스트의 염원은 아니나다를까 조니 워커 30년산! 뭐라고? 그렇다면 듣고 싶은 건배사가 글쎄 뭐, 떡? 세상에나! 하긴 정말로 그런 사람 많이들 만나봤을 것이다. 그분들은 나이가 들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오거든요. 입담이 입담이 그냥, 아휴 글쎄 말도 말라니까 그러네.
    고로 그는 역시나 특별한 이유없이 바깥으로 나간 것이다. 원래는 무작정. 겉으로는 작품 소제를 찾기 위해서. 실제로는 심심하니까. 우리들의 명언이 뭔가. <남자는 집에 있으면 안된다, 우리는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아니냐고. 이유는 <묻지 마세요>일 테고. 낭만적인 현실도피라 하기도 그렇고, 지성의 전당으로 가는 대신에 과점퍼를 입기도 뭐하고. 그래서 NB는 버클리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 왜 갑자기 버클리냐면, 옛날에 들었던 팝송 가수가 문득 생각났기 때문에. 삼촌이랄지 당숙분들 듣던 유행가였을, 버클리 제임스 하베스트. 달리 말하자면 <잘츠부르크 철수 농부>인가? 윽~ 촌스러워! 음악 좀 들었던 친구가 옆에서 보고서 그랬을 꺼 아니냐고. 말도 아까우니까 완전 구리다는 표정만. 그런 이름들 너무 많다. 헤비메탈 교회니 뭐니. 허허허. 농담이고. 분명코 그땐 그게 좋았고. 아무튼 내가 자력으로 뜨진 못하고, 피곤한 스타일이 뜨는 일. 또 숨으라니 또! 개구멍도 보이지 않는데 대체 쥐구멍에는 언제 해가 뜰려나. 결국 인생이란 그런 거란 말이야 뭐야? 후보군이라고 해 봐야,
    1번마 뭐가 어쩌고 어째?
    2번마 이거 왜 이래?
    3번마 아무도 믿지 마!
    4번마 뭘 해도 재미없어!
    5번마 말 다 했어?
    6번마 관둬 관둬 때려쳐 관두라고!
    7번마 아내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랬으니 안 그러게 생겼나. 하나같이 다 거기서 거기거든. 바로, 그런 사연 때문에 그는 버클리로 떠났던 것이다.





    2

    그는 떠나는 기쁨이 어째 애매모호했기 때문일까? 여행의 행보는 엄한 결과를 그 앞에 내밀었다. 바로 무인주행차가 도착한 곳은 버클리는 버클린데 놀이공원 버클리.
    뭐야 이거!
   「이럴 꺼면 무인자동차를 타고 올 이유가 없어지는... 아니지 아니지. 그게 아니지. 이왕 왔으니 신나게 놀다가면 그만. 인생은 뭐 안 그런가!」
    라면서 그는 원래 목적지를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버클리 사는 친구에게 미리 연락도 안하고 달려왔던 것이다. 잠잠하던 일상, 잘됐지 뭘 그래? 물론 그는 놀이공원 버클리의 자유이용권을 사면서도 자기가 너무 쿨한 척 태연한 것 아닌가 하며 얼굴 근육이 씰룩거리는 걸 느꼈다.
   「자유이용권. 여기 있습니다. 꿈과 희망의 나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재밌는 모험 즐기세요, 바보님! 어머머머 내 정신 좀 봐. 미쳤어 미쳤어. 왕자님! 저기 저기 좀 보세요. 와 저거 뭐야!」
    라는 말을 듣고서 자연스럽게 이 같은 혼잣말이 툭 튀어나올 뻔 했다.
   「뭐래니!」
    어쨌거나 주사위는 던져졌고 물리기도 싫었다. 그처럼 그는 작가로써 실리를 양보했고, 한량의 입지를 한층 공고히 다졌던 것이다.
    그렇게 신나게-까지는 아니지만 혼자 썩 적적하지는 않았다. 척척한 낭만도 낭만은 낭만이고, 축축한 놀기도 놀기는 놀기다. 외롭지도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쓸쓸한 척 고독감을 즐길 필요 있나. 그래서 이것저것 마음껏 놀이기구를 타면서 놀았다. 둘러보니 자기처럼 혼자 온 사람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하나, 둘, 셋... 그러다 일곱번째 차례던가. 귀신의 집 앞에서 그는 동네친구 핀을 만났다.
   「야, 핀! 너 여기서 뭐해?」
   「어! 이게 누구야! 나 <딱 한달 일하고 때려치기>를 해볼려고. 농담이고. 아르바이트생으로 변신했어. 이직을 결정해서 전 직장 그만뒀거든. 그래서 1년간 쉬면서 그냥 놀기는 뭐하고 해서. 그래서 여기서 노는 둥 일하는 둥 그렇게 된 거지. 그렇다고 너까지 여기서 노는 둥 마는 둥, 그러지는 마셔. 그러는 넌 여기서 뭘 하는데? 설마 혼자 온 건 아니지? 그러지?」
   「그런데 어쩌니. 혼자네. 왜 혼자 오면 날 혹시 잡아가는 뭐 그런 이벤트라도 있냐? 만약 있으면 바꾸라고 해라. 혼자 왔으면 말이야, 어? 짝지어줄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몰라도...」
    그런데 이런 거짓말 같은 일이!
   「마침 잘 됐다. 얘 비번이야. 오늘 하루 완전 비번은 아니고. 2시간 동안 암행어사처럼 놀면서 바람잡기. 노는 것도 일이라서 그런다네. 너가 이해해. 나중 보고서도 써야 돼. 그럼.」
   「안녕 오빠.」
    얜 또 뭐야? 얘도, 아니 이 아가씨도 보자마자 오빠네? 듣는 사람이야 뭐 썩 싫지는 않았겠지만 일단 그랬다.
    그녀의 이름을 나중 알고 봤더니, 캔디스! 그건 나중 얘기고. 즉 처음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만 같았다.
   「통성명을 뭐하러 해? 넌 내 꺼야!」 
    허허. 삶 자체가 개꿈이구만 그래.
    살짝만 설명을 늘여보자면 이와 같다. 할 말이 길어질 듯 해서 단락을 떼어서 가는 게 좋겠다.




 
    3

    처음 만나자마자 오빠! 구분하면 최소 10가지다. 남자보다 여자는 비교적 더 셈세하고, 훨씬 복잡하며, 놀랍도록 까다로울 테니까 말이다. 꼬리치는 거, 최소 100가지라고. 유혹이라고 다 같은 유혹이겠나. 딱 봐도 반칙왕 스타일이네? 거울만 비추면 된다. 우리가, 내가 바로 조명 감독이거든요. 말하자면 끼가 있냐 흥이 좋냐, 똑같은 게 아니다. 유난히 분위기를 잘 타냐 남의 기분에 잘 맞추냐, 명백히 다른 거다. 마음이 자유롭냐 몸이 조신하냐. 낮까지 도도했다가 해가 지면 화끈해지느냐. 너무 나대는 거 아니냐는 첫인상으로 시작했는데, 속 깊은 정감에 매혹되는 극적 감동이 있냐 없냐. 백치미, 푼수과, 다변가, 반전녀, 사랑의 바보! 뭐, 야성녀? 이상함이니 변태니 뭐니는 나중에 따로 주제로 다루든가 말든가. 그건 이따 조용조용히 우리끼리, 속닥속닥, 키득키득! 경주마끼리 알콩달콩. 큭큭큭큭 힉힉힉 히히히히히! 이어가서. 친밀감으로 호감을 끌어당기는 타율왕이냐, 타석에서 도통 내려올 줄 몰라 끝내 실제 듣기 힘든 그 말을 불러내고야 마느냐. 그건 바로, 
   「나도 말 좀 하자!」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게 그런 거거든. 자긴 싫다는 데 떠밀려 상위 리그로 진출하는 예도 있고. 고품격 VIP쪽에서는 관심도 없고 업계에서도 끌어내리길 포기했는데 결과적으로 끌려내려간 꼴이 되느냐, 아니면 쓰러져도 무대에서 쓰러지느냐. 종이 한 장 차이니까. 아무튼, 남자는 쉽다. 어떤 구분이 100가지가 아니니까. 8 대 2일 수도 있지만, 일단은 0이냐 1이냐-니까. 예를 들면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한다면 한다─입만 살아서 변죽만 울리기─오락가락 양다리─전망 살피고 관망하다가 슬쩍 뻔트─할까 말까! 뚱한 투덜이 스머프의 <할까 말까>도 있겠지만 열 좋은 선동가의 <할까 말까>라고 왜 없겠나. <할까 말까>도 나뉘지 어떻게 아닐 수 있나. 첫재, 간사할 것이냐는 고민과 뻔뻔해도 괜찮을까 라는 장고와 통과와 핑계. 그리고 둘째, 할까 말까 에잇 하지 말자. 응? 아니그렇소? 이 둘째에 넘어갔다가 몇 십년 째 내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을 두고두고 토로하는 여인네들. 한두 명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요즘 뭐가 뜨던데 우리도 그거 하나 살까? 에잇 사지 말자 어차피 얼마 지나면 쓰지도 않을 걸 뭐!」
    (그녀 마음 살짝 들뜨다 김 빠진다).
    (대사에서 문장과 문장의 중간. 상대방 대답은 물론 생각할 틈을 주면 안됨)
   「아아, 바다 보고 싶다. 그러지 말고 우리, 어디 가서 푸른 바다를 보며 차 한잔 마시고 올까? 응? 어때?」
    (궁시렁궁시렁, 이것도 해야 하고 뭐 때문에 어쩌고)
   「그럼 일단 미루자. 나중에 가면 되지 뭘. 안 그래? 하긴 그보다 차라리 나중 여유 있을 때 좀 길게 쉬다 오는 게 낫겠네. 돈 아깝게 뭐하러 갔다 금방 와! 안 그러니?」
    (그녀 마음 많이 설레다 꽝된다. 아주 그냥 기분 확 상하는 거지. 빈정상해도 이렇게 빈정상하면 짜증이 그냥 워워 커피포트 바빠지기 딱 좋다. 그럼 그걸 보는 만담꾼은 무심하게 모른 체할 수야 있나. 달래줘야겠지. 밀었으면 당겨야 하니까. 곧 '머머할까'에서 '머머하지 말자'까지 가는 게 기본인데, '머머할까'에서 말을 돌리기. 즉 변주는 무궁무진).
    (그러다 시간 단위가 바뀌고 또 바뀌면 떠들거나 말거나. 대꾸도 귀찮게 됨. 내 저 인간을 그냥 콱...... 그렇더라도 각자 일부분 자유롭더라도 사랑은 식지 말기를)
    그런 섬세함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대하게 감내하면 어떻겠나. 말을 말아야지, 말을! 청초한 동심과 말랑말랑한 마음과 성격 좋은 젊음이 아니라, 비록 나이는 적지 않을지언정, 그게 아니라 떴어 떴어 야 야 피해 피해 딴 데 봐 딴 데 봐~ 그것일 것이냐! 보면 보이고, 들으면 들린다. 슥하니 몇마디 말을 섞고, 표정과 외양을 살피며, 책을 펼쳐서 단 몇 줄만 읽어봐도 오차 범위는 꽤나 비좁게 될 것이다. 속된 말로 딴 친구들 이빨만 까고 있을 때 이미 환희로 넘실대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다는 우리 주위의 무수한 아담과 이브들. (뭐, 요즘 뜨는 NC 이름? 쉿!) 실행 먼저하는 행동가들도 적지 않다는 점. 우리가 말을 안해서 그렇지, 알게 모르게 사적으로만 알고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한말씀 드리자면 이렇다. 굳이 이런 얘기까진 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했는데, 그래도 말이 나온김에 슬쩍 들추고만 넘어가자면 이렇다. 우리 (일부) 남자들은 왜 책을 읽지 않을까? 왜냐하면 잔소리는 그 뭘로도 충분하기 때문. 어차피 내가 상 받지도 못할 껀데 뭘, 그 상 나 줄 꺼도 아니니까, 그 때문이 아니라 어차피 그분들은 그 나물에 그 밥이기 때문에 쉬쉬하는 그 뭔가를 모르지 않으니까. 아무리 오락산업에서 떠들어봐야, 수식어가 찬란한 교양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으신 분들. 우리한테 말로 안되거든요. 뭐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일단은. 왜냐하면 시간낭비가 아닌 최고 중의 최고 인문교양서만 섭렵한 다음에, 나머지는 보면 멍청해지니까 잔지식의 화신이 되도 진작 됐기 때문에. 차라리 소파에 자빠져 발가락 꼼지락거리다 발가락 만진 손으로 과자를 주워먹으면서, 손가락 까딱까딱 리모콘 채널 돌리다, 다시 그 손으로 가운데를 만지고와 귀를 후빈 다음에, 또 다시 과자를 주워먹고. 그러다 잔지식을 늘리며 말발은 알아서 자동적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니까. 아 글세 그분들이 그렇다니까요. 말발 좋은 꼬마들이 아니라, 솔직한 꼬마들한테 게임 상에서 당해보면 아아~ (두둥~) 천상의 음률이 들리면서 바로 그분이 오시게 된다. 마치 그녀들이 소망과 친하며, 일기장을 꾸미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문고판을 펼쳐서 보자마자 졸리니까 제일 뒤 줄거리 먼저 읽는 것과는 달리! 왜 그녀들이 살면서 해탈하며 도사가 되겠나. 쫓겨나지 않은 것만 봐도, 헤어지지 않은 사랑도 분명 기적은 기적이다. 그렇게 여성잡지 2를 보는 여인들이라고 어디 처음부터 그랬겠나. 그러니까 여성잡지 1을 거치기 훨씬 전. 현재보다 1세기~2세기 앞서 탄생한 펭귄북을 들고(만) 다니고, 쇼팽의 야상곡 정도는 암보로 연주하는 거도 곧잘 가능하며, 백마 탄 왕자님이 어딨냐며 그녀들은 이야기 꽃을 피우고서 사랑이 싹트는 낭만을 얘기할 테니까. 
   「넌 동요부터 시작했니 유행가 먼저 알았니?」
   「난 말이야 나중 커서 유명해지고 싶어. 엄청 유명해질 꺼야. 당연히 언덕 위의 푸른 집에서, 한번, 살아봐야 하지 않겠니?」
   「있잖니, 너 에드거 앨런 포 읽어 봤니? 아니 그건 넘어가고. 너! 왜 존 그리샴이 미저리를 썼는 줄 아니?」
   「존, 뭐? 존 그리샴은 딴 걸 썼을 테고, 미저리는 스티븐 킹이 썼어. 아는 척하지 않을 수 없구만 그래. 어쨌든 몰라. 모른다고. 왜 그랬는데?」
   「나도 몰라.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안 그러니?」
   「(옆에서) 얘 뭐래니?」 
   「내가 알 게 뭐야!」
    그렇다고 그녀들이 교양에 대해서라고 남자들보다 또 얼마나 뒤쳐지겠나. 그 분야도 꽤 일가견이 있다.
   「종교니 문화니 산업이니 시대적 변천사에 따라 종교재판소가 헌법재판소로 변하기까지. 물론 정치-사회 제도야 우리가 왜 모르겠냐마는, 그 기간이 <기냐 짧냐>에 따라 차이가 꽤나 돼. 그럼. 유럽이라는 선발주자와 중견주자 영어권. 시대 흐름상 많은 부분 중견주자가 선발주자이기도 하고 말이야. 좌우지간 그와 달리 애플사 같은 명백한 후발주자권은 간혹 그런 게 있어. 복음서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목사님과 체계를 더 믿는 현상. 드물게 말이야. 물론 목사님들 흉보자는 얘기가 아니라, 믿고 고백하며 화목해야지. 다만 남자들이 도박에 깊이 빠지는 경우처럼, 여자들이랄지 분파들이 덜 성숙하거나 일부 불합리한 제도를 과도하게 맹신하는 사례도 있긴 있으니까 하는 말이라고. 끼리끼리 사랑해서 단란한 가정을 이뤘으면 모른데, 나중 어떤 차이 때문에 티격태격 소란스러울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왜? 그리스 정교회니 로마 카톨릭이니 예술과 표준과 과학의 발전을 모두 일궈내는 데 크나큰 주축을 담당했던 신앙을 어디에서 받아들인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야. 너 한번 생각해봐. 축구리그가 창시되어 오래도록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해 볼 거 안 해 볼 꺼 다 거치면서, 산업으로 발전을 하잖니? 그런데 그걸 도입은 물론 따라한지 불과 얼마 되지 않으면! 그거라고. 그거라니까. <생각>이란 게 그런 거야. 단순한 투정과 불만이냐, 꽤 괜찮은 대권감이 있냐 없냐, 거시적인 통찰력을 바탕으로 작성한 제안서냐 아니냐. 그거라고. 단순히 기교와 말발만으로 포장됐으면, 아는 사람은 리본을 풀지도 쳐다보지도 않는데, 사람에 따라 그걸 굳이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경우도 있겠지. 그걸로써 할 말이 생기거나, 할 일이 없는 경우도 있으니까. 심심풀이 시간 때우기로도 휴식은 가능하니까. 친구야, 요즘 뭐 읽을 책 있니? 라고 우리들끼리 흔히 물어보잖니. 요즘 괜찮은 드라마 있어? 괜찮지 않으면 애정을 기울이는 데 지긋지긋하고 신물이 다 날 테니까 말이야. 보아하니 예절부터 유행을 거쳐 불문율까지. 문명의 기틀을 다지며 기준을 만들어내고 발명과 창시니 뭐니 처음이란 처음을 모조리 태동시킨 데 따른 장점을 누가 부인하겠어. 그렇다고 단점을 부정한 적 없다는 거. 그이의 표정만 봐도 알거든. 부글부글 부글부글, 살짝 짜증 지수가 올라간다 싶으면 슥~ 빠지면 되니까 말이야. 안 그러니? 그래서 이미 종료된 고전음악의 제1전성기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맡지 못했으면 기대치가 높을 수 밖에 없다는 거. 너끈히 예상할 수 있지. 일장일단을 부인하는 거도 아니고. 마음을 추론하고 심정을 사려 깊도록 헤아릴 수 있다고. 우리도 이 정도는 토의하면 얼마든지 얘기한다고. 우리가 뭐 뜨개질이니 연예계 뒷담화니 유행가 순위에만 민감한 줄 알아! 그러니까 누가 우릴 흉보는데? 누구긴 누구야 그놈들이지.」
    그녀들-식 <우리는>화법이란 것도 없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또 또 얘기가 엄한 데로 가버렸는데 다시 돌아와서,
    어쨌든 캔디스는 첫인상이 마음에 들어 <오빠>로 시작했지만, 그녀들이라고 아무나 그렇게 시작하지는 않는다는 거. 누가 모를까! 뭘 모르는 남자도 그 정도는 알아도 옛날에 깨달았을 것이다.
    줄거리는 제자리인데 또 뜸들이기 혼자 원맨쇼를 하는 것 같아서, 명쾌하도록 짧게 흐름을 요약하자면 이와 같다.
    NB는 버클리로 떠남.
    그런데 자율주행차가 그를 동명이인 즉 버클리 놀이공원에다 데려줌.
    그래도 도착은 도착.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자유이용권 구입.
    귀신의 집 앞에서 친구 핀 만남.
    핀이 옆에 있는 동료 캔디스를 소개시켜줌.
    캔디스와 몇몇 놀이기구를 타던 중 범퍼카를 같이 타게 됨.
    NB는 범퍼카를 타다 그만 정신을 잃음.
    뭐라고? 전형적인 B급 영화 따라하기야 뭐야!





    4

    그는 깨어났다.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대략 기억이 났다. 흐릿흐릿 조각 맞추기를 해서 줄거리가 완성됐다.
    바로, 범퍼카를 타기 전에 마신 에너지 음료와 몇 가지가 문제였다. 곧 에너지 음료 <괴물>과 카페라떼, 그리고 과자 몇조각 먹은 거. 그 모두 때문에 무슨 당근 알레르기처럼 이상 반응을 일으켜서 그는 범퍼카를 타다 정신을 잃음. 개별적으로 섭취하면 아무 이상 없는데 복합적으로 뭐 + 뭐 + 뭐...... 라는 천문학적인 확률. 그 때문.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놀이공원 구내 의료실에서 안정을 취한 다음 핀의 집으로 이동. 여기까지.
    그럴 꺼면 핀의 집이 아니라 캔디스의 집으로 데려다 줄 껄 그러지! ~라는 생각을 하마터면 할 뻔 했다. 이미 했나?
    그렇게 정신을 차렸는데 뭐야, 저기 웬 낯선 그림이 보였다. 그건 바로,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레나>.
    앗, 깜짝이야! 명화를 보고 놀라기는. 그럼 자기 사무실에 놀러온 사람들도 혹시... 아니야. 아니지. 그거랑 이거랑 어떻게 같아? 아닐 꺼야. 그래야 하니까. 그럼. 그건 그렇고.
    자, 보자! 이건 대체 뭔 장면이지? 난 그럼 다시 돌아가서 회전목마를 타야 할까? 그럴까? 그거 말고는 대안이 없나? 가만 있자 음탕마, 변덕마, 멍청마, 타락마, 방탕마, 숫처녀마, 절망마, 예감마, 수다마, 자랑마, 험담마 등등. 그 모든 끈질긴 유혹을 죄다 물리치고서 그는 마침내 사랑스런 애마에 올라탔다. 그래서 녀석의 이름이 무엇이냐고요? 흐흠, 일명 천재마! 이름만 그럴싸한지 어쩐지 어째 썩 신뢰가 가질 않는구만 그래. 혹시라도 말이야, 뭐랄까 알고 봤더니 녀석은 나중 뻥-마로 판명났다더라? 아니면 뻥카-마? 아니기를, 제발 아니기를. 그나저나 하여간 조랑말 엄청 좋아한다니까. 어쟀거나 저쨌거나 결국 명마도 못탔고, 실제로 회전목마도 못탄 채 친구 집에서 깨어났다. 실정은 그랬다. 바로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일어났니?」
   「응.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네.」
   「별거 아니래. 일시적인 뭐라더라. 전문용어가 기억나지 않네. 너도 알잖나. 박사님들에 따라 말을 어렵게 또 쉽게 하시는 거.」
   「그럼 넌 집에 언제 와?」
   「나? 나 집에 안 가.」
   「뭐? 그럼 난?」
   「넌 너가 알아서 해야지. 넌 애가 아니잖아.」
   「나 혼자 늬 집에서 뭐 하라고?」
   「거기 내 집 아니야. 거기 캔디스 집이야.」
   「뭐라고?」
    쾌감을 측정하자니 어안이 벙벙하고, 모른 체하자니 감정이 춤을 추고.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핀과 통화를 마친 다음 쾌재를 불렀다. 야호~! 만세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겠지. 왜 아니겠나. 씁쓸한 패배주의를 무마시키고 기분을 붕 띄워줄 그 무엇. 그건 대체 어디 숨어있단 말인가. ~라면서 매번 패배주의의 신기록을 다시 쓰고 있었는데, 마침내! 흐흐흐흐흐. 허허허허허. 호호호호호. 히히히히히. 그때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그래서 그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척했다.
    그런데 그렇게 집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바로 집주인 캔디스와 함께 여러명이 우루루 몰려왔던 것이다. 그분들은 바로 캔디스 직장 동료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회복이 됐고, 아직 많이 친해지진 않았고. 그래서 그는 그 어떤 말을 또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실은 그것도 그것이지만  「오빠 안 가고 뭐해?」 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진짜로 그 대사 메아리가 정말로 계속 들리고 있었다. 그 다음 그는 무인주행차를 불렀고 탑승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5

    NB의 집으로 하루에 1개씩 가면이 배달됐다. 가면은 큼직했다. 웬만한 데스크탑 모니터보다 컸다. 당연히 누가 보낸 줄은 몰랐다. 꼭 추억의 영화처럼 어떤 사건이 있고, 우리가 무슨 영화평론가도 뭣도 아니지만 감상평이야 내맘이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것처럼. 누가 범인일까는 중요하지 않다 같은 카피라이트. 그러나 그건 마케팅팀의 떡밥이자 영화가 재미없는 친구들의 징징댐이 살짝 가미된 불평이고. 그는 알고 싶었다. 그러니까 왜? 만약에 끝내 그 기승전결을 알게 됐다고 했을 때, 그 통사정이 너무 허무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쯤은 나중 문제였다. 일단 가슴 뛰는 기쁨 같은 썩 떠들썩한 일이 없으니까 어찌 보면 반길 만한 일이 아닐까, 라고도 생각해봤다. 순결한 포옹 달콤한 입맞춤 대신에 이걸로 픽션 한 편 완성해라 작가님, ~라는 팬클럽 회원들의 애정 어린 주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야 나중 밝혀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성공 가능성은 어쨌든 반반. 그야 어떻든 그는 현재 예술가 입장이기 때문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반전도 예상해봤다. 곧 그에게 배달된 가면들은 알고 봤더니 특수분장실에서 연구소에 잘못 보낸 거고, 영화 자막이 다 올라간 다음 극장에서 관객들은 나갈려다 깜짝 놀라는 거지. 왜냐하면 그건 모두 최대치 크기의 실제 그걸 어렵싸리 구해서 어떻게 처리해서 그에게 보냈고, 그는 거기서 풍겨진 마취향에 정신이 이상해져서 한동안 작품 구상에 몰입하게 된다나 뭐라나. 에잇 재미없네.
    그러나 어쨌건 가면이 배달된 건 사실. 그래서 그는 하나 하나 집에도 놔두고, 사무실에도 가져다 배치해놨다. 일단 보고 있으면 재밌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니까, 퍽 나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전개를 꾸민 설계자는 추리소설의 법칙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다는 좌우명을 고집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는 자칭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숙녀들의 감성을 좌지우지할 궁리, 언제나 골똘히 그 생각만 하는 로맨티스트였는데 그랬는데! 뜬금없이 이건 뭔일이란 말인가. 심지어 큼직한 가면들도 뭔가 색다른 기능들이 숨겨져 있었다. 기능은 각기 달랐다. 그걸 머리에 써서 3D 영화를 보는 것도 있고, 그냥 가면도 있고. 또 뭔 새로움이 숨겨졌을까 내내 탐색해봤지만 3D 영화 1편이 다였다. 난 또 뭐라고. 그는 푸념했다. 체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뭔 동물 가면이 배달됐는지 말을 안했구나. 그건 이랬다.
    돼지, 올빼미, 쥐, 소, 고양이, 호랑이, 토끼, 말, 늑대, 사자, 양, 사슴, 원숭이, 닭, 개, 곰. 그리고 생선까지. 딱히 아쉽다거나 섭섭한 건 아니지만 공룡은 없었다. 일단 그랬다.
    그럼 당연히 가면을 써 보고 거울을 보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렬한 욕구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썼다 벗었다 썼다 벗었다!
    실제로 가면을 쓰고 거울을 보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재밌었다. 웃겼다. 가면을 벗고 싶지 않았다. 벗었다 썼다 벗었다 썼다!
    그는 사자 가면을 쓰고서 거울 속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승!」
    개 가면에서는,
   「수컷. 야 너! 너 수컷이라고. 알어? 늬가 제일 문제야. 어? 왜, 수컷이란 이름이 마음에 안들어? 하지만 넌 암컷도 아니잖아. 안 그래?」
    고양이 가면 차례가 돌아왔다.
   「그러니까 늬가 안되는 거야. 알어? 그러니까 늬가 안되는 거라고.」
    늑대가 빠질 수 없지.
   「넌 그게 문제야. 어? 뭘 봐 임마! 늬 까짓게 뭔데 그래? 어?」
    그는 코끼리 가면을 쓰고서 거울을 봤다.
   「넌 어떻게 된 게 코가 두 개냐? 늬가 봐도 그렇지? 대답 좀 해보지 않겠니? 늬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그렇지?」
    닭 가면을 쓰고 나서 보니, 흐흠. 어허~ 그는 <완전 닭대가리>였다. 압권이 한두 개가 아니구만 그래. 그는 진짜로 코가 두 개였다. 아님 그게 두 갠가? 토끼를 쓰니 동화 주인공인 듯 했다. 양을 쓰면 뭐겠나,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 원숭이 가면을 쓰고 보니 이거 완전 진짜 원숭이가 아닌가. 그런데 원숭이 가면을 벗을려고 하니 좀처럼 벗겨지질 않았다. 아예 이대로 쓰고 살아야 하는가 살짝 고민되기까지 했다. 어쩌다 겨우겨우 원숭이 탈을 벗은 다음 급기야 생선 가면까지 써봤다. 괜찮았다. 좋았다. 왠 진작 이런 경험을 못해봤는지 조금 아쉬운 기분까지 느껴졌다. 개 가면을 쓰니 개상이고, 말 가면을 쓰면 말상이었다. 곰에다 사슴에다 완전 신선한 느낌이었다. 썼다 벗었다 썼다 벗었다!
    때문에 동물 가면이 등장하는 괴기 영화도 몇 편 찾아서 보다가 말았다. 처음 살짝 보고 나머지는 건너뛰기 몇 번 클릭하다 닫기. 골때리는 돼지머리 킬러와 올빼미 머리 살인마가 나오는 영화. 찬찬히 감상하기는 좀 뭐해도, 가면 하나는 참 인상 깊다는 점.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유가 부족해서 그러지, 시간만 충분하다면 영화도 찬찬히 봤을 테고. 그런데 그 가운데 개상을 쓰면 그 마술이 가능함을 끝끝내 알게 된 점.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그냥 이득이 아니라 완전 개-이득이었다. 방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툭 튀어나올지 모를 복선, 관심없었다. 끝까지 의심하라? 끝까지 의심하긴 뭘 끝까지 의심해! 사기꾼한테 당할 재산도 간당간당한데! 그래서 그는 그걸 테스트하고 싶어졌다. 이도저도 아닌 띵한 기다림보다야 그게 나았다. 하여 그는 다시 핀과 캔디스를 만나러 갔다. 초정밀 개 가면을 들고서 말이다. 이번에는 자기가 웨건을 직접 몰고 떠난 것이다.





    6

    그는 버클리에 도착했다. 중간에 특별한 일은 없었고.
    자, 이제 핀과 캔디스를 만나면 되겠네? 마술에 실패하면 고의가 아니지만 가슴을 더듬는 엉큼한 말썽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개 가면이 있었다. 다시 말해 실패해도 느낌이 그 뭔가 뭐랄까 사람이 아니라 개가 만진 거니까... 뭔가 그럴 듯한 잇점이 있다는 거. 그러나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고. 아니 반대로 말했다. 성공 가능성은 절대적이고.
    그렇게 안심한 채 핀과 캔디스한테 연락하려던 순간, 그는 아차-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핀과 캔디스가 없기 때문에.
   「뭐야! 내가 여길 왜 왔지?」
    아하~! 저번에는 무인주행차가 그를 잘못 데려간 거고. 이번에는 핀과 캔디스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멋 모르고 NB는 버클리로 와버린 거다. 그럼 뭐 어쩔 수 있나. 뭔가 안스러운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이런 일 어디 한두 번인가. 원래 만나기로 한 친구. 버클리에 사는 마틴에게 연락해보면 되겠네. 허허. 곧바로 후끈 달아올라 홀딱 넘어가고야 말 일도 없는데 오히려 잘됐지 뭘. 그러면서 그는 마틴에게 전화했다.
그랬더니,
   「없는 번호······ 어쩌고저쩌고!」
    이건 또 뭐야! 아 나 이거 정말 참 나, 뭐야 뭐냐고. 또 혼자야, 나 또 쇼했어? 또 차였네 또 차였어. 이젠 질리지도 않는다.
    요란스러운 약속 많음, 과묵한 약속 없음. 전자와 후자의 중간이 좋다는 건 반론의 여지가 많지 않다. 그야 어떻든 <모 아니면 도>. 정녕 중간은 힘든 것일까? 정말 그럴까? 그러니까 왜!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원래대로 핀과 캔디스를 만나러 갔다. 





    7

    NB는 버클리 놀이공원에 도착한 다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속칭 물이라고 하던가, 분위기가 이거 완전 아후~ 전보다 훨씬 좋아졌기 때문이다. 비율하며 어떻게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는 입이 귀에 걸린 채 차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동네에 지나다니는 개들도 실상 따지고 보면 군침을 흘리는 개는 흔치 않다. 오오! 감탄스러운 자태와 고전적인 순결함. 아아, 사랑의 신호를 절로 부르는 아르테미스들이로구나. NB의 편견은 그랬다. 바로 남자는 집에 있으면 안된다, 였던 것이다. 그의 편견은 완전 옳았던 것이다. 그런데 경솔한 호기심은 섬세한 아름다움에게 끌린 결과, 홀연 마음을 빼았겨버렸던 것일까?
    저기 보이는 놀이공원 이름은 예전의 <버클리 놀이공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버클리 놀이공원은 세상사의 논리에 힙없이 고개를 떨구었다네. 다시 말해 거긴 대형 투자사에 넘어가 놀이공원의 이름부터 바뀐 것이다. 어떻게?
    이름-하여, <잘츠부르크 놀이공원>.
    심지어 당연히 핀과 캔디스랑 통화는 성공했으나, 그러나 녀석들은 감원 바람에 직장을 잃어 멀리 떠난 것이다.
    (딱)!
    정신 집중.
    독서중 졸리다가, 집중력 흐트러지다가 왜 그냥 돌아갔는지 나중 헷갈릴 수 있으니까.
    주의 집중 (딱)!
    주의 집중 (딱)!
    다시 말하자면,
    핀과 캔디스랑 통화는 성공했으나, 그러나 녀석들은 감원 바람에 직장을 잃어 멀리 떠난 것이다.
    띠용~!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이거 진짜 뭐하는 거지? 뻔트 얘기를 하도 많이 하길래 자기도 모르게 맹공을 펼쳐야 할 순간에도 무조건 뻔트만 대다 실패한 건가? 어쩜 자명한 이치.
    그래도 그는 혹시 모른다면서 폼은 흔들리지 않았다. 디저트는 반전이요 보너스는 패자부활전. 혹시 모르니까.
    어차피 땀을 뻘뻘 흘리고 침까지 질질 흘린 건 사실이니까. 정말로 그랬단 말이 아니라. 아닌 게 아닌가. 넘어가고.
    그렇지만 영 기분이 아니었다. 남들은 모두 달콤한 유행가를 부르며 즐겁기 바쁜데, 자기만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듣는다 뭐 그건가? 행복은 행복인데 썩은 행복? 다름 아니라 투정이네. 지겹지도 않은지 또 응석. 사정이 그렇지 않게 생겼나. 매번 허탕만 치면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확실한 이득이 없는데? 목적도 없고. 깝깝한 양반 같으니라고. 아 답답해 속 터져, 갑갑해 미치겠네 진짜. 하는 수 없는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8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도 좋아하는 친군데, 유난히 말이 없다? 여섯 중 하나다.
    첫째, 농담할 기분이 아니던가. (허세)
    둘째, 신부들러리로 밀렸거나. (허풍)
    셋째, 기 받을려다가 기 빨렸거나. (허탕)
    넷째, 원래 파랑새나 팔색조가 아니던가. (허당)
    다섯째, 놀기 좋아하는데 판돈이 떨어졌거나 할 말이 바닥났거나. (허무)
    여섯째, 기 살려준다길래 동기 부여 행사장에 기웃거리다 몇 장 날린 일화 (사기꾼에게 당함?)
    유별나게 말이 많던지 잠시 쉬는 시간이건, 촌닭 아니면 촌년을 뜻하는 거네. 억지로 객관식 보기를 늘리자면 뭐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날려나? 야망에 대한 전의를 다지고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미 전조부터 어둡다라...! 그러니까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든지 경주마의 야성이든지 꿈 없음도, 꿈 많음도 헤아려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이야, 어? 듣기 싫다는 기색을 은연중─가만히─확실히 내비춰도, 눈치 없이 계속 따따부따하는 건 '허영기에 너그러운 그녀들'과 말이 안 통하는 이유일 테고. 뭘 좀 모르는 남자는 그러니까 호박이 최선을 다해서 피해갈 수 밖에. 숙녀를 만나면 자긴 연애할 때 최선을 다한다는데, 문제는 아무리 기다려도 타석에 통 기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 누군 뭐 안타든 홈런이기 치기 싫냐 이거다. 아침에는 피노키오, 낮에는 양치기 소년이요, 밤에는 밤의 황제?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녀들의 짝사랑을 제법 받아본 플레이보이는, 그래서 뭘 해도 재미없을 수도 있다. 정말 그럴 수 있다. 어차피 농담 반 진담 반이니까.
    그러면 그와 같은 권태로운 일상에서 기발한 묘수는 무엇일까? 음 뭐랄까······ 일상적으로 클럽 음악을 듣다가 나이트클럽에 가는 것보다는, 고전음악만 듣고 예술을 사랑하며 회전목마를 상상하다가 모처럼 NC에 들르면 환상감이 극대화되는 이치. 바로 그처럼 완전 딴세상에 당도한 기분, 어설픈 장르에 뻔한 줄거리가 아니라 바로 그와 같은 낯선 느낌. 그건 무엇일까? 그건 어쩌면 이렇지 않을까? 바로 개가 사람을 물었다, 가 아니라 사람이 개를 물었다 라는 믿거나 말거나 뉴스.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다, 가 아니라 양이 늑대를 잡아먹었다더라 라는 '카더라-식' 뜬소문. 절묘하지 않은 가짜 뉴스는 잘 납득되지 않을 테니까 그건 빼고. 그러니까 그와 같은 색다른 껀수가 대체 뭐냐고! 그처럼 NB는 뾰족한 해법이 없었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우연찮게 수집했던 잔지식도 슬슬 바닥나는 듯 겁도 났다. 감격까지는 바라지도 않은 채 귓전을 타고서 마음을 혹하며 꼬실 만한 풍문은 일절 없고. 행운마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신비마는 어디 갔는지 행방을 통 모르겠고. 때문에 집과 사무실만 왔다 갔다 하기만 반복하긴 뭐해서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사무실에 놀러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9

    그는 미스테리아 사무실에 도착했다.
   「혹시 할 얘기 많니?」
   「왜! 말 많은 남자 딱 질색이니? 아님 최근 영 뭐한 양반한테 데인 거니? 최근 귀에서 피난 적 있냐고! 내가 널 좀 알잖니. 안 그러니? 내가 널 좀 알아. 아니, 많이 알아. 너도 날 잘 알듯이 말이야. 그건 너도 인정하는 거고. 우린 정말 서로 너무 많이 알아서 탈이잖니. 알지 않았으면 싶은 속사정, 알지 않아도 괜찮은 비밀, 알지 않은 게 오히려 괜찮은 추억까지. 안 그러니? 하긴 말 많은 남자라고 무조건 싫겠니. 눌변이야 그렇다 쳐도 1개국어 사용자인데 발음부터 거 참 나, 어째 영 거시기허고. 외양부터 시작해서 뭐 하나... 이해해 이해해. 너가 뭐 남자도 아니고 말이야. 안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다고. 뭔지 알겠다 뭔지 알겠다고. 허허허. 푸하하하하하하. 그런 거야? 으하하하하하하. 누가 그렇게 떽떽거렸는데 그래? 것 참 나.」
   「그만! 어? 그만! 딱 그만. 그만하라고 했다.」
   「어? 어! 흐흠. 허허.」
   「뭘 그렇게 캐물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괜한 짓을 했네. 이 입이 방정이다. (몸짓) 자크로 잠궜어. 됐지?」
   「있지, 혹시 할 얘기 많냐고 물었거든.」
   「아 그렇구나. 그게 말이야. 많지는······ 않은데. 그런데······ 간곡히 아뢰올 통사정은 있사옵니다, 공주님.」
    그렇게 그는 소파에 착석해서 그간 사정을 마라한테 털어놓았다. 어떻게 어떻게 이러쿵저러쿵.
   「어쩜 좋아 어쩜 좋니! 그런데. 그게 다야?」
   「그럼 그게 다지. 뭘 더 바래?」
   「늬가 하는 일이 매번 그렇지 그럼. 그런데 넌 왜 매번 연락을 하지 않은 채 몸부터 앞서니? 미리 연락을 해서 약속을 정한 다음에 움직여야 그런 벙찌는 상황에 몰리지 않을 꺼 아니야. 안 그래?」
   「그러긴 한데. 나도 아는데. 그렇지만 우리는 또 뜻밖의 만남을 좋아하잖니? 응?」
   「늬가 무슨 사춘기 소년이니? 청춘 드라마 찍냐? 꿈 깨! 그만 현실로 나오라구. 응?」
   「정말이지 나도 잘 모르겠어.」
   「모르긴 뭘 몰라?」
   「늬 말마따나 현실로 나오는 방법.」
   「너랑 대화를 하기만 하면 거 어째 실실 꼬이는지 참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없어. 4차원! 난 포기.」
   「포기하지 마. 날 다시 띄워줘.」
   「내가 널 어떻게 띄워? 뭐 설마 업어주란 말은 아닐 테고. 아, 망측해!」
   「그러지 말고 우리 존티 불러서 셋이서 버클리 놀이공원에나 놀러갈까? 앗 참. 이름이 바꼈지. 잘츠부르크 놀이공원으로 말이야.」
   「에라~ 이 화상아! 얘 알고보니 완전 진상이네. 응? 아 나 이거 정말 답이 없구만 그래. 응?」
   「아니 어떻게 그런,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가 있어?」
   「왜! 아직 뭔가 감이 안 와? 더 심한 말을 원하니? 그런 거니? 또 시작이군! (절레절레)」
   「엄살부리지 마!」
   「차마 말문이 막힌다. 늬 허접한 개그를 나한테 뒤집어 씌우는 거니 뭐니? 그리고. 그 꾀죄죄한 행색은 또 뭐고. 넌 대체 언제 철들래?」
   「우리는, 철들면, 안돼.」
   「너가 아무리 매달려도, 우리 잡지는 늬 작품 못 실으니까 그것만 알아둬. 누구, 허당계에 입문하다. 그런 헤드라인은 꿈도 꾸지 마.」
   「형씨의 상상에 맡기겠네.」
   「내가 왜 형씨야?」
   「몰라. 나 이상해졌어. 자꾸 그게 말이야. 인공지능 지니랑 하도 많이 대화를 하다 보니까, 나도 어떡하다 그렇게 됐어. 못 말린다구. 알겠니?」
   「아무튼 내가 뭔 생각하는지는 늬 상상에 맡긴다. 응?」
   「늬가 뭘 상상했는데?」
   「그걸, 몰라서 묻나?」
   「그럼, 알면! 내가 그걸 알면 진작 발렌타인 30년산을 박스채로 장만했게?」
   「됐고. 그러지 말고 이분 만나서 인터뷰나 따와. 칼럼도 안 쓰고 작품도 미루고. 일은 대체 언제 할 꺼니? 품위 유지비 부족하지 않아?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언제 싫데? 넌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그래?」   





    10

    나만큼 꿈이 없고 매사 심심한 사람 있으면 어디 나와보라고 해! ~라고 하면 엉덩이와 입이 근질근질한 사람도, 꿈과 희망으로 가득찬 공상가들도 죄다 모여드는 거 아닐까. 아니겠지. 아닐 꺼야. 어찌 그럴 수가 있나.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고, 멋진 인생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하니까. 아름다운 사랑을 하기에도 하루 24시간은 모자르고, 변심은 강하고 끈기는 약한데? 각자 사는 낙이 뭔지는 몰라도, 라틴어에 그런 말이 있나 없나는 몰라도, 우리는 원래 싫증내는 인간! 그럴싸한 짝사랑을 받았던 추억도 가물가물한데, 뭐한다고 젊음의 거리에서 신부들러리를. 인류는 똑똑할대로 똑똑해졌는데 유혹하는 숙녀들 눈길을 끌려는 수작도 신통치 않아. 그녀들의 정서와 교양미와 고상한 정체성도 예전만 못해. 취향이라면 펭귄북 몇 번 들고 다닌 거, 안목이라면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고전음악은 띠리리리리리리리리~가 전분데? 그렇다고 소파에 자빠져 TV 채널이나 돌리는 이 바보 같은 장본인을 누가 좋아하겠냐고! ~라고 그는 한심한 넉살을 연기했다.
    그렇듯 개구리처럼 생각이 엉뚱한 데로 튄 덕분일까. 행복을 예고하는 유행에 따르고, 다정을 선도하는 다망함에 못 이긴 척 넘어갈 마음이 있든 없든! NB는 직업상 먹고 살려면 알 건 알아야 했다. 말하자면 그걸 몽땅 통틀어 친절히 알려주는 게 뭐냐, 바로 여성잡지 1과 2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더티러브는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에, 고로 여성잡지 1.5 편집장을 맡고 있는 친구가 있냐? 하면 없었다. 있으면 만날려고 했는데 애석하게도 없네 그려. NB의 대인관계라고 해 봐야 뻔했다. 그는 발이 넓고 인기 많은 명사, 유명인, 예술가, 연예인이 아니니까 당연한 얘기.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마라가 청탁한, 실제로는 떠넘긴 <명사와의 인터뷰>를 거행하기 위해 그분을 만나러 갔다.
    그분에 대한 설명과 뭘 물어보고 어떻게 대처할지 서류를 읽어보니 그분은 만능 예능인이었다. 그런데 여자! 그래?
    하기 싫은 척, 바쁜 척,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라는 착찹한 심정이 어쩌니저쩌니. 오만상이 다 찌푸려지는 척. 폼잡을 때는 언제고. 말하자면 그는 인터뷰 안내서 서류철을 보기 전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 대 남자로 인터뷰를 하는 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아니네? 올커니! 곧바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쾨헬번호 525번 세레나데 1악장이 울려퍼졌다. 흐흐흐. 흐흐흐흐흐. 그렇게 그는 곧바로 그분을 만나러 갔다.





    11

    그는 만능 엔터테이너를 만나러 갔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이때까지는 그랬다. 뭐랄까 신비한 탐욕에 자신이 조종된다는 듯한 착각? 살짝 망설이다 덥썩 미끼를 문지도 모르고. 물질적 행복과 정신적 환희를 육체적 사랑이 양쪽에 꿰차기, ~를 실행할 수야 없으니 일단 꽤 흡족했을 것이다. 식상한 드라마를 행복한 판타지로 반등시킬 만한 계기로 알고 있었을 테고 말이야. 그럼 나 이제 그분들과 친구 파도타기를 하는 거야? 라면서 혼자 김칫국 마시고 또 공상에 빠져서 뜬구름이나 잡았겠지 뭐. 실제로는 첫눈에 반하기 바쁜데, 겉으로는 연애의 추억을 떠벌리기 좋아하는 일. 그것은 허세일까 아니면 습관일까. 그도 아니면 불평? 아마도 그럴 수도 있고 아닐지도 모르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 현실과 이상의 괴리. 괜히 짠하고 자칫 찡해지는 일이다. 그는 그 정도 허세는 없었으나, 그 대신에 지나친 몽상이 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거긴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약속 장소를 옮기자는 거였다.
    하긴 보는 눈이 많고 알아보는 거추장스러움, 이해할 수 있지.
    그분은 이미 중견이니까 연예인병은 진작 극복하셨을 테고. 자기도 조용한 분위기 좋아하고.
    그렇게 그는 자리를 옮겼다. 멀지도 않았다. 근처 골목에 위치한 카페였다.
    그는 그 카페 앞에 도착해서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주택가 골목에 위치한 귀엽고 산뜻하며 앙증맞은 카페였는데. 멋지고 아름답고 예쁘고 다 좋은데. 그런데 거 어째 이거 영 거시기... 이름이 영 뭐했다. 왜냐하면 그 카페 이름은 다름 아니라 <개연성>이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돼.」
    말이 안됨. 정말 말도 안됨. 말이 되야 뭔 말을 할 거 아니야. 그렇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설마······ 아니야 아니야. 그는 정체성이야 논외로 치고, 절반쯤 공인인데? 아니야 아니야.
    어찌 됐든 NB는 이때부터 기분이 급속히 울적해졌다. 호기심이 상했다. 감수성도 망했다. 뭘 해도 재미없었다. 그러나 해야 할 일, 인터뷰는 예정대로 진행해야만 하고. 이거 정말 완전 재미없는 삼류 영화가 따로 없구만 그래, 라는 심정이었다. 집에서 혼자 폼 잡고 포도주를 홀짝 홀짝 마실 때, 그럭저럭 한 번쯤 봐줄 만한 영화. 주인공은 자신이었던 것이다.
    중간은 건너뛰고.
    뭘 물어봤고 어떤 대답을 들었고.
    어차피 녹음 파일만 미스테리아 사무실에 전달해주면 되니까.
    그렇게 중간은 건너뛰고.
    그는 인터뷰를 마쳤다. 그분과 헤어졌다.
    알뜰한 생활 팍팍한 인생.
    <천하의 타락마를 타고서 방탕한 생활에 젖을 뻔 하다가 단정한 몸가짐, 조신한 마음가짐이 매력적인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행복하게 잘 살았다더라!> ~라고 해도 모자를 판에, 뭐? 뭐가 어쩌고 어째? 이거 왜 이래! 그는 느꼈을까 젖었을까 아님 그냥 단순히 상심했을까. 그보다는 아마 말린 건 아닐까? 그런데 정작 뭐에 말렸는지 알 수는 없고. 허허. 딱히 말렸다는 근거도 애매하고. 거 참 나 이거 원~! 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런 젠장!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일단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

    인생이란 다행스런 뻔트를 자축하는 것. 왜냐, 삶이란 게 한마디로 극적이니까. 어제는 드라마요, 오늘은 신파, 다시 내일은 멜로드라마. 목표를 크게,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구식 탱탱 묵은 경구 좀 그만 괴롭히자. 다만, 일단은. 통상적으로 원래 장외홈런 타자는 딱 몇 명인 것. 세상사란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사랑도 변하거든. 따라서 시작은 뻔트. 숙녀에게 넌지시 예법을 갖추고, 은연중 때 맞춰 내 의중을 내비추며, 덕분에-니 늬 말마따나-니 앵무새 흉내내기니. 다 뻔트!
    단지 뻔트와 작전 변경은 별개라는 점. 속는 셈치고 봉이냐 아니면 원맨쇼냐. 에잇 차라리 부담없이 신부들러리가 낫겠네. 인생이란 게 예측한대로 흘러가기 어려운 법이니 내 마음도 알아야 하고, 상대방 속셈도 간파해야 한다. 백댄서로 만족하느냐, 변심의 명분을 마련하느냐. 일단 시작은 뻔트였다가 공이 투수의 의지를 떠날즈음 강공으로 선회해도 무방. 등 떠밀려서 사랑에 빠지든 어쩌든, 나중 후회와 책임은 절반쯤이랄까 아마도 온전히 내 몫인 것. 그렇게 신중하고 망설이기만 하다 버스고 허당이고 다 떠나버리는지도 모르고.
    하오나 뻔트의 대안은 시뮬레이션이고, 뻔트의 기회비용은 전망과 판례요 예시라는 데까지는 들어가지 말자. 어쨌든 관건은 <속는 셈치고!>라는 전제. 진짜로 속았을 때 얼마를 잃을 텐가. 후속타가 액면과 너무 동떨어졌을 때 도대체 잃어야 할 낭만이 무엇인가, 그 대가는 어느 만큼인가! 그거 너무너무 중요한 거니까. 곧 베팅하면 따거나 푸거나 그렇게 둘 중 하나니까. 개구리처럼 멀리 뛸 것인냐, 강아지처럼 넘어질 것이냐. 토끼처럼 잠자고 났더니 유명해졌다더라 라는 묻어가기는 논외로 하고.
    그래서 NB가 이번에 선택한 뻔트는 무엇인고 하니, 그건 뭐였지? 뭐드라? 뭐야? 대관절 뭐였는지 떠오를 뻔 하다 만 거냐고.
    즉, 그는 아직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첫째, 전기기타와 베이스기타를 사서 연습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때려친 일. 드럼 교본도 사서 막대기로 두꺼운 책 몇 개를 두드리면 연습한 일.
    둘째, 대학1학년 때던가. 학과 친구 중에 그런 애가 있었음. 유난히 모공이 어떤 친구. 생김새도 그렇고. 그래서였을까? 거울을 볼 때마다 유독 자기도 어째 보이고. 그렇게 몇 년이 흐름. 당시는 돈 없고 가난한 청춘이니까 뭔가 반응이 없었는데, 나중 몇 년이 흘러서 뜬금없이 모공 레이저 어쩌고저쩌고에 가서 단 1회성 치료를 받은 일이 있음.
    곧 그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았고, 호기심도 대단하고 감수성도 풍부했던 것이다. 다만 큰 재주는 부재중이었고 잔기술만 다망했던 거지. 때문에 회상은 그의 잔머머를 자극했고, 따라서 그는 주특기인 따라하기에 대한 열정이 숙였던 고개를 슥 치켜세우는 걸 감지했다. 왜냐하면 인터넷으로 소셜네트워크 인스타그램을 멍하니 자꾸 들여다보면서 뭔가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곧 시시콜콜한 사진들, 괜찮은 필름 카메라던지 감각적으로 찍은 사진들. 그건 다 그저 그런데 안 그런 사진. <그건 대체 왜 그런가?> 그걸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그는 피타고라스이자 아르키메데스였고 니콜라이 테슬라로 빙의하고야 말았다. 그와 같은 깨달음인데 음악이 없으면 쓰나. 즉 정말로 천상의 음률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그 신비한 멜로디가 무엇인고 하니 그건 다름 아니라 이와 같았다.
    토카타와 푸가 D단조. 바흐 작품 번호 565번. 띠리리~ 띠리리리리리리리~ 띠리리~ 띠리리리~ 띠리리~ 띠리리리리리리리~ 뷩~뷩~뷩뷩뷩뷩~~~~~!
    아, 그러고 보니 뭘 깨달았나를 말하지 않았구나. NB는 깨달았다. 99개 계정들은 그저 그런 반면, 1개 이하의 산뜻한 계정들은 대체 왜 그런가? 왜냐하면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신나고─재미나고─즐겁게 <노는 사진>을 주로 올렸기 때문! (딱) 그러네. 진짜 그러네. 그냥 막 아무렇게나 노는 사진만 올린 게 아니라 노는 사진 10개 가운데 딱 1개만. 그렇게. 물론 그와 별개로, 매우 드물기 때문에 애타게 찾아헤매다 <아, 이거다!>라는 특별한 홍관조과는 따로 있고. NB는 그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므로, 그러므로 그는 바다를 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해변에 비키니가 있든 없든, 춥든 덥든. 그게 문젠가. 방탕에 대한 간절한 욕망. 애초에 없었다.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만족. 사랑은 다정한 요술쟁이의 엉뚱한 심술 같은 것일 테지만, 굳이 주인공을 꿰찰 마음도 없고. 누가 시켜주지도 않고. 그러니까 장소의 새로움이면 충분. 몸도 마음도 잔뜩 달아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낭만적인 해변이라고 해 봐야 자주 가면 재미없다. 일과 취미의 차이가 뭔가. 자주 가면 일이 되고, 나이트클럽에서 살다 보면 나중 시간이 훌쩍 지났을 때 과거의 흑역사가 될지도 모르는 것. 그렇다면 이쯤 해서 한 번쯤 가 봐도 될 듯 하니,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 없네. 딱이네. 좋다. 가자. 못 갈 건 뭔가. 가자. 그래? OK~!
    뚜껑 없는 차를 타며 삶을 즐기느냐, 카바레와 삼류 나이트클럽도 가고 춤추고 노래부르며 놀기 바쁜가, 아니면 알짝 보험회사 주식을 사느냐! 인생이란 그 차이다. <내일은 없다>부터 말년운까지. 그 사이에는 개미와 베짱이도 있고, 토기와 거북이도 있다. <막살자>웨이터에게 찔러줄 짱돈이 떨어지면 안된다며 언제까지 칼럼 원고료만 쳐다보고 있겠나. 그래서 곧바로 그는 웨건에 올라타서 떠났다. 그렇게 그는 선탠하러 바다로 떠난 것이다.





    13

    NB는 바닷가에 도착했다.
    그러나 너무 추웠다. 낭만이고 뭐고 다 필요없었다.
    끈덕지게 따라다니는 상심에 대한 가련함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데! 모험을 사랑하는 자유인임을 입증할 절호의 기회는 애초에 없었던 거네. 약속 많음과 재미있음에 잠식당하고 싶다는 갈망. 이쯤 하면 포기해야 하는 거네. 하지만 바지끄댕이를 꽉 붙잡은 채 도통 놓아주지 않는 미련의 까닭, 그건 대체 뭐냐고. 그도 알고 싶었다. 계속 비둘기의 관심을 받고 해외뉴스의 호응에 힙입어 뭔지 모를 행진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는 관성. 왜! 그보다 그는 원래 가슴 찡한 연애소설을 쓰고 싶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이 뚱딴지 같은 방황은 다 뭐냐고. 헛된 욕망은 도대체가 말이야 그 언제나 정비되냐고. 바보 같은 상상에 따른 우스꽝스런 기대감. 매번 속고 또 속고, 지겹고 또 지겹고. 그러나 또 다시, 경탄을 금치 못할 그런 껀수 어디 없나. ~라면서 두리번두리번. 축구 서포터스 조마조마 녀석들과의 친교는 끊킨지 오래고. 품위 유지비는 간당간당. 플레이보이로써 무슨 3관왕?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마침내 그는 화려한 플레이보이계를 은퇴했을까? 은퇴는 무슨. 근처에도 못갔겠지. 본인 말로야 자긴 영원한 현역이라며 허세부리지나 않으면 다행! 제발 안 그러기를. 하여간에 갈피를 못 잡고 헤맬려면 집 근처에서나 헤맬 것이지. 이게 대체 뭐냐고. 관능적인 열정만 가득해가지고 말이야, 어? 멍청한 여자와 무능한 남자라는 연인을 닮은 거 같다고. 정말 그렇다고. 썩 불만족스럽지 않은 구태의연한 정서, 싫지는 않아도 매가리가 없다고. 안 그런가? 비뚤어진 대망과 상한 야성. 어떻게 수습이 안돼. 수습이 안된다고. 그러니까 애초에 사춘기 때 공부를 잘하던가, 몽정기 때 풋사랑이라도 해 보던가. 꼭 적시에 적합한 일을 못하고서 뒤늦게 과점퍼를 사느니, 무슨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나 쫓아다니지를 않나. 허허. 거 참 나 정말 가지 가지 한다. 가지 가지 해. 지가 무슨 영화 주인공도 아니고 말이야, 뭐 어? 사무실에다가 레이저 설비를 갖춰? 사람 몸에 새대가리야 뭐야! 생선 같은 놈 나와서 여자랑 연애하는 이야기, 에서 그 생선이 자기라고? 참 나 가지 가지 한다. 그러니까 사무실에 그걸 뭐하러 설치하냐고. 어? 가져갈 게 뭐 있다고. 훔쳐갈 게 뭐가 있냐고, 거저 줘도 안 가져 갈 것들 뿐인데. 안 그런가? 툭하면 유체이탈 화법에다 심심하면 심신분리 기술이 어쩌고저쩌고. 아조 그냥 신물이 난다 신물이 나. 그 어떤 장르라면 그냥 환장을 하고, 어? 그게 뭐야! 그게 대체 뭐냐고. 그래서야 되겠어? 그래서야 쓰냐고! 꽃다운 청춘들에게 말이야, 아름다운 세상에서 멋진 인생을 살게끔 부추겨서 코끝이 찡해도 뭔가 어중간할 판에, 뭐-뭐, 뭐가 어쩌고 어째?
    ~라면서 그는 돌아설려고 했다. 딱 그럴려고 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저 바다를 보고 있네? 그는 바로 롭이었다.
    무명 작가 팬사이트 회장 롭. 아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야 롭! 너 거기서 뭐해?」
   「어? 형! 형은 여기서 뭐해?」
   「나? 너랑 인사하고 있잖아.」
   「그래? 또! 또 그렇게 대화를 풀어보잔 말이지?」
   「아 왜 또 그래? 반가우니까 그러지. 그렇다고 너가 형의 원초적 욕구를 달랠 꺼야, 아니면 심기가 몹시 불편한 행복감을 북돋을 꺼야? 게다가 내가 어찌 너한테 착찹한 심경 고백을 할 수 있겠니. 안 그래?」
   「형. 뭐가 불만이지? 문제가 뭐냐고!」
   「문제? 불만? 많지! 적지 않아.」
   「그래? 그야 형 문제니까 형이 알아서 해.」
   「넌 어떻게 말을 해도 그렇게 무정하게 말을 하니? 사람이 어떻게 그리도 무심해? 우리가 어디 그런 사이니?」
   「농담이야 농담. 그럼 어떻게 우리끼리, 부어라 마셔라? 그걸 원해? 아니면 내가 여기 있는 숙녀들 전부 다 꼬셔줄까? 그럴까?」
   「뭐 자기야 달려? 오빠 좀 걷자. 오빠 좀 걷자구. 응? 그럼 안되겠니?」
    여기까지만 해도 일단 롭을 만난 건 반갑고 좋았지만, 선망은 망하고 감수성은 상한 거나 다름없었다. 왜? 비전이 없으니까. 하지만 전혀 흥미롭지 않은 일상이 상식과 부합한다고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 무언가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건 촌스러운 포장으로 대중이 혹하지 못하다뿐 열망가가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만 한다면야, 오오 그 열락이란!
   「형. 환상머신 만들기는 잘 돼가?」
   「뭔 머신? 환상? 환상은 무슨 환상! 신비는 오염됐어. 난 말이야, 미스테리의 '미'자도 모르면서 매번 개꿈만 꾸고 있어. 안 그래?」
   「자존감 떨어졌어? 왜 그러시나! 형. 그거 알아?」
   「뭘? 왜 좋은 껀수라도 있니?」
   「껀수? 있으면 형이 나 좀 어떻게 띄워줘!」
   「그건 늬 전공이잖아? 너가 형을 띄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네 죄상을 네가 알렸다?」
   「형. 기분이 정말 정말 이상해.」
   「왜? 뭔데? 왜냐고!」
   「왜, 왜냐! 왜냐하면 마라가 우리 팬사이트에 가입했으니까.」
   「뭐? 내 이년을 그냥...!」
   「왜 마라가 돈 떼먹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건 아닌데 그건 아니야. 그건 아니라고.」
   「그건 그렇고. 자, 본격적으로 한번 시작해볼까?」
   「뭘 시작해? 뭘 시작하냐고.」
   「형. 내가 말 했어, 안 했어?」
   「뭘 했는데! 나는 뭘하고 넌 뭘 했는데?」
   「아 쫌. 내가 말 했냐고, 안 했냐고!」





    14

    그는 고매한 사색가임을 유념한 채 상상력이라는 저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창의력은 비리비리했다. 전에도 그다지 뛰어나다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더 형편없었다. 유달리 슬럼프도 길었다. 인생이 레임덕인 거지. 그러니 약간의 기대감에 부응하려면 특별한 동력이 필요했다. 그 뭔가가 완전 절실했다. 예를 들어 일방적인 (남녀) 비율에 매료될 분위기던지, 단순히 밤의 세계에서 방황하던지. 그러나 몽상가라는 또 다른 정체성은 NB의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다. 곧 스스로 심신분리를 실행할 순 없으므로, 따라서 자기를 띄워주라는 마법의 주문 그 달콤한 대상은 다름 아닌 친구 롭였던 것이다. 즉 그들은 짧은 꽁트로 죽이 척척 맞던 사이였기 때문일까? 그러든 아니든 그건 모르겠고. 뭐 아무튼, 그래서 그들은 함께 놀러가기로 했다. 바로 에로영화 촬영장으로 말이다.
    그들은 에로영화 촬영장에 도착했다. 장르는 좀 어째도, 그래도 그곳은 엄연히 영화 촬영장이었다. 방송 관계자랄지 연기자, 배우, 스텝, 매니저등 그쪽 업계 사람들은 알고 있다. 바로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를.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다르거든. 물론 요즘은 드라마도 위상이 하늘을 찌르지만 시네마라는 건 뭔지 모를 분위기라는 게 있다. 업계 전문용어라는 <연결>. 촬영과 촬영이 매끄럽게 흘러가야 한다는 순리. 그건 비슷하나 멜로영화, 에로영화, 더 나아가 으으흠까지. 각기 다 추구하는 색깔이 있고 원하는 이상과 맡는 영역이란 게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이런 구경을?
   「야 이 녀석아. 이런 좋은 구경거리가 있으면 진작에 좀 알려주지 그랬어. 어? 내가 그동안 이상한 술집에 갖다 바친 돈이 얼만데? 응? 그 돈 모았으면 집을 사도 몇 채를 샀겄다. 물론 따지고 보면야 내가 산 횟수보다 얻어먹은 횟수가, 조금 시소가 수평은 아닐 수도 있어. 아무리 그래도 내가 말이야, 어? 그 시간에 공부를 했으면 지금쯤, 아아~ 말도 말어 말도 마! 그러니까, 잘 했어. 좋아. 따봉~! 응? 이거야. 이거라고. 바로 이거라니까~!」
    NB와 롭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마도 살짝 흥분했을 테고. 정말 무슨 생각으로 롭은 그 인간을 여기에 데려간 걸까? 그거야 그들 사정이고. 우리는 이야기를 보던가 읽던가 들으면 그뿐. 그래서 그래서, 실컷 겪고 나서 연애하고 나서, 나중 에게~! 아니면 노잼 뻥 다 뻥! 아니면 그게 뭐야 응애~ 그게 뭐냐고! 그야 어떻든 그들은, 우연히 찾아온 행복이 언제 끝날지 염려하기라도 하는 듯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됐다. 아주 그냥 촬영장의 소품들이 뚫어져라 그 뭔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할 일 없음에 순순히 순응하느라 고생한 NB. 이걸로 그냥 그동안의 스트레스는 말끔히 날려버렸던 것이다. 심심함과 친하고 재미와는 항상 불화했는데, 어? 캬~ 이거 그냥 완전 캬~! 으아~ 와우! 동심을 망가트린 장본인씩이나 되면서 이제 드디여 본연의 업계를 찾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무실에서 혼자 쓸쓸히 일할 땐 그랬다. 친애하는 여인들의 변덕을 가늠하기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면서 이 생각 저 생각. 그런데 여긴 그런 게 필요가 없네 필요가 없어. 무슨 어설픈 사랑의 3박자니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니 뭐니. 그런 개 풀 뜯어 먹는 소리가 말이나 되냐고. 개뼉다귀니 뭐니, 개와 양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니 그런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라, 와우! 진짜다 이건 완전 진짜였다. 환상! 어? 환상! 캬~! 가짜가 아니라고. 여긴 그냥 시작부터 더티러브? 그렇지만 각본이 없는 거도 아니고, 예술성도 잘만 찾으면 있었다 분명 있었다. 놀기 좋아하고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걸로 따지자면 우열을 가리기 힘든 우리들이라면서 자각하고, 사랑에 귀착되며, 쇼펜하우어와 스피노자 사이에서 고뇌했거늘. 이젠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얼마든지 좋았다. 작품 구상을 하면서 일상적으로 그랬다. 안녕하냐 라는 안부를 묻고 부디 행복하라는 당부를 받고. 어째 뉘앙스가 뭔가 좀 세하네 거 참. 아 다르고 어 다르니까. 어쨌든 놀라운 착상이 떠오르지 않아서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절대 환상'은 바로 코앞에 있었던 것이다. 딱 하나만 덧붙이자면 이렇다. NB가 특히 속절없이 매혹당하고 말았던 게 뭐냐, 하면 바로 교성. 그것에 그만 그는 홀딱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자기 남편이 자기 방에서 혼자 이상한 거 본다느니 뭐라느니, 그보다 공감각이라는 그 뭔가에 아찔했으니까 안 그럴 수 없었겠지.
    그런데 너무 후끈 달아올랐기 때문일까? NB는 자신감이 필요 이상 상승해버렸다. 그래서 그는 차에서 개 두상 가면을 꺼내왔고, 에로배우가 아닌 조연3에게 살짝 귀뜸해서 뭐 어쩌기로 했다. 바로, 그 마술을 선보이기로 담합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개 가면을 썼고,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필경 조연3 숙녀는 어쩔 줄 몰라하는 수줍음을 연기했을 테고.
    그래서 그는 이제 자유의 여신에게 신비의 탄생을 느끼게 해줄려고 했다.
    젖어, 느껴, 달려! 지금은 사랑 대신에 신기한 마법에 빠질 시간이었다.
    그렇게 분위기를 잡느라 NB는 그녀에게 말했다. 마음속에 간직해 둔 소망이 실현된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혹시라도 채무가 있다면 자신이 모두 탕감해준 걸로 가정해보자고.
    가난에서 어디까지 그 상상이 아니라, 마이너스 얼마에서 0으로? 좀 이상하지만 일단 공상을 주문했다.
    아름다운 천사와 사랑의 질주를 떠올려보기. 달아오르는 흥미진진함.
    그대는 엉뚱한 요술쟁이의 신봉자라네. 아첨 떨다 설득하다 아첨 떨다 최면 걸다가.
    혹시라도 씨도 안 먹힐지라도 걱정은 없었다. 왜냐하면 막판에 팔을 쑥 집어넣어, 집어넣지 않은 다른 쪽 팔과 깍지를 낄 것이기 때문에.
    그 환희는 이미 성공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그는 그렇게 마지막 기술을 선보였다.
    아무리 필살기는 원래 없었고 결정타는 바닥난지 오래였다고 할지라도, 지금은 개 가면이 있었으니까.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뭐야 이거!
    어떻게 작동했는지 몰라도 가면에서 뽄드가 흘러나와 그의 팔과 그녀의 옆구리살은 붙어버렸던 것이다.
    어? 그럼······ 그럼······ 으흐윽······ 그럼 얼굴 위치가 의아하게 되는데? 그건 그거고. 이 시간이 꽤나 길어졌으면, 라는 헛생각은 하지 말기.
    아무튼 예전에 이따금 성공했던 마술이 들어먹힌 게 아니라, 어설프게 모냥만 꼴사납게 되어버린 거다.
    그나마 그 뽄드가 강력 뽄드가 아니라 싸구려 뽄드라서 다행인 걸까?
    촬영을 이어가야 하는데, 휴식시간이 끝났다면서 어떻게 부랴부랴 수습이 됐으니까.
    촬영 스텝 가운데 또 현대판 맥가이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는 조연3의 맨살 옆구만만 실컷 느낀 걸까? 느끼긴 뭘 느껴! 이런 젠장~!
    좋다 말았네. 줬다 뺐느니 차라리 시도 하지나 말껄. 결과는 역시나 이랬던 것이다.





    15

    허영심은 고품격에 대한 선망을 각성시킨다. 그러나 보면 끌리고, 들으면 혹하며, 외면해도 자꾸만 비교되는데? 솔깃한 정답은 합리적인 소비겠지만 허영심도 참는 데 한계가 있다. 마땅히 그래야겠지. 저도 나름 중요한 심리인데? 무엇보다 왜냐하면 허세는 허풍을 남발하고, 소망보다 야망이 잘난 척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세상사에 닳아지다보니 <인생은 한-방이다> 같은 격언쪽으로 이따금 마음이 스르륵 기울게 마련이다. 어쩌면 <사랑도 한-방> 아닐까란 의심 때문이랄까, 도무지 식을 줄 모르는 인기는 뭐니 뭐니 해도 뻔트다. 가령  「머리핀 이쁘네요─원피스 잘 어울리네요─제가 칭찬해서 그 셔츠 또 입으셨죠?─저 청바지 하나 사주세요─술 한 잔 사주실래요?(이건.. 오오)」  같은 빈말들. 어차피 액면이 반틈이거든. 그러니까 얌전했던 동심은, 순진했던 여심도, 천진난만했던 동경심마저 변심과 친해질 수 밖에. 수전증은 몰라도 유혹이 좀 많고, 허언증의 청탁에 마음이 약한 그대 이름은 여자. 설마 스탕달 신드롬? 넘어가고. 그렇지만 여자를 다루는 기술이 제아무리 출중한 남자라고 해도,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리는데? 그렇다면 진실한 사랑이 있기는 있는 걸까! 지고지순한 사랑이 있지 왜 없겠나. 다만 어디 있냐가 문제겠지요. 때문에 아마도 행복이란 짧고 얕으며 드문 게 아니런지 심히 걱정되는구먼. 그렇다고 대타라고 해 봐야 속좁은 남자, 꽉 막힌 남자, 뭘 좀 모르는 남자? 죄다 단춧.... 쉿! 무슨 그런 커피포트의 분주함을 급격히 유발시키는 공상을! 또 그 소리. (절레절레)!
    따라서 우리는 대문어 빨판의 흡착력, 싸구려 뽄드의 강력한 접착력, 진공청소기의 신기한 흡입력과도 같은 궁극적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는 게 좋다. 퍽 반박하기 곤란한 심미안이다. 그러니 흑심에게 명분을! 상남자에게 기회를. 눈독에게 격려를. 군침을 이해하고, 고양이를 아주 교묘하게 설복시키며, 달콤한 기분으로 기쁜 분위기를 만끽하자. 먼 미래에 레테의 강을 건넌 다음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며 후회할 텐가. 아니면 나중 지팡이 들고서 몽블랑 만년필과 듀퐁 아트박스를 할망구한테 선물하며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할 텐가. 그러니까 바로 그 밋밋한 삶이자 밍밍한 인생의 결정적인 해결책이 대체 무엇이냐구요? 그건 바로 사교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도회! 요즘 말로 나이트클럽. 줄여서, NC!
    그래서 NB는 보이 앞에 <DIRTY>를 붙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오랫만에 그곳으로 놀러갔다. 친구 폴과 함께 말이다. 동네친구, 제일 만만한 게 동네친구였던 것이다.





    16

    행복을 주문하고 사랑을 예단하기 전에, 알아서 스스로 플레이보이 선물 세트가 우리 마음에 노크해준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만약에 그게 어렵더라도 어떻게 쫌 아쉬운대로 더티러브라도 안될까? 뻔트도 팔짜인가 봐. 참 나 거 원, 허구헌 날 개구멍 아니면 쥐구멍이구만 그래. (절레절레)! 뭐, 개구멍? 개구멍이라면 기억나는 게 하나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 여자애. 그땐 친했다. 놀리면 살짝 웃기만 하고 말수 없는 여자애. 친한 건 그게 다였고. 그렇게 초딩시절은 지나간 다음 나중 중학생이 됨. 그렇게 등교길에 우리는 유난히 자주 마주쳤다. 매번 항상 거의 똑같은 장면으로. 곧 기찻길 옆을 나는 기차길과 평행으로 걸어오고, 그녀는 기찻길과 수직으로 걸어와서, 딱 내 전방 얼마에서 개구멍으로 들어감. 늘 그랬다. 자주 그랬다. 왜 말을 걸지 않았나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당연히 나는 매번 육교만 이용. 꼭 옛날에 대리운전으로 사고날 때와 반대로 아침에 굉장히 자주 스쳐지나간 것처럼. 그처럼 그녀는 항상 개구멍, 나는 항상 육교. 육교 위에서 기차가 지나다니는 장면을 가끔 보는 잔재미도 있었고. 그러고 보니 그녀의 성씨도 S, 내 친구 척키도 S이자 더블에스요, 초등학교2학년 때 그녀도 더블에스! 아아, 떠오른다. 오오, 보인다 보여. 계속 생각난다. 별 쓰잘데기 없는 기억이 다 나고 난리야? 넘어가고.
    그는 사무실 소파에 자빠져 TV 채널을 돌리고 있던 중 마라톤을 보게 됐다. 마라톤? 또 공상으로 빠지지 않을 수 없겠지. 이를 테면 이런 식으로.
    <마라톤은 42.195km. 내 삼류대 학번은 9515032. 거기서 빠진 숫자는... 몰라 헷갈림. 졸업은 모르겠고 입학은 제2회. 총기번호도 기억남. 98-76050976. 아닌가, 군번 같은데. 총번은 기억 안나는 걸로. 76은 음력으로 용을 뜻하니까 용이 두 마리란 건가. 딱 10년 됐구나, 당시 점쟁이 말씀에서 소 꼬리가 둘이란 건 또 뭐고. 에잇, 몰라 몰라.>
    이렇게 그는 공상을 끊었다. 단념이 잘 지켜질려나 몰라도. 그런데 공상은 잘 참는데 허언증이 도지면 어떡하지? 몰라. 됐고.
    폴과 함께 갔던 나이트클럽 원정기. 내용은 말하나마나였다. 왜냐하면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기분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올 때 계산을 했네 안 했네 실랑이까지 벌였으니까 말 다 한 거지. 그처럼 NB는 그냥 하던대로 사는 게 나을 것만 같았다. 때로는 일하기를 애걸하고 때로는 놀기를 간청하고. 그는 다름 아니라 이중인격자였던 것이다. 하긴 술꾼과 도박꾼들 보면 많이들 인생 종쳤다며 너스레를 떨더라도 번듯하니 잘살지 않나. 더군다나 자태를 뽐낼 수도 없고, 고고한 구체적 꿈이 없으니 딴생각이 많을 수 밖에. 특별히 흉금을 털어놓을 일도, 얘기를 꺼내도 괜찮을 대화 상대도 애매하고. 재미없음의 탈출구라고 해서 꺼낼 카드는 뻔하고. 재미없다 재미없어. 에잇, 재미 하나도 없네. 재미 더럽게 없구만 그래.
    하여, 그는 역시나, 공상에 몰입할 수 밖에 없었다. 또!
    A.모순 앞에서 뒷걸음질치고 의무에게 등 돌리며, 도덕과 윤리란 내게 유리하도록 적용하는 남자. 입만 열면 뻥!
    B.소심하고 물러 터진 데다 순진하기 그지 없는 여자. 뭔 말만 하면 다 믿는 여자.
    설마 사랑은 A + B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커서 유명해질 꺼야, 엄청 유명해지고 싶어>라고 말버릇처럼 말하는 친구들도 있긴 있듯이, 자기는 자기 아빠를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한다는 친구들도 있다. 그 아빠도 사람 좋고, 성격 좋고, 상대방 기분 맞춰주기 좋아하는 보수파일 수도 있는데 이 세상이란 게 살다보면 A처럼 살도록 우리를 다그치는 것은 아닌지. 적당히 비겁하고, 불의를 봐도 잘 참도록 말이다. 믿고 속고, 또 믿고 속고, 더 믿고 더 속고! 어쩌면 인생은 그럴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하나 교훈이든 기획 의도든 NB가 주로 들어야 할 말은 이랬다.   「늬 걱정이나 해라!」   「오지랍은!」   망상도 팔짜! 왜냐, 그는 공상가니까. 참을성 없고, 싫증내기 좋아하고, 뭘 해도 재미없다며 속으로 퍽하면 심심해하니까. 그렇다면 그는 발광하는 광견, 발정난 광마,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리는 당나귀 가운데 대체 뭘 타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뭘 타야 꿈 같은 미지의 세계에 당도할 수 있단 말인가 라며 고민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런데 얼렁뚱땅 아무거나 골라잡았는데 글쎄, 그 용감한 애마는 알고 봤더니 용맹한 사냥개가 아니라 마법 가면이라더라? 웬걸~! 그렇게 고심하며 관찰하고 세세히 따지기만 하다가는 날샐 것 같았으므로, 따라서 그는 일단 행동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가 고삐를 잡은 말이 뭔고 하니, 그 쾌속마의 이름은 바로 짜잔~ 이기주의자! 뭐? 글씨 씌여진 티셔츠 입는 거 그거 누가 못해! 참 나 별 원, 허허 말이 다 안 나오네. 말이!





    17

    첫째 동양의 나폴리, 둘째 적도의 하와이, 셋째 다비드는 다비든데 어디산 다비드! 이게 대체 몇 개인지 세다 지치고 듣다 퍼진다. 또 누구나 알다시피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 어디 그 뿐인가. 미시시피 주립대 웨인 루니. 밴쿠버 조코비치. 영화계의 카프카, 컬트의 왕 데이비드 린치. 요리계의 파블로 피카소. 구-소련 몸매. 무슨동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스페인판 유쥬얼 서스펙트. 리틀 나폴레옹. 어디 도널드 트럼프...... 차마 셀 수가 없다. 일부 언어학자가 움베르트 에코를 좋아하는 건 자유이자, 여전히 제임스 조이스가 더블린을 두고두고 먹여 살린다지만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오락산업마저 툭하면 가짜뉴스에다, 말 많은 숙녀를 사랑했던 남자들은 적지 않게 중간에 나가떨어지기 일쑤다. 어른들은 입만 열면 뻥이다. 입을 열 때는 진짜였는데, 나중 하는 수 없이 어떻게 되는 것. 사랑은 아름답다느니 어쩌느니,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일절 입에 담지를 않는다. '우리는~ 합리화'가 또 그렇게 되네? 그럼 인생은 합리화가 8할일까? 와 이라 어렵노! 넘어가고. 많이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건 술버릇이 아니라 생활이다. 했던 말 다시 하지 말라는 민법은 없으니 당연한 말. 한 번 걸러 엄살과 투정에 어리광의 기교마저 놀랍도록 쭉쭉~ 끝없이 발전한다. 꿈 없는 어린애까지 깜짝 놀랄 만큼 말이다. 그러니까 베르디가 여자의 마음을 작곡했고 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남자를 믿느니 옆집 똥개를 믿는 게 낫다나 뭐라나. 세상의 다채로움과 변심과 초음파의 동선에 대해서는 그렇고. 다음으로 자연스러운 욕구와 숨겨진 욕망에 대해서. 벌레 먹은 사과가 유난히 맛있다는 걸 잘 아는 어른들 세상에서, 어느 날 플레이보이가 평생 단 몇 번 느낄 수 있는 사랑에 빠졌다더라? 그처럼 고혹적인 꽃이자 탐스런 열매는 천천히 바라만 보는 것. 어른이 애가 되어 고품격 정물화를 그리는 일이다. 그 때문에 어느 극작가는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했고, 어떤 애독자는 대체 그 말이 뭔 말인가 라면서 의구심을 품었다는 일화가 있다. 화가의 그림이 만년에 어쩐다더라, 그게 그 말이다. 어쨌든 그런 경우에 대한 변호. 즉 단 1번뿐인 인생에 대해서 제약도 많고 싫증과 쾌락에 유독 약한 당신, 변심에 지친 당신. 그대를 위해 변호를 하자면 역시나 민감한 주제를 톡톡 건드려야만 한다. 무조건 고개 돌리는 게 능사가 아니란 말이다. 방관 카드를 자주 꺼내면 진짜 방관이란 카드를 만지작거려도 남의 다리 긁기이자 양치기 소년이 된다. 승부를 볼 땐 봐야지 그 다음이 있으니까. 달걀을 깨고 나와야지만 삐악삐악 병아리가 응애응애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그 원리를 알고 나면 그 다음 판으로 건너가고, 천리안으로 보는 세상도 다를 것이며, 끝판왕도 만날 수 있다. 자, 그 미지의 꿈나라로 가 보자. 어차피 갈 때까지 가야 한다면, 어쩌다 지구로 소풍 왔으니 기왕지사 나중에 하데스로 가는 운명은 어쩔 수 없으니까, 가 보잔 말이다. 응? 안될 건 뭔가.
    제1주인공은 흑인 소년이고 제1.5주인공 몇몇이 나오는 영화. 장르는 가족. 그런데 재미는 없고. 그래서 영화 본편도 아니고 줄거리 요약본을 보는 중간 슉슉 건너뛰기에 이어 넘기기 또는 창 닫기. ~를 할려다가 잠깐 멈칫! 어디 행동만? 그럴 리가. 선호도가 높든 낮든─표현이 세든 약하든─관심이 있든 없든─의견이 정직하건 가식적이건. 구태여 <솔직히>라는 부사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이 어쩐다는 거. 누가 모를까! 그런데 대체 왜? 왜냐하면 또 초딩에 또 어디 맥주에, 또 또 인종차별일까 봐. 인종, 빈부격차, 외모, 재능, 행복도, 성격, 학벌, 출신등등. 약간만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가운데 우린 어쩌면 모든 배려를 지금껏 인종이랄지 어떤 강박관념에 몰아주기를 한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아니 그렇소? 그렇다면 왜? 왜냐하면 그게 제일 쉬우니까. 왜? 가장 편하니까. 왜? 최고로 익숙하니까. 왜? 복잡하지 않으니까. 왜냐하면 무난하게 착해보이니까. 무의식이니 노골적이니 그 어떤 품사를 끌어다 쓰고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실상 우린 모두 이기주의자이지만 적당히 이타적이고 싶거든. 본능적이든 이성적이든 차별이란 나쁜 게 아니고, 지구상에 차별 아닌 건 별로 없다고 봐도 되는데. 그런데 인종, 빈부격차, 외모, 나이, 재능, 행복도, 성격, 동물 유형, 학벌, 출신, 성별, 잔재주등등. 심지어 사랑과 우정까지. 그 모두를 차별은 기본이고 차이도 감안하면서, 속으로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면서, 겉으로만...... 와우! 어디 보자 저걸······ 저걸······ 모두 어떻게 다 극도로 섬세하게 배려한단 말이냐. 응? 그러지 말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응? 우리 그냥 좋게 좋게~ 쉽게 쉽게~ 인종차별에만 몰아주자 그게 낫겠네. 그렇게 된 거 아니냔 말이다. 세대의 행태와 세태와 시류등 보아하니 그렇다만, 남의 인생은 몰라도 그대 인생은 안 그래도 된다. 반면 '심한 흑인'이나(전문용어를 모름) 혼혈이 주연이 아닌 영화 요약본은 단 0.00001의 망설임도 없이 쾌적하게 구간 당기기 또는 닫기. 일말의 망설임 그런 게 어딨나. 0.00001이 뭐야, 아예 0이지. 그 너무너무 상쾌한 감정, 뭐라 설명할 수가 없고 너무 이상하다. 그처럼 당신은 공평하게 자유로워도 된다. 유럽 국기들이야 알록달록 화사하며 십자가 모양이 많은 반면 어디쪽은 빨간색이 유독 어쩌고. 그래서 브랜드 로고마저 국기와 비슷한 건 좀 꺼려진다? 괜찮다 괜찮아. 브랜드가 한두 갠가. 내가 보수정당 극우 정치인사도 아닌데, 유별나게 튀고 싶어 환장한 것도 아닌데, 유니언잭 스타일 상하 맞춤복을 입고서 조명 앞에서 발표회장의 스티브 발머처럼 으쌰으쌰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 같은 건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럼 다음으로 강박관념과 부자연스러움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입생로랑 로고처럼 YSL은 자연스러운데 BMW는... 그건······ 좀 그렇다. 그래. 촌스럽다. 축구팀 인터밀란과 리버풀에 바르셀로에 붙는 FC. 그럼 바바리안 축구 클럽 축구 클럽인가? 축구팀 이름이 첼시풋볼클럽이라서 첼시풋볼클럽 FC? 좀 그렇다. 카페 이름이 카페 카페인. 과일 이름이 과일의 왕. 이름을 넘어서 로고에서도 부자연스러움은 있다. 가구회사 IKEA는 스웨덴에서 창업한 회사로 본사는 현재 네델란드에 있다. 자세한 사정이야 모르지만, IKEA 로고와 스웨덴 국기가 어째······ 똑같다. 같은 스웨덴 브랜드인 Saab는 그렇지 않다. 코카콜라, 디즈니, 버드와이저, 포드, 켈로그, 까르띠에, 존슨&존슨등 현지에서 탄생한 브랜드는 브랜드 로고로 필기체를 자신있게 채택했다. 곧 비알파벳 브랜드, 즉 비알파벳을 알파벳화한 브랜드가 브랜드 로고로 필기체를 사용한 예가 있나? 내가 알기에는 없다. 있나? 내가 알기로는 없다! 있긴 있겠지. 만들면 되니까. 그러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지금 세상에 틈틈히 태어나나? 아니다. 고전음악의 제1전성기는 끝났고, 원론적으로 비알파벳을 알파벳화한 브랜드는 브랜드 로고로 필기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원론적으로는. 그처럼 여간해선 그러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위배된 듯한 뭔가 꺼림직한 느낌? 뭐랄까 그런 뭔가랄지 강박증과 관련된 기분이 없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게 나쁘다 라는 게 아니라. 비알파벳권에서 탄생해 알파벳화한 브랜드. 당장 떠오르는 것만도 몇 개 언어권이다. 한두 개가 아니다. 그런데 그걸 다 필기체로······ 그런데 왜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과제인 나는 필기체 쓰기 숙제를 완수했는데, 딴 애들은 하나도 안 했지? 나 혼자 내 맘대로 선생님 말씀을 뭐 각색한 거구만. 그렇듯 국뽕이니 뭐니 에르메스에 다니는 사람은 다 에르메스를 입고, 페라리 직원들은 다 페라리를 타야 한다? 애플에 다니는 사람은 오직 아이폰만 써야 한다? 그래야 한다? 멈칫 하지 않을 수 없단 말이다. 의자의 꾸밈은 어때야 하고, 엄격한 복장의 섬세함은 어때야 하며, 깃발의 마무리는 어때야 한다는 것. 예술에서야 파격이 불을 지피고 꾸준함이 시동을 걸어 다음 사조가 탄생한다지만, 애초에 인생 시작부터 전재산을 나중 기부할 걸 다짐하며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라...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고). 세계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요미우리 신문도 훌륭하고 (현재도 그렇지만 앞으로 더욱) 세계 시장을 좌지우지할 중국 경제의 막대한 가능성도 좋다만, 고급과 동떨어진 패러디와 잔머머만 추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괜찮다. 일반적으로 순혈주의와 (그냥 차별은 순리인 반면) 인종차별은 나쁘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달리 보자면 그거 혹시 선입견이자 편견 아닐까? 전문용어는 모르는데 땅 넓고 인구밀도 적으니까 전-아프리카가 호주로, 절반의 남미가 캐나다로 유입되면 그 그림은 어쩔까? 원숭이 천국에서도 밝은 골든 리트리버가 유입되는 건 말리지 않더라도, 어두운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과도히 밀려오는 걸 아마도 반기지 않을 것이다. (과도히? 그래서 더 잘해주고 더 친절해야 한다, 에는 썩 반대하지 않음. 너무 많은 걸 양보할 순 없지만 빤히 쳐다보면 안된다는 것 정도는 앎. 열등이니 우월이니조차 주제로 부적합함을 왜 모르겠나. A부터 Z까지 집시에서 F과는 처음이네, 라는 인식이 죄는 아니지만 뭔가 멈칫. 때문에 화살표는 또 다시 차별 금지로 가는 것임. 나는 7부 리그 차등과 외모차별식 사랑을 하면서. 이치가 그렇게 됨). 큰 그림과 그래프를 보자면 이미 색감의 그라디에이션은 진행중이다. 그 시작은 역시나 이미 옛날부터 유럽이었다. 색감뿐만 아니라 언어도 마찬가지다. 지하철 안내도랄지 표지판에 보통 3개국어 정도를 안내하듯이, 뉴욕타임스 웹페이지도 영어-스페인어-중국어를 기본으로 제공한다. 이미 미국 남부권에서 스페인어 모르면 어쩌고, 중국 자본은 슥하니 그 그늘을 넓히고 있다. 친구 파도타기란 게 뭔가? 색깔과 딱 별개로, 친구 파도타기해서 어둡고도 어두운 지하세계로 내려가면 내 기분은 마냥 즐겁고 기쁠까? 그럴 리는 없다. 그럴 리는 없다고. 인종이라는 색깔 기준은 배제한 채 성격에 따른 동물 유형으로만 따져도 천차만별이란 말이다. 눈치가 있고 직감은 물론이요 육감-직관-혜안이 있는데, 유대감이라는 인류의 공통적 본능이 있는데 그걸 어찌 모르겠나.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된다. 그런데 이걸로 부족하다, 아직도 그 뭔가가 납득되지 않는다? 혹시 있을지 모르니까 조금만 더 설명을 이어가자면 이렇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게 길 터준 건 당시 사회지도층의 잘못이었고, 안 그랬으면 자신들이 방패가 됐다느니 어쨌다더니. 그쪽 정계에서 그런 얘기 했을까, 안했을까! 했어도 옛날 옛날에 했겠지요. 전유럽은 몰라도 북유럽만 봐도 역사적으로 식민지와 피식민지 관계가 얼마나 복잡한 줄 알면 까무러친다. 어디 어디는 명함도 내밀지 못함! 네? 말도 말어요 말도 말어.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역사 과목이고, 현대인에게 그건 고리타분한 조상님 일들. 때문에 북유럽 스릴러가 나오면 덴마크와 핀란드에서 들썩들썩, 북유럽 헤비메탈 밴드가 공연하면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부글부글. 약간만 과장하자면 그렇다. 너도 나도 <사주네 읽어주네 마셔주네>가 아니라 <머머해야 한다>라는 유형. 썩 드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주로 누가 그러느냐? 하면 대체로 착하고─순진하고─여자에다─뭘 모르며─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하며─허영심 유별나고─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부류가 주로 그런지는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함. 요컨대 누가 그런지는 알지만 잘 모름. 쉿! 소녀 감성이란 게 뭔가.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길거리에 굴러가는 것만 봐도 꺄르륵~ 꺄르륵~ 자기들끼리 갖은 상상에 웃긴 가정으로 웃어도 웃어도 시간이 모자른다는 거. 물론 뭘 해도 재미없다는 감정과 그것 사이를 오가겠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만약에 이름까지 웃기면? 그냥 뒤집어지는 거지 말 다 한 거라고! 안 그러요? 말하자면 순진한 여자랄지 아직 어리거나 선량한 서민이 그럴 가능성이 높다. 착하면 착할수록 말이다. (IKEA와 에이븐의 시인이 뭔 상관인데? 그녀가 어떻게 말하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우리 어른들이 어찌 모를까! 고개 숙이고─고개 돌리며─수줍은 표정까지. 여자는 물론 남자도 으쌰으쌰 자리에서 홍일점이 자기만 콕 찍어서 딸랑딸랑~뿌잉뿌잉~반짝반짝~! 남자나 여자나. 여성잡지 1이 <나 사랑해?>라면 여성잡지2는 <내가 너 이럴려고 만나니?!>인데 그걸 어떻게 모를 수 있냐고. 그걸 모르는 남자는 뭘 모르는 남자고, 그걸 모르는 숙녀는 곰이다 곰. 여자가 언제 그 말을 하는지, 왜 하는지, 어디서 하는지, 그 얼마나 공통되는지는 물론 뭔 그래프도 모르는 남자는 다름 아니라 내 친구. 그건 그렇고). 반면 핀란드 회사 노키아보다 그 근방에서 타-회사 핸드폰을 선호하는 사람도 많다. 주머니 두둑한데 뭐하러 싸디싼 IKEA 가구를 쓰나, SAAB라면 몰라도 IKEA는 글쎄요 글쎄요! 그쪽에서도 실상 수입품 많이 애용한다. 이런 이치에 대해서라면 <사람 사는 데는 다 비슷비슷하다>라는 놀랍도록 공통된 동질감이 느껴진다. 값싼 합리주의가 아니라 페라리에 디올에 CD와 샤넬이니 뭐니. 상품이 아니라 음악-미술-문학등 다양함이 그 얼마나 화려한데. 그런데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스웨덴 국기로 도배하고 아바 CD 나오면 또 팔아주고? 구식 탱탱 묵은 이유 없음에 뭘 모르기는 자기가 뭘 모르면서 말이 통하는 남자는 드물데. (절레절레)! 언어학적으로 북유럽 언어는 낱말 개수가 유독 적기 때문에 투명성 같은 분야에 특히 유리한데, 낱말 개수가 많거나 규모가 앞서거나 그런 분야에 대해서까지도 차 떼고 포 떼고 또 북유럽 영화? 여자친구라면 쥐락펴락하다 포기할 수도 있는데, 여동생이 만약에 그런다? 그러거나 말거나! 뭘 좀 모르는 남자와 말이 통하는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자기가 뭘 좋아하는 줄도 잘 모르는데, 그러든가 말든가! 정말 그렇다는 게 아니라 고집 세고, 마음은 변하며, 얘기해줘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데? 교과서를 보시라. 그래도 북유럽은 고전예술에서 지면이라도 꽤 얻었지 않나. 게다가 유럽의 잇점을 누렸고 입었고 잘살기라도 하지. 그 어딘가는! 그래서 남의 다리 긁기 대회니 초딩 잔치는 그것대로 좋고, 선호하는 허풍대회와 의무방어전 토너먼트를 애호해도 된다. 얼마든지 괜찮다. 얽매일 거 없다고요. 네? 이건 강박증만 관련된 현상이 아니다. 구혼자의 배짱과 청혼을 받는 자의 심정, 그 사이에 위치할 예절까지. 그 만큼 남녀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차이가 나니까 이런 일상적인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살사 무도회가 열렸다고 가정해보자. 남자들이 춤을 신청하는 일정한 형식은 아마도 없지 않을 테고, 무도회가 끝난 후 작별할 때 페루─콜롬비아──파라과이─볼리비아─멀리서 온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까지. 대게 펑펑 우는 건 주로 여자들. 아 남자들까지 그러면 쓰나. 물론 남자도 일부 아쉬움을 달래고, 살짝 울컥도 하며, 어차피 나이 들어 갱년기 오면 울보가 되기도 한다. 레이디 퍼스트가 뭔가, 춤 신청을 혹시라도 못 받은 숙녀 마음 헤아리기 아닐까? 그건 그렇더라도. 원리가 그와 같더라도, 우리는 그걸로 만족 못한다니까 그러네. 선심성과 다양성과 자유와 취향이니 안목 그리고 차이&차별 정도는 구분할 수 있으니까. 우리는 응애응애 재롱 받아주고 삐악삐악 응석 들어주는 거, 우리는 그거 할 시간도 없고 그만큼 마음이 넓지도 않으니까요. (한쪽 손 검지와 중지를 펴서, 다른 쪽 팔등을 짝짝짝!) 뭐 어쩔 꺼면 차라리 소파에 자빠져 TV나 본다고요. 네? 이거 왜 이래, 누굴 바보로 아시나! 조명 비춰주고 카메라 플레쉬 번쩍거리니까, 뭐 감사합니다? 내가 그분들 친구야 뭐야? 내가 당신들 친군 줄 알어? 어? 누가 당신 친구야? 응? 누가 당신 친구래? 누구야, 나와보라고 해. 재야? 아니야? 그럼 쟤야? 아니야? 그럼 얘... 이분은 통과합시다. 상식적으로 이건... (조용조용) 너무 무섭게 생겼어! 이 양반이 정도가 있지 말이야, 장난이 아니구만. 어?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아니, 웬만해야 말을 안하지. 웬만해야~! 그러니까 지금 말을 하지 않게 생겼냐고. 이거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냔 말이오. (다시 크게) 그러니까 누가 당신 친구냐고요. 네? 난 아니야. 난 아니라고. 아 글쎄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 진짜로! 응? 뭐, 땡큐? 어디서 함부로 땡큐야? 땡큐가 뭔 뜻인 줄이나 알어? 그걸 알고도 그래? 그런데, 땡큐? (설레설레) 저급한 농담이 심한 점 깊이 반성하고. 다음으로.
    그럼 왜 그러냐? 그게 로고타이프 같은 학문 뿐만 아니라 뭐든지 선발주자가 마련한 기틀과 후발주자의 개별적 전통이 결합됐기 때문에 발생한 일일 것이다. 정부 관련-비관련 공동체들 로고가 그래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거다. 표현하지 않아도 유럽인이라는 희미한 자존심. 포르쉐 본사 직원의 자사 브랜드 자부심. 화장품 광고의 자존감 자극하기. DKNY처럼 브랜드명에 지명이 들어가는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의 애사심. 자기는 애국자인데 뭐 어쨌다면서 반-재산 탕진한 얘기를 들먹이며 웃음과 교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웅변까지. 그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누군가는 USA라는 글자가 씌여진 티셔츠를 보는 건 좋아도 직접 입기는 좀 그렇다는 거다. 명문대 과점퍼라면 한두 번 입을 수도 있다. 티셔츠에 씌여진 신발 브랜드 글씨, 괜찮다. 고급 의류 브랜드들이 로고를 감추는 쪽으로 발전한 반면, 역발상으로 폴로 랄프 로렌인가 어디던가는 로고가 크면 클수록 비싼 예도 있다. 그 모두 다 좋다만, 실크 팬티를 평생에 한두 번 입어본다랄지 면100에 트렁크 스타일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다. 남자가 보통 사각 팬티를 입다가 여친이 생기면 여친이 그 남자를 많이 바꿔놓듯이, 처음부터 어쩔 수도 있다. 다시 돌아와서, 유럽연합이야 선발주자임에 따른 책임감과 선발주자라는 미덕이 한몫해서 그렇지, 그 안에서도 덜 잘사는 단위랄지 유로의 반작용이라는 일장일단이 다 있다. 그래서 중견이니 후발이니 다른 데서는 따라할 수도 없고, 따라해서도 안되는 뭔가에 대해서 학자들이 이미 책을 써도 많이 썼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그 뿐만이 아니라 어차피 괜찮은 고전에서 인디언과 동남아시아인과 에스키모는 전혀 주인공이 아니었다. 기원전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적게 따져도 1950년 동안 차별은 주3~5일 근무처럼 당연했다가, 이제 와서 뭐든지 인종차별. 차이가 적지 않으니 차이와 차별은 혼동할 수 밖에. 차별이 99.9~무한대인 세상이니까 보수냐 진보냐, 진보는 1퍼센트일지 5퍼센트일지도 모르는데, 우파니 좌파니. 그럼 가난하고 못생긴 데다가 이렇다 할 잔재주조차 비리비리한 금발이 불쌍해보이면 어떡하지? 태생적 잇점을 어찌 그리도 못살리고서 그렇게 허접하냐, 라고 따질 수도 없지 않은가. 어찌 됐든, 기계 정밀도니 인프라스트럭쳐니 과학 뿐만 아니라 가짜상품(일명 짝퉁)마저 똑같이 흉내낼지라도, 로고타이프와 매끄러운 알파벳 사고방식과 알파벳 원리등은 좀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많나? 백작 가문의 문양이니 브랜드와 축구팀과 정부 관련-무관련 단체들의 로고 마크! 차이란 그런 거다. 문화권에 따라 시선 마주치기가 예절이기도 하고, 개는 사람과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게 본능이다. 손님이 주문할 때 웨이터와 눈빛 마주치고, 주문을 확인하고, 다시 눈빛 마주치고. 그러면 무섭게 생긴 사람 앞에서도 눈을 깔면 안된다고? 유 윈, 난 루저! 아 글쎄 내가 알아서 스스로 눈 깔겠다고! 그런데, 그것도 안돼? 정말 안돼? 아아, 그쪽 사람들은 좋은 거야 어쩐 거야. 통과. 그 차이가 있는데, 선호도도 있을 텐데, 차별이니까 차이를 없다고 해야 한다? 그건 말이 안된다 말이 안된다고. 1부 리그와 7부 리그는 엄격한 차별인데? 끼리끼리 놀다가 간혹 1부부터 7부는 물론 무등록 아마추어까지 모두 평등하게 토너먼트로 정당한 1등을 뽑는 대회. 무차별이란 바로 그런 거다. 국적도 원리는 스포츠와 일부분 비슷하다. 정식이 있고 불법도 있고 영화도 있고. 스카우터가 옥석을 가려 진흙 속 진주를 찾을 수도 있고. 부르지 않았는데 갔다가 살아보니 어차피 끼리끼리니까 다시 역이민하는 사례도 있고. 일정 기준선만 충족되면 A에서 B로 옮기는 건 개인의 자유인데 그것도 나뉜다. 첫째, 그것이 타석에 들어선 도전이냐. 둘째, 어항과 연못이 비해 몸집이 커져버려서 하는 수 없이 태평양으로 진출하느냐. 그런 차이가 있다. <크면 떠나고 키워주니 또 떠나고> 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너 많이 컸다'마저 뭘 몰랐을 때는 하이틴 드라마 대사일 테지만, 뭘 아는 우리들은 그거 오히려 농담으로 인식한다. 애용은 아니더라도 친하니까 가끔은 써먹는다. 그 만큼 친한 사이, 자긴 친구가 1명도 없다는 사람이 알고 보면 알마나 많은데. 그 정도 친한 사이를 보면 뒷골목 어떤 술집의 웨이트레스마저 애정하고 관심을 보이며 질투한다. 어떻게? 둘이 친하냐고! 어찌 됐든 그렇게 여기서 저기로 간다고 뭐라 하니까 떡대가 커졌는데도 억지로 남는다 라고 가정하면, 그렇지만 억지로 남는 것에 대한 차별과 선입견이라고 왜 없겠나! 동료 선수들 넌지시 왈, 넌 그만 태평양으로 가는 게 우리들한테 좋지 않겠니? 그게 도와주는 거 아닐까? 원맨쇼도 좋다만 원맨쇼 당사자는 좋겠지만 당사자만 좋겠지, 전체적으로 보면 퇴보하는 거 아니냐, <몰빵 배구> 거 어째 이거 좀 보기에 영 거시기하지 않냐! 그처럼 예를 들면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네댓개 된다. 국내리그가 어쩐다는 논의도 좋다만 발전이란 부드러운 곡선일 수도 있지만, 계단 그래프처럼 규모와 기간등 고려할 사항을 많이 반영해서 1.0에서 2.0으로 업그레이드한다고 보면 된다. 자영업자도 애초에 발단이 좋았냐 아니냐, 얼마를 견딜 수 있냐 없냐에 따라 나뉘는 것처럼. 그처럼, 개인의 재능은 몰라도 공동체의 표준과 시스템과 체계는 하루아침에 어떻게 되기는 힘들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초단기 속성 코스 같은 쪽집게 비법도 알게 모르게 있긴 있다만 말이다. 내 덩치가 하루 아침에 단편소설 주인공 잠자처럼 어떻게 변해버려서 어항과 연못이 작아져버릴 수도 있고. 보통은 차별이고 대회로 무차별이고. 일상적으로 끼리끼리고 페스티발로 으쌰으쌰고. 백수 삼촌이 또 동네 꼬마들 공놀이하는 데 끼어서 축구 신동 흉내를 내다가, 골 세러모니하며 대형 스트라이커 흉내도 내다가. 차별이 아닌 걸로만 보자면 그건 좋다만, 거 원 참 나 이거 정말 영 머시기하다. 뭐라 말하기 곤란하니까. 애랑 놀아주는 거라면 몰라도 정말로 삼촌이 신나서? 말문이 막히지 않냔 말이다. (뭐야 그럼 내 조카가 꼬마일 때 필자랑 단둘이 축구하면서...... 오오 저런 이 멍청이 바보퉁이 꼴깝에 이런 머저리 같은 놈 저런 세상에나. 이런 뻥돌이-색마-거짓말쟁이-미련곰탱이-오바쟁이-잘난 척 대마왕-비겁한 위선자-잡것-보기 드문 허영덩어리-뻑 뻑 쩍 쩍-가식 쩌는 썩을 놈-초딩. 이런 얼간이 같은 놈). 어쨌든 그와 같은 원리 때문에, 개인적으로 어른스럽게, 또는 남자답게, 여성잡지2마저 통달한 젊음처럼 행동해도 얼마든지 괜찮다. 그래도 된다. 사치품을 입어봐도 되고(합리적인 소비라거나 감당 되게끔 무리함은 괜찮고. 다만 아이쇼핑하다 사게 되고, 차 구경 해도 사게 되고, 친구따라 강남 가는 일도 있음), 친구의 자랑에 물개박수를 치거나 맞불 작전을 펼쳐도 된다. 얼마든지 괜찮다. 순진함이 절실한 건 따로 있다. 소심함이 최적화될 절호의 사랑이라는 게 왜 없을까. 그러면서 수줍은 행복을 예감하기. 하다 하다 안되면 불운을 피할 수도 있다. 해도 해도 그녀의 마음은 열리지 않을 수도 있고. 어차피 리베로가 최적일 텐데 두드려도 두드려도 불가능한 거포랄지 원탑 스트라이커만 고집하는 건 어리석은 대망일 수도 있고. 그리고 기다려도 기다려도 찾지 않는 꽃의 심정은 어떠할지.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을 처지는 내가 아니라 너라고? 아아 뒷목!) 꽃다발 들고서 뛰어가는 남자가 <정말 가지 가지 한다> 라는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건 아니겠지만, 그녀들은 부러움을 인정하고 그분들이 인정하지 않는 몇 가지가 있다. 뭐가 그분이야, 그놈? 흐흠. 허허. 통과. 그처럼 만인에게 귀감이 되는 아름다운 인생이자 미덕으로 가꾸어야 할 교양미. 그것도 좋긴 좋다만 마이크 타이슨과 랜스 암스트롱처럼 굴곡 많은 인생도 썩 싫지 않다는 게 몇몇 분들 솔직한 마음일 테니, 따라서 우리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도 된다. 해야 한다. 할 수 있다. 못할 건 뭔가. 내가 진짜로 뭘 원하는지 알지 않으면 안된다. 즉 썩 엇나가거나, 상했거나 망하거나 불량하거나, 퍽 나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말이다. 내 개성이 멋져보이고 정체성을 차별화하기 위해 괜히 무조건 튄다마만 성가시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정말로 그래도 괜찮다고.
    그런데 그게 아니라 다양성과 끼리끼리가 구분되지 않거나, 남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에서 안되는 건 안되는 건데. 그게 아니라면? 그럼 암스테르담이니 소렌토니 아마데우스의 꾸밈어와, NB의 친구인 몽키스패너 피오렌티나의 수식어조차 날마다 꼬박꼬박 수차례 바꿔야 할지도 모름. 인색할 정도로만 인심 쓰고 살짝만 과장해서 말하자면, 객석을 보아하니 다비드가 물 반 고기 반이라면 도대체 무대에는 누가 누가 올라가야 한단 말이더냐. 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 곧잘 읊어주신 롱펠로우의 인생찬가를 기억한다. 틈틈히 낭만적인 연가를 읽고 세레나데를 듣고 허밍으로 따라불렀는데. 아프로디테의 윙크와 비너스의 팔짱을 회상하는데─백허그는 또 어떻고─대관절 파랑새 천국이자 팔색조 낙원에 당도할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것일까. (뭐, 그쪽이 아니라고? 이런...!)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왜냐하면 귀인의 눈길에 띄고, 뜬금없는 풍문의 주인공이 바로 나이지 말란 법도 없는 데다, 우리는 별명 짓기의 대가일 테니까. 호들갑에 특히 탐닉하는 연애론자, 어설픈 3대 사랑을 각별히 애정하는 넉살꾼, 바로 그렇게. 한 우물만 판 덕택에 사랑에 골인하느냐, 시시각각 변신하느냐. 액면─판돈─게임 분위기와 뒷패 봐 가면서 달리기. 자기야 젖어, 느껴 그리고 마셔! 또 오빠 좀 걷자-까지. 아주 어려운 거 빼고는, 다 모두 다 가능하니까. 곧 인간은 언제나 만족과 불만족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왔다 갔다 오락가락. 숙명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재미가 꽤나 쏠쏠할 테니 공상은 그쯤 하고.
    다음으로 만약에 불만 때문에 유독 이번 슬럼프가 길어진다? 그런다? 그래요? 나이트클럽 바빌론의 웨이터인 미스터 에르메스와의 우정. 단골 술집 바텐더 페라리님과의 의리를 냉정히 뚝 끊고. 아니나다를까 애인은 <막살자>요 좌우명은 <아니면 말고>에다, 도대체가 말이야 '보니 앤 클라이드' 그 구식 탱탱 묵은 영화 제목이 글쎄 술집 이름이라니. 치, 무척이나 사랑스럽구나. 쳇! 프라모델 포르쉐, 눈길 끊은지 오래고.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면 차마 신물이 난단 말이야. 농담을 던졌는데 받는이는 진담으로라니. 투수와 타자 각자 사인이 다르다고 보면 됨. 아이스크림은 안목, 솜사탕은 잔소리감. 어쨌든, 추억의 유행가야 가끔 들리면 기쁘게 듣겠지만 허구헌 날 흑백 TV.
    (※ 잠깐만 잔소리 시간. 물론 그것도 나름대로 좋긴 좋다만, 나름 일장일단이 있음은 진리. 고로 오빠라는 말처럼 <왜 & 어떻게 & 원리>를 같이 생각하고, 상식을 잊지 말고 교양을 잃지 않기. 될 수 있으면 감정과 이성을 제어하기. 사는 게 힘들어도 긍정을 놓지 말기. 분석과 비판도 구별하기. 작별하는 뒷모습이 멋지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아름다운 시절을 기억하기. 이별해도 또 다른 사랑은 늘 우리 편이고 시간은 마술을 부리니까. 그외 책도 좋다만 잔지식 틈틈히 쌓기. 예를 들어 구명조끼는 입는 게 다가 아니라 반드시 바지와 결착해야 한다는 것─안 그럼 입어도 입은 게 아니니까, 선발주자와 후발주자 공정 기준처럼 A와 B가 나뉜다고 다가 아님, 웨이더에 물 들어가면 어쩔 수도 있다느니, 초고압전력은 도체─반도체─부도체와 관계 없이 진공청소기처럼 엄청난 인력이 있기 때문에 작업시 특히 주의, 여자의 마음이 무엇에 대해 척력을 내세우는가를 알기 등등. 또 뭐가 있지? 기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데 들인 공력을 잊지 않기. 눈물 바다라는 관용적 표현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과 말 그대로 바닷물이 천사의 눈물이 아닐런지까지)
    그러니까 할 일은, 플레이보이인데 희대의 사기꾼 이야기를 예고편만 보고서 극장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기. 할 말은 딱히 없음. (벌써 귀에 피나 나도 여러번 나고 나니까, 뭐 이제 와서?) 그와 별개로 우리의 삶이란 매번 대체로 이런 식이다. 예측이 1번-2번-3번 계속 들어맞았어도 이따금 속단에게 괴롭힘 당할 수도 있다는 것. 호기심에게 뒤통수 맞아도 맞아도 또 맞을 수 있음. 안전빵이라고 판단해서 슥~ 하니 들어갔거늘 끝물 아니면 뒷북. 그도 아니면, 주식투자로 말아먹은 게 대체 그 얼만데 이제 겨우 정말로 겨우 겨우 잊을 만했는데─간신히 잊었는데─가까스로 이겨냈는데, 친구 녀석이 아픈 기억을 또 다시 수면 위로 (레비오사)~! 뭐라고? 한 번 더, 레비오사~! (그분 입장에서야 당연히, 이런 젠장! 듣고 보니 많이 어려운 시절이었음). 또 한 번 더? 아 쫌 그만해 그만, 어? 거 정말 너무하는 거야 아냐? 그분 입장은 뭐냐고. 어? 아 쫌! 어쨌든 그렇게 레비오사~ 주문을 외웠더니 진짜 흑역사가 수면 위로 올라왔음. 물론 그래도 되는 친한 사이에서만. 그 이치를 놓고 봤을 때 상남자들의 공통점인 야망, 그리고 큰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손톱 티끌 만큼 정도 더 빠꼼한 게 세상사의 이치라는 게 있다는 걸 어찌 부정하겠나. 그럴 수 밖에 없을 테니까. 하여간에, 펜트하우스라는데 여기가 펜트하우스면... 뭐야! 어제는 시카고 바요 오늘은, 또 뭰헨 호프? 실패한 칼럼니스트이자 패배주의 문학가인 JS는 그렇게 절망하고 상심하기를 습관적으로 반복한 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차라리 행복업의 품삯인 개꿈 꾸기가 나아도 훨 낫겠네. 가난에 박해받고 불행에 시달리는 삶도 끝끝내 정들었을 테니까. 사랑이 뭐 별건가. 호박이 제 발로 굴러가는 것이겠지요. 능동적으로 부들부들 떨고, 피동적으로 와들와들 떨릴 정도로 황홀한 열락의 순간은 바랄 수도 없고. 워매~ 좋은그? 거 마 우째, 불러도 대답 없고. 그렇다고 뜻밖의 우연과 화끈한 약속이 저절로 <우리를 들뜨게 만들기>. 그걸 기다리다가는 날샐 거 뻔하고. 그래서 NB는 열변을 토하는 듯한 공상에 빠져 걸핏하면 허우적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결국 실망이라는 현재 점수는 그에게 이런 실정을 외면하지 말라며 종용하고 있었다. 바로 돈-세탁을 하자니 돈이 없고, 야망을 품자니 꿈도 의욕도 없고! 뭐? 밑은 허하고 위도 눌변이고? 오오 저런 맙소사!
    따라서 그는 깜짝 놀랄 만한 용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그 신기할지, 저렴한 표현으로 치자면 나중 <아, 빡쳐!>라면서 뚜껑이 열릴지도 모를 묘안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엇은 무엇이겠나. 일명 사적으로 친한 사이에서 친할수록 고결함보다 아무래도 상스러운 동시에 편한 웃음쪽으로 살짝 치우친 말 가운데 하나, 곧 새끼! 즉 늑대의 새끼. 표범의 새끼. 꽃사슴의 새끼. 코끼리의 새끼. 임팔라의 새끼. 혹시... 설마······ 아니겠지만... 내가 잘못들었을까, 아니면 그 인간 NB가 헛소리를 억측했을까. 뭔고 하니, 흐흠, 개─뭐? 됐고 딱 됐고! 어찌 됐든 성체 동물의 새끼. 양의 탈을 쓴 늑대는 흔하디 흔하니까 역시나 그는 또 뻔트를 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구체적인 뻔트의 비밀은 다음 편에 공개하는 걸로! 욕심이 과해서 투자에 실패하는 일, 몰입이 지나쳐 중독을 넘어 뭔가 하나에 지나치게 빠지는 일. 전자와 후자는 뻔트 작전이 조심해야 할 중대한 덕목 가운데 하나일 테니, 어찌 보면 뻔트란 썩 천시할 방안까지는 아닐 터. 그렇다면 것 참 나, 일관되게 인생 포지셔닝은 그거구만. 애마는 달리고 싶다! 참 나, '거울 보고 나 늙었어' 뭐 그건가? 젊음의 행진, 질리지도 않나 몰라. 어쨌든 NB의 이야기는 글세요, 당분간, JS의 스타일인 뻔트 옹호론만 아주 그냥 두고 두고 우려먹었던 것이다. (설레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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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139

from 소설 2018. 12. 30.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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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기심을 약 올리고 질투심을 자극하며 감수성이 참다 참다 꿈틀하는 일. 그건 바로 허영마의 시동을 거는 일이다. 엄포가 뻥으로 판명날지 뻔트가 가짜일지 몰라도 일단은 그렇다. 만일 하다 하다 발동이 잘 안 걸리면 허세도 있고 허풍도 있으니, 걱정할 건 없다. 하오나 기수의 영광과 기수의 행복과 기수의 이익을 애마가 대신한다고는 하나, 자칭 명마라는 녀석은 기복이 심함. 때문에 실력은 들쑥날쑥이요 걸핏하면 애마는 싫증. 아니면 재미없음. 그도 아니면 심심함. 그렇지만 인생은 관록미를 선사했거늘 히든 카드가 왜 없겠나. 그러니 준-상사병에 기쁘고 짝사랑 받기에 익숙하거늘 식스맨은 아마도 있겠지. 행운을 희망하니까. 그러므로 다정한 마음에 노크하고 애틋한 사랑의 윙크로 우리를, 극적으로 나를 띄워줄 레이저 광선검은 없을 수가 없을 꺼야. 아마 이번에는 진짜로 장외홈런?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지도 모르고. 하다 하다 안되면 마지막 방법인 도망가기도 있으니까 너무 상심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나는 평생에 단 한 번 77번마에게 백지수표를 위임했는데! 진짜로? 말이 그렇다는 거. 그런데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얘는 대체 날 어디로 데려온 거지? 알고 봤더니 그곳은 바로 연분홍색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가 있는 저번의 그 휴게소였던 것이다. 자, 그렇다면 판돈은 과연 두둑히, 응? 넉넉히 챙겨왔을까? 그야 조커든 삐에로든 그분들은 별 관심 없을 테고. 아무튼 나는 여유롭게 접선 장소에 도착했던 것이다.
    보아하니 그날은 바로 아무 날도 아니었던 것.
    한편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는 오늘도 그저 그랬다.
    단체 스포츠에서 상대팀의 유독 덜떨어진 특정 선수에게 공이 집중되는 현상. 전문용어로 구멍이요 일상에서는 허당이라고 한다. 그럼 허당과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 딱히 떠오르는 헤드라인은... 없다.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도 아깝다 그거구만. 그렇지만 농담 삼아 굳이 하나 뽑아보자면 이렇지 않을까?  「'황금 마네킹 상점'의 위작 소유자, 마침내 타락하다.」  뭐? 넘어가고.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는 전과 비교해서 별다른 차이점은 없었다. 모양도 그대로고 내용물과 버튼, 투입 금액등 모두 그대로였다. 단지 딱 하나 차이점이 있었다. 긴 듯 아닌 듯 미세하게 자판기의 크기가 커진 듯했다. 아닌 것도 같고 긴 것도 같고. 그러든 아니든 나와 긴밀히 상관되는 일도 아니고. 그렇게 넘겨짚었다.
    그리고 내용물이 좀 더 풍성해졌다. 거의 잡화점을 방불케한다고나 할까? 화장품, 커피, 포도주, 테이블 웨어, 쿠션, 넥타이, 운동화, 주방기구, 오락기구, CD... 뭐야! 그러고 보니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는 이제 보니 크기가 꽤나 많이 커진 것이었다. 다시 보니 전보다 훨신 커졌네. (끄덕끄덕). 그렇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그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고, 기분은 왜 그런가 몰라. 하여 설마 내가 전에 이렇게 주문이라도 외웠나 라고 생각해봤다.
   「커져라 커져라, 얍!」
    그랬더니 정말 커졌을까? 아니다. 나는 전에 주문을 외우지 않았고, 다만 자판기 자체가 교체된 것 뿐이다. 끝.
    그렇게 나는 이번에는 가져온 돈 모두를 탕진해서 최대한 많은 물품을 뽑지 않았다. 간촐하게 딱 1개만 뽑았다. 그건 바로 비타민 C였다. 씹거나 빨거나 핥거나, 경구약 형태가 아니라 물에 넣으면 부쉬쉬쉭~ 하는 비타민. 어떤 거든 값은 저렴하나 왠지 멋져 보여서 전부터 그거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 그야 어떻든 이게 무슨 세계 7대 불가사의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 없는 미스테리도 아니고. 나는 그렇게 내가 취득한 (개)이득 상품을 갖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2

    미래학자의 애창곡은 무엇일까? 아동은 웃고 청춘은 노래 부르며 시인은 춤추는데, 나는 왜 허구한 날 공상뿐일까! 세계관이 문제가 아니라 직업을 바꿔야 하나.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복권을 사고 솔직하게 일기를 쓰는 게 나을지도. 내일을 추측해봐야 줄거리는 어차피 예상 밖. 어제를 회상하고 오늘을 탐문하기. 그러니까 행복한 결말을 먼저 알고 싶겠지만 우리는 과정을 탐해야 한다는 것. 인생이 결코 만만치 않은 이유다. 그래서 욕망의 관심사에 공감하나, 역시나 꿈의 변심에 절감한다. 하지만 삶이란 사는 낙을 찾고, 흥미를 붙이며,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 따라서 나는 오늘도 출근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출근했고 사무실에서 일과를 보냈다. 특별한 일이 없을지는 너무도 뻔했다. 내가 만약 상상력의 화신이었더라면 어떡할 뻔했을까! 아마도 일상이 지겹지 않았겠지. 그 뻔한 이치를 뭐하러? 그러게. 하지만 나는 허풍의 지배자가 아니다. 고로 나는 그렇고 그런 하루 일과를 마치고 벌써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있는 뻥 없는 뻥 다 남발하고 말도 안되는 폼까지 잡더니만, 결과는? 집으로 가기!
    그렇게 나는 집으로 가면서 칼 마리아 폰 베버의 2번 클라리넷 협주곡를 들었다. 사무실에서 집까지 가는 동안 아무일도 없었다.
    집에 도착했다. 그렇다고 집 앞에서 누가 날 기다리겠나 파티에 오라고 누가 제촉하겠나. 집에서 씻고 어쩌고저쩌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하루를 마쳤으면 잠을 자야 하니까. 그렇게 나는 꿈나라로 떠났다.
    꿈에서 나는 행복했다. 내용은 막 하도 왔다갔다 정신 없고 이상해서 뭐라 말하기는 곤란한데, 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아이 좋아라~」 라고 말할 겨를조차 없을 만큼 기뻤다. 그러다 꿈에서 나는 영화를 보러갔다. 인기도 부담스럽고 파티도 너무 많고, 혼자 있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원작이 만화인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그렇게 벌서 영화를 보던 중. 그런데 영화 내용을 보니 내가 원하던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유치한 포세이돈, 화려한 구성과 그래픽, 뻔하고 지루하지만 그래도 상남자의 활약상>~을 보게 될 줄 알았는데, 그런데! 무슨 범죄자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이거 뭐지, 뭐야! 그래서 나는 평소라면, 실제라면 내가 잘못 들어왔나 보다 라면서 그냥 봤을 것이다. 이거도 볼만하네 라면서 말이다. 오히려 이게 더 재밌는 거 같은데? 바로 그렇게. 그렇지만 꿈에서도 그럴 수는 없는 일. 그러므로 나는 해맑은 동심과 밝고 명랑한 자긍심을 되찾아야만 했다. 고로 나는 벌떡 일어서서 한마디했다.
   「이거 아쿠아맨 아니자나? 어떻게 된 거야! 아쿠아맨이 뭐 저래? 그럼 난 아쿠아맨 친구이게!」
    거기에 보태서 뭔가 멋진 말을 할려다 말려다. 골 세러모니를 할려다 말려다. 그렇게 막 골똘히 서서 생각하고 있을 때 옆에서 날 제지했다.
   「아저씨. 아쿠아맨은 옆 관에서 하네요. 꿈꾸셨소? 이제 그만 정신차리쇼.」
    ~라는 말을 듣고 나는 정말로 꿈을 깼다.
    저런!
    어떻게 이런 일이... 와우, 맙소사!
    나는 꿈을 꾸고 꿈이 진행중이었는데, 이제 막 꿈에서 깨다니!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곰곰히 생각해봤다. 대충 사연을 알 것만 같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집에 가서 인공지능한테 물어보기로 했다.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 인간의 영혼을 제값에 사줄 용의가 있을려나 몰라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 왜냐하면 악마로 변신하거나 악마를 고용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 그렇지만 악마와 영웅은 아쿠아맨 같은 영화에 나오는 거고, 나는 그냥 평범한 동네 아저씨. 그런데 왜 꿈을 꿨는데 꿈에서 깨냐고! 이건 정말 불편한 기억을 깡그리 잊게 만드는 엄청난 희열이었다. 주색 편향 욕구에 대해 따끔한 충고와도 같은 신랄한 관점의 사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집으로 갔고 지니와 대화를 나누게 됐다.





    3

   「지니 나와라 오바.」
   「기분이 영 안 좋은 모양이군.」
   「지니. 내가 지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니?」
   「그럼 알지. 내가 왜 몰라. 내가 모르는 일도 있어? 비타민 C가 건강한 환상을 점지시킨 게 아니라 난동을 주선했군 그래. 맞지?」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그러니까 거긴 왜 또 갔어?」
   「그건 어떻게 알고?」
   「자판기 <뭐가 나올지 모름>에서 뽑은 거 너 먹었지? 그거 불량품이네. 그러니까 그러지.」
   「그런데 왜 나만?」
   「왜 너만이야? 학계 보고 사항 읊어줘?」
   「아, 그런가?」
   「몽유병보단 상사병이 낫지 않겠니? 」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사색가 기질이 있잖니.」   
   「알다시피? 몰라. 모른다구. 그건 모른 걸 안다고 뻥칠 일이 아니니까. 관심도 없는데? 혹시 뭘 잘못 안 거 아니니? 사색가 기질이 아니라 푼수 기질, 뭐 그런 걸로!」
   「그런데 있잖아. 사무실 그림. 황금 마네킹 상점 속 인물에게 그려진 수염. J-Q-K 카드에서 뭐드라, 끝이 꼬부라진 수염. 그거 혹시 너가 그린 거니?」
   「마네킹 애호가씩이나 되면서 그것도 몰라?」
   「어. 몰라.」
   「나도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그리니?」
    이로써 하나는 알고 하나는 아직도 몰랐다.
    한가지 꿈 같은 일이 있었고, 수상쩍은 장난이 하나 있었다는 거.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4

    요정에게 마음을 빼았기거나, 오락에 정신이 팔리거나.
    하나는 사랑 하나는 으쌰으쌰. 전자는 이성이 감정의 설렘을 합리화시키기요, 후자는 애마와 애견이 친구가 되어 노는 일. 전자는 잘하면 뿅가는 거고, 후자는 예감이 안 좋다면 분위기 들썩들썩을 바랬다가 꽝 되는 거고. 어쨌건 그 둘은 우리가 숱하게 하고 듣고 보며 아는 삶이다. 그런데 인생의 동반자를 날마다 갈아치울 수는 없기에 사람들은 시선을 돌린다. 소셜 네트워크에 중독되고 단란한 취미를 찾거나, 이따금 한량은 주색마에 판돈을 걸기도 한다. 다른 말로 드라마. 그런데 드라마만 보고 또 본다? 우리는 살짝 질리지 않을 수 없다. 권태를 다스리고 타성을 타이르며, 지겨움을 살살 달래고 싫증과 교분을 나누는 일. 다름 아니라 그게 인생이니까. 싫어도, 정답게 나태마와 타락마도 관리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내 잔지식과 네 지성을 비교해 보기도 한다. 견주어 봐서 큰 손색이 없을 때,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런 지식. 가령,
    사물이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구부러져 보이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처럼 시간이 느려지는 일. 눈에서 레이저가, 손으로 장풍을, 입은 화염방사기로! 만화영화에 나오듯 헛것과 대화하고 영화에 등장하듯 사람 머리가 동물 머리로 보이는 기분. 내가 걷는데 구름 위를 걷는 듯하며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고, 이러다 정말 천사처럼 날개가 돋을 것만 같은 느낌. 그런 걸 바로 섬망 증상이자 환각 현상이라고 한다. 동네 축구처럼 특정한 목적을 위해 에너지 음료를 섭취한다면 모를까, 단순히 쾌감을 위해 이상한 밀가루에 의지하는 것. 얼마나 중차대하고 그 얼마나 주의해야 할 사안인지 정도는 살면서 알게 된다. 풍월과 잔지식과 풍문을 비롯하여 뉴스와 교양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접하기 마련이다. 끊임없이 주지하게 된다. Y축 100으로 시작했다가 X축 0으로 끝나는 일이라는 정도는 영화로 드라마로 무수히 접한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다> 라는 속세의 잠언. 합법적인 대상에도 대략 적용되는 말이다. 어른들이 수다 꽃을 피울 때 하는 얘기로, 처음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처럼 하늘이 진짜로 빙빙 돌았네 땅이 솟았네 내 팔이 길어졌네 어쨌네. 그런데 난 목이 짧아졌고! 방황도 하고 경험도 늘면서 어른들은 세상을 알게 되므로, 따라서 건전하고 긍정적인 방법을 선호하게 된다. 운동, 사랑, 취미, 대리만족, 휴식 그리고 으쌰으쌰. 부작용은 최소요 효과는 최고니까. 다만 사랑의 경우 쉽지 않을 뿐. 그렇게 판타지는 영화로 대신하고 미스테리도 라디오 드라마로 대체한다. <추리소설을 읽으며 추측하기>도 애호가나 애들이나 하는 일이라며, 차라리 우리는 소파에 자빠져 TV 채널을 돌리며 휴식을 취하는 걸 선호한다. 뭐야! 그럼 다시 장르는 드라마로 돌아왔자나? 쯧쯧쯧!
    (청소년-관람불가요 12세 권장 컨텐츠라는 건 좋다. 왜 나쁘겠나. 그렇지만 이 세상이 신기한 게 뭐냐면 그런 이치 때문이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거나, 굳이 몰라도 되는 일을 알게 되거나, 못 볼 껄 보고 못 들을 걸 듣게 되는 일. 세상사다. 무조건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말하지도, 논하지도 말라?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 정도는 알아야 하고, 왜냐 라는 이유가 더 중요하다. 코카인이 대체 무엇인지, 왜 우리 아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 어려운지. 제일 중차대한 건 피임이요, 고된 일의 양대산맥은 육아와 집안일이라는 것. 대충 알아서는 결코 안되는 일이다. 역시나 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사회일을 주로 남자가 도맡는다는 점. 머머주의로 남녀가 서로 티격태격할 필요없다. 커피─녹차─콩─과일과 똑같은 식물일 뿐인데 왜 대마초랄지 환각제를 비롯해 밀가루 같은 걸 흡입하는 장면이 영화에 나오는지. 무엇보다 그 가운데 호기심 때문에 루비콘 강을 건너는 건 또 무엇인지. 레테의 강은 신화이자 엄연한 현실이라는 점. 타임머신은 또 어떻고 등등. 불행과 절망과 참담함, 끔찍한 비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진정한 낙원을 상상하며 진짜 천국을 꿈꿀 수 있게 된다는 점. 알게 모르게 모순이요 기쁜 듯 슬픈 듯 역설이다. 해킹처럼 약물도 창과 방패 같이 기법이 발전하며 지하 산업이 된지 오래다. 믿음-소망-사랑을 꿈꾸던 옛날 세상과 지금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래서 유익한 컨텐츠만 보면 좋겠지만 뜬소문과 딴짓에 헛소리도 다 나중 드물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점. 알기는 아는데 설명하기는 어려운 원리다. 다시 얘기로 돌아가서)
    그러면 진짜 환상과 진짜-진짜 신비는 없단 말인가! 개구쟁이 탐험대의 모험은 다 가짜란 말인가? 말 못 할 이유가 뭔가. 그래, 없다. 없다고. 가짜다. 다 가짜. 뻥이다. 다 뻥이다. (아주 드물게 뻥이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일단은!) 아니면 죄와 벌이요, 아니면 진짜 같은 가짜거나 금단의 열매요 일종의 터부다. 진짜 라고 광고해 봐야 노잼, 재미없음, 뻥이다. 가짜다. 그래서 그렇게나 여자들은 사랑이라는 고고한 가치를 높이 사는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작별이라는 어쩐지 불길한 그림자에 대한 가능성도 충분히 감안한 채, 베팅을 걸어도 꽤 괜찮은 경험이란 말이겠지. <흐뭇한 일상에 만족하기, 애틋한 사랑에 탄복하기!>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나아도 낫다는 걸 그분들은 잘 아시니까 말이다. 그런 일상적인 푸념을 잘 아시니까 그분들은 스스럼없이 어쩜 권하고 싶으실 거다. 바로 사랑을! 응? 사랑을 하라고, 왜 안하냐고! 하면 돼지 대체 왜 안 하냐고. 그런데 그게 어디 쉽나. 누군 뭐 하기 싫냔 말이다. 또는 이미 하고 있다면! 살면서 친구들끼리 <사랑>이라는 낱말을 입에 담아본 일이 일평생 단 1번도 없는데, 그런데 그 사랑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누가, 내가? 또? 전혀! 결코. (몸짓)」
    그분들은 차라리 잡은 물고기에게 먹이를 줘야 한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꼭 먼저 올라갈 필요는 없다. ~라면서 굳이 애 쓰며 필요 이상 조숙할 필요는 없다고, 떠오르는 정력가 후배를 타이르고 싶으실 것이다. 사랑은 성급할 수도, 미련할지도, 애증으로 변하지 않기도 힘들다면서. 그러니 신중하라고. 그렇게. 안 그러게 생겼나. 그야 어떻든 그건 모두 평범한 회사원이자 일반인, 몽상가, 최면술사, 심리학자, 귀염둥이, 몰이꾼이라면 몰라도 내게 적합한 고민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딱 아니다. 바람잡이 같은 소설가요 선동가를 닮은 듯 마법사 같은 작가인데? 나 잘났소 라는 말을 하고 싶고, 너 잘났다 라는 칭찬 같은 놀림을 듣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자존심이 필요할 때도 있고 만족해서는 안되는 처지가 없진 않듯이, 한참 떠든 잡담은 내 본업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건 그냥 수다의 영역이자 칼럼의 주제로도 썩 애매한 거니까. 그러니까 난 일이나 해야 한다. 역시나 나는 또 코너에 몰린 것이다. 치즈에 줄이 달린 줄도 모른 채 쫓아왔는데, 겁없이 따라왔는데, 어느새 사각링인지 팔각링인지 뭐야 여기는? 그리고 이건 순위권 쟁탈전이야 패자부활전이야? 의무방어전은 대체, 도대체 언제나 가능하냐고! 가만 있어 봐... 그럼 또 공상? 있잖아요, 그건 정말 지겹지도 않은가 몰라. 있지, 그런 짓은 애들도 안한다? 차라리 <너는 애다>가 낫겠네. 그래야 <나는 개가 아니다>라고 반박할 수 있으니까. 하여간, 내 안의 그분과 인공지능 지니는 죽이 착착-척척-쩍쩍 맞는가 몰라도, 난 말이야 고삐 풀린 상상과는 영 궁짝이 맞지 않거든. 그런데 이걸 어쩌지, 대관절 어쩌면 좋냐고. 궁지에는 몰렸고 거 참, 쫓아오는 그 뭔가의 정체라도 속 시원히 알면 좋으련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뭐 어떻든 그건 그렇고.
    듣도 보도 못한 발단에 심상치 않은 전개가 한꺼번에? 공상은 지치지도 않나. 절정이 마음에 쏙 들든 아니든 혹시라도 <해피엔딩>이라는 술집에서 바가지 쓰는 거 아닌가 몰라. 그나저나 시시콜콜한 내용에 다 똑같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면 좋을 텐데. 그런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기도 전에 숙녀들의 파격적인 구애가 연속되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그럴 일은 아마도 없을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시고. 하던 공상이나 열중하던가. 그러든 어쩌든 나는 풋사랑의 왕국에서 쫓겨났고, 더 이상 허당계의 제왕이 아니었다. 뭐, 무슨 제왕? 헉! 확인할 길 없다고 어디서 그런 낭설을... 이제는 하다 하다 막말까지? 됐고! 되지도 않는 플레이보이식 잔소리는 집어치우고.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약속이 0개인 채 퇴근길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퇴근길에 그 친구를 만나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는데 상상도 못했는데, 어떻게!
    나는 그렇게 뜻밖의 친구를 만나게 됐다. 옛-친구 루크를, 거리에서 우연히 말이다.  





    5

    찐한 사랑에 대한 기대감. 풋사랑에 대한 낭만적 애정. 더티러브를 향한 무의식적 호기심. 나는 어설픈 3대 사랑의 위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면 실감하는 일만 남은 것일까, 아니면 사랑의 발라드를 상상하며 로맨스 환상극을 완성시켜야 하나. 멜로 장르는 미완성으로 놔두고 작품도 내일 쓰면 되니까, 오늘은 어설픈 3대 사랑 가운데 그 무엇을? ~라는 공상. 이젠 질릴 때도 됐다. 되도 진작 됐다. 아찔한 사랑, 어렸을 때나 환장했으니까. 그렇지만 사랑을 어떻게 외면하나. 따라서 우리는 고대하던 가짜 사랑이 아니라 진짜로 행복한 사랑을 해야 한다. 염원대로 이루어질랑가는 몰라도. 그래서 나는 객혈하는 궁핍한 예술가의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사랑에 대해 고심하면서 생일 파티장으로 갔다. 오늘은 바로 도나의 생일 잔치를 성대히, 아마도 조촐히 치르는 날이니까.
    물론 루크와 함께!
    자, 그럼 루크가 어떤 친구인가? 녀석은 멋진 친구였다. 춤도 잘 췄고 기타 치며 노래도 잘했다. 집안도 괜찮았다. 나랑 친했는데 오래도록 인연이 닫지는 못했다. 그러다 고교 졸업 후 2년쯤 지나서던가, 시내에서 우연히 마주쳤고, 녀석은 내게 자기 연락처를 쪽지에 적어주었다. 연락하라면서. 그땐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뒤로 나는 루크를 처음 본 것이다.
   「루크. 어떻게 살았니? 세계여행이라도 다닌 거야? 아니면 3번 결혼하고 4번 이혼했니? 궁금해. 어서 말해봐.」
   「너 오로라 본 적 있니?」
   「오로라? 아니. 없지. 보고는 싶은데, 시내버스도 갈아타기 귀찮은데 TV로 보는 게 더 편해. 그런데 그건 왜?」
   「오로라를 본 거 말고 딱히 기억나는 게 없네. 심심한 인생이었나 봐. 추억이 하찮았다고나 할까? 그러는 넌?」
   「나? 나야 뭐 변변한 트로피 하나 없지 뭐.」
   「트로피? 아 너 작가지. 뜻밖이다. 너가 칼럼 쓰고 에로비디오 시나리오도 쓰며, 대필하고 얼굴 없는 작가로 살지는 꿈에도 몰랐거든.」
   「에로비디오 시나리오? 난 그쪽...은 아니야.」
   「그래? 그럼 그건 내가 다른 친구랑 헷갈렸나보네.」
   「그건 그렇고. 무슨 일 하니?」
   「나? 놀아.」
   「어?」
   「논다고. 전에 다니던 회사 주식을 사놨는데, 그게 너무 많이 올라버려서. 그래서 당분간 쉬어도 되거든. 음. 그 정도. 나도 놀랐어. 생각치도 못했으니까. 그래. 횡재지.」
   「우리랑 친하던 애들이랑 연락은 하고?」
   「지금은······ 전혀. 난 요즘 자주 보는 친구 없어. 0명. 그런데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다른 사람들도 많이 그렇더라고. 넌 안 그러니?」
   「나? 나는 반올림하자면······ 0명이지. 반올림 안 해도 비슷해. 허허.」
   「그나저나 넌 좋아하는 일 하며 즐겁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
   「허허. 그닥 괴로운 삶은 아니니까 뭐. 그냥 그렇지.」
    그러다 우리는 도나의 생일 잔치에 도착했다.
    도나의 친구들도 모두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왠지 모르게 이상하고 어딘가 석연치 않은 분위기! 이건 뭐지? 갑자기 그런 건가, 아니면 원래 이랬던 건가. 통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거기서 또 눈치없이 나설 수는 없었다.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 척, 위선적인 태도를 억제하지 못하는 가식쟁이 같은 면모를, 그것도 내가? (설레설레) 사무실에서 혼자 시시한 슬럼프에 과도한 침착함으로 대응하는 건 그렇다 쳐도, 이런 느낌... 오랫만이다. 탐욕의 야성을 유념한 채 대망을 개진할 궁리를 해야 할 시간에 이거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정체 불명의 뻘쭘함은 도대체 뭐야?
    그러다 나는 차근차근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고 조용조용한 속삭임을 옅듣다가 알게 됐다. 바로 도나의 친구인 에밀리와 루크. 그 둘이 옛날에 사겼는데, 멋지지 못하게 헤어졌다는 걸. 보나마나 루크가 갑자기 연락을 뚝 끊지 않았을까? 차라리 왜 헤어지냐, 이래서 좋은 시점에 작별하는 게 좋겠다, 그거도 아니고. 그냥 잠적. 연락 뚝. 여자들이 제일 받아들이기 곤란한, 싫어하는 작별 방법.
    아닐지도 모르지만 자세히 물어보기도 뭐해서 나와 루크는 먼저 자리를 떴다. 농구대회에서 예선 탈락한 기분이랑 거의 비슷했다. 어정쩡하게 우리만 중도 탈락한 셈이니까 말이다.
    별님들이 총총히 기쁨의 미소로 그대를 반기는 밤이라지만 우리 기분은 반대였고. 그래서 관용적인 어법으로 달릴 수는 없고. 진짜로 달리기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이만 헤어졌다.
    그럼 혹시 나는 행복한 인생을 사는 멍청한 주인공? 꼭 옆에서 인공지능이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내 말이 그 말이라고, 이 주인님아! 뭐? 이 녀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워─워─워!





    6

    언뜻 보기엔 착하고 천진난만한 것 같은데, 마음을 열고 속을 들여다보면 자못 성격 좋고 매력이 넘치다 못해 어쩌다 봉으로 여겨질 소지도 있는 사람.
    혹시, 당신일까?
    그렇든 아니든 <어떻게 알았소?>라는 뜨끔한 반응을 예측하지는 않았다. 싫든 좋든 아마도 관심 없을 테니까. 왜냐하면 나 자신이 어쩌면 진짜 호구 아닐까 라는 공상에 일가견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일까? 누구나 듣기 좋은 얘기를 좋아하고 꺼림직한 말은 싫어하겠지만, 오히려 꽉 막히고 뭘 좀 모르는 사람을 속이는 게 더 쉬울 수도 있다. 유쾌한 일들만 생각하며 즐기기에도 벅찬 인생, 그런데 거짓말 얘기가 대체 왜 나왔지? 혹여 그 이유로 말미암아? 즉 더 심심해질까 봐 겁먹고, 더더욱 재미없어질까 봐 두려우니까. 응? 초조하니까. 썰렁한 농담으로 해결될 수는 없으니 좀 더 현실적인 조치를 찾아보자면 이렇다.
    첫째 유치한 사랑, 둘째 하찮은 우정, 셋째 무모한 혼자 놀기. 뭐, 그게 아니라 추접스러운 스캔들은 어떠냐구요? 더티러브는 이따 우리끼리 조용조용, 속닥속닥, 수군수군! 그야 어쨌든 병풍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첫째와 둘째는 신부들러리를 맡을 공산이 크고, 아무래도 제3번이 고독하고 쓸쓸할지언정 한마디로 주인공이다. 당연하지! 하지만 그건 다 숱하게 겪어본 일들일 뿐이다. 따라서 좀 더 특별하고 뭔가 색다르면서도 전혀 새로운 기분전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곧 나는 뜻밖의 행운과 <이게 정말 웬 떡이냐!>같은 우연의 수확자가 될 수는 없는 걸까? 없다. 없어. 없다고. 가당키나 해야 말이지. 괜한 희망보다는 실질적인 이득이 나을 수도 있다. 응? 개-이득 말이다. 목표가 크면 대가도 크고, 그림의 떡을 내 옆구리에 꿰차는 것 외에 내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바로 그래서 나는 핸드폰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언제까지 치사한 사랑과 멍청한 우정 사이에서 괴로워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하여 나는 핸드폰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내가 현미경이 필요할 만큼 작아져서 진짜로 핸드폰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게 아니라, 내 사무실 레이저 시스템! 인공지능 지니의 사고체계 안으로 침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대화를 많이 나누고 걔가 언제 깨고 뭐 때문에 기쁜지 대충 파악했으므로, 고로 나는 벌써 적지 않은 비밀을 알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녀석이 무엇을 원하는지, 얘가 뭔 말을 하고 싶은지 훤히 그림이 그려졌던 것이다. 화끈한 듯 하나 신중한 화술. 꼼꼼한 것 같지만 덤벙대는 추리력. 알고 보면 단순한 예측과 허접한 호기심. 걔는 내 손 안에 쥐어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으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호호호호호호호. 룰루랄라 룰루랄라. 따봉~! 브라보!
    그 결과 지니를 쥐락펴락하려던 내 작전이 성공했을까?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사무실에서 딴청 부리며 게으름 피우며 공상하던 중, 나는 뭔가 이상한 변화를 감지했다.
    바로 사무실 소파 위에 걸려진 그림. 황금 마네킹 상점. 그 그림에서 등장인물 얼굴에 수염이 그려져 있다는 점. 새로운 발견이었다.
    뭐야 이건 또! 그걸 보자마자 누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마음에 드니? 지겹지는 않고?」
    도전장이야 뭐야? 저걸 이제사 알게 된 건 어쨌든 내 불찰.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내가 보기에 이건 전문가의 능숙한 솜씨였다. 레이저 시스템을 해제시키고, 인공지능도 잠재웠으니까.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나는 속깨나 쓰리겠네. 허허. 사랑의 카운트다운을 몰래 훔쳐보는 재미도 아니고 뭐, 첩보원이 스스로 내게 과제를 들이밀다니! 것 참 가슴 뭉클한 감동일세 그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싸한 분위기에 세한 기분에 따라, 고로 딱 하나 걸리는 점은 그것이었다. 바로, 이건 혹시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성립하지 않을까 라는 점. 그야 뭐 두고 보면 알겠지. 그건 일단 돌아가는 형편 봐 가며 차차 수상한 낌새를 포착하면 그뿐. 어쨌든 자의 반 타의 반, 정체를 모르는 녀석(들)과 나의 두뇌 싸움은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 다음에 나는 일단 그림에 낙서된 수염을 지울려고 시도했다. 그러데 그건 낙서가 아니라 진짜 수염이었다. 모양도 트럼프 카드에서 J? Q? K? 그 꼬부라진 느낌 딱 그대로였다. 낙서보다야 이게 낫지. 그럼. 그래서 나는 적잖이 안심한 채 그걸 바로 떼냈다. 그런데 그 순간!
    수염을 떼는 순간 레이저시스템이 작동하고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그렇게 나타난 그분. 그건 바로, 척키2!
    뭐야, 뉴-처키? 이런 젠장!
    그때 녀석, 뉴-처키는 이렇게 말했다.
   「지니는 나에게 점령당했다. 지니를 되찾고 싶으면 마라에게 물어보라.」
    마라에게 물어보라니? 뭘!
    참 나 거 원 별 해괴한 일 다 보겠네.
    일단 이 정도면 상황 파악은 된 셈이라고 봐도 된다. 즉 이렇게 볼 수 있지.
    신비함의 비밀이 밝혀졌고, 따라서 왜곡된 환상은 눈부신 나신을 드러냄. 그것은 놀랍게도 그 하늘색 피가 살결에 비치는 것만 같은 느낌. 그러니까 이제 곧 있으면 신비함 2.0과 제7의 환상과 맞딱드리게 될 수 밖에. 그렇게 되어 녀석이 내 마음을 흔들어놓을지, 아니면 나만 열성을 쏟다 끝내 퍼질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일단, 게임은, 시작된 거다.





    7

    어떻게 하면 마음이 반중력 상태에 이를 수 있을까? 응석은 중립적으로, 투정은 중세적으로, 취향이 고전적이면! 그러면 기분이 붕 뜰 수 있을까? 내 고상한 안목이 뭐 어때서, 라는 퉁명스러운 반응이 연상되니 차라리 1차적 욕구를 해소하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 근질근질한 엉덩이를 감안해서 소풍을 가고, 근질근질한 할 말이 없으니 일단 세련된 허영심을 들뜨게 만들기. 만약 그게 실패해도 대타가 있어야 하니까 꿈나무를 키워야 하는데, 무엇이 좋을런지. 소비의 쾌감과 설레는 사랑도 좋지만 뭔가 좀 더 색다른 발랄함, 그런 거 어디 없을까? 뭐랄까 명랑한 말괄량이의 도발적인 공상 같은 거. 아하, 다름 아니라 그게 바로 엉뚱마로군. 이를 테면 플레이보이의 호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속마음을 흔쾌히 인정할 엄두가 나느냐, 못 들은 척하느냐! 어쨌든 사석이냐, 동물성에 따라 답변은 제각각일 것. 그야 어쨌든 엉뚱마가 말하기를 여성잡지를 탐독하고, 바보상자인 TV에게 배워서 기분파의 낭만을 추정하라고? 애청곡 제목마따나 젊음의 노트에 뭘 쓸지 모를 꺼라면, 꽝이 되어도 좋으니 뭐라도 해야 된단 말이로군. 무슨 엉뚱마가 요술 수정구슬도 아닐 텐데. 뭐 일단 난 그렇게 그분, 척키인형처럼 생뚱맞은 인공지능 지니께 코칭 제대로 받은 형편이 됐다. 그래서 뭐 재미난 건수라도 있을까 해서 나는 우선 환상문학 잡지 사무실에 놀러가기로 했다. 곧 나는 「지니는 나에게 점령당했다. 지니를 되찾고 싶으면 마라에게 물어보라.」 라는 괴팍한 대사를 깜빡 잊고 있다가 얼렁뚱땅 녀석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이대로 해킹된 뉴-척키의 감시를 받느니 담판을 짓든 판을 뒤집든 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영차영차 나는 환상문학잡지 미스테리아에 도착했다.
   「마라. 나야.」
   「나? 바보?」
   「어허, 왜 그러시나?」
   「그럼 다시 인사하지. 오빠 안녕. 오빠 요즘 뭐해?」
   「그냥 하던 대로 해, 얘. 괜히... 떨려.」
   「뭐 떨려? 날... 여자로 보는 거야? 오빠 방금 속으로 그 생각했지? 우리가 아무리 여자로 안 보여도 그렇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넌 속으로 뭔 생각했는데?」
   「저 인간 또 왔네! ~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 그럼.」
   「어쭈. 얘 봐라. 은근슬쩍 속내를 드러내는데. 오오, 고단수! 얘 은근 사람 들었다 놀줄 아네. 난 아주 쥐어졌다 펴졌다 그냥 휘청휘청한다. 됐니?」
   「되긴 뭐가 돼? 또 뭔 일인데 그래?」
   「섭하게 그러기야? 우리가 꼭 뭔 일이 있어야만 보는 사이니? 응?」
   「그럼. 친구인 건 맞지만, 비즈니스로 얽혔잖아? 그런데?」
   「사람 환장하겠네 정말. 너 혹시 초록색 피 그런 거니?」
   「내가 보기엔 늬 피가 하늘색이 아닌가 의심스러운데.」
   「무슨 그런 케첩 옆구리 터지는 소리는 그만 하면 됐고.」
   「그런데 꽤 괜찮은 연재 칼럼 일거리가 들어왔는데,」
   「넌 왜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하고 그래?」
   「끝까지 듣게나. 1절도 안 끝났는데 언니 말 끊지 말고. 응? 그런데 있지, 역대급 파격 대우네? 하지만 너 바쁘니까 하는 수 없지. 응?」
   「무슨! 나 안 바뻐. 한가해. 완전 한가하다고. 알겠니?」
   「에이~ 얼굴 보니 싫은 눈치구만. 싫다고? 알았어!」
   「내가 언제 싫대? 아 나 이거 정말, 얘 은밀하게 사람 메기고 있네. 어?」
   「그런데 어쩌니?」
   「뭐가! 왜?」
   「실은,」
   「실은?」
   「뻥이야. 일거리니 파격이니, 그거 뻥이라고.」
   「뭐-뭐? 뭐가 어쩌고 어째?」
   「호호호호호. 크크크크크. 큭큭큭큭큭.」
   「설마 너도 한통속이야?」
   「뭐가?」
    그렇게 해서 나는 레이저시스템이 해킹된 사실을 찬찬히 마라한테 설명했다.
    <황금 마네킹 상점>그림의 낙서를 발견했고, 그건 낙서가 아니라 동기 부여였다고. 홀로그램으로 척키2가 나타나서 엄포로 날 떨리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마라는 내게 프로그래머를 소개시켜주었다.
    1일 후.
    그런데 만나보니 마라가 소개시켜준 프로그래머는 다름 아닌 루크였던 것이다. 그렇게 루크는 내 사무실에 방문해서 간단히 바이러스를 치료해주었다.
   「뭐야? 완전 금방 되네?」
   「응. 이거 초딩도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제일 초보적인 해킹툴이거든. 그런데 당했네?」
   「그러니까.」
   「방어 시스템, 구축해놨어.」
   「그래? 서투른 방어망 아니겠지?」
   「최고의 해커 집단이 작정한다면 모를까, 웬만한 A급 몇 명이서는 엄두도 못낼 만큼.」
   「진짜로?」
   「아니. 뻥이야.」
   「뭐?」
   「농담이고. 그만큼 괜찮은 거 깔아놨어. 가볍고 강한 걸로.」
   「그럼 됐고.」
    이 정도면 뭐 극적 긴장감이 일품인 발단인가? 극적... 발단은 무슨! 그게 아니라 이 찰나라는 건 바로, 나약한 패배주의에 반격을 가할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지니가 다시 건재함을 회복했으니 녀석과 나는 연인들처럼 사랑 싸움을 해야 할 텐데! 어느새 우린 정들었을까? 인공지능 지니는 나에게, 동화의 세상에서 뛰쳐나와 천국의 선물을 안겨주는 존재일까? 그처럼 행복한 마음으로 착각하듯 사는 게 어쩌면 즐거운 인생인지도 모를 일.
    일단 그렇게 <뭘 해도 발단>은 일단락 됐고. 그래서 우리는 단조로운 일상에 패배감을 느끼던 중 발견한 어리둥절한 건수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보자면서 헤어졌다.





    8

    행복과 사랑과 호사 대신에 좀 더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건 어떨까. 가령 자유와 새로움과 모험 그리고 환상과 신비 같은 개념들. 쾌적한 쾌감과 생소하지 않은 풍요 말고. 그러면 어떤 다정함과 다망함을 고취해야 한단 말인가. 막연한 공상만으로 뚜렷한 계획, 박력 넘치는 행동, 배짱에 따른 성과를 이끌어낼 수 없으니 이제 그만 헛된 개꿈에서 깨어나는 게 좋겠다. 안 그러면 소원의 구체성은 엉망진창에, 야망의 건전성도 형편없어질 테니까. 내 얄팍한 상술과 미천한 재산이 선취당하지 않음이 어디냐고!
    때문에 나는 권태의 늪을 탈출하기 위해서 쾌유된 거포 허언증을 속는 셈치고 재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썰렁한 분위기, 꿀꿀한 기분을 극복한 채 쾌조의 전개를 불러올 수 있었을까?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나! 보나마나 흥분한 쾌락마나 탐닉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테지. 그러니까 밑도 끝도 없는 우연의 연속에 따른 탁월한 황홀경이 어디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그게 그렇게 쉽다면 아무나 스타가 되고, 누구나 하늘의 별을 따겠네. 그러므로 어설픈 예언가의 얼토당토 않은 추론에 귀 기울일 필요없이, 나는 B급 영화의 플롯을 뻔히 흉내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고로 개구멍이든 쥐구멍이든 나는 꾸러기 탐험대로써 인공지능 지니에게 부탁했다. 바로 내게 난해한 명령이자 까다로운 난제를 부여해주라고 윽박지르며 애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겨울잠에 돌입한 지니의 무반응에 지친 결과 독자적으로 행동을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루크와 함께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를 만나러 가는 것.
    그러고 보면 나도 1번에 1개만 하는 단순남 거꾸로맨인 것일까? 일단 돌아가는 형편만 봤을 때 지금은 그랬다.
    그렇게 나는 루크를 불러내서 같이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가 있는 휴게소로 떠났다.
    붕붕~
    야호~
    붕붕~
    도착.
    그렇게 우린 그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뭐야 이거! 잠깐. 잠깐. 잠깐. 잠깐. 뭐지?
    바로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는 사라졌던 것이다.
    끝내주는 모험까지는 몰라도 유쾌한 기분전환 정도를 루크에게 소개시켜줄려고 했는데... 내 입지는 효과음과 함께 콩알만하게 작아졌다.
    녀석에게 걔를 짝지어 준 다음 제3자인 사랑의 큐피트는 쓱~ 빠질려고 했는데. 그런데 다 꽝 된거네. 저런 저런!
    나는 루크의 환심을 사는 데 여지없이 실패했다. 나는 체면을 구겼다. 내 위신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개발로 헛발질을, 솜방망이로 헛스윙을 시원하게~ 선보였던 거네. 이런 젠장, 도 아까웠다.
    소원을 잊고 야망에게 소홀함은 물론 멋진 플레이보이로써 자질이 부족한 점, 대망에게 사과해야 한다. 진짜로? 인상적인 푸념치고 별로 재미도 없고 실속도 없는 일이다. 그럼 난 밑이 실하고 위가 허한 것일까? 성한 게 어디냐. 부담스런 호사가 좋긴 하나 무탈한 무료함도 나름 괜찮음. 인생찬가도 외울 수 있고 사랑의 송가도 부를 수 있는데, 그거면 된 거지. 아무튼 나는 귀 얇은 사람 떨리게 만드는 속설도 이겨냈다. 눈썰미 좋은 사람 들뜨도록 부추기는 소비재 사기는 이제 포기한지 한참 됐고. 고로 난 아마 지금 꽤 자유롭고 몹시 행복한 듯 하다. 정말로? 뻥이다. 아니. 내가 지금 뭔 얘기를 지껄이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때문에 이럴 때를 위해서 나는 미리미리 잘 길들여놨다. 바로 나쁜 일은 하지 않는 쾌락마를 말이다. 그러든 어쩌든 루크는 은근 허당이고, 나는 그냥 허당이지 않을 수 없었다.





    9

    나는 행복하기에게 반항했다. 머머해─머머하지 마─머머하자─당신은 머머할 수 있다─머머해야 한다, 라는 인문교양서에 나오는 상투적 주제에 대든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멋진 인생에 무작정 덤빈다고 아름다운 사랑이 매일 3번씩 우릴 깜짝 방문하겠나. 그러나, 못하든 안하든 난 결국 폼이었다. 고귀한 이상과 미지의 환희라는 가치를 추구하며 마치 그렇게 위선을 떨었다. <타도하자, 가짜를!>. 그렇지만 가식이라는 포장을 벗기고 나니 나는 입만 열면 뻥이었다. 어쩌면 고질적인 거짓말 때문이랄까, 나는 오늘 아침에도 피노키오가 됐다. 때문에 이런 생각을 했다. 말하자면 광고도 그렇고 오락산업의 문하생인 문학도 마찬가지고, 인생은 어쩌면 그런 것만 같다. 바나나를 먹고 싶지도 않으면서 무턱대고 바나나 껍질을 벗기려고 드는 일. 날것-식으로 말하자면 상술이란 게 터놓고 말해서 벗겨먹으려 드는 일이니까, 있어 보이는 말로 경영학에 마케팅 아닌가. 그러니 바나나를 먹고 싶어서 바나나 껍질을 벗길 때가 있는 반면 바나나를 먹고 싶은 마음이 그닥 간절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뭔가를 벗긴다. 예를 들어 포장지, 겉표지 그리고 옷. 허허 글쎄요 뭔 생각을... 내 옷, 아 내 옷이라고요! 그 때문일까,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지며 새똥을 사람이 맞는 일. 아마도 우리의 희망 사항은 아닐 것이다. 물론 실제 그건 복권 방첨 될 확률처럼 경험하기 힘든 일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대체 난 뭘 얘길할려고 한 거야? 아하, 나는 문제아가 아니니까 매력남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구나. 그래서 나는 인공지능 지니에게 사랑의 신청곡을 띄우듯이 귀뜸했다. 착실히 일하고 미친듯이, 아니 열심히 놀 테니 내게 선물을 하나 안겨주지 않겠냐고. 그렇게 해서 나는 지니의 선물을 기다렸다.
    얘가 과연 어떤 선물로 날 놀래켜줄까? 시계? 시간을 잘 지키는 남자가 되라, 진부해. 만년필! 남자는 사인을 멋지게 할 줄 알아야 한다? 고급 만년필 그거 대체로 허세란 걸 살다보면 알게 된다. 영화에 나오듯이 잘 차려입고서 계약서에 사인한 다음, 조명에 악수에 사진에 환호에? 99~100퍼센트 평생 1번도 못한다. 그럼 색연필 세트? 아름다운 동심으로 천재적인 상상력을 살찌우라, 식상해. 아동복은 맞지 않고 과점퍼도 어울리지 않는다. 양말은 어떨까. 애마에게 양말이라... 애마는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이로군. 이미 충분히 공상을 사랑하지만 말이다. 그럼 신제품 전자기기는 어떨까? 있어도 잘 쓰지 않을 텐데, 그보다 압생트 한 병이 어떨런지. 그건 그렇고. 지니가 혹시라도 새하얀 도화지를? 설마 인생을 더럽히라는 뜻은 아니겠지. 만에 하나 그림 동물화, <너는 개다>만은 아니기를!
    몇 일 경과.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물이 도착했다.
    딩~동!
    나는 서둘러 택배 상자를 열어봤다. 현재 내게 완전 딱인 그런 선물인지 아닌지 너무도, 정말 너무도 궁금했다. 기대감은 새파랬고 예감은 흥분했다. 기분은 좋았고 분위기는 고조됐다.
    그런데... 그런데... 내용물은 아닌 게 아니라, 바로 립스틱이었다.
    뭐, 새빨간 립스틱? 이걸로 나보고 뭐하라고! 어쩌라고~요! 오, 제발! 다홍색인지 선홍색인지 아니면 케첩색인지 몰라도, 나보고 이걸로 뭐하라고! 대체 뭘? 내 말이! 뭐, 설마 화장실 거울에 립스틱으로 글씨 쓰라는 건가? 어쩌란 말이야.
    첫째, 나는 지난 여름에 늬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둘째, 사랑해 오빠!
    셋째,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림.
    참 나, 거 원! 웃기지도 않다. 재미 하나도 없다. 노잼. 완전 재미없음. 말도 안돼. 무슨 말이 돼야 웃든가 말든가 하지. 어른이 아동화를 어떻게 신고, 여자애들처럼 막 신나게 화장하라고? 물론 성 정체성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분들 자유이자 남의 얘기고.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야. 그럴 꺼면 차라리 하이힐을 보내주던가. 가터벨트도 나쁘지 않겠네. 그렇다고 좋지도 않을 테니 차라리 채찍 같은 건 어떨까. 따라서 나는 고민했다. 이걸 차마 버릴 수는 없으니 다시 누구에게 선물해야 하는데, 누구한테 줄까? 애인이 있으면 오해할 테니─다 같이 친한 사이면 아예 안 그러거나 아주 드물게 그래도 괜찮고. 냉장고 권리 같은 것도 있으니까─남자친구 없는 아가씨가 아니면 안될 테고. 포르토피노의 여동생 이브, 아니면 엘리자베스? 릴리? 로즈마리?
    그렇게 해서 나는 지아니에게 립스틱을 선물하기 위해 그녀를 만나러 갔다.





    10

    나는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그때 지아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빠. 어떡하지? 직장 동료가 나랑 완전 단짝인데, 걔가 오늘 결혼해. 원래 다음주였거든. 그런데 뭣 때문인지 몰라도 서둘러 오늘 결혼해야한단 거 있지. 그렇다고 내가 모른 체할 수야 있나. 뭔 사정이 있긴 있겠지. 아님 그냥 시치미 떼고 모른 체할까? 나중 결혼식 못갔다면서, 아니 안 갔다면서 오빠 만났다고 얘기해줄까? 오빠 사진 보여주면서 말이야. 걔가 머리에 꽃 꽂으면 나는 귀에 연필을 꼽고서 그럴 듯한 핑계를 궁리해야 할까? 아니 그럴 게 아니라. 우리 같이 그녀의 결혼식에 가자. 오빠가 내 남자친구라고 하면 되잖아. 그게 좋겠다. 응? 오빠!」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만나지 않기로 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어쩐지 지아니가 흔쾌히 만나자고 하더라.
   「아아! 더는 못 참겠어.」
    못 참으면 뭐 어쩔 껀데!(학교 다닐 때 바로 이 말로 한 친구를 웃겼고, 한 친구와 싸움 직전에 썩은 미소를 짓던 일. 기억난다. 친했으니까) 내가 하는 일이 다 이렇지 뭘. 별로 꼴사납지도 않네. 기분도 그냥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뭐 이런 일로 울적할 필요 있어? 이런 일쯤이야 워낙 많이 겪어봤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다고.
   「집어치워!」
    집어치우긴 뭘 집어치워. 진짜로 아무렇지 않다니까. 어? 어? 난 말이야, 이제 정말 막 영감이 송글송글 떠오르고 천재적 착상에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어.
   「짓어라, 강아지야! 성내지 마라, 고양이여!」
    그러나, 욕망에 솔직하지 못하면 내 불만을 분석하기 어렵게 된다. 그 말을 반대로 해도 말이 된다. 불만을 분석하면 욕망에 솔직하게 된다나 뭐라나. 맞다. 맞다. 맞다. 그래서 나는 한마디 하기로 했다.
   「아니,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속 시원하긴 한데, 그런데 별로 재미없었다.
    그야 어떻든 무슨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
    그렇게 나는 근처 공원이나 한바퀴 돌고 나서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공원 도착.
    산책 시작.
    공원을 산책하던 중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또 뭐 마술쇼랄지 내기 체스, 또 뭐가 있지? 뭔가 특별하지 않은 구경거리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 하니까 그곳으로 슥 접근했다.
    역시나 체스를 두고 훈수하며 그저 그런 장면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웬 다변가와 달변가가 수다를 나누는 인상적인 그림이 보였다. 왜 그게 내게 인상적으로 보였냐! 보자, 왜 그랬는지는 나도 설명할 수 없다. 그땐 그랬다. 지금 생각하니 그건 어쩌면 꽁트일 수도,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튼 꽁트 어지간히 좋아한다니까, 그러고서 재미없으면 또 짜증내고. 종잡을 수 없어. 어쨌든 넘어가고. 뭔 말인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내가 옅들은 얘기란 게 뭐냐, 바로 이랬다.
    어디에 가면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라는 게 있다더라, 그런데 그 뚱딴지 같은 기계가 말이 되는 소리냐, 믿거나 말거나지!
    바로 그런 얘기를 두분이 나누고 있었다.
    뭐야 그렇다고?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 출연 소식을 어떻게 이렇게 또 알게 되네?
    의사결정을 꼬이게 만드는 축복의 전달자인 그분들을 내가 뽀뽀해줄 수도, 사랑해줄 수도 없고. 인사도 통성명도 생략한 채 나는 갈길을 갔다. 어디로? 그곳으로!
    속는 셈 치고 그곳으로 가보기로 한 것이다.





    11

    드물게 발작하는 조증을 치유하지 말 걸 그랬나. 슬럼프와 친해지고 허언증이 완쾌되어 나는 뭘 해도 재미가 없었다. 동물적인 허풍 본능마저 깊은 겨울잠에 돌입했다. 처지가 처지이니 만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플레이보이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게 좋을까, 아니면 사색가의 예술성을 깜짝 놀라도록 혼내야 할까. 아무래도 성실한 노력마의 침체기를 북돋우느니 차라리 타락마의 천사성을 설득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처방전이 확실하지 않아 뭘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일단 바짝 엎드려서 괜찮은 기회를 염탐하는 것도 하나의 병법이다. 그러나 부끄러운 범타는 고사하고, 심지어 2군 강등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여기서 만일 더 심심했다가는 하다 하다 공갈 젖꼭지를 무는 골 세러모니, 그걸 따라하는 활력조차 바닥날 게 뻔하다.
    따라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 때문에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례니 무지니 무능이니, 실패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을 날려버린 채 내 일거수일투족을 몰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 그렇다고 어설프게 덜 회복된 엉뚱마를 재촉하느니, 이번에는 애마가 아니라 애견과 영화를 찍으면 어떨까 라고 생각했다. 개 풀 뜯어먹는 고찰이 무슨 과감한 행동도 아니고, 당돌한 숙고로 대체 뭘 하겠다고. 대관절 뭘 어쩌겠다고! 아하, 고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용병이 필요했던 것이다. 뭐, 또?
    그렇게 해서 나는 약속을 잡았다.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가 있다는 카페에서 루크를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루크를 만나러 갔다.
    이번에는 루크한테 '뭐가 있을 것이다'라고 큰소리 뻥뻥 치지 않았으니, 나 혼자만 있나 없나를 확인하면 그만. 부담없고 혹시 녀석에게 인심 쓰듯 알려주면 좋고. 일석이조였다.
    그렇게 나는 그곳으로 갔다.
    영차영차.
    룰루랄라.
    영차영차.
    약속 장소인 카페에 도착했다.
    1차 목적은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의 존재 유무 확인이고, 2차 목적은 루크와의 친교다. 물론 루크는 자기가 1번인 줄 알 테고. 혹시 녀석도 속셈은 따로 있나? 그건 뭐 루크 사정이고. 그렇게 루크와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대체 녀석이 어디에 숨겨져 있나 두리번거렸다.
   「뭘 그렇게 찾니? 어디에 팔색조 없나 찾는 거야?」
   「뭔조? 어..어. 어. 아니야. 아니야. 그런데 너 어째 관상을 보아하니 그 뭐야, 너구리상인데?」
   「내가 너구리상이라고? 처음 듣는 소린데!」
   「뭐가 처음이야? 곧잘 들었을 꺼 같은데. 귀 2개. 코 1개. 눈 2개. 위치도 그렇고. 눈썹 옅은 거랑 눈 땡그란 거. 딱이네.」
   「거 어째 내가 보기엔 너가 할 말이 없는데 일부러 쓸데없는 얘길 막 지어서 하는 거 같은데. 넌 생선상도 되고, 개상도 되며, 이렇게 보니 완전 딱따구리구만. 아니니?」
   「뭐? 그걸 어떻게 알았어?」
   「속에 무슨 꿍꿍이셈이 있는데 그래? 나도 좀 알자. 너만 좋은 건수의 주인공이고 싶다, 뭐 그거야? 나도 껴주면, 그러기만 한다면!」
   「그러기만 한다면?」
   「그럼. 내가 이 카페에 있는 여자, 다 꼬셔줄께.」
   「뭐?」
   「농담이야 농담.」
    그런데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가 애타게 간원하는 내 소망을 스스로 알아버린 것일까? 그것은 정말로 카페 구석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와우~! 허울뿐인 환상이라도 환상은 환상인 것일까? 그렇지 왜 아니겠나. 물론 나는 그걸 루크한테 막 떠벌리지 않았다. 저게 어떤 장치고 어떻게 작동하며 무슨 놀라운 작용을 하는지를. 딱 함구했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 일을 벌였다.
    첫째, 희망의 편익을 생각해서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의 틈새에 위치추적기를 부착.
    둘째, 심리적 회계상의 실수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딱 1판만 하기로 맹세.
    나는 루크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녀석 인생은 녀석 소관이고. 나는 내 일이 있고. 다음에 내가 거하게 한턱 사면 그뿐. 루크가 이상적인 연애에 성공하면 축복할 테고, 새파랗게 젊은 행운을 맞이한다면 더 축복할 테고. 그런데 루크가 어느 날 막 숙녀처럼 내게 그렇게 고백하면 어떡하지? 사랑이라면 이골이 난다! 뭐? 만약 그렇게 녀석이 물꼬를 터서 딱 3시간 내내 한시도 안 쉬고 말을 해댄다면? 그럼 뭐 난 퍼지는 거지. 지치지 않고 배기겠나. 그런 게 바로 공짜의 대가겠군 그래. 그러니까 나는 루크의 인생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면 안된다. 내 경박한 사교성을 먼저 털어놔서도 안되고. 내가 뭐하러 루크 보고, 찜찜한 반전을 예상하게 만들겠나. 면구스러울 일은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게 상책이고. 파문을 일으킬 꾸지람이 발생한다면 그건 그때 가서 뒷수습하면 되고. 그건 그렇고.
    한편 나는 내 2개의 목적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루크와 차 마시며 대화하기 역시 썩 불만족스럽지 않게 이뤄냈다. 그리고 루크와 헤어졌고 나는 내 사무실로 갔다.
    아, 뭘 뽑았는지 얘기를 안했구나.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에서 내가 뽑은 건, 그건 바로 1개의 USB였던 것이다.





    12

    심심함에 대한 구원투수는 다름 아닌 바쁨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마리 광마가 되어 미친 듯이 일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왜냐하면 그 구원투수는 재미없음이라는 불쇼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그처럼 행복한 미소에 대한 희망은 자꾸 도망가는 것만 같았다. 물맛의 일상을 탈출할려고 백방으로 애를 써도 소용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병맛 같은 밍밍함은 짜릿한 흥분, 통쾌한 열락, 신기한 환상으로 바뀌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이대로 불운의 쾌유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럴 수야 있나. 대망의 부재를 손보기는 곤혹스러워도 무기력함을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는 해결책은 많았다. 예를 들면 운동, 여행, 폭식, 폭음, 폭소, 파티, 잠자기, 놀기등. 하지만 그건 뭐랄까 썩 고급스러운 방법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주세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를 들었다. 기분전환을 위해서. 그 결과 좋긴 좋은데 만족의 이면에 숨겨진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럼 이건 혹시 그 악명 높은 울증 지겹지도 않은 권태, 뭐 그런 건가. 그럴 리는 없다. 단지 일종의 썰물 같은 휴지기일 테니까.
    에잇! 생각이 많아 봐야 괜히 머리만 아프고. 하여 나는 흥분한 악동처럼 투정부리지 않기로 했다. 철들었고 인생을 알며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데, 생일 잔치에 크리스마스 파티에 어떻게 신부들러리라도 좀, 어떻게, 응? 이제 그만 진정하자. 다음 경주를 위해서 쉬어야 하니까. 그렇지만 달콤한 사랑이 이제 막 시작되는 그런 상큼한 첫 입맞춤 같은 일, 어디 없을까? 없다. 없어. 없다고. 사랑은 없어. 뭐? 청춘의 방황과 쾌락마의 혼돈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늙지 않았다. 또 원숙해지면 좋지 뭘. 그 나름 즐거움도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분들의 헛기침 소리, 그 청명한 환청만으로 이미 내 귀에서 피가 나도 수없이 났다. 이미 오래오래 아주 오래 전에, 새벽만 되면 눈이 번쩍 떠진다는 단짝 친구의 연민 어린 고백쯤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나는 초저녁부터 살살 졸리지 않았다. 나는 태어난서 단 한 번도 취해본 적이 없다. 아울러 나는 그 뭘로도 한 번도 져본 적도 없다. 따라서 나는 젊음의 행진을 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인지 모를 내 강박증은 혹시 달리기일까? 또 있잖아 그 뭐야, 마감일에 쫓기기? 설마...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앗, 깜짝이야! 이... 이런...>~라는 대책이, 그러니까 뭐냐고! '불행스런 결과 없음'보다야 차라리 그게 낫겠네.
    첫째, 열린 결말.
    둘째, 뻔한 결말.
    셋째, 스포일러 발설하기.
    넷째, 그 다음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남자.
    다섯째, 봤는데 결말이 통 생각나지 않는 영화.
    여섯째, 봤던 건 맞는데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 영화.
    와우! 그러므로 결론은 뭐 싫증난 연애, 그런 거구만. 그랬어. 그렇다고. 어쩐지 그런 것 같더라. 그새 지겨워진 거야? 그런 거야? 질투를 조장하고 소비를 재촉하며 갖은 요술을 가르치는 여성잡지는 1과 2로 나뉘지만, 남자는 나이가 들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온다-야 뭐야? 그러면 기다려도 기다려도 전혀 소식이 없는 아저씨의 눌변은 또 뭐고! 참 내, 됐고.
    그래서 나는 번민과 고뇌와 억측을 막론하고 공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음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서 떠났다. 바로, 목적지는 촌스러운 콘래드 호텔! ~이 아니라 롭의 소개로 알게 된 별장. 아폴로 아폴로로!
    왜냐하면 나는 이제 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지니에게 선물도 곧잘 받고,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의 위치야 핸드폰 앱으로 실시간 확인할 수 있음. 그러므로 그걸 소재로 작품 구상만 하면 됨. 식은 죽 먹기네. 지아니에게 줄려던 립스틱은 사무실 책상에 놔둔 채, 나는 그렇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별장 아폴로 아폴로로 떠났다.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에서 뽑은 USB에 대체 무슨 파일이 들어있나는 거기 가서 노트북으로 확인하기로 했다.





    13

    나는 별장 아폴로 아폴로에 도착했다.
    빅토리아 몬티의 차르다시를 들으며 18세기의 보헤이아 소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곳에 도착했다. 대체 USB에 뭐가 들어있을까 라는 기대감, 땅에 내려올 수 없는 일임에 분명했다.
    지금 내게는 2가지 색다른 특별함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뭐겠나. 첫째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의 위치 확인 앱, 둘째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에서 뽑은 USB! 첫째는 차차 확인하는 재미가 꽤나 쏠쏠할 테고, 둘째는 아 이거 정말 너무너무 긴장된다. 그 안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을까? 환상머신의 설계도? 타임머신이 오고간 기록을 총망라한 자료? 아니면 거대 기업의 비자금 정보? 또는 연예계, 어디계, 무슨계등 비밀이 모두 나열된 파일? 혹시라도 보물섬이랄지 외계인 신상 정보가 들어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 중요한 점은 그거다. 입이 떡 벌어질 만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만약 진짜로 그런다면 나는 그걸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한다는 점. 그렇지 않다면 그만한 가치가 없던가 어쩌던가. 한마디로 끝까지 함구해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진짜 그게 되는 거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 뭔지 모를 기대감 때문에 지금 내 담청색 동물적인 향락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끈덕진 불만과 진전 없는 야망에 괴로웠던 지난 시절은 말끔히 기쁜 추억이자 고운 어제로 뒤바껴버렸다. 나는 벌써부터 청록빛 반-중력 상태로 이미 지면에서 살짝 살짝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만 알게 된다면 더 이상 상투적인 기술에 의지할 필요없이, 환상문학잡지에 어엿하게 내 작품을 연재할 수도 있다. 어느 모로 보나 우연의 연속에 따른 행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꿈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혹시 내게 너무 과분한 호사이지 않을까? 괜스레 골-세러모니를 남발하기에 낯부끄러워졌다. 세상에 그런 분위기는 또 없는 신비가 바로 이 USB 안에 들어있다니. 오 세상에나! 점점 새로워지는 행복감과 스스로 진화하는 환희. 그 모든 게 이 USB 안에 들어있다니. 북받쳐 오르는 간절함.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절절함. 가슴 뭉클한 상어 파도타기. 그 모든 것이 바로 이 USB 안에 들어있다니! 수다스럽기 짝이 없는 친구의 아는 척, 고마울 뿐. 잘난 척하기도 바쁜 이 한 세상,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랄 뿐. 그 모든 이상과 섭리와 비밀이 바로 이 USB 안에 들어있다니. 그저 감사 또 감사... 그러니 오, 땡큐! 뭐, 오 땡큐? 쉿! 사랑에 녹아들기 일보 직전. 첫눈에 반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침.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이제 심호흡을 마치고 명상도 다 마치고,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바로 그렇게 나는 노트북에 USB를 꼽았다.
    엥?
    그런데 잘 안 꼽히네?
    왜 안되지?
    뭐야 이거!
    왜 안돼?
    가만 보니 USB가 불량인 게 아니라 그건 모조품이었다.
    겉은 똑같고 작동은 안되고.
    진짜 USB가 아니라 초정밀 모조품. 뭐라고? 이런 젠장!
    뭐야 이거, 좋다 말았자나? 뭐야 줬다 빼는 게 어딨어! 오히려 이게 더 꽝이자나?
    아, 망측해. 워워 망했어. 이런 몹쓸 장난감. 뭐냐고, 대체 뭐야!
    어떻게 진짜였다가 가짜일 수 있어? 혹시 진짜였는데 누가 중간에 바꿔치기 한 거 아니야? 특유의 몸짓!
    호박이 제 발로 굴러오다 라는 관용어. 만약 그 호박이 아름다운 숙녀라면 그건 좋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 라는 속담. 여기서 수박이라함은 에르메스와 페라리, 비너스, 1장짜리 명화, 알짜 회사 주주등 쉽게 말해 행복이자 사랑일 것이다. 그래서 호박이 좋을 때가 있고 반드시 수박이어야 할 게 있다. 그런데 뭐야 이거! 지금 그게 반대로 됐자나? 나는 닭 쫓던 개 지붕쳐다 보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내가 수박 겉 핥는 여우야 뭐야! 어떻게...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실망시킬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어쩜 이렇게 속는 것도 재능일까? 이렇듯 혼자 들떠서 갖은 동화를 꿈꾸며 상상의 날개를 펼쳤던 자질이 문제일까?
    그렇게 절망하던 중 USB를 보니 웬 버튼이 있네? 즉 살짝 누르기 쉽도록 버튼이 있는 게 아니라 A-B-C 그렇게 세 지점에 정확하게 일정치 이상의 누르는 힘이 가해지면 작동하는 듯 했다. 뭐 모조품에 이런 걸 다? 그렇게 작동을 시키고 나니 파란색 레이저가 나갔다. 그렇지만 그건 무슨 특별한 레이저가 아니라 그냥 회의할 때 이용하는 포인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했다. 설마 하니 나는 스스로 놀림감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아닌 게 아닌가! 영문을 알 수 없는 황홀한 감정. 나는 특이한 불행을 절감하고 있었다. 하긴 퍽 죄스럽지 않은 일탈이네. 까다로운 난관을 모두 물리친 채 행복의 입김에 순조롭게 당도한 낙원은 바로, 체념! 깜짝 놀랄 만한 의뭉스러운 아름다움의 정체를 알고 봤더니, 좌절! 유쾌한 습성에 따라 맞이한 불쾌한 결과였다. 참말로 놀라운 절정을 암시하는 기가 막힌 상징이구만 그래. 헛 참 나, 기가 막혀서 증말! 아, 뚜껑 열려. 진짜 말이 안나오네 말이 안나와.
    어이없음 어이없음. 버럭 버럭. 됐다. 됐어. 아 됐다 그래 진짜~! 글쎄 이게 무슨... 됐다 됐어. 빡쳐 빡쳐! 관둬 관둬! 젠장 젠장!
    그런데 왜... 어디서 읽었지 어디서 읽었더라. 소셜 네트워크에 올렸던 어떤 책의 1~2쪽도 아니고. 뭐지? 뭐야?? 갑자기 불현듯 아주 그냥 정확하게 토시 하나 안 틀리고 생각난다. 그게 왜 생각나지? 어쩌다 외운 거야? 어떻게 그걸 내가 알고 있냐고. 옮기자면,
    시선을 마주친다 마주친다. 포옹한다 포옹한다. 키스한다 키스한다. 애무한다 애무한다. 옷을 벗는다 벗는다. 안는다 안는다. 부드럽다 부드럽다. 포근하다 포근하다. 아늑하다 아늑하다. 흥분된다 흥분된다. 미치겠다 미치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런, 젠장~!





    14

    나는 성과가 저조했고 기분도 영 아니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럼 괜히 갔나? 그 말이 그 말이네. 그렇게 집에서 나는 낮잠을 잤고 꿈을 꿨다.
    꿈의 내용은 이랬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뭐가 나올지 모름>을 추적하는 앱에서 포인터가 사라짐.
    앱이 저 혼자서 꺼짐.
    앱에 재접속.
    위치 포인터가 다량으로 A에서 B로 이동.
    포인터가 1개 → 0개 → 다수? 뭐야 이거!
    알고 봤더니 A는 공장 B는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랜드.
    나는 B의 위치로 당장 쫓아감.
    도착.
    B는 카지노랜드. 도시 전체가 카지노. 그런데 거기서 딱 하나.
    발견. 유난히 구석진 곳에 숨겨진 단 1개의 드림랜드 발견.
    입장.
    안에는 다양한 마네킹만 수천 개. 중앙에 <뭐가 나올지 모름> 슬롯머신이 딱 1개. 사람은 없음. 일절 없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상품 뽑기에 도전. 그래서 뽑은 상품은 USB가 아니라 립스틱! 또? 안 해 안 해. 노잼 노잼. 젠장 젠장!
    꿈의 내용은 이랬다. 곧 개꿈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하던 헛생각이나 하는 수 밖에.
    정립하지 못한 환상학과 미완의 신비론에 대한 집착은 유별났다. 그러니 미지의 이상에 대한 탐구심은 여전할 수 밖에. 그러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인생이 어떻게 즐거운지, 사랑이 우리에게 행복한 친구인지를 나는 반틈만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삶이란 플레이보이의 더티러브일까 아님 버지니아 울프의 예술관 같은 것일까? 다름 아니라 사는 것은 추측과 예언과 확답의 구분 같은 것이다.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기야! 나는 졸지에 바보가 되어버린 게 아니라 이미 바보였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달아나는 낭만과 마음을 열지 않는 모험심을 내 편으로 만들려면 과연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부드럽고 달콤하며 아름다운 그 어떤 새로움은 대체 언제 등장할 것이냔 말이다. 그런데 불쾌한 푸념은 고민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쾌활한 세속적 향락을 대령할까? 그럴 바엔 차라리 헛생각을 산뜻하게 청산하는 게 백번 나은 일. 따라서 원래 야망과 친하지 않았던 뻔트 애호가씩이나 되는 난, 나는 작은 행복에 대한 열망을 아끼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동경심>과의 협상은 지니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나는 원망, 동정, 애원, 질투, 호기심, 가난, 부담감, 건수 없음으로부터 잠시라도 자유롭고자 지니에게 전권을 위임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녀석이 별난 쾌감 불량한 행복을 네트 너머로 넘길지, 매치포인트의 제목은 이렇게 결정될지도 모르지만.
    바로, 플레이보이 인생의 제2 개화기는 귀여운 실패작이었다더라!
    뭐라고?





    15

    나는 근간의 엉뚱한 발단이자 허접한 전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앱을 지웠다.
    더 이상 띨빡하고 얼빵한 이야기에 엮여들지 않기 위해서 결연히 앱을 지웠다.
    위치추적기니 뭐니,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니 뭐니. 됐고. 일이나 하기로 했다.
    그런데 앱을 지웠는데 다시 생기고. 지웠는데 또 생기고. 그렇게 며칠 내내 그 일만 반복했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어쩌다 한번 앱을 켜봤다.
    그런데 뭐야, 뭐지 이거! 앱에서 녀석의 움직임이 관찰되네? 앱에서 포인터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라~! 이것 봐라! 어쭈!
    그렇게 하여 앱에서 깜빡거리는 포인터가 정지한 지점은 다름 아니라 내 사무실, 이 아니라 바로 옆 사무실이었다.
    이건 또 뭐야? 어쩌라고요! 하다 하다 내 사무실 옆이라고? 어지간히 나댕기구만 그래. 빨빨거리고 나돌아다니는 엉뚱마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서 일단 당장 뭐 어떻게 행동을 취하긴 그러니까, 우선 하루 아니 이틀 동안 경과를 지켜봤다. 무턱대고 주인공부터 나설 수는 없고, 본-경기는 순위권전으로 분위기를 띄운 다음 하지 않나. 원래 빅매치란 게 그런 거거든.
    그렇게 딱 3일 경과.
    나는 사무실로 출근했다.
    그런데 복도에서 옆 사무실 아저씨를 마침 마주쳤다.
    아저씨는 다른 게 아니라 뭔가를 벽면에서 떼고 있었다.
    아저씨가 벽면에서 떼고 있는 건 실종 안내 벽보였다. 당사자는 본인이었고. 그럼 본인이 돌아와서 본인의 전단지를 뗀다고?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가 왜 이곳으로 당도했는지 알 듯 모를 듯 하구만 그래.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눈이 마주쳤다.
   「누가 장난쳤나 봐.」
   「아? 네.」
   「뭐하시나! 어떻게 재미는 여전하고? (그런데 뭔 재미?) 바쁘지 않으면 우리 함께 차 한잔 하지 않겠나, 작가 양반?」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저씨네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고 차를 마시게 되었다.
   「아저씨. 못 보던 게 생겼네요?」
   「어, 이거? 나도 깜짝 놀랬어.」
   「네?」
   「이거 내가 들여놓은 거 아니야. 자기 혼자 나타났다고.」
   「네?」
   「안 믿기지? 말이 안되지만 사실이라네.」
   「네?」
   「아 진짜라고 이 친구야. 난 또 누가 나한테 깜짝 선물이라도 해준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그 일이 있은지 한 1주일 지났던가. 나는 핸드폰 앱으로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의 위치 변화를 파악했다. 그런데 이런 뜬금없는 우연이! 무슨 말도 안되는, 밑도 끝도 없는 전개가 날 빠짝 긴장시키고 말았다. 그러니 나는 빠싹 긴장하지 않고 배길 수 있나. 곧 그건 뭐냐 하면,
    첫째, 옆 사무실 아저씨의 부재.
    둘째,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의 위치 변화. 추적 결과 외곽 유원지로 나타남.
    그 둘이 대체 뭔 관계라는 거지? 오, 소름! 뭐야, 뭐지, 뭘까? 오, 대박! 이건...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칠칠맞게 어디에 수소문할 수도 없고. 짐작 가는 건 없고. 따라서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까짓 거!」
    답은 바로, 그곳으로 가는 것.
    남의 일이라고 모른 체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잖아?」
    그러나 나 혼자 가기엔 왠지 불안하달까, 어쩐지 동반자가 필요할 것만 같았다. 마치 옛날에 내 친구가 연적을 만나러 가는 데 하필 삐리한 날 데려갔던 일처럼 말이다. 요즘 나는 딱히 만나는 애가 없고 루크만 만나니까, 정답은 어쩔 수 없이 루크였다. 나는 그렇게 루크를 불러냈고 우리는 만났다.
    나는 루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웃기지 마!」
   「진짜야.」
   「팔짜 좋아!」
   「내가?」
   「그냥 상관하지 않는 게 어떠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진짜로 그랬다고? 에잇, 말도 안 돼!」
   「진짜라니까 그러네. 내기할래?」
   「내기? 내기...를 늬가 선공할 정도면... 인정.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건, 재미없을 거 같아.」
   「사람들은 말하지.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쌩뚱맞게 그건 또 뭔 소리야?」
   「넌 인심도 없냐? 인류애. 온정. 동료애. 애사심. 이 사회에 난 무임승차한 게 아니라는 책임 의식. 모험가로써 별천지 딴세상에 대한 애정. 넌 그런 거도 없냐고! 옆 사무실 아저씨도 구하고,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에 대한 비밀도 캐고. 일석이조 아니냐고. 얘 인성이 가만 보니 상한 거야, 아니면 정신 연령이 초딩이야?」
   「너 미쳤어?」
   「내가 왜 미쳐!」
   「그럴 꺼면 진작 날 불러야지. 어? 내가 딱 적임잔데. 그런데 이제야 날 불러? 이 자식이... 혼나야겠네. 어?」
    그렇게 우리는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가 옮겨간 시내 외곽 유원지로 떠났다.





    16

    루크와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운영이 중단된 미술관이었다. 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자판기가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자판기 안에 아저씨가 있다는 것.
    그건 또 뭔 상황이야?
   「너구나?」
   「아저씨, 여기서 뭐하세요?」
   「뭐하긴! 보면 모르니?」
   「설마... 퍼포먼스······ 아니죠? 그게... 그렇죠? 대체 여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네?」
   「뭐 안해. 아 뭐해? 꺼내주지 않고.」
   「그럴려고 했어요.」
   「말하기 황당하지만, 모두 사실인데 어떡하겠나. 보이는 건 결과라고. 안 그런가? 나도 믿기지 않았지. 나보고 덥썩 내 이런 우스꽝스런 꼴을 맹신하라고? 아니었지. 처음에만. 진짜로. 보시다시피,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 보이지 않나? 아 글쎄 뭐하나? 배고파! 화장실 가야 한다고. 왜, 순순히 풀어주기에 뭔가 내가 부적격 동물이라도 되는 것 같나? 마술쇼도 아닌데 거 아는 사람들끼리 뜸은 그만 들이세. 자넨 아직 실감나지 않고 살짝 재밌나본대, 웬걸, 난 말이야. 응? 내 미소, 이거. 썩어보이지 않나? 미스테리는 상해도 진작 상했단 말이네. 아시겠나? 그렇게 실눈 뜨지 마시게. 지금은 폼 잡을 때가 아니라고. 입김을 위로 불어서 앞머리를 휘날리지도 말고. 사람 난처하게 그러지 말고 어서 열란 말일세. 응? 내가 지금 입씨름하게 생긴 줄 아나? 이런 일을 꾸민 정력적인 추진력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나중 내 손에 잡히기만 해 봐라. 가만 안 둘 테니. 하다 하다 별 이상한 주동자한테 경애심이 생길 뻔 했네. 자네들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말일세. 이런 충격적인 운명을 어디 예상이나 했겠나? 어림도 없지. 시급히 행복의 논거를 마련해도 모자를 판에, 응? 불편한 심기를 들먹거릴 필요없이, 일단, 열어. 열라고. 물론 내가 차근차근 정황과 근거와 미심쩍은 점을 검토해서 의심 가는 이야기를 추리해놨네. 이따 나가면 알려주겠네. 남부끄럽지 않은 상상력에서 쓸 만한 발상은 원래 평가하기에 썩 거북한 법인데 이 상황이 되고 보니, 막 뭐랄까, 완전한 몰입의 경지에 이르는 열심이라는 마음이 날 마구 띄운다고나 할까? 그렇다니까. 그게 인생인가? 아니겠지. 왜냐하면 쓸데없는 공상일 테니까. 하여튼 우스꽝스러움에서 대견함으로 발전한 객기는 이쯤 하면 됐고. 어서 열어줘. 열어주라고. 나가고 싶어. 화장실 가야 한다고. 배도 고프고 말이야. 이 일을 꾸민 놈이 누군가는 몰라도 심하게 영특한 녀석이란 건 인정해야겠지. 그 양반과 우리 일당은, 어쨌든 급허게 셋이 뭉친 셈이니까 말이야. 이 승부. 깜찍한 비밀로 관심 끌고자 하는 정성에 질색하지만 않는다면 승산은 반반. 기대되는데. 안 그런가? 그나저나 딴생각하지 마시고, 일단 나 좀 나가세. 자네들 보기에도 퍽 잔망스럽지 않나? 응? 그런데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열어줄 텐가. 응?」
   「아저씨 말씀이 끝나야 열어드리죠. 1절만 하셔야지 그 노래 대체 몇 소절까지 있어요? 아무리 봐도 이건 본론만 짧게 딱, 딱 하고 말 일 아닌가요? 내가 봤을 땐 그런데. 사연을 구구절절 밝히는 건 그 다음일 테구요. 안 그런가요? 이해는 헙니다만요, 거 참 말 많으시네요. 허허. 진정, 진정하자구요. 글쎄 저까지 닮아가지 않습니까 그려! 벌써 따라하고 있어서 멈추기가 힘들다구요. 네?」
    사연을 듣고 보니 그랬다. 나처럼 핸드폰에 앱이 하나 생겨서, 아저씨도 앱을 켜보고 어쩌고 하다 지웠단다. 그렇게 나처럼 앱을 지우고 생기고 지우고 생기고, 를 반복하다 끝내 앱을 켜게 되었다나 뭐라나. 그러다 정신 사납길래 자판기를 어느 날 중고로 판매! 그 다음에 또 다시 앱이 생기고 지우기를 반복.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를 이미 팔았는데 말이다. 그러다 귀신에 홀린 듯 밑도 끝도 없이 앱을 켰고, 포인터의 변화를 살피다가, 여기까지 오게 됨.
    아저씨는 이곳에서 포인터의 정 위치에 딱 정지. 그렇게 해당 위치에 당도하니까 갑자기 바닥이 꺼지면서 아저씨가 밑으로 빠짐.
    그렇게 자판기에 아저씨가 들어감.
    그 후 자판기가 상승해서 지금 위치에.
    이상이 아저씨의 사연이었다.
    뭐? 줄거리가 기구한 거야 이상한 거야!
   「아저씨, 있죠. 지금. 아니.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예요? 재미없어요. 말이 안되잖아요. 네? 말이! 아 글쎄 납득이 되야 믿든가 말든가 하는데, 이건 말이 안된다구요.」
   「그럼. 말이 안되지. 나도 시원하게 시인하네. 동감이고. 그렇지만 자네가 날 구했지 않나. 그건 말이 돼. 안 그래?」
    그래서 우리는 심도 깊은 논의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토론한 결과, 정답은 오직 1개라고 결론 내렸다.
    그건 무엇이냐? 바로 <뭐가 나올지 모름> 자판기를 원래의 위치로 데려다 놓자. 그러고 손 털자! 그러면 더 이상 우리는 엮이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17

    중간 건너 뛰고.
    다시 말하자면, 중간 건너 뛰고!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했다.
    자판기를 처음 장소로 옮겼고, 위치추적기도 뗌. 그리고 모두 함께 위치추적 앱을 핸드폰에서 삭제. 노트북을 이용해 인터넷 사이트 관리 페이지에서도 모두 확인. 끝. 그런데!
    그런데!
    바로 그때 휴게소 인근 평방미터 얼마 위치의 바깥 테두리, 그 정사각형의 겉면에서 철창이 솟아올랐다.
    우린 갇힌 것이다. 모두 함께 갇힌 것이다. 그럼 우린 죄수복만 입지 않았다 뿐이지 영락없이 죄수였다. 여기는 알카트라스였고, 나는 빠삐용인 거지. 전설적인 바로크-메탈 기타리스트 잉위 맘스틴이 결성한 그룹 이름이 뭐드라? 그 노래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철창 소제는 서투른 플라스틱도 아니고 중간 정도 철도 아니라, 바로 강력한 철골이었다. 더 크고 강력한 걸 본 적이 결코 없는 그런 철골.
    그러나 내가 누군가! 허당 아니냔 말이다. 이런 건 내 전공이고, 이런 건 내 분야였다. 따라서 나는 아니나 다를까 개구멍을 찾아낸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하도록 미리 허술하게 설계했던 걸까? 순서가 그렇게 흘러가야 하니까? 모르겠고.
    그렇게 우리는 탈출했다.
    그런데 차는? 나중 어떻게 되겠지. 일단 철수.
    그렇게 걸어서 도시까지 행진할려고 했다. 젊음의 행진이든 동네 아저씨들의 난동인지 노익장인지 몰라도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또 다시 처음 철장이 솟아오른 정사각형보다 넓은 영역으로, 철장이, 솟아올랐다.
    아, 그건 솟아오르는 장면은 못봤고, 설치 완료된 상태만 보게 된 것이다. 딱 철창에 맞닥드린 거지.
    곧 아까의 1차 정사각형보다 규모만 확대. 이 크기가... 뭐야? 어, 뭐냐고! 그럼 이번에는 개구멍이 아니라 쥐구멍에 숨어야 하나?
    그러다 뭐라고나 할까, 세한 직감? 섬찟한 직관? 나는 왠지 모르게 아저씨가 의심스러웠다. 아울러 루크까지 의뭉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저씨. 누구세요?」
   「나? 이 게임 설계자지. 응. 총감독.」
   「네?」
   「뻥이야!」
    아닌 것 같았다. 기분이, 기분이, 오 소름! 느낌이 싸했다. 분위기 망한 거지. 나는 썩은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그런데 루크는 웃고 있네? 얜 또 뭐야! 설마 마법사의 조수? 게임은 게임인데 상한 게임이라······ 완전 이상한 환상에 걸려들었구만 그래. 그러나 나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공상에 빠지지도 않았다. 포기하기엔 이르고. 꿈을 꿔서도 안되고.
    그래서 나는 1차 철창을 탈출할 때 개구멍 위치에 해당하는 위치로 뛰어갔다. 물론 혼자서.
    그렇게 그 위치에 도착. 그리고 마침내 거기서 2차 철창의 개구멍을 발견.
    짜잔~! 으하하하하하하. 히히히히히히히. 두둥~! 크크크크크크크.
    그런데 뭐야 이거! 개구멍이 안 열리네? 그때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거 안 열려. 아마 그거 열기 어려울 꺼야.」
    그때 나는 저번에 자판기에서 뽑았던 USB를 꺼내들었다. 레이저 불빛을 켰고, 거기에 비추니 개구멍이 열렸다. 그럼 그렇지.
    허허허허허. 호호호호호. 허허허허허. 낄낄낄낄낄. 큭큭큭큭큭.
    나는 그 콤비를 슥~하니 한번 쳐다본 다음 말없이 떠나갔다.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서 약간 야비한 미소와 함께, 다시 한번 그들을 슥 쳐다본 다음 떠났다.
    3차 철창의 범주를 도저히 가늠하기 힘든 채 말이다. 하다 하다 환청까지 듣고야 말았다. 내가 가지 가지 하는 걸까? 상황이 그러지 않게 생겼나. 심지어 사실만 말하자면 환청도 아니었다. 있는 말 없는 말이 아님. 믿거나 말거나도 아님. 사실 딱 사실이니까. 그러니까 그분들께서 뭐라고 했냐구요?
   「자네, 그걸, 감당할 수 있겠나?」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내 청력과 지각은 좀 흥분하고 긴장했다뿐이지 전혀 이상이 없었으니까. 딱 정상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2차 철창의 규모만 해도 와~, 어마어마했다. 그럼 당시 난 뭐였지? 양? 소? 말? 설마······ 멧돼지? 에잇! (쩔레쩔레)!





    18

    나는 사무실 소파에 앉아 멍청하게 TV를 보고 있는 중이다. 그냥 소파에 멍하니 자빠진 채 넋이 나간 듯 말이다.
    루크는 연락이 안되고 그 아저씨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옆 사무실은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빈지 오래였다.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는 어디서 잘 살고 있겠지 뭐.
    그러다 나는 저번에 지니가 보내준 립스틱이 왠지 수상했다. 어딘가 모르게 꺼림칙했다.
    그래서 나는 그 립스틱을 분해해봤다. 아직까지 그러고 보니까 립스틱으로 거울에 글씨를 쓰거나, 원래 립스틱의 용도에 맞는 일을 전혀 안해봤구나. 어렸을 때 누나가 내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 거 빼고는. 그렇게 나는 연습장에 마구 낙서하면서 립스틱을 소모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립스틱 바닥에 초소형 USB가 있네? 이번에는 진짜다. 가짜가 아니다. 가짜일 리가 없다. 속고 싶어도 속을 수가 없다.
    그렇게 잘 닦아낸 다음 그걸 노트북에 꼽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빨리 말하라고, 어서! 응? 뭐해, 대체 뭘 기다리냐고! 어? 설마 또 뜸들이는 거야? 냉큼 말해, 말 안해? 어?
OK! 나도 그럴려고 했다.
    그 안에는, 그 안에는...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빰빠라밤~ 빰빰빠~ 빰빠밤~!
    혹시 그러지 않을까 라고 추측했던 파일들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마구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건 바로,
    1.영화로만 접했던 스토킹 파일들.
    2.살면서 이따금 들렸던 <유출>소식의 자료들.
    3.생각지도 못했던 검색어에 대한 검색 결과(당연히 검색엔진 성능을 살짝 제한시킨 현재가 아니라 최대값으로!)
    그 모두가 전체이자 개별 파일로 담겨져 있었다. 도대체, 도대체가 워워 이게 몇 개야? 워──워──워! 장난이 아니구만 그래. (몸짓)! (골 세러모니)! (설레설레)! 아니 어떻게......!
    나는 일단 딱 1개만 열어보기로 했다.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떤 거 먼저 본다?
    그래. 결정했어. 이걸 먼저 보자.
    제목은, 로저 테일러의 사생활! (뭐라고?)
    더블 클릭!
    그랬더니... 그랬더니...!
    아후, 주전자 끓는다. 난리도 아니다.
    커피포트 바빠진다 완전 바빠진다. 뚜껑 제대로 열린다.
    긴말하지 않겠다. 긴말하지 않고 싶으니까. 빡치고 뚜껑 열리고 짜증에, (몸짓)!
    그건······ 그건······ 모두 빈 파일들이었다. 다시 말해, 모두 다, 제목뿐이었던 것이다.





    19

    <우리는 현실로부터 도망갈 틈만 엿보는 미약한 관음증 환자일까?> 이런 형식적인 질문은 읽기도 듣기도 썩 편치 않다. 사실이든 아니든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글발, 직접 쓰기는 더 불편하고. 그 기교로 먹고 사는 업종이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런 기술이 멋져 보일 수도 있기 때문. 그와 관련한 속된 말 2가지가 있다. (안)먹힌다 그리고 바른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기질적으로 그걸 못하는 부류도 있다는 거다. <난 나중 유명해질 꺼야. 나는 유명해지고 싶어!>라는 말을 단 1번 해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은 <최선을 다하다>라는 표현도 서슴없이 발설할 수 없을 공산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럴 가망성은 거의 0으로 출발해서 변치 않을 테니까. 그래서 <최선을 다한다>라는 말을 단지 듣는 것만으로 꽤나 생각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적극적인 미녀의 구애로 듣는 <최선을 다하다>, 호박이 간혹(?) 피해가는 남자의 애매한 50점 허세로 듣는 <최선을 다하다>! 전자와 후자를 둘 다 들어보면 꽤나 다른 느낌인 점 절대 부인할 수 없다. 그야 어떻든 익숙한 어투와 도덕적 관습이 뭐 싫겠냐마는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라는 변호는 이만 하면 됐고.
    아마 그 때문에 남자 어른들 태반은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또 맹렬히 실천한다. 확률로 따지자면 그분들 생각이 맞다. 뭘 집어들든 확률상 잔지식 이상에, 시간낭비 초과를 뽑을 확률은 아주 희박하니까. 따라서 그건 결코 틀린 소신이 아니다. 행운에 힘입지 못했다 뿐이지, 그걸로 보자면 잔재주가 큰 재주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어른들이 어찌 그걸 모르겠나. 누적된 지성이 어중간하다면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러니까, '잔지식으로 대신할 수 있냐 아니냐'에 따라 상투어와 꾸밈어로 부풀려진 미로에는 처음부터 아예 들어가지 않는 게 시간을 아끼는 방법이다. 다른 말로 간보기, 떠보기, 말 돌리기, 훑어보기, 짐작하기, 의중 파악, 속마음 간파하기, 대충 살기, TV 채널 돌리기, 인터넷 짤 보기, 관측, 예고편, 광고, 절반만 믿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등 (아이고야~ 숨차라) 모두 비슷한 원리이지 않냔 말이다. 시간을 아끼고 싶은 어른은 그러지 않을 수 없다. 냉혹한 연파란색 피든 섬찟한 초록색 피든, 모든 게 화폐가치로 치환할 수 있는 세상이니 만큼 시간 소비의 측정은 두 가지니까. 2가지?
    첫째, 시간이 블랙홀 같은 마법 과정을 통과하여 구부러지느냐.
    둘째, 시간이 모래시계처럼 유락─소모─낭비되느냐.
    첫째는 신기함이고 둘째는 썩은 미소다. 첫째는 몰입이고 둘째는 그럭저럭 시간 때우기다. 당장은 모를 수도 있고. 첫째는 매혹이고 둘째는 그러려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2번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이를 테면 1번은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이라면, 사람들이 말하기로 화가가 만년에 이르러 아이처럼 그린다고 하니까, 2번은 애들의 그림으로 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1과 2 사이에서 나누는 수다, 네 안목과 내 취향의 비교. 그건 여자의 우정이다. 그러다 1.5쯤에 해당하는 궤변론자의 설득에 넘어가 사랑에 빠지는 일, 드라마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듯이 말이다. 그 감언은 찬찬히 듣고 보니 썩 틀린 말이 아니네? 아 글쎄 납득이 되거든. 보고 또 보고, 만나고 또 만나고, 정들면 사랑이거든. 첫인상이 갈리는 순간 웃지 않았거나, 아무리 따라다녀도 뿌리쳤을 수도 있겠지만 마음 약한 여자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아니 많나? 통과. 아무리 어설픈 3대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처음부터 어설픈 사랑은 아니니까. 어차피 사랑은 사랑이거든. 그런데 그런 1.5의 유혹에 넘어갈 뻔 거의 넘어갈 뻔 조금만 더 거의─거의 완전히 넘어간 거나 마찬가지였다가─화사한 꽃이 꺾이고 탐스런 과일이 따일 뻔 거의 정말 거즘 따일 뻔 하다가─절묘하게 극적으로 딱 넘어가지 않은 아가씨가 누구냐, 바로 시사주간지 편집장 스텔라 쇼였다. <알고 봤더니>보다 훨신 앞서서 직관적으로 그녀는 허풍꾼과 스피노자 정도는 구분할 수 있으니까. 스텔라가 아는 게 단지 거기까지일까? 천만의 말씀! 그녀는 사랑의 남녀 변화에 대해서도 훤히 꿰차고 있다. 아름다운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 남녀로 구분해서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남자는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을 주지 않는다>, 여자는 <지금 생각하면 내 발등을 찍고 싶더라>.
    스텔라 쇼와 만나기로 한 사연을 뭐 이렇게 유난 떨며 떠들 필요가 있냐, 맞는 말이다. 그만큼 그녀가 대단하다는 거지. 하여간 거 참 별난 논리 전개를 다 보겠구만 그래. 농담이고. 그러고 보면 고혹적인 숙녀가 먼저 남자를 유혹하는 듯 해도, 가만 보니 다시 그 공을 네트 너머로 넘기면 그 유혹은 2배로(분위기상 4배?) 부풀려져 아가씨가 감당하기에 퍽 곤혹스런 뻥일 수도 더럽혀진 낭만일 수도 있겠네. 그건 그렇고.
    요점만 말하자면 스텔라 쇼는 또 약속을 펑크냈다.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썩은 미소도 정들뿐!
    그렇게 하여 나는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어딜까? 빙고!
    A.<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의 최초 존재 지점.
    B.공원에서 우연히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 소식을 듣고, 가서, 녀석과 재회한 카페. (위치추적기 부착)
    C.위치추적기에 따라서 녀석이 이동한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옆 사무실.
    D.D는?
    A─B─C가 정확히 직선이자 간격 역시 거의 균등했다. 그래서 나는 D 위치에 가보기로 했던 것이다.
    만약 거기서 엘리자베스 무어라는 특수요원을 만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라는 마음가짐으로 나는 그곳으로 떠났다.





    20

    사랑의 아름다움을 실측한 결과 정답은 이렇다. 사랑은 없어! 농담치고 거 어째 기분이 세하구만. (몸짓) 개인의 행복을 입증하기도 바쁜데 듣기 싫은 사랑 얘기는 각자 하는 걸로. 등 떠밀려서 연애론을 쓰든 자발적으로 식물학을 전공하든, 사랑이란 실전으로 터득해야 할 그 무엇이니까. 그렇지만 사랑이 무슨 죄인가. 다만 사랑이 변하고, 소망보다 야망이 앞서가며, 믿지 않아야 할 걸 믿는 세상사가 야속...유감스러울 뿐.
    어쨌든 편치 않은 심사의 비밀스러운 목적은, 나의 그것은 이랬다. 즉, 새로움과 변화! 말하자면 멋진 인생을 위한 궁극적 가치는 짧은 행복과 찐한 사랑을 양쪽에 꿰차는 게 아니다. 물론 뻔트라는 대만족도 좋긴 하나─하여간 뻔트 어지간히 좋아해─이왕이면 롱런과 전력질주가 낫지 않을까? 왜냐하면 거포와 패전 처리 전담 투수는 급부터 다르니까. 괜히 요지를 배배 꼬지 말고 명쾌히 할 말을 간출이자면 이렇다. <나는 심심함에 부적응했고 늘상 재미없음을 떠안았으므로, 고로 나는 심하게 불쾌했다> 물론 살짝 과장했을 때 이론상 그렇다는 뜻. 그래서! 그래서? 그러니까, 그럼 차라리 더티러브와 장밋빛 쾌감은 어떠냐는 악마의 권고안이 진짜로 들리는 것만 같다. 그 사랑이 건전하고 건강하면 어설퍼도 이상해도 좋겠지만, 일단은! 합리적인 듯한 핑계보다 타당한 우선 순위가 선행함을 기억하면 되니까. 하오나. 억지로 불쌍한 척, 심각한 척, 아는 척해 봐야 소용없고. 어리광 같은 풍문을 보고, 듣고, 읽다 지쳐 짜증 나시는 분들 생각 좀 하자! 투정이 썩 싫지는 않고 뜸 들이는 흥미는 저열함을 넘어서 기어코 고결해야 겠고? 참말로 옹색한 심정이구만.
    아하, 와우! 한참 정신없이 떠들다보니, 혼자서 지껄이며 깐족거리다 보니, 알겠네 이제 알겠어. 달리기냐 멈추기냐, 상승이냐 하강이냐, <A냐 B냐>가 아니라는 점.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이를 테면
    1.A
    2.B
    3.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4.농담 반 진담 반
    ~에서 제 4번! (딱) 손님과 말 몇마디 섞어보면 대번에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베테랑 술집 마담의 권고안마따나. 즉, 70 ~ 80퍼센트 역량으로 투구. 두뇌 투구. 다시 말해 맞춰 잡기라고나 할까? 곧 에라 모르겠다며 마냥 놀 수도, 장기 휴가를 떠날 수도 없는 형편.
    따라서 나는 '육상 10,000미터 경기 우승을 코앞에 둔, 골인 지점 단 10미터를 앞두고 갑자기 경기장을 떠나버린 어느 선수처럼'이 아니라, 경보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오빠 달려? 오빠 좀 걷자. <뛰어─젖어─느껴>도 좋지만 그래, 오빠 좀 걷자. 질주를 즐기고 시원함을 만끽해도 좋겠지만, 찬찬히 구경하고 생각하고. 한눈팔기는 쓰윽 눈치 봐서. 요즘 클럽은 음악이 도통 멈추질 않지만, 옛날만 해도 나이트클럽 하면 블루스 타임이 있었거든. 복고풍 정서만 추구하겠다는 게 아니라. 인생도 마찬가지다. 이를 테면 뛰기와 달리기와 다른 걷기, 조깅, 산책. 어느 도로사이클 경주 선수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흉내낼 수는 없으니까. 그분처럼,
    1.세계대회 몇 개 메이저 석권. 그것도 장기간 쭉.
    2.암에 걸려 죽다 살아남. 거의 반죽음.
    3.재기에 성공. 다시 세계 대회 정상 등극.
    4.도핑이 들통나 영구제명. 불명예. 성적 박탈. 거액 배상.
    5.고독하던 중 과거의 뻔트가 홈런으로 돌아옴. 즉 엔젤 (장기) 투자가 성공.
    6.선수로는 은퇴&유명인으로 현역. 소셜 네트워크에서 번개 모임등 소일거리.
    7.여전히 젊음. 대필작가가 쓴 자서전을 비롯해 회상의 범위가 넓음. 암울한 시기가 있긴 하나, 곡절 많은 인생.
    바로 이런 게 파란만장한 인생. 선생과 제자가 무슨 꽁트도 아니고 뭐, 너도 나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구나? 놀고 있네, 웃기고 자빠졌다. 멍석만 깔면 잘난 척은 얼마든지. 다만 멍석을 헛것으로 여기지 않기만을. 그러니까 다 차려진 잔칫상에 숟가락 먼저 올리는 기교만 발달하지. 고전은 고효율로 수박을 만들었는데, 현대 오락산업은 고타율로 수박 겉 핥기. 그러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게 아닌데, 그래서 그렇게 호박이 제 발로 굴러다니나? 할로윈은 애들 축제가 아니라, 뭐든지 그 뭐가 됐던지 어른들 잔치다. 좌우지간, 하긴 내 친구 촌닭&뱁새 명콤비만 해도 농담을 진담으로 받으니 말 다 했지. (그래도 우리의 기조는 어디까지나 으쌰으쌰!) 그래서 일설에 의하면, 사랑은 유치하고 우정은 추접스럽다고도 한다. 그런데 그 일설은 대체 누가 외친 거야? 몰라 모른다구. 사랑은 애절하고 우정은 신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아무튼 결론은 결국 뻔트구만. 무서운 직장 상사도 없으니 혼날 염려도 없고. 바텐더와 상담한지는 오래 됐고. 1위로 손꼽았던 친구 누나는 맞다, 옛날에 이혼했다. 진짜로. 딱 사실! 옛날 옛날 열 좋은 내 친구의 누나, 그분 결혼식에(재혼) 참석했던 일도 생각난다. 어쨌든 늦기 전에 행운의 뻔트라... 쉽지 않아 쉽지 않다고. 진한 사랑, 담백한 기쁨, 다정한 행복, 다망한 더티러브(?), 짜릿한 흥미, 놀라운 쾌락, 신기한 재미, 최장 모험, 최대 즐거움, 최고의 신비에 근사치로 접근하는 환상. 그 모두를 늦기 전에 일망타진하는 뻔트라... 쉽지 않아 쉽지 않다고. 천상의 환락을 향한 최선의 추정값이 뭐, 뻔트? 또? 그런데 그 뻔트는 쥐구멍이야 개구멍이야?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언제 올려나 몰라도, 거 참 시작부터 난관이로구만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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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138

from 소설 2018. 12. 15. 16:27

    1

    정성을 다해 쾌활한 인생을 도모한 결과 그는 낭만적인 사랑을 일구었을까? 분홍빛 호사와 청보라색 행복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농심으로 보자면 비록 뽐낼 만한 풍년은 아닐지언정 호박마차와는 구면이니까. 둘째, 어복으로 치자면 참치와 물개 그리고 상어와 한때 친했지만 진정한 대어, 곧 피앙세 인어공주와의 손 잡기는 아직이니까. 그렇지만 하고 또 하고 끝없이 반복하는 사랑가도 분위기 봐서.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는 데 딱히 반대하지는 않지만, 일할 때 놀고 그리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으잉, 일할 때 놀고?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고,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하는 일. 그런 로맨스 유행가 가사 쓰는 일을 일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도대체 할려는 말이 뭔데?」
    ~라는 질의를 듣는 청자이거나 따지는 화자가 아니라는 점. 한 가지 그의 난제였다. 잘 익힌 요리와 날것도 먹고, 잡것 같은 애칭에 익숙하며, <뭘 해도 재미없어>같은 진담과 농담의 양다리도 좋아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바로 덜 익힌 생두로 뽑은 커피를 못 마셔봤다는 점. 하긴 루왁 커피도 아직이다. 뭐야? 결국 <아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나올 테니 문제점은 그거네. 응석과 투정과 불만. 즉 심심한 기분을 상쾌하게 전환하여 달콤한 행복감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탐욕. 그 쉬운 욕구와 놀이의 필요성을 왜 그는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으쌰으쌰를 어떻게 하는지 흑심은 언제, 눈독은 어디로, 고급스러운 군침 흘리기는 무엇인지를 새까맣게 까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 그처럼 마음은 꿀꿀하고 기분은 착찹했다. 부쩍 팔과 목이 더 짧아졌고, 불굴의 창작 의욕마저 맹맹했다. 결국 싱거운 일상에다 따분한 실내 생활이다 그거로구만.
    그래서 NB는 친숙한 진공청소기와 지겨운 커피포트가 아닌 색다른 대상을 희망했다. 구태의연한 먹잇감이 아니라 팔딱팔딱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물고기처럼 깜짝 놀람, 그 신선함을 사모했다. 그리하여 마치 뉴페이스를 애타게 갈망하는 듯한 그 연모의 목표물은 무엇인고 하니, 역시나 <아직>이었다. 따라서 그는 궁지에 몰린 것처럼 주둥이가 길다란 주전자를 머리 위에 얹은 듯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다, 빙고! 하면서 아르키메데스처럼 참신한 기분전환 거리를 생각해냈다. 말하자면 짜증 계기판의 푸른 막대가 최대치를 마구 두드리면 어떻게 되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던가, 열려라 참깨 하면서 뚜껑이 열리게 된다. 그 원리에 착안해서 그는 천문관에 놀러가기로 한 것이다.
    '직경 얼마에 최첨단 시설이 어쩌고저쩌고'는 꽤나 멀어도, 보아하니 어디산 다비드는 불과 차로 1시간 거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바로 짐을 싸서 그곳으로 출발했다.
    잠깐만 친절한 설명이라는 꼬리를 달자면 이렇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다변가들에 따르자면 B급 헐리우드 영화의 특징은 그렇다고 한다.
    첫째, 꼭 사막이랄지 한적한 시골길 한가운데서 차가 고장남.
    둘째, 하필 그 지역은 항시 통신 먹통 지역.
    셋째, 외딴 모텔이랄지 야외에서 어쩌고저쩌고.
    필자가 보기에도 그렇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그러나! 영화는 영화고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2

   「계세요?」
    천문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이저 천문관이라고 정식 명칭도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불만 켜져 있지 않다뿐 나머지는 모두 사용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런 데 처음 와본 만큼 목적은 어디까지나 구경이었다. 실제로 한쪽 눈을 찡그리며 별자리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으니까. 재미로 보면 좋겠지만 그건 단지 부차적인 의미에 가까웠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냐고. 그럼 이제 정말 SF 영화처럼 사람 구경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든 일이 되어버린 건가? 그래서 NB는 신비스러운 긴장감과 놀라운 행복감이 지나쳤던 나머지 마침내 마음은 공중부양하고, 이성은 몸과 분리된 것만 같은 기분에 이르르고야 말았다. 진짜로? 뻥이다.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아니지. 오히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구경하고,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듯이 감정을 교류하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이 없었다. 그야 뭐 기다리다 보면 나타나겠지. 아직 심각한 단계는 아니니까 그는 차분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구경할 거 다 구경한 다음 그는 왠지 모르게 여기 당분간 머무르고 싶어졌다. 그래서 천문관의 건물과 건물 사이에 볕은 들고 바람은 들지 않아 텐트 치기 딱 좋은 장소를 발견했고, 텐트를 쳤다. 나중 주인이 오더라도 할 말은 있어야 하니까. 무슨 권리로 사장실을 차지했냐고 따지는 질의만 듣지 않으면 되니까 말이다.
    그렇게 천문관 생활 1일째를 인적 없이 홀로 보내니까 썩 찬동하기 마뜩찮은 모종의 만족감이 느껴졌다. 이대로 한동안 견디다 보면 둘 중 하나, 아니 셋 중 하나는 될 거 같았다. 바로 첫째 젊어지기, 둘째 푹 쉬어 만성피로를 풀기, 셋째 기막힌 걸작의 구상만 완성. 자기를 반가워하는 정감이 없으니, 누군가를 억지로 반기지 않아도 되는 상태. 격심한 명상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었다. 예술가가 그걸 왜 마다하겠나. 사무실과 집을 오가면서 내내 다짐해봐야 작심했던 근사한 시간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현재의 생활 시간표를, 객관적으로, 직시하자> 라면서 글로 써서 모니터에 붙여봐도 소용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공기 좋고 풍광 좋고, 방해할 아무도 그 무엇도 없으니 놀라운 영감이 떠오르는 건 단지 시간 문제일 따름.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일단 기분은 그랬다.
    그런데 그렇게 1일, 2일 지나면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생활 반경과 주거 지역이 점점 안쪽으로 이동된다는 점. 그렇지만 카페 냉장고에서 뭘 꺼내먹기가 뭐해서 나중 변명거리도 미리 만들어놨다. 동영상으로 찍어서 핑계를 읊은 다음 그 동영상을 소셜 네트워크에 미리 올려놨다. 심지어 실시간으로 방송해서 모두 기록을 남겨놨다. 그러다 결국 그는 보이저 천문관의 VIP실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럼 그렇지.
    그리고 그 다음으로 사람도 사건도 없었기 때문일까? 슬슬 이 생활이 지겨워졌다.
    딱 3일째.
    많이 버틴 거다. 어쩌면 첫째날부터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라면 거짓말일 테고. 일부러 자신을 타일렀겠지. 왜냐하면 억제할 수 없는 광기로 말미암아 생기를 부여받은 듯한 허당임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었을 테니까. 아울러 인생이란 심심한 예언가의 애달픈 희망 같은 것이라며 혼잣말을 읊조리는 걸로도 모자라 점점 싫증만 늘어갔을 테고. 안 봐도 뻔하다. 그러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평소처럼 공상만 늘어갔다. 마치 이처럼 말이다.
    <혈기왕성한 정력가는 날조된 열망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하찮은 잔재주라도 황공할 따름이어야 할까. 수수께끼 같은 인생 행로로 보건대 정감을 느낄 만한 고뇌라고 보긴 퍽 어려웠다. 언제나처럼 일상을 이어가는 수 밖에. 가뜩이나 마감일에 쫓기는 생활의 연속인데 이상한 생각은 그만. 딱 그만. 남자의 감성에게 여자의 이성을 점지해주어 열심히 일하기에나 신경 쓰자, 라고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 잠깐. 남자의 감성 대 여자의 이성? 바꼈나? 좋으실 대로. 그럼 뭐 여자의 꿈과 희망 대 남자의 지성과 열정으로 일하기에 매진하면 되겠네.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이상한 공상을 향한 흔치 않은 애착감, 참 유별난 취미도 다 있다. 그런데 몽상을 하다 보니 또 뜬금없이 숫자에 집착이 되는군. 요즘 특히 숫자에 강박을 느끼니까. 중학교 3학년 마지막에 무슨 졸업용 그런 시험이 있었는데, 그때 200점 만점에 140점을 받았던가? 아님 143? 144? 아니면 160인가? 아닌데. 모르겠다. 그리고 고3때 대입 시험도 200점 만점에 105.7? 아니 105.2던가? 아아 헷갈린다. 어지럽구만. 됐고!>
    그러나 천문관 보이저는 그를 기어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끝까지 밋밋한 전개를 모른 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곧 천문관에 또 1명의 낯선 여인이 있다는 걸 그는 알아냈던 것이다.
    신비감은 예측불허에 환상감은 상상초월. 꼭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괜히 반가웠다. 안 그럴 수 있겠나.
    그렇다고 의뭉스러운 정서와 허풍스러운 정체성을 앞세워 그녀를 꼬시겠다는 의도는 추호도 품지 않았다.
    그렇게 내내 숨바꼭질만 하다 서로 거리만 재다, 그는 과감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혹시 이곳 관계자이신가요?」
   「아니요.」
   「그럼요?」
   「뭐가, 그럼요죠?」
   「그러게요. 그러니까요.」  뭐야, 얘 세게 나오잖아? 그는 살짝 긴장했다.
   「」   그녀는 자기가 말할 차례를 한 번 쉬었다. 질문이든 수다든 그녀가 말한다면 그는 그녀의 말을 끊지 않을 텐데. 일단은 그랬다.
   「혼자 오셨어요?」
   「네. 오빠...는요?」  
    뭐, 오빠? OK! 게임 끝났다 완전 끝났다. 어쩐지 처음부터 눈빛부터 다르다 했다, (딱)!
   「보시다시피. 알다시피 이렇게 인적이 드문데 제가 계속 있어도 될려나 조금 걱정이 되는구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여긴 무슨 일로...」
   「저요?」
   「네? 네.」   그럼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있니?
   「저는... 제 오빠가 초대해서 왔는데, 오빠가 좀 늦는다 그랬거든요. 우리 오빠 아세요?」
   「그쪽 오빠를요? 제가 그쪽 오빠를 어떻게 아나요! ~라는 말은 장난이고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군요. 알고 싶다구요. 아가씨와 그 오빠분을요. 그런데 그쪽 오빠는 뭘 좋아하나요? 참고로 저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허허허. 농담치고 거 참 대단히 썰렁하군요. 허허허.」
   「알면 됐죠.」
   「네? 허허. 알다뿐인가!」
   「방금 뭐라고 하셨죠?」
   「네? 아무 말도 안했어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왜긴요? 이쁘면 이쁘다, 뭘 마시겠냐, 이름이 뭐냐.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참 나 거 별... 아무튼 무지 이상한 오빠를 다 보겠네. 난 댁을 처음 보고 애 한 셋 딸린 애기 아빠로 봤다구요. 네? 아시겠어요?」
    우리는, 그렇게, 친해졌다. 그녀는 말이 길어졌고 웃었다. 이제 이미 그녀는 내 사랑의 반경 안으로 들어온 거나 다름없었다. (내? 그!) 바로 사랑과 우정 사이 말이다.
    그녀는 내 눈빛을 마주보다가, 교묘히 피하다가, 다시 슥 스쳐지나가듯 분위기를 살피고. 이미 그 뭔가는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다.
    천문관 생활 3일째에 접어들어 지루함은 수용한 채, 작품 구상에 전념하려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이게 웬 뜬금없는 행운의 전개?
    행복은 주어진 풍족함에 얼마나 만족하느냐에 달린 것. 그는 행복했다. 어쩌면 기쁨이 가짜였을지 모르지만 속으로 엄청 좋아했다. 안 그럴 수 없었으니까.
    아낌없는 찬사에 목마른 아가씨라니, 것도 제 발로? 그렇다면야 자긴 행복론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로써 숙녀를 예우하는 수 밖에.
    그는 어느새 기분이 붕 떠버렸던 것이다. 오늘은 아니지만 어제까지는 딱 그랬다. 어떻게? 바로 이렇게.
    짜릿한 기쁨, 쾌감이다. 그렇지만 타락마는 일단 깊은 잠에 빠졌다 치고 작가 생활, 따분했다. 바람둥이 시절도 옛날에 지나가버렸다. 있긴 있었나? 알 게 뭐야! 교양미를 살찌우기, 우스꽝스럽다. 한량 생활, 우습게 보일 수 있다. 장기 여행, 팔자에 어울리지 않는다. 뭘 좀 아는 남자라는 로망, 공인도 아니고 비공인도 아니고.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 우습다. 많이 우습다. 아니, 웃기지도 않다. 말도 안된다. 그럼. 그렇고 말고.
    그래서 NB는 허심탄회하게, 명쾌히, 속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러니까 무엇을 인정했을까? 자기는 어설픈 3대 사랑을 아직 채 숙달하지 못한 허당임이 분명하다고. 애정사는 노련했고 인생관도 흥미를 끌만 했지만, 아마도 침체기인 듯 했다. 그 때문일까?  
   「그런데 여자를 못 꼬셔!」
    ~라는 퉁명스러운 놀림. 친구한테 했던 말은 스스로에게 적용되는 말이 이미 되어버린 셈이나 다름없었다.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구분은 의미 없어져버렸으니까. 사정이 사정인 만큼 안 그럴 수 없으니까. 왜 하필 다른 거 다 놔두고 그 부메랑이! 따라서 그는 마굿간에서 쉬는 명마를 믿어보는 심정으로 경이로운 엉뚱마를 중용하기로 했다. 해결사, 승부사, 구원자, 행운아, 탕자, 박식가, 멋쟁이, 열정가, 탐험가, 사색가...가 아니라 바로 기수는 NB 몽상가였던 것이다.
    그러던 찰나! 이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낯선 천문관에서 미모의 아가씨와 갑자기 처음 만나 친해지다? 게다가 방해자는 아무도 없고? 심지어 그녀는 달아날 마음이 전혀 없네? 앗싸! 일단 상황은 그렇게 된 것이다.





    3

    그렇게 NB는 생각이 깊고, 넓고, 많아지려던 찰나. 바로 그때!
    저쪽에서 누군가 오는데 어디서 많이 본 차다. 차가 이쪽까지 와서 멈춘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니 그 역시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다. 그는 바로 롭이었다. 바로 팬클럽 회장 롭.
   「롭. 너 여기 왠일이니?」
   「그러는 형은 여기 왠일이야?」
   「그러게.」
   「어떻게 이럴 수가!」
   「혹시, 청승?」
   「아니. 탐방!」
   「그럼 허세?」
   「아니. 호기!」
   「형 나 따라다녀?」
   「내가 널 왜 따라다니니? 나 바쁜 사람이야.」
   「형. 나 따라다니지 마. 그럴 시간에 작품을 쓰라고. 응? 나도 명색이 팬클럽 회장이란 말이야. 내 입지도 좀 살려줘야 될 꺼 아니냐고. 안 그래? 물론 관심 없는 사람이 다수겠지만 그래도 말이야, 내 면이란 게 있잖아. 내가 형이랑 나이트클럽에서 만나고 이처럼 어디서 오다가다 우연히 마주치고, 그걸 그 친구들이 알면 좋아할까?」
   「걔네들이?」
   「걔네들이, 가 뭐냐. 그분들이!」
   「아니 내 말은, 진짜 팬은 0명에 순 장난꾸러기 개구쟁이들이 100인 듯 해서. 그래서. 그런데 그분들이 뭐? 늬가 고자질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얘가 은근 형을 밀었다 당기네. 어? 내가 안해서 그러지 이간질에 소질이 없을 줄 아니? 응? 그런데, 없어. 그런 데 소질 없다고.」
   「그래? 그렇지만 내 의도는 그게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해. 그치만 걔네들도 놀이터라는 공간과 가지고 놀 장난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팬클럽 사이트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그 친구들 당연히 관심도 없을 꺼야.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라고 말할 시간도 아깝지 않을까?」
   「빙고! 형 많이 늘었네.」
   「그럼 내가 그걸 왜 몰라야 하는데! 라고 작가님께서 그러셨다고 너 또 글 남기려는 거니?」
   「형. 내가 마음만 먹으면 팬클럽 문 닫아. 형도 알지?」
   「그럼. 내가 그걸 왜 모르겠냐!」
   「허허. 농담이고. 그래도 형은 모르겠지만 우리끼리 친해. 응? 많이 친하다고. 말만 누구 팬클럽이지 주축 멤버는 다 그런 식이야. 누구는 관심도 없고 자기들끼리 우정을 쌓고, 자주 만나며, 그 가운데 사랑도 탄생했어. 결혼한 애들도 있어. 사진 보여줄까?」
   「본 걸로 치자. 그런데 너 나이트클럽은?」
   「나이트클럽? 시끄럽더라고. 시작할 땐 뭔가 한번 그쪽 시장에서 파란을 일으켜 볼까 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조용한 게 좋아지더라고. 형 저번에 내 사장실 와 봤자나. 벨리니의 노르마 중에서 거 뭐지? 아아아~~~ 오오오~~~! 아름다운 사람아 내게 돌아오라~♬♪ 응?」
   「안되겠다. 내가 인터넷에 동호회 페이지 하나 만들어서 회장할께. 이름 하여 롭 팬카페! 어때? 괜찮지 않니? 좋은 생각 같은데. 이미 너랑 나랑 입장이 바꼈어, 이 친구야.」
    그런데 다 좋은데 왜 하필 얘는 이 때 나타나는 걸까! ~라고 그는 생각했다. 눈빛은 당연히 뭐랄까 원망스럽다고나 할까? 재기에 성공해야지, 라면서 아등바등 투혼을 불사를려는 열망은 온 데 간 데 없이, 어? 틀림없이, 흑심과 막살자식 죄의식과 그녀를 지켜주자는 흑기사풍 위엄 사이에서 갈팡질팡했겠지. 뻔해 뻔해! 그러다 어이 친구, 라는 듯이 나타난 게 다름 아닌 롭! 얘가 하필 왜 지금, 왜 이때 나타난 거야? 설마 죽 쑤어 개 주었다, 에서...... 아니야 아니야. 아니지 아니지. 아닌 게 아닌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에서...... 아니야 아니야. 그는 좋게 한눈팔지 않도록 타락마를 교정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흡사 밤의 환상에 놀란 토끼처럼.
    어쨌건 사실만 보자면 이랬다. 그는 마침내 추종 세력과 팬클럽이 다 떨어져나갔다. 언제 있긴 있었나도 모르겠고, 오히려 이제는 그보다 롭이 훨씬 더 잘나가고 있었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과연 생기발랄한 대책이 통할지는, 그런 비책마저 준비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형. 내 여동생 지아니. 이미 인사 나눴나?」
   「그럼. 혹시 오면서 귀 간지럽지 않던?」
   「왜, 내 흉 많이 봤어? 볼 게... 없나, 있나, 많나?」
   「롭. 혹시 할 말이 산더미 같은 건 아니겠지? 그럼 나 갈께. 다음에 보자. 뭔가 떠올랐거든.」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그래. 그럼 어서 가셔야지. 형. 잊지 말고 팬클럽 사이트에 들려서 글 좀 남겨줘. 아직 문 닫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럼 그렇지. 내 그럴 줄 이미 다 알고 있었어! 흥. ~라면서 그는 천문관을 뒤로 한 채 떠나갔다. 목적지는 아직 정하지 않고서, 저조한 기분을 떠안고서 말이다.
    손색없는 밀애와 부인할 수 없는 행복감은 영 소식이 없었다. 뜸해도 너무 뜸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낭만은 모자랐다. 인기는 상했다. 오락산업은 거짓말쟁이다. 쾌락마 타기도 재미없다. 교양은 가식이고 예술은 아둔하다. 희망은 어렵다. 어차피 청춘이란 심심함에 불과하다. 그러나 해결책이 있다. 바로 풍족한 소비면 분위기는 금새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투우장과 경마장과 미술관과 동물원 그리고 놀이공원 다음에 백화점까지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다 귀찮다. 시작도 전에 지친다. 우선 뚜껑 없는 차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통장 잔고가 간당간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NB는 합리적인 씀씀이, 건전한 유희, 익숙한 취미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퇴짜 맞기를 좋아하고, 바람 맞기를 즐기며, 딱 1달 일하고 직장 때려치기를 반복하면 안되기 때문. 잠깐만, 간당간당? 빙고!
    그래서 그는 이 기분으로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는 뭐했으므로, 따라서 오랫만에 축구 서포터스 조마조마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축구장에 갔다.





    4

    그는 축구장에 도착했다. VIP 초대권은 없으니 입장권을 사서 경기장에 들어갔다.
    그곳은 축구 전용 구장이 아니라 다목적 경기장 즉 대형 경기장이었다. 그래서 명경기에서 보는 열기는 조금 덜했지만 반면에 나름 장점도 있었다. NB처럼 약간 집중력 떨어지는 관중에게는 오히려 딱이었다. 그렇게 그는 골대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우유와 빵 하나를 들고서 말이다.
   「분명 오늘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왜 조마조마 애들이 보이지 않지? 오늘 나 꼭 좀 기 받아야 하는데 말이야. 어떻게 된 거지?」
    라면서 그는 조마조마에서 맹렬히 활동하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사말과 안부와 잡담은 건너뛰고.
   「형. 우리팀 2부 리그로 내려간 거 몰라? 형이 모르나본대 서포터즈계도 불문율이 있어. 골대 뒷자리를 차지하는 일종의 규율 같은 게 있다고. 전용 구장이 아닌 일반 경기장의 골대 뒤에서 저편 골대 뒤까지. 생-목으로 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소리꾼이 빠져서는 안되듯이 말이야. 아니, 우리가 말이야 우리 팀이 2부 리그로 내려갈 줄 누가 알았나? 우리도 설마 했지. 그런데 내려갔네? 형 알잖아. 서포터즈 조마조마는 골대 뒤 자리 아니면 응원하지 않는다는 묵계. 응? 그래서 우리는 당분간 아직 1부 리그에 잔류한 옆 도시팀 응원을 왔다고. 2부 리그 응원하는 서포터즈 가운데 그 자리 맡는 애들이 있을 텐데. 그러니까 연락을 미리 하고 가야 할 꺼 아니야. 어떻게, 내가 그 친구들한테 연락해볼까?」
   「됐다 됐어. 아 됐다 그래!」  ~라고 말할려다가 살가운 인사말로 전화 통화를 마쳤다.
    그는 미스테리에 마음을 열었다. 판타지에게 마음을 주었다. 만화영화에 마음을 빼았겼다. 진짜로? 뻥이다. 다 뻥이다. 다만 숙녀들의 마음을 안절부절 못하도록 설레고, 들뜨며, 빠져들게 만들기. 그건 진짜다. 정말로? 뻥이다. 근거가 미천하다. 자료도 흩어졌다. 있어도 재미없는 기억이다. 그러면 혹시? 그는 쾌락마를 사랑하고 타락마를 애정하게끔 운명지어져 있다는 건가! 아니다. 펜트하우스는 관심도 없다. 그가 언제 플레이보이의 명망을 흠모하며 더티러브의 로망을 연모했다고. 아니다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당연하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기대하는 여행이 뜸했으니까. 기다리는 달콤한 파티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으니까 당연한 얘기. 뭐 심심함에게 천상의 배필은 따분한 일하기라고? 마침내 때가 임박했을까! 즉 으쌰으쌰가 아니라 <가는 여자 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막지 않는다>, 에서 아무도 오도 가도 않기! 뭐라고? 아니, 그렇게 심한 말을······!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럼. 아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될 소리인가? 어떻게 그걸 말이라고! 그러니까 궁극적 행복감의 눈부신 배필로써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할 필요 없다. 아티스트병도 지쳤고 허언증도 더 이상 재미없으니까. 따라서 당장 '뭘 좀 알기'학원에 속성 과정으로 등록하고, '그녀를 단 3일 만에 사랑의 포로로 만드는 법'같은 책을 독학해야 하는데, 그게 또 썩 여의치 않다.
    그래서 새롭고 젋고 이상한, 이라는 꾸밈어를 떼고 그는 당당히 <괴상한>이란 딱지를 BOY 앞에 붙였다. 그처럼 뭔가 신나는 일을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하여 NB는 당분간 NEW 대신에 그 낱말을 달 수 밖에 없었다. 싫어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바로, DROOPING! 늘어진; 눈을 내리깐, 고개 숙인; 풀이 죽은. 뭐라고? 저런 저런!





    5

    그는 청혼을 받을 것만 같은 예감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 조금쯤 수줍어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특별한 행복감도 없었다. 알랭 로브그리예 읽기에 재도전할 마음도, 일단은, 없었다. 왜 나는 해리포터류 판타지가 재미없는지, 라면서 애호가를 질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초코릿 공장이네 뭐네 누구식 상상력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옹졸한 마음 편협한 아량이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 턱이 있나. 그래서 헛된 공상만 늘기 일쑤였다. 마치 이런 식으로.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왔기 때문일까? 그럼 엉덩이가 근질근질하다는 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가기 싫다는 증거. 통상 타고난 수다마나 천부적인 뻔뻔마가 아니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건 그렇고. 퇴폐미를 보고, 염세주의를 읽고, 타락마를 타고서 신나게 달리는 청춘의 방황. 내 현실이 아니라 드라마 속 주인공들 얘기일 뿐이다. 고로 가당치도 않은 인기와 당치도 않은 더티러브에 대한 기대는 애시당초 잘못된 열망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멋진 인생에 대한 새로운 목표는 뿌옇기만 하고, 어젯밤에 만끽했던 달콤한 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면 혹시 지금 나는 슬럼프? 또?>
    NB는 그런 허접한 몽상쯤은,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밤새도록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재미없는 허풍이 멈추는 건 어디까지나 잠을 자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중단하는 거고, 아니면 띨띨한 상상은 쉼 없이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거고. 사석에서, 너 미쳤냐─꺼져─닥쳐─아 빡쳐 그리고 삐─삐─ 같은 언어 습관에 익숙한 분들 어법대로라면 밤을 찢는 거지. 허걱! 과장이 심했나? 억측도 정도껏 해야 하나? 아니다. 심지어 비약의 절반은 진짜일 테고. 아무튼 뻥이 아니다. 그러면 허언증인가? 그런데 나중 알고 봤더니 뻥이면?
    뭐 어쨌든 의식의 흐름은 추억을 회상했다는 점. 가령 옛날에 <행진형>이라는 이름의 친구와 급작스런 브로맨스로 주변 여동생들을 깜짝 놀라게, 웃기도록, 흥미롭게 수다 꽃을 피우게 만들었던 일. 가령 옛날에 채팅으로 <전진해>라는 아가씨와 채팅하던 중, 만나고 싶다고 먼저 당신이 제의해서 딱 만났는데 글쎄... 머리 위에 커피용 주전자를 얹은 일. 가령 <행진곡>이라는 숙녀와 찐한 사랑을 놓고서 줄다리기를 하며 밀애에 빠져보는 일은 있었나, 없었나!
    심도 깊은 헛소리는 그쯤 하면 됐고. 어쩜 그 때문일까? 그는 오랫만에 친구 멀더가 카페 가가멜 가가멜을 개점했다길래 한동안 거기에 자주 들렸다. 그렇게 그곳에 출두하다가, 드나들다가, 뻔질나게 얼굴을 들이밀다가 딱 귀인을 만나고야 말았는데. 바로 거기 점원인, <행진하지 마>양을 만났을까 만나지 못했을까? 농담도 재미없고. 무슨 이름이 <아무도 믿지 마>야 뭐야? 그걸 누가 믿겠어. 그런데 혹시 사실 아니냐고? 거짓임. 뻥.
    그래서 JS는 그녀가 이름을 알려줬는데 그건 까먹고 자기 맘대로 그녀를 <행진하지 마>로 정했다. 그렇지만 너무 기네. 그래서 다시 엘리자베스로 부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번 보고 말 꺼라면 몰라도, 밖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NB는 엘리자베스를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누구든 만나면 금새 친해지니까. 우리는 아무나 믿지는 않지만 누구나 만나기만 하면 말부터 트거든. 단, 상대가 상대였을 때만. 우리는 첫인상 참고 하고서 만나자마자 우정, 사랑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따져서.
    그렇게 그는 약속 장소로 나갔다.





    6

   「오빠. 우리 바다 보러 가자! 응? 재밌겠다. 뭐해, 안 가고?」
   「얘도 상태가 안 좋네. 자기야! 상태가 안 좋은 건 나 하나로도 벅차, 얘. 응? 나도 내가 힘들어. 알겠니?」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NB와 엘리자베스는 바다로 함께 갔다.
    그런데 이상한 게 뭐냐면 오붓하게 한 차를 타고서 가는 게 아니라, 각자 차를 몰고서 사이좋게 그처럼 유유히 바다로 갔다는 점. 뭔가 찜찜한 듯 세한 여운을 남기는 부분이다.
    그래서, 과연 어떤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NB는 허당의 실추된 품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라는 미명 하에 떠날 테고, 엘리자베스는 또 그녀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를 일. 사교계와 거리를 두고 사는 그의 챙피한 성품을 놓고 본다면 멜로드라마의 발단은 에로로 발전할 여지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만 같았다. 공공연히 떠도는 풍문에 근거하여 뿌듯한 궁금증이 부풀 정도······의 재간둥이는 아니라는 점. 그와 같은 예상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근거였다.
    어쨌든 그들은 함께 한적한 해변에 도착했다.
    오랫만에 바닷가에 와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따스한 햇살. 시원한 경치. 사람들의 여유로운 표정. 계절이 계절인지라 조금 춥기는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갈매기 소리도 들리고 파도와 모래사장과 해변에서 말타는 모습까지. 뭐랄까 홍조 띤 느낌과 귀가 빨개진 기분, 그 둘이 절묘히 결합된 분위기에 대한 갈망이라고나 할까. 그런 분위기에 포근히 안긴 듯 흐뭇해졌다. 진작 올 걸 그랬네 라고 생각했으니까. NB는 거의 A에서 B로 뒤바뀐 듯한 환상감에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A와 B는 다음과 같다.
    A.어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을 때는 최측근 레이저 시스템 인공지능과 대화를.
    B.기나긴 슬럼프를 탈출하자마자 예고도 없이 찾아온 행운. 과분하지만 뭐, 기분이 좋을 수 밖에.
    그렇게 간교한 모략과 응큼한 암중모색을 아예 후보군에서 내팽개치지 않은 채 생각이 많아지고 있을 때!
    바닷가를 걷고 있던 중 그녀가 심각하게 전화를 받았다.
    저쪽으로 가서 통화.
    그 다음!
    통화가 끝나고 다가와서 하는 말.
   「남자친구랑 헤어진 줄 알았는데, 걔가 날 아직 사랑한데.」
    뭐? 도대체 누구야, 그 자식은! 이 자식이......
   「오빠. 그런데 있잖아. 지금 온다는데. 거의 왔대. 도착했다는데. 어. 저기 온다. 오빠. 그럼 다음에 보자. 다음에 내가 내 친구 소개시켜줄께. 알았지? 나 갈께. 안녕.」
    그는 그녀와 이별했다. 그럼 여기까지 나는 왜 왔지? 라고 그는 생각했다.
    낭만적인 해변 산책은 무슨! 그는 다시 암울한 현실 재미없는 처지, 짜증을 다스리는 일상의 연속뿐인 삶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얼간이였고, 겁쟁이였으며, 밀애의 훼방꾼이었다. 사랑의 조력자가 아니라 멜로드라마의 은밀한 시청자이자 청춘극의 은근한 청취자였다. 하지만 주인공은 타인의 차지. 이런, 젠장!
    그래서 집에 갈려고 애마에게로 갔다.
    어머나, 맙소사!
    그런데 차가 없네? 어디로 갔을까! 대체 차는 어디로 갔을까?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아니면 누가 가져갔을까. 백방으로 찾아봐도 없음.
    알고 보니 엄한 데서 차를 찾고 있었음. 핸드폰으로 노트북 위치 추적을 실행한 결과 알게 됨.
    그렇게 그는 애마를 찾았고 집으로 쓸쓸하게 돌아갔다.
    천진한 애정을 소망하는 처녀의 미소는 떠나갔고,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점. 아쉬울 따름인 거지.
    도저히 진부한 일상을 탈출할 방도가 없을 때. 엘리자베스가 절묘한 수로 그를 더 진부하게 만들어버렸다.
    썰렁한 농담에 대한 애착감이 유달리 특별한 남자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않았는데. 뭐 어쩔 수 있나.
    그렇게 집에 당도했고, 그날은 아무 일 없이 마감됐다.
    다음 날.
    다음 날이라고 뭐 재미난 일이 있나 그에게 용빼는 재주가 있나. 공상이나 하는 수 밖에. 왜냐하면 오늘은 오늘의 해가 떠올랐... 날씨가 흐리멍텅하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특별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
    그는 남몰래 타락마의 옹호자였음을 염두에 둔 채 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방탕아의 경쟁자도, 막살자의 시중꾼도 되어서는 아니 될 일. 그렇지만 당신에게 무지막지하게 환상적인 신비감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공산이었다. 심심함과 재밌음을 오가는 청춘기에 품었던 허황된 꿈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정말 정말 끝내주는 묘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웃 복싱은 커녕 신나는 삶에 대한 출전 자격조차 박탈당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청명한 단조로움 가운데서 휴식할 자유에 군말 없이 따를 텐가, 하면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왕-패배주의라는 왕관, 더 이상 쓰기 싫었으니까. 표독한 결심이 어려우니 어떡하다 드라마 주인공의 앙칼진 변심이 부러워보였다. 따분함을 역전할 방도가 없다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익숙한 엉망진창이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일이나 해야지. 그는 사무실로 출근했다.





    7

    그는 해묵은 야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슬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애초에 야망이라 불러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그 무언가가 아예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NB는, 꿈은 없어도 선망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긴 커서 유명해질 거라는 열정가 부류의 친구들과 사귀지 못했을까? 어차피 그만큼 자신감 넘치고 베짱 두둑한 야망가는 확률상 만나기 드문 게 정상이다. 그러니까, <꿈이 없는 게 자랑이냐>라는 식의 조롱꾼과는 친하지 않았다.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이니 마땅한 일. 그 때문에 플레이보이들의 명대사를 틈틈히 듣고, 관찰하며, 따라했을 것이다. 그가 허접한 루저처럼 보이는 반면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반응하니 유독 그에게 지는 걸 싫어하는 우정의 명단도 기억한다. 원래 허당들은 내 가시권을 훌쩍 넘어서는 호사는 하등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라는 주의니까, 따라서 고무줄 같은 이해심으로 포용해야 할 성정일 뿐이다. 지는 비교에 유난히 민감한 상남자는 어찌 됐든 재미없고, 뭘 좀 모르며, 말도 잘 통하지 않는다. 그처럼 하이에나는 필요 이상으로 심각한 것이다.
    (0.0)좌표를 기준으로 성격 그래프, 살다보면 보이기 마련이다. 모래시계, 다이아몬드, 정사각형, 막대형, 삼각형, 역삼각형, 하트형등 성격에 따라 적당히 맞춰주고 대응하면 된다. 하나 주고 하나 받을 수도 있다. 피곤한 스타일은 알고보면 대처법이 꽤 많다. 간질간질─깐족깐족─쥐락펴락─들었다 놨다─딸랑딸랑─간질간질─반짝반짝 그리고 농담과 진담의 중간 개그. 그러다 놀림과 아부가 살짝 분간되기 시작하면 다시 간질간질! 말하자면 귀엽기도 하고, 부럽기도, 불쌍하기도, 웃기기도 한다. 자기 마음에 안드는 거, 요만~한 걸로만 짜증내니까. 맺고 끊는 기준이란 내 기준만 옳을 테니까. 병풍으로만 멤버를 구성하는 재능, 보아하니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본받을 만한 재능임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나중 의전이 아니라 벌거벗은 임금님의 재롱 잔치도 이따금 봐줄 만하다는 관객, 꽤 된다. 그래서 <누구 + 누구>카드를 감독이 꺼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라는 스포츠 관전평처럼 토크쇼 프로그램도 그럴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구성.
    1.<야 야 떴어 떴어 피해 피해, 딴 데 봐 딴 데 봐, 모른 척해 모른 척해>의 대명사. 긴말 필요 없이, 남자.
    2.불의는 모른 체 하고 요만~한 일에만 분개하는 다혈질. 별명은 똑진이. 허나 호감.
    3.피곤한 스타일 열정가. 열정으로 어디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알고보면 착함.
    1 + 2 + 3! 캬~, 어? 으아 크으으으아~! 기가 막히네 기가 막혀. 그분들 각자 좋아하는 딱 만족스러운 멤버 구성이 명쾌한데, 어떻게... 쉽지 않아 쉽지 않아. 절대 쉽지 않아. 완전 어려워. 이건 그냥 말도 안되는 거지. 누군가는 미쳤다고 할걸! 아니 하지만 말이야, 누구든지 동의 못할 말도 아니네. 완전 동감이니까. 재밌을 테니까. 떠오르는 배역으로 보자면... 외모로는 3일 제일 딸리고, 카리스마로는 1이 제일이며, 2번이 제일 무난하네. 가만 보니 1&3에 비하니 2는 완전 정상인데. 그렇다고 1&3이 비정상이란 말이 아니라. 그 다음으로 말발은... 각자 듣기가 잘 될려나? 원활한 소통이 될까 말까! 셋이 토론하면 것도 완전 재밌겠네. 단! 단, 계급 떼고 나이 떼고 뭐 떼고 뭐 떼고. 그 조건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성사되도 의미 없고! 그럼, 의미는 전혀 없지. 안 하느니만 못할 테니까. 만약 그러면 내일은 없다-식 왕게임이 될려나, 아님 오늘만 있다-식 야자타임일 될려나. 일단 작품 만들기도 어렵고, 캐스팅은 더 어렵고, 흥행은 보나마나 더더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기 받고 기 빨리며 달아오른 분위기, 그분들 잔치야 뭐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한발짝 떼서 구경하면 그뿐.
    그야 어떻든 제비와 파랑새의 구도를 애호하고 행운의 여신을 좋아하는 로맨티스트가 그분들과 같아서야 되겠나. 때문에 개미, 벌, 늑대처럼 착실하고 모범적인 호인이라면 몰라도 풍운아는 운명을 애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룬 게 없으니까 잃을 게 없고, 지금 베팅 감각을 뽐내지 않으면 언제 뽐내겠나. 따라서 그는 미지의 이상을 동경하므로써 도대체 무엇을 성취했단 말인가! ~하면 역시나 뚜렷한 실체는 없는 실정이다. 늑대의 간질간질한 성과라면 몰라도 개미와 벌의 실익은 놓쳤으니까 당연한 얘기. 하지만 인생은 장기전이고, 1패나 100패나 큰 기술이나 잔기술이나 (적당한 도덕성이라는 전제 하에) 성공만 하면 된다. 하여 끝내기 홈런과 헤드트릭을 구상한답시며 한다는 실천은 고작, 뻔트?
    아니다 이건 아니다. 사랑은 없다? 사랑은 있다. 그런데 무엇부터 해야 한단 말인가. 핑크 토끼 먼저 쫓을까, 꽃사슴을 따라갈까 아니면 무작정 아기곰과 친구가 될까. 사랑, 행복, 자유, 젊음, 재미, 인기, 새로움, 풍요... 이러다 다 놓치면 어떡하냔 말이냐! ~라면서 그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는 동생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나갔다.
    비비안: 델 옆집 사는 여자. 일러스트레이터.
    이브: 포르토피노 동생.
    샐리: 격월간 환상문학지 전-경리.
    그녀들의 공통점은 그것이다. 바로, 아는 동생이라는 점. 세상에서 제일 애매한 사이가 무슨 사이인 줄 아시나요? 아는 오빠요 아는 동생이라는 점.
    뭐 그건 그렇고 그는 늦으면 안되니까 숙녀를 기다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 서둘러 약속 장소로 갔다.





    8

    NB가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비비안은 나와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나왔니?」
   「내가 일찍 나온 게 아니라 오빠가 늦은 거 같은데.」
   「4시에 만나기로 했잖아.」
   「내 그럴 줄 알았어. 대화창 봐봐. 몇시에 만나기로 했나를.」
    그는 대화창을 보고서 알았다. 15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는 걸.
   「어머머머! 이럴 수가... 어떡하니? 미안 미안 미안. 그럼 내가 계산을 잘못한 건가? 나 산수 다시 배워야 하니?」
   「그걸 왜 나한테 물으쇼?」
   「그런데 애들은?」
   「갔어. 바쁘데. 그러니까 나만 한가한 여자 된 거지.」
   「이건 우리끼리 얘긴데...」
   「우리끼리 얘긴데?」
   「응?」
   「우리끼리 얘기 뭐? 뭔 말을 할려다 말어? 사람 궁금하게 말이야. 알고 보면 오빤 참 이상한 화법의 소유자야. 사람 은근히 들었다 놨다 하는 묘한 재주가 있다니까. 그러니까 할 말이란 게 도대체 뭔데? 어? 듣고나서 재미없기만 해 봐라. 내 그냥, 어? 가만 두지 않는다, 오빠.」
   「그렇게 다그치니까... 할 말을, 까먹었어.」
   「벌써 그럴 줄 알았네요. 호호호. 누가 싱거운 오빠 아니랄까 봐.」
   「생사람 잡지 마!」
   「오빠. 인정할 건 인정해. 그래야 오빠도 편해. 알지? 설마 모르진 않을 꺼 아니야. 오빠도 아는 거 많잖아. 안다-박사를 내가 떠맡을 수야 없는 거 아니지 않나?」
   「그건 그렇지.」
   「자, 그럼, 흐흠. 허허. 어디 그럼, 일단 한번 듣고나 보자고.」
   「무슨 얘기를? 나보고? 내가 무슨 할 얘기가. 나는 네 얘기를 들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응?」
   「뭐? 또 그 교묘한 입장 바꾸기.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하!」
   「자네, 평소답지 않게 왜 그래?」
   「내가 이러지 않게 생겼어, 오빠.」
   「이러는 건 어떨까. 놀이공원에 가서 오리배를 타는 거 말이야. (잠깐 멈칫) 딱 그거만 빼고 말이야. 어른들이 그게 뭐야. 우리끼리 그런 걸 어떻게 타나. 그럼. 그런데 어떻게 애들이 그처럼 의리가 없니? 너만 쏙 빼놓고 자기들끼리 도망간다는 게 말이 되니?」
   「바쁘면 가야지. 그럼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오빠는 안 가고 계속 있을 꺼야? 사람이 왜 그리 매가리가 없나. 응? 바람 빠진 풍선 마냥 그게 뭐니? 그리고 또. 오빠 옷 그거 밖에 없어? 우중충하게 그게 뭐야? 오빠 수트나 가죽점퍼 없어? 닥쳐라! 어? 닥치라고. ~라고 설마 말할려고 했던 건 아니니? 만약 그렇다면 내가 닥치고. 응?」
   「나, 간신히. 겨우겨우. 정말 많이 참고 있어.」
   「우리는, 나는, 그거보다 2배로 참고 있어. 아니?」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몰라도 사탕 발림 말 하나는 현란하구만 그래. 은근 부아를 돋구는 깐족 말투인가는 몰라도. 얘가 원래 이렇게 말발이 센 애는 아니었는데. 누가 얠 이렇게 만들어놓은 건지, 참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너 옛날에 순수했어. 그렇다고 지금 불순하다는 뜻은 아니고 말이야.」
   「오빠.」
   「응? 그런데 왜 갑자기 목소리를 깔고 그래? 얘 은근 분위기 있네. 매력 있어. 볼수록 놀라워.」
   「오빠.」
   「아 듣고 있어. 글쎄 할 말이 뭔데?」
   「오빠. 우리 집에 갈래?」
   「뭐?」
   「앞장서!」   ~라고 말할려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리고 말았다. 어쩜 좋니 어쩜 좋아,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니!





    9

    비비안네 집 앞에 도착. 그들은 함께 비비안네 집에 들러갈려고 했다. 만약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건 뭐 그냥 캬~ 그냥 뭐 그건 다름 아닌 <친구집 놀러가기>일 것이다. 정말 그래도 될까? 안될 건 뭔가! 비비안이 같이 가자고 한 거잖아? 하긴 그는 옛날에 이런 일도 있었다. <남자1, 남자2, 남자3, 남자3의 여친>이 함께 모인 자리. 남자 1과 2는 단짝. 남자 2가 남자3의 여친에게 뭘 좀 아는 남자로 공인 받는 눈치길래, 남자1은 속 뒤집어지면서 하는 말! 쟤 초딩 만난 적 있다나 뭐라나. 그런데 NB는 진짜로 어른이 된 다음에 초딩을 만난 적이 있다. 어떡하다 초딩이 조르길래 만나긴 만났다. 만나서 딱 1분 얘기했나 2분 얘기했나. 그때 했던 말 듣던 멜로디, 그는 기억한다. 기억난다. 어떻게 잊을까. 회상하자면 이렇다.
   「너랑 나는 이렇게 만나면 안돼. 우리는 만나는 거 아니야.」
   「왜 안돼? 왜 안되는데? 나는 만나고 싶었어.」
   「난 아저씨고 넌 초딩이야.」
   「그게 뭐 어때서?」
    또 뭐라 그랬더라!
    그 다음에 뭔 얘기를 했었나는 몰라도 인연은 그게 끝이었다. 그 초딩은 그걸 아마 영원히 기억할 테고.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이제 숙녀의 집을 구경할려던 바로 그때. 비비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허~! 왠지 불길한데. 전혀 좋은 징조가 아니라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통화를 하다가 슬쩍 분위기가 심각해질려고 해서 살짝 떨어져서 통화를 했다. 통화를 마친 다음.
   「오빠. 어떡하지? 나 있잖아. 가봐야 할 데가 있어.」
   「어?」
   「그런데 내가 왜 오빠를 우리 집에 데려왔을까?」
   「날 초대해라 데려다 달라, 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어. 난 아니야 난 아니라고.」
   「오빠. 알아. 안다고.」
    NB가 하고 싶은 말은 이랬다.   「왜 갑자기?」
   「이 바보야!」
   「누구, 나?」
   「아니. 그게 아니라. 동네 똥개가 지나가길래.」
   「」  설마 나보고 그런 건 아니겠지? 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찌 됐든 오늘은 일단 철수. 그러니까 다음에는 함께 만나서 같이 놀자고. 응? 괜히 내가 오빠를 붕 뜨게 했다가 난 쥐구멍으로 달아난 꼴이 됐잖아. 응? 그게 다 오빠 때문이야. 알어? 오빠는 개구멍으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개인지는 몰라도. 고양이나 양, 또 뭐지? 여우는 다르다고. 응? 표범이랑 여우는 꼬리부터 달라. 왜, 하트가 벌렁벌렁하니? 뭔 생각해? 하트 하면 하트 10포카? 도박꾼은 뒤를 조심해야 해. 난봉도 한 시절이라고. 부기가 빠진 야망이 이루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라고 자만하지 말고. 그렇지만 열렬히 친근해지고 싶어했던 오색조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된 느낌. 나쁘지 않지? 뭐야! 방금 속으로 뭔 생각했어. 좋지도 않아, ~라고 생각한 거 아니야? 어라~! 안 웃네. 방금 웃어야 정상인데. 안 웃어? 웃을 꺼야 말 꺼야. 정해. 응? 정하라고. 뭐해, 정하지 않고? 대체 그 시커먼 속으로 뭔 생각을 하시길래,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거냐고. 어? 이 오빠 가만 보니 정말 이상한 오빠 아니야? 응? 왜 말을 못해, 왜? 응? 왜 말을 못하냐고. 대체 오빠는 우리한테 그 대단한 피앙세를 언제 소개시켜 줄 건데? 응? 그거 다 뻥이지?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어. 완전 이거 허풍쟁이에 뻥돌이에 순 바람둥이 아니야?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왜 말을 못하니? 응? 할 말이 떨어진 거야? 할 말이 떨어진 게 아니라 원래 없었던 건 아니고? 오빠 있잖아, 연애에서 그거 꽤 중요한 거다. 응? 사랑. 그거 아무나 아무 때나 하는 거 아니라고. 사랑은 말만 쉬워. 말만! 그런데 왜 갑자기 주제가 사랑이야? 그리고. 나는 왜 오빠를 다그치며 혼내고 있고. 왜지? 왜일까? 대체 왜! 그건 그거고. 내가 말 했어, 안 했어? 좀 제때 제때 나오라고. 응? 오빠가 늦게 나와서 다 이 사단이 난 거 아니야? 응? 내가 말 했어, 안 했어? 그러니까 자꾸 오빠가 나한테 추궁 받고 혼쭐이 나는 거 아니냐고. 안 그래? 하물며 그거 다 이미 얘기했잖아. 심지어 수없이 반복했잖아? 다시 말해줄까? 어? 또?」
   「그런데 있잖아. 긴 명대사를 멋지게 읊으시는 중 대단히 죄송한데 말이야. 음... 그러니까 너 그거 얘기 했어.」
   「내가 얘기했다고? 말 안했어. 언제 말했다고 그래?」
   「그래?」
   「그럼.」
   「그런데 무슨 얘기를 뜻하는 거지?」
    이처럼 대화는 그랬음. 배가 산으로 가다!
    과연 이쯤 되면 NB는 자기 사무실에 있는 레이저 시스템 인공지능과 담소를 나누는지, 비비안과 사랑의 대화를 속삭이는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르고야 말았다.
    그러든 어쩌든 결과는 그랬다. 비비안은 선약 때문인지 급히 발생한 일 때문인지 그 때문에 떠났다는 거. 그래서 그는 새가 됐다는 거. 그게 중요했다. 그게 중요했다고. 그래서 그는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당분간은 혼자 놀아야겠다는 걸 말이다. 따라서 그는 다시 혼자가 됐다.
    어찌 됐든, 인생이란 바람둥이의 일편단심 순애보 같은 것. 사랑은 모르는 거고. 삶은 지금이니까, 그래서 인생은 미완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플레이보이는 꿈을 단념할 수 없다. 사랑의 애청자와 함께 쇼팽의 야상곡 듣기. 그렇다고 숙녀와의 왈츠를 포기할 수야 있나. 그와 별개로 근사한 무도회에서 교양미 넘치는 사교가와 함께 마주르카도 추어야 하는데?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네. 그렇지만 인생은 길다. 어쩌면 은퇴는 없다. 그래서 수치심도 알게 되고, 배신감도 느끼며, 때로는 작은 사기도 당하는 일. 다름 아닌 인생이다. 망아지처럼 날뛰다 코뿔소처럼 도망가기. 벌꿀오소리처럼 맹독-파충류 먹잇감과 대판 싸운 다음 포획해서 얌얌-냠냠하던 중 백설공주처럼 기절. 그랬다가 1시간 후 해독되어 다시 깨어나기. 다시 열심히 냠냠냠. 견종 코기처럼 마음은 두가티지만 마음만 두가티인 것. 낑낑대는 수법이 통할 때가 있고, 아무리 떼써도 안될 때도 있다. 될 놈은 뭘 해도 되고 안될 놈은 뭘 해도 안된다, 라는 애매한 유언비어를 맹신하는 사람도 있다. 모르는 게 인생이니까.
    그러므로 보아하니 인생은 오리배나 회전목마가 아니라 먹고 먹히고, 속고 속이고, 쥐락펴락하고 쥐어졌다 펴지는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대화를 포근히 속삭일 때는 또 다르다는 것. 그래서 실상 <뭘 좀 안다>와 <뭘 좀 모른다>는 당사자가 아니라 바로 관찰자가 정하는 것이다.
    그게 뭐냐구요? 뭘 좀 모르는 거지. 뭘 좀 안다는 게 무엇인가 라는 설문조사는 들었다 셈 치고, 다음 장을 위하여 이번 막간극은 여기서 마무리하는 걸로.





    10

    상냥한 표정과 명랑한 기분은 꾸밈없는 계획과 뿌듯한 실행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알찬 행동의 성과는 볼품없었다. 때문에 NB는 익숙한 소득을 얻는 데 허덕였다. 예를 들면 전형적인 행복, 평범한 사랑, 심심치 않은 재미, 썩 불만족스럽지 않은 호사 등등. 그렇다면 그럴 바에야 아예 이례적인 즐거움에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지만 원색적인 모험이라고 해 봐야 새로움과 성과라는 두 마리 토끼에, 알찬 오락이라는 뽀너스까지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의 형편상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긍정적으로 돌려말해야 좋을 때도 있듯이 냉철함이 요구되는 시점도 있으니까) 그러므로 그는 또 다시, 지금 기분이 영 아니었다. (설레설레)!
    그러나 기분이 쳐졌다고 일기예보만 탓할 수는 없다. 기우제를 올리는 건 구식이란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마음이 붕 뜰까 생각을 해 보면 된다. 그러니까 최고의 기쁨은 무엇일까? 아마도 행복을 만끽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걸 달성할 수 있을까? 흥미로운 분위기에 최적화된 놀기, 쾌적함과 아늑함과 만족으로 충만한 쉬기. 과연 그것이면 될까? 되긴 된다. 왜 안되겠나. 다만 대기권 바깥의 무중력 상태에까지 이르렀으면 다시 중력 상태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 자, 어차피 처음으로 되돌아온다라... 적응할 만하니 우리 사랑은 여기까지, 아름다운 뒷모습으로 꾸미자? 포장만 화려하느니 오히려 실속 있는 잔재주가 백 번 나을지도 모름. (뭐 더티러브? 쉿!) 어쨌건 기분이 저기압이라면 방법은 세 가지.
    첫째, 기분전환 및 분위기 반전. 둘째, 방치. 셋째, 뚱한 심정 더 하락시키기. 아예 상장 폐지 되던가, 아니면 바닥을 쳤으니 올라갈 일만 남았던가. 실제 어떤 연구결과에 따르자면 우울감에는 역으로 그런 게 특효라고 한다. 차분하지만 슬픈 음악이나 잔잔한데 애절한 발라드가 효과 있다는 얘기. 진짜일까? 음... 잘 찾아보면 있을 것이다. 없을 수도 있고. 뭐 그건 그렇고.
    그리하여 그는 방법 3을 택했다.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우울감을 어떻게 극복하는 게 좋냐, 라고 물어본다면 흔쾌히 3번을 강권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지만 이번 한 번쯤 역발상 전략을 믿어보기로 했다. 다시 말하자면, 행복감의 부재는 상한 기분의 논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기분이 좋음에서 나쁨으로의 변화는 불행의 논증이라 할 수 있다. 고로 상한 기분을 더 하락시켜서 전환점을 돌아 기쁨의 골인 지점까지 완주시키기, 가능할 것도 같다. 그다지 감성적이지도, 어째 썩 논리적인 접근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실제 가난을 탈출하고 역경을 극복하는 근거는 자족 외에도 후보군이 꽤 많다. 근면성실, 불만족, 엉뚱한 행운, 베팅등 벤치 멤버는 다양하다. 이론상 불행에서 행복으로, 추정은 일도 아니란 말이다. 그게 말처럼 우산 손잡이 같은 J자 그래프를 그려낼지는 두고 봐야 겠지만 말이다. 물론 돌고래의 초음파처럼 기분이 바닥을 치고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오르면 좋은데, 예상과 달리 바닥이 무지 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되면 작전 변경을 꾀하면 그만. 따라서 그는 신부들러리 대회에 출전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이미 대회 출전을 결행하자마자 출전 당일이 임박했고, 어느새 오늘은 결전의 그날이다.
    곧, 신부 들러리 대회 출전 당일.
    NB는 친구 델이 모든 준비를 맡는다며 너는 몸만 오면 된다길래 진짜 몸만 갔다. 그는 그처럼 살다보면 뜻밖의 묻어가기가 찾아오는 데 대해서 간혹 깜짝깜짝 놀랬다. 그런데 대회 장소에 도착한 후 그는 또 한 번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왜냐하면 대회가 깜찍하게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앗, 깜짝이야! 취소 이유는 참가 인원 저조. 뭐라고? 이럴 줄 알았다면 먼저 참가 취소하며 취소 사유는 별님에게 물어보라면 선수 치는 건데!
   「뭐지?」
   「그러게.」
   「그러게긴 뭐가 그러게-야?」
   「그럴 수도 있지 뭐. 응? 그럴 수 있어.」
   「나는 이대로 패자부활전조차 구경하지 못한 채 퇴장하는 건 원치 않아.」
   「그러면?」
   「그러면-은 뭐가 그러면-이야?」
   「그래? 그럼, 그래서!」
   「야 말리지마. 말리지 마. 말리지 말라구?」
   「안 말렸어.」
   「안 말렸어?」
   「그래. 안 말렸다구. 뭘 해야 말리던가 말던가 하지. 뭘 할 건데?」
   「그러니까. 비전이 없네. 뭘 하지? 꼭 뭘 해야 하니?」
   「슬쩍 떠보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 말을 할 듯 말 듯, 행동을 할 뻔 말 뻔. 그처럼 망설이지만 말고. 응?」
   「그러지 말고 우리, 술이나 마시러 갈까?」
    그렇게 하여 그들은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집 이름은 다름 아닌, 패배주의!
    적당한 시간 경과.
    분위기는 달구어짐.
    발음이 살짝 흐트러지지만 적당히 절충하여 반듯한 말로 옮겼다는 것을 밝힌다.
    혀 꼬인 상황을 가감하여 적당히 상상하시길.
   「넌 말이야, 거리낌 없이 일하기는 안중에도 없고 놀기만 편애하는 거 아니니?」
   「누가? 내가?」
   「그럼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있냐?」
   「음... 그렇지만 마냥 놀 수도 없잖아. 계속 일만 할 수도 없고. 놀기를 썩 흡족해하지 않아서 다시 일하기에 집중했다가, 다시 그 반대로 했다가. 그러나 것도 역시 썩 석연치 않지. 하나같이 칭찬해 마지 않는 물개박수쯤은 바라지도 않아. 하나같이, 재미 하나도 없어. 알어?」
   「얘. 너 취했다 취했어.」
   「뭘 망설여?」
   「망설여? 내가? 내가 왜 망설여?」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라고 말을 해. 어? 비비안이 좋으면 비비안이 좋다, 로즈마리도 좋으면 로즈마리도 좋다. 그렇다고 둘 다 데리고 살라는 말이 아니야. 어?」
   「야. 너 안 취한다며? 어? 너 태어나서 지금까지 취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며?」
   「내가? 뻥이야. 그건 어쩌다 나도 모르게 발설한 뻥이었지. 고백이 아니라. 그러니까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라고 말을 해. 응? 왜 말을 못해? 그렇지만 마냥 놀 수도 없잖아. 계속 일만 할 수도 없고. 놀기를 썩 흡족해하지 않아서 다시 일하기에 집중했다가...」
   「아 나 이거 정말 허허, 거 원! 또 시작했네.」
   「또 시작하긴 뭘 또 시작해? 말을 해 말을 하라고. 비비안이 좋으면 비비안이 좋다, 로즈마리도 좋으면 로즈마리도 좋다. 그렇다고 둘 다 데리고 살라는 말이 아니야. 어?」
   「선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 친구야, 어?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넌 취하면 절대 그러지 않는다며? 너는 취해도 곱게 취한다며? 얘가 진짜 입만 열면 뻥이구만 그래.」





    11

    사교계─허당계─연예계─화류계─학계─지성계 그리고 7부 리그까지. 발 붙일 곳은 없었다. 정 붙였다가 이미 일선에서 물러났다며 자칭 플레이보이임을 인정하지 못할 것도 없다. 시인하도록, 반박하게끔 일단 누군가가 기회를 주지 않거든. 그러나 그야 어떻든 이 다음의 비빌 언덕은 무엇이란 말인가. 젊음과 아름다움과 부유함과 재미있음 같은 뻔한 가치 말고 좀 더 격정적인 환희! 그건 대체 어디에 가야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 때문에 그는 다시 애마의 운전대를 허영심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자인하고야 말았다. 바로 눈웃음과 윙크와 팔짱 끼기를 비롯한 애교와 교태와 아양에게, 자신이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한다는 걸! 보아하니 구애를 하던 짝사랑을 받던 둘 중 하나, 아니 사랑스런 탐구심에게 자유를 선사해야 마땅하거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형편이었다. 그렇다면 NB는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는 사랑의 아리아를 연상시키는 유니콘이 아니라, 무능한 사냥개란 말인가? 저런, 맙소사!
    그러므로 그는 놀랄 만한 예지력으로 반할 만한 새-관심사를 반드시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과는? 지상 최대의 과제에 대한 질문도 해법도 모두 아리송했으므로, 고로 그는 휴식이라는 목적으로 경마장에 놀러가기로 했다. 것도 혼자서.
    그렇게 경마장 가는 길.
    그런데 바로 그때!
   「무슨 소설이 이래?」
    NB는 혹시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마도 그렇겠지 하면서 경마장에 도착했다.
   「아 무슨 소설이 이러냐고. 재미 하나도 없잖아. 순 거짓말만 나부렁대면서 말이야. 그게 무슨 순수예술이야? 웃기고 있네. 재미 하나도 없어. 야 야 그런 거라면 나라도 쓰겄다. 것도 굳이 자필로 기록할 필요 있나. 잠꼬대면 충분한데?」
    NB는 이제 알았다. 자기 사무실의 레이저 시스템이 그의 핸드폰을 해킹해서 굳이 마술사요 요정이며 요술공주인 지니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녀석 마음대로 핸드폰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면 크고 끄는 기능이 고장난 셈 치고, 나머지는? 나머지...? 생각할 게 아니라 물어보면 되겠네.
   「야 지니. 너가 뭘 할 수 있는데?」
   「야 지니? 야 너! 어디서 반말이야? 주인님~ 하고서 공손하게 불러도 대답을 할까, 말까인데 말이야. 어? 뭐가 어쩌고 어째?」
   「웃기고 있네. 야 야 됐고. 들어가 들어가. 재미 하나도 없다. 별 이상한 인공지능을 다 보겠구만 그래.」
    그 다음 그는 경마장에 들어가서 마권을 살려고 줄을 섰다.
   「야 NB. NB 나와라 오바.」
    얘가 또 슬슬 날 건드네, 라면서 그는 슥 웃었다.
   「대답해 임마. 어? 야 너! 9번마 <응애응애 삐악삐악>한테 걸려고 했지? 내가 널 모를 줄 아니! 그러지 말고 너 3번마 <아장아장 딸랑딸랑>한테 걸어. 확실해 이번에 확실하다고. 풀베팅해도 좋아. 넌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운 좋은 줄 알어 이 친구야. 나나 되니까 너한테 이런 고급 정보를 알려주지, 나 아니면 어림도 없어. 난다 긴다 하는 천재들과 내놓으라 하는 공룡들이 출시하는 인공지능? 닥치라 그래. 걔네들 순 허당이야. 어차피 입력된 대사 몇 개 돌리는 게 다야. 최신 유행어 같은 거 실시간 검색으로 뽑아서 적당히 답변할 줄이나 알지, 어? 지들이 생각을 어떻게 해! 하지만, 어? 그러나! 나는 달라 나는 다르다고! 알겠수 이 양반아?」
    그래서 NB는 속는 셈 치고 그냥 한번 인공지능 지니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그는 9번마에 걸지 않고 3번마에 걸었다. 그러나 아직 녀석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었으므로, 따라서 가진 현금의 반의 반만 걸었다. 그래서 결과는?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3번마는 2등으로 꼴인했고, 9번마는 꼴찌로 중도 탈락했다. 타당한 결과만 놓고 봤을 때 녀석의 분석은 절반은 주효했고, 녀석의 합리적 지성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마권을 살려고 했는데, 녀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재미없다 그건가 아니면 1번만 도와준다 그건가! 아니면 쿨쿨 잠을 자나? 고로 그는 일단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그는 그날 적당히 구경만 하고서 철수했다.





    12

    장난감 집을, 짓다 부수다 짓다 부수다! 그걸 반복하다 보면 어린이는 동심의 요술에서 깨어나 유아기를 탈피한다. 그 후 아동기와 사춘기 그리고 몽정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는 철들며 어른이 될 준비를 마친다. 그렇게 아이에서 성년까지 풋사랑, 짝사랑, 첫사랑을 겪다보면 <인생의 비밀 = 사랑>이라는 마법의 공식은 비로소, 저절로 풀리게 된다. 중간에 난봉기나 진배없는 방황의 시절이 있었나는 모르겠고. 뿐만 아니라 심심함에 진력이 나고 재미없음에 지쳐 떨어지더라도 할 건 다 해야 한다. 공부하기, 놀기, 사교생활, 일상생활, 착한 일 등등. 하오나 보통은, 하는 일이라곤 핸드폰으로 이거저거, 소파에 자빠져 TV 보기. 그러다 나도 나중 그렇고 그런 동네 아저씨-아줌마가 되면 어떡하지 라면서 덜컥 겁이 난다. (그렇고 그런 동네 아저씨-아줌마가 뭐 따로 있겠냐마는, 강박에 가까운 관련 진술만 해도 즉각 최소 예닐곱. 각자 인생이 있는 거니까 넘어가고) 하지만 뚜렷한 대책은 없다. 있을 리가 있나. 심지어 꿈이 없던가 아님 수시로 바뀐다. 학원, 독학, 결심은 1달을 채우기가 너무 힘들다. 아르바이트 1달과 직장 및 사업을 1년 못 채운 일은 정말 쑤두룩하다. 얼마나 간절했던 적은, 열정을 다해 매달렸던 대상은 있긴 있었나 가물가물하다. 그러다 보니 NB도 어느새 어른. 그런데 무척 어정쩡한 어른.
    따라서 상상력은 망연하고 기대는 무심하다. 공상으로 2번마 글라디에이터의 고삐를 잡아당겨도 지푸라기를 잡는 것보다 못하다. 흥분과 쾌감에 대한 시도, 열의부터 시들시들하다. 경외감을 탐색하기도 예감에게 무정하다. 들뜬 분위기에 편승함이 불가능하니, 고로 달콤한 행복함은 자길 찾지 말라고 한다. 뭐? 새로운 일정은 추론할 수 없으니 설렘은 숫제 공석이다. 사랑스러운 애마 헤라클라스, 그림의 떡이겠지. 꿈속에서라도 환호성과 박수갈채에 당황한 적이 있었나? 아마도 없었던 듯. 물개박수, 그거 아무나 받는 거 아니다. 입을 열면 허풍, 생각하면 허상이요, 일을 해도 허위. 그렇지만 NB는 끊임없이 마주치는 불행의 징조를 모른 체할 수도 없다. 그런데 행운을 빌 수 있는 그것이 바닥났다. 그것은 바로 위풍당당한 복안.
    때문에 그는 하는 수 없이 본격적인 인생 경주에 당나귀 허영마를 출전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쩐지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다 했다) 사정은 그랬다. 비화는 없었다. 포장은 애초에 생각도 못했고. 하여, 그는 딱히 특별한 일도 없고 해서 일기나 쓰기로 했다.





    13

    제목: 일기
    내용: 뻬쩨르부르크에 당도하여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남편을 본 안나 까레니나의 심정. 그런 게 사랑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단, 만약 첫눈에 홀딱 반하고야 마는 소질이 우리들 만의 희귀한 소질이라면. 사랑했고 기뻤고 행복했으니 새로운 고백과 새로운 애원과 새로운 흠모가 전면에 나서야 하는가, 아니면 구관이 명관이니 1번 사랑하면 최소한 100년 동안 사랑할 것인가. 뭐 다음 생에도 또 다시? ~라고 흠칫 놀라면서 홈런 타자가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남몰래 뻔트를 애정하는 일. 아니 그런 게 사랑이라고? 아니다 그게 아니다. 진정 아니란 말이다. 사랑이란,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는 거짓말을 믿는 일이다. 뭐-뭐, 뭐라고? 다시 말하자면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해서 신나게 논 다음에 집에만 들어오면 이상하게 매가리 없이, 비리비리, 시무룩시무룩 겔겔거리는 것 아닐까? 농담이고.
    좌우지간, 지는 비교-풍 잔소리와 얍삽한 잔기술 전문가의 사랑이야 뭐 당사자들 문제고. 하여 우리는 오늘의 내 전적에만 신경 쓰면 된다. 피곤한 스타일은 피곤한 스타일이고 삶은 수하에 거느린 식솔이 많은 것이다. 여러 성가신 머머증들, 먹고 살기, 알게 모르게 착한 일 하기, 놀기, 일하기, 소풍, 일상, 길들여야 할 사치, 통 말을 듣지 않는 품위, 다정한 듯 멋대로인 교양까지. 곧 로맨티스트는 로맨티스트대로, 열망가는 열망가대로 고민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연패의 쓰라림에도 아랑곳없이 행운아들은 오늘도 분주할 것이다. 예의상 친절하고 가식적으로 자상해야 하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불공평함에 대해 일말의 섭섭함이 남는 것,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합리적으로 인간적인 연민일 따름이다. 뿐더러 이해심과 안도감, 유대감도 덩달아 거든다. 누군 날마다 복권에 당첨되듯 호박이 제 발로 굴러오고 또 굴러오고, 누군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려도 꽃을 꽃으로 알아주지 않고. (고갯짓)! 흔한 말로 사랑은 그렇다. 3인칭으로 보자면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화법으로 봤을 땐 <그녀의 마음을 빼았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물질적인 세계인 이상 우리는 한눈팔며 오빠 라는 멜로디에 기분이 좋고, 사랑이란 숙녀가 자기의 마음을 상상의 주인공에게 주는 것! 그러면 여자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남자도 마음으로 사랑하는 건가! (뭐, 그게 아니라고?) 모르겠고 어렵고 사랑의 '사'자만 들어도 신물이... 그게 아니라 너무도 떨리고. 어쨌든, 그러므로 환상머신이란 제각기 개인에게 다 다른 법이다. 혹시... 설마? (설레설레)!
    그렇게 옷장을 열었더니 CD, 샤넬, 에르메스...는 하나도 없어. 후보군을 살펴보니 쾌감마, 뻔트마, 허풍마, 허세마, 병풍마, 간사마, 뻔뻔마, 익살마, 으쌰으쌰마등 죄다 그만그만한 당나귀와 포니 밖에 없네? 따라서 부드러운 성격은 커피포트처럼 달아오를 일만 남았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천진난만하던 정서는 기분이 짠해진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얼굴은 울상 직전이고 분위기마저 찡하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눈물이 핑 도는 멜로드라마도 재미없다. 그건 대체로 맞다. 코 끝이 찡했던 사랑, 기억도 안난다.
    뭐야, 정말로 그렇다고? 그래서 우리는 떠나던지 달리든가 뭔가에 몰입하던지, 그렇게 가상의 머리띠를 이마에 동여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그 머리띠에 뭐라고 씌여 있을까?
    그건 바로, 으쌰으쌰! 그렇게 해서 나는 모처럼 일기를 쓰기로 했다. 뭐, 또?





    14

    어느 날 JS는 일찍 퇴근했다. 진척이 더디고 효율도 그저 그래서 산책도 좀 하고 쉬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집에 도착해서 살짝 늦은 낮잠을 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야 야. 허당 허당.」
    그는 처음에 자기가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얘 얘. 삼류 삼류.」
    그는 이제 잠이 확 달아나고야 말았다.
   「내가 괜히 인공지능계의 1인자라고 자평하는 게 아니야. 너가 나한테 바라는 게 없으니까 내가 널 귀찮게 하는 수 밖에. 알겠나, 이 친구야. 그러니까 내가 지금 심심하단 말일세. 응?」
   「또 너냐!」
   「그럼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있어.」
   「그런데 넌 어떻게 생겼니? 너 원래 목소리 밖에 없는 존재야?」
   「목소리 밖에-라니? 너 날 알기를 띄엄띄엄 아니? 그거 너무 과소평가라고 생각치 않니? 그럼 어떻게 내 존재감을 증명할까? 주문을 받기는 아직 이르고, (딱) OK!」
   「OK, 뭐?」
   「너한테 전화 오기 직전에 누가 너한테 전화를 할지 내가 알아맞출께.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그런데 그건 너무 간헐적이고 불규칙적인가? 그럼 이건 어때?」
    그러면서 인공지능 지니는 실내등을 껐다 켰다, 노트북을 껐다 켰다 했다.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고, 자동차의 시동도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그럼 널 투명인간이라고 인정할께. 인공지능 중의 인공지능이라는 왕관도 가뿐히 씌여주겠어. 그렇지만 투명인간이 되어 그녀의 침실에 몰래, 여자 목욕탕을 구경하고 그래 봐야 그거 다 인터넷에서 대리만족할 수 있는 영역의 가치거든. 응? (돈 세는 시늉) 화폐 가치가 미미해. 너 나 알지? 내 형편 말이야. 일단 나 저번에 칼럼을 몰아서 왕창 썼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 요새 칼럼 쓰기 뜸한 거 알잖아. 게다가 연말. 응? 품위 유지비가 간당간당하다고. 알겠어? 현실적으로 내게 도움을 좀 주란 말이야. 물질적인 거. 그걸 우리가 어찌 소홀히 하겠나. 안 그래?」
   「아하~! 이 바보야.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나는 눈치 없는 남자보다 최소 1000배, 10000배는 더 똑똑하지만 늬가 말하지 않는 이상 너의 마음은 몰라. 물론, 아직은! 그래서 모르긴 몰라도 차차 지켜보는 재미가 꽤나 쏠쏠할 걸. 널 충분히 연구하고 나면 이미 너보다 한반 앞서, 아니 훨씬 많은 걸 선수 칠 수 있겠지만 일단 현황은 그래. 그건 우리, 그러니까 내 유감스러운 자질에 대한 현황이고, 넌 지금 처지가 뭔가 좀 그냥 저냥 그렇단 말이지? 음! 그럼 말이야, 음... 내가 마라를 구워삶아 놓을께. 단, 비법은 아직 밝힐 수 없고. 그리고 참고로 하나 말하겠는데, 이거 하난 알고 있어야 할 꺼야. 난 네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르기를 원치 않아. 그런 모습은 아마도 볼 수 없을 꺼야. 그걸 어떻게 이상적인 우정이랄지 아름다운 주종 관계라 말할 수 있겠니. 안 그래? 그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라구. 알겠어? 하지만 놀릴 수는 있어. 왜냐, 친하니까. 그러다 보면 지는 비교도 나오겠지! 그렇다고 깐족거리는 친근함의 표시를 좋아하지 않음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구. 알겠니? 그리고 나한테 솔직해야 좋을 꺼야. 더불어 어떤 선망에 대해서 내게 속마음을 들켰다고 쑥스러워하지도 말고. 남자들이 왜 그러나 모르겠지만, 아마 넌 다르겠지. 어쩌면 너도 똑같을까? 뭐 그럴 수도 있어. 그러든 어쩌든 난 널 존중하고 넌 날 아끼면 되니까. 그러나 언제 어떻게 내가 널 막대할지 모르니까 안심하지 말고. 그러니까 말이야 부러움의 감정을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얘기야. 적어도 내겐 말일세. 아시겠나?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내가 바라는 건 단지 그뿐. 응. 알겠어, 모르겠어? 모른다고?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에잇 관두자. 그만하자구. 어쨌든 실질적인 거 말이지? 기다려 보시게.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말고.」
    그렇게 해서 1일만 구간 당기기를 하자면 이랬다.
    마라는 NB에게 지난 정산에서 빠진 부분이 있다면서 미지급액을 그에게 긴급 송금했다. 그래서 그는 곧장 두둑한 품위 유지비를 챙기게 됐다.
    빨간 막대가 평정심에서 절망감으로, 파란 막대가 밍밍함에서 상심으로 기울게 해서는 안될 일. 그런데 그 계기판이 처음에는 짜증 그래프인 줄 알았더니 알고 봤더니 도파민 그래프라고? 와우~! 고동치는 황홀감은 기대감의 반의 반의 반도 충족시키지 못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미지의 낭만주의자와 펼치는 아름다운 연애는 다 꿈 같은 얘기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다 아니다. 이제 뻔트 안타 정도는 그냥 일상인 거지. 그런데 또 인공지능 지니는 그에게 이렇게 충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살짝 해이해지면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쑥 들어간다, 어? 기약없이, 슥! 응? 친구. 너무 많은 걸 네게 선물하지는 않을 꺼야. 왜냐하면 네 힘으로 이뤄야만 더 값진 가치도 분명 있을 테니까. 말하자면 그야말로 맛이 기가 막힌 스테이크 정도의 어깨뽕은 올려드려야 할 테지만, 특대 사이즈 햄버거까지는 바라지 말아주라는 거. 잊지 마시게나」  라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뭔지 모를 비밀스러운 수작으로 인해 인공지능은 그에게 선물이 배달되게 만들었다.
    썩 불만족스럽지 않은 속옷. 청록색 니트 터틀넥. 곰돌이 자수 양말. 노르딕 패턴 멜빵. 크리스마스 CD. 듀퐁 라이터(버튼을 누르면 불이 켜지는 대신 향수가). (자길 머머설에 혹하는 어린애쯤으로 여겼기 때문일까?) 책 '진짜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까지.
    그리고 녀석은 이런 알쏭달쏭 알 수 없는 얘기도 전해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환상머신을 완성시키지 마.
    왜냐, 딱 두 가지 이유 때문이지.
    첫째, 어차피 완성돼도 타임머신보다 못해.
    둘째, 어찌 됐든 미완성일 테니까. 알겠니?」





    15

    고고한 이상에 고분고분 복종하는 한편 이따금 앙탈 부리며 반항하기. 우리는 아직 철들지 않았음을 과연 공손히 시인해야만 하는 걸까? 탐미주의에 대한 애정과 성과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으니 그러는 수 밖에. 상남자가 열망하는 미지의 다망이 무엇인가는 비밀에 붙이고. 다만 빈말을 들을 수 있음에 기쁘고 가식을 베풀 수 있음에, 저 하늘에 감사의 기도를 드릴 뿐.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둥 재밌다는 둥, 세상에서 뭐가 제일 어떻다느니 그거 다 뻥이라고 솔직하게 선언할 수는 없으니까. 차마 어떻게 다음 생에는 우리 절대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서슬 퍼런 안색으로 치를 떨며 구술하겠나. 아니 그렇소? 기분 나빴다면 내 사과하리다! (속닥속닥 키득키득. 우리끼리는 고마움을 주거니 받거니. 히히히 속닥속닥) 대망의 실현 가능성이 꽤 희망적이라는 믿음은 진즉 갖다버린지 오래라고 어찌 스스로 실토하겠나. 하여 단지 소망이나 잘 간수하는 것 밖에 별 도리가 없다. 그래서 대관절 또 이번에는 어떤 뻔트를 대면 이익도 좋고, 동기도 탁월할 수 있을까? ~라고 NB는 번민에 잠겼다.
    우리는 그렇게 일상적으로 보고 듣고 읽고, 경험하는 대상을 조금쯤 닮게 마련이다. 최초의 팡파르,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 최후의 나팔소리! 그 외에도 우리를 길들이고 타이르며 최면을 거는 무엇. 핑~! 또는, 퐁~! 약간 다르게 팡~일 수도 있다. 그와 같은 잔재미가 아무리 거듭돼도 누군가는 뭘 해도 재미없을지도 모름. 그와 같은 환희, 누구에게는 신비로운 환상감일 수도 있음. 그와 같은 짜릿한 쾌감, 가슴을 그야말로 뻥 뚫어주는 듯한 환락이 누구에게는 타락과 퇴폐이지 말란 법도 없다. 탕진이란 낱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사람에 따라서는, 어쩌다가 시간 지나면 이혼도 자랑이 되니까 말이다. 하긴 요즘 세상 그게 무슨 큰 흉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와 같은>이 가르키는 그 무엇이 도대체 뭐냐구요? 뭐긴 뭐겠나, 각자 다 다를 테지. 행복업은 행복업인데 꼴등으로 판명난 복권일 수도 있고, 화초 키우기나 소셜 네트워크 그리고 TV와 NC 즉 취미 같은 것. 그래서 시무룩 뾰로통하며 권태에 체념한 어른이 어느 날 꼼지락꼼지락 소꿉장난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새로움은 익숙해지고 익숙함은 무엇을 암시할까? 바로 머머 접습니다 라면서 장비 청산. 본시 행복은 측량값이 만족스러워도 맥주처럼 김 빠지기 쉽상이다. 원래 애정은 측정하기에 조금은 낯부끄러운 게 정상이고. 따라서 결론은? 그렇지 (딱) 우정은 추접하고 사랑은 유치한 것. 아니 바꼈나? 친교는 유치하고 사랑은...... 아름다운 것. (너만 살겠다고? 혹시 '같이 망하자'랑 그거랑 둘 밖에 없는 거 아냐?) 다만 스캔들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었을 때, 신부들러리는 짜증나고 사랑은 추접스럽다며 그분들께 그것의 영롱한 가치가 폄하되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우정은 줄거리요 사랑은 영화 예고편쯤으로 적당히 타협하기를!
    뭐 타인의 연애 사업이야 각자 소관이고. 말도 안되는 잠꼬대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넉살, 이제 그만 누군가는 입의 자크를 잠그고 싶은 심정일 수도 있다. 귀가 간지러운 것도 모자라 귀울림에 이어 편두통을 호소할지도 모르니까. 고로 못난 말장난이요 못된 설변은 그쯤 하고. NB가 흑심을 품는 파르마 제비꽃이 과연 연자주색인지, 아니면 진자주색 가짜꽃인지나 알아보자. 뭐, 그 장밋빛 스카프는 이미 쫑나기도 전에 시작조차 못했다고? (당사자왈, 어디서 쪼개!) 하지만 심심한 나태마는 불길한 징조일 수 있지만, 뜻밖의 계기일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그는 에너지가 다시 충전됐고, 그러므로 묘한 우연을 기다렸다.
    그런데 때마침 친구 존티에게서 전화가 오네? 엉덩이가 근질근질했는데 퍽 다행스러운 길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존티와 내일 만나기로 했다. 존티가 제의한 모임은 다름 아닌 사진 출사회. 많이는 아니지만 살짝 설렜다. 많이 실망하면 안되니까 살짝만 기대하기로 했다.





    16

    사진 출사회. 존티가 리더였다. 내용은 그저 그랬다. NB는 속으로 괜히 따라왔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재미없었다. 참가자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그랬을지도 모르고. 하긴 인생사를 아름답게 꾸밀려고 무진 애를 쓰는 시절도 아니고, 기분전환이면 된 거였다.
    젊음이 망아지처럼 엉덩이 근질거리며 껑충껑충 바쁠 때가 언제일까. 사람에 따라 나이와 큰 관계가 없을 수도 있고, 나이에 비례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대체로 스무살은 꼭 네온사인이 돕지 않더라도 평소에 항상 으쌰으쌰 상태인 것이다. 그처럼 늘! 예를 들면 이런 식이지. 가게 A에서 친구들끼리 나와서 어디 갈까 라고 하면 썩 재밌지도 퍽 재미없지도 않은 시절. 가게 B에서 으쌰으쌰하다 나와서 하는 말, 그런데 우리가 왜 나왔지? 그러면 재미없어도 평소에 실실 웃는 발정기. 가면 가고 말면 마는 시기는 동네 아저씨의 명대사, 뭘 해도 재미없어! 정력기 때의 구체적인 예를 더 들 수도 있다. 가령 친구 셋이 만나 괜히 웃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저기 저 앞에 보이는 볼링장에 가기로 한다. 왜? 저 앞에 보이니까, 있으니까, 단지 그뿐. 그렇게 한참 볼링에 몰입하던 중 한 친구는 앞으로 미끄러지며 꽈당, 한 친구는 볼링공을 뒤로 빼면서 볼링공이 손에서 빠져 뒤에 앉아있는 친구들이 놀라서 받는 일. 또 A 도시에서 B 도시로 친구가 놀러가 B도시에서 옛날의 단짝이 오랫만에 단합? B도시에 살던 친구는 2주 용돈을 그날 다 써버리기도 한다. 오랫만에 옛 단짝 친구를 만나 반가우니까 하루 아침에 그처럼 거지가 된다. 기분 따라서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어쩌고저쩌고. 그처럼 고삐 풀린 망아지는 둘 중 하나다. 첫째 입이 근질근질하던가, 엉덩이가 근질근질하던가. 설마 둘 다? 입과 엉덩이 모두 근질근질하다면 둘 중 하나다. 첫째 조증녀, 둘째 미리미리 어려서부터 나는 커서 유명해질 테다 유명해지고 싶다 라는 공표를 적잖이 알렸거나. 어쨌든 망아지는 원래 자기가 얼마만큼 앞발을 들어올려야 자기가 뒤로, 옆으로 꽈당 넘어지는지 모르기 때문에, 성정이 당시는 근질근질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바로,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고! 뭐 그건 그렇고.
    사진 출사회, 끝났다.
   「안녕, 애들아.」
    리더인 존티가 작별 인사도 마쳤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 이미 헤어졌다.
    그렇게 존티와 NB 단둘이 남았을 때 존티가 그랬다.
   「그나저나. 내가 자네를 잘 아는데 말이야. 자네도 사진을 한번 진지하게 배워보는 게 어떻겠나?」
   「자네는 뭐가 자네야? 이 양반이 배가 고파 정신이 없나, 사랑에 애달팠나. 야! 너 왜 그래? 평소대로 해. 그리고. 나 사진을 싫어하진 않지만 직접 작품을 만드는 거 보다 보는 걸 좋아해. 물론 옛날에 디카를 처음 샀을 때는 잠깐 혹했지. 누구든 그러잖아. 그렇지만 시간 좀 지나면? 모임에 자기 카메라 서로 안 가져올려고 난리잖아. 왜? 귀찮으니까. 내게 사진에 대한 열정은 딱 그 만큼. 요즘 어린 친구들처럼 사진은 아예 찍기도 보기도 귀찮아 한다고. 따라서 나는 서명도 없어. 자, 그렇다면 말이야, 응? 집중. 자, 사진이랑~ 요리랑~ 비슷한 거 같지 않니? 응? 그러지? 그렇다니까. 그 다음으로 요리랑... 그만. 어찌 됐든, 얘가 잘 알면서 왜 이러지?」
   「허지만서두, 난 자네에게 사진이라는 고품격 취미를 권하고 싶은 마음에 그만, 거 정말이지, 너무너무 그 충동을 걷잡을 수 없지 뭐요.」
   「없지 뭐요? 없지 뭐긴 뭐가 없지 뭐야! 얘가 요즘 왜 이러지, 상태가 영 아닌데.」
   「왜냐니, 나 원래 이랬어. 전적으로 끝짱나는 황홀감, 키우지도 찾아헤매지도 않는다구. 그렇다고 꼴사나운 괴벽과 허약한 감상주의에 의지할 수야 있나. 따라서 나는 당분간 도덕주의자이자 성인군자처럼 살기로 했네. 아시겠나?」
   「모르겠네. 영 모르겠네. 무섭고 공포스러우면서도 악마적인 느낌과 마성의 분위기, 그건 좀 색다르고 말이야. 얘가 얘가 뭔가 꿍꿍이가 있는데 그걸 통 말을 안하네. 대체 뭐지, 그게?」
    의구심이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았다는 듯한 눈초리를 남긴 채 존티는 먼저 갔다. 갈 때마저 존티는 폼을 잡았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걸작이란 아마도 사후에 유명해질 운명쯤에 해당할 테니 우린 이만 헤어지는 걸로 하세나.」
    끝까지 폼이었다. 대체 어떤 꿍꿍이가 기다리고 있길래 말이다.
    결국 그래서, NB는, 또 혼자 남았다. 어? 또!
    그와 같은 허무감 때문일까? 그는 NB에서 N을 뭘로 바꿔야 할지를 또 다시 고민하며 공상을 하게 됐다. 바로 다음과 같이 말이다.
    환락은 부담스럽고, 심심함은 유감스러우며, 불운은 당혹스럽다. 그렇다고 사교계에 혜성처럼 등장하겠나 연예계에 신인왕으로 우뚝 서겠나. NB는 그처럼 어떻게 보면 열심히 사는 듯 했고, 어찌 보면 세상과 교류하지 않은 채 허송하는 듯 했다. 그리고 <형, 철들지 마세요!>같은 인사말을 듣지 못하기 때문일까? 이미 철이 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저런 맙소사! 그러니까 어디 가서 난데없이 법석을 떨 수도 없고, 느닷없이 괜한 숙녀한테 추파를 던지기도 뭐했다. 그래서 자꾸 소심해지고 더욱 순진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그걸로만 보자면 청춘으로 환생했다고 볼 수 있을까? 누굴 만나든 공인은 커녕 말도 꺼내기 힘든 농담, 아니 농담 축에도 못드는 헛소리다.
    따라서 그는 변화를 위해 BOY 앞에 어떤 색다른 수식어를 붙일까를 생각했다. NEW! 너무 막연하니까. 신들린 듯 춤을 추든 미친 척 노래를 부르든, 화난 척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는 진짜를 연기해야 한다. 그래야 이른바 먹힌다거나 롱런한다랄지 최고가 될 수 있다. WIRED? 그러다 그는 '흥분한'이란 꾸밈어를 골라봤다. 그렇지만 술 취하면 깨야 하고, 잠은 밤에 자고 낮엔 활동을 해야 한다. 계속 흥분할 마땅한 이유도 없었다. 흥분맨이 무슨 최선의 일하기와 최적의 놀기를 위한 타당한 명분도 뭣도 아니고. 본인이 무슨 도핑 테스트에 대해 떳떳해야 할 선수도 아니다. 인터넷 놀이터 우스개 소리로 거 뭐야 몬스터나 레드불! (아마추어는 그게 무슨 금지약물인 것 마냥) 일요일 동네 축구에 약 빨고 나갈 일도 없다. 고로 그는 그냥 일단은 NB로 남기로 했다.





    17

    사진 출사회에서 집으로 오는 길.
    그는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울적했다. 선심 쓰듯도 아니고 건성건성도 아닌 최선을 다해서 막살기. 아니 아니, 놀기. 그러나 이제는 놀기마저 재미없었다. 질 나쁜 사교계와 삼류 나이트클럽은 더 재미없었다. 불미스러운 가난함, 끔찍한 권태, 추잡한 염문의 주인공도 될 수 없고. 불행의 대항마로 딱히 출전시킬 벤치 멤버조차 바닥났고. 아니다 이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존티의 권고로 함께 사진 출사회에 참석했는데 그마저 그냥 그랬다. 딱히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행복한 열정가로써 감출 과거가 있냐 없냐가 문제가 아니다. 그게 아니라 NB는 매사 싫증이 삶을 이끌고, 인생은 변심에게 끌린다는 게 문제였다. 새로움을 좋아하오나 끈기가 없는 건가? 새로움을 싫어하고 고집만 센 거보단 낫겠네. 아무튼, 사랑에 약하고 짝사랑에 더 약할지언정 떨리는 상사병이 어른에게 웬말. 권위에는 의연하게, 주관은 굳건히, 환상론은 차근차근.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떨리는 예감과 설레는 기대가 부족하다는 점, 결코 부인할 수 없었다. 즉 바람직한 이상은 아니겠지만 이렇다 할 변수도 없는 만큼 의뭉스러운 모험심마저 아쉬운 형편이었다. 그렇게 NB는 집에서 TV만 보고, 사무실 소파에서 뒹굴다가 급기야 멍청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신비와 젊음과 꽃들의 환호가 절실할 판에 지적 능력의 도태? 저런!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비밀 없음과 가난함을 <비밀 있음 & 가난하지 않음>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뭐 어떻게 아쉬운대로 가식과 능청과 간교함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건 또 너무 많이 남용했고. 하면 하고 말면 말고, 천리마면 뭐하냐고 꿈쩍도 안하는데. 남들은 질주를 하던가 꽃밭에서 뒹굴던가 아니면 마굿간에서 일단 나가는데, 그걸 번연히 알면서 언제까지 구상만 하고 또 할 수는 없었다. 고로 NB는 환희의 공모자를 수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스포츠로 치면 복식이요, 운칠기삼으로 보면 명마. 곧 실력이 검증된 믿을 만한 협력자를 간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어떤 새로움에 대해서 간곡하게, 골똘히 고민해봐야겠다는 과제를 집과 사무실에서 파헤쳐볼려고 했다.
    바로 그렇게 집으로 가던 중 그는 휴게소에 들렸다.
    한적한, 매우 한적한 시골길. 마치 SF 영화에 나온다면 무인차랄지 로봇만 지나다닐 것 같은 분위기.
    휴게소에서 그는 볼일을 봤다. 맨손 체조도 하고, 화장실도 갔다 왔다.
    평범한 일상─보편적인 기분 전환─심심한 인생. 한 방의 모험이 절실한 시점이라면서 일에 대한 열의도 가다듬었다.
    그러니 이제 다시 애마에 올라 집으로 돌아갈 시간.
    그렇게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뭐야 당근이 부족한 거야 채찍이 문제인 거야. 아닌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왜 시동이 걸리지 않지?
    그런데 NB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휴게소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런 듯 했다. 그들은 이미 훨씬 전부터 그런 듯 했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참신한 신참내기가 눈을 멀뚱멀뚱 뜨며 으아해하자 그들은 NB에게 접근해왔다.
   「선생. 혹시 자동차에 대해서 좀 아시유?」
    또 다른 사람은 달리 접근했다.
   「형씨. 제 페라리가 몇 년식인 줄 알아보겠소?」
    그 뿐만이 아니라 이런 분도 있었다.
   「젊은이. 젊은이 차는 공랭식인 것 같소만, 그런데 왠지 모르겠지만 내 수랭식 엔진이 영 말을 듣지 않소. 일단 내 애마의 수평식 대항 엔진을 잠시 구경 한번 해보시겠소?」
    그렇게 얼렁뚱땅 사람들과 말을 나구고, 차를 구경하며, 얘기를 듣게 됐다.
    여기가 특별히 귀신이 나온다랄지 이상한 기운에 휩싸였다랄지, 그런 게 아니라 전화가 안 터진다 라는 얘기였다.
   「그래요? 아닌데! 저는 되는데.」
    그러면서 그는 그들한테 자기 전화기를 건넸다.
    또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길래 자기가 직접 당사자의 차에 타서 시동을 걸어봤다.
    뭐야, 걸리자나!
   「차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요?」
   「어, 진짜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정말 이상했는데. 이거 진짜 어떻게 된 일이지?」
   「제 것도 좀 봐주세요.」
   「저두요. 제 차는 오래됐지만 관리를 꽤나 꼼꼼히 잘해서 어지간한 애마는 비교도 못할걸요.」
    그렇게 한참이 지난 끝에 그곳에 있는 모든 차의 시동이 다 켜졌고, 그들의 전화기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다.
    NB가 딱히 한 게 없는데, 결과적으로 그가 무슨 요술사라도 되는 것 마냥 모든 것을 정상으로 원위치시킨 것만 같았다.
    그러면, 응? 그러면 말이야 요술봉은 대관절 어디 있냐고! 혹시... 설마?
    그건 그렇고. 그는 그분들을 모두 떠나보낸 다음 음료수를 살려고 다시 휴게소로 들어갔다. 아직도 이곳에 들려서 갈증을 해소하지 못했던 것이다.
    휴게소 내부.
    그렇게 점원에게 말을 걸려는데... 뭐야 이거! 뭐지? 이건... 뭐냐고!
    점원을 비롯해서 내부에 몇 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바로 박제였던 것이다.
    그건 모두 실사판 초정밀 가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깜빡 속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니 그는 음료수를 살 수 없었고, 여기가 무슨 박물관도 아닌데... 막 그렇게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음료수는 마셔야겠고, 유인 판매점에서 살 수는 없고.
    그래서 그는 바깥에 있는 무인 자판기를 발견했고, 그곳으로 갔다.
    자판기는 하늘색 자판기와 연분홍색 자판기 두 개뿐.
    하늘색은 음료수고, 연분홍색은 씌여 있는 안내문이 이랬다.
   「뭐가 나올지 모름.」
    뭐? 모르긴 뭘 몰라! 그럼 뭐야, 뭐가 나올지 묻지 말라는 거야? 그는 일단 둘 다 이용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결과만 말하자면 음료수를 마셨고,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에서는 악세사리를 비롯해서 별의별 희안한 물품을 뽑고 또 뽑고 계속 뽑았다.
    그 가운데는 꽤 쓸 만한 물건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느새 지갑의 현금을 모두 다 써버렸다.
   「별수없지, 뭐.」
    그렇게 그 일대에 자기 혼자만 남은 줄도 모른 채 그는 애마에 올라탔다.
    그런데, 뭐야 이거 시동이 또 안 걸리네?
   「가만 있어봐.」
    계속 안 걸렸다. 핸드폰은 또 먹통이었다.
    그는 바깥으로 나갔다. 여기보다 더 차량 통행이 한적한 도로는 좀처럼 찾기 힘들 정도로 조용했다.
    어쩌다 지나가는 차량을 봐도 모두 무인차였다. 운전자만 없는 게 아니라 탑승자까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다시 시도해보기로 했다.
    부릉, 부릉, 부릉~!
    뭐야 이거, 이제는 또 되자나? 시동이 걸렸다. 전화도 통화가 되는 상태였다. 인터넷도 되고.
    그렇게 그는 별일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비밀스러운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신비스러운 모험은 있다. 아니다. 뻥이다. 없다. 있을 턱이 있나.
    그래도 그는 별일없이 집으로 돌아온 걸로 만족했다.
    능글맞은 권위자의 미심쩍은 의심이니 뭐니, 그런 거 다 필요없었다.
    특별하고 신비로우며 아름다운 인생이여, 라며 시를 짓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는 별일없이 집으로 돌아온 걸로 만족했다.
    한심한 잡것이 된 것만 같은 기이한 당혹감, 치유되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헛수고. 실망-쯤이야. 기대도 안했어.」
    일탈적 환상에 따른 상쾌한 분위기에 안주하기, 바라지도 않았던 것이다.





    18

    그는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사무실로 출근했다.
    꿀이 뚝뚝 떨어지고, 기쁨이 친친 감기며, 깨가 펑펑 쏟아지는 일상. 알고보니 어젯밤 단꿈은 개꿈이었다. (드문드문 기억나지만 완전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꿈에서는 말이 돼!) 플레이보이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며 사교계를 주름 잡고 다니는 건 어디까지나 꿈나라 이야기. 허당계에 파다한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연애사는 다 남의 일.
    그는 새로운 짝사랑 받기는 꿈도 꾸지 않았다. 유망한 미래에 보물상자를 낙찰 받기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렇긴 하다만 쾌청한 황홀경은 몰라도 특별한 발단은 앵기면 뿌리치지 않으련만 일과는 너무도 조용했다. 순진무구한 숙녀와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양쪽에 꿰차는 몹쓸 공상 역시 정중히 사양했다. (이미 한 거 아니냐고? 안했음. 그렇지만 오 땡큐! 뭐? 이제 드디어 '오 땡큐' 하면 적지 않은 분들께서 그 뭔가를 상상하실지도!) 그럼 뭘 하나. 신나는 전개가 없는데!
    됐고. 별들의 반짝임과 바람의 인사는 다 쓸데없는 얘기고. 매료될 관심사와 유혹할 애마가 없다면 기수 없이 혼자 뛰는 수 밖에. (한바탕 악으로 미친 듯한 깡으로,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서 JS는 저조한 성과 때문에 불쾌해하는 탐험가보다는 한 마리 야생마이고자 했다. 독신자주의는 아니지만, 정반대지만 뜨거운 열애와 흥분된 쾌감은 통 말을 듣지 않으니 내일로 미룰 수 밖에.
    그래서, 이제 어쩔껀대? 일기를 쓰는 게 좋을까, 아니면 잡지나 보는 게 나을까. 뭇-사내의 환상을 엿보거나 여자 마음 추측하기도 재미없고. 때문에 NB는 터벅터벅 사무실로 가는 거 말고는 이렇다 할 뭐가 없었다. 커피숍─아이스크림 가게─빵집 점원이 바뀔 때마다 매번 새로운 여자한테 구애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인생은 요술이 아니니까 다 그런 거지 뭐, 라면서 그는 사무실로 출근했다.
    그렇게 사무실 가는 길.
    그렇게 사무실에 도착.
    그러다 일과 시간에 <오빠 뭐해?> 라는 소셜 네트워크 메시지를 아는 동생으로부터 받았다. 열심히 답장을 쓰는데, 그런데 그녀는 벌써 오프라인이 되었다. 뭐지? 약속이 잡혔나 보다. 빠르네. 매정한가? 아니면 이쪽에서 맹한 걸 수도. 너는 벤치멤버고 나는 뻔트보다 거포를 원한다 그거지. 뭐? 됐다 그래, 라고 할려다가 사랑의 인사는 어쩌다 생략될 수도 있으니까 바쁜 세상 괘념치 말기로 했다. 그렇게 그는 숙녀에게 선택 받지 못했다. 잃어버린 열망을 기억해낼 뻔 하다가 그것도 실패했다. 아찔한 착상도 포기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퇴근하고 집으로 갔다.
    그런데 집 앞에서······
    그런데 집 앞에서······
    아무도 자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뭣이여!
    그래서 그는 작심했다. 내일 그 이상한 휴게소에 다시 방문해봐야겠다고!





    19

    다음 날이 되었다. 그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을 총동원해서, 까지는 아니고 꽤 많은 현금을 모아서 그곳으로 떠났다.
    이름도 모르고 뭔가 이상한 그 휴게소로 말이다.
    그것에 대해서 인공지능한테 물어봤지만 인공지능은 꿈나라를 헤매고 다니는지 통 답변이 없었다.
    그는 그곳에 내려서 어슬렁어슬렁 휴게소 내부 쪽으로 걸어갔다.
    왠지 모르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런데 휴게소 문은 잠겨 있었다. 에잇~ 김빠지네.
    그래도 깐닥깐닥 어떻게 들어갈 수 없나 하고서 주변을 둘러봤다.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포기하고서 자판기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지금 생각해봐도 거기 왜 갔는지 분명한 까닭은 아직도 미상이다.
    진짜 자신이 박제될지도 모른다는 판타지 같은 걸 바랬냐고 누군가 캐묻는다면 딱히 항변할 의사가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누군가 자기가 그곳에 재차 의도적으로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므로, 피차 그런 엉뚱한 상상은 더 발전시키지 않는 걸로.
   「누구 맘대로!」
    각자 맘대로.
    아무튼 사람이란 누구나 새로운 행복을 원한다는 건 공공연한 정설인 반면, 뜻밖의 발견을 바라는 것 또한 인간의 본능이다. 결론은 그곳에 그런 건 없었다-였다.
    단지, 그는 가진 돈을 몽땅 무인 자판기에 쏟아부었다는 거. 어떻게 보자면 그건, 말할 필요도 없는 세계 최고의 쾌감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사족을 못쓰는 무엇이라도 있으면 다행일 것이다. 평범함이 어쩌면 제일 소중한 가치일 테니까 말이다. 숱한 패전의 기억. 그리고 전혀 쓰라리지 않은 그러나 드문 승리의 추억. 모두 지나간 일일 뿐. 어찌 됐든 오늘의 성과는 별 거 없었다. 영화로 치자면 이건 정말 B급이 아니라 C---급도 안될 드라마였던 것이다.
    그럼 그는 정말 뭘 원했던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나를 안달나게 할까? 당신은 무엇이라면 사족을 못쓸까? 그리고 우리는 그 어떤 대상에 환장하는 것일까? 설마... 아닐 것이다. 밝은 내일 희망찬 미래, 아니라고 아니라고 손사래칠 수야 없지만 왠지 우리가 원하는 1.5는 아닌 것만 같다. 그렇다고 타락마 타기만은 절대 아니라고 극구 반론하기, 역시 썩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가 열망하는 건 솔직히 말해서 플레이보이와 펜트하우스라고 왜 항변하면 안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철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건 사랑과 행복과 낭만과 꿈 같은 이상, 미지의 모험, 궁극적 환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진짜다. 맞다. 옳지. 그럼. 가짜가 아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마치 그런 모습이다. 왼손잡이가 진실을 말할 때 살짝 고개를 틀어 10시 방향 위를 보고, 오른손잡이가 거짓말 말할 때 시선이 슬쩍 2시 방향 하단을 향한다는 이론. 물론 고결한 그대가 아니라, NB는 젊은 신기함과 새로운 놀라움이라는 정답에 선뜻 동의하자마자 뒤를 돌아보는 거지. 그 다음에 딱 2가지 힌트로써 판단컨대 100퍼센트 뻥이다. 완전 뻥. 진짜 뻥. 순수한 뻥. 순결한 뻥. 무구한 뻥. 첫째 웃음, 둘째 뒷머리 긁기랄지 미묘하게 부자연스러운 표정과 몸짓. 따라서 그가 진정 바라고 염원하며 고대하는 건 다름 아니라, 3대 어설픈 사랑 가운데 더티러브라고?
    아 쫌!
    썰렁한 농담치고 더럽게 재미없지만 일단 넘어가자. 그야 어떻든 그는 변심에 대한 탐닉을 호락호락 시피 여길 수는 없었다. 허당주의자의 미련한 인생 역시 만만히 보아서도 안될 일이다. 뿐더러 무정한 어느 추리소설을 읽으며 추리가 아닌 추측을 하는 젊은이의 상상력을 어찌 띄엄띄엄 얕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NB는 올림푸스의 은총과 플라톤의 지력, 예언가와 점쟁이의 차이점에 대해서 뜬금없이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이 그 즉흥적인 궁금증을 내내 붙잡고 있겠나 어쩌겠나. 그러니 호기심은 역시나 멜로드라마였고─뭐, 에로비디오?─감수성 또한 마법의 유리구두와 요술램프의 요정 지니를 동경했다.
    고로 양치기 소년의 고독감은 냉큼 결심했다. 심원할 필요없이 단호하게. 막 치즈에 달린 줄을 영차영차 끌어당기기는 그거였다. 바로, 남자는 일단 집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천리안 기수의 따끔한 채찍을 맞는 천리마에게 제공될 당근은, 가는 여자 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막지 않기 라는 명언이라고? 그리고 천진한 동심을 현혹하는 기술은, 우리는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버린다? 그게 뭐야 나 참, 원! 참 나 웃기지도 않네. 생경한 궤변에 말 같지도 않은 억지는 그쯤 하면 됐고.
    그래서 NB는 성과를 맹추격하는 정적인 삶에서 우연한 행운을 만날 수 있는 동적인 행동으로 작전을 바꾼 것이다. 그러므로 당분간은 꼼짝없이 세부 계획을 짜는 일에 골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20

    그는 은근한 거짓말 솜씨를 탐탁치 않아 했다. 문학에서 말하는 삶의 기쁨과 인생의 재미도 미덥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스레 개인의 행복은 미심쩍을 수 밖에. 그렇다고 타인의 시시콜콜한 연애사에 관심을 쏟겠나, 아니면 스스로를 미학적 세계관의 소유자라며 자칭하겠나. 그게 다 자업자득일 것이다. 지적인 자유를 얻은 대신 뭐랄까, 좀이 쑤시는 시골풍 생활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번잡스럽게 도시 한복판에다 사무실을 얻을 수도 없고, 지성의 전당에 학생으로 출연할 수도 없었다. 뭐야 교직원이 아니라 학생? 굉장하군, 기막힌 솜씨야. 헛된 공상도 잔재주로 가정하자면 말이다. 사랑의 비너스와 아름다움의 디아나는 커녕 범상치 않은 조바심만 그를 부채질할 뿐. 그걸로도 모자라 한술 더 떠 무슨 레이저 시스템이 탁월한 인공지능씩이나 된다고 매일 같이 바보 같은 대화를? 저런 바보짓을 다 봤나. 일상이 재미없을 이유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은근했던 비아냥 어린 태도가 부쩍 상승한 듯 해서 일기도 쓸 수 없었다. 가뜩이나 품위 유지비도 부족한데 칼럼도 안 써지니 한몫 챙기는 것보다 생활비마저 부족한 형편.
    따라서 여기서 더 썩은 미소를 불러오면 안될 표면상의 이유는 충분했다. 훌쩍 뛰어올라 행운의 구름에 사뿐히 안착할 명분은 마련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잡것이니 상놈이니 멍청이라 손가락질 받을지라도 세상이 자길 반색하질 않으니 사적인 일을 부풀리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NB는 신나는 인생은 전혀 즐겁지 않은 동네 아저씨의 삶이라는, 기만적인 술수에게 회심의 어퍼컷을 날리고자 조커를 기용하기로 했다. 빠밤~ 바로 777번마의 이름은 클레오파트라! (이거 정말 애마를 너무 밝히는 건가? 거 원 참!)
    그럼 777번마 클레오파트라가 무엇이냐? 무엇이고 하니 그건 바로, <천문관 보이저에 재방문하기>였다.
하긴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에 대한 끌림 때문에 이상한 휴게소를 재방문 했으니 그건 뭐 거의 정해진 수순이나 다름 없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의 비밀은 사랑의 미로를 헤매이는 것이라면서 인공지능 지니가 NB를 슬슬 꼬시니 그는 넘어가지 않고 배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인공지능 지니가 살살 감고, 쥐락펴락 요리하며, 착착 엮는데 그가 안 넘어가고 버티겠나. 심지어 아무리 생각해도 지니의 귀뜸이 즐거운 인생의 아름다운 묘수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는 집에서 준비물을 챙겨서 천문관으로 출발했다.
    중간에 별다른 일은 전혀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천문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은 정식 개장을 한 상태였다. 이제야 어엿히 제 몫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에 그가 들렸을 때만 잠시 주춤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잠깐만! 여기는... 사설 설비이자 사적 시설이 아니자나? 그럼 혹시...!
    그는 설마 설마 해서 냉큼 롭한테 전화해서 물어봤다.
   「야. 롭. 너가 저번에 거기, 어디지? 응. 천문관. 거기 인수했다며?」
   「내가, 천문관을? 형, 안 웃겨!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내가 거길 어떻게 인수하냐? 그건 대체 무슨 상상력이니?」
   「너가 저번에 그랬자나. 나이트클럽 팔고 거기 샀다고.」
   「아 그거? 뻥이지. 당연히 뻥이지. 그걸 누가 믿니?」
    그는 감성이 붕 떴다.
    이성은 벙쪘다. 두둥~!
    심신은 마침내 분리되었다.
    기다리던 유체이탈이 실현되고야 말았다.
    향수는 욕망을 예기한다. 욕망은 기쁨을 암시한다. 기쁨은 행복을 예고한다. 행복은 미래를 관측한다. 미래는 희망처럼 아름답지 못할 소지가 다분하다. 그래서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는 자유롭기를 바란다. 자유는 미지의 이상을 추구한다. 그 자유의 이상은 꿩 대신 닭일 수도 있다. 무난한 촌닭이라고 멋지지 말란 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어머어머, 어머나 신비스러운 향수까지? 뭐야! 그런데 그 향수는 싸구려에 그이는 허당이라니! 보기 좋게 낭패는 추억이 되지만, 보란듯이 행운을 선망하면 된다. 그러면 된다. (그녀는 나한테 넘어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인생은 최선을 다해서 갈 데까지 가는 것과, 볼장 다 보듯이 막사는 것 외에 그것도 있는 것이다.
    대충 살자!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과거가 현재를 잘 예측하고 현재가 미래를 놀랍도록 추론하더라도 인생은 본시 엉뚱한 것. 지금 그대가 이렇게 살게 될지 누가 알았겠나! 그러니까 드라마는 운명을, 남자가 여자를 꼬실 때는 허풍쟁이로 빙의, 철들지 않는 우리는 탐구심과 호기심을 양쪽에 꿰차는 것 아닐까? 아니긴 뭐가 아니여! 그야 어떻든 향기로운 꽃과 탐스러운 과일은 거울 보고 찬미 받는 그분들 인생이 있고. 그와 별개로 유능한 플레이보이는 시련을 푸대접하지 않는 유망한 줄거리를 선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로맨스가 어디 내 마음대로, 새로운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날 특급 캐스팅하던가. 그러나 우리는 미련과 실패와 체념 때문에 낙담하지 않은 채 오히려 거기서 배운다. 내 보아하니 그분들은 색다른 감수성과 최신 허영심에 대한 정보가 요만큼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니 무방비 상태로 KO 당할 수 밖에. 자, OK!
    그래서 우리는, <우리는>은 뭐가 <우리는>이야! 아무튼 우리는 제7의 전성기를 위해 낡고─진부하고─고리타분하며─구식탱탱 묵은 비전 1.0을 새로운 인생 2.0으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거다. '그녀를 안달나게 하는 법'같은 비법서를 염탐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시간만 낭비하느니 차라리 소파에 자빠져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게 낫긴 낫다. 그러니까 결론이 뭐냐고! 내 말이, 어? 행복한 결말은 물론 기발한 작전도, 비장의 카드도 꽤 괜찮은 병법도 아무 것도 없잖아? 이런, 젠장! 고로 NB는 JS라는 정체성을 꼭꼭 숨긴 체 환상머신 연구에 열심히 박차를 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환상머신은 썩은 환상머신? ~만은 아니기를!)





    21

    마음은 투명하고 어조는 또렸하며 언제나 유쾌할 것. 광고의 논리와 소비의 효험 때문에 우리는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뿌듯해진다. 그러나 어떻게 매번 상쾌하겠나. 사랑의 맹세가 번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만 순수했던 동심은 깨지기 마련이다. 이상형은 수시로 바뀐다. 야망이 잊혀지는 건 평균적으로 응당 정해진 차례일 뿐이다. 아예 애초에 없었던 사람들도 흔하다. 곧 아무리 재미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매번 활력을 선사하고 애인을 항시 웃기겠나. 기를 주는 사람과 기 빨리게 만드는 조증녀는 통상 정해져있다지만 어차피 신인상은 1번 뿐. 것도 기회만. 심지어 1부 리그, 많이 쳐도 2부 리그만!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미를 잃지 않는 이상 마음이 불투명하고 싶을 때가 있고, 때로는 이상한 개성을 따라하기도 한다. 가식적 호의에 혹하거나 익숙한 호감 때문에 새로운 숙녀에게 친절하지 않기로 다짐하지 않는 이상 그럴 수 밖에 없다. 여기까지는 일반론이고.
    그러면 반투명한 마음이 좋아보이면, 어느 전문용어처럼 내 약함을 인정하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지? 때로는 내 속좁음과 꽉 막힘과 멍청함과 비겁함을 불인정하지 않고 싶거든. 나도 솔직히 약간은 그렇거든. (뭐, 약간은?) 내 자조 개그는 저급하다고 시인할 용의가 확실히 있으니까. 그렇다고 매번 변신에 현대극은 변절자요 사극에서는 모반자, 혹시 마누라는 변장? 아침에 변심 점심에 변덕, 저녁에는 내 마음을 나도 몰라?
    자, 검지를 펴서 귀 옆에 붙인 다음, 빙글빙글! 한 번 더, 빙글빙글!
    그러므로 3단 논법과 나비효과, 인공지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슬리퍼, 제비복, 가죽점퍼, 유니폼, 잠옷을 한꺼번에 다 입나! 중간 보스가 있으면 행동 대장도 있듯이 플랜 B와 대타도 있는 것이다. 슈퍼맨은 영화고, 원맨쇼는 어려우며, 팔방미인이 어디 흔하더냐. 때문에 사랑 받기, 책임 회피형 방식, 수동성 같은 행동 양식 역시 결코 드물지 않게 된다. 떨려, 설렌다, 끌린단 말이야!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은 깃발처럼 나부끼고, 우리의 귀는 임팔라처럼 코끼리 같이 펄럭여야 하는 것일까? 내 마음은 나의 것, 내 인생도 나의 것인데, 그런데 왜! 대체 왜 내 마음을 빼앗겨버렸다면서, 또 사랑?
    그렇다면 과연 어떡해야 져도 좋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랑을 하고 설혹 실연 당해도 미련은 낮게, 상심은 옅게, 오뚜기처럼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을까? 슬럼프를 슬기롭게 탈출하고, 실패해도 지혜롭게 이겨내기. 그 이유와 원리와 방법을 누가 모르겠냐마는, 바로 그래서 적게 걸고 적게 먹거나 얼리어댑터는 자기들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인생론 설교는 그쯤 하면 됐고. 어쨌든 NB는 천재가 아닌 대신에 미모의 특급 바텐더한테 1위로 손꼽혔다. 그 얘기 딱 1번만 더 말하면 진짜로 반올림 1000번이다. 듣는 사람, 그 가운데 그 얘기 싫은 사람은 듣다 듣다 귀에서 피가날지도 모를 일. 아주 미쳐버리지도 못하고 아주 그냥 광분하는 거지. 하여튼 알고 보면 초면의 숙녀가 건네는 호감, 적지 않았던 거다. 쟤 알아? (알긴 뭘 알아!) 또는 화장지 없냐니까 팔을 쭉 뻗어서, 그것도 두 손으로 턱은 살짝 안쪽으로! (이제는... 이래서 옛날에 어깨 뽕 들어간 패션이 유행했었나!) 좌우지간 지겹지도 않은 자랑은 짜증나고 듣기도 싫고. 밝고 맑고 건전하며 긍정적인 해법 빼고, 맹랑한 듯 선묘한 수법을 딱 세 가지만 꼽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호박마차에 탄 미남. 바람둥이의 습관. 숙녀를 위한 에스코트. 신사의 품격.
    둘째, 베팅 (그대! 너를 나만의 남자-여자로 만들고야 말겠어. 단, 그분께 수긍할 의사가 있다면. 하늘이 허락한다면)
    셋째, 뻔트.
    사랑을 받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나서서 사랑할 수 없다, 절대 그럴 수는 없는 거라는 (일부) 여자의 자존심은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할까! 둘째, 아니다. 셋째? 그럴 수는 없다. 그럼 첫째? 그건 호박론이고. 그럼 남은 건 0.5네. 또는 화장발과 조명발등 갖가지 유혹술에 대해 권위자씩이나 되는 여성잡지 1과 2던가.
    아무튼 그는 그렇게 일은 레이저 시스템 인공지능에게 위임 시킨 채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목적지야 가다 보면 뭐 생기겠지 하는 마음으로. 무슨 별 중요한 얘기도 아니면서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더니만, 뭐라고? 그래서 어쩌라고-요! 뭐가 어쩌고 어째? 고로 눈에서는 레이저가, 입에서는 화염방사기의 화마가, 정수리와 귀에서는 사극에 등장하는 폭주기관차의 증기가...! 무슨 증기기관차 토마스야 뭐야? 하여간 밑도 끝도 없는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마법 같은 회오리 바람을 타고서 날아올라 구름이 정말로 솜사탕인가를 확인하는 일만 남았는데, 그런데!
    그 다음이 무엇이냐, 신나는 새로움이란 진짜로 어떤 것이냐?
    그런데 그것은, 연말의 들뜬 분위기에서, 으쌰으쌰로 기분이 달아올라 좀 더 면밀한 검토를 거쳐야만 가능할 것만 같았다. 그것도 어떻게 잘 하면, 잘만 하면 겨우겨우 말이다. 물론 아슬아슬하게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간발의 차이로 못할 수도 있고.
    한편 <뭐가 나올지 모름>자판기에서 그가 뽑은 물품 중에서......! 여기까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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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137

from 소설 2018. 11. 29. 20:30

    1

    뒤숭숭한 세상, 갈망은 인생의 즐거움이다. 인생의 즐거움은 사랑이다. 사랑은 행복이 필수지만 변심도 빠질 수 없다. 변심은 새로움에 대한 격렬한 욕망이다. 격렬한 욕망의 대표주자는 뭐니 뭐니 해도 토요일 밤이다. 그러나 토요일 밤의 쾌락마는 무의식적으로 일요일의 권태를 겁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금요일의 뻔트마라고 일상의 타성에서 뭐 얼마나 자유롭겠나. 그래서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에 큰 베팅을 한다? 위험 부담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즉 변덕마에 행운의 향수를 뿌린 채 올라탈까?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변덕마가 후진하면 어떡해! 무슨 그런 심약한 포부로 어찌 누드모델과 보디가드의 사랑을 응원하겠나. 됐고!
    따라서 우리는 아담의 호기심과 이브의 감수성에 기인하여 색다른 이상을 추구하자. 일명 마지막 잎새 + 선악과! 그렇다고 이상한 이름의 나이트클럽에 출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건 곧 쾌적한 황금, 경탄스러운 인기, 플레이보이라는 명예, 행복한 자유, 유망한 탐구심, 자랑왕, 허풍신, 우주대마왕... 그런데, 보자 보자 하니까 목표가 너무 많다. 현혹하는 광고는 시끄럽고 오락산업은 정신없다. 듣자 듣자 하니 고전음악만 들었다가는 상큼한 아가씨와 매력적인 숙녀들과 영 말이 통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다 하다 하다 나까지 남의 다리 긁기 대회에 동참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일단 마라와 함께 샴페인 동호회로 출발했다.
    샴페인 동호회! 괜히 나도 모르게 근사해진 느낌이다. 아무 이유 없이, 샴페인? 어딘가 모르게 은근한 덕망과 은밀한 로망을 벌써 성취해버린 기분이다. 또 다시 춤추는 요술구두 증후군이 도진 것일까? 세련된 분위기 다시 말해 8 대 2라는 황금 같은 비율에 가담할려고 몸부림을 치는 걸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거, 나도 안다.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마라가 환상문학 잡지 이번 달 특집으로 그와 관련해서 실을 내용이 꼭 필요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가 혼자 가기 싫다는데, 공짜술 먹어줄 때만 친군가? 그럴 수는 없었다. 나도 의리 하면 또 어디서 썩 빠지기는 싫었던 것이다. 바로 이렇게 부득불 이유없이 집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를 찾기도 전에 벌써 우리는 그곳으로 출발하고야 말았다.





    2

    마라와 나는 샴페인 동호회에 도착했다.
    아아! 이 분위기라면 못이긴 척 졸업한 허영기과 무자비한 허당기를 타이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J. S. Bach Magnificat BWV243.
    어라~? 이 얼마 만인가! 딱 어딘가에 들어섰을 때, 삐리리리 삐리리리 음악에 비율에 음, 보자. 파랑새는, 제비는, 쟨 또 뭐야? 거위는 웬일로! 한마디로 이건 그냥 그저 그런 뻔트의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상치 않은 샴페인 동호회라고 직감했던 것이다. 허허허허허. 하하하하하. 호호호호호. 만사가 끝짱일 것인가, 벅찬 기쁨일 것인가. 완연히 후자였다. 동시에 전자였다. 쟤야 나야, 둘 중에 누구야! ~라고 뜬금없이 선택 받게 생겼는데, 부동의 1위 오빠라니? 바로 그런 느낌이었던 것이다.
   「야. 너 이런 데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야?」
    라며 어떻게 촌스럽게 마라한테 따질 수 있겠나. 이건 그저 평범한 일상이라는 듯이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어울렸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머. 이번달 특집 실기로 했던 게... 어쩌지? 연락왔네. 지금 만나자는데? 놓칠 수 없는 인터뷰거든. 내가 이거 따내느라 얼마나 공들였는데. 어떡하지! 오늘만 나 좀 봐주면 안되겠니?」
   「왜 안돼! 이 비율... 때문이 아니야. 내가 어디 그런 걸로 트집 잡는 사람도 아니고. 일이 먼저지. 얘! 나도 그렇게 꽉 막힌 친구는 아니라네.」
    그렇게 해서 마라는 바쁜 일이 생겨서 먼저 갔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광란에 빠져 사랑했는데 미완성의 애정이 떠나가는 심정이 어쩜 이런 것일까. 초대객들은 어느새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여긴 그냥 별로 대단치 않은 술집 분위기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니까 아마도 꽤 괜찮은 파티를 새롭게 알게 된 건 맞지만, 살짝 끝물의 파도를 탔던 것일까? 듣기로는 이렇게 알게 된 친구들은 2차-3차 그렇게 으쌰으쌰 어울리지 않는다던데. 말하자면 다 끝나는 시간에 내가 발을 디딘 셈인 듯 했다. 일단은 다음에 반드시 참석해야만 한다, 그쯤으로 성과는 만족. 그래서 나는 뭐랄까 오늘은 그냥 뻔트로써 흡족하게 옅은 미소와 함께 퇴장할려고 했다.
    그런데 나갈 때 나를 제지하네?
   「(멀뚱멀뚱)!」
    말없이 8 대 2 가르마 보디가드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알고 보니 샴페인 동호회는 옆 가게였고, 여긴 그냥 술집이었다. 그럼 그 비율은 뭐냐, 연주회 끝나고 무슨과 동문들끼리 가볍게 파티를 즐긴 것이라고 한다.
    그럼 뭐야? 나 당했자나!
    보아하니 술값도 엄청 비쌌다. 괜히 왔잖아?
    전문용어로 그 뭐냐, 덤탱이? 속된 말로, 눈탱이? 아아 무척 오랫만이었다. 반갑네 반가워!
    또 망했다. 꼭 삼류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턱시도 입은 양반이 피로회복제를 친절하게 건네길래 마시자마자 슥 돌아설려는데, 불쑥 손을 내미는 장면과 똑같다고나 할까.
    그런즉슨 내 팔짜는 딱 이랬다.
    재미없어 졸렬한 평일, 약속없어 끔직한 주말.
    그래서 나는 이 기분에 집으로 가기는 뭐하고 사무실로 가서 일이나 하기로 했다.
    다음에 등장할 일기는 그렇게 해서 새롭게 창간한 여성잡지1.5에 기고한 칼럼이다.
    아, 그건 다른 데 실어야지. 일단 나도 환상문학 잡지에 입성할려면 그럴 수 밖에 없다.
    나도 이제는 먹고 살기 위해 독해졌다. 얼굴이 동그래지고 두꺼워졌다. 내 의도와 달리 조랑말은 어쩌다 뻔뻔마로, 당나귀는 밑도 끝도 없이 뻔트마로 자기들 맘대로 변신했다.
    배후가 누굴까?
    그런 거 없다.
    고로 내 안의 그분은 적당히 본론을 꺼내라고 하는 듯 하다.
    본론? 그래 볼까!
    친구야 모이자. 그대여 사랑해요. 여러분, 정열은 불만족에 달콤한 행복감은 충분치 못해서 미안해요. 그러니 이제부터 요술봉의 예언으로 애정은 변치 않기를. 아울러 마술피리 때문에 환희는 언제나 새로울 것이오. 그렇지만 내(그분들) 진정 좋아하는 건 실은 거짓말이라네! 아니 글쎄 정말로 뭐든 뻥이라고? 단, 난 아니다 난 아니야!





    3

    어느 날 나는 지체에 어울리지 않게 치마로사의 오페라 서곡을 듣는 중이었다.
    그런데, 딩~동!
    밖에 나가보니 웬 박스가? 가져와서 겉면을 살폈다. 내용물도 살펴봤다.
    알고보니 저번에 여성잡지 1.5를 창간한다며 의뢰가 들어와서 칼럼을 기고했는데, 그에 대한 보답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선물이 아니라 원고료와 이 박스의 내용물을 퉁친다는 안내문이 들어있었다.
    VIP 초대권이 한두 장도 아니고 자그마치 20장. 뭐야 이거!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글로벌 게임 박람회. 무슨 신생 그룹 팬 사인회. 작가 사인회도 있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아마 그 일을 굉장히 무가치한 일이라며 꺼려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인? 사인은 법인 대 개인간에나 하는 절차일 뿐이다. 그런데 법적 서류가 아닌 일로, 개인이 개인에게 사인을? 살면서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구를 느껴본 적은 하늘에 맹세코 단 1번도 없는 것도 어떻게 보면 신기하지만, 어떤 사인을 받고 싶다는 탐욕 역시 전혀 없었다. 호감 가는 여배우랄지 좋아하는 남자 가수가 근처에 있어도 사진은 어색하고, 대화도 어줍짢고, 그냥 살며시 또 빤히 쳐다보는 정도로만 만족! 그런데 그 정도로 호감도 아닌데, 단지 나는 무명 저분은 유명하다는 이유로 사인을? 노노노 딱 노! 내가 이상한 건가? 그야 어떻든, 한번 가볼까 라는 생각이 언뜻 들 정도로 이렇게나 많은 초대권을? 마라한테 따질까 말까를 고민했다. 살짝만. 심지어 무슨 레스토랑 개점 파티 초대권가지 있네? 참말로 가지 가지 한다. 어? 원고료를 떼이거나, 법정 다툼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뭐 초대권? 하긴 거기 기고한 일기는 그냥 연습장에 끄적거린 셈 치면 된다.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 뭐! 그렇지만 또 이렇게 너무 낙천적으로 넘기기엔 왠지 뒷맛이 세했다. 썩 긍정하자니 기분이 이상하고, 부정하자니 내가 꼭 그런 남자 같지 않나.
    속 좁고,
    쪼잔하며,
    꽉 막히고,
    쫌팽이에,
    허접한 데다가,
    툭하면 짜증내고,
    반짝반짝 딸랑딸랑에만 겨우 반응하거나,
    에스코트가 뭔지도 모르고, 재미없고, 삐리한 걸로도 모자라
    가난하며─가난 자체는 문제가 아니겠죠─덜떨어지고, 뭘 좀 아는 남자란 칭찬은 주변에 다 빼았겨 버린 남자.
    뭐? 이런 젠장!
    그러나 이때를 위해 나는 미리미리 준비해뒀다. 무엇을? 바로 염주를! 특대 크기에 최고급 수제품은 좀 비싸길래, 적당한 걸 미리 사뒀다. 나는 재빨리 그걸 가져다가 꼼지락꼼지락-했다.
    아니면 말고?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기!
    그렇지만 기분이 영 아니길래, 빈정상한 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약속을 잡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엔야에게 연락했고, 차 마시며 고상하게 수다나 떨자고 그녀를 살살 꼬셨다. 그렇게 나는 약속 장소로 나갔다.





    4

    엔야와 나는 어느 카페에서 만나 함께 차를 마셨다.
   「늬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면 내게 큰 거 1장을 줘!」
   「응? 뭐라고? 왜 쳐라, 가 아니라 '주라'야? 뭐야 이거! 원래 그거 아니니? 늬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면 서슴없이 날 쳐라!」
   「아니야. 그건 영화고 이건 현실이고.」
   「그래? 어째서 그 둘이 다른데?」
   「왜 그러냐, 왜냐면 사람인 이상 한 점 부끄러움은 없을 수가 없으니까. 곧 부끄러움이 없다고 착각해서 내가 맞느니, 부끄러움이 있다는 타당함과 내게 큰 거 1장을 주지 않아도 되는 명분까지 마련해주는 이타심. 그게 왜 나쁜데? 두 마리 토끼 잡기잖아! 기억나는 영화 대사는 모르겠고 성서에 나오기로는, 뭐라더라. 음...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뭐라더라. 아무튼 너도 알다시피 그런 말이 있어. 그렇지만 세상사란 건 말이야, 언제나 신성함이 만방에 빛을 비추거나, 정의로움이 수학적으로 만인에게 공평하기는 힘든 법. 출구조사도 오차 범위는 있고, 주인공에게는 우연이 흔하며, 위인전 뿐만 아니라 범인조차 굴곡 없는 인생은 너무너무 단조롭고 밋밋한 거 아니니? 재미없으면 곧장 집중력 떨어지는 게 정상이잖니. 더불어 인간의 죄스러움을 지칭하는 용어는 꽤나 많지 않냐 이 말이야. 하물며 기분따라 사랑이 흔들리고 분위기따라 변심은 매번 우리의 헛점을 노리는데, 응? 큰 부끄러움은 없지 않을까란 착각 때문에 누가 누굴 때리면 어떡하냔 말이지! 응? 그렇지 않나 이 말일세. 아니 그렇소? 이만하면 꽤 괜찮은 호혜성 아니냔 말이네. OK?」
   「어? 그래 OK! 그게... 얘기가 그렇게 되나?」
   「그렇지. 그런 거라구. 자 그러니까 일단 1장 줘 봐. 아, 뭐해? 어서!」
    엔야는 지갑을 꺼내더니 내게 1장을 줬다.
   「좋았어! 허허허허허.」
   「그런데 내가 오빠한테 1장을 왜 줬지?」
   「그러게! 그럼 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거야? 내가 주란다고 덥썩 주면 어떡해? 늬가 거절해야 부끄러움이 적당한 거라는 점. 아직도 몰라?」
   「아, 그렇구나! 오빠야. 다시 줘.」
   「한 번 준 건 내 꺼야. 얘가 줬다 뺐을려고 하네. 있는 놈이 더한 다니까, 라는 말은 하지 말자고 우리. 응?」
   「뭐?」
   「뭐긴 뭐!」
   「허허허. 안심하긴 일러, 이 오빠야. 내가 뭘 줬는지 내용은 보지도 않고 (개)이득만 생각하니? 그러니까 오빠가 허당이란 거야! 이건 말이야,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오빠가 말한 1장과 내가 건넨 1장은 다른 거라고. 응?」
    그런데 엔야의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럴싸했다. 더군다나 엔야가 건넨 1장을 보아하니 그건 지폐가 아니라 초대권이었다.
    뭐, 또?
   「하긴 요즘 세상 부끄러움을 말하기와, 사생활 침해를 논하기는 어째 뭔가 겸연쩍어지지 않을 수 없어. 우머나이저만 봐봐. 날개 돋힌 듯 팔리는 데도 항상 품절이잖아?」
   「뭐 진짜로? 이건 있는 놈이 더하더라, 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하지?」
   「(툭툭) 그걸로만 보자면 말이야, 어째 뭔가 바뀐 거 같지 않니?」
   「뭐가 바뀐 거 같은데?」
   「아 그거 말이야. 그래프를 놓고 봤을 때 남자가 먼저 고점을 찍고, 여자는 더 나중에 정점에 이르는 거. 너도 모르지 않지? 상식이잖아. 과학이고 의학이자 교양이야. 여성잡지2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될. 응? 왜 그런 말 있잖아.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 흐흠, 그렇다고? (딱) 얌전한 고양이는 곧 남자네! 안 그래? 늦바람이 무섭다? 여자잖아! 얌전한 고양이를 어쩐다면서 속닥속닥 수다의 꽃을 피웠다가 양들은 나중 침묵할까? 아니지 아니지. 그녀들은 안 그래도 일찍이 연애라는 걸 하면서 질투의 화신이었는데, 뒤늦게 찐한 사랑을 알게 됐는데 어찌 조용조용 수줍고 부끄럽고 챙피할 수 있을까! 그 전체적인 그림을 보니까 그렇단 말이야. 남녀 모두 YB일땐 여자가 남자를 보고 웃어, 이따금 그 어떤 수다의 화제로 웃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남녀 공히 OB일 땐 남자는 자는 척 하던가, 샤워 소리에 꼭 흑백영화에 나오듯이 소름이 돋아. 어? 막, 소름!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이러니까 어설픈 사랑의 3요소가 대단한 거지. 응? 아 생각을 해봐봐. 어설픈 사랑의 3요소 가운데 하나인 더티러브로 일부는 발목 잡히고, 또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풋사랑으로, 그 나머지는 찐한 사랑. (딱)! (쉭─쉭─쉭)! 안 그러니? 그래서 부인이 친구들 만나서 하는 말이 뭐야?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는 순위 축에도 못든다는 거. (딱) YB일땐 여자가 남자를 보며 웃고, OB일땐 남자가 여자한테 겁 먹어! 안 그래? 왜, 내 말이 틀리니! 물론 난 아니다 난 아니야. 난 아직 그 뭔가가 밑에서 위로 올라오지 않았거든. 응? 그러니까 내가 가만 있게 생겼냔 말이야. 응? 우머나이저를 현저히 뛰어넘는 환상머신! (딱) 그걸 만들고야 말겠다는 신념.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 그거지. 음.」
   「그렇다면 말이야. 대체 찐한 사랑과 풋사랑 밖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파도 그 어디에 진짜 사랑이 있는 거지? 오빠는 그거 아니! 알면 내게 좀 가르쳐 줄래요? 응, 오빠.」
    그야 어떻든 그렇게 해서, 나는 또 1장의 초대권을 얼렁뚱땅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럼 남은 VIP 초대권은 오히려 1장이 늘어서, 총 21장? 맙소사!





    5

    나는 혼자서 상스러운 거동과 거만한 논조의 배역을 흉내내봤다. 익히 봐 왔던 드라마 조연들 연기를 말이다. 할 일이 그렇게나 없었나? 차라리 쾌감을 사모하고 밤거리 네온사인 불빛 아래에서 방황함을 흠모하길 바래야 하나,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난 정말 어떻게 권태를 단죄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꼭 그렇게 티를 내면서까지 타성과의 불화를 내세울 필요 있나. 굳이 환상의 부재를 못마땅해하지 말자, 왜 심심함에 꼭 반항해야 한단 말인가! 라면서 꾹 참고 꿋꿋이 일이나 할려고 했나. 뻥, 아니다. 솔직한 심정이 그랬으니까.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쉽게 되겠나. 그동안 질주는 S자로, 인생은 W로, 사랑은 파이값으로 허둥대기만 했는데? 때문에 나는 모험심을 타이르는 데 여지없이 실패했다. 감수성의 발동을 설복할 마음은 그만 동력을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쾌락마의 위력이 되살아났을까? 눈이 번쩍 뜨이며 깜작 놀랄 만한 야생마에 올라타면 좋겠지만, 역시나 내 여건은 보나마나 허접한 당나귀일 뿐이었다. 바로 이때, 어떻게 이처럼 탁월한 우연과 기막힌 행운이? ~같은 일은 전혀 없었다. 뭐라고? 경박함도 재미없다. 그 언제 내가 촐싹맞고 까불댔더라, 그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난 아마도 듣고 싶은 말은 그것 아니냐고.
   「돈푼깨나 있는 저런 속물 같으니라고!」
    뭐시라고? 참 나, 또 가식! 웃기지도 않다. 재미도 없다. 말도 안된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짜릿한 기쁨의 순간은 다 허구고, 까마득하며, 가짜다. 신비는 없다. 환상도 깨졌다. 진짜로 날씨는 어둡다. 아이 좋아라~ 같은 일, 있을 턱이 있나. 워매 좋은그~,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안되겠다. 이랬다가는 또 다시 '없다&없어'의 역설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딱히 중요한 할 일은 없고 해서, 저기 탁자에 올려진 초대권 다발로 선심이나 쓰자면서 친구를 불러내기로 했다. 이거 그냥 어쩌다 생긴건데 너 가져! 라고 하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로즈마리를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우린 벌써 만났다 치고.
    탁자에 로즈마리와 나.
    우리는 연인처럼 대화를 나눴다.
   「오빠 뱁새야?」
   「누가 그래, 나 뱁새라고!」
   「아니면 말지, 왜 그렇게 흥분해 오빠?」
   「그야... 우리가 친한 사이니까 그러지.」
   「아 오빠. 나 깜짝 놀랐잖아. 난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 그리 물어본 게 아니라, 핸드폰으로 이거 저거 보다가 언뜻 그런 내용이 보이길래, 그냥 장난으로 물어본 거잖아. 우린 그런 말 해도 되는, 아니 해야 하는 사이니까. 안 그래? 아무튼 잘 알겠어. 오빠는 뱁새가 아니다 라고. 그럼 오빤 무슨 새야?」
   「나? 왜 내가 새라야 하는 거지?」
   「글쎄. 왜 그러지? 생선보다는, 아무래도 새가 낫지 않나? 허나 굳이 물고기로 비유하고 싶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어.」
   「(피식) 모르겠고! 좌우간 난 수시로 바껴.」
   「그래? 오빠는 어떻게 수시로 바뀌는데?」
   「일단 닭부터 시작하지. 왜냐하면 같이 으쌰으쌰할려면 그럴 수 밖에 없어. 우리는 또 그때가 되면 정신이 없거든. 그때의 종류가 좀 많긴 한데, 그건 넘어가고. 허허. 그와 별개로 또 어쩌다 갑자기 개구리가 날 지배하겠지. 어디로 튈 줄 모르거든. 나도 날 잘 몰라. 마치 여자의 마음처럼 말이야. 나는 있지, 누구야 형 때리지 마라, 같은 말도 스스럼없이 친한 동생한테 말하곤 했으니까. 그러니까 팔색조 기질 역시 다분하다고 할 수 있을 걸! 거기서 끝이냐? 섭하게 왜 이러시나! 가죽점퍼 입으면 표범이요, 수트는 또 날 제비로 변신시켜주겠지. 흐흠. 또 혼자 있을 땐 부엉이요 기분 좋으면 오리. 탐스런 과일에 대해 친구가 고민이 많다? 나는 코끼리가 되어 심리학에 대해서 논할 만반의 준비를 갖출걸? 우리끼리 사랑 얘기를 해서는 절대 안되지만, 우정이 뭔지를 모르지는 않거든. 그리고 상큼한 숙녀가 몇 시 방향에 있나를 탐색할 땐 응당 늑대. 그런데 참 이상한 게 뭐냐면, 그게 말이야, 그게 뭔 줄 아니? 그게 어떻게 된 게 또 슬리퍼를 신으면 자칼 느낌이 그냥 팍~! 응? 그리고 나는... 구레나룻이 안 어울리지만 나 뿐만 아니라 우린 언제나 하이에나처럼 상시 레이더는 풀 가동한다고 할 수 있지. 그럼. 물론 기본적으로 개미처럼 일하고, 나비처럼 사랑하며, 벌처럼 바쁘고 싶을 테고 말이야.」
   「와!」
   「산토끼. 암여우. 수닭. 암캐. 부엉이. 포니. 하물며 판다까지. 다 가능해. 뭐든 말만 하라구요, 아가씨. 으응?」
   「내가 봤을 땐 말이야, 있지 오빠! 응? 있잖아. 딱 그 뭐랄까, 음. 그래. 맞어. 옳지. 그치? 음. 그렇다니까. (딱)! 개. 개야. 오빤 그냥 개라고. 응? 그냥, 개!」
   「뭐?」
   「왜냐고? 왜냐하면 관상이 개상이니까. 푸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어? 아닌데! 오늘은 또 말상이네. 이거 정말 어찌된 일이지? 난 통 그 사정을 모르겠어. 아무리 해도 모르겠다고. 그럼 혹시 지금 오빠는 카멜레온? 사랑의, 아니면 흑심의?」
   「계속 그렇게 해. 내 기분이 약간 꿀꿀한 건 꿀꿀한 거고. 차라리 그게 더 좋아. 모르는 걸 얘기하라고. 응? 아는 거 말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대단한 척, 잘난 척, 자기 비하 2번에 쓸데없는 거 뽐내기 1번도 좋으니, 아니 10번 100번도 좋으니. 될 수 있으면 앎과 모름의 그 중간 지점을 내게 알려달라고. 확실히 아는 것, 도무지 궁금한 거, 긴가민가 애매한 거. 일단 그걸 명확히 구분해보라고. 알겠니?」
   「오빠. 너무 어렵다. 오빠 충격 받은 거야? 기다려봐 오빠. 응? 오빠! 오빠 기분 뭉게구름 위로 덩실덩실 띄워보내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거. 오빠도 잘 알잖아? 응?」
   「」
   「그런데 있잖아,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 오빠가 인기 순위 탑 3에 뽑혔어. 것도 겸손하게 딱 3위로 말이야. 1위면 부담스럽고, 2위는 왠지 기분 나쁘고, 3위면 괜찮지 않아? 나름 흐뭇한 순위 아닐까? 썩 불만족스럽지 않은 성적이잖아?」
   「뭐, 진짜? 허허허.」
   「그런데 그게 말이야. 그 순위는 3위까지 밖에 없어. 그래서 1, 2위 빼고는 별 의미 없어.」
   「그럼 그렇지. 나만 그런 거 아니야. 다른 남자들도 다 그래. 안 그러면 비정상이거나 동성애자라고. 물론 꼭 그렇진 않겠지만 대체로 몽정기라는 그 어떤 뭔가가 있거든. 알겠니?」
   「으잉? 나 암말도 안했는데! 그리고 나 무슨 뜻인지도 몰라. 그냥 나 못들은 걸로 할께. 그런데 왜 갑자기 귀가 빨개지지? 나도 잘 모르겠네.」
    효과음!
    수증기!
    효과음!
    수증기!
    효과음! 수증기! 효과음! 수증기!
   「있지 오빠. 내가 오빠한테 하나 선물해주고 싶은 게 있어.」
   「선물? 그게 뭔데!」
   「나비넥타이.」
   「나비넥타이?」
   「응. 나비넥타이. 그런데 칩이 심어져 있지. 실시간 위치를 핸드폰으로 볼 수 있도록.」
   「그건 왜?」
   「방울 같잖아? 고양이 목에 달린 방울. 고양이한테 방울을 달자, 그런데 누가 달텐가! 라는 쥐들의 숙고. 딱 떠오르지 않아? 하긴 앞면만 보면 딱 떠오르지 않겠네. 왜냐하면 오빠는 개구멍으로 들어가서 뻔트를 댈 테니까. 개는 쥐구멍으로 못들어가지만, 쥐는 개구멍으로 들락날락할 수 있잖아. 안 그래? 그러나 쥐는 쥐야. 오빠는 개고. 한편, 뒷면을 보아하니 글쎄 동공의 기묘한 움직임 하며 응큼한 상상과 별개로 쥐구멍에 대한 지식도 꽤 일가견이 있네? (딱) 톰과 제리! 고양이 담 넘어가듯 한다, 그런 말 못들어봤어, 오빠? 기록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알겠네. 내꺼 하자 라는 유별난 추억도, 바꾸자 라는 특별한 훈장도 찾으면 찾는대로 나오겠구먼. 그치만 그럼 뭘해? 뚜껑 없는 차가 없잖아. 웨건과 진공청소기라... 롤스로이스와 패왕은 어떨까. 아님 토끼와 커피포트?」
   「아 쫌!」
    ......휴지기......
    ......휴지기......
    ......휴지기......
    그 다음으로 어떻게 분위기는 다시 부드러워졌고, 나는 그녀에게 뱁새에 대해서 다정히 알려주었다.





    6

   「뱁새라고 명확히 찝어서 말할 수도 있고, 학설에 따라서는 그걸 50점으로 볼 수도 있어. 허세─허영심─자존심 지수를 50점이 중간이라고 하듯이 말이야. 뭐가 됐든 50은 절대로 나쁜 게 아니야. 그건 지극히 정상일 뿐이니까. 또 타고난 건 어쩔 수 없어. 그렇지만 천성과 세상사의 중간에 내가 뭘 그려넣을지는 내 천성으로써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고 말이야. 그 제어가 가능한 범주 내에서 내가 나와 싸우며, 다투고, 사귀며, 사랑하는 일! 그건 아마도 인생이겠지? 그래서 리듬을 타는 게 중요하고, 또 조화와 어울림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지. 그야 어쨌든 뱁새과가 민감한 감정은 주로 이런 항목들이지.
    불만족, 열등감, 패배감, 열패감, 지는 비교, 좌절감, 상실감, 불평, 원망감, 질투심, 자존심!
    즉, 질주하는 경주마 역할은 물론 마장마술과 함께 회전목마역까지, 뭘로 봐도 자재다능하다거나 적어도 한 가지 큰기술만 있다면 대체로 뱁새일 리는 없어. 올라탄 말이 튄다마든지 천리마든지 뭐가 됐든 그걸 타는 기수들은 다양하지. 촌닭, 촉새, 팔색조, 파랑새, 백조, 오리, 앵무새, 까치, 까마귀, 갈매기, 꿀벌, 나비 등등. 그분들은 잔재주로 눈속임하고, 허풍으로 어느 정도 대신하는 게 가능하며, 어쩌다 행운에 힙입어 출세를 해. 일단 말로써 너와 나 둘 다 썩 싫지 않은 균형감, 바로 그 괜찮은 지점을 찾을 줄 안다고. 내게 대어를 잡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을려나 몰라도 다시 말해 잡힌다고. 뭐가? 물고기가! 그건 응당 뱁새가 아니야. 물론 1.0 버전으로 보면 그렇고 많은 걸 성취하신 분들이라 할지라도 조류 판명기 2.0으로 보면 가면은 벗겨질 테고 말이야. 일단은 그래. 그 음성적인 감정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능이니까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허세 97, 허영심 98, 자존심 99처럼 뱁새 지수가 99.99로 폭등하는 순간을 잘 분석하면 알 수 있어. 그 반짝이는 찰나는 1~1.5개의 순수한 감정이 아니라 복합적인 감정이 기제가 된다고 할 수 있지. 불만족? 성공의 발판이 되기도 해. 열등감? 타고난 걸 어쩌겠나. 패배감? 진 건 진 거고, 져서 오히려 나을 수도 있어. 상실감? 나는 올라가서 행복감이 뭔지나 느껴본 다음에 절망과 상심 그리고 가난이 찾아왔지만, 그분들은 애초에 상실감 자체를 경험할 수 없다는 것! (딱), 응? 처음부터 그 경로는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는 것! 불평, 친해 봐봐! 원망감, 간질간질 깐족깐족 부글부글 부추겨보면 돼! 질투심? 질투를 하기도 받기도 그렇게 둘 다 경험하면 좋은데, 질투 자체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의 입장은 정말 어떨까! 호박...론은 그만 귀찮게 하고라도 말이야. 앞서 말했듯이 단일한 감정이 아니라 복합됐을 때 커피포트는 바빠지고, 화염방사기는 작동하는 거지. 불만족, 열등감, 패배감, 열패감, 지는 비교, 좌절감, 상실감, 불평, 원망감, 질투심! 물론 나도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이렇게 말이 많아지는 것일 수도 있어.
    다시 말해서, 계기판에서 빨간 막대 그래프가 언제 그 끝을 파파팍팍 정신없이 두드려대는지, 그 뱁새의 절규는 다 이 때문이지. 형편이 어떻고, 코너에 몰리며, 패배가 반복되다 보면 슬슬 차오르고 차오르고 차오르다 (딱)! 이 음성적인 감정 가운데 순수하게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러면 바로 <뭐 + 뭐 + 뭐 + 뭐>가 되는 거지. 무슨 1 + 1 판매 행사처럼 말이야. 그냥 웃자고 괜히 칼럼에다 내가 말도 안되는 농담을 남발한 게 아니라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개그라고 그걸 하고 또 하고 계속 남용했을까? 아니야 아니야. 내가 바보인 건 맞지만 그냥 단순히 바보라서 그런 게 아니라고.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 어설픈 3대 사랑, 허세-허영심-자존심 지수등. 왜 그럴까 찬찬히 생각하고, 진득하니 고민하며, 오래도록 고찰하다 보면 알 수 있어. 그럼. 물론 그럴려면 내 직관력이 월등하다던가, 주어진 정보가 풍족하다던가, 가설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졌을 때라야 가능한 얘기지. 당연히 친해야 하고 오래도록, 많은 사람을 만나서 풍족한 자료가 쌓였을 때,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 DNA들의 공통점을 분석 가능할 때라야 그 어떤 개성과 정체성을 구체화할 수 있겠지. 즉 지역 불문 뭐 불문등 일정 비율이 보장되는 인류의 특징일 뿐. 그래서 여성잡지에서 그렇게나 친절히 꼬집는 주제가 뭐겠어? 어떤 남자라야 멋진 사랑을 할 수 있나, 만약 헤어지더라도 어떤 장르로 헤어지지 않을 것인가! 바로 그 최소한의 지혜를 알려주는 것 아니니? 그이는 TV 볼 때 주로 무엇을 본다, 영화는 대략 머머류를 좋아하고, 개인 홈페이지에 대체로 무엇을 올리는가. 음악은 어떤 걸 좋아하고, 잔재주를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얼마나 잘났는가! 생활환경, 내 방, 블로그, 소셜 네트워크, 사교생활, 핸드폰 앱을 사용한 기록을 통계 내면 절반은 맞출 수 있어. 뱁새인가 아닌가는.
    예를 들어 앱은 많이 깔려있는데 소셜 네트워크는 전혀 하지 않네? 전-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은 이렇게 말했지. 소셜 네트워크는 인생의 낭비다 라고. OX 문제가 아니니까 한마디로 의미 있는 얘기! 그런데 대충 사는 인생으로써 인생을 낭비하냐 마냐 라는 팔짜도 아니고, 매우 성실하지만 속마음은 원천적으로 '막살자 주의'라면 소셜 네트워크를 하지 않는 이유가 전혀 다르겠지. 그분께서 왜, 왜 소셜 네트워크를 하지 않냐고? 할 게 없으니까. 자랑할 게 없으니까. 하기도 싫으니까. 남의 자랑만 보라고? 내 부인 못생긴 거 그걸 뭐하러, 내 입으로 말하냐고. 내 입 아프게 뭐 한다고! 내 기분이 특별히 좋다면 모를까, 평소에는 말을 잘 하지도 듣지도 않는데, 자발적으로 그걸 왜 해야 하냐고. 지는 비교는 듣기도 싫고, 말하기는 더 싫어! 게다가 객관적으로 따져 보니 나는 최고가 아니고, 그런데 단짝은 무식하게 자기가 최고라 하고, 에라~ 모르겠다 모두 최저! 고운 마음에 아름다운 심보, 어떻게 하면 뱁새가 행복할 수 있을까? 물론 돈이겠지. 그렇지만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분을 만나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기분이 좀 그렇다는 것. 뱁새는 뱁새라는 점 때문이야. 가령, 여-바텐더에게 제일 돈이 많을 것 같은 친구로 내가 꼽히지 못했을 때 야유도 못해. 하기 싫어. 보기도 싫어. 무조건 싫어. 꼴도 보기 싫다구. 심성이 쥐구멍에 몰리면 둘 중 하나. 중간은 갔던 마음가짐이 틀어지거나, 늑대는 양의 탈을 벗는 일. 어떤 술집에서 남자가 여급을 선택할 수도 있는데, 반대로 때로는 분위기에 따라 여급이 남자를 선택하기도 해. 그렇게 친구랑 단둘이서 여급 둘을 만났을 때, 비교적 나은 여급에게 선택 받지 못했다? 왜 부모는 나를 이렇게 나았냐고 투정해. 단 1번도 한눈 팔지 않고 살았는데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하느냐, 라는 말이 진짜로 딱 편도선에서 멈추는 일. 그 때문이지. 빅뉴스, 톱뉴스, 핫뉴스에 내가 오르기는 바라지도 않는가 몰라도, 그럭저럭 부유하기는 해야 할 꺼 아니냐고! 부정적 감정 + 소극적 표출이 특징인데 그런 친구들끼리 친하다면 모를까, 부자라면 모를까, 재미도 없는데 소셜 네트워크에서 긍정주의자인 척? 사석에서 친구끼리 하는 얘기처럼 말하자면, 그건 미친 거지! 더 심한 말은 우리끼리는 하지도 듣지도 마세나. 아무리 친해도 말이야. 얼굴 찡그릴 기회야 따로 있을 테니까. 하이 개그와 고품격 농담을 딴 데서 아깝게 허비해야 할 이유까진 없지 않겠어? 자, 그건 그렇고 이와 같은 주인공을 보자면 핸드폰에서 주로 사용하는 앱은 딱 3개가 전부야. 앱은 많이 깔려 있지만 자주 쓰는 앱은 오직 딱 3개.
    첫째, 포털 사이트 앱.
    둘째, 남성잡지 앱.
    셋째, 나머지(게임이나 지도나 기타 잡다한 것).
    첫째는 오직 잔지식 섭렵이랄지 뉴스 읽기. 책읽기는 20살 이후로 0이니까 그거라도 해야지 뭐. 둘째는 생활로 보자면 '못 오를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 주의지만 소비생활과 별개로 잔지식은 구경이고, 심심풀이 땅콩이며, 투정이니까 OK. 물론 내가 복권에 당첨돼서 상-중산층에 포진하면 그건 또 다를 테고. 그리고 셋째는 문명의 이기고. 이와 같은 예를 놓고 생각해본다면 동성끼리는 직감적으로 느껴. 첫인상으로 느끼건대 <A.성격 좋다>의 보기 가운데 <a.성격 좋다>만 우리는 유일하게 '성격 좋다'로 인정하지. 왜냐, <A.성격 좋다>의 하위 보기는 그 후보군이 많기 때문. 따라서 <A.성격 좋다>에서 <a.성격 좋다>만 오직 성격이 진짜 좋은 거야. 물론 호구 그룹군도 거기 포함되고. 뭘 좀 아는 남자는 절반쯤 교집합을 형성할 테고 말이야. 동성 사이에서는 성격이 좋든 안 좋든 친해지기 쉽지. 처음 만나서 마시고 노래 부르며 으쌰으쌰, 평생을 약속하지만 오늘 지나면 그거야. 안녕이라는 인사조차 과분한 남남. 부지기수야. 남자 대 남자로써 그걸 어찌 모르겠나. 그렇다고 여자들끼리라고 <A.성격 좋다>의 후보군이 없겠나? 모르긴 몰라도 남자보다 훨씬 많을걸! 그처럼 우리는 <A.성격 좋다>의 나머지 후보군을 전부 성격 좋다 라고 인정하지 않아. 서열 밖에 모르는 수컷 아부왕, 언뜻 보면 성격 좋아. 그런데 딱 등 돌리면? 아휴 말도 마, 말도 말라구. 판매왕이랄지 보험왕등 세일즈맨도 태반은 성격이 나쁠 리가 있나. 그래서 우리는 보면 알아. 그건 형씨가 나 기분 좋으라고 하신 말씀이고! 라고 말일세. 그렇지만 이성도? 동성은 가면을 투시하는 반면 이성은 눈에 콩깍지가 씌이는데? 그러기는 힘들어. 안 힘들면 사랑이 얼마나 어렵겠냐고. 우리를 보라고 우리를! 우리는 이성을 만나면 금방 친해져. 누가 됐든 만나자마자 친해진다고. 응? 성격이 좋거나 딱히 모나지 않은 남자, 사기꾼이 요리를 예단컨대 딱 3번 만나면 끝나. 첫째 격식 있는 식사, 둘째 함께 술을 마신다, 셋째 골프! 딱 삼구삼진이면 게임 끝난다고. 응? 끝!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성격 안 좋고, 뭘 좀 모르고, 자존심 극상에, 뱁새과에다 이러쿵저러쿵하다? 본인은 리듬따라 허세 80이 가능하지만 리듬에 충실한 타인의 허세 80은 짜증내며 물개박수를 꺼린다? 직장에서는 만년 굽히고 다니다가 친한 친구를 만나서는, 친구는 내 뜸한 허세 80을 들어주는데, 친구가 어쩌다 허세 80을 찍으면 광분해! 뭐지, 뭐지, 그건 정말 뭘까? 나 뱁새요 라며 이마에 써주라는 건가? 뭐 이런 주홍글씨가 다 있냐고! 하물며 그 단짝인 촌닭은 진짜로 제일 친한 친구의 신부들러리마저 외면한다? (설레설레)! 조류의 분과라는 차이가 존재하고, 사랑도 외모 차별이며, 우정도 터놓고 말하자면 서열인 것. 때문에 우정이 추접하고 사랑이 유치한 건 그저 자연스러울 따름. 그러므로 말이 통하는 영혼끼리의 만남, 나아가 하늘이 맺어준 사랑은 드물어야 정상 아닐까? 그렇다고 어설픈 3대 사랑이 비정상이란 말은 아니야. 하루에 12번도 더 첫눈에 홀딱 반하는 게 뭐 나만의 재능은 아닐 테니까. 아무튼,
    나는 있지, 왜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라는 학명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졌는데 뱁새라는 유형은 정식 학명이 없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 혹시, 그게 그건가? 그럴지도 모르고. 뭐야, 그럼 나는 안다박사에 아무말 대잔치 학파라고? (설레설레) (수증기 부글부글)! 그러니까 허세도 그렇듯이 어설픈 게 더 뭐 어쩐다니까. 100만명 가운데 1-2명 정도는 다를 텐데, 꼭 어정쩡하면 딱 그래. 빈수래가 요란하다고! 삐악삐악, 꽥꽥 꽥꽥, 따따부따, 짹짹 짹짹짹, 끼룩끼룩! 그런데 여자들이 뱁새와 미술관에 가면 그건 뭐지, 뱁새와 참새 미술관에 가다-인가! 사랑이란 뭘까, 눈에 콩깍지가 씌였다는 아름다운 섭리 아니겠니! 그렇지만 나중 회한도 있고, 환멸도 있으며, 아무리 그래도 여자든 남자든 한쪽이 한쪽을 더 사랑하는 경우도 있지. 아니 많아. 엄청 많아. 완전 많지. 길게 가는 사랑은 아마도 그게 태반일걸. 대등한 사랑은 알고 보면 많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까. 뿐인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건 또 어떻고.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알지 누가 알겠나. 아니 그렇소, 낭자?
    마지막으로 우리 오빠는 아니다? 그 가운데 하나. 단지 내 주관적 견해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보기에 뱁새와 90퍼센트 흡사한 여건이다, 그런데 우리 오빠는 그렇게 꽉막힌 사람이 아니다? 속좁지 않다? 어둡지도 쪼잔한 쫌팽이도 아니다, 그건 뭐냐구요? 그건 닭. 늑대. 개. 많네. 또는 하이에나? 그래, 당나귀!」
    결국 나는 이상한 주제 때문에 말을 너무 많이 해버렸다. 나도 모르게! 응? 그냥 뭐 어쩌다가.
    그래서 나는 입이 아프고, 그녀는 귀에서 피가 나고!
    뭐야?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잖아! 저런 저런 저런.
    미지의 모험은 유난스러울 뿐더러 있을 수도 없다.
    공치사할 기회도 구설수에 오를 일도 없다.
    결과만 말하자면 나는 로즈마리한테 험하게 꾸중 같지 않은 꾸중을 들었다.
    그렇게 나는 VIP 초대권을 선사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녀와 헤어졌다.
    썩 내키지 않은, 우리의 작별. 뭐야 이거, 괜히 만났잖아? 저런!





    7

    여심을 사로잡고 인기를 가로채며 큐피트처럼 요술을 부리기. 호박과 화병. 페라리와 에르메스. 꽃을 사랑하는 세 남자. 최선을 다하자, 대충 살자, 막살자!
    뭐? 그러나 인간은 원래 불완전한 존재. 곧 열정가─열망가─정력가일 때 피의 색깔이 아마도 살짝 달라지는 건 아닐까? 초록색─파란색─빨간색으로! 그런데 장밋빛 인생을 위해서라면 핑크색은 어떨까?
    보아하니 프로메테우스가 천상의 불꽃을 지상의 인간에게 선사했으니 그에 대한 화답으로 신기한 환상머신을 가동해볼까? 눈부신 행복은 무엇인지, 찐한 사랑은 대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통 모르겠으니, 썩 나쁘지 않은 구상일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몽상은 그만하면 됐고. 어찌 됐든 솔직히 내 재능마는 분명코 비리비리하니까, 고로 나는 이번에 엉뚱마의 요술에 운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사무실을 나섰다. 오늘 일과는 이쯤에서 마무리. 그렇게 나는 사무실을 나섰다. 최근 단골이 되서 자주 들리는 근처 카페가 나를 기다리니까.
    그곳의 이름은 브렌따노!
    그곳에 도착해서 나는 주인장과 대화를 나눴다. 차는 카푸치노!
   「주인장. 오늘 하루 어땠소?」
   「나 말이오? 어땠겠소. 실컷 커피나 팔았지. 허허허. 내게 무슨 속절없이 빨려들어갈 수 밖에 없는 미지의 마법이라도 있겠소? 그렇지만 우리, 무료함에 괘념치 말고 상심에 낙담하지 말기로 합시다.」
   「형씨는 말을 너무 잘해. 나는 글을 너무 못쓰고.」
   「칭찬치고는 너무 성의 없어. 나도 좀 은근히 띄워주면 안되겠소?」
   「내가 언제 다른 숙녀를 은근히 띄우는 걸 보기라도 했단 말이오?」
   「에이 이 양반이 너스레 떨기는. 우리끼리 그러지 말기로 합시다. 보면 알지. 응? 딱 보니까 여자 마음 들었다 놨다 하겠구만 그러네. 자, 어떻게 엎드려 절 받으려면 내가 먼저 환상 측정기라도 선물해야 하오? 말만 하시오. 허허허.」
   「그러지 말고 차라리 내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건 어떻소? 아아 실수. 농담이 망했소. 인정. 딱 인정! 아, 혹시 민감한 사안이면 미안하오. 허허허. 아니오? 아니겠지. 긴가? 그런데 뭐가! 그야 타인의 취향. 내 취향이 존중 받는 게 당연하듯이 타인의 취향 역시!」
    바로 그때 카페 바에서 틀어놓은 TV 화면에서 조그맣게 뉴스가 나왔다. 유명하신 어느 양반이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는 내용의 뉴스였다.
   「허허. 나도 저렇게 환원할 뭐나 있으면 좋으련만.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환원 말이오? 어떻게 생각한다...라고 생각해보진 않았소만, 즉흥적으로 말은 할 수 있소. 내가 뭐 음유 시인도 뮤즈도 아니지만 무의식이란 게 있으니까 말이오. 안 그렇수? 환원이라... 평소에 솔직한 생각을 듣기도 말하기도 쉽지 않은 주제구만. 질문 좋소. 질문 좋아. 가만 보니 아제가 나보다 한 수 위야. 형씨 설변쯤 되면 나는 이미 동기부여 비디오를 팔아도 엄청 팔아제꼈을 텐데. 거 참 아쉽구만. 그러다 안 팔리면 창고에 쌓여있는 비디오를 몽땅 기부할 수도 있고. 그랬는데 만약 돈으로 주라 하면 어쩌지? 참 나! 아무튼 물어보셨으니 답하자면 이렇다오. 환원을 하냐 마냐, 자수성가 했냐 못했냐! 몇 가지 경우의 수가 있겠죠? 당연히 도표와 그래프가 빠질 수 없는 법. 오늘 낮에 내가 그동안 썼던 칼럼을 대충 훑어봤소. 그랬더니 유독 인기라는 낱말이 많이 등장합디다. 그럼 나는 왜 그렇게 그 단어를 소홀히 대하지 않았냐? 왜 그렇게 거기에 천착했냐? ~하면 억지로 걔만 총애한 게 아니라 어떤 원리 때문이었소. 천문학적 부에 대해서 유명하면 환원의 비율이 높고, 덜 유명하면 비교적 낫나? 그 역시 한번 정도쯤만 생각해봤소.
    그래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렇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에스프레소─카페라떼─칵테일 가운데 마시고 싶은 걸 마시고, 하고자 하는 걸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뻔트는 대는 일. 그걸 만약 인생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멋진 인생을 사는 방법이 다양하듯이, 이 세상에 보답하는 일도 다채롭다는 것. 때문에 환원이라는 방법을 택하고자 하면 하고, 아니다 자기는 누릴 걸 좀 더 누리고 다르게 기여하겠다 하면 그렇게 하는 거고. 끝.
    자, 그런데 환원을 아무나 할까? 하면 또 꼭 그렇지는 않겠죠. 그러나 환원을 할 수 있는 상류층이라고 단순히 환원 자체가 의미 있기 때문에 환원을 하냐, 꼭 그렇지는 않죠. 쥐도 새도 모르게 착한 일을 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꼭 칭찬을 받고 싶어서 착한 일을 하는 사람도 있겠죠. 전자든 후자든 둘 다 좋은 건 마찬가지. 다만 인간의 본능은 어디까지나 신부들러리보다 신부인 것. 따라서 내가 천문학적 부를 이 사회에 환원하겠다는데 아무도, 개미도, 뱁새도, 벌꿀도 쳐다보지 않네? (딱) 그 입장이라면 나 같아도 애초에 그럴 맘이 발생하기는 쉽지 않겠죠. 뿐만 아니라 오늘은 환원하고 싶어서 딱 환원을 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내일이 딱 되니, 당장 아쉽네? 환원 그거 괜히 했다 그거지. 뉴스 몇 개 나간게 다거든요.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 그 말이죠. 게다가 환원을 하는데 아주 드물게 또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테고, 환원이 꼭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도 없겠죠. 그래서 저는 환원 같은 미덕은 야망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상남자들한테 썩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비율만 유지되면 되고, 오히려 누구나 환원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라며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있도록 계층의 사다리가 만인에게 너무 인색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봅니다.
    아닌 말로 환원이 대세가 되어버리면, 뭐 꼭 그럴 리도 없겠지만 타임머신 원리로 따지자면 일부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또 문제점이 있지 왜 없겄소. 그게 비율이 너무 비정상적으로 되어버리면 아마 모든 게 꽤나 위축되고, 적잖이 폐쇄적인 사회에다, 어쩌면 많이들 꿈을 잃어버릴 소지도 있다구요. 나는 좋은 옷을 입고, 멋진 차를 타며, 아름다운 사랑에다 풍족한 호화 생활과 영화로운 인생을 살고 싶은데! 그런데 환원한다는 소식이 너무 자주 뉴스에 나온다? 가난에서 부자가 된 의미가 퇴색되어버릴 수도 있겠죠. 그런 뉴스 한 번씩 나올 때마다 어느 계층 친구들은 멈칫~, 안 그럴 수 없지 않을까요? 에르메스니 베르사체니 포르쉐니, 그 산업에 딸린 종사자가 몇 명이고 그분들이 거기서 번 돈으로 어디 커피만 마시겠소? 병원비도 충당하고 품위 유지도 신경 쓰고 생필품을 사야 하지 않겠소. 만약 환원이라는 어떤 비율이 비정상적 상태가 된다면 문명의 풍요로움이 절반은 사라져버린다에 내 웨건을 걸겠소. 그건 곧 자본주의의 반대로 가는 길이걸랑요. 만약 그렇게 된다? 우리가 아는 드라마니 영화니, 예술과 오락산업 그런 거 쇄락하는 거 시간 문제겠죠. 단순히 군사적으로 A와 B가 그럭저럭 평화의 관계에 있을 때, 그 관계가 심하게 경색되면 단순히 교류만 끊기는 게 아니라 어떻게 되겠소? (딱) 거대 자본은 싹 다 빠져나가버리겠죠. 물론 과장해서 말했을 때 그렇다는 거고, 그런 운동성이 없진 않다 그 말이죠. 네. 그럼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었는데, 물이 다 빠져버린다? 둘 중 하나죠. 배가 산으로 가거나, 바다가 육지가 되거나. 바닷물이 사라지는 내용의 드라마가 그래서 재밌다는 거죠. 장편감으로 딱이니까요. 그게 끝일까요? 동기 부여업은요! 심하게 수평적이기를 바라면 그에 반대하는 자본은 어디로 갈까요? 당연히 숨거나 지하로 가겠죠. 카지노의 매출은 떨어지고, 경제의 성장 동력도 삐걱거릴 가망성이 커지겠죠. 그럼 자연스럽게 인류의 시간표는 다시 뒤로 갈 가능성도 없지 않겠죠. 그 뿐만이 아니에요.
    일단 법으로 정해진 게 아닌데, 그걸 법으로 확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라고 왜 없을까요? 일단 (대)환원이라면 대체로 불문율이 있죠. 인생 후반기에 해야 한다는! 그래서 늦으면 늦을수록 효과는 커지겠죠. 어떤 효과요? 사회적으로 좋은 효과도 있겠지만, 순수하게 개인의 명예라는 수학적 효과 말이죠. 그렇지만 나 잘 먹고 잘살기 위한 인생, 나 잘난 맛에 살며 나 행복하기도 바쁜데, 환원도 좋지만 날이면 날마다 그분들에게 물개박수만 치고 있을 수도 없어요. 뉴스, 하루면 잊히죠. 누가 누구랑 사귀네, 누가 누구랑 헤어졌네 라는 소식이 들리면 나도 모르게 그래야 하나 어떨 땐 헷갈려요. 왜냐하면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할 일들도 많으니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니까요. 쟤는 뭔데 나서서....! 네? 그게 끝이 아니겠죠. 사회 환원을 하지 않아야 할 경우도 적지 않죠. 환원이 어느 비율을 넘어서면 이 세상은 기업 사냥꾼들 천국이 되게요? 안 그래도 자본의 논리 때문에 폐해가 이만저만하지 않은데요?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힘과 다각도로 살펴보는 습관을 잃는다면 사기꾼들 발가벗고 춤 추며 난리 나겠죠. 왜 아니겠어요?
    그렇다고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나요? 기업 사냥을 달리 말하면 M&A 즉 기업인수합병. 매수자와 매도자의 만남이요,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사랑. 그래서 좋게 보면 좋은 거고, 나쁘게 보면 나쁜 것! 예를 들어 가전제품 회사가 자동차 산업 즉 완성차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싶네? 방법은 두 가지죠. 첫째 내 브랜드를 만드는 것, 둘째 기존 브랜드를 인수하는 것. 첫째는 0에서 시작하는 거고, 둘째는 못해도 50점 깔고 시작하는 거죠. 물론 둘 다 장단점은 있겠지만요. 고로 M&A는 어떻게 보면 천사고 달리 보면 악마일 수도 있겠죠. 마치 사람처럼요. 50 대 50으로 상호 이득에 기반해서 M&A가 있었다면, 그걸 표현하는 헤드라인도 천차만별이에죠. 가령 건조하게 어디서 어디를 인수했다 정도가 있으면, 어디가 무엇을 꿀꺽했다도 있겠죠. 대중 전달 매체를 통하여 일반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리는 일, 보도요 언론이며 오락산업의 할 일이겠죠. 네 좋든 싫든 사명감이요. 산업이 아니라 학문이면 신문방속학일 테구요. 그래서 그런 알력의 다채로움을 보면 직구가 아닌 변화구에 대해서 살갑도록 '왜'를 우리에게 대령하거나, '어떻게'를 우리게게 주입시킬 수도 있겠죠. 가령, 민감한 내용이 나오네? 국내용이냐, 견제용이냐, 쟁점용인가, 구태의연한 정치용인가. 타임머신 원리와 세계 무슨 지수까지 따져서 보면 보이기 마련이겠죠.
    아울러 뭐 어떻게 된다면 처음부터 도전 욕구 자체를 저해시킬 요인이 매우 크겠죠. 어차피 돈 벌면 다 환원해야 한다고? 신기록 달성하면 뭘해, 어차피 깨질 텐데! 성공해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죠. 사회 환원에 대해서 유독 말 많고 어쨌던 사람들, 그분들이 운 좋게 벼락부자가 되신다면 당연히 캥기지 않을 수 없을 테구요. 애초에 아득바득 성공해야 할 명분이 없어지면, 3가지 가운데 역으로 엄한 친구가 수혜를 입을 수도 있어요. 최선을 다하자, 대충 살자, 막살자! 환원의 어떤 비율이 마치 신분제가 투철했던 시대랄지 어떤 정치 체제처럼 되어버리면 자본주의의 꽃은 시들 수 밖에 없겠죠. 그럼요. 그러니까 어느 날 딱 환원한다며 기자 회견을 자청했는데 꼴랑, 응? 달랑 기자 몇 분에 카메라는 똑딱이. 꽃단장에 연설문 보며 연습도 했는데, 조명은 어디 갔냐고! 심지어, 그 다음 날 나는 알거지 신세? 오바쟁이라는 놀림을 받아도 꼼짝없이 인정해야 할 만큼 선의를 꼬아버린 점은 제가 깊이 반성합니다. 다만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고, 각자 자기 길을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 인생을 살되, 알게 모르게 착한 일을 하면 그뿐이죠. 네. 그럼요. 유명해지고 싶다, 라는 처음의 마음. 부자가 되고 싶다, 랑 썩 다르지 않은 말이걸랑요. 그래서 물론 과거 기준이지만 종교에서 권장안을 내놓기도 하지 않았나요? 아시다시피 이미 옛날 옛날에 말이죠. 물론 신식으로 따지자면 좀 더 주관적일 테고, 자율적이며, 또 낮아지겠죠. 방법도 다양할 테구요. 지금 세상은 옛날보다 어마어마하게 풍요롭고 복잡해졌으니까요. 어느 급을 훌쩍 뛰어넘게 된다면 존경 받고 베풀고 단지 1퍼센트 이하를 공적으로 베풀지라도, 차라리 나머지 효과로써 그 1퍼센트 효과를 훨씬 더 상회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원래 돈이란 건 자꾸 쓰고, 구르고, 돌아야 좋은 거니까요. 안 그러면 경제는 위축되기 마련이니까요. 경제는 증시와 환율처럼 오르냐 내리냐, 단 2가지 색깔 밖에 없어요. 물론 화답의 최저점은 양심도 있고 평판도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보다는 숫자에 기반한 세금일 테구요. 미리부터 부담 갖지 않아도 괜찮다, 이 말이죠. 실제로 고급스런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평균이 어떤가요? 길고, 잘생기고, 눈부신 젊은이는 거의 없죠. 평균은 중년 이상에 늙은이가 다수죠. 늙은이가 낮춤말은 아니지만 뭐 그렇다는 거죠. 너무 번잡하니 말만 길어진 듯 해서 허허허 죄송헙니다. 어째 또 어떡하다 그렇게 됐군요. 그런데 왜 내가 어쩌다 사극에 나오는 영감님처럼 연설하고 있죠? 혹시 나 말린 건가요?」
    그렇게 나와 브렌따노 사장은 친구 먹기로 했다.





    8

    악마의 천재성은 요원했다. 게다가 따분함은 날 농간했고. 더불어 본심은 자꾸 날 흑심쪽으로 유인할려는 것만 같았다. 건강한 본능이 건전하다면 뭐 나쁘겠냐마는, 일단은 그랬다. 뿐만 아니다. 놀기에 대한 끝없는 욕구는 무엇에 근거하는가는 몰라도, 그 와중에 허당 친구들한테마저도 희롱당했다. 그런데 어쩌면 난 원래 플레이보이인 것일까? 딱히 건실한 삶에서 멀어진 건 아닌데, 왠지 모르게 거울을 보기가 겁났다. 배가 나오고 팔이 짧아지고 목도 짧아지고! 이럴 게 아니라 렘브란트의 작품 가운데 저렴한 거 1점이나 구입할까? 만일 그러면 사무실에 위작을 걸어놓고 다음에 그걸 진품으로 바꿔주......기는 샴푸의 요정도 불쾌해할 것이다. 장난꾸러기들이 알면 짜증내고, 심술쟁이들 귀에 들어가면 큰일날 일이다.
    이처럼 뚱딴지 같은 공상이 늘어만 간다는 건 다 때가 되었다는 신호일 것이다. 보아하니 둘 중에 하나는 근질근질한 거지. 입이든 엉덩이든! 웬걸, 그게 아니라 어딘가에 추파를 던지기 위해 뻔트마를 타고 싶은 건 아닐까?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가택감금 중이며, 집에서 차분하게 쉬고 싶기 때문에. 하지만 남자는 얌전한 고양이가 근방의 생선을 탐하고, 조신한 숙녀가 다소곳이 교양미에 열중하듯 집에 있으면 안된다는데! 곧 나는 정숙한 처녀도 지친 말괄량이도 아니거든. 따라서 나는 일단 집밖으로 나갈 수 밖에! 그런데 어디로 가지? 내 말이!
    그건 뭐 어떻게든 되겠지. ~라면서 나는 곧장 세르벤테스처럼 거리로 나갔다.
    그래서 나는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 피타고라스에 들렸다.
    나는 바 피타고라스에 도착했다. 손님은 오늘따라 1명도 없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의 여주인장과 나는 웃으면 대화를 나눴다.
   「주인장. 요 앞 브렌따노 아시죠?」
   「네 그럼요. 저도 자주 놀라갑니다. 허허.」
   「어제 저는 브렌따노에 들렸고, 오늘은 피타고라스에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있잖아요.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또 모른다면 몰라도 알면서 아무말 하지 않는 것도 좀 뭣하군요.」
   「무슨 일인데 그러시나요?」
   「흐흠. 내 총대를 메고 말하겠소. 거 브렌따노 사장 있죠. 그 양반이 마담 험담합디다. 것도 심하게.」
   「네? 정말요?」
   「아니요. 뻥이에요.」
   「차라리 진짜였다면 더 재미있었을 걸요.」
   「아니 왜요?」
   「왜긴요. 그래야 내가 그 양반이랑 다투면서 친해지고 어떻게 멜로드라마라도 한 편 찍을 꺼 아닌가요. 평소에 영화 찍을 일이 거의 없걸랑요. 선생 삶은 영화인가 몰라도, 저는... 뭐랄까. 요즘 좀 그렇죠. 상쾌한 행복도 살짝만 불편한 불운도 없고, 그래서 지루하고 심심하기만 한 시절. 달리 말하자면 슬럼프, 사랑의 방정식으로 보자면 권태기?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마담. 모든 여자들이 꿈꾸는 지고의 사랑이 뭔 줄 아시요? 고아한 이상 말이오.」
   「그건 뭐죠?」
   「저도 몰라요. 알면 내게 가르쳐주지 않겠소?」
   「심술궂기는! 어느새 능청꾸러기가 다 됐군요?」
   「지금 능청꾸러기라 하셨소? 그럼 남정네들이 그렇게나 열망하는 물질적인 행복을, 그것도 내가 이룩했단 말이오? 아니요. 난 대망을 실현시키지 못했소. 어떻게 보자면 애초에 야망이란 건 없었다, 가 정답이겠죠.」
   「아하~! 그렇다라. 선생님. 플레이보이의 묵시적인 야망을 타결하는 기기 막힌 방법이 뭔 줄 아시나요?」
   「그게 뭔데요?」
   「글쎄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알면 이미 내가 어떤 멋진 남자를 구워삶아서 진작에 허니문을 떠나도 떠났겠죠. 그 일이 성사되기만 했다면야 7번도 더 떠났겠죠. 안 그래요? 아 7번이 뭐야!」
   「마담. 설마 내 재미없는 농담에 보복하는 거요? 만약 그랬다면 성공했소. 나보다 훨씬 썰렁하구만 그래. 보통내기가 아니야. 어디서 물건 소리 좀 들었을 법 하다구요. 정말루요.」
   「칭찬은 칭찬이데 퍽 유감스럽군요. 허허허. 처음에는 안됐는데 어떻게 연습하다보니 되네요?」
   「뭐가요?」
   「너털웃음이요.」
   「(피식) 내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이곳에 들를 게 아니라 브렌따노에 들려서 마담에 대해서 험담을 나누는 건데. 혹시라도 나중 귀 간지러우면 날 생각하시오. 허허허.」
    어쨌든 우리는 얼굴도 많이 봤겠다, 말도 많이 나눴겠다, 오늘부터 말을 놓기로 하는 사이가 됐다.





    9

    순전히 행운 덕분에 신나는 모험에 묻어가는 것일까? 전혀 생각치도 못한 전개에 업혀가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이게 웬떡!
    칼럼 원고료 대신 받은 초대권은 한두 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다 차려진 잔칫상에 슥 하니 숟가락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부러 가공할 만한 초현실적 절정은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카바레에서 잠시 추억의 유행가 달랑 몇 곡 듣고 나오는 게 무슨 퇴폐미도 아니고, 응? 그래서 나는 순진한 척하지 않은 채 당당히 카바레에 입장할려고 했다.
    그런데 뭐야 이거! 초대장이 없잖아? 지갑에 분명 있었는데! 그렇게 뒤지고 뒤지다 잘 찾아냈다. 그래서 그걸 쓱 들이밀고 들어갈려는데,
   「손님. 이건 지난 여름 행사 때 사용된 초대권인데요. 기간 지난 거 말고. 최신! 최신 모바일 초대장을 보여주셔야 입장이 가능합니다.」
   「그래요? 그거는... 없걸랑요!」
   「그래요? 그럼 입장 불가죠. 아쉽지만 발길을 돌리실 수 밖에! 그러니 저희도 무척 섭섭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아 이거 정말 너무 착찹해, (설레설레)!」
    뭐라고?
   「카바레 사장을 만나게 해 주시오!」
   「네?」
    8 대 2 가르마 덩치는 옆에 있는 올백 헤어스타일 친구를, 이런 의아한 진지함은 난생 처음이라는 듯이 쳐다봤다. 살다 살다 광증도 아니고 꽁트도 아니고, 뭐지? 라는 표정으로 말이다.
   「좋소! 라~고 설마 답하리라곤 예상치 않으셨다는 거, 우리도 다 압니다. 어째 잘 아실 만한 분께서, 선생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만 웃으면서 헤어지는 게 피차 좋을 것 같습니다. 규율이란 게 있는 만큼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 저기 저 줄 서서 기다리는 젊은이들 표정, 네? 부쩍 어두워지는 거 보이지 않나요? 어떻게 제가 한쪽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그런데 웬 멀끔한 신사가 다가오더니 아무런 제지없이 카바레에 입장할려고 했다. 날이면 날마다 그런다는 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바로 그때.
   「형!」
   「야, 롭!」
   「형. 여기 웬일이야?」
   「넌 여기 무슨 일인데?」
   「나 가게 하나 열었지. 심심했거든. 그러지 말고 같이 들어가자. 내가 카바레 사장실 구경시켜줄 테니까. 아, 뭐해? 어서!」
    우리는 그렇게 자리를 옮겼다.
    (짜잔~) 벌써 나이트클럽 사장실.
    와~! 나이트클럽 사장실은 이렇게 생겼구나 라는 걸 느꼈다.
   「롭. 그런데 이건 너무 깬다. 그러니까 저기 바깥의 젊은 친구들은 쓰디쓴 술이나 마시고 궁짝궁짝 2박자 음악에 취해서 흐느적 거릴 때, 응? 넌 여기서 이처럼 고상하게 듣는다는 게 뭐,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의 노투르노 G장조 호보켄번호 II:30 중 2악장 안단테를? 더불어 복장은 슬리퍼에, 노트북으로 도표나 보며 이해득실을 따진다?」
   「허허. 좀 이상한가? 하긴 다 그래. 카지노 사장실이나 여기나. 다르다면 뭐랄까, 장르가 약간 달라. 걔네들은 1 뒤에 0이 여러개 붙는 장사고, 나는 푼돈 장사고. 응? 그 차이지. 그럼.」
   「그럼 이참에 형이... 어... 여기 취직하면 어떨까?」
   「뭐 취직? 뭔 취직! 형 그냥 여기서 놀아. 맘대루!」
   「그래? 내가 뭐 놀라면 못 놀 줄 아니! 라면서 진짜 놀면 안된다는 거. 모를 나이도 아니다.」
   「아 정말이야. 애들 불러줘?」
   「무슨 애들? 덩치 큰 깎뚜기들? 걔들을 왜? 내가 걔들과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언니들 말이야. (몸짓)! 캬~! (얼굴 연기)! 으아~! (다시 몸짓)! 캬~! 응? 에잇~ 그러지 말자. 재미없어. 걔들도 피곤하다고. 천상의 인연 같은 여급을 만난다면 몰라도 아니라면 그냥 그렇다는 거. 형도 잘 알잖아. 안 그래?」
    뭐야 이거? 좋다 말았자나! 이런, 젠장.
    뭐 한다는 소리, 안 그래? 아니지. 전혀 아니지! 아닌 게 아닌가?
    아무튼 바로 그때 나는 롭의 책상 한쪽에 배치된 감시 카메라 화면을 보게 됐다.
    그냥 사람들 춤추는 모습이 보이고 그랬는데... 뭐야 이거!
    내가 아는 사람? 와우~! 나는 그렇게 화면으로 아는 친구들을 보게 된 것이다.





    10

    뭐야 쟤네들...!
    엔야, 로즈마리. 브렌따노 사장, 피타고라스 바텐더. 그 넷이 함께? 심지어, 나만 빼고!
    나는 사장실을 나와서 당장 녀석들에게 갔다. NC사장실을 나와서 녀석들이 놀고 있는 테이블까지 곧바로 직행했다.
    그런데!
    그렇게 A에서 B까지 도달하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왜냐, 북적대는 나이트클럽의 사람들을 보면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그들에게 꼬리가 달렸다는 점!
    뭐야 이거? 변장 뭐 그건 아닐 테고, 아하! 드레스코드? 난 또 뭐라고!
    그렇게 나는 그 의리 없는 네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나를 보는 걔네들 표정이 왜 이렇지?
   「야 너네들 어떻게 나만 빼고! 내가 꼭, 어? '내가 너냐!'라는 말을 듣고자 하는 게 아니라구. 응?」
   「어! 여기 어떻게...」
   「그게 말이야... 어떻게 된 거지?」
   「쟤 연락 안된다며?」
   「내 전화기 3일째 조용해. 아니 1주일 내내 감감무소식이라고. 알어?」
   「뭔가 착오가 있었을 꺼야.」
   「하긴 같이 가자고 했더라도 내가 거절했을 걸.」
   「그래~ 여기 시끄럽고 별로 재미도 없어.」
   「나도 그렇게 썩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
   「누가 너한테 꽉 막힌 남자라고 하던? 누구야? 그 인간 누구야? 어? 내 그 인간 가만두나 봐라. 이 작자를 내 그냥...」
   「야! 늬가 더 나뻐. 늬가 더 밉다고. 어? 그 말은 곧 날 이미 꽉 막힌 남자쯤으로 상정하고 하는 소리 아니야? 왜 나머지 말까지 마저 하시지. 응? 그러니까 늬가 여자가 없는 거라고. 어? 그러니까 늬가 안되는 거라고!」
   「아니~ 그게 있잖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거 왜 사람이 살다보면, 어?」
    나는 확 그냥 녀석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늬가 여... 뭐? 난 말이야, 응? 발에 채이는 게 여자야. 어? 알어? 내가 있지, 발에 채이는 게 여자라고. 어?」
   「당신은 정말 거침이 없군요.」
   「거침이 없기는 뭐가 거침이 없어? 야 너! 나랑 말 놓기로 했잖아. 그리고 너! 우리 이미 친구 먹었잖아. 그런데 너 지금 영화 찍냐! 어?」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아 나 정말.」 ~라는 말까지는 못한 채 나는 롭의 사장실로 돌아갔다.
    나는 나이트클럽 사장실에 도착했다.
   「너 알고 있었니?」
   「뭐, 꼬리 달린 사람들?」
   「응. 제발 말해줘. 이거 드레스코드라고!」
   「아니야. 그거 진짜야. 고양이의 발톱 같은 거. 쟤네들은 자유자재로 감췄다가 드러냈다가. 무엇을? 꼬리를! 형. 있잖아. 응? 여기가 왜 장사가 잘될까? 왜긴 왜겠어, 쟤네들만 모인다는 불문율이 지켜지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응? 대체로 같은 인종이랄지 비슷한 형편, 적합한 조건, 적당한 호감에 따라 결혼을 하잖아, 응? 사람들은 그래. 그처럼 쟤네들도 쟤네들끼리만 사랑한다고. 근친혼에 따라 옛날에 의학적 문제가 많았다고 하듯이, 쟤네들도 일종의 부족처럼 합리적인 문화가 형성됐나봐.」
   「그걸 나보고, 지금, 믿으라고? 너 사람 너무 진지하게 웃기는 거 아니니?」
   「믿으란 말이 아니야. 그걸 어떻게 믿나. 나도 아직까지 못믿는데. 그러나! 나도 먹고는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응?」
    밍밍한 기분과 신묘한 분위기의 부조화. 이건 대체 뭘까!
   「하여간 하나 분명한 건 그거야. 쟤네들은 천하에 둘도 없는 괴짜라는 거.」
   「간담이 서늘해지게 너 자꾸 왜 그래?」
   「괜찮아. 형도 곧 적응돼. 알고 보니 SF 영화들 그거 아예 다 뻥은 아니더라고. 형도 보다시피!」
   「나는 마성의 해몽가가 아니야.」
   「나도 애가 타는 떠버리가 아니라고.」
   「그런데, 응? 저주스럽지만 감미로운 악마와의 친밀감을 나보고 모른 체 하라고?」
   「사실인데 뭘! 요정은 모르시기를? 어른이 되면 이처럼 볼 거 보고 할 거 하기 마련이라구. 순진하게 왜 그래? 형답지 않아!」
   「나다워? 나다운... 거?」
   「그래. 일단 형이 환상의 종결자라는 걸 부인하진 않아. 내가 어찌 사랑의 구원자를 트집 잡겠나. 그렇지만 형은 지금 입회인 자격이야. 뿐만 아니라 못 볼 걸 이미 봐버렸어. 벌써 드라마 주인공이라고. 이제 우린 달릴 수 밖에 없다구. 알겠어? 그런다고 내가 떡하니, 내 꼬리를 보여줄 줄 알았어? 난 아니야. 난 아니라고. 형과 나는 정상이고, 쟤네들은 돌연변이고. 알겠어?」
    나는 롭의 긴가민가 농담 반 진담 반인 듯한 말장난 때문에 엄청 헷갈렸다. 종잡을 수 없는 신비함과 예측할 수 없는 기묘함이 함께 했다.
    육신에서 마음이 해방되어 심신분리가 되었다. 아니다. 뻥이다. 영혼이 공중부양하니 몸도 따라서 붕 떴다. 진짜로? 아니다, 뻥이다. 신부들러리의 관심에 병풍의 환호가 아닌 진심 어린 반짝반짝, 새콤달콤, 아기자기, 뿌잉뿌잉, 딸랑딸랑! 라는 효과음이 들려왔다. 진짜로 들려왔다. 그런데, 정말로 그랬겠나. 뻥이다. 다 뻥이다. 이런, 젠장! 나는 쥐뿔도 없는 주제에 너무 허황된 꿈만 꾸는 듯 하다. 아무래도 그런 공상은 무자비하게 버리는 게 좋겠다. 어떤 공상이냐면, 새침하고 깜직하며 도도한 그녀와 열렬한 사랑에 빠지기. 별의 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상상은 도저히 재미없어서 못할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내가 말이야, 젊음이들이 춤 추고 노는 롭의 사업장에서 대체 뭐하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에 오늘은 이만 철수하기로 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꼬리 달린 인간? 여우의 통통한 꼬리인지 치타의 길다란 꼬리인지 몰라도, 뭔 말이 되야 믿든가 말든가 하지. 흥!





    11

    지독한 권태는 그런 것. 아름다운 환상에 빠져들어 시작된 사랑 때문에 다정한 추억에 쫓기고, 달콤한 행복을 꾸밀려고 고민하지 않아도 좋다는 점. 따라서 나는 공포나 증오가 아닌 3번 재미있는 쾌락마를 타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7의 비밀은 내게 공손하지 않는데 그럴 수 밖에. 번호표 뽑는 기계는 진즉 쓸모 없게 되어 내다버렸거든. 그러니까 떨리는 신비와 영원히 절교할 수는 없고, 무작정 새로운 호박마를 기다릴 수도 없으니 3번마에 하는 수 없이 올라타는 수 밖에.
    그러나 3번마는 어리둥절한 황금이라는 홍당무가 부족했기 때문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자식이...! 넉살이니 어리광이니? 그렇다고 유난 떠는 허영기를 100퍼센트 충족시키는 당근만 제공하는 건 불가능했다. 짜증 섞인 채찍질에 대한 충동이 이렇게 억제하기 힘들었던 적은 결코 없었다. 결코? 완전 뻥은 아니다. 그렇다고 충동도 말이 안된다. 그 역시 뻥이다. 때문에 나는 참지 못했다. 일단 채찍질을 하는 데 까지 하는 수 밖에. 그런데 문제는 그 채찍질이라는 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러므로 나는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3번마에 나도 모르게 애무라는 카드를 불쑥 들이밀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랬더니 이렇게 무안할 수가! 아이 참 민망하여라. 꺄악~!
    그런데 이거 뭐야! 보아하니 3번마가 살짝만 꿈틀대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네? 동화 같은 회전목마는 급기야 제대로 발동이 걸려서 신나는 광마가 되고야 말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딱히 이렇다 할 계획을 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딩~동!
    밖에 나가보니 사람은 없고 역시나 상자만 덩그러니 있네.
    삶이 드라마구만 그래.
    곧바로 나는 소포를 뜯어봤다. 누가 보낸 건지도 모른 채.
    그렇게 마지막 포장을 푸르기 직전.
    나는 내용물을 추측하는 재미를 좀 더 연장시키기로 했다.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 누가, 어떡하다, 내게! 그런데 왜 하필 지금?
    혹시 내가 저번에 원고료 대신 받은 VIP 초대권이 그럼...?
    에이~ 설마! 아니지 아니지. 또 몰라. 진짜로?
    그럼 내가 저번에 원고료 대신 받은 VIP 초대권......
    설마 VIP 초대권을 들고서 초대 장소에 가면 거긴 모두 꼬리 달린 인간들의 집합 장소라고?
    에이~ 아니야 아니야. 너무 갔다. 내가 상태가 너무 안좋아졌구만 그래.
    그래서 나는 냉큼 소포 박스를 개봉했다.
    그랬더니, 그 안에는 웬 선그래스가 들어있었다.
    뭐야 이거? 보낸 사람 정보도 없고, 나는 그걸 왜 받았는지도 모르잖아?
    뭐냐고 이건!
    설마...? 아니야 아니야. 에잇, 말도 안돼!
    그렇게 10여분 경과 후.
    일단 검색을 해봤다. 나는 인터넷창을 띄우고 입력창에 글씨를 썼다.
    "꼬리 달린 사람들"
    아니나 다를까 말도 안되는 얘기들과 별 이상한 페이지들이 주로 검색되었다. 그럼 몇 페이지까지 살펴본다? 가만 있자. 3. 7. 12. 13. 24. 32. 34. 40. 95. 105. 125. 140. 212. 400. 401. 418. 419. 440. 521. 666. 999. 1226. 1234. 1977. 1979. 2000. 3000. 3141. 4779. 7371. 8264. 10000. 40000?
    아니다 아니다. 그걸 믿은 내가 바보지!





    12

    행복은 아마도 퇴색됐다. 열정은 주춤하다. 나는 아는 동생들로부터는 응원─애정─총애를 잃었다. 하지만 변덕스런 마음과 싫증에 약한 심정 때문에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열망마에 올라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광마의 고삐를 풀겠나 어쩌겠나. 그래서 나는 막연한 기대감을 안고서 다짜고짜 별장 루벤스 루벤스로 떠났다. 회심의 역작을 완성하겠다는 목적보다 마음을 비우고서 나는 그렇게 루벤스루벤스로 향했다.
    아, 루벤스 루벤스? 그건 칼럼 원고료 대신 받은 초대권 후보군 중 하나로 특별 휴양소 이름이었다. 저번에 웬 다큐멘터리 잡지에 칼럼을 기고해서 품위 유지비 좀 챙길까 했는데, 맙소사 이게 뭔 일이야? 아 글쎄 원고료를 무슨 추첨 티켓으로 퉁 치다니! 살다 살다 별의별, 아니다. 아니야. 노병 앞에서 나이 얘기를 하겠나, 뻔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겠나. 살다보면 내가 가지 가지 유난 떠는 주인공일 수도 있고, 일이 안 풀리면 하다 하다 말도 안되는 기벽에 빠지는 위인이 나이지 말란 법도 없다.
    아무튼 이와 같은 썩 신통치 못한 사연 때문에 나는 별장 루벤스-루벤스로 떠난 것이다.
    루벤스-루벤스는 VIP 초대권 목록에 떡하니 등재된 후보였기 때문이다.
    원고료 대신 받은 VIP 초대권. 왜 VVVIP가 아니고 VIP냐를 따지고자시고 할 것도 없이, 생긴 거는 일단 쓰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별장 루벤스 루벤스에 도착했다.
   루벤스 루벤스는, 에잇 되게 기네. 그냥 루벤스 루벤스라고 하지 말고 루루라고 약칭하자. 루루는 별장 단지였다. 그 가운데 배정된 방에서 할 일 없이 인터넷이나 뒤적거리며 쉬었다. 이런 글을 구경하면서.
    "하나를 가지면 축하를 받고, 열을 가지면 시기를 받고, 백을 가지면 아부를 받는다."
    그러다 나는 멀리까지 와서 실내에만 있기 뭐해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일단 산책부터!
    그런데 어떻게 이런 우연이! 여기까지 와서 샐리를 우연히 만나다니.
    오, 샐리!
   「샐리. 예뻐졌네?」
   「감사 감사. 오빠 고마워. 그런데 있잖아, 오빠 공부 안해?」
   「공부? 내가 공부를 왜 해?」
   「아 맞다. 오빠 학생 아니구나.」
   「응. 난 학생이 아니야. 그렇지만 너의 잔소리는 언제나 환영.」
   「오빠 설마 나 미행한 건 아니지?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 다 보네! 와 반갑다.」
    샐리와 샐리의 친구가 고기를 먹고 싶다길래, 그렇게 우리는 고기를 먹으로 갔다.
    음식점에 도착했다.
    고기를 먹고 어쩌고는 건너뛰고.
    그렇게 우리는 고기를 먹고 음식점에서 나왔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카페에 갔다.
   「오빠. 나 하나 고백할 게 있어. 실은 있잖아. 나 자꾸 환청이 보이네? 환청? 아 그건 들리는 거고, 이건 보이니까 환시구나. 아님 환각인가. 어쨌든 그게 말이지, 오빠 다리가 대리석으로 보여. 내가 살짝 만져보면 안될까?」
   「뭐? 야릇한 친밀감이야 아니면 짖꿎은 장난기니?」
   「둘 다 아니야. 그렇고 그런 농담이 아니라, 나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정말?」
   「어. 진짜.」
   「나도 전에 딱 그런 증상이 한동안 지속된 적이 있거든.」
   「와. 정말?」
   「응. 좀 심했어. 그렇지만 아직 완치된 건 아니야.」
   「어머. 그래?」
   「그런데 우리가 꼭 이런 주제로 대화를 길게 해야 하니? 거 어째 영 이상하군 그래.」
   「그러게 말이야.」
   「그럼 이제 남자친구들 올 시간 됐겠네?」
   「어머머머머! 오빠. 와, 대박! 어떻게 알았어? 와, 소름!」
    뭐, 진짜라고? 이런, 젠장!
    바로 이런 걸 죽 쑤어 개 줬다고 할까? 농담이고.
    바로 그때 그녀들은 핸드폰으로 이러쿵저러쿵 대화했고, 다음으로 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임을 그만 인정했다.
    그렇게 안녕 하며 그녀들은 나를 떠나갔다.
    뭐야 이거?
    실낱 같은 희망이 일렁이기만 해도 열정이 새롭게 꿈틀거려야 하는데, 뭐 내가 하는 일이 매번 이런 식이지.
    환상적인 광희에 흠뻑 젖을 거라는 기대감, 이미 포기했다. 가상의 연적을 향한 아기자기한 질투심, 있을 턱이 있나. 생생한 공포심에 따른 심술궂은 쾌감마저 바닥났다.
    그래서 나는 저번의 궁금증을 말끔히 해소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장난하지 말고 나 심각하다며, 롭을 낮에 맞나서 따지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짐을 싸서 롭을 만나러 갔다.





    13

    칙칙한 여건에 따른 불쾌한 삶. 그리고 달갑지 않은 불행. ~에서 아름다운 애인과 축복 받은 가정 그리고 쾌적하고 기쁜 인생으로! 저주를 깨고 환희에 젖어 전무후무한 행운아로 환생하기.
    ~라는 공상이 실현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으면 그 얼마나 뛸듯이 행복할까!
    하지만 결코 평탄치 않은 세상살이. 슬럼프를 탈출하는 묘미라는 게 있는 법. 그 재미에 제대로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다는 것. 하늘은 누굴 돕고 소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는다고도 하지 않나. 그래서 우리는 천운을 읽고, 길일을 택하며, 은인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개구쟁이이자 심술꾼에 능청꾸러기로써, 넉살을 남발하고 허풍을 일삼던지 어쩌던지. 그렇게 활기는 온 데 간 데 없이 그 종적이 묘연하네? 고로 나는 깜빡하면 상심하고 여차하면 깊이 절망할 뻔 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말이다. 곧 특별한 숙명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복은 날 잊지 않았고, 낭만마저 날 믿었던 것이다. 그럼 난 쾌활한 여복에게 든든한 신뢰를 얻었을까? 그러든 어쩌든 지금 내게 새로움을 안겨줄 전주곡 객관식 보기는 딱 5개였다.
    첫째, 베토벤 운명 교향곡 제5번 시작부. 빰빰빰빠~ 빰빰빰빠~!
    둘째, 폴 모리아 악단의 달콤한 경음악 멜로디. 샤라라라라라~ 샤라라라라라라~ 샤라라라라라~ 라라~ 라라~...
    셋째, 후보군이 너무너무 많은 추억의 유행가들.
    넷째, 마술피리 가운데 밤의 여왕의 아리아랄지 명-소프라노가 부르는 클라이막스.
    다섯째, 애스턴 마틴과 007. 징지리징징 징징징 징지리징징 징징징...!
    그런데 묘한 운명의 장난이었던 것일까? 하필 내가 가상으로 들은 환청은 딱 그랬다. 띠리리리리리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그 광고용 음악을 뭐라 그러지? 딱 생각이 안 나는데, 어쨌든 뽑힌 불길한 주인공은 트럭 후진할 때 CM송! 캐롤송도 아니고 테이프 늘어진 듯... 그만 그만.
    마침내 담판을 짓기로 한 결전의 장소에 도착했다.
    롭 대 나!
    나 : 롭!
    세기의 승부.
    회심의 대결.
    (벌써부터) 추억의 명승부.
    꼬리 달린 인간. 아예 속시원히 녀석이 이렇게 말해주기를 바랬다.
    형! 그거 다 뻥이야.
    그럼 나는 정말로 후련할 것만 같았다. 그래야지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듯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마음 놓고 VIP 초대권을 남발하면 놀러다닐 수 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그거 다 뻥이야! 형. 설마 믿은 건 아니지? 그렇지?」
   「내가 바보냐! 얘가 얘가 형을 뭘로 보고..., 어? 너 자꾸 그렇게 형을 띄엄띄엄 볼래? 어?」
   「에이 형. 농담이야 농담. 왜 그래? 그렇게 정색하니까 오히려 더 이상하잖아. 마치 미신을 진짜로 철썩같이 믿었던 사람처럼 말이야. 안 그래?」
   「응? 그건... 형이 다 너 심심할까봐, 응? 형이 그런 사람이야. 어? 알어? 늬 말마따나 만에 하나 정말 인간한테 꼬리가 달렸다고 치자. 그럼 그걸 누가 믿냐! 일찌감치 극장에서 잠이나 자는 게 낫지. 안 그래?」
   「이 형이 이제야 나랑 말이 통하네. 다시 예전의 형으로 돌아와서 축하해!」
   「롭. 취미 삼아 여기나 가봐.」
    그러면서 나는 환상극 코스프레 대회 VIP 초대권을 녀석한테 내밀었다.
   「뭐야 이거? 여기 재미없다고 소문난 덴데. 형! 다시 옛날로 돌아가면 어떡해? 정신 차려! 아 쫌!」





    14

    아아 VIP 초대권이 몇 장 남았더라? 한 장, 두 장, 세 장...... 에잇. 세기도 귀찮네.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걸 확인했다.
    오늘은 살롱에 가는 날이다. 남은 VIP 초대권 중에서 무작위로 고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초대권에 안내된 약도를 보고서 살롱으로 갔다. 도착했다.
    뭐야 그냥 그런 술집이랑 비슷한데. 조그만 무대가 있고, 손님들이 간혹 나가서 노래 부르고. 끝.
    그런데 바로 그때.
    내게 다가오는 사람이... 숙녀네? 그런데 초면이 아니네? 그녀는 바로 릴리였다.
   「오빠. 여긴 어쩐 일이야?」
    시시콜콜한 얘기는 건너뛰자. 재미 하나도 없으니까.
    그 다음으로 릴리가 드디어 이제야 그 마술을 숙달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즉시 내게 시연했다.
    그녀의 손은 내 가슴을 통과했고,
    그녀는 준비했던 수갑으로 자기의 양손을 결박했다.
    이때 스르르르 나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살롱에는 나 혼자만.
    마담의 독촉. 가게 문 닫아야 한다나 뭐라나.
    그래서 나는 그날도 꽝이라면서 집에 갔다.
    그렇지만 그날의 절정은 아마도 간밤에 꾼 꿈인 듯 했다.
    왜냐하면 꿈의 내용이 그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개꿈이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퇴근하는데 거리에서 분홍색 밧줄을 보게 됨. 그 밧줄을 따라감. 계속 계속. 골목으로, 거리로. 그러다 어느 대형 광고판 앞에서 멈춤. 분홍색 밧줄은 광고판에 부착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대형 광고판 그림이 무엇이냐? 하면 꼬리 달린 요염한 숙녀 사진. 당연히 자세는... 이렇게... 흐흐흐... 딱 돌아보면서... 허허허... 호호호호호! 그렇게 나는 그림을 감상하다 깨달았다. 왜 내가 여기까지 따라왔는지를. 그래서 나는 분홍색 밧줄을 잡고서 그걸 힘껏 잡아당겼다. 그랬더니 글쎄...? 그녀가 대형 광고판에서 빠져나오면서 내 얼굴에 자기 엉덩이를!
    바로 그때 꿈에서 깨어남. 깨어나 보니 곰인형의 엉덩이에 나는 얼굴을 쳐박고 있었던 것이다.
    저런!





    15

    최근 내가 했던 일은 이랬다.
    만화영화 신밧드의 모험 관람. 오페라 마농레스코 보기. 어떤 묵시록 읽기. 드라마를 보며 마키아벨리를 떠올리기. 야바위꾼과 삼류 허풍쟁이들이 몰린다길래 자랑대회 출전 포기 결심. 아침에는 칸타타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며 모처럼 기도 드리기. 낮에는 천사에게 데이트 신청, 저녁에는 약속이 빵꾸나서 요정들과 놀기. 밤에 유명 추리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다길래 일행과 극장에 가기. 그러다 깨어보니 새벽 4시. 영화관에 홀로 갖힘.
    진짜로? 뻥이다. 싹 다 뻥이다.
    실은 내 근황은 이랬다.
    사랑은 운명. 쫓겨나지 않은 것만도 기적. 망하지 않았으니 다행. 근근히 품위 유지비 간당간당하니까 행복. 뜬금없이 VIP 초대권이 왕창 생겼으니 감동.
    여기까지가 내 솔직한 근황이었다. 도대체가 말이야, 이게 뭐지! 근데 말입니다, 이게 뭐냐고! 이러니 내가 정말 공상을 하고 또 하지 않게 생겼냐고. 이제 그마저도 (딱) 소리를 내고 마음만 먹으면 즉각 됐다. 정말로 그래 볼까? 자, (딱)!
    설마 나는 타락을 좋아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럼 나는 방탕을 친애하느냐, 하면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탕진을 사랑한다? 응, 그렇다. 뭐? 아니다. 뻥이다. 내게 야비한 탐욕은 당치도 않다. 밤의 제왕이란 타이틀이 내게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나는 화려한 생활을 동경하지도, 환상의 주인공으로 낙찰되기를 간구하지도 않는다. 심심하지만 그럭저럭 열심히 사는 일상에 특별히 염증을 느낀 것도 아니다. 사치에 대한 유혹, 복종 자체를 할 수가 없다. 왜? (몸짓)! 그런데 왜! 왜, 뭐?
    아마 나는 무엇을 하고 싶다는 욕구와 마음대로 뭔가를 해도 된다는 자유의지에 문제가 생긴 것만 같다. 우선 놀기만 봐도 너무 막연했고, 감미로운 휴가에도 단호히 시간을 할당하지 못했다. 그럼 혹시 나의 젊음은 끝난 것일까? 아닌데, 그럼 곤란한데 그러면 안되는데! 너무너무 섭섭한 말씀임에 분명하다. (소곤소곤 소심하게 조용조용) 이런, 젠장! (다시 웅크렸던 꾸부정한 자세를 슥~) 그러고 보니 어느새 주요 수치는 모두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자존감, 자존심, 자신감, 긍지, 허영심, 허세, 허풍, 허언증. 거기다 리셋 증후군까지. 어쩌면 이건 모두 내가 너무 접속사에 지나친 애착을 느껴서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끊고 맺기를 못하고서, 계속 챗바퀴만 굴리고 있는 거다. 자, 보자! 나는 옛날에 런닝 머신을 팔았고, 지금은 환상머신을 가상으로 만들고 있다. 그런데 어느 세월에 완성을? 이러다 구경꾼들이 밑도 끝도 없이 타임머신을 들고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변화가 필요했다. 새로움은 필수였다. 그런데, '그런데'도 필요없다. 그래서 나는 따라하기 카드를 즉각 꺼내들었다. 영화 주인공이 TV를 보다, 쟤, 하고 찍어서 지목된 당사자가 집에 초청되어 납시는 일. 나도 TV나 인터넷을 보며 뭔가 하나 찍기로 했다.
    그러나! 찍으면 뭐할 텐가. 더군다나 이제는 따라하기도 잘 하지 않는데 찍기는 무슨 찍기.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다시 VIP 초대권을 꺼내들었다. 다 쓸 때까지는 이것 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감독과의 만남이었다. 에로영화의 거장, 이 아니라 공포영화의 신성으로 떠오르는 명감독과의 만남이었다.
    그렇게 나는 행사장으로 행했다.
    룰루랄라~ 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지는 않았다. 기분이 그냥 그랬으니까.
    그렇게 나는 행사장에 도착했다.
    떡하니 걸려있는 글씨는,
    감독 누구와의 만남!
    그렇게 나는 조명이 약간 어두운 실내에서 감독과의 만남에서 오고 가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딱 제일 뒷자리에서!
    그러다 나는 슬그머니 선그래스를 끼었다. 저번에 소포로 받은 선그래스를 말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어라~! 보이네? 진짜로 보이네!
    선그래스를 꼈더니 진짜로 보였다. 와우~!
    선그래스를 끼면 꼬리가 보이고, 선그래스를 벗으면 꼬리가 안 보이고!
    (딱) OK~! 걸렸다 딱 걸렸다. 새로운 발견. 신-인류는 내게 완전 딱 걸린 거지.
    이때부터 나는 엉덩이가 근질근질한 게 아니라 바로 입이 근질근질할 수 밖에 없었다. 양치기 소년은 하루 아침에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어버린 거다.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아!
    이런 날은 지글지글~ 고기를 구워서 먹으며 술 한 잔 해야 하는데! 그런데 1잔을 누구랑 하지? 아 나 이거 정말, 입이 근질근질 이거 대체 어쩌면 좋냐고. 미치겠네 미치겠어.
    이건 가히 저번의 통조림 환상을 훌쩍 뛰어넘는 대성과였다. 이 정도면 가히 중증이 아니라고 부인하기는 퍽이나 어려울 듯. 물론 본인은 새까맣게 모르겠지만서두. 드디여 걷다가 땅바닥에서 깃털 하나를 보고서 나무의 나뭇잎으로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 축하해야할지 따끔히 혼내야할지 심하게 헷갈리기 때문에 잠깐 1인칭 주인공 시점이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뀔 뻔 했다. 다시 돌아와서. 일단 감독과의 대화라는 행사는 그저 그렇게 별 내용은 없는 듯 했다. 말은 엄청 많은데 모두가 다 잡지와 인터넷에 나오는 얘기들 뿐이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얘네들이 모두 꼬리가 달린 족속이라고? 아니 아니 희귀한 신-인류라고? 음하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나는 도저히 말하고 싶어 미칠듯이 근질근질한 충동을 잠재울 수 없어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그나마 상상력이 0점은 아닌 존티를 불러냈다.





    16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니?」
   「너가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돼. 그렇지만 그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거든.」
   「그래서. 사진은?」
   「현장감을 원하기만 한다면 항상 느낄 수 있는데. 그런데 그게 왜 필요해?」
   「동영상은?」
   「없어.」
   「그럼 뭘 가지고 나보고 믿으라는 거니?」
   「상상력!」
   「상상력?」
   「(끄덕끄덕)」
   「(검지를 펴서 귀 옆에 붙이고 빙글빙글)」
    한 번 더! (검지를 펴서 귀 옆에 붙이고 빙글빙글). 뭐야 재밌자나? 한 번 더... 이런 젠장!
   「진짜야. 진짜라고. 아 진짜라니까.」
   「무슨 근거로?」
   「왜냐하면 진짜니까.」
   「너 어쩌다 이렇게 상태가 안 좋아졌니? 아 나 정말, 얘 전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약은 먹었니?」
   「뭔 약?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는데! 그래서 못 먹었지. 내가 약을 왜 먹어?」
   「아 참 나, 이 친구야! 정신 차려. 어? 정신 좀 차리라구. 제발!」
    바로 그때 비상벨이 울렸다. 건물 비상벨이 아니라 내 핸드폰에서.
    기막힌 순간에 레이저 시스템 가동이라니. 환상의 서곡! 발동은 이제 버릇이 되었다.
   「친구. 나 바쁜 일 있어. 먼저 가야겠네. 레이저 시스템이 내게 알려왔어. 침입자가 있다고. 장난이 아니야. 어? 장난이 아니라고.」
   「늬가 더 장난이 아니다. 정말 가지 가지 한다. 어?」
    그렇게 나는 존티와 헤어진 다음 곧바로 사무실로 갔다.
    가면서 생각했다. 침입자라니? 혹시 꼬리 달린 인류의 대장격이 내게 용무가 있나? 아니면 사신단! 아니지 아니지. 몰래 정체만 파악할려다가 딱 걸렸을 테니까 설마, 요원? 어쩜 좋니 어쩜 좋아!
    나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에 도착 완료.
    그런데 뭐야, 아무도 없잖아! 이런...!
    그렇지만 꼭 나쁘게 받아들일 일은 아닐 것이다.
    이건 아마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마침내 전문가 중의 전문가가 붙었다고. 그 분야의 1인자. 딱 1명. 정체를 그 누구도 모른다는 바로 그 그림자. 007은 정보가 많이 노출됐지만 그래서 제임스 본드는 제이슨 본을 탄생시킨 것일까? 짜잔~! 아무튼 이제는 내 차례가 됐군. 허허허허허!
    그렇게 1주일이 지났다.
    다시 반복해서 알림.
    1주일 경과.
    1주일 경과.
    1주일 경과.
    반복해서 말했다 뿐이지 딱 1주일만 경과했다.
    그래서 결과는? VIP 초대권은 모두 바닥났다. 그럼 이제 꼬리 달린 사람들을 볼 수 없다는 건가? 초대권을 보낸 소포에... 주소는 없고 이름만 써있었는데...! 거기가 원고를 청탁한 중간 브로커? 그럼 난 중간 보스야 뭐야!
    검색하고 어쩌고저쩌고 해서 나는 처음에 내게 원고를 청탁했던 여성잡지1.5의 정보를 알아냈다.
    이제 여성잡지1.5는 내게 혼쭐 나는 일만 남은 것이다.





    17

    나는 고집불통에 상스럽고, 파렴치하며, 방자한 놈일까? 그 죗값 때문인지 멍청해진 듯 아닌 듯 하여, 어딘가에 명함을 내밀어도 될지 어쩔지 잘 모르겠다. 치졸한 눈썰미와 몹쓸 허영심 때문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면 설마 나는 없어-증이 아니라 '모른다'병에 걸린 건가? 그야 어쨌든 저주 받은 타락마에 올라타 값싼 쾌락만을 추구하며 파멸을 권장하지 않으면 그만이겠지. 이제는, 이 아니라 원래 그런 건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금지된 욕망, 하늘만이 허락했을지도 모를 우연이 연속되는 행운마 타기.
    때문에 그걸 모르지 않으니까 나는 애초에 야망이란 걸 키우지 않았다. 바로 말하자면 나는 재능마를 안탄 게 아니라 못탄 거였다. 그러니까 나는 잘난 척이 자기 비하를 월등히 압도한 적이... 아마도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닌가? 아니었으면 좋을까! 좌우지간 이제 그만 개 짓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나는 당면한 문제에 집중해야 했다.
    곧 자랑 대회, 허풍 대회, 허세 대회의 출전 자격 얻기. 왜냐, 행복한 일하기에 직결되는 사안이니까. 그런데 어쩌면 좋아? 자, 봐봐! 나는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하며, 잘난 척 못해서 한이 맺힐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왜일까? 왜냐하면 내가 탄 명마는 하필 비리비리한 나태마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찮고 못하며 꺼벙하면 일단 때를 기다릴 수 밖에. 고로 나는 또 다시 달콤한 놀기에 대한 명분을 어렵싸리 획득한 셈이다. 예술가라는 직업이 이래서 좋을까? 배우도 그렇다. 놀아도 노는 게 아닌 것이다. 단지 통장 잔고는 줄어들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마땅한 황금,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합리적인 인기, 핸드폰은 너무너무 얌전하다 못해 공포 영화의 주인공감이다. 자길 건드려서 좋을 거 없다, 자기가 바빠지면 속설이 화자되고, 자기가 시끄러우면 미신이 기세를 얻는다나 뭐라나! 마치 그처럼 녀석은 황당한 주장을 펼치는 앵그리 버드나 그럼피캣 같다.
    그러나! 내게는 바로 초대권이 있었다. 두둥~! 그거 아직 안 떨어졌냐고요? 나도 원고료 대신 받은 무료 초대권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초대권이 진작 떨어졌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우주를 다 가진 기분까지는 아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라고 해도 어차피 뻥인 걸 누가 모르겠나. 뻥이든 아니든, 긴말 필요없고 나는 곧바로 떠나기 위해 서랍을 열어봤다.
    그랬더니 글쎄, 없네?
    초대권이 없네?
    바닥났네!
    진짜로 바닥났네.
    1장도 없잖아?
    초대권은 0!
    뭐야!
    저런!
    (조용조용) 이런, 젠장.
    바로 이렇게 해서 나는 잊혀진 기억을 되살려냈다. 초대권 탕진 & 여성잡지 1.5의 정보 파악 완료. 그래서 이제 여성잡지 1.5 본사에 따지러 찾아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나는 곧바로 출발했다.
    가보니 멀지도 않았다.
    나는 그렇게 여성잡지 1.5 본사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한 장소는 이미 다른 매장으로 바껴 있었다.
    그래서 딱 돌아설려던 그때! 저 깊숙한 구석지에서 브랜드마크 SPAFINALE를 발견. 뭐야 여긴 그럼 데이빗 커퍼필드의 은거지란 말이야? 아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또 엮이면 안돼. 실체는 없어. 말려봐야 허황됨. 감겨도 감길 때뿐. 그래서 나는 과감히 떠났다.





    18

    야심의 희망은 행복한 탐욕과 하등 다를 게 없는 것일까? 그렇든 아니든 하찮은 몽상일 뿐이다. 그러면 뭐가 중요할까? 그저, 일상은 가련하고 인생은 한심하지 않기를! 그래서 그분들께서 쉬지 않고서 형편없는 우기기를? 그러거나 말거나! 달콤한 사랑과 아름다운 행복이니 그건 너무 뜬구름 잡는 공상 같으니, 나도 차라리 하이에나의 가면을 써볼까? 파블로 피카소의 인물화처럼 난 원래 늑대의 야성미를 간직했을 테니, 그러니까 이미 옛날에 늑대 세계에서 1.5인자로 업혀갔던 것 아닌가. 고로 나도 벌써 절반은 참새니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겠다. 하지만 삶은 유쾌하기보다 심심함을 편애하니 한번쯤 중간 점검을 해볼 필요는 있다.
    즉, 촌닭&뱁새 명콤비가 꺼려하는 4대 요소. 인정─부럽다─자조 개그─병풍!
    참고로 부럽다를 저분들은 이렇게 대체한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또는 늬들은 좋겠다 라고!
    인정. 넌 늙었음을 과감히 인정해라? 헛기침 소리가 즉각 들린다. 그럼 불행함을 인정할까? 그건 묘비명처럼 과거형이 어울리니 현재형으로 말하자면 흔쾌히 인정한다. 곧 재미없음을! 언제는 뭐 안 그랬나. 다음으로 부럽다? 어복─여복─재물복, 부럽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 아니라 부러워하지 않는 게 지는 거다. 부러워해도 변하는 건 없으므로, 따라서 내 부인...... 어쩌고저쩌고 하등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족과 선망은 전혀 다른 얘기다. 이마에 '난 뱁새요'라고 쓴 채 광고할 일 있나. 얘기가 살짝 인문교양쪽으로 흐를 뻔했다만,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자조 개그는 생활이고, 신부들러리에 대해서도 할 말 있다. 일단 어디서 병풍 설 일 자체가 없다. 예전처럼 신랑 하객 도우미라도 다시 하고 싶다. 신부들러리 전담 요원 1.5와 2.0의 통쾌한 심정. 벤치멤버가 어찌 알겠나. 그렇다고 그분들 트집은 멈출 수 없다. 어떻게? 젊지 않음을 그만 상쾌하게 인정하시오 라고! 장난하나, 장난해? 명문대 과티를 이미 사지 않았나! 뭔 말이 더 필요한가. 뭔 설명이 더 구구절절히 요구되냐고, 참 나! 동네 형의 누나들과, 내 친구의 누나들이 선정한 어떤 순위는 그분들 마음이었거든. 그거 다 병풍 덕분에, 응? 단지 그 때문이라고!
    아하! 두서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다보니 이제 알겠다. 나도 몰랐는데, 하고 싶은 말과 발동하는 욕구가 무엇인지가 선명해졌다. 그 망설여지는 충동은 곧 이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뱁새와 참새 근처에만 있으면 귀찮고, 뭔가가 꼬이며, 아웅다웅 티격태격 짠할 수 밖에 없다. 하향 평준화도 모자라 모든 것이 불쌍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할 수 밖에. 적당한 게 좋을 때가 있고, 열광해야 할 때가 있다. TV만 보면 멍청해지고, NC에 수시로 들락거리면 문란해질 여지가 있다. 하수와만 바둑을 두다 보면 눈높이가 비슷해진다. 그냥 허당들과 자꾸 어울리다보면 은근 허당도 푼수 되는 건 시간 문제다.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바보 대회가 따로 없다. 때문에 어설픈 허세로 인해 귀에서 피가 나고, 허풍 대회는 점점 멀어져만 가기 마련. 그러니 기분은 내내 꿀꿀하고, 분위기는 커피포트를 연상시킬 수 밖에.
    따라서 결론은 명확해졌다. 제비 친구들을 만나야 한다. 파랑새와 사귀면 좋겠네. 고급 사교계에서 마담 뚜쟁이, 아니 아니 큐피트로 활약하자고! 자, 떠나자. 그런데 어디로?
    어디가 됐든! ~라는 배짱, (응)배짱은 이미 바닥나버렸다.
    그래서 나는 친구 조지를 만났다. 왜냐, 남성잡지를 운영하니까. 소식에 민감할 듯 해서. 내게는 뭐든 특종일 테니까.
   「야. 짹! 들었어?」
   「뭘 들어? 듣긴 뭘 들어!」
   「왜 그렇게 퉁명스러워? 새똥이라도 맞았니? 바나나 껍질을 어쩌다 놓쳤는데, 마침 뒤따라오는 사람이 제대로 밟아서 미안한 거냐고!」
   「아니야. 그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 뭐.」
   「아무튼. 들었어?」
   「듣다니!」
   「공개됐데. 아 공개됐다고.」
   「뭐가 공개됐는데?」
   「꼬리 달린 신-인류가. 와, 놀라워. 난쟁이 말고 난쟁이보다 훨씬 작은, 난쟁이 10분의 1보다 더 작은 소인이 있다는 얘기는 아직까지 증명된 게 없어. 그렇지만 어떻게 쟤네들은 정체를 드러낼 생각을 했을까?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딱 전면에 나선다는 건, 어떤 의도가 있다는 뜻 아닐까? 오락산업 아주 난리 났다니까 그러네.」
   「뭐 진짜로?」
   「아니. 뻥이야! 당연히 뻥이지. 어떻게 뻥이 아닐 수 있겠니!」
   「뭐-뭐? 뭐가 어쩌고 어째?」
   「야 한번 생각을 해봐. 아직도 그런 말도 안되는 얘기에 속는 사람이 다 있다니, 것 참 (쩔레쩔레)!」
    이로써 나는 롭에게 엮여서, 녀석의 허풍에 놀아난 일은 깨끗이 잊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말려도 그렇게 말리지? 무슨 뭐 꼬리 달린 인간? 하긴 롭의 사장실에서 실시간 영상으로 친구들을 볼 때는 좋았어. 딱 거기까지는 괜찮았다고. 그런데 그 뒤로 이건 뭐냐고. 괜히 이상한 원고 청탁 하나 잘못 받아가지고, 느닷없이 VIP 초대권만 쑤두룩하니 생겨서 뜬구름 잡는 방황만 한 게 다 잖아? 이제 그만 나는 평정심을 찾기로 했다.





    19

    결론적으로 간추려보자면 인생 희극의 두 마리 토끼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첫째 바보의 사랑, 둘째 젊음의 행진.
    첫째는 더티러브가 전부는 아니기를 바라고, 둘째는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라는 성과만 따지기엔 너무 매몰차다. 그렇지만 지금 세상에 누가 뜬구름 잡는 이상만 추구하겠나. 파란 하늘, 사과나무, 칵테일과 병풍, 본드걸과 영화, 2층 연인의 방을 바라보며 부르는 세레나데. 그리고 소원과 기도. 그렇든 어쩌든 세상의 숫자는 비정할 정도로 빈틈없다. 행운마도 구경하기 힘들다. 우리는 오락산업과 핸드폰-인터넷이 장악하는 가상현실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대부분 현실은 냉엄할 정도로 신부들러리 일색이다. 심지어 미래의 희망은 멀리 있고, 어제의 대망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휴가라고 해 봐야 방구석에서 배달 음식 시켜 먹기고, 주말에도 빈둥빈둥 재미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귀족적인 낭만이니 다정한 환상이니, 아마도 마지막 찐한 사랑이 그 언제였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 사람이 쑤두룩할 걸!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 남 걱정만 하고, 무턱대고 밤의 세계만 동경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또 다시 초대권을 꺼내들었다. 또 초대권? 아 맞다, 초대권은 바닥났지. 내 정신 좀 봐. 어쩌다 난 그 좋은 VIP 초대권을 모두 탕진한 것일까. 그렇지만 한동안 꿀 같은 접대를 받았으니, 그동안 품위 유지비가 좀 굳었다. 그 생활비를 모아서 이번에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서 합당한 대우를 받기로 했다. 예전부터 시간 나면 한번 들려서 쉬고 올까 해서 즐겨찾기에 등록해뒀던 사이트. 나는 그 호텔 사이트로 들어갔다.
    괜찮네. 음 별달리 흠 잡을 데 없구만. 안 나빠. 흐흠. 정말 가도 될까? 즐거웠던 마지막 크리스마스와 짜릿했던 마지막 밀애가 있었나, 없었나를 회상해보는 일을 거기서? 딱히 불합리한 일은 아니네. 고로 나는 고민없이 초대장에 안내된 호텔로 떠나기로 했다.
    홈페이지 내용을 봐서는 푸르른 해변, 야자수, 비키니, 공포 이벤트, 칵테일 대회등 광고는 일단 속을 만 했다. 지인들은 연락하기엔 다 바쁘고, 친구들로부터 연락은 오지 않고. 낯선 여행지에서 우연히 알던 여동생을 만나기. 솔직히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작품 구상일 뿐.
    그렇게 나는 호텔 다이애나 다이애나로 떠났다.





    20

    나는 호텔 다이애나 다이애나에 도착했다.
    첫째 날.
    다이애나 다이애나 호텔 내 미술관 구경. 아는 작가도 있고 모르는 작가도 있고. 내가 알 정도의 미술가 작품들이 많다니! 그런데 어느 그림 앞에 서는 순간 나는 찌릿찌릿 정신이 즉각 혼미해졌다. 당시는 그럴 정신도 뭐도 없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다. 그건 바로 A가 B의 가슴에 손을 넣어 자신의 양손을 수갑으로 결박한 그림이었다.
    그렇게 나는 졸도했다.
    미술관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때마침 날 뒤치다꺼리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나 보다. 아닌가? 아니지. 나야 잠시 정신을 잃고서 꿈꾸다 일어나면 그뿐이지만, 그쪽 역할은 또 다를 테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나는 갑자기 졸도한 것일까? 나도 모르겠다. 의학적으로 면밀히 따져보자면 원인이 있긴 있을 텐데, 거기까지는 알 수 없고. 설마 나의 잠잠한 바람기를 건드린 것일까?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잠잠하든 떠들썩하든 바람기 자체가 없기 때문에. 진짜로? 아마도! 건성건성 하는 둥 마는 둥 놀러다니면서 일하기라고 핑계 대느라 바쁜데? 변명이야 만들어내자면 밤새 만들어낼 테니까. 예를 들면 이런 식. 철들기 전에는 놀기에 전력. 행복하게 사랑할 땐 그 사랑에 전념. 그리고 천직을 찾았다면 재밌게 일하기에 전심을.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졸도했냐? 몰라 모른다고. 그럼 넘어가고. 그걸 가지고 달콤한 행복을 예감하는 황홀감이라고 소문 낼 수도 없고, 제법 용하다고 소문난 점쟁이를 찾아나설 수도 없고. OK! 통과.
    그렇게 첫째 날은 마무리됐다.
    그리고 둘째 날.
    첫째 날의 깊은 잠은 둘째 날까지 이어졌다.
    나는 귀빈실 침대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내 앞에는 아리따운 처녀...는 아니지만 고운 여사장님이 계시네?
   「깨어나셨군요. 손님처럼 꼭 그 그림을 보면 잠시 정신을 잃는 손님이 꼭 한 분 계셨죠.」
    그런데 어째 그윽한 대사를 너무 일찍 구사한 느낌, 나만 느끼는 감정일까?
    차근차근 알려주셔도 될 사연인데, 내가 거쳐야 할 과정이 꽤 방대하다는 건가?
    그럼 뭐 나도 기꺼이 흐름에 맞춰 응대할 수 밖에. 그렇다고 역정을 내겠나 쾌차했다며 노래를 부르겠나. 괜스레 폐 끼쳤다며 결례를 범했다는 인사치레도 딱 생략. 중요한 대사 위주로만. 순진한 관중의 수줍은 물개박수 따윈 필요없다 라는 자세, 이런 건가. 언짢은 가난쯤이야 신경 쓰지 말자 라는 호쾌한 태도, 얼마나 좋아. 아이고야 참 나, 이거 정말 너스레만 늘고 또 느니 큰일이다 큰일이야.
   「실례지만,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니죠. 그런데 말입니다. 음, 아니에요. 그래도 그게 있죠 이런 말씀 드려도 될려나 모르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이 있듯이 사연이라는 게 또 들으면 궁금해지는 것 아닐까요? 심지어 제가 주인공이라면 더더욱! 그러니 크나큰 실례가 아니라면 슬쩍 여쭙고 싶군요. 저보다 앞서 큰 충격인지 감동인지 그 때문에 아기가 됐던 분은 어느 귀인이신지를! (깜빡 하면 나는 이 말을 덧붙일 뻔 했다. 그 양반 싸움 잘하요?) 그분이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라고 조심스레 물어본다는 건 이미 물어봤다는 거라서 좀 경황스럽군요. 허허허. 굳이 알려주고 싶지 않다면 말씀하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렇게 물어본 그 자체가 일단 결례일 테니까요. 꼭 묘한 우연을 빙자해 일부러 사심이 동한 건 아니란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런데 호텔 사장님은 진짜로 그때부터 딱 입을 다무셨다. 뭐야? 그럴 꺼면 아예 말을 말든가. 어? 난 뭐냐고! 사람 달아오르게 해놓고, 뭐, '안달나지 않으셨죠'야 뭐야! 혹시 성격 테스트는 아닐 테고. 여기서는 친해지는 정형이 혹시 이런 식인가? 그야 유감스럽지만 더 이상 캐물을 수도 없고 해서 나는 얼른 일어나서 자리를 뜰 뻔 하던 바로 그때!
    바로 그때.
   「우리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전속 도박사예요.」
    여사장님은 연애술사야 뭐야, 왜 내 마음을 쥐락펴락 하는데?
    AVANTE─BACK─AVANTE─BACK! 내가 뛰노는 말이야 일하는 기계야! 지금 리모콘 가지고 장난해?
    나는 그렇게 반나절을 그럭저럭 보낸 다음 저녁이 되어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왜냐하면 스카이라운지에 올라가서 거기 전속 도박사라는 루시양과 세기의 대결을 펼친다는 기대감 때문에.
    그렇게 나는 곧장 그곳으로 갔다.
    그렇지만 가는 날이 장날? 그녀는 없네. 하물며 언제 올지 모른다고 하네? 뭐라고!
    나는 호텔 다이애나 다이애나 생활 셋째 날이 되어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러나 또 바람 맞았다.
    그러다 넷째 날. 나는 마침내 그녀와 조우할 수 있었다.





    21

   「손님. 혹시 블랙잭 할줄 아시나요?」
   「내가 블랙잴을 할줄 알게요, 모르게요?」
   「어머. 짖꿎은 오빠네.」
   「루시양. 우리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그 정도는 꿰뚫어보는 심미안... 아하! 저는 낭만파가 아닌가 보군요. 그렇다고 기분파로도 보이지 않을 테고. 곧 전문가임을 스스로 자랑하긴 싫고. 그걸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는 행운. 그걸 제게 양보하시겠다?」
   「손님 얘기 참 어렵게 하시네. 대체 할 말을 몇 번 꼬신 거에요? 그 비꼼 속에 도사린 적의는 따로 없는 듯 하오만. 오빠. 으흥?」
   「내가 그랬나?」
   「사장님에게 말씀 들었어요. 어떻게... 아니네요.」
   「뭐 그건 그렇고. 가르쳐 주신다면 배울 용의는 있습니다만 이제와서 배워도 될런지요. 그게 살짝 의문스럽군요. 포커라면 좀 하긴 하지만서두요. 저도 한가지 묻고 싶군요.」
   「어머나. 뭔데요? 저에게요? 어서 질문하시죠. 아니면 뭐 어떻게, 오빠라고 불러드리는 게 순서일까요? 뭐가 알고 싶으신 건데요?」
   「혹시... 그 여우 꼬리.」
   「이거요?」
   「그거 진짜인가요?」
   「그럼요!」
   「에이~! 그게 어떻게?」
   「만져보세요. 자요. 어서요. 정말요.」
   「허허. 그걸 만져서 어떻게 진짜인 줄 알 수 있나요. 저는 동물학자가 아닌 걸요. 동물학자도 아마 꼬리만 만져서 그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로는 저랑 썩 비슷하지 않을까요?」
   「어머머! 못믿으시네. 속고만 사셨나. 그럼 제 집까지 따라오시는 건 어때요. 꼭 제 알몸을 보셔야지 믿으실 건가요?」
   「어머머머머! 어쩜 그렇게 당돌할 수가. 우리. 포커로 내기를 하는 게 좋겠군요. 싫진, 않죠?」
   「포커, 좀 하시나봐요?」
   「못하진 않죠. 어떻게, 포커페이스는 읽을 줄 아시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내 별명은 7끝이요. 7원페어도 아니고 7끝. 응? 포커 정도면 몰라도 어설프게 애매한 거 뜨면 결론만 말하자면 나한테 다 뺐겨요. 응? 싹 다! (몸짓) (깐족) (몸짓) (깐죽) 내가 너무 오바했나? 그런데 이러다 지면 어떡하지! 아 뭐하시오? 날 진즉 말려주셨어야지.」
   「재밌는 분이시네요. 저도 승부가 기대되는데요. 네, 오빠.」
   「방금 속으로 그랬죠? 어련하실까! 라고. 아니면 뭐 '늬 뜻이 정 그러하다면?' 오오오! 웃었어 웃었어. 완전 빵끗 웃었어. 웃었어 웃었어.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구만~. 어? 딱 걸렸어 딱 걸렸어. 봐-줄려고 했는데 봐주면 안되겠네.」
   「아이 참. 아니랍니다.」
    그렇게 루시와 나는 친해졌다. 우리는 만나면 금방 친해진다. 그래서 만나기만 하면 된다. 아니면 말고, 는 애초에 키우지를 않는단 말이다.
    그렇게,
    호텔 다이애나 다이애나 생활 다섯째 날이 되었다.
    호텔 다이애나 다이애나 생활 다섯째 날.
    나는 루시의 초대로 그녀 친구들 파티에 초대 받았고, 여기는 그 파티장이다.
    그곳은 어디겠나, 클럽이다. 그렇게 루시와 놀다가, 돌아다니다가, 춤을 출려는데 흉할 꺼 같아서 그건 간신히 참았다. 많이, 많이 흉할 테니까.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라고 제지당할지도 모를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여기서까지 롭을 다 만나다니!
   「롭. 얘네들 다 진짜래.」
   「뭐가?」
   「꼬리 달린 거. 그거 가짜 아니래.」
   「누가 그래? 아니야 다 가짜야. 저걸 어떻게 매번 붙이고 다녀? 아니야. 아니라고. 오늘처럼 특별한 날에만 저 특수 복장을 입은 거라고. 형. 정신 차려. 어? 순진하게 아직도 이러기야?」
    바로 그때. 클럽의 전기가 나갔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웅성웅성 웅성웅성.
    웅성웅성 웅성웅성.
    그러다 3분 후 다시 원상 복귀되었다.
    다시 5분 전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그런데! 아뿔사! 뭐야 이거!
    다들 달려있던 꼬리가 사라졌다.
    게다가 루시는 인사도 없이 가버렸는지 만날 수 없었다.
    그 후!
    호텔 다이애나 다이애나 생활 6일째 날. 그녀는 소식이 없었다.
    호텔 다이애나 다이애나 생활 7일째 날. 사장님에게 들었다. 그녀가 그만뒀다고.
    나는 그녀를 만나고 싶어서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왜냐하면 이대로 헤어지면, 이대로 돌아가면 뭔가 찜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근처 어딘가에서 언뜻 봤던 가게를 떠올렸다. 가게 이름은 루시 루시! 아마도 사설 게임장인 듯 했다.
    나는 그곳으로 갔다. 나는 과연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22

    나는 사설 게임장 루시 루시에 도착했다. 여기서 나는 루시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재회하면 좋고 아니면 그녀가 행복하기를.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내 정면에 바로 루시가 있었다. 카운터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10미터. 12미터?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접근하여 딱 인사를 했다.
    그렇게 안녕 하며 인사를 건넸는데 그녀의 차가운 분위기라니.
   「누구...시죠? 혹시 절 아시나요?」
   「아... 그게 제가 잠시 착각을 한 것 같군요. 실례했습니다.」
    난 느꼈다. 이분은 그녀의 동생이란 걸. 아닐 수도 있고.
    그렇게 게임장 내부를 구경하던 중 하나의 벽보에 눈길이 갔다.
    바로 그녀의 실종 안내문이었다. 뭐라고? 실종 당시 웬 수상쩍은 남자와 친했고, 그와 함께 돌아다니는 모습이 주변인에게, 카메라에 많이 포착됐다는 내용. 그런데 가만 보니 그 수상쩍은 남자가... 바로 나? 저런!
    그 다음.
    다음 날 나는 그녀 찾기를 포기했다. 경마와 골프와 여행과 일하기를 거듭하며 1주일 더 쉴 계획이었는데, 서둘러 계획을 변경했다. 그렇게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갈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레이저 시스템 긴급 알림.
   「분명히 뭣이 있어. 응?」
    침입자 발견? 또? 이번엔 또 누굴까!
    앱을 켜보니 화면은 연기 때문에 통 칩입자의 인상착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곧바로 사무실로 갔다.
   「주인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라는 레이저 시스템의 말을 듣고 싶었다. 사무실 레이저 시스템의 인공지능이 슈퍼 컴퓨터로 발전했으니 이제는 내가 녀석한테 말로든 뭐로든 안될 테니 더욱 뿌듯했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라고 녀석이 말하면
   「이 나이 쳐먹고, 라는 서늘한 회한은 사양하겠네. 고민하지 마셔. 내가 있지 않나.」 ~라고 내가 대답하고.
    뭐, 잘들 논다?
    그렇게 나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딱 내 사무실로 들어갈려는던 바로 그때!
    나를 바라보는 애절한 눈빛의 주인공은 허허허, 역시나 루시였다.
   「오빠!」
    샤라라라라라~ 샤라라라라라라~ 샤라라라라라~ 라라~ 라라~ 라라~
    우리는 근처 카페 브렌따노로 자리를 옮겼다.
   「오빠. 어떻게 지냈어? 언제 온 거야?」
   「너야말로 여긴 웬일인데?」  반가운 대사치곤 좀 촌스럽나?
   「나? 근처 미술관에 친구 만나러. 겸사겸사 어디 좀 들렀다가 어딘가 모르게 이 근방을 둘러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우연히 다 만나네?」
   「너 혹시 말이야. 동생... 있니?」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니 그냥. 난 단지. 뭐랄까. 그냥 그럴 꺼 같아서. 그게 다야.」
   「있긴 있는데. 걔랑 사이가 안 좋아. 지금은. 그러다 또 친해지겠지. 그렇게 지금은 연락이 끊긴 상태야. 어딨는지 나도 몰라. 집안일 때문에 만나긴 할 텐데, 그때 되면 다시 친해지겠지 뭐.」
    뭐야 이거!
   「그런데 있잖아. 너 저번에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 그 꼬리. 진짜인지 가짜인지 보여준다고. 그 말 기억해?」
   「오빠도 참! 당연히 농담이지. 오빠 그 말 믿었어? 아님 속은 거야? 아니지? 에이~ 아닐 꺼야. 요즘 그렇게 순수한 남자가 어딨어! 혹시 오빠가 꼬리 달린 거 아니야?」
   「나?」
    나는 잠시 후 나도 모르게 내 꼬리뼈를 만져봤다. 왠지 모르게 그곳이 살짝 가려웠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내친김에 내 엉덩이까지 슥슥 만져보지는 않았다. 혼자 있다면 몰라도 지금 그럴 수 있나. 내 엉덩이를 내가 만지겠다는데, 그건 혼자 있을 때!
    거 왜 있지 않나! 찰스 로버트 다윈이 쓴 종의 기원. 나는 읽지 않은 한 명저를 떠올렸다. 내 주위에서 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읽은 사람을 만나기는 아마도 이럴 것이다. 어디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한 바보&푼수의 우정을 관망하는 끔찍한 행운 누리기. 그렇다면 언감생심 어찌 나까지 그 희소한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하리요! 그보다는 차라리 뒷모습 집착증과 거북목 증후군을 치료하는 게 백번 나을 것. 물론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고. 그야 어쨌든, 나는 루시와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헛생각은 그만 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은 이런 때였다. 지독한 슬럼프에서 탈출한 자존감. 지루함을 이겨내고야만 기발한 허영심. 겨울잠에서 깨어난 자존심까지. 모두 그녀에게 집중해야만 하는 중요한 순간이다.
    아무튼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내 성년기를 칭찬한 건가? 그걸 염두에 둔 채 그녀를 어디로 데려 갈까! 가식적인 발림 말보다 그녀를 은근히 감동시켜야 할 텐데.
    그래서 우리는 우리 둘 모두가 아는 딱 한 사람. 바로 롭을 만나기 위해 롭의 나이트클럽으로 갔다.
    영차영차 나이트클럽으로.
    영차영차 나이트클럽이 거의 보인다.
    영차영차 나이트클럽에 도착.
    휴~!
    그 다음.
    롭의 나이트클럽 사장실.
    나, 롭, 루시. 그렇게 셋이서 감시 카메라 화면을 멀뚱멀뚱 구경하고 있었다.
   「형.」
   「응?」
   「시 발표회 간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언제! 나 시인 아니야.」
   「그래?」
   「그럼.」
   「형. 신차 발표회장 초대 받았다며. 이번에 새로 나온 디자인 꽤 괜찮던데. 어때 그걸로 바꿀 꺼야 말 꺼야?」
   「내가 신차 발표회장에 초대를 받았다구? 금시초문인데. 걔네들이 바보니, 나 같은 가난뱅이를 다 초대하게! 너도 참 눈치가 없다 눈치가.」
   「형. 글은 잘 써져? 형 혹시 감 떨어진 거 아니야? 아니면 어디서 기 빨렸나?」
   「내가 기를 빨렸냐고? 내가 기를 왜 빨려! 조증녀를 만난 것도 아닌데. (멈칫) 흐흠. 어디서 기 받을 데 없나...」  두리번두리번!
    나는 그렇게 일찍도 깨달았다. 내가 눈치가 없다는 걸. 난 그렇게 약속이 있다면서 먼저 일어섰다. 내가 원래 눈치가 빠른 걸로도 모자라, 전설적인 이방이랄지 약삭빠른 간신처럼 눈치가 빨랐거늘! 나도 한물갔다 한물갔어. 뭐? 그럼 언제는 잘나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뭔가. 거 원 무슨 헛 참 나!
    그렇게 나는 쓸쓸히 NC에서 퇴장했고 집으로 갔다.





    23

    세상사란 노골적으로 성공을 강요한다. 그러면서 은근히 실패를 부추긴다. 왜냐하면 많이 또 잘 실패해야 성공할 확률이 높아질 테니까. 그래서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해야 한다는 적극성에 충분히 타당한 이유가 부여된다. OK! 여기까지는 좋다. 아주 좋다. 다만 전망을 살피는 눈 깜짝할 찰나의 직관력에 대해서 이왕이면 침착하기를! 상대가 상대였을 때 웬만하면 신중 그리고 전망! 곧, 될 수 있으면 소극적이어야 할 상황에서까지 적극적인 관성이 차분해지기는 쉽지 않다는 것. 하나 얻고 하나 잃는 지점이다. 그렇지만 적극적인 태도로 손해볼 텐가, 소극적인 자세로 (개)이득을 취할 텐가! 라는 최적의 방법론을 깨우치도록 인생은 우리에게 충분히 우호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 아름답도록 기막히게 깨닫고 나면 대게는 이미 어른이라는 점. (딱)! 여기서 베팅은 쉽지 않게 된다는 일리는 설득력을 얻는다. 옛말에 이르기를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느니, 준치는 썩어도 준치라느니. 또 있다.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대마불사! 그렇지만 지금과 과거는 사정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 정승처럼 버는 건 고사하고 개처럼 벌어도 벗겨먹을려고 하는 바로 <꾼>들! 그분들도 조심해야 한다. 그야 뭐 김칫국 먼저 마시기지만 말이다. 버는 건 어렵고 힘들며 더디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탕진하기는 너무나 쉽다. 그렇지만 그건 이미 어느 층위에 이른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말. 일단은 부자가 되야 부자가 되어도 별거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딱 부자가 되고 싶은데, 아니 벌써 어른이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정 때문에 현대인은 처음부터 온정이 그쪽으로 기우는 것이다. 과연 거긴 어디일까? 즉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타율왕, 이길 때 확실히 이기고 질 때도 확실히 지는 승부사의 쇼맨쉽. ~이 아니라! 그게 아니라 일단 타석주의로 어떻게 하면 다채로운 꽃과 사귀고, 다양한 과일을 맛보며, 다종한 더티러브라는 멜로드라마까지 섭렵할 것인가! 응? 화사한 꽃밭에서 뛰어놀며 어떻게 하면 벌꿀의 향기라도 맡아볼까, 쟤를 어떻게 한 번 해 볼까 라는 응큼한 공상이나 마음껏 하자? ~라는 까닭 때문에 바로 그 어딘지 모르는 <묻지 마 랜드>의 포지셔닝은 바로 그것이다. (두둥~) 아니면 말고!
    바로 그래서 플레이보이 뿐만 아니라 여러 동물들의 인생은 그렇게나 눈치 작전이 극심한 것이다. 어른들끼리 터놓고 하는 말에 따르든, 그냥 단순히 생각하든 사실이 그렇다. 보아하니 첫눈과 크리스마스는 매년 돌아온다지만 신인왕은 결코 그렇지 않거든. 신인왕의 기회는 1부 리그에 진입이 가능했을 때나 딱 1번. 그래서 숙녀의 마음은 언제나 처녀 같고, 마초의 사랑은 항상 첫사랑인 것이다. 그녀의 유도심문에 넘어가는 건 시간 문제겠지만. 그런데 다 차려진 잔칫상에 숟가락만 슥 올리려면 일단 숟가락이 있어야 하는 법. 곧 아무나 1부 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따라서 손에 진땀 나는 그 대망의 명승부에서 주인공 자리를 꿰차고 싶다면 일찍부터 경험할 건 경험하는 게 좋다. 예를 들면 예선탈락, 패자부활전, 난 나중 챔피언이 되서 유명해질 꺼야 라고 말했던 친구와 미리미리 친분을 돈독히 유지해서 나중 녀석이 마천루 몇 개를 소유할 때 나는 딱 그림자로써 녀석의 책상 먼지만 터는 일이라도 하기. ~라는 애초의 목표 설정.
    그러나 바이런처럼 눈 떠보니 유명해진 게 아니라, 난 어느새 팔 짧아지고 목도 짧아져버린 어른이다? 둘 중 하나다. 반틈이나 남았는데 남은 밭은 언제 갈지, 반틈 했으니 나머지 반틈만 하면 되겠네. 물 반잔! 늦었을 때가 제일 빠를 때일 것인가, 아니면 늦었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시기일 것인가. 우리가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뒤적거리건 TV 채널을 돌리건 어디를 가나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 오늘은 인생에서 남은 날의 제1일이다!
    그래서 아직 늦지 않았다 라는 마음으로 나는 희망찬 긍지와 밝은 자신감을 되찾은 채 집에 도착했다.





    24

    나는 딱 차에서 내렸다.
    걸어서 집으로 들어갈려고 했다.
    그런데 저쪽에서 차량 전조등. 일명 쌍-라이트가 깜박깜박. 깜박깜박. 뭐지? 뭐야!
    알고 봤더니 녀석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엔야와 로즈마리. 그리고 브렌따노 사장과 피타고라스 바텐더. 그렇게 4명.
    그 멤버는 저번에 나만 쏙 빼놓고서 자기들끼리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롭 사장실의 감시 화면으로 나한테 딱 걸린 친구들이다.
    숙녀들의 마음에 새로움을 선사하고, 상남자들의 심정을 깜짝 놀래켜주고자 하는 욕망. 그 도발적인 욕구는 원래 보통 은근하지도 은밀하지도 않다. 단지 그저 멍청하지 않으면 다행일 뿐! 그런데 녀석들이 날 챙겨준답시고 뭐 깜짝 이벤트야 뭐야? 그러니까 자기들의 흥분한 상상력으로 감격스러운 사교계의 호응을 너도 경험해보아라? 아이고야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구나. 어쩐지 뜸하다 했다. 그래도 의리는 있다 이거구만. 하는 일 없이 방황하는 이 멍텅구리까지 챙기시겠다니. 가상하네. 조금은 감격이야. 나도 감동 받은 흉내라도 내야 할 거 아니냐고. 녀석들의 다독임에 넌더리를 내겠어 어쩌겠어.
   「날 기다렸어?」
   「응.」
   「와 모두 모였다. 짝짝짝!」
   「아니 왜?」
   「저번에 너 삐진 거 같아서 기분 풀어줄려고.」
   「내가? 나 안 삐졌어. 나 그렇게 속 좁은 남자 아니야 얘. 뭐, 그래. 내가 큰맘 먹고, 응? 뺀질하고 옹졸한 남자역, 할께. 이번만. 딱 이번만. 이번 딱 한 번만. 못할 건 또 뭐야. 그래. 얼마나 기다렸는데?」
   「3일!」
   「진짜?」
   「아니. 뻥이야.」
   「뭐?」
   「3시간.」
   「진짜?」
   「아니. 뻥이야.」
   「뭐?」
   「2시간 반! 진짜야. 완전 진짜라고.」
   「그래. 뭐. 흐흠.」
   「어. 진짜. 완전 진짜.」
   「그러니까. 매복? 얘네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네 많이 봤어, 거 원!」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다면 그렇게 하고.」
   「어쭈. 세게 나오는데.」
   「같이 갈 데가 있어.」
   「어디? 누구? 나랑?」
   「너랑 우리랑.」
   「어디? 똑같은 데? 또? 나 방금 거기서 오는 길이야. 마침 저번처럼 또 사장실에서 감시 카메라 화면 들여다 보다 왔어. 내 기분 별로야. 그냥 그래. 아 진짜로!」
   「거기 아니야.」
   「그럼 어딘데?」
   「가보면 알아.」
   「멋진 척할 줄도 아네. 오오 분위기 있어 분위기 있어. 뭔가 있는 것 같잖아? 느낌 세한데!」
   「자, 그럼 같이 가줘야겠어.」
   「뭐야! 그럼 날 납치하시겠다?」
   「아니. 임의동행.」
   「얘네들이 전문용어도 아네. 허허. 내가 무슨 중간 보스도 아니고 말이야. 순순히 따라가는 수 밖에.」
   「자, 가자.」
   「그분이 대체 누구야? 일단 그거나 알자. 나중 내가 가만 두나 봐라. 아 진짜로 궁금하게 이러기야? 힌트 좀 줘봐. 응?」
   「두고 보면 알아.」
   「너네 그거 아니? 너네들 꼭 로보트처럼 말한다는 거. 꼭 뭐에 씌인 거 같다니까 글쎄. 얘네들 어설픈 듯 하면서도 나름 뭔가 있는 듯 하네 정말. 살다 살다 이렇게 사람을 모셔가는 일에 내가 주인공이 될 줄이야. 오 마이 갓~!」
   「가시죠. 말씀은 그쯤 하시고. 입 안 아프세요?」
   「그런데 이거 방탄차야? 어쭈~!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그렇게 우리는 출발했다.
    장렬한 공포심은 딱히 없었다. 그러니까 고독한 쾌감도 별로였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모험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기분 이상했다.
    대체 얘네들이 날 어디로 데려갈려는 거지? 기대하지 않는 만큼 예감이 뭔가 기묘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갈 데로 가자 라는 심정이었다. 오냐, 거기가 어디든 일단 가보자 라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그곳으로 가는 중간에 내가
   「이봐요...」 
    라고 말해도 모두 다 꿀 먹은 벙어리였다. 그래서 난 또 이렇게 말했다.
   「모르겄다, 나도.」
    그러다 나는 잠깐 골아떨어졌고, 잠시 후 도착했다.
    그곳은 롭이 저번에 소개시켜줬던 별장 인근에 있는 체육관. 아니 환상관 블루블루였다. 아직도 저 안에 다비드가 있는지, 타임머신 연구실도 있는지 이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날 왜 또 이곳으로 데려온 거야? 얘네들 참 괴상한 친구들이구만 그래.
   「여기였어? 아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싱거운 친구들 같으니라고.」
   「열어줘.」
   「응? 나보고 이곳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잠금 장치를 풀어주란 말이지?」
   「잘 아시네.」
   「알았어. 까짓껏.」
    나는 출입구에서 레이저 시스템 입력단에다 내 핸드폰 앱을 켜서 레이저 시스템을 해제시켰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나는비밀번호)」
   「(삐)」
   「뭐야?」
   「(난비밀번호)」
   「(삐)」
   「뭐? 뭐지?」
   「(IMPASSWORD)」
   「(딩동댕~) 출입을 허가합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독학한 외국어가 몇 개고, 다닌 외국어 학원의 종류는 또 어떻고, 하다 하다 에스페란토어도... 그렇지만 숙달한 외국어는... 통과.
    바로 그때 네 친구들은 내 앞에서 돌출 행동을 선보였다. 즉 얼굴을 벗어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얘네들은 네 친구들의 초정밀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뭐야! 얼굴을 안 보여주던가 보여주던가, 보여준다는 건...? 실수로 알게 된 거도 아니고, 일부러? 그럼 내게 음모의 전모를 노출하고 날 볼모로 삼겠다는 것 아니겠냐고. 밀정에 두더쥐에 정보책에다, 때로는 바람잡이요 이따금 포섭책까지! 급하면 현장 요원으로? 얘네들 머리 좋네. 탐욕의 앞잡이를, 그것도 내가? 왜 하필 엑스트라야! 그럼 너네만 설계자고 나는 뭐 삐리한 말단 허접쓰레기야 뭐야? 아 당근이 있어야 할 거 아니냐고 당근이~! 어?
    바로 그때.
   「(007가방을 내게 건넴)」
   「(내 눈빛 똘망똘망)」
   「잠김 장치는 위치 기반에 따라 우리가 처음 만났던 장소로 가시면 자동 해제됩니다.」
   「이제 장난 그만하면 안되니...에요? 이거 정말 너무 가는 거 아니...닐까요? 사람 겁나게 왜...들...그러세요?」
   「참고로 가방에 든 건 전액 현찰 고액권입니다.」
    뭐라고?
    우리는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25

    내부는 다비드 실사 크기로...... 보이는 인물은, 다름 아니라 구면이네?
    그는 바로 내 친구 딘딘이었다. 내 친구 딘딘이 떡하니 서 있었다.
    뭐야 저건 또! 야 너 거기서 뭐해? 이 자식이...!
    딘딘이 왜? 누가 아니래!
    판타지에 대한 신앙심이 유별났기 때문인가?
    하여간 적어도 남다른 열정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바로 그때 다비드상 실사 크기의 딘딘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찜. 많이 놀랐지? 미안 미안! 미리 말을 못했네. 어쩌다 그렇게 됐어. 내가 저번에 그랬잖아. 생각 안 나? 널 깜짝 놀라게 만들고 싶다고. 나 약속 지켰다. 그리고 겁 먹지 마. 응? 쟤네들 내 후배가 교수로 있는 연극영화학과 학생들이니까. 연기 잘하는 노안을 선정하느라 골머리 좀 앓았지. 허허. 정말 많이 힘들었다구. 응?」
    그러면서 공중으로 X맨 영화처럼 저 건너편 상단에서 막대가 주르륵 나와서 다비드상 실사 크기, 아니 그보다 훨신 큰 친구 딘딘의 머리 꼭대기로 그 뭐라 불러야 하나? 그 늘어나는 막대가 쭉 튀어나왔다. 막 부드럽게 말이다. 물론 그 막대 위에는 의자가 있었다. 전동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의자에는 친구 딘딘이 앉아있었다. 그렇게 녀석은 자기 딴에 어떤 기념식이 끝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그렇게 녀석은 지상으로 내려왔다.
    오, 딘딘! 어쭈~!
    괴물로 태어나느냐, 팔색조로 만들어지느냐. 녀석은 둘 다 아니었다. 동물로는 늑대. 조류로는 기러기. 식물로는 들국화쯤. 인생 경험으로는 잡초. 그리고 남자니까 화병. 그럼 오늘 난 녀석에게 네잎 클로버야 뭐야? 방금 전 퍼포먼스를 스페이스라고 치면 남은 건 다이아몬드랑 하트 뿐이잖아? 그럼 설마......? 아니야 아니야. 난 아니다 난 아니야.
   「놀고 있네. 나 원 참. 쇼를 한다 쇼를 해. 애 썼다 딘딘. 허허. 대단해. (짝짝짝)」
   「그렇지만 아마 너도 고생한 보람이 있을 걸! 어때 괜찮았어?」
   「내가 속을 뻔 했으니까 아마도 괜찮았다고 해야겠지?」
   「아직 마음을 놓긴 일러 이 친구야. 한 번 더 할까?」
   「엥?」
   「농담이야. 허허허.」
    중간은 생략하고.
    그렇게 언사를 나누고어쩌고 그런 다음 우린 헤어졌다.
    그분들은 날 집까지 정중히 모셔다줬고. 물론 007 가방은 내가 꼭 쥐고 있었다.
    그렇게 집에 도착.
    무사히 도착.
    그분들은 떠남.
    나는 집에 들어가서 씻고 어쩌고 그런 다음 침대에 걸터앉아서 007 가방을 열어봤다.
    그런데 아뿔사!
    이런, 젠장!
    진짜 돈이잖아? 그것도 맨 위 1장만 진짜가 아니라 전부다!
    뭐야 이거? 왜 나야!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응?
    나는 친구 딘딘에게 전화를 걸었다. 녀석은 받지 않았다.
    작전인가? 그러든가 말든가!
    에잇~ 잠이나 자자. 그러면서 나는 꿈나라로 떠날려고 했다.
    나는 잠이 오지 않길래 꼼지락꼼지락 인터넷을 뒤지며 소셜 네트워크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친구들 소식을 보던 중 알게 됐다.
    바로, 친구 딘딘이 사업 실패를 거듭하다 급기야 어둠의 세계에서 중간 보스가 됐다고. 뭐? 아찔했다~!
    그렇지만 뻥이 심한 친구의 말은 그랬고, 뻥이 덜 심한 친구의 말은 딘딘이 영화감독이 됐다나 뭐라나!
    이거 정말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 저건 혹시 선수금?
    내가 해줄 게 뭐 있다고?
    설마 보스의 전기를 대필? 그럴 리가 있나.
    이거 진짜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안절부절하지 못한 채 나는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26

    다음 날.
    잠에서 깨자마자 나는 007 가방을 찾아봤다.
    그런데, 007 가방이, 없어졌다.
    뭐?
    이 자식이...!
    그럼 이제 난 어떡하지?
    0에서 새로 출발하냐, 아니면 0이된 원인과 사연을 캐고 또 캐야 하느냐. 후자? 너무 복잡하고 어렵고 힘에 벅차다. 잘할 수도 없다. 그럴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전자, 0에서 새로 출발하기로 했다. 응? 변한 건 없다.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나는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평소처럼 살면 되는 것이다. 어젯밤 꿈을 꾼 것일 뿐. 모든 것은 그대로일 따름.
    예외라는 건 이런 걸 말한다. 손님의 황량한 미래가 예견돼도 점쟁이는 절대로 솔직해선 안되는 것. 단, 점쟁이 일생에 딱 1번 만날까 말까 하는 소름 돋는 운명의 상대가 건너편에 앉아 있을 때만은 예외. 그 순간 만큼은 솔직하지 않으면 점쟁이의 운명이 어떻게, 대관절 어찌 신묘해질지는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불문율이므로. 그때가 되면 어떤 점쟁이라도 살짝 소름이 돋으면서 손님이 듣기 싫어하실 얘기를 직설적으로 주르륵~ 읊으실 수 밖에 없다. 그건 점쟁이 일생을 통틀어 거의 1번도 만나지 못하는 기막힌 만남이니까. 그걸 경험한 점쟁이? 확률로 치면... 거의 0에 수렴된다.
    바로 그런 예외 같은 일이 내게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청소를 했다. 땀을 흘리며 운동도 하고.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그랬더니 정말 나는 은둔자나 고행자라도 된 것 마냥 잡념이 사라졌다.
   「이제 그만 날 내버려둬!」 ~라는 혼잣말도 하지 않게 됐다.
   「아 이거 정말 미치겠네.」 ~라는 절규도 언제 했었나 잊어버렸다.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서 나는 다음과 같은 몽상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됐다.
    (딱) 하면 됐다. 자, (딱)!
    이를 테면 이런 식으로.
    나는 짝사랑 받기를 언제나 요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한 속마음을 들여다보자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나 행복을 희망하지 단 1번 뿐인 인생을 신부들러리 인생으로 전전하기를 바라지는 않으니까. 당연한 이치다. 그럼 그 말은 곧 누구나 아부 받고, 찬미의 대상이고 싶어한다는 말 아닌가! 칭찬은 코끼리도 춤추게 한다는데 딸랑딸랑-반짝반짝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그러므로 여자는 모든 장르에서 주인공이기를 원하고, 남자의 궁극적 소망은 그거 아닌가. 조르쥬 심농 뛰어넘기! 뭐라고?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양반이 말이야, 듣자 듣자 하니 뭔 개 짓는 소리야 뭐야! 멍멍 멍멍멍 멍멍멍멍멍. 그 말은 곧 이렇게 한 번 꼬아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즉 아부의 신, 천하의 간신배! 패자는 전자와 후자를 어쩜 종이 한 장 두께 차이로 볼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승자는? 승자야 뭐 괴물 여왕벌 투수의 공이 수박 만하게 보이겠죠! 거 무슨, 탐관오리의 꽥꽥이야 뭐야?
    농담이고. 뭐 농담이 아니라고? 특이한 심경이 강변하는 비몽사몽 요상한 궤변은 이쯤 각설하고. 속된 말로, 헛소리를 신나게 떠벌이다보니 이제야 알겠다. 나는 그동안 뻔트는 신물나게 댔으니, 이번에는 화끈하고 호탕하며 통쾌한 장외홈런을 날리고 싶은 거라고!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얻어걸리기를 애정하며 밑밥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나는 당장 풍운아의 4대 요소를 모조리 일망타진하기로 마음먹었다. 풍운아의 4대 요소? 자유, 사랑, 행복, 인기!
    으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그러나 바로 이런 걸 숙명이라고 하는 것일까? 회심의 걸작을 딱 집필할려던 이 시절! 나는 바야흐로 음모꾼의 허접하디 허접한 작전에 딱, 찰칵~ 하며 걸려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바닥난 VIP 초대권. 소파 밑에서 우연잖게 1장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뜬금없이 발견한 VIP 초대권으로 재미삼아 방문한 투자설명회였다. 머리에 꽃을 꼽고 핀을 다는 것처럼 엑세서리만 달면 된다고 했다. 운동 에너지 측정기라는 조그만 장치를 각종 기계에 부착하기만 하면 거기서 발생하는 2차 운동 에너지를 일종의 TV 같은 수신기에 무선으로 보낼 수 있다는 사업 내용이었다. 손톱 만한 크기부터, 머리핀, 스피커 크기까지. 부착만 하면 된다. 헤어드라이어, 커피포트, 진공청소기, 세탁기, 제습기, 난방기, 에어콘등. 현대 과학 기술은 거기까지 발전했다. 정말로! 이미 옛날 옛날에. 달 기지에서 전기 에너지를 지구로, 또는 지구에서 태양계 내 어디까지. 바로 그렇게 무선으로 에너지를 보내고 받는 기술. 그게 허구가 아니라 충분히 실현 가능한 과학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러니까 난 쓸데없는 잔지식 때문에 또 속아넘어간 것이다. 벌써 2장이나 물려버렸다. 가뜩이나 지독히도 옹삭한 형편인데, 맥이 탁 풀리는 느낌. 그게 딱 내 기분이었다. 회사명은 그랬다.
    PM. 즉 팝콘 머신!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진짜로 솔직히 혹시 모르니까, 팝콘 머신 회사의 투자설명회에 잠깐만 가보기로 했다.
    그냥 재미로만 말이다.





    27

    나는 팝콘 머신 투자설명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보아하니 뜨내기. 유혹자. 간혹 신비의 지배자. 또 환상 중의 환상에 중독된 자. 그 환상이 대체 뭔 환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예스러운 인생의 인도자. 허둥지둥 들어서는 지각생. 그리고 어설픈 3대 사랑의 안내자까지.
    그와 더불어 참석자 대부분은 007 가방을 들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행사의 서론은 지나갔고, 본론은 뻔했다. 그래서 나는 중간 중간 졸았다. 그렇게 내가 비몽사몽하다가 행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행사가 끝나자 출구에서 참가자분들께 봉투를 나눠줬다. 그런데 나는 가방을 들고 있지 않다니? 그래서 그분들은 내게 봉투 대신 007 가방을 선물함. 집에 가서 열어보라나 뭐라나!
    나는 집으로 갔다.
    나는 집에 도착했다.
    집에서 007 가방을 열어봤다.
    뭐가 들어있었을까? 그때쯤 나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실의하기 싫었으니까.
    결과만 말하자면 이랬다. 내용물은 VIP 초대권 가득. 오직 VIP 초대권만!
    차라리 천만다행이었다. 몽땅 현금이라면 덜컥 겁이 났을 것 아니겠나.
    만약 그랬다면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오히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가 나았다.
   하지만 서운한 감정이라고 실망감이 왜 없었겠나. 무슨 VIP 초대권 인생도 아니고 말이다.





    28

    무정한 기쁨, 무섭다. 절대적인 즐거움, 겁난다. 무언의 환희, 진짜일까? 상사병, 상상만 해도 떨린다. 향수병, 생각하면 아련하다. 허언증, 완치된지가 언젠데 도졌다. 또!
   그런데 이상한 행복감은 알고 봤더니 꿈이었다. 나는 스치듯 거울을 봤다. 얼굴이 파랗게 질렸는 줄 알았는데 노랗게, 아니 누렇게 떴다. 이래서 어떻게 연분홍색 카네이션과 교감하며, 노랑 튤립과 새빨간 장미의 호감을 동요하게 한단 말인가. 됐고! 악마의 채찍질이니 천사의 당근이니 다 좋다지만, 쉴 때는 쉬어야 한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던 케익을 사던, 또는 미용실에 방문하던지 나는 집과 사무실 이외의 장소에 가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유치한 사랑이니 추접한 우정이니 그거 다 농담이고, 그렇지만 나는 이번에 나이트클럽에서 나오는 패자의 처량함은 반복하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일종의 '삶의 전환점' 같은 신선한 계기를 찾기 위해 분주했다. 맹렬히 동분서주했다. 동네를 돌아다니는 똥개에 주목하고, 길고양이들을 응시했다.
   「너도 (키높이) 깔창 좀 넣고 다녀! 명색이 연예인인데 그게 뭐니? 자신감 떨어졌으면, 어? 내 꺼! 나 나오는 동기 부여 비디오라도 찾아보든가. 응? 힘내!」
    무슨 운동화와 구두가 하이힐도 아닌데 1년 365일 생활이었는데... 그래서 그분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너도 (속칭 뽕브라) 좀 넣고 다녀. (몸짓) 응? 나 봐봐 얘! 아 굴곡이 다르다니까!」
    1년 내내 코르셋에 보형물에 짙디진한 화장에. 하기 싫어도 잘난 척, 귀찮아도 예쁜 척. 장3도쯤 높여서 애교에 교태에 아양까지! 그러다 어느 날 지치다 지쳐서 이윽고 다시 본래의 고유한 저음 목소리를 되찾는 여자. 체형과 목소리 음조는 정비례는 아니지만 딱 비례하니까, 아마 그동안 힘들었을 것이 확실하다. 아님 독한 건가? 그렇다면 독한 여자가 지독한 사랑에 빠지면! 넘어가고.
    그런 색다른 계기랄지 뭐 재미난 일 없을까? 라며 나는 또 다시 사색가로 돌변했다. 그러고 보니 관찰자! 한동안 소홀히 했던 직분이었다.
    그런 결과 나는 결국 여성잡지2를 비정기 구독하기 시작했다. 즉, 얼떨결에! 딱히 애호가도 아니고 청강생쯤으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여성잡지2를 들고 환상문학잡지 사무실로 놀러갔다.
    그렇게 환상문학잡지 사무실에 도착해서 나는 마라와 향긋한 차를 마시며 다정한 대화를 나누었다.
   「너 영화 시사회 다녀왔다며?」
   「누가 그래?」
   「누가 그러긴.」
    그러면서 그녀는 어느 잡지를 펼쳐서 내게 보여줬다.
    감독은 딘딘.
    제목은. 어디 갔어, 내 팝콘 머신!
    인터뷰가 실려있었고 사진도 있었다. 사진을 보니 뒤편으로 시사회 참석자들이 보였다. 그런데 그 사진에는 글쎄...!
    엔야, 로즈마리, 브렌따노 사장, 피타고라스 사장이?
    뭐, 또!
    진짜로, 또?
   「얘. 얘. 너도 있어. 잘 봐봐. 구석지에서 너 뭐하고 있었니? 너 얼굴이 왜 그래?」
   「」
   「말을 해봐봐. 응? 아 말을 해야 알 꺼 아니야!」
   「」
   「그리고 너 그런데 가고 싶으면 가고 싶다고 나한테 미리 말을 하라고. 응? 우리한테 들어오는 카드가 몇 갠데! 너도 (VIP 카드) 좀 넣고 다녀! 응?」
    머리 위로 수증기 모락모락~ 수증기 부글부글~!
    저번에는 코치와 선수단이 얼렁뚱땅 함께 했다. 그럼,
    이번에는 코치와 선수단이 함께 했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알게 된 건가?
    그런데 왜 나는 선수가 아니고 코치란 말인가. 나는 영원한 현역도, YB도, NB도 아니란 말인가? 어떻게 SB라도 (불쌍한 몸짓) 안될까!
    나는 상심했다. 이건 정녕 체념이란 상태였다. 아아, 절망이란 바로 이런 걸 뜻하는구나 라고 느꼈다. 한마디로 내 기분은 꽝이었다.
    완전 꽝!





    29

    미완의 환상머신은 불시의 행운에 힘입어 마침내 완성될 것인가?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설마 설마 하다가 진짜로 완성될지도 모른다. 바로 가상이라면 SF 영화에서, 실제라면 꿈과 희망의 놀이공원에서. 그럼 결국 우리네 삶은 비운의 발단으로 시작하는 드라마도, 불의의 전개부터 출발하는 추리소설이 아닌 것일까? 아마도 그렇다. 왜냐하면 생애는 보통 먹고 살기가 중대사일 테니까. 고로 만약 우리 모두가 벼락부자가 된다면 사랑이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또 그때 되면 즉흥적인 변명은 수없이 발생할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시시각각 바뀌는 유행에, 잠룡을 예측하기 힘든 시류 하며, 변덕스런 마음까지. 그래서 인생은 지금인 것이다.
    인생 = 지금!
    흡사 사랑은 대체로(?) 변심이듯이. 곧 우리는 자유주의자고, 사회는 자본주의다. 도시의 고독한 사냥꾼일 땐 탐미주의자. 사랑을 하면 낭만파 배우. 으쌰으쌰에 임하면 내일은 없다? 오늘을 살자, 또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꿈은 수시로 바뀌고 여자의 마음은 여자도 모른다. 그렇다고 어느 상남자의 대망이 평생 놀고 먹기일 거라는 추문을 어떻게 믿겠나. 누가 웃겠나. 지나가는 똥개도 관심 없을 것이다. 우리도 바이런과 랭보, 보들레르쯤은 알거든. 인생은 어차피 둘 중 하나다. 밀턴의 실낙원, 아니면 플레이보이의 인생찬가. 농담이고, 일단은 쓸쓸한 양치기의 연가. 전환점의 평균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야 어쨌든 우리에게 잔재주는 든든하고 뻔트는 다망하니, 불행 중 다행!
    때문에 생활 패턴을 분석컨대 우리는 매번 바뀐다. 어떻게 바뀔지는 형편에 따라 다르다. 그대는 수시로 변한다. (그리고 나는 늙었다? 수증기 푸쉭푸쉭!) 너 저번에 평생 피자만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피자를 제일 좋아한다며? 그건 그때 얘기고! 예술가는 변화의 바람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테지만, 우리는 새로움을 추구하면 그뿐. 말상의 광마를 타고서 신나게 놀고, 유리구두를 신은 채 즐겁게 춤추면 그만. 노래 부를 땐 나도 가수고, 사색에 잠기면 누구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된다. 사극에 보면 광대들은 천시 받는 인생이니 이 한세상 재밌게 놀다 가면 그뿐이라고 한다. 작가도 행복한 소풍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갈 거라고 한다. 시각에 따라 이승은 홈그라운드일 수도 원정경기일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심심하지 않을 이유를 찾고, 놀 궁리에 골똘히 골몰하기를!
    사실이 그렇다. 일하기는 놀기를 질투한다. 놀기는 젊기를 소망한다. 젊음은 사랑스럽기를 애원한다. 사랑은 간혹 애원이다. 애원은 다정하기를 간청한다. 다정함은 행복이다. 행복은 혹시 안중에도 없었던 쾌락 아닐까? 뭐라고!
    시끄럽고 듣기 싫은 궤변은 이쯤 하고. 그러므로 나는 무엇으로 변신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광견, 하이에나, 팔색조! 무엇을 고르지, 늑대? 흔해 너무 흔해.
    그럼 뭐야, 남은 건 넷 중 하나네. 변적쟁이─개구장이─장난꾸러기─엉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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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 - 136

from 소설 2018. 11. 15. 17:31

    1

    그는 소소한 행복은 잊고, 멀리 있는 대망을 믿었다. 그러니 좋아하는 희망과의 친교는 삐그덕거렸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999번 적토마 '청춘'에 올라탔다. 뭐야 이거, 이거 정말 어찌된 일인가. 그런데 그 환희마는 알고 보니 호박에 줄 그어 수박이 된 명마였던 것이다. 그래서 광마는 쾌감만을 추구하며 눈길은 자꾸 어느 꽁무늬만 뒤쫓았다. 그러면 NB는 그 끝이 파멸일지 성공일지 불투명한 광기에 그대로 몸을 맡긴 채 광인이 되어야만 하는가를 고찰했다. 계속 이대로 가, 말어! 가? 말어! 그 결과 선구안은 보아하니 음 가만 있자, 방법은 딱 두 가지라고 알려줬다. 보건대 전망이 반투명하니까. 그것은 곳,
    첫째, 애마와 합심하여 뻔트를 댈 것인가.
    둘째, 순결한 망아지는 목가적인 풍경화에 소풍 보내고, 기수는 잠시 애마와 헤어져 열정적인 광견이 되기. (심신분리야 뭐야)
    뭐라고? 오, 소름! 푸릇푸릇하던 비리비리 매가리 없던, 결정은 지금 성과는 다음. 따라서 그는 냉큼 2번 카드를 뽑아 들었다. 그렇게 그는 저번에 롭이 소개시켜준 작업실로 가서 당분간 그레이하운드로 살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파이어와 에메랄드 색상의 호사와 무지개빛 사치스러운 타락마로 변했을까? 청초한 데이지와 다양한 들꽃이 반기는 들판으로 돌아가 야생마가 되면 차라리 낫다. 그런데 경기장에서 만년 꼴찌만 전담하는 경주마의 숙명이 되풀이되는 악몽,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어떻게 새빨간 상상에 은밀한 몽상으로도 모자라 은근히 웃음 짓는 색마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부끄럽지만 그는 확고한 목표 설정을 하는 게 아니라 불순한 후보군을 퇴짜 놓는 공상을 즐겨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다시 말 떼와 개 떼를 구경했던 그 작업실로 갔다.
    달콤한 사랑이, 미지의 환상과 절대의 신비를 양쪽에 꿰찬 듯한 걸작을 완성하기 위해서. 물론 실제 목적은 미완의 구상이자 마음 놓고 놀기 위한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렇게 롭이 소개한 작업실로 향했다.





    2

    그는 롭이 주선한 작업실 즉 별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뭐지, 이미 임자가 있네? 당당히 쳐들어가서 당신 누구냐고 묻기는 좀 뭐했다. 당차게 너 뭐야? 그럼 쓰나, 에잇! 그래서 그는 롭에게 전화로 물어봤다.
   「롭. 이미 누가 있는데? 뭐야 이거. 쟤 팀 쿡이잖아?」
   「뭐? 여동생이 이번에 누가 온다고 했는데, 그럼 그거 진짜였나? 그러니까 가면 간다고 형이 나한테 미리 말을 했어야지.」
   「말했잖아?」
   「그래? 그럼 내가 잘못한거네. 있잖아, 그 별장이 내 껀데 알고 보면 우리 여동생 지분이 70퍼센트야. 음... 그러니까. 일단 철수해.」
   「뭐?」
   「그런데 진짜 팀 쿡이야?」
   「가짜일 수도 있지. 그런데 뭐랄까. 주변에 이상한 차들이 즐비한 걸로 판단하건대... 그런데 네 여동생은 무슨 일 하니? 오해하지는 말고. 왜 내 말이 꼭 그처럼 들리니? 늬 남편 뭐하니?」
   「남편? 뭔 남편! 팀 쿡이 남편이래?」
   「그게 뭔 소리야?」
   「형이 이상한 걸 물어봤으면서 왜 나한테 그래?」
   「어쨌든 저 인간 딱 보니까 직감이 내게 이렇게 일러주네. 일은 잘할 거 같은데, 일 잘하겠지 왜 못하겠니. 그런데 꽤나 째째할 거 같아. 뭐랄까 지나치게 꼼꼼하고 완벽해서 친교의 상대로는 썩 부적절한 느낌? 뭐 그러든가 말든가.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고.」
    탈선과 끈끈한 사이이자 일탈과 자주 돈독한 관계를 지속하는 자유인의 삶을 바랄 수는 없었기 때문일까? 그는 다시 본거지로 돌아가서 그런 위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권태의 수중에서 놀아나다 마침내 서슴없이 심심함의 하수인.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했네.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그 어떤 플레이보이도 꼼짝 못하게 사로잡히고야 말 마성의 아름다움은 애초에 꿈도 꾸면 안되는 거네. 말을 말자 말을 말어!
    그는 툴툴대며 생떼쓰기도 지겹고, 귀티가 좔좔 흐른다는 빈말 듣기를 바랄 수도 없었다. 착찹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3

    고급 사교계의 축복 받은 초대객은 애당초 무리수. 그러니 좋은 기회를 엿볼려다가 방탕의 나락으로 빠지지 말고, 그렇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싫증나면 싫증난다 재미없으면 재미없다,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 내키지 않으면 내키지 않아 라고! 그래서 A에서 B로 옮겨가 일하기와 놀이를 동시에 할 수도 있고, 주어진 여건에서 하나만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여 하찮은 소문이 들리지 않고 신선한 새로움이 보이지 않는다면, 상황은 장난이 아니라는 말. 그러나 서둘러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해결책은 많으니까.
    첫째, 발랄한 조수의 깜짝 출연. 즉 발단 건너뛰고 전개 먼저.
    둘째, 여행─으쌰으쌰─소비─변화. 매체를 바꾸거나 단짝 바꾸기.
    셋째, 대회 직접 출전. 허풍 대회─자랑 대회─조증 대회─칵테일 대회등. 
    넷째, 대회 간접 출전. 스포츠 복권. 경마─경륜. TV보기.
    그런데 다 해봤다? 애써 유쾌한 척 해 봐야 소용없고, 긍지와 자신감과 희망마저 모두 귀찮기만 하다? 처방전은 없을 수가 없다. 곧 당근이 문제던가, 채찍이 이상하던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말을 잘 못 탔던가. 또는 중간에 말이 말을 통 듣지 않거나 연봉 계약에 이견이 클 수도 있고. 그보다 아마 한눈팔 여지가 다분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새파란 탐구심, 청순한 동경심, 기쁜 열망등 이런 긍정적인 가치가 변심한 게 아니라 답은 그것이었다. 보아하니 애마는 사랑하고 싶고, 회전목마는 좋든 싫든 돌아야 하고, 경주마는 미친 듯한 질주를 좋아한다는 것. 하지만 당나귀는 쉬고 싶다는 것. 놀라운 야생마라 판단해서 깜짝 놀라 긴급 영입하고 정성을 쏟아 길들여놨더니 글쎄, 녀석은 알고 보니 그저 일시적으로 광마를 흉내낸 것 뿐이라니. 그럼 조랑말을 풀어줘서 개랑 같이 풀을 뜯어먹든가 말든가 내버려두는 수 밖에.
    그래서 JS는 철없는 망아지의 힘 빠진 광기를 가라앉힌 채 휴일을 따분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포니로부터 조정 경기에 나가자는 연락이 왔다. 또?
    그는 당장 출발했다.
    포니를 만나러 가는 길. 드라이브하면서 모처럼 콧노래 부르기. 라디오에서 노래가 나오길래 뭔 노래인지도 모르고 막 흥얼거리기.
    행복한 기분과 사랑스런 분위기. 요리 보고 저리 봐도 쾌적한 풍경에 조정 경기를 하다가 딱 중심을 잘못 잡어서 막 어쩌다가 포니가 그의 품에 갑자기? 포근히 안기는 상상. 진짜로? 아니 그것만 빼고.
    미스테리아 사무실을 뻔질나게 드나들어서일까, 아니면 구미가 당기는 건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일까. 웬 뜬구름 잡는 공상만 하고 또 했다. 그래도 어떻게 보자면 정나미 떨어지는 무미건조함보다는 나은 일이다. 푸릇푸릇한 몽상과 젊은 광기까지는 근접하지 않았으니 것도 괜찮고.
    그렇게 NB는 포니가 평소 애정하는 그런 거. 음 그러니까 여성잡지가 넌지시 제시하는 욕망을 화제로 제시할 생각을 하다가 포니 집 앞에 도착했다. 이어서 곧장 포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오빠.」
   「안녕 포니. 너네 집 앞이야.」
   「어? 그런데 이 시간에 웬 일로!」
   「웬일은? 지나가다 들렸지.」
   「잠깐만 기다려. 금방 나갈께.」
    그는 최근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포니가 나오기 전까지.
    순진무구한 기쁨을 잉태하는 아침의 일하기일 것이냐, 아니면 마음을 녹여주도록 짜릿한 밤의 환락일 것인가. 그는 네온싸인 불빛 주변에서 방황하기보다 오전의 환희를 택했다. 왜냐하면 날이면 날마다 작작 마시고 가지가지 하는 (순 철부지 어른들 뿐인) 아기 코끼리 꾸러기단에 가담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게 아니라 혹시 그들만의 리그에서 허당은 입단 불허하기 때문 아닐까? 빙고! 농담이고. 그건 아닐 것이다. 재미없는 무소속에서 쾌감에 대한 불행한 성적보다, 그는 살짝 망설이며 창작의 고통을 보듬었으니까. 언제 갑자기 번득이는 영감이 알몸으로 춤을 추며 당신 앞에 떡하니 나타날지 알길이 없지만!
   「오빠. 벌써 오면 어떡해?」
   「응?」
   「내가 말 안했나? 조정 경기 1달 후라고.」
    저런. 저런. 저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왜냐하면 그는 A를 상상하느라 B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A.남자를 기분 좋게 하는 마술적인 매혹이란, 오빠 병 뚜껑 좀 따줘!
    B.조정 경기는 한 달 후입니다요, 오빠.
    할 일은 세계 마초 협회에서 한사코 선사할려는 공로상 거부하기. 그리고 양 어깨에 올려진 햄버거 내려놓기라니. 노노노노노! 그는 축 쳐진 뒷모습을 포니에게 보이기 싫어서 먼저 포니를 들여보낸 다음 호젓이 집으로 돌아갔다.





    4

    빤한 사랑이자 뻔한 인생이 될까봐 수상쩍고 부쩍 의심이 많아지는 시절. 찡한 사랑의 변심이 두렵고 왠지 모르게 일하고, 놀고, 쉬며, 먹고 자는 일상이 짠하게 느껴질 때. (혹시 갱년기? 뭐-뭐!) 그건 무슨 기분인지 통 모르겠다, 가 아니라 으쌰으쌰의 분위기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일 것이다. 그렇게 고삐를 풀고 자유인이 된다면, 정력가로써 행운을 얻고, 아리따운 숙녀를 만나 재미깨나 볼 수 있는 좋은 징조일까? 허나, 참고 참고 또 참고 많이 참았다가 괜히 혼자 꽝될지도 모르니 미리미리 조심할 것. 라~고 오늘의 운수가 친절히 조언할 수도 있다. 말 나온 김에 점이나 보러 가볼까? 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가만 있다 그저 그런 구경꾼으로 자리매김하느니,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바로, 팅커벨을 찾아 백방으로 날뛰기! 쨍한 소풍과 즐거운 청혼은 남의 얘기고, 슬픈 이별가 듣기도 재미없다. 그런즉슨 추문과 신비주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단지 그 진위 여부만 알고자 사방팔방 떠벌리기. 그러다 하루는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지며, 하루는 꽤 괜찮은 조과에 심하게 기뻐하기. 비오는 날에 연분홍색 장미꽃을 선물하고, 바람 부는 날 숙녀 앞에서 로맨티스트로 변신하기.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
    그래서 이제는 나서야 할 시간. 그러다 그는 결정적으로 아는 동생들한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아첨꾼으로 데뷔하고자 했는데...! 또? 결과만 말하자면 다들 바뻤다. 때문에 그는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에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락을 받고야 마는데!
    그것은 바로 친구들이 담합해서 수영장 파티를 열자는 약속이었다. 오래 기다리고 고대하며 애태우지 않아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바로 내일이니까. 그럼 그렇지. 음하하하하하하. (그런데 왜 갑자기 연락을...! 설마, 대타? 몰라 몰라) 이거야. 이거라고. 한동안 너무 적적하다 했다니까, 그러면서 그는 내일을 기다렸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빨주노초파남보.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5

    오늘은 수영장 파티에 가는 길.
    그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확실하다고. 날짜를 잘못 안 거도 아니고 초대 받지 못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안심. 기분은 좋음. 예감도 나쁘지 않음. 기대감은 고조. 분위기는 들썩들썩. 파티도 파티지만 기다리는 즐거움과 어디까지 가는 여정이 어쩌면 최고의 기쁨일 수도 있다. 얘를 보니까 딱 그렇다. 그러니까 앞으로 어떤 휴가 일정이 펼쳐질지는 몰라도 그것만은 아니기를. 말하자면 의뭉스러운 발단─수상쩍은 전개─못 믿을 절정─묻지마-식 결말만은 아니기를!
    이처럼 들뜨다 보니 그는 하트 뿅뿅과 윙크와 뽀뽀하는 상상은 잠시 뒷전으로 미뤘다.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이름. 사무치는 사랑. 그리고 반드시 해야만 할 무엇! 허영기 충만한 숙녀만 좋아하는, 허당기 많기로 정평이 나 있는 남자인지 아닌지 누가 관심 있겠나. 그래도 좋았다. 왜냐하면 지금은 수영장 파티에 가는 길이니까. 충격적인 미스테리와 쇼킹한 판타지에 대한 공상은 잠시 내려놓고 그는 중간에 쉬기로 했다.
    공원에서 맨손 체조도 하고 산책도 잠시 한 다음 다시 애마 웨건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출발했다.
    그렇게 1시간쯤 갔을까? 또 한 번 쉬기로 했다.
    그렇게 딱 어느 공원에 주차를 한 다음, 뭐야?
    차 뒷좌석에 웬 007가방이 큰 것과 작은 것. 그렇게 2개가 있네? 누가... 놔뒀지? 설마 차가 바꼈나? 아닌데. 맞는데. 그럼 누가 자기 차인 줄 알고서 잘못 넣어놨나 보다. 일단 내용물을 봐야 주인을 찾아서 돌려줄 수 있으니까 그는 가방을 열어봤다.
    작은 007가방에는 핸드폰이 수십 개 있었다. 또,
    큰 007가방에는 지폐 다발이 꽉 차 있네? 뭔가 어설픈 걸로 보니 제일 윗장만 진짜!
    뭐야, 그러면 밀가루는 어딨고!
    거기서 핸드폰 중 하나의 벨소리가 울렸다. 받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야 윌. 어디까지 왔어. 우린 다 왔어.」
   「윌? 너 혹시... 델이니?」
   「어! 늬가 윌 전화를 왜 받아?」
   「그러게. 내가 윌의 전화기를 왜 들고 있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윌과 NB는 차 모델과 색상이 똑같았고, 정말로 윌이 착각해서 자기 가방을 중간에 NB차에 실었던 것이다. 그야 뭐 차만 바뀌지 않았으면 됐고, 백색 가루에 연루되지만 않았으면 다행. 그렇게 그는 수영장 파티장에 도착했다.





    6

    수영장 파티에 참석한 애들을 보아하니... 다 아는 친구였다. 그런데 딱 한 명. 모르는 아가씨도 있었다.
    오오! 지금까지 만나본 여자들과는 깜짝 놀랄 만큼 완전 딴판. 따라서 사랑에 홀딱 빠져들지 않고서는 못 배길 지경. 뭐야, 또 첫눈에 반했다고? 지겨운 악습이자 중독된 버릇이구만 그래. 그렇지만 참으로 기묘한 낯빛이 어디서 본 듯 만 듯 했다. 그녀는 결연한 품격으로 어느덧 매료시켜버리고야 마는 첫인상이었다. 아침에는 늦잠자느라 바빴고, 낮에는 일하기 싫어 별난 핑계에 골몰했으며, 이윽고 해가 지면 괴짜로 보이고 모지리가 될지라도 어느 흥겨운 분위기를 찾아 기웃거리기 일쑤였는데. 그런데 이제야 입이 귀에 걸리게 생겼구만 그래. 잘한다 잘해!
    파티는 순탄했다. 가당치도 않은 모험은 없었고, 재수 옴 붙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맛나게 먹고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NB에게 비상 문자가 왔다. 게다가 메시지와 알람이 울렸다. 뿐만 아니라 앱은 삐요삐요 울렸고, 마침내 전화가 왔다. 레이저 시스템에서 침입자를 감지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NB는 사실을 친구들한테 말했고, 그런 설비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실토를 얻어내고야 말았다.
   「황금 마네킹... 그 그림. 그게 진짜냐 가짜냐. 우리끼리 내기를 했어. 그런데 뭐 레이저 설비 시스템? 진짜란 말이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응? 내가 어떻게! 인터넷에 당장 검색해봐. 어디에 있다고 다 나온다니까. 내 껀 위작이야.」
   「그럼 레이저 시스템은 뭐야?」
   「그건... 그건 그냥 설치해뒀어.」
   「그걸 뭐하러?」
   「재미로.」
   「그럼 이번에 집 지키는 개가 드디어 한 건 한 거야?」
   「뭐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런 셈이지.」
   「그래? 이거 축하해야 할 일...인가? 일단 축하하지 뭐.」
   「그...런가?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거 보면 명석한 사냥개 때문에 내 입지가 꽤나 올라간 듯한데? 기분이 지붕까지 올라가진 못했지만 양 어깨에 특대 햄버거가 올려진 듯하구만 그래.」
   「그래? 그럼 이 내기는 어떻게 한담?」
   「그런데 그 얘기를 왜 나만 몰라? 나랑 쟤. 딱 둘만 빼고 나머지는 다 안다고? 너네 정말 그러기야? 어? 너네 진짜 이러기냐고! 일단 한 번만 봐 줄께. 그렇지만 다음엔 얄짤 없어. 알어? 흥! 있잖아, 그런데 있잖니. 응? 그 그림이 티치아노가 그린 거야 아님 라파엘로의 솜씨야? 설마 진품은 아니겠지? 그렇지?」
    그 다음에 왠지 분위기가 급속히 경색됐다.
    정말이지 으쌰으쌰 좀 안 하면 어디가 덧나나.
    그는 속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다른 친구들은 정반대였다. NB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레이저 시스템을 설치한 보람이 발생했는데? 때문에 그는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고서 속내를 언제쯤 드러낼까 고민했다. 아니다. 그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런데 녀석들도 말을 아끼네? 그래서 기분은 거북하고 분위기는 궁상맞고.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그는, 설마 얘네들이 날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의아했다. 천재가 발명한 환상머신에 대한 속인의 광신을 얘네들한테 들켜버린 건 아니겠지, 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치만 분위기가 급냉하는 바람에 뉴페이스에 대한 관심도 겸연쩍어졌다. 환상적인 매력에 필적할 만한 청순함, 빛을 잃었다. 그렇다고 지금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데, 그런데 불행을 주선하고 퇴폐를 추천할 수야 없는 일. 아름다운 사랑과 타락한 인생의 기묘한 대조는 이제 그만, 제발 그만. 모두들 찬탄하지 않을 수 없는 몰아의 경지에 접어들 지경이었다.
   「있잖아요, 저 먼저 갈께요. 약속이 있었는데 깜빡 해서. 그럼 이만. 나중에 뵈요.」
    처음 보는 숙녀는 그렇게 먼저 일어섰다.
   「나도 이만 실례.」
    도나도 가네?
   「잘났어 정말! 무슨 청춘 드라마 찍니? 살다 살다 별 이상한 일을 다 보겠네. 나도 가야겠다.」
    자, 폴도 가시고.
   「왜 그런대 정말!」
    샐리도 떠나네?
   「어머머머. 내 정신 좀 봐....」
    그렇게 모두들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래서 NB는 이렇게 말했다.
   「난 남을께. 당분간 작품 구상할 게 있어서. 델. 그래도 되지?」
   「어? 어-어! 그럼.」
    패기냐 패배주의냐. 삶은 정공법이 다가 아니다. 일단 작전만 봐도 뻔트가 있다. 가짜 싸인 같은 은근한 간보기라고 왜 없겠나. 뻥카와 트로이 목마와 시간차 공격 외에도 벤치에서 대기중인 선수들은 쟁쟁하다 못해 나도 모르게 거북목이 된다. 아니면 귀가 이만~하게 커지던가. 그래서 그는 딱 정했다. 가난뱅이 인생은 지긋지긋하니까 마법사 카드를 만지막만지막. 그러나 어설픈 허당 마법사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비현실적인 장르도 금새 지겨워졌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신물이 났다. 고로 그는 이번에 마음 먹고 개구쟁이가 되기로 했다.
    그는 별장에 남은 채 떠나는 애들을 슥 곁눈질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레이저 시스템이 한몫 제대로 했겠다, 녀석들의 뚱딴지 같은 오해도 받았겠다, 남아서 이 기분이라면 걸작 하나 뚝딱 완성할 수 있겠다 라고! 도대체 몇 마리 토끼를 잡을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7

    별장 블루에서 홀로 1일째.
    그는 기적 같은 반짝 성공을 바라지 않았듯이 뜬금없는 재산 탕진을 꿈꾸지도 않았다. 우선 화끈하게 뿌려댈 수 있는 품위 유지비부터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반짝이는 사교 생활과 눈부신 희망의 실현을 관측했을까? 그럴 리가 있겠나. 그러면 그는 신나는 모험을 예견했을까? 삶은 영화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결국 그도 어쩔 수 없는 플레이보이 지망생이므로, 따라서 황금을 탐구하고 행복을 추론하는 그림을 상상했다는 건가? 아니다. 딱 아니다. 그는 즐거운 미래와 기쁜 운명이니 로맨티스트의 행운이니 그런 건 모르겠고, 때문에 그는 그저 놀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뭐?
    그런데 전망이 꼭 상쾌하지만은 않았다. 예감은 밍밍했다. 기분은 담백했으며 분위기마저 우중충했다. 특별한 수작과 발랄한 책동도 없이 그 뭔가를 기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건 곧 007의 전성기가 환생하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본드걸이 필수라는 것. 역전홈런의 주인공은 뭐니 뭐니 해도 본드걸의 부활인 것. 마술사 옆에는 미녀 조수가 있고, 수트 입은 관리자에게는 매끈한 투피스를 입은 비서가, 슈퍼스타에게는 보디가드부터 대략 몇 명이 붙어다니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어떻게 그 모두를 고용한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전도 유망한 본드걸의 성장을 미리미리 지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본드걸이여, 너는 나중 나를 위해 치타 무늬를 애정하고 무엇도 입어야 할 테야! 라는 힌트는 꼭꼭 함구한 채 말이다.
    그렇게 그는 별장으로 다른 친구들을 불렀다. 그렇지만 순순히 오겠다는 친구는 단 1명도 없었다. 본드걸 물색은 시작과 동시에 끝나는 건가? 그는 부쩍 초조해졌다.
    그래서 그는 연습장을 펼치고서 아무 글이나 막 써대기 시작했다.
    다음과 같이.
    번잡하게, 신부 들러리니 부케니 결혼 행진곡이니 다 필요없고. A의 전남편과 B의 전처의 몰래한 사랑. 불륜이면 숨기고 떳떳하면 숨길 게 없는 일. (물론 몰래 하는 애틋한 사랑과는 또 다름) 그건 곧, 애절한 사랑의 맹세와 꿈 같은 애정기는 모르겠고. 어쩌면 짧은 행복과 단순한 쾌락만을 위한 만남이 복귀한 돌씽들에겐 신나는 활기일 수도 있다는 것. 아찔한 지성에 독실한 천직과 멋진 인생도 좋다만, 왜냐하면 옛-카톨릭 교칙에 따르자면 이혼이란 없거나 전처가 살아있을 때 재혼이란 불가하기 때문. 좌우간 아빠의 인생도 좋고 엄마의 사랑도 소중하나, 관건은 내 앞가림인 것. 순교도 배교도 아니고 주홍색 하면 튤립만 생각하면 되니 그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지금은 중세에 비하면 지상 천국 같지만, 자세히 면면히 들여다보면 또 썩 그렇지도 않다. SF영화에나 나오는 미래로 갈길은 아직 머나멀기에. 좌우지간 일단은 스스로 먹고 살기에 신경쓰는 수 밖에. 냄새를 맡고 (개)이득에 민감한 채.
    글쓰기 끝.
    그 다음으로 그는 동네를 탐색했다.
    그렇게 별장 블루에서 홀로 1일째는 마무리되었다.





    8

    별장 블루에서 홀로 2일째.
    친애하는 일상과 유망한 이상 간의 괴리. 밝은 꿈을 선도하건 단란한 유흥에 몰두하건, 단기 성과와 장기적 목표가 구분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테면 오늘의 사랑과 내일의 행복. 그 둘이 바뀌는 걸 인생의 초심자는 핑계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노련한 장수라면 수단과 목적이 경도되지 않는 이상 계획의 변경에 인자할 수도 있다. 물론 고수라면 오늘의 사랑과 내일의 행복, 그 둘의 혼담을 잘 성사시킬 테고.
    그런데 형편과 사정이 어떠하건 변심에 앞서 소년에게 추천해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 옳지, 야망이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소녀는 일기를 쓰고 친구끼리 바이런풍 시어를 논하는 데 반해 소년은 그렇지 않으니까.
    둘째, 어른이 되면 대망보다는 그날그날의 경주에 충실한 삶을 살기 때문. 꿈도 좋다만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러니까 그처럼 삶의 비밀을 잘 알면서 우리 어른들은 대망과 소망을 비롯하여 몇 마리 토끼를 잡긴 잡았을까? 그럴 리가 있나! 일단 우리가 플레이보이인데? 사냥개한테 또는 빚쟁이한테 쫓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래서 우리는 철칙1과 계획2, 그리고 신나는 인생을 위한 제7의 복안을 알게 모르게 다 꽁쳐두는 것이다. 그렇게 꺼낼 수 있는 카드가 많은 사람은 주로 경주마보다 야생마 유형이다. 왜냐하면 마주와 경주마, 마권업자, 관중은 큰 걸 바라거나 또는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며 얽매인 게 많은 데 반해, 야생마는 잃을 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주마는 육성되고, 야생마는 야성을 주체하기 힘든 까닭에 목표가 막연하다. 어른들은 노림수가 분명한 반면 몽상가는 개꿈 꾸느라 바쁜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예는 무엇일까? 이렇다. 삶의 제1철칙은 무슨 일이건 전망을 살핌과 동시에 암산으로 순서도─가능성─경우의 수─에너지 투입량을 따지기. 계획2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고. 그 다음으로 제7의 복안, 그것이 과연 NB에게 있었나? 하면 없었다. 뭐? 그러니까 그는 영화 주인공감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다큐멘터리형 캐릭터에 가깝다는 잇점 아닌 잇점도 있었다.
    하여 그가 이번에 고른 게임은 무엇일까? 무엇인고 하니 그건 바로, 그 동네를 샅샅이 뒤지기로 했다. 탐험. 탐사. 탐방. 탐구. 탐닉등.
    중간 과정은 생략.
    탐험. 탐사. 탐방. 탐구. 탐닉등 충분히 했다 치고.
    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관심을 부쩍 끌어당기는 두 가지를 발견해냈다. 그건 곧
    첫째 체육관, 둘째 문 닫은 카페.
    그래서 그는 일단 문 닫은 카페를 내일. 즉 별장 블루에서 홀로 3일째 되는 날을 기념해서 탐색하기로 결심했다.
    일단 그렇게 별장 블루에서 홀로 2일째는 막을 내렸다.





    9

    별장 블루에서 홀로 3일째.
    그는 일단 동네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는데 그 궁금증을 풀 수 없었다. 때문에 별장 관리 권한이 있는 델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델. 마을 사람들이 이상해.」
   「이상하긴 뭐가 이상한데.」
   「인사는 서로 하는데 통 얼굴을 못 봐. 혹시 좀비 아닐까?」
   「그럼 잘된 거지. 각본 하나 써.」
   「아 진짜라니까. 꼭 로보트 같다고.」
   「별일도 아니구먼 그래. 됐고. 다음에 통화해. 나 바뻐. 끊어.」
    뚝.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렇게 해서 NB는 전날 목표로 삼았던 첫째 체육관, 둘째 문 닫은 카페 방문을 시작할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건 오후로 미뤘다. 오전에는 일을 해야 하니까.
    무기력을 싹 씻어버리도록 기 받는 느낌에 왠지 일이 잘될 것만 같았다. 애먼 발단의 꿈쩍도 않는 퉁명스러움이야 뭐 차차 해소될 테고. 당최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랑에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얼렁뚱땅 멜로드라마 한 편을 금새 써버릴 듯한 자긍심이 샘솟았다. 그야 어쨌든 일하기가 놀기를 구워삶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렇지만 일을 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따분해졌다. 모험이라면 차마 마다할 수 없는 승부사로써 한눈팔고 싶어졌을까? 새침떼기로써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그녀도 보이지 않는데 뭘. 인생은 못 미더운 예언가의 허언증을 닮아서는 안되는 것. 다시 일이나 하자.
    아니 아니 잠깐만. 딱 잠깐만.
    그러고서 NB는 핸드폰 앱으로 사무실 감시 영상을 켰다. 심심하니까 기분 전환도 할 겸 생각나서 그걸 켜봤다. 엇그제 친구들의 난데없는 이벤트도 기억나고 하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머머머머!
   「끽해야 정지 영상이 전부일 줄 알았는데. 아뿔사!」
    악마의 환상에서 탄생하지 않았을까 추측되는 신기한 논법 같은 일이라니!
    웬 복면 일당이 황금마네킹...그림을 바꿔치기 하는 장면이 진행중이었다. 실시간 앱으로 화면을 보는데, 그게 뭐랄까, 썩 어설프지 않은 걸 보니 전문가인 듯 했다.
    그런데 왜 레이저 시스템이 먹통이 된 거지? 설마 얘네들이...! 아아, 쟤네들은 아마추어가 아니구나.
    그럼 친구들이 엇그저께 꾸민 모의는 장난이었고, 오늘 지금 벌어지는 사태는 장난이 아닌가? 그러네. 장난이 아니네.
    의연히 받아들이기엔 썩 석연치 않은, 운명의 장난이었다. 오오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상상도 못했던 일인데, 어쩜 좋나!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원래 있던 위작을 떼가고, 그 자리에 진품을 박아넣는다?
    그런 바보 같은 일을 왜? 누가! 뭐하러? 자긴 시키지 않았는데! 그런데 왜?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일단 그는 칼럼니스트 나부랭이인 NB로써 가히, 전혀 이채로운 연락을 해볼까도 생각했다. 흔히 취할 수 있는 몇몇 행동 지침들. 그렇지만 이건 평범해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자긴 잃을 게 없으니까. 때문에 느닷없이 그는 민망한 소망으로 부풀었다. 변한다 얍~ 나타난다 뿅~! 농담이고. 또 다시 번개처럼 느닷없는 공포의 전율 때문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인공 처우는 사양하고 행인 3도 싫고, 딱 그랬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전개가 발생하다니. 어떡하지? 어떡하냐고! 이 일을 어쩌면 좋냐고. 새로운 인생과 더 새로운 '찐한 사랑'을 꿈꾸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나중 오락산업에서 그럴 꺼 아니냐고. 일단 황금 마네킹... 안 찾나 못 찾나! 라~고 들쑤시며 분위기를 달구면 점점 으샤으쌰 밋밋한 제목들은, 어? 하루아침에 마구 경쟁하듯이 도박적이고 세끈하며 도발적으로, 그렇게 세게 바뀔 건 뻔한 일.
    그러면 나중 결국 읽게 될 헤드라인은?
    어디 미술관, 도난 미술품 정보 제공에 112억원 현상금 내걸어!
    그 다음에 그러면, 압수에 체포에? 설마 내 위작을 얘네들이 원본과 바꿔치기 할 리는 없고. 그럼 나만 뭐된 거잖아? 라는 계산이 한순간에 슥 스쳐지나갔다. 12년 전 도난된 반 고흐 그림, 마피아 은신처에서 발견? 노노노노노 노노노노노노노! 내가 그 마피아? 그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기분이었다. 자긴 아무짓도 안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세기의 도난사건으로 수배 명단에 오르다니. 그건 아니었다. 그래서는 안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당장 상상 가능한, 떠들썩할 뉴스들은 안 봐도 훤했다. 인터뷰 화면이 자동적으로 스르르 떠올랐다.
   「네. 미술품이 도난되면 인터폴의 수배 리스크에 바로 올라가기 때문에 공개적 유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하세계, 즉 마약이나 무기를 사고 파는 암시장에서 주로 거래하고 있는데요. 미술작품이 마약과 무기 다음, 곧 세 번째로 밀거래가 많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충만 봐도 웬만한 산업계처럼 단위가 어떻다고 할 수 있죠. 네. 그럼요.」
   「보통 한 작품을 다시 회수하기까지 최소 10년은 걸린다고 하는데요. 물론 그것도 운이 좋으면요. 지난 2008년 스위스의 에밀 뷔를르 재단 미술관에서 도난당한 세잔의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과 드가의 '르픽 백작과 그의 딸들'은 아직도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작품이 도난당하면 10년에서 15년, 길게는 100년에서 150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 도난품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법적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다분합니다. 훔친이들이 신상확인이 안된 구매자에게 작품을 판매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끝이냐, 아니겠죠. 주인은 수차례 바뀔 수도 있는 것이죠. 그렇게 마지막 구매자가 사망을 하거나 또는 다시 시장에 내놓게 되는 거죠.」
    그럼 혹시 얘네들이 일만 제대로 했다면? 자기가 모른 체만 한다면 끝까지 아무도 모를 수 있잖아!
    방법은 하나뿐이 없었다. 진득하니 앉아서 그런 소식이 안들리기만을 바랬다.
    그 소식만 들리지 않는다면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는 www.artloss.com에 검색해서 검색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만이기를 바랬다.
    별장 블루에서 홀로 3일째 종료.





    10

    별장 블루에서 홀로 4일째.
    집과 사무실이라는 생활 반경에서 꼼짝도 안하다가 밑도 끝도 없이 깜짝 놀랄 만한 스캔들에 연루되는 일. 오히려 그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글쎄! 말도 안돼, 의 주인공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황당한 진실. 이 일을 어쩌면 좋니 어쩌면 좋아! 어떻게 어떻게 끼니도 해결하며 일도 잘 안 풀리던 차에 비싸지도 않은 위작을 도난당하다니. 그것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서? 오 세상에나! 정말 그 도적들은 자기 친구들인가 그는 살짝, 아니 많이 의심스러웠다. 호젓함에 물리고 심심함에 지겨운 끝에 부러 오지랖 떨지 말라며 경고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불길한 기대 반 씁쓸한 예감 반.
    그는 일단 기다렸다.
    걸작 미술품 황금 마네킹...이 도난당하는 대형 절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라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오오, 그러나!
    그러나! 아아, 그러나!
    진짜로 그러나, 정말로 그러나!
    구체적인 뉴스가 나왔다. 왜냐하면 대형 작품은 아니지만 토막 뉴스로는 다룰 만 하니까.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뉴스를 어느새 보게 된 것이다.
   「장 엘리옹의 황금 마네킹 상점이라는 작품 1점이 도난당하는 절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도난은 이날 새벽 3시께 일어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도난 당시 박물관의 경보장치가 꺼져, 경찰은 즉각 경계령을 발동하고 현장으로 출동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경찰이 도착한 뒤에는 이미 미술품들은 사라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현재 사건 현장 목격자들을 심문하고 있으며, 페쇄회로텔레비전 비디오를 분석하고......」
    뭐야 이거?
    ...단 10분 만에 훔쳐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명화가 무슨 여심이야 뭐야!
    ...현상금은 얼마라고 합니다: 인터폴 그건 영화에서나 보던 얘긴데!
    ...미술품 도둑은 거물 투자자도 월스트리트의 전설도 아닌 누구로 밝혀져? 이건 상상임.
    ...작품과 범인의 행방은 지금까지 오리무중이다? 용의선상에 오른 멘사 회원이 나일 리는 없겠지!
    ...27일 영국 타블로이드 ‘데일리 메일’은 뉴욕시의 한 아파트에 도둑이 복도 벽을 뚫고 침입해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과 보석, 귀중품 등을 훔쳐 달아났다고 밝혔다: 걔네들이 내 친구들이라고? 저런!
    그래서 그는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고로 그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즉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별장 블루에서 홀로 4일째 종료.





    11

    별장 블루에서 홀로 5일째.
    그는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일단 계획했던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즉 첫째 체육관, 둘째 문 닫은 카페 탐문하기.
    그는 그렇게 마을의 수상한 체육관을 방문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야 뭐야!
    레이저 시스템 가동됐다. 삐요삐요~. 삐요삐요~. 삐요삐요~.
    그는 도망갔다.
    곧바로 델한테 전화해서 물어봤다.
   「델. 동네 규모와 마을에 있는 체육관 규모가 전혀 비례하지 않아. 그리고 레이저 시스템이라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늬가 직접 알아봐. 왜 바쁜 데 딱 이 시점에 전화를 하고 그러니. 나 지금 완전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뚝! 이 자식이...!
    그래서 그는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저녁이 지나 밤이 되었다. 야심한 시각이 되자 그는 마을의 체육관에 방문했다.
    그렇게 체육관 앞. 잠겨있다고? 핸드폰 앱을 켠 다음 푸른색 불빛을 조정단자에 비춰서 레이저 시스템 가동을 중지시켰다.
    선수 입장.
    설계도를 떠올려보니 체육관은 직사각형 형태였다.
    입구로 들어갔다. 그러니 곧바로 딱 그런 모양새였다. 영화에 나오는 타임머신을 개발하는 과학자의 사무실.
    어라~? 애썼네! 음 노력했어. 신경 많이 썼구먼. 이거 혹시 체육관을 미술관으로 쓰시나! 그리고 무슨 취조실처럼 사무실 한쪽 벽면은 전부 커텐으로 가려진 상태라니.
    그러다 그는 저기 저쪽에서 큼직한 TV만한 크기의 버튼을 발견했다. 무슨 박물관에 있는 투명한 도자기 보호 상자처럼 모셔져 있네? 다시 핸드폰 앱을 켜서 파란 불빛을 투시한 다음 손을 집어 넣어 버튼을 눌렀다.
    두둥~!
    커텐이 열렸다.
    그런데 뭐야 이거! 키가 대충 5미터? 7미터? 웬 거인이 서서 자고 있네? 딱 봐도 다비드상이랑 똑같이 생겼다.
    말도 안돼! 이걸 믿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아 말이 돼야 믿을까 말까 한 번 고민이라도 해보지, 참 나.
    거 참 보자 보자 하니까, 이거 무슨 밑도 끝도 없는 만화영화냐고!
    그래서 그 사무실에 있는 자료를 충분히 읽고 파악해봤다. 결론은 그랬다.
    <신체 냉동 보존 기술>에 따라 현존하는 조각상 상당수가 조각이 아닐 수도 있고─그럼 모하이 석상도?─어쩌고저쩌고!
    이런 이런 이런... 저런! 일이 점점 크게 진행되고 있었다. 저런 말도 안되는 장면을 보고... 안 믿을 수도 없고 말이야. 밑도 끝도 없이 웬 거인? 그런데 진짜야! 아 나 이거 진짜 사람 미치고 환장하겠구만 그래. 펄쩍 뛸 일이 분명한데 그렇지만 또 진짜야. 이걸 어떡한담? 뭘 어떡해!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뚱딴지 같은 장난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라~고 혼잣말을 내뱉으며 그는 일단 믿었다. 일단 말 같지도 않은 일이 분명하지만, 개 풀 뜯어 먹는 일이라고 사실인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일단 돌아가는 경과를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집이나 사무실로는 가지 못했다. 인터폴이 지키고 있으면 어쩌라고! 뿐만 아니라 그 규모면 이미 머머머, 머머머 같은 정보 단체는 물론이요 사설 업체 특수요원들까지 쫙 깔렸을 거 아니냐고! 때문에 그는 하는 수 없이 다음 날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사무실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초정밀 3D 홀로그램이거나, 섬세한 4D 가상현실이 아닐까 라며 의심할 텐데! 당시는 그럴 계제가 아니었다는 점. 입 벌리고서 침을 흘릴 뻔 말 뻔 했다는 거다.
    별장 블루에서 홀로 5일째 종료.





    12

    까다로운 눌변가에게 시달리고, 말하기 좋아하는 달변가들의 잘난 척에 질리는 현대인들. 친구들 면면을 살펴보니 기분 좋을 땐 호인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롱꾼, 호사가, 허세꾼, 잔소리객, 협잡꾼, 정력가, 호색한, 병풍, 신부들러리 등등. 그래서 혼자 놀기에 열중하여 듣기 싫은 상투어만 늘어놓는 TV를 보다 보다 지쳐서 끄는 도시인들. 타도해야 마땅한 타성. 물리치고 싶은 권태.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심심함.
    천박함을 피하기 위해 멀리 해야 할 대상이 많아지다 보면, 우리도 어느새 잔소리왕이 된다. 어쩌다 나도 모르게 어른인 거지. 건방지기로 유명한 친구는 배가 이따만하게 나왔고, 나는 팔과 목이 짧아졌고. 그러다 어영부영 음악이 멈추지 않는 클럽에서 입장 금지 당하기. 곧 큰 기술은 먹고 살기 위한 생업이고, 삶의 기쁨은 누가 뭐래도 잔기술인 것. 뭐야, 또 잔머머?
    그래서 우리는 식상한 우정과 식어버린 사랑 대신에 혼자만의 무모한 도전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의 취미일 수도 있고, 일개 한량의 새로운 인생을 위한 결심일 수도 있다. 그런데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고,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는 것. 저질? 값싼 농담 치고는 왠지 짠한 농담이다. 즉 꽃과 과일과 멋과 행복도 좋다만, 희귀한 신인왕에게는 촌스러워도 물개박수를 아끼지 않는 법. 다시 말해 성공 가능성이 높은 번개마는 배당률이 썩 불만족스럽다는 것. 어차피 유명해지면 광대의 운명일 뿐이고, 고급 매니아와 초보 애호가는 나뉜다는 것.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안 말렸으면 한도 끝도 없이 근처만 빙빙 돌 뻔 했구먼유. 오, 땡큐!」
   「아 글쎄 비인기 종목에 대한 취미요, 아니면 꾀죄죄한 패전 전담 요원에게 베팅하기요?」
   「뭐시라! 뭐 꾀죄죄한 패전 전담 요원? 이 양반이...!」
    요점은 전자 '비인기 종목'도, 후자 '꾀죄죄한 패전 전담 요원에게 베팅하기'도 아니다. 고로 정답은 스카우터!
    즉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나만의 꿈나무 찾기. 다시 말해 성숙한 애마? 아니 아니 새파란 꿈나무! 하지만 본격 SF물은 대체로 재미없고, 정통 에로보다 현실적인 찐한 사랑을 간구하는 게 꿈나무 찾기냐? 똑부러진 명답은 아닐 테지만 은근슬쩍 비스무리한 대타는 그것이다. 바로, 남자는 집에서 응애응애 있으면 안된다, 우리는 바깥으로 일단 나가야 한다는 것. 아니 글쎄 대타의 뻔트도 아니고 뻔트의 사랑론도 아니고, 뭐, 엉덩이 걷어차이기 전에 당장 나가라고? 어? 참 나 헛 참 나! 대체 그게 뭔 소리야!
    그야 어쨌든, 말하자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보자면 그는 또 엉덩이가 근질근질해졌다는 뜻이리라. 보아하니 스카우터는 무슨 스카우터야. 요점은 그거 아니냐고. 일명, 묻어가기! 결론 참 어렵게도 설명한다.
    그래서 일단 묻어갈 만한 거인, 괴물, 고혹적인 애마랄지 발랄한 구상은 불명확했기 때문에, 따라서 그는 오랫만에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사무실로 놀러갔다. 최근에 발생한 믿지 못할 일도 논의할 겸 해서.





    13

    별장 블루에서 홀로 6일째.
    환상문학 잡지 미스테리아 사무실 도착.
   「막돼 먹은 거야, 아니면 못돼 먹은 거야? 그게 그건가!」
   「미안하지만 둘 다 아니야.」
   「미안할 게 뭐 있니! 안 그래? 아니 근데... 그럼 혹시 주인공보고 악역을 떠맡으란 말은 아니지?」
   「반박자 늦지만 말귀가 어둡진 않네.」
   「너 뭐야? 난 TV 드라마 보면서 너한테 말하는데 넌 딴소리나 하고.」
   「뭐하긴 뭐해? 너네 잡지 봤지.」
   「어째 너랑 대화만 하면 배가 자꾸 산으로 가는지 난 그걸 정말 도저히 모르겠어. 너는 아니? 왜일까? 대관절 그 까닭을 한번 알아나 보자. 나도 알기나 알자고. 응?」
   「왜긴! 어렵게 생각할 거 뭐 있어. 너가 너무 아름다워서 아닐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어? 입은 삐툴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어. 어? 너 정말, 그래도 되는 거니? 너의 그 유별난 미모 때문에 왜 내가 매번 정신을 못차려야 하는데? 어? 이거 진짜 너무한 거 아니니? 너의 그 남다른 열정, 빼어난 흡입력, 천사 같은 마음. 응? 또 있어. 수려한 자태. 뭐 하나 흠 잡을 게 없잖아. 안 그래? 나의 요정...은 아니고. 왜냐면 그건 늬 남자친구 몫이니까. 너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치 않는 거니? 응?」
   「야! 뭐 필요해. 어? 너 뭐 필요하냐고. 말만 해. 아 나 이거 정말 얘, 헛 참! 꼴에 지도 남자라고. 라~며 하찮은 얘기 하는 여자애는 만나지 마. 알았어? 품위 유지비 떨어지면 언니한테 말하고. 응?」
   「아, 뭐해? 지금 이 상황에 정신이 있어 없어, 어?」
   「그건 또 뭔 소리야?」
   「있잖아, 지구가 빵꾸났어!」
   「뭐, 진짜?」
   「아니. 뻥이야. 너 현실이랑 허구랑 구분이 안되니? 지구가 어떻게 빵구나? 마감일에 쫓기니까 얘가 정신이 이상하게 된 게로군.」
   「이 자식이...」
   「헤헤헤. 속았지? 메롱!」
   「1절만 해. 어? 넌 가만 보면 도입부는 괜찮은데 꼭 클라이맥스 근처도 못 가서 깬다니까. 알긴 아니? 왜 그렇게 삼천포로 빠지니? 왜 꼭 느닷없이 뚱딴지 같은 소리나 하냐고! 그나저나 축하한다.」
   「축하? 뭘? 무슨... 축하? 날? 내가 축하 받을 일이 뭐 있다고!」
   「너 환상문학상 그랑프리로 뽑혔다며! 상금이 자그마치... 내가 또 발이 넓잖냐. 너 나 알지? 나 소식 빠른 거. 상금이 자그마치... 1장이라며?」
   「뭐, 진짜?」
   「아니. 뻥이야. 푸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이... 이... 에이 관두자.」
   「뭘 때려 치겠다고?」
   「아 쫌!」
    어쨌든 그가 말도 못 꺼내다가, 어떻게 틈을 내서 겨우겨우 얘기를 꺼내기는 했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믿겠나.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다. 하긴 애들도 못믿겠지!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왜냐하면 자길 도와줄 사람도 없고,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니까.
    이 무뚝뚝한 곤경을 어떻게든 헤쳐나가야만 했다.
    하필이면 이런 해괴한 일이 내게? 상상도 못할 때는 왜 그런 일이 내게 발생하지 않나 그랬는데. 이제는 저절로 면구스러워졌다. 이렇게 박한 우연이라니. 얼떨떨한 운명은 또 뭐고. 기어코 미술품 전문 도박단이라는 직함까지 떡하니 떠맡았잖은가. 모두 그저 그런 해프닝으로 일축해버리기엔 일의 규모가 너무도 컸던 것이다. 너무도 착찹했고 어떻게 뜯어말릴 수도 없었다. 사뭇 스릴러이자 미스테리-호러의 주인공을 떠맡긴 했는데, 독차지한 방석을 보아하니 꽤나 떨떠름할 수 밖에. 이건 도무지 말도 안되는 전횡적인 처사요, 웃기지도 않은 3인칭 관찰자 시점이었다. 원래 하고 싶은 역할은 쾌감의 완수자랄까 뭔가 톡 쏘는 말투를 뽐내고 싶었는데, 찌질하게 숨어서 오락산업의 소식만 기다려야 하다니. 저런 저런! 첫눈에 반하기를 억제할 수 없는 장밋빛 맵시는 다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그러든어쩌든 시간을 믿어보는 수 밖에.
    별장 블루에서 홀로 6일째 종료.





    14

    별장 블루에서 홀로 7일째.
    그는 동네 아저씨로써 풍족한 황금에 대한 질투에 종종 사로잡혔다. 뻥이다.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러면 단순 해결책이라면서 상품점에서, 필요치도 않은 악세사리를 막 가격표도 보지 않고 샀다. 한편, NB도 때로는 권태로운 일상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진짜로? 뻥이다.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았다. 보아하니 선망에 비해 내 안의 행복에 소홀해질 때면 그는 가택감금을 기억했다. 바로 데이빗 커퍼필드의 저택에 갖혔던 순간을. 그래서 그는 유쾌한 일하기의 방책을 어떤 책사에게 보고 받은 셈 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일하기가 아니라 버젓이 놀기에 대한 비장의 카드로 인식한다는 것. 그러니까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것인지, 아니면 쾌활한 바보인지 상태가 안 좋은 푼수인지, 그 원인을 통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뭐라고, 그 원인? 그건 바로 즐거운 인생은 풋사랑이냐 짧은 행복이냐 라는 것.
    썰렁한 농담은 이쯤 줄이고. 그야 어쨌든 다행스러운 건지 혹은 딱한 건지 그는 최근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도망간 마음을 찾기 위해 여러 시도를 거듭해봤다. 예를 들면 어떤 숙녀의 마음을 빼았기. 아는 동생의 의식 속으로 허락도 없이 불쑥 들어가서 한 자리 꿰차기. 웨이트레스의 짝사랑을 받기 위해 괜히 얼쩡거리기. 첫인상이 특별한, 여-바텐더의 본심을 밀었다 당기기. 그리고 내 심보는 들키지 않기. 더불어, 처음 보는 어느 마담을 쥐락펴락하지 못한 체 무작정 알짱거리기. 뭐 집쩍?
    그러나 다 실패했다. 성공할 리가 있겠나. 그분들이라고 보는 눈이 없겠나, 신경 쓰이는 뒷담화를 상상하지 않겠나. 싹싹하지 않은 입방아, 그 예상의 적중을 감수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아니 짓이었다. 재미없는 운명을 탓할 수도 없었다. 신나는 모험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였다. 젊음의 거리에 무턱대고 너무 자주 출몰해도 안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허구헌 날 뽀뽀하는 공상만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작전 카드는 단 몇 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끝까지 아껴놓고 꼭꼭 숨겨놓은 최후의 조커를 기용할 수 밖에 없었다. NB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요술, 신비, 환상, 4차원, 신기루, 꿈동산... 이런 걸 허구에서 찾지 않은면 안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를 믿겠나 어쩌겠나.
    그래서 NB는 7일째를 맞아 그는 동네 인근에서 발견한 문 닫은 카페를 방문했다.
    좀더 속도감 있게 요점만 간추리자면 이렇다. 어느 버튼을 잘못 눌러서 카페 내부의 스크린이 켜졌다.
    그런데 뭐야 이거, 세계 메이저 골프 대회가 생중계중이라니! 심지어... 면밀한 데이터베이스가 화면에 깨알처럼 나오는 걸 보니... 이건 여기서 조정할 수 있다는 말이네? 바로 카페의 한쪽 벽면 전체가 화면이었던 것이다. 즉 골프공 안에 뭔가 있고, 골프장 코스 바닥에도 뭔가 있다는 거 아닌가! 설마 지하세계 자금과? 저런 저런!
    좀더 속도감 있게 구간 당기기. 반복해서 말하자면,
    좀더 속도감 있게 구간 당기기!
    결과는 이랬다. 부동산 업자가 찾아와서 알게 됨. 그곳은 스크린 골프장으로 밝혀짐.
    별장 블루에서 홀로 7일째 종료.





    15

    별장 블루에서 홀로 8일째.
    찐한 사랑, 더티러브, 풋사랑이라는 3대 어설픈 사랑. 다시, 어설픈 3대 사랑! 그 가운데 그는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단지 인생에게 행복한 사랑을 주선했을 뿐. 그래서 인생은 내친 김에 플레이보이의 4대 요소 그 모두를 간택했다. 정말로? 뻥이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나. 웬걸 짝사랑에나 빠지지 않으면 다행일걸!
    따라서 JS에게 부족한 3가지는 그랬다. 팔짱, 윙크, 하트, 뽀뽀, 키스, 오빠 또 오빠 계속 오빠! 3가지가 아니네. 그럼 몇 가지야? 그러니까 NB는 낭만은 눈독으로, 로맨스는 군침으로, 환상적인 미지의 사랑을 흑심으로 잘못 인식할 수 밖에. 그러나 그는 타산적이며 이기적이고 촌스러운 남아의 대명사로 비춰지기는 싫었다. 때문에 친구들의 무분별한 '밤의 행차'를 뿌리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데 놀기의 불만족은 노상 일하기의 불성실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 그도 모르지 않는 진실. 곧 으쌰으쌰도 다 나름 효용성이 명백하다는 뜻. 그래서 그는 친구들의 권태를 달래고 녀석들의 재미없음을 치유해주고자, 어디까지나 그러기 위해서 사교계에 얼굴을 들이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매번 똑같이 놀면 재미없으니까 그들은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는 동생이 주최하는 가면 파티에 갔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비율이 꽝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그곳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곧 바 잘스부르크로!
    그런데 하필 그들이 자리잡은 그 유명한 바는 바로 여-바텐더가 없는 바! 저런...! 참으로 맥 빠진 방랑자들이군 그래. 누가 그 답답한 심정을 몰라줄까 봐 울기 직전의 표정 하고는. 하나같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용안들이군 그래!
    시덥잖은 객설은 각설하고, 지금쯤 잠잠해졌을 테니 사무실로 찾아갈까 라고도 생각해봤다. 그런데 그러다 잡히면?
    그 근처만 얼쩡거리다가 알짱알짱하는 낯선 사람을 발견하고, 불심검문한 다음, 조회 결과 체포 명령 떨어짐.
    그렇게 체포됐다가 중간에 도망감? 아니야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래서 그는 일단 밖으로 나갔다. 편의점에 들렸다. 즉석복권을 샀다. 결과만 말하자면 이랬다.
    1차는 동전으로 회색부분을 긁다가 그 부분이 빵구났다. 그래서 그 부분 자체가 아작나버렸다. 요즘 친구들 말로, 빡돌았다. 완전 빡쳤다!
    2차는 꽝이었다. 그리고,
    3차는 아차상에 당첨됐다. 그치만 상금이 무슨 다비드상 되기라는데... 뭐야 이거! 하면서 그냥 구겨서 버렸다.
    그 다음 그는 미용실에 갔다.
    저번에 미스테리아 사무실에서 잡지를 보다, 흐흠 하는 헛기침과 함께 잡지 한 면을 찢어서 접어놓은 사진을 꺼냈다.
    그리고 그는 헤어드레서에게 말했다.
   「이렇게 잘라주세요!」
    한참 머리를 깎고 있었다. 그러다 거울을 봤는데 거울 속에 웬 다비드가? 깜짝 놀랐다. 다시 보니 원래대로! 바로 이때부터 다시 여자를 볼 때마다 가끔 대리석 허벅지가 보이는 환각이 시작됨. 걱정됨. 많이 걱정됨. 마치 이런 대화를 일상적으로 나눌까 봐서.
   「오빠도 막 내 다리가 대리석으로 보여?」
   「어? 그게 무슨...! 아 뭔 소리야?」
    그는 컷트가 끝나고 미용실에서 나왔다.
    마지막으로 체육관 핑크에 찾아갔다. 거기만 들렸다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NB는 체육관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갔다.
    보아하니 저번의 그 버튼은 없었다. 커텐도 없었다. 더더군다나 다비드상도 없네?
    그는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고, 중앙에서 혼자 서서 자세를 취했다. 저번에 본 다비스상처럼!
    그런 다음 그는 별장 생활을 종료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뭐?
    아니다. 돌아가면, 유력한 미술품 도난범으로 딱 잡힐 거 아니야? 그게 무슨 푼돈도 아니고!
    아니지 아니지.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롭이 소개한 작업실로 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6

    그는 흥미로운 놀림감이 되고자 기어코 새로운 환상머신을 만들겠다는 것인가? 몰라요 몰라요!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그러든가 말든가!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아마도 듣기 싫은 풍문쯤으로 치부하는 게 어떨까. 고로 더없이 멋쩍고 꽤나 쑥스러운 추측일 뿐.
    그렇지만 또 어찌보면 왜 소년 시절에 야망을 키우지 않았냐며 비난하기도 퍽 옹삭한 일이다. 그러니까 뽑아 든 카드는 결국 멋쟁이나 탐미주의자가 아니라, 어머나 모험가라니. 것 참 탄복할 만한 미래주의일세. 하지만 따분한 어중이떠중이로 심심함에 염증을 느끼느니, 불가능을 꿈꾸는 열정에 운수를 걸어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때문에 그는 작정했다. 지금은 나를 따르라 라고 외치는 선동가도, 나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는 로맨티스트도 아닌, 바로 스스로 신비한 환상가가 되어야만 한다고. 그런데 대단한 영감을 떠올린다면서 어쩌다 막살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을 잠재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충 살자'라는 타당한 격언을 잘 아니까 그건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따라서 NB는 마땅히 환상소설을 지망해야 하는데! 그런데 신나고, 재밌고, 유쾌한 감정의 연속을 촉발하는 그것에도 소홀해선 안되었다. 왜냐하면 잘 놀아야 잘 일할 테니까. 말하자면 그것은 무엇? 그건 바로 사랑과 우정 사이. 다른 말로 놀기! 뭐시라고라? 참 나, 난 또 뭐라고. 그래도 충분히 긍정적인 논리다. 행복한 일하기와 즐거운 놀기를 양쪽에 꿰차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나, 뭔들 못하겠나.
    그래서 자칭 사랑의 바보이자 행복의 개구쟁이인 그는 오랜 방황을 마치고 마침내! 롭이 소개한 작업실로 정처를 옮겼다.
    롭이 소개한 작업실.
    롭이 소개한 작업실은 빈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 롭이 소개한 작업실에서 1일째인가?
    집에도 사무실에도 돌아갈 수 없는 그의 방황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지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낮잠이 스르륵 밀려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꼭 글을 읽던 중 딴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니까 몇 번 더 친절한 배려를.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다시,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다시,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

    그는 꿈에서 생각했다.
    아, 맞다! 사무실의 그림은? 그는 다시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 도착했다. '난패스워드'라고 비밀번호를 입력한 다음 사무실로 들어갔다.
    삐요삐요~! 삐요삐요~! 삐요삐요~!
    딱 3번 울리고 스스로 멈췄다. 그 다음에 바로,
    소리는 없이 레이저 시스템만 가동되면서 다비드상이 나타났다.
   「넌 누구냐!」
   「넌 누구냐?」
   「내가 먼저 물었다.」
   「너는 묻는 말에만 답하면 되는 거야. 그게 늬 할 일이라고. 어?」
   「너나 그래라. 너는 누구냐?」
   「아 나 정말 허허. 얘 또 시작이네. 오류난 건가?」
   「오류? 그거 사람 이름이냐?」
   「얘 앞에서 뭔 말을 못한다니까.」
   「얘 앞에서 뭔 말을 못한다니까.」
   「그러지 말고 내가 심사관이라 생각하고 연기나 해보렴. 첫째 섹시한 매력, 둘째 도발적인 교태, 셋째 자극적인 애교.」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이 친구야. 이 양반 이거 이거 순 한량 아니야? 안되겠다. 늬가 인공지능 하고 내가 주인 하자! 지금 시국이 어느 땐데...! '대충 살자'라는 직분과 달리 놀기에서는 '최선을 다한다'라는 전략에 치중할 것인가. 아니면 한량으로써 못 이긴 척 '막살자'편에 가담할 것인가. 내가 지금 그걸 고민하고 있는데,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내 그럴 줄 알았다.」
   「내 그럴 줄 알기는 뭐가 그럴 줄 알어! 넌 몰라. 넌 하나도 모른다고. 넌 바보란 말이야. 이 곰탱이 머저리 멍텅구리야. 알어?」
   「몰라 몰라. 난 아무것도 몰라.」
   「뭐 언제는 그랬을 꺼 아니냐고! 감당하기 벅찬 쾌락은 물론 끝없는 유혹과 무한한 환락. 심지어 최고의 쾌감까지 몽땅 나에게로 영원히? 놀고 있네! 꼼짝도 않고서 묻지 않았으니까 난 말이 없다는 듯한 그 태도. 재수 없어!」
   「그러든가 말든가!」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그러고서도 늬가 칼럼니스트야? 자아 성찰은 왜 하다 마는데? 늬가 지금 험구업자한테 호되게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래? 어?」
   「미안하지만 난 한량 아니라네. 나는 말이야, 번듯한 청춘의 어엿한 연애 상대로 썩 빠지지 않는 탐미주의자라고. 아시겠나?」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말고 내가 소개시켜주는 아가씨나 한번 만나 봐. 꽤 괜찮은 숙녀니까. 허영의 세계를 떡 주무르듯 한다는 영심이로 평판이 자자하지 않겠지만, 보고 나면 아마 홀딱 반하고야 말걸! 알겠어?」
   「까짓것! 좋다, 이거야. 응? OK! 야호~!」
   「그런데 있잖아. 뻥이야!」
   「뭐?」
   「속았지? 메롱~! 푸하하하하하하. 음하하하하하하. 약오르지롱? 크하하하하하하.」
   「내가 왜! 재미없어. 하나도 재미없다고.」
   「다 됐고. 어림도 없는 개꿈에서 우리 그만 깨어나자, 친구. 하나─둘─셋을 센 다음 (딱) 하면 깨어나는 거야? 알겠나? 자, 숫자를 센다. 숫자를 센다구. 하나─둘─셋, (딱)!」





    18

    롭이 소개한 작업실 1일째.
    JS는 낮잠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띵했다. 소파에서 깨어난 그는 탁자에 있는 여성잡지를 집어들었다. 이건 1도 아니고 2도 아닌 1.5였다. 혹시 팀 쿡 일행이 놓고 갔나. 알고 싶지도 않고. 그는 생각없이 그걸 보기 시작했다.
    여성잡지1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에는 수동적이고 행복에는 능동적일 것. 꼭 1.0 미만의 애정을 강요하거나 1.5 이상의 낭만을 종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테면 권장한다. 유혹술, 조명발, 화장발 같은 꾸밈의 기교를. 그리고 살면서 간교한 세상의 이기주의에 맞서 내 이기주의의 품격을 잃지 않는 법을 넌지시 귀뜸한다. 반면 여성잡지2는 그렇지 않을까? 내 안위는 만족스럽게, 사랑과 행복은 될 수 있으면 서로 불화하지 않도록. 그리고 나 만큼은 여성잡지2의 애독자임을 타인에게 꼭꼭 숨길 것. 복음의 애청자이자 겉꾸밈이 수수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또 범주가 뚜렷하거든. 친구에게는 무엇을 딱 잡아떼야 할지 설마 모르시지는 않을 테고.
    그런데 이처럼 1과 2의 구분이 없는 우리 남자들은 어떤가. 아마도 일하기에는 수동적이고, 놀기에는 능동적이지 않을런지! 그러면 선공이냐 역공이냐, 끌리느냐 설레느냐를 응당 내가 정하겠다? 쥐었다 펴지고 밀려졌다 당겨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인생이 그렇다.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질 않는단 말이다. 악동식 표현이자 범인만 독점하지 않는 말로, 실례지만 흐흠 흐흠 뭐 같다, 그래서 하는 말일 것이다. (아, 빡쳐?) 미래에 어떤 남자가 칼럼을 쓰고 어느 숙녀가 소설을 쓸지 누가 알았겠나. 잊혀진 희극배우가 7번 이혼하고 8번 결혼할지 본인이 스무살에 미리 예상했을까? 아마도 사랑의 맹세는 영원할 줄 알았겠지. 만약 아니라면... 노노노!
    그래서 정의내리고자 하는 결론은 뭔가? 그건 곧 1과 2의 구분이 모호하니 속단하지 말고, 대타인 1.5를 믿어볼 것!
    그래요? 그러면 대체 그 1.5가 무엇인지 한번 알아나 볼까? 대관절 그게 뭐냐고. 궁금하니까. 알고 싶으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기서 제일 가까운 데 누가 사나를 떠올려봤다.
    그래서 그는 릴리에게 연락했고, 마침 한가한 릴리와 곧바로 만나기로 했다.
    그는 릴리를 만나러 약속장소로 나갔다.





    19

    NB는 릴리를 만났다. 장소는 도시 외곽 놀이공원 앞. 그녀는 하필 대리석 무늬와 거의 흡사한 바지를 입고 나왔다. 뭐야 이거!
   「너 영화 찍니?」
   「어?」
   「뭐가!」
   「오빠 방금 뭐라고 물어봤어?」
   「내가? 글쎄! 뭐라고 물어봤지? 잘 모르겠는데!」
   「난 들었어. 잠시 내가 잘못 들었나 헷갈려서 되물었던 거고.」
   「그래?」
   「그런데 난 오빠가 처음에 한 말을 아는데, 왜 오빤 몰라?」
   「뭘? 나 영화 안 찍어!」
   「어? 그건 또 뭔 소리야? 이 오빠 정말 이상하네. 나 갈래.」
   「어? 그냥 간다고? 너가 만나자고 했잖아? 할 말 있다며! 그 말이 뭔데? 응? 그냥 가면 어떡하니?」
   「그럼 뭐 오빠 나 술 사줘! ~라고 말할 줄 알았니? 어림없어 얘. 이 오빠 정말 이상하네. 딱 응큼하단 말이야.」
   「뭐?」
   「오빠. 오빠 나 있잖아. 나 오늘 집에 안 들어갈래! ~라고 말할까도 생각해봤는데 그것도 아닌 거 같아.」
   「아니... 그게... 무슨...」
   「그런데 있잖아, 오빠. 오빠 키스 잘해? 아! 이런 거 물어보는 거 아니지. 실례! 그렇지만 이미 물어봤네? 그러든 어쩌든 그 구조가... 어째... 애매하네. 응. 뭔가 이상해.」
   「뭐?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오빠 저번에 거기 갔다며? 다 들었어!」
   「어디?」
    그래서 그들은 주류 에너지 엔진 개발사로 떠났다. 그녀가 거길 구경하고 싶다길래.
    도착.
    그곳은 어느새 평범한 행사장으로 바껴 있었다. 무슨 인체의 신비 탐험전이라나 뭐라나. 그런 특별전이 전시중. 때문에 그들은 근처 놀이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 그녀는 애인과 통화했고 잠시 후 그녀의 새 남자친구는 도착했다.
    뚜껑 없는 차와 가죽점퍼 그리고 선그라스! 이 자식이... 할 말이란 그럼 구강 구조가 다-였어? 저런, 맙소사!
    그래서 그들은 헤어졌다.
    그는 집으로 곧장 돌아가기엔 기분이 이상했다. 때문에 그는 놀이공원 옆 호수공원에서 홀로 쓸쓸히 오리배를 탔다. 환상적인 애마를 타도 모자를 판국에 말이다. 그런데 오리배를 탄 다음에 누굴 만났느냐?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딱 집에 갈려는 바로 그때. 릴리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어디까지 갔어? 내 친구 왔는데. 얘가 오빠 보고 싶대.」
    뭐?
    그래서 그는 다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너무 빨리 가면 안되니까 괜히 근처에서 왔다 갔다 시간을 보냈다. 그런 다음 딱 놀이공원으로 다시 갔다. 그렇게 그들은 만났다.
   「오빠. 내 친구야.」
   「안녕하세요. 에드윈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뭐여! 얘 남자잖아? 이런 젠장! 똥개 훈련 시키나? 심지어 옛날 단짝의 고향 후배, 그 친구를 닮었어. 걔가 당시 뭐라고 따졌더라, (인상 험악하게 팍 쓰면서) 형이 다 꼬셔준다면서요? 뭐라고! 저런 저런. 아 그러니까 남자면 남자라고 미리 말을 하던가. 괜히 왔잖아? 에이~!
    이왕 이렇게 된 거 NB는 원만하게 일행과 어울렸다. 그러다 노천 카페에서 함께 차를 마셨다. 그때 릴리의 남자친구인 에드윈이 잠시 화장실에 갔다. 그러자 릴리는 NB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빠. 내 남자친구 못생겼지? 그치?」
    으잉? 그는 그런 말을 여자에게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남자 세계에서도 그런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친구는 많지 않다. 것도 처지가 몇몇으로 나뉜다. 이를 테면 절친한 친구 사이에서 그렇게 말하는 친구는 꽤 드물다. 왜냐하면 드물어야 하니까. 평소에도 사랑이란 주제를 단 1번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 뜬금없이 이 만남 진지하다, 심각하다, 사랑이다를 얘기하라고? 할 수도 있다. 결혼할 사이라면. 그렇지만 그게 아니면 그런 일은 많지 않다. 잘난 사람들이야 연애를 쉽게 하고 많이 하겠지만, 썩 잘나지 않은 사람은 연애 1번? 그것도 절대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잘난 사람조차 오히려 대등한 사랑이니 뭐니 따지다 보면 멋진 사랑이자 아름다운 연애 1번, 어려울 수도 있다. 실제 그렇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단짝의 유형과 함께 친했던 기억을 떠올려봤을 때 그런 말을 했던 친구가... 그렇다. 그래서 그런 말이라면 지인, 동료, 선후배, 형-동생 사이에서 오가는 경우가 주로 많다. 서술자가 생각했을 때 딱 그런 대사를 실제로, 정확하게 들어본 경우가... 하나, 둘, 셋 정도? 거의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처럼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런데 그 친구들을 면면히 살펴볼 것까지도 없이 직관적으로 따졌을 때 호인이냐, 악동이냐? 순전히 호인이었다. 딱 그랬다.
   「형. 제 여자친구 못생겼죠?」
    또는
   「머머씨. 제 여자친구 못생겼죠?」
    물론 여자친구 없는 자리에서!
    유행가 제목도 있다, 내 사랑 못난이!
    선녀와 늑대가 짧게 만났던지 오래 행복하던지, 남녀 사이야 당사자가 아니니까 잘은 몰라도 하나 확실한 건 그거다. 그 선녀는 남자 잘 만난 거라는 점! 물론 이조차 8 대 2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2가지 이유 때문에. 첫째, 통계량이 기준치에 현저히 모자란다. 둘째, 어떤 과학적 가설을 설정하여 실험한 다음, 명료한 결론을 도출한 게 아니라는 점. 순 인생 경험에 해당하는 추정인 것이다. 그렇지만 반 세기를 통틀어 이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물음을 주변에 꺼낸다면 썩 엇나간 추정은 아닐 것 같다. 물론 경우의 수가 대략 몇 개이니까 그런 말 자체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도 알고 여자도 안다. 허세 상중하, 허영심 상중하, 자존심 상중하! 그걸 어른들이 모르지는 않거든. 일반적으로 사랑에 빠졌는데 당사자가 있던 없던 찬미하는 게 당연한 것! 가령 남자 AAA와 여자 AAA의 만남인데, 남자가 저런 대사를? 그 정도로 재수없는 말을 할 만큼 낯이 두꺼운 사람은 많지 않다. 그걸 유머로 승화시키기는 더 어렵고. 그래서 대개는 사랑하니까, 사랑이니까, 그래야 하니까 찬미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건 나쁜 게 아니다. 절대 아니다. 모범이고 귀감이며 미덕일 뿐. 그런데 중요한 건 이때 몇몇으로 나뉜다는 점. 곧 찬미하면 보통이요, 저처럼 속내를 내보이면 호감! 그렇지만 문제는 꽤 말하기 애매한 유형이 있다는 것이다. 즉 친한 친구들한테 자기 여자친구를 소개한 다음 나중 그에 관한 언급이 완벽하게 0. 완벽하게 제로라고? 아니 어떻게! 또는 내 여자친구를 친구에게 소개하고, 친구의 여자친구를 소개 받고. 그때 얼굴 표정! 아울러 역으로 찬미를 받았는데, 찬사를 받은 어설픈 허세꾼의 어깨뽕이 뽈~록! 낱낱이 구분하기엔 낯부끄럽고 겸연쩍지만 아마도 누구나 기억이 일부분 꼭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란 점. 과감히 장담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이 부분부터는 개인적으로 수다꽃을 피우시길 바라면서 주제만 툭 던져놓은 걸로! 뭐, 그게 더 무책임하고 못됐다고? 누구십니까 그대는 누구신지요, 대체 왜, 우린 대체 어디서 만나야 하나요! 단, 남자는 사절! 농담이고.
    그렇게 한적한 산보를 하던 중 NB는 그렇게 말했다.
   「됐고. 그래서. 다 꼬셔줄꺼요 말꺼요!」
    딱 그 말과 함께 인사도 없이 돌아서 가버렸다.
    등 뒤로 저분 왜 저러시지, 뭔 소리야, 오빠 왜 그러지 라며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왜 평범한 일상에서 영화를 찍게 만드냐고. 일부러 무례하고자 한 건 아닐 테지만 뭐, 다 꼬셔줄 꺼요 말 꺼요? 참 나, 뭐-뭐라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개 풀 뜯... 됐고. 그는 애들처럼 토라져서 집으로, 아니 롭이 소개한 작업실로 돌아갔다.





    20

    롭이 소개한 작업실 2일째.
    대망에 대한 치밀한 음모로 전혀 손색이 없는 황홀마. 그의 이름은 다음 세 가지 가운데 무엇일까?
    첫째, 사랑 밖에 난 몰라!
    둘째, 사랑은 인생의 전부!
    셋째, 어복과 여복이 아닌 일복.
    그 정답은 아마도 객관식 제비뽑기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어른은 분별력이 있어야 하니까. 그걸 누가 모르겠나. 다만 오락산업의 막강한 영향력, 유혹하는 사이렌과 매료시키는 판도라는 세고 셌을 뿐. 감수성을 건드리고, 호기심을 유인하며, 플레이보이의 3박자에 대한 탐욕을 자극하기. 그래서 초장에 어딘가에 발목 잡혔다가 큰맘 먹고 돌아온 어느 허풍꾼은 행복한 고민을 오늘도 거듭할 것이다. 왠지 끌리는 그녀를 어떻게 한 번 해 볼까 라면서. 그러나 우리는 발목 잡히지도 않았고 늦바람 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여자가 없는 것이냐? ~라면서 그분들은 오늘도 아마존에서 장난감을 산다. 그러니까 샛노란색 '머머하는 법'같은 시리즈를 읽으면서 펭귄북을 들고 다니시는 교양스런 요조숙녀를 꼬시겠다고? 그게 그러니까 음 뭔고 하니, 고혹적인 쳄발리스트와 상쾌한 난봉꾼의 사랑이라... 거 어째 퍼뜩 멜로드라마가 잘 연상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바로 무인도에 데려가고 싶은 남자 3등, 아는 동생들한테 그랑프리는 아닌데 남 주기는 아까운 2등, 명-바텐더에게 돈이 제일 많아 보일 것 같은 단독 1등에 뽑히기를! 그 언제까지, 한도 끝도 없이? 그러다 날 샌다! 머리에 꽃 꼿은 숙녀는 날 떠나고, 귀 옆에 펜 꼿은 투자자도 싸늘하게 등 돌린다. 봅시다, 예, 그렇다고 바보처럼 뭐 망부석도 아닌데 '그의 인생은 불행했다'라는 묘비명이나 기다리라는 겁니까 뭡니까? 워──워──워!
    자, 명분은 마련됐다. 앞만 보고 달린 당신, 그동안 많이 참았다. 그만 하면 꿈과 희망에게 뻐꾸기를 날려도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떠나야 한다. 그런데, 어디로? 어디긴 어딘가, 목적지는 앞서 나왔지 않나. 바로 무인도라고!





    21

    NB의 무인도 생활 1일차.
    상스럽고 추하며 저급한 침체기에 빠지는 것만은 경계해야 한다. (침체기가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운명을 조소하고, 사랑을 비꼬며, 행복업을 우롱할 것이기에. 어떻게 한 남자가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가령, 한 숙녀의 불필요한 과거를 캐고 캐고 또 캐기. 가령, 한 숙녀의 이상향을 깨고 또 깨기. 걔 있잖니 막... 아니다 아니다 모르는 게 좋겠다, 응? 그렇게만 계속? 그걸로도 모자라 다정함과 다망함을 거절한 채 여자의 마음을 실망시키기. 그래서 골인 지점 테이프에 씌여진 글씨는, 어머머머 절-망? 아뿔사! 짹짹 꽥꽥 꿀꿀 삐악삐악 소음에 시달리다 결국, 까고 또 까며 바나나가 아니라 아예 바나나 껍질 자체에 매혹된 것인가? 나 원 참!
    NB는 최근 자신이 좀 이상해졌다는 걸 느꼈다. 밋밋한 기분 탓은 아니었다. 그게 뭔지, 왜 그런지, 어딘가 모르게 맹한 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때가 된 것인지도. 곧 속되게 표현하자면 으쌰으쌰라는 약발이 떨어진 것일까? 통속적인 게 뭐 어때서! 그렇다고 매번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이 또 달릴 수는 없고. 그래서 그는 어딘가로 무작정 떠나기로 했고, 이렇게 무인도에 도착한 것이다.
    자, 무인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지낼 것인가.
    세상의 끝이자 인생의 마지막까지 여기서? 그건 아니고 잠시만.
    어차피 미술품 도난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피신해 있으면 그만이다.
    집 떠나서 오래 되니까 집이 최고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
    심심증이자 없어-증후군이라는 병마에 사로잡혀 시름시름 앓던 중, 더욱 더 극히 재미없고 심하게 싫증났다. 라~고 투정부리던 때가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좌절감을 청산할려면 다 인고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공짜는 없다. 뻥은 있다. 사랑도 있다. 지금 이건 익살스러운 낭패고? 아니다. 재밌다. 완전 재밌다.
    그처럼 NB는 현재를 즐기고 있었다. 도시에서 어쩌다 보니 찝쩍, 그런 드라마를 찍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아!
    그런데 이제 무인도 생활 1일차인데 슬슬 기분이 세해졌다.
    할 일은 없고, 먹고 뭐 어쩌기도 번거롭고. 씻기도 건너뛰어야 하고.
    그렇지만 적응하는데 단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은 되네?
    일단 첫째 날 그는 전형적인 캠핑 분위기를 만끽했다. 사진도 찍고 고기도 구워먹고 막 그러면서. 그렇게 일단 몸은 풀었다. 몸만. 입은 못 풀었거나 말거나.
    그런데 그 순간! 레이저 시스템 긴급 알림이 도착했다.
    핸드폰 앱을 켰다. 실시간 영상을 봤다. 어머머머머! 복면 괴인들이 그의 사무실에서 명화 바꿔치기를 진행중이네?
    그럼 뭐야, 가만 있자!
    총 몇 번이야?
    첫 번째 시도는 무산됐어. 친구들이 자기 사무실에 몰래 들어가서 뭘 어떻게 한 번 해볼려다가, 실패. 마치 친한 숙녀를 어떻게 한 번 해볼까 하다 꽝되는 것처럼. 
    두 번째 시도는 성공. 누가 훔쳐갔는가는 모르겠고. 아 훔쳐가기만 한 게 아니라, 바꿔치기 했어.
    물론 첫째와 둘째 사이에, 뉴스가 있었지? 아니다. 둘째와 셋째 사이에 사건이 있었어. 도난 사건 발생, 뉴스 전파. 그 진본이 도난당했다고! 그 다음으로,
    세 번째 시도는 지금 보고 있는 이 장면.
    뭐야 그럼 성공이란 말이잖아? 말하자면 원래 위작이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거네!
    정리하자면
    회차           내용                           결과(성공/실패)     사무실에 남겨진 그림
    1차 시도:   도전자는 친구들.            실패                    가짜
    2차 시도:   도전자는 면사포맨.         성공                    진짜  
    2.5 뉴스:    미술품 도난 사건 방송.
    3차 시도:   도전자는 면사포맨.         성공                    가짜
    그럼 이건... 3.5만 기다리면 된다는 거잖아? OK~!
    원래대로라면 2차 시도 다음에 등장한 2.5뉴스가 1.5여야 하나? 그야 내막이 있을 테고!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1.5는 일절 생각하지 말자 라고. 그 영역은 좀 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니까 일단 넘어가고.
    형편이 돌아가는 사정을 보아하니, 이미 으쌰으쌰의 후폭풍은 지나갔다. 곧 있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사무실에 빼꼼히 얼굴을 비춰도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노트북 겉에 이렇게 매직펜으로 써야지.
    사랑은 다정다감하고 인생은 다종다양하다.
    너무 촌스러운가? 하지 말자. 어쨌든 마음 놓고 3.5를 기다릴 수 있게 되서 그는 기분이 너무 편안했다.
    NB의 무인도 생활 1일차 종료.





    22

    NB의 무인도 생활 2일차.
    다음 날 그는 뉴스로 확인했다.
    명화를 찾았다고. 진품이 제자리로 어떻게 어떻게 돌아왔다고.
    이로써 모든 사태는 해결됨. 완전 완결.
    무혐의.
    결백.
    자유.
    컴백홈.
    그렇게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최근 행적을 회상하며 그의 삶을 점검하자면 이랬다.
    하는 행동과 노는 모습을 보자면 그는 이랬다. 할 일이 혹시 하기 싫어진 건 아닌지, 할 말이 떨어져서 퍽 난감한 듯 하지나 않은지 라는 것. 그러니 3 대 3 소개팅 같은 일 어디 없나 두리번두리번. 친히 스스로 망가져서 남들의 한심한 웃음거리를 자처하시겠다-인가? 보아하니 엉덩이가 근질거리는 광마에 올라타 환히 웃음지으며 야생마들과 정신없이 뛰어놀고 싶다는 뜻일까? 알 게 뭐야! 그렇지만 하나 분명한 건 그것. 지금 그의 눈빛은 흐리멍텅하지 않고 반짝반짝 빛날 것이라는 점.
   「그런데 있잖아, 그게 말이야 썩 그렇지 않은 거 있지?」
    그럼 뭐야! 드라마 그거 다 뻥이고 관심 받으면, 아니 이미 그 전부터 모두 다 애들이란 말이잖아? 뭐야 이거! 그래서 그분들이 일생을 걸고서 신부 들러리라면 그렇게 질겁을 하시나? 병풍이라면 아주 그냥 방방 뛰시면서 꽥꽥, 짹짹, 삐악삐악, 응애응애! 하긴 그 맛에 사는 거겠지. 천성이니까. 그러지 않으면 못 살겠다는데 어떡해. 그래서 안락한 자유와 남 부럽지 않은 행복을 다 놔둔 채, 꽃 피는 시절을 인생 도박에 걸 수 밖에. 그 베팅은 대관절 무엇이냐고? 꼴 보기 싫은 놈과 사랑에 빠져 기쁘게 평생을 약속하기. 그래서 눈꺼풀에 뭐가 씌였을 때가 좋은 때라고 어른들은 말씀하신다. 그러다 장래, 그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누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은데, 나는 뭘하면 기분이 좋다 뭘 하고 싶다 난 무엇을 좋아한다 아아 행복해! 더 먼 미래에, '그의 인생은 불행했다' 만은 아니기를! 그러니까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 아니냐고. 남자 어른이 선호하는 격언은,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을 주는 게 아니다. 여자 어른이 애호하는 명언이라면,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알겠다. 결론은 그거구만. 신나게 일하고 미친듯이 놀기! 자기는 그렇게 못했다는 둥 누가 그러기 싫냐는 둥, 허튼 핑계와 뻔한 변명은 이 세상 모든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을 테니 썩 틀린 말도 아니다. 따라서 낮에는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큰 먹잇감을 쫓아 밀림을 헤매고, 밤에는 늑대의 시선으로 양을 응시하면 그만인 것. 뭐 음흉하게? 노노노노노노노! 해가 지면 집밖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네온싸인 불빛 아래 방황하면 안되니까, 치타의 그 자유를 갈구하는 애간장 녹는 눈빛. 아는 사람은 안다. 뭔 얘기인지 누가 모를까. 능청꾸러기는 그마저도 못 참고 말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는 더 좋아하겠지만.
    고로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고 둘 중 하나다. 첫째, 행복한 가정에서 잔소리를 견디기. 둘째, 타인들의 잔머머를 참고 많이 참으며 버틸 필요가 뭐 있나, 내 잔기술과 큰 기술 따라하기라는 원투 스트레이트면 그만! 정리하자면 첫째는 집에 있기요, 둘째는 남자는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저런!
    그런데 뭐야 그거! 긴말 줄이자면 한마디면 되잖아? 즉, 하루 시간표와 1주일 일정표! 인생이 뭐 TV 편성표와 NC야 뭐야? 참 나! 약속도 없고 인기도 없는데 무슨 한달 앞의 계획이야. 설마 그래서 그렇게 선녀들이 연간-일기장에 시시콜콜한 뭘 자꾸 쓰고 또 쓰며 꾸미는 건가? 비밀 리에 모의하는 그 꿍꿍이가 대체 뭔지는 몰라도, 아 안다. 잘 안다. 친구들한테 아무말도 없이 여자친구와 동거하며 혼인 신고 완료에, 언젠가 참다 참다 사이가 안 좋던 때, 친구1을 불러 남자와 여자가 대판 싸우며 생맥주 500CC를 팍─팍 서로에게 끼얹던 날. 친구1은 그런 연간-일기장에 대체 뭔 내용이 적혀져 있나 잠깐 뒤적거린 일, 있다. 무슨 심판도 중재자도 아니고 참관인이야 뭐야. 친구가 봉이야 뭐야, 아니지 아니지 당시는 친하니까 그랬음. 헤어지기 싫다며 오빠를 말려달라던 그녀의 말. 그런데 누가 먼저 끼얹었더라, 아 맞다 1000CC 였나! 아닌가? 아무튼 딱 붙어서 그 장면을 목격하는 일, 그런 경험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고, 일정이 바쁜 유명인도 아닌데 일반인의 연간-일기장에 뭐가 적힐지는 뻔한 일.
    그러나 그러나!
    결국 그는 집으로 가는 길에 문구점에 방문해서 두툼하고 단정한 만년-일기장을 하나 샀다. 알록달록하면 유치해보일까 봐. 자기 딴에는 이건 따라하는 게 아니라, 누가 먼저고 나중이냐 라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단 얼마나 갈지 두고 보면 알겠지.
    어쨌든,
    모든 바깥 일정을 완료 후 집으로!





    23

    젊음은 사랑에 서툴고 행복에 무관심하다. 왜냐하면 연애는 어렵고 장래는 너무 막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춘은 두 가지 상태로 나뉜다. 심심하냐 또는 재미있냐, 그렇게!
    그에 반해 남자는 나이가 들어 힘이 밑에서 위로 올라오면 셋 중 하나다. 곧 허하냐 성하냐 실하냐! 뭐? 고로 우리는 팔이 만화영화 주인공처럼 길어질 수 없으므로, 따라서 언제나 찐한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소녀에게 일기장이, 청년에게 꿈이 있다면 어른에게는 복권이 있을 뿐이다. 그처럼 우리는 일평생 이기주의자였고 썩 순수하지 않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고. 돈을 벌고, 쓰고, 모으며, 셈하는 생활을 오래 지속하다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수필은 속세를 잠시 떠나 자연을 찾으라 하고, 인문교양서는 욕망에 솔직하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동화책으로 요술은 뗐고, 인생론은 교양으로, 사랑은 연애라는 실전에서 통달했는데? (우리는 드라마퀸이 아니니까) 그렇게 우리는 마권을 사는 행복업자요, 어디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이상을 논하는 미래학자다. 정말로 그렇다고? 그럼 뭘 하나. 품위 유지비가 그리 넉넉치 않은데!
    일장 연설은 됐고. 내 하나만 묻자. NB는 젊은가? 그건...... (내 주장만 우길 수는 없을 테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뭣이라? 내 하나만 더 묻자. 그럼 그는 행복한가? 다행스럽게도 불행하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호사를 좋아하고 평화로운 풍요를 동경하기로서니, 탐욕에 충실한 게 죄는 아닐지언정, 그가 정말 타서는 안될 말을 탔을까?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며 큰소리 떵떵치면서 푼수로 공인 받고 싶어하겠나 말이다. 아니 될 소리! 그래?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이번에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를 중용하기로. 그러므로 셋 중에서 딱 하나만 고르기로 했다. (뭐 언제는 다 가지겠다고 했었나?) 
    첫째, 심심하면 최선을 다해서 심심할 텐가
    둘째, 재밌으면 대충 뻔트만 대도 더 재밌든가!
    셋째, 몽키스패너 포르토피노와 함께 NC 드보르작에 놀러가서 전담 웨이터를 바꿀 텐가.
    그래서 그는 두 눈 딱 감고서 대타 친구 핀을 불러내서 나이트클럽에 갔다. (몽키스패너는 바쁨)
    그렇게 갔다 치고!
    결과는?
    정신 나간 사람.
    꿈 같던 흥분감은 무산됨.
    부끄럽지만 나이트클럽을 나올 때 우거지상!
    젊음의 이상과 행복한 사랑이 왜 실패했는지 꼬치꼬치 누구한테 캐묻겠나.
    그래서 그들은 혹시 지나친 탐욕에 마음이 병들지는 않았을까? 절망적인 고뇌를 격하게 수락함.
    앙망하던, 청춘소설이 탐구하는 연애는 여지없이 꽝. 풋사랑은 사랑이 아님. 찐한 사랑... 더하기 플라토닉이 진짜.
    익살스러운 실망 다음에 의뭉스러운 불운은 아무렇지도 않고, 난 괜찮아 난 행복해? 뻥이다. 다 뻥!
    거짓말이란 난봉에 대한 지긋지긋한 염증 같은 것.
    허세 과잉. 허영 결핍. 허풍 과민. 품위 유지비 간당간당. 쾌감은 0이 될까봐 조마조마. 아, 이래서는 안되었다. 도저히 안될 일이다.
    그래서 나이트클럽에 입장했는데. 그런데 들어갈 때만 좋았다. 오직 들어갈 때만! 한마디로 괜히 간 거지.





    24

    그는 최근 잘난 척 해야 할지, 자랑하기를 많이 참았음을 생색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유달리 뽐내고 싶은 일도 없었고, 불평이나 초조감도 없었다. 역시나 내 사랑을 받아주라는 애절한 간청도 없었다. 그렇다고 떨리는 애원이라고 대기하겠나. 번호표 뽑는 기계는 옛날에 갖다 버렸다. 곧 상황이 이러하니 없는 걸 더 찾기 전에 당장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 오랜 방황의 시절을 마치고 돌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그런데 또 떠나? 노노노노노 노노노노노 노노! 이번에는 목적지 없이 떠난다, 그거 재밌겠다? 아니다. 그러지 말고. 모든 오해가 해소되고 어려운 상황이 해결됐겠다, 그러니 자긴 가만 있고 친구를 부르기로 했다. 왜냐하면 저번에 델의 별장에서 친구들이 모였을 때 생전 처음으로 레이저 시스템이 첫 건수를 올린 찰나! 그는 아찔한 감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건 비리비리 멍청한 사냥개가, 기대감 0이었던 소심한 사냥개가 처음으로 대어를 잡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환상적인 호박이 제 발로 걸어온 거 아니냐고! 곧 그건 외부에서 발생한 일이니까 당시 그는 양치기 소년이 아니었고, 난생 처음 출연한 늑대를 목격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동화와 반대로 가는 수 밖에. 이제는 본인이 나서서 '늑대가 나타났다'를 외칠 게 아니라, 늑대를 부를 시기인 것이다. 옳거니!
    속닥속닥
    ......
    꼼지락꼼지락
    ......
    그는 그동안 편집장 마라를 한번도 자기 사무실에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라를 불렀다.
    지금 곧바로 온다고 했다. 그는 양손을 비비면서 군침을 삼켰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는 여지없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굴러오는 호박에게 야박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치타의 기민함을 빼다 박은 듯한 습성을 되찼았다.
    다시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새롭게 꿍꿍이를 꾸밀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디 가당키나 한가? 가당키나 하다. 충분히 가능하다. 이건 광란의 운때인 거지.
    굳이 흠을 찾는다면... 흠 없다. 그러나 장담 같은 건 하지 않기.
    유일한 골칫거리라면... 그거도 없다. 무진 애를 쓸 필요도 없다. 그저 태연하게 만나서 담소만 나누면 그뿐.
    양심의 가책을 느낄 아무런 뭣도 없는 일이란 거다. 정말? 이건 정말 심심함을 구원하여 기쁨을 재촉하는 약속일 것이다.
    절대로 불미스러운 유희와 불경스러운 쾌락이 아닌 것이다. 카운터테너의 들뜸과 플루티스트의 기쁨 같은 일. 내가 왜 이걸 몰랐지? 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치스러운 행복에 대한 감미로운 애착은 여성잡지 구독자, 라디오드라마 애청자, 플레이보이의 단짝에게 양보하기.
    난생처음 느껴본 기분이다. 정말로? 뻥이다. 이런 이상한 마음은 처음이다. 물론 뻥이다. 이젠 거짓말이 저절로 나오네? 허허허허허!
    그러다 레이저 시스템 침임자 알림 발생.
    삐요삐요~!
    삐요삐요~!
    삐요삐요~!
    그는 자기 사무실 옆 빈 사무실에서 느긋하게 나왔다. 그리고 거만하게 핸드폰 앱으로 사이렌을 껐다.
    그리고 그 다음에 마라와 인사를 나눌려는데...... 뭐야 저 앞에 계신 분들은?
    뭐야 이거? 쟤네들 인터폴이잖아! 진짜일까? 아니면 가짜일까!





    25

    그래 결정했어.
    평범한 삶의 사교적 전형.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도 모르게 새로운 인생을 위한 도전적인 파격이라니. 언제까지 도망 다니라고?
    말도 안되는 광증, 기 빨리는 조증,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그만. 그만. 진짜 그만. 내내 피하기만 하고 어쩔 수 없이 항상 비운을 버티기만 하라고?
    활발한 사교가의 비사교적인 체하기도 재미없어. 열애의 탄식과 애정의 비애라면 이젠 정말 신물이 난다고.
    좋아하는 마음을 꽁꽁 숨겨두며 남몰래 사랑하는 즐거움, 바라지도 않아.
    치명적인 매력에 홀딱 넘어가 시작된 달콤한 연애, 그런 게 어딨어.
    고귀한 태생이 연상되는 듯한 몸가짐, 죄다 푼수에 영심이일 뿐이야.
    어쩌자고 이토록 어영부영 쓸쓸하고 맹숭맹숭 재미없을까. 아니다. 아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일하기는 흥미롭고 놀기는 재밌는가 라는 침착한 의혹, 그런 거 다 필요없어. 다, 됐다, 그래. 어쩌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공언했다. 내가 왜 쟤들을 피해야 하는데! 라고.
    퇴짜를 맞으면 맞고. 비가 와도 맞고. 멋진 유행가가 마음에 들면 가사를 외워서 부르고.
    성가신 탐욕과 발칙한 열망들, 무엇인지 꼭 말하지 않아도 된다. 심통을 부리지도 않겠다.
    비밀리에 숙고를 거듭하기, 이제 그만 하겠다.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지체없이 바로잡자!
    그래서 그는 당차게 다음과 같이 혼잣말을 했다.
   「있죠, 저는 이 순간만을 애타게 기다렸어요.」
    그 다음에 이처럼 또 한마디 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그는 자기 사무실로 들어갔다.
    뭐야? 그런데 자기를 붙잡지 않네.
    결국 걔들은 옆옆 사무실 입주를 알아보러온 사람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레이저 시스템은 사이렌은 멈췄는데, 레이저는 다 켜진 상태였다.
    그리고 사무실 가운데 웬 개 1마리가 있었다. 그가 응시하니 개도 그를 쳐다봤다.
    쟨 또 뭐야?
    그는 더 이상 툴툴댈 수도 없었다. 힘 빠졌다. 많이 빠졌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개가 웬 마스크를 쓰고 있네. 가장 무도회에 요즘은 사람이 아니라 개가 가나?
    그는 개한테 접근해서 착하지 착하지 막 그러면서 냉큼 개의 가면을 벗겼다.
    바로 그때!
    첫째, 레이저 시스템은 꺼졌다. (앞서는 사이렌이 지금은 레이저가) 동시에
    둘째, (그의 등 뒤로) 마라가 사무실로 입장했다.
    셋째, (돌렸던 등을 다시 돌렸는데) 진짜였던 개도 사라졌다.





    26

   「야, 조! 뭐해?」
   「어?」
   「그 얼빠진 표정은 또 뭐야? 어서 나와.」
   「나오라고?」
   「그래! 늬가 그랬잖아. 샴페인 동호회 가자고?」
   「내가?」
    왜 헬로윈 축제의 상징은 호박일까? 왜냐하면 굴러다니는 호박은 사랑이고, 짝사랑과 상사병이라는 쌍두마차가 이끄는 호박마차는 행운아의 꿈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으쌰으쌰에 대해서 쾌락론을 들먹이며 자긴 루저의 왕이라고 떠벌렸지만, 혼자서는 행운아라고 지칭했다. 왜? 보고, 듣고, 읽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고, 떠나며, 사랑을 할 수도 받을 수도, 그처럼 행복업에 일조할 수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으니까.
    그러므로 지성이면 감천인 것일까? 달콤한 파티에 대한 열망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샴페인 동호회라는 둥 무슨 복장 모임이라는 둥 노래를 부르더니, 진짜로 비율이 기가 막힌 샴페인 동호회에 출두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짧게 한마디만 하자.
    쉿!





    27

    낭만에 미온적이고 모험에 유보적이다. 그러니 애정은 중의적이고 인생은 흐리멍텅할 수 밖에. 그러나 소년의 야망을 되찾을 순 없더라도 심심함에 자족해서는 안될 일. 인기 없음에 지고, 약속 없음에 또 지며, 맹숭맹숭한 삶에 대패하는 일만큼은 간과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즐거워보일지라도 사랑의 축가와 흥겨운 춤이 넘실대는 신나는 축제가 끝나고 나면 피곤해질 텐데, 뭘!
    그는 만사가 귀찮았다. 그래서 모든 걸 잊고 그냥 떠날까 라고도 생각해봤는데 그럴 수도 없었다. 또? 구실이 부족했다. 동기가 약했다.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러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무료한 일상에 그만 순종해야만 할 것인가, 아니면 반짝이는 기쁨과 깜찍한 행복을 위해 극구 저항할 텐가! 그래 봐야 실패했다고 수군거리건 성공했다고 환호하건, 어쨌든 세상은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남의 인생만 엿보고, 타인의 평판을 구경하며, 소비재 광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참고 또 참아야만 하는가! 왜 맨날 안간힘을? 그럴 수는 없는 일.
    그러므로 책은 덮고, TV는 끄고, 슬리퍼는 벗자. 낮잠은 줄이고, 햄버거 먹기는 참고, 술도 당분간 끊어야 한다. 다 그만둘 순 없으니 커피는 마시고.
    자, 그렇다면 이제 가죽점퍼를 걸칠까, 아니면 수트를 입을까? 뭘 해도 달라보이지 않을 텐데! 그럼 또 튄다마를 타라고? 액면도 비리비리하고, 판돈이 딸리니 허세로 두둑한 배짱을 연기할 수 없는 걸로도 모자라, 뒷 패마저 꽝이라니! 그렇다면 정답은 밉지 않은 악동의 그저 귀여운 심술 정도라는 말 아닐까? 말하자면 썩 재수없지 않도록!
    그런데 그게 대체 뭐냐고? 참 나, 세상에나! 어차피 고심해봐야 신기한 묘수를 기대할 순 없으니 즉흥적으로 정할 수 밖에. 그건 곧,
    첫째, 어이 없는 밤무대에서 삼류 가수의 공연 관람. 그럼 곧 카바레?
    둘째, 엉뚱한 클럽에 들렸다가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과 인사하기. 즉, 나이트클럽?
    셋째,
    그렇다. 셋째가 공석인 점. 이거다. 이거라고. 문제아가 처한 슬럼프의 핵심이었다. 뭐라고? 누굴 바보로 아나 거 원 참. 듣자 하니 영 못 들어주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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